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여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 등 경찰력은 오히려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 운동가들도 회유하는 한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3·1 운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강점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1919. 3. 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또,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국민 국가 건설을 효과적으로 준비할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마침내 이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9.).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통합하는 중심 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는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926). 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권을 빼앗긴 후에 애국 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옮겨 갔으나,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이봉창과 윤봉길이었다. 한편, 1937년에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조선 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4. 대한 민국의 성립과 발전 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해 왔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규정한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이나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도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소 냉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우익과 좌익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라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2.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식민지 수탈 정책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제의 목표는 경제 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였다. 1910년에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사업은 토지의 소유권, 토지 가격, 지형 및 용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는 당사자가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대한 제국 정부 소유지와 황실 소유지, 미신고 토지 및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토지 등은 강제로 빼앗았다. 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을 부정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기한부 계약에 따라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 늘어났다. 총독부는 지세 부과 대상을 크게 늘리고 토지 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거둔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이와 아울러 일제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회사를 설립하거나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함으로써 산업 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 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 증가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지주는 다소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소작농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결국 지주는 빠르게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으나,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1920년에 일제가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꾼 이후,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다.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과 군수 공업화 1930년대 이후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크게 늘어났다. 총독부가 일본은 발전된 공업 지역으로 유지하면서, 만주는 농업과 원료 생산 지대로 만들고,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 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 공업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주로 한반도의 북부를 중심으로 추진된 조선 공업화 정책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 생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추진되었다. 일제는 전력 자원을 개발하고, 토지와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하였으며, 광산 자원을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대자본이 활발하게 침투하면서,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금속,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총 생산액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 자본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영진, 상급 기술자도 일본인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에, 한국인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 기본권도 보장받기가 어려웠으며, 임금과 승진에서도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결국, 조선 공업화 정책은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민족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한국인이 기업 활동에 참여하였다. 농업 경영과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주나 상인 중에서 일부가 회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경성 방직 주식 회사나 여러 곳의 고무 공장,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을 경영하였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시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경제의 파탄 1941년에 일제는 미국 해군 기지가 있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징병과 징용을 통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전쟁 말기에는 군수 물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경제 활동에 대한 통제를 크게 강화하는 등 전시 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세금을 늘리고 저축을 강요하여 마련된 자금은 군수 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되었다. 또, 광산이나 군수 공장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하기도 하였다. 물자 부족이 심화되자 일제는 군수 산업 이외의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도 하였으며, 광물 자원의 약탈은 물론 학교의 철문이나 집안의 숟가락까지 강제로 빼앗아 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던 기업 중에 문을 닫는 경우도 있었으며,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던 사람도 심한 고통을 겪었다. 독립 운동 세력의 분화 1919년 3·1 운동이 좌절된 후, 독립 운동 진영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다. 이는 독립 운동의 방법과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 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으로 갈라졌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독립한 다음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 세력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나 물산 장려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하였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노동 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한 계급 운동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 일본,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청년·지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각종 청년회, 사상 단체, 노동 운동 단체, 농민 운동 단체가 생겨났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과 노선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 소년 운동 등 사회·경제적 대중 운동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간회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 2.) 신간회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만한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 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동양 척식 주식 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소작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다.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된 농민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나 빈민이 되거나, 광부, 화전민 등으로 살아갔다. 여기에 자연 재해를 당한 농민들은 새 삶을 찾아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전라 남도 부안군(현 신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암태도 농민은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워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의 소작 쟁의는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합법적 농민 조합 대신 비합법적, 혁명적 농민 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좌절되었다. 