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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자 정보 |이름 = 라이너스 칼 폴링 {{노벨상 딱지}} | 원어이름 = Linus Carl Pauling |그림 = pauling.jpg |그림 크기 = 250px |그림 설명 = 라이너스 칼 폴링 (1954년경) |출생일 = {{출생일|1901|2|28}} |출생지 =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오리건주)|포틀랜드]]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4|8|19|1901|2|28}}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빅서]] |거주지 = |국적 = [[미국]] |분야 = [[양자화학]], [[생화학]] |소속 = 정규교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1927-63)<br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1967-69)<br />[[스탠퍼드 대학교]] (1969-75)<br />선임 연구원:[[:en:Center for the Study of Democratic Institutions|민주제도 연구센터]] (1963-67) |출신 대학 = [[오리건 주립 대학교]] 화학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 디킨슨(Roscoe G. Dickinson) |지도학생 = |주요 업적 = |수상 = [[노벨 화학상]] (1954년), [[노벨 평화상]] (1962년) |종교 = |참고 사항 = }} '''라이너스 칼 폴링'''({{llang|en|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 (1954년)과 [[노벨 평화상]] (1962년)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 (책)|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는 지표 [[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상을 남편과 함께 받았고 [[존 바딘]]은 두 번의 물리학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으며 [[프레데릭 생어]]도 [[1980년]]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다.) 또한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 어린 시절과 교육 == 폴링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헤만 헨리 윌리엄 폴링(Herman Henry William Pauling, 1876년 - 1910년)과 루시 이사벨 벨레 달링(Lucy Isabelle Belle Darling, 1881년- 192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Carl)와 친할아버지(Linus)를 기념하여 라이너스 칼(Linus Carl)을 따라 지어졌다. 아버지 헤만과 어머니 루시는 각각 23살, 18살에 오레건주 콘돈의 한 디너파티에서 만났고 6개월 후 그들은 결혼했다. 헤만 폴링은 미주리 주의 콘코디아에서 독일계 이주 농민으로부터의 후손이다. 칼 폴링은 가족과 함께 오레건주의 오스웨고에 정착하기전 캘리포니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주조공장의 철물상으로 일했다.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헤만 폴링은 약사가 되기 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의 견습생 수행이 끝난다음, 그는 제과점 도매상인이 되었다. 폴링의 어머니 루시는 영국, 스코틀랜드계 후손이며 교사, 농민, 측량사, 우체국장, 변호사로 일한 라이너스 윌슨 달링의 딸이다. 라이너스 달링은 11세에 고아가 되었으며 학교선생이 되기 전에 제빵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는 오레건주 터너에서 온 엘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1888년 7월 17일 엘리스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네명의 딸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앨리스는 사망했다. 라이너스 폴링 태어난 후 1년을 포틀랜드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단칸방 아파트에서 보냈다. 1902년 그의 여동생 파울린이 태어난 후 폴링의 부모님은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살면서 아파트는 매우 붐볐고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루시는 헤만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동안 오스웨고의 헤만의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헤만은 Skidemore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된 살렘(Salem)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4년 루실의 출생과 함께 헤만 폴링은 오스웨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개인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오스웨고의 경기는 안 좋았으며 그와 그의 가족들은 1905년 콘돈으로 다시 이주했다. 1909년 폴링의 친할아버지 라이너스는 그의 두 번째 부인과 이혼했으며 그의 딸 루시(폴링의 어머니)와 나이가 거의 같은 어린 학교선생과 재혼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신장염으로 비롯되어 합병증으로 야기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동안에, 헤만 폴링은 복부의 주기적인 심한통증과 약한 체력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루시의 여형제 애비(Abbie)는 헤만의 목숨이 위태롭도록 아픈 것을 보고 즉시 가정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통증을 완화시키기위해 헤만에게 진정제를 투여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경감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가오는 몇 달동안 매우 악화되었으며, 1910년 6월 11일 그는 라이너스, 루실, 파울린을 혼자 짊어지게 된 루시를 남기고 위궤양으로 결국 사망했다. 폴링은 어린 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폴링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아버지 헤르만 폴링은 지방신문 더 오리가니안(The Oregonian)의 편집장에게 아홉 살 아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폴링의 초등학교 친구인 로이드 제프레스는 자기 방에 작은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프레스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은 폴링이 화학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서적 인용|제목=화학혁명과 폴링|저자=톰 헤이거|출판사=바다출판사}}</ref> 고등학교 때 폴링은 할아버지가 수위로 근무했던 제철 공장에서 많은 실험 기구와 재료를 몰래 운반하여 화학 실험을 계속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고등학생이 된 폴링은 책과 화학실험으로 쌓아온 엄청난 양의 화학지식으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화학 담당 선생님의 방과후 실험을 돕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폴링은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어하였고 대학에 가고 싶어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그러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 벨은 아들이 생계를 꾸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길 원했고 폴링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철물점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고민하던 폴링은 친구 제프리스 가족의 충고를 듣고 당시 오리건농업대학 (현 오리건 주립 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15세의 3학년 1학기 이미 오리건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점을 다 채워놓은 상태여서 대학에 진학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당시 오리건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필수 학점이었던 미국사 듣지 못하였다. 폴링은 학교장에게 1학기에 일년 과정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폴링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의 모교 워싱턴고등학교는 45년 뒤, 이미 폴링이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여름에 폴링은 식료품 잡화점에서 1주일에 8달러를 벌어가면서 아르바이트일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포틀랜드의 제조공장 다수를 운영하는 Schwietzerhoff와 면담을 하여 취직하도록 시켰다. 폴링은 견습공으로 한 달에 40달러를 받으며 고용되었다. 폴링은 그의 일에 매우 능숙해서 월급이 인상되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여가시간에 그의 친구 둘과 함께 사진실험실을 세우고 작은 사진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후에 그가 대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벌수있도록 소망했다. 폴링은 오레건주 농업대학에서 입학허가 편지를 1917년 9월에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직장 사장에게 그의 대학입학계획을 알렸다. == 고등교육과정 == 1917년 10월, 폴링은 그가 대학생활비용으로 모아두었던 200여달러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촌 Mervyn과 함께 Corvallis 캠퍼스 주변 하숙집에서 살았다. 첫 번째 학기에서 폴링은 화학과에서 두 과목, 수학에서 두 과목, 기계 제도, 현대영어산문, 체육 그리고 군 훈련을 수강신청했다. 폴링은 그의 학교 생활 초기에 1학년 여학생 이린(Irene)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폴링은 그가 저축한 150달러정도로 그녀를 위해 쓰기도 했다. 그는 곧 여학생기숙사의 주방을 정리하는 업무와 고기를 자르고 난로의 장작을 패는 일을 한달에 100시간 정도하는 그러한 일을 했다. 시간당 25센트의 보수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재정적으로 곤란함을 겪었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캠퍼스의 식당에서 하루에 한끼 식사하는 걸로 때웠다. 폴링은 매우 대학생활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Delta Upsilon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학년 이후에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포틀랜드에서 돈을 벌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그를 정량분석을 가르치는 위치를 그에게 권했고, 그는 마침 정량분석이라는 과목을 막 이수한 상태였다. 그는 일주일에 40시간을 실험실과 교실에서 일하여 한 달에 100달러정도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돈은 그가 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2년간의 대학생활에서 폴링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구조에 대한 일을 했던 Gilbert N. Lewis와 Irving Langmuir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연구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물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것들이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와 관련되어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화학이라는 새로운 과학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폴링은 인류학 사회학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다가 물리, 수학부의 필수과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다루었다. Samuel Graf교수는 폴링을 높은 수준의 수학과정에서 그의 조교로서 선발했다. 4학년 겨울 무렵, 폴링은 가정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화학부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제안받았다. 그곳에서는 폴링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인 Ava Helen Miller가 있었다. 1922년 폴링은 오레건주 주립대학을 졸업했으며 화학공학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원을 캘리포니아 주의 [[패서디나 (캘리포니아주)|패서디나]]의 칼텍으로 지도교수인 Roscoe G. Dickinson 지휘 아래로 갔다. 그는 결정의 구조를 결정짓는 X선 회절분광법의 사용을 포함하는 연구로서 졸업을 했고 그가 칼텍에 있는동안 광물질, 무기질들의 결정구조에 관한 7장짜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에서 phD를 받았으며, 1925년에 수리물리학분야의 최고 영예와 함께 졸업했다. 1917년 폴링은 코발리스(Corvallis)에 위치한 현재 오리건 주립 대학의 전신인 오리건 농업 대학(the Oregon Agricultural College)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는 full-time으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장작을 쪼개고, 청소를 하고, 여학생 회관의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 등의 일을 하였다. 또한 2학년 여름방학에는 아스팔트 성분을 시험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쓰고 남은 돈을 집에 보냈다. 그러나 2년의 학업을 마치고 어머니 벨은 아들 폴링에게 1년동안 휴학을 하고 일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폴링은 화학교수로부터 1년동안 정량화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받게 되고 학교에 계속 남아 돈도 벌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된다. 폴링은 강의 준비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고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았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1922년 겨울학기 가정경제학과의 화학수업을 맞게 된 폴링은 수업에서 아바 헬렌 밀러를 만나게 되고, 둘은 1923년 6월 17일에 결혼하게 된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OAC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과장 길버트 루이스와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공업화학자 어빙 랭뮤어의 원자의 전자구조와 분자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대한 성과를 접하게 된다. 그는 두 원자 사이에 공유 전자를 가진 화학 결합이 생긴다는 그들의 이론에 매혹되었고<ref name="라이너스 폴링"/>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원자들의 결합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주 연구분야로 하기로 하고, 양자 화학의 기초를 세운다. 1922년 폴링은 OAC를 졸업하고, 칼텍의 아더왕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학자 아더 아모스 노이즈에게 발탁되어 칼텍(California Institue of Technology, Caltech)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그는 로스코 G. 디킨슨의 지도 아래 X선 구조결정학을 연구하였고 몰리브덴광을 비롯한 다섯 가지 결정의 원자구조를 밝혀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그는 1925년 물리화학과 수리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화학 결합의 본질에 관한 연구 == 1920년대 말에 폴링은 화학결합의 본질에 관한 논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1939년에 출판한 화학결합에 관련된 그의 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폴링이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인 '화학결합의 본질과 그것을 이용한 복잡한 물질들의 구조규명에 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폴링은 그의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들을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에 집약시켜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가장 영향력이 큰 화학책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39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 이 책은 16000 번 이상 인용되었다. 심지어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들은 종종 그의 책을 인용하고는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련된 업적 중 하나는 혼성오비탈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자에 있는 전자는 s 혹은 p 오비탈등의 오비탈의 모양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자간의 결합을 설명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오비탈의 성질을 섞은 새로운 함수를 정의하면 훨씬 설명이 편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탄소원자의 경우 한 개의 2s 오비탈과 3개의 2p 오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 4개의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4개의 동일한 오비탈(sp3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것으로 메탄과 같은 탄소화합물에서 탄소가 4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탄소의 4개 오비탈 중 1개의 2s 오비탈과 2개의 2p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3개의 동일한 오비탈(sp2 혼성오비탈)을 형성하고 2p 오비탈 한 개는 혼성화를 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불포화 탄소화합물인 에틸렌과 같은 화합물의 결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탄소는 다른 화합물에서 다른 형태의 혼성화를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대한 업적 중 또 하나는 이온결합과 공유결합간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였다. 이온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원자간에 전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공유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전자의 균일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폴링은 이 두 종류의 결합이 상극을 이루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자간의 결합의 성격은 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링 자신이 제창한 '폴링의 전기음성도'의 개념이 쓰이게 된다. 결합을 이루는 두 원자의 전기음성도 차이가 결합의 이온성 즉 원자간의 결합이 이온결합과 공유결합중 어느 결합과 더 비슷하게 존재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한 업적 중 세 번째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였다. 이 이전까지 벤젠의 구조에 대한 가장 나은 설명은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의 설명이였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가지의 구조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 첫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이중결합으로 이중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으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폴링은 양자역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벤젠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의 중간쯤 되는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벤젠의 구조는 케쿨레가 제시한 두 가지 구조의 사이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두 가지 구조가 존재하여 그 두 가지 구조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후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공명(resonance)'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폴링의 벤젠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가 제시한 오비탈의 혼성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설명 모두 여러 개의 전자구조가 합쳐저서 그러한 구조들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 원자핵의 구조에 관한 연구 == 1952년 9월 16일에 폴링은 '나는 원자핵 모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연구노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0월 15일 폴링은 Science 지와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지에 그의 원자핵 모델인 Close-Packed Spheron Model 을 발표하였다. 이후 거의 30년동안 폴링은 1994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spheron cluster model 에 관련된 여러개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폴링의 spheron model 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원자핵은 중성미자 무리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은 중성미자 무리에는 중양자, 알파입자, 3중양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짝수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자핵의 경우 알파입자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폴링은 원자핵의 구 구조를 platonic solid 와 같은 기하적 구조로부터 도출 해내었는데 이는 이 당시의 독립 입자 모델로부터 이를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또한 1990년에 폴링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나는 실험적으로 측정된 들뜬 상태와 바닥상태의 진동에너지를 분석함으로써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Physical Review Letter' 나 다른 물리학 출판물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자 중 여태까지는 어느 누구도 내가 밝혀놓은 것까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밝힌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연구를 앞으로도 나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다.' == 생물 분자 == 1930년대 중반, 폴링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비록 그가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던 것은 무기 분자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자금 책임자였던 위버는 폴링에게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대어 주었다. 따라서 그 돈으로 연구 건물을 새로 짓고 직원을 뽑고 장비를 구축하여 분자생물학 분야로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그는 새로운 분야로의 연구를 위해 토마스 헌트 모건,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캘빈 브리지스, 알프레드 스터트반트와 같은 생물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어나갔다. 그 당시 폴링은 생명이 없는 화학물질이 생명체로 변환되는 데에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힌다면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X-ray 회절 분석을 통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하였지만 단백질은 그 방법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크기가 너무 크고 다양한 거대 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백질은 조금만 가열해도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제, 분리도 어려웠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따라서 1930년대 영국의 결정학자 윌리엄 아스트버리가 찍은 가장 좋은 X-ray 사진에 대해 폴링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11년이 걸렸다. 그의 수학적인 분석은 옳았지만, 아스트버리의 사진에서 단백질 분자는 예상 위치보다 기울어져 있었다. 폴링은 단백질의 변성 실험을 통해 단백질은 가역적인 약한 결합과 비가역적인 강한 결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약한 결합을 수소결합, 강한 결합을 공유결합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그는 미르스키와 함께 아미노산들이 공유결합의 일종인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고 이들이 약한 수소결합을 통해 특별한 모양을 가진 단백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그렇기 때문에 우선 아미노산의 구조를 밝혀 펩티드 결합의 길이와 각도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단백질의 가능한 구조의 수를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단백질의 성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이 연구를 통해 헤모글로빈 구조 모델에서는 원자들이 나선형 구조로 배열되어있다고 밝혔고, 이 아이디어를 일반화하여 단백질에 적용시켰다. 1951년, 아미노산과 펩티드의 구조, 그리고 펩티드 결합의 평면 성질을 기반으로 하여 폴링과 로버트 코리, 그리고 헤르만 브랜손은 단백질 2차 구조에서 1차적인 구조적 특징으로서 알파 나선과 베타 병풍 구조를 제안하였다.<ref>{{저널 인용| pmc=1063460 |제목=Configurations of Polypeptide Chains With Favored Orientations Around Single Bonds: Two New Pleated Sheets | 연도=1951 | 권=37 | 호=11 | pmid=16578412 | 저자=L. Pauling, R.B.Corey | 쪽=729–40 | 저널=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bibcode = 1951PNAS...37..729P |doi = 10.1073/pnas.37.11.729 }}</ref> 1936년 폴링은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 랜스타이너를 만났고 항체에 대한 의문점을 듣게 되었다. 항체들은 모두 비슷한 크기의 단백질인데 어떻게 특정한 항원을 정확히 구별하고 결합할 수 있는가? 폴링은 이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특정한 항원만을 구별하는 항체의 특이성이 분자의 구조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1940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항체의 한쪽 끝이 항원에 닿으면 주위에서 모양을 형성하여 수소결합이나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항체와 항원이 상보적 형태를 가지게 되어 잘 들어맞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으로 폴링은 이 분야를 이끌어갔고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단백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폴링이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비밀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의 실험 결과로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나자<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DNA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는 DNA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DNA는 [[삼중나선]] 구조라고 제안하였고,<ref>{{학위논문 인용 | url=http://www.farooqhussain.org/projects/paulingdnamodel/document_view | 제목=Linus Pauling's DNA Model | 확인날짜=2007년 8월 6일 | archive-date=2007년 3월 18일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318164531/http://www.farooqhussain.org/projects/paulingdnamodel/document_view }}</ref> 1952년 DNA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의 모델은 기본적인 실수가 있었다. 폴링은 DNA의 염기를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에 배치시켰고 인산기를 안쪽에 배치시켜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폴링이 DNA의 구조의 분자적 모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번디시 연구소에 전해졌을 때,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가 아직 출판하지 않은 데이터에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들의 데이터는 나선과 그 축을 따라 평면의 염기가 있음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1953년 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올바른 구조로서 DNA 이중 나선을 제안하였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DNA는 [[삼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에 대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들이 건넨 모형을 찢어버렸다. 그 모델의 문제점으로 음전하를 가진 인산기들이 DNA 분자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분자가 너무 촘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자신이 찍어낸 DNA의 X선 회절사진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바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밀도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였고 좋은 품질의 X-ray 회절 사진을 얻지 못하는 등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인정했다. 폴링이 그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영국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X-ray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폴링은 자신의 동료 로베르트 코레이가 프랭클린의 사진 몇 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DNA 구조를 고안하기 전에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폴링이 [[DNA 삼중나선]_ 이론을 급하게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얻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분자유전학 == 1949년 11월, 라이너스 폴링, 하베이 이타노, S.J. 싱어, 그리고 이베르트 웰스는 <겸형 적혈구 빈혈증, 분자병>이라는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출판하였다.<ref>{{저널 인용 | url=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blood/papers/1949p.15.html | 제목=Sickle Cell Anemia, a Molecular Disease | 확인날짜=2007년 8월 5일 | 저자=L.Pauling | 공저자=Harvey Itano, S. J. Singer, Ibert Wells | 월=November | 연도=1949 | 출판사=Science | archive-date=2013년 11월 9일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9021400/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blood/papers/1949p.15.html | url-status= }}</ref> 이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에 의한 인간 질병의 첫 증거물이었고, 분자 수준에서 이해된 첫 번째 질병이었다. 전기영동을 통해 그들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 환자 각각은 적혈구에서 변형된 형태의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겸형 적혈구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형태의 헤모글로빈 모두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멘델 유전이 단순히 단백질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특정한 물리적 특성까지 결정함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다. 즉, 분자유전학이 도래했음을 나타내었다. == 분자의학, 의학적 연구, 그리고 비타민 C 고취 == 1951년, 폴링은 “분자의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blood/pictures/1951s.17.html |제목=Molecular Medicine |확인날짜=2007년 8월 5일 |저자=L. Pauling |월=October |연도=1951 |publisher=Ava Helen and Linus Pauling Papers |archive-date=2007년 4월 27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427090402/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blood/pictures/1951s.17.html |url-status= }}</ref> 1950년대 후반, 폴링은 정신병이 효소의 기능장애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뇌의 기능에서 효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였다. 1965년, 폴링은 아브라함 호퍼의 <정신의학에서의 니아신 치료요법>이라는 논문을 읽고, 비타민이 그와 관련된 결핍증의 예방과 무관하게 생화학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8년 폴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정신의학>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투고하였다.<ref>{{저널 인용 |저자=Pauling L |제목=Orthomolecular psychiatry. Varying the concentrations of substances normally present in the human body may control mental disease |저널=Science |권=160 |호=3825 |쪽=265–71 |연도=1968 |월=April |pmid=5641253 |doi= 10.1126/science.160.3825.265|url=|bibcode = 1968Sci...160..265P }}</ref> 하지만 이 논문은 1970년대에 다소 논쟁이 있는 비타민 대량 투여 요법 운동을 야기했다. 폴링은 몸 속에 존재하는 물질의 농도를 변화시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실행을 언급하기 위해 “orthomolecular(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의 생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의학의 기초를 형성했으나 통상적인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실행되지 않고 강경하게 논쟁해왔다. 비타민 C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6년 생화학자 어윈 스톤의 비타민 C 복용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져, 폴링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비타민 C 3&nbsp;g을 복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영향이 있음을 인지하고 1970년 <비타민 C와 감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1년 영국의 암 외과의사 카메론과 함께 말기 환자들에게 암 치료요법으로 비타민 C를 복용시키거나 정맥 주사를 통해 주입하는 장기 임상 실험을 공동으로 시작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doctoryourself.com/biblio_cameron.html |제목=Cancer bibliography |확인날짜=2007년 8월 5일| 저자= Ewan Cameron M.D. |publisher=Doctoryourself.com}}</ref> 카메론과 폴링은 그들의 관찰 결과를 담고 있는 많은 전문 논문과 <<암과 비타민 C>>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폴링은 비타민 C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결국 비타민 C를 투여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생존 확률이 4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담고 있는, 다소 진위가 의심스러운 말기 환자들 100명 그룹에 대한 두 연구를 출판하였다.<ref>{{저널 인용 |저자=Cameron E, Pauling L |제목=Supplemental ascorbate in the supportive treatment of cancer: Prolongation of survival times in terminal human cancer |journal=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권=73 |호=10 |쪽=3685–9 |연도=1976 |월=October |pmid=1068480 |pmc=431183 |doi= 10.1073/pnas.73.10.3685|url=|bibcode = 1976PNAS...73.3685C }}</ref> 이후 메이오 클리닉에 의해 수행된 임상 시도에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10,000&nbsp;mg)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좋지 못했고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ref>{{저널 인용 |저자=Creagan ET, Moertel CG, O'Fallon JR, ''et al.'' |제목=Failure of high-dose vitamin C (ascorbic acid) therapy to benefit patients with advanced cancer. A controlled trial |journal=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권=301 |호=13 |쪽=687–90 |연도=1979 |월=September |pmid=384241 |doi= 10.1056/NEJM197909273011303|url=}}</ref> 이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학 협회 역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엉터리라고 결론지었다.<ref name=PNASChen2007>{{저널 인용 | 저자= Q. Chen | 공저자 = et al | 연도 = 2007 | url = http://www.pnas.org/cgi/content/full/104/21/8749 | 제목 = Ascorbate in pharmacologic concentrations selectively generates ascorbate radical and hydrogen peroxide in extracellular fluid in vivo | journal =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쪽 = 8749–54 | 권 = 104 | 호 = 21 | pmid = 17502596 | doi = 10.1073/pnas.0702854104 | pmc = 1885574 |bibcode = 2007PNAS..104.8749C }}</ref> 폴링은 그 연구 결과들을 비난하였고 최종 연구를 “사기와 계획적인 잘못된 설명”으로 간주하였으며,<ref>{{웹 인용|url=http://oregonstate.edu/dept/Special_Collections/sub쪽/ahp/1995symposium/goertzel.html|제목=Analyzing Pauling's Personality: A Three Generational, Three Decade Project|확인날짜=2007년 8월 5일|저자=Ted Goertzel|연도=1996|publisher=Special Collections, Oregon State University Libraries}}{{깨진 링크|url=http://oregonstate.edu/dept/Special_Collections/sub%EC%AA%BD/ahp/1995symposium/goertzel.html }}</ref> 비타민 C를 정맥주사를 통해 주입하지 않고 구강 복용을 시킨 연구에 대해 비판하였다.<ref>{{저널 인용 | url = http://www.cmaj.ca/cgi/content/full/174/7/937#T217 | 제목 = Intravenously administered vitamin C as cancer therapy: three cases | 확인날짜=2007년 8월 5일| 저자= Levine M et al. | 연도 = 2006 | journal =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CMAJ]] | 권 = 174 | 호 = 7 | doi = 10.1503/cmaj.050346 | 쪽 = 937–942 | pmid = 16567755 | pmc = 1405876 }}</ref> 또한 실험에서 조작 변인은 비타민 C를 복용하는 것이었고, 비타민 C 복용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메이오 클리닉을 비판하였다. 폴링은 암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타민 C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시도에서 메이오 클리닉 환자들은 두 달 반 동안만 비타민 C를 복용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Linus Pauling | 연도=1986 | 제목=How to Live Longer and Feel Better | publisher=[[W.H. Freeman and Company]] | location=New York | 쪽=173–175 | isbn=0-7167-1781-6}}</ref> 그 결과는 공개적으로 오랫동안 폴링과 카메론, 그리고 메이오 클리닉 사이에서 상당히 신랄한 논쟁이 일었다. 특히 서로 간에 위법 행위와 과학적 무능력함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오 클리닉 연구의 결과들이 암 치료제로서의 비타민 C에 대한 관심을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비타민 C를 암과 감기 치료제로 진척시키기를 지속하였는데, 비타민 C를 뇌가 손상된 아이들에게 치료제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능력계발연구소 (The Institutes for the Achievement of Human Potential)와 함께 연구하였다.<ref name="Pauling1978">{{저널 인용 | 저자= L. Pauling | 편집자= Ralph Pelligra, ed. | 연도 = 1978 | 월 = November | 제목 = Orthomolecular enhancement of human development | journal = Human Neurological Development | 쪽 = 47–51 | url = http://profiles.nlm.nih.gov/MM/B/B/K/G/_/mmbbkg.pdf |format=PDF}}</ref> 그는 이후 캐나다의 내과의사 아브람 호퍼와 함께 부가적인 암 치료법으로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을 비롯한 미량 영양소 식이요법을 공동연구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doctoryourself.com/biblio_hoffer.html |제목=Abram Hoffer, M.D., PhD 50 출판연도s of Megavitamin Research, Practice and Publication |확인날짜=2007년 8월 5일| 저자= Andrew W. Saul |공저자= Dr. Abram Hoffer |publisher=Doctoryourself.com}}</ref> 아서 B. 로빈슨, 그리고 다른 동료와 함께 폴링은 1973년에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분자교정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곧 라이너스 폴링 과학의학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폴링은 비타민 C에 대한 연구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 이론 화학과 물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대한 비타민 C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리신과 비타민 C를 이용해 협심증을 경감시키는 사례보고 3편을 발표하였다. 1996년에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주 Corvallis로 이전하여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미량영양소, 피토케미컬 (식물에 있는 화학 물질),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식이요법에 적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를 지속하였다.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Palo Alto에 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연구 조감독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이전한 뒤에 유전 정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 정치활동 == 폴링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나, 전쟁의 여파와 아내 아바 헬렌의 평화주의는 폴링 역시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는 대부분이 유태인인 독일의 동료과학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여행에 필요한 사증을 발급받아 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부터 폴링은 히틀러의 독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1939년 유니언 나우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전 세계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미국의 연방제를 모형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폴링은 이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된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나치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또한 미 해군 잠수함의 산소측정기, 폭약, 로켓 추진체 등 미국의 군수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맨허튼 프로젝트 초기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폴링을 화학분야 담당으로 초청하나 폴링은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거절한다. 전쟁 중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바 헬렌은 이것에 항의하여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감금반대 투쟁을 돕는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폴링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원자과학자연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원자력기술의 공유와 원자력을 민간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에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핵무기 개발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 조직하였고 폴링도 이에 가입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인 아내 아바 헬렌과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스탈린의 동유럽 봉쇄와 중국의 공산반군 등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자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원자기술공유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국가적으로 반공주의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도 그는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ref name="라이너스 폴링"/>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아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칼텍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총장 두브리지는 폴링에게 정치적 연설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1951년 논란이 되는 단체들을 탈퇴하고 연설들을 중지하였으며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언론의 비난과 국회의 의심은 계속되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대중과 지인의 의심이 많이 풀렸고 폴링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다시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과 낙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8년 폴링은 배리 커머너 등과 함께 방사성 동위원소 Sr-90의 유아 치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였고 1962년에는 루이스 라이스 등과 함께 낙진으로 떨어진 Sr-90을 젖소가 먹고 젖소로부터 우유를 먹는 사람의 뼈에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반공주의자인 텔러와 방사능 낙진의 위험에 대한 TV토론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폴링은 1958년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중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 서명목록을 UN에 제출하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대중의 압박과 낙진의 위험에 관한 연구결과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이 조약은 그해 10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바로 그날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_웹">{{웹 인용|저자=Nobel Media AB|제목=The Nobel Peace Prize 1962|url=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peace/laureates/1962/|웹사이트=Nobelprize.org|확인날짜=2016-03-02}}</ref> 폴링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논객들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960년 폴링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상원의 한 조사 소위원회에 출두를 명령받아 그토록 많은 서명들을 모은 과정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계속되었다. 그가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미국 라이프 잡지사는 “노르웨이에서 온 수상한 모욕”이란 헤드라인을 냈다. 칼텍 총장 두브리지 역시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폴링은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평화에 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10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칼텍을 떠난다고 발표했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 1962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노벨의 유언에 적합한 평화상 후보를 찾지 못하였다. 노벨상 규정에 따라, 이 경우 1962년 노벨상 후보를 다음 년도로 미룰 수 있었다. 이 노벨평화상을 폴링이 받게 됨으로써 폴링은 1962년 노벨평화상을 1963년에 받게 된 것이다.<ref name="라이너스 폴링_웹"/> == 말년 ==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 [[빅서]]의 자택에서 7시 20분경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 각주 == <references/> == 참고 서적 == * {{서적 인용 |저자=테드 고어츨,벤 고어츨 저/박경서 역 |제목=라이너스 폴링 평전 (원서:Linus Pauling: A Life in Science asnd Politics) |날짜=2011-06-15 |출판사=실천문학사 |출판위치= |ISBN=978-89-392-0658-8 }} * {{서적 인용| last=Hager | first=Thomas | year=1995 | title=Force of Nature: The Life of Linus Pauling | publisher=Simon & Schuster | isbn=0684809095}} * {{서적 인용| last=Hager | first=Thomas | year=1998 | title=Linus Pauling and the Chemistry of Life | 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 | isbn=0195139720}} * {{서적 인용| last=Marinacci | first=Barbara | coauthors=Ramesh Krishnamurthy | year=1998 | title=Linus Pauling on Peace | publisher=Rising Star Press | isbn=0933670036}} * {{서적 인용| last=Mead | first=Clifford | coauthors=Thomas Hager (eds.) | year=2001 | title=Linus Pauling: Scientist and Peacemaker | publisher=Oregon State University Press | isbn=0870714899}} * {{서적 인용| last=Serafini | first=Anthony | year=1989 | title=Linus Pauling: A Man and His Science | publisher=Paragon House | isbn=155778440X}} == 외부 링크 == {{위키공용|Linus C. Pauling}} *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6184 비타민C 아버지 ‘라이너스 폴링’] {{웨이백|url=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6184 |date=20111109154725 }} * [https://web.archive.org/web/20061011045731/http://osulibrary.orst.edu/specialcollections/rnb/ 1922년부터 1994년 사이 폴링의 공책 46권 스캔 자료 (英)] * [https://web.archive.org/web/20110225215552/http://thomashager.net/linus-pauling-genius-or-crackpot/ Linus Pauling: Genius or Crank?] a detailed overview of Pauling's work in molecular medicine and vitamin C. * [http://pauling.library.oregonstate.edu Linus Pauling Online] a Pauling portal created by Oregon State University Libraries * [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events/1995paulingconference/video-s1-2-crick.html Francis Crick: The Impact of Linus Pauling on Molecular Biology (transcribed video from the 1995 Oregon State University symposium)] {{웨이백|url=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events/1995paulingconference/video-s1-2-crick.html |date=20120920163023 }} * [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index.html The Ava Helen and Linus Pauling Papers at the Oregon State University Libraries] {{웨이백|url=http://osulibrary.oregonstate.edu/specialcollections/coll/pauling/index.html |date=20100601161603 }} * [https://web.archive.org/web/20190719010423/http://www.paulingcatalogue.org/ The Pauling Catalogue] * [http://paulingblog.wordpress.com The Pauling Blog] * [http://www.users.muohio.edu/shermalw/honors_2001_fall/honors_papers_2001/Lowrey_LPauling.htm Linus Pauling (1901-1994)] * [http://www.nap.edu/readingroom/books/biomems/lpauling.html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biography] * [https://web.archive.org/web/20080706123536/http://oralhistories.library.caltech.edu/archive/00000018/00/OH_Pauling_L.pdf Caltech oral history interview] * [http://globetrotter.berkeley.edu/conversations/Pauling Berkeley Conversations With History interview] {{웨이백|url=http://globetrotter.berkeley.edu/conversations/Pauling |date=20070320012923 }} * [http://pauling.library.oregonstate.edu/exhibit/ Linus Pauling Centenary Exhibit] * [https://web.archive.org/web/20070817054053/http://www25.uua.org/uuhs/duub/articles/linuspauling.html Linus Pauling from The Dictionary of Unitarian and Universalist Biography] * [https://web.archive.org/web/20080224211535/http://www.alternativehealth.co.nz/vitaminc/paulinginvestigates.htm Linus Pauling Investigates Vitamin C] * [http://lpi.oregonstate.edu/ The Linus Pauling Institute] at Oregon State University * [http://jchemed.chem.wisc.edu/Journal/Issues/1996/Sep/absA210.html The Many Lives of Linus Pauling: A Review of Reviews J. C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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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대통령 정보 |이름 = 빌 클린턴 |원어명 = {{lang|en|Bill Clinton}} |그림 = Bill Clinton.jpg |크기 = 300px |설명 = 빌 클린턴(1993년) |국가 = 미국 |대수 = 42 |문장 = Coat of Arms of Bill Clinton.svg |취임일 = 1993년 1월 20일 |퇴임일 = 2001년 1월 20일 |부통령 = [[앨 고어]] |출생일 = {{출생일과 나이|1946|8|19}} |출생지 = [[미국]] [[아칸소주]] [[헴스테드군]] [[호프 (아칸소주)|호프]] |사망일 = |사망지 = |정당 = [[민주당 (미국)|민주당]] |학력 = [[조지타운 대학교]] 학사(B.S.)<br />[[옥스퍼드 대학교]] 학사(B.A.)<br />[[예일 법학대학원|예일 로스쿨]] 법무석사(J.D.) |종교 = [[개신교]]{{smaller|([[침례회]])}} |배우자 = [[힐러리 클린턴]](1975년 결혼) |자녀 = [[첼시 클린턴]] |서명 = Signature of Bill Clinton.svg |전임 = 조지 H. W. 부시 |전임대수 = 41 |후임 = 조지 W. 부시 |후임대수 = 43 |국가2 = [[아칸소주]] |명칭2 = [[주지사]] |대수2 = 42 |취임일2 = 1983년 1월 11일 |퇴임일2 = 1992년 12월 12일 |부통령2 = [[윈스턴 브라이언트]]<br />[[짐 가이 터커]] |부통령명칭2 = 부주지사 |전임2 = 프랭크 화이트 |전임대수2 = 41 |후임2 = 짐 가이 터커 |후임대수2 = 43 |국가3 = [[아칸소주]] |명칭3 = [[주지사]] |대수3 = 40 |취임일3 = 1979년 1월 9일 |퇴임일3 = 1981년 1월 19일 |부통령3 = [[조 퍼셀]] |부통령명칭3 = 부주지사 |전임3 = 조 퍼셀 |전임대수3 = 39 |후임3 = 프랭크 화이트 |후임대수3 = 41 |공직2 = [[미국 주지사 협의회 (National Governors Association)]] |공직2명칭 = 의장 |공직2대수 = |공직2취임일 = 1986년 8월 26일 |공직2퇴임일 = 1987년 7월 28일 |공직2부공직자 = 존 수누누 |공직2부공직자명칭 = 부의장 |공직2전임 = 라마 알렉산더 |공직2후임 = 존 수누누 |공직3 = [[아칸소주]] |공직3명칭 = 법무부 장관 (Attorney General of Arkansas) |공직3대수 = 50 |공직3취임일 = 1977년 1월 3일 |공직3퇴임일 = 1979년 1월 9일 |공직3부공직자 = 데이비드 프라이어·조 퍼셀(권한대행) |공직3부공직자명칭 = 주지사 |공직3전임 = 짐 가이 터커 |공직3후임 = 스티브 클라크 }}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llang|en|William Jefferson Clinton}},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lang|en|William Jefferson Blythe III}}, {{문화어|윌리암 클린톤·빌 클린톤}}, [[1946년]] [[8월 19일]]~)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미국의 대통령|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ref>{{뉴스 인용 |last=Sandalow |first=Marc |title=Clinton Era Marked by Scandal, Prosperity: 1st Baby Boomer in White House Changed Notions of Presidency |work=San Francisco Chronicle |date=2001년 1월 14일 |url=http://www.sfgate.com/cgi-bin/article.cgi?file=/chronicle/archive/2001/01/14/MN71509.DTL |accessdate=2008년 10월 29일 |archive-date=2008년 6월 11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11162047/http://www.sfgate.com/cgi-bin/article.cgi?file=%2Fchronicle%2Farchive%2F2001%2F01%2F14%2FMN71509.DTL |url-status=dead }}</ref> 미국 대통령 재임시절 유능한 경제정책으로 3000만개 일자리를 창출했고 3500억 달러의 국가부채도 갚으며 그외의 분야에도 유능하여 대통령 재직 시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클린턴은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 계열로 묘사된다.<ref>{{웹 인용 |url=http://www.dlc.org/ndol_ci.cfm?kaid=127&subid=173&contentid=252794 |title=Bill Clinton, New Democrat |publisher=DLC |date=2004년 7월 25일 |accessdate=2010년 6월 13일 |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20530054140/http://www.dlc.org/ndol_ci.cfm?kaid=127&subid=173&contentid=252794 |archivedate=2012년 5월 30일 |url-status=dead }}</ref> 그의 정책 중 일부인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복지 개혁은 [[중도주의]] [[제3의 길]] 통치 철학 때문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에 그는 다른 정책에 대해서 중도 좌파적인 입장을 취했다.<ref name= 'The Natural'>{{서적 인용|last=Klein |first=Joe |title=The Natural: The Misunderstood Presidency of Bill Clinton |publisher=Doubleday |year=2002 |isbn=0767914120}}</ref><ref>{{뉴스 인용|last=Safire |first=William |title=Essay; Looking Beyond Peace |work=[[The New York Times]] |date=1993년 12월 6일 |url=http://query.nytimes.com/gst/fullpage.html?res=9F0CE5D91F39F935A35751C1A965958260|accessdate=2008년 10월 29일}}</ref><ref>{{뉴스 인용 |last=Duffy |first=Michael |coauthors=Laurence I. Barrett, Ann Blackman, James Carney |title=Secrets Of Success |work=Time Magazine |date=November 29, 1993 |url=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79697,00.html |accessdate=2008년 10월 29일 |archive-date=2013년 8월 13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813064313/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79697,00.html |url-status=dead }}</ref> 클린턴은 나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화로운 경제적 확장 기간이 된 경제적 확장의 지속을 이끌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8/02/02/AR2008020202521.html|title=Bill Clinton's Legacy|first=Peter|last=Baker|work=The Washington Post |date=2008년 2월 3일|accessdate=2010년 7월 13일}}</ref><ref>{{웹 인용|url=http://www.history.com/topics/bill-clinton|title=Bill Clinton|work=History.com|accessdate=2010년 7월 13일}}</ref> 의회 예산국은 2000년에 클린턴의 재임기간의 예산이 흑자라고 보고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bo.gov/budget/data/historical.pdf|title=Revenues, Outlays, Deficits, Surpluses, and Debt Held by the Public, 1968 to 2007, in Billions of Dollars|publisher=Congressional Budget Office|date=September 2008|format=PDF|accessdate=2010년 7월 13일|archive-date=2010년 4월 12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412101507/http://www.cbo.gov/budget/data/historical.pdf|url-status=dead}}</ref> 보건 보험 개혁의 실패 이후에 [[공화당 (미국)|공화당]]은 1994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40년만에 처음으로 승리했다.<ref>{{웹 인용|last=Hulsey |first=Byron |title=The Altered Terrain of American Politics (Review of Do Elections Matter?) |date= |url=http://www.h-net.org/reviews/showrev.php?id=1463 |accessdate=2008년 10월 29일}}</ref> 3년 뒤 1997년에 클린턴은 재선되었고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래 처음으로 두 번의 임기를 채운 대통령이 되었다.<ref name="Clinton@2">{{서적 인용|last=Jones |first=Charles O. |title=The Presidency in a Separated System |publisher=[[The Brookings Institution]] |year=2005 |page=318}}</ref> == 어린 시절 == {{진보주의}} [[아칸소주]] [[호프 (아칸소주)|호프]]에서 태어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5번째 세대의 아칸소주민이었다. 그의 모친 버지니아 켈리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로 이름을 지었다. 모친이 [[간호원]]으로서 훈련받는 동안 빌이 4세 때 그녀는 그를 그녀의 부모와 함께 두었다. 빌이 8세가 될 때 그의 모친은 로저 클린턴에게 결혼하였다. 가족은 [[핫스프링스 (아칸소주)|핫스프링스]]로 이주하여 실내 수도가 없이 작은 집에서 살았다. 빌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였고, 가족 생활은 가정 폭력에 의하여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그가 15세 때 빌은 자신의 계부에게 자신의 모친 혹은 이복 형을 절대 때리지 말라고 다시 경고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클린턴은 [[타임]] 잡지와 인터뷰에서 "그 일은 극적인 것이었다"고 상기하였다. 클린턴이 17세 때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결과로서 클린턴은 자신이 정치에서 경력을 원했던 것을 결정하였다. 그는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생으로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흑인 민권 운동]] 투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헌신했다. 클린턴은 국제학에서 학위와 함께 196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을 지속하는 다음 2년을 보내는 데 자신을 허용한 [[로즈 장학금]]을 수상하였다. 1970년 그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클린턴은 아칸소주 파예트빌에서 [[변호사]]로서 개인 실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한 아칸소 로스쿨에서 강의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 아칸소 정치 == 1974년 클린턴은 자신의 10대 시절 이래 자신이 원했던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미국 의회|의회]]를 위하여 나갔으나 매우 가까운 투표에서 선거를 패하였다. 1975년 10월 11일 클린턴은 예일 로스쿨에서 만났던 동료 법학생 [[힐러리 클린턴|힐러리 로덤]]에게 결혼하였다. 1976년 그는 아칸소주의 법무장관으로 선출되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978년 클린턴은 아칸소주지사의 직위를 위하여 나갔다. 그의 선거는 그를 그 주에서 최연소 주지사로 만들었다. 자신의 첫 기간에서 클린턴은 차량 라이센스의 비용을 올리는 시도를 포함하여 많은 것이 극단적으로 인기가 없던 다수의 변화들을 이루는 데 노력하였다. 1980년 그는 주지사로서 재선을 위하여 나갔으나 [[공화당 (미국)|공화당]]의 [[프랭크 D. 화이트]]에게 패하였다. 클린턴이 화이트를 상대로 1982년 선거를 위한 운동을 벌였을 때 그는 자신이 적응성과 타협의 중요성을 배웠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투표의 55 퍼센트를 받아 다시 한번 아칸소주지사가 되었다. 클린턴이 아칸소주지사였던 동안 그는 학교, 보건과 보장을 위한 개혁을 위하여 밀고 나갔다. 그는 또한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국내 정치에서 활동적이 되는 데 지속하였다. 1991년 그는 자신의 동배들에 의하여 가장 효과적인 주지사로 투표되어 민주당 리더십 회의를 사회보는 데 선택되었다. 동년에 클린턴은 대통령직을 위한 1992년 경주에 들어가고 있었다고 공고하였다. == 1992년 대통령 선거 == [[파일:ElectoralCollege1992.svg|섬네일|오른쪽|[[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여주는 지도]] 클린턴은 대통령을 위한 민주당 후보 지명을 위하여 거의 경쟁을 가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섞인 것 없고 미개발로 생각한 작은 주에서 왔다. 비판들은 국가 정부에서 그의 부족한 경험이 그에게 외교 정책의 작은 이해를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자신이 정부에게 가져오는 데 신선한 관점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클린턴의 선거 운동은 또한 개인적 스캔들에 의하여 특정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군사 복무의 기피에 관한 의문들과 혼외 관계들의 책임들을 향하였다. 클린턴은 경주에 남아있었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 자신의 러닝메이트로서 [[테네시주]] [[미국 상원|상원]] [[앨 고어]]를 골랐다. 클린턴은 경제적 문제들, 특히 실업과 보건에 자신의 선거 운동을 전념하였다. 1992년 11월 클린턴은 당시 현직 대통령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와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를 꺾어 4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거 운동 본부의 캠페인 문구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 42대 대통령(1993~2001) == [[파일:Bill Clinton taking the oath of office, 1993.jpg|섬네일|왼쪽|1993년 1월 20일 취임식을 올리는 클린턴]] [[파일:Bill Clinton, Yitzhak Rabin, Yasser Arafat at the White House 1993-09-13.jpg|섬네일|오른쪽|[[오슬로 협정]]이 있는 동안 [[백악관]]에서 [[이츠하크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와 함께(1993년 9월 13일)]] [[파일:Boris_Yeltsin_24_October_1995-1.jpg|섬네일|왼쪽|[[하이드파크 (뉴욕주)|하이드파크]]에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1995년 10월 24일)]] 1993년 1월 20일 취임식을 올린 클린턴은 대통령 직에서 한번 경제적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일하였으며, [[이자율]]과 [[실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인 힐러리 여사를 국내적 보건 개혁을 탐구하는 데 대책 본부의 지배인으로 임명하게도 하였다. 그는 [[미국]], [[캐나다]]와 [[멕시코]]의 단일 무역 단위를 만든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성원하였다. 클린턴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미국)|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12년 간(1981.1~1993.1)의 연속된 공화당 정권([[로널드 레이건|레이건]](1981.1~1989.1), [[조지 H. W. 부시|부시]](1989.1~1993.1))이 막을 내렸다. 그 선거 이후 민주당은 [[지미 카터]]의 통치 이래 최초로 의회 및 행정부를 포함한 연방정부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재임 초기 계속된 실책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크나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특히 하원에서는 40년 만에 공화당에 다수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 업적 ===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은 후 클린턴은 1993년 가족 의료 법안에 관한 대선 공약에 즉각 서명하게 된다. 본 법안은 고용인에게 종업원의 의료 문제 발생 상황시 의료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보호 법안이었다. 이 정책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클린턴이 대선 초기에 공약했던 [[군대]] 내 [[성소수자]] 권리 정책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는 [[보수주의|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주의|진보]] 진영은 정책이 다소 실험적이라고 주장했고 보수진영은 군생활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토의가 있던 후 클린턴과 [[미국 국방부|펜타곤]]은 일명 ‘[[Don't ask, don't tell|묻지도 말고 대답도 하지 말라]]’는 정책에 합의하게 되며 그것은 [[버락 오바마|오바마]] 대통령 때까지 유효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약대로 연방공무원 10만명 감축 지시를 내렸고, 고어 부통령에게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고어 부통령의 주도 아래 국정성과평가팀(NPR)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의 행정 개혁은 '정보기술을 통한 정부 재구축' 프로그램을 통해 공무원을 30만명 이상 감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미국 행정 개혁의 성공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전자정부의 구현을 통해 이룬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빌 클린턴은 3000억 달러 부채도 갚았고 일자리도 3000만개 창출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서 사생활만 빼면 다 좋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ref>[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804280147 전자정부를 통한 행정 개혁]</ref> === 재선, 스캔들과 탄핵 === {{본문|르윈스키 스캔들}} 클린턴의 첫 기간의 말기가 접근하면서 새로운 스캔들이 일어났다. 스캔들은 클린턴과 힐러리 여사가 아칸소주에 있는 화이트워터강을 따라 놓인 대지를 매입한 것에 의심스러운 거래가 있던 후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불렸다. 1996년 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2번째 기간으로 재선되었다. 그는 인기있는 투표의 49 퍼센트와 279개의 [[선거인단]]과 함께 자신의 공화당 상대 후보 [[밥 돌]]을 꺾어 압도적 대승리에 의하여 선거를 이겼다. 클린턴의 2번째 기간은 변호사 [[케네스 스타]]의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들어간 조사에 의하여 그늘지게 되었다. 조사는 [[백악관]] 수련생 [[모니카 르윈스키]]와 함께 클린턴의 정사의 고발들이 공개될 때 더욱 심각해졌다. 처음에 클린턴은 정세를 부인하였으나 후에 그는 르윈스키와 부적당한 관계에 있어왔다고 진술하였다. 1998년 12월 19일 [[미국 하원|하원]]은 클린턴을 탄핵하거나 르윈스키와 자신의 관계에 관한 서언 아래 거짓말을 한 고발들로 그를 의회에서 재판을 내리는 데 지배하였다. 상원은 그러고나서 탄핵 재판을 지휘하였다. 클린턴은 상원의 탄핵 도청을 향하는 데 미국 역사상 두번째 만의 대통령이었다. 1999년 2월 12일 상원은 클린턴이 무죄였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것에 국민과 의회에 사죄하였다. === 2번째 임기 기간 === [[파일:ClintonChild.jpg|섬네일|180px|왼쪽|1998년 [[시카고]]의 어느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클린턴 대통령]] 2000년 6월 5일 [[러시아]]의 [[두마]]에서 연설하는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자신의 연설에서 그는 러시아인들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미래가 20세기로 치명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후순에 그는 자필 서명으로서 온라인 전자 서명을 준 대망의 전자 서명법의 법률로 서명하였다. 화이트워터 사건 조사는 클린턴이나 힐러리 여사가 아무 범죄 행위에 참여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 충분한 증거가 없던 진술과 함께 9월 20일에 끝났다. 10월 16일 클린턴은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진행되는 푝력을 끝내는 데 협정으로 오기를 원했던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캠프데이비드]]에서 긴급 회의에 참석하였다. 바라크와 아라파트는 폭력을 끝내는 데 의도의 문과 함께 회의를 떠났으나 아무 쪽도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같은 달에 클린턴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영구적, 보통의 [[무역]] 지위를 준 법안을 서명하면서 자신의 행정부의 주요 성취를 굳게 하였다. 이 일은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의 통과 이래 가장 중요한 미국의 무역 입법으로 숙고되었다. [[파일:BillClintonHanoi2000.png|섬네일|오른쪽|[[베트남]] 방문 중 [[하노이]]에서(2000년)]] 그해 후순, 클린턴은 0.08 퍼센트에서 만취를 위하여 혈중알콜 한도를 세운 법안을 법률로 서명하였다. 이 것은 이전에 대부분의 주들이 이용한 것보다 엄격한 수준이었다. 법안의 성원자들은 법적으로 술취한 운전자 여부를 결심시키는 데 이용된 이 국가 표준이 매년 수백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클린턴은 자신이 [[미국 북동부|북동부]]를 위하여 난방유의 별도 준비금을 영구적으로 설립한 2000년 법률에 들어가는 또다른 법안을 서명하였다. 법률은 응급 상황에서 준비금들로부터 기름을 빼는 데 백악관을 위하여 더욱 쉽게 만들었다. 결국 11월 13일 클린턴은 [[아시아]]로 역사적 여행을 시작하여 베트남 전쟁 이래 [[베트남]]을 방문하는 데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방문의 목적은 [[하노이]]와 [[워싱턴 D. C.]] 사이의 관계들에 일하는 것이었다. == 퇴임 후 == [[파일:Barack Obama and Bill Clinton (cropped1).jpg|섬네일|왼쪽|[[버락 오바마]]와 클린턴(2012년)]] 2001년 1월 19일 대통령으로서 클린턴의 마지막 날,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 조사에서 자신이 오도하는 간증을 주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아무 범죄 고발들을 향하지 않았으나 법률을 실습하는 데 이 라이센스가 정지되었다. 클린턴은 또한 2만 5천 달러의 벌금을 내는 데 명령이 내려졌고, 자신이 아칸소주 법정의 행동 규칙 중의 하나를 어겼다고 인정하였다. 클린턴은 많은 문제들을 대표하여 지속적으로 연설하고 모금하였다. 그가 시간과 돈을 바치는 많은 경우들은 작은 [[비지니스]]들, 시티 이어 (젊은이들을 위한 국내적 서비스 프로그램)과 후천성 면역 결핍 ([[에이즈]]) 연구와 교육의 경제적 개발을 포함한다. 자신의 대통령직의 후반을 괴롭힌 스캔들과 어려움들에 불구하고,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활발한 공공 인물로 세계에 중요한 많은 문제와 원인들을 후원하였다. 존 F. 케네디 이래 최연소 대통령인 그는 아칸소주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으로부터 먼 길을 갔다. [[파일:Clinton family.jpg|섬네일|오른쪽|200px|클린턴 가족(왼쪽이 빌, 오른쪽 위가 힐러리, 아래가 첼시)]] 2009년 8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여기자 억류사태 해결 협상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여기자들을 대동하여 귀국했다. 특히 그는 핵문제 해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의 방북은 단순한 여기자 2명을 석방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24162 美 전직 대통령 '클린턴'은 北으로, '부시'는 南으로 ]{{깨진 링크|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24162 }}</ref>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이 일어난 동안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성원하였고, 4년 후에 힐러리 여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선거 운동을 벌일 때 부인을 성원하기도 하였다. == 가족관계 == 빌 클린턴과 전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서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있다.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낸 첼시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첼시의 결혼 후, 클린턴 부부는 현재 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 == 기타 ==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둘의 외모를 비교해보자면 트럼프 쪽이 훨씬 나이들어 보이지만 사실 둘 다 1946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 저서 == * 《나의 삶》, "My Life"(2004년). {{ISBN|0-375-41457-6}}.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선거인단)||결과||당락 |- |[[197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1974년 선거]]||[[미국 하원|하원의원(아칸소 제3선거구)]]||94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4|8|1|7}} 48.17%||83,030표||2위||낙선 |- |[[1978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78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0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6|3|3|6}} 63.36%||335,101표||1위||[[파일:Seal_of_Arkansas.svg|25px|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80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80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1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4|8|0|7}} 48.07%||403,242표||2위||낙선 |- |[[1982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82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5|4|7|1}} 54.71%||431,855표||1위||[[파일:Seal_of_Arkansas.svg|25px|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84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84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6|2|5|5}} 62.55%||554,561표||1위||[[파일:Seal_of_Arkansas.svg|25px|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86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86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6|3|8|9}} 63.89%||439,882표||1위||[[파일:Seal_of_Arkansas.svg|25px|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90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1990년 선거]]||[[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5|7|4|9}} 57.49%||400,386표||1위||[[파일:Seal_of_Arkansas.svg|25px|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1992년 선거]]||[[미국의 대통령 목록|미국의 대통령]]||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4|3|0|1}} 43.01%||44,909,889표(370명)||1위||[[파일:Seal_of_the_President_of_the_United_States.svg|25px]] |-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1996년 선거]]||[[미국의 대통령 목록|미국의 대통령]]||42대||[[민주당 (미국)|민주당]]||{{막대|청|4|9|2|4}} 49.24%||47,402,357표(379명)||1위||[[파일:Seal_of_the_President_of_the_United_States.svg|25px]] |} == 같이 보기 == * [[클린턴가]] * [[미국의 대통령 목록]]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인용집-줄|빌 클린턴}} *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130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빌 클린턴] * [http://clintonfoundation.org 클린턴 재단(영문)] * [http://www.bill-clinton-peace.blogspot.com/ Photos of Bill Clinton's actions to bring peace to the Middle East.] {{전임후임 |전임자 = [[조 퍼셀]] |후임자 = [[프랭크 화이트]] |대수 = 40 |직책 = [[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 |임기 = 1979년 1월 9일~1981년 1월 1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프랭크 화이트]] |후임자 = [[짐 가이 터커]] |대수 = 42 |직책 = [[아칸소주의 주지사|아칸소 주지사]] |임기 = 1983년 1월 11일~1992년 12월 12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러마 알렉산더]] |후임자 = [[존 H. 스누누]] |직책 = [[전미주지사협의회|전국 주지사 연합 의장]] |임기 = 1986년 8월 26일~1987년 7월 28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마이클 두카키스]] |후임자 = [[제임스 블랜차드]] |직책 = [[민주당 주지사 연합|민주당 주지사 연합 의장]] |임기 = 1988년~1989년 }} {{미국의 대통령 |전임자 = [[조지 H. W. 부시]] |후임자 = [[조지 W. 부시]] |대수 = 42 |임기 = 1993년 1월 20일~2001년 1월 2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자크 시라크]] |후임자 = [[토니 블레어]] |대수 = |직책 = [[G8|G8 의장]] |임기 = 1997년 }} {{전임후임 |전임자 = [[테드 터너]] |후임자 = [[피스메이킹|국제중재자]] |대수 = 66 |직책 =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92년 }} {{전임후임 |전임자 = [[앤디 그로브]] |후임자 = [[제프 베이조스]] |대수 = 72 |직책 =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98년 }} {{전임후임 |전임자 = [[조지 H. W. 부시]] |후임자 = [[조지 W. 부시]] |직책 = [[미국]]의 국가 원수 |임기 = 1993년 1월 20일~2001년 1월 20일 }} {{카롤루스 대제상 수상자}}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자}} {{타임 올해의 인물}} {{위대한 미국인}} {{전거 통제}} {{기본정렬:클린턴, 빌}} [[분류:빌 클린턴| ]] [[분류:1946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대통령]] [[분류:민주당 (미국)의 정치인]] [[분류:아칸소주의 정치인]] [[분류:민주당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92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96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미국의 유엔 직원]] [[분류:아칸소주지사]] [[분류:예일 대학교 동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동문]] [[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 [[분류:탄핵 절차가 진행된 공직자]] [[분류:로즈 장학생]] [[분류:미국의 침례교도]] [[분류:미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분류:미국의 회고록 작가]] [[분류:클린턴가]]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교수]] [[분류:미국의 인도주의자]] [[분류:카롤루스 대제상 수상자]] [[분류:뉴욕주의 민주당 당원]] [[분류:아칸소주의 민주당 당원]] [[분류: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인]] [[분류: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인]] [[분류:아칸소주 출신 작가]] [[분류:20세기 미국 사람]] [[분류:21세기 미국 사람]] [[분류:아칸소주의 변호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오일러}} {{과학자 정보 |이름 = 레온하르트 오일러 |원어이름 = {{lang|de|Leonhard Euler}} |그림 = Leonhard Euler.jpg |그림 크기 = 200px |그림 설명 =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초상화 |태어난 날 = {{출생일|1707|4|15}} |태어난 곳 = [[스위스 서약동맹]] [[바젤]] |죽은 날 = {{사망일과 나이|1783|9|18|1707|4|15}} |죽은 곳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지 = {{Plainlist| * [[스위스]] * [[프로이센]] * [[러시아 제국]] }} |국적 = 스위스 |분야 = [[수학]], [[물리학]] 등 |소속 = {{Plainlist| *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 |출신 대학 = [[바젤 대학교]] |지도교수 = [[요한 베르누이]] |지도학생 = |주요 업적 = {{Plainlist| * [[오일러 각]] * [[한붓그리기]] * [[오일러 공식]] *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 *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 [[오일러 항등식]] *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 *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 [[오일러 방정식]] * [[오일러 직선]] * [[오일러 수]] * [[오일러 운동 방정식]] * [[오일러의 정리]] * [[오일러 삼각형 정리]] * [[오일러 지표]] * [[오일러 피 함수]] * [[코시-오일러 방정식]] }} |수상 = |종교 =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서명 = Euler's signature.svg }} {{미적분학}} '''레온하르트 오일러'''({{llang|de|Leonhard Euler}}, {{llang|la|Leonhardus Eulerus|레온하르두스 에울레루스}},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논리학자]], [[공학자]]이다. [[미적분학]], [[그래프 이론]], [[위상수학]], [[해석적 수론]]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함수]] 기호 <math>f(x)</math>(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을 처음 도입하였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리는 ‘오일러 항등식’을 구안했다.<ref name="function">{{harvnb|Dunham|1999|p=17}}</ref> [[고전역학]], [[유체역학]], [[광학]], [[천문학]] 및 [[음악 이론]]<ref>{{웹 인용|url=https://scholarlycommons.pacific.edu/euler-works/33/|title=Tentamen novae theoriae musicae|author=Leonhard Euler|이름=|date=1739|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18세기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이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탈레스]], [[아르키메데스]]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문을 남겨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ref>https://www.cs.purdue.edu/homes/wxg/EulerLect.pdf</ref><ref>{{웹 인용|url=https://scholarlycommons.pacific.edu/euler/|제목=Euler Archive {{!}} University of the Pacific Research {{!}} Scholarly Commons|확인날짜=2020-08-15}}</ref>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보냈다. == 생애 == === 성장기 ===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ref name=Calinger>{{서적 인용| last = Calinger | first = Ronald S. | title = Leonhard Euler: Mathematical Genius in the Enlightenment | publisher = Princeton University Press | year = 2015 | page = 11 | isbn = 978-0-691-11927-4}}</ref>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다.<ref name="Calinger2">{{서적 인용|title=Leonhard Euler: Mathematical Genius in the Enlightenment|last=Calinger|first=Ronald S.|year=2015|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page=11|isbn=978-0-691-11927-4}}</ref> 오일러가 바젤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의 [[리헨]]으로 옮겨 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후 베르누이는 어린 오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ref name="childhood">{{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remarkablemathem0000jame|title=Remarkable Mathematicians: From Euler to von Neumann|last=James|first=Ioan|year=2002|publisher=Cambridge|page=[https://archive.org/details/remarkablemathem0000jame/page/2 2]|isbn=978-0-521-52094-2|url-access=registration}}</ref>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오일러는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27년에는 [[과학 아카데미 (프랑스)|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참가해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12번 수상하였다.<ref name="prize">{{harvnb|Calinger|1996|p=156}}</ref> ===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 [[파일:Euler-USSR-1957-stamp.jpg|왼쪽|섬네일|1957년 [[소련]]에서 오일러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ref>{{저널 인용|title=Leonhard Euler: The First St. Petersburg Years (1727–1741)|journal=Historia Mathematica|last1=Calinger|first1=Ronald|year=1996|volume=23|issue=2|pages=121–166|doi=10.1006/hmat.1996.0015|issn = 0315-0860 }}</ref><ref>{{웹 인용|url=http://www-history.mcs.st-andrews.ac.uk/Biographies/Bernoulli_Nicolaus%28II%29.html|title=Nicolaus (II) Bernoulli|last1=O'Connor|first1=John J.|last2=Robertson|first2=Edmund F.|website=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publisher=[[University of St Andrews]]|accessdate=25 August 2020}}</ref> 오일러는 이 제의를 수락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다.<ref>{{harvnb|Calinger|1996|p=125}}</ref>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ref>{{harvnb|Calinger|1996|p=127}}</ref>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ref name="prize"/>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ref>{{harvnb|Calinger|1996|p=128-29}}</ref>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 게오르크 젤(Georg Gsell)의 딸인 카타리나 젤(Katharina Gsell)과 결혼했다.<ref name="gekker">{{harvnb|Gekker|Euler|2007|p=[https://books.google.com/books?id=Ta9bz1wv79AC&pg=PA402 402]}}</ref> 두 사람은 [[네바강]] 옆의 집을 샀으며,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다섯 명 만이 살아남았다.<ref>{{웹 인용|url=http://www-history.mcs.st-and.ac.uk/~history/Extras/Euler_Fuss_Eulogy.html|title=Eulogy of Euler by Fuss|last=Fuss|first=Nicolas|accessdate=21 August 2020}}</ref> === 베를린 시절 === 1741년 6월 19일, 오일러는 러시아에서의 혼란을 피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으로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약 380편의 논문을 썼다. 1755년에 오일러는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오일러는 또한 프리드리히의 조카이자 [[안할트]] 공국의 공주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Friederike Charlotte)를 가르쳤다. 1760년대 초 오일러는 그녀에게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썼으며, 후에 이 편지들은 묶여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오일러의 편지([[:en:Letters to a German Princess]])'라는 저서로 출간되었다.<ref name="Digital Copy of Letters to a German Princess">{{웹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letterseulertoa00eulegoog|title=Letters to a German Princess on Diverse Subjects of Natural Philosophy|last=Euler|first=Leonhard|날짜=|웹사이트=|publisher=Internet Archive, Digitzed by Google|accessdate=21 August 2020}}</ref> 이 책에는 오일러의 인격과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수학 및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이 나타나 있다. 오일러의 많은 업적이 아카데미의 명성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궁정에 많은 지식인 집단이 있었으며, 수학자가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교하지 않고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일러는 기존의 사회 질서나 관습적인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단순하고 경건한 종교인이었는데 이는 당시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던 [[볼테르]]과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였다. 오일러는 숙련된 토론자가 아니었고,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주 볼테르의 놀림거리가 되었다.<ref>{{harvnb|Dunham|1999|pp=xxiv–xxv}}</ref> === 시력 악화 === 러시아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동안 오일러의 시력은 점차 악화되었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이 지난 1738년에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독일에 있는 동안 더 악화되었고, 그런 오일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은 [[키클롭스]]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하였다. 1766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이 실패하여 왼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암산 및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약 1만 3천 행에 달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ref name="volumes">{{저널 인용|title=Biography – Leonard Euler|journal=The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last=Finkel|first=B.F.|year=1897|volume=4|issue=12|pages=297–302|doi=10.2307/2968971|jstor=2968971}}</ref>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사망 === [[파일:Euler_Grave_at_Alexander_Nevsky_Monastry.jpg|왼쪽|섬네일|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있는 오일러의 묘]]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오일러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며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라고 썼다.<ref>{{웹 인용|url=http://www.math.dartmouth.edu/~euler/historica/condorcet.html|title=Eulogy of Euler&nbsp;– Condorcet|author=Marquis de Condorcet|author-link=Marquis de Condorcet|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60916192456/http://www.math.dartmouth.edu/~euler/historica/condorcet.html|archive-date=16 September 2006|url-status=live|access-date=30 August 2006}}</ref> 오일러는 바실례프스키섬에 있는 스몰렌스크 루터회 공동묘지에 있는 부인 카타리나의 묘지 옆에 묻혔다. 1837년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기존의 묘비를 새 것으로 교체했다. 오일러가 태어난지 250년째 되는 해인 1957년에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sfn|Calinger|2016|pp=530–536}} == 업적 == 오일러는 [[기하학]], [[미적분학]], [[삼각법]], [[대수학]], [[정수론]] 등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뿐만 아니라 [[연속체 역학]], [[천문학]] 등 여러 물리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많은 수학 개념에 오일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자신의 이름을 딴 상수가 두 개인([[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와 [[자연로그의 밑|오일러 상수]]) 유일한 수학자이다. === 수학 기호 === 오일러는 현재 사용하는 다수의 [[수학 기호]]들을 도입하거나 대중화하였다. [[함수]]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변수]] x에 대한 함수 f를 <math>f(x)</math>로 표기하였다.<ref>{{harvnb|Dunham|1999|p=17}}</ref> 또한 현대의 [[삼각함수]] 표기법을 도입했으며, [[자연로그의 밑]]을 <math>e</math>(오일러 수라고도 함.)로 표기하였다. [[급수 (수학)|수열의 합]]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 문자 [[Σ]](시그마)를 사용하였고, [[허수 단위]]를 <math>i</math>로 표기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historyofmathema00boye/page/439|title=A History of Mathematics|last=Boyer|first=Carl B.|author2=Merzbach, Uta C.|author2-link=Uta Merzbach|year=1991|publisher=[[John Wiley & Sons]]|pages=[https://archive.org/details/historyofmathema00boye/page/439 439–45]|isbn=978-0-471-54397-8}}</ref> 그리고 [[원주율]]을 <math>\pi</math>로 표기하는 것을 대중화시켰다.(<math>\pi</math>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웨일스]]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 (수학자)|윌리엄 존스]]이다.)<ref>{{웹 인용|url=http://www.stephenwolfram.com/publications/mathematical-notation-past-future/|title=Mathematical Notation: Past and Future|last=Wolfram|first=Stephen|날짜=|웹사이트=|출판사=|accessdate=25 August 2020}}</ref> === 해석학 === 18세기에 [[베르누이가|베르누이 일가]]는 아직 기초 단계에 머무르던 [[미적분학]]이 발전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오일러는 미적분학을 주로 연구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가 남긴 몇 가지 증명은 현대 수학에 비추었을 때 엄밀한 증명은 아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미적분학이 발전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오일러는 [[멱급수]]를 연구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래와 같은 여러 함수들을 멱급수 꼴로 나타내었다. <math>e^x = \sum_{n=0}^\infty {x^n \over n!} = \lim_{n \to \infty} \left(\frac{1}{0!} + \frac{x}{1!} + \frac{x^2}{2!} + \cdots + \frac{x^n}{n!}\right).</math> 오일러는 <math>e</math>와 [[역삼각함수|역탄젠트함수]]가 멱급수 꼴로 표현됨을 증명하였으며(간접적인 증명은 1670년과 1680년 사이에 [[아이작 뉴턴|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가 제시하였다.), 1735년에는 멱급수를 이용하여 [[바젤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1741년에 바젤 문제의 더 정교한 증명을 제시하였다.<ref>{{서적 인용| last = Wanner| first = Gerhard|author2=Hairer, Ernst | title = Analysis by its history| edition = 1st|date=2005| publisher = Springer| page = 63}}</ref> [[파일:Euler's_formula.svg|섬네일|[[오일러 공식]]의 도식화]] 오일러는 [[지수 함수|지수함수]]와 [[로그|로그함수]]를 해석적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로그함수를 멱급수 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음수와 [[복소수]] 영역으로 로그함수의 정의역을 확장시켰다.<ref>{{서적 인용|title = A History of Mathematics|last = Boyer|first = Carl B.|author2 = Merzbach, Uta C.|author2-link = Uta Merzbach|publisher = [[John Wiley & Sons]]|isbn = 978-0-471-54397-8|pages = [https://archive.org/details/historyofmathema00boye/page/439 439–45]|year = 1991|url = https://archive.org/details/historyofmathema00boye/page/439}}</ref> 또한 지수함수의 정의역도 복소수까지 넓혔으며,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오일러 공식]]을 발견하였다. 다음의 오일러 공식은 실수 <math>\varphi</math>에 대해 허수지수 <math>i\varphi</math>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math>e^{i\varphi} = \cos \varphi + i\sin \varphi.</math> <math>\varphi=\pi</math>일 때는 다음의 [[오일러 항등식]]을 얻을 수 있으며, 오일러 항등식은 기본 연산인 덧셈, 곱셈, 지수와 수학에서 중요한 상수인 0, 1, <math>e</math>, <math>i</math>, <math>\pi</math>가 한 번씩 들어간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린다.<ref>{{서적 인용|last= Feynman|first= Richard|title=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volume= I|page=10 |chapter= Chapter 22: Algebra |date= 1970}}</ref> <math>e^{i \pi} +1 = 0 </math> 이 외에도 오일러는 [[감마 함수|감마함수]]를 도입하여 [[초월함수]]를 정교화하였고, [[사차 방정식|사차방정식]]의 새로운 풀이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복소수 극한의 적분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는 [[복소해석학]]으로 발전하였다. 또 오일러는 미적분학의 한 분야인 [[변분법]]을 창시하였으며,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일러는 [[정수론]] 분야의 문제를 해석적으로 접근하였는데, 이로써 수학의 서로 다른 분야였던 해석학과 정수론을 합친 [[해석적 수론]]이 탄생하였다. 오일러는 [[초기하함수]], [[쌍곡선 함수]]에 대한 이론 및 [[연분수]]에 대한 해석적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이용하여 소수의 무한성을 증명하였으며, 소수의 분포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해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일러의 업적은 이후 [[소수 정리]]로 발전하였다.<ref name="analysis">{{harvnb|Dunham|1999|loc=Ch. 3, Ch. 4}}</ref> === 정수론 ===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동료였던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에게 영향을 받아 [[정수론]]에 흥미를 가졌다. 정수론에서 오일러의 많은 초기 업적들은 [[피에르 드 페르마]]가 한 일에 기반을 두었으며, 오일러는 페르마의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키거나 반증하였다. 오일러는 소수의 분포에 대해 해석적으로 접근하였으며, [[소수의 역수의 합의 발산성]]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그는 [[리만 제타 함수]]와 소수의 관계를 발견하였고, 이는 리만 제타 함수에서의 [[오일러의 곱셈 공식|오일러 곱]]으로 알려져 있다.<ref>{{서적 인용|제목=리만 가설|성=존 더비셔|이름=박병철 역|날짜=2006년 10월 10일|판=|출판사=승산|쪽=154|장=}}</ref> 오일러는 [[뉴턴 항등식]], [[페르마 소정리]], [[페르마 두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였고, [[라그랑주 네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 양의 정수 ''n''에 대해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를 나타내는 [[오일러 피 함수]] φ(''n'')를 만들었다. 그는 이 함수를 사용하여, 페르마 소정리를 일반화한 [[오일러의 정리]]를 증명하였다. 오일러는 [[완전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짝수 완전수와 [[메르센 소수]]가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오일러는 [[이차 상호 법칙]]을 추측하였으며, 이 법칙은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증명하였다.<ref>{{harvnb|Dunham|1999|loc=Ch. 1, Ch. 4}}</ref> 1772년에 오일러는 2<sup>31</sup> − 1 = [[2147483647|2,147,483,647]]이 메르센 소수임을 증명하였고, 이는 1867년까지 알려진 가장 큰 소수로 남아있었다.<ref>Caldwell, Chris. [http://primes.utm.edu/notes/by_year.html ''The largest known prime by year'']</ref> === 그래프 이론 === [[파일:Konigsberg_bridges.png|오른쪽|프레임|오일러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의 지도. 프레겔 강과 일곱 개의 다리는 색으로 구분하였다.]] 1735년에 오일러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로 알려진 다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ref>{{저널 인용| last = Alexanderson| first = Gerald|authorlink=Gerald L. Alexanderson|date=July 2006| title = Euler and Königsberg's bridges: a historical view| journal = Bulletin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doi = 10.1090/S0273-0979-06-01130-X| volume = 43| page = 567| issue = 4| doi-access = free}}</ref>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는 [[프레골랴 강|프레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에는 두 개의 큰 섬과 각 섬을 연결하는 총 7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때 7개의 다리들을 한 번씩만 건너면서 처음 시작한 위치로 돌아오는 길이 존재하는가가 문제였고, 오일러는 그러한 길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이 문제는 [[평면 그래프]]에서의 [[한붓그리기]] 문제로, [[그래프 이론]]의 시초로 여겨진다. 오일러는 또한 1752년에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로 불리는 식 <math>V-E+F=2</math>를 발견하였다.<ref>{{서적 인용|first=Peter R. |last=Cromwell |title=Polyhedra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OJowej1QWpoC&pg=PA189 |year=1999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978-0-521-66405-9 |pages=189–90}}</ref> <math>V</math>는 다면체의 꼭짓점 개수, <math>E</math>는 다면체의 모서리 개수, <math>F</math>는 다면체의 면의 개수이며, 상수는 3차원에서의 [[오일러 지표]]로 [[곡면 종수]]와 관련된 값이다.<ref>{{서적 인용|first=Alan |last=Gibbons |title=Algorithmic Graph Theory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Be6t04pgggwC&pg=PA72 |year=1985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978-0-521-28881-1 |page=72}}</ref> 이 식은 이후 [[오귀스탱 루이 코시]]<ref>{{저널 인용|author=Cauchy, A.L.|year=1813|title=Recherche sur les polyèdres – premier mémoire|journal=[[Journal de l'École Polytechnique]]|volume= 9 (Cahier 16)|pages=66–86}}</ref>와 [[시몽 앙투안 장 륄리에]]<ref>{{저널 인용|author=L'Huillier, S.-A.-J.|title=Mémoire sur la polyèdrométrie|journal=Annales de Mathématiques|volume=3|year=1861|pages=169–89}}</ref>에 의해 발전하였으며, [[위상수학]]의 시초로 여겨진다. === 응용 수학 === 오일러는 실제 세계에서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해결하는 것과, [[베르누이 수]], [[푸리에 급수]], [[오일러 수]], [[자연로그의 밑]], [[원주율]], [[연분수]]와 [[적분]] 등을 응용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물리 문제에 미분을 쉽게 적용하도록 발전시켰고, [[오일러 방법|오일러 근사]]으로 알려진 적분의 [[수치해석학|수치근사]]를 개선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잘 알려진 오일러 근사로는 [[오일러 방법]]과 [[오일러-매클로린 공식]]이 있다. 오일러는 또한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를 도입하여 [[미분방정식]]의 사용을 용이하게 하였다. 오일러는 수학적 아이디어를 음악에 응용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739년에 [[음악 이론]]이 수학의 한 분야로 통합되기를 바라면서 《Tentamen novae theoriae musicae》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음악가에게는 너무 수학적이라는 이유로 수학자에게는 너무 음악적이라는 이유로 폭넓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다.<ref>{{harvnb|Calinger|1996|pp=144–45}}</ref> == 같이 보기 == * [[오일러의 정리]] * [[다니엘 베르누이]] * [[오일러의 곱셈 공식|오일러의 곱셈 공식 (소수와 오일러-리만제타함수)]] * [[기둥#좌굴 하중|오일러 좌굴 하중]] * [[오일러의 거듭제곱의 합 추측]] == 참고 문헌 == * {{저널 인용|title=Leonhard Euler: The First St. Petersburg Years (1727–1741)|journal=Historia Mathematica|last=Calinger|first=Ronald|year=1996|volume=23|issue=2|pages=121–66|doi=10.1006/hmat.1996.0015|ref=harv}} * {{서적 인용|authorlink=William Dunham (mathematician) |first=William |last=Dunham |title=Euler: The Master of Us All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uKOVNvGOkhQC |year=1999 |publisher=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 |isbn=978-0-88385-328-3 |ref=harv}} * {{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Ta9bz1wv79AC|title=Euler and Modern Science|last1=Gekker|first1=I. R.|last2=Euler|first2=A. A.|year=2007|editor1-last=Bogolyubov|editor1-first=Nikolaĭ Nikolaevich|editor1-link=Nikolay Bogolyubov|editor2-last=Mikhaĭlov|editor2-first=G. K.|publisher=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chapter=Leonhard Euler's family and descendants|isbn=978-0-88385-564-5|ref=harv|editor3-last=Yushkevich|editor3-first=Adolph Pavlovich|editor3-link=Adolph P. Yushkevich|translator=Robert Burns}}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인용집-줄}} * {{MacTutor Biography|id=Euler|date=1998-09}} * {{MathGenealogy|id=38586}} * {{웹 인용|url=http://eulerarchive.maa.org/|제목=The Euler Archive|출판사=The 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 {{마법진}} {{전거 통제}} {{기본정렬:오일러, 레온하르트}} [[분류:레온하르트 오일러| ]] [[분류:1707년 출생]] [[분류:1783년 사망]] [[분류:18세기 수학자]] [[분류:스위스의 수학자]] [[분류:스위스의 물리학자]] [[분류:스위스의 음악 이론가]] [[분류:탄도학자]] [[분류:스위스의 개신교도]] [[분류:바젤슈타트주 출신]] [[분류:바젤 대학교 동문]] [[분류:스위스의 장애인]] [[분류:시각 장애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유체역학자]] [[분류:수론학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1-10-18}} {{인공지능}} '''중국어 방''' 혹은 '''중국인 방'''({{llang|en|Chinese room}})은 [[존 설]](John Searle)이 [[튜링 테스트]]로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 사고 실험 ==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우선 방 안에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들어간다. 그 방에 [[필담]]을 할 수 있는 도구와, 미리 만들어 놓은 [[중국어]] 질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 목록을 준비해 둔다. 이 방 안으로 중국인 심사관이 중국어로 질문을 써서 안으로 넣으면 방 안의 사람은 그것을 준비된 대응표에 따라 답변을 중국어로 써서 밖의 심사관에게 준다.}}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중국인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국어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할 뿐이다. 이로부터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완벽히 한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진짜로 이해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이 있어서 질문 답변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도 그것이 지능을 가졌는지는 [[튜링 테스트]]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 정형화된 논증 == 1984년 설은 좀 더 정식적인 버전으로 ‘중국어 방’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의 전제는 네 명제로 이뤄져 있다. * 전제 1. 뇌는 마음을 발생시킨다. * 전제 2. [[통사론|통사법]]은 [[의미론]]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 전제 3. 컴퓨터 프로그램은 전적으로 그것의 형식적이고 통사론적 구조에 의해 정의된다. * 전제 4. 마음은 의미론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중국어 방을 통한 논변으로 뒷받침되었고, 때문에 존 설은 오직 형식적인 통사론적 규칙에 따르는 방을 유지시켰으며 또한 이 방 안의 존재는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 설은 곧바로 세 가지의 결론을 도출했다. * 결론 1.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스스로에 의해 마음의 시스템과 같은 효과를 주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프로그램은 마음이 아니다. * 결론 2. 마음을 발생시키는 뇌의 기능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 결론 3. 마음을 가진(혹은 마음을 발생시키는)모든 것들은 최소한 뇌와 동등한 수준의 인과력(causal powers)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설은 이 논증을 “과도하게 조야한(excessively crude)” 것으로서 기술한다. 이 논증이 실제로 타당한지에 대한 고려할 만한 논박이 존재한다. 그 논의들은 전제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집중되어있다. 어떤 이는 전제 3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통사론적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의미론적 내용은 포함할 수 없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전제 2, 3, 4는 타당하게 결론 1을 도출해 낸 것으로 결론낼 수도 있다. 이것은 논쟁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내용의 기원으로 이끌고 간다. == 반론 == 이와 같은 논리를 뇌 안의 뉴런과 언어이해력에 대해 적용해 보면, 인간조차 언어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의 사람과 중국어 방을 더한 총체는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 중국인 방 이론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출처|날짜=2017-10-23}} 한 예로 [[애플]]사의 [[시리]]는 본질적으로는 미리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입력된 문장을 분석하고 적당한 문장을 출력하는 '중국인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리가 아주 훌륭한 인공지능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 같이 보기 == * [[중국인 체육관]] * [[계산주의]] {{마음의 철학}} {{전거 통제}} [[분류:인공지능]] [[분류:사고 실험]] [[분류:철학적 논증]] [[분류:심리철학에 관한 사고 실험]] [[분류:기술철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FileFolders.svg|섬네일|계층적으로 구분되는 파일과 폴더]] '''컴퓨터 파일'''({{lang|en|computer file}}, [[순화어]]: 기록철)은 [[컴퓨터]] 등의 기기에서 의미가 있는 [[정보]]를 담는 논리적인 단위이다. [[하드디스크]], [[콤팩트 디스크|CD]], [[DVD]] 등 [[저장매체]]에 대하여 추상화된 정보 단위이다. 운영체제는 파일 조작에 관련된 기능을 [[API]]로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파일의 [[파일 이름|이름]]과 [[파일 확장자|확장자]]로 식별하며, [[운영 체제]]에 따라 대소문자를 구별하거나 구별하지는 않는다. == 역사 == "파일"이라는 낱말은 1952년 일찍이 [[천공 카드]]에 저장된 정보를 가리키는 뜻으로 컴퓨터 기억 장치 환경에 나타났다.<ref>Robert S. Casey, et al. Punched Cards: Their Applications to Science and Industry, 1952. ISBN.</ref> 이용 초기에 사람들은 콘텐츠라기 보다는 뒷받침하는 하드웨어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에서 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IBM 350]] 디스크 드라이브는 "디스크 파일"이라고 불렸다.<ref>Martin H. Weik.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Report #1115. March 1961. pp. 314-331</ref> 1962년의 [[CTSS]](호환 시분할 시스템)와 같은 시스템은 여러 개의 파일들을 하나의 기억 장치에 제공하였던 파일 시스템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용어로 자리잡게 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CTSS에서의 파일 이름은 사용자가 인지할 수 있는 기본 이름(primary name)과 파일 형태를 가리키는 두 번째 이름(secondary name),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ref>{{웹 인용 |url=http://larch-www.lcs.mit.edu:8001/~corbato/sjcc62/ |제목=An Experimental Time-Sharing System<!--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9-09-1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906104446/http://larch-www.lcs.mit.edu:8001/~corbato/sjcc62/ |보존날짜=2009-09-06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 |url=http://www.lcs.mit.edu/publications/pubs/pdf/MIT-LCS-TR-016.pdf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09년 9월 1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913210311/http://www.lcs.mit.edu/publications/pubs/pdf/MIT-LCS-TR-016.pdf# |보존날짜=2006-09-13 |url-status=dead }}</ref>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비롯한 여러 운영 체제에서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용어 [[레지스터 파일]]이 파일의 초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 이용 == 운영 체제와 그에 수반되는 파일 시스템에 따라 프로그램이 파일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다음의 기능이 일반적으로 활용된다: * 주어진 이름으로 파일을 만든다. * 파일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특성을 설정한다. * 파일을 열어 콘텐츠를 사용한다. * 콘텐츠를 읽거나 새로 고친다. * 새로 고친 콘텐츠를 안정적인 기억 장소로 위임한다. * 다시 열릴 때까지 접근을 못하게 하기 위해 파일을 닫아 둔다. == 종류 == 파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텍스트 파일]] * 바이너리 파일([[이진 파일]]) 텍스트 파일은 [[ASCII]]나 [[유니코드]]로 이루어진다. 보통 텍스트 파일들은 [[메모장 (소프트웨어)|메모장]]으로 읽을 수 있다. 이진 파일은 0 또는 1의 데이터의 연속을 저장한 파일이다. 대부분의 [[문서 편집기]]에서는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글자가 깨진다. == 각주 == <references /> == 같이 보기 == * [[디스크 블록]] * [[컴퓨터 파일 관리]] * [[파일 복사]] * [[파일 삭제]] * [[파일 이동]] * [[파일 디렉터리]] * [[파일 관리자]] * [[파일 이름]] * [[파일 크기]] * [[파일 시스템]] * [[플랫 파일]] * [[소프트 카피]] == 외부 링크 == * {{dmoz|Computers/Data_Formats/ Data Formats}} {{컴퓨터 파일}} {{전거 통제}} {{토막글|운영체제|컴퓨터 과학}} [[분류:컴퓨터 파일| ]] [[분류:파일 시스템]] [[분류:프로세스 간 통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PDA}} [[파일:PalmPilot5000.jpg|섬네일|200px|팜 파일럿 5000]] {{위키공용|Personal digital assistant}} '''개인 정보 단말기'''({{llang|en|PDA, Personal Digital Assistant 또는 handheld PC}})는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사용하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컴퓨터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계산장치라는 의미의 휴대용 소형 컴퓨터에 개인의 일정관리와 검색, 관리 기능이 있는 주소록의 기능을 추가한 것을 말한다. 또, [[데스크톱 컴퓨터]]와 [[랩톱 컴퓨터|노트북]]의 자료를 서로 주고 받기 쉽다. 현재는 PDA와 [[휴대 전화]]의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서 PDA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슈퍼마켓 또는 편의점에서는 정보 누출 우려로 인해 PDA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 개요 == 이 용어는 [[1992년]] [[라스베이거스]] 전자 전시회(CES;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선보인 [[애플|애플사]]의 [[애플 뉴턴|뉴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6년 Psion 3 와 [[팜 파일럿]]이 최초로 PDA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다. 현재 PDA의 주요 [[운영 체제]]로는 [[팜소스]]사의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CE]], [[리눅스]], [[심비안]] 등이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서는 개인 일정 관리 위주의 수첩 대용이었으나, [[PDA폰]]으로 대중화된 이후, 이동통신 기능뿐 아니라, 카메라, [[무선랜]], [[GPS]] 등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게 발전하고 있다. == 역사 == [[파일:Psion Organiser 1.jpg|섬네일|Psion Organiser]] 만약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PDA의 정의에 맞는 기기를 추적해 볼 때 현재로서 발견된 최초의 PDA는 영국의 Psion plc.가 출시한 포켓 컴퓨터 Psion Organiser이다. 이때는 PDA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Psion사는 이 제품을 "최초로 쓸만한 포켓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첫번째 모델은 현재의 공학용 계산기의 기능과 형태에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으며,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모델은 다른 장치와 연결할 수 있었다. 1991년 [[HP (기업)|HP]]사에서 [[로터스 1-2-3]]을 휴대하기 편리하게 쓰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만든 HP95LX은 비록 팜탑 컴퓨터였고 팜탑 컴퓨터로서 판매되었지만, 마찬가지로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역시 PDA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 제품은 모바일 OS가 아닌 [[MS-DOS]]를 사용하였고, 로터스 1-2-3과 PIMS를 롬에 내장시켰으며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비표준 디스플레이 및 카드 슬롯과 제한된 메모리 용량으로 인해 일반적인 도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HP는 1994년에 후계작 HP200LX를 출시했다. HP200LX는 640*240 해상도의 CGA 디스플레이와, 2 메가바이트 메모리, 표준 [[PCMCIA]] 슬롯을 사용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것을 한국에서 [[보험설계사]] 공급용으로 대량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단종되었다. 키보드 입력과 텍스트 응용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PDA의 대중화에 한 몫 하였다. 최초의 PDA와 관련한 내용은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글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거듭되고 있다. 1992년 애플이 PD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는 PDA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따라서 Psion 제품을 최초의 PDA 제품이라고 할 수 없으며, HP 95LX, 200LX 제품군은 PDA가 아니라 팜탑(노트북)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모두 PDA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PDA들은 범용성을 위해 모바일 OS와 더불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SDK를 제공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스마트폰이란 용어로 통일 되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의미가 달랐다. 과거 PDA폰은 핸드폰과 PDA 기능이 결합된 제품, 스마트폰은 핸드폰과 PDA의 기능이 결합 되었으나 기능적으로 부족한 제품들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PDA폰에는 터치 스크린이 적용된 반면 스마트폰에는 일반 스크린이 적용되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사용된 포켓 PC는 각 모뎀별로 호환이 서로 되지 않았으나, 2003년 Windows Mobile 2003이 출시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었고 윈도우는 스마트폰 대중화 이전인 2000년대 후반까지 PDA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였다. == 쓰임새 == === 일정관리 === 하루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알람 기능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입력 자료를 동기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 주소록 === 가나다/A to Z 순으로 조회를 할 수 있는 주소록은 데스크톱과 연동하여 관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과 연동할 수 있다. === 기타 응용 === 개념이 애매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PDA는 개인 정보 관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대체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용량의 한계 때문에 [[UMPC]] 등이 출시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일반 대중에게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어 단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응용에서는 운영 체제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원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산기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계산기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게임을 설치하여 휴대용 게임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등, 본래 기능 이외에 부가적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 PDA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 산업용 === '''산업용 PDA'''는 산업시장에서 요구되는 휴대성·컴퓨팅 성능·높은 확장성·견고함을 충족하여 일반 [[PDA]] 및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PDA이다. IP rate (방진,방수)과 낙하충격에 대응하는 견고함과 바코드 스캐너, 내장프린터, RFID reader, 마그네틱카드리더, GPS등을 내장 혹은 외장형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업무용도로 적용될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vertical market에서 요구되는 제품들로 인해 굳이 산업용 (industrial PDA)라고 명명하기 어려우나 대표적으로는 industrial & enterprise PDA 또는 Rugged Mobile computer로 불리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TOP3 제조사로는 모토톨라(구 Symbol), Intermec, Honeywell(HHP를 인수)사가 있고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중 모토롤라가 전 세계 약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메이저 업체로는 Psion Teklogix, DataLogic, Casio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용 PDA 제조사가 존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PDA 제조사로는 블루버드 (Bluebird)가 있고, 그 외 캐치웰(구:이노텔리텍), M3 Mobile(구: 모바일컴피아), 대신정보통신, 포인트모바일, 웅진ST, 모비트론, ITwell, 비인터렉티브 등 여러 업체가 있다. 전 세계 Mobile Computer Manufacturer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 Motorola # Honeywell # Datalogic # 블루버드 (Bluebird) 개인용 스마트폰 대형 제조사 중 하나인 대만 HTC에서도 바코드 스캐너를 내장한 PDA를 런칭하였고, 중국과 인도의 중소규모 전자업체에서도 산업용 PDA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추세이나 영향력이 높지않다. == PDA의 종류 == * 호환성 높은 [[포켓 PC]] ([[윈도우 CE]]기반) * 휴대성과 간편성을 겸비한 [[팜 파일럿]] * 미려한 디자인의 팜 호환 [[클리에]] * 완벽한 [[한글]] 지원과 휴대성이 특징인 [[셀빅]] * [[리눅스]] [[운영 체제]] 기반의 [[요피]] * [[리눅스]] [[운영 체제]] 기반의 [[자우르스]] [[시리즈]] == PDA의 운영 체제 == PDA의 운영 체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의 [[포켓 PC]], [[애플]]의 [[iOS]] 그리고 [[심비안]]의 [[EPOC]]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또 [[리눅스]]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셀빅]]도 있다. === [[팜 OS]] === 1996년에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팜은 세계 PDA의 약 60%를 차지한다.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많고 배터리 소비가 적으며 많은 반MS 기업과 제휴를 맺었다. (삼성, 소니 등)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기반 ===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PDA의 운영 체제는 [[윈도우 CE]], [[포켓 PC]]와 [[윈도우 모바일]]이 있다. 윈도우 CE는 [[PMP]]와 같은 기기에 주로 사용되며, 포켓 PC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운영 체제로 구형 PDA에, 윈도우 모바일은 최근의 PDA에 사용된다. ==== [[윈도우 CE]] ==== 개인용 컴퓨터용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비슷하며 대개 배터리 소모가 많다. 초기 [[윈도우 CE]] 1.0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전력 소모와 느린 처리 시간 때문에 외면 받았지만 많은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 [[포켓 PC]] === 윈도우 CE 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운영 체제이다. 320x240, 640x480, 320x320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승인을 거친 기기만 포켓 PC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다. [[2007년]]에 윈도우 모바일 6이 공개되면서 포켓 PC라는 명칭이 더 이상 자사 제품에 사용되지 않는다. === [[iOS]] === [[애플]]의 [[iOS]]는 [[맥 OS X]]PC판과 비슷하며, [[아이폰]], [[아이폰 4]], [[아이팟 터치]] 및 [[아이패드]]에 채용되었다. === [[셀빅]] === 대한민국 기업인 제이텔이 만든 PDA이자 운영 체제의 이름이다. 셀빅 OS라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자체 개발하였는데 한글 지원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셀빅 OS는 팜 OS와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응용 프로그램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컬러를 지원하는 2.0까지 개발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인해 현재는 사실상 회사가 없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 [[리눅스 계열|리눅스]] 기반 === 리눅스를 기본 운영 체제로 탑재한 PDA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샤프(Sharp) 사에서 만든 자우루스(Zaurus)는 가장 많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우루스의 운영 체제는 큐토피아(Qtopia)로 리눅스 커널 2.4.20을 기반으로 한다. [[오픈 자우루스]](open zaurus)로 샤프(Sharp) 사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리눅스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지메이트사에서 만든 요피(YOPY) 시리즈가 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 현재는 제품이 단종되고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요피의 운영 체제인 리누피(Linupy)는 커널 2.4 기반의 엑스 윈도우(X-Window) 시스템을 사용한다. 현재 HP iPaq, 팜 및 다른 여러 기기에 리눅스를 탑재하려는 노력이 개인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안드로이드]] ===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개발한 [[운영 체제]]로서, 스마트폰, PDA, 스마트북 등에 사용된다. == 같이 보기 == * [[차량 자동 항법 장치]] * [[정보 기기]] * [[펜 컴퓨팅]]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s://web.archive.org/web/20100423195523/http://www.kpug.kr/ 한국 포터블 사용자 그룹 KPUG] * [[클리앙]] * [https://web.archive.org/web/20101129000727/http://startpda.kr/ 스타트 PDA] * [[투데이스피피시]] * [https://web.archive.org/web/20070627024116/http://www.zaurusian.net/ 한국 자우루스 사용자 모임] * [https://web.archive.org/web/20060220125734/http://openzaurus.sourceforge.net/wordpress/ 오픈자우루스 웹페이지] * [https://web.archive.org/web/20100418214107/http://www.kcug.pe.kr/ 한국셀빅유저그룹 KCUG ] * [http://www.khug.org/ 한국 핸드헬드 PC 사용자 그룹] {{컴퓨터 크기}} {{전거 통제}} [[분류:PDA| ]] [[분류:정보 기기]] [[분류:시간 관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Crystal Project computer.png|섬네일|right|컴퓨터 구성 요소가 포함된 금속 케이스, 디스플레이 모니터 및 키보드(표시되지 않은 마우스)를 포함하는 2000년대 데스크톱 스타일의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예술가의 묘사]] '''개인용 컴퓨터'''({{llang|en|personal computer, PC}})는 [[회사|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보통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 PC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미국]]의 [[IBM]]사와 [[휴렛 팩커드]]사가 발매한 기종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 때는 [[트랜지스터]] 방식이었으나 그 후 [[마이크로컴퓨터]]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PC 시대를 맞게 되었다. 1960년대 기관이나 기업의 컴퓨터 소유자는 컴퓨터로 유용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했다. 개인용 컴퓨터 사용자가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상용 소프트웨어, 대부분 독점인 무료 소프트웨어("프리웨어") 또는 "즉시 실행 가능" 또는 "이진 형식"으로 제공되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실행한다. 개인용 컴퓨터용 소프트웨어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또는 운영 체제 제조업체와 독립적으로 개발 및 배포된다. 최종 사용자 프로그래밍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많은 개인용 컴퓨터 사용자는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더 이상 프로그램을 작성할 필요가 없다. 이는 제조업체가 지원하는 채널을 통해서만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시스템과 대조되며 제조업체의 지원 부족으로 인해 최종 사용자 프로그램 개발이 방해받을 수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운영 체제(처음에는 MS-DOS, 그 다음에는 윈도우)와 인텔 하드웨어(총칭하여 "[[윈텔]]"이라고 함)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지배해 왔으며 오늘날 "PC"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유비쿼터스 윈텔 플랫폼을 의미한다. 윈도우의 대안은 시장에서 소수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애플의 맥 플랫폼(macOS 운영 체제 실행)과 리눅스와 같은 자유-오픈 소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가 포함된다. 1990년대까지 주목할만한 다른 플랫폼으로는 코모도어의 아미가와 NEC의 [[PC-98]]이 있었다. == 역사 == <div class=floatright> <timeline> ImageSize=width:375 height:350 PlotArea=left:60 bottom:51 top:10 right:16 AlignBars=justify Period=from:0 till:400 TimeAxis=orientation:horizontal Colors= id:gray value:gray(0.5) id:line1 value:gray(0.9) id:line2 value:gray(0.7) ScaleMajor=unit:year increment:50 start:0 gridcolor:line2 ScaleMinor=unit:year increment:50 start:0 gridcolor:line1 BarData= bar:1996 text:1996 bar:1997 text:1997 bar:1998 text:1998 bar:1999 text:1999 bar:2000 text:2000 bar:2001 text:2001 bar:2002 text:2002 bar:2003 text:2003 bar:2004 text:2004 bar:2005 text:2005 bar:2006 text:2006 bar:2007 text:2007 bar:2008 text:2008 bar:2009 text:2009 bar:2010 text:2010 bar:2011 text:2011 bar:2012 text:2012 bar:2013 text:2013 bar:2014 text:2014 bar:2015 text:2015 bar:2016 text:2016 bar:2017 text:2017 PlotData= color:tan1 width:10 bar:1996 from:start till:70.90000 text:70.9 million bar:1997 from:start till:80.60000 text:80.6 million bar:1998 from:start till:92.90000 text:92.9 million bar:1999 from:start till:113.500000 text:113.5 million bar:2000 from:start till:134.700000 text:134.7 million bar:2001 from:start till:128.10000 text:128.1 million bar:2002 from:start till:132.40000 text:132.4 million bar:2003 from:start till:168.90000 text:168.9 million bar:2004 from:start till:189.0000 text:189 million bar:2005 from:start till:218.50000 text:218.5 million bar:2006 from:start till:239.4 text:239.4 million bar:2007 from:start till:271.20000 text:271.2 million bar:2008 from:start till:290.80000 text:290.8 million bar:2009 from:start till:308.30000 text:308.3 million bar:2010 from:start till:350.90000 text:350.9 million bar:2011 from:start till:365.400000 text:365.4 million bar:2012 from:start till:351.100000 text:351.1 million bar:2013 from:start till:316.50000 text:316.5 million bar:2014 from:start till:313.70000 text:313.7 million bar:2015 from:start till:287.70000 text:287.7 million bar:2016 from:start till:269.70000 text:269.7 million bar:2017 from:start till:259.40000 text:259.4 million TextData= pos:(70,20) textcolor:gray fontsize:S text:Worldwide PC sales TextData= pos:(70,5) textcolor:gray fontsize:S text:(1996–2017) </timeline></div> PC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IBM]]에서 생산한 개인용 컴퓨터의 상품명인 [[IBM PC]]에서 유래하고부터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각종 [[디지털]] 정보의 저장·관리·통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감상, [[게임]], [[채팅]] 등에 쓰이기도 한다. 최초로 상업적으로 판매된 개인용 컴퓨터는 MITs사의 [[알테어 8800]]이었으며, 이를 본따 많은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이후 애플 II컴퓨터, 코모도어 VIC-20 등이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이후, MS와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MS-DOS와 윈텔 플랫폼으로 대부분 지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PC가 16비트에서 32비트로 개편될 조짐을 보였고<ref>{{뉴스 인용 |제목= PC업계 32비트중심으로 개편 움직임 |url=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3393661 |출판사= |저자= |쪽= |날짜=1990-07-25 |확인날짜=2011-02-20 }}</ref>, 그 후 32비트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여, 64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고, [[멀티 코어|코어가 여러 개]]인 CPU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 1970년대 8비트 시대 === AIM - 65 1974년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개인도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소형 컴퓨터가 등장했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4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Altair 8800('''[[앨테어 8800]]''')이었다. 애초에 개인용 컴퓨터 (personal computer)라는 말부터 Altair 8800의 설계자인 에드 로버츠가 최초로 언급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후 애플 컴퓨터, 탠디 라디오셱, 코모도, 아타리 등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이 등장했다. 특히 [[애플 II]]는 스프레드시트의 VisiCalc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어서 큰 성공을 하였다. 8 비트 시대의 개인용 컴퓨터는 CP/M이나 OS-9 또는 DISK-BASIC을 운영 체제로 사용하였다. 또한 ROM-BASIC를 표준으로 탑재한 컴퓨터가 가장 많았고, OS 부팅 디스크가 없는 경우는 ROM-BASIC이 자동으로 시작되었다. === 1980년대 16비트 시대 사무실에 보급 === IBM PC(IBM 5150) 1981년 16 비트 IBM PC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IBM PC에서 사용되는 인텔의 x86 계열의 [[중앙 처리 장치|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프로그램이 주류(사실상 표준)가 되었다. 또한 컴팩 등으로 구성된 IBM PC 호환기종 시장이 형성되고, "개인용 컴퓨터"의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스프레드시트]]는 로터스 1-2-3,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 퍼팩트(일본에서는 이치타로)가 보급되었다. 1984년에 등장한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념을 크게 보급시키는 데 성공하여, 다음 세대 컴퓨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5년 [[매킨토시]]에서 동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등장했고, 그 인터페이스는 다음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었다. === 1990년대 32비트 시대 인터넷의 보급 === 1990년대 초반까지 아미가와 코모도어 64, 아르키메데스 같은 취미용의 컴퓨터는 여전히 일정한 점유율을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IBM PC 호환기종 및 매킨토시가 PC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에 윈도우 3.0이, 1995년에 윈도우 95가 출시되어 기존의 "16비트 DOS"에서 점차 "32비트 윈도"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파워 유저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에 맞먹는 기능을 가진 [[OS/2]]나 [[윈도우 NT]], 더욱 강력한 OPENSTEP를 사용 PC에서 PC - UNIX 이용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인터넷이 급격히 발전하여, 개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 등의 사이에서 웹 표준을 놓고 브라우저 전쟁이 발생했다. 1998년 "인터넷을 위한 차세대 PC"라고 이름을 붙인 iMac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새로운 신기술이 사용되어 1990년경 16 - 20MHz 정도였던 PC용 CPU의 클럭은 2000년 1GHz에 도달했다. === 2000년대 64비트 시대 상품화 및 이용 형태의 다변화 === 2001년 매킨토시 OS가 OPENSTEP 기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맥 OS X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윈도우 NT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우 XP가 출시되면 윈도우 NT와 윈도우 9x 계열의 제품 라인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2003년 최초의 64 비트 PC인 파워맥 G5 (PowerPC 970 포함)이 발매되고, 이어 x86의 64비트 확장 버전인 AMD64 (x86 - 64)가 등장했다. OS는 윈도가 여전히 주류이지만, 오픈 소스 GNU / 리눅스 시스템도 일부 보급되고있다. 200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 (PC / AT 호환 기종)의 상용화가 진행되었다. 독자 플랫폼을 견지하고있는 애플을 제외한 PC 제조 업체들은 가격 경쟁 격화로 인한 곤경에 몰리고 개편도 잇따랐다. 2002년 휴렛 팩커드의 컴팩 인수, 2004년 IBM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레노버에 매각, 2007년 에이서의 팩커드 벨 인수 등 주요 제조 업체의 재편이나 과점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세이코, 샤프, 미쓰비시 전기, 산요전기 등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축소나 철수가 진행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는 많은 개인 PC가 보급되었다 하여 PC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 기기와 가전 제품이 보급되었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은 컴퓨터 사용의 확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와 미니 디스크 (MD)의 수요의 대부분을 대체했다. 2001년, 애플은 PC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연결하는 허브 (중심)를 담당하는 "디지털 허브"에 자리잡는 비전을 제시하고 iPod을 윈도에 대응함으로써이 개념을 보급시켜 갔다. 다른 PC 메이커도이 기기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기기로 PC를 입지 수요를 환기하고있다. 2007년부터는 최소 성능을 가진 저렴한 가격의 컴팩트한 노트북이 보급되어 후에 넷북라는 장르를 형성했다. 이 배경에는 클라이언트에서 처리는 최소화하여 네트워크 대상 서버 측에서 처리의 대부분을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보급을들 수있다. 또한 AJAX 등을 기반으로 한 클라우드 컴퓨팅의 보급을 배경으로 다시 브라우저 전쟁이 발발, 사파리, 구글 크롬을 중심으로하는 웹키트 계열 브라우저와 모질라 파이어폭스가 나타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독점하는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11년대에 들어서, 쿼드코어 CPU가 널리 보급되게 된다. 판매율은 2010년 하반기 30%에서 2011년 2월에는 46%까지 상승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etnews.co.kr/201103110089|제목=CPU 쿼드코어로 세대교체|날짜=2011-03-13|출판사=이티뉴스|쪽=|저자=강병준|확인날짜=2011-04-02}}</ref>. == 종류 == [[파일:Personal computer, exploded 5.svg|300px|right|섬네일|일반적인 데스크톱 컴퓨터의 구성 <ol style="font-size:9pt"> <li>[[컴퓨터 디스플레이|디스플레이]]</li> <li>[[메인보드|마더보드]]</li> <li>[[중앙 처리 장치|CPU]] ([[마이크로프로세서]])</li> <li>[[랜덤 액세스 메모리|램]]</li> <li>[[확장 카드]]</li> <li>[[전원 공급 장치]]</li> <li>[[광학 디스크 드라이브|광 디스크 장치]]</li> <li>[[하드 디스크]]</li> <li>[[컴퓨터 자판|컴퓨터 키보드]]</li> <li>[[마우스]]</li> </ol>]] 개인용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 [[워크스테이션]] * [[데스크톱 컴퓨터]]: 사무실 또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특정 자리에 고정된 컴퓨터. * [[넷북]] * [[울트라 모바일 PC]] * [[랩톱 컴퓨터]]: 국내에서는 노트북이라고 불리지만 영어권에서는 랩톱으로 더 많이 불리는 휴대용 컴퓨터. * [[포켓 PC]] ** [[개인 정보 단말기|PDA]]: 역시 휴대용 컴퓨터로서 크기가 손바닥만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노트북과는 달리 기능이 일부 제한되어 있음. * [[태블릿 PC]]: 노트북 컴퓨터와 유사하나, [[태블릿]] 기능이 추가됨. * [[방탄 PC]]: 폭발에서 버틸 수 있고, -10°C에서도 제 기능을 유지하는 컴퓨터. == 소프트웨어 == {{본문|소프트웨어}} 컴퓨터 소프트웨어란, 컴퓨터 프로그램과 절차 및 컴퓨터에 대한 지시사항울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다.<ref>{{웹 인용 | 제목 = Wordreference.com: WordNet 2.0 | 출판사 = Princeton University, Princeton, NJ | url = http://www.wordreference.com/definition/software | 확인날짜 = 2007-08-19 }}</ref>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들웨어]]로 나뉜다. == 시장 경쟁 ==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IBM]]의 [[IBM PC|PC]]와 [[애플]]의 [[매킨토시]]가 경쟁했다. 그러다 다른 회사에서 IBM 제품과 호환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PC의 기술은 많은 업체들의 경쟁으로 빠르고 폭넓게 발전해 나갔다. IBM이 PC를 개발할 때 자사의 기술은 [[바이오스]]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곧 컴팩이 특허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IBM의 바이오스를 합법적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복제해 내었다. 그로 인해 PC는 고속의 발전을 이룬다. 초기의 PC는 매킨토시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고 컬러도 아닌 흑백화면이었으나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매킨토시 대신 PC를 사용하였다. IBM은 PC의 후속기종으로 PS/2를 만들었고 PS/2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업체들은 로열티를 주지 않아도 되는 PC를 계속 사용하였고 결국 PS/2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애플의 매킨토시는 잠시 사용 허가서를 다른 기업에게 넘겼지만 이내 회수했다. 이에 따라 PC는 확장이 자유로운, 매킨토시는 구성이 일관된 특징이 드러난다. == 관련 박람회 == 해마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빗]]에서는 최신 컴퓨터 모델과 미래형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가정용 컴퓨터]] * [[IBM PC 호환기종]] * [[매킨토시]] * [[컴퓨터 시스템 제조업체 목록]] == 참고 자료 == * {{글로벌세계대백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언어링크|en}} [http://www.wikihow.com/Build-a-Computer 컴퓨터 조립방법] {{전임후임 |전임자 =[[레흐 바웬사]] |후임자 =[[로널드 레이건]]과 [[유리 안드로포프]] |대수 =56 |직책 =[[타임 올해의 인물|타임 올해의 기계]] |임기 =[[파일:Time Magazine logo.svg|center|x30px]]1982년 }} {{워드 프로세서}} {{크기별 컴퓨터}} {{타임 올해의 인물}} {{전거 통제}} [[분류:개인용 컴퓨터| ]] [[분류:컴퓨터의 유형]]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사무기기]]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Touchscreen IMG 2796.jpg|섬네일|한 아이가 터치스크린을 이용하여 모니터속의 퍼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다.]] '''터치스크린'''({{lang|en|touchscreen}}, {{문화어|손접촉}}<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582174 北 김정은, "휴대전화 화소수 높여라"]</ref>)은 사용자가 화면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 또는 [[스타일러스]] 같은 특수 장치로 터치하여 일정한 명령이 실행되도록 만든 접촉식 [[디스플레이 장치|디스플레이]], [[입력 장치]], [[포인팅 장치]]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손가락이나 [[손]]으로 기기의 화면에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컴퓨터 디스플레이|모니터]]에 특수 직물을 씌워 이 위를 [[손]]으로 눌렀을 때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타일러스]]와 같은 다른 수동적인 물체를 감지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직접 손으로 짚고, [[개인 정보 단말기|PDA]]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스타일러스|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펜]]과 같이 감지된 물체가 능동적이라면 터치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터치스크린은 입력('터치 패널') 및 출력('디스플레이') 장치의 집합체이다. 터치 패널은 일반적으로 전자 장치의 전자 영상 디스플레이 상단에 적층된다. 디스플레이는 [[LCD]], [[AMOLED]] 또는 [[OLED]] 디스플레이인 경우가 많다. 사용자는 특수 스타일러스나 하나 이상의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여 간단한 제스처나 멀티 터치 제스처를 통해 정보처리 시스템을 입력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 일부 터치스크린은 일반 장갑이나 특수 코팅된 장갑을 사용하여 작동하는 반면, 다른 터치스크린은 특수 스타일러스나 펜을 사용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 사용자는 터치스크린을 사용하여 표시되는 내용에 반응하고, 소프트웨어에서 허용하는 경우 표시 방법을 제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확대/축소하여 텍스트 크기를 늘린다. 터치스크린을 사용하면 사용자는 마우스, 터치패드 또는 기타 장치(대부분의 최신 터치스크린에서 선택 사항인 스타일러스 제외)를 사용하는 대신 표시된 내용과 직접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마트폰, 휴대용 게임 콘솔, 개인용 컴퓨터, 전자 투표기, 현금 자동 입출금기, [[판매 시점 정보 관리]](POS) 시스템과 같은 장치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컴퓨터에 연결하거나 터미널로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도 있다. 이는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 및 일부 [[전자책 단말기]]와 같은 디지털 기기의 설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터치스크린은 교실이나 대학 캠퍼스와 같은 교육 환경에서도 중요하다. 스마트폰, 태블릿 및 다양한 유형의 정보 기기의 인기로 인해 휴대용 기능성 전자 기기용 일반 터치스크린에 대한 수요와 수용이 늘어나고 있다. 터치스크린은 의료 분야, 중공업, ATM(현금자동입출금기), 박물관 디스플레이나 룸 자동화와 같은 키오스크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키보드와 마우스 시스템은 사용자가 컴퓨터와 적절하게 직관적이고 빠르며 정확한 상호 작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터치스크린 센서와 이에 수반되는 컨트롤러 기반 펌웨어는 디스플레이, 칩 또는 마더보드 제조업체가 아닌 다양한 애프터마켓 시스템 통합업체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와 칩 제조업체는 터치스크린을 사용자 인터페이스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추세를 인식하고 터치스크린을 제품의 기본 설계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 역사 == [[파일:CERN-Stumpe Capacitance Touchscreen.jpg|섬네일|프로토타입<ref>{{저널 인용 |publisher=CERN Courrier |date=31 March 2010 |title=The first capacitative touch screens at CERN |url=http://cerncourier.com/cws/article/cern/42092 |accessdate=2010-05-25 |postscript=<!-- Bot inserted parameter. Either remove it; or change its value to "." for the cite to end in a ".", as necessary. -->{{inconsistent citations}} }}</ref> x-y 상호 정전식 터치스크린(왼쪽)은 [[CERN]]에서 1977년 네덜란드의 공학자 Bent Stumpe가 개발하였다.<ref>{{저널 인용 |publisher=CERN |author=Bent STUMPE |date=16 March 1977 |title=A new principle for x-y touch system |url=http://cdsweb.cern.ch/record/1266588/files/StumpeMar77.pdf |accessdate=2010-05-25 |postscript=<!-- Bot inserted parameter. Either remove it; or change its value to "." for the cite to end in a ".", as necessary. -->{{inconsistent citations}} }}</ref><ref>{{저널 인용 |publisher=CERN |author=Bent STUMPE |date=6 February 1978 |title=Experiments to find a manufacturing process for an x-y touch screen |url=http://cdsweb.cern.ch/record/1266589/files/StumpeFeb78.pdf |accessdate=2010-05-25 |postscript=<!-- Bot inserted parameter. Either remove it; or change its value to "." for the cite to end in a ".", as necessary. -->{{inconsistent citations}} }}</ref> [[정전식 감응|자기 정전식 화면]](오른쪽)은 더 발전된 형태로, 이 또한 CERN의 Stumpe이 1972년 개발하였다.<ref>{{저널 인용 |publisher = CERN |author = Frank BECK & Bent STUMPE |date = 24 May 1973 |title = Two devices for operator interaction in the central control of the new CERN accelerator |url = http://cdsweb.cern.ch/record/186242/files/p1.pdf |accessdate = 2010-05-25 |postscript = <!-- Bot inserted parameter. Either remove it; or change its value to "." for the cite to end in a ".", as necessary. -->{{inconsistent citations}} }}{{깨진 링크|url=http://cdsweb.cern.ch/record/186242/files/p1.pdf }}</ref>]] E.A. 존슨은 1965년에 출간한 짧은 논문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에 대한 그의 작업을 기술하였고<ref>{{저널 인용|last=Johnson|first=E.A.|title=Touch Display - A novel input/output device for computers|journal=Electronics Letters|year=1965|volume=1|issue=8|pages=219–220|doi=10.1049/el:19650200}}</ref>, 그 뒤 1967년 출간한 논문에서 사진과 다이어그램과 함께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ref>{{저널 인용|last=Johnson|first=E.A.|title= Touch Displays: A Programmed Man-Machine Interface|journal=Ergonomics|year=1967|volume=10|issue=2|pages=271–277|doi=10.1080/00140136708930868}}</ref> [[멀티터치]] 기술은 1982년 시작하였고 당시 토론토 대학교의 입력 연구 그룹이 최초의 인간 입력 멀티 터치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 종류 == === 저항식 === {{참고|저항식 터치스크린}} === 정전식 === {{참고|정전식 감응}} === 광학식 === '''광학식 터치스크린'''은 터치스크린의 꼭짓점에 장착된 적외선 카메라와 적외선 조명이 화면을 터치하려는 물체의 그림자로 좌표를 측정하여 작동한다. == 개발 == 멀티 터치 스크린의 개발로 화면에서 두 개 이상의 손가락을 추적하는 것이 쉬워졌다. 따라서 두 개 이상의 손가락이 필요한 작업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장치를 사용하면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터치스크린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터치스크린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터치스크린 기술의 비용은 이를 통합하는 제품에 일상적으로 흡수되고 거의 제거된다. 터치스크린 기술은 신뢰성이 입증되었으며 비행기, 자동차, 게임 콘솔, 기계 제어 시스템, 가전제품, 휴대폰을 포함한 휴대용 디스플레이 장치에서 볼 수 있다. 모바일 장치용 터치스크린 시장은 2009년까지 50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화면 자체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기능도 새로운 그래픽 태블릿-화면 하이브리드와 함께 발전하고 있다. 폴리비닐리덴 플루오라이드(PVDF)는 태블릿이 압력을 감지하여 디지털 페인팅과 같은 작업을 종이와 연필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높은 압전 특성으로 인해 이러한 혁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1년 10월에 발표된 탭센스(TapSense)를 사용하면 터치스크린에서 손가락 끝, 관절, 손톱 등 손의 어느 부분이 입력에 사용되었는지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사 및 붙여넣기, 문자 대문자화, 다양한 그리기 모드 활성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 같이 보기 == * [[펜 컴퓨팅]] * [[에너지 하베스팅]] * [[제스처 인식]] * [[그래픽 태블릿]] * [[라이트 펜]] * [[잠금화면]] * [[태블릿 컴퓨터]] * [[리모컨]] * [[멀티터치]] == 출처 == {{참고 자료 시작}} * {{저널 인용|doi=10.1109/52.73754|title=Touch screens now offer compelling uses|journal=IEEE Software|volume=8|issue=2|year=1991|pages=93–94, 107|last=Shneiderman|first=B.|s2cid=14561929}} * {{서적 인용|last1=Potter|first1=R.|last2=Weldon|first2=L.|name-list-style=amp|last3=Shneiderman|first3=B.|title=An experimental evaluation of three strategies|series=Proc. CHI'88|location=Washington, DC|year=1988|publisher=ACM Press|pages=27–32}} * {{서적 인용|last1=Sears|first1=A.|last2=Plaisant|first2=C.|name-list-style=amp|last3=Shneiderman|first3=B.|chapter=A new era for high precision touchscreens|title=Advances in Human-Computer Interaction|volume=3|year=1992|editor1-last=Hartson|editor1-first=R.|editor2-last=Hix|editor2-first=D.|location=Ablex, NJ|pages=1–33}} * {{저널 인용|last1=Sears |first1=Andrew |last2=Shneiderman |first2=Ben |title=High precision touchscreens: design strategies and comparisons with a mouse |journal=International Journal of Man-Machine Studies |date=April 1991 |volume=34 |issue=4 |pages=593–613 |doi=10.1016/0020-7373(91)90037-8 |hdl=1903/360 |s2cid=2430120 |hdl-access=free }} {{참고 자료 끝}}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기본 컴퓨터 부품}} {{전거 통제}} [[분류:터치스크린| ]] [[분류:디스플레이 장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지식백과|G식백과|김성회 (1978년)#G식백과}} {{구별|백괴사전}} [[파일:Brockhaus Lexikon.jpg|섬네일|300px|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백과사전'''(百科事典, {{llang|en|encyclopedia}}, {{llang|la|encyclopædia}})은 [[학문]], [[기술]], [[예술]] 등 [[자연]]과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항목마다 풀이한 [[책]]으로 주로 [[참고서]]로서 활용한다. 백과사전의 영어명 ‘encyclopedia’는 그리스어의 ‘ἐγκύκλιος’와 ‘παιδεία’의 결합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온갖 종류의 지식을 가르쳐 기른다는 뜻이다. 즉, 백과사전의 원래 목적은 '교육'이었다. 한편 백과사전의 또 다른 목적으로는 '참고'가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들은 '교육'과 '참고' 모두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ref name=foo> {{저널 인용 |저자 = 김창일 |날짜 = 2009년 2월 |제목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편찬 방향과 전망 |url = https://www.riss.kr/link?id=A76359581 |저널 = 실천민속학 연구 |출판사 = 실천민속학회 |권 = 13 |호 = 8 |쪽 = 215-216 |확인날짜 = 2024년 10월 18일 }} </ref> 백과사전에서 내용 분류의 단위이자,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을 '[[표준어 규정의 조항|표제어]]'라고 한다. 표제어의 범위에 따라 백과사전의 종류가 나뉘는데, 넓은 범위를 갖는 표제어들로 백과사전을 구성하는 것을 대항목주의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표제어를 이용하는 것을 소항목주의라고 한다. 대항목주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육 목적의 백과사전이 유명한 학자의 논문을 모아서 엮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소항목주의를 채택한 백과사전은 표제어별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항목주의에 비해 다양한 표제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서 참고 목적의 백과사전에 많이 쓰인다.<ref name=foo></ref> 오늘날의 백과사전은 절충한 방식이 많으며, 내용에서도 문장 서술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도표 등 다양한 참고자료가 함께 제공되는 형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서적의 형태가 아니라 [[CD-ROM]], [[DVD-ROM]]의 형태로 된 것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것도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라인]]으로 서비스해주고 있는 [[한국어]] 백과사전으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 백과사전의 역사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21-11-14}} [[파일:Ad Encyclopaedia-Britannica 05-1913.jpg|섬네일|300px|오른쪽|[[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의 1913년 광고]] 백과사전의 기원은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편찬한 [[박물지]]이다. 편찬방식이 중국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엮은 동양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유집(類集)과 같았다. 이 유집과 같이 편찬하는 것은 [[17세기]]까지 편찬하였다. 최초의 [[알파벳]] 배열 백과사전은 [[1674년]] 모레리가 역사대사전에서 시도하였고, 그 이후 [[알스티드]]가 ''Encyclopaedia Septem Tomisdistincta''에도 이용하였다. 참고로 항목별로 종류에 따라 모았다는 의미에서 유집은 유서(類書) 및 유취(類聚), 휘집(彙集) 등으로도 불린다. === 백과전서 이후 === {{참고|백과전서|백과전서파|디드로}} [[1728년]] [[체임버스]]가 편찬한 백과사전이 현대적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과사전은 알파벳순으로 배열하고 상호참조표시를 하고 논문을 수록하였다. 이후 체임버스는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파]] 시대가 있었다. [[백과전서]]는 [[디드로]]가 중심이 되어 [[루소]], [[케네]], [[볼테르]] 등 [[계몽주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2권이 1751년 발간되었는데, 발행금치처분을 받았다. 이후 디드로가 더욱 만들어 [[1772년]] 28권을 완성시키고, 보유5권과 색인을 참가시켜 모두 35권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이와 비슷한 해에 [[19세기]] 세계대사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후 이 책은 [[라루스 백과사전]]이 된다. 같은 세기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71년에 3권으로 만들었다. 백과사전은 더욱 발전하여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산백과사전 등이 있다. == 현대의 백과사전 == === 서양의 백과사전 ===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ædia Britannica)]] *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Die Brockhaus Enzyklopädie)]] * 체임버스 백과사전(Chambers's Encyclopaedia) * [[라루스 백과사전|라루스 백과사전(Grand Larousse encyclopAdique)]] * 이탈리아나 백과사전(Enciclopedia Italiana) * [[소비에트 대백과사전|소비에트 대백과사전(Bol'shaya Sovetskaya Entsiklopediya)]] * [http://susi.e-technik.uni-ulm.de:8080/Meyers2/index/index.html Meyers Konversations-Lexikon 4th.ed. 1885-1892] {{웨이백|url=http://susi.e-technik.uni-ulm.de:8080/Meyers2/index/index.html |date=20061005085526 }} * [[위키백과]]([[Wikipedia]]) === 동양의 백과사전 === ==== 일본의 백과사전 ==== 현대적인 백과사전은 1972년에 전32권으로 완간된 고단샤(講談社)의 《휴먼라이프 엔사이클로페디아》을 시작으로 1980년 가쿠슈겐큐사(學習硏究社)의 전32권 《그랜드 현대백과사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1988년 완간한 전35권의 《세계대백과사전》, 1988년 쇼가쿠칸(小學館)에서 전25권으로 간행한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등이 있다. ==== 중국의 백과사전 ====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부터 《중국대백과전서》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1981년에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이 편찬한 전20권의 《중화백과전서》가 발간되었다. ==== 한국의 백과사전 ==== 한국의 현대적 백과사전은 [[1958년]] 문학과 교양서적을 전문출판하던 학원사(學園社)에서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시초로 한다. 4·6배판 전체 6권으로 1958년 9월 25일 제1권을 출판한 후 8년에 걸쳐 완성했다. 4 명의 편집진과 435명의 집필진이 참여하였고, 원고는 10만 매가 넘었다. 그 후 증보판 2권이 출간되었으며, [[1967년]]에는 전12권의 《세계백과대사전》으로 개정되어 [[1970년]]에 전15권, [[1973년]]에 전20권으로 증보된 신판이 발간되었다. 사전류 전문출판사인 [[동아출판사]]에서는 [[1959년]] 한권으로 발간한 《새백과사전》, [[1964년]] 전2권의 《국민생활백과사전》을 거쳐, 전30권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1978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82년]] 9월부터 2권씩 출간, [[1984년]] 완간하였다. 여기에는 13만여 항목이 수록되고 4만여 컬러 [[사진]] 및 8천여 흑백 사진이 삽입됐으며, [[1986년]]과 [[1990년]]에 각각 보유편이 발간되었다. 이것은 후에 [[1996년]] 8월에 두산동아(주)에서 출간된 전 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이어졌는데, 128167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으며 5개의 CD-ROM이 포함되었다. [[1974년]]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전16권으로 간행한 《[[대세계백과사전]]》에서는 다른 백과사전들과는 달리 가나다순의 사전식 배열이 아니라 주제별로 항목을 분류하였다. 동서문화사에서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을 [[1992년]]부터 시작하여 [[1995년]]에 전30권으로 간행하고, [[1997년]] [[8월 8일]]에 총 31권으로 완간하여 [[1999년]]에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으로 개편하였는데, 총13만 항목과 15만 색인이 수록되었고 기존의 백과사전에서 누락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항목과 [[공산주의]] 이념까지 포함되었다. 학원출판공사에서는 전 32권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을 간행하는데, 3년의 준비 기간과 5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1993년]] 1월부터 출간하여 [[1994년]]에 완간되었다. 이것에는 14만 5천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고 기존 백과사전과 달리 30여개의 기본 [[품사|동사]]가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한편, 외국의 백과사전이 번역된 것으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1989년]]부터 발간되어 1994년 3월에 전 27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11만여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제26권은 [[참고 문헌]], 제27권은 색인으로 되어 있다. [[1972년]]에 [[계몽사]]에서 만든 컬러학습대백과사전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로 만든 컬러판 대백과사전이다. [[동아출판사]](두산동아의 전신)에서 나온 15권으로 구성된 동아학습대백과, 16권으로 구성된 삼성당에서 나온 삼성학생대백과는 컬러 사진과 흑백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당에 있는 삼성학생대백과사전은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지리사전이 같이 편집되어 있어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새로운 독서습관을 키우게 되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흑백사진으로 편집되어 있는 중앙출판사의 세계대백과사전(전 5권)은 총 5만여 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고, 초등학생을 위하여 편집된 어린이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전 30권), 그리고, 웅진21세기학습대백과사전(학습별), 중앙대백과사전(20권)과 신21세기 학습대백과사전(3만여 항목)이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백과사전이다. 영상매체를 이용한 백과사전으로는 중앙 과학 백과사전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7년]]에 발행된 광명대백과사전(전20권), 조선대백과사전(전 30권, 10만여 항목), 그리고 백과사전(전3권, 3만 항목)이 있다. 그중에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백과사전은 정치 사전, 경제 사전, 역사 사전을 통합하여 편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형태의 백과사전들은 종이책 출간을 중지하고 CD롬이나 인터넷으로 변화해나갔는데, 2012년 기준으로 두산세계대백과의 후신인 [[두피디아]]가 지속적으로 개정되고 있다. ==== 한국의 옛 백과사전 ==== [[한자사전#.ED.95.9C.EA.B5.AD.EC.9D.98 .EC.82.AC.EC.A0.84|물명류]]도 초기형태의 어휘모음이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지만 최초의 백과사전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었고 가장 방대한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 [[홍봉한]]의 증보문헌비고 * [[성임]]의 태평통재 * [[최명길]] 어숙권의 고사촬요 * [[서명응]]의 고사신서 * [[김육]]의 유원총보 * [[김진 (조선)|김진]]의 신보휘어 * [[이익]]의 성호사설 * [[안정복]]의 성호사설류선과 잡동산 *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 [[김시민]]의 동국휘어 * [[홍만선]]의 [[산림경제]] * 유중임의 증보산림경제 * 민노행의 지문별집 국조휘언 고금사실유취 * [[유희]]의 물명고, 방물고 * [[유형원]]의 반계수록 == 백과사전 평가요소 == 박준식과 김문영은 A. B. Kroeger의 Guide to Reference Books (1902년)와 James I. Wyer의 Reference Work (1930년), Louis Shores의 평가 기준 (1950년대 중반), Kenneth Kister의 저서 (1978년)와 그의 후속 연구, Bopp와 Smith의 백과사전 평가에 관한 조언 (1994년), Sader와 Lewis의 평가기준 (1995년), William A. Katz의 저서 (1997년)을 참고로 하여 백과사전의 평가요소를 다음의 6 가지로 범주화하였다.<ref> {{저널 인용 |저자1 =박준식 |저자2 =김문영 |날짜 = 1996년 6월 |제목 = 인쇄본 백과사전의 평가요소 분석 |url = https://www.riss.kr/link?id=A101191338 |저널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출판사 = 한국문헌정보학회 |권 = 33 |호 = 2 |쪽 = 5-22 |확인날짜 = 2024년 10월 18일 }} </ref> * 목적과 범위: 편찬 목적, 취급 범위, 주된 독자, 내용의 깊이 * 권위: 편집자·집필진·판사의 권위, 기사의 서명 여부, 역사와 계보, 신뢰성(정확성), 서지, 서평지의 평가내용 * 접근성: 배열방법, 상호참조, 색인, 여백주기 * 기술형식: 표현형식, 객관성, 최신성(계속적 갱신, 연감․보유판의 발행) * 형태적 특징: 인쇄본과 전자본, 제본과 레이아웃 등의 체재와 삽도와 지도 * 특징과 가격 == 같이 보기 == * [[백과사전 목록]] * 한국의 백과사전 ** [[대동운부군옥]]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blog.daum.net/dicmanager/10476270 백과사전의 미래]{{깨진 링크|url=http://blog.daum.net/dicmanager/10476270 }} === 한국의 온라인 백과사전 === * [[위키백과]] ** [[한국어 위키백과]] *** [https://terms.naver.com/ 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daum.net/ Daum 백과사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제공 - 두산동아 ** [https://terms.naver.com/list.nhn?cid=40942&categoryId=40942 네이버 백과사전]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공 - 한국브리태니커 ** [http://100.daum.net/ Daum 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s://terms.naver.com/minbaek/ 네이버 백과사전] {{전거 통제}} [[분류:백과사전| ]] [[분류:명수 100]]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 {{학문 정보 |학문명 = 자연과학 |그림 = NaturalScienceMontage.png |그림크기 = |그림설명 = |다른 이름 = |연구 분야 = |학문 분야 =과학 |주요 개념 = |파생 분야 = |창시자 = |창시 시기 = |관련 직업 = }} '''자연과학'''(自然科學, {{llang|en|natural science}})은 [[자연]][[현상 (철학)|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ref>자연과학교재연구회, 인간과 자연과학, 학문사, 1995, {{ISBN|89-467-4069-8}} , 17쪽</ref> [[과학]]의 한 분야이다. ([[반의어]] : [[인문사회]]) == 개요 == {| class="toccolours" style="float:right; border: 2px solid #eeeeee; margin: 0 0 1em 1em; font-size: smaller; width:300px;" | {{인용문2| 자연과학은 수백 년 동안 세계 내의 지각할 수 있는 현상들을 서로 관통할 수 있게 결합시키려는 노력이었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과학은 모든 존재들의 개념을 파악하려는 과정에서, 이들 개념에 대한 후속적인 재건을 시도하는 것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ref>송병옥,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에코리브르, 2004, {{ISBN|89-90048-34-6}}, 26-27쪽</ref>}} |} 자연과학은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 방법]]이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분석하여 얻은 지식 체계이다. 따라서 과학은 결론도 중요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ref>곽영직, 자연과학의 올바른 이해, 학문사, 1995, {{ISBN|89-467-5151-7}}, 13쪽</ref> 과학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는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추론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은 조건에 따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역학의 실험 방법은 여전히 자연 과학의 한 분야이며 특정 조건 아래에서라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충실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른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도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언제나 반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ref>곽영직, 자연과학의 올바른 이해, 학문사, 1995, {{ISBN|89-467-5151-7}}, 13-19쪽</ref>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자연 법칙에 기반한 생활을 해 왔다.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고대 시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각종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정신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파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ref>송병옥,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에코리브르, 2004, {{ISBN|89-90048-34-6}}, 60쪽</ref> 이후 자연과학에서 수리적 모형을 이용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표준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과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에 의한 고전 역학의 성립으로 현재와 같은 학문 체계를 이루는 기반을 수립하였다. 즉 경험적인 [[실험]]을 통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ref>송병옥,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에코리브르, 2004, {{ISBN|89-90048-34-6}}, 53-74쪽</ref> == 과학적 방법 == {{본문|과학적 방법}} [[파일:Hooke Microscope.jpg|섬네일|[[현미경]]의 발명은 미생물 관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과학적 방법]]이란 실험적인 검증에 기초를 두는 연구 방법이다. 즉, 믿음에 기초하여 이론적인 추측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증거를 통해 검증하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연구 분야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나 다음과 같은 방법이 일반적이다.<ref>마릴린 모라이어티, 정희모 역, 비판적 사고와 과학 글쓰기, 연세대학교출판부, {{ISBN|89-7141-830-3}} , 6-7쪽</ref> * '''관찰''' - [[관찰]]은 자연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은 관찰된 현상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생겨난 것인지를 알아내는데 목적이 있다. 온도 변화의 측정, 물질 성분의 분석 등이 모두 관찰에 해당한다. * '''가설''' - [[가설]]은 관찰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을 하는 것이다. 논증과 증거로서 검증되기 이전의 가설은 직관적이며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한편, 과학적 방법은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므로 언제든지 반례가 등장할 수 있다. 널리 인정받는 과학적 지식도 반례가 나타나면 부정되거나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든 자연 과학의 법칙은 가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예상''' - 예상은 가설에 따라 자연 현상을 예측해 보는 것이다. * '''실험''' - [[실험]]은 적절한 통제를 통하여 관찰하고자 하는 현상을 단순화 하고 예상한 바와 같이 진행되는 지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연구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실험 방법이 있다. * '''검증''' - 과학적 방법에서 검증은 실험의 결과를 놓고 가설에 따른 예상이 옳은지 아닌지를 논증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실험의 결과를 놓고 실험군과 대조군의 비교를 통하여 가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게 된다. * '''일반화''' - 실험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 논증된 가설이 많은 반복 실험에 의해 검토되어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인정된 과학적 지식은 자연 과학 법칙으로 불리게 된다. 예를 들어 고전 역학의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것이 있다. == 역사 == {{참고|과학의 역사}}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을 통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톤 헨지]]와 [[고인돌]] 같은 석조물의 건축을 위해서는 [[지레]], [[빗면]], [[쐐기]], [[도르래]]와 같은 [[단순 기계]]들의 사용이 필수적이다.<ref>이종호, 윤석연, 고인돌, 열린박물관, 2006, {{ISBN|89-92043-02-3}}, 24-25쪽</ref> === 고대의 과학 === [[파일:Sundial Taganrog.jpg|섬네일|그노몬]] [[파일:Ancient ziggurat at Ali Air Base Iraq 2005.jpg|섬네일|[[우르]]의 지구라트]] [[파일:Baylonianmaps.JPG|섬네일|바빌로니아의 지도]] * '''천문학과 역법'''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초기 고대 사회 문명에서 이미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의 여신 [[이난나]]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ref>레너드 쉴레인, 강수아 역, 지나 사피엔스, 들녘, 2005, {{ISBN|89-7527-461-6}}, 566쪽</ref>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해시계]]의 일종인 그노몬을 사용하였다.<ref>나카타 노리오, 황소연 역, 이스탄불에서 수학을 배우자, 이지북, 2001, {{ISBN|89-89422-67-1}}, 63쪽</ref>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관찰하여 1[[년]]을 계산하였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5월이 되면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계절의 계산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달 (시간)|월]]을 30[[날|일]]로 하고 12개월을 1년으로 하였다. 마지막달에는 우수리로 5일을 더해 1년은 365일로 계산되었다. 이집트 달력에는 윤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ref>요시무라 사쿠지, 김이경 역,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역사기행, 서해문집, 2002, {{ISBN|89-7483-164-3}}, 26-27쪽</ref> * '''역학과 건축'''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석조 건축에는 다양한 [[단순 기계]]가 사용과 함께 [[역학 (물리)|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고대의 거대 건축물들은 동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단순 기계]]의 원리를 바탕으로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세워진 것들이다.<ref>김경제, 피라미드 축조의 비밀, 청어, 2009, {{ISBN|89-93563-40-3}}, 제7장 피라미드 축조의 방법은 기중기인가 경사로인가</ref>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공법은 [[아치]]이며 이 역시 [[무게]]를 분산하여 지탱하는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 '''고대의 생물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해부학|해부학적]] 구조를 직접 연구하는 등 생물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물의 역사와 같은 다양한 생물 관련 저서를 남겼다.<ref>박성래, 한국과학문화재단,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서해문집, 1998, {{ISBN|89-7483-104-X}}, 58쪽</ref> * '''화약과 로켓''' 최초의 [[화약]]과 [[로켓]]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의 발명은 다양한 화학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초의 화약은 한나라 시기에 발명되었으나 폭발력이 크지 않아 주로 전쟁터에서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화약의 원료인 [[초석]]의 비율이 커지게 되고 폭발력이 강하게 되자 [[총]]과 [[대포]]가 제작되게 되었다.<ref>곽영직, 자연과학의 올바른 이해, 학문사, 1995, {{ISBN|89-467-5151-7}}, 410쪽</ref> 중국의 화약 기술은 13세기 무렵 [[유럽]]으로 전파되었다.<ref>존M.홉슨, 정경옥 역,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에코리브르, 2005, {{ISBN|89-90048-40-0}}, 243쪽</ref> * '''지도의 제작''' 고대의 다양한 문화에서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미 점토판에 그린 지도가 제작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phil.uni-passau.de/histhw/tutcarto/english/1-eng.html |제목=The History of Cartography |확인날짜=2010-06-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923061103/http://www.phil.uni-passau.de/histhw/tutcarto/english/1-eng.html |보존날짜=2011-09-23 |url-status=dead }}</ref> 본격적인 지도의 제작은 [[고대 그리스]] 때 이루어졌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 최초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다.<ref>곡금량, 김태만 역, 바다가 어떻게 문화가 되는가, 산지니, 2008, {{ISBN|89-92235-45-3}}, 393쪽</ref> [[고대 로마]]는 자신의 영토안에 있는 [[로마 속주|속주]]를 잇는 도로를 표시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아그리파]]가 제작한 지도에는 [[유프라테스강]]에서 [[라인강]]까지의 모든 속주의 위치와 면적, 주민들이 기록되었으며 각 속주를 잇는 도로망이 표기되어 있었다.<ref>주느비에브 포스터, 남경태 역, 빛나는 로마 역사 이야기, 꼬마이실, 2006, {{ISBN|89-313-8030-5}}, 186쪽</ref>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년 무렵 청동 정(鼎)에 새겨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한나라]] 후기에는 [[축척]]을 이용한 지도가 제작되었으며 3세기의 지도 제작자 [[배수 (서진)|배수]]는 직교하는 기준선과 축척을 이용한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였다.<ref>재러미 블랙, 김요한 역, 세계 지도의 역사, 지식의 숲, 2006, {{ISBN|89-91762-14-X}}, 18쪽</ref> * '''논증 체계의 수립''' 고대 그리스의 학문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논증을 통해 입증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학의 개념 뿐만 아니라 수학의 법칙, 정치적 주장 등에 대한 논증 체계가 수립되었다.<ref>존 그리빈, 최주연 역, 과학의 역사 1, 에코리브르, 2005, {{ISBN|89-90048-57-5}}, 44-45쪽</ref> 고대 그리스 학문의 이러한 특징은 [[논리학]]의 발달과 다양한 논증 방법의 개발로 이어져 후일 [[과학적 방법]]의 근간이 되었다. === 중세·근세의 과학 === [[파일:Astrolabium.jpg|섬네일|13세기 이슬람의 천체 관측기구]] [[파일:Armillary sphere with astronomical clock.jpg|섬네일|혼천의와 시계가 결합된 혼천 시계]] [[파일:Galileo moon phases.jpg|섬네일|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관측한 달의 표면]] * 중세 초기 서부 유럽의 상황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서부 유럽에서는 한동안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우선시 한 당시 상황에서 [[학문]]은 경험적인 지식보다는 [[종교]]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였다. 한편, 세속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점성술]]과 [[연금술]]은 그 동기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 중세 이슬람 세계의 업적 고대 로마의 몰락 후 중세 서부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인 혼돈의 시기로 한동안 학문적 성취가 지체되었다. 고대의 학문은 [[동로마 제국]]과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되었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의학]], [[화학]], [[천문학]] 등 여러 학문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중세 이슬람의 통치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과 관련한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점차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박물학|자연사]] 분야의 지식들을 수용하였다.<ref>[http://www.postech.ac.kr/press/hs/author.html 임경순] {{웨이백|url=http://www.postech.ac.kr/press/hs/author.html |date=20131203043415 }}, [http://www.postech.ac.kr/press/hs/C04/C04S002.html 이슬람 과학의 발전: 번역, 실용주의, 주변부 과학] {{웨이백|url=http://www.postech.ac.kr/press/hs/C04/C04S002.html |date=20131203042510 }}, [[포항공과대학교]] 홈페이지</ref>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인도]]의 서적들을 번역하여 도입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이슬람 과학은 점차 독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의학서를 바탕으로 발달한 의학은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를 기반으로 발달한 [[천문학]]은 각종 관측기구의 고안과 함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사마르칸트에는 반지름 40미터, 3층건물 높이의 육분의를 쓰기도 했다. [[알바타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구면삼각법과 같은 기하학적 방법으로 개량·보완해서 태양과 달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1년과 사계절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관측소를 설립하였고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828년경에 세계 최초의 관측소를 세운다. 관측소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이 딸려 있고 정부의 지원 하에 과학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은 점성술의 예언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기에는 고대 천문학을 능가하는 비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을 만들어 행성 운동을 설명하였고 이를 고도로 정확한 관측으로 검증했다. 그러나 이 모형 역시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형이다. 이슬람의 수학은 이론적인 기하학보다 실용적인 산술, 대수학을 중시하였다. 인도로부터 쓰기 편한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였고 사실상 고차방정식을 해결했으나 이슬람 수학은 순수 수학적 목적에 의한 발전이라기보다 세금, 유산 분배와 같은 실용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은 광학의 발전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막 기후로 인해 눈에 무리가 가기 쉬운 이집트에서 안과학 문헌이 많이 쓰여졌으며 이슬람의 의사들은 눈 치료법과 시각(눈)의 해부학, 생리학의 전문가였다. 이슬람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의사가 아님에도 눈병에 관한 글을 썼으며 그의 광학에는 시각, 굴절, 암실, 불을 붙이는 거울, 렌즈, 무지개 등 다양한 광학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ref>임경순, [http://www.postech.ac.kr/press/hs/C04/C04S003.html 아랍의 의학, 천문학, 대수학] {{웨이백|url=http://www.postech.ac.kr/press/hs/C04/C04S003.html |date=20131203045454 }}, 포항공과대학교 홈페이지</ref> 중세 이슬람의 과학은 후일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 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코올]], [[알고리듬]]과 같은 낱말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ref>[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1/10/18/20011018200000000002/200110182000000000020110000000.html 이슬람 과학은 찬란했다]{{깨진 링크|url=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1/10/18/20011018200000000002/200110182000000000020110000000.html }}, 더사이언스, 2001년 10월 18일</ref> * 항해술의 발전과 지리학의 확장 15세기 [[명나라]]의 [[정화 (명나라)|정화]]는 [[쑤저우]]에서 [[몸바사]]에 이르는 [[인도양]]을 항해하여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정화의 항해는 고대 인도의 무역로를 이루어졌다.<ref>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휴머니스트, 2005, {{ISBN|89-5862-070-6}}, 158쪽</ref> 한편, 유럽에서도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항해는 모두 지리적인 인식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지리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달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다시 경험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중력]], [[마찰]], [[관성]]과 같은 과학적 현상을 관찰하였으며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 동아시아 중·근세의 과학 동아시아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중대한 조짐을 미리 살피기 위해 천체를 관찰하였다. [[혼천의]]는 이슬람의 천문 관측기구를 참조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제작되어 [[조선]]에 도입되었다.<ref>정은주, 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 창작과 비평, 2005, {{ISBN|978-89-364-7104-0}}, 358쪽</ref> 한편, [[조선]]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강우량 등의 기상 기록은 500여년 간 빠짐 없이 기상 현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f>전종관 문병권, [http://elnino.chonbuk.ac.kr/papers/Jhun%20and%20Moon%20(1997).pdf 측우기 강우량 자료의 복원과 분석]{{깨진 링크|url=http://elnino.chonbuk.ac.kr/papers/Jhun%20and%20Moon%20(1997).pdf }}, 한국기상학회지 33권 4호, 1997</ref> === 근대의 과학 === * 과학 혁명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경험주의와 자연주의의 확산은 증거로서 검증된 지식만을 인정하는 풍토를 조성하였고 이로써 과학적 방법론이 수립되었다.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 정립,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산소]]발견, [[요하네스 케플러]]의 지구 공전 궤도 계산과 같은 업적에 힘입어 [[물리학]], [[화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들이 수립되게 되며 가히 폭발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 양상을 [[과학 혁명]]이라 한다. 과학 혁명은 [[산업 혁명]]과 맞물리면서 [[근대]]의 특성을 낳았다.<ref>에른스트 페터 피셔, 이민수 역, 과학혁명의 지배자들, 양문, 2002, {{ISBN|89-87203-42-5}}, 2부 과학혁명의 시대</ref> * 18 - 19세기의 과학 [[파일:Origin of Species title page.jpg|섬네일|left|《[[종의 기원]]》초판본 표지]] 18세기에는 [[고생물학]]의 [[화석]]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지질 시대]]를 분류하는 [[지질학]] 연구가 이루어졌고<ref>존 그리빈, 최주연 역, 과학의 역사 2, 에코리브르, 2005, {{ISBN|89-90048-58-3}}, 79-81쪽</ref>, 여러 [[종 (생물)|생물 종]]의 특징을 조사하고 분류한 [[분류학]] 등이 활발히 연구되었다. [[칼 폰 린네]]가 생물의 [[학명]] 분류로 제시한 이명법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ref>조지 B 존슨, 전병학 역, 생명 과학, 동화기술, 2007, {{ISBN|89-425-1186-4}}, 274쪽</ref> 19세기에는 [[전자기파]]의 예언과 발견, [[진화|진화 이론]]의 성립, [[멘델의 유전법칙]] 발표와 [[유전학]]의 수립 등 다양한 분야가 새롭게 학문으로 수립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당시 서로 다른 힘으로 여겼던 [[전기]]와 [[자기]]가 같은 종류인 [[전자기력]]임을 증명하고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언하였다. 그가 제시한 [[맥스웰 방정식]]은 후대의 [[전파]] 연구에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무선 통신]]과 [[방송]] 등 전파의 이용에서도 사용되고 있다.<ref>변영태, GSM 이동통신기술 기초, 진한엠엔비, 2008, {{ISBN|89-8432-348-9}}, 2.1.3. 전파</ref> [[찰스 다윈]]은 [[진화]]의 요인을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로 보는 진화 이론을 발표하였다.<ref>Wallace, A; Darwin, C (1858).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350&viewtype=text&pageseq=1 On the Tendency of Species to form Varieties, and on the Perpetuation of Varieties and Species by Natural Means of Selection]". Journal of the Proceedings of the Linnean Society of London. Zoology 3: 53–62. doi:10.1098/rsnr.2006.0171. Retrieved 2007-05-13</ref> 다윈의 진화 이론은 당대에서부터 [[기독교]] 등에 의한 극심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현대 진화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f>Kutschera U, Niklas K (2004). "The modern theory of biological evolution: an expanded synthesis". Naturwissenschaften 91 (6): 255–76. doi:10.1007/s00114-004-0515-y. PMID 15241603</ref>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ref>멘델의 논문(영문): Gregor Mendel (1865). "[http://www.mendelweb.org/Mendel.html Experiments in Plant Hybridization]"</ref> 그의 유전법칙은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 초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재발견 되면서 [[고전 유전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ref>위르겐 브라터, 안미라 역, 즐거운 생물학, 살림, 2009, {{ISBN|89-522-1086-7}},151-153쪽</ref> * 과학의 그림자 근대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복리 증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과학의 결과물은 [[무기]]로 이용되어 더 큰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발명품이 무기로 사용되어 비난받자 자신이 번 자산을 인류의 복리 증진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데 사용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노벨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과 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고 있다.<ref>아그네타 발린 레비노비츠, 이충호 외 역, 노벨상 그 100년의 역사, 가람기획, 2002, {{ISBN|89-8435-123-7}}</ref> 그러나, 노벨 이후에도 [[원자 폭탄]]과 같은 더 강력한 무기가 만들어져 더 많은 파괴를 가져왔다. 한편, 근대 과학과 산업 혁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대량 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류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고 더 빠르게 더 많은 물자를 거래하게 되었으나 소위 [[열강]]이라 불리던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근대 과학의 결과물인 물자와 기술로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억압하였다.<ref>최종덕, 시앵티아, 당대, 2003, {{ISBN|89-8163-107-7}}, 44쪽</ref> === 현대의 과학 === 20세기에 들어 과학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과학은 아주 세분화되어 보다 전문적인 하위 학문들을 구성하게 되었다. *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파일:Black Hole Milkyway.jpg|섬네일|[[블랙홀]]에 의한 랜즈 효과]] 20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물리학]]의 가장 큰 발전은 [[양자역학]]이 성립되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양자역학의 성립은 곧 [[고전역학]]이 더 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고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우주]]와 자연 현상이 실상은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한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유명한 [[사고실험]]으로 양자 역학의 확률성을 잘 보여준다.<ref>배리파커, 이충환 역,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성이론, 양문, 2002, {{ISBN|89-87203-47-6}}, 293-295쪽</ref>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 [[길이]]와 같은 [[물리량]]이 고전 역학의 관점과는 달리 더 이상 고정적인 상수로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장]]에 의한 [[공간]]의 변형을 예언하였으며 이는 훗날 [[태양]]의 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을 관측함으로써 증명되었다.<ref>김성원, 상대성이론 100주년 - 상대성이론은 무엇인가, 과학동아 2005년 1월호, 동아사이언스, ISBN ABD2005010</ref> [[입자물리학]]의 발달은 [[기본입자]]의 발견을 가져 왔으며 양자 역학의 성과와 결합하여 표준 모형을 수립하게 되었다. 표준모형에서는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힘 (물리학)|힘]]을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으로 정리하였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이들 힘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대통일이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ref>JOHN R.TAYLOR 외, 강희재 외 역, 현대물리학 제2판, 교보문고, 2005, {{ISBN|89-7085-543-2}}, 863-864쪽</ref> 20세기 말 [[스티븐 호킹]]은 그 동안의 [[이론물리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우주론을 종합하였다.<ref>1997년 시간의 역사 {{ISBN|89-7291-405-3}}</ref> *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 [[파일:DNA Model Crick-Watson.jpg|섬네일|[[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제작한 DNA 모형]]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X선 회절]]로 DNA의 구조를 밝혔다.<ref>Watson, J. D.; Crick (1953). "[http://www.nature.com/nature/dna50/watsoncrick.pdf 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 Nature 171: 737. doi:10.1038/171737a0.</ref> 이들이 밝힌 DNA의 구조는 두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꼬여 있는 모습이었다.<ref>Watson, J. D.; Crick (1953). "[http://www.nature.com/nature/dna50/watsoncrick2.pdf Genetical Implications of the Structure of Deoxyribonucleic Acid]". Nature 171: 964. doi:10.1038/171964b0.</ref> DNA의 이러한 구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서열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DNA의 복제가 유전형질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ref>[http://nobelprize.org/nobel_prizes/medicine/laureates/1962/index.html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62]</ref> DNA 구조가 알려진 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유전자 발현]]의 기제가 알려지고<ref>이행석, 분자생물학, 기전연구사, 2006, {{ISBN|89-336-0726-9}}, 제3장 유전자로부터 단백질에 이르기까지</ref> [[유전성 질환]]에서 [[유전자]]의 역할이 하나 둘 밝혀지게 되었다.<ref>[http://helpline.cdc.go.kr/web/main.html 희귀난치성질환센터] {{웨이백|url=http://helpline.cdc.go.kr/web/main.html |date=20100609055742 }}, [http://helpline.cdc.go.kr/admin/bbs/bbs_down.asp?dbfilename=Introduction%20to%20Genetic%20disease.PDF&filename=Introduction%20to%20Genetic%20disease.PDF&mode=1&bname=cyber&idx=213 유전성 질환의 이해]{{깨진 링크|url=http://helpline.cdc.go.kr/admin/bbs/bbs_down.asp?dbfilename=Introduction%20to%20Genetic%20disease.PDF&filename=Introduction%20to%20Genetic%20disease.PDF&mode=1&bname=cyber&idx=213 }}(PDF)</ref>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ref name="HGP">"[http://www.ornl.gov/sci/techresources/Human_Genome/home.shtml Human Genome Project Information] {{웨이백|url=http://www.ornl.gov/sci/techresources/Human_Genome/home.shtml |date=20080315062131 }}". Human Genome Project. Retrieved 15 March 2008.</ref> 또한 [[진화]] 현상이 직접 관측이 가능해지고,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으며, [[살아있는 화석]]들의 유전체 연구를 통해 [[진화론]]이 발전하였고, 이는 [[진화학]] 혹은 [[집단 유전학]]으로 발달했다. * 새로운 물질의 발견과 핵 에너지의 사용 [[입자물리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연구되던 여러 [[방사능]] 물질들의 [[핵분열]]과 [[핵융합]]의 조작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하였다. [[핵물리학]]의 지식은 [[핵발전소]]와 같이 평화적인 분야에 이용되기도 하나 [[핵폭탄]]과 같이 재래식 무기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되기도 한다.<ref>로버트 M. 헤이즌 외, 이창희 역, 핵물리학, 교양인, 2005, {{ISBN|89-955300-6-5}}, 8. 핵물리학</ref> * 우주 탐사 [[파일:Apollo 11 Landing - first steps on the moon.ogv|섬네일|달 표면에 발을 딛는 [[닐 암스트롱]] ]] [[파일:Saturn (planet) large.jpg|섬네일| [[보이저 2호]]가 찍은 [[토성]] ]] 20세기 이후 현대는 무엇보다도 [[우주 탐사]]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인류는 [[달]]을 탐험하였고<ref>[http://news.nationalgeographic.com/news/2004/07/0714_040714_moonlanding.html Apollo Anniversary: Moon Landing "Inspired World"], 네셔널지오그래픽</ref> [[태양계]] 외부로 [[보이저 2호]]와 같은 탐사선을 보냈으며<ref>[http://www.space.com/scienceastronomy/060523_heliosphere_shape.html Voyager 2 Detects Odd Shape of Solar System's Edge] {{웨이백|url=http://www.space.com/scienceastronomy/060523_heliosphere_shape.html |date=20080516210220 }}, space.com</ref> [[허블 우주 망원경]]을 지구 궤도에 띄워 외계를 관찰하고 있다.<ref>[http://hubblesite.org/ 허블 우주 망원경 홈페이지]</ref> == 분야 == === 물리학 === {{본문|물리학}} [[물리학]]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과 물체의 운동 물질의 구성과 성질과 변화 에너지의 변화 등을 연구하여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화학 생물학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이루며, 자연과학 중에서 제일 기본적이고 가장 먼저 체계화 된 학문이다. [[물질]]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서<ref>[[리처드 파인먼]]은 [[원자론]]을 설명하면서 모는 과학 지식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만약 어떤 대재앙이 일어나 모든 과학 지식이 파괴 되고 오직 한 문장만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면, 나는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동 한다는 것이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다른 모든 지식들은 이로부터 재건될 수 있으니까" R.P. Feynman, R.B. Leighton, M. Sands (1963).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1. p. I-2. {{ISBN|0-201-02116-1}}.</ref>, [[힘 (물리학)|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개념을 포함한 [[시공간]]에서 물질의 [[운동 (물리학)|운동]]을 연구하며<ref>J.C. Maxwell (1878). Matter and Motion. D. Van Nostrand. p. 9. "물리학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조절과 관련된 지식 체계이다."</ref>,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ref>S. Holzner (2006). Physics for Dummies. Wiley. p. 7. "물리학은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다."</ref> 물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은 [[아원자 입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물리학이 다루는 물질에 대한 연구는 다른 모든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문에 물리학은 흔히 "기초 과학"이라고 불린다.<ref>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Volume I. Feynman, Leighton and Sands. {{ISBN|0-201-02115-3}} See Chapter 3 : "The Relation of Physics to Other Sciences" for a general discussion. For the philosophical issue of whether other sciences can be "reduced" to physics, see reductionism and special sciences).</ref> 현대의 물리학은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열역학]], [[양자역학]]과 같은 여러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 생물학 === {{본문|생물학}} [[생물학]]은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생물의 종류에 따라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으로 나누며 대상현상이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학, 형태학, 해부학, 발생학, 생리학,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태학, 생물지리학, 진화학 따위로 나뉜다.<ref>{{웹 인용 |url=http://www.bio.txstate.edu/~wetlands/Glossary/glossary.html |제목=Aquarena Wetlands Project glossary of terms. |확인날짜=2011년 10월 31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0608113114/http://www.bio.txstate.edu/~wetlands/Glossary/glossary.html |보존날짜=2004년 6월 8일 |url-status=dead }}</ref> 현대 생물학은 [[카를 프리드리히 부르다흐]], [[고트프리드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자리잡았다.<ref>Junker Geschichte der Biologie, p8.</ref><ref>Coleman, Bi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pp 1–2.</ref> 생물학은 많은 하위 학문을 포괄하는 광대한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가운데 현대 생물학의 주요한 핵심 연구 분야는 [[세포 이론]], [[진화]], [[유전자]], [[에너지]], [[항상성]] 등을 들 수 있다.<ref name="Avila">Avila, Vernon L. (1995). Biology: Investigating life on earth. Boston: Jones and Bartlett. pp. 11–18. {{ISBN|0-86720-942-9}}.</ref> 생물학의 하위분야는 연구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생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생화학]],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 생명의 진화 과정과 다양성 증가를 연구하는 [[진화생물학]],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세포생물학]], [[기관 (생물학)|기관]]이나 [[조직 (생물학)|조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생리학]],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 개체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학]] 등이 있다.<ref>{{웹 인용 |url=http://community.weber.edu/sciencemuseum/pages/life_main.asp |제목=Life Science, Weber State Museum of Natural Science |확인날짜=2013년 10월 2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727182113/http://community.weber.edu/sciencemuseum/pages/life_main.asp |보존날짜=2013년 7월 27일 |url-status=dead }}</ref>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특성과 분류에 따른 [[학명]]을 명명하는데 [[동물]]은 [[동물 학명 국제 코드]]에 따르며, [[식물]]과 [[균류]]는 각각 [[식물 학명 국제 코드]]와 [[균류 학명 국제 코드]]를 따른다. 이외에 [[바이러스]], [[바이로이드]], [[프리온]]과 같은 바이러스성 유기체는 [[바이러스 분류 및 명명 국제 코드]]를 따르고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ictvonline.org/virusTaxonomy.asp |제목=ICTV Virus Taxonomy 2009 |확인날짜=2010-06-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04225742/http://www.ictvonline.org/virusTaxonomy.asp |보존날짜=2013-10-04 |url-status=dead }}</ref><ref>[http://www.ncbi.nlm.nih.gov/ICTVdb/Ictv/fs_pospi.htm "80.001 Popsiviroidae - ICTVdB Index of Viruses."] (Website.) U.S.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website. Retrieved on 2009-10-28.</ref><ref>[http://www.ncbi.nlm.nih.gov/ICTVdb/Ictv/fs_prion.htm "90. Prions - ICTVdB Index of Viruses."] (Website.) U.S.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website. Retrieved on 2009-10-28.</ref><ref>[http://www.ncbi.nlm.nih.gov/ICTVdb/Ictv/fs_satel.htm "81. Satellites - ICTVdB Index of Viruses."] (Website.) U.S.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website. Retrieved on 2009-10-28.</ref> 한편, 여전히 분류되지 않은 바이러스 종들이 존재한다. === 화학 === {{본문|화학}} [[화학]]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 역시도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화학 원소|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ref name="hakwon">學園出版公社 事典編纂局 편, 〈화학〉, 《學園世界大百科事典》(Vol. 32), 서울:學園出版公社, 1993, 330~334쪽.</ref>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공해 (환경)|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ref>Oxtoby, D. W. et al., ''Principles of Modern Chemisty'', 6th edition, Belmont: Thomson Brooks/Cole, 2007, p. 2</ref> === 우주과학 === 하위분야로 [[천문학]]이 포함된다. === 지구과학 === {{본문|지구과학}} [[지구과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ref>{{웹 인용 |url=http://wordnet.princeton.edu/perl/webwn?s=earth%20science |제목=Wordnet Search: Earth science |확인날짜=2010-06-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200410063158/https://wordnet.princeton.edu/perl/webwn?s=earth%20science |보존날짜=2020-04-10 |url-status=dead }}</ref>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 등이 있다. == 메타 과학 == 자연과학은 오랫동안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로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토머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론에 따르면 자연 과학의 과학적 방법 역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지식 체계의 일부이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지식 체계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보았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으며 과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ref>전윤수, 쿤- 페러다임의 혁명, 20세기 인물 100과 사전, 숨비소리, 2008, {{ISBN|89-90431-59-X}}</ref> 자연과학의 지식체계와 과학적 방법 자체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메타 과학]]이라 한다.<ref>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1999, {{ISBN|0000700533}}</ref> == 같이 보기 == * [[사회과학]] * [[공학]] * [[인문과학]] == 각주 == {{각주|20em}} == 외부 링크 == {{위키공용|Natural science}} * {{언어링크|en}} [http://hrst.mit.edu/ The History of Recent Science and Technology] {{자연과학}} {{전거 통제}} [[분류:자연과학|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원소 정보/헬륨}} '''헬륨'''({{llang|en|Helium|힐리엄}}, {{문화어|헬리움}} {{llang|de|Helium|헬리움}})은 [[화학 원소]]로, '''He'''({{llang|la|Helium|헬리움}})이고 [[원자번호]]는 2이다. 질량수가 3인 <sup>3</sup>He과 4인 <sup>4</sup>He이 있다. 헬륨은 [[화학 원소]]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상압에서는 [[영점에너지]]로 인하여 [[절대영도]]에서도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단, 액체 헬륨의 [[동위원소]]는 일정한 온도 및 압력 하에서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기체, 액체, 고체가 공존하는 3중점이 없는 유일한 원소이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천문학자]] [[피에르 장센]]이 발견하였다. 그는 [[1868년 8월 18일 일식]]의 관측에서 특정 대역의 [[노랑|노란]] [[빛]], 즉 587.6 [[나노미터]] 부분에 새로운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고 헬륨의 존재를 밝혔다. 헬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말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다른 원소와 잘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상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헬륨은 대부분은 방사성 원소의 핵붕괴로 생성된 [[알파 입자]]가 [[천연 가스]]에 포획된 상태로 있다가 발굴된다. [[1903년]], [[미국]]의 [[천연 가스]]전에서 다량의 헬륨이 발굴되었다. [[파일:HeNe Laser Build.webm|섬네일|헬륨 레이저]] 그러나 헬륨은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흔한 원소로서, [[은하계]] 전체 원소의 24%를 차지한다. 태양과 가스 행성([[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들도 수소와 헬륨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항성]]이 [[주계열성]]으로 빛나면서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도 일부 생성된다. == 알려진 특성 == [[파일:Atom.svg|왼쪽|섬네일|<sup>4</sup>He의 원자 구조]] === 비활성 기체 === 헬륨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비활성 기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려진 모든 [[화학 원소]]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적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헬륨은 [[단원자 분자]]로 존재하며 반응하지 않는다. === 상 변화 === 헬륨은 매우 높은 압력하에서 고체나 액체의 상태가 될 따라 30% 정도 부피가 감소될 수 있다.<ref>{{웹 인용 |url=http://periodic.lanl.gov/elements/2.html |제목=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LANL.gov): Periodic Table, "Helium" (viewed 10 October 2002 and 25 March 2005) |확인날짜=2008-06-08 |archive-date=2008-06-0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02082826/http://periodic.lanl.gov/elements/2.html |url-status= }}</ref> 5×107 [[파스칼 (단위)|Pa]]의 압력에서 헬륨의 용적율은 [[물]]의 50배에 달한다.<ref>[http://www3.interscience.wiley.com/journal/105558571/abstract?CRETRY=1&SRETRY=0 C. Malinowska-Adamska, P. Soma, J. Tomaszewski. "Dynamic and thermodynamic properties of solid helium in the reduced all-neighbours approximation of the self-consistent phonon theory". physica status solidi (b) 240 (1): 55–67.]{{깨진 링크|url=http://www3.interscience.wiley.com/journal/105558571/abstract?CRETRY=1&SRETRY=0 }}</ref> 압력 1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영도]]에 도달하여도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양자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즉 헬륨의 [[영점 에너지]]가 너무 높아 절대 영도에 이르러도 분자 운동이 활발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헬륨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1.5 [[켈빈|K]](약 −272 [[섭씨|°C]])에서 약 2.5 MPa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ref>{{웹 인용 |url=http://www.phys.ualberta.ca/~therman/lowtemp/projects1.htm# |제목=알베르타 대학교, 고체 헬륨 관련 웹사이트 |확인날짜=2008-06-0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212140020/http://www.phys.ualberta.ca/~therman/lowtemp/projects1.htm# |보존날짜=2008-02-12 |url-status=dead }}</ref> 헬륨의 고체 상태와 액체 상태는 [[굴절률]]이 같아 분간이 매우 어렵다. 헬륨은 1기압의 압력에서 약 2.3[[켈빈|K]]에서 [[초유체]]로 상변이한다. 고압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도 초유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 액체 헬륨<ref>{{서적 인용|제목=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volume3|성=Richard|이름=Feynman|날짜=2009|출판사=승산|확인날짜=}}</ref> === 저온의 액체 헬륨에는 이상한 성질이 많다. 그중 여러가지가 헬륨이 원자가 보즈 입자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다. 한 가지는 액체 헬륨이 점성 저항(viscous resistance) 없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도가 작은 경우의 '마른 물(dry water)'의 이상적인 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액체가 점성을 가지려면 내부 에너지의 손실이 있어야 한다. 즉 액체의 한 부분이 나머지와는 다른 운동을 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자 몇 개를 나머지 원자들과는 다른 상태로 때려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열운동이 아주 작아지고 모든 원자는 같은 상태로 가려 한다. 몇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따라서 같은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운동에는 어떤 경직성(rigidity)이 있어서 독립적인 입자의 경우에 생기는 불규칙한 난류이 형태로 움직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보즈 입자로 이루어진 액체는 모든 입자들이 같은 상태로 가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고온에서는 많은 원자들을 여러 다른 상태들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열에너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협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선 헬륨 원자들이 모두 같은 상태로 가려 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헬륨이 초유동체([[superfluid]])가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현상은 헬륨의 동위 원소 중 원자량이 4인 것들에서만 볼 수 있다. 원자량이 3인 동위 원소는 개개의 원자가 페르미 입자이기 때문에 액체 상태에서 보통의 유체가 된다. 초유동체 현상은 <sup>4</sup>He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보즈 입자인 알파 입자의 성질에 의한 [[양자역학]]적 효과이다. == 용도 == [[파일:Goodyear-blimp.jpg|왼쪽|섬네일|헬륨을 이용한 비행선]] [[파일:HeTube.jpg|왼쪽|섬네일|헬륨을 이용한 조명기구]] 공기보다 가볍고 [[비활성 기체]]임을 이용해 폭발하기 쉬운 [[수소]] 대신에 [[비행선]], [[풍선]], 애드벌룬에 이용된다. 또, 심해 잠수부의 산소통의 [[질소]] 대체로 이용된다. 그 이유는 [[질소]]보다 헬륨이 [[혈액]]에 대한 용해도가 작아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륨의 [[끓는점]]이 매우 낮은 것을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헬륨은 산화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 [[용접]]을 할 때 산소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헬륨 환경을 조성한다. [[반도체]] 등의 제작을 위해 [[플라즈마]]를 생성시킬 때 플라즈마의 균일한 정착을 위해 헬륨을 적정량 사용한다. 또한 목소리 변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헬륨 가스에서는 공기 중에 비해 약 3배정도 전송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약 10~20초정도 목소리의 음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단 많은 양을 마실 경우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헬륨은 트리믹스에 사용되는데, 트리믹스는 압축 공기에서 질소의 비율을 줄이고 그만큼을 헬륨으로 채운 것이다. 헬륨은 용해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압축 공기를 사용했을 때(30~40m)보다 더욱 깊이 잠수할 수 있다. 그러나 70m~80m 정도까지 내려가면 헬륨이 용해되어 헬륨 마취 현상이 일어난다. {{-}} == 핵융합 == <sup>1</sup>H→<sup>3</sup>He→<sup>6</sup>Be→방사성 붕괴→<sup>4</sup>He→<sup>12</sup>C→<sup>16</sup>O→ <sup>20</sup>Ne→<sup>24</sup>Mg→<sup>28</sup>Si→<sup>56</sup>Fe == 같이 보기 == * [[라이덴프로스트 효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Helium}} * {{네이버캐스트|6104}} * {{언어링크|en}} [http://education.jlab.org/itselemental/ele002.html 헬륨 - It's Elemental] {{원소 주기율표}} {{전거 통제}} [[분류:헬륨| ]] [[분류:비활성 기체]] [[분류:화학 원소]] [[분류:전형 원소]] [[분류:양자 상]]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3-09-13}} {{회사 정보 |로고=Red Hat Logo 2019.svg |그림=Red Hat Tower (formerly headquarters of Progress Energy Inc.) -- 20 May 2012 (panoramio.com) (cropped).jpg |설명=레드햇 본사 }} '''레드햇'''(Red Hat, {{NYSE|RHT}})은 [[1993년]]에 창립된<ref>{{웹 인용|url=https://finance.yahoo.com/quote/rht/profile?ltr=1|title=Finance.yahoo.com|publisher=finance.yahoo.com|accessdate=October 14, 2017}}</ref> [[리눅스]] 배포판 제작회사로, [[레드햇 리눅스]]를 제작했다. 레드햇은 [[오픈 소스]]를 비즈니스로 전개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급하고 지원을 유료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있다. 리눅스가 등장하고 초기에는 일반적인 사용자가 사용하기 쉽게 리눅스 커널을 중심으로 GNU 프로젝트, BSD, X11 등의 소프트웨어를 조합하여 공급하는 형태로 리눅스 초기의 확산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레드햇의 리눅스 배포판(이후, 레드햇 리눅스)은 GPL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도 GPL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래드햇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타 기업의 배포판도 많이 존재한다. (예, [[수세 리눅스]]) 2003년 레드햇 리눅스 9을 마지막으로 일반 사용자용 레드햇 배포판의 판매 및 지원을 중지하고, 일반 사용자를 위한 리눅스 배포판의 개발은 오픈 소스인 [[페도라 프로젝트]]에 이양했다. 현재는 기업용 배포판인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 및 교육 등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6년에는 미들웨어 오픈 소스 업체인 [[제이보스]]를 인수하여, OS 뿐 아니라 미들웨어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덧붙여 지금까지 레드햇은 주식을 [[나스닥]](RHAT)에 상장하고 있었으나, 2006년 12월 12일에 [[뉴욕 증권거래소]](RHT)로 거래소를 변경하였다. 2018년 10월 28일 [[IBM]]에 인수되었다. 2022년 레드햇의 주요 제품은 [https://www.redhat.com/ko/technologies/linux-platforms/enterprise-linux 플랫폼], [https://www.redhat.com/ko/topics/cloud 클라우드 컴퓨팅], [https://www.redhat.com/ko/topics/cloud-native-apps/what-are-cloud-applications 애플리케이션 개발], [https://www.redhat.com/ko/topics/automation/why-choose-red-hat-for-automation 자동화]와 [https://www.redhat.com/ko/topics/containers/what-is-kubernetes 관리], [https://www.redhat.com/ko/topics/cloud-native-apps 애플리케이션 서비스], [https://www.redhat.com/ko/topics/data-services 데이터 서비스], [https://www.redhat.com/ko/topics/security 보안 솔루션] 등이다. == 역사 == 1993년  Bob Young 이 리눅스와 유닉스 소프트웨어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ACC Corporation을 설립하였다. 1994년,  Marc Ewing 은 자신의 리눅스 배포판을 만들어  Red Hat Linux[7] (Ewing은 카네기 멜른 대학에 다닐 때 할아버지가 준 빨간 [[라크로스]] 모자를 쓰고 다녔다)라고 이름붙였다. Ewing은 이를 10월에 릴리즈했고, 이에 따라 핼러윈 릴리즈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Young은 1995년 Ewing의 사업을 인수했고, 자신의 사업과 통합하여 Red Hat Software를 설립하여 CEO가 되었다. Red Hat은 1999년 8월 11일 기업을 상장했고, 이날 [[월 가]]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상장일 주가 상승이 있었다. 1999년 12월  Matthew Szulik 이 Bob Young의 뒤를 이어 CEO가 되었다. 1999년 11월 15일, Red Hat은  Cygnus Solutions를 인수했다. Cygnus는  free software 에 대한 상업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GNU Debugger 나  GNU Binutils와 같은 [[GNU]]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한 유지관리를 제공했다. Cygnus의 창립자 중 한명인  Michael Tiemann은 Red Hat의 CTO가 되었고 2008년까지 오픈 소스 부서의 부사장 역할을 맡았다. 그 후 Red Hat은 WireSpeed, C2Net  Hell's Kitchen Systems를 인수했다. 레드햇은 현재 [https://www.redhat.com/ko/about/brand/standards/history 오픈소스 방식]으로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는 고객, 기여자, 파트너 커뮤니티의 촉매 역할을 하겠다는 미션을 갖고 있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공식 웹사이트}} * [https://ko-kr.facebook.com/RedHatKorea/ 레드햇 공식 페이스북 (한국)] * [https://www.youtube.com/channel/UCVg0Gu5nqSRMpvImx8YNUjA 레드햇 공식 유튜브 (한국)] * [https://www.facebook.com/RedHatAPAC/ 레드햇 공식 페이스북 (아시아퍼시픽)] * [https://www.youtube.com/channel/UCp6NUFV9mSEK6RxUiEVymVg 레드햇 공식 유튜브 (글로벌)] * [https://twitter.com/redhat 레드햇 트위터 (글로벌)] * [https://www.instagram.com/redhatinc/ 레드햇 인스타그램 (글로벌)] {{전거 통제}} {{토막글|리눅스}} [[분류:레드햇| ]] [[분류:리눅스 기업]] [[분류:1993년 설립된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클라우드 컴퓨팅 제공자]] [[분류:1993년 설립된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리서치 트라이앵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SF|사이언스 픽션}} {{다른 뜻 넘어옴|사이언스 픽션}} {{사변물}}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약칭 '''SF'''는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외삽]]한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문학]] 장르인 '''과학소설'''(科學小說) 또는 '''SF 소설'''을 가리키며, 나아가서는 그런 요소를 가진 영화 등의 다른 매체들의 장르를 포괄하는 단어다. == 정의 == {{상세|SF의 정의}} SF 문학은 개론적으로는 과학적인 [[혁신]]과 그것이 인간 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즐겨 다루는 "개념(idea)의 문학"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지만<ref>Marg Gilks, Paula Fleming, and Moira Allen (2003). [http://www.writing-world.com/sf/sf.shtml "Science Fiction: The Literature of Ideas"]. WritingWorld.com.</ref>, 각론으로 들어가면 1세기가 넘는 역사를 통해 세분화된 광범위한 [[하위장르]]와 [[주제 (문학)|주제]]를 가지고 있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데이먼 나이트|나이트]]는 이러한 어려움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손을 들어 가리키면 그것이 바로 SF이다"<ref>Knight, Damon Francis (1967). In Search of Wonder: Essays on Modern Science Fiction. Advent Publishing, Inc. p. xiii. {{ISBN|0-911682-31-7}}.</ref>라고 말했다. 이것은 작가 [[마크 C. 글래시|글래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SF의 정의는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와 같다. 당신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알게 된다."<ref>Glassy, Mark C. (2001). The Biology of Science Fiction Cinema. Jefferson, N.C.: McFarland. {{ISBN|0-7864-0998-3}}.</ref>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나보코프]]는 엄밀하게 정의하면,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SF여야 한다고 주장했다.<ref>Nabokov, Vladimir Vladimirovich (1973). Strong opinions. McGraw-Hill. pp. 3 et seq. {{ISBN|0-07-045737-9}}.</ref>(이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판 서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인 [[로버트 A. 하인라인|하인라인]]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의 SF에 대한 간편하고 짧은 정의는 아마도 이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현실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기반한,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ref>Heinlein, Robert A.; Cyril Kornbluth; Alfred Bester; Robert Bloch (1959). "Science Fiction: Its Nature, Faults and Virtues". The Science Fiction Novel: Imagination and Social Criticism. University of Chicago: Advent Publishers.</ref> [[로드 셜링|셜링]]의 정의는 이렇다. "판타지는 개연성 있게 만들어진 불가능한 것. SF는 가능하게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것."<ref>Rod Serling (1962-03-09). The Twilight Zone, "The Fugitive".</ref> [[레스터 델 레이|델레이]]는 "헌신적인 애호가나 팬이라 해도, SF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정의"란 없고, "SF의 윤곽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ref>Del Rey, Lester (1980). The World of Science Fiction 1926–1976. Garland Publishing.</ref> c추가한다. SF는 주로 [[합리]]적으로 그리는 대안적인 가능 세계와 미래에 기반해있다.<ref>Del Rey, Lester (1979). The World of Science Fiction: 1926–1976. Ballantine Books. p. 5. {{ISBN|0-345-25452-X}}.</ref> 이 장르는 그런 면에서 [[판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서사|이야기]]의 맥락내에서, SF의 상상적 요소는 [[과학]]적으로 정립됐거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물리 법칙]]으로 대부분이 가능해진다.(그렇지만 이야기 속 몇몇 요소는 여전히 순수하게 상상된 사변일 수 있다) SF의 [[배경 (서사)|배경]]은 종종 [[합의된 현실]]과 반대이지만, 대부분의 SF는 다양한 가상의 요소로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이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촉진된 상당한 정도의 [[불신의 유예]]에 의존하고 있다. SF의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 [[대체역사|가상의 시간선]]상의 [[미래]], 혹은 [[역사학]]적이거나 [[고고학]]적인 진실과 모순된 역사적 배경 등의 시간적 설정 * [[외우주]](예시: [[우주 여행]]), 다른 세계, [[지저 세계]] 등의 공간적 배경, 장면<ref>Sterling, Bruce. "Science fiction" in Encyclopædia Britannica 2008</ref> * [[외계 생명체|외계인]], [[돌연변이 (픽션)|돌연변이]], [[안드로이드]] 혹은 [[휴머노이드]] [[로봇]], 그리고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른 캐릭터들 * [[광선총]], [[순간이동]] 장치, 휴머노이드 [[컴퓨터]] 같은 미래적이거나 그럴듯한 기술<ref>Card, Orson Scott (1990). How to Write Science Fiction and Fantasy. Writer's Digest Books. p. 17. {{ISBN|0-89879-416-1}}.</ref> * [[시간 여행]], [[웜홀]], [[초광속]] 여행, [[앤서블]]을 비롯한 새로운, 혹은 기존의 물리법칙과 모순되는 과학적 법칙 * [[디스토피아]], [[포스트 자원고갈]],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새롭거나 다른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시스템<ref>Hartwell, David G. (1996). Age of Wonders: Exploring the World of Science Fiction. Tor Books. pp. 109–131. {{ISBN|0-312-86235-0}}.</ref> * [[마인드 컨트롤]], [[텔레파시]], [[염력]], [[순간 이동]]과 같은 불가사의한 능력 * 다른 세계, 차원과 그곳을 오가는 여행 === {{앵커|공상과학}} 공상과학이라는 표현 === 20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주로 '공상과학소설'로 지칭되었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공상과학영화'라든지 '공상과학만화'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장르 전체를 가리키는 형용사로 자리잡았는데, 이것은 서구의 사이언스 픽션을 직접적인 번역이 아니라 일본 출판물의 [[중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입했던 과정의 부산물이다. 1959년 일본의 하야카와(早川) 출판사는, 미국의 과학소설 잡지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약칭 F&SF)과 제휴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SF 월간지였던 [[S-F 매거진]](S-F マガジン)을 창간하면서 잡지 표지에 『공상과학소설지({{llang|ja|空想科学小説誌}})』라는 오역에 가까운 부제(副題)를 붙였다.<ref>{{언어링크|ja}} [https://ja.wikipedia.org/wiki/S-Fマガジン 일본어판 위키백과 - SF매거진]{{깨진 링크|url=https://ja.wikipedia.org/wiki/S-F }}</ref> 여기서 '공상과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잡지 이름 중 'Fantasy'를 문학 장르인 '판타지'가 아닌 '공상'으로 오인하고 만들어낸 편의적인 조어였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 '공상과학소설'은 1960년대 중반까지 'science fiction'의 역어로 곧잘 쓰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SF라는 약어는 아직 생소했던 탓에 '공상과학소설'뿐만 아니라 '과학소설', '환상과학소설', '미래과학소설'이라는 역어들이 함께 쓰였는데, 1970년대 중반의 [[애니메이션]] 인기로 인한 SF 붐이 사회 현상으로까지 격상되면서 'SF 소설', 'SF 영화', 'SF 애니메이션' 하는 식으로 SF라는 약어가 완전히 자리잡았고, 그 결과 위의 한자어들은 1980년대에는 장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는 완전히 사어화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아동용 소설 전집이나 외국어 사전류를 통째로 [[중역]](重譯)하거나 참고해서 출간하는 일이 잦았기에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사이언스 픽션에 대한 역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도 업데이트가 미비한 사전류<ref>[http://endic.naver.com/enkrEntry.nhn?entryId=4d817e9c3b754095b9927d60aa6d6655 네이버영어사전 - science fiction]</ref><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14145&v=43 브리태니커백과 - 공상과학영화]{{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14145&v=43 }}</ref><ref>[http://100.naver.com/100.nhn?docid=908220 두산백과사전 - 공상 과학 박물관]{{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908220 }}</ref>나 언론 기사<ref>[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skill/421068.html ‘혈관 누비는 치료로봇’ 세계 첫 생체실험 성공] {{웨이백|url=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skill/421068.html |date=20160205151516 }}《한겨레》2010-05-16 오후 09:45:45</ref><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5/h2010051621524921950.htm 혈관 속 누비는 5mm 로봇 세계 첫 개발]{{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5/h2010051621524921950.htm }}《한국일보》2010/05/16 21:52:49</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7/2010051702977.html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조선일보》2010.05.17 22:03</ref> 등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공상과학'은 상술했듯이 애당초 졸역과 무비판적인 일본 문화 수용에서 비롯된 용어이고, 특히 '공상'이라는 한자 단어가 장르의 올바른 이해와 수용을 심각하게 저해하므로 가치 중립적이며 국제 기준에 맞는 'SF'로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왔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공상과학'은 당초 '사이언스 픽션'뿐만 아니라 [[판타지]]를 포함하는 표현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근본적 오류가 있고 엄밀하지 못한 단어이다.<ref name='st0430'>[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19713 ‘공상과학소설’은 잘못된 용어]{{깨진 링크|url=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19713 }}《사이언스 타임즈》2007.04.30</ref> 따라서 영어 Science Fiction을 한국어로 번역함에 있어, '공상'이란 단어가 포함될 이유가 없다. * 한국어의 '공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상상'을 의미하므로 사이언스 픽션의 본래 뜻을 심각하게 훼손하며,<ref name='kh'>{{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1004231725075&code=900308|제목=(책과 삶)‘과학의 꿈’에 보낸 무한 신뢰|출판사=[[경향신문]]}}</ref> 특히 [[유교]]의 영향이 강한 한국 특유의 교육 환경에서는'망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040430/8056915/1|제목=SF속 어딘가에 미래의 과학이…|출판사=[[동아일보]]}}</ref><ref name='st0430' /><ref>{{뉴스 인용url=https://archive.today/20120707023610/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7&Total_ID=2784485|제목=(북&피플) SF는 과학소설이지 오락물 아니에요|출판사=[[중앙일보]]날짜=2007-07-06}}</ref><ref>{{뉴스 인용|url=http://m.pressian.com/section_view.html?no=68969|제목=아이언맨·스타트렉의 원조! 대통령도 몰랐던 '미래 창조' 주역? <아톰부터 커크 선장까지> SF의 세계로 초대합니다|출판사=[[프레시안]]|날짜=2013=5=31|확인날짜=2014-10-2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022190047/http://m.pressian.com/section_view.html?no=68969|보존날짜=2014-10-22|url-status=dead}}</ref> 때문에 "해당 단어가 90년대 이후 2000년대초까지 팬덤 내부에서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성숙하는 동안 많은 SF 독자들에게 상처를 준 말이었으며, 지금도 적지 않은 SF독자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단어"<ref>[https://altsf.wordpress.com/2015/6/01/ed_16/ 안녕하세요, 알트 공상과학입니다.]《alt.SF》</ref><ref>[https://altsf.wordpress.com/2011/06/01/sp08/ 한국 SF 담론의 지형도 (상)]《alt.SF》</ref>인 것이 사실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 SF 팬덤과 출판계와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을 '과학소설'로 바꿔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고, SF 문학과 SF 영화가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2020년대 이후에는 언론계에서도 영화, 만화, 게임 등 여타 매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장르의 이름으로서 '공상과학'이 아닌 'SF'가 점점 우위를 점하는 중이다.<ref>{{웹 인용|url=http://www.djuna.kr/movies/etc_2000_08_25.html|제목=SF라는 명칭|저자=듀나|저자링크=듀나}}</ref><ref>[https://storify.com/venia76/twt-sf-sf SF는 SF일뿐.], 배명훈 트윗 모음, 2011.12.02</ref> 한편 [[중국]]에서는 SF장르를 과학환상({{llang|zh|科学幻想}}) 또는 간단히 과환이라고 부른다<ref>[https://zh.wikipedia.org/w/index.php?title=%E7%A7%91%E5%B9%BB&oldid=4963902 중국어판 위키백과 - 과환] 2010-05-26 확인.</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과학환상작품'이라는 유사용어를 사용한다.<ref>[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570400 국어사전 - 과학환상작품]《국립국어원》</ref> === 사이파이(Sci-fi)라는 표현 === Sci-Fi(사이-파이)라는 약어는 1954년에 과학소설 연구가인 [[포리스트 J 애커먼|애커먼]]에 의해 공식 문헌에 사용되었다.<ref>(2000)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 Houghton Mifflin Company.</ref> [[로버트 A. 하인라인|하인라인]]은 이보다 6년 먼저 사적인 글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ref>"www.jessesword.com/sf/view/210". Retrieved on 2007-02-02.</ref> SF가 대중문화로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더 오락 지향적인 SF물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일부 영화 비평가들이 저급한 'B급 SF 영화'를 'Sci-Fi'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평론가 등은 이 약어를 멸칭(蔑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SF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간주된다.<ref>[http://h21.hani.co.kr/arti/photo/cartoon/6847.html 환상여행의 마력에 빠지다 - 박찬욱 - 한겨레21]</ref><ref>{{언어링크|en}} [https://en.wikipedia.org/wiki/Syfy 영어판 위키백과 - Syfy]</ref><ref>[http://en.wiktionary.org/wiki/sci-fi 영어판 위키낱말사전 - sci-fi] 에 따르면 sci-fi는 science fiction의 약어이며 구어체적인 표현이라고 되어 있다.</ref> == 역사 == {{상세|SF의 역사}} SF를 [[사색]]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해보면, 이 장르의 기원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흐릿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2세기 [[루시안]]의 [[진짜 역사]]<ref>Grewell, Greg: "Colonizing the Universe: Science Fictions Then, Now, and in the (Imagined) Future", Rocky Mountain Review of Language and Literature, Vol. 55, No. 2 (2001), pp. 25–47 (30f.)</ref><ref>Fredericks, S.C.: "Lucian's True History as SF", Science Fiction Studies, Vol. 3, No. 1 (March 1976), pp. 49–60</ref><ref>Swanson, Roy Arthur: "The True, the False, and the Truly False: Lucian's Philosophical Science Fiction", Science Fiction Studies, Vol. 3, No. 3 (Nov. 1976), pp. 227–239</ref><ref>Georgiadou, Aristoula & Larmour, David H.J.: "Lucian's Science Fiction Novel True Histories. Interpretation and Commentary", Mnemosyne Supplement 179, Leiden 1998, {{ISBN|90-04-10667-7}}, Introduction</ref><ref>Gunn, James E., The New Encyclopedia of Science Fiction, Viking, 1988, {{ISBN|978-0-670-81041-3}}, p. 249, calls it "Proto-Science Fiction".</ref>,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츠]] 설화<ref>Irwin, Robert (2003). The Arabian Nights: A Companion. Tauris Parke Paperbacks. pp. 209–13. {{ISBN|1-86064-983-1}}.</ref><ref name="Richardson, Matthew 2001">Richardson, Matthew (2001). The Halstead Treasury of Ancient Science Fiction. Rushcutters Bay, New South Wales: Halstead Press. {{ISBN|1-875684-64-6}}. (cf. "Once Upon a Time". Emerald City (85). September 2002. Retrieved 2008-09-17.)