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1. 선사 시대의 전개 1. 선사 시대의 세계 인류의 기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35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화석이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3분의 1 정도였으나, 직립 보행을 하여 두 손으로 간단하고 조잡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인류는 처음에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하다가 곧이어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후 인류는 지혜가 발달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었고, 빙하기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통하여 식량을 조달하였고,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지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인 약 4만 년 전부터 진정한 의미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을 비롯한 체질상의 특징이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같으며, 현생 인류에 속하는 여러 인종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의 자연 환경에 적응하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갔기 때문이다.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명의 탄생 기원전 1만 년경에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생활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또다시 바뀌었다. 이에 구석기 시대가 지나고,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를 거쳐 신석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문화는 농경과 목축의 시작, 간석기와 토기의 사용, 정착 생활과 촌락 공동체의 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식량 채집 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류의 생활 양식은 크게 변하였다.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중동 지방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3000년경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인도의 인더스 강, 중국의 황허 강 유역에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들 큰 강 유역에서는 관개 농업의 발달, 청동기의 사용, 도시의 출현, 문자의 사용, 국가의 형성 등이 이루어져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 이로써 인류는 선사 시대를 지나 역사 시대로 접어들었다. 2. 우리 나라의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기원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요령(랴오닝)성, 길림(지린)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어느 나라 역사에 있어서나 모든 종족은 인근에 사는 종족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을 형성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 여러 민족이 문화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우리 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이다. 구석기 시대는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에는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중기에는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하여 석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지고 점차 한 개의 석기가 하나의 쓰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후기에는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까지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석기와 함께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출토되어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점차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 중에서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를 보여 주는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상원의 검은모루, 제천 창내,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막집 자리에는 기둥 자리, 담 자리 및 불땐 자리가 남아 있다. 집터의 규모는 작은 것은 3, 4명, 큰 것은 1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생활하였다. 무리 중에서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대표적인 석기로 슴베찌르개를 사용하였으며,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에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런 새로운 자연 환경에 대응하고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적합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큰 짐승 대신에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하여 활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석기들은 더욱 작게 만들어진 잔석기로서,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만들었다. 이음 도구에는 톱, 활, 창, 작살 등이 있었다. 한편,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동식물이 번성하여 사람들은 식물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많이 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우리 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부러지거나 무디어진 도구를 다시 갈아 손쉽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단단한 돌뿐만 아니라 무른 석질의 돌도 모두 이용하게 되었다. 또,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활이 더욱 나아졌다. 우리 나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의 토기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들은 무늬가 없는 것, 토기 몸체에 덧띠를 붙인 것, 눌러 찍은 무늬가 있는 것으로, 각각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압인문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토기는 제주도 한경 고산리, 강원 고성 문암리,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등에서 발견되었다. 빗살무늬 토기가 나온 유적은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등으로, 대부분 바닷가나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도토리나 달걀 모양의 뾰족한 밑 또는 둥근 밑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다양하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쓴 주요 농기구로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고기잡이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주로 활이나 창으로 사슴류와 멧돼지 등을 사냥하였고, 여러 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돌이나 뼈로 만든 낚시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 굴, 홍합 등 많은 조개류를 먹었는데,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잡아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도구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되자 주거 생활도 개선되어 갔다. 집터는 대개 움집 자리로,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다.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 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을 기본 구성 단위로 하였다. 이들 씨족은 점차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 사회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같이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고, 연장자나 경험이 많은 자가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등 사회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다.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고,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을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었다. 2. 국가의 형성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청동기의 보급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도 이 무렵 나타나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하였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유물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토기가 있다. 이들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집터를 비롯하여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등 당시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동검인 비파형 동검은 만주로부터 한반도 전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파형 동검의 분포는 미송리식 토기 등과 함께 이 지역이 청동기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하였음을 보여 준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는 지역에 따라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밑바닥이 편평한 원통 모양의 화분형과 밑바닥이 좁은 팽이형이 기본적인 모양이며, 빛깔은 적갈색이다. 철기의 사용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다. 철제 무기와 철제 연모를 씀에 따라 그 때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 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 이외에 입술 단면에 원형, 타원형,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생활 청동기·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 도구로 사용되던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돼지, 소, 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움집 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집터는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되어 취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제주시 삼양동의 경우, 철기 시대 전기의 계급 사회의 발생을 알려 주는 대규모의 집터(마을)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농경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사회 조직이 점차 발달하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보통의 집터는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4~8명 정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로, 이는 한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은 주로 집 안에서 집안일을 담당하고 남성은 농경, 전쟁과 같은 바깥일에 종사하였다. 한편,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힘이 강한 자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빈부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계급의 분화는 죽은 뒤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만들어졌고, 철기 시대에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전형적인 형태는 보통 탁자식에서 볼 수 있듯이, 4개의 판석 형태의 굄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고인돌은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정치 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 사상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공납을 요구하였다. 청동이나 철로 된 금속제 무기의 사용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를 계기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평등 사회는 계급 사회로 바뀌어 가고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지배자를 족장(군장)이라고 한다. 족장은 청동기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였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예술 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동으로 만든 도구의 모양이나 장식에는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의식용 도구에는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도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 면에 새긴 바위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으로 보인다. 고령 양전동 알터의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 유적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 농업 사회에서 보이는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로운 생산을 비는 제사 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