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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8D%B0%EC%B8%A0%ED%82%A4%20%ED%96%89%EC%A7%84%EA%B3%A1
라데츠키 행진곡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ch, )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하여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에게 헌정한 곡이다. 1848년 8월 31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기원 육군 원수 요한 요제프 벤첼 백작 라데츠키 폰 라데츠는 여러 전투에서 1848년의 이탈리아 국민혁명을 패배시킨 군사 작전을 지휘하였다. 산타 루치아(5월 6일), 비첸차(6월 10일), 쿠스토차(1848년 7월 22~26일)에서 승리한 후 이탈리아의 용감한 군대를 기리고 부상당한 전사들을 돕기 위한 승리 축하 행사가 1848년 8월 31일, 빈의 바서글라시스(Wasserglacis)에서 열렸다. 당시 도시 성벽을 둘러싸고 있던 공지는 현재 링슈트라세 대로와 시립 공원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그의 오케스트라가 이 행사를 위해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의 초연을 펼쳤으며, 피아노판 제목 페이지에는 '위대한 총사령관을 기리기 위해, 황제 겸 국왕 군대에 헌정되었다 '라는 문구를 볼 수 있고, 월계관과 군대 부호와 함께 액자에 넣어진 라데츠키의 초상화도 있다. 참고 문헌 https://archive.today/20220107161302/https://www.johann-strauss.at/forschung/forschungssplitter/radetzky-marsch-entstehung/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작품 오스트리아의 노래 군가 행진곡 관현악곡 취주악곡 1848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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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9D%BC%EA%B1%B4%EC%84%A4
성일건설
성일건설 주식회사(Sungil Construction Co., Ltd.)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건설회사이다. 1971년 설립되었다. 각종 기간산업과 민간 공사의 건설에 참여하여 반세기 많은 기술의 축적과 경험을 쌓았다. 연혁 1971.05 성일건설 주식회사 설립(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1971.07 종합 건설업 면허 취득(토목, 건축 공사업 제836호) 1972.02 재무부장관 표창(우수기업) 1973.05 전기 공사업 면허 취득(제 1종 137호) 1975.08 본사 이전(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4가 310-68) 1980.03 본사 이전(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 85-1) 1982.03 본사 이전(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산 1-1) 1984.06 석탑산업훈장 수훈(건설 산업 발전) 1985.04 주택건설사업자 등록 1986.08 소방설비 공사업 제1, 2종 면허 취득(제86-51-42호, 서울특별시) 1986.12 군납업 등록(제 A-352, 서울특별시) 1989.04 성일개발 주식회사 설립 1989.12 특수 건설업 면허 취득(포장 공사업 제254호, 국토교통부) 1990.03 국세청장 표창(모범 납세 업체) 1990.06 건설부장관 표창(기술개발) 1990.06 주택건설 지정업자 지정(제132호, 국토교통부) 1991.02 (주)여주종합터미널 설립 1991.04 본사 이전(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419-1) 1992.10 수질오염방지시설 등록(제356호, 한강환경관리청) 1992.11 해외건설업 면허취득(일반건설업 제99호, 국토교통부) 1993.04 일반 폐기물 처리시설 설계, 시공업등록 1993.07 분뇨처리시설 등의 설계, 시공업 등록 (우수정화시설설계 시공업 제294호, 서울특별시) 1994.06 동탑산업훈장 수훈 1994.09 공장등록(주형 및 금속제재업 29294, 여주군수) 1994.11 임대사업자 등록(제94-20-6호, 강남구청) 1995.04 학회상 수상 (사단법인 대한건축학회) 1995.11 여주종합터미널 지점 설치 1996.12 재단법인 성일장학재단 설립 1997.08 소방시설 공사업 등록(서울 강남 제85-51-42호, 강남소방서) 1997.11 우수시공 격려상 수상(대한주택공사) 1998.02 ISO 9001 인증 획득(제QSC80882, 크레비즈인증원) 1999.05 정보통신 공사업 허가(제210508호, 서울체신청) 2000.06 정보통신 공사업 등록(제111282호, 서울체신청) 2000.07 전기공사업 등록(서울-00039, 서울특별시) 2000.12 우수시공 격려상 수상(대한주택공사) 2001.05 성일건설 창립 30주년 2001.10 성일건설(주)과 성일종합건설(주)로 인적 분할 2002.05 성일건설 부설 기술연구소 설립 2002.10 (주)에스아이솔루션 설립 2002.12 사내 인트라넷 자체 개발(Si-Net) 2003.03 CM협회 가입 2004.01 자재관리 시스템 가동(SI-SCM) 2004.12 돈암동 성일 우리美 아파트 준공 2006.01 2006 고객만족 우수기업 선정(한국경제신문) 2006.05 성일건설 창립 35주년 기념행사(르네상스) 2006.09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수상(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2007.04 여주 오학 성일 우리美 아파트 분양 2007.06 금탑산업훈장 수훈 2007.12 감사패 전농지구대 신축공사(서울동대문경찰서) 2008.01 남양주 덕소 성일 우리美 아파트 준공 2008.08 정비사업 전문관리업 등록(서울특별시) 2008.10 감사패 시흥5동 성당 신축공사(천주교 시흥5동 성요셉성당) 2008.12 우수회원패 대한건설협회(서울특별시회) 2009.10 여주 오학 성일 우리美 아파트 준공 2010.07 표창장 인재개발원 창의관(서울특별시) 2013.06 국토교통부장관 표창 2013.08 정비사업 전문관리업 등록 2013.09 여주 우리美Park 착공 2015.08 여주 우리美Park 준공 2016.02 문화재수리업 등록 2021.07 성일개발(주) 합병 사업장 현황 본사: 서울특별시 강남구 남부순환로378길10 (도곡동, 성일빌딩) 여주종합터미널지점: 경기도 여주시 세종로 85 (홍문동, 여주종합터미널) 브랜드 상현재 외부 링크 성일건설 1971년 설립된 기업 2001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건설 기업 서울특별시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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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HW
HW
HW 또는 hw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숙제(homework) 하드웨어(hardware) 하트퍼드 웨일러스(Hartford Whalers,): 미국의 아이스하키 팀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 Hwair(Ƕ): 고딕 문자 "숙제"라는 뜻이 대부분이다. 선생님들이 많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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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7
7
7(칠)은 6보다 크고 8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또한 수를 표기하기 위한 숫자이기도 하다. 수학 7! = 5040 약수의 합은 8이다. 4번째 소수이다. 앞의 소수는 5이고, 다음은 11이다. 두 가지의 사촌 소수에 모두 포함될 수 있는 유일한 소수이다. {(3,7), (7,11)} 이는 서로 연속하는 세 홀수 중 하나가 3의 배수이며, 1은 소수가 아니므로 5가 두 쌍둥이 소수에 모두 포함되는 유일한 소수 인것처럼 (3, 5, 7) 등차가 4인 연속하는 세 수 중 하나가 3의 배수이며, 3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3, 7, 11)만 이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2번째 메르센 소수이다. (23 − 1 = 7) 앞의 메르센 소수는 3이고, 다음은 31이다. 정칠각형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없다. 주사위의 마주보는 두 면의 합은 7이다. 수학의 7대 난제 7의 제곱근은 2.645751311064590590501615753639260425710259183082450180368334459201068823230……이다. 3번째 메르센 수로, 2의 3제곱에서 1을 뺀 수다. 1×2×3×4×5×6×7=7×8×9×10, 1×2×3×4×5×6=8×9×10 1을 7로 나누면 소숫점 아래로 142857이 무한반복되는 소수가 된다. 일반적으로 확장하면, 7의 배수를 제외한 자연수를 7로 나누면 소숫점 아래로 142857이 무한반복된다. 1/7 = 0.142857142857... 2/7 = 0.285714285714... 3/7 = 0.428571428571... 4/7 = 0.571428571428... 5/7 = 0.714285714285... 6/7 = 0.857142857142... 칠진법의 밑이다. 과학 질소(N)의 원자번호. 중성 상태의 pH값. 태양계의 7번째 행성은 천왕성이다. 태양계에서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천체는 태양 (일요일), 달 (월요일), 화성 (화요일), 수성 (수요일), 목성 (목요일), 금성 (금요일), 토성 (토요일) 7개이다. 바빌론 인들이 일주일을 7일로 정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심리학 마법의 수 일곱, 더하거나 빼기 둘 기술 윈도우 7 -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 체제 OSI 모델 7 계층 7가지 논리 회로: NOT, AND, OR, NAND, XOR, NOR, XNOR 나이 대한민국의 방송물 등급인 만 7세 이상 관람가의 기준이 되는 나이 대한민국에서는 만 7세가 되는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기타 K7 기관단총 이 있다. 연도: 7년, 기원전 7년 야구에서 좌익수의 수비 위치를 나타낸다. 핸드볼은 7명이 한 팀을 이룬다. 무지개는 보통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일곱 색깔로 여겨진다. 세븐원더스. 세계 7대 불가사의. 서양에서 7은 행운의 상징이다. (럭키 세븐이라는 말이 생김)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맹획을 7번 잡았다가 풀어준다. 이를 칠종칠금이라 칭한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에는 7가지 비유가 설해져 있다. 이를 법화칠비라 부른다. 법화칠비에는 삼거화택의 비유, 장자궁자의 비유, 양의병자의 비유, 삼초이목의 비유, 계중명주의 비유, 빈인계주의 비유, 화성보처의 비유가 있다. 한 주는 월요일·화요일·수요일·목요일·금요일·토요일·일요일의 7일이다. 7일이 지나야 같은 요일이 돌아온다. 서양의 음계는 보통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의 7음계이다. 임진왜란은 7년간 지속되었다. 동양의 퍼즐 놀이 중 하나로 7개의 조각을 모두 사용하여 모양을 만드는 칠교놀이가 있다. 일본의 간토 지방에는 총 1도 6현(도쿄도,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이 있다. 일본의 긴키 지방에는 총 2부 5현(오사카부, 교토부, 효고현, 시가현, 와카야마현, 나라현, 미에현)이 있다. 일본 전국 시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의 수하에 7명의 장수가 7본창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제외하고는 에도 막부 체제에서 우선 개역 대상이 된다. 보잉 707, 보잉 717, 보잉 727, 보잉 737, 보잉 747, 보잉 757, 보잉 767, 보잉 777, 보잉 787 등 보잉 사의 제트 여객기들의 숫자는 모두 7로 시작해서 7로 끝난다. 세븐업과 세븐일레븐은 각각 음료와 편의점 브랜드이다. 칠지도(七支刀)는 몸통과 6개의 튀어나온 가지와 함께 총 7개의 날이 뻗어 있는 칼이다. 일부 기독교와 그 종교의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수이다. KBS2의 채널 번호이다. 여름방학은 대부분 7월에 시작된다. 서울 도시형버스 7번 서울 지하철 7호선 07 수비학 수비학에 관한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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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86%A0%20%EB%A9%94%EA%B5%AC%EB%AF%B8
사토 메구미
사토 메구미는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사토 메구미(1966년 ~ )는 일본의 육상 선수이다. 사토 메구미(1984년 ~ )는 일본의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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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B0%94%EB%A0%88%EC%A6%88%EC%82%AC%EC%9A%B0%EB%A3%A8%EC%8A%A4%EC%83%81%EA%B3%BC
알바레즈사우루스상과
알바레즈사우루스상과(Alvarezsauroidea)는 수각류의 한 분류군이다. 알바레즈사우루스상과 공룡은 1990년대에서야 처음 발견되었지만 그 후로 이 분류군의 구성원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대부분의 알바레즈사우루스상과 공룡은 몸집이 작은편으로 몸길이는 0.5m~ 2.0m사이였다. 이 분류군의 분기도에서의 위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 군은 백악기 말 대멸종때 절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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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C%B2%98%EB%A6%AC
해처리
해처리(Hatchery)는 부화장을 뜻하는 영어 낱말로, 다음 등을 가리킨다. 부화장(孵化場): 인공적으로 알을 까기 위해 만든 곳 해처리: 게임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에 등장하는 저그 종족의 라바(애벌레)를 생산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건물. 레어와 하이브로 진화할 수 있다. 최대 라바를 3마리까지 계속 생산한다. 해처리: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 트렉: 엔터프라이즈(Star Trek: Enterprise)의 에피소드 중 하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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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GaWC
GaWC
세계화와 세계도시 네트워크(Globalization and World Cities Research Network) 또는 GaWC는 세계화의 맥락에서 세계 도시들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소이며 영국 레스터셔주에 있는 러프버러 대학교의 지리학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GaWC는 1998년 피터 J. 테일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존 비버스토크, 리차드 G. 스미스와 함께 GaWC의 연간 세계 도시들을 국제적 연계를 바탕으로 "Alpha", "Beta" 및 "Gamma" 계층으로 분류한다. 도시 구분 GaWC는 전 세계 도시들을 조사하여 이들을 세계 도시 명단으로 좁힌 다음, 회계, 광고, 은행/금융, 법률 등 네 가지 "고급 생산자 서비스"를 통해 이들의 연결성에 기초하여 순위를 매긴다. GaWC의 재고자산은 도시경제를 정치적 또는 문화적 요소보다 더 비중 있게 순위를 매긴다. 알파 세계 도시(4개 하위 범주가 있는 도시), 베타 세계 도시(3개 하위 범주)와 가마 세계 도시(3개 하위 범주)를 넘어 가WC의 도시에는 "고충족도"와 "충족도" 수준의 추가 도시가 포함된다. 2004년 순위는 몇 가지 새로운 지표를 추가했고, 계속해서 정치적, 문화적 요인보다 도시 경제의 순위를 더 높게 매겼다. 1998년 버전과 유사하게, 2008년 등록 명단은 알파 세계 도시 4개 하위 범주, 베타 세계 도시 3개 하위 범주, 감마 세계 도시 3개 하위 범주, 그리고 충분성 또는 충분성이 높은 추가 도시로 분류된다. 2020년 결과 2020년도의 도시 분류는 다음과 같다. 알파(Alpha) 알파 레벨은 세계 경제의 주요 경제주, 지역과 연계되어 있으며, 알파++, 알파+, 알파, 알파- 등 4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알파++(Alpha ++) 알파++ 도시는 세계 경제와 가장 밀접하게 통합된 도시들이다. 알파+(Alpha +) 알파+ 도시는 고도로 통합된 도시로서 고급 서비스 요구 충족한 도시들이다. 알파(Alpha) 알파-(Alpha -) 베타(Beta) 베타 수준의 도시는 중간 경제 지역을 세계 경제와 연계하는 도시로서, 세 개의 섹션, 즉 베타 +, 베타, 베타 - 에 분류된다. 베타+(Beta +) 베타(Beta) 베타-(Beta -) 감마(Gamma) 감마 수준의 도시들은 작은 경제지역과 세계경제를 연결하는 도시로서, 감마+, 감마, 감마-도시로 구분된다. 감마+(Gamma +) 감마(Gamma) 감마-(Gamma -) 충족 충족 단계 도시들은 세계 도시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도록 충분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시들이다. 이것은 고충족 도시들과 충족 도시들로 분류된다. 고충족 도시 충족 도시 2018년 결과 2018년도의 도시 분류는 다음과 같다. 알파(Alpha) 알파++(Alpha ++) 알파+(Alpha +) 알파(Alpha) 알파-(Alpha -) 베타(Beta) 베타+(Beta +) 베타(Beta) 베타-(Beta -) 감마(Gamma) 감마+(Gamma +) 감마(Gamma) 감마-(Gamma -) 충족 고충족 도시 충족 도시 각주 도시 지리학 사회과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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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D%94%EC%A0%81%EA%B8%B0%EA%B4%80
흔적기관
흔적기관은 특정 종의 조상에서 기원한 기능 중 일부나 전체를 소실한, 유전적으로 결정된 구조나 특성의 진화의 과정 중 정체되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흔적기관의 예로는 섬에 사는 새들의 날개 기능의 소설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보습코기관, 뱀과 웨일의 뒷다리도 다른 한 예로 볼 수 있다. 같이 보기 격세유전 우성 (유전학) 각주 외부 링크 Vestigial organs at the TalkOrigins Archive 진화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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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4%8C%EB%A3%A8%EC%98%A4%EB%A6%B0%ED%99%94%20%EB%9D%BC%EB%8F%88
이플루오린화 라돈
이플루오린화 라돈은 비활성 기체인 라돈의 화합물이다. 라돈은 고체 화합물의 형태로 플루오린과 쉽게 화합한다. 라돈 화합물 플루오린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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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96%91%20%EC%BA%90%EB%A1%AF%20%EC%A0%90%ED%8D%BC%EC%8A%A4
고양 캐롯 점퍼스
고양 캐롯 점퍼스(Goyang Carrot Jumpers)는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 농구단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에 위치하는 고양체육관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 구단 역사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농구단의 역사는 1994년, 한국프로농구연맹에 창단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된다. 모기업 동양제과의 대지분으로 1995년 3월 '동양제과 농구단'을 창단하고 1995년 10월에는 농구단의 심볼을 오리온스로 확정지었으며, 1996년 3월 27일 창단식을 갖고 남자 농구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동양농구단은 27일 후 코리안리그 우승이라는 신화를 기록했고, 6개월 후에는 제7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올렸다. 1997년 프로농구 출범을 앞두고 1996년 11월 농구열기가 강한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정하였고, 같은 해 12월 27일 10개 구단 중 가장 먼저 독립법인 동양레포츠 주식회사를 설립, '동양제과 농구단'에서 '대구 동양 오리온스 프로농구단'으로 개칭, 프로농구단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2003년 9월에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의 그룹 분리로 '대구 오리온스 농구단'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2011년에 연고지를 대구광역시에서 고양시로 이전하여 '고양 오리온스 농구단'으로 교체하여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고,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다. 2015년 '고양 오리온스'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로 모기업 명을 포함한 팀명으로 변경했다. 홈구장은 2010-11 시즌까지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열렸고,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2011-12 시즌부터 고양체육관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다. 신생팀 선풍 대구 오리온스의 모태가 된 동양제과는 1996년 3월에 고려대학교와 경희대학교를 연고 학교로 하여 창단했다. 창단 감독으로는 상무 농구단의 감독이었던 박광호를 선임했으며, 김진 코치를 영입했다. 또, 고려대학교 포워드 전희철, 김병철과 김광운, 허남영 등을 비롯한 15명의 선수들을 창단 멤버로 영입하며 기틀을 마련했다. 그 해 4월의 박카스배 코리안리그 1차 대회에서 상무와 6승 2패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승자승 원칙에 따라 창단 27일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골밑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던 전희철은 MVP를 수상했고, 동양제과의 저력은 그 해 전국체전 준우승을 거쳐 프로 원년까지 이어져 우승 후보로 손꼽히기에 이르렸다. 덕분에 창단 초기부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며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프로 출범 초기 활약 프로 원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 팬들의 기대감은 뜨거웠다. 토니 매디슨과 로이 해먼즈, 두 용병 콤비와 전희철-김병철의 토종 콤비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높게 평가받았다. 시즌 초 단독 2위까지 치고 올라갔으나 시즌 중반 이후 기세가 꺾였다. 결국엔 원년 1997 시즌에서 11승 10패의 성적으로 4위를 기록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광주 나산 플라망스를 4승 1패로 완파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그 해 챔피언 자리에 오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게 패하였다. 다음 시즌인 1997-98 시즌에도 리바운드 1위를 기록한 용병 키넌 조던-전희철의 더블 포스트와 김병철의 폭발적인 3점 슛에 힘입어 23승 22패로 5위를 차지했고, 준 플레이오프에서 원주 나래 블루버드를 3승 2패로 제치고 2년 연속 4강에 진출한다. 이렇듯 전희철과 김병철은 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주축 선수였다. 이러한 점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이들의 병역이었다. 이 문제가 이후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긴 암흑기로서 표출되기 시작한다. 굴욕적인 32연패, 그리고 기나긴 암흑기 두 시즌 연속 4강에 진출하면서 가능성을 보인 오리온스의 가장 큰 난제는 전희철, 김병철, 박재일 등 주축 선수들의 병역 문제였다. 이들을 순차적으로 입대시키며 전력 누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안과 한꺼번에 입대시키는 방안을 놓고 고심하던 동양 오리온스 박용규 단장은 주위의 조언을 모두 종합해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결단은 '이왕 맞을 매, 화끈하게 한 번에 맞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돌아오는 날 '오리온스의 황금기'를 열겠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1997-1998 시즌 종료 후 전희철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고, 팀에서는 김병철, 박재일을 비롯한 주전급 국내 선수 6명을 모두 국군체육부대에 입대시켰다. 팀의 베스트 5는 외국인 선수 2명과 이적생 이인규, 이훈재, 정락영 등으로 모두 물갈이되었다. 외국인 선수 선발에서는 그레그 콜버트 라는 걸출한 선수를 뽑을 수 있었기에 구단 관계자들이 내심 최하위권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8경기를 치를 때까지 득점 및 리바운드 순위에서 1·2위를 다투던 그레그 콜버트가 부인과의 불화를 이유로 돌연 보따리를 싸 귀국하면서 시즌이 꼬이기 시작했다. 콜버트 대신 자바리 마일스를 영입했지만, 그의 기량은 콜버트에 크게 못 미쳤고 이후 연패를 거듭했다. 선수단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연패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KBL 신기록인 12연패와 NBA 기록인 25연패를 넘어서 결국 32연패에 빠졌고, 결국 이 연패 행진은 1999년 2월 28일의 나산 플라망스전에서 겨우 끝낼 수 있었다. 85:66으로 연패를 끊은 후 대구실내체육관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분위기였고 구장을 찾은 팬들과 팬클럽 회원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남은 경기에서도 전패를 당하며 3승 42패로 1998-1999 시즌을 마감했다. 다음 1999-2000 시즌에는 공익근무 소집이 해제되어 복귀하는 전희철, 신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입단한 조우현 등 복귀하거나 새로이 가세하는 선수들이 있어서 역시 시즌 초반에 기대감을 높였다. 그 밖에도 코칭 스태프와 선수, 프런트가 이전 시즌의 굴욕을 벗어 던지기 위해 혼연 일체가 되었다. 하지만 시즌 전 기대했던 신인 포인트가드 김상우가 팔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시즌 내내 포인트가드 부재로 고생하게 된다. 거기다 전희철이 시즌 초 이마 부상, 6강 다툼이 한창 치열할 때 발목 부상으로 결장하고 조우현도 허리 디스크로 시즌 중 15일간 결장한데다 외국인 선수 무스타파 호프 가 부인의 출산을 이유로 3경기를 결장하는 등 악재들이 겹치며 중하위권에서 계속 맴돌았다. 시즌 막판 6경기에서 5승 1패로 선전하며 치고 올라가는 듯했으나 결국 6위권과 1승 차이(20승 25패)로 8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00-01 시즌에는 김병철이 복귀하고 전희철 등이 건재하여 4강 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9승 36패로 다시 꼴찌를 기록하면서 참담한 시즌을 보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포인트가드의 부재였다. 원래 슈팅 가드인 김병철이 팀 사정상 시즌 내내 포인트가드 역할을 보면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이흥배, 김상우와 같은 기대했던 신예 포인트가드 선수들의 성장이 받쳐 주지 못했던 것이 뼈아팠다. 또한 기대 이하였던 외국인 선수가 자주 교체되면서 조직력을 정비할 시간이 없었다. 와이킹 존스-앨버트 리차드슨-토시로 저머니, 데이먼 플린트-마이클 루이스-토드 버나드 등으로 이어지는 교체 릴레이는 안 되는 팀의 전형이었다. 시즌 중 최명룡 감독이 해임되고 김진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임명되는 등 갖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10위라는 성적표만 안았다. 이런 답답함으로 인하여 오리온스는 2001-2002 시즌을 앞두고 새로 가드 한 명을 지명하기로 한다. 그리고 오리온스는 보기와는 다르게 성장한다 김승현의 합류, 그리고 전성기 감독대행을 맡고 있었던 김진 코치는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꼴찌의 반란'. 2001-02 시즌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게 따라다니던 호칭이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뽑은 동국대학교 출신의 수퍼 루키 가드 김승현과 1순위 용병 마커스 힉스의 가세로 다시 한 번 기대를 모았던 선수 구성이었지만 지난 3년의 길고 긴 부진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올해도 기대감에서 끝날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하였다.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폭발한 김승현과 마커스 힉스의 활약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김승현은 178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해 프로농구 무대 전체를 휘저었다. 김승현은 12.2득점, 4.0리바운드, 8.0어시스트, 3.2스틸를 기록하면서 어시스트 1위, 스틸 1위를 차지했다. 화려한 드리블과 패스, 엄청난 스피드로 몇 년간 이어졌던 동양 오리온스의 포인트가드 부재를 한 번에 해소해 주었다. 결국 시즌 MVP와 신인상까지 동시에 수상하였다. 한편, 마커스 힉스는 체격은 왜소했지만 NBA 수준의 골밑 돌파와 가공할 체공력에서 나오는 블록슛, 리바운드를 갖춰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1순위다운 실력을 뽐냈다. 농구팬들에게는 한 단계 수준이 높아진 농구를 보여줬다. 농구팬들에게는 보는 즐거움을, 팀에는 승리의 기쁨을 동시에 선사한 것이다. 24.2득점으로 4위, 8.2리바운드, 3.7어시스트, 2.9블록으로 1위를 기록하는 등 고른 활약으로 외국인 선수상을 차지했다. 욕심을 버리고 팀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않은 '양철' 듀오의 변신도 시즌내내 화제가 됐다. 초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으로 20년 가깝게 우정을 나눠온 전희철과 김병철은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서로 견제한다', '둘의 자존심이 팀을 망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이였으나 팀 득점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리한 플레이를 자아 냈고 시즌 전 구단측의 일방적인 연봉 삭감 통보를 감수하면서 묵묵히 부활을 준비했다. 농구공을 잡은 이래 처음 맛보는 '꼴찌' 수모는 이들의 자존심에 불을 지폈다. 김진 감독은 키가 작은 3점슈터 김병철에게 “수비가 안되면 출전시키지 않겠다”며 수비를 강조했고 골밑보다는 외곽을 선호하던 전희철에게는 골밑 로테이션 수비의 중책을 맡겼다. 이들은 '수비만 하라'는 김진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힉스의 공격패턴이 타팀에게 간파당하고 체력이 부쩍 떨어진 3라운드가 되자 김진 감독은 '출격 명령'을 내렸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김병철과 전희철은 내·외곽에서 득점을 해 줬고 동양은 이들의 든든한 활약으로 선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20순위로 가장 늦게 뽑힌 라이언 페리맨이 경기당 14.81개의 리바운드로 1위에 오르고 포스트 공격에서 힉스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숨은 활약을 펼쳐주었고 김진 감독의 용병술, 정태호 단장의 물심양면적 지원이 더해지면서 시즌 1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4강에서 5차전, 결승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선수단과 프런트, 팬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물론 지난 3년 간의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핵심 가드 김승현은 김진 감독과 함께 참가한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까지 차지하여 병역도 해결했다. 2002년에는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우승하고 나서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여 대구광역시 연고 프로 스포츠단들이 많이 우승을 차지한 해이기도 하다. 전성기, 계속된 정상도전 이어진 2002-03 시즌에 앞서 샐러리캡 문제로 전희철이 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하고 페리맨도 재계약하지 않고 창원 LG 세이커스로 팀을 이동하면서 우승 멤버 중 2명이 빠졌다. 그밖에 전력 플러스 요인이 없이 시즌을 맞이하여 우승 전력보다는 4강권으로 분류되었다. 새로 뽑은 외국인 선수 AJ 롤린스 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시즌 중반 토시로 저머니 로 대체되었지만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의 콤비플레이가 더욱 무르익어가고 LG에서 영입한 박훈근 이 전희철의 공백을 잘 메워 주면서 시즌 초 선두권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저머니의 부진과 김승현의 징계, 박훈근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면서 위기가 다가왔다. 이 위기는 김승현의 공백은 신인 가드 박지현이, 박훈근의 공백은 박재일이 훌륭히 메워 주었고 변함없이 김병철이 내외곽에서 활약하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결국은 2년 연속 정규리그 제패에 성공하면서 김병철(평균 36분 20초 출장, 16.9득점, 2.6리바운드, 2.7어시스트, 3점슛 2.5개(3위), 1.6스틸(9위))은 시즌 MVP, 마르커스 힉스(평균 37분 40초 출장, 26.1득점(2위), 8.6리바운드, 4.8어시스트(8위), 3.2블록(1위))는 외국인 선수상, 김진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3위였던 원주 TG삼보 엑서스와 맞붙었던 이 해의 KBL 챔피언 결정전에서 악명 높은 '15초 실종사건'이 일어난다. 챔피언 결정전 1,2차전을 TG 삼보에 내주고 3,4차전을 승리한채 맞은 5차전에서 3차 연장까지 간 끝에 패배하였다. 하지만 경기 후 이 경기를 분석하던 코칭 스태프는 4쿼터 종료 1분 16초전 허재의 아웃 오브 바운드로 TG 삼보가 공격을 재개해 잭슨의 3점슛이 들어가기까지 15초 동안 전광판 시계가 계속 멈춰있었던 계시원의 결정적 실수를 발견했다. 동양은 재경기를 요청했고 제정위원회에서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6차전 당일 오후 열린 KBL 김영기 총재와 양팀 단장간의 면담에서 동양은 고심 끝에 재경기 기회를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대로 재경기를 주장했다가는 TG 삼보가 6차전 몰수패를 선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정태호 단장은 “프로농구 발전이라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제소를 취하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동양은 선수들의 투혼이 6,7차전 승리로 이어지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숨막히던 승부는 6차전에서 TG 삼보의 우승으로 마무리지어졌다. 2003-04 시즌을 앞두고 모기업 동양그룹이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되어 대구 동양 오리온스는 오리온그룹 계열로 들어감에 따라 '대구 오리온스'로 팀명을 바꾸면서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오리온스는 2003-04시즌을 32승 22패, 3위로 마무리했다. 정규시즌 3연패 실패 원인은 두 명의 외국인 선수들이 힉스의 공백을 잘 메워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김승현, 김병철의 여전한 활약과 50%의 성공률로 3점슛 성공률 1위에 오르면서 급성장한 포워드 박재일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또 다시 오심에 눈물을 흘린다. 오리온스와 LG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 오리온스가 67-66으로 앞선 4쿼터 초반. LG의 공격 때 빅터 토마스가 엔드라인을 완전히 벗어나 볼을 패스했지만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경기는 계속됐고, 오리온스가 76-73으로 앞선 상황. 레이저가 림을 맞고 나온 볼을 건드려 바스켓에 넣었다. 그러나 심판은 실린더룰을 적용,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온스는 결국 강동희의 3점포에 무너지며 4강 플레이오프 진출 좌절이라는 불운에 울어야 했다. 오심 파문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확산일로를 치달았다. 김진 감독은 “조작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차라리 내가 심판을 하겠다”며 반발했고, 오리온스는 KBL에 재경기와 함께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KBL은 KCC와 LG의 플레이오프 4강 1차전이 열리던날 ‘오심은 인정되지만 조작의 증거는 없다’며 재경기 요구를 기가했고, 해당 심판에 대한 중징계만을 내렸다. 정태호 오리온스 단장은 사퇴 발표라는 배수의 진까지 쳤지만 KBL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남는 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KBL은 과거 한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외국인 심판제를 2004-2005시즌 다시 도입키로 했다. 