</ref>, 10세기의 [[다케토리 이야기]]<ref name="Richardson, Matthew 2001"/>, 13세기 [[이븐 알 나피스]]의 [[독학 신학]](Theologus Autodidactus)<ref>Dr. Abu Shadi Al-Roubi (1982), "Ibn al-Nafis as a philosopher", Symposium on Ibn al-Nafis, Second International Conference on Islamic Medicine: Islamic Medical Organization, Kuwait (cf. Ibnul-Nafees As a Philosopher, Encyclopedia of Islamic World [2])</ref>을 비롯한 SF의 선구자격 문학들을 만나게 된다. 막 싹트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의 생산물들과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조너선 스위프트|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ref name="ReferenceA">"Science Fiction". Encyclopædia Britannica. Retrieved 2007-01-17.</ref>는 [[볼테르]]의 〈[[마이크로메가스]]〉(1752)와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의 〈[[솜니움 (소설)|솜니움]]〉(1620~1630)<ref>Creator and presenter: Carl Sagan (1980-10-12). "The Harmony of the Worlds". Cosmos: A Personal Voyage. PBS.</ref>과 더불어 최초의 사이언스 판타지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아시모프]]와 [[칼 세이건|세이건]]은 〈솜니움〉을 최초의 SF로 여긴다.<ref>"Carl Sagan on Johannes Kepler's persecution". YouTube. Retrieved 2010-07-24.</ref><ref>Isaac, Asimov (1977). The Beginning and the End. New York: Doubleday. {{ISBN|978-0-385-13088-2}}.</ref> 《솜니움》에서는 달 여행과 달에서 바라본 지구의 움직임이 묘사됐다. 영국인 귀족 여성 [[마거릿 캐번디시]]의 〈[[빛나는 세계]]〉(1666) 역시 초기 SF의 전조로 여겨진다.<ref>{{저널 인용|last=White|first=William|title=Science, Factions, and the Persistent Specter of War: Margaret Cavendish's Blazing World|journal=Intersect: The Stanford Journal of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volume=2|issue=1|pages=40–51|date=September 2009|url=http://ojs.stanford.edu/ojs/index.php/intersect/article/view/53|accessdate=2014-03-07}}</ref><ref>{{서적 인용|author=Michael Murphy|title=A Description of the Blazing World|url=http://books.google.com/books?id=SLDFLYFi8LYC|year=2011|publisher=Broadview Press|isbn=978-1-77048-035-3}}</ref><ref>http://skullsinthestars.com/2011/01/02/margaret-cavendishs-the-blazing-world-1666/</ref><ref>{{서적 인용|author=Robin Anne Reid|title=Women in Science Fiction and Fantasy: Overviews|url=http://books.google.com/books?id=jKr0jWY8FLkC&pg=RA1-PA59|year=2009|publisher=ABC-CLIO|isbn=978-0-313-33591-4|page=59}}{{깨진 링크|url=http://books.google.com/books?id=jKr0jWY8FLkC&pg=RA1-PA59 }}</ref> 또다른 예시는 [[루드비히 홀버그|홀버그]]의 소설 〈[[닐스 클림의 지하 여행]]〉(1741)이다. 18세기 문학 양식으로서 소설의 발달에 뒤따라, 19세기엔 [[메리 셸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최후의 인간]]〉이 SF소설의 정의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며, [[브라이언 올디스|올디스]]는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주장했다.<ref>John Clute and Peter Nicholls (1993). "Mary W. Shelley". Encyclopedia of Science Fiction. Orbit/Time Warner Book Group UK. Retrieved 2007-01-17.</ref><ref>Wingrove, Aldriss (2001). Billion Year Spree: The History of Science Fiction (1973) Revised and expanded as Trillion Year Spree (with David Wingrove)(1986). New York: House of Stratus. {{ISBN|978-0-7551-0068-2}}.</ref> 이보다 나중에 [[에드거 앨런 포|포]]는 달 여행을 그린 이야기 한 편을 썼다.<ref>Poe, Edgar Allan. The Works of Edgar Allan Poe, Volume 1, "The Unparalleled Adventures of One Hans Pfaal". Retrieved 2007-01-17.</ref> 이밖에도 더 많은 예시들이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파일:H G Wells pre 1922.jpg|섬네일|left|150px|alt=Black-and-white photo of a man with bushy black mustache and black hair with parting.|[[H.G. 웰스]]]] [[전기]], [[전보]]와 같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통시설의 출현에 따라 [[H. G. 웰스|웰스]]와 [[쥘 베른|베른]]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ref>"Science Fiction". Encarta Online Encyclopedia. Microsoft. 2006. Retrieved 2007-01-17.</ref> 웰스의 〈[[우주 전쟁]]〉(1898)은 발달된 무기를 장착한 세 발 달린 전투 기계를 탄 화성인들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외계 침공]]을 실감나게 묘사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 픽션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적 로망스]](scientific romance)"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이것은 1884년 [[에드윈 애벗 애벗|애벗]]의 노벨라 《[[플랫랜드|플랫랜드: 다차원의 이야기]]》를 비롯한 작품을 파생시켰다. 이 용어는 20세기 초반 [[올라프 스테이플던|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파일:Jules Verne.jpg|섬네일|150px|alt=Black-and-white photo of man in formal dress with unkempt hair, mustache and beard.|[[쥘 베른]]]] 20세기 초반,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창간인 [[휴고 건스백|건스백]]에 영향받아 나타난 [[펄프 매거진]]들을 통해 주로 미국인 SF 작가들로 이뤄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다.<ref name="ReferenceB">Taormina, Agatha (2005-01-19). "A History of Science Fiction". Northern Virginia Community College. Retrieved 2007-01-16.</ref> 1912년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버로스]]는 화성을 배경으로 [[화성의 존 카터|존 카터]]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장기 시리즈인 [[바숨]]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 《[[화성의 프린세스]]》를 출간한다. 1928년, 필립 놀란이 어메이징 스토리즈에 [[벅 로저스]]의 원작 소설 아마겟돈 2419를 실은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벅 로저스(1929), [[브릭 브래드퍼드]](1933), [[플래시 고든]](1934)으로 이어지는 연재 만화의 바탕이 됐다. 이 연재 만화와 연속된 영화 시리즈는 SF를 대중화시켰다. [[파일:Amazing Stories Quarterly 1928 Spring.jpg|세계 최초의 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섬네일]] 1930년대, [[존 W. 캠벨|캠벨]]이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의 편집장을 맡게 되고, [[아이작 아시모프|아시모프]], [[데이먼 나이트|나이트]], [[도널드 A. 울하임|울하임]], [[프레드릭 폴|폴]], [[제임스 블리시|블리시]], [[주디스 메릴|메릴]] 등을 비롯해 [[퓨처리안]]이라 불리게 되는 일군의 신진 작가들이 뉴욕시에서 나타난다.<ref name="Resnick, Mike 1997">Resnick, Mike (1997). "The Literature of Fandom". Mimosa (#21). Retrieved 2007-01-17.</ref> 이 시기의 다른 중요한 작가들로 [[E. E. 스미스|스미스]], [[로버트 A. 하인라인|하인라인]], [[아서 C. 클라크|클라크]], [[올라프 스테이플던|스테이플던]], [[A. E. 밴보트|밴보트]] 등이 있다. 캠벨의 영향력 바깥에서 활동한 작가로 [[레이 브래드버리|브래드버리]]와 [[스타니스와프 렘|렘]]이 있다. 캠벨이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으로 지낸 기간은 보통 [[과학소설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로 여겨지며, 과학적 발견과 성취를 찬양하는 하드 SF 소설로 특징지어 진다.<ref name="Resnick, Mike 1997"/> 이 시기는 전후 기술적 발전, [[H. L. 골드|골드]]가 편집한 잡지 《[[갤럭시 (잡지)|갤럭시]]》의 출현, 그리고 하드 사이언스보다 사회 과학을 더 강조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1950년대 [[비트 세대]]는 [[윌리엄 S. 버로스|버로스]] 같은 사변적 작가들을 포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문학적"이거나 예술적 감성의 지식인적 자의식으로 가득찬 일련의 작가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높은 강도의 실험적 시도를 벌인 [[뉴웨이브 (SF)|뉴웨이브]]가 영국을 중심으로 발흥했고, 동시기 미국에서는 [[프랭크 허버트|허버트]], [[새뮤얼 R. 덜레이니|덜레이니]], [[로저 젤라즈니|젤라즈니]], [[할런 엘리슨|엘리슨]] 등의 작가들이 새로운 경향, 사상, 스타일을 탐구한다.<ref name="ReferenceA"/> [[어슐러 K. 르 귄|르귄]]과 다른 작가들은 소프트 SF 분야를 개척했다.<ref>Browning, Tonya (1993). "A brief historical survey of women writers of science fiction". University of Texas in Austi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6년 12월 8일. Retrieved 2007-01-19.</ref> 1980년대, [[윌리엄 깁슨|깁슨]]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은 전통적인 SF의 [[낙관론]]과 발전에 대한 지지에서 방향을 돌렸다.<ref>Philip Hayward (1993). Future Visions: New Technologies of the Screen. British Film Institute. pp. 180–204. Retrieved 2007-01-17.</ref>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은 [[필립 K. 딕|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 묘사되었다. 《[[스타 워즈]]》 프랜차이즈는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 신경을 쓰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ref>Allen Varney (2004-01-04). "Exploding Worlds!". Retrieved 2007-01-17.</ref> [[C. J. 체리]]의 [[외계 생명체|외계인]]의 삶과 복잡한 과학적 도전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ref>Vera Nazarian (2005-05-21). "Intriguing Links to Fabulous People and Places...". Retrieved 2007-01-30.</ref> 1990년대엔 [[환경 문제]], 글로벌 인터넷과 확장된 정보의 우주의 의미, [[바이오테크놀러지]], [[나노테크놀러지]], 포스트 [[냉전]], [[포스트 자원고갈]] 사회에 대한 관심을 비롯한 주제들이 급부상했다. [[닐 스티븐슨|스티븐슨]]의 《[[다이아몬드 시대]]》는 이러한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캐릭터 중심 서사를 되돌려왔다.<ref>"Shards of Honor". NESFA Press. 2004-05-10. Retrieved 2007-01-17.</ref>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 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1987)이 SF쇼의 범람을 예고했고, 이는 세 편의 《[[스타 트렉]]》 스핀오프 쇼([[스타 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딥 스페이스 9]], [[스타 트렉: 항해자|항해자]], [[스타 트렉: 엔터프라이즈|엔터프라이즈]])와 《[[바빌론 5]]》로 이어진다.<ref>David Richardson (July 1997). "Dead Man Walking". Cult Times. Retrieved 2007-01-17.</ref><ref>Nazarro, Joe. "The Dream Given Form". TV Zone Special (#30).</ref> 고대 포털과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게이트들에 대한 영화 《[[스타게이트(영화)|스타게이트]]》가 1994년 개봉했다.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SG-1]]》이 1997년 7월 27일 첫 방영되고, 이후 10시즌이 이어져 214개의 에피소드를 남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게이트 인피니티]]》와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아틀란티스]]》, 《[[스타게이트 유니버스]]》, [[DVD 직배급]] 영화 《[[스타게이트: 진실의 방주]]》, 《[[스타게이트: 연속체]]》 등의 스핀오프도 나왔다. 《스타게이트 SG-1》은 《[[엑스 파일]]》의 최장기 북미 SF TV 시리즈 방영 기록을 돌파했고, 이 기록은 후에 《[[스몰빌]]》에게 깨졌다.<ref>{{뉴스 인용|저자=대런 섬너|url=http://www.gateworld.net/news/2011/05/smallville-bows-this-week-with-stargates-world-record/ |title=''Smallville'' bows this week&nbsp;— with ''Stargate''{{'}}s world record |publisher=[[GateWorld]] |date=2011년 5월 10일 |accessdate=2014년 2월 23일}}</ref> 기술적 변화의 급격한 속도에 대한 우려는 [[버너 빈저|빈저]]의 소설 《[[실시간으로 버려지다]]》(Marooned in Realtime)로 대중화된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채택된다.<ref>Vernor Vinge, ''The Coming Technological Singularity'', Vision-21: Interdisciplinary Science & Engineering in the Era of CyberSpace, NASA Conference Publication CP-10129, [http://www-rohan.sdsu.edu/faculty/vinge/misc/singularity.html], 30–31 March 1993, accessdate=2007-08-07</ref> SF는 발전과 미래 기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SF 포럼보다는 문학과 사회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영화와 미디어 이론가인 [[비비안 소브책]]은 SF영화와 기술적 상상력 간의 영향관계를 검토했다. 기술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허구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가상 세계는 과학의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윌리엄 섀트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How William Shatner Changed the World)는 현실에서 실현된 상상 속 기술의 다양한 예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아서 C. 클라크|클라크]] 같은 초창기 SF작가들처럼 현재로선 불가능한 기술들을 곧 실현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ref>Sheila Schwartz (1971). "Science Fiction: Bridge between the Two Cultures". The English Journal. Retrieved 2007-03-26.</ref> ==SF의 범주== ===하드 SF=== {{본문|하드 SF}} [[파일:Clarke sm.jpg|섬네일|200px|[[아서 C. 클라크]]]] 하드 과학소설, 혹은 "하드 SF"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천체 물리학]], [[화학]]의 정확한 세부사항에 대한 엄격한 관심, 혹은 더 발전한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세계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특징지워진다. 과학 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가진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그레고리 벤퍼드]], [[제프리 A. 랜디스]], [[데이비드 브린]],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L. 포워드]], [[프레드 호일]] 등의 하드 SF 작가들은 현직 과학자 출신이며, [[루디 루커]], [[버너 빈지]], [[찰스 셰필드]], [[래리 니븐]] 같은 수학자들도 있다. 21세기의 가장 주요한 하드 SF 작가들로는 [[테드 창]], [[그레그 이건]], [[그레그 베어]], [[로버트 J. 소여]], [[스티븐 백스터]], [[얼레이스터 레널즈]] 등이 있다. ===소프트 SF=== {{본문|소프트 SF}} "소프트" SF는 아마도 [[사회 과학]], 이를테면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에 기반한 작품들이라고 넓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로 [[어슐러 K. 르 귄|르귄]], [[필립 K. 딕|딕]] 등이 있다.<ref name="ReferenceB"/><ref>Hartwell, David G. (August 1996). Age of Wonders. Tor Books. Retrieved 2007-01-17.</ref> 소프트 SF라는 용어는 하드 SF에 비해 엄밀한 범주는 아니며, 과학 및 과학기술의 묘사에 많은 힘을 쏟는 하드 SF에 비해 인물 조형과 문장의 완성도에도 같은 정도 또는 그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인 SF 소설들을 지칭하는 두리뭉실한 용어이다. SFWA 그랜드 마스터 [[레이 브래드버리|브래드버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프트 SF의 거장이다.<ref>Maas, Wendy (July 2004). Ray Bradbury: Master of Science Fiction and Fantasy. Enslow Publishers.</ref> [[동구권]]은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렘]], [[자누슈 자이델|자이델]]과 [[소련]]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커 불리초프|불리초프]], [[예브게니 자먀틴|자먀틴]], [[이반 예프레모프|예프레모프]] 등을 비롯한 방대한 분량의 사회과학적 SF 소설을 생산해냈다.<ref>[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528857/science-fiction/235713/The-evolution-of-science-fiction Encyclopædia Britannica. Science fiction]</ref><ref>Howell, Yvonne (1994). Apocalyptic Realism: The Science Fiction of Arkady and Boris Strugatsky. Peter Lang. {{ISBN|0-8204-1962-1}}.</ref> 어떤 작가들은 하드 SF와 소프트 SF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했다.<ref>[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Science_Fiction New World Encyclopedia: Science Fiction]</ref> 사회과학 소설과 소프트 SF는 [[유토피아]]<ref>{{웹 인용 |url=http://mirror.pe.kr/webzine6/79717 |제목=거울 10년: 유토피아를 향하여 |확인날짜=2015-05-1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518100552/http://mirror.pe.kr/webzine6/79717 |보존날짜=2015-05-18 |url-status=dead }}</ref>와 [[디스토피아]] 이야기와 연관된다; [[조지 오웰|오웰]]의 《[[1984 (소설)|1984]]》, [[올더스 헉슬리|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마거릿 애트우드|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풍자 소설 또한 과학소설이나 사변소설로 간주된다. == 하위 장르 == SF를 고정된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하위장르들이 간단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시간여행물이나 초인물처럼 전통적인 주제나 소재로 이루어진 분류가 있는가 하면, 뉴웨이브나 사이버펑크처럼 장르 내부의 역동적인 문학적 사조가 하위장르 내지는 그에 준하는 범주로 정착한 사례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연구들은 일반적인 하위장르들을 서로 중복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장르 밖이나 그 사이에서 장르의 경계에 포섭되지 않는 공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중 시장과 문학 비평 사이에도 장르와 분류를 설정하는데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사이버펑크=== {{본문|사이버펑크}} 사이버펑크 장르는 198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이 용어는 [[사이버네틱스]]와 [[펑크 음악|펑크]]의 합성어<ref>Stableford, Brian (2006). Science Fact and Science Fiction: An Encyclopedia. Taylor & Francis Group LLC. p. 113.</ref> 로서, [[브루스 베트케|베트케]]의 1980년 단편 《사이버펑크》를 통해 처음 만들어졌다. 시간적 배경은 주로 근미래이며, 설정은 대개 [[디스토피아]]적이고, 특유의 고통으로 형상화된다. 사이버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는 [[정보 기술]], 특히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인터넷]]의 발전, [[인공 지능]], [[보철학]], 기업이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적 제어 등이다. [[니힐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필름 느와르]] 기법이 일반적인 요소이며, 주인공은 반항적인 [[안티 히어로]]일 때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윌리엄 깁슨|깁슨]], [[브루스 스털링|스털링]], [[닐 스티븐슨|스티븐슨]], [[팻 캐디건|캐디건]]이 있다. 제임스 오흘레이는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사이버펑크''' 비주얼 스타일의 결정적인 예시라고 말했다.<ref>James O'Ehley (July 1997). "SCI-FI MOVIE PAGE PICK: BLADE RUNNER — THE DIRECTOR'S CUT". Sci-Fi Movie Page. Retrieved 2007-01-16.</ref> 이것은 후에 [[오시이 마모루|오시이]]의 《[[공각 기동대]]》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영상물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시간 여행=== {{본문|시간여행물}} 시간여행물은 18세기나 19세기에 그 전신이 나타난다. 최초의 중요한 시간여행 소설은 [[마크 트웨인|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이다. 가장 유명한 소설은 [[H. G. 웰스|웰스]]의 1895년작 《[[타임머신 (소설)|타임 머신]]》이다. 트웨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웰스의 소설에선 시간여행 장치가 조종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시간 여행|타임 머신]]"이라는 용어는 웰스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젠 시간여행 장치를 부르는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백 투 더 퓨처]]》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시간여행물은 [[조부모 패러독스]] 같은 논리적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ref>Frank Artzenius and Tim Maudlin (2000-02-17). "Time Travel and Modern Phys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etrieved 2007-01-16.</ref> 시간 여행은 현대 SF에서도 계속해서 인기있는 주제이며, 이를테면 《[[스타게이트 SG-1]]》이나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체 역사=== {{본문|대체 역사}} 대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분야의 소설들은 종종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동원하거나,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와는 다른 우주를 설정한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워드 무어|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필립 K. 딕|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분야의 고전이다. [[대체역사물을 위한 횡향 상|횡향 상]]은 최고의 대체역사물에 수여된다. 이 이름은 [[머리 라인스터|라인스터]]의 1934년 작품 《[[시간의 횡향]]》에서 가져왔다. [[해리 터틀도브|터틀도브]]는 이 분야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이며, 종종 "대체 역사 마스터"로 불린다.<ref>Adam-Troy Castro (2006). "Off the Shelf: In the Presence of Mine Enemies (book review)". Sci Fi Weekly .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June 2008. Retrieved 26 November 2008.</ref><ref>Hall, Melissa Mia (2008년 4월 7일). "Master of Alternate History". Publishers Weekly. Retrieved 26 November 2008.[링크 소멸]</ref> 한국에서는 상술한《[[높은 성의 사나이]]》에 촉발받고 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이 분야의 효시로 손꼽힌다. ===밀리터리 SF=== {{본문|밀리터리 SF}} [[밀리터리 SF]]는 국가, 행성, 항성간의 [[군사]] 분쟁을 배경으로 삼은 하위장르이며,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대개 군인이다. 밀리터리 SF는 군사 기술, 절차, 의식, 역사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며, 종종 실제 일어난 역사적 분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고든 딕슨]]의 《[[도사이]]》와 함께 이 분야 초기의 예시이다. 초기 작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스타일로 창작된 이 장르에 대한 비판이다.<ref>Henry Jenkins (1999-07-23). "Joe Haldeman, 1943-". Retrieved 2007-01-16.</ref> [[존 링고]], [[데이비드 드레이크]], [[데이비드 웨버]], [[톰 크래트먼]], [[마이클 Z. 윌리엄슨]], [[S. M. 스털링]], [[존 F. 칼]], [[돈 호스론]] 등이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작가이다. [[배인 북스]] 출판사는 이 소설가들 여럿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ref>"Website Interview with Toni Weisskopf on SF Canada". Baen Books. 2005-09-12. Retrieved 2007-01-16.</ref> ===초인물=== 초인물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등장을 주제로 다룬다. [[올라프 스테이플던|스테이플던]]의 소설 《[[이상한 존]]》과 [[시어도어 스터전|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 [[필립 와일리|와일리]]의 《검투사》에서처럼 자연적 발생을 기원으로 삼거나, 아니면 [[A. E. 밴보트|밴보트]]의 소설 《[[슬랜]]》에서처럼 과학적 진보를 통한 의도적인 개조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초인물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인들을 보는 사회의 반응과 초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다. 초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인간 개조]]에 대한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프레더릭 폴|폴]]의 《[[맨 플러스]]》 역시 이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아포칼립스, 포스트-아포칼립스물=== {{본문|아포칼립스물}} 아포칼립스물은 전쟁을 통한 [[문명의 종말]]([[해변에서 (소설)|해변에서]]), 전염병([[최후의 인간]]), 운석 충돌([[세계가 충돌할 때]]), 생태학적 재해([[미지에서 불어온 바람]]), 그리고 기타 [[재해|일반적 재해]]나 재해 발생 이후의 세계와 문명에 대해 다루는 하위장르이다. [[조지 R. 스튜어트|스튜어트]]의 소설 《[[견디는 지구]]》(Earth Abides)와 [[팻 프랭크]]의 [[아아, 바빌론]] 등이 이 분야의 전형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 근미래([[코맥 매카시|매카시]]의 《[[로드]]》)닥친 재앙의 여파부터 375년 후의 미래(바빌론의 물로 인해), 수백 수천년 후의 미래([[러셀 호반]]의 [[리들리 워커]], [[월터 M. 밀러 2세]]의 [[레보위츠를 위한 송가]])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데 비해, 아포칼립스물은 일반적으로 재앙 그 자체와 그 직후의 여파를 다룬다. 아포칼립스 SF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있는 장르이다.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 {{본문|스페이스 오페라}} [[스페이스 오페라]]는 작중 일부, 혹은 작중 전체를 외우주나 여러 개의 (때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배경으로 삼는 SF 모험물이다. 갈등은 대개 영웅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때로 황당한 플롯, 터무니없는 과학, 골판지 같은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로써 경멸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 용어는 동시에 노스탤지어적으로도 쓰이며,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는 [[SF의 황금기]] 시절의 [[경이감]]을 재탈환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서브장르의 선구자는 [[종달새 (시리즈)|종달새]]와 [[렌즈맨]] 시리즈를 쓴 [[E.E. 스미스|에드워드 E. (닥) 스미스]]이다. [[조지 루커스]]의 [[스타 워즈]]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프랜차이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시리즈는 온우주를 가로질러 펼쳐지는 선과 악의 장엄한 대결을 다룬다. [[알래스터 레이놀즈]]의 [[묵시론 우주]](Revelation Space) 시리즈, [[피터 F. 해밀턴]]의 [[보이드 삼부작]], [[밤의 새벽]], [[판도라의 별]] 시리즈, [[버너 빈저]]의 [[심연 위의 불길]], [[하늘의 깊이]]는 이 장르의 새로운 견본이다. 비디오 게임계에서 나타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좋은 예로 [[매스 이펙트]] 시리즈가 있다. ===사회 과학 소설=== {{본문|사회 과학 소설}} 사회 과학 소설은 인간 사회와 SF적 설정에 배치된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SF 하위장르이다. 대부분 인류에 대한 사변에 집중하는 대신 과학적 엄밀함엔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보통은 [[소프트 SF]]로 분류된다. ===기타 하위 장르=== * [[기후물]] 혹은 클라이파이(Cli-fi)는 가상의 기상 설정과 그 결과를 다룬다. * [[인류학 SF]] * [[괴수물]] * [[바이오펑크]] * [[코믹 SF]] * [[페미니즘 SF]] * [[스팀펑크]] * [[디젤펑크]] * [[사변적 시|SF 시]] ==팬덤과 커뮤니티== {{상세|SF 팬덤}} [[SF 팬덤|S]][[SF 팬덤|F]] [[SF 팬덤|팬덤]]은 "아이디어 문학의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에 출시되기 전에 나타나 길러지는 문화이다."<ref>von Thorn, Alexander (August 2002). "Aurora Award acceptance speech". Calgary, Alberta.</ref>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인 "[[팬]]"들은 [[SF 컨벤션|컨벤션]]이나 클럽, 종이나 온라인 [[SF 팬진|팬진]], 웹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서로 접촉한다. 미국의 SF 팬덤은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서한 칼럼을 통해 등장했다. 곧 팬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 팬진으로 알려질 비공식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의 논평을 모았다.<ref>Wertham, Fredric (1973). The World of Fanzines. Carbondale & Evanston: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ref> 정기적인 연락이 이어지자 팬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고, 지역 클럽을 조직했다. 1930년대, 최초의 [[SF 컨벤션]]은 팬들을 더 넓은 공간에서 만나게 했다.<ref>"Fancyclopedia I: C — Cosmic Circle". fanac.org. 1999-08-12. Retrieved 2007-01-17.</ref> 컨벤션, 클럽, 팬진은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 간의 통신을 용이하게 만들기 전까지 수십년간 팬 활동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의미한 형태로 조직된 팬덤은 [[나우누리]], [[천리안 (포털 사이트)|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인터넷 시대가 개막하며 보다 개인적인 성향의 팬덤층이 나타났다. 2017년에 이르러 SF작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넓은 범위의 팬 중심 단체인 [[한국SF협회]]가 만들어졌다. ===상=== {{상세|SF 상 목록}} 일반적으로 [[세계 SF 학회]](World Science Fiction Society)의 월드콘에서 수여되는 [[휴고상]], SFWA와 작가 커뮤니티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는 [[네뷸라 상]], [[최고의 과학소설을 위한 존 W. 캠벨 기념상]], [[테오도어 스터전 상|테오도어 스터전 기념상]](단편) 등이 가장 권위있는 SF상으로 취급된다. SF영화 분야에서 유명한 상으로 SF, 판타지, 호러 영화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토성 상]]이 있다. 그밖에 캐나다의 [[프릭스 오로라 상]](Prix Aurora Awards)이나 일본의 [[성운상]] 같은 국가별 상, [[태평양 북서부]] 오리콘에서 수여되는 [[엔데버 상]] 같은 지역별 상, 판타지 분야의 [[세계 판타지 상]]이나 미술 분야의 [[첼시 상]]처럼 하위장르에 수여되는 상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있었으나 곧 폐지됐고, 2014년 [[과천SF영화제]]의 일환으로서 [[SF 어워드]]가 시작됐다. 같은 해 [[한낙원과학소설상]]이 제정됐다. 2016년에는 [[한국과학문학상]]이 생겼다. 2021년에는 작가 [[문윤성]]을 기리는 [[문윤성 SF 문학상]]이 시작됐다. ===컨벤션, 클럽, 단체=== {{상세|SF 컨벤션}} [[파일:Sfcon-reading-ddb.jpg|섬네일|280px|[[미니콘]]에서 낭독 중인 파멜라 딘]] 컨벤션(팬덤에서는 주로 "콘"으로 줄여부름)은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열리는 지방, 지역, 국가, 국제 행사이다. 일반적인 컨벤션은 SF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만, [[미디어 팬덤]]이나 [[펄킹]]을 비롯한 몇몇은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대부분 [[NGO]]의 자원봉사자들로 조직되지만, 미디어 지향적 이벤트들은 주로 상업적인 프로모터들로 조직된다. 컨벤션의 행사들은 "프로그램"으로 불리며, 이는 패널 토론회, 독서회, 사인회, 코스튬 무도회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의 일환이 아닌 컨벤션 내내 지속되는 행사들로는 딜러의 방, 아트 쇼, 환영 라운지("콘 스위트룸") 등이 있다.<ref>Lawrence Watt-Evans (1000-03-15). "What Are Science Fiction Conventions Like?". Retrieved 2007-01-17. Check date values in: |date= (help)</ref> 컨벤션엔 수상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월드콘]]은 매년 [[휴고상]]을 수여한다. 형식적인 맥락에 집착하지 않는 "클럽"이라 불리는 SF 조직들은 SF팬들을 위한 연중 행사를 연다. 이것은 SF 컨벤션이나 정기 클럽 미팅과 연계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모임은 도서관, 학교, 대학교, 커뮤니티 센터, 술집, 식당, 조직원의 집에서 열린다. 전통 있는 모임인 [[뉴잉글랜드 SF 협회]], [[로스 앤젤레스 SF 협회]] 등은 모임을 위한 클럽하우스와 컨벤션 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보관된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ref name="Mike Glyer 1998">Mike Glyer (November 1998). "Is Your Club Dead Yet?" ( – Scholar search). File 770 (127). Retrieved 2007-01-17.[dead link]</ref> 전문 SF 작가들을 위한 [[미국 SF&판타지 작가 모임]](SFWA)는 1965년 [[데이먼 나이트]]에 의해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ref name="SFWA info">{{웹 인용|url=http://www.sfwa.org/org/sfwa_info.htm |title=Information About SFWA |publisher=Science Fiction and Fantasy Writers of America, Inc. |accessdate=16 January 2006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51224090923/http://sfwa.org/org/sfwa_info.htm |archivedate = 24 December 2005}}</ref> 24년 후 데이먼 나이트의 에세이 "단결 또는 저런!"은 [[국립 판타지 팬 연합]]에 인계됐다. 팬덤은 [[미디어 팬덤]]<ref>Robert Runte (2003). "History of sf Fandom". Retrieved 2007-01-17.</ref>, [[창조적인 시대착오를 위한 모임]]<ref>"Origins of the Middle Kingdom". Folump Enterprises. 1994. Retrieved 2007-01-17.</ref>, [[게이머]]<ref>Ken St. Andre (2006-02-03). "History". Central Arizona Science Fiction Societ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6년 12월 6일. Retrieved 2007-01-17.</ref>, [[플리커]], [[퍼리 팬덤]]<ref>Patten, Fred (2006). Furry! The World's Best Anthropomorphic Fiction. ibooks.</ref> 등의 관련 그룹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1999년 SF컨벤션협회가 출범해 [[한국SF컨벤션]]을 목표로 했고, 2018년 SF&판타지 도서관과 한국SF협회가 이를 이어받아 행사를 진행 중이다. ===팬진, 온라인 팬덤=== {{상세|SF 팬진}} 최초의 SF 팬진 《혜성》은 1930년에 출간됐다.<ref>Rob Hansen (2003-08-13). "British Fanzine Bibliography". Retrieved 2007-01-17.</ref> 팬진의 출판 방식은 [[젤라틴판]], [[둥사판]], [[저두 기계]]에서 현대적인 [[복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통과 배급은 가끔씩 상업 인쇄물의 가격을 결정한다. 현대 팬진은 [[컴퓨터 프린터]]나 지역 인쇄소,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발행된다. 현재 가장 유명한 팬진은 [[데이빗 랭포드]]가 편집하는 《[[앤서블]]》이며, 해당 팬진은 여러 차례 휴고상을 수상했다. 최근 상을 받은 다른 팬진들로 《[[파일 770]]》, 《[[미모사]]》, 《[[플록타]]》가 있다.<ref>"Hugo Awards by Category". World Science Fiction Society. 2006-07-26. Retrieved 2007-01-17.</ref> 브래드 W. 포스터, 테디 할비아, 조 메이휴처럼 팬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휴고상은 [[휴고상 최고의 팬 아티스트|최고의 팬 아티스트]] 항목을 신설했다.<ref>"Hugo Awards by Category". World Science Fiction Society. 2006-07-26. Retrieved 2007-01-17.</ref> 가장 초창기에 조직된 온라인 팬덤은 [https://web.archive.org/web/20061223120718/http://www.noreascon.org/users/sflovers/u1/web/ SF Lovers] 커뮤니티이며, 이것은 본래 1970년대 후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파일 아카이버|아카이브 파일]]을 받던 메일링 리스트에 기반한 것이다.<ref>Keith Lynch (1994-07-14). "History of the Net is Important". Retrieved 2007-01-17.</ref> 1980년대, [[유즈넷]] 그룹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발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말그대로 수천 수만개의 SF와 관련 장르, 매체를 다루는 웹사이트가 나타났다.<ref name="Mike Glyer 1998"/> 대부분의 사이트는 소규모에 짧게 지속됐으며, 좁은 분야에 집중했지만, [[SF 사이트]]처럼 광범위한 SF 관련 레퍼런스와 리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팬 픽션=== {{상세|팬 픽션}} 애호가들 사이에선 주로 "팬픽"으로 불리는 팬 픽션은 기존의 책, [[영화]], [[비디오 게임]], TV 시리즈(드라마) 등의 설정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비영리]]적 픽션을 일컫는다.<ref>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Houghton Mifflin Company. 2003. Retrieved 2007-01-17.</ref> 이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는 (1970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팬 픽션"의 의미와 헷갈리기 쉽다. 본래 [[SF 팬덤|팬덤]] 커뮤니티내에서 팬 픽션이란 팬들이 창작해 [[SF 팬진|팬진]]에 실은 (종종 팬들 자신을 작중 인물로 활용한) 오리지널, 패러디 픽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1956년 아일랜드 팬 존 베리가 그와 [[아서 톰슨 (팬진)|아서 톰슨]]의 팬진인 《징벌》(Retribution)에 실은 군 디펙티브 에이전시(Goon Defective Agency)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년간, SF 우주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지향하는 [[오리온의 팔]], [[갤럭시키]] 등의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경우엔 책, 영화, TV 시리즈의 저작권자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팬들에게 "중단 및 단념" 권고를 통지하기도 한다. ==SF 연구== {{상세|과학소설 연구}} ===진지한 문학으로서=== 중요한 로망스 작가로 여겨지는 [[메리 셸리|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SF소설을 여럿 썼다.<ref>Bennett, An Introduction, ix–xi, 120–21; Schor, Introduction to Cambridge Companion, 1–5; Seymour, 548–61.</ref> 《[[유년기의 끝]]》를 비롯한 많은 SF소설들이 비평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올더스 헉슬리|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오웰]]의 《[[1984 (소설)|1984]]》, [[앤서니 버지스|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마거릿 애트우드|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주류 문학에서 존경받는 여러 작가들이 SF를 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레싱]]은 SF 시리즈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를 썼고, [[커트 보니것|보니것]]이 쓴 대부분의 작품은 SF의 소재나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학자 [[톰 시피|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ref name="Shippey, Tom 1991 page 2">Shippey, Tom (1991) Fictional Space. Essays on Contemporary Science Fiction, page 2, Humanities Press International, Inc., NJ</ref>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bquote|나는 모든 소설은…대영 제국의 영광을 기념하여 노래를 부르거나 교리를 설교하지 않는, 캐릭터를 다루며, 그리하여 소설이란 양식은 서투르고, 자세하며, 드라마틱하지 않고, 풍부하며, 탄성적이고, 생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는다. …위대한 소설가들은 캐릭터를 통해 독자에게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소설가가 되는 대신 시인, 역사가, 팸플릿 작성가가 됐을 것이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시피<ref name="Shippey, Tom 1991 page 2"/>는 그의 에세이에서 르귄의 주장에 반론하지는 않으나, SF 소설과 SF 분야 밖에서 쓰인 소설 간에 놓인 본질적 차이를 논의하고 확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와 [[프레더릭 폴|폴]]과 [[C. M. 콘블루스]]의 《[[우주 상인]]》을 비교하고, SF 소설의 기반과 특성은 '''노붐'''([[다코 수빈]]이 [[에른스트 블로흐|블로흐]]에게서 가져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사실과 다르지 않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불가능하지 않은 정보의 개별 조각"<ref>Suvin, Darko (1979) Metamorphoses of Science Fiction: On the Poetics and History of a Literary Genre, New Haven, pp. 63-84.</ref>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자라 불리는 [[레슬리 피들러|피들러]]는 1970년대부터 주류 문학과 SF를 구분하기가 "황금기" 시절 작가들이 주장하던 때처럼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에서나 적절한 불모의 언어"를 통해 "학문적 해석"을 하는 아카데미 학자들이 "부적절하게도 엘리트 비평이론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테면 [[로버트 A. 하인라인|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아시모프]], 특히 [[A. E. 밴보트|밴보트]], 닥 스미스, [[올라프 스테이플던|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이 [[영문학]]계에서 종종 SF소설에 애착을 가진 학자들에게조차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현실은 과학소설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인 엘리트비평이 평가의 잣대로 삼는 전통적 기준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고 논한다.<ref>레슬리 피들러, SF문학의 비평에 대하여, 외국문학 1991년 봄호(제26호), 1991.3, 30-40 (11 pages)</ref> 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오슨 스콧 카드|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bquote|…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직업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반대중이 아무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모든 이야기들이 이렇듯 단순 명료하게 표현된다면 문학 교수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며 애매모호한 문장을 쓰는 작가들은 동정은 얻되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ref>오슨 스콧 카드:엔더의 게임, 서문. 루비박스, 2008</ref>}}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bquote|…불신을 접고 비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이 생소한 세계가 정말 진짜라고 설득해야만 한다. 모호한 말로 약점을 눈가림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면 모순을 지적하는 이메일이 수도 없이 올 것이다. (…) 고 [[이언 뱅크스]]와 [[조안 해리스]]처럼 문학소설과 사변소설에 똑같이 능숙하며 자기 작품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기를 거부하는 유능한 작가들 앞에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문학평론가들을 보면 무척 즐겁다. 문학소설의 최종적 특징이 탁월한 산문이라면, 최고조에 달한 [[테리 프래쳇]]도 분명 오늘날 글을 쓰는 최고의 산문 문장가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SF와 판타지 같은 단어로 원고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사후가정이니 마술적 사실주의니 하는 용어를 만든 것이다.<ref>줄리엣 매케나, [http://mirror.pe.kr/webzine6/98494 장르논쟁: 과학소설은 문학소설보다 멀리 간다], 웹진 거울, 2014.</ref>}} 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그레고리 벤퍼드|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ref>Benford, Gregory (1998) "Meaning-Stuffed Dreams:Thomas Disch and the future of SF", New York Review of Science Fiction, September, Number 121, Vol. 11, No. 1</ref>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ref>Lethem, Jonathan (1998), "Close Encounters: The Squandered Promise of Science Fiction", Village Voice, June. Also reprinted in a slightly expanded version under the title "Why Can't We All Live Together?: A Vision of Genre Paradise Lost" in the New York Review of Science Fiction, September 1998, Number 121, Vol 11, No. 1.</ref>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토머스 핀천|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아서 C. 클라크|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ref>Lethem, Jonathan (1998), "Close Encounters: The Squandered Promise of Science Fiction", Village Voice, June. Also reprinted in a slightly expanded version under the title "Why Can't We All Live Together?: A Vision of Genre Paradise Lost" in the New York Review of Science Fiction, September 1998, Number 121, Vol 11, No. 1.</ref> 레뎀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SF&판타지 매거진]]》의 편집자는 "언제쯤 돼야 SF 장르는 메인스트림을 감동시키려는 시도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ref>Van Gelder, Gordon (1998) "Editorial," Fantasy and Science Fiction, October/November v95 #4/5 #567</ref>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ref>Barnett, David. "Gaiman's choice: shouldn't good writing tell a story too?," The Guardian, London, 2010년 6월 23일,</ref> {{bquote| "문학적" 소설과 "장르" 소설 간의 끊임없는 전쟁은 모래 위에 그어진 뚜렷한 선과 같다. 장르계의 보병들은 문학적 소설을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무의미하지만 예쁘게 치장된 그림 컬렉션쯤으로 생각한다. 문학의 수호자들은 장르 소설을 천박하고, 상업적으로 훌륭한, 돈을 벌기 위한 작품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싸움은 계속된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ref>Barnett, David. "Science fiction: the genre that dare not speak its name," The Guardian, London, 2009년 1월 28일.</ref>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 {{bquote|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미국을 가로질러 펼쳐지는 여행, 복제인간 웨이트리스들이 반란을 일으킨 미래 사회, 특별한 가스를 품은 돌연변이 생명체들이 세계를 둘러싼 관, 공룡들이 정착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계획, 붕괴한 문명의 유전 공학 등을 다루는 소설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br/> 이들은 모두 SF가 아니다. <br/> 문학 독자들은 상기한 설명으로부터 [[코맥 매카시|매카시]]의 《[[로드]]》, [[데이비드 미첼|미첼]]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소설)|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일부, [[닉 하커웨이|하커웨이]]의 《[[사라진 세계]]》, [[재닛 윈터슨|윈터슨]]의 《[[바위 신 (소설)|바위 신]]》, [[마가릿 애트우드|애트우드]]의 《[[인간 종말 리포트|오릭스와 크레이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대부분의 사람들이 SF로 인식하는 문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해당 작품들의 저자나 출판인은 이들이 SF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보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 다양한 매체 == === [[SF 소설]] === [[파일:Correa-Martians vs. Thunder Child.jpg|섬네일|[[H. G.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의 일러스트. 헨릭 앨빔 코어 作 (1906년)]] === [[SF 영화]] === {{빈 문단}} === [[SF 드라마]] === {{빈 문단}} === [[SF 애니메이션]] === {{빈 문단}} === [[SF 게임]] === {{빈 문단}} === [[SF 만화]] === [[파일:Planet Comics 53.jpg|섬네일|SF 만화 잡지 《플래닛 코믹스》표지 (1948년 3월)]] == 국제적 예시들 == {{columns-list|colwidth=22em|*[[아프로퓨처리즘]] * [[오스트레일리아 SF]] * [[벵갈 SF]] * [[블랙 SF]] * [[브라질 SF]] * [[캐나다 SF]] * [[중국 SF]] * [[크로아티아 SF]] * [[체코 SF]] * [[프랑스 SF]] * [[일본 SF]] * [[노르웨이 SF]] * [[폴란드 SF]] * [[로마니아 SF]] * [[러시아 SF]] * [[세르비아 SF]] * [[스페인 SF]] * [[유고슬라비아 SF]] * [[한국 SF]]}} == 같이 보기 == * [[판타지]] * [[사변 소설]] == 각주 == {{각주}} == 참고 자료 == * [[브라이언 올디스]]. ''Billion Year Spree: The True History of Science Fiction'', 1973. * 브라이언 올디스와 [[데이빗 윙글로브]]. ''Trillion Year Spree: The History of Science Fiction'', revised and updated edition, 1986. * [[킹슬리 에이미스]]. ''New Maps of Hell: A Survey of Science Fiction'', 1958. * 닐 배론 편저. ''Anatomy of Wonder: A Critical Guide to Science Fiction'' (5th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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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정보상자|above=원자|abovestyle=background-color:#B5B5CC;|headerstyle=background-color:#B5B5CC;|image=[[파일:Helium atom QM.svg|300px|right|Helium atom ground state.]]|caption=[[헬륨]] 원자를 나타낸 그림. 가운데 [[원자핵]]이 분홍색으로, 그 주위를 뒤덮은 [[전자 구름]]이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 상단에서는 헬륨-4의 원자핵이 전자 구름의 모양과 유사한 것을 확대하여 보여준다 (실제는 이보다 더 복잡한 형태를 띈다). [[옹스트롬]]과 [[피코미터]]의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header1=정의|data2=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가진 최소 단위체|header3=성질|label4=[[원자 질량|질량]]|data4={{val|1.67|e=-27}} to {{val|4.52|e=-25|u=kg}}|label5=[[전하량]]|data5=중성이거나 [[이온]]형태로 전하를 띔|label6=[[직경]]|data6=62&nbsp;pm ([[헬륨|He]])에서 520&nbsp;pm ([[세슘|Cs]])|label7=[[아원자 입자|구성]]|data7=[[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원자핵]]과 [[전자]]}} '''원자'''(原子, atom)는 일상적인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일상적인 물질들이 [[원소 (화학)|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와 동의어이다. 모든 [[고체]], [[액체]], [[기체]], [[플라즈마]]가 전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면, [[원소 (화학)|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 어원 == 원자(原子)라는 용어는 [[우다가와 요안]]이 독일어 atom을 번역한 것이다. 이 독일어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 역사 == [[파일:CHEM Atom.jpg|floating|right]] === 원자설 === {{본문|원자주의}} 세상의 물질들이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상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가 아닌, 사상적 철학적 논증의 결과 나타난 사상의 한 갈래이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IQs5hur-BpgC&q=Leucippus+Democritus+atom&pg=PA56|title=The Atom in the History of Human Thought|last1=Pullman|first1=Bernard|date=1998|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Oxford, England|pages=31–33|isbn=978-0-19-515040-7}}</ref><ref>[[Atom#refMelsen1952|Melsen (1952). ''From Atomos to Atom'', pp. 18-19]]</ref> === 돌턴의 배수 비례의 법칙 === [[파일:Daltons_symbols.gif|오른쪽|섬네일|존 돌턴의 《화학철학의 새로운 세계''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1808)》에 그려진 원자와 분자들의 그림.]] [[존 돌턴]]은 1803년에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분석하여 [[화합물]]이 만들어질 때 필요한 [[원소 (화학)|원소]]의 질량비가 간단한 정수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배수 비례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에 따라 물질들이 기본적인 질량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턴은 논문에서 세 종류의 화학반응을 예로 들었다. 첫 번째 예시는 [[산화 주석]]이다. 검은 가루([[SnO]])는 [[주석 (원소)|주석]] 88.1%와 산소 11.9%로 이루어져 있고, 흰 가루([[Sno2|SnO2]])는 주석 78.7%와 산소 21.3%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13.5g이고, 흰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27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13.5와 27은 1:2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주석 1개당 산소 1개 혹은 2개를 가져간다.<ref>[[Atom#refDalton1817|Dalton (1817).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vol. 2, p. 36]]</ref><ref>[[Atom#refMelsen1952|Melsen (1952). ''From Atomos to Atom'', p. 137]]</ref> 두 번째 예시는 [[산화 철]]이다. 검은 가루는 78.1%의 철과 21.9%의 산소, 빨간 가루는 70.4%의 철과 29.6%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28g이고, 붉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42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28과 42은 2:3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철 2개당 산소 2개 혹은 3개를 가져간다.{{efn|Iron(II) oxide's formula is written here as Fe<sub>2</sub>O<sub>2</sub> rather than the more conventional FeO because this better illustrates the explanation.}}<ref>[[Atom#refDalton1817|Dalton (1817).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vol. 2, pp. 28]]</ref><ref>[[Atom#refMillington1906|Millington (1906). ''John Dalton'', p. 113]]</ref> 마지막으로 돌턴은 [[질소 산화물]]을 예시로 든다. [[아산화 질소]]는 63.3%의 질소와 36.7%의 산소로, [[일산화 질소]]는 44.05%의 질소와 55.95%의 산소로, [[이산화 질소]]는 29.5%의 질소와 70.5%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곧 각각 140g의 질소마다 80g의 산소, 160g의 산소, 320g의 산소가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필요한 산소의 질량비는 1:2:4의 비율을 이룬다.<ref>[[Atom#refDalton1808|Dalton (1808).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vol. 1, pp. 316-319]]</ref><ref>[[Atom#refHolbrowEtAl2010|Holbrow et al (2010). ''Modern Introductory Physics'', pp. 65-66]]</ref> === 기체 분자 운동론 === {{본문|기체 분자 운동론}}18세기 후반에 기체가 작은 입자들의 집합체로 해석함으로써 [[통계학]]과 [[확률론]] 등을 통해 실제 기체의 운동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턴의 원자론이 기체의 화학반응을 통해 물질의 구성성분이 입자임을 밝혔다면, 기체 분자 운동론은 물리적 성질을 통해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 브라운 운동 === {{본문|브라운 운동}} 1827년에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 (식물학자)|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을 통해 물 위에 뜬 티끌들이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브라운 운동]]이라 이름붙인다. 사람들은 여기 원자론을 적용하여 물 분자들이 티끌과 무작위적으로 충돌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추측했다. 이후 1905년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통계물리학]]을 통해 브라운 운동의 원인이 실제로 분자의 자발적 운동이라는 것을 밝힌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brownianmotion00mazo|title=Brownian Motion: Fluctuations, Dynamics, and Applications|last=Mazo|first=Robert M.|year=2002|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pages=[https://archive.org/details/brownianmotion00mazo/page/n11 1]–7|isbn=978-0-19-851567-8|oclc=48753074|url-access=limited}}</ref>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 페랭]]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여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 톰슨의 전자 발견 === {{본문|톰슨 원자모형}} [[파일:Geiger-Marsden_experiment_expectation_and_result.svg|오른쪽|섬네일|'''[[알파입자 산란실험]]좌측''': 기존의 푸딩 모형이 맞다면 알파입자는 반사나 굴절 없이 그대로 금박을 뚫고 지나갈 것이다.'''우측''': 실험 결과 소량이지만 굴절 또는 반사되는 입자가 관측되어, 양전하가 밀집된 구조가 원자 내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 1897년 영국의 과학자 [[조지프 존 톰슨]]은 [[음극선]]이 [[전자기파]]의 일종이 아닌, [[수소]]보다 1,800배나 가벼운 입자로 이루어진 빔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즉 원자보다 가벼운 입자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이 입자는 처음으로 발견된 [[아원자 입자]]로 처음에는 소체(小體)라는 의미의 ''corpuscle''라 불렸으나, 이후 [[전자]]로 다시 명명된다. 톰슨은 전자가 방사성 물질에서 방출된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후 [[광전 효과]]에서 튀어나오는 입자도 전자임을 보였다.<ref name="Thomson2">{{저널 인용|title=On bodies smaller than atoms|journal=The Popular Science Monthly|last=Thomson|first=J.J.|url=https://books.google.com/books?id=3CMDAAAAMBAJ&pg=PA323|date=August 1901|pages=323–335|accessdate=2009-06-21}}</ref> 금속 내부에서 흐르는 [[전류]]의 원인이 [[전자]]라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원자로 이루어진 음극 판에서 음극선이 방출되므로,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 톰슨은 양전하를 가지는 물체에 음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빵 속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 러더퍼드의 원자핵 발견 === {{본문|러더퍼드 원자 모형|알파입자 산란실험}} 위의 음극선 실험으로 톰슨은 음전하를 띄는 전자라는 입자가 양전하를 띄는 푸딩 안에 박혀있는 형태의 원자를 제안하게 된다.<ref>[[Atom#refNavarro2012|Navarro (2012). ''A History of the Electron'', p. 94]]</ref> 이 모형은 [[푸딩 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그 제자인 [[한스 가이거]], [[어니스트 마즈든]]은 [[알파 입자]]의 [[비전하]]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자가 측정기구 내부의 공기중에서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고, 결국 실험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차가 쌓인다. 톰슨도 음극선을 사용해 실험을 계속 진행하며 같은 현상을 마주했는데, 톰슨은 실험기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이를 해결했다. 그러나 러더퍼드는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더 무거운 알파 입자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톰슨처럼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톰슨의 원자 모형에 의하면, 양전하는 원자 내부 어딘가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 전체에 균질하게 퍼져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충분한 크기의 [[전기장]]을 형성하지 못할 텐데, 알파 입자가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더퍼드와 제자들은 이 산란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한다.<ref name="Heilbron2003p64-68">[[Atom#refHeilbron2003|Heilbron (2003). ''Ernest Rutheford and the Explosion of Atoms'', pp. 64-68]]</ref> 러더퍼드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무려 5년의 시간동안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실험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했지만, 90° 이상 산란되어 튕겨 나오는 알파입자도 관측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러더퍼드는 원자 내에 양전하가 한 군데 모여있으며, 그 위치는 원자의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 때 제안된 원자모형은 행성모형이라고도 불린다.<ref name="Heilbron2003p64-68" /> === 닐스 보어의 원자구조 === {{본문|보어 모형}} [[파일:Bohr_atom_animation_2.gif|오른쪽|섬네일|보어의 원자모형에서는 전자들이 에너지를 흡수 또는 방출하면서 궤도를 이동하는 "양자 도약"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원자의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고, 전자가 가속운동할 때 [[전자기파]]를 방사하는 [[싱크로트론 방사]]로 인해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려야 하지만, 실제 원자가 물리적으로 안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3년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는 전자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층에 존재한다는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도입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에 근거한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이 모형에서 전자는 광자를 흡수 또는 방출하면서 각 궤도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이처럼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통해 전자궤도의 안정성, 불연속적인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말엽, [[헨리 모즐리 (물리학자)|헨리 모즐리]]는 [[보어 모형]]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실험 결과를 얻는다. 또한 이 실험은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안토니우스 반 덴 브룩]]의 가설, 즉 원자는 원자번호 갯수만큼의 [[유효 핵전하|핵전하]]를 띌 것이라는 가설을 검증한다. 이로써 [[원자 번호]]가 물리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ref name="Pais">{{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inwardboundofmat00pais_0/page/228|title=Inward Bound: Of Matter and Forces in the Physical World|last=Pais|first=Abraham|year=1986|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New York|pages=[https://archive.org/details/inwardboundofmat00pais_0/page/228 228–230]|isbn=978-0-19-851971-3}}</ref> 원자간 [[화학 결합]]은 1916년에 [[길버트 뉴턴 루이스]]에 의해 설명된다. 루이스는 이 원자들이 전자를 공유함으로써 화학 결합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또 1919년에는 미국의 화학자 [[어빙 랭뮤어]]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주기율표]]를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한 원자 안에 있는 전자들이 물리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기 때문임을 논증한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periodictableits0000scer/page/205|title=The periodic table: its story and its significance|last=Scerri|first=Eric R.|year=2007|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 US|pages=[https://archive.org/details/periodictableits0000scer/page/205 205–226]|isbn=978-0-19-530573-9}}</ref> 보어의 모형은 [[전자껍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랭뮤어의 전자집단론이 맞았음을 보이고 있다. 이후 슈뢰딩거에 의해 더 완벽하고 정확한 원자모형이 제시되긴 하지만, 보어 모형은 당시까지 밝혀진 원자의 성질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완전한 원자모형이었다. 다만 수소가 아닌 다른 원자들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하지 못하고, 등속 원운동을 할 때 [[라모 공식]]을 따르자면 광자가 방출되어야 한다는 오류를 검증되지 않는 가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등의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더 나은 모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 슈뢰딩거의 원자 모형 === 1922년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원자의 속성들이 양자화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은 원자 빔이 불균질한 자기장 내부를 통과하면서 경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자의 [[자기 모멘트]]가 두 개로 양자화되어있어야만 했다. 스핀의 방향은 처음에는 무작위하게 분포되어 있다가, 빔이 자기장을 통과하면서 위 혹은 아래로 정렬되기 때문에 빔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화된 성질을 다루는데 유용한 [[행렬 역학]]을 처음으로 제안한다.<ref name="Pais2">{{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inwardboundofmat00pais_0/page/228|title=Inward Bound: Of Matter and Forces in the Physical World|last=Pais|first=Abraham|year=1986|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New York|pages=[https://archive.org/details/inwardboundofmat00pais_0/page/228 228–230]|isbn=978-0-19-851971-3}}</ref> 그 작년인 1924년에는 [[루이 드 브로이]]가 모든 입자는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는 가설인 [[물질파]]를 제안했다.<ref>{{서적 인용|title=Introducing Quantum Theory|author1=McEvoy, J. P.|author2=Zarate, Oscar|year=2004|publisher=Totem Books|pages=110–114|isbn=978-1-84046-577-8}}</ref> [[에르빈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이 가설을 정식으로 채택해 [[슈뢰딩거 방정식]]을 유도한다. 여기서 원자는 기존에는 입자로만 해석되었던 것과는 달리, 삼차원 [[파형]]을 가진 파동으로 해석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32241721|title=The Schrödinger equation A History|last=Kozłowski|first=Miroslaw|year=2019}}</ref> 이처럼 입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점 (기하학)|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자연스레 유도되었다.<ref name="Pais2" /><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TQKELOE9eY4|title=What is the 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author=Chad Orzel|date=16 September 2014|website=TED-Ed|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13185956/https://www.youtube.com/watch?v=TQKELOE9eY4|archive-date=13 September 2015|url-status=live|via=YouTube}}</ref> 이처럼 원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의 보어 모형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었던 원소들의 선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 관측결과도 잘 부합하는 터라 행성모형은 폐기되고, [[원자 오비탈]]의 개념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독일의 과학자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전자의 파동함수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함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확률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자 주위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여 확률의 분포를 점으로 찍어 구름처럼 표시하는 현대의 원자모형이 탄생하였다. === 중성자의 발견 === [[질량 분석기]]의 발달로 인해 원자의 질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은 이 기구를 통해 동위원소들이 서로 다른 질량을 가지며, [[원자 질량]]이 일정 정수비를 가진다는 [[정수율]]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은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이 [[양성자]]와 비슷한 질량을 가지지만 전하를 띄지 않는 입자인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로써 동위원소란 같은 수의 양성자를 가지나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지는 종류의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핵분열, 고에너지 및 응집물리학 === 러더퍼드의 제자이자 독일의 화학자인 [[오토 한]]은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고자 중성자를 우라늄 원자에 충돌시켰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우라늄보다 더 가벼운 원소인 [[바륨]]이 생성되었다. 이듬해 [[리제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인 [[오토 로베르트 프리슈|오토 프리슈]]는 한이 수행한 실험이 핵분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아낸다. 1944년, 한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한은 마이트너와 프리슈에게도 공을 돌리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오직 한만이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대에 고성능의 [[입자 가속기]]와 [[입자 검출기]]가 만들어짐에 따라 과학자들은 고에너지 상태에서의 원자의 행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연구결과가 이어지며 중성자와 양성자가 [[강입자]]에 속하며,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원자 입자들로 구성된 원자핵의 성질, 아원자 입자들의 상호작용 등을 설명하기 위해 [[표준 모형]]도 만들어졌다. == 구조 == === 아원자 입자 === {{본문|아원자 입자}}"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원자의 어원이 무색하게, 현대 물리학에서는 원자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 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 class="wikitable sortable" |+전자·양성자·중성자의 특성 |- | 입자 || 질량[g] || 상대 질량 || 전하[C] || 상대 전하 |- |전자 |9.110×10<sup>-28</sup> |1/1837 | -1.602×10<sup>-19</sup> | -1 |- | 양성자 || 1.673×10<sup>-24</sup> || 1 || +1.602×10<sup>-19</sup> || +1 |- | 중성자 || 1.675×10<sup>-24</sup> || 1 || 0 || 0 |} 전자는 음의 [[전하]]를 띄며, 매우 작아 현대의 기술로 형태를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atomsmoleculesph00demt_277|title=Atoms, Molecules and Photons: An Introduction to Atomic- Molecular- and Quantum Physics|last=Demtröder|first=Wolfgang|year=2002|edition=1st|publisher=Springer|pages=[https://archive.org/details/atomsmoleculesph00demt_277/page/n51 39]–42|isbn=978-3-540-20631-6|oclc=181435713|url-access=limited}}</ref> {{val|9.11|e=-31|u=kg}}로 위의 세 아원자 입자들 중 가장 가벼워서 모든 입자들 중 가장 가벼울 것으로 여겨졌으나, 더 가벼운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양의 전하를 띄는 원자핵 주변에 [[전자기력]]으로 포착되어 존재한다. 만일 원자가 가지고 있는 전자의 갯수가 원자번호와 다르다면 원자 자체가 전하를 띄게 되는데 이를 [[이온]]이라고 부른다. [[조지프 존 톰슨]]이 1897년에 처음을 발견하였다.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띄며, 전자보다 1,836배 더 무거운 {{val|1.6726|e=-27|u=kg}}의 질량을 가진다. 원자가 가지고 있는 양성자의 갯수는 [[원자 번호]]와 동일하다.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1919년에 [[질소]] 원자를 [[알파 입자]]와 충돌시키는 실험에서 처음으로 관측하였다. 1886년에 수소의 원자핵으로 처음 발견되었으나 이 실험으로 인해 원자의 일반적인 구성성분임이 널리 인정받아 러더퍼드가 양성자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게 된다. 중성자는 전하를 띄지 않고 전자보다 1,839배 더 무거운{{val|1.6749|e=-27|u=kg}}의 질량을 가진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cambridgehandboo0000woan/page/8|title=The Cambridge Handbook of Physics|last=Woan|first=Graham|year=2000|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page=[https://archive.org/details/cambridgehandboo0000woan/page/8 8]|isbn=978-0-521-57507-2|oclc=224032426}}</ref><ref name="2014 CODATA">Mohr, P.J.; Taylor, B.N. and Newell, D.B. (2014), [http://physics.nist.gov/constants "The 2014 CODATA Recommended Values of the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웨이백|url=http://physics.nist.gov/constants |date=20120211083747 }} (Web Version 7.0). The database was developed by J. Baker, M. Douma, and S. Kotochigova. (2014).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Gaithersburg, Maryland 20899.</ref> 이 세 종류의 입자들 중 가장 무겁지만 [[핵결합에너지]] 때문에 실제 질량은 이보다 작다. 양성자와 함께 [[핵자]]라고도 불리는데, 둘 다 {{val|2.5|e=-15|u=m}}의 비슷한 크기를 가지지만 둘 다 어떤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astronomyencyclo0000unse/page/33|title=The Enigmatic Electron|last=MacGregor|first=Malcolm H.|year=1992|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pages=[https://archive.org/details/astronomyencyclo0000unse/page/33 33–37]|isbn=978-0-19-521833-6|oclc=223372888}}</ref>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에서는 전자를 [[기본 입자]]로 보는 반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진 합성 입자로 본다. 원자에는 두 종류의 쿼크가 있는데, 양성자는 +{{sfrac|2|3}} 전하를 가지는 [[위 쿼크]] 2개와 −{{sfrac|1|3}} 전하를 가지는 [[아래 쿼크]]로 한 개로 이루어진다.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 쿼크와 하나의 위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전하와 질량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쿼크들은 [[글루온]]이 매개하는 [[강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묶여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서로 [[핵력]]으로 붙잡고 있는 형태이다. 글루온은 [[게이지 보손]]중 하나로 쿼크와 마찬가지로 기본 입자이고, 힘의 매개자로 작용한다. === 원자핵 === {{본문|원자핵}}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파일:Binding_energy_curve_-_common_isotopes.svg|섬네일|핵자 하나가 원자핵에서 분리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원자 내의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결합하여 [[원자핵]]을 만들고, 이러한 성질로 인해 [[핵자]]라는 명칭으로 따로 구분되기도 한다. 원자핵의 반지름은 <math>A</math>를 원자의 핵자 수라고 했을 때 대략 <math>1.07 \sqrt[3]{A}</math> [[펨토미터]]로 근사된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nuclearprinciple00jevr_450|title=Nuclear Principles in Engineering|last=Jevremovic|first=Tatjana|year=2005|publisher=Springer|page=[https://archive.org/details/nuclearprinciple00jevr_450/page/n83 63]|isbn=978-0-387-23284-3|oclc=228384008|url-access=limited}}</ref> 핵자들은 굉장히 짧은 거리에 작용하는 힘인 [[핵력]]으로 서로 결합되어있는데, 2.5 펨토미터까지는 이 힘이 [[정전기력]]보다 강하기 때문에 양성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힘보다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하여 서로 결합될 수 있다. 같은 [[원소 (화학)|원소]]에 속하는 원자들은 같은 갯수의 양성자를 가지는데, 이 갯수를 [[원자 번호]]라 한다. 양성자와는 달리 같은 종류의 원자끼리도 서로 다른 갯수의 중성자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양성자의 수는 같으나 중성자의 수는 다른 원자들의 관계를 [[동위원소]]라 하고, 더 세분화하여 [[핵종]]을 여러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양성자 수와 중성자 수가 다른 원자들은 쉽게 [[방사성 붕괴]]를 일으킨다. 그러나 원자 번호가 커져서 양성자의 갯수가 많아질수록 원자핵의 안정에 필요한 중성자의 갯수가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양성자 수에 대한 중성자 수의 비율은 [[방사성 동위 원소]] 원자핵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는 모두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는 [[페르미온]]이다. 그러므로 양자적으로 동일한 상태의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 존재할 수 없다. [[파일:Wpdms_physics_proton_proton_chain_1.svg|오른쪽|섬네일|핵융합을 통해 [[중수소]]의 원자핵이 만들어지고 있다. 두 개의 양성자가 충돌해 하나의 양성자와 하나의 중성자를 이루고, 이 과정에서 전자의 반물질인 [[양전자]](e<sup>+</sup>)와 [[중성미자]]가 방출된다.]] 매우 높은 에너지를 통해 원자핵의 양성자나 중성자 갯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기술로 여러개의 원자를 강하게 충돌시켜 무거운 원자핵을 합성하는 [[핵융합]]이 가장 대표적이다. 핵융합을 위해서는 [[쿨롱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 높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태양의 중심에서 충분한 에너지의 공급을 통해 핵융합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큰 원자핵을 두 개 이상의 작은 원자핵으로 나누는 과정인 [[핵분열]]도 있다. 이 핵분열은 고에너지의 아원자 입자나 광자를 원자핵에 충돌시킴으로써 유도할 수 있다. 핵융합 후의 원자핵은 그 재료들의 원자핵의 질량의 합보다 더 작은 질량을 가진다. 이 질량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감마선]]과 [[베타 입자]]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 <math>E=mc^2</math>를 따라 감소한 질량 <math>m</math>이 [[빛의 속력]] <math>c</math>를 두 번 곱한 만큼의 에너지가 방출된다.<ref>{{서적 인용|title=Fundamentals of Nuclear Science and Engineering|last1=Shultis|first1=J. Kenneth|last2=Faw|first2=Richard E.|year=2002|publisher=CRC Press|pages=10–17|isbn=978-0-8247-0834-4|oclc=123346507}}</ref> === 전자 구름 === {{본문|원자 궤도|전자 배치}} [[파일:Potential_energy_well.svg|오른쪽|섬네일|[[고전 역학]]에 의하면 입자는 어떤 위치 x에 도달하기 위해 V(x)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에너지가 E밖에 없다면 x<sub>1</sub>과 x<sub>2</sub>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 원자 내의 전자들은 핵의 양성자에 의해 [[전자기력]]으로 포섭되어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는 원자핵을 둘러싼 [[정전기학|정전기적]] [[퍼텐셜 우물]]에 둘러쌓여 있어서, 이를 탈출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한 상태이다. 핵에 더 가까이 위치한 전자일수록 더 강한 인력이 작용하게 되고, 결국 원자 중심에 가까울 수록 전자가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파일:Atomic-orbital-clouds_spdf_m0.png|섬네일|[[수소꼴 원자]]의 오비탈 모양. '''g'''오비탈 이상은 나타나 있지 않다.]] 전자는 다른 입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진다. 전자 구름이란 퍼텐셜 우물 내에 형성된 [[정상파]]로서 전자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는 전자가 각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계산함으로써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원자 궤도]] 또는 오비탈이라고 부른다. 오비탈들은 크기나 형태, 방향에 있어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한 각각 다른 [[에너지 준위]]를 가지고 있고 [[양자화 (물리학)|양자화]]되어있어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광자]]를 흡수한다면 더 높은 에너지 준위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너무 높은 에너지의 광자가 조사된다면 [[자연방출]]을 통해 광자를 방출하면서 오히려 더 낮은 에너지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도 있다. 각 오비탈간 에너지 차이는 [[선스펙트럼]]을 관찰하여 알아낼 수 있다. 전자를 떼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인 [[이온화 에너지]]는 핵자를 뗄 때 필요한 에너지보다 많이 작다. 일례로, [[정상상태]]의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내려면 13.6 eV가 필요하지만, [[중수소]]의 원자핵을 쪼개기 위해서는 2.23 MeV가 필요하다. 원자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전자는 근처의 원자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원자핵에 동시에 포섭될 수 있다. [[분자]]가 바로 이러한 형태의 [[화학 결합]]으로 형성된다. [[공유 결합]]으로 형성된 [[결정화|결정]]이나 [[이온 결정]]같은 경우는 이처럼 단순하게 분석할 수 없다.<ref>{{서적 인용|url=https://archive.org/details/physicsatomsions00smir|title=Physics of Atoms and Ions|last=Smirnov|first=Boris M.|year=2003|publisher=Springer|pages=[https://archive.org/details/physicsatomsions00smir/page/n262 249]–272|isbn=978-0-387-95550-6|url-access=limited}}</ref> == 원자론의 과학자와 현대 원자와 관련된 이론 == 원자 단위의 물리학은 [[원자 광학]]과 [[나노 과학]]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실험은 원자를 옮기고 운동 속도를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원자보다 더 작은 원자핵의 물리학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주제가 된다. * [[존 돌턴]] (John Dalton) * [[J. J. 톰슨]] (Joseph John Thomson) * [[어니스트 러더퍼드]] (Ernest Rutherford) * [[닐스 보어]] (Niels Bohr) == 같이 보기 == * [[분자]] * [[원자핵]] * [[전자]] * [[중성자]] * [[양성자]] * [[초원자]] == 각주 == {{각주}} ; 내용주 <references group="lower-alpha" /> == 참고 문헌 == * {{서적 인용|제목=아원자 입자를 찾아서|성=[[스티븐 와인버그]]|이름=|날짜=|판=|출판사=[[민음사]]|쪽=|장=}}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108 네이버 캐스트 - 빅뱅에서 태어난 원자]{{깨진 링크|url=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108 }}, * [https://web.archive.org/web/20090531182515/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513 원자로 구성된 나], [https://web.archive.org/web/20090317005122/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216 원자와 원자 핵], [https://web.archive.org/web/20090215154033/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33 원자론이 부른 비극] {{핵기술}} {{물질구조}} {{생물학적 조직}} {{전거 통제}} {{기본입자}} [[분류:원자| ]] [[분류:화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알찬 글}} [[파일:Polar graph paper.svg|섬네일|right|250px|여러 각이 표시된 극좌표]] {{포털|수학}} {{미적분학}} '''극좌표계'''(極座標系, {{llang|en|polar coordinate system}})는 [[평면]] 위의 위치를 [[각도]]와 [[거리]]를 써서 나타내는 [[2차원]] [[좌표계]]이다. 극좌표계는 두 점 사이의 관계가 각이나 거리로 쉽게 표현되는 경우에 가장 유용하다. [[데카르트 좌표계]]에서는 [[삼각함수]]로 복잡하게 나타나는 관계가 극좌표계에서는 간단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2차원 좌표계이기 때문에 극좌표는 반지름 성분과 각 성분의 두 성분으로 결정되며 주로 <math>r</math>로 나타내는 [[반지름]] 성분은 극(데카르트 좌표에서 원점)에서의 거리를 나타낸다. 주로 <math>\theta</math>로 나타내는 각 성분은 0°(데카르트 좌표계에서 x축의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잰 각의 크기를 나타낸다.<ref name="김홍종">{{서적 인용 | 저자 = 김홍종 | 제목 = 미적분학 1 |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 isbn = 89-521-0157-X}}</ref> == 역사 == [[파일:Head of Hipparchus (cropped).jpg|섬네일|왼쪽|upright=0.8|[[히파르코스]]]] 각과 반지름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에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기원전 190년|기원전 190]]~[[기원전 120년|120년]])가 여러 각마다 [[현 (기하학)|현]]의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는데, 그가 항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milestones">{{웹 인용 |성 = Friendly |이름 = Michael |제목 = Milestones in the History of Thematic Cartography, Statistical Graphics, and Data Visualization |url = http://www.math.yorku.ca/SCS/Gallery/milestone/sec4.html |확인날짜 = 2006-09-10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925115456/http://www.math.yorku.ca/SCS/Gallery/milestone/sec4.html |보존날짜 = 2006-09-25 |url-status = dead }}</ref> [[아르키메데스]]가 묘사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반지름 성분이 각에 따라 변하는 함수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좌표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극좌표를 정식 좌표계로 도입한 예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줄리언 쿨리지]]의 《극좌표의 근원》에 서술되어 있다.<ref name="coolidge">{{저널 인용 | 성 = Coolidge | 이름 = Julian | 제목 = The Origin of Polar Coordinates | 저널 =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 | volume = 59 | 쪽 = 78–85 | 연도 = 1952 | url = http://www-history.mcs.st-and.ac.uk/Extras/Coolidge_Polars.html | doi = 10.2307/2307104 | issn = 0002-9890 }}</ref> 17세기 중반에 [[그레구아르 생뱅상]]과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독립적으로 극좌표의 개념을 발표하였다. 생뱅상은 1625년에 작성해 1647년에 출판하였으며, 카발리에리는 1635년에 출판하였으며, 개정판은 1653년에 나왔다. 카발리에리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극좌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블레즈 파스칼]]은 [[포물선]]의 길이를 계산하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유율법》(Method of Fluxions, 1671년 작성, 1736년 출판)에서 “일곱 번째 방법: 나선에 대하여”로 표현한 극좌표와 다른 아홉 가지 좌표계 사이의 변환을 분석하였다.<ref>{{저널 인용 | 성 = Boyer | 이름 = C. B. | 제목 = Newton as an Originator of Polar Coordinates | 저널 =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 | volume = 56 | 쪽 = 73–78 | 연도 = 1949 | url = | doi = 10.2307/2306162 }}</ref> [[야코프 베르누이]]는 학술지 《''Acta Eruditorum''》(1691년)에서 점과 선을 이용한 좌표계를 사용하고 각각을 극과 극축이라 불렀다. 좌표는 극에서의 거리와 극축에서의 각으로 정의하였다. 베르누이의 연구는 곡선의 [[곡률반지름]]을 찾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극좌표”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폰타나]]가 처음 정하였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아 학자들이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조지 피콕]]이 1816년 [[실베스트르 프랑수아 라크루아|라크루아]]의 《미적분학》(Differencial and Intergral Calculus)을 번역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ref>{{웹 인용 |성 = Miller |이름 = Jeff |제목 = Earliest Known Uses of Some of the Words of Mathematics |url = http://members.aol.com/jeff570/p.html |확인날짜 = 2006-09-10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19991003184733/http://members.aol.com/jeff570/p.html |보존날짜 = 1999-10-03 |url-status = live }}</ref><ref>{{서적 인용 | 성 = Smith | 이름 = David Eugene | 제목 = History of Mathematics, Vol II | 출판사 = Ginn and Co. | 연도 = 1925 | 출판위키location = 보스턴 | 쪽 = 324 }}</ref>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는 극좌표를 처음으로 3차원으로 확장하였으며, [[레온하르트 오일러|오일러]]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ref name="coolidge" /> == 극좌표를 이용한 점의 표시 == [[파일:CircularCoordinates.svg|섬네일|230px|극좌표로 표시된 (3, 60°)와 (4, 210°)]] 극좌표계의 점은 반지름(''r'')과 각(''θ'')로 표현된다. ''r''은 극에서의 거리를 의미하고, ''θ''는 0°(데카르트 좌표계의 x축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의 각도를 의미한다. 만약 ''r''이 음의 값을 갖는다면, ''θ''가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리 |''r''|만큼 떨어진 점을 뜻한다.<ref name="김홍종" /> 예를 들어, 극좌표 (3, 60°)는 극에서 60° 방향으로 3단위만큼 떨어진 곳을 나타낸다. 극좌표 (3, -300°)도 같은 위치에 그려진다. 데카르트 좌표와는 달리 극좌표에서는 하나의 점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한히 많다. 여러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와도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r, θ'')는 :(''r, θ'' ± ''n''×360°) 또는 (−''r, θ'' ± (2''n''+1)×180°) 로 표현될 수 있다(n은 임의의 정수).<ref>{{웹 인용 |url = http://www.fortbendisd.com/campuses/documents/Teacher/2006%5Cteacher_20060413_0948.pdf |제목 = 극좌표와 그래프 그리기 |확인날짜 = 2006-09-22 |출판일자 = 2006-04-13 |format = PDF |보존url = https://www.webcitation.org/65Tl0XlQe?url=http://campuses.fortbendisd.com/campuses/documents/Teacher/2006/teacher_20060413_0948.pdf |보존날짜 = 2012-02-15 |url-status = dead }}</ref> (0, ''θ'')는 일반적으로 극을 뜻하며, 반지름이 0이기 때문에 어떠한 각이든 상관이 없다.<ref>{{서적 인용 | 제목=Precalculus: With Unit-Circle Trigonometry | 성=Lee | 이름=Theodore | 공저자=David Cohen, David Sklar | 연도=2005 | 출판사=Thomson Brooks/Cole | edition=Fourth Edition | iD=0534402305 }}</ref> 점을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로 제한할 때에는 ''r''은 양수로, ''θ''는 구간 [0, 360°) 또는 (−180°, 180°](라디안으로는 [0, 2π) 또는 (−π, π])의 수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ref>{{서적 인용|제목=Complex Analysis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Plane)|이름=Ian|성=Stewart|공저자=David Tall|연도=1983|출판사=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id=0521287634 }}</ref> 극좌표의 각은 [[라디안]]을 이용한 [[호도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2π rad = 360°),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항행]]에서는 [[60분법]]으로 각을 나타내며, [[물리]] 분야(특히 회전 역학)와 거의 모든 [[미적분]]에서는 [[호도법]]이 쓰인다.<ref>{{서적 인용 | 성 = Serway | 이름 = Raymond A. | 공저자 = Jewett, Jr., John W. | 제목 = Principles of Physics | 출판사 = Brooks/Cole—Thomson Learning | 연도 = 2005 | id = 0-534-49143-X }}</ref> === 극좌표와 데카르트 좌표 사이의 변환 === [[파일:Polar to cartesian.svg|right|섬네일|230px|극좌표와 데카르트 좌표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그림.]] ''r''와 ''θ''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로 변환할 수 있다. :<math>x = r \cos \theta</math> :<math>y = r \sin \theta</math>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는 극좌표의 ''r''로 변환할 수 있다. :<math>r^2 = x^2 + y^2</math> ([[피타고라스 정리]] 사용) ''θ''를 정의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 ''r'' = 0 일 때는 ''θ''는 임의의 실수가 될 수 있다. * ''r'' ≠ 0 일 때는 표현의 유일성을 위하여 크기가 2π보다 작은 구간으로 한정한다. 보통은 [0, 2π) 나 (−π, π]가 사용된다. [0, 2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math>\arctan</math>는 <math>\tan</math>의 역함수이다.) :<math>\theta = \begin{cases} \arctan \frac{y}{x} & \mbox{if } x > 0 \mbox{ and } y \ge 0\\ \arctan \frac{y}{x} + 2\pi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arctan \frac{y}{x} + \pi & \mbox{if } x < 0\\ \frac{\pi}{2}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frac{3\pi}{2}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end{cases}</math> (−π, 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ref>{{서적 인용|이름=Bruce Follett|성=Torrence|공저자=Eve Torrence|제목=The Student's Introduction to Mathematica®|연도=1999|출판사=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id=0521594618 }}</ref> :<math>\theta = \begin{cases} \arctan \frac{y}{x} & \mbox{if } x > 0\\ \arctan \frac{y}{x} + \pi & \mbox{if } x < 0 \mbox{ and } y \ge 0\\ \arctan \frac{y}{x} - \pi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frac{\pi}{2}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frac{\pi}{2} & \mbox{if } x = 0 \mbox{ and } y < 0 \end{cases}</math> == 극좌표 방정식 == 극좌표를 이용하여 곡선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극좌표 방정식''' 또는 '''극방정식'''이라고 한다. 보통은 ''r ''를 ''θ ''에 관한 함수로 정의한다. 곡선 위의 점은 <math>(r(\theta),\theta)</math>로 정의되며 함수 ''r ''의 그래프로 생각할 수 있다. 극좌표 방정식 ''r''(''θ'')의 형태로부터 대칭성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r''(−''θ'') = ''r''(''θ'') 이라면 곡선은 수평 반경(0° / 18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π−''θ'') = ''r''(''θ'')이라면 수직 반경(90° / 27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α''−''θ'') = ''r''(''θ'')일 때는 ''α/2''만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 곳에서 대칭이 된다. 극좌표계의 성질 덕에 많은 곡선이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데카르트 좌표로 표현되려면 난해한 곡선이 많이 있다.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선은 극좌 장미 곡선, 아르키메데스 나선, 달팽이꼴 곡선, 심장형 등이 있다. 아래에 서술된 내용에는 정의역과 치역의 범위의 제한은 없다. === 원의 극좌표 방정식 === [[파일:circle r=1.svg|섬네일|right|230px|''r''(''θ'') = 1 로 정의되는 원]] 원의 중심이 (''r ''<sub>0</sub>, ''φ'')이며 반지름이 ''a''인 원의 일반적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math>r^2 - 2 \cdot r \cdot r_0 \cdot \cos(\theta - \varphi) + {r_0}^2 = a^2</math> 위의 방정식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 ''r''(''θ'')=''a'' (원의 중심이 극에 있고 반지름이 a인 경우)<ref name="ping">{{웹 인용 |이름 = Johan |성 = Claeys |url = http://www.ping.be/~ping1339/polar.htm |제목 = Polar coordinates |확인날짜 = 2006-05-25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427230725/http://www.ping.be/~ping1339/polar.htm |보존날짜 = 2006-04-27 |url-status = dead }}</ref> === 직선의 극좌표 방정식 === 극을 통과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 ''θ'' = ''φ'' 위의 방정식에서 ''φ''는 극을 통과하는 선의 기울기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φ'' = arctan ''m''), ''m''은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기울기이다. 직선 ''θ'' = ''φ''에 수직이면서 점 (''r ''<sub>0</sub>,''φ'')를 지나는 직선은 <math>r(\theta) = {r_0}\sec(\theta-\varphi)</math>로 나타낼 수 있다. === 극좌표 장미 곡선 === [[파일:Rose 2sin(4theta).svg|섬네일|right|230px|''r''(''θ'') = 2 sin 4''θ''로 정의되는 극좌표 장미곡선]] 수학에서 [[장미 곡선]]은 꽃잎을 지닌 꽃처럼 보이는 유명한 곡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math>r(\theta) = a \cos (k\theta + \phi_0)</math> (<math>\phi_0</math>는 임의의 상수) ''k''가 [[홀수]]일 때는 ''k''개의 꽃잎을 지니며, ''k''가 [[짝수]]일 때는 2''k''개의 꽃잎을 지닌다. ''k''가 정수가 아닐 때에는 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때는 꽃잎이 겹쳐 보이게 된다. 즉, 4''n'' + 2개의 꽃잎을 지닌 장미 곡선을 그릴 수는 없다. [[변수 (수학)|변수]] ''a''는 꽃잎의 길이를 의미한다. {{-}} === 아르키메데스 나선 === [[파일:Spiral of Archimedes.svg|섬네일|right|230px0 < ''θ'' < 6π 구간으로 제한된 아르키메데스 나선 ''r''(''θ'') = ''θ'']]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나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r''(''θ'') = ''a'' + ''bθ'' [[매개변수]] ''a''는 나선의 위치를 돌려 놓으며, ''b''는 나선 사이의 폭을 조정한다. ''r''(''θ'') = ''bθ''일 경우, 각이 ''θ'' > 0일 때와 ''θ'' < 0일 때, 각각의 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는 두 가지의 곡선을 그리며 이들은 극에서 매끄럽게 만난다. 90°/270°선(데카르트 좌표계의 y축과 같음)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상을 그리면 다른 쪽 곡선이 나온다. 이 곡선은 수학 관련 저술에서 [[원뿔 곡선]] 다음으로 등장하는 곡선이며 극좌표로 가장 잘 표현되는 예로 거론된다. {{-}} === 원뿔 곡선 === [[파일:Elps-slr.svg|섬네일|right|230px|타원]] 초점 중 하나가 극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0°의 어딘가에 있는(원뿔 곡선의 주축이 극축에 있도록) [[원뿔 곡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math>r = { \ell\over {1 - e \cos \theta } } </math> ''e''는 [[이심률]]이며 <math>\ell</math>은 극이 아닌 초점에서 주축(major axis)에 수직이 되게 곡선까지 잰 거리(semi-latus rectum)이다. ''e'' > 1일 때 이 방정식은 [[쌍곡선]]이 되며, ''e'' = 1일 때는 [[포물선]]이 되고, ''e'' < 1일 때는 [[타원]]이 된다. ''e'' = 0일 때는 반지름 <math>\ell</math>인 원이 그려진다. == 복소수 체계 == [[파일:Imaginarynumber2.svg|섬네일|right|230px|복소수 ''z''를 복소평면에 그린 것]] [[파일:Euler's formula.svg|섬네일|right|230px|[[오일러 공식]]을 이용해 복소수를 복소평면에 그린 것]] 모든 [[복소수]]는 [[복소평면]] 위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데카르트 좌표계]]와 극좌표계의 방식으로 모두 표현 가능하다. 복소수 ''z''는 다음과 같이 데카르트 좌표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 <math>z = x + iy\,</math> <math>i</math>는 [[허수 단위]]이다. 이 식은 아래와 같이 극좌표계로 나타낼 수 있다. 이를 '''복소수의 극형식'''이라 한다. :<math>z = r (\cos\theta+i\sin\theta)</math> [[자연로그]]의 [[밑]] e를 이용하면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 : <math>z = re^{i\theta} \,</math> 이는 [[오일러의 공식]]으로 표현된 것과 같다<ref>{{서적 인용 | 성 = Smith | 이름 = Julius O. | 제목 = Mathematics of the Discrete Fourier Transform (DFT) | 확인날짜 = 2006-09-22 | 연도 = 2003 | 출판사 = W3K Publishing | id = 0-9745607-0-7 | chapter = Euler's Identity | chapterurl = http://ccrma-www.stanford.edu/~jos/mdft/Euler_s_Identity.html | archive-date = 2006-09-15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915004724/http://ccrma-www.stanford.edu/~jos/mdft/Euler_s_Identity.html }}</ref>(이러한 공식은 각 ''θ''의 단위가 [[라디안]]일 때에만 성립된다). 복소수의 직교 형식과 극형식 사이의 변환은 위에서 서술한 [[극좌표계#극좌표와 데카르트 좌표 사이의 변환|변환 공식]]을 사용하면 된다. 복소수의 [[곱셈]], [[나눗셈]], [[거듭제곱]] 연산을 할 때에는 데카르트 좌표계보다는 극좌표계로 표현하는 것이 계산이 더 간편하다. 지수 법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성질이 성립한다. * 곱셈: :: <math>r_0 e^{i\theta_0} \cdot r_1 e^{i\theta_1}=r_0 r_1 e^{i(\theta_0 + \theta_1)}</math> * 나눗셈: :: <math>\frac{r_0 e^{i\theta_0}}{r_1 e^{i\theta_1}}=\frac{r_0}{r_1}e^{i(\theta_0 - \theta_1)}</math> * 거듭제곱: :: <math>(re^{i\theta})^n=r^ne^{in\theta}</math> == 미적분 == 극좌표 공식은 [[미적분]]에도 적용할 수 있다.<ref>{{웹 인용 | url=http://archives.math.utk.edu/visual.calculus/5/polar.1/index.html | 제목=Areas Bounded by Polar Curves | 저자=Husch, Lawrence S. | 확인날짜=2006-11-25 | archive-date=2000-03-01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00301151724/http://archives.math.utk.edu/visual.calculus/5/polar.1/index.html | url-status= }}</ref><ref>{{웹 인용 | url=http://archives.math.utk.edu/visual.calculus/3/polar.1/index.html | 제목=Tangent Lines to Polar Graphs | 저자=Lawrence S. Husch | 확인날짜=2006-11-25 | archive-date=2019-11-21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1121222301/http://archives.math.utk.edu/visual.calculus/3/polar.1/index.html | url-status= }}</ref> 각 ''θ''의 측정 단위로는 [[라디안]]을 사용한다. === 미분 === 극좌표계와 데카르트 좌표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미분 공식이 성립한다. :<math>r \tfrac{\partial}{\partial r}= x \tfrac{\partial}{\partial x} + y \tfrac{\partial}{\partial y}</math> :<math>\tfrac{\partial}{\partial \theta} = -y \tfrac{\partial}{\partial x} + x \tfrac{\partial}{\partial y}</math> 극좌표 곡선인 ''r''(''θ'')의 데카르트 좌표계에서의 기울기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곡선을 매개변수 연립방정식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math>x=r(\theta)\cos\theta \,</math> :<math>y=r(\theta)\sin\theta \,</math> 두개의 등식을 ''θ''에 대하여 [[미분]]하면 :<math>\frac{dx}{d\theta}=r'(\theta)\cos\theta-r(\theta)\sin\theta \,</math> :<math>\frac{dy}{d\theta}=r'(\theta)\sin\theta+r(\theta)\cos\theta. \,</math> 두 번째 등식을 첫 번째 등식으로 나누면 (''r'', ''θ'')에 접하는 접선의 기울기가 된다. :<math>\frac{dy}{dx}=\frac{r'(\theta)\sin\theta+r(\theta)\cos\theta}{r'(\theta)\cos\theta-r(\theta)\sin\theta}.</math> === 적분 === [[파일:Polar coordinates integration region.svg|섬네일|230px|''R''는 곡선 ''r''(''θ''), ''θ'' = ''a'', ''θ'' = ''b''로 둘러싸인 부분이다.]] 곡선 ''r''(''θ''), ''θ'' = ''a'', ''θ'' = ''b''에 의해 둘러싸인 부분을 ''R'' 라 하자.(0 < ''b'' − ''a'' < 2π) 이때 ''R''의 넓이는 다음과 같다. :<math>\frac12\int_a^b r(\theta)^2\, d\theta.</math> [[파일:Polar coordinates integration Riemann sum.svg|섬네일|230px|지역 ''R''의 크기는 ''n''개의 구간을 이용해 근사값을 계산할 수 있다.(''n'' = 5).]]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를 유도할 수 있다. 먼저 구간 [''a'', ''b'']를 ''n'' 개의 구간으로 나눈다(''n''은 자연수). 각 구간 ''i'' = 1, 2, …, ''n''에서 ''θ''<sub>''i''</sub>이 각 구간의 중점이라 하고 극에 중심을 두는 [[부채꼴]]을 만든다(''r''(θ<sub>''i''</sub>), 중심각 : ''Δθ'', 호의 길이 : ''r''(''θ''<sub>''i''</sub>)''Δθ''). 이때 만들어진 각 부분의 넓이는 <math>\tfrac12r(\theta_i)^2\Delta\theta</math>이다. 따라서 총 넓이는 다음과 같은 [[리만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math>\sum_{i=1}^n \tfrac12r(\theta_i)^2\,\Delta\theta</math> 구간의 개수 ''n''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극한값은 ''R ''의 넓이에 가까워진다. === 일반화 === 데카르트 좌표를 이용해서 무한소 넓이는 <math>dA = dx dy</math>와 같이 계산된다. [[치환 적분법]]으로 좌표계를 바꾸어 [[중적분]]할 때에는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해야 한다. : <math>J = \det\frac{\partial(x,y)}{\partial(r,\theta)} =\begin{vmatrix} \frac{\partial x}{\partial r} & \frac{\partial x}{\partial \theta} \\ \frac{\partial y}{\partial r} & \frac{\partial y}{\partial \theta} \end{vmatrix} =\begin{vmatrix} \cos\theta & -r\sin\theta \\ \sin\theta & r\cos\theta \end{vmatrix} =r\cos^2\theta + r\sin^2\theta = r</math> 따라서 극좌표계의 좌표에 따른 넓이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math>dA = J\,dr\,d\theta = r\,dr\,d\theta</math> 이제 극좌표계로 주어진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적분할 수 있다. :<math>\iint_R f(r,\theta) \, dA = \int_a^b \int_0^{r(\theta)} f(r,\theta)\,r\,dr\,d\theta.</math> 여기서 ''R ''는 곡선 ''r''(''θ''), ''θ''= ''a'', ''θ'' = ''b''에 둘러싸인 영역이다. ''R ''의 넓이는 함수 ''f ''를 1과 같다고 하면 된다.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한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가우스 적분]]이다. :<math> \int_{-\infty}^\infty e^{-x^2} \, dx = \sqrt\pi</math> === 벡터 미적분 === [[벡터 미적분]]은 극좌표에도 적용할 수 있다. <math>\mathbf{r}</math>를 위치 벡터 <math>(r\cos(\theta),r\sin(\theta))\,</math>, (''r''과 ''θ''는 시간 ''t''에 의해 좌우된다.) <math>\mathbf{r}</math>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위 벡터 <math>\hat{\mathbf{r}} </math>를 다음과 같이 두고, :<math>\hat{\mathbf{r}}=(\cos(\theta),\sin(\theta))</math> <math>\mathbf{r}</math>에 수직인 단위 벡터를 다음과 같이 두자. :<math>\hat{\boldsymbol\theta}=(-\sin(\theta),\cos(\theta))</math> 이때 ''r''의 1계 미분, 2계 미분은 다음과 같다. :<math>\frac{d\mathbf{r}}{dt} = \dot r\hat{\mathbf{r}} + r\dot\theta\hat{\boldsymbol\theta},</math> :<math>\frac{d^2\mathbf{r}}{dt^2} = (\ddot r - r\dot\theta^2)\hat{\mathbf{r}} + (r\ddot\theta + 2\dot r \dot\theta)\hat{\boldsymbol\theta} = (\ddot r - r\dot\theta^2)\hat{\mathbf{r}} + \frac{1}{r} \ \dot {\overbrace{r^2\dot\theta }}\quad \hat{\boldsymbol\theta}</math> == 3차원 == 극좌표계는 원통좌표계와 구면좌표계로 확장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2차원의 극좌표계를 포함한다. 원통좌표계는 거리 좌표를 더해 극좌표계를 확장시키며, 구면좌표계는 각 좌표를 더해 확장한다. === 원통 좌표계 === [[파일:Cylindrical coordinates2.svg|섬네일|right|230px|원통좌표계로 그려진 점]] {{본문|원통 좌표계}} [[원통 좌표계]]는 평면 극좌표로 (0,0)을 제외한 ''xy'' 평면 전체를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으므로, 여기에 ''z''축을 더하여, 3차원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평면 극좌표계의 ''r, θ,'' 그리고 ''z''로 이루어지는 이 좌표계를 '''원통 좌표계'''라고 한다. '''원통 좌표계'''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 좌표 중 ''r''이 고정되고, ''θ, z''가 임의의 값을 취할 수 있을 때의 자취가 [[원통]]이기 때문이다. 원통 좌표계의 [[특이점]]은 ''z''축 위의 점들이다. 세 가지 원통 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써서 [[데카르트 좌표]]로 변환할 수 있다. :<math> \begin{align} x &= r \, \cos\theta \\ y &= r \, \sin\theta \\ z &= h. \end{align} </math> === 구면좌표계 === [[파일:Spherical coordinate.gif|섬네일|202x202픽셀|구면좌표계로 그려진 점]] {{본문|구면좌표계}} [[구면좌표계]]는 원점에서의 거리 ''r'', ''z''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θ'''', ''xy'' 평면으로의 사영이 ''x''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φ,'' 이 세 가지 변수 ''r,θ,φ''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특이점은 ''r''=''0'' 이거나, ''θ''=''nπ''(단, ''n''은 자연수)를 만족하는 모든 (''r,θ,φ'')이며, [[데카르트 좌표계]]에선 각각 (''x,y,z'')=(0,0,0), ''z''축에 해당한다. 구면 좌표계는 ''r''을 고정시켰을 때의 자취가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면좌표계의 ''r''은 원점과의 거리인 반면 [[원통 좌표계]]의 ''r''은 ''z''축과의 거리이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통 좌표계의 반지름을 ''r''대신 ''ρ''를 써서 표기하기도 한다. 원통 좌표계의 ''θ''는 구면좌표계의 ''θ''가 아닌, ''φ''와 일치한다. 또한 이 좌표계는 지구의 지도에 사용되는 [[위도]], [[경도]]와 비슷하다. 위도 ''δ''는 ''''''θ''''''의 여각이며(''δ'' = 90° − ''''''θ''''''), 경도 <math>\ell</math>은 <math>\ell</math> = ''''φ'''' − 180°와 같이 정의된다.<ref>{{웹 인용|url=http://www.math.montana.edu/frankw/ccp/multiworld/multipleIVP/spherical/body.htm|제목=구면 좌표계|이름=Frank|성=Wattenberg|연도=1997|확인날짜=2006-09-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1222101905/http://www.math.montana.edu/frankw/ccp/multiworld/multipleIVP/spherical/body.htm|보존날짜=2008-12-22|url-status=dead}}</ref> 세 가지 구면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데카르트 좌표]]로 변환될 수 있다. :<math> \begin{align} x &= \rho \, \sin\theta \, \cos\varphi \\ y &= \rho \, \sin\theta \, \sin\varphi \\ z &= \rho \, \cos\theta. \end{align} </math> == 일상에서의 적용 == 극좌표계는 2차원이기 때문에 점이 2차원 면에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극좌표계가 가장 널리 쓰이는 곳은 어떤 현상이 중앙에서의 거리와 방향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위의 예시는 기본적인 극좌표를 사용한 식이 곡선을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처럼 데카르트 좌표계로는 표현했을 때 복잡한 식이 한 예이다). 또한, 물체가 중심에서 돌거나 중심을 두고 발생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되는 물리 체계에서는 극좌표계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고 직관적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극좌표계를 도입하고자 한 계기는 [[등속 원운동]]이나 [[궤도 운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 위치와 항행 === 극좌표계는 [[항행]]에 자주 쓰이며, 각과 거리로 목적지나 여행 방향을 정해준다. 예를 들어 [[항공기]]는 항행을 위해 약간 변형된 극좌표를 사용한다. 0°는 주로 360°로 주로 일컬어지며, 각도는 반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방향으로 돈다. 360°는 [[자북극]]을 가리키며, 90°, 180°, 270°는 각각 동쪽, 남쪽, 서쪽을 일컫는다.<ref>{{웹 인용|url=http://www.thaitechnics.com/nav/adf.html|제목=항공기 항행 시스템|확인날짜=2006-11-26|이름=Sumrit|성=Santhi }}</ref> 따라서 동향으로 5[[해리 (단위)|해리]]를 이동하는 항공기는 90°로 5단위를 이동하는 것이 된다([[항공 교통 관제]]에서는 [[NATO 음성 문자|90(niner-zero)]]라고 읽는다).<ref>{{웹 인용|url=http://www.faa.gov/library/manuals/aircraft/airplane_handbook/media/faa-h-8083-3a-7of7.pdf|제목=Emergency Procedures|type=pdf|확인날짜=2007-01-15 }}</ref> === 모형화 === [[파일:Bosch 36W column loudspeaker polar pattern.png|섬네일|230px|공업 [[확성기]]에서의 6가지의 주파수의 출력 경향을 구면좌표계에 그린 것]] 중앙점이 대칭의 기준이 되는 시스템이면 자연스럽게 극좌표계를 사용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수 공식]]이며, 방사적으로 대칭되는 우물에 곧잘 쓰인다. 또한 [[중심력]]이 있는 시스템도 극좌표가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력장]]([[역제곱법칙]]을 따른다), [[안테나]]와 같이 [[점광원]]이 쓰이는 체계 등이다. 방사적으로 비대칭되는 시스템에도 극좌표계가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폰]]의 지향특성은 음원의 방향에 따라 비례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패턴은 극좌표 곡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마이크인 카디오이드 마이크의 곡선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math>1 =r = 0.5 + 0.5 \sin \Theta</math><ref>{{서적 인용 |성=Eargle |이름=John |제목=Handbook of Recording Engineering |연도=2005 |edition=Fourth Edition |출판사=Springer |id = 0387284702 }}</ref> 패턴은 낮은 주파수에 전방향성으로 바뀐다. [[확성기]]의 출력을 3차원으로 모형화한 것은 확성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패턴이 주파수에 따라 많이 변하기 때문에 여러 주파수에서 그린 그래프가 필요하다. 극좌표계 그래프는 많은 확성기가 낮은 주파수에서 전방향성으로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 == 같이 보기 == * [[구면좌표계]] * [[초구면 좌표계]] * [[구면 조화 함수]] == 각주 == {{각주|2}}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성=Anton|이름=Howard|공저자=Irl Bivens, Stephen Davis|제목=Calculus|edition=Seventh Edition|연도=2002|출판사=Anton Textbooks, Inc.|id=0-471-38157-8}} * {{서적 인용|성=Finney|이름=Ross|공저자=George Thomas, Franklin Demana, Bert Waits|제목=Calculus: Graphical, Numerical, Algebraic|edition=Single Variable Version|연도=1994|출판월=6월|출판사=Addison-Wesley Publishing Co.|id=0-201-55478-X}} == 외부 링크 == * [http://www.random-science-tools.com/maths/coordinate-converter.htm Coordinate Converter - converts between polar, Cartesian and spherical coordinates] * [http://scratch.mit.edu/projects/nevit/691690 Polar Coordinate System Dynamic Demo] {{전거 통제}} [[분류:좌표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국가원수 정보 | 이름 = 덩샤오핑 | 원어명 = ({{zh|s=邓小平|t=鄧小平}}) | 명칭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그림 = Deng Xiaoping at the arrival ceremony for the Vice Premier of China (cropped).jpg | 크기 = 330px | 국가 = 중화인민공화국 | 대수 = 5 | 취임일 = 1981년 6월 28일 | 퇴임일 = 1989년 11월 7일 | 전임 = 화궈펑 | 전임대수 = 4 | 후임 = 장쩌민 | 후임대수 = 6 | 출생일 = {{출생일|1904|8|22}} | 출생지 = 청나라 [[쓰촨성]] [[광안시|광안]]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7|2|19|1904|8|22}}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베이징]] | 정당 = [[중국공산당]] | 종교 = 없음([[무신론]]) | 배우자 = [[줘린]](3번째 부인) | 자녀 = 슬하 2남 3녀 | 학력 =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 정치학 수학 | 서명 = Signature of Deng Xiaoping 19840126.svg | 국가2 = [[중화인민공화국]] | 대수2 = 5 | 명칭2 = <br>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 취임일2 = 1978년 3월 8일 | 퇴임일2 = 1983년 6월 22일 | 부통령2 = | 부통령명칭2 = 부주석 | 전임2 = 저우언라이 | 전임대수2 = 4 | 후임2 = 덩잉차오 | 후임대수2 = 6 }} '''덩샤오핑'''({{zh|s=邓小平|t=鄧小平|p=Dèng Xiǎopíng {{소리|Zh-Deng Xiaoping.ogg}}|hanja=등소평}}, [[1904년]] [[8월 22일]]~[[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자 군사 전력가, 정치인, 외교가, [[혁명가]], [[사상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공산당]] 당료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20세기]]와 [[21세기]]의 [[아시아]] 위인 중 1위로, 전세계와 전인류의 [[지도자]]이자, 영도자로 평가되는 존체이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 6월 28일부터 1989년 11월 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권력자로 군림하는 한편, 1982년 6월 28일부터 1983년 3월 15일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에 있었으며 1983년 3월 15일부터 1983년 6월 18일까지 [[후야오방]](胡耀邦)이 마지막 후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당시 중공 국가부주석: [[우란푸]])을 수행하였고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8년 5개월 남짓의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과도정부 체제(1975년 1월 17일~1983년 6월 18일)가 종식되었으며 1983년 6월 18일, [[리셴녠]](李先念)이 정식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취임하였다. 덩샤오핑 취임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그 경제적인 효과는 약 2[[10000000000000000|경]] 원에 달하였다. 동시에 중국 내부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서 엄타(嚴打)를 엄포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1989년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zh:猫论|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 생애 == === 출생과 생애 초반 === ==== 태어남 ==== 1904년([[광서 (연호)|광서]] 30년) [[청나라]] [[쓰촨성]] [[광안]]의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탄생했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덩원밍은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므로, 덩샤오핑은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인]]으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 유학하다 ==== ===== 프랑스 유학 ===== [[파일:Student Deng Xiaoping in France.jpg|섬네일|왼쪽|[[프랑스]] 유학 시절의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 소련 유학 =====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 마오쩌둥과 만나다 ====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파일:Liudeng.jpg|섬네일|오른쪽|[[국공내전]] 중 [[류보청]]과 함께]] ==== 국공내전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덩샤오핑은 [[류보청]]이 사단장인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화이하이 대전에서 덩샤오핑이 이끈 60만명의 군대는 10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46년부터 1949년 국공내전시기에 화중, 화남, 서남지방이 정복됐으며 서남지방(쓰촨,꾸이저우,윈난,티베트)등 서남지방 4개성을 다스리는 제1서기가 됐다. [[파일:Deng xiaoping and his family in 1945.jpg|섬네일|왼쪽|덩샤오핑의 가족 (1945년)]] ==== 결혼 ====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 3녀). === 젊은 시절 === ==== 학창 시절 ====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f>《정운영의 중국 경제산책》/[[정운영]] 지음/자작나무</ref> 학생시절 [[중국공산당]](CCP)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파일:1937 Deng Xiaoping in NRA uniform.jpg|섬네일|왼쪽|1937년의 덩샤오핑]] ==== 공산당 입당과 대약진 운동 ====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부총리,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실권하였으나, 1973년 부총리로 다시 복권되었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 경제개혁 ==== [[파일:Xiaoping Deng factory.jpg|섬네일|오른쪽|[[우한]]의 한 공장을 방문한 덩샤오핑]]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 박해와 복귀 ====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고 1975년에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참모장에 내정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은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학교]]에서의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1988년 중국장애인연합회, 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ref>«내 눈에는 희망이 보였다»/강영우 지음/두란노p.104</ref> 그 해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복직한다. 여러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의 직계는 물론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한다. [[파일:Mao Zedong,Deng Xiaoping and Wang Jiaxiang.jpg|섬네일|왼쪽|[[마오쩌둥]]과 왕자샹과 함께]] === 혁명 활동 === ==== 농민출신 혁명가 ====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전한 고조|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 당내 권력투쟁 ==== 중국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아직도 [[화궈펑]]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 정치 활동 === [[파일:Mao, Soong and Deng at International Meetings of Communist and Workers.jpg|섬네일|오른쪽|[[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공산당 노동자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쑹칭링]]과 함께(1957년)]] 1975년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76년 [[문화 대혁명|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였으나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까지 당 부주석·총참모장·부총리·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지냈다. 1978년부터는 중국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였으며,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은 1983년까지 유지하였다. 1982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정치국 상무위원·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중공의 최고 정치 실력자로 군림하였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 부패개혁, 엄타 ==== 정치 활동으로 대표적 업적으로 엄타를 꼽을 수 있다. 범죄를 없애겠다는 명분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국공산당집정사십년>이라는 책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최소한 861,000명이 처리되었고, 24,000명이 총살로 사형당했다. 1983년 9월 2일, 전국인대 상임위원회는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엄벌하는데 관한 결정>등 3개의 중대한 결정을 통과시킨다. 이는 형법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다. 깡패죄등 10여종의 범죄를 "형법에 규정한 최고형이상으로 처형하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83년의 엄타이후, 다시 1996년, 2001년에도 전국범위에서 엄타를 진행하며 중국공산당 권력을 공고화했다. === 집권 기간 === ==== 개방 정책 ==== [[파일:Carter DengXiaoping.jpg|230px|섬네일|왼쪽|덩샤오핑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국제 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그 뒤 1983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 주석직]]이 부활하여 [[리셴녠]]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본격적으로 넘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위원회와 당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그가 차지함으로써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실권을 회복하는 등 아직도 실권은 그가 쥐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의 재통일|중국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 중국식 사회주의 ==== {{덩샤오핑주의}} 덩샤오핑의 개혁의 목표는 [[4대 현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이다.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공산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주의|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 개혁 정책 지원 ==== [[파일:Gerald and Betty Ford meet with Deng Xiaoping, 1975 A7598-20A.jpg|250px|섬네일|왼쪽|1975년 [[베이징]]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덩샤오핑.]]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도입되었다. 많은 개혁들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경험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장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 절차의 제도화 ===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1989년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서거했다. 향년 93세. == 유산 == [[파일:Shenzhen.Statue.Deng Xiaoping.jpg|150px|오른쪽|섬네일|덩샤오핑의 동상]] 언론인 짐 로워는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화장 정책을 추진한 중국 정부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유언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현대화되고 번영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 명언 == {{인용문|덩샤오핑 주석 명언<br> #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게 좋은 고양이다. ([[1962년]]) # 과학기술이 제일의 생산력이다. ([[1978년]]) # [[당정]]을 나누지 않고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980년]]) #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건설하자. ([[1982년]]) # [[정치]]는 1류, [[관료]]는 2류, [[백성]]은 3류, [[기업]]은 4류다. 4류 장사치가 설치는 나라는 망한 나라다. ([[1987년]]) # 계획이 곧 [[사회주의]]가 아닌 것처럼, 시장경제도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다. ([[1992년]]) # [[미국]]에 대들지말고, [[힘]]을 키워라. ([[1997년]] [[유언]])}} == 각주 == {{각주}} == 관련 도서 == * 《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지음, 권기대 옮김, 황금가지 펴냄. * 살림지식총서《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박형기 지음/살림 == 같이 보기 == * [[덩샤오핑주의]] * [[덩샤오핑 이론]]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154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덩샤오핑]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 |전임자= [[화궈펑]] |후임자= [[장쩌민]] |임기= 1978년 12월 22일 - 1989년 11월 9일 |대수= 3 }} {{전임후임 | 전임자=[[쑹칭링]] <br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명예 주석]])| 후임자=[[리셴녠]] <br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 주석]])| 대수= | 직책=[[중화인민공화국 주석|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대행]]| 임기= 1981년 5월 29일 - 1983년 6월 18일 }} {{전임후임 |전임자=[[린뱌오]] |후임자=[[장춘차오]] |대수= |직책=[[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임기=1971년 9월 13일 - 1976년 1월 1일 }} {| align="center" style="width:70%; border-collapse:collapse; border-top:0.2em solid #CD0000; border-bottom:0.2em solid #CD0000; clear:both; margin: 0.3em auto; background: #F9F9F9; text-align: center; line-height:1.5em;" |- style="background-color:#FF2424;" ! style="padding: 0.5em;" | [[파일: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45px]] ! style="padding: 0.5em;" | <big>[[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span style="color:gold">{{#if:{{{대수|}}}|제{{{대수}}}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 권한대행</span>]]</big> ! style="padding: 0.5em;" | [[파일:National Emblem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45px]] |- | width="27%"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85%;"|전 임<br />'''[[저우언라이]]''' | width="44%"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95%;"|1972년 11월 12일 ~ 1973년 1월 1일 | width="27%"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85%;"|후 임<br />'''[[저우언라이]]''' |- | colspan="3" style="text-align:center; border-top:1px solid #ccccff; font-size:75%;" width="100%" | [[저우언라이]]{{·}} [[린뱌오]](권한대행){{·}}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권한대행){{·}} [[저우언라이]]{{·}}[[장춘차오]](권한대행){{·}} [[화궈펑]]{{·}} [[자오쯔양]]{{·}} [[리펑]]{{·}} [[야오이린]](권한대행){{·}} [[리펑]]{{·}} [[주룽지]]{{·}} [[원자바오]]{{·}} [[리커창]] |} {{전임후임 |전임자=[[리셴녠]] |후임자=[[완리]] |대수= |직책=[[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임기=1977년 1월 8일 - 1980년 9월 9일 }} {{전임후임 | 전임자=라오수스| 후임자=[[안쯔원]]| 대수= | 직책=[[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 임기= 1954년 - 1956년 }} {{전임후임 | 전임자=공석<br />([[저우언라이]])| 후임자=[[덩잉차오]]| 대수=5| 직책=[[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임기= 1978년 3월 8일 - 1983년 6월 22일 }} {{전임후임 | 전임자=[[화궈펑]]| 후임자=[[장쩌민]]| 대수= | 직책=[[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1981년 - 1989년 11월 7일| }} {{전임후임 | 전임자=없음| 후임자=[[장쩌민]]| 대수= | 직책=[[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1983년 6월 6일 - 1990년 3월 23일| }} {{전임후임 |전임자 =[[안와르 사다트]] |후임자 =[[루홀라 호메이니]] |대수 =52 |직책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78년 }}{{전임후임 |전임자 =피터 위버로스 |후임자 =[[코라손 아키노]] |대수 =59 |직책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85년 }}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타임 올해의 인물}} {{냉전의 인물들}} {{전거 통제}} [[분류:덩샤오핑| ]] [[분류:1904년 출생]] [[분류:1997년 사망]]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분류: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분류: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분류:후진타오]] [[분류:문화 대혁명 피해자]] [[분류:중국의 혁명가]] [[분류:중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중국의 사회주의자]] [[분류: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분류:쓰촨성 출신]] [[분류: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문]] [[분류:모스크바 중산 대학 동문]] [[분류:하카인]] [[분류:중국공산당의 정치인]] [[분류:중국 인민해방군 군인]] [[분류:중화민국 대륙 시기 사람]] [[분류:중국-베트남 전쟁 관련자]]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중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마오쩌둥]]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중국인]] [[분류:소련에 거주한 중국인]] [[분류:국공 내전 관련자]] [[분류:1989년 톈안먼 사건 관련자]] [[분류:파킨슨병으로 죽은 사람]]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분수'''(連分數)는 다음과 같은 꼴의 분수를 말한다. :<math>x = a_0 + \cfrac{1}{a_1 + \cfrac{1}{a_2 + \cfrac{1}{a_3+\,\ddots}}} </math> 이 식에서 <math>a_0</math> 은 정수, 나머지 <math>a_n</math> 은 양의 정수이다. 위 분수꼴의 수를 <math>x = [a_0; a_1, a_2, a_3]</math>로 쓰기도 한다. 같은 방법으로 일반적인 연분수를 <math>[a_0; a_1, a_2, \cdots, a_n]</math> 로 쓴다. 이를 유한에만 한정하지 않고, 무한까지 확장하여, '''무한 연분수'''를 다음과 같이 [[극한]]을 이용하여 정의할 수도 있다. :<math>[a_{0}; a_{1}, a_{2}, a_{3}, \cdots ] = \lim_{n \to \infty} [a_{0}; a_{1}, a_{2}, \cdots, a_{n}] </math> 위 극한은 어떤 양의 정수 <math>a_1, a_2, a_3, \cdots</math> 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모든 유한 연분수는 유리수이며, 모든 [[유리수]]는 <math>[2; 3, 1] = [2; 4] = \frac 9 4 = 2.25</math>의 경우와 같이 정확히 두 가지 유한 연분수로 나타내어진다. 모든 무한 연분수는 [[무리수]]이며, 모든 무리수는 무한 연분수로 표현가능하며 그 표현은 유일하다. 무한 연분수 중 꼬리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순환 연분수'''라고 한다. 어떤 무리수가 순환 연분수로 표현가능할 필요충분조건은 그것이 어떤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는 것이다. 즉, '''이차 무리수'''({{llang|en|quadratic irrational number}})인 것이다. == 근사분수 == 무리수를 무한 연분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처음 몇 항까지의 연분수가 좋은 유리수 근삿값을 주기 때문에 특히 유용하다. 이런 근사 유리수값을 연분수의 ''[[근사분수]](convergents)''라 부른다. 짝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작은데 비하여, 홀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크다. 예를 들어, [[원주율]] 파이(<math>\pi</math>)의 근사분수들을 계산해 보자. :<math> \begin{aligned} a_0 & = \lfloor \pi \rfloor = 3 & u_1 & = \frac 1 {\pi - 3} \approx \dfrac { 113} { 16} = 7.0625 \\ a_1 & = \lfloor u_1 \rfloor = 7 & u_2 & = \frac 1 {u_1 - 7} \approx \dfrac {31993} {2000} = 15.9965 \\ a_2 &= \lfloor u_2 \rfloor = 15 & u_3 & = \frac 1 {u_2 - 15} \approx \dfrac { 1003} {1000} = 1.003 \end{aligned} </math> ::(<math>\lfloor x \rfloor</math>는 <math>x</math>보다 작은 최대 정수)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 이를 반복하면, 무한 연분수 :<math> \begin {aligned} \pi & = [3; 7, 15, 1, 292, 1, 1, 1, 2, \cdots] \\ & = 3 + \cfrac{1}{7 + \cfrac{1}{15 + \cfrac{1}{1 + \cfrac{1}{292 + \cfrac{1}{1 + \cfrac{1}{1 + \cfrac{1}{1 + \cfrac{1}{2 + \cfrac{1}{\ddots}}}}}}}}} \end {aligned} </math> 를 얻는다. <math>\pi</math>의 세 번째 근사분수는 <math>[3; 7, 15, 1] = \frac {355} {113} = 3.14159292035\cdots</math>이며,이는 실제 <math>\pi</math> 값에 매우 가까운 값이다. === 오차의 한계 === 어떤 무리수의 <math>n</math>번째 근사분수는, 그것을 분모와 분자가 서로소인 분수로 나타내었을 때의 분모보다 작은 분모를 가진 어떠한 유리수보다 주어진 무리수에 가까이 근접해 있다. 이 때의 오차의 한계는 <math>M</math>을 주어진 무리수, 각각 <math>p_n</math>과 <math>q_n</math>을 <math>n</math>번째 근사분수의 서로소인 분자와 분모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 <math>\left|M- \frac{p_n}{q_n}\right|< \frac{1}{2{q_n}^2}</math> 또한, 다음 식 : <math>\left|M- \frac{P}{Q}\right|< \frac{1}{2Q^2}</math> 을 만족하는 가장 작은 정수 <math>Q</math>에 대하여, 적당한 자연수 <math>k</math>가 존재하여 <math>P= p_k</math>와 <math>Q= q_k</math>를 만족한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포털|수학}} * [[펠 방정식]] == 참고 문헌 == * 오정환, 이준복, 『정수론』, 교우사, 2003 == 외부 링크 == * {{언어링크|en}} [http://wims.unice.fr/wims/wims.cgi?module=tool/number/contfrac.en Online continued fraction calculator] {{전거 통제}} [[분류:연분수| ]] [[분류:분수]] [[분류:해석학 (수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두 다른 뜻|양력의 10월|음력의 10월|음력 10월}} {{다른 뜻 넘어옴|시월|래퍼 cwar|시월 (래퍼)}} [[파일:Breviarium Grimani - Oktober.jpg|섬네일]] '''10월'''(十月<sup>시월</sup>, Octo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2월]]하고도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그 다음 해가 [[평년]]일 경우에는 그 다음 해 [[4월]]과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9월]]과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화요일]]과 [[수요일]]에 57번,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및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일 경우에는 10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및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2015년]], [[2026년]], [[2037년]])일 경우에는 한글날만 공휴일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1988년]], [[2016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개천절만 공휴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추석]]이 있는 해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7월 이전에 윤달을 끼고, 이 가운데에는 9월 30일이 추석 당일인 경우 혹은 [[대체휴일]]이 적용된 경우도 포함한다. (예: [[2001년]], [[2006년]], [[2009년]], [[2012년]] (10월 1일), [[2017년]], [[2020년]], [[2025년]] 등) 북한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노동당 창건일이 주말과 겹쳐 10월에 공휴일이 사실상 없는 해가 된다.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2016년, 2044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 (대한민국)|문화의 날]]이 [[스포츠의 날]]과 겹쳐지며,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8년]], [[2056년]]) 및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06년]], [[2017년]], [[2023년]], [[2034년]], [[2045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경찰의 날]]과 겹쳐진다. [[음력 8월]]과 [[음력 9월]]이 이 달에 있으며 10월에는 음력 8월 15~16일, 9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8월이나 윤9월이 양력 10월에 낀다. {{10월달력}} == 유래 == 영어의 October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서 유래되었다. 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eight(8)을 의미하는 octo에서 유래되었다. == 행사 == * [[음력 8월 15일]]은 [[추석]]이다.<ref>10월보다는 9월에 더 많이 온다. 10월에 오는 경우는 30% 음력 3월에 윤달을 끼고, 70% 음력 4월에 윤달을 끼며, 100% 음력 5월~7월에 윤달을 낀다.</ref> * 대한민국의 [[K리그]] 정규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대한민국 [[KBO 리그]]의 [[한국시리즈]]가 끝나는 달이다. * 대한민국의 [[한국프로농구|프로농구]]가 개막하는 달이다. *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 정규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미국]]의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 달이다. 핼러윈의 날짜는 10월 31일. * [[핀란드]] [[베이카우스리가]]의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며, 가끔 [[월드시리즈]]가 치러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이를 가리켜 '악토버 클래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는 10월부터 시작된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10월 1일]] - [[국군의 날]] -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 [[10월 2일]] - [[노인의 날]] * [[10월 3일]] - [[개천절]] (공휴일)<ref>일각에서는 개천절을 10월 첫째 주 월요일이나 11월 29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한다.</ref> -2021년부터 대체휴일제가 적용된다. * [[10월 5일]] - [[세계 한인의 날]] * [[10월 8일]] - [[재향군인의 날]] * [[10월 9일]] - [[한글날]] (공휴일) -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음. [[2013년]]부터 재지정. 2021년부터 대체휴일제 적용됨.<ref>일각에서는 한글날을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ref> * [[10월 10일]] - 임산부의 날 * [[10월 15일]] - [[스포츠의 날]] * [[10월 16일]] - 부마민중항쟁 기념일 * 10월 셋째 토요일 - [[문화의 날 (대한민국)|문화의 날]] * [[10월 21일]] - [[경찰의 날]] * [[10월 24일]] - [[유엔의 날]] - [[1976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 [[10월 25일]] - [[독도의 날]] * 10월 마지막 화요일 - [[금융의 날]] * [[10월 28일]] - [[교정의 날]] * [[10월 29일]] - 지방자치의 날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키프로스}}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국기나라|나이지리아}}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국기나라|팔라우}}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국기나라|투발루}} - 독립기념일 (10월 1일) * {{국기나라|우즈베키스탄}} - 스승의 날 (10월 1일) *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 - 국경절 (10월 1일) * {{국기나라|기니}} - 독립기념일 ([[10월 2일]]) * {{국기나라|이라크}} - 독립기념일 ([[10월 3일]]) * {{국기나라|대한민국}} - [[개천절]] (10월 3일), [[한글날]] (10월 9일), 추석 연휴 (일부) * {{국기나라|독일}} - 통일기념일 (10월 3일), 종교개혁기념일 ([[10월 31일]]<ref>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엔 주에서만 쉰다.</ref>) * {{국기나라|온두라스}} - 모라산의 날 (10월 3일), 콜럼버스의 날 (10월 12일), 국군의 날 ([[10월 21일]]) * {{국기나라|레소토}} - 독립기념일 ([[10월 4일]]) * {{국기나라|바누아투}} - 제헌절 ([[10월 5일]]) * {{국기나라|이집트}} - 육군기념일 ([[10월 6일]]) * {{국기나라|크로아티아}} - 독립기념일 ([[10월 8일]]) * {{국기나라|우간다}} - 독립기념일 (10월 9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선로동당 창건일]] ([[10월 10일]]) * {{국기나라|피지}} - 독립기념일 ([[10월 10일]]) * {{국기나라|중화민국}} - 쌍십절 (10월 10일) * {{국기나라|미국}} - 콜럼버스 기념일 (10월 둘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일본}} - [[스포츠의 날 (일본)|스포츠의 날]] (10월 둘째 주 월요일)<ref>과거 10월 10일</ref> * {{국기나라|캐나다}} - 추수감사절 (10월 둘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마케도니아}} - 혁명기념일 ([[10월 11일]]) * {{국기나라|적도기니}} - 독립기념일 ([[10월 12일]]) * {{국기나라|브라질}} - 어린이날 (10월 12일) * {{국기나라|과테말라}} - 콜럼버스 기념일 (10월 12일), 혁명기념일 ([[10월 20일]]) * {{국기나라|타이}} - 푸미폰 아둔야뎃 기일 ([[10월 13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탄자니아}} -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날 ([[10월 14일]]) * {{국기나라|아제르바이잔}} - 독립기념일 ([[10월 18일]]) * {{국기나라|알바니아}} - 마더 테레사의 날 ([[10월 19일]]) * {{국기나라|잠비아}} - 독립기념일 ([[10월 24일]]) * {{국기나라|그레나다}} - 추수감사절 ([[10월 25일]]) * {{국기나라|오스트리아}} - 독립기념일 ([[10월 26일]]) * {{국기나라|투르크메니스탄}} - 독립기념일 ([[10월 27일]]) * {{국기나라|체코}} - 독립기념일 ([[10월 28일]]) * {{국기나라|그리스}} - 오치 참전기념일 (10월 28일)<ref>이 날은 그리스뿐 아니라 키프로스에서도 쉰다.</ref> * {{국기나라|튀르키예}} - 독립기념일 ([[10월 29일]]) * {{국기나라|미국}}의 {{국기나라|네바다 주}} - 연방가입일 ([[10월 31일]]) * {{국기나라|슬로베니아}} - 종교개혁기념일 ([[10월 31일]]) * {{국기나라|이스라엘}} - 욤키푸르 (주로 10월 중에 온다.) * {{국기나라|뉴질랜드}} - 노동절 (10월 넷째 주 월요일) == [[절기]] == * [[한로]]: [[10월 8일]] 또는 [[10월 9일]]. * [[상강]]: [[10월 23일]] 또는 [[10월 24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10월|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1월|양력의 1월|음력의 1월}} {{다른 뜻 넘어옴|일월}} [[파일:15th-century unknown painters - Grimani Breviary - The Month of January - WGA15775.jpg|섬네일]] '''1월'''(一月, January)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첫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 중 하나다. 1월의 첫 번째 날은 중국에서 원단이라고 하며 대한민국의 [[양력설]]이다. 이 달과 작년의 [[5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윤년]]일 경우엔 이 달과 그 해의 [[4월]],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추우며([[겨울]]의 두 번째 달이다.), [[남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덥다([[여름]]의 두 번째 달이다.). 북반구에서 1월은 남반구의 [[7월]]과 기후적으로 동일하며, 반대로 남반구의 1월은 북반구의 [[7월]] 기후와 동일하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엔 56번 시작한다. [[음력 11월]]과 [[음력 12월]]이 이 달에 있으며 1월에는 음력 11월 15~16일, 1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1월달력}} == 유래 == 영어 'January'(라틴어 Mensis Ianuarius, "month of Janus")는 문(door)을 뜻하는 라틴어 ianua에서 유래했다. 문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따왔으며,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해를 여는 신이기도 하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문은 시작과 전환(beginnings and transitions)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 고대 로마 달력은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겨울은 달로서 생각되지 않았었다. 비록 원래의 고대 달력에서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기원전 713년]] 경 [[로물루스]]의 계승자였던 제2대 황제 [[누마 폼필리우스]]가 1월과 2월을 추가해 태음년(354일)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450년 경 [[데켐비리]]에 의해 1월이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에서는 3월 25일([[성모 영보]]), 12월 25일([[크리스마스]])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적 축일들이 새해의 첫 날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6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다시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1월 1일이 [[그리스도 할례축일]]이기 때문이었다. == 행사 == * [[1월 1일]]은 [[양력설]]이다. *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ref name="a>1월보다는 2월에 더 많이 온다. 1월에 오는 경우는 대부분 윤달이 낀다.</ref> * 대개 [[윤년]]의 이듬해 [[1월 20일]]<ref>과거에는 [[3월 4일]]이 취임식이었으나 [[레임덕]] 등을 우려해서 1월 20일로 바꿨다.</ref>에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치른다. * [[일본]]의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1월 1일에 치러진다. * [[일본]]의 [[대학 입시 센터 시험]]은 1월 13일 이후 첫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시행된다. 토요일에는 지리/역사/공민, 국어(일본어), 외국어 시험이, 일요일에는 수학과 이과(과학) 시험이 치러진다. * [[일본]]에서는 두 번째 주 월요일이 [[성인의 날]]이다. * [[미국]]에서는 세 번째 주 월요일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이다. * [[동방 정교회]]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날]]은 1월 26일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글날은 1월 15일이다. * [[대한민국]]에서 그 해의 [[병역판정검사]]는 주로 1월 하순에 시작한다. * 과거 후기대학 [[학력고사]]는 1월에 치렀다. *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2월]]에 [[졸업식]]과 [[종업식]]을 치르지만 최근에는 1월에도 치르는 경우도 많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1월 1일]] - [[양력설]] (공휴일) - 공휴일 지정 당시에는 1월 3일까지 연휴였으나, [[1990년]]부터 [[1월 3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며, 9년 후인 [[1999년]]부터 [[1월 2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ref name="a></ref> == 세계 각국의 휴일 == * 새해 첫날 ([[1월 1일]]) - 스리랑카, 이스라엘, 에티오피아, 미얀마, 일부 중동 국가 제외 * {{국기나라|수단}} - 독립기념일 (1월 1일), 콥트교 크리스마스 ([[1월 8일]]) * {{국기나라|카메룬}} - 독립기념일 (1월 1일) * {{국기나라|오스트레일리아}} - 독립기념일 (1월 1일) * {{국기나라|러시아}} - 신년 및 크리스마스 연휴 (1월 1일~7일/8일) * {{국기나라|미얀마}} - 독립기념일 ([[1월 4일]]) * {{국기나라|아르메니아}} - 크리스마스 ([[1월 6일]]) * {{국기나라|카자흐스탄}} - 크리스마스 ([[1월 7일]]) * {{국기나라|일본}} - [[성년의 날]] (1월 둘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미국}} - [[마틴 루터 킹]] 생일 (1월 셋째 주 월요일) * 주현절 (1월 6일) - 유럽의 기독교 국가만 * 동방교회 크리스마스 ([[1월 7일]]) * {{국기나라|이집트}} - 콥트교 크리스마스 (1월 7일) * {{국기나라|탄자니아}} - 잔지바르 혁명기념일 ([[1월 12일]]) * {{국기나라|오스트레일리아}} - 오스트레일리아의 날 ([[1월 26일]]) * {{국기나라|나우루}} - 독립기념일 ([[1월 31일]]) == [[이십사절기]] == * [[소한]]: [[1월 5일]] 또는 [[1월 6일]]. * [[대한 (절기)|대한]]: [[1월 20일]] 또는 [[1월 21일]].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1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Breviarium Grimani - February.jpg|섬네일]]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월 28일|28일]], [[윤년]]일 때에는 [[2월 29일|29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3월]] 및 [[1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올해의 [[2월 28일]]과 작년의 [[3월 1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그리고 [[북반구]]에서는 [[겨울]]의 마지막 달이며 [[남반구|남반1구]]에서는 [[여름]]의 마지막 달이다. 2월은 한중일월 모두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고 일본에만 있는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는 달이다. 대한민국에서 2월의 공휴일은 설날이 2월이거나 설 당일이 [[1월 31일]]인 경우에만 있다.<ref>단, [[대체휴일]]이 있는 경우 [[2월 2일]]도 포함되며, 이런 경우는 음력 8월 이후에 윤달을 낀다.</ref> 그마저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음력설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예 없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성절이 기본적으로 공휴일이며 정월 대보름도 공휴일이기 때문에 2월에 최대 3개의 공휴일이 잡히기도 한다. [[880년]] 2월에 [[리자몽|리베몽]]에서 독일의 루트비히 3세와 프랑스의 루이 3세, 샤를로망 3세 간에 로렌의 영유권을 독일의 루트비히 3세에게 양도하는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날짜는 미상이다. [[음력 12월]]과 [[음력 1월]]이 이 달에 있으며 2월에는 음력 12월 15~16일, 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1998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93년]], [[2099년]] 등)일 경우 달력에서 나머지 한 주일의 칸이 비게 된다.<ref>단, [[일요일]]을 달력에서 가장 앞에 배치할 때의 기준이다. 월요일을 달력의 첫주로 볼 경우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 등)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ref> {{2월달력}} == 유래 == 로마의 달인 2월(Februarius)은 고대 로마 달력에서 음력 2월 15일(만월)에 개최된 정화 의식인 Februa에서 비롯된, 정화(purification)를 의미하는 라틴어 '''februum'''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월과 2월은 로마 달력에 추가된 마지막 두 달이었는데, 로마인은 원래 겨울을 달력에 없는 기간(monthless period)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 행사 == *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ref name="a>간혹 1월에 드는 해도 있다. 가장 최근에 양력 1월이 설날이였던 해는 [[2001년]]([[1월 24일]]), [[2004년]](1월 22일), [[2006년]](1월 29일), [[2009년]]([[1월 26일]]), [[2012년]](1월 23일), [[2014년]](1월 31일), [[2017년]]([[1월 28일]]), [[2020년]]([[1월 25일]]), [[2023년]]([[1월 22일]])이였고, 양력 1월에 다가오는 설날인 해는 [[2025년]]([[1월 29일]]), [[2028년]]([[1월 27일]]), [[2031년]]([[1월 23일]]), [[2033년]]([[1월 31일]])이며, 이런 경우는 대부분 윤달이 낀다.</ref> * [[음력 1월 15일]]은 [[정월 대보름]]이다.<ref>간혹 3월에 드는 해도 있다. 가장 최근에 양력 3월이 정월 대보름이였던 해는 [[2007년]]([[3월 4일]]), [[2015년]]([[3월 5일]]), [[2018년]]([[3월 2일]])이였고, 양력 3월에 다가오는 정월 대보름인 해는 [[2026년]]([[3월 3일]])이며, 이런 경우는 전년에 음력 5월~11월에 윤달이 껴 있었다.</ref> * [[2013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매 5년마다 [[2월 25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취임식'''이 치러졌지만 당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탄핵|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인용]]으로 인해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5월 9일]]에 치렀고 보궐선거를 겸해서 치뤘기 때문에 대선 개표 종료 후 곧바로 [[5월 10일]]에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2022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제20대 대통령 선거]] 부터는 3월에 실시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이 달에 [[졸업식]]과 [[종업식]]을 거행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이 이달에 [[입학식]]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A리그]]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동계 올림픽]]은 주로 2월에 한다.<ref>개막식이 1월에 열린 마지막 동계올림픽은 [[1964년 동계 올림픽]]이며, 그 이후에는 2월에 개막식이 열린다.</ref> * [[슈퍼볼]]은 2월 둘째주 일요일에 열린다. * [[2월 2일]]은 [[그라운드호그 데이]]이다. == [[절기]] == * [[입춘]]: [[2월 4일]] 또는 [[2월 5일]]. * [[우수]]: [[2월 18일]] 또는 [[2월 19일]].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다.<ref name="a></ref>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르완다}} - 영웅의 날 ([[2월 1일]]) * {{국기나라|스리랑카}} - 독립기념일 ([[2월 4일]]), 마하시비바라트리의 날 (2월~3월 중, 보통 2월에 온다.<ref>스리랑카는 [[보름달]]이 뜨는 모든 날이 휴일이므로 2월에 보름달이 뜨면 그 날도 휴일이 된다.</ref>) - 대체휴일 적용. * {{국기나라|멕시코}} - 제헌절 ([[2월 5일]])<ref>휴일은 2월 첫째 주 월요일에 옮겨 지낸다.</ref> * {{국기나라|뉴질랜드}} - 와이탕이의 날 ([[2월 6일]]) * {{국기나라|그레나다}} - 독립기념일 ([[2월 7일]]) * {{국기나라|라이베리아}} - 추수감사절 (2월 둘째 주 토요일), 국군의 날 (2월 11일) * {{국기나라|일본}} - [[아베|건국기원절]] ([[2월 1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카타르}} - 체육의 날 (2월 둘째 주 화요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광명성절]] ([[2월 16일]]) * {{국기나라|미국}} - 대통령의 날 (2월 셋째 주 월요일<ref>과거에는 [[조지 워싱턴]] 탄생일이라는 이름이었고 [[2월 22일]]이었으나 [[월요일 공휴일 법]]에 따라 현재의 날짜로 옮겼다.</ref>) * {{국기나라|리비아}} - 혁명기념일 ([[2월 17일]]) * {{국기나라|코소보}} - 독립기념일 (2월 17일) * {{국기나라|감비아}} - 독립기념일 ([[2월 18일]]) * {{국기나라|세인트루시아}} - 독립기념일 ([[2월 22일]]) * {{국기나라|가이아나}} - 공화국의 날 ([[2월 23일]]) * {{국기나라|에스토니아}} - 독립기념일 ([[2월 24일]]) * {{국기나라|쿠웨이트}} - 독립기념일 ([[2월 25일]]), 해방기념일 ([[2월 26일]]) * {{국기나라|도미니카 공화국}} - 독립기념일 ([[2월 27일]]) * {{국기나라|이집트}} - 독립기념일 ([[2월 28일]]) * 카니발 - 가틀릭 국가 기념일 또는 기념일 날불명 * [[설날]] - 중화권 국가, 남북한,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만.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2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3월|양력의 3월|음력의 3월}} {{다른 뜻 넘어옴|삼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März.jpg|섬네일]] '''3월'''(三月, March)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세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북반구]]에서는 3월이 되면서 기온이 오르고 날씨가 풀리기 때문에, 대체로 이 달을 [[봄]]의 시작으로 본다. [[남반구]]는 [[가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윤년]]의 경우에는 작년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올해의 [[3월 1일]]과 내년의 [[2월 28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윤년]]([[2003년]], [[2014년]], [[2020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48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76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에는 3월의 공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 3월 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정월 대보름이 3월 초가 아닌 경우에는 3월에 공휴일이 없다.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24년]], [[2052년]], [[2080년]])과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2년]], [[2013년]], [[2019년]], [[2030년]], [[2041년]], [[2047년]], [[2058년]], [[2069년]], [[2075년]], [[2086년]], [[2097년]])일 경우 [[3월 2일]]이 토요일, [[3월 3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4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하고,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3년]], [[2014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 [[3월 2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3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한다. [[음력 1월]]과 [[음력 2월]]이 이 달에 있으며 3월에는 음력 1월 15~16일, 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낄 경우 [[춘분]] 이전은 윤1월, 춘분 이후는 윤2월이 된다. {{3월달력}} == 유래 == 3월(March)은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 달력상 10개의 달 중 첫 번째 달인 마르티우스([[:en:Martius (month)|Martius]])에서 유래되었다. 마르티우스는 [[기원전 153년]]까지 첫 번째 달이었으나 그 이후로 세 번째 달이 되었다. 마르티우스라는 명칭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으로부터 이어지는 로마인들의 선조 그리고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르스]]의 달인 마르티우스는 전쟁을 위한 절기의 처음이었다. == 행사 == * [[대한민국]], [[일본]]에서는 이 달에 [[입학식]]을 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이 달에 초{{.cw}}중{{.cw}}고등학교의 1학기가 시작된다. * [[일본]]에서는 이 달에 [[졸업식]], [[종업식]]을 한다. * [[대한민국]]에서 [[K리그]]의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달에 [[장교]]의 임관식을 한다. * 대한민국의 [[스키장]]은 보통 이 달에 폐장한다.<ref>[[용평리조트]] 등 일부는 [[4월]]에 폐장한 적도 있었다. 예외적으로 2017/18 시즌의 [[휘닉스 평창]]은 [[2018년 동계 올림픽]]의 경기장으로 활용되는 관계로 [[1월 21일]]까지만 운영한다.</ref> *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20대 대통령 선거]]([[2022년]])부터는 헌법 개정, 대통령 궐위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3월 3일~9일에 해당하는 수요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를 한다.<ref>2017년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만료일이 5월 9일이기 때문에 그 70일 전을 계산하면 원래 3월 1일~3월 7일이지만 공휴일(삼일절) 인접일은 피하는 규정 때문에 3월 1일~3월 2일은 3월 8,9일로 조정되었다.</ref> * 기독교의 [[부활절]]은 3월 말에 잡히기도 한다. * [[지구의 시간]]: 매년 3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8시 30분 ~ 9시 30분에 시행된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3월 1일]] - [[삼일절]] ([[대한민국의 공휴일|공휴일]]) * [[3월 3일]] - [[납세자의 날]] * 3월 8일 - [[세계 여성의 날|여성의 날]] * [[3월 22일]] - [[세계 물의 날]] * 3월 셋째 수요일 - [[상공의 날]] * 3월 넷째 금요일 - [[서해수호의 날]] ==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대한민국}} - [[삼일절]] ([[3월 1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일]] (숫자가 2, 7로 끝나는 해의 3월 3일~9일 사이에 있는 수요일) * {{국기나라|미국}} {{국기나라|텍사스 주}} - 텍사스 독립기념일 ([[3월 2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식수절]] (3월 2일) * {{국기나라|가나}} - 독립기념일 ([[3월 6일]]) * {{국기나라|노퍽 섬}} - [[파운데이션 데이]] (3월 6일) * [[세계 여성의 날]] - 러시아 등 일부 국가만 * {{국기나라|모리셔스}} - 국경일 ([[3월 12일]]) * {{국기나라|안도라}} - 국경일 ([[3월 14일]]) * {{국기나라|아일랜드}} - 성 파트리치오의 날 ([[3월 17일]]) * {{국기나라|일본}} - 춘분의 날 (3월 19~22일) * {{국기나라|튀니지}} - 독립기념일 ([[3월 20일]]) * {{국기나라|남아프리카 공화국}} - 인권의 날 ([[3월 21일]]) * {{국기나라|멕시코}} - [[베니토 후아레스]] 탄생일 (3월 21일)<ref>다만, 휴일은 3월 셋째 주 월요일에 옮겨 지낸다.</ref> * {{국기나라|이란}} - 노루즈 ([[3월 21일]]) * {{국기나라|북마리아나 제도}} - 연방의 날 ([[3월 24일]]), 부활절 (일부) * {{국기나라|아르헨티나}} - 현충일 (3월 24일) * {{국기나라|그리스}} - 독립기념일 ([[3월 25일]]) * {{국기나라|마다가스카르}} - 전사의 날 ([[3월 29일]]) * [[부활절]] - 일부 기독교 국가만 == [[절기]] == * [[경칩]]: [[3월 5일]] 또는 [[3월 6일]]. * [[춘분]]: [[3월 20일]] 또는 [[3월 21일]].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3월| ]] [[분류:마르스]]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2|양력의 4월|음력의 4월|음력 4월}} {{다른 뜻 넘어옴|사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April.jpg|섬네일]] '''4월'''(四月, {{llang|en|April}}, {{llang|la|Aprilis or mensis Aprilis}})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네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4월이 [[과학의 달]]이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7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로 58번, [[월요일]], [[화요일]]로 57번, [[목요일]], [[토요일]]로 56번 시작한다. 중국은 [[청명절]], 일본은 [[쇼와의 날]], 베트남은 [[:en:Hung king|훙왕]] 기일로 인해 4월에는 반드시 공휴일이 있으나 대한민국에서 4월의 공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2006년]] 식목일 이후로 없으나, 4년에 한 번씩 하는 총선의 선거일이 4월로 잡히기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공휴일이 생긴다. 또한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2006년 이전에도 식목일이 주말과 겹쳐 공휴일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예로 [[1981년]], [[1987년]], [[1992년]], [[1998년]] 등) 반면 북한은 [[청명절]]과 [[태양절]], 인민군 창건일 중 어느 하나가 주말과 겹치더라도 반드시 공휴일이 있다. [[음력 2월]]과 [[음력 3월]]이 이 달에 있으며 4월에는 음력 2월 15~16일, 3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4월달력}} == 행사 == * [[음력 3월 10일]]은 [[훙왕]] 기일이다. *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ref>4월보다는 5월에 더 많이 온다. 4월에 오는 경우는 100% 음력 4월에 윤달을 끼며, 30% 음력 5월에 윤달을 낀다.</ref> * [[한국]]에서는 4년마다 1회씩 4의 배수인 해(대개 윤년)의 이 달 9일~15일에 해당하는 [[수요일]]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선거]]를 치른다. * [[기독교]]의 [[부활절]]은 3월 말에서 4월 사이에 오는데 4월에 올 확률이 높다. * 한국의 [[워터파크]]는 이르면 4월 말<ref>늦게는 5월에 가서야 야외 시설물을 개장하기도 한다.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내 워터파크인 오션700은 7월에 야외 시설물을 개장한 적이 있었다.</ref>에 야외 시설물을 개장한다. == 4월과 스포츠 == * {{국기나라|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시즌이 시작하는 달이다. * {{국기나라|미국}} [[전미 농구 협회|NBA]]의 정규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골프]] 대회 중 하나인 [[매스터스 토너먼트]]는 대개 4월에 치른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4월 첫째 금요일 - [[향토예비군의 날]] - [[2006년]] 이전에는 4월 첫째 토요일이었음 * [[4월 3일]] - [[4.3제주항쟁희생자 추념일]] -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방공휴일로 지정됨 * [[4월 5일]] - [[식목일]] - 2005년 마지막 공휴일. 2006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 [[4월 7일]] - [[보건의 날]] * [[4월 11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 [[1990년]] ~ [[2018년]]에는 [[4월 13일]]이었음. * [[4월 16일]] - [[국민안전의 날]] * [[4월 19일]] - [[4.19 혁명]] 기념일 * [[4월 20일]] - [[장애인의 날]] * [[4월 21일]] - [[과학의 날]] * [[4월 22일]] - [[지구의 날]], [[정보통신의 날]], [[새마을의 날]] * [[4월 25일]] - [[법의 날 (대한민국)|법의 날]] * [[4월 28일]] -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 세계의 휴일 == * {{국기나라|아르헨티나}} - 퇴역군인의 날 ([[4월 2일]]) * {{국기나라|세네갈}} - 독립기념일 ([[4월 4일]]) * [[부활절]] - 기독교 국가만<ref>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부활절 월요일을 '가족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낸다.</ref> * {{국기나라|모잠비크}} - 여성의 날 ([[4월 7일]]) * {{국기나라|대한민국}} - 국회의원 선거일 (4의 배수인 해의 4월 9일~15일 사이에 있는 수요일), [[부처님 오신 날]] (4월 28~30일 사이에 오는 경우 / 4월 28일의 경우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과 겹침)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청명절]] ([[4월 4일]]), [[태양절]] ([[4월 15일]]) * {{국기나라|시리아}} - 독립기념일 ([[4월 17일]]) * {{국기나라|베네수엘라}} - 독립선언일 ([[4월 19일]]) * {{국기나라|니제르}} - 콩코드의 날 ([[4월 24일]]) * {{국기나라|오스트레일리아}}, {{국기나라|뉴질랜드}}, {{국기나라|통가}} - [[ANZAC의 날]] ([[4월 25일]]) * {{국기나라|포르투갈}} - 자유의 날 (4월 25일) * {{국기나라|시에라리온}} - 독립기념일 ([[4월 27일]]) * {{국기나라|남아프리카 공화국}} - 인권의 날 (4월 27일) * {{국기나라|네덜란드}} - 왕의 날 (4월 27일<ref>과거 [[율리아나]], [[베아트릭스]] 여왕의 재임 시절에는 율리아나 여왕의 생일인 [[4월 30일]]이 여왕의 날로 공휴일이었으나 현재의 국왕인 [[빌럼알렉산더르]]가 즉위하면서 그의 [[생일]]인 [[4월 27일]]이 왕의 날로써 공휴일이 되었다.</ref>) * {{국기나라|토고}} - 독립기념일 (4월 27일) * {{국기나라|아프가니스탄}} - 승리의 날 ([[4월 28일]]) * {{국기나라|바베이도스}} - 영웅의 날 (4월 28일) * {{국기나라|일본}} - 쇼와의 날 ([[4월 29일]]) * {{국기나라|베트남}} - 훙 왕 기일 ([[음력 3월 10일]]; 주로 4월에 온다.) == [[절기]] == * [[청명]]: [[4월 4일]] 또는 [[4월 5일]]. * [[곡우]]: [[4월 19일]] 또는 [[4월 20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4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6월|양력의 6월|음력의 6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Juni.jpg|섬네일]] '''6월'''(六月<sup>유월</sup>, June)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섯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는 네 개의 달 중 하나이다. 또한 한 해의 [[상반기]]가 끝나는 달이다. 이 달과 다음 해의 [[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이름의 유래는 [[오비디우스]]의 "Fasti"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 동격이자 쥬피터의 아내 로마 여신 [[유노 (신화)|유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juniores"인데, 이는 5월을 뜻하는 "May"가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maiore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Fasti"VI.1–88). 어느 해건 6월이 시작하는 요일은 그 해의 다른 달이 시작하는 요일들과는 항상 다르며, 이는 5월과 6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6월이 끝나는 요일은 그 해의 3월이 끝나는 요일과 항상 같으며, 6월이 시작되는 요일은 내년 2월이 시작되는 요일과 항상 같다. 또한, 전년도 [[9월]],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단, [[평년]]의 경우에만 해당).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3월]], [[1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8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6월에는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긴 날이 있고,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은 날이 있다. 또한 북반구에서 6월의 계절은 남반구에서의 [[12월]]의 계절과 같다. 북반구에서 기상학적으로 6월 1일에 여름이 시작되며, 정반대로 남반구에선 겨울이 시작된다. 6월엔 특히 결혼식이 많이 치러지는데, 그 유래 중 하나로는 6월이 [[유노 (신화)|유노]]([[헤라]])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유노는 결혼의 여신이었고, 그로 인해 6월에 결혼을 하면 운이 따른다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한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겨울]]이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위대한 김정일의 날만,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소년단 창립기념일만 공휴일이다. [[일본]]에는 이 달에 공휴일이 아예 없다. 과거에는 8월과 12월에도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 천황절, 2016년 [[8월 11일]]이 산의 날로 지정되면서 6월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하루도 없는 달로 남게 되었다. [[음력 4월]]과 [[음력 5월]]이 이 달에 있으며 6월에는 음력 4월 15~16일, 5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에 윤달이 들 경우 [[하지]] 이전이면 윤4월, 하지 이후이면 윤5월이 들게 된다. == 행사 == * [[음력 5월 5일]]은 [[단오]]이다.<ref>간혹 5월에 드는 해도 있다. 가장 최근에 양력 5월이 단오였던 해는 [[2006년]](5월 31일), [[2009년]](5월 28일), [[2017년]]([[5월 30일]])이였고, 양력 5월에 다가오는 해는 [[2025년]]([[5월 31일]]), [[2028년]]([[5월 28일]])이며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5~7월에 윤달을 낀다.</ref> * [[아일랜드]]에서 6월 16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인 [[율리시스]]를 기념하기 위한 날인 [[블룸즈데이]]이다. * [[미국]]에선 6월의 3번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기념한다. * [[스웨덴]]과 [[핀란드]]에선 6월의 3번째 금요일을 [[하지제]]로 기념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6월 7일과 8일에 [[가오카오]]를 치른다. 6월 7일에는 어문과 수학, 6월 8일에는 문/이과 종합과 외국어 시험을 본다. * 기독교에서 성령 강림절 이후 월요일은 주로 6월에 온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6월 1일]] - [[의병의 날]] * [[6월 5일]] - 환경의 날 * [[6월 6일]] - [[현충일]](공휴일)<ref>일각에서는 현충일을 6월 첫째 주 월요일과 같이 요일제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ref> * [[6월 10일]] - [[6월 항쟁|6·10 민주항쟁]] 기념일 * [[6월 25일]] - [[6.25 전쟁일]] * [[6월 28일]] - [[철도의 날]] ==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사모아}} - 독립기념일 ([[6월 1일]]) * {{국기나라|인도네시아}} - 빤짜실라의 날 (6월 1일) * {{국기나라|이탈리아}} - 공화국의 날 ([[6월 2일]]) * {{국기나라|부탄}} - 국왕 즉위일 (6월 2일) * {{국기나라|뉴질랜드}} - 여왕 생일 (6월 첫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적도기니}} -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생일 ([[6월 5일]]) * {{국기나라|스웨덴}} - 국경일 ([[6월 6일]]), 하지절 (6월 네 번째 토요일) * {{국기나라|대한민국}} - 현충일 (6월 6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선어린이재단의 날 (6월 6일),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의 날 ([[6월 19일]]) * {{국기나라|필리핀}} - 독립기념일 ([[6월 12일]]) * {{국기나라|러시아}} - 러시아의 날 (6월 12일) * {{국기나라|남아프리카 공화국}} - 청소년의 날 ([[6월 16일]]) * {{국기나라|아이슬란드}} - 공화국의 날 ([[6월 17일]]) * {{국기나라|볼리비아}} - 아이마라 신년 ([[6월 21일]]) * {{국기나라|모잠비크}} - 독립기념일 ([[6월 25일]]) * {{국기나라|피지}} - 체육의 날 ([[6월 26일]]) * {{국기나라|마다가스카르}} - 독립기념일 (6월 26일) * {{국기나라|지부티}} - 독립기념일 ([[6월 27일]]) * {{국기나라|우크라이나}} - 제헌절 ([[6월 28일]]) * {{국기나라|세이셸}} - 독립기념일 ([[6월 29일]]) * {{국기나라|수단}} - 혁명의 날 ([[6월 30일]]) * {{국기나라|과테말라}} - 국군의 날 (6월 30일) * {{국기나라|콩고 민주 공화국}} - 독립기념일 (6월 30일) * 성령 강림절 이후 월요일 - 기독교 국가 일부만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 - 단오절 == 6월과 스포츠 == * [[FIFA 월드컵]]의 개막전이 치러지는 달이다.<ref>예외로 [[1986년 FIFA 월드컵|1986 멕시코 월드컵]]과 [[2002년 FIFA 월드컵|2002 한일 월드컵]]은 [[5월 31일]]에 개막전을 했고 [[2022년 FIFA 월드컵|2022 카타르 월드컵]]은 [[11월 21일]]에 개막전을 했다.</ref> * {{국기나라|미국}}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결승전이 치러지는 달이다. == [[이십사절기]] == * [[망종]]: [[6월 5일]] 또는 [[6월 6일]]. * [[하지]]: [[6월 21일]] 또는 [[6월 22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6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7월|양력의 7월|음력의 7월}} {{다른 뜻|7월에||영화}} [[파일:Breviarium Grimani - Juli.jpg|섬네일]] '''7월'''(七月, Jul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또한 한 해의 [[하반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7월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월요일]]과 [[화요일]]에 57번,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7월의 기온은 북반구에서는 가장 높고<ref>예외적으로 [[한반도]]는 8월의 기온이 가장 높다.</ref>, 남반구에서는 가장 낮아, 북반구의 1월 기온과 같다. 11월과 함께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빈약한 달이기도 하다.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7월에 공휴일이 없고, 대한민국에서는 7월에 공휴일이 [[2008년]] 제헌절이후로 아예 없다. 2007년 이전에도 1983년, 1988년, 1994년, 2005년과 같이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나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 사실상 7월에 공휴일이 없는 해가 있었다. 반면 북한은 [[7월 27일]]이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공휴일이며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월요일]],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이 주말에 겹쳐서 북한도 7월에는 사실상 공휴일이 없는 해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7월에 공휴일이 반드시 있다. ([[바다의 날]]) 국내에서는 7월부터 휴가철이 시작된다. [[음력 5월]]과 [[음력 6월]]이 이 달에 있으며 7월에는 음력 5월 15~16일, 6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대서]] 이전은 윤5월, [[대서]] 이후는 윤6월이다. {{7월달력}} == 유래 == [[영어]]로 7월을 의미하는 July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전에는 5번째(fifth)를 의미하는 퀸틸리스 (Quintilis 또는 Qinctilis)로 불렸다. == 문화 == * 대한민국에서는 7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 시작된다. * 대한민국 학교의 대부분은 여름방학을 7월 중순부터 시작한다. 대학교의 경우, 6월 하순부터 시작한다. == 7월과 스포츠 == *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이 치러지는 달이다.<ref>단, 예외적으로 [[1978년 FIFA 월드컵]]과 [[1986년 FIFA 월드컵]],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은 6월 말에 실시되었으며, [[2022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은 12월에 실시되었다.</ref> *{{국기나라|스위스}} [[스위스 슈퍼리그]]의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 대한민국의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 * 7월 둘째 [[수요일]] - [[정보보호의 날]] * [[7월 17일]] - [[제헌절 (대한민국)|제헌절]] - 2007년 마지막 공휴일.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됨. 현재 윤호중의원이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임.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캐나다}} - [[캐나다의 날]]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홍콩}} - 반환기념일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소말리아}} - 독립기념일 (7월 1일) * {{국기나라|보츠와나}} - 세레체 키타마의 날 (7월 1일), 대통령의 날 ([[7월 16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가나}} - 공화국의 날 (7월 1일)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수리남}} - 자유의 날 (7월 1일) * {{국기나라|르완다}} - 독립기념일 (7월 1일), 자유의 날 (7월 4일) * {{국기나라|부룬디}} - 독립기념일 (7월 1일) * {{국기나라|벨라루스}} - 독립기념일 ([[7월 3일]]) * {{국기나라|미국}} - [[독립기념일]] ([[7월 4일]]) - 독립기념일 전후로 대체휴일제를 적용해 기념일이 토요일과 겹치면 전날인 금요일, 일요일이면 다음날인 월요일을 공휴일로 한다. * {{국기나라|푸에르토리코}}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국기나라|미국령 버진아일랜드}}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국기나라|아메리칸사모아}} -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 {{국기나라|통가}} - 투포우 탄신일 (7월 4일) * {{국기나라|알제리}} - 독립기념일 ([[7월 5일]]) * {{국기나라|베네수엘라}} - 독립기념일 (7월 5일) * {{국기나라|카보베르데}} - 독립기념일 (7월 5일) * {{국기나라|체코}} - 얀 후스의 날 (7월 5일) * {{국기나라|말라위}} - 독립기념일 ([[7월 6일]]) * {{국기나라|카자흐스탄}} - 수도의 날 (7월 6일) * {{국기나라|코모로}} - 독립기념일 (7월 6일) * {{국기나라|탄자니아}} - 사바 사바 ([[7월 7일]]) * {{국기나라|솔로몬 제도}} - 독립기념일 (7월 7일) * {{국기나라|남수단}} - 독립기념일 ([[7월 9일]]) * {{국기나라|아르헨티나}} - 독립기념일 (7월 9일) * {{국기나라|인도네시아}} - 대통령 선거일 (5년에 1번, 7월 3일~9일 사이의 수요일) * {{국기나라|바하마}} - 독립기념일 ([[7월 10일]]) * {{국기나라|몽골}} - [[나담]] ([[7월 11일]]~[[7월 13일]]) * {{국기나라|일본}} - [[바다의 날]] (7월 셋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키리바시}} - 독립기념일 ([[7월 12일]]) * {{국기나라|프랑스}} - 바스티유의 날 ([[7월 14일]]) * {{국기나라|브루나이}} - [[하사날 볼키아]] 생일 ([[7월 15일]]) * {{국기나라|레소토}} - 국왕 탄신일 ([[7월 17일]]) * {{국기나라|우루과이}} - [[제헌절]] ([[7월 18일]]) * {{국기나라|콜롬비아}} - 독립기념일 ([[7월 20일]]) * {{국기나라|괌}} - 해방기념일 ([[7월 21일]])<ref>괌은 미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7월 4일 독립기념일도 당연히 쉰다.</ref> * {{국기나라|벨기에}} - 독립기념일 (7월 21일) * {{국기나라|스와질란드}} - 소부자 왕 탄신일 ([[7월 22일]]) * {{국기나라|오만}} - 혁명기념일 ([[7월 23일]]) * {{국기나라|바누아투}} - 어린이날 ([[7월 24일]]), [[독립기념일]] ([[7월 30일]]) * {{국기나라|튀니지}} - 공화국의 날 ([[7월 25일]]) * {{국기나라|몰디브}} - 독립기념일 ([[7월 26일]]) * {{국기나라|라이베리아}} - 독립기념일 (7월 26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 ([[7월 27일]]) * {{국기나라|타이}} - 국왕 생일 ([[7월 28일]]), 삼보절, 입안거 (7월 중에 온다.) * {{국기나라|페루}} - 독립기념일 (7월 28일) * {{국기나라|산마리노}} - 파시스트 몰락의 날 (7월 28일) * {{국기나라|모로코}} - 왕좌의 잔치 (7월 30일) * {{국기나라|잠비아}} - 영웅의 날 (7월 첫째 주 월요일), 통일절 (7월 첫째 주 월요일 이후에 오는 첫 화요일) * {{국기나라|케이맨 제도}} - 제헌절 (7월 첫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가이아나}} - [[CARICOM]]의 날 (7월 첫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라오스}} - 입안거 (7월 중에 온다.), 독립기념일 ([[7월 19일]]) == [[절기]] == * [[소서]]: [[7월 7일]] 또는 [[7월 8일]]. * [[대서]]: [[7월 22일]] 또는 [[7월 23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7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8월|양력의 8월|음력의 8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August.jpg|섬네일]] '''8월'''(八月, August)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7월]]과 연속으로 31일까지 있으며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10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개국에서 공휴일이 빈약한 달 중 하나로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8월에는 공휴일이 없고 일본은 2015년까지 8월에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8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휴가철이 끝나는 달이며 [[대학교]]의 신학기(2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2015년까지는 [[일본]]에서 6월과 함께 공휴일이 없는 달이었으나 [[산의 날]]이 8월 11일로 지정되면서 빠졌다. [[음력 6월]]과 [[음력 7월]]이 이 달에 있으며 8월에는 음력 6월 15~16일, 7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들 경우 [[처서]] 이전은 윤6월, 처서 이후는 윤7월이다. {{8월달력}} == 유래 == 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그 전에는 6번째 달(sixth month)을 의미하는 섹스틸리스 (Sextillis)였다. == 문화 == *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는 8월에 한 시즌이 시작한다. * [[이탈리아]]의 [[세리에 A]]는 8월에 한 시즌이 시작한다. * [[네덜란드]]의 [[에레디비시]]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프랑스]]의 [[리그 1]]은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독일]]의 [[1 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A-리그]]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스코틀랜드]]의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프리미어리그]]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는 8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윤년에 개최되는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이 8월에 열린다. [[2024년 하계 올림픽]]처럼 빠른 경우에는 7월 말에 개막하기도 한다. 예외로 [[1988년 하계 올림픽|1988 서울 올림픽]]은 9월에, [[1964년 하계 올림픽|1964 도쿄 올림픽]]은 10월에 개막했다. == 행사 == * [[대한민국]], [[일본]]에서는 8월 중순에 2학기 개학을 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8월 하순에 [[대학교]]에서 1학기 [[졸업식]]을 치른다. == 국경일 및 법정기념일 == * [[8월 15일]] - [[광복절]](공휴일) * [[8월 22일]] - 에너지의 날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미국}}의 {{국기나라|콜로라도 주}} - 연방가입일 ([[8월 1일]]) * {{국기나라|베냉}} - [[독립기념일]] ([[8월 1일]]) * {{국기나라|스위스}} - 건국기념일 (8월 1일) * {{국기나라|니제르}} - 독립기념일 ([[8월 3일]]) * {{국기나라|부르키나파소}} - 독립기념일 ([[8월 5일]]) * {{국기나라|볼리비아}} - 독립기념일 ([[8월 6일]]) * {{국기나라|자메이카}} - 독립기념일 (8월 6일) * {{국기나라|코트디부아르}} - 독립기념일 ([[8월 7일]]) * {{국기나라|콜롬비아}} - 보야카 전투 기념일 (8월 7일) * {{국기나라|싱가포르}} - 독립기념일 ([[8월 9일]]) * {{국기나라|남아프리카 공화국}} - 여성의 날 (8월 9일) * {{국기나라|에콰도르}} - 독립기념일 ([[8월 10일]]) * {{국기나라|미국}}의 {{국기나라|미주리 주}} - 연방가입일 (8월 10일) * {{국기나라|차드}} - 독립기념일 ([[8월 11일]]) * {{국기나라|일본}} - [[산의 날(일본)|산의 날]] (8월 11일) * {{국기나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 독립기념일 ([[8월 13일]]) * {{국기나라|파키스탄}} - 독립기념일 ([[8월 14일]]) * {{국기나라|인도}} - 독립기념일 ([[8월 15일]]) * {{국기나라|대한민국}} - [[광복절]] (8월 15일) * {{국기나라|리히텐슈타인}} - 국경일 (8월 15일) * {{국기나라|적도기니}} - 제헌절 (8월 15일) * {{국기나라|코스타리카}} - 어머니날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 일부 기독교 국가만 (8월 15일) * {{국기나라|콩고 공화국}} - 독립기념일 (8월 15일) * {{국기나라|가봉}} - 독립기념일 ([[8월 17일]]) * {{국기나라|인도네시아}} - 독립기념일 (8월 17일) * {{국기나라|아프가니스탄}} - 독립기념일 ([[8월 19일]]) * {{국기나라|에스토니아}} - 독립기념일 ([[8월 20일]]) * {{국기나라|헝가리}} - 헝가리 국경일 (8월 20일) * {{국기나라|미국}}의 {{국기나라|하와이 주}} - 연방가입일 ([[8월 21일]]) * {{국기나라|우크라이나}} - 독립기념일 ([[8월 24일]]) * {{국기나라|우루과이}} - 독립기념일 ([[8월 25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국해방기념일]] (8월 15일), [[선군절]] (8월 25일) * {{국기나라|몰도바}} - 독립기념일 ([[8월 27일]]) * {{국기나라|키르기스스탄}}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국기나라|말레이시아}}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국기나라|트리니다드토바고}} - 독립기념일 (8월 31일) * {{국기나라|아일랜드}} - 8월 휴일 (8월 7일) * {{국기나라|사모아}} - 로투 (8월 두 번째 월요일) * {{국기나라|영국}} - 하계 휴일 (8월 마지막 월요일) == 기타 == * 불행 : [[8월의 저주]] == [[이십사절기]] == * [[입추]]: [[8월 7일]] 또는 [[8월 8일]]. * [[처서]]: [[8월 23일]] 또는 [[8월 24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8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2|양력의 9월|음력의 9월|음력 9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September.jpg|섬네일]] '''9월'''(九月, Sept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아홉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북반구]]의 나라들은 [[가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는 [[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에는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모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달로 일본과 베트남, 북한은 건국 이래 9월에 공휴일이 최소 하나는 무조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9월의 공휴일은 추석이 9월 내에 들거나 늦어도 [[10월 1일]]이 추석 당일이어야만 있으나<ref>이 날은 [[국군의 날]]과 겹친다.</ref> 추석이 9월에 들 확률이 10월에 들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ref>추석이 10월에 있는 경우는 거의 100% [[윤달]]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9월에 드는 경우라도 음력 4월 이전이나 음력 8월 이후에 윤달이 드는 해가 있다.</ref> 9월에 공휴일이 있을 확률은 높은 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와 같다. [[미국]]에서는 이 달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음력 7월]]과 [[음력 8월]]이 이 달에 있으며 9월에는 음력 7월 15~16일, 8월 15~16일에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7월 ([[추분]] 이전) 윤8월 ([[추분]] 이후)이 양력 9월에 있다. {{9월달력}} == 유래 == 9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September는 seven(7)을 의미하는 라틴어 'septem'에서 유래하였다. == 행사 == * [[음력 8월 15일]]은 [[추석]]이다.<ref>간혹 10월에 드는 해도 있다. 가장 최근에 양력 10월이 추석이였던 해는 [[2001년]](10월 1일 - 국군의 날과 겹침), [[2006년]](10월 6일), [[2009년]](10월 3일 - 개천절과 겹침), [[2017년]]([[10월 4일]]), [[2020년]](10월 1일 - 국군의 날과 겹침)이였고, 양력 10월에 다가오는 추석인 해는 [[2025년]]([[10월 6일]]), [[2028년]]([[10월 3일]] - [[개천절|개천절과 겹침]]), [[2031년]]([[10월 1일]] - [[국군의 날|국군의 날과 겹침]])이며, 모두 음력 3월~7월에 윤달을 낀다.</ref> * [[러시아]] 등의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에서는 새학년의 새학기가 시작된다.<ref>이들 국가에서는 9월생을 기준으로 학년을 끊기 때문에 동갑이라도 생일 때문에 학년이 아래로 내려가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의 41대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와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사례가 있다.</ref> * [[대한민국]]에서는 이 달에 초{{.cw}}중{{.cw}}고등학교의 2학기가 시작된다. ([[1945년]]에서 [[1950년대]] 초까지는 9월에 새학년이 시작되었다.) * 현재 대한민국의 일부 [[대학]]들은 미국처럼 9월 학기제를 시행한다. * [[에티오피아]]의 새해 첫날은 [[양력]]으로 환산할 경우 9월 11~13일 사이에 온다. == 9월과 스포츠 == * 일부 축구 리그는 9월에 시즌이 시작된다. * [[KBO 리그]]는 9월부터 주말 낮경기를 재개한다. == 국경일 및 법정기념일 == * [[9월 7일]] - [[사회복지의 날]], 푸른 하늘의 날 * [[9월 16일]] - 세계 [[오존층]] 보호의 날, 청년의 날 * [[9월 10일]] - 세계 자살예방의 날, 해양경찰의 날 * [[9월 18일]] - [[철도]]의 날 - 2018년 부터 6월 28일로 날짜 변경. * [[9월 27일]] - [[관광]]의 날 * 9월 30일 - 개인정보 보호의 날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우즈베키스탄}} - [[독립기념일]] ([[9월 1일]]) * {{국기나라|베트남}} - [[독립기념일]] ([[9월 2일]]) * {{국기나라|카타르}} - [[독립기념일]] ([[9월 3일]]) * {{국기나라|스와질란드}} - [[독립기념일]] ([[9월 6일]]) * {{국기나라|리투아니아}} - [[독립기념일]] (9월 6일) * {{국기나라|브라질}} - [[독립기념일]] ([[9월 7일]]) * {{국기나라|마케도니아 공화국}} - [[독립기념일]] ([[9월 8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인민정권 창건일]] ([[9월 9일]]) * {{국기나라|타지키스탄}} - [[독립기념일]] (9월 9일) * {{국기나라|미국}}의 {{국기나라|캘리포니아 주}} - 연방가입일 (9월 9일) * {{국기나라|미국}} - 레이버 데이 (9월 첫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캐나다}} - 레이버 데이 (9월 첫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에티오피아}} - 에티오피아 신년 ([[9월 11일]]) * {{국기나라|코스타리카}}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국기나라|엘살바도르}}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국기나라|온두라스}}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국기나라|과테말라}} - [[독립기념일]] (9월 15일) * {{국기나라|멕시코}} - [[독립기념일]] ([[9월 16일]]) * {{국기나라|파푸아뉴기니}} - [[독립기념일]] (9월 16일) * {{국기나라|칠레}} - 국경일 ([[9월 18일]]), 육군의 날 (9월 19일) - 국경일이 화요일이면 [[9월 17일]], 육군의 날이 목요일이면 [[9월 20일]] 추가 휴무 * {{국기나라|세인트키츠 네비스}} - [[독립기념일]] ([[9월 19일]]) * {{국기나라|일본}} - 경로의 날 (9월 셋째 주 월요일) * {{국기나라|아르메니아}}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국기나라|벨리즈}}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국기나라|몰타}} - [[독립기념일]] (9월 21일) * {{국기나라|불가리아}} - [[독립기념일]] ([[9월 22일]]) * {{국기나라|말리}} - [[독립기념일]] (9월 22일) * {{국기나라|일본}} - [[추분]] ([[9월 23일]]) * {{국기나라|사우디아라비아}} - [[사우디 국가기념일]] (9월 23일) * {{국기나라|기니비사우}} - 독립기념일 ([[9월 24일]]) * {{국기나라|체코}} - 주권의 날 ([[9월 28일]]) * {{국기나라|보츠와나}} - [[독립기념일]] ([[9월 30일]]) * {{국기나라|이스라엘}} - [[로쉬 하샤나]] ([[유대력]] 1월 1일, 보통 9월에 있다.) == [[절기]] == * [[백로 (절기)|백로]]: [[9월 7일]] 또는 [[9월 8일]]. * [[추분]]: [[9월 22일]] 또는 [[9월 23일]].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9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Breviarium Grimani - November.jpg|섬네일]] '''11월'''(Nov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한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그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 [[2월]]과 마지막 요일이 같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3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5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8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에서 공휴일이 가장 빈약한 달로, 중국과 베트남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건국 이래로 11월에 법정공휴일이 지정된 적이 아예 없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1월 16일]]이 어머니날로 공휴일이며 대한민국에는 4번의 임시공휴일이 11월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일본은 11월에 공휴일이 두 번 있다. [[음력 9월]]과 [[음력 10월]]이 양력으로 11월에 있으며 이달에는 음력 9월 15~16일, 10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9월이나 윤10월이 양력 11월에 든다. {{11월달력}} == 유래 == 1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mber는 "nine"을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에서 유래하였다. 11월은 고대 로마 달력의 9번째 달이었다. == 행사 == * 이달 셋째 토요일 직전 [[목요일]]에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1995학년도 ([[1994년]])부터 2006학년도 ([[2005년]])까지는 [[수요일]]이 시험일이었으나 2007학년도 ([[2006년]])부터는 [[목요일]]로 변경되었다. 한편 2012~2014학년도 수능에서는 11월 하순에 성적표가 나왔다. * [[미국]]에서는 [[미국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선거일은 11월 2일~8일 사이의 화요일이다. * [[일본]]의 [[시치고산]]은 [[11월 15일]]에 한다. * [[FIFA 월드컵]]의 예선은 월드컵 개최 전년도 11월에 끝난다. * [[미국]]의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즌이 끝나는 달이다. * [[월드시리즈]]가 치러지는 달이다. * [[일본]]의 [[J리그 디비전 2]] (J리그 2부) 플레이오프를 이 달에 하게 된다. * [[대한민국]]의 [[스키장]]은 보통 이 달에 개장한다.<ref>간혹 [[12월]]에 개장하는 스키장도 있다.</ref> * [[K리그1]]은 이 달에 시즌이 끝난다. * [[대한민국]]에서 [[병역판정검사]]는 보통 11월에 끝난다. * 과거 [[예비고사]]는 주로 11월에 치렀다.<ref>1968년 12월에 치렀던 1회 예비고사만 12월에 치렀다.</ref> == 국경일 및 법정기념일 == * [[11월 3일]] -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舊, 학생의 날) * [[11월 5일]] - 소상공인의 날 * [[11월 9일]] - [[소방의 날]] * [[11월 11일]] - [[농업인의 날]], 광고의 날, 보행자의 날, 서점의 날, 빼빼로 데이 * [[11월 17일]] - [[순국선열의 날]] * [[11월 19일]] - 아동학대 예방의 날 == 세계 각국의 휴일 == * [[모든 성인 대축일]] - 일부 기독교 국가만 ([[11월 1일]])<ref>[[콜롬비아]]는 11월 1일이 월요일이 아니면 이 날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에 옮겨 지낸다.</ref> * {{국기나라|미국}} - [[추수감사절]] (11월 넷째 주 [[목요일]]<ref>상당수 기업에서는 다음 날인 [[금요일]] ([[블랙 프라이데이]])도 휴일로 지정해서 4일 연휴를 보장한다.</ref>), 퇴역군인의 날([[11월 11일]]<ref>한때 10월 넷째 주 월요일이었던 적이 있었다.</ref>)- 퇴역군인의 날은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일본}} - [[문화의 날 (일본)|문화의 날]] ([[11월 3일]]), [[근로감사의 날]]([[11월 23일]]) * {{국기나라|파나마}} - 독립기념일 ([[11월 3일]]) * {{국기나라|도미니카 연방}} - 독립기념일 ([[11월 3일]]) * {{국기나라|몰디브}} - 승리의 날 ([[11월 3일]]), 공화국의 날 ([[11월 11일]]) * {{국기나라|북마리아나 제도}} - 시민권의 날 ([[11월 4일]])<ref>북마리아나 제도는 미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퇴역군인의 날과 추수감사절도 쉰다.</ref> * {{국기나라|폴란드}} - 독립기념일 ([[11월 11일]]) * {{국기나라|앙골라}} - 독립기념일 ([[11월 11일]]) * {{국기나라|캐나다}} - 현충일 ([[11월 11일]]) * {{국기나라|미크로네시아 연방}} - 독립기념일 ([[11월 3일]]), 퇴역군인의 날 ([[11월 11일]]) * {{국기나라|브라질}} - 공화국의 날 ([[11월 15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어머니날 ([[11월 16일]]) * {{국기나라|모로코}} - 독립기념일 ([[11월 18일]]) * {{국기나라|멕시코}} - 혁명기념일 ([[11월 20일]])<ref>다만, 휴일은 11월 셋째 주 월요일에 옮겨 지낸다.</ref> * {{국기나라|레바논}} - 독립기념일 ([[11월 22일]]) * {{국기나라|수리남}} - 독립기념일 ([[11월 25일]]) * {{국기나라|모리타니}} - 독립기념일 ([[11월 28일]]) * {{국기나라|아랍에미리트}} - 순국자의 날 ([[11월 30일]]) * {{국기나라|바베이도스}} - 독립기념일 ([[11월 30일]]) == [[절기]] == * [[입동]]: [[11월 7일]] 또는 [[11월 8일]]. * [[소설 (절기)|소설]]: [[11월 22일]] 또는 [[11월 23일]].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11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음력 12월|양력의 12월|음력의 12월}} [[파일:Breviarium Grimani - Dezember.jpg|섬네일]] '''12월'''(十二月, Dec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 중 마지막 달이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한국]], [[일본]], [[미국]]에서는 이 달을 [[겨울]]의 시작으로 본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등 [[남반구]]의 나라들은 여름이 된다. "구랍"이라고도 부르나, 이는 "지난해 [[음력 12월]]"을 뜻하므로, 양력 12월과는 관련이 없다. 이 달과 그 해의 [[9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일 경우 그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이 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이 달에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년의 첫날은 항상 같은 요일이다. 또한 한 해의 첫날 [[1월 1일]]과 마지막날 [[12월 31일]]은 평년일 경우만 요일이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 12월의 공휴일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등)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윤년]](예 : [[1993년]], [[1999년]], [[2010년]], [[2016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4년]], [[2049년]] 등) 그리고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23년]], [[2033년]], [[2039년]], [[2050년]] 등)일 경우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금요일]],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토요일]],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절]]만 공휴일이고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수요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김정숙 생일만 공휴일이 된다. 1988년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12월에 휴일이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와 함께 [[12월 23일]]이 [[천황탄생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에도 12월에 휴일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에는 12월에 휴일이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12월에 휴일이 2개 (김정숙 생일, 사회주의헌법절) 있다. [[음력 10월]]과 [[음력 11월]]이 이 달에 있으며 12월에는 음력 10월 15~16일, 1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12월에 윤달이 낄 경우는 [[동지]] 이전에는 윤10월이, [[동지]] 이후는 윤11월이 든다. {{12월달력}} ==유래== 12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December는 ten(10)을 의미하는 라틴어 'decem'에서 유래하였다. == 국경일 및 법정기념일 == * [[12월 3일]] - [[소비자의 날]]([[대한민국]]) * [[12월 5일]] - [[무역의 날]] * [[12월 10일]] - [[인권의 날|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성탄절, 聖誕節)<ref>법정 명칭은 기독탄신일(1974년 이전에는 기독탄생일이었으나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기독탄생일에서 기독탄신일로 바꿨다.)이다.</ref> * [[12월 27일]] -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 == 행사 == *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18대 대통령 선거]]([[2012년]])까지 5년마다(2, 7로 끝나는 해) 한 번씩 12월 세번째 수요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18대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실시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19대 대통령 선거]]는 [[2017년]] [[5월 9일]]에 치렀으며,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20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3월 3~9일 사이의 수요일에 실시된다. * [[대한민국]]에서는 12월부터 2월까지 [[민방위]] 훈련을 하지 않는다.<ref>여름에는 [[7월]]에만 민방위의 날 훈련을 하지 않는다. 다만, [[2010년]] 12월에는 민방위의 날 훈련이 있었다.</ref> * [[대한민국]]에서는 12월부터 2월까지 [[예비군]] 훈련을 하지 않는다. * [[미국 프로 농구 협회|NBA]]의 정규 시즌이 시작된다. *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는 12월 초에 나온다.<ref>예외적으로 2012~2014학년도 수능 성적표는 11월에 나왔으나 2015학년도 수능 이후 다시 12월에 나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2018 수능 성적표는 [[2018년 포항 지진]]으로 수능시험이 11월 23일로 연기되면서 성적 통지도 12월 중순인 12월 12일로 연기되었고 2019 수능 성적표는 [[12월 5일]]에 나왔다.</ref> * [[사회복무요원]] 본인선택은 12월에 한다. * 과거 전기대 [[학력고사]]는 12월에 치르기도 했다.<ref>1982년에는 [[12월 2일]]에 학력고사를 치렀고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11월에 치렀으나, 1987년 [[12월 22일]]에 학력고사를 치른 이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 전까지는 계속해서 12월에 전기대 학력고사를 치렀다. 후기대 학력고사는 1월에 치렀으며 체력장은 본 시험보다 빠른 9~10월에 치렀다.</ref> * 과거 [[고입선발고사]]는 주로 12월에 치렀다. * 대한민국의 일부 [[스키장]]은 12월 초에 개장한다.<ref>11월에 개장한 스키장이라도 모든 슬로프가 개장하는 달은 대개 12월이다.</ref> * 유럽의 주요 축구 리그들은 12월 중순부터 1월까지 겨울 휴식기에 들어간다.<ref>[[프리미어리그]]는 예외로 12월 말에 많은 경기가 배정돼 있고 겨울 휴식기 도입 시에도 1~2월이 휴식기이다.</ref> * [[FIFA 월드컵]] 본선 조추첨은 대개 월드컵 전년도 12월에 한다. * [[유대교]]의 축제 [[하누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축제 [[콴자]]는 12월에 온다. == 세계 각국의 휴일 == * {{국기나라|포르투갈}} - 독립기념일 ([[12월 1일]]) * {{국기나라|아랍에미리트}} - 내셔널 데이 ([[12월 2일]]) * {{국기나라|스페인}} - 제헌절 ([[12월 6일]]) * {{국기나라|핀란드}} - 독립기념일 (12월 6일) * {{국기나라|가나}} - 농부의 날 (12월 첫째 주 [[금요일]]) * {{국기나라|동티모르}} - 영웅의 날 ([[12월 7일]]) * {{국기나라|우즈베키스탄}} - 제헌절 ([[12월 8일]])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일부 가톨릭 국가만 (12월 8일) * {{국기나라|탄자니아}} - 독립기념일 ([[12월 9일]]) * {{국기나라|타이}} - 제헌절 ([[12월 10일]]), 신년망일 ([[12월 31일]]) * {{국기나라|케냐}} - 독립기념일 ([[12월 12일]]) * {{국기나라|카자흐스탄}} - 독립기념일 ([[12월 16일]]) * {{국기나라|남아프리카 공화국}} - 화해의 날 (12월 16일) * {{국기나라|카타르}} - 카타르 내셔널 데이 ([[12월 18일]]) * {{국기나라|마카오}} - 반환기념일 ([[12월 20일]]) * {{국기나라|상투메프린시페}} - 독립기념일 ([[12월 21일]]) * {{국기나라|일본}} - 천황탄생일 ([[12월 23일]]<ref>[[아키히토]] 천황이 생전퇴위 의사를 밝힘에 따라 [[2019년]]에는 천황탄생일이라는 이름의 공휴일이 없고 [[2020년]]부터는 새로운 천황이 되는 [[나루히토]] 황태자의 생일인 [[2월 23일]]이 천황탄생일로 바뀔 전망이다.</ref>) - 대체휴일제 적용 * {{국기나라|리비아}} - 독립기념일 ([[12월 24일]]) * [[크리스마스]] ([[12월 25일]]) - 동방교회 국가와 북한 등 일부 국가 제외. [[레바논]]과 [[몰도바]] 등 5개 국가는 '''12월 25일과 1월 7일 두 날을 모두 크리스마스로 인정하고 있다.''' * {{국기나라|파키스탄}} - 위대한 지도자의 날 (12월 25일) * {{국기나라|중화민국}} - 제헌절 (12월 25일) * [[박싱 데이]] - 일부 기독교 국가만 ([[12월 26일]])<ref>[[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2월 26일을 '굿윌 데이'라는 공휴일로 지낸다. 1980년까지는 박싱데이였으나 1981년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바꿨다.</ref> * {{국기나라|슬로베니아}} - 독립기념일 (12월 26일)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김정숙 (1917년 12월)|김정숙]] 생일 ([[12월 24일]]), [[사회주의 헌법절]] ([[12월 27일]]) * {{국기나라|몽골}} - 독립기념일 ([[12월 29일]]) * {{국기나라|이스라엘}} - [[하누카]](11월말~12월초) * {{국기나라|필리핀}} - 리잘의 날 ([[12월 30일]]), 신년망일 (12월 31일) == [[절기]] == * [[대설]]: [[12월 7일]] 또는 [[12월 8일]]. * [[동지]]: [[12월 21일]] 또는 [[12월 22일]]. == 같이 보기 == * [[13월]]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양력음력열두달}} {{전거 통제}} [[분류:12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Coord system CY 1.svg|섬네일|원점 {{mvar|O}}, 극축 {{mvar|A}}, 경도축 {{mvar|L}} 을 나타낸 원통좌표계. 사진의 점은 반지름 거리 {{math|''ρ'' {{=}} 4}}, 방위각 {{math|''φ'' {{=}} 130°}}, 높이 {{math|''z'' {{=}} 4}} 를 성분으로 가지는 점이다.]] '''원통좌표계''' (cylindrical coordinate system)는 다음 세 가지 변수로 3차원 공간의 점을 나타내는 [[좌표계]]이다. * 기준 축으로부터 거리 (사진의 축 L) * 기준 방향에 대한 각도 (축 A의 방향) * 기준 평면에 대한 거리 (보라색 면을 포함하는 평면) 마지막 변수는 점이 기준 평면의 위 또는 아래에 있는지에 따라 양수와 음수의 값을 가질 수 있다. 좌표계의 원점은 세 좌표가 모두 0의 값을 가지는 점이다. 이것은 기준 평면과 축 사이의 교점이다. 가운데의 축은 [[극축]]과 구별하기 위해서 원통축 혹은 경도축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극축은 원점에서 시작해 기준 방향을 가리키는 선이다. 세로축에 수직인 다른 방향들은 극을 통과하는 선이라고 불린다. 축으로부터의 거리는 반지름 거리 또는 반지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을 나타내는 성분은 방위각이라고 한다. 반지름과 방위각을 합쳐서 극 좌표라고 하는데, 이는 원통좌표계의 임의의 점을 지나고, 기준 평면과 평행한 평면에서의 이차원 [[극좌표계]]이다. 세 번째 좌표는 높이 또는 고도(기준 평면이 수평인 경우), 경도 위치<ref>{{저널 인용|제목=Resonant electron beam interaction with several lower hybrid waves|저널=Physics of Plasmas|성=Krafft|이름=C.|성2=Volokitin|이름2=A. S.|url=https://pubs.aip.org/pop/article/9/6/2786/319042/Resonant-electron-beam-interaction-with-several|날짜=2002-06-01|권=9|호=6|쪽=2786–2797|언어=en|doi=10.1063/1.1465420|issn=1070-664X}}</ref> 또는 축 위치<ref>{{저널 인용|제목=Solitary Vortex Pairs in Viscoelastic Couette Flow|저널=Physical Review Letters|성=Groisman|이름=Alexander|성2=Steinberg|이름2=Victor|url=https://ui.adsabs.harvard.edu/abs/1997PhRvL..78.1460G|날짜=1997-02-01|권=78|쪽=1460–1463|doi=10.1103/PhysRevLett.78.1460|issn=0031-9007}}</ref>라고 부를 수 있다. 원통좌표계는 긴 축을 중심으로 회전 대칭을 가지는 물체나 현상을 분석할 때 유용하다. 예를 들어, 원형 단면을 가진 직선 파이프에서의 물의 흐름, 금속 [[실린더]] 내의 열 분포, 긴 직선 도선에서 [[전류]]에 의해 생성되는 [[자기장]], 천문학에서의 [[강착 원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원통좌표계는 때때로 원통 극좌표계 (cylindrical polar coordinates)<ref>{{서적 인용|제목=Basic mathematics for electronic engineers: models and applications|성=Szymanski|이름=John E.|날짜=1989|총서=Tutorial guides in electronic engineering|출판사=Van Nostrand Reinhold|위치=London|isbn=978-0-278-00068-1}}</ref>, 극 원통좌표계 (polar cylindrical coordinates)<ref>{{서적 인용|제목=Intermediate fluid mechanics|성=Nunn|이름=R. H.|날짜=1989|출판사=Hemisphere Pub. Corp|위치=New York|isbn=978-0-89116-647-4}}</ref>로 불리며, 은하에서 별들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이 경우 은하 중심 원통좌표계 (galactocentric cylindrical coordinates)<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title/ocm74967110|제목=Galaxies in the universe: an introduction|성=Sparke|이름=Linda Siobhan|성2=Gallagher|이름2=John S.|날짜=2007|판=2nd ed|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위치=Cambridge ; New York|isbn=978-0-521-85593-8}}</ref>라고 한다. == '''정의''' == 점 P의 세 좌표 ({{mvar|ρ}}, {{mvar|φ}}, {{mvar|z}}) 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z축과의 유클리드 거리 {{mvar|ρ}} (반지름) * 원점과 기준 평면 위로의 P의 정사영을 잇는 선분, 기준 방향 사이의 각 {{mvar|φ}} (방위각) * 기준 평면에서 점 P까지의 부호가 있는 거리 {{mvar|z}} (높이) 일반적으로, 기준 평면의 위에서 바라봤을 때 반시계 방향으로 방위각을 측정한다. ==='''원통좌표계를 이용한 점의 표시'''=== 극좌표계와 마찬가지로, 원통좌표계에서는 하나의 점을 표현하는 방법이 무수히 많다. 한 점은 {{math|(''ρ'', ''φ'' ± ''n''×360°, ''z'')}} 또는 {{math|(−''ρ'', ''φ'' ± (2''n'' + 1)×180°, ''z'')}} 로 나타낼 수 있으며, ({{mvar|n}}은 임의의 정수) {{mvar|ρ{{=}} 0}} 일 때 방위각은 어떠한 값이든 상관이 없다. 각 점을 고유한 좌표로써 나타내려고 하는 경우, 반지름 {{mvar|ρ}}와 방위각 {{mvar|φ}}를 각각 음이 아닌 수 {{math|(''ρ'' ≥ 0)}} 와 {{math|[−180°,+180°]}} 또는 {{math|[0,360°]}} 과 같이 360°를 회전하는 구간으로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표기법=== 원통좌표계의 표기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ISO 31-11]]에서는 {{math|(''ρ'', ''φ'', ''z'')}}를 권장하며, 여기서 {{mvar|ρ}}는 반지름, {{mvar|φ}}는 방위각, {{mvar|z}}는 높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반지름은 {{mvar|r}} 또는 {{mvar|s}}로, 방위각은 {{mvar|θ}} 또는 {{mvar|t}}로, 높이는 {{mvar|h}}로 표시되거나, 원통축이 수평으로 간주되는 경우 {{mvar|x}} 또는 상황에 맞는 다른 문자로 표시되기도 한다. == '''좌표계의 변환''' == 원통 좌표계와 데카르트 좌표계 간의 변환을 위해 기준 평면을 데카르트 {{mvar|xy}}-평면 ({{math|''z'' {{=}} 0}} 일 때) 으로 가정하고, 원통축을 데카르트 {mvar|z}}-축으로 가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면 z-좌표는 두 시스템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원통 좌표 {{math|(''ρ'', ''φ'', ''z'')}} 와 데카르트 좌표 {{math|(''x'', ''y'', ''z'')}} 간의 대응은 극좌표계와 데카르트 좌표의 대응과 같게 된다. 원통좌표계를 데카르트 좌표계로 변환할 때는 <math display="block"> \begin{align} x &= \rho \cos \varphi \\ y &= \rho \sin \varphi \\ z &= z \end{align} </math> 와 같고, 반대 방향으로는 <math display="block">\begin{align} \rho &= \sqrt{x^2+y^2} \\ \varphi &= \begin{cases} \text{indeterminate} & \text{if } x = 0 \text{ and } y = 0\\ \arcsin\left(\frac{y}{\rho}\right) & \text{if } x \geq 0 \\ -\arcsin\left(\frac{y}{\rho}\right) + \pi & \mbox{if } x < 0 \text{ and } y \ge 0\\ -\arcsin\left(\frac{y}{\rho}\right) + \pi & \mbox{if } x < 0 \text{ and } y < 0 \end{cases} \end{align}</math> 와 같다. [[arcsin]] 함수는 [[sin]] 함수의 역함수이며, 치역은 일반적으로 {{math|[−{{sfrac|π|2}}, +{{sfrac|π|2}}]}} = {{math|[−90°, +90°]}} 에 속한다. 위의 공식들은 방위각 {{mvar|φ}}를 {{math|[−90°, +270°]}} 구간으로 변환한다. 치역이 {{math|[−{{sfrac|π|2}}, +{{sfrac|π|2}}]}} = {{math|[−90°, +90°]}}에 속하는 [[arctan]] 함수를 사용하면 {{mvar|ρ}}를 먼저 계산하지 않고도 방위각 {{mvar|φ}}를 계산할 수 있다. <math display="block">\begin{align} \varphi &= \begin{cases} \text{indeterminate} & \text{if } x = 0 \text{ and } y = 0\\ \frac\pi2\frac y{|y|} & \text{if } x = 0 \text{ and } y \ne 0\\ \arctan\left(\frac{y}{x}\right) & \mbox{if } x > 0 \\ \arctan\left(\frac{y}{x}\right)+\pi & \mbox{if } x < 0 \text{ and } y \ge 0\\ \arctan\left(\frac{y}{x}\right)-\pi & \mbox{if } x < 0 \text{ and } y < 0 \end{cases} \end{align}</math> 다른 공식들을 보려면 [[극좌표계]] 문서를 참고하여라. 많은 현대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조건을 주어진 ''x''와 ''y''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도 올바른 방위각 {{mvar|φ}}를 {{math|(−π, π)}} 범위에서 계산하는 함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C 언어]]에서는 이 함수가 {{mono|atan2(''y'', ''x'')}}로 호출되며, [[Common Lisp]]에서는 {{mono|(atan ''y'' ''x'')}}로 호출된다. == '''단위벡터''' == 각 [[단위벡터]]의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 <math> \hat{\mathbf{r}} = \frac{\frac{d\mathbf{r}}{dr}}{\left|\frac{d\mathbf{r}}{dr}\right|} = \begin{bmatrix} \cos \theta \\ \sin \theta \\ 0 \end{bmatrix}</math> : <math> \hat{\mathbf{\theta}} = \frac{\frac{d\mathbf{r}}{d\theta}}{\left|\frac{d\mathbf{r}}{d\theta}\right|} = \begin{bmatrix} -\sin \theta \\ \cos \theta \\ 0 \end{bmatrix}</math> : <math> \hat{\mathbf{z}} = \frac{\frac{d\mathbf{r}}{dz}}{\left|\frac{d\mathbf{r}}{dz}\right|} = \begin{bmatrix} 0 \\ 0 \\ 1 \end{bmatrix}</math> == '''유용한 공식들 '''== 부피 요소 :<math>\, {d V} = r d r d \theta dz</math> 라플라시안 :<math>\nabla^2 = \frac{1}{r}\frac{\partial}{\partial r} r \frac{\partial}{\partial r} + \frac{1}{r^2} \frac{\partial^2}{\partial \theta^2} + \frac{\partial^2}{\partial z^2}</math> == '''출처''' == [[분류:좌표계]] <references /> == '''편집''' == 전남과학고등학교 32기 위키번역 프로젝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비반응성 기체}} {{주기율표 (소형)|제목=비활성 기체}} [[파일:Glowing noble gases.jpg|섬네일|500px]] '''비활성 기체'''(非活性氣體) 혹은 '''불활성 기체'''(不活性氣體), '''희가스'''(稀gas), '''귀족 기체'''(noble gas)는 [[화학 계열]]로 [[주기율표]]의 [[족 (주기율표)|18족 원소]]를 말한다. [[최외각 전자]]가 모두 차 있는 이러한 [[화학 원소|원소]]들은 [[전자]]를 주고 받기 힘들기 때문에 [[화학결합]]을 하기 어렵다. (예외로 Xe는 산소, 할로젠 등과 반응한다.) {| border=0 cellpadding=2 cellspacing=0 width="100%" style="text-align: center;" |- style="background:#c0ffff;" |[[주기 (주기율표)|주기]] || 원소 이름 || [[원소 기호]] (번호) || [[원자 질량]] || [[녹는점]] ([[켈빈|K]]) || [[끓는점]] (K) |- | [[1주기 원소|1]] || [[헬륨]] || He (2) || 4.002602(2) || (2.5 [[메가]][[파스칼 (단위)|파스칼]]에서 0.95) || 4.22 |- style="background:#EEEEEE;" | [[2주기 원소|2]] || [[네온]] || Ne (10) || 20.1797(6) || 24.56 || 27.07 |- | [[3주기 원소|3]] || [[아르곤]] || Ar (18) || 39.948(1) || 83.80 || 87.30 |- style="background:#EEEEEE;" | [[4주기 원소|4]] || [[크립톤]] || Kr (36) || 83.798(2) || 115.79 || 119.93 |- | [[5주기 원소|5]] || [[제논 (원소)|제논]] || Xe (54) || 131.293(6) || 161.4 || 165.03 |- style="background:#EEEEEE;" | [[6주기 원소|6]] || [[라돈]] || Rn (86) || (220) || 202 || 211.3 |- | [[7주기 원소|7]] || [[오가네손]] || Og (118) || (294) || ? || ? |} == 갤러리 == <gallery class="center" caption="네온 [[네온 사인|사인에 쓰일 때 각 기체가 만들어 내는 색]]"> 파일:HeTube.jpg| [[헬륨]] 파일:NeTube.jpg| [[네온]] 파일:ArTube.jpg| [[아르곤]]<br />([[수은]]이 조금 포함됨) 파일:KrTube.jpg| [[크립톤]] 파일:XeTube.jpg| [[제논 (원소)|제논]] </gallery> == 같이 보기 == * [[귀금속 (화학)]] * [[비반응성 기체]] * [[산업 가스]] * [[옥텟 규칙]] {{원소 주기율표}} {{주기율표 둘러보기}}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 {{토막글|화학}} [[분류:비활성 기체| ]] [[분류:원소족]] [[분류:주기율표 족]]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미적분학}} '''구면좌표계'''(球面座標係, sphe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 상의 점들을 나타내는 [[좌표계]]의 하나로, 보통 <math>(r, \theta, \phi)</math>로 나타낸다. 원점에서의 거리 <math>r</math>은 0부터 [[무한대|<math>\color{Blue} \infty</math>]]까지, 양의 방향의 z축과 이루는 각도 <math>\theta</math>는 0부터 <math>\pi</math>까지, z축을 축으로 양의 방향의 x축과 이루는 각 <math>\phi</math>는 0부터 <math>2\pi</math> 까지의 값을 갖는다. <math>\theta</math>는 위도로, <math>\phi</math>는 경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기도 한다. 이 세 수치를 보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간의 점을 찾을 수 있다.: 원점 <math>(0, 0, 0)</math>에서 <math>r</math>만큼 z축을 따라 간다. 그 지점에서 x z 평면 안에 있으면서 z축에서부터 <math>\theta</math>만큼 회전한다. 이 xz 평면 전체를 z축을 축으로 <math>\phi</math>만큼 반 시계방향(+x축에서 +y축 방향으로)으로 돌린다. 구면좌표계라는 이름은 이 좌표계에서 '<math>r = 1</math>'이 [[단위구]](單位球)를 표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좌표계가 구대칭을 기치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면좌표계와 [[원통좌표계]]는 평면 [[극좌표]]계를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며, 구면좌표계는 구대칭이 나타나는 문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와 같이 구대칭이 있는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구면좌표계를 사용한다. 아래 변환식을 통해 [[직교좌표계]]와 변환할 수 있지만, 변환식에서 사용하는 [[역삼각함수]]는 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간상의 각 점마다 하나의 좌표만 대응하는 [[직교좌표계]]와는 달리, 구면좌표계는 한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 0°, 0°), (1, 0°, 45°), 과 (-1, 180°, 270°)는 모두 같은 점을 나타낼 수 있다. == 표시 문자 == 세 좌표의 표시를 위한 여러 가지 다른 약속이 존재한다. 국제 표준 기구의 지침([[ISO 31-11]])에 따라 [[물리학]]에서는 (''r'', ''θ'', ''φ'')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점에서의 거리, 천정과 이루는 각도(천정거리), 방위각 등을 표시하고, (미국의) 수학에서는 고도와 방위각이 바뀌어 'φ'와 'θ'로 표시된다.<ref>이러한 표시는 ''φ''가 2차원 [[극좌표]], 3차원 [[원통좌표]]의 방위각과 호환된다는 장점이 있다.</ref> == 정의 == [[파일:Spherical coordinate.gif|right|섬네일]] 좌표 <math>(r, \theta, \phi)</math>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주어진 점을 P라 하자. * [[r|<math>\color{Blue} r</math>]] : 원점으로부터 P까지의 거리. * [[θ|<math>\color{Blue} \theta</math>]] : z축의 양의 방향으로부터 원점과 P가 이루는 직선까지의 각 * [[φ|<math>\color{Blue} \phi</math>]] : x축의 양의 방향으로부터 원점과 P가 이루는 직선을 xy평면에 투영시킨 직선까지의 각. 구면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 <math>r \ge 0</math> : <math>0 \le \theta \le \pi</math> : <math>0 \le \phi < 2\pi</math> == 좌표 변환 == 다른 3차원 좌표계로 변환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 직교좌표계 === * 직교좌표계에서 구면좌표계로 변환시: :<math> \begin{align} r &= \sqrt{x^2 + y^2 + z^2} \\ \theta &= \arccos\frac{z}{r} \\ \phi &= \arctan\frac{y}{x} \end{align} </math> * 구면좌표계에서 직교좌표계로 변환시: :<math> \begin{align} x &= r \sin \theta \cos \phi \\ y &= r \sin \theta \sin \phi \\ z &= r \cos \theta \end{align} </math> === [[지리 좌표계|지리좌표계]] === :<math>{\delta}=90^\circ - \theta</math>, or :<math>{\theta}=90^\circ - \delta</math>, === 원통좌표계 === * 원통좌표계에서 구면좌표계로 변환시: :<math>r=\sqrt{\rho^2+z^2}</math> :<math>{\theta}=\operatorname{arctan}\frac{\rho}{z}</math> :<math>{\varphi}=\varphi \quad</math> * 구면좌표계에서 원통좌표계로 변환시: :<math> \rho = r \sin \theta \,</math> :<math> \varphi = \varphi \,</math> :<math> z = r \cos \theta \,</math> == 단위벡터 ==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 <math> \hat{\mathbf{r}} = \frac{\frac{d\mathbf{r}}{dr}}{\left|\frac{d\mathbf{r}}{dr}\right|} = \begin{bmatrix} \sin \theta \cos \phi \\ \sin \theta \sin \phi \\ \cos \theta \end{bmatrix}</math> : <math> \hat{\mathbf{\theta}} = \frac{\frac{d\mathbf{r}}{d\theta}}{\left|\frac{d\mathbf{r}}{d\theta}\right|} = \begin{bmatrix} \cos \theta \cos \phi \\ \cos \theta \sin \phi \\ -\sin \theta \end{bmatrix}</math> : <math> \hat{\mathbf{\phi}} = \frac{\frac{d\mathbf{r}}{d\phi}}{\left|\frac{d\mathbf{r}}{d\phi}\right|} = \begin{bmatrix} -\sin\phi \\ \cos\phi \\ 0 \end{bmatrix}</math> == 단위벡터의 미분 == : <math>\frac{\partial \hat{r} }{\partial r} = 0</math> : <math>\frac{\partial \hat{\theta} }{\partial r} = 0</math> : <math>\frac{\partial \hat{\phi} }{\partial r} = 0</math> : <math>\frac{\partial \hat{r} }{\partial \theta} = \hat{\theta}</math> : <math>\frac{\partial \hat{\theta} }{\partial \theta} = -\hat{r}</math> : <math>\frac{\partial \hat{\phi} }{\partial \theta} = 0</math> : <math>\frac{\partial \hat{r} }{\partial \phi} = \sin \theta \hat{\phi}</math> : <math>\frac{\partial \hat{\theta} }{\partial \phi} = \cos \theta \hat{\phi}</math> : <math>\frac{\partial \hat{\phi} }{\partial \phi} = -\cos \theta \hat{\theta} - \sin \theta \hat{r}</math> <br /> == 유용한 공식들 == 면적 요소 :<math>{d \mathbf{a}} = r^2 \sin \theta d \theta d\phi</math> 부피 요소 :<math>\, {d V} = r^2 \sin \theta d r d \theta d\phi</math> [[기울기 (벡터)|기울기]] :<math>\nabla = \hat{r} \frac{\partial}{\partial r} + \hat{\theta} \frac{1}{r}\frac{\partial}{\partial \theta} + \hat{\phi} \frac{1}{r \sin \theta}\frac{\partial}{\partial \phi}</math> [[발산 (벡터)|발산]] :<math>\nabla \cdot \mathbf{F} = \frac{1}{r^2}\frac{\partial}{\partial r} r^2 F_r + \frac{1}{r \sin \theta} \frac{\partial}{\partial \theta} \sin \theta F_\theta + \frac{1}{r \sin \theta} \frac{\partial}{\partial \phi} F_\phi</math> [[회전 (벡터)|회전]] :<math>\nabla \times F = \frac{1}{r^2 \sin \theta} \begin{vmatrix} \hat{r} & r\hat{\theta} & r \sin \theta \hat{\phi} \\ \\ {\frac{\partial}{\partial r}} & {\frac{\partial}{\partial \theta}} & {\frac{\partial}{\partial \phi}} \\ \\ F_r & rF_\theta & r\sin\theta F_\phi \end{vmatrix} </math> [[라플라시안]] :<math>\nabla^2 = \frac{1}{r^2}\frac{\partial}{\partial r} r^2 \frac{\partial}{\partial r} + \frac{1}{r^2 \sin \theta} \frac{\partial}{\partial \theta} \sin \theta\frac{\partial}{\partial \theta} + \frac{1}{r^2 \sin^2 \theta} \frac{\partial^2}{\partial \phi^2}</math>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직교 좌표계]] * [[원통 좌표계]] * [[적도 좌표계]] * [[초구면 좌표계]] * [[극좌표계]] * [[구면 조화 함수]] {{전거 통제}} [[분류:좌표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 그룹 정보 |이름 = 잭슨 5 |로고 = |그림 = Jackson 5 tv special 1972.JPG |그림설명 = 1972년의 잭슨 파이브 |국가 = 미국 |출신지역 =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인디애나주)|게리]] |다른이름 = 더 잭슨스 |장르 = [[팝]] |활동시기 = 1964년 ~ 1989년<br />2001년, 2012년 ~ |레이블 = |소속사 = [[모타운]] (1964년 ~ 1972년)<br />[[에픽 레코드]] (1972년 ~ 1989년) |관련활동 = [[마이클 잭슨]] |웹사이트 = |구성원 = [[재키 잭슨]]<br />[[티토 잭슨]]<br />[[저메인 잭슨]]<br />[[말론 잭슨]]<br />[[마이클 잭슨]] |이전 구성원 = [[랜디 잭슨 (1961년)|랜디 잭슨]] }} '''잭슨 5'''({{llang|en|The Jackson 5}})는 1964년에 결성하고, 잭슨 형제들로 이루어진 미국 인디애나주 출신의 대중음악 그룹이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멤버는 [[재키 잭슨|재키]](1951년생), [[티토 잭슨|티토]](1953년생), [[저메인 잭슨|저메인]](1954년생), [[말론 잭슨|말론]](1957년생), [[마이클 잭슨|마이클]](1958년생)이며, 이 중 막내가 나중에 팝의 황제로 불리게 되는 [[마이클 잭슨]]이다.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여 "버블검 [[소울]]"이란 스타일의 음악을 유행시켰다. 1972년엔 [[에픽 레코드]]으로 계약사를 바꾸었으며, 모타운이 잭슨 파이브란 이름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1989년에 해체했다. 2001년에 잠시 재결성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도로 해체하고 2012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 역사 == === 초기 === 잭슨 파이브의 구성원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자라났다. 레비, 티토, 재키, 저메인, 라토야, 말론, 마이클, 랜디, 자넷으로 이어지는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금속공장 직원이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는 반면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젊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클라리넷도 연주했다. 조셉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팔콘스로 활동하며 마을의 바와 클럽, 시카고와 인디애나 북부 지방의 대학 행사들을 휩쓸다가, 결국은 몇 달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 그룹을 해체한다. 밤마다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 곁에 모여 위대한 고전 팝송을 연주하는 일이 허다했다.{{sfn|티메 편집부|2009|p=14}} 아버지 조는 자식들이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아주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맨 위의 세 형제 재키, 티토, 저메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그룹 더 잭슨 브라더스가 결성되었다. 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다 말론과 특히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그룹은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어느날 꼬마 마이클이 꼭 제임스 브라운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 어머니의 제안으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 마이클은 한동안은 봉고를 연주하다가 그룹의 싱어가 된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는데도 몸과 목소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은 이미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다.{{sfn|티메 편집부|2009|p=14-15}} [[파일:Jackson_5_1969.jpg|섬네일|249x249픽셀|1969년경의 잭슨 파이브]] 1963년 말엽, 마이클은 다니던 학교의 연말 축제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다. 마이클은 검은 바지와 힌 셔츠를 차려입고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이 오른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서 〈Climb Ev'ry Mountain〉을 부른다. 어린 꼬마의 매끄러운 목소리에 학부모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내가 터져 나갈 듯이 박수를 쳤다. 훗날 마이클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기가 막힌 느낌이었죠." 아버지 조셉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의 모습과 아들이 장내에 일으킨 여파를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조셉은 개리 시와 주변 도시에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에 자녀들의 이름을 등록한다. 이들 그룹은 연령도 스타일도 다양한 사람들과 경합을 벌여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sfn|티메 편집부|2009|p=14}} 그 세계에서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도전자들이 된 잭슨 일행은 무엇 하나 거저 되는 일이 없는 만큼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액세서리며 이것저것 신경쓰기 시작했고, 조셉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카고로 가서는 흥행하는 공연들을 찾아냈다. 관중이 좋아하는 제스처며 음악이며 몸동작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식들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내도록 만들었다. 콘테스트를 거듭할수록 잭슨 형제는 하루가 다르게 노련해졌고 창의력 역시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일부 극성팬들이 싫증 내지 않도록 연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꾸준히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승해서 상을 받는 만큼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었다. 집에서 연습이 끝나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조셉은 아들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마이크며 악기들을 갖추어가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어쨌든 그런 희생이 다음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었다.{{sfn|티메 편집부|2009|p=16-17}} 잭슨 파이브는 아마추어 콘테스트 순회를 계속해 나갔다. 로열 시어터 상에 심취한 잭슨 파이브는 경쟁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쳐가며 매주 새로운 곡을 들고 나왔다. 로열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도 좋긴 했지만, 아버지 조는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는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편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디애나 주와 미시간 주에서 잭슨 파이브가 워낙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덕에 아폴로 시어터에서 예선 없이 곧장 본선에 진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잭슨 형제는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전국 최고 가수들의 얼굴로 도배가 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잭슨 파이브는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했다. 공연비로 당시 600달러를 받았고, 무엇보다 그룹 최초의 음반을 녹음할 수 있게 해준 값진 우승이었다.{{sfn|티메 편집부|2009|p=18-19}} 아폴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잭슨 일행은 아버지의 동료인 고든 키스 덕분에 처음으로 앨범을 취입할 기회를 얻었다. 고든 키스는 그 역시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자 개리의 스틸타운 녹음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sfn|티메 편집부|2009|p=20}} 어느 날 저녁, 조는 집에 올 때 고든 키스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해야 할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왔다. 아이들은 그 곡의 멜로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연습을 시작했다. 조는 데모 테이프를 제작자에게 넘기러 갔다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새로 연습할 노래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몇 주 후, 잭슨 일가는 최초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키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러스며 금관악기 연주자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악기를 연결하고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녹음 작업은 주로 일요일에 진행되어서 앨범 전체 녹음을 끝내기까지는 일요일이 여러 번 지나야 했다. 조는 주중에 내내 쉬지 않고 아들들을 연습시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룹은 마침내 그들의 첫 노래 〈Big Boy〉의 녹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사귀고 싶은 소년의 마음을 노래하는 발라드 곡이었지만, 정작 그런 가사를 읊조리는 마이클은 자신이 노래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서둘러 음반을 준비하고 나자 이제 잭슨 가족이 거머쥔 각종 콘테스트의 막간이나 끝났을 때를 이용해서 싱글을 파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싱글은 지방 라디오 방송곡에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sfn|티메 편집부|2009|p=20-21}} === 모타운 소속 시기 === 1968년, 잭슨 파이브는 프로가 되어 돌아온 아폴로 무대에서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 맡겨진 모타운 실무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신동들에게 아무것도 제안하지는 않았다. 모타운의 스타인 바비 테일러가 시카고 공연을 기회로 잭슨 파이브의 실력을 떠벌려 오디션 제안을 받은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잭슨 일행은 처음 모타운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황량한 건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게다가 그들을 맞는 분위기는 다소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베리 고디는 자리를 옮기면서도 전혀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마이클은 한 치도 양보도 없는 냉정한 시선을 받으며 〈I Got The Feeling〉, 〈Tobacoo Road〉, 〈Who's Loving You〉 세 곡을 불렀다. 잭슨 파이브는 일이 성공적이었는지 어쩐지도 모른 채 개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틀 후인 7월 26일, 그 유명한 음반 회사에서 첫 계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sfn|티메 편집부|2009|p=22-23}}[[파일:Jackson_5_Jim_Nabors_Show_1970.jpg|왼쪽|섬네일|1970년 《짐 내버스 쇼》에 출연한 잭슨 파이브]]모타운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잭슨 형제는 앨범 취입을 위해 개러와 디트로이트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했다. 마이클의 목소리는 채 변성기를 맞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잭슨 파이브의 레퍼토리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년들에게 걸맞는 스타일과 노래를 찾아내야 했다. 여러 주가 훌쩍 지나갔어도 잭슨 파이브에게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고디는 다섯 소년을 그때부터 모타운의 본거지가 된 캘리포니아로 보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한동안 묵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해서 다섯 형제는 유명한 가수의 집에서 지내게 되어 살짝 주눅이 들었다. 고디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는 이제 히트 퍼레이드에서 상위권에게 들어가게 될 싱글을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곡을 연달아 내놓게 될 거다." 다이애나 로스가 아이들에게 불쑥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느 저녁 파티에 잭슨 파이브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마이클의 나이는 11살이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실력에 감탄한다는 상업적 전략에 따라 그의 나이는 8살로 표기되었고 잭슨 파이브 모두의 나이가 두 살씩 내려갔다. 1969년 8월 음악 저널계와 상류층 인사들과 기자들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도착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Who's Loving You〉와 〈Zip-a-Dee-Doo-Dah〉를 감칠맛 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에 다들 넋을 잃었다. 이내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sfn|티메 편집부|2009|p=24-25}}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공연이 끝나고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고디는 작곡가 다크 리처드로부처 원해 글래디스 나이트에게 줄 작정이었던 곡 〈I Wanna Be Free〉를 다이애나 로스의 무대에서 직접 보았던 잭슨 파이브를 위해 다시 손을 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 곡은 머지않아 잭슨 파이브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는 곡 〈I Want You Back〉이 된다. 그 뒤로는 내놓은 노래마다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잭슨 파이브는 4년 동안 11개의 앨범을 취입하고 순회공연과 텔레비전 방송을 오가며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살게 된다.{{sfn|티메 편집부|2009|p=25}} === 더 잭슨스 === [[파일:The_Jacksons_1977.JPG|섬네일|230x230픽셀|1977년경의 더 잭슨스]] 1979년, 잭슨 형제는 그 전해에 발매된 음반 《Destiny》가 거둔 선풍적인 성공에 이어 월드투어를 준비한다. 잭슨 파이브가 전곡을 작곡한 그 음반은 어린 형제들의 독립성과 예술적인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데스티니 월드투어를 준비하면서 조는 론 와이즈너와 프레디 테먼을 매니저로 고용한다. 잭슨 형제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공연을 펼치게 된다.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가장 높은 고음부를 처리할 때 목소리가 끊어지는 걸 감추기 위해 형들 중 한 명과 짜놓은 작은 전략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이 노래하는 첫 입만 방긋거리면 그 소절은 말론이 대신 불렀다.{{sfn|티메 편집부|2009|p=26-27}} 1984년, 조셉 잭슨은 잭슨 파이브가 새로운 순회공연을 하게 될 거라고 언론에 발표한다. 하지만 데스티니 투어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지 5년이 지난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마이클은 《[[Thriller]]》 앨범을 발매한 뒤 스타가 되어 새로이 맞게 된 자유를 맘껏 누릴 셈이었다. 마이클이 그 투어에 참여하기로 한 건 마지못해서였다. 첫 번째 난점은 바로 빅토리 투어라는 공연 제목이었다. 그 제목은 애초에 예정했던 것처럼 잭슨 파이브 활동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수투표로 빅토리 투어 쪽으로 결정되면서 논쟁은 끝나버렸다. 두 번째로 의견 충돌을 빚게 된 건 부유한 계층보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이 더 많은 팬들을 위한 티켓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40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언론이 나서서 잭슨 일가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지적하고 나서야 마이클의 의견을 따라 티켓 판매가를 절반으로 낮추었다.{{sfn|티메 편집부|2009|p=28}} 투어는 198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다섯 형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무진으로 제각기 이동했다. 한편, 여동생 자넷이 당시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나 마이클은 벅찬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가 유럽 투어를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마이클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가족 관계는 부쩍 더 나빠졌다.