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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1904년)
조윤제(趙潤濟, 1904년 ~ 1976년 4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국문학자이다. 호는 도남(陶南)이며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1960년 한국 교수 협의회 의장·1965년 영남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그 후 학술원 회원을 거쳐 학술원 인문 과학부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고대 소설과 시가에 대한 사적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기도 하다. 이병도·이희승·이선근 등과 진단학회 결성에 참여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였고, 광복 후에도 한국 시가와 국문학사에 대한 연구 저술이 많으며, 초기의 실증주의에서 탈피하여 민족 사관을 주창, 일제 하에서 애국적 입장에 서서 국문학에 관한 학구적 연구를 견지해 왔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후에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 시가사강》,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 개설》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도남잡식》, 《교양문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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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
조인영(趙寅永, 1782년 ~ 185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조선에 고구마를 도입했던 조엄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장인 조만영의 동생이다. 풍양 조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었다. 생애.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이 있어 1817년(순조 17년)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1819년(순조 19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대사성,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이조참의, 직제학을 역임하고 이조참판, 예조참판, 동지돈녕부사, 홍문관제학을 한 뒤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 우참찬, 예문관제학을 차례차례 하며 수원유수, 예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당시 나이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순원왕후가 정사를 맡아보게 되자, 안동 김씨가 세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에 맞서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이 되어 외종손 헌종을 보필하였다. 호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1841년(헌종 7) 의정부 우의정을 거쳐 의정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며, 1847년 《국조보감》을 지을 때 공이 컸다. 저서로 《운석유고》가 있다.
319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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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기계화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首都機械化步兵師團, ) 또는 맹호 부대(猛虎 部隊), 수기사단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7기동군단 예하 기계화보병 사단이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먼저 기계화 편제를 갖춘 사단이다. 녹색 바탕에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부대 마크를 사용하고 있으며 경례 구호는 "맹호"를 사용하고 있다. 편제. 현재. 제133대대 2중대는 강재구 소령이 순직하기 전에 지휘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재구 중대로 별명을 지었다. 제102대대는 대한민국 국군이 가장 먼저 창설한 부대로서, 국군의 모체 부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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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규
조정규(趙廷奎, 1791년 ~ ?)는 조선 순조 때의 화가이다. 자는 성서, 호는 임전, 본관은 함안이다. 소림 조석진(趙錫晉)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첨사를 지냈으며, 산수·인물·꽃·새 특히 어해로써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화조도》, 《추경산수도》, 《어개도》 등이 있다.
319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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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르디에 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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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속철도 CRH1
중국고속철도 CRH1형()은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에서 운영하는 국영철로로 제6차 철도증속 계획에 의해 2004년부터 시작된 광선 철로 등의 고속철도 차량이다. 개요. 중국고속철도 노선에서 운행되는 고속철도 차량으로 봄바디어 트랜스포테이션, CRRC 칭다오 시팡의 공동 자금 출자와 동시에 제작하였다. 구성. CRH1형 전철은 8량이 편성있으며, 다음과 같이 1부터 번호가 매겨진다. 이중 00과 01호차는 선두차로 차체에 「CRH1-0 xxA」라고 표기되어 있다. 02에서 07호차는 팬터그래프를 탑재한다. 특징. CRH는 200km/h 이상 주행하는 중국 고속철도 차량의 호칭이다. 좌석은 회전식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형태의 좌석을 선택하였다. 세부 모델. CRH1A. CRH1A형 전철()은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가 제6차 재래선 증속 계획을 위해 캐나다의 봄바디어 등과 제휴해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으로 2006년부터 도입이 시작된 모델로 이 열차는 봄바디어 레지나를 베이스로 개발되었다. 당초 이 열차의 명칭은 스웨덴 SJ AB사의 레지나 C2008로 봄바디어 트랜스포테이션과 CRRC 칭다오 시팡이 공동으로 개발되었다. 2007년부터 운행에 들어갔으며 광저우 ~ 선전을 오가는 광선강 철로 노선에 투입되었다. CRH1B. CRH1B형 전철()은 2007년 10월에 20편성을 주문했다. CRH1A의 개량한 모델로 3량의 1등석, 12량의 2등 코치, 1량의 식당차로 구성해 16량 편성으로 구성되었다. 기존 모델과 달리 작동 속도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최고 영업 속도 여전히 250km/h로 운행하고 있다. 2009년부터 운행하기 시작했다. 2011년 원저우 철도 추돌 탈선 사고 당시 사고 모델은 이 모델이다. CRH1E. CRH1E형 전철()은 2007년 10월에 20편성을 주문했고 고속열차 세계 최초로 침대차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 열차는 봄바디어 제피로의 모델로 봄바디어 트랜스포테이션과 자가토가 설계했다. 2009년부터 베이징에서 상하이를 오가는 노선에 투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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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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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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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멘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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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속철도 CRH3
CRH3형 전철()은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의 제6차 재래선 증속 계획을 위해 독일 지멘스의 기술 제공 라이선스에 의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차량 메이커가 제조하는 고속철도 차량이다.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는 캐나다, 일본, 프랑스의 고속철도의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경쟁적인 제조 계약을 하고 있지만, 본 형식은 지멘스 벨라로 차량을 기반으로 개발하는 것으로 시속 최고 영업 속도 300km의 고속철도로 사용하는 차량과 시속 최고 영업 속도 200km로 운행하는 재래선 고속화용 차량을 모두 100대를 편성하였다. 그 중 60편성의 경우 지멘스 벨라로 기반의 차량을 현지 기업과 합작으로 납입하기로 2005년에 결정되었다. 3편성의 경우 독일에서 제작하는 반면 나머지 편성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 기술 이전을 통해 생산하도록 하여 베이차탕산()이 제조하게 되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고속철도 전용 선로가 건설하면서 26편성이 추가로 생산이 이뤄지고 있고 2010년 인도되었다. 베이징-톈진 고속철도의 개통에 맞추어 중국고속철도 CRH2C(신칸센 E2계 1000번대 계열) 모델과 함께 2008년 8월 1일부터 세계 최고 영업 속도인 350km/h 속도로 영업 운전을 시작했다. 세부 모델. CRH3A. CRH3A형 전철()은 2012년에 시속 최고 영업 속도 250km/h를 목표로 하는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을 시작했고 2013년에 최초로 시제차가 출시되었다. 2017년 10월 4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기존에 운행했던 CRH3C 전철, CJ1 전철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되었고 전 편성 CRRC 창춘에서 제작되었다. CRH3C. CRH3C형 전철()은 2005년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는 징광 고속철도에서 투입하기 위해 지멘스 벨라로 모델 60편성을 주문했다. 2007년에 최초로 독일에서 3편성을 제작했다. 이 모델은 지멘스 벨라로를 기반으로 하는 모델로 초기형 편성은 브레머하펜에서 제작되었다. 2008년부터 시속 최고 영업 속도 350km로 주행이 가능한 모델이 제작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징진 고속철도 구간에서 최고 영업 속도 394.3km/h를 기록했다. 이 모델은 스페인의 지멘스 벨라로 E 디자인과 유사하며 16량 편성으로 구성되었다. 1등석의 경우 50석, 2등석의 경우 490석으로 구성되었다. 2009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는 MOR 체결로 인해 20편성을 추가로 발주했다. 같은 해 12월에 정시 고속철도 구간에서 최고 영업 속도 394.2km/h를 기록했다.
31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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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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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84호선
지방도 제1084호선(함양 ~ 율곡선)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삼산리와 합천군 율곡면 노양 교차로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전 구간이 광주대구고속도로와 거의 평행하게 노선이 이어져 있으며, 해인사 나들목에서 직접 만난다. 때문에 광주대구고속도로의 우회도로로 활용되기도 하며, 광주대구고속도로가 미처 접근하지 못하는 읍면지역들의 중심을 거쳐가는 보조 간선도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거의 모든 구간이 왕복 2차로로 구성되어 있고, 야로 ~ 율곡 구간은 1차로이다. 2015년 12월 광주대구고속도로의 거창군 남하면 ~ 합천군 야로면 구간이 이설되면 구 고속도로가 지방도로 이용될 계획이 있다.
319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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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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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 (삼국지)
이숙(李肅, ? ~ 192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병주 오원군(五原郡) 사람이다. 동탁 주살에 참여한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를 동탁의 편으로 꾀는 등 그 비중이 크게 늘었다. 생애. 기도위였다. 192년(초평 3년) 왕윤과 여포의 동탁 주살 계획에 가담하여 10여 명의 용사를 궁문의 위사(衛士)로 꾸몄다. 동탁이 헌제의 병이 나은 것을 하례하러 여포 등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설 때 용사들과 함께 습격하였다. 동탁은 속에 갑옷을 입은지라 팔에만 부상을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이내 여포 등과 힘을 합쳐 죽였다. 이어서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고 있던 동탁의 사위 우보도 공격했다가 홍농현으로 패주하고 처형되었다. 삼국지연의.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와 동향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여러 이야기들이 붙었다. 정원의 양아들 여포에게 적토마와 온갖 재물을 주며 동탁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동탁 토벌전의 작중 서전인 사수관 전투에 참전한다. 자신을 소홀히 대하는 동탁에게 불만을 품고 왕윤의 동탁 암살 계획에 동참한다. 선양을 핑계로 동탁을 궁궐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는다. 얼마 못 가 수레바퀴가 부서지고 말이 고삐를 끊자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징조라 둘러댄다. 다음 날, 몰아치는 광풍과 하늘을 가린 안개는 제왕의 위엄이라 포장한다. 그날 밤, 아이들의 ‘천 리 풀이 암만 푸르러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겠구나!’란 노래는 유씨(劉氏, 한나라의 황실 성씨)가 망하고 동씨(董氏)가 흥할 뜻이라 왜곡한다. 다음 날, 口(입 구) 두 개를 쓴 베[布]를 장대 끝에 달아놓은 도인은 심양(心恙)에 걸렸다며 쫓아낸다. 이후는 사서와 비슷하다.
