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근·현대의 정치 1. 근·현대의 세계 제국주의 국가 간에 식민지 확보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뒤늦게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1914). 제1차 세계 대전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또,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한 노동자와 농민이 제정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19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일어났는데(1929), 이는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자, 독일에서는 나치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대두하였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군비 확장과 대외 침략 정책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하려 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시작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제3세계를 형성하여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채택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였고, 체제나 이념보다는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한 세계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흥선 대원군의 정책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1863)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항과 개화 정책 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서 조선 정부는 미국과 조약(1882)을 맺은 뒤,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과 청,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신식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구식 군인, 하층민 등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1882). 이에,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서울에 들어온 청의 군대는 일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잡아갔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과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발한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적 개화 세력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이들은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개화파 정권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갑신정변 추진 세력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민중의 지지 속에 정변을 성공시키기보다는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팽배하였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톈진 조약을 빙자하여 우리 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비록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개혁, 1894). 갑오개혁에서는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한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독립 협회와 대한 제국 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 파천, 1896),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 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산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 신문을 창간하여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 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 만에 환궁한 후,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대한 제국을 수립하였다(1897).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러·일 전쟁, 1904). 대한 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 일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1907).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910).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항일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 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의병 전쟁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 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장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의병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와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도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으나,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5. 근·현대의 경제 1. 외세의 경제 침략과 국민 경제의 모색 개항과 불평등 조약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통상 교역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일본이나 청에 시찰단을 파견하고, 개혁을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여, 기계 및 신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적 회사와 같은 새로운 경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노력은 재정 부족과 경험 미숙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통상 교역은 외국 상인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어서 조선 상인의 피해가 많았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관세 부과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며, 조약이 개정된 후에도 아주 낮은 관세만을 부과할 수 있었다. 1880년대 들어서는 외국 상인이 나라 안을 자유롭게 다니며 영업하였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불법 활동에 대해서 거의 처벌을 할 수 없었다. 또, 거래에 외국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외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고, 국내의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는 무역 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외국 상인의 침투와 무역의 확대 개항 직후의 무역은 거의 일본 상인이 주도하였으나, 1880년대 이후에는 청에서 온 상인이 가담하여 경쟁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외 소식에 밝지 못하고 근대적 운송 수단이 부족했지만, 조선 상인 중에서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참여하는 상인이 등장하였다. 일본과 청의 상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영국산 면제품을 사들여 와 조선에 되팔고 조선의 쇠가죽, 쌀, 콩, 금 등을 가져갔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상인은 일본산 면제품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산품을 들여왔다. 교역의 확대는 경제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교역이 면제품을 들여오고 곡식을 가져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폐단이 매우 컸다. 값싼 외국산 면제품은 가내 수공업 위주로 이루어진 국내의 면공업 발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농민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또,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쌀 부족과 쌀값 인상에 따른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나타나 도시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출되었으며, 부유층을 중심으로 사치 풍조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주와 상인은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이를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다. 또, 외국에서 실을 사 들여와 면직물을 제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각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 청과 일본은 정치·군사적인 위협을 병행하여 자국 상인을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빼앗아 갔다. 임오군란 직후 청은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열고 국내 곳곳을 다니며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을 도발하면서 철도 부설권 등 이권 탈취에 앞장섰다. 1896년에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인에 의한 광산 채굴권과 삼림 벌채권, 교통이나 통신 시설 부설권 등 경제적 이권 탈취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아관 파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는 러시아 인을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광산 채굴권이나 삼림 벌채권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운산 금광 등 광산 채굴권과 철도, 전기 등의 이권을 차지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도 여러 이권을 차지하였다. 특히,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우리 나라의 남북을 연결할 철도 부설에 주력하였는데, 결국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모두 차지하였다. 당시 우리의 손으로 자립적인 국민 경제를 형성할 기회를 가졌지만, 외국의 이권 침탈로 그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 흥업 노력 대한 제국기에 들어 외세의 경제 침탈을 막고 근대적인 국민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정치 및 행정을 맡은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식산 흥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정부는 전환국을 설치하여 화폐 제도 개혁과 중앙 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전·현직 관리와 민간의 자본을 모아 근대적 기업 설립에 나섰다. 또, 산업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토지나 광산 개발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않도록 한 뒤 독자 개발을 시도하였으며, 쌀의 유출을 막기 위한 방곡령도 시행하였다. 제조업자와 상인도 경제 발전에 적극 노력하였다. 농기구나 일용품을 만들던 철기 및 유기 제조업, 정미업, 직포 공업 등에서 공장을 늘리고 새로운 기계를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자본을 모아 합자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외국 상인의 침투에 맞서 상인들이 철시 투쟁을 벌였으며, 상인끼리 또는 상인과 관료가 함께 상회사나 금융 기관, 근대적 공장 설립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 협회나 황국 중앙 총상회 등과 같은 단체도 국내 산업 진흥과 상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이권 탈취 및 경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 흥업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자본의 축적과 근대적 금융 제도를 확립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산 흥업 노력은 좌절되었다.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러·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인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세를 늘려 나갔다. 나아가, 황실의 수입을 국유화함으로써 황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또, 일본의 제일 은행이 중앙 은행 기능을 맡도록 하여 대한 제국의 금융 정책을 지배하였으며, 1905년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의 상공업자나 금융 기관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빼앗았다. 이후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내세워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한 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좌절되었다. 반면에, 일제는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 갔다.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 일제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반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경제적 구국 운동이 활발해졌다. 러·일 전쟁 때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 막대한 국유지를 빼앗으려 하자, 보안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 이 요구를 좌절시켰다. 1905년 이후에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1907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정부가 진 빚을 갚아서 경제 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상공인과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이나, 비녀와 가락지 등과 같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1. 