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stringlengths
13
957k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__NOTOC__ {{년월 테두리|2004년}} <div style="float: right; width: 250px; padding-left:1%"> {{포털:요즘 화제/달력/2004년 9월}} </div> == [[2004년]] [[9월 30일]] == * 2004년 '''[[이그 노벨상]]''' 시상식이 [[하버드 대학]] 샌더스 극장에서 열리다. == [[2004년]] [[9월 28일]] == * 아테네 '''[[패럴림픽]]'''이 현지시간 28일 밤에 폐막되다. [[대한민국]]은 금메달 11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6개를 따내 종합 16위를 차지하다. == [[2004년]] [[9월 27일]] == * '''[[크리스티나 김]]''' 선수가 [[LPGA]] 투어 롱스드럭스 챌린지 대회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다. == [[2004년]] [[9월 26일]] ==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이라크]]의 불법 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영국의 정보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다. *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이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이라크]] 대표팀에 3:0으로 패하다. == [[2004년]] [[9월 25일]] == *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당내 대권 경선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발언하다. * [[영화진흥위원회]]가 제77회 [[미국 아카데미상|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출품하기로 결정하다. * '''[[강의석 (1986년)|강의석]]'''군이 [[대광고등학교 (서울)|대광고등학교]]의 "예배권" 약속과 함께 단식을 중단하다. == [[2004년]] [[9월 24일]] == *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운동에 대해 예산을 지원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이 '''[[김선일]]''' 사건과 관련하여 정부의 협상 노력에 한계가 있었으며, 정부의 파병 입장 재천명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결론내리다. * 최수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부상이 "미사일 발사 의심은 억측이다"라고 주장하다. == [[2004년]] [[9월 23일]] == * [[김용갑 (1936년)|김용갑]]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 5분발언 도중 졸도하다. *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 실험발사 징후를 포착하다. * [[성매매 특별법]]이 0시부터 시행되어 불법 성매매 업소들에 대한 한달간의 일제단속에 들어가다. * [[대구광역시]] 달성공원에서 농약성분이 담긴 요구르트를 마시고 노인 5명이 사망하거나 중태에 빠지다. == [[2004년]] [[9월 22일]] == *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와 [[이명박]] 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다. * [[한나라당]]이 행정수도 이전 반대당론을 확정하려 했으나 내부 반발로 무산되다. * [[이라크]] 무장단체 타우히드 왈 지하드가 또 다른 미국인 인질을 참수하다. * [[자이툰 부대]]가 주둔지인 [[이라크]] 아르빌로의 이동을 끝마쳤다. * [[대한올림픽위원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체조 개인종목에서 오심으로 인해 금메달을 놓친 [[양태영]] 선수에게 자체 제작한 금메달과 함께 금메달에 상응하는 격려금도 주었다. * [[LG텔레콤]]과 한국대중음악비상대책협의회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MP3폰의 무료 [[MP3]] 파일 재생에 사용제한을 두지 않기로 합의했다. == [[2004년]] [[9월 21일]] == * 아테네 [[패럴림픽]] 탁구 남자단식 3등급 부문에서 김영건 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국가보안법 사수를 위해 한나라당 전 의원이 사퇴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하다. *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협상에서 [[외교통상부]]가 [[노무현]] 대통령 및 [[국가안전보장회의]] 인사들을 반미주의자로 규정하고 협상에 개입할 수 없도록 했다고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밝혔다. * [[노무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를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다. * 연쇄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유영철]]이 법정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자신이 자백한 범죄들 중 일부는 경찰이 "아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대가를 제시하여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밝혔다. * [[김선일]]을 살해했던 [[이라크]] 무장단체 "타우히드 왈 지하드"가 미국인 인질 유진 암스트롱을 참수하는 동영상이 공개되다. *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이 취중에 "SBS는 탄압대상"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논란이 있었다. * 프로축구팀 전북 현대가 2004년 [[AFC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다. == [[2004년]] [[9월 20일]] == * [[열린우리당]]이 [[서울특별시]]에서 행정수도 이전 반대 데모를 지원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이해찬]] 총리가 정밀조사를 지시했고 [[서울특별시]]측은 이를 부인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측에서는 더 많은 증거를 내보이며 공세에 나서다. * 국회 행정자치위원회가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 관련 공청회를 열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입장을 급선회한 [[박근혜]] 대표에 대하여 [[한나라당]] 내부의 보수중진들이 반발하여, 개인적 발언으로 당론을 혼란스럽게 했다고 비판하다. * [[노무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비공식 만찬을 가지다. * 아테네 [[패럴림픽]] 여성 50m 소총 3자세 종목에서 허명숙 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 같은 종목에서 김임연 선수도 은메달을 따냈다. * 연쇄살인 혐의로 기소된 [[유영철]]이 쓴 참회의 편지가 공개되다. * [[#2004년 9월 16일|16일]] 가출하여 행방불명되었던 '''[[강의석 (1986년)|강의석]]'''군이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발견되다. * [[인도네시아]]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가 실시되다. * [[영국]] 정부가 [[이라크]]에 주둔중인 영국군의 3분의 1을 감축할 것이라고 전해지다. *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와 [[작센]]주 지방선거에서 신나치주의를 표방한 극우정당이 36년 만에 의회에 진출하다. * 연기자 [[송승헌]]이 귀국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다. == [[2004년]] [[9월 19일]] ==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국가보안법]] 제 2조의 수정과 법 명칭의 변경에 동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 [[노무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순방에 나서다. * [[장쩌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사임 의사를 밝혔고,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이 이 자리를 승계하다. 공산당 전체회의는 이를 승인하면서 폐막되다. * [[이란]]이 18일에 있었단 [[국제원자력기구]] 결의에 반발하며 [[유엔]]의 핵사찰도 거부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 [[병역비리]]에 연루된 또 다른 연예인 [[한재석]]과 [[장혁]]이 조사를 받고 혐의를 모두 시인하다. == [[2004년]] [[9월 18일]] == * 한국 정부가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밝혔다. *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6개 사립대학 입학처장들이 모여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다. * 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인 영화 "2046"의 표가 4분 54초 만에 매진되다. * 2004년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이 개막되다. *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이란]]의 핵농축 프로그램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다. == [[2004년]] [[9월 17일]] == * [[량강도 폭발 사고]] :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외교관들의 시찰 결과에 따라 량강도 김형직군의 대규모 폭발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다. * [[국제원자력기구]] 회의에서는 한국의 미신고 핵관련 실험에 대한 처리방향을 11월께 결정짓기로 하다. *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시내 사립대들의 비강남권 차별 의혹을 조사하기로 하다. * [[인천광역시]] 서부경찰서는 왕따를 당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19차례나 불을 지른 중학교 2학년 학생 김 모군을 구속하다. * [[병역비리]]에 연루된 연예인 [[신승환]]가 조사를 받았으며 혐의를 모두 시인하다. * [[아테네]] [[패럴림픽]] (~[[9월 28일]]) * [[이라크]] [[바그다드]]시 중심부에서 차량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 최소한 13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부상당하다. == [[2004년]] [[9월 16일]] == *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재사찰의 조사 결과가 한국의 우라늄 관련 실험과 핵무기 개발이 무관함을 알려줄 것"이라고 외교부 브리핑에서 말하다. *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화폐단위 변경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검토의 초기 단계"에 이르러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연초에 밝혔던 이 부총리의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 *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 논쟁 :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주최한 "한국사 속의 고구려의 위상"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개막되어, 중국 학자와 한국 학자들간에 논쟁이 벌어지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서울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원로들의 공동선언' 행사가 있었다. 또한 보수적 논객으로 알려졌던 소설가 [[이문열]]가 형법에 의해 보완된다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데 동의하라는 요지의 사설을 [[중앙일보]]에 기고했다. *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16기 제4차 전체회의가 개막되다. * [[대광고등학교 (서울)|대광고등학교]]의 종교교육 강요에 반발하여 단식투쟁을 벌이던 [[강의석 (1986년)|강의석]] 군이 강제적인 단식중단과 병원후송에 반발하여 가출, 행방불명되다. *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주최한 [[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가 치러지다. * [[병역비리]]에 연루된 연기자 [[송승헌]]이 "송구스럽고 죄송스럽다"고 입장을 표명하다. == [[2004년]] [[9월 15일]] ==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국회의원 25명이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여야 의원 172명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합의하였다"고 발표하다. *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진 [[김한길]] [[열린우리당]] 의원이 이를 시인했으며, 검찰측은 유종근 전 [[전라북도]] 도지사도 정치자금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 월성원자력 발전소에서 중수가 누출되어 작업자 10명이 방사능에 피폭당하는 사고가 발생하다. * 폭력조직 "서방파"의 두목이었던 [[김태촌]]이 그의 재심에서 자신이 [[1986년]]에 일으킨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황모씨 폭행사건은 당시 검사였던 박 모씨의 사주를 받아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 재수사 가능성이 희박한데다 사실 여부도 알 수 없다. * '''[[량강도 폭발 사고]]''' :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의 [[#2004년 9월 13일|13일]] 해명에 대해 "우리가 본 것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 제 59회 [[유엔]] 총회가 개막되다. 이번 회기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을 늘리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 [[2004년]] [[9월 14일]] ==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여당인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양당 원내대표 회담을 제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 개정의사를 밝힌다면 받아들이겠다"며 사실상 거부하다. * '''[[량강도 폭발 사고]]'''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북한에서 대규모 공사가 있을 때마다 사전보도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사전보도가 없었다"며 "북한측 발표의 사실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국제원자력기구]]는 18일께 추가 사찰단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 검찰은 조동만이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여권 중진들에게 수억원의 정치자금을 건넨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 [[노무현]] 대통령이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1백만 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난 [[김주수 (1952년)|김주수]] [[농림부]] 차관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했다고 [[청와대]]측이 발표했다. * [[미국]]의 학자 파노스 자보스 박사가 세계 최초로 사망한 사람의 세포를 이용한 [[배아복제]]에 성공하여 그 과학적 검증을 끝마치고 저명한 학술지에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장정진]]이 이틀째 의식불명인 가운데 [[한국방송공사|KBS]]는 예능 프로그램의 모든 음식 먹는 코너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다. * [[김종학]] 프로덕션의 김종학 PD는 병역비리에 연루된 연예인 [[한재석]]을 드라마 "[[해신 (드라마)|해신]]"에서 제외시키겠다고 발표하다. 또한 또 다른 연예인 [[송승헌]]에 대해서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이 없다고 밝혔으나, 사실상 대체할 다른 연기자를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2004년]] [[9월 13일]] == * '''[[량강도 폭발 사고]]''' : [[백남순 (1929년)|백남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은 [[#2004년 9월 9일|9월 9일]] [[김형직군]]에서 있었던 괴폭발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산을 계획적으로 폭파시켜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다. *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 한국의 우라늄 분리 실험과 관련히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한국 외무부측은 이것이 원칙수준의 표현일 뿐이라고 평하면서 확대해석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1982년에 한국이 IAEA에 신고되지 않은 3개 시설 중 1개 시설에서 금속우라늄 150kg을 생산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한국의 핵개발 논란이 지속되었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옥전리의 정신지체 보호시설 '성락원'에서 수용자 중 한 명이 흉기 난동을 부려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용의자는 도주 4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히다. *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가 9일과 11일에 '[[노무현]] 정권 전복론'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투쟁지침까지 적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사실이 언론 보도되자 [[열린우리당]]측은 "반공교주 [[조갑제]]는 [[영생교]] 교주와 닮았다"고 논평을 내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가 [[연세대학교]]의 1차 수시모집 전형 결과를 분석한 결과 [[연세대학교]]가 비강남권 학생들에 비해 강남권 학생들에게 최고 10% 이상의 가산점을 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측은 자체개발한 방식으로 점수를 매겼을 뿐 가산점을 부여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다. * 구속 수감된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이에 항의하며 4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 [[김수환]] 추기경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해 국론분열을 걱정한다며 밀어붙이기식 개혁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도 국민 대부분의 여론이 부정적이라면 좋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하다. * 유명 성우 [[장정진]]이 KBS2 "일요일은 101%"에 출연, 가래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의식불명 상태가 되다. == [[2004년]] [[9월 12일]] == * [[김기덕 (1960년)|김기덕]] 감독이 영화 "[[빈 집 (2004년 영화)|빈 집]]"으로 제 6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은 "베라 드레이크"(Vera Drake), 심사위원대상은 "아웃 오브 시"(Out of Sea)에 돌아갔다. "[[빈 집 (2004년 영화)|빈 집]]"은 이외에도 이 영화제에서 세 개의 비공식상을 받았다. == [[2004년]] [[9월 11일]] == * [[제주도]]에 기습적인 400mm의 폭우가 쏟아져 큰 피해를 입었다.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1부는 [[김현철 (1959년)|김현철]]을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2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수감하다. == [[2004년]] [[9월 10일]] == * [[광주 비엔날레|2004 광주비엔날레]]. (~[[11월 13일]]) * [[탈북자]]로 보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 [[베이징]] 소재 한국 총영사관으로 진입하려던 와중에 피격당했다고 알려졌으나, 뒤에 총영사관측에서 "총격은 없었으며, 진입하려던 네 명 중 한 명은 진입에 성공하였다"라고 밝혔다. 부상을 입은 한 명은 중국 공안측에서 공포탄을 발사하자 흉기로 자해하여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 [[대검찰청]]에서 조사를 받던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자해였다. *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이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에 대하여 "순진한 생각이거나 다른 불순한 목표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 [[2004년]] [[9월 9일]] == *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정부와 여당에 국가보안법 폐지 철회를 요구한 반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측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확인하다. * 1400여 명의 국가 원로들이 모여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선언하다. * 한국국학진흥원의 김순석 수석연구원은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팔도지도에 [[간도]]와 [[쓰시마섬|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고 밝혔다.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였다. 이 테러로 적어도 8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인도네시아 경찰은 이 테러를 제마 이슬라미야라는 이슬람 단체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량강도]] 김형직군에서 대규모 폭발이 있었다. 지난 [[룡천 열차폭발 사고]]보다 큰 피해가 난 것으로 추정되며, 인공위성에도 포착되었는데 수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폭파가 원자력 발전소 폭파로 잘못 포착되어서 언론에 보도되다. == [[2004년]] [[9월 8일]] == * 한국 국회의 행정자치위원회에서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의 개정안을 상정하여 심의에 들어갔다. 이 상정안이 통과되기 바로 전에 행자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발하여 집단 퇴장하였고,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소속 의원들만이 투표하여 이 개정안을 상정하다. *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FIFA 월드컵]] 예선에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과 맞붙어 2:1 역전승을 거두다. == [[2004년]] [[9월 6일]] == * 한국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하여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고 정부 당국자가 밝혔다. (참고 : [[간도 협약]]) * 검찰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20여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다. == [[2004년]] [[9월 5일]] == * [[노무현]] 대통령이 MBC "시사매거진 2580"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담을 진행하던 도중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다. * 야구선수와 연예인들에 대한 [[병역비리]] 수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송승헌]], [[한재석]], [[장혁]] 등의 연예인이 연루되었으며, [[한재석]]은 [[11월 15일]], [[송승헌]]과 [[장혁]]은 [[11월 16일]] 군에 입대했다. == [[2004년]] [[9월 3일]] == * [[경기도]] [[포천]] 육군 00부대에서 대전차화기 [[PZF-3]] 오발사고가 발생해 파편상을 입은 3명이 숨지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러시아]] 북오세티야의 학교 인질극이 러시아 특수부대의 강경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많은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측된다. == [[2004년]] [[9월 2일]] == * [[2000년]] 1월-2월에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동위원소]] 분리 [[레이저]] 연구장치를 이용한 [[우라늄]] 분리실험을 했으며, 이를 [[국제원자력기구]]에 알려 현재 사찰단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국 정부가 2일 오후 발표. 실험을 통해 추출한 우라늄은 0.2g에 불과한 실험용 샘플 수준이라고 밝혔으나, 외국 언론과 미국, 일본 등은 이번 사건에 대해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 [[이영훈 (경제학자)|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100분 토론"에 참가하여 토론을 벌이던 중 "위안소 업소 주인의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위안부는 공창"이라는 발언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 [[2004년]] [[9월 1일]] == * [[러시아]] [[북오세티야공화국]] [[베슬란]] 시의 한 [[학교]]에서 [[체첸]] 반군에 의한 인질 사태가 벌어지다. (~9월 3일까지) 인질 1000여 명 이상 사상. {{위키공용|Current events}} [[분류:2004년 9월|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Infobox scientist | birth_name = Francis Harry Compton Crick | honorific_suffix = {{post-nominals|country=GBR|OM|FRS|size=100%}} | name = Francis Crick | image = Francis Crick crop.jpg | image_size = | caption = | birth_date = {{출생일|1916|6|8|df=yes}} | birth_place = 잉글랜드 [[노샘프터션주]] 웨스턴 파벨 | nationality = 영국 | death_date = {{사망일과 나이|2004|7|28|1916|6|8|df=yes}} | death_place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 occupation = {{hlist|분자생물학자|생물리학자|신경과학자}} | field = {{Plainlist| * [[물리학]] * [[분자생물학]]}} | workplaces = {{Plainlist| * [[케임브리지 대학교]]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 [[캐번디시 연구소]] * [[분자생물학 연구소]] * [[소크 연구소]]}} | education = | alma_mater = {{Plainlist|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런던 대학교]] (BSc) * [[케임브리지 대학교]] (PhD)}} | doctoral_advisor = [[맥스 퍼루츠]]<ref name="Obituary">{{저널 인용| last1 = Rich | first1 = A. | author-link1 = Alexander Rich| last2 = Stevens | first2 = C. F. | author-link2 = Charles F. Stevens| doi = 10.1038/430845a | title = Obituary: Francis Crick (1916–2004) | journal = Nature | volume = 430 | issue = 7002 | pages = 845–847 | year = 2004 | pmid = 15318208 |bibcode = 2004Natur.430..845R | s2cid = 686071 | doi-access = free }}</ref> | doctoral_students = 없음<ref name=Obituary/> | thesis_title = Polypeptides and proteins: X-ray studies | thesis_url = http://ethos.bl.uk/OrderDetails.do?uin=uk.bl.ethos.598146 | thesis_year = 1954 | known_for = {{Plainlist| * [[DNA]] 구조 * [[센트럴 도그마]] * [[의식]]}} | prizes = | spouse = {{Plainlist| * {{결혼|루스 도린 더드|1940|1947|end=div.}} * {{결혼|오딜 스피드|1949}}}} | children = 3명 | signature = Francis Crick signature.svg | website = {{URL|www.crick.ac.uk/about-us/francis-crick}} | 이름 = 프랜시스 크릭 {{노벨상 딱지}} }}'''프랜시스 크릭'''({{lang|en|Francis Harry Compton Crick, [[메리트 훈장|OM]]}}, [[1916년]] [[6월 8일]] ~ [[2004년]] [[7월 2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이다. [[노샘프턴셔주]]에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는 [[생물학]]의 연구에 집중한다. 때마침 195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유학 중이던 [[미국]]의 젊은 생물학자 [[제임스 D. 왓슨]]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두 과학자는 서로의 중점 연구분야에 동의, [[1953년]] [[4월 25일]] [[DNA]]의 [[이중 나선]]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ref>{{저널 인용 |성1=왓슨 |이름1=제임스 |성2=크릭 |이름2=프랜시스 |날짜=1953년 4월 25일 |제목=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 |url=https://www.nature.com/articles/171737a0 |저널=네이처 |출판사= |권= |호=171 |doi=10.1038/171737a0 |확인날짜= |쪽=737–738 }}</ref> 이 논문은 발표 당시 학계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으나, 생물학이 점차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이 논문에서 제시된 DNA 구조의 중요성과 타당성이 인정되어 [[1962년]] 두 사람과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상]]을 수상한다. 지구 생명의 외계기원설(우주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의식에 대한 그의 책으로는 《[[놀라운 가설]]》이 번역되어 있다. == 신경과학과 기타 관심분야 == [[파일:Decisionbrain.jpg|섬네일|오른쪽|사람들이 시각 자극에 대한 의식적 결정을 내린 한 [[FMRI]] 실험 결과. 뇌에서 주황색의 작은 구역이 의사 결정 과정과 관련된 활동의 패턴을 보여 준다. 크릭은 인간의 두뇌 기능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의 발견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 크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은 그의 오랜 과학 경력의 절정이었지만,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 학장직을 고사하고 1977년 30년간 몸담았던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제임스 D. 왓슨]]은 2003년 [[DNA]] 구조 발견 50주년을 기념하는 한 케임브리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지난 세기중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취한 가장 우둔한 조치중 하나는 프랜시스 크릭이 1958년에 [[아서 밸푸어]] [[유전학]] 교수직에 응모했을 때 거절한 것이었음은 아마 꽤 잘 유지된 비밀이다. 그때 그들은 일련의 논쟁을 거쳐 프랜시스를 거절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거기에 담긴 뜻인 즉 우리를 전선으로 밀어내지 마라는 것이었다." 겉으로 "꽤 잘 유지된 비밀"은 200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소라야 드 샤다레비앙의 《생명의 설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분자생물학》에 이미 기록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 분자생물학에 미친 그의 중요한 공로는 199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 제4권(1870년 - 1990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유전학과의 공식 웹사이트<ref>{{웹 인용 |url=http://www.gen.cam.ac.uk/About/News/departmenthistory.htm# |제목=University of Cambridge, Department of Genetics<!--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4-1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309082505/http://www.gen.cam.ac.uk/About/News/departmenthistory.htm# |보존날짜=2009-03-09 |url-status=dead }}</ref>에 따르면, 교수직 선거인단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어서 당시 대학 부총장 로드 아드리언의 절충을 요구했다. 로드 아드리언은 그 교수직을 먼저 대안 후보 귀도 폰테코르보에게 제안하자, 그는 고사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크릭에게 교수직을 제안하자, 그도 고사했다는 것이다. 크릭은 1976년에 캘리포니아 [[라 호이아]]의 [[소크 연구소]]({{lang|en|Salk Institute of Biological Studies}})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크릭은 1960년부터 이 연구소의 비상근 연구원이었다. "나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고 크릭은 썼다. 안식년이 끝나자 크릭은 [[소크 연구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의 교수를 겸했다. 그는 [[신경해부학]]을 독학하고 [[신경과학]]의 다른 여러 분야를 공부했다. 그는 분자생물학에서 빠져 나오는 데 몇 년 걸렸다. 그는 마침내 1980년대에는 그의 새 관심사였던 [[의식 (심리철학)|의식]]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얼마나 미친 추구인가》는 왜 그가 분자생물학을 떠나 신경과학으로 돌아섰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크릭이 이론적 신경과학분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다음 몇가지는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 신경과학 안에 많은 하위분야가 서로 동떨어진 채 상호교류가 없었다. * 행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뇌를 암상자로 취급했다. * 많은 신경생물학자들은 의식을 금기의 주제로 여겼다. 크릭은 자기가 의식에 관련된 여러 하위분야 전문가들 사이의 건설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함으로써 신경과학의 발달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퍼트리샤 처칠랜드]] 같은 관련 철학자들과도 협력했다. 크릭은 [[크리스토프 코흐]]와 협력관계를 맺고 199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의식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크릭은 의식에 관한 자신의 이론적 연구를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수백 밀리초 동안에 뇌가 어떻게 시각적 인식을 일으키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의식은 아직껏 잘 알려지지 않은 단기 메모리 과정을 포함하는 만큼 매우 신비한 것 같다고 크릭과 코흐는 인정했다. 크릭은 신경생물학이 어떻게 해서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의식을 분자적, 세포적, 행동과학적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음을 밝히는 책도 출판했다.<ref>''The Astonishing Hypothesis: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by Francis Crick. (Scribner reprint edition, 1995) {{ISBN|0-684-80158-2}}</ref> 크릭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신경과학은 이제 뇌가 어떻게 의식이라는 경험을 일으키는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크릭은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상세한 정보 위에 세워지지 않은 인공지능형 정신기능 모형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 서훈 == * 1991년 [[메리트 훈장]](OM)<ref>{{저널 인용 |성= |이름= |날짜=1991-11-29 |제목=Honours and Awards |번역제목= |url=https://www.thegazette.co.uk/London/issue/52730/page/18348 |언어=en |저널=The Gazette |위치=런던 |출판사= |호=52730 |쪽=18348 |확인날짜=2017-04-20 }}</ref> == 같이 보기 == * [[놀라운 가설]] (1994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자}}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자}} {{1962년 노벨상 수상자}} {{전거 통제}} {{기본정렬:크릭, 프랜시스}} [[분류:1916년 출생]] [[분류:2004년 사망]] [[분류:잉글랜드의 유전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인문주의자]] [[분류:잉글랜드의 불가지론자]] [[분류:영국의 신경과학자]]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분자생물학자]] [[분류:종교 비평가]] [[분류:회의주의자]] [[분류:유물론자]] [[분류: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분류:잉글랜드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메리트 훈장]]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로열 메달 수상자]] [[분류:노샘프턴 출신]]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 동문]] [[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동문]]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대장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배종발달설]] [[분류:DNA]] [[분류:꿈]]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처칠 칼리지 교수]] [[분류: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 수상자]] [[분류:잉글랜드의 신경과학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3-5-24}} {{언어학자 정보 |이름 = 값찾기 |원어이름 = {{lang|fr|Ferdinand de Saussure}} |그림 = 값찾기 |그림크기 = |출생일 = 값찾기 |출생지 = 값찾기 |사망일 = 값찾기 |사망지 = 값찾기 |필명 = |별칭 = |직업 = 값찾기 |언어 =값찾기 |국적 = 값찾기 |학력 = 값찾기 |활동 기간 = |등단시기 = |등단작 = |주제 = 값찾기 |사조 = 값찾기 |주요 작품 = 값찾기 |수상 = 값찾기 |스승 = 값찾기 |제가 = 값찾기 |배우자 = 값찾기 |부모 = 값찾기 |형제 = 값찾기 |동거인 = 값찾기 |자녀 = 값찾기 |친척 =값찾기 |서명 = 값찾기 |웹사이트 = |묘소 = 값찾기 |묘비 = 값찾기 }} '''페르디낭 드 소쉬르'''({{llang|fr|Ferdinand de Saussure}},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이후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회학]]에서도 구조주의 사회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 업적 ==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중요 개념 중 [[공시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과 [[통시 언어학]](diachronic linguistics)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소쉬르의 제자들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그의 사후([[1916년]])에 출판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가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의 제자였으나 그들의 이성과 존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언어 현상을 전체로서 체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드 소쉬르의 최초의 논문이자 가장 중요한 저작인 1878년의 ''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도유럽어족]]의 음성체계에는 이미 알려진 음 이외에 소멸한, 음가를 알 수 없는 한 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덴마크]]의 한스 프레데리크 헨드릭센({{lang|da|Hans Frederik Hendriksen}})이 [[히타이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소쉬르가 언급한 바로 그 위치에서 어떤 [[후두음]]을 발견함에 따라 드 소쉬르의 이론의 정당성은 확고해졌다.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언어세계 == * 소쉬르는 언어 세계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나눈다.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 사용, 개인적인 언어 스타일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말하는 스타일이나 각 지방의 사투리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발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추상적 체계를 랑그라고 했다.<ref>원용진, 《새로 쓴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한나래, 2010, p. 277-278</ref> 예를 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랑그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파롤인 것이다. (바로 앞의 내용은 거꾸로 설명한게 아닐지? "예를 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파롤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랑그인 것이다."가 맞지 않을지?) * 기호의 자의성 기호의 자의성(arbitrary)이란 기표와 기의 간 연결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는 말이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기표인 음성의 연속과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과 아무런 자연적·내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므로 자의적이다. 또한 기표는 시간의 선상에서 전개된다. 기표는 청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음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이 음의 길이는 시간의 선이란 차원에서 헤아릴 수 있다. 언어 기호는 언어 연쇄의 선상에 놓이는 순서와 위치에 따라 변별적 단위가 되고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언어 기호의 성질을 선조성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기호의 특성은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의 제1의 원리와 제2의 원리로 설명된다(소두영, 1991).<ref>《네이버 지식백과》,문화 연구자, 2013.02.25., 커뮤니케이션북스</ref> * 언어의 가치 기호의 의미는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속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의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는 관계에 의해 부정적으로(negatively) 규정된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표의 차이로 인해 기의가 구성된다. == 같이 보기 == * [[얀 니에치스와프 보두앵 드 쿠르트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기본정렬:소쉬르, 페르디낭 드}} {{토막글|과학자|언어학}} [[분류:페르디낭 드 소쉬르| ]] [[분류:1857년 출생]] [[분류:1913년 사망]] [[분류:스위스의 언어학자]] [[분류:스위스의 기호학자]] [[분류:인도유럽어학자]] [[분류:구조주의자]] [[분류:제네바 출신]] [[분류:소쉬르가]] [[분류:제네바 대학교 동문]]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독일에 거주한 스위스인]] [[분류:언어적 전회]] [[분류:19세기 수필가]] [[분류:20세기 수필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Newtons cradle animation book.gif|섬네일]] [[파일:Orbital motion.gif|섬네일|right|261x261px|alt=animation of orbital velocity and centripetal acceleration|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의 궤도 운동 그림. 수직 속도 및 가속도(힘) 벡터를 고전적 해석을 통해 나타냄]] {{고전역학}} {{물리학}} '''고전 역학'''<ref>한국물리학회 물리학용어집 https://www.kps.or.kr/content/voca/search.php?page=3&et=en&find_kw=mechanics</ref>(古典力學, {{llang|en|classical mechanics}})은 [[투사체]], [[기계]] 부품, [[우주선]], [[행성]], [[별]], [[은하]] 등의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물리 이론]]이다. 고전역학은 [[물체]]에 작용하는 [[힘 (물리)|힘]]과 [[운동 (물리학)|운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물리학]]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을 만든 [[아이작 뉴턴|뉴턴]]의 이름을 따 "'''뉴턴 역학'''"이라고 불린다. 고전역학은 다시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하나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 움직이지 않는 물체들을 다루는 [[정역학]]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를 다루는 [[동역학]]이다. ([[역학 (물리학)|역학]] 참조) 고전역학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서는 [[상대성이론]], 원자단위와 같은 극히 미세한 스케일의 계에서는 [[양자 역학]]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리고 그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계에서는 [[양자 마당 이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전역학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여전히 아주 유용하다. # 다른 이론들에 비해 비교적 수학적으로 간단하여 쉽게 사용할 수 있다. # 대략적으로 옳은 결과를 주는 범위가 아주 넓다. 실제로 고전 역학은 다음과 같은 물체들의 운동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 일상생활에서 보는 물체 ([[팽이]]나 [[야구공]]) # 천체와 같은 극히 거시적인 물체 ([[행성]]이나 [[은하]]) # 극미한 영역의 물체 (유기[[분자]]) 고전역학은 따로 발전된 고전 전자기학,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 거의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더 심각한 모순점들이 드러나 현대 물리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고전 비상대론 전기역학은 [[에테르 (물리)|에테르]] 매질에 대해 [[빛의 속도]]가 일정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이 예측은 고전 역학과 융화될 수 없었고 그러한 사실이 특수상대론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는 [[엔트로피]]가 잘 정의될 수 없는 양이 되는 [[깁스 역설]]과 [[흑체]]복사의 자외선 영역에서의 무한한 에너지의 예측 등의 모순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양자 역학]]이 성장하게 되었다. == 이론 세부 설명 == 여기서 고전 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해하기 쉽게 점입자 - 즉 무시할 만큼 작은 크기를 가지는 물체 - 만 다루고자 한다. 적은 수의 맺음변수(parameter)를 가지고 ''점입자''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 그 몇몇 맺음변수는 위치, 질량, 그리고 점입자에 가해지는 힘이다. 맺음변수들 하나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고전 역학으로 기술할 수 있는 물체 중에서 어떠한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진짜 점입자들(예: [[전자]])은 [[양자 역학]]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다. 크기를 가지고 있는 물체들은 점입자라고 가정한 물체보다 훨씬 복잡한 운동 형태를 가진다. 왜냐하면 내부 구조 또한 다른 운동의 형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수가 회전을 걸어 던진 [[야구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구공과 같은 물체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입자의 집합체로 생각하여 점입자에 대해 얻은 결과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체 속 입자 간의 거리가 다른 물체와의 거리보다 충분히 작다면 이 집합체가 점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야구공 같은 집합체를 점입자로 취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 위치와 위치의 도함수 === 점입자의 ''위치''는 [[공간]] 내의 임의의 고정된 한 점, 때때로 이것을 ''원점'' 즉 '''O''', 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지며, '''O'''에서 입자까지의 [[벡터 공간|벡터]] '''r'''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점입자는 움직이거나 변화하기 때문에 '''r'''은 ''t''의 함수이다. 여기서 [[시간]]은 임의의 초기시간 이후로 지나간 시간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알려져 있기로는 [[갈릴레이의 상대성]])에서는 시간은 모든 기준틀에서 절대적이다. ==== 속도 ==== ''[[속도]]'', 즉 시간에 따른 위치의 변화율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math>\mathbf{v} = {d\mathbf{r} \over dt}</math>.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에서는 속도는 직접 더하고 빼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만약 자동차 A가 60&nbsp;km/h의 속도로 50&nbsp;km/h의 속도로 달리는 다른 자동차B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이럴 때 60&nbsp;km/h로 달리는 자동차A의 관점에서 보면 자동차 A는 속도60-50=10&nbsp;km/h로 달리고 있는 다른 자동차 B의 옆을 지나가는 것이다. 간단한 수식을 사용해보자. 앞에서 논의한 자동차 B의 기준좌표계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면 [[벡터 (물리)|벡터]] '''u''' = ''u'''''x''' ('''x'''는 x 방향의 단위벡터), 자동차A가 바라보는 자동차B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math>\mathbf{v'} = \mathbf{v} - \mathbf{u} </math> ==== 가속도 ==== ''[[가속도]]''(속도의 변화율)는 : <math>\mathbf{a} = {\frac{d\mathbf{v}}{dt}}</math>. 가속도 벡터는 속도의 크기가 변할 때, 방향이 변할 때 혹은 둘 다 변할 때 변한다. 만약 '''v'''의 크기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때때로 감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속을 포함해서 속도의 어떤 변화라도 간단히 가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작은 경우이다. :<math> \mathbf{a} < 0 </math> 그렇다면 가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큰 경우가 된다. :<math> \mathbf{a} > 0 </math> ==== 기준틀 ==== 두 개의 기준틀(Frames of Reference) S와 S'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S'는 S에 대해 상대속도 u로 움직이고 있다. S와 S'에서 각각 바라보는 하나의 사건(event)이 있다. 두 기준틀에서 바라보는 그 사건에 대한 연관성은 다음과 같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먼저 질량 m을 가지는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S에 있고, 당신의 친구는 S'에 있으며 당신의 친구가 속도 u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바라보는 물체의 속도는 v이며, 당신의 친구가 바라보는 속도는 v'이다. 이런 경우에 v와 v'의 연관성은 다음의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v'''' = '''v''' - '''u''' (u는 기준틀 사이의 상대속도이다.) * '''a'''' = '''a''' (입자의 가속도는 기준틀에 상관없이 모두 같다.) * '''F'''' = '''F''' (왜냐하면 '''F''' = ''m'''''a''') (입자에 작용하는 힘은 기준틀에 상관없이 모두 같다; [[뉴턴의 운동법칙|뉴턴 법칙]]을 참고) * [[빛의 속도|광속]]은 일정하지 않다. * [[맥스웰 방정식]]의 모양은 다른 기준틀에서 같은 모양을 유지하지 않는다. === 힘; 뉴턴 제2법칙 === [[뉴턴의 운동법칙|뉴턴의 제2법칙]]은 한 입자의 [[질량]]과 속도와 힘(벡터양)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m''은 입자의 질량 '''F'''는 그 입자에 가해지는 모든 [[힘 (물리)|힘]]들의 벡터합(외부에서 가해진 ''알짜''힘)이다. 그래서 뉴턴의 제2법칙은 다음{수식(1)}과 같다. :<math>\mathbf{F}_{net} = {\frac{d(m \mathbf{v})}{dt}}</math> 이 양 ''m'''''v'''는 [[운동량]]이라 불린다. 보통 질량 ''m''은 시간에 대해서 일정하며 이러한 경우에 뉴턴의 법칙은 좀 더 간단한 형태 {수식(2)} :<math>\mathbf{F}_{net} = m \mathbf{a}</math> 로 바뀐다. 여기서 a는 위에서 정의한 것처럼 가속도이다. 항상 질량(''m'')이 시간(''t'')에 대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질량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예도 있다. 먼 달로 쏘아 올린 로켓을 생각해 보자. 로켓의 질량은 로켓이 멀리 날아갈수록 줄어든다. 연료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위와 같은 간단한 형태{수식 (2)}는 틀린 것이 되며 뉴턴의 제2법칙의 완전한 형태{수식(1)}를 사용해야만 한다. 뉴턴의 두 번째 법칙만으로 한 입자의 운동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다. '''F'''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식은 그 입자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항력]]을 다음과 같이 입자의 속도에 대한 함수로 모형화할 수 있다. : <math>\mathbf{F}_{\rm R} = - \lambda \mathbf{v}</math> 여기에서 λ는 양의 상수라고 하자. 일단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을 구하고 나면 그 식을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대입하여 ''운동 방정식''이라고 부르는 [[미분 방정식|상미분 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앞에서 든 예를 계속 써서, 그 입자에 작용하는 힘이 마찰력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운동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 <math>- \lambda \mathbf{v} = m \mathbf{a} = m {d\mathbf{v} \over dt}</math>. 위 식을 [[적분]]하면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 <math>\mathbf{v} = \mathbf{v}_0 e^{- \lambda t / m}</math> 여기에서 '''v'''<sub>0</sub>는 초기 속도를 뜻한다. 즉 이 입자의 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수 함수|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 이 식을 다시 한 번 적분하면 입자의 위치 '''r'''을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다. 대표적인 힘의 예로 [[중력]]과 [[전자기학]]에서 나오는 [[로렌츠 힘]]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뉴턴의 셋째 법칙을 써서 입자에 작용하는 힘을 유도할 수도 있다. 어떤 입자 A가 다른 입자 B에 '''F'''라는 힘을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B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력'' -'''F'''를 A에 대해 작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에너지 === 힘 '''F'''를 한 입자에 주게되면 입자는 변위 δ'''r'''만큼 움직이며 이 힘에 의해 ''행하여진 일''은 스칼라양으로 다음과 같다. : <math>\delta W = \mathbf{F} \cdot \delta \mathbf{r}</math>. 입자의 질량이 일정하다고 하고 그 입자에 행하여진 총 일은 δ''W''<sub>total</sub> 이라고 한다면,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의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을 수 있다. : <math>\delta W_{\rm total} = \delta T</math>, 여기서 ''T''를 [[운동 에너지]]라고 부른다. 점입자의 경우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 <math>T = {m |\mathbf{v}|^2 \over 2}</math>. 여러개의 입자로 구성된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각각의 입자들의 운동에너지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특별한 힘의 종류인 보존력은 [[퍼텐셜 에너지]]의 스칼라 함수 V의 [[그라디언트]]로 나타낼 수 있다. : <math>\mathbf{F} = - \nabla V</math>. 입자에 작용하는 모든 힘이 보존력이라 하고 V를 총 퍼텐셜 에너지라하면 총 퍼텐셜 에너지는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에 대응하는 퍼텐셜 에너지의 합으로 얻어낼 수 있다. 그러면, : <math>\mathbf{F} \cdot \delta \mathbf{r} = - \nabla V \cdot \delta \mathbf{r} = - \delta V</math> : <math>\Rightarrow - \delta V = \delta T</math> : <math>\Rightarrow \delta (T + V) = 0</math>. 이것이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그리고 총 [[에너지]] <math>E = T + V</math>는 시간에 대해서 상수이다. 우리가 보통 다루는 힘이 보존력이기 때문에 이 법칙은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 추가 결과 === 뉴턴의 운동 법칙은 입자계에 대한 유용한 결과를 얻게 해준다. 참고 [[각운동량]]. 고전역학에 대응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체계가 있다. [[라그랑지안 역학]]과 [[해밀토니안 역학]]이 그것이다. 이 둘은 뉴턴 역학과 동등하나 문제를 풀 때 더 유용한 경우가 있다. 이 둘과 현대 물리학 체계들은 보통, 힘이라는 개념을 우회해 에너지 같은 다른 물리량을 사용하여 역학계를 다룬다. === 예시 === 두 개의 기준틀을 생각하자.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기준틀에 대해서 상대적인 속력 u로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면 차 한 대가 다른 차 한대에 대해서 10&nbsp;km/h로 지나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u는 10&nbsp;km/h가 될 것이다. 두 기준틀 ''S'' 와 ''S'''이며, '''''S''''은 ''S''에 대해서 u의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사건이 ''S''기준틀에서는 시-공간 좌표로 (''x'',''y'',''z'',''t'') 로 표시되고, ''S'''에서는 (''x'''',''y'''',''z'''',''t'''')''' 로 표시된다. [[갈릴레이-뉴턴 상대론]]에서 어떤 사건의 시-공간 좌표는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에 의해서 규정된다. 시간이 어떤 기준틀에서도 절대적이라고 가정하면, x방향으로 상대속도가 u만큼 차이나는 기준틀간의 시-공간 좌표는 다음의 관계를 갖는다. (''x''' = 0 이어서 ''x'' = ''ut''라 하자) :''x''' = ''x'' - ''ut'' :''y''' = ''y'' :''z''' = ''z'' :''t''' = ''t'' 이 방정식 4개가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을 정의한다. == 역사 == {{참고|고전 역학의 혁명}} 자연을 지배하는 추상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추상적인 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한 과학자 중 한 명인데 그는 [[피사의 사탑]]에서 대포알 두 개를 떨어뜨리는 유명한 실험을 수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실험에서 그는 두 개의 무게가 다른 물체가 땅에 동시에 떨어진다는 이론을 검증했다.) [[아이작 뉴턴]]경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에서 3개의 [[뉴턴의 운동법칙|운동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했으며 또한 이들 세 법칙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체나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뉴턴 이후로 여러 수학자들의 손을 거쳐가며 고전역학은 더욱 수학적이며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라그랑주 역학]], [[해밀턴 역학]]이 그 예이다. == 같이 보기 == * [[핼리]] * [[고전 역학의 혁명]] * [[과학사]] * [[운동학 (물리학)]] == 각주 == <references /> == 참고 문헌 == * {{서적 인용|저자=문희태|날짜=2006|제목=고전역학|판=개정판|위치=서울|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 {{서적 인용|이름=Atam P.|성=Arya|제목=대학 고전역학|판=2판|기타=윤진희, 차동우 역|위치=서울|출판사=북스힐|날짜=2000|isbn=9788988441428|url=http://www.bookshill.com/shop/shopdetail.html?branduid=83|확인날짜=2013-07-0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201341/http://www.bookshill.com/shop/shopdetail.html?branduid=83#|보존날짜=2016-03-04|url-status=dead}} * {{서적 인용|저자링크=리처드 파인먼|성=Feynman|이름=Richard|제목=Lectures on Physics|isbn=0-7382-0092-1|언어=en}} ** {{서적 인용|저자링크=리처드 파인먼|이름=Richard|성=Feynman|제목=Six Easy Pieces|isbn=0-201-40825-2|언어=en}} ** {{서적 인용|저자링크=리처드 파인먼|성=Feynman|이름= Richard | 제목=Six Not So Easy Pieces|날짜=1998-03|isbn=0-201-32841-0|언어=en}} * {{서적 인용|성=Kleppner|이름=D.|공저자=R. J. Kolenkow|제목=An introduction to mechanics|출판사=McGraw-Hill|날짜=1973|isbn=0-07-035048-5|언어=en}} * {{서적 인용 |이름= Stephen T.|성=Thornton|공저자= Jerry B. Marion|제목= Classical dynamics of particles and systems|연도=2003|출판사= Brooks/Cole|판=5판|언어=en}} * {{서적 인용 |이름=Herbert|성=Goldstein|공저자=Charles Poole, John Safko|제목= Classical mechanics|url=http://www.pearsonhighered.com/educator/product/Classical-Mechanics/9780201657029.page |날짜=2002|출판사=Addison Wesley|판=3판|zbl=1132.70001|언어=en}} * {{서적 인용 | 이름=Vladimir I.|성=Arnold|저자링크=블라디미르 아르놀트|title=Mathematical methods of classical mechanics|판=2판| publisher=Springer | year = 1997|isbn=978-0-387-96890-2|언어=en}}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Rosu, Haret C., "''[http://kr.arxiv.org/pdf/physics/9909035 Classical Mechanics] {{웨이백|url=http://kr.arxiv.org/pdf/physics/9909035 |date=20111216111811 }}''". Physics Education. 1999. [arxiv.org : physics/9909035] * Horbatsch, Marko, "''[http://www.yorku.ca/marko/PHYS2010/index.htm Classical Mechanics Course Notes]''". {{물리학 분야}} {{중력이론}} {{전거 통제}} [[분류:고전역학| ]] [[분류:고전물리학]] [[분류:물리학]] [[분류:물리학 개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철학자 정보 | 이름 = 값찾기 | 원어이름 = Ἀριστοτέληò | 그림 = 값찾기 | 그림설명 = 값찾기 | 문장 = 값찾기 | 문장설명 = 값찾기 | 별명 = 값찾기 | 시대 = | 지역 = | 학파 = | 분야 = 값찾기 | 대표작 = 값찾기 | 업적 = | 영향받음 = 값찾기 | 영향줌 = 값찾기 | 학력 = 값찾기 | 모교 = | 지도교수 = 값찾기 | 논문 = 값찾기 | 소속기관 = 값찾기 | 지도학생 = 값찾기 | 서훈 = 값찾기 | 출생일 = 값찾기 | 출생지 = 값찾기 | 사망일 = 값찾기 | 사망지 = 값찾기 | 사인 = 값찾기 | 안장지 = 값찾기 | 거주지 = 값찾기 | 국적 = 값찾기 | 종교 = | 서명 = 값찾기 | 가문 = 값찾기 | 부모 = 값찾기 | 형제자매 = 값찾기 | 배우자 = 값찾기 | 자녀 = 값찾기 | 친인척 = 값찾기 }} '''아리스토텔레스'''({{llang|grc|Ἀριστοτέλης}}, {{llang|el|Αριστοτέλης|아리스토텔리스}}, {{llang|en|Aristotle|애리스터틀}},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문학)|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고대 그리스 철학|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ref name="global1">{{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제목=인명사전/세계인명/ㅇ/아리스토텔레스}}</ref>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고전역학|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년]] ~ [[1400년]]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기 기독교|초대교회]]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서방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ref name="global1" />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ref>{{웹 인용 |last = Cicero |first = Marcus Tullius |authorlink = |coauthors = |title = flumen orationis aureum fundens Aristoteles |work = Academica |publisher = |date = 106BC-43BC |url = http://www2.cddc.vt.edu/gutenberg/1/4/9/7/14970/14970-h/14970-h.htm#BkII_119 |format = |doi = |accessdate = 2007-01-25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913194838/http://www2.cddc.vt.edu/gutenberg/1/4/9/7/14970/14970-h/14970-h.htm#BkII_119 |보존날짜 = 2007-09-13 |url-status = dead }}</ref>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ref>[[Jonathan Barnes]], "Life and Work"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ristotle'' (1995), p. 9.</ref> == 생애 == 그리스 북부 [[할키디키반도]]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 2세]]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기원전 367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 동안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쓰여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 전투|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 형이상학== {{본문|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서 <자연학(Physics)>의 뒤(Meta)에 놓였기 때문에 <자연학의 뒤의 서(Meta-Physics)>라고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 신학)'라 하였으며,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은 의사 가문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하였다. Hoi ik ben Henk de vries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學),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 윤리학 == {{본문|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한편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평등'(equa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Nicomachean_Ethics_(Chase)/Book_Five 위키문헌 영문판-니코마코스 윤리학 Book 5]</ref> == 논리학 == {{본문|오르가논}} 《분석론 전서》(''Prior Analytics'')의 편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개념은 19세기에 [[수리논리학]] 분야에서의 발전이 있기까지 서양 논리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마누엘 칸트|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관한 이론이 [[:en:deductive inference|연역 추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조금 더 설명을 추가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삼단 논법’이다. [[삼단 논법]]은 연역적 추론에 바탕한 논증이다. 삼단 논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적 방법이다.<ref>{{서적 인용|url=|제목=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성=마이클 앨러비, 데릭 예르트센|이름=|날짜=2011-11-15|출판사=한승|쪽=20|확인날짜=}}</ref> == 자연관 ==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보편성을 향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보편성은 특정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와 같은 보편성은 그들의 원형(原型) 또는 전형으로써 주장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특정한 것에서 보편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사물들의 본질(essence of things)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적인 방법이란 특정한 현상에 대한 연구로부터 본질에 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하며, 이는 [[이데아론|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form)이라 불린 것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이들과 유사한 형태로의 관상(contemplation), 다시 말해 인식하는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하향적인 과정을 취한 플라톤의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라톤의 방법이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의 연역 추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방법은 [[귀납]]적이면서 [[연역]]적이라 할 수 있다.<ref>{{서적 인용 | 성 =Jori | 이름 =Alberto | 제목 =Aristotele | 출판사 =Bruno Mondadori Editore | 연도 =2003 | 위치 =Milano }}</ref>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부분이며, 이는 현대의 물리학, 생물학 등의 분야를 포괄한다. 현대에 들어서 철학(''philosophy'')은 윤리학이라든지 논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과 같은 보다 더 포괄적이고(generic) 모호한 분야에 한정되었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계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를 [[과학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활동 분야는 지적 탐구(intellectual inquiry)의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 4원소설 ===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불'''(Fire) * 차갑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흙'''(Earth) * 뜨겁고 습한 성질을 지닌 '''공기'''(Air) *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닌 '''물'''(Water)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 사원인 === 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을 들었다(四因論). 그는 [[:en:Four causes#Material cause|재료의 측면]], [[:en:Four causes#Formal cause|형상의 측면]], [[:en:Four causes#Efficient cause|작용의 측면]], 그리고 [[:en:Four causes#Final cause|목적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답하였다. * [[:en:Four causes#Material cause|질료인]]은 대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탁자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나무이며, 차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고무와 철이 되는 것이다. 행동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며, 어떤 특정한 것이 다른 것보다 우위에 위치하는 것 또한 아니다. 둘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즉, 책상은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상이 있는 것이다. * [[:en:Four causes#Formal cause|형상인]]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 즉 정의, 형태, 특성이나 원형(原型, archetype)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을 나타낸다. 기초적인 원리나 일반적인 법칙에 의거한 설명을 활용한다. 형상인은 인과관계의 필수적인 것만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물건이 존재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가지는 청사진이 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책상은 책상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en:Four causes#Efficient cause|작용인]]은 변화 또는 변화의 끝이 처음 시작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무언가가 만들어지게 만드는 무언가와 무언가가 변화를 겪게 만드는 변화'를 결정하며,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함으로써 변화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 근거로 작용한다. 인과 관계에 관한 현대적인 이해를 반영하며, 특정한 현상 또는 요인으로서의 근거에 관한 개념을 포괄한다. 즉, 책상은 어떤 목수가 이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en:Four causes#Final cause|목적인]]은 사물이 있는 목적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목적성을 띄거나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포함한다. 목적인은 대상이 원래 쓰이는 용도에 관한 것이다. 즉, 책상은 위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위에 책을 놓고 책을 읽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또한 의지나 동기, 합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같이 행동에 대한 목적을 부여하는 정신적인 원인에 관한 현대적인 개념을 포괄한다. === 자연학 ===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달리 중요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 기록하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설명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을 발견하였고, [[꿀벌]]의 생태나 [[닭]]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種)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 천문학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反)[[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氣)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에테르 (고대 원소)|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턴]]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 광학 ===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광학에 관한 뛰어난 이론의 소유자였다. 기원전 350년에 쓰여진 그의 저서 '난제들'(''Problemata'')에 초창기의 카메라에 해당하는 [[:en:Camera obscura|암상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담겨 있다. == 교육 사상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생활의 영위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그는 개인이 타인과 접촉할 때 이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교육체계를 요망했다. 인간의 최고기능은 사고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는 데 있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통한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보고, 이 행복은 중용(中庸)이란 덕과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중용의 덕을 가진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원(成員)으로 교육할 수 있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교육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직업적(생산적) 교육이 아니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토록 하는 교육인데, 이를 위한 교육으로 읽기·쓰기·셈하기·음악·체육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은 문화인의 교양을 쌓는 것이며, 음악은 한가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체육은 건전한 신체를 갖게 하여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더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육의 조직이나 내용은 아동의 성장형태에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아에게는 동물놀이·신체적 활동·이야기 등으로 교육시키며, 14세 이전의 아동들에게는 도덕적·신체적 교육을 중시하여 체육·음악·독서·쓰기 등을 가르치되 이론이나 법칙의 교설(敎說)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한 안정된 습관을 확립케 하기 위해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21세가 될 때까지의 청년들은 수학·문학·천문·음악·문법·시·수사학·윤리학·정치학 등 지적인 학습을 시켜야 하며, 21세 이상의 대상자들에게 과학과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방법은 자연발달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었다. 처음의 불합리한 신체적 교육에서 점차로 합리적인 정신적 교육을 지향하며, 정신교육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욕망에서 합리적인 이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체적 교육에서 습관으로 향상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이성의 교육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진정한 교육방법이라고 했다. 즉 체육(體育)·훈육(訓育)·교수(敎授)의 3분야로 나누었던 것이다. == 여성관 == {{본문|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은 중세 말기까지 그를 절대 권위로 신봉한 서양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로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 저작 == ;논리학 {{본문|오르가논}} * 범주론(범주들) * 명제론(명제에 관하여) * 분석론 전서 * 분석론 후서 * 변증론(토포스론, 토피카) * 소피스트적 논박 ; 자연학 *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자연학]] * 천체에 관하여 *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 기상학 * <s>세계에 관하여</s> * 영혼에 관하여 * 자연학 논문집 ** 감각과 감각 대상에 관하여 ** 기억과 기억해냄에 관하여 ** 잠과 깨어 있음에 관하여 ** 꿈에 관하여 ** 잠 속의 예언에 관하여 ** 장수와 단명에 관하여 **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에 관하여 ** 호흡작용에 관하여 * 동물 탐구(동물지) * 동물의 부분들에 관하여(동물의 몸에 관하여) * 동물의 움직임에 관하여 * 동물의 나아감에 관하여 * 동물의 발생에 관하여 * <s>소품집</s> ** <s>색에 관하여</s> ** <s>청각대상에 관하여</s> ** <s>관상학</s> ** <s>식물에 관하여</s> ** <s>진기한 이야기들에 관하여</s> ** <s>역학적인 문제들</s> ** <s>자연학적인 문제들</s> ** <s>분할되지 않는 선에 관하여</s> ** <s>바람의 위치와 이름</s> ** <s>멜릿소스, 크세노파네스, 고르기아스에 관하여</s> ; 형이상학 *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 윤리학, 정치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 대 [[윤리학]] * 에우데모스 윤리학 *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 <s>덕과 악덕에 관하여</s> * <s>경제학</s> * [[아테네인]]들의 정치체제 ; 수사학, 시학 * [[수사학]](연설술) * [[시학 (아리스토텔레스)|시학]](창작술) *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치는 연설술 == 같이 보기 == * [[J. L. 아크릴]]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글로벌세계대백과}} * [http://philinst.snu.ac.kr/bbs/download.php?bo_table=supplement&wr_id=17&no=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김남두, 김재홍, 강상진, 이창우] pdf * [http://philinst.snu.ac.kr/bbs/download.php?bo_table=supplement&wr_id=86&no=0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 전헌상] pdf == 외부 링크 == {{위키문헌|저자:아리스토텔레스}} {{위키공용과 분류|Aristotle}} * {{IEP|aristotl}} * {{OL author|OL22105A}} {{포털|철학}} {{윤리학}} {{고대 그리스}} {{위대한 그리스인}} {{전거 통제}} [[분류:아리스토텔레스| ]] [[분류:기원전 384년 출생]] [[분류:기원전 322년 사망]] [[분류:아테나이의 철학자]] [[분류:아테나이의 작가]] [[분류: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물리학자]] [[분류:그리스의 생물학자]] [[분류:그리스의 논리학자]] [[분류:정치철학자]] [[분류:자연철학자]] [[분류:예술철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윤리학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경험론자]] [[분류:우주론자]] [[분류: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철학자]] [[분류:기원전 4세기 작가]] [[분류:알렉산드로스 대왕]] [[분류:기술철학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아리스토텔레스주의]] [[분류: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 [[분류:소요학파]] [[분류:사랑의 철학자]] [[분류:성철학자]] [[분류:그리스의 기상학자]] [[분류:명언가]] [[분류:도덕철학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Azzolino della Ciaja Sonata III frammento 3.JPG|thumb]] {{다른 뜻}} == 소나타의 역사 == === [[바로크 음악|바로크 시대]]의 소나타 === 소나타는 원래 16세기 초 프랑스의 세계적 성악곡인 [[샹송]]이 [[이탈리아]]에 전해져 악기로 연주된 데서 탄생하였다. 이 샹송 형식으로 된 [[오르간]]이나 기악합주용의 곡은 17세기 중엽부터 한창 작곡되어, 당시는 [[칸초네]] 또는 '칸초니 다 소나레'(악기로 연주되는 노래의 뜻)라 하였으나, 이것은 몇 개의 짧은 부분으로 된 1악장 형식의 것이었다. 이후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성악을 위한 [[칸타타]]와 구분하는 용어로 시작되었다. 17세기 후반, [[비탈리]] 부자(父子)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에 의하여 교회 소나타가,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을 중심으로 실내 소나타가 생겼다. 두 소나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 실내 소나타 (Sonata da camera): [[전주곡]] + 2 ~ 4 악장 * 교회 소나타 (Sonata da chiesa): 4 악장 (느리게 - 빨리 - 느리게 - 빨리) 전자는 [[대위법]]적인 스타일을 가졌고, 후자는 일종의 모음곡(組曲)풍인 것으로 양쪽 다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4악장으로 되었다. 그 후 이 두 가지 소나타는 서로 영향을 받다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바로크 음악|바로크 시대]] 소나타의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라는 양식으로 쓰였다. 이것은 화음반주의 낮은음부를 포함하는 독립된 3성부로 된 소나타로, 보통 높은 2성부를 2개의 [[바이올린]]으로 하고, 낮은 1성부를 [[첼로]]와 [[하프시코드]](또는 [[오르간]])로 연주하였다. 이 시대의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영국의 [[헨리 퍼셀|퍼셀]], 프랑스의 [[쿠프랭]], 이탈리아의 [[비발디]], [[스카를라티]], 독일의 [[쿠나우]], [[텔레만]], [[헨델]], [[바흐]] 등이 있다. 특히 바흐는 소나타를 진정 예술적인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 [[고전파 음악|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 이 시기의 소나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표하는 [[빈 고전파]]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낭만주의 음악|낭만파]]에 계승된 다악장형식의 기악곡을 말한다. 소나타는 보통 빠르기나 성격을 달리하는 3~4악장으로 구성된다. # 제1악장 ― 빠르다([[알레그로]]). [[소나타 형식]], 때로는 완만한 도입부를 갖는다. # 제2악장 ― 느리다([[아다지오]]). [[리드]] 형식, 때로는 [[소나타 형식]] 또는 [[변주곡]] 형식. # 제3악장 ― 조금 빠르다([[스케르초]] 또는 [[미뉴에트]]). [[미뉴에트]]-[[트리오]]-[[미뉴에트]] 또는 [[스케르초]]-[[트리오]]-[[스케르초]]의 복합 3부형식. # 제4악장(종악장) ― 빠르다([[알레그로]]). [[론도 형식]] 또는 [[소나타 형식]], 때로는 [[론도 소나타 형식]]이나 [[변주곡]] 형식. 이상은 소나타의 전형적인 악장 구성이다. 그러나 [[고전파 음악|고전파]]의 피아노 소나타나 [[협주곡]]의 대부분은 3악장제(보통 미뉴에트 악장을 생략)를 쓰며, 기타 2악장, 드물게는 1악장 또는 5악장 이상의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월광 소나타]]는 느린 악장으로 시작하여 2악장으로 [[미뉴에트]]를 거쳐서 [[소나타 형식]]의 3악장으로 마친다. 이 같은 형식으로 쓴 피아노곡을 [[피아노 소나타]]라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등의 경우는 보통 피아노 반주를 가진다. 3중주곡, 4중주곡 등도 각기 3개, 4개의 악기로 하는 기악합주를 위한 소나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주곡]]은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파 음악|고전파]]의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스카를라티]], [[클레멘티]], 만하임의 [[슈타미츠|시타미츠]] 부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 [[엠마누엘 바흐]], [[크리스티안 바흐]] 들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하이든]], [[모차르트]]의 손을 거쳐 [[베토벤]]에 의하여 형식과 내용이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 유명한 《[[열정 소나타]]》를 비롯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음악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데 대하여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고 있다. === [[낭만주의 음악|낭만파]] 이후의 소나타 === [[낭만주의 음악|낭만파]] 이후의 소나타에서는 형식의 발전은 없으나 독자의 개성적인 소나타가 많이 생겼다.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베버]],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슈만]], [[쇼팽]], [[프란츠 리스트|리스트]], [[브람스]], [[안토닌 드보르자크|드보르자크]], [[세사르 프랑크|프랑크]], [[카미유 생상스|생상스]], [[가브리엘 포레|포레]] 등이고 현대에서는 [[스크랴빈]], [[드뷔시]], [[레거]],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힌데미트]],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이 있다. == 형식으로서의 소나타 == {{참고|소나타 형식}} '''소나타의 대표적 악장 주기''' {| border="0" width="90%" cellpadding="6" cellspacing="6"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ffffcc;"| 전주<br />가단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eeffff;"| 앨러만드<br />가단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ffeeee;"| 코랜트<br />가단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eeeeff;"| 가보트<br />가단조 |} 코렐리, 트리오 소나타 (작품번호 4-5): 실내 소나타 {| border="0" width="90%" cellpadding="6" cellspacing="6"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ffffcc;"| 그라베이<br />가단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eeffff;"| 푸가<br />가단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ffeeee;"| 안단테<br />다장조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eeeeff;"| 알레그로<br />가단조 |} [[요한 세바스챤 바흐|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가단조(바하 작품번호 1003): 교회 소나타 {| border="0" width="68%" cellpadding="6" cellspacing="6" | align="center" style="width:30%; background: #ffffcc;"| 알레그로<br />라장조 | align="center" style="width:30%; background: #eeffff;"| 안단테<br />사장조 | align="center" style="width:30%; background: #ffeeee;"| 알레그레토<br />라장조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쾨헬 번호|쾨헬번호]] 306): 3악장 소나타 '''3중주 소나타 악기구성''' {| border="0" width="90%" cellpadding="6" cellspacing="6"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dddd00;"| 기본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eeee00;"| 피아노 | align="center" style="width:20%; background: #cccc00;"| 현악 3중주 |}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소나타 형식]] * [[소나타 론도 형식]] * [[소나티네]] == 참고 문헌 ==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악식}} {{전거 통제}} [[분류:소나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소피스트 (플라톤)||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트'''({{llang|el|Σοφιστές}}, {{llang|la|sophistes}}, {{llang|en|sophist}})는 [[고대 그리스]]의 특정 종류의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소피스트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 교육의 촉진에 기여하였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가 되어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열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소피스트들은 궤변론자(詭辯論者)등으로 치부되어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일부 나와 부분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이다. ==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 ==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소피스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 학파는 각자의 주장만을 고집했고, 자연 철학자들은 알맞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런 주장은 자연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난점을 제공했으며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를 초래했다. 회의주의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인간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두 번째는 [[아테나이|아테나]] 사회의 변화이다. [[페르시아 전쟁]](B.C 490~480)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게 되어 아테네 사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소위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 후 선생으로서 소피스트가 출현(대부분 아테네 출신이 아닌 타 지역인)하게 되었고 그들은 노예 국가에 예속된 소피스트들이었으므로 아테네의 관습과 문화를 바꾸는 데 주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피스트는 주로 떠돌이 교사로서 혹은 외교관의 자격으로 아테네에 왔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중 대략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에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아테네인의 사고 방식과 관습을 참신하게 여겼고, 그것들에 대해 탐구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 활동 == [[프로타고라스]]는 개인을 위주로 한 지식의 [[상대주의|상대성]]과 전진성을 강조하였고, 덕의 교사로서는 종래의 귀족적인 덕에 대신하여 욕지(辱知)와 정의와 우애를, 민중 일반이 가르침을 받아 공유(共有)해야 할 폴리스의 덕이라고 역설하였다. [[고르기아스]]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동시에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여 기만과 설득에 의하여 사람들을 시의적(時宜的)인 행동으로 유도해 가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긴장한 비극성을 아류(亞流)인 카리쿠레스와 프라시마코스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배덕적인 것으로 타락시켜 힘이 즉 정의라는 논법을 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케오스의 [[프로디코스]]가 [[고대 아테네|아테네]]를 방문하여 변론의 공연(公演)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자연에서 출발하여 언어·지식을 전달한 문명의 인위적인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란 덕론(德論)이 유명하다. 백과전서적인 관심을 보였던 [[히피아스 (소피스트)|엘리스의 히피아스]]는 전반적인 지식 위에 웅변가와 정치가의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또 자연의 법과 인위의 법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수학을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하였다. == 유명한 소피스트 == * [[프로타고라스]] * [[트라시마코스]] * [[고르기아스]] * [[프로디코스]] * [[히피아스 (소피스트)|히피아스]] * [[안티폰]] * [[크리티아스]] == 같이 보기 == * [[W. K. C. 거스리]] == 참고 문헌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고대의 사상/아테네기의 사상]]}}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전거 통제}} [[분류:고대 그리스의 교육자]] [[분류:철학]] [[분류:학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URI|조사=는}} {{Infobox technology standard | title = 통합 자원 식별자 (URI) | long_name = | native_name = | native_name_lang = | image = | caption = | abbreviation = URI | domain = [[월드 와이드 웹]] }} [[파일:URI syntax diagram es.svg|thumb]] '''통합 자원 식별자'''({{lang|en|Uniform Resource Identifier}}, '''URI''')는 인터넷에 있는 자원을 나타내는 유일한 주소이다. URI의 존재는 인터넷에서 요구되는 기본조건으로서 인터넷 프로토콜에 항상 붙어 다닌다. URI의 하위개념으로 [[URL]], [[URN]] 이 있다. == 표현방법 == 일반 URI와 절대 URI 참조 문법은 [[RFC]] 2396에 처음 정의되었으며, 1998년 8월 출판되었으며,{{sfnp|RFC 2396|1998}} <nowiki>RFC</nowiki> 3986로 완성되어, 2005년 1월 출판되었다.{{sfnp|RFC 3986|2005}} 일반 URI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scheme:'''['''//'''['''user'''[''':password''']'''@''']'''host'''[''':port''']]['''/path'''][?'''query'''][#'''fragment'''] === 예 === 다음은 2개의 예시 URI와 구성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 based on format of examples in RFC 3986 -->                     hierarchical part         ┌───────────────────┴────────────────────┐                     authority          path         ┌───────────────┴──────────────┐┌───┴────┐   abc://username:password@example.com:123/path/data?key=value#fragid1   └┬┘   └───────┬───────┘└────┬─────┘└─┬┘        └───┬────┘└───┬──┘ scheme  user information    host    port         query   fragment   urn:example:mammal:monotreme:echidna   └┬┘ └──────────────┬───────────────┘ scheme              path == 역사 == URI와 URL은 역사를 함께 공유한다. 1994년 [[팀 버너스 리]]가 [[하이퍼텍스트]]{{sfnp|Palmer|2001}}를 제안하면서 [[하이퍼링크]]의 대상이 되는 자원을 대표하는 짧은 문자열로 URL의 개념을 암묵적으로 도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하이퍼텍스트 이름"{{sfnp|W3C|1992}} 또는 "문서 이름"으로 불렀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웹사이트]] * [[URL]] * [[IRI]]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www.iana.org/assignments/uri-schemes.html URI Schemes]&nbsp;– [[IANA]]-maintained registry of URI Schemes {{시맨틱 웹}} {{URI 스킴}} {{전거 통제}} {{토막글|인터넷}} [[분류:응용 계층 프로토콜]] [[분류:인터넷 프로토콜]] [[분류:인터넷 표준]] [[분류:시맨틱 웹]] [[분류:URL]]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신력}} [[파일:Inter-grav.jpg|섬네일|right|달력 개정을 위한 교황의 칙서.]] '''그레고리력'''({{llang|en|Gregorian Calendar}})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하는 [[태양력]](太陽曆)으로,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이전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시행한 [[역법]]을 말한다. [[율리우스력]] 계산법은 천체운행과 불일치함으로 오차가 발생했기에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다. 그레고리력은 달 운동과 관계없이 태양 운행만 기준으로 한 태양력 한 종류로, 이 역법 사용이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한 시기는 20세기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1582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고, 대부분 [[개신교]]와 [[동방 정교회|정교회]] 국가는 정치·종교적 이유로 말미암아 기존 [[율리우스력]] 사용을 고수했다. [[영국]]은 [[1752년]], 일본은 1873년, [[러시아]]는 [[1918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ref>이무열 <한권으로 보는 러시아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10.20, p351</ref> 대한민국은 [[1896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고, [[서력기원]](西曆紀元, AD)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1962년]]부터다.<ref name=":5">[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4278&cid=46620&categoryId=4662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단군기원 [檀君紀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nowiki>].....1961년 12월 2일부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다시 그 부칙에서 “본 법은 서기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 본 법 시행 당시의 공문서 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연대에서 2,333년을 감하여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고 법제화함으로써 단군기원은 폐지되고 서력기원이 채택되었다.</ref><ref name=":4" />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태양력 또는 양력은 그레고리력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1년 평균 길이를 365.25일로 보고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하는 [[윤년]]을 두었다. 이는 천문학에서 1 [[회귀년]] 365.2421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 편차가 발생한다. 결국 이 편차가 1,250여 년 동안 누적되어 1582년에 이르자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춘분이 달력상 춘분인 [[3월 21일|3월 21]]일보다 10일 빨라지는 오차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편차를 수정하기 위해서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 중에 10일을 제거하고 이후에는 400년에서 3일(세 번 윤년)을 없애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 역법 개정 == === 개정 필요성 === 그레고리력 채택 동기는 [[부활절]]을 언제 지켜야 할 지에 관한 [[초기 기독교|초대교회]] 의견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기원후 [[4세기]] 초에 [[소아시아]](현재 [[터키|튀르키예]]) 도시 [[에페소스]]의 주교인 [[에페소스의 폴리크라테스|폴리크라테스]]는 부활절 날짜를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날짜와 다르게 정함으로써 의견 충돌을 빚었다. 폴리크라테스 주교 역시 부활절 날짜를 임의로 정한 게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요한 복음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한 날은 [[니산월|니산]] 14일([[춘분]] 즈음 시작하는 달의 보름: [[유대인]] [[광복절]]인 과월절 또는 [[유월절]]) 이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었는데, 부활절을 [[히브리력]]([[태음력]]) 유월절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기독교 공동체와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 공동체 사이 대립이 생겼다.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을 모든 [[기독교인]] [[교회력]] 시기로 통일하기 위해 [[춘분]] 이후 첫 보름 다음 [[일요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은 여러 장점에도 천문학적 햇수와 날 계산에서 작은 편차가 있었다. 즉, 율리우스력 한 해 길이는 정확히 365일 6시간이며, 이는 천문학적으로 계산한 1년 길이보다 약 11분 14초가 길다. 이 편차가 AD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1,250여 년 동안 누적된 1582년에 이르자, 실제 춘분은 그해 달력상 춘분인 3월 21일보다 10일 빨라진 [[3월 11일]]이라는 큰 오차가 생겼다.<ref name=":0">[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2444&cid=40942&categoryId=32295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태양력 [solar calendar, 太陽曆] (두산백과)</nowiki>]</ref><ref>오카자키 가츠요 <천지창조의 세계사> 창해 1997년 p221</ref> 결국 춘분을 기준으로 하여 정하는 부활절이 점점 더 만월 시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 개정 내용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교황에게 역법 개정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역법을 제정한후,<ref>이정임 <인류사를 바꾼 100대 사건> 학민사 2000.5.12 p79</ref> 1582년 2월 24일에 칙령을 통해 이를 발표하여 역법 개정을 단행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776&yy=2011|제목=[역사 속의 인물] 현재의 양력 만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저자=우문기|날짜=2011-02-24|출판사=매일신문|확인날짜=2011-02-24|archive-date=2016-03-05|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165937/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776&yy=2011|url-status=}}</ref><ref>''[http://www.bluewaterarts.com/calendar/NewInterGravissimas.htm Inter Gravissimas]'' Bill Spencer's (in English) translation of the ''Inter Gravissimas'', 1999, revised 2002, based on Rodolphe Audette's transcription of the (in Latin) text. Also includes Rodolphe Audette's translation into (in French).</ref><ref>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405</ref> 개정한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력으로 부르게 되었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582년]] [[10월 5일]](금)을 [[10월 15일]]([[금요일|금]])로 한다.(위에서 설명한 열흘의 편차를 제거함)<ref name=":3">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8.5 p604</ref> # 종전과 같이 4의 배수인 해를 [[윤년]]으로 한다. 그러나 400년마다 3회만은 윤년을 두지 않아 오차를 보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00으로 나눌 수 있지만 400으로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해는 윤년을 두지 않는다.(400년에 97회의 윤년을 둠)<ref name=":3" /> 그레고리력은 1년을 365.2425일로 보아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을 빼야 했고, 이를 위해 400년에서 3번의 윤년을 평년으로 변경하는 방법을 썼다. 즉, [[율리우스력]]에서 4년마다 발생하는 윤년 중에서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수정을 하되(400년의 일수가 4일 감소), 다만 그 중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여전히 윤년으로 두었다. 예를 들어, [[1700년]], [[1800년]],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은 평년으로 변경이 되어 윤년에 해당되지 않지만, [[1600년]], [[2000년]], [[2400년]]은 여전히 윤년으로 된다. 이로써 400년의 일수가 율리우스력에 비하여 3일 감소하여 1년의 평균 일수가 종전의 365.25일로부터 365.2425일로 단축 되고, 이는 평균 태양년 365.2422일에 더욱 근접하는 값으로 천문학의 [[회귀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ref>윤년인 [[2088년]]의 춘분점은 GMT시간으로 3월19일 15:16이므로 [[KST]]로는 3월20일 00시16분이 춘분점이 된다. 윤년인 [[2092년]]과 [[2096년]]에는 춘분이 3월 19일이다가 [[평년]]인 [[2100년]]에 다시 [[3월 20일]]이 된다. 참고: [http://www.astropixels.com/ephemeris/soleq2001.html Solstices and Equinoxes: 2001 to 2100 Greenwich Mean Time]</ref> === 지동설 체계 적용 === 새로운 달력을 만들면서 교황청은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체계를 참고로하여 1551년에 출판한 책의 《[[프로이센 표]]》를 기초로 하였다. 즉 그레고리력은 [[지구중심설|천동설]]이 아니라 1543년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을 출판하며<ref>[네이버 지식백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天球─回轉─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f> 공개적으로 주장한 [[태양중심설|지동설]] 체계를 적용한 것이다. 물론 당시 교회가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공인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좀 더 과학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지동설]] 체계를 바탕으로 하였을 뿐이다. 교회가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은 지동설이 발표된 지 440년이 지난 후에 일이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33245&cid=43072&categoryId=43072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1543년)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김희보)</nowiki>]</ref> == 그레고리력의 채택 == 21세기 현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 사용이 일반화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다. 그레고리력 제정 후 1년 만에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국가들은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18세기가 되어서야 채택하였고, [[동방 정교회|정교회]] 국가들은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교가 [[잉글랜드 성공회]]인 [[영국]]은 [[1752년]] [[9월 2일]] 다음날을 [[9월 14일]]로, 정교회 지역인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 [[1월 31일]] 다음날을 [[2월 14일]]로 하여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ref>이무열 <한권으로 보는 러시아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10.20, p351</ref>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며 [[영국]]의 그리고리력 사용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마다 [[역법]]이 달랐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The Pageant of World History | 저자= Gerald Leinwand |연도=1986 |출판사=Allyn & Bacon |장=Prologue: In Search of History |쪽= 4|ISBN=978-0-205-08680-1|인용문= England did not adopt the New Style calendar until 1752, and Russia did not adopt it until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Different dating systems in calendars make it hard for the historian to determine when something actually happened. }}</ref> 한 예로서 [[안톤 체호프]]가 [[독일]]의 바덴바일러에서 사망했을 때 그곳 경찰이 기록한 사망 날짜는 그레고리력에 따른 [[1904년]] [[7월 15일]]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쓰이던 [[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2일]]이며 체호프 연구학회에서는 지금도 체호프의 사망일을 7월 2일이라고 한다. {| class="wikitable" !년도 !국가와 지역 |- |1582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저지대 국가의 가톨릭 지역 |- |1584 |보헤미아, 스위스의 가톨릭 지역 |- |1610 |프로이센 |- |1648 |[[알자스]] |- |1682 |스트라스부르 |- |1700 |노르웨이, 덴마크, 저지대국가의 개신교 지역, 스위스의 개신교 지역 |- |1752 |아일랜드, 영국 |- |1753 |스웨덴, 핀란드 |- |1873 |일본 |- |1875 |이집트 |- |1896 |대한민국 |- |1912 |중국, 알바니아 |- |[[1915]] |리투아니아 |- |[[1916]] |불가리아 |- |[[1917]] |오스만 제국 |- |[[1918]] |러시아, 에스토니아 |- |1919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 |1923 |그리스 |- |1926 |터키 |- |[[2016]] |사우디아라비아 |} == 한국의 양력 사용 == === 음력 사용 === {{본문|태음태양력|시헌력}} [[조선]] 초에는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가져온 [[수시력|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다가, [[세종]] 때에는 [[회회력]]을 바탕으로 개정된 태음태양력을 사용하였다. [[병자호란]](1636)으로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을 가져오면서 조선에도 역법 개정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645년]]([[조선 인조|인조]] 23년) [[관상감]] 제조(提調)로 있던 [[김육]]이 상소하여 시헌력의 채용을 주장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12018_005 <nowiki>[인조실록 46권] 1645년 인조 23년 12월 18일.</nowiki>]...觀象監啓曰: "奏請使適得新曆而來, 卽爲考見,..(중략)....不可以《時憲曆》所載之文, 究其神妙之處, 必得諸率, 立成各年縷子, 然後可以知作曆之法。 使能筭之人, 入學於北京, 似不可已</ref> 인조의 승인하에 청나라의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이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만든 시헌역법을 10여 년 동안 연구하였고, [[1653년]]([[조선 효종|효종]] 4년)에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qa_10401006_001 <nowiki>[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1653년 1월 6일</nowiki>]........自甲午年, 一依新法, 推算印行爲當</ref><ref name=":02">[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2444&cid=40942&categoryId=32295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태양력 [solar calendar, 太陽曆] (두산백과)</nowiki>]</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47291&cid=62801&categoryId=62801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역법 [calendar, 曆法] (천문학백과)</nowiki>].....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음력은 효종 5년(1654년)에 도입된 시헌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시헌력은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 아담샬(Adam Schall, 1591 ~ 1666)이 만든 역법으로 중국에서는 1644년부터 시행되었으며(이하생략)</ref> 한국에서 7요일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95년 4월부터였다.<ref>민병덕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 책이있는마을 2005년 p260</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95223&cid=46637&categoryId=46637#TABLE_OF_CONTENT8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역법 [曆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nowiki>].....우리 나라에 7일주가 직접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7세기 초에 북경에서 들어온 천주교 때문이다. 1770년에 홍유한(洪儒漢)은 크리스트교에서 매월 7·14·21·28일에 묵상과 재계(齋戒)를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축제일이 7일 간격으로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이벽(李蘗)도 그렇게 하였다. 또 이승훈(李承薰)은 주일의 침례(浸禮)를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 7요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에는 1895년 음력 4월 초1일부터 7요가 있다.</ref> 이전에는 매월 1일, 7일, 15일, 23일, 절기가 드는 날(입춘, 경칩 등)은 정기휴일이었다. 국정 공휴일은 설날 7일, 대보름과 단오 그리고 연등회에 각각 3일, 추석에는 하루였다. 또한 정월에 자일(子日)과 오일(午日)에 쉬었으며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그날은 부정을 탄다 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ref>민병덕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 책이있는마을 2005년 p261</ref> === 양력 사용 === 19세기 말이 되자 당시의 국제정세의 흐름상 태양력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ref name=":0" /> 그래서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갑오개혁]] 차원에서 그레고리력 채택을 추진하여<ref name=":1">김은신 <한국 최초 101장면> 가람기획 1998.9.10 p216</ref> 1895년 9월 9일자 《관보》에 태양력을 사용하라는 조칙을 실었다. 또한 고종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였다.<ref name=":2">김은신 <한국 최초 101장면> 가람기획 1998.9.10 p217</ref>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ref name=":1" />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 <nowiki>[조선왕조 실록] 고종 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895년 11월 15일</nowiki>]</ref>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업무를 관할한 곳은 관상감의 후신인 관상소였다.<ref name=":2" /> 관상소에서 새로운 책력을 배포하였으나 갑작스런 양력의 사용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행사가 많았던 궁궐에서 조차 매우 혼란스러웠다. 음력을 참고하여 농사를 짓던 농촌의 촌로들은 크게 반발하며 책력을 내던지기도 했다.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며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였을뿐 [[서력기원]](西曆紀元, AD), 즉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광무(光武), 단기(檀紀) 등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광복직후 미군정시절 3년간 서력기원(AD)을 사용했으나 1948년에 폐지되었다. 서력기원(AD)을 다시 도입한 시기는 [[1962년]] 1월 1일부터이며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ref name=":5" /><ref name=":4">[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9506&cid=40942&categoryId=31675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단군기원 [檀君紀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nowiki>].....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모든 공문서(公文書)에 단군기원을 사용하기로 하여 10여 년간 시행해오다가 1961년 5 ·16군사정변 후 정부가 폐기하였고, 그 뒤부터 서력기원을 쓰고 있다.</ref>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공용(公用)으로 양력을 사용하고 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개인 생일이나 과거에 한때 3대명절로 분류되었던 [[단오절]] 행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4357&cid=46670&categoryId=4667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단오 [端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nowiki>].....단오는 1518년(중종 13) 설날·추석과 함께 ‘삼대명절’로 정해진 적도 있었다.</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9916&cid=40942&categoryId=32178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명절 [名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nowiki>].....조선·대한제국 시대까지만 하여도 거의 다달이 명절이 있었으나,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지배하여 그 민속을 훼손한 일제 때부터 많은 명절이 잊혀져, 지금은 설날·추석 등 몇몇 명절만 이어져 오고 있다.</ref> 물론 정부에서도 설날, 추석, 석가탄신일 등 전통 명절에 따른 [[공휴일|법정공휴일]]은 음력을 살펴 지정하고 있으나 그 밖에 [[3·1절|삼일절]], [[광복절]], [[한글날]] 등 [[국경일]]과 기념일 등은 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 참고 문헌 == {{위키공용분류}} * 《시간의 지도: 달력》, E.G. 리처즈, 이민아 옮김, 까치, 2003. == 같이 보기 == * [[역법]] * [[율리우스력]] * [[태양력]] * [[태음력]] * [[부활절]] * [[춘분]] * [[회귀년]] * [[윤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s://www.youtube.com/watch?v=mkzVpfLniJI&t=3s <nowiki>[차이나는 클라스] 지동설 체계를 적용한 그레고리력</nowiki>] {{역법}} {{시간 관련 주제}} {{전거 통제}} [[분류:태양력]] [[분류:교황 그레고리오 13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Perfect number Cuisenaire rods 6.png|섬네일]] [[수론]]에서 '''완전수'''(完全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양의 [[약수]](진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이 되는 [[자연수|양의 정수]]를 말한다. 또는 모든 양의 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의 2배가 되는 수를 말하기도 한다. 최초 6개의 완전수는 [[0]], [[6]], [[28]], [[496]], [[8128]], 33550336이다. 0 = 0 6 = 1 + 2 + 3 28 = 1 + 2 + 4 + 7 + 14 496 = 1 + 2 + 4 + 8 + 16 + 31 + 62 + 124 + 248 8128 = 1 + 2 + 4 + 8 + 16 + 32 + 64 + 127 + 254 + 508 + 1016 + 2032 + 4064 == 짝수 완전수 ==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들 네 개의 완전수밖에는 알지 못했다. [[유클리드]]는 이들을 <math>2^{n-1} \cdot (2^n - 1)</math> 에 알맞은 수를 대입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n'' = 1 일 때: &nbsp; 2<sup>0</sup> · (2<sup>1</sup> − 1) = 0 :''n'' = 2 일 때: &nbsp; 2<sup>1</sup> · (2<sup>2</sup> − 1) = 6 :''n'' = 3 일 때: &nbsp; 2<sup>2</sup> · (2<sup>3</sup> − 1) = 28 :''n'' = 5 일 때: &nbsp; 2<sup>4</sup> · (2<sup>5</sup> − 1) = 496 :''n'' = 7 일 때: &nbsp; 2<sup>6</sup> · (2<sup>7</sup> − 1) = 8128 이때 <math>n</math>은 언제나 [[소수 (수론)|소수]]이지만 <math>n</math>이 소수라고 2<sup>''n''</sup>&nbsp;−&nbsp;1도 꼭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2<sup>''n''</sup>&nbsp;−&nbsp;1이 소수일 때는 이를 [[메르센 소수]]라고 부른다. [[마랭 메르센]]은 [[17세기]]에 [[정수론]]과 완전수를 연구한 수도승이었다. :<math>2^{n-1} \cdot (2^n - 1) = \frac {M_n (M_n + 1)} 2 </math> 즉, 짝수 완전수와 메르센 소수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모든 짝수 완전수가 <math>2^{n-1} \cdot (2^n - 1)</math> 꼴이므로, 모든 짝수 완전수는 연속된 자연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메르센 수]]가 소수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숫자는 [[과잉수]]가 된다. 그와 동시에 모두 [[반완전수]]이기도 하다. 그러한 예는 120, 2016, 32640, 130816 등이 있다. 15, 63, 255, 511 등은 모두 메르센 수들 중에서 [[소수 (수론)|소수]]가 아닌 [[합성수]]이기 때문이다. 0 = 0 6 = 1 + 2 + 3 28 = 1 + 2 + 3 + 4 + 5 + 6 + 7 496 = 1 + 2 + 3 + 4 + 5 + 6 + 7 + 8 + 9 + . . . + 30 + 31 메르센 소수의 수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짝수 완전수의 수가 무한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 홀수 완전수 == {{미해결|수학|홀수 완전수는 존재하는가?}} 만약 홀수 완전수가 존재한다면 그 수는 다음 조건을 만족한다. * 10<sup>1500</sup>보다 크다.<ref name="Ochem and Rao (2012)">{{저널 인용| last1=Ochem | first1=Pascal | last2=Rao | first2=Michaël | title=Odd perfect numbers are greater than 10<sup>1500</sup> | 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 | year=2012 | volume=81 | issue=279 | doi=10.1090/S0025-5718-2012-02563-4 | url=http://www.lirmm.fr/~ochem/opn/opn.pdf | pages=1869–1877 | zbl=1263.11005 | issn=0025-5718 | doi-access=free }}</ref> * 105로 나누어떨어지지 않으며<ref name="Kühnel U">{{저널 인용|last=Kühnel|first=Ullrich|title=Verschärfung der notwendigen Bedingungen für die Existenz von ungeraden vollkommenen Zahlen|journal=Mathematische Zeitschrift|year=1950|volume=52|pages=202–211|doi=10.1007/BF02230691|s2cid=120754476|language=de}}</ref> ''N'' ≡ 1 (mod 12) 또는 ''N'' ≡ 81 (mod 324) 또는 ''N'' ≡ 117 (mod 468)꼴이다.<ref name="Roberts T (2008)">{{저널 인용|last=Roberts|first=T|title=On the Form of an Odd Perfect Number|journal=Australian Mathematical Gazette|year=2008|volume=35|issue=4|pages=244|url=http://www.austms.org.au/Publ/Gazette/2008/Sep08/CommsRoberts.pdf}}</ref> * 가장 큰 소인수는 10<sup>8</sup>보다 크고<ref name="Goto and Ohno (2008)">{{저널 인용|last=Goto|first=T|author2=Ohno, Y|title=Odd perfect numbers have a prime factor exceeding 10<sup>8</sup>|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year=2008|volume=77|issue=263|pages=1859–1868|doi=10.1090/S0025-5718-08-02050-9|url=http://www.ma.noda.tus.ac.jp/u/tg/perfect/perfect.pdf|access-date=30 March 2011|bibcode=2008MaCom..77.1859G|doi-access=free|archive-date=2011-08-0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807101906/http://www.ma.noda.tus.ac.jp/u/tg/perfect/perfect.pdf|url-status=}}</ref> <math>\sqrt[3]{3N}</math>보다 작다.<ref name="AK 2012">{{저널 인용|last1=Konyagin |first1=Sergei |last2=Acquaah |first2=Peter |title=On Prime Factors of Odd Perfect Numbers |journal=International Journal of Number Theory |date=2012 |volume=8 |issue=6 |pages=1537–1540|doi=10.1142/S1793042112500935 }}</ref> * 두 번째로 가장 큰 소인수는 10000보다 크고,<ref name="Ianucci DE (1999)">{{저널 인용|last=Iannucci|first=DE|title=The second largest prime divisor of an odd perfect number exceeds ten thousand|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year=1999|volume=68|issue=228|pages=1749–1760|url=https://www.ams.org/journals/mcom/1999-68-228/S0025-5718-99-01126-6/S0025-5718-99-01126-6.pdf|access-date=30 March 2011|doi=10.1090/S0025-5718-99-01126-6|bibcode=1999MaCom..68.1749I|doi-access=free}}</ref> <math>\sqrt[5]{2N}</math>보다 작다.<ref name="Zelinsky 2019">{{저널 인용|last1=Zelinsky |first1=Joshua |title=Upper bounds on the second largest prime factor of an odd perfect number |journal=International Journal of Number Theory |date=July 2019 |volume=15 |issue=6 |pages=1183–1189 |doi=10.1142/S1793042119500659 |arxiv=1810.11734 |s2cid=62885986 }}.</ref> * 세 번째로 가장 큰 소인수는 100보다 크고,<ref name="Ianucci DE (2000)">{{저널 인용|last=Iannucci|first=DE|title=The third largest prime divisor of an odd perfect number exceeds one hundred|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year=2000|volume=69|issue=230|pages=867–879|url=https://www.ams.org/journals/mcom/2000-69-230/S0025-5718-99-01127-8/S0025-5718-99-01127-8.pdf|access-date=30 March 2011|doi=10.1090/S0025-5718-99-01127-8|bibcode=2000MaCom..69..867I|doi-access=free}}</ref> <math>\sqrt[6]{2N}</math>보다 작다.<ref name="Zelinsky 2021a">{{저널 인용|first1=Sean|last1=Bibby|first2=Pieter|last2=Vyncke|last3=Zelinsky |first3=Joshua |title=On the Third Largest Prime Divisor of an Odd Perfect Number |journal=Integers |date=23 November 2021 |volume=21 |url=http://math.colgate.edu/~integers/v115/v115.pdf |access-date=6 December 2021}}</ref> * 소인수는 중복을 포함하여 적어도 101개이고 서로 다른 소인수는 10개 이상이다.<ref name="Ochem and Rao (2012)"/><ref name="Nielsen Pace P. (2015)">{{저널 인용|last=Nielsen|first=Pace P.|title=Odd perfect numbers, Diophantine equations, and upper bounds|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year=2015|volume=84|issue=295|pages=2549–2567|url=https://math.byu.edu/~pace/BestBound_web.pdf|access-date=13 August 2015|doi=10.1090/S0025-5718-2015-02941-X|doi-access=free|archive-date=2015-07-08|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708185554/https://math.byu.edu/~pace/BestBound_web.pdf|url-status=}}</ref> 만약 3이 인수가 아니면, 서로 다른 소인수는 적어도 12개이다.<ref name="Nielsen Pace P. (2007)">{{저널 인용|last=Nielsen|first=Pace P.|title=Odd perfect numbers have at least nine distinct prime factors|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year=2007|volume=76|pages=2109–2126|url=https://math.byu.edu/~pace/NotEight_web.pdf|access-date=30 March 2011|doi=10.1090/S0025-5718-07-01990-4|issue=260|arxiv=math/0602485|bibcode=2007MaCom..76.2109N|s2cid=2767519|archive-date=2021-11-03|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103100630/https://math.byu.edu/~pace/NotEight_web.pdf|url-status=}}</ref> * ''N''은 <math>N=q^{\alpha} p_1^{2e_1} \cdots p_k^{2e_k}</math>의 형태이며 다음을 만족시킨다. :* <math>q,p_1,\cdots ,p_k</math>는 서로 다른 소수이다. (오일러) :* <math>q\equiv \alpha\equiv 1\pmod{4}</math> (오일러) :* ''N''의 가장 작은 소인수는 <math>\frac{k-1}{2}</math> 이하이다.<ref name="Zelinsky 2021">{{저널 인용|last1=Zelinsky |first1=Joshua |title=On the Total Number of Prime Factors of an Odd Perfect Number |journal=Integers |date=3 August 2021 |volume=21 |url=http://math.colgate.edu/~integers/v76/v76.pdf |access-date=7 August 2021}}</ref> :* ''N''을 나누는, 10<sup>62</sup>보다 큰 소수의 거듭제곱수가 적어도 하나 있다.<ref name="Ochem and Rao (2012)"/> :* <math> N < 2^{(4^{k+1}-2^{k+1})}</math><ref name="Chen and Tang">{{저널 인용|last1=Chen |first1=Yong-Gao |last2=Tang |first2=Cui-E |title=Improved upper bounds for odd multiperfect numbers. |journal=Bulletin of the Australian Mathematical Society |date=2014 |volume=89 |issue=3 |pages=353–359|doi=10.1017/S0004972713000488 |doi-access=free }}</ref><ref name="Nielsen (2003)">{{저널 인용|last=Nielsen|first=Pace P.|title=An upper bound for odd perfect numbers|journal=Integers|year=2003|volume=3|pages=A14–A22|url=http://www.westga.edu/~integers/vol3.html|access-date=23 March 2021}}</ref> :* <math>\alpha + 2e_1 + 2e_2 + 2e_3 + \cdots + 2e_k \geq \frac{99k-224}{37} </math>.<ref name="Zelinsky 2021"/><ref name="Ochem and Rao (2014)">{{저널 인용| last1=Ochem | first1=Pascal | last2=Rao | first2=Michaël | title=On the number of prime factors of an odd perfect number. | journal=[[Mathematics of Computation]] | year=2014 | volume=83 | issue=289 | pages=2435–2439 | doi=10.1090/S0025-5718-2013-02776-7 | doi-access=free }}</ref><ref name="ClayotonHansen">{{저널 인용|last1=Graeme Clayton, Cody Hansen |title=On inequalities involving counts of the prime factors of an odd perfect number |journal=Integers |date=2023 |volume=23 |arxiv=2303.11974 |url=http://math.colgate.edu/~integers/x79/x79.pdf |access-date=29 November 2023}}</ref> :* <math> qp_1p_2p_3 \cdots p_k < 2N^{\frac{17}{26}}</math>.<ref name="LucaPomerance">{{저널 인용|last1=Pomerance |first1=Carl |last2=Luca |first2=Florian |title=On the radical of a perfect number |journal=New York Journal of Mathematics |date=2010 |volume=16 |pages=23–30 |url=http://nyjm.albany.edu/j/2010/16-3.html |access-date=7 December 2018}}</ref> 더 나아가서 지수 ''e''<sub>1</sub>,&nbsp;...,&nbsp;''e''<sub>''k''</sub>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알려져 있다. * 모든 ''e''<sub>''i''</sub>가 ''e''<sub>''i''</sub>&nbsp;≡&nbsp;1 ([[Modular arithmetic|mod]] 3)인 것은 아니다.<ref name="McDaniel (1970)">{{저널 인용| last1=McDaniel | first1=Wayne L. | title=The non-existence of odd perfect numbers of a certain form | journal=Archiv der Mathematik | volume=21 | year=1970 | issue=1 | pages=52–53 | doi=10.1007/BF01220877 | mr=0258723 | s2cid=121251041 | issn=1420-8938 }}</ref> * (''e''<sub>1</sub>,&nbsp;...,&nbsp;''e''<sub>''k''</sub>) &ne; (1, ..., 1, 3),<ref name="Kanold (1950)">{{저널 인용| last1=Kanold | author-link=:de:Hans-Joachim Kanold | first1=Hans-Joachim | title=Satze uber Kreisteilungspolynome und ihre Anwendungen auf einige zahlentheoretisehe Probleme. II | journal=[[Journal fü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 | volume=188 | year=1950 | issue=1 | pages=129–146 | doi=10.1515/crll.1950.188.129 | mr=0044579 | s2cid=122452828 | issn=1435-5345 }}</ref> (1, ..., 1, 5), (1, ..., 1, 6).<ref name="Cohen and Williams (1985)">{{저널 인용| last1=Cohen | first1=G. L. | last2=Williams | first2=R. J. | title=Extensions of some results concerning odd perfect numbers | journal=[[Fibonacci Quarterly]] | volume=23 | year=1985 | issue=1 | pages=70–76 | url=https://www.fq.math.ca/Scanned/23-1/cohen.pdf | mr=0786364 | issn=0015-0517 }}</ref> * {{math|1= ''e''<sub>1</sub> = ... = ''e''<sub>''k''</sub> = ''e''}}인 경우, ** ''e''는 3,<ref name="Hagis and McDaniel (1972)">{{저널 인용| last1=Hagis | first1=Peter Jr. | last2=McDaniel | first2=Wayne L. | title=A new result concerning the structure of odd perfect numbers | journal=Proceedings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 volume=32 | year=1972 | issue=1 | pages=13–15 | doi=10.1090/S0002-9939-1972-0292740-5 | mr = 0292740 | issn=1088-6826 | doi-access=free }}</ref> 5, 6, 8, 11, 14, 18,<ref name="Cohen and Williams (1985)" /> 24<ref name="McDaniel and Hagis (1975)">{{저널 인용| last1=McDaniel | first1=Wayne L. | last2=Hagis | first2=Peter Jr. | title=Some results concerning the non-existence of odd perfect numbers of the form <math>p^{\alpha} M^{2\beta}</math> | journal=[[Fibonacci Quarterly]] | volume=13 | year=1975 | issue=1 | pages=25–28 | url=https://www.fq.math.ca/Scanned/13-1/mcdaniel.pdf | mr=0354538 | issn=0015-0517 }}</ref>가 아니다. ** <math> k\leq 2e^2+8e+2</math>, <math> N<2^{4^{2e^2 + 8e+3}}</math>.<ref name="Yamada (2019)">{{저널 인용| last1=Yamada | first1=Tomohiro | title=A new upper bound for odd perfect numbers of a special form | journal=Colloquium Mathematicum | volume=156 | year=2019 | issue=1 | pages=15–21 | doi=10.4064/cm7339-3-2018 | issn=1730-6302 | arxiv=1706.09341 | s2cid=119175632 }}</ref> == 같이 보기 == * [[초완전수]] * [[반완전수]] * [[준완전수]] * [[부족수]] * [[과잉수]] == 각주 == {{각주}} {{전거 통제}} [[분류:완전수| ]] [[분류:정수열]] [[분류:수론의 미해결 문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 정보 | name = 피아노 소나타 14번 | subtitle = "월광 소나타" | composer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type = 피아노 소나타 | image = Beethoven_Riedel_1801.jpg | alt = | caption = 젊은 베토벤<br>(1801년, 카를 트라우고트 리델의 초상화) | translation = | native_name = | native_name_lang = | key = 올림다단조 | catalogue = | opus = 27-2 | genre = 피아노 소나타 | form = | text = | language = | melody = | client = | dedication = 줄리에타 귀차르디 백작부인 | composed = {{시작 날짜|1801}} | performed = | published ={{시작 날짜|1802|3||df=y}} (빈의 조반니 카피) | movements = 3 | scoring = | misc = }} 《'''피아노 소나타 14번''' 올림다단조, 작품번호 27-2》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의해 쓰인 작품으로, '''두 개의 소나타, 작품 번호 27'''([[환상곡풍소나타|환상곡풍 소나타]])의 두 번째 소나타이다. '''월광 소나타'''라는 별칭은 베토벤의 사망 이후 평론가의 논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피아노 소나타 8번 (베토벤)|비창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23번 (베토벤)|열정 소나타]]'''와 함께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로 불리기도 한다. == 작곡 및 배경 == 베토벤은 헝가리 귀족인 브룬스비크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800년, 1801년, 1806년에 그는 요제프 브룬스비크 백작(1750-1827)의 초청으로 가문의 맨션 중 하나인 운터쿠루파 성 근처에서 머물렀다. 그는 바로크 정원사의 오두막 위층에서 거주했는데, 1801년에 이 곳에서 브룬스비크 가문의 구전 전통에 따라 "월광 소나타"를 작곡했다(성 근처에 위치한 이 정원사의 오두막에는 현재 작은 베토벤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작품은 전통적인 [[고전주의 음악|고전주의]] 소나타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음악|낭만주의]]적 표현에 접근하고 있다.<ref>Steblin 2009.</ref> 속도 면에서는 완만한 1악장, 경쾌한 2악장, 급속한 3악장으로 구분되며, 악장이 진행될 때마다 템포가 빨라지는 서파급의 3단 구성을 보이고 있다.<ref name="schiff">{{웹 인용|url=http://www.theguardian.com/arts/audio/2006/nov/22/culture1414|title=Andras Schiff lecture recital: Beethoven's Piano Sonata Op 27 no 2|publisher=[[ガーディアン|The Guardian]]|accessdate=2015-12-12}}</ref> 또한 형식적으로는 소나타 형식의 피날레에 무게 중심이 놓인 균형잡힌 악장 배치가 이루어져 있고, 감정 변화가 강건한 의지 아래 흔들림 없는 귀결을 맞이한다는 베토벤 특유의 음악이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sfn|대목|1980|p=354}} == 출판 및 헌정 == [[파일:Beethoven_Piano_Sonata_14_-_title_page_1802.jpg|섬네일|초판 악보 표지, 1802년|upright=1.2]] 이 작품의 초판은 1802년 3월에 [[빈]]의 조반니 카피 사를 통해 간행되었다. 동반 작품 "작품번호 27-1" ([[피아노 소나타 13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13번]])과 함께 ''Sonata quasi una Fantasia'' (“환상곡 풍 소나타”)라는 이탈리아어 표제를 내걸고 출판되었는데, 이 표제는 베토벤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Fantasia'' (“환상곡”)이라는 용어는 피아노 소나타의 비정상적인 동작 순서를 나타낸다. 그 템포는 기존 소나타 형식과는 다른 것이며, 이 작품의 경우 소나타 형식의 첫 번째 (빠른) 악장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아다지오로 시작, 트리오가 있는 활기찬 알레그레토, 소나타 형식 주 악장의 구조를 가진, 빠르고 극적인 피날레가 이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악장마다 속도가 증가하는 것이다.<ref>[http://www.raptusassociation.org/son14g.html Beethovens Klaviersonaten, zum musikalischen Inhalt.] {{웨이백|url=http://www.raptusassociation.org/son14g.html |date=20150924084740 }} Raptusassociation.org; abgerufen am 26. Juni 2019.</ref> 베토벤은 짧은 시간 동안 사랑에 빠졌던 그의 피아노 학생,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이 소나타를 헌정했다.<ref>{{서적 인용|title=Beethoven|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00rudarich|last=Rudall|first=H. A.|year=1903|publisher=Sampson Low, Marston & Co|location=New York|page=[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00rudarich/page/71 71]|isbn=}}</ref><ref>{{서적 인용|title=The encyclopedia of Music|last=Matthews|first=Max Wde|year=2002|pages=335}}</ref> 하지만, 이는 베토벤이 줄리에타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겨지고 있다.<ref>Steblin 2009.</ref>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가문과의 인연으로 줄리에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줄리에타와 사촌 관계에 있는 “브룬스비크 자매”(“테레제와 요제피네”)와도 이미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ref>요제피네는 1799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ref> 1801년 말에 줄리에타의 피아노 지도를 맡게 된 베토벤은 눈에 띄게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ref>{{서적 인용|title=Beethoven: The Universal Composer|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univers0000morr_z1g5|last=Morris|first=Edmund|year=2005|publisher=[[HarperCollins]]|pages=[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univers0000morr_z1g5/page/93 93]–94|isbn=0060759747}}</ref> 1801년 11월 16일, 당시 30세의 나이였던 베토벤이 친구 프란츠 베겔러에게 쓴 편지에는 줄리에타를 향해 쓴 것으로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난, 이제 내 인생이 이제 조금 흐뭇해졌다고 느끼고, 다시 밖으로 나가 사람들 속에 있네. 지난 2년 동안 내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슬픈 것 이었는지 믿기 어려울 거네. 2년만에 얼마간의 행복한 순간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지. 이번 변화는 한 명의 귀엽고 매력적인 소녀에 의해 초래되었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녀를 사랑하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면 행복해 질 거라는 기대도 하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나와 신분이 다르다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은 결혼할 수 없을 것이네."<ref>"etwas angenehmer lebe ich jezt wieder, indem ich mich mehr unter Menschen gemacht, du kannst es kaum glauben, wie öde, wie traurig ich mein Leben seit 2 Jahren zugebracht ... diese Veränderung hat ein liebes zauberisches Mädchen hervorgebracht, die mich liebt, und die ich liebe, es sind seit 2 Jahren wieder einige seelige Augenblicke, und es ist das erstemal, daß ich fühle, daß – heirathen glücklich machen könnte, leider ist sie nicht von meinem stande." (Brandenburg 1996, #70.)</ref> 하지만, 줄리에타는 1803년 11월 14일,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작곡가인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하여 베토벤을 떠난다.<ref>스테블린 (2009, p. 145)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1803년 11월 3일 또는 4일이라는 날짜는 잘못 알려진 것 이라고 한다.</ref> 훗날(1823년), 베토벤은 당시의 비서이자 훗날의 전기 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줄리에타와 진정한 연애 관계를 가졌음을 고백했다. 쉰들러는 1840년에 베토벤의 전기에서 줄리에타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순수한 추측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주장에 즉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줄리에타의 사촌이었던 테레제 브룬스비크였다. 테레제는 의심을 품었다: "베토벤의 세 통의 편지가 줄리에타 앞으로 되어 있다? 허술한 건 아닌지" 테레제가 의심을 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쉰들러나 그 밖의 동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여동생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오랜 열애 관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에타에 대한 이 작품의 헌정은 당초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줄리에타에게는 "론도 사장조 작품번호 51-2"를 헌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론도를 헨리에테 리히노프스키 백작부인에게 헌정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줄리에타에게 헌정된 것이 이 소나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ref>{{서적 인용|title=Thayer's Life of Beethoven|url=https://archive.org/details/thayerslifeofbee0000thay|last=Thayer|first=Alexander Wheelock|authorlink=Alexander Wheelock Thayer|date=1921|editor-last=Elliot|editor-first=Forbes|editor-link=Elliot Forbes|edition=revised|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location=Princeton|at=p. 291 and p. 297|publication-date=1967|isbn=0-691-02702-1}}</ref> == 수용 및 유산 == 이 소나타가 처음 알려지게 된 시기에는 베토벤이 어느 정자에서 첫 악장을 즉흥적으로 만들었고 하여 "정자 소나타"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훗날 베토벤이 사망하고 5년 후인 1832년에 독일의 음악 평론가이자 시인, 기자였던 루트비히 렐슈타프는 이 음악이 그에게 연상 시키는 것에 대한 논평을 써냈는데, 그것은 이 음악의 첫 악장에 관한 것으로, "몽롱한 분위기가 달빛이 비치는 스위스 [[루체른호|루체른 호수]]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독일과 영국의 출판물은 일반적으로 "월광(月光, {{llang|en|Moonlight}}, {{llang|de|Mondschein}}) 소나타"라는 제목을 채택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나타는 이 통칭으로 유명해졌다. 한편 작곡자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체르니]]도 렐슈타프의 언급에 앞서, "야경, 저 멀리서 영혼의 슬픈 목소리가 들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해석의 배경은 안드라스 쉬프에 의해 제공되었다.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 슬픈 장면에서의 리듬적인 연관성을 보고 그것이 "죽음의 장면" 또는 "장례식 행진"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 바렌보임|바렌보임]]도 이 논문을 지지했다.<ref>Dieser Zusammenhang wurde von [[András Schiff]] in seinen Vorlesungen propagiert [https://www.theguardian.com/music/classical/page/0,,1943867,00.html András Schiff: the lectures | Classical and opera | guardian.co.uk Music].</ref> 쉬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1막에서 죽어가는 코멘다토레의 장면에 관하여 베토벤이 자신의 원고에 메모를 남겼다고 언급했지만, 베토벤은 1803-4년까지 그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1800-1년에 쓰여진 소나타, "작품번호 27-2"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ref>Murray Perhia: ''Vorwort''. In: Norbert Gertsch, Murray Perahia (Hrsg.): ''Ludwig van Beethoven Klaviersonate Nr. 14 cis-moll op. 27 Nr. 2 (Mondscheinsonate)''. G. Henle-Verlag, München 2012, S. III. [https://www.henle.de/media/foreword/1062.pdf PDF Online] {{웨이백|url=https://www.henle.de/media/foreword/1062.pdf |date=20201017031637 }}; abgerufen am 6. Januar 2020.</ref> 이 작품은, "월광 소나타"라는 별칭과 함께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고, 베토벤의 생전에도 그의 가장 인기있는 피아노 작품 중 하나였다. 너무도 유명해서 베토벤은 그의 학생인 [[카를 체르니]]에게 "나는 확실히 더 나은 것을 썼네"라고 말했다.<ref>[[Klaus Martin Kopitz]], [[Rainer Cadenbach]] (Hrsg.) u.&nbsp;a.: ''Beethoven aus der Sicht seiner Zeitgenossen in Tagebüchern, Briefen, Gedichten und Erinnerungen.'' Band 1: ''Adamberger – Kuffner.'' Hrsg. von der Beethoven-Forschungsstelle an der 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Henle, München 2009, [[Spezial:ISBN-Suche/9783873281202|ISBN 978-3-87328-120-2]], S. 218.</ref> 그것은 형식적인 자유와 감정적으로 결정된 표현 방식으로 [[낭만주의 음악|낭만주의]]의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의 표현 방식은 훗날 [[프레데리크 쇼팽|쇼팽]]의 "[[환상 즉흥곡|즉흥환상곡]]"이나<ref>[[Ernst Oster|Oster, Ernst]], "The ''Fantaisie-Impromptu'': A Tribute to Beethoven", ''Aspects of Schenkerian Analysis'', David Beach, ed. Yale University Press, 1983 {{ISBN|0-300-02800-8}}</ref> [[로베르트 폴크만|폴크만]]의 "피아노 삼중주 나단조, 작품번호 5"에서 채택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리스트]]는 극도로 까다롭다고 생각되는 이 작품에 관해서 학생들이 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ref>Murray Perhia: ''Vorwort''. In: Norbert Gertsch, Murray Perahia (Hrsg.): ''Ludwig van Beethoven Klaviersonate Nr. 14 cis-moll op. 27 Nr. 2 (Mondscheinsonate)''. G. Henle-Verlag, München 2012, S. III. [https://www.henle.de/media/foreword/1062.pdf PDF Online] {{웨이백|url=https://www.henle.de/media/foreword/1062.pdf |date=20201017031637 }}; abgerufen am 6. Januar 2020.</ref> 알렉산드로 실로티는 리스트가 베히슈타인 그랜드 피아노로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너무나도 매혹되어 나중에 다른 연주가로부터 그 곡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전했다.<ref>Volker Hagedorn: [http://www.zeit.de/2002/13/Stimme_seines_Herrn ''Stimme seines Herrn''.] In: ''[[Die Zeit]]'', Nr. 13/2002.</ref>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47"의 마지막 악장을 위해, "월광 소나타"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사망 직전에 베토벤에 대한 또 다른 기념비를 세웠다.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역사는 음악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문학]]과 [[조형 예술]], 모두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것은 대개 느린 첫 악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수많은 예술 작품 재현의 시도 대상이었다. == 악장 구성 == {{듣기 |파일이름=Ludwig van Beethoven - sonata no. 14 in c sharp minor 'moonlight', op. 27 no. 2 - i. adagio sostenuto.ogg |제목=1악장 :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6:03) |설명= |파일이름2 = Moonlight Sonata Allegretto.ogg |제목2= 2악장 : 알레그레토 - 트리오 (2:12) |설명2= |파일이름3 = Moonlight Sonata Presto.ogg |제목3= 3악장 : 프레스토 - 아기타토 (8:14) |설명3= 모든 파일 제공: [https://en.wikipedia.org/wiki/Musopen 폴 핏맨 (Musopen)] }} 연주에는 보통 15-16분 정도가 걸린다. === 1악장 -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올림다단조) === 2/2 박자, 세도막 형식 (두 번째 주제는 나란한 조가 아니라 관련 없는 나단조). 악장은 왼손의 옥타브와 오른손의 잇단음표 아르페지오로 시작하여 점차 오른손의 주선율을 도입한다. 동시에 오른손의 잇단음표 고정 리듬 패턴이 곡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강도는 매우 약하여 일반적으로 "pp"(pianissimo, 피아노시모, 매우 여리게)로 표시되고 가장 큰 위치는 "mf"(mezzo forte, 메조포르테, 조금 세게)로 표시된다. 악장은 차분하고 몽롱하며, 조용히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베를리오즈]]는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시"라고 말했다.<ref name="Rosen2">{{서적 인용|title=Beethoven's Piano Sonatas: A Short Companion|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last=Rosen|first=Charles|authorlink=Charles Rosen|year=2002|publisher=Yale University Press|page=[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page/157 157]|isbn=978-0-300-09070-3}}</ref> 그는 오른손의 선율을 "추도"(追悼)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월광"으로 해독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ref name="Rosen2" /> <score lang="lilypond">\new PianoStaff << #(set-global-staff-size 17) \new Staff \relative c' { \key cis \minor \time 2/2 \tempo "Adagio sostenuto" \tupletDown \tuplet 3/2 { gis8^"Si deve suonare tutto questo pezzo delicatissimamente e senza sordino" cis e } \override TupletNumber.stencil = ##f \repeat unfold 7 { \tuplet 3/2 { gis,8[ cis e] } } | \tuplet 3/2 { a,8[( cis e] } \tuplet 3/2 { a, cis e) } \tuplet 3/2 { a,8[( d! fis] } \tuplet 3/2 { a, d fis) } | \tuplet 3/2 { gis,([ bis fis'] } \tuplet 3/2 { gis, cis e } \tuplet 3/2 { gis,[ cis dis!] } \tuplet 3/2 { fis, bis dis) } | } \new Dynamics { \override TextScript.whiteout = ##t s4-\markup { \italic sempre \dynamic pp \italic "e senza sordino" } }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cis \minor <cis cis,>1 | <b b,>1 | <a a,>2 <fis fis,> | <gis gis,> q | } >> </score> === 2악장 - 알레그레토 - 트리오 (내림라장조) === 3/4 박자, 복합 세도막 형식. 스케르초의 첫 번째 부분이 반복되지 않는 비교적 전통적인 스케르초 및 트리오이다. 그것은 내림라장조로 쓰여진 상대적으로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며, 첫 악장의 조성인 올림다단조의 [[같은 으뜸음조]]인 올림다장조와 동등한 [[딴이름한소리]]로 기록된다. 악장은 길이가 짧고 주제도 짧으며(고집저음의 음형), 여러 번의 반복으로 더 차분하고 우아하게 두 악장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데, [[프란츠 리스트|리스트]]는 그것을 "두 심연(深淵) 사이의 한송이 꽃"이라고 불렀다.<ref>[[Alfred Brendel|Brendel, Alfred]] (2001). [https://www.amazon.co.uk/Alfred-Brendel-Music/dp/1906217017/ref=sr_1_1?s=books&ie=UTF8&qid=1325880457&sr=1-1#reader_1906217017 ''Alfred Brendel on music'']. A Capella Books. p. 71. {{ISBN|1-55652-408-0}}.</ref> 악장은 전반적으로 "p"(piano, 여리게)에 놓여져 있지만, 소수의 "sf"(sforzando, 스포르찬도, 특히 세게)와 "fp"(포르테피아노, 세게 곧 여리게)는 그 악장의 명랑한 기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score lang="lilypond">\new PianoStaff << #(set-global-staff-size 17) \new Staff \relative c'' { \key des \major \time 3/4 \tempo "Allegretto" \partial 4 <as des>4( | <as c>2 <g bes>4 | <as es'>4-.) r <f des'>-. | <as c>4-. r <g bes>-. | as4-. r <des ges!>( | <des f>2 <c es>4 | <des as'>4-.) r <bes ges'>-. | <des f>4-. r <c es>-. | des4-. r } \new Dynamics { s4\p }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des \major f4( | es2 des4 | c-.) r <bes des,>-. | <es es,>-. r <des es,>-. | <c as>-. r \clef "treble" bes'4( | as2 g4 | f-.) r <es ges>-. | <as as,>-. r <ges as,>-. | <f des>-. r } >></score> === 3악장 - 프레스토 - 아기타토 (올림다단조) === 4/4 박자, 소나타 형식. 폭풍우가 치는 마지막 악장은 베토벤의 "실험"(동반 소나타 Opus 27-1 및 이후의 Opus 101에서도 수행됨)을 반영, 이 작품의 중심이며 세 개의 악장 중 가장 무거운 악장이다. 첫 번째 주제는 오른손이 등반하는 아르페지오와 왼손의 강한 스타카토이다. 두 번째 주제는 첫 번째 주제에 얽힌 노래와 비슷하다. 전개부의 첫 부분에서는 두 가지 주제를 검토하고 재현부의 마지막에서는 극적인 절정에 도달한다. 이 악장의 감정의 폭발은 매우 강렬하며, 빠른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및 과장된 표현 기호가 많기 때문에 연주자의 기술과 정서적 경험에 대한 요구 사항이 높다. [[찰스 로젠|로젠]]은 이 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억제되지 않은 감정 표현이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격렬함이 놀랍다."<ref name="Rosen">{{서적 인용|title=Beethoven's Piano Sonatas: A Short Companion|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last=Rosen|first=Charles|authorlink=Charles Rosen|year=2002|publisher=Yale University Press|page=[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page/157 157]|isbn=978-0-300-09070-3}}</ref> 베토벤은 "sf"(sforzando, 스포르찬도, 특히 세게) 음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전략적으로 배치된 몇 개의 "ff"(fortissimo, 포르티시모, 매우 세게) 악절과 함께 전체적으로 "p"(piano, 여리게) 마킹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력한 사운드의 감각이 만들어지고 있다. <score>\new PianoStaff << #(set-global-staff-size 17) \new Staff \relative c { \key cis \minor \tempo "Presto agitato" \clef "bass" r16 gis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cis \clef "treble" e gis, cis e | \bar ".|:" gis16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cis e <gis e cis gis>8-. q-. | \clef "bass" r16 gis,,, bis dis gis bis, dis gis bis dis, gis bis \clef "treble" dis gis, bis dis | } \new Dynamics { s1\p s2. s4\sf } \new Staff \relative c, { \clef "bass" \key cis \minor \repeat unfold 4 { cis8-. gis'-. } | \repeat unfold 3 { cis,8 gis' } <cis cis,> gis | \repeat unfold 4 { bis,8 gis' } | } >></score> == 베토벤의 페달 마크 == [[파일:Manuscript of the Piano Sonata No. 14 in C-sharp minor Op.27-2 by Beethoven (trimmed).pdf|섬네일|피아노 소나타 14번의 자필 악보. 이미지를 클릭하여 다른 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upright=1.2]] {{참고|피아노 역사와 음악 공연|음소거 (음악)|피아노 페달#베토벤과 페달|역사적으로 알려진 공연}} 첫 번째 악장을 시작할 때 베토벤은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은 지시를 포함시켰다: "Si deve suonare tutto questo pezzo delicatissimamente e senza sordino"("이 전체 곡은 댐퍼(약음기) 없이 최대한 섬세하게 연주해야 한다"<ref>Translation from {{harvnb|Rosenblum|1988|p=136}}</ref>). 이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현대의 피아노와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 모두) 악장 내내 서스테인 페달을 밟거나 적어도 전체적으로 페달을 사용하지만 화음이 변경되면 다시 적용하는 것이다. 베토벤 시대의 댐퍼(약음기)라는 것은 현대의 현과 햄머 사이에 펠트를 껴서 소리를 완화시키는 효과를 주는 무릎레버(현대의 소프트 페달이나 일부 우나 코르다 페달의 효과에 해당)를 뜻하는데, 이를 사용하면 지속음과 배음이 모두 끊겨버리기 때문에 베토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피아노는 베토벤 시대의 악기보다 서스테인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서스테인 페달을 안정적으로 적용하면 불협화음이 생성된다. 대조적으로, “역사적 기반의 악기”(복원된 오래된 피아노, 또는 역사적 원칙에 기반한 현대 악기)를 사용하는 연주자는 문자 그대로 베토벤의 방향을 더 잘 따를 수 있다. 현대의 피아노 연주를 위해 몇 가지 옵션이 제시되었다. * 한 가지 옵션은 과도한 불협화음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주기적으로 서스테인 페달을 변경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소나타의 리코르디 판에서 편집자가 제공한 페달 마크에서 볼 수 있다.<ref>Translation from {{harvnb|Rosenblum|1988|p=136}}</ref> * “하프 페달링”(페달을 부분적으로 밟는 기술)은 종종 19세기 초에 페달의 짧은 서스테인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사용된다. 찰스 로젠은 하프 페달을 밟거나 1초 정도 늦게 페달을 놓을 것을 제안했다.