319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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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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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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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콜로니
다크 콜로니(Dark Colony)는 1997년에 Strategic Simulations, Inc.에 의해 개발되고 GameTek가 유통한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게임 동작환경은 Windows 95, Windows 98, Windows XP, Windows Vista, Windows 7 및 Mac OS에 작동한다. 개요. 다크 콜로니의 세계관은 멀지 않은 미래의 세계인 2137년 가상의 화성 식민지에 설정하고있다. 인간은 화성에서 페트라-7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주목할만한 에너지원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과 지구를 위해 화성의 소중한 자원을 채광하려 공기에 질식되지 않고, 토양 형성을 하고, 정글과 사막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시작하였다. 외계인들은 새로운 고향을 찾고, 흩어진 종족과 부흥하기 위해 화성이 딱 맞는 별이었다. 그들은 그래도 이주하기 전에, 그 성가신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 게임은 어느 누구의 공격과 및 목표를 방어하고, 외계인의 위협을 물리피고 식민지 산업 분야에서 화성 식민지 능력 지휘하려는 인간(Humans)과 화성에 있는 인간을 물리치고 부흥을 꿈꾸는 외계인(Grays)의 캠페인이 있다.
319689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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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째 프러포즈
《101번째 프러포즈》()는 1991년 후지 TV에서 방송된 일본의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92년 영화, 2006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일본 드라마 (1991년 作). 개요. 1991년 7월부터 후지 TV에서 방송된 드라마로 각본가 노지마 신지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딘지 신통치 않아 보이는 중년 남자와 미인 첼로 연주자와의 순애보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최고 시청률 36.7%까지 기록하며 일본에서 대 히트한 작품이다. 킨파치 선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타케다 테츠야가 중매에 99회나 실패한, 별 볼일 없는 중년남자 타츠로를 열연. 아사노 아츠코는 타츠로의 100번째 중매상대로 약혼자와 사별한, 아픔을 지닌 여성을 연기했다. 또한, 타츠로를 끔찍하게 아껴주는 동생 역으로는 헤어스타일 외에는 전혀 닮은 곳을 찾아볼 수 없는 에구치 요스케, 카오루에게 연정을 품고 안타까운 사랑을 하는 엘리트 연주가, 사와무라 나오토 역에 타케우치 리키가 캐스팅 되었다.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쓰인 차게 앤 아스카의 〈SAY YES〉는 대 히트를 기록하여 오리콘 차트 위클리 싱글 차트에서 13주간 1위를 기록하는 등 높은 판매고를 얻었다. 드라마에서 타츠로가 카오루에게 외치는 대사 “저는 죽지 않습니다! ()”는 일본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일본 후지 TV 게츠쿠 작품으로 1990년 7월 ~ 10월까지 방송된 드라마, 《멋진 짝사랑》, 1991년 1월 ~ 3월 방송된 드라마 《도쿄 러브 스토리》, 그리고 《101번째 프러포즈》 이렇게 3가지 작품을 일본에서는 순애3부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19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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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강석우의 여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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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브 레코드
자이브 레코드()는 뉴욕 시에 본사를 둔 음반사이다. 현재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한 회사로서 존재한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인 좀바 레이블 그룹(ZLG)의 자회사이다. 회사의 역사. 자이브 레코드는 1975년 영국 런던, 윌러스던 가(Willesden Street)에서 클라이브 콜더(Clive Calder)에 의해 창설되었다. 1981년에는 좀바 레코딩(Zomba Recording) 사의 한 지점 형식으로서 미국에 진출하였다. 자이브 레코드의 레이블 명의 "자이브"라는 단어는 타운십 자이브(Township Jive)이라는 남 아프리카 음악/무도 형식 이름에서 따왔다. 레이블 초창기에는 이 레이블 내에서 Whodini, Tight Fit, A Flock of Seagulls, 빌리 오션, 서맨사 폭스 같은 가수/그룹이 활동하였다. 미국 진출 이후 1987년까지, 미국 내 배급은 아리스타 레코드가 맡아서 했다. 베텔스만 뮤직 그룹(BMG)가 그 해 창설되자, 자이브 레코드에 대한 미국 내 배급은 RCA 레코드가 맡아서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엽, (당시 힙합 음악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던) 당시 아리스타 사장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자이브 레코드는 많은 힙합 음악 음반을 발매했다. 이들 중에는 Too Short나 Schoolly D 같은 뮤지션의 것들도 포함한다.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자이브 레코드는 힙합 장르에 있어서는 으뜸가는 규모가 상당한 음반사로 성장하였다. 뮤지션들 중 Whodini,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 E-40, A Tribe Called Quest, KRS-One 등이 크게 성공하였다. 또한 R&B 가수인 알리야, 알 켈리 등이 크게 히트쳤다. 1990년대 중반-말엽에 이르러서, 자이브 레코드는 팝 가수/그룹인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계약을 맺었다. 힙합 음악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던 음반사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 2000년대로 들어서자마자, 이들이 이 음반사 역사상 가장 크게 히트를 치는 가수/그룹이 되게 되었다. RCA와 맺은 배급 계약은 1991년 종료되었다. 이 때쯤에 BMG가 자이브 레코드 주식을 대량 매수하였다. 또한 1991년 배리 웨이스가 자이브 레코드의 CEO 겸 회장이 되었다. 자이브는 이후로 2002년까지 독립적으로 경영되긴 하되, 발매 음반의 배급은 BMG가 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2002년, 베텔스만 뮤직 그룹(BMG)이 좀바(Zomba)의 나머지 지분을 30억 미국 달러에 매수하였다. 이것은 음반업계 사상 최대의 독립 음반사 인수/합병으로 기록되었다. 좀바는 좀바 레이블 그룹(JLG)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자이브 레코드는 그 이름을 가지고, 그 자회사로서 계속 운영되었다. 2011년 RCA 레코드에 합병되었다.
319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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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브 레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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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원지방도 제67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67호선은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발개삼거리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 교차로를 잇는 국가지원지방도이다. 역사. 1994년 '창원 ~ 선산선'이라는 이름으로 국도 제67호선을 신설하기로 계획되었던 도로가 시초이며, 당시 연장은 118km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 부족으로 국도로 승격되지 못했으며 이 노선과 전혀 관계없는 칠곡군 왜관읍 ~ 구미시 구간이 국도 제67호선으로 지정되었다. 구상된 기존 노선은 폐기되고 신설된 국도의 연장선 개념으로 통영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국가지원지방도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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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공과대학교
두원공과대학교(斗元工科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시와 파주시에 소재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93년 3월 두원공업전문대학으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미래로, 세계로·진리·창의·봉사이다. 국문 약칭으로 두원공대(斗元工大), 영문 약칭으로 DUT 등을 사용하고 있다. 연혁. 1993년 11월 18일, 학교법인 두원학원의 김찬두에 의하여 두원공업전문대학이 경기도 안성시 일대에 설립되었다. 이듬해 3월 3일 개교하였다. 1998년 5월 1일, 두원공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8년 3월, 경기도 파주시 일대에 현재의 파주캠퍼스를 개교하였다. 2012년 4월 3일, 두원공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18년 교육부 등이 실시하는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어 신·편입생을 대상으로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과 학자금대출이 일부 제한된 이력이 있다. 교육편제. 두원공과대학교는 전문대학으로, 헬스 앤 라이프 그룹, 엔지니어링 앤 디자인 그룹, 아트 앤 미디어 그룹, 라이프 앤 디자인 그룹, 디지털 앤 테크놀로지 그룹 등 5개 그룹을 자체적으로 설정하고, 캠퍼스별로 특성화시켜 전문학사 학위 과정을 편제하고 있다. 안성캠퍼스. 두원공과대학교 안성캠퍼스는 헬스 앤 라이프 그룹, 엔지니어링 앤 디자인 그룹 등 2개 그룹 아래 18개 학과를 설치하여 전문학사 학위 과정을 교수하고 있다. 파주캠퍼스. 두원공과대학교 파주캠퍼스는 아트 앤 미디어 그룹, 라이프 앤 디자인 그룹, 디지털 앤 테크놀로지 그룹 등 3개 그룹 아래 17개 학과를 설치하여 전문학사 학위 과정을 교수하고 있다. 사건과 비판. 2019년 7월경, 두원공과대학교 전 입학홍보처장인 김현철 전 교수와 시민단체 '공익제보자 모임' 등에서 두원공과대학교가 신입생 충원율을 조작하여 10여년간 국고 보조금을 허위로 받았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발표와 각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두원공과대학교는 정원 내·외 합격자와 주·야간 합격자 수를 뒤섞어 충원율을 부풀려 교육부에 보고하고, 이를 통해 국고보조금을 허위로 취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현철 전 교수는 2004년부터 2017년경까지 본인이 두원공과대학교 교수직으로 재직하는 동안 이와 같은 조작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약 10여년간 행해진 조작으로 국고 1,000억원을 부정으로 받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와 설립·운영 재단인 학교법인 두원학원의 입장은 다르다. 조작은 없었고, 정당하게 받은 지원금이라는 것이다. 학교법인 두원학원측은 즉각 반박 성명을 통해, "김현철 전 교수의 주장은 모두 허위이며, 김현철 전 교수의 귀책 사유로 교수 보직에서 해임된 것에 학교에 앙심을 품고 허위 사실을 언론측에 발표한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교육부는 두원공과대학교 대학본부 및 학교법인 두원학원측에 소명 자료를 요구했으며, 이를 토대로 감사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현철 전 교수측은, 교육부의 감사 뿐만 아니라,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며, 지난 2019년 8월, 학교법인 두원학원의 김종엄 이사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정식으로 고발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2개월 앞선 2019년 5월경, '두원공대 정상화 추진위원회'와 강남대학교, 세한대학교, 수원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대덕대학교, 동신대학교, 신성대학교 각 교수협의회와 전국교권수호교수모임 등은 “사립대의 입시·인사·학사 비리 등은 모두 국비나 교비에 대한 자금 유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교육부가 사학 비리 감사에 나설 것을 촉구한 사실을 두고, 사립 대학 비리 사태에 대해 더욱 엄정하게 수사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캠퍼스 풍경. 두원공과대학교는 경기도 소재 사립 전문대학으로, 안성시와 파주시에 각각 캠퍼스를 두고 있다. 안성캠퍼스. 두원공과대학교 안성캠퍼스는 장원리에 위치한다. 두원공업전문대학 시절, 설립 당시의 캠퍼스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학본부 역할을 수행하는 캠퍼스로, 약 12동의 건축물이 위치하고 있다. 캠퍼스 북부방면 관음당길과 접속되어 캠퍼스 접근이 가능하다. 캠퍼스가 'U'자 형태로 형성되어 있으며, 동부 방면으로 안성장원일반산업단지가 위치한다. 파주캠퍼스. 두원공과대학교 파주캠퍼스는 봉암리에 위치한다. 2008년 3월 개교한 이원화 캠퍼스이다. 약 6동의 건축물이 위치하고 있다. 캠퍼스 남부 방면으로 주라위길과 접속되어 캠퍼스 접근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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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잼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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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고등학교
세경고등학교(世景高等學校)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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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핫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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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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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367호선