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을 마이클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소식이 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12월 9일, 미국 투어 마지막 날, 마이클은 결국 공연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고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자신은 이제 전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sfn|티메 편집부|2009|p=28-29}} == 구성원 == {{#tag:timeline| ImageSize = width:800 height:200 PlotArea = left:100 bottom:90 top:0 right:50 Alignbars = justify DateFormat = mm/dd/yyyy Period = from:01/01/1962 till:{{#time:m/d/Y}} TimeAxis = orientation:horizontal format:yyyy Legend = orientation:vertical position:bottom ScaleMajor = increment:5 start:1965 ScaleMinor = increment:1 start:1962 Colors = id:vocals Value:red legend:Vocals id:guitar value:green legend:Guitar id:keyboards value:purple legend:Keyboards id:bass value:blue legend:Bass id:perc value:claret legend:Percussion id:Lines value:black legend:Studio_album id:bars value:gray(0.97) id:grid1 value:gray(0.7) id:Tours value:gray(0.5) BackgroundColors = bars:bars LineData = at:12/18/1969 color:black layer:back at:05/08/1970 color:black layer:back at:09/08/1970 color:black layer:back at:10/15/1970 color:black layer:back at:04/12/1971 color:black lay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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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1970) * 《[[Maybe Tomorrow]]》 (1971) * 《Goin' Back To Indiana》 (1971) * 《Greatest Hits》 (1971 후반) * 《[[Lookin' Through the Windows]]》 (1972) * 《[[Skywriter]]》 (1973) * 《[[Dancing Machine]]》 (1974) * 《[[Moving Violation]]》 (1975) * 《[[Anthology]]》 (1975) ; CBS에서 더 잭슨스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 * 《[[The Jacksons]]》 (1976) * 《[[Goin' Places]]》 (1977) * 《Frontiers》 (1978) * 《[[Destiny]]》 (1978) * 《[[Triumph (더 잭슨스의 음반)|Triumph]]》 (1980) * 《[[Victory]]》 (1984) * 《[[2300 Jackson Street]]》 (1989)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참고 문헌 == {{참고 자료 시작}} * {{서적 인용 |성= 티메 편집부|이름= |날짜= 2009|제목= Michael Jackson|번역제목= 마이클 잭슨, 특별한 운명 : Michael Jackson 1959-2009||언어= 한국어|출판사= 뮤진트리|isbn= 978-89-961210-9-1|ref=harv}} {{참고 자료 끝}} {{마이클 잭슨}} {{전거 통제}} [[분류:잭슨 5| ]] [[분류:미국의 팝 음악 그룹]] [[분류:미국의 R&B 음악 그룹]] [[분류:미국의 보이 밴드]] [[분류:인디애나주 출신 음악 그룹]] [[분류:영어 음악 그룹]] [[분류: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그룹]] [[분류:가족 밴드]] [[분류: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모타운 음악가]] [[분류:에픽 레코드 음악가]] [[분류:마이클 잭슨]] [[분류:1964년 결성된 음악 그룹]] [[분류:1989년 해체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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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대통령 정보 |이름 = 야세르 아라파트 {{노벨상 딱지}} |원어명 = ياسر عرفات |그림 = Arafat by Yaakov Saar.jpg |크기 = 200px |설명 = |국가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대수 = 1 |명칭 = 수반 |취임일 = [[1994년]] [[7월 5일]] |퇴임일 = [[2004년]] [[11월 11일]] |총리 = [[마흐무드 압바스]] <br />[[아흐메드 쿠레이]] |출생일 = {{출생일|1929|8|24}} |출생지 = [[이집트]] [[카이로]]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2004|11|11|1929|8|24}} |사망지 = [[프랑스]] [[오드센주]] [[클라마르]] |정당 = [[파타]] |학력 = |종교 = [[수니파]] |배우자 = Suha Arafat (1990–2004) |서명 = Yasser Arafat signature.svg |전임 = |전임대수 = |후임 = 마흐무드 압바스 |후임대수 = 2 |웹사이트= |국가2 =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대수2 = 3 |명칭2 = 의장 |취임일2 = [[1969년]] [[2월 4일]] |퇴임일2 = [[2004년]] [[10월 29일]] |전임2 = 야히야 하무다 |전임대수2 = 2 |후임2 = 마흐무드 압바스 |후임대수2 = 4 }} '''야세르 아라파트'''({{llang|ar|ياسر عرفات|야시르 아라파트}}, {{문화어|야씨르 아라파트}}, [[1929년]] [[8월 2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 (1996년 ~ 2004년)이었다. 또한 쿤야 '''아부 아마르''' (أبو عمار)로도 알려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 (1969년 ~ 2004년)이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결과를 가져온 성공적인 협상들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1994년]] [[노벨 평화상]]의 공동 수상자였다. 아라파트는 자신의 장기적 경력을 통하여 논쟁적이며 양극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 활동으로 들어가는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의 꿈과 열정을 구체화한 운동으로서 [[1957년]] 자신이 창설한 [[파타]] (Fatah)를 지도한 것으로 넓게 인정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국가 열망을 상징한 영웅적인 자유 투사로서 그를 간주하였다. 많은 그의 이스라엘의 반대자들은 폭력을 흥행하는 장기적 유산과 함께 완고한 [[테러리스트]]로 그를 여겼다. 비판자들은 오슬로 협정이 있던 동안 그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는다. 다른 이들은 그를 부패하거나 약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난하였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든 아라파트는 국가의 민족 자결권에 관한 팔레스타인의 꿈을 위하여 싸우고 바친 시작부터 종말까지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ref>《우리가 모르는 아시아》/아시아 네트워크 씀/[[한겨레신문]]</ref> == 어린 시절 == 본명은 '''모함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lang|ar|محمد عبد الرؤوف عرفات القدوة الحسيني}})로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직물]]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어떤 [[이집트]]의 계통과 함께한 [[팔레스타인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예루살렘]]에 있는 옛 팔레스타인인 가족으로부터 왔다. 자신이 야시르로 불리면서 5세 때 모친이 사망하였다. 그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외삼촌과 사는 데 보내졌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약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일찍이 추억들 중의 하나는 한밤 중 후에 [[영국]]의 군인들이 자신의 삼촌의 집으로 침입하여 가족의 일원들을 패고 가구를 부수어 버렸던 것에 관해서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통곡의 벽]] 혹은 [[유대인]],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에 의하여 신성한 곳으로 숙고된 현장 [[알아크사 모스크]] 혹은 [[성전산]] 근처에 있던 집에서 살았다. 8세가 되었을 때 그의 부친은 두번째로 결혼하여 가족은 카이로로 다시 배치되었다.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부친이 세번째로 결혼했을 때 아라파트의 누이 이남은 자신의 형제·자매를 키우는 임무에 남겨졌다. 아라파트는 이후에 [[카이로 대학교]]로 이름이 다시 붙은 파우드 2세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후에 유대인들과 토론에 참여하면서 [[유대교]]와 [[시온주의]]의 더욱 나은 이해와 [[테오도르 헤르츨]]과 다른 시온주의자들에 의한 출판물들을 읽는 것을 추구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6년]]까지 그는 [[아랍]]의 [[국수주의자]]가 되었고, 아랍의 원인을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밀수될 무기들을 획득하고 있었다. 1948년 ~ 1949년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일어난 동안 아라파트는 대학을 떠났다. 다른 아랍인들과 더불어 그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의 이름에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는 데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추구를 하였다. 그는 무장 해제되었고 교전 지역으로 들어가는 데 자신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한 이집트 군대에 의하여 돌아갔다. 아라파트는 자신이 "이 아랍의 정권들에 의하여 배신을 당한" 것으로 느껴졌다. 대학으로 돌아온 후, 아라파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여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의 회장을 지냈다. 1956년까지 아라파트는 [[토목 공학]]에서 [[학사]] 학위와 함께 졸업하였다. 그는 후에 [[수에즈 위기]]가 일어난 동안 [[이집트 육군]]에서 [[소위]]로 복무하였다. 또한 1956년 [[프라하]]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의 상징이 된 전통적 체크 무늬 머리 장식 [[쿠피야]]를 입었다. 아라파트의 동생 파티 아라파트 박사는 아랍의 붉은 초승달을 창설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분쟁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연루되었다. [[1959년]] 아라파트는 인구들 야히아 가바니와 할릴 알와지르 (아부 지하드)와 [[가자 지구]]에서 온 난민들의 단체의 도움과 함께 [[쿠웨이트]]에서 [[파타]] (Fatah)가 된 단체들 중의 하나를 창립하였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위하여 정복 혹은 승리를 의미한다. 파타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으로 그 자신을 헌신하였다.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일을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기부를 통한 파타의 미래 재정적 성원을 위한 기초를 설립하는 데 거기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들은 [[석유]] 산업에서 자신들의 높은 봉급에서 아낌없이 주었다. [[1968년]] 파타는 [[요르단]]의 알카라메 마을에서 이스라엘 국방군 작전의 목표물이었다. 155명의 팔레스타인인과 29명의 이스라엘군이 살해되었다. 높은 아랍의 사망자 수에 불구하고 파타는 이스라엘군의 결국적 철수 때문에 자신들을 승리로 숙고하였다. 전투는 [[타임]] 잡지에 의하여 자세히 다루어졌다. 아라파트의 얼굴이 표지에 나와 자신들의 남성의 첫 이미지를 더욱 넓은 세계에 가져왔다. 전쟁 이후의 환경 속에서 아라파트와 파타의 인물 소개들은 이 중요한 전환점에 의하여 자라났다. 아라파트는 감히 [[이스라엘]]과 마주한 문화적 영웅으로서 여겨지는 데 왔다. 많은 젊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파타의 계급들에 가입하였고, 장비는 향상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지배하였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전국 의회에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7년]] [[12월]] [[아흐마드 슈케이리]]가 사임한 이래 임시 대행 지도자로 지낸 [[야히야 하무다]]를 대체하였다. 2년 후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치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 요르단 == [[파일:Arafat in Jordan.jpg|섬네일|오른쪽|[[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의 지도자 나예프 하와트메와 작가 카말 나세르와 함께 (1970년)]]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온 [[아랍인]]들과 [[요르단]] 정부 사이의 긴장들이 거대하게 증가하였다. 중무장을 한 아랍 저항 집단 (페다인)은 요르단에서 사실상의 "국가 안의 국가"를 창조하여 결국적으로 아즈자르크 근처의 석유 정제소를 포함한 요르단에서 몇몇의 전략 위치들을 통제하였다. 요르단은 이것을 그 주권과 안정으로 자라는 위협으로 숙고하였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하는 데 시도하였다. [[1970년]]의 [[6월]] 열린 싸움이 터졌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의 야망들로 위협이었다. 다른 아랍 정부들은 평화로운 해결을 협상하는 데 시도하였으나 [[9월 12일]] 3개의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에 의하여 납치되어 자르카에서 잡힌 3개의 국제 항공기들의 파괴 같은 요르단에서 지속된 파이딘 활동들은 그 영토에 통치를 다시 얻는 활동들을 취하는 데 구실로서 요르단 정부에 의하여 이용되었다. [[9월 16일]]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같은 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규 군대 [[팔레스타인 해방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이어지는 내전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국은 그들을 원조하는 데 요르단으로 대략 200대의 [[탱크]]로 구성된 군대를 보낸 [[시리아]]의 활동적 성원을 가졌다. 싸움은 주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해방군 사이였다. [[미국 해군]]은 동부 [[지중해]]로 [[제6함대 (미국)|제6함대]]를 급파하였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스라엘은 후세인 1세를 원조하는 데 군대를 전개시켰다. [[9월 24일]]까지 요르단군은 권세를 이루었고,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일련의 휴전으로 동의하였다. == 1970년대 동안 레바논에서 본부들 == [[파일:Bundesarchiv Bild 183-K1102-032, Berlin, Brandenburger Tor, Yasser Arafat.jpg|섬네일|왼쪽|1971년 [[동독]]을 방문한 아라파트]] [[검은 9월 사건]]과 요르단으로부터 제명에 이어 아라파트는 [[레바논]]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다시 배치하였다. 레바논의 약한 중앙 정부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사실상으로 독립 국가로서 운영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시민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목표물들에 대항하는 레바논으로부터 간헐적인 국경간 공격들을 가하였다. [[1972년]] [[9월]] [[검은 9월]] 테러단이 [[1972년 하계 올림픽|뮌헨 올림픽]]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하였다. 모하메드 다우드와 베니 모리스를 포함한 다수의 출처들은 검은 9월 사건은 테러리스트 작전들을 위하여 이용된 파타의 권력이었던 것을 진술하였다. 살해 사건들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아라파트는 공격들로부터 자신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공개적으로 분리하였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유럽]]에서 운영되는 파타의 세포들을 무너뜨리는 데 "바요네트 작전"으로 불린 캠페인을 정식으로 허가하였다. 1973년 ~ 1974년 아라파트는 해외 공격들이 너무 나쁜 홍보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 지구]](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외부에 폭력 행위들로부터 철수하는 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명령하였다. 파타 운동은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과 보안군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1974년]]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데 [[비정부 기구]]의 첫 대표가 되었다. 아랍 국가의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유일한 합법적인 대변인"으로 승인하였다. 자신의 유엔 총회 연설에서 아라파트는 시온주의를 비난하였으나 "오늘날 나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 투사의 무기를 품으러 왔다. 나의 손으로부터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의 연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정 성원을 증가시켰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76년]] [[아랍 연맹]]의 완전한 회원으로 인정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다수의 좌익 팔레스타인의 기구들이 나타나 이스라엘의 내부와 외부 둘다 시민들의 목표들을 향한 공객들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이 기구들에 최후적 통치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테러리즘]]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라파트는 이 단체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테러리스트]]의 활동들을 위한 책임을 부인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레바논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이루트]] 서부를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에 의한 포위 후에 아라파트는 베이루트가 "두번째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베이루트는 이어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포병과 공중 폭격의 결과로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17,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내전이 있어난 동안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레바논의 무슬림 단체들과 제휴시켰다. 하지만 권력을 잃을 것에 두려워한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는 편을 바꾸어 급진파 우익의 기독교 [[팔랑헤당]]을 돕는 데 자신의 군대를 보냈다. 내전의 첫 단계는 아라파트를 위하여 탈알자타르의 난민 캠프의 포획과 몰락과 함께 끝났다. 아라파트는 좁게 탈출하였으며 그의 탈출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하여 원조되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획이 있던 동안 [[미국]]과 유럽의 강국들이 [[튀니스]]에서 망명하는 데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위한 안전한 통로를 보증하는 거래를 중개하였다. 아라파트는 실제로 베이루트로부터 자신이 퇴거된 1년 후에 레바논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트리폴리 (레바논)|트리폴리]]에서 자신을 설립하였다. 이스라엘에 의하여 쫓겨난 대신 이번에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를 위하여 일을 한 동료 팔레스타인인에 의하여 쫓겨났다. 많은 파타 투사들이 그렇게 했어도 두번째 제명 후에 아라파트는 직접 레바논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1980년대 튀니지에서 망명 == 1982년 9월 레바논으로 이스라엘의 공격이 있던 동안 미국과 유럽은 휴전 거래를 중개하였다.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미국 해군의 착륙선에 의하여 후원된 800명의 [[미국 해병대]]를 포함한 다국적 군대의 보호 아래 레바논을 떠나는 데 허용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리더십은 결국적으로 [[1993년]]까지 자신의 운영들의 중심지로 남아있던 [[튀니지]]에 도착하였다. [[1985년]]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좁게 살아남았다. 대각 작전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F-15 전투기들이 튀니스에 있는 그의 본부를 폭탄 투하를 내려 73명의 사망으로 남겼는 데 아라파트는 그날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1980년대 동안 아라파트는 심각하게 폭행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재건하는 데 자신을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이 일은 [[1987년]] 12월 첫 "인티파다" (봉기)를 위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게 강화를 주었다. 인티파다가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자발적인 봉기였어도 몇주 안에 아라파트는 반란을 지시하는 데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것이 주로 시민의 불안이 그랬던 만큼 지속될 수 있었던 요단강 서안 지구에서 파타의 군대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의하여 정의가 내려지면서 팔레스타인의 전체에 권리를 주장한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위한 망명 정부인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언하여 분할의 아이디어를 거절하였다. [[12월 13일]] 연설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미래 승인을 약속하고, "국가의 테러리즘을 포함한 그 전체의 형성들에서 테러리즘"을 폐지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 242를 받아들였다. 아라파트의 12월 13일 진술은 [[캠프데이비드 협정]]에서 필요한 시작 포인트로서 이스라엘의 승인에 주장한 미국의 행정부에 의하여 용기를 얻었다. 아라파트의 진술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주요 목표들 중의 하나인 2개의 갈라진 자주 독립체들 -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아랍 국가와 [[1949년]] 휴전선들 안의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향한 이스라엘의 파괴로부터 교대를 나타냈다. [[1989년]] [[4월 2일]] 아라파트는 선언된 팔레스타인 국가의 정부 수반이 되는 데 팔레스타인 전국 의회의 중앙 위원회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990년]] 아라파트는 튀니스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위하여 일하면서 자신에게 결혼하기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팔레스타인의 [[정교회]] 기독교인 수하 타윌과 결혼하였다. [[1991년]] 마드리드 회의가 열린 동안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함께 공개 협상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걸프 전쟁]]에 앞서 아라파트는 많은 아랍 국가들을 양도하고 미국을 아라파트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로 지낸 것에 관한 주장들을 의심하는 데 이끈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였다. 모래 폭풍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비행기가 [[리비아]]의 사막에 부딪치면서 착륙했을 때 [[1992년]] [[4월 7일]] 다시 죽음을 좁게 탈출하였다. 아라파트는 몇몇의 [[뼈]]가 부러지고 다른 부상들을 겪었다.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평화 협상 == [[파일:Flickr - Government Press Office (GPO) - THE NOBEL PEACE PRIZE LAUREATES FOR 1994 IN OSLO..jpg|섬네일|왼쪽|[[오슬로 협정]]에 이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 (1994년)]] 1990년대 초반에 아라파트는 일련의 비밀적 교섭과 협상들에 이스라엘을 종속시켰다. 교섭들은 5년 기간에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기 통치의 이행을 요구한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이끌었다. 그해 [[9월 9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과 그 공식적 대표로서 아라파트는 폭력을 폐기하고,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2개의 문서들을 서명하였다. 답례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승인하였다. 이어진 해 아라파트는 라빈과 [[시몬 페레스]]와 더불어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아라파트는 어떤이들에게 영웅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으나 그러나 다른이들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졌다. [[1994년]]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에 의하여 창조된 잠정적 본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통치된 영토로 이동하였다. [[1995년]] [[7월 24일]]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 여사는 그의 사망한 모친의 이름을 딴 "자흐와"로 불린 딸을 낳았다. [[1996년]] [[1월 20일]] 아라파트는 압도적인 88.2 퍼센트의 다수와 함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단 한명의 다른 후보는 [[사미하 할릴]]이었다. 독립적인 국제 업저버들은 선거들이 자유롭고 공형했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하마스]]와 다른 운동들이 수반 선거에서 참가하지 않는 데 선택했기 때문에 선택들은 제한되었다. [[2002년]] [[1월]]을 위하여 예정된 다음 선거들은 연기되었다. 진술된 이유는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운동의 자유에 제한들은 물론 알아크사 인티파다와 이스라엘 국방군의 습격들에 의하여 부과된 긴급 상태들의 이유로 캠페인으로 무능이었다. 1996년 후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의 칭호는 "원수"였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유엔이 칭호를 "수반"으로 번역한 동안 이스라엘과 미국은 칭호를 "의장"으로 번역하였다. [[대중매체]]는 둘다의 용어들을 썼다. 1996년 중순에 [[베냐민 네타냐후]]가 좁은 차이들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들은 지속된 투쟁의 결과들로서 더욱 적대적으로 자라났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협정에 불구하고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 지위의 아이디어를 반대하였다.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명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데 설득시켰다. [[1998년]] [[10월 23일]]의 결과를 가져온 와이리버 각서는 평화 과정을 완성하는 데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택할 단계들을 상술하였다. [[파일:Arafat&Clinton&Barak.jpg|섬네일|오른쪽|[[캠프데이비드]]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2000년)]] 아라파트는 [[2000년]]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네타냐후의 후임자 [[에후드 바라크]]와 협상들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네타냐후가 우익의 [[리쿠드당]] 소속인 동안 바라크는 좌익의 [[이스라엘 노동당|노동당]] 소속이었다. 이 변화는 협상의 활력들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클린턴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라크는 아라파트에게 그 수도로서 예루살렘 동부의 외부에 놓인 외곽과 함께 요단강 서안 지구의 다수와 가자 지구의 전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제공하였다. 이스라엘은 [[네게브]]에서 대지를 위한 교환에서 큰 정착권들을 에워 싼 요단강 서안 지구의 남은 9 ~ 10 퍼센트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추가로 이스라엘의 제안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 관세들과 국방의 어떤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제공에서 포함된 것은 작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과 나머지를 위한 배상이었다. 바라크는 또한 2개의 수도들 -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옆에 팔레스타인 통치의 [[알쿠드스]]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진술하였다. 넓게 비판을 받은 운동에서 아라파트는 바라크의 제공을 거절하였고, 반대 제안을 만드는 데 거부하였다. 그는 아마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난민들을 여기는 불충분한 이스라엘의 제안들로 마지못해 동의하는 데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정하였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2001년]] [[타바]]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협상들은 지속되었다. 이번에 바라크는 이스라엘 총선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데 교섭에서 철수하였다. 2001년을 통하여 알아스크 인티파다 혹은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맹렬히 자라났다. [[아리엘 샤론]]의 선거에 이어 평화 과정은 완전히 쇠약해졌다. 이스라엘의 새롭게 선출된 총리 샤론은 [[라말라]]에 있는 모카타 본부로 아라파트를 감금하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라파트가 "평화의 장애물"이었다고 단언하였다. 다른 방면에 [[유럽 연합]]은 이 힘든 자세를 반대하였다. [[2004년]] [[11월 11일]] 아라파트의 사망에 이어 [[마흐무드 압바스]]가 [[2005년]] [[1월]] 수반 선거를 이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를 대체하였다. == 정치적 생존, 사회에서 소외와 논쟁 == [[파일:ArafatEconomicForum.jpg|섬네일|왼쪽|2001년 세계 경제 포럼에서 연설하는 아라파트]] [[중동]]에서 정치의 가장 위험한 자연과 자주 일어나는 [[암살]] 사건들이 주어진 아라파트의 장기적인 개인적과 정치적 생존은 비대칭 전쟁의 숙달로서 징후와 전술가로서 그의 실력으로서 대부분의 서방 주석자들에 의하여 취해졌다. 어떤이들은 그의 생존은 만약 자신이 암살되거나 이스라엘에 의하여 체포마저 된다면 팔레스타인의 원인을 위하여 그가 순교자가 될 수 있던 이스라엘의 위협의 두려움에 큰 이유였다고 믿는다. 다른이들은 하마스와 아라파트의 세속 조직에 후원을 얻는 다른 [[이슬람주의]] 운동들보다 적게 아라파트를 두려워하는 데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라파트를 살려둔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 관계들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방송망도 또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의 장수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전술적과 정치적 상황들로 적응시키는 아라파트의 능력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지하드 조직들이 상승하는 가운데 예시되었다. 이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거부파를 지지하였고, 자살 폭격 같은 새로운 전술들을 고용하여 심리적 손해들을 증가시키는 데 [[쇼핑몰]]과 [[극장]]들 같은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고의적으로 목표를 삼았다. 1990년대에 이 단체들은 국가로서 지위의 목표와 함께 통일한 비종교적 국수주의 단체를 함께 소유하는 아라파트의 수용력을 위협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아라파트의 영향력과 통치로부터 나온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라파트의 파타 단체와 활동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어떤이들은 이 단체들의 활동들이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들로서 아라파트에 의하여 동석되었다는 것을 단언한다. 어떤 이스라엘 정부의 공무원들은 2002년 파타의 당파 알아크사 마르티르의 여단들이 하마스와 함께 완료하는 데 이스라엘에 공격들을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2002년]] [[5월 6일]]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파트의 라말라 본부의 이스라엘군 점령이 있던 동안 알아스카 마르티르 여단들의 활동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데 아라파트에 의하여 서명된 문서들의 사본들과 함께 획득된 서류들에 부분적으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해 [[3월]] 아랍 연맹은 [[6일 전쟁]]에 포획된 전체의 영토들로부터 이스라엘군의 후퇴와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 지위와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위한 교환에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데 제공을 만들었다. 후원자들은 이 제공을 지방에서 포괄적인 평화를 위한 역사적 기회로서 보았다. 제공의 비평가들은 자살 폭발 공격들의 중단을 보증하지 않은 동안 그것이 이스라엘의 안정에 큰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은 피상적으로 간주된 이 제공을 무시하였다. 곧 후에 공격들은 135명 이상의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전에 아라파트가 자살 폭발에 대항하는 데 [[아랍어]]에 강하게 용기를 내어 말해버리는 것을 요구했던 샤론은 아라파트가 "테러리스트들을 원조하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적으로 만들어 아무 평화 협상들에 부적절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고나서 이스라엘은 요단 서안 지구로 들어가는 주요 군사 공격을 발포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을 대표하는 데 또다른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완고한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아라파트는 자신과 다루거나자신을 성원하는 것에 보통 꽤 조심스러워 왔던 자신 소유의 역사를 준 단체들의 성워을 즐기고 있었다. 알아크사 인티파다가 일어난 동안 [[마르완 바르구티]]가 지도자로서 나타났으나 이스라엘은 그를 체포하여 4개의 무기 징역 선고를 내렸다. 격렬한 협상들 후에 [[5월 3일]] 아라파트는 결국 자신의 울안을 떠나는 데 허용되었다. 아라파트와 함께 숨어 온 이스라엘에 의하여 원해진 6명의 무장 단체들이 이스라엘에 넘겨지거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구금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의 합쳐진 보안 요원은 원해진 남자들이 [[여리고]]에서 투옥되어 남아있던 것을 확실히 하였다. 추가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인들에 공격들을 멈추는 데 아랍어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탁을 발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라파트는 석방되어 [[5월 8일]] 부탁을 발표하였으나 크게 무시되었다. 많은이들은 이것은 그가 비밀적으로 공격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느낀다. 이 믿음은 심각하게 아라파트의 부탁을 응하지 않은 전체의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들 중에 넓게 퍼졌다. [[2004년]] [[7월 18일]] [[르 피가로]]에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은 아라파트를 협상 파트너로서 퇴거시켜 "현실의 문제는 '우리에게 국가를 설립하는 도움을 주고, 우리는 테러를 싸우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필요성을 응답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십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사이에 지도적인 4인조 협상들의 일부들이었던 유럽 연합과 [[러시아]]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기껏해야 아라파트는 다른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섞인 관계들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 중에 가장 인기있던 아랍 지도자로 남아있어 많은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선출된 아랍 지도자였다. 서방과 이스라엘의 매체에 의하여 아라파트의 가장 빈번한 비판은 그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손해에 타락했다는 것이었다. 아랍 지도자들로부터 아라파트의 성원은 그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압력을 받았던 때마다 자라난 것으로 이바지하였다. 이 전부의 다른 사정들과 아라파트의 그것들을 다루는 것을 합친 것은 더욱 큰 그림을 보는 데 퍼즐의 조각들을 연결한 것 같다. 나타나는 것은 아라파트가 이용할 수 있단 이해이며 자신 만의 생존이 아닌 또한 자신이 계획한 정치적 종말들에 이익을 준 상황들마저 교묘하게 다룬 것이다. == 금융 거래 == 이스라엘과 미국의 매체에서 2002년의 시작에 재정적 부패의 지속되지 않는 진술들이 드러났다. [[2003년]] [[국제 통화 기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감사를 실시하고 아라파트과 자신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최고 경제 금융 고문에 의하여 통제된 특별 은행 계좌로 공공 기금에 미국돈 9억 달러를 전환한 것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국제 통화 기금은 아무 부적당한 일들이 없었다는 것을 단언하지 않았고, 기금들이 국내 및 해외 모두 팔레스타인의 자산들에 투자하는 데 이용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2003년 아라파트 소유의 금융 봉사에 의하여 기용된 미국 회계사들의 팀이 아라파트의 금융들을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팀은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부의 일부는 라말라에 있는 [[코카콜라]] 병입 공장, 튀니지의 핸드폰 회사 같은 회사들에서 투자들과 미국과 [[케이먼 군도]]에서 투하 자본과 함께 1조 달러 가까운 가치에 비밀 서류첩에 있었다는 것을 단언하였다. 아라파트 자신이 항상 겸손하게 살았어도 [[조지 H. W. 부시|부시]]와 클린턴 대통령들을 위한 전 중동 협상자 데니스 로스는 아라파트의 "주의를 걷는 돈"이 신가산주의로 알려진 막대한 보호 시스템에 융자했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다른 말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협의 사항에 다른이들의 충성을 산출하는 데 국가 기금을 썼다. 아라파트 정부의 전직 내각 일원들은 자신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부를 몰수한 것으로 아라파트를 고발하였다. 2002년 아라파트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던 전 [[세계은행]]의 공무원 살람 파이야드는 아라파트의 필수품 독점권이 "특히 더욱 가난하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부도덕한 가자 지구에서" 자신의 국민들에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였다. 전 내각 일원 하난 아슈라위에 의하면 "아라파트를 보유물들을 넘기는 데 하는 것은 이빨을 뽑는 것 같았다. 아라파트 씨는 유럽 연합 같은 원조 기증자와 자신의 재무 장관이자 영토들에서 국제 통화 기금의 전 대표 살람 파이야드로부터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아라파트 씨가 더욱 나가서의 원조의 상태로서 투자들을 넘기는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유럽 연합의 기금들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잘못 쓰이고 있었다는 단언들로 유럽 연합에 의한 조사는 기금들이 영토의 활동들로 전환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않았다. 유럽 연합은 "그 재정적 관리를 향상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깊은 개혁을 납득시킨 것으로 남아있고, 감사 능력은 기금의 잘못된 사용과 부패에 대항하는 최고의 예방적인 전략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재정적 관리의 개혁은 유럽 연합의 재정적 원조로 접착된 몇몇의 주요 상태들의 목적이다."라고 말해졌다. 아라파트에게 전 재정 측근 파우드 슈바키는 보고적으로 아라파트가 무기들을 사고 무장 단체들을 성원하는 데 원조금의 몇백만 달러를 이용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신베트]]에게 말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재무부에서 무명의 출처들에 의한 단언들은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 여사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예산안으로부터 한달에 10만 달러의 연금을 받는 것을 진술하였다. [[런던]]에 기지를 둔 신문 알하야트와 인터뷰에서 수하 여사는 샤론 총리가 향하고 있던 부패 변증들로부터 매체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목적으로 자신에게 기금의 옮기는 것을 연루한 돈 세탁에 관한 퍼지는 소문들로 그를 고발하였다. [[프랑스]]의 검사들에 의한 2003년 철저한 조사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 질병과 사망 == [[파일:Mausoleo Arafat (Muqata, Ramallah) 02.JPG|섬네일|오른쪽|[[라말라]]에 있는 아라파트의 영묘]] 아라파트의 대변인이 말한 것에 그의 의사들에 의한 그의 치료의 첫 보고들이 말한 "감기"의 소식이 그가 회의 도중에 구토를 한 후 [[2004년]] [[10월 25일]]에 나왔다. 그의 상태는 이어진 날들에 악화되었다. 그는 [[10월 27일]] 10분 동안 의식을 잃게 되었다. 튀니지, 요르단과 이집트에서 온 팀들을 포함한 다른 의사들에 의한 방문들과 그의 복귀를 막지 않는 데 이스라엘에 의한 동의에 이어 아라파트는 프랑스 정부의 제트기에 실려 [[10월 29일]] [[파리 (프랑스)|파리]] 근처 [[클라마르]]에 있는 페르시 군사 병원으로 모셔졌다. [[11월 3일]] 그는 차차 깊은 [[혼수상태]]로 빠졌다. 아라파트의 건강은 그가 중독 혹은 [[에이즈]]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었던 의심과 함께 사색의 주제였다. 아라파트가 [[식물인간]] 혹은 [[뇌사]]에서 혼수상태였던 사색들은 아라파트의 요르단인 의사에 의하여 맹렬히 부인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공무원들과 수하 여사 사이에 더욱 많은 논쟁들이 터졌다. 아라파트는 [[11월 11일]] 새벽 3시 30분 75세의 나이로 사망이 선언되었다. 그의 질병의 정확한 원인은 전혀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아라파트의 사후, 프랑스 국방부는 아라파트의 의료 서류들이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 전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라파트의 조카 나세르 알키드와는 수하 아라파트의 남편의 질병에 관한 그녀의 침묵을 주위로 일을 했던 충분히 가까운 친척으로 결심되었다. [[11월 22일]] 나세르 알키드와는 프랑스 국방부에 의한 아라파트의 558 페이지 의료 서류의 사본이 주어졌다. == 유산 == 아라파트는 교활한 정치인이자 헌신된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리더십의 그의 10년 세월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위한 합법적인 옹호와 쉽게 그에게 더듬어 올라가지 않아온 군사 작전 행동과 전술들 사이에 불확실한 균형을 지켰으나 그의 협의 사항을 반대한 자들에 격동을 지켰다. 그 전체를 통하여 그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국내적 대망으로 세계적으로 넓은 인정을 가져왔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Yasser Arafat}} * [http://www.ict.org.il/articles/yasir_arafat.htm Yasir Arafat: Psychological Profile and Strategic Analysis] {{웨이백|url=http://www.ict.org.il/articles/yasir_arafat.htm |date=20041030083250 }} * [http://www.fas.org/irp/congress/1989_cr/s890208-plo.htm 1989 Senate testimony: Has the PLO abandoned terrorism?] * [http://abcnews.go.com/reference/bios/arafat.html ABC News : Arafat's Biography]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마흐무드 압바스]] |대수 = 1 |직책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정부수반|수반]] |임기 = [[1996년]] [[7월 5일]] ~ [[2004년]] [[11월 11일]] }}{{전임후임 |전임자 =[[빌 클린턴]] |후임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대수 =67 |직책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93년 }} {{노벨 평화상 수상자}} {{1994년 노벨상 수상자}} {{타임 올해의 인물}} {{전거 통제}} {{기본정렬:아라파트, 야세르}} [[분류:야세르 아라파트| ]] [[분류:1929년 출생]] [[분류:2004년 사망]] [[분류:팔레스타인의 정치인]] [[분류:팔레스타인의 군인]] [[분류:팔레스타인의 혁명가]] [[분류: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망명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분류:팔레스타인의 억만장자]] [[분류:팔레스타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토목공학자]] [[분류:파타 당원]] [[분류:공화국영웅 수훈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카이로 출신]] [[분류:이집트계 팔레스타인인]] [[분류:카이로 대학교 동문]] [[분류:항공 사고 생존자]] [[분류: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분류:팔레스타인의 대통령]]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작가 정보 |이름 = 나쓰메 소세키 |원어이름 = |그림 = 값찾기 |그림크기 = |설명 = |본명 = |로마자 표기 = |출생일 = 값찾기 |출생지 = 값찾기 |사망일 = 값찾기 |사망지 = 값찾기 |필명 = |별칭 = |직업 = 값찾기 |언어 =값찾기 |국적 = 값찾기 |학력 = 값찾기 |활동 기간 = |등단시기 = |등단작 = |장르 = |주제 = |사조 = 값찾기 |주요 작품 = 값찾기 |수상 = 값찾기 |스승 = 값찾기 |제가 = 값찾기 |배우자 = 값찾기 |부모 = 값찾기 |형제 = 값찾기 |동거인 = 값찾기 |자녀 = 값찾기 |친척 =값찾기 |영향 받은 인물 = 값찾기 |영향 준 인물 = |서명 = 값찾기 |웹사이트 = |묘소 = 값찾기 |묘비 = 값찾기 }} '''나쓰메 소세키'''({{llang|ja|夏目 漱石, なつめ そうせき}}, [[1867년]]([[게이오]] 3년) [[1월 11일]]~[[1916년]]([[다이쇼]] 5년) [[1월 9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이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llang|ja|夏目 金之助}})이다. 《[[도련님 (소설)|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소설)|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ref name="소세키 권혁건">{{웹 인용 |url=http://www.soseki.co.kr/# |제목=소세키 연구자인 동의대 일어일문학과 권혁건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자료실의 "나쓰메 소세키 생애" |확인날짜=2008-08-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20185630/http://soseki.co.kr/# |보존날짜=2007-10-20 |url-status=dead }}</ref>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었으나, 현재 천엔(千円)권에는 노구치 히데요로 바뀌었다. 현재는 해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ref name="소세키 권혁건"/> == 생애 == === 어린 시절 === [[게이오]] 3년([[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lang|ja|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lang|ja|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lang|ja|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 (소설)|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신주쿠 구립 아이지쓰 소학교|이치가야 학교]]({{lang|ja|市ヶ谷学校}})를 거쳐 [[지요다 구립 오차노미즈 소학교|니시키하나 소학교]]({{lang|ja|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메이지]] 12년([[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lang|ja|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메이지 17년([[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메이지 19년([[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 시키와의 만남 ===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lang|ja|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lang|ja|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lang|ja|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lang|ja|和三郎}})의 아내 도세({{lang|ja|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 영국 유학 ===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교육대학|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lang|ja|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립 마쓰야마히가시 고등학교|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나쓰메 교코|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파일:Natsume Soseki house Clapham.jpg|섬네일|런던 체류 당시 나쓰메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있던 집]] [[1900년]] 5월에 [[일본 문부성|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조지 메리디스|메리디스]]나 [[찰스 디킨스|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lang|ja|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lang|ja|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ref>고야마 게이타, 소세키가 본 물리학 : 목조르기 역학에서 상대성 이론까지, [[주코 신서]], 1991년.</ref>.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 아사히 신문사 입사와 문호의 길 ===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 (소설)|런던탑]]〉이나 《[[도련님 (소설)|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 (문학)|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lang|ja|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 슈젠지의 큰 병 === [[1910년]] 6월, 《[[산시로 (소설)|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 (소설)|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노쿠니|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lang|ja|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 (소설)|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소설)|행인]]》, 《[[마음 (소설)|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 시|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 (소설)|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lang|ja|雑司ヶ谷霊園}})이다. == 1000엔 지폐 == [[파일:1000 yen Natsume Soseki.jpg|섬네일|250px|나쓰메 소세키가 새겨진 1000엔 지폐]]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지폐의 인물은 아니였다. 일본 정부는 맨 처음 [[쇼토쿠 태자]]를, 그 다음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해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대만 등의 주변국들과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는 바람에 일본 정부에서는 [[1000엔 지폐]]의 인물을 [[1984년]]([[쇼와]] 59년)에 이토 히로부미에서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로 초상이 바뀌었다. == 주요 작품 == === 소설 ===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lang|ja|吾輩は猫である}}, [[1905년]] ~ [[1906년]]) * 《[[도련님 (소설)|도련님]]》({{lang|ja|坊っちゃん}}, [[1906년]]) * 《[[풀베개]]》({{lang|ja|草枕}}, [[1906년]]) * 《[[이백십일]]》({{lang|ja|二百十日 }}, [[1906년]]) * 《[[태풍 (소설)|태풍]]》({{lang|ja|野分}}, [[1907년]]) * 《[[우미인초]]》({{lang|ja|虞美人草}}, [[1907년]]) * 《[[산시로 (소설)|산시로]]》({{lang|ja|三四郞}}, [[1908년]]) * 《[[갱부 (소설)|갱부]]》({{lang|ja|坑夫}}, [[1908년]]) * 《[[그 후]]》({{lang|ja|それから}}, [[1909년]]) * 《[[문 (소설)|문]]》({{lang|ja|門}}, [[1910년]]) * 《[[피안이 지날 때까지]]》({{lang|ja|彼岸過迄}}, [[1912년]]) * 《[[행인 (소설)|행인]]》({{lang|ja|行人}}, [[1912년]]) * 《[[마음 (소설)|마음]]》({{lang|ja|心}}, [[1914년]]) * 《[[한눈팔기]]》({{lang|ja|道草}}, [[1915년]]) * 《[[명암 (소설)|명암]]》({{lang|ja|明暗}}, [[1916년]]) === 단편 소설·소품 === * 《[[런던탑 (소설)|런던탑]]》({{lang|ja|倫敦塔}}, [[1905년]]) * 《[[환영의 방패]]》({{lang|ja|幻影の盾}}, [[1905년]]) * 《{{lang|ja|琴のそら音}}》([[1905년]]) * 《[[하룻밤]]》({{lang|ja|一夜}}, [[1905년]]) * 《[[해로행]]》({{lang|ja|薤露行}}, [[1905년]]) * 《[[취미의 유전]]》({{lang|ja|趣味の遺伝}}, [[1906년]]) * 《[[문조 (소설)|문조]]》({{lang|ja|文鳥}}, [[1908년]]) * 《[[몽십야]]》({{lang|ja|夢十夜}}, [[1908년]]) * 《[[긴 봄날의 소품]]》({{lang|ja|永日小品}}, [[1909년]]) === 평론·강연 등 === ; 평론 * 《문학론》({{lang|ja|文学論}}, [[1907년]]) * 《문학평론》({{lang|ja|文学評論}}, [[1909년]]) ; 수필 * 생각나는 것들 〈{{lang|ja|思ひ出すことなど}}〉([[1910년]]) * 〈[[유리문 안에서]]〉({{lang|ja|硝子戸の中}}, [[1915년]]) ; 강연 * 〈[[현대 일본의 개화]]〉({{lang|ja|現代日本の開化}}, [[1911년]]) * 〈[[나의 개인주의]]〉({{lang|ja|私の個人主義}}, [[1914년]]) ; 기행 * 〈{{lang|ja|カーライル博物館}}〉([[1905년]]) * 〈만한 이곳저곳〉({{lang|ja|満韓ところどころ}}, [[1909년]]) ; 시집 등 * 《소세키 하이쿠집》({{lang|ja|漱石俳句集}}, [[1917년]]) * 《소세키 시집 인보부》({{lang|ja|漱石詩集 印譜附}}, [[1919년]]) ;신체시 * 〈종군행〉({{lang|ja|従軍行}}, [[1904년]]) === 한국어 번역본 === * [[행인 (소설)|행인]], 유숙자 역, 문학과지성사, 2001. * [[유리문 안에서]], 김정숙 역, 민음사, 2000. *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미요시 유키오 편, 이종수 역, 미다스북스, 2004. * [[명암]], 김정훈 역, 범우사, 2005. * [[마음, 그 후]], 서석연 역, 범우사, 1990. * [[나쓰메 소세키 단편선집]], 김정숙 역, 삼신각, 1996. : 이 외에는 개별 작품에 판본정보가 정리되어 있다. == 명언 ==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면 안 된다. == 각주 == <references /> == 참고 문헌 == * [[에토 준]], 《소세키와 그 시대》({{lang|ja|漱石とその時代}}) * [[고모리 요이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원제: {{lang|ja|漱石を読みなおす}}) == 같이 보기 == * [[이와나미 서점]] * [[마쓰야마시]] * [[세설신어]] * [[한자성어]]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위키문헌}} * {{언어링크|ja}} [http://www.natsumesoseki.com/ 나쓰메소세키.com] {{웨이백|url=http://www.natsumesoseki.com/ |date=20110607100703 }} * {{언어링크|ja}} [https://web.archive.org/web/20030803142652/http://www2a.biglobe.ne.jp/~kimura/sosekistudy.htm 나쓰메 소세키 연구] * {{언어링크|ja}} [http://www.aozora.gr.jp/index_pages/person148.html 아오조라문고]: 작품 전문을 읽을 수 있음. * {{언어링크|ko}} [https://web.archive.org/web/20071020185630/http://soseki.co.kr/ 소세키 연구자 권혁건 교수] {{포털|문학}} {{나쓰메 소세키}} {{전거 통제}} [[분류:나쓰메 소세키| ]] [[분류:1867년 출생]] [[분류:1916년 사망]] [[분류:19세기 일본 사람]] [[분류:20세기 일본 사람]] [[분류:19세기 시인]] [[분류:20세기 시인]] [[분류:일본의 소설가]] [[분류:일본의 시인]] [[분류:일본의 영문학자]]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무사시국 사람]] [[분류:나쓰메가]] [[분류: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동문]] [[분류:도쿄 대학 동문]] [[분류:니쇼가쿠샤 대학 동문]] [[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동문]] [[분류:도쿄 대학 교수]] [[분류:도쿄 교육대학 교수]] [[분류:와세다 대학 교수]] [[분류:메이지 대학 교수]] [[분류:구마모토 대학 교수]] [[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일본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북한|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북한 (십국)}} {{구별|조선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자|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북부에 위치한 [[나라]]이다.<ref>{{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32099|제목=[여의도포럼-이진우] 북한은 국가다|성=교수|이름=이진우|날짜=2018-11-13|웹사이트=국민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6-25}}</ref> 약칭은 '''조선'''({{한자|朝鮮}})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언론과 여론 구분에 관계없이 '''북한'''({{한자|北韓}})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엔]]이 추정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024년 기준으로 약 2,561만 명이며,<ref name=":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는 [[서북 방언|평양말]]을 기초로 형성된 [[문화어]]이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이밖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 도시로는 [[남포시]], [[개성시]], [[라선시]]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 형태는 정당이 [[조선로동당]]이 있으며 사실상 [[일당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6.25 전쟁]],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여 수령 중심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손인 [[김정일]], [[김정은]]은 차례로 집권을 하며 선대의 수령주의를 이어받은 정치를 펼쳤다. 이 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의 당<ref>{{웹 인용|url=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sumryMenuId=PO006|제목=통일부|성=통일부 정치군사분석과|이름=조선노동당|날짜=|웹사이트=통일부 북한정보포털|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8일}}</ref>인 [[조선로동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 일가의 의지에 따라,<ref>{{웹 인용|url=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제목=북한 통치 이념|성=통일부|이름=|날짜=|웹사이트=통일부 북한정보포털|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7일}}</ref>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언급,<ref>{{뉴스 인용|url=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03011315578|제목='조선없는 지구 깨야'는 김정일 발언|성=최선영|이름=|날짜=2003년 1월 13일|뉴스='조선없는 지구 깨야'는 김정일 발언|출판사=한국경제신문|확인날짜=|archive-date=2020년 2월 7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207023413/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03011315578|url-status=}}</ref> '수령결사옹위정신', '자력갱생'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수령 중심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왔다. 이를 위해 경제 개방을 포함한 외부와의 전면적 교류를 꺼려 외부에서 이 국가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 국호 == {{한국사}}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조선|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 시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조조선(李朝朝鮮/리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언론과 여론 구분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ref>[[대한민국 헌법]] 제3조 참조</ref><ref>대한민국의 법을 해석하는 대한민국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니라 [[반국가단체]]로 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 영토 일부를 불법 점령 중인 것으로 이해한다.</ref> 한국어 사전상 남한,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ref>[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7017700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f>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한반도 군사 분계선|휴전선]] 이북 지역)<ref>[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17830500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f>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남한과 북한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라는 용어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 '조국' 등으로 부르고,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 혹은 '''북조선'''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zh|t=北韓|p=Běihán|h=베이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기타초센"({{llang|ja|北朝鮮}})이라는 명칭을 쓴다. == 역사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참고|한국의 역사}} === 1945년 9월 2일 이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2일]] 이전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간주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은 모두 이 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의 일정 부분을 통치한 국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는 [[단군릉]]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함경남도]] [[금야군]] 비단리에 있는 소라리토성도 대표적인 [[고조선]] 유적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명성왕]]의 묘라 추정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36호 [[동명왕릉]]과 고구려의 궁이었던 국보 2호 [[안학궁]]터와 국보 8호 [[대성산성]] 복원물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공동 2호 [[보통문]], 국보 4호 [[대동문]], 국보 19호 [[을밀대]] 등의 고구려 [[장안성 (고구려)|장안성]]에 관련된 유적도 남아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의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발해의 수도인 5경중 남해부는 남경이라 불렸으며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하였다. [[황해도]]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팔도|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 (1383년)|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조선]]의 중심권역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출신을 가리키는 [[기호인]]과 [[평안도]], [[황해도]], [[개성]]을 출신은 가리키는 [[서북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의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정주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 1945년 9월 2일 이후 ===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이 [[북위 38도#삼팔선|38선]]을 경계로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자 평안남북도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조선반도]] 적화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47년 2월 최고의결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군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날을 [[인민정권 창건일]], 다른 말로 [[9.9절]]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 6.25 전쟁 === [[파일:SeoulWarDamage2.jpg|섬네일|왼쪽|6.25 전쟁 - 폐허에서 구조 화물을 뒤지는 여인]] {{본문|6.25 전쟁}}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6.25 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조선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개성시]]([[개풍군]]), 한강&임진강 하구, [[옹진반도]], [[함박도]], [[연백군]]을 상실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속초시]], [[설악산]], [[화진포]], 대붕호 ([[파로호]]), 철원평야, 양양 [[낙산사]]를 상실하게 되었다. === 6.25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 [[파일:Kim Il Sung Portrait-3.jpg|섬네일|[[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공산주의 운동)|소련파]] 계열, [[연안파 (공산주의 운동)|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꾸었다. *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 주체사상의 헌법 규범화 * 국가주석제 도입 및 권한 강화 * 집단주의 강조(조직적체계)}}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ref>김당택, 《우리 한국사 (정치사 중심의 새로운 한국 통사)》, 푸른역사, 501쪽</ref>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 [[김정일]] 정권 === [[파일:Kim Jong-il on August 24, 2011.jpg|섬네일|[[김정일]]]]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고 비축물자도 없고, 전투 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사일 발사 사건|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시]]에서 만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가 관광 도중 총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 [[김정은]] 정권 === [[파일:Kim Jong Un with Honor Guard portrait.jpg|섬네일|[[김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4성 장군|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 (군인)|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ref name="쿠쿠루삥뽕급|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년 3월 8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3일|보존url 4월 26일, [[대한민국]]의 [[류길재]]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했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제목 = 정부 "개성공단 남측인원 전원철수"…폐쇄 위기|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년 4월 2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7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531115855/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보존날짜 = 2013년 5월 31일|url-status = dead}}</ref>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1.kr/articles/1109709|제목 = 개성공단 126명 1차귀환 완료..29일 전원철수(종합)|저자 = 조영빈|날짜 = 2013년 4월 27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7일}}</ref>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479593|제목 = 北 개성공단 마지막 체류 50명 중 일부만 귀환 허가(1보)|저자 = 박지환|날짜 = 2013년 4월 29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9일}}</ref>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2017년 9월 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동창리]] 미사일 기지를 폭파 및 폐쇄하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520148600504|제목=트럼프 "북한 핵시설 5곳"…영변 外 시설 더 있나|성=김동현|날짜=2019-05-20|언어=ko|확인날짜=2019-08-11}}</ref><ref>{{웹 인용|url=https://mnews.joins.com/article/23474577|제목=트럼프 "북핵 나머지 3곳", 서위리·강선·분강 지하시설 가능성|날짜=2019-05-21|언어=ko|확인날짜=2019-08-11}}</ref>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ref>{{웹 인용|url=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08111452001|제목=북, 신형 단거리 '3종 고체 발사체 세트’로 스커드 액체 미사일 대체|날짜=2019-08-11|확인날짜=2019-08-11}}</ref>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에만 5월 4일에 1발 (고도 60여km, 사거리 240여km), 5월 9일에 2발 (고도 45~60여km, 사거리 420여km 및 270여km), 7월 25일에 2발 (고도 50여km, 사거리 600여km), 7월 31일에 2발 (고도 30여km, 사거리 250여km), 8월 2일에 2발 (고도 25여km, 사거리 220여km), 8월 16일에 2발 (고도는 30여㎞, 사거리 230여㎞)등을 발사하였다. [[대한민국]]의 [[킬 체인|킬체인]]체계 하의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미사일방어체계]]와 [[THAAD|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 정치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국가주석]]직을 신설해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주체를 명분으로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고 우상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주체사상을 통치 이념화하였다. 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해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도입한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 위원장 자격으로 통치하였으며 선군 사상을 표방하여 선군 정치를 하였다. 김정은은 북한만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조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국가나 민족의 사유화를 시도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n.news.naver.com/article/088/0000855656|제목=北 "한국 훈련 대응으로 해상사격…동족 개념 이미 삭제"|언어=ko|확인날짜=2024-01-06}}</ref> 그들은 세월은 흐르고 세대가 열백번 바뀌여도 변할수도 바뀔수도 없는것이 백두의 혈통이라는 주장으로 장성택을 처형하기도 했다.<ref>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6648221?sid=100</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수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당 독재<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ref> 체제다.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최룡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102217195&code=910303 경향신문 2010.10.10. 김정은 후계 공식화 ‘대미’… 북, 행사 첫 생중계]</ref> 2011년 김정일이 죽자 김정은이 실권을 장악했다. === 최고인민회의 === {{본문|최고인민회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 국방위원회 ===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1928년)|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 산하기관 ** [[국가보위성]] *** [[인민무력성]] === 내각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 정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 선거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대 지도자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목록}} * 1대: [[김일성]] * 2대: [[김정일]] * 3대: [[김정은]] == 대외 관계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재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ref name="동아19880913"/>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2761&cid=43865&categoryId=43866 북한과 루마니아의 관계], 루마니아 개황, 2006.9, [[대한민국 외교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재인용</ref> === 대한민국과의 관계 === {{본문|남북 관계}}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영토는 조선반도와 부속영토로 하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국가단체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 실효지역은 미수복영토이다.<ref>{{웹 인용|ur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724/65400600/1|제목=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날짜=2014-07-24|언어=ko|확인날짜=2020-02-12}}</ref><ref>{{웹 인용|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642|제목=靑, ‘북한과 합의는 조약 아냐...위헌 불성립’ - 통일뉴스|언어=ko|확인날짜=2020-02-12}}</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자국을 '''조선'''(朝鮮), '''공화국''', '''조국''', 혹은 '''북조선'''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때부터 [[국무원]] 고시에 의하여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을 금지하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만 쓴다. 양측의 관계는 70년대 이전에는 6.25 전쟁 등의 여파로 적대적이었고, 70년대 이후 5년 이내의 주기로 화해와 대립을 반복하였다. 한국 정치권에서 이 정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큰 상황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조선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기도 하였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과사전|《력사사전》]] '남조선괴뢰정부' 항목</ref>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화를 통해 통일을 하자는 주장, 이 정부가 없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대립하고 있다. 남북은 대화를 하며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와 같은 방안이 논의된 적도 있으나, 이것이 다시 무산되다가 대화가 추진되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남북 관계에서 일어난, 기존의 남북 관계를 바꾼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68년 [[1.21 사태]] *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 1983년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 1996년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 1999년 [[제1연평해전]] * 2000년 [[남북정상회담]] * 2002년 [[제2연평해전]] * 2007년 [[남북정상회담]] * 2010년 [[연평도 포격전]] *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 2018년 [[남북정상회담]] *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 ==== [[대한민국]] 측의 주장 ====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ref>[http://ko.wikisource.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A%B5%AD%EA%B0%80%EB%B3%B4%EC%95%88%EB%B2%95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제1장 제2조] 에서는 "반국가단체"를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간주된다. [http://freedom.jinbo.net/new_http/bbs/view.php?id=column&no=89 ②국보법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요?] - 최병모 변호사, [http://jus.snu.ac.kr/~kukcho/bbs/view.php?id=board30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24 〈2003.06.23 동아〉 국가보안법 개폐 금요대토론] - 법학자 [[조국 (법학자)|조국]], 《조국 교수의 사랑채》 게시판, [http://www.tongil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76613 화해협력시대를 반영한 역사적 판단] {{웨이백|url=http://www.tongil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76613 |date=20171108205509 }} -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통일뉴스》</ref>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123 개폐 논란 ‘계류중’]{{깨진 링크|url=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123 }} 1994년 9월 1일 《시사저널》 253호</ref>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ref>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웹사이트에 실린 [http://www.615.or.kr/board/view.php?&bbs_id=non&doc_num=1445 2009년 2월 27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실천연대 조작사건 1심 재판 참관 후기] {{웨이백|url=http://www.615.or.kr/board/view.php?&bbs_id=non&doc_num=1445# |date=20090803133355 }} 중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이재봉 교수의 말</ref>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ref>대법원 국가보안법</ref>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ref>{{웹 인용 |url=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43/66/IMG/NR004366.pdf?OpenElement |제목=ODS HOME PAGE |확인날짜=2018년 9월 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3061108/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43/66/IMG/NR004366.pdf?OpenElement |보존날짜=2013년 10월 23일 |url-status=dead }}</ref>에서, [[대한민국 정부]](大韓民國政府,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조선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ref>{{웹 인용 |url=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51/12/IMG/NR005112.pdf?OpenElement#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1-10-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109070659/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51/12/IMG/NR005112.pdf?OpenElement# |보존날짜=2015-01-09 |url-status=dead }}</ref> 또한 이를 확인했다. === 중국과의 관계 === {{참고|조중 관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승준 |제목=한국과 중국 100년 |연도= 2010|출판사=기파랑 |위치=서울 |ISBN=978-89-91965-12-6 |쪽= 16|인용문 = ...1949년... 중국은 이보다 닷새 뒤인 10월 6일 북한과 수교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간주하는 듯 했으나,...}}</ref> 6.25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조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조선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9722.html | 제목=북-중,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출판사 = 한겨레신문사 | 뉴스 = 한겨레21 | 날짜 = 2011-06-06}}</ref>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72554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72554] 2010-12-27 노컷뉴스</ref> 베이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2/09/0200000000AKR20110209045600073.HTML "北 무역상 베이징서만 1천명 외화벌이"] 2011-02-09 연합뉴스</ref>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 일본과의 관계 === {{참고|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 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조선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ref name="글로벌 한일관계 한·일 양국간의 문제점">《[[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일본의 관계#한·일 양국간의 문제점|한·일 양국간의 문제점]]〉</ref>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 러시아와의 관계 === {{참고|러시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 1956년경, [[박영빈]]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은 미국과 평화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평화 공존 정책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격분하여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과 직접 전쟁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를 단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f>김학준, 《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1995) 185~186</ref> 1961년에는 소련과의 상호 협력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1996년에 효력이 상실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는 군사 동맹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 독일과의 관계 === [[파일:Bundesarchiv Bild 183-1987-0130-315, Berlin, Nordkoreanische Botschaft.jpg|섬네일|베를린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1987년)]] [[파일:Bundesarchiv Bild 183-20634-0003, Berlin, Ankunft von koreanischen Gaststudenten.jpg|섬네일|독일민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칼 마르크스 대학(라이프치히)에 유학중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들 (1953년)]] 1990년 [[독일의 재통일]]로 인해 평양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의 권리는 국제법상 공식적으로는 [[스웨덴]] 대사관에 귀속되었다. 1만 6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공관이었다.<ref>{{뉴스 인용|저자=이선근 특파원|제목=[미니박스] 美연락사무소 후보지 평양주재 옛 동독대사관|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95592|뉴스=연합뉴스|위치= |날짜=1995-06-13}}</ref> 2000년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이 세워졌다.<ref>{{뉴스 인용|저자=조기원 기자|제목=“10년전 한국 요청으로 평양내 독일대사관 다시 열어”|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29930|뉴스=한겨레|위치= |날짜=2010-02-04}}</ref> 2002년 1월 서방국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 스웨덴과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지만 대리대사가 이끌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75184]</ref> ===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 오스트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오랜 기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 대통령이었던 [[하인츠 피셔]]는 조선.오스트리아친선협회의 창립 회원이자 공동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2000년과 2017년 정권이 바뀌면서 양국 관계는 약간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국민당|ÖVP]]와 FPÖ 등의 연립 정당은 대체로 조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이를 이용해 정치적인 경쟁상대를 비방하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unzensuriert.at/74642-wann-distanziert-sich-heinz-fischer-endlich-von-nordkorea/|제목=Wann distanziert sich Heinz Fischer endlich von Nordkorea? - Unzensuriert|날짜=2010-03-20|언어=de-DE|확인날짜=2023-03-06}}</ref><ref>{{웹 인용|url=https://www.ots.at/presseaussendung/OTS_20100420_OTS0242/nordkorea-gesellschaft-roter-praesidentschaftskandidat-heinz-fischer-der-unwahrheit-ueberfuehrt|제목=Nordkorea-Gesellschaft: Roter Präsidentschaftskandidat Heinz Fischer der Unwahrheit überführt|언어=de|확인날짜=2023-03-06}}</ref> 오스트리아에는 약 100여명의 조선인 인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빈]]에만 10명 가량의 [[국가보위성]] 요원이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0-12-05/for-north-korean-spies-vienna-provides-key-gateway-to-europe|제목=For North Korean Spies, Vienna Provides Key Gateway to Europe|날짜=2020-12-05|뉴스=Bloomberg.com|언어=en|확인날짜=2023-03-07}}</ref> 한때 조선이 유럽에서 운영한 마지막 은행인 [[골든스타 은행]]이 [[빈]]에 자리하기도 했다. === 기타 === * '''{{ROC}}''': [[1992년]]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단교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 '''{{USA}}''': 건국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을 주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많은 선전물에 미국을 적대시하는 등 미국과는 수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최근 6.12 북미회담으로 한동안 관계가 좋아졌다가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2월 27일 [[2019년 2월 북미정상회담|제2차 북미회담]]에서 결렬된 이후 다시 사이가 악화되었다. * '''{{SPA}}''': 2000년 12월 15일 스페인 정부는 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조선반도 화해와 정상화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040385]</ref> 그러나 대사관 설립여부는 밝히지 않았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042936]</ref>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한 국가들의 상주공관은 평양보다 베이징에 훨씬 더 많이 있는 실정이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79&aid=0002036976]</ref> * '''{{SWI}}''': 1974년 2월 27일, 취리히에 통상대표부를 개설하는 등 대 스위스 경제교류 촉진책을 써왔고, 1974년 12월 19일에 스위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1220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12-20&officeId=00020&pageNo=1&printNo=16377&publishType=00020 |제목=스위스北傀 修交합의 |출판사= [[동아일보]] | 날짜 = 1974-12-20 |쪽=1}}</ref> 스위스의 인도적 대북 지원량이 1997년 들어 급증하자, 1997년 8월 5일부터 9일까지 발터 푸스트 스위스 외무성 인도주의협조총국장을 수석대표로 한 외무성대표단이 방문해 평양에 스위스 외무성 직원 1∼2명이 상주하는 사무소를 개설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공개 합의했다. 1998년 평양주재 스위스 외무성 사무소가 설치되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539163]</ref> * '''{{ARG}}''': 아르헨티나는 세계 수위권 수준의 낙농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르헨티나와 1973년에 수교를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500만 달러 어치의 곡식을 '''외상'''으로 아르헨티나에게 수입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7년 돌연 아르헨티나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외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자동으로 단절되었으며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 측에서는 굉장히 황당해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르헨티나에게 재수교를 원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는 곡물 대금을 갚으면 다시 수교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 '''{{ITA}}''': 2000년 1월 [[G7]]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2001년 6월 20일 마테오 피카리엘로 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 서울 사무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경제 사절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최초의 이탈리아 경제사절단의 평양 방문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 하나인 뱅카 나치오날레 델 라보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C.S.I 테오레마, 의류업체 오벰 등이 포함되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128553]</ref> 2001년부터 이탈리아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과 의사, 연구원들을 이탈리아에 초청해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연간 20명 정도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664556]</ref> 평양에는 이탈리아 외교부 산하 개발협력처 평양 사무소가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6333]</ref> 평양의 광복거리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방장이 피자 재료까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원래의 맛을 추구하는 평양 최초의 이탈리아 피자가게가 2008년 12월 문을 열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1990834]</ref> 2009년 평양에 이탈리아 요리 전문식당이 하나 더 생겨 모두 3곳으로 늘면서, 피자와 스파게티가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203783]</ref> * '''{{POL}}''': 2010년 [[쇼팽]] 탄생 200돌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공동음악회를 열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北, 쇼팽 탄생 200돌 기념 폴란드와 공동음악회 |url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31958 |출판사 = 노컷뉴스 |저자 = 안윤석 대기자 |날짜 = 2010-11-12 |확인날짜 = 2010-11-17 }}{{깨진 링크|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31958 }}</ref> * '''{{FRA}}''': 1972년 6월 파리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이어서 1984년 12월 그것을 일반 상주 대표부로 승격시킨 바 있는 이 때, [[대한민국 정부]]는 윤석헌 주프랑스 대사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항의의 뜻을 표했었다. 또한 평양에 프랑스와의 합작투자 호텔을 건립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드문 선물을 주면서 서방국가에 외교적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ref name="동아19880913">{{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130020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13&officeId=00020&pageNo=1&printNo=20599&publishType=00020 |제목 =韓-헝가리 代表部설치 의미와 波長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1988-09-13 |쪽 =3 }}{{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130020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13&officeId=00020&pageNo=1&printNo=20599&publishType=00020 }}</ref> * '''{{HUN}}''': 1988년 조선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대사로 임명한 것을 두고 권력 계승을 둘러싼 갈등 문제와 관련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만큼 헝가리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ref name="동아19880913"/> * '''{{GBR}}''': 2001년 7월 28일 주 런던 대사관이 임시 개설되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138068]</ref> 2003년 4월 30일 최수헌 조선 외무성 부상이 주 영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런던 서부 주택가 일링의 거너스버리에 위치한 130만 파운드 짜리 저택을 매입해 대사관으로 개조했다.<ref name="news.naver.com">[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0065493]</ref> 서유럽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에 이어 6번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외교공관이며, 개관식에는 최수헌 외무성 부상, 리시홍 대리대사, 주 영국 중국 대사, 영국 외무부 관계자, 하원의원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개관식이 열리는 동안 대사관 앞에서 영국 인권단체인 세계기독연대(CSW·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와 ‘릴리즈 인터내셔널(Release International)’이 공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ref name="news.naver.com"/> * '''{{SWE}}''': 스웨덴은 반제국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197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75년 3월에는 서방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대사관을 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 출신의 외국인([[대한민국]], [[일본]] 제외)은 스웨덴 대사관이 보호한다. * '''{{YEM}}''': [[예멘]]에서는 조선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Koryo Traditional Medicine: an oriental solution for Yemeni patients |저자= Nadia Al-Sakkaf |url= http://yementimes.com/article.shtml?i=1224&p=health&a=1 |출판사= Yemen Times |언어= 영어 |확인날짜= 2015-08-21 |archive-date= 2009-06-05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90605033112/http://yementimes.com/article.shtml?i=1224&p=health&a=1 |url-status= }}</ref> == 군사 == [[파일:North Korean soldier Demilitarized Zone of Korea 2005.jpg|섬네일|공동경비구역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병사(2005년)]] {{본문|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노동당의 '당군'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조선로동당|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병제|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만 보면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되었기에 실질적인 전투 능력에 일정한 제한이 따른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주적인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장사정포|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0,000 ~ 13,000&nbsp;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nbsp;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nbsp;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등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대량살상무기 문제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문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였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04952 美, `北핵보유국' 표기해명..수정은 안해)</ref>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 (1928년)|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 행정 구역 == [[파일:Divisions of North Korea ko.svg|섬네일|400px|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3[[특별시]], 9[[도 (행정 구역)|도]], 2지구, 1특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 직할시 === * [[평양시]] === 특별시 === * [[개성시]] * [[남포시]] * [[라선시]] === 도 === * [[평안남도]] * [[평안북도]] * [[함경남도]] * [[함경북도]] * [[황해남도]] * [[황해북도]] * [[자강도]] * [[량강도]] * [[강원도 (북)|강원도]] == 지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 시간 === {{본문|평양시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를 [[평양시간]]이라고 부르며, 현재 [[동경 135도|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 위치와 면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위도|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경도|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nbsp;km<sup>2</sup>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ref name="TY">[http://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sumryMenuId=SO301 북한 지역의 위치와 면적]</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nbsp;km<sup>2</sup>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nbsp;km<sup>2</sup>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nbsp;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 지형 === [[파일:North Korea Topography.png|섬네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형도]]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랑림산맥|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7824&mobile&cid=46629&categoryId=4662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 기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쾨펜의 기후 구분|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 식생 === [[파일:Siperiantiikeri Korkeasaari.jpg|섬네일|왼쪽|전과범(시베리아호랑이)]]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 지하자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서조선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ref>{{뉴스 인용|저자=고수석 기자|제목=[고수석의 대동강 생생 토크] 북한 원유 매장량 세계 8위? … 채굴비 없어 '그림의 떡'|url=https://www.joongang.co.kr/article/17367743|뉴스=중앙일보|위치= |날짜=2015-03-17}}</ref> == 경제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부분적인 시장화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전반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인당 GDP는 구 공산권 국가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떠한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파일:Korea electricity.PNG|섬네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빨강)과 대한민국(파랑)의 전기 사용량 비교]] [[파일:Earthlights in nkorea.jpg|섬네일|[[미국 항공우주국]]이 2000년에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부분의 지역이 어둡게 나타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곽인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북한 내부 현금보유액은 총 1,000억달러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그 중 민간 부문에서는 430억달러, 정부 부문이 700억달러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평양 주민의 100만 명이 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3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평양 외곽 지역까지 따지면 100만 명 보다도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GDP 규모로 따지면 평양만 2,700달러가 넘는다.<ref>{{웹 인용|url=http://www.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88|제목=[곽인옥 교수의 평양워치(21)]평양 돈주들 현금보유액은 얼마? - e경제뉴스|성=숙명여대 교수|이름=곽인옥|날짜=2019-08-14|웹사이트=e경제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3}}</ref><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61222070800002|제목=KDI "평양 1인당 소득 2천700달러…북한 다른 지역 3배"|성=기자|이름=박대한|날짜=2016-12-22|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3}}</ref> [[평양시]]는 상류층인 왕돈주와 대돈주와 중돈주가 합하여 5%이고 중류층인 소돈주가 15%가 있고 중산층인 돈주급은 20%가 존재하고 있다. 그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지방에는 대돈주 2부류와 중돈주를 합한 상류층은 1.7%가 존재하고 중류층인 소돈주는 4.5%가 존재하며 특히 돈주급은 전체 지방의 2%가 존재한다. 즉 지방은 대돈주와 중돈주 그리고 소돈주를 포함한 상류층 5%, 돈주급과 중간층을 포함한 중류층 25%, 150달러를 버는 하류층 70%로 구성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ajunews.com/view/20180726145931169|제목=북한 무역회사 및 물품의 유통 구조|성=숙명여대 교수|이름=곽인옥|날짜=2018-07-26|웹사이트=아주경제|출판사=|확인날짜=2020-07-07}}</ref>[[파일:Pyongyang 125.73173E 39.02390N.jpg|섬네일|평양시의 위성 사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차 5개년 계획|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909006005 (北 오늘 9·9절) ‘北 정권60돌’ 최대규모로… 주민은 ‘원조’ 연명]</ref>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미국 달러|달러]]로 추계된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2002년]]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 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나 이 조치의 실시 결과로 계획 메커니즘을 제외한 시장형 메커니즘을 전부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경제개혁의 재평가와 전망|저널=대외경제정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임수호|날짜=2015-12-30|쪽=p. 42}}</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 (경제)|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하지만 [[200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결국 물가가 폭등을 하면서 결국 2010년 2월부터 다시 시장이 개방이 되었고 5월 26일에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5.26 지시를 발표하여 부분적인 경제 개혁안들이 실행을 하여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화폐개혁-이후-북한의-시장-통제-조/|제목=화폐개혁 이후 북한의 시장 통제 조치 일지|성=기자|이름=남궁민|날짜=2010-11-30|언어=ko-KR|확인날짜=2020-01-10}}</ref><ref>{{웹 인용|ur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00615/29114187/1|제목=“北 식량배급 포기… 장마당 전면허용”|성=주성하|이름=|날짜=2010-06-15|웹사이트=동아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2-14}}</ref>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의 의견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ref name=":1" />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ref name=":1">{{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1211148200504|제목="北, 시장사회주의 초입…제재가 체제변화동력 약화할 수도"|성=이준삼|이름=|날짜=2019-12-11|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3-10}}</ref>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815038400504|제목=文대통령 "北, 시장경제 도입"…북한판 경제개혁 어디까지 왔나|성=기자|이름=류미나|날짜=2019-08-15|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3-10}}</ref> === 기아문제 === 이 국가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식량난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식량난이 과장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ref>{{뉴스 인용|저자=김준억,김용래 기자|제목=북한주민 기대수명 남한보다 11세 낮아|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779426|뉴스=연합뉴스|위치= |날짜=2010-11-22}}</ref><ref name="통계청">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108780 북한 ‘고난의 행군’ 5년 동안 주민 33만 명 굶어 죽어</ref>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만성적인 식량 부족은 200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주성하 기자|제목=[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 매춘과 마약의 충격 실태|url=https://www.donga.com/news/Culture/more23/article/all/20160707/79060833/1#csidx26970ea92d2fc11be3803b0a5ac2230|뉴스=동아일보|위치= |날짜=2016-07-07}}</ref>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조선로동당|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58690 "北, 대남 경협기구 축소개편"<방북 전문가>]</ref>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59910 <北대남경협기구 개편설 의미는>(종합)]</ref>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9246 北 "라면 대량생산 통해 식량난 극복한다"]</ref>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3/2011050300951.html WSJ, 방북한 카터에게 연일 맹공]</ref>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news/102111-Amos-132332333.html |제목=유엔 OCHA 국장, "북한, 외부 식량 지원 필요성 확인" |확인날짜=2011-1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025063339/http://www.voanews.com/korean/news/102111-Amos-132332333.html |보존날짜=2011-10-25 |url-status=dead }}</ref> 유럽연합(EU)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17일 세계 식량의 날(10월 16일)에 즈음해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등이 최근 발표한 '글로벌 기아 지수(GLOBAL HUNGER INDEX·GHI)' 보고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0/17/0200000000AKR20161017161100098.HTML|제목="北기아지수 2000년 40.4→올해 28.6 개선…여전히 심각 수준"|성[email protected]|이름=|날짜=2016-10-17|뉴스=|출판사=연합뉴스|확인날짜=}}</ref> 2015년 이후 북한에 결식자가 거의 없다는 응답도 나왔음을 알수가 있는데 하루 식사를 몇회 했느냐는 질문에 거의 90%는 하루 세끼 이상이라고 답했음을 알수가 있고 주식으로는 백미를 먹었다는 응답이 70%로 지난해 45.3%에 비해 크게 올랐으며 고기에 대한 섭취율은 50%가 일주일에 한두번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매일이라고 답한 비율도 상당히 높았다.<ref>{{웹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91104512983|제목=北 부유층 중심 새 결혼 풍속도… ‘5장6기’ 대신 ‘손오공아’ 뜬다|날짜=2019-11-05|언어=ko|확인날짜=2020-01-10}}</ref> === 전력문제 === [[대한민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량은 216억 kWh로, 한국의 70년대 후반 1인당 발전량 수준에 불과하고 같은 해 한국의 발전량은 5220억 kWh로, 북한의 24배에 달한다.<ref name=":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설비용량은 2007년 795만kW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희천발전소를 비롯한 발전소 잇단 준공으로 2014년 725만kW까지 늘어났다.<ref name=":2" /> 하지만 이는 북한이 1987년에 발표한 제3차 7개년 계획의 발전 설비 용량 목표치인 1천700만kW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대한민국 통일부]]가 지난 2013년 탈북자 1,07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장기업소의 하루 평균 전력 공급 시간은 거의 12시간으로 조사되었다.<ref name=":2" /> 전력 공급 중단 시 자체 발전을 통해 전력 공급을 한 곳은 14.9%에 불과하고 2011년 이후 공장 내 생산라인 평균 개수는 거의 19개로, 이 가운데 가동된 라인은 절반 미만에 그쳤다.<ref name=":2" />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력 수급의 60%를 담당하는 수력 발전이 가뭄과 겨울철 갈수기 등 기상 여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불안정하다는 데 있고 지난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2014년에 이어 지난해 6월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가동률이 떨어졌음을 한국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 연구 위원이 말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s://www.voakorea.com/korea/korea-economy/3396898|제목=[기획보도] 북한 전력문제 해결 시급..."외부 자본·기술 도입해야"|성=김은지|이름=|날짜=2016-06-29|웹사이트=미국의 소리|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4|archive-date=2020-03-04|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304084626/https://www.voakorea.com/korea/korea-economy/3396898|url-status=dead}}</ref> 하지만 이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정책적으로 [[태양열]] 이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김정은]]은 2010년대 중반부터 태양열 등을 활용한 자연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해 이용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양열 패널 가격은 2 - 3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렸고 태양열 발전 시설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이 자유로워 열 효율이 개선돼 패널의 크기나 무게도 줄었으며 웬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정에서는 대부분 태양광 설치가 끝나 수요도 감소세로 보이고 있고 대신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태양열 시설은 늘고 있다. 데일리 NK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이나 원산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평북 염천 등 내륙 산간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세대별 태양광 발전 보급률은 50%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태양광-사용-가정-절반-넘어서발전용량이-빈부/|제목=北 태양광 사용 가정 크게 늘어…발전용량이 빈부격차 반영|성=기자|이름=강미진|날짜=2019-04-04|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ko-KR|확인날짜=2020-03-04}}</ref> 대부분의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민은 거의 모두 태양광 패널을 달며 크기가 작은 건 150W 태양광 패널이고 큰 것은 200 - 250W라고 밝히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사용 시간은 최소 8시간에서 최대 13시간까지 사용을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기가 일정하게 안 와서 [[인버터]]도 따로 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태양광 패널에 [[이차 전지|축전지]]와 [[인버터]]가 함께 나온다고 밝히고 [[중국]]에서 파는 태양광 패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실정에 맞게 인버터가 같이 나와서 이제는 인버터를 잘 안 산다고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전력도-자력갱생-北주민-태양판-좋아져-국가-전/|제목=전력도 '자력갱생'...北주민 “태양판 좋아져...국가 전기 안 바라”|성=기자|이름=문동희|날짜=2019-03-04|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4}}</ref> === 직업 === [[파일:Pyongyang Metro.JPG|섬네일|[[평양 지하철도]]]] [[1992년]] 개정된 공산주의 헌법 70조에 따르면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나 국가기관에서 배치한 데 따라 일해야 하며 그 기준이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성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2010년대 경제 개혁 이후 사적 고용의 확대를 지적하는 사례가 몇 존재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적 고용의 확대는 아직까지 대부분 비공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돈주는 물론 평범한 장사꾼들과 가정주부들도 일공을 채용해 구멍탄을 빚는 것이 시간과 돈을 절약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종전에는 자신이 석탄을 구입해 구멍탄을 직접 만들어 온 주민들이 최근에는 구멍탄을 만들어 주는 일공을 고용하고 있다.<ref name=":4">{{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도시-골목-구멍탄-찍어내는-일공日/|제목=“北도시 골목 구멍탄 찍어내는 일공(日工) 즐비…진풍경”|성=기자|이름=설송아|날짜=2015-10-13|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5}}</ref> === 주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조선로동당]], [[내각]], [[조선인민군]]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주방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2000년대 들어 평양에서는 집 다음에 계급투쟁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동산 열풍이 지속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부동산 투자로 100만 달러 이상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들은 30평대 아파트를 3 ~ 4만 달러에 분양받아 인테리어를 한 뒤 최고 10만 달러에 되팔아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들 브로커는 국내 돈주뿐만 아니라 화교 상인이나 조선족의 자본을 유치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 민간 사업자는 자금력을 가진 국내외 개인일 수 있고 여러 명의 컨소시엄 형태나 단체일 수도 있다. 이들은 건설 자금 - 자재 - 장비 등에 필요한 일체의 자금과 현물을 제공하고 대개 자재는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되고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제2경제, 인민보안성 등과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 화폐개혁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 [[2009년]] [[11월 30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개혁조치|7·1 경제개혁조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72763|제목=북, 17년 만에 '화폐개혁'... "강성대국 재원마련 고육지책"|날짜=2009-12-01|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390735.html 북 화폐개혁]</ref><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2/01/0200000000AKR20091201046000014.HTML 북한, 화폐개혁 왜 단행했나]</ref><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12/02/0511000000AKR20091202144800014.HTML] 北화폐개혁 혼란 계속..교환조건 잇따라 조정</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는 충언을 하다가 결국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알수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co-jj-01152013105129.html|제목=[김씨 일가의 실체] 북한 계획재정부장 박남기 처형의 실제 원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2-14}}</ref> 하지만 2013년 이후 2019년 북한연구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반론이 나왔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013년 이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당국의 통화 정책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정연욱 박사에 따르면 쌀 가격 등으로 추정한 북한의 물가 상승률은 2011년 229%까지 폭등했지만, 2014년에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5% 이내로 안정됐음을 알수가 있고 계속 안정중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북한의 환율 추이를 보면 불안정하던 환율은 2013년부터 8천원 선을 굳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가 가능하던 이유로는 통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와 악화일로로만 걷지 않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하였음을 알수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1011041700504|제목="北, '조용한' 통화정책 2013년부터 진행…물가 안정 성과"|성=정성조|날짜=2019-10-11|언어=ko|확인날짜=2020-01-10}}</ref> 북한 해커가 쓰는 용어를 한국식으로 바꾸어서 해킹을 시도하고 있다. 출처:[https://www.dailynk.com/%e5%8c%97-%ed%95%b4%ec%bb%a4-%eb%a1%9c%eb%8f%99%eb%8b%b9%e2%86%92%eb%85%b8%eb%8f%99%eb%8b%b9%ec%9c%bc%eb%a1%9c-%ec%8a%ac%ec%a9%8d-%eb%b0%94%ea%bf%94-%ec%9e%ac%ea%b3%b5%ea%b2%a9-%e5%8d%97/] ===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 {{본문|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7747|제목=北, 금년 4월부터 중국식 경제개혁 하려 했다!|성=기자|이름=최경선|날짜=2012-02-03|웹사이트=코나스넷|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6-01}}</ref>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539572.html|제목=“북한 김정일 사망 직전 경제 개혁 추진”|날짜=2012-06-25|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었으나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 담당 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2014년]] 5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내각]] 기관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5.30 경제개혁조치|5.30 담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이때 담화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 활동을 창의적으로 해 [[조선로동당]]과 국가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가 생산과 관리에 주인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 관리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가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nocutnews.co.kr/news/4349978|제목=북한 '5.30조치', 김정은 제1비서의 경제관련 담화|날짜=2015-01-06|확인날짜=2020-02-14}}</ref> 현재 [[김영환 (1963년)|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의 말에 의거하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대 월급 인상률은 일반 공업인에게는 25배의 월급 인상률이 올라 15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고 일반 편의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서는 10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0697|제목="북 국영기업 노동자 월급 0.5$→100$로 200배 상승"|날짜=2018-06-01|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이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현재 계획형 기업에도 상당한 액수가 인상이 되었으며 현재 가동률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 60% 가까이 가동률이 올라갔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의 산업 및 산업 정책,|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6|쪽=p. 229 - 236}}</ref> 은행에 자금을 예치함으로써 은행이 기업에게 넘겨줌으로 특히 영향력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기반을 담은 규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위험 요소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투자방식이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287}}</ref> 차후 채무 상환 불응시 현금 계좌 선 압류 및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즉시 선입금되는 조치로 인한 강제 집행을 통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조항들도 수록이 되어 있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78}}</ref> 특히 고정 자산을 임대하거나 혹은 [[내각]]에 관할하에 소규모 기업에게 이관할 수 있음을 차후인 2015년에 공식화하였으며 이를 2015년 기업소법에 명확히 하였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129}}</ref> == 주민 ==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 인구와 분포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 {{참고|한국#인구|설명=일제강점기 이전의 인구에 대해서는}} [[201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458만 9,122명(출처:CIA The World Factbook)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약 200명/km<sup>2</sup>이다. 인구는 대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해안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2004년 인구 증가율은 약 1%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가속화되어 2002년 기준으로 총인구의 61%가 도시지역에 산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평양시|평양]]으로, [[2010년]] 인구는 251만4,692 명이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함흥시|함흥]], [[청진시|청진]]이 이렇게 평양과 3대 대도시를 이루며 그 외 [[남포시|남포]], [[개성시|개성]], [[신의주시|신의주]], [[원산시|원산]] 등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동해]]안의 경제 무역 도시인 라진과 선봉이 합쳐 인구 40만 명 규모의 [[라선시]]가 되었으며, 이 도시는 [[2010년]] 1월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UN이 추정하는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2550만명이지만<ref name=":0">{{웹 인용|url=https://population.un.org/wpp/|제목=World Population Prospects|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816232627/http://esa.un.org/unpd/wpp/index.htm|보존날짜=2015년 8월 16일|url-status=dead|확인날짜=2020년 2월 10일}}</ref>,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ref>{{웹 인용|url=https://nklogin.com/post/Postmng?ptype=v&contentkey=BFC1558085398|제목=최초 공개-450만 명이 부풀려진 북한 인구 통계의 비밀, 북한 식량위기는 어떻게 조작됐나|성=주성하|이름=|날짜=|웹사이트=NK LOGIN|출판사=|확인날짜=|archive-date=2020-08-0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807130729/https://nklogin.com/post/Postmng?contentkey=BFC1558085398&ptype=v|url-status=}}</ref> 이 있다. === 언어 === {{참고|문화어}}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둔 언어를 표방한다. 표기상 [[한국어의 한자|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외래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어,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일상 생활,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와 통역 없이 소통이 가능하나 의학 용어와 같은 기술적 어휘에는 차이가 커 이 부분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역 방언으로 방언연구회(2001)의 구분에 따르면 서북 방언, 동북 방언, 중부 방언이 통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 사회 == === 인권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ref>{{뉴스 인용|저자=박정훈 기자|제목=정부, 北 정치범수용소 위치-인원-실태 첫 공식 확인|url=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307283&iid=145640&oid=020&aid=0002084758&ptype=011|뉴스=동아일보|위치= |날짜=2009-10-17}}</ref>.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66986 유엔아동위 "北, 아편재배 어린이 동원"), 《데일리NK》, 2009.02.01.</ref>,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400&num=66823 北 대표단, 소년병 문제 간접시인 발언"). 《데일리NK》, 2009.01.27.</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 정치범수용소|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 정치범수용소|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 정치범수용소|화성(16호 관리소)]], [[청진 정치범수용소|청진(25호 관리소)]], [[회령 정치범수용소|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ref>{{뉴스 인용|제목 =北 정치범 수용소 6곳… 15만4000명 수감|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1/19/2011011900069.html |출판사 = [[조선일보]] |날짜 = 2011-01-19|확인날짜 = 2011-02-03}}</ref> === 종교 === {{bar box |title=종교구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titlebar=#ddd |float=right |bars= {{백분율 막대|[[무종교]]|gray|64.3}} {{백분율 막대|[[전통종교]]|green|16}} {{백분율 막대|[[천도교]]|red|13.5}} {{백분율 막대|[[불교]]|yellow|4.5}} {{백분율 막대|[[기독교]]|blue|1.7}} }}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ref>{{harvnb|김병로|2002|ref=jarroad}}</ref> 한국전쟁 이전까지 종교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억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했다. 종교는 사람들을 [[사후세계]]의 행복에 몰두하게 만들고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사회질서를 허용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군정]]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를 [[반동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차원에서 기존의 민간종교조직을 흡수하고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조선기독교연맹과 조선불교도연맹을 세워 이러한 정책을 반영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허용되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개혁을 위한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해방 이전 대부분의 조직들은 일제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된 조직으로서 해방 이후 급속히 힘을 잃고 없어졌다. 신속한 개혁의 차원에서 북한의 혁명주체세력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세력 중 하나이자 지식인들의 집결지인 종교조직을 용인했다.<ref>{{harvnb|김병로|2002|ref=jarroad}}</ref> === 명절 ===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500&num=90182 데일리NK 2011년 4월 14일</ref>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 문화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 {| class="wikitable" |+평양의 문화단체 |- | 음악부문 || 피바다가극단 국립민속악단 보천보전자악단 |- | 미술부문 || 만수대창작단 조선미술가동맹 |- | 문학부문 || 조선문학가동맹 |- | 영화부문 ||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조선아동영화촬영소 |} 문화 활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 예술 ===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 체육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 문학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출처|날짜=2013-06-05}}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출처|날짜=2013-06-05}}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출처|날짜=2013-06-05}}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선문학> 1953년 10호, 125쪽). === 음악 ===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北, 南가요 가사 바꿔 `찬양가요'로 불러 |url =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0/08/02/0505000000AKR20100802194100014.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장용훈 기자 |날짜 = 2010-08-02 |확인날짜 = 2010-08-09}}</ref>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ref>{{뉴스 인용|저자=조민정 기자|제목= "北대학생들,안재욱 노래 부르다 처벌"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0/07/0200000000AKR20101007099200014.HTML|뉴스=연합뉴스|위치= |날짜=2010-10-07}}</ref> [[평양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반갑습네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 (영화)|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 영화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이씨조선|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조선)|명종]] 때 [[도적]], [[림꺽정|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표준어|각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제목 = <북한영상> 북한만화영화의 산실 '4.26아동영화촬영소'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2147240 |출판사 = 연합뉴스 |날짜 = 2008-06-26 |확인날짜 = 2019-09-29}}</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 음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파일:Okryu Restaurant in Pyongyang.jpg|섬네일|옥류관]]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인삼|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 의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23] === 세계 유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시]]와 [[남포시]]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https://web.archive.org/web/20140819090503/http://www.goguryeo.org/murals/m-japan-index.htm 다카마쓰쓰가 (高松塚) 고분] 이나 [https://web.archive.org/web/20140819090503/http://www.goguryeo.org/murals/m-japan-index.htm 키토라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http://whc.unesco.org/en/list/1135 고구려의 유적]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 문화 개방 과정 === [[2013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류경 (스마트폰)|류경 스마트폰]]을 판매를 하기 시작하여 [[광명망]]으로 서비스를 하기 시작을 하였고 특히 데이터 서비스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사|조선중앙통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하여 놓았으며 특히 '''만방''' 동영상 서비스로 인하여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kr.nknews.org/%eb%8b%a8%eb%8f%85-%eb%b6%81%ed%95%9c-3g-%ed%9c%b4%eb%8c%80%ed%8f%b0-%eb%8d%b0%ec%9d%b4%ed%84%b0%ec%9a%94%ea%b8%88%ec%a0%9c-%ec%b2%ab-%ea%b3%b5%ea%b0%9c/|제목=북한 3G 휴대폰 데이터요금제 첫 공개|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6-11-21|웹사이트=NK news|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특히 서비스 문물 개방 과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2016년부터 [[만수대 텔레비죤|만수대 TV]]를 [[케이블 텔레비전|케이블 TV]]로 전격 송출하여 [[UEFA 유로파리그]]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시청할 수 있도록 전격 조치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MYH20160518000600038|제목="북한, 외국인 전용 만수대TV 모든 주민에 개방"|성=기자|이름=이영현|날짜=2016-05-18|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만수대 TV'''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인 [[목란비데오|목란비디오]]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DVD]]로 발매하여 판매를 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news1.kr/articles/?3042889|제목='北 평양시내 영상물 판매소서 美 애니메이션도 판매중'|성=기자|이름=양새롬|날짜=2017-07-08|웹사이트=뉴스1|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28hbXI9cpY|제목=Buy DVD in Pyongyang - North Korea|성=Jaka Parker|이름=|날짜=2016-05-10|웹사이트=Youtube|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2016년]]에는 아예 [[스마트폰]]으로 [[목란비데오|목란비디오]]로 들어가서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로 설치하여 위의 영화들을 볼 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허용을 하였음을 알수가 있고 이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고 단, 역시 그외의 영화들을 볼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ws_indepth/newsindepth-07242019145343.html|제목=“북, 도발 카드로 미국에 양보 압박 중”|성=기자|이름=박정우|날짜=2019-07-24|웹사이트=자유아시아방송|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ref>{{웹 인용|url=https://areena.yle.fi/1-3462510|제목=Video of surfing on Kwangmyong|성=Yle Areena|이름=|날짜=2016-05-14|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2018년]]에는 많은 주민들이 최근 살기 힘들다고 말은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만수대 텔레비죤|만수대 TV]] 설치에 극성이다면서 지역 우체국에서는 핀잔을 주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외국 영화에 대한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당국도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결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주민들의 외부 정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650元으로-외국영화-시청-北-만수대통로-설치-허가/|제목=650元으로 외국영화 시청 北, 만수대통로 설치 허가|성=기자|이름=강미진|날짜=2018-03-09|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더군다나 '''나의 길동무''' [[앱 스토어]]를 통하여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지되었던 외국 도서들까지 대부분 허용하여 구매할 시 구독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었고 이를 '''김흥광''' 대표가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ws_indepth/cellphonesp-05212019110822.html|제목=사회변혁 촉진 비밀병기|성=기자|이름=노정민|날짜=2019-05-21|웹사이트=자유아시아방송|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2015년 1월 들어서는 광명망의 개인 이용이 다시 허용되었다고 알려졌음을 알수가 있고 특히 그리하여 북한은 가정집에도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ADSL]] 모뎀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615559|제목=대북매체 "한국 뮤직비디오, 北 젊은층서 유행"|성=기자|이름=홍지영|날짜=2016-06-08|웹사이트=SBS 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아예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고속 패킷 접속|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고속 패킷 접속|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에게 판매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7/08/photos-reveal-north-koreas-new-portable-intranet-devices/|제목=Photos reveal North Korea's new portable intranet devices|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7-08-10|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바일 [[1인칭 슈팅 게임|FPS]] 게임이 유명하여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게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는 것이고 특히 [[카운터-스트라이크|카운터 스트라이크]]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8/02/yankee-mopping-up-operation-shooting-game-popular-in-north-korea-state-media/|제목=Yankee mopping-up operation" shooting game popular in N. Korea: online outlet|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8-02-05|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en-US|확인날짜=2020-07-11}}</ref> 더군다나 스포츠 게임이 유명하여 [[UEFA 유로파리그|유로파리그]] 선수나 혹은 국가 대표팀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그래픽도 상당히 좋다.<ref>{{웹 인용|url=http://www.s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63|제목=北, 제재속에서도 첨단정보기술 제품 개발 계속...3D프린트-얼굴인식기-티머니 등 출시|성=대기자|이름=안윤석|날짜=2019-11-18|웹사이트=서울평양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2015년에는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옥류가 처음으로 개관하여 처음으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대략 30개의 온라인 쇼핑 사이트가 생겼다.<ref>{{웹 인용|url=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7/2018112700297.html|제목=평양은 온라인 쇼핑 열풍 … 치킨 배달도 한다|성=기자|이름=김명성|날짜=2018-11-27|웹사이트=조선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 교육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 === 유치원, 탁아소, 학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12년제 의무교육 체제에 따라 교육기관은 모두 정부가 운영한다. 그러나 유치원과 탁아소의 경우는 학교와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탁아소의 경우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도 관리되는데 이러한 사생아들은 국가에서 그 목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들을 혁명전사로서 활용한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원한다. === 교과 내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ref>{{뉴스 인용|저자=이은영 / 신동아 객원기자|제목=탈북 대학생 4인이 밝히는 북한식 학습법, 한국 대입(大入) 체험|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1698|뉴스=동아일보|위치= |날짜=2008-08-25}}</ref> === 학생 소조 활동 ===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 고등교육기관 ===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교 목록}}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김일성방송대학]]이 마련되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 과학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 === 주체 과학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때 주체과학으로 3대 과학으로 지정을 하였고 특히 '''주체철'''과 [[비닐론|비날론]], '''무연탄 가스화''' 혹은 '''갈탄 가스화'''가 있다. 비닐론 혹은 비날론은 1936년 [[리승기]] 박사가 개발한 섬유로써 이때 일본에서 개발하여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고 특히 섬유의 품질이 최상이라 면에 버금가는 화학섬유로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필라멘트 섬유로 만들면 비단과 같아지고 양모와 같은 스테이플 섬유로 만들면 양모보다 성질이 좋고 면직물과 거의 비슷한 품질을 자랑하여 항상 리승기 박사가 항상 입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ref>{{저널 인용|제목=리승기의 비날론 연구와 공업화|저널=서울대학교|성=학사|이름=김태호|url=|날짜=2001-02|출판사=|쪽=p. 16}}</ref> 결국 리승기 박사가 월북한 뒤 섬유 과정을 생략하고 원료 공정을 개발하여 무연탄으로 전용하는 과정과 카바이드 공정, 아세트 알데히드를 [[아세트산]]으로 변경하여 원료과정을 개발하여 [[1957년]] 개발에 성공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ref>{{저널 인용|제목=리승기의 비날론 연구와 공업화|저널=서울대학교|성=학사|이름=김태호|url=|날짜=2001-02|출판사=|쪽=p. 29 - 35}}</ref> 주체철은 원래 입철이라는 구단광을 [[청진제강소|청진 제강소]]에서 만들었으나 36만 톤의 규모로는 부족하여 개건 공사를 거쳤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도 공사를 거쳐서 입철을 더욱 강화하여 삼화철이라는 구단광을 새로 만들어 제강과정과 함께 사용하였으나 결국 노폐물이 자주 회전로에 끼며 특히 [[코크스]]도 상당부분 많이 넣어야 하여 결국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998년부터 주체철 사업이 시작하여 회전로 부문과 산소열법 용광로 부문 그리고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을 나누어 회전로 부문은 성진제강련합기업소가 산소열법용광로 부문은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은 [[김책제철련합기업소]]가 나누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회전로 부문에서는 결국 이사업이 10년을 끌동안 이 공법은 실패를 연속으로 하였으며 국내 기술로 활용할 수 없는 인식이 쌓여갔고 특히 결국 젖은 물가마니를 쓰고 특히 불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을 하였다. 실패를 통한 학습으로 2004년 50%의 코크스 배합 사용 공법을 달성을 하여 산화 배소 구단광을 만들게 되었으며 하지만 결국 60%로 실수율이 떨어지고 특수강을 생산하여 수출을 하여야 하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등 결국 원점으로 돌려서 개발을 다시 하였다. 결국 산소 용융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특히 실험 공장에서 6kg의 산소를 주입하여 2kg의 용선을 출선하는데 성공하자 결국 공업로 도입을 추구하였다.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도 특히 공장이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함께 실험을 계속하자고 하였고 특히 점결제 무사용과 함께 저질 석탄으로 기술 경제 지표를 개선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회전로가 계속 폭발하자 방법이 없던 한 박사가 결국 용융로 안에 들어가서 결국 폭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문제점을 해결해 품질이 좋은 용선이 출선이 되어 김정일이 극찬하고 이를 치하하였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산업혁신체제 연구 : 철강 및 공작기계산업 중심으로|저널=북한대학원대학교|성=석사|이름=강영실|url=|날짜=2015|출판사=|쪽=p. 139 - 148.}}</ref>{{위키공용분류}}[[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는 결국 2003년에는 국가 과학원 5월 28일 금속 연구소에서 발명 특허를 내어 결국 갈탄 제철에 의한 용선 생산법을 완비를 하는데 성공을 하여 이것을 통하여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가 주도하여 시험 공장을 차려서 실험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오류가 나기 쉬웠고 특히 불량이 많았으며 가는 곳곳마다 실패를 하여 결국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컸으며 특히 이것에 대한 포기론도 있었으나 결국 김정일은 한발짝이 아니라 반발짝도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때 1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를 하면서 힘을 내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갈탄 용광로가 개발이 완료되고 실험을 계속한 결과 1차 실험에서는 결국 지표 달성에 실패를 하였는데 반하여 2차 실험에서는 부분적인 달성에만 하였을 뿐 그리하여 결국 성과가 없자 결국 3차 실험에서 정상적인 지표 달성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을 시키고 특히 2010년에 출선을 하는데 성공을 하여 김정일이 치하를 하면서 기뻐하였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 버금가는 주체철 개발이라면서 좋아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결국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가면서 결국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 갈탄 용광로를 보면서 흐뭇하였고 출선 장면을 봤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산업혁신체제 연구 : 철강 및 공작기계산업 중심으로|저널=북한대학원대학교|성=석사|이름=강영실|url=|날짜=2015|출판사=|쪽=p. 148 - 158}}</ref> 2016년에는 이때부터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추진하여 성공을 시킨 산소열법 용광로를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기 시작하여 2017년부터 공사에 들어갔었고 이때 황해제철련합기업소에 사용하던 설비들을 대부분 활용하여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였다. 2018년 1월 1일 완공이 되어 첫 출선이 되는데 성공을 하고 출선을 한 용선이 품질이 좋은 용선이 되어 나오자 모두가 기뻐하였고 품질이 좋은 용선으로 변했으며 연산 규모는 30만 톤의 수준으로 추정을 할 수 있고 특히 황해제철련합기업소의 1.6배 더 많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80926031900014|제목=北, 김책제철소에 코크스 안 쓰는 '주체철' 생산공정 완공 보도|성=김효정|날짜=2018-09-26|언어=ko|확인날짜=2020-05-27}}</ref> === 전자 공학 ===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는 게 전자 공학 부문 특히 [[반도체]] 사업이며 특히 반도체 공학은 1983년부터 준비하여 [[평양시|평양]]과 [[성천군|성천]] 그리고 은정지구를 기준으로 반도체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특히 [[김정일]]과 [[김정은]]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것도 반도체 장비에 투자를 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알아본다면 [[리철호가사업하는기계공장|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집적회로공장|89호 집적회로 공장]], [[평양집적회로공장|평양 집적회로 공장]], [[평양집적회로시험공장|평양 집적회로 시험 공장]], [[Glocom]], [[111호마스크제작소|111호 마스크 제작소]]에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제프리 루이스 박사와 [[통일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가 나와 현재 반도체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특히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부분 군수 공장에 납품이 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901188015Y|제목=美전문가 "김정은 시찰공장 중 미사일 개발 관련 6곳 위치 특정"|성=연합뉴스|이름=|날짜=2019-01-18|웹사이트=한국경제|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그리고 [[하태경]] 의원도 현재 일본이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플루오린화 수소|불화수소]]와 그외의 장비를 납품하고 있고 특히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스스로도 전자빔 리소그래피 장비를 공급받았다고 인정을 하였다.<ref>MEBES-4700S 위상 반전 마스크 제작하기 위한 노광 기술 - 국가과학원 111호 마스크 제작소, 2004.08.05</ref><ref>{{웹 인용|url=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1/2019071100731.html|제목=하태경 日,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 대북 밀수출 30건, 안전정보센터 자료 공개|성=기자|이름=김민우|날짜=2019-07-11|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 [[조선중앙통신사|조선중앙통신]]과 [[내나라 (웹사이트)|내나라]]에서도 [[단일 칩 체제|SoC]] 제작에 성공하였다고 보도 하였으며 한술더떠 로동신문에서는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저전력 '''LP'''형 '''HKMG''' 개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공하였다고 보도하였고 이를 김정은이 축하문을 [[111호마스크제작소|111호 마스크 제작소]] 과학자들에게 직접 송부하였다고 밝혔다.<ref>로동신문, 2017.06.20</ref><ref>로동신문, 2017.07.01</ref>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도체 개발 공정 과정을 거치자면 2014년에는 20nm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2017년에는 '''LP'''형 '''HKMG'''를 개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19년]]에는 10nm [[핀펫|FinFET]] 공정을 개발하여 역시 파운드리하여 입증을 하는데 성공하였다.<ref>조선중앙통신, 2014.12.29</ref><ref>내나라, 2017.01.16, 2019.03.18</ref><ref>조선중앙통신, 2019.10.30</ref> {{위키인용집|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속담}} === 자체 네트워크 개발 === 1997년 EC계열의 통신망을 자체 개발하여 광명이라는 명칭의 인터넷 프로토콜 통신망을 개발하여 [[점대점 프로토콜]] 방식으로 추진을 하였다. 하지만 전화 통신망의 포화로 인하여 2000년대 전국적인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독자적인 인트라넷 망을 갖게 되었으며 [[200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까지 광케이블 공사가 부설이 완료가 되었고 특히 리 기준과 가정집에는 56Kbps 수준의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되어 있었고, [[201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 - 면 - 리 기준으로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완료가 되었고 가정집에서는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ADSL]]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완료가 되었다. 현재 광명망 서비스 중에서는 [[메일]] 서비스와 [[전자 게시판]] 서비스, [[채팅]] 서비스,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추진을 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유흥을 즐기기 위한 서비스를 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었고 한때는 자체로 게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2008년 중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집트의 [[오라스콤 그룹|오라스콤]]과 이동통신 계약을 하게 되면서 오라스콤이 광명망을 활용하며 디지털 이동통신망을 구축하였고 지방 지사를 연결해 관리하게 되었다. 오라스콤에서 휴대폰을 이용한 [[무선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WAP]]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망을 개인이 이용하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광명망 내에 개설된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면 홈페이지의 관리자나 감독 기관에서 글을 검열한 후에 게시하는 방식의 제한이 생기게 되었다.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고속 패킷 접속|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고속 패킷 접속|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에게 판매를 하였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7/08/photos-reveal-north-koreas-new-portable-intranet-devices/|제목=Photos reveal North Korea's new portable intranet devices|성=|이름=|날짜=2017-08-10|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 여기에 저장되어 있는 과학기술문헌 중 총 8,600여만 건이 광명망에 수록이 되어 있으며 발명특허는 3,600만 건이 광명에 수록된 과학기술문헌은 4,500만 건이 수록이 되어 있다. 이중에 10% 이상은 [[반도체]]와 [[컴퓨터 과학]] 문헌이며 이 기술 문헌들을 유료화 하여 반도체 연구와 소프트웨어 연구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설정을 하였다. 특히 이 과학기술문헌의 대부분은 [[조선콤퓨터중심|조선컴퓨터센터]]에서 대부분 외국 사이트에 자체 자산으로 구입하여 대부분 소장을 한 것으로 그만큼 과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zoCLIlVu33A|제목=중앙과학기술통보사를 찾아서|성=조선신보|이름=|날짜=2013-04-07|웹사이트=youtube|출판사=|확인날짜=2020-05-30}}</ref> === 소프트웨어 기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이미 전폭적으로 시작하여 [[하드웨어]]는 군수 전용 개발 부문으로 [[소프트웨어]]는 민수 전용 개발로 돌려 개발을 하였다. 특히 자체 네트워크 개발은 물론 특히 스마트폰의 게임이나 혹은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발하거나 혹은 복제하여 [[평양타치]] 스마트폰이나 [[아리랑 121]] 스마트폰에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현재는 자체 [[앱 스토어]]인 나의 길동무 4,1이나 혹은 자료봉사 2,0을 개발하여 [[미국]]의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UEFA 유로파리그]] 혹은 게임 엔진 계열인 [[카운터-스트라이크|카운터 스트라이크]] 계열도 개발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5347.html|제목=평양 거리에도 ‘스몸비’…북 400만~500만명이 셀카·채팅|성=기자|이름=김지은|날짜=2019-03-11|웹사이트=한겨레|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ref>{{웹 인용|url=http://www.nk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9|제목=북한판 앱스토어 자료봉사 2.0의 모습은?|성=기자|이름=강진규|날짜=2019-03-12|웹사이트=NK 경제|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8/02/yankee-mopping-up-operation-shooting-game-popular-in-north-korea-state-media/|제목="Yankee mopping-up operation" shooting game popular in N. Korea: online outlet|성=|이름=|날짜=2018-02-05|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는 많은 국가 특히 [[중국]]이나 혹은 [[미국]] 등지에서도 소프트웨어 기술을 합작 개발하여 많은 수익 사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작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작한 경우가 많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1630516|제목=남북 합작 애니메이션 '왕후 심청' 광복 60돌에 남북 동시 개봉 예정|성=기자|이름=정형모|날짜=2005-07-07|웹사이트=중앙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 같이 보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과사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검열]] * [[적화통일]] * [[한반도 평화협정]] * [[개인숭배]] * [[벼랑끝 전술]] * [[이북5도위원회]] * [[알레한드로 페레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 [[조선인민군]] * [[남북통일]] * [[6.25 전쟁]] * [[김일성]] * [[김정일]] * [[소비에트 연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 * [[선군정치]] == 각주 == {{각주}}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제목=북한 종교정책의 변화와 종교실태|url=http://unibook.unikorea.go.kr/libeka/elec/WebBook_data4/kinu/63645.pdf|성=김병로|날짜=2002|출판사=통일연구원|isbn=9788984791527|ref=jarroad}} == 외부 링크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https://web.archive.org/web/20171108205504/https://www.dprkorea.com/%EC%A1%B0%EC%84%A0%EC%9D%B8%ED%8F%AC%EB%B1%85%ED%81%AC] - 정부 공식 홈페이지(1)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9j2425b/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북한편)]{{깨진 링크|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9j2425b%2F }}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언어링크|en}} [http://www.korea-dpr.com/ Official Homepage -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North Korea)] - 정부 공식 홈페이지(2) * [https://web.archive.org/web/20100125164741/http://www.chosunexpo.com/ 조선엑스포] * [https://web.archive.org/web/20070930014351/http://www.kcckp.net/ko/index.php 내나라 사이트] * [http://www.uriminzokkiri.com/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웨이백|url=http://www.uriminzokkiri.com/ |date=20160307233123 }} ** [https://twitter.com/uriminzok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 [http://www.kcna.co.jp/ 조선 통신사] {{웨이백|url=http://www.kcna.co.jp/ |date=20041006163736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국영 통신사 * [https://web.archive.org/web/20190407181406/http://www.dprktoday.com/ 조선의 오늘] - 관광안내 전문 사이트 * [https://web.archive.org/web/20170829231443/http://ryongnamsan.edu.kp/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 * [https://chennaiprint.in/world/north-korea-confirms-first-death-from-coronavirus/2291/ 북한 코로나19 첫 사망자] {{웨이백|url=https://chennaiprint.in/world/north-korea-confirms-first-death-from-coronavirus/2291/ |date=20220513115107 }} - chennaiprint.in === [[대한민국]] === * [http://www.cybernk.net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 [http://www.sptv.co.kr 통일방송] === 미국 === * {{언어링크|en}}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kn.html CIA - The World Factbook: Korea, North] {{웨이백|url=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kn.html |date=20200518081122 }} CIA의 데이터 * {{dmoz|Regional/Asia/North_Korea}} === 일본 === * {{언어링크|ja}} [http://www.mofa.go.jp/mofaj/area/n_korea/ 일본 외무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보] === 비공식 사이트 === * [http://www.dailynk.com 데일리 NK] * {{언어링크|en}} [http://www.travel-images.com/korean.html Images of North Korea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진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041212213209/http://www.angelfire.com/folk/ukgalbert/index.html Musicals and Dram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 {{언어링크|ja}} [https://web.archive.org/web/20070111044820/http://www.infovlad.net/underground/asia/nkorea/ North Korea Today] * [http://www.dailynk.com/korean/index.php The Daily NK] * {{언어링크|en}} [http://www.lonelyplanet.com/destinations/north_east_asia/north_korea/ 론리플래닛의 정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 * [https://web.archive.org/web/20141218001315/http://nksis.com/ 북한전략연구] -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타 * [https://www.youtube.com/businessNK Foreign investment in North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동영상 {{지리적 위치 |중앙 = {{DPRK}} |북 = {{PRC}} |북동 = {{국기그림|러시아}} [[러시아 연방]] |동 = {{국기그림|일본}} [[일본]] |남동 = {{국기그림|일본}} [[일본]] |남 = {{KOR}} |남서 = {{PRC}} |서 = {{PRC}} |북서 = {{PRC}}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둘러보기 상자 묶음 |제목 = 대한민국 외교부 지정 특별여행경보제도 발령 지역 |bg = |fg = |내용1 = {{대한민국 외교부 지정 특별여행경보제도 흑색 경보 발령 지역}} }} {{둘러보기 상자 묶음 |제목 = 관련 주제 |bg = |fg = |내용1 = {{아시아}} {{동아시아}} }} {{사회주의 국가}} {{전거 통제}}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분류:한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류:1948년 설립]] [[분류:분단된 지역]] [[분류:일본의 옛 식민지]] [[분류:한국어권]]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공산주의 국가]] [[분류:사회주의 국가]] [[분류:범죄조직]] [[분류:대한민국의 범죄 조직]] [[분류:대한민국이 지정한 테러 단체]] [[분류:미국이 지정한 테러 단체]] [[분류:일본이 지정한 테러 단체]] [[분류:테러 조직으로 지정된 단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북위 38도선|텔레비전 드라마|북위 38도선 (드라마)}} {{위치 지도-선|위도=38}} '''북위 38도'''(北緯三十八度)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위선]]이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 [[태평양]],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지난다. 특히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리 == [[본초 자오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다음 지역을 지난다. {{-}} :{| class="wikitable plainrowheaders" ! scope="col" width="125" | 좌표 ! scope="col" | 나라, 지역, 해역 ! scope="col" | 주석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0|0|E|type:landmark|name=본초 자오선}} | style="background:#b0e0e6;" | [[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ITA}}의 마레티모섬 바로 북쪽을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2|19|E|type:country|name=이탈리아}} | {{ITA}} | 레반초섬과 [[시칠리아섬]]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5|25|E|type:waterbody|name=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메시나 해협]]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5|38|E|type:country|name=이탈리아}} | {{ITA}} | [[레조디칼라브리아]] 남부 교외를 지난다. |-valign="top"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6|8|E|type:waterbody|name=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이오니아해]] - {{GRC}}의 [[케팔로니아섬]]과 [[자킨토스|자킨토스섬]] 사이를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21|16|E|type:country|name=그리스}} | {{GRC}} | 수도인 [[아테네]] 북부 교외를 지난다.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24|2|E|type:waterbody|name=에게해}} | style="background:#b0e0e6;" | [[에게해]] | style="background:#b0e0e6;"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24|14|E|type:country|name=그리스}} | {{GRC}} | 페탈리오이섬과 [[에비아섬]]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24|34|E|type:waterbody|name=에게해}} | style="background:#b0e0e6;" | [[에게해]] | style="background:#b0e0e6;" | {{GRC}}의 [[안드로스섬 (그리스)|안드로스섬]] 바로 북쪽({{좌표|37|59|57|N|24|47|23|E|type:isle|name=안드로스섬}})을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27|7|E|type:country|name=터키}} | {{TUR}} | [[코니아]]와 [[니데]]를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44|17|E|type:country|name=이란}} | {{IRN}} | [[타브리즈]]의 바로 남쪽을 지난다.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48|55|E|type:waterbody|name=카스피해}} | style="background:#b0e0e6;" | [[카스피해]] | style="background:#b0e0e6;"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53|49|E|type:country|name=투르크메니스탄}} | {{TKM}}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55|17|E|type:country|name=이란}} | {{IRN}}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57|22|E|type:country|name=투르크메니스탄}} | {{TKM}} | [[아시가바트]] 바로 북쪽을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66|38|E|type:country|name=우즈베키스탄}} | {{UZB}}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68|17|E|type:country|name=타지키스탄}} | {{TJK}}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70|19|E|type:country|name=아프가니스탄}} | {{AFG}}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71|16|E|type:country|name=타지키스탄}} | {{TJK}} |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74|54|E|type:country|name=중국}} | {{PRC}} | [[신장 위구르 자치구]] <br/ > [[칭하이성]] <br/ > [[간쑤성]] <br/ > [[내몽골 자치구]] <br/ > [[닝샤 후이족 자치구]] <br/ > 내몽골 자치구<br/ > [[산시성 (섬서성)]] − 약 5&nbsp;km <br/ > 내몽골 자치구 − 약 14&nbsp;km <br/ > 산시성 (섬서성) <br/ > [[산시성 (산서성)]] — [[타이위안시]] 바로 북쪽을 지난다. <br/ > [[허베이성]] — [[스자좡시]] 바로 남쪽을 지난다. <br/ > [[산둥성]]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18|58|E|type:waterbody|name=황해}} | style="background:#b0e0e6;" | [[황해]] | style="background:#b0e0e6;" | {{KOR}}의 [[백령도]] 바로 북쪽을 지난다.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25|7|E|type:country|name=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PRK}} | [[황해남도]]([[옹진반도]]) — [[옹진군 (황해남도)|옹진군]], [[강령군]]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25|35|E|type:waterbody|name=황해}} | style="background:#b0e0e6;" | [[황해]] | style="background:#b0e0e6;" | [[옹진만]]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25|46|E|type:country|name=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PRK}} | [[황해남도]] — [[해주시]], [[청단군]], [[연안군]], [[배천군]]<br/ >[[황해북도]] — [[개풍군]], [[개성시]], [[장풍군]] <!-- 개성공업지구? --> |-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26|49|E|type:country|name=대한민국}} | {{KOR}} | [[경기도]] — [[연천군]], [[파주시]], [[포천시]], [[가평군]]<br / > [[강원특별자치도]] — [[화천군]], [[춘천시]], [[인제군]], [[양양군]]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28|44|E|type:waterbody|name=동해}} | style="background:#b0e0e6;" | [[동해]] | style="background:#b0e0e6;" |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38|14|E|type:country|name=일본}} | {{JPN}} | [[사도가섬]]:<br/ >— [[니가타현]]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38|33|E|type:waterbody|name=동해}} | style="background:#b0e0e6;" | [[동해]] | style="background:#b0e0e6;" |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39|14|E|type:country|name=일본}} | {{JPN}} | [[혼슈]]섬:<br/ >— 니가타현<br/ >— [[야마가타현]]<br/ >— [[미야기현]]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140|55|E|type:waterbody|name=태평양}} | style="background:#b0e0e6;" | [[태평양]] | style="background:#b0e0e6;" |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123|1|W|type:country|name=미국}} | {{USA}} | [[캘리포니아주]] ([[스톡턴 (캘리포니아주)|스톡턴]]을 지난다) <br/ > [[네바다주]]<br/ > [[유타주]]<br/ > [[콜로라도주]]<br/ > [[캔자스주]] ([[뉴턴 (캔자스주)|뉴턴]]을 지난다)<br/ > [[미주리주]]<br/ > [[일리노이주]]<br/ > [[인디애나주]] ([[에번즈빌]]을 지난다)<br/ > [[켄터키주]] ([[렉싱턴 (켄터키주)|렉싱턴]]을 지난다)<br/ > [[웨스트버지니아주]]<br/ > [[버지니아주]]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76|28|W|type:waterbody|name=체서피크 만}} | style="background:#b0e0e6;" | [[체서피크만]] | style="background:#b0e0e6;" |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75|53|W|type:country|name=미국}} | {{USA}} | [[메릴랜드주]]<br/ > [[버지니아주]]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75|16|W|type:waterbody|name=대서양}} | style="background:#b0e0e6;" | [[대서양]] | style="background:#b0e0e6;" | {{PRT}} [[아소르스 제도]]의 [[피쿠섬]]과 [[상미겔섬]] 사이를 지난다.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8|51|W|type:country|name=포르투갈}} | {{PRT}} | [[세투발현]]<br/ > [[베자현]] - [[베자 (포르투갈)|베자]] 바로 남쪽을 지난다. |-valign="top" |style = "font-size:80%;" | {{좌표|38|0|N|7|12|W|type:country|name=스페인}} | {{ESP}} | [[안달루시아 지방]]<br/ > [[에스트레마두라 지방]]<br/ > 안달루시아 지방<br/ > [[무르시아 지방]] - [[무르시아]] 바로 북쪽을 지난다.<br/ > [[발렌시아 지방]] |- | style="background:#b0e0e6; font-size:80%;" | {{좌표|38|0|N|0|39|W|type:waterbody|name=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지중해]] | style="background:#b0e0e6;" | |} == 같이 보기 == * [[북위 37도]] * [[북위 39도]] * [[38선]]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출판위치=서울 |ISBN=89-7474-870-3 |쪽=220~227쪽 |장=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인용문= }} == 각주 == {{각주|2}} {{위선과 자오선|상태=collapsed}} [[분류:위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ADSL modem router internals labeled.jpg|섬네일|230px|모뎀의 구조도.]] '''모뎀'''({{lang|en|MODEM}}, {{lang|en|MOdulator and DEModulator}})은 정보 전달(주로 디지털 정보)을 위해 신호를 [[변조]]하여 송신하고 수신측에서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 위해 [[복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컴퓨터]] 정보통신을 위한 [[주변기기]]로 많이 사용한다. 변조를 하는 이유는 전송선에 디지털 신호를 바로 보내면 신호 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같은 비트로 연속되면 전송특성상 신호 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송선의 특성에 맞추어 변조한다. 모뎀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회로|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의 일종으로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디지털]] 신호로 읽어낸다.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선]]을 이어주는 [[주변기기]]이다. 초기 모뎀은 주로 전화선을 통한 데이터 전송을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는 인터넷망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개인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망을 통해 개인컴퓨터와 서버와의 통신을 하게 되었다. 개인 컴퓨터와 서버 간에, 개인 인증과 망 접속을 위해 [[점대점 프로토콜|PPP]]프로토콜을 통해 접속한다. [[하이텔]] 같은 망이 대표적이다. 초기 모뎀이 전화망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에 주파수가 제한된다. 따라서 전송 속도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망은 음성을 전달하는 망이긴 하나, 가청 주파수 전체를 전달하지 않고 음성의 일부 주파수만 전송한다. 모뎀의 속도는 [[비트레이트|BPS]]로 나타내고 초당 비트 수를 의미한다. 한글 한 문자가 2바이트(16비트)로 되어 있으므로, 16BPS는 초당 한 글자를 전송하는 속도이다. == 초기 전화선 시대의 모뎀 == 일반 음성 회선으로는 [[1990년대]]에 [[PC통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속도는 300, 600, 1200, 2400, 4800, 9600, 14400, 19200, 28800, 33600, 38400, 56000 bps가 있었다. == 무선 모뎀 == 초기에는 컴퓨터와 [[아마추어 무선]]의 무전기(RIG)를 연결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선 모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저장 장치가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199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휴대 전화|휴대전화]]를 통한 자료 전송이 가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와이파이|무선 인터넷]]이 도입되어 무선 모뎀을 사용하면 [[무선 액세스 포인트|액세스 포인트]] 근처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주파수 변조|FM]] [[진동수]] 대역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 고속 인터넷 시대의 모뎀 == [[디지털 가입자 회선|DSL]]용 모뎀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의 회선을 이용하는 HFC 방식의 동축 케이블, 광 섬유 케이블 방식의 [[FTTH]] 모뎀도 개발되어, [[2000년대]]에 기존의 전화선을 통해서 [[인터넷|초고속 인터넷]]을 값싸게 공급하는 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 인터넷의 속도는 수 [[M]][[비트레이트|bps]]에서 수십 Mbps에 이른다. == 같이 보기 == * [[전화 접속]]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b:Serial Programming/Modems and AT Commands|Hayes-compatible Modems and AT Commands]] from the [[b:Serial Programming|Serial Data Communications Programming]] ''[[Wikibook]]'' * [http://www.itu.int/rec/recommendation.asp?type=products&lang=e&parent=T-REC-V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 ITU]: Data communication over the telephone network * {{웹 인용 |url=http://www.columbia.edu/acis/networks/protocols.html |제목=Columbia University - Protocols Explained |확인날짜=2018-05-2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619043804/http://www.columbia.edu/acis/networks/protocols.html |보존날짜=2006-06-19 |url-status=dead }} – no longer available, archived version * [http://www.3amsystems.com/wireline/hmo.htm Basic handshakes & modulations] – V.22, V.22bis, V.32 and V.34 handshakes * [http://www.techradar.com/news/internet/getting-connected-a-history-of-modems-657479 Getting connected: a history of modems] – techradar * [https://web.archive.org/web/20141121080645/http://nemesis.lonestar.org/reference/telecom/modems/modulations.html Data/FAX Modem Transmission Modulation Systems] – baud rates and modulation schemes {{인터넷 접속}} {{전기 통신}} {{전거 통제}} [[분류:모뎀| ]] [[분류:컴퓨터 통신]] [[분류:컴퓨터 주변기기]] [[분류:물리 계층 프로토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오픈 소스'''({{lang|en|open source}}) 제품에는 소스 코드,<ref name = "Open Source Org., 2007" >{{웹 인용 | url = https://opensource.org/docs/osd | title = The Open Source Definition | access-date = 2020-01-22 | date = 2006-07-07 | website = Open Source Org. | quote = Open source doesn't just mean access to the source code. | format = html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611152544/https://opensource.org/docs/osd | archive-date = 2007-06-11 | df = dmy-all | url-status = live }}</ref> 디자인 문서,<ref name = "Diffingo Solutions Inc., 2008" >{{웹 인용 | url = http://www.diffingo.com/oss/whyoss | title = What is Open Source Software | access-date = 2020-01-22 | website = Diffingo Solutions Inc. | quote = Open source software differers from other software because it has a less restrictive license agreement: Instead of using a restrictive license that prevents you from modifying the program or sharing it with friends for example, sharing and modifying open source software is encouraged. Anyone who wishes to do so may distribute, modify or even create derivative works based on that source code! | format = html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028104313/http://www.diffingo.com/oss/whyoss | archive-date = 2008-10-28 | df = dmy-all | url-status = live }}</ref> 또는 제품의 내용을 사용할 권한이 포함된다. 대체적으로 이를 [[오픈 소스 모델]]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나 기타 제품들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일부로서 [[오픈 소스 사용권]]으로 출시된다. 이 용어의 사용은 소프트웨어와 함께 기원되었으나 소프트웨어 부문을 넘어서 다른 [[오픈 콘텐츠]] 및 [[개방형 협업]]의 형태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 기원 == 소프트웨어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오픈 소스"라는 용어는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에 암시된 정치적 선전과 도덕적 철학을 비판했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ref>{{저널 인용| publisher = Stanford University| last = O'Mahony| first = Siobhan Clare| title = The emergence of a new commercial actor: Community managed software projects| location = Stanford, CA| date = 2002|pages=34–42}}</ref> 게다가 "프리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의 모호성(자유 소프트웨어, 무료 소프트웨어)은 비즈니스 채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b.org/~esr/open-source.html |title=Goodbye, "free software"; hello, "open source" |quote=The problem with it is twofold. First, ... the term "free" is very ambiguous ... Second, the term makes a lot of corporate types nervous.|author=Eric S. Raymond|author-link=Eric S. Raymond }}</ref><ref name="infoworld1983">{{웹 인용|url=https://books.google.com/?id=yy8EAAAAMBAJ&lpg=PA31&dq=us%20government%20public%20domain%20software&pg=PA31#v=onepage&q=us%20government%20public%20domain%20software&f=false |website=[[인포월드]] |date=1983-06-23|title=Free software - Free software is a junkyard of software spare parts |quote=''"In contrast to commercial software is a large and growing body of free software that exists in the public domain. Public-domain software is written by microcomputer hobbyists (also known as "hackers") many of whom are professional programmers in their work life. [...] Since everybody has access to source code, many routines have not only been used but dramatically improved by other programmers."'' |first=Tom |last=Shea |accessdate=2016-02-10}}</ref> 이 그룹에는 [[크리스틴 피터슨]], [[토드 앤더슨]], [[래리 어거스틴]], [[존 홀]], [[샘 오크먼]], [[마이클 타이먼]],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되었다. 피터슨은 [[팰로앨토]]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서<ref name=osihistory>{{웹 인용|url=http://www.opensource.org/history |title=History of the OSI |date=19 September 2006 |first=Michael |last=Tiemann |authorlink=Michael Tiemann |publisher=[[오픈 소스 이니셔티브]] |accessdate=23 August 2008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21001164015/http://www.opensource.org/docs/history.php |archivedate=1 October 2002 }}</ref> [[넷스케이프]]의 1998년 1월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내비게이터]]의 소스 코드 출시에 반응하면서 "오픈 소스"를 제안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다음날 그를 지지하였고 필 휴즈는 [[리눅스 저널]]에서 이 용어를 지지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처음에 이 용어를 채택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다.<ref name=osihistory/><ref name="rmsdissent">{{웹 인용|url=https://www.gnu.org/philosophy/open-source-misses-the-point.html |title=Why Open Source misses the point of Free Software |publisher=fsf.org |date=2012-05-18 |accessdate=2012-11-14}}</ref> 넷스케이프는 [[넷스케이프 퍼블릭 라이선스]]로 소스 코드를 출시하였다가 이후 [[모질라 공용 허가서]]로 출시하였다.<ref name="Muffatto000">{{서적 인용| title = Open Source: A Multidisciplinary Approach | first = Moreno | last = Muffatto | publisher = Imperial College Press | year = 2006 | isbn = 978-1-86094-665-3 }}</ref> 레이먼드는 특히 이 새로운 용어를 보급하는 시도에 활동적이었다. 그는 1998년 2월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에 이 용어의 채택을 최초로 호소하였다.<ref name="raymondCall">{{웹 인용|url=http://www.catb.org/~esr/open-source.html |title=Goodbye, "free software"; hello, "open source" |publisher=Catb.org |accessdate=2012-10-25}}</ref>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브루스 페런스]]와 협업하여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를 창립하였다.<ref name=osihistory/> 이 용어는 1998년 4월 기술 출판사 [[팀 오라일리]]에 의해 조직된 행사를 통해 더 가시화되었다. 원래 제목은 "프리웨어 서밋"(Freeware Summit)이었으나 나중에 "오픈 소스 서밋"(Open Source Summit)으로 변경된<ref name=opensourcesummit>{{웹 인용|url=http://linuxgazette.net/issue28/rossum.html |title=Open Source Summit |website=Linux Gazette |date=1998-04-10 |accessdate=2015-02-07 |first=Guido |last=van Rossum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29053622/http://linuxgazette.net/issue28/rossum.html |archivedate=29 December 2013}}</ref> 이 행사는 가장 중요한 자유 및 오픈 소스 프로젝트 다수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는데 여기에는 리누스 토르발스, [[래리 월]], [[브라이언 벨렌도르프]], [[에릭 올먼]], [[귀도 반 로섬]], [[마이클 타이먼]], [[폴 빅시]], [[제이미 자윈스키]],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된다. 이 회의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의 대안이 논의되었다. 타이먼은 "소스웨어"를 새로운 용어로 찬성하였으나 레이먼드는 "오픈 소스"를 찬성하였다. 이렇게 모인 개발자들은 투표를 거쳤고 가장 우세한 용어가 그 날 저녁 언론 콘퍼런스에서 발표되었다.<ref name=opensourcesummit /> 이전의 수많은 대형 기관들이 등장하여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발전을 지지하였으며, 여기에는 오픈 소스 프레임워크 [[아파치 하둡]]과 오픈 소스 [[HTTP]] 서버 [[아파치 HTTP 서버|아파치 HTTP]] 등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포함되어 있다. === 오픈 소스 모델과 개방형 협업 === 오픈 소스 모델은 [[개방형 협업]]을 장려하는 탈중앙식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인데,<ref name="doi.org">Levine, Sheen S., & Prietula, M. J. (2013).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1096442 Open Collaboration for Innovation: Principles and Performance]. ''Organization Science'', {{doi|10.1287/orsc.2013.0872}}</ref><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jo4hAQAAIAAJ|title=The cathedral and the bazaar: musings on Linux and Open Source by an accidental revolutionary|last=Raymond|first=Eric S.|publisher=OReilly|year=2001|isbn=978-0-596-00108-7|authorlink=Eric S. Raymond}}</ref> 이는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을 의미한다.<ref name="doi.org"/>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의 주된 원칙은 일반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소스 코드, [[청사진]], 문서 등 제품의 [[동료 생산]](peer producdtion)이다. 소프트웨어의 오픈 소스 운동은 사유 코드의 제한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모델은 [[:en:open-source appropriate technology|OSAT]](open-source appropriate technology),<ref>{{저널 인용|title=The Case for Open Source Appropriate Technology |journal=Environment, Development and Sustainability |volume=14 |issue= 3|pages=425–431 |year=2012 |doi=10.1007/s10668-012-9337-9 |url=https://www.academia.edu/1517361|last1=Pearce |first1=Joshua M }}</ref> 오픈 소스 신약 개발(drug discovery) 등의 프로젝트에 사용된다.<ref>[http://www.business-standard.com/india/news/sreelatha-menon-researchers-sans-borders/00/19/350429/ "Science 2.0 is here as CSIR resorts to open-source drug research for TB" Business Standard, 1 March 2009]</ref><ref>[[OpenWetWare:OSDDMalaria:GSK Arylpyrrole Series:Story so far|"Open Source Drug Discovery for Malaria Consortium]]</ref> 소프트웨어 개발의 오픈 소스 모델은 [[인터넷 포럼]],<ref name="Lakhani, Karim R. 2003">Lakhani, Karim R., & von Hippel, Eric (2003). How Open Source Software Works: Free User to User Assistance. ''Research Policy'', 32, 923–943 {{doi|10.2139/ssrn.290305}}</ref> [[메일링 리스트]]<ref name="Jarvenpaa, S. L. 2008">Jarvenpaa, S. L., & Majchrzak, Ann (2008).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20521057_Knowledge_Collaboration_Among_Professionals_Protecting_National_Security_Role_of_Transactive_Memories_in_Ego-Centered_Knowledge_Networks Knowledge Collaboration Among Professionals Protecting National Security: Role of Transactive Memories in Ego-Centered Knowledge Networks]. ''Organization Science'', 19(2), 260-276 {{doi|10.1287/orsc.1070.0315}}</ref>,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처럼 다른 형태의 개방형 협업을 가리키는 용어 사용에 영감을 주었다.<ref name="Faraj, S. 2011">Faraj, S., Jarvenpaa, S. L., & Majchrzak, Ann (2011). [http://www.adaptivecycle.nl/images/Knowledge_Collaboration_in_Online_Communities.pdf Knowledge Collaboration in Online Communities] {{웨이백|url=http://www.adaptivecycle.nl/images/Knowledge_Collaboration_in_Online_Communities.pdf |date=20211006214955 }}. ''Organization Science'', 22(5), 1224-1239, {{doi|10.1287/orsc.1100.0614}}</ref> 개방형 협업은 또한 [[비트코인]], [[TED]], [[위키백과]] 등 전반적인 다양한 벤처 기업들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운영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ref name="kurzweilai.net">{{웹 인용|url=http://www.kurzweilai.net/open-collaboration-leading-to-novel-organizations|title=Open collaboration leading to novel organizations - KurzweilAI}}</ref> 개방형 협업은 [[동료 생산]], [[집단적 협업]], [[위키노믹스]]의 기저를 이루는 원칙이다.<ref name="doi.org"/> 이는 처음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로 관찰되었으나 [[인터넷 포럼]],<ref name="Lakhani, Karim R. 2003"/> [[메일링 리스트]],<ref name="Jarvenpaa, S. L. 2008"/> 인터넷 [[공동체]],<ref name="Faraj, S. 2011"/>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와 같은 수많은 [[오픈 콘텐츠]] 등의 예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또, 이는 [[크라우드소싱]], [[공동 구매]], [[:en:Open_innovation|개방적 혁신]]의 일부 예를 설명하기도 한다.<ref name="Levine2013">{{저널 인용| doi = 10.1287/orsc.2013.0872 | issn = 1047-7039 | pages = 1414–1433 | last = Levine | first = Sheen S. | author2=Michael J. Prietula | title = Open Collaboration for Innovation: Principles and Performance | journal = Organization Science | volume = 25 | issue = 5 | date = 2013-12-30 | arxiv = 1406.7541 }}</ref> Riehle 등은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 [[능력주의]], [[자기조직화]]라는 세 가지 원칙에 기반한 협업으로 정의한다.<ref name="Riehel et al">{{저널 인용| doi = 10.1109/MS.2009.44| issn = 0740-7459| volume = 26| issue = 2| pages = 52–58| last1 = Riehle| first1 = D.| last2 = Ellenberger| first2 = J.| last3 = Menahem| first3 = T.| last4 = Mikhailovski| first4 = B.| last5 = Natchetoi| first5 = Y.| last6 = Naveh| first6 = B.| last7 = Odenwald| first7 = T.| title = Open Collaboration within Corporations Using Software Forges| journal = IEEE Software| date = March 2009| url = http://dirkriehle.com/uploads/2009/02/open-collaboration-within-corporations-using-software-forges.pdf| 확인날짜 = 2020-02-01|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1008003536/http://dirkriehle.com/uploads/2009/02/open-collaboration-within-corporations-using-software-forges.pdf| 보존날짜 = 2016-10-08| url-status = dead}}</ref> Levine과 Prietula는 개방형 협업을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으로 정의한다.<ref name="doi.org"/> 이 정의는 여러 예시를 포착하며 이 예시들은 모두 유사한 원칙에 의해 결합된다. 예를 들어, 목적의식은 있으나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작품에 기여하고 소비하고 소통할 권한이 개방된 경제 가치 상품인 요소들 전반이 위키백과와 같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나 사용자 포럼, 공동체에서 관찰된다. [[UCC]] 기반 상업용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방형 협업의 예시에서는 누구든지 느슨히 공동 작용을 하는 소통하는 참여자들이 생산한 공유의 산물에 자유로이 기여하고 참여할 수 있다. 개방형 협업의 연구와 실천에 헌신하는 연례 콘퍼런스는 [[OpenSym]](과거 이름: WikiSym)이다.<ref>{{웹 인용|url=http://www.opensym.org/about-us/|title=About|work=The International Symposium on Open Collaboration|date=15 June 2010}}</ref>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단체는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이며 자기조직화적인 협업"으로 정의한다.<ref name="Opensym">{{웹 인용 | title = Definition of Open Collaboration | work = The Joint International Symposium on Open Collaboration | author = Dirk Riehle | quote = Open collaboration is collaboration that is egalitarian (everyone can join, no principled or artificial barriers to participation exist), meritocratic (decisions and status are merit-based rather than imposed) and self-organizing (processes adapt to people rather than people adapt to pre-defined processes). | accessdate = 2013-03-26 | url = http://www.wikisym.org/2012/09/28/definition-of-open-collaboration/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312135554/http://www.wikisym.org/2012/09/28/definition-of-open-collaboration/ | 보존날짜 = 2013-03-12 | url-status = dead }}</ref> === 오픈 소스 라이선스 === {{본문|오픈 소스 라이선스}} 오픈 소스는 [[오픈 소스 사용권|오픈 소스]]나 [[자유 라이선스]]를 통해 제품의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접근, 그리고 해당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재배포를 촉진한다.<ref>{{저널 인용|last=Lakhani|first=K.R.|last2=von Hippel|first2=E.|date=June 2003|title=How Open Source Software Works: Free User to User Assistance|journal=Research Policy|volume=32|issue=6|pages=923–943|doi=10.1016/S0048-7333(02)00095-1|hdl=1721.1/70028}}</ref><ref>{{서적 인용|title=Proceedings of the SAICSIT 2010 Conference — Fountains of Computing Research|last=Gerber|first=A.|last2=Molefo|first2=O.|last3=Van der Merwe|first3=A.|publisher=ACM Press|year=2010|isbn=978-1-60558-950-3|editor-last=Kotze|editor-first=P.|pages=75–85|chapter=Documenting open-source migration processes for re-use|doi=10.1145/1899503.1899512|display-editors=3|editor2-first=A.|editor2-last=Gerber|editor3-first=A.|editor3-last=van der Merwe|editor4-first=N.|editor4-last=Bidwell|citeseerx=10.1.1.1033.7791}}</ref> "오픈 소스"라는 용어가 널리 채택되기 전까지 개발자들과 생산자들은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오픈 소스"는 [[인터넷]]의 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었다.<ref>{{harvnb|Weber|2004}}</ref> [[저작권]], [[면허|라이선스]], [[도메인 네임|도메인]], 소비자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이 발생하였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정의된 조항에 의거하여 사용, 수정,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프트웨어]]와 기타 제품을 위한 [[라이선스 호환성|라이선스]]의 일종이다.<ref>{{웹 인용|title=Brief Definition of Open Source Licenses|url=http://opensource.org/licenses|publisher=Open Source Initiative|accessdate=April 25, 2013}}</ref><ref name="Popp2">{{서적 인용| first = Dr. Karl Michael | last = Popp | title = Best Practices for commercial use of open source software | year = 2015 | publisher = Books on Demand | location = Norderstedt, Germany | isbn = 978-3738619096}}</ref> 이 경우 최종 사용자와 상업 기업들은 자신들의 맞춤식 수정, 호기심, 또는 문제 해결 요구를 위해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프리웨어|무료]]로 이용이 가능하지만 꼭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 목적으로만 소스 코드의 [[비상업]]용 재배포와 수정을 허가하는 라이선스는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일부 제약이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코드 안에 개발자 이름과 저작권 문구를 보존할 것을 요구하거나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를 동일한 라이선스(예: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에서처럼)로 재배포할 것을 요구하는 등 소프트웨어의 기원의 관점에 대한 표현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들은 [[오픈 소스의 정의]](OSD)에 기반한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OSI)의 승인을 받은 것들이다.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코드 === {{본문|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는 (상업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목적을 위해, 또 원래의 디자인으로부터 수정을 할 수 있도록 [[소스 코드]]를 일반에 공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말한다. 오픈 소스 코드는 프로그래머들이 소스 코드를 개선시키고 공동체 내의 변경사항을 공유하는 협업적인 노력의 산물을 의미한다. 코드는 [[소프트웨어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출시된다. 해당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버전(포크/fork)을 다운로드, 수정 후 공동체에 게시할 수 있다. === "오픈" VS "자유" VS "자유-오픈" ===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 and open-source software, FOSS) 또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libre and open-source software, FLOSS)는 사용, 수정, 배포에 어떠한 제한도 없이 라이선스된, 공개적으로 공유되는 소스 코드를 말한다. 이 완전히 제한이 없다는 정의에 관한 혼동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자유로운"으로 알려진 프리(free)라는 용어가 "무료의"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being free to speak"의 free는 "자유로운"인데, 이는 "free beer"의 free(무료)와 동의어가 아니다.<ref name="rmsdissent" /> 이와는 반대로, 리처드 스톨먼은 "오픈 소스"라는 용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용어의 지지자들이 [[오픈 소스의 정의]]의 조항을 충족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꼭 다른 권한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조사를 위해 소스 코드가 공개되고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ref>{{웹 인용|url=https://www.gnu.org/philosophy/open-source-misses-the-point.html|author=Richard Stallman|authorlink=Richard Stallman|title=Why Open Source misses the point of Free Software|access-date=2019-02-17|publisher=gnu.org|quote=However, the obvious meaning for the expression “open source software”—and the one most people seem to think it means—is “You can look at the source code.” [...] the obvious meaning for “open source” is not the meaning that its advocates intend [...]}}</ref> "자유-오픈"은 공용 소유([[국유재산]]), 탈사사화([[국유화]]), 사유화 반대, [[투명한 행위]](transparent behavior)와는 구별된다. * [[GNU]] ** [[GNU 선언문]] ** [[리처드 스톨먼]] * [[Gratis versus libre]] (비용 없음 vs 제한 없음) == 컨트리뷰션 ==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컨트리뷰션(contribution) 또는 기여라고 한다. 버그 수정, 기능 추가, 소스 코드 수정, 코드 테스트와 같은 중요한 활동 이외에도, 오타 수정, 번역, 가이드 문서 작성, 디자인 작업, 의견 제시와 같은 사소한 활동도 컨트리뷰션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컨트리뷰션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용하던 오픈 소스를 개선한 경우 자신만 사용하면 버전 업이 될 때마다 추가로 패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컨트리뷰션을 한다. 둘째로 개인의 개발 실력 향상과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픈 소스 커뮤니티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특히 개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로 오픈 소스 활동은 공개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구직 활동 시 자신의 이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성을 높이려고 기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기여에 참여한다.<ref name="오픈소스 가이드">{{웹 인용|제목=오픈소스 가이드|url=https://naver.github.io/OpenSourceGuide/book/BetterContribution/why-contribute-to-open-source.html|확인날짜=2018-04-12}}</ref> == 오픈 소스 프로젝트 구성원 == 대부분 오픈 소스 프로젝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ref name="오픈소스 가이드"/> * 사용자 * 컨트리뷰터: 컨트리뷰션을 하는 모든 사람들 * 커미터: 컨트리뷰션 내용을 리뷰하고 프로젝트에 반영할지 결정하는 사람. 없는 경우도 있음. * 메인테이너: 프로젝트 방향 설정, 관리하는 사람. 보통 커미터 중 일부가 맡으며, 없는 경우도 있음 * 저작자: 프로젝트 만든 사람 또는 조직 == 소스가 공개되는 이유 == 소스가 공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ref name="오픈소스 가이드"/> * 이미 있는 오픈 소스를 [[포크 (소프트웨어 개발)|포크]]하여 새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는 경우, 라이선스 때문에 공개해야 함. * 소프트웨어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외부 개발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면 더 다양한 환경에서 소프트웨어를 시험해보고 품질을 높일 수 있음. * 사회 공헌의 측면에서 기술의 공유는 물질의 공유보다 상대적으로 희소성이 반감되는 자산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프로그램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한편 [[웹 브라우저]]를 예로 들어보면 과거 웹 브라우저의 전설처럼 여겨졌던 1994년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시장에서 밀어내고 2004년을 전후로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전체 사용량의 90%를 점유하기도 했었으며 약 20년 간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 익스플로러(IE) 웹 브라우저는 독과점 문제로 이슈가 제기된 바 있었다.<ref>{{웹 인용 |url=https://www.mk.co.kr/news/home/view/2004/10/338626/ |제목=매일경제-MS 끼워팔기 공방 3년만에 종지부..거액 과징금 부과되나 |확인날짜=2019-07-09 |archive-date=2019-06-04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604143122/https://www.mk.co.kr/news/home/view/2004/10/338626/ |url-status= }}</ref>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에 의해 우월적 자리를 내주고 나서는 [[마이크로소프트|윈도우 그룹]]의 부사장 존 벨피오레는 2018년 12월 6일 회사 블로그에서 "우리는 고객들을 위해 웹 호환성을 높이고 모든 웹 개발자들을 위해 웹 분열화를 줄이고자 크롬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도입하려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로써 지난 지속적인 익스플로러 버전별 지원 중단에 따른 사용자들의 불편과 관련해서 향후 웹 브라우저의 시장 점유율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ref>[http://it.donga.com/24040/ IT동아-크롬이 이겼고 IE는 졌다]</ref><ref>[http://www.itworld.co.kr/news/114798 IT월드-엣지의 크로미움 전환이 IE의 ‘종말’을 뜻하는 이유]</ref><ref>[http://www.ciokorea.com/news/114030 '자체 브라우저 버리고 크롬 선택한 MS' 6가지 패배 원인]</ref> 이후 현재 [[웹 브라우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는 적어도 넷스케이프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전철을 밟지않을 가능성이 높다. 크롬은 [[크로미엄 (웹 브라우저)|크로미움]]이라는 오픈 소스를 기반하고 있어서 독과점에 의해 소스 공개나 신생 상용 브라우저에 의한 경제적인 경쟁 부담이 이미 오픈 소스에 의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픈 소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대기업의 사례는 기업과 사용자와의 긍정적인 관계형성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얻은 교훈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장단점 == === 장점 === 장점은 다음과 같다.<ref name="CIO">{{뉴스 인용|저자1=Paul Rubens|제목=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는 7가지 이유|url=http://www.ciokorea.com/news/19907|날짜=2014-02-13|확인날짜=2018-04-12|뉴스=CIO Korea}}</ref> * 이용에 비용이 들지 않거나 적다. * 원하는 대로 변형 가능 * 보안 취약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오픈 소스가 보안 측면에서 더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ref>{{웹 인용|저자1=David A. Wheeler|제목=Secure Programming for Linux and Unix HOWTO|url=https://wiki.kldp.org/HOWTO/html/Secure-Programs-HOWTO/open-source-security.html|확인날짜=2018-04-12}}</ref> * 누구나 버그를 고칠 수 있다. * 특정 제조업체인 벤더(vendor)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 단점 === 단점은 다음과 같다.<ref name="CIO"/> * 사용이 편리한 배포판이 아닌 소스 코드를 직접 [[소프트웨어 빌드|빌드]]하여 사용하기에는 비숙련 사용자들은 이용이 어려울 수 있다. * 이미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가 있는 경우 호환성 문제가 발생 * 고객 지원이 불리 * 잘못된 정보일 수 있음 == 소프트웨어 == :*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패키지 목록]] * [[오픈 소스 사용권]] ** [[오픈 소스의 정의]]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역사]]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지]]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 * [[오픈 소스 비디오 게임]] ** [[오픈 소스 비디오 게임 목록]]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비즈니스 모델]] * [[오픈 소스와 클로즈드 소스 소프트웨어 간 비교]]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다양성]] * [[맵가이드 오픈 소스]] *: [[오픈스트리트맵]](OSM)과는 구별 == 하드웨어 == * [[RISC-V]] == 농업, 경제, 제조, 생산 == * [[:en:Open-source appropriate technology]] (OSAT) **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 ** [[OpenCores]] ** [[오픈 디자인 얼라이언스]] ** [[OHANDA]](Open Hardware and Design Alliance) ** [[오픈 소스 생태계]](Open Source Ecology, OSE) ** [[OpenStructures]] (OSP) * [[오픈 제조]](Open manufacturing) * [[오픈 소스 아키텍처]](OSArc) * [[오픈 소스 콜라]] * [[오픈 소스 하드웨어]] ** [[오픈 소스 하드웨어 프로젝트 목록]] * [[오픈 소스 제품 개발]](OSPD) * [[오픈 소스 로보틱스]] * [[오픈 소스 시드 이니셔티브]] == 과학, 의학 == === 오픈 사이언스 === [[오픈 사이언스]]는 확인 가능한 공유된 지식의 열린 발견 과정으로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프로세스와 연구가 공개적으로 공유되지 않는 [[의사과학|회사 소유 과학]], 그리고 논문이 [[유로화 벽]] 뒤에 감춰졌거나 사적 저널로 출판되는 클로드즈 사이언스와는 대조된다. * [[오픈 사이언스]] ** [[오픈 사이언스 데이터]] ** [[오픈 사이언스 프레임워크]]와 [[오픈 사이언스 센터]] ** [[오픈 소스 랩]] * [[오픈 노트북 사이언스]] * [[오픈 소스 피직스]](OSP) * [[오픈 소스 지리공간 재단]] * [[NASA 오픈 소스 동의]](NOSA) * [[수학용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목록]] * [[오픈 소스 생물정보학 소프트웨어 목록]] * [[오픈 소스 의료 소프트웨어 목록]] * [[오픈 소스 의료 하드웨어 목록]] == 미디어 == * [[오픈 소스 영화]] ** [[오픈 소스 영화 목록]] ** [[오픈 소스 시네마]] * [[오픈 소스 저널리즘]] ** [[오픈 소스 조사]] *: 참고 항목: [[크라우드소싱]], [[역사수정주의]]. * [[오픈소스레코드 레이블]] * "Open Source": [[매직 머시룸]]의 1960년대 록 노래 * [[오픈 소스 (라디오 쇼)]] * [[오픈 텍스트북]] * [[The Open-Source Everything Manifesto: Transparency, Truth, and Trust]]: 2012년 책 == 단체 == *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 (OSI) *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인스티튜트]] * [[저널 오브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 [[오픈 소스 데이]] * [[오픈 소스 개발자 콘퍼런스]] * [[오픈 소스 개발 연구소]] (OSDL) * [[오픈 소스 드러그 디스커버리]] * [[Geeknet|오픈 소스 테크놀로지 그룹]](OSTG) * [[코소보의 오픈 소스]] * [[오픈 소스 유니버시티 밋업]] * [[뉴질랜드 오픈 소스 어워드]] == 프로시저 == * [[오픈 시큐리티]] * [[오픈 소스 인포메이션 시스템]] * [[오신트]] == 사회 == * [[오픈 소스 커리큘럼]](OSC) * [[오픈 소스 거버넌스]] ** [[오픈 폴리틱스]] *: 같이 보기: [[시민 기술]] * [[오픈 소스 종교]] * [[오픈 소스 노동조합]] == 각주 == <references />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Free software}} {{div col|colwidth=20em}} * [[협동조합]] * [[크라우드소싱]] * [[탈중앙식 컴퓨팅]], [[탈중앙식 웹]] ** [[분산 파일 시스템]] ** [[:분류:자유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 [[:분류:인터넷 프라이버시 소프트웨어]] ** [[인터넷 프라이버시]] ** [[프라이버시 소프트웨어]] * [[자유 저작물]] * [[자유 문화 운동]] *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FSM) * [[계약자유의 원칙]] * [[GNU]] ** [[GNU 선언문]] ** [[리처드 스톨먼]] * [[오픈 콘텐츠]] * [[열린교육]] ** [[OER]] * [[오픈 포맷]] * 오픈 라이선스, [[오픈 저작권 라이선스]] ** [[저작권]] ** [[카피레프트]]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 [[저작권 침해]] ** [[디지털 권리 관리]] ** [[전자 프런티어 재단]] ** [[국제해적당]] ** [[공정 이용]] * [[공개적 퍼블리싱]] * [[개방형 표준]] * [[P2P]] ** [[P2P 대출]] ** [[동등 계층 생산방식]] * [[과학적 방법]], [[과학주의]] * [[공유경제]] ** [[공유경제|공유의 종류]] * [[조합 (법률)]] {{div col end}}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지식 재산권 개혁 운동}} {{소프트웨어 배포}} {{전거 통제}} [[분류:학술 출판]] [[분류:사업 모형]] [[분류:협업 소프트웨어]] [[분류:기술법]] [[분류:자유 문화 운동]] [[분류:지식 재산법]] [[분류:오픈 액세스]] [[분류:오픈 포맷]] [[분류:오픈 사이언스]] [[분류:오픈 소스 하드웨어]] [[분류:공개출처정보]] [[분류:오픈 소스 운동]] [[분류:오픈 소스 비디오 게임]] [[분류:오픈 콘텐츠 프로젝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EulerPhi.svg|섬네일|오일러 피 함수의 그래프. ϕ(1)부터 ϕ(1000)까지의 값들을 나타낸다.]] [[수론]]에서 '''오일러 피 함수'''(-函數, {{llang|en|Euler’s phi (totient) function}})는 [[정수환]]의 [[몫환]]의 [[가역원]]을 세는 [[함수]]이다. 즉, ''n''이 [[양의 정수]]일 때, ϕ(''n'')은 ''n''과 [[서로소 (수론)|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와 같다. 예를 들어, 1부터 6까지의 정수 가운데 1, 5 둘만 6과 서로소이므로, ϕ(6) = 2이다. 1부터 10까지의 정수는 모두 11과 서로소이며, 1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가 아니므로, ϕ(11) = 10이다. 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이므로, ϕ(1) = 1이다. == 정의 == 양의 정수 <math>n</math>의 '''오일러 피 함수''' <math>\phi(n)</math>은 [[정수환]]의 [[몫환]] <math>\mathbb Z/(n)</math>의 [[가역원군]]의 원소 개수이다. 즉, 1부터 <math>n</math>까지의 정수 가운데 <math>n</math>과 [[서로소 아이디얼|서로소]]인 것들의 개수이다. :<math>\phi(n)=|(\mathbb Z/(n))^\times|=|\{k\in\{1,\dotsc,n\}\colon\gcd\{n,k\}=1\}|</math> == 성질 == === 값 === 1부터 80까지의 정수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다음과 같다. {{OEIS|A000010}} {| class="wikitable" ! ''n''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ϕ(''n'') | 1 || 1 || 2 || 2 || 4 || 2 || 6 || 4 || 6 || 4 || 10 || 4 || 12 || 6 || 8 || 8 || 16 || 6 || 18 || 8 |- ! ''n''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 ϕ(''n'') | 12 || 10 || 22 || 8 || 20 || 12 || 18 || 12 || 28 || 8 || 30 || 16 || 20 || 16 || 24 || 12 || 36 || 18 || 24 || 16 |- ! ''n''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 ϕ(''n'') | 40 || 12 || 42 || 20 || 24 || 22 || 46 || 16 || 42 || 20 || 32 || 24 || 52 || 18 || 40 || 24 || 36 || 28 || 58 || 16 |- ! ''n''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 ϕ(''n'') | 60 || 30 || 36 || 32 || 48 || 20 || 66 || 32 || 44 || 24 || 70 || 24 || 72 || 36 || 40 || 36 || 60 || 24 || 78 || 32 |} === 항등식 === 오일러 피 함수는 [[곱셈적 함수]]다. 즉, 만약 두 정수 <math>m,n</math>이 서로소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math>\phi(mn)=\phi(m)\phi(n)</math>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소인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이를 '''오일러 곱 공식'''({{llang|en|Euler product formula}})이라고 한다. :<math>\phi(n)=n\prod_{p\mid n} \left(1-\frac{1}{p}\right)</math> 예를 들어, 20의 소인수는 2, 5이므로 <math>\phi(20)</math>은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math>\phi(20)=20 \left( 1-\frac{1}{2}\right)\left( 1-\frac{1}{5}\right)=20 \times \frac{1}{2} \times \frac{4}{5}=8</math> 그리고, 소수 <math>p</math>의 거듭제곱 <math>p^k</math>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math>\phi(p^k)=p^{k-1}(p-1)</math> 이다. 특히 소수 <math>p</math>의 경우 :<math>\phi(p)=p-1</math> 이다. 오일러 피 함수를 통해 [[항등 함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math>\sum_{d|n} \phi(d)=n</math>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 :<math>\sum_{d|n}d\mu(n/d)=\phi(n)</math> 여기서 <math>\mu</math>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만약 양의 정수 <math>a,n</math>이 서로소라면, 다음과 같은 합동식이 성립한다. 이를 [[오일러의 정리]]라고 한다. :<math>a^{\phi(n)}\equiv 1\pmod n</math> == 응용 == 오일러 피 함수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론]]에서는 [[순환군]] <math>\mathbb Z/n\mathbb Z</math>의 가능한 생성원(generator)의 수는 <math>\phi(n)</math>이다. 이는 <math>n</math>과 서로소인 임의의 수를 사용하여 <math>\mathbb Z/n\mathbb Z</math>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다각형|정''n''각형]]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인지, 즉 [[컴퍼스와 자 작도|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있는지는 <math>\phi(n)</math>이 2의 [[거듭제곱]]수인지와 [[동치]]이다. 즉, :''n'' = 2, 3, 4, 5, 6, 8, 10, … 이라면 :<math>\phi(n)</math> = 1, 2, 2, 4, 2, 4, 4, … 이므로 정''n''각형을 작도할 수 있지만, 다른 값의 경우에는 작도할 수 없다. 특히, ''n''이 [[소수 (수론)|소수]]인 경우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암호학]]의 [[RSA 암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 같이 보기 == * [[페르마의 소정리]] * [[조르당 피 함수]] * [[카마이클 피 함수]] * [[토션트 합 함수]] == 외부 링크 == * {{eom|title=Totient function}} * {{매스월드|id=TotientFunction|title=Totient function}} [[분류:수론]] [[분류:레온하르트 오일러]] [[분류:모듈러 산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성인 정보 | 이름 =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노벨상 딱지|평화상|1979}} | 출생일 = {{출생일|1910|8|26}}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7|9|5|1910|8|26}} | 축일 = 9월 5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그림 = Mother Teresa 1.jpg | 크기 = 205px | 수상 = [[노벨 평화상]] | 출생지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코소보주]] [[스코페]]</br>(現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 사망지 = [[인도]] [[서벵골주]] [[콜카타]] | 시복일 = 2003년 10월 19일 | 시복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시성일 = 2016년 9월 4일 | 시성인 = [[교황 프란치스코]] | 상징 = [[수도복]], [[묵주]] | 수호 = [[세계 청년 대회]], [[사랑의 선교회]] | 서명 = Signature of Mother Teresa.svg }} '''테레사 수녀'''({{llang|en|Mother Teresa}}, [[1910년]] [[8월 26일]]~[[1997년]] [[9월 5일]] 총 87살)는 주로 [[인도]]에서 활동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녀]]다. 1950년에 [[인도]]의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라는 [[천주교]] 계통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헌신하였다. 본명은 '''아네저 곤제 보야지우'''({{llang|sq|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2016년 9월 5일 성인으로 되었다. 1970년대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ref>Associate Press. (October 14, 2003). [http://www.cnn.com/2003/WORLD/europe/10/14/rome.teresa.ap/index.html "Full house for Mother Teresa ceremony] {{웨이백|url=http://www.cnn.com/2003/WORLD/europe/10/14/rome.teresa.ap/index.html |date=20031017021738 }}". [[CNN]]. Retrieved May 30, 2007.</ref><ref>"[http://www.britannica.com/eb/article-9071751/Blessed-Mother-Teresa Blessed Mother Teresa]". (2007). ''[[Encyclopædia Britannica]]''. Retrieved May 30, 2007.</ref> 그녀의 공인 전기는 나빈 차와가 작성하고 1992년에 출판했으며 영화와 기타 책의 주제로 활동했다. 2017년 9월 6일, 테레사 수녀와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콜카타의 로마 가톨릭 대교구의 공동 후원자로 지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www.spiritualitycircle.com/uh19-mother-teresa-artist-ndash-chandan-pramanik-india.html|제목=Spiritual Art Gallery Exhibit (UH19) MOTHER TERESA Artist – Chandan Pramanik, India|언어=en|확인날짜=2020-05-01}}</ref> [[파일:Mother Teresa, signature.svg|섬네일|마더 테레사의 서명]]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라고 불리기도 한다. == 생애 == 1910년, [[오스만 제국]]령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도 참가했다가 의문사하였다.<ref>이에 대해 당시 북마케도니아를 새로 지배하게 된 [[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 정부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ref>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해서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영국령 인도 제국|인도]]로 이주하였다.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에 귀화해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인 [[사랑의 선교회|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llang|bn|Nirmal Hriday}}의 번역)이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지었다. 이때 테레사 수녀는 [[콜카타]] 시청에서 제공한 건물을 썼는데, 칼리 신전 뒤에 있었고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해서<ref>전기 공급, 취사설비, 넓은 안마당</ref> 기꺼이 쓰려고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건물을 쓸 것을 의심해서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 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 없이 복지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받아들였다.<ref>{{서적 인용|제목=20세기를 만든 사람들|장=마더 테레사|저자=에마 존슨|편집자=김석희 옮김|출판사=작가정신|쪽=76-80}}</ref> 1955년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라는 어린이 보호 시설을 개설하였고, 1958년에는 여기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이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고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 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ref>에마 존슨, 앞의 책, p.81</ref>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만들었다. 이런 여러 사회봉사 활동 덕분에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캘커타]]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 하였다. {{인용문2|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파일:President Ronald Reagan presents Mother Teresa with the Medal of Freedom at a White House Ceremony in the Rose Garden.jpg|300px|섬네일|[[미국]]의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의 메달을 수여하는 모습 (1985년)]] * 1980년 [[바라트 라트나]](BR) 수훈. * 1983년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honorary OM) 수훈. * [[1997년]] [[9월 5일]] [[인도]] 콜카타에서 사망. [[9월 13일]] 인도 [[국장 (장례)|국장]]으로 장례. *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복녀]] 반열에 오름. * [[2016년]] [[9월 4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성인 (종교)|성녀]] 반열에 오름. == 같이 보기 == * [[압둘 사타르 에디]] * [[알바니아인]] * [[여자 노벨상 수상자 목록]]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IMDb 이름|0609336}} {{노벨 평화상 수상자}} {{1979년 노벨상 수상자}} {{전거 통제}} [[분류:1910년 출생]] [[분류:1997년 사망]] [[분류:말라리아로 죽은 사람]] [[분류:북마케도니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인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인도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여자 노벨상 수상자]] [[분류:막사이사이상 수상자]] [[분류:템플턴상 수상자]] [[분류:알바니아계 인도인]] [[분류:알바니아계 북마케도니아인]] [[분류:북마케도니아계 인도인]] [[분류:스코페 출신]] [[분류: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인도의 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교황 프란치스코가 시성한 성인]] [[분류: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한 복자]] [[분류:알바니아의 로마 가톨릭 수녀]] [[분류:다르질링 출신]] [[분류:인도의 평화주의자]] [[분류:로마 가톨릭 공동체 창설자]] [[분류:인도의 자선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대통령 정보 | 이름 = 윤보선 | 그림 = 윤보선 대통령 존영2.jpg | 크기 = | 설명 = 윤보선(1960) | 국가 = 대한민국 | 대수 = 4 | 취임일 = 1960년 8월 13일 | 퇴임일 = 1962년 3월 24일 | 부통령 = [[허정]](1960년)<br />[[장면]](1960년~1961년) | 부통령명칭 = 국무총리 | 대통령 = [[이승만]](1949년) | 출생일 = {{출생일|1897|8|26}} | 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br />(현재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 국적 = 대한민국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0|7|18|1897|8|26}}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 매장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 본관 = [[해평 윤씨|해평]](海平) | 정당 = [[무소속]] | 경력 = 제2대 서울특별시장<br />제2대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장관]]<br />4선 국회의원<br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고문 | 종교 =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ref>[http://www.ever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0 대통령열전2 : 제4대 대통령 윤보선]</ref> | 학력 =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 학사<br />[[에든버러 대학교|동 대학원]] 고고학 석사<br />[[옥스퍼드 대학교|옥스퍼드 대학원]] 영문학 석사 수료 | 별명 = 자(字)는 경천(敬天)<br />호(號)는 해위(海葦) | 배우자 = 초배 [[여흥 민씨]] 민경숙(사별, 1915년 결혼~1937년 사별)<br />계배 [[공덕귀]](재혼, 1948년 재혼~1990년) | 자녀 = [[윤완구]](장녀), [[윤완희]](차녀)<br />[[윤상구]](장남), [[윤동구]](차남) | 부모 = [[윤치소]](부), [[이범숙]](모) | 가족 = 조부 [[윤영렬]] | 서명 = Yoon Po-Seon signature (2).svg | 전임 = 이승만 | 전임대수 = 1·2·3 | 후임 = 박정희 | 후임대수 = 5·6·7·8·9 }} '''윤보선'''(尹潽善,<ref>{{헌정회|891}}</ref> [[1897년]] [[8월 26일]]~[[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특별시장|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호서 지역의 [[대한제국]]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은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가 배출한 전세계 각 공화 국가 두 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군정기|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조선)|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1182.html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한겨레 2009.08.14</ref>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이준용 (1870년)|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1922년)|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과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시|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아무리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배경 ==== [[파일:Korea-History-Goban Game in Seoul Korea 1904 (LOC).jpg|섬네일|오른쪽|180px|종조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마을(현, [[아산시]] [[둔포면]] 신항1리 143-1)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이재룡)]](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유아기를 잠시 [[한성부]]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조선)|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파일:Yunchiho1945.jpg|섬네일|왼쪽|130px|당숙 좌옹 [[윤치호]]]] 윤보선의 10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조선)|선조]] 때의 형제 재상이었다. 9대조 [[윤흔]]은 [[선조 (조선)|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로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대조 [[윤취지]]는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7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6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가계가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고 사후에 [[증직]]으로 [[증직|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통정대부 비서원승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직|증]] 이조참의와 [[증직|증]] 의정부공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ref name="한영우111">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돌베개, 2003) 111페이지</ref>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ref name="한영우111"/> ==== 유년기 ==== [[파일:Yun Bo-seon's parents-01.PNG|섬네일|오른쪽|200px|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해위 윤보선은 많은 하인들을 보유한 귀족 양반가 출신이다. 해위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ref name="goo17">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17페이지</ref>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국동 윤보선가|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파일:윤영렬 & 한진숙 회혼례.jpg|섬네일|140px|왼쪽|1927년 5월 16일 조부 [[윤영렬]]과 조모 [[한진숙 (1851년)|한진숙]]의 회혼례식 사진]]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ref name="yuk166">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166페이지</ref>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여전히 부유했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ref name="goo17"/>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ref name="goo18">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18</ref>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우|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ref name="goo18"/>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ref name="goo18"/>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 학창 시절 === ==== 청소년기 ==== [[파일:Yun Chi-Yeong 1935.PNG|섬네일|140px|왼쪽|숙부이자 어린시절 친구인 [[윤치영]]]] 충청남도 아산 향리에서 지내던 윤보선은 [[을사늑약]] 체결 사건 직후 [[한성부]]로 본격 이사하였는데, 10세 때 집 근처에 있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ref name="goo18"/>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염려하게 하였다.<ref name="goo19">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19</ref>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ref name="goo19" /> 한일 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독립운동가]]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평생 존경해왔지만<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6~47</ref> 1950년 이후 정치적 노선 차이로 인해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ref>황현, 매천야록 (두산동아, 2010) 126</ref>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ref name="한영우111"/>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ref name="다음">[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079a 윤보선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 일본 유학 시절 ==== {{참고|신해혁명|삼민주의}} 1913년 윤보선은 소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중학교이던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그는 게이오 의숙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0">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0</ref> 모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그는 신념적으로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또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군주나 통치자가 아버지이고 백성, 국민은 자녀라는 주장에도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13년 [[일본]]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해 말 [[일본]]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0"/>,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ref name="다음"/> 드러내놓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학창시절의 그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 귀국과 망명 결심 ====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ref name="한영우111"/> 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0페이지</ref>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 청년기 === ==== 중국 망명 초기 ====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ref name="강준만"/>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화민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ref name="goo21">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1</ref>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ref name="goo21"/>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ref name="goo22">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2페이지</ref>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ref name="goo22"/>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였으나 사실 그의 상하이 망명을 주선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여운형이었다. 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 독립운동과 상해 생활 ==== [[파일: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21.jpg|250px|오른쪽|섬네일|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스승인 [[신규식]]]] {{참고|동제사|신한청년당}} 1917년봄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1895년)|신석우]], [[박찬익 (1884년)|박찬익]], [[이시영 (1868년)|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가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ref name="gg25">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5페이지</ref> [[상하이]]의 중국인 강도와 조선인 강도들의 존재를 염려한 [[신규식]]은 자신의 집, [[상하이시]] 어양리 5호에 있는 집 2층 다락방을 마련하여 그의 거처로 주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어양리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1917년 [[신규식]]이 1912년에 설립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이 되었다. 이어 [[신규식]], [[김규식]]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淸年黨)에도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의정원 규약에는 '만 23세 이상의 한국인 남녀는 [[의정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정원 의원 피선거권을 관철시켰고, 심사 끝에 그는 [[경기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 임시정부 활동 ==== ===== 임시정부 거사자금 운반책 ===== {{참고|대한민국 임시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여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지시를 받고<ref name="다음"/><ref name="gg25" />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1868년)|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ref name="gog26">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6페이지</ref>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ref name="다음"/>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ref name="gog26"/>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후 윤보선은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이승만으로부터 자금 조달 중책을 맡고 일단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차림새가 너무도 말쑥한 신사였다<ref name="dongdong">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1991) 273페이지</ref>'고 한다. 윤치영이 도쿄 YMCA 회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고 해서 나가 보니 해위가 정말 말쑥하게 영국신사처럼 쏙 빼입고 거기 섰더라는 것이다. 그때 윤치영은 그곳에 있던 몇 사람과 [[2.8 동지회]]를 구성<ref name="dongdong"/> 해서 활동하였다. [[2.8 독립 선언]]에 가담한 일로 [[윤치영]]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던 때인데 그렇게 정정당당히 나타나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 걱정 마시라는 표정으로 빙끗 웃으며 들어와서는 포켓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는데 그 때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서겸]](徐謙)의 서한이었다고 한다. 서겸은 당시 중국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냈는데 주일[[중국]]대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준 것이다.<ref name="gongdok274">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1991) 274페이지</ref> 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내 조카인데 볼 일이 있어 [[일본]]으로 보내니 모든 여행길에 편리를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ref name="gongdok274"/> 그러나 그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떨었다고 한다. 윤일선 박사, 동생 윤완선 등도 교토에서 올라왔는데 일단 윤보선이 오라 해서 왔지만 그들도 떨었다고 한다. 그 때 윤완선은 형의 전갈을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돈 삼천원을 마련해 와 윤보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ref name="gongdok274"/> 해위는 동생에게서 돈 삼천원을 받아 들고 다시 상해로 가서 이승만에게 전했다고 한다.<ref name="gongdok274"/>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ref name="gog26"/>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 의정원 의원 재선 및 언론활동 보조 =====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ref name="다음"/>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ref>임시의정원은 23세 이상이 되어야 의원 피선거권을 부여하였다.</ref> 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임시의정원|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ref name="gog27">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7</ref>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1868년)|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gog27"/>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ref name="한영우115">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돌베개, 2003) 115페이지</ref> 1920년 10월부터는 [[신규식]]이 1917년부터 창간하던 주간잡지 《[[진단]]》지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진단]]에는 [[장졔스]], [[쑨원]], [[천두슈]] 등 [[중국]] 명사들의 칼럼과 논문, 기행문 등도 수시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국 전까지 신규식의 진단지 발간과 편집일도 도와주었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뒤에 그는 스승 [[신규식]]과 인척이 되는데, 이는 [[신규식]]의 아들 신준호와 그의 둘째 딸 [[윤완희]]의 결혼으로 사돈이 된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는 다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와 결혼하여 후일 [[민필호]], [[김준엽]] 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 영국 유학 생활 ==== [[파일:윤보선 에든버러.jpg|섬네일|오른쪽|180px|[[에든버러 대학]] 재학 중(1920년대)]]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ref name="강준만"/>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ref name="gog27"/>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ref name="gog28">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28페이지</ref>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ref name="gog28"/>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1페이지</ref>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ref name="한영우111"/> 중퇴하였다. 그 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ref name="goo32"/> ==== 에든버러 대학 재학 시절 ====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2~33페이지</ref>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ref name="gog33">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3페이지</ref>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ref name="gog33"/>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7페이지</ref>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다. 윤보선은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하느냐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를 구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하였다. 결론은 신앙이 사회를 구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적극 참여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윤보선은 [[영국]]의 대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배우면서 정치인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ref name="yuk166"/> 그러나 일본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맡겨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밥먹듯 했다. [[에든버러 대학]] 유학 시절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ref name="yuk165">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165페이지</ref>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들과는 대화 한마디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 일제 강점기 후반 ==== ===== 졸업과 귀국 ===== [[파일:Yunposun1932.PNG|섬네일|왼쪽|170px|귀국 직후의 윤보선]]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에서 고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화민국 (1912년~1949년)|중화민국]] [[상하이시|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8페이지</ref>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9페이지">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9페이지</ref>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여비를 차라리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9페이지"/>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ref name="한영우111"/> [[파일:Yun Chi-ho's Family 02.png|섬네일|오른쪽|300px|어머니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윤보선, 넷째 줄 가운데는 당숙 [[윤치호]], 셋째 줄 가운데는 아버지 [[윤치소]], 그 옆은 할머니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어머니 [[이범숙]],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종형 [[윤영선 (1896년)|윤영선]], 오른쪽 끝은 숙부 [[윤치영]]]]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 귀국 직후 =====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ref name="강준만"/>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ref name="한영우111"/>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0페이지</ref>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7페이지">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7페이지</ref>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6년 어머니 [[이범숙]]의 환갑연을 기념하여 당숙 [[윤치호]]가 세운 [[신항리 감리교회]]에 특별히 1500원을 헌금하여 교회를 개축하게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감리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했다. 1938년 5월에는 [[월성소학교]]에 평당 시가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 기고문 발표 등으로 소일하였다. ==== 태평양 전쟁, 은둔생활 ==== [[파일:Yun Chi-ho's Family-01.jpg|섬네일|오른쪽|300px|문중 회의에 참석한 윤보선과 [[윤치호]](1943년), 세 번째 줄 왼쪽 끝 도포를 입은 이가 [[윤치호]], [[윤치호]]와 여성 사이로 보이는 네 번째 줄 왼쪽 끝 양복을 입은 남자가 윤보선]] [[파일:Yunposeon 1939.PNG|섬네일|왼쪽|150px|윤보선 (1930년대 후반)]] {{참고|태평양 전쟁|창씨 개명}} 1940년대 이후 그는 외부출입을 줄이고 가택에 칩거생활하였다. 때로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내려가서 지내기도 했다. 미니 골프장을 갖추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별장은 은둔하기에 너무나 좋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ref name="한영우111"/>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 [[윤치소]]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철원군]] 어운면 월성리의 [[월성소학교]]에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 광복 직후 === ==== 한민당 창당과 임시정부 환영회 ==== {{참고|국민대회 준비위원회}} {{참고|한국민주당}} [[파일:Yoon30.jpg|섬네일|오른쪽|140px|당숙 윤치호]] 1945년 8월 16일 그는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다시 [[원세훈 (1880년)|원세훈]]의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에 조직된 [[한국민주당]]에 흡수된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본 [[천두슈]]계의 [[중국 공산당]]을 목격한 적이 있어 평등주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인용문2|1945년 8월 15일 몽매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을 예기하고 그 날이 속히 이 땅에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해방을 맞은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터전을 마련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최선을 다할 때가 마침내 온 것이다.<ref name="goo41">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1</ref>}} 1945년 8월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 당숙 [[윤치호]] 등과는 달리 그는 [[친일파|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ref>심지연, 〈민주당 결성과 윤보선의 리더십 연구: 1960년대 초를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106~110쪽.</ref> 또한 [[일제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1945년 9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어 임시정부 환영대회 개최 및 장소, 비용 부담 등에 참여하였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5년 10월 미군의 한반도 상륙 뒤에는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다.