또 오심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실린더룰도 폐지되었다. 그 후 2004-05, 2005-06, 2006-07 시즌에서도 김진 감독, 김승현-김병철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면서 꾸준히 힘을 발휘해 서울 삼성 썬더스가 9시즌 연속 진출하기 전까지 KBL 최다인 6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기록을 달성한다. 속공을 내세우는 빠른 플레이, 3점슛, 덩크슛으로 대변되는 화려한 농구는 대구 오리온스의 특징으로 자리잡으면서 많은 팬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이는 KBL 12시즌 통산 득점 1위(50,323점), 3점슛 1위(4,686개)라는 기록이 말해준다. 대구 오리온스 자체로 한국 프로농구의 흥행코드로 자리잡았고 포인트가드 김승현, 프로 원년부터 팀을 한 번도 옮기지 않은 프랜차이즈 스타 김병철도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2007-08시즌 맞은 위기 2007-08 시즌을 앞두고 팀의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던 김진 감독이 서울 SK 나이츠로 떠나면서 다시 오리온스는 변화를 겪는다. 과거 대한민국 농구계의 슈퍼 스타였고 1997-98 시즌에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을 역임하며 수비 농구로 정규리그 2위를 이끌었던 이충희 감독을 영입했다. 그리고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2순위로 귀화 농구선수인 이동준을 영입하면서 어느 시즌보다 기대감을 높였으며 개막 2연승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김승현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김승현은 2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며 경기당 평균 6.0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 자리를 신인 김영수 가 비교적 잘 메꿔주었지만 역부족이었고 주태수, 이동준이 포스트에서 제역할을 해주었지만 꾸준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 둘은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가 발생하여 시즌 중 팀의 리빌딩을 위해 주태수는 눈물을 머금고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옮겨갔다. 이충희 감독도 시즌 초 사임하여 김상식 감독 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친 오리온스는 결국 12승 42패로 7년 만에 최하위의 수모를 겪게 된다. 하지만 신인 선수들인 김영수, 이동준, 그리고 슈팅가드 김병철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시즌 중 트레이드된 전정규의 가능성을 본 시즌이었다. 그리고 김승현의 공백시 전력이 크게 떨어지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2008 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대학 포인트가드 최대어 정재홍을 영입하는 등 다음 시즌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행보를 보이게 했다. 계속되는 몰락 2008-09 시즌 김상식 감독 체제로 갔던 오리온스는 김승현이 빠른 시일내에 복귀하고, 시즌 중반에 원주 동부 프로미 우승의 주역이었던 레지 오코사를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릴려고 했다. 하지만 김승현이 시즌 아웃을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오코사와의 호흡도 맞지 않아 끝내 김상식 감독은 사퇴한다. 시즌이 끝난 후,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코치였던 김남기 감독과 김유택 코치가 취임하였으나, 김승현이 이면계약으로 18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2010-11 시즌에도 몰락이 계속되어서 또 다시 10위를 기록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김병철이 은퇴했고, 김남기 감독도 물러났다. 김유택 코치도 팀에서 물러나 모교의 감독으로 옮겼다. 대구에서 고양으로 연고지 이전 김남기의 후임 감독으로 추일승이 취임하였다. 2011년 6월 오리온스가 대구광역시와 협의없이 경기도 고양시로 연고지 이전을 강행하였다. 그로 인해 2011-12 시즌부터는 대구 오리온스가 아닌 고양 오리온스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 여파로 오리온 제품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등 반발을 거세졌다. 대구광역시는 KBL에서 오리온스 연고지 이전 불허를 신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KBL이 27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오리온스의 연고지를 고양시로의 이전 확정이 승인됨에 따라, 2011-12시즌부터 팀명을 고양 오리온스로 교체하게 되었다. 연고지를 옮긴 뒤 처음 치른 시즌인 2011-12 시즌에서는 20승 34패, 8위를 기록하였다. 2012-13 시즌 초반에 6승 3패를 기록했으나 그 뒤 레더가 무단이탈하는 등 험난한 행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떻게든 6강에 진출했고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2패를 먼저 떠안았던 것을 홈에서 2승으로 되갚지만, 결국 4강 티켓을 내주었다. 2015-2016 시즌에 전주 KCC 이지스를 꺾고 역대 2번째 우승을 차지하였고 고양에서는 첫우승이다. 역대 감독 연혁 우승 기록 국내 대회 리그 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2): 2001-02, 2015-16 준우승 (1): 2002-03 KBL 정규리그 우승 (2): 2001-02, 2002-03 준우승 (1) : 2016-17 3등 (2): 2003-04, 2015-16 컵 KBL 컵대회 우승 (1): 2020 프로-아마농구 최강전 우승 (1): 2015 준우승 아시아 대회 FIBA 아시아 챔피언스컵 우승 준우승 3등 선수단 군입대 선수들 응원단 아나운서 : 이희승 응원단장 : 유세범 치어리더 :조다정 이서연 박소현 김이서 박타미 조예린 한서희 차예나 같이 보기 캐롯손해보험 각주 외부 링크 고양 롯 점퍼스 웹사이트 고양 캐롯 점퍼스 페이스북 고양 캐롯 점퍼스 트위터 고양 캐롯 점퍼스 유튜브 1995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 한국농구연맹 팀 점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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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B%9D%BC%EC%9D%B8%20%ED%95%98%ED%82%A4
인라인 하키
인라인 하키()는 하키 경기 중 하나이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스틱 (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퍽을 상대로 골에 넣으면 득점이 된다. 얼음이 아니라 마른 노면에서 행해진다. 미국에서는 롤러하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인라인 하키를 가리킨다. 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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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A1%EB%82%98%EB%9E%91%EA%B5%B0
븡나랑군
븡나랑군은 피찟주의 행정 구역이다. 이 지역의 총 인구 수는 2005년 기준으로 28277명이다. 인구 밀도는 km2이다. 행정 구역 피찟주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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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E%91
남작
남작(男爵, Baron, 여성형: 남작 부인(男爵 夫人, Baroness), 여남작(女男爵))은 자작의 하위로, 오등작 귀족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동양 비공식적으로 유교 경전에서 다른 오등작과 함께 고대 중국의 하나라 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나라때에는 자작위와 함께 폐지되다가 은주혁명 이후 주나라가 패권을 쥐면서 자작위와 함께 부활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흔적이 있어 실제로는 주나라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주나라 당시 오등작중 최하위였으며 자작과 함께 50리의 영토와 1군(軍)을 둘 수 있었고 당시 남작에 봉작된 제후로는 허의 군주가 대표적인 예다. 이후 진나라에선 상앙의 변법으로 사라진 후 진한 시대까지 역사의 그늘에 있다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개국남이란 명칭으로 부활해 당시의 행정 명칭에 따라 현남으로 불렸으며 이후 청나라 시대까지 존재하다가 신해혁명으로 청과 함께 제정이 무너지면서 폐지되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황족과 사족사이에 화족 계급이 성립하면서 화족신분중 마지막인 제5등위 계급으로 남작위가 만들어졌다. 수여 기준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화족이 된 자, 류큐(現 오키나와)왕가의 방계 왕족, 주요 신사(神社)의 신직(神職)을 세습해 온 14가문, 정토진종(浄土真宗)계 세습 주지 4가문, 남조 조정의 충신의 후손, 기타 국가에 훈공이 있는 자 등이다. 또, 다이묘중 세력이 가장 적은 이들이 이 작위에 편제되었다. 당시 일본은 수직적 계급사회로 황족-화족-사족-평민의 4신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하자 미군정은 1947년 만민평등주의 명분을 내세워 화족제도를 비롯한 모든 특권계층을 일소(일본 황실은 제외)하였는데 이 때 남작위도 다른 오등작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로 일본 화족 계급의 습작(해당 작위의 세습)은 원칙적으로 남성만이 가능했고 여성에게는 승계될 수 없었다. 한국 고려시대의 문종때 종5품 현남(縣男)이 남작에 해당된다. 개국남(開國男)이라고도 한다. 자작에 해당하는 정5품 개국자(開國子)의 바로 아래 서열의 작위이며 봉작된 이로는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 채충순, 해남현개국남(海南縣開國男) 주저 등이다. 원(몽골제국)의 내정 간섭기를 거치면서, 제후국에 이러한 작위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참람한 것이라는 명목하에 충렬왕때 폐지되었다. 훗날 원의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대에 들어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격하되었던 여러 칭호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사라지는 등 변천을 겪었다. 그 후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조선 개국 초기에 전례를 따라 개국공신들에게 공신들의 본관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한 후인 1401년 명과의 관계원활을 이유로 다른 작위와 함께 폐지하였다. 훗날인 1898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을 했으나 여전히 봉군제를 유지했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한일합방에 공이 있다는 구 대한제국의 방계황족과 관리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 때 남작위를 수여받은 이는 총 45명이었다. 서양 서양의 남작은 영주 중에 가장 세력이 적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국왕에게 직접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봉건화가 진행되는 후기에는 보통 휘하에 소영주를 거느리지 못한 몇 개의 장원 정도를 가지고 직접 영지를 통치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사실상 기사와 함께 소영주로 분류된다. 다만 남작 중에도 대남작이라 해서 백작을 능가하는 세력을 지닌 이가 존재하기는 했다. 프랑스 12세기 프랑스에서 바롱(baron)은 한정된 의미에서 볼 때, 요지에 있는 봉토를 가진 모든 영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3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국왕에게 직접 봉토를 받은 실력자들을 뜻하게 되었고, 따라서 중간 정도의 지위를 가진 봉신에 불과했던 백작보다 영향력이 더 컸다. 하지만 14세기 초부터는 남작 칭호가 그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남작이 여전히 다른 백작들보다 권세있고 영지가 많기는 했으나 지위는 백작과 자작 밑으로 떨어졌다. 17세기까지는 남작 칭호를 가지려면 남작령을 소유해야만 가능했는데, 절대군주제하에서는 루이 14세에 의해 수많은 국왕칙허장을 내려 수많은 남작을 만들었기 때문에 남작의 가치는 이때 처음으로 떨어졌다. 남작위 수여는 그 뒤 나폴레옹 황제가 다시 시작했으며 루이 18세, 사를 10세, 루이 필리프 때까지 이어졌고, 그 뒤 얼마 동안은 없다가 나폴레옹 3세 때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작위를 수여하는 일이 벌어졌다. 1870년 이후부터는 남작 칭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프랑스의 역대 공화정부들도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같은 정부의 태도 때문에, 사실 이렇다 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도 남작으로 칭하게 되는 사례가 빈번해져 혼란이 일어났다. 독일 독일에서는 남작을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로운 영주'를 뜻하는 말인 프라이헤어(Freiherr)라고 불렀다. 원래 이 말에는 왕가 사람들과 같은 지위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백작(Graf) 칭호를 갖지 않았으면서도 백작의 권한을 행사했다. 이들 가운데 세력이 강한 자들이 스스로 백작을 칭하게 되면서 프라이헤어 칭호는 그보다 낮은 귀족 작위가 되었다. 황제칙허장을 내려 프라이헤어의 칭호를 수여하는 관행은 16세기 황제 카를 5세 때 생겼고 뒤에 가서는 독일의 모든 군주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탈리아 중세 이탈리아의 남작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 막강한 재판권을 행사했고 때로는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다. 물론 항소권도 있기는 했으나 별로 유용성이 없었고 시칠리아나 사르데냐에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남작의 권력은 특히 남부에서 강해져, 화폐를 주조하고 개인적인 전쟁을 벌일 권한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남작 칭호는 1945년까지 인정을 받았다. 스페인 중세 초기에 나바라와 아라곤 두 왕국에서는 고위 귀족들을 가리켜 바론(barón)이라 했고 나중에는 리코스 옴브레스(ricos hombres:'부유한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이는 카스티야의 관행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단순히 그 지역의 실력자를 뜻했으나 중세 말기에는 프랑스의 남작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작위가 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이 칭호를 계속 보유하려 했으나 1812년 카디스에서 열린 코르테스(스페인 의회)에서 남작위는 폐지되었다. 잉글랜드 11~12세기초에 잉글랜드에서는 모든 봉토직수령자들을 배런(baron)이라 불렀으며 이들이 내는 봉토 상속세의 액수는 보통 영지의 크기에 따라 결정했다. 그러나 1200년경부터 이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리잡았고 대체로 '상위' 또는 '하위'귀족 등으로 그 지위를 나누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는 영지를 가진 사람들이 배런이 될 수 있었으나 나중에 에드워드 1세 때에는 왕에게서 소집장을 받은 사람만이 배런 자격으로 궁정회의(뒤에 상원으로 발전함)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배런의 지위 결정은 영지소유 유무가 아니라 왕의 뜻에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국왕의 소집장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당시에는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어떤 일정한 칭호나 직위를 갖지는 않았으며 남작이라는 공식 칭호는 1387년 리처드 2세가 처음 도입했다. 이때 리처드 왕은 칙허를 내려 존 비첨에게 비첨 경과 키더민스터 남작의 작위를 주었는데, 헨리 6세 때는 이런 작위수여가 흔히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쓸 때에는 여전히 남작이라는 말 대신 경(Lord)을 사용했고 오늘날에도 편지글에서 남작을 언급할 때는 '……경'이라는 칭호를 쓴다. 그러나 공작 아래에 있는 다른 귀족들의 경우에는 좀 차이가 있다. 이들을 부를 때는 마찬가지로 '……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편지글에는 각자가 가진 작위 이름을 쓴다. '……남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없었던 말로 최근에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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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동이 틀 때
먼동이 틀 때는 다음을 가리킨다. 먼동이 틀 때: 1927년 한국 영화 먼동이 틀 때: 1961년 한국 영화 먼동이 틀 때(By Dawn's Early Light): 2000년 미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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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us, 1947년)는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파우스트 전설을 근대화한 것으로 부제(副題)로 <한 친우가 이야기하는 독일의 작곡가 아드리안 레베퀸의 일생>이라 쓰여 있다. 1949년 동·서 양 독일로부터 괴테상(賞)을 받았다. 이 작품의 해석에는 1949년 발표된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이 참고가 된다. 줄거리는 작곡가인 아드리안이 인간을 사랑치 않을 것을 조건으로 예술창조의 감격을 위해 악마에게 자신을 팔아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이야기로 악마는 매독으로써 주인공의 뇌(腦)를 해친다. 니체의 발광(發狂)을 모델로 삼고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묵시록(默示錄)의 음악화(音樂化)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론을 쇤베르크의 음악에 의해 전개하고 있다. 만을 방문한 손자인 프리트가 “제가 찾아와 기쁘시지요”하고 말한 것을 그대로 작중(作中)의 어린 에히요에게 말하게 하고 있다. <부덴브로크>의 피날레인 “모두 어디로 갔을까”와는 반대로 ‘온다’고 하는 기쁨도, 사람을 사랑하여서는 안 되는 까닭에 어린 에히요를 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데 만은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외부 링크 토마스 만의 소설 독일 소설 음악을 소재로 한 소설 작곡가를 소재로 한 소설 영화화된 소설 텔레비전 프로그램화된 소설 철학 소설 모더니즘 1947년 소설 파우스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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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 (동음이의)
안도라는 다음을 가리킨다. 안도라(Andorra)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유럽의 공국이다. 안도라라벨랴(Andorra la Vella)는 안도라의 수도이다. 안도라(Andorra)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 테루엘 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안도라(Andora)는 이탈리아 리구리아 주 사보나 현에 위치한 코무네이다. 안도라 (희곡)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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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큐티는 다음을 가리킨다. 큐티(cutie)는 귀여움을 뜻하는 영어 낱말이다. QT 같이 보기 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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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코젠 합성
글리코젠 합성()은 포도당 분자를 저장하기 위해 글리코젠 사슬에 포도당을 첨가하는 과정이다. 글리코젠 합성 과정은 코리 회로 작동 후에 휴식 기간 동안 간에서 활성화되며, 또한 포도당의 높은 농도에(예: 탄수화물이 함유된 단 음식을 섭취한 후) 반응하여 인슐린에 의해 활성화된다. 단계 글루코스(포도당)는 글루코키네이스 또는 헥소키네이스의 작용에 의해 글루코스 6-인산으로 전환되며, 이 과정에서 ATP가 ADP로 전환된다. 글루코스 6-인산은 포스포글루코뮤테이스의 작용에 의해 중간생성물인 글루코스 1,6-이중인산을 거쳐 글루코스 1-인산으로 전환된다. 글루코스 1-인산은 UDP-글루코스 피로포스포릴레이스의 작용에 의해 UDP-글루코스로 전환된다. 피로인산이 형성되고, 나중에 피로포스파테이스에 의해 두 개의 인산 분자로 가수분해된다. 글리코제닌은 처음에 짧은 글리코젠 사슬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며, 그런 다음 글리코젠 합성의 다른 효소들에 의해 사슬이 신장되고 새로운 가지 사슬이 형성된다. 호모다이머인 글리코제닌은 각 소단위체에 티로신 잔기를 가지고 있어서 글리코젠의 환원 말단에 대한 앵커(anchor) 역할을 한다. 처음에 약 8개의 UDP-글루코스 분자가 글리코제닌에 의해 각 티로신 잔기에 순차적으로 첨가되어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형성한다. 일단 8개의 포도당 단량체의 사슬이 형성되면, 글리코젠 생성효소는 성장하는 글리코젠 사슬에 결합하고 글리코젠 사슬의 비환원 말단의 포도당 잔기의 4-하이드록시기에 UDP-포도당을 첨가하여, 이 과정에서 더 많은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형성한다. 분지는 글리코젠 분지효소(아밀로 α(1→4)~α(1→6) 트랜스글리코실레이스라고도 함)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효소는 적어도 11개의 포도당 잔기를 가지고 있는 글리코젠 사슬의 비환원 말단으로부터 6~7개의 포도당 말단 부분을 같은 또는 다른 글리코젠 사슬의 보다 안쪽에 있는 포도당의 6번 탄소(C-6)의 하이드록실기로 옮겨 α(1→6)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형성하며, 새로이 생성된 분지는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더 많이 형성함으로써 보다 더 성장한다. 통제 및 조절 글리코젠 합성은 호르몬 조절에 반응한다. 조절의 주요 형태 중 하나는 글리코젠 생성효소와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의 다양한 인산화이다. 이것은 차례로 많은 요인들에 의해 조절되는 호르몬 활성의 통제 하에 있는 효소들에 의해 조절된다. 이와 같이,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과 비교할 때 다른 많은 가능한 효과인자들이 존재한다. 에피네프린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는 인산화에 의해 활성화되는 반면, 글리코젠 생성효소는 인산화에 의해 억제된다.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는 가인산분해효소 b 키네이스에 의해 덜 활성화된 형태인 "b"형으로부터 활성형인 "a"형으로 전환된다. 가인산분해효소 b 키네이스는 단백질 키네이스 A에 의해 활성화되고, 인단백질 인산가수분해효소-1(가인산분해효소 a 인산가수분해효소)에 의해 불활성화된다. 단백질 키네이스 A 자체는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 호르몬에 의해 활성화된다. 에피네프린은 아데닐산 고리화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수용체 단백질에 결합한다. 아데닐산 고리화효소는 ATP를 cAMP로 전환시킨다. 2분자의 cAMP가 단백질 키네이스 A의 조절 소단위체에 결합하여 단백질 키네이스 A의 촉매 소단위체를 활성화시켜서 다른 단백질들을 인산화시킬 수 있도록 한다.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의 덜 활성화된 형태인 "b"형은 자체적인 입체구조의 변화없이 활성화될 수 있다. AMP는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 활성인자로 작용하는 반면, ATP는 억제인자로 작용한다. ATP는 이미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의 조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에너지 요구에 따라 대사 흐름의 속도를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에피네프린은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글리코젠 생성효소를 억제한다. 이것은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의 활성 효과를 증폭시킨다. 이러한 억제는 단백질 키네이스 A가 활성을 낮추는 효소를 인산화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유사한 메커니즘에 의해 달성된다. 칼슘 이온 칼슘 이온 또는 고리형 아데노신 일인산(cAMP)은 2차 전달자로 작용한다. 이는 음성 조절의 예이다. 칼슘 이온(Ca2+)은 인산가수분해효소 b 키네이스를 활성화시킨다. 이것은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를 활성화시키고, 글리코젠 생성효소를 억제한다. 각주 같이 보기 글리코젠 분해 글리코젠 생성효소 당원병 물질대사 대사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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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A2%85%ED%99%94%20%281908%EB%85%84%29
윤종화 (1908년)
윤종화(尹鍾華, 일본식 이름: 伊坂和夫, 1908년 3월 1일 ~ ?)는 일제강점기의 경찰 간부 겸 관료이다. 윤장섭(尹章燮)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생애 충청남도 출신으로 1934년에 규슈 제국대학 법문과를 졸업했다. 규슈 제국대학 재학 중인 1933년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경상남도 창녕군과 김해군에서 군수를 역임하였고, 1940년에는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임명되어 항일 운동을 탄압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1940년을 기준으로 종7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종로경찰서장을 거쳐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에는 황해도 경찰부장이 되었다. 당시 경찰부장 가운데 조선인은 윤종화가 유일하여 조선인 경찰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다. 이때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황해도 지역에 소군정이 실시되면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 소련으로 압송되어 간 뒤 실종되어 소식을 알 수 없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총독부 사무관과 경시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와 경찰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후손으로 둘째 아들이 윤석순으로 전두환정권때 부산영도에서 민정당 공천받았으나 낙선한후 남극탐사 대장을 하고 다시 고향에서 한나라당 공천신청하였으나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유로 낙천되었음 직접적인 후손은 아니나 윤종화의 형의 손자가 지금 인천에서 국회의원을 당선되었고 친박의 핵심이자 전 전두환의 사위이자 현 푸르밀 사위인 윤상현의원이다. 아마 윤석순이 민정당 공천을 받은 이유중 가장큰 이유가 전두환과 사돈관계였다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자료 각주 1908년 출생 몰년 미상 일제강점기의 경찰 일제강점기의 관료 한국의 실종자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충청남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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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흥전리 삼층석탑재
삼척 흥전리 삼층석탑재(三陟 興田里 三層石塔材)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 신라의 돈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절터 주변에 있는 탑과 석등 등의 석재이다. 2000년 1월 22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흥전리 절터는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기록과 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신라의 돈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절터 주변에는 탑과 석등 등의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基壇部)가 3층으로 되어 있어 보기드문 형태이다. 현재 무너져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부재들이 깨지지 않은 상태로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탑의 부재들로 추측된다. 같이 보기 삼층석탑 참고 자료 강원도 (남)의 유형문화재 흥전리 삼층석탑재 삼층석탑 신라의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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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6%AC%EC%8A%A4%ED%8B%B0%EB%94%94%EC%8A%A4%20%EC%95%84%ED%81%AC%EB%9D%BC%ED%86%A0%ED%92%80%EB%A1%9C%EC%8A%A4
아리스티디스 아크라토풀로스
아리스티디스 아크라토풀로스는 그리스의 테니스 선수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아크라토풀로스는 남자 단식 경기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에드윈 플랙을 꺾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런데 같은 그리스 팀동료인 콘스탄티노스 파스파티스에게 져서 공동 5위가 되었다. 남자 복식 경기에서는 형제인 콘스탄티노스 아크라토풀로스와 같이 짝을 이뤄서 출전했다. 이 팀은 1라운드에서 금메달리스트 팀인 독일의 프리드리히 브라운과 영국의 존 피우스 볼랜드에게 졌다. 출전한 5팀 중 공동 4위를 기록했다. 1896년 하계 올림픽 테니스 참가 선수 그리스의 남자 테니스 선수 그리스의 올림픽 테니스 참가 선수 19세기 그리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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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을 위한 세레나데 (차이콥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 다장조 작품번호 48》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1880년에 작곡한 후기 낭만파 양식의 세레나데이다. 다음과 같은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Pezzo i forma di sonatina: Andante non troppo - Allegro moderato Valse: Moderato - Tempo di valse Elegie: Larghetto elegiaco Finale (Tema russo): Andante - Allegro con spirito 외부 링크 IMSLP의 퍼블릭 도메인 악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작품 다장조 작품 현악 합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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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봉퐁 (2020년)
태풍 봉퐁(VONGFONG)은 2020년 5월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활동했고 최저기압 960hPa를 기록했던 2020년의 제1호 태풍이다. 필리핀에 영향을 주었다. 봉퐁은 마카오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말벌을 의미한다. 개요 2020년 제1호 태풍 봉퐁은 5월 12일 21시에 중심기압 100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북동쪽 반경)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세부 동쪽 약 5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5월 14일 15시에 필리핀 세부 북동쪽 약 260 km 부근 육상(사마르섬)에서 중심기압 960 hPa, 최대풍속 44 m/s의 세력 '매우 강'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고, 5월 14일 15시에 최성기의 세력을 그대로 가진 상태로 필리핀 사마르섬에 상륙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필리핀을 관통하며 육상 마찰로 약화되었고, 남중국해와 루손 해협에 진출한 이후로는 북~북북서진하며 높은 연직시어로 인해 급약화되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5월 17일 3시에 필리핀 마닐라 북쪽 약 601 km 부근 해상(루손 해협)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5월 17일 3시에 필리핀 마닐라 북쪽 약 570 km 부근 해상(루손 해협)에서 중심기압 100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각주 외부 링크 봉퐁 2020년 필리핀 필리핀의 태풍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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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Paparazzi%20%28%EB%A0%88%EC%9D%B4%EB%94%94%20%EA%B0%80%EA%B0%80%EC%9D%98%20%EB%85%B8%EB%9E%98%29
Paparazzi (레이디 가가의 노래)
"Paparazzi"는 미국의 음악가 레이디 가가의 노래로, 가가의 첫 정규 음반 The Fame에 수록되어 있다. 가가와 롭 푸사리가 함께 노래를 작곡했으며, 앨범의 마지막 싱글로 발매되었다. 영국, 이탈리아,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등지에서 10위권 진입을 했다. 미국에서는 2009년 7월 6일에 발매되었으며, 한국에서는 31일날 발매되었다. 처음에 영국에서는 "LoveGame"이 세 번째 싱글로 발매될 예정이였지만, "LoveGame"의 선정적인 가사와 뮤직비디오로 논란이 돼 대체할 싱글로 "Paparazzi"가 결정되었다. 노래의 가사는 레이디 가가가 작사하였으며, 내용은 명성에 대한 모험과 갈등을 묘사한 내용이다. 트랙 리스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CD 싱글 "Paparazzi" (Album Version) – 3:29 "Paparazzi" (Filthy Dukes Remix) – 5:21 차트 기록 각주 외부 링크 레이디 가가 "Paparazzi" 뮤직 비디오 MTV 레이디 가가의 노래 일렉트로팝 노래 미국의 노래 영어 노래 2009년 싱글 스토킹을 소재로 한 작품 2008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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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B%8B%AC%EC%A0%80%EC%88%98%EC%A7%80
박달저수지
박달저수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저수지이다. 형산강의 지류인 이조천의 발원지이다. 시설 관리자는 경주시장, 한국농어촌공사이다. 같이 보기 내남면 박달로 경상북도의 저수지 경주시의 지리 한국농어촌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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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AC%ED%8B%B0%20%EC%86%8D%EC%9D%98%20%EA%B0%9C%EB%AF%B8
팬티 속의 개미
《팬티 속의 개미》(Harte Jungs, Just The Two Of Us)는 독일에서 제작된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의 2000년 코미디 영화이다. 토비아스 쉔케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베른트 아이힝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출연 주연 토비아스 쉔케 악셀 슈타인 루이즈 하임 조연 미나 탠더 닉키 캔터 톰 라스 외부 링크 독일의 영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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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B%84%88%EC%84%9C