<ref name="Rosen3">{{서적 인용|title=Beethoven's Piano Sonatas: A Short Companion|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last=Rosen|first=Charles|authorlink=Charles Rosen|year=2002|publisher=Yale University Press|page=[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page/157 157]|isbn=978-0-300-09070-3}}</ref> * 조셉 바노베는 소스테누토 페달 사용을 제안한다. 피아니스트는 원하는 "흐림"을 제공하기 위해 낮은 베이스 현의 동조적인 떨림을 허용하면서 깨끗하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이것은 악장을 시작하기 전에 피아노의 가장 낮은 베이스 음을 조용히 누른 다음, 악장이 지속되는 동안 이러한 댐퍼(약음기)를 유지하기 위해 소스테누토 페달을 사용하여 수행한다.<ref name="Rosen4">{{서적 인용|title=Beethoven's Piano Sonatas: A Short Companion|url=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last=Rosen|first=Charles|authorlink=Charles Rosen|year=2002|publisher=Yale University Press|page=[https://archive.org/details/beethovenspianos0000rose/page/157 157]|isbn=978-0-300-09070-3}}</ref> == 참조 음반 == {{Div col}} * [[프리드리히 굴다]], 1951 (Decca) * [[빌헬름 켐프]], 1961 (DG)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962 (RCA Red Seal)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962 (RCA Victor Red Seal) * [[발터 클린]], 1963 (VOX (6)) * [[알프레드 브렌델]], 1964 (Turnabout) * [[빌헬름 박하우스]], 1965 (Decca) * [[다니엘 바렌보임]], 1967 (His Master's Voice) * [[밴 클라이번]], 1970 (RCA Red Seal) * [[파울 바두라스코다]], 1973 (BASF) * [[라두 루푸]], 1973 (Decca) * [[클라우디아 아라우]], 1979 (Philips) * [[에밀 길렐스]], 1981 (DG) *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1981 (Decca) * [[예노 얀도]], 1987 (Naxos) * [[두브라브카 톰시크]], 1988 (Pilz) * [[미하일 플레트네프]], 1989 (Virgin Classics) * [[예프게니 키신]], 1998 (RCA Victor Red Seal) * [[이연화 (피아노 연주자)|이연화]], 2007 (SONY BMG) * [[임현정]], 2012 (Warner Classics) * [[김선욱]], 2017 (Accentus Music) * [[손민수(피아노 연주자)|손민수]], 2020 (Sony Classical) {{Div col end}}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 * "[[scores:Piano Sonata No.14, Op.27 No.2 (Beethoven, Ludwig van)|피아노 소나타 14번 올림다단조, 작품번호 27-2]]" ː [[국제 악보 도서관 프로젝트]]의 악보 (IMSLP) * [http://www.oocities.com/Vienna/2192/essays1.html 32개의 피아노 소나타에 관한 알프레드 브렌델의 고찰] (영문) * [https://www.allmusic.com/composition/mc0002373304 ''올뮤직'' 제임스 릴 "피아노 소나타 14번"] (영문) * [https://www.mutopiaproject.org/cgibin/piece-info.cgi?id=276 소나타 14번], 뮤토피아 프로젝트 * [https://www.youtube.com/watch?v=W0UrRWyIZ74 클라우디아 아라우에 의한 연주 (1970년, 본, 베토벤할레, 베토벤페스트)] on YouTube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거 통제}} [[분류: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14]] [[분류:올림다단조 작품]] [[분류:환상곡]]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언어 정보 |이름= 중국어 |자기이름=中文, 汉语, 华语 |IPA=[ʈ͡ʂʊŋ˥ wən˨˥], [xän˥˩ ɥy˨˩˦], [xu̯ä˨˥ ɥy˨˩˦] |그림=Chineselanguage.svg |그림 크기=160px |계통색=중국티베트 |민족=[[중국인]] |나라=[[중화인민공화국]], [[싱가포르]] , [[대만]] 등 |지역=[[동아시아]] |인구=약 12억 명<br /> |순위=1위 ([[모국어]] 기준) |계통1=[[중국티베트어족]] |문자=[[한자]]([[정체자]], [[간체자]]) |어순=SVOanPa |공용나라={{PRC}}<br /> *{{HKG}} *{{MAC}} {{SIN}}<br />{{TWN}}<br />{{국기나라|유엔}}<br />[[상하이 협력 기구]]<br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표준=[[중화인민공화국|PRC]]: [https://web.archive.org/web/20151218080430/http://www.china-language.gov.cn/ 국가언어문자작업위원회] ({{zh|s=国家语言文字工作委员会}})<br />&nbsp;&nbsp;[[홍콩|HKG]]: [https://scolarhk.edb.hkedcity.net/tc/] ({{zh|t=語文教育及研究常務委員会}})<br>&nbsp;&nbsp;[[마카오|MAC]]: ({{zh|t=教育暨青年局語言推廣中心}})<br>[[중화민국|ROC]]: [http://depart.moe.edu.tw/ED2400/] ({{zh|t=教育部終身教育司}})<br />[[싱가포르|SIN]]: [http://www.mandarin.org.sg/ 추광화어이사회] ({{zh|s=推广华语理事会}})<br>[[말레이시아|MAS]]: ({{zh|s=华语规范理事会}}) |iso1=zh |iso2b=chi |iso2t=zho |lc1=cdo|ld1=민둥어(閩東語)|ll1=민둥어 |lc2=cjy|ld2=진어(晉語)|ll2=진어 |lc3=cmn|ld3=북방어(北方語)|ll3=북방어 |lc4=cpx|ld4=보선어(莆仙語)|ll4=보선어 |lc5=czh|ld5=후이어(徽語)|ll5=후이어 |lc6=czo|ld6=민중어(閩中語)|ll6=민중어 |lc7=dng|ld7=둥간어(東干語)|ll7=둥간어 |lc8=gan|ld8=간어(贛語)|ll8=간어 |lc14=yue|ld14=광둥어(粵語)|ll14=광둥어 |lc9=hak|ld9=하카어(客家語)|ll9=하카어 |lc10=hsn|ld10=샹어(湘語)|ll10=샹어 |lc11=mnp|ld11=민베이어(閩北語)|ll11=민베이어|lc12=nan|ld12=민난어(閩南語)|ll12=민난어 |lc13=wuu|ld13=우어(吳語)|ll13=우어 |lc15=zho|ld15=표준 중국어(標準中國語)|ll15=표준 중국어 |sil=CHN |지도=New-Map-Sinophone World.PNG |지도 설명=국가에 따른 중국어 사용자 수 }} '''중국어'''({{한국 한자|中國語}}) 또는 '''중문'''({{Zh|c=中文|p=zhōngwén}})은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언어군으로 '''한어'''({{zh|order=t|t=漢語|s=汉语|h=한위|p=hànyǔ}}, ㄏㄢˋㄩˇ), '''화어'''({{Zh|order=t|t=華語|s=华语|p=huáyǔ}}), '''중어'''(中語)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에 가장 많은 사용자가 있으며, 각지의 중국계 이주민들도 쓴다. 중국에서는 보통 중문(中文)으로 부르며 이러한 명칭은 현대 중국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으므로 역사적으로 그것까지 통틀어 일컬을 경우에는 한어(漢語)라고도 한다. 중국어는 단일의 언어라기보다는 [[방언연속체]]로 이루어진 제어(諸語)이며, 학자에 따라 다르나, 방언은 크게 10개 정도로 나뉜다. 따라서 중국어라 하면 좁은 의미로는 [[베이징관화]]에 기반한 현대 [[표준 중국어]]만을 가리키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는 관련된 [[언어변이형]]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베이징]] 등지의 방언이자 가장 많은 구사자를 보유한 [[관화]](官話; Mandarin),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남부의 [[민어 (언어)|민어]](閩語), [[광둥어]] 등이 있다. 현대 중국어는 고전 문학에 사용되는 [[한문]]과는 문법과 어휘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현대 중국어에는 Social(社会) , rebound(反弹), Electricity(电气) 등 근대에 도입된 많은 번역 어휘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한자]](漢字)라는 문자로 표기되는데, 이는 고대의 상형문자 [[갑골문]]을 기반으로 한 [[표어문자]]로서 그 수가 매우 많으며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발음을 표기할 때에는 한자에서 따온 [[주음부호]]와 [[로마자]]를 이용한 [[한어 병음]]이 사용된다. 현대 중국어는 [[성조]]가 존재하며, 성조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SVO형|SVO 어순]]을 따르며, 형태소가 굴절없이 단어를 이루어 어순에 따라 문법적 역할이 결정되는 [[문법적 고립어|고립어]]이다 == 분류 == === 역사적 분류 === 중국어를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상고 한어]]: [[주나라]]와 [[진나라]]와 [[한나라]]의 한어 * [[중고 한어]]: 남북조와 [[당나라]]의 한어 * [[중세 한어]]: [[오대십국]]과 [[송나라]]의 한어 * [[근대 한어]]: [[원나라]], [[명나라]]와 [[청나라]]의 한어 * [[현대 한어]]: 현대 중화권에서 쓰는 한어 === 계통학적 분류 === [[파일:Map of sinitic languages-ko.svg|섬네일|300px|중국어 방언]] 중국어 제(諸) 방언의 특징은 중국어를 모어로 하면서 방언을 쓰는 집단 간에 [[상호의사소통성|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각 언어변이형을 방언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개별의 언어로 취급하느냐 하는 데에는 논란이 있다. 다만, [[한자]] 및 [[한문]]이라는 공통된 문어의 기반 위에서는 중국어 제방언을 아우르는 상호의사소통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중국어 제방언을 공통된 언어로 묶는 역할을 한다. # cmn — [[관화]]({{lang|zh-Hant|官話}}) 또는 북방화({{lang|zh-Hant|北方話}}): 모어 화자 8억 명 이상의 중국어 최대 방언이다. 영어 명칭에 따라 [[만다린어]](Mandarin語)라고도 한다. ## '''[[베이징관화]] — ({{lang|zh-Hant|北京官話}})''' -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싱가포르]] 등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는 [[표준 중국어]]의 모태가 되는 방언.<ref>[[대한민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 영역 중국어는 표준 중국어로 문제를 출제한다. q=[[화어]], [[국어]], [[보통화]]라고도 한다.</ref> ## cjy — [[진어]]({{lang|zh-Hant|晉語}}): [[산시성 (산서성)|산시성]](山西省)에서. 보통 관화의 하위 방언으로 보나, 개별 방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 동북말({{lang|zh-Hant|東北話}}) # [[민어 (언어)|푸젠어]]({{lang|zh-Hant|閩語}}): [[푸젠성]](福建省)과 [[중화민국]]에서 5000만명. ## cdo — [[민둥어]](閩東語): 푸젠성 동북쪽과 [[저장성]](浙江省)남쪽 ## cpx — [[푸셴어]]({{lang|zh-Hant|莆仙語}}): 푸젠성 중앙의 [[푸톈시]](莆田市)와 [[셴유현]](仙遊縣)에서. ## czo — [[민중어]](閩中語): 푸젠성 중앙에서. ## mnp — [[민베이어]]({{lang|zh-Hant|閩北語}}): 푸젠성 북부에서. ## nan — [[민난어]](閩南語): 푸젠성 남부, [[광둥성]](廣東省)동부, [[하이난성]](海南省) 및 [[중화민국]]에서. ### [[차오저우어]]({{lang|zh-Hant|潮州語}}) ### [[하이난어]]({{lang|zh-Hant|海南語}}) ### [[장저우어]](漳州語) ### [[타이완어]](臺灣語): [[중화민국]]에서. ### [[샤먼어]](廈門語): [[샤먼시]]에서. ### [[취안저우어]]({{lang|zh-Hant|泉州語}}) # gan — [[간어]]({{lang|zh-Hant|贛語}}): [[장시성]](江西省)에서. - 2000만 명 # hak — [[학가어]](客家語): 광둥성 북부와 여러 나라의 화교 집단. - 3500만 명 # hsn — [[샹어]]({{lang|zh-Hant|湘語}}): [[후난성]] (湖南省)에서. - 3500만 명 # wuu — [[우어]]({{lang|zh-wuu-Hant|吳語}}): 중국 동부에서. - 9000만 명 # yue — [[웨어 (언어)|웨어]]([[광둥어]] 등)({{lang|zh-Hant|粵語, 廣東話}}, ): [[홍콩]], [[마카오]],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의 일부 및 해외중국인. - 8000만명 # dng — [[둥간어]](東干語):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둥간족]]. # [[핑어]](平語) - [[좡족]]. # czh - [[후이어]]({{lang|zh-Hant|徽語}}) - [[우어]] 혹은 [[간어]]의 일부로, [[안후이성]](安徽省)에서. == 음운 == 중국어는 [[성조]]어이다. 음절소리의 고저의 차이가 자음이나 모음과 같이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성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표준 중국어에는 {ma}라고 하는 형태소는 경성도 포함해서 19개나 있다<ref>{{lang|ja|松岡、2001}}</ref>. 하지만 음평성(陰平聲), 양평성(陽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의 4개의 성조와 경성이 있어서 모든 것이 같은 발음은 되지 않는다. * 음평성(제1성) - {{zh|s=妈|t=媽|p=mā|prefix=no}} (어머니) * 양평성(제2성) - {{zh|c=麻|p=má|prefix=no}} (삼, 얼얼하다) * 상성(제3성) - {{zh|s=马|t=馬|p=mǎ|prefix=no}} (말) * 거성(제4성) - {{zh|s=骂|t=駡|p=mà|prefix=no}} (욕하다, 욕설을 퍼붓다) * 경성 - {{zh|s=吗|t=嗎|p=ma|prefix=no}} (의문조사) == 문법 == 어형변화([[활용]])가 일어나지 않고, 어순이 의미를 해석할 때의 중요한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고립어 (언어유형론)|고립어]]이다. 고립적인 특징을 가진 언어로서는 그 밖에 [[영어]] 등이 있다. 기본어순은 주어-서술어-목적어형(SVO)이다. 하지만, 현대북방어나 문어에서는 {{lang|zh|把}}나 {{lang|zh|将(將)}}, {{lang|zh|以}}에 의한 목적격 표시 등이 있으며, 주어-서술어-목적어→주어-목적어-서술어 형의 문장을 만들 수가 있으며, 게다가 [[교착어]]에 가까워져 있다. '''예''' * 표준중국어의 문법: {{lang|zh|{{윗주|我|wǒ}}{{윗주|去|qù}}{{윗주|图|tú}}{{윗주|书|shū}}{{윗주|馆|guǎn}}{{윗주|看|kàn}}{{윗주|书|shū}}。(我去圖書館看書。)}}(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 ** [[상하이어]]의 문법: {{lang|zh|我到图书馆看书。}} 현대 중국어에서는 일본어처럼 동사의 전후나 문말에 조사, 조동사가 온다. 예를 들면 '''了'''는 동사에 붙으면 완료(perfect)를 표시하는 상(相, aspect)을 나타내며, 문말에 붙으면 법성(法性, modality)을 나타낸다. 중국어에는 [[시제]]를 나타내는 [[문법]]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상은 존재하며, 동사에 {{lang|zh|了}}(완료), {{lang|zh|过(過)}}(경험), {{lang|zh|着(著)}}(진행)을 붙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 {{lang|zh|{{윗주|我|wǒ}}{{윗주|昨|zuó}}{{윗주|天|tiān}}'''{{윗주|去|qù}}'''{{윗주|了|le}}{{윗주|电|diàn}}{{윗주|影|yǐng}}{{윗주|院|yuàn}}。(我昨天'''去'''了電影院。)}} (어제 영화관에 갔었다.) 또, '''[[격]]'''에 의한 어형변화는 없는 것이 고립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중국어에도 [[명사]]나 [[형용사]]에 격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격은 어순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예''' 1인칭단수의 [[인칭대명사]] 我 * 我去過中國。([[주격]]: 나는 중국에 간 적이 있다.) ** 상하이어:  <nowiki>'''</nowiki>我<nowiki>'''</nowiki>到中國去過個。 * 我媽媽讓<nowiki>'''我'''</nowiki>學習。([[목적격]]: 어머니는 나에게 공부시킨다.) ** 상하이어:  我個媽媽讓<nowiki>'''</nowiki>我<nowiki>'''</nowiki>學習。 == 사용 국가 및 지역 == {| class="wikitable" ! style="text-align: left;" colspan="2" |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 |- | colspan=2 | * {{PRC}} * {{HKG}} * {{MAC}} * {{SIN}} * {{TWN}} |- ! style="text-align: left;" colspan="2" | 공용어는 아니지만 중국어를 사용하는 국가 |- | {{MYS}} || 인구의 약 20~25%가 사용한다. 준중화권 국가. |- | {{THA}} || 인구의 약 10%가 사용한다. 준중화권 국가. |- | {{IDN}} || 인구의 약 4%가 사용한다. 준중화권 국가. |- | {{PHI}} || 일부 지역에서 통용. |- | {{BRU}} ||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며, 소수 중국계가 많이사용. |- | {{FRA}} || 대도시의 일부 중국계 주민에 의해서 사용. |- | {{UK}} || 대도시의 일부중국계주민에 의해서 사용. |- | {{CAN}} || rowspan="2" | 일부 차이나타운 지역에서 사용. |- | {{AUS}} |- | {{RUS}} || 일부 중국계 주민에 의해서 사용. |} == 표기 == {{본문|한자}} 중국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인 [[한자]]는 [[표의 문자]]로 [[로마자]]나 [[한글]] 같은 [[표음 문자]]와 달리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발음을 표기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다. 그래서 외국의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는 그 지역의 원래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가차(假借)<ref>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관하게 다른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ref>하여 쓰거나, 간혹 그 용도와 특징을 한자어로 번역하여 (예컨대 [[컴퓨터]]를 電腦(전뇌)로 번역) 어휘를 도입하기도 한다.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주음부호]]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www.ethnologue.com/show_family.asp?subid=90151 Ethnologue report for Chinese] {{UN 공식 언어}} {{중국어권}} {{중화인민공화국 주제}} {{전거 통제}} [[분류:중국어| ]] [[분류:성조어]] [[분류:중국의 언어]] [[분류:대만의 언어]] [[분류:몽골의 언어]] [[분류:홍콩의 언어]] [[분류:마카오의 언어]] [[분류:싱가포르의 언어]] [[분류:말레이시아의 언어]] [[분류:중국의 상징]] [[분류:고립어 (언어유형론)]] [[분류:분석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구별|바쿠}} {{쿠바 표}} '''쿠바'''({{llang|es|Cuba}}), 전체 이름 '''쿠바 공화국'''({{llang|es|República de Cuba|레푸블리카 데 쿠바}})은 [[북아메리카]]의 [[카리브 제도]]에 있는 섬나라로, [[아메리카]]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수도는 [[아바나]]이다. 카리브해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약 1,000만명의 주민이 살고있다. 카리브해에서 면적이 가장 큰 나라이다. [[윈드워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있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케이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케이만 제도와 자메이카가,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미국]] [[플로리다주]]가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포함되지만, 광의의 중앙아메리카에도 포함된다.「아메리카 합중국의 뒷마당」이라고 일반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뒷마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요로에 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성립한 공산주의 정권을 기념하여 「카리브에 떠오르는 붉은 섬」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참여한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래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 봉쇄로 [[경제]]의 어려움을 자립 경제 체제로 버티면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2014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 선언을 했다. [[1961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 바뀌었으며, [[냉전]] 시기인 [[1991년]]까지 [[중남미]]의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지원 국가였다. 쿠바 섬은 카리브해의 진주라고 불리면서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ref name="글로벌 쿠바">《[[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북아메리카/쿠바|쿠바]]〉</ref> == 역사 == {{쿠바의 역사}} {{본문|쿠바의 역사}} === 식민지 시대 === 쿠바에는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해방투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 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베일레르({{lang|es|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메인호 사건]])(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확인되었다.)를 구실로 미국이 일으킨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 군인들과 바티스타의 독재 ===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 공산주의 독재 === [[1959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장악하여 쿠바는 공산화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집권한 이 후 쿠바 내 미국 자산을 모두 국유화하였고, 이에 미국은 강력반발하며 보복으로 1961년 1월 3일 국교를 단절하고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이후, 미국은 [[피그스 만 침공|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공산화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공산당 군벌들을 원조했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쿠바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차원의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쿠바에 제재를 가했다. 카스트로정권에 반대하여 수감된 [[양심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침해로 비난받아 왔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새로운 국가평의회장직을 계승했다. 2014년 12월 18일, 쿠바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2016년 11월 28일에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는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지리 === {{본문|쿠바의 지리}} [[파일:Cayol3.jpg|섬네일|200px|왼쪽|[[카요라르고델수르섬]]의 해변.]] [[파일:Nebel im Valle des Vinales, Kuba.jpg|200px|왼쪽|섬네일|[[비냘레스 계곡]]의 풍경.]] 쿠바는 [[카리브해]] 북쪽에 있으며 주변으로 [[카리브해]], [[멕시코만]],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다. 쿠바 북쪽으론 [[미합중국]] [[플로리다주]]와 [[바하마]], 동쪽으로는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와 [[아이티]], 서쪽에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 남쪽으로는 [[케이맨 제도]]와 [[자메이카]]와 이웃하고 있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군도]]로, 쿠바는 주요 섬이다. 주변의 섬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콜로라도스 제도]], [[사바나 카마구에이 제도]], 하르디네스 데 라 레이나 제도, [[카나레오스 제도]]이다. 쿠바 본섬은 면적이 105,006 제곱킬로미터로 국토의 대부분을 이루며, 길이는 1,233km에 이르는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섬이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은 남서쪽의 [[후벤투드섬|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젊음의 섬)으로 그 면적은 3,056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의 총 면적은 110,860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2050년]]이 되면 국토의 6%가 바다에 잠긴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320601002 |출판사=서울신문사 |제목=‘쿠바 침몰’…2050년 국토 6% 바다에 |날짜=2009-03-20 | 확인날짜=2009-04-27}}</ref> 본섬은 대부분 평탄하거나 구릉이 있는 평야이다. 섬 남동쪽 끝에는 가파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피코 레알 델 투르키노 산]](높이 1,975m)이다. === 기후 === [[파일:Alejandro de Humboldt National Park.jpg|200px|왼쪽|섬네일|쿠바 동부의 [[알레한드로 데 움볼트 국립 공원]].]] 이 곳의 기후는 [[열대]]에 속하지만, 연중 부는 북동쪽의 무역풍으로 온화하다. 일반적으로(지역차가 있지만) 11월에서 4월까지는 건기이며,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평균 기온은 1월에는 21&nbsp;°C, 7월에는 27&nbsp;°C이다. 카리브 해는 기온이 따뜻한 데다 쿠바 섬이 멕시코 만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허리케인]]<ref name="글로벌 쿠바"/> 이 지나갈 때가 많다. 허리케인은 9월과 10월에 자주 일어난다. === 천연 자원 === 쿠바의 가장 중요한 광물 자원은 [[니켈]]이다. 쿠바는 러시아 다음으로 니켈 매장량이 많다.<ref name = "usgs.gov-Cuba97">[http://minerals.usgs.gov/minerals/pubs/country/1997/9509097.pdf The Mineral Industry of Cuba] (1997), Ivette E. Torres</ref> 캐나다의 에너지 기업인 [[쉐리트 인터내셔널]](Sherritt International) 사는 [[모아]]에 거대한 니켈 광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주요 자원으로는 니켈 채굴로 나오는 부산물인 [[코발트]]가 있다. 쿠바는 세계에서 정제한 코발트 생산량이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이다.<ref name = "usgs.gov-Cuba97"/> 최근 석유 탐사로 북부 쿠바 분지에서 약 46억~93억 배럴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쿠바는 이곳에 시험 시추를 시작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havanajournal.com/business/entry/cuban-oil-gas-output-grow-prensa-latina/ |제목=Cuban Oil, Gas Output Grow - Prensa Latina - Cuba Business News - Havana Journal<!-- Bot generated title --> |확인날짜=2009-06-16 |archive-date=2010-01-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116015522/http://havanajournal.com/business/entry/cuban-oil-gas-output-grow-prensa-latina/ }}</ref><ref>{{웹 인용 |url=http://www.thetrumpet.com/index.php?page=article&id=2826 |제목=theTrumpet.com<!-- Bot generated title --> |확인날짜=2009년 6월 16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205191119/http://www.thetrumpet.com/index.php?page=article&id=2826 |보존날짜=2008년 2월 5일 |url-status=dead }}</ref><ref>[http://www.guardian.co.uk/comment/story/0,,1936186,00.html Wayne S Smith: After 46 years of failure, we must change course on Cuba | Comment is free | The Guardian<!-- Bot generated title -->]</ref> == 정치 == {{본문|쿠바의 정치}} 쿠바의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가원수는 국가평의회 의장과 국무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현재 [[미겔 디아스카넬]](임기 5년)이다. 국가평의회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폐회 중일 때 입법 기능을 수행하고, 국무위원회는 행정을 담당한다. 국가평의회와 국무위원회의 구성원은 인민 주권 민족 회의(Asamblea Nacional del Poder Popular)에서 선출한다. 입법권은 5년 임기인 609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행사한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의 기관은 쿠바 최고 인민 법원(Tribunal Supremo Popular)이다. 쿠바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하지만, 후보를 지명하거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정당은 "쿠바 공산당"(PCC) 이외에는 없다. 쿠바의 [[수도]]는 [[아바나]]이며, 쿠바에는 14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역의 행정구역이 있다. 쿠바는 대단히 군사화 된 국가이며 국가 자원의 큰 부분을 군대의 설립과 유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할애하였다. 쿠바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전쟁을 지원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미국]]과는 [[2014년]] [[12월 18일]] [[1961년]] 국교가 단절된 이후 53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미국]]은 수개월 내에 쿠바의 [[아바나]]에 대사관을 재개관하기로 하고 여행, 송금 제한 완화와 미국 금융기관이 쿠바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제재 수위를 낮추기로 했다. [[대한민국]]과는 [[2005년]] [[KOTRA]] 무역관이 개관하였고, 현재 연간 5000여 명이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민간차원에서는 차질 없는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2024년 2월 14일 수교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60년에 수교하였다. [[파일:Cuba-map.png|섬네일|600px|쿠바의 행정 구역]] === 행정 구역 === [[쿠바의 행정 구역]] 쿠바에는 15개 주(provincia)와 특별구역([[후벤투드섬|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와 [[관타나모만 해군기지]]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여섯 지방으로 [[피나르 델 리오]](Pinar del Río), [[아바나]](Habana), [[마탄사스]](Matanzas), [[라스 비야스]](Las Villas), [[카마궤이]](Camagüey), [[오리엔테]](Oriente)로 나누었다. 현재 행정 구역은 쿠바 독립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군사 지역과 매우 유사하다. 쿠바의 주는 여러 시군(municipio)으로 세분된다. == 경제 == [[파일:Oljepumpe cuba.jpg|섬네일|200px|쿠바의 오일 펌프]] 쿠바 정부는 정부가 대규모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조직하는 데에 공산주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대부분은 정부가 소유·운영하며, 정부가 대부분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업의 인력 분담율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1981년 공공부분이 91.8%, 사기업이 8.2%의 인력을 고용한 것에 비하여, 2006년에는 공공부분이 78%, 사기업이 22%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ref name=oxfam>{{웹 인용 |url= http://www.oxfamamerica.org/newsandpublications/publications/research_reports/art3670.html/OA-Cuba_Social_Policy_at_Crossroads-en.pdf |제목= Social Policy at the crossroads |형식= PDF |확인날짜= 2009-02-05 |출판사= oxfamamerica.org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1009163422/http://www.oxfamamerica.org/newsandpublications/publications/research_reports/art3670.html/OA-Cuba_Social_Policy_at_Crossroads-en.pdf |보존날짜= 2007-10-09 |url-status= dead }}</ref> 자본 투자는 제한적이며 정부가 승인하여야 가능하다. 게다가, 쿠바 사람을 고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쿠바 정부에 임금을 지급하고, 쿠바 정부가 다시 해당 근로자에게 [[쿠바 페소]]로 임금을 지급한다.{{출처|날짜=2008-07-28}} 쿠바 정부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특권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공산당원 또는 정부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대가 존재한다.<ref>{{웹 인용 |url=http://ctp.iccas.miami.edu/Research_Studies/BLatell.pdf |제목=Untitled |확인날짜=2009년 1월 30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326012540/http://ctp.iccas.miami.edu/Research_Studies/BLatell.pdf |보존날짜=2009년 3월 26일 |url-status=dead }}</ref> 교통, 직업, 주거, 대학 교육 그리고 보다 우수한 보건 혜택을 받는 것은 정부나 또는 공산당 내에서 신분을 가져야 가능하다.<ref>[http://www.hrw.org/reports/1999/cuba/Cuba996-09.htm Cuba's Repressive Machinery]</ref> 1980년대 말부터 쿠바의 국가 운영 경제에 대한 [[소련]]의 보조금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쿠바에게 소련은 수출의 보호무역 시장이었고 많은 경제 원조의 주역이었다. 소련은 쿠바산 사탕수수를 시장보다 높은 가격에 사 주었고 석유를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쿠바에 공급해 주었다. 한때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60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 보조금이 사라지자 쿠바의 경제는 "페리오도 에스페시알 엔 티엠포 데 파즈"(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 불리는 급속한 경기불황에 직면하였다. 1992년에는 미국이 쿠바에 대한 [[엠바고]]를 더욱 강화하였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쿠바 사람들의 삶의 질을 1년 내에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는 데에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쿠바는 1인당 실질 GDP가 약 2만 달러에 달하지만, 엄청난 고환율 정책으로 인해 쿠바 페소화가 비정상적으로 자국내에선 고평가되어 있고, 국제 화폐 기준에서는 매우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수치이다. 전문가들은 쿠바의 1인당 명목 GDP를 약 7천 달러로 예상하며, 쿠바 내에서 생산되는 품목의 경우는 싼값에 거래되지만 수입 물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 상태이다.<ref name=oxfam/> [[소비에트 연방#소련 붕괴|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주의·후(後)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바는 소련의 원조의 종결을 벌충하여 [[식량]], [[소비재]], [[서비스]] 산업의 부족을 완화시킬 제한적인 자유 시장 수단을 취하였다. 이러한 수단들은 일부 [[소매]]와 [[경공업]] 분야에서의 자체적인 [[고용]]과 기업계에서 [[미국 달러]] 사용의 합법화, 그리고 [[관광]] 산업의 육성을 포함한다. 1996년, 관광산업은 사탕수수 산업을 제치고, 쿠바가 경화(硬貨)를 벌어들이는 가장 큰 자원이 되었다. 쿠바는 최근 10년간 카리브해 지역의 관광산업에 있어서 시장점유율을 3배나 올려놓았다. 이것은 관광산업의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이며, 이러한 성장율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ref>{{웹 인용 |url= http://lanic.utexas.edu/la/cb/cuba/asce/cuba7/crespo.pdf |제목= Cuban tourism in 2007: economic impact |확인날짜= 2009-02-11 |저자= Nicolás Crespo and Santos Negrón Díaz |형식= PDF |출판사= University of Texas |언어= 영어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1030021237/http://lanic.utexas.edu/la/cb/cuba/asce/cuba7/crespo.pdf# |보존날짜= 2007-10-30 |url-status= dead }}</ref> === 농업 === [[파일:Tobacco field cuba1.jpg|섬네일|200px|쿠바의 담배 농장]] 쿠바의 경제에서 기본은 [[사탕수수]] 생산이다.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부침땅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사탕수수는 수출총액의 80~85%를 차지한다. 설탕 수출량의 4분의 3이 미국에 수출되고 있다. 사탕수수의 생산은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한다. 아바나 [[시가]]는 세계 최고품 담배로 주요 수출품이다. 그밖에 [[벼]], [[옥수수]], [[두류|콩]], [[땅콩]], [[감자]], [[귤]], [[커피]], [[레몬]], [[코코아]], [[파인애플]], [[목화]], 채소류 등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농업협동화와 저수지건설이 힘차게 추진되고 있다. 축산물은 이 나라 [[농업]]의 2대 부문의 하나이다. 혁명 전의 플랜테이션이나 대지주 경작지는 전부 [[공산주의]] [[혁명]]이후 정부에 의해 [[토지개혁]]이 시행되어 국유농장이나 소농(小農)의 경작지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 쿠바"/>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봉쇄 정책으로 [[유기농업]]이 시작되었다. 쿠바는 사탕수수를 위주로 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포기하고 소와 유기질 비료를 이용한 협동농장 중심의 친환경 농업으로 전환하였다.<ref name="쿠바는 어떤">{{웹 인용 |url=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556.html |제목= [출판] 쿠바는 어떤 나라일까|확인날짜= 2009-06-10 |저자= 유현산 기자 |날짜= 2006-08-08 |웹사이트= 한겨레21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ref> === 목축업 === 주요 짐승은 [[닭]], [[소]], [[돼지]] 등이다. 수산업에서는 왕[[새우]]잡이가 유명하여 생산량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 공업 === 공업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탕공업이며 기타 채취, 전력, 야금, 세멘트, 화학, 원유가공 등 중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주요지하자원은 [[니켈]], [[코발트]], [[철]], [[망간]], [[구리|동]], [[크로뮴]], [[보크사이트]] 등이다. 주요수출품은 [[사탕수수]], [[니켈]]을 비롯한 광물류, 잎담배(시가)와 그 가공제품, [[커피]], 물고기 제품 등이며 주요수입품은 기계, 식료, 원유, 강재, 화학제품 등이다. [[철도]] 및 [[자동차]], 해상 운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무역 === 2006년 기준으로 쿠바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3.39%), 스페인(7.66%), 독일(5.66%), 미국(4.4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2.82%), 스페인(4.14%), 러시아(3.17%), 볼리비아(1.59%)이다. 2006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0,174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시가 제품(213,218천 달러), 기타 의약품(178,905천 달러), 무인 항공기(88,625천 달러), 페니실린 등 의약품(38,131천 달러), 금속(38,016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디젤유(450.232천 달러), 냉장고(281,446천 달러), 형광등(169,650천 달러), 쌀가루(152,997천 달러), 냉동 닭고기(105,213천 달러)이다. <ref>[https://wits.worldbank.org/, World Integrated Trade Solution] Worldbank</ref> == 사회 == [[국내 총생산]]의 10%를 투자하는 [[무상교육]]과 7%를 투자하는 [[무상의료]] 시스템은 오직 공공선의 목적으로 굴러간다. 쿠바에는 [[학생]]이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여 개에 달하고, [[의사]]들의 수준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ref name="쿠바는 어떤"/> 그러나 쿠바 국민은 전체가 [[배급]] 수첩을 소지하고 있으며, 매일 배급을 받는다. 과거에는 외국의 초청이 없는 한 해외로 출국할 수 없었으나 최근 여권만 있으면 출국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 인구와 주민 === {{본문|쿠바의 인구}} 이 나라는 500여 년 전에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인디오를 학살했기 때문에 백인 정착자와 흑인 이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주민의 인종 구성은 [[물라토]]가 37%, 유럽계 백인이 51% (주로 스페인계), 흑인 11%, 중국계 1% 인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도 [[메스티소]]가 있다. 쿠바 정부는 인종별 통계는 인종차별로 연결된다는 이유로 인종별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추계 값은 점차 혼혈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2002년 쿠바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쿠바의 총인구는 1117만7743명<ref>{{웹 인용 |url=http://www.cubagob.cu/otras_info/censo/index.htm |제목=Cuban Census |저자=Government of Cuba |확인날짜=2007-01-29 |날짜=200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203182631/http://www.cubagob.cu/otras_info/censo/index.htm |보존날짜=2007-02-03 |url-status=dead }}</ref> 이고 이 중 남성이 559만7233명, 여성이 558만0510명이었다.<ref>{{웹 인용 |저자 = Anthony DePalma | 날짜 = 1998-07-05|url =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310.html | 제목 =Cuban Site Casts Light on an Extinct People | 출판사 =New York Times | 확인날짜 = 2006-07-09}}</ref> 인종별로 보면, 백인이 727만1926명, [[메스티소]] 및 [[물라토]]가 277만8923명, 흑인이 112만6894명이었다. 인구 통계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이애미 대학교의 쿠바와 쿠바-미국 연구소(The Institute for Cuban and Cuban-American Studies)는 62%가 흑인이라고 말한다.<ref name="barrier">{{웹 인용 |url=http://www.miamiherald.com/multimedia/news/afrolatin/part4/index.html |제목= A barrier for Cuba's blacks | 출판사=Miami Herald}}</ref> 반면에 2002년 인구 조사에서는 백인이 65.05%로 나타났었다. 국제 소수자 인권 연대(The Minority Rights Group International)는 아프리카-쿠바 혼혈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혁명 전후의 빈약한 자료와 체계적인 연구의 결핍으로 인하여 여전히 의문인 상태라고 말한다. 쿠바의 인구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33.9%에서 62%로 매우 다양하다.<ref>{{웹 인용 |url=http://www.unhcr.org/refworld/docid/49749d342c.html|제목=World Directory of Minorities and Indigenous Peoples - Cuba : Afro-Cubans}}</ref> 쿠바의 주민은 매우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점점 흑인계의 인구증가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백인과 [[메스티소]]가 사회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는 다양한 종족간의 결혼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종족의 통합을 지향하는 추세다.<ref name="글로벌 쿠바"/> 백인의 선조들은 [[스페인 사람]]과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다.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카나리아 사람, 카탈란 사람, 안달루시아 사람, 갈리시아 사람 그 밖에 다른 스페인 사람들은 쿠바 이주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 러시아인, 전쟁 전 이민 온 일본계 등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쿠바에서 살고 있다. 아프리카-쿠바 혼혈인들의 선조는 주로 콩고에서 건너왔다. 20세기 동안 있었던 이민은 쿠바의 인구 특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3년에서 1933년 사이에 72만 명의 [[스페인 사람]], 19만 명의 아이티 사람, 12만 명의 자메이카 사람, 기타 약간의 미국 사람, 중국 사람 등의 이민이 있었다.<ref>福井英一郎(編)『世界地理15 ラテンアメリカII』朝倉書店、1978年</ref> 1959년 쿠바 혁명을 통해 이뤄진 현 정부의 정책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 국가별,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류에 기반 전통적 계급 사회는 파괴되고 많은 백인 유산 계층과 중산층이 미국 플로리다와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쿠바는 또한 비 쿠바인의 피신처이기도 한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천 명의 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10대 및 소아 난민들도 존재한다. 쿠바의 출산율(2006년, 1천명 당 9.88명<ref>{{웹 인용 |url= http://www.thepeninsulaqatar.com/Display_news.asp?section=World_News&subsection=Americas&month=May2007&file=World_News2007051741913.xml |제목= Population, birth rate falling in Cuba: Official |출판사= The Peninsula |확인날짜= 2009년 6월 9일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926222652/http://www.thepeninsulaqatar.com/Display_news.asp?section=World_News&subsection=Americas&month=May2007&file=World_News2007051741913.xml |보존날짜= 2007년 9월 26일 |url-status= dead }}</ref>)은 [[서반구]]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쿠바 전체의 인구는 1961년의 약 7백만 명에서 현재의 1100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증가율은 지난 수십 년간 둔화되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증가율이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2006년의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43명이다. 이러한 출산율의 하락은 서반구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쿠바에서 [[이혼]]은 자유로우며 1996년에 1천명당 58.6명이 이혼하였다. (캐리비안 지역 평균 35명, 라틴 아메리카 평균 27명, 유럽 평균 48명과 비교된다.) 피임율은 약 79%인데, 이 수치는 [[서반구]]의 상위 1/3에 속한다. === 언어 === 현재 [[공용어]]는 [[스페인어]](쿠바 방식의 스페인어)이다. 하지만 관광 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 본토에 가까운 곳, 그리고 공교육의 보급률이 높다는 점 때문에, 호텔, 레스토랑, 그리고 도심 등에서는 [[영어]](보통 [[자메이카]]에서 넘어온 사람도 사용한다.)가 통한다. 구 소련 해체 전에는 [[러시아어]]도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러시아어]]는 쿠바의 대도시에서 사용된다. 또한, [[아이티]]에서 이주한 주민은 [[아이티어]](아이티식의 독특한 크레올 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인구도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로 통하며, [[영어]], [[아이티어]]는 소수가 사용하기 따름이다. === 교육 === [[카스트로]]는 쿠바가 미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미국의 선전을 국민들이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력을 교육에 집중하였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은 교육 사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비율을 강화하고 관련 예산이 국가 예산의 16%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문맹률이 크게 하락하였고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무료로 제공한다. [[유치원]]을 거쳐 예비학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은 의무교육(obligatorio)이며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급을 20명으로 하거나, 서브티쳐(sub-teacher)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크게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실업계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한 인문계고등학교, 예술고, 체육고로 나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교복]]을 입으며, 학년에 따라, [[기숙사]] 여부에 따라, 전공에 따라 교복의 색과 무늬가 달라진다. 특히 농촌에서 높았던 문맹률 일소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률이 낮아졌다.<ref name="글로벌 쿠바"/>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99.8%이며<ref>{{웹 인용 |url=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cu.html |제목=CIA - The World Factbook<!--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9-06-13 |archive-date=2016-02-1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210152814/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cu.html |url-status=dead }}</ref> 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또 국민의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 1728년에 개교한 [[아바나 대학]] 등이 꼽힌다. 2001~2002년 기준으로 19만 1262명의 학생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또한 쿠바는 학교 교육에서 스포츠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필수 과목으로 도입했고 쿠바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 인권 === 쿠바 정부는 고문, 자의적인 구금, 불공정한 재판 그리고,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처형 {일명, 엘 파레돈("El Paredón")} 등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유린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ref>{{웹 인용| 날짜= 1967-04-07 | url = http://www.cidh.org/countryrep/Cuba67sp/indice.htm | 제목 =Information about human rights in Cuba | 출판사 =Comision Interamericana de Derechos Humanos | 언어 = 스페인어 | 확인날짜 =2006-07-09 }}</ref> [[휴먼 라이트 워치]]는 이 정권이 거의 모든 정치적인 반대를 탄압하고 표현·회합·사생활·정치적 운동의 자유와 [[적법절차]]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ref name="hrw2006">{{웹 인용|url=http://hrw.org/english/docs/2006/01/18/cuba12207.htm|제목=Cuba|출판사=Human Rights Watch|날짜=2006|확인날짜=2009-06-04|archive-date=2012-05-24|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20524192224/hrw.org/english/docs/2006/01/18/cuba12207.htm|url-status=dead}}</ref> [[앰네스티]]나 [[휴먼 라이트 워치]] 같은 인권 단체는 쿠바 양심수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08년의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쿠바를 최하위권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국경 없는 기자회는 쿠바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동으로 "세계에서 첫 번째로 언론인을 많이 투옥하는 나라"라고 간주한다.<ref>{{웹 인용|url=http://www.rsf.org/rubrique.php3?id_rubrique=367|제목=Updated information on imprisoned Cuban journalists|출판사=Reporters Without Borders|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30605124646/http://www.rsf.org/rubrique.php3?id_rubrique=367|보존날짜=2003-06-05|확인날짜=2009-06-04|url-status=dead}}</ref><ref>{{웹 인용|url=http://www.rsf.org/IMG/pdf/cl_en_2008.pdf|제목=Press Freedom Index 2008|출판사=Reporters Without Borders|날짜=2008|확인날짜=2009년 6월 4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303221403/http://www.rsf.org/IMG/pdf/cl_en_2008.pdf|보존날짜=2009년 3월 3일|url-status=dead}}</ref> 쿠바 반정부 단체 [[하얀 옷의 여자들]]은 2005년 [[유럽 의회]]에서 [[사하로프상]]을 수상했다. 쿠바는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였다. 유명 인사로는 페드로 루이스 보이텔(Pedro Luis Boitel), 마르타 베아트리즈 로케(Marta Beatriz Roque), 라울 리베로(Raúl Rivero), 마누엘 바즈케즈 포르탈(Manuel Vázquez Portal), 엑토르 마세다 구티에레즈(Héctor Maseda Gutiérrez), 호세 루이즈 가르시아 페레즈(Jorge Luis García Pérez), 기에르모 파리냐스(Guillermo Fariñas)가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투옥된 정치범의 숫자가 매우 축소되어 발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ref name="HRW-Cuba996-05">{{웹 인용 |url=http://www.hrw.org/reports/1999/cuba/|제목=CUBA'S REPRESSIVE MACHINERY: Human Rights Forty Years After the Revolution|chapter=V. GENERAL PRISON CONDITIONS|chapter-url=http://www.hrw.org/reports/1999/cuba/Cuba996-05.htm|출판사=Human Rights Watch|확인날짜=2007-12-18}}</ref> 휴먼 라이트 워치에 따르면, 정치범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수준 이하이며 비위생적인 조건의 감옥에 투옥되고 있다.<ref name=HRW-Cuba996-05 /> 그 밖에도 블로그를 통해서 쿠바 소식을 생생히 전하는 요아니 산체스(Yoani Sánchez)와 같은 경우는 매우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 쿠바 국민들은 정부 허가(하지만 극히 드물다) 없이는 쿠바를 떠나거나 돌아올 수 없다.<ref name="travel">{{웹 인용 |url=http://hrw.org/english/docs/2006/01/18/cuba12207.htm |제목=Essential Background: Overview of human rights issues in Cuba (Human Rights Watch, 31-12-2005)<!--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6-04 |archive-date=2012-05-24 |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20524192224/hrw.org/english/docs/2006/01/18/cuba12207.htm |url-status=dead }}</ref> 쿠바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슷한 광범위한 검열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8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최하위 순위를 보였다. 검열은 쿠바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제한한다. 언론매체는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ref name="글로벌 쿠바"/> 쿠바의 매체는 공산당의 혁명 지도부에서 관할하며, "선전 전략을 발전시키고 협조 한다.". 당국은 인터넷을 "21세기의 큰 질병"이라 부른다. 컴퓨터 소유가 금지되어 컴퓨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ref name="cubaonline">{{웹 인용|url=http://www.rsf.org/IMG/pdf/rapport_gb_md_1.pdf|제목=Going online in Cuba: Internet under surveillance|출판사=Reporters Without Borders|날짜=2006|확인날짜=2009년 6월 4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303221407/http://www.rsf.org/IMG/pdf/rapport_gb_md_1.pdf|보존날짜=2009년 3월 3일|url-status=dead}}</ref> 인터넷을 이용할 권리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가되며, 이들도 감시받는다.<ref name="cubaonline"/><ref name="cubainternet">{{웹 인용|url=http://www.rsf.org/article.php3?id_article=10611|제목=Internet in Cuba|출판사=Reporters Without Borders|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0831080120/http://www.rsf.org/article.php3?id_article=10611|보존날짜=2004-08-31|확인날짜=2009-06-04|url-status=dead}}</ref> 불법적인 인터넷 연결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 의료 ===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의료]]를 시행하였다.<ref name="글로벌 쿠바"/> 일차의료기관(Primary Health Care)을 중시하는 의료 제도를 채택하여 독특한 사회 복지 정책과 함께 "쿠바 모델"로 유명하다. 쿠바에는 '가정의 제도'가 있어 지역 주민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등 예방진료를 담당한다. 가정 의사는 [[의사]]가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종합의료기관(폴리클리닉)]]은 1차 진료기관으로 모든 진료과목과 [[전문의]]를 보유하고 있다. 최종 진료기관으로는 [[병원|종합병원]]이 있고 이는 종합수술 및 입원이 가능한 병실 등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쿠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는 미국인을 포함하여 [[유학생]]을 무료로 받는다. [[의사]]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에서 수년간 의료 봉사활동을 한다. 쿠바는 재해가 발생한 해외에 의사를 파견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job.yomiuri.co.jp/news/ne_07103001.htm |제목=米→キューバ医学留学 |언어=일본어 |날짜=2007-07-30 |확인날짜=2009-06-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1024032934/http://job.yomiuri.co.jp/news/ne_07103001.htm# |보존날짜=2009-10-24 |url-status=dead }}</ref> 이것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와 의사-석유 교환 협정으로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 미션]]에 의료인력과 설비를 제공하고 석유를 받고 있다. == 문화 == 쿠바 국민의 대부분이 스페인이나 아프리카로부터 이민을 왔기 때문에, 쿠바의 문화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특히 요루바(현재의 [[나이지리아]])의 전통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국민의 영화 감상이 번성한 나라이기도 하다. === 종교 === [[쿠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쿠바정부는 [[종교]]를 탄압했으나, 현재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무교가 인구의 55%에 달한다. [[스페인]] 식민의 영향으로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고 쿠바 혁명 이전에 인구의 7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1957년) 그러나 카스트로 정권 아래 신자 수는 약 40%까지 감소하고, 종교 활동이 반혁명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을 필요성 때문에 현재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교는 정부의 제한을 받고 있다. 다른 종교로는 [[장로교]] 등의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아프리카 요루바족의 전통종교가 섞인 혼합 종교인 [[산테리아]](Santería)도 민중 종교로 존재한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이티]]에서 온 [[이민]]자의 영향으로 [[부두교]] 신자도 있다.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특별하게도, [[일본]]에서 발상된 [[창가학회]]도 존재한다. ==== 기독교 ==== 쿠바의 [[국교]]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이지만,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정부에서 허가하면 야외에서 종교 집회를 열 수 있으며, 개신교인<ref>쿠바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소수이지만, [[장로교]], [[침례교]] 등의 교파들이 있다.</ref>과 가톨릭교회 신자 모두 사실상 [[쿠바 공산당]]([[1961년]] 결성)에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종교정책은 혁명초기에 비해 많이 온건화되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회선교]]에 따른 것이다. 그 증거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1982년]] 발행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의 소식지《''In-Touch''》와의 인터뷰에서 쿠바의 공산당원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사회선교를 실천하는 가톨릭교회 [[수녀]]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ref>당시 카스트로 의장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의적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쿠바의 모든 공산당원이여, 쿠바의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들을 보시오. 우리 공산당원들이 해야 할 자선활동을 아무런 대가 없이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들이 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산당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들을 본 받으시오."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1권-4강_정사와 권세를 굴복 시키는 부활 예수의 증인들(사도행전 4장), [[김회권]] 지음, [[복있는 사람]] p.162</ref> 가톨릭교회와 일반적인 개신교들을 제외한 교파로는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소속 [[쿠바 성공회]]({{llang|es|Iglesia Episcopal de Cuba}},{{lang|en|Episcopal Church of Cuba}})가 있다. === 음악 === 쿠바 음악은 스페인계와 아프리카계의 음악이 융합해 태어난 것을 기반으로 여러 요소가 서로 섞여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라틴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이다. 미국의 [[재즈]] 등과 함께 20세기의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쿠바 음악은 스페인의 기타와 아프리카의 북을 조합한 요루바계 문화의 영향이 강한 [[룸바]](Rumba)나 손(Son)이 있다. 그 외에도, 대중음악으로서, 트로바나 댄 손과 같이 유럽 음악의 요소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음악은 유로쿠바 음악, 아바네라(Habanera)와 아프로쿠바 음악인 룸바, 볼레로, 맘보, 차차차 등이 있다.<ref name="글로벌 쿠바"/> 19 세기에 프랑스의 비제가 아바네라 리듬을 받아들인 때부터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쿠바 음악은 먼저 1930년에 송(son)이 미국에 소개되었고, 193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로 확산되었다. 1959년 쿠바 혁명 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되고, 또한 경제봉쇄 때문에 쿠바 음악이 세계로 확장되는 경로가 좁아졌다. 그러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영향력이 지속되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는 혁명 이후 쿠바에서 젊은 세대의 운동으로 일어난 누에바 토로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얻었다. 또한 아프리카풍 리듬 감각과 소련과의 연계에 의하여 고전적인 기술 체계가 반영된 재즈 연주자의 수준은 아주 높았고 1970년대 후반에 그래미상을 받은 이라케레(Irakere), 19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곤사로 루발카바, 추초 발데스(Chucho Valdés, 이라케레의 리더)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뮤지션을 낳고 있다. 냉전 후 1990년대가 되면서, 로스 반 반(Los Van Van), 아달베르토 알바레즈 이 수 손(Adalberto Alvarez y su Son) 등 뉴욕 살사의 감각도 받아들인 그룹이 속속 등장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럽 등에서 강연하는 연주가도 증가하였다. 1990년대 말에는 노년의 뮤지션을 다루었던 영화(1998년의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작품,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경제봉쇄가 계속되던 중에도, 미국계 대형 레코드 회사가 차례로 쿠바의 음악가와 계약하고, [[일본]]에 와서 하는 공연도 증가하는 등, 쿠바 붐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활황을 보이고 있다. [[쿠바의 국가]]는 바야모 행진곡(La Bayamesa)이다.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작곡하였으며, 공식 국가로 제정된 해는 1902년이다. === 영화 ===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 대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에 비해 제작 편수는 적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혁명 정부가 1959년 세운 ICAIC(쿠바 예술, 영화 위원회)의 지원, 기획하에 영화가 제작되어 왔다. 유명한 영화인으로는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년),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 1993년)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감독,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as), 《인생은 휘파람을 부는 것》(La vida es silbar, 1998년),《아바나 조곡》(Suite Habana, 2003년)의 [[페르난도 페레스]](Fernando Pérez)를 들 수 있다. === 관광 === 카리브해에 떠 있는 붉은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쿠바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ref name="글로벌 쿠바"/> ==== 헤밍웨이 박물관 ====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ref name="글로벌 쿠바"/> ==== 혁명 박물관 ==== 혁명 박물관(Museo de la Revol cion)은 1920∼1960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현재 혁명관련 사진자료와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박물관 광장에는 카스트로가 반혁명파의 배를 침몰시킨 전차 Memorial Granma가 전시되어 있다.<ref name="글로벌 쿠바"/> [[파일:Cubanfood.jpg|섬네일|250px|쿠바식으로 요리한 로파 비에하라는 요리. 토마토소스와 콩, 바나나, 유카잎, 노란 쌀로 요리한다.]] === 요리 === {{본문|쿠바 요리}} 쿠바 요리는 [[스페인]], [[카리브해]], [[아프리카]] 영향을 다양하게 받아서 섞였다. 또한, 스페인과 미국의 영향이 강하여, [[쌀]], [[콩]],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한다. 쿠바 요리는 특이하게도 스페인과 아프리카식 요리법을 자국에 도입한 한편 타국과는 다른 독특한 향이 많이 나타나서 자국의 향취를 풍긴다. 적기는 하지만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중국 요리]]의 영향이 나타난다. 역사적 이유로 오래전부터 쿠바 본섬을 비롯해 지역적으로 인구 분포는 상당히 불균형적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상당 부분 기용됐지만 지금도 도시 내부에서는 소수 인구를 차지한다. [[담배]] [[플랜테이션]]과 [[땅콩]] 재배 인구도 많다. 쿠바요리는 [[멕시코 요리]]와 상당한 연관이 있으며 [[미국]]과 [[유럽]] 관광객이 많아서 특히 더 다양하다. [[라틴 아메리카]] 요리와 미국 요리가 지니던 특색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고들 한다. == 외교 관계 == ==== 대한 관계 ====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일하던 대한민국 농민들이 쿠바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쿠바의 경제 원조를 지원받기도 하였으나, 1959년에 일어난 쿠바 혁명에 따라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동안 외교 관계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2024년 2월 14일, 한국 주유엔 대표부는 쿠바와 양국 유엔대표부 사이 외교 공한(公翰·공적 편지) 교환을 통해 양국 간 외교 및 영사 관계를 수립했다고 밝혔다. ==== 대 베네수엘라 관계 ==== 쿠바는 미국, 서방 세계와의 경제 제재를 받을 정도로 고통을 주게 되자 기회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뿐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돈줄 역할로 쓰면서 쿠바에 석유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쿠바는 반대로 설탕을 베네수엘라에게 이익을 챙기려는 본심이 있다. ==== 대 캐나다 관계 ==== [[캐나다]]는 동방 정책을 취하기 위해 [[대한민국]], [[미국]], [[이스라엘]], 옛 서독 등과 달리 쿠바와의 외교 관계는 계속 유지중에 있으며, 캐나다에서 쿠바로 건널 때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등 외교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각종 단점들도 물론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기타 국가와의 관계 ==== 쿠바는 한국과 달리 [[일본]],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야구]]를 [[일본 프로 야구]]에 파견시켜서 선수를 배출하는 자격 조건도 충족되어 있고 중국은 [[미국]]과의 사이가 틀어지자 미국과 달리 쿠바와는 거의 친한 편이기도 하다. 또한 [[스페인]]의 경우 식민지 시절의 정신을 그대로 남아 있어 스페인이 쿠바에 [[포도주|와인]], [[올리브]] 등을 수출시킬 정도로 쿠바인들의 매력을 높일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경우, 카스트로 정권 수립 이후 [[소련]]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사이를 가지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어닥칠 때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의 악연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es|en}} [https://www.presidencia.gob.cu/en/cuba/ 쿠바 정부 홈페이지] * [https://web.archive.org/web/20090426120715/http://mex.mofat.go.kr/kor/am/mex/legation/add/cuba/index.jsp 주멕시코 대사관의 쿠바 설명] {{쿠바}} {{북아메리카}} {{유엔 창립 회원국}} {{공산주의 국가}} {{라틴 연합}} {{중남미·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 {{전거 통제}} [[분류:쿠바| ]] [[분류:섬나라]] [[분류:공화국]] [[분류:공산주의 국가]] [[분류:사회주의 국가]]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스페인어권]] [[분류:스페인령 서인도 제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BSD wordmark.svg|thumb]] '''BSD 허가서'''(BSD licenses)는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의 한 가지이다. [[BSD]] 계열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램에서 사용한다. BSD(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라이선스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여, 해당 소프트웨어는 아무나 개작할 수 있고, 수정한 것을 제한 없이 배포할 수 있다. 다만 수정본의 재배포는 의무적인 사항이 아니므로 BSD 라이선스를 갖는 프로그램은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상용 소프트웨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GNU]] [[GPL]]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GPL]]은 파생된 소프트웨어도 GPL과 같은 라이선스를 갖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즉 파생물의 경우에도 소스 코드가 반드시 배포되도록 하는 것인데, 이것은 [[GPL]]을 만들어낸 [[리처드 스톨먼]]의 의지에 따른 결과이다. BSD 라이선스의 경우에는 BSD 자체가 공공기관에서 만들어낸 것이므로 공공의 몫으로 돌려주자는 의미가 강하므로 라이선스 자체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GPL]]의 경우에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BSD 라이선스는 라이선스 자체에는 소프트웨어에 국한되지 않고 하드웨어 등에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사용자의 사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발생가능한 경우의 리스크와 손해에 대해 사전인식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사용자 본인에게 책임지고 있다는 점도 이 라이선스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특징 == {| class="wikitable" |+ !BSD 라이선스 ![[MIT 허가서|MIT 라이선스]] |- |<pre><nowiki> Copyright (c) <연도> <저작권 소유자> Redistribution and use in source and binary forms, with or without modification, are permitted provided that the following conditions are met: 1. Redistributions of source code must retain the above copyright notice, this list of conditions and the following disclaimer. 2. Redistributions in binary form must reproduce the above copyright notice, this list of conditions and the following disclaimer in the documentation and/or other materials provided with the distribution. THIS SOFTWARE IS PROVIDED BY THE COPYRIGHT HOLDERS AND CONTRIBUTORS "AS IS" AND ANY EXPRESS OR IMPLIED WARRANTIE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IMPLIED WARRANTIES OF MERCHANTABILITY AND FITNESS FOR A PARTICULAR PURPOSE ARE DISCLAIMED. IN NO EVENT SHALL THE COPYRIGHT HOLDER OR CONTRIBUTORS BE LIABLE FOR ANY DIRECT, INDIRECT, INCIDENTAL, SPECIAL, EXEMPLARY, OR CONSEQUENTIAL DAMAGE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PROCUREMENT OF SUBSTITUTE GOODS OR SERVICES; LOSS OF USE, DATA, OR PROFITS; OR BUSINESS INTERRUPTION) HOWEVER CAUSED AND ON ANY THEORY OF LIABILITY, WHETHER IN CONTRACT, STRICT LIABILITY, OR TORT (INCLUDING NEGLIGENCE OR OTHERWISE) ARISING IN ANY WAY OUT OF THE USE OF THIS SOFTWARE, EVEN IF ADVISED OF THE POSSIBILITY OF SUCH DAMAGE. </nowiki></pre> |<pre><nowiki> Copyright (c) <연도> <저작권 소유자> Permission is hereby granted, free of charge, to any person obtaining a copy of this software and associated documentation files (the "Software"), to deal in the Software without restriction, including without limitation the rights to use, copy, modify, merge, publish, distribute, sublicense, and/or sell copies of the Software, and to permit persons to whom the Software is furnished to do so, subject to the following conditions: The above copyright notice and this permission notice shall be included in all copies or substantial portions of the Software. THE SOFTWARE IS PROVIDED "AS IS", WITHOUT WARRANTY OF ANY KIND, EXPRESS OR IMPLIED,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WARRANTIES OF MERCHANTABILITY, FITNESS FOR A PARTICULAR PURPOSE AND NONINFRINGEMENT. IN NO EVENT SHALL THE AUTHORS OR COPYRIGHT HOLDERS BE LIABLE FOR ANY CLAIM, DAMAGES OR OTHER LIABILITY, WHETHER IN AN ACTION OF CONTRACT, TORT OR OTHERWISE, ARISING FROM, OUT OF OR IN CONNECTION WITH THE SOFTWARE OR THE USE OR OTHER DEALINGS IN THE SOFTWARE. </nowiki></pre> |}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 {{인용문| BSD 3-Clause License Copyright (c) <연도> <저작권 소유자> All rights reserved. Redistribution and use in source and binary forms, with or without modification, are permitted provided that the following conditions are met: ● Redistributions of source code must retain the above copyright notice, this list of conditions and the following disclaimer. ● Redistributions in binary form must reproduce the above copyright notice, this list of conditions and the following disclaimer in the documentation and/or other materials provided with the distribution. ● Neither the name of the <저작권 소유자> nor the names of its contributors may be used to endorse or promote products derived from this software without specific prior written permission. THIS SOFTWARE IS PROVIDED BY THE COPYRIGHT HOLDERS AND CONTRIBUTORS "AS IS" AND ANY EXPRESS OR IMPLIED WARRANTIE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E IMPLIED WARRANTIES OF MERCHANTABILITY AND FITNESS FOR A PARTICULAR PURPOSE ARE DISCLAIMED. IN NO EVENT SHALL THE COPYRIGHT HOLDER OR CONTRIBUTORS BE LIABLE FOR ANY DIRECT, INDIRECT, INCIDENTAL, SPECIAL, EXEMPLARY, OR CONSEQUENTIAL DAMAGE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PROCUREMENT OF SUBSTITUTE GOODS OR SERVICES; LOSS OF USE, DATA, OR PROFITS; OR BUSINESS INTERRUPTION) HOWEVER CAUSED AND ON ANY THEORY OF LIABILITY, WHETHER IN CONTRACT, STRICT LIABILITY, OR TORT (INCLUDING NEGLIGENCE OR OTHERWISE) ARISING IN ANY WAY OUT OF THE USE OF THIS SOFTWARE, EVEN IF ADVISED OF THE POSSIBILITY OF SUCH DAMAGE. }} == 같이 보기 == * [[MIT 라이선스]] * [[아파치 라이선스]] == 각주 == {{각주}} * [https://web.archive.org/web/20180807125306/https://www.tizen.org/ko/bsd-3-clause-license?langredirect=1 타이젠] == 외부 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110815154849/http://olis.or.kr/ossw/license/license/detail.do?lid=1003 BSD 허가서] (한국저작권위원회 OLIS) * {{언어링크|en}} [http://opensource.org/licenses/bsd-license.php BSD 허가서에 관하여]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권 종류}} [[분류:자유 및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사용권]] [[분류:BSD]]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사람|쑨원 (축구인)||중국의 여자 축구 선수}} {{공직자 정보 | 이름 = 쑨원 | 원어명 = 孫文 | 그림 = Sun Yat-sen 2.jpg | 그림크기 = 220px | 그림설명 = 쑨원의 채색 초상화 | 국가 = {{국기나라|중화민국}} | 임기 = 1923년 2월 21일-1925년 3월 12일 | 직책 =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대본영|육해군대원수]] | 전임 = 쑨원 (비상대총통) | 후임 = [[후한민|호한민]] (대리) | 국가2 = {{국기그림|중화민국}} [[광저우 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 직책2 = [[중화민국 비상대총통|비상대총통]] | 임기2 = 1921년 5월 5일-1923년 2월 21일 | 전임2 = 쑨원 (육해군대원수) | 후임2 = 쑨원 (육해군대원수) | 국가3 = {{국기그림|중화민국|1912}} [[중화민국 호법군정부]] | 직책3 = 육해군대원수 | 임기3 = 1920년 11월 28일-1921년 5월 5일 | 전임3 = [[육진동]] (주석총재) | 후임3 = 손일선 (비상대총통) | 임기4 = 1917년 9월 10일-1918년 5월 20일 | 전임4 = (신설) | 후임4 = [[잠춘훤]] (주석총재) | 국가5 = {{국기그림|중화민국|1912}} [[중화민국 임시 정부 (1912년)|중화민국]] | 직책5 = [[중화민국의 국가원수|제1대 임시대총통]] | 임기5 = 1912년 1월 1일-1912년 3월 10일 | 부통령5 = '''[[중화민국 부총통|임시부총통]]''' [[리위안훙]] | 총리5 = '''[[중화민국의 정부수반|국무총리]]''' [[탕사오이]] | 전임5 = (신설) | 후임5 = [[위안스카이]] | 국가6 = {{국기|중국국민당}} | 직책6 = [[중국국민당 주석|당총리]] | 임기6 = 1919년 10월 10일-1925년 3월 12일 | 전임6 = 쑨원 (중화혁명당총리) | 후임6 = [[장렌졔|장정강]] (중앙집행위 주석) | 국가7 = {{국기그림|중국국민당}} [[중화혁명당]] | 직책7 = [[중국국민당 주석|당총리]] | 임기7 = 1914년 7월 8일-1919년 10월 10일 | 전임7 = 쑨원 (국민당이사장) | 후임7 = 쑨원 (중국국민당총리) | 국가8 = [[국민당 (1912년)|국민당]] | 직책8 = 이사장 | 임기8 = 1912년 8월 25일-1914년 7월 8일 | 전임8 =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 후임8 = 쑨원 (중화혁명당 총리) | 국가9 = {{국기그림|중국국민당}} [[중국 동맹회]] | 직책9 = [[중국국민당 주석|총리]] | 임기9 = 1905년 8월 20일-1912년 8월 25일 | 전임9 = 쑨원 (흥중회 회장) | 후임9 = 쑨원 (국민당 이사장) | 국가10 = {{국기그림|중국국민당}} [[흥중회]] | 직책10 = [[중국국민당 주석|회장]] | 임기10 = 1900년 1월 24일-1905년 8월 20일 | 전임10 = [[양구운]] | 후임10 =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 출생일 = {{출생일|1866|11|12}} (음력: 동치 5년 10월 6일) | 출생지 =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 [[취형촌]]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25|03|12|1866|11|12}} | 사망지 = [[중화민국]] [[징자오 지방]] [[베이징 협화병원|협화병원]] | 거주지 = | 본관 = [[광동성]] [[동완현]] | 학력 = [[홍콩대학 리자청의학원|홍콩 화인서의서원]] (현 [[홍콩대학]]) | 경력 = | 정당 = [[흥중회]] → [[중국 동맹회]] → [[국민당 (1912년)|국민당]] → [[중화혁명당]] → [[중국국민당]] | 소속 = | 부모 = | 형제 = | 배우자 = 원처 [[루무전|노모정]] (1884년-1915년)<br> 계처 [[오쓰키 가오루|대월훈]] (1903년-1906년)<br> 계처 [[쑹칭링|송경령]] (1915년-1925년)<br> 첩실 [[천추이펀|진수분]] (1891년-1906년)<br> 첩실 [[아사다 하루|천전춘]] (1897년-1902년) | 자녀 = 적자 1남 2녀: : [[쑨커|손과]], [[쑨진위안|손금원]], [[쑨진완|손금완]] 서자 1녀: : [[미야가와 후미코|대월부미자]] | 종교 = [[회중교회|회중교]] | 별명 = [[휘]]: 문 ({{zh|order=t|c=文|p=Wén|h=원}})<br> [[아명]]: 제상 ({{zh|c=帝象|p=dìxiàng|h=디샹}})<br> [[보명]]: 덕명 ({{zh|c=德明|p=Démíng|h=더밍}})<br> [[자 (이름)|자]]: 재지 ({{zh|c=載之|p=Zaizhi|h=자이지}})<br> [[세례명]]: 일신 ({{zh|c=日新|p=rìxīn|h=르신}})<br> [[가명]]: 중[[나무꾼|산초]] ({{zh|c=中山樵|p=zhōngshānqiáo|h=쭝샨챠오}})<br> [[호 (이름)|호]]: 일선 ({{zh|c=逸仙|p=Yixian|h=이샨}})<br> | 서명 = | 서훈 = | 웹사이트 = | 신장 = | 체중 = | 혈액형 = <!-- 이하 군경력 변수는 변수 중 하나 이상이 채워져야 화면에 나타남 --> | 군복무 = | 복무기간 = | 소속군대 = | 계급 = | 지휘 = | 근무 = | 참전 = }} '''쑨얏센'''(孫逸仙) 또는 '''쑨원'''({{zh|order=t|t=孫文|s=孙文|p=Sūn Wén|hanja=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인]]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의 창립자이다. 호(號)는 '''이셴'''({{zh|c=逸仙|p=Yìxiān|hanja=일선}}, {{llang|yue|Jat6 Sin1|얏신}}<ref>쑨원은 서양에는 주로 광동어 발음 표기인 Sun Yat-sen이라는 철자로 많이 쓴다. 또한 쑨원 본인도 광동어를 사용했다.</ref>), 본명(本名)은 '''더밍'''({{zh|c=德明|p=Démíng|hanja=덕명}}), 별명은 '''중산'''({{zh|c=中山|p=Zhōngshān|hanja=중산}}) 또는 '''나카야마'''({{llang|ja|中山}})이다. '''쑨중산'''(孫中山)·'''쑨이셴'''(孫逸仙)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청나라]] [[광동성]](廣東省) [[중산시|향산현]](香山縣)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 시|광주]](廣州)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p142~p143</ref> [[1911년]] 쑨원은 [[난징시|남경]](南京)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위안스카이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袁)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주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국민당]]을 결성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북경(당시 경도특별시)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시|남경(난징)]](南京)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 이름 == [[청나라]]와 [[일본 제국]], 그리고 [[군벌 시대|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zh|t=孫德明|p=Sūn Démíng|h=손덕명}})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zh|t=孫帝象|p=Sūn Dìxiàng|h=손제상}})이다. 쑨원({{zh|t=孫文|p=Sūn Wén|h=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zh|t=載之|p=Zàizhī|h=자이즈}})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zh|c=日新|p=Rìxīn|h=르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zh|t=逸仙|p=Yìxiān|h=이시옌}})이라는 또다른 호(號)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lang|yue|Yat-sen|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 시|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ref>한국 한자 새김은 '땔나무 초'. 나무꾼이라는 뜻도 있다. '중국 산의 나뭇무꾼'이라는 뜻(혹 때때로 '''中山 椒'''라는 일본 가명 또한 사용하였다.)</ref>(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 생애 == === 생애 초기 === 손문(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lang|zh|香山縣}})<ref>지금의 중산시(中山市)</ref> 부근의 취형촌(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손달성({{zh|t=孫達成|p=Sun Dacheng|h=쑨다청}}, <small>[[아명|아명(兒名)]]은 쑨관린(孫觀林), [[호 (이름)|호(號)]]는 다오촨(道川)</small>)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zh|t=孫眉|p=Sun Mei|h=쑨메이}})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그의 집안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파일:Sun Yat Sen's Young Time2.png|섬네일|200px|오른쪽|17세의 쑨원]] [[파일:Si Da Kou.jpg|섬네일|왼쪽|200px|홍콩 서양 의학원 시절의 쑨원과 그의 친구들(왼쪽에서 2번째있는 인물이 쑨원이다.]] [[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무너져 가는 청조를 침략하여 이권을 차지하려는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제2의 [[홍수전]](洪秀全)으로 자처하며 청(淸) 타도를 꿈꾸었다. 집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채 13세때 [[1879년]]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그는 하와이 화교 자본가였던 큰형 [[쑨메이]](孫眉)의 도움으로 유학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몸소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홍콩]]으로 돌아온 이후 [[1892년]] [[홍콩 서양 의학원]]에서 의학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큰 영향을 받았다. === 청조말기 혁명운동 활동 === ==== 혁명운동 투신과 흥중회 활동 ==== {{참고|흥중회}} {{내셔널리즘 사이드바}}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제국|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 삼민주의 윤곽형성 ====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의대생이었을 때 스승이었던 [[제임스 캔틀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 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 망명과 무장봉기 기도 ====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 해외활동과 혁명선전 ==== {{참고|중국혁명동맹회}} [[파일:Sun Yat Sen 1900.png|섬네일|200px|오른쪽|[[1900년]] 8월, 쑨원]]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여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수립 === {{참고|신해혁명}}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열강에 이권 침탈에대하여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 외교활동 ====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 [[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 임시대총통 취임과 위안스카이와의 협상 ==== [[파일:Sun Yat Sen portrait 2.jpg|섬네일|왼쪽|200px|[[1912년]] 1월경의 쑨원]]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로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 (쑹자오런)|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파일:Soong Ching-ling Sun Yat-sen.jpg|섬네일|오른쪽|[[쑹칭링]]과 쑨원]] === 민국초기 혁명활동 === ==== 위안 스카이의 독재 ====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 (쑹자오런)|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 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 호법운동 ====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 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탕사오이]], [[우팅팡]], [[당계요]]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 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성]] 군벌 [[진형명]]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 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를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파일:Sun Yat-sen and Chiang Kai-shek.jpg|섬네일|240px|오른쪽|[[장제스]]와 쑨원.]]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 코민테른과의 연계 ====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 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장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 국공합작 ==== {{참고|제1차 국공합작}} [[파일:Sun Yat-sen 1924 Guangzhou.jpg|섬네일|200px|오른쪽|[[1924년]] 1월의 쑨원]]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말년과 병사 ===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인용문2|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다이지타오]]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인용문2|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시키기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는 아직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동지들은 필히 내가 쓴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따라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달라.}} 이는 [[왕징웨이]]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인용문2|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쑹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시|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 사후 ==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 (국민당)|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사후 43년 만인 [[1968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 == 평가 == --> [[파일:Sun yatse mausoleum.jpg|섬네일|250px|오른쪽|[[난징]]에 위치한 [[중산릉]].]] == 인간 관계 == * 청년 시절부터 [[쑹자수]](宋嘉樹), [[여우례]](尤列), [[양허링]](楊鶴齡), [[루하오둥]](陸皓東), [[관징량]](關景良), [[천사오보]](陳少白)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친구이자 [[흥중회]] 동지인 [[루하오둥]]은 [[1895년]]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집행되었고 친구이자 장인인 [[쑹자수]]는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되었는데 쑨원이 [[쑹자수]]의 차녀인 [[쑹칭링]]과 재혼하였기 때문에 [[쑹자수]]가 쑨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 옛 일본인 첩실 [[오쓰키 가오루]](大月 薰)의 딸 [[미야가와 후미코]](宮川 富美子)에게는 친아버지가 되나 생전에 쑨이 친권을 포기하였고 [[미야가와 후미코|후미코]]가 나중에 [[일본]]을 떠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이미 죽은 쑨과 그가 남긴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며 쑨을 정신적 지주로 섬기었다. == 연보 == * [[18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 정부 건설"을 강령으로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 * [[1895년]]: 홍콩 흥중회를 창설. 10월에 흥중회는 [[광저우]]에서 봉기를 모의하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 해외로 망명. * [[1896년]]: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남. * [[1904년]]: [[일본]], 하와이, [[베트남]], 사이암 (지금의 [[태국|타일랜드]]),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전파. * [[1905년]]: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 단체 조직. *: 8월: 흥중회, 화흥회(華興會)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동경에서 [[중국동맹회|동맹회(同盟會)]]를 창건, 총리에 추대.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소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 *: 동맹회의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서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의 [[삼민주의]]를 발표. * [[1906년]] - [[1911년]]: 해외의 모금 활동 등으로 중국 내의 여러 봉기를 지지. * [[1911년]] 10월 10일:[[우창 봉기|무창(武昌)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신해 혁명]] 발발. *: [[미국]]에서 12월 하순경 귀환, 17개 성 대표자들에 의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됨. * [[1912년]] 1월 1일: [[난징|남경(南京)]]에서 임시 대총통 (中華民國 臨時 大總統) 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구성. *: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 [[푸이]]({{zh|t=溥儀|p=Pǔyí|h=부의}}) 강제 퇴위. *: [[2월 14일]]: [[위안스카이]]({{zh|t=袁世凱|p=Yuán Shìkǎi|h=원세개}})와의 협약에 따라서 임시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양위하기 위해서 사임. *: [[3월 11일]]: 중화민국 임시약법(中華民國 臨時約法)을 반포. *: 7 - 8월: 동맹회가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쑨원을 이사장(理事長)으로 추대. * 1913년 3월: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력 타도할 것을 주장. *: 7월: 2차 혁명 주도, 실패. 일본으로 도피. * [[1914년]] 7월: [[도쿄]]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 * [[1915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서 10월 25일에 동경에서 [[쑹칭링]](宋慶齡)과 결혼. *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음. * [[1917년]]: 서남군벌(西南軍閥)과 연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대원수(海陸軍大元帥)에 추대되어 임시약법 수호 투쟁. *: 10월: 러시아 10월 혁명 * [[1918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5월에 대원수직을 사임,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감. * [[1919년]]: [[5.4운동]]. *: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개칭 (동맹회의 국민당 국회는 1913년에 위안스카이에 의해 해산된 바 있음). * [[1920년]]: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桂系軍閥) 축출. *: 11월: 광주에서 다시 임시약법 수호 운동. * [[1921년]]: <!-- 5월 -->광동 신정부 수립, 임시 대총통 취임. * [[1922년]] 6월: [[진형명]](陳炯明)의 반란. 광주를 떠나 [[상하이]]로 옮김. *: 7월: [[중국공산당]]이 5.4운동 정신 계승과 반제국주의를 강령으로 상해에서 비밀리에 결성됨.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리다자오|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 [[1923년]] 1월 1일 국민당의 개진(改進)을 발표, [[제1차 국공합작]] 시작. *: 2월: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 대원수(海陸軍大元帥)의 이름으로 군권과 정무를 총괄. *: 8월: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한 대표단을 소련으로 파견. *: 10월 소련에서 파견된 [[미하일 보로딘|보로딘(Borodin)]]을 고문으로 초빙. * 1924년 1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 [[황푸군관학교]] 설립 * [[1925년]] [[3월 12일]] 향년 59세의 일기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2년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난징]] 중산릉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기타 == === 정치활동 및 업적 ===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zh|t=孫眉|p=Sun Mei|h=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오권분립]]과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가 제창한 삼민주의 정신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또 국민당을 창당한 쑨원은 통치방식을 ‘군정’ ‘훈정’ ‘헌정’의 3단계로 나눴다. 군정은 군대의 힘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이른바 계엄상황이다. 훈정은 일당독재, 헌정은 보편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각각 의미한다. 쑨원은 당시 중국인들의 민도가 낮아 국민당 지도 아래 군정·훈정을 거치고 이후 헌정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중국 대륙]] 및 [[타이완]]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 1999년 50 주년 기념일 사진 참조 --> 2004년 중화민국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 조선일보 기사로 간접 확인 -->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부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 삼민주의 === {{참고|삼민주의}} [[삼민주의]]는 쑨원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으로 중국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6년]]~[[1897년]] 쑨원이 [[영국]] 런던에서 망명하던 중에 구상된 것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에 입각한 [[민족주의]], 수천년에 내려운 군주전제 정체의 변혁을 목표로 한 [[민권주의]], 사회·경제의 조직 개혁을 지향하는 [[민생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혁명 이론이다.<ref name="삼민주의">《한국근현대사사전》,가람계획. p143</ref> [[1905년]] 쑨원이 일본 [[도쿄]]에 망명하던 중 [[중국 혁명동맹회]]를 결성했는데, 동맹회 결성 후에는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신해혁명]] 후 혁명운동의 진전에 따라 그 내용도 점점 변화되어가고 발전하게 되었다.<ref name="삼민주의"/> 중요한 참고로, 삼민주의의 원형과 현대 중국 본토의 역사관은 사뭇 다름을 인지하여야 한다. 즉, 1905년 혁명동맹회에서 제시된 초기 삼민주의와 대비하여 현재의 삼민주의와 정치사상은 확인이 다름을 이해하고 인지하여야 한다. 초기의 삼민주의와 현재의 삼민주의는 같지 아니하며, 이의 변화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로서, 초기 삼민주의와 연관된 1905년 당시의 동맹회 구호는 구제달로(驅除撻虜 ; 달로(오랑캐)를 박멸한다), 회복중화(恢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의 4대 강령이었는데, 이 중 --- 현재로서는 그 표현이 다소 과격하기도 하고, 현대의 정치사상과 배척되는 --- '구제달로'의 민족주의 강령은 중국 통일 후 소수민족 수용을 위한 [[민족주의]]로서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정치적 필요를 고려하여 현대화 수용되었으며, 현재의 민족주의는 중국내부의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 등 여러 소수민족과 한족이 상호 평등 및 대외적으로 '하나의 중국 민족'으로 본다고 중국 내부에서는 교육되고 있다. 즉, 초기 삼민주의에서 제시된 구제달로 등 과격한 구호는 현재 마땅히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해 국민이 선거, 파면, 창제, 복결의 4대 권리를 가짐으로써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현대화된 사상을 교육하고 있다. [[민생주의]]는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주의]]적 성격의 주장으로서 자본의 억제와 지권의 평균을 제시하였으며 최종목적은 대동세계의 실현에 있다고 하는 현대적 해석이 주로 교육되고 있으며, 초기 삼민주의에 대해서는 애써 그 내용과 변화를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1924년]] 국공합작 후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 강령에서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 [[민권주의]]는 '기본적 인권옹호'와 '인민 민주 독재'로, [[민생주의]]는 '토지와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현대의 변화에 의미의 중심을 두고 삼민주의를 교육한다.<ref name="삼민주의"/> === 대아시아주의 === 쑨원은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897년]]경부터 일본에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정계인사들하고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으며 일본에 망명해 머문 기간은 총 10년에 이른다. [[1924년]] 11월이 마지막 일본 방문이 되었다. [[1924년]] [[11월 24일]]에 일본 [[고베]]에 도착, [[11월 30일]]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고베에서 [[11월 28일]] 고베여자고등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은 쑨원의 일생에서 최후의 공식적인 강연이자,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기록되고 있다.<ref name="대아시아주의">《쑨원과 한국》,배경한 저. 한울아카데미. p134~p135</ref> 여기서 쑨원은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연합 주장'을 조건으로 내세웠다.<ref name="대아시아주의"/> {{인용문2|[[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고 새로운 열강이 된 이후 일본은 아시아 약소민족들의 희망이 되었다. (중략) 현재의 세계적 정세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 상황인데 서양문화의 기반은 이욕과 강권(무력)에 기반하는 '패도문화'인 반면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문화의 기반은 도덕과 인의에 기반하는 '왕도문화'이다.(중략) 이러한 왕도문화를 발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민족들의 대연합, 즉 대아시아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현재 강권적 패도문화로부터 이탈해 나와 동양의 인의 도덕에 접근하고 있는 소련과의 연합도 모색해야 한다.<ref name="대아시아주의"/>}}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인 목표가 있어서 일본의 그것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었던 반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그 출발점을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항에 두고 있었다. 다만, 쑨원의 초기 대아시아주의는 유럽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황인종들의 단결을 주장했던 것으로, 열강의 침략을 백인종의 침략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반제국주의 인식을 가지지 못한 채 황인종인 아시아인들의 단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대아시아주의"/>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설명한 고베 강연에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패권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고,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고 경고하였다.<ref>[http://china.joins.com/portal/article.do?method=detail&total_id=4890210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④ 다시 쑨원에게 길을 묻는다] {{웨이백|url=http://china.joins.com/portal/article.do?method=detail&total_id=4890210 |date=20131212190511 }},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11년 1월 6일</ref>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동양사 교수인 박선영은 쑨원의 고베 강연에 대해 “쑨원이 주창한 아시아 연대는 서양의 반식민지를 경험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한제국이 이미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일본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모순된 것이었다. 한·중·일이 각기 주창했던 ‘아시아주의’는 지향하는 목적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시아 제국과의 연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정립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존재했다.” 고 평가하고 있다.<ref>[http://www.dkilbo.com/board/board.php?board=calum&page=29&command=body&no=152 ‘동아시아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려면]{{깨진 링크|url=http://www.dkilbo.com/board/board.php?board=calum&page=29&command=body&no=152 }}, 대경일보, 2010년 1월 12일</ref> <!-- ===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 --> [[파일:Sun Yat-Sen's House.jpg|섬네일|200px|오른쪽|[[상하이]]에 위치한 쑨원의 집이었던 곳. 이 곳은 당시 [[프랑스]] [[조계]]지역으로 쑨원은 이곳에서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하고 친분을 쌓았다.]] <!-- === 중화주의 === --> == 참고 서적 == * {{서적 인용 |저자=이윤섭 |제목=객관적 20세기 전반기 |날짜=2010-12-05 |출판사=필맥 |출판위치=서울 |ISBN=978-89-91071-82-7}} * {{서적 인용 |저자=신동준 |제목=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날짜=2010-10-04 |출판사=에버리치홀딩스 |출판위치=서울 |ISBN=978-89-92708-78-4}} * {{서적 인용 |저자=김상엽,김지원 엮음 |제목=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날짜=2010-02-22 |출판사=청아출판사 |출판위치=서울 |ISBN=978-89-368-0405-3}} * {{서적 인용 |저자=배경한 |제목=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날짜=2007-08-06 |출판사=한울아카데미 |출판위치=서울 |ISBN=978-89-460-3766-3}} * {{서적 인용 |저자=[[이원복 (만화가)|이원복]] |제목=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13: 중국 1 근대 편 |날짜=2010-07-26 |출판사=김영사 |출판위치= |ISBN=978-89-349-4024-1}} * {{서적 인용 |저자=[[마쓰모토 겐이치]] |제목=키타 잇키: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날짜=2010-07-02 |출판사= 교양인 |출판위치= |ISBN=978-89-91799-51-6}}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1911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1911년 선거]]||[[중화민국의 국가원수|중화민국 임시 대총통]]||1대||[[중국동맹회]]||{{막대|1민|9|4|1|1}} 94.11%||16표||1위||[[파일:Commander-in-Chief_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25px]] |- |[[1923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1923년 선거]]||[[중화민국의 국가원수|중화민국 대총통]]||3대||[[중국국민당]]||{{막대|1민|0|6|8|8}} 6.88%||33표||2위||낙선 |}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쑨얏센 중국 정원]](캐나다) == 참고 자료 == *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752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쑨원] * [https://web.archive.org/web/20030423001023/http://www.president.gov.tw/1_roc_intro/e_xpresident/index.html ROC Government Biography] * [https://web.archive.org/web/20070607065439/http://xml.lib.hku.hk/syshk/index.jsp Sun Yat-sen in Hong Kong] University of Hong Kong Libraries, Digital Initiatives * [https://web.archive.org/web/20060301032630/http://www.press.uillinois.edu/epub/books/chen/ch1.html Contemporary views of Sun among overseas Chinese] * [http://www.yocs.jp Yokohama Overseas Chinese School established by Dr. Sun Yat-sen] {{웨이백|url=http://www.yocs.jp/ |date=20190421021446 }} * [https://web.archive.org/web/20060718060848/http://www.yatsen.gov.tw/english/index.php National Dr. Sun Yat-sen Memorial Hall Official Website] * [https://web.archive.org/web/20051104014930/http://www.nycboe.net/OurSchools/Region9/M131/default.htm?searchType=school Dr. Sun Yat Sen Middle School 131, New York City] * [https://web.archive.org/web/20130114055545/http://www.sysmuseum-pg.com/ Dr. Sun Yat Sen Museum, Penang, Malaysia] * [http://www.homerleasite.com/Site/Blog/287092F4-7B02-11DD-BE22-003065F3F514.html Was Yung Wing Dr. Sun's supporter?] {{웨이백|url=http://www.homerleasite.com/Site/Blog/287092F4-7B02-11DD-BE22-003065F3F514.html |date=20110712214504 }} The Red Dragon scheme reveals the truth! * [http://www.homerleasite.com/Site/Blog/D6C44C9A-65C7-11DD-8871-003065F3F514.html Miyazaki Toten] {{웨이백|url=http://www.homerleasite.com/Site/Blog/D6C44C9A-65C7-11DD-8871-003065F3F514.html |date=20111005074005 }} He devoted his life and energy to the Chinese people. * [http://www.chinahighlights.com/guangzhou/attraction/sun-yat-sen-memorial-hall.htm Sun Yat-sen Memorial Hall ] A place to commemorate Sun Yat-sen in Guangzhou * [https://web.archive.org/web/20090204202113/http://www-cgi.cnn.com/ASIANOW/asiaweek/98/0612/sr14.html MY GRANDFATHER, DR. SUN YAT-SEN - By Lily Sui-fong Sun] * [http://www.chinanews.com.cn/n/2003-12-04/26/376869.html 濃濃鄉情系中原—訪孫中山先生孫女孫穗芳博士 - 我的祖父是客家人] * [http://www.sunyatsenhawaii.org Dr. Sun Yat-Sen Foundation of Hawaii] A virtual library on Dr. Sun in Hawaii including sources for six visits * [http://www.homerleasite.com/Site/Welcome.html Who is Homer Lea?] {{웨이백|url=http://www.homerleasite.com/Site/Welcome.html |date=20110303183835 }} Sun's best friend. He trained Chinese soldiers and prepared the frame work for the 1911 Chinese Revolution.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Sun Yat-sen}}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위안스카이]] |대수 = 1 |직책= [[중화민국의 총통|중화민국 대총통]] |임기= [[1912년]] [[1월 1일]] ~ [[1912년]] [[3월 1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푸이|청 공종]] |후임자 = [[위안스카이]] |직책 = [[중국]]의 국가 원수 |임기 = [[1912년]] [[1월 1일]] ~ [[1912년]] [[4월 1일]] }} {{중화민국의 국가원수}} {{중국국민당 지도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전거 통제}} [[분류:쑨원| ]] [[분류:1866년 출생]] [[분류:1925년 사망]] [[분류:중화민국 대륙 시기 사람]]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청나라의 철학자]] [[분류:중화민국의 철학자]] [[분류:중국국민당 당원]] [[분류:중화민국의 정치인]] [[분류:중국의 혁명가]] [[분류:중국의 의사]] [[분류:난징 대학 교수]] [[분류:홍콩 대학 교수]] [[분류:중국의 공화주의자]] [[분류:중국의 사회민주주의자]] [[분류:하카인]] [[분류:반파시스트]] [[분류:정당 창당자]] [[분류:인권 운동가]] [[분류:범아시아주의자]] [[분류:중화민국 대총통]] [[분류:중국동맹회원]] [[분류:6성장군]] [[분류:신해혁명 관련자]] [[분류:중국의 망명자]] [[분류:민족 해방 운동]]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광둥성 출신]] [[분류:쑨원가]] [[분류:홍콩 대학 동문]] [[분류:중화민국의 개신교도]] [[분류:메이지 시대의 외국인]] [[분류:까오다이교 성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Maoduntouxiang.JPG|섬네일|북경 소재 마오둔 고택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운동가, 마오쩌둥주의 운동가 마오둔의 동상]] '''마오둔'''(茅盾,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의 [[소설가]]이자, 작가, 평론가이며, [[코민테른]] 문학 공작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공작자, [[마오쩌둥주의]] 문학 공작자이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지도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이 [[1950년]]에 일으킨 항미원조 전쟁에서 문화부 총책을 담당하였다. [[마오쩌둥]] 집권 기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관광부|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이다. == 생애 ==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필명은 마오둔(茅盾)이다. [[중국 공산당]] 천두슈가 세운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 출신의 중국 현대 문학 작가, [[코민테른]] 혁명 작가, 문학 공작자, 중국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 주의]] 혁명 문학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항미 원조 전쟁에서 문화부 총책을 담당하였다. [[1896년]] [[저장성]] [[가흥]]에서 태어났고 [[1914년]] [[중화민국]] 국립 [[베이징대]] 문과(文科) 예과반에 들어간 뒤 소설과 비평을 발표했고, [[1920년]] [[5월]] [[코민테른]] [[천두슈]]의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거쳐 [[192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프롤레타리아트]] 예술론'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다. [[1921년]]부터 <공산당>, <소설월보>, <신청년> 등 문예 전선에서 [[제3인터내셔널]] 혁명 문학 진지 확보에 나섰고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원으로 들어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직원 파업을 열었다. 그는 [[코민테른]]의 [[취추바이]],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상하이 대학에도 들어가 [[중국 공산당]]의 문학 혁명 작업을 지도하였다. [[1926년]]에는 중공 선전 공작의 주축으로 '''[[마오쩌둥]]의 비서직'''에 있었다. [[1927년]] [[난창봉기]]와 [[추수봉기]]가 실패된 후는 검거를 피하여 [[1928년]] [[7월]] [[일본 제국]]으로 피신하였고, 문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랑손(郞損), 현주(玄珠), 방벽(方璧), 지경(止敬), 미명(微明), 심명보(沈明甫) 등 여러 필명을 사용하였고, 주로 [[국민 정부]] 통치 지역과 조계지에서 [[중국 공산당]]의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혁명 활동을 하였고, [[1940년]]에는 [[중국 공산당]] [[옌안]]의 [[루쉰]] 예술 학원에 건너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허치팡]], [[장칭]] 등과 함께 중공의 [[스탈린주의]] 공산 혁명 공작을 지도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대외 문화 공작자 교류의 일환으로 아내 쿵더즈(孔德沚)와 함께 [[소련 공산당]]을 직접 방문하였고, [[1947년]] [[4월]] [[상하이]]로 귀국하였으며, [[1949년]] [[1월]] [[베이핑]]으로 이동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 [[마오쩌둥]]의 중공 혁명 문학 비서,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초대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중국작가협회]] 회장(1949년~1981년) 등직에 있었고, [[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운동, 삼반오반 운동, [[반우파 운동]], [[대약진 운동]] 등에서 지도 공작에 참여하였다. [[1957년]]에는 [[마오쩌둥]]의 [[구소련|소비에트 연방]]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화 대혁명]]에서는 문화부 부장직에 있지 않았으나, [[장칭]] 등의 보호 하에서 탄압을 받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중국 인민들에게서 거둬 들인 거액의 인세 수입을 [[화궈펑]] 지도 하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전달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 가족 관계 == * 부 : 선융시(沈永錫) * 모 : 천아이주(陳爱珠) ** 부인 : 쿵더즈(孔德沚) - 공산당원 ** 남동생 : [[선쩌민]](沈澤民, 1900년 6월 23일 ~ 1933년 11월 20일) - 마오둔의 4살 아래 남동생으로, 마오둔과 함께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초기 당원이었고,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였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제11대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장관)]] 등직에 있다가 [[1933년]]에 병으로 일찍 죽었다. ** 제수 : 장친추(张琴秋, 1904년 11월 15일 ~ 1968년 4월 22일) - 심택민(선쩌민)의 아내로, 남편을 따라 공산당에 가입하여 [[28인의 볼셰비키]]로 활동하였으며, 남편 사후, 1943년 중화인민공화국 위생부 부부장(차관) 소정관(蘇井觀)과 재혼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방직공업부 부부장(차관)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장금추(장친추)는 몹시 수모를 겪고 1968년 4월 22일 새벽에 투신자살하였다. *** 조카 : 장마아(张瑪娥) - 심택민(선쩌민)과 장금추(장친추)의 딸로, [[문화대혁명]] 때, 어머니와 함께 몹시 박해를 받아 1976년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저술 == [[1927년]]의 '식 3부작'은 초기작으로 '환멸' '동요' '추구' 세 중편소설이고, [[1932년]]에 [[마오쩌둥]]의 [[추수봉기|농촌]] 혁명의 공작 일환으로 쓰여진 '농촌 삼부작', [[1933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혁명 소설 '자야' 등이 있다. [[1948년]]에는 '소련견문록'을 출판하였다. [[마오쩌둥]] 정권 성립 후로는 중공 혁명 문학 운동의 지도 공작에 집중하였으며, 평론으로 [[1950년]] '재북경 문학공작자 선언', [[1958년]] '약진 중의 동북', [[1960년]] '사회주의 약진의 시대를 반영해 사회주의 시대의 약진을 추진하라' 등이 있다. == 마오둔 문학상 == [[마오둔 문학상]]은 그의 유언과 [[화궈펑]] 이후의 정권에 의해서 [[1977년]]부터의 장편 소설을 대상으로, [[1982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장편 소설 문학상 수상이 이뤄지며, 초기 선정작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운동'을 주제로 직접 담은 작품도 포함된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08244&cid=40942&categoryId=31805 마오둔 문학상] - 두산백과</ref> == 같이 보기 == * [[천두슈]] * [[마오쩌둥]] * [[취추바이]] * [[저우언라이]] * [[후춘화]] == 각주 == {{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루딩이]] |대수 = 1 |직책 = [[중화인민공화국 문화관광부|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장관)]] |임기 = [[1949년]] [[10월 19일]] ~ [[1965년]] [[1월 4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바진]] |대수 = 1 |직책 = [[중국작가협회|중국작가협회 주석]] |임기 = [[1949년]] [[7월 23일]] ~ [[1981년]] [[3월 27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심균유]] 등 |후임자 = [[바진]] 등 |대수 = 4 · 5 |직책 =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임기 = [[1965년]] ~ [[1981년]] }} {{전거 통제}} [[분류:1896년 출생]] [[분류:1981년 사망]] [[분류:저장성 출신]] [[분류:자싱시 출신]] [[분류:오흥 심씨]]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분류:공산주의자]] [[분류:베이징 대학 동문]] [[분류:중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중국공산당원]] [[분류:베이징 대학]] [[분류:중국의 언론인]] [[분류:중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분류:공청단]] [[분류:코민테른 관련자]] [[분류: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분류:중국의 문학 평론가]]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 [[분류:김일성]] [[분류:중국의 극작가]] [[분류: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구성원]] [[분류:전국인민대표대회 구성원]]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마오쩌둥]] [[분류:문화 대혁명 관련자]] [[분류:루쉰]] [[분류:1989년 톈안먼 사건 관련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마오둔||중국 소설가 ‘모순(茅盾)’}} '''모순'''(矛盾)은 [[명제]]끼리 서로 맞지 않아 [[논리학|논리]]적인 이치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전 논리에서는, 어느 한쪽은 참을 결론으로 내어놓고 다른 쪽은 거짓을 결론으로 내어놓는 식으로 진리값이 맞지 않는 경우,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가리킨다. == 어원 == 다음은 한자 문화권에서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유래된 [[중국]]의 고사이다. [[초 (전국)|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명나라왕 신하중 한 명이 상인에게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비자]] 난(難)1》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 고사의 창과 방패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대당 사각형]]에서 말하는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는 문장과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다."는 명제는 동시에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당 사각형에서 모순은 동시에 참일 수도 없고 동시에 거짓일 수도 없다. == 논리학 == 본래 [[고전 논리]]에서는 진리값이 맞지 않는,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수리 논리학]]에서는 술어 p가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것을 <math>p \vdash\bot</math>인 경우, 즉 p로부터 거짓을 도출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귀류법]]은 어떠한 주장이 모순이기 때문에 그 주장의 부정이 참임을 논증하는 증명법이다. 한편 [[의미론]]에서는 어떠한 명제가 '충족불가능'한 경우로 정의한다. 이러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 이론을 [[무모순성|무모순적]](일관적)이라 하며, 이는 [[수학기초론]]의 중요한 개념이다. == 같이 보기 == * [[역설]] * [[귀류법]] * [[비모순율]] * [[무모순성]] {{전거 통제}} {{토막글|철학}} [[분류:논리학]] [[분류:마르크스주의 이론]] [[분류:인지부조화]] [[분류:명제 논리]] [[분류:명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사실 여부 의심|날짜=2018-03-29}} '''만우절'''(萬愚節, {{llang|en|April Fools' Day, April Fool's Day, All Fools' Day}})은 매년 [[4월 1일]]에 악의 없는 가벼운 거짓말로 서로 속이면서 즐기는 날이다. 명절이나 공휴일은 아니지만 서양의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기념일로 여긴다. 전통적으로 몇몇 나라에서는 만우절 장난은 정오 이전에만 행해지며, 이후에는 장난임을 알린다. 이때 오후에도 만우절 장난을 하는 사람 또는 그에 속은 사람을 '에이프릴 풀(April Fool)'이라 부른다.<ref>{{웹 인용 |url=http://www.kidlink.org/KIDPROJ/MCC/mcc0702.html |제목=KIDPROJ Multi-Cultural Calendar |확인날짜=2009년 4월 1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404045924/http://www.kidlink.org/KIDPROJ/MCC/mcc0702.html |보존날짜=2009년 4월 4일 |url-status=dead }}</ref> 한편, 어떤 곳은 농담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한다. == 유래 == 만우절에 관한 초기의 언급은 15세기에 [[제프리 초서]]가 쓴 이야기인 〈수녀와 수도사의 이야기〉에 나온다. 만우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3월 25일에서 4월 2일의 이 시기가 봄의 [[춘분]]과 관련이 깊고, 이 때가 고대로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기원설은 다양하게 많이 존재한다. 그중에 하나가 [[프랑스]]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1508년부터 1539년 사이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자료들 중 만우절 농담에 대한 이야기나 사월의 첫째날을 기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1564년까지 사람들은 4월 1일을 새해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프랑스의 샤를 9세|샤를 9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금의 4월 1일에서 새해 첫날인 1월 1일로 변경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5466&cid=40942&categoryId=32175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만우절 [April Fool's Day, 萬愚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nowiki>].......기원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프랑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옛날의 신년은 현행 달력으로 3월 2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날부터 4월 1일까지 춘분제가 행해졌고, 마지막 날에는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1564년 프랑스의 샤를 9세가 새로운 역법을 채택하여 새해의 첫날을 1월 1일로 고쳤으나 그것이 말단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4월 1일을 신년제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그날 선물을 교환하거나 신년 잔치 흉내를 장난스럽게 내기도 했는데, 이것이 만우절의 시초가 되어 유럽 각국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ref>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4월 1일에 축제를 벌였는데 이런 사람들을 '4월의 물고기'({{llang|fr|poisson d'avril}})라고 불렀으며 친구가 자는 머리맡에 천궁좌의 하나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놓는 등의 장난을 치며 조롱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다른 이유로 이 날을 기념한다. 1572년 스페인의 왕 필립 2세에 의해 네덜란드가 통치되고 있었을 때 네덜란드인 반란군들이 1572년 4월 1일 덴 브리엘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후에 다른 네덜란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 이 날을 유머로 기념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만우절의 유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 부활절에 상연된 기적극에서 유래했다. [[예수]]가 4월 1일에 처형되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때 물이 빠져나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를 보낸 날이 4월 1일이었으며, 헛된 심부름을 보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로마 농업의 여신 케레스를 기념하던 축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뒤로 프랑스 사람들이 계속 농담조로 신년의 선물을 하거나 인사를 하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첫눈 내리는 날이 만우절이었다. 이 날 만큼은 거짓말을 하여도 눈감아주었다.<ref>{{웹 인용|url=https://www.ytn.co.kr/_ln/0484_201703271100503495|제목=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있었다?|날짜=2017-03-27|언어=ko|확인날짜=2023-04-01}}</ref> == 유명한 만우절 거짓말 == * '''스파게티 나무''' : [[BBC]]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파노라마'''가 1957년에 방영한 유명한 장난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스위스에 있는 나무에서 스파게티를 수확하는 장면을 보여주자, 많은 사람들이 BBC에 전화를 걸어 스파게티 나무의 재배법을 알고 싶어했다. 이후로도 BBC는 거의 해마다 기발한 만우절 장난을 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타코 자유의 종''' : [[1996년]] 미국 회사 [[타코 벨]]이 [[자유의 종]]을 사들여 '타코 자유의 종'으로 이름을 변경했다는 내용의 광고를 [[뉴욕 타임즈]]에 실었다. 사실 여부에 대한 질문에 [[백악관]] 대변인 [[마이클 맥커리]]는 [[링컨 기념관]]도 팔려, '포드 링컨 머큐리 기념관'으로 이름이 바뀔 것이라고 대답했다. * '''[[피사의 사탑]]''' : 1950년대 한 [[네덜란드]] TV에서 피사의 사탑이 무너졌다는 보도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일부는 이를 한탄하면서 방송국에 전화하기도 했다. * '''[[빌 게이츠]]의 [[암살]]''' : 한 네티즌이 CNN과 똑같은 모방 사이트를 만들어 '빌 게이츠가 암살'되었다고 보도한 내용을 사이트에 올렸는데 이를 보고 많은 공영 방송에서 [[빌 게이츠]]가 암살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MBC와 YTN 마저도 이에 속아넘어가 속보로 이를 전한 후 사과방송을 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만우절에 ‘낚인’ 언론의 굴욕사|url = 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273687&iid=96510&oid=081&aid=0002006589&ptype=021|출판사 = 서울신문|저자 = 윤창수 기자|쪽 = |날짜 = 2009-04-01|확인날짜 = 2010-03-31}}</ref> * '''구글의 사투리 검색''' : [[2008년]] 만우절에는 [[구글]]이 '사투리 검색'을 새로 시작한다고 하였다.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블리자드]]사의 장난''' : 블리자드는 매년 만우절 장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다. 주로 자사의 게임에 관한 것들인데, 진짜 같은 [[스크린샷]]까지 같이 올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며 사내에 만우절 장난을 전담하는 팀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이다.<ref>[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type=&search_query=blizzard+april+fool&aq=1&oq=blizzard+ 유튜브에 올라온 블리자드의 만우절 장난들]</ref> :{| border=1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 font-size: small;" ! 연도 ! 게임 ! 내용 ! 동영상 ! 비고 |- ! [[2008년]] | rowspan=2|[[스타크래프트 2]] | 타우렌 마린<ref>[[워크래프트3]]에 오크족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타우렌족이 마린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ref><ref>스타크래프트 2 유즈맵 중에는 [http://kr.media4.battle.net/cms/carousel_header/BW6OSE5TV4521282203976852.jpg 타우렌 우주 해병 키우기] {{웨이백|url=http://kr.media4.battle.net/cms/carousel_header/BW6OSE5TV4521282203976852.jpg# |date=20110510075405 }}([http://kr.battle.net/sc2/ko/blog/257552 이미지 출처] {{웨이백|url=http://kr.battle.net/sc2/ko/blog/257552 |date=20100822152500 }})라는 게임이 있다.</ref>(동영상<ref>{{웹 인용 |url=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311183 |제목=타우렌 우주 해병 키우기 |확인날짜=2011-04-0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1085909/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311183 |보존날짜=2011-05-11 |url-status=dead }}</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JJoP-n6ofv0 타우렌 마린 이스터 에그]</ref>을 테란족의 새로운 유닛이라고 소개 | [https://www.youtube.com/watch?v=3ZsFR3yOAek 유튜브] | [https://web.archive.org/web/20090207194908/http://starcraft2.com/features/terran/taurenmarine.xml 타우렌 마린 소개] |- ! rowspan=3|[[2009년]] | 테란족에서 테라트론<ref>[https://www.youtube.com/watch?v=6nN9GAov2_Q 실제로 등장하는 테라트론의 모습]</ref>을 만들었다고 소개<ref>실제로 스타크래프트2에서 테라트론을 만날 수 있다. 히페리온 함선의 휴게실에 있는 게임기에서 미니 게임을 할 수 있는데, 마지막판 보스가 테라트론이다.</ref> | [https://www.youtube.com/watch?v=GJ63i9BXZSs 유튜브] | [http://kr.starcraft2.com/features/terran/terratron.xml 테라트론 소개] |- | [[디아블로 3]] | 새로운 캐릭터 "Archivist"를 소개 | [https://www.youtube.com/watch?v=ck6FssMnKmc 유튜브] |   |-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새로운 영웅 "방랑시인" 및 아이템 몇 종 소개 | [https://www.youtube.com/watch?v=di89UMObo_I 유튜브] |   |- ! [[2010년]] | [[스타크래프트 2]] | 은폐 잠복중인 액션 피겨를 팝니다.<ref>{{웹 인용 |url=http://temz.co.kr/90084257987# |제목=2010년 블리자드 만우절 장난, 은폐, 잠복 중인 액션 피겨를 판매합니다? |확인날짜=2010-04-0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0042206/http://temz.co.kr/90084257987# |보존날짜=2011-05-10 |url-status=dead }}</ref><ref>{{뉴스 인용|url=http://www.kbench.com/hardware/?no=82866&sc=1|제목=블리자드, '은폐' 완벽 구현한 스타크래프트 2 피규어 한정 판매|출판사=K벤치|날짜=2010-04-01|확인날짜=2010-04-02}}</ref> |   | 잠복중인 바퀴 액션 피겨<br />암흑기사 스태츄<br />은신중인 유령 스태츄 |- !rowspan=4| [[2011년]] | 종합 소식<ref>[https://www.google.co.kr/search?hl=ko&q=%EB%B8%94%EB%A6%AC%EC%9E%90%EB%93%9C%202011%EB%85%84%20%EB%A7%8C%EC%9A%B0%EC%A0%88&lr= 그밖의 구글에서 찾아낸 블리자드의 만우절]</ref> | 마누제르 구라킨<ref>{{뉴스 인용|url = http://www.trywow.co.kr/event/data/april/?product=sc2 | 제목=블리자드 20주년, 이제 새로운 마법이 시작됩니다.|출판사=블리자드|날짜 = 2011-04-01|확인날짜=2010-04-03}}</ref><ref>최근 블리자드에 합류한 ‘마누제르 구라킨’이라는 사람이 얘기하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참 특이합니다.</ref>의 2011년 만우절 프로젝트 소개 |   | |- | [[스타크래프트 2]] | 위대한 리그의 탄생.<ref>{{뉴스 인용|url = http://www.trywow.co.kr/event/data/april/sc2/|제목=위대한 리그의 탄생 ‘레알’ 실버 리그와 핑크 리그|출판사=블리자드|날짜=2011-04-01|확인날짜=2010-04-03}}</ref><br />스타크래프트 관측선 스태츄<ref name=Blizzard2011>[http://www.inven.co.kr/webzine/news/?news=34821 중간 쯤에 스타크래프트 관측선 스태츄 및 WOW 원기회복의 식탁, 생선 통구이 소개가 있다.]</ref> 한정 판매 |   | |-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레알 서바이벌<ref>{{뉴스 인용|url=http://www.trywow.co.kr/event/data/april/wow/|제목=프로젝트 시즌1 나는 윈대한 와우스타B|출판사=블리자드|날짜=2011-04-01|확인날짜=2010-04-03}}</ref><br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원기 회복의 식탁<ref name=Blizzard2011/> 및 생선 통구이<ref name=Blizzard2011/> |   | |- | [[디아블로 II]] | 젖소방의 변신<ref>{{뉴스 인용|url=http://www.trywow.co.kr/event/data/april/diablo/|제목=젖소방 변경|출판사=블리자드|날짜=2011-04-01|확인날짜=2010-04-03}}</ref> | | |} * '''[[라이엇 게임즈]]'''사의 장난 : 라이엇 게임즈 역시 블리자드처럼 만우절 장난을 치는 편인데, 2011년에는 '우르프'라는 챔피언을 출시한다는 장난을 쳤고, 2020년에는 '핑구'라는 챔피언을 출시한다는 장난 외에도 많은 장난을 하였다. 또한 만우절 기념으로 각종 스킨을 내기도 하며, 매년 만우절 기념으로 다양한 이벤트를 보여주고 있다. * '''[[니코니코 동화]] 2.0(笑)''' : 당시 SP1 버전으로 운영되던 [[니코니코동화]]가 [[2008]]년에 만우절 이벤트인 니코니코 동화 2.0(笑)으로 하루간 변경되었다. 이벤트였지만 지적받았던 인터페이스 개선, 코멘트 역류 기능, 피자배달기능(@피자 코멘트)가 추가되는 등의 변경사항이 있었다. 참고로 업로드 서버인 스마일 비디오(smile video)도 이름이 하루간 슬라임 비디오(slime video)로 변경됐었다. * '''하늘을 나는 펭귄''': 2008년 BBC는 남극에서 하늘을 나는 펭귄 무리가 발견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전했다. 몇몇 펭귄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하늘을 날아 남미까지 여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유명 코미디언 [[테리 존스]]가 직접 남극을 찾아 펭귄들의 비행 장면을 목격하는 매우 그럴듯한 영상이 곁들여져 전 세계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9dfWzp7rYR4 Penguins - BBC (유튜브 동영상)]</ref> 이 영상의 제작 과정도 공개되었는데, 테리 존스의 스튜디오 촬영과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만든 것이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lzhDsojoqk8 Penguins April Fool - The Making Of - BBC (유튜브 동영상)]</ref><ref>{{뉴스 인용 |제목=10 stories that could be April Fools... but aren't |url=http://news.bbc.co.uk/2/hi/uk_news/magazine/7324127.stm |날짜=2008-04-01 |확인날짜=2019-03-27 |뉴스=BBC}}</ref><ref>{{웹 인용 |제목=Flying Penguins &#124; World Penguin Day &#124; BBC|url=https://www.youtube.com/watch?v=9dfWzp7rYR4 |웹사이트=YouTube |출판사=BBC |날짜=2008-03-31 |확인날짜=2019-03-27}}</ref> * '''웹사이트들의 홈페이지 조작''' : [[2009년]] 싸이월드는 두벌식 한글 자판에서 cyworld를 한글 상태에서 치면 '쵸재깅'이라고 나온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이트 이름을 쵸재깅으로 개편하기도 하였다.<ref name="쵸재깅">{{뉴스 인용|제목 = 쵸재깅'이 뭐야?|url = 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273687&iid=96574&oid=108&aid=0001979807&ptype=021|출판사 = 스타뉴스|저자 = 정현수 기자|쪽 = |날짜 = 2009-04-01|확인날짜 = 2010-03-31}}</ref> 또한 파란닷컴은 90년대 PC통신이었던 하이텔(HiTEL)의 파란화면으로 개편하여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사이트 해킹? 알고 보니 만우절 장난|url = 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273687&iid=96675&oid=022&aid=0002033840&ptype=021|출판사 = 세계일보|저자 = 엄형준 기자|쪽 = |날짜 = 2009-04-01|확인날짜 = 2010-03-31}}</ref> 또한 [[2011년]]에는 네이트 홈페이지의 로고를 쵸재깅으로 바꾸고<ref>{{뉴스 인용|제목 = 네이트의 만우절 장난...'쵸재깅'이 뭐지?|url = http://news.nate.com/view/20110401n04679|출판사 = 헤럴드생생|저자 = 이혜미 기자|쪽 = |날짜 = 2011-04-01|확인날짜 = 2012-04-01}}</ref>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주인공을 소재로 한 가상 왜떴을까를 노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김주원·길라임 불화설, 오스카는 '나가수'에...|url = http://news.nate.com/view/20110401n12325|출판사 = 머니투데이|저자 = 김민경 인턴 기자|쪽 = |날짜 = 2011-04-01|확인날짜 = 2012-04-01}}</ref> 한편 [[백괴사전]]에서는 2010년에는 불법정보에 대한 차단 안내를 대문으로 내걸었으며 2011년에는 만우절을 맞아 모든 링크를 거꾸로 표시하는 일이 일어났었다. 또한, 사진은 표시되지 않았다.<ref>{{웹 인용 |url=http://uncyclopedia.kr/wiki/%EB%A7%8C%EC%9A%B0%EC%A0%88 |제목=백괴사전의 만우절 문서 |확인날짜=2022-08-21 |archive-date=2022-07-24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724092356/https://uncyclopedia.kr/wiki/%EB%A7%8C%EC%9A%B0%EC%A0%88 |url-status= }}</ref><!--뉴스 기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 '''기타 언론사들의 거짓 보도들''' : 이 외에도 영국의 언론 '텔레그래프'가 보도한 '하늘을 나는 호텔, 최초비행 시작', 가디언지 '인쇄물 서비스 종료, 모든 서비스를 트위터로 진행', 뉴질랜드의 헤럴드 "MS의 애플인수' 등 수많은 거짓 기사들을 내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 = “헬리콥터 호텔?”…화제만발 만우절 보도|url = 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273687&iid=96637&oid=081&aid=0002006632&ptype=021|출판사 = 서울신문|저자 = 강경윤 기자|쪽 = |날짜 = 2009-04-01|확인날짜 = 2010-03-31}}</ref> * '''컬러 TV''' : 흑백TV 시대인 1962년 4월 1일 스웨덴의 한 방송국 기술담당자인 스텐슨이 뉴스에 출연하여 "흑백TV 수상기를 간단하게 컬러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라고 방송을 했다. 흑백TV 화면에 나일론 스타킹을 씌우면 컬러로 방송을 볼 수 있다고 얘기를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방송을 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는 해프닝이 일어났다고 한다. * [[마인크래프트]]: 만우절 이벤트인 마인크래프트 2.0이 있다. 색유리, [[석탄]]블록, [[TNT]]슬랩이 등장한다. == 만우절의 부작용 == [[대한민국]]에서는 만우절에 주로 경찰서와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거는 것이 대표적이다.<ref>[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EC%82%AC%ED%9A%8C%20%EC%A3%BC%EC%9A%94%EA%B8%B0%EC%82%AC&year=2009&no=198748&selFlag=&relatedcode=&wonNo=&sID=504 만우절 허위신고 '형사처벌'] {{웨이백|url=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EC%82%AC%ED%9A%8C%20%EC%A3%BC%EC%9A%94%EA%B8%B0%EC%82%AC&year=2009&no=198748&selFlag=&relatedcode=&wonNo=&sID=504 |date=20110511174053 }}, 《매일경제》, 2009.3.31.</ref>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만우절 장난전화는 범죄 행위라고 규정하고 최대 2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 = 만우절 장난전화하면 200만원 날린다|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2347787|출판사 = 아시아경제|저자 = 조태진 기자|쪽 = |날짜 = 2010-03-31|확인날짜 = 2010-03-31}}</ref> 2018년 만우절(4월 1일)에 경찰서나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거는 일이 많이 줄었다. 부산소방안전본부 등의 집계를 보면 만우절 장난전화는 2010년 19건이던 것이 2011년 7건으로 줄었고, 2012년부터는 아예 없거나 1건에 그쳤고, 2016년 만우절에는 단 한 건의 장난전화도 없었다고 한다. 부산경찰서에 접수된 만우절 장난전화는 2014년부터 이듬해까지 매년 1건뿐이었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허위신고를 하면 6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의 형에 처해지며, 정도가 심하거나 상습적으로 허위신고를 하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ref>{{뉴스 인용|url=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80401.99099000028|제목=만우절, 112·119 장난전화 “심하면 5년 이하 징역”|성=|이름=|날짜=|뉴스=만우절, 112·119 장난전화 “심하면 5년 이하 징역”|출판사=국제신문|확인날짜=}}</ref> == 같이 보기 == * [[만우절 RFC]]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851828}} * [http://AprilFoolsDayOnTheWeb.com/ April Fools' Day On The Web: The most complete listing of April Fools' Day Jokes that Web Sites have run each year from 2004 all the way until the present] * [http://www.museumofhoaxes.com/hoax/aprilfool/ Museum of Hoaxes: Top 100 April Fools' Day hoaxes of all time] * [http://www.walyou.com/blog/2010/03/24/april-fools-pranks/ Top 100 April Fools Pranks and Gadgets] {{웨이백|url=http://www.walyou.com/blog/2010/03/24/april-fools-pranks/ |date=20101129053356 }} * [http://www.bonzasheila.com/sendcard/index.php April Fools' Day Antique Romantic Themed Postcards to send] from Bonza Sheila * [https://web.archive.org/web/20100405004535/http://smstimepass.blogspot.com/2010/03/april-fools-sms-in-hindi-april-fools.html April Fools Day SMS messages Hindi] * [https://web.archive.org/web/20100403002505/http://smstimepass.blogspot.com/2010/03/2010-april-fools-jokes-sms-messages.html April Fools Day Jokes messages] {{전거 통제}} [[분류:만우절| ]] [[분류:4월의 세시]] [[분류:4월 1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시문학 (잡지)|문학 장르인 시문학|대한민국의 시문학 잡지}} {{문학}} [[파일:The oldest love poem. Sumerian terracotta tablet from Nippur, Iraq. Ur III period, 2037-2029 BCE. Ancient Orient Museum, Istanbul.jpg|섬네일|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사랑의 시. 이라크 니푸르의 수메르 병마용 타블렛]] '''시'''(詩, poetry)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 시는 문자 그대로 또는 표면 수준의 의미에 추가하거나 그 대신에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언어의 심미적이고 종종 리드미컬한 특성을 사용하는 문학 예술의 한 형태이다. 시의 특정 사례를 시라고 부르며 시인이 썼다. 시인은 유성음, 두운법, 유포니와 불협화음, 의성어, 리듬(운율을 통해), 소리 상징과 같은 시적 장치라고 불리는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여 음악적 또는 주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시는 운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 리듬이나 기타 의도적인 패턴을 따른다. 이 때문에 운문은 시의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시는 길고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차별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 시는 적어도 선사 시대 아프리카의 사냥 시와 나일강, 니제르, 볼타 강 유역 제국의 찬가와 애가 궁중 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시 중 일부는 기원전 25세기에 쓰여진 피라미드 문헌에 등장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아시아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어로 쓰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기 시는 중국 시징과 같은 민요와 종교 찬송가(산스크리트 리그베다, 조로아스터교 가타, 후르리아 노래, 히브리 시편)에서 발전했다. 또는 이집트의 시누헤 이야기, 인도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와 같이 구전 서사시를 다시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를 정의하려는 고대 그리스의 시도는 수사학, 드라마, 노래, 희극에서의 언어 사용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의 시도는 반복, 운문 형식, 운율과 같은 특징에 집중하고 산문으로 알려진 좀 더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학술적 또는 전형적인 글쓰기 형식과 시를 구별하는 미학을 강조했다. 시는 단어에 대한 차별적인 해석을 제안하거나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형식과 관례를 사용한다. 모호함, 상징주의, 아이러니 및 기타 시어법의 문체적 요소를 사용하면 시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은유, 직유, 환유와 같은 비유적 표현은 서로 다른 이미지 사이에 공명을 형성한다. 즉, 의미가 겹쳐져 이전에는 인식되지 않았던 연결이 형성된다. 개별 운문 사이, 운율이나 리듬의 패턴에 있어서 유사한 형태의 공명이 존재할 수 있다. 일부 시 유형은 특정 문화와 장르에 고유하며 시인이 쓰는 언어의 특성에 반응한다. 시를 단테, 괴테, 미츠키에비츠, 루미와 동일시하는 데 익숙한 독자들은 시가 운율과 규칙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한 줄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시와 두운 운문과 같이 리듬과 유포니를 만들기 위해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전통도 있다. 많은 현대 시는 유포니 자체의 원리를 시험하거나 운율이나 정해진 리듬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시적 전통에 대한 비판을 반영한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언어의 "제작자"인 시인(poet)은 언어의 언어적, 표현적, 실용적 특성의 진화에 기여해 왔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시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형식, 스타일, 기법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화 전통(적어도 호머에서 릴케까지 확장)은 시 창작을 영감과 연관시킨다. 종종 뮤즈(고전 또는 현대)에 의해 또는 일종의 모범이나 도전을 제시하는 다른 시인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 이름의 유래 == 시는 한자어로 詩이며 이는 言(말씀 언)과 寺(관청 시)가 합쳐진 [[육서|형성자]]이다. 여기서 言이 의미기호, 寺가 소리기호이다. 즉 시는 言, 언어가 그 의미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이름이며,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시언지(詩言志, 언어로 나타낸 뜻이 곧 시)라는 구절이 나온다.<ref>이형기, 시란 무엇인가, 한국문연 펴냄, 25쪽.</ref> == 특성 == 시란, 울림, 운율, 조화를 가진 운문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시작품을 성립시키는 각 시구를 가리킨다. == 세계의 시 == === 한국의 시 ===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한국의 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의 한국어시는 [[향찰]]이나 [[이두]]로 기록되었다. * [[향가]] * [[고려 가요]] * [[시조]] - 3.4.3.4 / 3.4.3.4 / 3.5.4.3으로 진행되는 한국어 시이다. * [[한시]] * 현대시 ==== 상고 시대 ==== {{본문|한국의 상고시대 시가}}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한국의 상고시대 시가|시가 문학]]을 만들어 냈다. 서정 양식은 서정시로 대표된다.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문학의 창조적 싹을 틔워 왔다. 시가의 기원은 원시 고대적 공동체 사회의 [[제사|제의]](祭儀)에서 발생하였다. 제천 의식 때 제주(祭主)가 되는 기도사(祈禱詞)나 송축사(頌祝詞), 민족적 시조신(始祖神)이나 영웅을 칭송하는 제사(祭詞) 같은 것은 신악(神樂)이나 율동적인 무용과 아울러 종합 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했고, 또 이것이 민족 문학의 모체가 되어 주었다. 예컨대,《[[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고구려]] 민족은 가무를 좋아하며 10월 [[제천 행사|제천시]] 국중에 대회를 갖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 한다. (→[[한국의 제천 행사#고구려|고구려의 제천 행사]] 참조) 이러한 제의에서 불린 노래가 곧 삼국 초기의 시가 문학이다. 시가는 분화되어 악기를 연주하는 노래로 발전하고, 지금은 음악으로부터 유리된 가사만이 변천의 과정을 겪고 문자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가야]] 건국 신화 속에 낀 원시 시가의 유편인 〈구지가〉, 〈황조가〉, 〈공후인〉 등이 신화·전설 속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 가사의 내용이 한역(漢譯)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중, 〈황조가〉는 연애 감정을 표현한 서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서 집단적인 원시 문학으로부터 개인적인 고대 서정 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 삼국 시대 ==== {{본문|한국의 삼국시대 시가}}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시|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 참고 자료 == * 이형기, 시란 무엇인가, 한국문연 펴냄. == 같이 보기 == {{위키공용|Poetry}} * [[시인]] * [[동시]] * [[하이퍼텍스트 시]] * [[즉흥]] * [[스포큰 워드]] == 각주 == {{각주}} {{이야기}} {{글짓기}} {{미학}} {{전거 통제}} [[분류:시|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Athena Giustiniani Musei Capitolini MC278.jpg|섬네일|[[아테나 귀스티니아니|형 귀스티니아니]]의 아테나(Athena Giustiniani). 대리석. BC 5세기 후반의 그리스 원본의 로마시대 복제품]] [[파일:Mattei Athena Louvre Ma530 n2.jpg|섬네일|아테나]] '''아테나'''({{llang|el|Αθην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메티스 (신화)|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투구, 갑옷, 창,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아이기스]]), 올빼미,올리브나무,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언제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무장한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전쟁의 [[남신]]인 [[아레스]]와는 달리 총명하고, 이성적이고, 순결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며 영웅들을 수호한다. 그녀의 신전으로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며 ‘아테네’라는 명칭의 어원이다 == 개요 == 아테나 문화는 사람들이 아테나를 아테네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었던 신화가 여러 시대를 넘어 다시 기록되는 것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테나를 이집트인들의 고대 왕조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리비아]]의 전쟁의 신이자 여성 사냥꾼 신인 [[네이트 (신화)|네이트]]에서 왔다고 여기었다. 아테나는 또한 철학적인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어 5세기 후와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적용되었다.<ref>[[Walter Burkert]], ''Greek Religion'' 1985:VII "Philosophical Religion" treats these transformations.</ref> 그녀는 특히 방직, 그리고 여러 기술의 수호자(''Athena Ergane'')이기도 하고, [[전쟁]]에서의 전략을 맡아 지휘(''Athena Promachos'')하기도 한다.<ref name = "kygypw">Violence and bloodlust were Ares' domain.</ref> 무기의 제작과 관련된 금속 가공도 그녀의 가호 아래에 있기도 하다. 아테나의 지혜는 [[오디세우스]]에서 묘사된 모습처럼 [[메티스 (신화)|메티스]]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교활한 지성도 포함하고 있다. 아테나의 주위에서는 올빼미가 그녀의 시중을 들며,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그녀와 종종 동행하기도 하는데, 아테나의 조각상의 손바닥 위에 종종 작은 니케의 형상이 있기도 하다. 염소가죽, 혹은 뱀가죽으로 만든 흉갑 [[아이기스]]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문화적 정황에 연관되어 있었는데 후기의 신화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제우스]]가 주었다고 전해온다.<ref name = "rwwzsh">Zeus is also "Aegis-bearing Zeus".</ref> 아테나는 종종 투구를 쓰고 [[고르곤]]의 머리로 장식된 방패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조각상은 그리스 초기의 여신 문화로, 파르테논의 앞부분 앞 정점에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그녀의 방패는 후에 [[페르세우스]]의 축원의 선물이 된다. 뱀은 종종 아테나와 함께 동행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창]] 막대기로도 자주 묘사된다. 바다와 배, 말과 전차도 그녀와 연관되지만, 밀접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아테나는 무기를 든 전쟁의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 [[이아손]], [[헤라클레스]]와 같이 많은 영웅들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그녀의 유명한 신전도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참고로,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후 , 스틱스강에 처녀신으로 있을것임을 맹세하였다. 한번은 헤파이스토스에게 겁탈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치마에 묻은 정액을 닦아서 땅에 버렸다. 이로 인해 땅의 여신 가이아가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으로 수태하고, 에리크토니오스가 태어난다.<ref>Pseudo-Apollodorus, ''[[Bibliotheke]]'' 3.14.6.</ref> 그녀의 역할이 도시의 수호자였기에, 그녀는 그리스 전역에서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로서 숭배 받았다. 그녀는 [[아테네]]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데, 여신과 도시의 이름은 어원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f>"Whether the goddess was named after the city or the city after the goddess is an ancient dispute" (Burkert 1985:139).</ref> == 신화 == === 탄생 === 제우스는 자신이 아버지인 크로노스나 할아버지인 우라노스처럼 자신도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아들에게 지위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던 차에 장차 자신과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올림포스의 주신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가이아의 신탁을 듣자 몹시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은 개구리로 변신하고 메티스는 파리로 변신시킨 다음, 크로노스가 자신과 자신의 남매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메티스를 꿀꺽 삼켜버린다. 몇달 후, 제우스에게 갑자기 격한 두통이 몰려왔다. 두통이 갈수록 심해지자 [[헤파이스토스]]가 두통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갰다. 그러자 그 속에서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완전한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아테나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왔다. 이때 하늘과 땅, 바다가 아테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대하게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아테나는 늘 아버지 제우스의 총애를 받았다. 메티스는 이후로도 계속 제우스의 뱃속에 남겨져 임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제우스는 계속 권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Parthenon Greece.jpg|섬네일|파르테논 신전]] === 아테네의 수호신 === 아티카 지역의 도시 아테네를 두고 아테나는 [[포세이돈]]과 누가 인간에게 더 유용한 선물을 줄 것인가로 겨룬 적이 있다. 