<ref name="autogenerated4">{{웹 인용 |url=http://www.seoul.go.kr/ |제목=서울특별시 역대 시장 |확인날짜=2010년 12월 30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1230201259/http://www.seoul.go.kr/ |보존날짜=2010년 12월 30일 |url-status=dead }}</ref><ref name="autogenerated5">[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WIssue/Article.asp?aid=20090607002533]{{웨이백|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WIssue/Article.asp?aid=20090607002533|date=20131213221617}}<span> [김상회 풍경소리</span>&#x5D;<span>윤보선 前대통령 부귀한 자손임에도 검소한 생활 건강한 웃음 푸른 희망 - 스포츠월드<!-- 봇이 따온 제목 --></span></ref> 동시에 미군정청 행정자문위원과 미군정청 금융경제위원회의 고문도 겸직하였다. 1945년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ref>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 정계 입문 ==== [[파일:송진우.gif|섬네일|왼쪽|140픽셀|한민당의 초대 당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9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개설하자, 그는 국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9일 그의 5촌 당숙 [[윤치호|좌옹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심한 비판 끝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문중에서 창씨개명 할 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12월 30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그는 아침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 뒤 [[김구]],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다. 5월 27일에는 [[한민당]] 지역유세대 조직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일대를 다녔다. 1946년 6월 15일 저녁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ref name="다음"/>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 4일에는 [[한국의 군정기|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편되자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이 되었다. 1947년에는 우남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어떤 직위로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보선은 사회단체 활동과 [[민중일보]] 사장직으로 만족하겠다며 번번이 사양하였다. 7월 4일 [[이용설]] 등과 함께 외국의 정세를 연구하는 [[국제정세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영국 유학 경력을 인정받아 10월 8일에는 영국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영협회]](韓英協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바로 빈소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2월 13일에는 유엔 한국파견위원단(UN한위) 환영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유엔의 한국위원회 위원들의 영접을 준비하였다. ==== 정부수립과 제헌의원 낙선 ====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도너]], [[김병로]], [[엄항섭]] 등과 함께 회의에 참관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노선을 줄곧 지지해왔다.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 해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체를 조직한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출마를 위해 서울시당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충청남도로 내려갔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충남]] [[아산군|아산시]]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충청남도#아산군 (제18선거구)|낙선]]했다.<ref name="다음"/> 총선 낙선 이후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칩거 20일만인 5월 30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국회의장]] [[비서실장]]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신문사]] 경영 활동을 하고 있었다. 7월 22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민중일보]]사의 사주로 있겠다며 입각제의를 사양하였다. 초대 내각 구성을 놓고, 내각을 조직한 사람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그의 숙부였던 [[윤치영]]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다며 서운한 의사를 나타냈으나 그는 향후 다른 직책으로 그를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으로부터 주[[중화민국|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ref name="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7페이지"/> 그는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주[[일본]]공사직을 요청했고, 윤보선은 자리를 회피하며 주[[일본]]공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 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이 역시 거절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8페이지</ref> [[이승만]]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그의 외교관 파견을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허정과 이기붕을 보내와 주 중화민국 대사,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서울]]에서 조직된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 정치 활동 === ==== 서울시장 재직 ==== ===== 서울시장 취임 ===== {{참고|서울특별시장}} [[파일:Yun Bo-seon.jpg|섬네일|160px|왼쪽|서울특별시장 재직 당시]] 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특별시장|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허정]](許政)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직]]을 피하려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별장에 은둔하였으며, 이를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49</ref> 윤보선은 당시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尹致暎)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50페이지</ref> 신문기사에 서울시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지못해 내려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직에 취임하였다. {{인용문|과연 특별시장이라는 중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의문이나, 나로서는 전력을 다하여 서울시의 건전한 발전에 노력할 각오이니 일백 오십만 시민여러분의 끊임없는 성원을 바라 마지않는다<br /><br />서울시장 취임 담화문}}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특별시장|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ref name=autogenerated4 /><ref name=autogenerated5 /> 각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렸다. 동시에 시내 방역 소독 활동 역시 적극 추진하고 일일이 보고받고, 위생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청소상태 등을 직접 점검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또한 동사무소에도 [[국문]] 보급반을 설치하게 하여 성인들에게 한글 정도는 동서기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다. 또한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식량 배급을 1가구별로 받도록 정리, 기록케 하였다. ===== 서울시의 청소 시장 ===== [[파일:1950년대의 윤보선.jpg|섬네일|오른쪽|1950년대의 윤보선]] 그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할 무렵의 [[서울특별시]]는 거리에 쓰레기와 [[인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자동차나 열차, 전차에서 혹은 도보로 길에 투척한 쓰레기와 인분, 주취후 구토물로 몸살을 앓았다. 윤보선은 시장이 된 뒤 [[공무원]]과 단속요원, 경찰들을 통해 이들을 단속, 정리 및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시장으로서 제일의 당면과제는 다름 아닌 청소문제였다<ref name="guguk53">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53페이지</ref>'라고 회상하였다. {{인용문2|그때 서울 가도에는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산을 이루어 길을 막을 정도로 쌓였고 인분이 넘쳐서 불결함이란 실로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듯 청소 문제는 중시되었으며 따라서 시장으로서의 나의 평가에 대한 첫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는 [[신문]]에서 [[복마전]]으로 불리었다. 청소도 문제려니와 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벗겨야겠다. 새 시장의 책무는 실로 중대하였다.<ref name="guguk53"/>}} 그런데 [[시청]]에 가서 보니 그때까지는 청소가 큰 이권으로 화해서 각구에서 청소기재와 도구를 개인에게 청부를 주고 있었다. 이 청부를 맡은 개인들이란 꽤 유력자들이었고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책임수행은 않고 국고금만 축내며 이권화시키고 있었는데 모든 원인이 있었다. <ref name="guguk53"/> 그리하여 우선 이 청소권을 모두 회수해서 서울시의 직영으로한 후에 시장인 그가 직접 감독하여 전 시청직원이 총출동하고 각 구마다 책임제로 경쟁을 붙여 쓰레기 반출작업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ref name="guguk53"/> 또한 버스 승강장과 철도역, 공원 등에 공중 쓰레기통을 설치하여 보급하였다. 당시 윤보선이 보급한 공중 쓰레기통이란, 말뚝을 박고 큰 양동이를 걸어둔 것이었지만, 이는 공중 휴지통 설치의 시발점이 된다. 후일 그는 '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한 때 청소시장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ref name="guguk54">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54페이지</ref>'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소문제를 수습한 후 그는 시민에게 다시 호소하여 재래의 자기 집 문전을 알뜰히 하는 미풍을 되살리도록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학교와 각 부인회 그리고 경찰관들마저 비를 들고 나서게 되어 청소작업은 명실공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ref name="guguk54"/> ===== 시청 행정의 투명화 ===== 그는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하고, 서울시 시정사항을 일체 공개하고 공고문을 붙였다. 서울시 시정 공개는 이후 지방행정 사항을 공고, 공시하는 것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왕조시대 이후에도 일부 교서만이 반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행정사항은 대부분 공포되지 않았다. 청소 문제를 일단락 짓자 그는 그 다음 착수한 것은 서울시청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일소하는 것과 민원서류의 속결문제였다.<ref name="guguk54"/> 그는 이러한 지방 수령과 이속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부정부패와 담합, 암투를 불러오는 요인이라 지적하고 모든 행정사항을 관보 또는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공개할 것을 지시, 시행하였다. 시정 사항이 공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아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 신생활 운동 ===== [[파일:Toilet Beijing 2.jpg|섬네일|오른쪽|140px|한국에 처음 보급된 초기 양변기와 유사한 형태의 좌식 [[양변기]]]] 서울시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 그는 신생활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신생활운동이라고 하였다.<ref name="guguk54"/>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꼭 실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ref name="guguk54"/>, 그 실천단계에 들어설 때 상공부장관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ref name="guguk55">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55페이지</ref>'라고 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취임 초기부터 양복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취임 초 직원들과 구청, 동사무소 서기들을 통해 양복과 미국에서 반입된 의류들을 보급하였다. 이때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도 시중에 보급하였다. 윤보선은 생활의 개량, 의복 개량, 위생상태 점검 등의 시정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재래의 가정생활에서 모순되고 불편한 여러 면을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개혁해 보려 했던 것인데 특히 한복의 개량과 주택의 개량이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ref name="guguk55"/>'고 하였다. ===== 양변기 보급 =====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ref name="guguk55"/> 하겠다고 공포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 관공서와 기타 공중화장실을 대부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였다. 따라서 흉한 대소변 얼룩과 여름철 파리, 모기 등의 번식을 차단하고 주변에 대소변 악취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와서 변기가 흘러가는 것을 희한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또한 악취가 사라진 것을 놀라워했다. 윤보선은 자신이 1920년대, 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수세식 변기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것이 종전 이후 유럽에 보편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인용문2|전국에 걸쳐서 개혁은 못하더라도 우선 서울을 중심으로 실험해 볼 생각으로 모델 주택을 짓고 몇 개처에 수세식 변소를 지어 시범으로 보이고 계몽을 시켜나갈 작정으로 예산까지 마련했지만 그만 시장직을 떠나게 되어 공사직전에 중단되게 되었던 것이다.<ref name="guguk55"/>}} 서울시장 재직 때 보급한 수세식 양변기들은 6.25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의 수세식 양변기 보급은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비록 서울시에 한한 것이었지만 수세식 양변기는 그 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 1960년에는 경기도로 확대 시행시켰다. 그리고 1982년 이후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 서울시장 재직 후반 ==== [[파일:Kong Deok Kui 1928's.jpg|섬네일|160px|오른쪽|두 번째 부인 [[공덕귀]], 신학자, 전도사 출신이었던 [[공덕귀]]는 그의 부인이자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윤보선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지낸 기간은 나의 역대 관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장직도 내가 선뜻 응해서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울시장은 당시 나로써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인용문2|서울 시장은 당시 나로서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우선 거기선 모든 일이 내 명령하에 원활히 움직여 주었고, 그리고 모든 일의 성과가 그 즉각으로 눈에 띄게 나타나 일할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속 상관이라 할 내무부 장차관도 내게 대해선 함부로 하기는커녕 시에 관할 일은 오히려 와서 내게 상의를 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으니 직위상의 불만이 문제가 될 수도 없었으며, 더욱이 신생활운동에 나는 많은 열의를 갖고 추진에 몰두하려는 중이었기에 적어도 1년은 그 자리에서 일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범숙|윤명사]](尹明師)<ref>호는 명사(明師)로, 그래서 윤명사라 부른다.</ref>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신대학교|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 유학하려던 [[공덕귀]]는 [[최거덕]] 등의 권고로 그와 결혼하였다. [[공덕귀]]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곧 장남 [[윤상구]]를 낳고, 뒤이어 둘째 아이는 [[6.25 전쟁]] 중 대포 소리에 놀라 유산하였고 셋째 아들 [[윤동구]]를 연이어 낳아 주었다. 아들을 바라던 그의 어머니 [[이범숙]]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949년 2월 한민당과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민국당원이 되었다. 민주국민당 창당 직후 그는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6월 상공부장관이 되면서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직은 사퇴하고 평당원이 되었다. 1949년 3월 12일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 한국 전쟁 직후 ==== ===== 상공부 장관 시절 ===== 1949년 6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전임 [[임영신]] 장관이 [[상공부]]내의 유력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로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물러났으므로 윤보선은 [[상공부]][[장관]]직을 거듭 고사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임영신]]이 독직, 뇌물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아무도 [[상공부]][[장관]]직에 쉽게 앉으려 하지 않았고, 윤보선 역시 누차 사양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상공부장관직을 임명하고 [[허정]]을 통해 통보하였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ref>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1994) 80페이지</ref>'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ref name="gong81">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1994) 81페이지</ref>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ref name="gong81"/> {{인용문2|그 때 나는 없는 솜씨로 도시락을 싸며 힘들어했던 생각이 난다. 언젠가 한 번은 [[김활란]] [[박사]]가 [[상공부]]에 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 되자 해위는 점심을 같이하자며 도시락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도시락은 샌드위치였다. 그런데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이 없었던지 [[김활란]]이 진짜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하더라고 했다. 나는 해위에게 이 얘기를 들으며 꽤나 창피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당시 내 솜씨였다.<ref name="gong81"/>|부인 [[공덕귀]]의 진술}}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장관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는데도 정권 실세 유력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뇌물수수 누명을 쓴 것을 그는 늘 신경쓰고 각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사소한 종이 한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았고, 비품과 치약 등도 손수 준비해서 다녔다. 또한 저녁식사나 선물 등도 일체 거절하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ref name="갈등">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id=19990316006001&keyword=張勉</ref>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 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라고 술회했다.<ref name=" 갈등"/>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을 움직여 [[상공부 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58페이지</ref> ===== 각료 사퇴와 야당화 =====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며 이권이 집약된 [[상공부]][[장관]]직을 바르게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 일을 놓고 [[이승만]]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고집센 [[이승만]]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ref name="gong81"/> 1950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3월 23일 UN한국위원회의 초청으로 출국, 유엔을 방문하고 4월초에 귀국했다. 1950년 초부터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 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58~59</ref>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59페이지</ref>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충청남도]] [[아산]]에서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입후보,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가 한민당 당원이고 이조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이 존재하였다. 6월 [[한국 전쟁]] 직후 그는 관용차량으로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대구]]로 따라 이동했다. 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대전]]을 경유해서 피난지까지 내려갔고, 그의 가족들은 아내 [[공덕귀]] 등의 인솔로 그의 집안에 있던 자동차로 [[아산]]을 거쳐서 [[부산]]까지 피난했다. ===== 대한적십자사 총재 시절 =====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ref name="yunhan">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동아일보사, 1990) 461페이지</ref>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ref name="yunhan"/> 그러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가는 곳마다 정부 비난의 소리가 높아만 갔다. 어느날 그는 장덕수의 미망인 박은혜와 함께 수영비행장에 갈 일이 있어 동행했다가 도중에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걸인 군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옷은 다 해지고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얼굴은 모두 부어 있는 상태였다. 많은 청년들을 그토록 떼거지로 만들어 병들고 죽어가게 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고 살아 남은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병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ref name="yunhan"/>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는 즉시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 모략에 걸렸군."하더니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내심으로 이 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f name="yunhan"/> {{인용문2|내가 선생님께 한 가지 진언을 해야 하겠소. 육안으로 확인한 사실인데 그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내일 아침이라도 차 타고 가서 직접 보든가 하시오. 그러면 놀랄 만한 참상을 볼 것이요.<ref name="guguk61">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61페이지</ref>}} 후일 그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발생이 가능한 일을, 그것도 직접 목격하고 보고하는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원망하기에 앞서 불쾌감 마저 들었다.<ref name="yunhan2">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동아일보사, 1990) 462페이지</ref>"고 회상하였다. 1951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일본]]을 답방하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그해 2월 한정(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ref name="다음"/> 7월 18일 [[대한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퇴했다. 1954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종로갑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해 9월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농림업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승만과의 결별 ====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윤보선에 의하면 '이 대통령의 독재가 강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ref name="yunhan2"/>' 한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개정이란 당치도 않은 억지를 써서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ref name="yunhan2"/>'라는 평을 내리기로 했다. {{인용문2|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ref name="yunhan2"/>}} 이박사와는 정치적으로 하관 노릇을 했고 지난 날 혁명 선배로 애국하는데 도와 왔으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사태에서는 그와 일할 수 없다고 절실히 느껴 정치적인 결별을 하기로 작정했다.<ref name="guguk61"/>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ref name="yunhan2"/>' 윤보선은 '회고하면 내가 이 박사와 결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ref name="guguk61"/>'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인용문2|[[경성전기공사|경전사장]] [[이태환]]을 [[이승만]] 박사가 지독히 미워해서 자꾸만 갈아치우라고 하자 아무리 봐도 그럴만한 명분이 서지않아 갈지 않다가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을 하였다.<ref name="guguk58">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58페이지</ref> 이승만은 노발대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윤보선 [[대한민국 상공부|상공장관]]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다'라고 [[대통령]]이 메모를 해두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이승만]]에 대한 정분을 멀게 만들었다.<ref name="guguk59">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59페이지</ref>}} 그는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다. {{인용문2|이박사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한민당]]은 비록 이박사가 당원은 아니었으나 당[[총재]]와 같이 생각했고 이박사도 그렇게 생각해서 받아들였는데 [[대통령]]이 되자 확장일로에 있던 [[한민당]]의 세력을 경계하고 배척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민당]] 사람들 중에서도 가령 [[윤치영]], [[이기붕]], [[허정]], [[김도연 (1894년)|김도연]], [[장기영]] 그리고 나도 썼지만 이는 당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신임에 의해서였던 것이다.<ref name="guguk59"/><br /><br />그러나 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한민당을 누르기 위해 최초로 선거탄압을 하고자 백모씨를 [[대한민국 내무부|내무]][[장관]]으로 발탁하고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라고 하는 정치적 음모를 조작할 즈음엔 현직 장관인 나의 집을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체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ref name="guguk59"/>}} [[이승만]]과 친위 세력의 [[한민당]]계열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도 그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국무회의는 공전하기 일쑤라 흥미를 잃어오던 나로써는 사임해야 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50년 5월 사임하고 말았던 것<ref name="guguk59"/>'이다. 한편 윤보선은 [[이승만]]이 [[한민당]]을 팽하고 [[독립촉성중앙회]]를 설립한 것, 그밖에 [[윤치영]], [[이인 (변호사)|이인]](李仁) 등을 중심으로 친위정당인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조직되자 국민당을 편애한 것, 1951년에는 [[이범석]], [[이기붕]]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 것, 그리고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대종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었다. 이승만이 당숙 [[윤치호]]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아버지 윤치소, 삼촌 윤치성과의 친분관계와 더불어 당시 삼촌 [[윤치영]]이 [[이승만]]의 최측근이라는 점 때문에 갈등은 커져만 갔다. 1952년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5월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갑구에서 [[민의원]] 후보에 출마하였다. 그는 종로 갑구에서 처음 출마했기 때문에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순천]]씨가 여성이어서 전 유권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동정표를 몰아줄 것인데 남자는 12명이나 되니 절대 불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찌감치 당선자를 예상하기도 했다.<ref name="yunhan2"/> 윤보선은 선거를 하려면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상대해야지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가 가당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종로 갑구에는 박순천, 주요한, 장후영, 유석현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13명이나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다.<ref name="yunhan2"/>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박순천]]과 [[주요한]]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 ===== 3대 민의원의원 시절 ===== [[파일:유석 조병옥.JPG|섬네일|왼쪽|180px|[[유석 조병옥]],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가 된다.]] 3대 민의원의원이 된 윤보선은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와 민의원 외교분과위원을 맡았다. 당초 그는 원내총무 지명을 극구 사양하였는데, 당에서는 그의 거부의사에 상관없이 원내총무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원내총무에 지명되고도 요양을 핑계로 [[부산]]으로 내려가 끝내 사퇴하고 만다.<ref name="yuk165"/> 그는 민주당 서울시 종로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인용문2|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그를 야당 원내총무를 시켜주었지만 그는 원치 않아 사임을 해도 안받아주었다. 마침 병이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서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고<ref name="jhonggo"/> 그 후로는 외무분과위원회에 있었다.<ref name="ReferenceA">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67페이지</ref>}} 그는 [[신익희]], [[장택상]], [[조병옥]] 등이 술자리에 갈 때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인임을 들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증조부 [[윤득실]]이 술을 즐겨서 가산을 탕진, 할아버지 [[윤영렬]]이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이유로 들어 술자리 참여를 거부했다. 회식과 술자리 불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회자화되고 언급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성 의원들과 [[기독교|기독교도]] 의원들도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여하여 술을 마셨으므로 그의 술자리 참석 거부, 회식 거부는 독특한 취향으로 취급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서 그는 [[김도연 (1894년)|김도연]]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국회]] [[경제]]분과 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자 호헌동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2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가 사망하자 그의 [[국민장]] 장례식을 지켰다. 6월 [[김형근]](金亨根)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의 [[서울특별시|서울시내]] 판자집 철거 정책에 반대하여 [[김도연]], [[민관식]](閔寬植), 임흥순(任興淳) 등과 상의한 뒤 판자촌 철거는 민생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이 창당된 후, 그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어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ref>김삼웅,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김삼웅, 가람기획, 1994, 2판) 90쪽. <!--“민주당의 창당 당시의 부서와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 의원부장─윤보선”--></ref>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김도연 (1894년)|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ref name=autogenerated5 /> 1955년 11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1월 24일에는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 간사가 되었다. 5월 30일 민주당 중앙당 간사직을 사퇴했다. 1956년 9월 7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어 경찰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당내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구파였지만 특정 파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색채나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무에만 전념했는데, [[조병옥]]은 그에게도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번은 [[조병옥]]이 '언젠가는 윤보선이 전면에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 4대 민의원의원 시절 ===== 1957년 10월 19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의 회의에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다시 유임되었다. 이후 그는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인용문2|4대 국회 때부터는 선거 운동이 퍽 용이하게 되어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무난히 당선되곤 했다.<ref name="jhonggo">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66페이지</ref> 종로 갑구 구민들이 나를 밀어준 것은 아무래도 고맙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종로 갑구로 말하면 민주당으로선 가장 약한 지구당이어서 당원이 2백 명밖에 안 되었으며 그 당원도 대개가 이름만 얹어둔 정도여서 연차 지구당 모임을 갖자면 40명의 정족수를 채우기가 무척 힘드는 실정이었던 것이다.<ref name="jhonggo"/>}} 1955년 이래 그는 민주당 서울시 지구당과 종로구 지구당을 맡아보았다. 그런데 종로구 지구당은 그의 표현대로 지구당 모임 한 번을 제대로 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ref name="jhonggo"/> 그러나 자발적인 후원자들의 존재로 당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두고 "조직도 당원도 없는 그에게 언제나 선거 때면 몰표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다고 당선시킨 후에는 무슨 이권 운동이나 폐를 끼치려는 사람도 일체 없고 하다 못해 '적은 돈이나마 보태 쓰라'고 금일봉을 보내오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찌 평생을 두고 감사해 마지 않으리요.<ref name="jhonggo"/>"고 회상하였다. =====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59년에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9월 8일 민의원 각분야 상임위원을 선출할 때 민의원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 당시 조병옥 대표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에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신파]]에서는 윤보선에게 장면의 러닝메이트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에 걸친 제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양하였으며, 이후 조병옥 대표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조병옥 대표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 후보에 선출되면서 신파의 윤보선 러닝메이트 영입 시도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11월 2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 중앙위 의장에 재선출되었다. 4대 민의원에서 그는 주로 세무, 재정 등에 대한 분야에 대한 질의, 안건을 제출하였다. 그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1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 함께 이뤄진 최고위원 개선에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초 최고위원회는 조병옥과 백남훈 등 구파 2명, 장면, 박순천, 곽상훈 등 신파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파의 강력한 요구로 구파 위원을 한 명 추가하기로 하면서 그 자리가 윤보선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당초 구파 내에서는 [[김도연 (1894년)|김도연]]과 [[유진산]]이 새 최고위원에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별로 야심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지 않아 신파의 견제를 가장 덜 받던 윤보선이 최종 낙점된 것이었다. ====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 [[파일:1960년 3월 15일 동아일보.jpg|섬네일|250px|오른쪽|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1959년 11월 27일 [[서울]] 시공관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 몫의 최고위원을 선출할 때 추가로 보선되었다. 12월 23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원내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59년 정부로부터 서울시장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하였다.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金九)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6">[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90117000701 방대한자료·증언 바탕 제2공화국 긍정적 평가 - munhwa.com<!-- 봇이 따온 제목 -->]</ref>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ref name=autogenerated6 /> 그러나 후에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의 주도권을 놓고 [[유진산]], [[유진오]] 등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 3.15 부정선거 진상조사단장 ==== 1960년 4월 11일 그는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hoi465">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동아일보사, 1990) 465페이지</ref> 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ref name="hoi465"/>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ref name="hoi465"/>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으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ref name="hoi465"/> 그는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ref name="hoi465"/> {{인용문2|소란이 있은 후 밤에 모씨 집에서 잠을 자다가 멀리서 성난 파도처럼 만세 소리가 퍼져 나오다가 일제히 쏘는 총소리에 끊어지고 다시 만세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들었다.<ref>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71페이지</ref>}}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ref name="hoi465"/>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ref name="hoi465"/>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인용문2|내가 조사한 바로는 공산당 조직이 조정했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이 애국적인 동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한 마산 시민들을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붙인 결과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하더라도 어찌 선량한 국민을 빨갱이 세력으로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떳떳하지 못한 정권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f name="hoi466">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동아일보사, 1990) 466페이지</ref>}}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그는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ref name="hoi466"/> ==== 4.19 혁명 전후 ==== {{참고|3.15 부정선거|4.19 혁명}} 4월 19일 그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의원들을 방문했다. 데모가 한참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을 때 그는 국회에 나가니 이재학(李在鶴) 부의장실에 자유당 의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이었던 윤보선은 들어가서 거기서 한마디 했다.<ref name="hoi466"/> {{인용문2|이 사태를 단순한 데모로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장차 닥쳐올 정국에 큰 영향을 줄 일이니 부디 똑바로 사태를 주시해서 양심적으로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ref name="hoi466"/>}} 그는 자유당 회의장에 이 말을 남기고 거리로 나와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를 두고 자유당 의원들은 윤보선이 돌아다니며 데모대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ref name="dae72">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72페이지</ref> 자유당은 그가 불순한 목적으로 시위대를 선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나는 누군가에게) 데모를 선동한 일이 없다. 다만 상황을 살펴본 결과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더라.<ref name="dae72"/>'고 응수하였다. ==== 5대 민의원 당선 ==== [[파일:장면 윤보선.png|섬네일|4 19의거 후 민주당 신파 대표인 장면 씨와 회동한 구파의 윤보선]] 1960년 제4대 민의원은 [[의원 내각제|의원내각제]] 및 [[양원제]]를 골자로 한 [[대한민국 헌법 제4호|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윤보선은 새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제5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원내활동도 적고 또 야당 의원이라 선거구를 위해 해준 일도 별로 없는데 구민들의 지지와 동정이 컸다<ref name="ReferenceA"/>'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대한민국)|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29표를 받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ref name="강준만1">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75페이지</ref>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구파 내 다른 국무총리 후보 희망자였던 김도연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상징적 지위인 대통령을 택했다. === 대통령 재직 시절 === ==== 윤보선 정부와 장면 내각(1960~1961) ==== ===== 취임 직후 ===== {{본문|대한민국 제2공화국}} [[파일:Yun Kong's Family.jpg|섬네일|왼쪽|210px|부인 [[공덕귀]]와 두 아들과 함께]] [[파일:Jang.jpg|섬네일|200px|오른쪽|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인준 직후, [[장면]] 총리의 예방을 받을 때]] {{위키문헌|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에 [[김도연 (1894년)|김도연]]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파는 국무총리로는 신파의 장면을 지지하되 대통령은 구파에 내주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구파와 신파 모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으나, 김도연 총리 임명 동의안은 8월 17일 재적의원 227명의 과반인 114표에서 3표가 모자란 111표만의 찬성을 얻어 부결되었다. 반대표는 112표, 무효표는 1표, 그리고 표결 불참자는 3명이었다. 8월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당초 구파는 이마저 부결시킬 계획이었으나, 8월 19일 표결에서 재적의원 228명의 과반인 115표를 2표 넘는 117표의 찬성표가 나와 장면 총리 임명 동의안은 가결되었다. 반대표는 107표, 무효표는 1표, 불참자는 3명이었다.<ref name="강준만1"/> [[장면]]은 훗날 이 일을 놓고 도의상 신파인 자신을 지명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니었냐고 비판하였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각료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를 금하였으므로,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8140032910101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0-08-14&officeId=00032&pageNo=1&printNo=4436&publishType=00010|제목=의원직 사퇴코 탈당 윤 대통령 13일 굴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19-09-04}}</ref>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ref name="강준만85">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85</ref> 한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든 우표나 화폐 발행을 반대했다. 우표나 화폐 등은 죽은 사람이거나 공적이 뚜렷한 인물만 등재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8월 [[경무대]]에서 특별히 그의 생일 기념 축하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대한 축하식 대신 간단한 파티와 주변 친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와 각료들 외에 어머니 [[이범숙]],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1896년)|윤영선]] 등 일족들과 [[김도연]], [[유진산]] 등의 당직자, 몇몇 친한 친구 등 소수만이 초청되어 간략히 하였다. ===== 집권 1년차 =====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795741 대전일보 60주년 100년을 준비하겠습니다<!-- 봇이 따온 제목 -->]</ref>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ref name="강준만84">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84</ref>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ref name="강준만84"/> 그는 민주당 구파의 의원들을 모아 그들과 각종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간 정치다툼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대립을 외면하였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윤보선을 두고 아군은 맞느냐며 공격했다. 장면 내각 출범 20일 마인 9월 12일 국방 권중돈, 부흥부 김우평, 교통부 박해정, 체신부 조한백, 보사부 나용균 등 구파 5명을 받아들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정헌주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ref name="kang85">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85페이지</ref> 그래도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게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ref name="kang85"/> [[파일:South Korea Second Republic.jpg|섬네일|왼쪽|190px|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는 [[허정]] [[국무총리|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ref name="강준만 86">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86페이지</ref><ref name="이용원155">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범우사, 2007) 155페이지</ref> 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ref name="강준만 86"/><ref name="이용원155"/><ref>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윤보선과의 갈등(중), 대한매일 1999년 3월 19일자 6면 </ref> 60년 10월 12일 신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ref name="강준만2">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77페이지</ref> 윤보선은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ref name="강준만 86" />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ref name="강준만 86" /><ref>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백영철, 나남, 1996) 312페이지</ref>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내각제|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윤보선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실에서 의논하였다. 윤보선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 때의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파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재가 있다면 가려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결점, 단점을 찾기 보다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재능을 살리는 것이 정치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시절의 인사나 과도 내각의 인사까지 해임시키는 장면 총리와 갈등하였다. [[장면]] 총리의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다고 여긴 그는 장면에게 그럴 것이면 [[총리]] 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장면]]은 어이없어 하면서 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 직을 내려놓으란다 며 성토하였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 집권 2년차 ===== [[파일:Chang Myun.jpg|섬네일|왼쪽|180px|[[장면]] 총리 인준 직후 [[곽상훈]] 민의원 의장,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파일:ChangMyon1920's.jpg|섬네일|140px|오른쪽|[[장면]]<br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이자 그의 정치적 경쟁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윤보선은 전국 각지의 유적지 보존, 보호 사업에도 후원하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ref name="이용원155"/>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ref name="이용원166">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범우사, 2007) 156페이지</ref>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ref>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범우사, 2007) 16페이지</ref>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ref name="이용원166"/>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1961~1963) ==== ===== 5.16 군사 정변 직후 ===== [[파일:5.16 Coup Park Chung-hee.jpg|섬네일|250px|왼쪽|5·16 군사정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은 [[장도영]]으로부터 [[5·16 군사정변|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속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ref name="한영우114">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돌베개, 2003) 114페이지</ref>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파일:장도영, 박정희 1961년 5.16 군사정변.jpg|섬네일|210px|오른쪽|5월 20일 중앙청 광장에 선 [[장도영]]과 [[박정희]]]]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허정회고록289">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289페이지</ref>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책하였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에 등장하자 체념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자탄하였다. 그러나 그가 놀라거나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현석호]] 등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마디'라며 그를 원망하였다. 한편 그는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계엄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대한민국 국군|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을 우려해 거절했다.<ref name="다음"/>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ref name="mi214">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214페이지</ref>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ref>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215페이지</ref> 한편 그는 여러 비판 중에도, 자신이 사퇴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정부의 대표자로 나설 사람이 없으므로 국가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를 번복했다고 하였다. ===== 군정기간 중 =====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저녁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ref name="bbb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305페이지</ref> {{인용문|금번 [[5·16 군사 정변|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국가재건최고회의|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국가재건최고회의|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ref name="bbb2"/><ref>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한울, 1995) 112~113페이지</ref>}}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9시,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ref name="bbb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306페이지</ref> {{인용문2|내가 하야의 뜻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이 약해서도 아니요 군인이나 김차관의 간청이 절실해서도 아니요 또 나아가서 군정이나 내 개인일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국가원수로서 혁명정부가 들어선데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사람인데 그 혁명정부가 국가에 대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면 나는 더욱 큰 책 임을 면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하야 번복 성명서}} 윤보선은 5월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ref name="bbb3"/>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파일:국토건설사업 종강식.jpg|섬네일|왼쪽|160px|1961년 2월 [[국토건설단]] 수료식]] 5월 20일 상오 [[외무부|외무부 차관]] [[김용식 (1913년)|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ref name="bbb3"/>”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낮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1913년)|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ref name="bbb3"/>”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ref name="bbb3"/><ref name="bgf1">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대왕사, 1993) 223페이지</ref><ref name="dvf5">김성진, 《한국정치 100년을 말한다: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한국 정치의 실상》(두산동아, 1999) 211페이지</ref> 결국 윤보선은 저녁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ref name="bbb3"/><ref name="bgf1"/><ref name="dvf5"/>”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ref name="mk1">[http://news.mk.co.kr/v3/view.php?year=2009&no=422413 윤보선 정부의 경제정책 틀이 `한강의 기적` 밑거름 ] {{웨이백|url=http://news.mk.co.kr/v3/view.php?year=2009&no=422413 |date=20131217072750 }} mk뉴스 2009년 8월 7일자</ref>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 대통령직 사퇴 ==== [[파일:윤보선 하야발표.jpg|섬네일|1961년 하야 발표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는 윤보선 대통령]]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ref name="다음"/>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ref>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26페이지</ref>'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4·19 혁명]]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마땅치 않다면서 박정희가 나오게 해서 나왔어도 감시와 연금이 되풀이 되는 불행한 나날을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ref>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도서출판 답게, 1996) 5페이지</ref>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ref name="민준기60">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7) 60페이지</ref>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ref name="민준기60"/> 또한 군정 세력의 민정이양은 허구이며 군정 세력의 정권 연장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서울특별시|서울시내]]에서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낮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신민당 (1960)|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79페이지</ref><ref>김입삼,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 (한국경제신문사, 2006) 174페이지</ref>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에 그는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 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ref name="dd1">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80페이지</ref>'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대|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ref name="dd1"/>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81페이지</ref>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 야당 활동과 민주화 투쟁 === ==== 하야 직후 ==== 1963년 3월 [[박정희]]가 구 정치인 정치활동법 제한([[정치정화법]])을 강행하고 군정을 연장시키자 윤보선은 [[이윤영 (1890년)|이윤영]], [[장택상]] 등과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장면]]이 병으로 정당활동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야당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허정]] 등 일부는 그의 지도력에 반발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 (1894년)|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ref name="kyyyyy346">김용욱, 《한국정치론》(오름, 2004) 346페이지</ref>였다. 한편 야당 인사들 중에는 그가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정일형]] 등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군사쿠테타를 방조하였다며 그의 리더십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인사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군정 반대와 박정희 퇴진 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므로 반대파들의 음해와 공격은 일시적으로 누그러졌다. 3월 20일 [[허정]] 등과 함께 [[서울시청]]과 [[을지로]] 주변, 주한[[미국]] 대사관 주변 등을 활보하며,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를 했다. 3월 30일부터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ref name="kyyyyy346"/> 이후 그는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며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ref name="야당134">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34페이지</ref>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져버렸고<ref name="야당134"/>,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ref name="야당134"/>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ref name="야당134"/>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ref name="야당134"/>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민주구국선언대회<ref>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는 관련 없음</ref>'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1963년 초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체되었던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신민당 (1960)|신민당]] 및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 후보 단일화 과정 ==== [[파일:Heo Jeong.png|섬네일|오른쪽|150px|[[허정]]<br />(1960년대 초반 야당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합하였다.)]] 63년 7월 그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ref name="이영1">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에디터, 2006) 61페이지</ref>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1963년 9월 24일 "혁명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정화법에 도장을 찍어놓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출마한다고 하는 윤보선씨야말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ref>이상우, 《비록 박정희 시대 (1)》(중원문화사, 1984) 103페이지</ref> [[허정]]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자신이라고 [[대통령|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 5대 대선과 사상 논쟁 ==== 그 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ref name="민준기60" /><ref name="낙선1">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7) 228페이지</ref> 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ref name="민준기60" /><ref name="낙선1"/> [[박정희]]는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5대 대선 유세에서 그는 빈익빈이 민주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호소하였다. 한편 유세중 기자들이 경제정책에 대한 공약을 집요하게 물어오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그는 당선된 뒤에 밝히겠다고 하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였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ref>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1페이지</ref>"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ref name="그해5월3122">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2페이지</ref>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주의|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ref name="그해5월3122"/>'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민주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ref name="그해5월3122"/>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그를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김준연]]은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공화당 측에서는 윤보선이 [[김준연]]을 사주하여 흑색선전을 한다고 맞받아쳤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ref name="경향19630928">경향신문 1963년 9월 28일자 정치, 1면</ref>'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ref name="경향19630928"/>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ref name="경향19630928"/>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고 윤보선과 [[신민당 (1967년)|신민당]]을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무리들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 박정희와의 이념 대결 ==== 1963년 9월 23일 윤보선은 [[전라남도]]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하였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는 KBS 방송을 통해 윤보선을 공격,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하였다.<ref name="야당135">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35페이지</ref> 63년 9월 24일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기아·부패·실업·분열 등 군정의 5악을 몰아내고 민정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ref name="야당135"/> "고 외치던 윤보선은 9월 24일 전주 유세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ref name="야당135"/>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ref name="야당137">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37페이지</ref>"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시|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ref name="야당137"/> [[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ref name="야당137"/> 1963년 9월 윤보선은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ref name="그해5월3122"/> 뿐만 아니라 {{인용문|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버트란드 러셀|러셀]]을 찬양하고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ref name="그해5월3122"/>}}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주의|공산화]]<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ref>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ref name="그해5월3122"/> 한편 윤보선의 삼촌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ref>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3페이지</ref>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ref name="경향19630928"/>'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ref name="경향19630928"/>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ref name="경향19630928"/> 바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준연]]은 차라리 고소를 할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윤보선은 [[김준연]]과 함께 박정희에게 과거 전력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공세를 펼쳤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 제3공화국 시절 ==== ===== 대선 출마와 낙선 =====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유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ref name="파벌1">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이영훈 지음, 에디터, 2006) 64페이지</ref>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즘|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ref name="낙선1"/>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ref name="낙선1"/>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10월 9일 안동 유세를 다녀왔다. 윤보선은 이 날 8천 청중 앞에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단언했다.<ref name="yisang">이상우, 《비록 박정희 시대 (1)》(중원문화사, 1984) 146</ref> 그는 "북괴의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가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황태성이 안에 따라 서울에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한 [[민주공화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하고 반문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gonh147">이상우, 《비록 박정희 시대 (1)》(중원문화사, 1984) 147페이지</ref> 윤보선의 안동 발언은 막바지에 이른 선거 정국을 바짝 긴장시켰다.<ref name="gonh147"/> 그러나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ref name="야당138">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38페이지</ref>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ref name="야당138"/>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ref name="야당138"/>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ref name="야당138"/>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야당138"/>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ref name="야당138"/>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ref name="파벌1"/>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ref name="d22">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7) 229페이지</ref>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ref name="d22"/>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ref>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168페이지</ref>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 윤보선 암살 미수 사건 =====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서중석]]은 [[서울]]쪽을 먼저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봤다.<ref name="야당140">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0페이지</ref> 10월 15일 선거 다음날인 10월 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ref name="야당140"/> 이 뒤부터는 박정희는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ref name="야당140"/>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ref name="야당140"/>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ref name="야당139">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39페이지</ref> 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ref name="야당141">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1페이지</ref>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ref name="야당141"/>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ref name="야당141"/> 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ref name="야당141"/> 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ref name="야당141"/>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ref name="야당141"/>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ref name="야당141"/> 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은 [[대한민국 육군|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ref name="암살미수1">[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45001.html “김형욱 ‘대통령 지면 윤보선 암살’ 명령”] {{웨이백|url=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45001.html |date=20101025082315 }} 《한겨레》</ref>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ref name="암살미수1"/>,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ref>[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403 ‘윤보선을 암살하라’]《일요서울》2004년 2월 13일</ref> ===== 박정희와 대결, 월남 파병 반대 ===== {{참고|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사상 경력에 대한 공세가 있었다. 1963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 대해 변명하였다. 윤보선은 [[경상남도]] [[진해]]에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조봉암]]과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ref name="야당141"/> 1963년 11월 윤보선은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64년초 한동안 칩거하였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장택상]]·[[박순천]]·[[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후일 역사학자 [[서중석 (역사학자)|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ref name="d22" />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민주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ref name="민준기60" />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ref name="민준기60" />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윤보선의 [[안동장]] 건너편에는 망루를 설치하고 그의 집 출입자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파일:M67 Flamethrower Tank Vietnam.jpg|섬네일|오른쪽|210px|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1965년 초부터는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야당 인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 (1965년)|민중당]](民衆黨)이 출범하자 총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박순천에게 패하여 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낙선원인은 그에게 축출당했던 유진산이 복수차원에서 박순천을 당수후보로 밀었고 여기에 여당인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일부 대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등 복합적인 정치공작의 결과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그의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릴수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들의 계산착오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자신의 약화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하여 더욱 더 강경한 투쟁의 칼날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에 대해 대부분 야당인사들의 생각은 원내외투쟁을 병행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윤보선은 다가오는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양자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초강경투쟁을 주도하면서 선명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라야한다는 의도에서 야당의원들의 전원총사퇴로 배수의 진을 칠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대다수 야당의원들로부터 "우리가 해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들러리냐"하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의 강경노선에 동조하는 윤제술,김도연,김재광,정성태,정일형,정해영,서민호 등 7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의원직사퇴후 그들과 함께 초강경 선명야당 신한당의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신의 당수직과 대통령후보직을 위협할 수 있는 서민호와 김도연의 합류를 거부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동안 비록 의원직은 내놨을지라도 민중당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대선후보를 내지 못할 것이라 보고 느긋한 태도를 나타냈다. 한동안 그랬지만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중당이 대선후보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67년 대선이 박정희와 윤보선 그리고 유진오의 3자대결구도로 간다면 윤보선은 당선은 고사하고 참신성 등에 있어서 유진오에 밀려 3등으로 밀릴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윤보선은 민중당 측에 합당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진오와의 회동을 제안하였고 민중당이 이를 받아들여 윤보선ᆞ유진오 간 회동결과 신한당과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통합하고 당 대표에는 유진오,대선후보는 윤보선으로 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d22" />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ref name="d22" />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전쟁|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ref>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사비평사, 2008) 147페이지</ref>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 6·3 항쟁 ===== {{본문|6·3 항쟁}}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ref name="외로운 280">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동아일보사, 1991) 280페이지</ref> 하였다. 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ref name="외로운 280"/>는 것이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ref name="외로운 280"/>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ref name="외로운 280"/>,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ref name="외로운 280" /> 3월 9일 [[서울특별시|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ref name="외로운 280" />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ref>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 장택상 자서전》(장병혜·장병초 편,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146페이지</ref>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ref name="외로운 290">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동아일보사, 1991) 290페이지</ref> 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ref name="외로운 290"/> 윤보선은 [[서울대학교|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ref name="외로운 280"/>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ref name="외로운 280"/>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ref name="외로운 290"/> 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f name="외로운 290"/> 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ref>경찰이 이명박의 이름을 이명백으로 오기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3904&pt=nv “〈그때 그 사건〉‘빈둥 발언’은 자아비판인가”], 《뉴스메이커》, 2007년 3월 13일 작성.</ref>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 한일회담 직전 ====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손수 부인 [[공덕귀]], 비서관, [[함석헌]]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1965년 4월 30일 오후 방한 중인 마셜 그린 미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는 서울 중구 정동의 미 대사관저에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초대하여 한일회담과 관련한 요담을 했다. 그린 副차관보는 5·16 군사 혁명 때는 대리대사로서 당시 윤 대통령을 찾아가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軍(군)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동원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인연이 있었다.<ref name="chose">[http://monthly.chosun.com/client/column/view_cgj.asp?C_IDX=26812&c_cc=A&tbKey=CGJ 철없는 학생들과 위선적 지식인]</ref> 윤보선은 [[김준연]] 등을 대동하고 [[마셜 그린]] 부차관보를 면담했다. 이날 [[민정당]]의 [[김준연]] 의원은 그린 副차관보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박정희]]의 방미(訪美) 정상회담 계획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ref name="chose"/> 그린 부차관보는 '한일 국교회담의 조속한 정상하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윤보선과 야당에게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한잃회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인용문2|나도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는 문화적, 지리적 견지로 보아 역사적인 운명이라고 보지만, 현재의 이 한일회담은 국가 이익의 입장에서 이를 도저히 방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ref name="pirose">"한일회담 의견 교환 윤·그린", 동아일보 1965년 5월 1일자 1면, 정치면</ref>|1965년 4월 30일 오후 4시 [[마셜 그린]]과의 대담에서}} 마셜 그린은 '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이익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겠다.'고 약속하였다.<ref name="pirose"/> 윤보선과 [[마셜 그린]]의 회담을 불쾌하게 여긴 [[박정희]]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보고한 [[박상길 (정치인)|박상길]] [[청와대]] 대변인에게 "그 X버선인지 헌 버선(편집자 註-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ref name="chose"/>"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윤보선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며 그것이 [[박정희]] 씨의 인격이고 수준이라고 응수하였다. ===== 한일회담 반대 운동 ===== 1965년 6월 22일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민주당]]이 [[민중당 (1965년)|민중당]]으로 통합하였다.<ref name="야당144"/> 이때 윤보선은 통합 민중당의 당대표로 경선에 나왔으나 [[유진산]]은 [[박순천]] 쪽을 밀어서 박순천이 당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당수가 출현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민주당 구파였던 [[유진산]]이 신파와 손을 잡은<ref name="야당144"/> 결과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ref name="야당144"/>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ref name="민준기60"/>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ref name="민준기60"/>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민준기60"/>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ref name="민준기60"/>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ref name="민준기60"/> 65년 7월 22일 윤보선은 [[민중당 (1965년)|민중당]] 탈당을 선언했다. 7월 28일 윤보선은 정당생활을 청산할 뜻을 비치면서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게 탈당계를 제출했다.<ref name="갈등209">한국야당사(이기택, 백산서당, 1987) 209페이지</ref> 윤보선의 탈당계 제출로 [[민중당 (1965년)|민중당]]은 [[국회의원|의원]]직을 사퇴하고 원외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와 원내투쟁이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ref name="갈등209"/>이라는 [[박순천]] 중심의 온건파의 대립으로 대여투쟁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ref name="갈등210">한국야당사(이기택, 백산서당, 1987) 210페이지</ref> [[박순천]]은 윤보선의 탈당계를 반려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탈당계가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 의해 반려되자 정당법에 따라 소속 지구당인 종로구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ref name="갈등209"/> 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1900년)|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ref name="d22" /> 1965년 8월 14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국회를 떠나고 민중당을 떠났다.<ref name="chohee91">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조희연 저, 역사비평사, 2007) 91페이지</ref> 윤보선파는 "민중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고 비난했고<ref name="chohee91"/>, 당내에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한·일 협정 비준에 초강경투쟁을 벌이던 윤보선은 따로 나가서 당 하나를 만든다.<ref name="야당144"/> 신한당이다. ===== 유진산과의 갈등 =====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강원용]]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ref name="yu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1.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1] {{웨이백|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1.html |date=20130929190011 }} 신동아</ref>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지적을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그러나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ref name="야당143">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3페이지</ref> 싸움을 벌이게 된다.<ref name="야당144">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4페이지</ref> 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ref name="야당144"/><ref>이 때부터 유진산의 별명은 사쿠라가 되었고, 뒤에 여당과의 화합론을 주장한 이철승 역시 사쿠라로 몰렸다.</ref>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다. [[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 (1965년)|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ref name="야당144"/> 이때 윤보선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ref name="야당144"/>'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ref name="야당144"/>'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ref name="야당144"/>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1900년)|이범석]] 4자 회담을<ref name="야당144"/>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ref name="야당145">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5페이지</ref>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인용문2|윤보선씨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제 스승인 손창근 목사의 애제자예요. 그래서 제가 공덕귀씨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윤보선씨가 공덕귀와 결혼하면서 윤씨와도 인연이 맺어진 겁니다. 그 후에 윤보선씨가 상공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했죠.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제가 어디에 가서 강연을 하면 참석해서 듣곤 했습니다. 윤보선씨 집에 가보면 정말 양반 중의 양반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집안 출신인 윤보선씨가 공부는 영국에서 했으니(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 전공) 선비정신과 영국의 젠틀맨십을 겸하고 있었어요. 말이나 행동이 아주 신사적이었습니다.<ref name="yu1"/> 제가 윤보선씨와 가까워진 것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였어요. 민주당 정권 시절 구파와 신파가 싸울 때 저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선거에서 구파가 지고 윤보선씨가 실권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죠. 그때는 청와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서 그저 밥이나 먹고 왔지 별 관계는 없었어요. 5·16이 터지고 나서부터 저와 가깝게 된 겁니다. 윤보선씨는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와 다시 야당을 했지만, 당시 야권의 거물인 유진산과는 아주 미묘한 사이였죠.<ref name="yu1"/>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유진산씨를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유진산씨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쓰기도 했죠. 그랬더니 유진산씨가 “중앙정보부에서 (강원용이) 돈을 얼마나 받아먹고 그런 글을 썼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대요. 윤보선씨가 유진산씨와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제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듣지 않고 합했어요. 결국 거기에서 윤보선씨가 유진산과 갈라지면서 제 말이 옳았다는 걸 인정한 거죠.<ref name="yu1"/>|강원용의 증언}}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은 오히려 윤보선이 1963년 3월과 4월 [[박정희]]와 면담 때 박정희의 구정치인 배격을 비판하고 잡토도 섞어야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조롱하였다. ===== 6대 대선 출마와 낙선 =====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2월 2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3월 30일 [[신한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지구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한편 윤보선은 6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사상이 민주주의인가 이질적인 사상인가 의혹을 제기하였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대한민국 국회|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라며 바로 항의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대한민국 국회|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 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1966년 여름부터 윤보선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중소상공인들로부터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서한과 요청을 수시로 받았다. 이후 야당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압력으로<ref name="chohee91"/>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 (1965년)|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 (1967년)|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한편 [[허정]]은 그의 대통령 후보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5.16 군사정변]]의 원인제공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추대되어 출마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장준하]] 등이 주선한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 (1900년)|이범석]])에 참여하였으나 의견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67년 5월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로 나왔다. ==== 박정희와의 대결과 갈등 ====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ref name="야당145"/> 윤보선이 출마하자 그의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도왔다. 강원용은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어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를 돕는 일에 간접적으로 나마 나섰<ref name="자금193">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3:Between and Beyond》(한길사, 2003) 193페이지</ref> 다. [[강원룡]]은 윤보선 후보에게 직접 자금을 전해 주지 못하는 기업인들을 대신해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 주는 일을 몇 차례 맡아 했다.<ref name="자금193"/> 따라서 [[강원룡]] 자신의 회고로도 [[국민]]들에게는 '겉으로는 [[강원룡]]이 윤보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ref name="자금193"/>'처럼 인식되었다. 1967년 [[5·3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ref name="chohee91"/>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ref name="chohee92">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조희연 저, 역사비평사, 2007) 92페이지</ref> [[신민당]]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 경력을 집중 부각, 지적하였다. 윤보선은 이때는 사상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박 정권이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부정부패 바로잡겠다", "썩은 정치 바로잡겠다.<ref name="야당145"/>"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 일각에서는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전력이 다시 불거졌고, 박정희가 배신자임을 들어 신의없음을 지적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서중석]]은 '윤보선 하면 낡은 정치인, 늙은 정치인이 연상되어서 신선한 맛을 느낄수 없었<ref name="야당145"/>'다고 평했다. [[파일:장준하.jpg|섬네일|140px|오른쪽|[[장준하]]<br />(그는 5대 대선 이후부터 시종일관 윤보선을 지지했으나, 윤보선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야당의 후보였던 그는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81409110963429&outlink=1 한국 선거 60년-'황소'부터 '경제'까지<!-- 봇이 따온 제목 -->]</ref>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베트남 전쟁|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ref name="chohee92"/> [[박정희]]와 공화당은 윤보선의 집안을 친일파 가문이라 공격하였고, 윤보선은 [[박정희]]와 공화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은 것에 분노하였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ref name="chohee92"/> 윤보선은 [[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력을 들어 다시 공격했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선거기간 중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예를 들며 공격했다. 윤보선과 민주당은 [[박정희]]를 향해 친일파에 공산주의자 경력까지 있으며, [[히틀러]] 등도 긍정적으로 보는 박정희의 사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며 공격하였다.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 한 분은 "유세기간 중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살림을 펴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때문에)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312031009</ref>"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자립책이 비현실적임을 지적, [[미국]], [[일본]]과 교류 없이 문을 닫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사상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선거는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5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ref>박정희는 568만 9천여 표를, 윤보선은 452만 7천여 표를 받았다.</ref> [[박정희]]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ref name="야당147">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147페이지</ref>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ref name="야당147"/>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 제4공화국 시절 ==== ===== 유신 이후 야당 지도자 ===== {{본문|인혁당 사건}} {{본문|10월 유신}}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국민당 (1971)|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ref>역사비평:1991년 겨울호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1991) 413페이지</ref>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ref name="jang290">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3:Between and Beyond》(한길사, 2003) 290페이지</ref>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ref name="jang290"/> 하였다. [[장준하]]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치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한편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ref name="yu3">[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3.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3] {{웨이백|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3.html |date=20130929184852 }} 신동아</ref>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ref name="yu3"/> {{인용문2|해위(윤보선의 호) 선생, 그렇게만 볼 게 아닙니다. 내가 세 사람 다 만나봤는데 가능성 있는 사람은 김대중씨밖에 없습디다. 이번에 박기출씨를 내보내면 1963년 선거와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때 끝까지 출마를 포기하지 않은 변영태씨 때문에 해위 선생이 그 사람이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진 것 아닙니까. 이번에 박기출씨가 나오면 김대중은 박기출씨가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질 겁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도대체 누가 박기출이를 내세웠냐’고 들고 일어날 겁니다. 해위 선생이 매그루더에게 5·16 쿠데타군을 진압하지 말도록 했다는 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질 않습니까. 그 후에 반(反)박정희 운동을 해서 겨우 상처가 아물었는데, 이번에 그런 결과가 나오면 해위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겁니다.<ref name="yu3"/>}}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윤보선은 [[신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목회자)|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ref>[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60328153510420&p=kukminilbo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정구영 (1894년)|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 민청학련 사건과 체포 ===== {{본문|민청학련 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40715020236522&p=yonhap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웹 인용 |url=http://www.crlife.org/html/sub2_2_2.html |제목=¾¾¾ËÀç´Ü<!--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2-12 |archive-date=2016-03-04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201823/http://crlife.org/html/sub2_2_2.html |url-status=dead }}</ref>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일부 야당지도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들어 [[육영수]] 암살을 조롱하였으나 윤보선은 재판중임에도 [[육영수]] 피격사건에 대한 애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5737.html [길을찾아서]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 문정현]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ref name="수난사1">[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640826&cDateYear=2009&cDateMonth=04&cDateDay=30 (盧소환) 前대통령 수난史 '초대~16대'] 파이낸셜뉴스 2009-04-30일자</ref>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또한 그날 방송에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 김상진 사건과 명동 구국선언 ===== {{본문|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본문|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본문|김상진 할복 자살 사건}}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ref name="김상진1">윤보선,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400페이지</ref>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ref name="김상진1"/>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ref name="김상진1"/> 1976년 봄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 [[외무부|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일어서 행동을 할 때라는 의견을 듣고, 그로부터 [[이태영]], [[정일형]], [[김대중]] 셋이 [[정일형]], [[이태영]] 부부의 사저에서 3·1절에 구국선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ref name="명동1">윤보선,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401페이지</ref>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ref name="명동1"/> 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ref name="명동2">윤보선,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402페이지</ref>’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인용문|이 선언문은 미온적이어서 서명하기가 곤란하다. 내가 별도로 선언문을 준비할 테니 서명할 인사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ref name="명동2"/>}}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인용문| * 문익환: 해위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선언문 초안을 읽어보시고 너무 미온적이라 서명하지 않으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 윤보선: 그랬지. 서명 내용이 약하면 우리의 투쟁 의지가 너무 나약해 보여서 큰 효과를 거들 수가 없어요. 국민들에 대한 호소력도 약하고...(이하생략).<ref name="명동2" />}}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ref name="명동2"/>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ref>윤보선,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403페이지</ref> 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ref name="gam01">'비록 한국의 대통령' 《월간조선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조선일보사, 1993)</ref>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ref name="gam01"/>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 1970년대 후반 =====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180607 술김에 “무식한 박정희”말했다 징역2년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그 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ref name="수난사1"/>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1948년)|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1977년 이후 그는 일본의 후쿠다 수상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며 독재 정권에 협조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 화제가 되었다.<ref name="한영우114"/> 이는 방송에 보도되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다시 그를 [[친일파]]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그는 계속 김대중 석방구명운동에 동참했고, 1978년 [[김대중]]은 석방된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justice.or.kr/sub_1_5.html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0-02-12 |archive-date=2013-12-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3110315/http://www.justice.or.kr/sub_1_5.html |url-status=dead }}</ref>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ref name="정조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95817 "나도 한때는 '정조'를 파는 창부였다. 그러나 난 더이상의 창부이길 거부했다"] - 오마이뉴스</ref>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ref name="정조1"/>,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민주국민선언과 10.26 전후 ====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해버렸다.<ref name="국연700">김형수, 《문익환 평전:역사인물찾기 15》(실천문학사, 2004) 700페이지</ref>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ref name="국연700"/>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민주1">{{웹 인용 |url=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History/sub_01_view.asp?Num=5522# |제목=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주주의<!--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2-1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1094645/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History/sub_01_view.asp?Num=5522# |보존날짜=2011-11-21 |url-status=dead }}</ref> 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 /><ref name="민주1"/> 1979년 5월 [[신민당 (1967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 === 생애 후반 === ==== 최규하 정부 시절 ==== {{본문|YMCA 위장결혼식 사건}} 1979년 [[10·26 사태]]로 현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자 그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예상하고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김영삼]], [[김대중]]에게 요구하였으나 결렬되었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윤보선은 [[최규하]]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묵살당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함석헌]], [[박종태 (1920년)|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가들과 면담, 군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실내에서 결혼식 형태로 하기로 정하고 [[연세대학교|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종료 후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79년 11월 YM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ref name="수난사1"/> 당시 그는 벌써 80이 넘었다.<ref name="한영우114"/> 주목되는 점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투쟁과 관련된 윤보선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미국의 국무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ref name="한영우114"/> 11월 24일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윤보선 등은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위장결혼식 참석자들의 형량을 낮추어줄 것을 탄원하여, 전원 형량이 감경되었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석헌]]과 불구속되었던 윤보선은 법정구속되지는 않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의 봄]] 당시 윤보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 양김 후보단일화 촉구와 실패 ==== 1980년 2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ref name="aname161">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역사비평사, 2007) 161페이지</ref> 이때부터 1980년 3월에 이르는 시기에 [[김영삼]] [[신민당 (1967년)|신민당 총재]]는 정국을 관망만 했다. 그리고 4월 들어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섰다.<ref name="aname162">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역사비평사, 2007) 162페이지</ref> 또한 [[김영삼]]은 기타 야당 인사와 시민단체들에게 딱히 손을 내밀지도 않고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1967년)|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ref name="aname162"/>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ref name="aname162"/>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1967년)|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1967년)|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ref name="aname162"/>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 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구파는 [[장택상]]과 [[조병옥]]이 발탁한 [[김영삼]]이 영도하게 된다. ==== 제5공화국 시기 ==== {{본문|대한민국 제5공화국}}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였다. 전두환 등은 윤보선에게 [[박정희]]정권의 부패상 등을 지적 자신들은 [[박정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할테니 도와 달라<ref name="퍼스트81">조은희,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 (황금가지, 2007) 81페이지</ref> 고 했다.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온 데다가 기약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ref name="퍼스트81"/> [[강원룡]]과 [[천관우]], [[지학순]] 등과 함께 [[국정자문회의]] 의원 직을 수락하는데 세간에서는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을 가리켜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비아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인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함께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공덕귀와 남편 윤보선 간에 고성이 오갔다.<ref name="퍼스트81"/> 윤보선은 아니 [[공덕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가들의 [[반미주의]]적인 활동은 야당 운동, 학생 운동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은 [[공산주의]] 혁명론과 민족 해방론, 반미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하였다. [[강원용]]은 이를 두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ref name="banggong">{{웹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4.html |제목=&#91;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93;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4 |확인날짜=2013-04-3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29185548/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4.html |보존날짜=2013-09-29 |url-status=dead }}</ref>'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민청학련 관련자 구명운동 ==== {{본문|민청학련 사건}}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이전에 [[민청학련]]에 연루되었던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가 있었다.<ref name="야당213">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213페이지</ref> 전두환은 윤보선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그래서 윤보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면, 복권시키는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ref name="야당213"/>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역시 관련자 사면복권에 활약을 하였다.<ref name="야당213"/> 한편 1980년대 중반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반미 시위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며 [[반미주의]]적인 경향에는 반대하였다.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남북협상]]으로 태어날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생겨난 부산물로 여기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정부수립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곧 극우 세력과 학생운동가들의 날선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방관하였다. 1985년 6월 제4회 전국사회복지대회준비위원회에서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에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12월 [[미국]] US [[국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 5공 정권 붕괴와 만년 ==== 1987년 6월 22일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6월 항쟁|6.10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작은 메모를 보냈다. 또한 강원룡, [[신현확]] 등의 [[개신교]] 인사와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추천, 이들의 말을 듣고 시위대에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를 지지하기도 했고<ref name="갈등" />, 1987년 12월 14일에는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후 줄곧 [[노태우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노태우]] 공개 지지 선언은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실패,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함께 학생운동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숙부 [[윤치영]]의 구순기념논문 봉헌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밖에 [[강원룡]], [[김수환]] 등의 강연회와 [[기독교]]단체의 운동에 적극 후원, 참여하기도 했다. ==== 사망 ====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 양복은 어려운 중에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을 감사히 여긴 디자이너 이정송이 재단해준 양복이었다.<ref>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1991) 373페이지</ref>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88년 5월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병세가 악화,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동년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에 [[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990년 3월 말 다시 노환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투병하다가, 7월초 병환에 차도가 없자 퇴원, 임종을 위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가족장]](家族葬)으로 진행되었으며<ref>[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240022{{깨진 링크|url=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240022 }} donga.com[뉴스&#93;-국민장 치를지 가족장 치를지 유족과 논의해 결정<!--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240022 }}</ref><ref name="autogenerated2">[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251442461001 역대 대통령 장례식 어떻게 치러졌나? - 손에 잡히는 뉴스 눈에 보이는 뉴스 - 뉴스엔<!-- 봇이 따온 제목 -->]</ref>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수 없다고 반대했다 한다. 상훈으로 '인촌문화상'을 수여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2세였다. === 사후 === 사후 부인 [[공덕귀]]는 앞서 간 남편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ref name="퍼스트82">조은희,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 (황금가지, 2007) 82페이지</ref> 집안에 상청을 차려두고, 거기에 남편의 사진과 촛대와 꽃을 두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주 교회에 예배보러 나갈 때는 남편이 늘 앉았던 자리에 꽃을 갖다 놓곤 했다.<ref name="퍼스트82"/> [[안동교회]]에 아버지 [[윤치소]]와 그의 사후 윤보선이 앉아있던 좌측 맨 앞줄의 왼쪽 끝 좌석은 윤보선이 앉던 자리라는 표석이 붙여졌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서울특별시|서울]]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윤보선의 생가 역시 198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12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시|아산]]의 생가에 [[아산시]]와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윤보선 기념전시관이 열린 뒤<ref>[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12/h2009121622155984860.htm 故 윤보선 대통령 기념관 개관]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12/h2009121622155984860.htm# |date=20140222040214 }} 한국일보 2009.12.16</ref>, 바로 윤보선 기념관이 개관되었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122309130290832 윤보선 전 대통령 기념전시관 건립 - 아시아경제<!--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7/2009121700018.html [사람과 이야기&#93; 아산에 '윤보선 기념관' 19일 문열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1998년 한때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 한때 논의되었으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 안국동 사저 == {{본문|안국동 윤보선가}} 그의 [[서울특별시]] 안국동 사저는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게 되었다. 그의 안국동 사저는 [[한민당]]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48년 9월 윤보선이 스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를 [[한국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과 민국당, 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 저서 및 논문 == === 주요 저서 === * 《구국(救國)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0) === 논문 === * 농림업 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1954) == 학력 == * 한성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보통학교]] 졸업 * 일본 도쿄 [[게이오 중학교]] 수료 * [[일본 제국|일본]] [[도쿄도|도쿄]] [[세이소쿠가쿠엔|세이소쿠 고등학교]] [[졸업]] * 영국(잉글랜드) 버밍엄 [[:en:Woodbrooke Quaker Study Centre|우드브루크 퀘이커 전문학원]] 중퇴(1925년) * 영국(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시립 [[:en:University of Strathclyde|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1926년) * 영국(잉글랜드) [[옥스퍼드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1927년) * [[영국]](스코틀랜드) 국립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 [[학사]](1930년) * 영국(스코틀랜드) 국립 [[에든버러 대학교]] 대학원 [[고고학]] [[석사]](1932년) * 영국(잉글랜드)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석사]] 수료(1934년) === 명예 박사 학위 === * [[경희대학교]] [[명예 학위|명예]] [[법학박사]](1985년 12월 12일) * [[미국]] US국제대학교 명예 [[법학박사]](1986년 1월 16일) == 상훈 == * [[무궁화 대훈장]]<ref>동아일보 1972.06.26일자 3면</ref> * 인촌문화상 == 약력 ==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청남도 선거구) *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 1937년 첫 부인 [[여흥 민씨]] 사별 * 1938년 2월 18일 조모 [[한진숙 (1851년)|한진숙]] 상(喪) * 1939년 11월 4일 조부 [[윤영렬]] 상 * 1944년 2월 20일 부친 [[윤치소]] 상 *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위원 * 1946년 민중일보 사장 * 1947년 민중일보사 사장 재선 * 1947년 우남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 * 1947년 한영협회 회장 * 1948년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충청남도#아산군 (제18선거구)|제헌 국회의원(충남 아산) 낙선]] * 1948년 12월 8일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 1948년 12월 [[서울특별시]] 시장 * 1949년 [[상공부]]장관 * 195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 1950년 12월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 같은 날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1952년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54년 제3대 [[민의원]] * 1958년 제4대 [[민의원]] * 1959년 민주당 상임위원 * 1960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다. 구파의 지도자 [[신익희]], [[조병옥]]의 사망으로 구파의 지도자가 되어 신파의 지도자 [[장면]]과 대립하다. * 1960년 국회의 간접선거로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다. * 1961년 3월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을 주최하였다. * 1961년 3월 12일 서울 청량리 1동 동사무소 창고의 홍국직업소년학교에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과 함께 방문하였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교사로 일하던 이곳을 세상에 알리고자 석호필은 대통령에게 방문을 청하는 편지를 썼고, 윤보선은 [[스코필드]]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왔다. *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다. * 1961년 10월 26일 브라질 대사에 신임장 봉정을 봉정하고, 군대를 사열하였다.<ref>채덕신 외무장관이 동행하다.</ref> * 1961년 10월 28일 농촌지도자들과 면담, 이어 적십자 청소년, 한미연합사령관 슈프 대장과 면담. * 1961년 10월 28일 유엔의 날 축사 발표 * 1962년 3월 22일 정치정화법에 항의 하여 하야하였다. * 1963년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 *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 * 1963년 제6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1965년 1월 23일 외무부 장관 [[김용식 (1913년)|김용식]]을 만나 면담하다. * 1965년 2월 19일 [[장택상]] 등과 함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주관하다. * 1966년 [[신한당]] 총재 * 1967년 제6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출마 * 1969년 6월 18일 모친상 * 1971년 신민당 탈당,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박기출]], [[장준하]] 등과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국민당 (1971)|국민당]] 창당,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국민당 (1971)|국민당]] 총재 취임 * 1973년 유신 정권에 의해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국민당 (1971)|국민당]], 강제 해산당함 * 1974년 비상보통군사법회의에서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제소되었다. * 1974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 구형,항소 기각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년 확정 * 1977년 항소 후 대법원에서 명동사건 상고 기각 원심 확정되었으나 이때 윤보선 등 고령자는 형집행 정지되었다. * 1979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었다. * 1980년 1월 YMCA 위장결혼식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 1980년 형집행 면제 * 1980년 2월 29일 복권되었다. * 1981년 고령으로 정계 은퇴 * 1982년 1월 4일 [[국무총리]] [[유창순]]의 방문을 받았다. * 1983년 보신각 새종 중주(中鑄) 위원회 위원장 * 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고하 송진우]]동상 제막에 참석하였다. * 1984년 3월 13일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 * 1984년 4월 [[이윤영 (1890년)|백사 이윤영]] 회고록의 서문을 짓다. *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의 추모 예배에 참석하였다. *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재선) * 1987년 [[윤치영]]의 구순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 * 1989년 병으로 요양하였다. *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 * 1991년 사후 회고록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2집 출간 == 사상과 신념 ==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ref name="kangs79">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79페이지</ref>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ref name="kangs79"/> === 민주주의 보편타당론과 상식주의 ===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ref name="kimhi39">김준하, 《대통령과 장군-숙명의 대결,쿠데타에서 사상논쟁까지》(나남출판, 2002) 39페이지</ref>'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ref name="kimhi39"/>"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ref name="kimhi39"/>'이라 회상하였다. === 국익을 위한 초당적 협력 ===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ref name="changtaek150">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150페이지</ref>"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ref name="changtaek146148">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146~148페이지</ref>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ref name="changtaek150"/> [[김병로]]는 [[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ref name="changtaek150"/>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ref name="changtaek150"/>"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ref name="changtaek151">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151페이지</ref>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 ===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ref name="banggong"/>'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용문2|윤보선씨와 가까웠던 김정례씨도 그랬어요. 김정례씨는 박정희 치하에서 맹렬하게 싸운 사람 아닙니까. 김정례씨는 재야 운동권 인사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이 김정례씨 집에 피신해 있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정례씨는 그들을 사상적으로 의심하게 된 겁니다. 그들이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거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사상적인 불안감을 가졌던 거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ref name="banggong"/>|강원룡}} [[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 서구 사회에 대한 충격 ===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ref name="goo31">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1</ref>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ref name="goo32">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2</ref>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ref name="goo32"/> 남의 짐도 좋은 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ref name="goo32"/>'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ref name="goo32"/>'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 정신혁명론 ===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 형사들의 교회에서의 감시 ===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ref name="강준만"/>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측 [[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사망한 후에도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 기념 거부 ===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 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과 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 기타 == === 청와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재직 중 [[청와대]]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 취미 === 정원의 화단 가꾸기와 독서를 즐겨하였다. 그는 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ref name="잡곡1">조은희,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황금가지, 2007) 87페이지</ref>고 한다.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ref name="잡곡1"/> 것이다. == 평가와 비판 == === 긍정적 평가 ===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통령선거|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ref name="야당134" />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ref name="한영우111"/>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ref name="mk1"/>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ref name="mk1"/>'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ref name="최기일86"/>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 부정적 평가 === ==== 5.16 관련과 친일파 행적 ====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ref name="한영우111"/>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ref name="한영우115"/>'라고 보았다. 더한 지적도 많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을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ref>윤보선의 [[할아버지|조부]]와 [[아버지]]가 [[친일]]을 한 [[양반]]이었다.</ref>.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ref name="역비921"/>는 비판도 있다. {{참고|장면#중앙정보위원회&시국정화단 설치}}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ref name="mi214" />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ref name="한영우114"/>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 장면과의 갈등 관련 ==== 서중석은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ref name="야당134" />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 (1967년)|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이자 [[국무총리|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ref name="허정회고록289"/>'고 비판했다. ==== 기타 비판 ====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ref name="허정회고록290">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290페이지</ref>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ref name="허정회고록290"/>'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ref name="매카시즘">{{웹 인용 |url=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298736&q=%ED%99%A9%ED%83%9C%EC%84%B1# |제목=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확인날짜=2011-05-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12071546/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298736&q=%ED%99%A9%ED%83%9C%EC%84%B1# |보존날짜=2016-03-12 |url-status=dead }}</ref> [[한국 전쟁]]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과 '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ref>여기에 당시 많은 진보세력들도 가세해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많이 지지해줬고, 밀어줬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298736&q=%ED%99%A9%ED%83%9C%EC%84%B1 {{웨이백|url=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298736&q=%ED%99%A9%ED%83%9C%EC%84%B1# |date=20160312071546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고</ref>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ref>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가운데 최저 표차였다.</ref> 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ref name="매카시즘"/>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ref name="역비921">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2 여름) (역사비평사, 2007) 167페이지</ref> 고 보는 시각도 있다.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84</ref>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ref name="kang79">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79</ref>',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ref name="kang79"/>'고 평하였다. === 인물평 ===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ref>지동욱, 박윤희 옮김, 《한국 대통령 8인 비극적 말로의 비밀》(사람의향기,2003) 74쪽.</ref>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참고|흥선대원군#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수학}}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ref name="야당134" />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ref name="야당134" />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ref name="야당134" />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다고 평가했다.<ref name="야당134" />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ref name="최기일86">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생각의나무, 2002) 86페이지</ref>'는 평을 내렸다. == 의혹과 반론 == === [[5·16 군사정변]] 추인에 대한 의혹 ===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출처|날짜=2009-8-14}}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ref name="김현사129">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민연, 2000) 129페이지</ref>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조선인민군|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ref name="김현사129"/>"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관|주한미국대사]] [[마샬 그린|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ref name="김현사129"/>"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이 터지자 그는 1군사령관 이한림 1군단장 임부택 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 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자신의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 5.16 군사정변 방조 의혹 ===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 (군인)|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ref>[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2.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 (군인)|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ref name="신동아516"/> 그러나 [[김도연 (1894년)|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 (1894년)|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ref name="rnstk">[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2/21/200502210500024/200502210500024_6.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ref name="rnstk"/>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ref name="changs95">장면,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95페이지</ref>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ref name="changs95"/>'는 것이 장면의 주장이다.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ref name="mi213">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213</ref> {{인용문|학생혁명도 군사혁명도 똑같은 국민들이 일으킨 똑같은 혁명이다. 당신네 [[존 F. 케네디|케네디]] [[대통령|미국의 대통령]]이 [[장면]] [[총리|국무총리]]와 같은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학생혁명은 인정하고 군사혁명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ref name="dd1"/>}}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1961년 5월 17일 낮 11시 두 사람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ref name="한영우114"/>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그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ref name="한영우114"/> 현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ref name="한영우114"/> 주장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부 사령관은 [[미국]]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ref name="mi214" /> {{인용문|윤 대통령은 16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는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하오에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3시간 가까이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상 등 급박한 현안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국내각 구성을 주장했다.<ref name="mi214"/>}}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ref name="mi213" />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4성 장군|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ref name="mi213"/> === 올 것이 왔구나 ===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ref name="dae21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273페이지</ref>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ref name="dd212">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212</ref>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ref name="dae212"/> {{인용문|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ref name="dd212"/>}}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ref name="dd212"/>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 (군인)|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후에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ref name="신동아516">{{저널 인용 |저자=김준하 |제목=[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2/21/200502210500024/200502210500024_1.html |저널 =신동아 |연도 =2001 |작성월 =11 |issue=제506호 |쪽=352~371쪽 }}</ref><ref>{{저널 인용 |저자=윤보선 |제목=유원식 회고록에 할 말 있다 |저널 =정경문화 |연도 =1983 }}</ref>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사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ref name="허정회고록289"/> "올 것이 왔구나"를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ref name="한영우115"/> 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 반론 ===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ref name="취재1">[http://news.donga.com/People/Insa/3//20020709/7841028/1?dis_box=7 김준하씨 "尹대통령,5·16세력과 내통안했다"] {{웨이백|url=http://news.donga.com/People/Insa/3//20020709/7841028/1?dis_box=7 |date=20131213064750 }} 동아일보 2002년 7월 9일자</ref>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ref name="취재1"/>'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 일화 ===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ref name="한영우111"/>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은 [[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1961년 1월 1일 [[신정]]때 [[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의 [[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 장을 가져와 도안을 문제삼았다.<ref name="강준만 193">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193</ref><ref name="sogo">격랑 80년:선우종원 회고록(선우종원, 인물연구소, 1998) 244</ref> 소가 도안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안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은 [[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ref name="강준만 193"/><ref name="sogo"/>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金楠)의 동생 [[김상협]](金相浹)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은 당시 [[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장면|국무총리]]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ref name="강준만 193"/>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 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김성수 (언론인)|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ref>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193~194</ref> 1960년대 중반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쿠라<ref name="야당144"/> 라고 공격했고 이는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시|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ref>김두규, 내 운을 살려주는 풍수여행 (동아일보사, 2008) 340페이지</ref>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ref name="iebi0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060937171&code=900315 (춤과 그들) 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경향신문 2007년 12월 6일자</ref>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ref name="iebi01"/>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 최초로 최면시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문제로 [[류한평]] [[박사]] 등의 상담을 받고 최면시술을 받기도 했다. == 가족 관계 == [[파일:Yunchiho1945.jpg|섬네일|오른쪽|180px|윤보선의 당숙 친일파 [[윤치호]]]]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 겸 [[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그 이외에 [[윤원선]] 또한 동생이었으며 조부는 [[윤영렬]], 종조부로는 [[윤웅렬]], 백부는 [[윤치오]], 숙부로는 [[윤치영]], 사촌 형제로는 [[윤일선]], 5촌 당숙으로는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육촌 형제로는 [[윤영선 (1896년)|윤영선]], 5촌 조카로는 [[윤인구 (아나운서)|윤인구]] 등이 있다. * 조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1939년]] [[11월 4일]]) * 조모: [[청주 한씨]] [[한진숙 (1851년)|한진숙]](韓鎭淑, [[1851년]]~[[1938년]] [[2월 18일]]), 한말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백부: [[윤치오]](尹致旿, 호는 동암(東庵), [[1869년]] [[9월 10일]] ~ [[1950년]] [[12월 22일]]) ** 부: [[윤치소]](尹致昭, 호는 동야(東野), [[1871년]] [[8월 25일]]~[[1944년]] [[2월 20일]]) ** 숙부: [[윤치성]](尹致晟, 호는 악연(岳淵), [[1875년]] [[음력 3월 2일]] - [[1936년]] [[8월 11일]]) ** 숙부: [[윤치병]](尹致昞, 호는 간송(澗松), [[1880년]] [[음력 6월 4일]]~[[1940년]] 양력 [[1월 24일]]) ** 고모: [[윤활란]](尹活蘭, 1884년 3월 9일 ~ 1967년 12월 6일) ** 숙부: [[윤치명]](尹致明, 호는 남강(南岡), [[1885년]]<ref>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40페이지</ref><ref>[[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섯째 형님과 13년 차이라고 하였다.</ref> [[10월 27일]]([[음력 9월 20일]]) ~ [[1944년]] [[양력]] [[4월 21일]]) ** 고모: [[윤노덕]](尹老德, [[1889년]] [[9월 19일]] ~ [[1979년]] [[10월 23일]]) ** 숙부: [[윤치영]](尹致暎, 호는 동산(東山),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 * 조모: [[신덕경]](愼德卿, ? - 1894년 5월 29일) - 조부 [[윤영렬]]]의 첩 ** 이복 숙부: [[윤씨]](요절) * 조모: [[미상]](?~?) - 조부 [[윤영렬]]의 첩 ** 이복 고모: [[윤씨]](요절) * 조모: [[장복첨]](張福瞻, 1902년 1월 22일 ~ 1950년 8월 3일) - 조부 [[윤영렬]]의 첩 ** 이복 숙부: [[윤치정]](尹致晶, 1921년 11월 25일 ~ ?) ** 이복 고모: [[윤길희]](尹吉喜, 1924년 6월 16일 ~ 1973년 6월 28일) ** 이복 고모: [[윤인희]](尹麟喜, 1927년 1월 17일 ~ ?) ** 이복 숙부: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1985년 4월 8일) * 외조부: [[이재룡 (중추원 의관)|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재룡 (중추원 의관)|이봉하]](李鳳夏), [[중추원]] 의관 역임) ** 모: [[이범숙]] (李範淑, 호는 명사(明師), 본관은 전주, [[1876년]] [[10월 15일]]~[[1969년]] [[6월 18일]], [[교회]] [[권사]]이기도 했다.) *** 남동생: [[윤완선]](尹浣善, [[1901년]] [[2월 18일]]~[[1970년]] [[5월 23일]]) *** 제수: [[이순정]]([[1907년]] [[2월 29일]]~[[1998년]] [[7월 20일]])<ref name=":0">{{웹 인용|url=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SQ-G9CZ-V85P?i=876&cc=1398522|제목=해평윤씨대동보|성=해평윤씨대동보간행위원회|이름=|날짜=2005|웹사이트=|출판사=가승미디어|확인날짜=}}</ref> *** 여동생: [[윤예경]](尹禮卿, [[1905년]] [[6월 1일]]~[[2001년]]) *** 남동생: [[윤원선]](尹源善, [[1910년]] [[10월 27일]]~[[1971년]] [[12월 16일]], 제7대 경기도지사) *** 제수: [[이진완]](李辰琬, [[1916년]]~[[1997년]], [[영선군]] [[이준용]]의 서녀<ref>[[이준용]]의 [[첩]] [[전순혁]] 소생이다.</ref>, [[헌의대원왕]] [[증손녀]]) *** 남동생: [[윤한선]](尹漢善, [[1912년]] [[8월 21일]]~[[1972년]] [[10월 14일]]) *** 제수: [[김정현]](金貞賢, [[1918년]] [[6월 10일]]~[[2007년]] [[8월 21일]])<ref name=":0" /> *** 여동생: [[윤의경]](尹義卿, [[1912년]] [[9월 28일]]~?) ***: 매제:[[오진영]]([[오긍선]]의 아들) *** 남동생: [[윤택선]](尹澤善, [[1914년]] [[11월 20일]]~[[1998년]] [[4월 6일]])-[[서울]] 안동[[교회]] [[장로]] [[역임]]<ref>[http://www.andong-ch.org/intro/90history/90history04.pdf 안동교회 90년사]</ref> *** 제수: [[이기화]]([[1914년]] [[5월 7일]]~[[1996년]] [[5월 30일]]) *** 남동생: [[윤형선 (1917년)|윤형선]](尹瀅善, [[1917년]] [[4월 2일]]~[[?]]) *** 제수: [[이덕자]]([[윤형선 (1917년)|윤형선]]의 첫 번째 부인) *** 제수: [[변은영]]([[윤형선 (1917년)|윤형선]]의 두 번째 부인) *** 여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2011년]] [[3월 22일]]]) *** 매제: [[이재녕]](李宰寧, [[1918년]] [[5월 4일]]~[[2006년]] [[2월 19일]]), [[역사학자]] [[이병도]]의 조카, [[이병묵]](李炳默)의 아들<ref>셋째 사위이면서 동시에 동생 [[윤치영]]의 첫 번째 부인 [[이병영]]의 친정조카</ref> * 장인: [[민영철]](閔泳喆, [[1864년]]~[[1912년]], 첫 부인 [[여흥 민씨]] [[민경숙]]의 [[아버지]], 사촌동생 [[윤시선]]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 아내: [[여흥 민씨]]([[1894년]]~[[1937년]]) *** 장녀: [[윤완구]](尹琓求, [[1915년]] [[10월 18일]]~[[2007년]] [[3월 26일]]<ref>{{뉴스 인용 |제목=남흥우(고려대 명예교수)씨 상배 외 |url=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619 |출판사=기호일보 |날짜=2007-03-27 |확인날짜=2007-10-30}}</ref>, [[남흥우]]의 아내) *** 사위: [[남흥우]](南興祐, [[1913년]] [[6월 7일]]~[[2012년]] [[10월 6일]]) *** 차녀: [[윤완희]](尹完姬, [[1918년]] [[7월 12일]]~) *** 둘째 사위: [[신준호]](申俊浩, [[1916년]]~[[1971년]]),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조카<ref>{{웹 인용|url=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S7-997Q-PSJX-S?i=801&cc=1398522|제목=고령신씨세보|성=|이름=|날짜=1927|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 외손녀: [[신경수]](申瓊秀, [[1939년]]~) **** 외손녀사위: [[이동환]]([[1938년]]~, [[미국]] 뉴저지에 거주) **** 외손자: 신중수(申中秀, [[1941년]]~), [[독일]] 거주.<ref>[http://ehosun.tistory.com/tag/%EC%9C%A4%EB%B3%B4%EC%84%A0 Photolog, By Ryo ::<!-- 봇이 붙인 제목 -->]</ref> **** 외손자며느리: [[이의균]]([[1943년]]~) **** 외손자: [[신흥수]](申興秀, [[1943년]]~, 해태유업 직판부장) **** 외손자며느리: [[양향숙]]([[1950년]]~) **** 외손녀: [[신문수]](申文秀, [[1944년]]~) * 장인: [[공도빈]] (孔道彬) * 장모: [[방말순]](方末線) ** 아내: [[공덕귀]](孔德貴, [[1911년]] [[4월 21일]]~[[199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 장남: [[윤상구 (1949년)|윤상구]](尹商求, [[1949년]] [[10월 29일]]~) 기업인, 사회기관단체인, 건축자재 사업가. *** 장자부: [[양은선]](梁恩仙, [[1954년]]~,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손녀: [[윤영란]] **** 손녀 사위: [[문윤회]] **** 장손: [[윤일영]] *** 차남: [[윤동구 (1952년)|윤동구]](尹同求, [[1952년]] [[7월 12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 차자부: [[최영선]](崔映仙) * 사돈: [[신규식]](申圭植, [[1880년]] [[음력]] [[1월 13일]]~[[1922년]] [[양력]] [[9월 25일]]) * 사돈: [[조정완]] * 사돈: [[신명호]](申明浩<ref>사위 [[신준호]]의 누이</ref>, ) * 사돈: [[민필호]](閔弼鎬, [[1898년]] [[2월 7일]]~[[1963년]] [[4월 14일]], 독립운동가, 사위 [[신준호]]의 매부) * 사돈: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1939년]] [[4월 5일]]) - 6촌 형 [[윤광선]]의 장인 * 사돈: [[민영철]](閔泳喆, [[1864년]]~[[1912년]]) - 큰아버지 [[윤치오]]의 딸 [[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본처 [[민씨]]의 친정[[아버지]], [[민영환]]의 6촌 동생 * 사돈: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1943년]] [[4월 25일]]) - 8촌 매형 [[현정건]]의 동생이며, 큰아버지 [[윤치오]]의 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 * 사돈: [[손정도]](孫貞道, [[1872년]] [[7월 26일]]~[[1931년]] [[2월 19일]]) - 당숙 [[윤치창]]의 장인 * 사돈: [[손원일]](孫元一, [[1909년]] [[5월 5일]]~[[1980년]] [[2월 15일]]) - 당숙 [[윤치창]]의 처남 * 사돈: [[방일영]](方一榮, [[1923년]] [[11월 26일]]~[[2003년]] [[8월 8일]]) - 6촌 형 [[윤영선 (1896년)|윤영선]]의 [[손녀]][[사위]] [[방상훈]]의 아버지 * 사돈: [[방응모]](方應謨, [[1883년]] [[9월 29일]]~[[1950년]] [[8월]]) == 대중 매체 == === 드라마 === * [[이순재]] - 1989년 [[제2공화국 (드라마)|제2공화국]] [[문화방송|MBC]] 드라마 * [[원근희]] - 1989년 [[무풍지대]]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 [[이순재]] - 1993년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문화방송|MBC]] 드라마 * [[이신재]] - 1995년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문화방송|MBC]] 드라마 * [[이순재]] - 1995년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 [[이순재]] - 1998년 [[삼김시대 (드라마)|삼김시대]] [[SBS]] 드라마 * [[이종구 (성우)|이종구]] - 2004년 [[영웅시대 (2004년 드라마)|영웅시대]] [[문화방송|MBC]] 드라마 * [[이종구 (성우)|이종구]] - 2005년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문화방송|MBC]] 드라마 == 역대 선거 결과 == {{선거기록 시작|KR|개인}} {{선거기록/KR/개인|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총선]] | 1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아산군 (선거구)|충남 아산군]] | 한국민주당 | 7,069표| 14.17 | 4위 | 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1954년|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3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종로구 갑|서울 종로구 갑]] | 민주국민당1949 | 9,485표| 32.35 | 1위 | 당선 | 초선 }} {{선거기록/KR/개인|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4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종로구 갑|서울 종로구 갑]] | 민주당1955 | 22,780표| 63.20 | 1위 | 당선 | 재선 }} {{선거기록/KR/개인|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5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종로구 갑|서울 종로구 갑]] | 민주당1955 | 31,924표| 81.85 | 1위 | 당선 | 3선 }} {{선거기록/KR/개인|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대선]] | 4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당1955 | 208표| 82.2 | 1위 | 당선_대 | }} {{선거기록/KR/개인|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대선]] | 5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정당 | 4,546,614표| 45.09 | 2위 | 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1963년|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6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틀:제6대 비례대표 민정당|전국구]] | 민정당 | 1,870,976표| 20.1 | 전국구 1번 | 당선 | 4선 }} {{선거기록/KR/개인| 1967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대선]] | 6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신민당 | 4,526,541표| 40.93 | 2위 | 낙선 | }} {{선거기록 끝}} == 관련 서적 ==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동아일보사, 1991)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한국정경사, 1967) *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3:Between and Beyond》(한길사, 2003) * 심지연, 《장면, 윤보선, 박정희(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인물과사상사, 2006) *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에디터, 2006) * 지동욱, 박윤희 옮김, 《한국 대통령 8인의 비극적 말로의 비밀》(사람의 향기, 2003) * 주돈식, 《우리도 조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사람과 책, 2004) *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건국에서 제3공화국까지》(들녘, 1998) *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종로서적, 1983) * 현석호, 《한국인물대개 : 장면》(박우사, 1972) *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상산회고록》(일신문화사, 1968) *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상산회고록》(강우출판사, 1967) * 김준하, 《대통령과 장군:윤보선 대 박정희》(나남, 2002) *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생각의나무, 2002)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한국의 군정기]] *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 [[감리교]]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신민당 (1960)|신민당]] * [[민중당 (1965년)|민중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5·16 군사 정변]] * [[호헌동지회]] * [[김상진 할복 자살 사건]] * [[민청학련 사건]] * [[인혁당 사건]] * [[YMCA 위장결혼식 사건]] * [[국정자문회의]] * [[동아일보]] * [[윤보선길]] == 각주 == {{각주|30em|refs=<ref name="강준만">[[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77~78쪽.</ref>}}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문헌언어-줄|ko|저자:윤보선}} * {{헌정회|401|윤보선}} * [http://www.yunposun.com/ 해평윤씨 홈페이지] * [http://www.yunposun.or.kr/ 해위 윤보선 기념사업회] *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45001.html “김형욱 ‘대통령 지면 윤보선 암살’ 명령”- 한겨레신문] {{웨이백|url=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45001.html |date=20101025082315 }} * [https://web.archive.org/web/20111121094129/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2C34%26queryText%3DV_KDCD%3D18 윤보선대통령생가:문화재청]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34326/http://www.seoul.go.kr/v2007/seoul/mayor_his/mayor.html 역대 서울 시장:2대 시장]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임자 = [[이승만]]<br />[[허정]]<br />(권한대행) |후임자 = [[박정희]] |대수 = 4 |임기 = 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3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형민 (1909년)|김형민]] |후임자 = [[이기붕]] |대수 = 2 |직책 = [[서울특별시장]] |임기 = 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임영신]] |후임자 = [[김훈 (1900년)|김훈]] |대수 = 2 |직책 =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장관]] |임기 = 1949년 6월 6일~1950년 5월 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최규하]] |대수 = |직책 = 초대 [[대한민국 국가원로자문회의|국정자문회의 의장]] |임기 = 1980년 2월 18일~1980년 9월 }} {{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윤보선 |대수 = |직책 = 초대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임기 = 1979년~1986년 }} {{전임후임 |전임자 = 윤보선 |후임자 = [[최규하]] |대수 = 2 |직책 =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임기 = 1986년~1990년 }} {{전임후임 |전임자 =[[양주삼]] |후임자 =구영숙 |대수 =2 |직책 =[[대한적십자사]] 총재 |임기 =1950년 11월~1952년 9월 }}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전국구}} {{서울특별시장}}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 {{명동구국선언 참가자}} {{전거 통제}} [[분류:윤보선| ]]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1897년 출생]] [[분류:1990년 사망]] [[분류:아산시 출신]] [[분류:호헌동지회]] [[분류:대한적십자사 대표]] [[분류: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후보]] [[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조선귀족 거부자]] [[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상공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분류:한국민주당 당원]] [[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분류:민주당 (1955년 대한민국) 당원]] [[분류:민정당]] [[분류:신민당]] [[분류:국민당 (1971년 대한민국) 당원]] [[분류: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 [[분류: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 [[분류:해평 윤씨]]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동문]]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반파시스트]] [[분류:대한민국의 테러 피해자]] [[분류:대한민국의 범죄 피해자]] [[분류: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 [[분류:19세기 한국 사람]]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서울특별시의 국회의원]] [[분류:대한민국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분류:무궁화대훈장 수훈자]] [[분류:충청남도 출신 정치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작가 정보 |이름 = 나도향 |원어이름 = |그림 = 나도향.jpg |그림크기 = 200px |설명 = 나도향 |본명 = 나경손(羅慶孫) |출생일 = {{출생일|1902|3|30}} |출생지 = [[한성부]] [[용산구|용산방]] 청파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26|8|26|1902|3|30}} |사망지 = |필명 = 나빈(羅彬) |별칭 = 도향(稻香) |직업 = [[소설가]] |언어 =[[한국어]] |국적 = |학력 = |모교 = |활동 기간 = 1922년~1926년 |등단시기 = 1922년 |등단작 = 소설 《젊은이의 시절》 |장르 = |주제 = |문학 경향 = |주요 작품 = 《[[물레방아 (소설)|물레방아]]》<br/>《[[뽕 (소설)|뽕]]》<br/>《벙어리 삼룡이》<br/>《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수상 = |신장 = |배우자 = |부모 = |동거인 = |자녀 = |친척 = |종교 = |영향 받은 인물 = |영향 준 인물 = |서명 = }} '''나도향'''(羅稻香, [[1902년]] [[3월 30일]]~[[1926년]] [[8월 26일]])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며 필명은 '''나빈'''(羅彬)이다. 호는 도향(稻香)이다. [[한성부]] [[용산구|용산방]] 청파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영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여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다. 같은 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 (소설)|환희]]≫를 연재했고, 이어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했다. 여기서 장편 《환희》를 통해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 (문학)|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 <은화 백동화>, <17원 50전>,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 7월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초기에는 주로 작가의 자전적 측면에 연관된 내용을 소설로 썼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토로, 감상적인 예술가형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곧 습작기의 이런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를 벗어난 사실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장편 소설 ≪환희≫는 ≪동아일보≫의 청탁에 의한 것인데, 작자 자신도 “사색과 구상에 들어서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붓이 내려가는 대로” 썼다고 고백했듯이, 통속 소설의 취향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모호한 내면, 환상, 영탄을 사용하는 등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감상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러한 나도향의 낭만적 감상주의풍은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적인 간결함과 냉정한 시선, 객관성을 확보한 문체와 구성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소설의 단점을 극복해 낸 이런 소설적 성취는 나도향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즉,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 것과 그런 욕망이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관찰을 동시에 보여준다. 생에 대한 원초적 의지와 욕망이 사회적인 제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현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낭만적 열정과 사실주의적인 ‘관계성의 냉정한 분석’을 포함한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소설)|물레방아]]>, <뽕> 등의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 생명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면, 이 세 작품이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나도향의 소설은 이런 일그러진 원초성, 문명 이전의 건강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특징과 가치를 지닌다. 주요작품으로 《[[물레방아 (소설)|물레방아]]》, 《[[뽕 (소설)|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는데,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작품들 중 《벙어리 삼룡이》,《[[뽕 (소설)|뽕]]》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 참고 문헌 == * {{글로벌세계대백과}} * {{지만지|제목=초판본 나도향 단편집|주소=http://zmanzclassics.blogspot.com/2012/07/blog-post_06.html}} == 외부 링크 == * {{위키문헌언어-줄|ko|글쓴이:나도향|나도향}} * {{두피디아|101013000719863}} {{전거 통제}} {{토막글|한국 사람|작가}} [[분류:나도향| ]] [[분류:1902년 출생]] [[분류:1926년 사망]] [[분류:대한제국 사람]] [[분류: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분류:일제강점기의 작가]] [[분류:한국의 잡지 편집자]] [[분류:용산구 출신]]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나주 나씨]] [[분류:배재고등학교 동문]] [[분류:20세기 한국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사람}} {{영화인 정보 | 이름 = 문소리 | 사진 = Moon So-ri.png | 사진크기 = | 사진설명 = |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74|7|2}} | 출생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사망일 = | 사망지 = | 직업 = [[배우]] <br /> [[영화 감독]] | 종교 = [[불교]] | 활동기간 = 1999년 ~ | 부모 = 문창준 (아버지) <br /> 이향란 (어머니) | 배우자 = {{결혼|[[장준환 (영화 감독)|장준환]]|2006}} | 자녀 = 장연두 (딸, 2011년생) | 형제자매 = 1남 1녀 중 장녀 | 소속사 =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 수상 = }} '''문소리'''([[1974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다. == 경력 == * 2002년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홍보대사 * 2003년 제2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명예심사위원 * 2003년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 2004년 제5회 도쿄필름엑스영화제 심사위원 * 2005년 제42회 대종상영화제 홍보대사 * 2006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07년 대한핸드볼협회 홍보대사 * 2007년 구리시장애인종합복지관 명예홍보대사 * 2007년 제31회 카이로 국제 영화제 심사위 * 2008년 제5회 서울환경영화제 심사위원 * 2009년 독립영화배급사네트워크 다큐프렌즈 * 2009년 제6회 서울환경영화제 에코프렌즈 * 2009년 제9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10년 송파세무서 일일명예민원봉사실장 * 2010년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대사 * 2011년 3월 건국대학교 예술학부 영화전공 초빙교수 * 2013년 제26회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15년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15년 제6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심사위원 * 2015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초빙교수<ref>{{뉴스 인용|제목=[문소리]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url=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608|뉴스=씨네21|날짜=2015-10-21}}</ref> * 2016년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 2016년 제2회 아동권리영화제 홍보대사 * 2018년 제37회 국제현대무용제 홍보대사 * 2018년 보건복지부 공공의료 홍보대사 * 2019년 제18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명예심사위원 * 2019년 교육부 문해교육 홍보대사 * 2019년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심사위원 * 2019년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 == 생애 ==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아버지 문창준 어머니 이향란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으로 상경했다.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394546 문소리 "남자 친구 덕에 데뷔…'박하사탕' 만나게 해 줬다"] - 스포츠조선</ref>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입학을 준비하던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영화)|박하사탕]]》 오디션에서 여자 주인공인 윤순임 역으로 발탁되어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이에 앞서 MBC 공채 26기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으나<ref>{{뉴스 인용 | 제목 = 문소리, "공채 탤런트 시험 떨어진 적 있다" | url =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0846704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강종훈 | 쪽 = | 날짜 = 2004-12-09 | 확인날짜 = 2022-05-02 }}</ref> 탈락하기도 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377300 '힐링' 문소리, "남자 친구 덕에 '박하사탕'으로 데뷔"] - 마이데일리</ref> 문소리라는 이름을 대중에 알린 것은 《박하사탕》에 이어 2번째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춘 2002년작 《[[오아시스 (2002년 영화)|오아시스]]》에서였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에 걸려 자기 방 안에 갇혀 사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바람난 가족]]》에서는 옆집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변호사 부인 역을,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이발사 부인을 연기한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고,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썼다.<ref>{{웹 인용|url=https://www.kmdb.or.kr/story/11/87|제목=여배우는 오늘도|언어=ko|확인날짜=2018-10-24}}</ref> 2003년 [[정재일]]의 뮤직비디오 〈눈물꽃〉에 출연했고, 이를 연출한 영화 감독 [[장준환 (영화 감독)|장준환]]과 2006년 12월 24일 결혼했다. 문소리는 [[진보신당]]의 당원으로<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90644121 연예인의 정치활동 '아슬한 외줄타기']</ref>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덕양구]] 갑 국회의원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하였으며<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030661 문소리, 심상정 상중 대리유세]</ref>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멘토로 참여하기도 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39713 조국, 공지영, 이외수, 문소리, 박원순 선대위 멘토단 합류]</ref> == 연기/연출 활동 == === 영화 === {| class="wikitable" border="2" cellpadding="4" background: #f9f9f9; |- align="center" ! 연도 ! 영화 ! 역할 ! 감독 ! 비고 |- | [[1999년]] | [[박하사탕 (영화)|박하사탕]] | 윤순임 | [[이창동]] | |- | [[2000년]] | 블랙 컷 | 미숙 | 이동하 | 단편영화 |- | rowspan=2| [[2001년]] | [[외계의 제19호 계획]] | 처녀귀신 | 민동현 | 단편영화 |- | 봄산에 | 정우 | 이지행 | 단편영화 |- | [[2002년]] | [[오아시스 (2002년 영화)|오아시스]] | 한공주 | [[이창동]] |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br>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상)<br>제2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br>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br>제10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br>제5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신인 연기자상)<br>제29회 시애틀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 | [[2003년]] | [[바람난 가족]] | 은호정 | [[임상수]] | 제2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br>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br>제11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br>제41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 |- | [[2004년]] | [[효자동 이발사]] | 김민자 | 임찬상 | |- | rowspan=2| 2005년 | [[사랑해, 말순씨]] | 김말순 | [[박흥식 (1965년)|박흥식]] | |- |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 본인 | 위베르 뇨그레| 다큐멘터리 | |- | rowspan=2| 2006년 |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 조은숙 | [[이하 (영화 감독)|이하]] | |- | [[가족의 탄생 (영화)|가족의 탄생]] | 미라 | [[김태용 (영화 감독)|김태용]] | 제47회 데살로니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 | rowspan=2| 2008년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한미숙 | [[임순례]] | |- | [[사과 (2008년 영화)|사과]] | 현정 | 강이관 | |- | rowspan=4| 2009년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서울여자 목소리 | [[홍상수]] | |- | [[날아라 펭귄]] | 송희정 | [[임순례]] | |- |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 나레이션 | [[안해룡]] | 다큐멘터리 |- | [[디 엔드]] | | [[백현진]] | 단편영화 |- | rowspan=3| 2010년 | [[하하하]] | 왕성옥 | [[홍상수]] | 제19회 부일영화상 (여우 주연상) |- | [[작은 연못]] | 피난민 | 이상우 | |- | [[하녀 (2010년 영화)|하녀]] | 의사 | [[임상수]] | |- | rowspan=2| 2011년 |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마당을 나온 암탉]] | 잎싹 | [[오성윤]] | |- | [[다른 나라에서]] | 금희 | [[홍상수]] | |- | rowspan=2| 2013년 | [[분노의 윤리학]] | 김선화 | 박명랑 | |- | [[스파이 (2013년 영화)|스파이]] | 안영희 | [[이승준 (영화 감독)|이승준]] | |- | rowspan=3| 2014년 | [[관능의 법칙]] | 조미연 | 권칠인 | |- | [[만신]] | 70년대 김금화 | 박찬경 | |- | [[자유의 언덕]] | 영선 | 홍상수 | |- | rowspan=3| 2015년 | [[필름시대사랑]] | 병원 청소부 | [[장률]] | |- | 최고의 감독 | | rowspan="2"|[[문소리]] | 단편영화 / 주연,연출,각본 |- | 동행 | | 단편영화 / 주연,연출,각본 |- | rowspan=2| 2016년 | [[아가씨 (영화)|아가씨]] | 이모 | [[박찬욱]] | 특별출연 |- | [[가려진 시간]] | 민경희 박사 | [[엄태화]] | 특별출연 |- | rowspan=3| 2017년 | [[특별시민]] | 정제이 | 박인제 | |- | [[여배우는 오늘도]] | 문소리 | [[문소리]] | 배우 / 연출 / 각본 |- | [[1987 (영화)|1987]] | 버스 위에서 선창하는 사람 (목소리) | [[장준환 (영화 감독)|장준환]] | 특별출연 |- | rowspan=2| 2018년 | [[리틀 포레스트 (2018년 영화)|리틀 포레스트]] | 엄마 | [[임순례]] | |- |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 송현 | [[장률]] | |- | rowspan=2| 2019년 | [[배심원들]] | 재판장 김준겸 | 홍승완 | |- | [[메기 (영화)|메기]] | 이경진 | [[이옥섭]] | |- | 2020년 | 인간증명 | | 김의석 | |- | rowspan=1| 2021년 | [[세자매 (영화)|세자매]] | 미연 | 이승원 | 제42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 | rowspan=2| 2022년 |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안애숙 | 김지훈 | |- | [[서울대작전]] | 강 회장 | 문현성 | |- | 2023년 | [[좋.댓.구]] | 배우 문소리 | 박상민 | 특별출연 |- |} === 드라마 === {| class="wikitable" |- ! 연도 !방송사 ! 제목 ! 역할 ! 비고 |- | 2007년 | rowspan="3" |MBC | [[태왕사신기]] | 서기하 / 가진 | 24부작 |- | 2008년 |[[내 인생의 황금기]] |이황 |56부작 |- | 2013년 | [[드라마 페스티벌]] - [[하늘재 살인사건]] | 정분 | 단막극 |- | 2016년 |SBS |[[푸른 바다의 전설]] |사월 / 안진주 |20부작 |- | 2018년 |JTBC | [[라이프 (2018년 드라마)|라이프]] | 오세화 | 16부작 |- | 2020년 | rowspan="2" |MBC | [[시네마틱드라마 SF8]] - 인간증명 | 가혜라 | 단막극 |- | 2021년 | [[미치지 않고서야]] | 당자영 | 16부작 |- | rowspan="2" | 2023년 |Netflix | [[퀸메이커]] | 오경숙 | 11부작 |- |Disney+ |[[레이스 (드라마)|레이스]] |구이정 |12부작 |- | rowspan="2"|2024년 |tvN |[[정년이 (드라마)|정년이]] |서용례(채공선) |12부작 |- | rowspan="2" |Netflix |[[지옥 시즌 2]] |이수경 |6부작 |- |2025년 |[[폭싹 속았수다]] |중년의 애순 | |- |} === 연극 === {| class="wikitable" border="2" cellpadding="4" background: #f9f9f9; |- align="center" ! 연도 ! 작품 ! 역할 ! 비고 |- | 2006년 | 슬픈연극 | 심숙자 | |- | 2010년 | 광부화가들 | 헬렌 | 원작 [[:en:The Pitmen Painters (play)|The Pitmen Painters]] |- | 2016년 | 빛의 제국 | 장마리 | |- | 2019년 | 사랑의 끝 | 여자 | 원작 [[:fr:Clôture de l'amour|Clôture de l'amour]] |- | 2022년 | 광부화가들 | 헬렌 | 원작 [[:en:The Pitmen Painters (play)|The Pitmen Painters]] |- | 2024년 | 사운드 인사이드 | 벨라 | 원작 [[:en:The Sound Inside (play)|The Sound Inside]] |- |} == 기타 활동 == === 예능 === * 《[[시네마 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시네마 천국]]》 (EBS1, 2003년) * 《[[매직아이 (텔레비전 프로그램)|매직아이]]》 (SBS, 2014년) * 《[[전체관람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전체관람가]]》 (JTBC, 2017년) * 《[[방구석 1열]]》 (JTBC, 2018년) * 《[[가시나들]]》 (MBC, 2019년) * 《[[밥블레스유 2]]》 (Olive, 2020년) - 2회 * 《[[아는 형님]]》 (JTBC, 2021년 1월 9일) - 263회 === CF === * 민주노동당 총선 (2004년) * [[LG유플러스]] (2004년) * [[르노코리아]] [[SM5]] (2004년) * [[남양유업]] 드빈치 (2009년) * 카카오택시 (2015년) * [[KB국민카드]] 다담카드 (2016년) * 시크릿에이지 (2019년) * 오퓨리 (2020년) * 쿠스 (2020년) * [[KB국민카드]] KB Pay (2021년) * 영화진흥위원회 무비히어로 캠페인 (2021년) * LG전자 휘센 시스템에어컨 (2022년) == 수상 및 후보 == {| class="wikitable sortable" |- !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rowspan=10|[[2002년]] || 제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상|신인배우상]] || rowspan=9|[[오아시스 (2002년 영화)|오아시스]] ||{{won}} |- | 제23회 [[청룡영화상]] || 신인여우상 || {{won}} |- | 제10회 [[춘사대상영화제]] || 여우주연상 ||{{won}} |- |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won}} |- | rowspan=2| 제1회 [[대한민국영화대상]] || 신인여우상 || {{won}} |- | 여우주연상 || {{won}} |- | 제5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 올해의 여자신인연기자상 || {{won}} |- | 제3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 연기상 || {{won}} |- | [[씨네21 영화상]] || 올해의 여자배우 || {{won}} |- | [[문화체육관광부]] || 옥관문화훈장 (4등급) || {{N/A}} || {{won}} |- | rowspan=9|[[2003년]] || 제29회 시애틀 국제영화제 || 여우주연상 || [[오아시스 (2002년 영화)|오아시스]] || {{won}} |- | 제13회 스톡홀름 국제영화제 || 여우주연상 || rowspan=11| [[바람난 가족]] || {{won}} |- |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won}} |- | 제11회 [[춘사대상영화제]] || 여우주연상 ||{{won}} |- |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 여우주연상 ||{{won}} |- | 제4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 연기상 ||{{won}} |- | 제6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 올해의 여자연기자상 ||{{won}} |- | 제24회 [[청룡영화상]] || 여우주연상 ||{{nom}} |- | [[씨네21 영화상]] || 올해의 여자배우 || {{won}} |- | rowspan=3|[[2004년]] || 제41회 [[대종상]] || 여우주연상 ||{{won}} |- | 제1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 최고의 여자배우상 ||{{won}} |- | 제1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 최고의 여배우상 || {{won}} |- | 2006 || 제47회 데살로니키 국제영화제 || 여우주연상 || [[가족의 탄생 (영화)|가족의 탄생]] || {{won}} |- | rowspan=3|2008 || [[MBC 연기대상]] || 여자 우수상 || [[내 인생의 황금기]] || {{won}} |- | 제29회 [[청룡영화상]] || 여우주연상 || rowspan=2|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nom}} |- |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 여우주연상 || {{nom}} |- | rowspan=2| 2010 || 제19회 [[부일영화상]] || 여우주연상 || rowspan=2| [[하하하]] || {{won}} |- |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 여우주연상 || {{nom}} |- | 2012 || 제21회 [[부일영화상]] || 여우조연상 || [[다른 나라에서]] || {{nom}} |- | 2015 || 제2회 [[들꽃영화상]] || 여우주연상 || [[자유의 언덕]] || {{nom}} |- | 2016 || 제18회 정동진독립영화제 || 땡그랑동전상 || 최고의 감독 || {{won}} |- | rowspan=6|2017 || 제11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 || 여우조연상<ref>특별출연임에도 불구하고,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ref> || [[아가씨 (영화)|아가씨]]|| {{won}} |- | 제54회 [[대종상]] || 여우조연상 || [[특별시민]] || {{nom}} |- | 제1회 [[더 서울어워즈]]|| 영화부문 여우주연상 || rowspan=8|[[여배우는 오늘도]]|| {{nom}} |- | 제5회 마리끌레르 아시아스타어워즈 || 스페셜 어워드 || {{won}} |- | rowspan=2| 제38회 [[청룡영화상]] || 신인감독상 || {{nom}} |- | 여우주연상 || {{nom}} |- | rowspan=8|2018 || 제5회 [[들꽃영화상]] || 극영화부문 감독상 || {{nom}} |- | 제54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신인감독상 || {{nom}} |- | 제23회 [[춘사영화제]] || 여우주연상 || {{nom}} |- | 제27회 [[부일영화상]] || 신인감독상 || {{nom}} |- | 제2회 [[더 서울어워즈]] || 드라마부문 여우조연상 ||[[라이프 (2018년 드라마)|라이프]]|| {{won}} |- | 제38회 하와이국제영화제(BIFF) || 할레쿨라니 커리어 어치브먼트상 ||rowspan=3|[[여배우는 오늘도]]|| {{won}} |- | 제26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won}} |- | 제38회 [[황금촬영상]] || 촬영감독이 선정한 여자인기상 ||{{won}} |- |rowspan=2| 2019 || 제24회 [[춘사영화제]] || 여우주연상 ||rowspan=2|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nom}} |- |제20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 특별상 || {{won}} |- |rowspan=6| 2021 || 제57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rowspan=5| [[세자매 (영화)|세자매]]|| {{nom}} |- | 제30회 [[부일영화상]] || 여우주연상 || {{nom}} |- | 제26회 [[춘사영화제]] || 여우주연상 || {{nom}} |- | 제4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won}} |- || 제42회 [[청룡영화상]] || 여우주연상 || {{won}} |- | [[MBC 연기대상]] || 미니시리즈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미치지 않고서야]] || {{nom}} |}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페이스북}} * {{KMDb 사람}} * {{IMDb 이름}} * {{한시네마 인물}} {{둘러보기 상자 묶음 |title = 문소리의 수상 목록 |list = {{부일영화상 여우주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 {{춘사영화상 여우주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대종상 여우주연}} {{청룡영화상 여우주연}} {{청룡영화상 신인여우}}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배우}}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신인연기}}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연기}} {{씨네21 올해의 여자 배우}} {{MBC 연기대상 여자 우수연기상}} }} {{전거 통제}} [[분류:1974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서울삼전초등학교 동문]] [[분류:석촌중학교 동문]] [[분류:잠실여자고등학교 동문]] [[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 [[분류:중앙대학교 동문]] [[분류:부산광역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분류:여자 영화 감독]] [[분류: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상 수상자]] [[분류: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 [[분류: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자]] [[분류:부일영화상 수상자]] [[분류:춘사영화상 수상자]] [[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 [[분류: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수상자]] [[분류:디렉터스 컷 시상식 수상자]] [[분류: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수상자]] [[분류:옥관문화훈장 수훈자]]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MBC 연기대상 여자 우수연기상 수상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0-11-18}} {{다른 뜻}} [[파일:Radiocontrolledclock.jpg|섬네일|디지털 시계]] '''디지털'''({{lang|en|digital}}, {{문화어|수자형, 수자식}}<ref>표준어로 숫자식(數字式)을 뜻함.</ref>)은 [[아날로그]]를 연속적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용어는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digit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를 세는 데 쓰인다. '''디지털''' [[컴퓨터]], [[노트북]]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뿐만이 아니라 음성 자료도, 영상 자료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악이나 화상과 같은 아날로그 자료 샘플을 일정한 주기로 채집하여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을 [[표본화|샘플링]]이라 한다. 이 때, 초당 샘플링 회수는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2배 더 높아야 [[앨리어싱]] 현상(계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필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기계로는 [[모뎀]]이 있다. 90년대 중반 PC가 처음 대중화되었으며 이를 시점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1997년 삐삐를 제치고 등장한 시티폰으로 이동통신 업계도 급변했으며 1999년 [[국민PC]]가 첫 도입되어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리게 된다. 200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DVD와 디지털 카메라도 이 시기에 등장했지만, 90년대에는 크게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인 [[2011년]] 초봄까지 디지털 시장은 전자시장 별로 세분화되어 나뉜 구조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디지털 시장에는 [[MP3]],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PMP]], [[PDA]], [[전자사전]], [[디지털 카메라]] 등이 각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며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시티폰은 피쳐폰으로 대체되었고 [[피쳐폰]]은 세분화되어 있는 디지털 시장의 기능을 흡수하려 여러 시도를 했으나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날로그 매체는 200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 디지털 기술로 대체되어 조금씩 사양길을 걸었지만 완전히 몰락하진 않고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까지는 디지털 기술과 공존했다. 2007년, Apple의 [[아이폰]] 출시를 시작으로 2010년 갤럭시 S 시리즈 공개, [[2011년]] 여름을 기점으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디지털 시장은 엄청난 격변을 맞는다. 수많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던 디지털 전자시장의 기능이 작은 모바일 기기에 하나에 전부 들어간다는 스마트폰의 특징은 디지털 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졌다. 결국 기존에 존재하던 전자시장은 스마트폰에 흡수되어 완전 소멸되었으며 기존 PC 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 아날로그 매체 역시 스마트폰의 대중화 이후 인류의 삶에서 자동 소멸되었다. 기존의 디지털 시장마저도 스마트폰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밀리고 있던 아날로그가 설 자리가 없었고, 기술의 발달로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비디오테이프 등의 아날로그 방식을 더 이상 대중들이 이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디지털 매체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은 지 수 년이 넘은 [[2020년대]]에도 다양한 미래 디지털 기술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스마트폰 역시 초기 버전과는 차이점이 분명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 각주 == <references /> == 같이 보기 == * [[디지털 신호]] * [[아날로그]] * [[이진법]] * [[디지털 제어]] * [[디지털 패러다임]] {{전거 통제}} {{토막글|컴퓨터 과학}} [[분류:디지털 미디어]] [[분류:디지털 기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자 정보 |이름 = 헤르만 민코프스키 |원어이름 = {{lang|de|Hermann Minkowski}} |그림 = Hermann Minkowski Portrait.jpg |그림 크기 = 200px |서명 = Hermann Minkowski signature.svg |태어난 날 = {{출생일|1864|6|22}} |태어난 곳 = [[러시아 제국]] (오늘날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죽은 날 = {{사망일과 나이|1909|1|12|1864|6|22}} |죽은 곳 = [[독일 제국]] [[괴팅겐]] |시민권 = [[러시아 제국]]<ref name="Marshall Cavendish">{{서적 인용 |title=Encyclopedia of Earth and Physical Sciences |url=https://archive.org/details/encyclopediaofea02mars |url-access=registration |year=1998 |publisher=Marshall Cavendish |location=New York |isbn=9780761405511 |page=1203}}</ref>, [[독일]] |국적 = [[독일]] |분야 = [[수학]] |소속 = {{Plainlist| * [[괴팅겐 대학교]] *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 |출신 대학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지도교수 =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지도학생 = [[콘스탄디노스 카라테오도리]] |주요 업적 = {{Plainlist| * [[이차 형식 종수]] * [[민코프스키 부등식]] * [[하세-민코프스키 정리]] * [[민코프스키 정리]] * [[민코프스키 물음표 함수]] * [[민코프스키 공간]] }} }} '''헤르만 민코프스키'''({{IPAc-en|m|ɪ|ŋ|ˈ|k|ɔː|f|s|k|i|,_|-|ˈ|k|ɒ|f|-}};<ref>[http://www.dictionary.com/browse/minkowski"Minkowski"]. ''Random House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ref> {{IPA-de|mɪŋˈkɔfski|lang}}, {{llang|de|Hermann Minkowski}}, [[1864년]] [[6월 22일]] ~ [[1909년]] [[1월 12일]])는 [[러시아 제국]] 태생 독일 [[수학자]]이다. [[수론]]의 문제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푸는 기하학적 수론, 수리물리학, [[상대성 이론]] 등에 업적을 남겼다. == 생애 ==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본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취리히 시절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가르쳤다. 민코프스키는 <math>n</math>개의 변수를 갖는 2차 형식(quadratic forms)을 연구하는 과정에 <math>n</math>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과 관련된 것을 알아차렸다. 1896년 출판한 저서 《수의 기하학》({{lang|de|''Geometrie der Zahlen''}})에서 [[수론]]의 문제들을 기하학적인 방법과 연관시켰다. 1902년 당시 수학의 중심지였던 [[괴팅겐 대학교]]에 오랜 친구였던 [[다비트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수학 교수직을 얻어 연구하였다. 민코프스키는 또한 최초로 시공간을 통일된 기하학으로 다룬 사람이다. 1907년에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불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이용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루며, 그를 통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대칭]]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방법은 나아가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만들어지는데 핵심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민코프스키 공간을 일반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연구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민코프스키는 제80회 독일 자연과학자 모임에서 〈공간과 시간〉({{lang|de|''Raum und Zeit''}})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인용문2|Die Anschauungen über Raum und Zeit, die ich Ihnen entwickeln möchte, sind auf experimentell-physikalischem Boden erwachsen. Darin liegt ihre Stärke. Ihre Tendenz ist eine radikale. Von Stund’ an sollen Raum für sich und Zeit für sich völlig zu Schatten herabsinken und nur noch eine Art Union der beiden soll Selbständigkeit bewahren.<ref>[[:wikisource:de:Raum und Zeit (Minkowski)]]</ref>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하려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은 실험 물리학에서 유래합니다. 이 관점의 강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관점의 성격은 과격합니다. 앞으로 공간 자체 및 시간 자체는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이고, 오직 그 둘의 합체만이 독립적인 실체로 남을 것입니다.}} 1909년 [[괴팅겐]]에서 사망하였다. == 저서 == ;Relativity * {{저널 인용 |doi=10.1002/andp.19153521505 |author=Minkowski, Hermann |orig-year=1907|year=1915 |title=Das Relativitätsprinzip |journal=Annalen der Physik |volume=352 |issue=15 |pages=927–938|bibcode = 1915AnP...352..927M |url=https://zenodo.org/record/1447307 }} * {{저널 인용 |author=Minkowski, Hermann |year=1908 |title=Die Grundgleichungen für die elektromagnetischen Vorgänge in bewegten Körpern |journal=Nachrichten der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pages=53–111|title-link=s:de:Die Grundgleichungen für die elektromagnetischen Vorgänge in bewegten Körpern }} ** English translation: "[[s:Translation:The Fundamental Equations for Electromagnetic Processes in Moving Bodies|The Fundamental Equations for Electromagnetic Processes in Moving Bodies]]". In: The Principle of Relativity (1920), Calcutta: University Press, 1–69. * {{저널 인용 |author=Minkowski, Hermann |year=1909 |title=Raum und Zeit |journal=Jahresbericht der Deutschen Mathematiker-Vereinigung |pages=75–88|title-link=s:de:Raum und Zeit (Minkowski) |volume=18 |bibcode=1909JDMaV..18...75M }} ** Various English translations on Wikisource: "[[s:Space and Time|Space and Time]]". * Blumenthal O. (ed): ''Das Relativitätsprinzip'', Leipzig 1913, 1923 (Teubner), Engl tr (W. Perrett & G. B. Jeffrey) ''The Principle of Relativity'' London 1923 (Methuen); reprinted New York 1952 (Dover) entitled [[헨드릭 로런츠|H. A. Lorentz]], Albert Einstein, Hermann Minkowski, and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The Principle of Relativity: A Collection of Original Memoirs''. * Space and Time – Minkowski's Papers on Relativity, Minkowski Institute Press, 2012 {{ISBN|978-0-9879871-3-6}} (free ebook). ;Diophantine approximations * {{서적 인용 | author=Minkowski, Hermann | author-link=헤르만 민코프스키 | title=Diophantische Approximationen: Eine Einführung in die Zahlentheorie | location=Leipzig-Berlin | publisher=R. G. Teubner | year=1907 | url=http://catalog.hathitrust.org/Record/000424095 | access-date=2016-02-28}}<ref>{{저널 인용|author=Dickson, L. E.|author-link=레너드 유진 딕슨|title=Review: ''Diophantische Approximationen. Eine Einführung in die Zahlentheorie'' von Hermann Minkowski|journal=Bull. Amer. Math. Soc.|year=1909|volume=15|issue=5|pages=251–252|url=https://www.ams.org/journals/bull/1909-15-05/S0002-9904-1909-01753-7/S0002-9904-1909-01753-7.pdf|doi=10.1090/s0002-9904-1909-01753-7|doi-access=free}}</ref> ;Mathematical (posthumous) * {{저널 인용 | last1=Minkowski | first1=Hermann | author1-link=헤르만 민코프스키 | title=Geometrie der Zahlen | url=https://archive.org/details/geometriederzahl00minkrich | publisher=B. G. Teubner Verlag | location=Leipzig-Berlin | mr=0249269 | year=1910 | access-date=2016-02-28 }}<ref>{{저널 인용|author=Dickson, L. E.|title=Review: ''Geometrie der Zahlen'' von Hermann Minkowski|journal=Bull. Amer. Math. Soc.|year=1914|volume=21|issue=3|pages=131–132|doi=10.1090/s0002-9904-1914-02597-2|doi-access=free}}</ref> * {{서적 인용 | author=Minkowski, Hermann | author-link=헤르만 민코프스키 | title = Gesammelte Abhandlungen 2 vols| location = Leipzig-Berlin | publisher = R. G. Teubner | year = 1911 | url=http://catalog.hathitrust.org/Record/000169187 | access-date=2016-02-28}}<ref>{{저널 인용|author=Wilson, E. B.|author-link=Edwin Bidwell Wilson|title=Review: ''Gesammelte Abhandlungen von Hermann Minkowski''|journal=Bull. Amer. Math. Soc.|year=1915|volume=21|issue=8|pages=409–412|doi=10.1090/s0002-9904-1915-02658-3|doi-access=free}}</ref> Reprinted in one volume New York, Chelsea 1967. == 같이 보기 == * [[민코프스키 정리]] * [[하세-민코프스키 정리]] * [[민코프스키 물음표 함수]] * [[민코프스키 거리]] * [[민코프스키 공간]] * [[민코프스키 평면]] * [[민코프스키 합]] * [[막스 플랑크]] * [[아르놀트 조머펠트]] * [[아인슈타인]]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 {{위키공용분류-줄}} * {{MacTutor|id=Minkowski|date=2005-08}} * {{수학계보|id=29675}} {{전거 통제}} {{기본정렬:민코프스키, 헤르만}} [[분류:헤르만 민코프스키| ]] [[분류:1864년 출생]] [[분류:1909년 사망]]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유대계 독일인]] [[분류: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기하학자]] [[분류:리투아니아 유대인]] [[분류:상대성 이론가]] [[분류:리투아니아계 독일인]] [[분류:카우나스 출신]] [[분류:본 대학교 교수]] [[분류:괴팅겐 대학교 교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각주 부족|날짜=2023-01-27}} {{다른 뜻}} {{행성 정보/화성}} '''화성'''(火星, {{lang|en|Mars}})은 [[태양계]]의 4번째 [[행성]]이며, 4개의 [[지구형 행성]] 중 하나이다. 철의 산화로 표면이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뜻하는 화(火)를 써서 화성 또는 '''형혹성'''(熒惑星)이라 부르고, 서양권에서는 [[로마 신화]] 중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따서 Mars라 부른다. 오늘날 영어에서 [[3월]]을 뜻하는 '''March'''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지구와의 평균 거리는 7,800만 [[km]]이다. 화성의 지름은 지구의 1/2 정도이다. [[자전 주기]]는 '''24시간 37분 22초'''로 지구보다 더 길다. [[매리너 4호]]가 [[1965년]]에 화성을 처음으로 근접 비행을 하기 전까지 과학계 안팎의 사람들은 화성에 대량의 [[물]]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의 근거는 화성의 극지방에서 밝고 어두운 무늬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은 농업을 위한 관개수로가 화성에 있으리라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 [[20세기]] 초·중반의 공상과학 작가들의 상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1950년대]] 이후의 탐사선에 의한 관측으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물]]과 [[생명체]]의 발견에 대한 기대로 많은 [[탐사선]]들에 [[미생물]]을 찾기 위한 센서들이 탑재되어 화성에 보내졌다. 화성에서는 다량의 얼음이 발견되었고,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성 표면에서의 액체상태의 물은 낮은 대기압으로 인하여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화성의 극관은 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극관에 존재하는 물은 화성의 표면을 11m의 깊이로 뒤덮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 존재한다. 2016년 나사는 화성 표면 안에 얼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화성의 자전 주기와 계절의 변화 주기는 지구와 비슷하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화산이 있으며, 역시 태양계에서 가장 큰 계곡인 매리너스 협곡과 극관을 가지고 있다. 화성은 밤하늘에서 붉은 빛을 띄며 맨눈으로도 쉽게 관측이 된다. [[겉보기 등급]]은 1.6 ~ 3.0등급이며 [[태양]], [[달]], [[금성]], [[목성]] 다음으로 하늘에서 가장 밝은 태양계의 [[천체]]이다. == 물리적인 특성 == [[파일:Mars, Earth size comparison.jpg|섬네일|250px|왼쪽|[[지구]]와 화성의 크기 비교]] 화성은 붉게 타는 듯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질량은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은 두 개의 작은 [[자연 위성|위성]]인 [[포보스 (위성)|포보스]]와 [[데이모스 (위성)|데이모스]]를 가지고 있다. 화성의 대기권은 매우 얇으며, 표면의 기압은 7.5[[밀리바]]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 대기의 95%는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으며, 이 밖에 3%의 [[질소]], 1.6%의 [[아르곤]]과 약간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 지질 === 궤도선의 관측과 화성 기원의 [[운석]]에 대한 분석 결과에 의하면, 화성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화성 표면의 일부는 지구의 [[안산암]]과 같이 좀 더 [[이산화규소]]가 풍부하다는 증거가 있으나 이러한 관측은 규산염과 같은 유리의 존재를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표면의 대부분은 [[산화철]]의 먼지로 덮여있다. 화성의 표면에 일시적이나마 [[물]]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화성 표면에서 발견된 [[암염]]이나 [[침철석]]과 같이 대체로 물이 존재할 때 생성되는 [[광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성 자체의 [[자기장]]은 없지만, 과거 행성 표면의 일부는 자화된 적이 있음이 관측을 통해 밝혀졌다. 화성에서 발견된 자화의 흔적([[고지자기]])은 지구의 [[해양지각]]에서 발견되는 교대하는 띠 모양의 고지자기와 비교되어 왔다. [[1999년]]에 발표되고 [[2005년]]에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로부터의 관측 결과의 도움으로 재검토된 이론에 따르면, 이들 지자기의 띠들은 과거에 있었던 화성의 판구조 활동의 증거일 수 있다. 극 이동(polar wandering)으로도 화성에서 발견된 고지자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화성의 내부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내부 모델은 반경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인 코어를 의미하며, 주로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화 철(II) 황화핵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풍부하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행성에서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한 규산염 맨틀에 둘러싸여 있지만, 휴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노아키안 시대'''는 [[노아키스 테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성의 형성으로부터 38억~35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노아키안 시대의 표면은 많은 거대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 [[타르시스 벌지]]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후기에는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의한 홍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헤스퍼리안 시대'''는 [[헤스퍼리안 평원]]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35억 년 전부터 18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헤스퍼리안 시대의 화성에서는 넓은 [[용암대지]]가 형성되었다. '''아마조니안 시대'''는 [[아마조니스 평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대이다. 아마조니안 지역은 [[충돌구|크레이터]]가 거의 없으나 상당한 변화가 있는 지형이다. [[올림푸스 산 (화성)|올림푸스 화산]]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용암류가 형성되었다. 마스 익스프레스 오비터의 OMEGA 가시광-적외선 광물학 매핑 스팩트로메터 자료를 기초로 또 다른 시대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 지형 === 화성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하여서는 [[자오선]]과 0점 고도가 정해져야 한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해수면'이 없어서, 0점 고도면이나 [[평균 중력 표면]]이 임의의 지점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적도와는 달리 경도의 기준점은 임의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통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임의적으로 [[사이너스 메리디아니]](Sinus Meridiani, 적도만('Equatorial Gulf')) 안의 분화구가 0점 자오선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화성 지형의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성은 극 지방이 [[얼음]]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는 [[얼음]] 지대로 덮여 있다. 또한 화성에는 [[발레스 매리너리스]](Valles Marineris) 또는 ''화성의 흉터''라고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협곡 지대]가 있다. 이 협곡 지대는 4000km의 길이에 깊이는 7km에 이른다.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핵의 반지름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이며,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하 철 핵은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많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규산염 맨틀로 둘러싸여 있어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했지만, 휴면상태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화성 지각의 평균 두께는 약 50km(31mi)이며, 최대 두께는 125km(78mi)이다. 참고로 지구의 지각은 평균 40km(25mi)이다. 화성 [[북반구]]와 [[남반구]] 지형의 비대칭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북쪽 부분은 용암층이 흘러내림으로 인해 평평하고, 남쪽은 고지대에 오래전의 충격으로 인해 구멍이 파이고 분화구가 생겨나 있다. 지구에서 본 화성의 표면은 확실히 두 부분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지와 산화철이 섞인 [[모래]]로 뒤덮인 좀 더 창백한 부분은 한때 '아라비아의 땅'이라 불리며 화성의 대륙으로 여겨졌고, 어두운 부분은 바다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가장 어두운 부분은 [[시르티스 메이저]](Syrtis Major)이다.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헬라스 분지]](Hellas impact basin)인데, 가벼운 붉은 모래로 덮여 있다. 화성 표면 지역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국제 천문 연맹]]의 '행성계 명명법 워킹 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 대기 === {{본문|화성의 대기}} [[파일:MarsSunset.jpg|섬네일|오른쪽|280px|화성의 석양. '스피릿'호 촬영]] 화성의 대기압은 0.6에서 1.0[[파스칼 (단위)|kPa]]로, 지구의 대기 밀도와 비교하면 1/100 정도로 매우 낮다. 대기가 적으므로 기압이 매우 낮고 물이 있더라도 기압 때문에 빨리 증발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화성은 물이 풍부하고 대기도 지금보다 컸으리라고 추측한다.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얼어 거대한 [[극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양극에서 교대로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눈층을 형성하고 봄이 되면 증발한다. === 기후 === {{본문|화성의 기후}} === 자기권 === 아주 오래전 화성은 [[태양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자기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40억 년 전 화성의 [[다이나모]]가 멈추고 난 뒤에는 [[투자율]]이 높은 광물에 [[잔류자기]]가 남아있는 정도밖에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광물]]은 [[풍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남반구의 고지의 일부에서만 [[고지자기]]를 관측할 수 있다. 태양풍은 화성의 [[전리층]]에 직접 닿기 때문에 화성의 대기는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고 여겨지나 그 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와 마스 익스프레스는 화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온화된 대기의 입자를 탐지하였다. == 공전과 자전 == 화성의 [[궤도 이심률]]은 약 7%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양계에서 이보다 더 이심률이 큰 궤도를 가지는 행성은 [[수성]]밖에 없다.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2억 2천만 km(1.5 [[천문단위]])이며, 공전 주기는 686.971일이다. 화성의 [[태양일]](솔; sol)은 지구보다 약간 길어서 24시간 37분 22초 정도이다. 화성의 자전축은 25.19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공전 각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계절의 길이는 지구에 비해 약 2배정도 된다. {{-}} == 위성 == {{본문|화성의 위성}} [[포보스 (위성)|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 (위성)|데이모스]](Deimos)가 화성의 위성이다. 이들은 늘 달 쪽으로 같은 면을 향하고 있다. 포보스의 화성 주위 궤도가 화성 자체가 자전하는 속도보다 빠르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포보스가 화성 표면에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에 데이모스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두 위성은 모두 [[1877년]] [[미국]]인 [[천문학자]] [[아사프 홀]](Asaph Hall)이 발견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의 두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class="wikitable" |+ 화성의 [[위성]] ! 이름 !! 직경 (km) !! 질량 (kg) !! 평균 궤도 반지름 (km) !! 공전 주기 |- | [[포보스 (위성)|포보스]] | 22.2 (27 × 21.6 × 18.8)</td> | 1.08×10<sup>16</sup> | 9378 | 7.66 시간 |- | [[데이모스 (위성)|데이모스]] | 12.6 (10 × 12 × 16) | 2×10<sup>15</sup> | 23,400 | 30.35 시간 |} == 생명체 == 액체상태의 물의 존재를 가지고 생명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러한 생명가능성을 논하는 곳은 생명가능지대의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태양의 생명가능지대는 금성을 넘은 곳부터 시작하여 화성 부근까지 존재한다. 화성은 근일점에 도착하였을때, 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화성의 옅은 대기가 액체상태의 물이 화성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화성의 과거 물의 흐름은 생명거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는 화성에 존재하는 물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산도가 높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성에는 [[자기권]]이 없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풍을 막을 수 없다. 또한 화성의 옅은 대기로 인한 낮은 대기압으로 화성의 표면에 액체상태의 물의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다. 지질학적으로 화성의 화산 활동은 종결되어 화성의 내부 화학물질이 화성의 표면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화성의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거로부터 미루어 볼 때 화성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실제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이킹 탐사선은 [[1970년대|70년대]] 중반에 화성 표면에서 미생물을 탐지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여,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존슨 우주센터 연구소는 화성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 AL<ref>H84001에서 유기 화합물을 발견했다. 이 화합물들은 처음에 생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후~ 운석 충돌이 일어나면서 우주로 튕겨 나갔다가, 약 1500만 년 동안의 우주 유영을 한 후 지구에 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메테인]]과 [[폼알데하이드]]는 화성 대기에서</ref>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소량의 이들 분자는 화성에 생물이 사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들 원소는 화산이나 [[사문함화작용]] 같은 지질학적 작용에 의해서도 공급될 수 있다. * 화성은 생물이 살기에 부적합한 특성 역시 가지고 있다. 화성의 위치는 [[태양]]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거주 가능 지대]]보다 0.5 [[천문단위]]정도 멀리 떨어져 있고<ref>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거주 가능 지대 안에 들어있다. 뉴턴 2010년 8월 호.</ref> 물은 얼어 있다. 물론 과거에 물이 흘렀던 적이 있기는 하다. 화성에는 또한 [[자기권]]이 없으며 대기가 희박하며, 지각 열류량은 매우 적으며, 외부의 [[운석]] 또는 [[소행성]]들과의 충돌~ 또는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낮은 대기압 때문에 얼음은 액체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화해버리며, 지질학적으로 사실상 완전히 죽은 행성으로 본다. {[[화산]] 활동이 없기 때문에 표면과 행성 내부 사이의 화학 물질과 [[광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 다른한편으론,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대기에서 메탄의 검출을 든다. 그러나, 이는 지질활동이 멈춘 화성의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안면석이나 화성 피라미드와 같은 음모론적인 가설도 있으나 과학적인 의미로 주목받지는 못하다. ==화성 탐사== {{본문|화성 탐사}} === 무인 탐사선 === [[파일:Mars Viking 11h016.png|섬네일|250px|바이킹 1호 착륙선이 전송한 사진<br />1978년 2월 11일 Sol 556에서 촬영]] 지금까지 인류는 다수의 로봇 탐사선을 화성에 보냈고, 그중 몇몇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탐사의 실패율은 매우 높았다. 실패 사례 중 몇은 명백한 기술적 결함에 따른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연구자들은 확실한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는 지구-화성 "[[버뮤다 삼각지대]]" 혹은 화성탐사선을 먹고 사는 은하귀신(Ghoul)라는 농담을 낳았다. 화성 로봇 탐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사 시간대가 약 2년 남짓(화성의 공전 주기)의 기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1960년]] 소련은 두 기의 탐사선을 화성궤도를 지나쳐 돌아오는 계획으로 발사하였으나, 지구궤도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한다. [[1962년]] 소련은 세 기를 더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두 기는 지구 궤도에 머물렀고, 나머지 하나는 화성을 돌아오는 동안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1964년]]에 또 한번의 시도가 실패한다. [[1962년]]에서 [[1973년]] 사이에, [[NASA]](나사)의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는 내태양계(inner solar system)를 탐험할 10개의 [[매리너 계획|매리너 우주선]]을 설계·제작하였다. 이 우주선은 [[금성]], 화성, [[수성]]을 최초로 탐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매리너 우주선은 비교적 작은 로봇 탐사선으로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각 우주선의 무게는 500 [[kg]]를 넘지 않았다. [[매리너 3호]]와 [[매리너 4호|4호]]는 동일한 기체로, 최초로 화성을 지나치며 관찰하도록 설계되었다. 매리너 3호는 [[1964년]] [[11월 5일]] 발사되었으나, 우주선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이 적당히 열리지 않았고, 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3주 후 [[1964년]] [[11월 28일]] 매리너 4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8개월의 항해를 시작한다. 매리너 4호는 [[1965년]] [[6월 14일]] 화성을 지나며, 다른 행성의 근접 사진을 최초로 찍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기록된 그 사진들은 달 모양의 분화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분화구 들 중 몇몇은 서리가 덮여 추운 화성의 밤을 보여주었다. [[NASA]]는 계속해서 매리너 계획을 수행했다. 그들은 다음 발사 시간대에 근접 비행 시험을 또다시 수행하였다. 이 비행선들은 [[1969년]]에 화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매리너 6호]]와 [[매리너 7호|7호]]를 참조하라. 다음 발사 때 매리너 계획은 두 대의 비행선 중 한 대를 잃는 사고를 겪었다. 살아남은 [[매리너 9호]]는 성공적으로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매리너 9호가 화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과 두 대의 소련 인공위성은 행성 전영역에 걸쳐 먼지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매리너 9호는 포보스의 사진을 찍었다. 폭풍이 화성의 표면 사진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가라앉았을 때, 전송된 사진은 이전 임무의 결과로 온 사진보다 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화성에 한때 액체 형태의 물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1976년]]에 두 대의 [[바이킹 계획|바이킹 호]]가 화성 궤도에 들어가 각각 착륙 모듈을 내려 화성 표면에 내려 앉았다. 이 임무를 통해 인류는 첫 번째 컬러 사진과 더욱 확장된 과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화성 탐사 계획에서 발사한 우주선들은 바이킹보다 몇 년 일찍 수많은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리너 계획이 수행했던 것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스 패스파인더]]는 [[1997년]] [[7월 4일]]에 화성에 착륙하여, 소저너라는 매우 작은 원격 조정체를 움직여 착륙 지점 주위의 몇 미터를 여행하고, 화성의 환경 조건을 탐색하고 표면의 돌들을 수집해왔다. 다음 탐사는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임무는 20여 년간의 화성 탐사역사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인 것이었고, [[1996년]] [[11월 7일]]에 발사되어 [[1997년]] [[9월 12일]]에 화성 궤도에 도달하였다. 1년 반 정도가 흐른 후, 회전 궤도가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주선은 [[1999년]] 3월부터 기초적인 매핑 임무에 돌입했다. 우주선은 화성을 화성력으로 1년, 지구력으로는 거의 2년간 저고도에서 관찰했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호는 최근인 [[2001년]] [[1월 31일]] 그 기초적인 임무를 완료하고 현재는 2단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탐사는 화성 표면, 대기권, 그리고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탐사 계획에서 거둬들인 모든 결과물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져왔다. 이 가치있는 데이터들은 [http://pds-geosciences.wustl.edu/missions/mgs/mola.html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MOLA]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7월 31일 [[미국 국립항공우주국]]은 화성탐사선 [[피닉스 (우주선)|피닉스]]가 화성에 물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다. 피닉스는 2008년 11월 10일 임무가 종료되었다. 2021년 2월 [[퍼서비어런스 (탐사차)|퍼서비어런스]]<small>(Perseverance)</small> 화성 탐사차가 화성착륙에 성공하였다. 퍼서비어런스는 화성 [[탐사차]]로 2020년 7월 30일 지구를 떠나 2021년 2월 18일 화성에 착륙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mars.jpl.nasa.gov/mars2020/mission/overview/|제목=Mars 2020 Mission Overview|확인날짜=2018년 5월 14일}}</ref> 이로써 인간이 어떤 조건으로 착륙해야 되는지 등을 탐색하는등 유인 탐사선 계획등에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nasaspaceflight.com/2014/09/curiosity-edl-provide-2020-rover-super-landing-skills/|제목=Curiosity EDL data to provide 2020 Mars Rover with super landing skills|날짜=2014년 9월 2일|확인날짜=2018년 5월 18일}}</ref> == 관측의 역사 == [[기원전 1600년]]경에 화성에 대한 관측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화성은 [[불]]과 같이 붉게 빛나고 다른 천체와 달리 [[하늘]]에서 이상하게 움직인다고 알려졌다. * [[바빌로니아]]인은 이미 [[기원전 400년]]경에 천문현상을 연구했었으며 일식, 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예측하기 위해 고도로 발달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달력과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들을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현상에 대해서 깊게 분석한다거나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빌로니아인들은 화성을 [[네르갈]](Nergal, ‘위대한 영웅’ 또는 ‘전쟁의 왕.’ 원뜻은 ‘커다란 집의 주인’)이라 불렀다. * 이집트인은 별이 “고정된” 듯이 보이며, 태양이 고정된 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하늘의 5개의 빛나는 천체가 고정된 별 사이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이집트인은 화성을 Har Decher(붉은 것) 혹은 '죽음의 별'이라고 불렀다. * 그리스인은 화성을 전쟁의 신의 이름을 따서 아레스(Ares)라고 불렀다. 로마에서도 이 이름을 그대로 번역하여 화성을 마르스(Mars)라고 불렀고, 이는 지금까지 화성의 영어 이름으로 존재하게 된다. 화성의 기호는 마르스의 방패와 칼로 여겨진다. * [[조반니 스키아파렐리]](Giovanni Virginio Schiaparelli, 1835년~1910년)는 [[1877년]], 화성에서 "canali"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운하들"을 뜻하며 영어로는 "canals, waterways" 가 된다. 당시 수에즈 운하도 건설되던 차 화성 탐사 열풍이 시작되었다. ※ 동양의 고대기록에는 낮에 화성을 본 것이 있으나, 검증결과 금성의 착오였으며, 화성을 낮에 맨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화성을 소재로 한 작품 == === 영화 === * {{국기그림|미국}} [[마션 (영화)|마션]] (2015) * {{국기그림|미국}} [[존 카터(바숨전쟁의 서막)]](2012) * {{국기그림|미국}} [[미션 투 마스]](2000) * {{국기그림|미국}} [[레드 플레닛]](2000) * {{국기그림|미국}} [[화성 침공]](1996) * {{국기그림|미국}} [[화성의 유령들]](2001) == 참고 자료 == * "초대규모 우주 프로젝트의 [[정치경제학]]": [https://web.archive.org/web/20040606150615/http://www.transhumanist.com/volume4/space.html] <!-- 생성되지 않은 참고자료를 주석 처리합니다. * [[화성관련소설|소설 속의 화성]] * [[Darian calendar]] -->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710260}}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documentary/962 네이버 캐스트 - 화성 탐사로봇 생존기] * {{언어링크|en}} [http://news.bbc.co.uk/hi/english/sci/tech/newsid_2009000/2009318.stm 화성에 저장된 얼음에 대한 이야기, BBC] * {{언어링크|en}} [http://news.bbc.co.uk/1/hi/sci/tech/3426539.stm BBC 뉴스 업데이트: 화성 탐사로봇이 지표면의 물을 발견] * [https://web.archive.org/web/20050109115727/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199707/199707070040.html 화성에서 물발견, 조선일보] * [https://web.archive.org/web/20050205173643/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199707/199707050397.html 실제비행거리 4억9천만km…궤도수정 5번, 조선일보] * [https://www.google.com/mars/ 구글 마스 – 화성 표면을 대화식 화면을 통하여 제공] * [http://www.worldwindcentral.com/wiki/Mars 3D maps of Mars in NASA World Wind] * [http://mars.skymania.com/ Guide to Mars] {{웨이백|url=http://mars.skymania.com/ |date=20080724030705 }} – information about Mars and how to observe it. * [http://www.nineplanets.org/mars.html Nine Planets Mars page] * [http://history.nasa.gov/SP-4212/on-mars.html On Mars: Exploration of the Red Planet 1958–1978] {{웨이백|url=http://history.nasa.gov/SP-4212/on-mars.html |date=20041101091421 }} from the NASA History Office. * [http://www.cato.org/pubs/wtpapers/980815paper.html Martian Law – a CATO white paper] * [https://web.archive.org/web/20110513161927/http://www.maniacworld.com/mars_mariner_valley.htm Computer Simulation of a flyby through Mariner Valley] * [http://www.marsunearthed.com/ Mars Unearthed] – Comparisons of terrains between Earth ahe Mars Rovers (3D) * [https://web.archive.org/web/20090705142931/http://onmars.jpl.nasa.gov/ NASA/JPL OnMars WMS Server for Mars Data] – Work as Google Earth client overlays * [https://web.archive.org/web/20081230055501/http://www.lpi.usra.edu/expmars/images.html Exploring Mars: Image Center] * [http://www.astronomycast.com/astronomy/episode-52-mars/ Mars] [[Astronomy Cast]] episode #52, includes full transcript. * [http://news.bbc.co.uk/1/hi/sci/tech/4285119.stm BBC News Mars pictures reveal frozen sea] * [https://web.archive.org/web/20100130202708/http://www.space-nasa.com/02-apr-2007-esa-1.html Feb 07: ESA Prepares for a Human Mission to Mars] * [http://hubblesite.org/newscenter/archive/releases/2005/34/image/l Mars' apparent relative size] at opposition as seen by HST * [http://www.psrd.hawaii.edu/Archive/Archive-Mars.html Mars articles in Planetary Science Research Discoveries] * [http://themis.asu.edu/valles_video/ Flight Into Mariner Valley] – NASA/JPL/Arizona State University 3D flythrough of Valles Marineris * [http://www.geody.com/?world=mars Geody Mars] – World's search engine that supports [[NASA World Wind]], [[Celestia]], and other applications {{화성}} {{태양계}} {{전거 통제}} [[분류:화성| ]] [[분류:지구형 행성]]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자 정보 |이름=다비트 힐베르트 |원어이름={{llang|de|David Hilbert}} |그림=Hilbert.jpg |초상화=([[1912년]] 사진) |출생일={{출생일|1862|1|23}} |출생지=[[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사망일={{사망일과 나이|1943|2|14|1862|1|23}} |사망지=[[나치 독일]] [[괴팅겐]] |국적=[[독일]] |분야=[[수학]] |일자리=[[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br/> [[괴팅겐 대학교]] |출신 대학=[[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1 |지도 교수=[[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지도 학생=[[다카기 데이지]]<br/> [[막스 덴]]<br/> [[헤르만 바일]]<br/> [[세르게이 나타노비치 베른시테인]]<br/>[[에르하르트 슈미트]]<br/>[[후고 스테인하우스]]<br/> [[빌헬름 아커만]]<br/> [[에른스트 체르멜로]]<br/>[[에드워드 캐스너]]<br/>[[해스켈 커리]]<br/> [[리하르트 쿠란트]]<br/> [[게오르크 하멜]]({{llang|de|Georg Hamel}})<br/> [[에리히 헤케]] |known_for=[[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br/>[[웨어링의 문제]] 해결 <br/>[[힐베르트 공간]]<br/>[[힐베르트 공리계]]<br/>[[힐베르트 90번 정리]]<br/>[[힐베르트 기저 정리]]<br/>[[힐베르트 기호]]<br/>[[힐베르트 다항식]] <br/> [[힐베르트 변환]]<br/>[[힐베르트-슈미트 작용소]]<br/>[[힐베르트 영점 정리]]<br/>[[힐베르트의 문제들]] |prizes=[[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ref name="frs">{{저널 인용|doi=10.1098/rsbm.1944.0006|제목=David Hilbert. 1862-1943|저널=Obituary Notices of Fellows of the Royal Society|날짜=1944-11-01|권=4|호=13|쪽=547–553}}</ref> }} '''다비트 힐베르트'''({{llang|de|David Hilbert}}, {{IPA2|ˈdaːvɪt ˈhɪlbɐt}}, [[1862년]] [[1월 23일]] ~ [[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을 [[힐베르트 공리계|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 수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사후에도 [[힐베르트 문제]]를 통해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ref>장선영.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9136#08fn <장선영의 수학이야기(26)>힐베르트와 23개의 세기의 문제] {{웨이백|url=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9136#08fn |date=20180729051955 }}. 경상일보. 2017년 8월 22일.</ref> == 생애 == === 유년 === [[1862년]]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오토 힐베르트({{lang|de|Otto Hilbert}})와 마리아 테레제 힐베르트({{lang|de|Maria Therese Hilbert}}, {{small|[[혼인 성씨|혼전 성씨]]:}} 에르트만·{{lang|de|Erdtmann}})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1880년]]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힐베르트는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였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원주율]]의 초월성을 증명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가 사강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힐베르트는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성년 ===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1888년]] 초에 힐베르트는 [[파울 고르단]]({{llang|de|Paul Gordan}})을 만나 소위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레오폴트 크로네커]] 등을 방문하고,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혼인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자연로그의 밑|e]]와 [[원주율]]의 [[초월수|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 보고서》({{llang|de|Zahlbericht|찰베리히트}})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공저로 계획되었는데, 민코프스키는 자신의 몫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1897년]] 4월 힐베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부분만을 출판하였다. 이는 정수론에 대한 교재로서 수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898년]] ~[[1899년]] 겨울 학기에는 [[기하학]]의 기초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그 강의록을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llang|de|Grundlagen der Geometrie}})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제시하였다. 그 뒤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또한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세계 수학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의 가장 큰 과제들을 선별한 23개의 [[힐베르트의 문제들]]을 발표하였다.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의 주된 흐름을 예견하였고, 새로운 수학적 분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901년]] 힐베르트는 [[에리크 이바르 프레드홀름]]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 내용은 [[1912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 대학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의 문제]]를 증명하였다. [[1909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문제들|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는 [[상대성 이론]]으로 경쟁을 하는데, 상대성 이론에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발견한다. 힐베르트는 클라인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뇌터를 괴팅겐으로 초대한다. 힐베르트는 [[에미 뇌터]]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뇌터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을 꺼렸던 괴팅겐 대학교에서 '대학교는 목욕탕이 아니다'라며 뇌터의 채용을 설득했는데,<ref>{{서적 인용|제목=초끈이론의 진실(Not Even Wrong)|성=피터 보이트|연도=2008|원본연도=2006}}</ref> 뇌터는 이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뇌터 정리]]를 발표한다. 힐베르트는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llang|de|Die Grundlagen der Physik}})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 말년 === [[파일:Göttingen Stadtfriedhof Grab David Hilbert.jpg|섬네일|오른쪽|힐베르트의 묘비]]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인용문2|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br />{{lang|de|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 명언<ref>자료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ref> == * (논문) "Über das Unendliche" [무한에 관하여], Mathematische Annalen 95, (1926)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Cantor)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수 없다." :독일어: 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 :영어: (번역) No one shall expel us from the Paradise that Cantor has created. * (연설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 과학자 물리학 모임에서의 연설.(1930년 9월 8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음) :독일어: Wir müssen wissen — wir werden wissen! :영어: (번역) We must know — we will know!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힐베르트 공리계]] * [[힐베르트 문제]] * [[힐베르트 공간]] == 각주 == {{각주}} * {{서적 인용|성=리드|이름=콘스탄스|제목=현대 수학의 아버지 힐베르트|기타=이일해 역|출판사=사이언스북스|isbn=8983711655|url=http://sciencebooks.minumsa.com/book/238/|날짜=2005-06-13|확인날짜=2013-07-0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602160342/http://sciencebooks.minumsa.com/book/238/|보존날짜=2015-06-02|url-status=dead}} * {{MacTutor|id=Hilbert|date=1999-07}} * {{MathGenealogy|id=7298}} {{위키인용집}} {{전거 통제}} {{기본정렬:힐베르트, 다비트}} [[분류:다비트 힐베르트| ]] [[분류:1862년 출생]] [[분류:1943년 사망]]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불가지론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쾨니히스베르크 출신]] [[분류:기하학자]] [[분류:상대성 이론가]] [[분류:프로이센주 출신]]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프로그래밍 언어 정보 |이름 = HTML<br /><small>{{nowrap|(HyperText Markup Language)}}</small> |로고 = HTML5 logo and wordmark.svg |패러다임 = |설계자 = |개발자 = [[W3C]]와 [[WHATWG]] | released = {{시작 날짜와 나이|1993|df=yes}} | latest release version = [https://html.spec.whatwg.org/ Living Standard] | latest release date = 2022년 |형 체계 = |구현체 = TEXT/HTML |방언 = |영향을 받은 언어 = [[SGML]] |영향을 준 언어 = [[XHTML]] |운영 체제 = |라이선스 = |웹사이트 =http://www.w3.org/ |저장 방식 = .html, .htm }} {{HTML}} '''하이퍼 텍스트 마크업 언어'''({{llang|en|Hyper Text Markup Language, '''HTML'''}}, {{문화어|초본문표식달기언어, 하이퍼본문표식달기언어}})는 [[웹 페이지]] 표시를 위해 개발된 지배적인 [[마크업 언어]]다. 또한, HTML은 제목, 단락, 목록 등과 같은 본문을 위한 구조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링크, 인용과 그 밖의 항목으로 [[구조적 문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객체를 내장하여 대화형 양식을 생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HTML은 웹 페이지 콘텐츠 안의 [[괄호#꺾쇠 괄호|꺾쇠 괄호]]에 둘러싸인 "태그"로 되어있는 [[HTML 요소]] 형태로 작성한다. HTML은 [[웹 브라우저]]와 같은 HTML 처리 장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바스크립트]], 본문과 그 밖의 항목의 외관과 배치를 정의하는 [[CSS]] 같은 [[스크립트 언어|스크립트]]를 포함하거나 불러올 수 있다. HTML과 CSS 표준의 공동 책임자인 [[W3C]]는 명확하고 표상적인 마크업을 위하여 CSS의 사용을 권장한다.<ref name="deprecated">[http://www.w3.org/TR/html401/conform.html#deprecated HTML 4 — Conformance: requirements and recommendations]</ref> == 역사 == === 개발 === [[파일:Tim Berners-Lee April 2009.jpg|섬네일|오른쪽|[[팀 버너스리]]]] 1980년,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계약자였었던 물리학자 [[팀 버너스리]]가 HTML의 원형인 [[인콰이어]]를 제안하였다. 인콰이어는 CERN의 연구원들이 문서를 이용하고 공유하기 위한 체계였다. 1989년에 팀 버너스리는 [[인터넷]] 기반 [[하이퍼텍스트]] 체계를 제안하는 메모를 작성했다.<ref>Tim Berners-Lee, "Information Management: A Proposal." CERN (1989년 3월, 1990년 5월). [http://www.w3.org/History/1989/proposal.html W3.org]</ref> 버너스 리는 1990년 말에 HTML을 명시하고, 브라우저와 서버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그 해에 버너스리와 CERN 데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로버트 카일리아우]]와 함께 CERN측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CERN으로부터 정식으로 채택 받지 못했다. 버너스리의 개인적인 기록<ref>팀 버너리, [http://www.w3.org/DesignIssues/ "Design Issues"]</ref>에 1990년부터 "하이퍼텍스트가 사용되는 여러 분야의 일부"를 열거했고 백과사전을 그 목록의 첫 번째로 두었다. === 최초 규격 === HTML 최초의 일반 공개 설명은 1991년 말에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문서를 "HTML 태그"(''HTML tag'')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ref name="tagshtml" /><ref>{{웹 인용|url=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1SepOct/0003.html|제목=First mention of HTML Tags on the www-talk mailing list|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1991년 10월 29일|확인날짜=2010년 3월 3일|archive-date=2013년 5월 17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517212901/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1SepOct/0003.html|url-status=}}</ref> 그것은 머릿글자로 이루어진 20개의 요소를 기술하였고, 상대적으로 HTML의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하이퍼링크를 제외한 HTML 태그들은 CERN 자체의 [[SGML]] 기반 문서화 포맷인 SGML [[GUID]]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요소 중 13개는 HTML 4 버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1999/REC-html401-19991224/index/elements|제목=Index of elements in HTML 4|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1999년 12월 24일|확인날짜= 2010년 3월 3일}}</ref> HTML은 동적인 웹 페이지의 [[웹 브라우저]]를 통한 문자와 이미지 양식이다. 문자 요소의 대부분은 1988년 ISO 기술 보고서 9537 ''SGML을 이용한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GML 개념의 일반적인 마크업은 단지 개별 효과 보다는 요소 기반이고 또한 구조와 처리의 분리(?)(HTML은 CSS와 함께 이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해 왔다.) 