한편,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1930년대에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 쟁의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이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 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청년 운동, 여성 운동, 형평 운동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서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다. 이들 청년 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다. 또,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의식도 높아졌다. 1920년대에는 여자 청년회, 부인회 등 2백여 개의 여성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 단체들은 주로 남녀 평등, 문맹 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 등 여성 계몽과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서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등을 통한 여성 계몽 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에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성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변화 일제 강점기에도 인구는 늘어 갔다. 인구 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 거주 한국인은 1700만 명 정도였다. 1930년에는 2000만 명, 1942년에는 26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 명 정도였고, 1940년에는 93만 명 정도로 4배 가량 늘었다.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같은 전통 건물을 마구 헐어 내고, 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 역사 같은 관공서와 공공 시설, 공원, 학교 등을 잇따라 건립함에 따라 서울의 모습은 점차 식민지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갔다. 한편, 1930년 무렵 서울에는 10만여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은 본정(현 충무로), 명치정(현 명동), 황금정(현 을지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는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는 북촌으로 불렸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서울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백화점,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등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도시의 이중적인 모습은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많이 살던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등 개항장이던 도시 대부분이 그러했다. 의식주 생활의 변화 근대 문명의 유입은 의식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의생활에서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한복을 입으면서 고무신을 신고 모자를 쓰는 방식으로 한식과 양식을 혼합하였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성은 쪽진 가르마머리를 하였으나,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 단발머리와 파마머리, 스타킹과 하이힐 등은 도시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40년대에 전시 체제가 되면서 남녀의 복장이 모두 바뀌었다. 남자는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찼다.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를 입어야 했다. 식생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10년 이후, 과자, 빵, 케이크, 카스텔라, 비프스테이크, 수프, 아이스 크림 등 서양 음식이 대중에게도 본격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식품의 소비는 주로 도시의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일반 서민의 식생활은 형편이 사뭇 달랐을 뿐 아니라,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빴다. 산미 증식 계획 이후에 식량이 증산되었는데도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중·일 전쟁 후에 쌀 공출제를 실시함에 따라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민은 잡곡밥, 조밥, 수수밥을 먹거나, 심지어는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송기떡, 콩깻묵, 밀기울, 술찌기를 먹으면서 연명하기도 하였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주택이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 상류층의 문화 주택, 중류층의 개량 한옥, 중·하류층의 영단 주택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은 사랑방과 문간방이 없어지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니스와 페인트를 칠한 혼합형 가옥이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문화 주택은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생겨났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들어 도시민, 특히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지은 일종의 국민 연립 주택이었다. 서울 변두리에는 빈민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토막살이를 하는 사람은 1937년 서울(경성부) 총인구 70만여 명 중에서 15,000여 명에 달하였다. 2.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의 전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일제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에 따른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숨은 뜻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식민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하면서,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를 바꾸었다.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규정하고, 경성 제국 대학도 설립하였다. 표면상 일본인 교육과 대등하게 보이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교육 차별은 여전하였다. 1930년대 만주 침략 이후에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의 협조자로 만들려는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 내선 일체와 일선 동조론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고, 한국사 왜곡을 심화시켰다. 언론 분야에도 식민지 통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에 조선 일보, 동아 일보, 시사 신문의 일간지와 일부 잡지 발행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신문에 보도할 기사의 통제를 계속하다가 1940년에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마저 폐간시켰다.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특히,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종교 활동 역시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 정신을 강조하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종교 교단과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한국사 연구의 발전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 통사와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와 조선사 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고, 문일평, 안재홍, 남궁억 등도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조명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다. 이 밖에,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국외 유출을 막는 데 힘썼다. 민족 교육 진흥 운동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 여자 교육회와 조선 교육회가 성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24년에 발명 학회가 창설되었고, 이후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종교 활동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 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기독교는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민중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불교는 총독부의 간섭에 맞서 조선 불교 유신회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문학과 예술 활동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 문학계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동인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은 김소월은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시대 의식을 반영하였다. 한용운 역시 항일 운동의 민족주의 노선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예술성과 작품성을 강조하는 순수 문학 경향으로 대두하였다. 대륙 침략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다.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음악계에서는 홍난파와 현제명 등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어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국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애국가 합창을 넣은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잡았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다. 연극계에서는 3·1 운동 이후 근대 연극이 도입되어 극예술 연구회를 중심으로 민족적 비극을 무대 예술화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다. 영화계에서는 나운규가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아리랑(1926)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 때, 일부 예술인이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전개한 사실은 광복 후 예술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