포세이돈은 그의 삼지창으로 땅을 때려 말과 샘을 만들어 주고 아테나는 [[올리브|올리브 나무]]를 만들어 주었는데, 말이 투쟁과 슬픔을 상징하는 반면, 올리브 나무는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기에 인간들의 결정으로 아테나가 승부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로써 아테나는 그 도시를 갖게 되고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나 여신이 거주하는 장소로 알려진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수호신을 놓고 겨루는 승부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승부에서 진 포세이돈이 인간들에게 보복하고자 홍수를 불러오자 인간들은 아테나에 다음 가는 지배권을 그에게 맡겨 화를 풀도록 하였다 한다. === 에릭토니우스 ===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나가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대장간을 찾아오자 아테나에게 반해 강간하려고 했다.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를 뿌리치고 허벅지에 뭍은 [[정액]]을 닦아 땅에 버렸는데, 이로 인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수태]]해 [[에릭토니우스]]를 낳고만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거둔다. 아테네 왕 [[케크롭스]]의 딸인 공주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에게,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맡기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 하였다. 하지만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은 호기심으로 인해서 바구니를 열어 보고, 두 마리 뱀에게 감긴 에릭토니우스를 보자 실성하여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서 자살하였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바구니에서 꺼내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기어 길렀고, 후에 에릭토니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 아라크네 === 리디아의 염색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짜기와 자수를 잘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실력을 뽐내며, 아테나에게 도전한다. 아라크네의 자만심에 화가 난 아테나는 할머니로 변신하여 신을 모독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했는데, 아라크네가 그녀를 무시하고 쫓아내려 하자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와 시합을 벌인다. 아테나는 자신과 포세이돈이 아테네를 두고 겨룬 승부의 광경과, 신에게 대항한 인간들이 욕을 보는 장면과, 자신의 신목이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를 수놓아 아라크네에게 경쟁을 포기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크네는 자신의 직물에, 제우스와 여러 신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뛰어난 솜씨로 수놓는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뛰어난 솜씨에는 감탄했지만, 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수내용에 모욕과 분노를 느껴 북으로 직물을 찢는다. 아테나는 이 행동으로 인해 '신이 인간에게 패배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만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아라크네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때리며 자신의 죄와 치욕을 느끼게 하였고, 아라크네는 치욕을 참지 못하여 목을 맨다. 아라크네를 불쌍히 여긴 아테나는 그녀가 영원히 실을 잣도록 하게 만들고자 아코니트 즙을 뿌려 그녀를 거미로 만들고, 그녀의 목에 매어있던 밧줄은 거미줄이 된다. === 페르세우스와 메두사 그리고 페가수스 === 고르곤 세 자매 중 한 명인 [[메두사]]는 다른 자매들과는 다르게 본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처녀신 아테나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모욕을 느낀 아테나가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저주로 인해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하체를 가진 흉칙한 괴물이 되었고, 그녀의 눈 또는 머리를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되었다. 세리포스 섬의 왕 폴리데크데스의 명령으로 메두사의 목을 가져와야 하는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를 통해 메두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접근하여 그녀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후에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에게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그러나 메두사는 두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게 크리사오르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 [[페가소스]]였다. 원래 굉장한 미모를 갖고 태어난 메두사가 아테나에게 저주를 받아 흉칙한 괴물이 되고 나서 페르세우스에 의해 토벌당한 반면 페가소스는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았으며 일생이 다하는 순간 포세이돈에 의해 별자리에 올라갔다. === 헤라클레스 === [[파일:Athena Herakles Staatliche Antikensammlungen 2648.jpg|섬네일|헤라클레스와 아테나]] 기간테스 [[알키오네우스]]는 기간테스가 태어난 플레그라이 안에서는 죽지 않았다. 플레그라이에서 [[헤라클레스]]가 고전하게 되자 아테나는 알키오네우스를 어깨에 메어 플레그라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귀뜸을 주었다. 플레그라이를 벗어나게 된 알키오네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히드라 (신화)|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죽게 되었다. 한편 아테나는 헤라클레스가 조국 테베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그의 옆에서 함께 싸워주었으며 [[스팀팔로스의 새|스팀팔로스 숲의 새]]를 쫓을 때는 청동으로 된 종을 빌려 주었고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는 임무에서 케르베로스가 있는 지하 세계의 길을 안내해주기도 하였다. === 테이레시아스와 카리클로 === 카리클로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님프로, 에베레스와의 사이에서 테이레시아스를 낳았다. 사냥을 하던 테이레시아스는 우연히 카리클로의 도움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아테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분노한 아테나에 의해 눈이 멀게 되었다. 아들이 맹인이 된 것을 슬퍼하는 카리클로를 보자 아테나는 그것을 위로하고자 뱀이 테이레시아스의 귀를 핥도록 하여 새의 말을 듣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 7세대를 살 수 있는 생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 오디세우스 ===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영웅 중의 한명이었다. 아테나는 그에게 지혜로운 호의를 베푸는데, 그가 트로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절제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배가 난파되어 오기기아섬의 칼립소와 7년 동안 있게 되자 보다 못한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도록 오디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하여 필로스의 네스토르에게 찾아가는 여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는 변장을 하여 그를 시험해본다. === 포세이돈 === 포세이돈이 자신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정을 통하자 메두사를 저주해 못생긴 괴물로 만들었고 그 외에도 [[아테네]]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적도 있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를 포세이돈이 방해한 반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도와주었다. === 황금 사과 ===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자신만 하객으로 초대받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이 황금사과를 바칩니다.'라는 글을 써서 던졌다. 그러자 이때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후보로 나서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심판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로 결정되었다. 이에 헤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테나는 끝없는 지혜를 각각 조건으로 제시하며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줬다. == 숭배 == 아테나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부터 있던 여신으로, 뒤에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이전의 미노아와 달리 그리스에서는 군사 경제가 발달하였기에 아테나는 초기에 알려진 직물·요리·도기에 이어 전쟁 또한 주관한다고 생각되었다. 미케네 시대 이후 아테나의 영역은 궁궐에서 도시로 확대되었는데, 아테네의 수호신이 된 것은 고대의 도시 국가가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뀜에 따라 설정된 것이었다. 도시를 위한 아테나의 활동은 식물과도 연관이 있었다. 아테나의 탄생 축제인 판아테나이나는 식물의 성장과 결부되었으며, 프로카리스테리아는 봄을 맞아 여신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에 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비롯하여 3개의 아테나 상을 조각하였으며,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는 재판의 피고가 된 오레스테테이아에게 표결이 동수일 때는 무죄라는 선례를 남긴 것으로 묘사된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인용집}} {{위키공용|Athena}} * [https://web.archive.org/web/20020219155932/http://homepage.mac.com/cparada/GML/000Free/000Athena/AthenaAlbum.html (Carlos Parada) Athena Album] * [http://www.goddess-athena.org/Museum/Sculptures/index.htm Roy George, "Athena: The sculptures of the goddess"] * [http://www.theoi.com/Cult/AthenaCult.html Theoi.com Cult of Athena] * [http://www.nashville.gov/parthenon/index.htm The Nashville Parthenon] {{웨이백|url=http://www.nashville.gov/parthenon/index.htm |date=20130128110846 }} {{그리스 신들}} {{전거 통제}} [[분류:아테나| ]] [[분류:그리스의 여신]] [[분류:장인의 여신]] [[분류:그리스 신화의 처녀신]] [[분류:정의의 여신]] [[분류:평화의 여신]] [[분류:대장장이 여신]] [[분류:수호의 여신]] [[분류:전쟁의 여신]] [[분류:지혜의 여신]] [[분류:뱀의 여신]] [[분류:농경의 여신]] [[분류:예술의 여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제우스의 자식]] [[분류:아티케 신화]] [[분류:아테네]] [[분류:여전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준보호-무기한|크기=작게}} {{여러 문제| {{중립 필요|날짜=2018-03-22}} {{이해당사자|날짜=2018-03-22}} }} {{다른 사람}} {{국가원수 정보 | 이름 = 박정희 | 원어명 = | 그림 = [[파일:박정희 대통령.png|섬네일]] | 설명 = | 크기 = | 국가 = 대한민국 | 대수 = 5·6·7·8·9 | 취임일 = 1963년 12월 17일 | 퇴임일 = 1979년 10월 26일 | 부통령 = [[최두선]](1963년~1964년)<br />[[정일권]](1964년~1970년)<br />[[백두진]](1970년~1971년)<br />[[김종필]](1971년~1975년)<br />[[최규하]](1975년~1979년) | 부통령명칭 = 국무총리 | 출생일 = {{출생일|1917|11|14}} | 출생지 = [[일본 제국령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사곡동]]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79|10|26|1917|11|14}}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 매장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본관 = [[고령 박씨|고령]] | 정당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 학력 =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 | 종교 = [[무종교|무교]]<ref>{{웹 인용 |url=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38|제목=유승무 “개신교 대통령 때 국가-불교 갈등 격화”|날짜=2011-12-02|출판사=금강신문}}</ref>(친[[불교]]<ref name="태통령 교실 프로필">{{웹 인용 |url=http://www.pa.go.kr/school/president/former/index04.jsp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7-11-18 |archive-date=2017-12-0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1201040737/http://www.pa.go.kr/school/president/former/index04.jsp |url-status=dead }}</ref>적 행보<ref>{{웹 인용 |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308324.html|제목=역대 대통령들 종교문제|날짜=2008-09-03|출판사=한겨레신문}}</ref>) | 부모 = [[박성빈 (조선)|박성빈]](부), [[백남의]](모) | 배우자 = [[김호남 (1920년)|김호남]](1936년~1950년),<br /> [[육영수]](1950년~1974년) | 자녀 = 아들: [[박지만]],<br /> 딸: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 서명 = Park Chung-hee signature.svg | 전임 = 윤보선 | 전임대수 = 4 | 후임 = 최규하 | 후임대수 = 10 | 군사그림설명 =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직후, 헌병 조장(曹長, 원사에 해당) 시절의 박정희<ref name="news.naver.com">{{뉴스 인용 |제목 =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25616 |출판사 = 프레시안 |저자 = 김하영 기자 |쪽 = |날짜 = 2006-04-28 |확인날짜 = 2009-11-19}}</ref>, 이때의 계급은 일본 헌병 조장, 보직은 수습사관이었다. 그해 8월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 복무 = [[만주국 육군]]<br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44년~1945년([[만주국군]])<br />1945년~1946년([[한국광복군]])<br />1946년~1949년,1950년~1963년([[대한민국 육군]]) | 소속 = [[민주공화당]] | 계급 = [[만주국군]] : {{만주국군 계급장|중위}}<br />[[대한민국 국군]] :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대장|육군}} | 지휘 = 육군 [[제9보병사단 (대한민국)|제9보병사단]] 참모장<br />육군 [[제5보병사단 (대한민국)|제5보병사단]] 사단장<br />육군정보학교<br />육군 [[제7보병사단 (대한민국)|제7보병사단]] 사단장<br />육군 [[제2작전사령부|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근무 = | 참전 = [[중일 전쟁]]<br />[[여수·순천 사건|여순 사건]] <small>([[남조선로동당]] 14연대)</small><br />[[6.25 전쟁]] | 서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박정희'''(朴正熙,<ref>{{한민족백과|E0021134}}</ref>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1945년 9월 21일 [[베이징시|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ref>[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767000.html 한겨레 - “박정희, 1945년에 광복군 활동”…국방부 보도자료 논란]</ref> 1946년 5월 10일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ref>[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3/03/1998030370426.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20)]</ref>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 (1905년)|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일제 순사]] 출신 [[구미시|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3556946#home 중앙일보 - 실록 박정희시대 35.좌익 연루설(下) ]</ref> 반이승만파이던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심 판결 이후 [[남조선로동당]] 조직구도 윤곽을 증언한 뒤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방첩대장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조치로 풀려난다.<ref name='남로당1'>[https://www.joongang.co.kr/article/17280503#home 중앙일보 - 사형 위기서 살아난 박정희]</ref> 이후 백선엽 국장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전쟁]]때 다시 현역 군인으로 복귀한다.<ref name='남로당2'>[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697 오마이뉴스 - 좌익혐의로 무기징역... 재심서 '구사일생']</ref>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론|자주국방]] 및 [[율곡 사업|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9월 말에 일어난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같은 해 10월 16일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부장|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10·26 사건|암살당하였다]]. == 대통령이 되기 이전 == === 가계 === 박정희는 고령박씨(高靈朴氏) 직강공파(直講公派) 29세손이다. 경상도 성주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하여 성주파(星州派)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 세조때 현령을 지낸 14대조 박망달(朴望達)이 경상도 성주에 처음 살기 시작했고 증손인 12대조 박천신(朴天信)이 광해군 때 부호군을 역임 끝으로 벼슬을 하지 못했다. 조부 박영규(朴永奎)까지 4대는 독자였다. 박영규는 1840년 성주군 사읍촌에서 박이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박영규(朴永奎)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박영규(朴永奎)가 솔가(率家)하여 칠곡 약목으로 이사를 한 까닭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박영규(朴永奎)는 '약목평야'라 불릴 만큼 많은 농지와 소작농을 거느린 부농이었지만, 아버지 [[박성빈 (조선)|박성빈]](朴成彬)은 구한말 무과에 급제하여 정9품 효력부위까지 올랐으나 당시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해 젊은나이에 성주 동학접주가 되어 관군에게 체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916년 구미 상모동으로 옮겨 처가 수원백씨 문중 선산 산지기로 일하게 되었고, 다음해 1917년 9월30일 박정희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 생애 초반 === [[파일:studentparkchunghee.jpg|왼쪽|섬네일|200px|학창시절 박정희]]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慶尙北道 善山郡 龜尾面 上毛洞) 171번지에서 아버지 [[박성빈 (조선)|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의 7남매(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 (조선)|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ref name="misoo"/>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ref name="misoo"/>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ref name="한학">[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1470357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2)] 조선일보</ref> 훗날 입학하는 [[구미초등학교 (경북)|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ref name="한학"/>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ref name="효력부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5647]</ref>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62049 박근혜, 조부의 동학행적으로 부친의 과거사 굴레 벗나?]</ref>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초등학교 (경북)|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ref name="소학">[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0570427 [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4)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붙인 제목 -->]</ref>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ref name="Chogapje"/>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ref name="소학"/>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ref name="소학"/>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전기 (문학)|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1970년 4월 26일 박정희 자신이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직접 써준 '나의 소년 시절'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무척 동경했으며,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기록한다.<ref name="회상">[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0870352 &#91;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7) ] 조선일보</ref>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이광수 (1892년)|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ref name="회상"/>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ref name="qkrwjdgml">{{웹 인용 |url=http://www.516.co.kr/ |제목=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확인날짜=2005-10-1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30001731/http://www.516.co.kr/ |보존날짜=2007-09-30 |url-status=dead }}</ref>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이준상">[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0670355 &#91;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5)] 조선일보 1998.01.06일자</ref>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ref name="이준상"/>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ref name="이준상"/>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ref name="ddds">{{웹 인용 |url=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39# |제목=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홈페이지 (대구사범학교 입학) |확인날짜=2008-07-1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4081413/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39# |보존날짜=2015-09-24 |url-status=dead }}</ref>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초등학교 (경북)|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ref name="ddds"/>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ref name="ddds"/>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광역시|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ref name="대사111">[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2270389 &#91;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9)] 조선일보 1998.01.22</ref>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ref name="대사111"/> === 청년기 === ==== 결혼에서 재혼까지 ==== 1936년 4월 1일 3살 연하 [[김호남 (1920년)|김호남]]과 21살에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박성빈 (조선)|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나, 신혼 이후 성격 차이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로 지내다 결국 1950년에 이혼을 한다. 1947년 [[이효 (1912년)|이효]] 대위의 소개로<ref>[http://m.chogabje.com/client/news/viw.asp?idx=87965 조갑제닷컴 - 박정희가 사랑한 여인 李現蘭의 生前고백]</ref> [[이북]] 출신이자 이화여대 학생이던 24세 [[이현란]]을 처음 만나 1948년 약혼식을 갖고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한다. 당시 학비금도 내어주고 무척 잘해줬다고 한다. 허나 정작 [[이현란]]은 학교에서 어떤 소령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부끄러웠고, 박정희가 지프차를 타고 자주 보러 올때도 숨었다고 한다.<ref name="이현란">[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7253&C_CC=AC 조갑제닷컴 - 가장 비참할 때의 朴正熙를 곁에서 지켜본 한 여인의 證言]</ref> 1948년 박정희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숙군(肅軍) 대상자<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34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숙군(肅軍)]</ref>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이현란]]은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라고 푸념했다 한다. 이때 박정희에게 이혼수속을 해주지 않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괘씸한 생각이 들어 여러번 가출하다 1950년 2월 6일 결별했다고 [[조갑제]]가 기재한 자유기고가 강인옥의 녹취록 인터뷰에서 밝힌다.<ref name="이현란" />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의 2011년 기사에서는 [[이현란]]이 박정희와의 동거 때 아이가 태어났다고 주장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6819 오마이뉴스 - ]</ref> 반면 1997년 강인옥의 녹취록에서 [[이현란]]은 둘 사이 소생은 없었다고 밝힌다.<ref name="이현란2">[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2/18/1997121870310.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59)]</ref>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김호남 (1920년)|김호남]]과 이혼 후<ref name="박재옥">[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2008100046 월간조선 - 다시 읽는 ‘朴正熙-김호남 부부의 큰딸 朴在玉씨의 수기’]</ref> 곧바로 [[육영수]]와 재혼을 한다. 박정희에게 [[김호남 (1920년)|김호남]]과의 첫 결혼에서 생긴 [[박재옥|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육영수]]는 [[박재옥]]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20600#home 중앙일보 - 박정희의 숨겨진 장녀 "아버지는 늘 미안하다고 했다" ]</ref> 첫 부인 [[김호남 (1920년)|김호남]]은 훗날 두번째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았다고 한다.<ref name="박재옥" /> ==== 교사 생활 (1937 ~ 1939) ==== [[파일:Teacherpark1.jpg|왼쪽|섬네일|300px|문경공립보통학교 단체사진]]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초등학교|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ref name="박정희교사">[http://www.yna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94 영남신문 - 박정희 시대(時代) ② - 교사의 길]</ref>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 (조선)|박성빈]]이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문경초등학교|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때 박정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제자였던 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ref name="박정희교사"/> 농번기인 봄 가을에는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가사 실태를 조사하였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고 한다.<ref name="제자들1">[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06/1998020670364.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99) ]</ref> 제자 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에 보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ref>{{웹 인용 |url=http://w3devlabs.net/korea/archives/1417 |제목=김영기-학생운동-애국장 |확인날짜=2021-12-19 |archive-date=2021-12-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219014815/http://w3devlabs.net/korea/archives/1417 |url-status= }}</ref>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박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ref name="제자들1"/> 이영태는 박정희가 경찰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 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제자 박준복의 증언에서는 박선생은 일본인 교사들 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 교사와는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야나자와가 "조선인의 주제에…"라고 말하자 박정희가 의자를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ref name="제자들1"/>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신현균 또한 박선생이 특히 우리 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이어 박선생은 운동회 때 1백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특히 일본인한테 더욱 그러했다 전해진다.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고 한다.<ref name="제자들1"/>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1939년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였던 권상하씨의 증언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 즈음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와, 스스로 밝히길 가을에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강하게 비판했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고 증언한다. 허나 박정희는 10월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다시 문경학교로 돌아와 근무했었다. 박정희의 주장대로 일본인 교장을 때렸다면 다시 근무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ref name="이낙선비망록">[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12/1998021270499.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4)]</ref><ref name="박정희교사"/>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 씨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으며, 동네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빌리기도 힘들어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있었고, 일본인 교사들이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을 벌을 세우자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자주 언쟁이 발생하곤 하였다고 한다.<ref name="이낙선비망록" /> 이어서 이순희는 박정희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박정희를 집단 구타하였다 전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정희는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ref name="제자들1"/><ref name="박정희교사" /> [[파일:Teacherpark2.jpg|섬네일|250px|머리가 짦은 박정희]] 박정희의 제자 황실광의 증언에 의하면 졸업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었는데, 1939년 10월 박정희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에 갔더니 머리카락 길이에 관한 내용은 없고 아리마 교장이 시학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다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ref name="이낙선비망록" /> 현재 알려진 바로는 박정희 행적은 1939년 10월 만주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르고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문경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실린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를 확인 한 뒤 1940년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대통령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라고 묻자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며 단순명쾌하게 대답했다 한다.<ref name="이낙선비망록" />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ref name="조선족1">[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7617.html "박정희, 독립군 토벌" 출판업자 무죄 확정] 한겨레 2009년 2월 8일자</ref><ref name="한국1">.[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2/h2009020902590722000.htm "박정희, 독립군 토벌" 책 출판 무죄 확정]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2/h2009020902590722000.htm# |date=20110808180353 }} 한국일보 2009년 2월 9일자</ref>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ref name="강준만">[[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21쪽 참조</ref>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ref name="조선족1"/><ref name="한국1"/><ref name="조선족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81810195&code=940301 '독립군 토벌한 박정희' 역사서 명예훼손 무죄] 경향신문 2009년 2월 8일자</ref>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ref name="조선족1"/><ref name="한국1"/>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이 판결은 무죄가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임을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ref>[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t_name=news&id=145572&listpage=n_list.html&kind=menu_code&keys=1&idx=&search=&id=145572&smenu=&sel=&date1=&date2=&date3=&smno=&sb_sbj=&sdescr=&sun=&so=&chit=N 박정희가 정말 독립군을 토벌했는가]《데일리안》</ref> 대법원 3부에서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7617.html "박정희, 독립군 토벌" 출판업자 무죄 확정]《한겨레》</ref>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1942) ====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滿洲國 陸軍軍官學校, 또는 신징 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ref name="박정희기념관">{{웹 인용 |url=https://presidentparkchunghee.org/ |제목=박정희 대통령기념관. 생애와 업적 - 약력 |확인날짜=2021-12-08 |archive-date=2021-12-0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208082150/https://presidentparkchunghee.org/ |url-status= }}</ref> 원래 1기 지원을 했었지만 나이 초과로 탈락하여 재지원을 한 것이다. 군관학교 동기생들 가운데 5·16에 가담한 사람은 없었으나, [[간도]]·[[룽징시|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이자 군관학교 제1기생들인 선배 기수들 대다수가 훗날 박정희의 5·16을 지지한 핵심인물들이 되었다. [[이주일 (군인)|이주일]], [[김동하 (1918년)|김동하]], [[윤태일 (1918년)|윤태일]], [[박임항]], [[방원철]]이 그들이다.<ref>[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13/1998021370321.html 박정희의 생애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05) (18) 동양의 서부]</ref> ===== 혈서(血書) 지원 ===== 만 23세에 [[만주국군]] 1차 지원을 했을 때 나이 초과로 서류전형 탈락이 된 박정희는 재지원 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해 제출하며 반드시 군인이 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38년 5월경 당시 박정희와 같이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씨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다.<ref name="박정희혈서">[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조갑제닷컴 - 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滿軍에 갔다]</ref>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를 통해 교사시절 박정희가 만주군에 지원할 때 쓴 혈서가 그가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임을 뒷받침하는 자료 근거라고 주장한다. 본 기사 내용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마이크로필름에서 박정희의 편지 내용과 혈서 문구가 기록된 기사가 발견 되었고,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고 밝혔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3875 오마이뉴스 - "일본인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 박정희 만주군 지원 '혈서설' 증거 공개]</ref>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만주신문> 마이크로필름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과 혈서 글귀가 적혀있다. {{인용문|"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혈서(血書) -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ref name="혈서A">{{뉴스 인용 |제목 = "만주국 위해 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 신문 공개 (주의: 진위 논란)|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5&aid=0000385462& |출판사 = 국민일보 |저자 = 이경원 기자 |쪽 = |날짜 = 2009-11-06 |확인날짜 = 2009-11-06}}</ref><br />}} {{인용문|<br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ref name="혈서A"/>"}} [[파일:Park Chung-hee, Manchu Shinmun.jpg|섬네일|왼쪽|200px|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의 혈서 부분 (주의: 진위논란)<ref>{{웹 인용 | url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6107.html | title =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 publisher = [[ハンギョレ]] | date = 2009-11-05 | accessdate = 2010-12-17 }}</ref>]]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 근거로 당시 혈서를 쓴 한국 청년이 39년 첫 해엔 45명, 다음 해 박정희가 입교했던 40년에는 168명씩이나 되었다고 주장한다.<ref>{{뉴스 인용 |url=https://news.joins.com/article/7785547 |제목="박정희, 日학교 입학하며 혈서까지 쓴건 일종의…" |출판사=중앙일보 |저자=이정식 |날짜=2012-04-03 |확인날짜=2021-12-08 }}</ref> 실제로 [[광복절|광복]] 이후 한국군 사이에서는 군대 지원서에 혈서를 포함시켰던 문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51년 7월에 게제된 부산일보에는 "해병대원 모집에 수 많은 애국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지원하고 있거니와 그 중에는 혈서로써 滅共戰線(멸공전선)에 참가 하겠다고 하여와 관계관의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고 기록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海兵隊員(해병대원)을 血書(혈서)로 志願(지원) |url =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510728000033 |출판사 = 부산일보 |저자 = |쪽 = |날짜 = 1951-07-28 |확인날짜 = 2021-12-08}}</ref> [[파일:Ahn's Taegukgi.png|섬네일|안중근 의사의 태극기 혈서]] 혈서를 쓰는 문화가 무조건 일본식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09년 2월 [[독립운동가]] [[안중근]] [[열사 (칭호)|의사(義士)]]는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단지동맹기념비|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던 순간 왼쪽 손의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태극기에 혈서(血書)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한국의 독립운동|항일결의]]를 다졌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단지동맹(斷指同盟)]</ref> [[독립운동가]] [[남자현]] [[열사 (칭호)|지사(志士)]] 또한 1932년 손가락을 잘라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94059#home 중앙일보 - 손가락 잘라 혈서 쓴 ‘여자 안중근’ 남자현의 유언]</ref> ====== 만주신문 진위 논란 ======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박정희의 혈서 내용은 박정희의 만주군 서류지원 당시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유증선씨의 증언과 상당히 엇갈린다. 1998년 2월 12일 처음 게제됐었던 [[조갑제]]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유증선씨는 1938년 5월쯤에 박정희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써서 만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고, 편지를 보낸지 보름 정도가 지나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박정희혈서"/><ref name="이낙선비망록" /> 반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근거로 제공한 <만주신문> 자료는 1939년 3월 31일치 기사 전문에서 박정희의 편지가 29일에 공관학교로 도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가 1938년 5월 중순에 편지를 보냈고, 보름 정도의 운송기간 뒤 만주지역의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면, 같은해 5월 또는 6월, 길게 잡아도 7월 초에는 도착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자료근거에 의하면 1주일 또는 보름 정도면 만주에 도착했을 박정희의 편지가 10개월 뒤인 1939년 3월 말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만주신문 자료에는 박정희의 군관지원 편지와 함께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시이 테 오호코, 또는 일사이 테 어봉공, 박정희)라고 쓰여있는 혈서 내용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고 기록한다.<ref name="혈서">{{뉴스 인용 |제목 = "만주국 위해 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 신문 공개 (주의: 진위논란)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5&aid=0000385462& |출판사 = 국민일보 |저자 = 이경원 기자 |쪽 = |날짜 = 2009-11-06 |확인날짜 = 2009-11-06}}</ref> 허나 유증선씨의 증언에서는 박정희가 혈서에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문구를 썼다고 주장한다.<ref name="박정희혈서"/> [[조갑제]]가 인터뷰한 유증선씨의 증언과, 2009년 11월 5일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 인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근거자료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다. {{인용문|"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血書) -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사욕을 버리고 공익에 진력한다.<ref>[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27 시니어매일 - 滅私奉公(멸사봉공)]</ref><ref>[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60219440 정경조선 - ‘멸사봉공(滅私奉公)’이란 용어에는 과연 식민지 잔재가 담겼을까?]{{깨진 링크|url=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60219440 }}</ref><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1450419 중앙일보 - 홍준표 후보가 박정희 생가 방명록에 원래 쓰려던 사자성어는?]</ref><ref>[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4944&C_CC=AZ 조갑제닷컴 - 박정희의 긴 칼과, 진충보국을 탓하는 사람들에게....]</ref><br />}} 박정희가 만주군 서류지원에 편지와 혈서를 동봉했던 것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사실이다. 허나 혈서의 내용과 기사 날짜는 근거 자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다. 설령 유증선씨가 년도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증언 내용들이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는 입수할 방법이 없었던 1962년 최고회의 의장비서 [[이낙선]] 중령의 비망록에도 같은 대목이 발견되고 있고,<ref name="이낙선비망록" /> 유증선의 증언이 여러 공식 자료들과 과거 박정희 제자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서 섣불리 틀린 근거라고 치부할 수가 없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서류지원을 했던 시기에 동명이인이 존재했거나, 유증선의 기억이 틀리거나, 신문에 오타가 있었거나 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사의 정치적 거물들의 생애를 논할땐 항상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와 논란들이 생기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버리곤 한다. 반면 이와 같은 무분별한 루머나 정치적인 진위논란이 팽배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새로운 이슈를 만들려는 특정 사회 인물들의 독특한 정치생태계가 파생되기도 한다. 다채로운 논란들에 끊임없이 연관되어온 [[가로세로연구소]] 소장 [[강용석]] [[변호사]], '[[일베저장소|일간베스트]]' 회원 강씨, 그리고 [[정미홍]] 전 [[KBS]] [[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 목록|아나운서]]는 각자 박정희의 혈서가 날조라는 주장을 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 대통령 혈서 관련 기사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쳐왔다. 결론적으로 2017년 기준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강 변호사는 500만원, 정씨와 강씨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다.<ref>[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0774.html 한겨례 - ‘박정희 친일 혈서’ 조작 주장 강용석 변호사 손해배상 확정]</ref> 박정희가 쓴 혈서가 보도됐다고 알려진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5">[http://opac.ndl.go.jp/recordid/000000105606/jpn 国立国会図書館 NDL-OPAC(書誌 詳細表示) (추가확인 필요)]</ref>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혈서에 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ref>{{웹 인용 |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11/h2009112722030221950.htm#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3-03-1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102053905/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11/h2009112722030221950.htm# |보존날짜=2010-01-02 |url-status=dead }}</ref> ====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1944) ====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서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ref name="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9240 친일 조사대상서 박정희 뺄 수도 있다], 《오마이뉴스》, 2004.07.22.</ref> [[파일:Park Japan.JPG|섬네일|200px|[[만주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헌병 조장(曹長, 원사에 해당) 시절의 박정희<ref name="news.naver.com">{{뉴스 인용 |제목 =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25616 |출판사 = 프레시안 |저자 = 김하영 기자 |쪽 = |날짜 = 2006-04-28 |확인날짜 = 2009-11-19}}</ref>, 이때의 계급은 일본 헌병 조장, 보직은 수습사관이었다. 그해 8월에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5616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일본군 병적기록 60년 만에 '햇빛' - 오마이뉴스 2005-02-02]</ref>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군인)|신현준]], [[이주일 (군인)|이주일]], [[방원철]]은 훗날 [[5·16 군사 쿠데타|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인용문|“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ref>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ref>}} === 만주국군 복무 (1944~1945) ===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ref name="kang125">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125페이지</ref><ref name="moon66">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월간 말, 1999) 66-67페이지</ref>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ref name="kang125"/><ref name="moon66"/> 허나 이것은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사상적으로 갈라져 중국 [[국민혁명군]], 중국 [[홍군]], 중국 [[팔로군]],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등등 여러 단체들로 흡수되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립활동을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배제하는 편무적 해석이다. 일단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있는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하고 있다.<ref>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 P.121</ref>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최소 500여 명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숙청당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 조선인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사이 연대도 약화하였다.<ref>[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2/03/p021075000200203060399036.html 한겨레21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밥을 흘려도 죽였다]{{깨진 링크|url=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2/03/p021075000200203060399036.html }}</ref> 이진영 [[경희대학교]] 교수는 2000년, 자신의 논문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종언을 고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이진영 교수,‘학술지 논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 (2) 민생단 사건과 족성. (경희대학교, 2000)</ref> 하지만 좌익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이런 공산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달랐던 대한민국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에 협력하였다. [[김무정]] 같은 조선인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중공 [[팔로군]] 포병장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버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조선인민군]] 수립에 동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조선의용군]]은 박정희가 갓 복무한 1944년대에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6&levelId=tg_004_2760&ganada=&pageUnit=10</ref> 이에 대해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는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가상토론">{{웹 인용 |url=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_&n=200408040164&main=1 |제목="가상토론 박정희 조갑제 진중권 만나다" 동아일보 2006년 12월 6일자 |확인날짜=2009년 5월 26일 |archive-date=2006년 6월 18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60618060257/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_&n=200408040164&main=1 |url-status= }}</ref> <!-- 출처 "가상토론"에 해당 내용 없음 진중권은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된 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고 하였으나 --> [[성신여대]] 김명호 교수 또한 독립군이 "팔로군과 신사군의 지도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고 주장하였다.<ref>{{뉴스 인용 |저자=김명호 교수 |제목=“중공 승리해야 조선 해방” 조선인에게 투항이란 없었다 |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53714.html |뉴스=한겨레 |날짜=2014-09-01 |확인날짜=2015-03-30}}</ref>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한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2-3개월후 단장 부관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일선부대에서 빠지게 된다.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049417&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파일:Park Army ID.jpg|섬네일|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 계]] ==== 창씨개명 논란 ====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llang|ja|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타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ref name="오마이">[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6360 대통령과 '창씨개명'], 《오마이뉴스》, 2002.9.2.</ref> 1940년 여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일제는 [[창씨개명|창씨 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만주군관학교에서도 같은해 가을에 조선인학생들 24명(1기생 13명, 2기생 11명)을 호출, 1주일간의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 하였다. 박정희는 고향 구미에 내려와 [[독립운동가|항일활동가]]이던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와 함께 의논하여 고령박씨에서 '고목'이란 성을 작명하였다.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고목상희)',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고목용)'가 되었다.<ref name='창씨개명1'>[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17/1998021770433.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08)]</ref> {{출처|날짜=2021-12-10|1945년 3월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朴正熙)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첫째 형 박동희(朴東熙) 또한 다카키 도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 정치계에서는 [[창씨개명]] 존재를 두고 특정 인물들의 '친일성'의 근거라고 주장하지만, 창씨개명은 진보, 보수 출신 정치인들의 친일 성향과는 상관없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왔던 조선인들 전체가 강제로 겪은 일이다. 창씨 여부를 갖고 조상을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은 악의적인 정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ref name="강제창씨개명1">[https://www.joongang.co.kr/article/4007167#home 중앙일보 - 창씨개명 강요 …‘자발성’ 위장하려 골수 친일파들 면제]</ref>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ref name="오마이"/><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0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설진영(薛鎭永)]</ref>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에게는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심지어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에게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있었다.<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19423952#home 중앙선데이 - ‘자치위원회’ 이끌던 구용서, 조선은행 실세로 떠올라 ]</ref>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극렬 [[친일파]] 가운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검거 제1호'로 붙잡혀온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1903년)|박흥식]](朴興植)을 비롯해 중추원고문 [[한상룡]](韓相龍),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를 지낸 재일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경북도지사를 지낸 [[김대우 (1900년)|김대우]](金大羽),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덕영]](尹德榮) 등이 이에 속한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소위 내로라는 친일파들에게 일부러 창씨개명을 시키지 않는 잔꾀를 부렸다.<ref name="오마이"/><ref name="강제창씨개명1"/> 한때 박정희가 자신의 친일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오카모토 미노루’({{llang|ja|岡本 實, おかもと みのる}})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개명을 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시작된 가짜 정보인 것으로 밝혀졌다.<ref name="정운형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0625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 오마이뉴스, 2012.12.06</ref> 박정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두 언론매체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서 조차 박정희 2번 창씨개명 썰에 대해서는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힌다.<ref name="오마이"/><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0413 한겨레 - '박정희 재조명' 날선공방 불붙는다] 한겨레, 2004.07.26</ref> 이 논란이 퍼뜨려진 경위는 1973년 8월 11일자 [[북한]] <로동신문>이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비판글을 쏟아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ref name="정운형1"/><ref name="이시완1">[https://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37865 미디어워치 -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는 북한에서 시작된 네거티브]</ref> 재미 언론가 [[문명자]]의 1999년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며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2판에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ref name="세계일보">[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60809000886&subctg1=&subctg2=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왜 두개였나], 《세계일보》, 2006.08.09</ref> {{출처|날짜=2021-12-10|[[조희연 (1956년)|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ref>[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JW/viewSearchResultJW.jsp?&pSearchType=4&pSearchWord=&pSysLevel=3&pQuery=002800420049003A00285CA1672C5BEC00290029&pPageLine=10&pSearchName=5CA1672C5BEC&pSetID=105729&pOrderByType=&pTotalCount=19&pCurrentPage=1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JW/viewSearchResultJW.jsp?&pSearchType=4&pSearchWord=&pSysLevel=3&pQuery=002800420049003A00285CA1672C5BEC00290029&pPageLine=10&pSearchName=5CA1672C5BEC&pSetID=105729&pOrderByType=&pTotalCount=19&pCurrentPage=1 }}</ref>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배속된 23사단 72연대 연대장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는 김병태 교수의 주장은 허구성이 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국군 보병 8단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 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고 반박한다.<ref name="조선pub">[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40514769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인가] {{웨이백|url=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40514769 |date=20211211192757 }}, 조선일보, 2014.09.15</ref><ref name="정운형1"/> 또한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박정희가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ref name="정운형1"/> 2012년 12월 5일 인터넷 매체 '[[빅뉴스]]'의 기사에서([[미디어워치]]로 옮겨졌다)<ref name="이시완1"/> 이시완 자유기고가는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안티박정희' 진영이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 비판을 위해 퍼뜨렸다"고 주장한다. [[문명자]]가 증거로 제시했던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며 "이 사전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 고 지적했다.<ref name="이시완1"/> 또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는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조선pub"/><ref name="이시완1"/> === 광복 직후 === ==== 광복과 귀국 (1945~1946) ====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ref>조희연 저서 참고</ref>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1683백선엽, 5·16 때 박정희 사상 의심했다? ]{{깨진 링크|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1683%EB%B0%B1%EC%84%A0%EC%97%BD%2C }}</ref>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5 /><ref name="조희연35">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35페이지</ref>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ref>[https://archive.today/20120711093614/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352260&ctg=1000&cloc=home|showcase|main 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③]</ref>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한국광복군]]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730364& 日軍내 韓人 투쟁지침 알리는 전단 첫 공개: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군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라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ref name='부정'>[http://www.segye.com/Articles/News/Article.asp?aid=20060809000641&cid=0101090200000&dataid=200608091434000087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ref>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광복 직후(1946~1948) ====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ref>장교의 군번은 성적순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시종일관 동일하며 외국의 군대 역시 장교는 성적순으로 군번이 결정된다.</ref>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ref name="기념관1">[http://www.516.co.kr/client/news/nw_viw.asp?idx=4351&cpage=1&b_cate=1&m_cate=2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516.co.kr/client/news/nw_viw.asp?idx=4351&cpage=1&b_cate=1&m_cate=2 }}</ref> 1946년 10월 5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가였던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가<ref name='박상희1'>[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1/18/1998011870238.html 조선일보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5) ]</ref> [[10.1 대구 사건|대구 항쟁 사건]] 때 구미 경찰서에서 시위대와 진압대 사이를 중재하다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고 사살되었다.<ref name='박상희2'>[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5027 매일노동뉴스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62 박정희 셋째 형, 경북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상희]</ref><ref name='박상희3'>[https://www.hani.co.kr/arti/PRINT/764304.html 한겨례 - 나는 역사다 10월6일의 사람, 박정희 친형 박상희(1906~1946)]</ref> 육사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는 형의 피살 소식을 접했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한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박상희 (1905년)|박상희]]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ref name='박상희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5329 오마이뉴스 - 박정희는 왜 '빨갱이'가 되었나?]</ref> 박정희의 삶을 다방면으로 취재했던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는 박정희의 전반부를 다룬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게 된 데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ref name='박상희4'/> {{인용문2|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 장교 시절, 그리고 해방 뒤인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박정희의 성격은 현실에의 불만, 기성질서에의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남로당은 하나의 유혹이었다.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그리고 반외세를 상징하고 있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박정희의 사상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의 기질에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ref name='박상희5'>[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26&C_CC=AC 조갑제닷컴 - 남로당과 박정희 소령 연구 (1)]</ref>|따옴표크기=35px}} [[파일:백선엽.jpg|섬네일|왼쪽|150px|[[백선엽]], [[여순사건]] 재판 이후 파면된 박정희의 현역 복귀를 도왔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ref name="기념관1"/>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보는 앞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자원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ref name="기념관1"/>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 (1923년)|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하다 만난 이화여대 1학년 [[이현란]](당시 24세)과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 강제예편 이후 숙군작업과 한국전쟁(1949~1950) ====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고,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의심받아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ref>박태균, "한국전쟁" , pp.149-150, 2005.</ref><ref name='남로당1'/> [[고문]] 취조 이후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43071&section=section1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육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ref name='남로당2'/> 한편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장녀 백남희씨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가담 혐의자 4000여 명 가운데 12명이 최종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였고, 12명 모두 1949년 총살당할 운명이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육군 최고 지도부에 박정희의 감형을 요청하여 박 전 대통령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ref>[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7/16/TR3XZB4YYFFGTEDTHKNZ7TOKRM/ 조선일보 - 내 아버지 백선엽,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충성했다]</ref> 박정희가 이때 최종 사형판결을 받았다는 백남희씨의 주장을 뒷받쳐줄 공식적 기록은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49년 당시 용산 육군본부 군사법정 문건들에 따르면 이때 <국방경비법 16조 위반>(반란기도죄) 재판을 받았던 69명 가운데 4명은 무죄판정, 나머지는 유죄 판정을 받은 뒤 대다수 감형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구 경비법 32조 위반, 범죄사실은 '군 병력 제공죄'였고, 유일하게 1심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1949년 4월 18일자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에 적시되어 있다.<ref name='남로당2'/>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고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는 설이 존재허나<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80664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 아들 낳았다"</ref> 거짓으로 밝혀졌다. 박정희가 군내의 남로당 수사에 걸려 구석된 것이 1948년 11월, 이때 박정희의 용산관사와 가까운 집에 살던 [[이효]] 대위가 구속된 박정희를 대신해 이현란을 방문해 자금을 챙겨주었으나 임신에 대한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ref name="이현란2"/> 며칠 뒤 숙군수사 실무장교로 박정희의 조사를 맏았던 [[김창룡]] 또한 이현란을 직접 찾아가 경위를 설명해주며 박정희의 메모를 건네 주었음에도 약혼녀 이현란의 임신에 대한 조사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ref name="이현란2"/> 결정적으로 이현란 스스로가 박정희와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고 밝힌다.<ref name="이현란2"/>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파면된 민간인 신분에서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보병사단 (대한민국)|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211&C_CC=AP 기자 趙 甲 濟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봇이 붙인 제목 -->]</ref> === [[한국전쟁]] 이후(1950~1959) === {{참고|한국전쟁}}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광역시장|대구시장]] 허억(許億)이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ref name=autogenerated4 />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파일:Former President Park Chung-hee houses.JPG|섬네일|오른쪽|[[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박정희의 신당동 사가(私家)]]. 5·16 쿠데타 당시 여기에서 거주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군인)|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 (시인)|구상]]을 소개받게 된다.<ref name="쿠테1">[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7122570309 [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66)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ref name="쿠테1"/><ref name="쿠테3">[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770182{{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770182 }}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3) - (184)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붙인 제목 -->]</ref>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ref name="정변">[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ref name="정변"/>,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ref name="정변"/>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ref name="쿠테1"/>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ref name="쿠테1"/>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ref name="프로필1">{{웹 인용 |url=http://www.parkchunghee.or.kr/profile.html |제목=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권 - 도서관 프로필 |확인날짜=2008-07-1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1129025508/http://parkchunghee.or.kr/profile.html |보존날짜=2005-11-29 |url-status=dead }}</ref>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ref name="프로필1"/>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파일:Parkjunghee573.jpg|섬네일|왼쪽|200px|6군단 부군단장 시절]] {{인용문1|자유당 시절 말기 군내 부패가 극에 달했다. 미제 군용트럭으로 동해에서 명태를 실어다 팔거나, 산의 나무를 베어다 팔아먹던 시절이다. 부식비나 유류비 등을 횡령하는 장성도 비일비재했다. (사령관이) 전출할 때 보면 보통 트럭 2대에 군용물품을 잔뜩 실어서 떠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사령관 시절 ‘제닉스 라디오’로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군수기지사령부를 떠날 때 라디오를 놓고 가더라. 그래서 내가 ‘왜 안 가져가나’라고 했더니 ‘그게 내 건가. 부대 것이지’ 하고는 안 갖고 가더라. 박 사령관이 취임하고 나선 군수비리가 없었다. 당시 박 사령관 주변 사람들도 쟁쟁했다.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이 된 윤필용이 비서실장, 포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한 박태준이 인사참모, 상공부 장관을 한 이낙선이 공보참모를 했다.|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2017년 11월 21일 주간동아 인터뷰<ref>[https://weekly.donga.com/3/search/11/1132709/1 주간동아 인터뷰 -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희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감방에 있을 것”]</ref>}} 1957년 3월 20일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을 졸업한 뒤<ref name="오마이5">{{뉴스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207 |제목='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3] 누가 살려줬나 |출판사=오마이뉴스 |저자=정운현 |날짜=2004-08-12 |확인날짜=2008-07-15 }}</ref> [[육군]] [[소장 (군인 계급)|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 (1917년)|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ref name="오마이5"/>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ref name="프로필1"/>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ref name="프로필1"/>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 겸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 (1955)|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1916년)|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ref name="오마이5"/>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en:Carter B. Magruder|카터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ref name="오마이5"/>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1923년)|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ref name="오마이5"/>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ref name="프로필1"/>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 (1923년)|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ref name="오마이5"/>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대한민국 시국정화운동본부|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ref name="kimkyo114">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 2》 (평민사, 1990) 114페이지</ref>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당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 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ref name="kimkyo114"/>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ref name="kimkyo114"/>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대한민국 시국정화운동본부|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용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 대통령직 재임 시절 == === 5·16 군사정변 === {{본문|5·16 군사정변}} [[파일:Park Chung-hee, 1961-August-21.jpg|섬네일|300px|오른쪽|[[주한 미군]] 총사령부를 방문, [[:en:Guy S. Meloy, Jr.|멜로이]]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1961년 8월 21일)]] [[파일:장도영, 박정희 1961년 5.16 군사정변.jpg|섬네일|250px|왼쪽|5월 20일, [[장도영]]과 함께 중앙청 광장에서]] {{위키문헌|5·16 혁명 공약}}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01118/32678104/1</ref>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 (1963)|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 5·16 군사 정변 초기 ====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파일:Yun Posun 1.jpg|섬네일|왼쪽|200px|[[대통령]] [[윤보선]]<br />민주당 신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묵인한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 (군인)|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ref name="강원룡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2.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ref name="강원룡1"/>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 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파일:조리돌림.JPG|섬네일|300px|오른쪽|[[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1917년)|이정재]] 외 폭력배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1917년)|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 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범죄인)|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1919년)|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으로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ref>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쿠데타는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ref>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 (1900년)|김학규]]를 사면, 복권했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웨이백|url=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date=20050128003624 }}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ref name="외신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680&C_CC=AC 박정희, "국회에 불을 확 질러버리고싶었다"] - 조갑제 닷컴</ref>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ref name="외신1"/>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45페이지</ref>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1961~1962) ==== [[파일:Chang Do-young.jpg|섬네일|왼쪽|140px|계엄사령관이자 초대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참고|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해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ref name="qkrwjdgml"/>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50만 환, [[의친왕]]비(妃) 김 씨에게는 30만 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 씨와 삼축당 귀인 김 씨에게는 각각 10만 환 등 모두 100만 환을 지급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21007000/2006/08/021007000200608240624026.html |제목=“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확인날짜=2009-10-10 |archive-date=2011-08-1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812080320/http://www.hani.co.kr/section-021007000/2006/08/021007000200608240624026.html |url-status= }}</ref>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영친왕]])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ref name="출출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1.html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2월호(통권 533 호)</ref>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 D.C.|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ref>[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5.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파일:JFKWHP-AR6895-A.jpg|섬네일|300px|1961년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 1961년 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만나주는 조건으로 일본 [[이케다 하야토|이케다 총리]]와 만나라는 지령을 내렸다. 10월 10일 당시 일본 도쿄에서 6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고 있던 배의환 회담 수석대표와 정일영 당시 서울대 교수에게는 '급거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곧바로 서울에서 박 의장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과 만나 예상 회담의제와 일본의 반응에 대해 준비했다. 정 교수는 박 의장에게 일본이 현찰로 달러를 주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며 대신 물자나 산업 노하우를 가져올 것이며, "그 경우 우리 산업 및 경제가 일본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미리 설명해줬다.<ref name='케네디1'>[https://www.yna.co.kr/view/AKR20121102094300043 <외교열전> "JFK가 박정희 방일 요구했다"]</ref> 1961년 11월 12일 회담에서 [[이케다 하야토|이케다 총리]]는 예상대로 현금이 아닌 산업 건설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 명목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의장은 청구권 문제에 대해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이라면서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을 한국이 갖고 있는데 일본이 5천만달러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ref name='케네디1'/>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은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ref name='독도1'>[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25/2008042500866.html 조선일보 월간山 - 최선웅의 지도이야기 독도 지형도</ref> 한편 12월 학사 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 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ref name="qkrwjdgml"/> ====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1963) ==== [[파일:박정희 대장 예편.JPG|섬네일|1963년 대장 예편한 박정희]] [[파일:Park Chung-hee 1963's.png|섬네일|왼쪽|200px|박정희]]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 (1901년)|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1864년)|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정수장학회|5·16 장학회]]를 설립<ref name="qkrwjdgml"/> 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MBC|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98&aid=0000062919& 국가정보원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결과]</ref><ref>(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5/07/021075000200507260570082.html {{웨이백|url=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5/07/021075000200507260570082.html |date=20110812135702 }} 그는 언론이 탐나서 몸부림쳤다 - 한홍구, 한겨레21)</ref>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근혜) 전 대표만 (정수장학회 반환과 관련한)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68945</ref>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21046</ref> 1962년 12월 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하나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 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일축했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8416&CMPT_CD=P0000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ref> ===== 통화개혁 ===== {{본문|통화개혁}}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ref>(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4.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 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연이은 연계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돈을 일정 비율에 따라 증권으로 강제 전환함에 따라 중공업 육성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62&aid=0000001606 나가사키 화교 음식 ‘쨤뽄’이 한국에 있는 까닭)</ref>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교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통화 개혁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는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082190 자장면 원조 ‘공화춘’- 서울신문 2006.03.17)</ref> 그러나, 예상보다 검은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은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철회를 강요받았으며, 자금 융통이 제약을 받아 중소기업 가동률이 50%로 떨어지는 등 경제난까지 야기하여 거두어 들이고 실패하게 된다.<ref>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정부의 선택』, 후마니타스, 2009.</ref> === 제3공화국 === {{본문|대한민국 제3공화국}} ==== 5대 대통령 후보자 ====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78페이지</ref>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1960년)|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ref name="fd179">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79</ref>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柳陽洙) 재경위원장, [[홍종철 (1924년)|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ref name="fd179"/>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83페이지</ref>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남)|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 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 사상 검증 의혹 ===== [[파일:1963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2-1.jpg|섬네일|1963년 10월 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 호외에 실렸다.]]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224</ref>,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 (1963)|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 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을 비롯하여 [[민관식]](閔寬植),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221페이지</ref> 대구 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고 하였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224페이지</ref>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ref name="그해5월3122">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2페이지</ref>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버트런드 러셀|러셀]]을 찬양하고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ref name="그해5월3122"/> 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ref name="경향19630928">경향신문 1963년 9월 28일자 정치, 1면</ref>'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ref name="경향19630928"/>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ref name="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ref>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ref name="그해5월3122"/>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ref name="동아일보1963">동아일보 1963년 10월 2일자 정치, 1면</ref>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인용문|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ref name="동아일보1963"/>}}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두 사람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autogenerated2" />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ref name="강원룡1" />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ref name="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11114155405&Section=01 발굴-현대사 뒷모습]</ref>,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와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1.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 원용덕의 반론 ====== {{참고|원용덕}}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원용덕]]은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 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 밑 문주리 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 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1004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10-04&officeId=00032&pageNo=1&printNo=5522&publishType=00020 여순사건 박정희씨 무관] 경향신문 1963년 10월 4일</ref> ==== 제3공화국 초기(1963~1964) ==== [[파일:Bundesarchiv B 145 Bild-F019521-0013, Berlin, Staatsbesuch Präsident von Süd-Korea.jpg|1964년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 (왼쪽)|섬네일|300px]] {{위키문헌|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ref name="qkrwjdgml"/>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ref name="에르하르">[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6121201033405159002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munhwa.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ref name="에르하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ref name="글로벌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8b3644a 박정희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 지역주의와 인종주의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21&aid=0000000156 |출판사 = 프로메테우스 |저자 = 김진주 기자 |쪽 = |날짜 = 2005-01-31 |확인날짜 = 2009-11-19}}</ref>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ref>이기형 《여운형 평전 (역사인물찾기 5)》(실천문학사, 2009) 464페이지</ref>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31121125200009 연합뉴스 - 케네디 조문 박정희 전대통령 사진 실린 美화보 발견]</ref> ==== 베트남 전쟁 파병 ==== {{참고|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파일:M67 Flamethrower Tank Vetnam.jpg|섬네일|오른쪽|230px|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파일:CongressBuilding SEATO.jpg|섬네일|300px|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ref name="qkrwjdgml"/>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ref name="qkrwjdgml"/>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4/2009100400613.html [만물상&#93; 박정희와 KIST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 한일협정 전후(1965~1966) ====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ref name="담화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8&C_CC=AC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 [[조갑제]]</ref>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ref name="담화1"/>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ref name="담화1"/>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 (법학자)|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ref name="담화1"/>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ref name="존슨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16&C_CC=AC 박정희-존슨 회담과 월남파병] - 조갑제</ref>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ref name="존슨1"/>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ref name="존슨1"/>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ref name="존슨1"/>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ref name="존슨1"/>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5&aid=0000043157& 미, 65년 '독도 한·일 공동소유' 제안: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42년 전 한일 독도밀약의 실체는... |url=https://news.joins.com/article/2665406 |출판사=중앙일보 |저자=김상진 |날짜=2007-03-19 |확인날짜=2020-08-30 }}</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2&aid=0000017933& 美 “독도 한일 공동소유하라", 박정희 "있을 수 없는 일":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ref>{{웹 인용 |url=http://www.sisaseou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861 |제목=한일문서로 밝혀진 박정희 정권 비화 ‘전모’ |확인날짜=2010년 3월 1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19104018/http://www.sisaseou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861 |보존날짜=2011년 11월 19일 |url-status=dead }}</ref>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5374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628&PAGE_CD= "한일협정 뒷거래 박 정권은 매국정권 5년간 일본기업에 6600만불 제공받아"]</ref>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 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ref>[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9684 ‘독도문제’, 밀약파기가 유일한 해결책이다]</ref>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ref>[https://archive.today/20120708033212/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665649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ref>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ref name="운구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2&C_CC=AC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ref>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ref name="운구1"/>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ref name="운구1"/>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ref name="운구1"/> 1967년 9월 20일 [[김학규 (1900년)|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 포항제철 건설 ====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 막대한 개발자금을 필요로 하였으나 국내자본 축적이 미흡하고 외자도입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유무상차관도입을 전제로 하는 [[한일청구권협정|대일청구권자금]] 협상과 연계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기간 이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1964년 12월 18일에 양국간에「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관한 비준서를 교환하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 등 25개 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하였다. 일본 측과 협의하여 청구권 사용방안중 제1차년도 실시계획을 1966년 4월 20일 결정짓고 그것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 4월 27일 공고됨에 따라 5월부터 청구권자금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ref>[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162&pageFlag=&sitePage=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 대일청구권자금]</ref> 1969년 1월 31일, [[박태준 (1927년)|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은 통역담당 최주선 부장과 함께 피츠버그로 건너가 KISA 대표인 포이(F.Foy) 회장을 만났으며, KISA 회원사들을 따로따로 만나 한국의 경제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하였다. KISA와의 기본협정에 따르면 1972년까지는 제철소가 완공돼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늦어도 1969년 초부터는 건설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건설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차관 도입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ref name='포항제철1'>[http://museum.posco.co.kr/museum/poscoHistory/kor/story/s91b90050101l.jsp 포스코역사박물관 - 포스코 이야기]</ref> [[박태준 (1927년)|박태준]] 사장은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한일청구권협정|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ref name='포항제철2>[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14/2011121400251.html 조선Biz - 철강王 박태준 별세 "선조의 피값(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ref> {{인용문2|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요.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오.|청암 박태준<ref name='포항제철1'/>}} [[한일청구권협정|대일청구권자금]] 3억 달러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게 돼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이자 말하자면 ‘민족의 피맺힌 돈’이었다. 이 돈은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국 정부간에 합의가 끝나 이미 국회 비준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다면 ‘피맺힌 돈’의 가치를 가장 알차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이었다.<ref name='포항제철1'/> 1969년 5월 7일,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발언을 했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의 협상을 위해 외국까지 나갔지만 빚도 얻지 못하고 홀대를 당한 데 대한 하소연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차라리 제철소를 짓지 말고 철을 수입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진노했고, 결국 6월 2일 박 부총리를 경질했다. 정부는 [[박충훈]] 해임 뒤 [[김학렬]] 경제수석비서관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을 설치했다. 또한 1969년 8월 하순에 열리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청구권 자금 전용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ref name='포항제철1'/> 1969년 여름 [[박태준 (1927년)|박태준]] 사장은 도쿄에서 많은 정.재계 거물들을 만났다. 우선 일본철강연맹의 기술지원 약속, 특히 3대 철강회사(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의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외무상 아이치, 대장상 후쿠다, 통산상 오히라 등도 포함됐다. 야스오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많은 우군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1969년 8월 28일 양국 정부는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 정부는 포항제철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며,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해 최종합의서를 마무리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ref name='포항제철1'/> ====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1971) ==== [[파일:제6대 대통령 취임식의 거리 풍경 (1967.7.1).jpg|섬네일|250px|1967년 1월 제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의 거리 풍경]] {{위키문헌|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ref name="chohee92"/>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ref name="chohee92">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조희연 저, 역사비평사, 2007) 92페이지</ref>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베트남 전쟁|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ref name="chohee92" />,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ref name="chohee92"/>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ref name="chohee92"/>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대한민국의 대통령|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ref name="qkrwjdgml"/>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12# |제목=HOME > 인간박정희 > 박정희 대통령 > 경력<!--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9-10-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2202553/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12# |보존날짜=2013-12-12 |url-status=dead }}</ref>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9301823205&code=910302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따온 제목 -->]</ref>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ref name="qkrwjdgml"/>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ref name="qkrwjdgml"/> [[파일:지하철 건설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1971. 4. 12).jpg|섬네일|250px|1971년 4월 [[서울 지하철]] 건설 착공식의 박정희 대통령]]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ref name="qkrwjdgml"/> {{위키문헌|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ref>김충식,『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96쪽.</ref> ====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김신조]]사건 1.21 사태 (1968) ==== {{참고|1·21 사태}}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반공의식이 급속하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 교육, 문화 정책 ====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ref name="qkrwjdgml"/>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ref name="qkrwjdgml"/> 국민교육의 양적 향상을 위해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1971년) 등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확립하였다.<ref name="qkrwjdgml"/>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ref name="qkrwjdgml"/>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ref name="qkrwjdgml"/>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노동자에 대한 교육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ref name="qkrwjdgml"/> === 제4공화국 === {{참고|대한민국 제4공화국}} {{위키문헌|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위키문헌|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 10월 유신 직후 (1972 ~ 1973) ==== {{본문|10월 유신}}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해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ref name="qkrwjdgml"/> [[파일:Card Stunt for Park Chung-hee.jpg|섬네일|왼쪽|240px|국군의 날 행사 때 박정희 초상을 나타낸 [[카드섹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ref name="박정희정부, 유신선포전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90924102706236&p=yonhap "박정희정부, 유신선포전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ref>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ref name="qkrwjdgml"/>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ref name="qkrwjdgml"/> ====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 {{참고|육영수 저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 박정희가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던중에, 청중석에 있던 [[문세광]]이 연단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연설대 아래로 피해 무사했으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 만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후 뇌수술을 받았다.<ref name=":3">남지심 <자비의 향기 육영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12.15 p426</ref> 하지만 이날 오후 7시 경 향년 49세로 사망했다.<ref name=":4">남지심 <자비의 향기 육영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12.15 p427</ref> 범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문세광은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사용했고,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밀입국했으며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은 일본정부에 강력히 항의 했으며 양국관계는 냉각되었다. 9월에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사과방한 한후 양국관계는 정상으로 회복되었다.<ref name=":1">[[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6.12 p145</ref> ==== 새마을 운동 ==== {{참고|새마을 운동}}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ref name="qkrwjdgml"/> 1973년부터 [[새마을 운동|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ref name="전재호0082">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82쪽 참조.</ref>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ref name="전재호0082"/>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ref name="전재호0082"/>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ref name="qkrwjdgml"/>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전재호0082"/>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ref name="hello">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82~83쪽 참조</ref>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ref name="hello"/>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황경상 기자 |제목=박정희 성공한 정책, 알고보니 메이지 유신,군국주의 파시즘을 조국근대화로 포장…치욕 |url=http://www.yggun.or.kr/ibbs/view_print.php?code=yellin_free&number=14967&Mode=print&category= |뉴스=[[경향신문]] |확인날짜=2015-03-30 }}{{깨진 링크|url=http://www.yggun.or.kr/ibbs/view_print.php?code=yellin_free&number=14967&Mode=print&category= }}</ref><ref>{{뉴스 인용 |저자=최일붕 기자 |제목=파시즘이란 무엇인가? |url=http://wspaper.org/article/13823 |뉴스=[[노동자연대]] |날짜=2013-11-23 |확인날짜=2015-03-30}}</ref> 또한 새마을 운동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ref>{{뉴스 인용 |저자=김호천 기자 |제목=세계무형유산 '영등굿' 기능보유자 김윤수씨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893185 |뉴스=연합뉴스 |날짜=2009-09-30 |확인날짜=2015-03-30}}</ref>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이용해 농촌 가옥을 개량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ref>{{뉴스 인용 |저자=김하영 기자 |제목='제2 새마을운동'? 석면 지붕부터 책임져야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2425 |뉴스=[[프레시안]] |날짜=2013-10-25 |확인날짜=2015-03-30}}</ref> ====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1978) ====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6001012</ref>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http://news.donga.com/3//20090511/8730218/1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1-12-2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3070325/http://news.donga.com/3//20090511/8730218/1 |보존날짜=2013-12-13 |url-status=dead }}</ref>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ref name="김정렴1">[[김정렴]]이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언급. {{뉴스 인용|저자= 이고운 기자 | url=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6/08/23/200608230012.asp |제목= 박정희의 경제정책 18년, 생생한 증언 |날짜= 2006-08-23 | 확인날짜=209-5-12}}</ref>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시 (문학)|시]](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http://trotnews.com/board/zboard.php?id=board&no=10451# |제목=원로가수 남상규,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시로 노래 만들어 |확인날짜=2009-02-2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1113103234/http://www.trotnews.com/board/zboard.php?id=board# |보존날짜=2005-11-13 |url-status=dead }}</ref>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인용문2|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br />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br />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br /> }}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 [[파일:Armed Forces Day of South Korea (1973) 1.jpg|오른쪽|섬네일|1973년 제 25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진에 참가한 박정희]]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7102770182 [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9)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ref name="qkrwjdgml"/>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ref name="qkrwjdgml"/>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ref>[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5/02/021003000200502020546043.html <외교안보> 미국이 박정희 피살의 배후?]</ref><ref>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1999년 11월 7일)방송분</ref> =====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 [[파일: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 대통령.jpg|섬네일|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1976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대한민국 제10대 총선|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 (1967년)|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ref>[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090086{{깨진 링크|url=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090086 }} donga.com[뉴스&#93;-[나의 삶 나의 길&#93;<34>20일의 휴직<!--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5090086 }}</ref>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ref>[http://www.taxtimes.co.kr/hous01.htm?r_id=128657 세정신문-한국대표 조세정론지<!-- 봇이 따온 제목 -->]</ref>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ref>{{웹 인용 |url=http://www.welfarestate.net/g4/bbs/board.php?bo_table=03_01&wr_id=682&page=# |제목=복지한국연대 > 자료와 토론 > 세금 이야기- 박정희 정부와 부가가치세 논쟁<!--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9-10-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11041031/http://www.welfarestate.net/g4/bbs/board.php?bo_table=03_01# |보존날짜=2013-11-11 |url-status=dead }}</ref> ===== 코리아 게이트 사건 =====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ref name="갈등1">박정희를 넘어서(한국정치연구회 저, 푸른숲, 1998) 130페이지</ref>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ref name="갈등1"/>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ref name="갈등1"/> ====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 ==== {{참고|YH 사건|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179-180쪽</ref>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ref>[https://archive.today/20120713232615/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51590 단상의 외교사절 보면 커가는 한국 보인다- 중앙일보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 (1967년)|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1967년)|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윤태곤 기자 |제목=야당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배워야 할 것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1942298 |뉴스=프레시안 |날짜=2008-06-30 |확인날짜=2015-03-30}}</ref>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7110970223 [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1)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 미국과의 관계 악화 ==== [[파일:Jimmy Carter April 1980.jpg|섬네일|180px|[[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ref>[https://archive.today/2012070706140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중앙일보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박동진 (1922년)|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ref>전기 《박정희》(12권-45장, 주한미군 철수 저지 공작의 내막),조갑제 著</ref>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6001012 [서울신문&#93; "박정희 前대통령 말년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26/2009102600259.html "박정희 대통령,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참고|김영삼#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미국 하원 청문회 증인이었던 김형욱 전 안기부장의 암살 사건에 실무자였다고 증언하는 비선 공작팀장에게 1979년 초에 술을 직접 따라주었다는 언론 보도도 존재한다.<ref name="시사저널김형욱">{{뉴스 인용|제목=“김형욱은 내가 죽였다”|url=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489|출판사=시사저널|날짜=2005-04-11}}</ref> 이 사건 관련 기록도 중앙정보부에는 없으며 이 요원의 상급자도 파리 침투 사실을 몰랐다고 증언한다.<ref name="시사저널김형욱"/>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ref>《북조선 악마의 조국》(박갑동, 서울출판사, 1997) 253~254 페이지</ref>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ref>[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1917&C_CC=AZ 기자 趙 甲 濟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봇이 따온 제목 -->]</ref> == 사망 == {{본문|10·26 사건}} {{참고|부마 항쟁}}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ref>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도서출판 더불어, 1992) 114페이지</ref>,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ref>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도서출판 더불어, 1992) 133페이지</ref>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시|당진군]]의 [[삽교방조제]] 준공식에 이어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1세로 사망하였다. 최초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에서는 부상당한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곧바로 옮겼다고 알려져 왔었으나, 2016년 재미언론인 안치용의 기고에서 공개된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들에 의하면 처음 김재규가 권총을 발포 한 7시 41분 이후 부상당한 박정희는 9분 뒤 7시 55분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도착했다고 밝혀졌다.<ref name="비밀문서1">[https://sundayjournalusa.com/2016/03/03/%ec%9e%ac%eb%af%b8%ec%96%b8%eb%a1%a0%ec%9d%b8-%ec%95%88%ec%b9%98%ec%9a%a9%ea%b8%b0%ea%b3%a0%eb%af%b8%ea%b5%ad%eb%ac%b4%eb%b6%80-%ed%95%b4%ec%a0%9c-%eb%b9%84%eb%b0%80%eb%ac%b8%ec%84%9c%ec%97%90/ 시사저널 - [(재미언론인 안치용기고)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에서 드러난 박정희 시해사건 의혹들]</ref>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근무하던 청와대 의무실장 김병수가 박정희의 총상 입은 사체를 보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2시간이 지나서였다.<ref>[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19961025/7202736/1 중앙일보 - [그땐 그랬지요]故 박대통령 시신검안 김병수前국군병원장]</ref> 사건 이후 [[미국]]의 개입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ref name="제거1">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29페이지</ref> 또한 2016년에 김재규가 사건 당일날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주한미국대사]]를 오후 2시경에 만났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ref name="비밀문서2">[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01/18/2011011800051.html 뉴데일리 - 김재규 관련 美 비밀전문 모두 비공개...왜?]</ref>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하며,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ref name="제거1"/>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ref name="제거1"/>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제거1"/> 소설가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ref name="제거1"/>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ref name="제거1"/>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ref name="ReferenceA">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268페이지</ref><ref name="ReferenceB">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3》 (평민사, 1990) 222페이지</ref><ref name="ReferenceC">이상우,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동아일보사, 1986) 102페이지</ref> ===== 최규하 추도사 ===== {{위키문헌|박정희 대통령 국장 최규하 추도사|최규하 추도사 전문}}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 암살 배후 의혹 =====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1">「www.한국현대사.com」(김진국, 민연, 2000) 229페이지</ref>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ref name=autogenerated11 />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사건 당일날 오후 2시경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앞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주한미국대사]]를 먼저 만났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ref name="비밀문서2" />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ref>[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45 한겨레 온 -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2]</ref> 글라이스틴 대사가 왜 박대통령 암살 당일날 김재규를 만났던 사실을 평생동안 비밀로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사건 당시 박정희를 청와대 의무실장이 아닌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검진했다는 사실<ref name="비밀문서1" />을 정부에서 왜 비밀시 했는지도 불확실하다.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했었다.<ref>강준만 -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p.268)</ref> 또한 조사 과정에서 '혹시 미국 측에서 무슨 연락이 없느냐'고 수사관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ref>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하였는가, 책보세, 2012.</ref><ref>[https://m.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505172141385 경향신문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2). 김재규의 10·26 사건]</ref>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ref name="의혹2">「www.한국현대사.com」(김진국, 민연, 2000) 230페이지</ref>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ref name="의혹2"/>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장례식 ==== 10월 27일 새벽 [[국무총리]] [[최규하]]는 긴급히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 문제를 물었고 27일 아침에야 박정희가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공식 보도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결정되었고 [[국장 (장례)|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 장례식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규하에 의해 진행되고 11월 3일까지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시신은 석관에 안치되어 운구차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육영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 주요 정책 == === 경제 정책 ===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 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 부동산 정책 ===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있었지만 시장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ref>한국은행, <<주간 내외경제>> 864호, 1978, pp1~5</ref>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ref>이상 내용 2004년 4월 11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및 장상환, 「해방 후 한국자본주의 발전과 부동산 투기」, <<역사비평>> 2004년 봄호, 2004 참조</ref> === 외교관계 === [[파일:Bundesarchiv B 145 Bild-F019521-0007, Berlin, Staatsbesuch Präsident von Süd-Korea.jpg|섬네일|280px|박정희 대통령과 [[빌리 브란트|브란트]] [[서베를린]] 시장]] ==== 통일관 ====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ref name="cho1">[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283&C_CC=BB 기자 趙 甲 濟의 세 계: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봇이 붙인 제목 -->]</ref>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국민공통과정 국사교과서 p.153</ref> === 자주국방 === {{참고|자주국방론#박정희 정부의 자주국방론}} {{참고|율곡 사업}} 1970년대부터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 미군의 철수]],중국의 유엔가입 등으로 국제정세가 한국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었고,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목표는 유사시 북한이 단독으로 벌인전면적 도발만큼은 미군의 도움없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위한 실천노력으로, 첫째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따른 방위산업육성, 둘째 독자적인 전략과 전술개발에 따른 한반도 작전계획 수립,셋째 군사제도의 개혁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사상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한국의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제시하였다.<ref name="자주국방1"/> ==== 핵개발 추진 ====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닉슨 독트린|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ref name="dal1">김달중, 《한국의 외교정책》 (오름, 1998) 58페이지</ref><ref name="sil1">"실록 박정희시대(30), 자위에서 자주로," 『중앙일보』(1997년 11월 2일)</ref>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dal1"/><ref name="sil1"/>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ref name="dal1"/><ref name="sil1"/><ref>중앙일보 기사, "실록 박정희시대" 1997년 10월 26일, 29일, 11월 2일, 11월 5일자 참조.</ref><ref>하영선, 『한반도의 핵무기와 세계질서』(서울: 나남, 1991)</ref><ref>Peter Hayes,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uclear Issue," Pacific Focus VII: 1(Spring 1992), pp. 23-25 참조.</ref> {{인용문|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에 핵의지를 심은 건 미군의 일방적 철수였다. 70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철군 예정통보(71년 3월 2만2000명 철수→75년까지 완전 철수)가 있은 뒤 대통령은 내게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김종필]] 증언록 - 2015년 7월 10일, 중앙일보<ref name='자주국방1'>{{웹 인용 |url=https://www.joongang.co.kr/article/18210193#home |제목=‘박정희 핵 프로젝트’ 한국 내부 스파이들이 CIA에 고자질 … JP “미국은 한국을 자기들 손바닥 안에 가두려 했다” |확인날짜=2022-01-24 |archive-date=2022-01-2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120052554/https://www.joongang.co.kr/article/18210193#home |url-status= }}</ref>}}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 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ref name="갈등1" /><ref name="vi1">피터 헤이즈, 『韓國の核兵器開發』, 世界, 1992, 12.</ref> 1970년초 닉슨 대통령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광둥성]]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 고정하였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멸망의 길을 걷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ref name="갈등1" /><ref>노재현, 《청와대 비서실 2》 (중앙일보사, 1993) p.68</ref>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ref name="갈등1" /> ==== 비밀 플루토늄 도입 기도 ==== 박정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ref name="갈등1" /><ref name="vi1" />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ref name="갈등1" /><ref name="vi1"/>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ref name="갈등1" /><ref name="다큐1">김교식, 《다큐멘타리 박정희》 (평민사, 1990) p. 223</ref>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 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ref>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초부터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ref>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ref name="핵개2">박정희를 넘어서(한국정치연구회 저, 푸른숲, 1998.03.01) 131페이지</ref>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ref name="갈등1" /><ref name="다큐1"/> 1978년 11월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ref name="갈등1" /><ref name="다큐1"/>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ref name="갈등1" /><ref name="다큐1"/> ==== 미국과의 갈등 ====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ref name="autogenerated7">차상철, 《한미동맹 50년》(차상철 저 생각의나무 2004) 34페이지</ref>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ref name="cha34"/> [[제럴드 포드|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ref name="cha34"/>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ref name="갈등1" />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부|미국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ref name="cha34"/>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cha34"/>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ref name="cha34"/>,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ref name="갈등1" />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ref name="cha34"/>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ref name="cha34"/>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자주 국방이 나중에 [[민족 자주]]권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ref name="핵개2"/>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 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ref name="핵개2"/> 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ref name="핵개2"/>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는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국자들이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ref name="갈등1" /><ref>노재현, 《청와대 비서실 2》(중앙일보사, 1993) p. 87</ref>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핵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해 10월에 암살당하였다. === 베트남 전쟁 파병 ===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ref>[https://archive.today/20120707005625/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72344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봇이 붙인 제목 -->]</ref>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ref name="asdd">[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7020125 "책갈피 속의 오늘" 1965년 전투병 베트남 파병 의결]</ref>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ref name="asdd"/>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ref>김수행,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ref> == 사상과 신념 == === 종교적 편력 === 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828004008 역대 대통령과 종교]</ref>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ref name="종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0770369 &#91;박정희의 생애&#93;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6)] 조선일보 1998년 1월 7일자</ref>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 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ref name="종갈"/> 1974년 12월 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계기로 천주교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후 신부들을 연행과 구속이 되는 일이 있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bulgyofocus.net/news/read.php?idxno=10022 |제목=불국사-석굴암,1만원권 지폐모델 계획 있었다, 불교 포커스 |확인날짜=2008-07-18 |archive-date=2014-01-0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40107134615/http://www.bulgyofocus.net/news/read.php?idxno=10022 |url-status= }}</ref><ref>{{웹 인용 |url=http://h21.hani.co.kr/section-004000000/2005/04/004000000200504190704065.html |제목=1만원권 원래 도안은 석굴암, 한겨레 경제 |확인날짜=2008-07-18 |archive-date=2011-11-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2231117/http://h21.hani.co.kr/section-004000000/2005/04/004000000200504190704065.html |url-status= }}</ref><ref>[https://archive.today/20120701134001/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297170 1만원권 지폐 변천사, JOINS 뉴스]</ref> === 남조선로동당 활동 ===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직급을 박탈당하였다가 복귀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진실된 전향이었는지에 대해 정치계로부터 평생 의심을 받았다. 1946년 [[10.1 대구 사건]]때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했다.<ref name="autogenerated2"/> 목사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2" />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ref name="강원룡1" />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을 진두지휘하여 [[여수·순천 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하나<ref name="프레시안"/>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제14여대의 [[홍순석 (군인)|홍순석]], [[김지회]], [[지창수 (군인)|지창수]]가 [[제주 4.3 사건|제주도 진압 명령]]을 반대하며 남로당의 지령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으켰던 반란이다. 박정희는 사건 당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ref name='여수순천1'>[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7165 NEWSM - 4.3사건 때 박정희는 무엇을 했을까?]</ref> 현재 [[여수시]]에서는 1948년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남북협상의 실패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이승만]]과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타도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던 점, 그리고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흥사단]] 출신의 [[최능진]], 백범 [[김구]], [[김규식]], [[서세충]], [[오동기]] 같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사건의 주종자들이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좌파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 반란이였다기 보다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 추진을 반대하는 투쟁, 즉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연장선에 더 가까웠다고 결론 짓는다.<ref name='여수순천2'>[https://www.yeosu.go.kr/www/yeosu/yeosoon 여수시 - 사건으로 보는 여수·순천 10.19]</ref> 1948년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하기 위하여<ref name='신탁통치22'>[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32251821 한국경제 - 신탁통치에 좌우 분열…이승만 "찬탁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ref> 1월 9일 처음으로 서울에 입국한 이후 다음달인 2월 7일 [[2.7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4월 3일 일어난 [[제주 4.3 사건]], 4월 19일 결성되었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연석회의]], 10월 1일 [[혁명의용군 사건]], 그리고 10월 19일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까지 모두 1948년 한 해에 남한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ref name='유엔위원단1'>[https://theme.archives.go.kr/next/unKorea/establishment.do 한국과 유엔 - 정부수립과 유엔]</ref> == 사후 영향력 ==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96494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개발독재, 필연인가 선택인가]</ref> 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민국의 재벌|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ref name="부크111">[[토드 벅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승환옮김 ( [[김영사]] ) 15쪽 아시아의 붕괴.</ref>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930022011 “한·일회담서 과거사청산 못한 건 반공논리 탓”]</ref>[[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ref>[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53380 ‘녹색성장 원동력,그린벨트 벽 허물기] {{웨이백|url=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53380# |date=20131213144008 }}[http://www.segye.com/Articles/News/Opinion/Article.asp?aid=20081001004159&cid= 그린벨트]</ref>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ref name="전재호112">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112~113쪽.</ref>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4 />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한국국민당 (1981년)|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근령]]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1997년)|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ref>[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49 PD저널<!-- 봇이 따온 제목 -->]</ref>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ref>http://mbn.mk.co.kr/news/newsRead.php?vodCode=286139&category=mbn00006</ref><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673892 노컷뉴스<!--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673892 }}</ref>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ref>[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055639&cDateYear=2007&cDateMonth=07&cDateDay=20 First-Class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이명박]] 대통령이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가 충돌했다. 친이계와 김영삼은 연일 영남[[지역주의]]와 박정희 집권기를 비판하며 친박계를 공격했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역 정치권과 친박계는 반발했다. 박근혜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력히 주창하는 데는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선친의 유훈(遺訓)’의 영향이 있을 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돌이라는 평가도 있다. == 평가 및 논란 == {{본문|박정희에 대한 평가 및 논란}}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5개년 계획|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0/2009121001803.html 아시아·아프리카 20개국 70명 "한국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ref><ref>{{웹 인용 |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297473&cp=nv |제목="한국 산업 앞선 경험 배우러 왔죠" 왕양 中 광둥성 당 서기 방한 |확인날짜=2010-01-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2230357/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297473&cp=nv |보존날짜=2011-11-22 |url-status=dead }}</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52943 오방색 걸친 상처입은 산하 "개발의 잔혹함 그리고 싶었다"]</ref>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141835525&code=210000 "60년 최대 성과는 산업화" 56% 경향신문 2008. 8]</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1016002863&subctg1=&subctg2= 박정희 바로 세우기] 세계일보, 2009년 10월 16일</ref><ref>[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381310&section=S1N54&section2=S2N235 역대 최고 대통령에 박정희 압도적 1위] {{웨이백|url=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381310&section=S1N54&section2=S2N235# |date=20160305212015 }} 아시아경제, 2008년 8월 14일</ref>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성장·개발 향수 떨쳐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35342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김재중 기자 |쪽 = |날짜 = 2009-10-26 |확인날짜 = 2009-11-19}}</ref>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ref>{{뉴스 인용 |제목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49552 |출판사 = 오마이뉴스 |저자 = 정운현 기자 |쪽 = |날짜 = 2004-08-29 |확인날짜 = 2009-11-19}}</ref>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People/Article.asp?aid=20060628000574&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120100000&dataid=200606281532000111 월남전 파병은 정당했다] 세계일보 2006-06-29</ref><ref name="autogenerated14">{{뉴스 인용 |제목 = 파병 논란 아직도 현재진행형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280243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김정곤 기자 |쪽 = |날짜 = 2005-04-27 |확인날짜 = 2009-11-19}}</ref>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아이리스'에 비친 한국인의 핵무기 열망 |url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5948&sc=naver&kind=menu_code&keys=4 |출판사 = 데일리안 |저자 = 김헌식 기자 |쪽 = |날짜 = 2009-10-22 |확인날짜 = 2009-11-19}}</ref>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이나 [[문재인]]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는 2위로 하락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Main/3/all/20161223/82008376/2|제목=역대 대통령 국가발전기여도 노무현 1위…박정희 2위 · 김대중 3위|성=|이름=|날짜=2016-12-23|뉴스=news.donga.com|출판사=|언어=ko}}</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501364|제목=[뉴시스-리서치뷰 여론조사]文대통령, 전·현직 대통령 호감도 1위…박정희 2위|성=|이름=|날짜=2018-04-03|뉴스=중앙일보|출판사=|언어=ko-KR}}</ref> == 약력 == * 1917년 11월 14일 - 박성빈과 백남의의 5남 2녀 중 5남으로로 출생 * 1926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 1932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 1936년 -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 11월 24일 - 장녀 재옥 출생 * 1938년 - 부친 박성빈 사망 * 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 1942년 - 신징 군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 1944년 -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출처|날짜=2013-03-08|[[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 1945년 -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 1946년 :* 9월 -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 10월 - 대구폭동 중 셋째 형 [[박상희 (1905년)|박상희]] 사망 * 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현역부적합전역 * 1949년 - 군무원 신분으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ref name="몽양여운형">{{웹 인용 |url=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52# |제목=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확인날짜=2008-07-0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222125759/http://www.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52# |보존날짜=2014-02-22 |url-status=dead }}</ref> :* 8월 12일 - 모친 백남의 사망 * 1950년 :* 6월 -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소령으로 복직 :* 9월 15일 - 육군중령 진급 :* 10월 - [[제9보병사단 (대한민국)|제9사단]] 참모장 :* 11월 - 김호남과 이혼 :* 12월 - 육영수와 결혼 * 1951년 :* 4얼 15일 - 육군대령 진급 :* 5월 25일 - 육군정보학교 교장 * 1952년 - 2월 2일 차녀 근혜 출생 * 1953년 - 11월 25일, 육군준장 진급, 제2군단 포병사령관(현재의 포병여단장) * 1954년 - 6월 30일 3녀 근령 출생 * 1955년 - 제5사단 사단장 * 1957년 - 육군대학 졸업, 제6군단 부군단장, 제7사단 사단장 * 1958년 - 12월 15일 장남 지만 출생 * 1959년 - 3월 1일 육군소장 진급,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냄 * 1960년 - 1월에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둘째 형 박무희 사망 * 1961년 :* 5월 16일 -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킴 :* 5월 18일 -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 :* 7월 3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8월 11일 - 육군중장 진급 :* 11월 6일 - 육군대장 진급 후 예편 * 1962년 :* 3월 22일 -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 :* 7월 - 겸임 내각 수반 :* 아르헨티나와 외교 시작 * 1963년 -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 :*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임금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를 빌림 *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의 합의에 의해 배틀 머모리얼 대학과 자매기관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6대 대통령으로 재선, 산림청 개청 * 1968년 - 1·21사태 한국군복장을 한 북한공비 31명 국내 잠입.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시도. :* 여운형 추모회 고문. *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 1970년 -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 수출 10억 달러 달성,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새마을 운동 제창 * 1971년 - 국고로 아르헨티나의 국토 중 일부 구매 후 농민을 엄선하여 파견함 :*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 한국과학원 설립 * 1972년 :* 7월 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관련 공동성명 발표 (7.4 남북 공동 성명) :* 10월 17일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1차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91.5% 찬성표를 얻었으며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10월 유신), 남북공동성명 발표 * 1973년 8월 8일 - 김대중 납치사건 *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육영수 저격사건) * 1975년 :* 4월 9일 -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사법살인 자행 :* 1월 22일 - 2차 유신헌법 찬반 재신임 투표에서 73.1% 찬성표를 받아 재신임을 받음 * 1976년 8월 - 칠백의총 주변 기념관, 주차장, 관리사무소 등 기타시설 건립 지시<ref>관광 자원학(김병문, 백산출판사, 2000)</ref> * 1977년 -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수출 100억달러 달성, 부가가치세 시행 :* 12월 -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 * 1978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68년 박종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진) :* 12월 27일 - 9대 대통령에 선출, 세계에서 7번째로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및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 성공 * 1979년 10월 -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관련자 검거, 크리스찬아카데미 관련자 검거 :* 10월 26일 오후 8시경 -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10·26 사건)을 받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 :* 11월 3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 학력 == * 1932년 [[구미초등학교 (경북)|구미보통학교]] 졸업 * 1937년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졸업 * 1942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징 군관학교]] 2기 졸업 *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 졸업 *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졸업 * 1947년 [[육군보병학교 (대한민국)|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 1954년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ref>{{웹 인용|url=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49979|제목=[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⑬]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공약 이행|날짜=2023-12-02|출판사=월드코리안뉴스}}</ref> * 1957년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 졸업 == 군 복무 경력 == {| border="1" cellpadding="2" cellspacing="0" style="margin:auto; width:80%;" |- ![[만주국 육군]] [[소위]] !