버너스리는 [[SGML]] 응용 프로그램이 되는 HTML을 고안해야 했고 그것은 공식적으로 [[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에 의하여 1993년 중반, HTML 규격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간행물로 정의했다. (버너스리와 [[덴 콘놀리]]에 의한 문법을 규정하는 SGML [[문서 형식 정의]](SGML DTD)가 포함된 [http://www.w3.org/MarkUp/draft-ietf-iiir-html-01.txt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 인터넷 초안]<ref>{{웹 인용|url=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1NovDec/0020.html|제목=Re: SGML/HTML docs, X Browser (archived www-talk mailing list post)|저자=[[팀 버너스리]]|날짜=1991년 12월 9일|확인날짜=2010년 3월 7일|인용=SGML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HTML은 간단한 구조를 가진 하이퍼텍스트 문서에 적용된 SGML 기본 구문의 응용입니다.|archive-date=2013년 5월 20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520065930/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1NovDec/0020.html|url-status=}}</ref>) 이 초안은 6개월 후 만료된다. 하지만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NCSA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인라인 이미지를 내장하는 사용자 정의 태그의 사례는 주목할 만 했고, 성공적인 [[프로토타입]]에 대한 표준을 기반한 IETF의 철학을. <ref name="raymond">{{서적 인용|url=http://www.faqs.org/docs/artu/|chapterurl=http://www.faqs.org/docs/artu/ietf_process.html|제목=The Art of Unix Programming|성=Raymond|이름=Eric|장=IETF and the RFC Standards Process|인용문=In IETF tradition, standards have to arise from experience with a working prototype implementation — but once they become standards, code that does not conform to them is considered broken and mercilessly scrapped. …Internet-Drafts are not specifications, and software implementers and vendors are specifically barred from claiming compliance with them as if they were specifications. Internet-Drafts are focal points for discussion, usually in a working group… Once an Internet-Draft has been published with an RFC number, it is a specification to which implementers may claim conformance. It is expected that the authors of the RFC and the community at large will begin correcting the specification with field experience.|확인날짜=2010-03-1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317014053/http://www.faqs.org/docs/artu/|보존날짜=2005-03-17|url-status=dead}}</ref> 마찬가지로 데이브 라그렛의 경쟁 인터넷 초안인 "HTML+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포맷)"은 1993년 말에 테이블과 기입양식 같은 요소들을 이미 구현하여 표준화 제안을 했다.<ref name="html+">{{웹 인용|url=https://datatracker.ietf.org/public/idindex.cgi?command=id_detail&id=789|제목=HTML+ Internet-Draft - Abstract|인용=Browser writers are experimenting with extensions to HTML and it is now appropriate to draw these ideas together into a revised document format. The new format is designed to allow a gradual roll over from HTML, adding features like tables, captioned figures and fill-out forms for querying remote databases or mailing questionnaires.|확인날짜=2007년 6월 17일|보존url=http://arquivo.pt/wayback/20160515150537/https://datatracker.ietf.org/public/idindex.cgi?command=id_detail&id=789|보존날짜=2016년 5월 15일|url-status=dead}}</ref> 이후 1994년 초 HTML과 HTML+ 초안은 만료되었고, IETF는 HTML 작업 그룹을 설립해 1995년에 HTML 2.0을 완성한다. 최초의 HTML의 규격은 미래에 수행될 HTML 표준을 기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ref name="raymond"/>[[RFC]] 1996년에 HTML 2.0은 HTML과 HTML+ 초안의 아이디어가 포함됐다고 발표했다.<ref> {{웹 인용|url=http://www.ietf.org/rfc/rfc1866.txt|제목=RFC 1866: Hypertext Markup Language - 2.0 - Acknowledgments|출판사=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날짜=2005년 9월 22일|확인날짜=2007년 6월 16일|인용=Since 1993, a wide variety of Internet participants have contributed to the evolution of HTML, which has included the addition of in-line images introduced by the NCSA Mosaic software for WWW. Dave Ragget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eriving the forms material from the HTML+ specification. Dan Connolly and Karen Olson Muldrow rewrote the HTML Specification in 1994. The document was then edited by the HTML working group as a whole, with updates being made by Eric Schieler, Mike Knezovich, and Eric W. Sink at Spyglass, Inc. Finally, Roy Fielding restructured the entire draft into its current form.|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305063804/http://www.ietf.org/rfc/rfc1866.txt|보존날짜=2005년 3월 5일|url-status=dead}} </ref> HTML 2.0 지정은 이전의 초안들로부터 새로운 버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ref>{{웹 인용|url=http://www.ietf.org/rfc/rfc1866.txt|제목=RFC 1866: Hypertext Markup Language - 2.0 - Introduction|출판사=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날짜=2005년 9월 22일|확인날짜=2007년 6월 16일|인용=This document thus defines an HTML 2.0 (to distinguish it from the previous informal specifications). Future (generally upwardly compatible) versions of HTML with new features will be released with higher version numbers.|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305063804/http://www.ietf.org/rfc/rfc1866.txt|보존날짜=2005년 3월 5일|url-status=dead}}</ref> 게다가 IETF의 후원하에 개발은 상충하는 이해 관계 때문에 지연되었다. 1996년부터 HTML 규격은 상용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투입으로 [[W3C|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에서 유지해 왔다.<ref name="raggett">{{서적 인용|이름=Dave|성=Raggett|제목=Raggett on HTML 4|연도=1998|url=http://www.w3.org/People/Raggett/book4/ch02.html|확인날짜=2007년 7월 9일}}</ref> 하지만 2000년부터 HTML 또한 국제 표준([[ISO]]/IEC 15445:2000)이 되었다. 현재 W3C에 의해 발표된 최신 규격은 1999년 말에 발표된 HTML 4.01 권고안이며 2001년에 문제와 오류들이 수정되어 발표된 안이 최종 승인되었다. === 표준 버전의 역사 === ==== HTML 버전 스케줄 ==== ; 1995년 11월 24일: HTML 2.0이 [[IETF]]의 RFC 1866<nowiki/>로 발표되었다. 추보의 [[RFC]]의 추가된 기능: :* 1995년 11월 25일: RFC 1867 (양식 기반 파일 업로드) :* 1996년 5월: RFC 1942 (테이블) :* 1996년 8월: RFC 1980 (클라이언트 측 이미지맵) :* 1997년 1월: <nowiki>RFC 2070</nowiki> ([[국제화와 지역화|국제화]]) : 2000년 6월, 이 모든 것들이 RFC 2854에 의하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역사적인 것으로 선언됨. ; 1997년 1월: HTML 3.2<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REC-html32 |제목=HTML 3.2 Reference Specification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1997년 1월 14일 |확인날짜=2010년 3월 3일}}</ref> 가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은 1996년 9월에 폐쇄한 HTML 작업 그룹인 IETF와 같이 W3C에 의하여 배타적으로 개발되고 표준화된 첫 번째 버전이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MarkUp/HTML-WG/|제목=IETF HTML WG|확인날짜=2007년 6월 16일|인용=주: 이 작업그룹은 폐쇄되었다.}}</ref> :HTML 3.2에서 여러 종류의 겹치는 확장 수학 수식을 완전히 제외 시키고 넷스케이프의 비주얼 마크업 태그의 대다수를 채택했다. 넷스케이프의 [[블링크 요소]]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마퀴 요소]]는 두 회사의 상호 협의 하에 누락시켰다.<ref name="raggett"/> HTML에서 수학적 수식과 비슷한 마크업은 이후 [[MathML]]이 나올 때까지 14개월 동안 표준이 아니었다. ; 1997년 12월: HTML 4.0<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REC-html40-971218/ |제목=HTML 4.0 Specification |출판사=W3C |날짜=1997년 12월 18일 |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은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 Strict(엄격): 사용이 중지된 요소를 금지한다. :* Transitional(변이): 사용이 중지된 요소를 허용한다. :* Frameset(프레임셋): 대부분 [[HTML 요소#프레임|프레임]] 관련 요소에서만 허용한다. : 처음에 코드네임 "쿠가"<ref name="engelfriet">{{웹 인용 |url=http://htmlhelp.com/reference/wilbur/intro.html |제목=Introduction to Wilbur |저자=Arnoud Engelfriet |출판사=Web Design Group |확인날짜=2007년 6월 16일}}</ref>에서 HTML 4.0은 다양한 브라우저 특정 요소의 종류와 속성을 채택하였지만 동시에 스타일시트에 찬성하는 세력의 반대로 넷스케이프의 시각적 마크업 기능을 단계적으로 제거하기로 했다. HTML 4는 ISO 8879 - SGML에 따른 SGML 응용 프로그래밍 언어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html4/conform.html#h-4.2 |제목=HTML 4 - 4 Conformance: requirements and recommendations |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 1998년 4월: HTML 4.0<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1998/REC-html40-19980424/ |제목=HTML 4.0 Specification |출판사=W3C |날짜=1998년 4월 24일 |확인날짜=2010년 3월 12일}}</ref> 이 버전이 증가되지 않고 조금 수정되어 재발표되었다. ; 1999년 12월: HTML 4.01<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html401/ |제목=HTML 4.01 Specification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1999년 12월 24일 |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그리고 2001년 5월 12일에 그것에 대한 최종 [http://www.w3.org/MarkUp/html4-updates/errata 오류 수정 사항] 이 발표되었다. ; 2000년 5월: [[ISO/IEC 15445:2000]]<ref name="iso-html">{{웹 인용|url=http://www.iso.org/iso/iso_catalogue/catalogue_tc/catalogue_detail.htm?csnumber=27688 |제목=ISO/IEC 15445:2000 - Information technology -- Document description and processing languages -- HyperText Markup Language (HTML) |저자=ISO |날짜=2000 |확인날짜=2010년 3월 12일}}</ref> <ref>[https://www.cs.tcd.ie/15445/15445.HTML CS.TCD.ie]</ref> ("[[국제 표준화 기구|ISO]] HTML", HTML 4.01 Strict 기반)이 ISO/IEC 국제 표준과 함께 출시되었다. ISO에서 이 표준안은 [[ISO/IEC JTC1/SC34]] (ISO/IEC 공동 기술 위원회 1, 소위원회 34 - 문서 표현과 처리 언어)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ref name="iso-html" /> :2008년 중반, HTML 4.01과 ISO/IEC 15445:2000은 HTML의 대부분의 최근 버전이다. XML 기반 병렬 개발 언어인 XHTML을 통해 W3C의 HTML 작업 그룹은 2000년대 초중반에 성장하였다. ==== HTML 초안 버전 스케줄 ==== ; 1991년 10월: ''[[HTML 요소]]''<ref name="tagshtml" />: 비공식적 CERN 문서에서 12개의 HTML 태그 목록이 대중에게 언급되었다. ; 1992년 7월: 6단계 이후의 개정판과 함께 HTML DTD,[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2JulAug/0020.html] {{웨이백|url=http://lists.w3.org/Archives/Public/www-talk/1992JulAug/0020.html |date=20101120101957 }}의 첫 번째 비공식 초안 ; 1992년 11월: HTML DTD 1.1 (1.0 대신에 1.1을 [[버전 관리 시스템|RCS]]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첫 번째 버전 번호로 시작한다.), 비공식 초안 ; 1993년 6월: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ref>[http://tools.ietf.org/html/draft-ietf-iiir-html-00 Hypertext Markup Language: A Representation of Textual Information and MetaInformation for Retrieval and Interchange]</ref>는 인터넷 초안(표준에 대한 간략한 제안)과 함께[[IETF]]IIIR 작업 그룹에 의하여 발표되었다. 그것은 한 달 후 IETF에 의해 [http://tools.ietf.org/html/draft-ietf-html-spec-00] 6가지 추가 초안을 더한 두 번째 버전 [http://www.w3.org/MarkUp/draft-ietf-iiir-html-01.txt]으로 대체되었고 결국 HTML 2.0이 RFC1866을 주도했다. ; 1993년 11월: HTML+가 인터넷 초안과 함께 IETF에 의하여 출시되었고, HTML 초안과의 경쟁을 제안하였다. 1994년 5월 HTML+는 만료되었다. ; 1995년 4월 (1995년 3월에 저술): HTML 3.0<ref>{{웹 인용|url=http://www.w3.org/MarkUp/html3/ |제목=HTML 3.0 Draft (Expired!) Materials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1995년 12월 21일|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이 IETF 표준안으로 제안되었지만 이 제안은 이후 5개월 동안 진전이 없어서 만료되었다. 여기에는 [[데이브 라겟]]의 HTML+ 제안의 표와 복잡한 수학적 수식을 표시를 지원하는 것과 같은 특성의 상당부분을 포함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w3.org/MarkUp/html3/CoverPage |제목=HyperText Markup Language Specification Version 3.0 |확인날짜=2007년 6월 16일}}</ref> :W3C는 HTML3와 CSS를 지원하는 시험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아레나 브라우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HTML 3.0은 여러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 2008년 1월: [[HTML 5]]<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html5/ |제목=HTML 5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2008년 6월 10일 |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초안 작업은 W3C에 의해 발표되었다. : 비록 문법은 SGML의 문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HTML 5]]는 난해한 SGML 문법과 호환되지 않는다. 그리고 HTML 5를 "html" 시리즈라고 명시적으로 정의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QA/2008/01/html5-is-html-and-xml.html |제목=HTML 5, one vocabulary, two serializations|확인날짜=2010년 3월 4일}}</ref> ==== XHTML 버전 ==== {{본문|XHTML}} XHTML은 [[XML]] 1.0을 이용하여 HTML 4.01을 새로 만든 독립된 언어다. * XHTML 1.0<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1/ |제목=XHTML 1.0: The Extensible HyperText Markup Language (Second Edition)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 |날짜=2000년 1월 26일 |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은 2000년 1월 26일에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2002년 8월 1일에 개정과 재발표를 하였다. 이것은 XML에 관하여 새로 작성된 HTML 4.0 과 HTML 4.01 같이 세가지 문서 형태를 사소한 규약과 함께 제공한다. * XHTML 1.1<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11/ |제목=XHTML 1.1 - Module-based XHTML - Second Edition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 |날짜=2007년 2월 16일|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2001년 5월 31일에 W3C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XHTML 1.0 strict 기반이지만 사소한 변경 사항과 사용자 정의 기능을 포함하고, [http://www.w3.org/TR/xhtml-modularization/ XHTML의 모듈화] 으로부터 모듈을 이용하여 새로 작성되었다. * XHTML 2.0<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2/ |제목=XHTML 2.0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2006년 7월 26일 |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은 아직까지 W3C 작업 초안이다. W3C는 2009년 말까지 XHTML 2 그룹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News/2009#item119 |제목=XHTML 2 Working Group Expected to Stop Work End of 2009, W3C to Increase Resources on HTML 5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2009년 7월 17일|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그러므로 XHTML 2.0 표준은 사라질 것이다. XHTML은 XHTML 1.x와 호환되지 않는다. 따라서 XHTML 1.0에서 업데이트된 것 보다 XHTML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언어가 특성이 더 정확해진다. * XHTML5는 HTML 5 초안에서 [[HTML 5]]와 함께 정의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html/wg/html5/ |제목=HTML 5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 |날짜=2008년 10월 24일|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 마크업 == [[파일:Html-source-code3.png|프레임|오른쪽|HTML 4 구문 강조]] HTML 마크업은 '''HTML 요소'''(엘리먼트, {{lang|en|Elements}})와 그들의 속성({{lang|en|Attributes}})과 문자 기반 '''데이터 형태'''와 '''문자 참조'''와 '''엔티티 참조'''를 포함하는 몇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는 [[문서 형식 정의]](DTD, {{lang|en|Document Type Definition}})를 명시하는 [[문서 형식 선언]]({{lang|en|document type declaration}})이다. 차기 [[HTML 5]]에서는 DTD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레이아웃 모드로 지정된다 [http://www.w3.org/2008/Talks/04-24-smith/index.html]. [[Hello world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크립트 언어]] 그리고 [[마크업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HTML에서의 Hello world 프로그램은 단 9줄에 불과하다: <syntaxhighlight lang="html5"> <!doctype html> <html> <head> <title>Hello HTML</title> </head> <body> <p>Hello World!</p> </body> </html> </syntaxhighlight> (<html>과 </html>사이의 문자는 웹 페이지를 표현한다. <body>와 </body>사이의 문자는 표시되는 페이지의 내용이며, <head>와 </head>사이의 문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웹 페이지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해더 정보를 담고 있다.<title>과 </title>사이의 문자는 웹 브라우저의 페이지 제목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br />Hello world 프로그램을 최대로 짧게 만들고 싶다면: <syntaxhighlight lang="html5"> Hello world </syntaxhighlight> 이라고 해도 되지만, [[웹 표준]]에 위배된다.이 [[문서 형식 정의]]는 [[HTML 5]]이다. 만약 <code><!doctype html></code>로 선언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브라우저는 "[[쿽스 모드]]"로 렌더링한다.<ref name="hsivonen">[http://hsivonen.iki.fi/doctype/ Activating Browser Modes with Doctype]</ref> === HTML 요소 === {{본문|HTML 요소}} HTML 문서는 완전한 '''HTML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 "시작 태그"(Start Tag)와 "종료 태그"(End Tag) 와 같은 '''''태그''''' 한 쌍; 몇 가지 요소 '''''속성'''''은 그 태그들 내에서 특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문자와 그래픽 정보 ''콘텐츠''를 화면에 표현한다. HTML 요소는 태그의 사이와 포함되는 모든 것이다. '''태그'''는 꺾쇠괄호(<>)로 둘러싸인 키워드이다. ==== HTML 요소의 일반적인 형태 ==== <tag>''보이는 내용''</tag> HTML 요소의 이름은 태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종료 태그의 이름은 슬래시 문자 ("/")로 시작된다. ====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 ==== <tag attribute1="value1" attribute2="value2">''보이는 내용''</tag> 속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작 태그의 기본값을 사용하게 된다. ==== 태그의 기본적인 형태 ==== HTML의 머리부분 (<head>...</head>), 보통 제목은 <head>의 안에 포함된다. 예제: <syntaxhighlight lang="html5"> <head> <title>제목</title> </head> </syntaxhighlight> ==== 단락 구획 ====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p>단락 1</p> <p>단락 2</p></syntaxhighlight> 새 줄(<nowiki><br></nowiki>), <nowiki><br></nowiki> 와 <nowiki><p></nowiki> 간의 차이점은 'br'은 페이지의 의미론적 구조를 변경하지 않는 줄바꿈(breaks a line)인 반면 'p'는 단락으로 페이지를 구분한다.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code><p>이것은 <br /> 줄바꿈을 <br /> 포함하는 <br /> 단락이다. </p></code></syntaxhighlight> ==== 주석 사용 ====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설명!..--></syntaxhighlight> 주석은 코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웹 페이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 HTML에서 사용되는 마크업 요소의 형태 ==== * '''구조적''' 마크업은 본문의 목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code><nowiki><h2>골프</h2></nowiki></code>는 "골프"를 두 번째 수준의 [[제목]]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브라우저에서 이 장의 처음에 나오는 HTML 마크업 제목과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구조적 마크업은 어떤 특정한 렌더링을 표시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웹 브라우저는 요소 포맷팅에 대한 기본적인 스타일을 표준화했다. 텍스트는 캐스캐이딩 스타일시트(CSS)로 더 꾸밀 수 있다. * '''표현적''' 마크업은 기능에 관계없이 본문의 외관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code><nowiki><b>굵은 글씨</b></nowiki></code>는 시각적 결과 장치가 굵은 글씨 속에 있는 "boldface"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지만, 이것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을 해야 할 지(예를 들어 텍스트를 크게 읽어주는 장치와 같은 )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는다. <code><nowiki><b>굵게</b></nowiki></code>와 <code><nowiki><i>이탤릭</i></nowiki></code>과 같은 경우에는 보통 시각적 해석에 필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본래가 더 의미론적이다. 즉, 각각 <code><nowiki><strong>strong emphasis</strong></nowiki></code>와 <code><nowiki><em>emphasis</em></nowiki></code>같이 할 수 있다. 음성 사용자 에이전트가 어떻게 후자의 두 요소를 해석하는 지 지켜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표현 상대와 맞먹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책의 이름을 강조하는 것이 스크린을 읽는 유저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화면에서 그러한 이름이 이탤릭체로 될 것이다. 대부분의 표현 마크업 요소는 스타일 디자인에 근거한 CSS에 호응해서 HTML 4.0 스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 '''하이퍼텍스트''' 마크업은 다른문서와 연결시켜주는 문서의 부분이다. [[XHTML]] 1.1 버전을 통한 HTML은 본문속에서 하이퍼링크를 생성하기 위해 anchor 요소(<code><nowiki><a>위키백과</a></nowiki></code>)의 사용을 필요로 한다. 덧붙여, <code>href</code> 속성은 반드시 정확한 [[URL]]을 설정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HTML 마크업인 <code><nowiki><a&nbsp;href="https://ko.wikipedia.org/">한국어 위키백과</a></nowiki></code>는 [[하이퍼링크]]로써 "<span class="plainlinks">[https://ko.wikipedia.org/ 한국어 위키백과]</span>"처럼 보일 것이다. ** 하이퍼링크로써 이미지를 표현하는 예제 **: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a href="http://example.org"><img src="image.gif" alt="alternative text" width="50" height="50"></a></syntaxhighlight> ==== 주요 HTML 요소들 ==== {{본문|HTML 요소}} ;<code>&lt;br&gt;</code>: 줄바꾸기 ;<code>&lt;p&gt;</code>: 단락바꾸기(한줄 떨어짐) ;<code>&lt;hr&gt;</code>:가로줄 ;<code>&lt;center&gt;...&lt;/center&gt;</code>: ...을 가운데 정렬 ;<code>&lt;font&gt;...&lt;/font&gt;</code>: ...의 폰트를 바꿈 ;<code>&lt;ul&gt;&lt;li&gt;...&lt;li&gt;...&lt;/ul&gt;</code>: ...을 순서없는 목록으로 만듦(기본: 까만동그라미) ;<code>&lt;ol&gt;&lt;li&gt;...&lt;li&gt;...&lt;/ol&gt;</code>: ...을 순서있는 목록으로 만듦(기본: 숫자) ;<code>&lt;table&gt;&lt;/table&gt;</code>: 표만들기 ;<code>&lt;tr&gt;&lt;/tr&gt;</code>: 행(<span style="line-height: 1.5;">&lt;table&gt;...&lt;/table&gt;...에 넣는다)</span> ;<code>&lt;td&gt;&lt;/td&gt;</code>: 열(<span style="line-height: 1.5;">&lt;tr&gt;...&lt;/tr&gt; ...에 넣는다)</span> ;<code>&lt;td colspan=숫자&gt;&lt;/td&gt;</code>: 그 셀부터 숫자만큼의 오른쪽 셀을 병합한다 ;<code>&lt;td rowspan=숫자&gt;&lt;/td&gt;</code>: 그셀부터 숫자만큼의 아래쪽 셀을 병합한다 ==== 속성 ==== 대부분의 요소 속성들은 이름-값 형태이고, "="로 구분하고, 요소의 시작 태그 안에서 요소의 이름 다음에 쓰인다. 값은 외따옴표 또는 쌍따옴표로 둘러쌀 수 있다. 비록 어떤 문자로 구성된 값들이 HTML에서 인용부호 없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XHTML에서는 허용되지 않음), 그 값은 따옴표나 쌍따옴표 또는 쌍 인용부호로 둘러쌀 수 있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html401/intro/sgmltut.html#h-3.2.2 |제목=On SGML and HTML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1/diffs.html#h-4.4 |제목=XHTML 1.0 - Differences with HTML&#160;4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속성값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ref>{{웹 인용 |이름=Jukka |성=Korpela |url=http://www.cs.tut.fi/~jkorpela/qattr.html |제목=Why attribute values should always be quoted in HTML |출판사=Cs.tut.fi |날짜=1998년 7월 6일 |확인날짜=2010년 3월 7일 |archive-date=2008년 11월 21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1121032139/http://www.cs.tut.fi/~jkorpela/qattr.html |url-status=dead }}</ref> 이름값 쌍 속성과 대조하여, 요소 태그의 시작에 단순히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태그가 있다.<ref name="tagshtml"> {{웹 인용|url=http://www.w3.org/History/19921103-hypertext/hypertext/WWW/MarkUp/Tags.html |제목=Tags used in HTML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1992년 11월 3일 |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tag:ref|<code>img</code> 요소에서<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1999/REC-html401-19991224/struct/objects.html#adef-ismap |제목=Objects, Images, and Applets in HTML documents |출판사=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날짜=1999년 12월 24일|확인날짜=2010년 3월 7일}}</ref> <code>ismap</code> 속성과 같이.}} 대부분의 요소는 몇 가지 일반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 <code>id</code> 속성은 요소에 대한 문서 전체의 고유 식별자를 제공한다. 이것은 스타일시트에 의해 외관적인 특성을 제공하고, 브라우저에 의해 특정 요소를 처리하거나 스크립트에 의해 요소의 내용이나 외관을 바꿀 수 있다. 페이지의 URL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통 페이지 다음에 오는 요소에 대한 세계에서 유일한 식별자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code>https://en.wikipedia.org/wiki/HTML#Attributes</code> 에 있는 ID 속성과 같다. * <code>class</code> 속성은 유사한 요소를 분류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은 어휘적 또는 표현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휘적으로 분류는 미세 포맷에 사용된다. 표현적 목적으로 HTML 문서는 <code>class="notation"</code>과 같은 지정자에서, 이 class 값을 갖는 모든 요소는 문서의 주 텍스트에 종속된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요소는 HTML 소스에서 나타났던 장소에 나타나는 대신에 함께 모여서 페이지에서 각주와 같이 표현된다. * 작성자는 특정 요소에 표현적 속성을 지닌 <code>style</code> 비 속성 코드를 사용할 것이다. 단순하고, 특정한 또는 특수한 스타일 속성을 가진 애플리케이션에서는 너무 성가시긴 하지만, 스타일시트로 속성을 선택할 때는 요소의 <code>id</code>나 <code>class</code> 속성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간주된다. * <code>title</code> 속성은 요소에서 숨겨진 뜻을 설명하는 글을 첨부하는 곳에 사용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의 이 속성은 자주 [[툴팁]]과 같이 참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축 요소(<code>abbr</code>)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속성을 설명하는데 쓰일 수 있다: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abbr id="anId" class="aClass" style="color:blue;" title="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abbr></syntaxhighlight> 이 예제는 대부분의 브라우저에서 <span id="anId" class="aClass" style="color:blue;" title="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span>처럼 보인다. 이 단축에 커서를 가리키면 그 제목인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요소 또한 언어와 관련된 속성인 <code>lang</code>과 <code>dir</code>을 취한다. === 데이터 형식 === HTML은 스크립트 데이터와 스타일시트 데이터, 그리고 ID, 이름, URI, 숫자 길이의 단위, 언어, 미디어 기술자, 색상, 문자 인코딩, 날짜와 시간 등을 포함하는 속성 값의 종류를 위한 몇 가지 [[데이터 형태]]를 정의 내린다. 이러한 모든 데이터 형식은 문자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다. === 문서 형식 선언 === HTML 문서는 [[문서 형식 선언]] (비공식적으로, "doctype")으로 시작해야 한다. 브라우저에서 doctype의 기능은 렌더링 모드를 지시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쿼크 모드]]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doctype의 원래의 목적은 [[문서 형식 정의]] (DTD)에 기반한 SGML 도구를 통하여 HTML 문서의 파싱과 유효 여부 확인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DOCTYPE에 대한 DTD는 DTD에 순응하는 문서를 가진 허용 또는 금지된 내용을 지정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문법을 포함하도록 지시한다. 반면 브라우저는 HTML을 SGML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수행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DTD를 읽지 않는다. [[HTML 5]]는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DTD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TML5에서 doctype 선언 <code>&lt;!doctype html></code>는 DTD를 참조하지 않는다. HTML 4 doctype의 예제는 다음과 같다. <syntaxhighlight lang="html4strict"> <!DOCTYPE HTML PUBLIC "-//W3C//DTD HTML 4.01//EN" "http://www.w3.org/TR/html4/strict.dtd"> </syntaxhighlight> 이런 선언은 엄격한 HTML 4.01을 만들기 위해 DTD를 참조한다. 이것은 선언적인 요소인 <code>font</code> 같은 요소는 포함하지 않으며, CSS나 <code>span</code>, <code>div</code> 요소는 유지한다. SGML 기반의 유효 확인자(validator)들은 문서를 적절히 해석하거나, 유효 여부 확인을 실행하기 위해 DTD를 읽는다.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이 doctype은 [[쿼크 모드]]에 반대되는 표준 모드를 활성화한다. 게다가 HTML 4.01은 임시적이고 프레임 단위의 DTD를 제공한다. == 시맨틱 웹 == {{본문|시맨틱 웹}} == 전송 == HTML 문서를 다른 컴퓨터 파일과 같은 방법으로 전송할 수 있다. 하지만 HTML 문서들은 대부분 웹 서버에 의한 [[HTTP]]나 또는 이메일을 통하여 전송된다. === HTTP === [[월드 와이드 웹]]은 주로 [[웹 서버]]에서 [[하이퍼텍스트 전송 프로토콜]] (HTTP)을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로 전송되는 HTML 문서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HTTP는 HTML 이외에도 이미지나 소리, 그리고 기타 내용물을 서비스하는 데 사용된다. 브라우저가 받는 각 문서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게 하기 위해, 다른 정보가 문서와 함께 전송된다. 이 [[메타데이터]]는 보통 [[MIME 타입]] (예, <code>text/html</code> or <code>application/xhtml+xml</code>)과 문자 인코딩을 포함한다. ([[HTML에서 문자 인코팅]] 참조)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HTML 문서와 함께 전송되는 MIN 타입은 문서가 초기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X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문서는 잘 구성된 XML로 기대되며, 문법 오류는 브라우저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동일 문서가 HTML에 관대한 브라우저에서는 성공적으로 출력될 것이다. W3C 권고안에서는 권고안 부록 C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XHTML 1.0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1/#media |제목=XHTML 1.0 The Extensible HyperText Markup Language (Second Edition)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2000 |확인날짜=2008년 12월 7일 |인용=XHTML Documents which follow the guidelines set forth in Appendix C, "HTML Compatibility Guidelines" may be labeled with the Internet Media Type "text/html" [RFC2854], as they are compatible with most HTML browsers. Those documents, and any other document conforming to this specification, may also be labeled with the Internet Media Type "application/xhtml+xml" as defined in [RFC3236].}}</ref> 현재의 XHTML 1.1 작업 초안은 또한 XHTML 1.1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ietf.org/rfc/rfc2119.txt |제목=RFC 2119: Key words for use in RFCs to Indicate Requirement Levels |출판사=Harvard University |날짜=1997 |확인날짜=2008년 12월 7일 |인용=3. SHOULD This word, or the adjective "RECOMMENDED", mean that there may exist valid reasons in particular circumstances to ignore a particular item, but the full implications must be understood and carefully weighed before choosing a different course.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1206203611/http://www.ietf.org/rfc/rfc2119.txt |보존날짜=2008년 12월 6일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url=http://www.w3.org/TR/xhtml11/conformance.html#strict |제목=XHTML 1.1 - Module-based XHTML - Second Edition |출판사=World Wide Web Consortium |날짜=2007 |확인날짜=2008년 12월 7일 |인용=XHTML 1.1 documents SHOULD be labeled with the Internet Media Type text/html as defined in [RFC2854] or application/xhtml+xml as defined in [RFC3236].}}</ref> === HTML 전자 우편 === {{본문|HTML 전자 우편}} 대부분의 그래픽 이메일 클라이언트는 단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어휘적 마크업과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종종 정의되지 않는 HTML 부분집합 사용을 허용한다. 이것은 색상 제목, 강조, 인용문, 인라인 이미지와 도표와 같은 인쇄정보를 포함한다. 그러한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HTML 이메일 메시지를 작성하는 GUI 편집기와 그것을 해석하여 보여주기 위한 렌더링 엔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자 메일에서 HTML를 포함시키는 것은 호환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피싱 공격의 은닉을 도와줄 수 있고, 스팸 필터를 혼동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 텍스트보다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 명명 규칙 === 웹 문서의 가장 일반적인 [[파일 확장자]]는 <code>.html</code>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code>.htm</code>라고도 하며, [[DOS]]나 [[파일 할당 테이블|FAT]]와 같은 초기 [[운영 체제]]와 [[파일 시스템]]이 파일 확장자를 3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 HTML 애플리케이션 === {{본문|HTML 애플리케이션}} HTML 애플리케이션 (HTA; 파일 확장자 ".hta")는 애플리케이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HTML과 DHTML을 사용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정상적인 HTML 파일은 웹 서버와 통신하면서, 웹페이지 객체와 HTTP 쿠키만 다루는 웹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에 제한된다. HTA는 완벽히 신뢰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파일의 생성/편집/제거와 [[윈도우 레지스트리]] 엔트리에 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그 까닭은 그것은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HTA는 HTTP를 경유하여 실행되지 않지만, [[실행 파일]]과 같이 다운로드가 될 수 있으며, 로컬 파일 시스템에서 실행된다. == 위지위그 편집기 == {{본문|위지위그}} 몇 가지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 편집기는 HTML 문서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편집기가 HTML 문서로 생성하여 더 이상 사용자가 HTML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웹 페이지 편집은 위지위그 편집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성된 코드의 질이 낮았고 [[위지윔]](What Your See IS What You Mean, WYSIWIM)방식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늘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ref>Sauer, C.: WYSIWIKI - Questioning WYSIWYG in the Internet Age. In: Wikimania (2006)</ref><ref>Spiesser, J., Kitchen, L.: Optimization of html automatically generated by WYSIWYG programs. In: 13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World Wide Web, pp. 355--364. WWW '04. ACM, New York, NY (New York, NY, USA, May 17-20, 2004)</ref> 위지위그 편집기는 다음과 같은 결함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제이다. * 주로 의미와는 상반된 레이아웃에 의존하며, 종종 의도된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단순히 레이아웃을 복사만 하는 마크업을 사용한다.<ref>{{웹 인용 |url=http://xhtml.com/en/xhtml/reference/blockquote/# |제목=XHTML Reference: blockquote<!--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3-1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325160356/http://xhtml.com/en/xhtml/reference/blockquote/# |보존날짜=2010-03-25 |url-status=dead }}</ref> * 종종 HTML의 케스케이딩 성질과 CSS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잡다하고 중복되는 코드를 생성한다. * 종종 태그 수프라고 불리는 비문법적인 마크업을 생성한다. * HTML 문서의 많은 정보는 레이아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모델은 그것의 위지위그 본질에 대해 비난을 받아왔다.<ref>[http://www.invisiblerevolution.net/ Doug Engelbart's INVISIBLE REVOLUTION<!-- 봇이 따온 제목 -->]</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위그 편집기가 페이지를 작성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HTML에 대한 상세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위지위그 방식이 웹 저작을 지배하고 있다. == 예제 == <syntaxhighlight lang="html" line="1" start="1"> <!DOCTYPE html> <html> <head> <title> Hello World</title> </head> <body> <p> Hello World </p> </body> </html> </syntaxhighlight>Hello World를 타이틀, 메인페이지에 출력하기. == 같이 보기 == * [[HTML5]] * [[구문 분석]] * [[XHTML]] * [[DHTML|동적 HTML]] * [[HTML 편집기]] * [[마이크로포맷]] * [[웹 색상]] * [[CSS]] * [[팀 버너스리]] * [[Alt 속성]] == 각주 == {{각주|2}}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위키책|HyperText Markup Language}} {{위키배움터|HTML}} {{위키배움터|HTML Challenges}} * {{언어링크|en}} [[WHATWG]]'s [http://whatwg.org/html HTML Living Standard] * {{언어링크|en}} [[W3C]]'s [http://www.w3.org/html/wg/drafts/html/master/ HTML 5.1, the upcoming version of HTML] <!-- Please don't link to the horribly outdated /TR/ version --> * {{언어링크|en}} [[W3C]]'s [http://www.w3.org/TR/2014/REC-html5-20141028/ HTML5, the most recent finished specification (28 October 2014)] * {{언어링크|en}} [[W3C]]'s [http://www.w3.org/TR/1999/REC-html401-19991224/ HTML 4.01 specification (24 December 1999)] * {{언어링크|en}} [http://www.w3.org/MarkUp/Guide/ Dave Raggett's Introduction to HTML]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110412130543/http://computemagazine.com/man-who-invented-world-wide-web-gives-new-definition Tim Berners-Lee Gives the Web a New Definition] * {{언어링크|ko}} [https://web.archive.org/web/20110510004632/http://trio.co.kr/webrefer/html/ HTML4.01 규격 한국어 번역본] {{W3C 표준}} {{ISO 표준}} {{웹 브라우저}} {{자바스크립트}} {{전거 통제}} [[분류:마크업 언어]] [[분류:HTML| ]] [[분류:W3C 표준]] [[분류:ISO 표준]] [[분류:1990년 도입]] [[분류:오픈 포맷]]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인터넷}} '''웹 브라우저'''({{llang|en|web browser}}), '''인터넷 브라우저'''({{llang|en|internet browser}}) 또는 '''웹 탐색기'''(web探索機, {{문화어|열람기}})는 [[웹 서버]]에서 이동하며(navigate) 쌍방향으로 통신하고 [[HTML]] 문서나 파일을 출력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반의 [[응용 소프트웨어]]이다. 웹 브라우저는 대표적인 [[HTTP]] [[사용자 에이전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요 웹 브라우저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엣지]],<ref>{{웹 인용|last1=Fitzpatrick|first1=Jason|title=Five Best Web Browsers|url=http://lifehacker.com/5178564/five-best-web-browsers|website=[[Lifehacker]]|publisher=[[Gawker Media]]|date=22 March 2009|확인날짜=2016-11-12|archive-date=2017-08-24|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24074144/http://lifehacker.com/5178564/five-best-web-browsers|url-status=}}</ref><ref>{{웹 인용|last1=Wayner|first1=Peter|title=Battle of the Web browsers|url=http://www.infoworld.com/article/2623985/applications/battle-of-the-web-browsers.html|website=[[Infoworld]]|publisher=[[International Data Group|IDG]]|date=27 April 2011}}</ref><ref>{{웹 인용|last1=Tibken|first1=Shara|title=Aereo TV streaming expands to major Web browsers|url=http://www.cnet.com/news/aereo-tv-streaming-expands-to-major-web-browsers/|website=[[CNET]]|publisher=[[CBS Interactive]]|date=17 October 2012}}</ref> [[오페라 (웹 브라우저)|오페라]], [[삼성 인터넷]], [[사파리 (웹 브라우저)|사파리]], [[브레이브 (웹 브라우저)|브레이브]]가 있다. == 역사 ==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1990년]]에 [[팀 버너스 리]]가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W3C의 감독자로서 웹의 지속적인 발전을 감독하며, 월드 와이드 웹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브라우저는 [[월드와이드웹]]으로 불리다가 넥서스(Nexus)로 이름이 바뀌었다.<ref>{{웹 인용|url=http://www.w3.org/People/Berners-Lee/WorldWideWeb.html |title=Tim Berners-Lee: WorldWideWeb, the first Web client |publisher=W3.org |accessdate=2011-12-07}}</ref>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면서 대중이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Erwise]]이다. Erwise의 개발은 [[로버트 카이유]]가 시작하였다. == 프로토콜과 표준 == 웹 브라우저는 [[웹 페이지]]를 가져오기 위해(웹 문서를 열기 위해) 대부분의 [[웹 서버]]가 사용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로 통신한다. HTTP를 이용해 웹 페이지를 가져올 뿐 아니라 웹 서버에 정보를 송신하기도 한다. 작성한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HTTP는 HTTP/1.1로 [[RFC]] 2616에 정의되어 있다. HTTP/1.1은 현 세대의 다른 브라우저와는 달리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페이지들은 주소처럼 이용되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을 통해 장소가 정해지고, HTTP 접근을 위해 "http:"로 시작된다. 많은 브라우저가 [[파일 전송 프로토콜|FTP]]를 위한 "ftp:", [[HTTPS]](암호화된 HTTP)를 위한 "https:"와 같은 다양한 URL 종류와 대응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웹 페이지의 [[파일 포맷]]은 보통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 쓰이고 HTTP 프로토콜의 [[MIME]] "content type"에 의해 확인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는 HTML 외에 [[JPEG]], [[PNG]], [[GIF]] 이미지 포맷들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플러그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HTTP의 "content type"과 URL 프로토콜 명세의 조합으로 웹 페이지 설계자들은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 소리, [[스트리밍 미디어]] 등을 웹 페이지에 덧붙이거나 웹 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초기의 웹 브라우저는 단순한 [[HTML]]만을 지원했다. 독점적인 웹 브라우저의 빠른 개발로 [[HTML]]의 비표준 확장이 많이 이루어졌고, 웹 호환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현대의 웹 브라우저들은 모든 브라우저에서 동일하게 표시되어야 할 표준 기반의 [[HTML]]과 [[XHTML]](HTML 4.01에서 출발한)[https://web.archive.org/web/20091015072715/http://trio.co.kr/webrefer/xhtml/overview.html#xhtml]을 지원한다. 부가적으로 [[유즈넷]] 뉴스나 [[IRC]](Internet relay chat), [[이메일]] 등을 지원하는 브라우저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NNTP]], [[SMTP]], [[인터넷 메시지 접속 프로토콜|IMAP]] 등의 프로토콜 지원이 포함된다. == 기능 == {{참고|웹 브라우저의 비교}} 브라우저 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에 따라 구별된다. 오늘날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는 웹 초기에는 없었던 기능과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라우저 전쟁]] 때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에는 확장 기능이 급속도로 무질서하게 생겨났다. 아래는 특징이 있는 기능에 대한 목록이다. === 표준 지원 === * [[HTTP]], [[HTTPS]] * [[HTML]], [[XML]], [[XHTML]] * [[GIF]], [[PNG]], [[JPEG]], [[SVG]] 등을 포함한 [[그래픽 파일 포맷]] * [[CSS]] * [[자바스크립트]]([[DHTML]]) * [[HTTP 쿠키|쿠키]] * [[디지털 인증서]] * 즐겨찾기 아이콘([[파비콘]]) * [[플러그인]] 지원 === 주요 기능 === * [[북마크]] 관리자 * [[다운로드]] 관리자 * 웹 구성물 [[웹 캐시|캐시]] * [[플러그인]]을 통한 다양한 매체 지원 === 사용성과 접근성 기능 === * [[URL]]과 [[폼 데이터]]의 자동 완성 * [[탭 브라우징]] ==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 {{본문|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파일:Browser Market Map June 2015.svg|섬네일|나라별 가장 흔히 쓰이는 웹 브라우저 ([http://gs.statcounter.com/#browser-ww-monthly-201506-201506-map StatCounter])<br /> {{범례|green|[[구글 크롬]]}} {{범례|orange|[[파이어폭스]]}} {{범례|blue|[[인터넷 익스플로러]]}} {{범례|red|[[오페라 (웹 브라우저)|오페라]]}} (2015)]]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08년]] 말까지는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이어폭스]], [[사파리]], [[구글 크롬]] 등 새로운 웹 브라우저들이 나오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져 2011년 12월, 38%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크롬 27%, 파이어폭스 25%로 뒤따랐다.<ref name=":0">[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14013.html 웹브라우저 시장 구글크롬이 뜬다] 김선식《한겨레》2012-01-09</ref><ref>{{웹 인용 |제목 = 5대 웹 브라우저의 시장 점유율 추이 (전 세계) |url = http://gs.statcounter.com/ |출판사 = 스탯카운터 |날짜 = |확인날짜 = 2011-09-01 }}</ref> 그 후, 2013년 8월 18일 시점으로 크롬의 점유율이 43.17%로 1위이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5.03%, 파이어폭스가 19.31%, 사파리 8.65% 오페라 1.14%의 순이다. == 같이 보기 == * [[인터넷]] * [[인터넷의 역사]] * [[웹 애플리케이션]] * [[웹 브라우저 목록]] * [[웹 브라우저 연대표]] * [[브라우저 전쟁]] * [[모바일 브라우저]] * [[레이아웃 엔진]] * [[FOUC]]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www.blooberry.com/indexdot/history/browsers.htm Browser timeline (1993-2001)] * [http://browsers.evolt.org evolt.org - Browser Archive] * [https://web.archive.org/web/20100701033853/http://www.dejavu.org/ Deja Vu: (re-)creating web history] * [http://trio.co.kr/webrefer/xhtml/overview.html Trio의 XHTML 1.0 기술 규격(한글)] {{웨이백|url=http://trio.co.kr/webrefer/xhtml/overview.html |date=20091015072715 }} {{웹 브라우저}} {{전거 통제}} [[분류:웹 브라우저| ]] [[분류:잉글랜드의 발명품]]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소프트웨어 정보 | 이름 = 인터넷 익스플로러<br />Internet Explorer | 로고 = Internet Explorer 10+11 logo.svg | 로고크기 = | 화면 = [[파일:IE 11 Wikipedia.png|300px]] | 화면크기 = | 설명 =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스크린샷 | 원저자 = [[토머스 레던]] | released = {{시작 날짜와 나이|1995|8|24}}<ref>{{웹 인용|url=http://www.microsoft.com/windows/ie/community/columns/historyofie.mspx |title=The History of Internet Explorer |date=August 25, 2005 |publisher=[[마이크로소프트]] |work=News Center |archive-date=October 1, 2005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51001113951/http://www.microsoft.com/windows/ie/community/columns/historyofie.mspx |url-status=live }}</ref> (included with Plus! for Windows 95) | latest release version = {{Multiple releases | branch1 = Windows | version1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406|P548=Q2804309}} | date1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406|P548=Q2804309|P577}} | branch2 = macOS | version2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4116|P548=Q2804309}} | date2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4116|P548=Q2804309|P577}} | branch3 = Unix | version3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1368|P548=Q2804309}} | date3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1368|P548=Q2804309|P577}} }} | latest preview version = {{Multiple releases | branch1 = Windows | version1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406|P548=Q51930650}} | date1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406|P548=Q51930650|P577}} | branch2 = macOS | version2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4116|P548=Q51930650}} | date2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4116|P548=Q51930650|P577}} | branch3 = Unix | version3 = {{wikidata|property|preferred|references|edit|Q1575|P348|P400=Q11368|P548=Q51930650}} | date3 = {{wikidata|qualifier|preferred|single|Q1575|P348|P400=Q11368|P548=Q51930650|P577}} }} | 상태 = | 프로그래밍 언어 = |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차크라 (자바스크립트 엔진)|차크라]] | 플랫폼 = [[IA-32]], [[x86-64]], [[IA-64]], [[ARM 아키텍처|ARMv7]] | 크기 = | 언어 = 95개의 언어 | 종류 = [[웹 브라우저]] | 웹사이트 = | 표준 = [[HTML5]], [[종속형 시트|CSS3]], [[웹 오픈 폰트 형식|WOFF]], [[스케일러블 벡터 그래픽스|SVG]], [[RSS]], [[아톰 (표준)|아톰]], [[JPEG XR]] }} '''인터넷 익스플로러'''({{llang|en|Internet Explorer}}, {{약칭|'''I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 체제]]에 이 소프트웨어를 기본으로 포함하기 시작하며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9년]] 이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웹 브라우저가 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5]], [[인터넷 익스플로러 6|6]] 버전의 사용률이 정점에 이르러 95%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 대체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후기 버전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11]]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엣지]]의 사용을 권고하였다. 2022년 6월 15일, 서비스가 종료되었다.<ref>https://www.nytimes.com/2022/06/15/business/internet-explorer-shutting-down.amp.html</ref> == 역사 ==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공개되지 않은 윈도우 97의 주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개념이 자리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윈도우 95]]의 연장선으로 그려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1994년]] [[여름]]에 [[토머스 레던]](Thomas Reardon)이 시작하여 [[벤자민 슬리브카]](Benjamin Slivka)가 주도하였다. 소스 코드는 [[스파이글래스]]사에서 도입했다. 이 소스는 초기 상용 웹 브라우저였던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모자이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때 [[맥 OS]], [[유닉스]]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해 배포했지만 오래전부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를 위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개발하지 않았다. 맥 OS용도 [[2006년]] 1월 31일부터 개발하지 않고 있고 다운로드 또한 중지되었다. 또한 [[윈도우 11]]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으며, [[윈도우 11]]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엣지]]로 바뀌어 열린다. 단, IE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실행이 가능하다. === 버전 1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1}} '''인터넷 익스플로러 1'''은 [[1995년]] [[8월]]에 공개되었으며,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의 수정판이였다. === 버전 2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2}} '''인터넷 익스플로러 2'''는 [[윈도우 95|윈도우 95 OSR1]], [[윈도우 NT 4.0|윈도우 NT 4.0 영어판]] 두 곳에 포함되었으며. [[SSL]] 프로토콜 등의 기능을 지원했으며. 맥 OS도 지원했던 브라우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1]]과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 버전 3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3}} '''인터넷 익스플로러 3'''은 [[1996년]] [[8월 13일]]에 공개되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최초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윈도우 95|윈도우 95 OSR2, 2.1]], [[윈도우 NT 4.0|윈도우 NT 4.0 한글판]]에 기본 내장되어있고, 버전 3에서는 [[HTML]] 3.2 및 [[액티브엑스]] 제어와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자바]] [[애플릿]]의 실행 환경을 갖추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에 견줄 만한 기능까지 만들었다.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윈도우 2000 RTM]]과 같이 지원이 [[200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 버전 4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4}} '''인터넷 익스플로러 4'''는 [[1997년]] [[9월]]에 공개되었으며, [[윈도우 95|윈도우 95 OSR2.5]], [[윈도우 98]]에 기본 내장되어 있다. 버전 4부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윈도우 NT 4.0 서버, 윈도우 NT 4.0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2000 서비스팩 1과 같이 지원이 2004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 버전 5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5}} '''인터넷 익스플로러 5'''는 [[1999년]] [[3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5.0은 [[윈도우 98|윈도우 98 SE]]에 5.01은 [[윈도우 2000]]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br /> [[2000년]] [[7월]]에 나온 '''인터넷 익스플로러 5.5'''는 인쇄 미리 보기, CSS, HTML 표준 지원, 개발자 API가 개선되었으며 128 비트 암호화를 지원한다. 이 버전은 [[윈도우 미|윈도우 Me]]에 기본 포함되어 있었고, [[윈도우 95]]에서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 버전 6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6}}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윈도우 XP]] 출시 몇 개월 전인 [[2001년]] [[8월 27일]]에 공개되었다. 이 버전은 DHTML 향상, 콘텐츠 제한 인라인 프레임, CSS 수준 1, [[문서 객체 모델|DOM]] 수준 1, [[SMIL]] 2.0의 부분 지원을 포함하고 있다.<ref name="Axistive">{{웹 인용 |url = http://www.axistive.com/smil-standards-and-microsoft-internet-explorer-6-7-and-8.html |제목 = SMIL Standards and Microsoft Internet Explorer 6, 7, and 8 |확인날짜=2013-11-22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603084409/http://www.axistive.com/smil-standards-and-microsoft-internet-explorer-6-7-and-8.html |보존날짜 = 2007-06-03 |url-status = dead }}</ref> 2001년에 출시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에 버전 6.0 서비스 팩 1이 배포 되었으며, 이 버전은 [[윈도우 98|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미|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0 서비스 팩 2가 포함되었고, 이는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이 쉬었으나 웹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보안상의 문제로 2006년 PC월드 '전대 미문의 최악의 기술' 25위 중 8위에 선정된 바가 있으며,<ref>{{뉴스 인용 |제목 = The 25 Worst Tech Products of All Time |url = http://www.pcworld.com/article/125772-3/the_25_worst_tech_products_of_all_time.html |출판사 = PCWorld |저자 = Dan Tynan |쪽 = 3 |날짜 = 2006-05-26 |확인날짜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20116233704/http://www.pcworld.com/article/125772-3/the_25_worst_tech_products_of_all_time.html |보존날짜 = 2012-01-16 |url-status = dead }}</ref> IE6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또는 8로 업그레이드 하거나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애플 사파리]] 등 다른 브라우저 사용을 권고하였다.<ref>{{웹 인용 |제목 = 마이크로소프트의 Internet Explorer 6 Countdown |url = http://www.ie6countdown.com/ |출판사 = 마이크로소프트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2-01-05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514011142/http://www.ie6countdown.com/ |보존날짜 = 2013-05-14 |url-status = dead }}</ref><ref>{{웹 인용 |제목 = ie6nomore |url = http://www.ie6nomore.com/ |출판사 = ie6nomore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2-01-05 }}</ref> === 버전 7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7}}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은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 [[10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에는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버전 6에까지 제공되지 않던 탭 기능과 피싱 필터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었다. <br />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 버전 8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8}}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2009년]] [[3월 19일]] (한국시간)에 정식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 표준 모드"로 알려진 새로운 렌더링 모드를 포함하고 있다.<ref>{{웹 인용 |url=http://vasudevg.blogspot.com/2007/12/internet-explorer-8-q.html |제목=meraTechPort: Internet Explorer 8 Q&A<!--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8-02-2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231095612/http://vasudevg.blogspot.com/2007/12/internet-explorer-8-q.html |보존날짜=2007-12-31 |url-status=dead }}</ref> [[2008년]] [[2월]]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의 개인 베타 버전의 공개에 대한 초대장을 제공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blogs.zdnet.com/microsoft/?p=1214 |제목=Private IE 8 beta 1 test build coming soon {{!}} All about Microsoft {{!}} ZDNet.com<!--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8-02-26 |archive-date=2008-02-2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227005636/http://blogs.zdnet.com/microsoft/?p=1214 |url-status= }}</ref>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액티브X 기능을 최소화시키기로 했으므로 액티브X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한국 사이트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br />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3|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 버전 9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9}} '''인터넷 익스플로러 9'''는 [[2011년]] [[3월 14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웹 표준을 보다 준수하여 [[Acid 3]]에서는 95/100으로 이는 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8보다 높은 수치이다. 일부는 한국에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00916140845&type=det IE9 인터넷 뱅킹 호환성에 문제 없다 | ZDNet Korea]</ref> 다만 일부 사이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9부터는 GPU 가속의 지원으로 CPU 뿐만 아니라 GPU도 함께 쓰고 이 기술이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서는 지원하기 힘들다는 문제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는 지원 대상에는 제외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readwriteweb.com/archives/running_windows_xp_no_internet_explorer_9_for_you.php |제목=Running Windows XP? No Internet Explorer 9 For You |확인날짜=2011-02-1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629034505/http://www.readwriteweb.com/archives/running_windows_xp_no_internet_explorer_9_for_you.php |보존날짜=2011-06-29 |url-status=dead }}</ref>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만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br />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비스타]]와 같이 지원이 [[2017년]] [[4월 11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08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다. === 버전 10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10}}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스베이거스의 MIX 11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발표하면서 최초의 플랫폼 프리뷰를 공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이 개발에 3주 정도 걸린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blogs.msdn.com/b/ie/archive/2011/04/12/native-html5-first-ie10-platform-preview-available-for-download.aspx Native ''HTML5: First IE10 Platform Preview Available for Download'']</ref> 이번 출시는 CSS3 그라디언트를 포함한 표준 지원을 더 개선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 모드에서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만 모던 UI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은 9와 달리 한국의 대부분의 웹에서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며 급기야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으로의 업데이트를 막는 킷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기도 했다. <br />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은 [[윈도우 XP|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1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에 종료되었다. === 버전 11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11}} 인터넷 익스플로러 11 빌드가 [[2013년]] [[3월]] 유출된 윈도우 8.1 업데이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빌드에는 탭 동기화를 위한 불완전한 매커니즘을 포함하며 자체 [[사용자 에이전트]]에서 "[[게코 (레이아웃 엔진)|Gecko]]"와 비슷한 것으로 식별한다.<ref name=ars-wblue>{{웹 인용|제목=Windows Blue leaks: More Metro, more multitasking|url=http://arstechnica.com/information-technology/2013/03/windows-blue-leaks-more-metro-more-multitasking/|work=Ars Technica|accessdate= 2013-03-26}}</ref> 나중에 나온 빌드들에는 [[SPDY]], 확장된 개발 도구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며 [[웹GL]] 지원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인터넷 익스플로러다.<ref name=cnet-ie11dev>{{웹 인용|제목=Latest Windows 8.1 build beefs up IE developer tools|url=http://news.cnet.com/8301-10805_3-57582508-75/latest-windows-8.1-build-beefs-up-ie-developer-tools/|work=CNET|accessdate= 2013-05-29}}</ref><ref name=verge-ie11webgl>{{웹 인용|제목=Microsoft teases Internet Explorer 11 WebGL support on Vine|url=http://www.theverge.com/2013/5/22/4355942/internet-explorer-11-webgl-support-teased-on-vine|work=The Verge|accessdate= 2013-05-29}}</ref> <br />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16용은 [[윈도우 서버 2016]]과 같이 지원이 [[2027년]] [[1월 12일]] 종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윈도우 10]]용과 [[윈도우 서버 2019]]용은 [[2022년]] [[6월 15일]]에 종료되었다. == 운영 체제 호환 == 모든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일부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붙는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80%; text-align:center;" |- ! rowspan="2" style="width:3%" | 버전 ! rowspan="2" style="width:3%" | 연도 ! rowspan="2" style="width:9%" | [[레이아웃 엔진|레이아웃<br />엔진]] ! colspan="16"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rowspan="2" style="width:5%" | [[OS/2|IBM<br />OS/2]] ! colspan="4" | [[애플]] [[맥 OS]] ! rowspan="2" style="width:5%" | [[유닉스]]<br />HP-UX<br />솔라리스 |- ! style="width:5%" | [[윈도우 10|10]], [[윈도우 서버 2016|서버 16]],<br />[[윈도우 서버 2019|서버 19]] ! style="width:5%" | [[윈도우 8.1|8.1]], 서버<br />12 R2 ! style="width:5%" | [[윈도우 8|8]], [[윈도우 서버 2012|서버 12]] ! style="width:5%" | [[윈도우 7|7]], [[윈도우 서버 2008 R2|서버<br />08 R2]] ! style="width:5%" | [[윈도우 비스타|비스타]],<br />[[윈도우 서버 2008|서버 08]] ! style="width:5%" | [[윈도우 서버 2003|서버 03,<br />서버 03 R2]] ! style="width:4%" | [[윈도우 XP|XP]] ! style="width:4%" | [[윈도우 미|Me]] ! style="width:4%" | [[윈도우 2000|2000]] ! style="width:4%" | [[윈도우 98|98, 98 SE]] ! style="width:4%" | [[윈도우 NT 4.0|NT<br />4.0]] ! style="width:4%" | [[윈도우 95|95]] ! style="width:4%" | [[윈도우 NT 3.51|NT<br />3.51]] ! style="width:4%" | [[윈도우 NT 3.5|NT<br />3.5]] ! style="width:4%" | [[윈도우 NT 3.1|NT<br />3.1]] ! style="width:4%" | [[윈도우 3.1x|3.1x]] ! style="width:4%" | [[맥 OS X|X]]<br />[[PowerPC|PPC]] ! style="width:4%" | [[시스템 7|7.6]]~<br />[[맥 OS 9|9.2.2]]<br />PPC ! style="width:4%" | [[시스템 7|7.5.x]]<br />PPC ! style="width:4%" | [[시스템 7|7.1]]~<br />[[맥 OS 8|8.1]]<br />68K<br />[[시스템 7|7.1.2]]<br />PPC ! style="width:4%" | [[시스템 7|7.0.1]]<br />68K |- ! - | 연도 | - | <!-- 10/서버 2016/서버 2019 ---> 2015~2018 | <!-- 8.1/서버 2012 R2 ---> 2013 | <!-- 8/서버 2012 --------> 2012 | <!-- 7/서버 2008 R2 ----> 2009 | <!-- 비스타/서버 2008 --> 2006~2008 | <!--서버 2003/서버 2003 R2--> 2003~2005 | <!-- XP -------> 2001 | <!-- ME -------> 2000 | <!-- 2000 -----> 2000 | <!-- 98/98 SE -------> 1998~1999 | <!-- NT4 ------> 1996 | <!-- 95 -------> 1995 | <!-- NT3.51 ---> 1995 | <!-- NT3.5 ----> 1994 | <!-- NT3.1 ----> 1993 | <!-- 3.1x -----> 1992 | <!-- OS/2 -----> 1993 | <!-- OS X -----> 2001 | <!-- 7.6 PPC --> 1997 | <!-- 7.5 PPC --> 1994 | <!--7.1.x&68K--> 1992 | <!-- 7.0.1 ----> 1991 | <!-- Unix -----> 1990s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11|IE11]] | <!-- 출시년도 ----------> 2013<br/>~<br/>2018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7]] | <!-- 10/서버 2016 --------> {{Yes|표준}} | <!-- 8.1/서버 2012 R2 --------> {{Yes|표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Yes|가능*}}<br />SP1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10|IE10]] | <!-- 출시년도 ----------> 2012<br/>~<br/>2013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6]]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Yes|표준*}} | <!-- 7/서버 2008 R2 ----> {{Yes|가능*}}<br />SP1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9|IE9]] | <!-- 출시년도 ----------> 2011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5]]<ref>{{웹 인용 |url = http://blogs.msdn.com/ie/archive/2010/03/23/introducing-ie9-s-user-agent-string.aspx |제목 = Introducing IE9’s User Agent String |publisher = Microsoft |date=2010-03-23 |first=Marc |last=Silbey}}</ref>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Yes|가능*}} | <!-- 비스타/서버 2008 --> {{Yes|가능*}}<br />SP2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8|IE8]] | <!-- 출시년도 ----------> 2009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4]]<ref>{{웹 인용 |제목 = The Internet Explorer 8 User-Agent String |url = http://blogs.msdn.com/ie/archive/2009/01/09/the-internet-explorer-8-user-agent-string-updated-edition.aspx |publisher = MSDN |날짜 = 2009-01-09 |확인날짜 = 2009-03-22}}</ref>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Yes|표준*}} | <!-- 비스타/서버 2008 --> {{Yes|가능*}}<br />SP1/2 | <!--서버 2003--> {{Yes|가능*}}<br />SP2 | <!-- XP -------> {{Yes|가능*}}<br />SP3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7|IE7]] | <!-- 출시년도 ----------> 2006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3.1]]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Yes|표준*}} | <!--서버 2003--> {{Yes|가능*}}<br />SP1/2 | <!-- XP -------> {{Yes|가능*}}<br />SP2/3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6|IE6]] | <!-- 출시년도 ----------> 2001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Yes|표준*}} | <!-- XP -------> {{Yes|표준*}} | <!-- ME -------> {{Yes|가능*}}<br />6.0 SP1 | <!-- 2000 -----> {{Yes|가능*}}<br />6.0 SP1 | <!-- 98 -------> {{Yes|가능*}}<br />6.0 SP1 | <!-- NT4 ------> {{Yes|가능*}}<br />6.0 SP1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IE5.5 | <!-- 출시년도 ----------> 2000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Yes|표준*}} | <!-- 2000 -----> {{Yes|가능*}} | <!-- 98 -------> {{Yes|가능*}} | <!-- NT4 ------> {{Yes|가능*}} | <!-- 95 -------> {{Yes|가능*}}<br />5.5 SP2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5|IE5.0]] | <!-- 출시년도 ----------> 1999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br />(윈도우)<br />[[태즈먼 (레이아웃 엔진)|태즈먼]] (맥)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Yes|표준*}}<br /><sup>5.01 SP4</sup> | <!-- 98 -------> {{Yes|표준*}}<br />[[윈도우 98|98SE]] | <!-- NT4 ------> {{Yes|가능*}} | <!-- 95 -------> {{Yes|가능*}} | <!-- NT3.51 ---> {{Yes|가능*}}<br />16-bit | <!-- NT3.5 ----> {{yes|가능*}} | <!-- NT3.1 ----> {{yes|가능*}} | <!-- 3.1x -----> {{Yes|가능*}}<br />16-bit | <!-- OS/2 -----> {{No|불가}} | <!-- OS X -----> {{Yes|표준*}}<br />5.2.3 | <!-- 7.6 PPC --> {{Yes|표준*}}<br />5.1.7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Yes|가능*}}<br />5.01 SP1 |- ! {{rh}} | IE4.5 | <!-- 출시년도 ----------> 1999 | <!-- 레이아웃 엔진 -----> -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No|불가}}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Yes|표준*}} | <!-- 7.5 PPC --> {{Yes|가능*}}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4|IE4.0]] | <!-- 출시년도 ----------> 1997 | <!-- 레이아웃 엔진 -----> [[트라이던트 (레이아웃 엔진)|트라이던트]]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Yes|표준*}} | <!-- NT4 ------> {{Yes|가능*}} | <!-- 95 -------> {{Yes|표준*}}<br />OSR2.5 | <!-- NT3.51 ---> {{Yes|가능*}}<br />16-bit | <!-- NT3.5 ----> {{yes|가능*}} | <!-- NT3.1 ----> {{yes|가능*}} | <!-- 3.1x -----> {{Yes|가능*}}<br />16-bit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Yes|표준*}} | <!-- 7.5 PPC --> {{Yes|가능*}} | <!--7.1.x&68K--> {{Yes|가능*}}<br />4.01 | <!-- 7.0.1 ----> {{No|불가}} | <!-- Unix -----> {{Yes|가능*}}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3|IE3.0]] | <!-- 출시년도 ----------> 1996 | <!-- 레이아웃 엔진 -----> -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Yes|가능*}} | <!-- 95 -------> {{Yes|표준*}}<br />OSR2/2.1 | <!-- NT3.51 ---> {{Yes|가능*}}<br />16-bit | <!-- NT3.5 ----> {{Yes|가능*}}<br />16-bit | <!-- NT3.1 ----> {{yes|가능*}} | <!-- 3.1x -----> {{Yes|가능*}}<br />16-bit | <!-- OS/2 -----> 윈도우<br />16-bit | <!-- OS X -----> {{No|불가}} | <!-- 7.6 PPC --> {{Yes|표준*}} | <!-- 7.5 PPC --> {{Yes|가능*}} | <!--7.1.x&68K--> {{Yes|표준*}} | <!-- 7.0.1 ----> {{No|불가}} | <!-- Unix -----> [[유닉스용 인터넷 익스플로러|베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2|IE2.0]] | <!-- 출시년도 ----------> 1995 | <!-- 레이아웃 엔진 -----> -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Yes|표준*}} | <!-- 95 -------> {{Yes|표준*}}<br />OSR1 | <!-- NT3.51 ---> {{Yes|가능*}}<br />16-bit | <!-- NT3.5 ----> {{Yes|가능*}}<br />16-bit | <!-- NT3.1 ----> {{Yes|가능*}}<br />16-bit | <!-- 3.1x -----> {{Yes|가능*}}<br />16-bit | <!-- OS/2 -----> 윈도우<br />16-bit | <!-- OS X -----> {{No|불가}} | <!-- 7.6 PPC --> {{Yes|가능*}} | <!-- 7.5 PPC --> {{Yes|가능*}} | <!--7.1.x&68K--> {{Yes|가능*}} | <!-- 7.0.1 ----> {{Yes|가능*}}<br />2.0.1 | <!-- Unix -----> {{No|불가}} |- ! {{rh}} | IE1.5 | <!-- 출시년도 ----------> 1996 | <!-- 레이아웃 엔진 -----> [[스파이글래스 (레이아웃 엔진)|스파이글래스]]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Yes|가능*}} | <!-- 95 -------> {{Yes|가능*}} | <!-- NT3.51 ---> {{Yes|가능*}} | <!-- NT3.5 ----> {{Yes|가능*}}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 {{rh}} | [[인터넷 익스플로러 1|IE1.0]] | <!-- 출시년도 ----------> 1995 | <!-- 레이아웃 엔진 -----> [[스파이글래스 (레이아웃 엔진)|스파이글래스]] | <!-- 10/서버 2016 --------> {{No|불가}} | <!-- 8.1/서버 2012 R2 --------> {{No|불가}} | <!-- 8/서버 2012 --------> {{No|불가}} | <!-- 7/서버 2008 R2 ----> {{No|불가}} | <!-- 비스타/서버 2008 --> {{No|불가}} | <!--서버 2003--> {{No|불가}} | <!-- XP -------> {{No|불가}} | <!-- ME -------> {{No|불가}} | <!-- 2000 -----> {{No|불가}} | <!-- 98 -------> {{No|불가}} | <!-- NT4 ------> {{No|불가}} | <!-- 95 -------> {{yes|가능}}<br /> [[마이크로소프트 플러스!|Plus!*]] | <!-- NT3.51 ---> {{No|불가}} | <!-- NT3.5 ----> {{No|불가}} | <!-- NT3.1 ----> {{No|불가}} | <!-- 3.1x -----> {{No|불가}} | <!-- OS/2 -----> {{No|불가}} | <!-- OS X -----> {{No|불가}} | <!-- 7.6 PPC --> {{No|불가}} | <!-- 7.5 PPC --> {{No|불가}} | <!--7.1.x&68K--> {{No|불가}} | <!-- 7.0.1 ----> {{No|불가}} | <!-- Unix -----> {{No|불가}} |} <ref>{{웹 인용 |제목 = 인터넷 익스플로러 - 매킨토시 또는 윈도우 3.1 |url = http://support.microsoft.com/kb/164539 |확인날짜 = 2007-03-01}}</ref><ref>{{웹 인용 |url = http://browser.netscape.com/ns8/download/archive47x.jsp |제목 = Download Netscape 4.7x & 4.8 |확인날짜 = 2007-03-01}}</ref> ==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 == {{본문|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Internet Explorer Mobile)은 [[윈도우 모바일]]을 위한 웹 브라우저이다. 윈도우 모바일 5.0 이전에는 포켓 인터넷 익스플로러(PIE)라고도 불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폰]]에서도 쓰인다. 다만 [[윈도우 10 모바일]]에서 보조프로그램으로 격하되고, 모바일에선 CPU 미지원으로 액티브X를 쓸 수 없다. ==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고급 보안 설정 == [[윈도우 서버 2003]] 이후부터 제공되는 보안 설정이 강화된 서버용 한정판이다.<ref>레이몬드 첸 저, 손광수 역, 《윈도우개발 282 스토리》, 도서출판 ITC, 2007, 400 ~ 401쪽.</ref> == 시장 점유율 == ===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 [[파일:Internet-explorer-usage-data.svg|섬네일|300px|1995년부터 2019년까지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과거에는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브라우저였다. 그러나 [[모질라 파이어폭스|파이어폭스]], [[오페라 (웹 브라우저)|오페라]], [[구글 크롬]] 등 다른 웹 브라우저들의 시장 점유율이 오름에 따라 2004년 90%에 육박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떨어져서 2008년에는 모든 버전을 합쳐서 60% 후반대를 유지하였다.<ref>{{웹 인용 |제목 = 2008년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gs.statcounter.com/#browser-ww-monthly-200807-200812 |출판사 = 스탯카운터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09-01 }}</ref> 2011년 3월 14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9가 정식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의 시장 점유율은 반등하지 못하고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날 스탯카운터 통계 기준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은 30% 후반대를 머물고 있다.<ref>{{웹 인용 |제목 =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gs.statcounter.com |출판사 = 스탯카운터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12-30 }}</ref> 2016년이후부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10%이하로 내려갔다.<ref>스탯카운터 통계 기준 (2016년)</ref> === 대한민국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 스탯카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부터 8월까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 점유율은 매달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ref>{{웹 인용 |제목 = 2011년 1월 ~ 8월 대한민국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gs.statcounter.com/#browser-KR-monthly-201101-201108 |출판사 = 스탯카운터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11-02 }}</ref> 하지만 2011년 9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처음으로 90% 아래로 떨어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익스플로러 독점 `흔들`…점유율 90% 깨졌다 |url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100278951 |출판사 = 한국경제 |저자 = |날짜 = 2011-10-02 |확인날짜 = }}</ref><ref>{{웹 인용 |제목 = 2011년 대한민국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gs.statcounter.com/#browser-KR-monthly-201101-201112 |출판사 = 스탯카운터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12-04 }}</ref> 2011년 12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전별 점유율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이 46.48%로 가장 높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7]] 13.43%, [[인터넷 익스플로러 9]] 13.06%, [[인터넷 익스플로러 6]] 7.99% 순이다.<ref>{{웹 인용 |제목 = 2011년 12월 대한민국 버전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gs.statcounter.com/#browser_version-KR-monthly-201112-201112-bar |출판사 = 스탯카운터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12-04 }}</ref>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전 세계에 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한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매우 높고, 구 버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도 높기에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웹 표준 문제]]가 지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웹브라우저 편식 한국 ‘우물 안 인터넷 강국’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0&aid=0002094058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김상훈 기자 |쪽 = . |날짜 = 2009-11-21 |확인날짜 = 2009-12-12 }}</ref> 한편 국내에서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2019년 4월기준 점유율은 24.6%대로 [[구글 크롬]](63.6%)에 이어서 아직까지는 2위로 사용빈도가 있다. == 보안 문제 == === 중대한 크로스 버전 취약점 === 2014년 4월 26일, 마이크로스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6부터 11까지 버전에서 "원격 코드 실행" 취약점을 발표했다.<ref>{{웹 인용| url=https://technet.microsoft.com/en-US/library/security/2963983 | title=Microsoft Security Advisory 2963983 | date= 2014-04-26 | publisher=Microsoft | accessdate= 2014-04-28}}</ref> 2014년 4월 28일, 미 행정 부처인 [[국토안보부]]의 산하 컴퓨터 긴급 대응팀인, 미국 컴퓨터 긴급 대응팀 (이하, US-CERT)은 성명을 통해 주의보를 내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외부의 프로그램이나 사용자가 "시스템에 접근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취약하다라고 전했다.<ref>{{웹 인용 | url=http://www.reuters.com/article/2014/04/28/us-cybersecurity-microsoft-browser-idUSBREA3Q0PB20140428 | title=U.S., UK advise avoiding Internet Explorer until bug fixed | first=Jim | last=Finkle | date=2014-04-28 | publisher=Reuters | accessdate=2014-04-28 | archive-date=2014-04-29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29024131/http://www.reuters.com/article/2014/04/28/us-cybersecurity-microsoft-browser-idUSBREA3Q0PB20140428 }}</ref> US-CERT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보안의 취약점으로부터의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사안을 검토하고, 버그를 고칠때까지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하라고 권고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us-cert.gov/ncas/current-activity/2014/04/28/Microsoft-Internet-Explorer-Use-After-Free-Vulnerability-Being | title=Microsoft Internet Explorer Use-After-Free Vulnerability Guidance | date= 2014-04-28 | publisher=United States Computer Emergency Readiness Team | accessdate= 2014-04-28}}</ref><ref>{{웹 인용| url=http://www.kb.cert.org/vuls/id/222929 | title=Vulnerability Note VU#222929 - Microsoft Internet Explorer use-after-free vulnerability | date= 2014-04-27 | publisher=Carnegie Mellon University | accessdate= 2014-04-28}}</ref> 영국 국립 컴퓨터 비상상황 대응 팀 (The UK National Computer Emergency Response Team) (이하, CERT-UK)는 자문 발행물을 통해, 예상되었던 우려이며,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적인 단계의 백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백신을 최신상태로 유지해달라고 당부했다.<ref>{{웹 인용 | url=http://www.chicagotribune.com/business/technology/chi-microsoft-explorer-security-flaws-20140428,0,4797833.story | title=U.S.: Stop using Internet Explorer until security holes are fixed | date=2014-04-28 | publisher=Chicago Tribune | accessdate=2014-04-28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29003244/http://www.chicagotribune.com/business/technology/chi-microsoft-explorer-security-flaws-20140428,0,4797833.story | 보존날짜=2014-04-29 | url-status=dead }}</ref> 사이버 보안 회사인 [[노턴라이프록]]은 "Windows XP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ref>{{웹 인용| url=http://www.bbc.com/news/technology-27184188 | title=Microsoft warns of Internet Explorer flaw | date= 2014-04-28 | publisher=BBC | accessdate= 2014-04-28}}</ref> 그리고 업데이트 지원이 종료되었다. == 유용성 ==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온라인 뱅킹#호환성|온라인 뱅킹 호환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대다수 웹사이트 개발자들이 여러 웹 브라우저와 운영 체제들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ActiveX]]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71801031224152002 인터넷 ‘세계 표준’ 갈아타야 - munhwa.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또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도 그 까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를 참고.) 다만 현재는 여러 대체 브라우저를 지원하는 웹사이트가 많아지고 어떤경우에는 아예 익스플로러만 지원하지 않게 하는 웹사이트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웹 브라우저 목록]] *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 *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 [[브라우저 전쟁]]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구성 요소}} {{웹 브라우저}} {{전거 통제}} [[분류:인터넷 익스플로러| ]]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사유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구성 요소]] [[분류:윈도우 웹 브라우저]] [[분류:인간-컴퓨터 상호 작용]] [[분류:뉴스 애그리게이터]] [[분류:1995년 소프트웨어]] [[분류:FTP 클라이언트]] [[분류:중단된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분류:중단된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br />{{연도표기원후|1932}} {{기년법|1932}} '''1932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 연호 ==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大韓民國) 14년 *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기원|민국]](民國) 21년 * [[만주국]](滿州國) [[대동 (만주국)|대동]](大同) 원년 * [[일본]](日本) [[쇼와 시대|쇼와]]({{lang|ja|昭和}}) 7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연호)|바오다이]](保大) 7년 == 기년 == * [[만주국]](滿洲國) [[푸이|강덕제]](康德帝) 원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황제|보대제]](保大帝) 7년 == 사건 == * [[1월 1일]] -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인가 * [[1월 8일]] -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도쿄]] [[사쿠라다몬]] 밖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 * [[1월 12일]] - 제주 우도 잠녀들이 열악한 조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봉기([[제주잠녀항쟁]]) * [[2월]] - [[조선혁명군]]이 중국혁명군사령관 [[리춘룬]]과 합작하여 [[한중연합군]] 조직 * [[2월 23일]] - 조선 최대의 농민조합이었던 [[용천]]소작조합 강제 해산 * [[3월]] - [[단천]], [[성진]]에서 [[적색노조사건]]으로 관계자 다수 검거 * [[3월 1일]] - [[만주국]] 건국 * [[3월 11일]] -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이 [[중국의용군]]과 합작하여 만주 신빈현에서 일본군 대파 * [[4월 1일]] - [[한인애국단]]이 [[최흥식]], [[유상근]] 등을 중국 다롄에 파견해 일본 고위관리를 폭살 시도하다 검거 * [[4월 11일]] - 충청남도 [[아산]]에서 [[천연두]] 창궐로 100여명이 사망하였다. * [[4월 12일]] - [[이광수]] 장편 <흙>이 <[[동아일보]]>에 연재 * [[4월 29일]] -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의거 * [[5월]]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본부를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전 * [[5월 1일]] -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잡지)|한글]]> 속간 * [[6월 5일]] -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봉안식 거행 * [[6월 15일]] - <[[조선일보]]> 제8대 사장으로 [[조만식]] 취임 * [[6월 18일]] - [[국제 농구 연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되었다. * [[7월 5일]] -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의 총리로 취임 * [[7월 10일]] - [[방응모]], <[[조선일보]]> 인수 * [[7월 29일]] - 경상북도 일대에 폭염으로 섭씨 41-42도 기록, 일사병으로 5명 사망 * [[7월 30일]] -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932년 하계 올림픽|제10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 (~[[8월 14일]]). * [[7월 31일]] - [[나치]],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됨. * [[9월 19일]] - 한중연합군, 일본군과 제1차 [[쌍성보 전투]]를 벌임 * [[9월 23일]] - [[네지드]]와 [[헤자즈]] 왕국이 합쳐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 [[9월 30일]] -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 * [[10월 3일]] - [[이라크]]가 [[대영 제국|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 [[10월 7일]] - 조선경마령 공포 * [[10월 10일]] - [[히로히토]] 일본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가 일본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 * [[11월 6일]] -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제7대 의회 선거 * [[11월 7일]] - [[한국독립군]], 제2차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 * [[11월 10일]] ** [[김규식]], [[최동오]] 등이 상하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조직 ** [[조선총독부]]가 [[정신작흥운동]] 개시 * [[11월 20일]] - 통영운하와 통영해저도로 준공 * [[11월 27일]] - 황해도 해주구세요원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 발행 * [[12월 3일]] - 일본 농림성이 [[미곡법]]에 따라 한국미 50만 석을 매입할 것을 지시 * [[12월 19일]] - [[윤봉길]]이 일본 [[가나자와시]]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순국 * [[12월 25일]] - 한중연합토일군이 만주 동만에서 일본만주연합군 2천명과 격전해 대승을 거둠 * [[12월 27일]] - [[조선어철자위원회]] 조직 * 덴마크에서 [[레고 그룹]] 설립. == 문화 == * [[8월 6일]] - 제1회 [[베니스 영화제]] 개막. == 탄생 == {{분류 참고|1932년 출생}} === 1월 === * [[1월 3일]] - 미국의 배우 [[대브니 콜먼]]. (~[[2024년]]) * [[1월 4일]] - 스페인의 영화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2023년]]) * [[1월 5일]] **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작가 [[움베르토 에코]]. (~[[2016년]]) ** 영국의 축구 선수 [[빌 폴크스]]. (~[[2013년]]) * [[1월 8일]] - 대한민국의 관료 겸 정치인 [[이상희 (1932년)|이상희]]. (~[[2022년]]) *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윤재명]]. ** 미국의 육상 선수 [[딘 스미스 (육상 선수)|딘 스미스]]. (~[[2023년]]) * [[1월 1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윤형상]]. (~[[2022년]]) * [[1월 2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금진호]]. (~[[2024년]]) * [[1월 21일]] ** 대한민국의 경찰관 [[최규식 (경찰관)|최규식]]. (~[[1968년]]) ** 일본의 기업인 [[이나모리 가즈오]]. (~[[2022년]]) * [[1월 23일]]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라도]]. (~[[2022년]]) * [[1월 24일]] -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백기완]]. (~[[2021년]]) * [[1월 25일]] - 대한민국의 성우 [[구민]]. === 2월 === * [[2월 6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1984년]]) ** 쿠바의 혁명가, 아나키스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1959년]]) * [[2월 8일]] - 미국의 작곡가 [[존 윌리엄스 (작곡가)|존 윌리엄스]]. * [[2월 9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히로오카 다쓰로]]. * [[2월 17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박성용]]. (~[[2005년]]) * [[2월 18일]] - 미국의 영화 감독 [[밀로스 포만]]. (~[[2018년]]) *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만섭]]. (~[[2015년]]) ** 미국의 음악가 [[조니 캐시]]. (~[[2003년]]) * [[2월 26일]]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외교관 [[함병춘]]. (~[[1983년]]) * [[2월 27일]] - 영국의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2011년]]) * [[2월 29일]] -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백기완]]. === 3월 === * [[3월 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윤환 (1932년)|김윤환]]. (~[[2003년]]) * [[3월 6일]] - 폴란드의 역사가, 정치인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 (~[[2008년]]) * [[3월 7일]] -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김문기 (1932년)|김문기]]. (~[[2021년]]) * [[3월 12일]] - 대한민국의 언론 출신 정치인 [[박권흠]]. (~[[2024년]]) * [[3월 14일]] - 일본의 성우 [[오오타케 히로시]]. (~[[2022년]]) * [[3월 15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이호철 (소설가)|이호철]]. (~[[2016년]]) * [[3월 18일]] - 미국의 작가 [[존 업다이크]]. (~[[2009년]]) *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곽순옥]]. (~[[2023년]]) **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 [[신상현]]. (~[[2024년]]) * [[3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염보현]]. (~[[2021년]]) *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광석]]. (~[[2008년]]) * [[3월 31일]] - 일본의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 (~[[2013년]]) === 4월 === * [[4월 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하경근]]. (~[[2015년]]) ** 미국의 배우 [[데비 레이놀즈]]. (~[[2016년]]) * [[4월 4일]] -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1986년]]) * [[4월 5일]] -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 [[오형식 (1932년)|오형식]]. (~[[2006년]]) * [[4월 6일]] - 대한민국의 헌법학자, 정치인 [[갈봉근]]. (~[[2002년]]) * [[4월 10일]] ** 이집트의 배우 [[오마르 샤리프]]. (~[[201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임영득]]. * [[4월 14일]] - 미국의 음악가 [[로레타 린]]. (~[[2022년]]) * [[4월 1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종식 (1932년)|이종식]]. * [[4월 18일]] -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기업인 겸 정치가 [[이인구 (정치인)|이인구]]. (~[[2017년]]) * [[4월 19일]] - 콜롬비아의 조각가 [[페르난도 보테로]]. (~[[2023년]]) * [[4월 22일]] - 일본의 음악가 [[토미타 이사오]]. (~[[2016년]]) * [[4월 27일]] - 프랑스의 배우 [[아누크 에메]]. === 5월 === * [[5월 11일]] - 대한민국의 군인, 경찰, 제16대 서울시장, 정치 [[구자춘]]. (~[[1996년]]) * [[5월 15일]] - 미국의 정치가, 뉴어크의 첫 흑인 시장 [[케네스 A. 깁슨]]. (~[[2019년]]) * [[5월 2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노인환]]. (~[[2023년]]) ** 대한민국의 교육인 [[정희경]]. (~[[2024년]]) ** 일본의 정치인 [[와타나베 고조]]. (~[[2020년]]) === 6월 === * [[6월 12일]] - 대한민국의 의료인 [[이길여]]. * [[6월 13일]] - 미국의 물리학자 [[찰스 W. 미스너]]. (~[[2023년]]) * [[6월 21일]] - 아르헨티나의 음악가 [[랄로 시프린]] * [[6월 24일]] - 일본의 제12대 재무재신 [[후지이 히로히사]]. (~[[2022년]]) *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외교관 [[노재원]]. (~[[2006년]]) === 7월 === * [[7월 2일]] - 미국의 기업인, 웬디스의 창업자 [[데이브 토머스 (기업인)|데이브 토머스]]. (~[[1973년]]) * [[7월 9일]] - 미국의 정치가 [[도널드 럼즈펠드]]. (~[[2021년]]) * [[7월 12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오티스 데이비스]]. (~[[2024년]]) * [[7월 1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군인 [[신치구]]. (~[[2023년]]) * [[7월 20일]] - 한국계 미국인 현대미술가 [[백남준]]. (~[[2006년]]) === 8월 === * [[8월 2일]] - 미국의 스포츠 기업인 [[라마 헌트]]. (~[[2006년]]) * [[8월 7일]] - 에티오피아의 육상 선수 [[아베베 비킬라]]. (~[[2002년]]) * [[8월 12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이영욱 (1932년)|이영욱]]. (~[[2024년]]) * [[8월 15일]] - 미국의 영화배우 [[애비 돌턴]]. (~[[2020년]]) * [[8월 17일]] ** 영국의 소설가 [[V. S. 나이폴]]. (~[[2018년]]) ** 프랑스의 삽화가 [[장자크 상페]]. (~[[2022년]]) * [[8월 18일]] - 프랑스의 생물학자 [[뤼크 몽타니에]]. (~[[2022년]]) * [[8월 24일]] - 영국의 추기경 [[코맥 머피오코너]]. (~[[2017년]]) * [[8월 26일]] - 미국의 우주비행사 [[조 엥글]]. (~[[2024년]]) * [[8월 2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나오연]]. === 9월 === * [[9월 3일]] - 미국의 배우 [[아일린 브레넌]]. (~[[2013년]]) * [[9월 7일]]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고석규]]. (~[[1958년]]) * [[9월 9일]] ** 대한민국의 경찰관 [[최규식 (경찰관)|최규식]]. (~[[1968년]]) ** 미국의 배우 [[미치 매콜]]. (~[[2024년]]) * [[9월 10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정호용]]. * [[9월 13일]] - 대한민국의 언론 출신 정치인 [[이진희 (정치인)|이진희]]. * [[9월 17일]] - 미국의 소설가 [[프레드 스테워트]]. (~[[2007년]]) * [[9월 21일]] - 미국의 영화배우 [[믹키 컨]]. (~[[2022년]]) * [[9월 25일]] - 우크라이나의 오페라 가수 [[아나톨리 솔로비야넨코]]. (~[[1999년]]) * [[9월 26일]] ** 인도의 정치인 [[만모한 싱]]. **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 * [[9월 30일]] **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 [[김용수 (1932년)|김용수]]. ** 일본의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2022년]]) === 10월 === * [[10월 3일]] - 대한민국의 택시기사 [[김사복]]. (~[[1984년]]) * [[10월 5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이도선 (1932년)|이도선]]. * [[10월 8일]] ** 대한민국의 승려 [[법정 (승려)|법정]]. (~[[2010년]]) ** 웨일스의 스누커 선수 [[레이 리어던]]. (~[[2024년]]) *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비전향장기수 김동기. * [[10월 13일]] - 미국의 수학자 [[존 그리그스 톰프슨|존 G그리그스 톰프슨]]. * [[10월 14일]] - 미국의 모델, 영화배우 [[다이안 손]]. (~[[2020년]]) * [[10월 27일]] -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래스]]. (~[[1963년]]) * [[10월 28일]] - 구 소련의 정치인 [[블라디미르 이바시코]]. (~[[1994년]]) * [[10월 30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루이 말]]. (~[[1995년]]) ** 대한민국의 국정원장 [[서동권]]. === 11월 === * [[11월 4일]] - 오스트리아의 전 대통령 [[토마스 클레스틸]]. (~[[2004년]]) * [[11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종문 (1932년)|박종문]]. ** 대한민국의 승려, 저술가 [[법정 (승려)|법정]]. (~[[2010년]]) ** 중국의 작가 [[바오퉁]]. (~[[2022년]]) * [[11월 8일]] - 프랑스의 배우 [[스테판 오드랑]]. (~[[2018년]]) * [[11월 13일]] - 미국의 원반던지기 선수 [[올가 피코토바]]. (~[[2024년]]) *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시인, 교육자 [[이성교]]. (~[[2021년]]) === 12월 === * [[12월 4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2021년]]) * [[12월 5일]] - 미국의 가수 [[리틀 리처드]]. (~[[2020년]]) * [[12월 7일]] - 미국의 배우 [[엘런 버스틴]]. *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경재 (1932년)|이경재]]. (~[[2021년]]) *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재홍 (1932년)|김재홍]]. (~[[2001년]]) * [[12월 16일]] - 잉글랜드의 만화가 [[퀜틴 블레이크]]. *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영배 (1932년)|김영배]]. (~[[2013년]]) * [[12월 28일]] - 미국의 영화배우 [[니셸 니컬스]]. (~[[2022년]]) *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최일남]]. (~[[2023년]]) === 미상 === *대한민국의 성우 [[신원균 (성우)|신원균]]. (~[[1986년]]) == 사망 == [[파일:Colorpictureofgeorgeastman.jpg|섬네일|120px|조지 이스트먼]] [[파일:John_charles_fields.jpg|섬네일|120px|존 필즈]] {{분류 참고|1932년 사망}} * [[1월 24일]] - 독일의 히틀러 청소년단원 [[헤르베르트 노르쿠스]]. ([[1916년]]~) * [[3월 14일]] -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 ([[1854년]]~) * [[4월 5일]] - 멕시코의 작곡가 [[구티 카르데나스]]. ([[1905년]]~) * [[4월 20일]] - 이탈리아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 ([[1858년]]~) * [[5월 18일]] - 독일의 법학자 [[에른스트 폰 벨링]]. ([[1866년]]~) * [[8월 9일]] - 캐나다의 수학자 [[존 찰스 필즈]]. ([[1863년]]~) * [[9월 16일]] - 웨일스 출신의 할리우드 무명 여배우 [[페그 엔트위슬]]. ([[1908년]]~) *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봉창]]. ([[1900년]]~) * [[11월 17일]]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이회영]]. ([[1867년]]~) * [[12월 19일]]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1908년]]~) == 노벨상 == * '''문학상''': * '''물리학상''':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생리학 및 의학상''': * '''평화상''': * '''화학상''': == 달력 == {{연간달력|1932}} === 음양력 대조 일람 ===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임인]] || 대 || [[2월 6일]] || [[정유 (간지)|정유]] |- | [[음력 2월|2월]] || [[계묘]] || 대 || [[3월 7일]] || [[정묘]] |- | [[음력 3월|3월]] || [[갑진]] || 대 || [[4월 6일]] || [[정유 (간지)|정유]] |- | [[음력 4월|4월]] || [[을사]] || 소 || [[5월 6일]] || [[정묘]] |- | [[음력 5월|5월]] || [[병오]] || 대 || [[6월 4일]] || [[병신]] |- | [[음력 6월|6월]] || [[정미]] || 소 || [[7월 4일]] || [[병인]] |- | [[음력 7월|7월]] || [[무신 (간지)|무신]] || 대 || [[8월 2일]] || [[을미]] |- | [[음력 8월|8월]] || [[기유]] || 소 || [[9월 1일]] || [[을축]] |- | [[음력 9월|9월]] || [[경술]] || 소 || [[9월 30일]] || [[갑오]] |- | [[음력 10월|10월]] || [[신해]] || 대 || [[10월 29일]] || [[계해]] |- | [[음력 11월|11월]] || [[임자]] || 소 || [[11월 28일]] || [[계사 (간지)|계사]] |- | [[음력 12월|12월]] || [[계축]] || 대 || [[12월 27일]] || [[임술]] |} {{전거 통제}} [[분류:1932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2000}} {{기년법|2000}} {{요즘 화제 년월|2000년}} '''2000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 해이다. == 사건 == * [[1월 1일]] -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축제]]가 전세계에 걸쳐 열렸으나, [[제2천년기]]와 [[20세기]]는 '''2000년''' '''[[12월 31일]] 24시 00분 00초'''에 종료되었다. * [[1월 5일]] - [[하나로통신]]에서 무료 [[인터넷 전화]]를 처음으로 서비스 개시했다. * [[1월 10일]] - 미디어 그룹 [[타임 워너]]와 [[아메리카 온라인]]이 합병을 선언했다. * [[1월 20일]] ** [[버스카드]]의 이용 범위가 [[서울 지하철]]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교통카드]] 기능을 개시했다.<ref>{{뉴스 인용|제목=내일부터 버스카드로 지하철 이용 가능|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7729_19530.html|날짜=2000-01-20|확인날짜=2016-05-22|출판사=MBC 뉴스데스크}}</ref> ** 불법자금 수수 의혹을 받던 [[독일]]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민주연합]] 재정담당관 [[볼프강 휠러]]가 자살했다. 이로 인해 [[헬무트 콜]] 명예총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ref>{{뉴스 인용|제목=불법 정치자금 의혹 독일 기민당 재정 담당자 휠렌 자살|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7818_19530.html|날짜=2000-01-21|확인날짜=2016-05-22|출판사=MBC 뉴스데스크}}</ref> * [[1월 22일]] **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ref>{{뉴스 인용|제목=대구 지하철공사장 붕괴. 버스 추락, 3명 사망추정|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7843_19530.html|출판사=MBC 뉴스데스크|날짜=2000-01-22|확인날짜=2016-07-09}}</ref> 이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대구 지하철 2호선]]의 공사가 전면 임시 중단됐다. ** [[2000년 선수협 파동 사건]]이 발생했다. * [[1월 30일]] -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창당. * [[1월 31일]] - 주식회사 삼진방송이 주식회사 SBC로 변경되었다. * [[2월 11일]] - 영국 정부, [[북아일랜드]] 자치권 회수 및 직접 통치 개시. * [[2월 15일]] - [[윈도우 2000]] 출시. * [[3월 18일]] -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선. * [[3월 26일]] -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당선. * [[4월 5일]] - [[모리 요시로]]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 [[4월 7일]] ~ [[4월 15일]] - [[대한민국]] [[동해안 산불]] * [[4월 12일]] -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정두영]]이 경찰에 체포되다. * [[4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수혁]]이 롯데 자이언츠VS LG트윈스의 경기에서 2회초 2루로 진루하다 [[심정부정맥]]으로 쓰러지다. * [[5월 14일]] -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뇌경색으로 사망. * [[6월 13일]] - [[2000년 남북 정상 회담|남북 정상 회담]] 개최 (~[[6월 15일]]) * [[6월 25일]] - 한국전쟁 50주기 * [[7월 1일]] - 대한민국, 의약 분업 본격 시행. * [[7월 16일]] - 동아시아에서 [[개기월식]]이 관측되었다. * [[7월 25일]] - [[에어프랑스 4590편 추락 사고]] 발생. * [[8월 12일]] - 러시아 해군 소속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바렌츠해]]에서 침몰. 승무원 118명 전원 사망. * [[8월 15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북한 이산가족 200명 서울과 평양에서 반세기만에 혈육 상봉하였다. * [[8월 23일]] - [[태풍 프라피룬]]이 [[대한민국]]에 상륙. * [[9월 5일]] - [[투발루]], [[유엔]] 가입. * [[9월 25일]] - [[산마리노]]와 [[대한민국]]이 수교하였다. * [[9월 28일]] - [[대한민국 정부]], 대북 식량 차관 제공안 공식 발표. * [[10월 4일]] -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붕괴. * [[10월 5일]] -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의해 장례식을 치르다. * [[10월 14일]] -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연구팀, 첫 영장류 복제원숭이 ‘테트라’ 탄생시킴. * [[10월 16일]] - 대한민국과 미국, 적정 수준의 미사일 개발에 원칙적 합의, 사거리 300km 미사일 생산 가능. * [[10월 20일]] - 대한민국 서울에서 [[2000년 서울 아시아·유럽 정상회의]] 개최 (~[[10월 21일]]) * [[10월 31일]] - [[싱가포르 항공 006편 추락 사고|싱가포르 항공 006편]]이 [[대만]] 타오위안 공항에서 이륙하던 도중 공사 차량과 부딪혀서 많은 사상자가 나옴. * [[11월 1일]]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유엔]] 가입. * [[11월 5일]] -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유물을 날조하여 일본의 선사시대 연대를 70만년 전으로 조작했음이 밝혀졌다. * [[11월 7일]] -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승리. 최종 결과는 1개월 뒤 [[플로리다주|플로리다]]의 법원에 의해 결정됨. * [[11월 11일]]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스키 휴양지 키츠슈타인호른 빙하 근처 터널을 통과하던 산악열차에서 발생한 화재로 172명 사망. * [[12월 31일]] **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날. **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 문화 == * [[1월 1일]] - [[KBS 제3라디오]]가 AM 방송으로 개국했다. * [[1월 10일]] - [[명탐정 코난]] 1기가 [[KBS 2TV]]를 통해 첫 방영되다. * [[1월 23일]] - 2000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아메리칸 뷰티]]>가 최우수 극영화상과 감독상, 각본상 부문에서 수상했다.<ref>{{뉴스 인용|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7941_19530.html|제목=아메리칸 뷰티, 골든 글로브 3개부문 석권|저자=최명길|출판사=MBC 뉴스데스크|날짜=2000-01-24|확인날짜=2016-07-09}}</ref> * [[1월 24일]] - [[KBS 1TV]]의 오후 방송 시작시간이 오후 5시에서 오후 4시 5분으로 변경. * [[2월 6일]] - 애니메이션 [[난다 난다 니얀다]]가 일본의 [[TV 아사히]]를 통해 첫 방영되다. * [[2월 17일]] - [[윈도우 2000]]이 출시되다. * [[2월 29일]] -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역|온수]] ~ [[신풍역|신풍]] 구간 개통. * [[3월 3일]] - [[EBS 1TV]]의 [[방귀대장 뿡뿡이]] 첫 방송. * [[3월 6일]] - [[KBS 2TV 어린이 드라마]] [[요정 컴미]] 첫 방송. * [[3월 31일]] - 프로 야구팀 [[SK 와이번스]] 창단. * [[4월 1일]] - [[수도권 전철]] 노선 통합. 이날부터 [[대한민국 철도청|철도청]] 소속 [[수도권 전철|국철]] 노선들은 모두 [[서울 지하철]] 노선명을 따르게 된다. * [[4월 17일]] - [[SBS]]의 [[마법의 섬 띠또띠또]] 첫 방송. * [[5월 1일]] - [[한국방송공사|KBS]] [[인간극장]] 첫방송. * [[5월 2일]] - [[KBS 1TV]]의 [[피플 세상속으로]] 첫 방송. * [[5월 3일]] - [[부산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 [[5월 5일]] - [[KBS 1TV]]의 [[VJ 특공대]] 첫 방송. * [[5월 18일]] - 1세대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가 해체했다. * [[5월 21일]] ** 대한극장 철거 후, 2001년 [[12월 17일]]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재관. 대한극장은 국내 최초의 대형 상영관이다. ** 주러시아 미국 대사관이 착공 15년 만에 완공되다. * [[6월 1일]] - [[대한민국]] 요리전문채널 [[tvN STORY|채널F]](現 tvN STORY)개국 * [[6월 10일]] - 유로 2000 대회 개막. (~ [[7월 2일]]) * [[7월 2일]] - [[대한민국의 전화번호 체계|대한민국의 시외전화 지역번호]]가 16개 광역 지방자치단체 단위로 통합되었다. * [[7월 4일]] - [[대한민국]]에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다. * [[7월 6일]] - [[2006년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독일]]이 선정되었다. * [[7월 24일]] - [[KBS 2TV]]에서 [[수수께끼 블루]] 첫 방송. * [[8월 1일]] - [[서울 지하철 7호선]] 완전 개통([[신풍역|신풍]] ~ [[건대입구역|건대입구]] 구간). * [[8월 7일]] - [[서울 지하철 6호선]] [[봉화산역|봉화산]] ~ [[상월곡역|상월곡]] 구간 개통. * [[8월 14일]] - [[경의선]] [[탄현역]] 개통. * [[8월 1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국립교향악단]], 사상 첫 남북 클래식 합동음악회 갖기 위해 서울 도착. * [[8월 20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국립교향악단]] 첫 서울 공연. * [[8월 29일]] - 서태지 컴백 정규6집 * [[9월 10일]] - [[2000년 하계 올림픽|제27회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시입장 합의 발표. * [[9월 15일]] ~ [[10월 1일]] - [[호주]] [[시드니]]에서 [[2000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 [[9월 17일]] -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 마치고 개관. * [[9월 18일]] - [[임진각]]에서 분단으로 끊어진 [[경의선]] 연결공사 기공식 열림. * [[9월 19일]] - [[2000년 하계 올림픽|시드니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윤미진]], 김남순, [[김수녕]] 금-은-동 수상. * [[9월 27일]] - 뇌과학연구사업단 [[이수영 (교수)|이수영]] 교수팀 세계 3번째로 음성인식 반도체 칩 개발. * [[9월 28일]] - [[태권도]] [[정재은 (태권도 선수)|정재은]], [[2000년 하계 올림픽|시드니올림픽]]서 정식종목 채택 후 첫 금메달. * [[10월 1일]] - [[충북선]] [[청주공항역]] 개통되었다. * [[10월 6일]] - [[KBS 1TV]]에서 [[VJ특공대]]를 마지막 방송을 하다. * [[10월 7일]] - [[EBS 1TV]]의 [[모여라 딩동댕]] 첫 방송. * [[10월 13일]] ** [[VJ특공대]]가 가을개편에 따라 [[KBS 1TV]]에서 [[KBS 2TV]]로 이동했다.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다. * [[11월 10일]] -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가 개통하였다. * [[11월 14일]] - [[정선선]]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비둘기호]]가 퇴역하였다. * [[11월 15일]] - [[대한민국]],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 [[11월 20일]] -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개통. * [[12월 8일]] - [[대전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 [[12월 15일]] - ** [[IMT-2000]] 사업자로 [[SK텔레콤]]과 [[KT]]가 선정됨. ** [[서울 지하철 6호선]] 전 구간([[응암역|응암]]순환 ~ [[상월곡역|상월곡]]) 개통 및 [[이태원역|이태원]] ~ [[약수역|약수]] 구간 무정차 통과. * [[12월 23일]] - [[극동방송]] 표준FM 개국하였다.(주파수 FM 106.9MHz) (호출부호 및 출력 : HLKX-SFM 5KW) * [[12월 30일]] - [[중화인민공화국]]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 개항. * [[위키백과]]의 전신인 [[누피디어]]가 만들어짐. == 탄생 == {{분류 참고|2000년 출생}} === 1월 === * [[1월 1일]] ** 미국의 래퍼 [[아이스 스파이스]].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예원 (아나운서)|이예원]]. ** 대한민국의 가수 [[김경민 (가수)|김경민]]. ** 대한민국의 래퍼, 음악 프로듀서 [[최래성]].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전호준]]. ** 오스트레일리아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롭스카야]]. (~[[2020년]]) * [[1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솔. ** 대한민국의 가수 [[예빛]]. * [[1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기훈 (야구 선수)|김기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명기 (2000년)|이명기]]. * [[1월 5일]] - 일본의 배우 [[마시코 아츠키]]. * [[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권은빈]] ([[CLC (음악 그룹)|CLC]]). ** 중화민국의 가수 [[슈화]] ([[(여자)아이들]]). ** 독일의 축구 선수 [[얀피에테 아르프]]. * [[1월 7일]]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김하윤 (유도 선수)|김하윤]]. ** 대한민국의 가수 [[이준희 (가수)|이준희]]. ** 대한민국의 가수 [[세이 (2000년)|세이]] ([[위키미키]]). * [[1월 8일]] - 미국의 가수 [[노아 사이러스]] * [[1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훈 (가수)|지훈]] ([[TRCNG]]).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민준 (2000년 1월)|김민준]]. * [[1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희 (2000년)|김소희]]. ** 일본의 가수 [[스가와라 마야]]. * [[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석철 (가수)|이석철]] ([[더 이스트라이트]]). ** 대한민국의 가수 [[이채연 (가수)|이채연]] ([[IZ*ONE]]). * [[1월 12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김태기]].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스벤 보트만]]. * [[1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진욱 (2000년)|김진욱]]. * [[1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린]]. ** 캐나다의 축구 선수 [[조너선 데이비드]]. **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둑 기사 [[셰커]]. * [[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수현 (2000년)|수현]] ([[Billlie]]). ** 대한민국의 성우 [[한혜원 (KBS 성우)|한혜원]]. * [[1월 1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승훈 (축구 선수)|최승훈]]. *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찬희]] ([[SF9]]).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은원]]. * [[1월 18일]] - 대한민국의 모델 [[윤준협]]. * [[1월 19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최다빈]]. ** 일본의 가수 [[마츠오카 하나]]. ** 일본의 배우 [[이토 아사히]].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상혁 (축구 선수)|이상혁]]. * [[1월 20일]] - 에티오피아의 육상 선수 [[셀레몬 바레가]]. * [[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민재 (배우)|이민재]]. ** 대한민국의 가수 라온. * [[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서연 (가수)|이서연]]. ([[Fromis 9|프로미스나인]]). * [[1월 2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싱어송라이터 [[머드 더 스튜던트]]. * [[1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기욱 (가수)|기욱]]. ** 대한민국의 가수 이한울. * [[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노윤서]].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민호 (축구 선수)|김민성]]. ** 벨기에의 자전거 경주 선수 [[렘코 에베네풀]].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배드민턴 선수 [[요하니타 스콜츠]]. * [[1월 26일]] ** 스페인의 배우 [[에스테르 엑스포시토]]. ** 대한민국의 가수 [[서령 (가수)|서령]]. ([[공원소녀]]) ** 대한민국의 가수 [[안솜이 (2000년)|안솜이]]. ([[다이아]]) * [[1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비. * [[1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인호 (야구 선수)|최인호]].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오영수 (야구 선수)|오영수]]. ** 말레이시아의 배드민턴 선수 [[고진웨이]]. * [[1월 31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한다경]].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훌리안 알바레스 (축구 선수)|훌리안 알바레스]]. ** 브라질의 유도 선수 [[윌리앙 리마]]. === 2월 === * [[2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한이서 (가수)|한이서]]. ** 콩고 민주 공화국의 방송인 [[조나단 욤비]]. * [[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풀잎]]. * [[2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모 (가수)|정모]]. ([[CRAVITY]]) * [[2월 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진규 (2000년)|김진규]]. ** 대한민국의 가수 시호. * [[2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우리]]. (~[[2024년]]) * [[2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우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말랑 (프로게이머)|말랑]]. ** 중화인민공화국의 탁구 선수 [[왕만위]]. * [[2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영규 (야구 선수)|김영규]]. * [[2월 11일]] ** 대한민국의 스트리머 양아지.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칸나 (프로게이머)|칸나]]. * [[2월 12일]] ** 일본의 배우 [[카와즈 아스카]].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민 (배우)|김지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민준 (2000년 2월)|김민준]]. * [[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모델 [[한이슬]]. * [[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훈. * [[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신재원 (바둑 기사)|신재원]]. ** 필리핀의 체조 선수 [[카를로스 율로]]. * [[2월 17일]] - 대한민국의 아이돌 용희. ([[CIX (음악 그룹)|CIX]]) * [[2월 19일]] - 일본의 아이돌 [[모리토 치사키]]. ([[컨트리걸즈]], [[모닝구무스메|모닝구무스메'17]]) * [[2월 20일]] - 헝가리의 수영 선수 [[밀라크 크리슈토프]]. *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경윤 (2000년)|이경윤]]. ([[동키즈]]) ** 일본의 가수 [[하루 (가수)|하루]]. * [[2월 22일]] ** 대한민국의 유튜버 [[논리왕 전기]]. ** 미국의 축구 선수 [[티머시 웨아]]. * [[2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제이. ** 네덜란드의 육상 선수 [[펨커 볼]]. *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사격 선수 [[장국회]]. * [[2월 2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민수 (축구 선수)|최민수]]. ** 대한민국의 가수 [[현빈 (가수)|현빈]]. ** 캐나다의 수영 선수 [[마거릿 맥 닐]]. * [[2월 28일]] ** 일본의 배우, 가수 [[카미시라이시 모카]].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모이스 켄]]. * [[2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서.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페란 토레스]]. **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백크]]. === 3월 === * [[3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수녕]]. * [[3월 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재용 (축구 선수)|박재용]]. * [[3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박영훈. * [[3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방송인 [[정성영]]. ** 대한민국의 가수, 유튜버 [[영둥이]]. ** 중화인민공화국의 역도 선수 [[리원원 (역도 선수)|리원원]]. * [[3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에이첸]]. * [[3월 8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김다희. ** 대한민국의 배우 [[최설 (배우)|최설]]. * [[3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활 (가수)|활]] ([[더보이즈 (음악 그룹)|더보이즈]]). * [[3월 11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황성훈]]. *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표식]]. * [[3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예빈]]. * [[3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훈 (2000년)|지훈]] ([[트레저 (음악 그룹)|트레저]]). ** 일본의 바둑 기사 [[오니시 류헤이]]. * [[3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혁. ([[오메가엑스]]) * [[3월 17일]] ** 대한민국의 사격 선수 [[금지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신진서]].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우준]]. * [[3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영. * [[3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현진 (2000년 3월)|현진]] ([[스트레이 키즈]]). *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산하]] ([[아스트로 (음악 그룹)|아스트로]]). * [[3월 23일]] - 중국의 가수 [[런쥔]] ([[NCT (음악 그룹)|NCT]]). * [[3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서동욱 (2000년)|서동욱]]. * [[3월 25일]] ** 튀르키예의 축구 선수 [[오잔 카바크]].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제이든 산초]]. ** 미국의 육상 선수 [[셔캐리 리처드슨]]. * [[3월 26일]] - 벨기에의 체조 선수 [[니나 데르발]]. * [[3월 27일]] ** 미국의 가수, 배우 [[핼리 베일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준호 (2000년)|이준호]]. * [[3월 28일]] - 튀르기예의 가수 [[알레이나 틸키]]. * [[3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지현. ** 일본의 아이돌 [[에고 유나]]. ([[SKE48]]) * [[3월 30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요 마리우스]]. * [[3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리니. === 4월 === * [[4월 1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리안 브루스터]]. * [[4월 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문경민 (2000년)|문경민]]. * [[4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윤식 (야구 선수)|김윤식]]. * [[4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은비 (2000년)|김은비]]. * [[4월 6일]] ** 미국의 배우 [[CJ 애덤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원태인]]. * [[4월 7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박지현 (2000년)|박지현]].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엔비 (프로게이머)|엔비]]. * [[4월 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범수 (2000년)|김범수]]. * [[4월 9일]] ** 미국의 가수 [[재키 이베잉코]].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티아구 잘로]]. ** 일본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사카모토 카오리]]. * [[4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옥시노바]]. * [[4월 11일]] ** 미국의 배우 [[모건 랠리]]. ** 대한민국의 가수 [[카리나 (가수)|카리나]]. ([[Aespa]]) *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선우 (2000년)|선우]] ([[더 보이즈 (음악 그룹)|더 보이즈]]). * [[4월 13일]] - 미국의 가수 [[낸시 (가수)|낸시]] ([[모모랜드]]). *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상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도환 (야구 선수)|김도환]]. ** 일본의 탁구 선수 [[히라노 미우]]. ** 이탈리아의 태권도 선수 [[시모네 알레시오]]. *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태의]]. ** 대한만국의 배우 [[유준 (배우)|유준]]. * [[4월 16일]] -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 [[장준 (태권도 선수)|장준]]. *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혁. * [[4월 19일]] - 대한민국의 사격 선수 [[박하준 (사격 선수)|박하준]]. * [[4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빈첸]]. * [[4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노]] ([[NCT (음악 그룹)|NCT]]). ** 미국의 스노보드 선수 [[클로이 김]]. * [[4월 2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민서 (아나운서)|김민서]]. *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다빈 (2000년)|정다빈]]. * [[4월 26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박현수 (바둑 기사)|박현수]]. ** 대한민국의 가수 [[이수호 (가수)|이수호]]. ** 일본의 성우 [[노구치 이오리]]. * [[4월 2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윤병호 (가수)|불리 다 바스타드]]. ** 대한민국의 래퍼 [[BE'O]]. * [[4월 28일]] - 대한민국의 보치아 선수 고건 * [[4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소 (2000년)|미소]]. * [[4월 30일]] - 일본의 아이돌 [[히와타시 유이]]. === 5월 === * [[5월 1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지동건]]. * [[5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홍종표]]. * [[5월 3일]] - 우즈베키스탄의 태권도 선수 [[스베틀라나 오시포바]]. * [[5월 4일]]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목나경]]. * [[5월 5일]] - 중국의 아이돌 가수 [[쑨전니]]. * [[5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Woshi]]. * [[5월 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수빈 (축구 선수)|이수빈]]. * [[5월 8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전태권]].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건웅 (2000년)|김건웅]]. ** 일본의 배우 [[오노 리나]]. *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인서]]. * [[5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진영]] ([[워너원]], [[CIX (음악 그룹)|CIX]]).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박진영 (바둑 기사)|박진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레슬링 선수 [[최효경]]. ** 중화인민공화국의 태권도 선수 [[궈칭]]. * [[5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늘. * [[5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채영 (가수)|이채영]] ([[fromis_9]]). * [[5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요시 (가수)|요시]]. * [[5월 16일]]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이금주 (치어리더)|이금주]]. * [[5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온다. ([[에버글로우]])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라이언 세세뇽]]. * [[5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ONLEE]]. ** 일본의 가수 [[아사이 나나미]]. * [[5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Bel (가수)|Bel]] ([[더스틴 (음악 그룹)|더스틴]]). * [[5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양예나]] ([[에이프릴 (음악 그룹)|에이프릴]]). * [[5월 25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박채린.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엘림 (프로게이머)|엘림]]. * [[5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지 (2000년)|예지]] ([[ITZY]]). * [[5월 28일]]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필 포든]].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메이지 피터스]]. * [[5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예진. * [[5월 3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범죄자 [[노엘 (래퍼)|노엘]]. * [[5월 31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백인철 (수영 선수)|백인철]]. === 6월 === * [[6월 1일]] ** 미국의 배우 [[윌로 실즈]]. ** 대한민국의 가수 [[이나경 (가수)|이나경]] ([[fromis_9]]). * [[6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우지한]].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최혁준]]. * [[6월 3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준서 (쇼트트랙 선수)|이준서]]. * [[6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로한]]. ** 대한민국의 가수 [[정훈 (가수)|정훈]]. * [[6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해찬]] ([[NCT (음악 그룹)|NCT]]). * [[6월 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세코 아유무]].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드레드 (프로게이머)|드레드]]. * [[6월 8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이예솔]]. * [[6월 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정현 (2000년)|김정현]]. * [[6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훈. * [[6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유선]].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야하롱]]. * [[6월 13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둑 기사 [[딩하오]]. ** 대한민국의 인플루언서 [[최지효]]. * [[6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대정]].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창평]]. * [[6월 15일]] - 중화민국의 첼로 연주자 [[어우양나나]]. * [[6월 16일]] - 중국의 가수, 래퍼 [[판청청]]. * [[6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신영]]. ** 대한민국의 배우 [[이승일 (배우)|이승일]]. ** 벨라루스의 레슬링 선수 [[이리나 쿠라치키나]]. * [[6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제. * [[6월 20일]] - 이라크의 축구 선수 [[모하나드 알리]]. * [[6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현수 (2000년)|김현수]]. * [[6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현 (2000년)|세현]]. * [[6월 26일]] - 대한민국의 유튜버 원츄. *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베드민턴 선수 [[정나은]]. * [[6월 28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양궁 선수 [[양샤오레이]]. *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은우 (배우)|박은우]]. === 7월 === * [[7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블루디]]. * [[7월 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성민 (2000년생 축구 선수)|김성민]]. * [[7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렌. * [[7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튜버 [[한지효 (2000년)|한지효]]. * [[7월 6일]] - 미국의 농구 선수 [[자이언 윌리엄슨]]. * [[7월 7일]] - 대한민국의 래퍼 [[하온]]. * [[7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현수 (2000년생 야구 선수)|김현수]]. * [[7월 12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 [[7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진. * [[7월 17일]] - 중국의 가수 및 무용가 [[간왕씽]]. * [[7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상우 (배우)|김상우]]. * [[7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보경]]. * [[7월 20일]] ** 대한민국의 작가 이다은.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에이밍]].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남호 (야구 선수)|남호]]. * [[7월 21일]]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엘링 브레우트 홀란]]. ** 대한민국의 가수 [[리아 (2000년)|리아]] ([[ITZY]]). ** 대한민국의 배우 [[박가람 (배우)|박가람]]. * [[7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프리다앤]].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도란]].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쇼메이커]]. * [[7월 23일]] - 일본 여성 아이돌 그룹 SKE48 팀E 와 러브 크레센도 와 무시카고의 멤버 [[고토 라라]]. * [[7월 2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성민 (2000년)|이성민]]. * [[7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성유빈 (배우)|성유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지윤 (배구 선수)|문지윤]]. ** 중국의 가수 [[장하오 (가수)|장하오]].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형석 (2000년)|이형석]]. * [[7월 26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박예찬 (작곡가)|박예찬]]. ** 뉴질랜드의 배우 [[토머신 매켄지]]. ** 조지아의 유도 선수 [[라샤 베카우리]]. ** 이란의 태권도 선수 [[메흐란 바르호르다리]]. ** 튀니지의 태권도 선수 [[피라스 카투시]]. * [[7월 28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에밀 스미스 로]]. * [[7월 2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추효주]]. * [[7월 30일]] - 태국의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 [[야니네 바이겔]]. * [[7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새론]]. === 8월 === *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채원 (2000년)|김채원]] ([[아이즈원]]). ** 대한민국의 역도 선수 [[이선미 (역도 선수)|이선미]]. ** 일본의 아이들 [[후쿠오카 세이나]]. * [[8월 2일]] ** 가나의 축구 선수 [[모하메드 쿠두스]]. ** 대한민국의 가수 [[노아 (가수)|노아]]. * [[8월 3일]] - 대한민국의 래퍼 [[Hyeminsong]]. * [[8월 5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정지우 (2000년)|정지우]]. ** 대한민국의 배우 [[조아람]]. * [[8월 7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이소희 (농구 선수)|이소희]]. * [[8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향기]].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고리 (프로게이머)|고리]].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김건희 (쇼트트랙 선수)|김건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송명기]]. * [[8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고승민]]. ** 대한민국의 아티스틱스위밍 선수 [[이리영]]. * [[8월 1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제갈재민]] ([[대구 FC]]). ** 대한민국의 래퍼 [[근수]]. * [[8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민]] ([[NCT (음악 그룹)|NCT]]). *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윤]] ([[TOO]]).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김민기 (치어리더)|김민기]]. * [[8월 17일]] - 미국의 래퍼 [[릴 펌]]. * [[8월 20일]] - 일본의 전 가수 [[나카노 이쿠미]]. * [[8월 21일]] ** 일본의 배우 [[오쿠노 소우]].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이주아 (배구 선수)|이주아]]. * [[8월 22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트 (프로게이머)|페이트]]. * [[8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보민 (가수)|최보민]] ([[골든차일드 (음악 그룹)|골든차일드]]). ** 중국의 가수 [[류위 (가수)|류위]]. * [[8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Toru]]. * [[8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자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민 (2000년)|이승민]]. *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첼 (가수)|레이첼]] ([[에이프릴 (음악 그룹)|에이프릴]]). ** 미국 태생 일본의 유도 선수 [[무라오 산시로]]. * [[8월 29일]] - 일본의 배우 [[하마베 미나미]]. * [[8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다연]]. === 9월 === * [[9월 1일]] ** 일본의 배우 [[다이고 코타로]]. ** 대한민국의 배우 [[진호은]].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김민종 (유도 선수)|김민종]]. * [[9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지원 (2000년)|지원]]. ([[체리블렛]])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이유연]]. * [[9월 5일]]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박소영. * [[9월 6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이다은. * [[9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철 (2000년)|김민철]].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지훈 (2000년)|박지훈]]. ** 대한민국의 가수 [[이은성 (가수)|이은성]]. **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 선수 [[아리안 티트머스]]. * [[9월 8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김건희 (쇼트트랙 선수)|김건희]]. * [[9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안나]].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김이서]]. ** 대한민국의 배우 [[송예빈]].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형석 (2000년)|이형석]]. ** 대한민국의 가수 [[준규]]. * [[9월 10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태권도 선수 [[량위솨이]]. * [[9월 11일]] - 대한민국의 문학가, 작가 [[류이삭]]. * [[9월 12일]] -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HKT48 팀TII의 멤버 [[사카모토 에레나]]. * [[9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도현 (2000년)|김도현]]. * [[9월 14일]] ** 대한민국의 래퍼 [[한 (가수)|한]] ([[Stray Kids|stray kids]]). ** 대한민국의 펜싱 성수 [[박상원 (펜싱 선수)|박상원]]. ** 웨일스의 축구 선수 [[이선 암파두]]. * [[9월 15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래퍼 [[필릭스]] ([[스트레이 키즈]]). ** 대한민국의 배우 [[이채민 (배우)|이채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동혁 (2000년)|김동혁]]. * [[9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가이]]. ** 대한민국의 가수 [[Roon]]. * [[9월 1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태현 (2000년)|김태현]]. ** 대한민국의 가수 [[태선 (가수)|태선]]. * [[9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예인]]. * [[9월 21일]] ** 대한민국의 미국계 가수 겸 방송인 [[마리아 리스]]. ** 대한민국의 가수 [[천성훈]]. * [[9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승민 (2000년)|승민]] ([[스트레이 키즈]]). ** 대한민국의 배우 [[송채윤 (2000년)|송채윤]]. *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준영. * [[9월 2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원준 (2000년)|김원준]]. ** 일본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이쿠타 리라 ([[요아소비]]). * [[9월 27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토마스 포초]]. ** 대한민국의 가수 희주. *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도규]]. * [[9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다인]]. * [[9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서아]]. === 10월 === * [[10월 3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비스타 (프로게이머)|비스타]]. * [[10월 4일]] ** 대한민국의 전직 카트라이더 프로게이머 [[신종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재 (2000년)|이승재]]. * [[10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아 (2000년)|루아]] ([[위키미키]]). * [[10월 7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선가희]]. (~[[2022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민정 (바둑 기사)|김민정]]. * [[10월 9일]] ** 일본의 권투 선수 [[이리에 세나]]. ** 대한민국의 가수 [[한담]]. * [[10월 10일]] ** 중화민국의 가수 [[양양 (2000년)|양양]] ([[WayV]]).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트리거 (프로게이머)|트리거]]. *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카일리. *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종호]]. *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수한]]. *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이가을]]. * [[10월 16일]] ** 일본의 배우 [[야기 유키]]. ** 대한민국의 가수 [[우빈 (가수)|우빈]]. *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앤 ([[공원소녀]]). *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서진수]]. *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희진 (2000년)|희진]] ([[이달의 소녀]]).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바이퍼 (프로게이머)|바이퍼]]. *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진영 (2000년)|김진영]]. ** 대한민국의 작가 이현진. * [[10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돌 [[손준형]]. *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엽]].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이현중 (농구 선수)|이현중]]. ** 대한민국의 가수 [[정슬]]. * [[10월 24일]] -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HKT48 팀 H의 멤버 아키요시 유카. * [[10월 25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배우 황지현. * [[10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다연]]. *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송승환 (야구 선수)|송승환]]. *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겸 방송인 [[김시은 (2000년)|김시은]]. * [[10월 30일]] - 일본의 가수 [[지젤 (가수)|지젤]]. * [[10월 31일]] - 미국의 배우 밎 가수 [[윌로 스미스|윌로우 시미스]]. === 11월 === * [[11월 1일]] ** 일본의 가수 [[코코로 (가수)|코코로]].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지원 (축구 선수)|박지원]]. * [[11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J.YOU]] ([[TO1]]). ** 캐나다의 축구 선수 [[알폰소 데이비스]]. ** 대한민국의 전직 오버워치 프로게이머 [[학살 (프로게이머)|학살]].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카나비]]. * [[11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유리 (2000년)|김유리]]. * [[11월 4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탁구 선수 [[쑨잉사]]. * [[11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서준원]]. ** 중국의 가수 [[리자리]]. ([[AKB48 Team SH]]) * [[11월 7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캘럼 허드슨오도이]]. * [[11월 8일]] ** 중국의 가수 겸 배우 [[왕위안]]. ** 일본의 가수 [[쿠라노오 나루미]].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박혜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카라스 (프로게이머)|카라스]]. * [[11월 9일]] -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과즙세연]]. * [[11월 10일]] ** 미국의 배우 [[매켄지 포이]]. ** 대한민국의 배우 [[박준목]]. *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륜]]. *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민욱. *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출신 배우 [[박시연 (2000년생 배우)|박시연]]. *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진 (2000년 11월)|현진]] ([[이달의 소녀]]). ** 대한민국의 래퍼 [[양승호]]. ** 대한민국의 래퍼 [[소코도모]]. *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준형]]. *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고원 (가수)|고원]] ([[이달의 소녀]]). *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마스크 (프로게이머)|마스크]]. ** 영국의 가수 [[코니 탤벗]]. ** 일본의 레슬링 선수 [[구사카 나오]]. * [[11월 22일]] - 미국의 배우 [[아울리이 크러발리오]]. *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비. *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종현 (축구 선수)|박종현]]. * [[11월 25일]] ** 일본의 배우 [[후쿠모토 리코]]. ** 대한민국의 가수 [[쇼타로 (가수)|쇼타로]]. *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즈시아]]. * [[11월 28일]] ** 중국의 가수 겸 배우 [[이양첸시]]. ** 대한민국의 래퍼 [[이사벨라 (2000년)|이사벨라]]. *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범승혁]].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이승준 (배구 선수)|이승준]]. === 12월 === * [[12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석화 (가수)|강석화]] ([[위아이]]). * [[12월 2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클레버 (프로게이머)|클레버]]. ** 일본의 배우 [[오사키 이치카]]. ** 대한민국의 배우 [[우민규]]. * [[12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상영 (야구 선수)|이상영]].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노시환]]. * [[12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보라비]]. * [[12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경수 (2000년)|김경수]]. * [[1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희 (가수)|연희]] ([[로켓펀치 (음악 그룹)|로켓펀치]]). * [[12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민규]]. *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온]] ([[더스틴 (음악 그룹)|더스틴]]). *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주성 (2000년)|김주성]].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김지수 (유도 선수)|김지수]].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인규 (축구 선수)|이인규]]. ** 미국의 배우 [[루커스 제이드 주먼]]. *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말리타부]]. *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원홍]]. *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이시형 (피겨스케이팅 선수)|이시형]]. * [[12월 17일]] ** 캐나다의 유튜버, 스트리머 [[Twomad]]. (~[[2024년]]) ** 대한민국의 가수 비라. *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고민우 (축구 선수)|고민우]]. *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차희민]]. * [[12월 20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둑 기사 [[랴오위안허]]. *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채현]]. *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에릭 (2000년)|에릭]] ([[더보이즈 (음악 그룹)|더보이즈]]). * [[12월 23일]] - 일본의 아이돌이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 팀8와 팀B의 멤버 [[사카구치 나기사]]. *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 [[배준서 (태권도 선수)|배준서]]. ** 대한민국의 정당인 김세연. *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현호. * [[12월 28일]] ** 브라질의 배우 겸 가수 [[라리사 마노엘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무진]]. * [[12월 29일]] - 중국의 가수 [[이런]] ([[에버글로우]]). == 사망 == [[파일:Charles Schulz NYWTS.jpg|섬네일|120px|찰스 먼로 슐츠]] [[파일:Keizo Obuchi 19980730.jpg|섬네일|154x154픽셀|오부치 게이조]] [[파일:Noboru Takeshita 19871106.jpg|섬네일|154x154픽셀|다케시타 노보루]] [[파일:Pierre Trudeau (1975).jpg|섬네일|166x166픽셀|피에르 트뤼도]] {{분류 참고|2000년 사망}} * [[2월 11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로제 바딤]]. ([[1928년]]~) * [[2월 12일]] - 미국의 만화가 [[찰스 M. 슐츠]]. ([[1922년]]~) * [[2월 20일]] - 러시아의 정치인 [[아나톨리 솝차크]]. ([[1937년]]~) * [[2월 23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탠리 매슈스]]. ([[1915년]]~) * [[4월 7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 ([[1921년]]~) * [[4월 19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김복동 (1933년)|김복동]]. ([[1933년]]~) * [[5월 10일]] - 일본의 성우 [[시오자와 카네토]]. ([[1954년]]~) * [[5월 14일]] - 일본의 제84대 총리 [[오부치 게이조]]. ([[1937년]]~) * [[5월 27일]] - 영국의 외교관 [[맥리호스오브비오크 남작 머레이 맥리호스]] ([[1917년]]~) * [[6월 10일]] - 시리아의 제2대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 ([[1930년]]~) *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환성]] ([[NRG (음악 그룹)|NRG]]). ([[1981년]]~) * [[6월 19일]] - 일본의 제74대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1924년]]~) * [[7월 6일]]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1911년]]~) * [[8월 12일]] - 미국의 배우 [[로레타 영]]. ([[1913년]]~) * [[8월 24일]] - 스위스의 킥복싱 선수 [[앤디 훅]]. ([[1964년]]~) * [[9월 2일]] -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의 장교 [[하인츠 하르멜]]. ([[1906년]]~) * [[9월 14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순원]]. ([[1915년]]~) * [[9월 28일]] - 캐나다의 총리 [[피에르 엘리엇 트뤼도|피에르 앨리엇 트뤼도]]. ([[1919년]]~) * [[11월 22일]] - 체코의 육상 선수 [[에밀 자토페크]]. ([[1922년]]~) *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민경식 (1920년)|민경식]]. ([[1920년]]~) *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시인 [[서정주]]. ([[1915년]]~) * [[12월 25일]] - 미국의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 ([[1908년]]~) == 노벨상 == * '''경제학상''': [[제임스 헤크먼]], [[대니얼 맥패든]] * '''문학상''': [[가오싱젠]] * '''물리학상''': [[조레스 알페로프]], [[허버트 크뢰머]], [[잭 킬비]] * '''생리학 및 의학상''': [[아르비드 칼손]], [[폴 그린가드]], [[에릭 캔들]] * '''평화상''': [[김대중]] * '''화학상''': [[시라카와 히데키]], [[앨런 히거]], [[앨런 맥더미드]] == 72회 [[아카데미상]] 수상 == * '''작품상''': [[아메리칸 뷰티]] * '''감독상''': 샘 멘데스([[아메리칸 뷰티]]) * '''남우주연상''': [[케빈 스페이시]]([[아메리칸 뷰티]]) * '''여우주연상''': [[힐러리 스웽크]]([[소년은 울지 않는다 (1999년 영화)|소년은 울지 않는다]]) * '''남우조연상''': 마이클 케인(사이더 하우스) * '''여우조연상''': [[안젤리나 졸리]](처음 만나는 자유) == 달력 == {{연간달력|2000}} === 음양력 대조 일람 ===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무인 (간지)|무인]] || 대 || [[2월 5일]] ||[[계사 (간지)|계사]] |- | [[음력 2월|2월]] || [[기묘]] || 대 || [[3월 6일]] || [[계해]] |- | [[음력 3월|3월]] || [[경진]] || 소 || [[4월 5일]] || [[계사 (간지)|계사]] |- | [[음력 4월|4월]] || [[신사 (간지)|신사]] || 소 || [[5월 4일]] || [[임술]] |- | [[음력 5월|5월]] || [[임오]] || 대 || [[6월 2일]] || [[신묘]] |- | [[음력 6월|6월]] || [[계미]] || 소 || [[7월 2일]] || [[신유]] |- | [[음력 7월|7월]] || [[갑신]] || 소 || [[7월 31일]] || [[경인]] |- | [[음력 8월|8월]] || [[을유]] || 대 || [[8월 29일]] || [[기미]] |- | [[음력 9월|9월]] || [[병술]] || 소 || [[9월 28일]] || [[기축]] |- | [[음력 10월|10월]] || [[정해]] || 대 || [[10월 27일]] || [[무오]] |- | [[음력 11월|11월]] || [[무자]] || 대 || [[11월 26일]] || [[무자]] |- | [[음력 12월|12월]] || [[기축]] || 소 || [[12월 26일]] || [[무오]] |} == 같이 보기 == * [[2000년 문제]]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분류:2000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구별|마이크로 소프트웨어}} {{회사 정보 | 이름 = 마이크로소프트 코퍼레이션 | 원어 = Microsoft Corporation | 로고 = Microsoft logo (2012).svg | 로고크기 = 300px | 약칭 = MS | 그림 = Building92microsoft.jpg | 그림크기 = 300px | 그림설명 =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 | 종류 = [[공개회사]] | 창립 = {{시작 날짜와 나이|1975|4|4}} | 해체 = | 창립자 = [[빌 게이츠]]<br />[[폴 앨런]] | 시장 정보 = {{Nasdaq|MSFT}}<br />Dow Jones | 장소 = [[워싱턴 D.C.|워싱턴]] [[킹군]] [[레드먼드 (워싱턴주)|레드먼트]] | 지사수 = 전 세계 190개국, 수백 개의 지사 | 상장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86|3|13}} | 국가 = [[미국]] | 사업 지역 = 전 세계 | 인물 = [[사티아 나델라]] (CEO)<br />[[빌 게이츠]] (기술고문) | 티커 심볼 = MSFT | 산업 = 클라우드 컴퓨팅, 소프트웨어, 보안 산업, 전자제품 하드웨어 | 서비스 =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기업들의 사업 지원과 디지털 전환을 위한 소프트웨어(Dynamics 365), 워드, 파워포인트, 엑셀, 팀즈, 원노트, 액세스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Office 365), 링크드인(Linkedin), Windows 컴퓨터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Xbox 게임 패스, Bing 검색엔진, 마이크로소프트 뉴스, Edge 브라우저 | 제품 = Xbox 콘솔 게임기,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노트북, 태블릿 PC | 자본금 = 2062억 달러(2023년 회계연도 종료 기준) | 매출액 = 2119억 달러(2023년 회계연도 종료) | 영업이익 = 885억 달러(2023년 회계연도 종료) | 순이익 = 734억 달러(2023년 회계연도 종료) | 자산 총액 = 4119억 달러(2023년 회계연도 종료 기준) | 주주 = 빌 게이츠 | 자회사 = 링크드인,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스, 깃허브, 스카이프, Mojang 스튜디오, Xbox 게임 스튜디오, 제니맥스 스튜디오 | 종업원 = 22만 1천 명(2023년 회계연도 종료 기준) | 웹사이트 = [https://www.microsoft.com/ko-kr 공식 사이트] }} '''마이크로소프트'''({{llang|en|Microsoft Corporation}})는 컴퓨팅 파워를 지원해주는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을 중심으로, 기업들의 사업을 디지털 전환과 함께 지원하는 다이나믹스 365와 파워포인트, 워드와 엑셀, 원노트, 아웃룩, 팀즈 등의 오피스 365(Office 365), 링크드인, 그리고 Xbox 게임, 컴퓨터 운영체제 소프트웨어인 윈도우(Windows), 검색과 뉴스 등의 사업을 하는 미국의 기업이다. 2014년부터 사티아 나델라가 CEO를 맡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워싱턴주 레드먼드에 본사를 둔 미국의 다국적 기술 기업이다.<ref>{{웹 인용| 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faq.aspx | title=Microsoft Investor Relations - FAQs | website=Microsoft }}</ref>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잘 알려진 소프트웨어 제품은 윈도우 운영 체제 제품군, 마이크로소프트 365 생산성 응용 프로그램 제품군 및 엣지 웹 브라우저이다. 주력 하드웨어 제품은 엑스박스 비디오 게임 콘솔과 터치스크린 개인용 컴퓨터의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라인업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총 수익 기준으로 2022년 포춘 500대 미국 최대 기업 순위에서 14위를 차지했다. 2022년 기준 매출 기준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였다. 알파벳(구글의 모회사), 아마존, 애플, 메타 플랫폼과 함께 미국 빅 5 정보 기술 기업 중 하나로 간주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알테어 8800용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 및 판매하기 위해 1975년 4월 4일 빌 게이츠와 폴 앨런에 의해 설립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80년대 중반 MS-DOS로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 시장을 장악했으며 윈도우가 그 뒤를 이었다. 회사의 1986년 기업공개(IPO)와 그에 따른 주가 상승으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 직원 중 3명의 억만장자와 약 12,000명의 백만장자가 탄생했다. 1990년대 이후 운영 체제 시장에서 점차 다각화되었으며 여러 기업 인수를 단행했다. 가장 큰 규모는 2016년 12월 링크드인을 262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며, 이어 2011년 5월 스카이프 테크놀로지스를 85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bbc.com/news/business-13343600 |title=Microsoft confirms takeover of Skype |publisher=BBC |date=May 10, 2011 |access-date=April 29,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620073353/https://www.bbc.com/news/business-13343600 |archive-date=June 20, 2018 |url-status=live}}</ref> 2015년 기준 마이크로소프트는 IBM PC 호환 운영 체제 시장과 사무용 소프트웨어 제품군 시장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전체 운영 체제 시장의 대부분을 안드로이드에 잃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omputerworld.com/article/2490008/microsoft-windows/microsoft-gets-real--admits-its-device-share-is-just-14-.html |title=Microsoft gets real, admits its device share is just 14% |last=Keizer |first=Gregg |date=July 14, 2014 |website=[[Computerworld]] |publisher=[[International Data Group]] |quote=[Microsoft's chief operating officer] Turner's 14% came from a new forecast released last week by Gartner, which estimated Windows' share of the shipped device market last year was 14% and would decrease slightly to 13.7% in 2014. [..] Android will dominate, Gartner said, with a 48% share this year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21210826/http://www.computerworld.com/article/2490008/microsoft-windows/microsoft-gets-real--admits-its-device-share-is-just-14-.html |archive-date=August 21, 2016 |url-status=live}}</ref> 또한 이 회사는 인터넷(빙 사용), 디지털 서비스 시장(MSN 사용), 혼합 현실(홀로렌즈), 클라우드 컴퓨팅을 포함하여 데스크탑, 노트북, 탭, 가젯 및 서버를 위한 광범위한 기타 소비자 및 기업 소프트웨어를 생산한다. [[스티브 발머]]는 2000년에 빌 게이츠를 대신하여 CEO가 되었고 나중에 "장치 및 서비스" 전략을 구상했다. 이는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가 데인저(Danger Inc.)를 인수하고, 2012년 6월 태블릿 컴퓨터의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라인 출시로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 생산 시장에 진출했으며, 나중에 [[노키아]]의 장치 및 서비스 부문을 인수하여 마이크로소프트 모바일을 형성하면서 전개되었다. 2014년 사이타 나델라(Satya Nadella)가 CEO로 취임한 이후 회사는 하드웨어 규모를 줄이고 대신 클라우드 컴퓨팅에 집중했으며, 이는 회사 주가가 1999년 12월 이후 최고 가치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서 2010년 [[애플]]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난 마이크로소프트는 2018년에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장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nbcnews.com/business/business-news/how-did-microsoft-just-overtake-apple-world-s-most-valuable-n940751 |title=How did Microsoft just overtake Apple as the world's most valuable company? |work=NBC News |access-date=November 28, 2018 |language=en-US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1129112846/https://www.nbcnews.com/business/business-news/how-did-microsoft-just-overtake-apple-world-s-most-valuable-n940751 |archive-date=November 29, 2018 |url-status=live}}</ref> 2019년 4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시가총액 1조 달러에 도달해 애플과 아마존에 이어 각각 1조 달러가 넘는 미국 상장기업이 되었다. 2022년 기준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글로벌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4번째로 높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 관행으로 인해 비판을 받아 왔으며 회사의 소프트웨어는 사용 용이성, 견고성 및 보안 문제로 비판을 받아 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신용등급]]이 AAA인 유일한 미국 기업 두 곳 중 하나이다.<ref>[https://finance.yahoo.com/news/looking-bet-perfect-aaa-credit-171500242.html Looking to Bet On Perfect AAA Credit Ratings? Play These ETFs]</ref> == 역사 == [[파일:Building92microsoft.jpg|섬네일|레드먼드 캠퍼스]] [[파일:Microsoft building 17 front door.jpg|섬네일|마이크로소프트 본사]] [[1975년]]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Micro-soft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세웠다. [[2006년]] [[6월 15일]] [[빌 게이츠]]는 [[2008년]] [[7월 31일]]에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직접 세운 자선 단체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빌 게이츠]]의 대학 시절 친구인 [[스티브 발머]]가 사장직을 담당했다. [[2009년]]경, [[빌 게이츠]]가 그의 오른팔인 [[스티브 발머]]에게 회사의 최고 리더십을 양하는 과정에서 바통을 정확히 넘기는 방법에 관한 교본을 마련하기도 했다. 게이츠는 [[2000년]] 발머에게 CEO직을 넘겼다. 그러나 게이츠는 [[2008년]] 6월에야 회사의 일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그 2년 전에 미리 이 사실을 알려 대비토록 한 바 있다. 그렇지만 게이츠는 여전히 워싱턴주 레이먼드에 있는 회장실의 주인이다. MS는 발머의 인도 아래 세계 최고 수익성을 갖는 강력한 IT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2008년 여름 게이츠 퇴장 이후 주가가 30%나 떨어졌는데 발머에게 갖는 불안감 보다는 세계 경제의 어려움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467819 | 제목 = 美재계, CEO 후계자 준비 필요성 절감 | 출판사 = 중앙일보사 | 날짜 = 2009-01-22 }}{{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467819 }}</ref> [[2011년]] [[5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전자회사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약 10조 원)에 인수하였다. 더불어 [[2013년]] [[9월 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핀란드]]의 휴대전화 생산 업체인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54억 4,000만 유로(약 7조 8,654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가 12개월 안에 은퇴한다고 밝혔다. [[2014년]] [[2월 4일]],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존 W. 톰슨]]을 회장으로 임명했다. [[2015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HPE와 클라우드 사업부문에서 협력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집중하고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는 MS와 같은 파트너 솔루션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ref>{{뉴스 인용|성1=황|이름1=치규|제목=HPE, MS와 클라우드 사업 손잡는다|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5&oid=092&aid=0002087295|날짜=2015-11-30|확인날짜=2015-11-30}}</ref> === 1972~1985년: 설립 === 어린 시절 친구인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을 활용하여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ography.com/people/bill-gates-9307520#early-life |title=Bill Gates |publisher=Biography.com |access-date=November 8, 20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1106203412/http://www.biography.com/people/bill-gates-9307520#early-life |archive-date=November 6, 2016 |url-status=live}}</ref> 1972년에 이들은 자동차 교통 데이터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초보적인 컴퓨터를 판매하는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를 설립했다. 게이츠는 하버드 대학교에 등록했고 앨런은 워싱턴 주립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 학위를 취득했지만 나중에 허니웰에서 일하기 위해 중퇴했다. [[포퓰러 일렉트로닉스]]의 1975년 1월호에는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의 알테어 8800 마이크로컴퓨터가 실렸는데, 이는 앨런이 이 장치에 대한 BASIC 해석기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고 제안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게이츠는 MITS에 전화를 걸어 통역사가 있다고 주장했고 MITS는 시연을 요청했다. 앨런은 게이츠가 인터프리터를 개발하는 동안 알테어용 시뮬레이터 작업을 수행했으며 1975년 3월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MITS에 [[알테어 베이직]]으로 마케팅하며 시연했을 때 완벽하게 작동했다. MITS는 이를 배포하기로 동의하고 게이츠와 앨런은 1975년 4월 4일 게이츠를 CEO로 하여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했으며 앨런은 마이크로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약자인 "Micro-Soft"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1977년 8월, 회사는 일본의 ASCII 매거진과 계약을 체결하여 ASCII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번째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9년 1월 본사를 워싱턴 주 벨뷰로 이전했다.<ref name="BBCTL">{{뉴스 인용|url=http://news.bbc.co.uk/2/hi/business/5085630.stm |title=Bill Gates: A Timeline |work=BBC News Online |publisher=BBC |date=July 15, 2006 |access-date=July 17, 201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60622201711/http://news.bbc.co.uk/2/hi/business/5085630.stm |archive-date=June 22, 2006 |url-status=live}}</ref> 마이크로소프트는 1980년 [[제닉스]](Xenix)라는 자체 유닉스 버전을 내세워 운영체제(OS) 사업에 뛰어들었지만<ref>{{웹 인용|url=http://www.computersourcemag.com/articles/viewer.asp?a=695 |title=Under The Hood: Part 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60901182630/http://www.computersourcemag.com/articles/viewer.asp?a=695 |archive-date=September 1, 2006 |work=Computer Source |last=Dyar |first=Dafydd Neal |date=November 4, 2002 |access-date=July 14, 2010}}</ref> 회사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 것은 [[MS-DOS]]였다. [[IBM]]은 1980년 11월 [[IBM PC|IBM 개인용 컴퓨터]](IBM PC)에서 사용할 CP/M OS 버전을 제공하기로 마이크로소프트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거래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로부터 [[86-도스]]라는 [[CP/M]] 클론을 구입하여 MS-DOS라는 브랜드를 붙였지만 IBM은 IBM PC DOS로 브랜드를 변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81년 8월 IBM PC 출시 이후 MS-DOS의 소유권을 유지했다. IBM은 IBM PC BIOS에 대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회사에서는 비IBM 하드웨어가 IBM PC 호환 장치로 실행되도록 리버스 엔지니어링해야 했지만 그러한 제한은 없었다. 운영 체제에 적용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최고의 PC 운영 체제 공급업체가 되었다. 회사는 1983년 마이크로소프트 마우스 출시와 [[마이크로소프트 프레스]]라는 출판 부문을 통해 새로운 시장으로 확장했다. 폴 앨런은 1983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호지킨 림프종]]으로 발전하여 사임했다. 앨런은 "아이디어 맨: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립자의 회고록"에서 게이츠가 호지킨 병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충분히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자신의 지분을 희석하고 싶었다고 주장했다. 앨런은 나중에 저기술 부문, 스포츠 팀, 상업용 부동산, 신경과학, 민간 우주 비행 등에 투자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forbes.com/sites/clareoconnor/2014/01/31/10-things-you-didnt-know-about-microsoft-billionaire-paul-allen-seattle-seahawks-owner/#48d64a5f6db1 |title=10 Things You Didn't Know About Microsoft Billionaire Paul Allen, Seattle Seahawks Owner |last=O'Connor |first=Clare |work=Forbes |access-date=February 1, 2018 |language=en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202013548/https://www.forbes.com/sites/clareoconnor/2014/01/31/10-things-you-didnt-know-about-microsoft-billionaire-paul-allen-seattle-seahawks-owner/#48d64a5f6db1 |archive-date=February 2, 2018 |url-status=live}}</ref> === 1985~1994년: 윈도우와 오피스 === 마이크로소프트는 그해 8월 IBM과 공동으로 OS/2 개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1985년 11월 20일 MS-DOS용 그래픽 확장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를 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86년 2월 26일에 본사를 벨뷰에서 워싱턴 주 [[레드먼드 (워싱턴주)|레드먼드]]로 이전하고 3월 13일에 상장했으며, 그 결과 주가가 상승하여 약 4명의 억만장자와 12,000명의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이 백만장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87년 4월 2일에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에 OS/2 버전을 출시했다. 1990년에 연방 무역 위원회는 IBM과의 파트너십으로 인한 공모 가능성에 대해 마이크로소프트를 조사하여 10년 이상의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정부와 충돌한다. 한편 회사는 OS/2 코드 복사본을 기반으로 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NT]]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93년 7월 21일에 새로운 모듈식 [[커널 (컴퓨팅)|커널]]과 32비트 [[윈도우 API|Win32 API]](응용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가 포함되어 출시되어 [[16비트]](MS-DOS 기반) 윈도우에서 더 쉽게 포팅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에 윈도우 NT를 통보했고 OS/2 파트너십은 악화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winsupersite.com/reviews/winserver2k3_gold1.asp |title=Windows Server 2003: The Road To Gold |last=Thurrott |first=Paul |work=winsupersite.com |publisher=Penton Media |date=January 24, 2003 |access-date=July 15, 201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604082534/http://www.winsupersite.com/reviews/winserver2k3_gold1.asp |archive-date=June 4, 2010 |url-status=dead}}</ref> 1990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및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같은 별도의 응용 프로그램을 번들로 제공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제품군을 출시했다. 5월 2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텔 80386|인텔 386]] 프로세서를 위한 간소화된 사용자 인터페이스 그래픽과 향상된 보호 모드 기능을 갖춘 [[윈도우 3.0]]을 출시했다. 오피스와 윈도우는 각자의 영역에서 지배력이 쌓이게 되었다.<ref>{{잡지 인용|url=https://www.pcmag.com/article2/0,2817,1159610,00.asp |title=OS Market Share 1993–2001 – Windows 98 Put to the Test |magazine=[[PC Magazine]] |publisher=Ziff Davis |date=August 1, 1998 |access-date=July 3, 2010 |first=Michael |last=Miller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1141923/http://www.pcmag.com/article2/0,2817,1159610,00.asp |archive-date=May 11, 2011 |url-status=live}}</ref><ref>{{잡지 인용|url=http://www.pcworld.com/article/18462/a_peek_at_office_upgrade.html |title=A Peek at Office Upgrade |magazine=[[PC World]] |publisher=[[IDG]] |date=September 13, 2000 |last=McCracken |first=Harry |access-date=July 4, 2006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506065942/http://www.pcworld.com/article/18462/a_peek_at_office_upgrade.html |archive-date=May 6, 2009 }}</ref> 1994년 7월 27일, 법무부의 독점 금지 부서는 다음과 같은 경쟁 영향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8년부터 1994년 7월 15일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많은 OEM에게 반경쟁적인 '프로세서별 라이센스'를 실행하도록 유도했다. 프로세서 라이선스에 따라 OEM은 특정 마이크로프로세서가 포함된 컴퓨터를 판매할 때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로열티를 지불한다. 이는 OEM이 마이크로소프트 운영 체제를 탑재한 컴퓨터를 판매하든,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이 아닌 타사 운영 체제를 탑재하든 관계없이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에 로열티를 지불하는 것과 같다. 1988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세서당 라이선스 사용이 증가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justice.gov/atr/cases/f0000/0045.htm |title=Competitive Impact Statement : U.S. v. Microsoft Corporation |publisher=Justice.gov |access-date=May 11, 201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0012902/http://www.justice.gov/atr/cases/f0000/0045.htm |archive-date=May 10, 2011 |url-status=live}}</ref> === 1995~2007: 웹, 윈도우 95, 윈도우 XP 및 엑스박스 진출 === 1995년 5월 26일 빌 게이츠의 내부 "인터넷 해일 메모"(Internet Tidal Wave memo)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는 제품을 재정의하고 제품 라인을 컴퓨터 네트워킹과 월드 와이드 웹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넷스케이프와 같은 몇몇 신생 회사를 제외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의 일부가 될 만큼 빠르게 행동한 유일하고 확고한 기반을 갖춘 회사였다. 볼랜드, 워드퍼펙트, 노벨, IBM 및 로터스와 같은 다른 회사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훨씬 더 느리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될 것이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qiDsEgYKXRAC&q=Bill+Gates+1994+Internet+blow+over+Netscape+Borland+WordPerfect+Novell+IBM+Lotus&pg=PA11 |title=Network Security Foundations: Technology Fundamentals for IT Success |access-date=March 16, 2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323120021/https://books.google.no/books?id=qiDsEgYKXRAC&pg=PA11&dq=Bill+Gates+1994+Internet+blow+over+Netscape+Borland+WordPerfect+Novell+IBM+Lotus&hl=no&sa=X&ved=0ahUKEwjliaaH-IbhAhVHw4sKHRIlCnkQ6AEIKTAA#v=onepage&q=Bill%20Gates%201994%20Internet%20blow%20over%20Netscape%20Borland%20WordPerfect%20Novell%20IBM%20Lotus&f=false |archive-date=March 23, 2019 |url-status=live |isbn=9780782151367 |last1=Strebe |first1=Matthew |date=February 20, 2006|publisher=John Wiley & Sons }}</ref> 이 회사는 1995년 8월 24일에 선점형 멀티태스킹, 새로운 시작 버튼을 갖춘 완전히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32비트 호환성을 갖춘 윈도우 95를 출시했다. NT와 유사하게 Win32 API를 제공했다.  윈도우 95에는 온라인 서비스 MSN이 번들로 제공되었다. MSN은 처음에는 인터넷의 경쟁자가 될 의도였으며 및 (OEM의 경우) 웹 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도 있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소매 윈도우 95 상자와 함께 번들로 제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팀이 웹 브라우저를 완성하기 전에 상자가 인쇄되어 대신 윈도우 95 플러스! 팩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마케팅 캠페인과 [[뉴욕 타임스]]에서 "업계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열광적이며 가장 값비싼 컴퓨터 제품 출시"에 힘입어 윈도우 95는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1996년에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와 [[제너럴 일렉트릭]]의 NBC 부서는 새로운 24/7 케이블 뉴스 채널인 MSNBC를 만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디지털 단말기와 같이 메모리가 부족하고 기타 제약이 있는 장치를 위해 설계된 새로운 OS인 윈도우 CE 1.0을 만들었다.<ref>{{웹 인용|url=http://www.hpcfactor.com/support/windowsce/ |last=Tilly |first=Chris |title=The History of Microsoft Windows CE |work=HPC:Factor |access-date=August 18, 200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921144050/http://www.hpcfactor.com/support/windowsce/ |archive-date=September 21, 2008 |url-status=live}}</ref> 1997년 10월,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1994년에 서명한 계약을 위반했으며 법원에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윈도우의 번들링을 중단하도록 요청했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연방 지방 법원에 제출했다. 2000년 1월 13일, 빌 게이츠는 게이츠의 오랜 대학 친구이자 1980년부터 회사의 직원이었던 스티브 발머에게 CEO 자리를 넘겨주면서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Chief Software Architect)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포함한 다양한 회사는 무엇보다도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변경 사항을 식별하여 보안을 강화하고 지적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1999년 10월에 신뢰 컴퓨팅 플랫폼 얼라이언스(Trusted Computing Platform Alliance)를 결성했다. 비평가들은 동맹이 소비자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방식, 컴퓨터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무차별적인 제한을 시행하는 방법이자 디지털 권한 관리의 한 형태라고 비난했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소유자를 위해 보호될 뿐만 아니라 컴퓨터 소유자에게 적대하여 보호되는 시나리오를 들 수 있다. 2000년 4월 3일, 미국 대 마이크로소프트 사건에서 회사를 "남용적인 독점"이라고 부르는 판결이 내려졌다.<ref>{{웹 인용|last=Jackson |first=Thomas Penfield |url=https://www.justice.gov/atr/cases/f3800/msjudgex.htm |title=U.S. vs. Microsoft findings of fact |publisher=U.S. Department of Justice |date=November 5, 1999 |access-date=August 18, 200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815034900/http://www.justice.gov/atr/cases/f3800/msjudgex.htm |archive-date=August 15, 2010 |url-status=live}}</ref> 마이크로소프트는 나중에 2004년에 미국 법무부와 합의했다. 2001년 10월 25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XP]]를 출시하여 NT 코드베이스 아래에 OS의 주류 및 NT 라인을 통합했다. 회사는 그해 말 엑스박스를 출시하여 소니와 닌텐도가 지배하는 비디오 게임 콘솔 시장에 진출했다. 2004년 3월 유럽 연합은 이 회사가 윈도우 OS에 대한 지배력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이 회사를 상대로 독점 금지 소송을 제기하여 4억 9,700만 유로(6억 1,300만 달러)의 판결을 내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 없이 윈도우 XP의 새 버전을 생산하도록 요구했다. (윈도우 XP 홈 에디션 N 및 윈도우 XP 프로페셔널 N) 2005년 11월 회사의 두 번째 비디오 게임 콘솔인 엑스박스 360이 출시되었다. 가격은 기본 버전 299.99달러, 디럭스 버전 399.99달러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s://money.cnn.com/2005/08/17/commentary/game_over/column_gaming/index.htm |title=Microsoft sets price for Xbox 360—Aug. 17, 2005 |last=Morris |first=Game Over is a weekly column by Chris |website=money.cnn.com |access-date=January 4,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425204850/http://money.cnn.com/2005/08/17/commentary/game_over/column_gaming/index.htm |archive-date=April 25, 2018 |url-status=live}}</ref> 엑스박스 이후 하드웨어 사업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2006은 이전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포터블 미디어 센터의 후속 제품인 [[준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준]] 시리즈 디지털 미디어 플레이어를 출시했다. 이는 1983년 최초의 마이크로소프트 마우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전 하드웨어 약속을 확장한 것이다. 2007년 기준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유선 키보드(Natural Ergonomic Keyboard 4000), 마우스(IntelliMouse), 데스크톱 웹캠([[라이프캠|LifeCam]])을 판매했다. 그 해에 회사는 나중에 [[마이크로소프트 픽셀센스|픽셀센스]]로 이름이 변경된 서피스 "디지털 테이블"도 출시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microsoft.com/2007/08/22/a-microsoft-milestone-hardware-celebrates-25-years-of-proven-success/|title=A Microsoft Milestone: Hardware Celebrates 25 Years of Proven Success|date=August 22, 2007|website=Stories}}</ref> === 2007~2011년: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 === 2007년 1월에 출시된 윈도우의 다음 버전인 [[윈도우 비스타|비스타]]는 기능, 보안 및 [[윈도우 에어로|에어로]]라는 재설계된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중점을 두었다. 동시에 출시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은 이전 버전과 크게 다른 "[[리본 (컴퓨팅)|리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특징으로 한다. 두 제품 모두 상대적으로 높은 판매로 2007년에 기록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럽 연합은 마이크로소프트가 2008년 2월 27일에 내린 2004년 3월 판결을 준수하지 않은 이유로 8억 9900만 유로(14억 달러)의 추가 벌금을 부과했다. [[마이크로소프트 SQL 서버|워크그룹]] 및 백오피스 서버에 대한 주요 정보에 대해 불합리한 가격과 경쟁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규정을 준수했으며 "이번 벌금은 해결된 과거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2007년에는 썬 및 IBM과 같은 서버 회사의 뒤를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멀티 코어 장치가 탄생했다.<ref>{{웹 인용|url=http://www.serverwatch.com/trends/article.php/3657451/Microsoft-Multicore-and-the-Data-Center.htm |title=Microsoft, Multi-core and the Data Center |access-date=March 18, 20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406115001/http://www.serverwatch.com/trends/article.php/3657451/Microsoft-Multicore-and-the-Data-Center.htm |archive-date=April 6, 2013 |url-status=live}}</ref> 게이츠는 2008년 6월 27일에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역할에서 은퇴했으며, 이 결정은 2006년 6월에 발표되었으며, 동시에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에 대한 고문 역할 외에도 회사와 관련된 다른 직위를 유지했다. 회사가 윈도우용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에 진출한 [[마이크로소프트 애저|애저 서비스 플랫폼]]은 2008년 10월 27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2월 1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브랜드 소매점 체인을 개설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으며 2009년 10월 22일에는 최초의 소매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 (가게)|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가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애리조나주)|스코츠데일]]에 문을 열었다. 같은 날 윈도우 7이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출시되었다. 윈도우 7은 윈도우를 대대적으로 재작업하기보다는 사용하기 쉬운 기능과 성능 향상으로 비스타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cnet.com/8301-13860_3-10163206-56.html |title=Microsoft follows Apple into the retail business |work=CNET |publisher=CBS Interactive |first=Ina |last=Fried |author-link=Ina Fried |date=February 12, 2009 |access-date=July 17, 201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0020436/http://news.cnet.com/8301-13860_3-10163206-56.html |archive-date=May 10, 2011 |url-status=live}}</ref><ref>{{웹 인용|url=https://www.reuters.com/article/us-microsoft-store-idUSTRE59L5E220091022 |title=Long lines as Microsoft opens retail store |work=[[Reuters]] |publisher=[[Thomson Reuters]] |last=Gaynor |first=Tim |date=October 22, 2009 |access-date=July 3, 201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204102408/http://www.reuters.com/article/2009/10/22/us-microsoft-store-idUSTRE59L5E220091022 |archive-date=February 4, 2011 |url-status=live}}</ref><ref>{{뉴스 인용|url=https://www.nbcnews.com/id/33429899 |title=Windows 7 operating system makes its debut |work=[[NBCNews.com]] |publisher=[[NBCUniversal]] |agency=Associated Press |last=Mintz |first=Jessica |date=October 22, 2009 |access-date=April 4, 2012}}</ref>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 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현대적인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제공하는 데 경쟁사들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미국에서는 애플과 구글이 후원하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안드로이드]]에 뒤처졌다. 그 결과, 2010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노후화된 주력 모바일 운영 체제인 윈도우 모바일을 개편하여 그해 10월에 출시된 새로운 윈도우 폰 OS로 교체했다. 미니멀리즘의 개념을 활용하여 단순한 모양, 타이포그래피, 도상학을 눈에 띄게 사용하는 코드명 "메트로"라는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언어를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폰 OS를 사용하는 모든 스마트폰에서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구현했다. 2011년 노키아와 제휴를 맺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폰을 공동 개발하기 위해 회사와 긴밀히 협력했지만 오랫동안 윈도우 모바일 OEM HTC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 3월 23일에 시작된 [[오픈 네트워킹 재단]]의 창립 멤버이다. 동료 창립자는 구글, HP 네트워킹, 야후!, [[버라이즌 커뮤니케이션스]], [[도이체 텔레콤]] 및 기타 17개 회사였다. 이 비영리 조직은 소프트웨어 정의 네트워킹이라는 [[클라우드 컴퓨팅]] 이니셔티브를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계획은 통신 네트워크, 무선 네트워크, 데이터 센터 및 기타 네트워킹 영역에서 간단한 소프트웨어 변경을 통해 혁신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www.computerworld.com.au/article/380663/google_other_titans_form_open_networking_foundation/?fp=4&fpid=78268965 |title="Google and other titans form Open Networking Foundation." Noyes, March 23, 2011 |work=[[Computerworld]] |publisher=[[International Data Group|IDG]] |date=March 23, 2011 |access-date=May 29, 201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406121956/http://www.computerworld.com.au/article/380663/google_other_titans_form_open_networking_foundation/?fp=4&fpid=78268965 |archive-date=April 6, 2011 |url-status=live}}</ref> === 2011~2014년: 윈도우 8/8.1, 엑스박스 원, 아웃룩닷컴, 서피스 장치 === 윈도우 폰이 출시된 후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과 2012년에 걸쳐 회사의 로고, 제품, 서비스 및 웹 사이트가 [[메트로 (디자인 언어)|메트로]] 디자인 언어의 원칙과 개념을 채택하면서 제품군의 점진적인 브랜드 변경에 착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 6월 타이베이에서 개인용 컴퓨터와 태블릿 컴퓨터 모두를 지원하도록 설계된 운영 체제인 윈도우 8을 공개했다. 개발자 프리뷰는 9월 13일에 출시되었으며, 이후 2012년 2월 29일에 소비자 프리뷰로 대체되었고 5월에 대중에 공개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서피스]]는 6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하드웨어를 갖춘 회사 역사상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6월 25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소셜 네트워크 야머(Yammer)를 인수하기 위해 12억 달러를 지불했다. 7월 31일에는 [[Gmail]]과 경쟁하기 위해 [[Outlook.com]] 웹메일 서비스를 출시했다. 2012년 9월 4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서버 2012]]를 출시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crosoft.com/en-us/server-cloud/new.aspx |title=Windows Server 2012 "Save the Date" Announcement |date=August 8, 2012 |publisher=Microsoft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7032736/http://www.microsoft.com/en-us/server-cloud/new.aspx |archive-date=November 7, 2013}}</ref> 2012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1996년부터 NBC와 합작 투자로 운영해 온 MSNBC의 지분 50%를 매각했다. 10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와 함께 새로운 모습의 MSN의 일부인 뉴스 운영을 시작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이달 말 8일. 2012년 10월 26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8과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를 출시했다. 3일 후, 윈도우 폰 8이 출시되었다.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수요 증가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는 2012년에 문을 연 "오프라인"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의 증가하는 수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 여러 개의 "휴일 매장"을 열었다. 3월 29일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는 특허 추적기(Patent Tracker)를 출시했다.<ref>{{웹 인용|url=https://thenextweb.com/microsoft/2013/03/28/microsoft-launches-patent-tracker-to-help-you-search-its-library-of-intellectual-property/ |title=Microsoft launches 'Patent Tracker' to help you search its library of intellectual property |work=The Next Web |date=March 28, 2013 |access-date=March 29, 20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331031250/http://thenextweb.com/microsoft/2013/03/28/microsoft-launches-patent-tracker-to-help-you-search-its-library-of-intellectual-property/ |archive-date=March 31, 2013 |url-status=live}}</ref> 2012년 8월, [[뉴욕 경찰국]]은 뉴욕시 경찰 감시에 사용되는 도메인 인식 시스템 개발을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nydailynews.com/new-york/nypd-unveils-new-40-million-super-computer-system-data-network-cameras-license-plate-readers-crime-reports-article-1.1132135 |title=NYPD unveils new $40 million supercomputer system that uses data from a network of cameras, license plate readers and crime reports |last1=Parascandola|first1=Rocco|last2=Moore|first2=Tina |website=New York Daily News |date=August 8, 2012 |access-date=June 15, 2019}}</ref>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작하고 비디오 [[게임 컨트롤러]]로 설계된 동작 감지 입력 장치인 [[키넥트]]는 2010년 11월에 처음 출시되었으며 2013년 엑스박스 원 비디오 게임 콘솔 출시를 위해 업그레이드되었다. 키넥트의 기능은 2013년 5월에 공개되었다. 초광각 1080p 카메라, 적외선 센서로 인한 어둠 속에서의 기능, 고급 처리 능력 및 새로운 소프트웨어, 미세한 움직임(예: 엄지 손가락 움직임)을 구별하는 기능, 얼굴을 보고 사용자의 심박수를 결정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에 회사가 시청 환경을 보다 상호 작용적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키넥트 카메라 시스템을 사용하여 텔레비전 시청자의 행동을 모니터링할 수 있음을 제안하는 특허 출원을 제출했다. 2013년 7월 19일,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은 4분기 보고서에서 윈도우 8과 서피스 태블릿의 부진한 실적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제기된 후 2000년 이후 가장 큰 일일 하락률을 겪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32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cnet.com/8301-10805_3-57594612-75/funky-friday-more-than-$32-billion-in-microsoft-stock-value-wiped-out/ |title=Funky Friday: More than $32 billion in Microsoft stock value wiped out &#124; Microsoft—CNET News |publisher=News.cnet.com |access-date=July 21, 20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822073858/http://news.cnet.com/8301-10805_3-57594612-75/funky-friday-more-than-$32-billion-in-microsoft-stock-value-wiped-out/ |archive-date=August 22, 2013 |url-status=live}}</ref> PC 사업이 성숙해짐에 따라 2013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업을 운영 체제, 앱, 클라우드, 장치라는 4개의 새로운 사업 부문으로 개편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존 사업부는 인력 감축 없이 모두 새로운 사업부로 해체된다. 2013년 9월 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에이미 후드가 CFO 역할을 맡은 후 [[노키아]]의 모바일 사업부를 7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reuters.com/article/us-microsoft-cfo-idUSBRE94711Q20130508 |title=Microsoft names insider Amy Hood as CFO |agency=Reuters.com |date=May 8, 2013 |access-date=April 18, 2014 |newspaper=Reuters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09123351/http://www.reuters.com/article/2013/05/08/us-microsoft-cfo-idUSBRE94711Q20130508 |archive-date=April 9, 2014 |url-status=live}}</ref> === 2014~2020년: 윈도우 10,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홀로렌즈 === 2014년 2월 4일, [[스티브 발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에서 물러나 이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우드 및 엔터프라이즈 부문을 이끌었던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가 그 뒤를 이었다. 이날 기술고문으로 계속 참여했던 빌 게이츠 대신 존 W. 톰슨이 회장직을 맡았다. 톰슨은 마이크로소프트 역사상 두 번째 회장이 됐다. 2014년 4월 25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노키아 디바이시즈 앤드 서비시즈(Nokia Devices and Services)를 72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 새로운 자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 모바일 Oy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4년 9월 15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인크래프트로 가장 잘 알려진 비디오 게임 개발 회사 모장을 25억 달러에 인수했다. 2017년 6월 8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스라엘 보안 회사인 Hexadite를 1억 달러에 인수했다.<ref>{{웹 인용|last1=Dellinger |first1=AJ |title=Microsoft Buys Cybersecurity Company Hexadite To Respond To Cyberattacks |url=http://www.ibtimes.com/microsoft-buys-cybersecurity-company-hexadite-respond-cyberattacks-2549768 |website=[[International Business Times]] |date=June 8, 2017 |access-date=June 9, 201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608231948/http://www.ibtimes.com/microsoft-buys-cybersecurity-company-hexadite-respond-cyberattacks-2549768 |archive-date=June 8, 2017 |url-status=live}}</ref><ref>{{뉴스 인용|title=Microsoft agrees to buy U.S.-Israeli cyber firm Hexadite |url=https://www.reuters.com/article/us-microsoft-m-a-hexadite-idUSKBN18Z1XP |work=Reuters |date=June 8, 2017 |access-date=June 9, 201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609043207/http://www.reuters.com/article/us-microsoft-m-a-hexadite-idUSKBN18Z1XP |archive-date=June 9, 2017 |url-status=live}}</ref> 2015년 1월 21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최초의 대화형 화이트보드인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허브를 출시했다고 발표했다. 2015년 7월 29일에 윈도우 10이 출시되었으며, 서버 형제인 윈도우 서버 2016은 2016년 9월에 출시되었다. 2015년 1분기에 마이크로소프트는 3,300만 대(전체의 7.2%)를 판매하여 세 번째로 큰 휴대폰 제조업체였다. 이들 중 대다수(75% 이상)는 어떤 버전의 윈도우 폰도 실행하지 않지만(다른 휴대폰은 가트너에서 스마트폰으로 분류하지 않음) 같은 기간에 800만 대의 윈도우 스마트폰(전체 스마트폰의 2.5%)이 가트너에서 제조되었다. 모든 제조업체(대부분 마이크로소프트). 2016년 1월 미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점유율은 2.7%였다. 2015년 여름 동안 회사는 휴대폰 사업과 관련하여 76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7,8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ref name="WSJ: Microsoft to Streamline Smartphone Hardware Business">{{뉴스 인용|last1=Greene |first1=Jay |title=Microsoft to Streamline Smartphone Hardware Business |url=https://www.wsj.com/articles/microsoft-to-streamline-smartphone-hardware-business-1464166803 |newspaper=The Wall Street Journal |access-date=May 25, 2016 |date=May 25, 20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525095132/http://www.wsj.com/articles/microsoft-to-streamline-smartphone-hardware-business-1464166803 |archive-date=May 25, 2016 |url-status=live}}</ref> 2016년 3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는 PC와 엑스박스 사업부의 합병을 발표했으며, 필 스펜서는 UWP(유니버설 윈도우 플랫폼) 앱이 향후 마이크로소프트 게임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7년 1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런던에서 열린 BETT 2017 교육 기술 컨퍼런스에서 Intune for Education을 선보였다. Intune for Education은 교육 부문을 위한 새로운 클라우드 기반 애플리케이션 및 장치 관리 서비스이다.<ref>{{뉴스 인용|url=https://techcrunch.com/2017/01/24/microsoft-launches-intune-for-education-to-counter-googles-chromebooks-in-schools/ |title=Microsoft launches Intune for Education to counter Google's Chromebooks in schools |work=TechCrunch |author=Frederic Lardinois |date=January 24, 2017 |access-date=January 25, 201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125065925/https://techcrunch.com/2017/01/24/microsoft-launches-intune-for-education-to-counter-googles-chromebooks-in-schools/ |archive-date=January 25, 2017 |url-status=live}}</ref> 2016년 5월, 회사는 1,850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9억 5천만 달러의 손상 및 구조 조정 비용을 부담한다고 발표했다. 2016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정보 보호(Information Protection)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는 기업이 서버와 장치 간에 이동하는 데이터를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6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뉴욕 Connect(); 개발자 행사 기간 동안 리눅스 재단에 플래티넘 회원으로 가입했다. 각 플래티넘 멤버십 비용은 연간 미화 500,000달러이다. 그러나 일부 분석가들은 2001년 당시 CEO였던 [[스티브 발머]]가 리눅스를 암 덩어리라 불렀던 것처럼 10년 전에는 이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향후 몇 주 내에" Intune for Education의 미리 보기를 출시할 예정이며 일반 출시는 2017년 봄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가격은 장치당 30달러이거나 볼륨 라이선싱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neowin.net/news/microsoft-introduces-intune-for-education-promising-simple-setup-and-management-of-devices |title=Microsoft introduces Intune for Education, promising simple setup and management of devices |publisher=Neowin |author=Andy Weir |date=January 24, 2017 |access-date=January 25, 201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127080810/https://www.neowin.net/news/microsoft-introduces-intune-for-education-promising-simple-setup-and-management-of-devices |archive-date=January 27, 2017 |url-status=live}}</ref> 2018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텔의 멜트다운 보안 위반과 관련된 CPU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윈도우 10에 패치를 적용했다. 이 패치로 인해 인텔의 CPU 아키텍처에 의존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가상 머신에 문제가 발생했다. 1월 1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macOS 및 리눅스 운영 체제용 파워셸 코어 6.0을 출시했다. 2018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단종된 장치에 대한 펌웨어 업데이트를 효과적으로 종료하는 윈도우 폰 장치에 대한 알림 지원을 종료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8년 3월 윈도우 10 S를 리콜해 별도의 고유한 운영체제가 아닌 윈도우 운영체제용 모드로 변경했다. 지난 3월 회사는 오피스 365 사용자가 개인 문서에서 욕설을 사용하는 것을 검열하는 지침도 제정했다.<ref name="auto">{{웹 인용|url=https://www.theregister.co.uk/2018/12/25/microsoft_year_in_review_2018/ |title=Microsoft's 2018, part 1: Open source, wobbly Windows and everyone's going to the cloud |website=[[The Register]] |access-date=January 3, 2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103060059/https://www.theregister.co.uk/2018/12/25/microsoft_year_in_review_2018/ |archive-date=January 3, 2019 |url-status=live}}</ref> 2018년 4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프로그램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MIT 라이선스에 따라 윈도우 파일 관리자용 소스 코드를 출시했다. 4월에 회사는 리눅스 운영 체제의 자체 파생 제품으로 애저 스피어를 발표함으로써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를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표명했다. 2018년 5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클라우드 컴퓨팅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미국 정보 기관 17개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애저 정부"(Azure Government)라고 불리며 JEDI(Joint Enterprise Defense Infrastructure) 감시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 2018년 6월 4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깃허브]]를 75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거래는 2018년 10월 26일에 종료되었다. 2018년 7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서피스 고 플랫폼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달 말에는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를 무료로 전환했다. 2018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어카운트가드(AccountGuard)와 디펜딩 데모크라시(Defending Democracy)라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출시했다. 또한 ARM 아키텍처에서 윈도우 10에 대한 스냅드래곤 850 호환성도 공개했다.<ref>{{뉴스 인용|last1=Hackett |first1=Robert |title=Microsoft Offers Free Cybersecurity Tools to Political Candidates—But You've Got to Be a Microsoft Customer |url=http://fortune.com/2018/08/21/microsoft-free-cybersecurity-tools-midterm-election-facebook-google/ |access-date=August 24, 2018 |date=August 21,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822112819/http://fortune.com/2018/08/21/microsoft-free-cybersecurity-tools-midterm-election-facebook-google/ |archive-date=August 22, 2018 |url-status=live}}</ref><ref>{{뉴스 인용|last1=Lerman |first1=Rachel |title=Microsoft releases new security tools for political campaigns to combat hacking attempts |url=https://www.seattletimes.com/business/microsoft/microsoft-releases-new-security-tools-for-political-campaigns-to-combat-hacking-attempts/ |access-date=August 24, 2018 |newspaper=The Seattle Times |date=August 20,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824102040/https://www.seattletimes.com/business/microsoft/microsoft-releases-new-security-tools-for-political-campaigns-to-combat-hacking-attempts/ |archive-date=August 24, 2018 |url-status=live}}</ref><ref name="auto" /> 2018년 8월, [[쯔쇼 도요타]]는 물 관리와 관련된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위한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애플리케이션 제품군을 사용하여 양식 도구를 만들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 파트너십을 시작했다. 킨다이 대학 연구진이 부분적으로 개발한 물 펌프 메커니즘은 인공 지능을 사용하여 컨베이어 벨트에 있는 물고기의 수를 세고, 물고기의 수를 분석하고, 물고기가 제공하는 데이터에서 물 흐름의 효율성을 추론한다. 프로세스에 사용되는 특정 컴퓨터 프로그램은 애저 머신 러닝 및 애저 IoT 허브 플랫폼에 속한다.<ref>{{웹 인용|url=https://www.theregister.co.uk/2018/09/01/ai_roundup_310818/ |title=Google goes bilingual, Facebook fleshes out translation and TensorFlow is dope—And, Microsoft is assisting fish farmers in Japan |website=[[The Register]] |access-date=September 2,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902114415/https://www.theregister.co.uk/2018/09/01/ai_roundup_310818/ |archive-date=September 2, 2018 |url-status=live}}</ref> 2018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스카이프 클래식을 중단했다. 2018년 10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는 60,000개 이상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픈 인벤션 네트워크 커뮤니티에 합류했다. 2018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적 앞에서 탐지, 결정, 교전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치명성을 높이기" 위해 미군에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HoloLens) 헤드셋 10만 대를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2018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용 애저 [[다요소 인증]]을 도입했다. 2018년 1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및 Hyper-V 제품에 사용되는 [[UEFI]](Unified Extensible Firmware Interface) 코어의 오픈 소스 릴리스인 프로젝트 Mu를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서비스형 펌웨어]](Firmware as a Service) 아이디어를 장려한다.<ref>{{웹 인용|url=https://betanews.com/2018/12/20/microsoft-project-mu/ |title=Microsoft announces Project Mu, an open-source release of the UEFI core |date=December 20, 2018 |access-date=December 22, 201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1221230714/https://betanews.com/2018/12/20/microsoft-project-mu/ |archive-date=December 21, 2018 |url-status=live}}</ref> 같은 달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데스크톱 응용 프로그램 및 소프트웨어 개발에 사용되는 주요 프레임워크의 투명한 릴리스를 향해 회사가 더욱 나아갈 수 있도록 윈도우 폼 및 WPF(윈도우 프레젠테이션 파운데이션)의 오픈 소스 구현을 발표했다. 또한 12월에는 회사가 브라우저용 크로미엄 백엔드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2019년 2월 20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보안 격차를 해소하고 정치 공간의 고객을 해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의 12개 신규 시장에 사이버 보안 서비스 어카운트가드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2월, 수백 명의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은 미군을 위한 가상 현실 헤드셋 개발을 위해 4억 8천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고 회사가 전쟁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에 항의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9/feb/22/microsoft-protest-us-army-augmented-reality-headsets |title='We won't be war profiteers': Microsoft workers protest $480m army contract |newspaper=The Guardian |date=February 22, 2019 |last1=Wong |first1=Julia Carrie |author-link=Julia Carrie Wong |access-date=February 23, 2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223133132/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9/feb/22/microsoft-protest-us-army-augmented-reality-headsets |archive-date=February 23, 2019 |url-status=live}}</ref> === 2020년~현재: 인수, 엑스박스 시리즈 X/S, 윈도우 11 === 2020년 3월 26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어펌드 네트웍스(Affirmed Networks)를 약 13억 5천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는 건강 문제로 인해 모든 소매점을 무기한 폐쇄했다. 2020년 7월 2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믹서 (서비스)|믹서]] 서비스를 종료하고 기존 파트너를 페이스북 게이밍으로 이전할 계획을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xbox.com/en-us/2020/06/22/bringing-more-players-into-our-gaming-vision|title=Bringing More Players Into Our Gaming Vision|date=June 22, 2020|publisher=Microsoft|access-date=August 17, 2020}}</ref> 2020년 7월 31일, 트럼프 행정부가 [[바이트댄스]]에 애플리케이션 소유권을 미국에 매각하라고 명령한 후 마이크로소프트가 [[틱톡]] 인수를 위해 협상 중이라고 보도되었다. 2020년 8월 3일, 거래에 대한 추측 이후 도널드 트럼프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틱톡을 인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청서를 구매하려면 2020년 9월 15일까지 완료해야 하며, 통과하려면 [[미국 재무부]]가 일부를 받아야 한다.<ref>{{웹 인용|last=Davidson|first=Helen|date=August 3, 2020|title=TikTok sale: Trump approves Microsoft's plan but says US should get a cut of any deal|url=http://www.theguardian.com/technology/2020/aug/03/tiktok-row-trump-to-take-action-soon-says-pompeo-as-microsoft-pursues-deal|access-date=August 3, 2020|website=The Guardian|language=en}}</ref> 2020년 8월 5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iOS 장치에 대한 [[엑스박스 클라우드 게이밍|xCloud]] 게임 스트리밍 테스트를 중단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따르면 iOS에서 xCloud의 미래는 불분명하며 잠재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애플은 "원격 데스크톱 클라이언트"에 엄격한 제한을 적용했다. 즉, 이 응용 프로그램은 사용자 소유의 호스트 장치 또는 사용자가 소유한 게임 콘솔에만 연결할 수 있다. 2020년 9월 21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베데스다 소프트웍스]](Bethesda Softworks)의 모회사인 비디오 게임 회사 [[제니맥스 미디어]](ZeniMax Media)를 약 75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해당 거래는 2021년 회계연도 하반기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2021년 3월 9일 인수가 완료되어 제니맥스 미디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 사업부의 일부가 되었다. 총 거래 금액은 81억 달러이다.<ref>{{웹 인용|url=https://microsoft.gcs-web.com/static-files/0a2b8528-fb8b-4d11-8da2-fd9fa988a155|title=Form 10-K|page=39|website=[[U.S.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SEC]]|date=June 30, 2021|access-date=August 7, 2021|archive-date=2021-08-06|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806183040/https://microsoft.gcs-web.com/static-files/0a2b8528-fb8b-4d11-8da2-fd9fa988a155|url-status=}}</ref> 2020년 9월 2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OpenAI]]의 [[GPT-3]] 인공지능 언어 생성기를 사용할 수 있는 독점 라이선스를 보유했다고 발표했다. [[GPT-2]]라고 불리는 GPT-3의 이전 버전은 "공개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헤드라인을 장식했으며 웹사이트 디자인, 약물 처방, 질문에 답변, 기사 작성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www.independent.co.uk/life-style/gadgets-and-tech/microsoft-openai-gpt-3-exclusive-b550673.html |archive-url=https://ghostarchive.org/archive/20220514/http://www.independent.co.uk/life-style/gadgets-and-tech/microsoft-openai-gpt-3-exclusive-b550673.html |archive-date=May 14, 2022 |url-access=subscription |url-status=live|title=Microsoft gets exclusive access to AI deemed 'too dangerous to release'|access-date=September 24, 2020|website=Independent|date=September 23, 2020}}</ref> 2020년 11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스박스 시리즈 X/S 비디오 게임 콘솔을 출시했다.<ref>{{웹 인용|title=The all-new Xbox Series X {{!}} Xbox|url=https://www.xbox.com/en-US/consoles/xbox-series-x|access-date=December 2, 2020|website=Xbox.com|language=en}}</ref> 2021년 4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스를 약 160억 달러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뉘앙스 인수는 2022년 3월에 완료되었다. 2021년에는 부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분기별 수익이 강세를 보인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치 평가액은 거의 2조 달러에 이르렀다. 원격 근무 및 원격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클라우드 컴퓨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회사의 게임 매출이 증가했다.<ref>{{뉴스 인용|last=Tilley |first=Aaron |date=April 27, 2021|title=Microsoft Sales Show Strong Growth in Gaming, Cloud|language=en-US|work=[[The Wall Street Journal]] |url=https://www.wsj.com/articles/microsoft-msft-3q-earnings-report-2021-11619475788|access-date=April 29, 2021|issn=0099-9660}}</ref><ref>{{뉴스 인용|last=Tilley|first=Aaron|date=March 27, 2020|title=One Business Winner Amid Coronavirus Lockdowns: the Cloud|language=en-US|work=[[The Wall Street Journal]]|url=https://www.wsj.com/articles/one-business-winner-amid-coronavirus-lockdowns-the-cloud-11585327905|access-date=April 29, 2021|issn=0099-9660}}</ref><ref>{{웹 인용|title=FY21 Q2 – Press Releases – Investor Relations – Microsoft|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earnings/FY-2021-Q2/press-release-webcast|access-date=April 29, 2021|website=www.microsoft.com}}</ref> 2021년 6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이브스트림에서 [[윈도우 11]]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10]]이 운영 체제의 마지막 버전이 될 것이라고 발표한 후 발표는 혼란스러워졌다. 2021년 3분기 출시 예정. 2021년 10월 5일 일반 대중에게 출시되었다.<ref>{{뉴스 인용|title=Windows 11 available on October 5 |url=https://blogs.windows.com/windowsexperience/2021/08/31/windows-11-available-on-october-5/ |website=Windows Experience Blog |access-date=October 20, 2021 |date=August 31, 2021|last1=Blog |first1=Windows Experience }}</ref> 2021년 9월, 회사는 다양한 과목의 학생과 교사를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인 테이크레슨스(Takelessons)를 인수했다고 발표되었다. 이번 인수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온라인 교육을 제공하는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달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호주에 본사를 둔 비디오 편집 소프트웨어 회사 클립챔프(Clipchamp)를 인수했다.<ref>{{뉴스 인용|title=Microsoft acquires video creation and editing software maker Clipchamp|url=https://techcrunch.com/2021/09/08/microsoft-acquires-video-creation-and-editing-software-maker-clipchamp/|last=Perez|first=Sarah|website=TechCrunch|date=September 8, 2021|access-date=January 5, 2023}}</ref> 2021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화상 회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동안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보호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팀즈 통화에 대한 E2EE(종단 간 암호화) 지원을 출시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사용자는 자신의 통화가 암호화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통화 중인 양측이 각자 확인해야 하는 보안 코드를 활용할 수 있다. 10월 7일, 마이크로소프트는 OKR에 대한 기업의 진행 상황을 측정하는 소프트웨어 서비스인 Ally.io를 인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Ally.io를 비바(Viva) 직원 경험 제품군에 통합할 계획이다.<ref>{{웹 인용|url=https://techcrunch.com/2021/10/07/microsoft-acquires-ally-io-okr-startup-that-raised-76-million/|title=Microsoft acquires Ally.io, OKR startup that raised $76 million|website=Tech Crunch|date=October 7, 2021|author1=Ron Miller|author2=Alex Wilhelm|access-date=November 12, 2021}}</ref> 2022년 1월 18일,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비디오 게임 개발사이자 지주 회사인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687억 달러 규모의 전액 현금 거래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디아블로]], [[콜 오브 듀티]],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캔디크러쉬사가]], [[크래쉬 밴디쿳]], [[스파이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스파이로]], [[토니 호크 (비디오 게임 시리즈)|토니 호크]], [[기타 히어로]], [[오버워치]]를 포함하되 이에 국한되지 않는 프랜차이즈를 제작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액티비전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각각 인수가 메타버스에서 비즈니스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디오 게임 스튜디오 인수를 [[메타 플랫폼스]]와 경쟁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더스트리트]]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메타버스의 [[월트 디즈니 컴퍼니|디즈니]]"가 되고자 한다고 언급했다. . 마이크로소프트는 또한 2014년부터 엑스박스 브랜드 책임자인 필 스펜서를 새로 설립된 마이크로소프트 게이밍 부문의 초대 CEO로 임명했다. 이 부문에는 현재 엑스박스 운영 팀과 회사 포트폴리오의 3개 퍼블리셔(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 제니맥스 미디어,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포함되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최근 직원 학대와 관련된 액티비전의 법적 논란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논란의 주요 대상인 액티비전 CEO 바비 코틱이 인수가 마무리된 후 회사를 떠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 거래는 2023년 10월 13일에 종료되었다.<ref>{{웹 인용| url = https://www.videogameschronicle.com/news/microsoft-has-officially-completed-its-acquisition-of-activision-blizzard/| title = Microsoft has officially completed its acquisition of Activision Blizzard | first = Tom | last = Ivan | date = October 13, 2023 | accessdate = October 13, 2023 | work = [[Video Games Chronicle]] }}</ref> 2022년 1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를 포함한 제품에 대해 런던 증권 거래소와 새로운 10년 계약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번 거래의 일환으로 LSE의 약 4%를 인수했다.<ref>{{웹 인용|first1=Matt |last1=Clinch |first2=Arjun |last2=Kharpal |title=Microsoft buys near 4% stake in London Stock Exchange Group as part of 10-year cloud deal |url=https://www.cnbc.com/2022/12/12/microsoft-buys-near-4percent-stake-in-london-stock-exchange-and-launches-10-year-partnership.html |date=December 12, 2022 |website=CNBC |language=en}}</ref> 2023년 1월 CEO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약 1만 명의 직원을 해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진 등 50명이 참석한 스위스 다보스에서 스팅 콘서트를 개최한 지 하루 만에 나온 것이다.<ref>{{웹 인용|last=Taylor |first=Chloe |date=January 20, 2023 |title=Microsoft under fire for hosting private Sting concert for its execs in Davos the night before announcing mass layoffs |url=https://fortune.com/2023/01/20/microsoft-under-fire-hosting-private-sting-concert-execs-davos-night-before-announcing-mass-layoffs/ |access-date=January 23, 2023 |website=Fortune |language=en}}</ref> 2023년 1월 2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ChatGPT]] 개발자 OpenAI와 다년간 수십억 달러의 새로운 투자 계약을 발표했다.<ref>{{웹 인용|last=Capoot |first=Ashley |title=Microsoft announces multibillion-dollar investment in ChatGPT-maker OpenAI |url=https://www.cnbc.com/2023/01/23/microsoft-announces-multibillion-dollar-investment-in-chatgpt-maker-openai.html |access-date=January 23, 2023 |website=CNBC |date=January 23, 2023 |language=en}}</ref> 2023년 11월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대규모 언어 모델을 실행하도록 설계된 마이아(Maia) 칩과 애저의 일반 클라우드 서비스를 지원하도록 설계된 코발트(Cobalt) CPU라는 두 가지 새로운 맞춤형 컴퓨팅 칩을 발표했다.<ref>{{웹 인용|title=Microsoft introduces its own chips for AI, with eye on cost |url=https://www.reuters.com/technology/microsoft-introduces-its-own-chips-ai-with-eye-cost-2023-11-15/ |publisher=Reuters |access-date=December 14, 2023}}</ref><ref>{{웹 인용|title=Microsoft is finally making custom chips — and they're all about AI |date=November 15, 2023 |url=https://www.theverge.com/2023/11/15/23960345/microsoft-cpu-gpu-ai-chips-azure-maia-cobalt-specifications-cloud-infrastructure |publisher=The Verge |access-date=December 14, 2023}}</ref> 2023년 11월 20일, 사티아 나델라는 전(그리고 현) OpenAI CEO인 [[샘 올트먼]]과 전(그리고 현) 사장인 [[그렉 브로크만]]이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하여 새로운 고급 AI 연구 팀을 이끌 것이라고 발표했다.<ref>{{웹 인용|url= https://twitter.com/satyanadella/status/1726509045803336122 |title= Satyan Adella on X |website= X |access-date= November 20, 202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1120082141/https://twitter.com/satyanadella/status/1726509045803336122 |archive-date= November 20, 2023 }}</ref><ref>{{웹 인용|url= https://www.cnbc.com/2023/11/20/ousted-openai-head-sam-altman-to-lead-microsofts-new-ai-team-ceo-nadella-says.html |title= Ousted OpenAI head Sam Altman to lead Microsoft's new AI team |website=CNBC |date= November 20, 2023 |access-date= November 20, 202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1120084752/https://www.cnbc.com/2023/11/20/ousted-openai-head-sam-altman-to-lead-microsofts-new-ai-team-ceo-nadella-says.html |archive-date= November 20, 2023 }}</ref> 2024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가장 가치 있는 상장 기업이 되었다. 한편, 그 달 회사는 코파일럿 프로를 통해 중소기업을 위한 인공지능 구독 서비스를 발표했다.