지방도 제367호선은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를 잇는 경기도의 지방도이다. 전 구간 왕복 2차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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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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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산화막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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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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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환
일재 조중환(趙重桓, 1884년-1947년)은 일제령조선과 대한민국의 작가·번역가·기자·배우이다. 번안소설로서 당대에 이름이 자자했다.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주(楊州). 1902년 19세 되던 해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그리고 06년 일본 최대의 사립종합대 니혼 대학을 졸업했다. 정경과 또는 고등사범과를 졸업한 것으로 추정. 08년 해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윤창호를 얻는다. 10년 《매일신보》에 입사, 12년 《매일신보》를 거점으로서 전방위적 문예 활동을 전개한다. 동년 3월 윤백남과 극단 문수성을 창립하여 신파극을 공연했다. 7월 본인의 제1의 번안소설 《쌍옥루》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11-12월 번안 희곡 《희극 병자삼인》을 연재한다. 13년 번안소설 《장한몽》·《국의 향》을 연재한다. 14년 《단장록》·《비봉담》을 기행문 주유삼남을 연재한다. 15년 단편소설 《인연》·《속편 장한몽》을 연재. 또한 동년에서 이태간 《매일신보》의 경파 주임을 맡아본다. 《매일신보》에 있은 동안 기사를 쓰거나 평론을 쓰거나 했으나 19년 사업상 관계로 퇴사한다. 20-21년 장편소설 《관음상》을 연재한다. 22년 윤백남 창립의 민중극단에 참여하여 번역과 각색을 맡아봄. 민중극단은 그러나 실패하고 영화로 시선을 돌려 25년 계림영화협회를 창립. 첫 작품은 《장한몽》. 27년 계림영화협회를 주식회사로 돌려 《먼동이 틀 때》를 제작. 그러나 크게 실패한다. 34-35년 역사소설 《금척의 꿈》 연재. 그리고 39-40년 《안동의기》·《동지사비화》 연재. 40-43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간행의 기관지 《가정지우》·《한토노히카리》(半島の光) 한국어판에 역사 강담을 연재. 41년 경성방송국 제2 방송부 촉탁에 피임되어 라디오 소설을 맡아봄. 광복을 맞고 47년 《독립신문》의 주필로 피임되어 《해방전후》를 연재하였으나 끝을 보지 못하고 피임에서 6달만에 용산구 후암동 자택에서 영면. 사인은 숙환. 장례는 사장(社葬)으로 치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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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채
조태채(趙泰采, 1660년 ~ 1722년 11월 12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양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부수찬, 수찬, 검토관, 교리, 부교리, 지평을 거쳐 부수찬, 부교리, 시독관, 수찬을 지내고 다시 수찬, 부교리, 교리, 강관, 검토관, 문학, 부수찬, 정언을 두루 지내고 이조좌랑과 헌납을 거쳐 승지가 되고 참찬관을 겸하다가 다시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승진, 대사헌, 도승지, 이조참판을 두루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 호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수어사, 이조판서, 예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사복시제조, 좌참찬, 지경연사를 지내고 다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713년 지중추 부사로 있을 때 청나라에 다녀왔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경종 즉위 후 연잉군(후의 영조)을 세제로 책봉하는 데 소론파와 대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저서로 《이우당집》이 있다.
319724
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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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동음이의)
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9725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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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Stage
《Back To Stage》는 박진영의 7번째 정규 음반이다. 음반 제작에는 박진영 본인과 프로듀서 권태은, 김태윤, 방시혁 등이 참여하였고, 피쳐링 게스트로는 가수 바비 킴과 윤미래, 선예, 힙합 그룹 다이나믹 듀오가 참여하였다. 방송 발표곡. 니가 사는 그 집. 니가 사는 그 집의 가사는 박진영의 상상에 의해 쓰여졌다. 차를 운전하던 주인공 10년 전에 너무나도 사랑하던 여인이 여인을 꼭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픈 미행'을 시작 한다는 것이다. 2007년 11월, 박진영은 홍보와 방송을 통해 “'니가 사는 그 집'은 2003년에 작곡해 앨범 제작 전까지 쭈욱 회사 금고에 보관해 두었던 곡이다”라며 곡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편 이 곡은 각종 음악 차트 10위권에 진입하여 나름대로 잘 알려진 곡이 되었다. Kiss. 곡을 팔기 위해 미국에 건너 갔던 박진영은 미국 가수 캐시 Cassie 음반 제작에 참여하던 도중에 알게 된 미국 음악 프로듀서 Ryan Leslie와 비트 제작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두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 바로 'Kiss'이다. 레슬리와 박진영은 'NS4LIFE적'인 레슬리 특유의 사운드와 박진영적인 사운드를 접목시켜 음반에서 가장 균형 잡히고 날렵한 트랙을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한편 'Kiss'의 뮤직 비디오는 SM 행위를 연상시키는 박진영과 댄서들의 분장과 무대 배경,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장면과 여성의 옷을 벗기는 듯한 안무, 성적 환상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장면 때문에 몇몇 언론에서 관심을 가질 수준의 선정성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에 보수적인 취향을 가진 대중들이 큰 거부감을 일으켜 박진영의 '변태 고릴라', '섹스 박' 이미지는 거의 확실하게 굳혀졌다. 대낮에 한 이별. '대낮에 한 이별'은 원더걸스의 민선예가 피쳐링 게스트로 참여한 곡으로, 한국형 발라드 음악의 정석을 따른 곡이다. 한편 이 곡은 박진영이 출연한 방송에서 언급된 적조차 거의 없었고, 선정성 논란 등의 노이즈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Back To Stage 음반에서 가장 성공한 트랙이 되었다. 표절 논란. 박진영이 작곡한 많은 곡들은 숱한 표절 의혹을 제기 받아 왔는데, Back To Stage 음반이 발매되기 이전인 2007년 11월 전까지는 단순한 멜로디 표절 의혹만 있었다. 그러나 음반 발매 이후 타이틀 곡으로 공개된 '니가 사는 그 집'에는 대한민국 가요 역사상 유례가 없던 가사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다. '니가 사는 그 집'의 코러스 부분의 가사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중간 생략) 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모두 다 내 것이었어야 해"가 미국 가수 베이비페이스의 곡 What if의 브릿지 부분 가사 "Now that could be my car, that could be my house…"와 흡사하여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박진영 측은 "두 곡의 가사가 흡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라며 표절 의혹을 일체 부인하였다.
319727
4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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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나 슈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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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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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205형 미사일정
프로젝트 205형 미사일정()은 알마즈 중앙해양공학 설계국에서 개발된 소비에트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으로 프로젝트의 코드명은 모스킷(, 모기)이며, 나토에는 오사급 미사일정(Osa Class)으로 보고되었다. 개발. 이 미사일정에 앞선 프로젝트 183R형 미사일정(코마르급)은 선체 크기의 제한으로 더욱 많은 미사일의 장비가 불가능했고, 취약한 대공능력 또한 문제되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183R형은 6척으로 구성된 전대 단위로 작전했는데, 이는 나토 해군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기 위해서는 두 발의 미사일이 명중해야 한다고 추정됐으며, 이를 위해서는 12발의 미사일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3R형은 장차 해전에서 필요한 생존성이 부족하다고 결정된 이후, 같은 목표를 위해 절반이면 충분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미사일정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마즈 중앙해양 설계국의 E. I. 유흐닌이 설계자로 임명되었고 개발 감독에는 소련 해군 대령 V. V. 드미트리예프가 임명되어 설계가 시작되었다. 1957년에 설계가 끝난 205형은 강력한 대함 무장과 추진체계를 갖추어 후에 개발되는 프로젝트 206형 어뢰정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프로젝트 205형은 세베로드빈스크 조선소와 36번 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트 조선소,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달 조선소등 3개 조선소에서 건조가 진행되어 1973년까지 160척이 건조되었고, 중국에선 자체적으로 120척이 건조되었다. 1961년에는 KT-67 원통형 발사기를 갖춘 프로젝트 205U형(나토 코드 : 오사 II)이 개발되었다. 1968년 향상된 P-15M을 장착한 형식(프로젝트 205M형)이 개발되었으나, 후계함의 개발로 개조(프로젝트 205Mod형)는 19대에 그쳤다. 구조 및 추진. 철제 용접선체이며 낮고 넓은 선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전방 2개의 미사일 발사대는 고각 12도로 고정되어 있고 후방 2개의 발사대는 고각 15도로 상향 고정되어 있어 동시 발사시에도 상호 영향이 없도록 하였다. 무거워진 선체에도 불구하고 신뢰성과 내구성을 갖춘 M504 디젤엔진 3기(12,000 마력, 205U의 M504 B2 경우 15,000 마력)를 갖춤으로서 40 노트의 고속을 달성하였다. 3개의 추진축을 가지고 있으며, 3개의 발전기 또한 가지고 있다. 주엔진 2개와 발전기 1개는 앞쪽 엔진실에 있고, 나머지 1개의 엔진과 2개의 발전기는 뒷쪽 엔진실에 있다. 2개의 엔진룸 사이에 통제실이 있다. 무장. P-15 미사일체계는 4개의 발사기에 격납되어 있으며, MR-533 랑오웃(나토 코드 : 스퀘어 타이) 레이다와 니흐롬(나토 코드 : 하이 홀) ESM/피아식별장치의 도움을 받아 표적을 획득하여 발사된다. 표적이 레이다 전파를 방사한다면 수평선너머의 표적도 획득 가능하다. 날개를 접을 수 있는 P-15U가 개발되면서 보다 작은 원통형의 KT-67 발사기를 가진 프로젝트 205U형이 개발되었다. 183R형의 빈약한 대공무장에 대한 대책으로 MR-104 리스(나토 코드 : 드럼 틸트) 사격통제 레이다와 연동된 2문의 AK-230 30mm 기관포를 선수와 선미에 배치하였다. AK-230은 무인 기관표이며 해상 표적에 대한 공격도 가능하다. 개량된 205U형(오사 II)의 일부는 4연장 스트렐라 2 함대공 미사일 발사기와 미사일 16발을 탑재해 대공무장을 더욱 강화하였다. 운용국. 소련에서만 400척 이상이 건조되었고, 중국에서는 120척이 건조되었다. 205(오사 I) 205U(오사 II)
319730
3295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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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두 도시 이야기》(, 1859년)는 찰스 디킨스의 역사소설이다. 개요. 두 도시란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가리킨 것으로 이야기는 이 두 도시를 무대로 전개된다. 시대는 18세기 말의 15년간, 프랑스 혁명의 준비기부터 최전성기로 걸쳐 있다. 디킨스는 토머스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사〉와 기타의 역사서적으로 당시의 정세를 연구하여 그것을 이 작품에 구체화하였다. 런던의 변호사 시드니 카턴이 사랑하는 여성 뤼시 마네트를 위하여 자진하여 단두대에 서는 순애(純愛)의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의 광란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디킨스는 이 작품의 집필 당시 사랑했던 여성 엘렌 터넌(Ellen Ternan)에 대한 정열을 카턴의 사랑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주제. 희생과 부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드니 칼튼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찰스 다네이를 살리고 그 자신은 나중에 부활하는 영으로 묘사됨. 시드니 칼튼은 찰스의 모든 죄를 대신해 죽은 대속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나는 곧 부활이며 생명이니'의 성경메시지를 살렸음. 사회 정의. 디킨스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과거의 삶을 소설에서 그리며, 소작농의 가난한 삶과 부유한 자들이 삶을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다. 런던과 파리과 동등하게 사회정의가 사라진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인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냉소. 혁명에 그려졌던 폭력의 수단이었던 길로틴(참수형 장치)을 숭상하는 프랑스인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면을 드러내었다. 평가. 찰스 디킨스는 실제로 한번도 프랑스 파리에 산 적이 없으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외 인물들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랑스인으로 그려서 그의 프랑스어 구사의 실험은 실패였다고 평가되기도 함.