만주국 육군 [[중위]] ! !조선국방경비대 [[소위]] !조선국방경비대 [[대위]] !조선국방경비대 [[소령]] |-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Junior Lieutenant rank insignia (Manchukuo).pn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Lieutenant rank insignia (Manchukuo).pn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소위.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대위.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소령.JPG|100px]] |- !1944년 12월 23일 !1945년 7월 1일 ! !1946년 12월 14일 !1947년 9월 27일 !1948년 8월 1일 |- !대한민국 육군 [[중령]] !대한민국 육군 [[대령]] !대한민국 육군 [[준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 !대한민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대장]] |-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중령.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대령.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준장.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소장.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중장.JPG|100px]] | style="text-align:center; width:16%;"| [[파일:대장.JPG|100px]] |- !1950년 9월 15일 !1951년 4월 15일 !1953년 11월 25일 !1958년 3월 1일 !1961년 8월 11일 !1961년 11월 1일 |} == 박정희의 작품 == === 음악 === * 《[[금오산아 잘있거라]]》: 박정희 작사, 박시춘 작곡 * 《[[새마을노래]]》: 박정희 작사, 박정희 작곡 * 《[[나의 조국 (박정희)|나의 조국]]》 : 박정희 작사, 박정희 작곡 === 서적 === 박정희가 저술한 저서 * 《[[지도자도|지도자의 길]]》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 《[[국가와 혁명과 나]]》 * 《[[민족의 저력]]》 * 《[[민족중흥의 길]]》 편집본 * 《조국 근대화의 지표》 * 《한국 국민에게 고함》 * 《연설문집》 * 《수기집-나의 어린 시절》<ref name="소학" /> == 기타 == * 2016년에는 [[우정사업본부]]가 2017년 9월 15일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60만장을 발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박정희 기념우표, 탄생 100돌 내년 60만장 발행… 신경민 "상례 벗어나는 것" |url = http://www.moneyweek.co.kr/news/mwView.php?type=1&no=2016092014238083574&outlink=1 |출판사 = 머니투데이 |저자 = 장영락 기자 |날짜 = 2016-09-20 |확인날짜 = 2018-08-23}}</ref>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논란이 있기 때문에 기념우표 발행은 적절치 않다는 점,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 세칙》에서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의 경우에는 기념우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고 우정사업본부는 2017년 7월 12일에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를 통해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박정희 탄생 100주년 우표 발행 취소 |url = http://news.donga.com/3/all/20170713/85330049/1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신수정 기자 |날짜 = 2017-07-13 |확인날짜 = 2018-08-23}}</ref> {{참고|10월 유신#2차대전 이전에 일본의 근대화 방식}} *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ref name="ReferenceA"/><ref name="ReferenceB"/><ref name="ReferenceC"/> * 그는 집권 당시 [[드라마]]에 강력한 규제를 내렸으며, 대체로 검열 대상이 된 것은 [[왜색]]이 짙은 것, 퇴폐적인 것, 저속한 것이었다. * 1960년대 이후로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팝 음악]]과 [[미니스커트]], [[장발]] 문화, [[일본 만화]]에 대해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단속이 이루어졌다. 1973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단속을 위한 법적 근거를 갖추었으며, 이는 1988년이 되어서야 개정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theme.archives.go.kr/next/tabooAutonomy/kindOfTaboo02.do |제목=미니스커트와 장발 |웹사이트=국가기록원 |확인날짜=2015-03-30}}</ref> * 박성빈의 후손들 중 박정희 쪽 직계후손들은 부모와 자식 간 나이 차가 매우 심하다. :* 박성빈(1871년 ~ 1938년) - 박정희(1917년 ~ 1979년): 46년 :* 박정희(1917년 ~ 1979년) - 박지만(1958년 ~): 41년, 박성빈 - 박지만 87년 :* 박지만(1958년 ~) - 박세현(2005년 ~): 47년, 박성빈 - 박세현 134년 == 역대 선거 결과 == {{선거기록 시작|KR|개인}} {{선거기록/KR/개인| 1963년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대선]] | 5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공화당 | 4,702,640표 | 46.64 | 1위 | 당선_대 | }} {{선거기록/KR/개인| 1967년 |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대선]] | 6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공화당 | 5,688,666표 | 51.44 | 1위 | 당선_대 | }} {{선거기록/KR/개인| 1971년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대선]] | 7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공화당 | 6,342,828표 | 53.19 | 1위 | 당선_대 | }} {{선거기록/KR/개인| 1972년 |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대선]] | 8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공화당 | 2,357표 | 99.92 | 1위 | 당선_대 | 단독후보}} {{선거기록/KR/개인| 1978년 |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대선]] | 9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공화당 | 2,377표 | 99.85 | 1위 | 당선_대 | 단독후보}} {{선거기록 끝}} == 세계(世系) == 시조부터 본인까지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1세 언성(彦成) → 2세 인황(仁晃) → 3세 억(憶) → 4세 연정(連正) → 5세 지순(之順) → 6세 수화(秀華) → 7세 섬(暹) → 8세 윤정(允晶) → 9세 돈(暾) → 10세 사겸(思謙) → 11세 원후(原厚) → 12세 지(持) → 13세 효림(孝林) → 14세 숙동(叔童) → 15세 망달(望達) → 16세 효통(孝通) → 17세 린(隣) → 18세 천신(天信) → 19세 안인(安仁) → 20세 문달(文達) → 21세 수해(壽海) → 22세 이순(以順) → 23세 명흥(命興) → 24세 세형(世衡) → 25세 영환(英煥) → 26세 이찬(履贊) → 27세 영규(永奎) → 28세 [[박성빈 (조선)|성빈]](成彬) → 29세 정희(正熙) == 가족 관계 == {{박정희 가계도}} * 아버지: [[박성빈 (조선)|박성빈]](朴成彬, 1871년 6월 6일 ~ 1938년 9월 4일) *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1872년 9월 22일 ~ 1949년 8월 12일) ** 배우자: [[김호남 (1920년)|김호남]](金好南, 1920년 ~ 1991년) *** 장녀: [[박재옥]](朴在玉, 1937년 11월 24일 ~ 2020년 1월 8일) *** 사위: [[한병기]](韓丙起, 1931년 6월 8일 ~ 2017년 4월 21일) **** 외손자 : 한태준(韓太竣, 1959년 ~ ) **** 외손녀 : 한유진(韓由辰, 1961년 ~ ) **** 외손남 : 한태현(韓太賢, 1963년 ~ ) ** 배우자: [[육영수]](陸英修, 1925년 11월 29일 ~ 1974년 8월 15일) *** 차녀: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대한민국]]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 3녀: [[박근령]](朴槿令, 1954년 6월 30일 ~ ) *** 사위: [[신동욱 (1968년)|신동욱]](申東旭, 1968년 1월 16일 ~ ) *** 장남: [[박지만]](朴志晩, 1958년 12월 15일 ~ ) *** 자부: [[서향희]](徐香姬, 1974년 6월 30일 ~ ) **** 손자 : 박세현(朴世現, 2005년 9월 12일 ~ ) **** 손자 : 박정현(2014년 1월 31일 ~ ) **** 손자 : 박지현(2015년 4월 28일 ~ ) **** 손자 : 박수현(2015년 4월 28일 ~ ) ==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 === 문학 ===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15295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ref> * [[이인화]], 《인간의 길》<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76145 인간의 길]</ref> *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만화 *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 드라마<ref>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ref> === * 1987년 - 《[[욕망의 문]]》, KBS2 ([[이진수 (배우)|이진수]]) * 1989년 - 《[[무풍지대]]》, KBS2 ([[신종섭]]) * 1989년 - 《[[제2공화국 (드라마)|제2공화국]]》, [[MBC TV|MBC]] ([[이진수 (배우)|이진수]]) * 1990년 - 《[[야망의 세월]]》, KBS ([[정욱 (1938년)|정욱]]) * 1990년 - 《[[여명의 그날]]》, [[KBS]]([[백준기]]) * 1993년 -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김상민]] - 소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홍경인]] - 청소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이창환 (배우)|이창환]] - 청년 박정희 역 * 1993년 -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이진수 (배우)|이진수]] - 장년 박정희 역 * 1995년 - 《[[전쟁과 사랑]]》, MBC, [[이진수 (배우)|이진수]] * 1995년 -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MBC (이창환) * 1995년 -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SBS TV|SBS]] ([[독고영재]]) * 1998년 - 《[[삼김시대 (드라마)|삼김시대]]》, SBS (이창환) * 1998년 - 《[[야망의 전설]]》, KBS ([[정욱 (1938년)|정욱]]) * 2003년 - 《[[야인시대]]》, SBS (이창환) * 2004년 - 《[[영웅시대 (2004년 드라마)|영웅시대]]》, MBC (독고영재) * 2005년 -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MBC (이창환) * 2009년 -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 [[평화방송]] 드라마 (이창환) * 2013년 - 《[[대한민국 정치비사]]》, MBN (이창환) * 2014년 - 《[[불꽃 속으로]]》, TV조선 (독고영재) === 영화 ===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 1995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영화)|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균식]]<ref>단역이었다.</ref>) * 2004년 - [[효자동 이발사]], ([[조영진]]<ref>조영진이 맡은 배역은 '통치자'였다. 이 통치자의 이름은 영화 안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으나, 영화 내용상으로 볼 때, 통치자는 박정희를 나타낸다.</ref>) * 2005년 - [[그때 그 사람들]], ([[송재호]]) * 2006년 - [[잘 살아보세]], ([[이창환 (배우)|이창환]]) * [[민족과 운명]]<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ref>, ([[김윤홍]]) * 2016년 - [[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 ([[김승훈 (배우)|김승훈]]<ref>영화에서는 본명 '박정희'가 아닌 각색된 이름. '박의장'으로 출연한다.</ref>) * 2020년 - [[남산의 부장들]], ([[이성민 (배우)|이성민]]<ref>영화에서는 본명 '박정희'가 아닌 각색된 이름. '박통'으로 출연한다.</ref>) * 2022년 - [[킹메이커 (2022년 영화)|킹메이커]], ([[김종수 (배우)|김종수]]<ref>영화에서는 본명 '박정희'가 아닌 각색된 이름. '박기수'으로 출연한다.</ref>) === 다큐멘터리 === * 2013년 - [[다큐극장]], ([[이창환 (배우)|이창환]]) == 같이 보기 == {{col-begin}} {{col-4}} * [[국가재건최고회의]] *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 [[제3공화국 (드라마)]] *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 [[제4공화국 (드라마)]] * [[5·16 군사 정변]] * [[10월 유신]] * [[10·26 사건]]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국토종합개발계획]] * [[국민교육헌장]] * [[그린 벨트]] * [[독도밀약]] * [[새마을 운동]] * [[대한민국 제2공화국]] * [[오노 반보쿠]] * 오원철 * [[육영수]] * {{임시링크|허먼 칸|en|Herman Kahn}} -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학 교사 {{col-4}} * [[윤보선]] * [[친일파]] * [[좌파 파시즘]] * [[차지철]] * [[최규하]] * [[전두환]]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 [[정수장학회]] * [[여순반란]] * [[남로당]] * [[만주국]] *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 [[김옥선 파동]] * [[부마민중항쟁]] * [[김학규 (1900년)|김학규]] * [[김성진]] * [[육인수]] * [[이석제]] * [[유원식]] * [[지미 카터]] {{col-4}} * [[박종규 (1930년)|박종규]] * [[박동선 사건]]([[코리아게이트 사건|코리아게이트]]) * [[제2차 세계대전]] * [[김종필]] * [[김대중]] * [[김영삼]] * [[김정렴]] * [[유원식]] * [[윤치영]] * [[이한빈]] * [[박상희 (1905년)|박상희]] * [[한국 전쟁]] * [[박근혜]] * [[송요찬]] * [[장경순]] * [[린든 B. 존슨]] * [[존 F. 케네디]] * [[장제스]] * [[적화통일]] {{col-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윤필용]] * [[이승만]] * [[이후락]] * [[장도영]] * [[장준하]] * [[장면]] * [[조갑제]] * [[지만원]] * [[김재규]] * [[정구영 (1894년)|정구영]] * [[황태성]] * [[기시 노부스케]] * [[세지마 류조]] * [[고다마 요시오]] * [[마치이 히사유키]] * [[사사카와 료이치]] * [[미군 위안부]] * [[박근혜]] {{col-end}} == 각주 == {{각주|30em|refs=<ref name="misoo">[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7122670313 [박정희의 생애&#93; "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ref name="Chogapje">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조선일보사]], 1998)353~354쪽 참조.</ref><ref name="autogenerated15">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참조.</ref><ref name="cha34">한미동맹 50년 (차상철 저 생각의나무 2004) 34페이지</ref>}}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시작}}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김정렴]], 《아, 박정희 - 김정렴 정치 회고록》(중앙M&B, 1997) * 김성진, 《박정희 시대》(조선일보사, 1994) * 김일영, 《건국과 부국: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도서출판 기파랑, 2010) * 김종신,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 》(한국논단, 1997) * 김종신, 《영시의 횃불: 박정희 대통령 수행기자 7년의 기록》(도서출판 기파랑, 2011) *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일조각, 2005) * 박봉현, 《박정권 19년을 해부한다》(고려출판사, 1991) * 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동서문화사, 2005), 《국가와 혁명과 나》(향문사, 1963),《하면 된다! 떨쳐 일어나자》(동서문화사, 2005),《나라가 위급할 때 어찌 목숨을 아끼리》(동서문화사, 2005) * 심융택 《백곰 하늘로 솟아오르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비화》(도서출판 기파랑, 2013) * [[안병훈]]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도서출판 기파랑, 2012)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동서문화사, 2006) * [[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 이경준 《민둥산을 금수강산으로: 박정희가 이룬 기적》(도서출판 기파랑, 2010) * 이근미 《역사를 바꾼 대통령 박정희》(도서출판 기파랑, 2013) * [[이상무]] 《만화 박정희》(도서출판 기파랑, 2011) * 이석제, 《각하,우리 혁명합시다》(1995, 서적포) * 이한빈, 《일하며 생각하며:이한빈회고록》(조선일보사, 1996)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 정재경, 《한민족의 중흥사상-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철학》(신라출판사, 1979), 《박정희 사상 서설:휘호를 중심으로》(집문당, 1991), 《박정희 실기-행적초록》(집문당, 1994)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조선일보사]], 1998),《박정희의 마지막 하루》 (월간조선, 2006) * [[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62년 생애의 62개 장면 》(도서출판 기파랑, 2009) * 홍하상,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2005, 국일미디어) *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2007) *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개마고원, 1998) *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한강사, 2000) * 전인권, 《박정희 평전: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 (이학사, 2006) * [[이만섭]],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 2009) {{참고 자료 끝}}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문헌언어-줄|ko|박정희}} * {{위키인용집-줄|박정희}} * [http://www.presidentparkchunghee.org/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웨이백|url=http://www.presidentparkchunghee.org/ |date=20180516161203 }}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0234316/http://www.parkchunghee.or.kr/index.html 박정희 전자도서관] *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5/27/1998052770445.html <nowiki>[박정희생애] 제7부 가난한 군인의 길②- 미국에 가다<193></nowiki>] 1998-05-27 {{대한민국 대통령| 대수=5·6·7·8·9| 전임자=[[윤보선]]| 임기=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후임자=[[최규하]]| }} {{전임후임| |전임자 = [[윤보선]] |후임자 = 박정희 |직책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 |임기 = 1962년 3월 24일 ~ 1963년 12월 16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송요찬]] |후임자 = [[김현철 (1901년)|김현철]] |직책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내각수반]] |임기 = 1962년 6월 18일 ~ 1962년 7월 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장도영]] |대수= 2 |직책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임기 = 1961년 7월 3일 ~ 1963년 12월 16일 }} {{전임후임| |후임자 = [[이주일 (군인)|이주일]] |대수= 1 |직책 =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임기 = 1961년 5월 20일 ~ 1961년 7월 2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정구영 (1894년)|정구영]] |후임자 = [[박준규 (1925년)|박준규]] (총재권한대행) |대수 = 2·3 |직책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총재 |임기 = 1963년 8월 31일 ~ 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권한대행}} {{냉전의 인물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대한민국 우익}} {{전거 통제}} [[분류:박정희| ]] [[분류:박정희 정부| ]] [[분류:1917년 출생]] [[분류:1979년 사망]]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 [[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 [[분류:5·16 군사정변 관련자]] [[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분류:친위 쿠데타를 한 지도자]] [[분류:일제강점기의 교육인]] [[분류:일제강점기의 교사]] [[분류:관동군 관련자]] [[분류:만주국의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관련자]]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구미시 출신]] [[분류:고령 박씨]] [[분류:대구사범학교 (1923년) 동문]] [[분류:구미초등학교 (경북) 동문]] [[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 육군포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대학 동문]] [[분류:경북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암살된 정부수반]] [[분류:암살된 국가원수]] [[분류:대한민국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남조선로동당]]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분류:박근혜]] [[분류:박성빈 가]]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만주국의 한국인]] [[분류:한국의 민족주의자]] [[분류:무궁화대훈장 수훈자]] [[분류:경상북도 출신 정치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공직자 정보 |이름 = 고건 |원어명 = 髙建 |그림 = 고건국무총리.jpg |국적 = 대한민국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38|1|2}}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청진정]] |사망일 = |사망지 = |본관 = [[제주 고씨|제주]](濟州) |정당 = |학력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 석사 |경력 = 교통부 장관<br>농림수산식품부 장관<br>제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br>내무부 장관<br>제22·31대 [[서울특별시장]]<br>제30·35대 [[국무총리]] |종교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부모 = [[고형곤]](부), 장정자(모) |배우자 = 조현숙<ref>2021년 9월 29일 배우자 사별</ref> |자녀 = 3남(그 중 장남 [[고진 (1961년)|고진]]) |서명 = Goh Kun signature.svg |국가 = [[대한민국]] |직책 = 제30·35대 [[국무총리]] |대통령 = [[김영삼]]<br>[[노무현]] |전임 = [[이수성]]<br>[[김석수]] |후임 = [[김종필]]<br>[[이해찬]] |임기 = 1997년 3월 5일~1998년 2월 24일<br>2003년 2월 25일~2004년 5월 14일 |서훈 = 홍조근정훈장(1972년)<br>청조근정훈장(1982년)<br>몽골국 북극성훈장(2002년) }} '''고건'''(髙建, [[1938년]] [[1월 2일]]~)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30대·35대 국무총리이다. 본관은 [[제주 고씨|제주]](濟州)이다. == 학력 == * 195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 1960년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 1971년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대학원]] 공학 석사 === 명예 박사 학위 === * 1992년 [[원광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2001년 [[시라큐스 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생애 == === 혈통과 학력 === 1938년 1월 2일,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고형곤]](高亨坤)과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 張氏)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종손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부계 혈통과 모계 혈통 모두 황족, 귀족인 후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고씨|제주]](濟州)로 [[고구려]]의 [[황태자]] 고말로(髙末老)의 후손이다. 고건 총리의 증조부는 노비 370명을 보유했다. 유력 정치인 2세로 아버지 [[고형곤]]은 학술원 회원을 역임한 철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형제 고석윤은 행시와 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이후 상공부 상역국장을 지내다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가 검찰의 내사를 받자 공직을 사퇴한 후 로펌을 경영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9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졸업 후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 제13회 [[행정고시|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 공직자 활동 === 지방행정사무관에 임용된 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1965년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 1968년 서기관으로 승진, [[전라북도청]] 식산국장과 내무국장을 거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지방국 지역개발담당관, 새마을담당관 등을 지냈다. 행정관리관으로 승진, 1973년 [[강원도 (남)|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 1975년 [[전라남도지사|전남지사]]를 거쳐 1979년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 국토개발연구원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5·17 쿠데타|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리자 5.17을 군정으로 간주하고, 군정하에서 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70611 고건의 반격 "군정 반대해 사표낸 나를..."]</ref> === 정치 활동과 제30대 국무총리 ===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내무부 장관에서 하야한 뒤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하나 열고 칩거하던 중 1988년 민정당 군산지구당 위원장, 민정당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고 뒤이어 1991년부터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명지대학교]] 총장직에 있다가 1995년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거쳐,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8년 3월 3일 퇴임 다음날 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재청하고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김종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 1998년 4월 그는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에 특별 임용되었다. === 제35대 국무총리 === 고건 총리는 2001년 한국상하수도협회 초대회장, 2002년 국제투명성기구 대한민국지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2003년 다시 입각제의를 받고 입각, 고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193대 2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를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헌법에 의거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 대통령 권한대행 ==== {{참고|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고건 총리는 권한을 대행하게 되자 외신, 특히 미국계 외신은 특별한 기대를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다고 보도했다.<ref name="ed11">[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0138074 (탄핵)"고건 대행, 안정적 리더쉽 발휘할것"-외신들] 이데일리 2004-03-13일자</ref> 통신은 한국에서 국무총리는 통상 의전적인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했다면서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ed11"/> 뉴욕타임스(NYT)는 고 총리가 지난 97~98년 외환위기 당시 총리를 지냈던 경험을 살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결정을 내리기까지 임시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면서 정치 분석가들은 고총리의 풍부한 행정 경험, 격동의 시기에 안정적인 스타일의 리더쉽을 발휘해온 점을 평가하고 있다<ref name="ed11"/> 고 발표했다. 영국 BBC는 고 총리를 한국의 안정적인 리더(South Korea"s "steady" leader)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비교적 자세히 논평을 실었다. 요지는 세 번의 장관, 두 번의 서울 시장에 이어 국무총리도 두 번째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잘 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 [[BBC]] 역시 고 총리를 "미스터 안정(Mr.stability)" "행정의 달인(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했다.<ref name="ed11"/> BBC는 고 총리가 핵심 요직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 사건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 보수파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을 잘 보좌해 왔다고 평가했다. BBC는 대미관계에 있어 비굴한 아부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 당시부터 마찰을 빚어왔던 노대통령과 달리 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ref name="ed11"/> 미국 언론의 관심 이후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고건은 2개월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 특히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정한 관리라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자동으로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종료하고 [[5월 24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 ====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 기간 중 고건은 민심과 여의도 국회의 분노를 수습하는 등 무난한 수습 노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은 그를 총리로 기용한 것은 인사실패라고 비판하여 설전을 벌였다. 2006년 12월 15일 광주 전남방문에서 그는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남의 탓만 하고 있다"든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는 무책임한 충격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비판했다.<ref name="nk1">[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390616 盧 '고건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 발언 일파만파] 노컷뉴스 2006년 12월 22일자</ref> [[노무현]]은 12월 21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ref name="yun1">[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503789 고건 "노대통령 자가당착" 정면 비판] 연합뉴스 2006년 12월 22일자</ref> 에서 고 전 총리 기용에 대해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 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했다"며 "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다"라고 말했다.<ref name="nk1"/> 이어 "오히려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ref name="han1">[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79814.html 노대통령, “고건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 한겨레 2006년 12월 21일자</ref>" 고 하여 노무현은 고건의 기용을 인사 실패라고 규정했다. 고건 총리 측에서는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고 즉각 반박했다.<ref name="nk1"/> 고건의 한 측근은 그 날 "(그가) 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서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고 전총리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ref name="nk1"/><ref name="han1"/> 인사실패 발언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고건은 [[12월 22일]]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다 22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자신의 총리 기용을 `인사 실패'로 규정한 노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ref name="yun1"/> 이어 그는 [[노무현]] [[대통령]] 등의 고립에 대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탓<ref name="yun1"/><ref name="ytn1">[http://www.ytn.co.kr/_ln/0101_200612221104401843 대통령발언 고건 전총리 정면반박] YTN 2006년 12월 22일</ref>"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고건 총리는 또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ref name="yun1"/><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612/h2006122218524321000.htm 분노한 고건, 盧대통령 정면 공격]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612/h2006122218524321000.htm# |date=20140201173524 }} 한국일보 2006/12/22일자</ref><ref name="ytn1"/><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no=557854&year=2006 고건 "부담없이 이혼도장 찍게 됐다"] 매일경제 2006년 12월 22일자</ref>"라며 반박했다. 덧붙여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가르기, 민생문제도 챙기지 못한 무능력,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런 귀결<ref name="yun1"/><ref name="han1"/><ref name="mk1"/>"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당이 원내 제1당이었음에도 국정운영은 난맥을 거듭했다<ref name="yun1"/><ref name="ytn1"/>"면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은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석이 46석에 불과한 여소야대 정국이었다"며 "총리 주재로 4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국정협의회를 정례화해 국가적 현안과제들을 정치권과 조율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 나감으로써 큰 차질없이 국정을 운영한 바 있다"고 말했다.<ref name="yun1"/> 고건 총리는 또 "참여정부 초대 총리직을 제의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했다"며 "그러나 안정속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며 억울함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아 권한대행으로서 국민의 협조를 얻어 국가적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데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행은 신중하고, 절제돼야 한다.<ref name="yun1"/><ref name="mk1"/>"고 반박했다. 비판 성명 발표 이후 '성명 내용이 강경하다.'는 한 언론의 질문에 대해 고건은“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ref name="han1"/>”라고 응답했다.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하게끊는 계기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되었었다.<ref name="mk1"/> 이후 그의 한 측근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제 부담없이 `이혼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됐다<ref name="mk1"/>."고 밝혔다. 이후 그는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대선주자와 대선 후보로 거론됐으며 [[대통합민주신당]] 영입설, 민주당 영입설, [[한나라당]] 영입설 등이 나타났으나 2007년 1월 16일 언론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발표했다. === 국무총리 퇴임 이후 === 2009년 대통령 소속의 [[대한민국 사회통합위원회|사회통합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는데, 고건 총리가 초대 위원장으로 위촉됐다.<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12/23/0501000000AKR20091223058300001.HTML 사회통합위 출범.."갈등치유 기대"] 연합뉴스 이승우 2009-12-23</ref><ref>{{웹 인용 |url=http://www.jejugo.co.kr/bbs/zboard.php?id=notice20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2 |제목=고건(髙建) 전 총리, 사회통합위원장 이임사 |확인날짜=2012-01-0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1122071848/http://www.jejugo.co.kr/bbs/zboard.php?id=notice20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2 |보존날짜=2016-11-22 |url-status=dead }}</ref> == 서훈 == * 1972년 홍조근정훈장 * 1982년 청조근정훈장 * 1998년 국제투명성기구(TI) 세계청렴인 상 * 2001년 3월 국제투명성기구(TI) 올해의 세계청렴인상 * 2002년 9월 [[몽골]]국 북극성훈장 * 2005년 암창 상(賞) == 논문 == * 1994년 지방자치에 대응하는 지방정부의 쇄신과제 * 1995년 지방화시대의 행정개혁 전략 == 평가 == 고건 총리는 행정의 달인, 유능한 관료,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한 관료라는 평가가 있다. '사실상 새마을운동을 기획한 주무책임자로서 농촌부흥운동을 진두지휘했다. 새마을운동 성공이 그를 최연소 도지사(전남·37)로 만든 것이다. 세계 5대 지하철 교통망 구축, 난지도 생태공원 조성, 서울 도시고속도로건설, 한옥마을 복원' 등이 업적으로 거론된다. “청렴은 사명감 이전에 나의 생존법칙이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그의 청렴성은 브랜드화됐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 속에서도 스캔들이나 부정부패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일이 없다. 그가 행정의 달인이 된 배경에도 청렴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1990년 2월 초 한보 수서택지분양 때 도덕성과 자리를 바꿨다. 청와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수서택지분양 수의계약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이 서울시장(관선)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고 전 총리의 설명이다. 당시 수서특혜분양수사 결과 많은 사람이 구속됐으나 서울시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다. 이로써 ‘클린 서울’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청렴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1998년 그에게 세계청렴인상을 주었다. == 역대 선거 결과 == {{선거기록 시작|KR|개인}} {{선거기록/KR/개인| 1985년|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2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군산시·옥구군 (1981년 선거구)|전북 군산시·옥구군]] | 민주정의당 | 67,179표| 49.71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군산시·옥구군|초선]] }} {{선거기록/KR/개인|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3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군산시 (1988년 선거구)|전북 군산시]] | 민주정의당 | 28,118표| 35.54 | 2위 |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군산시|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방 선거]] | 32대 | [[서울특별시장|시장]] | [[서울특별시장 선거|서울특별시]] | 새정치국민회의 | 1,838,348표| 53.46 | 1위 | 당선_서울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초선]], 민선 2기 }} {{선거기록 끝}}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고병소 * 할머니: [[조씨]] **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 아버지: [[고형곤]] (1906년 4월 16일 ~ 2004년 6월 25일) ** 어머니: 장정자 (1914년 ~ 2001년 5월 14일) *** 큰형: 고석윤 *** 작은형: 고경 (1936년 ~ 요절) *** 큰여동생: 고혜경 *** 작은여동생: 고혜련 *** 배우자: 조현숙 (1938년 ~ 2021년 9월 29일) **** 장남: [[고진 (1961년)|고진]] (1961년 10월 11일 ~ ) **** 차남: 고휘 (1962년 ~ ) **** 삼남: 고위 (1968년 ~ ) == 같이 보기 ==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군산시·옥구군]] * [[군산시의 국회의원]] * [[옥구군의 국회의원]] * [[강원특별자치도 부지사]] * [[전라남도지사]] * [[서울특별시장]]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 * [[대한민국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 [[대한민국의 행정안전부 장관]]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헌정회|560|고건}} {{전임후임 |전임자 = 박종성<br>(직무대리 전영춘 기획관리실장) |후임자 = 임성재 |대수 = 4 |직책 = [[강원도 부지사]] |임기 = 1973년 11월 1일 ~ 1973년 12월 16일 }} {{전임후임 |전임자 = [[허련 (1924년)|허련]] |후임자 = [[장형태]] |대수 = 18 |직책 = [[전라남도지사]] |임기 = 1975년 11월 13일 ~ 1979년 1월 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정상천]] |후임자 = (정무수석으로 통합) 고건 |대수 = 2 |직책 =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제2정무수석비서관]] |임기 = 1979년 1월 10일 ~ 1979년 12월 18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류혁인]] (제1정무수석)<br>고건 (제2정무수석) |후임자 = [[김창식]] |대수 = 1 |직책 =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정무수석비서관]] |임기 = 1979년 12월 19일 ~ 1980년 6월 7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재명 (1925년)|김재명]] |후임자 = [[윤자중]] |대수 = 27 |직책 =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교통부 장관]] |임기 = 1980년 9월 2일 ~ 1981년 3월 1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정종택]] |후임자 = [[박종문 (1932년)|박종문]] |대수 = 35 |직책 = [[대한민국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농수산부 장관]] |임기 = 1981년 3월 10일 ~ 1982년 5월 2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정호용]] |후임자 = [[정관용 (1935년)|정관용]] |대수 = 46 |직책 = [[대한민국의 행정자치부 장관|내무부 장관]] |임기 = 1987년 5월 26일 ~ 1987년 7월 14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용래 (1934년)|김용래]] |후임자 = [[박세직]] |대수 = 22 |직책 = [[서울특별시장]] |임기 =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이영덕 (1926년)|이영덕]] |후임자 = [[송자 (1936년)|송자]] |대수 = 4 |직책 = [[명지대학교]] 총장 |임기 = 1994년 3월 17일 ~ 1997년 3월 5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이수성 (1939년)|이수성]] |후임자 = [[김종필]] |대수 = 30 |직책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임기 = 1997년 3월 5일 ~ 1998년 3월 2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조순]]<br/>(권한대행)강덕기 |후임자 = [[이명박]] |대수 = 32 |직책 = [[서울특별시장]] |임기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이명박]] |대수 = 1 |직책 = [[전국시도지사협의회#역대회장|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임기 = 1999년 1월 23일 ~ 2002년 9월 23일 }} {{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안상영]] |대수 = 1 |직책 = [[한국상하수도협회]] 회장 |임기 = 2001년 12월~2002년 10월 31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석수]] |후임자 = (권한대행)[[이헌재]]<br/>[[이해찬]] |대수 = 35 |직책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임기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5월 24일 }}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권한대행}}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전라북도}} {{전라남도지사}}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서울특별시장}} {{전거 통제}} [[분류:1938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제주 고씨]]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 [[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 [[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 [[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분류:대한민국의 교통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농수산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분류:민주정의당]] [[분류:민주자유당 당원]] [[분류:상도동계]] [[분류:신한국당 당원]] [[분류:새정치국민회의]] [[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 [[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분류:명지대학교 총장]] [[분류:명지대학교 교수]]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전북특별자치도의 국회의원]]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자유한국당 당원]] [[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ANSI logo.svg|섬네일|미국 국가표준 협회 로고]] '''미국 국가표준 협회'''({{lang|en|American National Standards Institute}}, ANSI)는 [[미국]]에서 제품, 서비스, 과정, 시스템, 인력관리 분야에서 표준을 개발하는 것을 감독하는 비영리 민간 기구로서, 미국을 대표하여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가입하였다.<ref>"[https://www.ansi.org/about_ansi/introduction/introduction?menuid=1 Introduction to ANSI]", 미국 국가표준 협회 웹사이트, 2018년 3월 22일 확인.</ref> 이 협회는 미국의 제품이 전세계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미국의 표준을 [[국제표준]]에 맞추는 활동도 한다. 이 협회는 다른 표준화 기구나 정부 기관, 소비자 단체, 회사 등이 개발한 표준을 승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용어를 통일하고, 제품의 특성, 성능, 테스트 방법 등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협회는 제품이나 인력의 인증 기구가 [[국제표준]]에서 정의된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승인하기도 한다. 이 협회가 제정한 표준을 "ANSI"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국 내 표준이지만, [[국제 표준화 기구]]의 ISO 표준보다 먼저 제정되는 경우도 많으며, ANSI 표준이 ISO 표준이 되기도 한다. == 역사 == 1918년 이전에 다음의 5개 학회는 공학 학회 연합(United Engineering Society, UES)을 구성하고 있었다. * 미국 전기 기술자 협회(American Institute of Electrical Engineers, AIEE) - 지금의 [[전기 전자 기술자 협회]](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 IEEE) * 미국 기계 학회(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ASME) * 미국 토목 학회(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ASCE) * 미국 광업 학회(American Institute of Mining Engineers, AIME) - 지금의 미국 광업 야금 석유기술 연구소(American Institute of Mining, Metallurgical, and Petroleum Engineers) * 미국 시험 재료 학회(American Society for Testing and Materials) - 지금의 국제 재료 시험 학회(ASTM International) 이들 5개 학회는 1918년 [[미국 전쟁부|전쟁부]], [[미국 해군|해군]], [[미국 상무부|상무부]]라는 3개 정부기관과 함께 [[국가표준]] 기구 설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미국 공학표준 위원회(American Engineering Standards Committee, AESC)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1928년 미국 표준 협회(American Standards Association, ASA)가 되었고, 1931년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의 미국 위원회와 제휴를 맺었다. 그 후 명칭과 조직에서 몇번의 변화를 거치는데, 1966년 미합중국 표준 협회(United States of America Standards Institute, USASI)가 되었으며, 1969년에 지금의 미국 국가표준 협회(American National Standards Institute, ANSI)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ref>"[https://www.ansi.org/about_ansi/introduction/history?menuid=1 ANSI: Celebrating 100 Years 1918 – 2018]", 미국 국가표준 협회 웹사이트, 2018년 3월 22일 확인.</ref> == 회원 == 이 협회는 정부 기관, 각종 기구와 회사, 학회, 국제 조직, 개인 등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고, 27만개가 넘는 회사, 3천만명이 넘는 전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ref>"[https://www.ansi.org/membership/overview/overview?menuid=2www.ansi.org/membership ANSI Membership – A Value Proposition]", 미국 국가표준 협회 웹사이트, 2018년 3월 22일 확인.</ref> == 과정 == 이 협회 자체가 표준을 개발하지는 않지만, 이 협회는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의 절차를 인증함으로써 표준의 개발과 사용을 감독한다.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이 사용하는 절차가 이 협회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개방성, 균형, 합의, 그리고 적절한 절차라는 요구사항에 부합해야 한다. 이 협회는 어떤 표준이 개발된 환경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공평하고, 그들이 접근할 수 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판단할 때, 그것을 미국 국가표준(American National Standards, ANS)으로 지정한다. 만약 자발적인 합의로 표준이 되었다면, 그 제품이 소비자 보호를 위한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확인됨으로써 시장이 급속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 협회가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한 것은 대략 9,500개 정도이다.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다음의 원칙을 준수한다. * 모든 이해관계 단체의 대표자들에게 개방된 집단이 합의한다. * 표준 초안에 대해 폭넓은 공개 검토와 지적을 허용한다. * 그런 지적을 고려하고 그에 대해 응답한다. * 동일한 합의 요구에 충족하는 변경이 제출되면, 그것을 표준 초안에 통합한다. * 표준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들 원칙이 존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참여자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 활동 == 이 협회는 산업계에 소속된 기술자 그룹들과 함께 일하며, [[국제 표준화 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 등의 일원이다. 이 협회가 제정한 컴퓨터 관련 표준 중 대표적인 것으로 [[ASCII]] 코드가 있다. == 같이 보기 == * [[미국 정보 교환 표준 부호]] (American Standard Code for Information Interchange, ASCII) * [[국제 표준화 기구]](ISO) * [[개방형 표준]]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공식 웹사이트}} {{전거 통제}} [[분류:표준화 기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 대통령 목록}} {{관직 정보 |국가 = 대한민국 |명칭 = 대통령 |문장 = Seal of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 |문장크기 = 135px |문장설명 = 대한민국 대통령의 문장 |기 = Flag of the President of South Korea.svg |기크기 = 135px |기설명 = 대한민국 대통령의 기 |현직 = [[윤석열]](20대) |현직그림 = South Korea President Yoon Suk Yeol portrait.jpg |현직그림크기 = 150px |취임일 = 2022년 5월 10일 |관저 = [[대한민국 대통령실]] |초대= [[이승만]] |임기 = 5년 (단임제) |성립 = 1948년 8월 15일 |웹사이트 = http://www.president.go.kr/ |권한대행= }} {{대한민국의 정치}} '''대한민국 대통령'''(大韓民國 大統領, {{llang|en|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은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행정부 수반]]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헌법]]에 따라 5년 단임제를 따른다. 현직 대통령은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다. == 대통령의 지위 == ===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 있다. 이를 [[대한민국 헌법 제66조|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원수라 함은 국내법상 국가의 통일성과 항구성을 상징하며, 국내에서는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 국가기관을 말한다. 대통령이 헌법에 의하여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외교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에 따른 것이다. ===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 === 대통령은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제4항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수반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정부가 그에 의하여 조직되고 영도되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은 정부조직권과 행정각부 장의 임명권, 감사원의 조직과 통할권을 가진 기관인 동시에, 국무회의의 의장으로서의 지위 및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행정의 최고지휘자의 지위 등도 갖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직무를 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과 영전수여권, 등을 가진다.<ref>[http://news.donga.com/3//20080226/8548405/1 7000여 국가요직 임명장에 '이명박' 서명]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80226/8548405/1 |date=20140106041807 }}《동아일보》2008년 2월 26일 박성원 기자</ref> 그리고 국군통수권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가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행정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가지는 권한이다. ===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 === 대한민국 헌법은 제66조 제2항과 제3항에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대통령의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와 [[한국의 재통일|한반도 통일]] 책무자로서의 지위를 명시하고 있다.<ref>정승재, 《개정판 법학통론》, 형설출판사, 2003년, 164-165쪽.</ref> == 대통령 선거 == {{본문|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참고|대한민국 헌법 제67조|대한민국 헌법 제68조}}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당일 40살에 달하여야 한다. 대통령의 선거 시기는 임기가 만료된 때와 궐위된 때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통해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사람으로 정하며, 선거에서 최고득표자가 두 명 이상일 때에는 국회의 재적인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 따라서 득표율의 제한 없이 최다수득표자가 당선자가 된다. 대통령 후보자가 한 사람일 때에는 그 득표자가 총 선거권자의 3분의 1 이상을 득표하지 않으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 ===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 === {{참고|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결과}} === 대통령 당선인 === 현 대통령의 임기가 70여일이 남은 시점에서 선거를 시행하여 차기 대통령 취임자로 확정될 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된다. 현직이자 전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당선인이 취임하면 정식 대통령으로 호칭된다. == 대통령의 임기 == {{참고|대한민국 헌법 제70조|대한민국 헌법 제128조|대한민국 헌법 부칙}}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없고 단임제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중임으로 변경하는 개헌은 그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이는 과거의 정권이 그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헌을 추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통령은 임기 개시일 0시에 취임하게 되는데<ref>공직선거법 제14조 제1항</ref>, 이러한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업무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취임식은 대개 임기 개시 이후에 진행하게 되므로, 취임식은 취임의 요건이 아니다. [[1987년]] 헌법 개정으로 [[1988년]] 이후부터 임기가 5년 단임으로 고정되어 재직 일수는 1826일 또는 1827일(5년)<ref group="주">[[윤년]] [[2월 29일]]이 1번 들면 1826일, [[윤년]] [[2월 29일]]이 2번 들면 1827일이 된다.</ref>이 되었다. 이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 [[이승만]]: 4273일 (11년 10개월 25일) * [[윤보선]]: 589일 (1년 7개월 11일) * [[박정희]]: 5793일 (15년 10개월 9일) * [[최규하]]: 255일 (8개월 10일) * [[전두환]]: 2491일 (6년 9개월 27일) * [[박근혜]]: 1475일 (4년 14일) === 선서 및 의무 === {{참고|대한민국 헌법 제66조|대한민국 헌법 제69조|대한민국 헌법 제83조}} 대통령은 취임 시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한다. {{인용문|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 대통령의 직무상 의무는 아래와 같다. # 헌법 수호 의무 #: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고 이를 실현할 의무를 진다.<ref>"대통령이 현행법을 '관권선거시대의 유물'로 폄하하고 법률의 합헌성과 정당성에 대하여 대통령의 지위에서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할 의무와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대통령도 정치인으로서 현행 법률의 개선방향에 관한 입장과 소신을 피력할 수는 있으나,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연관관계에서 법률의 개정에 관하여 논의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 사건의 경우와 같이, 대통령이 선거법위반행위로 말미암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현행 선거법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법률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헌재 2004년 5월 14일 선고, 2004헌나1.</ref> # 국가의 독립·보전의무 #: 대통령은 국가가 주권적으로 독립하고 계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진다. # 직무 수행 의무 # 겸직 금지 의무 #: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총리|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각부의 장 기타 법률이 정하는 공사의 직을 겸할 수 없다. # 평화 통일 노력 의무 #: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 역대 대통령 명단 == {{참고|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 == 역대 대통령 지지율 == {{참고|대한민국의 대통령 지지율}} == 대통령의 특권 == === 불소추특권 === [[대통령]]은 형사상 특권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84조|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에 따르는 권위를 유지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재직 중에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재직 중에는 형사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지 않는다<ref>헌재 1995년 1월 20일 선고, 94헌마246도 참고.</ref>.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에 소추되는 것은, 이러한 행위가 헌법수호자의 지위를 스스로 부정하여 헌법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시점은 취임 이전이나 이후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죄 이외에는 법원의 재판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법원은 공소기각의 판결(형사소송법 제327조 제1호)을 한다. 다만 재직시에 기소되지 않더라도, 퇴임시까지는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ref>헌재 1995년 1월 20일 선고, 94헌마246.</ref> === 직무수행상의 면책특권 ===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행하는 적법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판단 오류 등으로 인한 정책집행의 오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위법한 행위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진다. == 퇴임 후의 예우 == {{위키문헌|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위키문헌|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직 대통령의 신분과 예우에 관해서는 법률로 정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85조|헌법 제85조]]의 규정에 따라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다. 동법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 재직 중에 탄핵 결정을 받아 퇴임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형사 처분을 회피할 목적으로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 대한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경우 등에는 경호 이외의 예우는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90조|헌법 제90조 제2항]]에 따라 [[대한민국 국가원로자문회의|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두는 경우에는 전직대통령 가운데 직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이 된다. [[1989년 3월]] 의장을 위해 국회의장에 준하는 예우를 규정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폐지되었고, [[1995년 12월]] 전직 대통령들을 원로위원으로 모신 전직 대통령 예우법 해당 규정은 폐기되었다. 이후 법으로는 국가원로자문회의 규정은 존재하나, 설치되지 않고 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으로 총 3명이지만, 이중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한 두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박탈되었다. 박근혜는 사면 복권으로 출소하면서 경호 기간내여서 경호 예우는 받게 되었다. 이명박은 구속 수감되었으나, 배우자가 살아있어 경호기간 내에 배우자가 예우에 따른 경호를 계속 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사유는 [[이명박]]은 재임기간 중 직권남용, 뇌물수수,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 여러 가지 혐의, [[박근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탄핵]]으로 인해 대통령 예우가 각각 박탈되었다. === 장례와 안장 === 대통령은 국가장법에 따라 사망한 경우에는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하여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으로 할 수 있다. 또,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가 된다. 또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더라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존묘지]]로 지정될 수 있다. * [[이승만]] (1965년 7월 19일 사망, 1965년 7월 27일 가족장)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small>([[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small> * [[박정희]] (1979년 10월 26일 사망, 1979년 11월 3일 국장)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small>([[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small> * [[윤보선]] (1990년 7월 18일 사망, 1990년 7월 23일 가족장)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 <small>(사설묘지)</small> * [[최규하]] (2006년 10월 22일 사망, 2006년 10월 26일 국민장)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small>([[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 1호)</small> * [[노무현]] (2009년 5월 23일 사망, 2009년 5월 29일 국민장)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21-7 <small>(사설묘지, 국가보존묘지 1호)</small> * [[김대중]] (2009년 8월 18일 사망, 2009년 8월 23일 국장)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small>([[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small> * [[김영삼]] (2015년 11월 22일 사망, 2015년 11월 26일 국가장)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small>([[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small> * [[노태우]] (2021년 10월 26일 사망, 2021년 10월 30일 국가장)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로 98 <small>(국가보존묘지 2호)</small> * [[전두환]] (2021년 11월 23일 사망, 2021년 11월 27일 가족장) == 권한 == 대통령은 그 지위에 따라 일정한 권한을 갖는다.<ref>이하 권한의 분류는 홍성방, 《헌법학》, 현암사, 2007년.의 분류를 따름.</ref> === 국가대표자의 지위 === ==== 외교에 관한 권한 ====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의 [[조약]]을 체결·비준한다([[대한민국 헌법 제73조|헌법 제73조]]). 또한 대통령은 외교사절의 신임·접수·파견권([[대한민국 헌법 제73조|헌법 제73조]]), 선전포고와 강화에 관한 권한([[대한민국 헌법 제73조|헌법 제73조]]), 국군을 외국에 파견하는 권한([[대한민국 헌법 제60조|헌법 제60조 제2항]])을 가진다. 다만 외교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며([[대한민국 헌법 제89조|헌법 제89조 제2호~제6호]]), [[대한민국의 총리|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써 하여야 한다([[대한민국 헌법 제82조|헌법 제82조]]). 또한 일정한 조약을 체결·비준하거나 외국 군대를 대한민국에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회|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대한민국 헌법 제60조|헌법 제60조 제1항 및 제2항]]). ==== 영전수여권 ====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훈장 기타의 영전을 수여한다([[대한민국 헌법 제80조|헌법 제80조]]). === 국가 및 헌법의 수호자의 지위 === ==== 국군통수권 ====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대한민국 헌법 제74조|헌법 제74조]]).<ref>다만 대통령의 국군 통수권이 국가 원수의 지위에서 도출되는가(김철수, 헌법학개론, 박영사, 2001년, 1065쪽.; 홍성방, 앞의 책, 829쪽.), 행정부 수반의 지위에서 도출되는가(허영, 한국헌법론, 박영사, 2001년, 921~922쪽.)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ref> 다만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의 경우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국가안전보장회의]]의 자문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 하여야 하며([[대한민국 헌법 제91조|헌법 제91조]], [[대한민국 헌법 제89조|제89조 제6호]], [[대한민국 헌법 제82조|제82조]]), 선전포고나 국군의 외국 파견 등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필요로 한다([[대한민국 헌법 제60조|헌법 제60조 제2항]]). ==== 긴급명령권 ====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교전상태에 있어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가 불가능한 때에 한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긴급명령을 발할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76조|헌법 제76조 제2항]]). ==== 긴급재정·경제처분 또는 명령권 ====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76조|헌법 제76조 제1항]]) ==== 계엄선포권 ====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77조|헌법 제77조 제1항]]) ==== 위헌정당해산제소권 ==== {{참고|위헌정당 해산제도}} 대통령은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 위헌정당해산제소권을 갖는다([[대한민국 헌법 제8조|헌법 제8조 제4항]]). === 국정의 통합·조정자의 지위 === ==== 헌법개정안 발안권 ====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대한민국 헌법 제89조|헌법 제89조 제3호]]) 헌법개정안을 발안할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128조|헌법 제128조 제1항]]). ==== 국가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 부의권 ====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72조|헌법 제72조]]).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간접민주제]]의 예외인 [[직접민주제]]에 대한 규정이며,<ref>다만 예외가 아닌 수정이라는 견해로 김선택, 《헌법사례연습》, 2005년, 924~925쪽;<br/>정종섭, 《헌법학원론》, 2006년.</ref>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필수적인 것과 달리 임의적 국민투표이다. 특히 헌법개정안의 경우 국회의 의결을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30조|헌법 제130조 제2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 제72조|제72조]]의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헌법개정안을 확정하려고 하는 시도는 헌법에 명백히 위배된다.<ref>김선택, 앞의 책, 927~930쪽.;<br/>구병삭, 《신헌법원론》, 박영사, 1990년.;<br/>강경근, 《헌법》, 법문사, 2004년.;<br/>정종섭, 앞의 책.</ref> 뿐만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의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 법률안 제출 및 공포권 ==== * 법률안 제출권 :대통령은 입법에 관여할 권한을 갖는다.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으며(제52조), 국회에서 의결되어 정부에 이송되어 온 법률안은 대통령이 이를 공포하며(제53조 제1항), 만약 법률안에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국회에 환부하여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제53조 제2항).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다(제75조). 헌법은 이와 같이 대통령에게 일종의 준입법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것을 위임입법이라 한다. ==== 국회 임시회 집회 요구권 ==== :대통령은 국회의 임시회 소집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대통령은 집회요구의 기간과 이유를 명시하여야 한다(제47조 제3항). ==== 사면·감형·복권에 관한 권한 ==== [[대한민국 헌법 제79조|헌법 제79조 제1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사면|복권]]을 명할 수 있다”, "일반 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하여 대통령의 사면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면법이 정해져 있다.<ref>헌법재판소 2004년 5월 14일 선고, 2004헌나1 결정도 참조.</ref> 사면은 좁은 의미로 [[형사소송법]]이나 그 밖의 형사법규의 절차에 의하지 않고 형의 선고의 효과나 공소권을 소멸시키거나, 형의 집행을 면제시키는 [[국가 원수]]의 행위를 말한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사면권은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면과 함께 감형 및 복권에 대한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ref>홍성방, 앞의 책, 839~840쪽.</ref> 다만 이러한 사면권에 대하여 한계를 규정한 조문은 없지만, 일부 법학자는, # 국가이익과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정치적 기타의 이유로 남용할 수 없다. # [[권력분립]]의 원칙상 사법권의 본질을 침해할 수 없다. # 탄핵 등의 정치적 책임을 질 사람에 대하여 공소권의 소멸이나 탄핵소추권 소멸을 해서는 안 된다. # 사면의 결정에 사법부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 국회는 일반사면에 대한 동의 여부를 심리함에 대통령이 제안하지 않은 죄의 종류를 추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면권의 한계를 주장하기도 한다.<ref>김철수, 앞의 책, 1063쪽.<br/>[[권영성]], 앞의 책, 955쪽.<br/>홍성방, 앞의 책, 841쪽.</ref> ==== 국회 출석·발언권 ==== *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하여 발언하거나 서면으로 의사를 표시할 수 있으며(제81조), 이는 정부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이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부여한 것이며, 그의 발언이나 서신은 국회에 대하여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ref>정승재, 앞의 책, 167-168쪽.</ref> === 헌법기관 구성자의 지위 === 대통령은 헌법기관 구성자로서의 지위에서 [[헌법기관]]을 구성할 권한을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의 임명권([[대한민국 헌법 제98조|헌법 제98조 제2항 및 제3항]]), [[대한민국의 대법원장|대법원장]] 및 대법관의 임명권([[대한민국 헌법 제104조|헌법 제104조 제1항 및 제2항]]),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장|헌법재판소장]]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 재판관|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권([[대한민국 헌법 제111조|헌법 제111조 제2항 및 제4항]]),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가운데 3인에 대한 임명권([[대한민국 헌법 제114조|헌법 제114조 제2항]])을 갖는다. <단, 감사원장,대법원장,대법관,헌법재판소장을 임명 하려면 [[대한민국 국회|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 행정부 수반의 지위 === 행정부의 수반이라 함은 행정부의 조직자로서 집행에 관한 최고 결정권과 지휘감독권을 행사함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탄핵소추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 법률안 거부권 ==== 법률안 거부권이란 국회에서 의결하여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이의가 있을 때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미국 대통령제 헌법에서 유래된 것이다. ==== 행정입법권 ==== 현대복지국가 사회국가에 있어서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사항이 증대되고 이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가 권리의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법률로 구체적인 범위를 정하여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부에 의하여 만들어진 법을 행정입법이라 한다.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시행령)을 발할 수 있다. ==== 행정부 구성권 ====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정부]]의 각 부서와 기관을 조직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부서나 기관을 만들 수 있고 또는 폐지할수도 있다. 그리고 각 부서와 기관을 책임질 장인 [[장관]]이나 기관장을 임명 할 수 있다. 또한, [[청와대]] 내부의 인사나 조직들도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다. <단,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감사원장,헌법재판소장,대법관,국회에서 선출하는 헌법재판관 및 중앙선거관리위원은 [[대한민국 국회|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 공무원 임면권 ====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무원을 임명한다. === 권한 행사의 방법 === * 국무회의의 심의 :대통령은 그의 권한을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서 행사한다. 대통령은 국정의 기본계획과 정부의 일반정책, 중요한 대외정책, 헌법개정안, 재정에 관한 중요사항, 국회해산 등 일정한 사항에 관해서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제 89조). 국무회의의 심의는 절차상 반드시 필요하지만 대통령은 그 심의결과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 국회의 동의 또는 승인 :대통령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데 국무회의의 심의 외에 국회의 동의나 승인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일정한 조약의 체결과 비준, 선전포고, 국군해외파견, 외국군 국내주류에 대한 국회의 동의(제60조), 일반사면(제79조 제2항), 국무총리(제86조 제1항)와 감사원장(제98조 제2항), 대법원장(제104조 제1항)의 임명에서 국회의 동의, 긴급재정경제처분명령권 및 긴급명령권에 대한 국회의 사후승인(제76조 제3항), 예비비 지출에 대한 차기국회의 승인(제55조 제2항 후단) 등이 그것이다. * 부서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하도록 하고 있다(제82조). 부서(副署)란 대통령의 권한행사에 대한 일종의 제약으로서,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게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 자문 :대통령은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으며(제90조), 평화통일정책의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제92조)를 둘 수 있다. 또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대외정책·군사정책과 국내정책의 수립에 관하여 국무회의의 심의에 앞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둔다(제91조). 이러한 자문기관의 조직·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90조 제3항, 제91조 제3항, 제92조 제2항).<ref>정승재, 앞의 책, 169- 170쪽.</ref> == 사건 == ===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준수요청 조치 사건 === {{위키문헌|2007헌마700}}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조치 사건(2007헌마700)은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등 조치 취소에 대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 결정례이다. ==== 사실관계 ==== 현직 대통령인 청구인이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강연, 특강, 기념사, 대담 등에서 공직선거법상의 선거중립을 해치는 내용의 발언을 거듭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 조치를 취하자 청구인은 위 조치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ref>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45933 {{웨이백|url=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45933 |date=20160324112029 }} 황도수 2008년 분야별 중요판례분석] (2)헌법]</ref> ==== 관련조문 ==== ===== 공직선거법 ===== '''제9조 (공무원의 중립의무 등)''' (1)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 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 결정 요지 ==== 위 법률조항은 선거영역에서의 특별법으로서 일반법인 국가공무원법 조항에 우선하여 적용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법률조항의 행위는 공직자가 공직상 부여되는 정치적 비중과 영향력을 국민 모두에 대하여 봉사하고 책임을 지는 그의 과제와 부합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선거에서의 득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말한다.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는 입법목적과 입법경위, 수범자의 범위 및 선거과정의 특징을 고려할 때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지 않으며, 공명선거의 책무는 우선적으로 국정츼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지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선거활동에 관하여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 사건 법률조항은 단지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만을 제한적으로 금하고 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되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 {{참고|대한민국 헌법 제71조}}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정부]]에서 대통령 직위가 유고 시에 대통령 자리를 대신한 직위를 뜻한다. 이 직위는 [[대한민국 헌법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에 규정되어 있다. === 대통령 권한대행 승계 서열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장관|기획재정부 장관]] #[[대한민국의 교육부 장관|교육부 장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외교부 장관]]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통일부 장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대한민국의 행정안전부 장관|행정안전부 장관]] #[[대한민국의 국가보훈부 장관|국가보훈부 장관]]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한민국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장관|보건복지부 장관]] #[[대한민국의 환경부 장관|환경부 장관]] #[[대한민국의 고용노동부 장관|고용노동부 장관]] #[[대한민국의 여성가족부 장관|여성가족부 장관]]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국토교통부 장관]] #[[대한민국의 해양수산부 장관|해양수산부 장관]] #[[대한민국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중소벤처기업부 장관]]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 * [[대한민국의 부통령]] *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 * [[대한민국 대통령실]]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 [[대한민국의 부총리]] == 각주 == ; 내용주 {{각주|group="주"}} ; 참조주 {{각주|2}} == 참고 문헌 == * [http://m.lawtimes.co.kr/lawPnnn/PnnprContents?serial=2815&kind=2 헌법재판소결정 2007헌마700, 2008.01.17, 법률신문]{{깨진 링크|url=http://m.lawtimes.co.kr/lawPnnn/PnnprContents?serial=2815&kind=2 }} * p 77-120, 정태호,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운동에 관한 행정지도와 기본권구제: 헌재 2008년 1월 17일 2007헌마700 결정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법준수촉구조치의 공권력성 인정의 함의 분석을 중심으로, 憲法學硏究, 2011.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8584 중앙선거관리위가 헌재에 보낸 답변서 뷰스앤뉴스 2007-07-12] *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45933 황도수, 2008년 분야별 중요판례분석 (2) 헌법, 법률신문] {{웨이백|url=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45933 |date=20160324112029 }} *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36555 "대통령은 정치활동 자유보다 선거중립의무 우선” 헌재, 노 대통령 헌법소원 기각, 법률신문, 2008.01.21] {{웨이백|url=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36555 |date=20180310012449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728104|한국의 대통령}} * [https://pa.go.kr/index.jsp 대통령기록관] - 행정안전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3부요인 및 헌법기관장}} {{대한민국의 부총리급 이상의 고위공무원}} {{대한민국의 헌법 기관}} {{전거 통제}}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파이어폭스}} {{소프트웨어 정보 | 이름 = 모질라 파이어폭스 | 로고 = Firefox logo, 2019.svg | 로고크기 = 100px | 화면 = Firefox 89 on Wikipedia article.png | 설명 = [[윈도우 10]]에서의 파이어폭스 89 | 원저자 = [[모질라 재단]] | 개발자 = [[모질라 코퍼레이션]]및 사용자 기여 | 발표일 = [[2002년]] [[9월 23일]] | ver layout = stacked | 최근 버전 = {{Multiple releases |branch1 = 표준 |version1 = {{wikidata|property|reference|edit|Q698|P548=Q2804309|P348}} |date1 = {{시작 날짜와 나이|{{wikidata|qualifier|Q698|P548=Q2804309|P348|P577}}}} |branch2 = 확장<br />지원<br />릴리스 |version2 = {{wikidata|property|reference|edit|Q698|P548=Q104243413|P348}} |date2 = {{시작 날짜와 나이|{{wikidata|qualifier|Q698|P548=Q104243413|P348|P577}}}} }} | 미리보기 버전 = {{Multiple releases |branch1 = 베타 & 개발자 에디션 |version1 = {{wikidata|property|reference|edit|Q698|P548=Q3295609|P348}} |date1 = {{시작 날짜와 나이|{{wikidata|qualifier|Q698|P548=Q3295609|P348|P577}}}} |branch2 = Nightly |version2 = {{wikidata|property|reference|edit|Q698|P548=Q5209391|P348}} |date2 = {{시작 날짜와 나이|{{wikidata|qualifier|Q698|P548=Q5209391|P348|P577}}}} }} | 상태 = 개발 중 | 프로그래밍 언어 = [[C++]], [[자바스크립트]], [[C (프로그래밍 언어)|C]], [[HTML]], [[러스트 (프로그래밍 언어)|러스트]] |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macOS]], [[리눅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 [[iOS]] | 엔진 = [[게코 (레이아웃 엔진)|게코]], [[스파이더몽키]], [[웹킷]] (ios 한정) | 언어 = [https://www.mozilla.or.kr/ko/firefox/all.html 97개 언어] ([[한국어]] 포함) | 종류 = [[웹 브라우저]], [[뉴스 애그리게이터]], [[모바일 브라우저]] | 라이선스 = [[모질라 공용 허가서]] 2.0 | 웹사이트 = [https://www.mozilla.org/ko/firefox/new/ 공식 웹사이트] | 표준 = [[HTML5]], [[종속형 시트|CSS 3]], [[RSS]], [[아톰 (표준)|아톰]] }} '''모질라 파이어폭스'''({{lang|en|Mozilla Firefox}})는 [[모질라 재단]]과 [[모질라 코퍼레이션]]이 개발하는 [[자유 소프트웨어]] [[웹 브라우저]]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리눅스]], [[macOS]],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 그리고 [[iOS]] 및 [[iPadOS]]<ref>[https://support.mozilla.org/ko/kb/install-firefox-your-ipad-iphone-or-ipod iPad, iPhone 또는 iPod에 Firefox 설치하기]</ref>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 브라우저는 2014년 2월 기준,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약 12%~22%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두 번째나 세 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웹 브라우저이다. 모질라에 따르면 전 세계 4억 5천만명 이상의 사용자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이란, 독일, 폴란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웹 브라우저로 각각 55%, 46%, 43%, 41%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웹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게코 (레이아웃 엔진)|게코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며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다운로드 관리자 등이 있다.<ref>{{웹 인용 |제목 = Latest Firefox’s Feature-Pack |url = http://www.techpluto.com/latest-features-of-firefox/ |출판사 = TechPluto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08-14 }}</ref> 그리고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엔진(대부분 지역에선 구글이 기본)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안드로이드 기준. 검색바를 길게 누르면 검색 엔진을 직접 추가할 수 있다.) 제3자가 만든 부가 기능으로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 역사 == 데이브 하얏트와 블레이크 로스는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를 모질라 프로젝트의 실험적인 분파로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넷스케이프]]의 후원에서 비롯된 상업적인 요구와 개발자들의 무분별한 기능 추가가 모질라 브라우저의 효용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모질라 스위트를 비대한 소프트웨어로 보았으며, [[모질라|모질라 스위트]]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이 정제된 브라우저를 만들었다. [[모질라 재단]]은 [[2003년]] [[4월 3일]]에 개발의 초점을 모질라 스위트에서 파이어폭스(당시 피닉스)와 [[모질라 선더버드|선더버드]]로 전환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0년 3월 22일, [[윈도우 모바일]] 버전의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네이티브 프로그램 불허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ref>{{웹 인용 |제목 = Stopping Development for Windows Mobile |url = http://blog.pavlov.net/2010/03/22/stopping-development-for-windows-mobile/ |출판사 = blog.pavlov.net |저자 = |날짜 = 2010-03-22 |확인날짜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325010412/http://blog.pavlov.net/2010/03/22/stopping-development-for-windows-mobile/ |보존날짜 = 2010-03-25 |url-status = dead }}</ref>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여러 번 이름 변경을 겪었다. 원래는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피닉스 테크놀로지(Phoenix Technologies)와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여 이름을 변경하였다. 변경된 이름인 파이어버드(Firebird)는 파이어버드 자유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질라 재단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브라우저의 이름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모질라 파이어버드라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서버 개발자 커뮤니티 측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2004년]] [[2월 9일]] 모질라 파이어폭스(줄여서 파이어폭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2004년]] [[11월 9일]] 파이어폭스 1이 나오기까지 여러 버전이 발표되었다. 모질라 재단은 안정성과 보안 관련 문제점을 수정하여 2005년 11월 29일 첫 번째 주요 업데이트 버전인 파이어폭스 1.5를 출시하였으며, 파이어폭스 1.5.0.12를 끝으로 [[윈도우 95]]에 대한 공식 버전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6년]] [[10월 24일]]에 파이어폭스 2를 발표하였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2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2.0/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06-10-24 |확인날짜 = }}</ref> 이 버전은 개선된 [[탭 브라우징]] 환경과 부가 기능 관리자, 개선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찾기 및 검색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엔진, 세션 복구 기능, 인라인 맞춤법 검사, 최초에 구글이 제공하는 확장 기능<ref>{{웹 인용 |제목 = Google Safe Browsing for Firefox |url = https://www.google.com/tools/firefox/safebrowsing |출판사 = [[구글]]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07-02-05 }}</ref><ref>{{웹 인용 |제목 = Phishing Protection Design Documentation&nbsp;— Background |url = https://wiki.mozilla.org/?title=Phishing_Protection:_Design_Documentation&oldid=46996#Background |출판사 = 모질라 위키 |저자 = 모질라 위키 기여자들 |날짜 = |확인날짜 = 2011-05-26 }}</ref>에 의해 기능이 제공되었고 나중에 프로그램 자체에 기능이 통합<ref>{{웹 인용 |제목 = 모질라 파이어폭스 2 출시 안내서 |url = http://www.mozilla.com/firefox/2.0/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법인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05-26 }}</ref>된 [[피싱]] 방지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2007년]] 겨울에는 파이어폭스 라이브 챗이 론칭되었다. 이는 작동 보증시간과 근무시간 이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이브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오픈파이어|시스템]]을 이용해 사용자가 자원봉사자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ref>{{웹 인용 |제목 = Firefox Support Blog » Blog Archive » Firefox Live Chat launching today |url = http://blog.mozilla.com/sumo/2007/12/28/firefox-live-chat-launching-today/ |출판사 = 모질라 재단 블로그 |저자 = |날짜 = 2007-12-28 |확인날짜 = }}</ref> 파이어폭스 2.0.0.20은 [[윈도우 NT 4.0]], [[윈도우 98]]과 [[윈도우 ME]]에서 수정없이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8년]] [[6월 17일]]에는 34개월의 작업을 끝마치고 수천가지 기능이 개선된 파이어폭스 3을 출시했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3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3.0/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08-06-17 |확인날짜 = 2011-08-18 }}</ref><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3, 6월 17일 정식 출시 |url = http://www.mozilla.or.kr/zine/?p=878 |출판사 = 모질라 한국 커뮤니티 |저자 = |날짜 = 2008-06-12 |확인날짜 = 2011-08-14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515224930/http://www.mozilla.or.kr/zine/?p=878# |보존날짜 = 2010-05-15 |url-status = dead }}</ref> 파이어폭스 3은 웹 페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질라 [[게코 (레이아웃 엔진)|게코]] 레이아웃 엔진 버전 1.9를 사용한다. 이 버전은 많은 버그를 수정하고, 표준 준수성을 향상시켰으며 새로운 웹 [[API]]들을 적용했다.<ref>{{웹 인용 |제목 = Firefox 3 for developers |url = https://developer.mozilla.org/en/Firefox_3_for_developers |출판사 = 모질라 개발센터 |저자 = |날짜 = 2007-07-17 |확인날짜 = 2011-05-2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113072436/https://developer.mozilla.org/en/Firefox_3_for_developers |보존날짜 = 2008-11-13 |url-status = dead }}</ref> 그 밖에 새로 디자인된 다운로드 관리자, 북마크와 방문 기록을 저장하는 새 "Places" 시스템과 각 [[운영 체제]]별로 독립된 [[테마 (컴퓨팅)|테마]]가 [[모질라 파이어폭스#파이어폭스 3 테마|새로운 기능으로 포함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마지막 버전은 3.0.19이다. 파이어폭스 3의 첫 번째 베타 버전은 개발 일정이 늘어지는 중에도 몇 개월 이른 2007년 11월 19일에 나왔고,<ref>{{웹 인용 |제목 = Firefox 3 Beta 1 now available for download |url = https://developer.mozilla.org/devnews/index.php/2007/11/19/firefox-3-beta-1-now-available-for-download/ |출판사 = Mozilla Developer News |저자 = Mike Beltzner |날짜 = |확인날짜 = }}</ref> 이어지는 2008년 봄에 몇 번의 베타 버전이 공개되는 끝에 6월에 최종 버전이 출시되었다.<ref>{{웹 인용 |제목 = Firefox 3 Beta 2 now available for download |url = https://developer.mozilla.org/devnews/index.php/2007/12/18/firefox-3-beta-2-now-available-for-download/ |출판사 = Mozilla Developer News |저자 = Mike Beltzner |날짜 = |확인날짜 = }}</ref> 파이어폭스 3의 코드네임은 그랜 파라디소(Gran Paradiso)이다.<ref>{{웹 인용 |제목 = Gecko 1.9/Firefox 3 ("Gran Paradiso") Planning Meeting, Wednesday Jun 7, 11:00 am |url = http://groups.google.com/group/mozilla.dev.planning/browse_thread/thread/c73f6a1c25e8e7b0/b714ca46975f0109#b714ca46975f0109 |출판사 = Google Groups: mozilla.dev.planning |저자 = Vladimir Vukicevic |날짜 = 2006-06-02 |확인날짜 = }}</ref> 파이어폭스 3은 출시 직후 24시간 동안 800만이 넘는 고유 다운로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ref>{{웹 인용 |제목 = 모질라 파이어폭스 3 다운로드 데이에서 공식 기네스 세계 기록 수립 |url = http://www.mozilla.or.kr/community/blog/889 |출판사 = 모질라 커뮤니티 |저자 = |날짜 = 2008-07-19 |확인날짜 = }}</ref> 2008년 11월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20%를 돌파했다.<ref>{{웹 인용 |제목 = 2008년 11월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url = http://marketshare.hitslink.com/report.aspx?qprid=0&qpcal=1&qptimeframe=M&qpsp=118 |출판사 = [[넷 애플리케이션]]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2011-08-14 }}</ref> 이후 출시된 버전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버전 3.5: [[2009년]] [[6월 30일]]에 출시된 파이어폭스 3.5의 코드네임은 [[시레토코 국립공원|시레토코]](Shiretoko)이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3.5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3.5/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09-06-30 |확인날짜 = }}</ref><ref>{{웹 인용 |제목 = 모질라 파이어폭스 3.5 출시 |url = http://www.mozilla.or.kr/community/blog/923 |출판사 = 모질라 한국 커뮤니티 |저자 = |날짜 = 2009-07-01 |확인날짜 = }}</ref> 개발 초기의 버전 넘버는 3.1이었으나, 후에 베타 4부터 3.5로 변경되었다. * 버전 3.6: [[2010년]] [[1월 21일]]에 출시된 파이어폭스 3.6의 코드네임은 [[나모로카 국립공원|나모로카]](Namoroka)이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3.6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3.6/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10-01-21 |확인날짜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522135347/https://www.mozilla.com/en-US/firefox/3.6/releasenotes/ |보존날짜 = 2010-05-22 |url-status = dead }}</ref><ref>{{뉴스 인용 |제목 = 모질라, 파이어폭스3.6 정식버전 공개 |url = http://www.zdnet.co.kr/Contents/2010/01/22/zdnet20100122103957.htm |출판사 = 지디넷 코리아 |저자 = 임민철 기자 |날짜 = 2010-01-22 |확인날짜 = }}</ref><ref>{{웹 인용 |제목 = Firefox/Namoroka |url = https://wiki.mozilla.org/Firefox/Namoroka |출판사 = 모질라위키 |저자 = |날짜 = 2009-08-08 |확인날짜 = }}</ref> 파이어폭스 3.6은 게코 [[레이아웃 엔진|렌더링 엔진]] 버전 1.9.2를 사용한다. * 4.0: [[2011년]] [[3월 22일]] 파이어폭스 4의 안정판이 공개되었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4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4.0/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11-03-22 |확인날짜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323143835/http://www.mozilla.com/en-US/firefox/4.0/releasenotes/ |보존날짜 = 2011-03-23 |url-status = dead }}</ref> 파이어폭스 4의 코드네임은 [[투무쿠마카이 국립공원|투무쿠마카이]](Tumucumaque)이다.<ref>{{웹 인용 |제목 = Tumucumaque Park |url = http://chelseanovak.wordpress.com/2011/07/08/looking-back-on-mozilla-park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10-11-28 |확인날짜 = }}</ref> 개발 초기의 알파 버전은 3.7을 썼었으나, 베타 버전부터 4.0으로 변경되었다. * 버전 13.0: 새로운 기능이 새 탭과 기본 홈페이지에 도입되었다. 새 탭을 열면 가장 많이 방문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기본 홈페이지(about:home)는 즐겨찾기, 설정, 과거 방문 기록, 다운로드 관리자 등으로 바로가는 링크를 제공한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13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org/en-US/firefox/13.0/releasenot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2012-06-05 |확인날짜 = }}</ref> * 버전 21.0: 새로운 [[모질라서]]가 탑재되었으며, [[2013년]] [[5월 14일]]에 출시된다. * 버전 57.0: 이름이 파이어폭스퀀텀으로 바뀌면서 속도가 향상되었다. === 파이어폭스 모바일 === {{본문|파이어폭스 모바일}} [[2010년]] [[1월 28일]]에는 노키아의 [[마에모]] [[운영 체제]]로서 모바일용인 코드네임 페넥(Fennec)이 나왔다. 모바일 파이어폭스 1.0은 파이어폭스 3.6의 게코 레이아웃과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 === 개발 === [[2011년]] [[4월 13일]]에 새로운 공개형 테스트 채널이 개설되었다. 명칭은 ‘오로라(Aurora)’로, 기존의 비공개형 테스트 채널(나이틀리, Nightly)과 공개형 테스트 채널(베타, Beta)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ref>{{웹 인용 |제목 = New Channels for Firefox Rapid Releases |url = http://blog.mozilla.com/blog/2011/04/13/new-channels-for-firefox-rapid-releases/ |출판사 = 모질라 재단 블로그 |저자 = |날짜 = 2011-04-13 |확인날짜 = }}</ref> 2017년 파이어폭스 및 모질라 재단은 오로라 프로젝트가 파이어폭스 베타(Beta)와 나이틀리(Nightly) 버전(채널)에 향후 흡수 및 중단 계획을 발표하였다.<ref>[참고](모질라 기술블로그) 헥스(hacks) 2017.4.17</ref> 이로써 2017년 6월12일부터 파이어폭스 55버전을 기점으로 나이틀리 빌드가 비공개형 테스트의 주요 개발자 에디션 채널을 담당하게 된다.<ref>[참고](지디넷 - 모질라, 파이어폭스 '오로라' 업데이트 중단 "배포 채널 '나이틀리→오로라→베타'에서 '나이틀리→베타' 체제로 변경")https://zdnet.co.kr/view/?no=20170418092221</ref><ref>[참고](Firefox Browser Developer Edition)https://www.mozilla.org/en-US/firefox/developer/</ref> === 나이틀리 === 나이틀리(Nightly) 채널은 '홈 그로운 파이어폭스'(Home Grown Firefox)로 불리는 애칭에서처럼 브라우저 빌드가 보다 대중화되고 개발자 에디션에 대한 사용자 접근 용이성을 목표로 하는 모질라의 기술력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나이틀리(Nightly)버전은 콘솔(터미널)을 통해 구동되는 방식에서 샌드박스(sandbox)를 통한 강화된 보안 기술 및 디버그 등의 실시간 모니터링과 기술보완의 피드백을 위한 로그 등이 제공되고 있다.<ref>Firefox developer edition - Nightly channel building 91.0a1(2021-07-08)(64bit)</ref> == 주요 특징 == [[파일:Firefox URL Auto Complete.png|섬네일|200px|주소창 자동 완성 기능]] * [[탭 브라우징]] * [[팝업창]] 차단 * 방문한 웹 페이지 기록 저장, 주소창 자동 완성 기능 * 빠른 북마크 저장 * 확장 기능([[파이어폭스 애드온]]) 추가 및 관리 : 확장 기능으로 기본적인 웹 브라우저에 여러 가지 추가 기능을 붙여 사용자 개개인의 편의대로 웹 브라우저를 사용할 수 있다. 너무 많은 확장 기능을 이용하면 웹 브라우저가 느려지는 단점이 있다. * 동적인 테마의 전환 : 테마 기능이 있어 웹 브라우저의 모양을 바꿀 수 있다. 파이어폭스 3.6부터 [[페르소나]]를 자체 지원하여 선택의 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 개인 정보 보호 및 보안 * 폼의 자동 완성 기능 * 빠르고 편리한 사이드바 * 툴바의 검색창 * 책갈피 그룹 * [[캔버스]] 기능을 통해 2D/3D 그래픽 기능 브라우저에 내장 * [[SVG]](Scalable Vector Graphic) 표준 브라우저 내장 기능으로 탑재 * [[CSS|CSS 2]], [[CSS|CSS 3]], [[자바스크립트]] 1.6의 새로운 웹 표준 기능 지원 * 강화되고 빨라진 인터넷 속도 * [[HTML5|HTML 5]]의 비디오 재생 및 음원 재생 지원 (일부) * webRTC,webSocket 지원 * KS X 1001의 한글 채움 문자(0xA4D4) 지원. == 파이어폭스의 기능 == 파이어폭스에서는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통합된 다운로드 관리자, [[단축키]],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 파이어폭스에서 사용자가 확장 기능 및 테마를 맞출 수도 있다. 2010년 5월 기준 모질라는 1억 5000만 개 이상의 부가 기능을 [https://web.archive.org/web/20070630211925/https://addons.mozilla.org/en-US/firefox/ addons.mozilla.org(AMO)]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 파이어폭스는 [[웹 개발자]]들을 위한 에러 콘솔 또는 DCM 검사 또는 파이어버그 부가 기능같은 개발 도구들을 제공한다. === 웹 표준 ===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HTML]], [[XML]], [[XHTML]], [[SVG]] 1.1 (일부), [[종속형 시트#CSS3|CSS3]] (확장 포함, 일부), [[ECMA스크립트|ECMAScript]] ([[자바스크립트]]), [[문서 객체 모델|DOM]], [[MathML]], [[문서 형식 정의|DTD]], [[XSLT]], [[XPath]], [[PNG]], [[APNG]] 이미지 등을 포함한 많은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 쪽의 저장소와 같은 WHATWG 그리고 캔버스 요소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 === 이스터에그 === [[모질라]]의 새 로고를 보면 본래의 회사명 'mozilla'를 일종의 도메인처럼 'moz://a'라 써 놓은 동태인데('i'는 ':'로, 'l' 2개는 '/'로 바꿔었다), 이를 실제 모질라 파이어폭스 도메인 창에 써 보면 최신버전의 Mozilla 선언문으로 이동된다. == 성능 == 2005년 12월, '인터넷 위크'(Internet Week) 지는 기사에서 많은 독자들이 파이어폭스 1.5의 메모리 사용량이 높다고 보고했다.<ref>{{뉴스 인용|last=Finnie |first=Scot |title=Firefox 1.5: Not Ready For Prime Time? |work=InformationWeek |date= 2005-12-08 |url=http://www.informationweek.com/software/opensource/174909795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090624202020/http://www.informationweek.com/news/showArticle.jhtml?articleID=174909795 |archivedate= 2009-06-24 |accessdate= 2007-01-24}}</ref> 모질라 개발자들은 파이어폭스 1.5의 많은 메모리 사용량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새로 도입된 빠른 앞뒤로 기능 (FastBack) 때문이라고 밝혔다.<ref>{{웹 인용|last=Goodger |first=Ben |authorlink=Ben Goodger |title=About the Firefox 'memory leak' |work=MozllaZine weblogs |date= 2006-02-14 |url=http://weblogs.mozillazine.org/ben/archives/009749.html |archiveurl= https://web.archive.org/web/20110717141231/http://weblogs.mozillazine.org/ben/archives/009749.html |archivedate= 2011-07-17 |accessdate=November 17, 2007}}</ref> 메모리 문제의 다른 알려진 문제는 구글 툴바와 애드블록 구버전 같이 잘못 동작하는 확장 기능,<ref>{{웹 인용|url=http://kb.mozillazine.org/?title=Problematic_extensions&oldid=30448 |title=Problematic Extensions |accessdate= 2007-01-24 |author=MozillaZine Knowledge Base contributors |date= 2007-01-19 |publisher=MozillaZine Knowledge Base}}</ref> 구버전의 어도비 아크로뱃 리더같이 잘못 작동하는 플러그인 때문이다.<ref>{{웹 인용|url=http://kb.mozillazine.org/?title=Adobe_Reader&oldid=30451 |title=Adobe Reader |accessdate= 2007-01-24 |author=MozillaZine Knowledge Base contributors |date= 2007-01-17 |publisher=MozillaZine Knowledge Base}}</ref> PC 매거진이 파이어폭스 2, 오페라 9,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의 메모리 사용량을 비교했을 때, 그들은 파이어폭스가 나머지 두 브라우저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pcmag.com/article2/0,2817,1991370,00.asp |title=Which New Browser Is Best: Firefox 2, Internet Explorer 7, or Opera 9? |accessdate=2007-01-24 |date=2006-07-19 |last=Muchmore |first=Michael W. |work=[[PC Magazine]] |archive-date=2008-03-1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317040651/http://www.pcmag.com/article2/0,2817,1991370,00.asp |url-status=dead }}</ref> Softpedia는 파이어폭스 1.5가 다른 브라우저보다 시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는데,<ref>{{웹 인용|url=http://www.softpedia.com/reviews/windows/Mozilla-Firefox-Review-13677.shtml|title=Mozilla Firefox 1.5 Final Review|accessdate=2006-09-22|date=November 30, 2005|last=Muradin|first=Alex|publisher=Softpedia|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1027180757/http://www.softpedia.com/reviews/windows/Mozilla-Firefox-Review-13677.shtml|보존날짜=2006-10-27|url-status=dead}}</ref> 이후의 속도 테스트에서 확인된다.<ref name="speedcmp">{{웹 인용|url=http://www.howtocreate.co.uk/browserSpeed.html#winspeed |title=Browser Speed Comparisons|accessdate= 2007-01-24|last=Wilton-Jones|first=Mark|publisher=How To Create}}</ref> IE6은 윈도우 XP에서 파이어폭스 1.5보다 더 부드럽게 실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구성요소가 시스템 시작시에 이미 로드되었기 때문이다.<!--<ref name="speedcmp"/>-->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시스템 시작시에 파이어폭스의 구성 요소를 불러오는 프리로더가 만들어졌다.<ref>{{웹 인용|url=https://sourceforge.net/projects/ffpreloader/ |title= Firefox Preloader| accessdate= 2007-04-26|publisher=SourceForge}}</ref> PC world와 Zimba가 2006에, 파이어폭스 2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한다고 했다.<ref name="pcworldreview">{{뉴스 인용 |last=Larkin |first=Erik |title=Radically New IE 7 or Updated Mozilla Firefox 2 – Which Browser Is Better? |work=[[PC World]] |date=2006-10-24 |url=http://www.pcworld.com/article/127309-6/radically_new_ie_7_or_updated_mozilla_firefox_2which_browser_is_better.html |accessdate=2007-05-18 |archive-date=2008-09-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913021731/http://www.pcworld.com/article/127309-6/radically_new_ie_7_or_updated_mozilla_firefox_2which_browser_is_better.html }}</ref><ref>{{웹 인용 |last=Dargahi |first=Ross |title=IE 7 vs IE 6 |publisher=Zimbra |date=2006-10-19 |url=http://www.zimbrablog.com/blog/archives/2006/10/ie-7-vs-ie-6.html |accessdate=2007-01-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15025653/http://www.zimbrablog.com/blog/archives/2006/10/ie-7-vs-ie-6.html |보존날짜=2008-06-15 |url-status=dead }}</ref> 파이어폭스 3은 모질라, Cybernet, Browser world가 수행한 실험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오페라 9.50 베타, 사파리 3.1 베타, 파이어폭스 2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했다.<ref>{{뉴스 인용|author=Ryan Paul|title=Firefox 3 goes on a diet, eats less memory than IE and Opera |publisher=Ars Technica |date= 2008-03-17 |url= http://arstechnica.com/open-source/news/2008/03/firefox-3-goes-on-a-diet-eats-less-memory-than-ie-and-opera.ars |accessdate= 2008-06-01}}</ref><ref>{{뉴스 인용 |title=Browser Performance Comparisons |publisher=CyberNet News |date=2008-03-26 |url=http://cybernetnews.com/cybernotes-browser-performance-comparisons/ |accessdate=2008-06-01 |archive-date=2009-06-25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625154908/http://cybernetnews.com/cybernotes-browser-performance-comparisons/ |url-status= }}</ref><ref>{{웹 인용 |title=Firefox 3.0 Beta 4 Vs Opera 9.50 Beta Vs Safari 3.1 Beta: Multiple Sites Opening Test |publisher=The Browser World |date=2008-03-29 |url=http://www.thebrowserworld.com/2008/03/29/firefox-30-beta-4-vs-opera-950-beta-vs-safari-31-beta-multiple-sites-opening-test/ |accessdate=2008-06-0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16073517/http://www.thebrowserworld.com/2008/03/29/firefox-30-beta-4-vs-opera-950-beta-vs-safari-31-beta-multiple-sites-opening-test/ |보존날짜=2008-06-16 |url-status=dead }}</ref> 2009년 중반, Betnews는 파이어폭스 3.5를 벤치마킹했고 이 때 파이어폭스는 윈도우 XP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거의 10배 더 빠르게 작동했다.<ref name="betanews">{{뉴스 인용|author=Scott M. Fulton, III |title=The final score: Firefox 3.5 performs at 251% the speed of 3.0 |date= 2009-07-01 |publisher=Betanews |url= http://www.betanews.com/article/The-final-score-Firefox-35-performs-at-251-the-speed-of-30/1246470925 |accessdate= 2010-05-04}}</ref> 2010년 1월 Lifehacker는 파이어폭스 3.5, 3.6, 구글 크롬 4(안정 버전, 개발 버전), 사파라 4, 오페라(10.1 안정, 10.5 프리알파)의 성능을 비교했다. Lifehacker는 브라우저들이 페이지 로딩을 시작해서 마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시스템 시작 직후 및 한번 구동된 이후 둘 다) 측정을 했고, 탭 9개를 한번에 띄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질라의 Dromaeo 온라인 수트(애플의 SunSpider와 구글의 V8 테스트를 수행한 수트)를 이용해 자바스크립트 속도를 시험했고, 윈도우 7의 프로세스 매니저를 이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 3.5와 3.6은 시스템 시작 시에 각각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빠른 브라우저이고, 탭 9개를 여는 데에는 3.5가 세번째, 3.6이 여섯번 째로 빠른 브라우저, 3.5는 여섯 번째, 3.6은 다섯 번 째로 자바스크립트 테스트에서 빠른 브라우저라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또한 파이어폭스 3.5가 메모리 사용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은 파이어폭스 3.5라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title=Browser Speed Tests: Firefox 3.6, Chrome 4, Opera 10.5, and Extensions |publisher=Lifehacker |date=2010-01-26 |url=http://lifehacker.com/5457242/browser-speed-tests-firefox-36-chrome-4-opera-105-and-extensions |accessdate=2010-05-04 |archive-date=2010-06-0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609205138/http://lifehacker.com/5457242/browser-speed-tests-firefox-36-chrome-4-opera-105-and-extensions |url-status= }}</ref> 2012년 2월, 톰의 하드웨어는 윈도우 7에서 크롬 17, 파이어폭스 10, 인터넷 익스플로러 9, 오페라 11.61, 사파리 5.1.2의 성능을 시험했다. 톰의 하드웨어는 테스트를 성능, 효율성, 안정성, 적합성의 네 범주로 요약했다. 성능 범주에서 그들은 HTML5, Java, 자바스크립트, DOM, CSS3, 플래시, 실버라이트, WebGL, 시작 시간과 로드 시간을 테스트했다. 성능 테스트에서 대부분의 범주에서 받아들일 만 하고 강력하다고 보여졌고, HTML5, HTML5 하드웨어 가속, 자바 부분에서 승리했으며 단지 CSS 성능에서만 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효율성 테스트에서, Tom's Hardware는 메모리 관리와 사용량을 테스트했다. 이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은 메모리 사용으로 동작하는 데에 있어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브라우저였다. 안정성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절한 페이지 로드에서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범주인 적합성에서, 파이어폭스는 자바스크립트와 HTML5에 강력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이 판별되었다. 결론적으로, Tom's Hardware는 파이어폭스를 윈도우 7을 위한 최고의 브라우저로 꼽았는데, 구글 크롬에 비해서 조금 더 좋은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www.tomshardware.com/reviews/chrome-17-firefox-10-ubuntu,3129-17.html |title=Benchmark Analysis: Windows 7 and Ubuntu 11.10 |publisher=Tom's Hardware |author=Adam Overa |date= 2012-02-21 |accessdate= 2012-04-08}}</ref> 2013년 6월, Tom's Hardware는 다시 파이어폭스 22, 크롬 27, 오페라 12,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의 성능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는 대기시간, 자바스크립트 수행 시간, HTML5/CSS3 랜더링, 하드웨어 가속 성능을 측정하는 성능 분야에서 다른 브라우저에 비해서 조금 성능이 좋았다. 파이어폭스는 메모리 효율성, 안정성, 보안, 표준 적합성과 같은 비성능 분야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Toms's Hardware는 성능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를 안전한 승자로 결론지었다. <ref name=Overa13>{{뉴스 인용|last=Overa |first=Adam |title=Chrome 27, Firefox 22, IE10, And Opera Next, Benchmarked |newspaper=Tom's Hardware |date= 2013-06-30 |url=http://www.tomshardware.com/reviews/chrome-27-firefox-21-opera-next,3534-12.html |accessdate= 2014-05-02}}</ref>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ref name=Brinkmann14>{{뉴스 인용|last=Brinkmann |first=Martin |title=Chrome 34, Firefox 29, Internet Explorer 11: Memory Use 2014 |newspaper=gHacks Technology News |date= 2014-01-02 |url=http://www.ghacks.net/2014/01/02/chrome-34-firefox-29-internet-explorer-11-memory-use-2014/ |accessdate= 2014-05-02}}</ref> == 라이선스 == 파이어폭스의 소스 코드는 자유 소프트웨어이고 대부분의 소스는 모질라 공용 라이선스(MPL)로 배포된다.<ref name=Licensing-Policies>{{인용|url=http://www.mozilla.org/foundation/licensing.html |title=Mozilla Licensing Policies |publisher=mozilla.org |accessdate= 2012-01-05}}</ref> 이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를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결과적으로 파이어폭스로부터 몇몇 대중적인 프로그램, Flock, Miro, Iceweasel, Songbird와 같은 프로그램이 파생되었다. 과거에는 파이어폭스는 단지 MPL 버전 1.1로만 배포되었다.<ref name="mozrelicensing">{{웹 인용|url=http://www-archive.mozilla.org/MPL/relicensing-faq.html |title=Mozilla Relicensing FAQ |accessdate= 2007-01-24 |publisher=Mozilla}}</ref> 그래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라이선스가 허가한 약한 카피래프트에 대해 비판했다. 게다가 MPL 1.1로만 라이선스된 코드는 법적으로 GNU 일반 공용 허가서(GPL)과 호환되지 않는다.<ref>{{웹 인용|url=https://www.gnu.org/philosophy/netscape-npl.html |title=On the Netscape Public License |accessdate= 2007-01-24 |last=Stallman |first=Richard |authorlink=Richard Stallman |publisher=[[자유 소프트웨어 재단]]}}</ref><ref>{{웹 인용|url=https://www.gnu.org/licenses/license-list.html#MPL |title=Various Licenses and Comments about Them. Mozilla Public License (MPL) |accessdate= 2007-01-24 |publisher=[[자유 소프트웨어 재단]]}}</ref> 이러한 관심 때문에, 모질라는 파이어폭스 대부분을 MPL 1.1, GPL 2.0, LGPL 2.1로 삼중 라이선스로 배포하게 된다. 이 재라이선싱 때문에 개발자들은 용도에 따라 라이선스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cluding the possibility of proprietary derivative works) if they chose the MPL.<ref name="mozrelicensing"/> However, on January 3, 2012, Mozilla released the GPL-compatible MPL 2.0,<ref>{{웹 인용 |title=Announcing Version 2.0 of the Mozilla Public License |publisher=[[Mozilla]] |date=2012-01-03 |url=https://mpl.mozilla.org/2012/01/03/announcing-mpl-2-0 |accessdate=2012-06-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306113159/http://mpl.mozilla.org/2012/01/03/announcing-mpl-2-0/ |보존날짜=2012-03-06 |url-status=dead }}</ref> and with the release of Firefox 13 on June 5, 2012, Mozilla used it to replace the tri-licensing scheme.<ref>{{뉴스 인용|title=Firefox 13 released – now using SPDY by default |publisher=The H - Open |url= http://www.h-online.com/open/news/item/Firefox-13-released-now-using-SPDY-by-default-1605039.html |accessdate= 2012-06-06}}</ref> == 비판과 문제점 == === 구동 시간 === 대부분 파이어폭스가 [[구글 크롬]]이나 [[오페라 (웹 브라우저)|오페라]]보다 최초 로딩(Cold Start) 시간, 재 시작(Warm Start) 시간이 느리다는 지적을 한다. 다른 [[게코 (레이아웃 엔진)|게코]] 기반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는 [[K-멜레온]] 같은 브라우저는 플랫폼에 종속적인 코드를 사용하여 파이어폭스보다 빠르게 불러들인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5에서 악화되었으며 파이어폭스 3.6에서 많이 개선이 되었다.<ref>{{웹 인용 |제목 = Mozilla Firefox Release Notes |url = http://www.mozilla.com/en-US/firefox/releases/ |출판사 = 모질라 |저자 = |날짜 = |확인날짜 = }}</ref> === 메모리 사용량 === 2006년 이전까지는 파이어폭스가 빠른 앞으로/뒤로 기능, 잘못 동작하는 부가 기능과 플러그인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의 특성인 하나의 프로세서가 많은 페이지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있음에 따른 문제도 있다. 파이어폭스를 포함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는 프로세서 하나가 탭을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아주 많은 프로세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존에 여러 개의 프로세서로 관리되던 것이 하나의 프로세서로 합쳐짐에 따른 착시적인 현상'''으로, 멀티 탭 브라우징과 메모리 사용량은 관계가 없다. 단적인 예로 멀티 탭 브라우저라도 구글 크롬과 같이 탭마다 개별 프로세서를 생성하는 경우 그런 메모리가 비대한 프로세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점차적인 개선으로 인해 파이어폭스 5에서 메모리 관리 기능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특히 다중 탭을 사용하는 경우 뛰어난 메모리 관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ref>{{웹 인용 |제목 = Firefox 5 Benchmarked – Faster And Better Than Ever Before! |url = http://digitizor.com/2011/06/21/firefox-5-benchmark/ |출판사 = Digitizor Media & Web |저자 = |날짜 = 2011-06-21 |확인날짜 = |archive-date = 2011-07-21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721030830/http://digitizor.com/2011/06/21/firefox-5-benchmark/ }}</ref> 그리고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ref name=Brinkmann14/> === 대한민국 웹사이트에서의 호환성 === {{본문|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 대한민국에서는 먼저 확산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맞추어 웹 페이지가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액티브X|ActiveX]]를 사용한 부가 서비스(보안, 저작권보호, 게임 런처 등)를 이용하기 힘들다.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2004년 [http://forums.mozilla.or.kr/viewforum.php?f=9 웹 표준 포럼] {{웨이백|url=http://forums.mozilla.or.kr/viewforum.php?f=9 |date=20170630034611 }}을 개설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토론 및 홍보 활동을 지속하였다. 운영자인 [[윤석찬]]의 주도로 반 [[액티브X]] 캠페인을 진행하며, 매년 웹 표준 가이드를 무료 제공하고, [[김기창 (법학자)|김기창]] 교수와 함께 [[오픈웹|오픈 웹]] 소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9년 12월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알라딘]], 2010년 1월 [[YES24]] 등 대한민국 내 유명 웹 기반 북스토어에서 오픈 웹을 기반으로 하는 파이어폭스 및 사파리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에 결제 가능한 서비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2010년 2월 YES24에서는 전자지불(PG)사의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호환성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렌더링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https://web.archive.org/web/20100831121539/https://addons.mozilla.org/en-US/firefox/addon/92382/ IE Tab 2], [https://web.archive.org/web/20101205022405/https://addons.mozilla.org/en-US/firefox/addon/10909/ Coral IE Tab]과 같은 부가 기능이 등장했고, 이 부가 기능을 설치하면 ActiveX나 전자 결제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제시한 부가 기능들이 파이어폭스의 창 안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어 있는 운영 체제에서만 작동하고 [[리눅스]], [[매킨토시]]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위의 부가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영구적인 해결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웹 표준 기반 [[HTML5]] 암호화 및 인증서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 [[W3C]] 웹 크립토그래피 API를 제안하여, 표준 활동이 시작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20323121226|제목=ZDNet코리아|성=임|이름=민철|날짜=2012-03-23|뉴스=[단독]"액티브X 없이 공인인증서 쓴다"|출판사=|확인날짜=}}</ref> <!--=== 플러그인 지원 === 비록 모질라 파이어폭스가 [[XPCOM]]에 기반한 독자적인 플러그인을 지원하지만, ActiveX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그래서 ActiveX 컨트롤을 주로 사용하는 웹 사이트를 다닐 수 없다. 이를 위해서 모질라에서 ActiveX 플러그인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존재한다.<ref>[http://www.iol.ie/~locka/mozilla/plugin.htm Mozilla ActiveX Plug-in]</ref>--> === 파이어폭스와 한국어 위키백과 ===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유니코드 지원 문제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초기의 한국어 위키백과의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미디어위키 소프트웨어의 개선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많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운영 체제 기반의 사용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어폭스는 일부 위키백과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브라우저로 [https://web.archive.org/web/20110807075748/https://addons.mozilla.org/en-US/firefox/addon/locationbar%C2%B2/ Locationbar²] 애드온은 주소창에서 유니코드가 글자로 보이지 않고 코드로 보이는 단점을 제거하여 위키백과 편집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이와 같은 확장 기능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코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에서 개선되어 유니코드를 글자 그대로 표현한다. === 한글 입력 문제 === [[입력기]]에 의존한 파이어폭스는 사용하는 한글에 대한 키 입력 이벤트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ref>[https://bugzilla.mozilla.org/show_bug.cgi?id=354358 Bug 354358 - Key events via Korean IME not available]</ref>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MS 윈도우]] 사용자는 한글 입력이 무시된다. 일례로 위키백과에서는 검색의 자동완성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 질의어로 "위키백과"를 입력하는 동안 반응이 없으며 "위키백과 "와 같이 인식가능한 빈 공간이나 알파벳 등이 입력될 때 반응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웹 개발자는 다른 트릭을 써서 해결하고 있다.<ref>[https://bugzilla.mozilla.org/attachment.cgi?id=240567&action=edit Sample trick to avoid this bug]</ref> === 동기화 데이터가 사라지는 현상 === 파이어폭스의 동기화 서비스는 저장시킨 동기화 데이터가 아무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북마크 데이터를 동기화 기능으로 저장해둬도 시간이 지나면 동기화 로그인을 했을 때 데이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기타 문제점 === 기본 암호를 정하지 않는 이상, 설정에서 어떤 보안장치도 없이 저장된 암호를 볼 수 있다. == 채널 빌드 == 모질라 재단은 'Beta', 'Developer'(전 aurora), 'Nightly' 채널 등의 파이어폭스 개발자 빌드를 지원한다. 2015년 11월 기준으로, 파이어폭스 43이 Beta 채널에, 파이어폭스 44이 Developer 채널에, 파이어폭스 45가 Nightly 채널에 있다. === 릴리즈 프로세스=== 파이어폭스는 나이틀리 버전과 그 브렌치(branch)인 베타 버전 그리고 또다시 그 브렌치(branch)인 정식버전 순으로 어어지는 타임라인을 갖는 [[트레인 모델]](Train Model)로 불리는 지속성을 갖는 실용적인 릴리즈 프로세스를 가동하고 있다.<ref>[참고](파이어폭스 위키-Train Model OTA Branch)https://wiki.mozilla.org/Train_Model_OTA_Branch</ref><ref>[참고](파이어폭스 위키-The Firefox release process)https://wiki.mozilla.org/Release_Management/Release_Process</ref> === 모바일 === [[USB 플래시 드라이브]]같은 휴대용 기기에서 설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휴대용 버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PortableApps.com에서는 [http://portableapps.com/apps/internet/firefox_portable/localization 파이어폭스의 휴대용 버전]을 제공한다. === 확장 지원(ESR) === 확장 지원 버전(Extended Support Release, ESR)은 대량으로 설치하는 기업 등을 위한 버전으로, 일반 정기 출시 버전과 달리 일 년 단위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성능 향상을 하면서 그 일 년 동안에는 정기적이고 보다 장기적으로 보안 갱신을 유지하는 [[LTS]] 의미도 갖는다. === 64비트 === {| class="wikitable" |- ! 운영 체제 !! 64비트 지원 유무 |- | 윈도우 || 지원함<ref>37.0 beta 2 버전부터 '''베타 버전'''만 지원되고 있음. 39 버전까지는 정식 버전은 미지원.</ref> |- | 맥 OS || 지원함 |- | 리눅스 || 지원함 |} === 빌드 ===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MS윈도우에서의 빌드시 [[비주얼스튜디오]]에서 [[크로미엄 (웹 브라우저)|크로미움]]과는 다르게 워크로드(Workloads) [[C++]] 리소스 설정에서 테스크탑개발(Desktop development)뿐만아니라 게임개발(Game development) 자원을 요구하지만 개별구성요소(Individual components)에서는 [[액티브 템플릿 라이브러리|ATL]]만 요구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파운데이션 클래스 라이브러리|MFC]]라이브러리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ref>[참고](크로미움 구글저장소-Checking out and Building Chromium for Windows)https://chromium.googlesource.com/chromium/src/+/refs/heads/main/docs/windows_build_instructions.md</ref><ref>[참고](마이크로소프트 -MFC 및 ATL)https://docs.microsoft.com/ko-kr/cpp/mfc/mfc-and-atl?view=msvc-160</ref><ref>[참고](모질라 - 파이어폭스,Building Firefox On Windows)https://firefox-source-docs.mozilla.org/setup/windows_build.html</ref> == 파이어폭스 퀀텀 == {| class="wikitable" |- |align='center'|[[파일:Ubuntu20LT firefox nightly91 rect79.png|400px]] |- | (예시) 파이어폭스 나이틀리(Nightly) 91 (퀀텀 엔진) , 시스템테마(자동) |} 2017년 11월에 출시된 Firefox 57은 [[서보 (레이아웃 엔진)|서보]] 구성 요소가 활성화된 초기 버전으로 잘알려져있다. Mozilla는 이것을 '파이어 폭스 퀀텀'(firefox quantum)이라고 명명했다.<ref>[참고](Firefox Introducing the New Firefox: Firefox Quantum ,calendar November 14, 2017 author Mark Mayo)https://blog.mozilla.org/en/mozilla/introducing-firefox-quantum/?utm_source=mozilla.org-firefox-browsers-quantum&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seo-quantum&utm_content=hero&entrypoint=mozilla.org-firefox-browsers-quantum</ref> 이후 퀀텀은 [[러스트]](Rust)와 함께 게코 엔진 및 파이어폭스의 핵심 구성요소이자 기본 레이어를 이루고 있다. 2021년 6월1일 파이어폭스 (퀀텀) 89.0 버전 릴리즈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한 CSS 병렬코어워킹이 구현된 [[Stylo]]<ref>[참고]( Inside a super fast CSS engine: Quantum CSS (aka Stylo) By Lin Clark ,Posted on August 22, 2017 in Code Cartoons, CSS, Featured Article, Firefox Nightly, Quantum, and Servo)https://hacks.mozilla.org/2017/08/inside-a-super-fast-css-engine-quantum-css-aka-stylo/</ref> 및 저전력 소비기술등의 [[게코 (소프트웨어)|게코]](Gecko) 최적화 기술의 결정체를 표현하듯이 디자인면에서도 영감을 주는 플로우팅 탭(floating tab)등을 선보였다. 이는 사용자 경험과 성능 양 측면에서 미래기술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지속적 개선의 작업물로 평가받을수있다.<ref>[참고](Firefox Release Notes-Version 89.0, first offered to Release channel users on June 1, 2021)https://www.mozilla.org/en-US/firefox/89.0/releasenotes/</ref> ==콘솔== 파이어폭스(Firefox)의 콘솔 터미널은 개발자 도구의 하나로 제공되며 디버그(debug)나 트레이서(tracer)등의 로그(log) 기능등에서 유용하다. 콘솔 창 오픈 단축키는 Ctrl + Shift + K를 제공한다. == 위키백과 시각편집기와의 관계 == 위키백과 베타 중 시각편집기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브라우저이다. == 스크린샷 == === 버전별 스크린샷 === <gallery> 파일:Firefox_1_0_ko.png|파이어폭스 1 파일:Firefox_1_5_ko.png|파이어폭스 1.5 파일:Firefox_ko.png|파이어폭스 2 파일:Firefox_3_ko.png|파이어폭스 3 파일:Firefox 4.0 MacOS 10.6.6 ko.png|파이어폭스 4 파일:Mozilla Firefox 5 on Ubuntu 11.04 ko wiki.png|파이어폭스 5 파일:Mozila Firefox 6.0 on Ubuntu 11.04 ko wiki.png|파이어폭스 6 </gallery> === 파이어폭스 3 테마 === 파이어폭스 3의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래에 보이는 네 개의 스크린샷이 각 운영 체제에서의 기본 인터페이스이다. {| class="toccolours" style="border-collapse:collapse;margin:0 auto;text-align:center;" border="1" |- | align="center" valign="top" style="width:33%;"|[[파일:Firefox 3 Strata Aero.png|350px]]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비스타]] "Strata" 비주얼 스타일. | align="center" valign="top" style="width:33%;"|[[파일:Firefox 3 Strata XP.png|350px]]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XP]] "Strata" 비주얼 스타일. |- | align="center" valign="top" style="width:33%;"|[[파일:Firefox 3 Firelight.png|350px]] [[Mac OS X]] "Firelight" 비주얼 스타일. | align="center" valign="top" style="width:33%;"|[[파일:Firefox 3 Tango Blubuntu.png|350px]] [[우분투 (운영 체제)|우분투]]에서의 [[리눅스]] "Tango" 테마. |} == 파이어폭스 로고 == 파이이폭스 로고에 대한 역사적인 디자인 리소스뿐만 아니라 현재 로고 등 다양한 자료가 모질라 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ref>https://www.mozilla.org/en-US/styleguide/identity/firefox-family/overview/</ref> <!-- 파이이폭스 로고 디자인 리소스의 공식사이트<ref>https://www.mozilla.org/en-US/styleguide/identity/firefox-family/overview/</ref> --> ==브라우저 에디터== [[HTML5]]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의 특성상 <contenteditable>을 지원함으로 Data URI인 'data:text/html'을 통해서 편집기 구현이 가능하며 또한 보안 폴터인 다운로드 폴더에 저장이 가능하다. 다음은 HTML5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를 간단히 편집기로 사용하는 주소창에서의 명령어 집합을 보여준다.<ref>(MDN 모질라-HTML Demo: contenteditable)https://developer.mozilla.org/ko/docs/Web/HTML/Global_attributes/contenteditable</ref><ref>(coderwall - One line browser notepad)https://coderwall.com/p/lhsrcq/one-line-browser-notepad</ref> data:text/html , <html contenteditable> 추가 기능으로 인스펙터(Inspector,단축키 crtl+shift+c)는 소스코드 편집(Edit as HTML)기능을 브라우저 에디터상에서도 지원한다. 이러한 개발자 도구들(web developer tools)은 브라우저 에디터가 안정된 웹에디터(Web disign editor)나 리치텍스트(rich text editor)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모질라서== [[모질라서]](''The Book of Mozilla'')는 [[이스터에그]]의 한종류로 성경의 기술양식을 취하고 있는 다소 서사적인 맥락의 표현 구절들의 모음이다. == 같이 보기 == * [[웹 브라우저 목록]] * [[모질라]] * [[모질라서]] * [[게코 (레이아웃 엔진)|게코]] * [[GNU 아이스위즐]] == 각주 == {{각주|2}}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ko}} {{공식 웹사이트|http://www.mozilla.or.kr/ko/firefox/new/}} * {{언어링크|en}} {{공식 웹사이트|https://www.mozilla.org/products/firefox/}} * {{언어링크|ko}} [http://firefoxinside.tistory.com/ 파이어폭스 인사이드 (파이어폭스 팬 사이트)] * {{언어링크|ko}} [http://forums.mozilla.or.kr/ 모질라 한국 커뮤니티] * {{언어링크|en}} [http://gs.statcounter.com/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 {{dmoz|Computers/Software/Internet/Clients/WWW/Browsers/Firefox}} === 관련 웹사이트 === * [https://bugzilla.mozilla.org 버그질라] : 모질라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모든 버그를 접수하여 처리하는 곳이다. 한국 모질라 포럼에서 버그를 대신해서 버그질라에 전달하기도 하지만 체계적인 버그 보고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보고 자체의 신뢰성이 떨어지며, 사용자가 버그를 버그질라에 직접 보고하는 경우 문제를 더욱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 [https://web.archive.org/web/20100424025943/http://www.babelzilla.org/index.php 바벨질라] : 영어로 된 확장 기능을 한글화하기 위해 누구나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트이다. 확장 기능의 번역결과가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빠르고 오역을 최소화해 한글화할 수 있다. 그리고 [https://web.archive.org/web/20110115111353/http://www.babelzilla.org/forum/index.php?showforum=99 바벨질라 한국 포럼]이 운영되고 있어서 한글화와 관련 번역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모질라 프로젝트}} {{웹 브라우저}} {{전거 통제}} [[분류:파이어폭스| ]] [[분류:MacOS 웹 브라우저]] [[분류:POSIX 웹 브라우저]] [[분류:윈도우 웹 브라우저]] [[분류:뉴스 애그리게이터]]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2002년 소프트웨어]] [[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모질라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분류:FTP 클라이언트]] [[분류: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안드로이드 웹 브라우저]] [[분류:IOS 웹 브라우저]] [[분류:자유 웹 브라우저]] [[분류:모질라]] [[분류:IPadOS 웹 브라우저]] [[분류:크로스 플랫폼 웹 브라우저]] [[분류:OS/2 웹 브라우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Infobox video game |title = 록 밴드 |image = |caption = |developer = [[하모닉스 뮤직 시스템즈]] (Xbox 360/PS3)<br />[[Pi Studios]] (PS2/Wii/) |publisher = [[MTV|MTV 게임스]] |designer = Greg LoPiccolo, Rob Kay, Dan Teasdale |engine = |series = [[록 밴드]] |released = '''Xbox 360'''<br />{{vgrelease|NA|2007년 11월 20일<ref name="gamespy-preview">{{웹 인용| url = http://xbox360.gamespy.com/xbox-360/harmonix-music-project/828392p1.html | title = ''Rock Band'' Preview | publisher = [[GameSpy]] | first = Sal | last = Accardo | date = October 18, 2007 | accessdate = 2008-07-24}}</ref>|EU|2008년 5월 23일<ref name="Gamers Daily News">{{웹 인용|url=http://www.gamersdailynews.com/story-4320-Rock-Band-Price-Cut-for-Europe-UK.html|title=''Rock Band Price Cut for Europe, UK''|author=Rick, Christopher|date=2008년 9월 8일|publisher=Gamers Daily News|accessdate=2008-09-15|url-status=dead|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929214326/http://www.gamersdailynews.com/story-4320-Rock-Band-Price-Cut-for-Europe-UK.html|archivedate=2008년 9월 29일}}</ref>|AUS|2008년 11월 7일<ref name="au release">{{웹 인용 | url = http://xbox360.ign.com/articles/911/911920p1.html | title = EA Finally Sets A Date For Rock Band In Australia | publisher = IGN | first = Narayan | last = Pattison | date = 2008년 9월 21일 | accessdate = 2008-09-21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216124704/http://xbox360.ign.com/articles/911/911920p1.html | 보존날짜 = 2008년 12월 16일 | url-status = dead }}</ref>}}'''PlayStation 3'''<br />{{vgrelease|NA|2007년 11월 20일<ref name="gamespy-preview"/>|EU|2008년 9월 12일<ref name="Gamers Daily News"/>|AUS|2008년 11월 7일<ref name="au release"/>}}'''PlayStation 2'''<br />{{vgrelease|NA|2007년 12월 17일<ref name="OfficialReleaseDate">{{웹 인용| url = http://www.rockband.com/news/pr/534 |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006224242/http://www.rockband.com/news/pr/534 | archivedate = 2008-10-06 | title = MTV Games and Harmonix Unveil Set List for ''Rock Band'' | publisher = [[하모닉스 뮤직 시스템즈]] | date = 2007년 10월 29일 | accessdate = 2008-07-24}}</ref>|EU|2008년 9월 12일<ref name="Gamers Daily News"/>|AUS|2008년 11월 7일<ref name="au release"/>}}'''Wii'''<br />{{vgrelease|NA|2008년 6월 22일<ref name="wii release">{{웹 인용 |url=http://www.next-gen.biz/news/rock-band-officially-rocking-wii |title=Rock Band Officially Rocking Wii |publisher=Next Generation |date=March 24, 2008 |accessdate=2008-03-27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30115090812/http://www.next-gen.biz/news/rock-band-officially-rocking-wii |보존날짜=2013-01-15 |url-status=dead }}</ref>|EU|2008년 9월 12일<ref name="Gamers Daily News"/>|AUS|2008년 11월 7일<ref name="au release"/>}} |genre = [[리듬 게임]] |modes = [[일인용 비디오 게임]], [[다인용 비디오 게임]] |platforms = [[엑스박스 360]]<br />[[플레이스테이션 3]]<br />[[플레이스테이션 2]]<br />[[Wii]]<ref name="GamePro">{{웹 인용|url=http://www.gamepro.com/news.cfm?article_id=159348|title=''Rock Band'' Page |author=Snow, Blake|date=2008년 2월 1일|publisher=[[게임프로]]|accessdate=2008-03-31|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204045642/http://www.gamepro.com/news.cfm?article_id=159348|archivedate=2008-02-04}}</ref> }} 《'''록 밴드'''》(Rock Band)은 하모닉스 뮤직 시스템이 개발해, EA 및 MTV 게임스가 출판하는 [[음악 게임]]이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공식 웹사이트}} * [https://web.archive.org/web/20081020210645/http://www.rockbandstore.com/ Official ''Rock Band Store'' website] {{전거 통제}} {{토막글|비디오 게임}} [[분류:2007년 비디오 게임]] [[분류:음악 게임]] [[분류: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 [[분류:플레이스테이션 3 게임]] [[분류:Wii 게임]] [[분류:엑스박스 360 게임]] [[분류:협동 비디오 게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5-07-28}} {{악기 정보 | 이름 = 베이스 기타 | 별칭 = 베이스, 베이스 기타, 일렉 베이스 | 그림 = MartinEB18front-1.jpg | 그림설명 = Martin EB18 베이스 기타의 모습. | 배경 = 현악 | 분류 = | 호른보스텔_작스 = 321.322 | 발명가 = Paul Tutmarc, Leo Fender | 발전 = 1930년대 | 음역 = [[파일:Range contrabass.png|130px|가운데]]<div style="text-align: center;">(4현 베이스)</div> | 관련 = * [[전기 기타]] * [[콘트라베이스]] * [[어쿠스틱 베이스 기타]] }} '''베이스 기타'''({{llang|en|Bass Guitar}}, {{문화어|바스기타}}), 또는 '''일렉 베이스'''는 [[현악기]]의 하나로, 보통 4개의 줄을 가지고 있으나, 5현, 6현, 그 이상도 있다. [[전기 기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줄이 굵고 낮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다. 종류에 따라 프레시전 베이스, 재즈 베이스, 스타인버거 타입, 프렛레스 타입, 어쿠스틱 베이스 등이 있다. 취향에 따라 손가락, 또는 피크로 친다. == 구조 == 베이스는 크게 헤드와 넥, 바디로 나뉘어 있다. 헤드는 줄이 감기는 줄감개, 넥 부분의 너트와 줄감개 사이에서 줄을 고정하는 스트링가이드로 이루어져 있다. 줄감개는 줄의 팽팽함을 조절하는 헤드머신과 연결되어있어 튜닝 시 이용된다. 스트링 가이드는 종류에 따라 없는 경우도 있다. 넥은 헤드와 바디 사이에 위치한 부분으로 운지하는 부분이다. 줄들 사이사이에 운지할 수 있도록 줄과 닿는 프렛이 위치하고 있다. 일부 프렛과 프렛 사이에는 포지션마크가 있어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다. 너트는 헤드에서 넥으로 넘어오는 부분에 위치하는데 줄 간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디는 줄에 관계되는 부분으로 브릿지와 픽업이 있고, 출력을 조절하는 볼륨노브와 톤노브가 있다. 볼륨 노브가 2개인 경우 위치에 따라 프론트볼륨 노브와 리어볼륨 노브로 나뉘는 경우도 있다. 액티브와 패시브 전환이 가능한 베이스의 경우 패시브/액티브 전환 스위치도 같이 존재한다. 브릿지는 뒤쪽에서 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픽업은 현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꿔주는 부분인데 핑거링 주법을 사용할 때는 엄지를 올려놓게 된다. 재즈 베이스와 같이 픽업이 두 개로 나뉜 경우 헤드에 가까운 쪽부터 먼 쪽까지 각각 프론트 픽업, 리어 픽업이라고 한다. 그밖에 어깨끈(스트랩)을 고정하는 스트랩핀과 케이블을 연결하는 아웃풋잭, 줄의 끝부분이 고정되는 테일피스가 있다. 피크로부터 바디가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피크가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 특징 ==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가 박자 맞추기를 담당하는 것처럼 밴드악기에서 박자를 담당하는 악기이다. 또한 베이스 기타는 음의 고저를 운지할 수 있음에도 합주할 때에는 드럼의 박자를 이끄는 리듬악기에 가깝기 때문에 박자감이 매우 중요하다. 음의 위치는 통기타와 일렉기타의 위쪽 4현과 동일하다. 또한 무게도 엄청나다. 일렉기타보다 1kg정도 더 무겁다. == 종류 == === 프레시젼 베이스/재즈 베이스 === 픽업의 배열에 따라 나뉘는데 프레시전 베이스는 험버커 픽업, 즉 1,2번/3,4번줄의 픽업이 앞뒤로 바로 붙어있다. 때문에 볼륨 노브가 하나뿐이며 재즈베이스에 비해 다소 두껍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재즈 베이스는 이와 달리 픽업이 프런트 픽업과 리어 픽업으로 나뉘어 있으며 따라서 볼륨 노브 또한 2개이다. 두개의 픽업이 있기에 다양한 톤을 연출할 수 있다. === 헤드리스 타입 === 헤드리스 타입이란 스타인버거사에서 나온 베이스를 가리키는 말로 헤드가 없는 특징을 가진다.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이 몹시 뛰어나다. 튜닝은 브릿지 쪽에서 하는데 튜닝할 때 힘이 적게 들어간다는 장점이 있다. === 프렛리스 타입 === 말그대로 프렛이 없는 베이스를 일컫는다. 프렛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용자가 숙련돼야 하며 슬라이딩을 할 때에 몹시 부드럽다. 하지만 프렛이 없기에 명확한 음을 내기 힘들다는 단점을 지닌다. === 5현 베이스 === 일반적인 베이스가 4현만을 사용하는 반면, 5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역시 일반 기타에서 위로부터 5줄까지의 음과 동일하다. 4현베이스 튜닝은 4현부터 E - A - D - G 인 반면 5현베이스 튜닝은 (5현기준으로) B - E - A - D - G이며 솔로를 지향하는 베이시스트들은 주로 B현 대신 E - A - D - G - C처럼 하이 C 현을 넣어 튜닝하기도 한다. 혹은 둘 모두를 넣기도 하는데, 이를 6현 베이스라 한다. == 주법 == === 핑거 피킹 주법 === 핑거 피킹 주법이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방법이다. 지문 부분을 이용해 누르는 느낌으로 연주하며 중지가 약지보다 길기에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여 자세를 잡는다.(불편하다면 굳이 기울일 필요는 없다.)(긴 손가락을 조금 구부려 길이를 맞추는 방법도 있다.) === 피크 피킹 주법 === 피크를 이용하는 주법으로 베이스 피크의 경우 기타 피크와는 달리 상당히 두꺼운 피크를 쓴다. 위아래로 현에 닿게 연주하며 안정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핑거피킹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서 주로 록이나 메탈 같은 음악에 많이 쓰인다. === 슬랩 주법 === 베이스 연주의 화룡점정인 주법. 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주법으로 엄지의 경우 반동적으로 튕기듯하고 검지는 줄을 흡사 뜯는 느낌으로 연주한다. 빠른 속주가 가능하고 독특한 음색을 낸다. 그루브있는 음악을 연주하기 용이하다. 난이도가 비교적 높아 초보자들은 쉽게 따라하기 힘든 주법이다. === 그 밖 === 왼손만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머링, 폴링오프가 있다. 해머링은 넥부분의 현에 손가락을 찍듯이 눌러 음을 내는 방법으로 특정음을 낸 후에 해머링을 이용하여 높은 음을 곧바로 낼수있다. 폴링 오프는 이와 반대로, 가한 손가락으로 줄을 잡아당기듯 연주한다. == 같이 보기 == * [[어쿠스틱 베이스 기타]] * [[픽업 (악기)]] {{위키공용분류}} {{위키책|en:Guitar/Bass Guitar|베이스 기타}} {{악기}} {{전거 통제}} [[분류:베이스 기타| ]] [[분류:저음부]] [[분류:리듬 섹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 장르 정보 |이름 = 록 음악<br />Rock music |배경색 = |글자색 = |설명 = |장르 뿌리 = {{hlist|[[로큰롤]]|[[로커빌리]]|[[블루스]]|[[일렉트릭 블루스]]|[[포크송]]|[[컨트리 음악]]|[[리듬 앤드 블루스]]}} |문화 뿌리 = 1950, 60년대 영국과 미국 |사용 악기 = {{hlist|[[전기 기타]]|[[베이스 기타]]|[[어쿠스틱 기타]]|[[드럼]]|[[피아노]]|[[신디사이저]]|[[건반 악기]]|[[현악기]]|[[보컬]] 그 외 다수}} |인기 = |파생 장르 = {{hlist|[[뉴에이지 음악]]|[[신스팝]]}} |하위 장르 = {{hlist|[[얼터너티브 록]]|[[아트 록]]|[[비트 음악]]|[[익스페리멘탈 록]]|[[블루스 록]]|[[팝 록]]|[[포크 록]]|[[개러지 록]]|[[글램 록]]|[[하드 록]]|[[하트랜드 록]]|[[어쿠스틱 록]]|[[헤비 메탈]]|[[인디 록]]|[[뉴 웨이브 (음악)|뉴 웨이브]]|[[포스트 펑크]]|[[포스트 록]]|[[프로그레시브 록]]|[[프로토 펑크]]|[[사이키델릭 록]]|[[펑크 록]]|[[피아노 록]]|[[라가 록]]|[[루트 록]]|[[소프트 록]]|[[일렉트로닉 록]]|[[서던 록]]|[[서프 음악]]}} |퓨전 장르 = {{hlist|[[바로크 팝]]|[[컨트리 록]]|[[댄스 록]]|[[펑크(Funk) 록]]|[[인더스트리얼 록]]|[[재즈 퓨전]]|[[노이즈 록]]|[[파워 팝]]|[[랩 록]]|[[레게 록]]|[[삼바 록]]|[[수피 록]]}} |지역별 무대 = {{hlist|[[K-ROCK|대한민국]]|[[J-ROCK|일본]]|[[C-ROCK|중국]]}} 그 외 전 세계 |국내 무대 = |관련 항목 = {{hlist|[[로큰롤 명예의 전당]]|[[대중음악]]|[[팝 음악]]|[[프로그레시브 음악]]|[[록 밴드]]|[[재즈의 용어 목록]]|[[록 오페라]]}} }} '''록 음악'''({{llang|en|Rock music}})은 1950년대 [[미국]]에서 생겨난 ''[[로큰롤]]''에서 시작된 광범위한 [[대중음악]]의 한 형식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1960년대 중반]]부터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다양한 스타일로 발전했다.<ref>{{서적 인용|url=http://archive.org/details/classicrockrollr0000stud|제목=The classic rock and roll reader : rock music from its beginnings to the mid-1970s|성=Studwell|이름=William E. (William Emmett)|날짜=1999|출판사=New York : Haworth Press|isbn=978-0-7890-0151-1}}</ref> 록은 일반적으로 보컬, 리드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넷으로 구성되며, 일렉 기타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ref>통기타의 은은한 리듬, 클래식, 경음악과는 구별되는 편이나, 어쿠스틱 록, 아트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에서는 그러한 요소마저 흡수하며 혼합한다. 