<ref>{{웹 인용|last=Novet |first=Jordan |date=January 12, 2024 |title=Microsoft tops Apple as world's most valuable public company |url=https://www.cnbc.com/2024/01/12/microsoft-tops-apple-in-market-cap-at-fridays-close.html |access-date=January 14, 2024 |website=CNBC |language=en}}</ref><ref>{{웹 인용|last=Novet |first=Jordan |date=January 15, 2024 |title=Microsoft brings Copilot AI assistant to small businesses and launches a premium tier for individuals |url=https://www.cnbc.com/2024/01/15/microsoft-brings-copilot-to-small-businesses-launches-copilot-pro.html |access-date=January 15, 2024 |website=CNBC |language=en}}</ref>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2024년 4월 16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에미라티 AI 회사 G42에 15억 달러의 상당한 투자를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진화하는 글로벌 AI 환경에서 인공 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노력과 G42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조한다.<ref>{{웹 인용|date=April 16, 2024 |title=Microsoft to invest $1.5 bln in Emirati AI firm G42, takes minority stake |url=https://www.reuters.com/markets/deals/microsoft-invest-15-bln-emirati-ai-firm-g42-new-york-times-reports-2024-04-16/ |access-date=April 16, 2024 |website=Reuters |language=en}}</ref> 2024년 4월 30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인도네시아의 AI 및 클라우드 인프라 개발에 17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다양한 부문에서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데이터 센터 및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국가의 디지털 변혁 노력을 강화하고 지역 기술 발전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ref>{{웹 인용|date=April 30, 2024 |title=Microsoft To Invest $1.7 Billion To Develop AI, Cloud Infrastructure In Indonesia|url=https://www.forbes.com/sites/yessarrosendar/2024/04/30/microsoft-to-invest-17-billion-to-develop-ai-cloud-infrastructure-in-indonesia/?sh=6ceee60a7e5c |access-date=April 30, 2024 |website=forbes |language=en}}</ref> 2024년 5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위스콘신 남동부에 인공지능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33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초기 제안의 3배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라신 카운티에서 발표한 이 계획에는 데이터 센터 건설, 2025년까지 2,300개의 건설 일자리 창출, 시간이 지남에 따라 2030년까지 2,000개의 영구 일자리 창출, 최대 1,000명의 개인을 교육하기 위해 UW-밀워키에 AI 공동 혁신 연구소 설립 등이 포함된다.<ref>{{웹 인용|last=Schmidt |first=Mitchell |date=2024-05-09 |title=What to know about Microsoft's $3.3 billion data center in southeast Wisconsin |url=https://madison.com/news/state-regional/business/wisconsin-microsoft-artificial-intelligence-racine-biden-evers-trump-foxconn-manufacturing-data-center/article_3b0f4012-0d42-11ef-a7db-9325e7c8bc73.html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archive.today/20240515115627/https://madison.com/news/state-regional/government-politics/wisconsin-microsoft-artificial-intelligence-racine-biden-evers-trump-foxconn-manufacturing-data-center/article_3b0f4012-0d42-11ef-a7db-9325e7c8bc73.html#selection-3893.0-4397.143 |archive-date=15 May 2024 |access-date=2024-05-15 |website=Wisconsin State Journal |language=en}}</ref> 2024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의 혼합 현실 및 애저 클라우드 컴퓨팅 부서에서 직원 1,000명을 해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ref>{{웹 인용|last=Novet |first=Jordan |date=2024-06-03 |title=Microsoft confirms layoffs in mixed reality but will keep selling HoloLens 2 headsets |url=https://www.cnbc.com/2024/06/03/microsoft-confirms-mixed-reality-layoffs-will-keep-selling-hololens-2.html |access-date=2024-06-04 |website=CNBC |language=en}}</ref><ref>{{웹 인용|last=Stewart |first=Ashley |date=June 3, 2024 |title=Microsoft is laying off hundreds in its Azure cloud business, sources say |url=https://www.businessinsider.com/microsoft-cuts-azure-jobs-cloud-2024-6 |access-date=2024-06-04 |website=Business Insider |language=en-US}}</ref> 2024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우스이스트리즈(South East Leeds)에 "하이퍼스케일 데이터 센터"를 구축한다고 발표했다.<ref>{{웹 인용|date=2024-06-28 |title=Microsoft to build 'hyperscale data centre' near Leeds |url=https://www.bbc.com/news/articles/cy79eww4g8go |access-date=2024-06-29 |website=BBC News |language=en-GB}}</ref> == 회사 구조 == === 사업 부문 === 2015년 기준 마이크로소프트가 참여하는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 * [[윈도우 폰|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폰]] ([[모바일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사무용 제품군]]) *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태블릿 컴퓨터|태블릿 기기]]) *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북]] ([[노트북|노트북 기기]]) * [[마이크로소프트 루미아]] ([[휴대 전화]]) * [[빙 (검색 엔진)|마이크로소프트 빙]] ([[검색엔진]]) * 마이크로소프트 [[스카이프]]([[인스턴트 메신저]]) *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원]](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 *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통합 개발 환경]]) * [[MSN]]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 [[인터넷 포털]]) *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웹 브라우저]]) * [[마이크로소프트 코타나]] ([[음성 인식]]) === 주요 제품군 === * [[MS-DOS]]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 [[윈도우 라이브 메신저]] ([[인스턴트 메신저]]) ** [[2013년]] 3월부터 [[스카이프]]로 대체되었다. *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 *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통합 개발 환경]]) * [[포켓 피씨|마이크로소프트 포켓 피씨]] ([[PDA]]용 운영 체제) * [[윈도우 CE]](모바일 기기용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SQL 서버]] *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서버]] * 마이크로소프트 기타 서버 제품 (SMS, ISA, MOM, 등) * 마이크로소프트 기업용 CRM 제품 *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 [[준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마이크로소프트 준]] * [[마인크래프트]] * [[엑스박스|Xbox]] === 최고 경영자 === # [[빌 게이츠]] (1975~2000년) # [[스티브 발머]] (2000~2014년) # [[사티아 나델라]] (2014년~현재) === 재정 지표 === [[파일:Microsoft 5-Year Stock History.svg|upright=1.6|섬네일|2013년 7월 17일 기준 나스닥 주식의 5년 역사 그래프<ref>{{웹 인용|url=http://zenobank.com/index.php?symbol=MSFT&page=quotesearch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1030114740/http://zenobank.com/index.php?symbol=MSFT&page=quotesearch |url-status=dead |archive-date=October 30, 2008 |title=Five year history graph of (NASDAQ:MSFT) stock |work=ZenoBank |publisher=AlphaTrade |date=September 29, 2009 |access-date=September 29, 2009}}</ref>]] {| class="wikitable float-left" style="text-align: right;" !연도 !소득<br />100만 US$<ref>{{웹 인용|title=FY23 Q4 - Press Releases - Investor Relations - Microsoft |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earnings/fy-2023-q4/press-release-webcast |access-date=2023-07-25 |website=www.microsoft.com}}</ref> !순소득<br />100만 US$<ref>{{웹 인용|title=FY23 Q4 - Press Releases - Investor Relations - Microsoft |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earnings/fy-2023-q4/press-release-webcast |access-date=2023-07-25 |website=www.microsoft.com}}</ref> !총 자산<br />100만 US$<ref>{{웹 인용|title=FY23 Q4 - Press Releases - Investor Relations - Microsoft |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earnings/fy-2023-q4/press-release-webcast |access-date=2023-07-25 |website=www.microsoft.com}}</ref> !직원 수<ref name=":2">{{웹 인용|title=Microsoft Investor Relations—Annual Reports |url=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annual-reports.aspx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1107145159/https://www.microsoft.com/en-us/Investor/annual-reports.aspx |archive-date=November 7, 2018 |access-date=November 7, 2018 |website=www.microsoft.com |language=en}}</ref> |- | 2005 | 39,788 | 12,254 | 70,815 | 61,000 |- | 2006 | 44,282 | 12,599 | 69,597 | 71,000 |- | 2007 | 51,122 | 14,065 | 63,171 | 79,000 |- | 2008 | 60,420 | 17,681 | 72,793 | 91,000 |- | 2009 | 58,437 | 14,569 | 77,888 | 93,000 |- | 2010 | 62,484 | 18,760 | 86,113 | 89,000 |- | 2011 | 69,943 | 23,150 | 108,704 | 90,000 |- | 2012 | 73,723 | 16,978 | 121,271 | 94,000 |- | 2013 | 77,849 | 21,863 | 142,431 | 99,000 |- | 2014 | 86,833 | 22,074 | 172,384 | 128,000 |- | 2015 | 93,580 | 12,193 | 174,472 | 118,000 |- | 2016 | 91,154 | 20,539 | 193,468 | 114,000 |- | 2017 | 96,571 | 25,489 | 250,312 | 124,000 |- | 2018 | 110,360 | 16,571 | 258,848 | 131,000 |- | 2019 | 125,843 | 39,240 | 286,556 | 144,106 |- |2020 |143,015 |44,281 |301,311 |163,000 |- |2021 |168,088 |61,271 |333,779 |181,000 |- |2022 |198,270 |72,738 |364,840 |221,000 |- |2023 |211,915 |73,307 |411,976 |221,000 |} == 기업 아이덴티티 == === 로고 ===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연도별로 크게 아래와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처음 사용된 초기의 로고는 1987년 9월까지 사용되었고, 로고의 이름은 blibbet이라고 불렸다. 그 뒤 [[1987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스캇 베이커(Scott Baker)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갖춘 팩맨(Pac-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고를 만들었다. 1994년부터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오늘은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라는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면서부터 1987년 디자인된 팩맨 로고 아래에 추가적으로 캠페인 문구가 삽입되었고 이 캠페인 문구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02년]]까지 각종 인쇄매체, [[텔레비전 광고|TV 광고]], 웹사이트 로고 등에 쓰인다. 2003년부터는 "Your potential, Our passion (당신의 가능성, 우리의 열정)"이란 슬로건 문자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가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슬로건]]이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10년]]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2010년에 열린 비공개 MGX (Microsoft Global Exchange)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슬로건인 "Be What's Next (다음의 무언가가 되자)"를 공개했다. 이 슬로건은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engadget.com/2010/07/22/new-microsoft-brand-logos-company-tagline-revealed-at-mgx-event/ | 제목 = "New Microsoft brand logos, company tagline revealed at MGX event? (MGX 행사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새로운 브랜드 로고, 슬로건이 공개되었나?) | 출판사 = 앤가젯 | 확인날짜 = 2011-02-13}}</ref><ref>{{뉴스 인용 | url = http://downloadsquad.switched.com/2011/01/19/microsoft-testing-new-be-whats-next-metro-and-ie9-inspired-h/ | 제목 = "Microsoft testing new "Be what's next" Metro- and IE9-inspired homepage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새로운 Be What's Next가 적용된 Metro UI 기반, IE9 스타일의 홈페이지를 테스트 중임) | 출판사 = AOL, Switched Download Squad | 확인날짜 = 2011-02-13 | archive-date = 2011-01-22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122094629/http://downloadsquad.switched.com/2011/01/19/microsoft-testing-new-be-whats-next-metro-and-ie9-inspired-h/ }}</ref> 이후 2012년 8월 23일 새로운 로고를 선보였다. 이 로고는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뀐 형태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betanews.net/article/566378 | 제목 = 마이크로소프트, 25년 만에 ‘로고 변경’ }}</ref> {{중앙|'''슬로건'''}} <div align="center" > <gallery> 파일:Microsoft logo (1987) + slogan (1994).svg|스캇 베이커가 디자인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팩맨 로고.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쓰였으며 1994년-2002년까지는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용됨. 파일:Microsoft logo (1987) + slogan (2006).png|''"Your potential, Our passion."''이란 슬로건과 함께 사용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용됨. 파일:Microsoft logo (1987) + slogan (2011) horizontal.png|"Be What's Next"란 슬로건과 함께 사용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됨. </gallery> </div> {{중앙|'''로고'''}} <div align="center" > <gallery> 파일:Microsoft logo (1982).svg|1982년부터 1987년까지 사용한 초기의 로고 파일:Microsoft logo (1987).svg|1987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한 로고 파일:Microsoft.svg|2012년 8월 23일부터 새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로고.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이 사각형은 반시계 방향으로 오피스, 윈도우, 빙,엑스박스를 의미한다. </gallery> </div> === 비판 ===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에 [[MS-DOS]]를 납품하였고, 때마침 PC의 성공에 힘입어 [[도스]] 시장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1995년]], [[윈도우 95]]라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를 출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 [[주변기기]] 업체들로 하여금 윈도우 전용 [[장치 드라이버|드라이버]]를 중심으로 개발하도록 유도했다. 자사의 MS-DOS 이외의 다른 [[도스]]와의 호환성도 인위적으로 버렸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이 [[인터넷]]에서 앞서나감에 따라, 윈도우 95용으로 별도 판매된 PLUS! 팩에 처음 제공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8]]부터는 운영 체제에 포함하여 끼워팔기를 하여 비판을 받았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지나친 시장 장악으로 경쟁사들을 시장에서 도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익스플로러는 점유율 95%의 독점 상태에까지 이르러서,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의 대체 브라우저가 등장하기까지 5년여동안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은 'Micro$oft'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밸브 코퍼레이션]]이 [[레프트 4 데드]] 관련 포럼에서 {{인용문2|XBOX360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소유이다. 그러니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요. Micro$oft잖아요, 뭘 더 바랍니까?<br />''Microsoft owns the XBOX360, thats why you need to pay. It's Micro$oft, what do you expect?''}}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 같이 보기 == * [[빌 게이츠]] *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넷]] * [[구글]]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각주 == {{각주}} == 참고 자료 == * {{웹 인용 | url = http://www.seri.org/kz/kzBndbV.html?ucgb=KZBNDB&no=8644&cateno=1 | 제목 =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배구조 사례연구 | 출판사 = [[삼성경제연구소]] | 날짜 = 2007-04-24 | 확인날짜 = 2010-06-15 | archive-date = 2021-02-24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210224145456/https://www.seri.org/kz/kzBndbV.html?ucgb=KZBNDB&no=8644&cateno=1 | url-status = }}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Microsoft}} * {{언어링크|en}} {{공식 웹사이트}} * {{언어링크|ko}} {{공식 웹사이트|http://www.microsoft.com/korea/}} {{Finance links|name=마이크로소프트|google=MSFT:NASDAQ|yahoo=MSFT|bloomberg=MSFT:US|reuters=MSFT.O|alphasquare=MSFT}} === 해외 외부 링크 === {{글 숨김}} ==== Asia ====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https://www.microsoft.com/zh-cn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 {{국기그림|홍콩}} [https://www.microsoft.com/en-hk 마이크로소프트 홍콩(영어)] * {{국기그림|홍콩}} [https://www.microsoft.com/zh-hk 마이크로소프트 홍콩(중국어)] * {{국기그림|인도}} [https://www.microsoft.com/en-in 마이크로소프트 인도] * {{국기그림|인도네시아}} [https://www.microsoft.com/id-id 마이크로소프트 인도네시아] * {{국기그림|일본}} [https://www.microsoft.com/ja-jp 마이크로소프트 일본] * {{국기그림|대한민국}} [https://www.microsoft.com/ko-kr 마이크로소프트 대한민국] * {{국기그림|카자흐스탄}} [https://www.microsoft.com/ru-kz 마이크로소프트 카자흐스탄] * {{국기그림|스리랑카}} [https://www.microsoft.com/en-lk 마이크로소프트 스리랑카] * {{국기그림|말레이시아}} [https://www.microsoft.com/en-my 마이크로소프트 말레이시아] * {{국기그림|파키스탄}} [https://www.microsoft.com/en-pk 마이크로소프트 파키스탄] * {{국기그림|필리핀}} [https://www.microsoft.com/en-ph 마이크로소프트 필리핀] * {{국기그림|싱가포르}} [https://www.microsoft.com/en-sg 마이크로소프트 싱가포르] * {{국기그림|태국}} [https://www.microsoft.com/th-th 마이크로소프트 태국] * {{국기그림|중화민국}} [https://www.microsoft.com/zh-tw 마이크로소프트 대만] * {{국기그림|베트남}} [https://www.microsoft.com/vi-vn 마이크로소프트 베트남] ==== Middle East ==== * {{국기그림|걸프 협력 회의}} [https://www.microsoft.com/ar-gulf 마이크로소프트 걸프(아랍어)] * {{국기그림|걸프 협력 회의}} [https://www.microsoft.com/en-gulf 마이크로소프트 걸프(영어)] * {{국기그림|이스라엘}} [https://www.microsoft.com/he-il 마이크로소프트 이스라엘] * {{국기그림|이라크}} [https://www.microsoft.com/ar-iq 마이크로소프트 이라크] * {{국기그림|요르단}} [https://www.microsoft.com/en-jo 마이크로소프트 요르단] * {{국기그림|레바논}} [https://www.microsoft.com/en-lb 마이크로소프트 레바논] * {{국기그림|사우디아라비아}} [https://www.microsoft.com/ar-sa 마이크로소프트 사우디아라비아(아랍어)] * {{국기그림|사우디아라비아}} [https://www.microsoft.com/en-sa 마이크로소프트 사우디아라비아(영어)] ==== Europe ==== {{div col|2}} * {{국기그림|오스트리아}} [https://www.microsoft.com/de-at 마이크로소프트 오스트리아] * {{국기그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https://www.microsoft.com/bs-ba 마이크로소프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국기그림|벨기에}} [https://www.microsoft.com/fr-be 마이크로소프트 벨기에(프랑스어)] * {{국기그림|벨기에}} [https://www.microsoft.com/nl-be 마이크로소프트 벨기에(네덜란드어)] * {{국기그림|불가리아}} [https://www.microsoft.com/bg-bg 마이크로소프트 불가리아] * {{국기그림|벨라루스}} [https://www.microsoft.com/ru-by 마이크로소프트 벨라루스] * {{국기그림|스위스}} [https://www.microsoft.com/de-ch 마이크로소프트 스위스(독일어)] * {{국기그림|스위스}} [https://www.microsoft.com/fr-ch 마이크로소프트 스위스(프랑스어)] * {{국기그림|키프로스}} [https://www.microsoft.com/en-cy 마이크로소프트 키프로스] * {{국기그림|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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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icrosoft.com/en-ca 마이크로소프트 캐나다] * {{국기그림|캐나다}} [https://www.microsoft.com/fr-ca 마이크로소프트 캐나다] * {{국기그림|미국}} [https://www.microsoft.com/en-us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 Latin America ==== * {{국기그림|아르헨티나}} [https://www.microsoft.com/es-ar 마이크로소프트 아르헨티나] * {{국기그림|볼리비아}} [https://www.microsoft.com/es-bo 마이크로소프트 볼리비아] * {{국기그림|브라질}} [https://www.microsoft.com/pt-br 마이크로소프트 브라질] * {{국기그림|칠레}} [https://www.microsoft.com/es-cl 마이크로소프트 칠레] * {{국기그림|콜롬비아}} [https://www.microsoft.com/es-co 마이크로소프트 콜롬비아] * {{국기그림|코스타리카}} [https://www.microsoft.com/es-cr 마이크로소프트 코스타리카] * {{국기그림|도미니카 공화국}} [https://www.microsoft.com/es-do 마이크로소프트 도미니카 공화국] * {{국기그림|에콰도르}} [https://www.microsoft.com/es-ec 마이크로소프트 에콰도르] * {{국기그림|과테말라}} [https://www.microsoft.com/es-gt 마이크로소프트 과테말라] * {{국기그림|온두라스}} [https://www.microsoft.com/es-hn 마이크로소프트 온두라스] * {{국기그림|멕시코}} [https://www.microsoft.com/es-mx 마이크로소프트 멕시코] * {{국기그림|니카라과}} [https://www.microsoft.com/es-ni 마이크로소프트 니카라과] * {{국기그림|파나마}} [https://www.microsoft.com/e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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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호주] * {{국기그림|뉴질랜드}} [https://www.microsoft.com/en-nz 마이크로소프트 뉴질랜드] {{글 숨김 끝}} {{마이크로소프트|expended}}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계열}}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 구성 종목}} {{나스닥100 지수 구성 종목}} {{주요 인터넷 기업}} {{전거 통제}} [[분류:마이크로소프트| ]] [[분류:1975년 설립된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레드먼드 (워싱턴주)의 기업]] [[분류:컴퓨터 기업]] [[분류:빌 게이츠]] [[분류:클라우드 컴퓨팅 제공자]] [[분류:미국의 다국적 기업]] [[분류:미국의 전자 기업]] [[분류: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업]] [[분류:혼성어]] [[분류:1975년 설립된 컴퓨터 기업]] [[분류:1975년 설립된 전자 기업]] [[분류:1975년 설립된 기술 기업]]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WebCite||웹페이지 보존 사이트}} [[파일:Www.wikipedia.org screenshot.png|thumb]] '''웹사이트'''({{llang|en|website}}<ref>{{웹 인용 |url=http://www.thefreedictionary.com/Website |title=website – definition of website by the Free Online Dictionary, Thesaurus and Encyclopedia |publisher=Thefreedictionary.com |date= |accessdate=2011-07-0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507204408/https://www.thefreedictionary.com/website |보존날짜=2018-05-07 |url-status=dead }}</ref>, {{문화어|웨브싸이트}})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https://vietstaragency.com/10-cach-toi-uu-hoa-hieu-suat-website.html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 (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로컬 영역 네트워크|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 역사 ==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다.<ref>[http://info.cern.ch/ Welcome to info.cern.ch<!-- 봇이 따온 제목 -->]</ref>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ref>[http://www.w3.org/History.html 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Wide Web<!-- 봇이 따온 제목 -->]</ref>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 info.cern.ch ==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웹 사이트로 CERN 홈페이지 안에 Welcome to info.cern.ch!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개발자인 팀 버너스리의 소개와 생애, 연구자료, 스크린샷 등 여러 CERN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 후로, 약 24년 동안 전 세계 수억 개의 사이트가 새로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 기능별 분류 ==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 [[개인 웹 페이지|개인 웹사이트]] * [[상용 웹사이트]] * [[전자 정부|정부 웹사이트]] * [[비영리 단체]] 웹사이트 == 종류 == * [[포털 사이트]] - 현관문이란 뜻으로 정보검색, 커뮤니티를 통합한 형태의 웹사이트이다. * [[검색 사이트]] - [[웹 크롤러]]가 수집한 많은 인터넷상의 웹문서중 사용자가 검색한 정보만 추출해서 보여준다. * [[전자상거래 사이트]] - [[인터넷]]을 통해 상품을 사고판다. * [[다운로드 사이트]] - [[소프트웨어]]나 [[바탕화면]] 등의 자료를 받는다. * [[정보 사이트]] - 어떤 주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 [[미러 (컴퓨팅)|미러 사이트]] * [[블로그]] * [[인터넷 포럼]] == 기관별(도메인) 분류 == * '''ac(Academy) :''' [[대학]], 대학원. * '''co(Company), com(Commercial) :''' [[기업]], [[상업]]기관. * '''go(Government) :''' [[정부]]기관. * '''net(Network) :''' [[네트워크]] 관련 단체 도메인. * '''or(Organization) :''' [[비영리 단체|비영리기관]]. * '''pe(Personel) :''' 개인 홈페이지. * '''re(Research) :''' [[연구소|연구기관]]. * '''es(Elementary School) :''' [[초등학교]]. * '''ms(middle school) :''' [[중학교]]. * '''hs(high school, secondary schoo) :''' [[고등학교]]. * '''sc(School) :''' 기타학교([[특수학교]] 등). == 인트로 페이지 ==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의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의 이름을 갖는 [[HTML]] 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frameset> [[HTML 요소|태그]]와 하위의 <frame>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ref>(MDN -frameset example)<frameset cols="50%,50%"> <frame src="http://developer.mozilla.org/en-US/docs/Web/HTML/Element/frameset" /> <frame src="http://developer.mozilla.org/en-US/docs/Web/HTML/Element/frame" /> </frameset> (https://developer.mozilla.org/en-US/docs/Web/HTML/Element/frameset)</ref> <ref>(index.html의 가벼운 구조)<frameset cols="25%,75%"> <frame src='menu.html'> //menu side <frame src='contents.html'> //contents </frameset></ref><ref>(php)index.php</ref> == 같이 보기 == * [[전자 게시판]] * [[깨진 링크]] * [[웹사이트 목록]] * [[사이트맵]] * [[웹 디자인]] * [[웹 개발]] * [[웹 호스팅 서비스]] * [[웹사이트 모네타이제이션]] *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www.w3.org 월드 와이드 웹 협회] {{전거 통제}} {{토막글|웹사이트}} [[분류:웹사이트| ]] [[분류:영어계 외래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0-10-14}} [[파일:Sistema hipertextual.jpg|섬네일|[[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 '''하이퍼텍스트'''({{lang|en|hypertext}}, {{문화어|초본문, 하이퍼본문}})는 참조([[하이퍼링크]])를 통해 독자가 한 문서에서 다른 문서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ref>{{웹 인용| url=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hypertext | title=Hypertext | type=definition |publisher=Marriam-webster Free Online Dictionary | accessdate= February 26, 2015}}</ref> 주로 컴퓨터나 다른 전자기기들을 통해 표시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낱말은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넬슨]]이 처음 고안하여 쓰이게 되었다.'hyper(건너편의, 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인터넷]]과 결합하여 [[HTML]]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었다. 기존의 문서가 순차적이면서 서열형 구조라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 따라 그 차례가 바뀌는 임의적이면서 나열형인 구조를 가진다. 즉, 출판된 책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을 어떠한 행위(클릭)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은 [[검색엔진]]과 더불어 정보습득의 새로운 장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https://m.blog.naver.com/hyperjang/221417500769 하이퍼서사(하이퍼픽션)]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케 하였다. [[웹]]이라는 것은 컨텐츠들이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쓰인 기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HTML]]과 [[HTTP]]이다. [[HTTP]]는 하나의 프로토콜으로서, 이 통신규약을 이용해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HTTP]]로 [[HTML|HTML 문서]]가 전달될 수 있다. == 역사 == 1941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에 영감을 준 것으로 간주되는, 갈림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ref name="inspiration">{{인용 | url = http://dl.acm.org/citation.cfm?id=317431 | publisher =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 title = Hyper<wbr>text and creative writing}}.</ref> 1945년, [[버니바 부시]]는 [[디 애틀랜틱|애틀랜틱 먼슬리]]에 "As we may think"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에서 제시한 [[메멕스]]라는 개념은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시초로 일컬어진다. 1989년,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과학자였던 [[팀 버너스리|팀 버너스 리]]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정보 공유 기능이 CERN 및 기타 학술 기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 간에 사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하였고 나중에 원형을 만들었다.<ref name = "WWW_proposal">{{인용 | url = http://www.w3.org/Proposal.html | title = WorldWideWeb: Proposal for a Hyper<wbr>Text Project | publisher = The World Wide Web consortium}}.</ref> == 비평가와 이론가 그리고 작가 == *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 *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 * [[옐로리스 더글러스]](J. Yellowlees Douglas) * [[캐서린 하일리스]](N. Katherine Hayles) * [[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 * [[조지 랜도우 (교수)]](George Landow (professor)) *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 * [[스튜어트 몰드롭]](Stuart Moulthrop) * [[테드 넬슨]](Ted Nelson)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HTML]] == 각주 == {{각주}} {{시맨틱 웹}} {{전거 통제}} {{토막글|인터넷}} [[분류:하이퍼텍스트| ]]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1960년대 신조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KB Dubeolsik for Old Hangul (NG3).svg|섬네일|두벌식 한글 자판.]] '''문자 인코딩'''(文字 - , {{llang|en|character encoding}}) 또는 텍스트 인코딩(text encoding)<ref>(마이크로소프트-파일을 열거나 저장할 때 텍스트 인코딩 선택)https://support.microsoft.com/ko-kr/office/%ED%8C%8C%EC%9D%BC%EC%9D%84-%EC%97%B4%EA%B1%B0%EB%82%98-%EC%A0%80%EC%9E%A5%ED%95%A0-%EB%95%8C-%ED%85%8D%EC%8A%A4%ED%8A%B8-%EC%9D%B8%EC%BD%94%EB%94%A9-%EC%84%A0%ED%83%9D-60d59c21-88b5-4006-831c-d536d42fd861#bm1</ref> 또는 줄여서 '''[[부호화|인코딩]]'''은 사용자가 입력한 [[문자]]나 [[기호]]들을 [[코드|컴퓨터가 이용할 수 있는 신호]]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시스템|넓은 의미의 컴퓨터]]는 이러한 신호를 입력받고 처리하는 기계를 뜻하며, [[신호 처리 시스템]]을 통해 이렇게 처리된 정보를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docsity.com/pt/electric-circuits-9th-edition-by-james-w-nilsson-susan-riedel/4806377/|제목=Electric Circuits|성=Nilsson|이름=James W|성2=Riedel|이름2=Susan|날짜=2011|판=9|출판사=Pearson|쪽=9}}</ref> 이 신호를 입력하는 인코딩과 문자를 해독하는 [[디코딩]]을 하기 위해선 미리 정해진 기준을 바탕으로 입력과 해독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를 문자열 세트 또는 문자셋이라고 한다. 초기 보급형 컴퓨터의 문자열 세트는 [[아스키]]나 [[EBCDIC]]이 표준이었으나, 이러한 문자열 세트는 세계 곳곳에 인터넷이 보급되며 표현해야 할 문자가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자셋들을 표준화하기 위해 많은 [[Ad hoc|대체 방식]]이 개발되었다. 표준 문자셋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후에는 [[유니코드]]가 등장하게 되었다.<ref>{{서적 인용|제목=HTML CSS|성=김선희|이름=|날짜=2013-08-26|판=|출판사=길벗출판사|쪽=96|장=2|isbn=9788966185795}}</ref> == 문자열 세트의 종류 == * [[ISO/IEC 646|ISO 646]] ** [[ASCII]] * [[EBCDIC]] ** [[EBCDIC 37|CP37]] ** [[EBCDIC 930|CP930]] ** [[EBCDIC 1047|CP1047]] * [[ISO/IEC 8859|ISO 8859]]: ** [[ISO/IEC 8859-1|ISO 8859-1]] 서유럽 ** [[ISO/IEC 8859-2|ISO 8859-2]] 서유럽 및 중앙유럽 ** [[ISO/IEC 8859-3|ISO 8859-3]] 서유럽 및 남유럽 (터키어, 몰타어, 에스페란토어) ** [[ISO/IEC 8859-4|ISO 8859-4]] 서유럽 및 발트 해 국가 (리투아니아어, 에스토니아어, 라프어) ** [[ISO/IEC 8859-5|ISO 8859-5]] 키릴 문자 ** [[ISO/IEC 8859-6|ISO 8859-6]] 아랍 글자 ** [[ISO/IEC 8859-7|ISO 8859-7]] 그리스 글자 ** [[ISO/IEC 8859-8|ISO 8859-8]] 히브리 글자 ** [[ISO/IEC 8859-9|ISO 8859-9]] 서유럽 (개정된 터키어 문자 집합 포함) ** [[ISO/IEC 8859-10|ISO 8859-10]] 서유럽 (개정된 노르딕어를 위한 문자 집합 및 완전 아이슬란드 문자 집합 포함) ** [[ISO/IEC 8859-11|ISO 8859-11]] 타이어 ** [[ISO/IEC 8859-13|ISO 8859-13]] 발트어, 폴란드어 ** [[ISO/IEC 8859-14|ISO 8859-14]] 켈트어 (아일랜드 게일어, 스코틀랜드어, 웨일스어) ** [[ISO/IEC 8859-15|ISO 8859-15]] 유로 기호 및 ISO 8859-1에 대한 다른 항목 추가 ** [[ISO/IEC 8859-16|ISO 8859-16]] 중앙 유럽, 남유럽어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헝가리어, 알바니아어, 로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 [[코드 페이지 437|CP437]], [[코드 페이지 737|CP737]], [[코드 페이지 850|CP850]], [[코드 페이지 852|CP852]], [[코드 페이지 855|CP855]], [[코드 페이지 857|CP857]], [[코드 페이지 858|CP858]], [[코드 페이지 860|CP860]], [[코드 페이지 861|CP861]], [[코드 페이지 863|CP863]], [[코드 페이지 865|CP865]], [[코드 페이지 866|CP866]], [[코드 페이지 869|CP869]] * [[코드 페이지|MS 윈도 문자 집합]]: ** [[Windows-1250]] 라틴 글자를 이용하는 중앙 유럽 언어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헝가리어, 슬로베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로마어, 알바니아어) ** [[Windows-1251]] 키릴 문자 ** [[Windows-1252]] 서양어 ** [[Windows-1253]] 그리스어 ** [[Windows-1254]] 터키어 ** [[Windows-1255]] 히브리어 ** [[Windows-1256]] 아랍어 ** [[Windows-1257]] 발트어 ** [[Windows-1258]] 베트남어 * [[맥 오에스 로만]] (Mac OS Roman) * [[KOI8-R]], [[KOI8-U]], [[KOI7]] * [[MIK 코드 페이지|MIK]] * [[ISCII]] 인도 * [[TSCII]] 타밀어 * [[VISCII]] 베트남어 * [[JIS X 0208]] 일본어 ** [[Shift JIS]]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32]]는 Shift_JIS의 파생) ** [[EUC-JP]] ** [[ISO/IEC 2022|ISO-2022-JP]] * [[JIS X 0213]]는 JIS X 0208의 확장판. ** [[Shift JIS|Shift_JIS-2004]] ** [[EUC|EUC-JIS-2004]] ** [[ISO/IEC 2022|ISO-2022-JP-2004]] * 중국어 간체자 [[GB 표준 목록|GB]] ** [[GB 2312]] ** [[GBK]]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36) ** [[GB 18030]] * 대만 [[Big5]] (더 잘 알려진 종류가 마이크로소프트 [[코드 페이지 950]]) * 홍콩 [[HKSCS]] * 한국어 ** [[KS X 1001]]은 2바이트 한국어 문자 인코딩 표준이다. ** [[EUC-KR]] ** [[ISO/IEC 2022|ISO-2022-KR]] * [[유니코드]] ([[UTF-8]]도 참조) * [[ANSEL]] 또는 [[ISO/IEC 6937]] == 문자 인코딩의 구성 == 문자 정보는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글자들의 집합을 정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문자 집합을 여러 문자 인코딩에서 쓸 수도 있다. 특히 집합 안의 문자들에 음수가 아닌 정수들을 배정한 것을 부호화된 문자 집합(coded character set, CCS)라 한다. 문자 집합은 ASCII와 같이 더 이상의 문자가 추가될 수 없기도 하고, [[유니코드]]와 같이 문자가 계속 추가될 수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과 문자 인코딩은 어떤 문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타낸다는 데서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MIME]]이나 그에 기반한 시스템은 문자 집합("charset")을 문자 인코딩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문자 인코딩 형태'''(character encoding form, CEF)는 특정한 문자 집합 안의 문자들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의 정수(코드값)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유니코드 코드 포인트를 8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8]]이나, 16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16]],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문자 인코딩들이 포함된다. '''문자 인코딩 구조'''(character encoding scheme, CES)는 문자 인코딩 형태로 변환된 코드값을 [[옥텟 (컴퓨팅)|옥텟]] 기반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옥텟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 형태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으며, 8비트 이상의 숫자를 사용하는 UTF-16과 같은 문자 인코딩 형태의 경우 [[엔디안]]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ISO 2022]]와 같은 복합 인코딩이나, [[SCSU]]와 같은 압축 방법 등이 속한다. ==퍼센트 인코딩== {{본문|퍼센트 인코딩}} 퍼센트 인코딩(percent-encoding)은 URL에 문자를 표현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알파벳이나 숫자 등 몇몇 문자를 제외한 값은 옥텟 단위로 묶어서, 16진수 값으로 인코딩한다. ==문자깨짐 현상== {{본문|문자깨짐}} [[utf-8]]이나 [[euc-kr]]같은 서로 다른 문자 인코딩 방식은 텍스트나 문자의 깨짐 현상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중 하나이다. == 같이 보기 == * [[:분류:문자 인코딩|문자 인코딩의 목록]] * [[문자 집합]]([[:분류:문자 집합|문자 집합의 목록]]) * [[제어 문자]] * [[코드 페이지]]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언어링크|en}} [http://www.iana.org/assignments/character-sets Character sets registered by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050323094939/http://www.unicode.org/unicode/reports/tr17/ Unicode Technical Report #17: Character Encoding Model] {{문자 인코딩}} {{타이포그래피 용어}} {{전거 통제}} [[분류:문자 인코딩|*]]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3-4-30}} {{다른 뜻}} [[파일:Client-server-model.svg|섬네일|[[컴퓨터 네트워크 다이어그램]]. [[클라이언트 (컴퓨팅)|클라이언트]]가 서버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통신하고 있다.]] [[파일:Wikimedia Foundation Servers-8055 35.jpg|썸네일|right|250px|[[위키미디어 재단]]의 서버]] [[파일:My_Opera_Server_Back.jpg|섬네일|뒤에서 볼 수 있는 오페라 서버 랙]] '''서버'''({{llang|en|server}}, {{문화어|봉사기/奉仕器}})는 [[클라이언트 (컴퓨팅)|클라이언트]]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컴퓨터 프로그램'''(server program) 또는 '''장치'''(device)를 의미한다. 특히, 서버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서버 소프트웨어'''(server software)라 한다. 주로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를 설치한 대형 컴퓨터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버는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과의 연결, 데이터·프로그램·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팩스·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버는 사용자(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하여 서비스를 하는데 이와 같이 구성된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 이상의 응용 프로그램을 상호 협력적인 환경에서 운용하는 [[분산처리]] 형태를 의미한다. 즉, 서비스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처리하는 서버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처리방식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한 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 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통신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 역사 == '''[[컴퓨팅]]'''에서의 "서버"(server)라는 용어의 이용은 [[대기행렬이론]]에서 비롯한 것으로,<ref>{{서적 인용 |title=Desktop computers: in perspective |authors=Richard A. Henle, Boris W. Kuvshinoff, C. M. Kuvshinoff |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 |year=1992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g4krAAAAYAAJ&dq=server+%22queuing+theory%22 |page=417 |quote="Server is a fairly recent computer networking term derived from queuing theory."}}</ref>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켄들의 기호]]를 선보인 논문 {{Harvtxt|Kendall|1953}}에서 "서비스'와 함께 눈에 띄게 사용되었다. {{Harvtxt|Erlang|1909}}와 같은 초기의 논문들의 경우 "전화 교환원"과 같은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컴퓨팅에서 "서버"는 적어도 RFC 5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ref name="rulifson">{{IETF 인용 |title=DEL |rfc=5 |last=Rulifson |first=Jeff |authorlink=Jeff Rulifson |year=1969 |month=June |publisher=[[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IETF]] |accessdate=30 November 2013}}</ref> 이 RFC는 [[ARPANET]]([[인터넷]]의 선구자)을 기술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용자"와 대비되고 있고 두 가지 종류의 [[호스트]]와는 구별하고 있다: "서버 호스트", "사용자 호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 서빙(serving)이라는 용어 또한 RFC 4와 같은 초기 문서들로 거슬러 올라가며,<ref>{{IETF 인용 |title=Network Timetable |rfc=4 |last=Shapiro |first=Elmer B. |year=1969 |month=March |publisher=[[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IETF]] |accessdate=30 November 2013}}</ref> "serving-host"와 "using-host"를 대조하고 있다. == 서버 운영 체제 == 잘 알려진 서버 운영 체제로는 이를테면 [[FreeBSD]], [[솔라리스]], [[리눅스]] 등이 있다. 유닉스는 본래 [[미니컴퓨터]] 운영 체제였으며 전통적인 미니컴퓨터를 서버가 대체해감에 따라 서버는 효율적인 유닉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서버 지향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서버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사용할 수 없거나 선택적으로 사용 가능 * 다시 시작 없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다시 구성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 * 중요한 [[데이터]]를 온라인 상에서 주기적으로 백업하는 고급 [[백업]] 시설 * 다른 볼륨이나 장치 사이의 [[투명성|투명]]한 데이터 전송 * 유연하고 고급적인 네트워킹 기능 * 유닉스의 데몬 및 윈도의 서비스와 같은 자동화 기능 * 고급 사용자, 리소스, 데이터, 메모리 보호를 비롯한 꼼꼼한 시스템 보안 == 종류 == * [[애플리케이션 서버]] * [[카탈로그 서버]] * [[통신 서버]] * [[슈퍼컴퓨터|컴퓨팅 서버]] * [[데이터베이스 서버]] * [[팩스 서버]] * [[파일 서버]] * [[게임 서버]] * [[메일 서버]] * [[미디어 서버]] * [[인쇄 서버]](프린트 서버) * [[사운드 서버]] * [[프록시 서버]] * [[웹 서버]] == 인터넷 상의 서버 == [[인터넷]]의 전반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동작하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는 수백만 대에 이른다. 인터넷 서버가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가운데 다음을 포함한다: * [[월드 와이드 웹]] * [[도메인 이름 시스템]] * [[전자 우편]] * [[파일 전송 프로토콜|FTP 파일 전송]] * 채팅 및 [[인스턴트 메신저|인스턴트 메시지]] * [[VoIP|음성 대화]] * [[스트리밍 미디어|스트리밍 오디오 및 비디오]] * [[온라인 게임]]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P2P]] *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NAS]] *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 * [[홈 서버]] * [[FTP 서버]] * [[데이터 센터]] * [[baas.io]] :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필요로 하는 서버의 기능을 일반화/정형화하여 API로 제공하는 서비스 == 각주 == {{각주}} {{컴퓨터 크기}} {{전거 통제}} [[분류:서버| ]] [[분류:컴퓨터 네트워킹]] [[분류:전산장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전자기학}} [[파일:Induction experiment.png|섬네일]] '''전자기 유도'''(電磁氣誘導)는 변화하는 [[자기 선속|자속]] 속에 놓인 [[전기 전도체|도체]]가 [[기전력]]을 생성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기전력을 '''유기 기전력''', 또는 '''유도 기전력'''이라고 하는데, 도체가 고리 모양으로 닫힐 때 기전력에 의해 전자가 흐르게 되어 유기 전류(유도 전류)가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1831년에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프란체스코 잔테데스키가 1829년의 연구에서 이를 이미 예견했을 수도 있다. 패러데이는 폐회로에서 발생하는 기전력과 그 경로로 둘러싸인 곡면을 통과하는 자속의 변화율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전도체로 둘러싸인 곡면을 통과하는 [[자기 선속|자속]]이 변할 때 닫힌 도체 안에서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장]] 자체가 변하거나 도체가 자기장을 통해 이동할 때 적용된다. 전자기 유도는 [[발전기]], [[유도전동기]], [[변압기]] 및 대부분의 기타 전기 장비 작동의 기초이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은 전자기 유도에 의한 유도 기전력의 크기는 단위 시간당 자기 선속의 변화율과 코일의 감긴 횟수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math>\mathcal E=-N{{d\Phi} \over dt}</math> 여기서 <math>\mathcal E</math>는 [[기전력]]으로 단위는 [[볼트 (단위)|볼트]](V)이고, N은 전선이 감긴 횟수, <math>\Phi</math>는 [[자기 선속]]으로 단위는 [[웨버 (단위)|웨버]](Wb)이다. 이 법칙에서 자기선속의 변화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는 면적의 변화와 자기장의 세기 변화가 있다. 이 중 하나만 변화하면 자기 선속의 크기는 변화하며 유도 기전력이 발생할 수 있다. 유도 기전력을 강하게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선속의 변화율 값을 키우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는데, 다른 요소 값을 고정한 후에 면적의 변화율이나 자기장 세기 변화율의 크기를 크게 하여 큰 전력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변화율이라는 것인데, 자기 선속이 커도 변화율이 작으면 큰 기전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전자기 유도에 의해 발생하는 [[기전력]]의 부호는 [[렌츠의 법칙]]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회로에 유도된 전류의 방향은 유도된 기전력을 발생시킨 자기장의 변화를 상쇄하는 방향이다. 즉, : ''회로에 기전력이 유도되고 유도된 전류가 흐르면 회로 주변에 다시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그 자기장의 방향은 최초 기전력을 유도했던 자기장의 변화를 상쇄하는 방향이 된다'' 로렌츠 법칙을 활용하여 기전력을 새로운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math>\mathcal{E} = \frac{1}{q} \oint_{\mathrm{wire}}\mathbf{F}\cdot d\boldsymbol{\ell} = \oint_{\mathrm{wire}} \left(\mathbf{E} + \mathbf{v}\times\mathbf{B}\right)\cdot d\boldsymbol{\ell}</math> 여기서 F는 로렌츠 힘을 나타낸다. 이는 직선이나 원형 전류 또는 솔레노이드에 의한 자기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참고: [[맥스웰 방정식]] : <math>\nabla \times \mathbf{E} = -\frac {\partial \mathbf{B}}{\partial t}</math> == 발전기 == [[파일:Spindle.PNG|섬네일]] 발전기는 전동기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석 연료나 수력, 원자력 등으로 얻은 높은 열은 물을 끓이는데 사용되고 여기서 얻은 증기는 터빈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 회전하는 터빈에 코일을 연결시키고 그 주위에 자석으로 코일 내부를 통과하는 자속을 매 시간 변화시킨다. 이로부터 코일에는 유도 전류가 흐르고 기전력을 얻을 수 있다. [[영구 자석]]이 도체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경우, 기전력이 생성된다. 와이어가 [[전기 부하]]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 전류는 흐르고 전기 에너지가 생성된다. == 같이 보기 == *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 [[맥스웰 방정식]] * [[전동기]] * [[발전기]] * [[변압기]] == 외부 링크 == * [http://nationalmaglab.org/education/magnet-academy/ Magnet Academy] {{전거 통제}} [[분류:전자기학]] [[분류:마이클 패러데이]] [[분류:맥스웰 방정식]]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코드분할다중접속'''({{llang|en|Code-Division Multiple Access}}, '''CDMA''')은 [[이동 통신]]에서 [[부호 (통신)|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서 최초로 상용화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0210020910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0-21&officeId=00020&pageNo=2&printNo=23003&publishType=00010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휴대통신 기술표준 코드분할 다중접속 채택 (1995년 10월 21일자)]</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90218131008797&p=akn ICU 역사속으로],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공로로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과 조정남 SK텔레콤 고문에게 명예경영학박사 수여, 아시아경제 2009-2-18</ref> == 역사 ==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를 기반으로 한 이동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였다.<ref>[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8120302011131618002 SK텔레콤의 과거와 미래], [[디지털타임즈]], 2008-12-2</ref> CDMA는 미국의 [[퀄컴]]에서 기술규격을 개발하여, 1989년 [[샌디에이고]]에서 최초로 CDMA 기술을 이용한 통화시험에 성공하였다. 1993년 CDMA 기술 규격인 IS-95A가 정립되었으며, 1995년 9월 [[홍콩]]에서 [[허치슨텔레콤]]에 의해 상용화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 전 세계 가입자 수는 700 ~800백만이었다. 1998년 [[LG텔레콤]](현.[[LG유플러스]])은 CDMA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9년 전 세계 가입자는 5000만명으로 늘었다. 2000년 CDMA 2000 1x EV/가 [[3세대 이동통신]] 규격으로 국제시장에 출시되었지만,<ref>엄금용, CDMA 이동통신(IMT-2000), 기전연구사, 2006, 160쪽</ref> [[KT]]의 경우, [[4세대 이동 통신|4G]] LTE 주파수 재배치의 일환으로, [[2012년]] 3월초에 [[2세대 이동 통신|2G]] PCS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일제히 종료하였다. 더욱이, [[SK텔레콤]]의 경우, [[2020년]] [[7월 27일]]에 2G 서비스를 최종적으로 종료하였다. 이는, 시스템 노후화가 심해 통신망 장애 문제가 우려되고, 핵심부품의 단종으로 인한 유지보수의 불가로, 정상적인 서비스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전제 조건으로, 2G 서비스 종료를 단행하여, [[LG유플러스]]도 이듬해인 2021년 6월 말에 최종적으로 종료한 바 있다. == 기술 개요 == 코드분할다중접속은 코드를 이용하여 하나의 [[셀 (이동통신)|셀]]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동통신은 제한된 [[주파수]] [[통신 주파수 대역|대역]]을 활용하여 다수가 통신을 하므로 [[다중접속]]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이외의 기술 중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는 [[GSM]]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다중접속]](TDMA)가 있다.<ref name=ok>옥윤철, CDMA(개정증보판), 진한도서, 2008</ref> 코드분할다중접속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코드화한 [[신호]]를 [[대역 확산]]하여 전송한다. 단말기는 확산된 신호를 디코드하여 [[복조]]함으로써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 다중접속의 종류와 CDMA === {{본문|다중접속}} [[파일:Multiple access.png|섬네일|400px|다중접속의 종류와 개요]] 다중접속(Multiple Access)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다수의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다중접속은 기술 규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ref name=pyk>박용기 외, 디지털 멀티미디어개론, 교보문고, 2006</ref> 기술 별 다중 접속의 대략적 개념은 오른쪽 그림에서 참조할 수 있다. * 시분할다중접속([[TDMA]], '''T'''ime '''D'''ivision '''M'''ultiple '''A'''ccess), * 주파수분할다중접속([[FDMA]], '''F'''requency '''D'''ivision '''M'''ultiple '''A'''ccess) *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TDMA는 [[GSM]]의 기반기술로 상용화되었다. CDMA는 대한민국 등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사용의 효율성이 낮은 FDMA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 대역확산과 코드화 === 대역 확산 기술은 일반적으로 전송할 정보신호의 대역폭보다 훨씬 큰 대역폭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보의 다중화와 고속처리가 가능해진다. 대역확산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주파수 도약과 동일 주파수 내에서 변조되는 직접 확산의 방식이 있다. CDMA는 직접확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ref name=ok/> <span style="font-size:150%;"> s(t)Acos(ω<sub>e</sub>t+Φ) </span> <small>s(t): 확산용 코드 Acos(ω<sub>e</sub>t+Φ):신호</small> 위 수학적 표현의 통신상 의미는 결국 비교적 큰 신호인 통신 신호를 아주 작고 무작위적인 코드신호로 곱하여 [[변조]]시킨다는 것이다. 신호 변조의 개념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그림에서 제일 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를 가운데는 코드를 나타낸다. 제일 아래는 두 신호를 [[XOR]]시킨 결과 변조된 신호이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가 송출되게 된다. [[파일:Generation of CDMA.jpg|center|섬네일|600px|코드에 의한 신호 변조]] 변조에 사용되는 코드가 다르면 변조된 결과도 다르게 되므로, 사용자마다 다른 확산용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주파수 대역 내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다중화라 한다.<ref>윤종호, 정보통신일반, 교학사, 2007, 82-83쪽</ref> 다중화에 사용되는 코드는 되도록 [[백색잡음]]과 같이 무작위적이어야 한다. 코드가 일정한 경향을 가질 경우 충분히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DMA에서는 [[상호상관]](Cross-Correlation)이 거의 없는 일종의 무작위 신호를 코드로 사용한다.<ref name=ok/> 이 코드를 생성하는 기술의 특허는 퀄컴이 소유하고 있다. == 기술 특징 == CDMA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ref name=pyk/> * 개인간의 간섭/보안에 강하다. 코드화된 특정 사용자의 신호는 다른 사용자에게는 잡음으로 인식된다. * [[셀 (이동 통신)|셀]](cell, 무선 통신에서의 기지국-단말기 간의 통신 단위) 설계가 쉽다. 코드화된 신호를 직접 확산함으로 인접 기지국 사이의 신호 간섭이 적다. * 소프트 핸드오프가 가능하다. * 단말기 소비전력이 적은 편이다. * 레이크 수신기(지연이 있는 신호를 구분할 수 있는 수신기)를 사용할 수 있다. * 단말기와 기지국 간에 시간이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있어야 한다. 실제적으로는 몇 개의 채널(파일럿, 동기, 통화 등)로 구분되어 있어서, 파일럿 채널을 통해 단말기와 기지국 사이에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동기 채널에서 코드 동기화를 하여 통화채널로 음성 데이터를 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 기술 진화 == 기존의 [[IS-95]] 방식에서 현재는 [[CDMA2000]]과 같은 보다 고속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근본 기술에 대한 [[칩셋]] 설계와 관련 기술 특허는 [[퀄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ref>[http://stock.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6050911220823348&type=1 퀄컴 로열티 연 3조 넘어], 머니투데이 2006-5-9</ref> == 같이 보기 == * [[이동 통신]] * [[무선 네트워킹]] * [[퀄컴]] * [[:en:PN Sequences|PN Sequences]]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www.3gpp2.org/ The Third Generation Partnership Project 2 (3GPP2)] {{웨이백|url=http://www.3gpp2.org/ |date=20040123013738 }} * [http://www.3gpp.org/ The Third Generation Partnership Project (3GPP) ] * [http://www.cdg.org/ CDMA Development Group (CDG)] {{웨이백|url=http://www.cdg.org/ |date=20110208014615 }} * [http://www.radio-electronics.com/info/cellulartelecomms/ Radio-Electronics.Com] {{전기 통신}} {{전거 통제}} [[분류:이동 통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Infobox protocol | name = 블루투스 | image = BluetoothLogo.svg | caption = | developer = [[블루투스 스페셜 인터레스트 그룹]] | industry = [[개인 통신망]] | introdate = {{시작 날짜와 나이|df=yes|1989|5|7}} | connector = | hardware = [[개인용 컴퓨터]]<br />[[스마트폰]]<br />[[비디오 게임 콘솔|게이밍 콘솔]]<br />오디오 장치 | range = 일반적으로 {{convert|10|m|sigfig=2|abbr=on}} 미만, 최대 {{convert|100|m|sigfig=2|abbr=on}}<br />블루투스 5.0: {{convert|40-400|m|sigfig=1|abbr=on}}<ref name=BTrange>{{웹 인용|url=http://www.bluair.pl/bluetooth-range|title=Bluetooth Range: 100m, 1km, or 10km?|author=bluAir|website=bluair.pl|accessdate=4 June 2015|archive-date=2015-06-13|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613072937/http://www.bluair.pl/bluetooth-range}}</ref><ref name="bluetooth1">{{웹 인용|url=http://www.bluetooth.com/Pages/Basics.aspx |title=Basics &#124; Bluetooth Technology Website |publisher=Bluetooth.com |date=23 May 2010 }}</ref> | website = {{URL|bluetooth.com}} }} {{OSI스택}} '''블루투스'''({{llang|en|Bluetooth}})는 [[1994년]]에 [[스웨덴]]의 [[에릭슨 (기업)|에릭슨]]이 최초로 개발한<ref>{{웹 인용|title=Bluetooth traveler|publisher=hoovers.com|url=http://www.hoovers.com/business-information/--pageid__13751--/global-hoov-index.xhtml|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111075514/http://www.hoovers.com/business-information/--pageid__13751--/global-hoov-index.xhtml|url-status=dead|archive-date=11 January 2011|accessdate=9 April 2010|df=dmy-all}}</ref> [[데이터 전송|디지털 통신]] 기기를 위한 개인 [[근거리 무선 통신]] 산업 표준이다. [[ISM 대역]]에 포함되는 2.4~2.485GHz의 [[단파]] [[UHF]] [[전파]]를 이용하여<ref>{{웹 인용|url=https://www.bluetooth.com/what-is-bluetooth-technology/bluetooth-technology-basics/br-edr|title=basic rate/enhanced data rate (br/edr)|publisher=Bluetooth.com|accessdate=3 June 2016}}</ref> 전자 장비 간의 짧은 거리의 데이터 통신 방식을 규정하는 블루투스는 [[개인용 컴퓨터]]에 이용되는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해, [[휴대전화]] 및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태블릿]], [[스피커]] 등에서 문자 정보 및 음성 정보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디지털]] 정보를 [[무선 통신]]을 통해 주고 받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 개요 == 블루투스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정보기기 사이에, 전파를 이용해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사용된다. 당초에는 에릭슨을 필두로,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 등의 5개 회사가 프로모토로서 규격의 책정에 참가했으며,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3COM]], [[루센트 테크놀로지]] 등의 4개 회사가 추가 참여했다. 현재는 3COM과 루센트 테크놀로지 대신, [[애플]], [[노르딕 세미컨덕터]](Nordic Semiconductor)가 추가되어, 총 9개 회사가 프로모터 기업으로 참가했다. [[IEEE]]에서는 규격명 '''[[IEEE 802.15]].1'''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현재 블루투스는 [[:en:Bluetooth Special Interest Group|Bluetooth Special Interest Group]] (SIG)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이 그룹에는 전기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가전 등의 분야의 30,000사 이상의 기업들이 멤버에 가입되어 있다.<ref name="autogenerated1">Newton, Harold. (2007). ''Newton’s telecom dictionary.'' New York: Flatiron Publishing.</ref> 블루투스 SIG는 규격의 개발을 감시, 규격의 인증 프로그램의 관리 및 트레이드마크의 보호를 관장하고 있다.<ref>{{웹 인용 |url=https://www.bluetooth.org/About/bluetooth_sig.htm |title=Bluetooth.org |publisher=Bluetooth.org |accessdate=3 May 201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314202133/https://www.bluetooth.org/About/bluetooth_sig.htm |보존날짜=2013-03-14 |url-status=dead }}</ref> 장비 제조사가 블루투스 장비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SIG에서 제정한 표준 규격을 만족해야 한다.<ref>{{웹 인용 |url=https://www.bluetooth.org/en-us/bluetooth-brand/brand-enforcement-program |title=Brand Enforcement Program |publisher=Bluetooth.org |accessdate=2 November 2013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31104093347/https://www.bluetooth.org/en-us/bluetooth-brand/brand-enforcement-program |보존날짜=2013년 11월 4일 |url-status=dead }}</ref> == 이름의 유래==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10세기]] 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하랄드 블라톤]]({{lang|non|Haraldr Blátǫnn}}) 국왕의 별칭이 '파란 [[이 (몸)|이빨]]의 왕'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ref>([[아사히 신문]][[2014년]] 11월 15일 be「今さら聞けない」)。</ref> 블라톤({{lang|non|Blátǫnn}})을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lang|en|Bluetooth}})이다. 블루투스 이름의 아이디어는 1997년 인텔 출신의 짐 카다크({{lang|en|Jim Kardach}})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제안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pcworld.com/article/2061288/so-thats-why-its-called-bluetooth-and-other-surprising-tech-name-origins.html|title='So, that's why it's called Bluetooth!' and other surprising tech name origins|work=PCWorld|access-date=2017-08-16|language=en}}</ref> 제안했을 당시에, 그는 스웨덴의 작가 프란스 G. 벵트손({{lang|sv|Frans G. Bengtsson}})의 역사 소설 《붉은 뱀》({{llang|sv|''Röde Orm''}}, {{llang|en|''The Long Ships''}})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이킹과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ref name="EETimes">{{웹 인용|url=http://www.eetimes.com/electronics-news/4182202/Tech-History-How-Bluetooth-got-its-name|title=Tech History: How Bluetooth got its name|first=Jim|last=Kardach|date=5 March 2008|accessdate=11 June 201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618043909/http://www.eetimes.com/electronics-news/4182202/Tech-History-How-Bluetooth-got-its-name|보존날짜=2012-06-18|url-status=dead}}</ref><ref>Mark Forsyth. The etymologicon. // Icon Books Ltd. London N79DP, 2011. p. 139.</ref> 하랄드 블라톤 왕이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했던 것처럼, '난립하는 여러 무선 통신 규격을 통합하자'는 염원이 담겼다고 한다.<ref>{{웹 인용|url=http://www.ericsson.com/bluetooth/companyove/history-bl/|title=Milestones in the Bluetooth advance|publisher=Ericsson Technology Licensing|date=22 March 2004|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40620150507/http://www.ericsson.com/bluetooth/companyove/history-bl/|archivedate=20 June 2004}}</ref> 블루투스의 로고는 북유럽의 [[룬 문자]](옐링 거석의 비석에서 찾을 수 있는)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름의 앞글자 [[파일:Runic letter ior.svg|8px]](H)와 [[파일:Runic letter berkanan.svg|8px]](B)를 결합한 모양에서 유래한다.<ref>[http://www.bluetooth.com/Pages/Press-Releases-Detail.aspx?ItemID=39 2008 MARKS TEN YEARS OF BLUETOOTH WIRELESS TECHNOLOGY]</ref><ref>{{웹 인용|url=https://twitter.com/BluetoothSIG/status/704694301201043456|title=Bluetooth on Twitter|publisher=}}</ref><ref>{{웹 인용|url=https://www.bluetooth.org/DocMan/handlers/DownloadDoc.ashx?doc_id=46091|title=Bluetooth Experience Icons|publisher=Bluetooth Special Interest Group|quote=Bluetooth Experience Icons borrow two of these three features: the blue color and the rune-inspired symbol.|access-date=2016-10-21|format=PDF}}</ref> == 연혁 == * [[1994년]] - 에릭슨의 사내 프로젝트로 개발 시작 * [[1998년]] - 에릭슨 포함 5개 회사가 Bluetooth SIG를 설립. '''Bluetooth'''라는 이름을 발표 * [[1999년]] [[7월 26일]] - 블루투스 [[사양서]] 1.0 버전이 발표됨<ref>{{웹 인용|date=1999-07-27 |url=http://pc.watch.impress.co.jp/docs/article/990727/blue.htm |title=Ericssonら5社、Bluetooth 1.0の仕様を公開 |publisher=PC Watch |accessdate=2012-09-03}}</ref> * [[2003년]] 11월 - 버전 1.2 발표 * [[2004년]] 11월 - 버전 2.0 + EDR 발표 * [[2007년]] [[3월 28일]] - 버전 2.1 + EDR 발표 * [[2009년]] [[4월 21일]] - 버전 3.0 발표 * [[2009년]] [[12월 17일]] - 버전 4.0 발표 * [[2011년]] [[6월 21일]] - 애플과 Nordic Semiconductor가 이사회에 추가 * [[2013년]] [[12월 4일]] - 사양서 버전 4.1을 발표<ref>{{웹 인용 |url=http://blog.bluetooth.com/bluetooth-sig-introduces-new-bluetooth-4-1-specification/ |제목=Bluetooth SIG Introduces New Bluetooth 4.1 Specification {{!}} Bluetooth Technology Website |확인날짜=2017-09-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16074739/http://blog.bluetooth.com/bluetooth-sig-introduces-new-bluetooth-4-1-specification/ |보존날짜=2016-03-16 |url-status=dead }}</ref> * [[2014년]] [[12월 3일]] - 버전 4.2을 발표<ref>[http://www.itmedia.co.jp/news/articles/1412/04/news057.html 「Bluetooth 4.2」発表 2.5倍高速になり、セキュリティも強化 - ITmedia ニュース]</ref> * [[2016년]] [[12월 8일]] - 버전 5를 발표<ref>{{웹 인용 |url=https://www.bluetooth.com/news/pressreleases/2016/12/07/bluetooth-5-now-available |제목=Bluetooth 5 Now Available |확인날짜=2017-09-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929093131/https://www.bluetooth.com/news/pressreleases/2016/12/07/bluetooth-5-now-available |보존날짜=2017-09-29 |url-status=dead }}</ref> == 사양과 특징 == PANs의 산업 표준중 하나인 블루투스는 ISM 대역인 2.45GHz를 사용한다. 버전 1.1과 1.2의 경우 속도가 723.1kbps에 달하며, 버전 2.0의 경우 EDR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2.1Mbps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블루투스는 [[RS-232]], 유선 [[USB]]를 대체하는 개념이며 이는 [[와이파이]]가 [[이더넷]]을 대체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암호화에는 SAFER을 사용한다. 장치끼리 믿음직한 연결을 성립하려면 키워드를 이용한 페어링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 블루투스 1.0과 1.0B === 1.0과 1.0B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제조사들이 그들의 제품 간의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과 1.0B는 또한 [[핸드셰이킹]] 과정에서 블루투스 하드웨어 장치 주소(BD_ADDR)를 반드시 전송해야 하므로 프로토콜 수준에서의 익명(IP와 같은 주소 없이)의 연결(rendering anonymity)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블루투스 환경에서 제공 되도록 계획한 소비확대정책(Consumerium)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큰 제한사항이었다. 블루투스는 2.4Ghz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무선 랜([[802.11]]b/g/n)도 2.4Ghz대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므로 동시사용에 따른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양 제품의 초기 보급 시에는 그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블루투스의 버전업과 연결 특성 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블루투스는 해당 주파수 대역에서 비어있는 채널을 찾아 데이터를 전송하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즉시 다른 빈 곳으로 전송하게 된다. 음성기기의 사용 시 아주 잠깐의 지연현상이 발생하지만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기기의 거리가 1cm 이하로 근접해 있을 경우 간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무선랜과 블루투스 두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기의 경우에는 두 장비가 하나의 안테나를 사용하게 되는데, 서로 번갈아가며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용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애초부터 그 간섭을 최대한 줄이게끔 되어 있다. === 블루투스 1.1 === 2002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고, 1.0B의 많은 문제점들을 수정하였다. 이 외에 비 암호화 채널(non-encrypted channels)을 지원하였고, Signal Strength Indicator (RSSI)를 수신 받을 수 있게된다. === 블루투스 1.2 === 이 버전은 1.1 버전과 호환되며 주요 향상 점은 다음과 같다: 빠른 접속과 가까운 거리에서의 주파수 간섭 및, 먼 거리에서의 분산스펙트럼(frequency-hopping spread spectrum)에 대비하였다. 실제 전송 속도는 1.1과 같은 723kbit/s이다. 패킷의 오류나 재전송에 따른 음성이나 음원신호의 quality손실을 막는 Extended Synchronous Connections (eSCO)를 지원하게 되었고, three-wire UART를 위한 Host Controller Interface (HCI)를 지원하게 되었다. 2005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 블루투스 2.0 + EDR === 2004년 10월에 표준화가 된 이 버전은 1.1과 호환되게 하였다. 주된 향상 점은 3.0Mbit/s의 향상된 데이터 속도(Enhanced Data Rate, EDR)를 지원하게 된 점이다. 이로써 다음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 평균 3배, 최대 10배의 데이터 전송 속도(Data Transfer Rate) 향상(실제 전송 속도 2.1Mbit/s)과 Duty Cycle감소에 의한 저 전력 소비, 또한 multi-link scenarios의 단순화로 사용할 수 있는 대역폭이 늘어났다. 이론상의 전송 속도는 3.0Mbit/s이고, 실제 data전송 속도는 2.1Mbit/s이다. Special Interest Group (SIG)에 표준화가 된 "블루투스 2.0 + EDR"은 많은 업체들이 사용하는 EDR과 표준화되지 않은 "블루투스 2.0"를 포함한다. 앞에 명시된 기술을 보여주는 HTC TyTN pocket PC phone과 다른 블루투스 2.0 without EDR의 기술은 추가적인 문제점들을 수정한 버전 1.2와 거의 같다. 많은 제품들이블루투스 2.0을 지원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제로 EDR을 지원하는지는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 블루투스 2.1 + EDR === 1.2버전과 완벽하게 호환이 되는 핵심 표준화 버전인 블루투스 2.1은 블루투스 SIG에 의해 2007년 7월26일 채택되었다. 이 기술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확장된 질의 응답: 장치들을 연결하기 전에 좀 더 나은 장치를 걸러내기 위해 질의 과정동안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정보에는 장치의 이름, 장치가 지원하는 서비스 목록, 날짜나 시간, 공유정보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 스니프 서브레이팅(Sniff subrating) 기술: 저 전력 모드일 경우, 특히 비대칭 전송(asymmetric data flows)으로 연결되어 있을 경우 전력소비를 줄일 수 있다. 휴먼 인터페이스 장치들이 가장 이익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적어도 3배에서 최대 10배까지 배터리의 수명을 증가시킬 수 있다. * 부호화 일시 중지/재개(Encryption Pause Resume): 암호를 다시 설정했을 경우, 장치 간에 더욱 강력한 암호화로 최소 23.3시간 이상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안전하고 간편한 공유: 보안의 강화와 사용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블루투스 장치 간의 공유 기술이 근본적으로 향상되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블루투스의 사용에 있어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 NFC 코퍼레이션: NFC 라디오 인터페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자동적으로 안전하게 접속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수 센티미터 이내로 헤드셋을 NFC를 포함한 블루투스 2.1 전화로 가져가기만 하여도 접속할 수 있게 되고 또 다른 예로는 휴대 전화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디지털 액자에 가깝게 가져가는 것만으로 디지털 사진을 디지털 액자로 업로드할 수 있게 된다. === 블루투스 3.0 + HS === 블루투스 3.0은 2009년 4월 21일에 발표되었다. 블루투스 3.0의 큰 특징은 802.11 PAL(Protocol Adaptation Layer)를 채용해서 속도를 최대 24Mbps로 향상시켰다. (+HS 가 붙어있지 않은 제품에서는 이와 같은 High Speed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3.0에서 추가된 기능만을 지원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기기간에 대용량 그림, 동영상, 파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PC를 모바일 기기와 동기화를 할 수 있고 프린터나 PC로 많은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추가된 점으로 내장된 전력 관리 기능을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 블루투스 4.0 + LE === {{more|Bluetooth Low Energy}} Bluetooth SIG는 블루투스 사양서 버전 4.0(Bluetooth Smart)을 [[2010년]] [[6월 30일]]에 채택하였다. 이 사양에는 클래식 블루투스(Classic Bluetooth), Bluetooth high speed 와 [[Bluetooth low energy]] 프로토콜이 포함되었다. Bluetooth high speed는 Wi-Fi를 바탕으로, 클래식 블루투스는 기존의 레거시 블루투스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종래의 버전과 비교해 대폭적으로 소비전력을 낮춘 Bluetooth Low Energy는 Bluetooth SIG 공개자료에 의하면, 버튼형 전지 1개만으로도 수년간 구동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송 속도는 1Mbps로, 데이터 패킷 사이즈가 8 - 28옥테드로 매우 작아졌다. 가전제품 등에 탑재된 센서와의 데이터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양으로, 기존 3.0+HS과 방향성을 달리하여, 제품 제작자는 3.0+HS 및 4.0을 별도로 목적에 맞춰 채용하는 식이 되었다. === 블루투스 4.1 === 블루투스 SIG는 2013년 12월 블루투스 4.1의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ref>{{웹 인용|제목=Bluetooth 4.1 features unveiled|url=http://www.phonearena.com/news/Bluetooth-4.1-features-unveiled_id50009|publisher=phonearena.com|date=2013-12-06|accessdate=2013-12-06}}</ref>. 블루투스 4.1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공존성(coexistence)''' 향상- 블루투스와 [[LTE]] 무선이 서로 통신 상태를 조정해 가까운 대역폭으로 인한 간섭 현상을 줄여준다. * '''더 나은 연결(better connections)'''- 블루투스 연결 장치끼리의 거리가 증가해 잠시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4.1 블루투스 장치는 거리 내로 되돌아올 시 자동으로 재연결된다. * '''데이터 전송 개선(improved data transfer)'''-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악세서리 장치(헬스 기구) 등과의 통신 전송 상태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였다. * '''개발자에게 더 많은 유연성 제공(more flexibility to developers)'''- 앞으로 있을 웨어러블 기기 붐에 대비한 업데이트로, 블루투스 연결을 통해 웨어러블 기기가 스마트폰의 주변장치이자 동시에 다른 장치와의 허브 역할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장래를 위해 '''사물 인터넷(The Internet of Things)'''을 위한 새로운 '''[[IPV6]]''' 사용 표준도 들어가 있다. ===블루투스 4.2=== 4.2 버전은 2014년 12월 2일 발표되었다. 이 판에는 [[사물인터넷]] 지원을 위한 특징을 도입했다. 주요한 개선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에 저전력 보안 접속 * 확장된 스캐너 필터 정책을 가진 Link Layer Privacy * 스마트홈 지원을 위한 블루투스 저전력 사물인터넷용으로 IPv6나 6LoWPAN을 통해 인터넷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 오래된 블루투스 하드웨어는 4.2를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으로 받아들이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보안을 개선했다.<ref name=":0">{{웹 인용|url=http://www.redmondpie.com/bluetooth-4.2-announced-heres-what-is-new/|title=Redmondpie|date=|website=|publisher=|accessdate=}}</ref><ref name=":1">{{웹 인용|url=http://www.dailytech.com/Bluetooth+42+Promises+Faster+Connections+Better+Security+to+Stop+Snooping/article36960.htm|title=DailyTech|date=|website=|publisher=|accessdate=|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207093853/http://www.dailytech.com/Bluetooth+42+Promises+Faster+Connections+Better+Security+to+Stop+Snooping/article36960.htm|보존날짜=2014년 12월 7일|url-status=dead}}</ref> ===블루투스 5=== [[2016년]] [[6월 16일]] [[런던]]에서 개최한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블루투스 5가 블루투스 SIG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은 주로 부상하는 [[사물인터넷]]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17년 4월에 블루투스5가 지원되는 [[삼성 갤럭시 S8]]을 출시했다. 마켓팅을 위해 소숫점 이하의 숫자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용자 편의를 위한 마켓팅을 단순화시키기 위함이다.<ref>[http://www.cnx-software.com/2016/06/10/bluetooth-5-promises-four-times-the-speed-twice-the-range-of-bluetooth-4-0-le-transmissions/ Bluetooth 5 promises four times the speed and twice the range of Bluetooth 4.0 LE transmissions]</ref> 주요 개선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Slot Availability Mask (SAM) *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it/s PHY for LE * 길어진 도달 거리† * High Duty Cycle Non-Connectable Advertising * LE Advertising Extensions * LE 채널 선택 알고리즘 #2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ps, 1Mbps, 125kbps가 되었고, 2M와 1Mbps는 예전처럼 도달 거리가 100m, 125kbps는 도달 거리가 400m가 되었다. === 블루투스 5.1 === 2019년 발표. * GATT * 위치 정확도 향상 * 패킷 충돌을 피하고 Bluetooth 신호 도착율을 보장하는 임의 채널 색인 === 블루투스 5.2 === 2020년 1월 도입 * Isochronous 채널 (ISOC) - CIG (Connected Isochronous Group) 좌/우측 이어버드를 그룹으로 묶어 전송동기화 하여 좌우측 딜레이 차이를 최소화 * LE 파워 컨트롤 (LEPC) - LC3(저복잡성 통신코드) 고품질 저전력 오디오 코덱 지원 , 이어버드에 직접 동기화된 오디오 스트림 , 멀티 스트림 , * 향상된 특성 프로토콜 (EATT) - 기존 ATT보다 향상된 GATT(Generic Attribute Profile)에서 개선된 프로토콜 , L2CAP모드 적용 == 프로파일 == {{more|블루투스 프로파일 목록}} 블루투스는 여러 종류의 장비로의 통신에 사용되는 규격인 이유로, 장비의 종류에 따라 규정되는 각각의 별도의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이들 프로토콜의 사용법을 '''프로파일'''이라는 용어로 표준화하고 있다. 통신하고자 하는 장비와 장비 간에,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프로파일을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프로파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GAP (Generic Access Profile) : 블루투스 장비의 접속/인증/암호화를 규정하는 프로토콜. ; SDAP (Service Discovery Application Profile) : 다른 블루투스 장비가 제공하는 기능(프로파일)을 참조하는 용도의 프로토콜. ;DUN (Dial-up Networking Profile) : [[휴대전화]] 등을 통해 인터넷에 다이얼 업 접속을 할 때 사용되는 프로파일 ;FTP (File Transfer Profile) : 컴퓨터 사이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프로파일. 참고로 파일전용 프로토콜 [[FTP]]와는 관계 없음. ;HID (Human Interface Device Profile) : [[컴퓨터 마우스]] 또는 [[키보드]] 등의 입력장비와 무선으로 연결하기 위한 프로파일 ;HSP (Headset Profile) : 블루투스를 내장한 헤드셋과의 통신을 위한 프로파일. 모노 음성 수신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의 쌍방 통신도 규정. ;HFP (Hands-Free Profile) : 차내 또는 헤드셋을 통한 핸즈프리 통화를 위한 프로파일. HSP 기능에 추가로 통신의 발신/착신 기능을 규정. ;[[A2DP]] (Advanced Audio Distribution Profile) : 음성을 리시버가 달린 헤드폰(또는 이어폰)으로 전송하는 프로파일. HSP/HFP가 모노 음성인 것에 반해, 스테레오 고음질 음성을 지원. ;[[AVRCP]] (Audio/Video Remote Control Profile) :AV기기의 리모콘 기능을 구현하는 프로파일 == 클래스 == 블루투스는 통신에 이용되는 전파의 강도를 '''클래스'''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루투스 지원 장비는 어떤 장비든 한 클래스로 분류된다. 쌍방이 같은 클래스일 필요는 없다. {| class="wikitable" |+블루투스 클래스 |- !클래스 !출력 !도달 거리 |- |Class 1 |align="right"|100mW |align="right"|100m |- |Class 2 |align="right"|2.5mW |align="right"|10m |- |Class 3 |align="right"|1mW |align="right"|1m |- |Class 4 |align="right"|0.5mW |align="right"| |} == 사진 == <gallery> 20220113 블루투스 기기.jpg|[[브리츠 (기업)|브리츠]]의 블루투스 기기 20240523 브리츠 블루투스 헤드셋.jpg|[[브리츠 (기업)|브리츠]]의 블루투스 헤드셋 </gallery> == 인용 문서 == {{각주}} == 같이 보기 == * [[블루투스 비콘]] * [[DASH7]] * [[핫스팟 (와이파이)]] * [[라이파이]] * [[근거리 무선 통신]] * [[테더링]] * [[스레드 (통신 프로토콜)]] * [[직비]]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en}} {{공식 웹사이트}}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120809162233/http://www.bluetooth.org/Technical/Specifications/adopted.htm 블루투스 규격] * {{언어링크|en}} [http://www.tutorial-reports.com/wireless/bluetooth/ 블루투스 자습서] * {{언어링크|en}} [http://people.csail.mit.edu/albert/bluez-intro GNU/Linux에서 블루투스 프로그래밍 소개] {{인터넷 접속}} {{전거 통제}} [[분류:블루투스| ]] [[분류:스웨덴의 발명품]]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1947}} {{기년법|1947}} '''194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된 [[냉전]]의 첫 해였다. == 연호 == *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임정]](大韓臨政)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大韓民國) 29년 *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기원|민국]](民國) 36년 * [[일본]](日本) [[쇼와 시대|쇼와]]({{lang|ja|昭和}}) 22년 == 사건 == * 2월 -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 * [[2월 25일]] - [[프로이센]] 해체. * [[2월 28일]] - [[중화민국]] [[타이완]] 섬에서 [[2·28 사태]] 발생. * [[3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남대문]]에서 좌,우익 세력 집회도중 충돌. 38여명의 사상자 발생. * [[3월 1일]] - [[제주 3·1절 발포사건]]. * [[3월 12일]] - [[트루먼 독트린]] 발표([[냉전]]의 시작) * [[5월 21일]] - [[서울]] [[덕수궁]]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 [[6월 21일]] - 대한민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 [[8월 14일]] - [[파키스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 * [[8월 15일]] - 인도,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해 독립 * [[8월 28일]] - [[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 * [[9월 9일]] - 첫 번째 [[소프트웨어 버그|버그]]<small>(사진)</small> 발견: [[하버드 대학교]]가 만든 마크 II [[컴퓨터]]의 [[계전기]]에서 [[나방]]이 발견되다. * [[9월 17일]] - [[유엔 총회]] 한국 문제 정식 상정 * [[9월 18일]] -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 [[9월 21일]] - [[군정기]]: 반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결성(단장 [[지청천]]) * [[9월 26일]] - 소비에트 연방,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군 동시 철수 제의 * [[9월 30일]] - [[예멘]], [[파키스탄]] 유엔 가입 * [[10월 5일]] - 소비에트 연방 등 동구 9개 공산국, 공산당 정보기관인 [[코민포름]] 결성 * [[10월 18일]] - [[미소 공동위원회]] 무기한 휴회. == 문화 == * [[8월 8일]] - [[파키스탄]] [[파키스탄의 국기|국기]] 채택. == 탄생 == {{분류 참고|1947년 출생}} === 1월 === * [[1월 8일]] - 영국의 음악가,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 (~[[2016년]]) * [[1월 9일]] - 대한만국의 기업인, 정치가 [[남현식]]. (~[[1994년]]) * [[1월 15일]] - 대한민국의 교육인 [[정홍섭 (1947년)|정홍섭]]. (~[[2024년]]) * [[1월 18일]] - 일본의 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 * [[1월 21일]] - 중국의 반체제 인사 [[레비야 카디르]]. * [[1월 22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호시노 센이치]]. (~[[2018년]]) * [[1월 23일]] -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 [[1월 25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토스탕]]. * [[1월 26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대학교수 [[박준홍 (정치인)|박준홍]]. * [[1월 2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체추 로호]]. (~[[2022년]]) * [[1월 29일]] - 미국의 생물학자 [[린다 B. 벅]]. * [[1월 31일]] - 미국의 전 야구 선수 [[놀런 라이언]]. === 2월 === * [[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창식 (가수)|송창식]]. * [[2월 3일]] **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 ** 미국의 가수 [[멜라니 사프카]]. * [[2월 4일]]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김재홍]]. (~[[2023년]]) ** 미국의 정치인 [[돈 퀘일]]. * [[2월 7일]] - 미국의 성우 [[웨인 올와인]]. (~[[2009년]]) * [[2월 8일]] **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 [[신중대]]. ** 대한민국의 범죄자 [[김대한 (범죄인)|김대한]]. (~[[2004년]]) * [[2월 11일]] ** 일본의 정치인 [[하토야마 유키오]]. ** 대한민국의 가수 [[나훈아]]. * [[2월 1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근태]]. (~[[2011년]]) * [[2월 12일]] - 대한민국의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 [[2월 16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겸 목회자 [[박대석 (목회자)|박대석]]. * [[2월 18일]] - 일본의 가수 [[오쿠무라 치요]]. * [[2월 20일]] ** 대한민국의 교육인, 정치인 [[고영진]]. ** 아이슬란드의 기업인 [[에게르트 마그누손]]. * [[2월 21일]] - 미국의 정치인 [[올림피아 스노]]. *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항선 (배우)|장항선]]. * [[2월 24일]] - 홍콩의 가수, 영화배우, 작사가 [[정사오추]]. * [[2월 26일]] - 영국의 봅슬레이 선수 [[고머 로이드]]. (~[[2016년]]) * [[2월 27일]] -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앨런 구스]]. * [[2월 28일]] -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 3월 === * [[3월 1일]] -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 [[홍승연]]. (~[[2021년]]) * [[3월 2일]] - 러시아 수학자 [[유리 마티야세비치]]. * [[3월 3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동명 (바둑 기사)|김동명]]. * [[3월 6일]] ** 미국의 영화 감독, 배우 [[롭 라이너]]. ** 미국의 육상 선수 [[딕 포스버리]]. (~[[2023년]]) *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천풍조]]. *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원광호]]. * [[3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윤식]]. * [[3월 19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홍신]]. ** 미국의 배우 [[글렌 클로스]]. *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교육자, 전 국무총리 [[정운찬]]. * [[3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희라]]. * [[3월 24일]] - 미국의 언론인, 대학교수 [[앨런 와이즈먼]]. * [[3월 25일]] - 영국의 가수 [[엘튼 존]]. * [[3월 26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 (~[[1990년]]) **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 *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재복]]. (~[[2009년]]) ** 대한민국의 성우 출신 배우, 연극연출가 [[김동수 (1947년)|김동수]]. (~[[2024년]]) === 4월 === * [[4월 1일]] ** 프랑스의 수학자 [[알랭 콘]]. ** 대한민국의 배우 [[정영숙]]. * [[4월 7일]] - 독일의 음악가 [[플로리안 슈나이더]]. (~[[2020년]]) * [[4월 8일]] ** 프랑스의 기업인,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파스칼 라미]]. ** 타이완의 영화감독 [[허우샤오셴]]. ** 미국의 작가 [[로버트 기요사키]] * [[4월 12일]] ** 미국의 희극인, 사회자 [[데이비드 레터먼]]. ** 미국의 작가 [[톰 클랜시]]. * [[4월 13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강수림]]. * [[4월 15일]] - 영국의 기업인 [[마틴 브로턴]]. * [[4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현석 (배우)|현석]]. **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시종]]. ** 미국의 배우, 프로듀서 [[제임스 우즈]]. ** 폴란드의 배우, 영화 감독 [[예지 스투흐르]]. * [[4월 19일]] - 미국의 피아노 연주자 [[머리 퍼라이아]]. * [[4월 2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최용득]]. (~[[2023년]]) * [[4월 21일]] - 미국의 가수 [[이기 팝]]. * [[4월 22일]] - 대한민국의 목회자 [[김성광]]. (~[[2022년]]) * [[4월 25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요한 크라위프]]. (~[[2016년]]) * [[4월 29일]] - 브라질의 음모론자 [[올라부 지 카르발류]]. (~[[2022년]]) === 5월 === * [[5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 감독 [[김인식 (1947년)|김인식]]. * [[5월 3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 (소설가)|이윤기]]. (~[[2010년]]) * [[5월 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진표 (정치인)|김진표]]. * [[5월 9일]] - 일본의 특수단체인 [[아마노 유키야]]. (~[[2019년]]) * [[5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용식 (성우)|김용식]]. * [[5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희라]]. *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직 부산광역시의원 [[이영 (1947년)|이영]]. * [[5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인철 (배우)|백인철]]. * [[5월 25일]]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좌승희]]. * [[5월 26일]] - 튀니지의 영화배우 [[히쳄 로스텀]]. (~[[2022년]]) * [[5월 27일]] ** 슬로베니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브란코 오블라크]]. ** 대한민국의 소설가 [[곽의진]]. (~[[2014년]]) ** 일본의 배우 [[사츠마 켄파치로]]. (~[[2023년]]) * [[5월 2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언론인 [[박용호 (1947년)|박용호]]. === 6월 === * [[6월 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종규 (익산시의원)|박종규]]. * [[6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순창]]. * [[6월 19일]] ** 인도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 대한민국의 배우 [[윤여정]]. * [[6월 21일]] - 이란의 변호사 [[시린 에바디]]. * [[6월 22일]] -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2022년]]) * [[6월 23일]] - 캐나다의 경제학자 [[스탠리 웡 (경제학자)|스탠리 웡]]. (~[[2016년]]) * [[6월 25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존 파월 (육상 선수)|존 파월]]. (~[[2022년]]) ** 미국의 화학자 [[윌 스테판]]. (~[[2023년]]) === 7월 === * [[7월 3일]] ** 대한민국의 교육학자 [[문용린]]. (~[[2023년]])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로프 렌센브링크]]. (~[[2020년]]) * [[7월 4일]] - 이탈리아의 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 (~[[2023년]]) * [[7월 5일]] - 대한민국의 방송작가 [[이홍구 (1947년)|이홍구]]. * [[7월 9일]] -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 출신 배우, 범죄자 [[O. J. 심슨]]. (~[[2024년]]) * [[7월 1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상목]]. ** 자메이카의 싱어송라이터 겸 기타 연주자 [[존 홀트 (가수)|존 홀트]]. (~[[2014년]]) * [[7월 13일]] - 영국 찰스 왕세자의 배우자 [[영국의 콘월 공작 부인 카밀라|카밀라 왕세자비]]. * [[7월 17일]] -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배우자 [[영국 왕비 카밀라]]. * [[7월 19일]] - 영국의 대중음악가수 [[브라이언 메이]]. ([[퀸 (밴드)|퀸]]) * [[7월 22일]] - 미국의 배우, 희극인 [[앨버트 브룩스]]. * [[7월 25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배우 [[이수나]]. * [[7월 29일]] - 미국의 기업인 [[스탠 크롱키]]. * [[7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인수]]. ** 미국의 영화배우, 정치인 [[아널드 슈워제네거]]. === 8월 === * [[8월 3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황우여]]. * [[8월 7일]] - 대한민국의 농민운동가 [[이경해]]. (~[[2003년]]) * [[8월 8일]] - 미국의 배우 [[래리 윌콕스]]. * [[8월 9일]] - 영국 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로이 호지슨]]. * [[8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인원]]. (~[[2016년]]) * [[8월 14일]] - 미국의 소설가 [[대니엘 스틸]]. * [[8월 1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송영진 (정치인)|송영진]]. (~[[2022년]]) * [[8월 19일]] - 대한민국의 의학자, 교수 [[한송]]. (~[[2024년]]) * [[8월 24일]] ** 브라질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 미국의 배우 [[앤 아처]]. * [[8월 28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이상벽]]. === 9월 === * [[9월 3일]]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조동진]]. (~[[2017년]]) ** 프랑스의 축구 감독 [[제라르 울리에]]. (~[[2020년]]) * [[9월 4일]] - 일본의 정치인 [[야마모토 고이치]]. (~[[2023년]]) * [[9월 5일]] ** 영국의 음악가 [[멜 콜린스]]. ** 대한민국의 과학자 [[이은철 (1947년)|이은철]]. * [[9월 6일]]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실베스터 (가수)|실베스터]]. (~[[1988년]]) * [[9월 9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윤아]]. * [[9월 14일]] - 영국의 배우 [[샘 닐]]. * [[9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윤배 (배우)|박윤배]]. (~[[2020년]]) * [[9월 21일]] -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 * [[9월 25일]] - 대한민국의 지휘자 [[금난새]]. * [[9월 26일]] - 미국의 가수 [[린 앤더슨]]. * [[9월 27일]]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조동진]]. (~[[2017년]]) ** 미국의 가수 [[미트 로프 (가수)|미트 로프]]. (~[[2022년]])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딕 아드보카트]]. * [[9월 28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김봉조 (수영 선수)|김봉조]]. (~[[2017년]]) ** 영국의 언론인 [[존 스노 (언론인)|존 스노]]. * [[9월 3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혜숙]]. ** 대한민국의 음악가, 작곡가 [[이건용 (작곡가)|이건용]]. === 10월 === * [[10월 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최수민 (성우)|최수민]]. * [[10월 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학기]]. *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은수 (배우)|박은수]]. * [[10월 13일]] - 미국의 록 가수, 기타리스트, 작곡가, 음악가, 기업가 [[새미 헤이거]]. *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김학원 (정치인)|김학원]]. (~[[201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심우창]]. * [[10월 26일]] - 미국의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 * [[10월 29일]] - 미국의 배우 [[리처드 드라이퍼스]]. === 11월 === * [[11월 4일]] - 일본의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2024년]]) * [[11월 6일]] - 타이완의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 (~[[2007년]]) * [[11월 8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성동 (소설가)|김성동]]. (~[[2022년]]) ** 미국의 가수 [[미니 리퍼턴]]. * [[11월 9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오정희 (소설가)|오정희]]. * [[11월 12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배우 [[파트리스 르콩트]]. *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병경]]. *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홍문표]]. *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대중 가수 [[윤형주]]. *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손학규]]. *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민욱 (배우)|민욱]]. (~[[2017년]]) === 12월 === * [[12월 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지방자치단체장 [[이태근 (1947년)|이태근]]. * [[12월 5일]] - 대한민국의 수필가 [[송우혜]]. * [[12월 6일]] - 영국 태생 캐나다의 컴퓨터 과학자 [[제프리 힌턴]]. *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홍세화]]. (~[[2024년]]) *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국 (배우)|신국]]. (~[[2020년]]) * [[12월 24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미겔 앙헬 곤살레스 수아레스]]. (~[[2024년]]) *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군인 [[박승춘]]. (~[[2024년]]) *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톨릭 성직자 [[이기헌 (주교)|이기헌]]. ** 캐나다의 기업인 [[리처드 페디]]. === 미상 === * 대한민국의 성악가, 대학교수 [[박세원 (성악가)|박세원]]. (~[[2024년]]) == 사망 == {{분류 참고|1947년 사망}} * [[1월 25일]] - 미국의 마피아 [[알 카포네]]. ([[1899년]]~) * [[3월 9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권동진]]. ([[1861년]]~) * [[5월 3일]] - 미국의 배우 [[해리 홀먼]]. ([[1872년]]~) * [[5월 16일]] - 중화민국의 장군 [[장링푸]] ([[1903년]]~) * [[7월 19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여운형]]. ([[1886년]]~) **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혁명가 [[아웅 산]]. ([[1915년]]~) * [[8월 8일]] - 러시아 제국의 장군 [[안톤 데니킨]]. ([[1872년]]~) * [[9월 27일]] -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 [[루이지 바를라시나]]. ([[1872년]]~) * [[10월 4일]] -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1858년]]~) * [[11월 30일]] - 미국의 배우, 영화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1892년]]~) *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덕수]]. ([[1894년]]~) * [[12월 28일]] - 이탈리아의 왕국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869년]]~) * [[12월 30일]]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1861년]]~) ** 네덜란드의 화가 [[한 판 메이헤런]]. ([[1889년]]~) == 노벨상 == * '''문학상''': * '''물리학상''':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 '''생리학 및 의학상''': * '''평화상''': * '''화학상''': == 달력 == {{연간달력|1947}} ===음양력 대조 일람===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임인]] || 대 || [[1월 22일]] || [[신축]] |- | [[음력 2월|2월]] || [[계묘]] || 대 || [[2월 21일]] || [[신미 (간지)|신미]] |- style="background:#ddddff;" | [[윤달|윤]]2월 || || 소 || [[3월 23일]] || [[신축]] |- | [[음력 3월|3월]] || [[갑진]] || 소 || [[4월 21일]] || [[경오]] |- | [[음력 4월|4월]] || [[을사]] || 대 || [[5월 20일]] || [[기해]] |- | [[음력 5월|5월]] || [[병오]] || 소 || [[6월 19일]] || [[기사 (간지)|기사]] |- | [[음력 6월|6월]] || [[정미]] || 소 || [[7월 18일]] || [[무술 (간지)|무술]] |- | [[음력 7월|7월]] || [[무신 (간지)|무신]] || 대 || [[8월 16일]] || [[정묘]] |- | [[음력 8월|8월]] || [[기유]] || 소 || [[9월 15일]] || [[정유 (간지)|정유]] |- | [[음력 9월|9월]] || [[경술]] || 대 || [[10월 14일]] || [[병인]] |- | [[음력 10월|10월]] || [[신해]] || 소 || [[11월 13일]] || [[병신]] |- | [[음력 11월|11월]] || [[임자]] || 대 || [[12월 12일]] || [[을축]] |- | [[음력 12월|12월]] || [[계축]] || 대 || [[1948년]] [[1월 11일]] || [[을미]] |}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 [[분류:1947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Marble_bust_of_Herodotos_MET_DT11742_(cropped).jpg|섬네일|서양에서 종종 "역사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헤로도토스]]의 모델 (기원전 484년경 – 기원전 425년경)]] '''역사'''(歷史, {{llang|en|history}})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한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명예와는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ref name="evans1">{{웹 인용 |url= http://www.history.ac.uk/ihr/Focus/Whatishistory/evans10.html|제목= The Two Faces of E.H. Carr |확인날짜=10 November 2008 |저자= Professor Richard J. Evans |날짜= 2001 |웹사이트= History in Focus, Issue 2: What is History? |출판사= University of London}}</ref><ref>{{웹 인용 |url= http://www.history.ac.uk/ihr/Focus/Whatishistory/munslow6.html |제목= What History Is |확인날짜=10 November 2008 |저자= Professor Alun Munslow |날짜= 2001 |웹사이트= History in Focus, Issue 2: What is History? |출판사= University of London}}</ref>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 (헤로도토스)|역사]]》에서 말했다.<blockquote>훗날 인간의 업적이 망각되거나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모두의 위대하고 경이로운 행적이 기록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이 역사서를 썼다.</blockquote>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에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했고,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료|역사적 자료]]를 탐색한다. 이 [[사료|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The Pageant of World History'' | 저자= Gerald Leinwand |연도=1986 |출판사=Allyn & Bacon |장=Prologue: In Search of History |쪽= 1|ISBN=978-0-205-08680-1|인용문= To find out about the past, historians use many different resources and reference materials. They use primary sources and secondary sources. A primary source is a document, record, or written acount by someone who took part in an event.}}</ref> 역사 연구는 서사(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 어원 ==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ref name=JosephJanda>{{인용| 저자 =Brian Joseph(Ed.)| 공저자 = Richard Janda (Ed.)| 날짜 =30 December 2004| 제목 =The Handbook of Historical Linguistics| 출판사 =Blackwell Publishing| 쪽 =163| id =978-1405127479| 연도 =2008}}</ref>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ref>{{서적 인용| 저자 = William K. Mahony | 발행 =[[28 Feb]] [[1998]] | 제목 =The Artful Universe: An Introduction to the Vedic Religious Imagination | 출판위치 =Albany, New York | 출판사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 쪽 =235 | id =0791435806}}</ref>,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ref>Online Etymology Dictionary, http://www.etymonline.com/index.php?search=history&searchmode=none</ref>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박물학|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 (역사서)|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 역사 서술 ==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된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 과거"를 참칭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물론 하나의 집단 내부에서도 역사를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교육 등을 통하여 이런 관행들이 사라질 것이라 믿기도 했으나 근대 이후 일부 고위층의 연구 결과나 현대의 우파적 학파들에서는 인간 혹은 자아를 가진 지성체의 본성이라 미래에도 계속될 일로 보는 편이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한다.<ref>Scott Gordon and James Gordon Irving,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ocial Science''. Routledge 1991. Page 1. {{ISBN|0-415-05682-9}}</ref>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ref>Ritter, H. (1986). Dictionary of concepts in history. Reference sources for the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no. 3. Westport, Conn: Greenwood Press. Page 416.</ref>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ref>Michael C. Lemon (1995).The Discipline of History and the History of Thought. Routledge. Page 201. {{ISBN|0-415-12346-1}}</ref>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ref name="graham-ch1">{{서적 인용 |제목=The Shape of the Past |저자 =Graham, Gordon |출판사=Oxford University |연도=1997 |장=Chapter 1}}</ref> == 고대의 인류 문명사 ==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 [[수메르 문명]] * [[인더스 문명]] * [[요하문명|요하 문명]] * [[황하 문명]] * [[이집트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 * [[히타이트 문명]] * [[고대 그리스 문명]] * [[고대 로마사|고대 로마 문명]] * [[페르시아 제국]] *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아스텍 문명]] * [[잉카 문명]] * [[한국의 역사]] == 역사의 시대적 구분 == === 선사 시대 ===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 [[석기 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 === 역사 시대 ===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 [[고대사]] : [[문자]] 발명(기원전 3000년경)~[[서로마제국]] 멸망(서기 476년) * [[중세|중세사]] : 서로마제국 멸망(476년)~[[동로마제국]] 멸망(1453년) * [[르네상스]] : 14세기~16세기 문예부흥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 * [[근세|근세사]] : 르네상스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기, 한국사에서는 [[조선]] 건국(1392년)~[[철종 (조선)|철종]] 시대 * 후기 [[근대사]] : 19세기~20세기 * [[현대사]] : 20세기~21세기 * 미래사 : 22세기 이후 == 대륙별 역사 == * [[아프리카의 역사|아프리카]] * [[아메리카의 역사|아메리카]] * [[아시아의 역사|아시아]] * [[유럽의 역사|유럽]] == 지리학과의 관계 ==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다. == 같이 보기 == * [[세계의 역사]] * [[역사 연표]] * [[대폭발]](빅뱅) * [[빅 히스토리]](대역사) **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 [[역사철학]] * [[계량경제사]] == 참고 문헌 == * [http://edurss.ru/cgi-bin/db.pl?cp=&page=Book&id=53185&lang=en&blang=en&list=Found History & Mathematics: Historical Dynamics and Development of Complex Societies]. Moscow: KomKniga, 2006. {{ISBN|5-484-01002-0}}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포털|역사}} {{위키공용분류}}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301449&v=42 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간 관련 주제}} {{전거 통제}} [[분류:역사|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IP스택}} [[파일:Application Layer.png|섬네일]]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llang|en|Internet Protocol Suite}})는 [[인터넷]]에서 [[컴퓨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통신규약([[통신 프로토콜|프로토콜]])의 모음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중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와 [[인터넷 프로토콜|IP]]가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에 '''TCP/IP 프로토콜''' 슈트라고도 불린다. == 역사 ==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는 [[1960년대]] 말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수행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탄생하였다.<ref>[http://citeseerx.ist.psu.edu/viewdoc/download?doi=10.1.1.88.7505&rep=rep1&type=pdf "The DoD Internet Architecture Model"], Vinton G. Cerf and Edward Cain, ''Computer Networks'', 7 (1983), North-Holland, pp. 307-318</ref> == TCP와 IP == TCP/IP는 패킷 통신 방식의 인터넷 프로토콜인 [[인터넷 프로토콜|IP]] (인터넷 프로토콜)와 전송 조절 프로토콜인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 (전송 제어 프로토콜)로 이루어져 있다. IP는 패킷 전달 여부를 보증하지 않고, 패킷을 보낸 순서와 받는 순서가 다를 수 있다.(unreliable datagram service) TCP는 IP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토콜로, 데이터의 전달을 보증하고 보낸 순서대로 받게 해준다. [[HTTP]], [[파일 전송 프로토콜|FTP]], [[SMTP]] 등 TCP를 기반으로 한 많은 수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들이 IP 위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묶어서 TCP/IP로 부르기도 한다. ==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의 계층 구조 ==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은 보통 네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 cellpadding="5" cellspacing="1" |- |5 |style="border:1px solid black;"|'''[[응용 계층]]''' | [[도메인 네임 시스템|DNS]], [[TFTP]], [[전송 계층 보안|TLS/SSL]], [[파일 전송 프로토콜|FTP]], [[HTTP]], [[인터넷 메시지 접속 프로토콜|IMAP]], [[인터넷 릴레이 챗|IRC]], [[네트워크 뉴스 전송 프로토콜|NNTP]], [[POP3]], [[세션 개시 프로토콜|SIP]], [[SMTP]], [[SNMP]], [[시큐어 셸|SSH]], [[텔넷]], [[ECHO 프로토콜|ECHO]], [[비트토렌트]], [[실시간 전송 프로토콜|RTP]], [[PNRP]], [[rlogin]], [[ENRP]], … |- |4 |style="border:1px solid black;"|'''[[전송 계층]]''' |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 [[사용자 데이터그램 프로토콜|UDP]], [[DCCP]], [[SCTP]], [[IL Protocol|IL]], [[RUDP]], … |- |3 |style="border:1px solid black;"|'''[[인터넷 계층]]''' | [[인터넷 프로토콜|IP]] ([[IPv4]], [[IPv6]]) |- |2.5 |style="border:1px solid black;"|'''[[주소 결정 프로토콜|ARP]]''' | [[주소 결정 프로토콜|ARP]], [[RARP]] |- |1,2 |style="border:1px solid black;"|'''[[네트워크 인터페이스 계층]]''' | [[이더넷]], [[Wi-Fi]], [[토큰링]], [[점대점 프로토콜|PPP]], [[SLIP]], [[FDDI]], [[비동기 전송 방식|ATM]], [[프레임 릴레이]], [[SMDS]], … |} === [[OSI 모델]]과 비교 === 두 모델은 관련은 있으나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계층의 수이다. 앞의 모델은 네 계층, 혹은 (링크 계층을 물리 계층과 데이터 링크 계층으로 나눈다면) 다섯 계층 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OSI 모델]]은 일곱 계층을 사용한다. [[OSI 모델]]이 더 잘 맞는 경우는 SSL이나 TLS를 설명할 때이다. 보통 SSL이나 TLS는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의 상위에, 그리고 [[HTTP]]나 SFTP, 그 밖에 stunnel이나 [[가상 사설망|VPN]] 위에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는 하위에 있는 세션 계층 프로토콜로 쓰인다. {| cellpadding="5" cellspacing="1" |----- | 7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응용 계층]]''' | [[HTTP]], [[SMTP]], [[SNMP]], [[파일 전송 프로토콜|FTP]], [[텔넷]], [[시큐어 셸|SSH]] & [[Scp]],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NFS]], [[RTSP]] |----- | 6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표현 계층]]''' | [[XDR]], [[ASN.1]], [[서버 메시지 블록|SMB]], [[애플 파일링 프로토콜|AFP]] |----- | 5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세션 계층]]''' | [[전송 계층 보안|TLS]], [[전송 계층 보안|SSL]], ISO 8327 / CCITT X.225, [[RPC]], [[넷바이오스]], [[애플토크]] |----- | 4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전송 계층]]''' |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 [[사용자 데이터그램 프로토콜|UDP]], [[실시간 전송 프로토콜|RTP]], [[SCTP]], [[SPX]], [[애플토크]] |----- | 3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네트워크 계층]]''' | [[인터넷 프로토콜|IP]], [[인터넷 제어 메시지 프로토콜|ICMP]], [[IGMP]], [[X.25]], [[CLNP]], [[주소 결정 프로토콜|ARP]], [[RARP]], [[경계 경로 프로토콜|BGP]], [[OSPF]], [[라우팅 인포메이션 프로토콜|RIP]], [[IPX]], [[DDP]] |----- | 2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데이터 링크 계층]]''' | [[이더넷]], [[토큰링]], [[점대점 프로토콜|PPP]], [[HDLC]], [[프레임 릴레이]], [[ISDN]], [[비동기 전송 방식|ATM]], [[무선랜]], [[FDDI]] |----- | 1 | style="border:1px solid black;" | '''[[물리 계층]]''' | [[전선 (전기)|전선]], [[전파]], [[광섬유]], [[동축케이블]], [[도파관]], [[PSTN]], [[리피터]], [[DSU]], [[CSU]], [[모뎀]] |} == 같이 보기 == * [[TCP/UDP의 포트 목록]] == 각주 == {{각주}} {{전거 통제}} [[분류:컴퓨터 네트워킹]] [[분류:컴퓨터 통신]] [[분류:인터넷 프로토콜]] [[분류:통신공학]] [[분류:통신]]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참조 모형]]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구별|인프라넷}} [[파일:Intranet.png|thumb]] '''인트라넷'''(intranet)은 단체의 직원만 접근이 가능한 [[사설망]]이다.<ref name=sun /><ref>[http://www.iorg.com/papers/iw/19981019-advisor.html "The Difference Between Internet, Intranet, and Extranet"], October 19, 1998, Steven L. Telleen, http://www.iorg.com/</ref>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프로토콜]]을 쓰는 폐쇄적 [[근거리 통신망]]으로 간주된다. [[인터넷]]을 조직 내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인트라넷은 [[근거리 통신망]]([[LAN]])을 기반으로 [[데이터]] 저장장치인 [[서버]]를 연결하고 [[PC]]에 설치된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방화벽 (네트워킹)|방화벽]]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거나 일부 제한하여 보안을 유지한다. 인트라넷은 1994년 수많은 단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ref name=sun>Nielsen, J. and Sano, D., '[http://www.useit.com/papers/sunweb/ 1994 Design of SunWeb - Sun Micro-systems' Intranet] {{웨이백|url=http://www.useit.com/papers/sunweb/ |date=20120805122349 }}', Useit.com, 1994.</ref> == 개요 == 인트라넷은 일반적으로 외부인의 액세스를 배제하고 조직 내에서 정보, 간편한 통신, 공동 작업 도구, 운영 체제 및 기타 컴퓨팅 서비스를 공유하기 위한 컴퓨터 네트워크이다. 이 용어는 인터넷과 같은 공용 네트워크와 대조적으로 사용되지만 인터넷 프로토콜 제품군을 기반으로 동일한 기술을 사용한다. 조직 전체의 인트라넷은 내부 커뮤니케이션과 협업의 중요한 초점을 구성할 수 있으며 내부 및 외부 리소스에 액세스할 수 있는 단일 시작점을 제공한다. 가장 간단한 형태로 인트라넷은 LAN([[근거리 통신망]]) 및 WAN([[광역 통신망]]) 기술을 사용하여 구축된다. 많은 최신 인트라넷에는 검색 엔진, 사용자 프로필, 블로그, 알림 기능이 있는 모바일 앱, 인프라 내 이벤트 계획 등이 있다. 인트라넷은 때때로 [[엑스트라넷]]과 대조된다. 인트라넷은 일반적으로 조직의 직원으로 제한되지만 고객, 공급업체 또는 기타 승인된 당사자도 엑스트라넷에 액세스할 수 있다. 엑스트라넷은 인증, 권한 부여 및 계정(AAA 프로토콜)을 위한 특별한 규정을 통해 개인 네트워크를 인터넷으로 확장한다. == 이용 == 협업(그룹 작업 및 화상회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또는 기업 디렉토리, 판매 및 고객 관계 관리 도구, 프로젝트 관리 등 도구를 제공하기 위해 인트라넷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인트라넷은 기업 문화 변화 플랫폼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인트라넷 포럼 애플리케이션에서 주요 문제를 논의하는 다수의 직원은 관리, 생산성, 품질 및 기타 기업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질 수 있다. 대규모 인트라넷에서 웹 사이트 트래픽은 공개 웹 사이트 트래픽과 유사한 경우가 많으며 웹 측정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전체 활동을 추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용자 설문조사는 또한 인트라넷 웹사이트 효율성을 향상시킨다. 대규모 기업에서는 인트라넷 내의 사용자가 방화벽 서버를 통해 공용 인터넷에 액세스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보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메시지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다. 인트라넷의 일부가 고객 및 회사 외부의 다른 사람이 액세스할 수 있게 되면 엑스트라넷의 일부가 된다. 기업은 인트라넷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 연결하기 위해 특별한 암호화/암호 해독 및 기타 보안 보호 장치를 사용하여 공용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인트라넷 사용자 경험, 편집 및 기술 팀이 협력하여 내부 사이트를 제작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인트라넷은 대규모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HR 또는 CIO 부서 또는 이들의 조합에 의해 관리된다. 콘텐츠의 범위와 다양성, 시스템 인터페이스 수로 인해 많은 조직의 인트라넷은 해당 공개 웹 사이트보다 훨씬 더 복잡한다. 인트라넷과 그 사용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닐슨 노먼 그룹]]의 2007년 인트라넷 디자인 연감에 따르면 참가자 인트라넷의 페이지 수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평균 200,000페이지였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평균 600만 페이지로 증가했다.<ref>Pernice Coyne, Kara; Schwartz, Mathew; Nielsen, Jakob (2007), "Intranet Design Annual 2007", [[Nielsen Norman Group]]</ref> == 같이 보기 == * [[국영 인트라넷]] * [[인터넷]] * [[근거리 통신망]](LAN) * [[포털 사이트]] * [[엑스트라넷]] * [[서버]] * [[광명망]] == 각주 == {{각주}} {{글로벌|제목=인트라넷|주소=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B%9C%EC%82%AC/%ED%98%84%EB%8C%80%EC%82%AC%ED%9A%8C%EC%99%80_%EC%8B%9C%EC%82%AC/%EA%B5%B0%EC%82%AC%C2%B7%EA%B3%BC%ED%95%99%EA%B8%B0%EC%88%A0%C2%B7%EC%8A%A4%ED%8F%AC%EC%B8%A0_%EB%A0%88%EC%A0%80%C2%B7%EC%9D%98%EB%A3%8C/%EA%B5%B0%EC%82%AC%C2%B7%EA%B3%BC%ED%95%99%EA%B8%B0%EC%88%A0#%EC%9D%B8%ED%8A%B8%EB%9D%BC%EB%84%B7}} {{전거 통제}} {{토막글|컴퓨터 과학|통신}} [[분류:컴퓨터 통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가 정보 | 이름 = 프레디 머큐리<br />Freddie Mercury | 그림 = Freddie Mercury performing in New Haven, CT, November 1977.jpg | 그림크기 = | 설명 = 프레디 머큐리 (1977년) | 본명 = 파로크 불싸라<br />(ફરોખ બલ્સારા‌) | 출생일 = {{출생일|1946|9|5}} | 출생지 = 영국령 잔지바르 [[스톤타운]]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1|11|24|1946|9|5}}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국적 = [[인도]] (1946 ~ 1964) </br> [[영국]] (1964 ~ 1991) | 직업 = [[음악가]], [[음악 프로듀서]] | 장르 = [[록 음악|록]], [[하드 록]], [[글램 록]] | 악기 = [[보컬]], [[피아노]], [[키보드 (악기)|키보드]], [[기타]] | 활동시기 = [[1969년]] ~ [[1991년]] | 레이블 =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폴리도르 레코드|Polydor]], [[:en:EMI Record|EMI]], [[팔로폰|Parlophone]], [[할리우드 레코드|Hollywood Records]] | 관련활동 = [[퀸 (음악 그룹)|퀸]] | 배우자 =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예명 = | 서명 = Freddie Mercury signature 2.svg }} '''프레디 머큐리'''({{llang|en|Freddie Mercury}}, 본명은 '''파로크 불싸라''' 또는 '''프레드릭 불싸라'''({{llang|gu|ફરોખ બલ્સારા‌, fredrickbulsara}}), [[1946년]] [[9월 5일]] ~ [[1991년]] [[11월 24일]])는 [[잔지바르]]<ref>현재 [[탄자니아]]의 [[자치령]]</ref>에서 태어난 [[영국]]의 [[음악가]]이자 [[음악 프로듀서]]이다. [[퀸 (밴드)|퀸]]의 [[리드 보컬]]로서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이 압권이며 특유의 무대 장악력과 퍼포먼스로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이 있다. == 생애 == === 유년시절 ===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9월 5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싸라''''({{llang|gu|ફરોખ બલ્સારા‌}})였으며, 1953년에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 학창시절 ===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 시기부터 프레디(Freddy; Frederick의 애칭)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 (악기)|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 현 [[웨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본명을 [[인도]]식 이름인 '파로크 불사라'에서 [[영어]]식으로 ''''프레드릭 불사라''''로 개명했다. 그후 [[1970년]] ''''프레디 머큐리'''' 로 [[개명]]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히드로 공항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후에 후배 직원들이 Queen의 I want to break free에 맞추어 춤춘 영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 있다. === 음악 활동 === [[파일:Queen_1984_0009.jpg|섬네일|왼쪽|1984년의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en:Ibex (band)|아이벡스]](Ibex)<ref>후에 프레디의 제안으로 밴드명을 '레키지(Wreckage)'로 바꾼다.</ref>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팀 스태플]](Tim Staffell),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는 밴드 [[스마일 (밴드)|스마일]]에서 활동하였는데, 보컬 팀 스태플이 [[:en:Humpy Bong|험피 봉]](Humpy Bong)으로 이적하기 위해 스마일에서 탈퇴하자, 프레디는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 (밴드)|퀸]]을 결성하였으며,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하였다. 당시 멤버들이 Queen이라는 이름을 반대한 이유는 퀸이라는 단어가 주로 여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게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의 고집으로 퀸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1970년대 중후반, 감히 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4집과 5집의 성공, 그리고 6집 News of the world는 퀸의 인기에 정점을 찍는다. we will rock you, 프레디가 작곡한 we are the champion이 앨범에서 나왔다. 7집과 8집은 특히 미국에서 성공을 하였고 미국 진출의 큰 기여를 한다. 프레디는 뉴욕에 집 2채를 사는 등 미국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 [[1980년대]] 10집의 실패로 1980년 초에는 퀸 활동을 잠시 쉬면서 프로듀서 리처드 울프(Richard Wolf)의 작업에 참여하고 영화 《[[메트로폴리스 (1927년 영화)|메트로폴리스]]》의 재개봉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85년]]에는 솔로 앨범 《[[Mr. Bad Guy]]》를 발매하였고, [[영국 음반 차트]] 6위에 올랐다. 싱글 발매된 〈[[I Was Born to Love You]]〉는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1집 The works를 발매하고 해체설에 시달리던 퀸은 Live aid에서 보여준 단 20분간의 공연으로 해체설을 일단락 시켰다. 1986년에 발매한 12번째 앨범 A kind of magic이 최후의 하이랜더 ost가 되었고 이는 크게 성공한다. [[1988년]]에는 오페라 가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와 협업하여 솔로 2집 《[[Barcelona (음반)|Barcelona]]》를 발매한다. 프레디와 몽셰리 카바예가 스페인 국왕을 위해 바친 How can i go on과 The golden boy는 아직도 회자되는 곡들이다. 동명의 앨범 수록곡인 〈Barcelona〉는 [[1992년 하계 올림픽|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선택되었으나, 프레디의 사망 이후 주제가 선정이 취소되고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로 대체되었다. 올림픽 주제가 선정 과정에 힘입어 《Barcelona》는 1992년 재발매되었고 [[빌보드 200|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수록곡 〈Barcelona〉는 [[영국 싱글 차트|영국]]과 네덜란드에서 2위까지 올랐다. 1989년 13집 The miracle을 발매하며 음악성을 인정 받았고 이때부터 작곡명의를 퀸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프레디는 점점 야위었고 투어도 취소하고 언론의 무차별 의혹 기사로 큰 곤혹에 시달렸다. [[파일:Freddie Mercury Statue Montreux.jpg|섬네일|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스위스]])]] === 사망과 추모 === [[1990년]] 퀸과 함께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린《[[Innuendo]]》레코딩을 시작한 후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진 듯 했던 그는 I'm going slightly mad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에서 너무 야윈 모습으로 등장했다. 결국 [[1991년]] 11월 22일 자신이 [[에이즈]]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에이즈와의 투쟁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지 하루 뒤 [[11월 24일]] 자신의 집에서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45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92년]] [[4월 20일]] 부활절, 그를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공연이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1923년)|웸블리 경기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퀸의 나머지 멤버들과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조지 마이클]], [[익스트림 (밴드)|익스트림]],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밥 겔도프]], [[로버트 플랜트]] 등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 TV로 생중계되어 약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하였다. [[1995년]]에 《[[Made in Heaven (퀸의 음반)|Made in Heaven]]》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는 〈A Winter's Tale〉 뿐 아니라 퀸의 미발표 곡들, [[1991년]] 《[[Innuendo]]》 발매 이후에 녹음한 곡들, 프레디 머큐리 사망 2주전 녹음한 곡 〈[[Mother Love]]〉<ref>〈A Winter's Tale〉은 프레디 단독 작품이며, 〈Mother Love〉는 브라이언 메이와의 공동 작품이다.</ref><ref>https://www.telegraph.co.uk/culture/music/music-news/10486116/Inside-the-studio-where-Freddie-Mercury-sang-his-last-song.html</ref>, 그의 솔로곡들을 나머지 퀸 멤버들이 편곡한 곡들 등이 담겨졌다. [[2011년]] 프레디 머큐리 출생 65주년을 기념하여 [[구글]]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스페셜로고와 모션그래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ref name="프레디 머큐리 65주년 구글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KX2BQM0D01M&list=PLuploads&feature=channel_hash_redirect</ref> [[2012년]] 8월 13일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1986년 웸블리 콘서트 당시 실황 중계 영상의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떠난지 20년 만에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공연을 이루었다. 그리고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We will rock you를 연주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17473 프레디머큐리]]라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현재 퀸의 활동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고있다. 그리고 이 인기에 더불어 퀸은 2020년 1월 18일과 19일에 고척돔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앨범 == * [[Mr. Bad Guy]](1985) * [[The great pretender]](1987) * [[Barcelona]](1988 with 몽셰리 카바예) * [[Living on my own]] .remix(1993) * [[Time waits for no one]](2019) * [[Love me like there's no tomorrow]](2019) == 디스코그래피 == * 《[[Mr. Bad Guy]]》(1985년) * 《[[Barcelona (음반)|Barcelona]]》(1988년) * 《The Freddie Mercury Album(The Great Pretender)》(1992년) * 《The Solo Collection》(2000년) * 《Lover of Life, Singer of Songs》(2006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Freddie Mercury}} * {{언어링크|en}} {{공식 웹사이트}} * {{마이스페이스|freddiemercuryonline}} * {{Discogs 음악가|Freddie Mercury}} * {{올뮤직|class=artist|id=p4899}} * {{last.fm|Freddie Mercury}} * {{IMDb 이름|0006198}} * [https://www.youtube.com/FreddieMercurySolo 프레디 머큐리의 채널] - [[유튜브]] {{프레디 머큐리}} {{퀸}} {{기본정렬:머큐리, 프레디}} {{전거 통제}} [[분류:프레디 머큐리| ]] [[분류:1946년 출생]] [[분류:1991년 사망]] [[분류:에이즈로 죽은 사람]]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인도계 영국인]] [[분류:이란계 영국인]] [[분류:퀸의 일원]] [[분류:영국의 록 가수]] [[분류:영국의 록 기타 연주자]] [[분류:영국의 록 키보드 연주자]] [[분류:영국의 하드 록 음악가]] [[분류:영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 [[분류:영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분류:영국의 조로아스터교도]] [[분류:양성애자 음악가]] [[분류:브릿 어워드 수상자]] [[분류:구자라트주 출신]] [[분류:영국의 록 피아노 연주자]] [[분류:할리우드 레코드 음악가]] [[분류:20세기 성소수자 사람]] [[분류:영국의 성소수자 가수]] [[분류:파르시인]] [[분류:인도에서 잉글랜드로 이민간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자 정보 |이름 =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원어이름=Ludwig Eduard Boltzmann |그림 = Boltzmann2.jpg |그림 크기 = 225px |그림 설명 =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1844-1906) |태어난 날 = {{출생일|1844|2|20}} |태어난 곳 = [[오스트리아 제국]] [[빈]] |죽은 날 = {{사망일과 나이|1906|9|5|1844|2|20}} |죽은 곳 = [[이탈리아 왕국 (1861년~1946년)|이탈리아 왕국]] [[두이노]] |거주지 = [[오스트리아]], [[독일]] |국적 = 오스트리아 |분야 = [[물리학]] |소속 = [[그라츠 대학교]], [[빈 대학교]], [[뮌헨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출신 대학 = [[빈 대학교]] |지도교수 = [[요제프 슈테판]] |지도학생 = [[리제 마이트너]] <br> [[파울 에렌페스트]] <br> [[필리프 프랑크]] <br> [[구스타프 헤르글로츠]] |주요 업적 = [[볼츠만 상수]] <br> [[볼츠만 운송 방정식]] <br> [[볼츠만 분포]] <br> [[슈테판-볼츠만 법칙]] <br> [[H 정리]] |수상 = |종교 = |참고 사항 = }}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llang|de|Ludwig Eduard Boltzmann}},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 생애 == === 어린 시절과 학생 시절 === 볼츠만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1844년]]에 [[빈]]에서 태어났다. 볼츠만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George Boltzmann)은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서 이주한 시계공이었다. 어머니인 카테리나 파우에른파인트(Katharina Pauernfeind)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볼츠만은 양친으로부터 가정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15세에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에 볼츠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63년]] [[빈 대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해 [[1867년]] 기체운동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요제프 슈테판]]의 조수가 되어 2년간 일했다. 볼츠만에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업적을 소개한 것은 슈테판이었다. === 학문적 경력 === 볼츠만은 그의 나이 25세가 되는 [[1869년]]에 [[그라츠 대학]]의 [[이론물리학]]([[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869년의 몇 달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베르트 분젠]]과 [[레오 쾨니히스베르거]]와, [[1871년]]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 연구를 했다. [[1873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76년]]까지 일했다. [[파일:Boltzmann-grp.jpg|섬네일|왼쪽|280px|루트비히 볼츠만과 그라츠 대학의 동료들, 1887년. (서 있는 왼쪽 사람부터) [[발터 네른스트|네른스트]], Streintz, [[스반테 아레니우스|아레니우스]], Hiecke, (앉아 있는 왼쪽 사람부터) Aulinger, Ettingshausen, Boltzmann, Klemenčič, Hausmanninger]] [[1873년]]에 볼츠만은 그라츠의 교사 양성 대학의 여학생이었던 헨리에테 폰 아이겐틀러를 처음 만났고, [[1876년]] 7월에 헨리에테와 결혼해 슬하에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볼츠만은 다시 그라츠로 돌아와 실험물리학과의 학장을 맡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아레니우스 방정식]]으로 유명한 [[스반테 아레니우스]]와 [[열역학 제3법칙]]으로 유명한 [[발터 네른스트]]가 있었다. 볼츠만은 그라츠에서 14년간을 일했으며, 이 당시에 [[통계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발전시켰다. [[1887년]]에는 그라츠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볼츠만은 [[1890년]] 독일에 있는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요세프 슈테판]]의 자리를 이어 이론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 말년 ===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1906년]] [[9월 5일]], 볼츠만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의 두이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postech.ac.kr/press/pp/part01/ch030/sec070/# |제목=물리학의 선구자, 임경순 |확인날짜=2007-10-3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1101151302/http://www.postech.ac.kr/press/pp/part01/ch030/sec070/# |보존날짜=2005-11-01 |url-status=dead }}</ref>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되지만, 명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 철학 == 볼츠만의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에른스트 마흐]]와 물리화학자인 [[오스발트]]같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반대했다. 1890년대 동안 볼츠만은 원자론자들과 비원자론자 모두가 원자에 대한 논의 없이 물리학을 할 수 있도록 타협안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해결 방법은 원자는 곧 "Builder"라고 하는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헤르츠]]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원자론자들은 그 그림이 실제 원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원자론자들은 그림 자체가 실제 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집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트나 순수 열역학의 옹호자들은 볼츠만의 원자와 분자에 관한 가정과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 해석 때문에 기체분자운동론과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백여년에 걸쳐 볼츠만의 과학은 다른 철학적 반대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흐의 학생과 [[구스타프 야우만]] 등을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헤르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운동은 궁극적으로 전자기적 운동이며, 전자기적 운동은 원자와 분자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볼츠만의 운동론과 열역학 2법칙의 통계적 해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볼츠만을 깊게 우울하게 만들었다. 1901년 빈 대학의 마흐가 사직을 한 후, 볼츠만은 다시 빈으로 돌아가 그의 물리학의 철학적 반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한번 낙담하게 된다. 1904년에 세인트 루이스의 국제 물리학 회의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츠만은 물리학 부문에 초청받지 못하고 "응용수학" 분과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의 관점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가까운 것으로,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된 철학사상을 계속 이어받고 그래서 그러한 인습을 과학자들이 극복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05년에 볼츠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 철학자 [[브렌타노]]와 광범위하게 뜻을 같이했다. 그는 과학에서 좀 더 철학의 실재를 반박하기 위해서 좀 더 명확하게 철학에 정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에 있어 또 다시 낙담했다. 이듬해 1906년 그의 정신 상태는 매우 나빠졌고, 그는 은퇴하고 말았다. 그는 같은해 9월에 자살했다. == 물리학 == {{통계역학}} 볼츠만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체의 분자 속도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포함한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맥스웰-볼츠만 통계|맥스웰-볼츠만 통계역학]]과 에너지에 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고전 통계 역학의 기초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맞지 않는 여러 현상에 적용가능하며, 온도의 의미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의 확립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미국의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 그리고 1808년 [[존 돌턴]]의 원자 발견의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자와 공유되었다. 그는 분자와 원자에 관해서 독일 물리학지 편집자와 긴 논쟁을 벌였다. 볼츠만이 죽고 2~3년 뒤에 [[장 바티스트 페랭|페랭]]의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아보가드로 수]]와 [[볼츠만 상수]]가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작은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납득시켰다. 그의 업적으로는 [[볼츠만 인자]]라고 불리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가 플랑크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또 슈테판-볼츠만 공식을 유도해냈다. 흑체의 단위표면적에서 방출되는 모든 파장의 빛에너지의 총합이 흑체의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1879년에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1884년에 이론적으로 유도해내었다. 이것은 20세기 양자론이 등장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하면 "[[엔트로피]]와 [[확률]]이 로그로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진술된 것은 볼츠만의 기체분자이론에서였다." 그 유명한 엔트로피 S에 관한 식은 :<math> S = k \, \log W</math> 여기서 <math>k</math>&nbsp;=&nbsp;1.3806505(24)&nbsp;×&nbsp;10<sup>−23</sup>&nbsp; J K<sup>−1</sup>는 [[볼츠만 상수]]이다. W는 거시상태의 기회의 빈도,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계의 거시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W는 아래의 식을 이용하여 구해낼 수 있다. :<math> W = \frac{N!}{\prod_i N_i!} </math> 이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태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를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 볼츠만 운송 방정식 == {{본문|볼츠만 운송 방정식}} 볼츠만 방정식은 이상기체의 동역학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이전에는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태에 도달해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비평형상태에 있을 경우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나갈 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볼츠만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math> \frac{\partial f}{\partial t}+ v \frac{\partial f}{\partial x}+ \frac{F}{m} \frac{\partial f}{\partial v} = \frac{\partial f}{\partial t}\left.{\!\!\frac{}{}}\right|_\mathrm{collision} </math> 여기서 f는 주어진 시간에 따른 물질의 위치와 운동량의 분포 함수이며, F는 힘, m은 물질의 질량, T는 시간이며, v는 물질의 평균속도를 의미한다. 이 방정식은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확률 분포의 시공간 미분을 나타내고 있다. 좌변의 첫항은 분포 함수의 시간 미분을 나타내고, 두 번째 항은 위치 미분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항은 물질에 주어지는 어떠한 힘의 효과를 나태내고 있다. 우변은 충돌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파일:Zentralfriedhof Vienna - Boltzmann.JPG|섬네일|왼쪽|200px| 빈에 있는 볼츠만의 무덤. 그의 상반신과 엔트로피식이 보인다]] 원칙적으로, 위 방정식은 적절한 경계조건이 주어진다면 완벽하게 기체들의 총제적인 동역학을 보여준다. 1차 미분 방정식은 믿을 수 없게 간단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f는 멋대로인 물질의 분포함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에 주어지는 힘 또한 본포함수의 속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볼츠만 방정식은 적분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그것을 풀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다고 한다. 충돌항에 관한 모양은 얼추 맞다. 그러나 이상기체에 관한 볼츠만 방정식의 [[Chapman-Enskog]] 확장이 더욱 더 정확하다. 볼츠만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열역학 제 2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H정리]]이다. 그의 충돌항에서 그가 만든 핵심 가정은 "분자 혼돈"({{llang|en|molecular chaos}})이다. 가역성을 깨버린 그의 가정은 제 2법칙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연론적인 가정이었고, 볼츠만의 겉보기 성공에 불과했다. 결국 [[요한 요제프 로슈미트]]와의 [[로슈미트의 역설]]에 관한 긴 논쟁은 결국 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70년대에 코헨과 도르프만은 높은 밀도에서 볼츠만 방정식의 체계적 확장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따라서 밀집된 기체와 액체의 비평형 통계역학은 [[그린-구보 관계]](Green-kubo relations), [[파동이론]] 그리고 다른 접근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볼츠만 두뇌]] * [[볼츠만 메달]] {{위키공용|Ludwig Boltzmann}} {{기본정렬:볼츠만, 루트비히}} {{전거 통제}} [[분류:루트비히 볼츠만| ]] [[분류:1844년 출생]] [[분류:1906년 사망]] [[분류:오스트리아의 자살한 사람]] [[분류: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분류:열역학자]] [[분류:빈 대학교 동문]]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빈 출신]]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분류:19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분류:20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분류:수리물리학자]] [[분류:유체역학자]] [[분류:1906년 자살]]
지시 사항들이 나열된 순서를 '''프로그램'''({{llang|en-GB|programme}}, {{llang|en-US|program}}, {{문화어|프로그람}})이라고 부른다. * [[컴퓨터 프로그램]] * [[텔레비전 프로그램]] * [[라디오 프로그램]] * [[행사 프로그램]] * [[교육 프로그램]] * [[프로그램 (프로그래밍 언어)|프로그램]]은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 [[프로그램 (기계)]] * [[감시 프로그램]] * [[프로그램 (영화)]] == 같이 보기 == * {{in title|프로그램}} {{동음이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코믹}} {{만화}} [[파일:Krazy Kat 1918-09-07.png|thumb]] '''만화'''(漫畵, {{문화어|이야기그림}}, {{llang|en|Comics|코믹스}})는 [[시각 예술]]의 일종으로,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매체이며 종종 텍스트나 다른 시각적 정보과 결합한다. 일반적으로 이미지 패널의 형식을 취하며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의 조합으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론가들과 역사가들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이미지와 글자, 일부 순차성 또는 다른 이미지 관계, 그리고 대량 복제나 반복되는 인물의 사용과 같은 다른 역사적 측면의 조합을 강조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초기에는 [[캐리커처]]나 간단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하위 장르를 가진 [[예술]] 매체로 발전했다. 만화는 [[소설]]과 [[그림]]을 융합한 종합예술이며 두 가지 장르를 합쳤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특출나도 걸작이 나올 수 있다. 대화, 서술, 음향 효과 기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말풍선]], 짧은 해설, [[의성어]]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컷의 크기와 배열로 묘사의 속도를 조절한다. 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삽화는 만화에 쓰이는 가장 흔한 이미지 제작의 수단이다. 만화의 일반적인 형태로는 [[코믹 스트립]], 시사 [[만평]], 만화책 등이 있다. 20세기말 이후, [[그래픽 노블]], 코믹 앨범, [[단행본]] 등의 합본이 점차 흔해졌고, 21세기 들어 [[웹 만화]]가 확산되었다. 만화의 역사는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학자들은 [[라스코 동굴]]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라고 추정해 왔다. 20세기 중반, 만화는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와 벨기에), [[일본 만화|일본]] 등에서 유난히 번창했다. 유럽의 만화는 1830년의 로돌페 퇴퍼({{언어링크|en}} [[:en:Rodolphe Töpffer|Rodolphe Töpffer]])의 연재 만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땡땡의 모험]]와 같은 1930년대의 연재 만화와 만화책의 성공에 힘입어 널리 확산되었다. 미국의 만화는 20세기 초 신문 연재 만화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로 부각되었다. 잡지 형식의 만화책은 1938년 [[슈퍼맨]]이 등장한 이후 [[슈퍼히어로]] 장르가 두드러져 1930년대에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2세기부터 만화가 시작되었음을 제시되었고, 근대적 만화는 20세기 초에 [[메이지 유신]] 이후 각종 서양문물의 전파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에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의 인기와 함께 만화 잡지와 만화책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만화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저급 문화]]로 취급받았으나, 20세기 말로 진행되면서 대중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개요 ==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멀게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컷과 그림 안의 말풍선을 가진 오늘날의 만화 형식 및 '만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며,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학자들 중 [[윌 아이스너]]는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이라 정의했다.<ref>Eisner, Will (1990 Expanded Edition, reprinted 2001). Comics & Sequential Art. Poorhouse Press. {{ISBN|0-9614728-1-2}}.</ref> 그는 1996년에 만화를 최종적으로 '만화책 등에서 삽화와 [[말풍선]]이 순서에 따라 나열된 것'으로 정의했다.<ref>Eisner, Will (1996). Graphic Storytelling. Poorhouse Press. {{ISBN|0-9614728-2-0}}.</ref> 《[[만화의 이해]]》(1993)에서 [[스콧 매클라우드]]는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했다.<ref>McCloud (1993). p. 7-9.와 맥클루드 (1998). p. 15-17.</ref> 이 정의에서는 [[패밀리 서커스]]나 풍자 만화와 같은 한컷 만화를 만화가 아닌 [[카툰]]으로 분류한다. 그 반면, [[코믹스 저널]]은 "20세기 최고의 만화 100선"이라는 기사에서 수많은 카툰 및 캐리커처 작가들의 한컷 작품을 포함시켰다.<ref>Spurgeon, Tom et al (February 1999) "Top 100 (English Language) Comics of the Century". The Comics Journal 210.</ref> == 특징 == 문화를 크게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맥락 문화에 속하는 나라들인데, 고맥락 문화란, 민족적으로 동질을 이루며 역사, 습관, 언어 등에서 볼 때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 즉 맥락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깊은 인간관계로 묶여있으며 멤버 간에 공유하는 정보가 많으며 간단한 메시지라도 깊은 의미를 갖기 쉬운 문화이다. 또한, 언어 코드보다 컨텍스트(context: 비언어코드,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적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비언어행동에 있어서는 미묘한 것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에, 저맥락 문화는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이 대표국이며, 멤버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비율이 낮아 개인주의와 다양성이 발달하는 문화를 가진다. 저맥락 문화에 속하는 미국만화는 정교한 그림체와 짧은 이야기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선악의 확실한 구분과 수많은 말풍선을 사용한 스토리 전개, 소설식 설명구조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만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독자들은 처음 망가를 접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식 이야기 관습에 당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 특유의 느긋한 스토리 구조와 속도조절을 위해 사용되는 감성적 이미지들, 말없는 칸들은 서양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며, 감정을 나타내는 많은 기호들과 소리와 움직임뿐 아니라 상황과 심리적 상태까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그림문자들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표현매체로서 받아들여진다. == 만화 산업 == 한국 만화 생태계의 기본 구조는 '창작-제작-유통-소비'의 흐름을 가진다. 창작 단계는 개인 창작, 공동 창작, 수입 라이선스 만화로 나뉘며 제작 단계는 온라인과 만화전문 출판사, 일반 출판사, 대여점용 출판사 등의 출판으로 나뉜다. 이 밖에도 신문, 동인지 시장, 모바일 등도 제작 단계에 포함된다. 만화 산업은 다양한 제작 단계와 패키징 과정을 거쳐서 제작되며, 하나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가치사슬을 만들며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콘텐츠는 기획에서부터 다수의 가치 사슬에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 만화의 제작 환경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6-12-05}} === 온라인 제작(웹툰) === 온라인이라 하면 보통 웹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툰 작가들은 개인창작 위주로 활동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있다. 웹툰은 대개 규모가 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가 된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가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수많은 노력을 통해 정식 연재를 하게 된다. 웹툰은 만화 연재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포털 사이트 방문 횟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이버'라는 포털 사이트가 있다. 네이버에서는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요일별 웹툰을 제공한다. 요일당 평균 24개 정도의 웹툰을 제공하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원고료를 제공하고 웹툰을 무로료 제공하고있다. === 신문 제작 === 신문 만화는 전통적으로 '시사만화'의 영역이었다. 1개 신문에 적어도 네 칸 만화와 한 칸 만화가 동시에 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네 칸 만화 지면을 폐지할 정도로 시사만화의 창작·제작환경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신문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로 대여점용 성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협조해 적은 비용 혹은 무료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 분류 == === 매체에 따른 분류 === * [[인쇄 만화]] : 일반적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만화책을 통틀어 설명한다. * [[코믹 스트립]] : [[신문]]이나 [[잡지]]에 주로 4컷 정도 분량으로 수록 * [[만화책]] : 단행본으로 발행된 만화가 그려진 책이다. * [[웹툰|인터넷]] : 스마트폰 및 컴퓨터 일상화가 된 지금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에서 즐길 수 있는 만화를 표현한다. === 내용에 따른 분류 === * [[시사 만화]] : 시사에 맞는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만화 * 유머 만화 : 예술성과 웃음을 지향하는 만화 * [[학습 만화]] : [[아동]]이나 [[청소년]]의 학습을 돕기 위해 그려진 만화 === 국가에 따른 분류 === * [[한국 만화]] : ex) 키드갱, 열혈강호, 타짜, 짱 * [[일본 만화]] : ex) 신의 물방울, 원피스, 슬램덩크, 크로우즈 * [[중국 만화]] ([[홍콩 만화]]) : ex) 영연천사, 용호문, 싼마오 유랑기 * [[미국 만화]] : ex) 마블 코믹스(아이언 맨, 헐크 등), DC 코믹스(슈퍼맨, 배트맨) * [[유럽 만화]] : ex) 뫼비우스, 아스테릭스, 피터팬, 스콜피온 == 같이 보기 == {{포털|만화}} * [[웹툰]] * [[애니메이션]] * [[만화책]]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위키낱말사전-줄|만화}}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분류:만화|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특정한 프로토콜 기술|인터넷 관련 프로토콜의 전체 설정}} {{다른 뜻|IP 주소||비슷한 뜻}} {{IP스택}} [[파일:InternetProtocolStack.png|섬네일]]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프로토콜]]'''('''IP''', '''I'''nternet '''P'''rotocol)은 송신 [[호스트 (네트워크)|호스트]]와 수신 호스트가 [[패킷 교환 네트워크]](패킷 스위칭 네트워크, Packet Switching Network)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는 정보 위주의 규약(프로토콜, Protocol)이며, OSI 네트워크 계층에서 호스트의 주소지정과 패킷 분할 및 조립 기능을 담당한다. 줄여서 '''아이피'''(IP)라고도 한다. IP의 정보는 [[패킷]] 혹은 [[데이터그램]]이라고 하는 덩어리로 나뉘어 전송된다. IP에서는 이전에 통신한 적 없는 호스트에 패킷을 보낼 때 경로 설정이 필요없다. IP는 비신뢰성(unreliability)과 비연결성(connectionlessness)이 특징이다. 비신뢰성은 흐름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보낸 정보가 제대로 갔는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송과정에서 패킷이 손상될 수도 있고, 같은 호스트에서 전송한 패킷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고, 같은 패킷이 두 번 전송될 수도 있으며, 아예 패킷이 사라질 수도 있다. 패킷 전송과 정확한 순서를 보장하려면 [[전송 제어 프로토콜|TCP]] 프로토콜과 같은 IP의 상위 프로토콜을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준 프로토콜은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인 [[IPv4]]이다. 그러나 IPv4는 주소공간 고갈 문제를 겪고 있어 조만간 6번째 판인 [[IPv6]]가 대중화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7]], [[OS X]], [[리눅스]] 등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IPv6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 기능 == [[파일:UDP encapsulation.svg|섬네일|UDP를 통해 링크 프로토콜 프레임으로 전달되는 애플리케이션 데이터 캡슐화]] 인터넷 프로토콜은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컨트롤러|호스트 인터페이스]] 주소 지정, 데이터를 데이터그램([[IP 단편화|단편화 및 재조합 포함]])으로 캡슐화, 하나 이상의 IP 네트워크를 통해 소스 호스트 인터페이스에서 대상 호스트 인터페이스로 데이터그램 라우팅을 담당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인터넷 프로토콜은 패킷 형식을 정의하고 주소 지정 시스템을 제공한다. 각 데이터그램에는 [[헤더 (컴퓨팅)]]와 [[페이로드 (컴퓨팅)]]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IP 헤더]]에는 소스 IP 주소, 대상 IP 주소 및 데이터그램을 라우팅하고 전달하는 데 필요한 기타 메타데이터가 포함된다. 페이로드는 전송되는 데이터이다. 헤더가 있는 패킷에 데이터 페이로드를 중첩하는 이 방법을 캡슐화라고 한다. IP 주소 지정에는 IP 주소 및 관련 매개변수를 호스트 인터페이스에 할당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주소 공간은 네트워크 접두사 지정을 포함하여 [[부분망]](서브넷)으로 구분된다. IP 라우팅은 모든 호스트와 라우터에 의해 수행되며, 주요 기능은 네트워크 경계를 넘어 패킷을 전송하는 것이다. 라우터는 네트워크 토폴로지에 필요에 따라 특별히 설계된 [[라우팅 프로토콜]](내부 게이트웨이 프로토콜 또는 외부 게이트웨이 프로토콜)을 통해 서로 통신한다. == 대표적인 IP 주소 체계 == 다음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IP 주소]] (ip address)체계이다. * [[IPv4]] * [[IPv6]] == 버전 역사 == 1974년 5월 IEEE([[전기전자공학자협회]])는 "패킷 네트워크 상호 통신을 위한 프로토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저자인 [[빈트 서프]]와 [[로버트 칸|봅 칸]]은 네트워크 노드 간 [[패킷 교환]]을 사용하여 리소스를 공유하기 위한 [[인터네트워킹]] 프로토콜을 설명했다. 이 모델의 중앙 제어 구성 요소는 호스트 간의 연결 지향 링크와 데이터그램 서비스를 모두 통합한 "전송 제어 프로그램"이었다. 모놀리식 전송 제어 프로그램은 나중에 전송 계층의 전송 제어 프로토콜과 사용자 데이터그램 프로토콜, 인터넷 계층의 인터넷 프로토콜로 구성된 모듈식 아키텍처로 나뉘었다. 이 모델은 국방부(DoD) 인터넷 모델 및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로 알려졌으며 비공식적으로는 TCP/IP로 알려졌다. IP 버전 1~3은 1973년에서 1978년 사이에 설계된 실험적 버전이었다. 다음 IEN(Internet Experiment Note) 문서에서는 IPv4 최신 버전 이전의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 3에 대해 설명한다: * [http://www.rfc-editor.org/ien/ien2.txt IEN 2] (''Comments on Internet Protocol and TCP'') * [http://www.rfc-editor.org/ien/ien26.pdf IEN 26] (''A Proposed New Internet Header Format'') * [http://www.rfc-editor.org/ien/ien28.pdf IEN 28] (''Draft Internetwork Protocol Description Version 2'') * [http://www.rfc-editor.org/ien/ien41.pdf IEN 41] (''Internetwork Protocol Specification Version 4'') * [http://www.rfc-editor.org/ien/ien44.pdf IEN 44] (''Latest Header Formats'') * [http://www.rfc-editor.org/ien/ien54.pdf IEN 54] (''Internetwork Protocol Specification Version 4'') 사용 중인 [[인터넷 계층]]에서 지배적인 인터네트워킹 프로토콜은 [[IPv4]]이다. 숫자 4는 모든 IP 데이터그램에 포함된 프로토콜 버전을 식별한다. IPv4는 RFC 791(1981)에 설명되어 있다. 버전 2와 3은 1~16옥텟(8~128비트) 범위의 가변 길이 주소를 지원했다. 버전 4의 초기 초안에서는 최대 256옥텟(최대 2048비트)의 가변 길이 주소를 지원했지만 나중에 IPv4 최종 버전에서는 고정 크기 32비트 주소를 위해 이를 포기했다. 버전 번호 5는 채택되지 않은 실험적인 스트리밍 프로토콜인 [[인터넷 스트림 프로토콜]]에서 사용되었다. IPv4의 후속은 [[IPv6]]이다. IPv6는 TP/IX(RFC 1475), PIP(RFC 1621) 및 TUBA(더 큰 주소를 사용하는 TCP 및 UDP, RFC 1347)와 같은 다양한 프로토콜 모델이 제안된 수년간의 실험과 대화의 결과이다. 버전 4와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소 크기이다. IPv4는 주소 지정에 32비트를 사용하지만 대략 43억(4.3×109)개의 주소, IPv6은 128비트 주소를 사용하여 대략 3.4×1038개의 주소를 제공한다. IPv6 채택 속도는 느리지만 2023년 1월 기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IPv6 채택률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 트래픽의 41% 이상이 IPv6 연결을 통해 전달된다. IPv6가 이전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사를 통해 확인될 때까지 새로운 프로토콜을 IPv6으로 지정하는 것은 불확실했다. 다른 인터넷 계층 프로토콜에는 7(IP/TX), 8, 9(이전)와 같은 버전 번호가 할당되었다. 특히 1994년 4월 1일 IETF는 IPv9에 대한 [[만우절]] 농담을 발표했다. IPv9는 TUBA라는 대체 주소 공간 확장 제안에도 사용되었다. "IPv9" 프로토콜에 대한 2004년 중국 제안은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IETF에서 승인하지 않는다. == 신뢰성 == 인터넷 프로토콜 제품군의 설계는 CYCLADES 프로젝트에서 채택한 개념인 엔드투엔드 원칙을 준수한다. 엔드투엔드 원칙에 따르면 네트워크 인프라는 단일 네트워크 요소나 전송 매체에서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링크와 노드의 가용성 측면에서 동적이다. 네트워크 상태를 추적하거나 유지하는 중앙 모니터링 또는 성능 측정 시설은 없다. 네트워크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네트워크의 인텔리전스는 최종 노드에 위치한다. 이러한 설계의 결과로 인터넷 프로토콜은 최선의 전달만을 제공하며 해당 서비스는 신뢰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네트워크 아키텍처 용어에서는 연결 지향 통신과 달리 연결 없는 프로토콜이다. 데이터 손상, 패킷 손실, 복제 등 다양한 오류 조건이 발생할 수 있다. 라우팅은 동적이므로 모든 패킷이 독립적으로 처리되고 네트워크가 이전 패킷의 경로를 기반으로 상태를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패킷이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동일한 대상으로 라우팅되어 순서가 뒤바뀐 전달이 발생할 수 있다. 네트워크의 모든 결함 조건은 참여하는 최종 노드에 의해 감지되고 보상되어야 한다. 인터넷 프로토콜 제품군의 상위 계층 프로토콜은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호스트는 데이터가 애플리케이션에 전달되기 전에 올바른 순서를 보장하기 위해 네트워크 데이터를 [[버퍼 (컴퓨터 과학)|버퍼링]]할 수 있다. IPv4는 IP 패킷의 헤더에 오류가 없도록 보장하는 보호 장치를 제공한다. 라우팅 노드는 헤더 [[체크섬]] 테스트에 실패한 패킷을 삭제한다. ICMP([[인터넷 제어 메시지 프로토콜]])가 오류 알림을 제공하지만 라우팅 노드는 양쪽 끝 노드에 오류를 알릴 필요가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IPv6은 현재 [[링크 계층]] 기술이 충분한 오류 감지 기능을 제공한다고 가정하므로 헤더 체크섬 없이 작동한다. ==링크 용량 및 성능== 인터넷의 동적 특성과 구성 요소의 다양성으로 인해 특정 경로가 실제로 요청된 데이터 전송을 수행할 수 있거나 적합하다는 보장은 없다. 기술적인 제약 중 하나는 주어진 링크에서 가능한 데이터 패킷의 크기이다. 로컬 링크의 [[최대 전송 단위]](MTU) 크기를 검사하는 기능이 있으며 경로 MTU 검색은 대상까지의 전체 의도 경로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 IPv4 인터네트워킹 계층은 링크 MTU가 초과되면 전송을 위해 데이터그램을 더 작은 단위로 자동으로 [[IP 단편화|단편화]]한다. IP는 순서가 잘못된 조각을 다시 정렬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IPv6 네트워크는 네트워크 요소에서 단편화를 수행하지 않지만 경로 MTU를 초과하지 않도록 최종 호스트와 상위 계층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TCP([[전송 제어 프로토콜]])는 세그먼트 크기를 MTU보다 작게 조정하는 프로토콜의 예이다. UDP([[사용자 데이터그램 프로토콜]]) 및 ICMP는 MTU 크기를 무시하므로 IP가 크기가 큰 데이터그램을 단편화하도록 한다. ==보안== [[아파넷]]과 초기 인터넷의 설계 단계에서는 공용, 국제 네트워크의 보안 측면과 요구 사항을 적절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인터넷 프로토콜은 네트워크 공격과 이후의 보안 평가를 통해 강조된 취약점을 드러냈다. 2008년에는 철저한 보안 평가와 문제 완화 제안이 발표되었다. IETF는 추가 연구를 진행해 왔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IP 주소]] * [[인터넷]] * [[IP 패킷]] * [[ICANN]] * [[차세대 통신망]] == 외부 링크 == * {{dmoz|Computers/Internet/Protocols}} * [https://web.archive.org/web/20181120100028/http://www.findip.kr/ 자기 IP 주소 보기] * {{웹 인용|url=https://www.ict.tuwien.ac.at/lva/384.081/datacom/09-IP_Technology_v6-3_handout.pdf |author=Manfred Lindner |title=IP Technology |access-date=2018-02-11}} * {{웹 인용|url=https://www.ict.tuwien.ac.at/lva/384.081/datacom/10-IP_Routing_v6-2_handout.pdf|author=Manfred Lindner|title=IP Routing|access-date=2018-02-11}} {{전거 통제}} [[분류:인터넷 프로토콜| ]] [[분류:인터넷 표준]] [[분류:인터넷 계층 프로토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수론]]에서 '''페르마의 소정리'''(Fermat小定理, {{llang|en|Fermat’s little theorem}})는 어떤 수가 [[소수 (수론)|소수]]일 간단한 [[필요 조건]]에 대한 정리이다. 추상적으로, [[소수 (수론)|소수]] 크기의 [[유한체]] 위의 [[프로베니우스 사상]]이 [[항등 함수]]임을 의미한다. == 정의 == <math>p</math>가 [[소수 (수론)|소수]]이고, <math>a</math>가 [[정수]]라고 하자. '''페르마의 소정리'''에 따르면, 법 <math>p</math>에서 <math>a^p</math>와 <math>a</math>는 서로 [[합동 (수론)|합동]]이다. :<math>a^p \equiv a \pmod p</math> 위 식은 <math>p\mid a</math>일 때 자명하게 성립한다. 만약 <math>p\nmid a</math>일 경우, 양변을 약분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math>a^{p-1} \equiv 1 \pmod p\qquad(a\ne0)</math> 이는 모든 소수가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페르마의 소정리에 나타난 합동식을 만족하는 수가 반드시 [[소수 (수론)|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math>a^{b-1} \equiv 1 \pmod{b}</math> 를 만족하면서 소수가 아닌 <math>b</math>를, <math>a</math>를 밑수로 하는 ''' [[카마이클 수]]'''라고 부른다. == 역사 ==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페르마는 이 정리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기록상 남아 있는 증명 가운데 최초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것이다. == 증명 ==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동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증명 방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ol> <li> <math>a</math>와 서로소인 소수 <math>p</math>에 대해 <math>a,\ 2a,\ 3a,\ \cdots\ ,\ (p-1)a</math>인 <math>p-1</math>개의 수를 살펴보자. 이 수들을 <math>p</math>로 나눴을 때 나오는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 증명 : [[귀류법]]으로, 두 수 <math>ia</math>와 <math>ja</math>가 존재해서 그 나머지가 같다고 하자(<math>0 < i < j < p</math>인 정수). 그렇다면 그 두 수의 차 <math>(j-i)a</math>는 <math>p</math>로 나누어질 것이다. 그러나 <math>0<j-i<p</math>이므로 <math>j-i</math>는 <math>p</math>의 배수가 아니며, 문제의 가정에 따라 <math>a</math>는 <math>p</math>와 서로소이다. * 따라서 같은 나머지를 가지는 수가 없으므로, <math>p-1</math>개의 수는 모두 그 나머지가 다르다. <li> 또 <math>0 < i < p</math>인 <math>i</math>에 대해 <math>ia</math> 역시 <math>p</math>의 배수가 아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위와 같으므로 생략한다. <li> 이제 [[집합]] :<math>A = \left\{x|x = ia,\;i\in B\right\}</math> 를 정의하자. 이는 첫 번째에 가정한 <math>p-1</math>개의 수들의 집합이다. 여기서 집합 :<math>B = \{1,\ 2,\ \cdots\ ,\ p-1\}</math> 인데, <math>p</math>와 서로소인 수를 <math>p</math>로 나눌 때 생기는 모든 나머지들의 집합이다. 처음에 했던 증명에 의해, <math>A</math>와 <math>B</math>의 [[기수 (수학)|크기]]는 같다. <li> 따라서, :<math>a \times 2a \times 3a \times \cdots\times(p-1)a\equiv 1\times2\times\cdots\times(p-1)\not\equiv0\pmod p</math> 이다. 양변을 <math>(p-1)!</math>로 나누면, :<math>a^{p-1} \equiv 1 \pmod p</math> 을 얻는다. </ol> == 일반화 == === 오일러 정리 === {{본문|오일러 정리}} 이 정리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이용하여, [[소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n이 [[자연수]], a가 n과 [[서로소 정수|서로소]]인 [[자연수]]일 때, :<math>a^{\varphi(n)} \equiv 1 \pmod{n}</math> 이 성립한다. 식에서 <math>\varphi(n)</math>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나타낸다. === 유한체론 === [[유한체]] 이론에서 다항식의 나눗셈에 관련된 결과를 통해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ref>Joseph A. Gallian (2006), ''Contemporary Abstract Algebra'', Houghton Mifflin Company(Boston, New York), p.388.</ref> [[환의 표수|표수]]가 <math>p</math>인 유한체 <math>\mathbb F_{p^r}</math>에 대하여, 다음 두 명제가 성립한다. # [[기약 다항식]] <math>g\in \mathbb F_{p^r}[x]</math>에 대하여, <math>g\mid x^{p^n} - x</math>라면 <math>\deg g\mid n</math>이다. # <math>k \mid n</math>인 두 양의 정수 <math>k,n\in\mathbb Z^+</math>에 대하여, <math>C(p,k)</math>를 <math>g\mid x^{p^n} - x</math>인 k차 [[기약 다항식]] <math>g\in\mathbb F_{p^r}[x]</math>들의 수라고 하자. 그렇다면 :::<math>\sum_{j\mid k} jC(p, j) = p^k</math> ::이다. 여기서,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따라 C(p, k)를 얻는 일반적인 공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math>C(p, k) = \frac1k \sum_{j \mid k} \mu(j)p^{k/j}</math> 여기서 <math>\mu(j)</math>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 같이 보기 == * [[프로베니우스 사상]] * [[모듈러 역원]] == 참고 문헌 == <references/> * {{저널 인용|성=Golomb|이름=Solomon W.|제목=Combinatorial proof of Fermat’s “little” theorem|저널=The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권=63|호=10|날짜=1956-12|쪽=718–718|doi=10.2307/2309563|jstor=2309563|언어=en}} * {{저널 인용|성=Alkauskas|이름=Giedrius|제목=A curious proof of Fermat’s little theorem|저널=The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권=116|호=4|날짜=2009-04|쪽=362–364|arxiv=0801.0805|bibcode=2008arXiv0801.0805A|jstor=40391097|언어=en}} == 외부 링크 == * {{eom|title=Fermat's little theorem}} * {{매스월드|id=FermatsLittleTheorem|title=Fermat's little theorem}} {{전거 통제}} [[분류:소수에 관한 정리]]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모듈러 산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AKIRA||아키라}} {{만화애니 정보/머리말 | 제목 = 아키라 | 제목(원제) = アキラ | 그림 = Akira logo.svg | 크기 = | 설명 = | 장르 = [[사이버 펑크]] }} {{만화애니 정보/만화 | 제목 = 아키라 | 그림 = | 작가 = [[오토모 카츠히로]] | 작화 = 오토모 카츠히로 | 화풍 = | 출판사 = [[고단샤]] | 그외출판사 = {{국기그림|대한민국}} 세미콜론 | 연재잡지 = [[영 매거진]] | 레이블 = | 개시 = 1982년 | 종료 = 1990년 | 발매일 = | 책수 = 6권 | 그 외 = | 저작권 = }} {{만화애니 정보/꼬리말 | 위키프로젝트 = | 위키포털 = }} 《'''AKIRA'''》({{llang|ja|アキラ|아키라}})(국내수입명: 폭풍소년)는 [[오토모 가쓰히로]]가 창작한 [[일본]]의 [[만화]]이다. [[고단샤]]가 발행한 만화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화(1988년) 및 [[게임]]화도 되었다. == 개요 == 근미래의 황폐한 세계를 그린 SF 작품으로,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나 연출 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만화와 영화 모두 대히트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다. 이후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준 영향도 크다. 원작인 만화판은 '만화계의 두 번째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진다(첫 번째는 물론, 데즈카 오사무). 제목인 AKIRA는 오토모 자신이 팬으로 삼고 있으며 큰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유래한다. 붓으로 쓴 제목은 만화가인 [[히라타 히로시]]가 쓴 것이다. 단행본은 주간지와 같은 대형판 사이즈와 절단면에 채색을 하는 등, 이목을 끄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의 만화가 [[장 지로|뫼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작자의 치밀한 묘사로서는 이 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국외에서는 [[아메리칸 코믹]]의 스태프가 채색한 외국어판이 유통되었으며, 이것을 일본어로 역번역한 것이 《국제판 AKIRA》 및 《총천연색 AKIRA》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발매됐다. [[영화]]는 제작비에 10억 엔을 건 대규모 작품으로, 치밀한 작화나 음악, 파괴 영상 등으로 당시의 [[애니메이션]]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제작 기법으로 [[애프터 레코딩]]가 아닌 [[프리 스코어링]]을 채용했다. 또, 통상적으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인물의 입의 움직임은 3종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음의 수와 같은 5종류로 그려졌다.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평가나 수출의 증가에 공헌했다. [[자기 테이프|비디오]]화가 될 때에 많은 컷을 손보거나, 음악과 관련해서도 손을 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본 작품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서양의 대중시장으로 폭발적으로 넓힌 마일스톤이 되어 해외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여름에 공개할 예정인 실사영화 제작이 계획되어 있다. 제작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감독은 로리 로빈슨, [[워너브라더스]] 배급이다.<ref>[https://web.archive.org/web/20080228043341/http://www.sponichi.co.jp/entertainment/news/2008/02/23/05.html 〈AKIRA〉할리우드서 실사판] [[스포츠닛폰]] 2008년 2월 23일</ref> 하지만 원작이 워낙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은 탓에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기란 쉽지가 않았고 각본마저 제작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다가 2013년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ref>[http://magazine.movie.daum.net/w/magazine/film/detail.daum?thecutId=4995 안타깝게 무산된 TOP 프로젝트 [아키라]의 컨셉아트] {{웨이백|url=http://magazine.movie.daum.net/w/magazine/film/detail.daum?thecutId=4995 |date=20160307130722 }} [[다음영화 매거진]] 2013년 7월 5일</ref> == 스토리 == [[1980년대|198X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1988년이라고 나온다.) 도쿄는 신형 폭탄에 의해 붕괴되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여, 세계는 황폐되어 가고 있었다. 2019년. [[도쿄 만]]에 떠오르는, 동경 23구를 본뜬 인공 도시 네오동경의 어둠에 버려진 고속도로. 폭주족 소년들이 들어와서 질주한다. 그중 한 멤버인 데쓰오는 백발의 소년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중상을 입는다. 백발의 소년은 정부의 초능력 연구 기관에서 반정부 게릴라(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빠져나오게 된 초능력자 다카시였다. 데쓰오는 다카시와 함께 연구 기관에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초능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 등장인물 == 극장판과 원작에서는 인물의 설정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양자의 공통 사항을 기술하고, 특히 극장판과 원작에서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그 점을 설명한다. ; 키네다 쇼타로(金田正太郎) : 본편의 주인공으로 자칭 '건강 우량 불량 소년'. 우수한 운동신경을 갖고 있으며, '하시리야'(走り屋)로서는 배짱있는 질주를 한다. 그 민첩함이나 도망치는 속도는 군대조차도 잡을 수 없을 정도다. 자기 전용으로 개조한 [[오토바이|바이크]](도난품)를 몰고, 나날을 목적 없이 폭주 행위에 낭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중상위권으로, 의외로 머리가 좋다. 세부적인 개조나 [[튜닝]]은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모터]]에 대해서는 밝지 않다. [[폭주족]] 팀의 리더격으로, 동료나 '하시리야(走り屋)' 사이에서의 인망도 두텁다. 원작에서는 직업훈련학교의 보건부(保健婦)와 관계를 가진 듯하며, [[임신]]시켜도 별로 개의치 않거나, 흥분제와 같은 약물을 일상적으로 섭취하고 있는 묘사도 있지만, 극장판에서는 생략되었다.<ref>'하시리야'는 굳이 직역하자면 '달리기꾼'이라는 의미가 되며, 한국어로는 적절한 명칭이 없으나 영어권에서는 'Street Racer'가 이에 대응하는 표현이다.(일본 내에서 '롤링족'이나 '룰렛족' 같은 용어도 하시리야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내 번역물에서는 그냥 '레이서'라고만 옮겨놓은 곳이 많으며, 웹상의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그냥 하시리야라는 말을 쓰는 경우와, 일반적인 레이서 내지는 아마추어 레이서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공공도로에서 법적으로 금지된 고속 경쟁을 벌인다'는 의미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레이서'에 가깝다.(자신들이 쓰는 명칭이므로 굳이 불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소음만 일으키는 폭주족과도 다르다는 차별의식에서.) 일본 경찰청과 경시청에서는 '위법 경주형 폭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엄연히 폭주족의 한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ref> : 케이를 구한 일로 반정부 [[게릴라]]와 얽히게 된다. 데쓰오와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이자 비호하는 입장의 친구로서 지내고 있었다. 능력에 각성하여, 약물에 빠진 테츠오가 리더가 된 폭주족 팀 '크라운'과의 항쟁에서 테츠오를 몰아 넣고 총구를 들이대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으나, 눈 앞에서 야마가타가 살해당하자, 이것을 계기로 데쓰오를 향한 복수를 다짐한다. 극장판에서는 데쓰오와 함께 아키라의 힘에 말려든다. 원작에서는 게릴라의 일원으로서 게이나 지요코와 행동을 같이 했지만, 각성한 아키라의 힘에 삼켜져, 이야기 중반에는 무대에서 일단 자취를 감춘다. 후에 지구의 존재도 뒤흔드는 아키라와 데쓰오의 힘의 발동하던 도중에 제3차 세계 대전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이름의 유래는 《[[철인 28호]]》의 주인공 가네다 쇼타로. : 사건의 종료 후에는 게이, 지요코, 가이 등과 함께 '대동경제국'을 아키라, 데쓰오에게서 계승한다. : [[드라이 클리닝|클리닝]]점을 경영하는 양친과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남동생의 간병 피로로 쓰러져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에게 [[부양]] 책임이 없으므로, 양호 시설 입소했다. 그 후는 기숙제 중학교에 입학하지만, 다음 해에 비행에 빠지고, 더구나 경찰사태까지 일으켜 퇴학. 직업훈련학교에 편입해서 바이크 팀을 결성한다. : [[2003년]] [[9월 5일]]생. ; 시마 테츠오(島鉄雄) : 가네다의 소꿉 친구. 가네다 팀과 폭주 도중 타카시와 충돌사고를 일으킨 것을 계기로 초능력에 각성했다. 능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아키라에 대적하는 힘을 손에 넣어 세계를 농락한다. 이름의 유래는 《[[철인 28호]]》의 등장인물로 쇼타로의 친구인 시키시마 데쓰오. : [[2004년]] [[7월 29일]]생. ; 야마가타(山形) : 가네다 팀의 특공대장 같은 존재. 팀에서 2번째로 키가 크다. : [[2003년]] [[11월 9일]]생. ; 카이(甲斐) : 키가 작고, 러프한 복장의 가네다 일행과는 달리, 유일하게 자켓에 타이와 같은 전통적인 모습을 좋아하여, 팀 내에서는 착실한 편이다. : [[2004년]] [[1월 8일]]생. ; 조커(ジョーカー) : 폭주족 팀 〈크라운〉의 리더로, 가네다 일행의 대항세력. ; 카오리(カオリ) : 원작에서는 난민이자, 데쓰오의 놀이 상대로서 연행되어 데쓰오의 시녀가 된다. (애니판에서는 후에 테츠오를 돕다 폭주한 테츠오의 거대화된 장기에 압사한다.) ; 류(竜) : 케이가 속한 반정부 [[게릴라]] 그룹의 리더. 본명은 류사쿠(竜作). 가네다를 그룹에 들인 것도(굳이 말하자면 케이의 우유부단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류다. ; 케이(ケイ) : 반정부 [[게릴라]]의 소녀. 오빠의 선배인 류와는 같이 호흡을 맞춘 콤비. : [[2002년]] [[3월 8일]]생. ; 치요코(チヨコ・본명 불명・원작만) : 반정부 게릴라의 무기조달・연락원으로, 거한의 여성. 케이를 친 딸처럼 소중히 생각한다. ; 대령(大佐) (본명은 시키시마 대령) : 아미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으로, 동결된 아키라의 최고 관리자이기도 했다. 성(姓)은 시키시마(敷島). : [[1977년]] [[11월 15일]]생. ; 닥터(ドクター)(본명은 오니시 박사. 닥터는 별칭) : 대령 밑에서 아키라를 시작으로 하는 넘버즈의 연구 관리를 담당하는 인물이지만, 현상의 관측에 열중한 나머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데쓰오의 폭주를 허용하고 만다. 작품에서 최연장자. 원작에서는 아키라 각성 시의 냉각액 누수로 동사(凍死). 극장판에서는 데쓰오의 능력 데이터 수집에 혈안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아키라의 힘의 개방에 말려들어 관측 트레일러 채로 압사(圧死)한다. ; 네즈(根津) : 정부 야당에 소속하는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미야코 교단의 힘을 배경으로 정계 공작을 행하고(원작) 뒤로는 게이의 반정부 게릴라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지도하고 있다(원작・극장판 공통). 원작에서는 다카시를 사살하고, 이것이 2번째로 아키라가 폭주하게 된 계기가 되어, 그로 인해 깨진 자갈과 함께 소멸한다. 극장판에서는 아미가 숨긴 아키라의 정체를 거머쥠으로서 정치적 우위에 서는 것을 획책하고, 그 결과 대령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실각하여, 혼란한 상태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한다. : [[지바현]]의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학업은 우수. 모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아키라에 의한 동경 붕괴를 만난다. 그로부터 3년간은 [[암거래상]]으로 활동했으며, 뒷세계 사람들에게 이름이 퍼지게 된다. 대학이 사업을 재개한 즈음에 복학하고, 졸업 후는 [[변호사]]가 된다. 30세를 전후하여 정계에 진출한다. : [[1964년]] [[12월 11일]]생. ; 타카시(タカシ) : 26호라고도 불린다. 초능력 각성 전에는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3인의 점술사 넘버즈 중에서는 가장 성격적으로 어리고, 밖으로 나가 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야기 초반에 게릴라의 안내에 따라 시설에서 탈주했으며, 데쓰오가 초능력을 각성하는 방아쇠가 된다. 원작에서는 네즈의 오발로 사망하지만, 그 충격로 아키라가 폭주. 이번엔 네오동경 붕괴의 방아쇠가 된다. : [[1980년]]생. : 일정 이상의 힘을 가진 실험체에게는 번호가 붙여지는데, 손바닥에도 이 번호가 새겨 있기에 '넘버즈'라고도 불린다. ; 키요코(キヨコ) : 25호라고도 불린다. 초능력을 각성하기 전까진 다른 넘버즈와 같이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미래 예지는 93 ~ 95%의 확률이며, 네오동경 붕괴도 예지했다. 신체적으로는 매우 약해서누운 채로 스스로 움직이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초능력으로 자신의 침대나 자기 자신을 뜨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최초로 테이를 정신력으로 조종하여 테츠오에 대항하지만 실패했으며, 다음 번에는 그 도주를 도와주거나 했다. : [[1979년]]생. ; 마사루(マサル) : 27호라고 불린다. 초능력을 각성하기 전 평범한 어린이었을때의 모습을 보면 가장 어른스럽다. [[급성회백수염|소아마비]]를 앓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부유하는 의자에 앉아 이동한다(하지만 앉지 않은 장면도 존재함). 3인의 넘버즈 중에서는 어른에 대한 동경도 강하여, 수트에 넥타이 모습에서 매번 등장했다. 성격적으로도 안정적이다. : 1980년생. ; 미야코(ミヤコ) : 아키라를 받드는 종교를 지도하는 노파. 일찍이 아키라의 힘을 눈앞에서 보고 실명하였지만, 강한 감응력으로 타인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작에서는 가사 상태인 채 파기된 전 넘버즈(19호)로, 네오동경 붕괴 후에는 메인 캐릭터들에게 많은 조언을 주고, 데쓰오와도 직접 대결한다. 하지만 극장판에서는 완전히 엑스트라 취급으로, 모브 신에 몇 번 등장하는 정도다. ; 아키라(アキラ) : 이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소년. 28호라고도 불린다. [[1982년]](극장판에서는 [[1988년]])에 각성하고 동경 붕괴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하에서 냉동되어 아미의 감시하에 있었다. 원작에서는 지하에서 끌려나와 각성한 후, 다카시의 죽음을 계기로 폭주하고, 네오동경 붕괴를 초래했다. 극장판에서도 각성해 네오동경 붕괴를 일으켰다. 극장판에서는 조사를 위해 몸을 토막 내 냉동되어, 종반에 부활한다. 원작에서는 통상의 냉동 수면으로, 비교적 빠른 단계에 부활하지만, 몽유병처럼 반자각 상태인 채로 언제 폭주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위의 인간에게 놀림 당한다. == 만화 == 영 매거진에서 [[1982년]] 12월 20일호부터 [[1990년]] 6월 25일호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인해 일시 중단됐다. 전 120화. [[1984년]], 제8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수상. [[2002년]], [[아이즈너 상]] 최우수 국제 아가이브 프로젝트 부문 및 최우수 국제 작품 부문을 수상. 또, 그 이전의 [[1992년]]에 올 컬러 국제판 AKIRA가 최우수 채색 부문을 수상했다. === 단행본 === * AKIRA 제1권 1984년 9월 21일 발행 {{ISBN|4061037110}} * AKIRA 제2권 1985년 9월 4일 발행 {{ISBN|4061037129}} * AKIRA 제3권 1986년 9월 1일 발행 {{ISBN|4061037137}} * AKIRA 제4권 1987년 7월 10일 발행 {{ISBN|4061037145}} * AKIRA 제5권 1990년 12월 11일 발행 {{ISBN|4063131661}} * AKIRA 제6권 1993년 3월 23일 발행 {{ISBN|406319339X}}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집 1988년 10월 7일 발행 {{ISBN|4063050114}}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2집 1989년 3월 17일 발행 {{ISBN|4063050122}}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3집 1989년 6월 23일 발행 {{ISBN|4063050130}}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4집 1989년 10월 20일 발행 {{ISBN|4063050149}}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5집 1990년 2월 20일 발행 {{ISBN|4063050157}}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6집 1990년 5월 31일 발행 {{ISBN|4063050165}}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7집 1990년 8월 31일 발행 {{ISBN|4063050173}}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8집 1990년 12월 10일 발행 {{ISBN|4063050181}}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9집 1991년 4월 20일 발행 {{ISBN|406305019X}}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0집 1991년 9월 20일 발행 {{ISBN|4063050203}}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1집 1992년 6월 20일 발행 {{ISBN|4063050211}} * 올 컬러 국제판 AKIRA 제12집 1996년 9월 20일 발행 {{ISBN|406305022X}} * 총천연색 AKIRA 제1권 2003년 12월 6일 발행 {{ISBN|4063645002}} * 총천연색 AKIRA 제2권 2003년 12월 6일 발행 {{ISBN|4063645010}} * 총천연색 AKIRA 제3권 2004년 1월 16일 발행 {{ISBN|4063645029}} * 총천연색 AKIRA 제4권 2004년 2월 16일 발행 {{ISBN|4063645037}} * 총천연색 AKIRA 제5권 2004년 3월 16일 발행 {{ISBN|4063645045}} * 총천연색 AKIRA 제6권 2004년 4월 16일 발행 {{ISBN|4063645053}} === 자료집 === * AKIRA CLUB 1995년 6월 9일 발행 {{ISBN|406330003X}} * 아키라・아가이브 2002년 10월 발행 {{ISBN|4063301958}} == 극장 애니메이션 == {{본문|아키라 (영화)}} 1988년 제작. 상영 시간 124분. 70mm프린트. 제작비 약 10억 엔. 총 셀화 매수 약 15만 장. === 상영력(上映歴) === * 1988년 7월 16일: [[도호]]계에서 공개 * 1990년 12월 25일: 전미 공개 * 2001년 3월 20일: 디지털 수정판이 [[뉴욕]]에서 공개 * 2001년 10월 31일: DVD판이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2001에서 공개 === 스태프 === * 프로듀서: 스즈키 료헤이, 가토 슌조 * 감독: [[오토모 가쓰히로]] * 조감독: 다케우치 요시오, 사토 히로아키 * 각본: [[오토모 가쓰히로]], 하시모토 이조 * 작화감독: 나카무라 다카시 * 작화감독보: 모리모토 코지 * 미술감독: 미즈타니 도시하루 * 미술: 에비사와 가즈오, 이케하타 유지, 오노 히로시 * 설정・레이아웃: 와타베 다카시, 다나카 기요미 * 색지정: 야마나 킨에다, 이케우치 미치코, 다나카 세쓰코 * 하모니: 다카야 노리코 * 촬영감독: 미사와 가쓰지 * 작곡・지휘・음악감독: [[오하시 쓰토무|야마시로 쇼지]] * 음향감독: 아케타가와 스스무 * 녹음: 세가와 데쓰오 * 효과: 구라하시 시즈오 * 편집: 세야마 다케시 * 원화: 후쿠시마 아쓰코, 이노우에 도시유키, [[우루시하라 사토시]] * 애니메이션 제작: [[도쿄 무비 신사]] * 제작: 아키라 제작위원회 === 목소리 출연 === {| class="wikitable" |- !캐릭터 !목소리 출연 일본어판 !목소리 출연 영어판 !목소리 출연 영어판(DVD판) |- !가네다 ![[이와타 미츠오]] ![[캠 클라크]] ![[조니 용 보시]] |- !대령(大佐) ![[이시다 다로]] !토니 보브 !제이미슨 K 프라이스 |- !류(竜) ![[겐다 뎃쇼]] !스티브 클레이머 !로버트 버프홀츠 |- !게이 ![[고야마 마미]] !라라 코디 ![[웬디 리]] |- !데쓰오 ![[사사키 노조무]] !장 라바슨 !조슈아 세스 |- !닥터 ![[스즈키 미즈호]] !워트니 헬드 !마시 마사 |- !가이 ![[쿠사오 타케시]] !밥 버건 !맷 K 밀러 |- !야마가타 ![[오쿠라 마사아키]] !토니 보브 !마이클 린지호그 |- !가오리 ![[후치자키 유리코]] !바버라 굿슨 ![[미셸 러프]] |- !기요코 ![[이토 후쿠에]] !멜로라 하트 ![[샌디 폭스]] |- !마사루 ![[신토 가즈히로]] !밥 버건 !코디 매켄지 |- !다카시 ![[나카무라 다쓰히코]] !바버라 굿슨 ![[모나 마셜]] |- !미야코 ![[기타무라 고이치]] !스티브 클레이머 !- |- !네즈 ![[오타케 히로시]] !토니 보브 !마이크 레이놀즈 |} == 신 애니메이션 == Anime expo 2019에서 오토모 가츠히로의 신 프로젝트 발표회 스테이지에 게스트로 아사누마 마코토 선라이즈 CEO가 등단하여 프로젝트 중 하나로 AKIRA의 신 애니메이션 기획이 언급되었다. 아사누마는 예전부터 1988년의 AKIRA가 만화의 스토리를 제대로 담지 못해 작화는 좋아도 스토리는 이상한 애니로 여겨지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자신이 성공하면 원작 스토리 기준으로 장편 애니화 하겠다고 라이프워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번에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고 스토리도 만화판을 그대로 재현할 것이라고 한다. == 실사영화화 == 2002년에 [[워너브라더스]]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는데 많은 우려를 얻는 실정이다. 2011년 10월 미국 버라이어티지에서는 워너가 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 실사판 제작을 드디어 허가했다고 보도했다. 촬영은 내년 3월 시작 예정으로 [[카탈루냐]] 출신의 자우메 코예트세라가 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예산은 9천만 달러로 책정되었으나 확실치는 않다. 무엇보다 현재 CG 수준으론 충분히 원작 묘미를 살릴 수 있으나 그러자면 제작비가 2억 달러 이상 필요할 예정이라 과연 이게 제대로 만들어질지 의문이다. 결국... 제작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세일러문]]이나 무수한 일본 애니 영화화 판권을 헐리웃 업체들이 사가선 끝내 제작이 불발된 경우처럼 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결국 제작비 부족으로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6천만 달러 제작비가 들어갈 예정이라서 제작진들이 도저히 이 돈으로 만들기 무리라고 반발이 심한 끝에 이리 되었다고. 그러던 중 2015년 9월 15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AKIRA 영화 감독을 맡는다는 루머가 나왔다. 2015년 9월 9일 뉴스에서 "워너브라더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를 2017년 7월 21일 개봉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9월 15일 나온 내용에 따르면 워너에서 2017년에 AKIRA 영화를 만들 예정인데, 위의 내용과 연결하여 AKIRA의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것이다. 기사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은 워너브라더스의 관계자와 3개월째 이 프로젝트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2017년에 개봉하는 영화는 3부작 중 1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컴퓨터 그래픽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모든 장면을 촬영하길 원한다' 등의 루머가 돌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 덩케르크 로 확정되면서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7월 1일에는 아키라 실사판 컨셉아트 가 나온 것을 보면 제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 실사 영화가 나오기 전에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먼저 등장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AKIRA 애니메이션의 상징적인, 카네다가 모는 바이크가 등장하는 것이다. 2017년 3월에는 다니엘 에스피노사(차일드 44, 라이프)와 데이비드 샌드버드(라이트 아웃) 감독이 제작이 참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2017년 9월, 실사 영화판 감독으로 [[토르: 라그나로크]]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감독으로 발탁했지만, 차기작 조조 래빗 개봉 이후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초기 개발 단계이며, 애니판이 아닌 책을 기반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2019년 4월, 마침내 수 년간의 루머들 끝에 촬영 도입이 발표되었고 시놉시스도 공개되었다. 동년 5월에는 2021년 5월 21일로 개봉일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타이카 와이티티가 [[토르: 러브 앤 썬더]]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7월에 다시 중단되었다. == 게임 == * AKIRA(1988년 12월 24일, [[패밀리 컴퓨터]], [[타이토]]) * AKIRA PSYCHO BALL(아키라 사이코 볼)(2002년 2월 21일, [[플레이스테이션2]], [[반다이]]) == 참고 == 본작에서 AKIRA(28호)가 [[철인 28호]]의 오마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주인공인 가네다([[쇼타콘]]의 어원인 가네다 쇼타로)나 데쓰오(철인을 비꼬고 있음)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 마약 문화와의 관련성 === 본 작품은 일본에서도 [[1960년대|1960]] ~ [[1970년대|70년대]]에 유행한 [[서브컬처]]인 [[사이키델릭]] 문화([[마약]] 문화・[[히피]] 문화와도 관계 있음)의 영향이 작중에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주인공이나 크라운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흥분제(이것은 가네다의 자켓의 등에 그려진 [[캡슐]]에도 관계 있음), 더욱이 초능력자가 복용하는 치사량에 달하는 위험한 약물 등의 관련성을 밝혀내는 서브컬처 연구자도 적지 않다. === 네오동경의 바이크 === 작중에서 주인공인 가네다가 다루는 '가네다의 바이크'를 시작으로, 다른 모든 개성적인 바이크는 카울부터 프레임 레이아웃에 이르기까지 세미 이지 오더 시스템(semi-easy order syste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륜 안에 설치된 상온 초전도 모터를 통해 양륜구동을 실현하고, 전력은 가솔린 엔진에 의한 발전(영화 앞부분에서 데쓰오가 제멋대로 찾아왔고, 원작에서는 가네다가 약을 연료 탱크에 숨기고 있음). 또, 보디의 이곳저곳에 붙여진 스티커는, 1980년대 회고 붐에 의한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조커가 타는 대형 아메리칸은 현재와 같은 가솔린 엔진의 후륜구동차라는 설정이며(그의 취미), 큰 머플러가 몇 개씩이나 나와 있다. === 가네다의 바이크 === ;제원 * 전장 - 2947mm * 전고 - 1171mm(실드 포함) * 전폭 - 831mm * 시트고 - 340mm * 최저지상고 - 76mm * 휠베이스 - 2194mm * 타이어 사이즈 전18인치 후19인치 * 최고속도 243&nbsp;km/h * 건조중량 - 154&nbsp;kg * 발전형식 - 상온초전도발전기 * 최고발전량 - 83.0&nbsp;kW * 엔진 회전수 - 12500rpm * 최대전압 - 12000V * ABS * 대장애물용 레이다 * 오토나비 시스템 === 원작 단행본 === 단행본 4권이 간행된 후에 영화판의 제작이 개시됐으며, 원작 만화의 연재는 장기간 휴재되었다. 5권의 간행까지 실로 3년간을 필요로 했지만, 영화의 세계적인 히트로 발매된 "국제판 AKIRA"(해외에서 발매된 원작 영어판의 역수입)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미발매된 5권의 전반에 상당하는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국제판은 1권당 수록화가 일본의 것보다 적었는데, 일본에서 5권으로 발매되기에는 부족한 화수라도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4권의 권말에는 5권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5권이 최종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연재 재개 후에는 장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연재가 계속되었으며, 5권은 사전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게 아닐까 예상되었지만, 결국 5권과 6권으로 나뉘면서, 6권이 최종권이 되었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www.bandaivisual.co.jp/akira AKIRA 공식 사이트(반다이 비주얼)] * [http://www.ad2019.com A.D.2019] - 《AKIRA》 팬 사이트. * {{언어링크|it}} [http://knol.google.com/k/redazione-rivista-terre-di-confine/akira/33rs3irbyfff4/56# ''Akira(Akira - Katsuhiro Otomo, 1995)'']{{깨진 링크|url=http://knol.google.com/k/redazione-rivista-terre-di-confine/akira/33rs3irbyfff4/56 }} {{고단샤 만화상 일반부문}} [[분류:사이버펑크]] [[분류:주간 영 매거진의 만화]]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분류:일본의 SF 영화]] [[분류:2002년 비디오 게임]] [[분류:1988년 비디오 게임]] [[분류:1988년 애니메이션 영화]] [[분류:폭주족을 소재로 한 작품]] [[분류:오토모 가쓰히로의 작품]] [[분류:21세기를 배경으로 한 만화]] [[분류:정치 스릴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일본의 애니메이션·만화}} {{다른 뜻 넘어옴|1=아니메|3=애니메이션}} {{다른 뜻 넘어옴|일본 애니메이션|기업|닛폰 애니메이션}} '''아니메'''({{llang|ja|アニメ}}, Anime) 또는 '''재패니메이션'''({{llang|en|Japanimation}})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기존에 연재되는 동명의 인기있는 [[일본 만화|만가]]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제작되며, 장면의 대부분은 [[셀 애니메이션]] 방식이 사용된다. ' 아니메 '는 영어 단어 'Animation (애니메이션)'이 변형된 형태이다.<ref name="japanese">{{웹 인용 |url=http://www.bellaonline.com/articles/art4260.asp |title=What is Anime? |publisher=Bellaonline |accessdate=2007-10-28 |work=Lesley Aeschliman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1107150423/http://www.bellaonline.com/articles/art4260.asp |archivedate=2007-11-07 |url-status=live }}</ref> 다른 언어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나 다채로운 그림, 활기찬 캐릭터와 판타지적 주제를 가진 일본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의미한다. 초기 일본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캐릭터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경우 1960년대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국내외 시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직접 홈 미디어로, 인터넷으로 배포되었고, 다양한 대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다양한 장르로 나뉘었다. 아니메는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Animation)을 지칭하는 약자였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중 60% 이상을 제작할 정도로<ref>{{웹 인용 |url=http://www.uk.emb-japan.go.jp/en/creativejapan/manga/index.html |제목=Creative Japan - Manga Anime And Games |확인날짜=2010-05-1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709211304/http://www.uk.emb-japan.go.jp/en/creativejapan/manga/index.html |보존날짜=2010-07-09 |url-status=dead }}</ref> 거대해진 오늘날에 '아니메'는 각국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여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ref>[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anime Etymology Dictionary Reference - Anime]</ref> 그러나 [[한국어권]]에서는 " 일본 애니메이션 " 또는 줄여서 " 일본 애니 " , " 일애니 " 라고 하고 있어 아니메란 용어의 비중이 낮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 나온 기술에 반응하여 시간에 적응해 온 독특한 제작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의 형태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임에는 초점을 덜 맞추고, 패닝과, 줌, 앵글 샷을 비롯한 카메라 효과의 사용과 더불어 주위 환경의 사실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예술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강조된 감정 표현이나 현실적인 크기의 눈을 포함하여, 등장 인물의 조화와 특징은 꽤 다양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30여 회사가 있는데 그 중 유명 회사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토에이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고 있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DVD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SNS와 스트리밍의 다양화로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서 일본 밖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팬과 산업계 모두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할 뿐이다. 2019년 일본의 연간 애니메이션 해외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10조 원을 넘었다.<ref>https://m-dojo.hatenadiary.com/entry/2019/12/16/095922</ref> 2021년 기준 미국에서 아니메는 외국어 문화 콘텐츠 중에서 가장 높은 수요를 차지한다.<ref>{{뉴스 인용|title= US audiences can't get enough of Japan's anime action shows |url=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1-05-11/u-s-audiences-can-t-get-enough-of-japan-s-anime-action-shows |work=Bloomberg |date=12 May 2021}}</ref> == 역사 == === 초창기와 군부독재 시절 === [[파일:Anime cell 1917.jpg|섬네일|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 (1917년)]] [[파일:Chikara to Onna no Yo no Naka screenshot.jpg|섬네일|1933년에 상영된 일본의 [[유실 영화|유실된]] 애니메이션 영화 《힘과 여자의 세상 속》({{llang|ja|力と女の世の中}})]]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230962</ref> [[칠판]]에 [[분필]]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조악하고 단순하였지만, 훗날 시모카와는 기초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ref>장면마다 배경을 인쇄해둔 다음, 그 위에 캐릭터를 그려 서로 겹치는 부분은 흰색으로 칠해 한장면씩 그리는 방식이었다고 전해진다.</ref>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 내어서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발발, 1933년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ref>대표적으로 일본 만화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에서 해당 작품을 보고는 '일본에서도 이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동받아 애니메이션 제작을 결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f> === 전후 혼란과 도에이 애니메이션 === 전쟁이 끝난 뒤 [[GHQ]]는 신속한 점령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홍보를 활용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45년]] 가을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 겐지]]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소집되어 [[신일본동화사]]가 설립되었다. 마사오카 겐조는 봄꽃의 평화를 강조하는 《벚꽃》(1946)을 제작하였으나 극장가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버려진 고양이 도라짱》(1947) 등을 제작하였지만 GHQ가 바라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척되자 [[디즈니]]의 역할을 염두에 두었던 GHQ도 이내 포기, 신일본동화사는 1947년에 해산되었다. 신일본동화사의 세 사람은 같은 해 일본만화영화사를 설립하나 무라타 야스지만 남고, 무라타는 [[세오 미쓰요]]를 불러들여 《임금님의 꼬리》(1949)를 제작하나 배급사 [[도호]]에서 내용 문제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 일본만화영화사는 큰 투자금을 보전하지 못하여 파산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전에 활약하던 작가 대부분은 패전의 충격과 사회 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던 실정이었다. 야마모토 사나에, 마사오카 겐조는 도호의 투자를 받아 '일본동화'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치]] 등의 인사도 들어와 있었다. 이후 도호의 관련사를 흡수해 투자를 늘려 회사명을 니치도(日動) 영화로 바꾸고, 1995년에는 [[도에이]]의 위탁으로 단편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도에이가 니치도 영화를 매입, 도에이 교육영화 소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삼으며 [[1956년]] 7월 '[[도에이동화]]'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도에이동화는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차용,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1957년]] 13분 분량의 첫 작품 《새끼 고양이의 낙서》를 발표한 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 (애니메이션)|백사전]]》을 개봉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으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상영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에이는 《[[원숭이 소년 사스케]]》(1959), 《[[서유기 (1960년 영화)|서유기]]》(1960) 등을 공개하였다. 한편 1952년 〈[[철완 아톰]]〉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다가, 도에이동화 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유기》의 제작 협력 의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배웠다. 1961년 도에이동화에서 퇴사한 데즈카는 [[사카모토 유사쿠]], [[요코야마 다카이치]] 등과 함께 도쿄 후지미다이에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실험작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1962)을 계기로 데즈카 프로덕션은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TV 애니메이션의 시대 ===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는 애니메이션 환경의 변화도 이뤄졌다.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고, 1959년에는 주간 단위의 [[만화잡지]]들이 창간되어 어린이들은 매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은 앞으로의 방향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설정하고, 철저한 상업적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표현을 생략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하고, 에피소드 방식의 미국 애니와는 다른 '재미있으면서 복잡한 스토리', 즉 이야기와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무시 프로덕션의 첫 정기작품은 탄탄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쌓아가고 있던 〈[[철완 아톰]]〉으로 결정되었고, 1년 간의 제작 끝에 [[1963년]] [[1월 1일]] [[저녁]] 6시 15분, [[후지테레비]]에서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I2btYv8GaXk 철완 아톰 (1963년)]</ref> 철완 아톰은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구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설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철완 아톰》의 성공에 주목한 TV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속 참가하였다. [[TCJ]] 스튜디오는 1963년 한 해에 《[[신선부락]]》, 《[[철인 28호]]》, 《[[에이트맨]]》을 제작해 방영 개시하였는데 모두 [[공상과학]] 장르에 속해 SF 작가가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도에이동화]]는 《[[늑대소년 켄]]》을 제작하였지만 그간 장편애니에 집중한 탓에 비효율적인 제작방식이라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는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였는데 이미 방영되던 《철완 아톰》이 첫 대상이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밀림의 왕자 레오|정글 대제]]》를 풀 컬러 애니메이션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기동전사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어른|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인기 순위에서 2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던 [[1986년]]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시작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과 [[1993년]]부터 시작한 농구만화 [[슬램 덩크 (만화)|슬램 덩크]]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점차 애니메이션 작품 제작비의 70~80%를 차지하는 인건비가 상승하고, 일본의 버블 경제([[잃어버린 10년 (일본)|잃어버린 10년]])가 무너지면서 일본은 장기간의 [[경제]] 침체로 이어져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 종류 == === 프로덕션 종류 === 기본적으로 판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 [[극장판]] : 말 그대로 극장 상영용으로 만들어진 작품. 일반 영화와 비슷한 상영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전문적으로 극장을 목표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종종 인기 있는 TV 시리즈나 OVA가 극장판화되기도 한다. 대규모 스튜디오와 자금이 동원되므로, 상당한 걸작들이 많다. 주요 감독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이 있다. * [[OVA]](Original Video Animation) : 제작된 작품은 VCR용 카세트를 비롯한, DVD, 블루레이 디스크의 형태로 판매된다. 소규모 고정 지지층을 가진 장르물이나 소수의 작가들이 모여서 만드는 소규모 작품 등을 취하는 형태이다. 과거에는 자금력이 부족하여 그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현재는 OVA 시장 자체가 상당히 커짐에 따라 TV판 이상의 수준을 보이기도 한다. * [[TV 시리즈]] : TV 방영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작품. 시간 제한 문제로 초기 작화와 후기 작화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 (한국 드라마의 날림 현상과 비슷하다.) 재패니메이션의 가장 근간이 되는 제작 방식이다. 대개 TV사의 발주를 각 제작 스튜디오에서 주문을 받아 만들어지는 형태가 되므로, 인기가 없어서 광고가 잘 들어오지 않는 시리즈물의 경우엔 1쿨/혹은 1기(=13주. 1년의 1/4 기간으로 보통 일본 TV사의 방송 프로그램 개편 패턴) 단위로 잘려 나가게 된다. === 분류:애니메이션 === * [[:분류: NHK의 애니메이션]] * [[:분류: TBS 계열 애니메이션]] * [[:분류: TV 도쿄 계열 애니메이션]] * [[:분류: TV 아사히 계열 애니메이션]] * [[:분류: UHF 애니메이션]] * [[:분류: 닛폰 TV 계열 애니메이션]] * [[:분류: 마이니치 방송의 애니메이션]] * [[:분류: 선라이즈 작품]] * [[:분류: 일본의 애니메이션]] * [[:분류: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 [[:분류: 일본의 웹 애니메이션]] * [[:분류: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 * [[:분류: 후지 TV 계열 애니메이션]] == 배포 ==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화풍, 애니메이션 기법, 생산, 제작에 있어서 다른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를 띈다. 시각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화가, 감독, 원작가, 스튜디오에 따라 그림체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한 그림체가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기법과 캐릭터 디자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 애니메이션 기법 ===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 애니메이션 제작과 마찬가지로 [[콘티]] 작성, 목소리 녹음, 캐릭터 디자인, [[셀 애니메이션|셀 제작]] 등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터들은 점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후지 노부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실험적이었고 흑판에 그린 그림, 종이를 잘라 만든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ref name="Jouvanceau2004"/><ref name="Cinémathèque2008">{{웹 인용 |title=Tribute to Noburō Ōfuji |work=To the Source of Anime: Japanese Animation |publisher=Cinémathèque québécoise |year=2008 |url=http://www.cinematheque.qc.ca/animation_japonaise.pdf |format=PDF |accessdate=2008-07-2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819214736/http://www.cinematheque.qc.ca/animation_japonaise.pdf |archivedate=2008-08-19 |url-status=dead }}</ref> 셀 애니메이션은 점차적으로 유명해져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모치나가 타다히토]], [[카와모토 키하치로]], [[무라타 토모야스]]가 만든 스탑 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을 비롯한<ref name="Sharp2004">{{웹 인용|last=Sharp|first=Jasper|title=Interview with Kihachirō Kawamoto|work=Midnight Eye|year=2004|url=http://www.midnighteye.com/interviews/kihachiro_kawamoto.shtml|accessdate= 2008-07-21}}</ref><ref>{{웹 인용|last=Munroe Hotes|first=Catherine|title=Tomoyasu Murata and Company|work=Midnight Eye|year=2008|url=http://www.midnighteye.com/features/tomoyasu-murata-and-company.shtml|accessdate= 2008-07-21}}</ref> 독립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ref name="Sharp2003">{{웹 인용|last=Sharp|first=Jasper|title=Beyond Anime: A Brief Guide to Experimental Japanese Animation|work=Midnight Eye|year=2003|url=http://www.midnighteye.com/features/beyond_anime.shtml|accessdate=2008-07-21|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725193748/http://www.midnighteye.com/features/beyond_anime.shtml|archivedate=2008-07-25|url-status=live}}</ref> 컴퓨터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셀 애니메이션과 섞은 [[공각기동대 (영화)|공각기동대]],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이 있다.<ref name=ae />{{rp|29}} 셀을 제작하는 주요 회사인 [[후지필름]]은 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셀을 모아야 한다는 충격을 주었고 서둘러서 디지털 작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ae />{{rp|29}} 디지털 시기가 오기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pose to pose approach를 사용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ref name="Jouvanceau2004">{{서적 인용 |last=Jouvanceau |first=Pierre |coauthors=Clare Kitson (translator) |title=The Silhouette Film |publisher=[[Le Mani]] |year=2004 |location=Genoa |page=103 |url=http://www.heeza.fr/description.php?lang=2&path=64&sort=Article&page=0&id=296 |isbn=88-8012-299-1 |accessdate=2009-08-0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320051512/http://www.heeza.fr/description.php?lang=2&path=64&sort=Article&page=0&id=296 |보존날짜=2008-03-20 |url-status=dead }}</ref>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비싼 원화를 덜 사용하고 중간에 동화를 많이 끼워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ref name=ANNKeyAnimation>{{웹 인용|url=http://www.animenewsnetwork.com/chicks-on-anime/2008-11-04 |last1=Dong |first1=Bamboo |last2=Brienza |first2=Casey |last3=Pocock |first3=Sara |title=A Look at Key Animation |series=Chicks on Anime |publisher=[[Anime News Network]] |date=November 4, 2008 |accessdate= 2012-09-30}}</ref>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기존의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선구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중점을 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을 조금 줄여서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단점을 정성을 들인 작화로 극복하는 등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개념으로서도 사용된다.<ref name="ChicksOnAnimeSep2008">{{웹 인용|url=http://www.animenewsnetwork.com/chicks-on-anime/2008-09-16|last1=Dong |first1=Bamboo |last2=Brienza |first2=Casey |last3=Pocock |first3=Sara |last4=Sevakis |first4=Robin |title=Chicks on Anime - Sep 16th 2008 |series=Chicks on Anime |publisher=[[Anime News Network]] |date= 2008-09-16 |accessdate= 2012-09-30}}</ref>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삼차원 뷰를 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배경은 작중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이다.<ref name="manga!">{{서적 인용|last=Schodt |first=Frederik L. | title=Manga! Manga!: The World of Japanese Comics |publisher=[[Kodansha]] International |date= 1997-08-18|edition=Reprint |location =Tokyo, Japan |isbn=0-87011-752-1 }}</ref> 배경은 항상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배경을 따 오는 경우도 있다.<ref name=dc >{{서적 인용| title=The Anime Art of Hayao Miyazaki | publisher=McFarland | year=2006 | author=Cavallaro, Dani | pages=157–171}}</ref><ref>{{웹 인용| url= http://www.rinku.zaq.ne.jp/p_v/haruhi.html| title= Reference pictures to actual places| accessdate= 2007-01-25|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126012418/http://www.rinku.zaq.ne.jp/p_v/haruhi.html| archivedate= 2007-01-26| url-status= dead}}</ref> Oppliger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스타급 캐스팅을 합쳐서 매우 강한 감동을 자아내는 드문 매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www.animenation.net/blog/2012/10/01/ask-john-what-determines-a-shows-animation-quality/ |last=Oppliger |first=John |title=Ask John: What Determines a Show's Animation Quality? |publisher=[[AnimeNation]] |date= 2012-10-01 |accessdate= 2012-10-28}}</ref>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화적 효과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카메라가 찍은 것과 같이, 패닝, 줌, 원거리/단거리 샷과 같이 영화같은 샷을 사용하는데, 현실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훨씬 동적인 샷을 사용하기도 한다.<ref name=ae />{{rp|58}}<ref name="production">{{웹 인용|url=http://www.huitula.com/productionIG2_page2.htm|title=Anime production process - feature film|year=2000|accessdate=2007-08-27|work=PRODUCTION I.G|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815101432/http://www.huitula.com/productionIG2_page2.htm|archivedate=2007-08-15|url-status=live}}</ref><ref>{{웹 인용 |url=http://www.understandinganime.com/cinematography.php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13154025/http://www.understandinganime.com/cinematography.php |archivedate=2008-06-13 |title=Cinematography: Looping and Animetion Techniques |year=1999 |accessdate=2007-08-29 |work=Understanding Anime |url-status=dead }}</ref>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사 녹음을 먼저 하고 동화 작업을 하는 북미 애니메이션과 달리 동화 작업을 끝낸 다음에 대사를 녹음한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입 모양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오류도 생길 수 있다.<ref name=ae />{{rp|59}} === 캐릭터 ===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신체의 비례는 현실계의 신체 비례를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작자는 머리 높이를 비례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한다. 머리 길이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키는 7등신에서 8등신 정도이다.<ref name="headheight">{{웹 인용| url= http://animeworld.com/howtodraw/bodies1.html| title= Body Proportion| accessdate= 2007-08-16| work= Akemi's Anime World|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805152410/http://animeworld.com/howtodraw/bodies1.html| archivedate= 2007-08-05| url-status= live}}</ref> 캐릭터 디자이너는 신체가 상당히 변형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은 작은데 머리는 큰 균형에 맞지 않는 캐릭터가 있으며 이 경우 2등신에서 4등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짱구는 못말려]] 같은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신체 비례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예이며, 서양 애니메이션과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눈 크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눈이 큰 아니메 캐릭터는 [[베티 부프]]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테즈카 오사무]]가 눈이 상당히 큰 캐릭터를 그린 것이 시초이다. 테즈카는 일본 만화애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테즈카가 만든 상징적 예술 스타일과 캐릭터 디자인은 사람 감정 전체를 눈 모양을 통해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ref name=ae />{{rp|60}} 제작자는 눈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밝은 음영, 색조, 어두운 음영을 섞어서 눈 색을 표현한다.<ref>{{웹 인용| url= http://www.biorust.com/tutorials/detail/141/en/| title= Basic Anime Eye Tutorial| accessdate= 2007-08-22| work= Centi, Biorust.com|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824072700/http://biorust.com/tutorials/detail/141/en/| archivedate= 2007-08-24| url-status= dead}}</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VyJ9yfYl_Fc |title=How to color anime eye |date= 2007-06-06 |accessdate= 2007-08-22 |author=Carlus |publisher=YouTube}}</ref> 문화 인류학자 Matt Thorn은, 일본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눈이 다소 외국인같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ref name="manga characters look white">{{웹 인용 |title=Do Manga Characters Look "White"? |url=http://www.matt-thorn.com/mangagaku/faceoftheother.html |accessdate=2005-12-1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717060459/http://www.matt-thorn.com/mangagaku/faceoftheother.html |archivedate=2011-07-17 |url-status=live }}</ref> 하지만, 모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이 다 큰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사실적인 눈 크기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도 현실적이다.<ref name="companion">{{서적 인용|last=Poitras |first=Gilles |title=Anime Companion |publisher=Stone Bridge Press |year=1998 |location=Berkeley, California |isbn=1-880656-32-9}}</ref> [[파일:Manga emotions-EN.jpg|섬네일|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미리 정해져 있는 표정을 그리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지 않게 생생하고 다채로우며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과장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의 과장된 움직임은 액션과 캐릭터의 감정을 시각적 효과로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ref name=ae />{{rp|62}} Poitras는 만화 표지 일러스트의 머리카락 색을 조사했는데, 눈을 사롭잡는 그림과 다채로운 색채는 어린이용 만화에 매력적이라고 했다.<ref name=ae />{{rp|61}}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제작되기는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은 항상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같이 의도적으로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ref>{{서적 인용|last=Tobin|first=Joseph Jay|year=2004|title=Pikachu's Global Adventure: The Rise and Fall of Pokémon|publisher=Duke University Press|page=88|isbn=0-8223-3287-6}}</ref>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이미 정해져 있는 표정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ref>{{웹 인용| url= http://www.mangatutorials.com/tut/expressions.php| title= Manga Tutorials: Emotional Expressions| accessdate= 2008-08-22| work= Rio|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80729175352/http://www.mangatutorials.com/tut/expressions.php| archivedate= 2008-07-29| url-status= dead}}</ref> 이러한 특징은 서양 애니메이션과 다르다. 또한, 그러한 특징에는 특정한 감정과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고정된 도해법이 포함되어 있다.<ref name="bloody" /> 이러한 표현은 종종 과장되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캐가 화를 낼 때에는 코피가 난다.<ref name="bloody">{{웹 인용|url=http://www.umich.edu/~anime/info_emotions.html |title=Emotional Iconography in Animae |author=University of Michigan Animae Project |date=Current |accessdate= 2009-08-08}}</ref> 순간적으로 단순그림체가 단순해질 때도 있다.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땀을 그린다거나,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붉게 그린다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게 표현하는 것 같은 다양한 시각 기호가 사용된다.<ref name="ma">{{서적 인용| title=Understanding Manga and Anime | publisher=Libraries Unlimited | author=Brenner, Robin | year=2007 | isbn=978-1-59158-332-5}}</ref>{{rp|52}} === 음악 ===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의 오프닝, 엔딩곡은 J-Pop이나 락 음악에 속해 있으며, 때때로는 유명한 밴드의 곡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중 스토리를 마음에 두고 가사를 쓰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시장도 목표를 해서, 주제를 살짝만 내비치는 곡도 나타나며 아예 줄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곡도 나오기도 한다. 음악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경 음악은 줄거리 노선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단지 애니메이션 장면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몇몇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에 쓰인 음악을 전부 모아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다.<ref>{{웹 인용|title=Original Soundtrack (OST)|url=http://www.animenewsnetwork.com/encyclopedia/lexicon.php?id=74|website=Anime News Network|publisher=ANN|accessdate=2014-10-15}}</ref><ref>{{웹 인용|title=gogoanime|url=https://gogoanime.mom/|website=Anime News Network|publisher=ANN|accessdate=2014-10-15|archive-date=2021-11-22|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122122912/https://gogoanime.mom/|url-status=}}</ref> == 장르 == 일본 애니메이션은 타겟 연령층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만화]], [[소녀 만화]], [[소년 만화]], [[청년 만화]], [[여성 만화]]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소녀 만화와 소년 만화는 다양한 성별의 독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녀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줄거리 복잡성이 더 크기도 하며, 성인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rp|44–48}} 성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일부는 일본에서 "R18"로 분류가 되는데,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헨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성적인 주제나 암시가 들어가 있는 '[[엣치]]'라는 것이 있는데 전형적으로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하렘 애니메이션에 이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청소년 계층과 성인 계층에게 인기가 많아서 애니메이션에 [[판치라]]를 비롯한 엣치 요소를 넣는 것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ref name="askjohn">Ask John: [http://www.animenation.net/blog/2005/05/20/ask-john-why-do-americans-hate-harem-anime/ Why Do Americans Hate Harem Anime?] {{웨이백|url=http://www.animenation.net/blog/2005/05/20/ask-john-why-do-americans-hate-harem-anime/ |date=20080409032645 }}. animenation.net. May 20. 2005. ''Note: fan service and ecchi are often considered the same in wording.''</ref><ref name="r.brenner">Robin E. Brenner: ''Understanding manga and anime.'' Libraries Unlimited, 2007, {{ISBN|978-1-59158-332-5}}</ref>{{rp|89}}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류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분류와 달라서 간단한 특징으로 분류할 수 없다.<ref name="ae">{{서적 인용| title=Anime Essentials: Every Thing a Fan Needs to Know | publisher=Stone Bridge Press | author=Poitras, Gilles | year=2000 | pages=7–115 | isbn=978-1-880656-53-2}}</ref>{{rp|34}}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해 책을 쓴 Gilles poitras는 [[전쟁과 평화]]를 전쟁 소설로 여기게 하는 것과 유사하게 '건담 0080'과 그것의 복잡한 전쟁 묘사를 거대 로봇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을 비교했다. SF는 일본 애니의 주된 장르이고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 28호]]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다. SF의 하위 장르 중에는 [[메카]]물이 잇는데 [[건담]]과 같은 작품이 있다.<ref name=ae />{{rp|35}} 다양한 판타지 장르 애니메이션 중에는 일본의 옛 설화에서 소재를 따 온 '[[이누야샤]]'와 같이 동서양의 전통과 설화에 기반한 작품이 있고, [[위그드라실]]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온 스칸디나비아 여신을 묘사한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작품도 있다.<ref name=ae />{{rp|37–40}} 애니메이션의 장르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는데, [[드래곤 하프]]와 같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섞인 작품, [[칼리오스트로의 성]]과 같이 범죄 애니메이션에 익살스러움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ref name=ae />{{rp|41–43}} 다른 하위 장르로는 [[마법소녀]], [[하렘]], 스포츠, 무술, 문학의 애니화, 전쟁 등이 있다.<ref name=ae />{{rp|45–49}} 동성애를 다룬 장르도 있다. 원래 용어에는 외설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야오이]](남성간 동성애)와 [[백합 (장르)|백합]](여성간 동성애, 百合)은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동성애 성향이 있는 캐릭터는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성애 캐릭터를 진지하면서도 공감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ref name=ae />{{rp|50}} == 영향 == [[아시아]] 시청자들 상당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파일:Akihabara picture.jpg|섬네일|일본 [[오타쿠]] 문화의 중심지인 [[아키하바라]]]]2020년대 들어서며 아니메는 외국어 프로그램 중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요를 차지할 만큼 큰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1-05-11/u-s-audiences-can-t-get-enough-of-japan-s-anime-action-shows|title=US audiences can't get enough of Japan's anime action shows|date=12 May 2021|work=Bloomberg}}</ref> == 역대 시청률 == 역대 최고 시청률은 다음과 같다.<ref>[https://www.videor.co.jp/tvrating/past_tvrating/anime/01/index.html 애니메이션 최고 시청률 베스트] 《[[비디오 리서치]]》</ref> # 《[[마루코는 아홉살]]》 1990년 10월 28일 (후지 TV) 39.9% # 《[[사자에상]]》 1979년 9월 16일 (후지TV) 39.4% # 《[[닥터슬럼프]]》 1981년 12월 16일 (후지TV) 36.9% # 《[[명랑 개구리 뽕키치]]》 1979년 2월 23일 (닛폰TV 방송망) 34.5 #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 1981년 1월 10일 (TBS) 33.6% # 《[[루팡 3세]] 최종회》 1978년 12월 8일 (닛폰 TV 방송망) 32.5% # 《[[터치 (만화)|터치]]》 1985년 12월 22일 (후지TV) 31.9% # 《[[내일의 죠]]》 1980년 3월 13일 (닛폰 TV 방송망) 31.6% # 《[[도라에몽]]》 1983년 2월 11일 (TV아사히) 31.2% # 《[[아기공룡 둘리]]》,1983년 4월 22일 (NHK) 30. 8% # 《[[게게게의 키타로]]》 1986년 3월 22일 (후지TV) 29.6% == 같이 보기 == * [[한국 애니메이션]] * [[OVA]] * [[일본의 웹 애니메이션]] * [[일본 애니메이션의 방영 횟수순 목록]] *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 (AMV)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 {{서적 인용|저자1=야마구치 야스오|저자링크1=야마구치 야스오|제목=일본 애니메이션 역사|날짜=2005|출판사=미술문화|isbn=89-86353-99-7|판=1}} * 박인하 (2009)《월트 디즈니 VS 미야자키 하야오》. == 외부 링크 == {{위키공용|Anime}} * {{dmoz|Arts/Animation/Anime}}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7&aid=0000008535 COVER STORY | 콘텐츠 왕국 日本 06 -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주간동아 2009년 9월 23일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61600209109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6-16&officeId=00020&pageNo=9&printNo=22543&publishType=00010 21세기를 여는 포성 문화전쟁 (16) 일 만화영화]{{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61600209109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6-16&officeId=00020&pageNo=9&printNo=22543&publishType=00010 }}, 동아일보 1994년 6월 16일 {{애니메이션}} {{일본 주제}} {{전거 통제}} [[분류:일본의 애니메이션|*]] [[분류:1917년 도입]]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24절기}} '''백로'''(白露)는 24절기의 15번째로 태양 황경이 165도가 될 때이다. 양력으로는 [[9월 7일]] 내지 [[9월 8일]]에 해당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 하여 백로라고 한다. 백로는 이슬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 기후 == * 밤에 기온이 떨어지고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등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 * [[장마]]가 물러가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지만, 간간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으로 말미암아 곡식이 줄기째 부러지고 [[해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 풍속 == *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千石)을 늘인다"고 하여 백로에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이 들 조짐으로 보았다. == 기타 == *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4개만 큰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20개는 특별한 명칭과 의미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문학에서는 [[춘분점]], [[하지점]], [[추분점]], [[동지점]] 등 4개만 있고, 나머지 20개에 대응하는 명칭이나 용어가 없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47239&cid=62801&categoryId=62801 절기 (한국천문학회 천문학백과)] [http://wiki.kas.org/index.php/%EC%A0%88%EA%B8%B0 절기 (한국천문학회 위키천문백과사전)]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만 의미가 있고 나머지 20개에 대응하는 용어는 없다. 태양의 적위가 황경에 선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24절기에 따라 태양의 남중고도가 일정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절기가 계절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4계절은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 4립의 날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절기의 이름이 중국 주나라 때 화북 지방의 날씨에 맞춰지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24절기를 현대 동아시아 전역에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ref>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적위]] ([[절기|24절기]]에 따른 태양의 적위 참고) == 참고 문헌 및 링크 == * [https://astro.kasi.re.kr/life/pageView/7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 생활천문관 → 월별 천문현상] 에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4개만 절입시각이 표기돼 있고, 나머지 20개의 절입시각은 표기돼 있지 않다. (이는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매년 11월쯤에 발행하는 '''역서''', '''천문력'''(벽걸이용, 탁상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역서''', '''천문력'''(벽걸이용, 탁상용)은 구매하여 이용할 수 있다. (무료 아님)) 단, [https://astro.kasi.re.kr/life/post/calendarData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 생활천문관 → 달력자료(월력요항) → 달력자료] 에서는 나머지 20개의 절입시각도 확인할 수 있다. * {{글로벌세계대백과}} {{토막글|시간}} [[분류:절기]] [[분류:9월의 세시]]