개항 이후의 사회 변화 사회 제도와 의식의 변화 개항 무렵, 일부 양반과 중인 출신 인사들은 개화 세력을 형성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해 나갔다. 이들은 실학 사상을 계승하고 서구의 사회 사상을 받아들여 평등한 근대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며,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선언하는 등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860년대에 등장한 동학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사상에 기초한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가 타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추구하던 신분 제도의 폐지는 마침내 갑오·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 또, 조혼이나 과부의 재혼 금지, 인신 매매, 고문, 연좌제 같은 악습도 없앴다. 아울러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만들었으며,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사법 제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한편, 독립 협회는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민권 의식과 평등 의식이 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많은 사람이 독립 신문을 구독하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에 참여하거나 독립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애국 계몽 운동 단체나 학회, 언론 활동으로 이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의식, 민권 의식, 평등 의식이 높아졌다. 갑오개혁으로 비록 신분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남녀노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의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이 운동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의병에는 많은 평민층이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신분 의식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남녀 평등 의식의 확장과 함께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많은 여성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의식주 생활의 변화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서양의 생활 문화도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의식주 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생활에서 본격적인 변화는 양복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일부 상류층과 개화 인사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일반 남성의 복장은 예전처럼 바지와 저고리 차림의 한복이었는데, 저고리 위에 마고자와 조끼를 입는 풍습이 새로이 생겨났다. 개화기에 대부분 여성은 전통적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만든 개량 한복도 등장하였다. 개량 한복은 여학생의 교복이나 신교육을 받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자리잡아 갔다. 여성의 외출과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입었고, 오랫동안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과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고 양산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음식 문화도 들여왔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저와 함께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중과 일부 상류층에는 커피와 홍차, 양과자와 빵 같은 식품과 서양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전해졌다. 임오군란 이후에 들어온 청나라 상인 중에서 일부는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와 만두, 찐빵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또, 청·일 전쟁 이후에 들어온 일본인은 초밥, 우동, 어묵, 단팥죽, 단무지, 청주 등 일본 음식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외래 음식과의 접촉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가 일반 서민의 음식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그 동안 신분에 의해 규제받던 주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옥의 규모나 건축 양식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서양인과 일본인이 살게 되면서 서양식 건물이나 일본식 주택이 나타났다. 또, 관청이나 공공 건물, 학교 건물, 상업용 건물, 종교 건물 등 근대식 건물이 잇따라 세워졌다. 1890년대에 들어와 민간에서도 서양식 건축물의 이점을 살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동포들의 국외 이주 19세기 후반에 조선 사회에는 가난과 수탈, 자연 재해 등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에 일부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났다. 우리 동포가 맨 처음 이주한 지역은 만주와 연해주였다. 특히, 만주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할 농경지도 많았으며,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 곳으로 이주해 온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거나,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는 두만강을 건너가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 왔다.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살았다. 연해주의 한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웠다. 이 곳에 자치 기구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연해주 지역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주 이주는 1902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하와이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은 정부의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000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는 사탕수수 농장일뿐만 아니라,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 고된 일을 하면서 인종 차별까지 당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다. 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개항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근대 제도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외국 기술자도 초빙하였다. 이러한 개화 정책에 따라 박문국에서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기기창에서는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전환국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개항 이후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다. 전신이 설치되면서 국제 전신망이 연결되었으며, 궁궐과 상류 사회에는 전화도 보급되었다. 문명의 불인 전등이 경복궁의 밤을 밝혔으며,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서울 시내 일부에 전기가 들어왔다. 철도는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다. 서양 의학이 보급되면서 근대 의료 시설인 광혜원을 비롯하여 많은 병원이 들어섰고, 서양식 건축물인 명동 성당과 덕수궁 석조전 등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 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근대 교육과 학문의 보급 개항 이후, 개화파와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인재를 양성하고자 근대 교육을 보급하려 하였다. 1883년에는 원산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어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으며, 정부도 같은 해에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이어, 1886년에는 육영 공원을 세워 상류층 자제에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의 정신에 따라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였다. 한편,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 학교를 세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으며, 20세기 초 애국 계몽 운동가들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워 근대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구국 운동이 벌어졌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이 활발하였다. 국학 연구 조선 후기 실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국학 연구는 대한 제국 말기인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 의식을 높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 문화를 지키려 하였다. 국어 분야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공문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제도화되고, 학교 교육에서 국·한문체 교과서가 사용되면서 언문 일치의 문자 생활이 가능해졌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국·한문 혼용체 보급에 기여하였다. 1907년에는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와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근대 계몽 사학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고자 역사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나라를 구한 위인의 전기를 써서 보급하고, 외국의 건국과 흥망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사 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신채호는 대한 매일 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최남선,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실학자의 저서를 비롯한 고전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언론 기관의 발달 개항 이후 근대 인쇄술로 간행된 각종 신문과 출판물은 개화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다. 한성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 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 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 매일 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한글 신문인 제국 신문, 국·한문 일간지인 천도교의 만세보 등도 국권 회복 운동을 지원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도하였고,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문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의 요구가 절실했던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새로운 근대 사상을 소개하거나 사회적 자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8년을 전후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와 신소설이 등장하여 근대 의식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였다. 성경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이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번역 문학은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초래하는 폐단도 있었지만, 근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예술계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 부문에서는 서양 음악이 소개되었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가 유행하였다. 미술 부문에서는 화가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였고, 서양식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 회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서민층에서는 민화가 유행하였다. 연극 부문에서는 신극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서민 사이에서는 판소리와 민속 가면극이 성행하였다. 특히, 판소리에서는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분창 형식이 유행하였고,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이다.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개신교는 1880년대에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 갔다. 동학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 때 친일 세력을 내쫓고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교에서는 박은식이 유교 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에서는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며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