319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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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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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신
주명신(周命新, ? ~ ?)은 조선 말기의 의학자. 호는 기하이며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이 깊고 재능이 많았으며 병을 잘 치료하였다. 저서로 《의문보감》이 있는데, 이 책은 임상 치료학과 의학의 입문서이다.
319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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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식
주의식(朱義植, ? ~ ?)은 조선 중기의 가인이자 시조 작가이다. 자는 도원, 호는 남곡, 본관은 나주이다.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칠원 현감을 지냈으며, 노래와 시조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노래는 내용이 도덕적이고 건실하였으며, 시조 14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에 실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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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죽지(竹旨, ?~?)는 신라시대의 대신, 화랑 출신 장군으로 다른 이름은 죽만(竹曼), 지관(智官), 죽만랑(竹曼郞), 죽지랑(竹旨郞)이라고도 한다. 김유신과 함께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고,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정벌에도 참전하였으며 재상을 지냈다. 화랑 득오가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생애. 김술종이 삭주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중 죽지령(竹旨嶺)이라는 곳에서 한 거사(居士)를 만났고 부임한 지 1달이 되었을 즈음에 거사가 죽었는데, 곧 김술종의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는데 술종공이 이를 거사가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는 거사와 처음 만났던 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죽지라 했다. 죽지는 이후 649년(진덕여왕 3년) 8월에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진춘, 천존 등과 함께 김유신의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도살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651년(진덕여왕 5년) 2월에는 새로 설치된 집사부에 파진찬 관등으로 중시가 되어 655년(태종무열왕 2년) 1월까지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 4월에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으나, 7월에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 668년(문무왕 8년) 6월에는 이찬 관등으로 진춘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에 임명되어 같은해 10월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인정받아 각간 관등이 됐다.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 문무왕 11년(671)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의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보급을 차단했으며 당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하였다고 하였다.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효소왕대 모량리(牟粱)에서 아찬 관등을 지내던 익선(益宣)은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를 차출하여 부역시켰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고,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모량리 사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 후에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며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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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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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맥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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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통
지통(智通, ? ~ ?)은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이다. 생애. 7세에 출가하여 영취산의 낭지 법사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었다가, 의상 밑에서 불경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원효 대사가 반고사에 있을 때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지었다고 한다. 의상 대사의 10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세상에서 10대덕 중 한 사람이라 칭한다. 저서로 《추동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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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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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영
처영(處英, ? ~ ?)은 조선 중기의 승려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호는 뇌묵(雷默)으로 서산대사의 제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호남 지역에서 1000명의 승병들을 이끌고 봉기해 전라도순변사 권율과 함께 독성산성, 평양, 개성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1594년 도원수 권율의 명령으로 의령에서 군사를 이끌고 남원의 교룡산성을 수축했다. 사후 1794년 임금 정조의 명령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에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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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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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속철도 CRH5
중국고속철도 CRH5형()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에서 운영하는 국영철로로 제6차 철도 고속화 계획에 의해 프랑스의 TGV를 제조한 알스톰과 제휴해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개요. 이 전철은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가 제6차 재래선 고속계획을 위해 프랑스의 알스톰과 제휴해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기반은 알스톰의 기술을 도입해 제조되었지만, 전기 기관차에 의한 동력 집중 방식은 TGV와는 달리 구 피아트의 펜돌리노 ETR600형 전철을 기반으로 한 동력 분산 방식에 의한 고속전차 차량이다. 영업 운전 속도는 200km/h 이상이며, 중국 측이 계약한 차량 수는 60대이다. 그 중 3편성은 이탈리아에서 제조되어 완성품 형태로 중국에 인도되고, 6편성의 경우 부품 상태로 중국 측에 인도되어 조립된다. 나머지 51편성의 경우 창춘궤도객차가 제조한다. 이 계약 내용은 다른 나라에 발주한 CRH1~3형과 같다. 2006년 12월 11일에 이탈리아에서 창춘에 배편으로 발송되어, 2007년 1월에 도착했다. 중국 생산 차량은 2007년 4월에 철도부에 납품되어 영업 운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7년 5월에 점검을 위해서 철도국 검사장에 보내졌는데, 내장된 비품 대부분이 승객에 의해서 도난당했다. 세부 모델. CRH5A. CRH5A형 전철()은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철도부에서 CRRC 창춘 철도 제작소와 알스톰에서 계약해 최대 영업 속도 250km/h로 운행하는 고속열차로 60편성까지 도입했다. 2009년에 30편성을 추가로 발주한데 이어 2010년에 20편성, 2011년에 30편성을 주문했다. 초기 편성의 경우 이탈리아에 제조해 200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배달했다. 51편성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 CRRC 창춘 철도 제작소에서 제조했다. 2007년 4월부터 정규 노선에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징하 고속철도 노선을 운행하기 시작해 칭난 고속철도, 스타이 고속철도를 잇는 노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CIT001. CIT001형 전철()은 2007년 4월 2일에 CRH5A 모델을 기반으로 주문했고 같은 해 7월에 시범 열차 운행에 들어갔다. 특징. 차폭이 확장되어 신칸센, 다른 CRH1, 2, 3형과 동등한 한 열에 최대 5석을 설치하였다. 단 좌석의 방향은 CRH1와 같은 고정식으로, CRH2, 3형과 같이 좌석의 방향을 회전해 바꿀 수 없다. 객차 구성. CRH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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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춘궤도객차 구펀 유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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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H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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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유
최광유(崔匡裕, ? ~ ?)는 신라의 대학자이다. 학문이 깊었으며 시도 잘 지었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에 대한 명성이 높았는데, 당에서는 최치원·박인범 등과 함께 '신라 10현'이라 불리었다. 고려 때 발간된 《십초시》 하권에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고려 때 간행되었다가 조선 문종 때 밀양 부사 이백상이 다시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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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눌
최눌(最訥, 1717년 ~ 1790년)은 조선의 승려이다. 자는 이식(耳食), 호는 묵암(默菴), 본관은 밀양이다. 성은 박씨이며 최눌은 이름이다. 생애. 14세 때 낙안 징광사의 돈정에게서 불도를 배우고는 승려가 되었다. 18세 때 만리 대사에게 3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풍암·호암·새봉 등에게 불법을 배우고 진명 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제경문답 반착회요》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을 하여 당시의 불교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770년 해남 표충사 원장이 되었고, 송광사에 비가 있다. 저서로 《내외잡저》 10권과 《심성론》 3권, 《문집》 3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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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용
곽재용(郭在容, 1959년 5월 22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이다. 1989년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다. 약력. 뛰어난 영상미와 특유의 감수성으로 1980년대 청춘영화 붐을 일으켰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감독 데뷔 후, PC통신에 연재된 이야기를 영화화하여 상투적인 멜로 영화의 공식을 뒤집으며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새바람을 몰고 온 작품 《엽기적인 그녀》로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모녀의 로맨스를 한 폭의 그림처럼 서정적으로 그려낸 《클래식》과 한국, 중국, 홍콩에서 동시 개봉하며 범 아시아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까지 연속적인 흥행작을 탄생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감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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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
최병헌(崔炳憲, 1858년 ~ 1927년)은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목회자, 교육자, 번역가이다.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YMCA 청년회를 지도하였다. 아호는 탁사이다. 충청북도 출신. 생애. 최병헌은 충청북도 제천출신으로 1888년 아펜젤러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소개받은 후 1893년 감리교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존슨 목사로부터 한문으로 된 신약 성경을 얻어 100일 동안 특별 기도를 올리며, 열심히 읽었다. 1893년 존슨 박사에게 세례를 받고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의 신약 성경의 한국말 번역에 적극 협력하였고 배재학당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서울 종로에 책점을 설립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도서관을 창립하였다. 1894년에는 《조선 기독교인 회보》, 《신학월보》의 주필을 맡아 보다가 1902년에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서 12년 동안 재직하고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겸임으로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YMCA 청년회를 지도하다가 1927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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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고대 그리스의 예술, 건축, 문화면에서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 고전기 그리스의 심장부가 로마에 병합된 기원전 146년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는 헬레니즘 사회와 문화를 단절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까지 그 본질을 유지해왔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은 이때 종식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그리스 본토(대체로 현대 그리스의 영토)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도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케이아로, 각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의 도읍이었다. 