루너서
루너서(, , )는 게일 사람들의 축제로 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섬에서 열린다. 루너서는 세 가지 가을 축제 중 가장 먼저 시작되는 축제였습니다. 이 날은 수확의 계절을 알리는 날이었으며, 여름이 쇠하고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루너서는 라마스(Lammas)라고도 불렸는데, 이것은 "빵의 축제(the Feast of Bread)"를 뜻하는 색슨 어의 라-마스(Hlaf-mass)에서 온 말이었죠.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루너서의 축제와 의식은 풍작을 기원하고 수확의 때가 온 것을 축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풍작을 기원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는데, 그 해 가을 얼마나 거둬들이는지에 따라 부족의 사활(死活)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죠. 고대인들은 빌베리(bilberries)를 따 모음으로써 루너서 의식이 성공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베리가 많다면, 의식은 성공한 것이고 그 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었죠. 루너서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루(Lugh) 신을 찬양하는 축제였습니다. 일다나흐(Idanach), 즉 "모든 일에 능한 신(the God of All Skills)"이라고도 불리는 루는 "밝게 빛나는 자(Bright or Shining One)"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태양의 신인 그는 농업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했습니다. 브리튼과 웨일즈에서 루는 "류(Lleu)"라고 불렸는데, 별과 재생(再生)의 여신인 아리안로드(Arianrhod)의 아들이었죠. 보통 이 날에는 루를 찬양하기 위한 운동 경기들이 벌어졌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희생제(犧牲祭)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루를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기도 했지만, 어떤 곳에서는 나무를 심을 땅을 마련하다 죽은 루의 양어머니 탈티우(Tailtiu)를 위한 의식으로서 행해졌습니다. 많은 종류의 곡식과 약초, 열매 등이 이 시기에 수확되어 건조되었습니다. 8월의 기념일 아일랜드의 행사 스코틀랜드의 행사 게일 문화 맨섬의 문화 아일랜드 신화 스코틀랜드 신화 루 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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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76%EB%85%84%20%EB%8F%99%EA%B3%84%20%EC%98%AC%EB%A6%BC%ED%94%BD%20%EA%B7%B8%EB%A6%AC%EC%8A%A4%20%EC%84%A0%EC%88%98%EB%8B%A8
1976년 동계 올림픽 그리스 선수단
1976년 동계 올림픽 그리스 선수단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개최된 1976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올림픽 그리스 선수단이다. 참조 올림픽 공식 결과 1976년 동계 올림픽 선수단 올림픽 그리스 선수단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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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B%A1%9C%20%EC%97%90%EB%84%88%EC%A7%80%20%EB%B9%8C%EB%94%A9
제로 에너지 빌딩
제로 에너지 빌딩(zero-energy building) 또는 에너지 제로 하우스는 고성능 단열재와 고기밀성 창호 등을 채택,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는 ‘패시브(Passive)기술’과 고효율기기와 신재생에너지를 적용한 ‘액티브(Active)기술’ 등으로 건물의 에너지 성능을 높여 사용자가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에너지 공급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건축한 빌딩을 이야기한다. 소비성 에너지나 오염 물질이 나오지 않고 태양열 에너지나 풍력 에너지, 지열 에너지 등을 사용한 집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채광, 환기, 단열이 잘 되어 있는 집을 말하기도 한다. 정부가 2015년 11월 23일 발표한‘2030년 에너지 신산업 확산전략'에 따르면 2025년부터는 국내 신축되는 건물이 모두 ‘제로(0)에너지 빌딩’으로 건축돼야 한다. 조건 고효율 저에너지 소비의 실현 단열, 자연 채광, 바닥 난방, 고효율 전자기기 사용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난방, 조명 등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건물의 자체적인 에너지 생산 설비 태양광, 풍력 등 자체적인 신재생에너지 생산 설비를 갖추고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에너지 절감이 제로 에너지 빌딩의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신재생에너지에 의한 에너지 생산은 충분조건이라 할 것이다. 전력망과의 연계 제로 에너지 빌딩이라면 자체 에너지 설비를 갖추기 때문에 전력망과의 연계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는 계절이나 시간, 바람 등 외부 환경에 의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에 큰 편차가 존재한다. 바람이 잘 불거나 햇빛이 강할 때는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제공하다가 막상 바람이 멈추거나 밤이 되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기존 전력망과의 연계를 통해 에너지를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양이 충분할 때는 이를 외부에 공급하고, 부족한 시기에는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받으면서 연간 기준으로 제로(Net Zero)를 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자체 생산되는 에너지를 저장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이 경우 전력망과의 연계는 필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에너지 저장 기술을 고려하면 전력망을 통해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에 비해 원가가 더 높기 때문에 전력망과의 연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출처 주택 지속 가능한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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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B%B2%A0%EB%A0%88
스베레
스베레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스베레 시구르손: 1184년에서 1202년 사이의 노르웨이 국왕 폴 스베레 발헤임 하겐: 노르웨이의 배우 스베레 앙케 우스달: 노르웨이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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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6%80%EA%B8%89%20%EC%9E%A5%EA%B0%91%EC%88%9C%EC%96%91%ED%95%A8
바얀급 장갑순양함
바얀급 장갑순양함(Armored Croiseur class Bayan)은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구축함급이다. 단 함으로 통상파괴 작전에서 함대 직영함까지 운영되었으며, 일반 장갑순양함으로 프랑스에 설계를 의뢰해 건조되었다. 이 때문에 1번함인 바얀 만 프랑스 소시에떼 누벨르 지중해 조선소에서 제작되었고, 나머지 3척은 러시아에서 제작된 것이다. 개요 선체 형상은 외양 항해 성능을 높이기 위해 높은 건현을 가진 긴 뱃머리 누각형 선체로 외양에서 능파성은 양호했다. 함수에서 앞쪽을 향해 203mm 속사포를 올린 단장 주포탑 1개를 배치하고, 사령탑을 하부로 편입하였으며, 함교 구조는 상자형이다. 사령탑과 함교 주위에 상하 2단의 선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에는 1단의 감시소가 있는 단각식의 정면 기둥이 서 있다. 함교 뒤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4개의 굴뚝이 서 있다. 굴뚝 주위에는 함재정 보관소가 있으며, 현측에 2개를 1세트로 함재정이 편현에 2쌍식 모두 4조로 운용된다. 4번 굴뚝 뒤쪽은 간소한 단각 후방 돛이 있고, 후방으로 향해 있는 주 포탑 1기가 실려 있다. 함미 수면 아래에 방향타가 자리를 잡고, 현마다 1축씩 통로에 4장 날개 프로펠러가 달려있다. 부포는 현측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돌출부에 152mm 단장 속사포가 케이스 메이트 배치로 현마다 4기씩 총 8개를 가진다. 무장 주포 바얀급의 주포는 ‘패턴 1892 203mm (45 구경) 속사포’를 채택했다. 그 성능은 87.8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18도에서 16,100m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이 포를 새롭게 설계한 단장식 포탑에 담았다. 포탑의 부앙 능력은 앙각 18도, 부각 5도이다. 회전 각도는 단일체 수미선 방향으로 0°도, 좌우 135도의 회전 각도를 가지고 있으며, 주포의 포신 부앙, 포탑의 회전, 포탄의 양탄, 장전은 주로 전동으로 이뤄지며, 보조 인력이 필요했다. 발사 속도는 분당 1발이었다. 부포 외 당시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 기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포도 카네사의 제품을 구입하여 ‘패턴 1892 152mm (45 구경) 속사포’를 채택했다. 성능은 41.4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20도에서 11,520m까지 쏘아 보낼 수 있었다. 이 포를 단장포가에 올려서 현측 케이스 메이트(포곽)에 배치해 현마다 4기씩 총 8기를 배치했다.부앙 능력은 앙각 20도, 부각 5도이다. 회전 각도는 100도의 선회 각도를 가지고 있고, 포신의 부앙, 포탑의 선회, 포탄의 양탄, 장전은 주로 인력을 필요로 했다. 발사 속도는 분당 7발로 빠른 편이었다. 그 외에도, 대 어뢰정 요격을 위해 패턴 1892 75mm (50구경) 속사포를 단장포가 20개, 근접전투용으로 이 시대의 군함에 널리 채택된 프랑스의 호치키스 사의 ‘호치키스 47mm (40구경) 기관포를 단장포 차체에 8개를 장착했다. 대함 공격용으로 457mm 어뢰 발사관을 현측 부에 단장 발사관을 2개를 배치했다. 동급함 참고 문헌 《세계의 함선》 증보판 제50집 프랑스 순양함 역사 (해인사) Conway 《All The World's Fightingships》 1860-1905」(Conway) 각주 외부 링크 WWI Naval Operations in the Baltic Theater Site in English with photographs 러시아 제국 해군의 순양함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군 함정 순양함 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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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5%90%20%EB%AF%B8%EB%8B%88%EC%B8%A0%20-%20%ED%8A%B8%EB%9F%BC%ED%8E%AB
텐 미니츠 - 트럼펫
《텐 미니츠 - 트럼펫》(Ten Minutes Older: The Trumpet)은 영국에서 제작된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2002년 드라마 영화이다. 마르꾸 펠톨라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울리치 펠스버그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출연 주연 마르꾸 펠톨라 카티 오우티넨 기타 Line PD: 버치 로빈슨 Line PD: 리온틴 루에테 협력프로듀서: 스테이시 E. 스미스 미술: 카오 의상: 존 A. 던 배역: 헤이디 르빗 배역: 엘렌 루이스 외부 링크 Analysis of Jim Jarmusch's Int. Trailer. Night at http://journals.cambridge.org/action/displayAbstract?fromPage=online&aid=8443890 2002년 영화 스파이크 리 감독 영화 짐 자머시 감독 영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 영화 장뤼크 고다르 감독 영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영화 빔 벤더스 감독 영화 마이크 피기스 감독 영화 클레르 드니 감독 영화 영국의 독립 영화 작품 옴니버스 영화
1065677
https://ko.wikipedia.org/wiki/2010%EB%85%84%20%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C%98%81%ED%99%94%20%EB%AA%A9%EB%A1%9D
2010년 대한민국의 영화 목록
다음은 2010년에 개봉됐던 대한민국의 영화 목록이다. 개봉 목록 1분기 2분기 3분기 4분기 각주 및 인용 영화 대한민국의 영화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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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82%98%EC%BD%94%EC%9D%98%20%EC%9D%B8%EA%B5%AC
모나코의 인구
다음은 모나코의 인구 통계이다. 성별 및 연령별 인구 구조 2016년 6월 7일 2016년 6월 7일 추산 : 각주 모나코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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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B%8F%99%ED%95%99%EA%B5%90
중동학교
중동학교(中東學校)는 1907년 최규동(崔奎東)이 창설한 학교로 현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광무 10년(1906) 4월 한어학교(韓語學校) 교관 세 사람이 관립 외국어학교 내의 교실 3개를 빌어 한학·산술을 가르치는 야학(夜學)을 시작했다. 1907년 1월 학부대신(學部大臣)의 인준을 얻어 '중동야학교'라 칭하고, 일어 및 한어과를 증설, 융희 원년(1907) 9월 영어·산수·부기 등 세 과를 또 증설하였다. 융희 3년(1909) 5월 학부의 지정으로 '사립중동학교' 설립의 인가를 받았다. 당시에 영향이 컸던 교사로는 대수(代數)에 최규동, 기하에 안일영(安一英)·조동식(趙東植)이 유명하였다. 한국의 학교 1907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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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D%BC%EA%B8%B0%EB%B8%8C%20%EC%B9%B4%EC%9D%B8%EB%93%9C
퍼기브 카인드
퍼기브 카인드(The Fugitive Kind)는 미국에서 제작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60년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마틴 주로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출연 주연 말론 브란도 안나 마냐니 조연 조앤 우드워드 모린 스태플튼 빅터 조리 R.G. 암스트롱 존 배러그레이 샐리 그레이시 루실 벤슨 벤 야피 제작진 원작자: 테네시 윌리엄스 미술: 리처드 실버트 의상: 프랭크 L. 톰슨 Ass-PD: 조지 저스틴 외부 링크 The Fugitive Kind: When Sidney Went to Tennessee an essay by David Thomson at the Criterion Collection 1960년 영화 영어 영화 작품 미국의 드라마 영화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뉴올리언스에서 촬영한 영화 시드니 루멧 감독 영화 미국의 영화 작품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영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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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4%EC%88%98%20%EC%A2%8B%EC%9D%80%20%EB%82%A0%20%28%EC%9D%8C%EC%95%85%29
운수 좋은 날 (음악)
《운수 좋은 날》은 대한민국의 블루스 밴드 하 수상의 네번째 싱글이다. 이 싱글 음원은 같은 소속사인 정흠밴드와 콜라보 프로젝트이며, 두 팀의 버전으로 각각 발매되었다. 《운수 좋은 날》은 현진건의 1924년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한 곡으로, 소설 속 김첨지의 아이러니한 비극적 상황을 2015년 현실에 맞게 각색하여 해학적으로 담아냈다. 수록곡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공식 트위터 공식 페이스북 네이버 공식 카페 2015년 싱글 2015년 음반 하 수상의 음반 대한민국의 음반 블루스 음반 인디 록 음반 독립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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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8B%A8%20%EC%9D%91%EB%A0%A5
전단 응력
전단 응력(剪斷 應力)은 재료가 전단력을 받을 때 이에 저항하여 생기는 응력을 말한다. 토질역학에서의 전단 강도 흙이 전단 응력을 받아 현저한 전단 변형을 일으키거나 명확한 전단 활동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흙이 전단 파괴되었다'고 하며 이때의 활동면 상의 전단 응력을 전단 강도(shear strength)라고 한다. Mohr-Coulomb의 이론에 따르면 전단강도는 흙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점착력(c)과 마찰에 의해서 결정된다. Φ는 내부마찰각 또는 전단저항각이라고 한다. 흙의 전단 강도 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전응력을 나타낸다. 만약 공극 수압이 발생한다면, 위 식에서 전응력이 아닌 유효응력을 대입하여 계산해야 한다. 즉, 유효응력이란 전응력에서 공극 수압을 뺀 것과 같다() σ와 τ에 따른 파괴 포락선(failure envelope)은 실제로 곡선이지만, 계산의 편의 상 직선으로 보고 사용하며, 이를 모어―쿨롱의 파괴규준(Mohr―Coulomb failure criteria)이라고 한다. 파괴 규준 선 이하에 σ, τ가 위치하면 아직 전단파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파괴 규준 선에 점이 위치하면 전단파괴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전단강도는 흙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흙이라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전단강도에 영향을 주는 현장 요인들 공극비, 입도, 흙 입자 형상 함수비 하중 재하 속도. 급속 하중 재하는 과잉간극수압을 발생시킴 강도의 비등방성: 연직방향과 수평방향의 강도가 다를 수 있음. 전단강도에 영향을 주는 실내 실험 요인들 과잉간극수압 발생 여부 시료 교란 여부 함수비 Mohr의 응력원 지표면에서 z 거리만큼 아래에 있는 흙의 미소 단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미소 요소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응력을 이라 하고, 수평으로 작용하는 응력을 라 할 때, 미소 요소내의 임의 경사면 상에서의 수직 응력과 전단 응력을 구할 수 있다. 라고 가정한다면, 이 작용하는 면을 최대 주응력면이라고 하고, 가 작용하는 면을 최소 주응력면이라고 한다. 이때 는 최대 주응력면과 응력을 구하려는 면이 이루는 각이다. 해당 경사면에 작용하는 수직 응력과 전단 응력은 다음과 같다. 유체역학 뉴튼 유체의 거동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가정조건 : 비 압축성 유동, 등방성 뉴턴유체) 여기서, 는 유체에 작용하는 전단 응력(shear stress) 는 유체의 점성계수 는 전단력에 수직한 방향의 속도의 기울기로 표현되는 전단변형률이다. 각주 참고 문헌 성안당 출판사, <토목기사 과년도 시리즈 - 토질 및 기초>, 2015 토질역학 재료역학
677363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B%9E%8C%EC%9D%98%20%ED%81%AC%EB%A1%9C%EB%85%B8%EC%95%84
바람의 크로노아
《바람의 크로노아》() 시리즈는 남코에서 개발한 게임 시리즈이다. 시리즈의 특징 비치 발리볼 게임인 크로노아 Beach Volleyball과 2D RPG형식의 크로노아 히어로즈: 전설의 스타메달을 제외하면, 모두 횡스크롤 형식의 게임이다. 상하좌우 이동이 기본이지만, 3D 그래픽을 사용한 일부 게임에서는 앞과 뒤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조작법을 가지는 게임들은 모두 1인용이며, 예외적으로 바람의 크로노아 2 ~세계가 갈망한 분실물~만이 2인 협력 플레이를 지원한다. 게임 플레이 횡스크롤 조작법을 가지는 게임 횡스크롤 조작법을 가지는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크로노아가 가진 링의 힘으로 '바람의 구슬'을 발사하여 적을 잡아 다양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게임의 주된 요소이다. 게임 목록 대한민국에 발매된 게임은 Wii의 바람의 크로노아 door to phantomile이 유일하다. 바람의 크로노아 door to phantomile (1997) : 플레이스테이션 (이식) 남콜렉션(NamCollection) 중 (2005) 플레이스테이션 2 (이식) (2008) iアプリ 바람의 크로노아 door to phantomile (일본:2008, 외 2009) : Wii 바람의 크로노아: Moonlight Museum (1999) : 원더스완 바람의 크로노아 2 ~세계가 갈망한 분실물~ (2001) : 플레이스테이션 2 바람의 크로노아: 꿈꾸는 제국 (2001) : 게임보이 어드밴스 바람의 크로노아: 드림 챔프 토너먼트 (2002) : 게임보이 어드밴스 크로노아 히어로즈: 전설의 스타메달 (2002) : 게임보이 어드밴스 크로노아 Beach Volleyball (2002) : 플레이스테이션 비디오 게임 시리즈 1997년 시작한 비디오 게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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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0%B0%EB%A6%AC%20%EC%9B%A8%EB%B2%84
찰리 웨버
찰리 웨버(, 1978년 9월 20일 ~ )는 미국의 배우이다. 출연 작품 애프터: 그 후 (2020) 익스페트리어트 (2017) 하우 투 겟 어웨이 위드 머더 시즌3 (2016) 자헤드 3: 더 씨즈 (2015) 하우 투 겟 어웨이 위드 머더 시즌2 (2015) 범죄의 재구성 (2014) 뱀파이어 써커 (2010)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3 (2004) 게이시 (2003) 뱀파이어 해결사 (1997) 외부 링크 197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미주리주 출신 배우 독일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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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3%A4%EC%83%A4
샤샤
샤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사샤의 다른 표기 샤샤는 피타텐의 등장인물이다. 샤샤는 롯데제과에서 출시했던(대한민국)/출시 중인(일본) 실 형태로 겹친 초콜릿이다. 샤샤:네이버웹툰 '테러맨'에 나오는 캐릭터, '릴리아'의 쌍둥이 동생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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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A7%84%EA%B2%BD%EB%B3%B4%EC%B2%B4%EA%B3%84
지진경보체계
지진경보체계 (Earthquake warning system) 은 지진시에 경보를 발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안전 관리 시스템이다. 일본 기상청이 발표하는 긴급지진속보는 지진경보체계의 일종이다. 각주 같이 보기 긴급지진속보 전국순간경보시스템 지진조기경보 지진학 정보 시스템 경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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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96%B4%EB%A7%81%20%ED%8F%AC%ED%8B%B0%EC%A6%88
로어링 포티즈
로어링 포티즈(Roaring Forties)는 남위 40°와 50° 사이에 대하여 항해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며, 그 이유는 몹시 세차고 자주 불어오는 편서풍 때문이다. 이 바람은 코리올리 효과(Coriolis effect)에 의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바람을 가로막을 대륙이 없기 때문에 이 바람은 남반구에서, 특히 현재 남극해(Southern Ocean)이라고 불리는 남인도양에서 매우 강하다. 뉴질랜드 웰링턴은 로어링 포티즈에 있는 유일한 수도이다. 태즈메이니아섬 및 오스트레일리아 남쪽 주들은 모두 로어링 포티즈에 들어가며, 그 때문에 적은 인구와 바람에 풍화된 서부 해안을 가진다. 이 지역의 편서풍은 클리퍼 루트에서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다. 이 바람은 1610년 네덜란드인 항해자 헨드릭 브라우워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타비아(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향해 인도양을 급속히 통과한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에 의해 개척된 전통적인 루트는 희망봉을 지나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모잠비크 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를 경우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이 모잠비크를 점유하고 있고 항행상의 위험으로 인해 이 길은 매력적이지 못하였다. 마다가스카르 동쪽으로 항행하는 것 또한 일정치 못한 바람과 해류, 그리고 적도 무풍지대에서 정지하여 선원들이 죽어갈 위험으로 인해 문제가 있었다. 해결책은 1610년 브라우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남위 35°~40°에서 동쪽으로 항행하다가 동경 110°에서 북쪽으로 배를 돌리는 것이다. 지속적인 편서풍, 일명 브라우워 루트를 이용함으로써 항해시간을 6개월까지 단축하게 되었고, 모든 네덜란드 선박에게 의무화되었다. 하지만 17세기에는 동경 110°에 대한 측량이 과학적이지 못하여 많은 배들이 암초나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연안에 좌초되었다. 위선 인도양 태평양 대서양 남극해 날씨 범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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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B%A7%A4%20%EB%84%B7%20%EB%8B%AC%EB%A7%81
애매 넷 달링
《애매 넷 달링》()은 '코가미 아키라 & 시라이시 미노루' 명의로 발매된 콘노 히로미와 시라이시 미노루의 싱글 CD다. 2007년 7월 25일 발매되었다. 개요 TV 애니메이션 《러키☆스타》의 관련 프로그램인 라디오 《러키☆채널》의 오프닝 테마와 엔딩 테마가 수록되고 있다. 쟈켓에는 코가미 아키라와 시라이시 미노루가 그려져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와 같이 시라이시 미노루에게는 채색이 되어있지 않다. 수록곡 작사:하타 아키 작곡・편곡:코우사키 토오루 작사:하타 아키 작곡・편곡:코우사키 토오루 (off vocal) (off vocal) 비고 양곡 모두 콘노 히로미와 시라이시 미노루의 애드립이 여기저기에 포함되어 있다. 또,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일류 뮤지션이 연주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각주 외부 링크 애매 넷 달링 Lantis web site 러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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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D%B0%EC%9D%B4%EB%B9%84%EB%93%9C%20%EC%A0%9C%ED%94%84%EB%A6%AC%20%EA%B7%B8%EB%A6%AC%ED%94%BC%EC%8A%A4
데이비드 제프리 그리피스
데이비드 제프리 그리피스(, 1942년 12월 5일 - )는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1978년에서 2009년 사이에 리드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사(1964년), 석사(1966년), 박사(1970년)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은 이론입자물리학이고 지도교수는 시드니 콜먼이었다. 학부생 수준의 교과서들을 여럿 집필한 것으로 가장 이름높다. 대표저서로는 《기초전자기학》(), 《양자역학》() 등이 있다. 외부 링크 Griffiths's web page 1942년 출생 하버드 대학교 동문 미국의 물리학자 입자물리학자 살아있는 사람 웨일스계 미국인 미국 물리학회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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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1%EC%84%9C%ED%84%B0%20%EC%B9%98%ED%94%84%EC%8A%A4
엑서터 치프스
엑세터 치프스 럭비 클럽(Exeter Chiefs Rugby Club)은 1871년 창단한 잉글랜드 데번주 엑세터의 프로 럭비 유니온 팀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십에 참가하고 있으며 홈구장은 샌디 파크이다. 1871년 설립 잉글리시 프리미어십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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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키보드
애플 매직 키보드(Apple Magic Keyboard)는 애플이 개발한 컴퓨터 키보드이다. 매직 마우스 2와 매직 트랙패드 2와 함께 출시되었다. 애플 와이어리스 키보드의 뒤를 잇는다. 기능 매직 키보드는 전작과 비슷하지만 더 하위의 프로파일을 갖추고 있다. 애플은 시저(scissor) 매커니즘을 재구성하여 키 안정성을 33퍼센트까지 증가시켰고 키 트래블을 줄였다. 비교환식의 재충전 가능한 리튬 이온 배터리를 내장하고 있어서 키보드의 중앙 뒷면의 라이트닝 단자를 통해 충전된다. 이 재충전식 배터리는 한 번 충전하면 한 달을 지속한다. 이 키보드는 OS X 엘카피탠 버전 10.11 이상을 구동 중인 애플 매킨토시 데스크톱과 노트북 컴퓨터, iOS 9 이상을 구동 중인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tvOS 10이나 애플 TV 소프트웨어 7.0 이상을 구동 중인 애플 TV와 호환된다. 2017년 6월 5일 매직 키보드에는 비주얼 업데이트가 있었다. 컨트롤과 옵션 키들은 둘 다 새로운 심볼을 받았다. 사진 각주 애플의 주변기기 2015년에 출시된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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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구
판교구(板橋區)는 다음을 뜻한다. 대한민국 분당구의 판교신도시를 분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분구 시 가장 유력한 구명이다. 일본 이타바시구() 대만 반차오구()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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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찬
양유찬(梁裕燦, You Chan Yang, 1897년 - 1975년 10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의사, 외교관, 대학 교수, 정치인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 제2대 대사를 역임하였다. 생애 생애 초반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 1916년 하와이 미킴레이고등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하와이 대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북미 보스턴으로 옮겨가 1923년 보스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하와이로 돌아와 병원을 개업하였다. 사회사업으로 한인대학구락부를 만들고 호놀룰루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이사, 호놀룰루한인기독교재단 회장 등의 일을 맡아보며 재미동포의 단결과 친목에 노력하였다. 주미 대사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미대사를 맡았다. 주미 대사가 되기 전, 양유찬은 하와이에서 의사로 기반을 착실히 닦아 중국인 의사 2명까지 고용, 큰 병원을 경영하는 등 명성과 재물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1년 2월 어느날,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이 돌연 양유찬을 찾아가 "부산에 가서 이대통령을 좀 만나보라"는 전갈을 했다. 양유찬은 그래서 이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주미대사로 가달라"는 말을 들었다. 돌연한 이 말에 양유찬은 외교를 전혀 모를 뿐아니라 한창 번창하고 있는 병원사업에서 손을 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네가 후손에게 백만큼의 재산을 물려주고 죽는게 나으냐, 우리 3천만백성을 살리는게 좋으냐"면서 24시간의 말미를 주었다. 당시 초량(草梁)에 있던 양성봉(梁聖奉) 경남지사 집에서 하룻밤 묵은 후 이튼날 아침 이승만에게 "제가 꼭 도움이 되겠다면 가겠습니다"고 하자 이승만은 "여기 가까이 앉으라"고 하면서 "내가 젊을 적에 너를 가르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네가 자라서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기회는 왔다. 너는 가서 전쟁으로 먹고입을 것을 다 잃은 3천만 민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1952년 제7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서, 변영태(단장), 임병직, 한표욱, 이재항, 서재식, 전상진과 함께 참석하였다. 1953년 4월 21일 현 상태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이 이루어진다면 한국군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비망록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하며 1953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일본과의 교섭에 앞장선 적도 있다.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6년 3월경, 한 담화 기사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제거하면 누가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가겠는가. ... 한국의 투표자들은 만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신 경우 미국은 대한원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양 대사를 소환하라〉, 《조선일보》는 〈규명되어야 할 양 대사의 발언〉, 《경향신문》은 〈발언의 진부(眞否)를 규명하라〉, 《한국일보》는 〈교만과 억설을 삼가라〉등의 사설을 통해 비판하였다. 1957년 6월 5일,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1959년 12월 31일, 양유찬 대사는 소련 타스 통신의 "한국 해역 밖에서 비무장한 소련의 측량선에 대해 한국 전함이 공격을 가했다"는 보도는 허위조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 대사는 성명을 통해, "소련은 순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육지 및 공중공격을 위한 구실을 조작하고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이어 "우리 정부와 해군은 타스 통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공격을 한 바도 없으며 또한 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이어 "나는 대한민국 해군을 손상시키기 위한 이러한 허위무근(虛僞無根)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큰 위험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1960년 1월 21일 하오, 양유찬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극동 방문에 관하여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하였다. 양 대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 여부는 백악관에서만 결정할 수 있으되 국무성에서는 그의 요망을 백악관에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양 대사는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커다란 자신을 갖고 있다. 