어떤 록 음악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는 무의미한 이야기다.</ref> 대개 [[보컬]], [[전기 기타]], 그리고 강한 백비트로 구성되며, 백비트는 신디사이저부터 색소폰 등, 여러 종류의 악기들에 의한 스타일이 일반적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여러가지 악기로 다채로운 소리를 추가하기도 한다. 록 음악은 젊음의 기쁨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젊은층이 가진 욕구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가사는 종종 낭만적인 사랑을 강조하지만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다양한 주제도 다루고 있다. 록 음악은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미국과 서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르였다.. == 명칭 및 정의 == 록은 1950년대 [[로큰롤]](Rock and Roll)에서 비롯되었다. 록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 모호하다. 이 단어는 때때로 여러 장르들이 모호하게 섞여있는 것, 이를테면 소울, [[헤비메탈]] 심지어는 [[힙합]]을 포함하는 것까지,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넓게 보자면 로큰롤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좁게 보면 로큰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 특징 == 록 음악의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전기 기타]]를 중심으로 하며,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과 심벌이 포함된 [[드럼 킷]]을 사용한다. [[피아노]]나 [[해몬드 오르간]], [[신시사이저]]와 같은 건반악기도 역시 자주 사용한다. 록 밴드는 일반적으로 [[보컬리스트]], [[리드 기타|리드 기타리스트]], [[리듬 기타|리듬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럼셋|드러머]]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둘에서 다섯 정도의 멤버로 구성된다. 이 일반적인 형태는 [[버디 홀리]]가 고안해냈고 [[비틀즈]]가 확립했다. 록 음악은 전통적으로는 백비트가 있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자주 사용한다. 록 음악은 스타일적으로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역사와 다른 장르의 요소의 잦은 유입 등의 이유로 록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힘들다. == 역사 == 록 음악은 처음 시작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록음악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을 때는 로큰롤이라고 불렀는데,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무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기성 세대는 이전에는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록음악의 뿌리였던 [[블루스]]에서 벗어나 간단히 록음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록 음악은 음반 사업 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사회, 정치 풍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과 결합 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반문화]], 히피 무브먼트, 모드 사조, 비트 사조 등이 있다. 1960년대 중반 록 뮤지션들은 음반을 녹음된 음악 표현과 소비의 지배적인 형태로 싱글보다 앞서 앨범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전의 선두에는 비틀즈가 있었다. 그들의 공헌은 장르에 주류의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향후 수십 년 동안 음악 산업에서 록 기반의 앨범 시대를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 클래식 록 "  기간에는 블루스 록 , 포크 록 , 컨트리 록 , 서던 록 , 라 가 록, 재즈 록 과 같은 하이브리드를 포함하여 다양한 록 음악 하위 장르가 등장하여 록 음악 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반문화 사이키델릭 및 히피 장면 의 영향을받은 사이키델릭 록 . 등장한 새로운 장르에는 예술적 요소가 확장된 프로그레시브 록 , 쇼맨십과 시각적 스타일이 강조된 글램 록이 포함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펑크 록은 수수하고 정력적인 사회, 정치적 비평을 내놓으며 반응했습니다. 펑크는 1980년대 뉴 웨이브 , 포스트 펑크 , 결국 얼터너티브 록 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1990년대부터 얼터너티브 록이 록 음악을 장악하며 그런지 , 브릿팝 , 인디 록 등의 형태로 주류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 이후 팝 펑크 , 일렉트로닉 록 , 랩 록 , 랩 메탈 을 포함한 추가 융합 하위 장르가 등장했습니다 . 일부 운동은 2000년대의 개러지 록 / 포스트 펑크 부흥을 포함하여 록의 역사를 재검토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였습니다 . 2010년대 이후 록은 세계 문화에서 가장 뛰어난 대중음악 장르로서의 위치를 잃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여전히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힙합 과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 의 영향력 증가는 록 음악, 특히 2010년대 초반의 테크노팝 씬과 2020년대 팝펑크힙합의 부활 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록은 또한 영국의 모드 와 로커 , 히피 운동, 19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퍼진 더 넓은 서구 반문화 운동을 비롯한 주요 하위문화를 이끄는 문화 및 사회 운동의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 그 중 후자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펑크 문화 는 고스(goth) , 펑크(punk), 이모(emo) 하위문화를 낳았습니다 . 항의 노래 의 민속 전통을 계승한 록 음악은 인종, 성, 마약 사용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관 되어 왔으며 종종 성인 소비주의 와 순응에 대한 청소년 반란의 표현으로 간주됩니다 .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매진 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장르의 변천사 == {{본문|록 음악 장르}} 1940년대 재즈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대중에 멀어졌다. 재즈의 쇠퇴와 록의 도래 사이의 과도기 시절인 1950년 대 초반에는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가수로서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찰스 유진 분|팻 분]], [[냇 킹 콜]] 등이 있었다.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기성 세대들이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면 비주류 계층인 흑인들은 블루스 음악을 즐겼으며 농촌의 백인들은 컨트리 송을 즐겼다. 블루스 음악은 스윙 재즈의 영향을 받아 곧 리듬 앤 블루스로 진화했다. 그리고 컨트리 송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는 달리 보통의 리듬 앤 블루스는 초기 로큰롤의 형태이다. 로큰롤은 백인 청소년에게 점점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가수는 주로 흑인이었다. 대표적으로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있었다. 이에 음반 제작자들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숨겨진 리듬 앤 블루스 명곡을 백인이 커버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들이 가수로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 빌 헤일리, 버디 홀리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장르를 로커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큰롤과 컨트리 송의 진화 형태인 힐빌리를 합친 말이다. 이런 음악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리버풀 등 항구 도시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로큰롤은 재즈와 결합하여 스키플 사운드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있었다. 주류가 로큰롤을 하였다면 언더그라운드 비주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하였다. 기존의 블루스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으로 이뤄진 컨트리 블루스와 델타 블루스 등이 있었다. 곧 미국이 발전을 하게 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블루스에도 전기 악기가 접목되어 일렉트릭 블루스가 되었는데 특히 시카고에서 인기를 끌어 시카고 블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음악은 로큰롤이 도래하기 이전 영국으로 전해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백인)들은 브리티시 블루스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알렉시스 코너와 존 메이올이 있었다. 로큰롤을 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 중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공연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그 다음 공격을 하여 성공을 했는데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한다. 뒤이어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5, 무디 블루스 등이 진출을 하였다. 이런 가수들은 모두 사조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음악 이외에도 브리티시 블루스를 하던 사람들도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수가 롤링스톤즈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기성 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비트 사조에 빠져들었고 곧 히피 무브먼트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마약을 하였는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하였다. 사이키델릭 록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포크 송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피트 시거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이 있었다. 한편 이런 식으로 미국식 사이키델릭 록이 마냥 외쳐대는 밴드였다면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은 예술적, 음악적인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밥 딜런이 포크 송과 로큰롤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크 록을 만들어냈다.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의 발전으로 곧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었고 브리티시 블루스의 영향으로 블루스 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블루스 록을 하던 밴드였던 크림은 하드 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결합시켜 하드 록을 더욱 발전시켰다. 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중요하다. == 비화 == 락의 시초는 블루스이며 1930년대 로버트존슨이 개발한 리듬이 시초가 된다. 하지만 로버트 존슨이 약혼녀에게 독살 당하고 그가 개발한 리듬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50년대 척베리 등과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의 리듬을 발전시켜 락앤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같은 락앤롤 뮤지션들의 노래는 젊은 이들을 크게 열광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기성 세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관습적으로 락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표적으로 락 이전에 존재했던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불허하여 그들이 하는 모든것은 매도되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음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에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이라고 매도되었다. 이때문에 재즈같은 경우는 어느정도 즐기는 백인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흑인들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즐기고 연주하는 백인들은 찾기 힘들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로버트 존슨의 일화중 미시시피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나 음악을 배웠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렇게 와전된 전설 역시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블루스에서 발전한 락앤롤을 백인들이 공연장에서 열렬히 부르자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열광을 한다. 클래식, 재즈, 스탠다드 팝 등 기존의 음악을 뒤로하고 락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 전까지는 없었으며, 음악을 들을 때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은 금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기성세대들에겐 젊은이들이 미친것으로 보였으며, 이러한 락은 기성세대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다. 락앤롤은 젊은이들을 악마의 유혹에 빠뜨리는 주적이 된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으론 기독교가 있었다. 1950년대 락앤롤 뮤지션인 제리 리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Great Balls of Fire』을 보면 기독교가 락앤롤을 얼마나 매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제리는 마지막에 "락앤롤이 악마의 음악이라면 나는 지옥에서도 피아노를 치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 락앤롤은 기독교 관습으로 인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흑인에 대한 차별이 줄고 젊은이들의 열광도 익숙해지며, 락은 성장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락에 대한 매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갈수록 퇴폐적인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락앤롤 밴드 비틀즈는 발라드 명곡 Yesterday를 발표해서 기성세대에게도 락앤롤을 한다고해서 다 천덕꾸러지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악동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는 온갖 성적인 발언과 추악한 행동으로 기성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다. 또한 1960년대 후반 샤이키델릭이 성행할 때, 샤이키델릭의 음악 성향상 마약의 복용은 흔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락은 매우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등이 이런 약물에 의해 사망한다. 또한 락은 대중음악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저항을 상징하는 포크 뮤지션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만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성적인 문제도 자주 일으켰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샤이키델릭, 포크등에 의해 히피문화가 발전하고 약물, 퇴폐성, 폭령성 등의 어두운 부분이 극에 다다른다. 기독교 계열에서 비판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락 뮤지션들중에 반-기독교 성향을 보이는 무신론자도 많을 뿐더러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욕을 잦게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도 있다. == 같이 보기 == * [[KROQ|KROQ 106.7]] - 미서부 최대의 록 음악 전문 라디오 방송국 * [[록 음악 장르 목록]] == 참고 자료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dmoz|Arts/Music/Styles/R/Rock/}}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배움터-줄|포털:교양/록의 역사}} {{록}} {{음악 주제}} {{전거 통제}} [[분류:록 음악| ]] [[분류:영어계 외래어]] [[분류:1950년대 유행]]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Cup-Noodles-2.jpg|섬네일|컵라면]] '''컵라면'''({{llang|en|Cup Noodle}}, {{llang|ja|カップ麺}})은 컵 형태의 작은 용기에 포장된 [[라면]]이다. '컵누들'(cup noodle)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닛신식품]]의 등록 상표이다. 면과 함께 분말이나 액체 소스 형태의 양념이 첨가되어, 폴리스티렌, 폴리에틸렌 또는 종이컵에 담겨 판매된다. 양념은 별도의 패킷에 들어 있거나 컵에 바로 담겨 있을 수 있다. 뜨거운 물은 컵라면과 같이 판매되지 않고 별도로 필요하다. 물을 부으면 조리에는 3~5분 정도 소요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컵라면이 대중적인 주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 역사 == [[1971년]]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개발하였다. 최초의 컵라면은 닛신 식품의 [[컵누들 (닛신)|컵누들]]이었다.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 내 라면시장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 새로운 재품을 고민하던 중, 1971년 컵누들을 발명하게 되었다. 당시 해외 시장또한 겨냥하기 위해 라면 용기 안쪽에 포크를 함께 포장해서 팔던 것이 특징이었으며 일본 라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시 광고 내용은 ‘끓인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였으며 지금 현재에도 일본 컵라면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컵라면이 시판된 지 1년만에 [[아사마 산장 사건]]에 동원된 [[경시청]] 기동대원들에게 식량으로 배급되면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1972년]] [[3월]] [[삼양식품]]에서 국내 첫 컵라면을 출시하였으며, 이후 [[1976년]] 컵라면 무인 판매기 5대를 명동 미스코시 백화점, [[경희대학교|경희대]]입구, [[삼양식품]] 체인점, 그랜드 제과, [[이화여자대학교|이대]] 입구 등에 설치하였다. 이후 [[부산광역시|부산]], [[대구광역시|대구]], [[광주광역시|광주]], [[인천광역시|인천]], [[대전광역시|대전]] 등지에서도 컵라면 자판기를 추가하였다. [[1982년]] [[농심]]도 본격적으로 컵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하였으며, 이에 삼양은 쇠고기, 유부맛 컵라면 65g짜리와 쇠고기맛 대접면 86g짜리를 출시해 맞섰다. 1981년 후 일본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미니 컵라면을 출시했는데 일반 컵라면이 75g, 130엔 인데 비해 이 컵라면은 37g에 60엔으로 절반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당시에 1400 이르는 일본 컵라면 시장에서 10퍼센트에 가까운 매출을 차지했다.<ref>1981년 5월 9일 경향신문</ref> 1988년 봉지면에 비해 컵라면의 소금섭취량이 많다는 의견의 기사가 올라와 소비자 건강에 대한 우려를 내비추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1000289108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10&officeId=00028&pageNo=8&printNo=102&publishType=00010|제목=소금함량 문제|저자=|날짜=1988-09-10|뉴스=라면 너무 짜다|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ref>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컵라면은 이후에도 꾸준히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89년 일본의 닛산식품회사는 캔속에 물을 붓기만 하면 물이 자동으로 끓는 라면을 개발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1900209204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9-19&officeId=00020&pageNo=4&printNo=20912&publishType=00020|제목=새로운 라면 개발|저자=로이터|날짜=1989-09-19|뉴스=물만 부으면 저절로 끓는 라면 개발|출판사=동아일보|확인날짜=}}</ref> 1989년에는 봉지면과 컵라면에 들어가는 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겼다는 일명 '우지논란'이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한강공원 등지에서 컵라면을 판매 허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서의 라면을 즐기게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0200289109014&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5-02&officeId=00028&pageNo=9&printNo=607&publishType=00010|제목=한강공원에서의 라면|저자=|날짜=1990-05-02|뉴스=한강공원 컵라면등 판매 허용|출판사=햔겨레|확인날짜=}}</ref> 1996년부터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컵라면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0300099131009&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6-10-03&officeId=00009&pageNo=31&printNo=9565&publishType=00010|제목=편의점과 컵라면|저자=이계진|날짜=1996-10-03|뉴스=편의점, 구멍가게에서도 컵라면 조리판매 가능|출판사=매일경제|확인날짜=}}</ref> 1998년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기업에서는 끓는 물을 붓고 30분이 지나서부터 환경호르몬이 검출되는데 이 시간을 넘겨서 컵라면을 섭취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나라별 컵라면== ===대한민국=== {| class="wikitable" !출시년도 !1972 !1981 !1982 !1986 !1989 ! colspan="2" |1990 |- |상품명 |컵라면 |사발면 |육개장 사발면 |도시락 라면 |새우탕 큰사발 |왕뚜껑 |튀김우동 큰사발 |- |제조사 |삼양 |농심 |농심 |팔도 |농심 |팔도 |농심 |} [[대한민국]]은 [[삼양식품]]에서 1972년 3월에 국내최초 용기면인 ‘컵라면’을 생산하였고, [[농심|농심사]]가 1981년 11월 국내 최초로 사발형태의 ‘사발면’을 개발하였다. 그 이후로 여러 종류의 컵라면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컵라면에는 농심의 '신라면', [[오뚜기]]의 '진라면', [[팔도]]의 '도시락'이 있다. 2012년부터 삼양에서 불닭볶음면이 출시되면서 한국에서는 매운 라면의 인기가 SNS를 통해 퍼졌다. 이에 컵라면으로도 출시되어 소비자들은 보다 편리한 컵라면을 소비하는 등 "큰컵불닭볶음면"이 유행하였다. 또한 매운맛에 도전하기 위해 삼각김밥, 치즈를 함께 먹는 레시피가 인터넷과 SNS 등에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라면들을 "섞어"먹는 새로운 방식이 시도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섞어먹기 편한 컵라면의 판매량이 증가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컵라면과 컵라면 내에서의 국물없는 비빔면 종류의 판매가 증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1&aid=0002471307|제목=매운 컵라면|저자=심희정|날짜=2014-02-23|뉴스=매운 컵라면의 화끈한 반란|출판사=서울경제|확인날짜=}}</ref> 한국에서의 매운 컵라면이 유행하자 [[유튜브]] 등에서는 외국인의 한국 컵라면 체험 후기 등의 영상이 유행하였다. 10분 내외의 짧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nJeAU76HI44 로한_컵라면]</ref> 한국 매운 컵라면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드러나는데 2017년 사스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동남아 지역에서의 불닭볶음면의 매출이 올라갔다.<ref>{{뉴스 인용|url=http://www.thebell.co.kr/front/free/contents/news/article_view.asp?key=201705170100022130001340|제목=붉닭볶음면의 해외 인기|저자=김기정|날짜=2017-05-18|뉴스='사드 불패'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으로 '퀀텀점프'|출판사=the bell|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www.thebell.co.kr/front/free/contents/news/article_view.asp?key=201705170100022130001340 }}</ref> ===중국=== 중국 컵라면은 한국과 달리 일회용 젓가락이나 포크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액상 스프를 사용하고, 향신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맛의 컵라면이 있다. 매운맛의 라면도 있지만 매운 맛이 아닌 구수한 맛이 나는 컵라면도 있다.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라면인 '캉스푸 홍샤오니우로우미엔"은 중국 소비자 10명 중 5명이 먹는 라면회사라는 수식이 붙은 캉스푸에서 만든것이며 [[대한민국]] 온라인 매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일본===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닛신 돈베이 우동이 있다. 이 컵라면은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개발한 ‘닛신푸드’의 제품이다. 이 컵라면의 맛은 소고기와 유부 2가지 맛이 있는데 두 제품 모두 면발이 마치 [[대한민국]]의 칼국수처럼 굵고 납작하다. 일본의 컵라면에는 대한민국의 컵라면에 들어있는 건더기 양에 비해 풍부한 양의 건더기가 있다. 일본에는 컵라면 박물관<ref>{{웹 인용 |url=http://www.cupnoodles-museum.jp/korean/attraction/index.html# |제목=컵라면 박물관 |확인날짜=2017-05-1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1013105357/http://www.cupnoodles-museum.jp/korean/attraction/index.html# |보존날짜=2016-10-13 |url-status=dead }}</ref>이 있는데,이곳에서는 세계최초 치킨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의 생애를 영화로 상영하는 '모모후쿠 극장'과 치킨라면을 손수 만들어 볼 수 있는 '치킨라면 팩토리' 등 인스턴트 라면을 토대로한 다양한 전시와 활동들을 진행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 엔화약세 등의 이유로 젊은층에서의 일본여행이 유행하면서 일본 라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 중 닛신의 컵누들의 경우 세계 최장수 라면으로 독특한 [https://www.youtube.com/watch?v=jY6nJ5bWTbQ 광고]로 유명세를 탔다. 닛신식품과 마루짱등이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특히 마루짱은 멕시코에서 컵라면의 대명사격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태국=== 태국은 라면에서 신 맛이 난다. 또한, 태국에는 컵라면을 살 때 용기 안에 플라스틱 포크가 들어있기 때문에 따로 나무젓가락을 챙길 필요가 없다. 태국 라면의 가장 큰 특징은 향미유(향신료)가 있어 기호에 맞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며 분말 스프는 약간의 신 맛이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대한민국]]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태국의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가 있으며, 이 라면은 톰얌쿵의 맛을 끓여 먹는 라면으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톰얌쿵’이란 ‘세계 3대 수프’ 중에 하나이다. 태국어로 ‘톰’은 끓임, ‘얌’은 시큼한 맛, ‘쿵’은 새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는 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살린 라면이다. 실제로 수프의 색도 빨간색이 아니라 흰 우유를 부은듯한 오렌지색이다. 맛은 일반 라면 스프에 신 맛을 더하면 된다고 한다.<ref>먹어서 세계 속으로 태국편 출처: GEARBAX I 네이버 포스트</ref> ===인도네시아=== 2013년 세계 라면 협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한 명당 일 년에 평균 74.1개의 라면을, 인도네시아는 60.3개를 먹는다고 한다. 이런 열풍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1위의 라면 생산 업체 인도미(Indo mie)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라면은 대한민국에 비해 양이 적고 칼로리가 낮다. 수치로 비교해보면, 125g정도 하는 대한민국의 라면에 비해 인도네시아 라면의 무게는 67g~68g정도로 매우 작다. 1봉지를 섭취했을 때의 칼로리는 대한민국은 500kcal, 인도네시아는 340kcal로 현저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라면의 면은 대한민국과 다르게 두껍지 않고 얇다. 소스에는 [[카피르라임 잎]]이 들어 있는데, 이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남아의 음식에 들어가 음식 맛의 풍미를 살려준다. == 공정 과정 == === 제조 공정 === 라면의 제조 공정과 유사하며 마지막 포장 단계에서 봉지가 아닌 용기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 라면과의 차이점 === * 면 # 용기면에는 봉지면보다 뜨거운 물에 닿는 면발의 표면적을 증가시키기 위해 면의 굵기를 더욱 가늘게 하는 경우도 많다. # 라면은 밀가루를 주성분으로 하는데 밀가루만 사용하면 면의 쫄깃한 맛이 다소 부족하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분(라면에는 주로 감자를 원료로 만든 감자전분을 주로 사용) 을 밀가루에 일정량 섞어서 면을 만들면 면질도 쫄깃쫄깃해질뿐 아니라 이 감자전분이 밀가루보다 낮은 온도에서 빨리 호화 (일반적으로 익는 현상)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조리시간이 짧아지는 효과가 있다. 특히 용기면에는 이 호화온도가 더욱 낮은 감자전분을 사용함으로써 끓이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조리가 될 수 있다. * 스프 # 컵라면의 분말 스프가 봉지라면보다 더 진한 편이다. 컵라면은 주로 밖에서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김치'를 따로 구매하지 않는 이상 라면만 섭취하기 때문에 간이 심심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소비자를 고려하여 스프의 간을 세게한다는 것이다. == 용기 == === PSP 용기 === 이 용기는 Polystyrene (폴리스티렌) 원료를 10~30배로 고발포하여 시트 내부에 공기층을 형성시킨 것으로 단층구조가 아닌 여러겹이 쌓여있는 구조이다. 액체나 기체에서의 열의 전도는 고체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열의 절연체인 공기가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최대한의 열손실을 방해하고자 한 것이다. 열손실이 적어야 용기안의 면이 익을 만한 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PSP 용기의 특성은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하여 여타 이물질이 묻어있는지를 쉽게 구분 할 수 있으며 국물이 배거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어떠한 이물질의 혼입을 막아주는 등 위생성이 양호하다. 단열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이 있는 라면 용기등에 매우 적합하며 선도유지성이 우수하고 수분증발 방지 등의 효과가 뛰어나다. 또한 충격에 강하여 상품의 운반 보관에 매우 유익하다. 경량성이 뛰어난것도 특징이다. PSP용기는 PS 수지를 5-15배 발포시킨 것으로 크기에 비해 매우 가볍다. 다른 용기보다 가벼우면서 내용물을 동일하게 담을 수 있어 운반이나 취급시 용이한 것이다. 또한 내용물이 용기의 표면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판매와 취급이 편리하며 회수 상태에 따라 원료나 연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ref>문방환, 「식품포장용기의 안전 및 PSP 용기의 시장 동향과 전망」, 2001</ref> === 종이 용기 === PSP 용기가 환경호르몬의 발생 원인이라고 하여 친환경적이라고 주목받는 종이용기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종이용기는 PSP용기보다 개발시 용기 가격이 비싸지만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재활용이 가능하며 2중용기로서 단열효과가 좋아 취식시 안전성이 양호하다. 쉽게 파손되지 않고 내용물 보호에 유리하며 겉면 인쇄도 유리하다. === 환경호르몬 논란 === 1998년 6월 일본 국립의약품 위생 연구소에서 기존에 쓰이던 PSP (Polystyrene paper)의 재질로 만들어진 용기에서의 내분비계장애(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인 다이머(dimmer), 트리머(trimer) 용출 시험 결과를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 인용 보도하면서 환경호르몬 논란이 대두되었다.<ref name=":0">김성진 ( Seong Jin Kim ). 1999. 컵라면 용기의 종이컵 대체. 한국포장학회지, 5(2): 59-62</ref> 1998년 4월 26일 동아일보에서 "컵라면 등 용기 생식기능 저하 물질 함유"<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42700209119014&editNo=45&publishDate=1998-04-27&officeId=00020&pageNo=19&printNo=23861&publishType=00010&from=news|제목=1998년 4월 26일 동아일보 "컵라면 등 용기 생식기능저하 물질 함유" 기사|저자=|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98년 4월 26일 서울경제의 "라면 등 1회용 식기에 생식기능장애 환경호르몬 함유", 1998년 4월 26일 중앙일보의 "컵라면 용기에 환경호르몬 함유... 생식기능 저하될수도"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기사가 보도된 이후 주 소비층인 주부와 청소년층에서 불신감이 팽배해 졌다.<ref>이재혁. 1999. 청소년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라면용기의 종이컵 사용 - 골판지포장.물류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 6(30): 84-90</ref>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결과 PSP 용기 제조 시 다이머(dimer)와 트리머(trimer) 같은 물질은 환경호르몬 작용 즉, 내분비계 장애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또한 라면 용기의 안전성에 대해 많은 연구발표가 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을 보면 미국 산업화학독성연구소 로저맥클레란 대표는 컵라면 용기와 관련하여 환경호르몬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금물이고, 스틸렌다이머와 트리머에 대한 환경 호르몬 연구결과는 없으며, 자신도 전자레인지에 가열해 먹는다고(전자레인지용 용기로)하면서 안전한 물질임을 피력 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1998&M=11&D=21&ID=9811212507|제목=환경호르몬 관련 인터뷰|저자=임호준|날짜=1998-11-21|뉴스=“미정부 환경호르몬 연구 착수… 아직 규명안돼 ”|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나아가 일본 환경청은 폴리스틸렌을 내분비교란물질 목록 SPEED 98 개정판에서 삭제<ref>일본 석유화학신문 2000. 11. 27.6면</ref>하였고, 유럽 아시아를 비롯 세계각국의 정부기관들에서도 사용을 승인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번 감소세로 이어진 판매량은 회복되지 않았다.<ref name=":0" /> 따라서 라면 업체에서는 용기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으며 PSP 용기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XqOxBZF4fhI PP용기]나 종이용기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펄프(주)는 컵라면 용기를 라면업체 빙그레와 현진제업과 공동으로 개발하였으며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PSP 용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ref>한국포장협회. 2000. 포커스 -컵라면 종이 용기 개발 -시대변화에 부응. 포장계 (한국포장협회), 92(0): 168-169</ref> 또한 2005년 농심의 경우 라면용기를 PSP 용기에서 전분발포용기로 교체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foodba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제목=전분발포용기 개발|저자=이형곤 기자|날짜=2005-10-06|뉴스=식품용기에도 친환경 바람 분다.|출판사=식품외식경제|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330143909/http://www.foodba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보존날짜=2018-03-30|url-status=dead}}</ref> 오뚜기의 경우, 독자 기술을 통해 발명한 친환경 용기를 활용,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해도 안전한 컵라면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7년 기준, 오뚜기는 진라면 2종을 시작으로 참깨라면, 진짬뽕까지 전자레인지용 용기를 확대 적용했으며, 나머지 컵라면의 용기도 전부 친환경 용기로 교체할 계획을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bizwatch.co.kr/article/consumer/2018/03/30/0011/prev_ver|제목=오뚜기 컵라면, 레인지에 돌려도 '안전'…맛은 'UP'|저자=정재웅 기자|뉴스=비즈니스워치|언어=ko|확인날짜=2018-03-3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330144044/http://news.bizwatch.co.kr/article/consumer/2018/03/30/0011/prev_ver|보존날짜=2018-03-30|url-status=dead}}</ref> == 같이 보기 == * [[라면]] * [[라면 스프]] == 각주 == {{각주}}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 [[분류:라면| ]] [[분류:일본의 발명품]]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식 정보 |이름=라면 볶이 |그림=Ra-bokki.jpg |종류=[[떡볶이]] |나라=[[한국]] |주_재료=[[가래떡]], [[라면]], [[고추장]] 또는 [[떡볶이]], [[삶은 달걀]] }} '''라볶이'''는 '''라면 볶이'''의 줄임말로서, [[떡볶이]]에 [[라면]] 면발을 얹은 먹기도 하는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 또는 라면 분말소스를 적당히 넣을 수도 있다. 일부 [[식당]]에서는 [[라면]]의 면발 대신 [[쫄면]]의 면이나 사리를 넣기도 한다. 달콤한 맛을 내기 위해 케챂도 넣는 곳도 있다.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60331001525688}} {{국수}} {{토막글|한국 요리}} [[분류:떡볶이]] [[분류:라면]] [[분류:대한민국의 국수 요리]] [[분류:대한민국의 길거리 음식]]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네티즌'''({{llang|en|netizen}}) 또는 누리꾼은 [[인터넷]] [[통신망]]에 형성된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네티즌' 은 인터넷 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 어원 및 활용 == === 네티즌 === 네티즌은 [[통신망]]을 뜻하는 'net'과 [[시민]]을 뜻하는 'citizen'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시민(citizen)은 자립성, 공공성, 능동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티즌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마이클 하우번]](Michael Hauben)은 네티즌이란 용어가 단순히 통신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통칭하는 개념이 아닌 통신망에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가꾸어가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네티즌이라는 용어가 [[영어권]]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영어권보다는 [[중국]]이나 [[대한민국]]에서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 영향으로 영어권에서는 주로 아시아지역 누리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ref>{{언어링크|en}}[http://edition.cnn.com/2010/WORLD/asiapcf/09/14/china.leaders.virtual.tour/index.html Chinese leaders invite citizens into their 'home' to vent]《CNN》2010-09-14</ref><ref>{{언어링크|en}}[http://edition.cnn.com/2010/SPORT/02/26/olympics.skating.kim/index.html?iref=allsearch South Korea rejoices as Kim wins women's figure skating]《CNN》2010-02-26</ref> 영어권에서는 '''사이버시티즌'''(cybercitizen)이라고도 하며, '''인터넛'''(internaut: internet + astronaut)이라는 은어가 쓰이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누리꾼을 네티즌(ネチズン, netizen)이라 하지 않고, '''넷 유저'''(ネットユ一ザ一, net user)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한민국 대형 신문사들이 일본어 서비스로 제공한 기사에서 "네티즌(ネチズン)"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 일본에서는 '네티즌'이라 하면 흔히 '대한민국의 누리꾼'을 떠올리게 되었다. === 누리꾼 === 2004년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에서 네티즌을 순화한 단어로서, 세상을 뜻하는 '누리'와 전문인을 뜻하는 '꾼'의 파생어이다. 초기에는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순화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으나<ref>{{웹 인용 |url=http://www.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983 |제목=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통신언어 추가 놓고 네티즌 공방 《뉴스보이》 2007-10-17 |확인날짜=2007-12-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28092443/http://www.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983 |보존날짜=2007-10-28 |url-status=dead }}</ref>, 현재는 두 단어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누리망'으로, [[홈페이지]]는 '누리집'으로 순화되었으나, '누리꾼'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며 공식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다. == 평가 ==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정보교환을 장점으로 본다. 그러나 [[익명]]을 사용하여 [[토론]] 상대나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미성숙함도 이따금씩 지적받는다. == 같이 보기 == * [[인터넷 사용자 수에 따른 나라 목록]] * [[네티켓]] * [[홈페이지]] == 각주 == {{각주}} [[분류:인터넷 인물| ]] [[분류:인터넷 문화]] [[분류:가상 공간]] [[분류:정보화 사회]] [[분류:시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식 정보 | 이름 = 떡볶이 | 그림 = Tteokbokki.JPG | 설명 = 분식 떡볶이의 모습. | 나라 = [[한국]] | 나라별_요리 = [[한국 요리]] | 종류 = | 주_재료 = [[떡면]](또는 [[가래떡]]), [[고추장]](또는 [[간장]]), [[어묵]], [[파]] | 비주_재료 = | 열량 = 약 500 | 단백질 = | 지방 = | 탄수화물 = | 기타 = | 맛 = 매운맛 , 달콤한 맛 등 |image_alt=|name_lang=|name_italics=|코스=|제조사=}} {{한국 이름 | 제목 = 떡볶이 | 한글 표기 = 떡볶이 | 한자 표기 = | 개정 로마자 표기 = Tteokbokki | 매큔-라이샤워 표기 = Ttŏkpokki | 예일 표기 = Ttekpokki | 공식 로마자 표기 = | 국제 음성 기호 = {{IPA-ko|t͈ʌk̚.p͈o.k͈i||}} }} '''떡볶이'''는 [[떡면]](가는 [[가래떡]])을 주재료로 하는 [[한국 요리]]이다. 일반적인 떡볶이는 밀떡, 쌀떡, [[어묵]], [[채소]], [[고추장]] 등의 [[양념]]을 넣어 볶은 음식으로 한국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다. [[고추장]]과 [[간장]]을 기본으로 양념할 수 있는데 전자가 가장 대표적인 형태다.<ref>{{웹 인용|url=http://www.cnngo.com/seoul/eat/search-spiciest-dish-korea-245114|제목=Don't say we didn't warn you: Korea's 5 spiciest dishes {{!}} CNNGo.com|날짜=2012-05-31|확인날짜=2019-05-10|archive-date=2012-05-31|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20531221427/http://www.cnngo.com/seoul/eat/search-spiciest-dish-korea-245114|url-status=}}</ref> 그러나 지금은 모든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전통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분식점과 [[노점상]]에서 많이 판매하며 보통 떡볶이와 함께 다른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흔하다. 일반적으로 튀김류에 떡볶이 양념을 묻혀 먹기도 하며, [[김밥]]과 [[순대]]와 곁들이기도 한다. == 역사 == 현대 한국에서 즐겨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한국 전쟁]] 직후에 개발된 음식이다. 이전에 궁중에서 먹던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280410635|제목=Rŏkk'i Sŏul bŭrabo Taehan Min'guk : 20-segi Han'guk ŭl ingnŭn 25-kaji p'ungsok k'iwŏdŭ|성=Son, Sŏng-jin, 1961-|성2=손 성진, 1961-|날짜=2008|판=1-p'an|출판사=Ch'usubat|위치=Sŏul-si|isbn=978-89-92355-35-3}}</ref>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다른 찜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한다. 흰떡을 탕무처럼 썰어 잠깐 볶는다. 다른 찜과 같은 재료가 모두 들어가지만 가루즙은 넣지 않는다"라는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으며, '[[주식시의]](酒食是儀)'에서는 떡을 잘라 [[기름]]을 많이 두르고 [[쇠고기]]를 가늘게 썬 것과 함께 넣어 볶는다고 나와 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700&key=20140404.99002181729 |제목 = 떡볶이가 궁중요리?…옛날엔 귀한 음식, 고추장 떡볶이 유래는? |확인날짜 = 2014-07-21 |날짜 = 2014-04-04 |출판사 = [[국제신문]] }}</ref>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ref>{{저널 인용|제목=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url=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06658&cid=63723&categoryId=63723}}</ref>에서도 궁중 떡볶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의 고추장 떡볶이는 [[1953년]]에 [[마복림]](1921~2011)이 [[광희문]] 밖 개천을 복개한 [[서울특별시|서울]] [[신당동 (서울)|신당동]] 공터에서 길거리식당 음식으로 팔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star.mt.co.kr/stview.php?no=2015032523503192229&type=1&outlink=1|제목='수요미식회' 신당동 떡볶이 골목 유래 "마복림 할머니가 원조"}}</ref> 처음에는 연탄불 위에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라디오 프로그램)|임국희의 여성살롱]]"이란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골목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매콤달콤’ 그 참을 수 없는 유혹 |url =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25404 |출판사 = 디트news24 |날짜 = 2011.12.26 11:26:08 |확인날짜 = 2014-07-26 |archive-date = 2014-07-29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729113307/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25404 }}</ref><ref>{{뉴스 인용 |제목 = 5천만의 국민 간식 신당동 떡볶이 골목 |url = http://www.dv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41 |출판사 = 디지털밸리뉴스 |날짜 = 2013.06.11 10:37:37 }}</ref> 한국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는 한식 세계화 과정에서 고급화와 다양화되고 조리법의 노하우 등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NFL]] [[휴스턴 텍선스]]의 홈구장에서 [[미식축구]]구장 최초로 한국식 고추장 떡볶이를 판매하는 등<ref>{{뉴스 인용 |제목 = NFL경기장에 등장한 떡볶이 |url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883679 |출판사 = [[매일경제]] |날짜 = 2013.09.23 17:06:30 }}</ref> 세계 각국에서도 떡볶이를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늘고 있다. == 종류 == 떡볶이는 [[고추장]]을 사용해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떡볶이와 [[간장]]을 사용하는 간장 떡볶이로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원래 궁중에서 발달한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워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운 맛이 아니었으며, ‘[[궁중떡볶이|궁중 떡볶이]]’로 불린다. 보통 떡볶이 하면 연상되는 고추장 떡볶이는 대개 [[고추장]]과 [[설탕]]을 써서 매운 맛과 단 맛을 내는데 보통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등의 양념과 단 맛을 내는 [[설탕]]이나 [[물엿]] 등을 섞은 양념장에 [[떡]]을 섞은 뒤 졸여서 볶아낸다. 지역에 따라 여기에 [[케첩]], [[후추]], [[겨자]] 등의 재료를 첨가하여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한다. 또한 고추장 떡볶이 소스의 감칠맛을 내기 위하여 [[짜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커리]]와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떡은 [[떡면]](떡볶이떡) 또는 [[가래떡]]을 사용하며 떡의 주재료가 [[쌀가루]]로 만들었냐 [[밀가루]]로 만들었냐에 따라 '밀떡볶이'와 '쌀떡볶이'로 나뉘기도 한다. 떡볶이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는 [[한국 전쟁]] 이후에 흔해진 밀가루로 만든 떡을 사용하였다. 이후 쌀가루로 만든 쌀떡볶이가 나온 이후에도 사용되는 곳이 많다. 밀떡볶이는 떡볶이 국물의 점도가 매우 높아지고, 쌀떡볶이는 오래 끓여도 탄력성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밀떡과 쌀떡을 섞어 판매하는 곳도 많다. [[밀가루]]에 [[녹말가루]]를 섞어 만든 떡으로 만든 떡볶이도 있으며 더 쫄깃하고 잘 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색깔은 노란색인데 익히면 흰색에 가까워진다. 추가하는 양념의 종류에 따라서 [[치즈 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 [[짜장 떡볶이]], 커리 떡볶이, [[로제 떡볶이]], 크림 떡볶이 등의 다양한 떡볶이가 있으며, 추가할 수 있는 양념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흔한 고추장 떡볶이 역시 배합과 양념에 따라 맛의 차이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 '''국물떡볶이''': 국물떡볶이는 일반적인 떡볶이 보다 [[국물]]이 많이 들어 있는 떡볶이의 일종이다. * '''[[기름떡볶이]]''': 기름떡볶이는 [[기름]]과 떡을 중심으로 국물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 '''간장떡볶이''': 간장떡볶이는 [[간장]]을 주요 양념으로 해서 만든 떡볶이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 '''궁중떡볶이''': 궁중떡볶이는 일반 떡볶이 같은 고추장이 아닌 간장을 바탕으로 만들고, 소고기를 같이 넣어서 만든 음식이다. 기본적으로 맵진 않으나 짭조름함을 가진 음식이다. 또 다른 종류의 떡볶이인 간장떡볶이와 비슷하다. * '''치즈떡볶이''': 치즈 떡볶이는 완성된 떡볶이 위에 [[치즈]]를 얹거나 떡 속에 치즈가 들어 있는 떡볶이를 말한다. 보통 분식집에서 판매되며,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위에 녹차가루, 허브가루, [[깨]], [[파슬리]] 등을 뿌려 먹기도 한다.<ref name="cookcooktv">{{웹 인용|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988197&cid=48164&categoryId=48204|확인날짜=2015-12-26|제목=치즈떡볶이 만드는 법|출판사=요리백과: 쿡쿡TV}}</ref> * '''커리떡볶이''': 커리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커리 소스로 만든 것으로 커리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커리떡볶이의 커리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 '''짜장떡볶이''': 짜장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짜장 소스로 만든 것으로 짜장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짜장떡볶이의 짜장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 '''크림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라고도 하며 크림파스타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졌다. 기존의 떡볶이 특유의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대신하여 크림파스타에서 사용하는 크림소스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어묵]]대신 [[베이컨]]을 넣는다. * '''로제떡볶이''': 우유, 크림, 토마토 소스를 섞어 만든 [[로제 소스]]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떡볶이다. 떡 이외에 납작 당면, 베이컨, 소시지 등 다양한 토핑과 함께 먹을 수 있다. 최근 유튜브와 SNS를 통해 로제 소스를 활용한 음식들이 화제가 되고 있으며, 대다수의 떡볶이 프랜차이즈 브랜드에서 로제 떡볶이를 신메뉴로 출시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mnb.moneys.mt.co.kr/mnbview.php?no=2021031114198078332&ref=|제목=색다른 맛으로 차별시킨 '로제떡볶이' 인기상승 중|성=강동완 기자|웹사이트=MNB|출판사=|확인날짜=2021-04-01}}</ref> * '''즉석떡볶이''': 즉석떡볶이는 테이블에 재료를 갖추고 손님이 직접 조리하여 먹는 떡볶이로 기본 재료인 양념, 떡, 어묵, 야채, [[달걀]], [[튀김]] 등을 손님이 원하는대로 추가 및 배합할 수 있다. "떡볶이 뷔페"라고 하는 손님이 직접 재료를 골라 가져와 조리하는 곳도 있다. * '''[[라볶이]]''': 떡볶이 국물과 함께 미리 데쳐놓은 [[라면]] 사리를 넣어 조리한 음식. 떡볶이를 먹고 남은 [[국물]]을 쓰거나 떡볶이 국물을 처음부터 만들고 조리하기도 한다. 라면 사리 대신 [[우동]]과 [[쫄면]] 사리를 넣어 조리하기도 한다. 라볶이가 만들어진 유래는, 한 여고생이 떡볶이에 라면사리를 넣어 조리한 후 갖고 왔는데 그것을 가게 주인이 먹어본 이후 생각보다 맛있었다고 해서 라볶이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 '''[[떡꼬치]]''': 재료가 되는 떡이 떡볶이용 가래떡을 기름에 튀겨 소스를 바른 음식이다. == 열량 == 기본 떡볶이는 1인분 기준으로 약 260kcal이다. 큰 통에 담아서 파는 배달 떡볶이는 1통 기준으로 약 1500-2600kcal이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etoday.co.kr/news/view/2014986|제목=[인포그래픽] 칼로리가 무려…국민간식 '떡볶이'의 배신?}}</ref> == 사진 == <gallery> Ganjang-tteok-bokki.jpg|간장떡볶이 Cheese-tteok-bokki.jpg|치즈떡볶이 Korean food-Rabokki-01.jpg|[[라볶이]] </gallery> == 같이 보기 == * [[떡국]] * [[떡꼬치]] * [[떡볶이&쌀면 페스티벌]]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책-줄|떡볶이}}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837753}} {{길거리 음식}} [[분류:국민 음식]] [[분류:떡볶이| ]] [[분류:한국의 궁중 요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분식회계||회사의 회계정보 등을 왜곡하는 것}} [[파일:Korean.snack-Tteokbokki-Mandu-01.jpg|섬네일|떡볶이, 만두, 오뎅]] '''분식'''({{한자|粉食}})은 [[떡볶이]], [[김밥]], [[순대]], [[어묵]], [[라면]], [[닭강정]]과 같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간편하게 조리하여 파는 음식들을 말한다.<ref name=":1">[https://www.hy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4238 오랜 세월 대중과 함께해온 분식], 한대신문, 2009년 11월 22일</ref> 원래는 쌀밥이나 보리밥과 같이 곡물 알갱이를 그대로 먹는 입식(粒食)에 대비하여 가루를 낸 재료를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표적인 가루 재료인 [[밀가루]]를 비롯하여 보릿가루, [[미숫가루]], [[녹말]] 가루 등을 이용한 음식이 모두 분식에 해당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ref name=":2">[https://www.vogue.co.kr/2017/06/27/%EB%B6%84%EC%8B%9D-%EA%B3%A0%EC%B0%B0/ 분식 고찰], 보그 코리아, 2023년 2월 20일</ref> == 유래 == 여러 열매나 곡물을 가루로 내어 조리하는 것은 세계 모든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조리 방식의 하나이다. [[신석기 문화]]의 유물인 [[갈돌과 갈판]]에서는 [[도토리]]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것들을 갈았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에 들어 곡물을 갈아 가루를 만든 흔적이 일반화 되었다.<ref>[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50611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갈았을까], 국립중앙박물관</ref> 갈아낸 도토리가루는 매우 떫기 때문에 물에 우려내어 사용해야 한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가루를 물에 우려내고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한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2_0030_0030_0010_0010_0030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야생식물의 채취], 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ref> 한국은 오래 전부터 가루 음식을 만들어 왔지만 밀가루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전기까지도 [[국수]]는 귀한 사치품에 가까웠다.<ref>[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fuMDSYQycjjsLkO6PDViOePBGdfsvVsEF9HN13Hd5uY911YFpECUXaAVeq6MZ1L9.cha-was02_servlet_engine1?nttId=26010&bbsId=BBSMSTR_1008&pageIndex=159&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dept=&searchWrd=&searchCn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옥수수로 만든, 국수 아닌 국수], 문화재청</ref> 분식이 오늘날과 같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싼 음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일제는 계속되는 전쟁의 군량 확보와 늘어나는 인구에 따른 수요의 억제를 위해 쌀과 여러 곡물을 섞어 먹는 혼식과 대량 수입이 가능하게 된 밀가루 등을 이용한 분식을 장려하였다.<ref name=":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935 혼분식 장려 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식량 수입이 크게 줄어들자 밀가루 역시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품목은 아니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을 의무적으로 정부에 팔도록 하는 공출 제도를 도입하는 한 편<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535 공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대체할 식량을 배급제로 운영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847 배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해방 이후 한국은 쌀의 수출을 재개할 정도로 농업이 회복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경제 기반이 붕괴되면서 극심한 [[식량위기]]를 겪었다. 한국의 식량 원조 요청에 미국은 잉여 농산물을 지원하였고 막대한 양의 밀가루가 국내로 유입되어 배급과 판매에 사용되었다. 정부 역시 부족한 미곡을 충당하기 위해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였다. 당시 들여온 밀가루를 이용한 각종 음식이 오늘날 현대적인 분식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26_0070_0030 미 잉여 농산물 원조, 쌀과 밀의 다툼], 한국문화사, 우리역사넷</ref>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은 [[국수]]와 [[수제비]] 등으로 오늘날에도 간편하게 사먹을 수 있는 저렴한 국수집들이 운영되는 시초가 되었다.<ref>[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2800 해방 이후 쌀값 폭등으로 많이 먹게된 밀가루 수제비], 지식N문화</ref> 혼식과 분식의 장려는 식생활의 변화와 농업 생산량 증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쌀이 남게 되는 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ref name=":3" /> 분식 장려 정책은 국수나 수제비 뿐만 아니라, [[빵]]과 [[우유]]의 소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역시 분식으로 불렸다.<ref name=":1"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밀가루는 [[가래떡]]을 이용한 [[떡볶이]], 두툼한 면을 쓰는 [[짜장면]]과 같은 여러 음식에 두루 쓰였고 [[쫄면]]과 같은 새로운 요리가 나오면서 현재의 분식에서 볼 수 있는 메뉴가 하나 둘 갖춰졌고<ref>[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241829 ‘52년 인천生 곰표’…70년 식생활을 바꾸다!], 한국방송, 2021년 7월 26일</ref> 한때 분식 장려 정책의 같은 부류로 묶였던 빵은 [[베이커리]] 산업의 발달과 함께 다른 종류의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분식이 여전히 저렴한 음식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베이커리는 점차 고급화되는 추세이고 이제는 [[카페]], [[디저트]] 등의 음식 부류로 묶인다.<ref>[https://www.foodba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581 코로나19 속 한식·외국식·커피·베이커리 양극화 뚜렷], 식품외식경제, 2020년 11월 17일</ref> == 음식 종류 == 분식집의 메뉴판에 놓이는 각종 분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닌 것이 널리 유행하면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쫄면]]이나 [[닭강정]]은 인천의 [[신포국제시장]]에서 개발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ref>[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04515283 쫄면·만두·닭강정 먹거리 천국… 100년 역사 인천 신포국제시장 ‘입이 즐겁다’], 세계일보, 2023년 5월 5일</ref> [[마복림]]이 만든 [[떡볶이]]는 [[신당동]]을 분식점 집결지로 바꾸었다.<ref>[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515461.html 연탄불에 보글보글 끓던 빨간 국물 - 신당동 떡볶이 골목 탄생시킨 마복림 할머니의 즉석떡볶이], 한겨레, 2012년 1월 19일</ref> 분식 장려 정책이 폐지되자 분식집에는 쌀을 이용한 [[김밥]]과 [[덮밥]]이 메뉴로 추가되었다.<ref name=":2" /> [[어묵]]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에서 유입된 음식으로 해방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 확산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대구의 양념어묵과 같이 여러 변화가 추가되었다.<ref>[http://www.grandculture.net/daegu/toc/GC40005940 양념오뎅], 대구역사문화대전</ref> 분식으로 취급되는 음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계란초]] * [[김밥]] * [[닭강정]] * [[떡볶이]], [[라볶이]] * [[라면]] * [[쫄면]] * [[맛감자]] * [[상추튀김]] * [[순대]] * [[어묵]] * [[튀김]] * [[김말이튀김]] * [[회오리감자]] == 같이 보기 == * [[길거리 음식]] * [[군것질]] * [[주전부리]] * [[포장마차]] == 각주 == {{각주}} [[분류:분식|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식 정보 | 이름 = 순대 | 그림 = Korean.food-Sundae-01.jpg | 설명 = 순대 | 다른_이름 = | 나라 = [[한국]] | 지역 = | 나라별_요리 = | 만든 사람 = | 연도 = | 최소시간 = | 최대시간 = | 종류 = | 코스 = | 서브 = | 주_재료 = [[곱창]], [[채소]], [[당면]], [[선지]], [[두부]] | 비주_재료 = | 변형 = | 1인분 = 100 g | 열량 = | 단백질 = | 지방 = | 탄수화물 = | 혈당_지수 = | 비슷한_음식 = | 기타 = | 난이도 = }} '''순대'''는 [[한국의 음식]]으로, 돼지의 [[창자]]에 [[채소]]나 [[당면]]을 비롯한 각종 속을 채우고 [[선지]]로 맛과 색깔을 낸 후 수증기에 쪄내어 만든다.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인기 있는 음식이다. == 유래 == [[춘추 시대]] 쓰인 《[[시경]]》의 〈대아〉 편에는 ‘갹(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송나라|송]] 대의 [[운서]] 《[[집운]](集韻)》에 의하면 이것은 양의 창자에 고기와 내장을 채운 뒤 구운 음식이다.{{sfn|육경희|2017|p=27}} 또 500년대 [[북위]]의 농서 《[[제민요술]]》에는 양의 선지, 기름, 밀가루, 쌀밥을 섞은 뒤 갖은 양념을 하여 양의 대창에 넣고 삶아서 썰어 먹는 ‘양반장자해(羊盤腸雌解)’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sfn|육경희|2017|p=28}} 순대가 한국에 전파된 유래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삼국 시대]]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양반장자해’가 전파되었고, 이를 먹었다는 설이다.{{sfn|육경희|2017|p=30}} 둘째로는 [[고려]] 말기에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피순대가 한국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sfn|육경희|2017|p=31}}<ref>{{뉴스 인용 |제목=미처 알지 못했던 삼다도의 맛, 여기서 제대로 즐겨볼까요? |url=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20621000016 |출판사=부산일보 |저자=디지털미디어본부 |날짜=2012-06-21 |확인날짜=2017-08-13 }}</ref> 일각에서는 순대는 돼지 창자에 채소와 쌀 따위를 넣어 먹는 [[칭기즈 칸]] 시대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인 ‘게데스(гэдэс)’가 전래된 것이라고도 한다.<ref name="munhwa2015"/> 그러나 게데스는 그러한 음식이 아니라 단지 몽골의 내장 요리의 총칭이며<ref name="육경희339340">{{harvnb|육경희|2017|p=339-340}}.</ref>, 실제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은 동물의 내장을 말려 만든 주머니에 건조시킨 고기를 가루 내어 최대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ref name="육경희325333">{{harvnb|육경희|2017|p=325-333}}.</ref>, 이 음식은 ‘보르츠(борц)’라고 하는 순대와 무관한 음식이다.<ref name="육경희339340"/> 순대라는 말은 [[만주어]]로 순대를 뜻하는 ‘성기 두하(senggi-duha)’에서 유래하였는데, ‘성기’는 피를 뜻하며,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ref>{{뉴스 인용 |제목=부시는 순대를 좋아할까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1370 |출판사=한겨레21 |저자=김학민 |날짜=2003-03-26 |확인날짜=2017-08-13 }}</ref> 1800년대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슌ᄃᆡ’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며, 이는 ‘성기 두하’가 축약된 말이다.{{sfn|육경희|2017|p=24}} == 조리법 == 순대의 껍질은 돼지 창자를 소금과 밀가루로 문질러 잡내를 없애서 만든다. 손질한 돼지 창자를 뒤집으면 깨끗한 면이 바깥으로 노출된다. 이 안에 두부, 숙주나물, 찹쌀과 각종 향신료와 함께 돼지피를 넣는다. 이렇게 만든 순대를 가마솥에 쪄낸다.<ref name="seoul">{{뉴스 인용 |제목=[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피부 미인 그녀 순대 마니아? |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402017002 |출판사=서울신문 |저자=김경운 |날짜=2016-04-02 |확인날짜=2016-04-02 }}</ref> == 지역별 특색 == [[부산]], [[울산]] 및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는 막장(쌈장)에,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양념 [[소금]]에 찍어먹으며, [[돼지]] [[간]]이나 [[허파]] 등의 부산물과 함께 팔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ref name=seoul/> 재료에 따라 [[오징어순대]], 찹쌀순대 등이 있으며, 만든 지역에 따라 병천 순대, 아바이 순대 등이 있다. [[충청도]]는 대게 새우젓과 먹으며, 광주 및 전북 전주, 완주 지방 등에서는 초장을 찍어 먹는다. == 종류 == === 겉 재료에 따른 종류 === ==== 돼지 내장 ==== 1830년의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도저장(饀猪腸)’이라 하여 [[돼지]]의 창자에 선지, 참기름, 콩나물, 후추 등을 섞은 것을 넣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으며, 이때 설탕[砂糖]으로 창자를 씻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ref>[http://www.koreantk.com/ktkp2014/life/life-view.view?artNo=0270402000516 한국전통지식포탈 - 도저장(饀猪膓)]</ref> 이는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를 다룬 조선 시대 최초의 기록이다.<ref name="육경희35"/>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도야지슌ᄃᆡ’라 하여 숙주, 미나리, 무, 배추김치, 두부, 생강, 마늘, 깨소금, 기름, 고춧가루, 후추 등을 돼지 선지와 섞은 것을 창자에 넣어 삶은 뒤 식혀 썰어 먹는 음식이 등장하였다.<ref>{{harvnb|孫禎佑|1998|p=289}}; {{서적 인용 |저자=이성우 |날짜=1992 |제목=韓國古食文獻集成 4 |위치=서울 |출판사=수학사 |쪽=1417-1422 }}에서 재인용함.</ref><ref>[http://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view?foodCd=107288 한국전통지식포탈 - 돼지순대]</ref>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순대는 돼지 내장에 속을 채워 만들며, 주로 소창을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창을 사용하기도 한다. ==== 소 내장 ==== 1600년대 말의 《주방문(酒方文)》에는 ‘팽우육법(烹牛肉法)’이라 하여 [[소]]의 대창에 선지, 밀가루, 매운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sfn|육경희|2017|p=34}}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우장증방(牛腸蒸方)’이라 하여 소의 창자에 소고기, 갖은 양념, 유장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히고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 나와 있다.<ref>{{harvnb|孫禎佑|1998|p=289}}; {{서적 인용 |저자=이성우 |날짜=1992 |제목=韓國古食文獻集成 2 |위치=서울 |출판사=수학사 |쪽=404-458 }}에서 재인용함.</ref> 1809년의 《[[규합총서]]》에는 소의 곱창에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 갖은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힌 뒤 사실상 마찬가지 방법으로 먹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ref>{{harvnb|孫禎佑|1998|p=289}}; {{서적 인용 |저자=빙허각 이씨 |번역자=정양완 |날짜=1975 |제목=규합총서 |위치=서울 |출판사=보진제 |쪽=168 }}에서 재인용함.</ref> 1800년대 중반의 《역주방문(曆酒方文)》에는 ‘우장증(牛腸蒸)’이라 하여 갖은 양념을 한 소의 살코기를 창자에 넣어 솥에 삶은 뒤 생강을 넣은 초장에 찍어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ref>{{harvnb|孫禎佑|1998|p=289}}; {{서적 인용 |저자=이성우 |날짜=1992 |제목=韓國古食文獻集成 4 |위치=서울 |출판사=수학사 |쪽=1291-1307 }}에서 재인용함.</ref><ref>[http://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view?foodCd=010603 한국전통지식포탈 - 소 순대]</ref> ==== 양 내장 ==== 1800년대 중반의 《[[임원경제지]]》에는 ‘관장방’이라 하여 [[양]]의 창자에 양념과 유장을 섞은 선지를 넣어 찐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ref name="육경희35">{{harvnb|육경희|2017|p=35}}.</ref> ==== 개 내장 ====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개]]의 창자에 개의 살코기,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장을 섞어 채운 뒤 시루에 삶아서 초와 겨자를 곁들여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ref>{{harvnb|孫禎佑|1998|p=289}}; {{서적 인용 |저자=안동 장씨 |번역자=황혜성 |날짜=1980 |제목=규곤시의방 해설본 |위치=서울 |출판사=한국인서출판사 |쪽=27 }}에서 재인용함.</ref> ==== 어류 ==== 1700년대의 《소문사설(謏聞事說)》에는 ‘어장증(魚腸蒸)’이라 하여 대구의 창자에 대구살을 넣고 찐 뒤 썰어 먹는 요리가 기록되어 있다.<ref name="육경희36">{{harvnb|육경희|2017|p=36}}.</ref><ref>[http://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view?foodCd=104485 한국전통지식포탈 - 대구순대]</ref>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어교슌ᄃᆡ’라 하여 삶은 숙주와 미나리를 소고기와 함께 다진 뒤 두부를 섞어 갖은 양념을 하고, 이것을 잘 씻은 [[민어]]의 부레에 넣고 삶은 뒤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다.<ref name="육경희36"/><ref>[http://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view?foodCd=107287 한국전통지식포탈 - 어교순대]</ref> 함경도의 [[명태순대]]가 유명하다. === 속 재료에 따른 종류 === ==== 당면순대 ==== [[파일:Korean food-Sundae-01.jpg|섬네일|240px|당면 순대]] 당면순대는 [[당면]]이 주 재료인 순대이다. 해방 이후 순대는 고가의 음식이었으나, 1960년대 초반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양돈 사업을 육성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돼지 부속물과 창자의 가격이 많이 내렸고, 여기에 저렴한 당면을 주 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당면순대가 대중화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주영하의 음식 100년](23) 돼지순대 |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81906585 |출판사=경향신문 |저자=주영하 |날짜=2011-08-08 |확인날짜=2017-08-13 }}</ref> 1970년대 초반부터 내장을 제거한 돼지고기의 일본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돼지 부속물이 많이 유통되었고, 이에 당면순대의 보급이 뒤따랐다는 주장도 있다.{{sfn|육경희|2017|p=61}} 현재 당면순대의 90% 가량은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예능리뷰] ‘수요미식회’ 홍신애, “당면 순대의 90퍼센트는 공장산” |url=http://news.topstarnews.net/detail.php?number=180422 |출판사=톱스타뉴스 |저자=천지현 |날짜=2016-02-17 |확인날짜=2017-08-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13144805/http://news.topstarnews.net/detail.php?number=180422 |보존날짜=2017-08-13 |url-status=dead }}</ref> 대표적인 [[분식]] 메뉴이기도 하다. ==== 찹쌀순대 ==== 찹쌀순대는 찰순대라고도 한다. [[찹쌀]]로 만든 당면을 사용한 순대, 또는 찹쌀밥을 속으로 사용한 순대를 뜻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연변]]의 순대는 거의 대부분 찹쌀밥을 넣고 만든다. ==== 피순대 ==== 피순대는 [[선지]]가 주 재료인 순대이다. 당면은 넣지 않으며, 선지, 채소, 다진 고기 등이 들어간다.<ref>{{뉴스 인용 |제목=한국의 찬란한 무형 문화유산과 만나다, 전주, 완주 국립무형유산원 |url=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0/2017011002042.html |출판사=트래블조선 |저자=최갑수 |날짜=2017-03-07 |확인날짜=2017-08-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307025808/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0/2017011002042.html |보존날짜=2017-03-07 |url-status=dead }}</ref>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와 완주군의 피순대가 유명하다. === 지역에 따른 종류 === ==== 백암순대 ==== 백암순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내장에 두부, 숙주와 콩나물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들며<ref name="munhwa2015">{{뉴스 인용 |제목=영양학자 김갑영의 우리 음식 이야기-순대 |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81901033312000001 |출판사=문화일보 |저자=김갑영 |날짜=2015-08-19 |확인날짜=2017-08-13 }}</ref>, 조선 시대에는 [[죽산군]]에서 주로 먹던 것이 우시장이 유명하던 백암 5일장으로 옮겨왔다.{{sfn|육경희|2017|p=43}} ==== 병천순대 ==== 병천순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소창에 선지, 들깨, 배추, 파, 고추, 찹쌀 등을 넣어 만들며, 1960년대 초반 병천 일대에 햄 공장이 생기면서 육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돼지 부산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순대를 파는 가게가 들어선 것이 시초이다.{{sfn|육경희|2017|p=164}}<ref name="munhwa2015"/> ==== 아바이순대 ====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식 순대를 변형하여 돼지의 대창에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 배춧잎 등이 들어가는 순대로,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청호동 (속초시)|청호동]] 아바이마을의 특산물이다.<ref>{{뉴스 인용 |제목=실향민의 아픔 가진 '아바이순대' |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92 |출판사=통일뉴스 |저자=김양희 |날짜=2010-05-27 |확인날짜=2017-08-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13150154/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92 |보존날짜=2017-08-13 |url-status=dead }}</ref> 청호동은 본래 모래 해변에 불과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1.4 후퇴]] 이후 [[함경남도]]의 실향민들이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삼삼한 여름 속초…3가지 먹거리 3가지 즐길거리 |url=http://www.hankookilbo.com/v/c338ff9e63fd44d3976ddc6190ad0867 |출판사=한국일보 |저자=최흥수 |날짜=2017-07-25 |확인날짜=2017-08-13 }}</ref> 흔히 1960년대 초반부터 아바이순대가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시기를 1990년대 초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sfn|육경희|2017|p=76-77}} ==== 암뽕순대 ==== 암뽕순대는 돼지 막창으로 만든 순대와 새끼보([[자궁]], 암뽕)를 함께 내놓는 음식이다.<ref>{{뉴스 인용 |제목=[테이스티워드]순대가 몽골에서 왔다고? |url=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31711181864515 |출판사=아시아경제 |저자=김철현 |날짜=2017-03-19 |확인날짜=2017-08-13 }}</ref> 암뽕순대라는 말은 담양에서 순댓집을 운영하는 배서운이 암퇘지의 자궁이 봉우리와 모양이 유사한 점에서 착안하여 ‘암퇘지 봉우리’의 두문자어인 ‘암봉’으로 부르던 것이 [[한국어 음운론#경음화|경음화]]로 ‘암뽕’이 되었고, 1990년대 초반 〈고향의 아침〉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암뽕과 순대’가 ‘암뽕순대’로 소개되면서 전국에 퍼지게 된 이름이다.{{sfn|육경희|2017|p=132-135}} ==== 용궁순대 ==== 용궁순대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막창으로 만들며, 5일장인 용궁시장 인근에 많이 있던 돼지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하여 탄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토끼간빵·용푸치노·용궁순대 … 먹거리도 용의 전설을 품다 |url=http://news.joins.com/article/18540539 |출판사=중앙일보 |저자1=임현동 |저자2=백종현 |날짜=2015-08-28 |확인날짜=2017-08-13 }}</ref> ==== 수애 ==== 수애(수웨) 또는 돗수애(돝수웨)는 [[제주도]]의 순대이다. 선지에 메밀가루를 섞어 만들며, 원나라의 고려 침략기 때 몽골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sfn|육경희|2017|p=95}} 선지에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섞은 뒤 양의 내장에 채워 만드는 [[몽골]]식 피순대인 게데스 초스(гэдэс цус)와 유사하다.<ref name="육경희325333"/> 관혼상제를 치르기 위하여 만드는 특별한 음식으로서, 퍽퍽하고 건조한 맛이 특징이다.<ref>{{뉴스 인용 |제목=미모의 영화배우 수애도 제주에선 ‘순대’! |url=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71596 |출판사=제주의소리 |저자=양용진 |날짜=2009-11-17 |확인날짜=2017-08-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13161334/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71596 |보존날짜=2017-08-13 |url-status=dead }}</ref> 창자는 70~80 cm 길이로 잘라 장 속의 내용물을 훑어 제거하고, 안팎을 뒤집은 뒤 굵은소금으로 주물럭거리고 흐르는 물에 씻어 준비한다.<ref name="허남춘175">{{harvnb|허남춘|2007|p=175}}.</ref> 소는 돼지 피에 메밀가루 또는 명아주 가루나 보리가루를 넣고, 부추(겨울철에는 잔파), 빻은 마늘, 생강, 소금 등과 함께 섞어 만든다.<ref name="허남춘175"/> 이때 수애에 넣는 소는 창자 한 근에 돼지피 두 사발, 메밀가루 한 사발 정도의 비율로 하여 집었을 때 흘러내릴 정도로 섞어 준비하고<ref name="허남춘176">{{harvnb|허남춘|2007|p=176}}.</ref>, 3분의 2 정도만 채우고 양 끝부분을 묶는다.<ref name="허남춘176"/> 꼬챙이로 찌르면 핏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삶아서 식혀서 잘라 먹는다.<ref name="허남춘176"/> 예식을 치르는 집의 남자 친척 중 돼지를 잡은 사람들이 소를 준비하여 내장의 속을 채우며{{sfn|허남춘|2007|p=174}}, 삶는 것은 나머지 집안 남자들이 담당하였다.<ref name="허남춘175"/> 수애는 창자의 부위에 따라 ᄌᆞᆫ배설수애, 훌근배설수애, 막창(창도름)수애로 나뉘는데, 두께가 두꺼우며 지방층이 있어 씹는 맛이 좋은 막창수애가 가장 고급이라고 한다.<ref name="허남춘176"/> == 순대 요리 == * [[순댓국]] * [[순댓국#순대국밥|순대국밥]] * [[순대볶음]] == 유사한 음식 == {{본문|선지 소시지#목록}} == 같이 보기 == * [[한국 요리]] * [[명태순대]] * [[오징어순대]] == 각주 == {{각주|2}} == 참고 문헌 == <!--sfn, harvnb 각주 틀에서 사용하는 문헌 목록 --> * {{저널 인용 | 저자=孫禎佑 | 날짜=1998 | 제목=순대의 文獻的 考察 | url=http://www.riss.kr/link?id=A45010721 | 저널=培花論叢 | 출판사=배화여자대학 | 권=16 | 호= | 쪽=287-294 | doi= | ref=harv }}{{깨진 링크|url=http://www.riss.kr/link?id=A45010721 }} * {{서적 인용 | 저자=육경희 | 날짜=2017 | 제목=순대실록 | 위치=서울 | 출판사=BR미디어 | ISBN=9788993508376 | ref=harv }} * {{서적 인용 | 저자=허남춘 | 날짜=2007 | 제목=제주의 음식문화 | 위치=서울 | 출판사=국립민속박물관 |ISBN=9788992128247 | ref=harv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두피디아|101013000751025}} {{한반도의 특산품}} {{길거리 음식}} [[분류:대한민국의 길거리 음식]] [[분류:분식]] [[분류:순대|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2|일본의 국물 요리|식재료|어묵|한국의 길거리 음식|어묵꼬치}} {{음식 정보 | 이름 = 오뎅 | 그림 = Oden_by_Mori_Chan.jpg | 그림 크기 = 200px | 설명 = 컵에 담긴 오뎅의 모습 | 다른_이름 = | 나라 = [[일본]] | 지역 = | 나라별_요리 = | 제조사 = | 만든 사람 = | 연도 = | 최소시간 = | 최대시간 = | 종류 = [[국]] | 코스 = | 서브 = | 주_재료 = [[무]], [[삶은달걀]], [[곤약]], [[지쿠와]] | 비주_재료 = | 변형 = | 1인분 = | 열량 = | 단백질 = | 지방 = | 탄수화물 = | 혈당_지수 = | 비슷한_음식 = | 기타 = | 난이도 = }} [[파일:20150127안양중앙시장 어묵106.jpg|섬네일|한국식 튀김 오뎅의 모습.]] '''오뎅'''({{llang|ja|おでん}})은 [[일본]]에서 기원한 [[요리]]로서, 여러 가지 [[어묵]]을 [[무 (식물)|무]], [[곤약]] 등과 함께 국물에 삶아낸 요리이다. ==어묵과 오뎅== [[일본어]] ‘오뎅’은 요리 자체를 부르는 말이지만 [[한국어]]권에서는 ‘오뎅’을 탕에 쓰이는 낱개의 어묵을 부르는 말로 쓰고, 탕 전체는 ‘오뎅탕’으로 부른다. == 재료 ==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게 있지만, 공통으로 10재료가 들어간다. === 공통 10 재료 === * [[무]] : 껍질을 벗기고, 작게 잘라서 사용한다 * [[삶은 달걀]] : [[메추리알]]도 사용한다. 껍데기를 까서 사용한다. * [[다시마]] * [[곤약]] * [[실곤약]] : 묶어서 먹기 쉽게 사용한다. * [[지쿠와]] * [[아쓰아게]] * [[간모도키]] * [[유부]]주머니 : 속재료는 떡이다. === 지역, 점포, 취향에 따른 재료 === * [[한펜]] * [[소 힘줄]] * [[당근]] * [[미역]] * [[토란]] * [[감자]] * [[은행]] * [[죽순]] * [[양배추말이]] * [[버섯]] : [[표고버섯]], [[잎새버섯]], [[큰느타리]] * [[두부]] * [[냉동두부]] * [[가마보코]] * [[달팽이]] * [[문어]] * [[소시지]] * [[닭고기]] * [[토마토]] * [[우동]] * [[튀김어묵]] ** [[생선 완자]] ** [[츠쿠네]] * [[사오마이]] == 같이 보기 == * [[덴가쿠]] * [[어묵]]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일본 음식과 음료}} {{전거 통제}} {{토막글|일본 요리}} [[분류:나베모노]] [[분류:길거리 음식]]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Eomuk.jpg|섬네일|여러 가지 어묵]] [[파일:Kamaboko.jpg|섬네일|[[가마보코]] (일본식 어묵의 일종)]] '''어묵'''({{llang|en|Fish cake}}, {{문화어|고기떡}})은 [[생선]]의 [[살]]을 으깨어 [[소금]]과 [[밀가루]], [[녹말가루]] 등 부재료를 넣고 뭉친 후 익혀서 [[묵]]처럼 만든 [[음식]]이다. 찌거나 굽거나 튀겨 먹는다. 세계 각지에 여러 가지 어묵이 있는데, 한국식 어묵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 나라별 어묵 == === 한국 === ==== 이름 ==== [[오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분식|분식집]]에서 파는 어묵을 [[속어]]로 오뎅으로도 부르기도 하지만, [[일본어]]의 [[오뎅]]은 어묵, [[무]], [[곤약]] 등을 넣고 끓인 탕을 말하며, 이들은 어묵과 오뎅을 구별한다.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어묵과 [[일본]]의 [[가마보코]]는 차이가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chamsal.co.kr/history/01.asp |제목=가마보꼬 제조회사 참살, 가마보꼬 이야기. |확인날짜=2007-12-2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223152122/http://www.chamsal.co.kr/history/01.asp |보존날짜=2008-02-23 |url-status=dead }}</ref> ==== 역사 ==== 어묵은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18세기]] 역관 이표가 쓴 요리책 《소문사설》에 可麻甫串(가마보곶)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문사설에 나오는 가마보곶의 제작 방법은 어묵과 달라, 이것이 어묵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한편 [[숙종 (조선)|숙종]] 45년([[1719년]])의 《진연의궤》에 보면 "생선숙편"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를 한국식의 어묵이라고 보기도 한다. {{인용문|숙종 45년([[1719년]])의 [[기록]]인 <진연의궤>에는 생선숙편이라는 찬품이 나온다. [[재료]]는 <대생선 3미, 간장 3홉, 녹말가루 1되 5홉, 참기름 3홉, 잣 5작>이다. 조리법은 안 나오는 모양인데, 김상보씨는 이것이 <생선 으깬 것에 [[녹말가루]], [[참기름]], [[간장]] 등을 넣고 차지게 섞어 틀에 넣어 쪄낸 다음 이것을 편으로 썰어서 잣가루를 넣은 [[간장]]에 찍어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추리했다. 이 생선숙편은 후일 진찬의궤([[1829년]]), 진연의궤([[1901년]]) 등에 생선문주라는 명칭으로 변모되어 나타났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음식문화, p235}} 현재 한국의 어묵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어묵공장은 부평동시장에서 시작한 동광식품(창업주 이상조)이다. [[1953년]]에는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 온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삼진어묵]]을 설립한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 공장이다. 때마침 [[한국 전쟁]]이 발발해 [[난민|피난민]]이 대거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유입되자 어묵 생산은 [[경기 순환|호황]]을 맞기 시작한다. 이즈음 동광식품과 삼진어묵의 공장장 출신이 합작해 영주동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게 된다. [[1950년]]~[[1960년대]]에 미도, 환공, 삼진, 동광, 대원, 영진 등의 어묵 제조 공장이 생겨나며 어묵업계는 [[춘추전국 시대]]를 맞는다.<ref>[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10308000220 부산일보 '부산의 노포']</ref> 대기업 제품으로는 [[1985년]] 삼호 F&G에서 만들었다. 이 때 "어묵"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ref>{{웹 인용 |url=http://www.cj.net/company/food/CoFoSamho.html |제목=CJ 삼호 F&G |확인날짜=2007-12-25 |archive-date=2007-12-14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1214035509/http://www.cj.net/company/food/CoFoSamho.html |url-status= }}</ref> 단, 어묵이라는 이름 자체는 신문 상으로는 [[1969년]]에 처음 등장한다. [[1990년대]] 초에 소위 "부산어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마차]]에서 먹는 어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부산어묵은 앞의 부산어묵과는 달리 길쭉한 모양의 어묵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 모양과 종류 ==== * 오징어 - 갈치살과 [[오징어]]의 씹히는 맛이 특징이다. * 맛살 - [[게맛살|맛살]]을 첨가하여 만든 어묵 * 만두 - 만두 모양의 어묵으로 [[당면]]과 약간의 [[채소]]를 첨가하여 담백하다. * 고구마 - [[고구마]]를 첨가해 고소하다. * 버섯 - 명태살, 도미살, [[당근]], [[파 (채소)|파]], 건표고버섯을 넣었다. * 치즈 - 조개살과 [[치즈]]를 넣었다. * 순대 - [[고추]]와 [[당면]]을 첨가하여 매콤하다. * 소시지 - 소시지를 넣어 톡톡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 미국 === * [[크랩 케이크]] === 인도네시아 === * [[오탁오탁]] === 일본 === * [[가마보코]] * 콩 - [[콩]]을 넣어 담백하고 고소하다. * 구운 - 대구살을 주원료로 했다. * [[지쿠와]] * 가쓰마아게 * 샤브뎅(냉오뎅) - [[인도양]] [[말레이반도]]에서 도미살로 만들었다. * 피시볼 * 어묵고로케 * 어묵면 === 포르투갈 === * [[볼리뉴 드 바칼랴우]] – 대구살로 만든다. == 같이 보기 == * [[고기풀|연육]] == 각주 == {{각주}} {{해산물}} {{길거리 음식}} {{전거 통제}} {{토막글|음식}} [[분류:생선 요리]] [[분류:분식]]
'''자바'''(Java, {{문화어|쟈바}})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자바]] (Java) -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언어 ** [[자바서버 페이지]] ('''JSP''', JavaServer Pages) - [[HTML]] 문서에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자바]] 코드를 삽입하여 동적 웹 페이지를 생성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 [[자바 애플릿]] (Java Applet) - [[자바 바이트코드]] 형태로 배포되는 [[애플릿]] ** [[자바 라이브러리]] (Java Library) - 다양한 패키지를 Zip으로 묶어 .jar 로 변환한 파일 * [[자와섬]]의 영어 이름. ** 이에 관한 동음이의어는 [[자와]]에 있다. * [[자바펜]] - [[대한민국]] 필기구 제작 업체 * [[자바 커피]] *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 생물 중 한 명의 이름이 [[자바 더 헛]]이다. == 같이 보기 == * {{in title|자바}} * [[자바스크립트]] {{동음이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좌표|36|23|31.2|N|127|23|56.4|E|type:edu|display=title}} {{대학 정보 |이름 = 한국정보통신대학교<br/>{{lang|en|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그림 =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Main Buildings.jpg |설명 = 한국정보통신대학교 대학본부 |표어 = |설립 = 1998년 |개교 = {{시작 날짜|2002|03}} |폐교 = {{끝 날짜|2009|03}} |종류 = 사립 |건학이념 = |학문제휴 = |제휴 = |총장 = 이혁재 (총장직무대행) |설립자 = |학교법인 = 한국정보통신학원 |학부 = |대학원 = |교직원수 = |국가 = [[대한민국]] |규모 = |위치 =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93 |교색 = |상징= |웹사이트 = http://www.icu.ac.kr/ |로고 = }} '''한국정보통신대학교'''(韓國情報通信大學校,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대덕연구개발특구|대덕연구단지]] 내에 설립된 IT계열 특성화 대학이다.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 및 다수의 IT관련업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왔으나 [[2007년]] [[10월]]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2009년]] [[3월 1일]], [[KAIST]]와 통합되면서 [[KAIST-ICC]]가 설립되었다. 본래는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로, 대학원 과정만 존재하였으나, [[2002년]]에 공학부와 IT경영학부 등 학부 과정을 설립하여 '''한국정보통신대학교'''로 교명을 개정하였다. 학부생은 매년 120명 정도를 받아들였다.(공학부 90명, IT경영학부 30명) 대학원 외국인 비율은 10%를 훨씬 상회하며, 학부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icu.ac.kr/admission/Admission0801.jsp?pageNum=4&subNum=1# |제목=입시통계현황 |확인날짜=2007-01-2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706154513/http://www.icu.ac.kr/admission/Admission0801.jsp?pageNum=4&subNum=1# |보존날짜=2007-07-06 |url-status=dead }}</ref>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제도#정시모집|정시모집]]의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개 영역 이상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에게 지원자격이 주어졌다(초기에는 전체등급 1등급이 지원 최소 자격이었다). 전공 전과목은 영어로 진행되며, 1년 3학기제를 도입, 3년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연차 이내의 학생에 한하여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6년]] 당시 학부생, 대학원생 총 학생수는 약 1500명 정도였다. == 연혁 == * 1998년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개교 * 2002년 '''한국정보통신대학교'''로 교명 변경 * 2009년 한국과학기술원과 통합 === ICU-[[KAIST]] 통합 === [[2004년]]에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은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의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 사업’에 대한 감사에서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는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규정을 어기고 사립학교 형태의 ICU를 세워 기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지원하는 불합리성을 보였다'며 사립대인 ICU가 국가 기금인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에 의존해 설립되었다는 점이 형평성에 어긋나며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ref>{{뉴스 인용 |저자 = 김권호 |제목 = KAIST, ICU 통합 오리무중 |url = http://times.kaist.ac.kr/archive/288/news/kkh2-288/kindex.html |날짜 = 2007-04-03 |확인날짜 = 2007-10-08 |출판사 = 카이스트 타임즈}}{{깨진 링크|url=http://times.kaist.ac.kr/archive/288/news/kkh2-288/kindex.html }}</ref><ref name="joongdo">{{뉴스 인용 |저자=이희택 |제목=ICU-카이스트 통합 가시화 관측 우세 |url =http://www.joongdoilb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0710090148 |날짜=2007-10-10 |확인날짜=2007-10-10 |출판사 = 중도일보}}</ref> 이에 [[한나라당]] [[김영선 (1960년)|김영선]] 의원은 국회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7년]]도 예산안에는 KAIST와의 통합을 전제로 ICU에 대한 예산지원을 국회에서 승인하였으나 [[2008년]]도 예산안의 ICU 국비 지원안은 기획예산처에서 전액삭감되었다.<ref name="joongdo"/>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인수희망자 등의 후원자를 구하거나, [[kAIST|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 = 류현성 |제목 = <인터뷰> 유영환 정보통신부 장관 |url =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07/09/10/0303000000AKR20070910152500006.HTML |형식 = |뉴스 = |출판사 = 연합뉴스 |쪽 = |날짜 = 2007-09-10 |확인날짜 = 2007-10-08 |언어 = ko}}</ref>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반대로 힘든 형편이고, 인수희망자도 없는 실정이라, [[kAIST|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의 하나로 떠올랐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거듭 결정을 연기하고 있었고 일부 이사진과 총장이 통합에 반발하였다. 허 총장은 양교 통합과 관련, ICU 학부생의 96%가 KAIST와의 하향식 통합에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설문조사 결과를 이사회에 제출했다.<ref> {{뉴스 인용 |저자=김양우 |제목=ICU 통합,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날짜=2007-12-04 |확인날짜=2007-12-04 |출판사 = 카이스트 타임즈 }}</ref> 또한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양 대학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ref>{{뉴스 인용 |저자 = 김양수 |제목 = ICU 와 KAIST 통합 '불투명' |url = http://www.newsis.com/newsis/Index?title=&pageTp=Sub4&pId=&cId=&artiGbn=ARTI&artiId=NISX20080130_0006136054 |형식 = |뉴스 = |출판사 = 뉴시스통신사 |날짜 = 2008-01-30 |확인날짜 = 2014-11-08 |언어 = |참고 = 기사 본문 삭제됨. }}{{깨진 링크|url=http://www.newsis.com/newsis/Index?title=&pageTp=Sub4&pId=&cId=&artiGbn=ARTI&artiId=NISX20080130_0006136054 }}</ref><ref>{{뉴스 인용 |저자 = 박희범 |제목 = NASA와의 공동 연구 협약 KAIST 총장 단독 인터뷰 |url =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802010219 |형식 = |뉴스 = |출판사 = 전자신문 |날짜 = 2008-02-04 |확인날짜 = 2008-02-04 |언어 = }}</ref><ref>{{뉴스 인용 |저자 = |제목 = KAIST-ICU 통합논의 '헛바퀴' 정부조직개편안 따른 상급기관 통·폐합… 진로 불투명 |url =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91138 |형식 = |뉴스 = |출판사 = 충청타임즈 |날짜 = 2008-01-31 |확인날짜 = 2014-11-08 |언어 = 한국어 }} </ref> 한동안 통합 논의가 중단되었으나, [[2008년 4월]]에 정부가 KAIST-ICU 통합이 이뤄진다면 그간 ICU에 지원해오던 매년 75억의 예산을 3년간 지원하기로 약속하여 논의가 재개되었다. [[2008년]] [[5월 22일]], 통합에 관한 MOU가 교환되어 통합이 기정사실화되었고, [[2009년]] [[1월 16일]]에는 한국과학기술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통합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ICU는 KAIST와 합병하여 KAIST ICC(IT Convergence Campus.KAIST 문지캠퍼스)로 바뀌었다. 통합 이후 기존 ICU 공학부는 KAIST 정보과학기술대학 정보통신공학과로 변경되었으며, 기존 ICU 공학부 재학생은 희망에 따라 KAIST 전산학과 또는 전기및전자공학과로 전과가 가능했다. * [[2007년]] [[10월 5일]] 학부생 200여명은 서울 정보통신부 건물 앞에서 조속한 통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ICU가 학교 정체성과 관련해 법적·정치적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다”며 “학생과 학부모들은 KAIST와의 통합을 원하고 있지만 총장과 경영진 등에 의해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ref>{{뉴스 인용 |저자 = 노형일 |제목 = ICU ‘KAIST 통합여론’ 불 붙었다 학부생들, 정통부 결단촉구 대대적 상경집회 |url = http://www.daejonilbo.com/news/news/newspage_06.asp?pk_no=716435&gubun=06_001_01 |형식 = |뉴스 = |출판사 = 대전일보 |쪽 = 7 |날짜 = 2007-10-06 |확인날짜 = 2007-10-08 |언어 = }}{{깨진 링크|url=http://www.daejonilbo.com/news/news/newspage_06.asp?pk_no=716435&gubun=06_001_01 }}</ref> * [[2007년]] [[10월 8일]] 이날 열린 이사회에 [[허운나]] 총장은 통합에 반대하며 총장직에서 사임의사를 표명했다.<ref>{{뉴스 인용 |저자 = 이희택 |제목 = ICU 학생들 자퇴서...“KAIST와 통합을” 허 총장 사표… 정통 장관 이사회 불참 차기일정도 미지수 |url = http://www.joongdoilb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0710080073 |형식 = |뉴스 = |출판사 = 중도일보 |쪽 = |날짜 = 2007-10-09 |확인날짜 = 2007-10-09 |언어 = }} </ref> * [[2008년]] [[3월 27일]] KAIST 서남표 총장이 'ICU의 요구가 과다해 통합이 어렵게 됐다'고 발표, ICU 혼란 가중<ref>{{뉴스 인용 |저자 = 신하영 |제목 = KAIST-ICU 통합 물건너가나 |url =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46529 |형식 = |뉴스 = |출판사 = 한국대학신문 |쪽 = |날짜 = 2008-04-03 |확인날짜 = 2008-04-03 |언어 = }} </ref> * [[2009년]] [[3월 1일]] KAIST에 통합되어 KAIST-ICC 설립<ref>{{뉴스 인용 |저자 = 노형일 |제목 = 포토 - KAIST-ICU 통합대학 출범 기념식 |url = http://www.asiae.co.kr/uhtml/read.jsp?idxno=2009030216153766488 |형식 = |뉴스 = |출판사 = 아시아경제 |쪽 = |날짜 = 2009-03-02 |확인날짜 = 2009-03-02 |언어 = }} </ref> == 저명한 동문 == {{참고|분류:한국정보통신대학교 동문}} == 같이 보기 == * [[한국과학기술원]] * [[ICT폴리텍대학]] == 각주 == <references/> {{대한민국의 없어진 대학}} [[분류:1998년 개교]] [[분류:2009년 폐교]] [[분류:대한민국의 폐교된 대학교]] [[분류:한국과학기술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SI base units.svg|섬네일|오른쪽|264px|SI 기본 단위 {| |- ! 기호 !! 이름 !! 물리량 |- | style="text-align: center;" | A || [[암페어]] || 전류 |- | style="text-align: center;" | K || [[켈빈]] || 온도 |- | style="text-align: center;" | s || [[초 (시간)|초]] || 시간 |- | style="text-align: center;" | m || [[미터]] || 길이 |- | style="text-align: center;" | kg || [[킬로그램]] || 질량 |- | style="text-align: center;" | cd || [[칸델라]] || 광도 |- | style="text-align: center;" | mol || [[몰 (단위)|몰]] || 물질량 |- |} ]] '''국제단위계'''(國際單位系, {{llang|fr|Système international d’unités}}, {{llang|en|International System Units}} 약칭 '''SI''')는 전류, 온도, 시간, 길이, 질량, 광도, 물질량을 전 세계에서 표준화된 [[도량형]]으로, [[MKS 단위계]]([[미터|Mètre]]-[[킬로그램|Kilogramme]]-[[초 (시간)|Seconde]])이라고도 불린다. 국제단위계는 각 국가별로 상이하게 적용하는 단위를 [[미터법]]을 기준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널리 쓰이는 도량형이며, 국제적인 교류나 산업 등에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단위인 만큼 반드시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단일화된 국제 단위계를 만드려는 노력으로 1960년 10월 제 11차 [[국제 도량형 총회]](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에서 SI가 결정되었다. 이 당시 국제 단위계의 체계를 접두어, 유도 단위 및 추가 단위에 대해 확립하였다. SI단위는 7개의 기본 단위([[미터]](m), [[킬로그램]](kg), [[초 (시간)|초]](s), [[암페어]](A), [[켈빈]](K), [[몰 (단위)|몰]](mol), [[칸델라]](cd)), 2개의 보조 단위([[라디안]](rad), [[스테라디안]](sr))와 이들로부터 유도되는 조합단위(19개)를 요소로 하는 일관성이 있는 단위의 집단이다. 이들 단위에 SI접두어(16개)를 붙여서 구성한다.<ref>{{서적 인용 |언어 =ko |공저자=권혁칠, 조성갑, 정운철 |저자=고영하 |제목=유체역학 |판=초판 |연도= 2012|출판사=북스힐 |isbn=89-5526-286-8|쪽=11 }}</ref> == 단위 == === 기본 단위 === {{본문|SI 기본 단위}} 국제단위계에서는 7개의 기본 단위가 정해져 있다. 이것을 SI 기본 단위(국제단위계 기본 단위)라고 한다. {| class="wikitable" !물리량 !이름 !기호 |- |[[길이]] |[[미터]] |m |- |[[질량]] |[[킬로그램]] |kg |- |[[시간]] |[[초 (시간)|초]] |s |- |[[전류]] |[[암페어]] |A |- |[[온도]] |[[켈빈]] |K |- |[[물질량]] |[[몰 (단위)|몰]] |mol |- |[[광도]] |[[칸델라]] |cd |} * 초: 1초는 온도가 0K인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 사이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의 9 192 631 770주기의 지속 시간이다. * 미터: 1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이다. * 킬로그램: 1킬로그램은 질량의 단위이며 [[플랑크 상수]] ''h'' 가 정확히 6.626 070 15×10<sup>−34</sup> J⋅s (J = kg⋅m<sup>2</sup>⋅s<sup>-2</sup>)이 되도록 하는 값이다. * 암페어: 1암페어는 1초 동안 1/1.602 176 634×10<sup>−19</sup>만큼의 [[기본 전하]] ''e''가 흐르는 것이다. * 켈빈: 열역학적 온도의 단위인 [[켈빈]]은 [[볼츠만 상수]] ''k''가 1.380 649×10<sup>-23</sup> J⋅K<sup>-1</sup>, (J = kg⋅m<sup>2</sup>⋅s<sup>−2</sup>)이 되도록 한다. * 몰: 1몰은 단위 물질의 양이 [[아보가드로 수]](6.02214076×10<sup>23</sup>)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 1 칸델라는 진동수 540×10<sup>12</sup>[[헤르츠]]인 단색광을 방출하는 광원의 복사도가 어떤 주어진 방향으로 [[스테라디안]]당 1/683[[와트]]일 때 이 방향에 대한 광도이다. === 유도 단위 === {{본문|SI 유도 단위}} * 유도 단위의 정의 기본량이 아닌 물리량을 유도량이라고 하며 정의식(定義式)이나 실험식같이 물리량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식을 이용하여 기본량이나 이미 있는 유도량으로부터 유도된다. 이 유도량의 단위를 유도단위라고 한다. 유도단위는 대응하는 물리량 사이의 관계식에 따라 기본단위나 이미 정해진 유도단위에서 유도된다. 국제단위계의 유도 단위의 크기는 유도단위를 이끌어 낸 물리관계식에 관계없이 하나의 양에 관해 일치한다. 다만 단위의 명칭은 유도한 관계식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단위로 표시된 SI유도단위를 제외한 유도단위는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특별한 명칭과 기호」를 부여한다. ==== 일반 유도 단위 ==== {| class="wikitable" !유도량 !이름 !기호 |- |[[넓이]] |[[제곱미터]] |m<sup>2</sup> |- |[[부피]] |[[세제곱미터]] |m<sup>3</sup> |- |[[속력]], [[속도]] |[[미터 매 초]] |m/s |- |[[가속도]] |[[미터 매 초 제곱]] |m/s<sup>2</sup> |- |[[밀도]] |[[킬로그램 매 세제곱미터]] |kg/m<sup>3</sup> |- |[[농도]] |[[몰 매 세제곱미터]] |mol/m<sup>3</sup> |- |[[휘도|광휘도]] |[[칸델라 매 제곱미터]] |cd/m<sup>2</sup> |} * SI 표준에서 따로 이름이 주어진 유도단위의 목록은 모두 22개로 아래와 같다. ==== 차원 단위 ==== {| class="wikitable" |+ !유도량 !이름 !기호 !SI 단위로 나타낸 값 |- |[[주파수]] |[[헤르츠]](hertz) |'''Hz''' | s<sup>−1</sup> |- |[[힘 (물리)|힘]] |[[뉴턴 (단위)|뉴턴]](newton) |'''N''' | kg·m·s<sup>−2</sup> 또는 kg·m/s<sup>2</sup> |- |[[압력]], [[변형력]] |[[파스칼 (단위)|파스칼]](pascal) |'''Pa''' | N/m<sup>2</sup> = kg·m<sup>−1</sup>·s<sup>−2</sup> 또는 kg/m·s<sup>2</sup> |- |[[에너지]], [[일 (물리)|일]], [[열량]] |[[줄 (단위)|줄]](joule) |'''J''' | N·m = kg·m<sup>2</sup>·s<sup>−2</sup> 또는 kg·m<sup>2</sup>/s<sup>2</sup> |- |[[일률]], [[전력]], [[동력]] |[[와트]](watt) |'''W''' | J/s = kg·m<sup>2</sup>·s<sup>−3</sup> 또는 kg·m<sup>2</sup>/s<sup>3</sup> |- |[[전하량]], [[전기량]] |[[쿨롱]](coulomb) |'''C''' | A·s |- |[[전위차]], [[기전력]], [[전압]] |[[볼트 (단위)|볼트]](volt) |'''V''' | W/A = kg·m<sup>2</sup>·s<sup>−3</sup>·A<sup>−1</sup> 또는 kg·m<sup>2</sup>/s<sup>3</sup>·A |- |[[전기 용량]] |[[패럿]](farad) |'''F''' | C/V = s<sup>4</sup>·A<sup>2</sup>·kg<sup>−1</sup>·m<sup>−2</sup> 또는 s<sup>4</sup>·A<sup>2</sup>/kg·m<sup>2</sup> |- |[[전기 저항]] |[[옴 (단위)|옴]](ohm) |'''Ω''' | V/A = kg·m<sup>2</sup>·s<sup>−3</sup>·A<sup>−2</sup> 또는 kg·m<sup>2</sup>/s<sup>3</sup>·A<sup>2</sup> |- |[[전도율]] |[[지멘스 (단위)|지멘스]](siemens) |'''S''' | A/V = s<sup>3</sup>·A<sup>2</sup>·kg<sup>−1</sup>·m<sup>−2</sup> 또는 s<sup>3</sup>·A<sup>2</sup>/kg·m<sup>2</sup> |- |[[자기 선속]] |[[웨버 (단위)|웨버]](weber) |'''Wb''' | V·s = kg·m<sup>2</sup>·s<sup>−2</sup>·A<sup>−1</sup> 또는 kg·m<sup>2</sup>/s<sup>2</sup>·A |- |[[자기선속밀도]] |[[테슬라 (단위)|테슬라]](tesla) |'''T''' | Wb/m<sup>2</sup> = kg·s<sup>−2</sup>·A<sup>−1</sup> 또는 kg/s<sup>2</sup>·A |- |[[인덕턴스]] |[[헨리 (단위)|헨리]](henry) |'''H''' | Wb/A = kg·m<sup>2</sup>·s<sup>−2</sup>·A<sup>−2</sup> 또는 kg·m<sup>2</sup>/s<sup>2</sup>·A<sup>2</sup> |- |[[섭씨 온도]] | 섭씨도([[셀시우스]], degree Celsius) |'''℃''' | K - 273.15 |- |[[광선속]] |[[루멘]](lumen) |'''lm''' | cd·sr |- |[[조도]] |[[럭스]](lux) |'''lx''' | lm/m<sup>2 |- |[[방사능]] |[[베크렐]](becquerel) |'''Bq''' | s<sup>−1</sup> |- |[[흡수선량]] |[[그레이 (단위)|그레이]](gray) |'''Gy''' | J/kg = m<sup>2</sup>·s<sup>−2</sup> 또는 m<sup>2</sup>/s<sup>2</sup> |- |[[선량당량]] |[[시버트]](sievert) |'''Sv''' | J/kg = m<sup>2</sup>·s<sup>−2</sup> 또는 m<sup>2</sup>/s<sup>2</sup> |- |[[촉매|촉매 활성도]] |[[캐탈]](katal) |'''kat''' |s<sup>−1</sup>·mol |} ==== 무차원 단위 ==== {| class="wikitable" !유도량 !이름 !기호 !SI 단위로 나타낸 값 |- |[[평면각]] | [[라디안]](radian) | '''rad''' | |- |[[입체각]] | [[스테라디안]](steradian) | '''sr''' | |} 이 중에서 라디안과 스테라디안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단위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 '''라디안'''은 한 [[원 (기하학)|원]]의 원둘레에서 그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를 가지는 호의 길이에 대한 중심각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원점 O을 중심으로 그린 반지름이 1인 원 (단위원)이 있을 때, 원의 일부인 호 XY의 길이가 반직선 OX와 반직선 OY 사이의 중심각이다. ** 30도 : π/6 ** 45도 : π/4 ** 60도 : π/3 ** 90도 : π/2 ** 180도: π ** 270도: 3π/2 ** 360도 :2π * '''스테라디안'''은 반지름이 r인 [[구 (기하학)|구]]의 표면에서 r<sup>2</sup>인 면적에 해당하는 입체각이다. 구 전체의 입체각은 4π sr이 된다. === SI 접두어 ===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약칭 SI)에서 각 단위의 양의 크기를 쉽게 나타내기 위해 각 단위의 앞에 붙여 쓰는 접두어를 말한다. SI접두어는 각각 10의 거듭제곱(10<sup>n</sup> 또는 10<sup>-n</sup>)의 크기(인자)의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원래는 엑사 페타 테라 기가 메가 킬로 헥토 데카 데시 센티 밀리 마이크로 나노 피코 펨토 아토 등 16가지였으나, 1991년 10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제타, 요타, 젭토, 욕토 4가지를 추가하기로 결의하여 모두 20가지가 되었다. {{SI 접두어}} === 국제단위계와 함께 쓰이는 단위 === {| class="wikitable" !유도량 !이름 !기호 !국제단위로 나타낸 값 |- |[[시간]] |[[분 (시간)|분]](minute) |'''min''' |1 분 = 60 [[초 (시간)|s]] |- |시간 |[[시간 (단위)|시간]](hour) |'''h''' |1 h = 60 min = 3600 s |- |시간 |[[날|일]](day) |'''d''' |1 d = 24 h = 1440 min = 86400 [[초 (시간)|s]] |- |[[각도]] |[[도 (각도)|도]](degree) |'''°''' |1° = (π/180) [[라디안|rad]] |- |각도 |[[분 (각도)|분]](arcminute) |'''′''' |1′ = (1/60)° = (π/10800) rad |- |각도 |[[초 (각도)|초]](arcsecond) |'''″''' |1″ = (1/60)′ = (1/3600)° = ([[원주율|π]] /648000) [[라디안|rad]] |- |[[부피]] |[[리터]](liter 또는 litre) |'''L''' |0.001 [[세제곱미터|m<sup>3</sup>]] |- |[[질량]] |[[톤]](tonne) |'''t''' |1 t = 10<sup>3</sup> [[킬로그램|kg]] |- !colspan="5" | 국제단위계와 함께 사용되는 것이 용인된 비국제단위 |- |[[에너지]] |[[전자볼트]](electrovolt) |'''eV''' |1eV = 1.60217733 (49) × 10<sup>−19</sup> [[줄 (단위)|J]] |- |[[질량]] |[[원자량 단위]](Atomic mass unit) |'''u''' |1u = 1.6605402 (10) × 10<sup>−27</sup> [[킬로그램|kg]] |- |[[길이]] |[[천문 단위]](astronomical unit) |'''au''' |1au = 1.49597870691 (30) × 10<sup>11</sup> [[미터|m]] |- ! colspan="5" | 국제단위계와 함께 사용되는 것이 현재 용인된 그밖의 비국제단위 |- |[[길이]] |[[해리 (단위)|해리]](Nautical mile) |'''해리''' |1 해리 = 1852 [[미터|m]] |- |[[속력]] |[[노트 (속력)|노트]](knot) |'''kn''' |1 kn = 시간당 1 해리 = (1852/3600) m/s |- |[[넓이]] |[[아르]](are) |'''a''' |1a = 1dam<sup>2</sup> = 100 [[제곱미터|m<sup>2]] |- |넓이 |[[헥타르]](hectare) |'''ha''' |1ha = 100a = 10000 m<sup>2</sup> |- |[[압력]] |[[바 (단위)|바]](bar) |'''bar''' |1 bar = 10<sup>5</sup> [[파스칼 (단위)|Pa]] |- |길이 |[[옹스트롬]](Angstrom) |'''Å''' |1 Å = 0.1&nbsp;nm = 10<sup>−10</sup> [[미터|m]] |- |면적 |[[바안]](barn) |'''b''' |1b = 10<sup>−28</sup> m<sup>2</sup> |} == SI단위의 일반원칙과 사용실태 == === 일반원칙 === * 일반적으로 로마체 소문자를 단위의 기호로 사용하지만, 기호가 고유명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면 로마체 대문자를 사용한다. * 숫자에서 정수부분과 소수부분을 나누는 기호로 프랑스식은 반점(,)을 영국식은 온점(.)을 사용한다. 문장 끝의 마침표를 제외하고는 단위기호 뒤에 온점을 찍지 않는다. * 긴(매우 크거나 작은)수를 표기할 때는 판독을 쉽게 하기 위하여 소수점을 중심으로 3자리씩 묶어서 띄어 쓴다. *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3자리마다 반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 각도(°(도), ′(분), ″(초))를 제외한, 단위 기호와 숫자 사이에는 빈칸을 두어 표기하여야 한다. 예: 1 m, 25 ℃, 45 kg, 15°30′30″ === SI단위의 사용실태 === * 미국은 1998년 모든 문서에 SI단위를 사용하고 비SI단위는 SI단위와 반드시 병기하도록 관련법을 규정하였다. * 영국은 1994년에 2001년부터 SI단위를 사용하는 법안을 확정하여 SI단위를 도입하였다. * 일본은 1993년 계량법을 개정하여 1999년부터 kgf, mmH<sub>2</sub>O, cal 등 비 SI단위 사용을 폐지하고 SI단위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비 SI단위를 사용하여 검정, 검사성적서 등을 발급할 수 없도록 하였다. * 대한민국은 1999년 국가표준기본법을 제정하여 SI단위를 법정계량단위로 사용토록 규정하였다. == 같이 보기 == * [[국제도량형총회]](CGPM) * [[국제 도량형국|국제 도랑형국]](BIPM) * [[국제 도량형 위원회|국제 도랑형 위원회]](CIPM) * [[미터법]] * [[국가기술표준원]] * [[SI 기본 단위]](SI base units) == 출처 == <references/>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SI units}} * [http://www.kriss.re.kr/w/fileDownload.do?fileSeq=3898 국제단위계(제9판) 다운로드] {{웨이백|url=http://www.kriss.re.kr/w/fileDownload.do?fileSeq=3898 |date=20210514051805 }} * [https://www.bipm.org/en/measurement-units The International System of Units (SI)] * {{웹 인용|url=https://www.kriss.re.kr/standard/view.do?pg=explanation_tab_01|제목=국제단위계 해설|출판사=한국표준과학연구원|확인날짜=2021-08-09|archive-date=2021-08-09|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809045116/https://www.kriss.re.kr/standard/view.do?pg=explanation_tab_01|url-status=dead}} {{SI 단위}} {{전거 통제}} [[분류:표준]] [[분류:SI 단위계| ]] [[분류:국제 표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1942}} {{기년법|1942}} '''1942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 연호 ==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大韓民國) 24년 *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기원|민국]](民國) 31년 * [[만주국]](滿州國) [[강덕 (만주국)|강덕]](康德) 9년 * [[일본]](日本) [[쇼와 시대|쇼와]]({{lang|ja|昭和}}) 17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연호)|바오다이]](保大) 17년 == 기년 == * [[만주국]](滿洲國) [[푸이|강덕제]](康德帝) 11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황제|보대제]](保大帝) 17년 == 사건 == * [[1월 1일]] -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26개국, [[워싱턴 D.C.|워싱턴]]에서 공동 선언 조인. * [[1월 14일]] - 일제, 조선군사령 공포 * [[1월 20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반제회의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 * [[2월]] - 조선총독부, [[구정]] 폐지 * [[2월 1일]] -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의 시작을 선언했다. * [[2월 14일]] - 조선총독부, 조선체육진흥회 설립 * [[2월 20일]] - 식량관리법 공포 * [[2월 27일]] - 해외독립 운동단체 한족대회가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 * [[3월]] - [[유치환]]의 <수>, [[황순원]]의 <그늘> 발표 * [[3월 1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미국]], [[영국]], [[소련]] 측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 ** 일제, 일반 가정의 금속 공출 시작. * [[4월]] - 중화민국 정부 국방최고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안 의결 * [[4월 1일]] - [[조선마사회]] 설립, 철강통제규칙 공포 * [[4월 18일]] - [[제2차 세계 대전]]:[[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16대의 [[미국]]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시|요코스카]], [[오사카시|오사카]], [[와카야마시|와카야마]], [[고베시|고베]], [[나고야]], [[욧카이치]], [[가와사키시|가와사키]] 등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이 실행됨. 이 작전으로 [[일본]]은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입었다. * [[5월]] -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가 <대동아>로 제호를 바꾸고 민족지에서 친일지로 전향 * [[5월 1일]] ** [[조선어학회]] 잡지 <한글>이 통권 93호로 폐간 ** 조선총독부, 체력단련 목적으로 조선 전국의 [[건민운동]] 전개 * [[5월 8일]] - 일제, 조선에 [[징병제]] 실시 결정 * [[5월 15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 * [[5월 20일]] - 일제, 조선염전매령 공포 * [[5월 27일]] - [[제2차 세계 대전]]:[[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나치 총독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대장 암살 목적 공격([[유인원 작전]]) * [[5월 29일]] - 일제, [[고이소 구니아키]]를 신임 조선 총독으로 임명 * [[6월]] - 일제, 조선목재통제령 공포 * [[6월 9일]] - [[제2차 세계 대전]]:체코슬로바키아의 [[리디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됨. 이 마을은 전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 [[6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중 하나인 [[미드웨이 해전]]발발 * [[6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안네 프랑크]]가 13번째 생일의 선물로 일기장을 받다. * [[6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미드웨이 해전]]종료 * [[6월 15일]] - [[쿠바]] [[아바나]]의 전승연합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 [[6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가스실]]에서 최초로 처형당할 첫 번째 유태인들이 [[파리시]]에서 열차에 실리다.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의 [[포케볼프 Fw-190]]이 [[웨일스]]에 실수로 착륙하여 연합군에 노획되다. * [[6월 30일]] - [[제2차 세계 대전]]:[[에르빈 롬멜]] 지휘 하에 독일-이탈리아군이 [[엘 알라메인]]에 도착되었다. * [[7월]] ** 중국 연안에서 [[김두봉]] 등이 조선독립동맹 조직 ** 국민총력연맹, 가정의 유기그릇 공출 지시 * [[7월 6일]] - [[이승만]],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연설 * [[8월 16일]] - [[제2차 세계 대전]]:미.영.소 군부, [[모스크바]] 회담. 소련, 제2 전선 요구. 미-영군,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 (횃불 작전) 결정. * [[8월 24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일본]], [[동부 솔로몬 해전|2차 솔로몬 해전]] * [[9월]] - [[광복군]]총사령부, 중국 [[시안]]에서 [[충칭]]으로 본부 이전 * [[9월 8일]] - [[일본]], 〈[[조선 목재 통제령]]〉 시행규칙 공포 시행 * [[9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시내 돌입 * [[9월 30일]] - 일제, 청장년 국민등록 실시 * [[10월 1일]] -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학자 30여 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 [[10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2차 엘알라메인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나다. * [[10월 14일]] - [[일제강점기]]: 일본, [[조선군사령]] 공포 * [[10월 20일]] - [[최호진]], <근대조선경제사> 간행 * [[11월 8일]] - [[제2차 세계 대전]]:미-영군, [[북아프리카]] 상륙. [[횃불 작전]] * [[11월 11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및 이탈리아군 [[안톤 작전]] 개시. [[비시 프랑스]]를 무력으로 점령 * [[11월 20일]] - 일제, 조선징병제도 실시요강 결정 * [[12월 1일]] - 무선통신에 관한 전시특별규정 제정 * [[12월 20일]] - 한국 최초로 [[노기남]] 주교 임명 * [[성서조선 필화 사건]] 일어남 .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 등 투옥됨. == 문화 == * [[3월 17일]] - [[명륜전문학교]] 설립인가 * [[10월 15일]] - [[리스본 공항]] 개항. == 탄생 == {{분류 참고|1942년 출생}} === 1월 === * [[1월 1일]] - 코트디부아르의 경제학자, 정치인, 대통령 [[알라산 우아타라]]. * [[1월 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동연 (정치인)|강동연]]. (~[[2004년]]) ** 헝가리의 정치인 [[쇼욤 라슬로]]. (~[[2023년]]) * [[1월 5일]] **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2024년]]) ** 쿠웨이트의 정치인 [[자베르 알무바라크 알하마드 알사바]]. (~[[2024년]]) * [[1월 6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김광일 (1942년)|김광일]]. * [[1월 8일]] ** 영국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 (~[[2018년]]) ** 일본의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 [[1월 9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이건희]]. (~[[2020년]]) * [[1월 1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기산]]. (~[[2023년]]) * [[1월 14일]] - 독일의 영화배우 [[미하엘 그비스데크]]. (~[[2020년]]) * [[1월 17일]] - 미국의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 (~[[2016년]]) * [[1월 24일]] - 일본의 법조인 [[구마자키 가쓰히코]]. (~[[2022년]]) * [[1월 25일]]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에우제비우]]. (~[[2014년]]) * [[1월 27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최병국 (1942년)|최병국]]. * [[1월 28일]]- 네덜란드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샤우크여 데이크스트라]]. (~[[2024년]]) * [[1월 29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한광옥]] ** 쿠바의 우주인 [[아르날도 타마요 멘데즈]]. * [[1월 3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노건평]]. === 2월 === * [[2월 2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신규범]]. (~[[2023년]]) * [[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정희]]. * [[2월 6일]] - 대한민국의 국악인 [[신영희 (1942년)|신영희]]. * [[2월 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조영재 (1942년)|조영재]]. (~[[2012년]]) * [[2월 9일]]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캐럴 킹]]. * [[2월 1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영희 (정치인)|김영희]]. * [[2월 14일]] - 미국의 정치가 [[마이클 블룸버그]]. * [[2월 16일]] - 대한민국의 한국화가 겸 동양화가 [[성창경 (화가)|성창경]]. * [[2월 17일]] - 미국의 행동가, 흑표당의 공동창립자 [[휴이 뉴턴]]. (~[[1989년]]) *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용균 (1942년)|김용균]]. * [[2월 20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각본가 [[클로드 밀러]]. (~[[2012년]]) *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선]]. * [[2월 26일]] ** 일본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 [[야마시타 요스케]]. ** 슬로바키아의 축구 선수 [[요제프 아다메츠]]. (~[[2018년]]) * [[2월 28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디노 초프]]. ** 미국의 전 정치인, 문학 작가 [[토머스 조지프 라이언 (1942년)|토머스 조지프 라이언]]. === 3월 === * [[3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민호 (1942년)|강민호]]. * [[3월 7일]] ** 미국의 기업인, 월트 디즈니 최고경영자 [[마이클 아이스너]]. ** 뉴질랜드의 사학자 [[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 (~[[2023년]]) ** 태국의 가수 [[와이폿 펫수판]]. (~[[2022년]]) *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정자 (배우)|박정자]]. * [[3월 1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정병탁]]. (~[[2016년]]) ** 폴란드의 배우 [[예지 트렐라]]. (~[[2022년]]) * [[3월 15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원일 (소설가)|김원일]]. ** 이란의 프로레슬링 선수 [[아이언 쉬크]]. (~[[2023년]]) * [[3월 16일]] - 미국의 활동가, 작가 [[아니타 호프만]]. (~[[1998년]]) * [[3월 17일]] - 일본의 배우, 성우 [[야마모토 요코]]. (~[[2024년]]) * [[3월 21일]] - 예멘의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 (~[[2017년]]) * [[3월 23일]] - 오스트리아의 영화 감독 [[미하엘 하네케]]. * [[3월 25일]] - 미국의 가수 [[어리사 프랭클린]]. (~[[2018년]]) * [[3월 27일]] - 영국의 생물학자 [[존 설스턴]]. (~[[2018년]]) === 4월 === * [[4월 6일]] - 미국의 영화 감독 [[배리 레빈슨]]. * [[4월 11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송재익]]. * [[4월 17일]] - 영국의 배우 [[데이비드 브래들리 (배우)|데이비드 브래들리]]. * [[4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충식]]. * [[4월 22일]] - 이탈리아의 철학자, 미학자 [[조르조 아감벤]]. * [[4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호]]. (~[[1971년]]) ** 대한민국의 가수 [[하청일]]. ** 미국의 가수, 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4월 26일]] - 미국의 가수 [[보비 라이델]]. (~[[2022년]]) * [[4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백인천]]. ** 러시아의 우주인 [[발레리 폴랴코프]]. (~[[2022년]]) === 5월 === * [[5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손영순]]. * [[5월 2일]] - 벨기에의 의사 체육인 [[자크 로게]]. (~[[2021년]]) * [[5월 5일]] - 미국의 컨트리 가수 [[태미 와이넷]]. (~[[1998년]]) * [[5월 6일]] - 중화민국의 바둑 기사 [[린하이펑]]. * [[5월 9일]] - 미국의 가수 [[토미 로]]. * [[5월 10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송광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 [[지재룡]]. * [[5월 12일]] - 일본의 바둑 기사 [[오타케 히데오]]. * [[5월 16일]] - 일본의 가수 [[사사키 이사오 (가수)|사사키 이사오]]. * [[5월 20일]] - 대한민국의 공무원 [[정정길]]. * [[5월 22일]] - 유나바머로 유명한 미국의 테러리스트 [[시어도어 카진스키]]. (~[[2023년]]) * [[5월 25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몽근]]. === 6월 === * [[6월 2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김신조]]. * [[6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길부]].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지원 (1942년)|박지원]]. ** 적도기니의 대통령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 [[6월 7일]] - 리비아의 정치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 (~[[2011년]]) * [[6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변희봉]].(~[[2023년]]) * [[6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철 (가수)|현철]]. (~[[2024년]]) ** 이집트의 법학자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 [[6월 18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타보 음베키]]. ** 영국의 가수, 작곡가 [[폴 매카트니]].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자친토 파케티]]. (~[[2006년]]) **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 (~[[2013년]]) * [[6월 21일]] - 일본의 스키점프 선수 [[아오치 세이지]]. (~[[2008년]]) * [[6월 24일]] - 오스트리아의 작가 [[게르하르트 로스]]. (~[[2022년]]) * [[6월 28일]] - 대한민국의 신부 [[함세웅]]. === 7월 === * [[7월 1일]] - 캐나다의 배우 [[준비에브 뷔조]]. * [[7월 2일]] - 멕시코 정치인 [[비센테 폭스]]. * [[7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일웅]]. (~[[2022년]]) * [[7월 9일]] - 미국의 배우 [[리처드 라운트리]]. (~[[2023년]]) * [[7월 10일]]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식스토 로드리게스]]. (~[[2023년]]) * [[7월 13일]] - 미국의 배우 [[해리슨 포드]]. * [[7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종설]]. * [[7월 2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고민수]]. (~[[2022년]])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방송인 [[박상규 (가수)|박상규]]. (~[[2013년]]) * [[7월 23일]] - 핀란드의 가수 [[프레디 (가수)|프레디]]. * [[7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자]]. * [[7월 29일]] ** 대한민국의 문학가 [[김현 (문학평론가)|김현]]. (~[[1990년]]) ** 미국의 배우 [[토니 시리코]]. (~[[2022년]]) * [[7월 31일]] - 잉글랜드의 가수 겸 작곡가 [[대니얼 분 (가수)|대니얼 분]]. === 8월 === *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미술가 [[차중락]]. (~[[1968년]]) ** 이탈리아의 배우 [[지안카를로 지아니니]]. * [[8월 5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정치인 [[박철언]]. * [[8월 7일]] ** 미국의 가수 [[B. J. 토머스]]. (~[[2021년]]) ** 미국의 배우 [[토빈 벨]]. * [[8월 1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설송웅]].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조반니 로데티]]. (~[[2023년]]) *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조세희]]. (~[[2022년]]) ** 미국의 음악가·배우 [[아이작 헤이스]]. (~[[2008년]]) * [[8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안종국 (성우)|안종국]]. (~[[2024년]]) === 9월 === * [[9월 5일]] ** 대한민국의 농업인 [[망절일랑]]. (~[[2012년]]) ** 독일의 영화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 * [[9월 15일]] - 중국의 정치가,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 * [[9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바둑 기사 [[윤기현]]. * [[9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백인천]].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태홍 (정치인)|김태홍]]. (~[[2011년]]) ** 미국의 기업인 [[아서 블랭크]]. * [[9월 28일]] - 미국의 배우 [[마셜 벨]]. === 10월 === * [[10월 3일]] - 미국의 배우 [[앨런 레이친스]]. (~[[2024년]]) *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전도봉]]. * [[10월 19일]] - 미국의 사업가 [[짐 로저스]]. *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전경환]]. (~[[2021년]]) * [[10월 22일]] - 상투메프린시페의 제10대 대통령 [[이바리슈투카르발류]]. (~[[2022년]]) * [[10월 23일]] - 미국의 과학 소설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 * [[10월 26일]] - 잉글랜드의 배우 [[밥 호스킨스]]. (~[[2014년]]) * [[10월 29일]] - 미국의 화가 [[밥 로스]]. (~[[1995년]]) === 11월 === * [[11월 8일]] ** 대한민국의 시인 [[이승훈 (시인)|이승훈]]. (~[[2018년]]) **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이수일 (경찰공무원)|이수일]]. (~[[2005년]]) * [[11월 15일]] - 아르헨티나의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 * [[11월 17일]] - 미국의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 [[11월 19일]] -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 * [[11월 20일]] **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당선인 [[조 바이든]]. ** 대한민국의 평론가, 언론인 겸 공학자 [[지만원]]. *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유강진]]. * [[11월 24일]] - 영국의 정치인 [[앤드루 스터넬]]. (~[[2024년]]) *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반효정]]. ** 미국의 음악가, 기타 연주자 [[지미 헨드릭스]]. *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최봉홍]]. (~[[2023년]]) *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관용]]. *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화가 [[함섭]]. (~[[2024년]]) === 12월 === * [[12월 4일]] - 잉글랜드의 배우 [[제마 존스]]. * [[12월 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낙성]]. * [[12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우 (가수)|장우]]. (~[[2024년]]) * [[12월 8일]] - 미국의 농구 선수 [[밥 러브]]. (~[[2024년]]) * [[12월 9일]] - 미국의 배우 [[딕 버트커스]]. (~[[2023년]]) *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호일]]. ** 튀르키예의 영화배우 [[파트마 기리크]]. (~[[2022년]]) *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미혜]]. * [[12월 21일]] - 중국의 정치가, 중국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 *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지만원]]. *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진영 (1942년)|김진영]]. * [[12월 30일]] ** 미국의 영화배우 [[프레드 워드]]. (~[[2022년]]) ** 미국의 음악가, 가수, 소설가, 각본가, 영화배우 [[마이클 네스미스]]. (~[[2021년]]) === 미상 ===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춘제]]. (~[[2024년]]) * 대한민국의 의원 [[김영희 (1942년)|김영희]]. == 사망 == [[파일:Carole Lombard 1940.jpg|섬네일|120px|캐롤 롬바드]] [[파일:Bundesarchiv Bild 183-R98683, Reinhard Heydrich.jpg|섬네일|120px|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분류 참고|1942년 사망}} * [[1월 16일]] - 미국의 배우 [[캐럴 롬바드]]. ([[1908년]]~) * [[1월 19일]] - 중국 청나라의 황족 종실 겸 정치가 [[푸쥔]]. ([[1885년]]~) * [[5월 25일]] - 한국의 소설가 [[이효석]]. ([[1907년]]~) * [[5월 27일]] -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장 [[천두슈]]. ([[1879년]]~) * [[6월 4일]] -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04년]]~) * [[8월 26일]] - 베니토 무솔리니의 사생아이자, 이탈리아의 군인 [[베니토 알비노 달세르]]. ([[1915년]]~) == 지도 == [[파일:Flag-map of the world (1942).png|800px|가운데|섬네일|1942년 당시의 세계 지도]] == 달력 == {{연간달력|1942}} === 음양력 대조 일람 ===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임인]] || 대 || [[2월 15일]] || [[기해]] |- | [[음력 2월|2월]] || [[계묘]] || 소 || [[3월 17일]] || [[기사 (간지)|기사]] |- | [[음력 3월|3월]] || [[갑진]] || 대 || [[4월 15일]] || [[무술 (간지)|무술]] |- | [[음력 4월|4월]] || [[을사]] || 대 || [[5월 15일]] || [[무진]] |- | [[음력 5월|5월]] || [[병오]] || 소 || [[6월 14일]] || [[무술 (간지)|무술]] |- | [[음력 6월|6월]] || [[정미]] || 대 || [[7월 13일]] || [[정묘]] |- | [[음력 7월|7월]] || [[무신 (간지)|무신]] || 대 || [[8월 12일]] || [[정유 (간지)|정유]] |- | [[음력 8월|8월]] || [[기유]] || 소 || [[9월 11일]] || [[정묘]] |- | [[음력 9월|9월]] || [[경술]] || 대 || [[10월 10일]] || [[병신]] |- | [[음력 10월|10월]] || [[신해]] || 소 || [[11월 9일]] || [[병인]] |- | [[음력 11월|11월]] || [[임자]] || 소 || [[12월 8일]] || [[을미]] |- | [[음력 12월|12월]] || [[계축]] || 대 || [[1943년]] [[1월 6일]] || [[갑자]] |} {{전거 통제}} [[분류:1942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1991}} {{기년법|1991}} {{요즘 화제 년월|1991년}} '''1991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이 해는 [[1947년]]에 시작된 [[냉전]]의 마지막 해였다. 한 해 동안, [[소련]]은 붕괴되었고, 15개의 독립 공화국과 CIS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사건 == * [[1월 17일]] - [[다국적군]], [[이라크]]에 공격을 개시하다. ([[걸프 전쟁]] 발발) * [[1월 30일]] - [[김부남 사건]]이 발생하다. * [[2월 27일]] - 걸프전 종전. [[쿠웨이트]] 해방. * [[3월 3일]] - 사인방 사건 재판에서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장칭]]이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실세였던 [[장쩌민]]이 조치를 내린 [[형벌|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동시에 [[가택 연금|가택연금]] 조치로 처분되었다. * [[3월 5일]] - 제1호 태풍 샤론이 발생하였다. * [[3월 26일]] - [[대한민국]],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 [[지방선거]]가 다시 시행되어 기초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고, 이와 동시에 [[개구리 소년 사건]]이 발생하였다. * [[4월 3일]] -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 중 마지막 열 번째 사건이 발생하다. * [[4월 26일]] - [[명지대학교|명지대생]] [[강경대|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이 발생하다. * [[6월 12일]] -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 [[6월 20일]] - [[지방선거]] 광역의회 의원 선거 * [[6월 25일]] -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 선언하다. * [[7월 19일]] -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가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출범하다. * [[8월 4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남부 해상에서 여객선 오세아노스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승객과 승무원 전원 생존하였다. * [[8월 6일]]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남북한의 유엔가입 신청안을 이의없이 채택함. * [[8월 8일]] - [[레바논]]에서 이슬람 지하드에 5년 넘게 인질로 붙잡혀 있던 [[영국]] [[저널리스트]] [[존 매카시 (언론인)|존 매카시]]가 풀려나다. * [[8월 14일]] -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여성운동가)|김학순]]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다. * [[8월 19일]] -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연금하다. (~21일) * [[8월 21일]] - [[라트비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 [[8월 22일]] ** [[대한민국]]과 [[알바니아]]가 수교하다. ** [[대한민국]], 태풍 글래디스가 상륙하다. * [[8월 24일]]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다. * [[8월 27일]] - [[몰도바]] 독립. * [[9월 2일]] - [[미국]], [[발트해]] 3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독립을 승인하다. * [[9월 4일]] - [[소비에트 연방]], [[발트해]] 3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독립을 승인하다. * [[9월 6일]] - [[발트 3국]] 독립. * [[9월 7일]] - 외무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 평양 77그룹 아주그룹 각료회의에 참석하다. * [[9월 8일]] - [[북마케도니아]] 독립. * [[9월 9일]] - {{국기나라|타지키스탄}} 독립. * [[9월 13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동시가입결의안을 유엔 사무국에 제출하다. * [[9월 15일]] - [[유고슬라비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전면 무력 충돌하다. * [[9월 17일]]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마셜 제도]], [[에스토니아]], [[미크로네시아 연방]]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다. * [[9월 18일]] - [[북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 [[9월 19일]] - [[알프스산맥]]에서 [[석기 시대]] 사람인 욋치의 [[미라]]가 발견되다. * [[9월 21일]] - [[아르메니아]]가 독립하다. * [[9월 23일]] - 이라크, 유엔 핵사찰단 [[바그다드]]에 억류되다. * [[9월 24일]]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다. * [[10월 3일]] - [[대한민국]]과 [[부룬디]]가 수교하다. * [[10월 9일]] - [[전노협]], 업종회의 등을 주축으로 한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이하 ILO공대위)'가 결성되었다. * [[10월 17일]] - [[거성관 화재 사고]] 발생. * [[10월 19일]] - [[여의도광장]]에서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어린이 2명이 숨지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 [[11월 24일]] - 영국의 가수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고백하고 숨졌다. * [[12월 8일]] - ** [[벨라베자 조약]]으로 [[독립국가연합]] 창설. **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이 승인됐다. * [[12월 9일]] - [[웅진여성]] [[에이즈]] 복수극 파문으로 허위 기사로 판명되다. * [[12월 13일]] -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다. * [[12월 16일]] - [[카자흐스탄]]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 [[12월 24일]] - [[러시아 연방]], [[유엔]]에 가입하면서 [[소련]] 계승. * [[12월 25일]]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사임. * [[12월 26일]] -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 '''[[소련]] '''공식 해체.''' '''완벽하게 냉전 종료.''' * [[12월 29일]] - [[중화항공 358편 추락 사고]] 발생. == 문화 == * [[2월 20일]] - [[현대자동차]]에서 2세대 뉴쏘나타를 출시하다. * [[3월]] - {{국기나라|일본}}에서 [[짱구는 못말려|크레용 신짱 (짱구는 못말려)]]이 주간 액션에 정식으로 출간되기 시작함. * [[3월 11일]] - [[KBS 라디오서울]], 오후 5시([[한국 표준시]])에 폐국. * [[3월 20일]] - [[SBS 러브FM|SBS 라디오]] AM 방송 개국. * [[5월 7일]] - [[현대자동차]]에서 4도어 뉴엑셀을 출시하다. * [[5월 14일]] - [[대우조선해양|대우국민차(대우조선해양의 전신인 대우조선 계열)]]에서 [[대우 티코|티코]] 출시.(시판은 같은 달 [[5월 17일|17일]]) * [[6월 3일]] - [[한국GM|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대우 프린스|프린스]] 시판. * [[6월 28일]] ~ [[7월 7일]] - [[1991년 CONCACAF 골드컵]]이 개최되었다. * [[7월 26일]] - {{국기나라|일본}}에서 [[세가]]의 대표 게임인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의 첫 작품이 [[메가드라이브]]로 발매되었다. * [[8월 6일]] -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을 공개하였다. * [[8월 25일]] - [[리누스 토르발스]]가 [[유즈넷]] 뉴스그룹에 새로운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고 있다고 발표했다. * [[9월 7일]] - [[KBS홀]]이 개관하였다. * [[9월 17일]] - [[성남시]] [[중원구]]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분리됨. * [[9월 25일]] - [[현대모비스|현대정공(현대모비스의 전신)]]에서 [[현대 갤로퍼|갤로퍼]] 시판. * [[10월]] - [[한국GM|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대우 브로엄|슈퍼 살롱]] 시판. * [[10월 1일]] - [[국군의 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 [[10월 9일]] -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었으며, 2013년부터 공휴일로 재지정되었다. * [[10월 12일]] -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 [[선전 바오안 국제공항]]이 개항했다. * [[11월 4일]] - [[대우조선해양|대우국민차(대우조선해양의 전신인 대우조선 계열)]]에서 [[한국GM 다마스|다마스]]와 [[한국GM 라보|라보]] 출시.(시판은 같은 달 [[11월 18일|18일]]) * [[11월 11일]] - [[서울지방항공청]] 발족. * [[11월 26일]] - {{국기나라|미국}}에서 [[마이클 잭슨]]이 [[Dangerous (마이클 잭슨의 음반)|Dangerous]]를 발매하였다. * [[12월 5일]] - [[잡지]] [[코믹챔프]] 창간. * [[12월 9일]] - [[대한민국]] [[SBS TV]] 방송 개국 및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 실시. * [[12월 17일]] - 1992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 탄생 == {{분류 참고|1991년 출생}} === 1월 === * [[1월 1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영화배우 [[이아민]]. * [[1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유지 (가수)|유지]].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진하]]. ** 대한민국의 성우 [[김수영 (성우)|김수영]]. * [[1월 3일]] ** 대한민국의 전직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인 [[조유영]]. ** 대한민국의 가수 [[구하라]] ([[카라 (음악 그룹)|카라]]). (~[[2019년]]) ** 미국의 농구 선수 [[다리우스 모리스]]. * [[1월 4일]] - 대한민국의 테니스 선수 김지혜. * [[1월 5일]] ** 대한민국의 댄스 스포츠 선수 이해인.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다니엘 파체코]]. * [[1월 6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정다운. * [[1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우연]].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여명 (정치인)|여명]].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에덴 아자르]].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클레망 그르니에]].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여명 (정치인)|여명]]. * [[1월 8일]] ** 대한민국의 리듬체조 선수 [[신수지]]. ** 대한민국의 래퍼 [[지민 (래퍼)|지민]] ([[AOA (음악 그룹)|AOA]]).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구 선수 [[리영철 (축구 선수)|리영철]]. ** 몬테네그로의 축구 선수 [[스테판 사비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길태곤]]. * [[1월 10일]] ** 스페인의 핸드볼 선수 [[곤살로 페레스 데 바르가스]]. ** 영국의 배우 [[피네건 올드필드]]. * [[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영. * [[1월 12일]] ** 영국의 가수 [[픽시 로트]].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이안]]. ** 대한민국의 가수 [[반석]]. ** 대한민국의 가수, 복싱 선수 [[주형 (가수)|주형]]. * [[1월 14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스티븐 피스코티]]. ** 미국 태생 체코의 야구 선수 [[에릭 소가드]]. * [[1월 15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은서 (레이싱 모델)|이은서]]. ** 대한민국의 럭비 선수 [[안드레 진]]. ** 대한민국의 가수 [[양화 (가수)|양화]].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마르크 바르트라]]. ** 미국의 레슬링 선수 [[애들린 그레이]]. * [[1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대원 (1991년)|이대원]]. * [[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기섭]] ([[유키스]]).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가수 [[송상은]]. ** 핀란드의 랠리 선수 [[에사페카 라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원준 (축구 선수)|김원준]]. * [[1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이안]]. * [[1월 1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노열]] ([[삼성전자 칸]]). ** 대한민국의 래퍼 [[어글리덕]]. ** 대한민국의 배우 [[황인엽]]. * [[1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글로우션]]. * [[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수향]]. * [[1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다윤]]. ** 대한민국의 배우 [[최배영]]. ** 대한민국의 성우 [[성예원]]. * [[1월 2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권영진 (축구 선수)|권영진]]. ** 대한민국의 배우 정연주. * [[1월 24일]] ** 대한민국의 래퍼 [[기리보이]]. ** 우크라이나의 레슬링 선수, 정치인 [[잔 벨레뉴크]]. ** 우크라이나의 레슬링 선수 [[파르비즈 나시보우]]. * [[1월 25일]] ** 일본의 가수 [[세키구치 멘디]]. ** 미국의 배우 [[아리아나 데보세]]. ** 일본의 성우, 배우 [[키타무라 료]].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동혁 (축구 선수)|김동혁]]. * [[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동범 (배우)|김동범]].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해림 (배우)|김해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영오 (뮤지컬 배우)|영오]]. * [[1월 2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강성규]]. ** 대한민국의 가수 [[예아라]]. * [[1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형식 (야구인)|정형식]].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재민]]. * [[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푸만두]]. ** 대한민국의 전 배우 [[박훈정 (배우)|박훈정]]. * [[1월 30일]]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김정우 (프로게이머)|김정우]]. ** 대한민국의 방송인 [[변서은]]. ** 중화인민공화국의 배우 [[장위시]]. * [[1월 31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정종락]].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이슬기 (1991년 1월)|이슬기]]. === 2월 === * [[2월 1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방송인 [[김민아 (방송인)|김민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송서미]]. ** 알제리의 축구 선수 [[파우지 굴람]].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루카 칼디롤라]]. * [[2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최원석. * [[2월 3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염혜선]]. * [[2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아진 (배우)|이아진]]. * [[2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안다 (가수)|안다]]. ** 대한민국의 배우 [[최지희 (1991년생 배우)|최지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민익]]. ** 대한민국의 가수, 태권도 선수 겸 배우 [[나태주 (연예인)|나태주]]. * [[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후자. * [[2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우혁]]. * [[2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남우현]] ([[인피니트]]). ** 튀니지의 축구 선수 [[와흐비 카즈리]]. ** 베네수엘라의 축구 선수 [[다니엘 페블레스]]. * [[2월 9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알무트 슐트]]. ** 대한민국의 유튜버 [[장삐쭈]]. ** 중화인민공화국의 유도 선수 [[청쉰자오]]. * [[2월 10일]] ** 미국의 배우 [[엠마 로버츠]]. ** 대한민국의 가수 [[록현]] ([[백퍼센트 (음악 그룹)|백퍼센트]]). ** 미국의 모델 [[서맨사 후프스]]. *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승훈 (배우)|오승훈]].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엘로]].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은우]]. * [[2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정종현 (프로게이머)|정종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가솔현]]. **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마린 (프로게이머)|마린]]. ** 일본의 아나운서 [[히로나카 아야카]]. *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유다솜 (레이싱 모델)|유다솜]].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엘리아킴 망갈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폰투스 얀손]].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김하윤 (기상 캐스터)|김하윤]]. * [[2월 14일]] - 오스트리아의 사이클 선수, 수학자 [[아나 키젠호퍼]]. * [[2월 16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세르히오 카날레스]].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현영 (축구인)|이현영]]. ** 대한민국의 가수 [[장하온]]. * [[2월 17일]]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 ** 잉글랜드의 배우, 모델 [[보니 라이트]]. * [[2월 18일]] ** 미국의 배우 [[제러미 앨런 화이트]].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민 (1991년)|김성민]].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박기량 (치어리더)|박기량]]. ** 대한민국의 래퍼 [[가오가이]]. * [[2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보디빌딩 선수 [[송나은]]. * [[2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릴샴]]. ** 필리핀의 역도 선수 [[하이딜린 디아스]]. *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솔라 (가수)|솔라]] ([[마마무]]).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지소연]]. ** 알제리의 축구 선수 [[리야드 마레즈]]. ** 일본의 가수 [[세카이 (댄서)|세카이]]. ** 대한민국의 가수 [[이소나]]. * [[2월 22일]] ** 우간다의 육상 선수 [[리베카 체프테게이]]. (~[[202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은율. * [[2월 23일]] - 기니비시우의 축구 선수 [[제르수 페르난드스]]. * [[2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나혜미]]. ** 미국의 모델 [[에밀리 디도나토]]. ** 대한민국의 가수 [[에이민]]. *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민시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신영 (바둑 기사)|김신영]].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민선e]]. * [[2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CL (가수)|CL]]. ** 대한민국의 가수 [[이창섭 (가수)|이창섭]] ([[비투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승호 (1991년)|이승호]]. * [[2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소유]]. ** 대한민국의 배우 [[서준 (배우)|서준]]. ** 일본의 배우 [[렌부츠 미사코]]. * [[2월 28일]] ** 일본의 배우 [[야마모토 히카루]]. ** 일본의 성우 [[야마키타 사키]]. ** 대한민국의 가수 [[로이도]].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강상준 (뮤지컬 배우)|강상준]]. === 3월 === * [[3월 1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준희 (축구 선수)|박준희]]. * [[3월 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민수 (1991년)|김민수]]. *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초롱]] ([[에이핑크]]). ** 대한민국의 배우 [[홍지윤 (배우)|홍지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상민 (축구 선수)|김상민]]. * [[3월 4일]] ** 대한민국의 전직 기상캐스터 [[임혜정]]. ** 대한민국의 배우 [[하수민]]. * [[3월 5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비키 로사다]].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선영 (1991년)|박선영]]. **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해나 맹건로런스]]. * [[3월 6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강민지]]. * [[3월 7일]]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정다혜 (치어리더)|정다혜]].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김윤식 (1991년)|김윤식]]. * [[3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지성]]. ([[워너원]]) ** 대한민국의 배우 [[오영주]]. ** 일본의 성우 [[우메하라 유이치로]]. ** 미국의 가수 [[데번 워크하이저]]. * [[3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영]].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유환]]. * [[3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미르 (가수)|미르]]. **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김영미 (컬링 선수)|김영미]]. **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켄시]]. ** 대한민국의 방송인, 미스코리아 [[정소라]]. * [[3월 11일]] ** 중국의 가수 [[첸링]] ([[모닝구 무스메]]).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알레산드로 플로렌치]]. *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윤채원]]. ** 미국의 배우 [[해나 홀먼]]. ** 헝가리의 근대5종 선수 [[코바치 셔롤터]]. * [[3월 13일]] ** 미국의 전 래퍼 [[일라이 (가수)|일라이]].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나라 (가수)|나라]]. * [[3월 14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사카이 고토쿠]]. ** 대한민국의 방송인 [[서하얀]]. * [[3월 15일]] - 일본의 배우 [[키타노 키이]]. * [[3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진아 (가수)|이진아]]. *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지안]]. * [[3월 18일]] ** 그리스의 축구 선수 [[미할리스 바카키스]].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김자영 (골프 선수)|김자영]].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김태균 (프로게이머)|김태균]]. ** 대한민국의 래퍼 [[장석훈]]. * [[3월 19일]] ** 일본의 가수 [[사쿠라 모코]] ([[허니팝콘]]).