페르가몬, 에페소스, 로도스, 셀레우키아 같은 도시들도 중요했으며, 이 시기에 동부 지중해에서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수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정복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시야는 크게 넓어졌으며,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심했던 도시간의 끝없는 갈등은 이제 사소하고 하찮은 일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리스인들, 특히 젊고 야심이 있던 자들은 동방의 새로운 그리스 제국으로 계속 이주하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케이아나 알렉산드로스 정복으로 생겨난 여타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로 옮겨갔는데, 그 범위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이르렀으며 이 곳에서는 그리스와 박트리아, 인도와 그리스 왕국이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폴리스들을 격파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도시국가는 다시는 절대 패권을 되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폴리스들이 통합하든가 혹은 마케도니아와 그 후계 국가들과 연합하지 않는 한 이들의 패권에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각자 지역의 독립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현실적인 통합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되찾고자 수차례 연합을 결성한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장군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붕괴되고 여러 새 왕국들이 들어섰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명장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장악했다. 그는 테살로니키를 마케도니아의 도읍으로 삼고, 새 왕국을 건설했다. 아나톨리아의 지배자 안티고노스가 카산드로스의 권력에 도전했는데, 그는 그리스 도시들에 자신을 도와주는 대가로 자유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반란이 일어나 성공하게 된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나이를 장악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억압했던 이 곳의 민주정을 복원했다. 그러나 기원전 301년 카산드로스와 다른 헬레니즘 왕들이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물리쳤다. 기원전 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자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라 그리스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는 기원전 285년 그리스 지배자들의 두 번째 연합에 패하여, 그리스의 지배권은 트라키아의 뤼시마코스에게로 넘어간다. 뤼시마코스는 기원전 280년에 전사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돌아갔으나, 당시 발칸 지역에 살던 갈리아인들이 그리스를 침략하여 이에 패했다. 갈리아에 대항한 전쟁으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와 안티오케이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이들은 가장 부유했던 헬레니즘 국가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에도 대항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39년에 죽을 때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가문은 기원전 146년 로마 제국이 왕조를 폐하기 전까지 계속 왕위를 지켰다. 그러나 그리스 폴리스들에 대한 지배권은 때때로 바뀌기도 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같은 다른 지배자들이 그리스의 反 마케도니아 파벌을 밀어주어 안티고노스 왕조의 지배권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의 전략적 요충지인 코린토스에 주둔군을 배치했으나 아테나이, 로도스, 페르가몬 등 다른 도시국가들은 실질적인 독립을 누렸다. 이들은 독립 수호를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도 독립을 유지했으나, 대개 다른 연합에 끼지 못했다. 기원전 26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 도시들을 꾀어 안티고노스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 그리하여 아테나이 지도자 크레모니데스의 이름을 딴 크레모니데스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스 도시들은 패배했고, 아테나이는 독립과 민주 정치를 상실했다. 아이톨리아 연맹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제한되었으나 기원전 245년 테바이의 지배를 허락받고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되었다. 이로써 아테나이는 정치적 역할을 잃었으며, 다만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진보한 도시로 남았다. 기원전 255년 안티고노스는 코스섬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여 로도스를 제외한 에게 해 섬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필리포스 5세. 기원전 239년 안티고노스 2세가 죽었다. 그가 죽자 시키온의 아라토스가 이끄는 아카이아 동맹의 그리스 도시들은 또 반란을 일으킨다.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가 기원전 229년에 어린 필리포스 5세만 남기고 죽자 안티고노스 도손이 섭정이 되었다. 명목상 프톨레마이오스에 지배를 받은 아카이아인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였으며, 그리스 남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이에 적당히 동의를 표시하며 이 전쟁에 거리를 두었다. 스파르타는 아카이아인들과 적대 관계를 지속하여, 기원전 227년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는 아카이아를 침공하여 연맹의 주도권을 잡았다. 아라토스는 가까운 스파르타보다 멀리 떨어진 마케도니아를 선호하여, 도손과 동맹을 맺었는데, 기원전 222년 도손은 스파르타를 물리치고 그들의 도시를 병합했다. 이것은 스파르타가 처음으로 외국에 점령당한 일이었다. 기원전 221년 도손이 죽자 필리포스 5세는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그리스를 통일하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구름"인 로마의 발흥에 대항해 독립을 지킬 기회와 재능을 가진 마지막 마케도니아 지배자였다. 그는 "헬라스의 총아(寵兒)"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의 보호하에 나우팍토스 화의(기원전 217년)을 맺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맹들간의 갈등을 종식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아테나이, 로도스, 페르가몬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는 로마의 적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 때문에 로마는 처음으로 그리스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게 된다. 로마는 즉시 아카이아 도시들을 꾀어 필리포스에 대한 명목상의 충성을 버리도록 했으며, 로도스와 페르가몬과 동맹을 맺어 소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다. 기원전 212년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205년에 애매하게 끝났다. 그라나 이때부터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적이 된다. 로마의 동맹 로도스는 에게 해 섬들에 지배권을 행사했다. 기원전 202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찔렀고, 이제 동족에 관심을 돌릴 여력이 생겼다. 로마는 그리스 동맹국인 로도스와 페르가몬을 이용했다. 기원전 198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기본적으로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동방의 강대국 셀레우코스 왕국의 잠재적인 동맹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필리포스의 그리스 동맹국들은 그를 배신하고 기원전 197년 그는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로마의 전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리스에는 다행스럽게도 플라미니누스는 온건한 인물로, 그리스 문화의 옹호자였다. 필리포스는 자신의 함대를 넘겨주고 로마의 동맹국으로 전락했다. 기원전 196년 이스트모스 경기에서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와 칼키스에 로마군을 주둔하되 모든 그리스 폴리스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로마가 약속한 자유는 환상일 뿐이었다. 로도스를 제외한 모든 도시는 사실상 로마가 움직이는 새 연맹에 가입되었으며, 민주 정치 대신 로마와 연합한 귀족 정권들이 들어섰다. 로마의 발흥. 기원전 192년 안티오코스 3세가 10,000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략했다. 그는 아이톨리아인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91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테르모퓔라이에서 그를 막아 소아시아로 물러나게 했다. 이제 몇몇 그리스 도시들은 안티오코스를 해방자로 여기게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로마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기원전 191년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패했다. 이 전쟁 당시 로마군은 처음으로 소아시아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 그들은 마그네시아 전투(기원전 190년)를 통해 안티오코스를 다시 격파했다. 그리스는 이제 동쪽에서도 로마를 만나게 되었으며, 로마군은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된다. 아파마이아 화의(기원전 188년)로 로마는 그리스 전역에 대한 우위를 가지게 된다. 이후 몇 년간 로마는 그리스 정계에 깊이 관여했는데, 정쟁에서 패한 파벌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마케도니아는 명목상 로마의 동맹이나 아직 독립 상태였다. 기원전 179년 필리포스 5세가 죽고, 마케도니아가 지배하는 그리스의 통일을 꿈꾼 아들 페르세우스가 뒤를 이었다. 이제 마케도니아는 부흥의 과업을 이루기엔 너무 약한 상태였으나, 로마의 동맹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의 잠재적인 위협이 되리라 로마를 충동질했다. 그리스 독립의 종식. 에우메네스의 음모로 로마는 기원전 171년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여 100,000 병력을 그리스에 보냈다. 마케도니아는 로마군의 적수가 못되었고, 페르세우스는 다른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로마군의 지휘가 무능한 덕분에 그는 3년을 버텼지만 기원전 168년 로마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그리스에 보내어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군을 분쇄한다. 페르세우스는 사로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네 개의 소국으로 분할되었으며 마케도니아를 지원한 그리스 도시들은 징벌되었다. 로마의 동맹국이던 로도스와 페르가몬도 사실상 독립을 잃었다. 안드리스코스라는 한 모험가의 지도로 기원전 149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다음 해 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 지역 최초로 로마 속주에 편입되고 말았다. 로마는 그리스 독립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카이아 연맹에 이제 해산을 요구하게 된다. 아카이아인들은 이에 거부하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로마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스 도시 대부분이 아카이아의 편에 섰으며, 노예들도 그리스 독립에 싸우기 위해 해방되었다.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진격하여 코린토스에서 그리스인들을 제압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기원전 146년, 도서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아테나이와 스파르타 이외의 지역에는 로마의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모든 도시들은 로마의 지역 동맹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이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다. 그리하여 에게 해 반도가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기원전 88년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100,000 명이 넘는 로마인들과 로마의 소아시아 동맹국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그리스는 완전히 몰락한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인이 아니었으나, 아테나이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은 자신들의 괴뢰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미트리다테스에 합류했다. 로마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를 쳐부수자 로마는 그리스에 다시 앙갚음을 하여 그리스 도시들은 다시는 독립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6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대 폼페이우스)에 마침내 패퇴한다. 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결국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를 로마 제국의 아카이아 속주에 직접 편입되었다. 로마와 투쟁하면서 그리스는 인구 감소와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지배로 최소한 전쟁은 끝났고, 아테나이, 코린토스, 테살로니카, 페트라스 같은 도시들은 곧 재건되어 번영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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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위
최사위(崔士威, 961년 ~ 1041년)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수주(水州 : 수원) 자는 동현(動寰)이다. 생애. 증조 최서천(崔徐遷)은 호장(戶長), 조부 최한용(崔韓用)은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 아버지 최융예(崔融藝)는 대위(大尉)를 지냈다. 처음에 목종을 섬겨, 벼슬을 여러 번 옮기고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009년(목종 12) 김치양(金致陽)이 난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려 하자, 대정문별감(大定門別監)에 임명되어 궁문을 폐쇄하고 국왕을 호위하였다. 1010년(현종 1), 통군사(統軍使)로서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주둔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고, 거란이 침입하자 강조(康兆) 등과 함께 거란군의 공격을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다음 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했으며,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와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거친 다음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옮겼는데, 후에 장연우(張延祐), 황보유의(皇甫兪義)와 함께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없애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둘 것과 12주(州)의 절도사를 5도호(都護)·75도 안무사(安撫使)로 대체할 것을 건의했고, 그대로 실행되었다. 1012년(현종 3),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1014년(현종 5)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고, 1019년(현종 10), 추충좌리동덕공신호(推忠佐理同德功臣號)를 받았으며, 청하현개국남(淸河縣開國男)에 봉해져 식읍 300호(戶)를 받았다. 1020년(현종 11)에는 왕명으로 지중추사(知中樞事) 강민첨(姜民瞻)과 함께 당시 다섯 살인 현종의 아들 왕흠(王欽, 훗날 덕종으로 즉위)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司徒) 겸 내사령 상주국 숭인광효보운공신(內史令 上柱國 崇仁廣孝輔運功臣)으로 책립하고 연경군(延慶君)으로 봉하였다. 1021년(현종 12),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 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청하백(淸河伯)으로 다시 봉해졌으며, 식읍도 700호로 올려졌는데, 같은 해에 또 광국공신(匡國功臣) 호를 받고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여러 주ㆍ현 장리(長吏)의 칭호가 혼잡하므로 군ㆍ현 이상은 호장(戶長)이라 부르고, 향(鄕)ㆍ부곡(部曲)ㆍ진구(津口)ㆍ정(亭)ㆍ역(驛)은 장(長)으로 통일하자고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1027년(현종 18)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임명되었으며, 아버지 최융예는 수사공 상주국 한남국개국남(守司空·上柱國·漢南郡開國男)의 벼슬과 식읍 300호를, 어머니 유씨(庾氏)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을 추증받았다. 1029년(현종 20) 발해(渤海)의 유민이자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으로 있던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자, 형부상서 곽원(郭元)이 기회를 타서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최사위는 서눌(徐訥), 김맹(金猛) 등과 함께 글을 올려 반대하였으나, 곽원은 이를 고집하고 군대를 보냈다가 패배했다. 같은 해 12월, 흥료국의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이 동북 여진을 이끌고 거란과 서로 싸우면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자, 왕이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게 했는데, 최사위와 평장사(平章事) 채충순(蔡忠順)이 방비를 견고히 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자고 청하여 받아들여졌다. 1030년(현종 21), 노환으로 왕에게 퇴직을 청했으나, 현종이 허락하지 않고 5일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하였고, 이듬해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했다. 1034년(덕종 1), 덕종이 즉위하자, 5일에 한번 일을 보게 하였고, 1041년(정종 7) 3월 4일 향년 81세로 죽자 태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며, 1052년(문종 6),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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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식 (수학자)