문호는 닫히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서 "수많은 미국 청년이 희생된 한국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양유찬은 1960년 1월 30일, 서방측이 앞으로 소련과 가지게 될 정상회담과 군축협상은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양대사는 협상에 의한 냉전완화의 희망을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국가안보여성토론회에서 행하기 위하여 준비된 연설중에서 양대사는 소련수상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냉전협상을 가지기로 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서방동맹국들의 결정에 대하여 특정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크리스찬 허터(Christian Herter) 미국무장관은 1960년 3월 16일, 한국의 정부통령선거에 관하여 일어난 폭력사태를 개탄하였다. 한편 허터 미국무장관은 양유찬 대사를 국무성으로 불러, 20분간 회담하였다. 동 회담 직후 양대사는 허터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는 유감스러운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알리고 싶어 하였다"고 말하였다. 양대사는 또한 허터 장관이 자기에게 한일 양국간의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회담이 진전없음에 대해서도 얘기하였다고 말하였다. 허터 국무장관은 이번 선거소란을 가장 불행한 사건이라고 칭하였다고 말하였다. 4·19 혁명 직후에 양유찬은 사직하였다. 과도 국무원은 4월 29일 상오 10시부터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사표를 낸 양유찬 대사를 면직하기로 정식의결하였다. 1960년 4월 29일, 양유찬은 워싱턴에서 개인사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양유찬은 아직 한국 임시정부로부터 누가 그의 후임이 될 것인가에 관하여 아무런 시사도 받지 않았다. 그는 아직 명확한 계획은 없으나 한국 정계에 투신하거나 의업을 재계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5월 2일, 양유찬은 새로운 한국정부가 이날 그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양유찬은 "나는 그들이 나의 사표를 수리해서 기쁘며 짐이 가벼워졌다"고 말하였다. 한편 한국 대사관의 제2자(第二者)이며 노련한 외교관인 한표욱 공사가 대리대사로 지명되었다. 이와 같은 변경에 관한 정식 통고문이 2일 미국 국무성과 외교단에 전달되었다. 양유찬의 외교활동은 외무본부의 체계를 무시한 경무대 직통 외교로 비난을 받았다. 외교 옵써버들은 양유찬이 한결같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적인 외교를 합리화시키는 데 전력을 경주하였으며 지난 3∙ 15 정∙ 부통령선거에 대하여도 자유세계에 모범이 된 공정한 선거였다는 것을 우방 제국에 왜곡 선전하는 한편 마산에서의 국민의거는 공산오열(五列)의 개입 운운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패상을 묵인, 국제여론을 오도케 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양유찬은 조용한 주택지인 메이플밀가(街)에 있는 자택에서 자기와 한(韓) 공사가 이승만의 돈을 스위스 은행에 예금하였다는 모 신문기사에 관하여 펄펄뛰면서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1960년 7월 13일 반박하였다. 대일 외교 1960년 3월 19일, 양유찬은 일본 공동(共同) 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한일간의 여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한일문제 : 양유찬은 한국과 일본이 1960년 3월에 억류자를 상호석방하기로 한 합의는 양국간의 주요한 여러 가지 문제해결에 더한층의 진전을 약속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양유찬은 기타 모든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논쟁 중인 한일간의 어로문제의 만족할만한 조정이 회담석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양유찬은 어로선문제가 토의되기 전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1. 제2차세계대전 전 또는 대전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문제 2. 한국으로 송환되는 재일한교(韓僑)들이 재산을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 3. 일본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한교들에게 강제송환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정당한 거주권의 인정 4. 한국국보의 반환 5. 일본에 있는 한국재산권의 해결 6. 일본에 가져간 한국 선박 7만5천톤의 반환 7. 한일간의 해저전신에 관한 문제의 해결 △ 영해문제 : 이상의 조건 수락으로 평화선 문제는 해결되나 평화선문제와 영해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 해양법 회의 : 한국정보는 해양법회의에서 미국안을 지지하도록 대표들에게 훈령하였다. 그러나 평화선문제는 영해문제와는 별도로 한일양국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양유찬은 이상 조건을 일본이 수락한다면 한일관계는 정상화되고 평화선문제와 어로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 허터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은 시종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기타 1950년대 외자도입으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은 양유찬의 압력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양유찬이 1960년 미국산 중고객차 도입에 개입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양유찬은 미국에 있는 한국인 2세 헨리 송이라는 업자의 청탁을 받아 경무대 비서로 하여금 압력을 가하게 하여 당초의 외자청장 안희경(安喜慶)씨에 의해 미원(美源)상사에 낙찰시키게끔 하기 위한 일련의 각본이 꾸며져 있었다. 헨리 송이라는 한국인업자는 그가 경영하는 트레이드 메이카 소개의 객차를 팔아먹기 위해 동 객차구매계획을 입안할 당시부터 양유찬을 앞장에 세워 암약했다. 이래서 객차규격을 미국산규격으로 제한하는 성공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아이젠버그 회사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태에 이르자 외자청 주미 구매관 신태언씨를 앞장세워 1960년 2월초순 동 객차구입에 따르는 현황조사차 방미 출장을 간 당시의 교통부 공전국장(工電局長) 정두길씨가 아이젠버그 회사가 추천한 중고 객차 조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해왔으며 이는 특히 당시의 안 외자청장이 전문(電文)으로 이러한 방해공작을 신 구매관에게 지시한데 자신을 얻어 공공연히 헨리 송씨의 앞장을 섰다. 양유찬은 419 후에도 5월 초에 외자청장 김영원(金英源)씨에 대하여 전문으로 "이왕이면 재미교포의 물건을 사는 것이 좋겠으며 국제검정기관에서 너무 까다로운 검사를 하니 이를 완화토록 조치해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양유찬은 이북의 선전공세를 막기 위하여 대이북 서울 회담을 제의하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표명한데 대하여 1960년 12월 10일 외무부장관 정일형은 반대태도를 취하였다. 1960년 12월 24일 상오, 정일형은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서 직장을 구하여 거주함으로써 국가위신을 추락시키고 있는 해외공관장들에게 강력한 소환명령을 발하였다고"고 언명하였다. 소환해당자에는 양유찬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1년∼1958년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 1960년 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를 지냈다. 1965년 9월 7일,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양유찬을 특명전권순환대사에 임용키로 의결했다. 양유찬은 유엔대표부에 소속토록 되었다. 이때부터 1972년에 걸쳐 순회대사로 각국 순방의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1972년 외무부 대기대사를 지냈다. 저서로 《Our common task》(1953년), 《The aspirations of Korea》(1954년), 《Korea Against Communism》(1966년) 이 있다. 1960년 6월 28일, 양유찬은 자유당의 김상도 의원에게 꾸어준 돈 200달러를 좀 받아달라는 편지를 외무부로 보냈다. 편지 내용은 "김의원이 작년에 미국을 들렸을 때 여비가 모자란다기에 200달러를 꾸어준 일이 있는데 아직도 갚을 생각을 안하니 꼭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1960년 2월 19일, 양유찬 대사의 부인이 워싱턴에서 열린 홈쇼에서 미세스 가정주부(워싱턴에 주재하는 외국외교관 부인 가운데서 선출된다)로 지명되었다. 참고 자료 각주 관련 항목 한미 관계 이승만 김규식 장면 윤치영 임병직 한표욱 윤보선 정일권 존 포스터 덜레스 대마도 대마도 분쟁 - 1951년 7월 19일 당시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은 美국무부에 찾아가 존 포스터 덜레스를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 정부의 5개 요구사항을 전하였다. 5개 항 가운데서 마지막 항은 “대마도, 파랑도, 독도가 러일전쟁 중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 한국 영토였으므로, 일본은 그 세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프레이저 보고서 딘 러스크 러스크 서한 1897년 출생 1975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부산광역시 출신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일제강점기의 의사 하와이 대학교 동문 보스턴 대학교 동문 연세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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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이상
중력이상(重力異常, Gravity anomaly)은 실측(實測) 중력치와 이론(理論) 중력치와의 차이를 가리킨다. 이론 중력치는 표준중력식(標準重力式)에 의하여 계산할 수 있다. 중력이상의 값이 (+)라고 함은 그 근방의 지각의 밀도가 평균상태에 비해서 크다는 뜻이며, 반대로 (-)라 함은 지각밀도가 작다는 뜻이다. 가령 높은 산에서 중력을 측정하고, 적당한 보정(補正)을 가하여 이를 해면상의 값으로 고친 다음에 해면상의 표준중력의 값과 비교하면 (-)의 중력이상치를 얻을 수 있으며, 지각 평형설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표준중력식 국제측지학회에서 1976년에 채택한 위도에 따른 평균 중력 값이다. 회전하는 타원체라는 사실에 근거해 만든 식이다. 적도()에서는 약 978031.5mGal이며, 극()에서는 983217.7mGal이다. 이때, 중력가속도 단위(mGal)는 로 정의된다. 중력은 적도에서 극지방까지 약 5000mGal 정도의 변화를 보인다. 프리에어 중력이상 지구 표면의 특정 지점에서의 중력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관측 지점의 위도를 표준중력식에 대입하고,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관측지점의 고도를 프리에어 보정을 통해 고려될 수 있다. 관측 지점 하부의 질량분포는 중력이상으로 설명 가능하다. 프리에어 보정은 고도에 의한 지역적인 중력 변화를 보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력이 지구 질량 중심에서관측 지점까지의 거리 증가에 따른 함수이며, 중력 변화 경향을 고려해 근사적으로 구할 수 있다. 지구 중심으로부터 거리 증가에 따른 중력 변화는 으로 구할 수 있다. 이때, g의 평균값은 980,626 mGal이며, R=6.367*106m이다. 즉, 이다. 지표면으로부터 3m 높아질 때마다 중력가속도가 1Gal씩 감소한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점이 낮은 지점보다 작은 중력 값을 얻게 된다. 한편, 서로 다른 고도의 관측점에서의 중력값을 비교하려면, 측증된 값에 프리에어 보정값인 FAC을 더해야 한다. (단, h는 해수면으로부터 관측지점까지의 고도) 즉, 프리에어 중력이상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난다. 관측점의 고도에 대한 보정이 이루어진 관측값이다. 여기서 은 회전과 적도 부근의 팽창과 관련된 위도 효과 보정값이고, +FAC는 고도에 의한 중력 손실 보정값이다. 프리에어 중력이상 값은 질량 초과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값을 갖는 반면, 질량 부족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값을 갖는다. 도표를 그리면, 지형을 닮은 중력 변화를 보인다. 부게 중력이상 고도 보정 후에도 관측 지점과 해수면 사이 질량 효과가 존재한다. 해수면 위쪽에 있는 질량에 의한 중력효과를 보정해야 하는데, 이를 부게 보정이라고 한다. 관측지점의 고도와 같은 두께의 무한 판으로 근사할 수 있다. 이때의 무한판의 효과 BC는 이다. 육지에서의 부게 중력이상 육지에서의 부게 중력이상은 프리에어 이상으로부터 무한판의 효과인 BC를 빼서 단순 부게 이상을 먼저 구한다. 여기서 환산밀도는 화강암의 전형적인 밀도인 2.67g/cm3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다. 고도가 9m 높아질 때마다 측정 중력값에 1mGal 정도 증가하므로 최종적으로 이 된다. 위 식을 통해서 중력이상에 대한 일반적인 성질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해수면보다 높은 관측점에서 부게 중력이상은 언제나 프리에어 중력이상보다 작다. 즉, 해수면 윗부분에 의한 인력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부게 중력이상은 프리에어 중력이상에 배하여 완만한 곡선의 형태를 보인다. 또한, 질량초과는 중력이상에 양의 변화, 질량 부족은 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바다에서의 부게 중력이상 관측고도 h가 0인 바다에서의 부게 중력이상은 프리에어 중력이상과 일치한다. 해수면 기준 수심과 같은 두께는 화강암과 바닷물의 밀도 차에 해당하는 무한 판으로 가정하여 부게 보정한다. 여기서, 으로 가정하면, 이다. 즉, 수심이 14.5m 깊어질 때마다 측정 중력값에 1mGal 정도 감소하므로, 와 같은 최종적인 식이 된다. 완전 부게 중력이상 지형의 높낮이 변화가 큰 곳에서는 추가적인 지형보정(TC)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부게이상에 추가적으로 지형보정을 실시하여 완전 부게이상을 구해야 한다. 위와 같은 식으로 완전 부게이상의 최종값을 구할 수 있다. 각주 중력 측지학 광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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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초상
유근 초상(柳根 肖像)은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이다. 1972년 7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566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유근 초상(柳根 肖像)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경(西坰) 유근(柳根. 1549~1627)의 추상화로, 가로 89cm, 세로 163cm 크기이며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유근은 문장이 뛰어나 외국사신들에게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이 초상화는 정장 관복 차림을 하고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 안에 넣은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높이가 상당히 낮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 관모의 형태를 반영한 것이다. 얼굴은 엷고 밝은 살색을 띠고 있으며 가슴에는 공작과 모란무늬가 수놓아진 흉배를 하고 있다. 관복의 오른쪽으로는 트임이 있어 청색과 녹색의 안감이 드러나 있다. 바닥은 여러 가지 짙은 빛깔로 화려하게 꾸민 양탄자가 깔려 있다. 이 영정은 유근이 71세가 되던 해인 광해군 11년(1619)에 그려졌는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신 공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져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진본이다. 17세기 공신초상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엄중한 표현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같이 보기 유근 참고 자료 충청북도의 보물 괴산군의 문화재 조선의 그림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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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푸트 회화
라지푸트 회화(Rajput painting)는 주로 17~18세기 북인도 라즈푸타나의 궁중에서 발전하고 번성한 회화이다. 기원 7세기에서 10세기 말경까지 라지푸트족(族)이 북서(北西)인도를 지배하고, 그 회화 전통은 고대파(古代派) 벽화의 영향하에 온존(溫存)되어, 기원 16세기∼19세기에 걸쳐 펀자브나 라자스탄 지방의 라지푸트 토후(土侯) 아래에서 성하게 제작되었다. 주제는 인도의 민간신앙설화나 비시누파(派)의 신앙에 관한 제 설화(諸說話)로서, 섬세 미묘한 묘선(描線)으로 윤곽선을 쳐서 다채색(多彩色)을 세밀하게 착색하는 미니어처를 만들어 내었다. 제신(諸神)의 화신(化身)인 남녀의 표정과 자태, 의복 등은 상당히 유형적(類型的)인 패턴으로 표현되나 회화면(繪畵面)에 일종의 무드(情趣)가 넘치고 있다. 초기 작품은 평면적인 것이 많은데, 그 후에 배경의 원근감(遠近感)과 투시화법(透視畵法), 음영(陰影)에 의한 입체감 등이 가미되어 섬세한 감각은 후기의 작품에서 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라자스타니파(派)와 파하리파(派)가 있어 근세(近世)까지 제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각주 외부 링크 Indian medieval painting schools - Rajput painting 채식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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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
질료(質料, )는 원어 필레이는 숲의 나무라든가 재목의 뜻이지만 바뀌어 재료·소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형상(形相)의 대(對)개념, 또는 상대적인 원리이며, 사물의 실체-본질을 형상인(形相因), 기체(基體)가 되는 것을 질료인(質料因)이라고 한다. 이 양자가 결합하여 개별적인 것이 성립한다. 하나의 금반지라면 금은 질료요, 원형은 형상을 말한다. 각주 외부 링크 Definition 자연철학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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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신여자고등학교
숭신여자고등학교(崇信女子高等學校)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71년 5월 28일 : 학교법인 숭신학원 인가 (설립자 재암 권재찬 선생) 1971년 5월 28일 : 초대 이사장 이영광 선생 취임 1971년 12월 31일 : 숭신여자중학교 설립인가 (18학급) 1972년 12월 26일 : 숭신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 (15학급) 1973년 3월 3일 : 고등학교 개교식(5학급) 1973년 4월 18일 : 초대 교장 박보영 선생 취임 1976년 1월 20일 : 제1회 졸업식(252명) 2001년 5월 29일 : 심원관 신축 2002년 12월 30일 : 제6호관(4층 20개교실) 신축 2010년 6월 3일 : 제4대 이사장 권승호 선생 취임 2019년 1월 4일 : 제44회 졸업식 (졸업생 340명, 졸업생 누계 20,085명) 2019년 3월 1일 : 제7대 교장 이종여 선생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숭신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성남시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경기도의 사립 고등학교 1973년 개교 대한민국의 여자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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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A
LBA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논리 블록 주소 지정(Logical block addressing) 선형 경계 오토머튼(Linear bounded automaton) Lega Basket Serie A Late Bronze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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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츠
콘스탄츠(Konstanz)는 독일 남쪽 보덴호에 위치한 도시로, 보덴호와 맑은 날에는 바로 스위스의 알프스가 보여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콘스탄츠 공의회(Konstanzer Konzil 1414~1418)의 개최지이다. 역사 콘스탄츠 문명의 첫 번째 흔적은 석기 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 동안 다뉴브 남쪽에 거주하던 켈트족은 로마인에게 정복당했다. 서기 40년경, 최초의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라인강 왼쪽 강둑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아마도 처음에는 드루소마구스(Drusomagus)라고 불렸으며, 로마 속주인 라에티아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원래 콘스탄티아(Constantia)라는 이름은 300년경에 이 지역에서 알레만니족과 싸워 강력한 요새를 건설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또는 그의 손자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 354년에 이 지역을 방문했다. 후기 로마 요새인 콘스탄티아의 유적은 2003년에 발견되었다. 585년경에 첫 번째 주교는 콘스탄츠에 거처를 잡았고, 이것은 영적 중심지로서의 도시의 중요성의 시작을 알렸다. 중세 말까지 콘스탄츠의 6,000명의 주민 중 약 4분의 1이 성직자의 권리 때문에 세금이 면제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무역이 번성했다. 콘스탄츠는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이 지역의 유일한 다리를 소유하여 슈바벤 공국의 전략적 위치가 되었다. 아마포 생산은 콘스탄츠를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만들었고, 번성했다. 1192년에 콘스탄츠는 제국 도시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이후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만 종속되었다. 1414년에서 1418년 사이에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고, 그 동안 1415년 7월 6일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던 얀 후스(체코의 종교 사상가, 철학자, 개혁가)가 화형당했다. 이곳에서 교황의 분열이 종식되고,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알프스 북쪽에서 열린 유일한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다. 울리히 폰 리헨탈이 해설한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는 공의회 기간 동안 일어난 모든 주요 사건과 중세 콘스탄츠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콘 질게 보데콘클라베가 열렸던 곳은 아직도 항구 옆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처에는 공의회를 풍자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1993년에 세워진 동상인 임페리아(Imperia)가 있다. 1460년에 구스위스 연방은 콘스탄츠의 자연 배후지인 투르가우를 정복했다. 그 후 콘스탄츠는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삼림주에서는 과도한 도시 국가를 두려워하여 가입에 반대했다. 콘스탄츠는 대신 슈바벤 동맹에 합류했다. 1499년의 슈바벤 전쟁에서 콘스탄츠는 투르가우에 대한 마지막 특권을 연방에 잃었다. 1520년대에 콘스탄츠에서 암브로시우스 블라러가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곧 도시는 공식적으로 개신교를 선언했고, 교회에서 사진이 제거되었으며 주교는 일시적으로 호수 건너편의 작은 마을인 메르스부르크로 이사했다. 도시는 먼저 네 도시의 신앙고백을 따르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랐다. 그러나 1548년 카를 5세 황제는 콘스탄츠에 대한 제국 금지령을 내렸고, 갑자기 공격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게 항복해야 했다. 따라서 콘스탄츠는 제국 도시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새로운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재가톨릭화 하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1604년에 예수회 대학이 문을 열었다. 1610년에 지어진 부속 극장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이 도시는 1806년에 바덴 대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1821년에 콘스탄스 주교구는 해산되어 프라이부르크 대교구의 일부가 되었다. 콘스탄츠는 독일 통일 기간인 1871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이곳은 바덴 공화국에 포함되었다. 1940년 10월 22일, 마지막 유대인 거주자 중 110명이 프랑스의 구르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2년 8월에 살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보르나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다. 콘스탄츠는 스위스 국경에 바로 인접해 있고, 거의 스위스 내에 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의 폭격을 받지 않았다. 도시는 밤에 모든 불을 켰고, 따라서 폭격기들은 그것이 실제로 스위스의 일부라고 생각하도록 속였다. 전쟁이 끝난 후, 콘스탄츠는 처음에는 남바덴에 포함되었고, 그 다음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새로운 주에 포함되었다. 현대 콘스탄츠의 작은 규모에 비해 규모가 큰 알트슈타트(구시가지)에는 오래된 건물과 구불구불한 골목이 많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콘스탄츠 대성당, 다른 여러 교회, 성벽에서 남겨진 세 개의 탑에 의해 지배되며, 그중 하나는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이전 중세 다리의 위치를 표시한다. 콘스탄츠 대학교는 1966년 마을 근처에 설립되었다. 약 2백만 권의 책이 있는 훌륭한 도서관과 하루 24시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식물원이 있다. 특히 2007년부터 독일 대학 우수 이니셔티브(German Universities Excellence Initiative)에서 가장 성공적인 9개 독일 대학 중 하나인 이 대학은 소위 ‘엘리트 대학’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콘스탄츠는 유명한 체펠린 비행선의 건조자인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의 출생지였다. 2010년대 후반에 콘스탄츠는 독일의 기본 품목에 대한 저렴한 가격, 스위스 프랑과 유로 사이의 유리한 환율, 독일의 관대한 부가가치세 환급 덕분에 비유럽 연합 거주자에게 스위스의 국경 간 쇼핑을 위한 인기 있는 목적지가 되었다. H&M 및 dm과 같은 소매체인이 무역을 수용하기 위해 도시의 중앙 광장 근처에 대규모 신규 상점을 건설했으며, 일부 콘스탄츠 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도시가 역사적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에 그 지역을 피한다. 이로 인해 크로이츨링엔 시가 이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크로이츨링엔의 공무원들과 마찰이 생겼고, 독일 정부에 VAT 환급 문제를 제기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독일은 환급받을 독일 VAT에 대해 영수증당 최소 지출 금액을 €50,01로 도입했다. 통관 센터는 쇼핑센터 근처에 편리하게 위치해 있다. 위치 이 도시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으며 콘스탄스 호수(독일어로 보덴제) 유역에 위치해 있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시작되는 라인강은 보덴 호수를 지나 도시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 아래로 흐르면서 훨씬 더 커진다. 강의 북쪽에는 주거 지역, 산업단지와 콘스탄츠 대학교가 있는 도시의 더 큰 부분이 있다. 강 남쪽에는 호히슐레 또는 응용과학 대학교 외에도 관리 센터와 쇼핑 시설이 있는 구시가지가 있다. 자동차 페리를 통해 콘스탄스 호수를 건너 메르스부르크까지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카타마란은 프리드리히샤펜까지 보행자를 위한 셔틀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일-스위스 국경은 도시의 남서쪽과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며, 스위스 크로이즐링엔 마을과 구분된다. 행정구역 콘스탄츠는 15개의 동 또는 구(Stadtteile)로 세분화된다. 마이나우섬은 1971년 12월 1일 콘스탄츠에 통합될 때까지 별도의 시정촌인 리첼슈테텐 동에 속해 있었다. 기후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콘스탄츠는 춥고, 눈 덮인 겨울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습한 여름(호수로 완화됨)과 함께 악화된 해양성 기후(쾨펜 : Cfb)를 제공한다. 세계유산 그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알프스 주변의 선사시대 말뚝 주거지의 일부인 하나 이상의 선사 시대 말뚝 주거지 (또는 수상 가옥)의 본거지이다. 교통 콘스탄츠역은 독일 전역으로 연결되는 징엔까지 서쪽으로 달리는 하이라인 철도와 스위스로 남쪽으로 달리는 에츠빌렌-콘스탄츠선이 있으며 바인펠덴의 주요 노선과 연결된다. 서비스는 도이치반 AG와 스위스 THURBO 회사 및 독일 자회사에서 제공한다. 가장 가까운 공항은 프리드리히스하펜에 있으며, 호수에서 고속 페리 서비스를 이용하면 콘스탄츠를 다른 호숫가 마을로 연결한다. 공항은 주로 국내선을 운항하지만, 오스트리아 및 터키행 항공편을 사용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바젤의 슈투트가르트와 콘스탄츠에서 직행 열차가 운행되는 취리히에 있다. 도시 내 버스 서비스는 슈타트베르케 콘스탄츠 GmbH에서 제공한다. 또한 콘스탄츠와 프리드리히샤펜은 2005년부터 두 쌍동선(2008년부터 3개)인 콘스탄스와 프리돌린에 의해 연결되었다. 각주 외부 링크 콘스탄츠 (공식) 독일의 도시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자유제국도시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역사 보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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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8B%88%20%EC%95%88
토니 안
토니 안(Tony An, , 1978년 6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H.O.T., jtL의 멤버이자 솔로 가수이다. VJ, MC,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표곡으로는 유추프라카치아,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답다, blue Sky, Melody, Top Star 등이 있다. 생애 1978년 6월 7일, 서울 용산구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이수만의 눈에 띄어 가요계에 데뷔했다. H.O.T., jtL 활동을 거쳐 2004년 10월, 1집 앨범《Believe》을 발매하며 솔로로 데뷔했다.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답다〉,〈유추프라카치아〉등 감성적인 댄스곡들과 상상플러스 등의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큰 사랑을 받으며 솔로가수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부터 티엔 엔터테인먼트와 교복 회사 스쿨룩스 등의 사업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1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후, 2008년 11월 4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육군훈련소에 현역으로 입대해 부산 53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으나 서울 용산 국방홍보지원대로 차출되어 국군방송에서 〈토니안의 주고 싶은 마음 듣고 싶은 얘기〉, 〈일 플러스 성공〉등 DJ와 MC로 활약하다가 2010년 9월 14일에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20세기 미소년 등의 방송으로 주목을 받았다. 현재 티엔네이션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가수 겸 방송인으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 2018년 2월 15일 전원 멤버들이 재결합을 했다. 학력 서울서빙고초등학교 수료 (3학년때 미국이민)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예술학 석사 (학위논문명 : IPTV 드라마 제작 활성화 방안 연구) 음반 H.O.T., jtL 때의 음반은 해당 페이지 참고. 솔로 음반 디지털 싱글 참여 음반 공연 단독콘서트 토크 콘서트 가요 프로그램 1위 수상 경력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남자댄스부문 가수상 2017년 SBS 연예대상 쇼•토크 부분 우수상《미운 우리 새끼》 2017년 SBS 연예대상 대상 《미운 우리 새끼》 (어머니가 수상) 2018년 아시아모델페스티벌 아시아모델어워즈 아시아특별상 수상 출연 고정 프로그램 2003년, 2006년 《일요일이 좋다 - X맨[2,58기]》 (SBS) 2004년~2005년 《상상플러스》 (KBS2) 2009년~2010년 《일 플러스 성공》 (국군방송) 2010년 《우리들의 일밤》 (MBC) 2010년 《스쿨 버라이어티 백점만점》 (KBS2) 2011년~2012년 《M! Countdown》 MC (Mnet) 2011년 《재미있는 퀴즈클럽》 (SBS) 2012년 《토니안&김인석의 오당첨주식회사》 (손바닥TV) 2012년 《K-pop Star Hunt》 Season 2 (tvN Asia) 2013년 《20세기 미소년》 (QTV) 2016년 《매력TV》 (OnStyle) 2016년 《플랜맨》 (TRENDY) 2016년 《맛집남》 (동아TV) 2016년 《연예반장》 (JTBC) 2016년~2018년 《미운 우리 새끼》 (SBS) 2016년 《립스틱 프린스》 (OnStyle) 2017년 《편의점을 털어라》 (tvN) 2017년 《캐리어를 끄는 남자》 (네이버TV) 2018년 《청춘다워》 (한국직업방송) 2018년 《더 하이브리드(플랜맨X캐남)》 (네이버TV) 2018년 《토니 재원의 핫!라이브》 (네이버TV) 2018년 《미미샵》 (JTBC4) 2018년 7월 8일~현재《TV 동물농장》MC (SBS) 2018년 《청춘다워 시즌2》 (한국직업방송) 2019년 《펫츠고!댕댕트립》 (SBS Plus) 2019년 《토니 재원의 톡!라이브》 (유튜브) 2019년 《문제적 보스》 (tvN) 2019년 《일단 같이 가》 (TV조선) 2019년 《그랜드 부다개스트》 (JTBC2) 2019년 《밀실의 아이들》 (올레TV) 2019년 《스윙키즈》 (tvN) 2019년 《쇼핑왕》 (TV조선) 2020년 《아이돌 피싱캠프》 (JTBC) 2020년 《토니안주》 (유튜브) 2021년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KBS2) MC 2016년 DMC 페스티벌 '레전드 토토가' MC 2017년 제6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MC 2017년 드림콘서트 in 평창 MC 2017년 2018 평창동계올림픽 D-50 특별생방송 하나된 열정 이제는 평창 MC 2018년 아시아모델페스티벌 아시아모델어워즈 MC 2018년 게임돌림픽 MC 라디오 DJ 2009년~2010년 《토니안의 주고 싶은 마음 듣고 싶은 얘기》DJ (국군방송) 드라마 까메오 1997년 MBC 일일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 1997년 8월 문화대학교 축제 초대 가수 역 1998년 SBS 일일시트콤 《순풍산부인과》- 아이돌 그룹 H.O.T. 역 2002년 MBC 청춘시트콤 《뉴논스톱》- 박경림의 첫사랑 '듄상' 역 2004년 MBC 시트콤 《두근두근 체인지》- 조정린이 짝사랑하는 남자 역 2005년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솔로가수 '토니 안' 역 2006년 tvN 드라마 《하이에나》 2012년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97》- 1997년 H.O.T.멤버 '토니 안' 역 2019년 JTBC4 단막극 《너를 싫어하는 방법》 2019년 JTBC 금토드라마 《멜로가 체질》- 토크쇼 MC '토니 안' 역 2019년 tvN 토일드라마 《날 녹여주오》 - 1999년 H.O.T.멤버 '토니 안' 역 2020년 JTBC 시트콤 《놓지마 정신줄》- 의사 '안정섭' 역 2021년 MBC 일일드라마 《두 번째 남편》- 프로듀서 역 나레이션 2011년 7월 17일 KBS2 《다큐멘터리 3일》 청춘의 가장 빛나는 순간 - 논산 육군훈련소 2011년 8월 21일 KBS2 《다큐멘터리 3일》 피서지에서 생긴 일 - 해운대 해수욕장 2018년 7월 8일《TV 동물농장》(SBS) 게스트 2018년 7월 7일 tvN 《비밀의 정원》 2019년 7월 26일 JTBC2 《악플의 밤》 2018년 7월 8일《TV 동물농장》(SBS) 영화 까메오 2013년 《앵두야 연애하자》- 탑아이돌 가수 '토니 안' 역 홍보대사 2005년 파타야 인터내셔널 뮤직 페스티벌 한국대표 2006년 싱가포르 명예 홍보대사 선정 광고 2016년 남성화장품 피토메스 2017년 동국제약 저스트워터 2018년 편의점 세븐 일레븐 2019년~ 반려견 용품 브랜드 더마독 2020년~ 밀키트 식품 브랜드 그래오늘은 제작 가수 에반 (유호석) 스매쉬 어썸베이비 각주 외부 링크 토니안 웨이보 토니안 공식 팬카페 프롬토니 티엔네이션 H.O.T.의 일원 살아있는 사람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대한민국의 기업인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 1978년 출생 서울특별시 출신 가수 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서울특별시 출신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대한민국의 방송인 서울서빙고초등학교 동문 동국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에 거주한 미국인 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20세기 미국 사람 21세기 미국 사람 한국계 미국인 배우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 미국으로 귀화한 사람 순흥 안씨