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황경영]]. ** 대한민국의 가수 [[신윤아]]. ** 브라질의 육상 선수 [[카이우 본핑]]. * [[3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소니]]. * [[3월 21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투안 그리즈만]].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마테우스 우리베]]. * [[3월 22일]] - 대한민국의 오르간연주가 이예원. * [[3월 23일]] ** 일본의 가수 [[센가 켄토]] ([[Kis-My-Ft2]]).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문찬종]]. * [[3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 [[김미리]]. * [[3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코코. * [[3월 26일]] ** 대한민국 출신 미국 야구 선수 [[롭 레프스나이더]]. ** 대한민국의 앵커, 전 아나운서 [[정성욱 (아나운서)|정성욱]].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허진 (바둑 기사)|허진]]. * [[3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승윤 (1991년)|오승윤]]. ** 대한민국의 성우 [[정유정 (성우)|정유정]]. *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혜영]].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호원 (배우)|이호원]].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루카스 힌터제어]]. * [[3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린 (가수)|아이린]] ([[레드벨벳 (음악 그룹)|레드벨벳]]). ** 대한민국의 배우 [[원진아]]. ** 캐나다의 무술가, 스턴트 배우 [[서맨사 조]].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은골로 캉테]]. ** 일본의 가수 [[후카가와 마이]]. * [[3월 30일]] ** 일본의 성우 [[사사키 미코이]]. ** 대한민국의 배우 [[서한결]]. * [[3월 31일]]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최정민 (프로게이머)|최정민]]. ** 미국의 가수 다니엘 ([[DMTN]]). ** 미국의 모델 이성희. === 4월 === * [[4월 1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바니티 레베리사]]. ** 대하민국의 축구 선수 [[김승대]]. * [[4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상욱]].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정우 (야구 선수)|임정우]]. * [[4월 3일]] ** 미국의 가수 [[헤일리 기요코]]. ** 대한민국의 가수 [[표혜미]]. ([[나인뮤지스]]) * [[4월 4일]] - 일본의 배우 [[코이케 유이]]. * [[4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정수 (1991년)|김정수]].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너새니얼 클라인]]. * [[4월 6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다올]]. ** 독일의 축구 선수 [[알렉산드라 포프]]. * [[4월 7일]] ** 영국의 가수 [[앤마리]].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루카 밀리보예비치]]. * [[4월 8일]] - 일본의 가수 [[다카하시 미나미]] ([[AKB48]]). * [[4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도연 (1991년)|김도연]]. ** 프랑스의 배우 [[마린 박트]]. * [[4월 10일]] ** 대한민국의 유튜버 [[잇섭]]. ** 미국의 가수, 배우 [[어맨다 미샤카]]. * [[4월 11일]] ** 일본의 가수 [[마노 에리나]]. ** 대한민국의 배우 [[방초록]].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티아고 알칸타라]]. *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정현 (바둑 기사)|김정현]].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김성연 (유도 선수)|김성연]]. * [[4월 13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지바니우통 마르친스 페헤이라]]. *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용지]]. * [[4월 15일]] ** 일본의 가수 [[아리오카 다이키]] ([[Hey! Say! JUMP]]).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안한별]]. ** 대한민국의 배우 [[차서원 (1991년)|차서원]]. ** 일본의 해커 [[가네시로 타다시]]. * [[4월 16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동원 (프로게이머)|김동원]]. ** 대한민국의 래퍼 [[IAMMONEY]].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김정은 (미스코리아 대구)|김정은]]. * [[4월 17일]] ** 대한민국의 작가 [[손희애]].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정보경]].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정은 (미스코리아 대구)|김정은]]. ** 대한민국의 배우 [[김대현 (배우)|김대현]]. * [[4월 19일]] ** 대한민국의 유튜버 [[새송]]. ** 대한민국의 가수 달리.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김현준 (1991년생 배우)|김현준]]. **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김국영]]. * [[4월 20일]] - 일본의 가수 [[노나카 미사토]]. * [[4월 21일]] - 가나의 방송인, 배우 [[샘 오취리]]. * [[4월 22일]] ** 이라크의 축구 선수 [[아흐메드 야신 가니|아흐메드 야신]]. ** 일본의 성우 [[사이토 소마]].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에스카]].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주형준]]. *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자이언트핑크]].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대근]]. *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하윤 (1991년)|이슬비]]. *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인선]]. * [[4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곡가 단테. * [[4월 27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이사크 쿠엥카|이사크 쿠엔카]]. ** 대한민국의 배우 [[한재이]]. ** 스위스의 알파인 스키 선수 [[라라 구트]]. * [[4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동현. * [[4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무스 (가수)|무스]].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성]]. ** 대한민국의 배우 [[문지후]]. ** 일본의 가수 [[스즈키 마리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김희진 (배구 선수)|김희진]]. * [[4월 30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레티시아 필리프]]. ** 일본의 가수 [[센고쿠 미나미]]. ** 미국의 래퍼, 디자이너 [[트래비스 스콧]]. === 5월 === *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진운]] ([[2AM]]). ** 대한민국의 가수 [[남유정 (가수)|남유정]] ([[브레이브걸스]]). * [[5월 3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로헬리오 푸네스 모리]]. ** 대한민국의 가수 [[서사무엘]]. * [[5월 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세연 (아나운서)|김세연]]. ** 대한민국의 아이스하키 선수 [[김원준 (아이스하키 선수)|김원준]]. * [[5월 5일]] - 멕시코의 야구 선수 [[라울 히메네스]]. * [[5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은진]]. * [[5월 7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엘리사 바르톨리]]. ** 대한민국의 래퍼 [[저스디스]]. * [[5월 8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임솔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대유 (1991년)|김대유]]. * [[5월 9일]] ** 일본의 축구 선수 [[하라구치 겐키]].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박아름 (1991년)|박아름]]. * [[5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유튜버 [[이민지 (미스코리아)|이민지]]. **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MACO]]. ** 대한민국의 래퍼 겸 안무가 [[빅원 (가수)|빅원]]. * [[5월 1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기자 이수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지훈 (축구 선수)|최지훈]]. ** 대한민국의 가수 [[알케이]]. * [[5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예지. * [[5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응]].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프랑시스 코클랭]]. ** 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조 메이슨]]. * [[5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해진]]. ** 벨기에의 영화 감독 [[뤼카스 돈트]]. *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소율]]. ([[크레용팝]])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정현 (희극인)|김정현]]. ** 대한민국의 예술가, 공연연출가 [[황유택]]. * [[5월 16일]] -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애슐리 왜그너]]. * [[5월 17일]] ** 일본의 전 가수 [[코바야시 카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창혁]].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박지연 (바둑 기사)|박지연]]. * [[5월 18일]] - 이라크의 축구 선수 [[잘랄 하산]]. * [[5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지만]]. * [[5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세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최혜라]]. * [[5월 21일]] ** 미국의 군인 [[힐다 클레이턴]].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호석 (축구 선수)|이호석]]. ** 대한민국의 연극, 뮤지컬 연출가, 프로듀서 [[김현준 (연출가)|김현준]]. ** 대한민국의 가수 [[모니카 (1991년)|모니카]]. * [[5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호]]. ([[EXO]], [[EXO-K]]) ** 나이지리아의 축구 선수 [[조엘 오비]].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카일 바틀리]]. * [[5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훈 (배우)|강훈]].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한승수 (쇼트트랙 선수)|한승수]]. *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윤혜]]. ** 일본의 가수 [[우메다 에리카]]. ** 일본의 컬링 선수 [[후지사와 사쓰키]]. ** 일본의 컬링 선수 [[요시다 지나미]]. * [[5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조아영 (1991년)|조아영]]. ([[달샤벳]]) ** 미국의 영화 배우, 가수, 댄서 줄리아나 로즈 마우리엘로. * [[5월 27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정휘 (배우)|정휘]]. * [[5월 2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지동원]].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알렉상드르 라카제트]]. * [[5월 29일]] ** 일본의 성우 [[하야미 사오리]]. ** 대만의 배우 [[왕다루]]. * [[5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사라. === 6월 === * [[6월 1일]] ** 독일, 미국의 배우 [[자시 비츠]]. ** 대한민국의 전직 스티그래프트 프로게이머 [[조병세 (프로게이머)|조병세]]. * [[6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진소연]]. ** 대한민국의 가수 [[해나 (가수)|해나]]. * [[6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이현 (1991년)|조이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유리 (1991년 6월)|김유리]]. ** 대한민국의 가수 [[혜이니]].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박수호 (프로게이머)|박수호]]. ** 도미니카공화국의 야구 선수 [[요르다노 벤투라]]. (~[[2017년]]) * [[6월 4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에이제이 (가수)|에이제이]]. ** 영국의 배우 [[메건 프레스콧]]. ** 영국의 배우 [[캐스린 프레스콧]].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로렌초 인시녜]]. ** 대한민국의 가수 [[시윤]].([[유키스]]) * [[6월 5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남궁경호]].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영 (1991년)|김소영]]. * [[6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손동운]] ([[비스트 (음악 그룹)|비스트]], [[하이라이트 (음악 그룹)|하이라이트]]). ** 대한민국의 가수 [[장재인]]. ** 일본의 가수 [[요네자와 루미]]. * [[6월 7일]] - 대한민국의 래퍼 [[릴보이]]. * [[6월 8일]] ** 독일의 모델 [[스테파니 미초바]]. ** 대한민국의 성악가 [[존 노]].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용재 (축구 선수)|이용재]]. * [[6월 9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쇼트트랙 선수 [[저우양 (쇼트트랙 선수)|저우양]]. * [[6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지. * [[6월 11일]] - 일본의 가수 [[토노오카 에리카]]. * [[6월 12일]] - 캐나다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제시 레예스]]. * [[6월 13일]] ** 우크라이나 출신 아제르바이잔의 유도 선수 [[이리나 킨제르스카]]. ** 대한민국의 가수 [[강시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라이언 메이슨]]. * [[6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다은 (배우)|송다은]]. ** 그리스의 축구 선수 [[코스타스 마놀라스]]. ** 잉글랜드의 가수 [[제시 넬슨 (가수)|제시 넬슨]]. * [[6월 15일]] - 일본의 배우 [[다케다 리나]]. * [[6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우]] ([[B1A4]]). ** 대한민국의 가수 [[임영웅]].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한태인]]. ** 우즈베키스탄의 복싱 선수 [[파즐리딘 가이브나자로프]]. ** 필리핀의 사회자, 배우, 가수 [[라이언 방]]. * [[6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동혁]].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트 프로게이머 [[장민철]]. ** 대한민국의 디자이너 [[김현지 (디자이너)|김현지]]. ** 일본의 배우 [[하루 (배우)|하루]]. * [[6월 18일]] ** 대만의 배우, 가수 [[커전둥]]. ** 일본의 배우 겸 가수 [[오카모토 레이]]. * [[6월 19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이 크라마리치]]. ** 덴마크의 축구 선수 [[카트리네 베예]]. * [[6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HW4NG]]. ** 세네갈의 축구 선수 [[칼리두 쿨리발리]]. * [[6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안승민]] ([[한화 이글스]]). ** 대한민국의 가수 [[민 (가수)|민]] ([[미스에이]]). ** 대한민국의 희극인 [[장하나 (희극인)|장하나]]. ** 대한민국의 가수 [[PERC%NT]]. * [[6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서준. * [[6월 24일]] ** 일본의 가수 [[키타하라 리에]]. ** 일본의 성우 [[쿠와하라 유우키]].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김민구 (농구 선수)|김민구]]. ** 카타르의 육상 선수 [[무타즈 이사 바르심]]. * [[6월 25일]] - 케냐의 축구 선수 [[빅터 완야마]]. * [[6월 2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안수민]]. ** 일본의 성우 [[하나에 나츠키]]. *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박민하 (1991년)|박민하]]. ** 대한민국의 배우 [[이원근]]. ** 일본의 성우, 가수 [[야마자키 하루카]]. * [[6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서현 (가수)|서현]] ([[소녀시대]]). ** 대한민국의 가수 [[강민혁 (가수)|강민혁]] ([[씨엔블루]]).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케빈 더 브라위너]].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우 (1991년)|이재우]].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가람 (가수)|가람]]. * [[6월 2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석현준]] ([[AFC 아약스]]).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제이슨 데이비드슨]]. * [[6월 30일]] - 일본의 배우 [[카호]]. === 7월 === * [[7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백수연]].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루카스 바스케스]]. ** 대한민국의 프로 사진기사 윤원균. * [[7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고은]]. * [[7월 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남태희]]. **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아나스타시야 파블류첸코바]]. ** 영국의 펜싱 선수 [[제임스앤드루 데이비스]]. ** 일본의 가수 [[이타노 도모미]] ([[AKB48]]).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배우 [[신인선]]. * [[7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슬릭 (래퍼)|슬릭]]. *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박준호. * [[7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환희]]. * [[7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태준]].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왕준호]]. * [[7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태리]]. ** 대한민국의 희극인 [[황신영]]. ** 네델란드의 축구 선수 [[버질 판 데이크]]. ** 대한민국의 가수 [[두리 (가수)|두리]]. * [[7월 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기제]]. * [[7월 10일]] ** 일본의 가수 [[마에다 아쓰코]] ([[AKB48]]). ** 대한민국의 리듬체조 선수 [[김윤희 (체조 선수)|김윤희]]. ** 대한민국의 배우 [[정유민 (배우)|정유민]]. ** 우크라이나의 리듬체조 선수 [[알리나 막시멘코]]. * [[7월 11일]] ** 일본의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승빈]]. ** 중국의 배우 [[한청위]]. ** 대한민국의 성악가, 뮤지컬 배우 [[박회림]]. * [[7월 12일]]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하메스 로드리게스]]. ** 스페인의 테니스 선수 [[파블로 카레뇨 부스타]]. ** 코스타라카의 배우 [[다니엘 소바토]]. * [[7월 13일]] ** 미국의 야구 선수 [[타일러 스캐그스]]. (~[[2019년]]) ** 태국의 배우, 모델 [[앙수말린 신팟라삭메타]]. * [[7월 14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강지수 (기상 캐스터)|강지수]]. ** 미국의 가수 [[지호지방시]]. * [[7월 15일]] ** 일본의 가수 [[가시와기 유키]] ([[AKB48]]). ** 일본의 축구 선수 [[다니구치 쇼고]].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석환]].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다닐루 루이스 다 시우바]]. ** 일본의 성우 [[히오카 나츠미]]. ** 미국의 농구 선수 [[데릭 페이버스]]. ** 중국의 야구 선수 [[왕천싱]]. ** 대한민국의 배우 [[윤영경]]. * [[7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로. * [[7월 17일]] - 미국의 힙합 가수 [[맨 (가수)|맨]]. * [[7월 18일]] ** 대한민국의 현대무용가 [[김민진 (현대 무용가)|김민진]]. ** 일본의 배우 [[야마모토 미즈키]]. * [[7월 19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박상면 (프로게이머)|박상면]].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이연윤]]. ** 대한민국의 전 기상캐스터 [[김태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대현 (1991년)|정대현]]. ** 대한민국의 가수 [[강설민]]. * [[7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시온.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임단 지도자 [[이종원 (e스포츠인)|이종원]]. * [[7월 21일]] - 일본의 배우, 가수 [[야스이 켄타로]]. * [[7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신재은 (모델)|신재은]]. * [[7월 23일]]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호준 (프로게이머)|이호준]].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은 (1991년)|김성은]].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광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황인준 (1991년)|황인준]]. ** 칠레의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네 엔들레르]]. * [[7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메이다니]]. ** 대한민국의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황병영]]. * [[7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핑]]. * [[7월 2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준태 (1991년)|박준태]]. * [[7월 27일]] ** 일본의 가수 [[마쓰이 레나]] ([[SKE48]]). ** 대한민국의 배우 [[조윤우]]. ** 일본의 만화가 [[하루바 네기]]. ** 대한민국의 배우 [[주종혁 (1991년)|주종혁]].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경 (1991년)|이태경]]. * [[7월 28일]] ** 일본의 배우 [[아이자와 리나]].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성근]]. * [[7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유환]] ([[스피드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스피드]]).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주원 (축구 선수)|김주원]].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최훈호]]. ** 대한민국의 전 배드민턴 선수 [[성지현]] * [[7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벤 (대한민국의 가수)|벤]]. ** 대한민국의 배우 [[지율 (가수)|지율]]. ** 잉글랜드의 가수 [[다이애나 비커스]]. * [[7월 3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선엽]]. === 8월 === * [[8월 1일]]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정민수 (프로게이머)|정민수]]. * [[8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태양. *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남영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은성 (1991년)|지은성]]. ** 일본의 가수 [[마스다 유카]]. ** 일본의 양궁 선수 [[가와나카 가오리]]. * [[8월 5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아스 바이만]].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담]].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지수 (1991년)|김지수]]. (~[[2007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위하준]]. * [[8월 6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송다혜. * [[8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시영]]. ** 미국의 야구 선수 [[마이크 트라우트]]. ** 대한민국의 배우 [[이지영 (1991년)|이지영]]. * [[8월 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마르타 코레데라]]. ** 카메툰의 축구 선수 [[조엘 마티프]]. * [[8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헤이즈 (가수)|헤이즈]]. **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 [[알렉사 블리스]]. ** 인도의 배우, 모델 [[한시카 모트와니]]. * [[8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현영]] ([[레인보우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레인보우]]). ** 대한민국의 가수 정동환 ([[멜로망스]]). **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간다효]]. ** 대한민국의 유튜버 [[효기심]]. * [[8월 12일]] ** 일본의 배우 [[오자와 렌]]. ** 대한민국의 배우 [[강영석 (배우)|강영석]]. * [[8월 1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백성동]].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힐다 칼렌]]. ** 대한민국의 사이클 선수 이주희. * [[8월 14일]] -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와꾸대장봉준]]. * [[8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프린]]. *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훈 (가수)|훈]] ([[유키스]]). ** 대한민국의 가수 [[리세 (가수)|리세]] ([[레이디스 코드]]). (~[[2014년]]) ** 아일랜드의 배우 [[이반나 린치]]. * [[8월 1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모리야스 쇼헤이]]. ** 미국의 배우 [[오스틴 버틀러]]. * [[8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기현 (배우)|이기현]]. **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선수 [[살렘 알다우사리]]. * [[8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은성]].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한호정]]. * [[8월 21일]] ** 일본의 배우 [[마나키 레이카]].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레안드로 바쿠나]]. * [[8월 22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페데리코 마케다]]. ** 대한민국의 배우 [[류해준]]. ** 대한민국의 배우 [[손소망]]. ** 대한민국의 배우 [[조보아]].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최원종 (뮤지컬 배우)|최원종]]. * [[8월 23일]]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미스코리아 [[조수연 (방송인)|조수연]].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문도원]]. * [[8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영한]] ([[삼성전자 칸]]).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임태규]].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크 우트]]. * [[8월 25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김세훈 (1991년)|김세훈]]. * [[8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민석 (가수)|김민석]]. ** 미국의 배우 [[딜런 오브라이언]].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성준 (축구 선수)|박성준]]. * [[8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성열]] ([[인피니트]]). *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JUN H.]] ([[UNVS]]). ** 대한민국의 가수 이진희. ** 미국의 배우, 가수 [[카일 매시]]. * [[8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YY (가수)|YY]] ([[UNVS]]). ** 대한민국의 가수 [[이상규 (가수)|이상규]] ([[양반들 (음악 그룹)|양반들]]). ** 대한민국의 모델 [[태이 (모델)|태이]]. ** 미국의 DJ [[데오로]]. ** 프랑스의 배우 [[가이아 와이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주원 (1991년생 야구 선수)|김주원]]. * [[8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이. === 9월 === * [[9월 1일]] ** 대한민국의 모델, 기업인 [[김민영 (모델)|김민영]].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선기 (야구 선수)|김선기]]. * [[9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니스 (가수)|유니스]]. ** 대한민국의 희극인 [[조수연 (희극인)|조수연]]. * [[9월 3일]]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이평강]]. * [[9월 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동원 (프로게이머)|신동원]] ([[CJ 엔투스]]) ** 대한민국 엔터테이너 엄준식. * [[9월 5일]] ** 잉글랜드의 배우 [[스캔더 케인스]]. ** 일본의 야구 선수 [[이와사다 유타]]. ** 노르웨이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헤게 뵈코]]. ** 대한민국의 전직 오버워치 프로게이머 [[류제홍]]. ** 미국의 배우 [[폴리나 싱어]]. * [[9월 6일]] **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인 [[권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권도형]]. * [[9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방세진]]. ** 대한민국의 배우, 방송인 [[김아라]]. * [[9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소담]]. * [[9월 9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오스카르 두스 산투스 임보아바 주니오르]].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장혜선 (아나운서)|장혜선]]. ** 대한민국의 성악가 [[김바울]]. ** 중국의 배우 [[양양 (배우)|양양]].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방송인 [[정우재 (골프 선수)|정우재]]. * [[9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예원]]. * [[9월 11일]] ** 노르웨이의 음악 프로듀서 [[카이고]].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김유리 (배구 선수)|김유리]]. * [[9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한울]]. ** 대한민국의 가수 [[소유 (가수)|소유]]. ([[씨스타]])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손자희]]. ** 벨기에의 축구 선수 [[토마 뫼니에]].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규빈]]. * [[9월 13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다영. * [[9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나 (배우)|나나]] ([[애프터스쿨]]). ** 대한민국의 희극인 [[홍나영]]. ** 뉴질랜드의 축구 선수 [[라이언 데 브리스]]. * [[9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신]] ([[씨엔블루]]). ** 대한민국의 모델, 무용가 [[박다영]]. *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고영표]].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안성준 (바둑 기사)|안성준]]. * [[9월 17일]] ** 일본의 성우 [[코토부키 미나코]]. ** 캐나다의 배우 [[미나 마수드]].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안병훈 (골프 선수)|안병훈]]. * [[9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현목]].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전광인]]. * [[9월 19일]]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아뎀 랴이치]]. ** 일본의 모델 [[시마 마키]]. * [[9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종훈 (1991년)|박종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심동섭]]. ** 아랍에미리트의 축구 선수 [[오마르 압둘라흐만]]. ** 대한민국의 모델 [[정혁 (모델)|정혁]]. ** 일본 태생 오스트레일리아의 육상 선수 [[켈시리 바버]]. ** 미국의 배우 [[조나 메이어슨]]. * [[9월 21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류민형]]. * [[9월 22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두경민]]. *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Key (가수)|Key]] ([[샤이니]]). ** 멕시코의 축구 선수 [[스테파니 마요르]]. * [[9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도지한]]. ** 대한민국의 래퍼 [[그냥노창]]. ** 대한민국의 유튜버, 가수 [[조민 (1991년)|조민]]. ** 일본의 전 축구 선수 [[사카모토 가즈토]]. * [[9월 2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조현우]]. *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여민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진우 (가수)|김진우]] ([[위너 (음악 그룹)|위너]]).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민유린]]. ** 대한민국의 배우 [[강서연]]. ** 대한민국의 배우 [[박수연 (1991년)|박수연]].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정주 (축구 선수)|김정주]]. * [[9월 27일]] ** 일본의 가수 [[요코야마 루리카]]. ** 일본의 배우 [[우치다 리오]]. ** 루마니아의 테니스 선수 [[시모나 할레프]].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셀 할스텐베르크]]. * [[9월 2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장현수]]. * [[9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수현. ** 영국의 태권도 선수 [[비앙카 워크든]]. * [[9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오니. === 10월 === * [[10월 1일]] - 대한민국의 장고연주가 정이수. * [[10월 2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은별]].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김호중 (음악가)|김호중]].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건태 (야구인)|김건태]].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호베르투 피르미누]]. ** 대한민국의 핸드볼 선수 [[이미경 (핸드볼 선수)|이미경]]. * [[10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박성균 (프로게이머)|박성균]] ([[KT 롤스터]]). ** 일본의 가수 [[타카죠 아키]]. * [[10월 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노동건]]. * [[10월 5일]] ** 중국의 배우 겸 아이돌 [[샤오잔]]. ** 대한민국의 가수 [[강자민]]. * [[10월 6일]] ** 대한민국의 피트니스 모델 [[이연화 (모델)|이연화]]. ** 대한민국의 가수, 래퍼 [[프란코 (래퍼)|프란코]]. * [[10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니콜|니콜]].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 ([[EXO]], [[EXO-M]]). * [[10월 8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민수 (1991년 10월)|김민수]].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엘]]. * [[10월 9일]] - 미국의 배우 [[켈시 차우]]. *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슬기 (배우)|김슬기]]. **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선수 [[모하메드 알오와이스]]. ** 스위스의 축구 선수 [[제르단 샤키리]]. *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진 (1991년)|소진]] ([[나인뮤지스]]).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키카 판 에스]]. ** 미국의 음악가, 게임 개발자 [[토비 폭스]]. ** 일본의 가수, 모델 [[하루나 루나]]. ** 일본의 성우 [[니시야마 코타로]].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주세페 데 루카]]. *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권혜인]]. ** 대한민국의 배우 [[송지현 (배우)|송지현]]. *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강아랑]]. ** 대한민국의 가수, 래퍼 [[오왼]]. ** 대한민국의 가수 [[전은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박하얀]]. *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김수진. *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손수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이서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국헌]]. ** 일본의 여성 아이돌 [[나카야 사야카]]. *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장예인]]. * [[10월 17일]] - 중국의 바둑 기사 [[장웨이제]]. *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유라 (가수)|김유라]]. ** 일본의 작가 [[마후마후]]. ** 대한민국의 가수 [[김민지 (2001년)|김민지]]. ** 스코틀랜드의 배우 [[조애나 밴더햄]]. * [[10월 19일]] - 일본의 바이올리니스트, 성우 [[Ayasa]]. *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신진호 (야구인)|신진호]]. ** 대한민국의 가수 [[탱 (가수)|탱]]. * [[10월 21일]] - 아르메니아의 레슬링 선수 [[아르투르 알렉사냔]]. *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최고기]]. *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곽진언]].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신원호 (가수)|신원호]] ([[크로스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에밀 포르스베리]].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권진영 (축구 선수)|권진영]].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권용현]]. ** 일본의 전 황족 [[고무로 마코]].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에밀 포르스베리]]. *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나 (1991년)|이나]]. * [[10월 25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정바스]]. * [[10월 2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전용기]]. ** 대한민국의 배우 [[지이수]]. ** 일본의 배우 [[이이다 리호]]. ** 일본의 배우, 가수 [[와타나베 슈]]. *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우영]]. * [[10월 28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마르코스 아쿠냐]].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루시 브론즈]]. *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지민 (아나운서)|박지민]]. *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승안]]. * [[10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변우석]]. === 11월 === * [[11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선웅]].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경민 (1991년)|김경민]]. ** 대한민국의 체조 선수 [[조재윤 (체조 선수)|조재윤]]. ** 일본의 배우 [[하시모토 타이토]]. * [[11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채지안]]. * [[11월 4일]] ** 일본의 스모 선수 [[쇼부시 간지]]. (~[[2020년]]) ** 미국의 배우 [[아드리아나 체칙]]. * [[11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원식 (축구 선수)|김원식]]. *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가영. * [[11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국악인 [[박민주 (가수)|박민주]]. * [[11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범주 (가수)|범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윤희 (아나운서)|김윤희]].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민아 (축구 선수)|이민아]]. * [[11월 9일]] ** 미국의 가수 [[애슐리 (음악가)|애슐리]] ([[레이디스 코드]]).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성현 (야구 선수)|문성현]]. *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준. *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맹세창]]. ** 캐나다의 배우 [[데번 보스틱]]. *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봄이]]. ** 일본의 가수 [[히라마쓰 가나코]]. * [[11월 15일]] ** 미국의 배우 [[셰일린 우들리]]. ** 대한민국의 희극인 [[송필근]]. *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박형식]].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윤하운]]. ** 일본의 가수 [[카사이 토모미]]. ** 대한민국의 킥복싱 선수 강주희.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네마냐 구델]]. *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영]] ([[B1A4]]). ** 대합민국의 가수 [[스텔라장]].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도 선수 [[엄윤철]]. *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규원 (1991년)|이규원]]. *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세용]] ([[마이네임 (음악 그룹)|마이네임]]). ** 대한민국의 래퍼 [[딘딘]].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이슬아 (바둑 기사)|이슬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현 (1991년)|이승현]]. *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희 (가수)|우희]] ([[달샤벳]], [[유니티 (음악 그룹)|유니티]]). ** 독일의 축구 선수 [[디에고 뎀메]]. * [[11월 22일]] - 일본의 가수 [[시미즈 사키]] ([[Berryz코보]]). * [[11월 23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윌리앙 주제 다 시우바]]. *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김미나]]. *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키스#케빈|케빈]] ([[유키스]]). *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강유택]].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마놀로 가비아디니]]. *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도우]].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이 (남자 배우)|이상이]]. *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윤채]]. ** 베트남의 축구 선수 [[후인느]]. *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차주현]]. *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들레]]. **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게이머 [[유영진 (프로게이머)|유영진]]. === 12월 === * [[12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원 (배우)|정혜원]]. ** 중국의 수영 선수 [[쑨양]].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민우 (축구 선수)|이민우]]. *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출신 인터넷 방송인 [[정다래]]. ** 대한민국의 가수 [[김가영 (1991년)|김가영]].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남유진 (기상 캐스터)|남유진]].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찰리 푸스]]. * [[12월 3일]] ** 대한민국의 래퍼 [[한요한]]. ** 대한민국의 가수 [[신예영]]. ** 대한민국의 가수 [[지유 (가수)|지유]]. * [[12월 5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야코포 살라]]. ** 미국의 야구 선수 [[크리스천 옐리치]]. * [[12월 6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나현 (바둑 기사)|김나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진하진]]. ** 대한민국의 희극인 [[조준래]]. * [[12월 7일]] ** 뉴질랜드의 축구 선수 [[크리스 우드 (축구 선수)|크리스 우드]]. ** 일본의 배우 [[사쿠라다 도리]]. ** 대한민국의 래퍼 [[TAKEWON]]. * [[12월 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윤하]]. ** 대한민국의 희극인 [[송이지]]. *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LE (가수)|LE]] ([[EXID]]).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민철 (프로게이머)|김민철]]. * [[12월 11일]] ** 대한민국 전직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조커 (프로게이머)|조커]]. ** 스웨덴의 가수 [[안나 베리엔달]]. ** 대한민국의 배우 [[윤혜리]]. *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차세영]].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원준 (야구 선수)|김원준]]. * [[12월 13일]] ** 일본의 배우 [[오노 노노카]]. ** 짐바브웨의 축구 선수 [[텐다이 다리콰]]. * [[12월 14일]] ** 일본의 배우, 가수 [[타카하타 미츠키]]. ** 미국의 래퍼, 싱어송라이터 [[오프셋 (래퍼)|오프셋]]. ** 대한민국의 전 배우 [[차주혁]].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은지 (아나운서)|조은지]]. * [[12월 15일]] ** 미국의 음악가, 배우 [[알라나 하임]] ([[하임 (밴드)|하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영준 (1991년)|최영준]]. *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이지혜.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새미나]]. ** 대한민국의 만화가 [[이자혜]]. ** 대한민국의 가수 [[하평 (가수)|하평]]. *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재진 (1991년)|이재진]] ([[F.T 아일랜드]]). ** 대한민국의 배우 [[정해나]]. *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정다정]]. ** 일본의 가수 [[이노우에 나루]]. ** 대한민국의 아이스하키 선수 [[박진규 (아이스하키 선수)|박진규]]. * [[12월 19일]] ** 일본의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 ** 중국의 가수, 방송인 [[펑티모]].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스티븐 베르하위스]].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철규 (아나운서)|박철규]]. *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빛찬]].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조르지뉴 (1991년)|조르지뉴]]. *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형태 (가수)|김형태]]. *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세희 (배우)|이세희]]. ** 미국의 래퍼 [[다베이비]]. ** 일본의 가수 [[시미즈 사키]]. *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푸름]]. **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윤태경 (1991년)|윤태경]]. * [[12월 24일]] ** 영국의 가수 [[루이 톰린슨]]. ** 대한민국의 성악가 [[강동훈 (성악가)|강동훈]]. * [[12월 25일]] ** 일본의 배우 [[쿠로세 마나미]]. ** 일본의 성우, 가수 [[아이미 (성우)|아이미]].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주지훈 (농구 선수)|주지훈]]. *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필드하키 선수 서정은. ** 대한민국의 배우 [[장유빈]]. ** 대한민국의 가수 [[최우진 (가수)|최우진]]. ** 미국의 배우 [[이든 셔]]. *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다인. ** 대한민국의 배우 [[선주아]]. *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승범 (1991년)|홍승범]]. ** 일본의 가수 [[오오야 시즈카]]. *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민희 (여자 가수)|강민희]]. *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전 아나운서, 앵커 [[김지현 (앵커)|김지현]]. *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나영 (가수)|김나영]].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철 (배우)|김성철]]. ** 우크라이나의 위키인 [[이호르 코스텐코]]. (~[[2014년]]) === 미상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SUMIN]]. *대한민국의 가수 [[박민영 (가수)|박민영]]. *대한민국의 배우 [[서지원 (배우)|서지원]].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이예은 (1991년)|이예은]]. *대한민국의 필드하키 선수 [[이정준 (필드하키 선수)|이정준]]. == 사망 == [[파일:Olav V of Norway.jpg|섬네일|120px|올라프 5세]] [[파일:Rajiv Gandhi (1987).jpg|섬네일|120px|라지브 간디]] [[파일:Miles Davis by Palumbo.jpg|섬네일|120px|마일스 데이비스]] [[파일:Freddie Mercury Statue Montreux.jpg|섬네일|120px|프레디 머큐리]] {{분류 참고|1991년 사망}} * [[1월 17일]] - 노르웨이의 국왕 [[올라프 5세]]. (1903년~) *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한복남]]. (1919년~) * [[1월 30일]] - 미국의 물리학자 [[존 바딘]]. (1908년~) * [[2월 20일]] -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유진 포시]]. (1904년~) * [[4월 16일]] - 영국의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 (1908년~) * [[4월 26일]] - 대한민국의 열사, 학생운동가 [[강경대]]. (1972년~) * [[5월 14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장칭]]. (1914년~) * [[5월 21일]] - 인도의 정치인 [[라지브 간디]]. (1944년~) * [[5월 25일]] -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김귀정]]. ([[1966년]]~) * [[6월 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허정숙]]. (1902년~) * [[6월 14일]] - 영국의 배우 [[페기 애시크로프트]]. (1907년~) * [[7월 19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창희 (1933년)|이창희]]. (1933년~) * [[8월 22일]] - 소련의 공산주의 정치가 [[보리스 푸고]]. (1937년~) * [[9월 7일]] - 미국의 물리학자 [[에드윈 맥밀런]]. (1907년~) * [[9월 28일]] ** 프랑스의 작곡가 [[외젠 보자]]. (1905년~)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 (1926년~) * [[11월 9일]] - 프랑스의 배우 [[이브 몽탕]]. (1921년~) * [[11월 24일]] - 영국의 가수,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 (1946년~) * [[12월 15일]] - 소련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1915년~) *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인한. (1924년~) == 노벨상 == * '''경제학상''': 로널드 H. 코스 * '''문학상''': [[나딘 고디머]] * '''물리학상''': [[피에르질 드 젠]] * '''생리학 및 의학상''': [[에르빈 네어]], [[베르트 자크만]] * '''평화상''': [[아웅산 수지]] * '''화학상''': 리하르트 R. 에른스트 == 달력 == {{연간달력|1991}} === 음양력 대조 일람 ===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경인]] || 소 || [[2월 15일]] || [[병진 (간지)|병진]] |- | [[음력 2월|2월]] || [[신묘]] || 대 || [[3월 16일]] || [[을유]] |- | [[음력 3월|3월]] || [[임진]] || 소 || [[4월 15일]] || [[을묘]] |- | [[음력 4월|4월]] || [[계사 (간지)|계사]] || 소 || [[5월 14일]] || [[갑신]] |- | [[음력 5월|5월]] || [[갑오]] || 대 || [[6월 12일]] || [[계축]] |- | [[음력 6월|6월]] || [[을미]] || 소 || [[7월 12일]] || [[계미]] |- | [[음력 7월|7월]] || [[병신]] || 소 || [[8월 10일]] || [[임자]] |- | [[음력 8월|8월]] || [[정유 (간지)|정유]] || 대 || [[9월 8일]] || [[신사 (간지)|신사]] |- | [[음력 9월|9월]] || [[무술 (간지)|무술]] || 소 || [[10월 8일]] || [[신해]] |- | [[음력 10월|10월]] || [[기해]] || 대 || [[11월 6일]] || [[경진]] |- | [[음력 11월|11월]] || [[경자]] || 대 || [[12월 6일]] || [[경술]] |- | [[음력 12월|12월]] || [[신축]] || 대 || [[1992년]] [[1월 5일]] || [[경진]] |} {{전거 통제}} [[분류:1991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국회 임기 정보 | 이름 = 제16대 대한민국 국회 | 그림 = File:Vladimir Putin in South Korea 26-28 February 2001-10.jpg | 그림크기 = | 그림설명 =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 입법부 = [[대한민국 국회]] | 국가 = | meeting_place = | 선거 = [[2000년 대한민국 총선|2000년 4월 13일 총선]] | 정부 = [[김대중 정부]] (~2003.2.24)<br>[[노무현 정부]] (2003.2.25~) | 임기시작 = | 임기끝 = | 전 =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제15대 국회]] | 후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제17대 국회]] | 웹사이트 = | 의원1 = | 의원수1 = 273명<br> (227석 / 46석) | 과반정당1 = | 의원1대표1유형 = [[대한민국 국회의장|의장]] | 의원1대표1 = [[이만섭]] (전반기)<br>[[박관용]] (후반기) | 의원1대표2유형 = 부의장 | 의원1대표2 = [[홍사덕]]·[[김종하 (정치인)|김종하]], [[김종호 (1935년)|김종호]] (전반기)<br>[[김태식 (정치인)|김태식]], [[조부영]] (후반기) | 회기1시작 = {{시작 날짜|2000|05|30|df=y}} | 회기1유형 = 임기 | 회기1끝 = 2004년 5월 29일 }} '''제16대 [[대한민국 국회]]'''는 21세기 첫 대한민국 국회이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상 첫 원내교섭단체 양당체제로 [[2000년]] [[6월 5일]]에 개원하였다. ==임기== 4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국회의 구성== ===의장·부의장=== {| class="wikitable" |- | || colspan=2| 2000년 6월 5일 ~ 2002년 5월 29일|| colspan=2| 2002년 7월 8일 ~ 2004년 5월 29일 |- |<b>국회의장 || align="center" colspan=2| [[이만섭]] || align="center" colspan=2| [[박관용]] |- |<b>국회부의장 ||align="center"| [[홍사덕]] (한나라당)<ref name="보선">보궐선거를 통해 선출된 김종하 의원이 2001년 6월 12일부터 국회부의장직을 맡았다.</ref> <br/>[[김종하 (정치인)|김종하]] (한나라당)<ref name="보선"/>|| align="center"| [[김종호 (1935년)|김종호]] (자유민주연합) || align="center"| [[김태식 (정치인)|김태식]] (새천년민주당) || align="center"|[[조부영]] (자유민주연합) |} === 정당별 구성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대한민국 국회]] 정당별 의석수 |- ! rowspan="2" |교섭단체명 ! rowspan="2" |정당명 ! colspan="3" |2000년 총선 당시 ! colspan="3" |2004년 총선 당시 |- ! 지역구 ! 비례대표 ! 합계 ! 지역구 ! 비례대표 ! 합계 |- style="background-color:#ccffcc;" |'''한나라당''' | '''[[한나라당]]''' | 112석 | 21석 | 133석 | 118석 | 21석 | 139석 |- style="background-color:#ccffcc;" |'''새천년민주당''' | '''[[새천년민주당]]''' | 96석 | 19석 | 115석 | 40석 | 19석 | 59석 |- style="background-color:#ccffcc;" |'''열린우리당''' | '''[[열린우리당]]''' | colspan=3| [[한나라당]]<br>[[새천년민주당|민주당]]에서 분리 | 49석 | 0석 | 49석 |- |rowspan=6 style="background-color:#eeEEee;"|'''비교섭단체''' |- style="background-color:#ffcccc;" | '''[[자유민주연합]]''' | 12석 | 5석 | 17석 | 5석 | 5석 | 10석 |- style="background-color:#ffcccc;" | '''[[민주국민당 (2000년)|민주국민당]]''' | 1석 | 1석 | 2석 | 0석 | 1석 | 1석 |- style="background-color:#ffcccc;" | '''[[국민통합21]]''' | colspan=3| 신생정당 | 1석 | 0석 | 1석 |- style="background-color:#cccccc;" | '''[[희망의한국신당]]''' | 1석 | 0석 | 1석 | colspan=3| 자진해산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 |- style="background-color:#ffcccc;" | 무소속 | 5석 | - | 5석 | 11석 | - | 11석 |- !colspan=2|계 | 227석 | 46석 | 273석 | 224석 | 46석 | 270석 |} {{범례|#ccffcc|교섭단체}} {{범례|#ffcccc|비교섭단체}} {{범례|#cccccc|해체된 정당}} === 상임위원회 === {{Col-begin}} {{col-2}} {| class=wikitable "font-size:85%;" |+ 16대 국회 상임위원회 전반기 위원장 명단 |- !위원회!!이름!!소속정당 |- |rowspan=3|국회운영위원회||[[정균환]]||[[새천년민주당]] |- ||[[이상수]]||새천년민주당 |- ||[[정균환]]||새천년민주당 |- |법제사법위원회||[[박헌기]]||[[한나라당]] |- |정무위원회||[[박주천]]||한나라당 |- |rowspan=2|재정경제위원회||[[최돈웅]]||한나라당 |- ||[[나오연]]||한나라당 |- |통일외교통상위원회||[[박명환]]||한나라당 |- |국방위원회||[[천용택]]||새천년민주당 |- |행정자치위원회||[[이용삼]]||새천년민주당 |- |교육위원회||[[이규택]]||한나라당 |- |rowspan=2|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이상희]]||한나라당 |- ||[[김형오]]||한나라당 |- |문화관광위원회||[[최재승]]||새천년민주당 |- |농림해양수산위원회||[[함석재]]||[[자유민주연합]] |- |산업자원위원회||[[박광태]]||새천년민주당 |- |보건복지위원회||[[전용원]]||한나라당 |- |rowspan=2|환경노동위원회||[[유용태]]||새천년민주당 |- ||[[이윤수]]||새천년민주당 |- |건설교통위원회||[[김영일]]||한나라당 |- |정보위원회||[[김명섭 (1938년)|김명섭]]||새천년민주당 |- |여성위원회||[[이연숙 (1935년)|이연숙]]||한나라당 |} {{col-2}} {| class=wikitable "font-size:85%;" |+ 16대 국회 상임위원회 후반기 위원장 명단 |- !위원회!!이름!!소속정당 |- |rowspan=2|국회운영위원회||[[정균환]]||[[새천년민주당]] |- ||[[유용태]]||새천년민주당 |- |rowspan=2|법제사법위원회||[[함석재]]||[[한나라당]] |- ||[[김기춘]]||한나라당 |- |rowspan=2|정무위원회||[[이강두]]||한나라당 |- ||[[이재창]]||한나라당 |- |rowspan=2|재정경제위원회||[[나오연]]||한나라당 |- ||[[안택수]]||한나라당 |- |통일외교통상위원회||[[서정화]]||한나라당 |- |국방위원회||[[장영달]]||새천년민주당 |- |행정자치위원회||[[박종우]]||한나라당 |- |교육위원회||[[윤영탁]]||한나라당 |- |rowspan=2|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김형오]]||한나라당 |- ||[[안동선]]||[[자유민주연합]] |- |문화관광위원회||[[배기선]]||새천년민주당 |- |농림해양수산위원회||[[이양희 (1945년)|이양희]]||한나라당 |- |산업자원위원회||[[박상규]]||새천년민주당 |- |보건복지위원회||[[박종웅]]||한나라당 |- |환경노동위원회||[[송훈석]]||새천년민주당 |- |건설교통위원회||[[신영국]]||한나라당 |- |정보위원회||[[김덕규]]||새천년민주당 |- |여성위원회||[[임진출]]||한나라당 |} {{col-end}} == 의석 변동 == {{글 숨김 | 제목= 16대 의원 및 당적 변동 사항}}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90%;" ! 날짜 !! 이름 !! 소속정당 !! 선거구 !! 사유 !! 정당별 <br /> 증감 !! 의석 수 |- |rowspan=4 |[[2000년]] [[5월 22일]] || [[강운태]] ||rowspan=4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남구 (광주 선거구)|광주 남구]] ||rowspan=4 |민주당 입당 ||rowspan=4 |±4 ||rowspan=6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9석<br>자유민주연합 17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1석 |- | [[이강래 (1953년)|이강래]] ||[[남원시·순창군|전북 남원시·순창군]] |- | [[박주선]] ||[[보성군·화순군|전남 보성군·화순군]] |- | [[이정일 (1947년)|이정일]] ||[[해남군·진도군 (1988년 선거구)|전남 해남군·진도군]] |- | [[2000년]] [[9월 20일]] || [[김한길]] → [[김화중]]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김화중 승계 |- | [[2000년]] [[12월 28일]] || [[서영훈]] → [[최명헌]]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서영훈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최명헌 승계 |- |rowspan=3 |[[2000년]] [[12월 30일]] || [[송석찬]] ||rowspan=3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rowspan=3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 위한 당적 변경 ||rowspan=3 |±3 ||rowspan=3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20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1석 |- | [[배기선]] ||[[부천시 원미구 을|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 | [[송영진]] ||[[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2001년]] [[1월 8일]] || [[강창희]] ||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중구 (대전 선거구)|대전 중구]] || 의원꿔주기 반대로 제명되어 자민련 탈당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19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2석 |- |[[2001년]] [[1월 10일]] || [[장재식]]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서대문구 을|서울 서대문구 을]] ||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 위한 당적 변경<br>자민련 원내 교섭단체 지위 획득<br>원내교섭단체 3당 체제 전환 ||±1 ||rowspan=2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20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2석 |- | [[2001년]] [[1월 28일]] || [[한명숙]] → [[박양수]]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한명숙 여성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박양수 승계 |- |[[2001년]] [[6월 1일]] || [[김영구]] || [[한나라당]] ||[[동대문구 을|서울 동대문구 을]] ||rowspan=2 | 대법원에서 선거 무효 판결로 의원직 상실 || -1 ||한나라당 132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20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2석 |- |[[2001년]] [[7월 13일]] || [[장영신]] || [[새천년민주당]] ||[[구로구 을|서울 구로구 을]] || -1 ||한나라당 132석<br>새천년민주당 114석<br>자유민주연합 20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2석 |- |[[2001년]] [[9월 3일]] || [[최돈웅]] || [[한나라당]] ||[[강릉시 (2000년 선거구)|강원 강릉시]] || 당선무효 회피를 위한 의원직 사퇴 || -1 ||한나라당 131석<br>새천년민주당 114석<br>자유민주연합 20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2석 |- |rowspan=4 |[[2001년]] [[9월 4일]] || [[장재식]] ||rowspan=4 |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서대문구 을|서울 서대문구 을]] ||rowspan=4 |자민련 탈당<br>자민련 원내 교섭단체 지위권 상실<br>원내교섭단체 양당체제 전환 ||rowspan=4 |±4 ||rowspan=4 |한나라당 131석<br>새천년민주당 114석<br>자유민주연합 16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6석 |- | [[송석찬]] ||[[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 [[배기선]] ||[[부천시 원미구 을|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 | [[송영진]] ||[[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rowspan=2 |[[2001년]] [[9월 7일]] || [[이한동]]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연천군·포천군|경기 연천군·포천군]] ||연립정부 붕괴에도 국무총리직 유임해 제명 ||±1 ||rowspan=2 |한나라당 131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7석 |- | [[유삼남]] → [[조배숙]]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유삼남 해양수산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조배숙 승계 |- |rowspan=4 |[[2001년]] [[9월 10일]] || [[장재식]] ||rowspan=4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서대문구 을|서울 서대문구 을]] ||rowspan=4 |민주당 복당 ||rowspan=4 |±4 ||rowspan=4 |한나라당 131석<br>새천년민주당 118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희망의한국신당 1석<br>무소속 3석 |- | [[송석찬]] ||[[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 [[배기선]] ||[[부천시 원미구 을|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 | [[송영진]] ||[[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rowspan=2 |[[2001년]] [[10월 20일]] || [[강창희]] || 무소속 → [[한나라당]] ||[[중구 (대전 선거구)|대전 중구]] ||rowspan=2 |입당 ||rowspan=2 |±2 ||rowspan=2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8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 [[김용환]] || [[희망의한국신당]] → [[한나라당]] ||[[보령시·서천군|충남 보령시·서천군]] |- |rowspan=3 |[[2001년]] [[10월 25일]] || [[홍준표]] ||rowspan=3 |[[한나라당]] ||[[동대문구 을|서울 동대문구 을]] ||rowspan=3 |[[2001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당선]] ||rowspan=3 |+3 ||rowspan=3 |한나라당 136석<br>새천년민주당 118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 [[이승철 (1964년)|이승철]] ||[[구로구 을|서울 구로구 을]] |- | [[최돈웅]] ||[[강릉시 (2000년 선거구)|강원 강릉시]] |- |[[2002년]] [[1월 5일]] || [[손태인]] || [[한나라당]] ||[[해운대구·기장군 갑|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 사망 || -1 ||한나라당 135석<br>새천년민주당 118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2002년]] [[1월 22일]] || [[장성민]] || [[새천년민주당]] ||[[금천구 (선거구)|서울 금천구]] ||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 -1 ||한나라당 135석<br>새천년민주당 117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2002년]] [[1월 27일]] || [[심규섭]] || [[새천년민주당]] ||[[안성시 (선거구)|경기 안성시]] || 사망 || -1 ||한나라당 135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2002년]] [[2월 21일]] || [[김호일]] || [[한나라당]] ||[[마산시 합포구|경남 마산시 합포구]] ||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 -1 ||한나라당 134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2석<br>무소속 2석 |- |[[2002년]] [[2월 26일]] || [[한승수]] || [[민주국민당 (2000년)|민주국민당]] → 무소속 ||[[춘천시 (2000년 선거구)|강원 춘천시]] || 민주국민당 탈당 || ±1 ||한나라당 134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1석<br>무소속 3석 |- |[[2002년]] [[2월 28일]] || [[박근혜]] || [[한나라당]] → 무소속 ||[[달성군 (1996년 선거구)|대구 달성군]] || 한나라당 탈당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6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1석<br>무소속 4석 |- |[[2002년]] [[3월 8일]] || [[이만섭]] ||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전국구 || 국회법 개정으로 국회의장 당적보유 금지되어 민주당 탈당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15석<br>민주국민당 1석<br>무소속 5석 |- |[[2002년]] [[5월 16일]] || [[함석재]] ||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천안시 을|충남 천안시 을]]|| 자민련 탈당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무소속 6석 |- |[[2002년]] [[5월 17일]] || [[박근혜]] || 무소속 → [[한국미래연합]] || [[달성군 (1996년 선거구)|대구 달성군]] || 한국미래연합 창당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5석 |- |[[2002년]] [[5월 24일]] || [[유성근]] || [[한나라당]] ||[[하남시 (선거구)|경기 하남시]] ||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 -1 ||한나라당 132석<br>새천년민주당 115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5석 |- |[[2002년]] [[5월 27일]] || [[김민석 (정치인)|김민석]] || [[새천년민주당]] ||[[영등포구 을|서울 영등포구 을]] || 서울시장 출마로 사퇴 || -1 ||한나라당 132석<br>새천년민주당 114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5석 |- |[[2002년]] [[5월 30일]] || [[함석재]] || 무소속 → [[한나라당]] || [[천안시 을|충남 천안시 을]] || 한나라당 입당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4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2002년]] [[6월 14일]] || [[박용호 (1947년)|박용호]] || [[새천년민주당]] ||[[서구·강화군 을|인천 서구·강화군 을]] ||rowspan=2|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 -1 ||한나라당 133석<br>새천년민주당 113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2002년]] [[6월 25일]] || [[정인봉]] || [[한나라당]] ||[[종로구 (1988년 선거구)|서울 종로구]] || -1 ||한나라당 132석<br>새천년민주당 113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rowspan=2 |[[2002년]] [[6월 28일]] || [[정재문]] || [[한나라당]] ||[[부산진구 갑|부산 부산진구 갑]] ||rowspan=2 | 당선무효 ||rowspan=2 | -2 ||rowspan=2 |한나라당 131석<br>새천년민주당 112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장정언]] || [[새천년민주당]] ||[[북제주군 (1988년 선거구)|북제주군]] |- |rowspan=2 |[[2002년]] [[6월 29일]] || [[이만섭]]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국회의장 임기 만료으로 민주당 복당 || ±1 ||rowspan=2 |한나라당 130석<br>새천년민주당 113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박관용]] || [[한나라당]] → 무소속 || [[동래구 (2000년 선거구)|부산 동래구]] || 국회의장 선출되어 한나라당 탈당 || ±1 |- |rowspan=3 |[[2002년]] [[7월 1일]] || [[손학규]] || [[한나라당]] ||[[광명시 (2000년 선거구)|경기 광명시]] || 경기지사 취임으로 의원직 사퇴 || -1 ||rowspan=3 |한나라당 129석<br>새천년민주당 111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박광태]] ||rowspan=2 | [[새천년민주당]] ||[[북구 갑 (광주)|광주 북구 갑]] || 광주시장 취임으로 의원직 사퇴 ||rowspan=2 | -2 |- |[[강현욱]] ||[[군산시 (2000년 선거구)|전북 군산시]] || 전북지사 취임으로 의원직 사퇴 |- |[[2002년]] [[7월 10일]] || [[김태호 (1935년)|김태호]] || [[한나라당]] ||[[중구 (울산 선거구)|울산 중구]] || 사망 || -1 ||rowspan=2 |한나라당 128석<br>새천년민주당 111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 [[2002년]] [[7월 22일]] || [[전재희]] → [[김영선]] | [[한나라당]] || 전국구 || 전재희 [[2002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출마 위해 사퇴 김영선 승계 |- |rowspan=13 |[[2002년]] [[8월 8일]] || [[박진 (정치인)|박진]] ||rowspan=11 |[[한나라당]] ||[[종로구 (1988년 선거구)|서울 종로구]] ||rowspan=13 |[[2002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당선]]<br>한나라당 원내 과반수 확보 ||rowspan=11 |+11 ||rowspan=13 |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113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 [[이우재]] ||[[금천구 (선거구)|서울 금천구]] |- | [[권영세 (1959년)|권영세]] ||[[영등포구 을|서울 영등포구 을]] |- | [[이경재]] ||[[서구·강화군 을|인천 서구·강화군 을]] |- | [[김병호]] ||[[부산진구 갑|부산 부산진구 갑]] |- | [[서병수]] ||[[해운대구·기장군 갑|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 | [[전재희]] ||[[광명시 (2000년 선거구)|경기 광명시]] |- | [[김황식]] ||[[하남시 (선거구)|경기 하남시]] |- | [[이해구]] ||[[안성시 (선거구)|경기 안성시]] |- | [[김정부]] ||[[마산시 합포구|경남 마산시 합포구]] |- | [[양정규]] ||[[북제주군 (선거구)|북제주군]] |- |[[김상현]] ||rowspan=2 |[[새천년민주당]] ||[[북구 갑 (광주)|광주 북구 갑]]||rowspan=2 |+2 |- | [[강봉균]] ||[[군산시 (2000년 선거구)|전북 군산시]] |- |[[2002년]] [[8월 16일]] || [[안동선]] ||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부천시 원미구 갑|경기 부천시 원미구 갑]]|| 민주당 탈당 || ±1 ||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112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5석 |- |[[2002년]] [[10월 9일]] || [[한승수]] || 무소속 → [[한나라당]] ||[[춘천시 (2000년 선거구)|강원 춘천시]]|| 한나라당 입당 || ±1 ||한나라당 140석<br>새천년민주당 112석<br>자유민주연합 14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rowspan=2 |[[2002년]] [[10월 14일]] || [[전용학]] || [[새천년민주당]] → [[한나라당]] ||[[천안시 갑|충남 천안시 갑]]||rowspan=2 |당적변경 || ±1 ||rowspan=2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111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4석 |- |[[이완구]] ||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 ||[[청양군·홍성군 (1988년 선거구)|충남 청양군·홍성군]]|| ±1 |- |rowspan=2 |[[2002년]] [[11월 1일]] || [[김명섭 (1938년)|김명섭]] ||rowspan=19 |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영등포구 갑|서울 영등포구 갑]]||rowspan=19 |민주당 탈당 ||rowspan=2 | ±2 ||rowspan=2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109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6석 |- |[[강성구]] ||[[오산시·화성군|경기 오산시·화성군]] |- |rowspan=2 |[[2002년]] [[11월 3일]] || [[이근진]] ||[[고양시 덕양구 을|경기 고양시 덕양구 을]] ||rowspan=2 | ±2 ||rowspan=2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107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8석 |- |[[김윤식 (1947년)|김윤식]] ||[[용인시 을 (2000년 선거구)|경기 용인시 을]] |- |rowspan=11 |[[2002년]] [[11월 4일]] || [[설송웅]] ||[[용산구 (1988년 선거구)|서울 용산구]] ||rowspan=11 | ±11 ||rowspan=11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96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19석 |- |[[김원길]] ||[[강북구 갑|서울 강북구 갑]] |- |[[김영배 (1932년)|김영배]] ||[[양천구 을|서울 양천구 을]] |- |[[박상규]] ||[[부평구 갑|인천 부평구 갑]] |- |[[송석찬]] ||[[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유재규]] ||[[홍천군·횡성군|강원 홍천군·횡성군]] |- |[[이윤수]] ||[[성남시 수정구 (선거구)|경기 성남시 수정구]] |- |[[최선영]] ||[[부천시 오정구 (선거구)|경기 부천시 오정구]] |- |[[김덕배]] ||[[고양시 일산구 을|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 |[[이희규]] ||[[이천시 (1996년 선거구)|경기 이천시]] |- |[[박종우]] ||[[김포시 (선거구)|경기 김포시]] |- ||[[2002년]] [[11월 8일]] || [[원유철]] ||[[평택시 갑|경기 평택시 갑]] ||±1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95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20석 |- |rowspan=3 |[[2002년]] [[11월 9일]] || [[유용태]] ||[[동작구 을|서울 동작구 을]] ||rowspan=3 | ±3 ||rowspan=3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무소속 23석 |- |[[송영진]] ||[[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장성원]] ||[[김제시 (선거구)|전북 김제시]] |- |rowspan=4 |[[2002년]] [[11월 11일]] || [[정몽준]] || 무소속 → [[국민통합21]] || [[동구 (울산 선거구)|울산 동구]] || 국민통합21 창당 || ±1 ||rowspan=4 |한나라당 145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3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9석 |- |[[원유철]] ||rowspan=3 | 무소속 → [[한나라당]] ||[[평택시 갑|경기 평택시 갑]] ||rowspan=3 | 한나라당 입당 ||rowspan=3 | ±3 |- |[[이근진]] ||[[고양시 덕양구 을|경기 고양시 덕양구 을]] |- |[[김윤식 (1947년)|김윤식]] ||[[용인시 을 (2000년 선거구)|경기 용인시 을]] |- |rowspan=3 |[[2002년]] [[11월 14일]] || [[이양희 (1945년)|이양희]] ||rowspan=2 |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 || [[동구 (대전 선거구)|대전 동구]] ||rowspan=2 | 당적변경 ||rowspan=2 | ±2 ||rowspan=3 |한나라당 147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20석 |- |[[이재선 (1956년)|이재선]] || [[서구 을 (대전)|대전 서구 을]] |- |[[오장섭]]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 [[예산군 (1988년 선거구)|충남 예산군]] || 자민련 탈당 || ±1 |- |[[2002년]] [[11월 20일]] || [[강성구]] ||무소속 → [[한나라당]] || [[오산시·화성군|경기 오산시·화성군]] || 한나라당 입당 ||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9석 |- |[[2002년]] [[11월 11일]] || [[이한동]] || 무소속 → [[하나로국민연합]] || [[연천군·포천군|경기 연천군·포천군]] || 하나로국민연합 창당 ||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한국미래연합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18석 |- |[[2002년]] [[11월 23일]] || [[박근혜]] || [[한국미래연합]] → [[한나라당]] ||[[달성군 (1996년 선거구)|대구 달성군]] || 한나라당 복당 || ±1 ||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18석 |- |[[2002년]] [[11월 25일]] || [[김원웅]] || [[한나라당]] → [[개혁국민정당]] ||[[대덕구 (선거구)|대전 대덕구]] || 당적변경 ||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9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18석 |- |rowspan=16 |[[2002년]] [[11월 26일]] || [[설송웅]] ||rowspan=12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용산구 (1988년 선거구)|서울 용산구]] ||rowspan=12 | 민주당 복당 ||rowspan=12| ±12||rowspan=16|한나라당 150석<br>새천년민주당 103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석 |- |[[김영배 (1932년)|김영배]] ||[[양천구 을|서울 양천구 을]] |- |[[김명섭 (1938년)|김명섭]] ||[[영등포구 갑|서울 영등포구 갑]] |- |[[유용태]] ||[[동작구 을|서울 동작구 을]] |- |[[송석찬]] ||[[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유재규]] ||[[홍천군·횡성군|강원 홍천군·횡성군]] |- |[[이윤수]] ||[[성남시 수정구 (선거구)|경기 성남시 수정구]] |- |[[최선영]] ||[[부천시 오정구 (선거구)|경기 부천시 오정구]] |- |[[김덕배]] ||[[고양시 일산구 을|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 |[[박종우]] ||[[김포시 (선거구)|경기 김포시]] |- |[[송영진]] ||[[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장성원]] ||[[김제시 (선거구)|전북 김제시]] |- |[[김원길]] ||rowspan=2 | 무소속 → [[한나라당]] ||[[강북구 갑|서울 강북구 갑]] ||rowspan=2 | 한나라당 입당 ||rowspan=2| ±2 |- |[[박상규]] ||[[부평구 갑|인천 부평구 갑]] |- |[[곽치영]] || [[새천년민주당]] ||[[고양시 덕양구 갑|경기 고양시 덕양구 갑]] || 당선무효 || -1 |- | [[이회창]] → [[유한열]] | [[한나라당]] || 전국구 || 이회창 16대 대선 출마로 의원직 사퇴 유한열 승계 |- |[[2002년]] [[12월 1일]] || [[이인제]] ||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논산시·금산군|충남 논산시·금산군]] || 민주당 탈당 || ±1 ||한나라당 150석<br>새천년민주당 10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5석 |- |rowspan=2 |[[2002년]] [[12월 3일]] || [[안동선]] ||rowspan=2 |무소속 → [[자유민주연합]] ||[[부천시 원미구 갑|경기 부천시 원미구 갑]] || rowspan=2 | 자민련 입당 ||rowspan=2| ±2||rowspan=2|한나라당 150석<br>새천년민주당 102석<br>자유민주연합 12석<br>민주국민당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이인제]] ||[[논산시·금산군|충남 논산시·금산군]] |- |[[2002년]] [[12월 19일]] || [[정갑윤]] ||[[한나라당]] ||[[중구 (울산 선거구)|울산 중구]] ||[[2002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당선]] ||rowspan=1 |+1 ||한나라당 151석<br>새천년민주당 102석<br>자유민주연합 12석<br>민주국민당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2002년]] [[12월 27일]] || [[이희규]]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이천시 (1996년 선거구)|경기 이천시]] || 민주당 복당 ||±1||rowspan=4|한나라당 151석<br>새천년민주당 103석<br>자유민주연합 12석<br>민주국민당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2석 |- | [[2003년]] [[2월 6일]] || [[황승민]] → [[장광근]] | [[한나라당]] || 전국구 || 황승민 사망 장광근 승계 |- |rowspan=2 | [[2003년]] [[3월 4일]] || [[김영진 (1947년)|김영진]] → [[오영식]]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김영진 농림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오영식 승계 |- |[[김화중]] → [[구종태]]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구종태 승계 |- |[[2003년]] [[3월 7일]] || [[문희상]] || [[새천년민주당]] ||[[의정부시 (선거구)|경기 의정부시]] ||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으로 의원직 사퇴 || -1 ||한나라당 151석<br>새천년민주당 102석<br>자유민주연합 12석<br>민주국민당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2석 |- |[[2003년]] [[3월 28일]] || [[김영배 (1932년)|김영배]] || [[새천년민주당]] ||[[양천구 을|서울 양천구 을]] ||rowspan=2|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 -1 ||한나라당 151석<br>새천년민주당 101석<br>자유민주연합 12석<br>민주국민당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2석 |- |[[2003년]] [[4월 8일]] || [[원철희]] || [[자유민주연합]] ||[[아산시 (선거구)|충남 아산시]] || -1 ||한나라당 151석<br>새천년민주당 101석<br>자유민주연합 11석<br>민주국민당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개혁국민정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2석 |- |rowspan=3 |[[2003년]] [[4월 24일]] || [[오경훈]] ||rowspan=2 |[[한나라당]] ||[[양천구 을|서울 양천구 을]] ||rowspan=2| [[2003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당선]] ||rowspan=2 |+2 ||rowspan=3 |한나라당 153석<br>새천년민주당 101석<br>자유민주연합 11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2석 |- |[[홍문종 (정치인)|홍문종]] ||[[의정부시 (선거구)|경기 의정부시]] |-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고양시 덕양구 갑|경기 고양시 덕양구 갑]] ||+1 |- |[[2003년]] [[6월 10일]] || [[송광호]]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제천시·단양군|충북 제천시·단양군]]|| 자민련 탈당 ||±1||한나라당 153석<br>새천년민주당 101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rowspan=6 |[[2003년]] [[7월 7일]] || [[김영춘]] ||rowspan=5 |[[한나라당]] ||[[광진구 갑|서울 광진구 갑]] ||rowspan=5 |한나라당 탈당 ||rowspan=5 |±5 ||rowspan=6 |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101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7석 |- |[[이우재]] ||[[금천구 (선거구)|서울 금천구]] |- |[[이부영]] ||[[강동구 갑|서울 강동구 갑]] |- |[[안영근]] ||[[남구 을 (인천)|인천 남구 을]] |- |[[김영춘]] ||[[군포시 (1996년 선거구)|경기 군포시]] |- |[[송광호]] ||무소속 → [[한나라당]] ||[[제천시·단양군|충북 제천시·단양군]]|| 한나라당 입당 ||±1 |- |rowspan=37 |[[2003년]] [[9월 20일]] || [[설송웅]] ||rowspan=39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용산구 (1988년 선거구)|서울 용산구]] ||rowspan=39 |민주당 탈당 ||rowspan=37 |±37 ||rowspan=37|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4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4석 |- |[[임종석]]||[[성동구 (2000년 선거구)|서울 성동구]] |- |[[김희선]]||[[동대문구 갑|서울 동대문구 갑]] |- |[[이상수]]||[[중랑구 갑|서울 중랑구 갑]] |- |[[유재건]]||[[성북구 갑|서울 성북구 갑]] |- |[[신계륜]]||[[성북구 을|서울 성북구 을]] |- |[[김근태]]||[[도봉구 갑|서울 도봉구 갑]] |- |[[임채정]]||[[노원구 을|서울 노원구 을]] |- |[[신기남]]||[[강서구 갑|서울 강서구 갑]] |- |[[김성호]]||[[강서구 을|서울 강서구 을]] |- |[[김명섭 (1938년)|김명섭]]||[[영등포구 갑|서울 영등포구 갑]] |- |[[이해찬]]||[[관악구 을|서울 관악구 을]] |- |[[이호웅]]||[[남동구 을|인천 남동구 을]] |- |[[송영길 (정치인)|송영길]]||[[계양구 (선거구)|인천 계양구]] |- |[[정동채]]||[[서구 (광주 선거구)|광주 서구]] |- |[[김태홍 (정치인)|김태홍]]||[[북구 을 (광주)|광주 북구 을]] |- |[[박병석]]||[[서구 갑 (대전)|대전 서구 갑]] |- |[[송석찬]]||[[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이종걸]]||[[안양시 만안구 (선거구)|경기 안양시 만안구 을]] |- |[[배기선]]||[[부천시 원미구 을|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 |[[정장선]]||[[평택시 을|경기 평택시 을]] |- |[[천정배]]||[[안산시 을 (1996년 선거구)|경기 안산시 을]] |- |[[김덕배]]||[[고양시 일산구 을|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 |[[남궁석]]||[[용인시 갑 (2000년 선거구)|경기 용인시 갑]] |- |[[이창복]]||[[원주시 (2000년 선거구)|강원 원주시]] |- |[[김택기]] ||[[태백시·정선군|강원 태백시·정선군]] |- |[[홍재형]]||[[청주시 상당구 (선거구)|충북 청주시 상당구]] |- |[[이원성]]||[[충주시 (1996년 선거구)|충북 충주시]] |- |[[문석호]] ||[[서산시·태안군|충남 서산시·태안군]] |- |[[송영진]]||[[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장영달]]||[[전주시 완산구 (선거구)|전북 전주시 완산구]] |- |[[정동영]]||[[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전북 전주시 덕진구]] |- |[[강봉균]]||[[군산시 (2000년 선거구)|전북 군산시]] |- |[[김원기]]||[[정읍시 (선거구)|전북 정읍시]] |- |[[이강래 (1953년)|이강래]] ||[[남원시·순창군|전북 남원시·순창군]] |- |[[정세균]] ||[[진안군·무주군·장수군 (1988년 선거구)|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 |- |[[천용택]] ||[[강진군·완도군|전북 강진군·완도군]] |- |[[2003년]] [[9월 23일]] || [[김덕규]]||[[중랑구 을|서울 중랑구 을]] ||±1 ||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3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5석 |- |[[2003년]] [[10월 14일]] || [[정대철]] ||[[중구 (1988년 서울 선거구)|서울 중구]] ||±1 ||rowspan=2|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6석 |- |[[2003년]] [[10월 21일]] || [[이미경]] [[이재정 (1944년)|이재정]] <br>[[허운나]] <br>[[박양수]] <br>[[오영식]] <br> → [[안상현 (1963년)|안상현]] <br>[[황창주 (1955년)|황창주]] <br>[[박종완]] <br>[[한충수]] <br>[[양승부]]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이미경, 이재정, 허운나, 박양수, 오영식<br>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승계 |- |[[2003년]] [[11월 1일]] || [[최용규 (1956년)|최용규]]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부평구 을|인천 부평구 을]] ||민주당 탈당 ||±1 ||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1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개혁국민정당 2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7석 |- |rowspan=2 |[[2003년]] [[11월 3일]] || [[김원웅]] ||rowspan=2 |[[개혁국민정당]] → 무소속 ||[[대덕구 (선거구)|대전 대덕구]] ||rowspan=2 | 개혁국민정당 탈당 ||±2 ||rowspan=2 |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1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9석 |- |[[유시민]]||[[고양시 덕양구 갑|경기 고양시 덕양구 갑]] |- |rowspan=48 |[[2003년]] [[11월 11일]] || [[정대철]]||rowspan=47 |무소속 → [[열린우리당]] ||[[중구 (1988년 서울 선거구)|서울 중구]]||rowspan=47 |열린우리당 창당<br>열린우리당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br>원내 교섭단체 3당 체제 전환 ||rowspan=47 |±47 ||rowspan=50|한나라당 149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설송웅]]||[[용산구 (1988년 선거구)|서울 용산구]] |- |[[임종석]]||[[성동구 (2000년 선거구)|서울 성동구]] |- |[[김영춘]]||[[광진구 갑|서울 광진구 갑]] |- |[[김희선]]||[[동대문구 갑|서울 동대문구 갑]] |- |[[이상수]]||[[중랑구 갑|서울 중랑구 갑]] |- |[[김덕규]]||[[중랑구 을|서울 중랑구 을]] |- |[[유재건]]||[[성북구 갑|서울 성북구 갑]] |- |[[신계륜]]||[[성북구 을|서울 성북구 을]] |- |[[김근태]]||[[도봉구 갑|서울 도봉구 갑]] |- |[[임채정]]||[[노원구 을|서울 노원구 을]] |- |[[신기남]]||[[강서구 갑|서울 강서구 갑]] |- |[[김성호]]||[[강서구 을|서울 강서구 을]] |- |[[이우재]] ||[[금천구 (선거구)|서울 금천구]] |- |[[김명섭 (1938년)|김명섭]]||[[영등포구 갑|서울 영등포구 갑]] |- |[[이해찬]]||[[관악구 을|서울 관악구 을]] |- |[[이부영]]||[[강동구 갑|서울 강동구 갑]] |- |[[안영근]] ||[[남구 을 (인천)|인천 남구 을]] |- |[[이호웅]]||[[남동구 을|인천 남동구 을]] |- |[[최용규 (1956년)|최용규]]||[[부평구 을|인천 부평구 을]] |- |[[송영길 (정치인)|송영길]]||[[계양구 (선거구)|인천 계양구]] |- |[[정동채]]||[[서구 (광주 선거구)|광주 서구]] |- |[[김태홍 (정치인)|김태홍]]||[[북구 을 (광주)|광주 북구 을]] |- |[[박병석]]||[[서구 갑 (대전)|대전 서구 갑]] |- |[[송석찬]]||[[유성구 (선거구)|대전 유성구]] |- |[[김원웅]]||[[대덕구 (선거구)|대전 대덕구]] |- |[[이종걸]]||[[안양시 만안구 (선거구)|경기 안양시 만안구 을]] |- |[[배기선]]||[[부천시 원미구 을|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 |[[정장선]]||[[평택시 을|경기 평택시 을]] |- |[[천정배]]||[[안산시 을 (1996년 선거구)|경기 안산시 을]] |- |[[유시민]]||[[고양시 덕양구 갑|경기 고양시 덕양구 갑]] |- |[[김덕배]]||[[고양시 일산구 을|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 |[[김부겸]] ||[[군포시 (1996년 선거구)|경기 군포시]] |- |[[남궁석]]||[[용인시 갑 (2000년 선거구)|경기 용인시 갑]] |- |[[이창복]]||[[원주시 (2000년 선거구)|강원 원주시]] |- |[[김택기]] ||[[태백시·정선군|강원 태백시·정선군]] |- |[[홍재형]]||[[청주시 상당구 (선거구)|충북 청주시 상당구]] |- |[[이원성]]||[[충주시 (1996년 선거구)|충북 충주시]] |- |[[문석호]] ||[[서산시·태안군|충남 서산시·태안군]] |- |[[송영진]]||[[당진군 (1988년 선거구)|충남 당진군]] |- |[[장영달]]||[[전주시 완산구 (선거구)|전북 전주시 완산구]] |- |[[정동영]]||[[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전북 전주시 덕진구]] |- |[[강봉균]]||[[군산시 (2000년 선거구)|전북 군산시]] |- |[[김원기]]||[[정읍시 (선거구)|전북 정읍시]] |- |[[이강래 (1953년)|이강래]] ||[[남원시·순창군|전북 남원시·순창군]] |- |[[정세균]] ||[[진안군·무주군·장수군 (1988년 선거구)|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 |- |[[천용택]] ||[[강진군·완도군|전북 강진군·완도군]] |- |[[정범구]]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고양시 일산구 갑|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탈당 ||±1 |- |[[2003년]] [[12월 9일]] ||[[김홍신]] → [[송병대]] | [[한나라당]] || 전국구 || 김홍신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송병대 승계 |- |[[2003년]] [[12월 12일]] ||[[조배숙]] → [[박금자]]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조배숙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박금자 승계 |- |[[2003년]] [[12월 26일]] || [[김윤식]]||[[한나라당]] ||[[용인시 을 (2000년 선거구)|경기 용인시 을]]||대법원에서 공직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 확정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2004년]] [[1월 14일]] || [[백승홍]]||[[한나라당]] → 무소속 ||[[중구 (대구 선거구)|대구 중구]]|| 한나라당 탈당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석 |- |[[2004년]] [[1월 16일]] || [[안동선]]||[[자유민주연합]] → [[새천년민주당]] ||[[부천시 원미구 갑|부천시 원미구 갑]]||당적변경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1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9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석 |- |[[2004년]] [[1월 20일]] || [[김홍일]]||[[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목포시 (2000년 선거구)|전남 목포시]]||민주당 탈당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9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5석 |- |[[2004년]] [[1월 30일]] || [[정범구]]||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고양시 일산구 갑|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민주당 복당 ||±1 ||rowspan=2|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1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9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4석 |- |[[2004년]] [[2월 1일]] ||[[이상희]] → [[김영구]] | [[한나라당]] || 전국구 || 이상희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김영구 승계 |- |[[2004년]] [[2월 1일]] || [[김홍일]]||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목포시 (2000년 선거구)|전남 목포시]]||민주당 복당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9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하나로국민연합 1석<br>무소속 3석 |- |[[2004년]] [[2월 19일]] || [[이한동]]||[[하나로국민연합]] → [[자유민주연합]] ||[[연천군·포천군|경기 연천군·포천군]]|| 자민련 복당 ||±1 ||한나라당 148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3석 |- |[[2004년]] [[2월 23일]] || [[박시균]]||rowspan=7 |[[한나라당]] → 무소속 ||[[영주시 (선거구)|경북 영주시]]||rowspan=7 |한나라당 탈당 ||±1 ||한나라당 147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4석 |- |[[2004년]] [[2월 26일]] || [[박종웅]]||[[사하구 을|부산 사하구 을]] ||±1 ||한나라당 146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5석 |- |[[2004년]] [[3월 2일]] || [[김일윤]]||[[경주시 (2000년 선거구)|경북 경주시]] ||±1 ||한나라당 145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6석 |- |rowspan=3 |[[2004년]] [[3월 2일]] || [[서청원]]||[[동작구 갑|서울 동작구 갑]] ||rowspan=3 |±3 ||rowspan=3 |한나라당 142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9석 |- |[[하순봉]]||[[진주시 (2000년 선거구)|경남 진주시]] |- |[[윤한도]]||[[의령군·함안군|경남 의령군·함안군]] |- |[[2004년]] [[3월 8일]] || [[박승국 (정치인)|박승국]]||[[북구 갑 (대구)|대구 북구 갑]] ||±1 ||한나라당 141석<br>새천년민주당 62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0석 |- |[[2004년]] [[3월 16일]] || [[조성준]]||rowspan=2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경기 성남시 중원구]]||rowspan=2|민주당 탈당 ||±1 ||한나라당 141석<br>새천년민주당 61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1석 |- |rowspan=2|[[2004년]] [[3월 19일]] || [[박주선]]||[[보성군·화순군|전남 보성군·화순군]]||±1 ||rowspan=2|한나라당 140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3석 |- |[[김기배]]||rowspan=2 |[[한나라당]] → 무소속 ||[[구로구 갑|서울 구로구 갑]]||rowspan=2 |한나라당 탈당 ||±1 |- |[[2004년]] [[3월 21일]] || [[박원홍]]||[[서초구 갑|서울 서초구 갑]] ||±1 ||rowspan=2|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7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4석 |- |[[2004년]] [[3월 22일]] ||[[김종호]] → [[변웅전]] | [[자유민주연합]] || 전국구 || 김종호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변웅전 승계 |- |[[2004년]] [[3월 23일]] || [[박승국 (정치인)|박승국]]||무소속 → [[열린우리당]]||[[북구 갑 (대구)|대구 북구 갑]]||열린우리당 입당 ||±1 ||rowspan=2|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8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3석 |- |[[2004년]] [[3월 25일]] ||[[조웅규]] → [[박경섭]] | [[한나라당]] || 전국구 || 조웅규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박경섭 승계 |- |[[2004년]] [[3월 26일]] || [[조성준]]||무소속 → [[열린우리당]]||[[성남시 중원구 (선거구)|경기 성남시 중원구]]||열린우리당 입당 ||±1 ||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60석<br>열린우리당 49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2석 |- |rowspan=2|[[2004년]] [[3월 29일]] || [[설훈]]||[[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도봉구 을|서울 도봉구 을]]||민주당 탈당 ||±1 ||rowspan=3|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59석<br>열린우리당 49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민주국민당 1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1석 |- |[[임진출]] → [[이만재]] | [[한나라당]] || 전국구 || 임진출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이만재 승계 |- |[[2004년]] [[3월 31일]] ||[[박인상]] → [[이종성]]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박인상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이종성 승계 |- | [[2004년]] [[4월 20일]] || [[강숙자]] || [[민주국민당 (2000년)|민주국민당]] → 무소속 || || 총선 득표율 미달로 정당 등록 취소 || ||rowspan=3 |한나라당 139석<br>새천년민주당 59석<br>열린우리당 49석<br>자유민주연합 10석<br>국민통합21 1석<br>무소속 12석 |- |[[2004년]] [[5월 21일]] ||[[박종완]] → [[안희옥]] | [[새천년민주당]] || 전국구 || 박종완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안희옥 승계 |} {{글 숨김 끝}} == 같이 보기 ==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목록]] *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 각주 == <references/> {{대한민국 국회}}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운영 체제 정보 | 이름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br />(Microsoft Windows) | 로고 = [[파일:Windows logo and wordmark - 2021.svg|250px]] | 스크린샷 = | 설명 = | 개발자 = [[마이크로소프트]] | 계열 = 윈도우 계열(윈도우 NT) | 상태 = 지원 중 | 소스형태 = [[사유 소프트웨어]]<br />[[공유 소스]] | 최초버전출시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85|11|20}} ([[윈도우 1.0]]) | 최신버전 = {{소프트웨어의 최신 버전 (안정판)/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미리보기버전 = {{소프트웨어의 최신 버전 (미리보기판)/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마케팅대상 = 퍼스널 컴퓨팅 | 언어 = 137개 | 프로그램언어 = | 업데이트방식 = [[윈도우 업데이트]]<br />[[윈도우 애니타임 업그레이드]]<br />[[윈도우 스토어]]<br />[[윈도우 서버 업데이트 서비스|WSUS]] | 패키지관리자 = [[윈도우 인스톨러]] (.msi)<br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 (.appx) | 지원되는플랫폼 = [[ARM 아키텍처|ARM]], [[IA-32]], [[아이테니엄]], [[x86-64]], [[알파 프로세서]], [[MIPS 아키텍처|MIPS]], [[파워PC]] | 커널형태 = [[윈도우 NT]] ([[하이브리드 커널]])<br />[[윈도우 CE]] (하이브리드 커널)<br />[[윈도우 9x]], [[MS-DOS]] ([[모놀리식 커널]]) | UI = [[윈도우 셸]] | 라이선스 = 사유 소프트웨어<br />[[상용 소프트웨어]] | 웹사이트 = [https://www.microsoft.com/ko-kr/windows/ 공식 사이트]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llang|en|Microsoft Windows|마이크로소프트 윈도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다.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에 처음으로 도입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인 [[맥 OS]]에 대항하여, 당시 널리 쓰이던 [[MS-DOS]]에서 멀티태스킹과 GUI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응용 프로그램으로 처음 출시되었다. 현재 전 세계 90%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고 있으며, 서버용 운영 체제로도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윈도우 운영 체제의 경우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일반 사용자들에게 매우 익숙할뿐 아니라 호환되는 유명한 응용 프로그램이 많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보안 문제에서는 취약점이 많은 운영 체제로 인식되기도 한다.<ref>그러나 실제로 보안상 취약한 부분이 다른 운영체제에 비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다.현재 한국 os 점유율을 보면 윈도우가 88.8%를 차지하고 있다.</ref>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하고 판매하는 독점 그래픽 운영 체제 제품군이다. 이는 소비자 또는 기업 워크스테이션용 윈도우(비자격), 서버용 윈도우 서버, 임베디드 시스템용 윈도우 IoT 등 컴퓨팅 산업의 특정 부문에 맞는 제품군 및 하위 제품군으로 그룹화된다. 존재하지 않는 제품군에는 윈도우 9x, 윈도우 모바일, 윈도우 폰 및 윈도우 임베디드 컴팩트가 포함된다. 윈도우의 첫 번째 버전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MS-DOS용 그래픽 운영 체제 셸로 1985년 11월 20일에 출시되었다. [[스탯카운터]](StatCounter)에 따르면 윈도우는 2023년 3월 기준 7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데스크톱 운영 체제이다.<ref name="pc">{{웹 인용|title=Desktop Operating System Market Share Worldwide |url=https://gs.statcounter.com/os-market-share/desktop/worldwide/#monthly-202208-202306 |access-date=2023-07-16 |website=StatCounter Global Stats |language=en |archive-date=January 27, 2020 |archive-url=https://archive.today/20200127171354/https://gs.statcounter.com/os-market-share/desktop/worldwide/#monthly-202208-202306 |url-status=live }}</ref> 그러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안드로이드]]의 엄청난 성장으로 인해 윈도우는 모바일 및 데스크톱 OS를 모두 포함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운영 체제는 아니다.<ref>{{웹 인용|last=Keizer |first=Gregg |date=July 14, 2014 |title=Microsoft gets real, admits its device share is just 14% |url=https://www.computerworld.com/article/2490008/microsoft-gets-real--admits-its-device-share-is-just-14-.html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21210826/http://www.computerworld.com/article/2490008/microsoft-windows/microsoft-gets-real--admits-its-device-share-is-just-14-.html |archive-date=August 21, 2016 |website=[[Computerworld]] |publisher=[[IDG]] |quote=<nowiki>[</nowiki>Microsoft's chief operating officer<nowiki>]</nowiki> Turner's 14% came from a new forecast released last week by Gartner, which estimated Windows' share of the shipped device market last year was 14%, and would decrease slightly to 13.7% in 2014. Android will dominate, Gartner said, with a 48% share this year}}</ref> 2024년 기준 윈도우의 최신 버전은 소비자 PC 및 태블릿용 윈도우 11, 기업용 윈도우 11 엔터프라이즈, 서버용 윈도우 서버 2022이다. 일부 버전의 윈도우 10, 윈도우 서버 2016 이상(그리고 예외적으로 윈도우 서버 2012 및 윈도우 임베디드 POSReady 7까지 유료 지원)이 계속 지원된다. == 한글 표기 == 영어 표기는 '''Windows'''이지만 [[한글]]로는 여러 가지 표기가 쓰이고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윈도''', '''윈도스''', '''윈도즈''', '''윈도우''', '''윈도우즈''', '''윈도우스'''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1995년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은 컴퓨터 운영 체제 이름인 'Windows 95'를 '윈도 95'로 정하면서 'Windows'의 한글 표기를 '''윈도'''로 확정하였다.<ref>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그대로 따르자면 'Windows'는 '''윈도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으나, 외래어 표기를 결정하는 정부언론외래어심의회 9차 회의에서 원어에는 복수 표시가 되어 있어도 국어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구별해 쓰지 않을 경우는 단수 표기와 같게 적도록 한 점을 적용하여, 'Windows 95'를 '''윈도 95'''로 정한 바 있다.</ref>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제품 이름을 한글로 옮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한국어 홈페이지에 있는 제품명은 모두 영문 이름 '''Window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필요에 따라 '''윈도우'''라는 한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microsoft.com/korea/windows/magazine/december_01.aspx# |제목=매력만점 운영체제, 윈도우 7 탄생 2주년을 되돌아보며… |확인날짜=2011-12-2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5202432/http://www.microsoft.com/korea/windows/magazine/december_01.aspx# |보존날짜=2013-11-05 |url-status=dead }}</ref> 실제 출하된 제품의 포장에는 "한글 윈도우"로 표기되어 있으며, 공식 기술자료(KB)와 보도자료(Press) 등에도 "윈도우"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공식 표준어는 '''윈도'''지만, 통상 '윈도우'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 버전 == 윈도우 1.0부터 3.1x에 이르는 버전들은 운영 체제가 아닌, MS-DOS 하에서 동작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 간주된다. === 초기 버전 === {{본문|윈도우 1.0|윈도우 2.0|윈도우 2.1x}} Windows 초기버전은 배경화면도 없고 windows.exe같은 글자와 물론 시작버튼도 없었다. 그리고 명령어를 입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쓰기 불편해 초기버전은 명령어를 아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작동방식이 MS-DOS여서 일종의 소프트웨어이다. === 윈도우 3.0과 3.1 === {{본문|윈도우 3.0|윈도우 3.1x}} 윈도우 3.0은 [[애플]]의 [[맥 OS]]와 UI가 매우 흡사하였다. === 윈도우 95, 98, Me === {{본문|윈도우 95|윈도우 98|윈도우 Me}} [[윈도우 95]]가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255자까지의 [[긴 파일 이름]] 지원, [[플러그 앤 플레이]]를 통한 하드웨어 자동 설치 및 구성 등을 채용하면서 1995년 8월에 출시하였다. 순수 32비트 응용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고 윈도우 3.1에 비해 안정성을 높이고 몇 가지 기술을 향상시켰다. 윈도우 95의 OEM 서비스 릴리즈 (OSR) 버전이 몇 가지가 있으며 각기 [[서비스 팩]]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윈도우 98]]이 1998년 6월에 출시되었으며 SE 버전이 1999년 5월에 출시되었다. === 윈도우 NT 계열 === {{본문|윈도우 NT|윈도우 2000}} 최초의 NT 계열 운영 체제는 1993년에 나온 [[윈도우 NT 3.1]]이며 여기서 3.1이라는 숫자는 소비자용 윈도우 버전을 가리키며 뒤를 이어 1994년에 [[윈도우 NT 3.5]], 1995년에 [[윈도우 NT 3.51]], 1996년에 [[윈도우 NT 4.0]], 2000년에 [[윈도우 2000]]이 출시되었다. 윈도우 2000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활성화]]를 포함하지 않는 마지막 NT 기반 윈도우이다. NT 4.0은 윈도우 95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처음 도입하였으며 윈도우 95의 내장 32비트 런타임을 처음으로 포함하였다. 과거 윈도우 ME로 인해 쓴맛을 본 MS가 윈도우 9x 커널의 한계를 깨닫고 기업용 커널인 NT커널로 [[윈도우 XP]]를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출시하였다. 과거 윈도우 9x보다 훨씬더 안정적인데다 향상된 시스템 복원 기능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향상시켜 출시하였다.(틈새 시장에서는 [[태블릿 PC]], 미디어 센터용으로 출시) 그 뒤에 윈도우 XP를 출시한지 1년 반이 지나 서버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서버 2003]]이 나왔다. 장기간의 개발 후 [[윈도우 비스타]]가 2006년 말에 출시되었으며 서버 제품으로 [[윈도우 서버 2008]]이 2008년 초에 출시되었다. 그 뒤에 2009년 7월 22일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의 RTM 버전이 공개되었다. 윈도우 7은 2009년 10월 22일에 공식 출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미국 현지시각) 윈도우 8.1이 공식 출시되었다. 윈도우 8.1은 윈도우 8 사용자들은 무료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현재 윈도우 10이 정식출시 하였으며 2015년 7월29일에 전세계에서 출시되었다. ==== 64비트 운영 체제 ==== [[윈도우 NT]]에는 [[x86]] 기반 [[개인용 컴퓨터]]가 전문적인 세계를 차지하기 이전에 여러 플랫폼의 지원을 포함하였다. 당시 일부 제품이 64비트 프로세서였던 [[윈도우 NT 3.1|NT 3.1]]부터 [[윈도우 NT 4.0|4.0]]까지 [[파워PC]], [[DEC 알파]], [[MIPS]] R4000을 지원하였으나 운영 체제는 이들을 32비트 프로세서로 취급하였다. [[인텔 아이테니엄]] (IA-64)이 도입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지원하는 새로운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를 출시하였다.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와 [[윈도우 서버 2003]]이 x86 (32비트)가 주류인 시대에 출시되었다. 2005년 4월 25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x86-64]] 아키텍처를 위한 [[윈도우 XP 프로페셔널 x64 에디션]]과 윈도우 서버 2003 x64 에디션을 공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의 지원을 2005년에 중단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종 사용자 버전을 위한 x86, x64 에디션으로 처음 출시한 것이다. [[윈도우 비스타]]는 아이테니엄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는다. 현대의 64비트 윈도우 계열은 AMD64/IA-64 버전의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을 이루며 아이테니엄과 x64 에디션도 존재한다. [[윈도우 서버 2008 R2]]에는 32비트 버전이 없지만 [[윈도우 7]]에는 존재한다. === 윈도우 CE === {{본문|윈도우 CE|윈도우 폰 7}} 윈도우 CE(윈도우 임베디드 콤팩트)는 위성 내비게이션과 일부 휴대 전화와 같은 소형 컴퓨터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윈도우 에디션이다. 윈도우 CE는 [[드림캐스트]]에서 세가의 사유 운영 체제와 더불어 채용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NT 커널 기반을 하는 소형 에디션인 [[윈도우 XP 임베디드]]나 [[윈도우 NT 4.0 임베디드]]와는 다른 것이다. === 윈도우 XP === {{본문|윈도우 XP}} [[윈도우 XP]]는 [[윈도우 2000]]의 뒤를 잇는 제품이며,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초의 소비자 지향 운영 체제이다. 'XP'라는 말은 ''e'''XP'''erience'' 중 "XP"를 따와서 만들었다. [[2001년]] [[8월 24일]] 출시되어 [[2014년]] [[4월 8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 윈도우 비스타 === {{본문|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XP]]의 후속작으로, 개인용 버전은 [[2007년]] [[1월 30일]]에, 기업용 버전은 [[2006년]] [[11월 30일]]에 발매되었다. 이때부터 에어로 테마가 시작되었다. [[2017년]] [[4월 11일]]에 지원이 종료되었다. === 윈도우 7 === {{본문|윈도우 7}} [[윈도우 비스타]]의 후속작으로, [[2009년]] [[10월 22일]]에 [[윈도우 7 에디션|6가지 에디션]]의 소매 버전으로 대중에게 출시되었다. [[윈도우 7]]은 [[윈도우 비스타]]에서 이루어 놓은 응용 프로그램 및 하드웨어 호환성을 개선함과 더불어 윈도우 계열의 중심적이고 점층적인 업그레이드에 집중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원래 에어로 효과가 있었지만 [[윈도우 7]]은 홈 프리미엄부터 시작됐다.<ref>[http://windowsteamblog.com/blogs/windows7/archive/2008/10/28/windows-7-unveiled-today-at-pdc-2008.aspx Windows 7 Unveiled Today at PDC 2008<!-- 봇이 따온 제목 -->]</ref> [[2020년]] [[1월 14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 윈도우 8 === {{본문|윈도우 8}} 윈도우 7의 뒤를 이어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0년 10월 22일에 네덜란드의 블로그 엔트리에 "2년 뒤에 윈도우 8이 공개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ref>http://news.cnet.com/8301-13860_3-20020544-56.html?tag=mncol;title{{깨진 링크|url=http://news.cnet.com/8301-13860_3-20020544-56.html?tag=mncol;title }}</ref> 2012년 6월 1일에 윈도우 8 릴리즈 프리뷰가 배포 되었고, [[2012년]] [[8월 1일]]에 윈도우 8 RTM이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 네트워크|MSDN]], 테크넷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2012년 10월 26일 윈도우 8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버그가 많아 8.1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메트로 테마를 적용하였다. 또한 Windows 8부터는 [[윈도우 투 고]]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윈도우 8.1 === {{본문|윈도우 8.1}} [[2013년]] [[10월 17일]] 출시되었으며 [[윈도우 8]]의 기능 추가 및 핫픽스 롤업 통합 버전. 그 밖에 여러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윈도우 8]] 사용자들은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2023년]] [[1월 10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 윈도우 10 === {{본문|윈도우 10}} 2014년 9월 30일에 윈도우 10 테크니컬 프리뷰가 공식 발표되었다. 윈도우 9를 건너뛰고 윈도우 10을 개발했던 것이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명칭을 윈도우 원(Windows One)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윈도우 1.0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윈도우 원(1)이 아닌 10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Windows 8.1 이후에 Windows 9가 출시되어야 하지만 Windows 98 등의 이전 버전의 Windows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Windows 10으로 즉시 업데이트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에 따라 Windows 8.1까지는 버전 코드가 NT 6.3이였던 것을 갑작스럽게 NT 10.0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에서 혼란이 있었다. ISS(Windows Server)에서 PHP 관련 소스 설정에서 이 때문에 설치에 약간의 트릭이 필요하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차세대 윈도우의 이름을 '윈도우 10'이라고 지은 이유는 "윈도우 10이 많은 혁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7월 29일 공식 발매를 시작하며 윈도우 7과 윈도우 8.1를 사용하는 모든 이용자에 한해서(비정품 이용자도 포함) 1년 간 무료로 윈도우 10으로 업데이트를 1년 후인 2016년 7월 29일까지 지원하였다. (추가 기능을 사용하는 윈도우에 한해 업그레이드 중이다.) 그리고 2017년 12월 31일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10 출시 이후 이 버전이 마지막 윈도우 버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 윈도우 11 === {{본문|윈도우 11}} [[윈도우 10]]이 마지막 OS라고 했지만, 그 계획은 철회되었으며, [[윈도우 11]]이 출시되었다. [[2021년]] [[6월 16일]]에 Tom Warren에 의해 개발자 프리뷰 버전이 공개되었고 [[2021년]] [[6월 24일]]에 공식 프리뷰 버전이 공개되었다. [[2021년]] [[10월 5일]]에 정식출시되었다. 개발이 중지된 [[윈도우 10X]]의 디자인을 일부 승계한 형식이다. === 윈도우 투 고 === {{본문|윈도우 투 고}} Windows 8 Enterprise 버전 또는 Windows 8 이상의 Enterprise 버전에서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가 설치되지 않은 PC에 즉시 USB로 부팅할 수 있는 윈도우의 프리뷰와 비슷한 기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UWP(Windows 유니버셜 앱. Windows 10부터는 개선된 Windows Store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한다. )를 제외한 게임 및 다른 모든 Executable ( *.exe ) 파일을 실행할 수 있고 NX 실행비트를 지원한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 설치 디스크 이미지 내부에 있으며 윈도우 설치의 핵심 파일 및 시스템을 담고 있는 파일인 install.wim을 해석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USB에 덮어쓰며 진행된다. Windows 설치 과정과 동일하지만 하드디스크와 달리 포터블이므로 운영체제의 가벼움과 쉽게 액세스 등의 기능이 필요해졌다. 물론 Windows 7 또는 다른 운영체제에서도 일부 Windows To Go를 만들어 주는 일부 프로그램이 있다. 단, install.wim 파일이 필요하며 Windows의 정품 제품키가 필요하다. 먼저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에서 운영체제가 Windows To Go를 지원하는지 정보 파일을 확장하여 install.wim이 담고 있는 Windows의 정보를 가져온다. install.wim의 운영체제가 Windows 8 이하일 경우는 계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일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다음으로 Windows의 파일 확장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의 내부 파일을 해석하면서 USB에 파일을 확장(배치)해 나가는 구조이다. 완료되면 약 17GB 정도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최소 32GB의 USB에 설치해야 한다. 또한 Windows To Go의 경우 다른 리눅스 계열의 운영체제와 달리 커널이 없어 모든 작업은 USB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USB가 3.1 또는 3.0 이상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은 부팅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0으로 해본 결과 하루가 지났음에도 부팅이 완료되지 않았다) == 역사 == {| class="wikitable sortable" align="right" style="font-size: 85%; text-align: center;" |+ 2023년 6월의 윈도우 운영 체제 전세계 점유율<ref>[https://gs.statcounter.com/os-version-market-share/windows/desktop/worldwide#monthly-202306-202307]</ref> |- ! abbr="Version" | 버전 ! abbr="percentage" | [[시장 점유율]] |- !전세계 PC 운영체제 중 하나(Windows, macOS, Linux.. 등)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 69.51% |- ![[윈도우 10|10]] | 71.1% |- ![[윈도우 11|11]] | 23.68% |- ![[윈도우 7|7]] | 3.7% |- ![[윈도우 8.1|8.1]] | 0.7% |- ![[윈도우 8|8]] | 0.35% |- ![[윈도우 XP|XP]] | 0.33% |} {{본문|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역사}}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기에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의 윈도우를 출시하였으며 이는 운영 체제가 아니었다. [[1993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윈도우 NT]]를 운영 체제로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운영 체제로서의 윈도우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하나는 가정 사용자, 다른 하나는 기업과 전문 IT 사용자용이다. 이 두 운영 체제는 가정용 버전의 경우 게임이나 시각 효과가 더 많이 지원되고 [[컴퓨터 네트워크|네트워킹]]이나 [[컴퓨터 보안|보안]] 등의 기능을 빼는 한편, 전문가용 버전에서는 시각 효과를 제외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을 강화하였다. 첫 독립된 버전 [[윈도우 1.0]]은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 [[1985년]] [[11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은 [[1987년]] [[12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3에서는 서로 겹치는 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걸기도 했다. [[윈도우 3.0]]은 [[1990년]]에 출시되자 첫 6개월 만에 2백만 부가 팔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I]] 및 [[멀티태스킹]]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후 발표된 [[윈도우 3.1]]은 [[트루타입]] 글꼴을 지원하였는데, 영문 [[윈도우 3.0]]과 [[윈도우 3.1]] 사이에 발표된 한글 [[윈도우 3.0]]의 경우 영문 [[윈도우 3.1]]에 앞서 트루타입 글꼴이 적용되었다. [[1993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NT]]를 내놓았다. [[윈도우 NT]]는 전문가용 운영 체제로 인정되었고 실제로 네트워크용이었으며, 후에 출시된 [[윈도우 XP]]의 초석이 되었다.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표면적으로 [[윈도우 95]]는 도스를 포함하지만 도스 상에서 실행되지 않는 완전한 운영 체제가 되었으며, UI가 많이 변경되고 멀티태스킹 기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윈도우 95]]는 기본적으로 32비트 운영 체제였지만 16비트 하위 호환성을 유지하였다. [[윈도우 3.1]]과의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GUI API 등에서 16비트 코드를 수용한 까닭에 성능과 안정성이 떨어졌다. 그런데 윈도우 95는 시작버튼이 들어간 컴퓨터라서 인기가 폭발했다. [[1998년]] [[6월]] [[윈도우 98]]이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0을 탑재하는 등 크기가 커지면서 [[윈도우 95]]에 비해 느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1999년]] [[윈도우 98 SE]]를 내놓으면서 많은 문제를 개선했다. 하지만 [[윈도우 98 SE]]는 자잘한 업데이트를 패치 받고는 [[2006년]]에 [[윈도우 98]]과 함께 지원 종료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전문가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2000]]을 [[2000년]] [[2월]]에 내놓았다. 하지만 [[윈도우 98]]의 후속작은 [[윈도우 미]]였고 이는 [[2000년]] [[9월]]에 나왔다. [[윈도우 미]]는 유니버설 플러그 앤 플레이와 시스템 복원 등의 기능을 새로 추가했지만, 출시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윈도우 XP]]가 출시되어 [[컴퓨터 하드웨어|하드웨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성이 부족했고 메모리 관리가 미흡하여 리소스 부족 문제를 자주 발생시켰다. [[2001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XP]]를 출시하였다. 이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면서 [[윈도우 95]] 및 그 후계작의 사용자 편의성을 살렸다.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으로 나뉘어 출시되는데, 두 에디션은 완전하게 동일하며 단지 두 가지 기능만 다르다. 도메인에 가입하는 기능과 [[다중 언어 사용자 인터페이스|MUI]]를 지원하는 기능 이 두 가지 기능이 "홈 에디션"엔 빠져 있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3은 [[2008년]] [[4월 21일]] 발표되었다.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이 [[2003년]], [[2004년]], [[2005년]]에 출시되었는데, 이는 DVD/TV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고, 프로그램 녹화 및 원격 조정을 지원한다. 업데이트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매년 새 버전이 출시되다가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면서 단종되었다. [[2003년]] [[4월]], [[윈도우 서버 2003]]이 출시되었다. 이는 [[윈도우 2000 서버]] 제품군에 비해서 새로운 기능과 강력한 보안을 내세우고 있다. 후속작으로 [[2005년]] [[12월]] [[윈도우 서버 2003]] R2 버전을 출시했다. [[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 팩 2는 [[2007년]] [[3월]]에 발표되었다. [[2007년]] [[1월]] [[윈도우 비스타]]가 (코드네임 "롱혼") 출시되었다. 윈도우 비스타는 [[사용자 계정 컨트롤|UAC]] 기능을 포함하여 [[윈도우 XP]]보다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고 미디어센터 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호환성 문제로 일부 국가에서 [[윈도우 XP]] 기반의 프로그램이 비스타에서 작동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일부 사용자들이 XP로 다운그레이드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08년]] [[3월]] [[윈도우 서버 2008]]은 [[윈도우 서버 2003]]의 후계작으로 개발이 완료되었으며 [[2008년]] [[3월 20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가 [[2009년]] [[10월]], 비스타의 호환성 문제와 일부 기능을 개선하여, [[윈도우 7]]을 출시했다. [[2012년]] [[10월]],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한국 시각), [[윈도우 8.1]]이 공개되었다. 공개 이후부터 기존 [[윈도우 8]] 정품 사용자는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윈도우 8.1]]에서는 Sound Recorder, Scan 등의 기본 앱이 추가되었고, 타일의 크기를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본래 [[윈도우 8]]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 표시줄의 시작 버튼이 다시 생겨났다. [[2014년]] [[9월 30일]] 공개되었으며 [[10월 2일]](한국 시각 새벽 1시), [[윈도우 10]][[프리뷰]]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윈도우 95]], [[윈도우 98]] 등과 이름에러(프로그램이 [[윈도우 95]], [[윈도우 98]]을 [[윈도우 9]]까지만 인식을 하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임)를 줄이기 위해 9를 건너 뛰고 10이 되었다. [[2015년]] [[7월 29일]], [[윈도우 10]] 정식판이 출시되었다. 1년 간 무료 업그레이드를 제공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윈도우 10]]이 무료 업데이트 제공이 종료되었다. [[2021년]] [[10월 5일]], [[윈도우 11]]이 정식출시되었다. == 릴리스 타임라인 == {{Version|l||show=111111}} {| class="wikitable" |- ! rowspan="2" | 제품명 ! rowspan="2" | 최신 버전 ! rowspan="2" | [[소프트웨어 배포 생명 주기|GA]](General availability) 날짜 ! rowspan="2" | 코드명 ! colspan="2" | 지원 기한<ref>{{웹 인용|url=http://support.microsoft.com/lifecycle/|title=Microsoft Support Lifecycle|publisher=Microsoft|url-status=live|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1011144824/http://support.microsoft.com/lifecycle/|archivedate=2008년 10월 11일|df=mdy-all}}</ref> ! colspan="3" | 최신 버전 |- ! 메인스트림 ! 확장 ! style="width:50px;" | [[Internet Explorer|IE]] ! style="width:50px;" | [[DirectX]] ! style="width:50px;" | [[Microsoft Edge|Edge]] |- | {{version|o|[[Windows 1.0]]|show=|sortKey=1.0}} | 1.01 | 1985년 11월 20일 | Interface Manager (인터페이스 메니저) | rowspan="11" colspan="2" align="center" | 2001년 12월 31일 | rowspan="4" {{N/A}} | rowspan="11" {{N/A}} | rowspan="25" {{N/A}} |- | {{version|o|[[Windows 2.0]]|show=|sortKey=2.0}} | 2.03 | 1987년 12월 9일 | rowspan="3" {{N/A}} |- | {{version|o|[[Windows 2.1]]|show=|sortKey=2.1}} | 2.11 | 1988년 5월 27일 |- | {{version|o|[[Windows 3.0]]|show=|sortKey=3.0}} | 3.0 | 1990년 5월 22일 |- | {{version|o|[[Windows 3.1]]|show=|sortKey=3.1}} | rowspan="2" | 3.1 | 1992년 4월 6일 | Janus(제너스) | rowspan="7" | [[Internet Explorer 5|5]] |- | {{version|o|[[Windows 3.1x|Windows For Workgroups 3.1]]|show=|sortKey=3.101}} | October 1992 | Sparta, Winball (스퍼타,윈볼) |- | {{version|o|[[Windows NT 3.1]]|show=|sortKey=NT 3.1}} | NT 3.1.528 | 1993년 7월 27일 | {{N/A}} |- | {{version|o|[[Windows 3.1x|Windows For Workgroups 3.11]]|show=|sortKey=3.111}} | 3.11 | 1993년 8월 11일 | Sparta, Winball (스퍼타,윈볼) |- | {{version|o|[[Windows 3.1x|Windows 3.2]]|show=|sortKey=3.2}} | 3.2 | 1993년 11월 22일 | {{N/A}} |- | {{version|o|[[Windows NT 3.5]]|show=|sortKey=NT 3.5}} | NT 3.5.807 | 1994년 9월 21일 | Daytona (데이토나) |- | {{version|o|[[Windows NT 3.51]]|show=|sortKey=NT 3.51}} | NT 3.51.1057 | 1995년 5월 30일 | {{N/A}} |- | {{version|o|[[Windows 95]]|show=|sortKey=4.0}} | 4.0.950 | 1995년 8월 24일 | Chicago, 4.0 (시카고) | align="center" | 2000년 12월 31일 | align="center" | 2001년 12월 31일 | [[Internet Explorer 5|5.5]] | 6.1 |- | {{version|o|[[Windows NT 4.0]]|show=|sortKey=NT 4.0}} | NT 4.0.1381 | 1996년 7월 31일 | Cairo (케올) | align="center" rowspan="3" | 2002년 6월 30일 | align="center" | 2004년 6월 30일 | rowspan="5" | [[Internet Explorer 6|6]] | {{N/A}} |- | {{version|o|[[Windows 98]]|show=|sortKey=4.10}} | 4.10.1998 | 1998년 6월 25일 | Memphis, 97, 4.1 (멤퍼스) | align="center" rowspan="2" | 2006년 7월 11일 | rowspan="2" | 6.1 |- | {{version|o|[[Windows 98 SE]]|show=|sortKey=4.11}} | 4.10.2222 | 1999년 5월 5일 | rowspan="2" {{N/A}} |- | {{version|o|[[Windows 2000]]|show=|sortKey=NT 5.0}} | NT 5.0.2195 | 2000년 2월 17일 | align="center" | 2005년 6월 30일 | align="center" | 2010년 7월 13일 | {{N/A}} |- | {{version|o|[[Windows Me]]|show=|sortKey=4.90}} | 4.90.3000 | 2000년 9월 14일 | Millennium, 4.9 (밀레니엄) | align="center" | 2003년 12월 31일 | align="center" | 2006년 7월 11일 | rowspan="6" | 9.0c |- | {{version|o|[[Windows XP]]|show=|sortKey=NT 5.1}} | NT 5.1.2600 | 2001년 10월 25일 | Whistler (휘슬러) | align="center" rowspan="2" | 2009년 4월 14일 | align="center" rowspan="2" | 2014년 4월 8일 | [[Internet Explorer 8|8]] |- | {{version|o|[[Windows XP 64-bit Edition]]|show=|sortKey=NT 5.21}} | rowspan="3" | NT 5.2.3790 | 2003년 3월 28일 | rowspan="3" {{N/A}} | [[Internet Explorer 6|6]] |- | {{version|o|[[Windows Server 2003]]|show=|sortKey=NT 5.22}} | 2003년 4월 24일 | align="center" | 2010년 7월 13일 | align="center" | 2015년 7월 14일 | rowspan="3" | [[Internet Explorer 8|8]] |- | {{version|o|[[Windows XP Professional x64 Edition]]|show=|sortKey=NT 5.23}} | 2005년 4월 25일 | align="center" rowspan="2" | 2009년 4월 14일 | align="center" rowspan="2" | 2014년 4월 8일 |- | {{version|o|[[Windows Fundamentals for Legacy PCs]]|show=|sortKey=NT 5.24}} | NT 5.1.2600 | 2006년 7월 8일 | Eiger, Mönch (이걸,몬치) |- | {{version|o|[[Windows Vista]]|show=|sortKey=NT 6.0}} | NT 6.0.6003 | 2007년 1월 30일 | Longhorn (롱혼) | align="center" | 2012년 4월 10일 | align="center" | 2017년 4월 11일 | [[Internet Explorer 9|9]] | 11 |- | {{version|o|[[Windows Home Server]]|show=|sortKey=NT 5.25}} | NT 5.2.4500 | 2007년 11월 4일 | Quattro (큐톨) | colspan="2" align="center" | 2013년 1월 8일 | [[Internet Explorer 8|8]] | 9.0c |- | {{version|o|[[Windows Server 2008]]|show=|sortKey=NT 6.01}} | NT 6.0.6003 | 2008년 2월 27일 | Longhorn Server (롱혼서버) | align="center" rowspan="3" | 2015년 1월 13일 | align="center" rowspan="3" | 2020년 1월 14일 | [[Internet Explorer 9|9]] | rowspan="4" | 11 |- | {{version|o|[[Windows 7]]|show=|sortKey=NT 6.1}} | rowspan="2" | NT 6.1.7601 | rowspan="2" | 2009년 10월 22일 | Blackcomb, Vienna (블랙큐브,비엔나) | rowspan="2" | [[Internet Explorer 11|11]] | rowspan= "12" | 115.0 [https://learn.microsoft.com/en-us/deployedge/microsoft-edge-relnote-stable-channel 릴리스 노트] |- | {{version|o|[[Windows Server 2008 R2]]|show=|sortKey=NT 6.11}} | {{N/A}} |- | {{version|o|[[Windows Home Server 2011]]|show=|sortKey=NT 6.12}} | NT 6.1.8400 | 2011년 4월 6일 | Vail (벨) | colspan="2" align="center" | 2016년 4월 12일 | [[Internet Explorer 9|9]] |- | {{version|co|[[Windows Server 2012]]|show=|sortKey=NT 6.21}} | rowspan="2" |NT 6.2.9200 | 2012년 9월 4일 | rowspan="2"{{N/A}} | align="center" | 2018년 10월 9일 | align="center" | 2023년 10월 10일 | [[Internet Explorer 11|11]] | rowspan="2" | 11.1 |- | {{version|o|[[Windows 8]]|show=|sortKey=NT 6.22}} | 2012년 10월 26일 | colspan="2" align="center" | 2016년 1월 12일 | [[Internet Explorer 10|10]] |- | {{version|o|[[Windows 8.1]]|show=|sortKey=NT 6.31}} | rowspan="2"|NT 6.3.9600 | 2013년 10월 17일 | Blue (블루) | align="center" | 2018년 1월 9일 | align="center" | 2023년 1월 10일 | rowspan="6" | [[Internet Explorer 11|11]] | rowspan="2" | 11.2 |- | {{version|co|[[Windows Server 2012 R2]]|show=|sortKey=NT 6.32}} | 2013년 10월 18일 | Server Blue (서버블루) | align="center" | 2018년 10월 9일 | align="center" | 2023년 10월 10일 |- | {{version|c|[[Windows 10]]|show=|sortKey=NT 10 1}} | NT 10.0.19045 | 2015년 7월 29일 | ''[[Windows 10#Updates and support|Various]]'' 벌러스 | colspan="2" align="center" | 2025년 10월 14일 | rowspan="4" | 12 |- | {{version|co|[[Windows Server 2016]]|show=|sortKey=NT 10 2}} | NT 10.0.14393 | 2016년 10월 12일 | rowspan="3" {{N/A}} | align="center" | 2022년 1월 11일 | align="center" | 2027년 1월 12일 |- | {{version|co|[[Windows Server 2019]]|show=|sortKey=NT 10 3}} | NT 10.0.17763 | 2018년 10월 2일 | align="center" | 2024년 1월 9일 | align="center" | 2029년 1월 9일 |- | {{version|co|[[윈도우 서버 2022|Windows Server 2022]]|sortKey=NT 10 4}} | NT 10.0.20348 | 2021년 9월 2일 | align="center" | 2026년 10월 13일 | align="center" | 2031년 10월 14일 |- | {{version|c|[[윈도우 11|Windows 11]]|show=|sortKey=|NT 11 4}} | NT 10.0.22621 | 2021년 10월 5일 | Sun Valley (썬 벨리) | {{N/A}} | {{N/A}} | {{N/A}}<ref>[[윈도우 11|Windows 11]]부터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할 수 없다. 실행하더라도 , [[마이크로소프트 엣지|엣지가]] 열린다</ref> |12 Ultimate |} {{윈도우 타임라인}} {{넓은 그림|Suite des versions de Windows.svg|700px|윈도우 계열 트리|100%|center}} == 로고 변천사 == {{갤러리2 |lines=3 |File:Windows logo - 1985-1989.svg|[[윈도우 1.0]] |File:Windows logo - 1992.svg|[[윈도우 3.1]] |File:Windows Logo (1992-2001).svg|[[윈도우 95]] |File:Windows XP logo.svg|[[윈도우 XP]] |File:Windows Vista logo.svg|[[윈도우 비스타]] |File:Windows 7 logo.svg|[[윈도우 7]] |File:Windows 8 logo and wordmark.svg|[[윈도우 8]] |File:Windows 10 Logo.svg|[[윈도우 10]] |File:Windows 11 logo.svg|[[윈도우 11]] }} == 클론 소프트웨어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직접 사용없이 게임이나 어플리케이션을 구동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Bottles<ref>https://usebottles.com/</ref> * 리눅스 KVM/QEMU Virt-Manager 가상머신<ref>https://sysguides.com/install-a-windows-11-virtual-machine-on-kvm/ 윈도10/11등 다수의 가상머신 구동이 가능하다. 그래픽 설정은 QXL/SPICE 모드가 기본. 3D가속 그래픽을 위해 서드파티 VirGL 드라이버 또는 GPU Full Passthrough 모드가 있다.</ref> * [[와인 (소프트웨어)|와인]] ** 다윈 * [[ReactOS]] <!-- 티맥스 윈도우는 에뮬레이터가 아닌 운영 체제임. 추가하지 말 것. --> == 사회적 인식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대한민국]]에서 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본사가 위치한 [[미국]]에서도 소비자들이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비싼 가격으로 출시하는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평가 받는다. == 같이 보기 == * [[휴지통 (윈도우)]] * [[운영 체제]] * [[맥 OS]] * [[리눅스]] ** [[우분투 (운영 체제)|우분투]] * [[마이크로소프트]] * [[윈도우 설치]] * [[윈도우 오류 보고]]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https://web.archive.org/web/20050930213553/http://www.microsoft.com/korea/windows/default.mspx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공식 홈페이지]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계열}} {{운영 체제}} {{전거 통제}} [[분류: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분류:운영체제]] [[분류:운영체제 계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소프트웨어 정보 |이름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로고 = Office 365 app logos.svg |화면 = Microsoft Office 2016.png |설명 = |원저자 = |개발자 = [[마이크로소프트]] |발표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90|11|19}} | ver layout = stacked |최근 버전 = {{소프트웨어의 최신 버전 (안정판)/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미리보기 버전 = |프로그래밍 언어 = C++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플랫폼 = |언어 = 35개 이상<ref>{{웹 인용 |url = http://office.microsoft.com/en-us/suites/HA102113701033.aspx |제목 = The 2007 Microsoft Office suites localized versions |work = Microsoft Office website |publisher = Microsoft Corporation |accessdate = 2011-06-1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522124424/http://office.microsoft.com/en-us/suites/ha102113701033.aspx |보존날짜 = 2010-05-22 |url-status = dead }}</ref> |종류 = [[오피스 제품군]] |라이선스 = [[셰어웨어]] (리테일 소프트웨어 및 볼룸 라이선스 키) |웹사이트 = https://www.microsoft.com/ko-kr/microsoft-365 }} {{소프트웨어 정보 |이름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맥 |로고 = |화면 = |설명 = |원저자 = |개발자 = [[마이크로소프트]] |발표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89|8|1}} |최근 버전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21 |미리보기 버전 = |프로그래밍 언어 = |운영체제 = [[macOS]] |플랫폼 = |언어 = 16개 언어 |종류 = [[오피스 제품군]] |라이선스 = |웹사이트 = https://products.office.com/ko-kr/mac?rtc=1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Microsoft Offic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OS X|맥]]용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묶음이다. [[1989년]]에 맥용으로,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몇 가지 버전을 예로 들면 [[2007년]] [[1월 30일]]에 [[윈도우 비스타]]와 동시에 출시된 윈도우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과 [[2008년]] [[1월 15일]]에 출시된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이 있다. 이 버전들은 새로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인터페이스]]와 [[오피스 오픈 XML]] 포맷(.docx, .xlsx, .pptx 등)을 사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호환성 패키지를 설치하면 윈도우용 [[오피스 2000]]-[[오피스 2003]], 맥용 오피스 2004 에서도 이 문서들을 보고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서비스 팩과 더불어 새로운 버전들이 업데이트되었으며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원노트는 대부분의 오피스 에디션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2022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명칭을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변경과 함께 단품으로 나오는 제품이 단종되었다. == 역사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첫 버전은 1989년에 맥용으로 출시되었다. 또한 윈도우용은 1990년에 출시되었다. === 윈도우용 오피스의 역사 ===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3.0]]'''은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출시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0]]'''은 1994년에 출시되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워드]] 6.0,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엑셀]] 5.0, [[파워포인트]] 4.0을 포함하고 있다. 워드는 전 버전이 2.0임에도 불구하고 맥용 오피스와 버전 번호를 같이 하기 위하여 2.0 다음 버전을 6.0으로 맞추었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3'''은 마지막 [[16비트]] 지원 오피스이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과 [[윈도우 NT 3.1]] 그리고 [[윈도우 NT 3.5]]를 마지막으로 지원하는 버전이다. ([[윈도우 NT 3.51]]은 오피스 97까지 지원된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5]]'''(버전 7.0, 5.0과 6.0은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의 버전을 맞추려고 넘어갔다.)은 [[윈도우 95]]와 호환되기 위하여 모두 [[32비트]]로 구성된 버전이며. 오피스 95 스탠다드와 오피스 95 프로페셔널의 두가지 에디션이 있다. 스탠다드 버전은 워드 7.0, 엑셀 7.0, 파워포인트 7.0, 스케줄+ 7.0을 포함하고 있으며, 프로페셔널 에디션은 스탠다드 에디션에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액세스]] 7.0을 추가한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버전 8.0)은 큰 변화와 향상이 있었던 버전이다. [[일본]]과 [[한국]]을 대상으로 오피스 98(버전 8.5)도 출시되었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0]]'''(버전 9.0)은 매크로 바이러스를 방지하기 위한 [[디지털 서명]] 등 새로운 [[보안]] 기능을 추가했다. 오피스 2000은 [[윈도우 95]]를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며, 제품 인증을 포함하지 않는 버전이기도 하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XP]]'''(버전 10.0, 오피스 2002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안전 모드]]라는 기능을 추가했는데. 만약에 레지스트리 수정등의 이유로 한 프로그램의 로딩이 실패하면. [[안전 모드]]가 문제를 감지하고 수정할 수 있게 했다. 이 버전은 제품 인증이라는 기능도 추가했다. 오피스 XP는 [[윈도우 98|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미|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윈도우 2000 서비스 팩 2 이하 버전]]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고,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에서 호환된다고 보고된 첫 번째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3]]'''(버전 11.0)은 2003년에 출시된 버전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인포패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원노트]]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이 버전은 윈도우 XP [[스타일]]의 [[아이콘]]과 [[디자인]]을 사용한 첫 버전으로, 아웃룩 2003은 정크 메일 필터를 강화했다. 오피스 2003은 [[윈도우 2000|윈도우 2000 서비스 팩 3 이상 버전]]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며, [[윈도우 8]],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를 지원하는 첫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버전 12.0)은 2006년, 2007년에 윈도우 비스타의 기업용/개인용 버전과 함께 출시된 버전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그룹을 포함하며, 이전 오피스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인터페이스]]인 [[리본 UI]]를 사용한다. 오피스 2003은 윈도우 XP 서비스 팩 2~3, [[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팩 1 이상, 또는 윈도우 비스타에서 사용할 수 있다. 오피스 2007 서비스팩 2부터 오피스 2007은 [[리브레오피스]] 및 [[오픈오피스]]에서 쓰이는 [[오픈도큐먼트|ODF]] 포맷을 지원하며, [[윈도우 10]]과 [[윈도우 서버 2016]]을 지원하는 첫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0]]'''(버전 14.0)은 2010년 6월에 출시되었다. 버전 13은 13에 대한 안 좋은 생각 때문에 출시되지 않는다. 테크니컬 프리뷰 1 버전(14.0.4006.1010)이 2009년 5월 15일에 유출되었는데. 7월 13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공식적으로 오피스 2010에 관해 언급했다. 7월 13일은 새로운 테크니컬 프리뷰 버전(14.0.4302.1000)이 유출된 날이기도 하다. [[윈도우 XP]],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버전 15.0)은 2012년 7월 16일(현지시간)에 오피스 2013 커스터머 프리뷰에서 공개했다. [[윈도우 7]], [[윈도우 8]], [[윈도우 8.1]], [[윈도우 10]],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윈도우 서버 2016]], [[윈도우 서버 2019]]를 지원한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버전 16.0)은 2015년 5월 4일에 일반 사용자용 프리뷰가 공개되었다. 2015년 9월 22일 오전 9시([[PDT]])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7]], [[윈도우 8]],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를 공식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10]] 기반의 UI를 적용한 첫 버전이기도 하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9]]'''(버전 16.0)은 2018년 9월 24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10]], [[윈도우 서버 2016]], [[윈도우 서버 2019]]만을 지원한다. 비공식적으로 [[윈도우 7]], [[윈도우 8]],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서버 2012|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에서도 설치가 가능하나, 지원 대상이 아니기에 사용에 제약이 약간 있을 수 있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21]]'''(버전 16.0)은 2021년 10월 5일에 출시를 했다. [[윈도우 10]] 버전 1809 이후, [[윈도우 서버 2019]], [[윈도우 서버 2022]], [[윈도우 11]]를 공식 지원하는 버전이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제품의 마지막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변경되어서 오피스 2021을 마지막으로 마이크로소포트의 오피스 제품의 단품은 단종되었다. === 맥 OS용 오피스의 역사 === 오피스를 만들기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1.0을 1984년에 출시하고. 엑셀 1.0을 1985년에, 파워포인트 1.0을 1987년에 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를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포함하지 않는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1.0'''는 윈도우용 오피스가 출시되기 1년 전인 1989년에 출시되었다. 이 버전은 워드 4.0, 엑셀 2.20, 파워포인트 2.01을 포함한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1.5'''는 1991년에 출시되었으며, 엑셀 3.0으로 엑셀 버전을 업데이트했으며, 애플의 시스템 7을 처음으로 지원하는 오피스이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9'''는 1992년에 출시되었으며 엑셀 4.0을 탑재했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0'''은 1993년에 출시되었으며, [[파워맥]]용 첫 오피스 프로그램이었다. 이 버전은 68k 프로세서를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8 맥 에디션'''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4]]와 함께 1998년에 발표되었으며, 처음으로 [[퀵타임]]을 지원하는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1'''은 2000년에 출시되었으며, 맥 OS X의 이전 버전에서 마지막으로 사용 가능한 버전이다, 맥 OS 8.5 이상에서 작동하며, 마이크로소프트 앙투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인데, 이 버전은 이메일 클라이언트에 노트, 주소록, [[달력]] 등의 부가 기능들이 있는 버전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버전 X'''는 2001년에 맥 OS X용으로 새롭게 출시된 버전이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4'''는 2004년에 출시되었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은 2008년에 출시되었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1]]'''(버전 15.0)은 2010년 가을에 출시되었다. *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버전 16.0)은 2015년 3월 5일(현지 시간)에 프리뷰가 공개되었다. 2015년 7월 9일에 출시되었다. === 클라우드 오피스의 역사 ===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365]]'''는 2013년 5월에 출시를 했다. * '''[[마이크로소프트 365]]'''는 2022년 하반기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을 변경해서 단품은 단종시키고, 구독형으로 바꿨다. == 구성 == === 주요 에디션 === * 기본 프로그램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Word) **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Excel) **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Outlook/Entourage) **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PowerPoint) **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 (Access)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원노트]] (OneNote) ** [[마이크로소프트 인포패스]] (InfoPath)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부터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디자이너]] - [[마이크로소프트 프론트페이지|프론트페이지]]를 대체 (SharePoint Designer/FrontPage)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개발자 도구 - 개발자 에디션에만 포함. 오피스용 비주얼 스튜디오 도구를 대체 **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 (Publisher)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프로젝트]] (Project)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비지오]] (Visio)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어카운팅 (Accounting)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도큐먼트 이미징]] (Document Imaging)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도큐먼트 스캐닝]] (Document Scanning)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그루브/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2010버전부터는 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꿨다.) (Groove/Sharepoint Workspace)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인터커넥트 (InterConnect)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픽처 매니저 (Picture Manager)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웹 서비스 ====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라이브 스몰 비즈니스 (Live Small Business)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라이브 워크스페이스 (Live Workspace)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라이브 미팅 (Live Meeting)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온라인 (Online) - 마이크로소프트 365로 명칭 변경 후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업데이트]] (Update) - '''마이크로소포트 365 업데이트'''로 명칭 변경됨 ==== 서버 구성요소 ==== 커뮤니케이터가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로 합쳐졌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폼즈 서버 (Forms Server)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그루브 서버 (Groove Server)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 (Communications Server R2)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퍼포먼스포인트 서버 (PerformancePoint Server)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서버]] (Project Portfolio Server)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젝트 서버 (Project Server)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셰어포인트 서버 (SharePoint Server) ** 액셀 서비스 (Excel Services) ** 인포패스 폼 서비스 (Infopath Forms Services) === 지원 운영체제 ===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0]] 이하 : [[윈도우 비스타]] 버전 이하 지원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 : [[윈도우 7]] 버전 이상 지원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9]]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21]] : [[윈도우 10]] 버전 1809 이상 지원 * [[맥 OS]], [[macOS]] === 윈도우에서 사용 가능한 오피스 버전 === {| class="wikitable"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버전 ! 