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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남북국의 통치 체제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신라 말기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성립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웠던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엇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앙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신라는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통일 후 신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성장을 토대로 경주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생산이 늘어나 이전에 설치된 동시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국가는 왕실과 귀족이 사용할 금은 세공품, 비단류, 그릇, 가구, 철물 등을 만들기 위한 관청을 정비하여 이에 속한 장인과 노비에게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게 하였다. 통일 후 당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고, 공무역뿐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과 교류를 제한하여 무역이 성행하지 못하였으나, 8세기에 이르러 활발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슬람 상인이 울산에까지 와서 무역하였다.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져,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 귀족의 경제 생활 통일이 되면서 왕실과 귀족은 이전보다 풍족한 경제 기반을 가졌다. 왕실은 삼국의 경쟁 과정에서 새로 획득한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국가의 수입 중 일부를 왕실의 수입으로 삼았다. 귀족은 식읍과 녹읍을 통하여 그 지역의 농민을 지배하여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귀족은 국가에서 준 토지와 곡물 이외에 물려받은 토지, 노비, 목장, 섬도 가지고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업도 수입원의 하나였다. 귀족은 당이나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비단, 양탄자, 유리 그릇, 귀금속 등 사치품을 사용하였다. 당시 귀족은 당의 유행을 따라 옷을 입을 정도였으며, 경주 근처에 호화스러운 별장을 짓고 살았다. 농민의 경제 생활 통일 이후 사회 안정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어났으나 한계가 많았다. 당시는 시비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경작할 수 없었고, 1년 또는 몇 년을 묵혀 두었다가 경작해야 하였다. 대체로, 비옥한 토지는 왕실, 귀족, 사원 등 세력가가 가졌고, 농민의 토지는 대부분이 척박하여 생산량이 귀족의 것보다 적었다.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은 생계를 유지하려면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수확량의 반 이상을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야 하였다. 전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였지만, 그 밖에 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여러 가지 물품을 공물로 내고 부역도 많아 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군역에 나가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농민도 많았다. 향이나 부곡에 사는 사람은 일반 농민보다 어려운 형편이었다. 농민과 대체로 비슷한 생활을 하였으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노비는 왕실, 관청, 귀족, 절 등에 속하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하여 음식, 옷 등 각종 필수품을 만들고 일용 잡무를 하였으며, 주인을 대신하여 농장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발해의 경제 발달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들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수공업은 철, 구리, 금은 등 금속 가공업과 삼베, 명주, 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특히,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일본과의 무역도 규모가 한 번에 수백 명이 오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삼국은 상호간에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도 동질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언어와 풍습은 비슷하였고, 복장을 비롯하여 절하는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하나의 국가 아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주어 포용하였다. 통일 직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9서당에 편입함으로써 민족 융합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 지배층은 삼한(삼국)이 하나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 이후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그러나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의 정치 사회적 비중은 여전히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고,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였다. 한편,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삼국 통일 이후 골품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부터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다. 발해의 사회 구조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렸다.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에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인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발해는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신라 말의 사회 모순 신라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의 정권 다툼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백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지방의 토착 세력과 사원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유력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지방의 자영농들은 귀족들의 농장이 확대되면서 몰락해 갔다. 더욱이 중앙 정부의 통치력 약화로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농민이 더 많은 조세를 감당하게 되었다. 9세기 이후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무장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아우른 큰 세력가가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버리고 떠돌게 되었다. 걸식을 하거나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였으며,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었다.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 갔다.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은 충효 일치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학문과 유학을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발해에서도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이 많아졌다. 그 중에서 최치원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발해도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 나왔다. 원효대사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원효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승려가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전수해 왔다.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는 승려도 있었다. 그 중에 혜초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적 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에서 발굴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은 발해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 준다. 선종과 풍수지리설 신라 말에는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 불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선종의 확산은 경전 연구와 교단 조직을 중시하는 기존의 교종 중심 체제를 뒤엎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당시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으며, 선종 승려들은 지방 호족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이다. 선종은 지방을 근거로 성장하여 지방 문화 역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선종 승려는 사회 변혁을 희망하던 6두품 지식인과 함께 새로운 고려 사회 건설에 사상적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 지리적 학설로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석굴 구조나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과 다보탑 등의 건축에도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이용되었다.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목판 인쇄술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점차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통일 신라의 궁궐과 가옥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사원을 많이 축조했는데, 그 중에서 8세기 중엽에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 신라의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불국사는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와 균형 감각으로 표현한 사원이다. 정문 돌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켰으며, 축대는 자연의 선에 인공적으로 맞추어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키고 있다. 복잡하고 단순한 좌우 누각의 비대칭은 간소하고 날씬한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어울려 세련된 균형감을 살리고 있다. 인공으로 축조된 석굴 사원인 석굴암은 네모난 전실과 둥근 주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좁은 통로로 연결하고 있는데, 주실의 천장은 둥근 돔으로 꾸몄다. 전실과 주실, 그리고 천장이 이루는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의 조형미로 석굴암은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한편, 안압지는 통일 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압지의 연못, 인공섬, 구릉과 건물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꾸며졌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통일 신라에 들어와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을 완성하였다. 통일 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대표적인 것은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불국사에는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3층 석탑과 높은 예술성과 빼어난 건축술을 보여 주는 다보탑이 있다. 신라 말기에는 석탑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과 승려의 이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한다. 이런 승탑과 탑비는 지방 호족이 정치적 역량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들이다.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이다. 입구 쪽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점점 정제되어, 불교의 이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발해에서는 자기 공예도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모양,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고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조물을 많이 만들었다. 불국사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단아하면서도 균형잡힌 걸작으로 꼽힌다.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통일 신라의 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범종이다. 통일 후에는 상원사 종, 성덕 대왕 신종 등 범종이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성덕 대왕 신종은 맑고 장중한 소리와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하다.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 삼국 문화에 뒤이어 통일 신라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 신라 문화의 전파는 일본에서 파견해 온 사신을 통해서 이뤄졌다. 원효, 강수, 설총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 문화는 일본 하쿠호 문화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심상에 의하여 전해진 화엄 사상은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긴 후부터는 외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