'''PC'''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 * [[다면체 복합체]](Polyhedral complex) * [[단백질의 결정]](Protein crystallization) * [[단백질 복합체]](Protein complex) * [[물리 상수]](Physical constant) * [[비밀번호 크래킹]](Password cracking) * [[점별 수렴]](Pointwise convergence) *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나타낼 때 쓰는 말 * [[주곡률]](Principal curvature) * [[추밀원]](Privy Council): 국가의 주권자(전형적으로는 군주)의 자문기관 * [[프로그램 계수기]](Program Counter): 마이크로프로세서(중앙 처리 장치) 내부에 있는 레지스터 중의 하나 *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Prestressed Concrete): 철근 콘크리트 보에 일어나는 인장응력을 상쇄할 수 있도록 미리 압축응력을 준 콘크리트 * [[파섹]](parsec, pc)은 천문학에서 쓰는 거리의 단위 * [[페트로프 분류]](Petrov classification) * [[플레이어 캐릭터]](Player Character): 비디오 게임이나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 * [[포스파티딜콜린]](Phosphatidylcholine) *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 비스페놀 A(BPA)와 포스젠의 연쇄 구조로 이루어진 무색 투명한 무정형의 열가소성 플라스틱 중합체 * [[푸아송 코호몰로지]](Poisson cohomology) * [[프로필렌 카보네이트]](Propylene carbonate) * [[플랑크 상수]](Planck constant) *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 * [[확률 흐름]](Probability current) * 페이퍼 크레인 [[종이학]] 이다. * 페이즈 체인지 (Phase Change) 상변화/상전이 이다. * 폴리 카보니트 (Poly Carbonate) 이다. * 패리티 체크섬이다, == 같이 보기 == * [[피시]] {{동음이의 알파벳 이니셜 약자}} {{동음이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Thermohaline Circulation 2.png|섬네일|300px|right|[[열염순환]]]] '''해양학'''(海洋學, {{llang|en|Oceanography}})은 바다(해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이들 각 분야의 학문을 바다와 그 주위에 적용할 공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한다. 해양학의 세부학문으로는 해양지질학(海洋地質學), 물리해양학(物理海洋學), 해양생물학(海洋生物學), 화학해양학(化學海洋學), 해양공학(海洋工學) 등이 있다. 해양지질학은 지구 내부의 성분, 지각의 변동, 해저퇴적물의 특성,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해양지질학은 순수 학문분야를 넘어 지진예측이나 지하자원의 분포를 분석하는 실용적인 학문에도 영향을 주는 학문분야이다. 물리해양학은 파랑역학, 해류, 해양-대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최근 물리해양학은 공해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예측이 중요해짐에 따라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해양생물학은 해양생물의 분포와 특성, 해양-대기의 상관관계로 인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해양생물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학해양학은 해양의 용존 고체 및 기체와 이들 성분이 해양에 미치는 지질학적·생물학적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양공학은 석유 플랫폼, 선박, 항만 등 해양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구조물의 건조·설계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 항해의 안전성 재고에 대한 연구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역사 == [[파일:Gulf_stream_map.gif|섬네일|[[벤저민 프랭클린]]이 1770년경에 그린 [[멕시코 만류]].]] === 초기역사 === 해양학은 선사시대에 인류가 바다와 파도와 해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84-322년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트라본]]이 조수를 기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marinebio.org/creatures/marine-biology/history-of-marine-biology/|title=A History Of The Study Of Marine Biology ~ MarineBio Conservation Society|date=17 June 2018|language=en-US|access-date=2021-05-17}}</ref> 바다에 대한 초기탐험은 주로 지도 제작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이 어부들이 그물에서 기르던 동물과 해양의 표면에 대한 것들로 제한되었으며, 이후 납선을 이용한 바다의 깊이 측정 또한 이루어졌다. 체계적으로 지속된 최초의 과학적 대규모 프로젝트로는 대서양의 해류와 바람에 대한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해 캠페인이 있다. 수학자 및 천문학자로서 인정받았던 포르투갈의 수학자 [[:en:Pedro_Nunes|페드루 누네스]](1502-1578)는 1527년부터 왕실에 임명될 때까지 조종사 및 선임 선원의 교육에 관여하였는데, 2차원상의 지도에 표시된 두 지점의 지구에서의 최단경로인 [https://ko.dict.naver.com/#/entry/koko/d4e9dac6558846328a085e3677641169 사항곡선]에 대해 연구했다.<ref name="mathshistory.st-andrews.ac.uk">[https://mathshistory.st-andrews.ac.uk/Biographies/Nunes/ Pedro Nunes Salaciense] at the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retrieved 13/06/2020)</ref><ref>W.G.L. Randles, "Pedro Nunes and the Discovery of the Loxodromic Curve, or How, in the 16th Century, Navigating with a Globe had Failed to Solve the Difficulties Encountered with the Plane Chart," Revista da Universidade Coimbra, 35 (1989), 119-30.</ref> 그는 이후 〈구에 대한 소고<small>Treatise of the Sphere</small>〉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기하학적 및 천문학적인 탐색 방법에 대한 논문이 포함되어있다. 카나리아 제도의 남쪽에서 출발한 배는 오직 바람에 맡긴 항해만으로 돌아오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바람과 해류의 흐름의 변화 때문이다.<ref>http://ksuweb.kennesaw.edu/~jdirnber/oceanography/LecuturesOceanogr/LecCurrents/LecCurrents.html (retrieved 13/06/2020)</ref> 북대서양 환류와 적도 반류와 북동무역풍과 남동무역풍이 만나는 복잡한 바람과 해류의 흐름 때문에 범선이 북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ref>https://kids.britannica.com/students/assembly/view/166714 (retrieved 13/06/2020)</ref>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인도와 아프리카 주변을 통과하는 해상 항로를 명확히 하기 위해 포르투갈인이 체계적인 항해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카나리아의 남부지역에서 돌아오는 그 경로를 'volta do largo' 또는 '[[:en:Volta_do_mar|volta do mar]]'라 이름 붙였다. 1427년 [[아소르스 제도|아소르스제도]]의 ‘재발견’은 현재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돌아오는 경로에 있는 섬의 전략적 중요성과 [[사르가소해]]에 대한 기존의 이야기들을 재조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섬은 1436년에는 다시 돌아오는 서쪽항로 쓰였는데, 항해 도중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남동풍과 북동풍을 이용하여 서풍이 선원들을 유럽의 서해안으로 이동시키는데 필요했다.<ref>{{웹 인용|url=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8/Map_prevailing_winds_on_earth.png/1200px-Map_prevailing_winds_on_earth.png|title=Map|website=upload.wikimedia.org|format=PDF|access-date=2020-09-15}}</ref> 포르투갈인들은 1년 중 대서양의 계절변화에 따른 해류와 바람의 세기를 고려하여 다양한 경로를 이용할 정도였으며, 포르투갈의 항해법에 대한 정보 중 지도와 경로를 유출하면 사형을 할 정도로 정보관리가 엄중했고, 이런 민감한 정보들을 1775년 리스본 지진으로 파괴된 왕립기록보관소에 보관하였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1487년 8월에 전설적인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를 발견 할 것을 명령받아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계획하였다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이 발견된 후 포르투갈의 숙원이던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1493년 3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는데,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토르데시야스조약]]을 체결하여 카보베르데섬 서쪽 서경46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을 그어 동쪽은 모두 포르투갈이, 서쪽의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이 인도산 후추를 독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남미대륙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 조약으로 인한 것이다. 덴마크의 아라비아 탐험은 1761~1767년에 일어났다. 이 원정대는 [[프레데리크 5세|프레드릭 5세]]의 후원으로 1761년 1월 4일 코펜하겐에서 6명이서 출발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나일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들의 주요목적은 이집트, 아라비아와 시리아의 자연사를 연구하고 지리를 파악해서 지도를 제작하는 거였으며, 부수적으로 구약성서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원정대에는 해양생물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그물이 있었으며, 스크레퍼를 이용하여 바닥에 있는 샘플까지 수집할 수 있었다. 긴 항해를 마치고 1767년 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같은 해의 11월에 코펜하겐으로 돌아왔는데 여행도증 5명이 사망하고 1명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태평양의 해류에 대한 정보는 [[제임스 쿡]]과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을 포함한 18세기 후반의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en:James_Rennell|제임스 레넬]]은 1777년 희망봉 주위를 항해하며 Scilly 섬 근처의 간헐적 해류에 대해 이해하고(Rennell 's Current라고 함) 대서양과 인도양의 해류를 자세히 설명하는 해양학에 대한 최초의 과학 교과서를 썼다. === 현대해양학 === 과거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식은 바다의 얕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바다의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영국 왕립해군|영국 왕립 해군]]의 모든 세계의 [[해안선 (경계선)|해안선]]을 도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해양에 대한 과학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파일:Challenger.jpg|오른쪽|섬네일|1872년에 해양탐사를 진행한 HMS 챌린저호]] 순수하게 과학을 목적으로 둔 최초의 해양 탐사는 [[챌린저탐사|챌린저 탐사]]이다. 1871년 영국 정부가 영국 왕립 학회의 권고에 따라 세계의 바다를 탐험하고 해양의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는 탐험을 발표를 하였다. 이후 스코트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에든버러 대학]]에서 자연사를 담당하던 찰스 와이빌 톰슨과 캐나다출신인 그의 제자 존 머레이가 시작하였다. 챌린저 호는 톰슨의 감독하에 약 70000해리(130,000km)의 탐사를 여행했다. 1876년 탐사를 끝낸 챌린저호는 [[심해생물]]을 발견하였다. 약 4717종의 [[해양 생물|해양생물]]을 발견하여 해양생물학이란 학문을 탄생시키기도 하였으며 바다 수온, 퇴적물 채집, 심충수, [[해류]], 기상관측 등의 자료는 현대 해양학의 기초가 되었다. 챌린저 탐사의 영향으로 서방국가에서는 해양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77년에는 미국의 박물학자 아가시(Alexander Agassiz)가 블레이크 호를 동원하여 355여군데에서 심해를 조사하였으며 이후 최초의 해양 선박인 알바트로스를 이용해 여러 번의 해양 조사를 하여 수많은 [[해양생물학]]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파일:Ocean_currents_1911.jpg|오른쪽|섬네일|225x225픽셀|[[해류]] 지도]] 19세기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기술의 발전에 따라 해양학도 발전하게 되는데 1914년에는 최초로 바닥에서 반사되는 음파로 수짐을 재는 음향 측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925년에서 1927년까지 약 2년동안 [[음향측심기]]를 사용하여 약 70,000개의 해양 깊이를 측정, 수집하여 해저 수심도를 작성하였는데 이 탐사를 메테오 탐사(Meteor Expedition)라고 한다. 1957년에는 핵잠수함 [[노틸러스 호 (원자력 잠수함)|노틸러스호]]가 북극을 탐사하였다. 20세기 후반에는 그동안 바다에서 진행되던 해양학 연구가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하늘 위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1978년 미국은 최초의 해양탐사용 위성 Seasat을 발사하여 해양의 [[수온]], [[해안선 (경계선)|해안선]]과 같은 해양 자료를 수집하였다. 1990년에는 10년 연구계획으로 WOCE(World Ocean Circulation Experiment,세계 해양 순환 실험)가 형성되어 미국, 일본, 한국등 다양한 국가가 참여하여 연구를 하였다. 현대의 해양 연구는 지구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생물권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해양에 대한 더 많은 연구는 과학자들이 기후 예측을 더 쉽게 판단할 수 있게해주며 더 나아가 지구 자원의 효율적 활용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 세부 분야 == === 생물해양학 === 해양생물학은 생물 해양학과 대조될 수 있다. 해양생물은 해양생물학과 생물해양학에서 모두 연구하는 분야이다. 생물 해양학은 생물체가 해양학계의 물리, 화학, 지질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대부분 바다 속의 미생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생물이 환경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해양 생물과 생태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본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해양생물학과 비슷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해양생물을 연구한다. 생물 해양학은 먹이 거미줄 측면에서 상향식 접근법을 취하는 반면 해양 생물학은 하향식 관점에서 바다를 연구한다. 생물 해양학은 플랑크톤에 대한 다양성(모형학, 영양 공급원, 운동성, 신진대사), 그들의 생산성과 그것이 전지구적 탄소 순환에서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분포(예식 및 생명 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또한 먹이 사슬에서 미생물의 역할과 인간이 바다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한다. === 화학 해양학 === 화학 해양학자들은 바다에서 발견되는 다른 화학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이들은 pH 측정기, 전기 전도도 측정기, 용존 이산화탄소 측정기와 같은 계측기를 물에 대한 화학물질의 소산율을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들은 또한 대기와 해안선, 그리고 해저에서도 입자 물질을 측정할 수 있다. 화학 해양학자들은 이러한 측정을 사용하여 지구에 대한 결론을 예측하고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주기, 패턴, 화학적 상호작용의 전문가들이다. 수백만년 전 바다가 어땠는지, 아니면 앞으로 몇 세기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는 이 지식으로 말이다. 현대 기술을 이용하여, 화학 해양학자들은 환경과 지구 전체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바다가 있는 상태 또한 나머지 환경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만약 바다가 변하고 있다면, 나머지 환경도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뀔 것이다. 화학 해양학자들은 주로 해양 산성화와 관련이 있다. 해양산성화는 공기 중에 탄소가 과잉일 때, 탄소가 바다로 용해되어 화학적 조성의 균형을 잃고 산도가 상승할 때 일어난다. ==== 해양 산성화 ==== 해양 산성화는 인위적인 이산화탄소(CO2) 배출에 의해 대기 중으로 발생하는 해양 pH의 감소를 설명한다. 바닷물은 약간 알칼리성이며 산업화 전 pH는 약 8.2였다. 보다 최근에, 인공적인 활동은 대기의 이산화탄소 함량을 꾸준히 증가시켰다; 추가된 이산화탄소의 약 30~40%가 해양에 흡수되어, 탄산을 형성하고 해양 산성화로 pH(현재 8.1 미만)를 낮춘다. pH는 2100년에는 7.7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해양동물의 골격에 중요한 요소는 칼슘이지만 탄산칼슘은 압력에 의해 용해되기 때문에 탄산칼슘의 껍질과 골격은 탄산염 보상 깊이 아래로 용해된다. 탄산칼슘은 pH가 낮아지면 수용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해양산성화는 굴, 바지락, 성게, 산호와 같은 석회 껍질이 있는 해양생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고, 탄산염 보상 깊이는 해수면에 더 가까워진다. 영향을 받은 플랑크톤 유기체는 익룡류, 동석류, 그리고 아미페라를 포함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먹이 사슬에서 중요하다. 열대 지방에서는, 산호가 탄산칼슘 골격을 만들 수 없게 되면서, 다른 암초 거주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현재 해양화학 변화의 속도는 지구 지질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보여 해양생태계가 가까운 미래의 변화 여건에 얼마나 잘 적응할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높은 온도와 낮은 산소 농도의 예상되는 추가 스트레스 요인들과 산성화의 조합이 바다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지질해양학 해양 지질학 또는 지질 해양학은 해저의 역사와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해저와 해안 지대에 대한 지구물리학적, 지질학적, 퇴적물학적, 고생물학적 조사를 포함한다. 해양 지질학은 지구물리학과 물리 해양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양 지질 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 해저 확산과 판구조론학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깊은 바다 바닥은 기본적으로 미개척의 마지막 개척지이며 군사(잠수함) 목표와 경제(석유 및 금속 채굴) 목표를 모두 지원하는 상세한 지도이다. === 물리해양학 === 물리적 해양학은 해양 내의 물리적 조건과 물리적 과정, 특히 해양의 움직임과 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리적 해양학은 해양학이 나뉘는 여러 하위 영역 중 하나이다. 다른 것들로는 생물, 화학, 지질 해양학 등이 있다. 물리적 해양학은 기술적이고 역동적인 물리적 해양학으로 세분될 수 있다. 서술적 물리적 해양학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유체 움직임을 설명하는 관찰과 복잡한 수치 모델을 통해 바다를 연구하려고 한다. 역동적 물리적 해양학은 주로 이론 연구와 수치 모델에 중점을 두고 유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들은 기상학과 함께 공유되는 지구 물리 유체 역학(GFD)의 큰 영역의 일부이다. GFD는 코리올리스 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공간적 및 시간적 척도에서 발생하는 흐름을 설명하는 유체 역학 하위 영역이다. ==== 해류 ==== {{본문|해류}} 해양학자들의 초기 해양 탐험 이래로, 해류와 온도 측정에 대한 연구가 주로 관심을 받았다. 조수, 코리올리 효과, 바람의 방향과 강도 변화, 염분, 온도 등이 해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열화칼린 순환(THC, 온도와 염분 함량을 가리키는 -haline)은 주로 바닷물의 밀도에 의존한다. 온도와 염도를 넘어 다른 주행요인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경계 뒤집기 순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 해양 열 함량 ==== 해양 열 함량(OHC)은 바다에 저장된 열을 가리킨다. 해양 열기의 변화는 열팽창 때문에 해수면 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양 온난화는 1971년부터 2010년까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에너지 축적량의 90%를 차지한다. === 고생대양학 === 고생물 해양학은 순환, 화학, 생물학, 지질학, 퇴적 패턴과 생물학적 생산성에 관한 지질학적 과거의 해양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환경 모델과 다른 대용물을 이용한 해양학 연구는 과학계가 과거 기후를 다양한 간격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지구 기후에서 해양 과정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고생대양학 연구는 고생대 기후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 [[한국해양학회]] * [[한국해양과학기술원]] * [[한국해양연구원]] * [[국립해양조사원]] * [[국립수산과학원]] *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 [[인천대학교]] * [[인하대학교]] * [[군산대학교]] * [[경북대학교]] * [[부경대학교]] * [[한국해양대학교]] * [[강릉원주대학교]] * [[제주대학교]] * [[전남대학교 수산해양대학]] * [[목포해양대학교]] == 각주 == {{각주}} {{전거 통제}} [[분류:해양학|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Anna Lindh 2002.jpg|섬네일|250px|안나 린드 (2002년)]] '''안나 린드'''({{llang|sv|Anna Lindh}}, 1957년 6월 19일 ~ 2003년 9월 11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환경부 장관, [[1998년]]부터 [[2003년]] 암살당할 때까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스톡홀름]] 태생이며, [[1982년]] [[웁살라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총선 이후에 [[예란 페르손]]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능력과 인기로 사회민주당에서 페르손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쇠데르만란드주]](Södermanland)의 주지사였던 보 홀름베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 암살 == 안나 린드는 [[2003년]] [[9월 10일]] 오후 4시 정각 직후에 스톡홀름 시내 누디스카 콤파니엣(Nordiska Kompaniet) 백화점에서 쇼핑 중 칼을 든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가슴과 배, 팔 등 급소 부위를 칼에 찔리고 말았다. 당시 관례에 따라 경호원은 곁에 없었으며, 공격직후 카롤린스카(Karolinska)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9시간에 걸친 1차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2차 수술에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5시 29분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암살범은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가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나 린드는 스웨덴에서 지난 10년 동안 암살된 두 번째 정치인이며, 19세기부터 따지면 3번째이다. 전 총리 [[올로프 팔메]]도 [[1986년]] 알 수 없는 범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린드는 생전에 스웨덴의 [[유로화]]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녀의 암살은 유로화 사용에 대한 국민투표(9월 14일)가 있기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났다. 암살 사건 이후에 유로화 도입 찬반 진영은 찬반 유세 활동을 중지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하여 스웨덴 국민은 유로화 채택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 같이 보기 == * [[조 콕스]] * [[올로프 팔메]]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 {{기본정렬:린드, 안나}} [[분류:1957년 출생]] [[분류:2003년 사망]] [[분류:스웨덴의 외무장관]] [[분류:스웨덴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웁살라 대학교 동문]] [[분류:스톡홀름 출신]] [[분류:스웨덴의 여자 외교관]] [[분류:2003년 살인 사건]] [[분류:여자 외무장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Infobox scientist | name = 에드워드 텔러 | image = EdwardTeller1958 fewer smudges.jpg | caption = 텔러 (1958년 사진) | birth_date = {{출생일|1908|1|15}} | birth_place =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다페스트]] | death_date = {{사망일과 나이|2003|9|9|1908|1|15}} | death_place =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 (캘리포니아주)|스탠퍼드]] | nationality = 미국 | fields = [[물리학]] | known_for = [[수소폭탄]] | alma_mater =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br />[[라이프치히 대학교]] | doctoral_advisor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br /> [[프리드리히 훈트]] | doctoral_students = [[양전닝]] | work_institution = [[괴팅겐 대학교]]<br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br />[[조지 워싱턴 대학교]]<br />[[맨해튼 계획]]<br />[[시카고 대학교]]<br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br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br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 awards = Harvey Prize (1975년) | signature = Edward Teller signature.svg }} '''에드워드 텔러'''({{lang|en|Edward Teller}}, {{llang|hu|Teller Ede|텔레르 에데}}, [[1908년]] [[1월 15일]] ~ [[2003년]] [[9월 9일]])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유대계]] [[미국]] 물리학자이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 생애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7-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헝가리를 떠나 [[독일]]에서 고등교육을 받는다.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괴팅겐]]에서 2년을 보내고, [[1934년]]에 유대인 구출 위원회(Jewish Rescue Committee)의 도움으로 독일을 탈출한다. 잠시 영국에 머물다가, [[닐스 보어]]가 있던 [[코펜하겐]]에서 1년을 지낸다. [[1935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41년]]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는 [[조지 가모프]]를 만난다. [[1958년]]부터 [[1960년]]에 걸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근무한다. == 맨해튼 계획 == [[1942년]] 브릭스 위원회(Briggs committee)에서 근무하면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 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문에 소속되어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폭탄에서 핵융합을 이용하는 핵폭탄([[수소폭탄]])으로의 발전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 수소폭탄 == [[1946년]]에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시카고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49년]]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핵폭탄 개발 성공 이후 [[1950년]] 로스 앨러모스로 돌아와, 수소폭탄 계획에 참여한다. 그와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실제 작동하는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출하였지만, 그 계획을 지휘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1952년]] 오늘날의 [[마셜 제도]]에서 최초의 수소폭탄인 [[아이비 마이크]]가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같은 해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 1952년 새로 설립된 캘리포니아 대학 방사선 연구소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지부에 참여하게 된다. == 오펜하이머와의 갈등 == [[1954년]] 텔러는 보안 청문회(security clearance hearings) 때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난하여 사이가 나빠진다. 둘은 수소 폭탄의 개발과 [[핵확산]]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텔러는 오펜하이머와 달리 정부의 수소 폭탄 개발을 지지했고, 모든 핵무기를 [[유엔]]의 관리하에 두자는 오펜하이머의 제안에도 회의적이었다.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텔러는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종전 이후 행적을 증언하며 공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문회는 텔러의 뜻대로 끝났지만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ref name=":0" /> == 평화적 핵폭발 == 텔러는 [[평화적 핵폭발]]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핵무기의 실용적 용도를 찾기 위해 핵실험을 계속 하도록 설득했다. 그가 내세운 평화적 핵폭발의 예시에는 [[석유]] 탐사, [[운하]] 건설, 기상 조절 등이 있었다. 텔러의 주장에 설득된 미국 정부는 [[보습 기획]]을 실시했다.<ref name=":0">{{웹 인용|url=https://www.wagingpeace.org/edward-teller-the-real-dr-strangelove-a-book-review/|제목=Edward Teller: The Real Dr. Strangelove- A Book Review|성=Wittner|이름=Lawrence|날짜=2005-01-15|언어=en-US|확인날짜=2023-07-28}}</ref> == 전략방위구상 == 그는 지치지 않는 핵개발론의 옹호자로 지속적인 핵개발을 주장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 적국의 핵 미사일을 요격할 목적으로 [[전략방위구상|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일명 [[스타워즈]] 계획을 논의했을 당시 그 역시 SDI 체계를 지지했다. 비현실적이고 너무 비싸다는 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비판에도 계속되던 SDI는 1993년 이미 300억 달러의 예산을 쓴 후 중단됐다.<ref>{{웹 인용|url=https://www.history.com/news/reagan-star-wars-sdi-missile-defense|제목=Why Reagan's 'Star Wars' Defense Plan Remained Science Fiction|날짜=2019-01-22|언어=en|확인날짜=2023-07-28}}</ref> == 말년과 사망 == 1975년 퇴직 후 죽을 때까지 리버모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었으며, 또한 후버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0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대중매체 ==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4년 풍자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스트레인지러브의 모델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전기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오펜하이머]]에서는 [[베니 사프디]]가 연기했다. 1991년 "[[평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고자 한 평생의 노력"을 인정받아 [[이그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했다. == 각주 == {{각주}} == 저서 == * 《Conversations on the Dark Secrets of Physics》 (1991년) * 《Better a Shield Than a Sword》 (1987년) * 《Pursuit of Simplicity》 (1980년) * 《Energy from Heaven and Earth》 (1979년)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수학계보|id=105772}} {{전임후임 |전임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후임자 =[[존 F. 케네디]] |대수 =34 |직책 =[[타임 올해의 인물]] |임기 =[[파일:Time Magazine logo.svg|가운데|x30px]]1960년 }} {{타임 올해의 인물}} {{전거 통제}} {{기본정렬:텔러, 에드워드}} [[분류:1908년 출생]] [[분류:2003년 사망]] [[분류:미국의 물리학자]] [[분류:헝가리의 물리학자]] [[분류:미국의 불가지론자]] [[분류:헝가리의 불가지론자]] [[분류:헝가리계 미국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맨해튼 계획 관련자]] [[분류:핵물리학자]] [[분류:이그 노벨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발명가]] [[분류:헝가리의 발명가]]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분류:괴팅겐 대학교]] [[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교수]]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헝가리 유대인]] [[분류:헝가리의 장애인]] [[분류:슬로바키아계 미국인]]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부다페스트 출신]] [[분류: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중립 필요|날짜=2024-09-13}} {{요약 필요|날짜=2024-09-13}} {{음악가 정보 |이름 = 브라이언 메이 <Br> Brian May |원어이름 = |그림 = TaylorHawkTributeWemb030922 (208 copped).jpg |그림크기 = |그림설명 = 2022년 메이의 공연 |본명 = 브라이언 해럴드 메이<br />{{lang|en|Brian Harold May}} |예명 = |출생일 = {{출생일과 나이|1947|7|19}} |출생지 = [[잉글랜드]] [[미들섹스]] [[햄프턴 힐]] |사망일 = |사망지 = |국적 = |거주지 = |직업 = [[음악가]], [[음악 프로듀서]], [[천체물리학|천체물리학자]], [[작가]] |장르 = [[록 음악|록]],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악기 = [[기타]], [[보컬]], [[키보드 (악기)|키보드]] |활동시기 = 1963년 ~ 현재 |배우자 = 크리시 멀런 (1974-1988; 이혼)<br />애니타 돕슨 (2000년 결혼) |가족 = 자녀 3명 |종교 = |레이블 = [[할리우드 레코드|할리우드]], [[팔로폰]] |소속사 = |소속그룹 = [[퀸 (밴드)|퀸]] |관련활동 = [[스마일 (밴드)|스마일]], [[피노미나]], [[블랙 사바스]], [[퀸 + 폴 로저스]], [[애덤 램버트]], [[레이디 가가]] 등 |서명 = |웹사이트 = {{URL|brianmay.com}} }} [[파일:Hannover7908.jpg|섬네일|1979년 퀸의 투어에서]] '''브라이언 해럴드 메이 [[Sir|경]]'''({{Llang|en|Sir<ref name=Sir>{{저널 인용 |성= |이름= |날짜=2022-12-31 |제목=Supplement No. 1: New Year Honours List - United Kingdom |번역제목= |url=https://www.thegazette.co.uk/London/issue/63918/supplement/N2 |언어=en |저널=[[런던 가제트]] |위치= |출판사= |호=63918 |쪽=N2 }}</ref> Brian Harold May, [[대영 제국 훈장|CBE]]}}, [[1947년]] [[7월 19일]] ~ )은 [[영국]]의 [[음악가]]이자 [[천체물리학자]]이다. 록 밴드 [[퀸 (밴드)|퀸]]의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 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제4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 총장을 지냈다. == 음악가 경력과 특징 ==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그만의 기타 음색은 많은 사람들이 카피를 시도하지만 완벽히 같은 음색을 따라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는 다양한 종류의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로 레드스페셜을 연주한다. 레드스페셜은 그가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와 함께 디자인한 기타로, 18세기에 화로로 썼던 나무로 만들었다. 레드스페셜에 대한 그의 설명을 《Queen In Their Own Words》(믹 마이클 저, 1992)의 62페이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 큰 넥을 좋아합니다 - 두껍고, 평평한 거요. 핑거보드는 러스틴 플라스틱 코팅으로 칠했고요. 트레몰로는 자전거 안장에 다는 주머니로 만들었는데, 끝부분의 놉은 뜨개질용 바늘로, 스프링은 낡은 오토바이의 벨브 스프링으로 만들었답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독창성은 메이가 오묘하고 독특한 사운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왔다. 예를 들어 〈Procession〉이란 노래에선 오케스트라를 흉내낼 수 있었고, 〈Get Down, Make Love〉에서는 [[신시사이저]]로 착각할만한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Good Company〉에선 [[트롬본]], [[피콜로]] 등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제 기타와 함께 플라스틱 [[피크]] 대신에 영국의 6펜스 동전을 사용하는데, 동전이 딱딱하기 때문에 연주하면서 컨트롤하기에 더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는 어린 시절에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의 팬이었는데, 이들은 메이가 거칠고 빠른 곡을 즐겨 연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퀸의 코러스에서 그는 보통 낮은 음의 배킹 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ome Day One Day〉, 〈All Dead, All Dead〉, 〈Leaving Home Ain't Easy〉, 〈’39〉와 같은 노래에선 직접 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후, 2개의 솔로 앨범(《Back to the Light》, 《Another World》)을 내기도 했다. == 천체물리학자로서의 경력 ==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하여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행성간 먼지의 속도에 따른 빛의 반사에 대해 연구하였다. 1970년대 초 퀸 활동이 성공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가, 2007년 10월 [[황도광]]에 대한 박사 논문(A Survey of Radial Velocities in the Zodiacal Dust Cloud)을 완성하여 2008년 5월 14일 졸업하였다. 2007년 11월 17일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어 2008년 취임하였고, 2013년까지 재임하였다. == 사생활 == 메이는 동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는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마약이나 문란한 여성 관계 등과도 거리가 멀었다. 술은 아주 가끔 마시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네스]], 가장 좋아하는 리큐르는 [[베일리스]]다. 그는 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었다. 그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프레디의 건강 악화로 라이브 투어까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가 애연가였기 때문에 메이는 담배를 싫어하며 특히 실내에서의 흡연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종종 글 중에 내비치곤 한다. 메이는 2000년 11월 18일 배우 애니타 돕슨과 재혼했으며,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다. == 음반 목록 == '''솔로 음반''' * ''[[Back to the Light]]'' (1992) * ''[[Another World (브라이언 메이의 음반)|Another World]]'' (1998) * ''[[Furia (음반)|Furia]]'' (2000) - [[사운드트랙]] == 서훈 == 2005년 12월 6일, 브라이언 메이는 음악 산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ref group="주">2005년 6월서훈명단({{lang|en|2005 Birthday Honours}})에 등재</ref><ref>{{저널 인용 |성= |이름= |날짜=2005-06-11 |제목=Supplement No. 1: Birthday Honours List - United Kingdom |번역제목= |url=https://www.thegazette.co.uk/London/issue/57665/supplement/8 |언어=en |저널=[[런던 가제트]] |위치= |출판사= |호=57665 |쪽=B8 }}</ref> 2023년, 음악에서의 공로와 함께 동물복지 등 여러 영역에서의 자선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대상자로 올랐다.<ref group="주">2023년 신년서훈명단({{lang|en|2023 New Year Honours}})에 등재</ref><ref name=Sir /> == 각주 == === 내용주 === <references group="주" /> === 참조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en}} {{공식 웹사이트}} * {{IMDb 이름|0006190}} {{퀸}} {{전거 통제}} {{기본정렬:메이, 브라이언}} [[분류:브라이언 메이| ]] [[분류:1947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퀸의 일원]] [[분류:잉글랜드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분류:잉글랜드의 록 가수]] [[분류:잉글랜드의 록 기타 연주자]] [[분류:잉글랜드의 록 피아노 연주자]] [[분류:잉글랜드의 록 키보드 연주자]] [[분류:잉글랜드의 헤비 메탈 음악가]] [[분류:영국의 하드 록 음악가]] [[분류:잉글랜드의 물리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천문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대학 교수]] [[분류:영국의 저술가]] [[분류:영국의 기사]] [[분류: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분류:스코틀랜드계 잉글랜드인]] [[분류:런던 출신 음악가]] [[분류: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동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낡음}} [[파일:Treo.jpg|300px|섬네일|right|팜 [[개인 정보 단말기|PDA]]들. 오른쪽부터 트레오, [[클리에]], 팜 Vx, 팜 IIIe ]] '''팜'''('''palm''')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개인 정보 단말기|PDA]]이다. 저렴한 가격, 휴대성과 실용성이 두드러진다. [[2010년]] [[4월 28일]]에 [[HP (기업)|HP]]는 팜을 [[미국 달러|US $]]12,000,000,000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ref>http://www.usatoday.com/tech/news/2010-04-28-hp-palm_N.htm</ref> 단종 모델 "파일럿 5000"을 비롯한 초기 모델에서는 '''팜 파일럿'''({{llang|en|Palm Pilo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팜 파일럿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 역사 == 파일럿({{llang|en|Pilot}})은 [[1996년]] 팜 컴퓨팅({{llang|en|Palm Computing}}, 팜 컴퓨팅은 U.S. 로보틱스의 한 사업부였고 이후 U.S. 로보틱스는 3Com에 합병된다)사에서 생산된 첫 번째 세대의 PDA였다. 출시 당시 파일럿은 간결한 디자인과 수많은 [[응용 소프트웨어]] 덕분에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만년필]]로 유명한 [[파이롯트]]에서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으로 인해 [[1997년]] 두 번째 세대인 팜 파일럿이 탄생하였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팜과 [[PDA]]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파일럿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제프 호킨스와 도나 더빈스키, 그리고 에드 콜리건이었다. 이들은 팜 컴퓨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의 원래 목적은 [[그래피티]]({{llang|en|Graffiti}})라 불리는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팜 컴퓨팅이 3Com에 합병되자 설립자들은 팜 제품에 대해 깊게 관여하지 못하게 된 것에 분노했고, 1998년 6월 3Com을 떠나 핸드스프링({{llang|en|Handspring}})사를 설립하게 된다. 호킨스는 팜을 떠날 때 [[팜 OS]]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팜 호환 기종인 핸드스프링 [[바이저]]({{llang|en|Visior}})를 생산하였다. 3Com의 팜 컴퓨팅 사업부는 이후 [[2000년]] 팜({{llang|en|Palm, Inc.}})사로 분사하였고, 이후 [[핸드스프링]]과 합병하였다. [[2003년]]에는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는 [[팜원]]({{llang|en|PalmOne}})과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하는 [[팜소스]]({{llang|en|PalmSource}})로 분할되었다. [[2005년]]에 팜원은 다시 팜으로 개명하였고, [[팜소스]]는 일본의 [[액세스 (기업)|액세스]]({{llang|en|Access}})사가 인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팜 기기들은 초기 모델에서 점점 진화하였다. 초기 모델은 당시에 인기 있었던 [[모토로라 드래곤볼]] 프로세서({{llang|en|DragonBall Processor}})를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ARM 아키텍처]]를 채택한 모델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또한 [[개인용 컴퓨터|PC]]와의 연결도 직렬 [[RS-232C]] 케이블에서 [[USB]] 케이블로 바뀌어 동기화 속도도 향상되었고 심지어는 PC의 [[하드 드라이브]]로 인식되게끔 하는 라이프 드라이브({{llang|en|LifeDrive}}) 모델까지도 생산되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스마트폰]]으로의 진화도 본격화되어 트레오 600/650({{llang|en|Treo 600/650}}) 모델이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650은 [[휴대폰]]과 통합되어 [[스마트폰]] 형태를 가진 모델로 휴대전화 기능은 물론, 전자우편, SMS 등의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97년]] 말 [[한메소프트]]가 파일럿 5000을 최초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세스컴]], [[코오롱정보통신]], [[팜잇]]에서 수입, 판매하였으나 대부분 사업을 철수하였다. == 모델 == === 파일럿 1000/5000 === [[파일:PalmPilot5000.jpg|섬네일|right|파일럿 5000]] [[1996년]] 2분기에 발표되었고, [[팜 OS]]가 탑재된 팜 파일럿의 최초 [[PDA]] 모델이다. [[한메소프트]]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최초 수입된 모델이 파일럿 5000이었다. * [[운영 체제]]: [[팜 OS]] 1.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 디스플레이: 160 X 160 [[픽셀]] [[해상도]] * [[메모리]]: 128KB(1000)/512KB(5000)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데스크톱 PC: [[윈도우 3.1]] 또는 [[윈도우 95]]/ 매킨토시 지원 === 팜 파일럿 퍼스널/프로페셔널 === [[1997년]] 1분기에 팜 파일럿 퍼스널과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을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인 파일럿 5000에 [[백라이트]] 기능을 추가하고, [[메모리]] 용량을 늘렸다.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의 경우 최초로 [[TCP/IP]]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과 [[전자우편]] 연동기능을 지원하였다. * [[운영 체제]]: [[팜 OS]] 2.0 / 2.0.5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 [[메모리]]: 512KB(퍼스널)/1MB(프로페셔널)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크기: 길이 4.7 인치, 폭 3.2 인치, 두께 0.7 인치, 무게 6.0 온스 === 팜 III === [[1998년]] 1분기에 [[적외선 통신]]을 통한 비밍({{llang|en|Beaming}}) 기능을 갖춘 팜 파일럿의 3세대 [[PDA]]인 팜 III가 발표되었다. 팜 III는 [[플래시롬]]({{llang|en|FlashROM}})을 탑재한 최초의 모델이었다. 이에 따라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졌다. * [[운영 체제]]: [[팜 OS]] 3.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 [[메모리]]: 2MB *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출시가격: $399.99 === 팜 IIIx === [[1999년]] 발표되었다. 직전의 팜 III 모델과의 차이점은 메모리뿐이다. * [[운영 체제]]: [[팜 OS]] 3.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16MHz * [[메모리]]: 4MB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 팜 V/Vx === 팜 V모델은 [[1999년]] 1분기에, Vx 모델은 같은 해 4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파일럿 모델 중에 가장 뛰어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CEO들이 많이 사용하여 CEO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 [[운영 체제]]: [[팜 OS]] 3.3(V)/3.5(Vx) (Vx의 경우 초기 모델은 3.3)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V)/20MHz(Vx) * [[메모리]]: [[램]] 2MB(V)/8MB(Vx), [[플래시롬]] 2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4비트 그레이, 백라이트(Backlit) * [[무선통신]]: 적외선(IrDA) 통신 지원 * [[전지|배터리]]: [[리튬이온 충전지 | 리튬이온(Li-Ion) 충전지]] 3.3V * 크기: 길이 11.4cm (4.5인치), 폭 7.8cm (3.1인치), 두께 1.0cm (0.4인치), 무게 113g (4온스) === 팜 VII === 팜 최초의 무선 연결이 가능한 모델이다. 오른쪽 후면에 안테나가 있어 이를 플립식으로 올리면 무선통신이 가능해진다. 무선통신 서비스는 일반 TCP/IP 기반의 서비스가 아닌 [[웹클리핑]]({{llang|en|WebClipping}})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였다. 미국에서만 이용이 가능했다. 월 $9,99의 표준서비스(50KB 제공)와 $24.99의 확장서비스(150KB 제공)가 있었다. * [[운영 체제]]: [[팜 OS]] 3.2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 [[메모리]]: [[램]] 2MB, [[플래시롬]] 2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8.3cm(5.25인치), 폭 13.3cm(3.25인치), 두께 1.9cm(0.75인치), 무게 190g(6.7온스) * 출시가격: $599.00 === 팜 IIIe === [[1999년]] 3분기에 팜 III 시리즈 중 저가 모델로 발표되었다. 플래시롬이 없어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이후에 발표된 팜 IIIe SE(Special Edition) 모델은 투명 외장으로 되어 있다. * [[운영 체제]]: [[팜 OS]] 3.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 [[메모리]]: [[램]] 2MB. [[플래시롬]] 없음.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출시가격: $149 === 팜 IIIxe === [[파일:Palm IIIxe PDA.jpg|섬네일|right|팜 IIIxe]] 팜 III 모델 시리즈와 메모리용량을 제외하고는 같은 사양을 가졌으며, [[2000년]] 1분기에 발표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3.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없음.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팜 IIIc === [[파일:Palm IIIc.jpg|섬네일|right|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스크린 모델: 팜 IIIc]] 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디스플레이를 갖춘 모델이다. [[2000년]] 1분기에 출시되었다. [[1999년]] [[모토로라]]는 256컬러를 지원하고 33MHz에서 동작하는 VZ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발표했지만, 팜 IIIc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 [[운영 체제]]: [[팜 OS]] 3.5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 20MHz *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2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TFT]] 256 컬러 디스플레이 * [[전지|배터리]]: [[리튬이온]] 내장 충전지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출시가격: $449.00 === 팜 VIIx === 팜 VII에 이은 후속모델로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사양이 확장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3.3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20MHz * [[메모리]]: [[램]] 8MB, [[플래시 메모리]] 2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백라이트(Backlit),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8.3cm(5.25인치), 폭 13.3cm(3.25인치), 두께 1.9cm(0.75인치), 무게 190g(6.7온스) * 출시가격: $499.00 === 팜 m100 ===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IIIe를 대체하는 저가 모델로 지금까지의 팜 파일럿 모델과는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스틱 플립커버가 있어 액정 화면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작은 액정 화면은 단점으로 지적되었었다. 아울러 [[개인용 컴퓨터|PC]]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은 제공되었으나 크래들({{llang|en|Cradle}})이라 불리는 거치대는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 [[운영 체제]]: [[팜 OS]] 3.5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 [[메모리]]: [[램]] 2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11.84cm(4.55인치), 폭 7.92cm(3.12인치), 두께 1.83cm(0.72인치), 무게 124.7g(4.4온스) * 출시가격: $149.00 === 팜 m105 === [[2001년]] 1분기에 발표되었고, 이전 모델인 팜 m100에 비해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 또한 크래들도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3.5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MC68EZ328) 16MHz * [[메모리]]: [[램]] 8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11.84cm(4.55인치), 폭 7.92cm(3.12인치), 두께 1.83cm(0.72인치), 무게 124.7g(4.4온스) === 팜 m500/m505 === 팜 파일럿의 새로운 고급모델로 [[2001년]] 팜 m500과 팜 m505가 나란히 발표되었다. 두 모델의 차이는 디스플레이의 컬러 표시 여부이지만, 팜 파일럿 최초로 [[SD 카드|SD]]와 [[멀티미디어카드]](MMC)가 지원되는 확장슬롯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 팜 파일럿의 흥행 모델이었던 팜 V 시리즈의 뒤를 잇는 외형을 가졌으나 출시 당시 가격이 비싼 편이었고, 디스플레이 화면이 어둡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이 모델부터 팜의 새로운 PC 연결방식인 범용커넥터({{llang|en|Universal Connector}})가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해 [[2001년]] [[코오롱정보통신]]이 팜 m500과 m505를 정식으로 수입판매했었다. 한글 입출력을 위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한팁]]({{llang|en|HanTip}}) 3.1이 제공되었다. [[대한민국|한국]] 출시가는 m500이 56만원, m505가 66만원, 저가 모델로 m105가 25만원이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8 MB. [[플래시 메모리]] 4MB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m500)/65,000+ 컬러 스크린(m505)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llang|en|Lithium Polymer}}) *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 크기(m500): 길이 11.41cm(4.49인치), 폭 7.67cm(3.02인치), 두께 1.17cm(0.46인치), 무게 118g(4.162온스) * 크기(m505): 길이 11.38cm(4.48인치), 폭 7.70cm(3.03인치), 두께 1.27cm(0.50인치), 무게 136g(4.8온스) * 출시가격: $399.00(m500)/$449.00(m505) === 팜 m125 === [[2001년]] 1분기에 에 발표되었다.이전 모델인 팜 m100/m105와 같은 외형을 가졌으나 확장슬롯과 함께 [[USB]]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8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확장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전지|배터리]]: AAA [[건전지]] 2개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4.82인치, 폭 3.1인치, 두께 0.872인치, 무게 5.31온스 * 출시가격: $249.00 === 팜 m130 === [[파일:M130.jpg|섬네일|right|팜 m130]] [[2002년]] 1분기 출시되었으며, m125와 같은 외형을 가졌지만, 컬러 스크린을 지원했다. 컬러를 지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던 모델이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8MB, [[롬]] 8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 확장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머 충전지]]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11.38cm(4.8인치), 폭 7.70cm(3.1인치), 두께 1.27cm(0.9인치), 무게 157g(5.4온스) * 출시가격: $279.00 *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 팜 i705 === [[2002년]] 1분기에 팜 VII의 후속 모델로 발표되었다. 무선데이터 통신은 북미지역에서만 서비스가 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8MB, [[플래시롬]] 4MB * 디스플레이: 160 X 160 해상도, 흑백 LCD, 백라이트 * 확장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크기: 길이 4.65인치, 폭 3.06인치, 두께 0.61인치, 무게 5.9온스 * 출시가격: $449.00 === 팜 m515 === 일종의 팜 m505 개선모델로 [[2002년]] 발표되었다. 가장 큰 개선점은 디스플레이가 더 밝아지고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 [[운영 체제]]: [[팜 OS]] 4.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16 MB. [[플래시롬]] 4MB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 [[어댑터]]: 입력 120VAC 60Hz 11W, 출력 5.0VDC 1.0A * 크기: 길이 11.38cm(4.48인치), 폭 7.70cm(3.03인치), 두께 1.27cm(0.50인치), 무게 136g(4.8온스) * 출시가격: $399.00 === 팜 자이어(Zire) === 팜의 새로운 저가 모델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외형을 가졌다.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이전 저가 모델인 m100이나 팜 IIIe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다. 확장슬롯의 부재와 백라이트가 없음에도 과거 "단순한 팜(Simply Palm)"을 잘 지킨 모델이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EZ 16MHz * [[메모리]]: [[램]] 2MB. [[마스크롬]] 2MB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llang|en|Lithium Ion}})(3.7V, 600mAh) * 크기: 길이 4.4인치, 폭 2.9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3.8온스 * 출시가격: $99.00 === 텅스텐(Tungsten) T=== 팜 최초로 슬라이드 방식과 [[팜 OS]] 5.0 버전을 채택한 모델이다. [[텅스텐]] T에서 T는 [[텅스텐]]({{llang|en|Tungsten}})을 의미하며,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320 X 320의 높은 고해상도와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양으로 출시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0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OMAP]]1510 ([[ARM 아키텍처|ARM]]925 코어(144MHz) + C55x [[디지털 신호 처리장치|DSP]] (200MHz)) * [[메모리]]: [[램]] 16MB. [[플래시롬]] 4MB(US), 8MB(Int'l)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 오디오: 스피커, 스테레도 헤드셋 잭, 모노 마이크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 크기: 길이 4.0인치(최대 4.8인치), 폭 3.0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5.6온스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 텅스텐(Tungsten) W === 텅스텐 T와 함께 출시되었다. 모델명에서 W가 무선({{llang|en|Wireless}})의 의미하듯이 [[이동전화]]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음성통화와 [[문자 서비스]] 기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음성 통화는 헤드셋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동전화 서비스는 [[AT&T Wireless]]를 통해 제공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4.1.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모토로라 드래곤볼]] VZ 33MHz * [[메모리]]: [[램]] 16MB. [[플래시롬]] 8MB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 오디오: 스피커, 스테레오 헤드셋 잭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GSM]]/[[GPRS]] 음성/데이터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500mAh) * 크기: 길이 4.8인치, 폭 3.07인치, 두께 0.65인치, 무게 6.4온스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팜 자이어(Zire) 71 === 팜의 보급형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으나 [[블루투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OMAP]]310([[ARM 아키텍처|ARM]]) 144MHz * [[메모리]]: [[램]] 16MB (13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 스크린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셋 잭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00mAh) *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0.3메가픽셀) * 크기: 길이 4.5인치, 폭 2.9인치, 두께 0.67인치, 무게 5.3온스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출시가격: $299.00 === 텅스텐(Tungsten) C === 팜 최초로 무선랜(Wi-Fi)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팜 최초로 인텔 CPU가 사용된 모델이기도 하다. 큰 배터리 용량과 메모리 용량, 그리고 미려한 화면이 장점이나 2.5mm 모노 헤드셋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인텔]] PXA255 [[XScale]] 400MHz * [[메모리]]: [[램]] 64MB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TFT 컬러 스크린 * 오디오: 모노 스피커, 2.5mm 모노 헤드셋 잭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IEEE 802.11]]b [[무선랜]](Wi-Fi)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500mAh) * 크기: 길이 4.8인치, 폭 3.07인치, 두께 0.65인치, 무게 6.3온스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출시가격: $499.00 === 텅스텐(Tungsten) T2 === 텅스텐 T를 잇는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체적으로 텅스텐 T와 사양이 유사하나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고, 화질이 개선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1510 ([[ARM 아키텍처|ARM]]925 코어(144MHz) + C55x [[디지털 신호 처리장치|DSP]] (200MHz)) * [[메모리]]: [[램]] 32MB, [[플래시롬]] 8MB(US)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TFT 컬러 스크린 * [[컴퓨터 오디오|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 크기: 길이 4.0(4.8인치)인치, 폭 3.0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5.6온스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 트레오(Treo) 600 === 휴대전화 기능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핸드스프링]]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같은 해 10월 핸드스프링과 팜의 합병으로 팜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팜원에서 계속 판매되었다. 휴대전화 기능과 PDA가 합쳐진 [[PDA폰]]은 이전 모델에서도 종종 출시되었으나 이 모델만큼 시장에서 성공한 모델은 없었다. 팜 파일럿 계열의 PDA를 다시 중흥시킨 모델이다. 트레오 600 모델도 휴대전화 표준에 따라 세분되어 있는데, [[싱귤라 와이어리스]]({{llang|en|Cingular Wireless}}), [[T-모바일]]({{llang|en|T-Mobile}}) 등은 [[GSM]]/[[GPRS]] 모델을 지원하고, [[스프린트]]({{llang|en|Sprint}})에서 [[CDMA]] 모델을 지원한다. * [[운영 체제]]: [[팜 OS]] 5.2.1H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1510 ([[ARM 아키텍처|ARM]]925 코어(144MHz) + C55x [[디지털 신호 처리장치|DSP]] (200MHz)) * [[메모리]]: [[램]]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CSTN 컬러 스크린 * [[컴퓨터 오디오|오디오]]: 폰 스피커/마이크,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MIDI 전화 벨소리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GSM/GPRS 음성/데이터 또는 CDMA 음성/데이터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3.7V, 900mAh) * 크기: 길이 11.2cm, 폭 6.0cm, 두께 2.2cm, 무게 168g(GSM)/175g(CDMA)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 (0.3 메가픽셀) * 출시가격: $700 === 팜 자이어(Zire) 21 ===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되었으며 [[팜 OS]] 5를 채택한 새로운 저가 자이어 모델이다. 자이어 21, T3, TE는 모두 [[10월 1일]]에 출시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311 [[ARM 아키텍처|ARM]] (126MHz) * [[메모리]]: [[램]] 8MB (7.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16단계 그레이스케일 * [[컴퓨터 오디오|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PC 연결: 미니 [[USB]]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 크기: 길이 4.4인치, 폭 2.9인치, 두께 0.6인치, 무게 3.8온스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키패드: 2개의 하드버튼, 상하 스크롤 버튼 * 출시가격: $99 === 텅스텐(Tungsten) T3 === 텅스텐 T2 이후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된, 가상 그래피티와 320X480 해상도의 LCD를 채택한 고급 모델이다. 화면 회전기능인 가로보기와 세로보기가 지원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400MHz [[인텔]] [[XScale]] * [[메모리]]: 64MB (5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슬라이드를 닫았을 때), 320X480(슬라이드를 열었을 때)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900mAh) * [[컴퓨터 오디오|오디오]]: 내장 마이크,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 크기: 길이 4.3 인치(닫았을 때)/5.2인치(열었을 때), 폭 3.0 인치, 두께 0.66 인치, 무게 5.5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텅스텐(Tungsten) E === [[2003년]] [[10월 1일]] 자이어 71, T3와 함께 발표되었다. 저렴한 가격임도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와 단순한 외형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모았다. * [[운영 체제]]: [[팜 OS]] 5.2.1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텍사스인스투르먼트]] [[OMAP]]311 [[ARM 아키텍처|ARM]] (126MHz) * [[메모리]]: 32MB (28.6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3.7V, 840mAh)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 PC 연결: [[USB]] * 크기: 길이 4.5 인치, 폭 3.1 인치, 두께 0.5 인치, 무게 4.6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출시가격: $199.00 === 팜 자이어(Zire) 31 === [[파일:PalmOne Zire31.JPG|섬네일|right|팜 자이어 31]] [[2004년]] [[4월 28일]]에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이었던 자이어와 자이어 21에 비해 SD/MMC 확장 슬롯을 지원하고 160X160 해상도이지만, 컬러 스크린을 장착하였다. 이전 모델과는 달리 [[인텔]]계열의 CPU를 사용하였다. * [[운영 체제]]: [[팜 OS]] 5.2.8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200MHz [[인텔]] [[ARM 아키텍처|ARM]] CPU * [[메모리]]: 16MB (1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STN]] 컬러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00mAh)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 PC 연결: 미니 [[USB]] * 크기: 길이 11.17cm(4.4 인치), 폭 7.36cm(2.9 인치), 두께 1.52cm(0.6 인치), 무게 116.23g(4.1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출시가격: $149.00 === 팜 자이어(Zire) 72 === [[2004년]] 2분기에 출시되었다. 자이어 71의 개선 모델로 여러 부분에서 사양이 늘어났으며, [[블루투스]] 기능이 내장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5.2.8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12MHz [[인텔]] PXA270 [[ARM 아키텍처|ARM]] CPU * [[메모리]]: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950mAh)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PC 연결: 미니 [[USB]] * [[디지털 카메라]]: 1280 x 920 해상도(1.2메가픽셀), 2배 디지털 줌, 동영상 기능(320 x 240 해상도) * 크기: 길이 11.6cm(4.6 인치), 폭 7.5cm(2.95 인치), 두께 1.7cm(0.67 인치), 무게 136g(4.8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출시가격: $299.00 === 텅스텐(Tungsten) T5 === 텅스텐 T3의 후속 모델로 [[2004년]] [[10월 4일]] 출시되었다. 외형은 텅스텐 E와 유사하지만, 기존 모델들과의 큰 차이는 160MB의 [[플래시램]]({{llang|en|flash-RAM}})을 가지고 있어 [[데스크톱 PC]]와 연결되었을 때 [[USB 드라이브]]로서 동작한다는 것이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416MHz [[인텔]] [[XScale]] * [[메모리]]: 256MB (215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플래시램]] 160MB *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300mAh)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 PC 연결: [[USB]] * 크기: 길이 4.76 인치, 폭 3.08 인치, 두께 0.61 인치, 무게 5.1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출시가격: $399.00 === 트레오(Treo) 650 === 트레오 600의 뒤를 이은 모델로 [[2004년]] [[10월 25일]]에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보다 향상된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용량,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큰 인기를 끌었던 모델이었다. 휴대전화 서비스는 CDMA의 경우 [[스프린트]]({{llang|en|Sprint}})에서, GSM의 경우 [[싱귤라 와이어리스]]({{llang|en|Cingular Wireless}})와 AT&T Wireless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5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12MHz [[인텔]] PXA270 [[ARM 아키텍처|ARM]] CPU * [[메모리]]: [[램]] 32MB (24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컬러 TFT 컬러 스크린 * 오디오: 폰 스피커/마이크, 2.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MIDI 전화벨소리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GSM/GPRS 음성/데이터 또는 CDMA 음성/데이터 * 확장 슬롯: 1개의 [[SD 카드|SD]]/[[멀티미디어카드|MMC]] 슬롯 * PC 연결: [[USB]] * [[전지|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 (1800mAh) * 크기: 길이 11.3cm, 폭 5.9cm, 두께 2.3cm, 무게 178g * 어댑터: [[교류|AC]] 어댑터 120VAC, 60Hz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디지털 카메라]]: 640 x 480 해상도 (0.3 메가픽셀), 2배 디지털 줌, 반사경, 비디오 녹화기능 === 텅스텐(Tungsten) E2 ===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텅스텐 E의 후속모델로 블루투스와 비휘발성 메모리가 추가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200MHz [[인텔]] [[XScale]] CPU * [[메모리]]: 32MB (26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디스플레이: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 오디오: 모노 스피커,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 알람: 진동, 사운드, LED 알람 * PC 연결: [[USB]] * 크기: 길이 4.5 인치, 폭 3.1 인치, 두께 0.59 인치, 무게 4.7 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출시가격: $199 === 팜 라이프드라이브(LifeDrive) === [[파일:LifeDrive.jpg|섬네일|right|[[하드디스크]]가 내장된 팜 라이프드라이브]] 팜 모델 최초로 소형 [[하드디스크]]인 4GB [[마이크로드라이브]]가 내장된 모델이다.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으며, [[블루투스]]와 [[무선랜]]이 내장된 최상급 모델이다. 정식 명칭은 팜 라이프드라이브 모바일 매니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연결하여 [[USB 드라이브]]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사양의 모델이나, 기존의 팜 모델에 비해 동작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8 * [[메모리]]: 32MB [[램]], 4GB [[마이크로드라이브]](3.85G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416 MHz [[인텔]] [[XScale]] [[ARM 아키텍처|ARM]] CPU *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블루투스]] 1.1 지원, [[IEEE 802.11]]b [[무선랜]](Wi-Fi) * 오디오: 스피커, 표준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폴리모 충전지]] (1660mAh) * PC 연결: [[USB]] 2.0 * 크기: 길이 121mm (4.76인치), 폭 73mm (2.87인치), 두께 19mm (0.74인치), 무게 190g (6.8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어댑터(US): [[교류|AC]] 어댑터 108~132VAC, 60Hz * 어댑터(Int'l): [[교류|AC]] 어댑터 100~240VAC, 50~60Hz * 출시가격: $499 === 팜 Z22 === $100 미만의 가격이 책정된 [[PDA]] 초보자를 위한 저가 모델이다. 자이어와는 다른 제품 라인이다. 고급 모델인 팜 TX와 함께 [[2005년]] 4분기에 출시되었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 * [[메모리]]: 32MB [[램]](2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200MHz [[ARM 아키텍처|ARM]] CPU * 디스플레이: 160X160 [[해상도]]. 백라이트, STN 컬러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적외선 통신(IrDA) * 오디오: 스피커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 (900mAh) * PC 연결: 미니 [[USB]] * 버튼: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지원, 2개의 하드웨어 버튼 * 크기: 길이 10.31cm(4.06인치), 폭 6.86cm(2.7인치), 두께 1.52cm (0.6인치), 무게 96.4g (3.4온스) * 데스크톱 PC: [[윈도우 98]]/[[윈도우 NT|NT]]/[[윈도우 2000|2000]]/[[윈도우 미|Me]]/[[윈도우 XP|XP]], [[맥 OS]] 9.1 또는 [[OS X|맥 OS X]] 10.1.2, 10.2.6 * 어댑터(US): [[교류|AC]] 어댑터 108~132VAC, 60Hz * 출시가격: $99 === 팜 TX === [[2005년 ]] 4분기에 출시된 고급 모델이다. * [[운영 체제]]: [[팜 OS]] Garnet 5.4.9 * [[메모리]]: 128MB (10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12 MHz [[인텔]] 프로세서 * 디스플레이: 320X48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블루투스]] 1.1 지원, [[IEEE 802.11]]b [[무선랜]](Wi-Fi) 지원, 적외선(IrDa) 통신 * 오디오: 스피커, 표준 3.5mm 스테레오 헤드폰잭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전지|배터리]]: 내장 [[리튬이온 충전지]](1250mAh) * 크기: 길이 12.09cm, 폭 7.82cm, 두께 1.55cm, 무게 148.83g * 데스크톱 PC: [[윈도우 2000]]/[[윈도우 XP|XP]], [[OS X|맥 OS X]] 10.2.8 ~ 10.4 * 출시가격: $299.00 === 팜 트레오(Treo) 700w/700wx/700v === 700w는 팜 파일럿 최초로 [[팜 OS]]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모바일 운영 체제인 [[윈도우 모바일]] 5.0을 탑재한 [[PDA 폰]]이다. 700w의 후속모델로 700wx가 출시되었으며, 이 모델은 700w와 비교해 사용자 가용 메모리가 두 배로 증가되었고 외관색이 짙은 회색점만 다르다. 700v는 [[보다폰]]용으로 유럽에서 출시된 모델명이다. * [[운영 체제]]: [[윈도우 모바일]] 5.0 * [[메모리]]: 128MB [[플래시 롬]] (62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12 MHz [[인텔]] [[XScale]] PXA 272 [[ARM 아키텍처|ARM]] CPU * 디스플레이: 2.5인치 240X24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블루투스]] 1.2 지원, 적외선(IrDa) 통신, [[CDMA]] [[1xRTT]]와 [[EVDO]] * 오디오: 스피커, 표준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헤드폰잭, 음성녹음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전지|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800mAh) * 크기: 길이 4,4인치, 폭 2.3인치, 두께 0.9인치, 무게 180그램 * 데스크톱 PC: [[윈도우 2000]]/[[윈도우 XP]]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디지털 카메라]]: 1.3 메가픽셀 * 출시가격: $499.00 === 팜 트레오(Treo) 700p === 트레오 650의 뒤를 이은 모델이다. 전체적인 외형은 트레오 700w로 거의 같다. * [[운영 체제]]: [[팜 OS]] 5.4.9 * [[메모리]]: 128MB [[플래시 롬]] (60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12 MHz [[인텔]] [[엑스스케일]] PXA 272 [[ARM 아키텍처|ARM]] CPU * 디스플레이: 2.5인치 320X320 [[해상도]]. 65,000 컬러의 반투과형 TFT 디스플레이 * 무선통신: [[블루투스]] 1.2 지원, 적외선(IrDa) 통신, [[CDMA|CDMA2000]] [[1xRTT]]와 [[EVDO]] * 오디오: 스피커, 표준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핸드프리 헤드셋잭, 음성녹음, MIDI, MP3, WAV 벨보리 * 확장 슬롯: SD, SDIO 지원 * [[전지|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800mAh) * 크기: 길이 129밀리미터, 폭 58밀리미터인치, 두께 58밀리미터, 무게 180그램 * 데스크톱 PC: [[윈도우 2000]]/[[윈도우 XP|XP]], [[OS X|맥 OS X]] 10.2.4 ~ 10.4 * 키패드: 5방향 버튼 내비게이션 채용, 내장 키보드 * [[디지털 카메라]]: 1.3 메가픽셀 1280x1024 해상도, 352X288 해상도의 비디오 캡처기능 === 팜 트레오 750/750v === [[2007년]] 1월 발표된 팜 트레오 700w/wx의 후속 모델로 [[윈도우 모바일]]을 장착했다. * [[중앙 처리 장치|프로세서]]: 300 MHz [[삼성전자|삼성]] 프로세서 * [[운영 체제]]: [[윈도우 모바일]] 5.1 포켓피씨 폰 에디션 * 디스플레이: [[액정 디스플레이|LCD]] 240X240 [[해상도]] * [[메모리]]: 128 MB 플래시 메모리 (60 MB의 실제 사용자 메모리) * 크기: 길이 111밀리미터 x 폭 58밀리미터 x 두께 22밀리미터, 무게 154그램 * 확장 슬롯: [[미니 SD]] * 무선통신: [[GSM|쿼드밴드 GSM/EDGE]], [[UMTS|트라이밴드 UMTS]]; [[블루투스]] 1.2 * 오디오: 2.5밀리미터 스테레오 헤드셋잭, 스피커폰 * [[전지|배터리]]: 착탈식 [[리튬이온 충전지]](1,200mAh) * 키패드: [[QWERTY]] 키보드, 5방향 키패드 * [[디지털 카메라]]: 1.3메가픽셀 해상도 ==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 == 팜 파일럿의 핵심을 이루는 [[팜 OS]]는 2바이트 [[문자코드체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입력하거나 출력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수입사들을 중심으로 [[팜 OS]]용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번들 형태로 판매되었고, [https://web.archive.org/web/20051124023016/http://www.kpug.net/ KPUG]에서 필명 '''오마르'''로 활동하는 개인 개발자에 의해 [[KOSPI (프로그램)|KOSPI]]라는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까지 개발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 [[한메한글 포 팜파일럿]] * [[세스한]] * [[한팁]] * [[디오펜 포 팜 OS]] * [[KOSPI (프로그램)]] == 같이 보기 == * [[팜 OS]] * [[웹OS]] * [[팜 (기업)]]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s://web.archive.org/web/20051030045840/http://wiki.jmjeong.com/wiki.cgi?ProjectPTwo 팜 위키] * [https://web.archive.org/web/20080120201642/http://www.ktreo.net/ 한국 TREO 세상] * [https://web.archive.org/web/20030926090907/http://www.palm.com/ 팜 파일럿 홈페이지] {{전거 통제}} [[분류:PDA]]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화소 (일본사)}} {{다른 뜻 넘어옴|픽셀}} [[파일:Pixel-example.png|오른쪽|프레임|이 예는 그림의 일부를 크게 확대했을 때의 장면이다. 여기서 각 화소가 사각형으로 되어 있음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화소'''(畵素) 또는 '''픽셀'''({{lang|en|pixel}}; pictures의 축약형 pics와 element의 축약형 el, 즉 pictures element에서 유래한 [[혼성어]])은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ref>《IT융합 시대의 멀티미디어 배움터 2.0》최윤철, 임순범 공저. P.72</ref> 디지털 이미징에서 화소는 [[래스터 그래픽스|래스터 이미지]]에서 주소를 지정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요소이거나 도트 매트릭스 디스플레이 장치에서 주소를 지정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요소이다. 대부분의 디지털 디스플레이 장치에서 픽셀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조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요소이다. 각 픽셀은 원본 이미지의 샘플이다. 일반적으로 샘플이 많을수록 원본을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 각 픽셀의 강도는 다양하다. 컬러 이미징 시스템에서 색상은 일반적으로 빨간색, 녹색, 파란색 또는 청록색, 자홍색, 노란색, 검정색과 같은 3~4가지 구성 요소 강도로 표현된다. 일부 상황(예: 카메라 센서에 대한 설명)에서 픽셀은 다중 구성 요소 표현의 단일 스칼라 요소를 참조하는 반면, 다른 상황에서는 MRI와 같은 조건에서는 공간 위치에 대한 구성 요소 강도 집합을 나타낼 수 있다. 초기 소비자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큰 픽셀이 있는 낮은 해상도로 렌더링되어야 했다. 이러한 제한 하에 만들어진 그래픽은 특히 비디오 게임과 관련하여 픽셀 아트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최신 컴퓨터와 디스플레이는 이전에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픽셀을 쉽게 렌더링할 수 있으므로 메가픽셀(100만 픽셀)과 같은 대규모 측정을 사용해야 한다. == 용어 == [[파일:Closeup of pixels.JPG|섬네일|right|노트북의 LCD 스크린의 픽셀 디스플레이 구성요소]] 픽셀이라는 단어는 pix("pictures"에서 유래, 축약형 "pics")와 el("element")의 조합이다. 'el'과 유사한 구성에는 복셀(voxel)의 'volume pixel' 및 텍셀(texel)의 'texture pixel'이라는 단어가 포함된다. pix라는 단어는 영화와 관련하여 1932년 버라이어티 잡지 헤드라인에 픽처스(Pictures)라는 단어의 약어로 등장했다. 1938년에는 사진기자들이 정지 사진을 지칭할 때 "pix"를 사용했다. "픽셀"이라는 단어는 우주 탐사선에서 달과 화성까지 스캔한 이미지의 그림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1965년 JPL의 프레데릭 C. 빌링슬리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다. 빌링슬리는 [[팰로앨토]]에 있는 제너럴 프리시전 링크 디비전(General Precision Link Division)의 키스 E. 맥파랜드(Keith E. McFarland)로부터 이 단어를 배웠는데, 그는 해당 단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맥파랜드는 단순히 "당시 사용 중"이라고 말했다(1963년 경). "그림 요소"의 개념은 예를 들어 폴 닙코우(Paul Nipkow)의 1888년 독일 특허에서 "Bildpunkt"(픽셀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문자 그대로 '그림 점')와 같은 초기 텔레비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양한 어원에 따르면, 그림 요소라는 용어 자체가 최초로 출판된 것은 1927년 와이어리스 월드 잡지였지만, 이 용어는 이미 1911년에 제출된 다양한 미국 특허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일부 저자는 1972년부터 픽셀을 픽처 셀(picture cell)로 설명한다. 그래픽과 이미지 및 비디오 처리에서는 픽셀 대신 pel이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IBM은 원래 PC에 대한 기술 참조에서 이를 사용했다. 두 번째 i로 철자를 쓰는 [[픽실레이션]](Pixilation)은 영화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련 없는 영화 제작 기술로, 실제 배우가 프레임별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방식이다. "정령([[픽시]])의 소유"를 의미하는 고대 영국 단어인 이 용어는 1950년대 초반부터 애니메이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노먼 맥라렌과 그랜더 먼로를 포함한 다양한 애니메이터들이 이를 대중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 == {{본문|해상도}}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크게 다음과 같다. {| class="wikitable sortable" border="2" cellpadding="4" cellspacing="0" style="margin: 1em 1em 1em 0; background: #f9f9f9; border: 1px #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font-size: 95%;"" !이름!!해상도<br />(메가픽셀)!!가로 x 세로 |- |[[컬러 그래픽스 어댑터|CGA]]||0.064||320×200 |- |[[강화 그래픽스 어댑터|EGA]]||0.224||640×350 |- |[[VGA]]||0.3||640×480 |- |[[SVGA]]||0.5||800×600 |- |[[XGA]]||0.8||1024×768 |- |[[SXGA]]||1.3||1280×1024 |- |[[UXGA]]||1.9||1600×1200 |} == 메가픽셀 == [[파일:FILE Hipersônica Rio 09 - 8 BIT Game People, Festival Internacional de Linguagem Eletrônica.jpg|섬네일|픽셀 아트]] 메가픽셀 (줄여서 MP, Mpx)은 100만 화소를 가리키며 영상의 화소 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요소의 수나 [[컴퓨터 모니터|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디스플레이 요소의 수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1250x800 센서 요소는 1 메가픽셀 (1250 × 800 = 1,000,000)를 가진다는 말과 같다. == 서브픽셀 == [[파일:Pixel geometry 01 Pengo.jpg|섬네일|upright=0.9|다양한 CRT 및 LCD 디스플레이의 컬러 요소의 기하학적 구조 모음; CRT 컬러 디스플레이의 형광체 점은 픽셀 또는 서브픽셀과 관련이 없다.]] 많은 디스플레이와 영상 획득 시스템들은 여러 이유로, 다른 색의 채널들을 하나의 소재에서 보여 주거나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소 그리드는 표시되는 단일의 색 영역이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이는 느낄 수 있는 색으로 나뉘게 된다. == 앤티에일리어싱 == {{본문|앤티에일리어싱}} 컴퓨터 화면에서는 화소 단위보다 세세하게 표현할 수 없다. 벡터가 아닌 비트맵 방식의 사진이나 그림을 확대하면 거칠게 각져서 두드러진 화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줄이기 위해, 화소의 모서리를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바꾸어 색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을 [[앤티에일리어싱]](anti-aliasing)이라고 한다. == 각주 == <references /> == 같이 보기 == * [[앤티에일리어싱]] * [[클리어타입]] * [[불량 화소]] * [[픽셀 아트]] == 외부 링크 == * {{언어링크|en}} [http://alvyray.com/Memos/CG/Microsoft/6_pixel.pdf A Pixel Is Not A Little Square]: Microsoft Memo by computer graphics pioneer Alvy Ray Smith. * {{언어링크|en}} [http://lurkertech.com/lg/pixelaspect/ Square and non-Square Pixels]: Technical info on pixel aspect ratios of modern video standards (480i,576i,1080i,720p), plus software implications. * {{언어링크|en}} [http://www.gigapixel360.com 120 Megapixel is here now] {{웨이백|url=http://www.gigapixel360.com/ |date=20210225040743 }}: A lot of information about MegaPixel and Gigapixel. {{전거 통제}} [[분류:컴퓨터 그래픽스]] [[분류:컴퓨터 그래픽스 자료 구조]]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학문 정보 |학문명 = 천문학 |그림 = Starsinthesky.jpg |그림크기 = |그림설명 =[[불규칙은하]]인 [[대마젤란 은하]]의 별 생성영역. |다른 이름 =천체학 |연구 분야 = |학문 분야 =자연과학 |주요 개념 = |파생 분야 = |창시자 = |창시 시기 = |관련 직업 = }} [[파일:Crab Nebula.jpg|섬네일|[[초신성 잔해]]의 하나인 [[게 성운]]]] '''천문학'''(天文學, {{llang|en|astronomy}}), 또는 '''천체학'''은 [[항성|별]]이나 [[행성]], [[혜성]], [[은하]]와 같은 [[천체]]와, 지구 대기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우주]]의 [[빅뱅 이론|시작 및 진화]],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천체의 운동]], [[물리]], [[화학]], [[기상]], [[진화]] 등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역법]], [[천문항법]], [[점성술]]까지 수많은 분야들을 포함했다. 천체의 움직임에서 가장 비중이 큰 힘은 [[중력]]이므로, [[일반상대론]]을 많이 이용한다. 20세기에 들어와 천문학은 관측 분야와 이론 분야로 나뉘었다. 관측 천문학은 천체에 대한 자료를 얻고 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며, 이론 천문학은 천체와 천문학적 현상들을 컴퓨터나 해석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모형을 세운다. == 어원과 용어 == 천문학의 영어 낱말 ''astronomy''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ron'' (''[[wikt:ἄστρον#Ancient Greek|ἄστρον]]'')과 법칙, 문화를 뜻하는 ''nomos'' (''[[wikt:νόμος#Ancient Greek|νόμος]]'')에서 유래했는데, 문자 그대로 "별의 법칙"(또는 별의 문화)를 의미한다. 천문학은 점성술학(인간의 사건이 천체의 위치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야가 공통된 근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구별된다. === 천문학과 천체물리학 === 일반적으로 천문학({{lang|en|astronomy}})과 천체물리학({{lang|en|astrophysics}})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ref name="scharrinhausen"> {{웹 인용 |제목=Curious About Astronomy: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stronomy and astrophysics? |url=http://curious.astro.cornell.edu/question.php?number=30 |first=B. |last=Scharringhausen |accessdate=20 June 2007}}</ref><ref name="odenwald"> {{웹 인용 |제목=Archive of Astronomy Questions and Answers: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stronomy and astrophysics? |url=http://www.astronomycafe.net/qadir/q449.html |first=S. |last=Odenwald |accessdate=20 June 2007}}</ref><ref name="pennstateerie">{{웹 인용 |제목 = Penn State Erie-School of Science-Astronomy and Astrophysics |url = http://www.erie.psu.edu/academic/science/degrees/astronomy/astrophysics.htm |accessdate = 20 June 2007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1101100832/http://www.erie.psu.edu/academic/science/degrees/astronomy/astrophysics.htm |보존날짜 = 2007년 11월 1일 |url-status = dead }}</ref> 엄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천문학은 "지구 대기 밖의 물체들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ref name="mw-astronomy"> {{웹 인용 |제목=Merriam-Webster Online |work=Results for "astronomy" |url=http://www.m-w.com/dictionary/astronomy |accessdate=20 June 2007}}</ref>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의 한 분야로서 천체 및 천문현상의 물리적, 운동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ref name="mw-astrophysics"> {{웹 인용 |제목=Merriam-Webster Online |work=Results for "astrophysics" |url=http://www.m-w.com/dictionary/astrophysics |accessdate=20 June 2007}}</ref> 한편, 천문학 개론서인 "물리적인 우주(''The Physical Universe'')"에서처럼 "천문학"은 우주·천체·천문현상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를, "천체물리학"은 이러한 대상을 보다 물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는 분야를 의미하는데 쓰이기도 한다.<ref name="shu1982"> {{서적 인용 |first = F. H. |last=Shu |제목 = The Physical Universe |publisher = University Science Books |year = 1982 |location = Mill Valley, California |isbn = 0-935702-05-9}}</ref> 그러나 측성학 같이 전통적인 천문학에 가까운 분야도 있는 반면, 대부분의 현대 천문학 연구는 물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므로, 천문학은 실제로는 천체 물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ref name="scharrinhausen"/> 여러 대학이나 연구소는 주로 역사적인 이유나, 구성원들의 가지고 있는 학위 등에 따라서 종종 천문학과나 천체물리학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과가 역사적으로 물리학과와 같이 붙어 있었다면, 주로 천체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ref name="odenwald"/><ref name="pennstateerie"/> 저명한 천문학 저널로는 유럽의 [[천문학과 천체물리학]]([[:en:Astronomy and Astrophysics|Astronomy and Astrophysics]])과 미국의 [[천체물리학 저널]]([[:en:The Astrophysical Journal|The Astrophysical Journal]]), [[천문학 저널]]([[:en:The Astronomical Journal|The Astronomical Journal]])이 있다. == 기원과 역사 == {{참고|천문학의 역사}} [[파일:Planisphæri cœleste.jpg|섬네일|17세기 네덜란드 지도제작가 [[:en:Frederik de Wit|프레데리크 더빗]]이 만든 성도]] [[파일:AiKhanoumSunDial.jpg|섬네일|위오른쪽|그리스의 해시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기원2-3세기)에서 발견됨.]]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양쪽에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사]]와 [[날씨]] 예견 그리고 해양, [[지리]] 관측과 측량이 그 주요 동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톤헨지]]처럼 천문학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기도 했다. 제사 같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이러한 [[천문대]]들은 1년의 길이를 재거나, 매해 일정한 시기에 농사를 짓고, 수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name="history">Forbes, 1909</ref>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천문관측은 높은 건물 같은 곳에서 맨 눈으로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마야 문명 등에서 [[천문대]]가 만들어졌고, 우주의 본질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초기 천문학은 오늘날에는 측성학으로 알려진, 하늘에서 별과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관측으로부터, 행성의 운동, [[태양]], [[달]], 지구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를 [[지구중심설]], [[천동설]] 또는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이라고 부른다.<ref> {{서적 인용 | last=DeWitt | first=Richard | 제목=Worldviews: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 year=2010 | publisher=Wiley | location=Chichester, England | isbn=1-4051-9563-0 | page=113 | chapter=The Ptolemaic System}}</ref>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빌론]]에서 수학·과학적 천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월식]]이 [[사로스 주기|사로스]]라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ref>{{웹 인용 |url = http://sunearth.gsfc.nasa.gov/eclipse/SEsaros/SEsaros.html |제목 = Eclipses and the Saros |publisher = NASA |accessdate = 28 October 2007 |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20524183445/http://eclipse.gsfc.nasa.gov/SEsaros/SEsaros.html |보존날짜 = 2012년 5월 24일 |url-status = live }}</ref>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이 후 다른 문명에서 발달할 천문학적 전통의 기반을 닦았다.<ref> {{저널 인용 | 제목=Scientific Astronomy in Antiquity | author=Aaboe, A. | journal=[[:en: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 volume=276 | issue=1257 | year=1974 | pages=21–42 | jstor=74272 | doi=10.1098/rsta.1974.0007 | bibcode = 1974RSPTA.276...21A | issn = 0080-4614 }}</ref> 바빌론 이후의 천문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천문학은 천문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물리적인 답을 구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었다.<ref> {{서적 인용 | last = Krafft | first = Fritz | year = 2009 | contribution = Astronomy | editor-last = Cancik | editor-first = Hubert | editor2-last = Schneider | editor2-first = Helmuth | 제목 = [[:en:Brill's New Pauly|Brill's New Pauly]] | ref = harv}}</ref>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의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였고, 달과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였다. 한편 그는 처음으로 지동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히파르쿠스]]가 [[세차]]를 발견하였고 달의 크기와 거리를 계산하였으며, [[아스트롤라베]]([[:en:astrolabe|astrolabe]])이라고 불리는 천문기구를 발명하였다.<ref>{{웹 인용 | url=http://www-groups.dcs.st-and.ac.uk/~history/Biographies/Hipparchus.html | 제목=Hipparchus of Rhodes | publisher=School of Mathematics and Statistics, University of St Andrews, Scotland | accessdate=28 October 2007 | archive-date=2007-10-23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23062202/http://www-groups.dcs.st-and.ac.uk/~history/Biographies/Hipparchus.html | url-status= }}</ref> 히파르쿠스는 또한 방대한 1020개 별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북반구의 대부분의 별자리는 이러한 그리스 천문학에서 유래했다.<ref>Thurston, H., [http://books.google.com/books?id=rNpHjqxQQ9oC&pg=PA2 ''Early Astronomy.''] Springer, 1996. {{ISBN|0-387-94822-8}} p. 2</ref> 반면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고, 당시의 천문학을 집대성한〈[[알마게스트]]〉를 남겼다. 천동설은 [[기독교]]의 교리에 더 부합하였으므로, 중세에 들어서는 이 책은 천문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이 널리 믿어지게 된다. <!-- 이 부분은 영어위키 Antikythera mechanism에서 따온 것인데, 사실인지 아닌지 논쟁이 있음. 따라서 삭제함. [[:en:Antikythera mechanism|Antikythera mechanism]] (c. 150–80 BC)는 특정 날짜의 태양, 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는 초기의 아날로그 컴퓨터였는데, 이 정도로 복잡한 기기는 약 14세기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천문학 시계가 등장하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The [[:en:Antikythera mechanism|Antikythera mechanism]] (c. 150–80 BC) was an early [[:en:analog computer|analog computer]] designed to calculate the location of the [[:en:Sun|Sun]], [[:en:Moon|Moon]], and [[:en:planets|planets]] for a given date. Technological artifacts of similar complexity did not reappear until the 14th century, when mechanical [[:en:astronomical clock|astronomical clock]]s appeared in [[:en:Europe|Europe]].<ref name=insearchoflosttime> {{저널 인용 | last1=마천트 | first1=조 | 제목=In search of lost time | journal=Nature | volume=444 | issue=7119 | pages=534–8 | year=2006 | pmid=17136067 | doi=10.1038/444534a | bibcode = 2006Natur.444..534M }}</ref> -->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문학도 [[중세]] 유럽에서는 13세기까지 거의 정체되었지만, 이슬람과 다른 지역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약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지역의 최초의 [[천문대]]가 등장했다.<ref name=Kennedy-1962> {{저널 인용 |last=케네디 |first=에드워드 S. |year=1962 |제목=Review: ''The Observatory in Islam and Its Place in the General History of the Observatory'' by Aydin Sayili |journal=[[:en:Isis (journal)|Isis]] |volume=53 |issue=2 |pages=237–239 |doi=10.1086/349558}}</ref><ref name = "Micheau-992-3"> {{저널 인용 | last=미쇼 | first=프랑수아즈 | 제목=The Scientific Institutions in the Medieval Near East | pages=992–3}}, in {{Harv | Rashed | Morelon | 1996 | pp=985–1007}}</ref><ref> {{서적 인용 | last=Nas | first=Peter J | 제목=Urban Symbolism | year=1993 | publisher=Brill Academic Publishers | isbn=90-04-09855-0 | page=350}}</ref> [[964년]]에는 페르시아 천문학자 [[압드 알라흐만 알수피]]가 안드로메다 은하를 발견하고, "[[:en:Book of Fixed Stars|Book of Fixed Star]]"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ref name="NSOG"> {{서적 인용 | last= Kepple | first= George Robert | coauthors= Glen W. Sanner | 제목= The Night Sky Observer's Guide, Volume 1 | publisher= Willmann-Bell, Inc | year= 1998 | isbn= 0-943396-58-1 | page=18}}</ref> 역사상 기록된 가장 밝은 [[초신성]]인 [[SN 1006]]가 이집트 출신 아랍 천문학자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중국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1006년에 관측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천문학에 많은 공헌을 한 유명한 천문학자로는 [[알바타니]], [[압드 알라흐만 알수피]], [[아부 마샤르 알바키]], [[비루니]], [[알비르잔디]] 등과 [[마라게]], [[사마르칸트]]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 있다. 이 당시의 아랍 천문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많은 [[항성 목록|항성 이름들]](예를 들어, [[베가]], [[알골]])을 도입하였다.<ref name="short history"> {{서적 인용 | first=Arthur | last=Berry | 제목=A Short History of Astronomy From Earliest Times Through the Nineteenth Century | publisher=Dover Publications, Inc. | location=New York | year=1961 | isbn=0-486-20210-0}}</ref><ref name="Cambridge history"> {{서적 인용 | editor=Hoskin, Michael | 제목=The Cambridge Concise History of Astronomy |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 year=1999 | isbn = 0-521-57600-8}}</ref>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팀북투]]의 유적들도<ref> {{서적 인용 | url=http://books.google.com/?id=Pk-bZMS_KdUC&pg=PA103&lpg=PA103 | 제목= The royal kingdoms of Ghana, Mali, and Songhay: life in medieval Africa | first=Pat | last= McKissack | coauthors= McKissack, Frederick | year=1995 | publisher=H. Holt | isbn=978-0-8050-4259-7}}</ref> 과거에 천문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저널 인용 | url=http://www.newscientist.com/article/dn3137-eclipse-brings-claim-of-medieval-african-observatory.html | 제목=Eclipse brings claim of medieval African observatory | year=2002 | journal=New Scientist | accessdate=3 February 2010 | last=Clark | first=Stuart | coauthors=Carrington, Damian}}</ref> 또한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전에 천문학 관측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ref>{{웹 인용 |url = http://www.scienceinafrica.co.za/2003/november/cosmic.htm |제목 = Cosmic Africa explores Africa's astronomy |accessdate = 3 February 2002 |publisher = Science in Africa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31203055223/http://www.scienceinafrica.co.za/2003/november/cosmic.htm |보존날짜 = 2003년 12월 3일 |url-status = dead }}</ref><ref> {{서적 인용 | url=http://books.google.com/?id=4DJpDW6IAukC&pg=PA180&lpg=PA180 | 제목=African Cultural Astronomy | first=Jarita C. | last= Holbrook | coauthors=Medupe, R. Thebe; Urama, Johnson O. | publisher=Springer | year=2008 | isbn=978-1-4020-6638-2}}</ref><ref>{{웹 인용 |url = http://royalsociety.org/news.asp?year=&id=4117 |제목 = Africans studied astronomy in medieval times |date = 30 January 2006 |publisher = The Royal Society |accessdate = 3 February 2010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09112829/http://royalsociety.org/news.asp?year=&id=4117 |archivedate = 2008년 6월 9일 |url-status = live }}</ref><ref>Stenger, Richard [http://articles.cnn.com/2002-12-05/tech/zimbabwe.observatory_1_supernova-forecast-eclipses-star?_s=PM:TECH Star sheds light on African 'Stonehenge'] {{웨이백|url=http://articles.cnn.com/2002-12-05/tech/zimbabwe.observatory_1_supernova-forecast-eclipses-star?_s=PM:TECH |date=20110512162930 }}. CNN. 2002년 12월 5일. Retrieved on 2011-12-30.</ref> === 과학 혁명 === [[파일:Galileo moon phases.jpg|섬네일|오른쪽|위오른쪽|[[갈릴레오 갈릴레이|갈릴레오]]가 그린 달 표면의 울퉁불퉁한 모습.]] [[17세기]]를 전후하여 발명된 [[망원경]]으로 천문학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발전된 [[고전역학|역학]], [[전자기학]] 및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업적은 천문학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우주를 관찰·탐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기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에 의해 좀 더 확장되고 발전되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천문학에 [[망원경]]을 도입하였다.<ref name=f58-64/> 케플러는 마침내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에 놓는 타원궤도를 공전하는 정확한 태양계 모형을 고안해 냈지만,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ref>Forbes, 1909, pp. 49–58</ref> 이는 마침내 [[아이작 뉴턴|뉴턴]]이 [[천체역학]]과 [[중력|중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뉴턴은 또한 새로운 방식의 [[반사 망원경]]을 고안하기도 했다.<ref name=f58-64>Forbes, 1909, pp. 58–64</ref> 망원경의 크기과 성능이 향상되면서 많은 천문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천문학자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라카유]]에 의해 방대한 별의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윌리엄 허셜|허셜]]은 방대한 성운·성단목록을 제작했고, 1781년에는 처음으로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게 된다.<ref>Forbes, 1909, pp. 79–81</ref> 1838년에는 [[프리드리히 베셀|베셀]]이 [[백조자리 61]]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처음으로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다.<ref>Forbes, 1909, pp. 147–150</ref> 18-19세기 중에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오일러]],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클레로]], [[장 르 롱 달랑베르|달랑베르]] 등이 [[삼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써 달과 태양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라그랑주]]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라플라스]]는 이러한 노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달과 행성의 섭동으로부터 질량을 추정하기도 했다.<ref>Forbes, 1909, pp. 74–76</ref> [[분광학]]과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천문학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프라운호퍼]]는 1814–15년에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약 600여개의 어두운 띠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1859년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키르히호프]]에 의해 각기 다른 원소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광학을 다른 별들에 적용함으로써,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며, 다만 온도, 질량, 크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정립되었다.<ref name="short history" /> 20세기에 들어 하늘에 보이는 은하수가 별들의 집합인 [[우리은하]]라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이어서 우리은하 밖의 [[은하|외부 은하]], 그리고 [[우주의 팽창]]이 발견되었다.<ref name=Belkora2003> {{서적 인용 |author=Belkora, Leila|제목=Minding the heavens: the story of our discovery of the Milky Way |isbn=978-0-7503-0730-7 |url=http://books.google.com/?id=qBM-wez94WwC&printsec=frontcover |publisher=[[:en:CRC Press|CRC Press]] |year=2003|pages=1–14}}</ref> 현대 천문학은 또한 [[펄사]], [[퀘이사]], [[블레자|블레이져]], [[전파은하]] 같이 특이한 천체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관측들은 이를 [[중성자별]]·[[블랙홀]]로 설명하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허블의 법칙]], [[대폭발 핵합성|우주의 원소 함량]] 등의 관측이 지지하는 [[대폭발 이론]]의 등장으로, 물리적 우주론은 20세기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주 망원경]]의 발전으로 지구 대기에 흡수되어서 그동안 관측 할 수 없었던 전자기파의 영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잘못 알고 있는데, 빅뱅 이론을 말하기 전에, 천동설과 지동설의 뜻을 알아두어야 한다. 1.천동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지구가 중심이고, 그 주위로 태양과 행성, 소행성 등이 돌고 있다고 주장. 2.지동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이 중심이고, 그 주위로 태양과 행성, 소행성 등이 돌고 있다고 주장. == 관측천문학 == {{본문|관측천문학}} 천문학에서의 모든 정보는 주로 천체로부터의 [[가시광]] 영역의 빛, 또는 일반적으로 다른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ref>{{웹 인용|url=http://imagine.gsfc.nasa.gov/docs/science/know_l1/emspectrum.html|제목 = Electromagnetic Spectrum|publisher = NASA|accessdate = 8 September 2006}}</ref> 관측천문학은 전자기파의 파장대별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한 파장대의 빛도 있지만 어떤 영역대는 높은 고도의 지역에서나 또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 전파천문학 === {{본문|전파천문학}} [[파일:USA.NM.VeryLargeArray.02.jpg|섬네일|전파망원경의 일종인 거대전파간섭계([[:en:Very Large Array|VLA]])]] 전파천문학은 약 1mm보다 긴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연구하는 분야이다.<ref name="cox2000"> {{서적 인용 |editor=Cox, A. N. |제목=Allen's Astrophysical Quantities |year=2000 |url=http://books.google.com/?id=w8PK2XFLLH8C&pg=PA124 |publisher=Springer-Verlag |page=124 |location=New York |isbn=0-387-98746-0}}</ref> 전파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관측된 전파를 개개의 [[광자]]로 다루기보다는 [[파동]]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짧은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와 달리, 전파의 [[세기]](amplitude)뿐만아나라 [[위상]]([[:en:Phase (waves)|phase]])을 측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전파는 [[제동 복사|열적 발산]]의 형태로 천체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전파는 [[싱크로트론 복사]]의 형태이다.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자]]가 자기장 주변에서 진동할 때 생성된다. === 적외선천문학 === {{본문|적외선천문학}} 적외선천문학은 [[적외선]] 영역대(가시광의 붉은색 빛보다 파장이 긴 대역)의 빛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근적외선(1-3μm)을 제외하고는, 적외선 영역의 빛은 [[대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지구대기 또한 많은 양의 적외선을 내뿜는다. 그 결과, 적외선 관측은 높은 고도의 건조한 곳에 위치한 천문대, 또는 우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적외선을 이용하면 행성이나 [[원시 행성계 원반|원시 행성 원반]]같이 온도가 매우 낮아서 가시광선을 거의 내지 않는 천체들을 관측할 수 있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가시광선을 쉽게 가로막는 성간먼지를 투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와 [[분자구름]]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젊은 별들을 연구하는데 유용하다.<ref> {{뉴스 인용 |author=Staff|date=11 September 2003 |제목=Why infrared astronomy is a hot topic |publisher=ESA |url=http://www.esa.int/esaCP/SEMX9PZO4HD_FeatureWeek_0.html |accessdate=11 August 2008}}</ref> 어떤 분자들은 적외선에서 특히 강한 방출선을 내는데, 이를 이용하여 성간물질의 화학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분광학으로 혜성에 존재하는 물분자를 검출하기도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Infrared Spectroscopy – An Overview |publisher = NASA/IPAC |url = http://www.ipac.caltech.edu/Outreach/Edu/Spectra/irspec.html |accessdate = 11 August 2008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005031543/http://www.ipac.caltech.edu/Outreach/Edu/Spectra/irspec.html |보존날짜 = 2008년 10월 5일 |url-status = dead }}</ref> === 광학천문학 === {{본문|광학천문학}} [[파일:The Keck Subaru and Infrared obervatories.JPG|섬네일| [[마우나케아 천문대]]의 [[스바루 망원경]](왼쪽), [[켁 망원경]](가운데 2개):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관측에 쓰인다.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사 적외선 망원경]]([[:en:NASA Infrared Telescope Facility|NASA IRTF]])은 근적외선 관측에만 쓰인다.]] 광학천문학(가시광선 천문학)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천문학 분야이다.<ref name="moore1997"> {{서적 인용 |author=Moore, P. |제목=Philip's Atlas of the Universe |year=1997 |publisher=George Philis Limited |location=Great Britain |isbn=0-540-07465-9}}</ref> 오랫동안 광학 영상은 손으로 그려져 기록되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는 사진이나 건판을 주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디지털 검출기, 특히 [[CCD|CCD 카메라]](빛을 [[전하]]로 변화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시광영역은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로, 근자외선(400나노미터에 가까운 자외선 영역)과 근적외선(1μm에 가까운 적외선영역)의 관측에도 같은 기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 자외선천문학 === {{본문|자외선천문학}} 자외선천문학은 10 나노미터에서 320 나노미터 영역대의 [[자외선]] 파장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ref name="cox2000"/> 이 파장대의 빛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천문대는 지구대기층이 얇은 높은 고도, 또는 우주에 세워져야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뜨겁고 파란 별들로부터 나오는 [[열적 복사|열복사]]와 [[방출선]]들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분야이다. [[우리은하]] 밖의 [[은하|다른 은하]]에 위치한 푸른 별들은 몇몇 자외선관측의 주요 관측대상이 되어 왔다. 자외선영역의 또다른 관측대상으로는 [[행성상 성운]], [[초신성 잔해]],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그러나, 자외선은 [[성간 먼지]]에 의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 관측은 [[성간물질#성간 소광|소광]]([[:en:Extinction (astronomy)|extinction]])을 정확히 보정해 주어야 한다.<ref name="cox2000"/> === X-선 천문학 === {{본문|X-선 천문학}} X-선 천문학은 [[엑스선]] 파장대의 빛을 내는 천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형적으로 X-선은 매우 뜨거운 천체들로부터 [[싱크로트론 복사]], [[제동복사]]({{lang|en|bremsstrahlung radiation}}), 그리고 [[흑체복사]]({{lang|en|blackbody radiation}})의 형태로 방출된다. X-선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높은 고도로 띄우는 [[풍선]], [[로켓]], [[비행선]]을 이용하거나 [[우주망원경]] 형태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X-선 천체로는 [[엑스선 이중성]], [[펄사]], [[초신성 잔해]], [[타원은하]], [[은하단]],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ref name="cox2000"/> <!--- 천문학 문서에서 X-선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According to NASA's official website, X-rays were first observed and documented in 1895 by [[Wilhelm Conrad Röntgen]], a [[:en:Germany|German]] scientist who found them quite by accident when experimenting with vacuum tubes. Through a series of experiments, including the infamous X-ray photograph he took of his wife's hand with a wedding ring on it, Röntgen was able to discover the beginning elements of radiation. The "X", in fact, holds its own significance, as it represents Röntgen's inability to identify exactly what type of radiation it was. --> === 감마선천문학 === {{본문|감마선천문학}} 감마선 천문학은 가장 짧은 전자기 파장대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이다. [[감마선]]은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Compton Gamma Ray Observatory)와 같이 인공위성에 의해, 또는 [[대기 체렌코프 망원경]](atmospheric Cherenkov telescopes)이라 불리는 특화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된다.<ref name="cox2000"/> 체렌코프 망원경은 감마선을 직접적으로 검출하진 않지만, 감마선이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었을 때 생성되는 가시광 영역의 반짝임(체렌코프 복사)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는 [[감마선 폭발]]이다. 감마선 폭발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감마선을 방출하고 금방 어두워지는 천체이다. 그 외에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로는 [[펄사]], [[중성자별]], [[활동은하핵]]이 있다. === 전자기파 이외의 천문학 === 전자기파(빛)이외에도 중성미자, 중력파 등을 이용하여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또한 탐사선을 이용하여 달이나 혜성 같은 지구 밖의 천체에서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한다. 뉴트리노는 주로 태양 내부나 초신성 폭발에서 만들어지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 (물리)|우주선]]([[:en:Cosmic ray|Cosmic ray]])이 차례로 붕괴하거나 대기의 입자와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ref>{{웹 인용 |author = Tammann, G. A.; Thielemann, F. K.; Trautmann, D. |year = 2003 |url = http://www.europhysicsnews.org/index.php?option=article&access=standard&Itemid=129&url=/articles/epn/abs/2003/02/epn03208/epn03208.html |제목 = Opening new windows in observing the Universe |publisher = Europhysics News |accessdate = 3 February 2010 |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20906192257/http://www.europhysicsnews.org/index.php?option=com_article&access=standard&Itemid=129&url=/articles/epn/abs/2003/02/epn03208/epn03208.html |보존날짜 = 2012년 9월 6일 |url-status = dead }}</ref><ref> {{서적 인용 |first=Thomas K. |last=Gaisser |year=1990 |제목=Cosmic Rays and Particle Physics |pages=1–2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0-521-33931-6}}</ref> 이러한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으므로, 지하시설에 위치한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가끔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 검출기로는 [[:en:SAGE (ruSsian American Gallium Experiment)|SAGE]], [[:en:GALLEX|GALLEX]], [[Kamioka Observatory|Kamioka II/III]]같은 특별한 지하 시설이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새롭게 발생한 천문학의 분야로서, 블랙홀, 중성자별 등으로 구성된 쌍성들이 내는 것 같은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en:LIGO|LIGO]]) 같은 관측소가 만들어졌고, 2016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행성과학자들은 직접적인 관측을 위해, 우주탐사선을 행성에 보내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탐사선이 행성을 지나쳐 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행성표면에 직접 착륙해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고, 표면에 탐사선을 충돌시키고 이 때 발생하는 물질들을 원거리에서 관측하기도 한다. === 측성학과 천체역학 === {{본문|측성학|천체역학}} 측성학({{lang|en|astrometry}})는 천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분야 중의 하나로써,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학문분야이다. 역사적으로 해, 달, 행성, 별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항해]]나 [[달력]]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측성학은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섭동 (천문학)|중력의 섭동]]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천체역학]]({{lang|en|Celestial mechanics}})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근지구 천체]]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비껴가는 위험한 경우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f>{{웹 인용 |last = Calvert |first = James B. |date = 28 March 2003 |url = http://www.du.edu/~jcalvert/phys/orbits.htm |제목 = Celestial Mechanics |publisher = University of Denver |accessdate = 21 August 200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907120741/http://www.du.edu/~jcalvert/phys/orbits.htm |보존날짜 = 2006-09-07 |url-status = dead }}</ref> 가까운 별들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크기를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차근차근 정립해나가는 소위 [[우주 거리 사다리]]를 구성하는가가 되는 일이다. 또한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일은 별의 절대 광도 같은 물리량을 정확히 잴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별들의 [[시선속도]]를 재는 것과 함께 [[고유운동]]을 재면 별들의 3차원적인 운동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은하 내의 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연구할 수 있다. <!-- 전혀 근거가 없는 듯? 참고 문헌이 잘 못 된 듯 Astrometric results are also used to measure the distribution of [[:en:dark matter|dark matter]] in the galaxy.<ref> {{웹 인용|url = http://www.astro.virginia.edu/~rjp0i/museum/engines.html|제목 = Hall of Precision Astrometry|publisher = University of Virginia Department of Astronomy|accessdate = 10 August 2006|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826104509/http://www.astro.virginia.edu/~rjp0i/museum/engines.html|보존날짜 = 2006-08-26|url-status = dead}} </ref> --> 1990년대부터는 별의 궤도가 예상과는 달리 약간 흔들거리는 현상({{lang|en|stellar wobble}})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이러한 별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ref name="Wolszczan"> {{저널 인용 | author=Wolszczan, A.; Frail, D. A. | 제목=A planetary system around the millisecond pulsar PSR1257+12 | journal=Nature | year=1992 | volume=355 | issue=6356 |pages=145–147 | doi= 10.1038/355145a0 | ref=harv | bibcode=1992Natur.355..145W}}</ref> == 이론천문학 == {{본문|이론천문학}} 이론 천문학자들은 천체나 천문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적인 모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형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장점이 있다. 해석적인 모형은 —다시말해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서술하는 방법— 어떤 현상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며, 수치적인 모형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기본 물리 법칙으로부터 계산해 냄으로써 어떤 현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f> {{저널 인용 |first=H. |last=Roth |제목=A Slowly Contracting or Expanding Fluid Sphere and its Stability |journal=Physical Review |volume=39 |issue=3 |pages=525–529 |year=1932 |doi=10.1103/PhysRev.39.525 |bibcode = 1932PhRv...39..525R }}</ref><ref> {{서적 인용 |first=A.S. |last=Eddington |제목=Internal Constitution of the Stars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year=1926|url=http://books.google.com/?id=hJW3JbhnFQMC&pg=PA182 |isbn=978-0-521-33708-3}}</ref> 이론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연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측자들은 여러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려줄 관측 자료들을 모으거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새로운 관측 자료가 얻어지면, 이론 천문학자들은 이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꾸준히 모형을 바꾸고 발전 시킨다. 만약 자신의 이론이 새롭게 얻어진 관측 자료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관측 결과를 맞출 수 있게 모형을 약간 수정할 수 있지만, 만약 이론이 아주 많은 관측 자료와 모순된다면, 그 모형은 폐기되기도 한다. 이론 천문학의 주제로는 천체 역학, [[항성 진화|별의 진화]], [[은하의 형성과 진화]], [[우주 거대구조]], [[우주선 (물리)|우주선]]의 기원, [[일반 상대론]], [[물리우주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 천문학은 다양한 물리법칙·이론들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상대론은 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주 거대 구조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중력파와 블랙홀등을 연구하는 데 바탕이 된다. 현대 이론 천문학은 [[급팽창 이론]], [[암흑 물질]],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법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ΛCDM 모형]]을 정립하였고, 이는 현재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대 천문학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제이다. 다음은 이론 천문학에서 어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실험·관측 결과에 기반하여, 이론적인 모형을 만들고, 이로써 어떠한 현상을 설명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 class="wikitable" |- | |<!-- A --> '''물리 현상''' | |<!-- B --> '''실험·관측''' | |<!-- C --> '''이론적인 모형''' | |<!-- D --> '''설명·예측''' |- | |<!-- A --> [[중력]] | |<!-- B --> [[전파망원경]] | |<!-- C --> 자체 중력에 묶인 계 | |<!-- D --> [[항성계]] |- | |<!-- A --> [[핵융합]] | |<!-- B --> [[분광학]] | |<!-- C --> [[항성 진화|별의 진화]] | |<!-- D --> 별의 에너지원과 [[중원소 함량|중원소]]들의 형성 |- | |<!-- A --> [[대폭발]] | |<!-- B --> [[허블 우주 망원경]], [[COBE]] | |<!-- C --> [[우주의 팽창]] | |<!-- D --> [[우주의 나이]] |- | |<!-- A --> [[양자 요동]] | |<!-- B --> | |<!-- C --> [[급팽창 이론|우주의 급팽창]] | |<!-- D --> 우주의 평탄 문제([[:en:Flatness problem|Flatness problem]]) |- | |<!-- A --> [[중력붕괴]] | |<!-- B --> [[X-선 천문학]] | |<!-- C --> [[일반 상대론]] | |<!-- D --> 은하 중심의 [[블랙홀]] |- | |<!-- A --> 별의 [[CNO 순환|CNO 반응]] | |<!-- B --> | |<!-- C --> | |<!-- D --> 무거운 별의 에너지원 |} == 연구 대상에 따른 천문학의 세부분야 == === 태양천문학 === {{본문|태양}} [[파일:Uvsun trace big.jpg|왼쪽|섬네일|[[TRACE 우주 망원경]]이 태양의 [[광구]]를 [[자외선]]에서 촬영한 것. [[미국 항공우주국]] 제공.]] 태양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있으며 가장 연구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항성]]이고 전형적인 [[황색 왜성|G형 분광형]]을 지닌, 46억 살의 [[주계열성]]이다. 태양은 [[변광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흑점 주기]]로 알려진, 주기적인 밝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1년 주기에 걸쳐 [[흑점]]의 숫자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흑점은 강력한 [[자기장]] 활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양 표면의 다른 곳에 비해 온도가 낮은 지역이다.<ref name="solar FAQ"> {{웹 인용 | 성 = Johansson | 이름 = Sverker | 날짜 = 2003-07-27 | url=http://www.talkorigins.org/faqs/faq-solar.html | 제목 = The Solar FAQ | 출판사 = Talk.Origins Archive}}</ref> 태양은 나이를 먹으면서 밝기가 천천히 증가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계열성으로 생애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 40퍼센트 정도 더 밝다. 태양은 탄생 이후 지구의 [[생태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변해 왔다.<ref name="Environmental issues : essential primary sources.">{{웹 인용| 성 = Lerner & K. Lee Lerner | 이름 = Brenda Wilmoth | 날짜 = 2006 | url=http://catalog.loc.gov/cgi-bin/Pwebrecon.cgi?v3=1&DB=local&CMD=010a+2006000857&CNT=10+records+per+page | 제목 = Environmental issues : essential primary sources." | 출판사= Thomson Gale }}</ref> 예를 들어 [[마운더 극소기]]로 인해 중세에 [[소빙기]] 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future-sun">{{웹 인용 | author=Pogge, Richard W. | year=1997 | url=http://www-astronomy.mps.ohio-state.edu/~pogge/Lectures/vistas97.html | 제목=The Once & Future Sun | 형식=lecture notes | 웹사이트=New Vistas in Astronomy | 확인날짜=2008년 8월 21일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1218084430/http://www-astronomy.mps.ohio-state.edu/~pogge/Lectures/vistas97.html | 보존날짜=2005년 12월 18일 | url-status=dead }}</ref>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의 바깥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광구 위에는 [[채층]]으로 불리는 얇은 지대가 존재한다. 채층 위에는 [[코로나 (천문학)|코로나]]가 형성되어 있으며,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태양핵|핵]]이 있으며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고 압력 또한 크다. 중심핵 위에는 복사층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즈마는 에너지 플럭스를 복사 형태로 전달한다. 복사층 위에는 대류층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는 에너지가 물리적인 가스 교환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태양의 대류층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이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 표면에 흑점이 생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f name="solar FAQ" /> [[플라즈마]] 입자로 이루어진 [[태양풍]]은 태양으로부터 꾸준히 우주 공간으로 흘러 나와서 [[태양권계면]]까지 이어진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반응하여 [[밴 앨런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기력선이 대기로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로라]]를 형성한다.<ref> {{웹 인용 |author = Stern, D. P.; Peredo, M. |date = 28 September 2004 |url=http://www-istp.gsfc.nasa.gov/Education/Intro.html |제목 = The Exploration of the Earth's Magnetosphere |publisher = NASA |accessdate = 22 August 2006}}</ref> === 행성천문학 === {{본문|행성천문학}} 행성천문학은 [[행성]], [[위성]], [[왜행성]], [[혜성]], [[소행성]], 기타 태양을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 그리고 [[외계 행성]] 집단들을 연구 대상으로 다룬다.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관측 도구로 주로 [[망원경]]을 이용했으며 최근에는 우주 [[탐사선]]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련의 탐사로 인해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다.<ref name="geology">{{서적 인용| 저자=J. F. Bell III, B. A. Campbell, M. S. Robinson | 제목=Remote Sensing for the Earth Sciences: Manual of Remote Sensing | 출판사=John Wiley & Sons | 판 = 3rd | 연도=2004 | url=http://marswatch.tn.cornell.edu/rsm.html | 확인날짜 = 2006-08-23 }}</ref> [[파일:dust.devil.mars.arp.750pix.jpg|섬네일|The black spot at the top is a [[:en:dust devil|dust devil]] climbing a crater wall on [[:en:Mars|Mars]]. This moving, swirling column of [[:en:Atmosphere of Mars|Martian atmosphere]] (comparable to a terrestrial [[:en:tornado|tornado]]) created the long, dark streak. ''[[:en:NASA|NASA]] image''.]] 태양계는 내행성, 소행성대, 외행성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행성계로 일컫는 [[지구형 행성]]들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있다. 바깥쪽을 공전하고 있는 외행성계는 [[가스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ref name="planets">{{웹 인용| 저자 = E. Grayzeck, D. R. Williams | 날짜= 2006-05-11 | url=http://nssdc.gsfc.nasa.gov/planetary/ | 제목= Lunar and Planetary Science | 출판사= NASA | 확인날짜= 2006-08-21 }}</ref> 해왕성 너머로는 [[카이퍼대]]가 존재하며, 가장 바깥쪽에는 최대 1광년에 이르는 거리까지 [[오르트 구름]]이 펼쳐져 있다. 행성들은 원시 태양을 두르고 있던 [[원시행성계원반]]에서 생겨났다.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 충돌, [[강착]] 과정을 통하여 원반에 있던 물질들은 큰 덩어리들로 자라났으며 이후 [[원시행성]]들로 진화했다. [[태양풍]]에 의한 [[복사압]]으로 인해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 물질들은 쓸려 나갔고, 자기가 지닌 가스 대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천체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행성들은 계속 커지거나 또는 극심한 충돌로 인해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을 방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충돌의 증거는 달이나 수성 등에 있는 많은 [[충돌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원시행성들 중 일부는 충돌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ref name=Montmerle2006> {{저널 인용 |last=Montmerle |first=Thierry |coauthors=Augereau, Jean-Charles; Chaussidon, Marc et al. |제목=Solar System Formation and Early Evolution: the First 100 Million Years |journal=Earth, Moon, and Planets |volume=98 |issue=1–4 |publisher=Spinger |pages=39–95 |year=2006 |doi=10.1007/s11038-006-9087-5 |bibcode=2006EM&P...98...39M}}</ref> 행성들은 충분한 질량을 획득한 뒤, 무거운 물질은 행성 중심부로 가라앉고 가벼운 물질은 위에 남는, [[행성 분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행성들의 중심에는 철이나 석질의 중심핵이 생성되고 그 위는 보다 가벼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맨틀]]이 형성되었다. 핵 부위는 고체 또는 액체 성분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행성의 중심핵은 고유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기장은 행성의 대기를 태양풍으로부터 보호하여, 벗겨져 나가지 않게 한다.<ref>{{웹 인용 | 성 = Roberge | 이름 = Aki | 날짜 = 1998-04-21 | url = http://www.dtm.ciw.edu/akir/Seminar/internal.html | 제목 = 생성된 이후의 행성들(''The Planets After Formation'') | 출판사 = Department of Terrestrial Magnetism | 확인날짜 = 2006-08-23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813092601/http://www.dtm.ciw.edu/akir/Seminar/internal.html | 보존날짜 = 2006-08-13 | url-status = dead }}</ref> 행성이나 위성들의 내부열은 이들을 만들었던 물체(방사성 물질로 예를 들면 [[우라늄]], [[토륨]], [[알루미늄 동위 원소|<sup>26</sup>Al]] 등이다)들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열 및, [[조석가속]]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일부 천체들의 경우 [[화산]]이나 지각 운동 등 지질학적 활동이 생겨날 정도의 열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기를 갖게 되는 천체는 바람이나 물로 인하여 지각의 침식 과정을 겪는다. 질량이 작은 천체들은 빠르게 식었고, 충돌구 생성을 제외한 일체의 지질학적 활동을 멈추었다.<ref name="new solar system">{{서적 인용| 편집자=J.K. Beatty, C.C. Petersen, A. Chaikin | 제목=The New Solar System | 출판사=Cambridge press | 판= 4th | 연도=1999 |ISBN=0-521-64587-5 }}</ref> === 항성천문학 === {{본문|항성}} [[파일:Ant Nebula.jpg|섬네일|오른쪽|보통의 불규칙한 외형의 성운 형태와는 달리, [[개미 성운]]의 중심부에서 죽어가는 별에서 분출하는 가스는 좌우 대칭형의 구도를 보여준다.]] [[항성]] 및 그들의 [[항성 진화|진화]] 과정을 아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체물리학]]은 관측 및 이론, 항성 내부 [[시뮬레이션|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항성 연구에 기여해 왔다.<ref name="Harpaz1994"> {{서적 인용 |author=Amos Harpaz |제목=Stellar Evolution |url=http://books.google.com/books?id=kd4VEZv8oo0C |accessdate=10 May 2012 |year=1994 |publisher=A.K. Peters |isbn=978-1-56881-012-6}}</ref> 항성 생성은 [[암흑 성운|거대 분자 구름]]으로 알려진, 먼지와 가스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 분자 구름이 불안정 해지면, 분자 구름이 [[중력]]때문에 붕괴하면서 여러 조각들로 깨지게 되고, 각각의 조각들은 [[원시별]]을 형성한다. 중심핵 부분이 충분히 밀도가 높고, 뜨거워지면 [[핵융합]] 작용이 시작되며, 여기서 [[주계열성]]이 탄생하게 된다.<ref name=Smith2004/> [[수소]]와 [[헬륨]], [[리튬]]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을 천문학에서는 [[중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계열성을 벗어난 항성의 진화 과정은 주로 별의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 별이 질량이 크면 클수록 더욱 밝아지며 중심핵에서 수소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이 갖고 있던 수소가 헬륨으로 모두 바뀌면, 항성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헬륨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중심핵의 온도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에 항성의 중심핵 밀도는 증가하며, 부피 또한 커지게 된다. 부피가 증가한 항성은 헬륨을 다 태울 때까지 잠시 동안 [[적색 거성]] 단계에 머무른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의 경우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태우는 일련의 진화 단계를 따로 걷게 된다.<ref name="Harpaz1994"/> 항성의 최후 양상 역시 마지막에 남은 별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 정도 질량을 갖는 별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질량을 방출하고 중심부에 [[백색왜성]]을 남긴다. 주계열 시절 질량이 태양의 8배 이상이었던 별들의 경우 중심핵이 붕괴하면서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초신성 폭발 후 중심에 남은 물질은 [[중성자별]]이 되거나, 혹은 폭발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는 경우 [[블랙홀]]로 진화한다.<ref name="Harpaz1994"/><ref name="Cambridge atlas">Jean Audouze, Guy Israel, 《캠브리지 천문학 아틀라스》(The Cambridge Atlas of Astronomy),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 1994, {{ISBN|0-521-43438-6}}</ref>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쌍성]]의 경우 주성에서 나온 물질이 반성인 백색 왜성으로 흘러들어가서 [[신성 (천체)|신성]]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욱 복잡한 진화 경로를 겪게 된다. 행성상 성운 및 초신성은 중원소를 성간 공간에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명체가 탄생할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새롭게 탄생하는 별들 및 행성들은 수소와 헬륨으로만 이루어질 것이고, [[지구형 행성]]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은하 천문학 === {{본문|우리은하천문학}} [[파일:Milky Way Arms.svg|오른쪽|250px|섬네일|[[우리 은하]]의 모식도. 하단부 회색 부채꼴 범위는 [[성간 먼지]]에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의 [[태양계]]는 [[국부 은하군]]에 속해 있는 [[막대나선은하]]인 [[우리 은하]]({{lang|en|Galaxy; Milky Way}})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가스,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서로의 중력을 통해 묶여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 질량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성간 물질|성간 먼지]]를 포함하는 바깥쪽 나선팔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지가 시야를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모습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 은하 중심부에는 막대 모양의 팽대부가 있으며, 은하 중심에는 [[초대질량블랙홀|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은하중심부는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처럼 퍼져나가는 네 개의 [[나선팔]]로 둘러싸여 있다. 나선팔은 금속함량이 많고 젊은 [[항성종족 I]] 별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은하 원반]]을 구형의 [[은하 헤일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늙은 [[항성종족 II]] 별들과 별들이 조밀하게 뭉친 [[구상성단]]들이 분포하고 있다.<ref>{{웹 인용 |성 = Ott |이름 = Thomas |날짜 = 2006-08-24 |url = http://www.mpe.mpg.de/ir/GC/index.php |제목 = 은하의 중심(''The Galactic Centre'') |출판사 = Max-Planck-Institut für extraterrestrische Physik |확인날짜 = 2006-09-08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409035115/http://www.mpe.mpg.de/ir/GC/index.php |보존날짜 = 2011-04-09 |url-status = dead }}</ref> 별들 사이에는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희박한 [[성간 물질]]이 분포하고 있다. 성간 물질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수소]] 분자 및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분자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 곳에서 별들이 태어난다. 별의 생성은 처음에는 분자구름이 밀집된 [[암흑 성운]]의 형태로 시작되며, 이들은 압축되고 붕괴되어 [[원시별]]을 형성하게 된다.<ref name=Smith2004> {{서적 인용 | first=Michael David | last=Smith | year=2004 | pages=53–86 | 제목=The Origin of Stars | chapter=Cloud formation, Evolution and Destruction | publisher=Imperial College Press | isbn=1-86094-501-5 | url=http://books.google.com/?id=UVgBoqZg8a4C&dq}}</ref> 질량이 큰 별들이 태어나는 곳의 주변은 빛을 방출하는 가스와 [[플라스마]]로 이루어진 [[H II 영역]]으로 진화한다. 무거운 별들은 강한 [[항성풍]]을 방출하고 [[초신성]] 폭발로 일생을 마치는데, 이로 인해 주변의 성간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때로는 여러 별들로 이루어진 [[산개 성단]]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산개 성단의 별들은 점차 흩어지게 되면서 우리 은하의 항성 종족에 편입된다.<ref> {{서적 인용 | first=Michael David | last=Smith | year=2004 | pages=185–199 | 제목=The Origin of Stars | chapter=Massive stars | publisher=Imperial College Press | isbn=1-86094-501-5 | url=http://books.google.com/?id=UVgBoqZg8a4C&dq}}</ref> [[우리 은하]] 및 [[은하|외부 은하]]에 대한 [[운동학]]적 연구를 통해 보이는 물질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은 가지는 [[암흑물질]]의 본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은하무리|암흑물질 헤일로]]가 우주에 있는 물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ref> {{저널 인용 | 저자=Van den Bergh, Sidney | 제목=암흑 물질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Dark Matter'') | 저널=Publications of the Astronomy Society of the Pacific | 연도=1999 | volume=111 | 쪽=657–660 | url=http://www.journals.uchicago.edu/PASP/journal/issues/v111n760/990017/990017.html | doi=10.1086/316369}}</ref> === 외부은하 천문학 === [[파일:Hubble sequence photo.png|섬네일|360px|은하의 형태학적 분류. ''E''는 타원 은하, ''S''는 나선 은하, ''SB''는 막대나선 은하를 가리킨다.]] {{본문|외부은하 천문학}} 외부은하 천문학은 [[우리은하]] 밖의 천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주로 [[은하의 형성과 진화]], 외부은하의 형태와 분류, [[활동은하핵|활동은하]], [[은하단]]과 [[은하군]],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지는 우주 거대구조를 연구한다. 대부분의 은하들은 모양에 따라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로 분류된다.<ref> {{웹 인용 |last = Keel |first = Bill |date = 1 August 2006 |url=http://www.astr.ua.edu/keel/galaxies/classify.html |제목 = Galaxy Classification|publisher = University of Alabama |accessdate = 8 September 2006}}</ref> 이름대로 타원은하는 하늘에 투영된 모습이 타원을 띄는 은하이다. 타원은하의 별들은 무작위적인 궤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성간물질이 적으며, 새로 생성되는 별이 적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원은하들은 주로 은하단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여러 은하들이 [[병합|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선은하는 납작한 회전하는 원반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부의 팽대부(또는 막대)와 나선 모양의 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선팔들은 성간먼지를 많이 포함하고, 주로 별들이 형성되는 곳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선은하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헤일로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대표적인 나선은하이다. 불규칙은하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로 분류할 수 없는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은하이다. 이러한 불규칙한 모양은 다른 은하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만들어진다. 활동은하는 방출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별, 먼지, 성간물질 같은 것이 아닌 은하 중심의 다른 에너지 원(블랙홀)으로부터 나오는 은하이다. 이러한 [[활동은하핵]]은 [[강착원반]]을 가진 [[초대질량 블랙홀]]이라고 여겨진다. 활동은하에는 [[시퍼트 은하]], [[퀘이사]], [[블레이저]], [[전파은하]] 등이 있다. 전파은하는 일반적인 은하와 달리 전파에서 매우 강한 빛을 내며, 퀘이사는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우주 거대구조는 이러한 개개의 은하들이 모여서 이루는 구조를 의미한다. 우주의 거대 구조는 계층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은하들이 모여 [[은하군]]을 이루고, 이 은하군들이 모여 [[은하단]]을 형성하며, 다시 [[초은하단]]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집들은 다시 필라멘트 구조와 그 사이의 공동을 이루며 분포한다.<ref name="evolving universe"> {{서적 인용 |first=Michael |last=Zeilik |제목=Astronomy: The Evolving Universe |edition=8th |publisher=Wiley |year=2002 |isbn=0-521-80090-0}}</ref> === 우주론 === {{본문|물리우주론}} 물리 우주론([[:en:physical cosmology|physical cosmology]])은 우주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분야이다. 우주론의 연구 대상으로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대폭발 핵합성]], 우주 거대구조,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이 있다. 우주론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년 전에 시공간의 한 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팽창하여 왔다는 [[대폭발 이론]]이다.<ref name=Dodelson2003/> 1965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 발견됨으써 [[대폭발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ref name=Dodelson2003> {{서적 인용 |last=Dodelson |first=Scott |제목=Modern cosmology |year=2003 |isbn=978-0-12-219141-1 |publisher=[[:en:Academic Press|Academic Press]] |pages=1–22}}</ref>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여러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대폭발 직후 아주 초기에는 우주가 [[급팽창 이론|급팽창]]이라고 불리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팽창을 겪었다고 생각되며, 이 급팽창 때문에 우주가 현재 관측되는 것처럼 균질({{llang|en|homogeneous}})하고 등방적({{llang|en|isotropic}})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급팽창 이후에는 중수소, 헬륨과 같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바리온)이 만들어진 이 과정을 [[대폭발 핵합성]] 또는 원시 핵합성이라고 부른다.<ref name=Dodelson2003/> 우주가 팽창하고 식어감에 따라 중성 원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빛이 이온화된 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지게 된다. 이 때 발생한 빛이 현재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관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후의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lang|en|Dark Age}})라고 부른다.<ref name="cosmology 101"> {{웹 인용 |last = Hinshaw |first = Gary |date = 13 July 2006 |url=http://map.gsfc.nasa.gov/m_uni.html |제목 = Cosmology 101: The Study of the Universe |publisher = NASA WMAP |accessdate = 10 August 2006}}</ref> 우주에 존재하던 작은 밀도 요동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질들이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가스 덩어리를 만들고, 여기서 처음으로 별들([[:en:Population III stars|Population III stars]])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별들은 내부의 핵융합을 통해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되고, 이 때 발생하는 빛들은 주위의 가스를 이온화시켜서, 소위 [[재전리]]라는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ref>Dodelson, 2003, pp. 216–261</ref> 별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면서 처음으로 은하들을 만들게 되고, 이 은하들이 다시 중력에 의해 분포하면서 은하군이나 은하단 같은 더 큰 구조들을 만들고, 이는 우주의 거대구조를 형성하게 된다.<ref> {{웹 인용 |url=http://www.damtp.cam.ac.uk/user/gr/public/gal_lss.html |제목 = Galaxy Clusters and Large-Scale Structure |publisher = University of Cambridge |accessdate = 8 September 2006}}</ref> 소위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이러한 우주론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이 되어왔으며, 두 성분을 합쳐서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의 하나이다.<ref>{{웹 인용 |last = Preuss |first = Paul |url = http://www.lbl.gov/Science-Articles/Archive/dark-energy.html |제목 = Dark Energy Fills the Cosmos |publisher = U.S. Department of Energy, Berkeley Lab |accessdate = 8 September 2006 |archive-date = 2006-08-11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811215815/http://www.lbl.gov/Science-Articles/Archive/dark-energy.html |url-status = }}</ref> == 학제간 연구 ==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관련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를 활발하게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고천문학]]({{lang|en|Archaeoastronomy}})은 고고학과 융합된 학문으로서 고대 또는 전통적인 천문학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생물학]]({{lang|en|Astrobiology}})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의 생성, 변화, 소멸등을 연구하는 분야는 [[천문화학]]({{lang|en|Astrochemistry}})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물질들은 주로 분자운, 온도가 낮은 별들, 갈색왜성, 그리고 행성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주화학]]({{lang|en|Cosmochemistry}})은 태양계내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들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원소와 동위원소의 상대적인 비율을 다룬다. 이 두 분야들은 천문학과 화학이 융합된 분야이다. == 아마추어 천문학 == {{본문|아마추어 천문학}} 천문학은 비전문가들(아마추어들)이 가장 많이 기여를 하는 과학분야 중 하나이다.<ref>{{저널 인용 |last = Mims III|first = Forrest M. |제목=Amateur Science—Strong Tradition, Bright Future |journal=Science |year=1999 |volume=284 |issue=5411 |pages=55–56 |doi=10.1126/science.284.5411.55 |quote=Astronomy has traditionally been among the most fertile fields for serious amateurs [...] |bibcode = 1999Sci...284...55M }}</ref>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한다. 일반적인 관측대상으로는 달, 행성, 별, 혜성, 유성우, [[심원천체]](성단, 은하, 성운)등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관측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장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인들은 밤하늘이나 특정 천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사진을 천문사진 이라고 부른다.<ref> {{웹 인용 |url=http://www.amsmeteors.org/ |제목 = The Americal Meteor Society |accessdate = 24 August 2006}}</ref><ref> {{웹 인용 |first=Jerry |last=Lodriguss |url=http://www.astropix.com/ |제목 = Catching the Light: Astrophotography |accessdate = 24 August 2006}}</ref> 이러한 취미활동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천문학 연구에 꾸준히 공헌해왔다. 실제로 천문학은 아직까지도 비전문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해내기도 하고, 변광성을 꾸준히 관측한다. 디지털 관측기기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천문 사진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다.<ref>{{웹 인용 |url=http://www.lunar-occultations.com/iota/iotandx.htm |제목=The International Occultation Timing Association |accessdate=24 August 20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821180723/http://www.lunar-occultations.com/iota/iotandx.htm |보존날짜=2006-08-21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url=http://cbat.eps.harvard.edu/special/EdgarWilson.html |제목 = Edgar Wilson Award |publisher = IAU Central Bureau for Astronomical Telegrams |accessdate = 24 October 2010}}</ref><ref>{{웹 인용|url=http://www.aavso.org/ |제목 = American Association of Variable Star Observers |publisher = AAVSO |accessdate = 3 February 2010}}</ref> == 천문학의 미해결 문제 == 비록 천문학은 우주와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아직도 중요한 미해결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상·우주 망원경, 그리고 획기적인 이론·실험 물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질량에 따른 별들의 개수 분포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즉 왜 별들이 생성될 당시의 질량분포([[초기질량함수]])가 일정해 보이는가?<ref>{{저널 인용 |last = Kroupa |first = Pavel |제목=The Initial Mass Function of Stars: Evidence for Uniformity in Variable Systems |journal=Science |year=2002 |volume=295 |issue=5552 |pages=82–91 |doi=10.1126/science.1067524 |pmid=11778039 |arxiv = astro-ph/0201098 |bibcode = 2002Sci...295...82K }}</ref>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별과 행성의 생성과정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더 나아가 지성을 가진 외계인이 존재하는가? 외계생명의 존재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astrobio.net/debate/236/complex-life-elsewhere-in-the-universe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628214416/http://www.astrobio.net/debate/236/complex-life-elsewhere-in-the-universe |archivedate = 2011-06-28 |제목 = Rare Earth: Complex Life Elsewhere in the Universe? |publisher = Astrobiology Magazine |accessdate = 12 August 2006 |url-status = live }}</ref><ref>{{웹 인용 |url=http://www.bigear.org/vol1no2/sagan.htm |제목 = The Quest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publisher = Cosmic Search Magazine |accessdate = 12 August 2006}}</ref> 우리 태양계는 보편적인 행성계인가 아니면 특별한가? * 왜 우주는 생겨났는가? 우리 우주를 균일하게 만든 급팽창({{lang|en|inflation}})은 왜 발생했는가? 왜 [[중입자 비대칭|바리온 비대칭성]](baryon asymmetry)이 존재하는가? *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들은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성분이지만 그 본질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ref name="physics questions">{{웹 인용 |url = http://www.pnl.gov/energyscience/01-02/11-questions/11questions.htm |제목 = 11 Physics Questions for the New Century |publisher = Pacific Northwest National Laboratory |accessdate = 12 August 2006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60203152634/http://www.pnl.gov/energyscience/01-02/11-questions/11questions.htm |archivedate = 2006년 2월 3일 |url-status = dead }}</ref> 우주의 궁극적 [[우주의 종말|운명]]은 무엇인가?<ref> {{웹 인용 |last = Hinshaw |first = Gary |date = 15 December 2005 |url = http://map.gsfc.nasa.gov/m_uni/uni_101fate.html |제목 = What is the Ultimate Fate of the Universe? |publisher = NASA WMAP |accessdate = 28 May 2007}}</ref> * 어떻게 은하들이 처음 형성되었는가? 거대한 블랙홀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초고에너지 입자]]([[:en:ultra-high-energy cosmic ray|ultra-high-energy cosmic ray]])들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Col-begin}} {{Col-break}} * [[점성술학과 천문학]]([[:en:Astrology and astronomy|en]]) * [[천문학자]] * [[:분류:천문대]] * [[:분류:천문학 관련 기관]] * [[천문학 연표]] * [[별자리]] * [[물리우주론|우주론]] * [[우주 거리 사다리]] {{Col-break}} * [[천문학용어집]] * [[세계 천문의 해]] * [[우주 탐사]] * [[우주과학]] * [[태양계]] * [[항성|별]] * [[망원경]] {{Col-break}} {{Col-end}}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낱말사전|천문학}} * [http://www.kasi.re.kr/ 한국천문연구원] * [http://www.kas.org 한국천문학회] * [http://www.kaas.or.kr/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 {{언어링크|en}} [http://antwrp.gsfc.nasa.gov/apod/ NASA의 오늘의 천체사진] {{웨이백|url=http://antwrp.gsfc.nasa.gov/apod/ |date=20110126064324 }} * {{언어링크|en}} [http://www.iau.org 국제 천문 연맹] * {{언어링크|en}} [http://www.gsfc.nasa.gov NASA] * [http://www.astronet.co.kr/ NADA] * {{언어링크|en}} [http://www.esa.int/esaCP/index.html European Space Agency] {{웨이백|url=http://www.esa.int/esaCP/index.html |date=20071221001951 }} * {{언어링크|en}} [http://www.stsci.edu/resources/ STSci : 우주망원경연구소]{{깨진 링크|url=http://www.stsci.edu/resources/ }} * {{언어링크|en}} [http://www.jpl.nasa.gov/ 제트추진연구소 - Caltech] * {{언어링크|en}} [http://www.astronomy2009.org International Year of Astronomy 2009] IYA2009 Main website * {{언어링크|en}} [http://www.aip.org/history/cosmology/index.htm Cosmic Journey: A History of Scientific Cosmology] {{웨이백|url=http://www.aip.org/history/cosmology/index.htm |date=20081021070242 }} from the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 {{언어링크|en}} 천문학, 천체물리학 분야의 주요 [http://ads.harvard.edu/books/clab/ 서적] 과 [http://ads.harvard.edu/books/claj/ 저널] 들. Smithsonian/NASA [[:en:Astrophysics Data System|Astrophysics Data System]]. {{천문학}} {{자연과학}} {{천문학 하위분야}} {{전거 통제}} [[분류:천문학| ]] [[분류:자연과학]] [[분류:천체물리학]] [[분류:태양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div class="thumb tright"> <div class="thumbinner" style="width: 262px;"> [[파일:Animexample3edit.png]] <div class="thumbcaption">위의 애니메이션은 총 6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div> [[파일:Animexample.gif]] <div class="thumbcaption">또한 이 애니메이션은 초당 10 프레임으로 움직인다.</div> </div> </div> [[파일:Animhorse.gif|right|섬네일|150px|[[로토스코프]]로 움직이는 말의 모습.]] '''애니메이션'''({{llang|en|Animation}})은 여러 장의 화면을 연속촬영 하고, 조작하여 화면이 움직여 보이게 만든 [[영화]]의 한 일종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Anima''에서 비롯하였다. 간단히 '''동화'''(動畵)라고도 부른다. '만화'나 '동화'는 그림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각 장면은 그림이 아닐 수 있다. [[3차원 모델링]]을 통해 [[컴퓨터]] 화면상으로 재현된 영상의 경우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니'''라고 짧게 표기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아니메]]'''({{lang|ja|アニメ}})로 줄여 부르거나 '''도가'''({{llang|ja|動画}}, 동화)라고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일본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일본(Japan)과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 기원 및 발전 == 초기 애니메이션은 배경에 그림을 그려 움직이게 하는 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흙이나 모형 등의 피사체를 조금씩 변형하여 각 장면을 촬영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생겼고,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으로 등장인물의 각 동작과 배경을 구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2D의 셀 애니메이션만을 쓰거나, 3D와 셀을 조합하여 사용한다. == 종류 == === 유통 형태 === 애니메이션은 유통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TV에서 방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텔레비전 시리즈|TV 시리즈]]가 제작되며, 일본에서는 보통 25분 정도의 시간으로 1주일에 한 편씩 13주간 방송할 수 있는 분량을 한 단위(쿨,기)로 하여 방송한다. * [[일본]]에서 영상 매체([[DVD]], [[VHS]], [[LD]], [[블루레이 디스크]] 등)에 담겨 판매 혹은 대여되는 [[OVA]](혹은 OAV)가 있으며, 한 편의 길이는 TV시리즈와 비슷하나 전체 분량은 유동적이다. *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극장판|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있다. 자금과 노력이 많이 투자되어 일반적으로 세 가지 형식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나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 못하고 (VHS, DVD, 블루레이 디스크 등)으로 출시된 애니메이션도 있다. 주로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제작 기법 === * [[셀 애니메이션]] - 필름에 그림을 그려넣고 사진을 찍어 각 장면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 [[클레이 애니메이션]] - 찰흙으로 만든 모형을 프레임에 맞게 조금씩 움직인 후 사진을 찍는 방법이다. * [[페인트 온 글라스 애니메이션]] - 일반적으로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닌 유리판 위에 바로 물감으로 색을 입혀, 그 유리판을 한장씩 촬영하여 만드는 애니메이션 기법이다. * [[컴퓨터 애니메이션]] - 모든 작업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화상 처리하는 2D 및 3D 애니메이션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며, 3차원 모델을 이용하기도 한다. 플래시가 가장 좋은 예이다. *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 사진기로만 그림이나 광경을 몇분이나, 소수의 차이가 보이도록 찍어, 한꺼번에 연결시켜 매끄러운 움직임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외에도 페이퍼 애니메이션, 모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이 있다. == 창작 경로 == 현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다. 성격상 가장 유사한 [[만화]]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으로 창작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 캐릭터 애니메이션 ==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애니메이션 기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독자들이나 필자가 [[디자이너]]라면 [[캐릭터]]를 [[미술]]이나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프로그래머]]에게 캐릭터란 결국 메시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메시들의 집합을 어떤 애니메이션 방식과 결합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표현 방식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 애니메이션의 교훈적 특징 == {{본문|교훈#애니메이션과 교훈}} == 애니메이션 시청자에게 일어나는 심리현상 == * [[심리투영|투사]] [[심리현상]] 중 하나인 투사는 지니고 있을 법한 자신의 측면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타인이 지닌 자신의 측면을 혐오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태도나 특성이 보기 언짢다면 그 캐릭터는 자기 내면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정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본인의 측면 중 하나일 수 있다. * [[전이|감정전이]] 전이는 특정 상황에 각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장면의 유사 요소가 많은 상황이 찾아오면 해당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가 그 실제 상황에 반영돼 느껴진다. == 같이 보기 == {{포털|애니메이션}} * [[미국의 애니메이션]] * [[일본의 애니메이션]] * [[만화]] * [[영화]] == 외부 링크 == {{위키공용|Animation}} * [https://web.archive.org/web/20090208092536/http://www.jade-voice.com/ 일본성우 전문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Jade Voice] * {{dmoz|Arts/Animation}} {{애니메이션}} {{영화 장르}} {{전거 통제}} [[분류:애니메이션| ]] [[분류:영상 기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알찬 글}} {{태풍 정보 | 종류 = 열대 | 해역 = 북서태평양 | 태풍이름 = 200314 무지개 (MAEMI) | 이미지 주소 = Typhoon maemi 2003.jpg | 이미지 이름 = 태풍 매미 (9월 10일) | 발생일 = [[2003년]] [[9월 6일]] | 소멸일 = [[2003년]] [[9월 14일]] | 최저기압 = 910 | 10분최대풍속 = 105 | 1분최대풍속 = 150 | 최대크기(직경) = 1000 | 인명피해 = 135명</br>(대한민국 132명, 일본 3명) | 재산피해(억원) = 4조 8,750억원</br>(41억 3,600만 달러) | 10분최대풍속(KMA) = 54 | 최대강풍반경(KMA) = 460 }} '''태풍 매미'''(태풍 번호: 0314,<ref>{{Digital Typhoon|200314|MAEMI}}</ref>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 지정 번호: 15W,<ref group="주">최대 풍속이 13 m/s (25 kt)를 넘는 열대저기압에 붙여지는 번호로, 일본 기상청과는 해석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번호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ref> 국제명: MAEMI, 필리핀 기상청(PAGASA) 지정 이름: Pogi)는 [[2003년]] [[9월 12일]] [[한반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태풍]]이다. “Super Typhoon Maemi” 혹은 “2003년 태풍 제14호”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 중 상륙 당시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급이고, 2003년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태풍으로 발달하였다. '매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ref>{{뉴스 인용|url=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3091287018|제목=태풍 이름 '매미' 북한 제안|성=김귀근|이름=|날짜=2003-09-12|뉴스=|출판사=한국경제|확인날짜=2019-09-20|archive-date=2022-04-0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407055844/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3091287018|url-status=}}</ref> 곤충 [[매미]]에서 온 이름이다. 한편 이 태풍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태풍 이름 목록에서 "매미"라는 이름이 영구 제명되어, 후에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무지개"로 다시 제명되었다가 "무지개"도 중국에 많은 피해를 주어 다시"수리개"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ref>후에 무지개라는 이름도 [[중화인민공화국]] 남부에 큰 피해를 주어 제명되어 태풍 "수리개"로 재명명되었다.</ref><ref>{{뉴스 인용|저자1=유용하|제목=느리고 커지는 태풍… ‘쁘라삐룬’ 다음은 ‘마리아’|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704023003|날짜=2018-07-04|확인날짜=2018-07-04|뉴스=[[서울신문]]}}</ref> == 태풍의 진행 == {{열대 저기압의 경로|Maemi 2003 track.png}} [[2003년 태풍|2003년]] 9월 4일 [[괌]]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은 느리게 발달하면서 북서쪽으로 나아가 약 이틀이 지난 9월 6일 15시 무렵 제14호 태풍 매미가 되었다. 이렇게 열대저기압에서 [[태풍]]으로 인 정되기까지 발달 속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기상청]] 등은 이와 같은 느린 발달 경향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태풍은 9월 9일의 무렵 [[일본]] [[류큐 열도]] 남동쪽 먼 바다에 접근하면서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9월 10일에는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에 달하는 최강 급의 [[태풍]]으로 성장했다.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해석에서는 1분 평균 최대 풍속 75 m/s (150 kt)의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5등급|카테고리 5급]]”이며 [[일본]]의 기준으로는 “맹렬한 태풍”이고 [[대한민국]]의 기준으로는 "초강력 태풍"이다. [[파일:Maemi 2003-09-13 0115Z.jpg|200px|섬네일|right|9월 13일 10시,<br />동해상에 진출한 태풍 매미.]] 최성기를 맞이한 [[태풍]]은 진로를 서서히 북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9월 11일 새벽에는 [[일본]] [[미야코섬]]을 통과해 [[동중국해]]로 들어갔다.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미야코섬]]의 기상관청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nbsp;m/s 가 관측,<ref name="ja">{{언어링크|ja}} [http://www.jma-net.go.jp/miyako/kakosiryou/ty0314/ty0314.htm 2003年台風第14号 観測資料] {{웨이백|url=http://www.jma-net.go.jp/miyako/kakosiryou/ty0314/ty0314.htm |date=20120420214354 }} - 미야코섬 기상대</ref> [[일본]]에서는 수십 년 만의 기록이 되었다. [[동중국해]]에 들어가서는 북북동 방면으로 전향하여 [[한반도]]를 향해 북상, 그러면서 차츰 쇠퇴기에 접어들어 11일 오후에 중심 기압 920 hPa / 최대 풍속 50&nbsp;m/s의 강도 “매우 강”으로 조금 약해진 뒤, 9월 12일 15시에는 중심 기압 935 hPa / 최대 풍속 45 m/s의 세력으로 [[제주도]] 남동쪽 해상에 이르렀다. 같은 날 20시 20분경에는 약간 더 쇠약해진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의 “중형의 강한 태풍”으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고성군]] 일대에 상륙,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동부를 관통하여 상륙 후 약 6시간 만인 9월 13일 2시 30분경에 [[울진군|울진]] 앞 바다로 빠져나와 동해상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상까지 나아가, 9월 14일 6시경에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남부 지방과 [[일본]] [[미야코섬]]의 큰 피해, 그리고 경로, 위력 등에 있어서 1959년의 제14호 [[태풍 사라 (1959년)|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태풍이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4&aid=0000047020 태풍 매미, 발생에서 소멸까지] - YTN</ref><ref>《태풍 매미 백서》 89쪽 <유사사례 분석> - 기상청</ref> === 중심 기압 및 최대 풍속의 경과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font-size: 85%; text-align:left" color:white width=65% |- ! class="unsortable"| 날짜 및 시각 ! 중심 기압 ! 최대 풍속 ! class="unsortable"| 비고 |- |9월 6일 3시 |1002 hPa |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해석으로 태풍 발생. |- |9월 6일 15시 |994 hPa |18&nbsp;m/s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태풍 발생.<br />제14호 태풍 “매미”로 명명. |- |9월 7일 3시 |992 hPa |20&nbsp;m/s | |- |9월 7일 15시 |992 hPa |20&nbsp;m/s | |- |9월 8일 3시 |985 hPa |25&nbsp;m/s | |- |9월 8일 15시 |975 hPa |30&nbsp;m/s | |- |9월 9일 3시 |970 hPa |35&nbsp;m/s | |- |9월 9일 15시 |950 hPa |40&nbsp;m/s | |- |9월 9일 21시 |940 hPa |45&nbsp;m/s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 “Super Typhoon”<ref group="주">최대 풍속이 1분 평균으로 67 m/s (130 kt) 이상인 태풍을 말한다.</ref>으로 분류. |- |9월 10일 3시 |930 hPa |45&nbsp;m/s | |- |9월 10일 9시 |925 hPa |50&nbsp;m/s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885 hPa,<br />1분 평균 최대 풍속 75&nbsp;m/s (150 kt)의 “카테고리 5급”. |- |9월 10일 15시 |910 hPa |50&nbsp;m/s | |- |9월 10일 21시 |910 hPa |55&nbsp;m/s |[[일본 기상청]] 기준상의 “맹렬한 태풍”으로 발달. |- |9월 11일 3시 |910 hPa |55&nbsp;m/s |4시경 [[미야코섬]] 최접근.<br />[[미야코섬]]에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nbsp;m/s.<br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해석으로는 최성기에 비해 조금 약해져 있어,<br />중심 기압 904 hPa, 1분 평균 최대 풍속 70&nbsp;m/s (135 kt)의 “카테고리 4급”이 된다. |- |9월 11일 9시 |910 hPa |55&nbsp;m/s | |- |9월 11일 15시 |920 hPa |50&nbsp;m/s | |- |9월 11일 21시 |930 hPa |50&nbsp;m/s |일본 [[오키나와섬]]의 서쪽 약 250&nbsp;km 부근 해상을 통과. |- |9월 12일 3시 |935 hPa |45&nbsp;m/s | |- |9월 12일 9시 |930 hPa |50&nbsp;m/s | |- |9월 12일 15시 |935 hPa |45&nbsp;m/s |16시경 [[제주도]] 최접근.<br />성산포에서 최저해면기압 954.4 hPa, [[제주시|제주]]·고산에서 최대순간풍속 60.0&nbsp;m/s. |- |9월 12일 18시 |945 hPa |40&nbsp;m/s | |- |9월 12일 20시 20분<ref name="korea" group="주">이 시각의 태풍 해석치는 [[일본 기상청]]이 아닌 [[대한민국 기상청]]의 것이다.</ref> |950 hPa |40&nbsp;m/s |[[사천시|사천]] 부근 해안으로 상륙. |- |9월 12일 21시<ref group="주" name="korea" /> |950 hPa |40&nbsp;m/s |[[통영시|통영]]에서 최저해면기압 954.0 hPa. |- |9월 13일 0시<ref group="주" name="korea" /> |960 hPa |36&nbsp;m/s |[[대구광역시]] 남동쪽 20&nbsp;km 지점 통과. |- |9월 13일 3시 |970 hPa |30&nbsp;m/s |2시 30분경 [[동해]]상 진출. |- |9월 13일 9시 |975 hPa |30&nbsp;m/s | |- |9월 13일 21시 |980 hPa |25&nbsp;m/s |일본 [[홋카이도]] 접근. |- |9월 14일 6시 |984 hPa |20 m/s |[[온대저기압]]으로 변질. |} == 특징 및 영향 == === 2003년 최강의 태풍 === [[파일:ST Maemi 12 sep 2003 0455Z.jpg|200px|섬네일|9월 12일 오후 4시 55분,<br />태풍의 한반도 상륙 3시간 전.]] 태풍 매미의 최대 세력은 대한민국과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nbsp;m/s (105 kt)이며, 풍속 값을 1분 평균으로 산출하는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해석으로는 중심 기압 885hPa<ref group="주">각 기관에서 발표되는 태풍의 세력은 위성 화상 해석을 통해 “추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같은 시각의 같은 태풍이라 할지라도 중심 기압과 최대 풍속이 기관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ref> / 최대 풍속 75&nbsp;m/s (150 kt) 가 된다. 그 위력은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 중에서 으뜸인 것은 물론, 그 해의 모든 허리케인과 사이클론을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ref group="주">2003년 발생한 전 세계의 열대저기압 [http://weather.unisys.com/hurricane/s_indian/2003H/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s_indian/2003H/index.html|date=20100729190937}}[http://weather.unisys.com/hurricane/n_indian/2003H/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n_indian/2003H/index.html|date=20100729190656}}[http://weather.unisys.com/hurricane/s_pacific/2003/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s_pacific/2003/index.html|date=20100729190737}}[http://weather.unisys.com/hurricane/atlantic/2003H/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atlantic/2003H/index.html|date=20100729190825}}[http://weather.unisys.com/hurricane/e_pacific/2003H/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e_pacific/2003H/index.html|date=20100729190858}}[http://weather.unisys.com/hurricane/w_pacific/2003H/index.html] {{웨이백|url=http://weather.unisys.com/hurricane/w_pacific/2003H/index.html|date=20100729191129}} 목록을 참고로 한다.</ref> 게다가 북위 30도 이북에까지 진행하였음에도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nbsp;m/s (95 kt)의 강도 “매우 강”에 해당하는 세력을 유지, 북상하면서도 좀처럼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nbsp;m/s (80 kt)의 세력으로 상륙<ref>《태풍 매미 백서》 114쪽</ref> 했다. 상륙 시의 중심 기압 950 hPa 은 이전에 강한 세력으로 상륙했던 [[태풍 사오마이 (2000년)|2000년 제14호 태풍 사오마이]] (상륙 시 중심 기압 959 hPa), [[태풍 루사|2002년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시 중심 기압 960 hPa)의 기록을 크게 경신하는 것이다. 태풍이 이렇게 강력한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원인을 꼽자면,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았던 것과 비교적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평년보다 2~3도 높았던 해수면 온도는 태풍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다소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는 태풍이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태풍의 상륙 지점에 가까웠던 [[여수시|여수]], [[통영시|통영]], [[마산시|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기압이 되어, 그중 통영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54.0 hPa를 관측했다.<ref name="tkma">[http://web.kma.go.kr/servlet/NeoboardProcess?mode=download&bid=press&num=1170975&fno=1&callback=http%3A%2F%2Fweb.kma.go.kr%2Fnotify%2Fpress%2Fkma_list.jsp&ses=USERSESSION&k=ATC201001041220361085_6edd0a99-e88a-414c-b7d1-610e877a5f2e.hwp 제14호 태풍 ""매미(MAEMI)"" 종합 상황] '''(HWP)''' - 기상청</ref> 이것은 태풍에 의해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부문 역대 2위가 되는 기록이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기록<ref>{{언어링크|en}} [http://www.jma.go.jp/jma/jma-eng/jma-center/rsmc-hp-pub-eg/Besttracks/bst_all.txt RSMC 태풍 베스트 트랙] {{웨이백|url=http://www.jma.go.jp/jma/jma-eng/jma-center/rsmc-hp-pub-eg/Besttracks/bst_all.txt |date=20130625032417 }}</ref>에 의하면 중심 기압 930 hPa 이하의 세력을 북위 30도 이상까지 유지한 태풍은 극히 드물어, 이러한 태풍은 1951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1450여개의 태풍 중 매미를 포함하여 11개밖에 없다. === 강풍 === 매우 강한 바람을 동반했던 것이 이 태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상륙 시의 폭풍역 (풍속 25&nbsp;m/s 이상의 폭풍 범위) 이 남동쪽으로 반경 150&nbsp;km, 북서쪽으로는 반경 55&nbsp;km 정도로 북서 방향의 폭풍역이 다소 작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최대순간풍속 10~20&nbsp;m/s 내외의 수준에 그쳤지만, 태풍의 폭풍역에 해당했던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그리고 [[쓰시마섬|대마도]]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강풍이 되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에 속한 대부분의 관측 지점에서 종전의 풍속 기록이 바뀌었다. 관측된 최대순간풍속은 [[제주시|제주]] 60.0&nbsp;m/s<ref group="주" name="wind">제주도 고산 지역과 제주시에서 관측된 태풍 매미에 의한 최대순간풍속의 기상청 공식 기록은 60.0 m/s 로 되어 있지만 2003년 당시 풍속계의 측정 상한이 60 m/s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실제로는 이보다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ref>, 고산 60.0&nbsp;m/s<ref group="주" name="wind" />, [[여수시|여수]] 49.2&nbsp;m/s, [[부산광역시|부산]] 42.7&nbsp;m/s 등으로, 제주도와 여수 등의 지역은 태풍의 가항반원에 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상위 기록의 대부분은 태풍의 중심권에 가까웠던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다. 고산에서는 최대 풍속 51.1&nbsp;m/s 가 함께 관측되어,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최대 풍속 부문 역대 1위 기록이었던,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 (2000년)|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를 내습하면서 세운 최대순간풍속 58.3&nbsp;m/s, 최대 풍속 47.4&nbsp;m/s를 3년 만에 다시 경신했다.<ref name="tkma" />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역대 1위를 바꾼 60.0&nbsp;m/s의 풍속이 제주와 고산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된 것은 대단히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최대순간풍속은 비공식으로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한 경우가 있어, [[일본]] [[미야코섬]] 자위대 주둔지에서는 공식 기록 (최대순간풍속 74.1&nbsp;m/s, 미야코섬 기상관청 관측) 을 훨씬 뛰어넘는 86.6&nbsp;m/s<ref>{{언어링크|ja}} [http://www.arch.t-kougei.ac.jp/COE/reports/0314miyakojima.pdf 宮古島における台風0314号(Maemi) 被害調査報告] '''(PDF)'''</ref>를 기록했는가 하면, [[부산광역시|부산]]에서도 공식 기록인 42.7&nbsp;m/s를 넘는 비공식 기록이 잇달아, 구덕산 레이다에서 53.4&nbsp;m/s, [[광안대교]]에서 56.2&nbsp;m/s, 신선대 부두에서 52.0&nbsp;m/s 등을 기록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0461652 <세계3위 부산항 경보시스템 전무>] - 연합뉴스</ref> 이와 같이 기록적인 강풍이 일었던 원인은 물론 강력했던 태풍의 세력이 일차적이지만, 부가적인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먼저 한반도 상륙 시 45&nbsp;km/h 정도의 상당히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이 이동속도가 태풍의 풍속 (상륙 시 최대 풍속 40&nbsp;m/s) 에 더해져 위험반원에서의 바람의 힘을 그만큼 더 강하게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특성상 진행방향의 오른쪽, 다시 말해 위험반원에서는 태풍의 회전과 진행방향이 중첩되어, 태풍의 이동속도가 그대로 풍속에 더해지기 때문이다.<ref>{{언어링크|ja}} [http://www.jma.go.jp/jma/kishou/know/typhoon/2-1.html 台風に伴う風の特性] - 일본 기상청</ref> 게다가 태풍 상륙 일인 9월 12일 오후의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매우 낮은 중심 기압의 태풍과 북쪽의 고기압이 마주치는 형국이 되어 있어, 이 부근의 기압경도를 급격하게 만듦에 따라 강풍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형성했다.<ref name="tkma" /> 즉,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태풍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던 바람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 호우 === [[파일:Maemi 12sep1224 utc.gif|200px|섬네일|right|9월 12일 오후 9시 24분,<br />TRMM 위성에서 관측된 매미.]]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의 이미지가 크게 각인되어 있으나, 강수에 있어서도 꽤 큰 영향을 끼친 태풍이다. 전체적인 강수량은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히는 [[태풍 루사|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나 태풍 아그네스 등이 몰고왔던 호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남해군|남해]] 410.0&nbsp;mm, [[강릉시|강릉]] 307.5&nbsp;mm, [[고흥군|고흥]] 291.0&nbsp;mm 가 기록되는 등, 남해안과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최대 450&nbsp;mm 에 달하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무엇보다 태풍이 다소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나감에 따라 비구름대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강수량이 기록된 것으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강수가 집중되는 형태를 보였다. 위에 언급된 강수량의 대부분은 태풍이 한반도 가까이에 존재했던 12일 오후 늦게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ref name="bkma">《태풍 매미 백서》 60쪽, 61쪽 - 기상청</ref> 또한 지역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났는데, 주로 태풍의 중심권이 통과한 [[제주도]], [[전라남도|전남]] 동부, [[경상남도|경남]] 서부, [[대구광역시|대구]] 근방 지역에서 총강수량 200&nbsp;mm 이상의 기록적인 호우가 관측된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가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남해군|남해]]의 강수량은 약 400&nbsp;mm 에 이르렀지만 동쪽으로 불과 100&nbsp;km 정도 떨어진 [[부산광역시|부산]]의 강수량은 60&nbsp;mm 안팎에 지나지 않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태풍 진행방향의 서쪽 (가항반원)으로 꽤 떨어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는 그보다도 적은 강수를 기록했다.<ref name="tkma" /> 특히, [[대관령]]과 [[강릉시|강릉]]을 포함한 [[영동 지방]]에서는 태풍이 몰고온 온난 다습한 기류와 북동쪽에서 유입된 비교적 한랭한 기류가 [[태백산맥]]에서 부딪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비구름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태풍 루사|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 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형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영동 지방에 300&nbsp;mm 가 넘는 비가 쏟아진 원인이다.<ref>[http://www.codil.or.kr:8080/newcodil/a_search/ReMetaView.jsp?mode=NCA&oMetaId=OTGWDR060014 강원도 재해특성과 방재대책]{{깨진 링크|url=http://www.codil.or.kr:8080/newcodil/a_search/ReMetaView.jsp?mode=NCA&oMetaId=OTGWDR060014 }}</ref> == 기록 == === 대한민국에서의 기록 === * 최대순간풍속 (상위 5지점) ** 고산 60.0&nbsp;m/s<ref group="주" name="wind" /> ** [[제주시|제주]] 60.0&nbsp;m/s<ref group="주" name="wind" /> ** [[여수시|여수]] 49.2&nbsp;m/s ** [[통영시|통영]] 43.8&nbsp;m/s ** [[부산광역시|부산]] 42.7&nbsp;m/s ** <small>[[자동기상관측장비|AWS]](자동기상관측장비)<ref group="주">기상청에서 운용하는 무인기상관측장비로, 이것에서 관측된 자료는 비공식 기록으로 취급된다.</ref> 관측치 : 거문도 55.8&nbsp;m/s, 부산 구덕산 기상레이다 관측소 53.4&nbsp;m/s, 나로도 44.5&nbsp;m/s, 마라도 42.9&nbsp;m/s</small> * 최대 풍속 (상위 5지점) ** 고산 51.1&nbsp;m/s ** [[제주시|제주]] 39.5&nbsp;m/s ** [[여수시|여수]] 35.9&nbsp;m/s ** [[통영시|통영]] 31.8&nbsp;m/s ** [[완도군|완도]] 28.9&nbsp;m/s * 최저해면기압 (상위 8지점) ** [[통영시|통영]] 954.0 hPa ** 성산포 954.4 hPa ** [[남해군|남해]] 956.1 hPa ** [[여수시|여수]] 956.5 hPa ** [[마산시|마산]] 959.0 hPa ** [[진주시|진주]] 960.9 hPa ** [[거제시|거제]] 961.6 hPa ** [[서귀포시|서귀포]] 964.9 hPa * 일(日)최다강수량 (상위 8지점) ** [[남해군|남해]] 410.0&nbsp;mm ** [[고흥군|고흥]] 289.5&nbsp;mm ** [[진주시|진주]] 259.5&nbsp;mm ** [[산청군|산청]] 247.5&nbsp;mm ** [[제주시|제주]] 231.5&nbsp;mm ** [[여수시|여수]] 216.0&nbsp;mm ** [[대관령]] 216.0&nbsp;mm ** [[대구광역시|대구]] 187.0&nbsp;mm * 기간 강수량 (9월 11일 ~ 9월 13일, 상위 8지점) ** [[남해군|남해]] 452.5&nbsp;mm ** [[대관령]] 397.0&nbsp;mm ** [[강릉시|강릉]] 308.0&nbsp;mm ** [[고흥군|고흥]] 303.0&nbsp;mm ** [[진주시|진주]] 271.1&nbsp;mm ** 성산포 269.0&nbsp;mm ** [[여수시|여수]] 258.6&nbsp;mm ** [[산청군|산청]] 256.5&nbsp;mm ** <small>[[자동기상관측장비|AWS]](자동기상관측장비) 관측치 : [[한라산]] 진달래밭 637.0&nbsp;mm, [[사천시|사천]] 412.0&nbsp;mm, [[지리산]] 403.0&nbsp;mm</small> * 1시간최다강수량 (상위 5지점) ** [[남해군|남해]] 89.5&nbsp;mm ** [[대관령]] 56.5&nbsp;mm ** [[진주시|진주]] 56.0&nbsp;mm ** [[강릉시|강릉]] 52.0&nbsp;mm ** [[대구광역시|대구]] 42.0&nbsp;mm === 일본에서의 기록 === 태풍 매미 강타시 [[일본]] [[미야코섬]]에서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과 최대순간풍속 74.1&nbsp;m/s<ref name=ja />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일본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씩 기록될 만한 값으로, 최저해면기압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4위 기록, 최대순간풍속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7위 기록이다.<ref>{{언어링크|ja}} [http://www.jma-net.go.jp/miyako/kakosiryou/ty0314/ty0314kyokuti.htm 日瞬間風速, 日最低海面気圧の極値順位表] {{웨이백|url=http://www.jma-net.go.jp/miyako/kakosiryou/ty0314/ty0314kyokuti.htm |date=20120421022243 }} - 미야코섬 기상대</ref> * 최대순간풍속 ** [[미야코섬]] 74.1&nbsp;m/s ** [[쓰시마섬|이즈하라]] 46.5&nbsp;m/s ** [[이시가키섬]] 40.0&nbsp;m/s * 최대 풍속 ** [[미야코섬]] 38.4&nbsp;m/s<ref group="주">미야코섬의 주변부에서는 이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 [[미야코 제도|시모지섬]] 49 m/s, [[미야코 제도|이라부섬]] 42 m/s 등의 최대 풍속을 기록했다.</ref> * 최저해면기압 ** [[미야코섬]] 912.0 hPa * 일최다강수량 ** [[미야코섬]] 285.0&nbsp;mm ** [[도쿠시마시|도쿠시마]] 174.5&nbsp;mm ** 후쿠에 171.0&nbsp;mm * 1시간최다강수량 ** 후쿠에 66.0&nbsp;mm ** [[나가사키시|나가사키]] 59.5&nbsp;mm ** [[미야코섬]] 58.5&nbsp;mm == 피해 == === 대한민국 === ==== 대응 ==== [[파일:Maemi Wreck, Yeongdo Bridge, Busan.jpg|섬네일|225px|태풍이 지나간 뒤 [[부산]] [[영도대교]] 부근에서 침몰한 배]] 태풍 매미는 발생에서 소멸까지 [[태풍]]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물선]] 형태에 가까운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진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한반도]] 상륙의 가능성도 꽤 일찍부터 예상되었다. 기상청은 9월 10일 오후 5시에 보도자료를 통해 [[태풍]]의 [[한반도]] 남해안 상륙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이 소식은 주요 언론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ref>[http://web.kma.go.kr/notify/press/kma_list.jsp?bid=press&mode=view&num=1170969 제14호 태풍 “매미(MAEMI)”] - 기상청</ref> 9월 11일 오전 4시에는 태풍이 최대순간풍속 74.1&nbsp;m/s의 맹렬한 강풍과 함께 일본의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을 직격하여 태풍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이곳에서조차 심대한 피해가 발생, 태풍의 위력이 실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태풍이 곧 당도할 대한민국 역시 큰 피해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상청은 9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2차 보도자료를 발표해 주의를 촉구했으며,<ref>[http://web.kma.go.kr/notify/press/kma_list.jsp?bid=press&mode=view&num=1170970 제14호 태풍(매미)현황 및 전망] - 기상청</ref> 오후 6시에는 본청을 포함한 전국의 기상관서에서 태풍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주요 방송사 및 신문에서는 태풍의 북상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59년의 [[태풍 사라 (1959년)|태풍 사라]]에 비견되는 태풍 매미가 북상 중”등으로 연달아 보도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0311477398 태풍 '매미', '사라'급 초강력 태풍] - SBS</ref> 태풍의 영향이 본격화된 9월 12일에는 초특급 태풍의 한반도 내습 소식을 주요 방송사에서 따로 특보를 편성,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부 당국의 대처는 매우 미흡해 [[마산 지하 상가 참사]] 등의 결과로 이어졌으며<ref>[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309/20030915/483587.html 경남 자치단체들, 재해대책 초보 수준]{{깨진 링크|url=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309/20030915/483587.html }} - KBS</ref>, 또한 전봇대나 송전 철탑 등의 전기 공급 시설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으로, 강풍에 의해 정전이 속출하여 이 일대는 뉴스 특보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세력의 태풍은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으로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에 따른 희생자가 매우 많았고,<ref>[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309/20030916/484029.html 개인 안전수칙 안 지켜 희생 컸다]{{깨진 링크|url=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309/20030916/484029.html }} - KBS</ref> 재산 피해액은 전년의 [[태풍 루사]]에 이어 사상 최대 급에 이르렀다. ==== 피해 상황 ==== * 인명 피해<ref name="nema">[http://www.safekorea.go.kr/dmtd/contents/room/ldstr/DmgReco.jsp?q_menuid=&q_largClmy=3 태풍 매미 피해] {{웨이백|url=http://www.safekorea.go.kr/dmtd/contents/room/ldstr/DmgReco.jsp?q_menuid=&q_largClmy=3 |date=20150924093447 }} - 국가재난정보센터</ref> ** 사망·실종 132명 ** 이재민 6만 1천여 명 * 재산 피해<ref name="nema" /> ** 4조 7천억여 원 ([[2003년]] 화폐가치 기준)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ref>[https://archive.today/2012071500341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30681 전국 14개 시도 `특별재해지역` 선포] - 연합뉴스</ref> ===== 해일 피해 ===== [[파일:Ship cafe wrecked by Typhoon Maemi.jpg|섬네일|right|250px|태풍 매미로 인해 난파된 부산의 한 선상 카페]] 태풍의 상륙 시각이 남해안의 [[만조]] 시각과 겹쳐 가공할 만한 [[해일]]이 발생, [[마산시|마산]]에서는 지하 노래방에 갇힌 사람들이 그대로 익사하는 등 1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냈다.<ref>[https://archive.today/20120708011042/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26995 지하 상가 등 3곳서 모두 12명 사망] - 연합뉴스</ref> 당시 마산의 고조(高潮) 높이는 약 180&nbsp;cm 로 예측되었으나 태풍에 의한 [[해일]]은 최대 439&nbsp;cm 에 달해 예측치를 훨씬 뛰어넘었다.<ref>《태풍 매미 백서》 31쪽 - 기상청</ref> [[해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마산 당국은 제대로 된 대피령을 내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두의 원목 수천여 개가 바닷물과 함께 밀려와 지하 건물의 출구를 막으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ref>[https://archive.today/20120708110740/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26961 상가 덮친 원목 책임 논란] - 연합뉴스</ref> [[부산광역시|부산]]에서는 [[해일]]에 가까운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신속한 대피가 이루어져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해운대]]에 위치한 부산 아쿠아리움이 침수되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 재산 피해가 매우 컸다. 이밖에, 태풍을 피해 남해안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의 피해가 상당하여 수천 척의 선박이 [[해일]]에 의해 파손되거나 침몰했으며 도심에서는 [[해일]]에 밀려온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널려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해 지역이 워낙 넓었고, 유입된 물의 양이 많아 복구가 늦어졌기 때문에 함께 밀려왔던 쓰레기 및 폐수의 처리가 늦어져 위생 상태가 나빴던 지역이 많았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sfrm=4&f=total&&n=200309160102 태풍 피해지역 후유증도 심각]{{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4&f=total&&n=200309160102 }} - 연합뉴스</ref> ===== 바람 피해 ===== [[태풍]]에 동반된 최대순간풍속 50&nbsp;m/s 가 넘는 강풍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신주와 철탑이 쓰러져 전국적으로 145만여 가구가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거제도]] 지역에서는 송전 철탑이 강풍에 파괴되어 약 4일 동안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ref>[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170 정전 피해 종합] {{웨이백|url=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170 |date=20150923224249 }} - 조선일보</ref> 고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이 바람에 의해 파손되는일이 잇달았고 [[도심]]에서는 날린 [[간판]]과 뽑힌 [[가로수]], 깨진 [[유리창]] 등이 뒤엉켜 굴러다녀, 일부 거리는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ref name="br">[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26711 부산 곳곳 폭격 맞은 듯 처참]{{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26711 }} - 연합뉴스</ref> 날려지던 물체의 일부는 주차된 차량을 덮쳐 곳곳에서 파손된 차량이 수천 대에 달했으며 부산항에서는 800톤이 넘는 컨테이너 크레인 11대가 강풍에 의해 무너지거나 궤도를 이탈<ref>[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197 부산항 크레인 8기 '폭삭'...화물선적 큰 차질] {{웨이백|url=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197 |date=20150923224251 }} - 조선일보</ref> 하는 한편, 해운대에서는 7000톤이 넘는 해상관광호텔이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전복되어 피해액은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ref name="br" /> 여기에, 옥상에서 물건을 줍던 사람이 바람에 떠밀려 추락하여 숨지거나 폭풍속에서 배를 살피러 나온 노인이 파도에 휩쓸리는 등, 바람에 대한 경계심 부족이 인명 피해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었다.<ref>[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208 초속60m 강풍…남해안 폭격 맞은듯] {{웨이백|url=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208 |date=20150923224252 }} - 조선일보</ref> 이러한 바람 피해는, 태풍의 위험반원에 해당했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11447 부산 경남 태풍 피해 큰 이유는?] - YTN</ref> ===== 호우 피해 ===== 태풍이 통과하던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400&nbsp;mm 에 가까운 강수를 관측, 더욱이 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태풍이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던 6시간 동안에 집중되어, 짧은 시간 동안의 강렬한 호우로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가를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다. 호우에 따른 산사태의 위험성이 제대로 경고되지 않은 것과 대피 명령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난 [[태풍 루사|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의 교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916010303231120020 태풍피해 ‘人災’ 속속 드러나] - 문화일보</ref> 또한 단시간에 쏟아진 많은 양의 비는 곳곳의 하천을 범람시켜, 농경지가 침수되고 주택가에는 물이 들어차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태풍 매미에 의한 폭우가 쏟아져 심대한 피해가 되었다.<ref>[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262 <강원> 6명사망…이재민 2천138가구] {{웨이백|url=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91370262 |date=20150923224253 }} - 조선일보</ref> === 일본 === 태풍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사망]] 3명,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ref>{{언어링크|ja}} [http://www.data.jma.go.jp/obd/stats/data/bosai/report/2003/20030910/20030910.html 台風第14号] - 일본 기상청</ref> 했고, 그 피해는 주로 [[미야코섬]]에 집중되었다. ==== 미야코섬 ==== 태풍 매미는 거의 최성기의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의 상공을 통과하여, [[미야코섬]]에 [[1968년]]의 제16호 태풍 이래 35년 만의 대 재해를 낳았다. 강력한 폭풍으로 약 1300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침수된 것과 함께 160여 억엔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했다. [[미야코섬]]은 태풍에 대한 수준 높은 방재시스템이 있어 웬만한 태풍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곳인 만큼 태풍 매미에 의한 이 같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f>{{언어링크|ja}} [http://www.shimatate.or.jp/20kouhou/simatatei/sima_28/sima28-10-12.pdf 宮古島 台風14号] {{웨이백|url=http://www.shimatate.or.jp/20kouhou/simatatei/sima_28/sima28-10-12.pdf |date=20160204181222 }} '''(PDF)'''</ref><ref>{{언어링크|ja}} [http://www.shimatate.or.jp/20kouhou/simatatei/sima_28/sima28-22-23.pdf 巨大台風の爪痕に宮古島茫然自失] {{웨이백|url=http://www.shimatate.or.jp/20kouhou/simatatei/sima_28/sima28-22-23.pdf |date=20160204181224 }} '''(PDF)'''</ref> === 퇴출 === 이 태풍이 대한민국에 입힌 피해가 너무나도 극심했기 때문에, [[200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는 이 태풍의 이름이었던 “[[매미]](MAEMI)”를 퇴출시키고 “[[무지개]](MUJIGAE)”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151550 일부 태풍명 변경] - 연합뉴스</ref> 그러나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사용한 [[2015년 태풍#제22호 태풍 무지개|무지개]]라는 이름도 [[필리핀]]과 [[중국]]에 끼친 심대한 피해로 퇴출되었고 대신 "[[솔개|수리개]](SURIGAE)"가 쓰이게 되었다. == 그 외 == 속보 해석으로 태풍 매미는 북위 30도를 넘은 시점에서 중심 기압 945 hPa까지 약화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기상청]]의 사후 해석<ref group="주">동아시아의 태풍 예보를 전담하고 있는 일본 기상청은 태풍이 소멸한 후에, 관측 기록과 위성 화상 등을 참고하여 태풍의 재분석을 실시한다. 이것을 사후 해석이라 하며, 사후 해석에 의해 속보로 발표되었던 태풍 정보가 재해석되어 수정되는 경우가 많다.</ref>에 의해, 북위 30.5도에서의 세력이 “중심 기압 945 hPa / 최대 풍속 40 m/s”에서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로 상향 수정<ref>{{언어링크|en}} [http://www.jma.go.jp/jma/jma-eng/jma-center/rsmc-hp-pub-eg/Besttracks/bst2003.txt RSMC 2003년 태풍 베스트 트랙] {{웨이백|url=http://www.jma.go.jp/jma/jma-eng/jma-center/rsmc-hp-pub-eg/Besttracks/bst2003.txt |date=20110524105820 }}</ref> 되었다. 또한, 사후 해석을 참고하면 태풍의 상륙 지점은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이 발표했던 [[사천시|경상남도 사천시]] 부근보다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가까운 것이 된다. == 관련 통계 == {{태풍의 재산피해 순위}} {{태풍상륙시중심기압}} {{태풍최저해면기압}} {{태풍최대풍속}} {{태풍최대순간풍속}} == 참고 서적 == * 《태풍 매미 백서》, 기상청 발간 == 같이 보기 == * [[폐기된 태풍 이름의 목록]] * [[태풍 너구리 (2014년)]] * [[태풍 차바 (2016년)]] * [[태풍 콩레이 (2018년)]] == 각주 == {{각주|group="주"}} == 출전 == {{각주|2}}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디지털 태풍|200314|MAEMI}} * [https://www.data.jma.go.jp/yoho/data/typhoon/T0314.pdf 일본 기상청의 태풍 매미 사후해석] {{폐기된 태풍}} {{태풍 이름 목록}} {{기본정렬:매미}} [[분류:2003년 태풍]] [[분류:일본의 태풍]] [[분류:대한민국의 태풍]] [[분류: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 [[분류:폐기된 태풍]] [[분류:2003년 일본]] [[분류:2003년 대한민국]]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2003년 9월]] [[분류:태풍 이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4-11-14}} {{과학자 정보 |그림=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jpeg |그림제목= |태어난 날=[[1826년]] [[9월 17일]] |태어난 곳=[[독일]] 브레젤렌츠 ({{llang|de|Breselenz}}) |죽은 날=[[1866년]] [[7월 20일]] |죽은 곳=[[이탈리아]] 셀라스카 ({{llang|it|Selasca}}) |국적=독일 |분야=[[수학]] |지도교수=[[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지도학생=[[구스타프 로흐]] |배우자=엘리제 코흐({{llang|de|Elise Koch}}) |주요 업적=[[리만 가설]]<br /> [[리만 계량]]<br /> [[리만 곡률 텐서]]<br /> [[리만 곡면]]<br /> [[리만 구]]<br /> [[리만 기하학]]<br /> [[리만 다양체]]<br /> [[리만-로흐 정리]]<br /> [[리만-르베그 보조정리]]<br /> [[리만 사상 정리]]<br /> [[리만 재배열 정리]]<br /> [[리만 적분]]<br /> [[리만 제타 함수]]<br /> [[리만 합]]<br /> [[코시-리만 방정식]]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llang|de|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년]] [[9월 17일]]~[[1866년]] [[7월 20일]])은 [[독일]]의 [[수학자]]이다. [[해석학 (수학)|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만 적분]], [[코시-리만 방정식]], [[리만 제타 함수]], [[리만 다양체]] 등의 수학 용어에 남아 있다. 그는 [[리만 가설]]을 최초로 고안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 생애 == === 초년 === 현재 [[독일]]의 다넨베르크(Dannenberg) 근처인 [[하노버]] 왕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은 [[루터 교회]]의 가난한 [[목사]]였고, 리만은 6명의 자녀들 중 둘째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수학|수학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대중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었다. === 성장기 === [[1840년]] 할머니와 살면서 중학교(lyceum, middle school)를 다니기 위해서 하노버(Hanover)에 갔다. [[1842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요하네움 뤼넨부르그(Johanneum Lüneburg)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자주 수학으로 돌아가곤 했다. 심지어 [[창세기]]의 정확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생각까지 했다. 담당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천재성을 간파했고, 그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당연히 그 제자는 교사의 수학(授學) 능력 범위를 벗어나곤 했다. [[1846년]] 리만이 19세였을 때, 목사가 되어서 가계(家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47년]] 아버지로부터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학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자코비(Jacobi), 디리클레(Dirichlet), 슈타이너(Steiner) 등이 가르치는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2년동안 머물렀다가 [[1849년]] 독일 [[괴팅겐]](Göttingen)으로 돌아왔다. === 성년 === 짧은 일생을 통해서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複素函數論)에서 복소 로그나 제곱근 같은 1대1이 아닌 함수의 역을 고려하는 경우에 어울리는 [[리만 면]]을 정의하였고, 복소기하학의 초창기에 해당한다고 평가된다. [[리만 사상 정리]]를 통해 복소 평면 상에서 하는 해석학에서 근본적인 정의역의 종류에 대한 [[위상 수학]]적인 고찰을 하였고 이를 [[앙리 푸앵카레]]가 [[균일화 정리]]로 일반화하였다. [[1854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그는 [[리만 적분]]을 정의하고, 삼각 급수의 [[수렴]](收斂)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인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후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H.르베그에 의해서 [[르베그 적분]]이라는 더욱 포괄적인 정의가 도입되었다. [[1854년]] 취임 강연에서 그는,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 공간의 개념을 도입해서 리만 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이는 [[리만 기하학]]으로 부른다. 생애 마지막에 가까워서는 W. E. 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 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관해서 강의하였고,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 사망 === 리만은 40세 생일의 두 달 전인 [[1866년]] [[7월 20일]] 사망했다. == 리만에 대한 일화 == * 수학의 황제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우스]]는 리만의 박사 학위 논문을 보고, "박사 학위 논문이라고 볼 수가 없는 대논문"이라는 찬사를 쉴 틈 없이 보냈다고 한다. 가우스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리만의 논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같이 보기 == * [[리만 가설]] * [[리만 기하학]] * [[리만 사상 정리]] * [[리만 면]] == 외부 링크 == {{위키공용|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 [http://www.emis.de/classics/Riemann/ 리만의 모든 저작] * {{MacTutor|id=Riemann|date=1998-09}} * {{MathGenealogy|id=18232}} {{전거 통제}} {{기본정렬:리만, 베른하르트}} [[분류:베른하르트 리만| ]] [[분류:1826년 출생]] [[분류:1866년 사망]]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미분기하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Guitar picks DSC06879.jpg|섬네일|다양한 기타 피크]] '''피크'''({{lang|en|Pick}})는 [[기타]]를 치는 데 쓰는 삼각형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다. [[:en:Plectrum|플렉트럼]]의 일종이다. 피크를 사용해 기타를 연주할 경우 손가락으로 연주할 때보다 강하고 명료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피크의 종류에는 물방울, 변형삼각형, 엄지손가락 착용형 등이 있다. == 같이 보기 == * [[현악기]]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토막글|악기}} [[분류:기타]] [[분류:발현악기]]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악기 정보 |이름=기타 |별칭= |배경=현악 |그림=guitar_1.jpg |그림설명=[[클래식 기타]]의 모습. |분류=[[현악기]] |호른보스텔_작스=321.322 |호른보스텔_작스_설명=[[현명악기]] |음역=[[파일:Range guitar.png|130px|가운데]]<div align=center>(정식 조율된 기타)</div> |관련=[[찰현악기]]와 [[발현악기]]|음악가= |관련된 글= }} '''기타'''({{llang|en|Guitar}})는 현(Strings)을 튕겨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로, [[스페인|프랑스]] 지방에서 유래하였다. 머리(Head), 목(Neck), 몸체(Body)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 부분에는 20여 개의 프렛(Fret)이 박혀 있다. 기타는 주로 6개의 현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경우에는 머리가 없는 기타({{llang|en|Headless Guitar}})나, 프렛이 없는 기타({{llang|en|Fretless Guitar}})도 있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록]], [[팝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사용된다. 또한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기타리스트'''({{llang|en|Guitarist}})라고 부른다. 기타는 기타 몸체의 울림구멍(Sound Hole)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고, 프렛을 통해 음정을 제어한다. 현의 양 쪽에는 몸체체의 브릿지(Bridge) 위에 위치한 하현주(Saddle)와 목 부분의 상현주(Nut)가 있다. 그리고 현의 장력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는 페그(Peg)가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 6개의 현은 연주를 위해 기타를 안았을 때 위쪽이 가장 굵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또한 현이 가늘어질수록 음역이 점점 높아진다. 목 부분에는 손가락을 짚는 지판(Finger Board)이 있는데, 지판 위의 프렛에 현을 닿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기타의 종류로는, 몸체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통기타]](Acoustic Guitar)와 마그네틱 픽업(Pickup)과 앰프(Amplifier)를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전기 기타]](Electric Guitar), 크게 2가지로 나뉜다. == 역사 == === 기타 === 기타는 기턴(gittern)에서 유래되었다. 기턴은 [[류트]]와 비슷한 작은 악기로 13세기 후반에 [[무어인]]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을 거쳐 유럽에 도입되었다. 4줄의 거트 현이 있는 기턴은 음유시인뿐 아니라 귀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 악기는 15세기 동안 길게 만들어졌고 현은 3줄의 복현이 각각 D, G, B로 조현되었으며 단현은 E로 조현되었다. 각 복현의 제2현은 한 옥타브 낮다.<ref name=":0">{{서적 인용|url=|제목=세계의 악기 백과 사전 : 악기의 기원과 발전|성=Max Wade-Matthews|이름=|날짜=2004|출판사=교학사|쪽=118-119|isbn=|확인날짜=|번역자=이용일, 나재용, 양은주}}</ref> === 비우엘라 === 스페인에서 기타는 비우엘라(vihuela)로 변형되었다. 비우엘라는 평평한 악기로써 옆면은 구부러져 있고, 복현 5줄과 단현 1줄로 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페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영국의 [[헨리 8세]]는 스페인 비우엘라를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라곤왕 페르디난드의 딸 케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우엘라는 궁정용 악기인데 반해, 복현 4줄의 기타는 대중적인 음악에 사용된 악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 도처에 알려졌다. 16세기 중엽에는 특별히 기타를 위한 곡이 작곡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는 1586년에 최초의 교본 《기타라에스파뇨라》를 출판하였다. 100년도 안 되어 기타는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악기가 되었고 비우엘라는 서서히 생겨났다 .<ref name=":0" /> === 르네상스 === === 기타 === 15세기 초반에는 4줄의 복현 르네상스 기타가 출연했다. 이 기타는 깃대 플렉트럼으로 연주했으며, 현은 목둘레에 묶인 거트 프렛과 움직이는 줄받침을 거쳐 전면의 줄 고정 장치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타보다 작으며, 작은 크기의 기턴과 비우엘라의 큰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4줄에 다섯 번째 복현이 더해졌다. 복현이 단현으로 되면서 연주 기술이 단순화되었고, 18세기에는 옆면이 안으로 굽고 뒤판은 평평한 나무 공명기가 있는, 6현의 근대 기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근대 기타는 오늘날의 기타보다 폭이 좁고 길었다. 유명한 제작자로는 스페인 카디스의 호세 파게스, 파리의 르네 프랑수아즈 라코테, 런던의 루이스 퍼너모 등을 들 수 있다.<ref name=":0" /> === 군대 기타 === 17세기 기타는 몸통의 폭이 넓어졌고 안쪽의 버팀대가 부채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금속 프랫을 목에 끼워 고정시켰고, 줄받침은 높게 제작되었다. 이같은 혁신은 스페인 기타 제작자 안토니오 토레스 후라도에 의한 것이었다. 현을 65cm 길이로 표준화시킨 사람 또한 토레스였다. 20세기에는 나무못으로 만든 줄감개를 금속 나사로 바꾸고, 지판을 울림 구멍까지 아래로 늘리는 등 더 많은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기타를 가장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대중음악 밴드이다. 1930년대에 픽업을 사용하여 현의 음을 증폭시키는 전기 기타가 개발되었고 1940년대에는 단단한 몸체의 기타가 [[레스 폴]]에 의해 발명되었다. 록 음악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카포 타스토(이동 줄베개)가 개발되어 조옮김이 쉽게 되었다. 카포 타스토를 프렛판 위에 끼우면 모든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 현대 전기 기타는 굵은 금속 현으로 되어 있으며 플렉트럼으로 연주한다.<ref name=":0" /> == 클래식 기타와 전기 기타의 부분 == <div class="thumb tright" style="width:445px;"> <div class="thumbinner">[[파일:Acoustic guitar-ko.svg|344x344px]][[파일:Electric guitar parts.jpg|342x342px]] <div class="thumbcaption" style="-moz-column-count:3; -webkit-column-count:3; column-count:3;"> <small>클래식 기타(좌)와 일렉트릭 기타(우)의 모습과 부위별 번호매김.</small> </div> </div> </div> # 헤드(Head) : 인체로 비유할 때 머리 부분에 해당하며, 펙헤드(Peghead)가 달려있는 곳으로 보통 상표와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연주 시 사용하지 않는다. 넥(Neck)의 일부로 넥에 포함된다. # 너트(Nut) : 넥(Neck)의 위에 덮여 있는 지판(Fingerboard)의 시작부분에 있는 것으로 줄의 걸림이 시작된다. 현을 고정 및 지지하며 재질은 상아나, 플라스틱을 사용한다 # 펙 헤드(Peghead) : 페그헤드, 튜너, 줄감개, 튜닝키, 머신헤드 등으로 불리며 선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조절해 음을 맞춘다. # 프렛(Fret) : 음쇠. 즉, 반음 간격으로 나 있는 쇠. 운지 중에 프렛에 손가락이 가까워 지면 줄의 울림이 저하 된다. # 트러스 로드 (Truss Rod) : 어저스트 로드 (Adjust Rod)라고도 한다. 줄의 장력으로 인한 넥의 휨을 조절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렌치를 사용하여 조절한다. 두랄루민 봉을 삽입하여, 넥휨 조절 없이 단순히 넥을 고정시키는 목적으로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 인레이 : 포지션 마크라고 부른다. 포지션 마크는 보통 1음 1음을 표기할 때 사용하며 특히 12프렛에 있는 포지션마크는 모양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12번째 프렛의 경우 개방현의 소리와 정확히 1옥타브의 음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넥(Neck) : 인체로 비유할 때 목부분에 해당 하는 것으로, 프렛(Fret), 너트(Nut, 지판(Fingerboard)등의 위치하며, 현(줄 ; String)이 넥의 위를 지나간다. 헤드(Head)도 이에 포함. # 힐 : 넥과 바디의 접합부. # 바디 : 인체로 비유할 때 목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반적인 통기타나 클래식 기타의 경우에 현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통([[사운드박스]])의 역할을 하며, 일렉기타의 경우에는 이의 기능을 픽업이라는 것으로 대체한다. # 픽업 : 쉽게 말하자면, 현의 울림을 잡는 마이크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일렉기타의 현의 떨림을 잡아 소리를 전기 기호로 바꾸는 장치이며,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제조사에서 특수하게 자신의 회사만의 기술로 제조된 픽업이 있는 경우도 있다. # 노브(Knob) : 기타의 전자 장치에서의 소리에 대한 조절을 할 수 있는 장치. 볼륨 노브와 튠 노브가 있는데 각 기능이 다르다. 볼륨은 소리의 크기를, 튠은 소리의 높이를 조정한다. # 브리지 : 줄을 받치는 전체의 판이다. # 픽가드 : 스트로크 연주법으로 기타 바디의 피니쉬나 나무 자체의 긁힘으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부착하는 것으로 플라멩코 기타를 제외한 클래식 기타에는 없는 편이며, 통기타나 일렉트릭 기타에 있는 것이 많다. # 사운드 홀 : 통기타에서 줄의 진동으로 인한 소리가 바디의 구멍으로 들어가 울리게 된다. 작은 사운드홀이 현 양옆에 여러 개가 뚫려있는 경우는 오베이션 기타라 불리는데 보통 바디를 플라스틱으로 제조한다. 고가의 클래식 기타의 경우 사운드홀을 뿔피리 모양으로 제작하기도 하는데 잎사귀를 닮았다 하여 '라 폴리아'라고 부른다. 주로 10현 이상의 기타에 적용된다. # 현 : 줄, 스트링 등으로 불리며 장기간의 연주 혹은, 손의 땀이나 공기 중의 습도로 인해, 녹이 스는 경우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1~3번 줄이 나일론으로 되어 있으며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줄은 크게 차이점이 있다. ## 현고 : 줄의 높이. 현이 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1번 프렛 현고는 3mm, 6번 프렛 현고는 4.5mm 정도면 정상이다. # 브리지 (새들) : 너트와 마찬가지로 현을 고정 및 지지하며, 바디로 현의 울림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일렉트릭 기타의 한 종류에서는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 모든 줄의 장력을 조절하여 한꺼번에 음의 높낮이에 변화를 주는 주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 프렛보드 (Fretboard ; 핑거보드, 지판) : 프렛과 너트가 있는 넥의 일부분이다. 손가락과 맞닿는 부분으로 줄이 이부분에서 눌려 줄의 울리는 길이의 조절을 통해 음의 높낮이가 변하게 된다. == 종류 == === [[통기타]] === * [[클래식 기타]] * [[통기타]] (어쿠스틱 기타) * [[플라멩고 기타]] * [[웨스턴 기타]] * [[12현 기타]] * [[미니 통기타]] === [[전기 기타]] === * [[풀 할로우 바디 기타]] * [[세미 할로우 바디 기타]] * [[솔리드 바디 기타]] * [[베이스 기타]] ===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춘 기타 === * [[12현 기타]] * [[테너 기타]] * [[슬라이드 기타]] == 현 == 현은 6개가 주류이지만 그 밖에 7현, 10현, [[12현 기타]] 등도 존재한다. 또, [[베이스 기타]]는 4개의 현을 갖춘 것이 보통이지만, 5, 6현을 갖춘 것도 널리 사용된다. 현은 금속, [[나일론]] 등이 쓰인다. === 나일론 현 === 클래식 기타에서 고음의 1~3현에 부드러운 나일론 현을 이용한다. 저음의 4~6현에는 가는 나일론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양의 창자를 말려 만든 거트 현을 이용하였으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이후로 현대에는 내구성이 높은 나일론 등의 화학 합성 섬유로 만든 현이 주로 쓰인다. === 강철 현 === [[통기타]]나 [[전기 기타]] 대부분은 강철 현의 금속([[니켈]], [[스테인리스강|스테인리스]] 등)의 현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저음의 현은 가는 금속의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사용한다. 보통 [[통기타]]가 3~6현, 전기 기타는 4~6현을 감는다. 현의 종류나 두께에 따라 기타의 음색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 기타의 느낌이 다르다. == 현의 튜닝 == {{본문|기타 튜닝}} {| class="wikitable" ! 0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 E | F || F# || G || A♭ || A || B♭ || B || C || C# || D || E♭ || E |- ! B | C || C# || D || E♭ || E || F || F# || G || A♭ || A || B♭ || B |- ! G | A♭ || A || B♭ || B || C || C# || D || E♭ || E || F || F# || G |- ! D | E♭ || E || F || F# || G || A♭ || A || B♭ || B || C || C# || D |- ! A | B♭ || B || C || C# || D || E♭ || E || F || F# || G || A♭ || A |- ! E | F || F# || G || A♭ || A || B♭ || B || C || C# || D || E♭ || E |} 현의 튜닝도 여러 가지가 쓰인다. 보통 저음의 현(6현)부터 E-A-D-G-B-E라는 표준 튜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많은 코드나 음계 등을 연주할 때 알맞은 튜닝으로 정착하고 있다. == 코드<ref name=":0" /> == {{본문|기타 코드}} == 연주법 == 보통 오른손잡이는 반대쪽 왼손으로 넥 부분을 잡고 현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현을 탄현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다. 왼손잡이인 사람은 가격, 상품 수 등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용 기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오른손잡이에 맞춰진 기타에 기존의 반대 자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는 있지만, 전기 컨트롤러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 현을 누르는 손은 넥 부분의 아래쪽을 빠져나가듯이 하여 엄지를 목 뒤쪽에 잡고, 집게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4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클래식 스타일, 곧 기본 자세이다. 또 엄지를 넥 위쪽 핑거보드에 가깝게 목 부분을 잡는 스타일도 주로 록 음악에서 이용된다. 시각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목의 아래쪽부터 손가락을 위치해 현을 누르지 않고, 위쪽부터 손가락을 감싸듯이 하여 현을 눌러 연주하는 연주인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왼발을 발판에 실어 다리의 위치를 높여서 몸체 측면의 움푹한 곳을 왼발의 넓적다리에 실어 기타를 몸 전체로 감싸 안는 자세로 연주한다. 그 밖의 통기타나 전기 기타의 경우는 발판은 쓰지 않고 기타 측면의 움푹한 곳을 오른쪽 다리의 넓적다리에 실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무대에서 클래식 기타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 연주하며, 그 밖에는 주로 기타 끈을 매고 어깨에 내려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재즈 기타리스트는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 때 빅 밴드 시대의 무대 형태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록 음악인은 앉아서 연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 같이 보기 == * [[현악기]] * [[통기타]] * [[클래식 기타]]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747892}} * {{언어링크|en}} [http://www.bsharp.org/physics/guitar Guitar physics] {{웨이백|url=http://www.bsharp.org/physics/guitar |date=20101209191707 }} {{악기}} {{전거 통제}} [[분류:기타| ]] [[분류:현울림악기]] [[분류:발현악기]] [[분류:리듬 섹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Evolution 36 mail.png|섬네일|이메일 클라이언트의 받은 편지함 스크린샷]] '''전자우편'''({{한자|電子郵便}}) 혹은 '''이메일'''({{llang|en|e-mail}})은 컴퓨터 통신망(주로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해당 편지를 일컫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전자 메일'''(electronic ma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이메일인 한메일이나 [[구글]]의 지메일처럼 해당 서비스에 가입함으로써 인터넷이 연결되면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웹 메일, 자신의 컴퓨터에 선택적으로 내려 받을 수 있는 POP3, 간단하게 메일을 보내는 [[간이 우편 전송 프로토콜|SMTP]] 방식 등이 주로 쓰인다. [[PC통신]] 시절에는 유료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전자 우편을 사용하곤 했다. == 기원 == 전자 우편은 [[인터넷]]의 발단으로 거슬로 올라가며, 사실 인터넷이 만들어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원격 전화 접속 터미널에서 IBM 7094에 기록할 수 있게 하였고 디스크에서 온라인으로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능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데 힘을 북돋어 주었다. 전자 우편은 [[1965년]]에 [[시분할]] [[본체 컴퓨터]]의 여러 명의 사용자들을 위한 방법으로 시작했다. 이렇다 할 만한 역사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설을 갖춘 첫 시스템들 사이에 [[System Development Corporation|SDC]]의 [[Q32]]와 MIT의 [[CTSS]]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자 우편은 빠르게 퍼져나가 네트워크 전자 우편이 되었으며, 사용자들이 적어도 [[1966년]]까지 다른 컴퓨터들 사이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SAGE]] 시스템이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넷]](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자 우편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1969년]]에 실험적인 교환 시스템 전자 우편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전송된다는 보고가 있다. [[1971년]]에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컴퓨터와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 사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파넷은 전자 우편의 대중성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갔으며 아파넷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은 1979년, 당시 14살의 인도계 미국인인 [[시바 아야두라이]]([[:en:Shiva Ayyadurai|V.A. Shiva Ayyadurai]])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메일은 이미 1970년대 중반에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으며, 아파넷의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부정하고 있다.<ref>https://arstechnica.com/tech-policy/2017/06/shivas-war-one-mans-quest-to-convince-the-world-that-he-invented-e-mail/</ref> === 전자우편 주소 구성 === {{본문|전자 우편 주소}} 전자우편 주소는 '아이디[[@]]메일서버이름'의 형식이다. 전자우편 주소의 아이디로 한글 등 영문 외 문자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영문, 숫자, 일부 기호만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메일서버이름(domain)은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디(local-part)는 대소문자를 구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일 서비스들은 아이디도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 ==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로는 전 세계적으로 [[야후! 메일]],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구글]] [[지메일]] 등이 많이 쓰이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네이버 메일|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서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를 운영한다. == 같이 보기 == * [[메일링 리스트]] * [[이메일 클라이언트]] * [[전자 우편 주소]] * [[스팸 메일]] * [[웹 메일]]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dmoz|Computers/Internet/E-mail/}} {{이메일 클라이언트}} {{전거 통제}} [[분류:전자 우편| ]] [[분류:인터넷 용어]]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PC통신]]