마지막 버전 ! 기본 지원 종료일 ! 확장 지원 종료일 |- | [[윈도우 NT 3.51|윈도우 NT 3.51 서비스 팩 5]]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오피스 97]] | [[2001년]] [[8월 31일]] | [[2004년]] [[1월 16일]] |- | [[윈도우 95]]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0|오피스 2000]] | 2004년 [[6월 30일]] | [[2009년]] [[7월 14일]] |- | [[윈도우 NT 4.0]] | 오피스 XP | 2006년 7월 11일 | 2011년 7월 12일 |- | [[윈도우 98]] | 오피스 XP | 2006년 7월 11일 | 2011년 7월 12일 |- | 윈도우 98 SE | 오피스 XP | 2006년 7월 11일 | 2011년 7월 12일 |- | 윈도우 2000 서비스 팩 2 이하 | 오피스 XP | 2006년 7월 11일 | 2011년 7월 12일 |- | [[윈도우 2000|윈도우 2000 서비스 팩 3 이상]]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3|오피스 2003]] | 2009년 [[4월 14일]] | [[2014년]] [[4월 8일]] |- | [[윈도우 미|윈도우 ME]]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XP|오피스 XP]] | [[2006년]] [[7월 11일]] | [[2011년]] [[7월 12일]] |- | 윈도우 XP 서비스 팩 2 | 오피스 2007 | 2012년 10월 9일 | 2017년 10월 10일 |- | [[윈도우 XP|윈도우 XP 서비스 팩 3]] | 오피스 2010 | 2015년 10월 13일 | 2020년 10월 13일 |- | [[윈도우 서버 2003]] | 오피스 2003 | 2009년 4월 14일 | 2014년 4월 8일 |- | [[윈도우 서버 2003|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 팩 2]] | 오피스 2010 | 2015년 10월 13일 | 2020년 10월 13일 |- | 윈도우 비스타 RTM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오피스 2007]] | [[2012년]] [[10월 9일]] | [[2017년]] 10월 10일 |- | [[윈도우 비스타|윈도우 비스타 서비스 팩 1 이상]]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0|오피스 2010]] | [[2015년]] 10월 13일 | 2020년 10월 13일 |- | [[윈도우 서버 2008]] | 오피스 2010 | 2015년 10월 13일 | 2020년 10월 13일 |- | [[윈도우 7]] | 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서버 2008 R2]] | 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8]] | 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서버 2012]] | 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8.1]]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서버 2012 R2 | 오피스 2016 | 2020년 10월 13일 | 2025년 10월 14일 |- | [[윈도우 10]]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21|오피스 2021]] | 2021년 10월 5일 | 미정 |- | [[윈도우 서버 2016]] | 오피스 2021 | 2021년 10월 5일 | 미정 |- | [[윈도우 서버 2019]] | 오피스 2021 | 2021년 10월 5일 | 미정 |- | [[윈도우 11]] | 오피스 2021 | 2021년 10월 5일 | 미정 |- | [[윈도우 서버 2022]] | 오피스 2021 | 2021년 10월 5일 | 미정 |} === 맥에서 사용가능한 오피스 버전 === {| class="wikitable" ! 맥 운영체제 ! 마지막 버전 |- | (68K) 시스템 7.0 - 맥 OS 8.1 | 오피스 4.2.1 |- | (PPC) 시스템 7.1.2 | 오피스 4.2.1 |- | (PPC) 시스템 7.5 - 맥 OS 8.0 | 오피스 98 |- | (PPC) 맥 OS 8.1 - 9.2.2 | 오피스 2001 |- | (PPC) 맥 OS X 10.1 - 10.5 | 오피스 버전 X |- | (PPC) Mac OS X 10.2 - 10.5 | 맥용 오피스 2004 |- | (범용) Mac OS X 10.4 - 10.6 | 맥용 오피스 2008 |- | (인텔) Mac OS X 10.5 - | 맥용 오피스 2011 |- | (인텔) Mac OS X 10.10 - | 맥용 오피스 2016 |} == 지원 == 2002년부터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원 수명(Support LifeCycles) 정책을 지원한다.<ref>[https://support.microsoft.com/en-us/lifecycle?p1=18412&wa=wsignin1.0 Microsoft 지원 주기]</ref><ref>[http://support.microsoft.com/gp/lifepolicy Microsoft Support Lifecycle Policy FAQ<!-- 봇이 따온 제목 -->]</ref> * 초기 버전의 오피스 97 (노트 에디터 97 포함) 은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 오피스 97 (아웃룩 98 포함) – 기본적인 핫픽스는 2001년 8월 31일에 지원이 끝났다. 연장된 핫픽스는 2002년 2월 28일에 지원이 끝났다. 보조 지원은 2004년 1월 16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00 – 기본적인 지원은 2004년 6월 30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09년 7월 14일에 끝났다. * 오피스 XP – 기본적인 지원은 2006년 7월 11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1년 7월 12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03 - 기본적인 지원은 2009년 4월 14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4년 4월 8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07 - 기본적인 지원은 2012년 10월 9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7년 10월 10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10 - 기본적인 지원은 2015년 10월 13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20년 10월 13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13 - 기본적인 지원은 2018년 4월 10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23년 4월 11일에 끝났다. * 오피스 2016 - 기본적인 지원은 2020년 10월 13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25년 10월 14일까지다. * 오피스 2019 - 기본적인 지원은 2023년 10월 10일까지다. 연장 지원은 2028년 10월 10일까지다. * 오피스 2021 - 연장 지원은 2026년 10월 13일까지다. * 오피스 2021까지 버전 - 기본적인 지원은 공개일 후 5년에 끝나거나, 다음 릴리즈가 나온 뒤 2년까지이다. 연장 지원은 5년까지다. == 같이 보기 == * [[마이크로소프트]]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21]] * [[마이크로소프트 365]] * [[한컴오피스]] * [[한/글]] * [[리브레오피스]] * [[오픈오피스]]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https://learn.microsoft.com/ko-kr/officeupdates/current-channel?redirectSourcePath=%252farticle%252f95c8d81d-08ba-42c1-914f-bca4603e1426 마이크로소프트 365 및 오피스 업데이트] * [http://office.microsoft.com/ko-kr/default.aspx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공식 웹 사이트 - 보존 문서] * {{언어링크|en}} [http://office.microsoft.com/en-us/default.aspx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공식 웹사이트 - 보존 문서] * {{dmoz|Computers/Software/Office_Suites/Microsoft_Office - 보존 문서}}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오피스 제품군}} {{윈도우 모바일}} {{전거 통제}}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 [[분류:1989년 소프트웨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MacOS||애플의 현재 운영체제}} {{운영 체제 정보 | 이름 = 맥 OS | 로고 = | 스크린샷 = [[파일:macOS wordmark (2017).svg|100px]] | 설명 = | 개발자 = [[애플|애플 컴퓨터]] | 계열 = | 상태 = | 소스형태 = | 최초버전출시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84|01|24}} | 최신버전 = Ventura 13 Beta 4 | 최신버전출시일 = 2022년 가을 | 미리보기버전 = | 미리보기버전출시일 = | 마케팅대상 = | 언어 = 다국어 | 프로그램언어 = | 업데이트방식 = App Store | 패키지관리자 = | 지원되는플랫폼 = {{단순목록| * [[모토로라 68000|모토로라 68K]]{{small|([[맥 OS의 역사|1.0]]-[[맥 OS 8|8.1]])}} * [[PowerPC]]{{small|([[시스템 7|7.1.2]]-[[맥 OS X 레퍼드|10.5.8]])}} * [[IA-32]]{{small|([[맥 OS X 타이거|10.4.4]]-[[맥 OS X 스노 레퍼드|10.6.8]])}} * [[x86-64]]{{small|([[맥 OS X 타이거|10.4.7]]-)}} }} | 커널형태 = | UI = | 라이선스 = [[사유 소프트웨어|사유]] [[EULA]] | 웹사이트 = [https://www.apple.com/macosx/ 맥 OS 공식 홈페이지] }} '''맥 OS'''(맥 오에스, Mac OS)는 [[애플]]이 [[매킨토시]] 용으로 개발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운영 체제]]이다. 처음에 이 운영 체제는 매킨토시에 포함된 이름 없는 운영 체제로 간단히 '''시스템 소프트웨어'''라고 불렸으나, 1997년 맥 OS 7.6의 출시와 함께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옛날 버전의 맥 OS는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에서만 호환되었다. 그 후 애플이 [[파워PC]] 기반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맥 OS는 [[파워PC]]용으로도 포팅되었다. [[맥 OS 8]].1은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모토로라 68040)에서 호환되는 마지막 버전이었으며, [[맥 OS X]]는 [[파워PC]]만을 지원하다가 [[맥텔|인텔 맥]]을 출시하면서 10.4.4 버전부터 [[인텔]] 프로세서용으로 포팅되었다. 10.6 스노 레퍼드부터는 [[파워PC]] 프로세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크게 나누어 전통적인 클래식(Classic) 시리즈(시스템 1.0 ~ [[맥 OS 9]])와 새로운 [[맥 OS X]] 이후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버전 == 옛날의 매킨토시 시스템은 "시스템"과 "파인더"라는 두 가지 종류의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고. 두 소프트웨어는 버전 번호도 달랐다.<ref>{{웹 인용 |url=http://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15582 |제목=Macintosh: System Software Version History |확인날짜=2010-10-2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420180131/http://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15582 |보존날짜=2008-04-20 |url-status=dead }}</ref> 시스템 7.5.3은 맥 OS 로고를 포함한 첫 버전이고, 맥 OS 7.6부터는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파워PC]] G3 이전의 시스템은 중요한 부분을 모두 [[고정 기억 장치|ROM]]에 저장했다. 원래는 [[하드 디스크]]가 없던 옛날의 [[매킨토시]]가 [[플로피 디스크]]의 한정된 저장 공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ROM에 저장했으나, 이 아키텍처는 완전한 그래픽 OS를 [[명령 줄 인터페이스]]나 텍스트 콘솔 없이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시동 오류도 사용자에게 그래픽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의 PC와는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장점을 낮은 수준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맥 OS는 코어 시스템을 [[고정 기억 장치|ROM]]에 의존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애플 컴퓨터나 (저작권으로 보호된 애플의 [[고정 기억 장치|ROM]]을 포함한) 라이선스된 [[클론]]만이 맥 OS를 구동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맥 OS는 다음 두 분류로 구별할 수 있다. * 클래식 맥 OS. 애플의 자체 코드 기반. * 맥 OS X 운영 체제, 클래식 맥 OS와 [[유닉스 계열]] [[NEXTSTEP]] 기반. == 클래식 맥 OS == 클래식 맥 OS는 완전히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그래픽]]으로 구성되었으며, [[명령 줄 인터페이스|명령 줄]]이 전혀 없는 [[운영 체제]]로, 쉬운 사용법과 협력형 [[멀티태스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주 제한된 [[메모리 관리]]와 [[메모리 보호|보호된 메모리]]. 그리고 불안정한 운영 체제 확장 기능으로 비판을 받았다. 원래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파일 시스템(MFS)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파일 시스템]]은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지 못하며, 1985년에 바로 계층형 파일 시스템(HFS)로 대체되었다. HFS는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여 디렉터리 트리를 만들 수 있다. 두 [[파일 시스템]]은 서로 호환된다. [[파워PC]] 버전의 [[맥 OS X]]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클래식 맥 OS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호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버전은 [[맥 OS 9#맥 OS 9.1]] 이후 버전을 돌릴 수 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응용 프로그램은 이 호환 모드에서 잘 돌아가지만 실제 하드웨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클래식 환경은 [[맥 OS 9]]가 [[x86]] 프로세서를 지원하지 않아 [[맥텔|인텔 맥]]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 또한 [[맥 OS X 10.5|맥 OS X 레퍼드]]부터는 지원이 중단되어 클래식 모드를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수많은 클래식 맥 OS 사용자들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사용자에게 덜 친숙하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또한 새로운 OS로 다시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기능, 같은 하드웨어에서도 클래식 맥 OS보다 느려졌다는 점, [[장치 드라이버|드라이버]]와 [[응용 소프트웨어|응용 프로그램]]이 거의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 옛날 [[매킨토시]]로의 지원 중단도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출시 초기에는 많은 사용자들이 클래식 맥 OS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2005년 경에는 거의 모든 사용자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다. 2005년 6월, [[스티브 잡스]]는 [[WWDC]] 2005에서 애플 컴퓨터는 [[파워PC]] 칩셋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이동할 것이며, 새로운 기기에 맥 OS 클래식의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콘퍼런스에서 잡스는 개발자 변환 키트를 제공하여 개발자들이 자신의 [[응용 소프트웨어|응용 프로그램]]이 [[맥텔|인텔 맥]]에서 잘 돌아가는지 테스트 할 수 있게 했다. 2006년 1월에 애플은 첫 인텔 기반 매킨토시인 [[아이맥]]과 [[맥북 프로]]를 출시했다. 2006년 2월엔 [[맥 미니]]를 출시했으며, 2006년 5월에 [[맥북]], 2006년 8월에 [[맥 프로]]로 모든 [[매킨토시]]를 [[인텔]] 프로세서 기반으로 바꿨다. == macOS == {{본문|macOS}} [[macOS|macOS(맥 OS)]]는 애플의 가장 최신인 맥 OS [[운영 체제]]다. 이전 이름은 OS X (오에스 텐)이었다. 이 버전은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맥 OS의 버전 10이지만, 기존 맥 OS와는 아주 많은 변화를 띄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맥 OS 9]]와 클래식 맥 OS의 다음 버전으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면서 가져온 [[NEXTSTEP]]과 [[마하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macOS]]는 [[BSD]] 코드 베이스를 사용한다. mac은 그동안 데스크톱용 릴리즈로 9번 출시되었다. 2016년 9월 20일에 공개한 macOS 10.12로 , [[macOS 시에라]]로 불리며 2017년에 WWDC에서 발표한 macOS 10.13로, [[MacOS 하이 시에라|macOS 하이시에라]]로 불린다(macOS 버전 대의 경우, [[고양이과]]의 [[펫 네임]]을 별명으로 붙여 친숙함을 높이려 했는데, [[OS X 마운틴 라이언|OS 10.8 마운틴 라이언]]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주|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데스크톱용 버전과 같이 macOS은 8번의 서버용 릴리즈가 있었다. 첫 번째 릴리즈는 [[OS X 서버 1.0]]으로, 서버 버전은 당시의 데스크톱용 맥 OS(클래식 맥 OS)와 아키텍처가 완전히 달랐으며, 많은 서버 관리 도구를 탑재하고 있었다. macOS는 [[Xserve]]의 기본 운영 체제이다. 그리고 데스크톱용 버전과 다르게 [[패러럴즈 데스크톱]]과 같은 [[가상 머신]]에서도 돌아간다. macOS는 [[아이폰]], [[아이팟 터치]], [[아이패드]], [[애플 TV]]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iOS]]의 기초이다. == 에뮬레이션 == === 68000 === vMac, Basilisk II. Executer 등의 서드 파티 68000 에뮬레이터는 인텔 기반 [[개인용 컴퓨터|PC]]에서 맥 OS를 로드할 수 있게 했다. 이 에뮬레이터들은 [[모토로라 68000]] 칩셋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때문에 [[맥 OS 8]].1 이상의 버전은 [[파워PC]]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기에 에뮬레이트할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맥 [[고정 기억 장치|ROM]] 이미지나 실제 맥 [[고정 기억 장치|ROM]] 칩을 필요로 했다. 맥 [[고정 기억 장치|ROM]] 이미지를 사용하는 에뮬레이터는 거의 100% 맥 OS 호환성을 유지하며 [[x86]] 프로세서에서도 아주 빠른 맥 OS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 파워PC === PearPC라는 [[파워PC]] 에뮬레이터는 [[파워PC]] 프로세서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맥 OS X]]를 에뮬레이트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아직도 초기 개발 상태이고, 네이티브 [[파워PC]] 칩보다 속도가 아주 느리다. 맥을 [[파워PC]]에서 [[맥텔|인텔 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애플은 사용자들이 [[파워PC]] 기반 응용 프로그램을 [[맥텔|인텔 맥]]에서 돌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에뮬레이터 "로제타"를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로제타가 PearPC처럼 아주 느린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퍼포먼스는 예상외로 상당히 빨랐다. 또다른 [[파워PC]] 에뮬레이터로는 SheepShaver가 있으며, 원래는 [[BeOS]]를 [[파워PC]] 플랫폼에서 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이 에뮬레이터는 실제 [[파워PC]] 프로세서가 필요했으나, 후에 [[오픈 소스]]화 되면서 [[x86]] 프로세서용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에뮬레이터는 [[메모리 관리 장치]]를 에뮬레이트하지 않기 때문에 [[맥 OS 9]].0.4 이후 버전은 에뮬레이트할 수 없다. == 매킨토시 클론 == 몇몇 컴퓨터 제조사들은 맥 OS를 구동할 수 있는 [[클론 컴퓨터]]를 만들어왔다. 대표적이 예로 파워 컴퓨팅, UMAX, [[모토로라]]가 그래왔다. 이 버전은 클래식 맥 OS를 정상적으로 구동할 수 있다. 하지만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가 곧 클론 라이선싱 프로그램을 끝냈다. 2008년, [[사이스타]]사가 499달러의 베어본 [[컴퓨터]]를 내놓았는데, 이 컴퓨터는 [[맥 OS X 10.5]] 레퍼드를 돌릴 수 있다. 사이스타는 이 [[컴퓨터]]를 오픈 맥이라 부르며, 애플은 현재 이 회사에 소송을 걸고, 판매한 모든 클론을 리콜한 후, 애플에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A/UX == {{본문|A/UX}} [[1988년]]에 [[애플]]은 첫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인 [[A/UX]]를 출시했다. 이 [[운영 체제]]는 당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가 아니었던 맥 OS를 기본 [[운영 체제]]로 사용하지 못했던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맥 OS X]]를 개발할 때 [[A/UX]]의 코드가 약간 쓰였다. ==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애플|애플 컴퓨터]]가 [[유닉스 계열]] [[워크스테이션]]에서 애플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다. 이 프로그램은 [[X 윈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파인더 스타일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에뮬레이트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3.0은 맥 시스템 7.5.3과 호환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SPARC]]station과 [[HP]]의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98년]] 5월 14일 단종되었다. == MkLinux == {{본문|MkLinux}} OSF와 애플 컴퓨터가 1996년 2월 리눅스를 파워PC 플랫폼으로 포팅하기 위해 시작한 오픈 소스 컴퓨터 운영 체제로, 1996년 WWDC에서 공개되었으며, 1998년 여름에 커뮤니티 중심의 MkLinux 개발자 단체가 개발을 맡기 시작하였다. 마이크로커널 리눅스 (MicroKernel Linux)의 줄임말이며, 마하 커널 3.0에 기반을 두고 있다. == OSx86 == {{본문|OSx86}} 애플의 [[EULA]]<ref>{{웹 인용 |url=https://www.apple.com/legal/sla/docs/macosx105.pdf#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8-05-1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023213633/http://www.apple.com/legal/sla/docs/macosx105.pdf# |보존날짜=2011-10-23 |url-status=dead }}</ref>에 위배되는 동시에 보증을 포기하는 행위지만, 애플 컴퓨터가 아닌 x86 컴퓨터에서 맥 OS X를 구동하는 것은 커널 수정, 커뮤니티 드라이버, 에뮬레이션 등으로 가능하다. 예로, PC-EFI는 애플 컴퓨터에 기본으로 있는 [[확장 펌웨어 인터페이스|EFI]]를 에뮬레이트해서 비 애플 컴퓨터에 맥 OS X를 설치할 수 있게 한다.<ref>{{웹 인용 |url=http://www.insanelymac.com/forum/index.php?showtopic=70943 |제목=PC EFI Enables Vanilla OS X Kernel Boot on White Box PCs - InsanelyMac Forum<!--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10-23 |archive-date=2011-07-1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713040754/http://www.insanelymac.com/forum/index.php?showtopic=70943 }}</ref> == 같이 보기 == * [[맥 (컴퓨터)]]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공식 웹사이트}} * [https://www.apple.com/support/mac101/ 맥 101] - 애플의 맥 OS 안내서 {{맥 OS 역사}} {{운영 체제}} {{전거 통제}} [[분류:맥 OS| ]] [[분류:애플의 운영 체제]] [[분류:1984년 소프트웨어]] [[분류:애플의 소프트웨어]] [[분류:운영체제 계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소문자}} {{다른 뜻|맥 OS||클래식 맥 OS}} {{운영 체제 정보 | 이름 = macOS | 로고 = [[파일:MacOS wordmark (2017).svg|100px]] | 스크린샷 = OVM4muF oF599qTsitwRYDarZVPwMyJIMT X5KBR29FL4NzQj53AS2-css2yOedF9QvyVc 81xr1qn9C T86pijaUcMkIxJmB05jB3 0eM58 hAv2YwB57C4 0YiKS30PGQa7o7OWQqkmYcEjFeORQ.webp | 설명 = Mac OS Sequoia Beta 구동화면 | 개발자 = [[애플]] | 계열 = [[UNIX]]<ref name=":0">{{웹 인용|url=https://www.opengroup.org/openbrand/register/|제목=The Register of UNIX® Certified Products|확인날짜=2021-03-13}}</ref> | 소스형태 = [[클로즈드 소스]]<br />([[오픈 소스]] 구성 요소 포함) | released = {{시작 날짜와 나이|2001|03|24}} | latest release version = {{wikidata|property|reference|edit|Q14116|P348|P548=Q2804309}} | latest release date = {{시작 날짜와 나이|{{wikidata|qualifier|Q14116|P348|P548=Q2804309|P577}}}} | 미리보기버전 = 15.0 beta 4 (Public Beta 2), (24A5298h)<ref>{{웹 인용|date=2024-07-23 |title=Apple Seeds Fourth Beta of macOS Sequoia to Developers |url=https://www.macrumors.com/2024/07/23/apple-seeds-macos-sequoia-beta-4/ |access-date=2024-07-24 |website=MacRumors |language=en}}</ref> | 커널형태 = [[마하 (커널)|마하 커널]] 기반 [[하이브리드식 커널]] | UI = [[아쿠아 (사용자 인터페이스)|아쿠아]] | 라이선스 = 사유 [[EULA]] | 상태 = 지원 중 | 패키지관리자 = | website = {{공식 URL|https://www.apple.com/kr/macos}} }} '''macOS'''({{llang|ko|맥 오에스}}, 이전 명칭: OS X, 맥 OS X / Mac OS X)는 [[애플]]이 개발한 [[유닉스]] 기반 [[운영 체제]]<ref name=":0">{{웹 인용|url=https://www.opengroup.org/openbrand/register/|제목=The Register of UNIX® Certified Products|확인날짜=2021-03-13}}</ref>이다. 최초의 유닉스인 AT&T [[벨 연구소]] 유닉스의 소스코드를 이어받은 [[유닉스 계열|유전적 유닉스]]에 속하며 동시에 유닉스 상표권을 소유하며 유닉스 표준을 만든 오픈그룹으로부터 유닉스 인증을 받아 기술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완벽하게 유닉스 기준을 충족한다.<ref name=":0" /> 때문에 애플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macOS를 UNIX로 설명한다.<ref>{{웹 인용|url=https://developer.apple.com/opensource/|제목=Open Source - Apple Developer|확인날짜=2021-03-13}}</ref> macOS는 현존하는 유일한 PC용 유닉스 운영체제이며 완전한 UNIX이기에 [[유닉스 계열|Unix-like]]라고 표기되지 않는다. (Unix-like에 해당하는 리눅스는 UNIX가 아니며 별개 계통에 속한다.) 2002년 4월부터 모든 [[매킨토시]] 컴퓨터에 적용되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1984년 1월부터 애플 컴퓨터를 이끌어 왔던 [[맥 OS]]의 마지막 고전 버전인 [[맥 OS 9]]의 뒤를 잇는다. OS X이라는 이 운영 체제의 예전 이름에 들어있는 "X"라는 글자는 알파벳 "X"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킨토시]]의 10번째 운영 체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 숫자 "10"을 뜻하는 것이다.<ref name=ten_not_x>{{웹 인용 |확인날짜=2009-07-10 |날짜=2007-11-14 |제목=What is an operating system (OS)? |url=http://support.apple.com/kb/TA22541?viewlocale=en_US |출판사=Apple Inc|quote=The current version of Mac OS is Mac OS X (pronounced "Mac O-S ten").}}</ref> 이 [[운영 체제]]는 [[애플]]이 1996년 12월에 인수한<ref name="NeXT_인수">{{웹 인용 |url=http://product.info.apple.com/pr/press.releases/1997/q1/961220.pr.rel.next.html |제목=애플사의 NeXT 인수 |확인날짜=2009-07-10 |archive-date=2002-02-0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20208190346/http://product.info.apple.com/pr/press.releases/1997/q1/961220.pr.rel.next.html |url-status= }}</ref> [[NeXT]]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유닉스 계열|유닉스]]에 기반을 하고 있다.<ref name="Mac_OS_X이란?">{{웹 인용 |url=https://www.apple.com/kr/macosx/what-is-macosx/ |제목=Mac OS X이란? |확인날짜=2018-05-11 |출판사=Apple Inc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05033410/http://www.apple.com/kr/macosx/what-is-macosx/ |보존날짜=2011-05-05 |url-status=dead }}</ref> macOS는 전통적으로 [[매킨토시]]가 많이 사용되는 [[전자출판]], [[디자인]], [[멀티미디어]] 부문 등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1년 7월 20일에 [[맥 OS X 라이언|OS X 라이언]]이 출시되었다. 기존에도 줄여서 '''OS X'''이라고 많이 표현했으나, [[OS X 마운틴 라이언]] 공개와 함께 기존 '''맥 OS X'''(Mac OS X)에서 ''''맥'''(Mac)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제거되었다. 2016년 6월 13일에 [[macOS 시에라]] 공개와 함께 제품명이 '''OS X'''<ref>{{웹 인용|url=http://www.theverge.com/2012/2/16/2802281/apple-officially-renames-mac-os-x-to-os-x-drops-the-mac|제목=Apple officially renames Mac OS X to OS X, drops the 'Mac'|last=Patel|first=Nilay|authorlink=Nilay Patel|date=2012-02-16|work=[[The Verge (website)|The Verge]]|publisher=[[Vox Media]]|accessdate=2012-02-21}}</ref>에서 '''macOS'''로 변경되었다. == 역사 == [[스티브 잡스]]가 설립한 [[넥스트사]]의 [[NeXTSTEP]]를 [[애플]]이 인수하여 [[다윈 (운영 체제)|다윈]]과 macOS를 개발하였다. [[마하 (커널)|마하커널]]과 [[BSD]]를 기반으로 하는 macOS는 애플의 [[다윈 (운영 체제)|다윈]] 운영 체제 위에 아쿠아 그래픽 레이어와 [[응용 소프트웨어|응용 프로그램]] 레이어를 올렸고, 이를 위해 [[쿼츠 (그래픽스 계층)|쿼츠]], [[코코아 (API)|코코아]], [[카본]],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등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였다. macOS의 아쿠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인터페이스]]는 화제를 모았고, 여러 컴퓨터 산업 부문에 영향을 주었다. [[파일:Unix timeline.en.svg|섬네일|800x800픽셀|유닉스와 리눅스 계보|가운데]] === 개발 === macOS가 될 유산은 [[스티브 잡스]]가 1985년 [[애플]]을 떠난 후 설립한 [[NeXT]]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유닉스 계열]] NeXTSTEP 운영 체제가 개발되어 1989년에 출시되었다. NeXTSTEP의 커널은 원래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개발된 Mach 커널에 추가 커널 계층과 FreeBSD 및 기타 BSD 운영 체제의 일부에서 파생된 저급 사용자 공간 코드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Objective-C]]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객체 지향 [[GUI 툴킷]] 위에 구축되었다. 1990년대 내내 애플은 Taligent, [[코플랜드 (운영 체제)|Copland]] 및 Gershwin 프로젝트를 통해 클래식 맥 OS를 계승할 "차세대" OS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모두 포기되었다. 이로 인해 애플은 1997년에 NeXT를 인수하여 나중에 [[오픈스텝]]으로 불리는 NeXTSTEP이 애플의 차세대 운영 체제의 기반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인수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임시 CEO로 복귀한 후 영구 CEO로 복귀하여 프로그래머 친화적인 오픈스텝을 애플의 주요 시장인 가정 사용자와 창의적인 전문가가 채택할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맥 OS X로 명명되기 전에 처음에는 코드명 "[[랩소디 (운영 체제)|랩소디]]"(Rhapsody)로 명명되었다.<ref>{{웹 인용|last=Fawcett |first=Neil |date=February 12, 1998 |title=Rhapsody suffers an identity crisis |url=https://business.highbeam.com/411267/article-1G1-20334085/rhapsody-suffers-identity-crisis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30502033350/https://business.highbeam.com/411267/article-1G1-20334085/rhapsody-suffers-identity-crisis |archive-date=May 2, 2013 |access-date=April 19, 2012 |website=[[Computer Weekly]] |publisher=[[Reed Business Information]] |df=mdy-all}}{{subscription required}}</ref><ref name="Rhapsody and Blues">{{웹 인용|last=Siracusa |first=John |date=April 3, 2008 |title=Rhapsody and Blues |url=https://arstechnica.com/staff/2008/04/rhapsody-and-blues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1104224017/https://arstechnica.com/staff/2008/04/rhapsody-and-blues |archive-date=November 4, 2015 |access-date=30 November 2015 |website=[[Ars Technica]] |df=mdy-all}}</ref> === 맥 OS X === 맥 OS X 이름의 문자 "X"는 [[로마 숫자]]인 숫자 10을 의미하며, 애플에서는 이 맥락에서 "10"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자 "X"처럼 발음되기도 한다. 이후 iPhone X, iPhone XR 및 iPhone XS는 모두 이 규칙을 따랐다. 이전 매킨토시 운영 체제(클래식 맥 OS 버전)는 맥 OS 8 및 맥 OS 9와 마찬가지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이름이 지정되었다. macOS 11 빅서까지 모든 운영 체제 버전에는 10.x 형식의 버전 번호가 지정되었다. , 이는 10.0에서 10.15까지 진행된다. macOS 11 빅서부터 애플은 주요 릴리스마다 번호가 1씩 증가하는 주요 릴리스 번호 매기기로 전환했다. 맥 OS X의 첫 번째 버전인 맥 OS X 서버 1.0은 고전적인 맥 OS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특징으로 하는 과도기 제품이었지만 이전 시스템용으로 설계된 소프트웨어와 호환되지 않았다. 맥 OS X의 소비자 릴리스에는 이전 버전과의 호환성이 더 많이 포함되었다. 맥 OS 애플리케이션은 카본 API를 통해 기본적으로 실행되도록 다시 작성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성능이 저하되면서 클래식 환경을 통해 직접 실행할 수도 있다. 맥 OS X의 소비자 버전은 2001년 맥 OS X 10.0과 함께 출시되었다. 세련되고 광택이 나는 아쿠아 인터페이스에 대한 광범위한 칭찬과 함께 리뷰가 다양했지만 성능이 느리다는 비판이 있었다. 애플의 인기가 낮아지자 프레임메이커 제조사인 [[어도비 (기업)|어도비]]는 맥 OS X용 새 버전 개발을 거부했다. 최대 10.10까지 모든 주요 OS X 릴리스를 검토한 아스 테크니카 컬럼니스트 존 시라쿠사는 초기 릴리스에 대한 회고에 따르면 개처럼 느리고 기능이 좋지 않으며 아쿠아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엄청난 자원을 잡아먹는 요소라고 말했다. 애플은 여러 가지 새로운 맥 OS X 릴리스를 신속하게 개발했다. 시라쿠사의 버전 10.3 리뷰인 팬서는 "수년간의 불확실성과 허풍의 시대에서 매년 주요 새 운영 체제 릴리스가 꾸준히 공급되는 상황이 된 것은 이상한다."라고 언급했다. 버전 10.4 타이거는 빠른 파일 검색, 향상된 그래픽 처리 등 마이크로소프트가 허용 가능한 성능으로 윈도우 비스타에 추가하기 위해 수년을 애썼던 기능을 제공하여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진을 놀라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영 체제가 발전하면서 응용 프로그램이 추가되거나 제거되면서 기존 맥 OS에서 멀어졌다. 음악이 주요 시장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애플은 [[아이튠즈]] 및 [[개러지밴드]]를 포함하여 아이팟 음악 플레이어와 맥용 음악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소비자 및 미디어 시장을 목표로 애플은 아이라이프 제품군, 프론트러 미디어 센터를 통한 통합 홈 엔터테인먼트 및 사파리 웹 브라우저와 같은 새로운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애플리케이션을 강조했다. 인터넷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애플은 .Mac, MobileMe 및 가장 최근의 아이클라우드 제품을 포함한 추가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중에 [[맥 앱 스토어]]를 통해 타사 애플리케이션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맥 OS X의 최신 버전에는 일반 인터페이스에 대한 수정 사항도 포함되어 초기 버전의 줄무늬 광택과 투명도에서 벗어났다. 일부 응용 프로그램은 버전 10.4에서 브러시 처리된 금속 모양 또는 핀스트라이프가 아닌 제목 표시줄 모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레퍼드에서 애플은 표준화된 회색 그라데이션 창 스타일로 인터페이스 통합을 발표했다. 2006년에는 맥 OS X 10.4 타이거의 특수 버전이 포함된 최초의 인텔 맥이 출시되었다. 시스템의 주요 개발은 2007년 이후 아이폰의 발표 및 출시였다. 애플의 이전 아이팟 미디어 플레이어가 최소한의 운영 체제를 사용한 반면, 아이폰은 나중에 "아이폰 OS"로 불리게 된 맥 OS X 기반의 운영 체제를 사용했으며 그 다음에는 iOS로 바뀌었다. 동일한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한 두 가지 운영 체제의 동시 출시는 애플에 긴장감을 주었다. 애플은 아이폰이 맥 OS X 10.5 레퍼드를 지연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애플이 아이폰을 제3자 개발자에게 공개한 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맥 OS X가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많은 아이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맥 개발에 관심을 보였다. 2007년에 맥 OS X 10.5 레퍼드는 인텔 맥과 일부 PowerPC 맥 모두에 설치할 수 있는 범용 바이너리 구성 요소를 갖춘 유일한 릴리스였다. 또한 PowerPC 맥을 지원하는 최종 릴리스이기도 하다. 맥 OS X 10.6 스노레퍼드는 인텔 맥 전용으로 제작된 최초의 맥 OS X 버전이자 32비트 인텔 맥을 지원하는 최종 릴리스이다. 이 이름은 사용자가 직면하는 기능보다는 기술 및 성능 개선에 초점을 맞춘 레퍼드의 반복으로서의 지위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개발자에게는 '새로운 기능 없음' 릴리스로 명시적으로 브랜드화되었다. 출시 이후 여러 OS X 또는 macOS 릴리스(예: OS X 마운틴 라이언, OS X 엘카피텐, macOS 하이시에라 및 macOS 몬트레이)는 인텔의 '틱-톡 모델'과 유사하게 이전 버전에서 파생된 이름을 사용하여 이 패턴을 따른다. 라이언과 마운틴 라이언이라는 두 가지 후속 버전에서 애플은 일부 애플리케이션을 현대 iOS 버전에서 영감을 받은 고도로 스큐어모픽한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옮겼으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스크롤 막대와 같은 컨트롤이 페이드 아웃되도록 하여 일부 요소를 단순화했다. 이 방향은 브러시드 메탈 인터페이스처럼 일부 사용자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소용돌이치는 성운에 대해 과거 파일 버전을 표시하는 타임 머신 백업 유틸리티와 같은 디자인 측면에서 이전에 볼 수 있었던 인터페이스에서 더 큰 애니메이션과 다양성의 추세를 계속했다. 레퍼드와 스노 레퍼드의 광택있는 반투명 도크. 또한 맥 OS X 10.7 라이언을 통해 애플은 맥 OS X의 별도 서버 버전 출시를 중단하고 맥 앱 스토어를 통해 서버 도구를 별도의 다운로드 가능한 응용 프로그램으로 판매했다. 한 리뷰에서는 서버 제품의 추세가 "더 저렴해지고 단순해지고... 대기업에서 소규모 기업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f name="Guide to OS X Server">{{웹 인용|last=Cunningham |first=Andrew |date=July 29, 2012 |title=Server, simplified: A power user's guide to OS X Server |url=https://arstechnica.com/apple/2012/07/the-server-simplified-a-power-users-guide-to-os-x-server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1208042819/https://arstechnica.com/apple/2012/07/the-server-simplified-a-power-users-guide-to-os-x-server |archive-date=December 8, 2015 |access-date=2 December 2015 |website=[[Ars Technica]] |df=mdy-all}}</ref> === OS X === [[파일:The_OS_X_Logo.svg|섬네일]] 2012년 OS X 10.8 마운틴 라이언이 출시되면서 시스템 이름이 공식적으로 맥 OS X에서 OS X로 단축되었다. 이전 버전에서는 1년 전 비슷한 방식으로 시스템 이름을 줄였다. 그해 애플은 OS X 개발 책임자인 Scott Forstall을 해임하고 디자인을 보다 미니멀한 방향으로 변경했다. 깊은 색상 채도, 텍스트 전용 버튼 및 최소한의 '플랫'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애플의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2013년 iOS 7에서 처음 선보였다. OS X 엔지니어들이 2013년에 출시된 버전인 iOS 7에서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0.9 매버릭스는 스큐어모픽 디자인 중 일부가 제거된 반면 매버릭스의 일반적인 인터페이스 대부분은 변경되지 않은 상태로 일종의 과도기적 릴리스였다. 다음 버전인 OS X 10.10 요세미티는 iOS 7과 유사한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마우스로 제어되는 인터페이스에 적합하도록 더 복잡해졌다.<ref name="OS X Yosemite review">{{웹 인용|last=Siracusa |first=John |date=October 16, 2014 |title=OS X Yosemite review |url=https://arstechnica.com/apple/2014/10/os-x-10-10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1124200435/https://arstechnica.com/apple/2014/10/os-x-10-10 |archive-date=November 24, 2015 |access-date=30 November 2015 |website=[[Ars Technica]] |df=mdy-all}}</ref> 2012년부터 시스템은 10.4 타이거 이전의 iOS 및 맥 OS X 릴리스와 유사한 연간 릴리스 일정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스노 레퍼드부터는 업데이트 비용을 꾸준히 절감한 후 OS X 매버릭스에서는 업그레이드 비용을 완전히 제거했다. 일부 언론인과 타사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이러한 결정이 더 빠른 기능 출시를 허용하는 동시에 안정성에 집중할 기회가 적어지고 새로운 기능 이상의 안정성과 성능을 요구하는 사용자에게 권장되는 OS X 버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했다. 애플의 2015년 업데이트인 OS X 10.11 엘카피텐은 특히 안정성과 성능 향상에 중점을 두고 발표되었다.<ref>{{뉴스 인용|last=Hattersley |first=Lucy |title=Mac OS X El Capitan review: The best (and worst) new features |language=en-GB |work=Macworld UK |url=https://www.macworld.co.uk/review/mac-software/mac-os-x-el-capitan-mac-review-3613524 |url-status=live |access-date=2017-05-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511161056/https://www.macworld.co.uk/review/mac-software/mac-os-x-el-capitan-mac-review-3613524 |archive-date=May 11, 2017 |df=mdy-all}}</ref> === macOS === [[파일:MacOS_logo.svg|섬네일|현재 로고]] 2016년 macOS 10.12 시에라가 출시되면서 애플의 다른 기본 운영 체제인 iOS, watchOS 및 tvOS의 브랜드와 맞추기 위해 이름이 OS X에서 macOS로 변경되었다. macOS 시에라에는 Siri, 아이클라우드 드라이브, PIP(picture-in-picture) 지원, 밤에 디스플레이를 더 따뜻한 색상으로 전환하는 나이트 시프드 모드, 두 가지 연속성 기능(애플 장치 전체에서 사용자의 클립보드를 동기화하는 범용 클립보드 및 자동 잠금 해제)이 추가되었다. , 애플 워치로 사용자의 맥을 잠금 해제할 수 있다. macOS 시에라는 또한 애플의 이전 HFS+ 파일 시스템의 후속 제품인 APFS(애플 파일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추가한다. 2017년에 출시된 macOS 10.13 하이시에라에는 성능 개선, 메탈 2 및 HEVC 지원이 포함되었으며 APFS를 SSD 부팅 드라이브의 기본 파일 시스템으로 만들었다.<ref>{{웹 인용|last=Swain |first=Chris |title=APFS in macOS High Sierra |url=https://www.macinchem.org/blog/files/960e8891940dfc087f89f0b0aa42af9b-2167.php |access-date=2022-10-07 |website=Macs in Chemistry |language=en |archive-date=October 26, 20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1026093900/https://www.macinchem.org/blog/files/960e8891940dfc087f89f0b0aa42af9b-2167.php |url-status=live }}</ref> 후속작인 macOS 10.14 모하비는 2018년에 출시되었으며 다크 모드 옵션과 동적 배경 화면 설정이 추가되었다. 2019년 macOS 10.15 카탈리나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아이튠즈를 다양한 미디어 유형에 대한 별도의 앱으로 대체하고 iOS 앱 포팅을 위한 카탈리스트 시스템을 도입했다.<ref>{{웹 인용|last=Cunningham |first=Andrew |date=2019-10-07 |title=macOS 10.15 Catalina: The Ars Technica review |url=https://arstechnica.com/gadgets/2019/10/macos-10-15-catalina-the-ars-technica-review |access-date=2019-10-07 |website=Ars Technica |language=en-us |archive-date=September 22, 20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922032420/https://arstechnica.com/gadgets/2019/10/macos-10-15-catalina-the-ars-technica-review/ |url-status=live }}</ref> 2020년 애플은 WWDC 2020에서 macOS 11 빅서를 선보였다. 이는 2000년 Mac OS X 공개 베타 출시 이후 macOS의 기본 버전 번호가 처음으로 증가한 것이다. macOS 11 업데이트에는 애플의 다른 운영 체제에서 사용하는 버전 번호 체계와 일치하는 11.x 번호가 부여되었다. 빅서는 UI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Arm 명령어 세트에서 실행되는 최초의 버전이었다.<ref>{{웹 인용|last=Tung |first=Liam |date=2020-06-23 |title=Apple Big Sur: Here's what makes new macOS 'biggest update to design in over a decade' |url=https://www.zdnet.com/article/apple-big-sur-heres-what-makes-new-macos-biggest-update-to-design-in-over-a-decade/ |access-date=2020-06-23 |website=ZDNet |language=en-us |archive-date=April 5, 20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405090919/https://www.zdnet.com/article/apple-big-sur-heres-what-makes-new-macos-biggest-update-to-design-in-over-a-decade/ |url-status=live }}</ref> 새로운 넘버링 체계는 2021년 macOS 12 몬터레이, 2022년 macOS 13 벤투라, 2023년 macOS 14 소노마, 2024년 macOS 15 세쿼이아에서 계속되었다. === 출시 타임라인 === {{MacOS 버전}} == 출시 역사 == <div class="thumb tright"><div class="thumbinner" style="width: 350px;"> <timeline> ImageSize = width:350 height:550 PlotArea = width:200 height:530 left:50 bottom:10 DateFormat = dd/mm/yyyy Period = from:01/01/1997 till:01/01/2024 TimeAxis = orientation:vertical ScaleMajor = unit:year increment:1 start:01/01/1997 ScaleMinor = unit:month increment:3 start:01/01/1997 PlotData= bar:macos mark:(line,black) fontsize:10 at:26/09/2023 shift:(20,-2) text:"[[macOS Sonoma|macOS 14 Sonoma]] (26/09/2023)" at:24/10/2022 shift:(20,-2) text:"[[macOS Ventura|macOS 13 Ventura]] (24/10/2022)" at:25/10/2021 shift:(20,-2) text:"[[macOS Monterey|macOS 12 Monterey]] (25/10/2021)" at:12/11/2020 shift:(20,-2) text:"[[macOS Big Sur|macOS 11 Big Sur]] (12/11/2020)" at:07/10/2019 shift:(20,-2) text:"[[macOS Catalina|macOS 10.15 Catalina]] (07/10/2019)" at:24/09/2018 shift:(20,-2) text:"[[macOS Mojave|macOS 10.14 Mojave]] (24/09/2018)" at:25/09/2017 shift:(20,-2) text:"[[macOS High Sierra|macOS 10.13 High Sierra]] (25/09/2017)" at:20/09/2016 shift:(20,-2) text:"[[macOS Sierra|macOS 10.12 Sierra]] (20/09/2016)" at:30/09/2015 shift:(20,-2) text:"[[OS X El Capitan|OS X 10.11 El Capitan]] (30/09/2015)" at:16/10/2014 shift:(20,-2) text:"[[OS X Yosemite|OS X 10.10 Yosemite]] (16/10/2014)" at:22/10/2013 shift:(20,-2) text:"[[OS X Mavericks|OS X 10.9 Mavericks]] (22/10/2013)" at:25/07/2012 shift:(20,-2) text:"[[OS X Mountain Lion|OS X 10.8 Mountain Lion]] (25/07/2012)" at:20/07/2011 shift:(20,-2) text:"[[Mac OS X Lion|Mac OS X 10.7 Lion]] (20/07/2011)" at:28/08/2009 shift:(20,-2) text:"[[Mac OS X Snow Leopard|Mac OS X 10.6 Snow Leopard]] (28/08/2009)" at:26/10/2007 shift:(20,-2) text:"[[Mac OS X Leopard|Mac OS X 10.5 Leopard]] (26/10/2007)" at:29/04/2005 shift:(20,-2) text:"[[Mac OS X Tiger|Mac OS X 10.4 Tiger]] (29/04/2005)" at:24/10/2003 shift:(20,-2) text:"[[Mac OS X Panther|Mac OS X 10.3 Panther]] (24/10/2003)" at:24/08/2002 shift:(20,-2) text:"[[Mac OS X Jaguar|Mac OS X 10.2 Jaguar]] (24/08/2002)" at:25/09/2001 shift:(20,-2) text:"[[Mac OS X 10.1]] Puma (25/09/2001)" at:24/04/2001 shift:(20,-7) text:"[[Mac OS X 10.0]] Cheetah (24/04/2001)" at:13/09/2000 shift:(20,-7) text:"[[Mac OS X Public Beta]] Kodiak (13/09/2000)" at:16/03/1999 shift:(20,2) text:"[[Mac OS X Server 1.0]] Hera (16/03/1999)~Mac OS X Developer Preview (16/03/1999)" at:31/08/1997 shift:(20,-2) text:"[[Rhapsody (operating system)|Rhapsody Developer Release]] (31/08/1997)" </timeline> <div class="thumbcaption">버전 [[타임라인]]</div></div></div> 맥 OS X 버전은 맥 OS X 서버 1.0과 원래 공개 베타를 제외하고 맥 OS X 10.0부터 애플이 캘리포니아 지역 사용으로 전환한 OS X 10.9 Mavericks까지 큰 고양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출시 이전 버전 10.0은 애플 내부적으로 "Cheetah"라는 코드명이었고, 맥 OS X 10.1은 내부적으로 "Puma"라는 코드명이었다. 맥 OS X 10.2(코드명 "Jaguar")를 둘러싼 엄청난 화제 이후 애플의 제품 마케팅은 운영 체제를 홍보하기 위해 코드명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맥 OS X 10.3은 "Panther", 맥 OS X 10.4는 "Tiger", 맥 OS X 10.5는 "Leopard", 맥 OS X 10.6은 "Snow Leopard", 맥 OS X 10.7은 "Lion", OS X 10.8은 "Mountain Lion"으로, OS X 10.9는 "Mavericks"로 사용된다. "Panther", "Tiger" 및 "Leopard"는 애플의 상표로 등록되어 있지만 "Cheetah", "Puma" 및 "Jaguar"는 등록된 적이 없다. 애플은 또한 "Lynx" 및 "Cougar"를 상표로 등록했지만 이러한 기능은 소멸되었다. 컴퓨터 소매업체인 [[타이거 다이렉트]]는 "Tiger"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애플을 고소했다. 2005년 5월 16일, 플로리다 남부 지역의 미국 연방 법원은 애플의 사용이 타이거 다이렉트의 상표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 공개 베타 === {{본문|맥 OS X 공개 베타}} 2000년 9월 13일, 애플은 사용자로부터 피드백을 얻기 위해 내부 코드명 Kodiak인 맥 OS X의 미화 29.95달러 "미리보기" 버전을 출시했다. 알려진 대로 "PB"는 아쿠아 인터페이스의 처음 도입됐으며 애플은 고객 피드백을 기반으로 UI에 많은 변경을 적용했다. 맥 OS X 공개 베타는 2001년 봄에 만료되어 작동이 중단되었다. === 맥 OS X 10.0 치타 === {{본문|맥 OS X 10.0}} [[2001년]] [[3월 24일]] 나온 맥 OS X 10.0 치타(Cheetah)는 최초로 나온 맥 OS X이다. 상용 프로그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실행 속도가 매우 느렸다. 베타 버전에 가까운 매우 불안정한 [[운영 체제]]로 10.1(Puma)가 나오자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 맥 OS X 10.1 퓨마 === {{본문|맥 OS X 10.1}} [[2001년]] [[11월 25일]] 나온 맥 OS X 10.1 퓨마(Puma)는 치타의 무상 업그레이드 판이다. 퓨마는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거나 애플 스토어에서 무상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유상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 퓨마는 치타보다 응용 프로그램이 많이 포함되었으며, 3D 그래픽 성능이 향상되었고, [[DVD]] 재생 프로그램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프린터]], [[카메라]], [[저장장치]] 등의 [[장치 드라이버]] 지원이 확대되었고, [[애플 스크립트]]가 강화되었다. === 맥 OS X 10.2 재규어 === {{본문|맥 OS X 10.2}} [[2002년]] [[7월 24일]] 나온 맥 OS X 10.2 재규어(Jaguar)는 [[쿼츠 (그래픽스 계층)|쿼츠]] 익스트림 기술과, 랑데뷰 네트워킹 기술([[2005년]] 봉쥬르로 이름이 바뀜)을 지원했으며, [[iChat]] 인터넷 메신저와, [[스팸메일]] 필터가 추가되었다. 또 [[코드네임]]을 [[마케팅]]과 [[광고]]에도 사용하였다. === 맥 OS X 10.3 [[퓨마|팬서]] === {{본문|맥 OS X 팬더}} [[2003년]] [[10월 24일]] 나온 맥 OS X 10.3 팬더(Panther)는 기존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메탈룩 인터페이스를 채용했다. 팬더에서는 파인더가 개선되어 전반적인 실행 속도가 재규어에 비해 매우 빨라졌다. [[재규어]]에서 사라졌던 꼬리표가 다시 부활했으며, 새로 추가된 엑스포제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과 창의 전환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에도 사용자 계정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기능과 [[사파리 (웹 브라우저)|사파리 웹 브라우저]], 개발 도구인 [[Xcode]]가 추가되었고, 재규어부터 지원된 쿼츠 익스트림 기술은 팬서의 비주얼적인 면을 보다 향상시켰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3.9이다. === 맥 OS X 10.4 타이거 === {{본문|맥 OS X 타이거}} [[2004년]] [[6월 28일]]에는 [[WWDC|WWDC 2004]]를 통해 맥 OS X 10.4 타이거(Tiger)가 처음 모습을 공개하였다. 타이거에는 문서 파일의 내용과 [[메타데이터]]를 검색하는 스팟라이트, 주가 검색 등 간단한 작업을 백그라운드로 실행하는 대시보드, 일련의 작업 흐름을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오토메이터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코어 이미지(Core Image), 코어 비디오(Core Video), 코어 오디오(Core Audio) 기능이 추가되었고 64비트 지원이 강화되었다. 그 외에 [[iChat]] AV 3.0으로 4자간 화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파리 2.0에 [[RSS]] 리더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퀵타임이 업그레이드되어 [[H.264]] 코덱을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 계획과 인텔 프로세서용 맥 OS X이 발표되었다. 이후 [[2006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을 모두 지원하는 맥 OS X 10.4.4가 발표되었다. 10.4.4에서는 사파리나 메일 등 기본 포함된 프로그램들이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에서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유니버설 바이너리로 작성되었고, 파워피씨용으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실행시켜주는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가 추가되었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4.11이다. === 맥 OS X 10.5 레퍼드 === {{본문|맥 OS X 레퍼드}} [[2006년]] [[8월 7일]] [[WWDC|WWDC 06]]에서 공개되었고, [[2007년]] [[10월 26일]]부터 판매를 시작한 맥 오에스 텐의 버전이다. 레퍼드(Leopard)에서는 [[채팅]] 프로그램인 [[iChat]]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자동 백업 프로그램인 [[타임 머신 (소프트웨어)|타임 머신]], 가상 데스크톱인 스페이스, [[오픈GL]]기반의 새로운 그래픽 기술인 [[코어 애니메이션]]의 탑재, 인텔 맥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를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부트 캠프 (소프트웨어)|부트 캠프]]의 정식 버전인 부트 캠프 2.0이 포함되었고, 파워피씨/인텔 프로세서, 32/64비트를 모두 지원한다.(완전한 유니버설 바이너리의 이주가 목적이었다.) 2007년 6월 11일 개최된 WWDC 07에서 새로워진 데스크톱, 개선된 [[파인더 (소프트웨어)|파인더]], 파일을 열지 않고도 내용을 보여주는 퀵룩 등 레퍼드의 주요 신기술이 발표되었다. 최종 버전은 10.5.8이며 OS X10.5는 단일 유닉스 규격(Single UNIX Specification)에 인증되었다. === 맥 OS X 10.6 스노 레퍼드 === {{본문|맥 OS X 스노 레퍼드}} [[2008년]] [[6월 9일]] [[WWDC|WWDC 08]]에서 맥 OS X의 차기 버전인 맥 OS X 10.6 '''[[맥 OS X 스노 레퍼드|스노 레퍼드]]'''(Snow Leopard)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전 까지의 맥 OS X의 판올림에서는 새로운 기능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진 것에 반해 이번 버전에는 성능 향상과 안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빠르고 안정적인 64bit 환경으로의 이주가 주 목적이다.) 참석한 개발자들에게 개발자 미리보기 버전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DVD OS X다<ref>[http://www.appleinsider.com/articles/08/06/10/apple_seeds_iphone_build_5a331_os_x_10_6_build_10a96_safari_4.html AppleInsider | Apple seeds iPhone build 5A331, OS X 10.6 build 10A96, Safari 4<!-- 봇이 따온 제목 -->]</ref>, 인텔 프로세서가 장착된 맥에 설치가 가능하다. [[GPGPU]]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인 [[OpenCL]], 다중 프로세서에서 병렬 프로그래밍을 위한 '그랜드 센트럴', [[퀵타임]] X, 16 [[테라바이트|TiB]]의 [[램]] 지원,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서버]] 2007 완벽 지원과 같은 기능 및 OS X의 거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 커널, 서브 시스템 및 드라이버(kext) 환경이 64비트로 전환되었다.<ref>[https://www.apple.com.macosx/snowleopard/ Apple - Mac OS X Leopard - Snow Leopard<!--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s://www.apple.com.macosx/snowleopard/ }}</ref> === 맥 OS X 10.7 라이언 === {{본문|맥 OS X 라이언}} [[2010년]] [[10월 20일]] 'Back to the Mac' 이벤트에서 [[맥 OS X 라이언]]의 프리뷰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판올림에서는 [[아이패드]]에 사용된 [[iOS]]의 여러 장점을 흡수하였다. [[맥 앱 스토어]]가 지원되어 애플이 직접 응용 프로그램 유통을 맡게 되었다. '런치패드'와 풀 스크린 애플리케이션, '미션 컨트롤' 등의 향상된 인터페이스가 지원된다. [[페이스타임]]을 지원하여, [[페이스타임]]을 지원하는 디바이스와 영상통화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OS X 10.7 버전부터 별도의 서버판 OS X은 없어지며 소비자용 리테일버전에 서버기능이 통합된다. [[2011년]] 7월 20일에 발매되었다.<ref>[https://www.apple.com.macosx/lion/ Apple - OS X Lion]{{깨진 링크|url=https://www.apple.com.macosx/lion/ }}</ref> === OS X 10.8 마운틴 라이언 === {{본문|OS X 마운틴 라이언}} [[2012년]] [[2월 16일]] 발표된 [[OS X 마운틴 라이언]]은 iOS 5의 일부 기능을 통합하였다. [[아이클라우드]]를 바탕으로 한 공유 기능 확산, 메시지, 미리알림(reminder), [[노트]], 알림센터, 게임센터, 에어플레이 미러링, 게이트키퍼가 도입되었다. 2012년 7월 16일에 발매되었다. === OS X 10.9 매버릭스 === {{본문|OS X 매버릭스}} 애플은 [[2013년]] [[6월 10일]] WWDC 2013에서 OS X 10.9 매버릭스(Mavericks)를 공개했다. 새 지도 앱, 개선된 알림센터, 새 아이북스 앱을 포함한다. 또한 Finder의 Tag기능과 Multiple Display 기능을 지원하며, [[2013년]] [[10월 23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같은 날에 공개된 것은 맥 프로, [[iOS]] 7, 맥북 에어 등이다. === OS X 10.10 요세미티 === {{본문|OS X 요세미티}} 애플은 [[2014년]] [[6월 2일]] WWDC 2014에서 OS X 10.10 요세미티(Yosemite)를 공개했다. 기존의 OS X의 [[유저 인터페이스]]였던 [[아쿠아]]를 제거하고 iOS 7에서 선보인 플랫한 디자인의 아이콘과 그 외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인터페이스 하단부의 독(Dock)이 맥 OS X Panther의 독처럼 입체적인 모양을 버리고 평면적인 사각형이되었다. 또한 메뉴 막대와 독의 색을 어둡게 하고 글자를 하얗게 한 반전 색상을 가진 [[다크 모드]](Dark Mode)를 설정할 수 있게 하였다. [[2014년]] [[10월 16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 OS X 10.11 엘카피탠 === {{본문|OS X 엘카피탠}}2015년 6월 9일 WWDC 2015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30일에 발매되었다. Mac의 성능 향상, 보안 스택 강화, 풀 스크린에서 앱을 동시에 두 개 표시 할 수 있는 스크린 스플릿 기능, 시스템 폰트 추가 등이 포함되었다. Spotlight가 보다 구어체 검색에 대해서도 결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 macOS 시에라 === {{본문|macOS 시에라}}macOS 시에라(버젼 10.12)는 2016년 6월 30일 WWDC 2016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20일에 발매되었다. 이 버전부터 iOS와 watchOS, tvOS 등 애플의 다른 OS들과 같은 형식의 이름인 '''macO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버젼명인 10.12는 공식 명칭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HFS 포맷 대신 [[APFS]]가 실험적으로 도입되었으며, [[Siri]]가 처음으로 macOS에 도입되었으며 iOS, watchOS와의 보다 많은 연계 기능이 탑재되었다. [[Mac mini]]를 제외한 Late 2009 모델 이전의 Mac에서의 직접 인스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 macOS 하이 시에라 === {{본문|macOS 하이 시에라}}macOS 하이 시에라(버젼 10.13)는 2017년 6월 5일 WWDC 2017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HFS+ 대신 [[APFS]]를 쓰도록 되었으며, [[메탈 (API)|메탈 2]]와 더불어 [[고효율 비디오 코딩|'''HEVC''']] 코덱을 OS단에서 지원한다. [https://support.apple.com/ko-kr/HT201634 iMac] (Late 2009, 27 or 21.5-inch) 모델까지는 'macOS 하이 시에라'로 업그레이드가 지원되나, 그 이전 모델 iMac(Early 2009, 24 or 21.5-inch)은 업그레이드를 지원하지 않는다. === macOS 모하비 === {{본문|macOS 모하비}} macOS 모하비(버젼 10.14)는 2018년 6월 4일 WWDC 2018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으며 2018년 9월 24일(현지시각) 정식 배포를 시작했다. 보안성 향상 및 [[FaceTime]] 최대 100명 영상통화 등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버전이다. [[iMac]] 2012년 이전모델은 'macOS 모하비'로의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는다. === macOS 카탈리나 === {{본문|macOS 카탈리나}} macOS 카탈리나(버젼 10.15)는 2019년 6월 4일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WWDC]] 2019에서 공개되었다. '''Sidecar'''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iPad를 Mac의 보조 디스플레이로 활용해서 작업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기능은 동일한 행사에서 새롭게 공개된 '''[[iPadOS 13]]''' 이상에서 지원한다. 또한 스크린 타임 기능이 추가되었다. 사용 시간을 모니터링하고, 다운타임 일정을 잡고, 앱과 웹사이트 사용 시간 제한을 모든 기기에 걸쳐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 macOS 빅서 === {{본문|macOS 빅서}} macOS 빅서(버젼 11.0)는 2020년 6월 22일 WWDC 2020에서 공개되었다. [[맥 OS X 10.0|맥 OS X 10.0 치타]]가 나온지 19년만에 메이저 버전이 11.0으로 업데이트되었다. UI가 전반적으로 리프레시되었고, [[인텔]] 프로세서에서 [[Apple Silicon]]으로의 전환을 발표하며 [[ARM 아키텍처]]를 지원하는 최초의 맥 운영체제가 되었다. 전환에 따른 하위호환성을 지원하기 위해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 2]]와 [[유니버설 바이너리|유니버설 2]] 등의 기술이 함께 발표되었다. === macOS 몬터레이 === {{본문|macOS 몬터레이}} macOS 몬터레이(버전 12.0)는 2021년 6월 7일 WWDC 2021에서 공개되었다. 메이저 버전은 12.0이다. 2021년 10월 25일에 출시되었으며 범용 제어(입력 장치를 여러 장치에서 동시에 사용 가능), 초점 모드(알림 및 경고를 선택적으로 제한 가능), 숏컷(오토메이터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는 iOS 및 iPadOS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작업 자동화 프레임워크), 새롭게 디자인된 사파리 웹 브라우저, 페이스타임 업데이트 및 개선 사항을 도입했다. === macOS 벤투라 === {{본문|macOS 벤투라}} macOS 벤투라(버전 13.0)는 2022년 6월 6일 WWDC 2022에서 발표되었다. 메이저 버전은 13.0이며 2022년 10월 24일에 출시되었다. iOS와 더욱 유사한 디자인으로 재설계된 시스템 환경설정(시스템 설정)과 새로운 자유형, 날씨 및 시계가 맥에서 기본적으로 실행되는 앱으로 함께 제공된다. 사용자는 연속성 카메라를 통해 아이폰을 화상 회의용 웹캠으로 사용할 수 있다. Siri의 외관은 iOS 14 및 iPadOS 14 버전과 더 비슷하게 변경되었다. 메일 앱에는 이메일 보내기 예약 및 보내기 취소 기능이 도입되었으며, 메시지에는 메시지 보내기 취소 및 편집 기능도 추가되었다. 지도에는 다중 정류장 경로 기능이 추가되었고, 공간적 및 시간적 이미지 업스케일링을 지원하는 메탈 3가 추가되었으며, 사이버 공격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잠금 모드가 추가되었으며, 주변 배경 소리를 재생하는 기능이 환경 설정의 접근성 기능으로 추가되었다. === macOS 소노마 === {{본문|macOS 소노마}} macOS 소노마는 2023년 6월 5일 WWDC 기조 연설에서 발표되었으며 2023년 9월 26일에 출시되었다. macOS 소노마는 위젯을 개선하여 이제 데스크톱 어디에나 배치할 수 있다. 게임 모드는 게임 작업의 우선 순위를 지정하고 게임에 더 많은 GPU 및 CPU 용량을 할당하여 게임 성능을 최적화하며, 이를 통해 게임 플레이에 보다 부드러운 프레임 속도를 제공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 검색 표시줄과 모든 앱 아이콘이 더욱 둥글게 만들어졌고, 알림과 잠금 화면에 더 부드러운 애니메이션이 구현되었으며, 전 세계 다양한 위치의 새로운 슬로우 모션 화면 보호기가 추가되었다. 로그인하면 점차 속도가 느려지면서 데스크톱 배경화면이 표시된다. === macOS 세쿼이아 === {{본문|macOS 세쿼이아}} macOS 세쿼이아는 2024년 6월 10일 WWDC 기조 연설에서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애플 인텔리전스 기능(예: 재설계된 Siri, 쓰기 도구, 이미지 플레이그라운드, Genmoji 및 GPT-4o와의 시스템 전체 통합)에 대한 지원도 추가된다. 더 빠른 자동 채우기와 더 체계적인 비밀번호를 위한 새로운 전용 비밀번호 앱인 아이폰 미러링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창 스냅 기능과 유사한 기능인 창 타일링을 추가했다. == 아키텍처 == macOS의 코어에는 명령줄 인터페이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유닉스 기능을 위한 [[FreeBSD]] 사용자 영역과 [[XNU]] [[커널 (컴퓨팅)|커널]]([[FreeBSD]] 커널의 상당 부분이 통합됨) 위에 구축된 [[POSIX]] 호환 운영 체제가 있다. [[애플]]은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다윈 (운영 체제)|다윈]]이라는 자유-오픈 소스 운영 체제로 출시했다. 애플은 다윈 위에 [[아쿠아 (사용자 인터페이스)|아쿠아 인터페이스]], [[파인더 (소프트웨어)|파인더]] 등 여러 구성 요소를 계층화하여 macOS라는 GUI 기반 운영 체제를 완성했다.<ref name="aqua23">{{웹 인용|last=Grothaus |first=Michael |date=April 12, 2011 |title=Mac OS X Lion to tone down the Aqua |url=https://www.tuaw.com/2011/04/12/mac-os-x-lion-to-tone-down-the-aqua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828084840/https://www.tuaw.com/2011/04/12/mac-os-x-lion-to-tone-down-the-aqua |archive-date=August 28, 2011 |access-date=April 9, 2012 |website=The Unofficial Apple Weblog |publisher=[[AOL]] |df=mdy-all}}</ref> 맥 OS X로 처음 출시된 이 시스템은 이전 버전인 클래식 맥 OS보다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기능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선제적 멀티태스킹과 메모리 보호는 서로를 방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고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시스템 능력을 향상시켰다. macOS 아키텍처의 많은 측면은 한 플랫폼에서 다른 플랫폼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이식 가능하도록 설계된 [[오픈스텝]]에서 파생되었다. 예를 들어, [[NeXTSTEP]]은 애플이 NeXT를 인수하기 전에 원래 68k 기반 NeXT 워크스테이션에서 x86 및 기타 아키텍처로 포팅되었으며, OPENSTEP은 나중에 [[랩소디 (운영 체제)|랩소디]] 프로젝트의 일부로 [[파워PC]] 아키텍처로 포팅되었다. macOS 하이시에라 이전 및 SSD([[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 이외의 드라이브에서 기본 파일 시스템은 클래식 맥 OS에서 상속된 HFS+이다. 운영 체제 설계자 [[리누스 토르발스]]는 HFS+가 "아마도 사용자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손상시키는" 설계를 지닌 최악의 파일 시스템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파일 이름의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했는데, 이는 애플이 [[유니코드]]를 지원하도록 파일 시스템을 확장했을 때 디자인이 더욱 악화되었다.<ref>{{웹 인용|first1=Swapnil |last1=Bhartiya |date=January 13, 2015 |title=Linus Torvalds: Apple's HFS+ is probably the worst file system ever |url=https://www.itworld.com/article/2868393/linus-torvalds-apples-hfs-is-probably-the-worst-file-system-ever.html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525041019/https://www.itworld.com/article/2868393/linus-torvalds-apples-hfs-is-probably-the-worst-file-system-ever.html |archive-date=May 25, 2015 |website=ITworld |df=mdy-all}}</ref><ref>{{웹 인용|author=Junio C Hamano (Gitster) |date=Dec 22, 2014 |title=CVE-2014-9390 aka "Git on case-insensitive filesystems" |url=https://plus.google.com/+JunioCHamano/posts/1Bpaj3e3Rru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514102424/https://plus.google.com/+JunioCHamano/posts/1Bpaj3e3Rru |archive-date=May 14, 2015 |website=Google+ |df=mdy-all}}</ref> macOS의 다윈 하위 시스템은 유닉스 권한 계층을 포함하는 파일 시스템을 관리한다. 2003년과 2005년에 두 명의 [[맥월드]] 편집자가 허가 체계에 대해 비판을 표명했다. 테드 랜도는 macOS에서 잘못 구성된 권한을 "가장 일반적인 불만 사항"이라고 불렀고, 롭 그리피스는 일부 사용자는 매일 권한을 재설정해야 할 수도 있으며 이 프로세스는 최대 15분까지 걸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최근에 또 다른 맥월드 편집자인 댄 프레이크스는 권한 복구 절차가 지나치게 과도하게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macOS는 일반적으로 사용자 간섭 없이 권한을 적절하게 처리하며 문제가 발생할 때만 권한 재설정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f>{{웹 인용|last=Frakes |first=Dan |date=June 2, 2008 |title=Five Mac maintenance myths |url=https://www.macworld.com/article/133684/2008/06/maintenance_intro.html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123230040/https://www.macworld.com/article/133684/2008/06/maintenance_intro.html |archive-date=January 23, 2009 |access-date=February 8, 2009 |website=[[Macworld]] |publisher=[[International Data Group|IDG]] |df=mdy-all}}</ref> macOS의 아키텍처는 계층화된 디자인을 통합한다. 계층화된 프레임워크는 일반적인 작업에 대한 기존 코드를 제공하여 애플리케이션의 신속한 개발을 지원한다. 애플은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 특히 [[Xcode]]라는 [[통합 개발 환경]]을 제공한다. Xcode는 C, C++, [[Objective-C]] 및 스위프트를 포함한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컴파일러에 대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맥의 인텔 프로세서로의 전환|맥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전환]]하는 경우 개발자가 인텔 기반 및 PowerPC 기반 매킨토시 제품군 모두와의 호환성을 제공하는 범용 바이너리로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할 수 있도록 수정되었다. 자사 및 타사 응용 프로그램은 [[애플스크립트]] 프레임워크를 사용하여 프로그래밍 방식으로 제어하거나 클래식 맥 OS에서 유지하거나 프로그래밍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사전 작성된 작업을 제공하는 최신 [[오토메이터]]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제어할 수 있다.<ref>{{웹 인용|title=The really simple guide to Automator in OS X on the Mac {{!}} RAW Mac |url=https://www.rawinfopages.com/mac/content/really-simple-guide-automator-os-x-mac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103170340/https://www.rawinfopages.com/mac/content/really-simple-guide-automator-os-x-mac |archive-date=January 3, 2017 |access-date=2017-01-03 |website=www.rawinfopages.com |df=mdy-all}}</ref> === 소프트웨어 호환성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macOS 버전 및 해당 버전에서 실행되는 소프트웨어 목록 |- ! 운영체제 ! [[사파리 (웹 브라우저)|사파리]] ! [[메일 (애플)|메일]] ! [[퀵타임]] ! [[아이튠즈]] ! [[메시지 (애플)|메시지]]/[[아이챗]] ! [[아이워크]]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10.0|10.0]]<ref name="iTunesClassic" group="note"/> | rowspan=2 {{N/a}} | rowspan=4 | 1.x | 5.0 | 2.0.4 | rowspan=2 {{N/a}} | rowspan=2 {{N/a}}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10.1|10.1]] | 6.3.1 | 4.7.1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Jaguar|10.2 "Jaguar"]]<ref name="KeynoteJaguar" group="note"/> | 1.0.3 | 6.5.3 | 6.0.5 | 2.0 | [[키노트]]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Panther|10.3 "Panther"]] | 1.3.2 | 7.5 | 7.7.1<ref>{{웹 인용|date=August 25, 2012 |title=iTunes 7.7.1 for Panther |url=https://discussions.apple.com/thread/4239503?start=0&tstart=0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417072338/https://discussions.apple.com/thread/4239503?start=0&tstart=0 |archive-date=April 17, 2017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Official Apple Support Communities |df=mdy-all}}</ref> | 2.1<ref>{{웹 인용|date=March 23, 2004 |title=iChat AV 2.1 |url=https://www.apple.com/support/downloads/ichatav21.html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429174825/https://www.apple.com/support/downloads/ichatav21.html |archive-date=April 29, 2007 |access-date=March 16, 2017 |website=Apple}}</ref> | '05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Tiger|10.4 "Tiger"]] | 4.1.3 | 2.1.3 | 7.6.4 | 9.2.1<ref>{{웹 인용|date=July 19, 2010 |title=iTunes 9.2.1 |url=https://support.apple.com/kb/DL1056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26175009/https://support.apple.com/kb/DL1056 |archive-date=February 26, 2015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 |language=en |df=mdy-all}}</ref> | 3.0 | rowspan=5 | '09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Leopard|10.5 "Leopard"]] | 5.0.6 | 3.6 | 7.7 | 10.6.3<ref>{{웹 인용|date=June 11, 2012 |title=iTunes 10.6.3 |url=https://support.apple.com/kb/DL1575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16011200/https://support.apple.com/kb/DL1575 |archive-date=February 16, 2015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 |language=en |df=mdy-all}}</ref> | 4.0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Snow Leopard|10.6 "Snow Leopard"]] | 5.1.10<ref>{{웹 인용|date=September 12, 2013 |title=Safari 5.1.10 for Snow Leopard |url=https://support.apple.com/kb/DL1569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22022933/https://support.apple.com/kb/DL1569 |archive-date=February 22, 2015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 |language=en |df=mdy-all}}</ref> | 4.5<ref>{{웹 인용|date=March 23, 2016 |title=Mac OS X v10.6: "You can't use this version of Mail…" alert after installing Security Update 2012-004 |url=https://support.apple.com/HT203684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417235624/https://support.apple.com/HT203684 |archive-date=April 17, 2017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ref> | rowspan=2 | 10.1 | 11.4<ref>{{웹 인용|date=September 9, 2014 |title=iTunes 11.4 for OS X 10.6 |url=https://support.apple.com/kb/DL1774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11120630/https://support.apple.com/kb/DL1774 |archive-date=February 11, 2015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 |language=en |df=mdy-all}}</ref> | 5.0 |- ! style="text-align:left" | [[Mac OS X Lion|10.7 "Lion"]]<ref name="MessagesLion" group="note"/> | 6.1.6 | rowspan=2 {{Unknown}} | 12.2.2<ref>{{웹 인용|date=September 16, 2015 |title=iTunes – Download iTunes Now |url=https://www.apple.com/itunes/downlo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16003346/https://www.apple.com/itunes/download |archive-date=September 16, 2015 |access-date=April 16, 2017 |website=Apple}}</ref> | 8.0b or 6.0.1 |- ! style="text-align:left" | [[OS X Mountain Lion|10.8 "Mountain Lion"]] | 6.2.8 | 10.2 | 12.4.3<ref>{{웹 인용|date=June 1, 2016 |title=iTunes – Download iTunes Now |url=https://www.apple.com/itunes/downlo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05124649/https://www.apple.com/itunes/download |archive-date=September 5, 2016 |access-date=September 16, 2017 |website=Apple}}</ref> | rowspan=3 | 8.0 |- ! style="text-align:left" | [[OS X Mavericks|10.9 "Mavericks"]] | 9.1.3 | 7.3 | 10.3 | 12.6.2 | 2013 |- ! style="text-align:left" | [[OS X Yosemite|10.10 "Yosemite"]] | 10.1.2 | rowspan=2 | 9.3 | rowspan=4 | 10.4 | rowspan=4 | 12.8.2 | rowspan=2 | 2014 |- ! style="text-align:left" | [[OS X El Capitan|10.11 "El Capitan"]] | 11.1.2 | 9.3 |- ! style="text-align:left" | [[macOS Sierra|10.12 "Sierra"]] | 12.1.2 | rowspan=2 | 11.0 | 10.0 | 2018 |- ! style="text-align:left" | [[macOS High Sierra|10.13 "High Sierra"]] | 13.1.2 | 11.0 | 2019 |- ! style="text-align:left" | [[macOS Mojave|10.14 "Mojave"]] | 14.1.2 | 12.0 | rowspan="7" | 10.5 | 12.9.5 | 12.0 | 2020 |- ! style="text-align:left" | [[MacOS Catalina|10.15 "Catalina"]] | 15.4 | 13.0 | rowspan=6 {{N/a}} | 13.0 | 2021 부분, 2020 |- ! style="text-align:left" | [[macOS Big Sur|11 "Big Sur"]] | rowspan=3 | 16.0 | rowspan=3 | 14.0 | rowspan="5" | 14.0 | rowspan=3 | 2022 (12.0) |- ! style="text-align:left" | [[MacOS Monterey|12 "Monterey"]] |- ! style="text-align:left" | [[MacOS Ventura|13 "Ventura"]] |- ! style="text-align:left" | [[MacOS Sonoma|14 "Sonoma"]] |17.0 | rowspan="2" |16.0 |14.0 |- !style="text-align:left" | [[MacOS Sequoia|15 "Sequoia"]] |18.0 |14.1 |} {{각주|group="note"|refs= <ref name="MessagesLion" group="note">A beta version of Messages 8.0, known as [https://web.archive.org/web/20170417070728/https://www.macrumors.com/2012/02/17/after-beta-messages-will-be-exclusive-to-os-x-mountain-lion Messages 8.0b], was available exclusively from February 16 until December 12, 2012.After then, customers had two options to keep using Messages: either go back to using iChat on OS X 10.7 or update to a newer version of OS X (10.8 "Mountain Lion" for US$19.99, or 10.9 "Mavericks" or newer for free). .</ref> <ref name="KeynoteJaguar" group="note">The only iLife application that works with Mac OS X 10.2 "Jaguar" is [https://web.archive.org/web/20030109062111/https://store.apple.com/1-800-MY-APPLE/WebObjects/AppleStore?productLearnMore=M8820Z%2FA Keynote 1.0] . This version is compatible with two minor updates, 1.1.1 and 1.1.</ref> <ref name="iTunesClassic" group="note">Only with [[List of macOS components#Classic|Classic]] installed will iTunes 2.0.4 operate. If not, iTunes 1.1.1 can only be used natively by Mac OS X 10.0.</ref>}} === 하드웨어 호환성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text-align:center" |- ! 운영체제 ! 출시 연도 ! 지원 시스템<ref>{{webarchive |url=https://web.archive.org/web/*/apple.com/macos/how-to-upgrade/#hardware-requirements |title=macOS – Mac Hardware Requirements}}</ref> ! RAM 요구사항 |- | [[Mac OS X 10.0|10.0]] – [[Mac OS X Jaguar|10.2]] | 2001 – 2002 | G3, G4, G5 [[iBook]], [[PowerBook]], [[Power Macintosh|Power Mac]], [[iMac]]<br /><small>([[PowerBook G3]] "Kanga" 제외)</small> | data-sort-value=128 rowspan=2 | 128 MB |- | [[Mac OS X Panther|10.3]] | 2003 | [[뉴 월드 롬]]이 탑재된 맥<ref name="TigerRequirements">{{웹 인용|date=April 28, 2005 |title=Mac OS X: System Requirements |url=https://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106163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809065541/https://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106163 |archive-date=August 9, 2007 |access-date=December 20, 2006 |publisher=[[Apple Inc.|Apple]] |df=mdy-all}}</ref> |- | [[Mac OS X Tiger|10.4]] | 2004 | [[파이어와이어]] 및 [[뉴 월드 ROM]]/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맥 | data-sort-value=256 | 256 MB |- | [[Mac OS X Leopard|10.5]] | 2006 | 선별된 G4, G5, 인텔 맥 <small>(32-bit 또는 64-bit)</small> @ 867&nbsp;MHz 이상<br />[[macOS 구성 요소 목록|클래식]]은 10.5 이상부터 지원 중단. | data-sort-value=512 | 512 MB |- | [[Mac OS X Snow Leopard|10.6]] | 2008 | 인텔 맥 <small>(32-bit 또는 64-bit)</small><ref name="LionReq" /> | data-sort-value=1024 | 1 GB |- | [[Mac OS X Lion|10.7]] | 2010 | 인텔 맥 <small>(64-bit)</small><ref name="LionReq">{{웹 인용|title=System requirements for OS X Lion and Mac OS X v10.6 |url=https://support.apple.com/en-au/HT202328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23033514/https://support.apple.com/en-au/HT202328 |archive-date=September 23, 2016 |access-date=2016-09-22 |language=en-AU |df=mdy-all}}</ref><br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 지원은 10.7부터 지원 중단. | data-sort-value=2048 rowspan=4 | 2 GB |- | [[OS X Mountain Lion|10.8]] – [[OS X El Capitan|10.11]] | 2012 – 2015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Aluminum, 2008년 후반 이상), [[MacBook Air]] (2008년 후반 이상), [[MacBook Pro]] (2007년 중반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09년 초 이상), [[iMac]] (2007년 중반 이상), [[Mac Pro]] (2008년 초 이상) * 서버: [[Xserve]] (2009년 초) }} |- | [[macOS Sierra|10.12]] – [[macOS High Sierra|10.13]] | 2016 – 2017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09년 후반 이상), [[MacBook Air]] (2010년 후반 이상), [[MacBook Pro]] (2010년 중반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0년 중반 이상), [[iMac]] (2009년 후반 이상), [[iMac Pro]] (2017) (macOS 10.13), [[Mac Pro]] (2010년 중반 이상) }} |- | [[macOS Mojave|10.14]] | 2018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15년 초 이상), [[MacBook Air]] (2012년 중반 이상), [[MacBook Pro]] (2012년 중반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2년 후반 이상), [[iMac]] (2012년 후반 이상), [[iMac Pro]] (2017), [[Mac Pro]] (2010년 중반 이상<ref>{{웹 인용|title=Install macOS 10.14 Mojave on Mac Pro (2010년 중반) and Mac Pro (2012년 중반)|url=https://support.apple.com/en-us/HT208898|access-date=March 3, 2021|website=Apple Support|archive-date=November 12, 2020|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1112022658/https://support.apple.com/en-us/HT208898|url-status=live}}</ref>) }} |- | [[macOS Catalina|10.15]] | 2019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15년 초 이상), [[MacBook Air]] (2012년 중반 이상), [[MacBook Pro]] (2012년 중반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2년 후반 이상), [[iMac]] (2012년 후반 이상), [[iMac Pro]] (2017), [[Mac Pro]] (2013년 후반 이상) }} | rowspan="3" data-sort-value="4096" | 4 GB |- | [[macOS Big Sur|11]] | 2020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15년 초 이상), [[MacBook Air]] (2013년 중반 이상), [[MacBook Pro]] (2013년 후반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4년 후반 이상), [[iMac]] (2014년 중반 이상), [[iMac Pro]] (2017), [[Mac Pro]] (2013년 후반 이상) }} |- | [[macOS Monterey|12]] | 2021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16년 초 이상), [[MacBook Air]] (2015년 초 이상), [[MacBook Pro]] (2015년 초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4년 후반 이상), [[iMac]] (2015년 후반 이상), [[iMac Pro]] (2017), [[Mac Studio]] (2022), [[Mac Pro]] (2013년 후반 이상) }} |- | [[MacOS Ventura|13]] | 2022 | {{Plainlist | * 노트북: [[MacBook]] (2017), [[MacBook Air]] (2018 이상), [[MacBook Pro]] (2017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8 이상), [[iMac]] (2017 이상), [[iMac Pro]] (2017), [[Mac Studio]] (2022 이상), [[Mac Pro]] (2019 이상) }} | rowspan="3" data-sort-value="8192" | 8 GB |- |[[MacOS Sonoma|14]] | 2023 |{{Plainlist| * 노트북: [[MacBook Air]] (2018 이상), [[MacBook Pro]] (2018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8 이상), [[iMac]] (2019 이상), [[iMac Pro]] (2017), [[Mac Studio]] (2022 이상), [[Mac Pro]] (2019 이상) }} |- |[[MacOS Sequoia|15]] | 2024 |{{Plainlist| * 노트북: [[MacBook Air]] (2020 이상), [[MacBook Pro]] (2018 이상) * 데스크톱: [[Mac Mini]] (2018 이상), [[iMac]] (2019 이상), [[iMac Pro]] (2017), [[Mac Studio]] (2022 이상), [[Mac Pro]] (2019 이상) }} |} === 파워PC-인텔 전환 === {{본문|맥의 인텔 프로세서로의 전환}} [[파일:Steve_Jobs_Presentation_1.jpg|섬네일|스티브 잡스가 인텔 프로세서로의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02년 4월, eWeek는 애플이 인텔 x86 프로세서에서 실행되는 코드명 Marklar라는 맥 OS X 버전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발표했다. Marklar의 기본 아이디어는 애플이 PowerPC 플랫폼의 발전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맥 OS X를 대체 플랫폼에서 계속 실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2005년 5월말까지 잠잠해졌으며, [[월스트리트 저널]] 및 [[CNET]]과 같은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 애플이 앞으로 몇 달 안에 Marklar를 공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5년 6월 6일, 스티브 잡스는 WWDC의 기조 연설에서 애플이 향후 2년에 걸쳐 PowerP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전환할 것이며 맥 OS X는 전환 기간 동안 두 플랫폼을 모두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잡스는 또한 애플이 대부분의 개발 기간 동안 인텔 프로세서에서 실행되는 맥 OS X 버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했다. 인텔 기반 맥은 PowerPC 맥 OS X용으로 컴파일된 소프트웨어가 인텔 맥 OS X 시스템에서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너리 변환 계층인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와 함께 다시 컴파일된 새로운 버전의 OS X를 실행한다. 이 시스템은 맥 OS X 버전 10.6.8까지 포함되어 있다. 애플은 새로운 인텔 맥에서 클래식 모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미니 vMac, Basilisk II 및 십셰이버(SheepShaver)와 같은 타사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는 일부 초기 버전의 맥 OS를 지원했다. 새로운 버전의 [[Xcode]]와 기본 명령줄 컴파일러는 두 아키텍처 모두에서 실행되는 범용 바이너리 구축을 지원했다. PowerPC 전용 소프트웨어는 애플의 공식 바이너리 번역 소프트웨어인 로제타에서 지원되지만, 인텔 프로세서용으로 출시된 최신 버전에서 제대로 실행하려면 애플리케이션을 다시 작성해야 했다. 애플은 처음에 개발자들에게 PowerPC와 인텔을 모두 지원하는 범용 바이너리를 생성하도록 권장했다. PowerPC 바이너리는 로제타를 통해 인텔 맥에서 실행될 때 성능 저하를 겪는다. 또한 커널 확장 및 시스템 환경 설정 플러그인과 같은 일부 PowerPC 소프트웨어는 인텔 맥에서 전혀 지원되지 않는다. 사파리용 플러그인은 사파리와 동일한 플랫폼용으로 컴파일되어야 하므로 사파리가 인텔에서 실행되는 경우 인텔 전용 또는 범용 바이너리로 컴파일된 플러그인이 필요하므로 PowerPC 전용 플러그인은 작동하지 않는다. 인텔 맥은 PowerPC, 인텔 및 범용 바이너리를 실행할 수 있지만 PowerPC 맥은 범용 및 PowerPC 빌드만 지원한다. 전환 후 PowerPC 플랫폼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9년 애플은 WWDC에서 맥 OS X 10.6 스노레퍼드가 PowerPC 프로세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인텔 전용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로제타는 맥 OS X 10.7 라이언에서 중단되기 전까지 스노레퍼드에서 선택적 다운로드 또는 설치 옵션으로 계속 제공되었다. 또한 맥 OS X 자사 및 타사 소프트웨어의 새 버전에는 아이라이프, 아이워크, 애퍼처 및 로직 프로의 새 버전을 포함하여 점점 더 인텔 프로세서가 필요하게 됐다. === 인텔-애플 실리콘 전환 === {{본문|맥의 애플 실리콘으로의 전환}} [[파일:Apple M1.jpg|left|섬네일|애플 M1 프로세서]] 애플이 맥을 인텔에서 iOS 장치에 사용되는 내부 ARM 프로세서로 전환한다는 소문이 2011년 초부터 퍼지기 시작하여 2010년대 내내 썰물처럼 잦아들었다. 2020년에 회사가 WWDC에서 맞춤형 프로세서로의 전환을 발표할 것이라는 수많은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소문이 더욱 심해졌다.<ref>{{웹 인용|title=ARM Macs: Expected at WWDC 2020, What We Know |url=https://www.macrumors.com/guide/arm-macs |access-date=2020-06-22 |website=MacRumors |language=en |archive-date=June 25, 202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625004016/https://www.macrumors.com/guide/arm-macs/ |url-status=live }}</ref> 애플은 2020년 6월 22일 WWDC 2020에서 자체 설계된 프로세서로의 전환을 공식 발표했으며, 전환은 2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다. ARM을 지원하는 첫 번째 macOS 릴리스는 macOS 빅서이다. 빅서 및 이후 버전은 인텔(x86-64) 및 애플 실리콘(AArch64) 바이너리로 구성된 애플리케이션인 유니버설 2 바이너리를 지원한다. 시작되면 적절한 바이너리만 실행된다. 또한 로제타 2 바이너리 변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애플 실리콘 기반 맥에서 인텔 바이너리를 실행할 수 있다. 전환은 WWDC 2023에서 애플 실리콘 맥 프로 발표로 완료되어 3년 만에 전환이 종료되었다. 프로세서 아키텍처의 변화로 인해 ARM 프로세서가 탑재된 맥에서 iOS 및 iPadOS 앱을 기본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ref name="Engadget1">{{뉴스 인용|last=Lee |first=Nicole |date=June 22, 2020 |title=iOS apps will run natively on ARM-powered Macs |work=[[Engadget]] |url=https://www.engadget.com/ios-apps-arm-powered-macs-192046502.html |access-date=June 23, 2020 |archive-date=December 8, 2020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1208172634/https://www.engadget.com/ios-apps-arm-powered-macs-192046502.html |url-status=live }}</ref> == 기능 == === 아쿠아 사용자 인터페이스 === {{본문|아쿠아 (사용자 인터페이스)}} === 구성 요소 === {{본문|macOS 내장 앱 목록}} [[파인더 (소프트웨어)|파인더]]는 컴퓨터의 모든 영역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파일 브라우저로, macOS의 후속 릴리스에서 수정되었다. [[훑어보기]]는 버전 10.5부터 파인더의 일부였다. 다른 응용 프로그램을 열지 않고도 비디오 및 여러 페이지 문서를 포함한 파일을 동적으로 미리 볼 수 있다. 버전 10.4부터 파인더에 통합된 파일 검색 기술인 [[스포트라이트 (소프트웨어)|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하면 데이터 파일, 메일 메시지, 사진, 항목 속성(메타데이터) 또는 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기타 정보를 실시간으로 빠르게 검색할 수 있다. macOS는 최소화된 창뿐만 아니라 파일 및 폴더 바로가기를 보관하는 독(Dock)을 사용한다. 애플은 버전 10.3에 익스포제(Exposé, 버전 10.7부터 [[미션 컨트롤]]이라고 함)를 추가했다. 이 기능에는 창과 데스크톱 간의 접근성을 돕는 세 가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능은 다양한 작업을 쉽게 탐색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모든 창을 썸네일로 즉시 표시하고, 열려 있는 모든 창을 현재 응용 프로그램의 썸네일로 표시하고, 바탕 화면에 액세스하기 위해 모든 창을 숨기는 것이다. [[파일볼트]]는 128비트 고급 암호화 표준(AES-128)을 사용한 사용자 파일의 선택적 암호화이다. 버전 10.4에 도입된 기능에는 다양한 작업에 대한 자동 워크플로우를 생성하도록 설계된 애플리케이션인 [[오토메이터]]가 포함된다. [[대시보드 (macOS)|대시보드]](Dashboard)는 한 번의 키 입력으로 불러오고 닫을 수 있는 데스크톱 위젯이라고 불리는 작은 응용 프로그램의 전체 화면 그룹이다. [[애플 리모트]]로 액세스하는 미디어 뷰어 인터페이스인 [[프런트로]]도 있다. 동기화 서비스를 사용하면 응용 프로그램이 일정 및 연락처 항목을 비롯한 다양한 사용자 데이터 요소에 대한 중앙 집중식 확장 가능 데이터베이스에 액세스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운영 체제는 충돌하는 편집 및 데이터 일관성을 관리했다. 모든 시스템 아이콘은 버전 10.5부터 최대 512×512 픽셀까지 확장 가능하여 [[아이튠즈]], 파인더 등에 포함된 3차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인 [[커버 플로]] 뷰를 포함하여 더 큰 크기로 표시되는 다양한 위치를 수용할 수 있다. 표지 아트워크를 통해 파일 및 디지털 미디어 라이브러리를 시각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애플 제품이다. 해당 버전에는 사용자가 두 개 이상의 데스크톱을 보유하고 이를 익스포제와 유사한 인터페이스에 표시할 수 있게 해주는 가상 데스크톱 구현인 [[스페이스 (소프트웨어)|스페이스]]도 도입되었다. 사용자가 이전 버전의 파일과 애플리케이션 데이터를 보고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타임 머신 (소프트웨어)|타임 머신]]이라는 자동 백업 기술, 화면 공유가 처음으로 내장되었다. 최신 릴리스에서 애플은 독점적인 애플 컬러 이모지(Apple Color Emoji) 글꼴을 포함하여 [[이모지]] 문자에 대한 지원을 개발했다. 애플은 또한 사진, 텍스트 등 콘텐츠에 대한 공유 버튼을 추가하여 macOS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와 연결했다. 애플은 원래 모바일 운영 체제인 iOS에서 처음 선보였던 여러 응용 프로그램과 기능을 최근 릴리스에서 macOS에 도입했으며, 특히 macOS 버전 10.12에 도입된 지능형 개인 비서 [[Siri]]를 선보였다.<ref name="siri1">{{웹 인용|title=13 Things You Can Do with macOS Sierra You Couldn't Before |url=https://fieldguide.gizmodo.com/13-things-you-can-do-with-macos-sierra-you-couldnt-befo-1787059614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27150746/https://fieldguide.gizmodo.com/13-things-you-can-do-with-macos-sierra-you-couldnt-befo-1787059614 |archive-date=September 27, 2016 |access-date=September 28, 2016 |website=[[Gizmodo]] |date=September 27, 2016 |df=mdy-all}}</ref><ref name="siri2">{{잡지 인용|title=How to use Siri in macOS Sierra: A look at using the Apple's virtual assistant on the Mac |url=https://www.macworld.com/article/3088224/macs/how-to-use-siri-on-macos-sierra.html |url-status=live |magazine=[[Macworl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204005925/https://www.macworld.com/article/3088224/macs/how-to-use-siri-on-macos-sierra.html |archive-date=February 4, 2017 |access-date=September 28, 2016 |df=mdy-all}}</ref> === 다언어 지원 === 설치 시점에 사용자가 macOS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 언어는 39개이다. 시스템 언어는 전체 운영 체제 환경에서 사용된다. 수십 개의 스크립트를 입력하기 위한 입력 방법은 시스템 언어와 독립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최근 업데이트에는 한자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고 중국의 인기 소셜 네트워크와의 상호 연결이 추가되었다.<ref name="Apple's Tim Cook visits China to talk expansion, expansion, expansion">{{웹 인용|last=Cheng |first=Jacqui |date=January 10, 2013 |title=Apple's Tim Cook visits China to talk expansion, expansion, expansion |url=https://arstechnica.com/apple/2013/01/apples-tim-cook-visits-china-to-talk-expansion-expansion-expansion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18220931/https://arstechnica.com/apple/2013/01/apples-tim-cook-visits-china-to-talk-expansion-expansion-expansion |archive-date=September 18, 2015 |access-date=14 August 2015 |website=Ars Technica |df=mdy-all}}</ref><ref name="Next version of OS X to be more iOS-like than ever with Mountain Lion">{{웹 인용|last=Foresman |first=Chris |date=February 16, 2012 |title=Next version of OS X to be more iOS-like than ever with Mountain Lion |url=https://arstechnica.com/apple/2012/02/apple-unleashes-mountain-lion-on-developers-set-for-summer-release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820063157/https://arstechnica.com/apple/2012/02/apple-unleashes-mountain-lion-on-developers-set-for-summer-release |archive-date=August 20, 2015 |access-date=14 August 2015 |website=Ars Technica |publisher=Conde Nast |df=mdy-all}}</ref><ref name="Apple targets China, Japan with new OS X El Capitan system fonts and input">{{웹 인용|last=Campbell |first=Mikey |title=Apple targets China, Japan with new OS X El Capitan system fonts and input |url=https://appleinsider.com/articles/15/06/08/apple-targets-china-japan-with-new-os-x-el-capitan-system-fonts-and-input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06180240/https://appleinsider.com/articles/15/06/08/apple-targets-china-japan-with-new-os-x-el-capitan-system-fonts-and-input |archive-date=September 6, 2015 |access-date=14 August 2015 |website=Apple Insider |date=June 8, 2015 |df=mdy-all}}</ref><ref name="chinamtnlion">{{웹 인용|last=Panzarino |first=Matthew |date=February 16, 2012 |title=Apple courts China with Sina Weibo, Baidu, Youku and more integrated in Mountain Lion |url=https://thenextweb.com/apple/2012/02/16/apple-is-serious-about-china-sina-weibo-baidu-youku-and-more-integrated-into-mountain-lion |url-status=live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20321020638/https://thenextweb.com/apple/2012/02/16/apple-is-serious-about-china-sina-weibo-baidu-youku-and-more-integrated-into-mountain-lion |archive-date=March 21, 2012 |access-date=March 15, 2012 |publisher=The Next Web |df=mdy-all}}</ref> macOS는 다음 언어를 포함하여 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ref>{{웹 인용|url=https://support.apple.com/kb/SP742?viewlocale=ko_KR&locale=ko_KR|제목=MacOS Sierra - 제품 사양|출판사=Apple Inc.|언어=한국어}}</ref> {{col-begin|width=700px}} |-valign="top" | * [[영어]] * [[한국어]] * [[프랑스어]] * [[독일어]] * [[스페인어]] * [[멕시코 스페인어]] * [[이탈리아어]] | * [[네덜란드어]] * [[일본어]] * [[스웨덴어]] * [[덴마크어]] * [[노르웨이어]] * [[핀란드어]] * 중국어([[간체자|간체]], [[번체자|번체]]) | * [[브라질 포르투갈어]] * [[포르투갈어]] * [[러시아어]] * [[폴란드어]] * [[체코어]] * [[튀르키예어]] | * [[헝가리어]] * [[아랍어]] * [[카탈루냐어]] * [[크로아티아어]] * [[그리스어]] * [[히브리어]] * [[루마니아어]] | * [[슬로바키아어]] * [[태국어]] * [[우크라이나어]] * [[말레이어]] * [[인도네시아어]] * [[베트남어]] |} === 업데이트 모델 === macOS는 시스템 설정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설정 창이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명령줄 유틸리티를 사용하여 업데이트할 수 있다. OS X 10.8 마운틴 라이언까지는 별도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애플리케이션이 이 기능을 수행했다. 마운틴 라이언 이상에서는 기본 업데이트 메커니즘이 변경되지 않고 앱 스토어 애플리케이션을 구입할 때 사용되는 다운로드 메커니즘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이것이 맥 앱 스토어 애플리케이션에 병합되었다. macOS 10.14 모하비에서는 업데이트 기능이 다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설정 창으로 이동되었다. 대부분의 맥은 6~7년 동안 macOS 업데이트를 받는다. macOS의 새로운 주요 릴리스 이후 이전 두 릴리스는 여전히 가끔 업데이트를 받지만 많은 보안 취약성은 최신 macOS 릴리스에서만 패치된다.<ref name=":2">{{웹 인용|last=Cunningham |first=Andrew |date=2022-10-27 |title=Apple clarifies security update policy: Only the latest OSes are fully patched |url=https://arstechnica.com/gadgets/2022/10/apple-clarifies-security-update-policy-only-the-latest-oses-are-fully-patched/ |access-date=2023-02-12 |website=Ars Technica |language=en-us |archive-date=February 12, 202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0212160619/https://arstechnica.com/gadgets/2022/10/apple-clarifies-security-update-policy-only-the-latest-oses-are-fully-patched/ |url-status=live }}</ref> == 맥 앱 스토어 == {{본문|맥 앱 스토어}} [[맥 앱 스토어]]는 iOS의 앱 스토어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iOS의 앱 스토어에는 있는 앱이 맥 앱 스토어에는 없을 수도 있다.<ref>https://itunes.apple.com/kr/genre/mac/id39</ref> 맥 앱 스토어에 올라오는 앱들은 모두 애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macOS의 보안기능인 [[게이트키퍼]]에 걸리지 않는다. [[애플 실리콘]] 프로세서([[애플 M1|M1]], [[애플 M2|M2]] 등)를 탑재한 맥에서는 개발자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iOS 기반 앱들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 같이 보기 == * [[애플]] * [[아이맥]] * [[맥북]] * [[맥북 프로]] * [[매킨토시]]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공식 웹사이트}} {{OS X}} {{애플의 운영 체제}} {{맥 OS 역사}}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전거 통제}} [[분류:MacOS| ]] [[분류:맥 OS]] [[분류:BSD]] [[분류:1999년 소프트웨어]] [[분류:애플의 소프트웨어]] [[분류:유닉스 계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macOS 그래픽스 모델}} '''쿼츠'''(Quartz)는 [[macOS]]에 쓰이는 그래픽 기술의 일부로서, 코어 그래픽스 프레임워크인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의 일부이다. 코어 그래픽스와 합성 엔진에서 2차원 렌더링을 지원하며 명령을 그래픽 카드로 보낸다. 쿼츠는 "코어 그래픽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ref name="apple1">{{웹 인용 | 제목=Apple - Developer - Graphics & Imaging Overview | url=http://developer.apple.com/graphicsimaging/overview.html | accessdate=2007년 2월 12일}}</ref> 더 일반적인 용어로서 "쿼츠", "쿼츠 기술"이라는 용어는 거의 모든 부분의 OS X 그래픽 모델에서 컴포지터의 렌더링 계층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용도에서 이 용어는 코어 이미지와 코어 비디오도 아우르는데<ref>{{웹 인용 | 제목=Apple - Developer - Graphics & Imaging Reference | url=http://developer.apple.com/reference/GraphicsImaging/idxQuartz-date.html | accessdate=2007년 4월 17일 | archive-date=2009년 7월 19일 |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719145554/http://developer.apple.com/reference/GraphicsImaging/idxQuartz-date.html | url-status=dead }}</ref>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애플이 제공하는 다양한 그래픽 기술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 쿼츠 2D * 쿼츠 익스트림 * 쿼츠GL * 쿼츠 2D 익스트림 * 쿼츠 컴포지터 * 쿼츠 코어 프레임워크 * 쿼츠 디스플레이 서비스 * 쿼츠 이벤트 서비스 * 쿼츠 프레임워크 ==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 == [[쿼츠 2D]]는 주로 2차원 텍스트와 그래픽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가리킨다. 실행 중에 렌더링 및 앤티에일리어싱을 거쳐 [[2차원 컴퓨터 그래픽스|2차원 그래픽스]]를 표현하여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아쿠아 (사용자 인터페이스)|아쿠아]]를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쿼츠는 하부 픽셀 정밀도로 문자열을 렌더링한다. 그래픽은 기본 동작 모드인, 더 전통적인 앤티에일리어싱에 제한되지만 이 기능을 끌 수 있다.<ref>{{웹 인용 | 제목=Apple - Developer - Quartz Programming Guide for QuickDraw Developers: Drawing Destinations | url=http://developer.apple.com/documentation/Carbon/Conceptual/QuickDrawToQuartz2D/tq_other/chapter_3_section_3.html | accessdate=2007년 2월 12일}}</ref> OS X v10.4에서 애플은 쿼츠 2D 익스트림을 도입하였는데, 쿼츠 2D가 지원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렌더링할 수 있게 한다. OS X 10.4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기본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비디오 다시 그리기나 커널 패닉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ref>{{웹 인용 | 제목=Apple - Info - Docs - About the {{nowrap|Mac OS X}} 10.4.3 Update (Delta) | url=http://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301984 | accessdate=2007년 9월 20일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16043656/http://docs.info.apple.com/article.html?artnum=301984 | 보존날짜=2007년 10월 16일 | url-status=dead }}</ref> OS X v10.5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쿼츠GL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기능은 여전히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일부 상황에서 성능 저하를 일으키거나 비주얼 글리치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원하면 이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 별도 켜고 끌 수 있다. [[쿼츠 컴포지터]]는 쿼츠 2D 및 기타 렌더러([[오픈GL]], [[코어 이미지]], [[퀵타임]] 따위)가 사용하는 합성 엔진이다. OS X v10.2 이후로 쿼츠 컴포지터는 지원 그래픽 카드의 프로세서(GPU)를 이용하여 합성 성능을 개선한다. 이 기술은 쿼츠 익스트림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원 그래픽 카드와 함께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활성화된다.<ref name="apple1"/> == PDF의 이용 == 쿼츠의 초기 개발자 문서에 따르면 쿼츠는 [[PDF]]를 이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ref>{{웹 인용 | 제목 = {{nowrap|Mac OS X}} DP4 Inside Quartz | url = http://arstechnica.com/apple/reviews/2000/05/mac-os-x-dp4.ars/4 | accessdate = 2011년 9월 7일}}</ref> 쿼츠의 내부 이미징 모델은 PDF 오브젝트 그래프와 관련하여 PDF를 여러 장치에 쉽게 출력할 수 있게 하고 있다.<ref>{{웹 인용 | 제목 = Why Apple didn't use X for the window system | url = http://developers.slashdot.org/comments.pl?sid=75257&cid=6734612 | accessdate = 2006년 12월 23일 | first = Mike | last = Paquette}}</ref> == 같이 보기 == * [[다이렉트엑스]] * [[오픈GL]] == 참조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언어링크|en}} [http://arstechnica.com/apple/reviews/2005/04/macosx-10-4.ars/13 Quartz in Tiger] * {{언어링크|en}} [http://developer.apple.com/graphicsimaging/quartz/ Apple's Quartz page for developers] * {{언어링크|en}} [http://developer.apple.com/referencelibrary/GettingStarted/GS_GraphicsImaging/ Introduction to OS X graphics APIs] * {{언어링크|en}} [http://cocoadevcentral.com/d/intro_to_quartz/ Cocoa Graphics with Quartz: Part 1] * {{언어링크|en}} [http://cocoadevcentral.com/d/intro_to_quartz_two/ Cocoa Graphics with Quartz: Part 2] {{애플}} {{OS X}} [[분류:그래픽 소프트웨어]] [[분류:MacOS]]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매킨토시}} [[파일:M2 Macbook Air Starlight model.jpg|섬네일|애플의 가장 잘 팔리는 맥 모델인 맥북 에어]] '''매킨토시'''({{llang|en|Macintosh}}, {{문화어|메킨토쉬}}) 혹은 줄여서 '''맥'''({{llang|en|Mac}})은 [[애플]]이 디자인, 개발, 판매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제품 이름이다. [[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매킨토시'''는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를 채용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윈도우 기반의 PC를 쓰고 있다. 매킨토시는 값이 비쌌으며 내부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애플]]은 1980년대의 [[MS-D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사용하던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 시장 점유율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애플은 1998년 성공적인 판매와 더불어 매킨토시 상표의 부활을 보여준 [[아이맥]]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모델로 다양한 수준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맥 시스템은 주로 가정과 교육,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그것들이 바로 앞서 설명한 일반 사용자용 모델인 [[아이맥]]과 [[맥 미니]], [[맥북 레티나]]와 [[맥북 에어]] 모델,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인 [[맥 프로]], [[맥북 프로]] 등이 있다. 맥 제품들은 [[하드웨어]]와 맥에 설치되는 모든 [[운영 체제]]를 함께 생산함으로써 사용이 쉽고 용이하게 수직적으로 통합되어있다. 이것은 다양한 제조사가 하드웨어를 만들고 또 각기 다른 제조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IBM 호환 PC와의 큰 차이점이다. 애플은 자사가 모두 맥 하드웨어를 생산하며 내부 시스템과 디자인, 가격을 모두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애플도 다른 회사의 구성품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재 매킨토시의 [[중앙 처리 장치|CPU]]는 [[인텔]]사의 [[x86|x86 아키텍처]]이고 그 이전에는 [[AIM 연합]]의 [[PowerPC]]를 썼고, 그 이전에는 [[모토로라]]의 [[68k]]를 사용했다. 애플은 또한 맥에서 사용되는 [[운영 체제]]를 개발하는데 현재 최신 맥 [[운영 체제]]는 [[macOS 벤투라]]다. 현재의 인텔 기반 맥은 다른 [[개인용 컴퓨터|PC]] 같이 [[리눅스]], [[FreeBSD]],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같은 [[운영 체제]]를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컴퓨터에서는 원칙적으론 [[맥 OS]]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해킨토시]]와 같은 방법으로 우회 설치가 가능하다. == 역사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09-7-16}} === 1979 ~ 1984년 ===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1970년대 후반,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이 쉽고 가격이 낮은 컴퓨터를 보급하고자 했던 애플 직원 [[제프 래스킨]]([[:en:Jef Raskin|Jef Raskin]])이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 종류인 '매킨토시(Mcintosh)'로 이름을 짓고자 했으나 이미 그 이름을 쓰고 있던 오디오기기 회사 '매킨토시 래버러토리'와의 법률상 문제 때문에 철자를 'Macintosh'로 바꾸었다. 1979년 9월 래스킨은 프로젝트를 위해 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견본을 만들 엔지니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애플 리사팀([[애플 리사]] 컴퓨터는 매킨토시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고급 사양으로 개발되고 있었다)의 멤버였던 빌 앳킨슨(Bill Atkinson)이 더 이전에 입사했던 서비스 기술자인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몇년 뒤, 래스킨은 최초의 매킨토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될 큰 규모의 개발팀을 모으게 된다. 구성원은 래스킨, 빌 앳킨슨(Bill Atkinson),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 크리스 에스피노사(Chris Espinosa), 조애나 호프먼(Joanna Hoffman), 조지 크로(George Crow), 브루스 혼(Bruce Horn), 제리 매넉(Jerry Manock), [[수잔 케어]], 앤디 허츠필드(Andy Hertzfeld) 그리고 대니얼 콧키(Daniel Kottke) 등이었다. 스미스의 첫 번째 매킨토시 보드는 래스킨이 디자인한 64 킬로바이트(KB) 램, 모토로라 6809E 마이크로프로세서, 256x256 해상도가 지원되는 흑백화면의 사양으로 설계되었다. 매킨토시 프로그래머인 버드 트리블(Bud Tribble)은 [[애플 리사|리사]]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돌리는 데 관심이 있어, 프로젝트의 지원 자금이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서도 스미스에게 [[애플 리사]]의 [[모토로라 680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맥에 장착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1980년 12월 스미스는 68000 프로세서를 장착할 뿐 아니라 속도도 5에서 8MHz로 끌어올린 기판 설계에 성공하였다. 이 보드는 또한 384x256 픽셀의 해상도를 지원했다. 스미스의 디자인은 리사보다 적은 개수의 램을 사용하여 생산단가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맥의 최종 디자인은 자체 내장형이었는데 다른 컴퓨터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큰 64Kb 롬에 퀵드로 그래픽 언어를 내장했고, 16개의 64Kb 램 칩을 연결한 128KB RAM을 장착했다. 메모리 슬롯이 없더라도 맥의 RAM은 공장에서 조립시 16개의 칩 슬롯을 256KB로 바꿔 납땜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512KB로 확장이 가능했다. 최종 생산품은 위의 견본 제품에서 9인치 화면과 512x342의 흑백 해상도로 수정되었다. 매킨토시의 구성은 애플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잡스]]의 관심을 끌었다. 리사보다 시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스티브 잡스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래스킨은 1981년 잡스와의 마찰로 프로젝트를 떠났고 마지막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래스킨보다 잡스의 요구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이때 잡스는 래스킨이 지은 매킨토시(macintosh)라는 이름까지 바이씨클(bicycle)로 바꾸려 하였으나 이는 취소되었다). [[제록스 PARC]]사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잡스는 [[제록스 알토]] 컴퓨터를 관전하고 [[스몰토크]] 개발도구를 애플 주식옵션과 교환하는 협상을 위해 제록스 PARC사를 방문한다. 제록스는 세가지 기술을 시연했는데 결국 잡스는 액면가 100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양도하고 GUI 기술을 가져왔다. 리사와 매킨토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제록스 PARC사가 선보인 기술에 영향을 받아 매킨토시 개발진들의 자체 의견과 조합된 결과이다. 또한 잡스는 산업 디자이너인 하르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에게 매킨토시 개발에 참여하길 권고했고 결과적으로 디자인 언어인 스노 화이트(Snow White)가 탄생하였다. 초기 맥에는 너무 늦은 완료 시기였지만, 1980년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거의 모든 맥에 적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프로젝트에서의 잡스의 리더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CEO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와의 격렬한 대립 후, 1985년 분노를 머금고 사퇴한다.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NeXT]])를 설립한 잡스는 1997년까지 애플로 복귀하지 않았다. === 1984년 === [[파일:Steve Jobs with Wendell Brown in January 1984, at the launch of Brown's Hippo-C software for Macintosh.jpg|섬네일|Macintosh Hippo-C 소프트웨어 출시 행사: [[스티브 잡스]]와 [[웬델 브라운]], 1984년]] [[매킨토시 128K]]는 [[1983년]] 10월에 [[언론]]에 소개됐고, 12월에 18쪽짜리 소책자와 함께 여러 잡지에 소개되었다. 매킨토시는 1984년에, 지금은 15,000,000달러의 거물이 된 [[리들리 스콧]]의 [[TV 광고]]인 “1984”에 소개되었다. 광고는 1984년 1월 거의 모든 미국인이 시청했던 [[슈퍼볼]] VXIII의 3쿼터에 방송에 나갔는데, 지금은 “획기적 사건”과 “걸작”으로 불린다. 1984 광고에는 “동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매킨토시의 등장 (여자의 흰 상의에 피카소 풍의 그림으로 애플사의 매킨토시라고 그려져 있다)을 상징하기 위해 무명의 여자가 출연했다. 이 그림은 [[빅 브라더]](Big Brother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소설)|1984]]에서 커다란 화면에 얼굴만 보이는 독재자)에게 지배되는 미래를 그린 소설 [[1984 (소설)|1984]]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4 광고가 전파를 탄 이틀 뒤 매킨토시는 판매를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인터페이스]]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해 [[맥라이트]](MacWrite)와 [[맥페인트]](MacPaint) 두 가지의 [[응용 프로그램]]을 꾸러미로 제공했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맥 키노트]] 연설에서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미칠듯이 대단해!(Macintosh, Insanely great!)”라는 명언을 화면에 그리며 합성된 목소리로 소리까지 시연했다. 매킨토시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겐 너무 단순한 “장난감”으로 치부되었다. 그 까닭은 기계 전체가 GUI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프로그래머]]들에겐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 모드와 명령 방식으로 된 코드의 재작업을 의미했고, 이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에겐 큰 도전이므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소프트웨어 부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84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멀티플랜(MultiPlan, MS사의 초기 사무용 문서 프로그램)이 [[MS-DOS]]에서 독립했고 뒤따라 1985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되었다. 1985년에는 로터스 소프트웨어가 [[로터스 1-2-3]]의 성공을 잇는 IBM PC용 [[로터스 재즈]](Lotus Jazz)를 출시하지만 큰 실패를 한다. 같은 해 애플은 [[매킨토시 오피스]](Macintosh Office)를 [[레밍즈]](Lemmings) 광고와 함께 출시하지만 매킨토시의 잠재적인 고객에게는 상당한 불명예를 안기며 성공하지 못했다. 1984년 11월 뉴스위크 경선 특별판에서 애플은 2,500,000달러를 들여 39쪽의 모든 광고란을 사들여 화제가 되었다. 애플은 또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에게는 24시간 동안 대여했다가 후에 매장에 돌려주는 매킨토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2.000,000명의 고객들이 참여하자 판매사들은 프로모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주문에 의한 매킨토시의 공급이 부족했고, 반납된 많은 제품들이 다시 팔지 못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 판매행사는 CEO인 John Sculley가 가격을 미화 1,995달러에서 2,495달러로 올리는 이유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을 위한 조정, 2007년엔 약 5,000달러로 조정.) === 1985 ~ 1989년 === 1985년, 맥과 [[애플]]의 [[레이저 프린터]], 보스턴 소프트웨어(Boston Software)의 맥퍼블리셔(MacPublisher)와 앨더스 페이지메이커(Aldus PageMaker) 같은 맥에 특화된 제품들은 사용자로 하여금 문자와 그림을 배열하여 디자인, 미리 보기, 출력 등을 가능케 했다. - 이런 활동은 전자출판으로 알려지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전자출판은 유일하게 맥에서만 가능했으나, 결국 후에는 IBM PC 사용자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매크로미디어]] 프리핸드(Macromeida FreeHand), [[쿼크익스프레스]], [[어도비 포토샵]], 그리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들은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서의 맥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했고 전자출판 시장의 확장과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초기의 맥이 마주친 한계는 곧 사라졌다: 초기의 맥은 1984년의 다른 컴퓨터들과 비교해도 적은 메모리 용량이었고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도 부족하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1985년 10월, 애플은 맥의 메모리를 [[매킨토시 512K|512kb로 늘렸지만]], 128kb([[매킨토시 128K]])인 맥에서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부품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애플은 1986년 1월 10일 미화 2,600달러의 [[매킨토시 플러스]]를 발표했다. 4메가까지 확장 가능한 1메가바이트의 램을 장착했고, 하드 드라이브나 [[이미지 스캐너|스캐너]] 등 최대 7개의 주변 장치까지 제어할 수 있는 가히 혁명적인 병렬 [[SCSI]] 인터페이스를 제공했다. 플로피 드라이브는 800kb까지 용량이 늘어났다. 맥 플러스(Mac Plus)는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고 1990년 10월 15일까지 생산되었다. 4년하고도 10개월 동안 판매된 셈인데, 이것은 애플 역사상 가장 긴 생명력이었다. 또 다른 사건도 남겼는데, 특히 느린 프로세서 속도와 그래픽 능력의 한계는 업무용 컴퓨터 시장에 맥의 진입을 막는 장애였다. 진화된 모토로라의 CPU는 좀 더 빠른 컴퓨터를 가능케 했고 1987년 애플은 모토로라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모토로라의 68020]] 16MHZ를 사용한 [[매킨토시 2]]를 소개했다. 매킨토시 2의 가장 큰 발전은 ROM에 내장돼 있는, 매킨토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퀵드로]](QuickDraw) 언어로 표시되는 색채였다. 특히나 어떤 화면 크기라도 소화할 수 있고 어떤 색 깊이도 소화할 수 있으며 다중 화면을 지원하는 것은 퀵드로의 많은 혁신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매킨토시 2는 지금까지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확장 슬롯과 컬러 그래픽, 공개 아키텍처를 채용했고 애플의 다른 제품들과 확장 가능한 애플 2계열에 영향을 받은, [[IBM PC]]와는 다른 디자인은 매킨토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매킨토시 2는 하드 드라이브와 함께 꽤 시끄러웠던 송풍기(fan)이 달린 전원공급장치를 내장하고 있었다. 한 외부 개발사에서 냉각기의 온도를 인식해 송풍기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팔긴 했지만 소비자는 애플의 보증을 받을 수 없었다. 후에 매킨토시 컴퓨터는 좀 더 조용한 하드 드라이브와 전원공급장치를 채용했다. 1986년 9월 애플은 MPW라고도 불리는 매킨토시 프로그래머 웍샵에서 맥용 프로그램을 리사를 통한 개발 대신에 맥에서 개발하는 법을 소개했다. 1987년 애플은 HyperCard를 공개했고, 매킨토시에서 동시 다중작업을 가능케 하는 MultiFinder를 소개했다. 가을에는 모든 애플에 위 두 가지 제품이 꾸러미로 제공되었다. 매킨토시 2를 바로 뒤이어, [[매킨토시 SE]](Second Edition)가 출시됐는데 최초의 20MB 내장 하드 드라이브와 하나의 확장슬롯이 장착된 맥이었다. SE는 또한 제리 매넉과 테리 오야마의 최초 디자인을 향상시켰고 매킨토시 2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와 몇 개월 후 [[애플 IIGS]]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애플 테스크탑 박스|애플 데스크탑 박스]] B) 마우스와 키보드를 공유했다. 1987년 애플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사업을 [[클라리스 (기업)|클라리스]](Claris)로 분리한다. 클라리스는 애플에 쓰였던 몇몇 응용 프로그램의 코드와 법적 권리를 인수했다. 주요 제품은 MacWrite, MacPaint와 MacProject 등이다. 1980년대 후반에 클라리스는 몇몇 수정판 응용 프로그램을 출시하는데 MacPaint Pro, MacDraw Pro, MacWrite Pro 그리고 FileMaker Pro 같은 “프로(Pro)” 계열이었다. 완벽한 사무용 프로그램 한 벌을 만들고자 클라리스는 맥에 있던 Informix Wingz(업무용 문서 프로그램 )를 사들여 이름을 Claris Resolve로 바꾸고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Claris Impact를 추가했다. 1990년 초기에 오면서, 클라리스 프로그램들은 일반인 사용자들에게 판매되는 맥의 주요품목이 되었고,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1년, 클라리스는 곧 두 번째 인기상품이 되는 ClarisWorks를 출시한다. ClarisWorks는 버전 5.0이 나오면서 AppleWorks로 이름이 바뀐다. [[매킨토시 포터블]](Macintosh Portable )은 애플의 첫 번째 휴대용 맥이다.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생산했고 [[시스템 6]]과 [[시스템 7]]을 돌릴 수 있었다. 1988년, 애플은 애플에 저작권이 있는 GUI, 사각형의 창 모양, 화면 겹침 기능(Overlapping), 창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 등을 무단 사용한 혐의로 마이크로스프트사와 휴렛 패커드사를 고소했다. 4년 후 애플의 패배로 판결이 나고 후에 애플은 다시 항소했다. 애플은 이러한 행동때문에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FSF)을 비롯한 일부 단체로부터 치명타를 맞게 되는데,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애플이 GUI 기술을 독점하려 한다고 여겼고 7년 동안 매킨토시 환경에서 돌아가는 GUI 프로그램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1988년 새로운 [[모토로라 68030]] 프로세서와 함께 매인 보드에 MMU 내장을 포함해 내부가 향상된 [[매킨토시 IIx]]가 출시되었다. 1989년에 슬롯 개수를 줄인 버전으로 [[매킨토시 IIcx]]와 16&nbsp;MHz 69030을 장착한 Mac SE가 뒤따라 출시되었다.(이름 짓는 규칙대로 가면 “SEx”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킨토시 SE/30]]라고 지었다.) 그해 후반에 25MHz의 속도로 동작하고 8MB 이상의 램을 지원하지만, 그 프로세서와는 다르게 “32-bit 비호환” ROM(32 bit 중의 8 bit만이 OS 레벨의 주소할당이 가능했다.)을 장착한 [[매킨토시 IIci]]는 “32-bit 호환”이 되는 최초의 맥이었다. 시스템 7은 32-bit 주소할당이 가능한 최초의 Mac OS였다. 애플은 또한 [[매킨토시 포터블]]도 소개했는데 16&nbsp;MHz 68000 모델에 능동행렬평판화면(active matrix flat panel display)을 채용했고 어떤 모델은 역광화면(backlit)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다음해에 가격이 미화 9,900달러부터 시작된 [[매킨토시 IIfx]]가 베일을 벗었다. 이 제품은 40 MHZ의 빠른 68030 프로세서와는 별개로 더 빠른 메모리, I/O 연산에 할당되는 애플 2 에라 CPU(Apple II-era CPU) 같은 내부적으로 아주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 1990 ~ 1998년 === 1990년 5월에 성능과 기능면에서 매킨토시 운영 체제에 버금가면서 가격은 더 싼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3.0|윈도우 3.0]](Microsoft Windows 3.0)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에 애플은 이전보다 가격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며 대응했다. [[매킨토시 플러스]](Macintosh Plus)의 주요 기능만으로 가격을 낮춘 [[매킨토시 클래식]]은 미화 999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2001년 초까지 결국 맥의 가격대는 올라갔다. 68020 CPU를 장착하고서 피자 상자 같이 특이한 가방에 들어가는 [[매킨토시 LC]]는 미화 1,800달러에 살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컬러 그래픽과 512 x 384 픽셀을 지원하면서 저렴한 가격의 새로운 모니터를 채용했다. 20&nbsp;MHz IIci 제품에서 하나의 확장 슬롯만 넣은 [[매킨토시 IIsi]]는 미화 2,500달러였다. 이들 세 가지 제품은 모두 잘 팔렸지만, 애플의 순수익은 이전의 매킨토시 제품들보다 낮았다. [[시스템 7|시스템 세븐]](System 7)은 최초의 주요 판 올림이 이뤄진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1991년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시된 시스템 세븐은 32비트 코드로 재작성되어 나옴으로써, 컬러 그래픽 조작성과 메모리 주소 할당, 네트위킹이 강화되었고 [[협력적 다중작업]](co-operative multitasking) 구현과 [[가상 메모리]] 기술까지 적용되어 나온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그해 후반에 애플은 속도가 더 향상된 [[모토로라 68040]] 프로세서를 최초로 채용한 [[매킨토시 쿼드라 700]](Quadra 700)과 900을 선보였다. 이 제품들은 16&nbsp;MHz 68030 CPU를 사용해 전년도 최고 인기 상품이기도 했던 [[매킨토시 클래식 2]](Classic II)와 [[매킨토시 LC II]]의 개선판으로서 시장에 나왔다. 또한 이때에 매킨토시는 프락디자인(Frogdesign) 사에 비싼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며 사용하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를 버리고, Apple Industrial Desing Group을 설립하여 새 운영 체제에 사용될 언어를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에 휴대용 매킨토시(Macintosh Portable) 제품군은 소형화된 포터블 개념으로 나온 최초의 세 가지 [[파워북]](PowerBook)-- [[파워북 100]]과 16&nbsp;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40]], 25&nbsp;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70]]으로 대체된다. 이 제품들은 키보드 아래쪽에 손바닥을 놓일 공간을 마련되고, 포인팅 장치([[트랙볼]])가 내장된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였다. 애플 매장에는 [[매킨토시 센트리스]](Macintosh Centris)라 불린 [[매킨토시 쿼드라|쿼드라]](Quadra) 계열의 중간쯤 되는 모델이 있었는데, 소비자들이 클래식 계열, LC 계열, [[매킨토시 II 시리즈|II계열]], Quadra 계열, [[매킨토시 퍼포마|펄포마]] 계열, 센트리스 계열로 혼란스러워 해서 곧 쿼드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애플은 파워북 듀오 계열의 축소판 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제품은 사무실 등의 작업장에 쓰이는 기능성 도구 같은 제품이었는데 데스크톱용 기지국(Base Station)에 연결되는 용도였다. 이 제품은 1997년 초반까지 판매되었다. 1994년 5월, 차세대 파워북 계열인 [[파워북 500]]을 출시하는데 [[트랙패드]](trackpad)라는 기발한 장치를 최초로 장착한 제품이다. 또한 1994년 애플은 AIM 연합, IBM, 모토로라가 개발했던 RISC 파워피씨(RISC PowerPC) 아키텍처에서 모토로라 CPU를 버렸다. [[파워 매킨토시]] 계열은 새로운 칩을 사용한 첫 번째 제품으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데 9개월 만에 100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런 기술과 상업적인 성공에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은 [[윈도우 95]] 운영 체제와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하락시켰다. 이 두 제품은 [[IBM 호환 PC]]의 멀티미디어 기능과 동작 속도를 획기적으로 상승시켰지만 윈도우 운영 체제의 GUI는 여전히 맥과 닮아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애플은 "매킨토시 호환 프로그램(Macintosh clone program)"을 시행했는데, 이 호환 제품들은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본체)에 애플의 [[시스템 7]] 운영 체제를 장착한 제품들이었다. 이 전략은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다소 높여주고 고객들에게는 더욱 싼 하드웨어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애플에게는 경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돌아오면서 버전 7.7로 알려진 다음 운영 체제의 이름을 [[맥 OS 8]]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애플이 다른 회사에 허용했던 저작권은 오직 시스템 7만 해당했으므로 결국 매킨토시 호환 제품의 생산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은 맥 호환 하드웨어 생산에 상당한 투자를 했던 모토로라사나 파워 컴퓨딩 사(Power Computing Corporation)에게는 치명적인 재정적 손실을 입혔다. === 1998 ~ 2011년 ===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다음 해인 1998년 애플은 모든 구성품이 하나로 통합된 [[아이맥]](iMac)을 선보인다. 반투명한 아이맥 케이스는 청록색에서 시작해 나중엔 여러 색깔로 생산됐는데, 1990년대 후반에 제품 디자이너인 홀마크(hallmark)가 고안한 것이다. 아이맥은 이전까지 애플의 표준 연결 방식인(그리고 거의 독자 기술이었던) SCSI나 ADB 같은 장치를 버리고 두 개의 [[USB]] 단자를 장착했다. 또한 아이맥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앴는데, 그 대신 [[CD-ROM]]을 장착했다. 아이맥은 139일 만에 80만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고, 그해 애플의 연간 매출은 미화 3억 9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던 1995년 이래 처음으로 순수익이 난 해였다.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은 [[파워 매킨토시]](Power Macintosh)에도 적용됐고 연이어 나온 새로운 제품인 [[아이북]](iBook)에도 적용되었다. 1999년 7월에 소개된 아이북은 애플의 첫 번째 일반인용 노트북 컴퓨터였다. 9월에 판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14만대의 선주문이 있었고 10월이 되면서는 아이맥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면서 인기를 끌었다. 애플은 연이어 [[파워 맥 G4 큐브|큐브]](Cube)나 교육 시장용 [[eMac|이맥]](eMac), 전문가를 위한 [[파워북 G4]](PowerBook G4) 랩탑 등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 최초의 아이맥은 G3 프로세서를 썼으나 G4를 거쳐 G5로 넘어가면서 제품 디자인도 흰색 플라스틱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현재의 아이맥은 알루미늄 케이스다. 2005년 1월 11일, 애플은 미화 499달러로 책정된 [[맥 미니]](Mac Mini)를 출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가장 값이 싼 맥이다. 맥 OS는 9.2.2판까지 개선되어 나왔지만, 그것의 구식 아키텍처—몇 번 갱신이 되긴 했다. 예를 들면 파워 피씨 포트 중의 하나로 나노커널(nanokernel)이 추가됐고 Mac OS 8.6은 멀티프로세싱 서비스 2.0(Multiprocessing Services 2.0)을 지원하도록 수정되었다.-- 는 교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애플은 [[맥 OS 9]]을 완전히 재정비한 [[유닉스 계열]] 기반의 [[OS X|맥 OS X]](Mac OS X)을 소개하는데 [[다윈 (운영 체제)|다윈]](Darwin) 커널과 XNU를 사용하는 넥스트스텝(NEXTSTEP)을 토대로 하였다. 맥 OS X은 2000년 9월에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퍼블릭 베타로 공개되었다. 원하는 고객들은 미화 29.99달러에 애플의 이 새로운 운영 체제를 미리 체험하고 정품이 발매되기 전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2001년 3월 24일 Mac OS X의 첫 번째 버전인 [[맥 OS X v10.0|10.0]](별명은 치타)이 출시되었다. Mac OS X의 초기 버전에서는 이전의 OS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들을 클래식이라는 구성을 이용하여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애플은 Mac OS X의 10.5 버전인 레퍼드(Leopard)부터 클래식을 빼버렸다.] Mac OS X의 다음 버전들은 2001년 9월 25일 출시된 10.1 버전 "[[맥 OS X v10.1|푸마]]"(Puma), 2002년 8월 24일 출시된 10.2 버전 "[[맥 OS X 재규어|재규어]]"(Jaguar), 2003년 10월 24일 출시된 10.3 버전 "[[맥 OS X 팬서|팬서]]"(Panther), 2005년 4월 29일에 출시된 "[[맥 OS X 타이거|타이거]]"(Tiger), 2007년 10월 26일에 출시된 "[[맥 OS X 10.5|레퍼드]]"(Leopard), 2009년 2월 28일에 출시된 "[[맥 OS X 10.6|스노우 레오파드]]"(Snow Leopard), 2011년 7월 20일에 출시된 "[[맥 OS X 라이언|라이온]]"(Lion)이다. 인텔 버전의 레퍼드는 [[오픈 그룹]]으로부터 유닉스 규격 인증을 받았다. [[1991년]]에 [[중앙 처리 장치|CPU]]를 [[파워피씨]] 프로세서로 변경하면서 [[파워 매킨토시]], [[파워맥 G3]], [[파워맥 G4]], [[파워맥 G5]]가 출시되었고, [[1998년]]에는 [[아이맥]]이 큰 성공을 거두며 애플의 부흥을 이끌었다. [[2006년]]부터는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이 판매되고 있다. 매킨토시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역사를 두 번 바꾸었다. 매킨토시 128부터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하고 과감하게 5.25인치 드라이브를 버렸다. 또한 아이맥부터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없애고 CD롬 드라이브만 탑재함으로써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운영 체제 == === 시스템 (1 ~ 7.5) === 매킨토시가 발표되었을 때 운영 체제는 '시스템'(System)으로 불렸다. 최초의 시스템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와 [[위지위그]] 등 당시 상황에서는 혁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없었다. [[1987년]] 시스템 5.0으로 버전이 올라가면서 멀티파인더를 통해 [[협력형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 [[1991년]]에는 [[가상 메모리]], [[파일 공유]]를 지원하고 멀티미디어와 그래픽 지원이 강화된 [[시스템 7]]이 출시되었다. 시스템이라는 이름은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처음으로 지원한 7.5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 맥 OS (7.6 ~ 9.2.2) === {{본문|맥 OS}} [[1997년]] 맥 OS 7.6이 발표되면서 명칭이 '맥 OS'(Mac OS)로 변경되었다. 곧이어 [[멀티스레드]] 파인더와 새로운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맥 OS 8]]이 발표되었다. [[1999년]] 맥 OS의 마지막 메이저 버전인 [[맥 OS 9]]가 발표되었다. [[2001년]] 초에 발표된 [[OS X|맥 OS X]]에는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맥 OS X으로 전환하는 동안 기존에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맥 OS 9는 [[2001년]] 12월에 발표된 9.2.2를 마지막으로 개발과 지원이 중단되었다. === macOS (10.0 ~ ) === {{본문|macOS}} 현재 매킨토시의 운영 체제는 [[macOS]]이다. 이것은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사]]를 인수하여 [[BSD]] [[유닉스 계열]] 기반인 [[NeXTSTEP]]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것이며, 이때의 이름은 OS X(오에스 텐)이었다. OS X은 더 이상 버전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운영 체제]]의 이름으로 사용하며, 메이저 버전을 내놓을 때 소숫점 밑의 버전만을 올리며, 코드명을 이용하여 이름붙인다. 치타, 퓨마, 재규어, 팬서, 타이거 등 [[고양이과]] 동물들의 이름으로 각 버전의 [[코드명]]을 지정하였고 [[OS X 매버릭스|10.9 매버릭스]] 이후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명을 사용하여 코드명을 지정하며, [[맥 OS X 재규어|재규어]](10.2) 이후로는 코드명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10.12 버전의 [[macOS 시에라|시에라]]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macOS로 바꾸었으며, 현재 가장 최신의 운영 체제는 10.15 버전의 카탈리나이다. == 대한민국에서의 매킨토시 사용 == [[대한민국]]에서 매킨토시는 전통적으로 [[북디자인]], [[음악]], 영상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지금은 [[X86]]용으로도 나와 있지만, 초기에는 [[쿼크익스프레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레이저 프린터]], 고품질 [[서체]]를 매킨토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출력을 쉽게 할 수 있어서 [[북디자인]]을 비롯한 디자인계에서는 맥이 널리 사용된다. 음악 분야에서도 로직 프로 등의 주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그램을 통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영상 분야에서는 애플의 멀티미디어 기술인 [[퀵타임]]을 기반으로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방송이나 영화 업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크로스 플랫폼 프로그램 개발 노력으로 제한점들이 많이 사라졌다.<ref>매킨토시 전문 [[잡지]] 《맥마당》 [[2003년]] 4월호 기사에 따르면, 독자의 57.2%가 [[디자인]](29.2%)과 [[전자출판]](28%) 종사자였다. 영상편집자도 소수이지만 5.8%를 차지했다.</ref> 최근에는 인텔 매킨토시가 등장하면서 매킨토시의 판매가 증가하였다. 매킨토시는 가격이 비싸다는 선입관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매킨토시의 가격이 동일 사양의 PC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OS X과 윈도를 함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국의 각종 포탈이나 커뮤니티 사이트, 온라인 게임 사이트, 인터넷 뱅킹이나 공공기관 등 [[공인 인증서]]를 사용하거나 [[액티브 엑스]]를 사용하는 사이트는 매킨토시에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국내 운영 체제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상황에서 인터넷 사용이 확산되면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윈도-인터넷익스플로러 환경만을 감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이를 방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액티브 엑스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고 웹에서의 평등한 접근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웹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반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윈도우10]]이 2015년 출시된 이후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 매킨토시의 종류 ==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매킨토시는 크게 대상 사용자 유형에 따라 일반 사용자용과 전문 사용자용, 제품 유형에 따라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 분류되어 크게 네 가지 제품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맥 미니]], [[맥북 에어]]와 서버인 [[XServe]]가 추가된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85%;" ! 사진 !! 이름 !! 종류 !! 사용자 !! 설명 |- ||| [[맥 미니]] ||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 일반 || 인텔 듀얼코어 i5 프로세서 장착. 2.3&nbsp;GHz 버전과 2.5&nbsp;GHz 버전이 있다. 애플의 저변확대용 모델. |- ||| [[맥 미니 서버]] ||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 서브 || 인텔 쿼드코어 i7 2.0&nbsp;GHz 프로세서 장착. [[ODD]]가 없는 모델로, 대신 500GB의 [[HDD]] 두개가 [[RAID]]로 구성된다. [[운영 체제]]는 [[맥 OS X 10.7]] 서버가 제공된다. |- | [[파일:IMac vector.svg|40px|아이맥]] || [[아이맥]] ||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 일반 || 2010년 여름의 모델에는 SDXC 슬롯이 내장되어 있다. LCD 디스플레이의 크기에 따라 16:9 비율의 21.5인치, 27인치 2가지 모델이 제공되며, 인텔 코어 i3 (3.06&nbsp;GHz, 3.2&nbsp;GHz)를 장착했으며, 27인치 모델은 인텔 코어 i3(3.2&nbsp;GHz, 옵션 3.6&nbsp;GHz) 또는 네할렘 쿼드코어 프로세서 (i5 2.8Ghz, 옵션 i7 2.93&nbsp;GHz)를 장착한 모델도 있다. 27인치 모델은 [[미니디스플레이포트]]를 이용한 외부입력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5K 해상도를 지원하는 iMac 5K가 출시되었다. |- ||| [[맥 프로]] ||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 전문가 || 전문 업무용 컴퓨터.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8&nbsp;GHz 1개(옵션 쿼드 코어 3.2&nbsp;GHz, 6-코어 3.33&nbsp;GHz)와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4Ghz 2개를 장착한 모델이 있다. 12코어 모델은 인텔 제온 6-코어 프로세서 2.66&nbsp;GHz 2개(옵션 6-코어 2.93&nbsp;GHz 2개)가 장착되어 있다. 또한 Xserve 단종으로 Server 모델이 추가되었으며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8&nbsp;GHz 1개(옵션 쿼드 코어 3.2&nbsp;GHz, 6-코어 3.33&nbsp;GHz, 쿼드 코어 2.4&nbsp;GHz 2개, 6-코어 2.66&nbsp;GHz 2개, 6-코어 2.93&nbsp;GHz 2개)를 장착하고 있다. 서버 모델에 한해 [[맥 OS X 10.6]] 서버가 제공된다. |- | [[파일:MacBook with Retina Display (cropped).jpg|40px|맥북]] || [[맥북]] || 노트북 || 일반 || 인텔 코어 2 듀오 프로세서 장착. 맥북 프로의 유니바디 디자인을 적용한 흰색 모델이 있다. 사양은 맥북 프로 13인치 모델과 유사하나 [[파이어와이어]]와 [[SD 카드]] 슬롯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북]] 제품군의 후속 모델이며, 단종되었다. [[2015년]] 새로운 라인업으로 부활했다. |- ||| [[맥북 프로]] || 노트북 || 일반/전문가 || 인텔 i5, i7 프로세서를 장착한 전문 업무용 노트북. 13인치, 15인치 모델이 존재한다. 15인치 모델은 화면을 무광 화면으로 교체 할 수 있으며. 15 인치 모델에는 쿼드코어 프로세서가 장착된다.. [[파워북]] 제품군의 후속 모델. |- | [[파일:MacBook Air Mid 2012.png|40px|맥북 에어]] || [[맥북 에어]] || 노트북 || 서브/일반 || 인텔 듀얼코어 i5 프로세서를 장착한 서브 노트북. ODD, 유선 랜 포트, [[파이어와이어]]가 없는 것이 특징. 발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었다. 현재 11인치 맥북 에어는 1.6&nbsp;GHz CPU를 장착하며 64GB 또는 128GB 플래시 메모리가 장착되며, 13인치 맥북 에어는 1.7&nbsp;GHz CPU와 128GB 또는 256GB 플래시 메모리가 장착되어 있다. |- | [[파일:Xserve G5.jpg|40px|Xserve]] || XServe || 서버 || 기업 || 인텔 Xeon "네할렘" 쿼드 코어 프로세서를 장착한 서버용 컴퓨터. 모델에 따라 2.26&nbsp;GHz 1개와 2개가 제공된다. 2011년 1월 31일까지만 구입이 가능하다(즉, 단종되었다).<ref>https://www.apple.com/kr/xserve/resources.html 지원은 계속 받을 수 있다.</ref> |} == 매킨토시의 역사 == * [[1984년]] 최초의 매킨토시인 [[매킨토시 128k]] 출시 * [[1985년]] [[애플 레이저라이터]]가 출시되면서 출판인쇄 분야에서 매킨토시가 사용되기 시작함 * [[1987년]] 확장이 가능한 [[매킨토시 II]] 출시 * [[1991년]] 매킨토시 노트북인 [[파워북]] 출시 * [[1994년]]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장착한 [[파워 매킨토시]] 출시 * [[1997년]] [[파워북 G3]] 출시 * [[1998년]] [[아이맥]] 출시 * [[1999년]] [[아이북]], [[파워맥 G4]] 출시 * [[2000년]] [[파워맥 G4 큐브]] 출시 * [[2001년]] [[파워북 G4]] 출시, 맥 OS X으로 운영 체제 이전 * [[2002년]] [[아이맥 G4]], [[eMac|이맥]], XServe 출시 * [[2003년]] [[파워맥 G5]], 아이북 G4 출시 * [[2004년]] [[아이맥 G5]], XServe G5 출시 * [[2005년]] [[맥 미니]] 출시 * [[2006년]]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 프로]], [[맥북 프로]], [[아이맥]], [[맥북]], [[맥 미니]] 출시 * [[2007년]] 알루미늄 프레임, 유리 커버가 사용된 아이맥 출시 * [[2008년]] 초박형 서브노트북 맥북 에어 출시 * [[2008년]]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만든 유니바디 맥북 13인치와 맥북 프로 15인치 출시. * [[2009년]] 네할렘 아키텍처를 채용한 Xserve 출시. * [[2009년]] 맥북 알루미늄 모델이 단종되고, 맥북 프로 모델 (13인치, 15인치, 17인치)과 맥북 에어 모델이 수정되었다. * [[2009년]] 아이맥 21.5인치와 27인치, 수정된 맥미니와 맥미니 서버, 그리고 유니바디 맥북 출시. * [[2010년]] 새로운 맥북 에어 출시 * [[2011년]] Xserve가 1월 31일에 단종. * [[2012년]] 새로운 맥북 에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15인치([[6월 12일]]), 새로운 아이맥 출시 * [[2012년]]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13인치([[10월 23일]]) 출시 * [[2013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맥 프로]] 출시 * [[2014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새로운 맥 미니 출시 * [[2015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뉴 [[맥북]] 출시 * [[2016년]] [[맥북 에어]] 리프레시 모델 출시, 터치바를 단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출시 *2017년 맥북 프로 13", 15" 모델 출시 *2019년 맥북 프로 13", 16" 출시(마지막으로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함) *2020년 맥북 프로 13" 출시, 자사 프로세서 M1 탑재 *2020년 맥 미니 출시, M1 탑재 *2020년 맥북 에어 출시, M1 탑재 == 같이 보기 == * [[애플]] * [[맥북]] * [[사파리 (웹 브라우저)]]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Apple Macintosh}} * [https://www.apple.com/kr/ 애플 공식 홈페이지] {{애플}} {{전거 통제}} [[분류:매킨토시| ]] [[분류:개인용 컴퓨터]] [[분류:스티브 잡스]] [[분류:68000 기반 가정용 컴퓨터]] [[분류:매킨토시 플랫폼]] [[분류:애플의 하드웨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한글|언어|문자}} {{언어 정보 |이름=한국어 |계통색= |IPA=[ha(ː)n.ɡu.ɡʌ], [ɦa(ː)n.ɡu.ɡʌ] |그림=Hangugeo-Chosono.svg |지역=[[한국]] |나라=[[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인구=약 8,100만 명<ref name="Ethnologue">{{웹 인용 |url= http://www.ethnologue.com/language/kor |제목= Korean language |work= [[에스놀로그]] |edition= 27|date= 2024년 |accessdate= 2024-06-04}}</ref> |민족=[[한민족]] |어순= SOVanPo |문자=[[한글]]{{·}}[[한국 한자|한자]]{{·}}[[한글 점자]] |공용나라=[[대한민국]]<br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br />[[중화인민공화국]]([[옌볜 조선족 자치주]]) |표준={{국기그림|대한민국}} [[국립국어원]]<br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br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중국조선어규범위원회 |계통1=[[한국어족]] 또는 고립어 |초기=[[한국조어]]<br />[[고대 한국어]]<br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br />[[중세 한국어]]<br />([[고려어 (고대어)|고려어]]·[[조선어]])<br />[[근대 한국어]] |iso1=ko |iso2=kor |iso3=kor | lc1 = kor | ld1 = 현대 한국어 | lc2 = jje | ld2 = 제주어 | lc3 = okm | ld3 = 중세 한국어 | lc4 = oko | ld4 = 고대 한국어 | lc5 = oko | ld5 = 한국조어 |지도= Idioma coreano.png |지도 설명 =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지역 }} [[파일:Map of Korean language.png|섬네일|300px|한국어의 세계 분포를 나타낸 그림]] '''한국어'''(韓國語), '''조선말'''(朝鮮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이다. 둘은 표기나 문법, 동사 어미나 표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세계 여러 지역에 [[한민족]] 인구가 이주하여 거주하자 전세계 각지에서 한국어를 사용한다. 2016년 1월 초 기준으로 한국어 사용 인구는 약 8,000만 명으로 추산한다.<ref name="Ethnologue" /> 역사 및 현대 언어학자들은 한국어를 고립어로 분류한다.<ref name="google15">{{인용| last = Song | first = Jae Jung | year = 2005 | url = https://books.google.com/books?id=rIk52cJ1vDEC&pg=PA15 | title = The Korean language: structure, use and context | publisher = Routledge | page = 15| isbn = 978-0-415-32802-9 }}.</ref><ref>{{인용| first1 = Lyle | last1 = Campbell | first2 = Mauricio | last2 = Mixco | year = 2007 | title = A Glossary of Historical Linguistics | publisher = University of Utah Press | contribution = Korean, A language isolate | pages = 7, 90–91 | quote = most specialists... no longer believe that the... Altaic groups... are related […] Korean is often said to belong with the Altaic hypothesis, often also with Japanese, though this is not widely supported}}.</ref><ref>{{인용| first = David | last = Dalby | date = 1999{{ndash}}2000 | title = The Register of the World's Languages and Speech Communities | publisher = Linguasphere Press}}.</ref><ref>{{인용| first = Nam-Kil | last = Kim | year = 1992 | contribution = Korean | title =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Linguistics | volume = 2 | pages = 282–86 | quote = scholars have tried to establish genetic relationships between Korean and other languages and major language families, but with little success}}.