1814231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7%90%ED%82%A4%20%EB%82%98%EC%98%A4%EC%95%BC
사에키 나오야
사에키 나오야 (1977년 12월 18일 ~ )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주빌로 이와타, 비셀 고베, 오미야 아르디자, 아비스파 후쿠오카, 제프 유나이티드 지바, 도쿄 베르디에서 활동하였다. 외부 링크 197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축구 선수 J1리그의 축구 선수 J2리그의 축구 선수 주빌로 이와타의 축구 선수 비셀 고베의 축구 선수 오미야 아르디자의 축구 선수 아비스파 후쿠오카의 축구 선수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축구 선수 도쿄 베르디의 축구 선수 축구 미드필더 고쿠시칸 대학 동문 도쿄도의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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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C%96%91%ED%83%90%EC%82%AC
해양탐사
해양탐사는 다양한 관측선에서 해양관측기기를 이용하여 해양의 특성과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료를 얻는 것을 말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은 항해술과 수중음향학, 무인관측기술, 해저탐사기술 등의 발달을 이룩하였다. 인간은 음향을 이용하여 바다의 수심을 측정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해저지형과 지층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게 되었으며, 해수의 이동과 해양의 특성을 상시적으로 자동 관측할 수 있게 되었고, 압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천 m 해저를 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해양탐사의 종류 해양탐사는 배를 타고 직접 바다에 나가 바다 속에 관측기기를 넣어 탐사하는 방법과, 잠수정을 타고 심해까지 들어가 해저 지형이나 생물 자원, 퇴적물 등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으며,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단시간에 넓은 영역의 자료를 씨는 방법이 있다. 해양탐사의 현황 국토해양부(장관 권도엽)는 지난해 3월 수중무선통신 시스템 개발에 이어 수중에서 음파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디지털 데이터를 다중으로 송신 및 수신할 수 있는 네트워크 핵심기술을 개발헤 LIG넥스원에 기술이전을 한다고 밝혔다. 한국해양연구원(원장 강정극)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는 LIG넥스원은 이 핵심기술을 활용해 항만방어체계 등 해양 방위산업과 다이버 폰을 활용한 해양레저, 해양조사 등 다양한 산업에 활용할 상용화 기술을 개발할 예정이다. 국토해양부는 해양분야에서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키울 차세대 심해용 무인잠수정 개발과 대형 해양과학조사선 건조, 제2남극기지 건설 등 11개 사업을 연구개발(R&D) 중점 추진사업으로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이번에 선정된 R&D중점 추진사업은 해양과학 인프라 구축, 미래 첨단 해양과학기술, 해양안전 및 환경기술 분야 등으로 나뉘어 있다. 심해용 차세대 자율무인잠수정(AUV)도 개발된다. 현재 수심 6000m까지 탐사가가능한 ‘해미래’가 있지만 이는 줄을 매달아 투하하는 원격조종방식(ROV)으로 실제 100m의 얕은 수심에서만 탐사가 가능하다. 5000t급 대형 해양과학조사선도 오는 2014년까지 건조된다.현재 온누리호가 해양과학연구를 수행하고 있지만 20년 된 노후 선박이어서 최신장비 탑재가 어려워 정밀 탐사가 불가능하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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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88%EA%B0%95%EC%9D%B8%EA%B0%80%EB%AA%A9
금강인가목
금강인가목(Pentactina rupicola) 또는 금강국수나무는 금강산에만 자생하는 장미과의 식물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역사 1917년에 미국의 하버드 식물원으로 반출되어 증식되었다. 이후 1924년에는 영국 에든버러 식물원으로도 전해졌는데, 현재 하버드 식물원에서 자라던 것은 고사(枯死)했다. 2012년부터는 대한민국 국립수목원에서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름 이름의 유래와 뜻은 알려져 있지 않다. '금강국수나무'라는 이름은 줄기 중심부에 심처럼 박힌 골속이 국수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 산의 암석에 붙어서 자라며, 1m도 채 자라지 않는다. 같이 보기 천연기념물 각주 나무 장미아과 금강산 나카이 다케노신이 명명한 분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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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0%98%EC%9D%B4%EC%84%B1%EB%AC%B8%EB%B2%95
일반이성문법
일반이성문법(Grammaire générale et raisonnée)은 일반적이며 이성적인 문법을 설명했다는 의미로, 앙투안 아르노와 클로드 랑슬로가 지었다. 엄밀하고 논리적인 연구가 돋보인다. 아르노와 랑슬로의 이 역작은 17세기 첫 출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 왔다. 소쉬르와 촘스키, 푸코와 같은 거장들이 모두 이 책에 주목했다. 언어학자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봐야 할 책.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극을 받게 될 책이다. 오늘날 언어 이론과 문법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손꼽히는 저서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일반이성문법≫은 포르루아얄 문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법학자인 클로드 랑슬로와 철학자인 앙투안 아르노가 함께 집필한 이 책은 1660년에 파리에서 익명으로 처음 출간된 후, 1664년, 1676년, 1679년, 1709년에 계속 증보되어 출판되었다. 두 저자는 아주 간결하긴 하지만, 그들의 야심에 찬 문법이 일반적이며 동시에 이성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이 문법의 독창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일반문법이다. 개별문법처럼 단순히 이런저런 언어의 여러 규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기술의 진정한 토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개별 언어의 구조적 특수성을 강조하며 이 문법서가 제시하는 이론적 성찰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려 들지만, 언어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변형문법가들은 그들의 이성주의적 언어관의 기원을 이 저서에서 찾는다. 그 대표자로 미국의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아르노와 랑슬로가 문장의 논리적 구조를 강조한 것에 주목했으며, 그들이 자신이 생각한 고유한 어떤 개념을 먼저 파악한 선구자임을 알았다. 각 저자의 이 책에 대한 기여도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기가 불가능하지만, 앞선 이론에 대한 지식과 문법에 대한 연구, 언어에 대한 구사는 랑슬로가 담당했을 것이고, 이들 잡다한 자료를 우수한 지능과 분석력으로 아르노가 종합 정리했다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1660년 책 언어학 책
155375
https://ko.wikipedia.org/wiki/%ED%94%8C%EB%9F%AC%EC%8B%9C%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플러시 (동음이의)
플러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플러시 플러쉬 (영화) 플러시는 포커의 패의 하나이다. 플러시는 포켓몬의 하나이다. 같이 보기
1175122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20%EB%AF%BC%EB%B2%95%20%EC%A0%9C603%EC%A1%B0
대한민국 민법 제603조
대한민국 민법 제603조는 반환시기에 대한 민법 채권법 조문이다. 조문 해설 사례 판례 참고 문헌 오현수, 일본민법, 진원사, 2014. 오세경, 대법전, 법전출판사, 2014 이준현, LOGOS 민법 조문판례집, 미래가치, 2015. 같이 보기 소비대차 603 계약법 소비대차
1140932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20%EB%AF%BC%EB%B2%95%20%EC%A0%9C205%EC%A1%B0
대한민국 민법 제205조
대한민국 민법 제205조는 점유의 보유에 대한 민법 물권법 점유권 조문이다. 조문 사례 판례 205 물권법 점유권 청구권
2798228
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B%A1%A4%EB%93%9C%20%EA%B5%BF%EC%9C%88
해롤드 굿윈
해롤드 굿윈은 다음 인물을 가리킨다. 해롤드 굿윈 (미국 배우) 해롤드 굿윈 (영국 배우)
727842
https://ko.wikipedia.org/wiki/%ED%99%98%EC%9E%90
환자
환자(患者) 또는 병자(病者), 병객(病客)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환자는 대개 아프거나 외상을 입은 상태에 처해 있으며 의사, 고등 간호사, 수의사, 의료인으로부터 치료의 손길이 필요하다. 환자는 크게 외래환자와 입원환자로 나눌 수 있는데, 외래환자는 입원을 하지 않고 병원에 다니면서 진료를 받는 환자를 가리키는 반면, 입원환자는 병원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는 환자를 가리킨다. 외래 환자와 입원 환자 외래 환자()는 24시간 미만 입원하는 환자를 말한다. 반면, 입원 환자()는 병원에서 특정되지 않은 시간 동안이나 여러 날에 걸쳐 머무르며, 혼수상태, 지속식물상태 등 일부 극심한 경우 (종종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수년을 입원하기도 한다. 같이 보기 의사 의학 용어 간호
553137
https://ko.wikipedia.org/wiki/%EB%85%BC%EB%A6%AC%EC%8B%9D
논리식
논리학에서 논리식(論理式, ) 또는 정형 논리식(整型論理式, , 약자 WFF)은 어떤 논리 체계의 언어 속 기호들로 구성된 유한 문자열 가운데, 합법적인 ‘명제’로 여길 수 있는 것들이다. 명제 논리나 술어 논리에서, 논리식은 원자 명제와 논리 연산을 통해 재귀적으로 구성되며, 공리와 추론 규칙으로부터 다른 논리식들을 유도하는 증명에 참여한다. 이론의 모형 속에서 각 논리식은 그 모형에서의 구체적인 명제로 해석되어 참과 거짓 여부를 부여받는다. 정의 어떤 논리 체계 속에서, 논리식은 원자 논리식으로부터 논리 연산을 유한 번 가하여 얻을 수 문자열로 정의되며, 이는 보통 재귀적으로 정의된다. 같이 보기 헤이팅 대수 술어 논리 직관 논리 추론 형식 제어문 참고 문헌 불 대수 컴퓨터 과학 고전 논리 명제 논리
159845
https://ko.wikipedia.org/wiki/%ED%95%AD%EB%A0%A5
항력
유체동역학에서 항력(抗力, drag)은 ‘물체가 유체 내를 움직일 때 이 움직임에 저항하는 힘’이다. 항력은 마찰력과 압력으로 구분된다. 마찰력은 물체의 표면에 평행한 방향으로 작용하며, 압력은 물체의 표면에 수직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유체 내에서 움직이는 고체 물체의 경우, 항력은 ‘유체의 유동과 동일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모든 유체역학적 힘의 합’이다. 따라서 항력은 물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힘이다. 항공기에서 추력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항력이라는 힘을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유체 유동의 방향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힘은 양력(lift)이라고 한다. 물체에 대한 항력은 무차원 수인 항력 계수(Cd, drag coefficient, coefficient of drag)로 나타낼 수 있으며, 항력 방정식을 사용해 계산할 수 있다. 항력 계수를 상수라고 가정한다면, 일반적으로 항력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항력 방정식 항력 방정식은 물체가 유체 내에서 움직일 때 작용되는 항력을 계산하는 식으로서,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측의 - 부호는 항력이 물체의 동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나타낸다 (순수한 항력 계수를 나타낼 때는 - 부호를 쓰지 않는다) 여기서, 는 항력 는 유체의 밀도 는 유체에 대한 물체의 상대 속도()의 속력 는 기준 면적 는 항력 계수 는 속도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위 벡터이다. (앞에 붙은 음수 기호는 항력이 이 속도 벡터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함을 나타낸다) 기준 면적 는 물체를 물체의 운동 방향에 수직한 평면에 투영한 면적과 관계된다. 같은 물체에 대해서도 다른 기준 면적이 주어질 때가 있는데, 이 때에는 각각의 기준 면적에 대한 항력 계수가 각각 주어져야 한다. 날개에 대해서는, 기준 면적은 전방 면적(frontal area)이 아닌 plane area이다. 항력 계수는 무차원 상수이고, 예를 들면 자동차에 대해서는 0.25 ~ 0.45의 값을 가진다. 항력 극복에 필요한 동력 항력을 극복하기 위한 동력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위 식을 보면, 항력을 극복하기 위한 동력이 속력의 3제곱에 비례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80 km/h로 달리는 자동차가 공기의 항력을 극복하는 데에 7.5 kW의 동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같은 차가 160 km/h로 달린다면 60 kW라는 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항력 방정식은 근사식일 뿐이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오차가 클 수도 있는 식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식을 사용하기 위한 가정을 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스토크스의 법칙 위의 항력 방정식은 일반적인 경우에 대한 식이다. 특수한 경우로서 물체의 크기가 매우 작거나 속도가 매우 느린 경우(레이놀즈 수가 )에는 스토크스의 법칙이라 불리는 식을 적용할 수 있다. 항력 방정식에서와 달리, 스토크스의 법칙에서는 항력이 속도에 비례한다. 여기서, 는 유체의 성질 및 물체의 크기와 관계된 상수 는 물체의 속도이다. 물체가 구형(sphere)인 특수한 경우에는, 항력 계수를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여기서, 은 입자의 스토크스 반경 는 유체의 점성 계수이다. 같이 보기 경계층 낙하산 받음각 부가 질량(Added mass) 스톨 종단속도 수 레이놀즈 수 쿨리간-카펜터 수(Keulegan–Carpenter number) 항력 계수 방정식 모리슨 방정식(Morison equation) 베르누이 방정식 항력 방정식(Drag equation) 법칙 스토크스의 법칙 학문 공기역학 선박공학 유체역학 자동차 공학(Automotive engineering) 항공공학 효과 마그누스 효과 코안더 효과(Coandă effect) 힘 공기력(Aerodynamic force) 압력 램 압력(Ram pressure) 항력 유해 항력(기생 항력, Parasitic drag) 공기역학 유체동역학 유체역학 항공공학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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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B0%94%EC%9D%BC%20%EB%AF%B9%EC%84%9C
모바일 믹서
모바일 믹서는 건물의 건설에 필요한 콘크리트를 현장에서 직접 생산할 수가 있는 장비를 갖춘 특장차이다. 레미콘과 비슷하나 레미콘과는 달리 건설 현장에 필요한 콘크리트를 직접 생산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역사 모바일 믹서는 역사는 여러 방향에서 비롯된다. 1964년, 해럴드 짐머만은 펜실베이니아에서 모바일 믹서에 대한 특허를 받았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 장비 제조업체는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1999년에 해당 제조업체는 VMMB를 만들었다. 특징 레미콘, 펌프카와 함께 건물의 건설 현장에서 보이는 차종이며 건물의 건설 현장에서 필요한 콘크리트를 직접 생산한다는 차이점이 있는 차종이다. 그래서 차량은 현장에서 필요한 콘크리트를 바로 생산할 수가 있는 모바일 배치플랜트란 특수 장비를 장착하고 있다. 일반적인 레미콘과는 달리 자주 안보이는 차종이며 주로 22톤이나 25톤의 대형 화물차를 특장해서 만든다. 또한 콘크리트 배치 플랜트 트럭과 같이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급되진 않았기 때문에 희소성이 있는 차종이다. 같이 보기 상용차 레미콘 펌프카 각주 화물자동차 교통수단 상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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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20%EC%84%9C%EC%9A%B8%20%EC%95%84%EC%B9%B4%EB%8D%B0%EB%AF%B8
FC 서울 아카데미
FC 서울 아카데미는 FC 서울의 유스 시스템에 의해 프로 선수 육성 개념으로 운영되는 각급 유소년팀(U-18팀, U-15팀, U-12팀) 그리고 축구 저변 확대 개념으로 운영되는 유소년 축구교실인 Future of FC 서울을 말한다. 역사 200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K리그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유스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채 연고지 지명 고등학교를 두고 드래프트에서 연고지명으로 고등학교 선수들을 선발하고 취미 목적의 유소년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2001 시즌을 마지막으로 드래프트가 폐지되고 자유계약선수제도가 시행되자 2002 시즌부터 2005 시즌 동안 이청용, 송진형, 고명진, 안상현, 한동원, 기성용 등의 10대 선수들을 영입하여 2군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 1군 선수로 성장 시키기도 하였지만 체계적인 유스 시스템에 의한 성과는 아니었다. 2006년 말 축구 명문 동북고등학교와 협약을 맺고 2007년부터 FC 서울에서 직접 U-18팀을 운영하며본격적인 유스 시스템 구축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유스 시스템을 강화하고자 2012년 2월 미래기획단이라는 조직을 신설하여 최순호 전 강원 FC 감독을 단장으로 선임하였으며동북고등학교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2012년 8월 28일 오산고등학교 축구부와 오산중학교 축구부와 새롭게 협약을 체결하고 그 해 12월 U-18팀, U-16팀, U-14팀을 창단하였다. U-12팀에 부문에서는 전문적인 U-12팀을 두지 않은 채 리틀 FC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소년 축구교실을 운영하였으며 2012년 10월 Future of FC 서울로 개명 후 확대 운영을 하였다. 또한 Future of FC 서울은 매년 K리그 U-12 유소년 클럽 캠프에 참가하였으며 프로반은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에 2010년부터 참가하였다. 2014년 12월 Future of FC 서울 회원들과 지원자를 대상으로 선수 선발과 동시에 FC 서울 U-12팀을 창단하여 유스 시스템 구축을 완료하였다. 코칭스태프 FC 서울 U-18팀 FC 서울은 U-18팀으로 2012년 12월 창단한 오산고등학교 축구부를 운영중이며 K리그 클럽 U-18 유소년팀들의 리그인 K리그 주니어에 참가한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는 동북고등학교 축구부를 운영하였다. 우승 기록 K리그 주니어 우승 (2): 2009, 2020 A조 준우승 (3): 2015 전기, 2016 전기, 2017 전기 3위 (2): 2008, 2010 K리그 U18 챔피언십 우승 (1): 2022 준우승 (1): 2018 3위 (1): 2015 춘계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전 우승 (1): 2019 역대 시즌 통계 FC 서울 U-18 기록승계 2008–2012: 동북고등학교 축구부 2013–현재: 오산고등학교 축구부 K리그 주니어 대회방식 2008: 양대 리그 후 4강 토너먼트 2009–2011: 양대 리그 후 순위 결정전 2012: 양대 리그 2013–2014: 단일 리그 2015–현재: 양대 리그 및 전후기 리그 시즌별 전 대회 기록 토너먼트 기록 우선지명 선수 명단 연도 표기는 드래프트 추첨행사가 열린 연도가 아니고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된 선수들이 뛰게 되는 시즌으로 표기한다. (2008 드래프트: 2007년 11월 15일 드래프트 추첨행사 개최) 과거 드래프트에도 연고지 내 고등학교 선수에 대한 우선 지명권이 있었지만여기서는 FC 서울이 직접 유소년팀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우선 지명권을 행사한 2008 드래프트부터 표기한다. 4명까지 지명할 수 있었던 우선 지명 선수 인원이 2012 드래프트부터 무제한으로 늘어났다. (대) 표기는 선발은 되었지만 대학 진학 후 입단하는 선수를 의미한다. (대후) 표기는 선발 후 대학에 진학하여 중퇴 및 졸업 후 입단하는 선수를 의미한다. 2013 드래프트까지는 동북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배출한 선수들이다. 입단 선수 명단 배출 유명 선수 ※ FC 서울에서 U-18팀으로 동북고등학교 축구부를 직접 운영한 시기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이며 2013년부터는 오산고등학교 축구부를 운영 중이다. FC 서울 U-15팀 FC 서울은 U-15팀으로 2012년 12월 창단한 오산고등학교 축구부를 운영중이며 전국중등축구리그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한다. 우승 기록 전국중등축구리그 왕중왕전 우승 (1): 2016 K리그 U15 챔피언십 우승 (1): 2018 서울소년체육대회 우승 (1): 2019 FC 서울 U-12팀 FC 서울이 자체 운영하는 U-12팀으로 2015년 1월 창단하여 전국초등축구리그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한다. 우승 기록 금석배 전국초등학생 축구대회 우승 (1): 2016 Future of FC 서울 과거 리틀 FC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된 유소년 축구교실이 시초이며 2012년 10월 Future of FC 서울로 개명하였다. 2013년부터 유소년 인재 발굴과 연고지역 팬층 확대 그리고 축구교실로 인한 구단 수익 증대를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사업으로 진행 중이다. 6세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남녀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며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 난지천공원 인조잔디 축구장, 아차산 배수지 축구장, 보라매공원 인조잔디 축구장, 상암풋살구장 등에서 강습을 하고 있으며 K리그 U-12 유소년리그 캠프에 참가하고 있다. 취미가 아닌 프로반도 운영중이며 프로반에서 다시 FC 서울 U-12팀으로 스카우트되는 구조이다. 2015년 1월 28일 중국 축구 꿈나무들을 대상으로 한 위탁 교육 운영 협약을 맺었다. 배출 유명 선수 Future of FC 서울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안양 LG 유소년 축구교실 출신의 주세종 선수와 리틀 FC 서울 유소년 축구교실 출신의 안현범 선수가 있다. 관련 항목 FC 서울 FC 서울 2군 오산고등학교 축구부 오산중학교 축구부 FC 서울 U-12팀 Future of FC 서울 동북고등학교 축구부 각주 참고 자료 한강 보이는 FC서울 유스 숙소, 최상 환경 속에서 선수 꿈 키운다 일반 학생들과 수업 듣는 서울 유스, 축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 링크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Future of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Future of FC 서울 공식 페이스북 Future of FC 서울 공식 블로그 K리그 주니어 일정 및 결과 K리그 주니어 공식 블로그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일정 및 결과 FC 서울 2군과 아카데미 FC서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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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D%B4%EB%B2%84%20%EC%A1%B0%EC%84%A0%EC%99%95%EC%A1%B0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버 조선왕조(Cyber 朝鮮王朝)는 조선시대 가상 사회와 역사를 중심 주제로 하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이다. 2000년 8월 15일에 개통한 후 여러 차례 사이트 개편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관청의 연혁, 청사 배치도에 관한 자료가 특징이다. 구성 텍스트 위주의 게시판 약 100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궁궐과 조정(관청), 지역(팔도)의 3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백성이 되며 과거 시험을 보거나 교육 기관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관직에 진출하면 관원이 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품계 승진을 통해 판서와 같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 경복궁 : 왕실 인물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관직을 맡은 인물들이 출입하며, 승정원 같은 궐내각사 관청이 있다. 조정 : 의정부, 의금부 이조, 호조 등의 중앙 관청 공간이다. 각 관청 화면에는 관청의 역사, 연혁 자료가 있다. 한성부 및 팔도 : 일반 백성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지역 관청(감영), 교육기관(서당), 소모임(단체) 등이 있으며, 각 지역에 대한 자료 페이지가 있다. 연혁 2000년 8월 15일, 사이트 개설 2000년 10월 14일, 도메인 www.1392.org 연결 2000년 12월 13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선정 청소년권장사이트 지정 2001년 12월 10일, 제3회 조선일보인터넷대상 자유부문 대상 2005년 1월 19일, 사이트 리뉴얼 기타 대한제국 황실 관련 민간 단체인 우리황실사랑회는 사이버 조선왕조 내에서 시작된 소모임에서 비롯되었다. 광해군을 인터넷 공간에서 혜종으로 복위하는 사업이 사이트 내에서 진행되었다. 만25세 이하 연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이버 대한제국'(www.1392.net)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서비스되었다. 각주 외부 링크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버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2000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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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D%95%98%EB%A5%B4%ED%86%A0
수하르토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 1921년 6월 8일 - 2008년 1월 27일)는 인도네시아의 군사·정치 지도자였다. 보통 수하르토(, )라고 줄여 부른다. 1967년부터 1998년까지 오랫동안 독재 정치를 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2년 간 독재자로 살아오면서 1998년, 아시아에 몰아닥친 금융 위기와 이어진 IMF 체제하에서 그동안 부패 및 경제 실정에 대해 국민들의 독재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를 했으며, 결국은 31년 간의 독재 정부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일으키며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회교도로서 지독한 반공주의자로 당시에는 군인으로써 수카르노에 대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가두어 자신이 대통령을 하게끔 만들었다. 생애 군복무 수하르토는 1921년 6월 8일, 자와섬의 케무수 아르가물자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라 불렸다. 대부분의 자바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성 없이 이름만을 사용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네덜란드 식민지군에 입대하여 부사관이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조직한 방위군에 재입대하여 장교로 임관한다. 쿠데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자 신생 인도네시아 국가에 참여하였고, 계속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1965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쿠테타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에 1967년에 수카르노를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 후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물러날 때까지 7선 대통령이었다. 독재 취임 기간 중 수하르토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인도네시아를 공업 국가로 이끌었다. 그러나 독재통치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 수하르토 집권기간에는 자녀들과 친인척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경제 권력도 구축했고, 수많은 사람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철권통치를 했으며, 350억 달러에 달하는 부정 축재 문제로 국제 투명성 기구(Tranparency International, TI)는 "20세기에서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꼽기도 했다. 누적된 문제들이 1997년 금융 위기로 터지자 반정부 시위와 폭동으로 이어진다. 이에 수하르토는 군부를 동원하여 시위 진압을 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진압을 거부했고, 결국 시위에 이기지 못해 1998년에 결국 물러났다. 수하르토는 하야한 후에도 질병을 이유로 기소받지 않았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였고, 콩팥과 폐 기능의 이상 등으로 2008년 1월 27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1921년 출생 2008년 사망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인도네시아의 장군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인도네시아의 반공주의자 지폐의 인물 대량 살인자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자와족 욕야카르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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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민