최윤식(崔允植, 1899년 ~ 1960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제1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도쿄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해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공업학교 등의 교사로 있었다. 194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에 이어 대한 수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대한수학회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1954년 4월 6일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할 때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것을, 최윤식 교수가 203명의 2/3이 135.33…명이므로, 반올림해서 135명만 찬성하면 된다고 이승만 측에 말해주었다. 당시 개헌에 필요한 한표가 모자랐던 상황에 '사사오입'(四捨五入, 4는 버리고 5는 올린다)이라는 아이디어는 궤변이라고 알려져 있다. 1955년 그후, 55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귀국, 56년 서울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문교부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교부로부터 교육자 근속상을 수여받았다. 사사오입 개헌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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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최진립(崔震立, 1568년 ~ 1637년 1월 21일)은 조선의 무신이다.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생애. 1566년 경주에서 최신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1607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를 지내고, 1614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청하나 응하지 않았다 갑산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어 가덕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복직하였고, 1626년에는 경흥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1630년(인조 8년)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기수사에 올랐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1632년에는 교동부사가 되었고, 163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거쳐 덕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634년인조 12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공주 영장으로 감사 정세규의 좌영장으로 출진하여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후.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 《정무공기실 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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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케이아
오론테스 강의 안티오케이아(그리스어: Ἀντιόχεια ἡ ἐπὶ Δάφνῃ, Ἀντιόχεια ἡ ἐπὶ Ὀρόντου or Ἀντιόχεια ἡ Μεγάλη; 라틴어 Antiochia ad Orontem; 아랍어:انطاکیه)는 오론테스 강 동쪽 유역에 있던 고대 도시이다. 오늘날 이곳 근처에는 터키 안타키아시가 있다. 기원전 4세기 말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이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리고자 처음 도시를 건설하였다. 각지에 같은 이름의 도시가 많이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오론테스 강의 안티오케이아가 가장 유명하다. 오론테스 강의 안티오케이아는 고대에 서부 시리아, 오론테스 강(현재의 아시 강) 주위에 건설되었고, 때문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왕국의 수도, 로마 시대의 시리아 속주의 수도로써 번영을 누렸다. 실크로드의 서방 출발점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안티오키아」라는 이름은 헬레니즘 시대 이래 그리스어 발음으로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안티오케이아」라는 독법이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라고 불렸다. 한편 현대의 발음은 「안디오히아」로 표기된다. 오론테스 강의 안티오케이아의 역사.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리고자 16개의 도시를 세웠는데, 안티오케이아도 그 가운데 하나로서 이소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인 기원전 300년에 도시의 토대를 닦았다. 안티오케이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써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도시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에 멸망당한 뒤에도 안티오케이아는 근동에서 알렉산드리아 버금가는 제국 제3의 도시로써 번영을 누렸다. 초기 기독교 시대 사도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포교 거점이 된 도시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땅이었다.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이 거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마태오 복음서》에는 서시리아에서 성립되었다는 설도 싣고 있다) 훗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국교로 삼은 뒤, 안티오키아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과 함께 기독교 5대 교구의 지위를 얻고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어, 시리아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써 번영을 이어갔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 가운데 한 명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또한 이곳에서 태어났다. 현재에도 동방 정교회에서는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이름을 유지하는 교회가 여럿 있는데, 실제 활동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다른 도시로 옮겨간 상태다. 그러나 526년 5월 29일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25만에서 30만이 넘는 도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재건된 뒤로도 예전의 위용은 떨치지 못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거듭된 공격으로 안티오키아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7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제국에 패배하고 시리아를 잃은 뒤에는 안티오키아 주변에서 두 제국의 공격이 이어지며 안티오키아의 쇠퇴는 가속화되었고, 안티오키아는 북시리아의 지방 도시가 되었다. 969년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되찾았지만, 1084년에 다시 셀주크 투르크에 정복당했다. 1096년의 제1차 십자군은 반년 이상을 안티오키아 포위공성전에 쏟아부었고, 안티오키아를 정복해 그 땅에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지만, 1268년 맘루크 왕조에 안티오키아를 다시 빼앗겼다. 이슬람 시대에 안티오키아는 아시라 불렸다. 1516년에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 도시를 정복하였고, 오스만 제국령 알레포 주의 한 지방도시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의 위임통치에 들게 된 시리아에 편입되었는데, 투르크계 주민이 시리아에서 분리운동을 일으키고 1939년 터키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터키 하타이 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안타키아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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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식
최찬식(崔瓚植, 1881년 8월 16일 ~ 1951년 1월 10일)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신소설 작가로, 호는 해동초인이다. 종교는 불교다. 경기도 광주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언론인 최영년의 아들이다. 한성중학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뜻을 두어, 1907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소설집 《설부총서》를 번역하여 한국 현대 소설의 토대가 된 신소설 분야를 개척하였다. 1912년에 발표한 《추월색》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신문학 개척에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안(雁)의 성》, 《금강문》, 《춘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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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어커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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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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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남 (고구려)
추남(楸南, ? ~ ?)는 고구려의 역술인이다. 영양왕 때 국경 지방의 강물이 거꾸로 흘러서 왕이 점을 치게 하자, 왕비가 음양의 도를 역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가 난 왕비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상자 속에 쥐 한 마리를 넣고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이 쥐가 여덟마리가 있다고 하자 왕비가 맞추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그 후 쥐의 배를 갈라보니 일곱 마리의 새끼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형되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후에 장군으로 태어나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했는데, 그 화신이 바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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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맨 (음악 그룹)
캔디맨()은 대한민국의 혼성 2인조 음악 그룹이다. 음반 목록. 정규 음반. Friday morning (2001년 11월 2일, BMG). 타이틀곡: 〈일기〉 수록곡 : Dialogue (2005년). 타이틀곡: 〈Smile〉 수록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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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맨
캔디맨(Candyman 또는 Candy Man)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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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익
치익(致益, 1862년 ~ 1942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승려이다. 호는 해담이며 속성은 서이다. 본관은 이천 서씨 19세에 통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용문사의 해주에게서 경전을 배웠다. 그 후 고운사의 음관의 법을 이어받았다. 1929년 선교 양종 칠교정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며, 통도사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증곡집》(曾谷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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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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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 (고려 문신)
태평(泰評, 생몰년 미상)은 고려(高麗)의 문신이다. 황해도(黃海道) 연안군(沿岸郡)에서 태어났다. 생애. 사서에 능하여 이사(吏事)를 잘 보았다. 신라(新羅) 말에 호족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 되었다. 유긍순(柳矜順)이 궁예(弓裔)에게 격파되자, 궁예(弓裔)에게 항복하였다. 후에 왕건(王建)을 섬겨 고려(高麗) 개국(開國)에 공을 세우고 순군 낭중(徇軍郞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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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흘
태흘(泰屹, 1710년 ~ 1793년)은 조선의 승려이다. 호는 천봉, 본관은 서흥, 속성은 김이다. 16세에 유덕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도원으로부터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1729년, 우점에게 학문을 배운 후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그 후 만년에 배천 호국사로 들어가 좌선하다가 해숙의 법을 이어받았다. 죽은 후 정골 2편과 사리 64개가 나왔는데, 호국사·월정사·망월사 등에 각기 나누어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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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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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스타빌레