{{위키|스킨}} '''벡터'''({{lang|en|vector}}, {{문화어|벡토르}})는 다음의 뜻이 있다. == 수학, 과학, 공학 == * '''[[벡터 공간|벡터]]'''는 [[수학]], [[물리학]], [[공학]]에서 '''크기와 방향을 함께 갖는 양'''을 일컫는다. ** '''[[유클리드 벡터]]''': 유클리드 공간에서 크기와 방향을 모두 포함하는 기하학적 대상 == 생물학, 의학 == * '''[[벡터 (분자생물학)|벡터]]'''는 [[분자생물학]]에서 유전 물질의 운반자이다. * '''[[벡터 (의학)|벡터]]'''는 [[의학]]에서 병균의 매개 동물이다. == 컴퓨터 과학 == * 컴퓨터에서 '''[[벡터 그래픽스|벡터]]'''는 화상의 표현 요소로서의 방향을 지닌 선. 선그림. * 컴퓨터에서 벡터는 또한 [[동적 배열]] [[자료구조]]를 뜻하기도 한다. ** 동적 배열의 일종인 [[벡터 (STL)|벡터]]는 [[표준 템플릿 라이브러리]]의 자료형이다. * 인공 지능의 [[기계 학습]] 분야 ** '''[[벡터 (기계 학습)|벡터]]'''는 기계 학습 분야에서 입력 데이터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 기업 == * '''[[벡터 (기업)|벡터]]'''는 일본의 기업이다. == 총기 == * '''[[TDI 벡터|벡터]]'''는 [[TDI]]사에서 제작한 기관단총이다. == 인명 == === 가공의 인물 === * '''[[벡터 (캐릭터)|벡터]]'''는 [[소닉 더 헤지호그]]에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 기타 == * '''[[벡터 (항공)|벡터]]'''는 무전에 의한 유도(誘導) 또는 항공기의 진로이다. == 같이 보기 == * {{in title|벡터}} {{동음이의|인명}}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행진}} {{다른 뜻 넘어옴|행렬론|이론물리학 용어|행렬 이론}} [[파일:Matrix ko.svg|섬네일|행렬의 각 성분은 보통 그 행과 열의 번째수를 나타내는 첨자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행렬 <math>A</math>의 3번째 행의 2번째 열에 있는 성분은 <math>a_{32}</math>이다.]] [[수학]]에서 '''행렬'''(行列, {{llang|en|matrix}})은 [[수 (수학)|수]] 또는 [[다항식]] 등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것이다.<ref name="Lang">{{서적 인용 |성=Lang |이름=Serge |저자링크=서지 랭 |제목=Algebra |언어=en |판=개정 3 |총서=Graduate Texts in Mathematics |권=211 |출판사=Springer |위치=New York, NY |날짜=2002 |issn=0072-5285 |isbn=978-1-4612-6551-1 |doi=10.1007/978-1-4613-0041-0 |zbl=0984.00001 |mr=1878556 }}</ref><ref name="Kharab">{{서적 인용|저자1=Abdelwahab Kharab|저자2=Ronald B. Guenther|제목=An Introduction to Numerical Methods A MATLAB Approach|번역제목=이공학도를 위한 수치해석|날짜=2013|출판사=학산미디어|isbn=978-89-966211-8-8}}</ref> 예를 들어, 실수 1, 9, −13, 20, 5, −16을 2×3 직사각형 위에 배열한 행렬은 다음과 같다. :<math>\begin{pmatrix} 1 & 9 & -13 \\ 20 & 5 & -16 \end{pmatrix}</math> 행렬에는 덧셈과 [[스칼라 곱셈|스칼라배]], 곱셈 연산이 존재한다. 크기가 같은 두 행렬은 같은 위치의 성분별로 더할 수 있으며, 첫째 행렬의 열과 둘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두 행렬은 첫째 행렬의 각 행벡터와 둘째 행렬의 각 열벡터의 [[스칼라곱]]을 통해 곱할 수 있다. 곱셈의 [[교환 법칙]]이나 [[소거 법칙]] 등 [[복소수]]의 일부 성질들은 행렬 연산에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가환환]] 위의 유한 차원 [[자유 가군]](특히, [[체 (수학)|체]] 위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의 [[선형 변환]]을 행렬로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행렬의 중요한 응용이다. 예를 들어,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회전]]은 [[회전 행렬]] <math>R</math>을 각 열벡터 <math>v</math>에 곱하여 새 열벡터 <math>Rv</math>를 얻는 함수이다. 행렬의 덧셈과 스칼라배는 선형 변환의 점별 덧셈과 점별 스칼라배, 행렬의 곱셈은 선형 변환의 [[함수의 합성|합성]]에 대응한다. 행렬은 [[가우스 소거법]] 등 [[연립 일차 방정식]]의 풀이에도 응용된다.<ref name="Kharab" />{{rp|97}} [[정사각 행렬]]과 그 선형 변환의 일부 성질들은 그 [[행렬식]] 또는 [[고윳값]]과 [[고유 벡터]]에서 반영된다. 예를 들어, [[가환환]]의 원소를 성분으로 하는 행렬이 [[역행렬]]을 가질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가역원]]인 것이며, 특히 [[체 (수학)|체]]의 경우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0이 아닌 것이다. 행렬은 과학과 수학의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응용이 있다. [[물리학]]의 [[전기 회로]] 이론, [[고전역학]], [[광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 전기역학]] 등 분야에서 응용되며, [[컴퓨터 그래픽스]]에서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투영하거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 사용한다. [[확률론]]과 [[통계학]]의 [[마르코프 행렬]]과 [[다변수 미적분학]]의 [[헤세 행렬]] 등 역시 행렬의 응용이다. 행렬 계산은 [[수치해석학]]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행렬 분해]]는 행렬 계산을 이론과 실제 응용에서 모두 단순화할 수 있다. [[희소행렬]], [[띠행렬]] 등 널리 사용되는 특수한 구조의 행렬들의 경우 특화된 고속 알고리즘들이 존재한다.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 등 분야에서는 무한 행렬도 등장한다. == 정의 ==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은 각 행 <math>i\in\{1,\dotsc,m\}</math> 및 열 <math>j\in\{1,\dotsc,n\}</math>의 [[순서쌍]] <math>(i,j)</math>에 환의 원소 <math>A_{ij}\in R</math>를 대응시키는 [[함수]] <math>A=(A_{ij})_{i,j}</math>이다.<ref name="Kharab" />{{rp|98}} 행렬 <math>A</math>는 모든 성분을 직사각형으로 배열한 다음 [[소괄호]] 또는 [[대괄호]]를 추가하여 :<math>\begin{pmatrix} A_{11} & A_{12} & A_{13} &\cdots & A_{1n} \\ A_{21} & A_{22} & A_{23} &\cdots & A_{2n} \\ A_{31} & A_{32} & A_{33} &\cdots & A_{3n} \\ \vdots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A_{m1} & A_{m2} & A_{m3} &\cdots & A_{mn} \end{pmatrix}</math> 또는 :<math>\begin{bmatrix} A_{11} & A_{12} & A_{13} &\cdots & A_{1n} \\ A_{21} & A_{22} & A_{23} &\cdots & A_{2n} \\ A_{31} & A_{32} & A_{33} &\cdots & A_{3n} \\ \vdots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A_{m1} & A_{m2} & A_{m3} &\cdots & A_{mn} \end{bmatrix}</math> 와 같이 표기한다. 각 <math>A_{ij}</math>를 <math>A</math>의 <math>i</math>번째 행 <math>j</math>번째 열의 '''성분'''(成分, {{llang|en|entry}}) 또는 '''원소'''(元素, {{llang|en|element}}) 또는 '''계수'''(係數, {{llang|en|coefficient}})라고 한다. 행렬 <math>A</math>의 각 성분은 행과 열의 번째수를 첨수로 사용하여 <math>A_{ij}</math>, <math>A_{i,j}</math>, <math>a_{ij}</math>, <math>a_{i,j}</math>, <math>A(i,j)</math>, <math>A[i,j]</math> 등과 같이 나타낸다. 행과 열의 번째수가 같은 성분 <math>A_{ii}</math> (<math>i\in\{1,\dotsc,\min\{m,n\}\}</math>)을 <math>A</math>의 '''대각 성분'''(對角成分, {{llang|en|diagonal entry}}) 또는 '''대각 원소'''(對角元素, {{llang|en|diagonal element}}) 또는 '''대각 요소'''(對角要素) 또는 '''[[주대각선]]''' 성분이라고 한다.<ref name="Kharab" />{{rp|99}}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의 집합은 <math>\operatorname{Mat}(m,n;R)</math> 또는 <math>\operatorname M_{m,n}(R)</math>로 표기한다. === 크기 === 행렬 <math>A</math>의 '''크기'''({{llang|en|size}})는 행과 열의 수의 [[순서쌍]] <math>(m,n)</math> 또는 <math>m\times n</math>을 뜻한다. 일부 특수한 크기의 행렬들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 만약 행과 열의 수가 같다면 (<math>m=n</math>), <math>A</math>를 '''정사각 행렬'''(正四角行列, {{llang|en|square matrix}}) 또는 '''정방 행렬'''(正方行列)이라고 한다.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n\times n</math> 정사각 행렬의 집합은 <math>\operatorname{Mat}(n;R)</math> 또는 <math>\operatorname M_n(R)</math>로 표기한다. * 만약 <math>m=1</math>이라면, <math>A</math>를 <math>1\times n</math> '''행벡터'''(行-, {{llang|en|row vector}})라고 한다. * 만약 <math>n=1</math>이라면, <math>A</math>를 <math>m\times 1</math> '''열벡터'''(列-, {{llang|en|column vector}})라고 한다. 특히, 행렬 <math>A</math>의 <math>i</math>번째 행벡터와 <math>j</math>번째 열벡터는 각각 :<math>A_{i,-}=\begin{pmatrix} A_{i1} & A_{i2} &\cdots A_{in} \end{pmatrix}</math> 와 :<math>A_{-,j}\begin{pmatrix} A_{1j} \\ A_{2j} \\ \vdots \\ A_{mj} \end{pmatrix}</math> 이며, 이를 통해 행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math>A =\begin{pmatrix} A_{1,-} \\ A_{2,-} \\ \vdots \\A_{m,-} \end{pmatrix} =\begin{pmatrix} A_{-,1} & A_{-,2} &\cdots & A_{-,n} \end{pmatrix} </math> == 연산 == 행렬들에 대하여 덧셈, 스칼라배, 곱셈, [[전치 행렬]] 등의 연산을 정의할 수 있으며, 정사각 행렬은 [[역행렬]], [[대각합]], [[행렬식]] 등 연산이 추가로 정의된다. 덧셈은 같은 크기의 두 행렬에 대해서만 정의되며, 곱셈은 오직 첫 번째 행렬의 열의 수와 두 번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경우에만 정의된다.<ref name="Kharab" />{{rp|99}} [[역행렬]]은 [[가역 행렬|가역]]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되며, [[행렬식]]은 [[가환환]] 위의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된다. === 덧셈과 스칼라배 === {{본문|행렬 덧셈}}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두 <math>m\times n</math>의 행렬 <math>A,B\in\operatorname{Mat}(m,n;R)</math>의 합 <math>A+B\in\operatorname{Mat}(m,n;R)</math>은 두 행렬을 성분별로 합한 <math>m\times n</math> 행렬이다. 즉, 각 행과 열 <math>i</math>, <math>j</math>에 대하여, :<math>(A+B)_{ij}=A_{ij}+B_{ij}</math> 이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math> \begin{pmatrix} 1 & 3 & 7 \\ 1 & 0 & 0 \end{pmatrix} + \begin{pmatrix} 0 & 0 & 5 \\ 7 & 5 & 0 \end{pmatrix} = \begin{pmatrix} 1+0 & 3+0 & 7+5 \\ 1+7 & 0+5 & 0+0 \end{pmatrix} = \begin{pmatrix} 1 & 3 & 12 \\ 8 & 5 & 0 \end{pmatrix} </math>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의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 및 환의 원소 <math>r\in R</math>에 대하여, 왼쪽·오른쪽 스칼라배 <math>rA,Ar\in\operatorname{Mat}(m,n;R)</math>는 각각 행렬의 각 성분의 왼쪽·오른쪽에 스칼라를 곱한 <math>m\times n</math> 행렬이다. :<math>(rA)_{ij}=rA_{ij}</math> :<math>(Ar)_{ij}=A_{ij}r</math> 만약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이 두 연산은 일치하며, 이를 스칼라배라고 부른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math>2 \begin{pmatrix} 1 & 8 & -3 \\ 4 & -2 & 5 \end{pmatrix} = \begin{pmatrix} 2\cdot 1 & 2\cdot 8 & 2\cdot -3 \\ 2\cdot 4 & 2\cdot -2 & 2\cdot 5 \end{pmatrix} = \begin{pmatrix} 2 & 16 & -6 \\ 8 & -4 & 10 \end{pmatrix} </math>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의 집합 <math>\operatorname{Mat}(m,n;R)</math>은 위 덧셈과 왼쪽·오른쪽 스칼라배에 따라 <math>(R,R)</math>-[[쌍가군]]을 이룬다. 만약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이는 (덧셈과 스칼라배에 따른) <math>R</math>-[[가군]]이 되며, 특히 만약 <math>R</math>가 [[체 (수학)|체]]일 경우 <math>R</math>-[[벡터 공간]]이다. 이 [[쌍가군]]의 덧셈 [[항등원]]은 '''[[영행렬]]'''(즉, 모든 성분이 0인 행렬) :<math>0_{m\times n}=\begin{pmatrix} 0 & 0 & \cdots & 0 \\ 0 & 0 & \cdots & 0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0 & 0 & \cdots & 0 \end{pmatrix}\in\operatorname{Mat}(m,n;R)</math> 이며, 각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의 덧셈 [[역원]]은 성분별 덧셈 역원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 :<math>(-A)_{ij}=-A_{ij}</math> 이다. 특히, 두 행렬 <math>A,B\in\operatorname{Mat}(m,n;R)</math>의 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math>A-B=A+(-B)\in\operatorname{Mat}(m,n;R)</math>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의 <math>(R,R)</math>-[[쌍가군]] <math>A,B\in\operatorname{Mat}(m,n;R)</math>는 왼쪽 가군으로서 <math>mn</math>차원 왼쪽 [[자유 가군]]을 이루며, 오른쪽 가군으로서 <math>mn</math>차원 오른쪽 [[자유 가군]]을 이룬다.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math>mn</math>차원 자유 <math>R</math>-가군이다. 그 한 [[기저 (선형대수학)|기저]]는 다음과 같다. :<math>E_{ij}\in\operatorname{Mat}(m,n;R)</math> :<math>(E_{ij})_{kl}=\delta_{ik}\delta_{jl}= \begin{cases} 1 & i=k\land j=l \\ 0 & i\ne k\lor j\ne l \end{cases} </math> :<math>i\in\{1,\dotsc,m\}</math> :<math>j\in\{1,\dotsc,n\}</math> === 곱셈 === {{본문|행렬 곱셈}} [[파일:Matrix multiplication diagram.svg|섬네일|행렬 곱셈]]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와 <math>n\times p</math> 행렬 <math>B\in\operatorname{Mat}(n,p;R)</math>의 곱 <math>AB\in\operatorname{Mat}(m,p;R)</math>는 <math>m\times p</math> 행렬이며, 그 <math>i</math>번째 행 <math>j</math>번째 열 성분은 <math>A</math>의 <math>i</math>번째 행벡터와 <math>B</math>의 <math>j</math>번째 열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둘 모두 <math>n</math>차원 벡터이므로 ‘스칼라곱’이 정의된다). :<math>(AB)_{ij}=\sum_{k=1}^nA_{ik}B_{kj}=A_{i1}B_{1j}+A_{i2}B_{2j}+\cdots A_{in}B_{nj}</math>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math> \begin{pmatrix} 1 & 0 & 2 \\ -1 & 3 & 1 \\ \end{pmatrix} \begin{pmatrix} 3 & 1 \\ 2 & 1 \\ 1 & 0 \end{pmatrix} = \begin{pmatrix} 1\cdot 3+0\cdot 2+2\cdot 1 & 1\cdot 1+0\cdot 1+2\cdot 0 \\ -1\cdot 3+3\cdot 2+1\cdot 1 & -1\cdot 1+3\cdot 1+1\cdot 0 \end{pmatrix} = \begin{pmatrix} 5 & 1 \\ 4 & 2 \end{pmatrix} </math> 행벡터와 열벡터 :<math>A=\begin{pmatrix} A_{1,-} \\ A_{2,-} \\ \vdots \\A_{m,-} \end{pmatrix}</math> :<math>B=\begin{pmatrix} B_{-,1} & B_{-,2} &\cdots & B_{-,n} \end{pmatrix}</math> 를 통해 행렬 곱셈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math>AB =\begin{pmatrix} A_{1,-}B \\ A_{2,-}B \\ \vdots \\A_{m,-}B \end{pmatrix} =\begin{pmatrix} AB_{-,1} & AB_{-,2} &\cdots & AB_{-,n} \end{pmatrix} =\begin{pmatrix} A_{1,-}B_{-,1} & A_{1,-}B_{-,2} & \cdots & A_{1,-}B_{-,p} \\ A_{2,-}B_{-,1} & A_{2,-}B_{-,2} & \cdots & A_{2,-}B_{-,p}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A_{m,-}B_{-,1} & A_{m,-}B_{-,2} & \cdots & A_{m,-}B_{-,p} \end{pmatrix} </math> 행렬 곱셈은 [[결합 법칙]]을 만족시킨다. 즉,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임의의 <math>m\times n</math>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 및 <math>n\times p</math> 행렬 <math>B\in\operatorname{Mat}(n,p;R)</math> 및 <math>p\times q</math> 행렬 <math>C\in\operatorname{Mat}(p,q;R)</math>에 대하여, :<math>(AB)C=A(BC)</math> 가 성립한다. 행렬 곱셈은 함수 :<math>\operatorname{Mat}(m,n;R)\oplus\operatorname{Mat}(n,p;R)\to\operatorname{Mat}(m,p;R)</math> 로서 <math>(R,R)</math>-쌍선형 함수를 이룬다. 특히,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정사각 행렬들의 <math>(R,R)</math>-[[쌍가군]] <math>\operatorname{Mat}(n;R)</math>는 그 위의 행렬 곱셈에 따라 <math>R</math>-[[결합 대수]]를 이룬다. 특히 [[환 (수학)|환]]을 이루며, '''[[행렬환]]'''(行列環, {{llang|en|matrix ring}})이라고 한다. 행렬환의 곱셈 [[항등원]]은 '''[[단위 행렬]]'''(즉, 모든 대각 성분이 1, 그 밖의 성분이 0인 행렬) :<math>1_{n\times n}=\begin{pmatrix} 1 & 0 & \cdots & 0 \\ 0 & 1 & \cdots & 0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0 & 0 & \cdots & 1 \end{pmatrix}\in\operatorname{Mat}(n;R)</math> 이다. ==== 교환 법칙과 소거 법칙의 실패 ====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가환환]]이 아니다. 즉, 행렬 곱셈의 [[교환 법칙]]은 ([[체 (수학)|체]]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행렬의 경우 :<math> \begin{pmatrix} 1 & 0 \\ 0 & 0 \end{pmatrix} \begin{pmatrix} 1 & 2 \\ 0 & 3 \end{pmatrix} = \begin{pmatrix} 1 & 2 \\ 0 & 0 \end{pmatrix} </math> 이지만 :<math> \begin{pmatrix} 1 & 2 \\ 0 & 3 \end{pmatrix} \begin{pmatrix} 1 & 0 \\ 0 & 0 \end{pmatrix} = \begin{pmatrix} 1 & 0 \\ 0 & 0 \end{pmatrix} </math> 이다. 물론 [[교환법칙|가환]]하는 두 행렬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가환환]] 위의 [[스칼라 행렬]]은 (같은 크기의) 모든 행렬과 가환한다. 또한, [[가환환]] <math>R</math> 및 정사각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n;R)</math>에 대하여, :<math>R[A]=\{p(A)\colon p\in R[x]\}\subseteq\operatorname{Mat}(n;R)</math> 는 [[가환환]]이다.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0이 아닌 왼쪽·오른쪽 [[영인자]]를 갖는다. 즉, 0이 아닌 두 행렬의 곱은 0일 수 있으며, [[소거 법칙]]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행렬에서 :<math> \begin{pmatrix} 2 & -1 \\ -2 & 1 \end{pmatrix} \begin{pmatrix} 1 & 3 \\ 2 & 6 \end{pmatrix} = \begin{pmatrix} 0 & 0 \\ 0 & 0 \end{pmatrix} </math> 이다. ==== 역행렬 ==== 행렬환 <math>\operatorname{Mat}(n;R)</math>의 [[가역원]]은 '''[[가역 행렬]]'''이라고 하며, 그 곱셈 [[역원]]은 '''[[역행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행렬환은 ([[체 (수학)|체]] 위에서도) 0이 아닌 비[[가역 행렬]]을 갖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정사각 행렬 :<math>\begin{pmatrix} 0 & 5 \\ 0 & 3 \end{pmatrix}</math> 은 [[가역 행렬]]이 아니다. 만약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가역 행렬은 [[행렬식]]이 환의 가역원인 것과 [[동치]]이며, 특히 [[체 (수학)|체]]의 경우 [[행렬식]]이 0이 아닌 것과 [[동치]]이다. 또한, [[가역 행렬]] <math>A\in\operatorname{Unit}(\operatorname{Mat}(n;R))</math>의 [[역행렬]]은 [[행렬식]]과 [[수반 행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math>A^{-1}=\frac 1{\det A}\operatorname{adj}A</math> === 전치 행렬 === {{본문|전치 행렬}}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의 '''[[전치 행렬]]''' <math>A^\top\in\operatorname{Mat}(n,m;R)</math>는 행과 열을 교환한 <math>n\times m</math> 행렬이다. 즉, 각 <math>i\in\{1,\dotsc,n\}</math> 및 <math>j\in\{1,\dotsc,m\}</math>에 대하여, :<math>(A^\top)_{ij}=A_{ji}</math> 이다.<ref name="Kharab" />{{rp|99}}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math> \begin{pmatrix} 9 & 8 & 7 \\ -1 & 3 & 4 \end{pmatrix}^\top = \begin{pmatrix} 9 & -1 \\ 8 & 3 \\ 7 & 4 \end{pmatrix} </math> 이다. 전치 행렬은 함수 :<math>^\top\colon\operatorname{Mat}(m,n;R)\to\operatorname{Mat}(n,m;R)</math> 로서 <math>(R,R)</math>-[[쌍가군]] [[동형]]을 이루며, 그 [[역함수]] 또한 ([[정의역]]과 [[공역]]이 뒤바뀐) 전치 행렬이다. 또한, 임의의 <math>m\times n</math>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 및 <math>n\times p</math> 행렬 <math>B\in\operatorname{Mat}(n,p;R)</math>에 대하여, :<math>(AB)^\top=B^\top A^\top</math> 이다. 특히,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정사각 행렬의 <math>R</math>-[[결합 대수]] <math>\operatorname{Mat}(n;R)</math> 위에서, [[전치 행렬]]은 <math>\operatorname{Mat}(n;R)</math>와 그 [[반대환]] <math>\operatorname{Mat}(n;R)^{\operatorname{op}}</math> 사이의 [[대합 (수학)|대합]] <math>R</math>-[[결합 대수]] [[동형]]이며, 만약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math>\operatorname{Mat}(n;R)</math>는 전치 행렬에 따라 <math>R</math>-[[대합 대수]]를 이룬다. === 대각합 === {{본문|대각합}}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n\times n</math> 정사각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n;R)</math>의 '''[[대각합]]'''은 모든 대각 성분들의 합이다. :<math>\operatorname{tr}A=\sum_{i=1}^nA_{ii}=A_{11}+A_{22}+\cdots+A_{nn}\in R</math> 대각합 :<math>\operatorname{tr}\colon\operatorname{Mat}(n;R)\to R</math> 는 <math>(R,R)</math>-[[선형 변환]]을 이룬다. 또한, 임의의 <math>A\in\operatorname{Mat}(n;R)</math>에 대하여, 그 대각합은 그 [[전치 행렬]]의 대각합과 같다. :<math>\operatorname{tr}(A^\top)=\operatorname{tr}A</math> 만약 <math>R</math>가 [[가환환]]일 경우, 임의의 두 행렬 <math>A,B\in\operatorname{Mat}(n;R)</math>에 대하여, 두 행렬의 곱의 대각합은 곱하는 순서와 무관하게 같다. :<math>\operatorname{tr}(AB)=\operatorname{tr}(BA)</math> === 행렬식 === {{본문|행렬식}} [[가환환]] <math>R</math> 위의 <math>n\times n</math> 정사각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n;R)</math>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math>\det A=\sum_{\sigma\in\operatorname{Sym}(n)}\sgn\sigma\prod_{i=1}^nA_{i,\sigma(i)}\in R</math> 여기서 <math>\operatorname{Sym}(n)</math>은 [[대칭군]]이며, <math>\sgn\sigma</math>는 [[순열의 부호]]이다. 행렬 <math>A</math>의 행렬식은 <math>\det A</math>, <math>|A|</math>, <math>\operatorname D(A)</math> 등으로 표기한다. 특히, 2×2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2;R)</math>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math>\det A= \begin{vmatrix} A_{11} & A_{12} \\ A_{21} & A_{22} \end{vmatrix} =A_{11}A_{22}-A_{12}A_{21}</math> 행렬식은 <math>n</math>개의 행벡터(또는 열벡터)의 함수 :<math>\det\colon\operatorname{Mat}(n;R)=\underbrace{\operatorname{Mat}(1,n;R)\oplus\cdots\oplus\operatorname{Mat}(1,n;R)}_n\to R</math> 로서, [[단위 행렬]]의 [[상 (수학)|상]]이 1인 유일한 <math>R</math>-[[교대 다중 선형 형식]]이다. 또한, 행렬식은 두 환의 곱셈 [[모노이드]] 사이의 준동형이며, [[전치 행렬]]에 대하여 불변이다. 즉, 임의의 <math>A,B\in\operatorname{Mat}(n;R)</math>에 대하여, :<math>\det(AB)=\det A\det B</math> :<math>\det A^\top=\det A</math> 이다. 행렬식은 [[크라메르 공식]]에서 사용된다. === 부분 행렬과 소행렬식 === {{본문|부분 행렬}} [[환 (수학)|환]] <math>R</math> 위의 <math>m\times n</math> 행렬 <math>A\in\operatorname{Mat}(m,n;R)</math>의, 행과 열의 집합 :<math>I=\{i_1,i_2,\dotsc,i_{|I|}\}\subseteq\{1,\dotsc,m\}\qquad(i_1<i_2<\cdots<i_{|I|})</math> :<math>J=\{j_1,j_2,\dotsc,j_{|J|}\}\subseteq\{1,\dotsc,n\}\qquad(j_1<j_2<\cdots<j_{|J|})</math> 에 속하는 행과 열을 취한 '''[[부분 행렬]]'''은 다음과 같다. :<math>A_{I,J}= \begin{pmatrix} A_{i_1,j_1} & A_{i_1,j_2} & \cdots & A_{i_1,j_{|J|}} \\ A_{i_2,j_1} & A_{i_2,j_2} & \cdots & A_{i_2,j_{|J|}} \\ \vdots & \vdots & \ddots & \vdots \\ A_{i_{|I|},j_1} & A_{i_{|I|},j_2} & \cdots & A_{i_{|I|},j_{|J|}} \end{pmatrix} \in\operatorname{Mat}(|I|,|J|;R) </math> 특히, * <math>A</math>의 <math>I</math>에 대한 '''[[주부분 행렬]]'''은 부분 행렬 <math>A_{I,I}</math>를 뜻한다.<ref name="Golub">{{서적 인용|성1=Golub|이름1=Gene H.|성2=Van Loan|이름2=Charles F.|제목=Matrix computations|언어=en|판=4|총서=Johns Hopkins Studies in the Mathematical Sciences|출판사=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위치=Baltimore|날짜=2013|isbn=978-1-4214-0794-4|mr=3024913|zbl=1268.65037|lccn=2012943449}}</ref>{{rp|24, §1.3.3}} * <math>A</math>의 <math>k\times k</math> '''[[선행 주부분 행렬]]'''은 부분 행렬 <math>A_{\{1,\dotsc,k\},\{1,\dotsc,k\}}</math>를 뜻한다.<ref name="Golub" />{{rp|24, §1.3.3}} * <math>A</math>의 <math>i</math>번째 '''[[행벡터]]'''는 <math>A_{i,\{1,\dotsc,n\}}</math>이다. * <math>A</math>의 <math>j</math>번째 '''[[열벡터]]'''는 <math>A_{\{1,\dotsc,m\},j}</math>이다. [[가환환]] 위의 행렬의 부분 [[정사각 행렬]]의 [[행렬식]]을 '''[[소행렬식]]'''이라고 한다. == 예 == 몇몇 특수한 행렬들은 다음이 있다. * [[영행렬]] * [[단위 행렬]] * [[스칼라 행렬]] * [[대각 행렬]] * [[삼각 행렬]] * [[대칭 행렬]] * [[반대칭 행렬]] * [[직교 행렬]] * [[에르미트 행렬]] * [[반에르미트 행렬]] * [[유니터리 행렬]] * [[정규 행렬]] * [[정부호 행렬]] == 역사와 어원 == 1848년 수학에 처음으로 [[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실베스터]]가 사용한 '''행렬(matrix)'''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해부학에서 [[자궁]](子宮,모체母體)을 뜻한다. 행렬식에 대해서 행렬의 의미를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ref>고등기하와 벡터, 성지출판 (<math>\mathbf{I}</math> 일차변환과 행렬) 수학이야기-행렬과 행렬식30p</ref> == 같이 보기 == * [[텐서]] == 참고 문헌 == {{위키공용분류}} {{각주}} == 외부 링크 == * {{eom|제목=Matrix}} * {{매스월드|id=Matrix|제목=Matrix}} * {{nlab|id=matrix|제목=Matrix}} {{선형대수학}} {{전거 통제}} [[분류:행렬|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조리 (음식)|조리 과정을 거쳐 만든 음식|요리를 만드는 방법이나 과정}} {{다른 뜻}} {{다른 뜻 넘어옴|료리}} [[파일:Wiener-Schnitzel02.jpg|250px|섬네일|중앙 유럽 요리의 한 예로 비엔나 슈니첼이 있다. 그것은 지역의 재료들과 지역의 요리 스타일에 따라 준비된다.]] {{식사}} '''요리'''({{문화어|료리}})는 [[음식]]을 [[가공]]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요리는 독특한 재료, 기법 및 요리를 특징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특정 문화나 지리적 지역과 관련된 요리 스타일이다. 지역 음식 준비 기술, 풍습, 재료가 결합되어 지역 고유의 요리가 탄생한다. 크게 나누어 지역별로, 시대별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 용어 ==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들고 시식 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요리'''는 여러 [[조리 (음식)|조리]]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그 음식을 말하며 주로 [[가열]]한 것을 말한다. '''[[조리 (음식)|조리]]'''(調理)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나 그 방법, 과정 등을 말한다. 음식의 조리법을 뜻하는 '''레서피'''(또는 레시피, {{llang|en|recipe|/ˈrɛsəpi/}})는 '''[[조리법]]'''으로 순화어를 쓰도록 되었다.<ref>{{웹 인용|제목=순화어|url=http://korean.go.kr/09_new/dic/word/word_refine_view.jsp?idx=23822|날짜=2009-08-04|저자=말터|출판사=국립국어원|확인날짜=2012-06-28}}{{깨진 링크|url=http://korean.go.kr/09_new/dic/word/word_refine_view.jsp?idx=23822 }}</ref> 그리고 [[가스레인지]]나 [[풍로]]를 비롯, 조리를 자체적으로 하는 행위의 일종인 '''취사'''도 역시 요리의 일부를 구성한다. == 나라별 요리 ==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ref>《먹거리의 역사》(상) 마귈론 투생-사마, 까치글방(2002) 15쪽.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ref> 전통 음식은 국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 요리의 기원 == 요리를 통해 소화하기가 쉬워지고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독성이 중화된다.<ref>{{웹 인용|url=https://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56233|제목=인간이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이유|언어=ko|확인날짜=2023-04-29}}</ref><ref>{{웹 인용|url=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588032|제목=인간은 ‘불로 요리하는 동물’|웹사이트=동아사이언스}}</ref><ref>{{서적 인용|제목=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성=조너선 실버타운}}</ref> === 아시아 === {{col-begin}} {{col-3}} ; 동아시아 * [[한국 요리]] * [[중국 요리]] * [[일본 요리]] * [[몽골 요리]] * [[타이완 요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요리]] * [[홍콩 요리]] * [[마카오 요리]]{{col-3}} ; 동남아시아 * [[태국 요리]] * [[라오스 요리]] * [[베트남 요리]] * [[미얀마 요리]] * [[필리핀 요리]] * [[인도네시아 요리]] * [[캄보디아 요리]] * [[싱가포르 요리]] * [[브루나이 요리]] * [[동티모르 요리]] * [[말레이시아 요리]]{{col-3}} ;남아시아 * [[인도 요리]] * [[네팔 요리]] * [[파키스탄 요리]] * [[티베트 요리]] * [[스리랑카 요리]] * [[부탄 요리]] * [[몰디브 요리]] * [[방글라데시 요리]]{{col-end}} {{col-begin}} {{col-3}} ;서아시아 * [[레바논 요리]] * [[바레인 요리]] * [[예멘 요리]] * [[오만 요리]] * [[이라크 요리]] * [[이스라엘 요리]] * [[쿠웨이트 요리]] * [[파키스탄 요리]] * [[아프가니스탄 요리]] * [[조지아 요리]] * [[튀르키예 요리]] * [[이란 요리]] * [[키프로스 요리]] * [[카타르 요리]] * [[사우디아라비아 요리]] * [[시리아 요리]] * [[아랍에미리트 요리]] * [[요르단 요리]] * [[팔레스타인 요리]]{{col-3}} ;중앙아시아 * [[위구르 요리]] * [[타지기스탄 요리]] * [[투르크메니스탄 요리]] * [[우즈베키스탄 요리]] * [[키르기스스탄 요리]] * [[카자흐스탄 요리]] {{col-3}} ; {{col-end}} === 유럽 === * [[서양 요리|양식]] {{col-begin}} {{col-3}} ;[[북유럽]] * [[덴마크 요리]] * [[라트비아 요리]] * [[스웨덴 요리]] * [[노르웨이 요리]] * [[핀란드 요리]] * [[아이슬란드 요리]] * [[에스토니아 요리]] {{col-3}} ;[[서유럽]] * [[영국 요리]] * [[네덜란드 요리]] * [[아일랜드 요리]] * [[프랑스 요리]] * [[벨기에 요리]] {{col-3}} ;[[남유럽]] * [[스페인 요리]] * [[포르투갈 요리]] * [[그리스 요리]] * [[마케도니아 요리]] * [[몬테네그로 요리]]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요리]] * [[이탈리아 요리]] * [[산마리노 요리]] * [[세르비아 요리]] {{col-end}} {{col-begin}} {{col-3}} ;중앙유럽 * [[스위스 요리]] * [[슬로바키아 요리]] * [[체코 요리]] * [[폴란드 요리]] * [[헝가리 요리]] * [[독일 요리]] * [[오스트리아 요리]] * [[룩셈부르크 요리]] {{col-3}} ;[[동유럽]] * [[러시아 요리]] * [[우크라이나 요리]] * [[벨라루스 요리]] * [[루마니아 요리]] {{col-3}} ; {{col-end}} === 아메리카 === * [[미국 요리]] * [[캐나다 요리]] * [[멕시코 요리]] * [[쿠바 요리]] * [[아이티 요리]] * [[자메이카 요리]] * [[도미니카 공화국 요리]] * [[바하마 요리]] * [[앤티가 바부다 요리]] * [[푸에르토리코 요리]] * [[도미니카 연방 요리]] * [[세인트루시아 요리]] * [[바베이도스 요리]] *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요리]] * [[세인트키츠 네비스 요리]] * [[그레나다 요리]] * [[과테말라 요리]] * [[벨리즈 요리]] * [[온두라스 요리]] * [[엘살바도르 요리]] * [[니카라과 요리]] * [[코스타리카 요리]] * [[파나마 요리]] * [[콜롬비아 요리]] * [[에콰도르 요리]] * [[베네수엘라 요리]] * [[가이아나 요리]] * [[수리남 요리]] * [[페루 요리]] * [[볼리비아 요리]] * [[파라과이 요리]] * [[브라질 요리]] * [[칠레 요리]] * [[우루과이 요리]] * [[아르헨티나 요리]] {{col-begin}} {{col-3}} === 아프리카 === * [[가나 요리]] * [[가봉 요리]] * [[감비아 요리]] * [[기니 요리]] * [[기니비사우 요리]] * [[나미비아 요리]] * [[나이지리아 요리]] * [[남수단 요리]] * [[남아공의 요리]] * [[니제르 요리]] * [[라이베리아 요리]] * [[르완다 요리]] * [[리비아 요리]] * [[마다가스카르 요리]] * [[말라위 요리]] * [[말리 요리]] * [[모로코 요리]] * [[모리셔스 요리]] * [[모리타니 요리]] * [[모잠비크 요리]] * [[베냉 요리]] * [[보츠와나 요리]] * [[부룬디 요리]] * [[부르키나파소 요리]] * [[상투메 프린시페 요리]] * [[세네갈 요리]] * [[세이셸 요리]] * [[소말리아 요리]] * [[소말릴랜드 요리]] * [[수단 요리]] * [[시에라리온 요리]] * [[알제리 요리]] * [[앙골라 요리]] * [[에리트레아 요리]] * [[에스와티니 요리]] * [[에티오피아 요리]] * [[우간다 요리]] * [[이집트 요리]] * [[잠비아 요리]] * [[적도 기니 요리]] * [[지부티 요리]] * [[짐바브웨 요리]] * [[차드 요리]] * [[카메룬 요리]] * [[카보베르데 요리]] * [[케냐 요리]] * [[코모로 요리]] * [[코트디부아르 요리]] * [[콩고 공화국 요리]] * [[콩고 민주 공화국 요리]] * [[탄자니아 요리]] * [[토고 요리]] * [[튀니지 요리]] {{col-end}} == 현대의 가공식품 == * [[인스턴트 식품]] * [[패스트 푸드]]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요리법]] * [[음식 사진]] * [[조리 (음식)]] * [[조리법]] * [[식사]] * [[식사 준비]] * [[취미]]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dmoz|Home/Cooking}} {{요리}} {{전거 통제}} [[분류:요리|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20-05-24}} [[파일:Roasted Beijing Duck sliced.jpg|섬네일|[[베이징 카오야]]]] {{중국 요리}} '''중국 요리'''(中國料理, {{zh|t=中國菜|s=中国菜|p=Zhōngguó cài|h=중궈차이}})는 [[동아시아]]에 있는 [[중국]]의 요리이다. '''중식'''(中食, {{zh|c=中餐|p=zhōngcān|h=중찬}}) 또는 '''청요리'''(淸料理)로도 부른다. 중국의 화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세계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꾼 요리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은 [[국토]]가 아주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내륙 지방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날생선 음식이 적고 가열 조리가 발달하였다. 특수 재료로는 건조시킨 것이 많고, 종류도 풍부해서 이것을 불리는 기술이 뛰어나며, 특히 조리법이 매우 발달하였다. 기름과 녹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용 방법이 교묘하다. 기름과 함께 파, 생강, 마늘을 사용하여 이 재료들의 특유한 향과 자주 성분으로 다른 재료의 좋지 않은 냄새를 제거시키고 동시에 기름의 느끼함을 완화시켜 준다. 또한 녹말을 사용하여 식품이 가진 맛을 보존시키며 부드러운 향기을 주어 맛의 조화를 이루고 음식이 따뜻함을 지속시키도록 한다. 조리 기구는 한 개의 냄비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여 편리하고 합리적이다. 음식은 하나의 그릇에 담아 돌려가며 덜어 먹는 형식이므로 서빙이 비교적 간단하다.<ref>{{글로벌2|제목=중국 음식의 특징}}</ref> == 개요 == [[파일:文會圖.jpg|섬네일|left|바깥에서 잔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송나라]]의 [[중국화|그림]]. 이 그림은 [[당나라]]의 원본 그림을 고쳐 만든 것이다.]] 중국 요리 거의 대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문화|중국 문화]]는 식탁에서 [[칼 (도구)|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것을 [[야만]]스럽게 본다. 이는 이런 도구들이 [[무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이 직접 음식을 자르는 것도 무례한 것으로 여긴다. [[생선]] 요리는 보통 완전히 요리되어 나오며 젓가락으로 살코기 덩어리를 집어 먹는다. 다른 종류의 요리는 보통 발라내서 먹는데 이와 대조된다. 가능한 신선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문화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수많은 식당에서 두 개의 숟가락을 이용하여 고기를 나눠 식탁에 올려 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닭고기]] 또한 중국 요리에 있어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닭의 살코기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아 벼슬까지 대접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완전함을 상징한다. == 요리 계통 == [[파일:Beef noodle.JPG|섬네일|[[뉴러우몐]](牛肉麵)]] [[파일:Manchu Han Imperial Feast Tao Heung Museum of Food Culture.jpg|섬네일|[[만한전석]](滿漢全席)]] [[파일:Chinese fried rice by stu spivack in Cleveland, OH.jpg|섬네일|달걀[[차오판]](蛋炒飯)]] 중국 요리에는 요리 계통({{llang|zh|菜系}})이 있다. 4대 요리 계통은 다음과 같다. * [[노요리]]({{lang|zh|鲁菜|루차이}}): [[산둥 요리]] * [[소요리]]({{lang|zh|苏菜|쑤차이}}): [[장쑤 요리]] * [[월요리]]({{lang|zh|粤菜|웨차이}}): [[광둥 요리]] * [[천요리]]({{lang|zh|川菜|촨차이}}): [[쓰촨 요리]] 8대 요리 계통은 4대 요리 계통에 다음을 더한 것이다. * [[민요리]]({{lang|zh|闽菜|민차이}}): [[푸젠 요리]] * [[상요리]]({{lang|zh|湘菜|샹차이}}): [[후난 요리]] * [[절요리]]({{lang|zh|浙菜|저차이}}): [[저장 요리]] * [[휘요리]]({{lang|zh|徽菜|후이차이}}): [[안후이 요리]] == 조리 방법 == 식재를 다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 자르는 방법 === * '''鬆''' (송) 다진다. * '''片''' (폔) 얇게 썬다. * '''絲''' (쓰) 가늘게 자른다. * '''条''' (탸오) 실보다 길게 하여 봉 모양으로 찌른다. * '''丁''' (딩) 각지게 자른다. * '''塊''' (콰이) 덩어리 지게 자른다. === 조리하기 === 중화 요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한다. * '''炒''' (차오) :기름의 양을 적게 해서 볶는다. 더 적게 해도 중화요리의 기준이지만, 한국인의 느낌으로 볼 때는 여전히 많다. 빨리 불을 통과하면서 조리하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중화요리의 조리법이다. * '''溜''' (류) :원료를 익힌 후 걸쭉한 전분으로 즙을 만들어 원료 위에 부어서 만든 다음 졸여서 즙이 비교적 많게 만들어 진한 맛을 나게 한다. 예) [[류산슬]] * '''炸''' (자) :튀김 조리법. 불을 균일하게 하여 고르게 튀기다가 재료가 크기와 모양을 갖추면 불을 줄이는 것 * '''烹''' (펑) 기름에 튀긴 재료를 살짝 끓인다. * '''爆''' (바오) 차오(炒) 보다 더 센 불에 단숨에 볶는 방법 * '''燴''' (후이) 조리방법의 하나로, 졸여서 걸쭉한 국물을 만들어 완성한다. * '''氽''' (툰) 기름으로 튀긴다. * '''燒''' (사오) (식재료를) 찌거나 튀기거나 살짝 볶은 후에, 국물과 양념을 넣고 다시 볶거나 졸이다. 혹은 먼저 끓인 다음 다시 기름에 튀기는 방법 * '''煮''' (주) 끓인다. * '''燜''' (먼) 기름에 튀기거나 재료를 끓인다. * '''炖''' (둔) (불로) 끓여서 졸인다. * '''扒''' (바) 조리법의 하나로 약한 불로 장시간 끓인다. * '''煎''' (젠) 양면을 잘 굽는 조리법 * '''蒸''' (정) 찌고 증기를 통과 시키는 조리법 * '''烤''' (카오) 직화로 구운 토스트 조리법 (예, [[베이징 카오야]]) * '''煨''' (웨이) 조미료를 첨가, 장시간 약한 불로 끓인다. * '''涮''' (솬) 얇게 썬 재료를 가볍게 끓인다. 샤부샤부한다. * '''卤''' (루) 각종 조미료, 향료를 넣어 숙성한다. * '''拌''' (반) 혼합하여 버무린다. * '''腌''' (옌) 소금에 절인다. (넓게는) 된장, 간장 등을 바른다. * '''熏''' (쉰) * '''醤''' (장) 간장에 끓인다. * '''掛霜''' (과솽) == 채식주의 == [[채식주의]]는 서양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중국 채식주의자들은 [[두부]]를 많이 먹는다. 중국의 채식주의자들 대다수가 [[불교]] 신자이며 생물의 고통을 줄이는 불교적 가르침을 따른다. 중국의 채식주의적 요리는 커다랗고 다양한 야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기를 모방한 음식도 몇 가지 넣는다. 고기 모방 요리는 대부분 콩 단백질과 [[글루텐]]으로 만들어 오리, 닭, 돼지와 유사한 모양과 맛을 낸다. 콘작을 이용한 [[해산물]] 모방 요리도 존재한다. == 기름 == 중국에게 [[기름]]이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중국의 마트에 가보게 된다면 대용량으로 파는 식용유들이 많다. 그래서 중국의 음식 중 80%이상은 기름으로 튀겨서 만든다. 이렇게 중국에서 기름을 이용한 음식이 많은 이유는 중국의 [[수질문제|수질]] 때문이다. 물을 이용한 음식보다는 물을 최대한 적게 사용한 음식을 주로 즐겨먹었다. 그리고 중국의 기후 또한 [[건조]]하여서 작물을 키우기 힘들어서 기름에 튀겨서 음식의 기간을 늘리고 기름에 튀긴 [[높은 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였다. 이처럼 중국은 수질문제와 [[기후문제]] 때문에 예로부터 기름을 이용한 음식이 많아 질 수 밖에 없었다. === 양파 === 중국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많이먹으니까 건강이 좋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은 놀랍게도, [[세계보건기구]]가 10년간 세계 37개국의 [[심장병]] 발병률을 역학조사한 결과, 인구 10만 명당 심장병 발병률이 가장 낮는 나라는 바로 중국이었다. 미국의 5분의 1, 핀란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이처럼 기름지고 건강에 좋지않은 음식을 먹어도 이렇게 건강한 이유는 [[양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파가 심장병 예방에 좋은 이유는 양파에 다량 함유된 퀘르세틴은 녹차의 카데킨, 토마토의 [[리코펜]]과 동일한 분자구조를 가진 항산화물질때문이다. 고지방식과 흡연을 하면 혈관 벽에 콜레스테롤이 달라붙게 된다. 그런데 이때 양파를 먹으면 [[퀘르세틴]]이 항산화 작용을 통해 혈관 속 [[콜레스테롤]]을 분해함으로써 혈관을 깨끗하게 하고 심장을 보호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하루평균 양파 2개정도 많은 양의 양파를 섭취한다. ===향신료=== 중국 음식은 튀기거나 기름에 볶은 음식이 많아서 기름지고 느끼하다. 그래서 [[팔각]], [[산초]], [[고수]] 등 많은 향신료를 요리할 때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고수]] 잎으로 장식된 요리가 많은데, 고수 잎이 소화를 도와주기 때문에 즐겨 사용한다. 또한 오리, 닭, 돼지고기 요리에 사용하면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커피나 차의 맛을 좋게 하는 팔각도 많이 사용한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61768&cid=48180&categoryId=48254] 중국의 [[사천 요리]]는 매운맛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나오는 매고 얼얼한 맛은 [[정향]], [[팔각]], [[후추]], [[육두구]], [[화자오]] 같은 향신료에서 나온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49230&cid=43667&categoryId=43667] ==중국의 향신료 역사==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몇 세기 전부터 중국인은 [[향신료]] 교역망에 뛰어들어 [[후추]], [[정향]], [[육두구]], [[계피]]을 구해갔다. 아시아 교역은 매우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서 중국인은 원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15세기에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원정을 시작했다.[[포르투갈]]이 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인 1400년대부터 이미 중국은 [[정화]](중국어 간체자: 郑和, 정체자: 鄭和, 병음: Zhèng Hé 정허[*], 1371년 ~ 1434년, 본명: 마삼보(馬三寶)) 장군이 이끄는 원정대를 서쪽으로 보냈다. 이 원정대의 첫 항해는 62척의 중국 범선과 225척의 지원선, 2만 700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했다. 중국이 이미 향신료를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 항해를 했던 목적은 대체로 [[명나라]]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선전용 원정이라 여겨진다. [[정화]]는 일곱 번의 원정으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족으로는 향신료 제도에 이르기까지 인도양 전역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기린을 구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후 성리학적 정치 제도로 전환 중이던 명나라 조정에서 내치를 중요시하여 중국의 해상 활동이 중단되었다.<ref>프레드 차라, <향신료의 지구사>, 145쪽, 2014년, 휴머니스트</ref> ==떡== [[파일:Mooncake1.jpg|섬네일|월병月餠]] 중국의 [[떡]]은 한대에 들어온 새로운 식재료인 밀의 광범위한 보급과 다양한 지역별·민족별 식문화의 차이 등으로 인해 [[한국]]이나 [[일본]]의 떡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쌀가루]]나 [[밀가루]] 외에도 다양한 [[곡물 가루]]를 이용하여 떡을 만들고 이를 병(餅)이나 고(糕)로 지칭하는데, 병(餅)은 기름에 굽거나 지진 [[전병|전병류]]를 가리키고, 고(糕)는 곡물가루로 만들어 찐 떡류를 가리킨다.<ref>[[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백과사전]] [중국의 떡]</ref> *'''연고年糕''' [[찹쌀가루]]에 물과 꿀을 섞어 둥글게 빚어서, 대추나 밤 등에 버무려, 대나무 잎으로 싸서 찌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점고粘糕''' 새해맞이 설떡, 북부지방에서는 기장으로 만들고, 남부지방에서는 쌀로 만드는 차이점이 있으며, 북부지방 보다는 남부지방에서 더 보편화된 떡이다. *'''[[월병|월병月餠]]''' '추석날 온 가족이 모여 달 구경을 하면서 명절을 즐긴다'는 의미,밀가루에 [[라드]], 설탕, 물엿, 달걀 등을 섞어 뜨거운 물로 반죽해서 껍질을 만들고, 안에 팥소 또는 말린 과일을 넣은 다음 무늬가 있는 둥근나무틀에 끼워서 모양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표면에 광택을 내는 액([[노른자|난황]], 설탕, [[캐러멜]] 등)을 바르고 굽는다. *'''[[탕원|탕원湯元]]''' [[찹쌀가루]] 안에 설탕이나 깨, 고기 소 등을 집어넣어 동그란 모양으로 빚은 음식이다.일반적으로는 흔히 [[흑임자]]를 넣지만, 흑설탕, 대추, 단팥 등도 즐겨 사용된다. *'''[[춘병|춘병春餠]]''' 밀가루 반죽으로 얇은 전병을 만들어, 미리 준비된 야채와 육류를 넣어 만든 소를 넣고 돌돌 말아서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이다. 지금은 [[춘권|'춘권春卷']]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널리 불린다. *'''송고松糕''' [[찹쌀가루]], [[쌀가루]], 붉은 팥, 설탕, 돼지기름이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호두, 잣, 대추, 귤, 계화, 장미, 박하 등 갖가지 견과류와 과일류가 추가된 송고는 화려한 모양 때문인지, 중양고처럼 예물로서 사용된다. *'''방고方糕''' 오吳지역의 특산 떡으로 보통 10cm의 정사각형 모양에 2cm의 두께를 가지고 있는 하얀색을 띤 우리나라의 [[백설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백설기와는 달리 소가 들어가며, 소는 일반적으로 팥소가 주로 사용된다.<ref>김원희, 이종무. (2011.06), [https://kiss.kstudy.com/DetailOa/Ar?key=51139644|시와 고사를 통해 살펴본 중국의 떡 문화], 중국문화연구학회</ref><ref>[[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백과사전]] [월병]</ref> == 음료 == 전통 중국 문화에서, 차가운 [[음료]]는 뜨거운 음식을 잘 [[소화 (생물학)|소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차가운 물이나 [[청량 음료]]와 같은 액체는 전통적으로 식사 시간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죽이 나오면, 뜨거운 [[차 (음료)|차]]나 뜨거운 물 등의 음료가 식탁에 오른다. 차는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맥주와 청량 음료를 중화 음식과 함께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지방의 조그마한 식당의 많은 수가 찬 맥주에 [[핫 팟]]을 둔 렁단베이(冷淡杯)라는 음료를 취급하며 이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차=== [[파일:Tea leaves steeping in a zhong čaj 05.jpg|섬네일|[[우롱차]]]] 중국에서 [[차 (음료)|차]]는 아주 널리 사랑받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화차]], 상해와 절강성 등 중부지방에서는 [[녹차]], 남부지방에서는 [[우롱차]]를 즐겨마신다. 이외에도 중국내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는 [[홍차]]와 [[백차]], [[황차]], [[흑차]] 등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거듭 석 잔을 권하는데, 처음 두 잔은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마지막 잔은 한 번에 마시는 것이 예절이다. 중국이 차를 마시게 된 계기는 수질문제 때문이다. 중국의 물에는 석회질이 많이 섞여있어서 물에서 흙내가 많이 나서 이 냄새를 가리기 위해 물에 찻잎을 넣고 끓여 마시는 [[차 (음료)|차]]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술=== [[황주 (술)|황주]]는 3~4천 년의 역사가 있는 술로 곡식으로 제조하는 발효주이며 종류가 다양한데 홍여주가 유명하다. [[백주]]는 천 년의 역사가 있는 곡주로 40도 이상의 증류주로 무색투명하며 특이한 향이 난다. 우량이에, [[마오타이]]가 유명하다. 포도주도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장백산 포도주, 통화 포도주 등이 있다.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세계 3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데, 청도맥주, 오성맥주가 유명하다. 보통 식사가 나오기전에 건배를 하며,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즉시 따라 주는데, 비우지 않았는데도 첨잔하며 계속 권한다. 술잔은 술을 마신 후 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권한다. ==코스요리 식사순서== 보통 만찬을 위한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오는 순서가 있는데, 보통 차가운 요리를 먼저 내온 후 더운 요리를 내온다. 더운 요리도 흔히 먹는 볶음요리(热炒)가 먼저 나오고, 가장 중요한 주요리는 그 다음에 나온다. 주요리는 해삼, 전복, 샥스핀, 제비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 또는 오리나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요리 중간 중간에 [[뎬신]](딤섬)이 나오는데 보통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짠맛의 뎬신이 올라오고, 단맛의 뎬신은 디저트로 먹는다. 주요리가 끝나면 밥이나 면으로 식사를 하는데, 요리가 충분하면 건너뛰고 탕을 마신다. 그 다음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과일을 먹는다. 주문을 할 때에는 이 순서를 고려해서 냉채, 볶음요리, 주요리, 디예신을 각각 선택을 하되, 보통 사람 수 만큼의 주요리를 시키면 적당하다.<ref>신계숙, 자오동메이, '중국요리기행', 132쪽, 2008년, 파프리카</ref> ==식사 예절== {{독자 연구 문단|날짜=2020-05-24}} 초대를 받았을 때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원형 테이블이 놓인 자리에서는 안쪽의 중앙이 주인석이다. 일반적으로 식단은 전채 2~4종, 탕 6~8종, 디저트 2종 등 짝수로 나오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내어 먹는다. 보통 손님이 먼저 덜고 주인이 나중에 덜어 낸다. 요리는 한 접시에 한 가지씩만 먹고 여러 요리를 한꺼번에 가져다 먹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접시를 바꾸어 먹는데, 접시를 들고 먹거나 국수를 소리내어 먹거나 죽 종류는 그릇을 입에 대고 먹지는 않는다. 생선을 먹을 때에는 뒤집어서 먹지 않는데, 이는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 주인이 권하면 주빈부터 사양하지 말고 먹도록 한다. 찰기가 없는 중국쌀의 특성으로 인해 국그릇과 접시는 식탁에 올려둔 채로 먹고 밥그릇은 들고 먹어야 한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마치 동물이 먹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릇에 입을 대는 것은 금물이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대화 때문에 음식을 식어버리게 하거나, 자기 앞에 고정시키면 안된다. 중국에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이다.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다 먹으면 준비한 음식이 부족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주인이 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개인의 앞접시에 담은 음식은 모두 먹는 것이 예의이다. 디저트는 주로 단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씩 덜어서 먹도록 한다. == 같이 보기 == * [[아시아 요리]] * [[한국식 중국 요리]]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K.C. Chang [http://asiasociety.org/lifestyle/food-recipes/food/meats/food-chinese-culture "Food in Chinese Culture"] [[Asia Society]] * {{curlie|Home/Cooking/World_Cuisines/Asian/Chinese}} * "[https://www.bbc.co.uk/chinesefoodmadeeasy/ Chinese food made easy]" at the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BBC]] * "[http://guides.library.stonybrook.edu/content.php?pid=190666&sid=1599362 Chinese Culinary History (Websites for Research)] Stony Brook University Libraries. * "[https://www.sedaily.com/NewsView/1RY43LBNUN] 양파의 효능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61768&cid=48180&categoryId=48254] 중국 향신료 3종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49230&cid=43667&categoryId=43667] 마라 향신료 {{중화인민공화국 주제}} {{아시아 주제| 요리}} {{요리}} {{전거 통제}} [[분류:중국 요리|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구별|자장몐}} {{다른 뜻|짜장면 (만화)||만화}} {{음식 정보 | 이름 = 짜장면 | 다른 이름 = 자장면 | 그림 = Jajangmyeon.jpg | 설명 = | 나라 = 한국 | 지역 = | 나라별_요리 = [[한국식 중국 요리]] | 만든 사람 = | 연도 = | 최소시간 = | 최대시간 = | 종류 = 국수 | 코스 = 메인 | 서브 = | 주_재료 = [[돼지고기]], [[양파]], [[양배추]], [[밀가루]] | 비주_재료 = [[감자]], [[호박]], [[해산물]] | 변형 = | 1인분 = 650g | 열량 =(간짜장 기준) 825<ref>{{뉴스 인용 |저자= 정종훈 |제목= 돼지고기 수육, 칼로리 1위 … 나트륨 제일 많은 건 짬뽕 |url=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166220&cloc=olink |뉴스= |출판사= 중앙일보 |위치= |날짜= 2015년 7월 4일 |확인날짜= 2015년 7월 8일 |archive-date= 2015년 7월 9일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150709104152/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166220&cloc=olink |url-status= }}</ref> | 단백질 = | 지방 = | 탄수화물 = | 혈당_지수 = | 비슷한_음식 = | 기타 = | 난이도 = 중간 }} '''짜장면'''(-醬麵) 또는 '''자장면'''(-醬麵)은 [[양파]], [[양배추]]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기름으로 튀긴 [[춘장]]을 넣어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로, [[짬뽕]], [[우동 (한국식 중국 요리)|우동]]과 더불어 대표적인 한국식 중국 요리로 꼽힌다. 짜장면은 [[중국]]의 [[자장몐]]이 [[한국식 중국 요리|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산동 요리]]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 한국식 [[중국]] 요리처럼 그 대표격인 짜장면은 [[인천광역시|인천]]이 시작점이다.<ref>정광호 <음식천국, 중국을 맛보다> 매일경제신문사 2008년 p27</ref> == 특징 == === 재료 === 굵은 [[국수]]에 검은색에 가까운 양념을 얹어 비벼 먹는다. * '''국수''' : 짜장면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늘려 만든 굵은 [[국수]]가락을 사용한다. [[스파게티]] 면보다는 굵고 [[우동]] 면보다는 가늘다. * '''양념''' : [[돼지고기]], [[양파]] 등에 [[춘장]]을 넣어 [[식용유]]와 함께 볶아 만든다. === 영양 ===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대략 700kcal 정도로, 이는 한국 성인 기준 남성 1일 섭취량의 28%, 여성의 35%이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05977 | 제목 = [라이벌열전] 자장면 1인분, 열량은 얼마나 될까? | 날짜 = 2008-04-10 | 출판사 = 일간스포츠 | 작품명 = | 저자 = 구민정 | 확인날짜 = 2020-08-30 }}{{깨진 링크|url=https://www.joongang.co.kr/article/3105977 }}</ref> == 종류 == 종류는 다양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간짜장''' : (←{{lang|zh|乾-}})[[물]]하고 [[녹말가루]]를 사용하는 대신 [[춘장]]을 [[기름]]에 볶아서 만든다.<ref name=shin_chosun>신정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04/2015020402340.html 지위도 체통도 白旗투항… 온국민 홀린 '검은 마력'], 조선일보</ref> 일반 짜장하고 달리 [[국수]]하고 짜장소스가 따로 나오며, 기호에 따라 계란 프라이를 곁들이는 경우도 있다. * '''삼선짜장''' : (三鮮-)[[새우]], [[오징어]], [[해삼]], [[미더덕]], [[전복]], [[주꾸미]] 같은 [[해산물]]을 넣어 만든다([[생선]] 제외). * '''유니짜장''' : (←{{lang|zh|肉泥-}})[[채소]]와 [[고기]]를 잘게 갈아 넣은 부드러운 짜장이다. ‘유니’는 다진 고기를 뜻하는 [[중국어]] 肉泥의 [[산둥]] 지방의 발음에서 온 말이다.<ref name=shin_chosun/> * '''유슬짜장''' : (←{{lang|zh|肉絲-}})재료를 실처럼 가늘고 길쭉하게 채썰어서 [[국수]]와 같이 볶아 납작한 [[접시]]에 올려진 짜장이다. '유슬'은 길게 채썬 고기란 뜻의 [[중국어]] 肉絲의 [[산둥]] 지방의 발음에서 온 말이다.<ref name=shin_chosun/> * '''옛날짜장''' : [[소스]]가 묽은 편이고 [[감자]]가 들어가 있어 [[춘장]]의 맛이 부드럽다. * '''사천짜장''' : (四川-)[[춘장]] 대신 [[두반장]]을 사용해서 만들며, [[짜장]]에 [[겨자]] 또는 [[고추]]를 넣은 것이 특징이다([[춘장]]하고 [[두반장]]을 섞어서 하는 경우도 있음). 순 100% [[두반장]]만 사용할 경우 짜장면 특유의 [[검은색]]이 아닌 [[붉은색]]이 되며, [[쓰촨 요리]]처럼, 매운 것이 특징이다. * '''쟁반짜장''' : 큰 [[쟁반]]에 볶은 짜장을 올려 여럿이 같이 먹는 짜장으로, 대표적으로 '''해물 쟁반짜장'''이 있다. * '''짜장밥''' : [[국수]] 대신 [[밥]]에 [[짜장]]을 비벼먹는 [[음식]]이다. 짜장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되어 [[짜장라면]] ([[짜파게티]], [[짜짜로니]], [[짜왕]], 짜슐랭 등)이 판매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반 짜장면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는 종류의 짜장면도 있다. <gallery mode="packed"> 파일:Korean black bean noodle dish-Jaengban Jajangmyeon-01.jpg|쟁반짜장 파일:Jajangmyeon topped with Samgyeopsal.jpg|삼겹살 짜장면 파일:Korean.cuisine-Jajangmyeon-01.jpg|짜장면 상차림 </gallery> == 유래와 역사 == {{참고|자장몐}} [[파일:Jjajangmyeon Museum, 2013.jpg|섬네일|짜장면박물관 (구 공화춘 건물)]]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자장몐]](炸醬麵)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금도 [[베이징시|베이징]]에서는 라오베이징자장몐다왕(老北京炸醬麵大王)등 전문점이 산동식 자장몐을 판다.<ref>양세욱, 《짜장면뎐》, 프로네시스, [[2009년]], {{ISBN|978-89-01-09300-0}}, 116-121쪽</ref>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근로자인 쿠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ref name="동아20140318">[https://news.v.daum.net/v/20140318030549359 짜장면-쫄면의 원조도시에 '누들타운' 만든다] 동아일보, 2014.3.18.</ref> 이후 [[인천 차이나타운|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 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ref>오형규, 《자장면 경제학》, 좋은책만들기, [[2010년]], {{ISBN|89-92-53836-7}}, 19쪽</ref><ref>[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115940.html 자장면 발상지 '문화재 됐다'] {{웨이백|url=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115940.html |date=20141025031757 }} 한겨레신문, 2006.4.14.</ref> [[1948년]] 영화장유가 창업하여 짜장면용 면장을 만들어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6.25 전쟁|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의 사장 왕송산은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단맛이 나도록 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짜장면은 여러모로 중국의 자장몐과는 다른 음식이 되었다.<ref>양세욱, 《짜장면뎐》, 프로네시스, [[2009년]], ISBN {{ISBN|978-89-01-09300-0}}, 145-149쪽</ref> [[1960년대]]에 짜장면의 원가를 낮추기 위해 [[감자]]와 [[양파]]를 넣게 되었다.<ref name="Joo et al. 2017">{{서적 인용 |저자1=주영하 |저자2=김혜숙 |저자3=양미경 |제목=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 현대 식생활사 |연도=2017 |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위치=성남 |isbn=979-11-5866-259-2 |쪽=149 |판=1}}</ref> [[1960년대]]~[[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 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6/2009030601702.html|제목="한국인, 하루에만 자장면 600만 그릇 먹죠"|출판사=조선일보|날짜=2009-03-07|저자=김남인|확인날짜=2009-03-22}}</ref> == 대중 문화 속의 짜장면 == 짜장면은 저렴한 가격에 어디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북극해 횡단을 3개월 만에 마친 등산가 [[허영호 (산악인)|허영호]] 씨는 인터뷰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짜장면을 꼽기도 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 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ref name="gr1">{{웹 인용| url = http://www.medipaper.com/process/view_form.htm?__primary_key=4001&__page_now=9&__seek_field=&__key_value=&__user_table=news&category=today_common | 제목 = 졸업식날 자장면 '옛말'| 날짜 = 2006-02-16| 출판사 = 메디뉴스| 통신사= 연합뉴스| 저자 = 천상옥| 확인날짜 = 2007-11-04}}</ref>·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를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god (음악 그룹)|god]]의 1집에 수록된 《어머님께》에서도 짜장면을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환상의 커플]]》 등 많은 작품에서 짜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는 [[중국 요리|중화요리]]의 대를 이어온 [[화교]] 삼부자 이야기에 등장했다. == 표준어 문제 ==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현.[[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ref name="구태의연">{{웹 인용|url=https://www.korean.go.kr/nkview/nknews/200005/22_6.htm|제목=‘짜짱면’, ‘짬뽕’|성=박용찬|출판사=국립국어연구원|확인날짜=2021-05-23}}</ref>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면'(麵)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ref name="구태의연"/> 그러나,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151명이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korean.go.kr/common/download.do?file_path=reportData&c_file_name=71f912c1-cde2-47cc-b678-a3f55461cb5b_0.pdf&o_file_name=%ED%91%9C%EC%A4%80%20%EB%B0%9C%EC%9D%8C%20%EC%8B%A4%ED%83%9C%20%EC%A1%B0%EC%82%AC.pdf|제목=표준 발음 실태 조사|성=최혜원|날짜=2002|출판사=국립국어원|쪽=19}}</ref>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ref>{{웹 인용|url=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9167.html|제목=그래도 짜장면 이다|성=안도현|날짜=2005-10-05|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2021-05-23}}</ref>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지<ref>[[짬뽕]]의 어원은 [[일본어]]인 [[잔폰]]({{llang|ja|ちゃんぽん}})이다.</ref> 의문이 들게 만든다"라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ref>김하수, 〈한국어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점〉, 배달말 25쪽, 배달말학회.</ref> 한편, [[2009년]] [[5월 17일]], SBS 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SBS 스페셜]]의 164회 "자장면의 진실"에서 "짜장면"이란 표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에서 자체적으로 "자장면"과 "짜장면"의 표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응답자 중 91.8%가 "짜장면"으로 부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594367&plink=OLDURL|제목=[SBS스페셜]⑤발음공방 '짜장면 대 자장면'|날짜=2009-05-19|출판사=SBS|확인날짜=2021-05-23}}</ref>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은 [[아나운서]]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자장면"에 비해 "짜장면"이 실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현실을 수용해 "짜장면"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10831080900005|제목='짜장면', 표준어 됐다|성=김태식|날짜=2011-08-31|출판사=연합뉴스|확인날짜=2021-05-23}}</ref> == 가격 == [[파일:CPI of Jajangmyeon from 1975 to 2013 at Korea.png|섬네일|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 1963년 무렵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은 20 ~ 30 원 정도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40711/65122800/1 서민 굶주림 해결한 ‘라면의 代父’] 동아일보, 2014.7.12.</ref> 2010년 가격을 100으로 하였을 때 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는 아래의 표와 같다.<ref>대한민국 통계청, [http://kosis.kr/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J0A112&conn_path=I2# 품목별 소비자 물가지수]</ref> {| class='wikitable sortable' |- !연도 !물가지수 !가격 |- | 2013년 || 110.15 || 5,000 원<ref name="한경">[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082327951 글로벌 경제 '디스인플레' 조짐…돈 풀어도 물가는 주춤] 한국경제신문, 2013.8.23.</ref> |- | 2012년 || 108.26 || 4,500 원<ref name="경남매일">[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83 자장면 값 두 배 올라도 쌀 값은 그대로] 경남매일, 2012.11.25.</ref> |- | 2011년 || 107.0 || |- | 2010년 || 100.0 || 3,900 원<ref name="경남매일"/> |- | 2009년 || 98.768 || |- | 2008년 || 97.067 || |- | 2007년 || 85.839 || |- | 2006년 || 82.749 || |- | 2005년 || 81.674 || |- | 2004년 || 81.331 || |- | 2003년 || 79.463 || |- | 2002년 || 71.938 || |- | 2001년 || 67.929 || |- | 2000년 || 67.091 || |- | 1999년 || 66.150 || |- | 1998년 || 68.575 || |- | 1997년 || 60.125 || |- | 1996년 || 56.790 || |- | 1995년 || 52.241 || 1,900 원<ref name="경남매일"/> |- | 1994년 || 49.011 || |- | 1993년 || 44.440 || |- | 1992년 || 41.096 || |- | 1991년 || 36.795 || |- | 1990년 || 30.391 || |- | 1989년 || 25.119 || 1,200 원<ref name="여수시">[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46317 여수시내 음식값 등 크게 올라] 연합뉴스, 1990.3.7.</ref> |- | 1988년 || 21.236 || |- | 1987년 || 18.889 || |- | 1986년 || 18.032 || |- | 1985년 || 17.265 |- | 1984년 || 15.925 || |- | 1983년 || 14.732 || |- | 1982년 || 14.780 || |- | 1981년 || 9.756 || |- | 1980년 || 7.788 || 500 원 |- | 1979년 || 5.720 || |- | 1978년 || 5.455 || |- | 1977년 || 5.455 || |- | 1976년 || 4.271 || |- | 1975년 || 3.870 || 210 원<ref name="한경"/> |} == 대중 매체 == * {{에피소드 인용 |종류=텔레비전 |시리즈= [[SBS 스페셜]]|제목 =짜장면의 진실 |네트워크=SBS 시사교양본부 기획·제작|회=164 |날짜=2009-05-17}} == 같이 보기 == * [[한국 요리]] * [[한국식 중국 요리]] * [[블랙데이]] * [[탕수육]] * [[공화춘]] * [[짬뽕]] * [[짬짜면]] * [[자장몐]] * [[짜장라면]]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낱말사전-줄|자장면}} * {{위키책-줄|자장면|자장면}} * {{위키공용분류-줄}} {{국수}} [[분류:볶음국수]] [[분류:비빔국수]] [[분류:한국식 중국 요리]] [[분류:한국의 국수 요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Korean black bean noodle dish-Jaengban Jajangmyeon-01.jpg|섬네일|블랙데이에 먹는 짜장면]] '''블랙데이'''({{llang|en|Black Day}})는 매년 [[4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에 기념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5월 14일은 [[로즈데이]]다. ==상세==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0년대 신문 기사들로, 어느 신문은 블랙데이에 대해 “[[애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짜장면 박물관|짜장면]], [[아메리카노]] 등 [[검은색]] 음식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는 날”로 해석하기도 했다.<ref name="개요"/>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이 2000년대 들어 2-30대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아니냐 하는 해석도 있다.<ref name="개요">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3&sid2=245&oid=277&aid=0003974951</ref> '블랙데이'라는 명칭은 [[화이트데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커플들의 기념일인 3월 14일 화이트데이와는 정 반대로, 한달 뒤 솔로들의 날인 4월 14일을 [[화이트]]의 반대인 [[블랙]]으로 비튼 것이다.<ref name="개요"/> 한편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ref name="개요"/> 여느 '[[데이]]'와 마찬가지로, [[빼빼로 데이]]처럼 마케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특정회사의 독점 상품이 아닌 일반적인 짜장면이기 때문에 비판의 근거는 약한 편이다.<ref name="개요"/> 실제로 [[중국집]]([[:en:Chinese restaurant|Chinese restaurant]])들이 블랙데이 기념으로 특별히 짜장면을 판촉하지도 않으며, 이날에 한해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ref name="개요"/>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발렌타인 데이]] * [[화이트데이]] * [[로즈데이]] {{토막글|기념일|한국 문화}} [[분류:대한민국의 기념일]] [[분류:비공식 기념일]] [[분류:4월의 기념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에릭 레이먼드]]가 쓴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자유 소프트웨어]] 철학을 대변하는 유명한 글이다. 레이먼드는 이 글에서 [[리눅스 커널]] 개발과정과 패치메일이라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개발한 경험을 들어 오픈 소스 개발 방식의 유효성을 설명한다. [[1997년]] [[5월 27일]] 리눅스 회의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9년]] 같은 이름의 [[책]]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글에서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의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을 대조한다. * 성당 모델: 출시 때에만 소스 코드를 공개하고 그 사이에는 제한된 개발자들만 소스 코드에 접근할 수 있다. GNU [[이맥스]]와 [[GNU 컴파일러 모음]]이 예이다. * 시장 모델: 소스 코드가 인터넷으로 일반에 공개된 상태로 개발된다. 레이몬드는 리눅스 커널 프로젝트의 리더인 [[리누스 투르발스]]가 이 방식을 발명해 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한 페치메일 프로젝트에 자신이 이 모델을 적용한 이야기도 쓰고 있다. 글의 주제는 그가 리누스 법칙이라고 이름붙인 "보는 [[눈 (해부학)|눈]]만 많다면, 어떤 [[소프트웨어 버그|버그]]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훑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코드가 공개되어 있으면 버그는 빨리 잡힐 것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성당 모델에서는 소스 코드를 여러 명의 개발자들만 볼 수 있으므로 버그를 잡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 글로 인해 GNU 이맥스와 GCC를 포함한 많은 오픈 소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시장식의 열린 개발 모델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공개한 것과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성당 모델은 상용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이다. 더욱이 상용 소프트웨어는 보통 출시 때 소스가 같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과 성당"이라는 구문은 종종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와 상용 소프트웨어를 비유하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원래 글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들 중에 두 종류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상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성당과 시장의 예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키백과는 시장식의 프로젝트이고, [[누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당형의 프로젝트이다. == 같이 보기 == * [[Bazaar (소프트웨어)]]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 * [http://wiki.kldp.org/wiki.php/DocbookSgml/Cathedral-Bazaar-TRANS 〈성당과 시장〉], 1.31.2 버전, KLDP 위키, 2001.([https://web.archive.org/web/20051118181552/http://korea.gnu.org/people/chsong/cb/cathedral-bazaar/ 그누]) [[분류:미국의 수필]] [[분류:소프트웨어 공학 책]] [[분류:자유 소프트웨어를 소재로 한 책]] [[분류:리누스 토르발스]] [[분류:소프트웨어 개발 철학]] [[분류:1997년 책]] [[분류:1999년 책]] [[분류:1997년 수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인물 정보 |그림=Eric Steven Raymond.CUT.png |그림제목=2005년 Linucon에서의 레이먼드. |출생일= {{출생일과 나이|1957|12|4}} |출생지= [[미국]] [[보스턴]] |사망지= |사망일= |사망원인= |거주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펜실베이니아]] |국적= 미국 |별명= ESR |학력= |직업= 소프트웨어 개발자, 저술가, 창도자 |종교= [[신이교주의]] |배우자= |자녀= |부모= |친척= |서명= |웹사이트= http://www.catb.org/~esr/ }} '''에릭 레이먼드'''(Eric Steven Raymond, [[1957년]] [[12월 4일]]~)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해커이며 자신을 인터넷과 해커 문화의 "참여 관찰 인류학자 (observer-participant anthropologist)"라고 부르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b.org/~esr/press.html|제목=Press and Presentation Resources|확인날짜=2019-05-30}}</ref> 그는 오픈 소스의 형태로 개발되고 발전된 [http://www.fetchmail.info/ 패치 메일]의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오픈 소스]] 철학을 대변하는 문서인[[성당과 시장]]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반복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해커]]들이 쓰는 용어를 설명한 [[자곤 파일]]("신 해커사전")을 편집했으며, [[넷스케이프]]의 [[소스 코드]] 공개, [[모질라]]의 설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현재 태권도 검은 띠의 소유자이다.<ref>{{웹 인용 |url=http://www.washingtonpost.com/wp-srv/business/longterm/microsoft/stories/1998/raymond120398.htm |제목=The Spreading Grass-Roots Threat to Microsoft |확인날짜=2009-03-25 |형식= |출판사=《Washington Post》|언어=영어 |인용=....He is also a black belt in Tae Kwon Do. "I needed to become the kind of person for which the horrible memories of my childhood would not have crippling power," says Raymond. }}</ref> == 저서 == * 《[[성당과 시장]]》 * 《The New Hacker's Dictionary》 * 《The Art of Unix Programming》 == 같이 보기 == * [[해커 윤리]] == 참고 == <references/>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www.catb.org/~esr/ 에릭 레이먼드의 홈페이지] * [http://esr.ibiblio.org/ 에릭 레이먼드의 블로그] {{전거 통제}} {{기본정렬:레이먼드, 에릭}}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1957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해커]]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분류:보스턴 출신]] [[분류:미국의 블로거]] [[분류:뇌성마비 환자]] [[분류:오픈 소스 지지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비디오 게임}} '''온라인 게임'''({{llang|en|online game}}, {{문화어|직결유희}})은 인터넷이나 기타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하는 [[멀티 플레이]] [[비디오 게임]]이며, 컴퓨터, 휴대전화, 휴대용 게임기 등 다양한 기기에서 각자 다양한 장르의 온라인 게임을 지원한다. == 역사 == 온라인 게임의 역사는 1970년대 초창기 [[패킷 교환]] 기반 컴퓨터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ref name=Woolley>{{웹 인용 | url=http://thinkofit.com/plato/dwplato.htm | title=PLATO: The Emergence of Online Community | author=David R. Woolley | publisher=thinkofit.com | access-date=October 12, 2013 | archive-date=2013-09-04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04151631/http://thinkofit.com/plato/dwplato.htm | url-status= }}</ref> 온라인 게임의 초기에는 1978년 개발되고 처음에는 1980년 [[ARPANet]]에 연결되기 전 내부망으로 한정된 [[MUD1]]을 포함한 [[MUD]]였다.<ref name=Patrovsky>{{서적 인용|last1=Mulligan|first1=Jessica|last2=Patrovsky|first2=Bridgette|title=Developing online games: an insider's guide|date=2003|publisher=New Riders Publ.|location=Indianapolis, Ind. [u.a.]|isbn=1-59273-000-0}}</ref> 이후 10년 간 여러 상용 게임들이 잇따랐는데 여기에는 1984년 데뷔한 최초의 상용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아일랜드 오브 케스마이]](Island of Kesmai)<ref name="Patrovsky"/>, 그리고 1986년 [[MSX]] LINKS [[액션 게임]]과 같은 더 그래피컬한 게임,<ref>[https://www.msx.org/wiki/The_LINKS_(Network) The LINKS (Network)], MSX Resource Center</ref> 1987년 [[비행 시뮬레이터]] [[에어 워리어]], 1987년의 [[패미컴 모뎀]]의 온라인 바둑 게임이 포함된다.<ref name="How the Famicom Modem was Born">{{잡지 인용| first=Masaharu | last=Takano | title=How the Famicom Modem was Born | others=[http://www.glitterberri.com/developer-interviews/how-the-famicom-was-born/developing-the-famicom-modem/ English translation by GlitterBerri] | date=September 11, 1995 | magazine=Nikkei Electronics | language=ja }}</ref> 1990년대 인터넷의 빠른 보급으로 온라인 게임이 확장되기 시작했는데 저명한 타이틀로는 [[바람의 나라 (온라인 게임)|바람의 나라]](1996), [[퀘이크월드]](1996), [[울티마 온라인]](1997), [[리니지]](1998), [[스타크래프트]](1998), [[카운터스트라이크]](1999), [[에버퀘스트]](1999)가 포함된다. [[패미컴 모뎀]](1987), [[세가 메가넷]](1990), [[Satellaview]](1995), [[세가넷]](2000), [[플레이스테이션 2]](2000), [[엑스박스]] (2001) 등 [[비디오 게임 콘솔]]도 온라인 네트워크 기능들을 수신하기 시작했다.<ref name=Hachman>{{웹 인용|last1=Hachman|first1=Mark|title=Infographic: A Massive History of Multiplayer Online Gaming|url=https://www.pcmag.com/article2/0,2817,2390917,00.asp|website=PC Magazine|access-date=October 6, 2015}}</ref><ref name=Donovan>{{서적 인용|last1=Donovan|first1=Tristan|title=[[Replay: The History of Video Games]]|date=2010|publisher=Yellow Ant|location=East Sussex, England|isbn=978-0956507204}}</ref> 연결 속도가 개선되면서,<ref name=Rouse>{{웹 인용|last1=Rouse|first1=Margaret|title=Gaming|url=http://whatis.techtarget.com/definition/gaming|website=WhatIs.com}}</ref> [[소셜 네트워크 게임|소셜 게임]], 그리고 [[모바일 게임]] 등의 새 플랫폼과 같은 새로운 장르가 보급되었다.<ref name=TechopediaMobileGame>{{웹 인용|title=Mobile Games|url=http://www.techopedia.com/definition/24261/mobile-games|website=Techopedia}}</ref> == 형태 == * [[MUD]] * [[웹게임]] == 장르 == * [[AOS]] * [[TRPG]] * [[MMORPG]] * [[MMOFPS]] * [[RTS]] * [[FPS]] * [[TPS]] * [[레이싱 게임]] * [[스포츠 게임]] * [[격투 게임]] * [[액션 게임]] * [[어드벤처 게임]] * [[액션 어드벤처 게임]] * [[음악 게임]] * [[슈팅 게임]] * [[퍼즐 게임]] *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 과금 ==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과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꾸미기 위해서(35%)이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32%), 빠른 성장(18%), 경쟁심(15%)의 이유도 있다. 과금하면 만족한다고 답한 사용자는 39%였고 아니라고 답한 사용자는 20%였다. 과금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돈이 아깝거나(33%)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26%) 과금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19%)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다.<ref>{{뉴스 인용|저자1=김나리|제목=온라인 게임 이용자, 왜 돈 쓸까?|url=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020500&g_serial=1099951|날짜=2018-06-10|확인날짜=2018-06-25|뉴스=아이뉴스}}</ref> 한편 과금이 지나친 경우 피로감을 느낀 이용자가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게임을 찾는 경우도 있다.<ref>{{뉴스 인용|저자1=백철|제목=30대 겜돌이가 모바일 게임 지운 까닭|url=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708191626001&code=930507|날짜=2017-08-19|확인날짜=2018-06-25|뉴스=경향비즈}}{{깨진 링크|url=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708191626001&code=930507 }}</ref> == 같이 보기 == * [[온라인 게임 목록]] * [[오프라인 게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소프트웨어 디지털 배급 플랫폼}} {{CVG 장르}} {{전거 통제}} [[분류:온라인 게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학자 정보 | 이름 =송두율 | 원어 이름 =Song Du-yul | 그림 = | 그림_크기 = | 그림_설명 = | 출생일 ={{출생일과 나이|1944|10|12}} | 출생지 =[[일본 제국]] [[도쿄]] |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사망년도|사망월|사망일|YYYY|MM|DD}}--> | 사망지 = | 사망_원인 = | 거주지 = | 국적 =[[대한민국]]→[[독일]] | 별명 = | 직업 = | 활동_기간 = | 칭호 = | 종교 = | 배우자 = | 자녀 = | 수상 = | 서명 = | 서명_크기 = | 학력 =[[서울대학교]] | 논문_url = | 논문_제목 = | 논문_연도 = | 학파_전통 = | 지도_교수 =[[위르겐 하버마스]] | 영향줌 = | 시대 = | 분야 =[[사회학]], [[철학]] | 하위_분야 = | 소속_기관 = | 주요 제자 = | 주요_관심 = | 주요_저작 = | 주요_개념 = | 영향받음 = | 웹사이트 = }} '''송두율'''(宋斗律, {{llang|de|Song Du-yul}}, [[1944년]] [[10월 12일]]~)은 한국계 독일인 [[사회학]]자, [[철학]]자로, 독일 [[뮌스터 대학교]]의 [[사회학]], 철학 교수였다. 본관은 [[여산 송씨|여산]](礪山)이다. == 생애 == [[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도|도쿄]] [[아라카와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이다. 아버지 [[송계범]]은 [[일본]] [[도쿄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송계범이 한국 전쟁 이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광주광역시|광주]]에 거주하며 광주 중앙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특별시|서울]]로 이주해,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동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훗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된 [[최재석]]이었다. 교사 송찬식(후에 국민대 사학과교수)의 권유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학 시절 59학번이던 시인 [[김지하]]와 알게 된다. 1967년 독일로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뮌스터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로 채용되어 정치경제학, 사회학방법론, 후진국사회학을 강의했으며, [[뮌스터]]에서 정정희와 결혼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1973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였다.<ref>{{뉴스 인용|저자=김하영 기자 |제목=송두율 "국보법으로 유지되는 민주주의는 문제"|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10823|뉴스=프레시안 |위치= |날짜=2004년 5월 20일}}</ref> 그는 이후 총 18회 북한을 방문하였다. 독일에서 대한민국 학술원을 운영하며 북한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1977년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81년 공산주의에 대해 내재적 방법으로 비판적인 분석을 한 논문 '소련과 중국'을 발표하였고, 1982년 1월 사회학 교수자격 논문을 마무리하여 교수자격을 받았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김일성과 대면하였다. 1994년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1997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에 귀국했으나,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지방법원 최완주 부장판사는 2003년 10월 22일 "범죄사실이 소명되나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해 증거인멸 우려가 있고 높은 처단형이 예상돼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아 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재판장 [[이대경 판사|이대경]] 부장판사)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살아온 과정 등을 볼 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도 존경한다'고 진술하였다.<ref>{{뉴스 인용|저자=전진배 기자|제목=송두율씨 "김일성을 존경한다"|url=https://www.joongang.co.kr/article/259343|뉴스=중앙일보|위치= |날짜=2003-11-19}}</ref> [[2004년]] [[7월 21일]] 2심 재판부([[서울고법]], 재판장 [[김용균 (판사)|김용균]] 부장판사)는 기소된 사건 내용중 방북 사실을 제외한 간첩 혐의 등 대부분을 무죄로 판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송두율 씨 정치국 후보위원 인정 안돼"<법원>(종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709422|뉴스=연합뉴스 |위치= |날짜=2004년 7월 21일}}</ref>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석방됐고, 2004년 8월 초에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2004년 7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은 "2003년 10월 24일 ~ 11월 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검찰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는 등 부당한 계구 사용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는 등의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2단독 최지수 판사는 2005년 1월 7일 "당시 정황상 송두율이 도주하거나 폭행할 우려가 없었는데도 계구를 사용한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는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의자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계구 사용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최소범위에서 허용돼야 한다 무리한 계구 사용은 피의자의 심리를 위축시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는 송두율에게 1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ref>{{뉴스 인용|저자=김지성 기자|제목=송두율씨 인권침해 손배소 승소/ "포승·수갑으로 정신적 피해 100만원 국가 배상"|url=https://hankookilbo.com/News/Read/200501080097503167 |뉴스=한국일보 |위치= |날짜=2005-01-08 }}</ref> 서울중앙지법 민사 88단독 김래니 판사는 조사과정의 변호인 입회를 불허한 검사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구속상태에 처한 피의자에게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은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권리이다"라고 하면서“국가는 500만 원, 관련 검사 4명은 각각 100만 원씩 모두 9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송두율 측 변호인단은 2003년 10월 송두율이 구속수감된 이후 검찰이 보안을 이유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하지 않자 "입회불허 결정을 취소하라"는 준항고를 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변호인 입회불허 취소를 결정했다. 2008년 4월 17일 상고심(2004도4899)에서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에 간 것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일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2008년]] 8월 24일 서울고법은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09년]] 여름 학기를 끝으로 [[뮌스터 대학교]]에서 퇴임했다.<ref>[http://www.wienerzeitung.at/themen_channel/wz_reflexionen/zeitgenossen/470599_Koreas-Teilung-ist-der-Grund-allen-Uebels.html] {{웨이백|url=http://www.wienerzeitung.at/themen_channel/wz_reflexionen/zeitgenossen/470599_Koreas-Teilung-ist-der-Grund-allen-Uebels.html |date=20150220170811 }}, Wiener Zeitung, 2012년 7월 8일, Stefan Kraft: Du-Yul Song: „Koreas Teilung ist der Grund allen Übels“</ref> == 사회 운동 == [[1960년대]]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시도한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이후 독일에 머물며, 남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일련의 저서를 썼다. 그 안에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론]]을 내세우며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학술적인 교류를 갖는 남한/북한 학술 회의를 주도했다. == 수상 == * 2004년: [[안중근평화상]] == 저서 및 논문 == === 논문 === * 1972년 철학 박사 학위 논문 〈Aufklärung und Emanzipation : Die Bedeutung der asiatischen Welt bei Hegel, Marx und M. Weber〉, Berlin:X-Press, 1987 : 논문의 지도교수는 [[위르겐 하버마스]]이다. === 저서 === * 계몽과 해방-헤겔과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세계관/ 한길사, - 1988 (236쪽)-원문을 번역하고 ‘1985년 추고’를 덧붙임 * 계몽과 해방, 당대, 1996 (264쪽) : 위 번역본에다 2편의 논문을 덧붙인 개정증보판으로 한국어판 ‘정본’ * 1980, (송두율 편) Wachstum, Diktatur und Ideologie in Korea (대한민국 내 성장, 독재 그리고 이데올로기) * 1982, 사회학 ‘교수 자격(venia legendi)’ 획득: 교수 자격 논문(Habilitation-Schrift), 1981년 제출 - Sowjetunion und China : Egalisierung und Differenzierung im Sozialismus (소련과 중국-사회주의내에서 평등화와 차등화), Frankfurt am Main:Campus, 1984 * 윤도현, 이성백 옮김, 소련과 중국-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농민·지식인/ 한길사, 1990 (302쪽) * 1990, Metamorphosen der Moderne : Betrachtungen eines Grenzgängers Asien und Europa (근대의 변형-아시아와 유럽사이에서 한 경계인의 고찰), Münster:Wulf-Verlag * 1990, 현대와 사상-사회주의·(탈)현대·민족/ 한길사 (324쪽) * 1991,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 한길사 (228쪽) * 1995, Korea-Kaleidoskop : Aktuelle Kontexte zur Wiedervereingung (한국이라는 거울 : 통일에 관한 현실적 맥락), Osnabrück * 1995, 역사는 끝났는가/ 당대 (378쪽): 현대와 사상”에서 5편,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에서 3편을 재수록 * 1995,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 1998, 21세기와의 대화/ 한겨레신문사 (271쪽) * 2000,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사 (309쪽):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개정판 준비하려다가 새 책 집필 * (송두율 편) Südkorea : Kein Land für friedliche Spiele (남한 : 평화로운 놀이가 없는 땅 ) * 2002, Schattierungen der Moderne : Ost-West-Dialoge in Philosophie, Soziologie und Politik (현대의 명암 : 철학, 사회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동-서 대화), * 2002, 경계인의 사색/ 한겨레신문사 (295쪽) - 위 독일어 저서에서 5편의 글을 뽑아 이 책의 ‘4부’에 실었다. * 2007,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후마니타스 * (출간예정) Konstitution der Moderne (현대성의 구성) * 2012, 境界人の眼から見たカントの世界市民主義 in: カント研究会 編、石川求・寺田俊郎 編著, 世界市民の哲学* (現代カント研究12), 晃洋書房(京都), pp. 137-163 * 2012. Korea - von der Kolonie zum geteilten Land (코리아-식민지에서 분단국으로), Wien (Rainer Wernig 공저) * 2017, 불타는 얼음.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후마니타스 (396쪽)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두피디아|101013000877203}} * [http://www.taz.de/pt/2003/04/26/a0230.nf/text (독) 타게스 차이퉁 2003년 4월 26일자 인터뷰 기사] * [http://www.taz.de/pt/2003/10/18/a0063.nf/text (독) 타게스 차이퉁 2003년 10월 18일자 송두율사태에 대한 기사] * "Koreas Teilung ist der Grund allen Übels" Interview mit Du-Yul Song in "Wiener Zeitung"(2012년 7월 8일자 인터뷰 기사):https://web.archive.org/web/20150220170811/http://www.wienerzeitung.at/themen_channel/wz_reflexionen/zeitgenossen/470599_Koreas-Teilung-ist-der-Grund-allen-Uebels.html {{전거 통제}} [[분류:1944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20세기 한국 사람]]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0세기 독일 사람]] [[분류:21세기 독일 사람]] [[분류:여산 송씨]] [[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 [[분류: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분류:독일의 대학 교수]] [[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 [[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 [[분류:대한민국의 반체제자]] [[분류:독일의 사회학자]]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뮌스터 대학교 교수]] [[분류:사회철학자]] [[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 [[분류: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동문]]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한국계 독일인]] [[분류:위르겐 하버마스]] [[분류:20세기 사회학자]] [[분류:21세기 사회학자]] [[분류:조선로동당 당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좌표|37.493764|N|126.917005|E|display=title|format=dms}} {{정부 기관 정보 |이름 = 기상청 |영어명 = {{Lang|en|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그림 = [[파일: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Logo (horizontal).svg|300px|link=]] |그림크기 = 300 |그림설명 = |약칭 = KMA |설립일 = [[1990년]] [[12월 27일]] |설립 근거 = 「[[:s:정부조직법|정부조직법]]」 §40② |전신 = 중앙기상대 |해산일 = |후신 = |소재지 = '''대전청사''' : [[대전광역시]] [[서구 (대전광역시)|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1동 11~14층<br />'''서울청사''' : [[서울특별시]] [[동작구]] 여의대방로16길 61 |직원 = 431명<ref name="정원">「기상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 2</ref> |예산 = 세입: 81억 3300만 원<ref name="세입">{{웹 인용 |url=https://www.openfiscaldata.go.kr/op/ko/sd/UOPKOSDA01 |제목=열린재정 > 재정연구분석 > 재정분석통계 > 예산편성현황(총수입) |저자=기획재정부 |날짜= |웹사이트=열린재정 |확인날짜=2023-01-24 }}</ref> <br/> 세출: 4696억 7200만 원<ref name="세출">{{웹 인용 |url=https://www.openfiscaldata.go.kr/op/ko/sd/UOPKOSDA01 |제목=열린재정 > 재정연구분석 > 재정분석통계 > 세목 예산편성현황(총지출) |저자=기획재정부 |날짜= |웹사이트=열린재정 |확인날짜=2023-01-24 }}</ref> |모토 = 신속하고 정확하며 가치있는 기상서비스 실현 |기관장 직책 = [[대한민국의 기상청장|청장]] |기관장 성명 = [[장동언]] |기관장2 직책 = [[대한민국의 기상청 차장|차장]] |기관장2 성명 = |상급기관 = [[대한민국 환경부|환경부]] |산하기관 = [[#조직]] |웹사이트 = https://www.kma.go.kr/kma/ |각주 = }} [[파일: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JPG|섬네일|305px|기상청 서울청사]] '''기상청'''(氣象廳)은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청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 소관 사무 == * 기상(지상 및 수상을 포함한다)에 관한 사무 == 역사 == [[대한제국]] [[농상공부]] 소속으로 설치된 관측소가 기상청의 전신이다. 당시 관측소는 [[러일 전쟁]] 때 [[일본]]의 필요로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것이 중앙관상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에는 내무부 학무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학무국이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로 독립하면서 문교부 소관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인천에 위치한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은 1948년 3월 1일의 일이다.<ref>{{뉴스 인용 |저자= |제목=仁川中央氣象台 三月一日서울에移轉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226002092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2-26&officeId=00020&pageNo=2&printNo=7523&publishType=00020 |뉴스=동아일보 |위치= |날짜=1948-02-26 |확인날짜=2018-07-11 }}</ref><ref>{{뉴스 인용 |저자=부형권 |제목=[책갈피 속의 오늘]1990년 기상청 독립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0277725 |뉴스=동아일보 |위치= |날짜=2004-12-27 |확인날짜=2018-07-11 }}</ref> 다만, 근거 법령은 1949년 8월 18일에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관상대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직책에서 유래했다.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을 관장한 기관으로 천체 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택근 |제목=[여적]기상청장, 직책의 무거움 |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32101585&code=990201 |뉴스=경향신문 |위치= |날짜=2011-02-13 |확인날짜=2018-07-11 }}</ref> 1956년 3월 16일에는 [[미국 국무부]]의 도움을 받아 [[세계기상기구]]에 정식 가입했다.<ref>{{뉴스 인용 |저자= |제목=16日字로加入 世界氣象機構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32100209203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3-21&officeId=00020&pageNo=3&printNo=10214&publishType=00020 |뉴스=동아일보 |위치= |날짜=1956-03-21 |확인날짜=2018-07-11 }}</ref> 1962년에는 교통부 소속으로,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로 이관되었다. 1981년에는 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0년에 지금과 같은 기상청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기상 업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저자= |제목=기상대 기상청으로 오늘 출범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31356 |뉴스=연합뉴스 |위치=서울 |날짜=1990-12-28 |확인날짜=2018-07-11 }}</ref>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전 [[대한민국 대통령직인수위원회|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상청을 기상기후청으로 개편하는 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기상관측뿐만이 아니라 기후변화 예측·감시 업무까지 수행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깊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새 정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계연 |제목='기상청→기상기후청' 23년만에 명칭변경 추진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074865 |뉴스=연합뉴스 |위치=서울 |날짜=2013-02-04 |확인날짜=2018-07-11 }}</ref> 2022년 2월 [[정부대전청사]]로 이전했다. === 연혁 === * 1949년 8월 18일: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 소속으로 국립중앙관상대 설치.<ref>대통령령 제165호</ref> * 1962년 7월 16일: [[대한민국 교통부|교통부]] 소속으로 변경.<ref>각령 제887호</ref> * 1963년 2월 12일: 중앙관상대로 개편.<ref>각령 제1208호</ref> * 1967년 3월 30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과학기술처]] 소속으로 변경.<ref>법률 제1947호</ref> * 1981년 12월 31일: 중앙기상대로 개편.<ref>법률 제3518호</ref> * 1990년 12월 27일: 기상청으로 개편.<ref>법률 제4268호</ref> * 1998년 2월 28일: [[대한민국 과학기술부|과학기술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ref>법률 제5529호</ref> * 2008년 2월 29일: [[대한민국 환경부|환경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ref>법률 제8852호</ref> * 2022년 2월: [[정부대전청사]]로 일부 이전.<ref>{{뉴스 인용 |저자=조명휘 |제목=기상청, 대전이전 본격 시작…27일까지 정책부서 이전 마무리 |url=https://newsis.com/view/?id=NISX20220218_0001763791&cID=10807&pID=10800 |뉴스=뉴시스 |위치=대전 |날짜=2022-02-18 |확인날짜=2022-03-13 }}</ref> === 역대 로고 === <gallery> 파일:기상청 로고 (1999-2008).svg|1999년부터 2008년까지 사용된 기상청 로고 파일:기상청 로고 (2008-2016).svg|2008년부터 2016년까지 사용된 기상청 로고 </gallery> == 조직 == {| class="wikitable" |- ! style="background:#CDD2DA; font-size:12pt;"| 국 !! style="background:#CDD2DA; font-size:12pt;"| 담당관실·과 |- ! colspan=2 | 청장 산하 하부조직 |- | || 대변인실 |- ! colspan=2 | 차장 산하 하부조직 |- | 기획조정관실 || 기획재정담당관실ㆍ혁신행정담당관실ㆍ연구개발담당관실ㆍ국제협력담당관실 |- | || 감사담당관실<ref group="내용" name="개방형">개방형 직위.</ref>ㆍ운영지원과 |- | 예보국 || 총괄예보관<ref group="내용">4명을 둔다.</ref>ㆍ예보정책과ㆍ예보기술과ㆍ국가태풍센터ㆍ재해기상대응팀<ref group="내용" name="한시조직">2024년 12월 31일까지 존속하는 한시조직.</ref>ㆍ영향예보지원팀<ref group="내용">2026년 3월 31일까지 존속하는 한시조직.</ref> |- | 관측기반국 || 관측정책과ㆍ계측표준협력과ㆍ정보통신기술과<ref group="내용" name="개방형"/>ㆍ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ㆍ정보보호팀<ref group="내용">2025년 3월 29일까지 존속하는 한시조직.</ref> |- | 기후과학국 || 기후정책과ㆍ기후예측과ㆍ해양기상과<ref group="내용" name="개방형"/>ㆍ기후변화감시과ㆍ수문기상팀<ref group="내용">2025년 4월 30일까지 존속하는 한시조직.</ref> |- | 기상서비스진흥국 || 기상서비스정책과ㆍ국가기후데이터센터ㆍ기상융합서비스과 |- | 지진화산국 || 지진화산정책과ㆍ지진화산감시과ㆍ지진화산연구과ㆍ지진화산기술팀<ref group="내용" name="한시조직"/> |} === 소속기관 === * 청장의 관장 사무를 지원하는 기관 ** [[수치모델링센터]], [[기상기후인재개발원]], [[국가기상위성센터]], [[기상레이더센터]] * 청장의 소관 사무를 분장하는 기관 ** 지방기상청 * 청장의 관장 사무를 지원하는 책임운영기관 ** [[국립기상과학원]], [[항공기상청]] === 소속 자문위원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위원회명!!설치근거!!비고 |- |기상관측표준화위원회 ||기상관측표준화법 제20조|| |- |지진 및 지진해일관측기관협의회 ||지진재해대책법 제9조|| |} == 정원 == 기상청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ref name="정원"/> {| class="wikitable" |- ! colspan=2 style="background:#CDD2DA;" | 총계 !! style="background:#CDD2DA; text-align:left;" | 431명 |- | colspan=2 style="border-bottom:none; background:#EAECF0;" align="center" | 정무직 계 | style="background:#EAECF0;" | 1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청장 || 1명 |- | colspan=3 style="background:#FFF;" | |- | colspan=2 style="border-bottom:none; background:#EAECF0;" align="center" | 일반직 계 | style="background:#EAECF0;" | 430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고위공무원단 || 7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3급 이하 5급 이상 || 119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6급 이하 || 299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전문직공무원 || 4명 |- | style="border-top:hidden; background:#EAECF0;" | | 전문경력관 || 1명 |} == 재정 == 총수입·총지출 기준 2023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ref name="세입"/><ref name="세출"/> {{col-begin}} {{col-2}} {| class="wikitable" |- ! 구분 !! 세입예산 !! 작년 대비 증감 |- | 일반회계 || 81억 3300만 원 || -62.03% |- | colspan=3 | |- | 합계 || 81억 3300만 원 || -62.03% |} {{col-2}} {| class="wikitable" |- ! colspan=2 | 구분 !! 세출예산 !! 작년 대비 증감 |- | 일반회계 || 과학기술일반 || 4666억 2800만 원 || +3.07% |- | 혁신도시건설특별회계 || 과학기술일반 || 30억 4400만 원 || +222.12% |- | colspan=4 | |- | colspan=2 | 합계 || 4696억 7200만 원 || +3.52% |} {{col-end}} == 기상용 슈퍼컴퓨터 == 기상청은 슈퍼컴퓨터 1호기를 2000년 9월에 도입하였고, 2005년 8월 2호기, 2010년 12월 3호기, 2015년 12월 4호기를 도입하였으며, 2020년 12월 5호기를 도입할 예정이다. === 기상용 슈퍼컴퓨터 도입 연혁 === * 1988년 8월: 기상분석용 중형컴퓨터(Cyber 932) 도입 * 2000년 9월: 기상용 슈퍼컴퓨터 1호기 도입 * 2005년 8월: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기 도입 * 2010년 12월: 기상용 슈퍼컴퓨터 3호기 도입 * 2015년 12월: 기상용 슈퍼컴퓨터 4호기 도입 == 비판 == 2016년 여름철에 장마와 폭염에 대해 오보를 계속 내어 비판을 샀다. 7월에는 소나기 예보를 내린 날에는 해가 뜨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소나기가 내려 '양치기 기상청'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폭염이 절정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했으나 19일이 되어도 폭염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 이후에도 폭염이 꺾이는 시점에 대한 보도를 16일, 22일, 24일로 계속해서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 기상청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공기 흐름이 정체되어 있어 폭염이 끝날 줄 알았으나 계속 이어진다는 등 대기 예측이 매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한편, 기상청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슈퍼컴퓨터를 통한 자료를 예보관들이 분석함으로써 알려주는 것인데 오보가 나올 때마다 예보관을 교체해서 해당 분야에 유능한 인재가 머물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강기헌 |제목=기상청 장마에 이어 폭염도 오보…하루만에 기존 예보 뒤집어 |url=http://www.joongang.co.kr/article/20478284 |뉴스=중앙일보 |위치= |날짜=2016-08-20 |확인날짜=2016-08-21 }}</ref><ref>{{뉴스 인용 |저자=강경민 |제목=하루만에 또 바뀐 '오보 기상청' |url=http://news.hankyung.com/article/2016081966281 |뉴스=한국경제 |위치= |날짜=2016-08-20 |확인날짜=2016-08-21 |archive-date=2017-08-0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01202926/http://news.hankyung.com/article/2016081966281 |url-status= }}</ref><ref>{{뉴스 인용 |저자=김성모 |제목=이틀마다 "곧 폭염 끝난다"… 양치기 기상청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0/2016082000207.html |뉴스=조선일보 |위치= |날짜=2016-08-20 |확인날짜=2016-08-21 }}</ref><ref>{{뉴스 인용 |저자= |제목=[사설] '오보청' 오명 벗도록 날씨 예보 신뢰도 높여야 |url=http://www.hankookilbo.com/v/207aa6e3637a40589950441e6f952cc4 |뉴스=한국일보 |위치= |날짜=2016-08-10 |확인날짜=2016-08-21 }}</ref>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대한민국의 기상청장|기상청장]] * [[대한민국의 기상청 차장|기상청 차장]] * [[대한민국 기상청의 일기예보]] * [[기상관측소]] * [[자동기상관측장비]] * [[일기예보관]] * [[전지구정보시스템센터]] * [[아시아풍력협회]] * [[국가농림기상센터]] * [[기상청 날씨누리]] == 각주 == === 내용주 === {{각주|group=내용}} === 참조주 === {{각주}}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 * {{공식 블로그}}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대한민국 기상청}} {{대한민국 행정부}} {{대한민국 날씨 정보 서비스}} {{전거 통제}} [[분류:대한민국 기상청| ]] [[분류:1990년 설립|기상청]] [[분류:대전 서구 소재의 관공서|기상청]]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번역 확장 필요|en|tropical cyclone}} [[파일:Maria, Bopha and Saomai 2006-08-07 0435Z.jpg|섬네일|200px|오른쪽|열대 저기압의 일종인 [[태풍]]]] '''열대 저기압'''(熱帶低氣壓, tropical cyclone)은 지구의 [[열대 기후|열대 지역]]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다.<ref>열대성 저기압은 몇몇 열대 해역에서 발생하는데, 발생 장소는 달라도 거의 비슷한 성질을 갖는다. ‘열대성 저기압과 태풍’,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조</ref> 이들은 발생 지역에 따라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 (열대 저기압)|사이클론]]'으로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을 '[[윌리윌리]]'로 불렀으나 폐기되었다.<ref name="kukinews" /> == 각 기관별 분류 == {{참고|태풍#발달 단계|설명=[[태풍]]의 세부 구분에서 풍속 단위를 [[미터 매 초|m/s]]로 표기한 표에 대해서는}} {| class="wikitable" cellpadding="10" cellspacing="1" style="margin-bottom:1.5em; width:700px" |+10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 |- !풍속</br>([[노트 (속력)|kt]], 10분 평균) ![[대한민국 기상청|KMA]]</br>대한민국 기상청 ![[일본 기상청|JMA]]</br>일본 기상청 ![[:en:Météo-France|MFR]]</br>프랑스 기상청 ![[:en:Fiji Meteorological Service|FMS]]</br>피지 기상청 ![[:en:Bureau of Meteorology (Australia)|BoM]]</br>호주 기상청 |- |align="center"|<28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5ebaff"|열대 저압부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5ebaff"|열대 저기압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80ccff"|열대 요란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5ebaff"|열대 저기압 |- |align="center"|28 ~ 33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5ebaff"|열대 저기압 |- |align="center"|34 ~ 47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00faf4"|열대 폭풍 |align="center" style="background:#00faf4"|약한 열대 폭풍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00faf4"|1등급 사이클론 |- |align="center"|48 ~ 63 |align="center" colspan="3" style="background:#ccffff"|강한 열대 폭풍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ccffff"|2등급 사이클론 |- |align="center"|64 ~ 85 |align="center" colspan="2" rowspan="6" style="background:#fdaf9a"|[[태풍]]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ffffcc"|[[사이클론]]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ffffcc"|3등급 사이클론 |- |align="center"|86 ~ 89 |align="center" colspan="2" rowspan="2" style="background:#ffc140"|4등급 사이클론 |- |align="center"|90 ~ 106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ffc140"|강한 사이클론 |- |align="center"|107 ~ 114 |align="center" colspan="2" rowspan="2" style="background:#ff6060"|5등급 사이클론 |- |align="center"|>114 |align="center" style="background:#ff6060"|매우 강한 사이클론 |} {| class="wikitable" cellpadding="10" cellspacing="1" style="margin-bottom:1.5em; width:700px" |+<span id="1분 평균">1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span> |- !풍속</br>([[노트 (속력)|kt]], 1분 평균)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br>미국 합동 태풍 경보 센터 ![[미국 국립허리케인센터|NHC]]</br>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 ![[:en:Central Pacific Hurricane Center|CPHC]]</br>중태평양 허리케인 센터 |- |align="center"|<34 |align="center" colspan="3" style="background:#5ebaff"|열대 저기압 |- |align="center"|34 ~ 63 |align="center" colspan="3" style="background:#00faf4"|열대 폭풍 |- |align="center"|64 ~ 82 |align="center" rowspan="4" style="background:#fdaf9a"|태풍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ffffcc"|1등급 허리케인 |- |align="center"|83 ~ 95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ffe775"|2등급 허리케인 |- |align="center"|96 ~ 113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ffc140"|3등급 허리케인 |- |align="center"|114 ~ 129 |align="center" colspan="2" rowspan="2" style="background:#ff8f20"|4등급 허리케인 |- |align="center"|130 ~ 135 |align="center" rowspan="2" style="background:#ff8f20"|슈퍼 태풍 |- |align="center"|>135 |align="center" colspan="2" style="background:#ff6060"|5등급 허리케인 |} {| class="wikitable" cellpadding="10" cellspacing="1" style="margin-bottom:1.5em; width:450px" |+<span id="3분 평균">3분 평균 최대풍속을 사용하는 기관의 열대 저기압 분류</span> |- !풍속</br>([[노트 (속력)|kt]], 3분 평균) ![[:en:India Meteorological Department|IMD]]</br>인도 기상청 |- |align="center"|<28 |align="center" style="background:#80ccff"|저기압 |- |align="center"|28 ~ 33 |align="center" style="background:#5ebaff"|발달한 저기압 |- |align="center"|34 ~ 47 |align="center" style="background:#00faf4"|사이클론 |- |align="center"|48 ~ 63 |align="center" style="background:#ccffff"|강한 사이클론 |- |align="center"|64 ~ 89 |align="center" style="background:#ffffcc"|매우 강한 사이클론 |- |align="center"|90 ~ 119 |align="center" style="background:#ffc140"|극도로 강한 사이클론 |- |align="center"|>119 |align="center" style="background:#ff6060"|슈퍼 사이클론 |} == 이름 == {{본문|열대 저기압의 이름}} 열대 저기압은 여러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예보에서 올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붙는다. 주변 관계국들이 이름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다. == 관측 ==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최대 풍속은 [[대한민국 기상청]],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0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하고 있다. 기압은 [[파스칼 (단위)|헥토파스칼]](hPa), 강수량은 [[밀리미터]](mm)를 표준 단위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SSHS)이라는 등급을 이용하여, 5등급을 가장 강력한 열대 저기압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3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5등급 태풍이었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5등급 허리케인이었다. 2008년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등을 강타하여 10만 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4등급 사이클론이었다. 미군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전 세계에 10여 대의 항공모함 함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태풍의 경보와 그에 따른 함대의 이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와이주]] [[진주만]]의 해군해양기상센터(Naval Maritime Forecast Center) 내에 미국 해군과 미국 공군이 합동으로 운영하는, [[합동태풍경보센터]](JTWC)가 있다. 대부분의 해역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이동 상황 등을 전 세계 미군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8년]] [[4월 21일]] 국가태풍센터를 제주도에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가태풍센터는 전 세계의 열대 저기압을 감시 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처럼 북서태평양의 태풍만 감시하고 관측한다. === 역사 ===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의 넓은 해상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주로 남태평양에 있는 몇몇 섬에서 관측이 행해졌고, 그 외에는 때때로 그 해역을 지나가는 배에서 전해 주는 기상통보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존재를 알 뿐이었다. 따라서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강도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때때로 섬을 통과할 때나 배가 태풍 중심에 휘말려 들어갈 때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면 미군의 비행기가 그 중심까지 날아가 관측하게 되어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관측지 근처에 가까이 오면 각지에 있는 레이다에 의해 저기압을 연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열대성 저기압 주위에 있는 특유한 구름 분포가 찍히는데, 이것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정할 수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쏘아올린 [[기상위성]]에서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일기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갑작스럽게 열대성 저기압이 엄습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ref name="글로벌_1">태풍의 관측,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태풍 정찰 비행 ===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루에 두세 번 미군 비행기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까지 들어가 레이다나 드롭 존데를 이용하여 열대성 저기압을 자세히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의 등압선은 거의 원형이므로 비행기가 언제라도 왼쪽으로 바람을 받아 날아가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중심에 가까이 가면 레이다로 중심의 위치를 잡아 더욱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다. 격렬한 동요와 강한 비가 내리는 지역을 뚫고 나가 열대성 저기압의 눈 안에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8자를 그리듯이 비행한다. 그러면 정확한 중심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드롭 존데를 떨어뜨려 비행 고도에서 해면까지 사이의 [[기온]]과 [[습도]]를 측정하고, 또 해면에서 중심 기압을 구한다. 그리고 [[파도]]의 상태로 해면 부근의 풍속을 추정한다.<ref name="글로벌_1"/> === 레이더에 의한 관측 === 열대성 저기압이 200 ~ 300km 거리까지 다가오면 [[레이다]]로 열대성 저기압을 관측할 수 있다. 레이다로 찍은 열대성 저기압을 보면 중심 주위를 나선형 구름이 몇 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알 수 있다.<ref name="글로벌_1"/> === 기상위성에서의 관측 === 레이다의 경우는 비가 내리고 있는 [[구름]]밖에 찍을 수 없지만 위성에서 본 경우에는 상층의 구름 등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곳도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연속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진로나 강도의 변화 등도 추정할 수 있다.<ref name="글로벌_1"/> 미국의 극궤도 기상위성 [[NOAA]]는 하루에 두 차례 대한민국 상공을 통과한다. 이러한 기상위성의 관측 데이터는 기상위성센터에서 처리하는데, 구름 화상 사진으로 작성하여 태풍감시나 기상예보에 이용되고 있다.<ref name="글로벌_1"/> == 특징 및 구조 == [[파일:Hurricane-en.svg|섬네일|열대 저기압의 구조. (북반구 기준)]] 열대성 저기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과는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은 그 중심부에 눈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열대성 저기압의 구조도 눈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ref name="글로벌_3">태풍의 구조,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구름 ===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더로 관측하면 고도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란운이 중심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고리 모양의 구름을 벽운(壁雲)이라 하며 그 안쪽을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의 크기는 평균 15 ~ 20km 정도이지만 열대성 저기압에 따라 다르며, 같은 열대성 저기압이라도 시간적으로 매우 다르다. 눈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길다란 띠 모양으로 연결된 적란운이 주위에서 모여들어 벽운을 형성하고 있다. [[레이다]]에 찍히는 것은 굵은 빗방울을 내리게 하는 구름뿐이며, 찍히지 않는 검은 부분이라도 실제로는 구름이 있다. 또한 비행기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태풍의 눈 안에도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벽운처럼 길다란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해가 비치거나 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ref name="글로벌_3"/> === 기압과 바람 === 일기도상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주위에 동심원 모양을 한 등압선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간격은 좁아진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이 지나간 관측소의 기압이나 풍속의 변화를 보면, 기압은 중심에 가까우면 급격히 낮아지고 바람도 급격히 강해지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갑자기 약해진다.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의 주위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바람이 등압선과 20 ~ 30°각도로 열대성 저기압 안으로 불어들고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고 있는 상공의 바람을 비행기에서 보면 중심에서 극히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불어나오고 있다.<ref name="글로벌_3"/> === 기온 ===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지역에 있는 동안은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 지역 내의 기온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의 경우에는 난역과 한역(寒域) 사이에 커다란 온도차가 있으므로 열대성 저기압과 상당히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상공의 기온은 매우 특징있는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비행기에서 관측해 보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고, 주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 도중에는 온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서로 교대로 나타난다. 온도가 높은 띠 모양의 구역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띠 모양의 구름과 일치한다. 태풍의 눈 내부가 기온이 매우 높은 것은 이곳이 하강기류 영역이기 때문이며, 중심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것은 구름 속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潛熱)을 방출하기 때문이다.<ref name="글로벌_3"/> == 발생과 소멸 ==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곳은 [[편동풍]] 골의 끝부분이나 중위도에서 뻗어 있는 [[기압골]] 위쪽 등 상승 기류가 있는 곳이다. [[열대]]의 해면은 수온이 높고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이 활발하여 [[대기]]는 충분히 습해져 있다. 또한 [[라디오 존데]] 관측 결과에 의하면 열대의 대기는 조건부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가 어느 정도 상승하여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점점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적란운]]이 형성된다. 적란운 안에는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다.<ref name="글로벌_2">태풍의 일생,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한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것은 상공에서 커다란 기류의 발산이 있을 때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면의 적란운 주위에서 수렴하여 상승한 기류가 상공에서 발산하여 그것이 하층의 수렴을 웃돌게 되면 [[기압]]이 내려간다. 또한, 적란운으로 에워싸인 [[태풍의 눈|눈]] 안에서는 강한 하강 기류가 있기 때문에 공기는 단열적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기온이 한층 높아진다. 기온이 높아지면 [[밀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심부의 기압은 눈 주위보다 더욱 낮아진다. 계산에 따르면, 태풍의 중심부에서는 온도의 상승에 의해 밀도가 감소한 것만큼 기압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기압이 내려가면 주위에서 기류가 수렴하여 적란운을 더 한층 발달시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ref name="글로벌_2"/> 이상과 같이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면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여 대기가 충분한 습기를 가지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태풍이 발달하려면 표면 수온이 26 ~ 27&nbsp;°C 이상이어야 한다. 열대의 해양에서도 남동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수온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북서 태평양에서 강한 태풍이 된 것은 모두 수온이 28&nbsp;°C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비행기 관측으로 얻은 열대 저기압의 중심 기압의 최저치는 870hPa로, 열대에서의 평상시 기압보다도 135hPa나 낮은 수치이다.<ref name="글로벌_2"/> 열대성 저기압은 해면의 수온이 높고 상승 기류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상공에서 큰 발산이 있는 경우에 발달한다. 실제로 태풍의 발달 상황을 조사해 보면 발생하고 나서 2, 3일 후에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한 차례만 기상 통보를 수신하던 배가 갑자기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ref name="글로벌_2"/> 넓은 해면에서는 수온이나 기류의 상태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이와 같은 곳으로 오면 발달이 멈추고 쇠퇴한다. 그러나 일단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 해상에서 금방 소멸하지는 않는다.<ref name="글로벌_2"/> 열대성 저기압은 육지에 오르면 해면에서 수증기의 보급이 없어져 표면 마찰이 커지기 때문에 급속도로 쇠퇴한다.<ref name="글로벌_2"/> 가을에 중위도까지 와서 일단 주춤한 열대성 저기압이 온대성 저기압 성질을 갖기 시작하여 다시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한다.<ref name="글로벌_2"/> == 각주 == {{각주 | refs= <ref name="kukinews">{{웹 인용 |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143&aid=0000019017 | 제목=“호주태풍 이름이 왜 사이클론?”…윌리윌리라는 이름은 없어져 | 저자=모규엽 | 뉴스=쿠키뉴스 | 출판사=국민일보 | 날짜=2006-03-20 | 확인날짜=2016-12-28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20716005210/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143&aid=0000019017 | 보존날짜=2012-07-16 | url-status=live }}</ref> }} == 같이 보기 == * [[태풍]] * [[허리케인]] * [[하이퍼케인]] * [[사이클론 (열대 저기압)|사이클론]] * [[저기압]] * [[온대 저기압]] *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 == 참고 자료 == * {{글로벌세계대백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Tropical cyclone}} {{열대 저기압}} {{자연재해}} {{전거 통제}} [[분류:열대 저기압| ]] [[분류:저기압]] [[분류:기상 현상]]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정당 정보 |국가 = 일본 |이름 = 자유민주당 |원어 이름 = {{lang|ja|自由民主党}} |배경색 = 자유민주당 |워드마크 = 자유민주당 (일본).svg |로고 = 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jpg |약칭 = 자민당, 자민, 自民党, 自民 |언어1 = 영어 |언어1_이름 = Liberal Democratic Party (LDP) |지도자1_직명 = [[자유민주당 총재|총재]] |지도자1_이름 = [[이시바 시게루]] |지도자2_직명 = [[자유민주당 부총재|부총재]] |지도자2_이름 = [[스가 요시히데]] |지도자3_직명 = [[자유민주당 간사장|간사장]] |지도자3_이름 = [[모테기 도시미쓰]] |지도자4_직명 = 참의원 회장 |지도자4_이름 = 세키구치 마사이치 |표어 = 政治は国民のもの, 日本の明日を切り拓く。<br />정치는 국민의 것, 일본의 내일을 개척해 나가자 |창당 = [[1955년]] [[11월 15일]] |분당전 = [[신진당]], [[일본의 마음]] |선행조직 = [[자유당 (1950년 일본)|자유당]]<br />[[일본민주당]] |중앙 당사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나가타초]] 1초메 11-23, 〒100-8910 |기관지 = 자유민주(自由民主) |재정지원 = 17,647,718,000 엔 |재정_연도 = 2019년 |당원 = 1,124,763명 |당원_연도 = 2022년 |국제조직 = [[국제민주연합]] |이념 = [[보수주의]]<ref>{{뉴스 인용|last= Newlands |first= Peter |date= 16 December 2012 |title= Conservatives win by a landslide in Japanese general election |url= https://www.thetimes.co.uk/article/conservatives-win-by-a-landslide-in-japanese-general-election-nrkf77ltql6 |work= The Times |access-date= 13 May 2020 |quote= Exit polls indicated that the conservative Liberal Democratic party has been returned to office after winning almost 300 seats in the lower house, which has 480 members. The new prime minister will be Shinzo Abe, a hawkish former prime minister, who is expected to revise the country’s pacifist constitution. <br> THE conservative Liberal Democratic party in Japan won back power in an election landslide today, returning Shinzo Abe, a former prime minister. }}</ref><ref>{{뉴스 인용|date= 20 October 2014 |title= Japan ministers Yuko Obuchi and Midori Matsushima quit |url= https://www.bbc.co.uk/news/world-asia-29684631 |work= BBC News |access-date= 13 May 2020 |quote= Mr Abe said he took responsibility for having appointed both women, and that they would be replaced within a day. Both are members of his governing conservative Liberal Democratic Party (LDP).}}</ref><ref>{{뉴스 인용 |date= 23 July 2018 |title= Poll finds nearly two-thirds oppose passage of casino bill; Cabinet's approval rating falls to 43.4% |url= https://www.japantimes.co.jp/news/2018/07/23/national/politics-diplomacy/nearly-two-thirds-oppose-recently-passed-bill-authorizing-casinos-cabinet-approval-rating-falls-43-4-poll/ |work= The Japan Times |location= Kyodo |access-date= 13 May 2020 |quote= The telephone poll conducted by Kyodo News over the weekend found that 64.8 percent of respondents opposed the legislation and 27.6 percent supported it. The Diet, dominated by the conservative Liberal Democratic Party, passed the bill on Friday despite stiff resistance from opposition parties. |archive-date= 2022-09-22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220922014940/https://www.japantimes.co.jp/news/2018/07/23/national/politics-diplomacy/nearly-two-thirds-oppose-recently-passed-bill-authorizing-casinos-cabinet-approval-rating-falls-43-4-poll/ |url-status= }}</ref><br />[[내셔널리즘|일본 내셔널리즘]]<ref>https://www.theglobalist.com/japan-shinzo-abe-nationalism-germany/</ref><ref>Ganesan (2015). Bilateral Legacies in East and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p. 67.</ref><br />'''내부 정파''':<br />[[자유보수주의]]<ref name="Noman2010">{{서적 인용|author=Omar Noman|title=Responsible Development: Vulnerable Democracies, Hunger and Inequality|year=2010|publisher=Routledge|isbn=9781135180751|url=https://books.google.com/books?id=p7eLAgAAQBAJ&pg=PT123|page=123}}</ref><ref>{{인용|first=Pradyumna P. |last=Karan |title=Japan in the 21st century: environment, economy, and society |publisher=University Press of Kentucky |year=2005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wS5kcRvShg8C&pg=PT259 |isbn=978-0813137773}}</ref><ref>{{서적 인용|editor=William D. Hoover |title=Historical Dictionary of Postwar Japan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Exa7XoW-1n8C&pg=PA211 |year=2011 |publisher=Scarecrow Press |isbn=978-0-8108-7539-5 |page=211}}</ref><br />[[국수주의 (일본)|국수주의]]<ref>{{웹 인용|url=https://www.eurasiareview.com/16072019-beautiful-harmony-political-project-behind-japans-new-era-name-analysis/|title=Beautiful Harmony: Political Project Behind Japan’s New Era Name – Analysis|quote=The shifting dynamics around the new era name (gengō 元号) offers an opportunity to understand how the domestic politics of the LDP’s project of '''ultranationalism''' is shaping a new Japan and a new form of nationalism.|date=16 July 2019|work=eurasia review|확인날짜=2019-08-2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90813053041/https://www.eurasiareview.com/16072019-beautiful-harmony-political-project-behind-japans-new-era-name-analysis/|보존날짜=2019-08-13|url-status=dead}}</ref> |스펙트럼 = [[우익]]<ref>{{뉴스 인용|title= Unwelcome Change&nbsp;– A Cabinet Reshuffle Poses Risks For Japan's Ties with Neighbors |newspaper= The Economist |date=30 August 2014 |url=https://www.economist.com/news/asia/21614189-cabinet-reshuffle-poses-risks-japans-ties-its-neighbours-unwelcome-change}}</ref><ref>[[小林正弥]]. [https://webronza.asahi.com/politics/articles/2012111900021.html?page=2 戦後初の「極右党首」登場――「日本維新の会」と石原新党の合併が意味するもの]. [[WEBRONZA]]. (2012年11月20日) 2018年12月27日閲覧。</ref> [[포괄정당|빅텐트]]<ref>{{서적 인용|author1=Glenn D. Hook|author2=Julie Gilson|author3=Christopher W. Hughes|author4=Hugo Dobson|title=Japan's International Relations: Politics, Economics and Security|url=https://books.google.com/books?id=MHhE6AlgkIoC&pg=PA58|year= 2001|publisher=Routledge|isbn=978-1-134-32806-2|page=58}}</ref><br />'''내부 정파:'''<br />[[중도우파]]<ref>{{서적 인용|author=Ludger Helms|title=Parliamentary Opposition in Old and New Democracies|url=http://books.google.com/books?id=_UCPAQAAQBAJ&pg=PA97|date=18 October 2013|publisher=Routledge|isbn=978-1-317-97031-6|page=97}}</ref><ref>{{서적 인용|author1=Peter Davies|author2=Derek Lynch|title=The Routledge Companion to Fascism and the Far Right|url=http://books.google.com/books?id=1-iXGKN1AK4C&pg=PT236|date=16 August 2005|publisher=Routledge|isbn=978-1-134-60952-9|page=236}}</ref> ~ [[극우]]<ref>{{bulleted list |{{뉴스 인용 |성=무에노 |이름=나루사와 |날짜=2013.1.7 |제목=Abe Shinzo: Japan’s New Prime Minister a Far-Right Denier of History |번역제목=일본의 신임총리 아베의 극우적인 역사 부정 |url=https://apjjf.org/2013/11/1/Narusawa-Muneo/3879/article.html |언어=영어 |뉴스=아시아 태평양 저널 }} |{{뉴스 인용 |성=지크 |이름=린다 |날짜=2019.8.9 |제목=Japan, led by less apologetic generation, stays tough in South Korea feud |번역제목=사과 없는 일본이 한국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다 |url=https://www.msn.com/en-us/news/world/japan-led-by-less-apologetic-generation-stays-tough-in-south-korea-feud/ar-AAFwpxy |언어=영어 |뉴스=MSN |확인날짜=2019-08-1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90812080312/https://www.msn.com/en-us/news/world/japan-led-by-less-apologetic-generation-stays-tough-in-south-korea-feud/ar-AAFwpxy |보존날짜=2019-08-12 |url-status=dead }} |{{뉴스 인용 |성=빙셍 |이름=자베르 |날짜=2015.6.2 |제목=La face cachée de Shinzo Abe |번역제목=아베 총리의 숨겨진 이면 |url=https://www.nouvelobs.com/monde/20150521.OBS9364/japon-la-face-cachee-de-shinzo-abe.html |언어=프랑스어 |뉴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 |{{저널 인용 |날짜=2015 |제목=Japan |번역제목=프리덤하우스 : 일본 |url=https://freedomhouse.org/report/freedom-world/2016/japan |언어=영어 |access-date=2019-08-15 |archive-date=2019-08-1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812080325/https://freedomhouse.org/report/freedom-world/2016/japan |url-status=dead }} |{{저널 인용 |성=리 |이름=베슬리 |날짜=2018.5.1 |제목=Making Japan Great Again: Japan's Liberal Democratic Party as a Far Right Movement |번역제목=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극우 운동으로써의 일본 자유민주당 |url=https://repository.usfca.edu/cgi/viewcontent.cgi?article=1023&context=honors |언어=영어 |저널= |위치=샌프란시스코 대학 |출판사= |확인날짜= }} |{{웹 인용|url=https://thediplomat.com/2018/06/why-steve-bannon-admires-japan/|title=Why Steve Bannon Admires Japan|quote=In Japan, populist and '''extreme right-wing''' nationalism has found a home within the political establishment.|work=The Diplomat|date=22 June 2018}}}}</ref> |상징색 = {{colorbox|{{정당색/일본|자민당|색1}}}} [[초록]]<ref>2017년 이전에 주로 쓰이던 색. 지금도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쓰이고 있다.</ref><br />{{colorbox|#1AADE0}} [[파랑]]<br />{{colorbox|#E50038}} [[빨강]]<ref>2017년 48회 중의원 총선기간 이후로 주로 쓰이고 있다.</ref> |의석1 제목 = [[참의원 (일본)|참의원]] |의석1 수 = 118 |의석1 정수 = 248 |의석2 제목 = [[중의원]] |의석2 수 = 261 |의석2 정수 = 465 |의석3 제목 = [[도도부현]] |의석3 수 = 1283 |의석3 정수 = 2643 |의석4 제목 = [[시정촌]] |의석4 수 = 2179 |의석4 정수 = 29608 |의석5 제목 = [[시구정촌]] |의석5 수 = 3 |의석5 정수 = 1739 |웹사이트 = http://www.jimin.jp/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of Japan logo.svg|섬네일|자유민주당 워드마크]] [[파일:LDP launching conventin.jpg|섬네일|[[1955년]]의 자유민주당 창당 대회]] [[파일:Jimin Honbu at Tokyo in 2018.jpg|섬네일|자유민주당 중앙당사(2018년 1월)]] '''자유민주당'''({{llang|ja|自由民主党|지유우민슈토}}, {{llang|en|Liberal Democratic Party, '''LDP'''}}), 약칭 '''자민당'''({{llang|ja|自民党|지민토}})은 [[1955년]]에 [[자유당 (일본, 1950년)|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ref>{{서적 인용|author1=Larry Diamond|author2=Richard Gunther|title=Political Parties and Democracy|url=https://books.google.com/books?id=zZ2XT76eqMAC&pg=PA145|date=26 December 2001|publisher=JHU Press|isbn=978-0-8018-6863-4|page=145}}</ref> 정당이며 2024년 현재 [[자유민주당 총재|총재]]는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은 [[모테기 도시미쓰]]이다. 1955년의 창당 이후 [[중의원]] 내에서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55년 체제]]라 불리는 양대정당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후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우위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그러나 익년인 1994년 다시 내각을 이룬 이후로도 2009년~2012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제1당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으며, 계속적으로 [[일본의 총리|총리]]를 배출해내고 있는 등 일본 국내의 정치계에서의 그 영향력은 거대하다. 소속 의원들은 당내의 특정 파벌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총리나 내각 인사의 선출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개요 == 1955년에 [[자유당 (일본, 1950년)|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으로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을 기원으로 하며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을 담당한 익찬의원연맹, 익찬정치회, 대일본정치회 및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동교회, 호국동지회, [[자유당 (일본, 1950년)|일본자유당]], 일본진보당, 일본협동당이 자민당의 기원으로 꼽힌다. 이렇게 자민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주도했거나 이를 계승하는 세력과, 제국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친미]], [[반공주의]] 성향을 띠는 [[보수자유주의|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출발했다.<ref name="nipponica2">가토 데쓰로. [https://kotobank.jp/word/%E8%87%AA%E7%94%B1%E6%B0%91%E4%B8%BB%E5%85%9A%28%E6%97%A5%E6%9C%AC%29-1549048#歴史と政策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 歴史と政策]. 고토뱅크. 2018년 9월 6일에 확인함.</ref> 자민당은 창당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당 지도부의 힘이 약했고, 대신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각각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을 형성해 각 파벌 간의 대립과 합종연횡을 통해 당이 운영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는 한 정당이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의 후보를 내야만 하는 [[중선거구제]]를 선거 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출마한 자민당 후보들은 서로가 같은 당에 소속된 동지임과 동시에 당선을 다투는 라이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한 선거구에 입후보자가 여러 명이어서 한 후보자가 중앙당의 선거 지원을 독차지할 수 없었기에 각 후보자는 선거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 후원회를 조직하거나, 영향력이 강한 정치인의 파벌에 들어가 그 정치인의 뜻에 따르면서 선거 때마다 파벌의 지원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형성된 파벌 정치는 서로가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선거에 이용하는 [[금권 정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민당은 보수, 우익 정당이지만,<ref name="nipponica2"/> [[55년 체제]] 하에서는 서방의 보수 정권과 비교해 사회, 경제 전반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심했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ref>久米郁男 他著. 『정치학 보정판 Political science : scope and theory』 (New liberal arts selection) 有斐閣, 2011년, 26쪽. ISBN 978-4-641-05377-9</ref> 자민당 정권은 정부가 국가 경제 정책을 모두 관리하면서 여러 산업 분야 중 경쟁력이 부족한 분야의 기업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행정 절차상 인허가 권한 등을 이용해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농업 종사자에게 보조금을 교부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이렇게 강력한 정부 개입으로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이 "소득 격차 해소" 및 "리스크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전후 자민당 체제는 그들의 이념과는 결함되게도 성공한 사회주의 체제였다"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 http://dl.ndl.go.jp/view/prepareDownload?itemId=info%3Andljp%2Fpid%2F9971894&contentNo=1 |title=書評と紹介 高木郁朗/住沢博紀/T. マイヤー編著『グローバル化と政治のイノベーション 「公正」の再構築をめざしての対話』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accessdate=2019-07-27 |author=法政大学大原社会問題研究所 (評者:高橋善隆) |date=2004-06-25 |format=PDF |website=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publisher=일본 국립국회도서관 |pages=1-2 }}</ref> 자민당은 일본의 여러 유명 정치인을 배출했다. 1990년대 이후 정계계편을 통해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된 사람들도 그 뿌리를 따져보면 자민당 출신이 꽤 많다. 자민당 출신으로서 야권에 자리를 잡은 인사로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오자와 이치로]], [[가메이 시즈카]] 등이 있다. == 당명 == 1955년 11월 창당에 즈음하여 신당 창당 준비회가 "당명 위원회"를 따로 구성해 당명을 공모했다. 전국에서 총 2,191건의 공모가 있었는데, 많은 수를 얻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일본보수당"이 546건으로 1위, "민주자유당"과 "보수당"이 각각 187건으로 공동 2위, "일본국민당"이 159건으로 4위였다.<ref>{{웹 인용 |url=https://enterprisezine.jp/iti/detail/2164?p=3|author=니와 후미오 |title= 参院選前に「平沼新党」結成か!?|accessdate=2016-06-03}}</ref> 이렇게 "일본보수당"이 1위를 차지했지만 "이런 당명을 써서는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등의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어 결국 채택되지 못했고, 이후 당내에서 논의한 결과 신당이 추구하는 핵심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로 "자유민주당"이 당명으로 결정되었다. 창당 이후 언론 매체 등에서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과 약칭인 "자민당"을 자유롭게 혼용해 왔으나, 1990년대에 [[간 나오토]] 및 [[하토야마 유키오]]가 [[민주당 (일본, 1996년)|민주당]]을, [[오자와 이치로]]가 [[자유당 (일본, 1998년)|자유당]]을 창당하고 나서부터는 혼동을 막기 위해 자유민주당을 언급할 때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은 잘 쓰이지 않고 약칭인 "자민당"이 더 자주 쓰인다. 같은 이유로 당의 기관지 이름도 "자유신보"에서 "자유민주"로 바꾸었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5회 총선거]] 패배로 야당이 된 직후인 2009년 9월에 열린 자민당의 "집권 구상 회의"에서는 "자유민주당"이라는 당명에 여론의 거부 반응이 있다며 당명 변경론이 나왔다. 새 당명으로는 "화혼당({{lang|ja|和魂党}})", "자유신당({{lang|ja|自由新党}})" 등이 제안되었지만, "당의 체질 개선이 먼저인데 당명을 바꾸자는 건 본말전도인 것 같다"는 등 당 내부의 비판이 나오자 결국 무산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ankei.jp.msn.com/politics/situation/091204/stt0912041118004-n1.htm|title=自民党が「党名変更」を正式断念|newspaper=[[산케이 신문]]|date=2009-12-04|accessdate=2010-02-03|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1207092742/http://sankei.jp.msn.com/politics/situation/091204/stt0912041118004-n1.htm|archivedate=2009-12-07|url-status=dead}}</ref> == 역사 == === 창당 및 55년 체제 성립에 이르기까지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정치 구도는 좌익과 우익 모두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전후 일본의 우익 세력은 전쟁 전의 [[입헌정우회]]나 [[입헌민정당]]의 계보를 잇는 여러 정당으로 나뉘었고, 이들의 통합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55년 10월 13일, 4년 간 온건 세력 및 급진 세력으로 갈라져 있던 좌익 세력이 [[일본사회당]]에 재통합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 및 각계 인사들이 우익 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차 및 [[일본국 헌법]]의 정당성 및 개헌 문제, [[미국]] 등 서방 세력에 대한 시각차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우익 세력들이 통합되는 계기가 마련, "[[보수합동]]"이 이루어지며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초기에는 [[요시다 시게루]]를 지지하는 요시다파 및 이에 반대하는 반(反)요시다파와 함께 당인파, 관료 세력, 전전파(戰前派), 전후파(戰後派) 등 내부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수합동]]을 주도했던 [[미키 부키치]]를 비롯해 당내에서 "10년만이라도 통합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ref>기타오카 신이치. 『자민당 집권 38년』. ([[요미우리 신문]], 1995년 11월)</ref> 창당 후 첫 총선거인 1958년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무소속 입당자를 포함해 총 298석을 확보했다. [[일본사회당]] 역시 167석을 획득하여, 자민·사회 양당이 전체 의석의 99%를 차지하는 양당 체제가 성립되었다([[55년 체제]]). 또한 자민당이 창당 직전인 1954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백악관]] 및 [[미국 국무부|국무부]]의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았던 사실이 훗날 밝혀지기도 했다.<ref name="us state department">[[미국 국무부]]. 『미국의 외교』. 제29항 제2부. 2006년 7월 18일. ([http://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4-68v29p2/d1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 XXIX, Part 2, Japan, Document 1])</ref><ref name="jtimes2006">{{뉴스 인용 |title=U.S. admits CIA gave LDP money in 1950s, 1960s |newspaper=[[재팬 타임스]] |date=2006-07-20 |author=|url=http://www.japantimes.co.jp/news/2006/07/20/national/u-s-admits-cia-gave-ldp-money-in-1950s-1960s/#.V5Gn4JOyOko |accessdate=2016-07-22}}</ref> CIA는 일본에서 [[일본사회당|사회당]] 정권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민당에 금전을 지원하고 나아가 선거 승리를 위한 조언까지 해주는 등 일본 내 우익 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을 펼쳤다. 훗날 이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공개되자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민당은 부정했다.<ref name="jtimes2006"/> === 고도 경제 성장과 당 안정기 === [[기시 노부스케]] 내각 기간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싼 "[[안보투쟁]]"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시민·학생 운동이 벌어지고, 여야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국 불안이 이어졌지만,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을 틈타 의석을 오히려 늘렸다. 시민 주도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자민당 정권은 국가 운영의 우선 순위를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 주도의 장기 경제 발전 계획인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을 실시하고, 여기에 [[한국 전쟁]] 기간 동안의 특수 효과까지 겹치면서 급속도로 경제를 재건한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8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고도경제성장]]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일본에서 고도경제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감소하면서 사실상 [[안보투쟁]] 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퇴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은 "대화의 정치"를 내세우며 [[일본사회당]] 등 야당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정국 또한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1963년 10월, 자민당 조직조사회장이었던 [[미키 다케오]]가 당의 현대화에 관한 자문 보고서를 정리해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자민당을 지배하고 있던 파벌의 폐해에 대한 내용이 담겼고, 더 이상의 당내 갈등을 막기 위해 파벌을 없애야 할 필요성과 함께 각 파벌 수뇌부에 몰리는 정치 자금을 모두 당 집행부가 관리하는 것으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담겼다. 그러나 [[자유민주당 총재|총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미키 보고서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비공식 회견에서 말하는 등 각 파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ref>마스미 준노스케. 『현대 일본의 정치 체제』 p.433, [[이와나미 서점]], 1969년.</ref> 이후 보고서 내용에 따라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파벌이 해산됐지만, 이미 나뉜 당내 세력의 갈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는 질병을 이유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 및 [[자유민주당 총재|자민당 총재]]직에서 사퇴할 뜻을 표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다. 같은 해 [[오노 반보쿠]]가 사망했고, 다음 해인 1965년 7월에는 [[고노 이치로]]가 사망하고 뒤이어 8월에는 [[이케다 하야토]]가 사망하면서 사토 에이사쿠를 위협하는 당내 라이벌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1966년에는 "[[검은 안개 사건 (정계)|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정치 스캔들이 발생하여 여러 거물급 정치인들이 낙마하는 일이 속출했고, 이에 자민당은 당내외의 비판에 시달리며 여론이 악화, 1967년에 실시된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전이 예상됐지만,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하여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자신에 우호적인 인사를 전면에 포진시켜 당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 당 총재 4선을 하며 [[한일기본조약|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내고, 공해 대책 및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하며 7년 8개월간 장기 집권하였다. 이렇게 자민당은 창당 때부터 1960년대까지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입후보자가 감소하고 득표율도 조금씩 감소해 갔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기였다. 한편 자민당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가 많은 대도시나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비교적 열세를 보였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진보 성향 정당이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당이 분열되어 민주사회당이 창당되고, [[공명당]] 등 중도 성향 정당이 약진하며 진보 성향 정당이 도시 지역의 기반을 상당 부분 잃은데 비해, 자민당은 지지 기반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 보수·진보 세력의 대립과 당내 갈등 === [[사토 에이사쿠]]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며 열린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의 중진들로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등 4명이 출마하였고, 선거 결과 "일본 열도 개조론"과 중일 국교 정상화를 내세운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다나카 내각은 1972년 9월에 [[중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중일 수교가 결정되자 자민당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이 정책 기구를 만들고 중일 수교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다나카 내각은 "일본 열도 개조론"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과 [[신칸센]]의 정비 등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비를 증액한 1973년도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직후 [[1973년 석유 파동|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고, "광란 물가"로 불릴 만큼 비정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일본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다나카는 본인의 경쟁자이면서 균형 재정을 지향했던 [[후쿠다 다케오]]를 [[일본 대장성|대장대신]](현재의 [[일본의 재무대신|재무대신]])에 임명하며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후쿠다는 정부 예산의 감축, [[통화 정책|금융 긴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다나카 내각은 소비 환기 정책에서 소비 억제 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해 나갔다. 1974년 일본은 전후 처음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ref>산와 료이치. 『개설 일본 경제사근현대』. 제2판 [[도쿄 대학]] 출판회, 2002년 11월.</ref> 익년인 1975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경제 성장률이 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1974년 7월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과반수 의석을 유지했지만, 여야 의석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자금 문제가 불거져 다나카가 총리 및 당 총재직에서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나카의 후임이 될 자민당 총재는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았고, 대신 부총재였던 [[시나 에쓰사부로]]의 지명에 따라 양원 의원총회에서 승인을 받은 [[미키 다케오]]가 신임 총재로 취임했다. 미키는 당의 현대화와 정치 불신 해소, 경기 침체의 극복을 내걸었다. 1976년 2월에는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6월 자민당 소속인 [[고노 요헤이]]와 [[야마구치 도시오]] 등 6명의 국회의원이 당의 부패를 이유로 탈당하여 "부패와의 결별"을 모토로 [[신자유클럽]]을 결성했다. 같은 해 7월, 도쿄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다나카 가쿠에이]]를 구속하였고, 이에 다나카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사태가 전직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이르자 국내외의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8월, 다나카는 [[뇌물죄]]와 외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키 다케오]] 총리 및 [[이나바 오사무]] [[일본의 법무대신|법무대신]]은 록히드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에 당내에서 일부 세력의 반발이 이어지고 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러한 당내 움직임에 대해 미키는 대응 차원에서 록히드 사건 검찰 수사에 반발하던 각료를 파면하고,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까지 내세웠지만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던 만큼 해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의석을 획득하게 되었다(이후 무소속 의원의 입당으로 과반수를 간신히 확보). 미키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일본 국회|국회]]에서는 여야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며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1976년 12월, [[후쿠다 다케오]]가 [[자유민주당 집행부|자민당 집행부]]의 추천과 양원 의원총회의 승인을 얻어 새 총재에 취임했다. 당초 후쿠다는 2년간만 재임한 뒤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총재직을 넘긴다는 [[다이후쿠 밀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toshiyuki takahashi">다카하시 도시유키. 『나가타초의 사랑스러운 악당들: "파벌 정치"의 암투와 붕괴』. PHP 연구소, 2010년 8월.</ref> 후쿠다 내각은 출범 당시 지지율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여야 대립 구도가 지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지도부가 일부 야당에 대해 부분 협력을 호소하는 등 대야 관계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여야 갈등도 진정되기 시작했다.<ref name="toshiyuki takahashi"/> 또한 자민당은 1977년, 총재 선거에 당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당칙을 개정하기로 결정했으며, 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참여하는 "자유국민회의"도 결성했다. 더욱이 자민당 내부의 통합을 막고 있던 파벌 갈등의 해소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각 파벌은 또다시 형식적으로나마 해산되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다이후쿠 밀약을 무시하고 총재 재선을 위해 입후보했으나, 당내 유력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히라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오히라는 1979년 10월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비세]]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자민당은 직전 총선거에 이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당내에서 오히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라는 사퇴 요구를 일축했으며, 이후 자민당은 차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 지명을 둘러싸고 극심한 당내 갈등에 빠졌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열린 임시 국회에서의 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오히라가 승리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출범으로 당내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 기간의 혼란은 이후 "40일 항쟁"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자민당 역사상 최악의 당내 갈등 사례로 꼽히고 있다. 1980년 5월 16일, [[일본사회당]]이 [[중의원]]에 오히라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미키파와 후쿠다파 등의 국회의원 69명은 불신임 투표에 불참했으며, 결국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오히라 내각은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곧바로 중의원의 해산을 선언했다. 이후 조기 총선 일정이 확정된 5월 30일, 오히라는 [[심근 경색]] 발작 증상을 일으키며 입원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인 6월 12일에 급사했다. 오히라는 사망했지만 자민당은 6월 22일에 실시된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및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 오히라의 후임으로는 오히라에 우호적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취임했다. 스즈키는 "화해의 정치"를 내걸며 당내 화합에 주력하고 행정·재정 개혁에도 앞장섰다. === 이중 권력 구조와 보수 우위 ===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등 진보 정당 소속의 지방자치단체장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과거 진보 정당이 강세를 보였던 대도시 지역에서도 자민당이 우위를 회복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2년 11월 실시된 총재 선거에 현직인 [[스즈키 젠코]]는 입후보하지 않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 등 4명이 입후보했다. 결과는 나카소네의 당선이었다. 그러나 나카소네는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의 힘을 빌려 총재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내각 및 당직 인선에서도 다나카파가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우대를 받았기 때문에 [[제1차 나카소네 내각]] 기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 때문에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다나카소네 내각"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카소네는 정권의 슬로건으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행정 개혁,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 규제 완화, 민간 분야 활용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교육 개혁, 국방 정책의 재검토,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의 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외교 면에서는 1983년 1월 방미 때 [[로널드 레이건]] [[미국의 대통령|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고 발언하는 등 미일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냉전]] 체제에서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나라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1983년 10월 12일, 도쿄 지방 재판소(법원)은 [[록히드 사건]]에 관한 [[다나카 가쿠에이]]의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야당은 다나카에게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지만 다나카는 이를 거부했고, 국회에서 여야간 충돌이 벌어졌다. 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자"며 [[중의원]] 해산을 요구했다. 결국 중참 양원 의장의 권유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다나카 판결 해산). 이렇게 실시된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으나 무소속 당선자의 영입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카소네는 "이제부터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 정치 윤리를 고양하고, 당 체질의 근본적 쇄신에 힘쓰며, 청결한 당 문화를 확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27일에 자민당은 분당되었던 [[신자유클럽]]과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연립 정권을 이루어 국회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1986년 6월, 나카소네 총리의 주도 아래 [[중의원]]을 해산하여 [[참의원 (일본)|참의원]] 선거와 동시에 실시했다. 자민당은 중의원 304석, 참의원 74석(개선 의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 후에는 선거 승리에 대한 특례로 나카소네의 당 총재 임기 1년 연장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8월에는 [[신자유클럽]]이 해산되어 대부분의 당원이 자민당에 재합류했다. 나카소네 내각은 [[일본전신전화공사]] 및 [[일본전매공사]]의 민영화와 [[국철분할민영화]]를 성사시키고, 1987년도 예산에서 방위 예산 1% 한도를 철폐하는 등의 정책을 실현하며 4년 11개월간의 집권을 마쳤다. 나카소네의 후임을 선출하는 1987년 10월의 당 총재 선거에서는 "뉴 리더"로 불렸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 이른바 "안치쿠미야" 3인방이 모두 입후보했다. 과거처럼 상대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 3명은 토론을 벌인 결과 후보 단일화 문제를 나카소네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다케시타를 후보로 한다는 나카소네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도 일어났다. 1988년 7월 임시 국회에서 [[다케시타 내각]]은 소비세 법안을 포함한 세제 개혁에 관련된 6개 법안을 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리크루트 홀딩스]] 관계 회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사의 비상장 주식이 정관계 및 재계의 유력 인사와 그들의 비서, 가족들에게 뇌물로 제공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리크루트 사건]]이 터졌다. 야당은 세제 개혁 관련 법안의 심의보다 리크루트 스캔들의 해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법안 심의를 일체 거부하고, 사건 관련자를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시킬 것을 요구하며 국회는 공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야당은 법안 표결을 위한 본회의 때 회의를 지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였고, 12월 9일에는 부총리 겸 [[일본 대장성|대장대신]](현재의 [[일본의 재무대신|재무대신]])이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채용 비리 문제로 사임했다. 그러나 세제 개혁 관련 6개 법안은 12월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1989년 1월 7일에는 [[쇼와 천황]]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아들인 [[상황 아키히토|황태자 아키히토 친왕]]이 [[일본 천황|천황]]에 즉위하였다. 당시 [[일본의 내각관방장관|내각관방장관]]이었던 [[오부치 게이조]]가 새 연호 "[[헤이세이 시대|헤이세이]]"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소비세 도입 직후 총리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5월 22일 도쿄 지검 특수부는 나카소네파 소속인 [[후지나미 다카오]]를 [[리쿠르트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뇌물죄]]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였고, 후지나미는 자민당을 탈당하였다. 5월 2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증인으로 출석해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으며, 심문 직후 나카소네 역시 자민당을 탈당했다. 다케시타의 후임으로는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일본의 외무대신|외무대신]]을 지내고 있던 [[우노 소스케]]가 추천되었다. 6월 2일 우노는 자민당 양원 의원총회에서 기립 투표를 거쳐 총재에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6월 3일에 다케시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그런데 우노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여성 스캔들이 발각되었다. 우노는 이를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7월에 열린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이 스캔들을 비롯해 [[리쿠르트 사건]], [[소비세]] 도입 문제, 농산물 수입 자유화 문제 등 "3종 세트"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자민당이 역풍을 맞아 겨우 36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편,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사회당]]은 여성 후보자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46석을 얻어 약진했다. 자민당은 [[참의원 (일본)|참의원]] 제1당을 유지하긴 했으나 여야의 의석 구도가 역전되었다. 우노는 선거 직후 총리 및 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약 2개월만에 다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가이후 도시키]], [[하야시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 등 3명이 출마했다. 여기서 다케시타파, 옛 나카소네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가이후 도시키가 과반수 득표로 총재에 당선되었다. [[가이후 내각]]은 가이후가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과 역시 같은 다케시타파 소속이자 자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가 사실상 배후에서 조종하는 구조였으며, 이를 "이중 권력"이라 지칭한다.<ref>이오 준. 『정국에서 정책으로: 일본 정치의 성숙과 전환』 p.32. NTT 출판, 2008년.</ref> 1991년 9월, [[가이후 내각]]은 당대에 주요 정치 이슈가 되고 있던 "정치 개혁" 문제를 이른 시일 내에 매듭지을 수 있도록 임시 국회 기간에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적용되고 있던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치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9월 30일에 돌연 [[중의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이사회에서 이 법안의 폐기가 결정됐다. 법안 폐기가 결정되자 가이후는 "중대한 결의로 임한다"며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을 보였지만, 당내 반발과 가이후를 지지하던 다케시타파의 해산 반대 기류도 있어 실제로 해산을 하지는 않았다. 이후 가이후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같은 해 10월에 열리는 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고 퇴진했다. === 55년 체제의 붕괴와 연립 정권 시대의 도래 === 1991년 10월 27일에 열린 총재 선거에서 [[미야자와 기이치]]가 승리하여 72세에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런데 1992년 [[가네마루 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령 문제로 국민들의 자민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자민당 장기 집권에 따른 [[금권 정치]]의 폐해가 자주 거론되었다. 또 가네마루가 실각함에 따라 다케시타파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는 다케시타파가 이름을 바꾼 오부치파와 정치적으로 갈라져 하네다파를 결성했다. [[가이후 내각]] 시절 폐안되었던 정치 개혁 법안을 다시 추진한 [[미야자와 내각]]은 법안 성립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폐안되고 말았다. 이후 이에 반발한 [[세이와 정책연구회|미쓰즈카파]] 회장이었던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하네다파 등 일부 세력이 대거 자민당을 탈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며 이루어진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해산 당시의 의석을 획득하며 중의원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만든 신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편 자민당과 함께 전후 일본 정치를 좌우해 온 [[55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일본사회당]] 역시 참패했다. 그 결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이 최초로 성립되어 창당 이래 줄곧 집권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자민당을 야당으로 전락시켰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를 꺾고 [[고노 요헤이]]가 당선되었다. 한편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자 자민당 내부에서 연립 여당으로 이적하는 의원도 생겨났다. 선거 결과에 따라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은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병립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 개혁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하였고, 법안 심의 과정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되 [[석패율제]]를 도입하자는 자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1994년 1월 29일에 [[일본 공직선거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바뀐 선거 제도는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적용되었다. 연립 정권은 호소카와 내각을 지나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총리직을 이어받으면서 계속되었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정책을 둘러싼 의견차로 연립 정권 내의 불협화음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민당은 [[55년 체제]] 하에서 대립 구도에 있었던 [[일본사회당]]과 함께 새로운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하였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총리로 하고 여기에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형태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정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자민당은 약 1년만에 연립 여당으로서 정권에 복귀했다. 1996년 1월 11일에는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총리로 하여 다시 한번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내각이 출범하였다. 동년의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과반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239석으로 의석을 크게 회복했다. 같은 해 [[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 (일본, 1996년)|민주당]]이 사회 개혁을 내세우며 자민당과 대립각을 세우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하시모토 내각이 당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1993~1994년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담당했던 인사들의 대부분은 [[신진당]]에 포진해 있었지만, 자민당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의해 신진당에서 자민당으로 이적하는 의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은 1997년에 총선거를 거치지 않고 [[중의원]] 과반수 의석을 회복했다. 소속 의원들의 이탈로 당세가 크게 위축된 신진당은 결국 해산되었고, 과반을 회복했기 때문에 성향이 다른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자민당은 1998년에 [[일본사회당]]에서 개편된 [[사회민주당 (일본)|사회민주당]] 및 [[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 정권을 종료하고 자민당 단독 정권을 구성했다. 하시모토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로 자민당은 1998년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기록하며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했다. 후임은 [[오부치 게이조]]가 되어 [[오부치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1999년 1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 (일본, 1998년)|자유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 "자자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공명당]]이 연정에 합류하여 "자자공 연립 정권"으로 바뀌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연정에서 이탈하고 대신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당이 연정에 들어와 "자공보 연립 정권"으로 또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부터 자민당과 [[공명당]]의 본격적인 공조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오부치가 질병으로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모리 요시로]]를 새 총리로 하는 모리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모리의 계속되는 실언에 자민당의 정치 공작 의혹까지 더해지며 내각 지지율은 침체 상태에 빠졌고, 이에 당내 일부 세력이 모리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자 코너에 몰린 모리 내각은 총사직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1939년)|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이른바 "[[YKK (정치)|YKK]]"가 [[고이즈미 내각]]을 수립했다. === 구조 개혁과 참의원의 여소야대 === 1991년, 일본의 [[일본의 거품 경제|버블 경기]]가 종말을 맞았다. 이 시기 [[냉전]]이 종결되고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기존의 정부 주도형 경제 운영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경제 정책 전환에 실패하였다. 정부는 경기 부양 효과가 크지 않다고 여겨지던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을 비롯해 비효율적인 여러 국책 사업을 밀어붙이며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했는데,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업에서 손실이 발생하면서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모두 막대한 재정 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일본은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부동산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매우 부풀려진 상태에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야마이치 증권]], [[산요 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홋카이도 척식 은행]],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주요 [[금융 기관]]들이 경영 실패로 파산에 이름과 동시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엔|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 또한 약화되어 해외 투자가 감소하여 주식 및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일본의 경제가 "[[잃어버린 10년 (일본)|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에 빠지면서 기존에 정부가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이 유지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추진해 온 경제 정책이 전환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2001년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면서 재정 적자의 원인이 된 비효율적인 국책 사업을 중단시켜 정부 예산의 낭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민간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으며, 기존에 정부 주도로 각 지방에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했던 자민당의 관습을 폐지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자 모양의 헤어 스타일을 가지는 등 차별화를 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고이즈미 돌풍"으로 불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이즈미 내각]] 출범 직후인 2001년 4월에 실시된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역대 내각 지지율 중 최고 수치인 87.1%를 기록했으며, 동기간에 실시된 여론조사 중 가장 낮은 수치인 [[아사히 신문]] 조사에서도 78%를 기록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일본 내각관방|내각관방]] 산하 내각공보실이 발행하는 인터넷 잡지인 "고이즈미 내각 메일 매거진"을 발행하였는데, 구독자가 2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이즈미의 인기에 힘입어 자민당은 같은 해 7월의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고이즈미는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국방위원장]]과 사상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3년 10월,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고이즈미는 비례대표 의원에 73세 정년제를 적용할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83세의 [[미야자와 기이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한 반면 85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완강히 저항하며 용퇴를 거부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 집행부의 강한 의지로 결국 나카소네는 용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실시된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신보수당]]의 연립 여당은 절대 안정 다수를 유지했지만, 자민당은 10석이 줄어들었고 여권 전체로는 12석이 줄어들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 자민당이 [[신보수당]]을 흡수 합당하고부터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양당 연립 정권으로 개편되었다([[자공 연립 정권]]). 2004년 7월, [[제2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연금]] 제도 개혁이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고이즈미 내각은 선거 직전인 6월에 연금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선거 결과 자민당은 49석을 얻는 데 그쳐 50석을 얻은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에 1석 뒤졌다. 2005년 8월에 열린 통상 국회에서는 고이즈미 내각의 핵심 공약이었던 [[일본의 우정민영화|우정 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서는 가결된 반면에 [[참의원 (일본)|참의원]]에서 부결되었고, 법안 표결 직전 "우정 민영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다면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고이즈미의 예고에 따라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이렇게 열린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는 다른 모든 이슈를 "우정 민영화" 단 하나만으로 덮어버리는 선거 전술을 사용하여 자민당 정권에 반대하는 여론을 최소화시켰다. 결국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고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의석을 합해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327석을 확보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우정 민영화에 반대했던 당내 일부 의원들이 제명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부분이 낙선하는 타격을 입으면서,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 내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기류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ref>「역사 교과서, 북한 납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제명자들 잇단 낙선 자민당 내 '반대파' 뜻밖의 위기」 (『[[산케이 신문]]』, 2005년 9월 14일)</ref> 고이즈미 정권 후반기인 2005년부터는 "포스트 고이즈미"로 불리며 고이즈미를 이을 차기 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는 "포스트 고이즈미"의 대표 4인방으로 꼽혔다. 2006년 9월 20일 열린 [[2006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선거 전부터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어 왔고 고이즈미 내각에서 [[일본의 내각관방장관|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한 [[아베 신조]]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후 9월 21일 고이즈미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만료되었고, 9월 26일 고이즈미 내각이 총사직하며 아베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아베 내각은 [[일본 사회보험청|사회보험청]]의 연금 가입자 기록 문제가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으며, 연이어 각료들의 스캔들이 터지는 등 위기에 직면하여 2007년 7월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을 얻는 데 그쳐 60석을 얻은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일본)|참의원]] 제2당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파가 서로 다른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네지레 국회]]). 이로 인해 안건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어떻게든 참의원에서 안을 부결시키려는 야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민당 정권의 [[레임덕]]도 가속화되었으며, 총리도 1년마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바뀌는 등 총리의 지도력도 약화되었다. === 2번째 야당 시절과 여당 재복귀 === 2009년 7월 12일, [[2009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도쿄도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중의원]]의 4년 임기 만료에 따른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총선거]]가 늦어도 2009년 10월까지는 실시되어야 했기에 이 선거는 "총선거의 전초전"으로 불렸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총 127석의 [[도쿄도의회]] 의석 중 38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하였고, 야당인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은 54석을 얻어 의회 제1당을 차지했다. 총선거만큼 자민당이 공을 들였던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가 나오자,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기자회견을 열고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스모(패배)를 당했다. 대단히 귀찮은 결과"라고 말하며 [[아소 다로]] 등 당 지도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선거 후 자민당 내에서는 [[자유민주당 총재|당 총재]]이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인 [[아소 다로]]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아소 다로는 자신에 대한 퇴진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선거 다음 날인 7월 13일 오후에 기자회견을 통해 "7월 21일에 중의원을 해산해 8월 30일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며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였고, 일각에서 제기된 당 총재직 사퇴 요구는 일축하였다. 아울러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 등 야권은 선거 결과를 기회로 삼아 [[중의원]]에는 [[불신임 결의|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참의원 (일본)|참의원]]에는 총리 문책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며, 이후 불신임 결의는 중의원(자민당이 제1당)에서 부결, 총리 문책 결의안은 참의원(민주당이 제1당)에서 가결되었다.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는 불협화음이 계속되었고 일부 중진들도 "아소 총재 체제로 총선거를 치르면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라며 지도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아소의 예고대로 2009년 7월 21일 중의원이 해산되었고,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119석을 얻는 데 그쳐 308석을 얻은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에 대참패를 기록했다. 전직 총리와 유력 파벌의 수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민주당의 신인 후보에 패하였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 제2당이 되어 야당으로 전락했다. 직전인 1993~1994년의 야당 기간에는 그래도 중의원 제1당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패배였다. 자민당이 선거 패배의 충격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각료 경험자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의 탈당자가 속출했으며, 2010년 6월까지 약 7개월 동안 탈당자가 15명에 달했다. [[아소 다로]] 총재는 선거 다음 날 아침,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아소 내각]]이 총사직하였고, 아소에 사임에 따라 9월 28일 열린 [[200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200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야당이 된 후 처음 치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10년 7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 정권의 핵심 인사인 [[오자와 이치로]]가 [[소비세]]율 인상을 주장하여 여론의 반발을 불렀고, 여기에 오자와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비행장|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싼 정권 내부 갈등이 겹치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였으며, 이를 틈타 자민당은 개선 의석 기준으로 51석을 획득하여 44석을 획득한 민주당을 누르고 연립 여당의 참의원 과반 의석 확보를 저지했다. 이후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절대 안정 의석인 294석을 획득([[하토야마 구니오]]의 복당으로 선거 직후 295석으로 증가)하며 [[중의원]] 제1당에 올라섰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miuri.co.jp/election/shugiin/2012/?from=ygnav|title=衆院選2012特集|newspaper=YOMIURI ONLINE|date=2012-12-17|accessdate=2012-12-21}}</ref> 이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은 [[공명당]]과 함께 약 3년 3개월 만에 집권 여당에 복귀했다. 2013년 7월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공명당]]과 의석을 합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291석을 획득해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2016년 7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자민당은 21승 11패를 기록하는 등 지역구 37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6석을 획득했다(전체 121석). 이 선거를 통해 [[일본국 헌법]]의 개정에 찬성하는 이른바 "개헌 세력"(자민당 + [[공명당]] + [[일본유신회 (2015년)|일본유신회]] +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 + 기타 개헌에 적극적인 정당 및 무소속 의원 포함)이 중참 양원에서 모두 3분의 2를 넘어 개헌 발의 요건을 충족했다. 선거 직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히라노 다쓰오]]가 자민당에 입당하면서 27년 만에 [[참의원 (일본)|참의원]]에서 단독 과반수 의석(122석)을 확보했다. 2017년 1월 16일,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이후 "일본의 마음"으로 당명 변경)과 참의원에서 통일 회파(교섭단체)를 구성했다. 회파명은 "자유민주당·마음"이다.<ref>[http://www.iza.ne.jp/smp/kiji/politics/news/170116/plt17011618430013-s1.html 自民、こころが統一会派 参院で126人] {{웨이백|url=http://www.iza.ne.jp/smp/kiji/politics/news/170116/plt17011618430013-s1.html |date=20210210090626 }}. iza. 2017년 1월 16일.</ref> 2017년 10월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218석, 비례대표 66석으로 총 284석을 획득했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야당인 [[민진당 (일본)|민진당]]이 분열되어 [[희망의 당]]과 [[입헌민주당 (일본)|입헌민주당]]으로 나뉘어 표가 분산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야권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최대 63개의 지역구에서 당선자가 뒤바뀐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asahi.com/articles/ASKBR54WCKBRUTFK014.html|title=野党一本化なら63選挙区で勝敗逆転 得票合算の試算|publisher=[[아사히 신문]] 디지털|date=2017-10-23|accessdate=2017-10-24|archive-date=2021-04-1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417065205/https://www.asahi.com/articles/ASKBR54WCKBRUTFK014.html|url-status=}}</ref> 2018년 11월,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일본의 마음]]을 흡수 합병했다. 이에 앞서 참의원에서의 회파명을 "자유민주당·국민의 목소리"로 바꾸었다. 2019년 7월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22승 10패를 기록하며 지역구 38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7석을 획득했다. 이는 직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4회 참의원 선거]]의 56석에서 1석이 증가한 것으로, 이 선거에서 개선 대상이 된 66석에는 못 미쳤다. 자민당, [[공명당]]의 연립 여당은 전체 개선 의석인 121석의 과반수인 63석을 넘는 71석을 획득했지만 개선 대상인 77석에서는 6석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자민당은 참의원 단독 과반수 의석 유지에 실패했다. 비개선(비선출) 의석을 포함한 참의원 전체로는 자민, 공명 연립 여당을 포함해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 (2015년)|일본유신회]]와 일부 무소속 의원을 포함한 이른바 "개헌 세력"의 비개선 의석은 79석이므로 개헌이 가능한 전체 의석의 3분의 2인 164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85석 이상을 얻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81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3분의 2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아베 신조]] 총재는 [[국민민주당 (2018년 일본)|국민민주당]]의 일부 개헌 찬성 세력 등의 협력을 얻어 조기에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f>[https://www.asahi.com/senkyo/senkyo2019/ 2019 参議院選挙]. [[아사히 신문]].</ref> 다만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경우 개헌 자체에 부정적인 인사들도 많아 실제로 개헌이 이뤄질지의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 연혁 == * 1955년 ** 11월 15일 - [[자유당 (일본, 1950년)|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합당으로 자유민주당 창당([[보수합동]]). 초기에는 당 총재를 두지 않고 "총재 대행 위원회"를 두었다. 총재 대행 위원은 [[하토야마 이치로]](합당 전 일본민주당 총재), [[오가타 다케토라]](합당 전 자유당 총재), 미키 부키치(합당 전 일본민주당 총무회장), [[오노 반보쿠]](전직 중의원 의장) 등 총 4명이었다. 창당 당시 소속 국회의원은 [[중의원]] 298명, [[참의원 (일본)|참의원]] 115명이다. * 1956년 ** 4월 5일 - 총재 선거를 시행하여 [[하토야마 이치로]]를 초대 총재로 선출함으로써 총재 대행 위원회 활동 종료. ** 7월 8일 - 창당 후 첫 전국 단위 선거인 [[제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122석에 그쳐 과반수 획득에 실패. ** 12월 14일 - 총재 선거를 시행하여 [[이시바시 단잔]] 통상산업대신이 결선 투표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에 역전승을 거두며 제2대 총재로 선출. * 1957년 ** 2월 1일 - [[이케다 하야토]]의 제안으로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와 [[사토 에이사쿠]]가 입당. * 1958년 ** 5월 22일 - 창당 후 첫 총선거인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87석을 획득하여 166석을 획득한 [[일본사회당]]에 승리. * 1960년 ** 11월 20일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96석을 획득. * 1976년 ** 6월 25일 - [[고노 요헤이]], [[니시오카 다케오]] 등 6명이 탈당, [[신자유클럽]] 창당(이후 1986년 8월 15일 해산, 대부분이 자민당에 복당). ** 12월 5일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 획득 실패(선거 직후 보수 성향 무소속 의원의 입당으로 과반수를 확보). * 1983년 ** 12월 18일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 획득 실패(선거 직후 보수 성향 무소속 의원의 입당으로 과반수를 확보). ** 12월 27일 - 창당 이후 처음으로 [[신자유클럽]]과의 연립 정권 구성,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출범. * 1984년 ** 9월 19일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의 소행으로 자유민주당 중앙당사 방화 습격 사건 발생. 중앙당사 건물의 일부를 태웠다. * 1989년 ** 7월 23일 -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사회당]]에 참패하여 보수 성향 무소속 의원을 모두 합쳐도 [[참의원 (일본)|참의원]] 과반수 의석에 이르지 못함. * 1993년 ** 7월 18일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에 탈당자가 속출. 선거 결과, 선거 직전 의석수를 유지하는 데 그치고, 제1당은 유지했지만 [[중의원]] 단독 과반수에 못 미침. ** 8월 9일 - [[일본사회당]]·[[신생당 (일본)|신생당]]·[[공명당]]·[[민사당 (일본)|민사당]]·[[민주개혁연합 (일본)|민주개혁연합]]·[[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 등 7개 정당이 일본신당 소속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삼아 연립 정권([[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구성함으로써 처음으로 자민당이 야당이 됨. * 1994년 ** 6월 30일 -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위원장을 총리로 하는 자유민주당·[[일본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연립 정권이 출범, 약 11개월 만에 여당으로 복귀. 자민당이 다른 당의 당수에게 총리직을 맡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1995년 ** 7월 23일 -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제1당을 야당인 [[신진당]]에 내줬다. * 1996년 ** 1월 11일 - 약 2년 반 만에 [[자유민주당 총재|자민당 총재]]를 총리로 하는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 * 1997년 ** 9월 5일 - 무소속 의원들의 입당으로 약 4년 만에 [[중의원]] 단독 과반수를 회복. * 1998년 ** 6월 1일 - [[사회민주당 (일본)|사회민주당]]·[[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 정권 종료. * 1999년 ** 1월 14일 - [[자유당 (일본, 1998년)|자유당]]과의 연립 정권 수립(자자 연립), [[오부치 내각 (제1차 개조)|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 출범. ** 10월 5일 - [[공명당]]이 연정에 합류(자자공 연립), [[오부치 내각 (제2차 개조)|오부치 제2차 개조내각]] 출범. * 2000년 ** 4월 1일 - [[자유당 (일본, 1998년)|자유당]]이 연정에서 이탈.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당(2002년 12월 신보수당으로 당명 변경)과 연립 정권 구성(자공보 연립). * 2003년 ** 11월 21일 - 신보수당이 자민당에 흡수 합당되면서 [[자공 연립 정권]]으로 개편. 이후 자민당·[[공명당]] 양당의 공조가 정착. * 2005년 ** 11월 22일 - 창당 50주년 기념 전당대회에서 "새 이념", "새 강령", "창당 50년 선언"을 채택. 동시에 자민당의 [[일본국 헌법]] 개정안인 "신헌법 초안"을 공식 발표. * 2007년 ** 7월 29일 -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에 참패하며 창당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일본)|참의원]] 제2당으로 전락. * 2009년 ** 8월 30일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해산 전 300석을 크게 밑도는 119석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하며 창당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 제2당으로 전락. ** 9월 16일 -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으로 약 15년 만에 야당으로 전락. * 2010년 ** 1월 24일 - 제77회 정기 전당대회에서 "헤세이 22년 강령"을 발표. ** 4월 11일 - 강경파 의원 6명이 당의 노선과 운영을 비판, 탈당하여 신당 [[일어나라 일본]]을 창당. [[중의원]] 의석수가 113석으로 감소. ** 7월 12일 -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개선 의석 기준으로 여당이자 제1당인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보다 7석이 많은 51석을 획득(전체 84석). * 2012년 ** 4월 27일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개헌안을 발표(2005년 안에서 보충). ** 12월 16일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94석을 획득하며 [[중의원]] 제1당에 복귀. ** 12월 26일 -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출범으로 [[공명당]]과 함께 약 3년 3개월 만에 여당에 복귀. * 2013년 ** 7월 21일 -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개선 의석 기준으로 현행 선거 제도하에서 최다인 65석을 획득(전체 115석).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의석을 합쳐 [[참의원 (일본)|참의원]] 과반수 의석 확보. * 2014년 ** 12월 14일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91석을 획득. [[공명당]]과 합쳐 326석을 확보하여 전체 의석 수의 3분의 2 이상을 유지. * 2016년 ** 7월 10일 -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지역구 37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6석을 획득(전체 121석). ** 7월 23일 - 무소속 참의원 의원 1명이 입당하여 27년 만에 [[참의원 (일본)|참의원]]에서 단독 과반수 의석(122석) 확보. * 2017년 ** 3월 5일 - 제84차 정기 전당대회에서 [[자유민주당 총재|자민당 총재]] 임기를 종래에 연속 2기까지 재임 가능했던 것을 연속 3기까지 재임할 수 있도록 하는 당칙 개정안을 확정.<ref>[http://www.news24.jp/articles/2017/03/05/04355694.html 自民党大会で総裁任期を3期9年に延長]. [[닛폰 TV 방송망|닛폰 TV]] NEWS24. 2017년 3월 5일.</ref> ** 7월 2일 - [[2017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23석을 획득하는 데 그쳐 [[도쿄도의회]] 제1당을 [[도민퍼스트회]]에 내주며 [[2009년 도쿄도의회 의원 선거|2009년 선거]]의 38석을 크게 밑도는 참패를 기록. ** 10월 22일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84석을 획득. [[공명당]]과 합쳐 313석을 확보하여 전체 의석 수의 3분의 2 이상을 유지. * 2018년 ** 11월 1일 - [[일본의 마음]]을 흡수 합당.<ref>{{뉴스 인용|title=自民党 日本のこころと合併|newspaper=[[마이니치 신문]]|date=2018-11-02|url=https://mainichi.jp/articles/20181102/ddm/005/010/074000c|accessdate=2018-11-0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1102180648/https://mainichi.jp/articles/20181102/ddm/005/010/074000c|보존날짜=2018-11-02|url-status=dead}}</ref> * 2019년 ** 7월 21일 -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지역구 38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7석을 획득(전체 113석). == 당직 == === 총재 === {{본문|자유민주당 총재}} 자유민주당의 당수이며, 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연속 3기"에 한정하여 재임할 수 있다. 제1당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게 되는 관례에 따라 일반적으로 자유민주당의 총재는 총리직을 겸하게 된다. 현재 총재는 제28대 총재인 [[이시바 시게루]] 이다. === 집행부 === {{본문|자유민주당 집행부}} * 2024년 9월 29일 현재<ref>[https://www.jimin.jp/member/officer/ 자유민주당 임원표 (일본어)]</ref> {| class="wikitable" ! 직책 !! 성명 !! 중·참의원 !! 소속(출신) 파벌 |- | [[자유민주당 총재|총재]] | [[이시바 시게루]] | 중의원 | 무파벌 |- | [[자유민주당 부총재|부총재]] | [[스가 요시히데]] | 중의원 | 무파벌 |- | [[자유민주당 간사장|간사장]] | [[모테기 도시미쓰]] | 중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간사장 대행 | [[가지야마 히로시]] | 중의원 | 무파벌 |- | 간사장 대리 | 다나카 가즈노리 | 중의원 | 지공회 (아소파) |- | 재무위원장 | 시오노야 류 | 중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선거대책위원장 | 엔도 도시아키 | 중의원 | [[유린회]] (다니가키파) |- | 조직운동본부장 | [[오부치 유코]] | 중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홍보본부장 | [[고노 다로]] | 중의원 | 지공회 (아소파) |- | 국회대책위원장 | 모리야마 히로시 | 중의원 | [[근미래정책연구회]] (이시하라파) |- | 당기위원장 | 에토 세이치 | [[참의원 (일본)|참의원]] | [[지수회]] (니카이파) |- | 중의원 의원 총회장 | 후나다 하지메 | 중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총무회장]] | [[후쿠다 다쓰오]] | 중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양원 의원 총회장 | 오쓰지 히데히사 | 참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정무조사회장]] | [[다카이치 사나에]] | 중의원 | 무파벌 |- | 참의원 의원 총회장 | 세키구치 마사카즈 | 참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참의원 간사장 | [[세코 히로시게]] | 참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참의원 간사장 대행 | 노가미 고타로 | 참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참의원 정책심의회장 | (공석) | 참의원 | |- |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 | 오카다 나오키 | 참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중앙정치대학원 학원장 | 나카타니 겐 | 중의원 | 무파벌 |- | 행정개혁추진본부장 | [[사쿠라다 요시타카]] | 참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대책본부장 | 야마타니 에리코 | 참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당·정치 제도 개혁 실행본부장 | [[시오자키 야스히사]] | 중의원 | 무파벌 |- | 헌법 개헌 추진본부장 | 에토 세이시로 | 중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동일본 대지진 부흥 가속화 본부장 | [[누카가 후쿠시로]] | 중의원 | 헤이세이 연구회 (구 다케시타파) |- | 2020년 올림픽·패럴림픽 도쿄 대회 실시 본부장 | 엔도 도시아키 | 중의원 | 무파벌 |- | 지방 창생 실행 통합본부장 | [[가와무라 다케오]] | 중의원 | 지수회 (니카이파) |- | 1억 총활약 추진 본부장 | 이노구치 쿠니코 | 참의원 | 지공회 (아소파) |- | 북한 핵실험·미사일 문제 대책 본부장 | [[니카이 도시히로]] | 중의원 | 지수회 (니카이파) |- | 인공지능 미래사회경제전략본부장 | 시오노야 류 | 중의원 | 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 | 국토강인화 추진본부장 | 니카이 도시히로 | 중의원 | 지수회 (니카이파) |- |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추진 본부장 | 니카이 도시히로 | 중의원 | 지수회 (니카이파) |- | TPP·일EU·일미TAG 등 경제협력대책본부장 | 모리야마 히로시 | 중의원 | 근미래정책연구회 (이시하라파) |} == 지지 기반 == === 대도시와 지방 === 농업 종사자에 보조금을 교부하고, 전국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하는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 등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경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이래 답습해 온 자민당은 농어촌 및 지방 소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고, 반대로 대도시 및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열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등의 [[자유 무역 협정]]을 추진하여 농수산물 수출입의 전면 개방이 이뤄지면서 농어촌 지역의 지지율이 빠지는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언론 홍보 및 당의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면서 종래의 자민당 지지층 외에 대도시 지역 무당층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층으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당수의 이미지를 보고 자민당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B층"이 생겨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구 밀도가 낮은 지자체에서는 자민당의 득표율이 높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으로 갈수록 득표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ref name="miharu104">{{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104 |isbn=9784480072214 }}</ref> 그 이유로는 "자민당이 [[농업협동조합 (일본)|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매개로 한 두터운 기반을 지방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ref name="miharu104"/> === 지방자치단체별 === 자민당은 현직 [[일본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이자 [[자유민주당 총재|당 총재]]인 [[아베 신조]]가 지역구를 두고 있는 [[야마구치현]]과 [[호쿠리쿠 지방]] 3현([[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ref>{{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89, 95 |isbn=9784480072214 }}</ref> 그 밖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ref>{{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90 |isbn=9784480072214 }}</ref> === 소득 수준별 === [[파일:Election_Result_(2016)_and_Household_Income_in_Tokyo_at-large_district_(jpn).png|섬네일|오른쪽|310px|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도쿄도 선거구]]에서 당선된 후보 6명의 지자체별 득표율(같은 정당의 후보가 2명 이상일 경우 총합)과 지자체별 가구당 평균 연 소득의 상관 관계를 나타낸 그래프. 자민당 후보의 경우 평균 소득이 높아질수록 득표가 높아지는 현상을 보인다.<br>(출처: [[도쿄도]] 선거관리위원회 및 [[일본 총무성|총무성]] 통계국<ref>{{웹 인용 |date= |url=http://www.senkyo.metro.tokyo.jp/election/sanngiin-all/sanngiin-sokuhou2016/ |title=参議院議員選挙(平成28年7月10日執行) 投開票結果 |publisher=도쿄도 선거관리위원회 |accessdate=2016-08-2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26180942/http://www.senkyo.metro.tokyo.jp/election/sanngiin-all/sanngiin-sokuhou2016/ |보존날짜=2016-08-26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 |date= |url=http://www.stat.go.jp/data/jyutaku/kekka.htm |title=住宅・土地統計調査 統計表一覧 |publisher=[[일본 총무성|총무성]] 통계국 |accessdate=2016-08-2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20173012/http://www.stat.go.jp/data/jyutaku/kekka.htm |보존날짜=2016-08-20 |url-status=dead }}</ref>)]] 과거 10년 간의 자민당 지지율 추이를 가구 소득별로 보면 2005년에는 부유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지지율이 비슷했던 반면, 2015년에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의 자민당 지지가 상승하고 빈곤층의 지지는 하락했다(아래 표 참조).<ref name="asahidata20160326">{{뉴스 인용 |title=(여론조사 데이터를 읽다) 저소득층 지지 정당 소득 격차 불만으로 변화의 조짐? |newspaper=[[아사히 신문]] |date=2016-03-26 |author=야마시타 쓰요시 |url=http://digital.asahi.com/articles/DA3S12277494.html |accessdate=2016-03-26 }}{{깨진 링크|url=http://digital.asahi.com/articles/DA3S12277494.html }}</ref>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가구당 연 소득이 300만 엔 미만인 경우 자민당 지지층에서 이탈하여 무당층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ref name="asahidata20160326"/> {| class="wikitable" style="margin:0 auto" |+ 가구당 연 소득별 자민당 지지율 추이 ([[아사히 신문]] 조사)<ref name="asahidata20160326"/> ! style="width:9em" | 가구당 연 소득 ! style="width:150px" | 2005년 12월 (%) ! style="width:150px" | 2015년 3월 (%) |- | align=right | 1000만 엔 이상 | <div style="width:107.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3</div> | <div style="width:11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6 ({{증가}} 3)</div> |- | align=right | 750만~1000만 엔 | <div style="width:92.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37</div> | <div style="width:120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8 ({{증가}} 11)</div> |- | align=right | 500만~750만 엔 | <div style="width:100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0</div> | <div style="width:102.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1 ({{증가}} 1)</div> |- | align=right | 300만~500만 엔 | <div style="width:10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2</div> | <div style="width:102.5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1 ({{감소}} 1)</div> |- | align=right | 300만 엔 미만 | <div style="width:100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40</div> | <div style="width:90px;height:24px;background:#adadff;font-weight:bold">&nbsp;36 ({{감소}} 4)</div> |} 또한 [[일본 총무성|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도쿄도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자의 득표율([[나카가와 마사하루]] 및 [[아사히 겐타로]]의 합)은 가구당 평균 소득이 높은 지자체에서는 높았던 반면, 평균 소득이 낮은 지자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오른쪽 그래프 참조). === 연령별 === 연령별로는 20대와 70대 이상에서 많은 표를 얻는 추세이다.<ref>[http://www.tokyo-np.co.jp/senkyo/kokusei201607/zen/CK2016071102000149.html 18、19歳の比例投票先 「自民」が40% 共同通信出口調査] {{웨이백|url=http://www.tokyo-np.co.jp/senkyo/kokusei201607/zen/CK2016071102000149.html |date=20191019091112 }}. [[도쿄 신문]]. 2016년 7월 11일.</ref><ref>{{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150, 155 |isbn=9784480072214 }}</ref> 이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자민당이 70대 이상의 고령층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듯 20대 등 젊은 층에서는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자민당 지지율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고, 이들 무당층의 대부분이 투표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자민당의 득표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f>{{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150~152 |isbn=9784480072214 }}</ref> 실제로 한 여론조사에서 연령별 자민당 지지율을 보면 70대 이상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60대, 50대, 40대 순이었으며 30대 이하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했다. 한편, 무당층의 비율은 30대 이하에서 가장 높았다.<ref>{{서적 인용 |author=三春充希 |year=2019 |title=무기로서의 여론조사 - 사회를 잡고 미래를 바꾼다 |series=지쿠마 신서 |publisher=지쿠마 서방 |page=154 |isbn=9784480072214 }}</ref> === 지원 단체 === ; 당우 조직 * [[자유사회를 지키는 국민회의]](약칭 "자유국민회의") : 1977년 창설되었다. 단체 스스로 "자민당에 할 말은 하는 응원 단체"를 표방하고 있다. 자민당원이 가입하는 것도 가능하며,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만 가입할 수 있다. ; 정치 자금 조직 * [[국민정치협회]] : 1976년 1월 1일 자민당의 공식 자금 조직으로 지정되었다. [[법인]]상으로는 공식 당우 조직이다. [[자유사회를 지키는 국민회의|자유국민회의]]와 마찬가지로 개인 회원 가입 자격은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외국계 기업이 법인 회원이 되는 것, 재일 외국인이 회원이 되는 것은 정치자금규정법의 규정에 의해 불가능하다. ; 종교 단체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를 지원한 종교 단체는 다음과 같다.<ref>"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를 지원하는 종교 단체, 야스쿠니 참배에 찬반". [[아사히 신문]]. 2013년 8월 16일(금) 조간 3면.</ref> {{div col|cols=2}} * [[조동종 (일본)|조동종]] * [[일련종]] * [[천태종]] * [[정토종]] * [[세계구세교]]·주지광교단 * MOA 인터내셔널 (밝은 사회를 만드는 모임) * [[신생불교교단]] * [[불소호념회교단]] * [[숭교진광]] * [[세계진광문명교단]] * [[염법진교]] * [[해탈회]] * [[영우회]] * [[신토 정치 연맹]] ([[신사본청]]) * [[흑주교]] * [[덴쇼코타이 신궁교]]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div col end}} == 비판 및 사건 사고 == === 역사관 === 일본 자유민주당의 역사관은 종종 해외 역사학자들에게 극우적인 역사 왜곡이라고 여겨진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IHJsoCAREsg</ref> 자유민주당이 지원하는 교과서에는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에 대한 사건 축소,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군국주의 옹호 등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의 증거를 입증할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침략의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인식에 대한 논란이 있다.<ref>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394586</ref> 더불어 종군위안부는 군에 의한 강제 동원이 아니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176</ref> 자유민주당의 많은 정치인들은 헌법 9조를 폐기 및 일본 재무장하며,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재 군국주의화라는 주변국의 비판이 존재한다. 더불어 자유민주당의 많은 정치인들은 주변국에 대한 망언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으며,<ref>https://www.nocutnews.co.kr/news/1132676</ref>이러한 역사 부정은 자국의 [[일본 공산당]]을 위시로 한 혁신 정당 계열에게도 비판받았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v2GZ-HMFgcc</ref> === 부정부패 === 자유민주당의 총재인 [[스가 요시히데]]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의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정경 유착 및 부정 부패에 연루되어있다는 의혹을 받으며, [[벚꽃 스캔들]]이라 불리는 스캔들 의혹으로 현재 자유민주당 당직자들 중 상당수가 조사중에 있다.<ref>https://www.ytn.co.kr/_ln/0104_201911132252398719</ref> 5억 8천만원이 사용된 벚꽃 축제라는 점에서 횡령의 의심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2017년 [[모리토모 학원|아베 총리는 우익 유치원과 유착해 땅 특혜 매입을 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이 유치원은 우익적 사관을 세뇌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84552.html</ref> == 역대 선거 결과 == === 중의원 === {{역대정당득표도표 |제목 = 역대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의원 총선거]] 득표 |정당 = 자유민주당 |국가 = 일본 |연도1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58]] |선거결과1 = 59.0 |연도2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0]] |선거결과2 = 58.1 |연도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3]] |선거결과3 = 56.0 |연도4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7]] |선거결과4 = 48.9 |연도5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9]] |선거결과5 = 47.6 |연도6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2]] |선거결과6 = 46.9 |연도7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6]] |선거결과7 = 41.8 |연도8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9]] |선거결과8 = 44.59 |연도9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0]] |선거결과9 = 47.88 |연도10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3]] |선거결과10 = 45.76 |연도11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6]] |선거결과11 = 49.42 |연도12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0]] |선거결과12 = 46.14 |연도1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3]] |선거결과13 = 36.62 |연도14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6]] |선거결과14 = 32.76 |연도15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0]] |선거결과15 = 28.31 |연도16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3]] |선거결과16 = 34.96 |연도17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5]] |선거결과17 = 38.18 |연도18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9]] |선거결과18 = 26.73 |연도19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2]] |선거결과19 = 27.79 |연도20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4]] |선거결과20 = 33.11 |연도21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7]] |선거결과21 = 33.28 |연도22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1]] |선거결과22 = 34.66 }} {{역대정당득표도표 |제목 = 역대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의원 총선거]] 자유민주당 의석 점유율 |정당 = 자유민주당 |국가 = 일본 |연도1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58]] |선거결과1 = 61.46 |연도2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0]] |선거결과2 = 63.38 |연도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3]] |선거결과3 = 60.6 |연도4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7]] |선거결과4 = 57 |연도5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9]] |선거결과5 = 59.26 |연도6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2]] |선거결과6 = 55.19 |연도7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6]] |선거결과7 = 48.73 |연도8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79]] |선거결과8 = 48.53 |연도9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0]] |선거결과9 = 55.58 |연도10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3]] |선거결과10 = 48.92 |연도11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86]] |선거결과11 = 58.59 |연도12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0]] |선거결과12 = 53.71 |연도1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3]] |선거결과13 = 43.64 |연도14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6]] |선거결과14 = 47.8 |연도15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0]] |선거결과15 = 48.54 |연도16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3]] |선거결과16 = 49.38 |연도17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5]] |선거결과17 = 61.67 |연도18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09]] |선거결과18 = 24.79 |연도19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2]] |선거결과19 = 61.25 |연도20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4]] |선거결과20 = 61.05 |연도21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7]] |선거결과21 = 61.08 |연도22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1]] |선거결과22 = 56.12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90%;" !선거||[[자유민주당 총재|총재]]||당선자||득표율 (지역구)||득표율 (비례대표)||집권 여부 |-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58년]]''' || [[기시 노부스케]] || {{정당 정보/의석|298|467|#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5|9}} 59.0% || || {{yes2}}집권 |-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60년]]''' || rowspan="2" | [[이케다 하야토]] || {{정당 정보/의석|300|467|#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5|8|1}} 58.1% || || {{yes2}}집권 |-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63년]]''' || {{정당 정보/의석|283|467|#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5|6}} 56.0% || || {{yes2}}집권 |-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67년]]''' || rowspan="2" | [[사토 에이사쿠]] || {{정당 정보/의석|277|486|#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8|9}} 48.9% || || {{yes2}}집권 |-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69년]]''' || {{정당 정보/의석|288|486|#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7|6}} 47.6% || || {{yes2}}집권 |-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72년]]''' || [[다나카 가쿠에이]] || {{정당 정보/의석|271|49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6|9}} 46.9% || || {{yes2}}집권 |-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76년]]''' || [[미키 다케오]] || {{정당 정보/의석|249|51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1|8}} 41.8% || || {{yes2}}집권 |-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79년]]''' || rowspan="2" | [[오히라 마사요시]] || {{정당 정보/의석|248|51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5|9}} 44.59% || || {{yes2}}집권 |-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80년]]''' || {{정당 정보/의석|284|51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7|8|8}} 47.88% || || {{yes2}}집권 |-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83년]]''' || rowspan="2"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정당 정보/의석|250|51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5|7|6}} 45.76% || || {{yes2}}자민-신자유클럽 연립 |-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86년]]''' || {{정당 정보/의석|300|51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9|4|2}} 49.42% || || {{yes2}}집권 |-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90년]]''' || [[가이후 도시키]] || {{정당 정보/의석|275|51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6|1|4}} 46.14% || || {{yes2}}집권 |- | rowspan="2"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93년]]''' || rowspan="2" | [[미야자와 기이치]] || rowspan="2" | {{정당 정보/의석|223|511|#41A12E}} || rowspan="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6|6|2}} 36.62% || rowspan="2" | || {{no2}}비집권 {{small|(1993~1994)}} |- | {{yes2}}자민-[[일본사회당|사회]]-[[신당 사키가케|사키가케]] 연립 {{small|(1994~1996)}} |-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1996년]]''' || [[하시모토 류타로]] || {{정당 정보/의석|239|50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8|6|3}} 38.63%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2|7|6}} 32.76% || {{yes2}}자민-[[사회민주당 (일본)|사민]]-[[신당 사키가케|사키가케]] 연립 |-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00년]]''' || [[모리 요시로]] || {{정당 정보/의석|233|48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0|9|7}} 40.97%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8|3|1}} 28.31% || {{yes2}}자민-[[공명당|공명]]-신보수 연립 |-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03년]]''' || rowspan="2"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정당 정보/의석|237|48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3|8|5}} 43.8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4|9|6}} 34.96%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05년]]''' || {{정당 정보/의석|296|48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7|8}} 47.80%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8|1|8}} 38.18%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09년]]''' || [[아소 다로]] || {{정당 정보/의석|119|48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8|6|8}} 38.68%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6|7|3}} 26.73% || {{no2}}비집권 |-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12년]]''' || rowspan="3" | [[아베 신조]] || {{정당 정보/의석|294|48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3|0|1}} 43.01%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7|7|9}} 27.79%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14년]]''' || {{정당 정보/의석|291|475|#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8|1}} 48.10%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3|1|1}} 33.11%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17년]]''' || {{정당 정보/의석|284|465|#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8|2|1}} 48.21%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3|2|8}} 33.28%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21년]]''' || [[기시다 후미오]] || {{정당 정보/의석|261|465|#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8|0|5}} 48.0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4|6|6}} 34.66% || {{yes2}}자민-[[공명당|공명]] 연립 |} === 참의원 === {{역대정당득표도표 |제목 = 역대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득표 |정당 = 자유민주당 |국가 = 일본 |연도1 = [[제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56]] |선거결과1 = 39.7 |연도2 =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59]] |선거결과2 = 41.2 |연도3 = [[제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62]] |선거결과3 = 46.4 |연도4 =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65]] |선거결과4 = 47.2 |연도5 = [[제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68]] |선거결과5 = 46.7 |연도6 =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71]] |선거결과6 = 44.5 |연도7 =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74]] |선거결과7 = 44.3 |연도8 =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77]] |선거결과8 = 35.8 |연도9 =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80]] |선거결과9 = 43.3 |연도10 =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83]] |선거결과10 = 35.3 |연도11 = [[제1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86]] |선거결과11 = 38.58 |연도12 =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89]] |선거결과12 = 27.32 |연도13 =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92]] |선거결과13 = 33.29 |연도14 =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95]] |선거결과14 = 25.40 |연도15 =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98]] |선거결과15 = 25.17 |연도16 =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01]] |선거결과16 = 38.57 |연도17 = [[제2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04]] |선거결과17 = 30.03 |연도18 =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07]] |선거결과18 = 28.10 |연도19 =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0]] |선거결과19 = 24.07 |연도20 =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3]] |선거결과20 = 34.68 |연도21 =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6]] |선거결과21 = 35.91 |연도22 =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 |선거결과22 = 35.37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90%;" !선거||[[자유민주당 총재|총재]]||당선자||선거 후 의석수||득표율 (지역구)||득표율 (비례대표)||원내 지위 |- | '''[[제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6년]]''' || [[하토야마 이치로]] || {{정당 정보/의석|61|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22|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8|4}} 48.4%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9|7}} 39.7% || {{partial|소수 여당}} |- |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9년]]''' || [[기시 노부스케]] || {{정당 정보/의석|71|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32|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5|2}} 52.0%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1|2}} 41.2% || {{yes2}}다수 여당 |- | '''[[제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62년]]''' || [[이케다 하야토]] || {{정당 정보/의석|69|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42|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7|1}} 47.1%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6|4}} 46.4% || {{yes2}}다수 여당 |- |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65년]]''' || rowspan="3" | [[사토 에이사쿠]] || {{정당 정보/의석|71|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40|251|#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2}} 44.2%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7|2}} 47.2% || {{yes2}}다수 여당 |- | '''[[제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68년]]''' || {{정당 정보/의석|69|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37|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9}} 44.9%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6|7}} 46.7% || {{yes2}}다수 여당 |- |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71년]]''' || {{정당 정보/의석|62|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42|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 44.0%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5}} 44.5% || {{yes2}}다수 여당 |- |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74년]]''' || [[다나카 가쿠에이]] || {{정당 정보/의석|62|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26|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9|5}} 39.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4|3}} 44.3% || {{yes2}}다수 여당 |- |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77년]]''' || [[후쿠다 다케오]] || {{정당 정보/의석|63|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24|249|#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9|5}} 39.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8}} 35.8% || {{partial|소수 여당}} |- |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80년]]''' || [[오히라 마사요시]] || {{정당 정보/의석|69|125|#41A12E}} || {{정당 정보/의석|135|250|#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2|5}} 42.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3|3}} 43.3% || {{yes2}}다수 여당 |- |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83년]]''' || rowspan="2"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정당 정보/의석|68|126|#41A12E}} || {{정당 정보/의석|137|25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3|2}} 43.2%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3}} 35.3% || {{yes2}}다수 여당 |- | '''[[제1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86년]]''' || {{정당 정보/의석|72|126|#41A12E}} || {{정당 정보/의석|143|25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5|0|7}} 45.07%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8|5|8}} 38.58% || {{yes2}}다수 여당 |- |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89년]]''' || [[우노 소스케]] || {{정당 정보/의석|36|126|#41A12E}} || {{정당 정보/의석|109|25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0|7}} 30.70%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7|3|2}} 27.32% || {{partial|소수 여당}} |- | rowspan="3" |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92년]]''' || rowspan="3" | [[미야자와 기이치]] || rowspan="3" | {{정당 정보/의석|68|126|#41A12E}} || rowspan="3" | {{정당 정보/의석|107|252|#41A12E}} || rowspan="3"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5|2|3}} 45.23% || rowspan="3"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3|2|9}} 33.29% || {{partial|소수 여당}} {{small|(1992~1993)}} |- | {{no2}}소수 야당 {{small|(1993~1994)}} |- | {{yes2}}다수 연립 여당 {{small|(1994~1995)}} |- |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95년]]''' || [[고노 요헤이]] || {{정당 정보/의석|46|126|#41A12E}} || {{정당 정보/의석|111|25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7|2|9}} 27.29%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5|4}} 25.40% || {{yes2}}다수 연립 여당 |- |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98년]]''' || [[하시모토 류타로]] || {{정당 정보/의석|44|126|#41A12E}} || {{정당 정보/의석|103|25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0|4|5}} 30.45%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5|1|7}} 25.17% || {{yes2}}다수 연립 여당 |- |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01년]]''' || rowspan="2"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정당 정보/의석|64|121|#41A12E}} || {{정당 정보/의석|111|247|#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1|0|4}} 41.04%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8|5|7}} 38.57% || {{yes2}}다수 연립 여당 |- | '''[[제2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04년]]''' || {{정당 정보/의석|49|121|#41A12E}} || {{정당 정보/의석|115|24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0|8}} 35.08%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0|0|3}} 30.03% || {{yes2}}다수 연립 여당 |- | rowspan="2" |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07년]]''' || rowspan="2" | [[아베 신조]] || rowspan="2" | {{정당 정보/의석|37|121|#41A12E}} || rowspan="2" | {{정당 정보/의석|83|242|#41A12E}} || rowspan="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1|3|5}} 31.35% || rowspan="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8|1}} 28.10% || {{partial|소수 연립 여당}} {{small|(2007~2009)}} |- | {{no2}}소수 야당 {{small|(2009~2010)}} |- | rowspan="2" |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10년]]''' || rowspan="2" | [[다니가키 사다카즈]] || rowspan="2" | {{정당 정보/의석|51|121|#41A12E}} || rowspan="2" | {{정당 정보/의석|84|242|#41A12E}} || rowspan="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3|3|8}} 33.38% || rowspan="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4|0|7}} 24.07% || {{no2}}소수 야당 {{small|(2010~2012)}} |- | {{partial|소수 연립 여당}} {{small|(2012~2013)}} |- |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13년]]''' || rowspan="3" | [[아베 신조]] || {{정당 정보/의석|65|121|#41A12E}} || {{정당 정보/의석|115|24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2|7|4}} 42.74%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4|6|8}} 34.68% || {{yes2}}다수 연립 여당 |- |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16년]]''' || {{정당 정보/의석|56|121|#41A12E}} || {{정당 정보/의석|121|242|#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9|9|4}} 39.94%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9|1}} 35.91% || {{yes2}}다수 연립 여당 |- |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2019년]]''' || {{정당 정보/의석|57|124|#41A12E}} || {{정당 정보/의석|113|245|#41A12E}}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9|7|7}} 39.77%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3|7}} 35.37% || {{yes2}}다수 연립 여당 |} == 같이 보기 == * [[일본의 정당]] * [[자유민주당 파벌]] ** [[세이와 정책연구회]](청화회) - 자민당 내 최대 파벌세력 * [[자유민주당 총재]] * [[일본회의]]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언어링크|ja}} {{공식 웹사이트}} {{일본 자유민주당}} {{일본의 정당 일람}} {{전거 통제}} [[분류:자유민주당 (일본)| ]] [[분류:1955년 설립된 정당]] [[분류:국민보수주의 정당]] [[분류:일본의 보수주의 정당]] [[분류:사회보수주의 정당]] [[분류:나가타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