하영민(河永民, 1995년 5월 7일 ~ )은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의 투수이다. 아마추어 시절 2012년 제 46회 대통령배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MVP를 차지했다. 넥센 히어로즈 & 키움 히어로즈 시절 2014년 4월 13일 한화전에서 데뷔 첫 등판이자 첫 선발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며 KBO 리그 역대 5번째 선발 투수 데뷔전 승리를 기록했다. 2014년에 3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2승은 한화 이글스, 1승은 LG 트윈스를 상대로 기록했다. 2016년 5월 25일 한화전 등판 후 오른쪽 팔꿈치 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됐다. 2020년 1월 6일에 사회복무요원으로 입소했다. 2018년 시즌 9경기에 등판해 2패, 7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출신 학교 광주수창초등학교 광주진흥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 통산 기록 각주 외부 링크 199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광주광역시 출신 KBO 리그 투수 넥센 히어로즈 선수 키움 히어로즈 선수 광주수창초등학교 동문 광주진흥중학교 동문 광주진흥고등학교 동문 진양 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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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옙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은 니콜라옙스크에서 벌어진 전투와 학살 사건을 가리킨다. 야코프 트랴피친이 지휘하는 붉은군대의 러시아인 볼셰비키-아나키스트 그룹과 중국인 그리고 일리야 박이 지휘한 한국인 게릴라들이 자행한 대규모 학살과 테러로 인해 니콜라옙스크에서 수천명이 사망하고 지역이 폐허가 됐다. 그리고 트랴피친 게릴라에 의해 도시의 여성(소녀, 부인)에 대한 대규모 강간살인도 벌어졌다. 2019년 최신 연구정리에 의하면 소련-러시아 학계에서는 도발이나 유도한 측이 트랴피친 측인지 일본 측인지 여부에 대해서 학자마다 엇갈린다. 그러나 그런 엇갈린 논의에서도 트랴피친 측의 학살과 파괴는 '트랴피친의 행동을 전례없고 근거없는 잔인함' '도시 전체를 의도적으로 태우고, 해당 전쟁의 역사에 비할 데 없이 파괴와 황폐화를 시켜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이며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을 설명하는 역사학 박사들의 대부분은 분명히 트랴피친의 적색 게릴라가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고 설명한다.(아래 표 참고)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인명사전에선 박일리야 독립군이 일본인 포로뿐만 아니라 반혁명파 러시아인도 살해한 사건이라 서술하고 있다. 트랴피친 군대의 학살에 의한 사망자수 학살에 의한 사망자에 대한 공식 문서와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볼셰비키·소비에트 정부 공식문서 볼셰비키, 행정당국의 내부문서에 의하면, 1920년 당시 볼셰비키 당국이 내린 공식판결에 의하면 트랴피친 부대에 의해 사할린 지역인구의 약 절반이 박멸됐다.[Красный клич: Орган военно-революционного штаба Красной Армии Николаевского округа. — 1920. — 11 июля.] 1924년 지역 코뮌에 추정한 1920년의 니콜라옙스크 인구는 3만명[Ауссем О. Х. Николаевская на Амуре Коммуна (1920 г.) // 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1924. № 5. С. 36−63], 사할린 지역 행정당국의 추정에 의하면 기아와 박탈로 사망한 인구수를 포함하면 1만명 이상이 사망했다.[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политика Советской России (1920−1922 гг.). Сб. документов… С. 8.] 역사학 박사들의 견해 많은 역사학 박사들은 트랴피친 군대의 살인에 의한 사망자 규모를 수천명이라 설명하고 있다. 등 많은 역사학박사들이 트랴피친 군대의 대규모 학살로 수천명이 학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학계와 증거 역사학자들의 견해 니콜라옙스크 사건을 설명하는 역사학 박사 다수는 트랴피친 게릴라 부대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설명하고 있으며, 위의 표중 일본인 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역사과학 박사인 블라디미르 프로코로비치는 최대 25,00명이 사망했다고 말한다.지고바-로고바(Зыкова-Рогова, 지코프-로고프) 현상은 유일하지 않았다: 쿠즈네즈크에는 다른 «적색»패거리도 있었다. 또 다른 대규모 유사한 로고바(роговской) 학살은 이른바 아무르 비극이었다. 1920년 봄 니콜라옙스크 항구에서는 23세의 아나코-공산주의자 야코프 트랴피친이 이끄는 붉은 게릴라들이 수백명의 일본인 포로를 총살했다. 그런 다음 도시 주민들에 대한 체계적인 박멸이 전개되고, «종족[민족, 부족으로도 번역]분류[этноклассовому]» 원칙에 따라 다섯가지 범주로 나뉘었다. 도시는 불태워졌고, 10일간의 살육동안 약 2,500명이 사망했다(커다란 숫자로 일컬어졌다[называли и большие цифры]). 트랴피친(농민 출신), 그의 참모장 니나 레베데바(21세의 모스크바 여성), 5명의 볼셰비키 공범자는 소비에트 정권의 위신의 실추라는 표준적인 유죄판결로 총살됐다. 역사학 박사 블라디미르 그레고리예비치 다치센은 수천명이 사망했다고 분석한다.1920년 3월. Ya. I. 트랴피친은 사할린 지역에 대해 "혁명적" 테러 공격을 벌였고 극동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일본과의 전쟁을 촉구했다. 무장 충돌의 결과로 니콜라옙스크 항구의 일본 수비대는 전체 일본 공동체와 함께 물리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극동 공산주의자들에 따르면 아무르 하류에는 일본인과 함께 «농민계급 사이에 일본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주 전체 러시아인 인구의 거의 절반이 박멸되었다.블라디미르 그레고리예비치 다치센 박사와 세르게이 V. 그리샤체프 와의 2019년 공동 논문소비에트 정권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인물 아나키스트 야코프 트랴피친의 게릴라부대가 1920년 1월에 도시에 접근했다. 일본 수배대와 합의가 이루어지고, 부대는 출입이 허용되었다. 그런 붉은 게릴라와 지역 주민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은 오래가지 못 했고, 곧 병사들은 화이트 운동에 동조하는 개인들을 샤냥했고, 체포되어 처형했다. 부유한 민간인들의 체포와 처형이 뒤따랐고, 3월까지 분쟁은 일본군을 포함했다. 수비대는 무장해제 최후통첩을 받았고 거절했고, 그리고 이것은 3월 12일에 무력 충돌의 발발로 이어졌다.[중략] 일본 부대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 하구로 보내졌고 군함은 5월 해안에 근접했다. 상황을 고려해, 트랴피친의 부대는 나무구조물이 불에 타고 돌 구조물에 불을 붙이는 등 도서 전체를 황폐화시킨 후 퇴각하였다.[중략]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트라이아피친의 행동이 전례가 없는 근거 없는 잔혹행위라는 설명에 동의한다. "도시 전체를 고의적으로 불태워 헤아릴 수 없는 폐허와 그 전쟁의 역사에 비할 바 없는 영토의 황폐화로 수천 명을 죽였다." (Nelyubova 2012, 291)역사학 박사 겸 사학과 교수 Vladimir G. Datsyshen와  러시아 주립 대학 역사, 정치학 및 법학부 박사 Sergey V. Grishachev의 영어논문「Allied Intervention in the Russian Civil War and Japanese Troops in Russia’s Far East, 1918–1922」에서 니콜라옙스크 학살에 대한 소련-러시아 학계의 논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도 아나키스트 트랴피친의 붉은 게릴라 부대가 도시에 접근하고 진입한 뒤 일본군과 전투전부터 처형과 사냥을 벌였으며 도시를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강제로 끌고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련-러시아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설명하는데 도발이나 유도한 측이 트랴피친 측인지 일본 측인지 여부에 대해서 학자마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런 엇갈린 논의에서도 '트랴피친의 행동을 전례없고 근거없는 잔인함' '도시 전체를 의도적으로 태우고, 해당 전쟁의 역사에 비할 데 없이 파괴와 황폐화를 시켜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에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학계 논의를 요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도발 유발이나 유도측이 어느 집단인지 여부이며 트랴피친이 대규모 학살을 벌여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은 학계 내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트랴피친 측의 대규모 학살은 학계 밖은 몰라도 학계 내부에서는 논란이 없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Тепляков 박사는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의 논문에선, 2015년 논문에는 약 6-7,000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1919년말, 트랴피친은 군사-혁명 본부와 하바로스크와 니콜라옙스크 지역 혁명 단체에 의해 반란 운동을 조직하기 파견되었다. [중략]트라피친과 레베데바의 약 2천명의 군대는 아무르 아래로 이동하면서 농촌 지식인(혁명적인 "수동성")과 마을 사람들 중 "부르주아"와 비슷해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거의 완전히 박멸(истреблением), 사제들을 얼음구멍에 빠뜨리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자발적으로 다가간 사람들도 총살됐다. [중략] 랩타 부대는 트라피친의 자바르진, 비트센코, 딜딘, 오세빌리, 사소브와 함께 시내를 점령하기 전부터 수백명의 아무르인을 살해했다.[중략]트랴피친의 부대는 200명의 금광에서 모집한 중국인과 한국인(후자는 일리아 박[Илья Пак]이 지휘)이 있었고, [중략]가장 저명한 시베리아 볼셰비키중 하나인 A. A. 시랴모프는 아무르의 러시아 광산 노동자들 사이 "강력한 형사범죄 요소가 상당부분"이 있다고 썼다. 인구가 희박한 북방수림(тайге)에서 자립적인 삶은 광부들을 아나키스트적 성격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무르 게릴라들은 "너무 지나친 잔인함을 보였다." 시랴모프는 "아무르 북방수림에 우리 [먼] 조상들의 복수와 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있다."고 직접 언급했다.[중략]트랴피친은 고의적인 아동 박멸을 포함하여 민간인 집단에 대한 대량 불순분자 제거에 대한 사상가인자 실천자 중 한명이다. 그의 분리주의, 테러리즘, 그리고 초 혁명적 모험주의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특수 부대의 주도권 하에 게릴라들의 손에 의해 트랴피친 독재의 제거로 이어지게 했다.[중략]재판에서 게릴라들은 지역 인구의 약 절반이 박멸됐다고 이야기했다. 1920년 초. 이 지역의 인구는 코뮌 지도자들에 의해 거의 3만명으로 추정되었다.[해당 논문이 주석 60에 인용한 자료: "Ауссем О. Х. Николаевская на Амуре Коммуна (1920 г.) // 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1924. № 5. С. 36−63." 1924년 현지 코뮌 지도자들의 1920년 니콜라옙스크 인구를 추정치가 3만명다.] 트랴피친의 학살 결과로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1920년에 사할린 지역 인구는 1만명을 감소했으며 이 지역은 곧 정리되어 아무르 지역과 합병됐다. 1920년 말 사할린 주의 지도부는 러시아인 인구의 규모는 17000명, 비 러시아인 인구는 1200명으로 판정했다. 따라서 니콜라옙스크에서 트랴피친 측의 최소 희생자수는 사건의 동시 사람들의 추정처럼 6-7천명(백색 수비대와 일본인 포함)이라 추정될 수 있다. 사할린 행정 당국의 추정에 따르면—생존인구의 18000명 기준으로—이 지역 전체의 손실 건수는 기아와 박탈로 의한 사망자를 포함하여 최소 1만~1만 5천명이었다.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의 2017년 논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도 2017년의 논문에서 강간, 대량 학살, 약탈, 잔혹 행위들이 여자와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의 2018년 논문. 2018년에 게재한 논문에서 박일리야 등 사할린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러시아로 건너간 반항적인 한국인은 기초적으로 이르쿠르크로 방향을 정하고, 나머지는 상하이의 혁명적 파벌로 방향을 정했다. 동시에 특별사할린게릴라 부대의 «상하이파[프로 상하이 прошанхайские про шанхайские]» 게릴라 지도자들은 1919-1920년에 사할린 지역과 니콜라옙스크 항구에서 주민에 대한 야만적인 살육에 능동적으로 참가했다. 아나키스트 Ya. I. 트랴피친의 테러리스트 군대에서 중요하고 돌격 부대였다. 당연히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을 받자 떠났다. 아무르 하류 블라고베셴스크 근처에서, 습관적인 방법으로 공급과 개인적인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하였다.[중략] 김과 박은, 부대를 이동시키며, 자유시[스바보드나]의 농촌 지역에서 «그들은 저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 대해 약탈하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했다.» 그에 대해 격노한 농민들은 한국인 격퇴를 목적으로, 한국인 게릴라에 대한 무장해제와 [농민들을]무장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니콜라옙스크에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한국 소총대대 병사들과 지휘관들을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무질서 상태는 게릴라들의 규율을 완전히 부패시켰다, Ya. I. 트랴피친 독재곁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것이 습관화된 게릴라들을. [중략, 자유시 참변 사건이 벌어진 이후]한국인 부대는 이전과 똑같이 제멋대로 굴며 행동:1921년 7월. 그들은 아무르 주 체르니코브카의 볼로스트 마을 주민들을 희롱하며식료품을 요구하며수레와 짐마차에서 빼앗으며 최소한의 이의를 제기하면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집밖으로 몰아냈다. 이에 농민들을 한국인을 «두번째 사무라이[вторыми самураями]»라고 불렀다. 논문에서 일부 '상하이파' 유격대 지도자들이 아니키스트 트랴피친이 이끄는 테러군대에서 핵심돌격대가 되어 1919-1920년 니콜라옙스크와 사할인 지역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으며 박일리야 등 이 사할린 부대를 가리켜 '트랴피친 하에서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이라 설명하고 있다.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크리벤키 박사의 논문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크리벤키 박사의 2018년 E.G.말라페예프, A.N푸피긴 공동 논문. 다음은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크리벤키, E.G.말라페예프, A.N푸피긴의 2018년 논문이다.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크리벤키는 역사과학 박사이다.(кандидат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старший научныйсотрудник Столичного бизнес-колледжа)그는 연해주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 지역의 자원(인간, 식료품)을 활용할 계획을 실행기위해 본부가 니콜라옙스크로 파견한 탐사대 부대 우두머리로 밝혀졌다. 1920년 1월, 니콜라옙크 전선 사령관이라고 선언 후,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사실상 절대권력자로 행동하였다. 니콜라옙스크 항구를 점령 한 후, 시작, 소위, 1920년 3월 12-15 "니콜라옙스크 사건". 게릴라가 유발하여, 일본 분리대의 진출은 그 부대 자체만이 파괴된 게 아니다. 니콜라옙스크의 모든 일본 식민지도, 여성을 포함해서, 아이들, 가족과 함께 영사관, 부상자, 포로들. 결국 일본은 러시아 문제에 대한 주요 무장 개입을 정당화했다.(극동 전역의 일본 행동, 일본의 사할린 북부 점령). 그 사건 전에 일본군은 1920년 2월 4일 중립을 선언했었다. 2월 17일 러시아 영토에서는 군대를 대피시키기 시작했었다. 1920년 5월 말일과 6월 1일에 트랴피친 본부, 그 및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니콜라옙스크 항구 마을이 폭발하고 불태워지고, 해안가 주변에 있는 어업이 불태워지고, 도시의 주민들은 "신뢰성"과 사회적 소속의 자격에 따라 박멸당했다(уничтожены), 생존해 감옥에 갇혀있던 일본인 죄수들도, 트랴피친의 행동에 반대하는 게릴라들도. 인구의 일부가 북방수림(тайгу) 대피한 결과, 5세 미만의 거의 모든 어린이가 사망했다. 그는 1920년 7월 9일 켈비 마을에서 "103인" 법원의 판결로 총살됐다. 그는 정착지 외곽의 공동 무덤에 묻혔다. 트랴피친의 급진주의와 초혁명 모험주의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특수기관 주도로 게릴라들의 손으로 트랴피친의 독재를 제거하게 한다.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크리벤키의 2020년 A.N푸피긴 공동 논문에서도 소녀를 가리지 않고 잔혹한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알렉산드르 알렉세이비치 아자렌코프 박사의 2019년 논문. 아자렌코프는 역사학 박사이다. (кандидат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доцент, стар- ший научный сотрудник)«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콜라옙스크 항구에서 빨치산 지도자 트랴피친에 의해 수행된 일본인과 도시 주민들 학살. 게릴라는, 일본 수비대와의 휴전을 깨고, 강점하고, 그리고 일본인 인질과, 동시에 «네뜨루다보이» 도시 주민(소수의 인뗄리겐찌야 포함)을 총살했다. 살아남은 패거리들은 북방수림(тайгу)를 통해 아무르(게릴라 온상지 — 이른바 «붉은 오스뜨라프»)까지 [주민들을] 강제로 데려갔다. 니콜라옙스크 현장에는 황량한 재만이 남았다. 이완종 박사의 2014년 문서해제. 러시아연방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 수학(역사학 박사)이완종 박사의 2014년 문서해제: 빨치산 부대의 퇴각을 결정한 트랴피친은 “반(反)소비에트 분자들”을 처형하며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약 4천 명의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피신할 수 있었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주민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빨치산들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미국과 서구 존 J 스테판 박사의 1994년 서적. 박사(PhD, London, 1969) 하와이 대학 역사학 교수 (Professor of History, University of Hawai´i, 1970-2001) 런던대학교 박사학위 및 하와이 대학교 역사학 교수 John J. Stephan 도 러시아 극동지역 역사 개설서에서 니콜라옙스크 학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존 J 스테판의 1994년 학술서: 5월 말 구조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파르티잔들은 일본인 포로 136명 사형시키고 약 4,000명의 러시아 남성, 여성, 아이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후 멍한 생존자 2천명을 암군 강을 따라 켈비로 몰아갔다. 트랴피친 측이 일본군과 전투 이전부터 처형을 했으며 철수전에 러시아인 4천명으로 남녀노소할 것 없이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커트 해커머 박사의 1998년 논문. 텍사스 A & M 대학교 역사학 박사(Ph D, History, Texas A&M University, 1994) 텍사스 A&M 대학 역사학 박사 겸 사우스다코타 대학 교수 Kurt Hackemer는 1998편에 게재한 니콜라옙스크 학살 논문 「The Nikolaevsk massacre and Japanese expansion in Siberia.」에서 박사는 일관되게 본 사건을 학살이라 적고 있으며 트랴피친 측의 마지막 행동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119쪽]트랴피친의 군대는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탈출, 북방수림[taiga]으로 떼를 지어 도망갔다. 극동공화국이 지배하는 아무르의 도시에서 블라고베셴스크에 가장 큰 시체[시체들이 수상에 떠오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략] 니콜라옙스크에 머무는 동안의 잔학 행위의 희생자들은 "우파의 사람들뿐 아니라 리버럴 사회주의자들과 심지어 볼셰비키 여러명까지 포함됐다." 존 K 창 박사의 2014년 논문 잉글랜드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러시아/소련 분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존 K 창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개입 기간 동안의 정치적 충성심은 국적에 의해 엄격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니콜라옙스크에 붉은 빨치산이 포위 공격(1920년 3월 4일)을 하는 동안. 많은 러시아 사업가들과 경영자들은 일본인들과 '협력자'로 여겨졌다. 승리 후, 트리피친(적색 빨치산)과 그의 군대는 유난히 니콜라옙스크의 러시아인 주민들(니콜라옙스크의 어업 및 해운업에서 일본 기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종사했기 때문에 )과 일본인들을 학살[massacred]했다. 트라피친이 거느린 2천여명의 군대에는 중국인 300명과 한국인 200명이 포함되었다. 타티아나 린코바 박사의 2018년 논문.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역사학 박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PhD in History, 2015) 트랴피친 군대에게 러시아인이 수천명이 학살됐음에도 일본이 아예 무시하고 일본인 사망자를 수천명으로 과장했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일본이 트랴피친 군대에게 살해된 러시아인 수천명을 무시했다고 적고있다. 일본군은 1918년 여름 니콜라옙스크를 점령했는데, 주로 그 지역의 상당한 일본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야코프 트랴피친 휘하의 게릴라들에게 공격받기 전까지 말이다. 니콜라옙스크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에, 700명 이상의 일본인 장교와 마을 주민들과 러시아 시민 8, 000명이 추가로 살해됐다. 소비에트는 1920년 7월 트랴피친을 붙잡아 쳐형하고, 볼셰비키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포착해 선전공세를 시작했다. 신문들은 살해된 5,000명의 일본 시민들(실제 수인 700명이 아닌)에 대한 소름끼치는 기사들을 보도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 살해된 러시아인의 수를 누락시켰다. 중화민국 중화민국(대만) 중앙연구원 현대사 연구원 이 창 박사의 2016년 논문. 국립정치대학 역사학 박사(Ph.D. History, National Cheng-chih University) 타이베이 중앙연구원 현대사 연구소 연구원 리 장 (Chang Li)의 논문에서는 적군(Red Army)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4,000명도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태웠다고 쓰고 있다.25일 밤, 적군(Red Army)은 니콜라옙스크의 감옥을 불태워 투옥된 일본군 134명이 사망하고, 26일에는 마을 전체를 불태웠고, 총 834명의 일본인과 4,000명의 러시아인을 학살한 반면, 레드 아미(Red Army)는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00명의 중국 국외 거주자와 1명의 영국시민이 교차사격에 걸려 사망했다. 한국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반병률 교수와 함께 완성한 책에도 트랴피친 진영의 대규모 학살이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일본인 학살을 부정하지만 트랴피친의 군대가 약 3~4천명의 러시아인을 아이 어른 구분없이 학살한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아무르강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1920년 5월말 일본원정군의 입성에 임박하여 러시아빨치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항을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과 약 4천명의 러시아인어른, 아이들을 학살하였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 증거 생존자들의 증언 많은 생존자들이 트랴피친 측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여러 증언을 러시아어였으나 트랴피친 군대가 벌인 학살의 생존자인 Anna Illinishna Lury의 손녀이자 니콜라옙스크 출신 실향민 Ella Lury Wiswell이 번역한 대량의 생존자들의 증언들로 미하일 페트로비치 그리고리예프, 세르게이 데멘티예비치 스트로드, 야코프 그달리예비치 도비소프, 아브람 아브살루모프, 아나톨리 파블로비치 압샬루모프, 안나 니콜라예브나 보즈코, 에브게니 이바노비치 바실레프스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버나셰프, 필리프 테렌티예비치 파투르낙, 페트르 야코블레비체 보로비예프, 세르게이 레포르스키,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주예프, 파벨 세메노비치 에포프(38세), 파벨 페트로비치 날레토프 (23세), 게오르기 바그라토비치 바셰이슈빌리, 발렌티나 니콜라예브나 크바소바, 이오시프 라페일로비치 버만트(46세), 안나 일리니슈나 루리(60세), 라이사 야코블레브나 밀러, 알렉세이 아프나시예비치 멜니코프, 라이사 세메노브나 악커만, 마리아 이시도로브나 그로시,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에멜리아노프(37세), 이오시프 이오시포비치 미하일릭(39세), 에카테리나 페도로브나 코토바,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코발리크(33세), 마트베이 이그나티에비치 닐리우보프(55세), 알렉산드르 그리고리비치 보로파예프(26세), 이오소프 딤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불리바르(53세), 이반 에고로비치 카자흐코프(25세), 야코프 바실리예프(43세),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캅잔(51세), 가브리일 이바노비치 투고프초프(29세), 에브도킴 스테파노비치 부겐코, 안톤 자하로비치 오브치니코프, 조지 S 다이어 등 생존자 대부분이 압도적으로 트랴피친 측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인이다. 1920년에 후버도서관에서 필사된 Anton Zakharovich Ovchinnikov의 기록 「Memoirs of the Red Partisan Movement in the Russian Far East, 1918-1920」이 존재한다. 중국영사관에 머물러서 살아남은 George S. Dyer가 망원경으로 학살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한 기록(Statement of George S. Dyer, Caldwell to Colby, July 14, 1920, received August 25, 1920, RDS, 861.00/7290.)도 존재한다. 비볼셰비키 언론. 1920년 7월 13일 블라디보스톡에는 비볼셰비키 위원회가 있었고 그들이 니콜라옙스크에 도착해서 사건을 조사했다. 이 때 블라디보스톡 기자인 E.에흐(V. 칠리킨) 가 같이 따라왔다. 그 기자는 거기서 현장을 조사하고 기사로 내보냈다. 신문 Delo Rossii의 특파원 N.Amursky은 생존자들을 최초로 만난 사람중 하나였는데 이후 기사를 내보냈다. 볼셰비키 진영. 볼셰비키 진영 내부에서도 이 사건을 문제삼았다. 케르비 읍의 군사회의 전권위원 베즈드닌은 니콜라옙스크 학살사건을 알게 됐고, 윗사람들을 상대로 이 사건이 어찌된 것인지 제대로 된 해명을 요구하였다.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의 자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자료도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하고 있다. 영국 잉글랜드 캔터베리의 켄트 대학 역사학 교수 이안 R 스톤의 경우 구트만의 저서가 객관적이지 않고 편향적인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구트만의 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저자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흥미로운 건, 이 책은 러시아에서의 연합 개입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그 시대의 일반적인 역사에서 무시되거나 기껏해야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근현대적인 설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모든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저자는 그 사건을 전반적인 정치적 맥락에 놓으려고 시도 했고, 예를 들어,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이 지역과 사할린 북부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이유를 고안했을 것이라는 것이다.세르게이 V. 그리샤체프 & 블라디미르 G 다트시셴의 2019년 논문에서도 구트만의 기록을 역사적 기록이라 인정하며 소련과 현대 러시아 학자들의 서적처럼 학계의 연구중 일부로 인정한다.그러나 또 다른 역사적 기록이 있다. 이미 1924년에, 호평을 받은 언론인 아나톨리 간(아나톨리 야 구트만의 필명) 그의 저서 'Nikolaevsk-on-Amur: 극동에서의 내전의 에피소드' (Gibel Nikolaevskana-Amure: Stranitsy iz istorii grazhdanskoĭ voĭny na Dal′nem Vostoke)로 사건의 연대기를 발표했다. 간은 내전 당시 시베리아와 극동을 여행했다. 그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연해주에서 살았다. 따라서 1920년 봄의 잔혹한 사건에 대해 보도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는 2013년 논문에서 구트만의 저작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트랴피친 현상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있는 연구원이 통찰력 있게 쓴 것처럼[이 때 주석에서 소개하는 문헌이 "20. Гутман А.Я. (Анатолий Ган) 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Страницы из истории войны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 Берлин, 1924. С. 9."이다.]학계에서 구트만의 연구는 인정받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해석 독립기념관에선 러시아빨치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항을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과 약 4천명의 러시아인어른, 아이들을 학살하였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고 서술하였고, 이후 트랴피친이 처형사건에서 "박일리야 등은 트랴피친을 혁명적인 애국자라고 간주하여 그를 처형한 것에 불만"이었다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인명사전 "고명수" 문서에서는 박일리야의 독립군부대가 러시아인 살해에 직접 참여하였고 서술하고 있다.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여 1920년 2월 일본 제14사단 보병 2연대 3대대가 니콜라옙스크 항구를 점령하자 소련 적군(赤軍)이 포위 공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 협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본군이 3월 협정을 위반하고 기습에 나서자 한인들은 독립군을 박일리야(朴一, 박윤천) 중심으로 편성하여 소련 적군과 함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전투 후 박일리야가 이끄는 380명의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하였고,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였다. 박일리야가 니콜라옙스크에서 한인 독립군을 조직하였을 때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그해 5월 일본 구원 부대가 니콜라옙스크를 공격하자 러시아 적군과 박일리야의 독립군이 일본인 포로와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살해하고 후퇴한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사건, 尼港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사할린의용대는 아무르주 마자노프(Мазанов)로 이동하였다. 각주 같이 보기 소련의 전쟁 범죄 통화 사건 통주 사건 외부 링크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book review in the Cambridge University Press. 소련의 전쟁 범죄 반러 감정 시베리아 전쟁 하바롭스크 변경주의 역사 한국의 독립운동 유대사 소련이 참가한 전투 일본이 참가한 전투 1920년 러시아 1920년 일본 1920년 2월 1920년 3월 1920년 중국 다이쇼 시대의 사건 성범죄 소련의 전쟁 범죄 한국의 학살 중국의 학살 소련-일본 관계 일본-중국 관계사 러시아-중국 관계 인종청소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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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BD%EA%B2%8C-%EC%BF%A0%ED%83%80%20%EB%B0%A9%EB%B2%95%EC%9D%98%20%EB%AA%A9%EB%A1%9D
룽게-쿠타 방법의 목록
룽게-쿠타 방법은 다음 상미분방정식의 수치해법이다 이 수치해법은 다음의 형태를 가진다. 이 문서에 있는 모든 방법은 다음과 같이 계수를 배열한 Butcher 테이블로 정의하였다: 명시적 방법 명시적 방법은 행렬 이 하삼각행렬인 방법이다. 오일러 오일러 방법은 일차이다. 안정성과 정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수치 해석 방법의 간단한 예제로 사용한다. 명시적 중간점 방법 (명시적) 중간점 방법은 두 단계의 이차 방법이다(아래의 암시적 중간점 방법을 보라): 호인의 방법 호인의 방법은 두 단계의 이차 방법이다(또한 명시적 사다리꼴 공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랄스톤 방법 랄스톤 방법은 두 단계 이차 방법이고 최소 지역오차 경계가 있다: 일반적인 이차 방법 쿠타 삼차 방법 고전적 사차 방법 "원조" 룽게-쿠타 방법이다. 3/8-규칙 사차 방법 이 방법은 "고전적" 방법만큼 악명높진 않지만 같은 논문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고전적이다(Kutta, 1901). 내장형 방법 내장형 방법은 룽게-쿠타 한 단계의 지역 절단 오차를 계산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결과로 적응형 단계 크기로 오차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테이블에 있는 p차와 p-1차의 두 방법을 사용한다. 낮은차수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이때 는 고차 방법과 같다. 그러면 오차는 다음과 같다 이 오차는 . 이런 종류의 방법의 Butcher 테이블은 호인-오일러 가장 간단한 적응형 룽게-쿠타 방법은 이차인 호인의 방법과 일차인 오일러 방법을 결합한 것이다. 확장된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추정 오차는 단계크기를 조절하는데 사용된다. 펠버그 RK1(2) 펠버그 방법은 일차와 이차의 두 방법을 가진다. 확장된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b 계수의 첫 줄은 일차 정확한 해를 주고, 두 번째 줄은 이차이다. 보가키–샴폐인 보가키-샴폐인 방법은 이차와 삼차의 두 방법이다. 확장된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b 계수의 첫 줄은 삼차 정확한 해를 주고, 두 번째 줄은 이차이다. 펠버그 룽게-쿠타-펠버그 방법은 오차와 사차의 두 방법이다. 확장된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b 계수의 첫 줄은 5차 정확한 해를 주고, 두 번째 줄은 4차이다. 캐쉬-카프 캐쉬와 카프는 펠버그의 원래 아이디어를 수정했다. 캐쉬-카프 방법의 확장된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b 계수의 첫 줄은 5차 정확한 해를 주고, 두 번째 줄은 4차이다. 도르몬드–프린스 도르몬드-프린스 방법의 확장된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b 계수의 첫 줄은 5차 정확한 해를 주고, 두 번째 줄은 4차이다. 암시적 방법 역 오일러 역 오일러 방법은 일차이다. 선형 확장 문제에 대해서 조건적 안정하고 진동이 없다. 암시적 중간점 암시적 중간점 방법은 이차이다. 이것은 배열 방법 중 가우스 방법이라는 그룹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이는 사교 적분자이다. 가우스-르장드르 방법 이 방법들은 가우스-르장드르 구적법에 기반하고 있다. 4차 가우스-르장드르 방법의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6차 가우스-르장드르 방법의 Butcher 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로바토 방법 로바토 방법의 주요 세 방법은 IIIA, IIIB 그리고 IIIC로 불린다(고전 수학 문헌에서 기호 I과 II는 라다우 방법의 주 종류에 예약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리후엘 로바토(Rehuel Lobatto)의 이름을 따왔다. 모두 암시적 방법이고, 2s-2차 방법이며, 모두 c1 = 0이고 cs = 1이다. 다른 어떤 명시적 방법과는 달리, 이 방법들은 더 큰 단계도 가능하다. 로바토는 룽게와 쿠타가 고전적인 사차 방법을 만들기 전에 살았었다. 로바토 IIIA 방법 로바토 IIIA 방법은 배열 방법이다. 이차 방법은 사다리꼴 공식으로 알려져있다: 4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은 A-안정하지만 L-안정하거나 B-안정하지는 않다. 로바토 IIIB 방법 로바토 IIIB 방법은 배열 방법이 아니지만 불연속적 배열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4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로바토 IIIB 방법은 A-안정적이지만 L-안정하거나 B-안정하지는 않다. 로바토 IIIC 방법 로바토 IIIC 방법도 불연속적 배열 방법이다. 이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4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L-안정하다. 이것들은 게다가 대수적으로 안정하고, 따라서 B-안정하기 때문에 딱딱한 방정식에 적합하다. 로바토 IIIC* 방법 로바토 IIIC* 방법은 문헌에서 로바토 III 방법(Butcher, 2008), Butcher의 로바토 방법(Hairer et al, 1993), 그리고 로바토 IIIC 방법(Sun, 2000)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아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4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은 A-안정하지도, B-안정하지도, L-안정하지도 않다. . 일반화된 로바토 방법 다음의 형태를 가지는 로바토 계수를 고려함으로써 세 실수 변수 , 여기서, . 예를 들면, (Nørsett and Wanner, 1981)에 소개되었고 로바토 IIINW라고도 불리는 로바토 IIID는 다음의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이 방법은 , , , 그리고 . 이 방법은 L-안정적이다. 또한 대수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B-안정적이다. 라다우 방법 라다우 방법은 완전히 암시적 방법이다(이런 방법의 행렬 A는 어떤 구조도 가질 수 있다). 라다우 방법은 s 단계에 2s-1차이다. 라다우 방법은 A-안정적이지만 구현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게다가 차수의 감소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일차 라다우 방법은 역 오일러 방법과 유사하다 라다우 IA 방법 삼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5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라다우 IIA 방법 이 방법의 ci는 다음의 근이다 . 삼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5차 방법은 다음과 같다 참조 . . . 수학에 관한 목록 수치미분방정식 룽게-쿠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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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D%ED%9E%88%EB%93%9C%20C-130%20%ED%97%88%ED%81%98%EB%A6%AC%EC%8A%A4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록히드 C-130 허큘리스()는 4개 엔진의 터보프롭 수송기이다. 세계 여러 나라 군대의 주요 전술기이다. 40개가 넘는 모델과 파생형이 5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2006년 12월, C-130는 미국 공군에서 50년간 계속 사용된 세 번째 비행기가 되었다. 1호는 영국 일렉트릭 캔버라가 2001년 5월에 기록했으며, 2번째는 B-52가 2005년 1월에 기록했다. 2012년에는 P-3 오라이온이 50년간 미국 해군에서 사용된 비행기가 될 것이다. 또한, 남극으로 가는 유일한 비행기이도 하다. (이때는 보통 ANI기로 불림. 탑승료 1인당 $15,000 = 약 1,500만 원) 개발 1950년 6월 시작된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의 형태가 다른 미국의 전술 수송기들(C-119 플라잉 박스카, C-47 스카이트레인, C-46 코만도)을 미국이 운용하게 되면서 운용 유지 비용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고, 또 현대전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51년 2월 2일, 미공군은 보잉, 더글러스, 페어차일드 항공사, 록히드에 새로운 작전능력이 향상된 차세대 전술수송기의 도입을 계획한 일반운용요구사항(GOR, General Operating Requirement)을 제출하였으며 새로운 수송기는 92명의 승객 또는 64명의 보병을 태우고 1,100 해리를 날 수 있고, 짧고 제대로 된 활주로가 없는 곳(unprepared strips)에서 이륙할 수 있고, 1개의 엔진이 멈춰도 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윌리암 호킨스를 팀장으로 하는 록히드 설계팀은 록히드 82를 위한 130페이지 분량의 제안서로 시작했다. 