기예르모 스타빌레(Guillermo Stábile, 1905년 1월 17일 ~ 1966년 12월 27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전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이자 축구 지도자이다. 선수 시절에는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8골을 뽑아내 초대 월드컵 득점왕에 오른 경력이 있다. 선수 시절에는 CA 우라칸, 제노아 CFC, SSC 나폴리, 레드 스타 파리 등에서 활약한 바 있다. 은퇴한 뒤에는 1939년부터 1960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6회 우승에 기여하였다. 플레이 스타일. 달리기가 엄청나게 빠른 것 하나만을 이용하여 상대 수비수의 등 뒤로 가서 슈팅을 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상대 수비수들은 스타빌레와 볼 경합을 하게 되면 늘 볼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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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로스타 이탈리아
에우로스타 이탈리아(, 시간표 상 ES AV*)는 이탈리아의 고속 철도이다. 일일 130회 이상 운행한다. 이탈리아 국철(Ferrovie dello Stato) 시대부터 운행을 시작하여 현재는 트레니탈리아가 운영한다. 이탈리아의 트럭 제조사 이베코에서 이름 사용에 대한 허가를 받고 사용한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채널 터널을 달리는 유로스타와는 관계가 없다. 처음에는 단순히 에우로스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개요. 1977년 2월 24일 피렌체-로마 고속선(페로비아 디레티시마 피렌체-로마; 일직선을 뜻함)의 로마와 시타 델라 피에베 구간이 개통되었을 때에는 고속선을 위한 별도의 차량이 없었고, 이 노선이 기존선을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FS E444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여 운행하였다. 고속 차량 개발도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어, 영국에서 시도했다 실패한 어드밴스드 패신저 트레인의 틸팅 기술을 도입하였다. ETR 450은 1989년에 로마와 밀라노 간 첫 영업을 시작하였다. 현재의 이름인 에우로스타 이탈리아는 1996년경에 도입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모든 승객에게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였다. 2001년까지는 자유석이 존재했으나, 2006년 이후부터 전 좌석 지정석이다. 1등석과 2등석 사이에 식당차가 있다. 상위 서비스로 로마, 볼로냐, 밀라노에만 정차하는 대신 요금이 비싼 에우로스타 이탈리아 비즈니스가 있다. ETR 485 전동차가 도입되면서 영업을 시작했으나, 이용 승객이 적어지고 에우로스타 이탈리아 패스트가 운행하면서 2008년 12월부터 1일 왕복 4편성만 운행한다. 최근 2015년 기준으로 펜돌리노 계열치량은 프레챠비안카와 프레챠르젠토등급으로 운행중이며, ETR 400은 프레챠로사로 운행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브랜드도 변경되었다. 다만 ETR 500과는 약간 차이를 갖고 운행한다. 차량. 1988년 5월 처음으로 운행한 차량은 ETR 450 펜돌리노이다. 현재는 변종 ETR 460, 470, 480도 운행한다. 460은 직류 3kV 전용, 470은 직류 3kV와 교류 15kV, 480은 직류 3kV와 교류 25kV 겸용이다. ETR 450, 460 및 변종은 모두 영업 최고 속도 250 km/h를 내며, 틸팅 기능이 있어서 곡선 주행 시 감속하지 않아도 된다. 현재 ETR 450의 틸팅 기능은 사용하지 않는다. 펜돌리노 열차는 모두 고정 편성으로, 편성 정원은 480명이다. 이후 시속 300km급 ETR 500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1988년과 1990년에 시제품이 탄생하였다. ETR 500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양산되었으며, 직류 3kV 전용 차량과 교류 25kV/직류 1.5kV 겸용 차량이 있다. 동력 분산형인 이전 차량과는 다르게 맨 앞과 맨 뒤에 기관차가 있으며, 틸팅 기능이 삭제되었다. 또한 ETR 500 초기편성은 E414명칭으로 개조되었다. 최근 ETR 500의 후계차량인 ETR 400을 도입하였다. 다만 선행 차량인 ETR 500과는 다르게 8량 편성의 동력분산식을 사용한다. 서비스. 2006년 7월 현재 운행 노선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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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렉 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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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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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레르모 스타빌레
31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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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31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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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 왕자
319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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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팔계
저팔계(猪八戒, Zhu Bajie)는 중국의 4대 기서 가운데 하나인 《서유기》의 등장인물로, 본명은 저강렵(猪剛鬣), 법명은 저오능(猪悟能)이다. 팔계라는 이름은 삼장법사가 지어줬다. 저팔계는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의 두 번째 제자가 되어, 손오공, 사오정 등과 함께 삼장법사를 보호하며, 현재의 인도, 즉 천축에 있는 뇌음사에 불경을 구하러 간다. 저팔계는 그 외모가 돼지의 머리에 덩치 큰 사람의 몸뚱이를 갖고 있다. 저팔계의 전생과 현생. 전생의 저팔계는 천계의 은하수를 다스리던 천봉원수였다. 그러던 중 천봉원수는 월궁(달나라) 항아를 술김에 희롱하여 옥황상제의 노염을 사 죗값으로 인간세상으로 쫓겨난다. 인간 세상으로 떨어지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인간이 아닌 암퇘지의 뱃속으로 떨어져 돼지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어 복릉산 운잔동이란 동굴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관세음보살과 혜안 행자를 만나 불문에 입문하여 돼지 저(猪)에 깨달음 오(悟) 능할 능(能)자를 써서 '저오능'이라는 법명을 얻게 된다. 또한 불제자에게 금지된 다섯 가지 음식과 도가에서 금하는 세가지 음식을 끊고 채식을 시작한다. 그래서 '여덟가지 음식을 금한다'는 뜻의 '저팔계(猪八戒)'라고 불린다 삼장법사와 함께 불경을 구하러 가는 시기에는 위로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을 충실히 모시는 충성스러운 모습을 지닌 반면 먹을 것을 밝히는 습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훗날 삼장법사가 불경을 무사히 구한 이후에 저팔계는 그 보상으로 정단사자가 된다. 저팔계는 평소에 먹을 것을 너무 밝혔던 탓에 심부름꾼에 해당되는 신분을 부여받게 되었다. 고우영 화백의 서유기에서는 손오공과 삼장법사를 이간질시켜 결국 삼장법사를 위기에 빠뜨릴(물론 손오공이 다시 나타난 덕분에, 삼장법사는 요괴의 계략으로부터 구출받는다.)만큼 시기심이 많고, 이미 불교신앙으로 욕심을 극복한 사오정과 손오공과는 달리, 석가모니를 뵙기 직전까지도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가 되지 못하고 정단사자로 임명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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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덕
하경덕(河敬德, 1897년 ~ 1951년)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학자·언론인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전주 신흥학교 1915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25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흥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광복 후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 서울신문사·합동통신사의 사장을 지냈다. 그 후 종합잡지 《신천지》를 발행하였다. 이어 1948년 인도에서 개최된 ‘범아 문화 대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미 국무성의 특별 촉탁으로 일본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있다가 이듬해 도쿄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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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
하백(河伯, 생몰년 미상)은 전설상의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외조부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해모수와 사통하자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중국의 신화.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은 강의 신이다. 낙수의 여신 복비(卜妃)는 물에 빠져 죽은 인간, 풍이를 되살리는데, 상제인 제곡에 의해 강의 신이 된다. 신이 되어 우쭐해진 하백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담대멸명이 지니고 있는 백옥을 탐내다가 수모를 당한다. 한편 위국 업의 사람들에게 매년 처녀를 바치라고 강요하여 원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처녀를 바치는 관습은 현령으로 부임한 서문표에 의해 없어졌다. 결국 아내인 복비의 청탁을 받은 예의 화살에 왼쪽 눈이 멀게 된다. 일본의 갓파. 일본에는 갓파라는 물귀신이 있는데, 하백은 이 갓파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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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홍도
하홍도(河弘度, 1593년 ~ 1666년)는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중원, 호는 겸재, 본관은 진주이다. 일찍이 조식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해군 때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인조 때 여러 번 벼슬에 불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암천산에 살면서 집을 짓고 영귀대라고 이름붙였다. 1662년 암행어사로 내려온 남구만과 가까이 지내면서 예론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남구만은 그의 깊은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니, 왕은 곡식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저서로 《겸재집》 1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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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고려)
한수(韓脩, 1333년 10월 1일(음력 8월 22일)~1384년 4월 18일(음력 3월 28일))는 고려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본관은 청주이다. 생애. 1347년(충목왕3)에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우왕 때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75년(우왕1)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동지서연(同知書筵), 1376년(우왕2) 부사(副使), 동지(同知), 5월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가을에 지사(知司), 1378년(우왕4)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고, 대광(大匡)의 품계로 오르면서 관직이 진현(進賢)으로 바뀌었다. 1379년(우왕5) 광암사의 비문을 써 첨서(簽書)가 되었다. 1380년(우왕6)에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1382년(우왕8)에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에 호종(扈從)했으며, 1383년(우왕9)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384년(우왕10) 음력 3월 28일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글씨에도 능해 해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또한 학식이 있고 행동이 의로워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사후. 《유항 한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에 있다. 묘역은 종중 묘역으로 한수의 아버지인 한공의(韓公義, 1307~1365)묘역과 형제인 한리(韓理, 1337~1417) 묘역이 인근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역은 부인 안동 권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묘비 1기씩을 조성하고 그 아래로 장명등을 각각 1기씩 설치하였다 장명등을 사이로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아래 양 쪽으로 문인석 4기와 망주석 2기가 나란히 배치되 어 있다. 상석 옆으로 근래에 새로 세운 묘비가 있을 뿐 다른 석물들은 원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석물 들의 형태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03년 4월 21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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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윤
한형윤(韓亨允, 1470년 ~ 1532년)은 조선의 문신·서예가이다. 자는 신경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성준의 외손자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신으로 무예에 능한 자를 선발하는 데 뽑혀 참의에 이르렀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지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천성이 청렴·강직하여 바른말을 잘 하였으므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유배되기도 했다. 글씨에 뛰어나 왕으로부터 왕희지의 필체첩을 하사받았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글씨로 파주의 《영의정 황보인 묘비》, 양주의 《명숙공 성준 묘비》가 있다. 아들 한기(韓記)는 성종의 서10녀 정혜옹주와 혼인해 청평위(淸平尉)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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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갑수 (1913년)
한갑수(韓甲洙, 1913년 6월 26일~2004년 11월 21일)는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와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상명실천여학교 교사, 1946년 서울대 사범대 강사를 거쳐 음악대 교수, 1949년 한글 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장교로 군복무중이던 1953년 미국 동성 훈장·을지 무공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미국 공군대지휘참모학교를 졸업하였다. 1957년 민의원 의장 비서실장·1965년 대한일보 전무, 5․16민족상 이사·1975년 민속음악 학회장·1982년 국가 제정 추진위원회 부위원장·1989년 서예가 연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1972년·1975년 각각 국민투표지도 계몽연설회 연사·국민투표 계몽담당자로 활동하며 유신헌법 찬성을 독려하였다. 제5회 외솔상·제1회 방송문화상·금성 충무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원본 훈민정음 풀이》 《바른 말 고운 말 사전》 《태극기 해설》 《국어대사전》 등이 있다. 2004년 11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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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
한희유(韓希愈, ? ~ 1306년)는 고려 말기의 무신이다. 가주 한씨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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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유일
함유일(咸有一, 1106년 ~ 1185년 12월 19일(음력 11월 26일))은 고려의 관리이다. 본관은 양근(楊根), 자는 형천이다. 생애. 고려 개국공신 함규(規)의 5세손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컸다. 아버지 친구인 이준양의 도움으로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며,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왕충의 추천으로 선군기사(選軍記事)가 되었다. 명종 때 병부낭중·공부상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교로도감으로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평생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가계. 아들 순(淳)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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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 (고려)
혜명(慧明, ? ~ ?)은 고려 광종 때의 승려이다. 968년 은진 반약산에 큰 돌이 땅에서 솟아나자 나라에서는 그 돌로 불상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불상을 잘 조각하는 사람을 구하였다. 이에 혜명이 백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공사를 시작하여 37년 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불상을 세울 길이 막연하였는데, 하루는 사제촌에서 한쌍의 동자가 진흙으로 3단으로 된 불상을 쌓아가며 세우는 것을 보고 깨우쳐, 마침내 높이 55자 5치의 불상을 세웠다. 이 불상은 나라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흉란이 있으면 땀이 난다고 한다. 이 불상이 바로 지금 충남 은진면 관촉사의 미륵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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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 (조선)
혜명(慧明, 1861년 ~ 1937년)은 조선 말기의 승려이다. 호는 혜월, 본관은 예산, 속성은 신씨이다. 11세에 덕산 정혜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884년 경허에게서 지눌의 《수심경》을 듣고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성우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도리사·파계사·미타암·통도사 등을 다니며 설법을 하다가, 1921년 부산 선암사 주지가 되어 산지를 개간하였다. 그 후 부산 양안암에서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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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 (신라)
혜소(慧昭, 774년 ~ 850년 2월 24일(음력 1월 9일))는 신라의 승려이다. 전주 출신이며 시호는 진감(眞鑑), 속성은 최씨이다. 생애. 774년(혜공왕 10) 재가승려인 아버지와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따르면 어머니 고씨가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서역의 승려가 나타나 아들이 되기를 원한다 하며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이윽고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고, 소리를 낮추고 말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804년 당에 가서 창주 신감 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얼굴이 검어 함께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서 흑두타(黑頭陀)라고 불렸다고 한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종남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선(禪)을 설법하였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후 847년 파주시 탄현면 소재의 검단사를 창건하고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지었다. 850년(문성왕 12) 여생을 마쳤다. 후에 정강왕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치게 하고 진감(혜소의 시호) 국사비를 세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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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고려)
정현(鼎賢, 972년 ~ 1054년)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이씨이며, 시호는 혜소국사(惠炤國師)이다. 10세 때에 영통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으며 996년 승과에 급제하여 칠장사에 들어가 있었다. 999년 대사가 되었고 덕종 때 승통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1046년 문종 때 왕에게 《금고경》을 강의하였으며 가뭄이 들었을 때 불경을 읽어 비를 내리게 하였다. 1049년 왕사가 되었으며, 1054년 국사가 되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3년(972년)에 출생하여 10세에 입산하였고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고승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83세가 되던 문종 8년(1054년)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이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혜소국사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썼다. 비신의 높이는 241cm, 폭은 128cm이고 비신의 양측에는 쌍룡이 새겨졌는데 그 솜씨가 극히 뛰어나다.
319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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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심
혜심(慧諶: 1178년~1234년 7월 23일(음력 6월 26일))은 고려의 승려이다. 자는 영을, 호는 무의자, 속명은 최식(崔寔)이다. 시호는 진각국사(眞覺國師)이다. 1201년 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다. 그 후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에 머물면서 불경을 탐독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국사 지눌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스승인 지눌의 생전에는 직책을 맡는 것을 거듭 사양하였으나,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로 들어가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결사의 2대조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에 제수 되었으며 이어 대선사에 올랐다. 승과(僧科)에 응시하지 않고 승직에 오른 드문 경우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뒤를 이어 보조의 선(禪) 사상을 발전·종합하고 간화선 수행방법을 고려불교에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송광사에 그의 진각국사 원조탑(覺圓照)이 있다. 저서로 《선문염송》《심요》《무의자 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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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장
혜장(惠藏, 1772년 ~ 1811년 10월 30일(음력 9월 14일))은 조선의 승려이다. 자는 무진, 호는 연파, 속성은 김씨이다. 해남군 출신. 어려서 대둔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대흥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 《논어》를 즐겨 읽고 변려문을 잘하였으며 성리학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아암집》이 있다.
31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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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철
혜철(惠哲: 785년 ~ 861년)은 신라의 승려이다. 16세에 승려가 되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듣고 806년에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81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 지장에게서 심인(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받았다. 그 후 서주에 있는 부사사에서 3년간 대장경을 공부하였다. 839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곡성 동리산의 대안사에서 불도를 폈다. 이 결과, 신라 선문 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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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정
사오정(沙悟淨, Sha Wujing)은 중국의 4대 기서 가운데 하나인 《서유기》의 등장인물로, 그 외모가 하천의 괴수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손오공조차 사오정을 처음에 요괴로 착각해서 공격하는 것을 삼장법사가 말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오정의 성격과 행위. 첫 번째는 천계의 장군시절인데 사오정은 이때 저팔계와 마찬가지로 죄를 짓고 천계에서 쫓겨나 하천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두 번째는 삼장법사와 함께 불경을 구하러 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위로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을 충실히 모시는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각각의 개성을 지닌 손오공이나 저팔계와는 달리 조용한 성격을 지녔다. 훗날 삼장법사가 불경을 무사히 구한 이후에 사오정은 그 보상으로 금신나한(金身羅漢)이 된다. 예전 하천에서 계속 살았던 사오정의 습성을 토대로 사오정은 문지기의 특성을 가진 직함을 부여받게 된다. 캐릭터. 사오정의 캐릭터성은 사오정이 워낙 조용한 캐릭터였으므로 서유기를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그 외모가 천지차이가 되었다. 성성이, 물고기인간, 거북인간, 산적처럼 생긴 사람 등 사오정의 외모는 다양했다. 일본에서 만든 서유기에서는 사오정이 하천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거의 대부분 일본 고유의 가공생물인 갓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허영만은 자신의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에서는 이렇게 조용한 성격의 사오정을 오히려 굉장히 개성이 강한 캐릭터로 변모시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만들기도 했다. 고우영 화백은 만화《서유기》에서 사오정을 하늘나라에서 음주소동을 일으켜 쫓겨난 경력 때문에 발음이 나쁜 제자로 묘사했는데, 손오공이 지혜와 무예로 삼장법사를 보호했다면, 사오정은 조용히 말을 끄는 성실함으로 삼장법사를 충직하게 섬긴다. 사오정 시리즈. 허영만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사오정은 거적때기를 걸치고 허름한 외모를 가진 보라색 괴물로 나온다. 가는 귀를 먹어서(정확히는 머릿살의 주름에 귀가 파묻혀있다.) 주름을 걷고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사오정은 전혀 엉뚱하게 알아듣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가 의외로 큰 인기를 끌자 이를 패러디한 사오정 시리즈가 등장하게 되었다. 사오정시리즈의 내용은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의 캐릭터와 같이 하는 말을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여서 생기는 해프닝을 주 소재로 하고 있다. 실제 허영만 화백 역시 사오정 시리즈의 파급효과를 인식하자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사오정만의 특별 버전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사오정과 외모가 완전히 똑같은 생물들이 사는 사오정의 마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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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
혜소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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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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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
혜명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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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편
혜편(惠便, ? ~ ?)은 고구려 말기의 승려이다.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 백성이 무지하여 포교가 매우 어려웠다. 584년 백제 사신 녹량이 미륵 불상을 가지고 일본에 왔는데, 일본의 대신이며 불교 신자이던 소가가 절을 짓고 석불을 모셨으나, 봉향할 사람이 없어 마침내 혜편이 뽑혔다. 이에 소가는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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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현
혜현(慧現 또는 慧顯: 570~627)은 백제의 승려이다. 혜현은 당나라에 간 일은 없으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당나라 때 649년에 도선(道宣: 596~667)에 의해 편찬된 《속고승전(續高僧傳)》(당고승전(唐高僧傳)이라고도 한다)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혜현은 어려서부터 불도에 전념하여 《법화경》과 삼론을 깨우치고 신명에 통하였다. 수덕사에 있으면서 강론을 했는데 사방에서 사람이 모여와 집 밖까지 신발이 가득할 정도였다. 차차 번잡한 생활이 싫어져 강남의 달라산에 들어가 정좌하며 일생을 마쳤다. 혜현이 죽은 후 시체를 석굴 안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다 먹어버리고 혀만 남겼다. 3년이 지나자 혀가 돌처럼 굳어져서 이를 돌탑 속에 간직하였다. 이 전기에서 혀만 생생히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야기는 《법화경》을 독송한 공덕에 따른 것이라는 영험설화(靈驗說話)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같은 유형의 설화는 일찍부터 널리 있었던 것으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다수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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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
홍랑(洪娘, ? ~ ?)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다. 1573년 당시 삼당파 또는 팔문장으로 불리던 고죽 최경창이 북도 평사로 경성에 갔을 때 그도 따라가 함께 있었다.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그도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하면서 최경창을 위해 시조 1수를 지었는데, 지금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