처녀 비행 : 치열한 경쟁 끝에 1951년 7월 록히드사가 제안한 모델(Model) 82가 차세대 전술수송기로 결정된다. 이후 시제기 제작에 들어가게 되고, C-130이라는 제식명칭을 부여 받는다. 1954년 8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의 록히드 공장에서 YC-130 시제기의 처녀비행이 있었다. 양산 현황 : 1957년 12월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하여 오늘날 대표적인 전술수송기로 손꼽히는 C-130 허큘리스(Hercules)는 배치된 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 2,400여대가 생산되어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사용되었거나 운용 중이다. 주요 특공작전 투입 C-130 수송기는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이 착륙이 가능하고 항속거리는 4,000km에 달한다. 그러다보니 각종 특수작전에 투입 빛나는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투입 작전으로는 1976년 7월 3일부터 4일까지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항공기의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기습 작전인 엔테베 특공작전에 이스라엘 공군의 C-130 수송기가 동원되어 인질들을 성공적으로 구출하였다. 항공모함 최대이륙중량 70톤인 C-130은 미국 역사상 항공모함에서 이착륙을 한 최대 규모의 항공기이다. 1963년 10월 미국 해병대의 KC-130F는 포레스탈 항공모함에서 29차례의 터치앤고, 21차례의 어레스팅 후크 없는 착륙, 21차례의 캐터펄트 도움 없는 이륙에 성공했다. 85,000 파운드 (38.6 t)인 KC-130F는 267 피트 (81 m)에서 착륙하여 완전히 정지했다. 최대화물탑재를 하고서 745 피트 (227 m)만에 이륙했다. 미국 해군은 C-130이 25,000 파운드 (11 t)의 화물을 싣고 2,500 마일 (4,000 km)을 비행한 다음 항공모함에 착륙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착륙이 너무 위험하고, 엘리베이터에 넣을 수가 없어서, 최대이륙중량 27톤인 C-2 그레이하운드 수송기가 개발되었다. An-12 미국의 C-130과 유사한 것은 소련의 An-12이다. 개발시기, 최대이륙중량, 프로펠러 엔진 4개 사용 등 여러가지가 매우 유사하다. C-130은 2천여대가 제작되었으나 An-12는 1천여대가 제작되었다. 둘 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현재에도 C-130은 생산 중이나, An-12는 생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Y-8이 현재에도 생산 중이다. 중국은 Y-8을 KJ-200 조기경보기로도 사용하고 있다. 허큘리스 사용국가 - 1500기 - 20기 - 16기 - 14기 - 5기 - 14기 - 42기 - 26기 - 7기 - 20기 - 45기 - 50기 - 18기 - 20기 - 5기 - 4기 - 5기 - 16기 대한민국 도입 운용현황 C-130 수송기도입 이전까지 공군이 운용한 기체는 C-123 프로바이더(Provider) 수송기를 운용했었으나 기체 노후화로 인해 1982년에 제주도와 청계산에서 연이어 발생한 추락 사고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되어 결국 신형 수송기인 C-130을 도입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88년 4대를 시작으로 1990년 3월까지 모두 12대의 C-130H 수송기를 도입했으며 이중 4대는 동체를 연장한 C-130H-30이다. 국내에 C-130H 수송기 주용작전으로 1991년 걸프전파병, 1993년 소말리아 평화유지군 파병, 1999년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병, 2003년 이라크 파병 등 주로 우리 군의 해외파병시 많은 활약을 했다. 2010년에는 C-130H 수송기 보다 성능이 더욱 향상된 C-130J 슈퍼 허큘리스 수송기를 4대를 추가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C-130J 수송기는 출력이 향상된 가장 신형 엔진을 장착해 항속거리와 비행고도가 늘어났으며, 최신 항공 전자 장비를 탑재해 각종 시스템이 자동화되어 기체 조종에 필요한 승무원이 4명(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항공기관사)에서 2명(조종사, 부조종사)으로 줄어들었다. C-130J 수송기 4대는 2014년 6월 대한민국 공군에 전량 배치되어 운용되고 있다. 제원 (C-130H) 같이 보기 각주 및 참고 자료 외부 링크 C-130 Hercules USAF fact sheet C-130 US Navy fact file and C-130 history page on Navy.mil C-130 page on GlobalSecurity.org C-130 Hercules page on AviaMil.net HerkyBirds.com 10,000+ C-130 images and forum C-130 systems on heyeng.com C-130 page on amcmuseum.org Aircraft.co.za - The Complete Aviation Reference Navy.mil - Standard Aircraft Characteristics: C-130G C-130J Specification Book 미국의 군용기 록히드 항공기 수송기 1954년 첫 비행한 항공기 고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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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EC%82%AC%EA%B8%B0%20%28%EA%B5%AD%EB%B3%B4%20%EC%A0%9C322-2%ED%98%B8%29
삼국사기 (국보 제322-2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서울특별시 중구 성암고서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판본 책이다. 2018년 2월 22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22-2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국보 제322-2호『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민족자아의식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512년까지 증보된 보각판에 기초하여 찍은 인출본으로, 인출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9책의 낙장이 없는 완질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판각본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의 조성형식과 보존상태 등도 확인할 수 있다. 갤러리 같이 보기 삼국사기 각주 참고 자료 서울특별시의 국보 성암고서박물관 소장품 조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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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EC%9D%98%20%EA%B8%B0%ED%9B%8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후는 대부분 냉대 기후를 띄는데,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대부분의 평지대에서는 Dwa,Dfa,Dwb,Dfb를 띄며,서부 지역에서는 대부분 냉대 동계 소우 기후,동부 지역에서도 원산만 근처와 함경북도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를 띄지만,강원도 남부와 함경도 일부에서는 동해와 개마고원의 지형적인 영향을 받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개마고원 등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아예 ET(툰드라 기후)를 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리 나라별 기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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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D%99%A9%ED%86%A0%EA%B8%B0%20%EB%AC%B8%ED%99%94
적황토기 문화
적황토기 문화()는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다수 발견되는 황토 재질 토기 문화를 말한다. 신석기 시대의 다른 토기 문화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기원전 제6천년기에 안달루시아 지방에 처음 농업이 보급되었다. 농업이 어디서 전래된 것인지 출처는 불명확하나 북아프리카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유럽의 신석기 문화 스페인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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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IU
CIU
CIU는 다음을 의미한다. 우루과이 신분증(Cédula de Identidad de Uruguay) 만성 특발성 두드러기(Chronic idiopathic urticaria)
744760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3%B0%ED%83%80%EC%97%AD
아쓰타역
아쓰타 역()은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아쓰타구에 있는 도카이 여객철도 도카이도 본선의 역이다. 개요 이 역은, 1886년 3월에 개업했다. 도카이도 53차 41번째의 역참인 미야주쿠, 아쓰타 신궁이 있던 것에 의해, 아쓰타는 예부터 번창하였다. 아쓰타 역이 설치되었던 경은, 주변이 갈대 투성이의 나고야 역과 비교하면, 이 역은 아스라이 나고야의 관문으로서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3년에 아이치 전기 철도(후의 나고야 철도)의 진구마에 역이 부근에 설치되면, 열차 개수가 열세했던 일 등부터 어울림을 사로잡혔다. 예전에는, 이 역과 나고야 역과의 사이에 역은 없고, 유료 급행이 운전되고 있던 시대는 일부의 급행 열차가, 그 이후는 쾌속 열차가 정차하고 있지만, 옆의 가나야마 역이 1989년의 종합역으로서 정비되었으면, 그 지위를 잃었다. 나고야 역에는 열차를 유치하지 않기 때문에, 남아졌던 넓은 구내나 어느 선의 유치선으로, 러시 아워용의 통근열차나 호쿠리쿠 방면의 특급열차가 쉬고 있었다. 주간, 평일은 117계 8량 편성이 3개, 토·휴일은 311계 4량 편성이 1개, 아침에 운용을 마쳤던 후 밤에 사용을 갖춰서 장시간 유치되었다. 특급 '시라사기'는, 종점의 나고야 역에서 승객을 끌어냈던 후 이 역까지 회송되어, 리넨 교환등의 차내 정비를 행했던 후, 다시 나고야 역까지 회송되었다. 역 구조 및 승강장 섬식 승강장 2면 4선을 가진 지상역. 승강장의 번호는 구내 서쪽부터 붙여져 있고, 1번선부터 4번선까지 존재한다. 1·2번선이 하행열차용, 3·4번선이 상행열차용으로, 2·3번선이 본선, 1·4번선이 대피선으로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승강장이 없는 선로가 있고, 1번선 서쪽의 2선은 대피선, 4번선 동쪽의 2선은 막다른 형식의 유치선(착발 수용선)으로 되어 있다. 이 대피선 · 유치선은, 특급 '시라사기'의 반환 회송열차나 통근 수송용의 열차(주간은 117계가 유치되고 있는 일이 많다, 토·일·휴일에는 311계)가 유치되고 있다. 역사와 2개의 승강장은 과선교로 연결한다. 배리어 프리로는 3대의 엘리베이터(승강장 - 과선교 간 2대, 개찰층 - 지상 1대)와, 개찰과 과선교의 사이를 경사로 연결하는 일로 대응하고 있다. 구내의 서쪽에 있는 역사는 2층 건물로, 역 사무실 · 개찰구는 2층에 있다. 메이테쓰진구마에 역과는 같지 않은 선상 역사로는 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나고야 철도의 선로를 넘어서 역의 동쪽으로 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도카이 여객철도의 직영역이지만 역장은 배치되지 않기 때문에, 가나야마 역이 이 역을 관리한다. 발권 창구, 승차권 자동 발매기 2대(TOICA 대응 터치 패널식), TOICA 현금기도 설치되어 있다. JR의 특정도구시내 제도로 걸친 '나고야 시내'의 역이다. 역 주변 아쓰타 신궁 나고야 시 아쓰타 구청 · 도서관 · 보건소 진구히가시 공원 진구마에 역 - 나고야 철도 진구니시 역 - 나고야 시 교통국 지하철 닛폰 차량제조 본사 나고야 시 아쓰타 토목 사업소 닛폰 가이시 본사 · 공장 진구히가시 주니치 하우징 센터 국도 제19호선 역사 다케토요 역을 기점으로 해, '한다 선'등으로 불리었던 노선의 종착역으로서 1886년 3월에 개업했다. 당시는 현위치보다 78C(약 1.57 km) 남쪽, 현재의 미즈호구 우키시마 정 부근에 역이 있어, 아쓰타 항을 사이에 둔 철도 · 수운의 연락역이었다. 1896년, 이용증가에 수반해 아쓰타 역을 아쓰타 신궁 근처의 현 위치로 이전했다. 이전에 수반해 아쓰타 항으로부터 떨어졌지만, 쇼진 강(후의 신호리 강)으로의 운하를 건설해, 항으로의 연락을 도모한다. 그 후의 나고야코 역이나 시로토리 역의 개업에 의해 이용이 감소해 매립할 수 있었다. 현재의 역사는 4대째이다. 역의 이전에 수반해 건설되었던 2대째의 역사는 태평양 전쟁중의 1945년 5월, 공습으로 당해 소실되었다. 이 날의 공습으로는, 아쓰타 신궁의 신사나 가사데라 역 역사 등도 소실했다. 소실부터 2년 후의 1947년 6월에 3대째의 역사가 건설되어, 1982년 10월에 4대째의 현 역사로 개축되었다. 개업시부터 철도 화물 수송 거점역의 하나였고, 유개차용 차급 승강장이 역 구내로 설치되었던 것 외, 닛폰 차량제조 본사 공장이나 내외 수송 나고야 지점, 주쿄 창고등으로 이어지는 전용선이 존재했다. 1980년대 전반에 합리화하기 위해 모두 폐지되어, 일부의 업무는 나고야 화물 터미널 역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카 트레인이 운행되고 있던 시간대는, 이 역이 나고야지구의 시발 · 종착역이었다. 연표 1886년 3월 1일 : 관설 철도(후의 국철 · JR)의 다케토요 - (오부) - 아쓰타 간 개업시에 개업. 일반역. 1886년 4월 1일 : 관설 철도가 비와지마 역(현재의 기요스 역)까지 연신. 도중역이 된다. 1895년 4월 1일 : 선로 명칭 제정. 도카이도 선(1909년에 도카이도 본선으로 개칭)의 소속이 된다. 1896년 9월 1일 : 현 위치로 이전. 1908년 5월 3일 : 역 앞에 나고야 전기 철도(후의 나고야 시덴)가 노선 연장. 1918년 9월 10일 : 지쿠사 역으로의 도카이도 본선 화물 지선 개업. 1930년 4월 1일 : 지쿠사 역으로의 도카이도 본선 화물 지선 폐지. 1945년 5월 17일 : 공습에 의해 역사 소실. 1947년 6월 22일 : 역사 재건. 1974년 2월 16일 : 나고야 시덴 아쓰타에키마에 역 폐지. 1978년 1월 16일 : 전용선 발착을 제외한 화물의 취급을 폐지. 1982년 10월 : 현재의 역사로 개축. 1984년 1월 10일 : 화물의 취급을 전부 폐지. 1986년 11월 1일 : 하물의 취급을 폐지. 1987년 4월 1일 : 일본국유철도 분할 민영화에 의해, 도카이 여객철도 (JR 도카이)가 승계. 1989년 7월 9일 : 옆의 가나야마 역의 승강장이 도카이도 본선상으로 마련되어, 이 역이 새로운 신쾌속 · 쾌속 정차의 역으로 되었던 일에 수반해, 쾌속 정차역으로부터 보통열차만의 정차역으로 한다. 1995년 10월 14일 : 자동 개찰기를 도입. 2006년 11월 25일 : TOICA를 도입. 인접 역 같이 보기 도카이 여객철도의 철도역 나고야시의 철도역 아쓰타 신궁 도카이도선 (JR 도카이) 1886년 개업한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 아쓰타구의 건축물 아쓰타구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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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A7%81%EA%B3%A0%EB%93%B1%ED%95%99%EA%B5%90
사직고등학교
사직고등학교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는 공립고등학교. 학교 연혁 1983년 1월 20일 : 사직고등학교 설립 인가(학년당 10학급, 계 30학급) 1983년 3월 1일 : 초대 정병로 교장 취임 1983년 3월 2일 : 부곡동 소재 동현중학교에서 개교 1983년 3월 5일 : 제1회 신입생 입학식(608명 입학) 1983년 7월 4일 : 현 교사로 이전(사직2동 632-8번지) 1986년 2월 13일 : 제1회 졸업생 581명 배출 2000년 9월 1일 : 1, 2, 3학년 각 10학급, 총 30학급(남녀공학)으로 학칙 변경 (남고-->남녀공학) 2004년 6월 30일 : 웅비관(신관) 완공 2015년 9월 1일 : 제14대 장규화 교장 취임 2019년 2월 12일 : 제34회 졸업식(331명, 총 16,965명) 2019년 3월 4일 : 제37회 신입생 입학식(252명)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1983년 개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부산광역시의 공립 고등학교 부산 동래구의 고등학교
1474441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A%A8%EB%82%98%EC%B9%B4%EC%97%AD
가모나카역
가모나카 역()은 일본 시마네현 운난시에 위치한 서일본 여객철도 기스키 선의 철도역이다. 섬식 승강장 1면 2선의 구조를 갖춘 지상역이다. 타는 곳 이용 현황 역 주변 국도 제54호선 운난시 가모 종합센터 인접 역 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시마네현의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 1916년 개업한 철도역 운난시의 건축물 운난시의 교통
1801305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D%94%84%20%EB%8D%B4%20%EC%95%84%EC%9C%8C
요프 덴 아윌
요하네스 마르턴 "요프" 덴 아윌(, 1919년 8월 9일~1987년 12월 24일)은 네덜란드의 정치인이다. 소속 정당은 노동당이다. 생애 노르트홀란트주 힐베르쉼 출신이다. 5차례(1956년 11월 6일 ~ 1963년 6월 5일, 1967년 2월 23일 ~ 1973년 5월 11일, 1977년 6월 8일 ~ 1977년 9월 8일, 1978년 1월 16일 ~ 1981년 9월 11일, 1982년 9월 16일 ~ 1987년 12월 24일)에 걸쳐 네덜란드 하원 의원을 역임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66년 9월 13일부터 1986년 7월 21일까지 노동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3차례(1967년 2월 15일 ~ 1973년 5월 11일, 1978년 1월 16일 ~ 1981년 9월 10일, 1982년 9월 7일 ~ 1986년 7월 21일)에 걸쳐 노동당의 네덜란드 하원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965년 4월 14일부터 1966년 11월 22일까지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고 1973년 5월 11일부터 1977년 12월 19일까지 네덜란드의 총리를 역임했다. 1981년 9월 11일부터 1982년 5월 29일까지 네덜란드의 부총리 겸 네덜란드 사회부 장관, 네덜란드 수리남·네덜란드령 안틸레스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7년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 외부 링크 1919년 출생 1987년 사망 20세기 네덜란드 사람 21세기 네덜란드 사람 네덜란드의 정치인 네덜란드의 총리 네덜란드의 부총리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네덜란드의 반전 운동가 노르트홀란트주 출신 암스테르담 대학교 동문
1290153
https://ko.wikipedia.org/wiki/WR%2042e
WR 42e
WR 42e(2MASS J11144550-115001)는 용골자리 방향으로 지구로부터 약 25,000 광년 떨어진 볼프-레이에별이다. 겉보기 등급은 14.53으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산개성단 NGC 3603 중심에서 서쪽으로 33 초각 떨어진 곳에 있다. 참고 문헌 용골자리 볼프-레이에별 O형 초거성 2MASS 천체
16260
https://ko.wikipedia.org/wiki/1180%EB%85%84
1180년
연호 남송(南宋) 순희(淳熙) 7년 금(金) 대정(大定) 20년 일본(日本) 지쇼() 4년 서하(西夏) 건우(乾祐) 11년 리 왕조(李朝) 찐푸(貞符) 5년 기년 남송(南宋) 효종(孝宗) 18년 금(金) 세종(世宗) 20년 고려(高麗) 명종(明宗) 10년 서하(西夏) 인종(仁宗) 41년 리 왕조(李朝) 고종(高宗) 5년 사건 지쇼-주에이의 난 발발 경대승, 중방을 무력화 시키고 도방을 설치함. 탄생 8월 6일 - 일본의 고토바 천황 사망 7월 27일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이소응(李紹膺)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허승(許升)
1031341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D%98%B8%EB%AF%B8%EC%8A%A4%EB%AF%B8%EC%97%AD
미호미스미역
미호미스미 역()은 일본 시마네현 하마다시에 있는 서일본 여객철도 산인 본선의 철도역이다. 역 구조 단선 · 섬식의 복합형 2면 3선의 승강장과 보선용의 측선을 가진, 교환 · 대피 설비를 가진 지상역이다. 하마다 철도부가 관리해, JR 서일본 요나고 맨텍이 역 업무를 위탁하는 업무위탁역이며, 창구에는 POS 단말, 역사 내에는 자동 발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용 현황 역 주변 미스미 추오 공원 인접 역 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하마다시의 철도역 1922년 개업한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 산인 본선
90725
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D%81%AC%EB%A1%9C%EB%85%B8%EB%AF%B8%EC%BD%98
네크로노미콘
《네크로노미콘》()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책이자 마법의 책(textbook of magic)이다. 《네크로노미콘》은 1924년 단편 〈개〉에 처음 등장하였으나, 그 저자 압둘 알하즈레드는 1년 앞서 단편 〈이름없는 도시〉에 인용된 바 있다. 신화 내에서 《네크로노미콘》은 옛것들과 그들의 역사, 그들을 소환하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 사후 여러 출판사에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제목으로 된 여러 책을 출판, 이 책이 진서인지 위서인지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나 《네크로노미콘》은 러브크래프트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러브크래프트가 어떻게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러브크래프트는 이 제목을 꿈에서 발견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제목은 "죽은 자의 법률에 대한 이미지" - nekros(사체), nomos(법), eikon(이미지)로 해석된다고 밝힌 바 있다. 보다 원제에 가까운 번역은 nemo(고려하다)의 동사번형에서 비롯된 "죽은 자에 대하여"일 것이다. 내용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내용이나 심지어 외양에 대해서도 자세한 묘사를 남기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는 위대한 고대의 존재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아래의 두 구절은 단편 〈이름없는 도시〉에 최초로 등장하고 〈크툴루의 부름〉에서 《네크로노미콘》 인용임이 확인되는 유일한 단편이다: 죽지 않은 그것은 영원을 존재할 수 있으나 기묘한 영겁 속에서는 죽음마저 죽을 지 모른다. 가상의 역사 1927년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역사〉라는 가상의 역사를 기록했고, 1938년 그의 사후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책의 원제는 《알 아지프(Al Azif)》로, 러브크래프트에 따르면 아지프는 "아랍인들이 곤충들이 밤에 내는 소리를 악마의 울부짖음이라 칭하는 말"이다. 아랍어 Azīf는 "바람소리; 기괴한 소리 혹은 소음"을 의미한다. 〈네크로노미콘의 역사〉에 따르면 "미친 아랍인" 알하즈레드는 러브크래프트의 신화적 존재인 요그-쇼토스와 크툴루를 숭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예멘의 사나 출신으로, 바빌론의 유적들과 멤피스의 지하의 비밀들을 보았으며, 아라비아의 사막들을 방문하고 이렘의 지하에서 "이름없는 도시"를 발견하였다. 만년에는 다마스커스에 살며 《알 아지프》를 저술하고 738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백주대낮의 다마스커스 거리 한복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기괴한 죽음을 맞이했다. 《알 아지프》는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 시대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그러나 은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의 가상의 학자 테오도로스 필레타스에 의해 950년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제목으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여러 실험자들로 하여금 끔찍한 시도를 하게끔 만들었으며, 결국 총대주교 미가엘에 의해 금지되고 불태워졌다." (총대주교 미가엘은 1059년 사망한 역사적 인물이다.) 탄압을 거친 끝에 《네크로노미콘》은 비밀스럽게 공유되다가 덴마크의 학자 올라우스 보르미우스에 의해 1228년 번역되었다. (현실의 보르미우스는 1588년에서 1624년까지 살았다.) 이 책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1232년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15세기와 17세기에 각각 독일과 에스파냐에서 재간되었으며, 그리스어본은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인쇄되었다. 영국의 마법사 존 디 (1527년-1609년)는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영문본은 인쇄되지 않았고 오직 단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러브크래프트에 따르면 아랍어 원본은 1050년에 그리스어판이 금지되기 전에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 중에 샌프란시스코에 비밀스런 사본이 등장했다가 불타 사라졌다는 루머가 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리스어본은 세일럼의 한 주민의 도서관에서 1692년 불타 사라진 이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사본 러브크래프트의 〈네크로노미콘의 역사〉에 따르면 《네크로노미콘》의 원본은 다음 5곳에 보존되어 있다. 대영박물관 프랑스 국립도서관 하버드대학 위드너 도서관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미스캐토닉대학 도서관: 매사추세츠주 아캄의 가상의 대학. 미스캐토닉대학 도서관은 17세기 에스파냐에서 출간된 올라우스 보르미우스의 라틴어본을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본들은 여러 개인들의 비밀 소장품으로 되어 있다. 외부 링크 "The Dan Clore Necronomicon Page", Everything You Never Wanted to Know about the Necronomicon (Al Azif) of the Mad Arab Abdul Alhazred but Weren't Afraid Enough to Know Better than to Ask! "History of the Necronomicon", by H. P. Lovecraft "The Wikinomicon", an online Necronomicon that anyone can edit. 크툴루 신화의 책 가공의 마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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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Live%20from%20the%20UK%20Sept./2006
Live from the UK Sept./2006
《Live from the UK Sept./2006》는 2006년에 발매된 빌리 탤런트의 음반이다. 워너 뮤직 그룹에 의해 발매되었다. 곡 목록 2006년 라이브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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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5%20%ED%81%AC%EB%A0%88%ED%8B%B0%EC%95%B5
장 크레티앵
장 크레티앵(, , OM, CC, 1934년 1월 11일~)은 캐나다의 자유당 정치인이며 변호사와 장기적 하원 의원으로 20대 총리 (1993 ~ 2003)였다. 자신의 초기 정치 경력에서 크레티앵은 캐나다 권리 자유 헌장은 물론 캐나다 헌법의 추방을 협상하는 도움을 주었다. 총리로서 그는 30년 가까이 연방 정부를 그 첫 과잉으로 이끌었지만 그의 행정부는 또한 현대 최악의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퀘벡주에서 비용이 드는 후원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기도 하였다. 크레티앵 정부는 그가 이어서 일어난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선포를 위하여 직접적인 성원을 마련하는 데 공공연하게 거부하였어도 코소보 전쟁 (1999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2년 시작)에 캐나다의 힘을 가하였다. 다수의 영예와 상의 수상자인 그는 몇몇의 국제 기구들이 평화, 민주주의와 다른 세계적 관심사들에 바치는 것에 연루되었다. 어록으로 "솔직히 말해 정치는 권력을 원하고, 얻고, 행사하고, 지키는 것일 뿐이다." (To be frank, politics is about wanting power, getting it, exercising it, and keeping it.)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초기 생애와 교육 조제프 자크 장 크레티앵()은 퀘벡주 셔위니건에서 19명의 자식들 중 18번째로 겸손한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의 부친 웰리 크레티앵은 제지 공장의 기계공이자 자유당의 결성자였다. 후에 "셔위니건에서 온 꼬마"로 자신을 묘사할 장은 학교에서 자신의 노여움과 싸움으로 알려졌다. 전기 작가 마틴 로런스의 〈Chrétien : The Will To Win〉 (1995년)에 의하면 크레티앵의 급우들 중의 하나가 자신의 악몽은 크레티앵에 의하여 주먹으로 맞았다는 것을 연보에 썼다고 한다. 친구 장 펠레티에에게는 크레티앵이 싸우는 자이며, 그가 이겨야 한다고 했다. 12세의 나이에 크레티앵은 자신의 얼굴의 한쪽이 부분적으로 불구가 된 것으로 남긴 벨마비의 발작을 겪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입의 "양쪽에 큰 소리로 말하지 않은" 한명의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견고한 자유주의 가족의 일원인 크레티앵은 이른 나이로 정치에 연루되어 아직도 어린이였던 동안 대집회들에 참석하고 정치적 팜플렛들을 배포하였다. 1957년 그는 자신의 정치 경력을 통하여 자신을 성원하고 조언할 알린 샤이네와 결혼하였다. 부부는 3명의 자식들 - 아들 위베르와 입양아 미셸, 그리고 지원 복무와 자선 행위로 2011년 캐나다 훈장을 수상한 딸 프랑스를 두었다. 1959년 크레티앵은 라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와 함께 졸업하고, 셔위니건에 있는 로펌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행을 쌓으는 동안 정치적으로 활동에 남아있었다. 초기 정치 경력 1963년 크레티앵은 자유당원으로서 캐나다 하원으로 선거를 이겨 생모리스라플레슈의 선거구를 대표하였다. 그는 레스터 B. 피어슨 내각에서 무임소장관, 그러고나서 국세청 장관을 지냈으며, 1968년 당의 리더십을 위하여 미첼 샤프를 성원하였다. 피에르 트뤼도 총리 아래 그는 재무 위원회, 통상부 장관, 재무 장관, 법무 장관과 에너지부 장관과 원주민 정세국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장관직을 차지하였다. 1970년 경에 크레티앵이 왕립 원주민 북부 개발 장관이었을 때 그와 알린 여사는 이누빅 고아원으로부터 자신들의 아들 미셸을 입양하였다. 강하고 감정적인 연설자인 크레티앵은 퀘벡주의 내부와 외부 양쪽에서 숙고적인 인기를 즐겼다. 1977년 프랑스계 캐나다인 처음으로 재무 장관이 되었으며, 어려운 경제 상황을 자극하기 위하여 감세를 실시하였으나 불경기는 계속되었다. 법무 장관 (1980 ~ 82)으로서 그는 1980년 5월 퀘벡주 국민투표에서 연방주의의 권력들을 지도하였으며, 그러고나서 캐나다 헌법의 추방과 권리 자유 헌장의 제정을 위하여 연방 정부의 전략을 안출하고 이행하는 도움을 주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상냥한 스타일을 이용한 그는 자신의 관중들과 함께 관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가 1984년 자유당 지도권 선거 운동에서 존 터너에게 밀려 2위를 할 때 자신의 관중들과 그의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말하는 스타일, 강한 신분 증명과 정치적 결성자로서 실력들이 상세하게 증명되었다. 터너 총리 아래 부총리를 지낸 크레티앵은 이어진 선거에서 자신의 의석을 유지하였으나 대립에서 반항적이었다. 터너의 지도권이 1986년 자유당 집회에서 확증되면서 크레티앵은 캐나다 하원에서 자신의 의석을 사임하고, 법률의 개인적 실행을 차지하였다. 이 시간을 둘러싸 그는 빠르게 베스트셀러가 된 자신의 저서 〈Straight from the Heart〉 (1985년)를 펴내기도 하였다. 자유당 당수 1990년 보수당에 의하여 2번째 패배 후에 존 터너는 지도권을 사임하였다. 이때 크레티앵은 폴 마틴을 꺾고 자유당 지도권을 이기는 데 성공하였고 캐나다 하원으로 복귀하여 뉴브런즈윅주 보세주르의 선거구를 대표하였다. 크레티앵은 조직이 문란하고 거의 파산에 이른 정당을 상속받았다. 더우기 1992년 샬럿타운 헌법 협정의 실패가 주에서 주권을 위한 요구들로 공헌한 동안 1990년 미치레이크 협정으로 그의 반대가 퀘벡주의 국수주의자들 중에서 그를 성원하는 비용을 들였다. 하지만, 그의 당은 1993년 10월 선거를 위하여 잘 준비되었다. 크레티앵은 거의 완벽한 선거 운동을 운영하여 직업 창조의 논점에 목표를 두고, 자신이 이전의 자유당 정부들의 사치들을 다 써버리는 데 복귀를 특정을 지으려고 한 효과적으로 비판들을 응답한 상세한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크레티앵은 자신의 생모리스의 옛 선거구를 되찾고, 퀘벡 블록의 맹습의 형세에 퀘벡주에서 19개의 의석들을 이기는 데 처리하였다. 캐나다의 딴 곳에서 자유당이 명확한 다수 (전체 177개의 의석)를 이기면서 선거 운동은 승리였다. 10월 25일 선거에 이어 잠시의 이행 후, 크레티앵은 캐나다의 20대 총리로서 선서되었다. 151개에서 2개의 의석들로 떨어진 킴 캠벨 아래 보수당의 완전한 붕괴와 신민주당의 무너짐과 함께 크레티앵의 자유당은 개혁당과 퀘벡 블록에 의하여 대표된 지방적 봉쇄들을 향하는 데 캐나다 하원에서 남은 단 하나의 국가 정당이었다. 총리 재임 1기 (1993 ~ 97) 크레티앵 정부는 어려운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동시에 그 일은 통치된 시기에서 운이 좋았다. 1993년에 캐나다는 높은 세금들, 높인 국가의 빚과 심상치 않은 해마다 부족액을 가졌다. 크레티앵은 지방들에 보조금들을 포함한 연방 프로그램들을 삭감하거나 제한시키고, 자신의 정부의 주요 우선권들로서 부족액을 삭제하는 데어려운 선택을 만들었다. 자유당원들은 크레티앵이 한번 폐지하기로 약속한 인기없는 부가가치세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다행이도 경제 상태들은 좋았고, 세입들이 올라가 1998년 30년 가까이 캐나다의 첫 과잉을 용납하였다. 자유당의 예산 삭감들의 악의에서 크레티앵과 그의 재무 장관 폴 마틴은 혼란에 남아있던 정치적 반대로 비교에서 높은 공공적 찬성을 즐겼다. 퀘벡 독립운동에서 영구한 논쟁으로 올 때 크레티앵은 얼마간 적은 행운이었다. 1995년 10월 퀘벡 국민투표에서 텅빈 승리와 함께 파진 연방주의 권력들과 선거 운동에서 크레티앵의 역할은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 서식스 드라이브 24번지에 침입 퀘벡 국민투표가 있은지 얼마 후, 무장 침입자가 서식스 드라이브 24번지에 있는 총리 관저로 들어가 침입하였다. 그의 이후의 재판에서 자세히 말하면서 정신 분열증을 겪은 앙드레 달레르는 총리를 죽이고 투표 결과들을 복수하는 데 자신을 지시하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울타리를 기어 올라간 후, 그는 창문을 깨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소리에 의하여 잠이 깬 알린 여사는 조사하러 나갔고, 침실문의 겨우 외부에서 달레리에 의하여 직면되었다. 침실로 후퇴하고 문을 잠근 후, 그녀는 남편을 깨워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 안전 팀에 전화를 걸었다. 크레티앵은 자신을 방어하는 데 옆에 있던 탁자로부터 아비의 이누이트 조각을 집었다. 하지만 달레르는 침실로 들어가는 데 전혀 시도하지 않다가 결국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후에 살인을 시도한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범죄적으로 책임으로 붙들어지지 않았다. 후원 프로그램 퀘벡 국민투표의 결과들은 크레티앵의 고향 주에서 그의 인기가 제한되었다고 명확히 밝혀졌다. 크레티앵은 목표물이 된 광고 프로그램을 통하여 캐나다와 퀘벡주 연방 정부 둘다의 자세를 들어올리는 데 꾸며진 잘못 생각되고 크게 비밀적 "후원" 프로그램을 통하여 상황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대신 연방주의를 위하여 성원을 창조하는 데 약간 일을 한 수백만 달러의 스캔들로 변하였다. 글로브 앤드 메일 센터에서 폭로들이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의 조사, 그리고 자유당의 친구다운 광고 상회들을 풍부하게 하고, 연방 자유당의 퀘벡파로 정치 헌금들과 선거 운동 기금들을 마련하는 데 이용되어 온 공공 자금을 찾아낸 높은 고머리 조사국을 포함한 조사들의 일련들을 자극하였다. 2005년 크레티앵은 고머리 조사국을 입증하였고, 자신이 스캔들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지 않았어도 정세는 그의 후임자 폴 마틴을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하고, 다가올 세월을 위하여 퀘벡주에서 자유당 브랜드를 오염시키려고 하였다. 팀 캐나다 외교 정책에서 자유당원들은 크레티앵의 첫 재임 기간 동안 전부의 위에 경제적 외교를 강조하였고, 크레티앵 자신은 다양한 국가들과 지방들로 높게 공표된 "팀 캐나다" 사절 임무들의 일련을 지도하였다. 사진 기회들과 유리한 매체들에 의하면 비판들이 무역의 목적을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국가들에서 인권 침해를 간과하면서 비판들이 정부를 고발하였어도 이것들은 승리들로 지내왔을 것이다. 이 무역 사절들의 장기간 경제 이익들도 또한 토론되어 왔다. 캐나다-미국간의 관계들에서 크레티앵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지만 분명히 성심 성의의 관계를 설립하였다. 총리 재임 2기 (1997 ~ 2000) 1997년 크레티앵은 6월 2일을 위하여 연방 선거를 불렀다. 야당들은 산산조각이 되고 인상적이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호소에서 국내적으로 보다는 지방적이었다. 결과로서 크레티앵은 작지만 301개의 의석 중 155개의 유용한 다수와 함께 선거를 이겼다. 그 2번째 기간에서 크레티앵 정부는 아시아에서 경제적 위기들과 유럽에서 부진한 경제에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번영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새 장관 로이드 액스워디와 함께 그 외교 정책은 인권의 논쟁들을 향한 중요성을 돌리는 데 나타났다. 논리적인 결과로서 캐나다는 1999년 나토의 코소보 전쟁에서 참전국이었다. 경제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그의 재무 장관 폴 마틴이 넓게 감탄하면서 1999년 말기에 아무 주요 행정적 혹은 정책 문제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자유당으로 가장 알기 쉬운 위협은 보수당원들의 나머지를 흡수하면서 개혁당이 자신을 개주하는 데 시도하고 있었던 우파로부터 왔다. "우파로 단결" 운동이 2000년 초순 "캐나다동맹"의 형성에서 실현했다. 캐나다동맹은 즉시 새롭고 경험이 없는 당수 스톡웰 데이를 선출하였다. 크레티앵은 정치적 기회를 보아 빼앗으면서 열정이 없는 자유당에 총선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만약 순위와 파일의 자유당원들이 주저한다면 캐나다동맹과 당수 데이가 비참하게 준비되지 않았다. 11월 27일 크레티앵은 172개의 의석과 투표의 가까운 41 퍼센트와 함께 3연속 다수를 확보하였다. 무엇보다도 크레티앵의 전망의 요점으로부터 자유당원들은 인기있는 선거에 의하여 처음으로 퀘벡주에서 퀘벡 블록을 따라가 앞질렀다. 총리 재임 3기 (2000 ~ 03) 크레티앵의 재임 3기 동안 주요 문제는 미국과 관계들이었다. 평화로운 1990년대가 아무 거대한 문제를 취하지 않은 동안 사실로 그 수출품들을 위하여 미국 시장에 캐나다는 압도적으로 의존국이었다. 하지만 2001년 9월 미국이 무장 이슬람주의 단체 알카에다와 관련된 테러리스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미국 국경들의 안정이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처음으로 심각한 논쟁이 되었다. 정통적으로 캐나다인들과 특히 크레티앵은 미국을 성원하였으나 게을리하고 자금이 부족했던 10년간의 세월은 캐나다를 약한 군대와 사태로 응답하는 데 제한된 사원들과 함께 남겼다. 캐나다는 2002년 초순에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전쟁으로 군인들을 보냈으나 크레티앵은 이어서 이라크 전쟁에서 직접 참전하는 것을 거부하여 캐나다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의한 허가 없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라크에 크레티앵의 의존은 캐나다 (특히 퀘벡)에서 막대하게 인기를 증명하였으나 재무 장관 폴 마틴의 후원자들이 크레티앵의 수행원들을 줄인 것에 성공한 그의 당에서 오르는 불만으로부터 그를 구할 수 없었다. 크레티앵은 결국 자신이 자유당의 당수로서 물러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의 마지막 공식적 활동은 2003년 11월 토론토에서 자유당 전당 대회에서 화려한 연설을 하는 것이었으며 이어진 달에 그는 총리로서 사임하였다. 자유당의 새 당수 폴 마틴이 12월 12일 즉시 총리로서 크레티앵을 대체하였다. 퇴임 후 정치적 인생으로부터 퇴임한 후, 크레티앵은 히넌 블레이키 LLP 로펌을 위한 상담자가 되었다. 2014년 2월 히넌 블레이키의 붕괴 후, 그는 상담자로서 덴턴스 캐나다 로펌에 가입하였다. 크레티앵은 또한 만약 공식적 근거에 있지 않다면 정치에서 연루되는 데 남아있기도 하였다. 2008년 그와 전 신민주당 당수 에드 브로드벤트는 스티븐 하퍼가 이끄는 존재하는 보수당 정부를 축출하는 데 자유당과 신민주당 사이에 연정 동의서를 형성하는 데 일하였다. 하퍼는 의회를 정회하는 데 처리하였지만 비 신뢰의 제의를 내는 연정의 수고들을 정지하였다. 2013년 크레티앵은 공공적으로 하퍼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여 다른 정부들 아래 국가의 국제적 지보에 관한 공공적 토론을 일으켰다. 퇴임 이래 크레티앵은 다수의 국제 기구들에서 연루되어 왔으며 그는 민주주의 정부들을 향하는 도전들에 조언하는 전직 총리와 대통령들의 단체 세계 지도권 동맹 - 마드리드 클럽의 회원이다. 그는 세계 평화로 봉납한 기구 시라크 재단 명예 위원회에 있기도 한다. 2008년 크레티앵은 지구촌 공동체를 향한 문제들의 실습적 해결들을 개발하고 추천하는 전직 국가와 정부 원수들의 기구 인터액션 카운실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서훈 2007년 캐나다 훈장 컴패니언(CC) 2009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 역대 선거 결과 외부 링크 193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캐나다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리 캐나다의 부총리 캐나다의 변호사 캐나다의 자서전 작가 프랑스계 캐나다인 라발 대학교 동문 캐나다의 로마 가톨릭교도 퀘벡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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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Hush%20%28%EB%AF%B8%EC%93%B0%EC%97%90%EC%9D%B4%EC%9D%98%20%EC%9D%8C%EB%B0%98%29
Hush (미쓰에이의 음반)
Hush(허쉬)는 대한민국의 걸 그룹 미쓰에이의 2번째 정규 음반이다. 2013년 11월 6일에 발매되었다. 수록곡 2013년 음반 미쓰에이의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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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8%84%EB%B9%84%EC%95%84%EC%9D%B8
누비아인
누비아인은 수단 북부와 이집트 남부의 민족이다. 수단의 민족 이집트의 민족 누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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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5%B4%EB%AA%A8%EB%93%88%EB%9F%AC
르모듈러
르모듈러(Le Modulor)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건축가인 르 꼬르뷔지에에 의해 만들어진 측정 체계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조화'를 자신의 건축의 주요 개념으로 삼았으며, 그는 인간과 우주와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설계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준선'과 '모듈러'이며 이들은 수학적 비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비례체계이다. 규준선과 모듈러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배경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관 르 꼬르뷔지에는 비례와 조화를 자신의 건축작품의 주요 개념으로 삼았다. "건축은 인간 자신이 창조한 우주이며, 이 우주는 인간 최초의 증명이다. 그는 자연의 이미지 안에서, 자연의 법칙 -우리의 본질과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에 복종하여 그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는 자연은 겉으로 보았을 때 우연적이고 혼돈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법칙이 있음을 확신했다. 또한, 자연의 법칙이 우리 인간과 우주를 지배한다고 여겼는데, 이 때의 법칙을 수의 질서인 비례에서 찾았다. 즉, 그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인간이 우연적이고 혼돈된 자연 속에서 그 법칙을 찾아내 무엇인가-건축-를 창조함으로써 우주 및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르 꼬르뷔지에는 비례를 중시하던 고전 건축을 긍정적으로 인식했고 비례를 건축적으로 재해석하여 수 많은 그의 작품에 반영한다. 비례를 중시한 르 꼬르뷔지에 실제로 고전건축에서는 비례, 균형, 조화 등 건축의 미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비례는 형성된 체계를 통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고, 때로는 신적 상징성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과학과 사상의 발전으로 합리주의적 사고가 시대를 지배하면서 비례체계는 보편적 규범으로서의 위치를 잃었고 건축은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였다. 18세기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수적 이론이 그들의 자유로운 예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19세기에 와서도 비례에 관심을 가진 자들은 주로 학자들이었을 뿐, 건축에 있어서 비례를 중심 문제로 거론했던 건축가는 별로 없었다. 르 꼬르뷔지에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우주에 보편적 진리가 존재함을 확신하였고 수적 비례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는 비례를 우주와 인간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해결책으로 여겼고, 비례를 재해석하여 수많은 그의 작품에 반영했다. 별도의 측정체계에 대한 필요성 인식 모듈러 이전에도 측정체계는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척도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측정대상은 신체의 길이 및 무게였다. 신체의 각 부위 – 팔꿈치, 손가락, 발, 보폭 등 –를 도구로 하여 큐빗(1큐빗 = 약 50cm. 성인 남자의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 피트(1피트 = 약 30.48cm. 발 길이), 야드, 척 등의 단위를 만들어냈고, 이를 파르테논 신전, 인도의 사원, 그리고 수많은 성당들을 건립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인간의 신체가 조화의 원천인 비례를 내포하기 때문에 무한히 풍요로운 측정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신체를 이용해 물체의 길이 및 크기를 어림하는 방식은 각 지역별로 신체의 크기 및 치수가 달라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므로 세계화된 근대에서는 부적절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미터법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미터법은 지구 자오선의 길이를 기초로 한 척도로 인체와는 무관한 척도였다. 그는 이러한 척도를 건축에 적용할 경우 인간과 자연, 우주간의 질서 및 조화로운규준서 관계에 있어서 왜곡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존 척도에 대한 한계점을 인식한 그는 인간과 건축 간의 공통요소를 확립할 수 있는 새로운 척도체계를 만들고자 연구하였고, 그 결과 모듈러를 창안하게 된다. 발전과정 규준선(The regulating lines) 규준선 - 대각선을 바탕으로 하는 기하학적 비례체계 르 꼬르뷔지에가 그의 전반기 건축에서 조화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황금비와 규준선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Capitol을 보면서 직각의 위치가 전체의 구도를 통제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규준선을 착상했다고 한다. 또한, 오귀스트 슈와지의 <건축 역사>를 읽고 규준선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1929년 건축 잡지를 통해 발표한 규준선은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 대각선에 의한 규준선 (Trace Diagonal): 작은 요소와 전체 구성 사이의 기하학적인 관계를 결정한다. 입면에서 개개요소의 비를 통해 상호간의 수학적인 관계를 얻는다. 2. 수에 의한 규준선 (Trace Numerique): 대각선을 보완하는 선으로써 입면 높이에서 산술적인 관계로 요소들을 구성한다. 3. 자동조절되는 규준선 (Trace Automatique): 구조물을 정리하는 산술적인 측량으로써 규칙적인 리듬을 확립해준다 4. 인체치수(Echell Humaine) 규준선의 선들은 미리 정해져 있는, 어느 대상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선들이 아니다. 건축가는 규준선을 이용해 갖가지 조형물의 면을 분절함으로써 형태 기하학적인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대각선에 의한 규준선’ 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다음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입면에서 높이와 폭의 비가 같은 구형들은 크기가 다르더라도 서로 조화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각선에 대한 수직선들로 이루어진 장방형 요소들도 같은 비를 가지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통일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르꼬르뷔지에는 대각선을 사용함으로써 입면의 모든 면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수에 의한 규준선’은 ‘대각선에 의한 규준선’에 의해 결정된 입면의 개구부와 전체구형의 높이 방향을 단순비로 정리한 것이다. ‘자동조절되는 규준선’은 황금비와 관련되어 있다. 구조체의 비를 2:1:2:1:2나 1:1과 같이 1과 2만으로 배열하면, 1과 2의 정수를 반복해 3:5나 5:8과 같은 황금비에 근접한 비례를 얻을 수 있음을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1,2,3,5,8...은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며 이후 1945년 개발된 모듈러의 기본 수치가 된다. 가르쉬 주택이 비례를 보여 주고 있는 다이어그램을 보십시오. 비례를 창안하는 것, 개구부의 위치와 크기를 선택하는 것, 대지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 너비에 적합한 높이를 정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창조적인 행위의 모든 부분들인 것입니다. 규준선은 단순한 수학이 아니다. 규준선은 공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연결지어 생각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며 입면을 구성하는 서로 상이한 요소들의 관계를 다루어 주변과 건축물의 입면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내기 위한 창조적 도구이다. 비례격자(The grid of proportions) 1943년 12월, 르꼬르뷔지에는 규준선과 황금비의 원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비례 시스템-비례 격자-를 발명한다. 이 연구는 아스코럴(ASCORAL. 건축적 재견을 위한 제작자 협회)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는 황금비에 바탕을 둔 비례격자를 사용할 경우, 다양한 비례-예) 1:2, 5:8, 8:13 등-로 요소들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져, 보다 다양한 요소들을 한 공간 안에서 조화롭게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발명한 비례 격자를 형성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정사각형 acdb의 한 변 ab의 2등분점인 e를 기준점으로 하고, c점을 시작점으로 하는 호를 그려 점 g의 위치를 정한다. 정사각형의 2등분점인 점 f와 점 g 그리고 새로운 점 i 가 직각삼각형을 이루도록 점 i의 위치를 결정한다. 이 때 □ghji는 원래 사각형인 □acdb의 2배가 되며 l이 선분 hj의 이등분점일 경우 □ghlk와 □lkij는 정사각형 acdb의 크기와 같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의 도형에서 각각의 선분의 길이를 살펴보면, = 0.236 (= 2×0.118), = 0.382, = 0.618, = 1, = 1.618 인데 이 길이들은 피보나치 수열을 이룬다. 르 꼬르뷔지에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황금비와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을 통합했다. 그는 인체 치수 역시 황금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통합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위의 비례 격자 내부에 팔을 들어올린 인간을 넣음으로써 인체의 치수와 수학적 비례를 조화시키는 일련의 치수값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 그가 가정한 사람은 팔을 들어올렸을 때의 높이가 2.2미터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한 변의 길이가 1.1미터인 정사각형 2개에 넣었다고 가정했다. 좀 더 진행된 그의 연구에서 기준이 된 인체 치수는 프랑스인의 표준 신장인 1.75미터였다. 그 결과 배꼽 높이는 전체 높이의 이등분점, 머리 높이는 배꼽 높이의 1.1618배이므로 기준이 되는 =1, 즉 배꼽높이는 108cm (=175/1.1618) 이었고, = 25.4cm (=108×0.236), = 41.45cm(108×0.382), = 66.8cm(108×0.618) 라는 값이 얻어졌다. 이때의 모든 수는 정확히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었다. 르 꼬르뷔지에는 자신이 발명한 이 격자가 널리 사용되기를 바랐다. 모듈러 Ι 모듈러: 신체의 비례체계에 따른 조화로운 측정방법 모듈러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면서 그는 앞서 만들었던 비례격자가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비례격자 대신 비례자를 선택한다. 비례격자가 2차원적 현상이 아닌 선적 현상에 기초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0에서 무한대로 움직이는 황금분할 집합인 선형체계를 만들고 이것을 비례자라고 부른다. 이 비례자를 바탕으로 1945년 12월 1.75M의 인체를 기준으로 하는 0~2.16M의 띠자를 만들어낸다. 모듈러는 단일 정사각형과 이중 정사각형에 2개의 황금비를 적용한 것이다. 적색계열은 단일 정사각형(108cm)에 황금비를 더하는 것이고, 적색계를 수치의 두배인 청색계열은 이중 정사각형(216cm)에서 황금비를 빼는 것이다. 모듈러 치수는 신체 치수와 황금비인 1:1.618의 관계를 가지는 수치로 결정되었다. 단일 정사각형에 더해진 황금비는 신체의 두 부분인 발바닥으로부터 배꼽까지의 치수와 배꼽으로부터 머리까지의 치수 관계를 결정한다.이중 정사각형으로부터 빼지는 황금비는 발바닥으로부터 성기까지의 치수와 성기로부터 팔을 든 손가락의 끝까지의 치수 관계를 결정한다. 모듈러 Ⅱ 모듈러 1의 치수들은 미터법에 의한 치수였다. 즉, 모듈러 1에서 얻어진 각각의 치수들을 인치-피트법의 단위로 바꾸게 될 경우 수가 맞아 떨어지지 않아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모듈러가 모든 국가에서 적용될 수 있는 통합적 측정수단이 되기를 기대했다. 계속된 연구 끝에 그는 영국인의 신장 6피트 (6*30.48cm = 182.88cm)를 모듈러 1의 시스템에 적용했다. 그 결과 새로운 모듈러의 눈금은 피트- 인치 체계에 딱 떨어지는 숫자들로 변환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그의 모듈러가 이전부터 문제로 거론되었던 미터법과 피트-인치법 간의 상호 불통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줌을 의미했다. 113.2 × 0.236 = 26.66cm → 27cm = 10.503 → 10.5’ 113.2 × 0.382 = 43.16cm → 43cm = 16.99’ → 17’ 113.2 × 0.618 = 69.83cm → 70cm = 27.49’ → 27.5’ 113.2 × 1 = 113.02cm → 113cm = 44.49' → 44.5’ 113.2 × 1.618 = 182.88cm → 183cm = 72.00’ → 72’ 모듈러 1에서와 같은 방법을 적용해보면 적색계열은 0에서 시작하여 182.9cm에서 끝나며, 청색계열은 0에서 시작해 2.26cm에서 끝난다. 르꼬르뷔지에는 이 수치들을 결합하여 격자 형태로 조합하였고 이런 조합을 발전시켜 다양한 부피를 가지는 공간을 구축할 수 있었다. 모듈러의 가장 큰 특징은 불변의 가치를 갖는 기하학과 인간 사이에 공통요소를 확립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체측정학적 치수를 미학적 비례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즉, 모듈러는 인체 치수를 바탕으로 정립된 비례시스템이며 사용자의 활동반경을 정립한 합리적인 측정체계이다. 그래픽 표현 한 팔을 올린 양식화된 인간 형상인 모듈러의 그래픽 표현은 두 개의 수직 측정 옆에 서 있는데, 이는 그림의 배꼽 높이(원래 버전 1.08m, 개정 버전 1.13m)를 기반으로 한 빨간색 시리즈와 그림의 전체 높이인 배꼽 높이의 두 배(원래 버전의 경우 2.16m, 개정판의 경우 2.26m)를 기준으로 한 파란색 시리즈로 비슷하게 분할된다. 빨간색과 파란색 부분 사이에 그래픽으로 발전된 나선형은 인간의 볼륨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듈러2는 André Maissonier와Justino Serralta가 그렸다. 모듈러의 적용 그가 제안한 모듈러의 모든 치수들은 이웃하는 치수와 황금비의 관계를 갖는 수열을 이룬다. 이와 같이 비례가 보존되기 때문에 큰 규모의 치수들간의 관계는 작은 규모의 치수들간의 관계와 같게 되며, 스케일상의 변화와 상관 없이 모듈러를 작은 크기의 산업 생산품에서부터 대규모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물에 적용가능한 치수체계 및 디자인 도구가 된다. 모듈러를 다양한 대상물에 적용하기 위한 첫번째 시도는 다음과 같다. 마르세이유 주거 단위 : 26개의 공동시설을 포함한 1600명 주민을 위한 건물 세브르가 35번지 작은 사무실 : 작은 사무실에 가구와 장식품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적용 이동 전시회 준비 : 1948년 8개 주요 미국 박물관의 후원 아래 효율적인 전시 벽과 전시 진열대를 위한 적용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 1948년 잡지 《오늘의 건축L'Architecture d'Aujourd'hui》 특별호에 실린 200개의 도판 배치를 위해 적용 생-디에에 있는 공장 나무로 만든 유리가 껴진 새로운 형의 창틀 : 유리창의 조화를 찾기 위한 모듈러 적용 이스트 강변에 있는 유엔 빌딩 : 도시 계획 : '파리 1937년을 위한 계획' 그는 1945년 모듈러를 발명한 이후 모든 건축물에 모듈러의 치수를 적용하여 설계를 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건축은 질서이며, 비례를 통해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스팬과 층고, 기둥 단면 크기, 슬래브 두께와 같은 건축물의 구조요소에 일관적으로 비례체계인 모듈러를 적용함으로써 신체치수에 근거한 설계가 가능해졌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e d'Habitation) Unite d'Habitation (Marseilles, France, 1946-52)2차 세계대전 이후 주택공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된 거대주거단지 유니테 다비타시옹 <small>*1: 거실 부분 층고: 485cm = 226cm(층고) + 33cm(중층 바닥슬래브두께) + 226cm(층고)*2: 113cm: 사람의 신장을 기준으로 발끝에서 배꼽 위치까지의 거리로, 전체 모듈러 치수인 226cm의 절반.*3: 43cm: 거주자가 앉았을 때 적정한 의자 높이</small> 위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구조 및 외관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치수는 모듈러의 직조구성에 있는 적색계열과 청색계열의 수치를 그대로 사용한 결과이다. 국립서양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Tokyo( Tokyo, Japan, 1956-58) *1: 적색계열 모듈러치수가 그대로 적용된 592cm는 1층 필로티의 천정고 296cm의 두 배이다. 즉, 스팬과 기둥의 높이 비가 2:1의 비를 이룬다. 찬디가르 사무국 건물 (Secretariat Building in Chandigarh) Secretariat Building (Chandigarh, india, 1958) 행정청사로 사용되는 건축물 *1: 후면 층고 785cm = 한 개 층고 366cm + 슬래브두께 53cm + 한 개 층고 366cm *2: 유리벽의 멀리온 간격 치수는 순수형과 통합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수형에는 청색계열 수치(13, 20, 33, 53, 86, 140)와 적색계열 수치(17, 27, 43, 70, 113)가 혼용되어 사용된다.통합형은 이들 모두의 수치를 사용하여 배치한 것을 말하는데 X차 변형으로 변형을 줄 수 있다. X차 변형: 각 계열의 모듈러 치수 중 가장 작은 치수부터 X개의 치수를 제외한 나머지 치수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유형 청색계열에서는 기본형, 2차 변형, 3차 변형이 가능하고, 적색계열에서는 기본형과 1차 변형, 2차 변형이 가능하다. 또한, 통합형에서는 기본형과 4차 변형, 6차 변형이 가능하다. 가령, 통합형의 기본형은 13, 17, 20, 27, 33, 43, 53, 70, 86, 113, 140이며 4차 변형은 앞에서부터 13, 17, 20, 27을 제외한 나머지 치수 33, 43, 53, 70, 86, 113, 140으로 배열된 유형이다. 같은 원리로 6차 변형은 앞에서 여섯 숫자를 제외한 53, 70, 86, 113, 140으로 배열된 유형을 말한다. 출판 르 코르뷔지에가 1948년에 르 모듈러를 출판했고 1955년에 모듈러 2를 출판했다. 이 작품들은 1954년에 The Modulor로 영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1958년에 Modulor 2 (Let the User Speak Next)로 출판되었다. 2004년에 출판된 두 권의 책을 포함한 박스 세트는 모듈러를 사용하여 정사각형 형태로 인쇄되었으며, 27에서 140까지 시리즈는 크기가 10분의 1로 축소되었다. 모듈러의 의의 및 르 꼬르뷔지에의 기대 르 꼬르뷔지에는 모듈러가 비례라는 미학원리로서 뿐만 아니라 일반화된 척도체계에 사용되어 건축과 산업에서 표준화와 대량생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안한 표준화된 요소들을 사용한 생산방식은 당시 건설과 산업 환경에서 요구했던 생산성 향상과 경제성을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방안이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건축개념인 질서, 조화, 완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즉, 그의 표준화 개념은 대량 생산의 가능성에 대한 양적 문제의 해결책에서 질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파생하고 있다. 르 꼬르뷔지에는 그의 모듈러가 전 세계에 통용되기를 기대하였다. 그가 전 세계의 양대 측정 단위인 미터 체계와 인치-피트 체계에 같이 적용될 수 있는 모듈러 2를 개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제안한 모듈러의 모든 치수들은 이웃하는 치수와 황금비의 관계를 갖는 수열을 이룬다. 이와 같이 비례가 보존되기 때문에 큰 규모의 치수들간의 관계는 작은 규모의 치수들간의 관계와 같게 되며, 스케일상의 변화와 상관 없이 모듈러를 작은 크기의 산업 생산품에서부터 대규모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물에 적용가능한 치수체계 및 디자인 도구가 된다. 시각적 비례관계에 의하여 설정된 수치체계인 규준선을 발전시켜 사용자의 활동반경을 수치로 정립한 모듈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생활을 고려한 설계가 가능해졌다. 모듈러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인간의 활동반경에 대한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유니버설 디자인 (Universal Deisgn)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데, 사용자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사용자의 신체크기 및 자세, 손이 닿고 조작하기 적합한 치수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모듈러는 불변의 가치를 갖는 기하학과 인간 사이에 공통요소를 확립하려고 시도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인체측정학적 치수를 미학적 비례와 동일하게 만듦으로써 공통요소를 만들고자 하였다. 비평 르 꼬르뷔지에는 모듈러를 그의 건축적 개념 -비례와 조화- 이 집약된 결과물로 제시한다. 그는 건축물 뿐만 아니라 회화, 도시계획에도 모듈러를 적용하였고, 실내가구와 내, 외장 마감재 등 모든 곳에 모듈러를 적용하였다. 그는 모듈러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치수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듈러는 영국인의 키를 기준으로 하였다. 각 나라마다 표준 신장에 차이가 있다는 점 때문에 모듈러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척도체계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건축물에서의 모듈러의 적용을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며, 모듈러에 의한 비례 및 조화가 단지 이념적으로만 표현되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모듈러는 비례체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평가받았다. 게다가 비례 체계로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모듈러를 활용해 설계했던 건물이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슈타니슬라우스 폰 모스(Stanislaus von Moos): “모듈러는 틀에 박힌 건물의 추악함에 대한 구제책도 아니었다.” 존 섬머슨 (John Summerson): “그 체계를 만들어 낸 사람의 정신적인 내용이 중요하다. 그 체계들은 그들을 만들어내고 사용한 사람들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한다." 모듈러의 가치는 르 꼬르뷔지에가 그것을 사용한 방법에 있지, 모듈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알란 콜쿤 (Allan Colquhoun)은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의 비례시스템에 관한 관심은 균형잡힌 표면을 점검하려는 경험적 형식을 취했던 반면, 전쟁 이후 모듈러의 출판으로 그의 관심은 가장 작은 디테일에서부터 대부분의 불규칙한 형태들에 플라톤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숫자로 나타낸 척도가 되며 그 의도는 대량생산과 표준화가 예술적 자유와 조화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빈 에반스는 모듈러를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명확하면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건축디자인의 딜레마를 제시하고 있는 통찰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blockquote>“It is a scale that makes the good likely and the bad unlikely.” <small>꼬르뷔제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그는 항상 모듈러는 도구이지, 미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니라고 밝혔다. 모든 도구와 같이 그것을 더 좋게 사용할 수도 있고 더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small></blockquote> 각주 건축 단위 1948년 책 1955년 책 건축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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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8%EC%82%B0%EC%A2%85%ED%95%A9%EC%9A%B4%EB%8F%99%EC%9E%A5
울산종합운동장
울산종합운동장(蔚山綜合運動場, )은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에 있는 스포츠 시설이다. 주경기장은 1970년에 개장하여 울산 현대 FC의 홈 경기장이었던 울산공설운동장을 2003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건설하여 2005년 다시 개장하였으며, 그 외 보조경기장, 청소년 공연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모델링 후 전국 체전과 FIFA 주관 U-17월드컵이 개최되었으며, 2005년부터 2016년까지 내셔널리그 소속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울산 시민축구단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울산 현대의 홈 구장인 울산문수축구경기장이 잔디 공사 관계로 2019 시즌 동안 사용하기도 하였다. 시설 주경기장 축구와 육상 경기를 할 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으로 19,471명을 수용할 수 있다. 보조경기장 및 농구장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400M 트랙과 105M x 68M 인조 잔디, 28M × 15M의 야외농구장, 934석(VIP석 108, 일반석 826석)의 관객석을 가지고 개장되었으며, 지역민을 위한 각종 행사장 제공에 사용되고 있다. 부대시설 청소년 공연장, 옥상 광장, 컨벤션 웨딩홀 등이 있다. 개최 대회 2005년 : 2005년 전국체육대회 2007년 : 2007년 FIFA U-17 월드컵 2010년 : W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 2016년 : WK리그 올스타전 2005년 ~ 2016년 : 내셔널리그 2019년 : K3리그 베이직 각주 참고 문헌 같이 보기 울산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 울산공설운동장 외부 링크 울산종합운동장 공식 웹사이트 울산시설공단 - 울산종합운동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울산종합운동장 두피디아 - 울산종합운동장 네이버 지식백과 - 울산종합운동장 (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 지식백과 - 울산종합운동장 (두산백과) 2005년 설립 2005년 완공된 스포츠 시설 울산광역시의 건축물 울산 중구의 건축물 울산광역시의 스포츠 대한민국의 육상 경기장 대한민국의 축구 경기장 울산광역시의 육상 경기장 울산광역시의 축구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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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assion Play
《A Passion Play》는 1973년 7월 13일에 발매된 제쓰로 툴의 음반이다. 크리설리스 레코드에 의해 발매되었다. 곡 목록 평가 각주 1973년 음반 콘셉트 음반 리프리즈 레코드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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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포항
대지포항(大池浦港)은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있는 어항이다. 2002년 8월 6일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시설관리자는 남해군수이다. 어항 연혁 옛날 마을내 들판 한가운데에 자연적인 큰 못이 있다하여 대지포(大池浦)로 유래되었다. 어항 시설 방파제 L=75, B=6.0m, 선착장 L=0m, B=0m, 호안 L=507, B=6.0m, 물량장 L=50m, B=14m 주요 어종 장어, 문어, 도다리, 메기, 노래미 등 대한민국의 어촌정주어항 남해군의 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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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꿈나무정보도서관
동두천꿈나무정보도서관은 경기도 동두천시 소재의 도서관이다. 연혁 2003년 6월 9일 건립추진 계획수립 2004년 6월 28일 공사 착수 2005년 7월 7일 공사준공 2005년 9월 14일 꿈나무정보도서관 개관 시설현황 3층: 디지털자료실, 시네마천국 2층: 꿈나무자료실 1층: 꼬맹이방 지하1층: 세미나실 이용 안내 이용시간: 매일 오전 9시~오후 6시 휴관일: 매주 금요일 및 법정 공휴일, 설날, 추석 외부 링크 동두천꿈나무정보도서관 2005년 설립 경기도의 도서관 동두천시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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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91년
사건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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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마 유
기지마 유 (1986년 5월 18일 ~ )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시미즈 에스펄스,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활동하였다. 외부 링크 198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쓰쿠바 대학 동문 일본의 축구 선수 J1리그의 축구 선수 J2리그의 축구 선수 일본 풋볼 리그의 축구 선수 시미즈 에스펄스의 축구 선수 오이타 트리니타의 축구 선수 축구 공격수 고베시 출신 효고현의 축구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