</ref><ref>{{인용| first = András | last = Róna-Tas | year = 1998 | contribution = The Reconstruction of Proto-Turkic and the Genetic Question | title = The Turkic Languages | publisher = Routledge | pages = 67–80 | quote = [Ramstedt's comparisons of Korean and Altaic] have been heavily criticised in more recent studies, though the idea of a genetic relationship has not been totally abandoned }}.</ref><ref>{{인용| first = Claus | last = Schönig | year = 2003 | contribution = Turko-Mongolic Relations | title = The Mongolic Languages | publisher = Routledge | pages = 403–19 | quote = the 'Altaic' languages do not seem to share a common basic vocabulary of the type normally present in cases of genetic relationship}}.</ref> 그러나 한국어와 [[제주어]](제주도에서 사용하며 구별한다고 간주함)와 함께 [[한국어족]]을 구성하던 몇 개의 사라진 언어(사어)가 한 때 존재했었다.<ref>{{인용| contribution = Stratification in the peopling of China: how far does the linguistic evidence match genetics and archaeology? | editor1-last = Sanchez-Mazas | editor2-last = Blench | editor3-last = Ross | editor4-last = Lin | editor5-last = Pejros | title = Human migrations in continental East Asia and Taiwan: genetic, linguistic and archaeological evidence | year = 2008 | publisher = Taylor & Francis}}</ref><ref>{{저널 인용|url=https://www.academia.edu/18764127|title=Korean as a Paleosiberian Language (English version of 원시시베리아 언어로서 한국어)|first=Alexander|last=Vovin}}</ref> 일부 언어학자들이 한국어를 [[알타이 제어]]에 포함하였지만, 오늘날 알타이 제어설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sfnp|Cho|Whitman|2020|pp=11–12}} == 한국어의 여러 명칭 == {{참고|한국어의 호칭 문제}} [[대한민국]]에서 '''한국어'''/'''한국말'''이라고 불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어'''/'''조선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드는 사전 이름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겨레말 큰사전]]》이다. 1994년부터 여는 남북한 한글과 한국어 컴퓨터 처리를 표준화하려는 학회명은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이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쵸센고(조선어)'라고 불렀으나, 근래에 대한민국 국적 사람들이 쓰는 말을 '칸코쿠고'(한국어)라고 부른다. 일본 내 교포 사회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로 갈라져 각각 [[표준어]]와 [[문화어]]를 지지하는 경향이있으므로, [[NHK]]는 중립성을 지키고자 한국어 회화 명칭을 '칸코쿠고(한국어)', '쵸센고(조선어)' 대신 '한구루 코우자'({{llang|ja|ハングル講座}}, 한글 강좌)<ref>그러나, 북한에서는 한글을 이르는 말로 보통 "조선글(자)"를 사용하므로 이 표현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다만, 최근 북한 사전들에서 "한글"을 올림말로 삼는다.</ref>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중립성을 고려하여 '칸코쿠ㆍ조센고(韓国・朝鮮語, 한국ㆍ조선어)', '코리아고'({{llang|ja|コリア語}}, 코리아어)나 '카라노쿠니노코토바'({{llang|ja|{{후리가나2|韓|から}}の{{후리가나2|国|くに}}のことば}}<span lang="ja" dir="ltr">,</span> "한"의 나라말) 등 명칭이 있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코리아고(코리아어)'는 [[1977년]] [[조치 대학]]이 처음으로 전공 학과를 개설한 이후 일부 대학교에서 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과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말로서 한국어를 조선어로 불렀으나, 현재는 대한민국에서 쓰는 말은 한국어로 부른다. 이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한국어를 주로 '챠오셴위({{zh|c=朝鲜语|p=Cháoxiǎnyǔ}}, 조선어)'라고 불렀다.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 이후에 양국이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사회 각층 민간 생활 중에서 '한궈위({{zh|c=韩国语|p=Hánguóyǔ}}, 한국어)' 또는 '한위({{zh|c=韩语|p=Hányǔ}}, 한어)' 등의 명칭으로 쓰인다. 학술 상으로 문화어 계열 어휘를 많이 사용하지만, [[베이징 대학]], [[베이징 외국어대학]], [[상하이 외국어대학]] 등을 비롯한 중국 대부분 한국어 학과는 학과 명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말의 뜻 조선어로 하고 강의 내용은 99.9%{{출처|날짜=2023-01-10}} 이상 대한민국 서울 표준 한국어를 가르친다. [[타이완]]은 한국어를 '한궈위({{zh|c=韓國語|p=Hánguóyǔ}})'나 '한위({{zh|c=韓語|p=Hányǔ}})'로 부른다. 베트남에서 용법은 대한민국 표준어는 '띠엥한'({{llang|vi|Tiếng Hàn}}, 㗂韓)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에는 한국어 문서 제목이 '한국어'를 뜻하는 '띠엥한꾸억'({{llang|vi|Tiếng Hàn Quốc}}, 㗂韓國, 한국어)으로 표기한다. 한편, 한국어는 [[영어]]로 'Korean', [[프랑스어]]로 'Coréen', [[스페인어]]로는 'Coreano'로 칭한다. == 계통 == {{본문|한국어의 계통}} 한국어는 [[제주어]]와 함께 [[한국어족]]에 속한다. 일부 언어학자들이 한국어를 [[알타이 제어]]에 포함하였지만 오늘날 알타이 제어설은 사실상 학술적인 의미가 없다.{{sfnp|Cho|Whitman|2020|pp=11–12}}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어족]]이나 [[퉁구스어족]]에서 찾지 못하는 한국어와 유사한 어휘 항목이 여럿 있다. 거란어에서 한국 영향력을 발견한다.<ref>{{저널 인용|last=Vovin |first=Alexander |date=June 2017 |title=Koreanic loanwords in Khitan and their importance in the decipherment of the latter |journal=Acta Orientalia Academiae Scientiarum Hungaricae |volume=70 |issue=2 |pages=207–215 |doi=10.1556/062.2017.70.2.4 |url=http://real.mtak.hu/56022/1/062.2017.70.2.4.pdf |access-date=20 September 2019 |archive-date=24 February 2021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224042740/http://real.mtak.hu/56022/1/062.2017.70.2.4.pdf |url-status=live | issn = 0001-6446}}</ref> 한국어가 일본어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은 사무엘 E. 마르틴<ref>{{harvp|Martin|1966}}, {{harvp|Martin|1990}}</ref>과 로이 앤드류 밀러<ref>e.g. {{harvp|Miller|1971}}, {{harvp|Miller|1996}}</ref>와 같은 연구자들이 자세히 설명한 어휘와 유사한 문법적 특징 일부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일부 지지자들이 있다.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1991)은 일본어-한국어 100단어 [[스와데시 리스트]]에서 약 25%의 잠재적 동족어를 발견했다.<ref>{{서적 인용|last=Starostin|first=Sergei|url=http://starling.rinet.ru/Texts/Starostin_AP.pdf|title=Altaiskaya problema i proishozhdeniye yaponskogo yazika|publisher=Nauka|year=1991|location=Moscow|language=ru|trans-title=The Altaic Problem and the Origins of the Japanese Language|access-date=22 November 2012|archive-date=9 May 2021|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509142850/http://starling.rinet.ru/Texts/Starostin_AP.pdf|url-status=live}}</ref> 알렉산더 보빈을 포함하여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 문제를 우려하는 일부 언어학자들은 발표한 유사성이 어떤 유전적 관계가 아니라, 특히 고대 한국어에서 고대 일본어가 단어를 많이 차용을 한 탓이라고 주장한다.{{sfnp|Vovin|2008|pp=211–212|ps=.}} 허드슨 앤 롭비츠(Hudson & Robbeets, 2020)는 한국어에 니브흐어 이전의 기질의 흔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가설에 따르면, 한국어 화자가 등장하기 전에 한반도에 니브흐어(아무르어라고도 함)의 조상 언어가 한때 분포했었다. 한국어의 유래와 함께 그 발달 과정도 아직 모른다. 중세 한국어 이전 기록이 극도로 부족하고, 고대 한국어 기록을 [[한자]]로 써서 그 해석에 따라 음이 크게 달라지는 등으로 연구가 더욱 어렵다. 고대 한반도 언어 연구에서 [[지명학]]적 흔적은 크게 의미가 있다.<ref name = "Vovin2013">Vovin, Alexander (2013), "From Koguryo to T'amna", Korean Linguistics 15:2</ref> 한국어가 만주 등 북방 지역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설은 [[퉁구스어족]]에서 고대 한국어 흔적이 나타나고 역으로 한국어 음운에서도 [[고시베리아제어]]와 접촉 흔적이 개연적으로 나타나므로 설득력이 있다.<ref name = "Vovin2013"/><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id=cC9tDwAAQBAJ&pg=PA25&lpg=PA25&dq=koreanic+languages+origin#v=onepage&q=koreanic%20languages%20origin&f=false|title=A typology of questions in Northeast Asia and beyond: An ecological perspective|last=Hölzl|first=Andreas|date=2018-08-29|publisher=Language Science Press|isbn=9783961101023|language=en}}</ref> 한편 하위 계통으로서 [[이기문 (언어학자)|이기문]] 등이 정립한 한-부여 분류가 국내외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한-부여 분류는 고대 한반도 지역에서 사용한 언어의 분류로, [[고구려어]], [[백제어]]를 포함하는 부여계 제어와 [[신라어]]를 포함하는 한계 제어를 아우른다.<ref>Young Kyun Oh, 2005. ''Old Chinese and Old Sino-Korean''</ref> 다만 학자에 따라 그 차이가 방언 수준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며, 방언 주순이었다면 앞의 분류는 편의상 구분일 뿐이다. 한편 [[크리스토퍼 벡위스]]는 부여계 언어가 신라어와 완전히 달랐으며 일본어와 연관있다는 [[부여어족]] 가설을 주장하였으나 여러 오류가 있어 더 이상 중요한 주장이 아니다. === 알타이어족설 === {{참고|알타이 제어}} 알타이어족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과 문법적 특징을 공유하므로 같은 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설이다. 알타이어족이란 19세기부터 연구했다. 이 알타이어족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언어학 대가인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 1873~1950)와 예프게니 폴리바노프 그리고 현대 언어학자인 로이 앤드류 밀러가 있다. 근대에 핀란드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가 대어족 가설인 [[알타이어족]]설을 제시할 때 한국어를 포함하면서 예프게니 폴리바노프, 로이 앤드류 밀러 등 20세기 중반 많은 언어학자들이 이 가설을 지지했다.<ref name="관견">{{서적 인용 |성=Ramstedt |이름=Gustaf John |저자링크=구스타프 욘 람스테트 |연도=2016 |원본연도=1928 |번역자=도재학 |제목=알타이 가설과 한국어 |번역제목= |장=Remarks on the Korean language |번역장=한국어에 대한 관견 |총서=아시아학술번역총서 1 |위치=서울 |출판사=역락 |쪽=30, 49 |isbn=9791156867296 |인용문=The result of etymological researches will, as far as I can see, once for all fix the Korean language in its proper place as an old branch of a large East-Asiatic group, from which the Mongoloturcicum seperated earlier, while another group, the Tungusian, remained closer to the Korean, from which it also got Chinese loanwords. }} [{{저널 인용 |성=Ramstedt |이름=Gustaf John |저자링크=구스타프 욘 람스테트 |연도=1928 |제목=Remarks on the Korean language |저널=Mémoires de la Société Finno-ougrienne |언어=영어 |판= |위치= |출판사= |권=58 |호= |쪽=441-453 |인용문= }}에서 재인용.]</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147 알타이어족(─語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람스테트는 논문 〈한국어에 대한 관견〉(1928)에서 [[우랄알타이어족]]을 폐기하지 않고, [[알타이어족]]을 분리했으며<ref>Ramstedt, Gustaf John (2016) [1928]. 위의 책. 30-31, 49쪽. “The traditional and unconvincing «Uraloaltaic» theory must be removed far away, as the center of the Altaic world locates itself on the Western and Eastern slopes of the Hingan mountain range.”</ref>, 한국어는 동아시아 여러 언어 가운데 일찍이 분기한 언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관견"/> 이후 그는 《한국어의 문법》(1939)에서 음운 대응에 주목하여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임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어 어원연구》(1949), 《알타이어학 개설》(1952/57/66)에서도 한국어와 알타이어족의 동계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한국어연구의 태두 「람스테트」 박사-김방한<서울대 문리대교수> |url=https://news.joins.com/article/1265948 |출판사=중앙일보 |저자= |날짜=1970-11-20 |확인날짜=2019-09-23 }}</ref> 람스테트 이후, 러시아 언어학자 [[니콜라스 포페]]는 한국어와 알타이제어가 공유하는 특성을 여러 가지 밝혀냈으나, 그러면서도 《알타이 언어학으로의 초대》(1965)에서 “한국어의 위치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라며 아래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 한국어가 알타이제어와 친근 관계라는 가능성 # 원시 한국어는 알타이제어 통일체가 이뤄지기 전, 매우 이른 시기에 분열했을 가능성 # 한국어는 비알타이어로 고대 알타이어를 기층언어로 흡수하였거나, 기층언어인 알타이어 위에 덮혔을 가능성 언어계통 중요성에서 문법적인 요소를 가장 많이 강조한다. 한국어와 알타이어족 고대언어 유사성에 20세기 언어학자들이 수많은 연구를 진행했다.<ref>eg Vovin 2008: 1</ref>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이라고 가르쳐서<ref>{{서적 인용|제목=고등학교 국어(하)|저자=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날짜=2002|출판사=두산동아|인용문=여러 자료들을 볼 때, 몽골 어군(語群), 만주·퉁구스 어군, 튀르크 어군 등과 함께 국어가 알타이 어족(語族)에 속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은 분명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위치=서울|페이지=16}}</ref><ref name="histsb">{{서적 인용|제목=고등학교 국사|저자1=국사 편찬 위원회|저자2=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날짜=2006-03-02|출판사=(주)교학사|인용문=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위치=서울|페이지=19}}</ref>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믿는다. 대한민국 언어학자 [[이기문]]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 공유하는 성질이 많으나,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퉁구스 어군, 몽골 어군, 투르크 어군들이 서로 같은 단어가 많지만, 한국어에는 많은 차용어로 알타이어족 단어가 사라졌다고 주장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李基文 |연도=1972 |제목=國語史槪說 |판=改訂 |위치=서울 |출판사=塔出版社 |쪽=14-15, 28 |isbn=8934200421 }}</ref> === 고립어 또는 한국어족 설 === 다른 학자들은 한국어족을 [[고립어 (비교언어학)|고립어]](language isolate)로 분류한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알렉스 버라타 교수<ref name="Alex12">{{뉴스 인용 |언어=영어 |제목=Is the Korean language really an orphan? |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20308001122 |출판사=The Korean Herald |성=Baratta |이름=Alex |날짜=2012-03-08 |확인날짜=2019-09-22 }}</ref>,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스테판 게오르크<ref name="Cambridge99">{{저널 인용 |성1=Georg |이름1=Stefan |성2=Michalove |이름2=Peter A. |성3=Ramer |이름3=Alexis Manaster |성4=Sidwell |이름4=Paul J. |제목=Telling general linguists about Altaic |url=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journal-of-linguistics/article/telling-general-linguists-about-altaic/4062C2C55ABDE1D32E08D74FA26A6330 |날짜=1999-03 |권=35 |호=1 }}</ref>, [[유타 대학교]]의 마우리시오 믹스코 교수<ref name="Glossary"/>가 고립어설을 지지했다.<ref name="Cambridge99"/><ref name="KNK92"> Kim, Nam-Kil (1992), "Kore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Linguistics, 2, pp. 282–86, scholars have tried to establish genetic relationships between Korean and other languages and major language families, but with little success.</ref><ref name="Glossary">{{서적 인용 |성1=Campbell |이름1=Lyle |성2=Mixco |이름2=Mauricio J. |제목=A Glossary of Historical Linguistics |위치=Salt Lake City |출판사=Edinburgh University Press |쪽=7, 90-91 |isbn=9780874808933 |인용문= While ‘Altaic’ is repeated in encyclopedias and handbooks most specialists in these languages no longer believe that the three traditional supposed Altaic groups, Turkic, Mongolian and Tungusic, are related.[p=7] Korean, A language isolate [...] Korean is often said to belong with the Altaic hypothesis, often also with Japanese, though this is not widely supported.[p=90-91] }}</ref> 한국어를 고립어 또는 한국어족으로 분류하는 언어학자들은 알타이어족과 한국어의 공통 어휘가 적거나 재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립어는 외부 접촉이 적은 고립된 곳에서 매우 적은 화자들이 사용하는데, 한국어는 약 8천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하므로 고립어로 분류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만약 한국어 고립어설이 맞다면 고립어중 한국어는 가장 많은 화자있는 언어다. 또한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 공통 어휘가 적은 이유는 일본어와 비슷하게 한자를 차용어로 쓴 단어가 있어서고, 현재 한국어 한 부분이었던 부여어족 기록이 적으므로 부여어족 기록을 더 발견하면 주장은 달라지므로 이들 의견은 여전히 논쟁중이다. 한편, [[유네스코]] 등 일부 단체나 학회에서 표준어와 차이가 큰 제주 방언을 [[제주어]]로 분리하여 [[한국어족]]이라고 본다. 또한 2000년대 초 고립어설을 지지한 스테판 게오르크도 제주어와 함께 한국어족을 이루는게 맞다고 견해를 정정했다.<ref>Other isolated languages of Asia</ref> 또한 학자들은 한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알타이어족은 같은 어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사하지만 한국어 경우 기초 어휘에 공통점이 적다고 말한다. 즉 칼 멩게스는 알타이어족은 단순히 SVO만 일치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므로 일치하는 공통 어휘만 많다면 인도유럽어족처럼 같은 어족으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티너 로베이츠]]는 한국이 중세에 한글을 발명했지만 근대까지 한자를 쓰며 소통하며, 한국 고유어가 사라졌으므로 알타이어족의 공통 어휘가 많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ref>{{저널 인용|제목=THE ALTAIC LANGUAGES|저널=Bulletin of the American Association of Teachers of Slavonic and East European Languages|성=Menges|이름=Karl H.|url=https://www.jstor.org/stable/43191627|날짜=1946|권=3|호=4|쪽=74–76|issn=2325-7717}}</ref> ===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 === {{참고|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 일본어와 한국어의 연관은 과거부터 여러 학자가 지적하였다. 특히 문법이나 어휘의 유사성에서 창안된 주장이다. 서구 문화권과 비유하자면 [[독일어]]와 [[영어]]의 관계이다. 다만 고대 한국어 자료가 부족하여 둘 간의 실제 연관은 가설 단계이다. 이노우에 키요시({{lang|ja|井上淸}})는 언어에서 중요한 1인칭에 주목했다. 일본 고어에서 1인칭은 나(己)라는 한자를 사용하며 나(な)라고 읽었는데 일본 1인칭 고어가 한국어 1인칭인 "나"와 같다. 일본어 1인칭이 동일한 곳은 중국 남부나 북부가 아닌 한국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s://kotobank.jp/word/%E5%B7%B1-453569</ref> 기본 어휘 중 한국어에서 숫자 1을 뜻하는 "하나"와 일본어에서 최초, 처음을 뜻하는 “はな”(하나)가 같은 점이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일본어가 친족 관계 가능성을 지닌 언어는 오직 한국어뿐이며, 만일 그렇다면 공통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조몬시대]] 중기 이전으로 추정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1>憎惡의 根源 |ur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80718/8604412/1 |출판사=동아일보 |저자=[[박경리]] |날짜=2008-07-18 |확인날짜=2019-09-22 }}</ref> 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에 유사성이 있는 이유는 한국인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했던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I. Beckwith)는 [[고구려어]] 어휘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며 신라어를 포함하지 않는 [[부여어족]]의 성립을 주장하였으나<ref>크리스토퍼 벡위드(2006), 《고구려어: 일본을 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 서울: 고구려연구재단, {{ISBN|8991448658}}.</ref> 주류 학계에서는 수용하지 않고 현재 소수설이다. [[알렉산더 보빈]]은 부여어족의 근거로 들리는 지명 어휘의 일치는 한국어족 어휘가 아니며 고구려어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 남부에 잔존한 [[일본어족]] 언어 흔적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 비알타이어 기층설 === 소수 가설 중 하나로 대한민국 언어학자 [[김방한]]은 비알타이어 기층설을 주장한다. 김방한은 한국어 기층에 원시 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인 비알타이어 기층이 있고, 그 위에 알타이어계 요소가 덮혔거나, 그 반대로 비알타이어가 알타이 기층에 덮혀서 한국어 뼈대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는 원시 한반도어와 계통적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편의상 고시베리아어족으로 분류하는 [[니브히어]](길랴크어)를 지목하였다. 이후 [[유하 얀후넨]]은 한국어와 니브흐어 사이에 파열음 일치를 들어 고대에 접촉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 외에는 [[안드레 에카르트]] 등 한국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으나, 계통적 관계를 규명한 기존의 연구들로 반박하였다.<ref>{{harvnb|Lewin|1976|p=394|ref=lewin}}: "The German Koreanist Eckardt has in fact sought Korean affinities in Indo-European, which years before had led to the strange hypothesis of an "Eurasian language family". On the other hand Eckardt in one of his essays (1971) has attempted to derive Japanese from Korean. Two studies, written in German by Korean scholars, which came about under his influence, also opposed the prevailing view of a genetic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languages or between Korean and the Altaic languages"</ref> == 음운 == {{본문|한국어 음운론}} === 모음 === 다음은 [[대한민국 표준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 class="wikitable" !음소 !대표적인 음성 !적요 !예 |- | align="center"|/ㅏ/ |{{IPA|[a]}} |[[전설 비원순 저모음]], [[중설 근저모음]]<ref group="vn">전설 모음 기호 {{IPA|a}}는 전통적으로 한국어 중설 모음을 나타내는 데 쓴다. 일반적으로 {{IPA|[ɐ]}}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ref> |/'''a'''i/ 아이 {{IPA|[ai]}} |- | align="center"|/ㅓ/ |{{IPA|[ʌ]}} |[[후설 비원순 중저모음]]<ref group="vn">서울 방언 /ㅓ/는 완전한 비원순 모음이 아니라 원순과 비원순의 중간적인 발음이다. 또한 [[문화어]]에서 이 모음을 {{IPA|[ɔ]}}로 소리 낸다.</ref> |/'''ʌ'''di/ 어디 {{IPA|[ʌdi]}} |- | align="center"|/ㅗ/ |{{IPA|[o]}} |[[후설 원순 중고모음]] |/'''o'''i/ 오이 {{IPA|[oi]}} |- | align="center"|/ㅜ/ |{{IPA|[u]}} |[[후설 원순 고모음]] |/'''u'''ɾi/ 우리 {{IPA|[uɾi]}} |- | align="center"|/ㅡ/ |{{IPA|[ɯ]}} |[[후설 비원순 고모음]] |/g'''ɯ'''/ 그 {{IPA|[kɯ]}} |- | align="center"|/ㅣ/ |{{IPA|[i]}} |[[전설 비원순 고모음]] |/'''i'''ma/ 이마 {{IPA|[ima]}} |- | align="center"|/ㅐ/ |{{IPA|[ɛ]}} |[[전설 비원순 중저모음]]<ref group="vn" name="n3">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노년층을 제외하고 /ㅐ/와 /ㅔ/의 구별을 상실하며 거의 같은 소리로 발음한다. 그 음성은 {{IPA|[ɛ]}} 와 {{IPA|[e]}}의 중간 소리다. 또 서울 방언과 평양 방언 모두 단모음 음소로서 /ㅚ/, /ㅟ/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방언에서 /ㅚ/는 보통 {{IPA|[we]}}(평양 방언에서는 {{IPA|[wɛ]}})로 나타나며 /ㅟ/는 {{IPA|[wi]}}로 나타난다. 따라서 단모음의 종류가 가장 적은 서울 방언 화자의 경우 단모음은 일곱 가지(/ㅏ, ㅓ, ㅗ, ㅜ, ㅡ, ㅣ, ㅔ/)밖에 없다.</ref> |/h'''ɛ'''/ 해 {{IPA|[hɛ]}} |- | align="center"|/ㅔ/ |{{IPA|[e]}} |[[전설 비원순 중고모음]]<ref group="vn" name="n3"/> |/nu'''e'''/ 누에 {{IPA|[nue]}} |- | align="center"|/ㅚ/ |{{IPA|[ø]}} ({{{IPA|[we]}}} 허용) |[[전설 원순 중고모음]]<ref group="vn" name="n3"/> |/s'''ø'''/ 쇠 {{IPA|[sø]}} |- | align="center"|/ㅟ/ |{{IPA|[y]}} ({{{IPA|[wi]}}} 허용) |[[전설 원순 고모음]]<ref group="vn" name="n3"/> |/'''y'''/ 위 {{IPA|[y]}} |} <references group="vn"/> === 자음 === {| border="2" cellpadding="4" cellspacing="0" style="margin: 1em 1em 1em 0; background: #f9f9f9; border: 1px #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text-align: center;" !&nbsp; ! style="padding: 2px;"|[[양순음|양순]] !! style="padding: 2px;"|[[치경음|치경]] !! style="padding: 2px;"|[[치경구개음|치경구개]] !! style="padding: 2px;"|[[권설음|권설]] !! style="padding: 2px;"|[[경구개음|경구개]] !! style="padding: 2px;"|[[연구개음|연구개]] !! style="padding: 2px;"|[[성문음|성문]] |- ![[파열음]] | {{IPA|p b}} || {{IPA|t d}} || || || || {{IPA|k ɡ}} || |- ![[비음]] | {{IPA|m}} || {{IPA|n}} || || || || {{IPA|ŋ}} || |- ! [[마찰음]] | || {{IPA|s z}} || {{IPA|ɕ ʑ}} || || {{IPA|ç}} &nbsp;&nbsp; || {{IPA|x}} &nbsp;&nbsp; || {{IPA|h ɦ}} |- ! [[파찰음]] | || || {{IPA|ʨ ʥ}} || || || || |- ! [[탄음]] | || {{IPA|ɾ}} || || || || || |- ! [[접근음]] | {{IPA|w}} || || || || {{IPA|j}} || {{IPA|ɰ}} || |- ! [[설측음]] | || || || {{IPA|ɭ}} || {{IPA|ʎ}} || || |} {| border="2" cellpadding="4" cellspacing="0" style="margin: 1em 1em 1em 0; background: #f9f9f9; border: 1px #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text-align: center;" |+ 음운 체계 | colspan="2" | |style="padding: 2px;"|[[양순음]] |style="padding: 2px;"|[[치경음]] |style="padding: 2px;"|[[경구개음]] |style="padding: 2px;"|[[연구개음]] |style="padding: 2px;"|[[성문음]] |- | ROWSPAN="3"| [[파열음]] | [[평음]] || ㅂ ({{IPA|b/p}}) || ㄷ ({{IPA|d/t}}) || || ㄱ ({{IPA|g/k}}) || |- | [[경음]] || ㅃ ({{IPA|p͈}}) || ㄸ ({{IPA|t͈}}) || || ㄲ ({{IPA|k͈}}) || |- | [[격음]] || ㅍ ({{IPA|pʰ/bʱ}}) || ㅌ ({{IPA|tʰ/dʱ}}) || || ㅋ ({{IPA|kʰ/gʱ}}) || |- | rowspan="3" |[[파찰음]] | [[평음]] || || || ㅈ ({{IPA|ʥ/ʨ}}) || || |- | [[경음]] || || || ㅉ ({{IPA|ʨ͈}}) || || |- | [[격음]] || || || ㅊ ({{IPA|ʨʰ/ʥʱ}}) || || |- | ROWSPAN="2"| [[마찰음]] | [[평음]] || || ㅅ ({{IPA|sʰ/zʱ}}) || || || rowspan="2" |ㅎ ({{IPA|h/ɦ}}) |- | [[경음]] || || ㅆ ({{IPA|s͈}}) || || |- | COLSPAN="2"| [[비음]] | ㅁ ({{IPA|m}}) || ㄴ ({{IPA|n}}) || || ㅇ ({{IPA|ŋ}}) | |- | COLSPAN="2"| [[유음]] | || ㄹ ({{IPA|l}}) || || || |} * /ㅅ/는 {{IPA|[sʰ]}}, {{IPA|[j]}}나 {{IPA|[i]}} 앞에서는 {{IPA|[ɕʰ]}}가 된다. 비음 앞과 뒤에서는 {{IPA|[zʱ]}}로 발음된다. (단, {{IPA|[j]}}나 {{IPA|[i]}} 앞에서는 {{IPA|[ʑʱ]}}가 된다.) * /ㅎ/는 {{IPA|[h]}}. {{IPA|[j]}}나 {{IPA|[i]}} 앞에서는 {{IPA|[ç]}}, {{IPA|[w]}}나 {{IPA|[u]}} 앞에서는 {{IPA|[ɸ]}}, {{IPA|[ɰ]}} 앞에서는 {{IPA|[x]}}가 된다. 모음, 비음 뒤에서는 {{IPA|[ɦ]}}로 발음되며, 비음 뒤에서는 음가가 사라진다. * /ㅂ, ㄷ, ㅈ, ㄱ/는 {{IPA|[p], [t], [ʨ], [k]}}. 모음 사이, 비음 뒤에서는 {{IPA|[b], [d], [ʥ], [ɡ]}}가 된다. * /ㄹ/는 모음 사이에서는 {{IPA|[ɾ]}}, 어말에서 또는 겹으로 날 때는 {{IPA|[l]}}. 겹으로 날 때 {{IPA|[i]}}나 {{IPA|[j]}} 앞에서는 {{IPA|[lʲ]}}가 된다. 어두에서는 [[두음법칙|음가가 없어진다]]. * 위의 표에서 [[평음]]. [[경음]], [[격음]]은 [[기식성]]에 의해 나눈 것이고, [[긴장성]]에 의해 [[무기 연음]]. [[무기 경음]]. [[유기 경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 한국어의 강세는 불규칙이다. === 형태 음소론 === 조사의 형태는 앞 소리 영향을 받는다. 은/는, 이/가, 을/를과 같이 음절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에서/서, 으로/로와 같이 음절이 끼어드는 경우도 좋다. 특히 은/는, 이/가, 을/를의 경우, 모음 연쇄르 피하고자 자음을 삽입하는 규칙적인 경우이나, 와/과, 으로/로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으로/로는 ㄹ 뒤에서 독특하게 분포한다. 와/과 역시 중세 한국어에서 으로/로와 마찬가지로 ㄹ뒤에서 '와'를 쓰는 독특한 분포를 보였으나 현대 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와/과의 경우 이중모음/ㅘ/가 모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음 연쇄 환경이 아니고 사용 빈도에 따라 분포를 설명한다.<ref>{{저널 인용 |성1=남 |이름1=성현 |성2=김 |이름2=선회 |날짜=2015 |제목=제약서열과 사용빈도 |url=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49997 |저널=언어연구 |출판사=한국현대언어학회 |doi=10.18627/jslg.31.3.201511.605 |확인날짜=2016-07-17}}</ref> {| class="wikitable" |+ 한국어 조사 ! 자음 뒤 !! 모음 뒤 |- | colspan="2" | -의 |- | -은 || -는 |- | -이 || -가 |- | -을 || -를 |- | -과 || -와 |- | -으로 ||-로 |} 형태 음소론적 차이는 일부 동사에서도 관찰된다. == 문법 == {{본문|한국어 문법}} 한국어는 [[어근]]과 [[접사]] 등 특정 표지가 붙어서 단어 기능을 결정하는 [[교착어]]로 분류한다. 특히 [[조사 (품사)|조사]]에 따라 문법적 격을 정하며 이 때문에 [[고립어]]에 비해 어순이 비교적 유동적이나, 일반적으로 [[SOV형]] 어순, 곧 주어-목적어-서술어 구조다. 또한 일반적인 경우 서술어는 반드시 문장의 끝에 위치하여야 한다. 조사는 문법적 격을 나타내는 격조사, 단어끼리 이어주는 접속조사, 특별한 의미를 가하는 보조사로 나누며, 조사가 붙는 체언이 개음절인지 폐음절인지에 따라 다른 조사가 붙기도 한다. 일례로, '사람'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이'이나, '머리'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가'이다. [[어미]] 다양성이 특징으로, 문장 내에서 기능이나 수식은 물론 미묘한 분위기까지 묘사한다. 특히 주로 종결 어미나 선어말 어미에 따라 드러나는 낮춤말과 평어, 높임말의 복잡한 존비어 체계가 특징이다. 화자 간에 존댓말(높임말)과 반말(낮춤말, 평어)에 합의를 명확하게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소통할 때 어색한 상황이 발생한다.<ref>{{뉴스 인용|제목=미수다 “한국어 존댓말 그것이 궁금하다|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04080132361001|날짜=2008-04-08|확인날짜=2018-10-06|뉴스=Newsen(뉴스앤미디어)}}</ref> 이러한 언어와 호칭 선택 문제 때문에 갈등과 권위적 상황이 나타난다는 분석도 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럼]미묘한 호칭 갈등|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021911275&code=990000|날짜=2011-01-02|확인날짜=2018-10-06|뉴스=경향신문}}</ref> [[용언]]은 [[동사 (품사)|동사]]와 [[형용사]]를 포함하는데, 둘의 어미 변화가 거의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다. 용언의 기본형은 모두 종결어미의 일종인 '-다'로 끝나는 것으로 취급되며, 그 기능에 따라 조금씩 변하나 대부분 여전히 '다'로 끝나 문장의 끝을 암시한다. 그 시제는 현재, 과거, 미래형으로 나누며, 이 또한 동사의 종류나 기능에 따라 다양한 어미가 있다. == 어휘 == {{본문|한국어의 고유어|한국어의 한자어|한국어의 외래어}} 한국어 [[어휘]]는 크게 [[한국어의 고유어|고유어]](흔히 이르는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로 분류한다. 고유어는 한국어 기층을 형성하는 고유 어휘로, 사용 빈도가 높은 [[일상어]]는 거의 대부분 고유어다. 음운적으로 ㄹ 소리로 시작하는 토착 어휘는 거의 없으며, 이는 [[알타이 제어]]의 음운론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어에 한자 비율은 일반적으로 한자 비율이 50%라는 주장이 세간에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가능한 많은 영어와 독일어에서 번역하거나 차용한 현대어 낱말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예를 들어 Society=사회)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우리말 70%가 한자말? 일제가 왜곡"|url=http://hani.co.kr/arti/culture/religion/376204.html|날짜=2009-09-11|확인날짜=2018-10-06|뉴스=한겨레|archive-date=2018-08-26|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826214445/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76204.html|url-status=}}</ref> 또한, 국어사전이 수록하는 한자어 상당수는 한문 문장에만 용례가 있고, 한국어에서는 용례 없는 단어들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를 보면 우리말의 낱말 사용 비율은 토박이말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였다. 외래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한자 이외 외국어에서 유래한 어휘다. 근대 이전에는 불경에서 간접 차용한 [[산스크리트어]](한자어 형태)를 비롯하여 [[몽골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차용어]]로 쓰였으며 (예를 들어 송골매), 일제강점기에는 영어와 독일어 현대어를 한자로 차용하여 사용한 단어가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등 소수의 인도유럽어족의 어휘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으나 현재 사용 빈도는 매우 적다. 예를 들어 "Part time job"이라는 말을 일본에서 쓰던 독일어인 "아르바이트(Arbeit; 일<sub>事</sub>)"라고 부르며 원래의 아르바이트의 의미와 다르게 쓰인 말들이 있다. 현대에는 영어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영어에서 많은 차용어가 들어와서 사용한다. == 문자 == {{본문|한글|이두|향찰|구결}}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한 문자 체계는 한자다. 한문 유입 이후, 고유명사 표기 등 한국어 표기 필요성이 대두하였으며, 1934년 경주에서 발견한 [[임신서기석]]은 어순이 한문 어순이 아닌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하여 한자를 이용해서 한국어를 표기하고자 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이 임신서기석에 사용한 변칙 한문체를 서기체 또는 의국체라고 한다. 단음절어이며 [[고립어 (언어유형학)|고립어]]인 [[한자]]는 다음절어이면서 [[교착어]]인 한국어의 표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 중에서 [[이두]], [[구결]]이 있었으며 [[향찰]]은 소멸하였다.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보다는 문어체 한문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구어(한국어)와 문어(한문) 이중 체계를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현재 한국어 표기에 쓰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 있었으나, 1940년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을 발견하면서 발성 기관을 본떠서 만든 사실을 발견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적었다. 한글 창제 이후 조선에서 소설이나 편지 등에서도 많이 사용하였다. ([[국한문혼용]]) 현재 대한민국에서 한글이 공식문자이고, 일부 한자어는 한자를 괄호에 넣어 병기하지만 한자 사용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소련|구 소련]] 지역에서는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가급적 한글로만 한국어를 표기한다.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 여러 소수 민족 언어를 대상으로 한 로마자 표기 정책 일환으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안을 승인했지만, 실제 로마자 표기안을 마련하여 생활에 적용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국어 문자생활에서 로마자로 한글·한자를 대체하려던 방안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고유명사의 표기에 쓰는 현재 로마자 표기 규범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로마자 [[두문자어]] 표기와 일부 고유 명사 표기에 로마자를 일부 제한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방언 == {{본문|한국어의 방언}} [[파일:Korean dialect dragonfly.png|섬네일|'[[잠자리]]'를 부르는 여러 가지 말.]] [[파일:Koreandialects.png|섬네일|한국어의 지역별 방언 구분]] [[한국어의 방언]]은 [[경기 방언]], [[영동 방언]], [[서북 방언]],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동북 방언]], [[재미 한국어]], [[재중 한국어]], [[재일 한국어]] 등으로 나눈다. 경기 방언과 황해 방언, 강원 방언(영서 방언/영동 방언), 충청 방언을 중부 말로 합쳐 일컫기도 한다. 제주 방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방언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 표준어는 서울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준어인 [[문화어]]는 분단 이전 남한 표준어에 기반을 두고 서북 방언 어휘들을 추가하였다. 최근에 미국 등 영어 사용 국가로 이민이 늘어나면서 이민 2세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계 외국인들이 영어를 번역한 듯한 한국어(번역체)를 사용하기도 한다.<ref>[http://yoksa.aks.ac.kr/jsp/ll/Directory.jsp?gb=1 한국 방언 자료집] - ASX,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 한국어의 남북 간 차이 === {{본문|한국어의 남북 간 차이}}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0-05-29}}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약 80년 가까이 나뉘어 언어상 특징도 적지만 다른 점이 있다. 서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는 없으며 소수 단어를 빼고서 모든 언어와 문법은 일치한다. 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건데기나 지팽이와 같이 'ㅣ'의 모음 역행 동화를 인정하는 경향이 크며,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두음 법칙]]은 없으므로 여자, 염원, 노동 대신 녀자, 념원, 로동과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문체나 구어체를 활용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어감이 강한 표현을 많이 쓴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찔리우다'와 같이 대한민국보다 보조용언을 겹쳐 쓰는 경우가 많으며, 접미사 '들'을 많이 쓰는 경향도 있다. 어휘 면에서는 특히 많은 차이를 보이며, 외래어 수용에 큰 거리낌이 없는 대한민국에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말다듬기로 고유어를 많이 사용한다. == 외국어로서 == [[미국]],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프랑스]], [[폴란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러시아]] 등지에서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에 따른 국제적 위상 확대와 [[한류 (문화)|한류]] 등 문화적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과거에 영어, 일본어 등 유럽, 미주 및 일본을 중심으로만 한국어 학습용 교재를 발간했으나, 근래에는 한국어 학습 동기 다변화와 국내 외국인 수 증가로 중국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한국어 교재를 발간한다. [[고려인 강제 이주]]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을 포함하여 예전 소련 일부 지역에서도 사용한다. 조선족이 조선말을 사용하면서 둥베이 지역에서도 사용한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이 발표한 '미국 국무부 외국어 직무수행 평가서'에 따르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와 더불어 한국어를 미국인이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superhard language)로 분류하는데, 이는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 한국어 어원이 아예 다른 탓이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417248|제목=미국인들 배우기 가장 어려운 언어는 한국·중국·일본·아랍어|성=이은주 기자|이름=|날짜=2006-08-13|출판사=중앙일보|확인날짜=2017-12-06}}</ref> 한국어를 배우는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국어를 학문으로서 배운다는 의견도 존재한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koreaherald.com/lifestyle/Detail.jsp?newsMLId=20100720000729 |제목 = More foreigners study Korean academically |확인날짜 = 2010-08-05 |저자 = Koh Young-aah |날짜 = 2010-07-20 |출판사 = The Korean Herald |언어 = 영어 |archive-date = 2010-08-11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811161607/http://www.koreaherald.com/lifestyle/Detail.jsp?newsMLId=20100720000729 |url-status = }}</ref> === 한국어 검정시험 === ==== 대한민국 ==== 대한민국에는 현재 한국어 능력을 검정하는 시험이 몇 가지 있다. [[한국어능력시험]](韓國語能力試驗,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 ; TOPIK), [[국어능력인증시험]](國語能力認證試驗, Test of Korean Language;TOKL), [[KBS 한국어능력시험]](Korean Language Test) 등이 있다. * [[한국어능력시험]](韓國語能力試驗, TOPIK) *: 국립국제교육원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인정하는 자격시험으로 매년 4월과 9월에 시행한다. (대한민국에서는 2007년부터, 일본에서는 2008년부터 연 2회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글능력검정시험과 달리 1, 2급이 초급이고 3, 4급이 중급, 5, 6급이 고급단계이다. 대한민국, 일본 외에 세계 28개국에서 실시하는 국제적 시험이다. 외국인이 유학으로 대한민국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할 때 이 시험 성적 증명서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많은 외국인 대상 어학당(어학원)에서 이 시험 결과로 반을 편성하며 TOPIK 시험을 위해 공부를 가르친다. TOPIK 시험은 듣기, 읽기, 쓰기가 있다. TOPIK에 말하기 평가를 신설한다는 뉴스가 계속 있었고, 2019년에 해외에서 "말하기 평가" 모의시행을 열었고, 2023년부터 TOPIK에 말하기 평가를 신설하여 2023년부터 말하기 평가, 듣기, 읽기, 쓰기로 시험을 진행한다.<ref>{{뉴스 인용 |제목=한국어능력시험도 말하기 평가 만든다…2023년 본격 도입 |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118134400004 |출판사=연합뉴스 |저자=이효석 |날짜=2019-01-20 |확인날짜=2019-09-22 }}</ref> * [[세계한국말인증시험]]<ref>[http://www.klpt.org 세계한국말인증시험 웹사이트] {{웨이백|url=http://www.klpt.org/ |date=20170610091212 }} 2000년에 위원회를 발족한 세계한국말인증시험(KLPT)은 2001년부터 한글학회 주관하에 미주, 유럽, 동남아 등 40여 곳에서 시험을 시행해 왔다.</ref>(KLPT) *: 한글학회가 주최하는 자격시험으로 4월, 10월에 시행한다. 2006년까지 1,4,7,10월 연 4회 시행했으나, 2007년부터 연 2회로 단축했다.(적은 수험자 인원수를 원인으로 추측한다.) 평가는 500점 만점 점수제로 토익과 같은 형태다. * [[한국어 레벨테스트]](KLT) *: 점수제이고 1000점 만점이다. 시험시간은 90분이고 비교적 단시간에 시험을 볼 수 있다. 한국,일본외에 중국과 미국에서도 수험이 가능하다. 2004년부터 개시했지만 2009년 1월부터 시행하지 않았다. ==== 일본에서 한국어 시험 ==== 일본에 시행하는 네 가지 한국어 시험 가운데 일본에서 잘 알려진 시험은 한글능력검정시험과 한국어능력시험이다. 한글능력검정시험을 뺀 나머지 모든 시험은 대한민국 표준어 시험이기 때문에 표준어가 기준이며, 이와 다른 문화어 맞춤법이나 어법은 오답으로 처리한다. 이외 일본 [[대학 입시 센터 시험]]은 [[2002년]]부터 한국어를 포함한다. * [[한글능력검정시험]] *: 일본 특정 비영리법인 한글능력검정협회가 주최하는 자격시험으로 6월경(연 2회)에 실시한다.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이 가장 잘 아는 시험이다. 5급이 가장 낮은 급수이고 4급<3급<준2급<2급<1급순으로 급수가 올라간다. 일본 국내에서만 인정하며 등급이 영어검정(일본)시험과 거의 같으므로 영어검정시험과 비교 대조하기도 한다. 2006년부터 "준 1급"을 없앴다. 1, 2급은 문제 지문을 포함하여 모든 글을 한국어로 표기한다. 또한, 이 시험은 답을 적을 때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느 한쪽으로 일관성이 있으면 정답으로 간주한다. 근래 한류 영향으로 초급 수험자는 상당히 증가했으나 반대로 1, 2급 등 고급 레벨에는 수험자 수가 매우 적다. 2004년 전후에 상급 시험 문제는 난도가 계속 상승하는 반면, 3급 이하 급수는 합격률이 90%로 문제가 쉬운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2006년 다시 출제 기준과 난이도를 조정하여, 낮은 급수도 난도가 대폭 상승해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난이도 유동에 따라 자격 시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출처|날짜=2017-12-06}} == 인터넷에서의 한국어 == {{참고|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 목록}} 한국어 문서가 전 세계 [[월드와이드웹|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에 4.1%로, 이는 영어(35.8%), 중국어(14.1%), 일본어(9.6%), 스페인어(9%), 독일어(7%)에 이어 전 세계 6위이다.<ref name="dtimes20050316">{{뉴스 인용 |저자=이택수 |제목=한글 홈피 점유 4.1% 중국·일본어 이어 6위 |url=http://www.dt.co.kr/contents.htm?article_no=2005031602010731671002 |출판사=[[디지털타임스]] |날짜=2005-06-16 |확인날짜=2011-01-10 |인용문=온라인에서의 언어 분포는 영어가 35.8%로 1위를 차지했고. 중국어가 14.1%, 일본어가 9.6%, 스페인어가 9%를 차지했으며, 한글은 독일어(7%)에 이어 4.1%로 6위에 올랐다.}}</ref> 웹상에서의 한국어 사용 인구는 전 세계 75억여 명의 인구<ref name="un_worldpopulation2008">{{웹 인용 |1= |제목=World Population Prospects: The 2008 Revision |url=http://esa.un.org/unpp |출판사=[[국제 연합]] |연도=2009 |확인날짜=2011-01-10 |언어=영어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107202528/http://esa.un.org/unpp |보존날짜=2010-01-07 |url-status=dead }} 해당 웹페이지의 지역 항목에서 'World'를 선택하면 조회 가능.</ref> 중 약 1%<ref>{{웹 인용 |제목=Ethnologue - Korean |url=http://www.ethnologue.com/show_language.asp?code=kor |출판사=[[국제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언어=영어 |확인날짜=2011-01-10 |인용문=Population 42,000,000 in Korea, South (1986). Population total all countries: 66,305,890.}}</ref>에 해당한다. == 한국어 사용 국가 == * {{국기나라|대한민국}}(국가 공용어) * {{국기나라|미국}}(재미동포, 한인타운 등지에서 사용, 주요 외국어 [[SAT]] 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카자흐스탄}}(고려인,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키르기스스탄}}(고려인,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우즈베키스탄}}(고려인,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투르크메니스탄}}(고려인,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 공용어) * {{국기나라|일본}}(인구의 약 0.8% 사용, 재일동포가 사용,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공항 및 지하철 안내 언어) *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공용어) * {{국기나라|러시아}}(북-러양국문화인민언어선택) * {{국기나라|튀르키예}}(제2외국어 과목 채택) * {{국기나라|아제르바이잔}}(제2외국어 과목 채택) == 사용 빈도가 높은 낱말 == {{참고|wikt:부록:자주 쓰이는 한국어 낱말 5800}} [[국립국어원]]은 지속적으로 사용 빈도가 높은 한국어 기초 어휘 관련 자료들을 연구 및 제공한다. 그중에서 한국어 낱말 단어를 수록한 "한국어 학습용 어휘" 6,000 낱말을 2004년 12월에 발표하였으며 이후 이러한 자료를 세계인들이 사용하도록 [[한국어기초사전]]을 통해 어휘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한국어 어휘에 대한 사용 빈도 자료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학습 및 교육 등에 중요한 근거 자료로 그 활용도가 높다.<ref>국립국어원, [https://www.korean.go.kr/attachFile/viewer/201905/7fe221a2-da7b-4187-9e98-5d5d55642f9f_0.pdf.htm 2018년 국어기초어휘선정및어휘등급화연구].</ref><ref>국립국어원, 2004.12, '한국어 학습용 어휘 6,000 낱말'</ref><ref>{{뉴스 인용 |제목=동사만으로도 말 되는 한국어 |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261322.html |출판사=한겨레 |저자=김철호 |날짜=2008-01-06 |확인날짜=2019-09-22 }}</ref> == 같이 보기 == * [[한국 수어]] * [[한국어의 언어 순수주의]] * [[한국어의 품사]] * [[SOV형]] * [[한글]] * [[한글날]] * [[훈민정음]] * [[긴 한국어 낱말]] * [[잰말 놀이#한국어|발음하기 힘든 한국어 문장]] * [[한국어 사전]] * [[한국어 위키백과]] * [[한자]] * [[한자어]] * [[한자 문화권]]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www.itkc.or.kr/ 한국 고전 번역원] * [http://www.korean.go.kr/ 국립국어원] {{한국어}} {{대한민국 주제}} {{전거 통제}} [[분류:한국어| ]] [[분류:대한민국의 언어]]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어]] [[분류:한국의 상징]] [[분류:교착어]] [[분류:SOV형 언어]] [[분류:한국어족]]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문자 정보 |이름 = 한자 |색 = 표어 |유형 = 표어문자 |IPA=[ha(ː)n.ja.ʌ], [ɦa(ː)n.za.ʌ] |그림 = Hanzi.svg |그림_설명 = 정체자(흑색)와 간체자(적색)의 표기 |표기 언어 = [[일본어]], [[한국어]]([[국한문혼용]]), [[중국어]]([[관화]], [[광동어]], [[민어 (언어)|민어]], [[하카어]], [[간어]], [[샹어]], [[우어]], [[진어]]), [[류큐어파]], [[좡어]], [[베트남어]]([[쯔놈]]) 등 |시기 = [[기원전 14세기]] ~ 현재 |계통1 = [[갑골 문자]] |iso15924=Hani }} {{한자 둘러보기}}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한자'''(漢字)는 [[표어 문자]]의 하나로, [[중국 대륙]]에서 발원 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본토,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일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거나 역사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 역사 == 한자의 기원을 유추할 근거는 3,000년 전 사용된 [[금문]]과 3,300년 전 사용된 [[갑골문]], 그리고 6,800년 전 사용된 [[도문 (문자)|도문]]인데, 일반으로 [[갑골문]](甲骨文)을 한자의 기원인 글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ref>'한자가 궁금하다' 9쪽, 학민사, 이규갑</ref> [[한비자]]나 [[여씨춘추]]와 같은 책을 보면, 한자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창힐은 상고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황제라는 설도 있고 황제의 사관이라는 설도 있다.<ref>같은 책, 13쪽</ref> 그 사람이 사물의 모양이나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자는 한 사람이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시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글자도 아니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1903년]] [[은허]]에서 출토된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있다. [[기원전 14세기]] ~ [[기원전 1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자는 당시 중대사를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 놓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 후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주문(籒文:大篆)을 만들었고 [[춘추 전국 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가 쓰이다가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문을 개량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한, 진의 옥리(獄吏) 정막(程邈)은 실무에 편리한 예서(隸書)를 지었고 [[한나라]] 때에는 이것을 계승한 한예(漢隸)가 문자로서 통용됐다. [[춘추 전국 시대]]에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나 종(鐘)·정(鼎) 등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후한(後漢)에 이르러 왕차중(王次仲)은 한예를 간략화하여 해서(楷書)를 만들었고 이후 이것을 정서(正書)라 하여 표준 자체로 삼았다. 즉, 이사가 소전을 제정하여 문자 대혁신을 이룩한 후 300여 년이 경과하여 한자는 해서(楷書)로서 정립된 것이다. [[목간]]과 죽간을 대체하여 필기구가 붓·먹·종이가 중심인 시대가 되자 해서가 중용되었고, [[삼국 시대 (중국)|삼국시대]]에는 모필(毛筆)로 쓰기에 편리한 초서(草書)와 행서(行書)가 나타났으며, 육조(六朝)와 [[당나라]] 때에는 서도(書道)가 문예의 일부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자의 역사, 특히 양식의 변천을 자형(字形)에 따라 고찰하면 갑골문자·금석문자·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 등 다섯 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해서 이후로는 오랜 시대에 걸쳐 변화한 흔적이 없다. 다만 서체(書體)로서 조형예술 성격을 띤 다양한 작풍이 나타났을 뿐이다. == 한자의 제작 원리 == {{본문|육서}} 한자의 형성 과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육서]](六書)라고 한다. [[후한]]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한자를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등 여섯으로 나누어 한 설명이 현재 육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기초가 되었다. == 한자의 필순 == {{위키공용분류|CJK_stroke_order|필순}} [[파일:日-bw.png|섬네일|오른쪽|300px|日의 필순]]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 예) 川, 外, 側 # 위에서 아래로 쓴다. #: 예) 三, 言, 高 # 가로획과 세로획이 교차될 때에는 가로획을 먼저 쓴다. #: 예) 十, 古, 支 # 삐침을 먼저 쓰고 파임을 나중에 쓴다. #: 예) 人, 公, 父 # 좌우 모양이 같을 때는 가운데를 먼저 쓴다. #: 예) 小, 水, 永 #: 예외) 火 # 몸과 안으로 된 글자는 몸을 먼저 쓴다. #: 예) 用, 同, 問 # 상하로 꿰뚫는 세로획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中, 事, 車 # 좌우로 꿰뚫는 가로획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女, 母 # 오른쪽 위의 점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犬, 武 ,成 # 받침이 독립된 글자가 아닐 때 받침을 맨 나중에 쓴다. #: 예) 近, 建 # 받침이 독립된 글자일 때 받침을 먼저 쓴다. #: 예) 起 # 가로획이 짧고 왼쪽 삐침이 길면 가로획부터 쓴다. #: 예) 在, 左, 友 # 가로획이 길고 왼쪽 삐침이 짧으면 왼쪽 삐침부터 쓴다. #: 예) 布, 右, 有 == 한자의 부수 == # 사람 인 (人→亻), 마음 심 (心 →忄), 물 수 (水→氵) 등의 부수는 형태가 변하여 변이 된다. #: 예) 休, 情, 江 # 칼 도 (刀), 고을 읍 (邑), 하품 흠 (欠) 등의 부수는 형태가 변하여 방이 된다. #: 예) 列, 郡, 欲 # 대나무 죽 (竹), 비 우 (雨) 등의 부수는 머리가 된다. #: 예) 笑, 雲, 電 # 사람 인 (人), 불 화 (火), 그릇 명 (皿) 등의 부수는 발이 된다. #: 예) 無, 盛 # 그 외에도 호(집 엄, 굴바위 엄), 몸(나라 국), 받침(쉬엄쉬엄갈 착), 제부수 등도 있다. #: 예) 廷, 四, 高, 行 한자의 부수는 총 214자가 있다. == 한자 문화권 == {{본문|한자 문화권}} [[파일:Chinese characters distribution.svg|섬네일|upright=0.85|420px|나라별 한자 사용 현황<br /> {{legend inline|#006622|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됨}} {{legend inline|#929b00|한자가 사용되지만 주요 문자로서 사용되지는 않음}} {{범례|#c9a400|과거에 한자가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사용되지 않음}}]]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과 [[베트남]]은 2천년 이상 [[중국]]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ref>중국 [[한나라]]의 [[한 무제|무제]]가 [[기원전 111년]] [[베트남]]의 [[남월국]]을, [[기원전 108년]] [[한반도]]의 [[고조선]]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기원전 1세기]]에는 [[베트남]]과 [[한반도]]에 한자(漢字)가 상당히 침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관자]](管子)》에 [[고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는 [[춘추 시대]]에 이미 한자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의 경우에는 중국 출신인 [[조타]]가 세운 [[남월국]]이 [[툭판 왕조]]를 멸망시킨 [[기원전 207년]]에 이미 한자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을 펴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한글]]만을 쓰고 있으며, 현재는 [[중화권]] 국가들([[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등)과 [[일본]]이 일상에서 한자를 사용한다. === 한국 === {{본문|한국어 한자}}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한글]]을 쓰지만, [[한국어]]의 단어 중 57% 정도가 [[한자어]]이며, 성명과 지명(地名)<ref>다만, [[한국의 지명|지명]]은 [[취음]](取音) 등 여러 변수가 있어서 한자로 표기된 것들 중 [[한자어]]가 아닌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독도]]는 한자로 '獨島'라고 쓰는데, 이 지명은 '돌섬'의 [[호남 방언]]인 '독섬'을 '獨'이란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거문도]](巨文島) 역시 '검은 섬'의 음차이다.</ref>은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는 자주 쓰는 한자 1,800자를 지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의 90% 정도는 이들 한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다.<ref>같은 책, 247쪽</ref> 대한민국에서는 학술 용어, 고문(古文) 해독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한자를 쓸 때는 [[정체자]]로 쓴다. === 중국 === 중국 대륙에서 중국어는 거의 [[간체자]]로 표기한다. (하지만 가끔씩은 외관상의 미를 위해 [[정체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외래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보통 [[정체자]]를 쓴다. === 대만 === [[대만]]에서는 [[정체자]]를 써서 중국어를 표기한다. === 일본 === {{본문|일본어 한자}} [[일본어]]에서는 일본의 음절 문자인 [[가나 (문자)|가나]]와 함께 쓰인다. 일본의 한자는 1949년 일본 정부가 간략화한 [[신자체]]이며, 일본어 한자는 음독(音讀, 일본식 한자음)과 훈독(訓讀, 한자를 같은 뜻의 일본 고유어로 읽는 것)이 함께 쓰이므로 고유어도 한자로 나타낸다. 이 방식은 고유어를 보존하면서 음절 길이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자 읽기가 복잡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인명]] 등 [[고유명사]]나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한자 위에는 읽는 법을 다는 [[후리가나]]가 있다. 일본어에서 한자는 명사, 동사와 형용사의 어간 및 일부 부사에 쓰이고, 가나는 문법 기능을 나타내는 토씨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표기할 때에 주로 쓰인다. === 베트남 === {{본문|베트남어 한자}} [[베트남]]에서는 [[쯔꾸옥응으]]라고 하는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므로, 일상에서 한자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어의 단어에는 [[한국]]의 [[한자어]]와 비슷한 [[한월어]]가 있다. 베트남어인 [[쯔놈]]도 한자에서 유래했다. == 이민주 == 다른 문자로 된 문헌을 한자로 번역하는 것을 '''한역'''(漢譯)이라고 한다. "한역"이라는 말은, 특히, [[고대]]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 특이한 한자 == [[파일:Zhé.svg|섬네일|‘수다스러울 절’은 龍(용 룡) 네 개로 이루어진 한자이다.|200px]] [[파일:Biáng_(regular_script).svg|섬네일|뱡뱡몐을 나타내는 한자 ‘뱡’|200px]] 실제로 한자는 [[#한자의 분류|제자 원리]]에 따라 무한히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있는 문자 중에서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기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니코드]] 5.0에 포함된 가장 복잡한 한자는 <span style="font-size:xx-large">{{한자 글꼴|𪚥}}</span>(수다스러울 절, U+2A6A5)로, 龍(용 룡)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고 16 × 4 = 64획이다. 이 한자는 조엘 벨라센(Joël Bellassen)(1989) 등에 따르면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어 한자 중 가장 복잡하며, [[5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64획으로 <span style="font-size:xx-large">{{한자 글꼴|𠔻}}</span>(뜻 미상, 음은 정<ref>[[강희자전]]에서 音政이라 소개되어있다.</ref>,八부 62획, U+2053B)이 있으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자는 興(일어날 흥)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다.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산시성 (섬서성)|산시성]](섬서성)에서 유명한 면 음식인 [[뱡뱡몐]]을 가리키는 57획짜리 한자이지만 방언에서만 사용되는 문자로 취급되어 자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현대 한자 자전에 나오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span style="font-size:xx-large">{{한자 글꼴|齉}}</span>(코 막힐, 코를 킁킁거릴 낭)으로 36획이다. 이 밖에 일부 한자의 ‘고자’(古字)는 상당히 복잡한 경우가 있다. 그 예로 우레 뢰(雷)의 고자는 밭 전(田)이 가로로 4자, 그 밑으로 돌아올 회(回)가 가로로 4자 다시 밭 전이 4자로 된 것이 상하로 2개 있는 모양, 도합 128획이다.<ref>{{뉴스 인용|제목 = 대략 난감? ‘난해한 한자’ 인터넷 투표|url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46049.html|출판사 = 한겨레|날짜 = 2007-10-26|확인날짜 = 2008-03-17}}</ref> == 같이 보기 == * [[갑골문자]] * [[한문]] * [[한자 문화권]] * [[한국어]] * [[훈민정음]] ** [[한국어 한자]] ** [[한국제 한자]] ** [[한국 한자음]] * [[정체자]](正體字) * [[간체자]](簡體字) * [[신자체]] * [[구자체]] * [[여진 문자|여진문자]] * [[서하 문자|서하문자]] * [[거란 문자|거란문자]] * [[漢字辭典]]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Chinese characters|한자}} {{위키문헌|분류:한자}} * [http://www.itkc.or.kr/ 한국고전번역원] * [http://zonmal.com 존 한자사전] * [http://kldp.net/hanja/ KLDP.net: 한자한글변환 프로젝트] {{전거 통제}} [[분류:한자| ]] [[분류:동아시아의 문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의회 정보 | 배경색 = #c19431 | 글색 = #ffffff | 이름 = 대한민국 국회 | 원명 =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 | 의회임기 = [[대한민국 제22대 국회]] | 문장_pic =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 문장_res = 150px | 문장_alt = 대한민국 국회의 문장 | 로고_pic = Communication logo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 로고_res = 200px | 로고_alt = 대한민국 국회의 로고 | 의회 체제 = 단원제 | 개회 = [[1948년]] [[5월 31일]] | 의원= | 의장1칭호 =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의장]] | 의장1 = [[우원식]] | 정당1 = | 의장선거1 = | 의장2칭호 =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부의장]] | 의장2 = [[이학영]] ([[더불어민주당]])<br /> [[주호영]] ([[국민의힘]]) | 정당2 = | 의장선거2 = | 의장3칭호 = [[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사무총장]] | 의장3 = [[김민기 (정치인)|김민기]] | 정당3 = | 의장선거3 = | 정원 = {{#invoke:wd|property|Q494162|P1342}}석 | 의원임기 = 4년 | 의회1 = | 의회2 = | 그림1 = 22nd South Korea National Assembly.svg | 그림1_res = 300px | 그림1_alt = | 그림2 = 20140808다문화가족과 함께119서울투어98.jpg | 그림2_res = 300px | 그림2_alt = | 정당구성1 = * {{colorbox|#152484|border=darkgray}} [[더불어민주당]] (170) * {{colorbox|#E61E2B|border=darkgray}} [[국민의힘]] (108) * {{colorbox|#0073CF|border=darkgray}} [[조국혁신당]] (12) * {{colorbox|#F37021|border=darkgray}} [[개혁신당]] (3) * {{colorbox|#D6001C|border=darkgray}} [[진보당 (대한민국, 2017년)|진보당]] (3) * {{colorbox|#00D2C3|border=darkgray}} [[기본소득당]] (1) * {{colorbox|#F58400|border=darkgray}} [[사회민주당 (대한민국, 2024년)|사회민주당]] (1) * {{colorbox|#808080|border=darkgray}} [[무소속]] (2) | 정당구성2 = | 위원회1 = | 위원회2 = | 합동위원회 = | 선거제1 = [[보통선거]]{{·}}[[평등선거]]{{·}}[[직접 선거]]{{·}}[[비밀 선거]] | 선거제2 = [[소선거구제]] (254석)<br>[[비례대표제]] (46석) | 이전선거1 =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 선거|2024년 4월 10일]] | 이전선거2 = | 의사당_room = National Assembly Building of the Republic of Korea.png | 의사당_res = 300px | 의사당_room2 = Main conference room of South korean national assembly building.JPG | 의사당_res2 = 300px | 의사당2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여의도동]]) | 웹사이트 = [http://www.assembly.go.kr 대한민국 국회] | 비고 = }} {{대한민국의 정치}} '''대한민국 국회'''(大韓民國 國會, {{llang|en|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는 [[대한민국]]의 [[입법부]]로서,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대한민국 행정부]]와 [[대한민국의 사법기관|대한민국 사법부]]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한다.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 [[의회]]이며 300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다. 본래 [[대한민국 제헌 헌법|한국 제헌 헌법]]에서는 단원제,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제정된 제2호 헌법에서는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도록 제정되었으나 참의원의 구성이 늦어져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때에 비로소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 [[1963년]]부터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회가 부활하였으나 현재와 같이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어 구성되었다. 매년 [[9월 1일]] 정기 국회가 열리고 정기회·임시회의 100일 이내의 회기가 열린다. 이 기간에는 정치적 이슈가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경향이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8939&cid=47312&categoryId=47312 정기 국회]{{깨진 링크|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8939&cid=47312&categoryId=47312 }}</ref> == 국회의장·국회부의장 == * 임기: 2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국회의장]]: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결정 *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국회부의장]]: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결정(2인) == 국회의원 == {{본문|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참정권]] ** [[선거권]] - 만 1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 ** [[피선거권]] -만 1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 * 임기 - 4년 * 의원수 - 국회의원의 정원은 300석이다. 253석은 [[소선거구제]]에 의한 지역구 의원을, 47석은 정당 투표에 의한 득표율에 따라서 비례대표를 선출한다.<ref>{{웹 인용|url=https://www.assembly.go.kr/views/cms/assm/assembly/assorgani/assorgani02.jsp|제목=국회의원 - 국회의 구성 - 국회소개 - 대한민국국회|확인날짜=2020-05-09}}</ref> == 국회의 역사 == [[파일:Former National Assembly Building on Taepyeong-ro.jpg|섬네일|250px|태평로 [[부민관|구 국회의사당]], 등록문화재 제11호,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60번지 1호, 1935년 완성된 다목적 공공건물.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여의도로 이전하였다. 그 후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거쳐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로 사용하고 있다.]] * [[1948년]] **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단독 총선거로 [[대한민국 제헌 국회|제헌국회]]를 구성하여 [[5월 31일]]에 [[서울]]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중앙청]] 중앙홀에서 개원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 헌법|제헌헌법]]을 제정하였고,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의장]] [[이승만]]이 [[7월 17일]] 이를 공포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1950년]] ** 임시 수도 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1951년]] ** 임시 수도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1954년]] ** 구 [[부민관|경성부민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1975년]] **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에서 여의도로 [[국회의사당 (대한민국)|국회의사당]]을 이전하였다.<ref> [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67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까지 60년 유랑사]</ref> * [[2021년]] ** [[세종의사당]] 설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488815&mkey=mobile 세종의사당법 본회의 통과 ..."역사적 이정표"]</ref> == 구성과 조직 == 현재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때에는 양원제를 채택하기도 하였는데, [[민의원]]과 [[참의원 (대한민국)|참의원]]을 두고 있었다. * [[국회사무처]] *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 [[국회예산정책처]] * [[국회입법조사처]] === 상임위원회 ===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80%; |+ 국회 상임위원회 현황<ref>{{웹 인용|url=https://committee.na.go.kr:444/portal/state01.do|제목=상임위원회 및 상설특별위원회 현황|성=대한민국 국회|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1-10-23}}</ref> ! rowspan="2" |상임위원회 ! rowspan="2" |위원장 ! rowspan="2" |간사 ! colspan="4" |위원 구성 ! rowspan="2" |소위원회 |-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비교섭단체 !정수 |- |[[대한민국 국회 국회운영위원회|국회운영위원회]]<br>(겸임) |{{Color box|#E61E2B}} [[주호영]]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송언석]] (국민의힘) |16 |11 |1 |28 | *국회운영개선소위원회(8인, 위원장 송언석)<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진성준)<br> *청원심사소위원회(6인, 위원장 [[이은주]]) |-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 |{{Color box|#E61E2B}} [[김도읍]]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정점식]] (국민의힘) |10 |7 |1 |18 | *법안심사제1소위원회(8인, 위원장 기동민)<br> *법안심사제2소위원회(11인, 위원장 정점식)<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정점식)<br> *청원심사소위원회(6인, 위원장 [[김의겸]]) |- |[[대한민국 국회 정무위원회|정무위원회]] |{{Color box|#004EA2}}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윤한홍]] (국민의힘) |14 |9 |1 |24 | *법안심사제1소위원회(13인, 위원장 김종민)<br> *법안심사제2소위원회(11인, 위원장 윤한홍)<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성주)<br> *청원심사소위원회(6인, 위원장 송석준) |- |[[대한민국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Color box|#E61E2B}} [[박대출]]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류성걸 (국민의힘) |15 |10 |1 |26 | *조세소위원회(0인, 위원장 공석)<br> *경제재정소위원회(0인, 위원장 공석)<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0인, 위원장 공석) |- |[[대한민국 국회 교육위원회|교육위원회]] |{{Color box|#004EA2}}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이태규 (1964년)|이태규]] (국민의힘) |9 |6 |1 |16 | *법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영호<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이태규)<br> *청원심사소위원회(4인, 위원장 [[권은희]]) |-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Color box|#004EA2}}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공석 (국민의힘) |11 |8 |1 |20 | *과학기술원자력법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공석)<br> *정보통신방송법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조승래)<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정필모]])<br> *청원심사소위원회(6인, 위원장 공석) |- |[[대한민국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외교통일위원회]] |{{Color box|#E61E2B}} [[윤재옥]]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김석기]] (국민의힘) |12 |8 |1 |21 | *법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이명수]])<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이재정)<br> *청원심사소위원회(3인, 위원장 [[김홍걸]]) |- |[[국방위원회]] |{{Color box|#E61E2B}} [[이헌승]]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신원식 (1958년)|신원식]] (국민의힘) |9 |6 |1 |17 | *법률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병주)<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신원식)<br> *청원심사소위원회(5인, 위원장 [[배진교]]) |- |[[대한민국 국회 행정안전위원회|행정안전위원회]] |{{Color box|#E61E2B}} [[이채익]]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김교흥]]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이만희 (국민의힘) |13 |8 |1 |22 | *법안심사제1소위원회(9인, 위원장 김교흥)<br> *법안심사제2소위원회(9인, 위원장 이만희)<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철민]])<br> *청원심사소위원회(3인, 위원장 [[장제원]]) |- |[[대한민국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화체육관광위원회]] |{{Color box|#004EA2}}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윤덕]]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이용호]] (국민의힘) |9 |6 |1 |16 | *문화예술법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이용호)<br> *체육관광법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윤덕)<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임종성]])<br> *청원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배현진]]) |- |[[대한민국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Color box|#004EA2}}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승남]]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이양수]] (국민의힘) |11 |7 |1 |19 | *농림축산식품법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김승남)<br> *해양수산법안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이양수)<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이달곤]])<br> *청원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주철현]]) |- |[[대한민국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Color box|#004EA2}}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한무경]] (국민의힘) |17 |12 |1 |30 |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13인, 위원장 김한정)<br> *중소벤처기업소위원회(12인, 위원장 한무경)<br> *예산결산소위원회(12인, 위원장 구자근)<br> *청원심사소위원회(5인, 위원장 김정호) |- |[[대한민국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보건복지위원회]] |{{Color box|#004EA2}}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강기윤]] (국민의힘) |14 |9 |1 |24 | *제1법안심사소위원회(13인, 위원장 강기윤)<br> *제2법안심사소위원회(10인, 위원장 강훈식)<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13인, 위원장 [[한정애]])<br> *청원심사소위원회(2인, 위원장 공석) |-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 |{{Color box|#004EA2}}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임이자]] (국민의힘) |9 |6 |1 |16 | *환경법안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임이자)<br>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김영진)<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9인, 위원장 [[이주환]])<br> *청원심사소위원회(3인, 위원장 [[이학영]]) |- |[[대한민국 국회 국토교통위원회|국토교통위원회]] |{{Color box|#004EA2}} [[김민기]]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김정재]] (국민의힘) |17 |12 |1 |30 |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12인, 위원장 김정재)<br> *교통법안심사소위원회(10인, 위원장 최인호)<br>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11인, 위원장 [[김두관]])<br> *청원심사소위원회(10인, 위원장 [[이종배]]) |-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정보위원회]]<br>(겸임) |{{Color box|#E61E2B}} [[조해진]] (국민의힘) |{{Color box|#004EA2}}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유상범]] (국민의힘) |7 |5 |0 |12 | *법안심사소위원회(5인, 위원장 유상범)<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5인, 위원장 윤건영)<br> *청원심사소위원회(4인, 위원장 유상범) |- |[[대한민국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여성가족위원회]]<br>(겸임) |{{Color box|#004EA2}}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정경희]] (국민의힘) |10 |6 |1 |17 | *법안심사소위원회(8인, 위원장 정경희)<br>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7인, 위원장 유정주)<br> *청원심사소위원회(4인, 위원장 [[김선교]]) |} === 상설특별위원회 ===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80%; |+ ! rowspan="2" |상임위원회 ! rowspan="2" |위원장 ! rowspan="2" |간사 ! colspan="4" |위원 구성 ! rowspan="2" |소위원회 |-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비교섭단체 !정수 |-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br>(겸임) |{{Color box|#004EA2}}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Color box|#004EA2}} [[박정]] (더불어민주당) {{Color box|#E61E2B}} [[이철규]] (국민의힘) |29 |19 |2 |50 | *결산심사소위원회 (7인, 위원장 이철규) |} === 비상설특별위원회 ===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80%; |+ ! rowspan="2" |상임위원회 ! rowspan="2" |위원장 ! rowspan="2" |간사 ! colspan="4" |위원 구성 ! rowspan="2" |소위원회 |-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비교섭단체 !정수 |- |[[대한민국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윤리특별위원회]]<br>(겸임) |{{Color box|#004EA2}} 공석 |{{Color box|#004EA2}} 공석 (더불어민주당) {{Color box|#FFFFFF}} 공석 (국민의힘) |0 |0 |0 |12 | |} === 직제 === 각 상임위원회별로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있으며 수석전문위원은 차관보급으로 전문위원을 대표한다. == 국회의 운영 == 한국의 국회는 1년 동안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리는 미국, 영국 등의 의회와는 달리, 정기회·임시회의 회기로 열린다. [[유신헌법]] 시절에는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1년 중 최고 150일까지만 열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82조). 현행 제도로는 연간 회기 일수 제한을 폐지하여 매일 국회가 열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제16대 국회]]의 경우, [[본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임시국회가 5차례나 있었다. 즉 5달 동안 한 번도 본회의를 열지 않았다.<ref>[https://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0&article_id=0000236206&section_id=100&menu_id=100 [17대국회 4大 쟁점법안] {{웨이백|url=https://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0&article_id=0000236206&section_id=100&menu_id=100# |date=20041015081851 }}<3>국회개혁 입법] {{웨이백|url=https://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0&article_id=0000236206&section_id=100&menu_id=100 |date=20041015081851 }} [[동아일보]] 2004-04-29</ref><ref>[https://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1&article_id=0000098799&section_id=100&menu_id=100 법안 5분에 1건 `뚝딱`...졸속 처리] {{웨이백|url=https://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1&article_id=0000098799&section_id=100&menu_id=100# |date=20041015081851 }} [[문화일보]] 2005-03-02</ref> 반면 미국 의회는 2년을 하나의 임기로 하여 전반 1년을 제1회기, 후반 1년을 제2회기라고 한다. 정기회 임시회의 구분이 없다. [[대통령]]이 임시회 집회를 요구하는 일도 없다. 2년의 임기가 지나면, 하원은 전원, 상원은 1/3씩 단계적으로 선거를 하여 교체한다. 1년 내내 회기에 있고, 회기중에는 [[불체포특권]]이 있으므로, 사실상 의원은 임기 내내 불체포특권이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등이 [[연중회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ref>[[정종섭]], 헌법학원론, 2006, p.897</ref> 헌법 제47조 : ①국회의 정기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년 1회 집회되며, 국회의 임시회는 대통령 또는 국회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에 의하여 집회된다. : ②정기회의 회기는 100일을, 임시회의 회기는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 : ③대통령이 임시회의 집회를 요구할 때에는 기간과 집회요구의 이유를 명시하여야 한다. * 정기회 : 매년 [[9월 1일]] 개회 (그 날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다음날), 회기는 100일 이내 * 임시회 :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의 4분의 1 이상이 요구 시, 또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이 국정조사 요구시 개막. 회기는 30일 이내. == 국회의 권한 == === 입법에 관한 권한 === ==== 법률 제·개정권 ====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고 있으므로(제40조), 법률 제·개정권은 국회의 가장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 법률안의 제출 :법률안은 국회의원과 정부가 제출할 수 있다(제52조). 국회의원이 법률안을 발의함에는 10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국회법 제79조 제1항). 정부가 법률안을 제출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제89조 제3호). * 법률안의 심의·의결 :국회는 법률안을 심의·의결한다. 국회의장은 제안된 법률안을 본회의에 보고하고 소관상임위원회에 회부하여 그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 부의한다(국회법 제81조 제1항). 여기서 심사한 결과는 본회의에 회부하지 아니할 수 있으며,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부터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명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하며(국회법 제87조 제1항), 이 요구가 없을 때에는 그 의안은 폐기된다(동조 제2항). :본회의에서 법률안 의결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 서명·공포 :국회에서 의결되어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은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서명·공포하여야 하며(제53조 제1항),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공포한 날부터 20일이 경과되면 그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송된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이의서를 첨부하여 국회에 환부하여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재의 결과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동조 제2항, 제4항). 그렇지 못하면 그 법률안은 폐기되는데, 이를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이라고 하며, 대통령은 일부거부 내지 수정거부는 하지 못한다(동조 제3항). ==== 헌법개정의 권한 ====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고(제128조 제1항), 대통령안과 국회의원안 모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이를 의결하며(제130조 제1항),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인다(제130조 제2항). ==== 조약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 ====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제6조 제1항). 따라서 헌법은 중요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을 인정하고 있다(제60조 제1항).<ref>정승재, 《개정판 법학통론》, 형설출판사, 2003년 2월 20일 161-162쪽</ref> === 재정에 관한 권한 ===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국가경비의 세입·세출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국회의 의결을 기초로 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재정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 조세법률주의 ==== 조세의 부과는 반드시 법률에 의거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여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법률로 정한다(제59조). ==== 예산심의확정권 ==== 정부는 회계년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년도 개시 90일 전에 국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국회는 회계년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제54조 제2항). 국회는 예산안의 심의에 있어서 정부예산안의 수정권은 가지고 있으나, 이 수정권은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전액의 삭감 또는 비목의 삭제에 그치는 것이 원칙이고,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금액의 증액 또는 새 비목의 설치는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이를 행할 수 있다(제57조). ==== 예비비 의결과 지출승인권 ==== 예비비는 총액으로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하며, 그 지출은 차기 국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한다(제55조 제2항). ==== 기채동의권 ==== 정부는 국채를 모집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국채에 대한 국회의 동의는 기채할 때마다 동의를 얻지 아니하고 연간의 예산총액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동의를 얻어도 된다. ====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에 대한 동의권 ====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이라 함은 국가가 1회계년도를 지나는 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채무를 부담하는 계약을 말한다. ==== 결산심사권 ==== 감사원은 세입·세출의 결산을 매년 검사하여 대통령과 다음 연도 국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제99조). 국회에서 의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 결과인 결산을 심사함으로써 국회의 재정에 관한 권한을 실효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ref>정승재, 《개정판 법학통론》, 형설출판사, 2003년 2월 20일 162-163쪽</ref> ===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 === 국회는 일반국정에 관하여 정부를 감시·비판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며, 이를 대정부 견제권 또는 정부통제에 관한 권한이라 한다. 국회의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으로는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 동의할 수 있는 임명동의권(제86조 제1항), 국무총리·국무위원출석요구권과 질문권(제62조 제2항),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권(제63조 제1항·제2항), 긴급재정경제명령과 긴급명령사후승인권(제76조 제3항), 계엄해제요구권(제77조 제5항), 선전포고와 국군해외파견·외국군 주류에 대한 동의권(제60조 제2항), 국정감사·[[국정조사권|조사권]](제61조), 탄핵소추권(제65조) 등이다.<ref>정승재, 《개정판 법학통론》, 형설출판사, 2003년 2월 20일 164쪽</ref> == 교섭단체 == {{본문|교섭단체#대한민국의 교섭단체}} 국회에 20명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 교섭단체 제도의 목적은, 국회에서 일정한 정당에 소속하는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에 통합·조정하여 정파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의사 개진을 막는다는 단점도 상존한다. 단일정당으로 구성되지 않은 교섭단체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63년]] [[대한민국 제6대 국회|6대 국회]]에서 13석의 [[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민주당]]과 9석의 [[자유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자유민주당]]과 2석의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당]]이 공동교섭단체인 [[삼민회]]를 구성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18대 국회]]에서 18석의 [[자유선진당]]과 3석의 [[창조한국당]]이 공동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20대 국회]]에서 14석의 [[민주평화당]]과 6석인 [[정의당 (대한민국)|정의당]]이 공동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을 구성하였다. [[2020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20대 국회]]에서 18석의 [[민생당]]과 무소속 의원 4명이 공동교섭단체인 [[민주통합의원모임]]을 구성하였다. == 국회의 의사 절차의 원칙 == {| class="wikitable" !회의 공개의 원칙 |국회의 의안 심의 과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여 정책 결정의 민주성과 공정성 확보 |- !회기 계속의 원칙 |한 회기 중 의결되지 못한 안건은 다음 회기에서 계속하여 심의하도록 하여 동일한 의안 제출로 인한 번잡성 예방 |- !일사부재의의 원칙 |한 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내에 다시 제출할 수 없도록 하여 소수파에 의한 의사 진행 방해 예방 |} == 정당별 의석 수 == {| style="width:100%;" |- | colspan="11" style="text-align:center;"|↓ |- | style="background:#D6001C; text-align:center; width:1.0%;"|<span style="color:white;">'''3'''</span> | style="background:#00D2C3; text-align:center; width:0.3%;"|<span style="color:white;">'''1'''</span> | style="background:#F58400; text-align:center; width:0.3%;"|<span style="color:white;">'''1'''</span> | style="background:#152484; text-align:center; width:56.6%;"|<span style="color:white;">'''170'''</span> | style="background:#0073CF; text-align:center; width:4.0%;"|<span style="color:white;">'''12'''</span> | style="background:#808080; text-align:center; width:0.6%;"|<span style="color:white;">'''2'''</span> | style="background:#F37021; text-align:center; width:1.0%;"|<span style="color:white;">'''3'''</span> | style="background:#E61E2B; text-align:center; width:36.0%;"|<span style="color:white;">'''108'''</span> | |- style="font-size:100%;"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D6001C;">'''[[진보당 (대한민국, 2017년)|<span style="color:#D6001C;">'''진보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00D2C3;">'''[[기본소득당|<span style="color:#00D2C3;">'''기본소득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F58400;">'''[[사회민주당 (대한민국, 2024년)|<span style="color:#F58400;">'''사회민주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152484;">'''[[더불어민주당|<span style="color:#152484;">'''더불어민주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0073CF;">'''[[조국혁신당|<span style="color:#0073CF;">'''조국혁신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808080;">'''[[무소속|<span style="color:#808080;">'''무소속'''</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F37021;">'''[[개혁신당|<span style="color: #F37021;">'''개혁신당'''</span>]]'''</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E61E2B;">'''[[국민의힘|<span style="color:#E61E2B;">'''국민의힘'''</span>]]'''</span> |} == 정당별 구성 == {{대한민국 제22대 국회 정당별 의석수}} == 국회 휘장 == 1948년 제헌국회 시절부터 국회는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를 상징화한 꽃무늬 안에 한자 國(국)을 형상화해 삽입한 것을 휘장으로 사용해왔으나 한글이 아닌 한자를 국가 중요 기관의 휘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과, 동그란 테두리가 글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 國(국)이 아닌 或(혹)자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참의원은 휘장으로 한자 대신 한글 "국"을 삽입한 것을 채택한 바가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어 왔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14년 한자를 삭제하고 한글 "국회"를 삽입하는 새 휘장을 채택하는 안이 가결되었고, 현재 새로운 휘장을 사용하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5686551 국회의원 배지 '國→국회'로 바뀐다]</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240414 '國→국회'로…의원 배지 한글화, 운영위 전체회의 통과]</ref> {{갤러리2 |lines=4 |파일: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1948년 제헌국회 시절부터 2014년까지 사용한 국회 휘장 |파일:Flag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1948년 제헌국회 시절부터 2014년까지 사용한 국회기 |파일: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2014년부터 사용 중인 현재의 국회 휘장 |파일:Flag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2014년부터 사용 중인 현재의 국회기 }} == 국회 입법정보서비스 == 국민과 함께하는 스마트 국회를 목표로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의정환경을 조성하고 투명한 입법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열린 국회 서비스 === 국민에게 국회의 현황과 의정활동을 신속하고 투명하게 제공하며, 입법과정에 국민의 편리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하여 아래의 정보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 국회: http://www.assembly.go.kr (국회 대표 웹사이트) * 국회위원회: http://committee.na.go.kr/ (국회 상임/특별 위원회 정보) * 국회사무처: http://nas.na.go.kr (국회 소속기관1 정보) *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 (국회 소속기관2 정보) * 국회예산정책처: http://www.nabo.go.kr/ (국회 소속기관3 정보) * 국회입법조사처: http://www.nars.go.kr/ (국회 소속기관4 정보) * 국회뉴스ON: http://www.naon.go.kr/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 국회채용시스템: http://gosi.assembly.go.kr/ (국회 채용관련 정보) *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 (접수, 진행, 처리된 의안 정보) * 국회입법예고: http://pal.assembly.go.kr/ (진행 및 종료된 입법예고 정보) * 법률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law/ (법령 관련 정보) * 인터넷의사중계시스템: http://assembly.webcast.go.kr/ (실시간 회의 영상 인터넷 중계) * 회의록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record/ (문서 회의록 정보) * 영상회의록: http://w3.assembly.go.kr/vod/ (영상 회의록 정보) * 맞춤입법콘텐츠검색시스템: http://naph.assembly.go.kr/ (법률, 의안, 회의록 등 통합검색) * 국정감사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inspections/ (국정감사 결과 정보) * 예결산정보시스템: https://web.archive.org/web/20080517174050/http://nafs.assembly.go.kr:83/ (예산 및 결산 정보) * 미디어자료관: http://w3.assembly.go.kr/multimedia/ (국회관련 주요기록 및 홍보 동영상) === 모바일 국회 서비스 ===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여 내 손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국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앱 서비스: 대한민국국회, 국회의원광장, 의안정보, 국회회의록, 국회의사중계, 국회관람, 국회방송, 국회입법예고 * 국회홈페이지(http://m.na.go.kr{{깨진 링크|url=http://m.na.go.kr/ }}), 국회뉴스ON(http://www.naon.go.kr), 법률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law/) * 국회도서관(http://www.nanet.go.kr), 국회예산정책처(http://www.nabo.go.kr), 국회입법조사처(http://www.nars.go.kr) === 전자국회 === 국회의원의 효율적인 의정활동과 국회 직원의 편리한 업무수행을 지원하기 위하여 디지털본회의장시스템, 입안지원시스템, 의정자료전자유통시스템, e-의안시스템, 영상회의 시스템 등을 운영하고 있다. == 비판 == === 몸싸움 === 과거 대한민국 국회의 고질적 문제로 파행에 따른 몸싸움이 꼽혔다. 주요 법안들에서 여야가 갈등을 빚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러한 대립이 대화로 해결되지 못하고 강행 처리하려는 원내 다수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수 정당과 충돌로 몸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몸싸움은 1년에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으며, 각종 장비들이 동원되기도 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8&aid=0002353555 대물' 속 '막장 국회', 현실 국회와 싱크로율 100%?] 이데일리 2010년 12월 10일</ref> 이러한 물리적 충돌 방지와 관련한 법안이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여야간의 갈등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가 2012년 5월 제18대 국회 마지막 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몸싸움은 사라졌다. 허나, 2019년 12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안과 공직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안건에 국회선진화법을 무시한 채 국회에서 다시 몸싸움이 일어났다.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정부]] * [[대한민국 행정부]] * [[대한민국 사법부]] * [[대한민국 법원]] *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 [[국회의사당 (대한민국)|국회의사당]] *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 * [[대한민국의 정당]] * [[민의원]] * [[참의원 (대한민국)|참의원]]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구 목록]] * [[국회방송]] * [[대한민국의 지방의회]]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공식 웹사이트}} {{대한민국 입법부}}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의 헌법 기관}} {{대한민국의 선거|}} {{대한민국의 정당}} {{대한민국의 정당 역사}} {{전거 통제}} [[분류:대한민국의 국회| ]] [[분류: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관공서]] [[분류:단원제 입법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소프트웨어 정보 |이름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br />Microsoft Word |로고 = Microsoft Office Word (2019–present).svg |로고크기 = 100px |화면 = |화면크기 = |설명 = |원저자 = |개발자 = [[마이크로소프트]] |발표일 = 윈도우용: [[1983년]] [[10월 25일]]<br />맥용: [[2016년]] |최근 버전 = 윈도우용: 1809 (18.0.10730.20138), 맥용: 16.17.0 |최근 버전 출시일 = 윈도우용: [[2018년]] [[9월 27일]], 맥용: [[2018년]] [[9월 9일]] |미리보기 버전 = |미리보기 버전 출시일 = |지원중단 = |상태 = |프로그래밍 언어 = |운영체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br />[[macOS]] |엔진 = |플랫폼 = |크기 = |언어 = |종류 = [[워드 프로세서]] |라이선스 = [[사유 소프트웨어]] |웹사이트 = [https://products.office.com/word products.office.com/word] |표준 =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워드 프로세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주요 제품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83년 10월 25일<ref>{{웹 인용|url=http://royal.pingdom.com/2009/06/17/first-version-of-todays-most-popular-applications-a-visual-tour/|title=Version 1.0 of today's most popular applications, a visual tour – Pingdom Royal|work=[[Pingdom]]|date=June 17, 2009|accessdate=April 12, 20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813072250/https://royal.pingdom.com/2009/06/17/first-version-of-todays-most-popular-applications-a-visual-tour/|보존날짜=2018-08-13|url-status=dead}}</ref> "Multi-Tool Word for Xenix systems"라는 이름으로 첫 출시되었다.<ref name="PCHistory">{{서적 인용|first=Roy|last=A. Allen|title=A History of the Personal Computer: The People and the Technology|date=October 2001|publisher=Allan Publishing|edition=1st|isbn=978-0-9689108-0-1|url=https://archive.org/details/A_History_of_the_Personal_Computer|chapter=Chapter 12: Microsoft in the 1980's|chapterurl=https://archive.org/download/A_History_of_the_Personal_Computer/eBook12.pdf|pages=12/25–12/26|accessdate=November 7, 2010}}</ref><ref>{{웹 인용|url=http://office.microsoft.com/en-us/help/HA101996251033.aspx |title=Microsoft Office online, Getting to know you...again: The Ribbon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1074037/http://office.microsoft.com/en-us/help/HA101996251033.aspx |archivedate=May 11, 2011 |df= }}</ref><ref>{{웹 인용|url=http://www.historyofbranding.com/microsoft.html |title=The history of branding, Microsoft history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528002301/http://www.historyofbranding.com/microsoft.html |archivedate=May 28, 2009 |df= }}</ref> [[1983년]]에 [[MS-DOS]]용으로 워드1이라는 버전으로, [[1985년]]에는 [[매킨토시]]용으로, [[1989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rand()이라 치고 엔터 키를 누르면 도움말이 나온다. == 기본 확장자 == 워드의 파일 포맷은 [[오피스 오픈 XML]]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doc, .docx라는 확장자를 사용한다. == 매킨토시용 제품 == === 워드 2004 === [[OS X]]용으로 2004년에 출시되었다. [[파워PC]](PowerPC) [[중앙 처리 장치]]에서 작동하도록 개발되었고, [[인텔]]사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는 [[OS X]]의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 기술로 워드 2004를 [[에뮬레이터|에뮬레이팅]]해 사용할 수 있다. === 워드 2008 === {{본문|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 [[2008년]] 1월에 [[로제타 (소프트웨어)|로제타]](Rosetta) 기술을 이용해 [[에뮬레이션|에뮬레이팅]]하지 않고도 [[인텔]] 중앙 처리 장치든 [[파워PC]](PowerPC) 장치든 상관 없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유니버설 바이너리]] 버전으로 출시했다. == 윈도우용 제품 == === 워드 2007 === {{본문|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 워드 2007에 새로 나온 기능은 다음과 같다.<ref>{{웹 인용 |url = http://office.microsoft.com/ko-kr/help/HA100742241042.aspx |제목 = Microsoft Office Word 2007의 새로운 기능 |확인날짜 = 2008-09-01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914164139/http://office.microsoft.com/ko-kr/help/HA100742241042.aspx# |보존날짜 = 2008-09-14 |url-status = dead }}</ref> * 새로운 모양의 서식 설정 버튼. 서식들 중 하나를 예전 버전보다 쉽게 고를 수 있다. * 단어 수가 상태 표시줄에 표시된다. 사용자가 단어를 넣으면 자동적으로 단어 수가 갱신된다. * 맞춤법 검사기가 이전에 비해 일관성이 나아졌다. 또한,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문서에서만큼은 "문맥에 맞는 맞춤법" 검사 기능이 들어가 있다. * 서식이 설정된 콘텐츠를 문서에 추가할 수 있도록 문서 블록이라는 기능을 제공한다. [[파워포인트]]의 서식 설정 기능과 비슷한 것이 이번 버전에서야 들어갔다. * 두 가지 버전의 문서를 비교할 수 있다. 비교 중인 문서, 원본 문서, 수정한 문서가, 화면을 분할하여 각각의 조그마한 창에 표시된다. * 문서를 공유하기 전에 문서 검사를 사용하여야지, 해당 문서에서 숨겨진 메타데이터, 개인 정보 또는 문서에 저장된 콘텐츠 등을 검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 최종 문서 버전을 다른 사용자와 공유하기 전에 최종본으로 표시 명령을 사용하여 해당 문서를 읽기 전용으로 만들고 최종 문서 버전을 공유할 다른 사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 새로운 [[수식 편집기]]가 포함되었으며, [[TeX]]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독자적인 Office Math Markup Language(OMML) 문법으로 수식을 직접 입력할 수도 있으며, [[위지윅]] 방식으로도 수식을 입력할 수 있다. 클립보드를 통해 [[MathML]] 포맷으로 다른 프로그램과의 자료 호환을 지원하며, [[MathMagic]]과 같은 일부 [[수식 편집기]]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2007의 수식을 직접 읽어 들이는 것을 지원한다. == 버전 == [[MS-DOS]]용 버전: * 1983년 11월 — 워드 1 * 1985년 — 워드 2 * 1986년 — 워드 3 * 1987년 — 워드 4 aka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4.0 PC용 * 1989년 — 워드 5 * 1991년 — 워드 5.1 * 1991년 — 워드 5.5 * 1993년 — 워드 6.0 [[매킨토시]]용 버전: * 1985년 1월 — 워드 1 * 1987년 — 워드 3 * 1989년 — 워드 4 * 1991년 — 워드 5 * 1993년 — 워드 6 * 1998년 — 워드 98 * 2000년 — 워드 2001, [[맥 OS 9]]과 마지막으로 호환되는 버전 * 2001년 — 워드 v.X, 최초의 [[macOS|맥 OS X]] 전용 호환 버전 * 2004년 — 워드 2004, [[맥용 오피스 2004]]의 일부 * 2008년 — 워드 2008,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의 일부 * 2011년 — 워드 2011,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1]]의 일부 * 2015년 — 워드 2016,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의 일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버전: * 1989년 11월 - 워드 1.0 (코드이름: Opus) * 1990년 3월 - 워드 1,1 (코드이름: Bill the Cat) * 1990년 6월 - 워드 1.1a * 1991년 - 워드 2.0, (코드 이름: Spaceman Spiff) * 1993년 - 워드 6.0, (코드 이름: T3) * 1995년 - 워드 95 (버전 7.0) - [[오피스 95]]에 포함 * 1997년 - 워드 97 (버전 8.0) - [[오피스 97]]에 포함 * 1998년 - 워드 98 (버전 8.5) - [[오피스 97]] 파워에 포함 ([[일본]], [[한국]]에서만 배포) * 1999년 - 워드 2000 (버전 9) - [[오피스 2000]]에 포함 * 2001년 - 워드 2002 (버전 10) - [[오피스 XP]]에 포함 * 2003년 - 워드 2003 (버전 11) - [[오피스 2003]]에 포함 * 2006년 - 워드 2007 (버전 12) - [[오피스 2007]]에 포함 * 2010년 - 워드 2010 (버전 14) - [[오피스 2010]]에 포함 * 2012년 - 워드 2013 (버전 15) - [[오피스 2013]]에 포함 * 2015년 - 워드 2016 (버전 16) - [[오피스 2016]]에 포함 * 2018년 - 워드 2019 (버전 17) - [[오피스 2019]]에 포함 SCO UNIX용 버전: * [https://web.archive.org/web/20080820172738/http://www.opsys.com/products/sco/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UNIX Systems Release 5.1)] [[OS/2]]용 버전: * 1992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for OS/2 버전 1.1B == 점유율 == [[대한민국]]에서 [[워드 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 [[일본]]에서도 [[이치타로]], 전 [[세계]]적인 [[워드 (컴퓨팅)|워드]] 90%대의 [[점유|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office.microsoft.com/word/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홈페이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워드 프로세서}} {{전거 통제}} [[분류:워드 프로세서]] [[분류: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분류: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소프트웨어]] [[분류:1983년 소프트웨어]] [[분류:스크린샷 소프트웨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판례 |별칭 = |사건명 = 대통령(노무현) 탄핵 |사건번호 = 2004헌나1 |원문 = |선고일자 = 2004년 5월 14일 |판례집 = 16권 1집 609~669 |결정 = '''기각''' |합헌 = |위헌 = |헌법불합치 = |인용 = 김영일, 권성, 이상경 |기각 = 윤영철, 김경일, 김효종, 송인준, 주선회 |각하 = 전효숙 |보충 = |참조조문 = }} {{위키문헌|2004헌나1}}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은 [[2004년]] [[3월 12일]]에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새천년민주당]]과 [[자유한국당|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하에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을 대상으로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때 노무현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4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노무현은 탄핵 소추 64일 만에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8&aid=0000059323&sid1=001|제목=노대통령 탄핵기각 직무복귀|언어=ko|확인날짜=2020-05-22}}</ref> == 원인 및 경과 == [[2004년]] [[3월 12일]]에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이에 동조하였으며,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탄핵 소추안 통과는 그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한국방송공사|KBS]], [[문화방송|MBC]], [[SBS]] 등 여러 방송사들은 탄핵 투표 당시 국회의 혼란과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방영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news.kbs.co.kr/exec/program/prog_main.php?prog_id=01&broad_dt=20040312# |제목=KBS 방송 |확인날짜=2007-07-2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9110919/http://news.kbs.co.kr/exec/program/prog_main.php?prog_id=01&broad_dt=20040312# |보존날짜=2007-09-29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 |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4/03,1,list1,12.html |제목=MBC 방송 |확인날짜=2007-07-2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27020509/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4/03,1,list1,12.html |보존날짜=2013-09-27 |url-status=dead }}</ref><ref>{{웹 인용 |url=http://news.sbs.co.kr/review/news_review.jsp?reg_date=20070720&prog_cd=R1&year=2004&month=03&day=12&Lselect3=2007&Lselect4=7# |제목=SBS 방송 |확인날짜=2007-07-2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01000942/http://news.sbs.co.kr/review/news_review.jsp?reg_date=20070720&prog_cd=R1&year=2004&month=03&day=12&Lselect3=2007&Lselect4=7# |보존날짜=2007-10-01 |url-status=dead }}</ref>한편 전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 [[광화문]] 일대 등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를 벌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0590569&sid1=001|제목=노무현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언어=ko|확인날짜=2020-05-22}}</ref> [[2004년]] [[5월 14일]]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탄핵 소추안의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하며 지속적으로 충돌을 빚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648735 헌재 앞의 탄핵 지지와 반대] 연합</ref> === 과정 ===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90%;" align=right |+2004년 3월 12일 |- align="center" ! colspan="2"| 대한민국 국회<br>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 |- ! colspan="2"| <small>재적 271명 중 2/3인 181명 동의 필요</small> |- ! 선택 ! 득표 |- style="background:lightgreen;" | '''가''' | {{정당 정보/의석|193|271|green}} |- | 부 | {{정당 정보/의석|2|271|red}} |- | 기권 | {{정당 정보/의석|0|271|gray}} |- | 무효 | {{정당 정보/의석|0|271|gray}} |- | bgcolor="gray" colspan="2"| |- | 미투표 | {{정당 정보/의석|76|271|gray}} |} * [[2004년]] [[2월 18일]] : [[노무현]]은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 가진 합동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라고 발언하여 특정정당 지지를 유도한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 [[2004년]] [[2월 24일]] :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과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고 발언하였고 이로 인해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 [[2004년]] [[3월 3일]] :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다. * [[2004년]] [[3월 4일]] :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 [[2004년]] [[3월 5일]] :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및 측근비리 등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같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에 탄핵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 [[2004년]] [[3월 6일]] :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인 압력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 [[2004년]] [[3월 9일]] :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재차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 [[2004년]] [[3월 10일]] : 탄핵안을 처리하려는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과 탄핵안을 반대하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의사당 내에서 대치했고 탄핵안 1차 처리에 실패한다. * [[2004년]] [[3월 11일]] : [[노무현]]은 특별 기자 회견을 열고 사과요구를 거부하며 [[남상국 (1945년)|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노건평]]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의혹에 대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이후 [[남상국]]은 서울 한남대교 밑에서 투신자살을 했고, 이에 탄핵에 반대하던 [[자유민주연합]]이 자유투표로 당론을 선회하면서 탄핵안 가결이 급진전된다. * [[2004년]] [[3월 12일]] : 오전 11시 3분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회단상을 점거하고 저항했지만, 국회 경호권 발동으로 이를 막고 국회(임시회) 제 2차 본회의를 개회하였다.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소속 의원 등 총 195명이 투표를 실시하였으며, 투표 결과 가 193표, 부 2표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오후 3시, 소추결의서 정본이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 송달되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창원의 [[로템]]사를 방문 중이었고,<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0137935 (탄핵)막전막후..누적 악재가 `파국` 초래| 조용만 기자, 이데일리, 2004.3.12]</ref>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지금 이 과정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괴롭기만 한 소모적 진통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날 열린 [[해군사관학교 (대한민국)|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여 "마지막일지 모르겠는데 내년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0137935 盧대통령 탄핵가결 盧대통령 입장 표명 "발전 위한 진통" 한국경제, 2004.3.12]</ref> * [[2004년]] [[3월 30일]]: 헌재, 1차 변론 * [[2004년]] [[4월 2일]]: 헌재, 2차 변론. 양측 절차적 정당성과 부당성을 각기 주장함. 소추위원 측, [[노무현]] 대통령 등 29명 증인 신청 * [[2004년]] [[4월 9일]]: 헌재, 3차 변론. 신청 받은 29명 증인 가운데 4명 채택, 19명 기각, 6명 보류([[노무현]] 대통령 포함) * [[2004년]] [[4월 15일]]: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열린우리당]] 압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대참패 * [[2004년]] [[4월 20일]]: 헌재, 4차 변론. [[최도술]](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안희정]]([[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선 후보실 정무팀장) 증인신문 진행 * [[2004년]] [[4월 23일]]: 헌재, 5차 변론. 여택수(전 대통령 제1부속실 행정관) 증인신문. 증인으로 소환된 [[신동인]] [[롯데백화점|롯데쇼핑]] 사장은 입원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음 * [[2004년]] [[4월 27일]]: 6차 변론 * [[2004년]] [[4월 30일]]: 7차 최후 변론 *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에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을 기각하기로 결정했다. == 여론 및 탄핵 역풍 == [[파일:Image-GohKun-cropped.jpg|섬네일|125px|left|[[고건]] 당시 국무총리]] 탄핵안이 발의된 3월 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탄핵반대는 65.2% 찬성은 30.9%였지만 노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6%,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견은 30.1%로 엇갈렸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0&aid=0000230842 여론조사 "탄핵 반대가 찬성보다 두배"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무현|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라고 밝혔다. 많은 국민이 당시 탄핵에 반발한 이른바 탄핵 역풍에 힙입어,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제17대 총선]]에서 사실상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최초로 원내 과반을 차지하였다.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에게도 밀려 제4당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야당 내 탄핵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때 선봉자 역할을 한 '탄핵 5인방'이라 불리는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다. 총선 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삼보일배를 한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3김 가운데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 mid=sec&sid1=001&oid=022&aid=0000071934& 2004 정치권 뜬별진별]{{깨진 링크|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 }}</ref> 그러나 [[추미애]], [[조순형]]과 [[친박연대]]로 복귀한 [[홍사덕]]은 차기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에 성공했으며 이를 근거로 탄핵에 대한 국민의 재평가가 내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조순형|조 전 대표]]의 당선으로 '탄핵 주역'이라는 멍에를 벗었다고 자평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216121& '盧탄핵 2년`다시 주목받는 그 주역들]</ref>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서 1명은 자살했고 [[백은종|1명]]은 분신하여 부상을 입었다.{{출처|날짜=2022-10-04}} == 심판 == {{위키문헌|2004헌나1}} [[2004년]] [[3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심판을 시작했다. 소추위원 측과 피청구인 측 변호사, 그리고 그들이 요청한 증인들을 출석시켜 모두 7차례 변론을 진행하였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소추안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인용문|여당을 지지하는 발언은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으며 대한민국 선거법을 폄하한 것과 국민투표를 언급한 것은 각각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동적 그리고 소극적으로 위반하는데 그치고 있어 탄핵을 기각한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transparent" |+ 소추사유 선고결과 |- ! width="35%"|행위 ! width="35%"|조항 ! width="30%"|결과 |- |rowspan=2|열린우리당 지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없음 |- |대한민국 선거법 폄하 |rowspan=3|헌법준수 의무 |위반 |- |국민투표 언급 |위반 |- |국회 비하 |없음 |} == 평가 == 다수당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 등 다양하다. 이 사태는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못하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치게임을 벌였다며 정치불안과 국내 경제계의 충격과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 그에 따른 경제위기 등 파장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590264 탄핵정국에 혼란우려 목소리]</ref> == 기타 == * 노무현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하던 3월 12일 경남 창원 ㈜로템 공장을 방문 중이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소식을 접한 뒤 "오늘 저녁까지는 괜찮다"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등 예정된 일정을 차질없이 소화했다.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상태에서 귀경한 노 대통령은 곧바로 국무위원 간담회를 갖고,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데 시간을 잘 활용하겠다"며 향후 활동범위를 스스로 규정했다. 탄핵심판이 최종 기각된 후, 청와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노 대통령의 지난 64일을 "탄핵기간은 노 대통령에게 역사를 성찰하고 자아를 재충전하며 국정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학습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ref>[http://tan.hani.co.kr/section-003500000/2004/05/003500000200405141029001.html 한겨레신문, 노대통령 '관저칩거' 2개월 , 2004.5.14]{{깨진 링크|url=http://tan.hani.co.kr/section-003500000/2004/05/003500000200405141029001.html }}</ref> 노무현은 헌재 심판 후 즉시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 [[2004년]] [[5월 13일]], [[조선일보]]에서 탄핵 심판의 소수 의견을 공개하기로 했다는 오보를 냈다.<ref>[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5/200405130338.html 憲裁 소수의견 공개하기로] {{웨이백|url=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5/200405130338.html# |date=20050407021544 }} - 조선일보, 2004년 5월 13일자.</ref><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327 조선 ‘헌재 소수의견 공개’ 오보 파문] - 미디어오늘, 2004년 5월 19일자.</ref> * [[2004년]] [[5월 14일]] 선고 당일, [[KBS 1TV]], [[MBC TV|MBC]], [[SBS TV|SBS]] 등의 지상파 3사 및 [[YTN]] 등이 심판과정을 생중계 했다.<ref>[http://www.hani.co.kr/section-003500000/2004/05/003500000200405151029212.html 한겨레신문, 탄핵안 '기각' 시청률 27.4∼29.4%, 2004.5.15]{{깨진 링크|url=http://www.hani.co.kr/section-003500000/2004/05/003500000200405151029212.html }}</ref> * 한나라당 [[장광근]] 의원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통해 “탄핵안 가결은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정략이다. 탄핵을 기다리며 버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라고 주장했다.<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1019000974]</ref> * 사건 당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법에서는 위헌심판결정,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에 대해 소수의견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탄핵심판과 정당해산심판에는 소수의견을 공개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사건 이후 탄핵심판과 정당해산심판의 소수의견도 공개하도록 개정되었다. * 소수의견 내용과 각각 의견에 찬성한 헌법재판관 명단이 헌재에 공개되었다.<ref>[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893881&ref=A 시사기획 창 노무현 탄핵심판 사건의 진실을 공개한다]</ref>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노무현]] * [[박근혜]] * [[열린우리당]] *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 * [[박근혜 대통령 탄핵]] == 외부 링크 == * [http://likms.assembly.go.kr/bill/billDetail.do?billId=027886 대통령(노무현)탄핵소추안 - 대한민국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https://www.law.go.kr/%ED%97%8C%EC%9E%AC%EA%B2%B0%EC%A0%95%EB%A1%80/(2004%ED%97%8C%EB%82%981) 대통령(노무현)탄핵 - 국가법령정보센터] {{헌법재판소 주요결정}} {{대한민국의 탄핵 심판}} [[분류:대한민국 헌법재판소 판례]] [[분류:대한민국의 탄핵]] [[분류:노무현]]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 [[분류:대한민국의 헌정사]] [[분류:2004년 대한민국]] [[분류:2004년 3월]] [[분류:2004년 5월]] [[분류:2004년 판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Candleburning.jpg|150px|섬네일|right]] '''촛불 집회'''( - 集會, {{llang|en|candlelight vigil}})는 시민들이 광장 등에서 [[양초|촛불]]을 들고 벌이는 집회이다.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며, 시민 주도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다. 촛불시위는 단순하지만 시각적 효과가 크고, 일과를 끝낸 시민들의 참여가 용이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 대한민국의 촛불 집회 == 대한민국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상 일몰 후에는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어 있음<ref name="gypsy">[[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도 옥외집회를 허용할 수 있다."</ref> 문화행사 등을 예외로 하는 것<ref>같은 법 제15조,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冠婚喪祭) 및 국경행사(國慶行事)에 관한 집회에는 제6조부터 제12조까지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ref>을 이용해 문화제 등의 명목으로 촛불시위가 진행되었다. 문화제는 노래 등에 대한 대중공연의 형식이 가능하며 구호를 외치거나 피켓을 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이후 [[야간 집회 금지 사건]]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과 자정까지의 야간 시위 금지 위헌 결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야간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 유명한 촛불 집회 == === 대한민국 === [[파일:AntiMBProtest9.jpg|300px|섬네일|right|[[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미국소 수입 협상 반대]] 촛불집회]] * [[1992년]] [[하이텔|코텔]] 유료화 반대 촛불집회<ref>{{뉴스 인용 |제목 = PC통신, 인터넷기반 `부활의 변신`모색 |url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80101031629066001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쪽 = |날짜 = 2003-08-01 |확인날짜 = }}</ref> * [[2002년]] 11월 ~ 12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촛불집회 - [[오마이뉴스]]의 김기보(아이디 '앙마') 시민기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 [[2004년]] 3월 ~ 4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통과 반대 촛불집회 * [[2004년]] 12월: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촛불집회 * [[2004년]] 11월 ~ [[2005년]] 2월: [[국가보안법]] 반대 촛불집회 * [[2008년]] 5월: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미국 광우병 수입 협상 반대 시위]] 촛불집회 * [[2009년]] 2월: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용산 참사 추모 촛불문화제]] * [[2011년]] : 반값등록금 공약 촉구 촛불집회 * [[2013년]] 6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규명 촛불집회 * [[2016년]] 10월 ~ [[2017년]] 5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및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촛불집회]] * [[2018년]] : [[대한항공]] [[조양호]] 일가 퇴진 촛불집회 * [[2019년]] 9월 ~ 12월 : 조국수호 및 검찰, 언론 개혁 촛불집회 * [[2022년]] 11월 ~ 12월 :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윤석열 대통령 퇴진 운동]] 촛불집회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wikia:chotbul|촛불 집회 위키]] ([[위키아]] 산하)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31012009 진화하는 집회 문화], 《서울신문》, 2008.7.31.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7224403/http://www.ccourt.go.kr/home/att_file/com/movie/1236849292245.htm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를 따지는 공개변론 동영상] [[헌법재판소]] [[분류:시위]] [[분류:양초]] [[분류:사회 운동]] [[분류:비교정치학]] [[분류:사회변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Ngũgĩ wa Thiong'o (signing autographs in London).jpg|섬네일|250px|응구기 와 시옹오]] '''응구기 와 티옹오'''({{llang|ki|Ngũgĩ wa Thiong'o|{{IPA|[ᵑɡoɣe wá ðiɔŋɔ]}} 응구기 와 디옹오}}, [[1938년]] [[1월 5일]]~)는 [[케냐]]의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이다. 응구기는 [[1938년]]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당시 "백인 고지({{lang|en|White Highlands|화이트 하일랜드}})"로 불리는 고지대의 [[리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비옥한 고지대의 원래 주인이었다가 땅을 [[백인]]에게 빼앗긴 [[키쿠유 족]] 출신이며 [[기독교|기독교 신자]]로 자라났다. (나중에 그는 [[영어]]와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름도 본명인 '''제임스 응구기'''에서 '''응구기 와 티옹오'''로 계명한다.) [[캄팔라]](현 [[우간다]]의 [[수도]])의 [[마케레레 대학]]과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lang|en|Weep Not, Child}})', [[사이의 강]]({{lang|en|The River Between}})', [[한 알의 밀]]({{lang|en|A Grain of Wheat}})'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식민지에서의 문화 충돌과 [[기독교]]의 역할, 영국의 키쿠유 족 등 아프리카인들 탄압, 식민 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반란]]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케냐 독립 이후로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강력히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77년]]에는 [[나는 원할 때 결혼하겠다]]({{llang|sw|Ngaahika ndeenda}})'라는 희곡의 정치권 풍자가 정권의 미움을 사 응구기는 [[대니얼 아랍 모이]] [[케냐의 대통령|당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수감 중에 그는 소설 [[피의 꽃잎]]({{lang|en|Petals of Blood}})'를 집필하였다. 석방 후 1982년 [[케냐]]를 떠나 [[런던]]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1987년]]에는 대표작 [[마티가리]](Matigari)'를 발표하였다. 후에 [[나이로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키쿠유어]]를 사용한 소설 집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에 발표된 '십자가의 악마([[키쿠유어]] : Caitaani muthara-Ini)'는 사상 최초의 키쿠유어 소설이다. 응구기는 참된 [[아프리카 문학]]은 아프리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부터는 [[뉴욕 대학]](NYU)에서 비교문학과 공연학 교수로 있다.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en}} [http://www.ngugiwathiongo.com 공식 웹사이트] {{전거 통제}} {{기본정렬:와 티옹오, 응구기}} {{토막글|작가}} [[분류:1938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케냐의 소설가]] [[분류:케냐의 수필가]] [[분류:케냐의 극작가]] [[분류:박경리문학상 수상자]] [[분류:마케레레 대학교 동문]] [[분류:리즈 대학교 동문]]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교수]] [[분류:케냐의 망명자]] [[분류:20세기 수필가]] [[분류:21세기 수필가]] [[분류:영국에 거주한 케냐인]] [[분류:우간다에 거주한 케냐인]] [[분류:케냐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
'''율리시스'''(Ulyss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 문학과 영화 == * 《[[율리시스 (소설)|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 [[율리시즈 (1954년 영화)]] * [[율리시스 (1967년 영화)]] : 율리시스 소설에 바탕한 영화 * [[율리시스 (시)]] : [[앨프리드 테니슨|앨프레드 테니슨]]의 시 * [[율리시스 무어]] :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의 소설 == 지리 == * [[율리시스 (캔자스)]] * [[율리시스 (뉴욕)]] == 기술 == * [[율리시스 (로봇)]] : 폭탄 탐지 로봇 * [[율리시스 (케이블 시스템)]] : 해저 통신 케이블 네트워크 == 운송 수단 == * [[율리시스 (우주선)]] : 태양을 연구하기 위한 우주 탐사선 * [[USS 율리시스]] : 미국 해군 함선 이름 == 인물 == * [[율리시스 S. 그랜트]] : 미국의 장군이자 18대 대통령 == 같이 보기 == * {{in title|율리시스}} {{동음이의|지명|인명}}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선거 정보 | 선거명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국가 = 대한민국 | 국기_연도 = 1997 | 유형 = 의회 | 선거일 = 2004년 4월 15일 | 선거_구성원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목록|국회의원 목록]] | 이전선거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이전선거_연도 = 2000년 | 차기선거 =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차기선거_연도 = 2008년 | 선출_의석 = 299석 | 과반_의석 = 150석 | 투표율 = 60.6%({{증가}} 3.4%p) | 정당색 = yes | 정당명 = no <!-- 열린우리당 --> | 이미지1 = [[파일:Minister of Unification Chung Dong-Young.jpg|150x150px]] | 리더1 = [[정동영]]<br /><small>당의장</small> | 정당1 = [[열린우리당]] | 색1 = 열린우리당 | 리더_취임1 = 2004년<br />1월 11일 | 리더_선거구1 = 비례대표 22번 ''(선거 전 사퇴)'' | 이전선거결과1 = ''신생 정당'' | 선거전_의석1 = 47석 | 선거후_의석1 = '''152석''' | 의석증감1 = {{증가}} 103 | 득표수1 = '''8,145,814''' | 득표율1 = '''38.26%''' | 득표증감1 = <!-- 한나라당 --> | 이미지2 = [[파일:Park Geun-hye.jpg|150x150px]] | 리더2 = [[박근혜]]<br /><small>당대표</small> | 정당2 = [[자유한국당|한나라당]] | 색2 = 한나라당 | 리더_취임2 = 2004년<br />3월 23일 | 리더_선거구2 = [[달성군 (1996년 선거구)|대구 달성군]] | 이전선거결과2 = '''133석''' | 선거전_의석2 = '''139석''' | 선거후_의석2 = 121석 | 의석증감2 = {{감소}} 18 | 득표수2 = 7,613,660 | 득표율2 = 35.76% | 득표증감2 = <!-- 민주노동당 --> | 이미지3 = [[파일:Kwon Young-Ghil.png|150x150px]] | 리더3 = [[권영길]]<br /><small>당대표</small> | 정당3 =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 색3 = 민주노동당 | 리더_취임3 = 2000년<br />1월 30일 | 리더_선거구3 = [[창원시 을|경남 창원시 을]] | 이전선거결과3 = 0석 | 선거전_의석3 = 0석 | 선거후_의석3 = 10석 | 의석증감3 = {{증가}} 10 | 득표수3 = 2,774,061 | 득표율3 = 13.03% | 득표증감3 = <!-- 새천년민주당 --> | 이미지4 = [[파일:조순형.jpg|100x100px]] | 리더4 = [[조순형]]<br><small>대표최고위원</small> | 정당4 =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새천년민주당]] | 색4 = 새천년민주당 | 리더_취임4 = 2003년 | 리더_선거구4 = [[수성구 갑|대구 수성구 갑]] ''(낙선)'' | 이전선거결과4 = 115석 | 선거전_의석4 = 59석 | 선거후_의석4 = 9석 | 의석증감4 = {{감소}} 50 | 득표수4 = 1,510,178 | 득표율4 = 7.09% | 득표증감4 = <!-- 자유민주연합 --> | 이미지5 = [[파일:Kim Jong-pil 1999.png|120x100px]] | 리더5 = [[김종필]]<br><small>총재</small> | 정당5 = [[자유민주연합]] | 색5 = 자유민주연합 | 리더_취임5 = 1995년<br>3월 21일 | 리더_선거구5 = 비례대표 1번 ''(낙선)'' | 이전선거결과5 = 17석 | 선거전_의석5 = 10석 | 선거후_의석5 = 4석 | 의석증감5 = {{감소}} 6 | 득표수5 = 600,462 | 득표율5 = 2.82% | 득표증감5 = <!-- map --> | 지도_이미지 = South Korean Legislative Election 2004 districts.svg | 지도_크기 = 350px | 지도2_이미지 = South Korean Legislative Election 2004.svg | 지도2_크기 = 350px | 지도2_설명 = 정당별 의석 획득 수<br /><span style="color:#0095DA;">■</span> 한나라당 <span style="color:#00A594;">■</span> 새천년민주당 <span style="color:#FFE04D;">■</span> 열린우리당 <span style="color:#498C00;">■</span> 자유민주연합 <span style="color:#197C53;">■</span> 국민통합21 <span style="color:#F8941D;">■</span> 민주노동당 <span style="color:#A6A6A6;">■</span> 무소속 <!-- bottom --> | 직책 =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국회의장]] | 선거전 = [[박관용]] | 선거전_정당 = [[자유한국당|한나라당]] | 선거후 = [[김원기]] | 선거후_정당 = [[열린우리당]] }} [[파일:Emblem_of_the_National_Assembly_of_Korea_(1948-2014).svg|120px|right]]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4년]] [[4월 15일]] 목요일에 실시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 선거부터 [[1인 2표제]]가 도입되어 지역구 투표에 1표, 비례대표 투표에 1표를 행사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하여 총 299명(지역구 243, 비례 56)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으며, 선거 투표율은 60.6%를 기록하였다. 선거 결과 [[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인 152석을 얻었다. 이어 [[자유한국당|한나라당]]이 121석,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이 10석, [[민주당 (2000년 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이 9석, [[자유민주연합]]이 4석, [[국민통합21]]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얻었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목록|제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임기는 2004년 5월 30일부터 4년이다. == 선거 개요 == 민주당계 정권 2기 [[참여정부]] 출범부터 시작해서 [[삼김시대]]의 종식과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민주당-열린우리당 간의 분열, 제1야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김대중]] 정부의 4천억 불법 대북 송금,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규정하던 공직선거법 제189조가 위헌 판정을 받아([[:s:2000헌마91|2000헌마91]]), 이 선거부터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별개로 실시하는 [[1인 2표제]]를 도입했다. === 지역구 선거구 조정 === 서울특별시는 성동구,노원구 갑·을,송파구 갑·을은 선거구 인구수 초과으로 인해 각각 성동구 갑·을, 노원구 갑·을·병,송파구 갑·을·병으로 분구한다. 경기도는 [[수원시]]에 영통구가 신설되면서 수원시 팔달구에서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가 분구되었다. 안양시 동안구는 안양시 동안구 갑·을, 의정부시는 의정부시 갑·을,남양주시는 남양주시 갑·을,광명시는 광명시 갑·을으로 분구하였다. 화성시·오산시는 인구 증가되어서 화성시, 오산시의 단독 선거구로 분리한다. 반면 단독 선거구였던 이천시와 여주군은 선거구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이천시·여주군으로 통합하고 반면 연천군·포천군, 광주군, 과천시·의왕시는 포천시-연천군, 광주시, 의왕시·과천시으로 명칭변경을 한다. 인천광역시에서 유일한 단독 선거구 계양구를 계양구 갑·을로 분구한다. 부산광역시 남구는 부산 남구 갑·을으로 분구하고 울산 남구는 울산 남구 갑·을으로 분리하고 경남는 김해시, 진주시를 각각 김해시 갑·을,진주시 갑·을으로 분리한다. 대신에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의령군·함안군, 함양군·거창군, 산청군·합천군이 의령군·함안군·합천군과 산청군·함양군·거창군으로 조정되었다. 대구광역시는 대구 동구, 대구 달서구 갑·을이 각각 대구 동구 갑·을,대구 달서구 갑·을·병으로 분리하게 된다. 경북은 단독선거구였던 구미시는 인구수 초과으로 인해 구미시 갑·을으로 분구되며 고령군·성주군과 칠곡군은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칠곡군·성주군·고령군으로 통폐합이 되었었다. 군위군·의성군, 봉화군·울진군, 청송군·영양군·영덕군은 군위군·의성군·청송군과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광주광역시는 서구가 서구 갑·을으로 분리되고 전라남도의 여수시는 인구 초과로 여수시 갑·을로 분구되었다. 반면, 나주시, 고흥군, 보성군·화순군이 나주시·화순군, 고흥군·보성군으로 조정되었다. 전라북도는 전주시 완산구, 익산시는 인구수가 초과되어서 전주시 완산구 갑을,익산시 갑을으로 분구되었다. 반면 김제시, 완주군·임실군, 진안군·장수군·무주군이 김제시·완주군, 진안군·장수군·무주군·임실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충남는 부여군, 청양군·홍성군, 예산군이 부여군·청양군, 홍성군·예산군으로 구역 조정되었고, 논산시·금산군은 계룡시가 신설되면서 논산시·계룡시·금산군으로 선거구 명칭를 변경했다. 충북는 청주시 흥덕구가 인구수가 초과되어서 청주시 흥덕구 갑·을으로 분구했으며 진천군-괴산군-음성군은 증평군 신설으로 인해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으로 선거구 명칭를 변경했다. 강원은 태백시·정선군과 영월군·평창군이 선거구 인구수가 미달되어서 태백시·정선군·영월군·평창군으로 통폐합되었고,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과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이 속초시·고성군·양양군과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제주는 제주시,북제주군은 북제주군이 인구수 미달되어서 제주 지역의 일부를 편입해 와 제주시-북제주군 갑·을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반면 대전광역시의 변동 사항은 없다. {| class=wikitable !지역 !16대 국회 지역구 !17대 국회 지역구 !비교 |- | rowspan=3 | 서울 || 성동구 || 성동구 갑을 || rowspan=3 | 분구 |- | 노원구 갑을 || 노원구 갑을병 |- | 송파구 갑을 || 송파구 갑을병 |- | rowspan=13 | 경기 || rowspan=2 |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 팔달구 || rowspan=2 | 선거구 신설<br>분구 |- | 수원시 영통구 |- |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동안구 갑을 || 분구 |- | rowspan=2 | 화성시·오산시 || 화성시 || rowspan=2 | 분구 |- | 오산시 |- | 광명시 || 광명시 갑을 || 분구 |- | 의정부시 || 의정부시 갑을 || 분구 |- | 남양주시 || 남양주시 갑을 || 분구 |- | 이천시 || rowspan=2 | 이천시·여주군 || rowspan=2 | 선거구 통폐합 |- | 여주군 |- | 연천군·포천군 || 포천시·연천군 || rowspan=3 | 명칭 변경 |- | 광주군 || 광주시 |- | 과천시·의왕시 || 의왕시·과천시 |- | 인천 || 계양구 || 계양구 갑을 || 분구 |- | 부산 || 남구 || 남구 갑을 || 분구 |- | 울산 || 남구 || 남구 갑을 || 분구 |- | rowspan=5 | 경남 || 김해시 || 김해시 갑을 || 분구 |- | 진주시 || 진주시 갑을 || 분구 |- | 의령군·함안군 || 의령군·함안군·합천군 || rowspan=3 | 선거구 통폐합 |- | 함양군·거창군 || rowspan=2 | 산청군·함양군·거창군 |- | 산청군·함안군 |- | rowspan=2 | 대구 || 동구 || 동구 갑을 || 분구 |- | 달서구 갑을 || 달서구 갑을병 || 분구 |- | rowspan=6 | 경북 || 구미시 || 구미시 갑을 || 분구 |- | 칠곡군 || rowspan=2 | 고령군·성주군·칠곡군 || rowspan=2 | 선거구 통폐합 |- | 성주군·고령군 |- | 군위군·의성군 || 군위군·의성군·청송군 || rowspan=3 | 선거구 통폐합 |- | 청송군·영양군·영덕군 || rowspan=2 |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 | 봉화군·울진군 |- | 광주 || 서구 || 서구 갑을 || 분구 |- | rowspan=4 | 전남 || 여수시 || 여수시 갑을 || 분구 |- | 나주시 || rowspan=2 | 나주시·화순군 || rowspan=3 | 구역 조정 |- | 화순군·보성군 |- | 고흥군 || 고흥군·보성군 |- | rowspan=5 | 전북 || 전주시 완산구 || 전주시 완산구 갑을 || 분구 |- | 익산시 || 익산시 갑을 || 분구 |- | 김제시 || 김제시·완주군 || rowspan=3 | 선거구 통폐합 |- | 완주군·임실군 || rowspan=2 |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 |- | 진안군·장수군·무주군 |- | rowspan=4 |충남 || 부여군 || 부여군·청양군 || rowspan=3 | 선거구 통폐합 |- | 예산군 || rowspan=2 | 홍성군·예산군 |- | 홍성군·청양군 |- | 논산시·금산군 ||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명칭 변경 |- | rowspan=2 | 충북 || 청주시 흥덕구 || 청주시 흥덕구 갑을 || 분구 |- | 진천군·괴산군·음성군 ||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 명칭 변경 |- | rowspan=4 | 강원 || 철원군·화천군·양구군 ||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 || rowspan=2 | 구역 조정 |- |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 || 속초시·고성군·양양군 |- | 태백시·정선군 || rowspan=2 |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 || rowspan=2 | 선거구 통폐합 |- | 영월군·평창군 |- | rowspan=2 | 제주 || 제주시 || rowspan=2 | 제주시·북제주군 갑을 || rowspan=2 | 선거구 통폐합 |- | 북제주군 |} === 열린우리당 ===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초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뒤처지던 지지도가 역전되어 2위로 올라섰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과 경합 내지는 근소한 차이로 1위로 올라서는 선전을 펼쳤다. 이에 일각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수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제1당은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이 나왔는데, 2004년 3월 12일에 터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에 힘입어 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하였고,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하고 여기에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정동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 사퇴 및 비례대표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총선 결과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 한나라당 === 한나라당은 16대 대선에서 대권 강력후보 [[이회창]]은 대선 2번째 도전에서 결국 패배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여 떠나고 야당 생활은 계속 이어 갔다. 그러나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새천년민주당, 자민련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였다. 이후 전당 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 의원을 제치고 총선에서의 승리를 공약한 [[박근혜]] 의원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근혜는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목표 개헌 저지선 100석 이상 확보 및 거여 견제론에 바탕하여 선거 운동을 펼쳤고,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원내 121석을 확보하여 선거 운동 기간 초기에 예상되었던 참패는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의석수 100석 미달하면 보수 우파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다. 허나 지역구 의석수 100석 가운데 60석 정도는 텃밭이던 영남권 지역으로, 비영남권 지역에선 서울 강남권, 강원, 경기 동남부 지역 중심으로 40석 밖에 못얻었다는 한계는 보였다. 사실 이것도 범여권이 분열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그리고 이후 한나라당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새로운 차기 대선주자로 떠오르며 본격적인 [[친이]], [[친박]] 계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 민주노동당 ===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은 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權永吉) 대표의 지역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승리하였고, 13.0% 정당투표 득표율로 무려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새천년민주당 ===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공동으로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반발로 지지도가 급락하는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호남 지역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졌고, 이어진 당내 내분의 결과 [[추미애]]가 새천년민주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다. 추미애는 [[광주광역시]]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지지세 회복을 도모했지만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에서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전라남도]]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어 원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 자유민주연합 === 자유민주연합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충청권에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고 이를 실현에 옮기려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연합이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데 대해 충청권의 민심은 냉랭했고 그 결과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충청남도에서 겨우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은 비례대표 순위 1번으로 등록하여 국회의원선거 10선 달성을 목표로 했지만 지역구 의석이 4석에 그치고 비례대표 득표 역시 2.8%로, "비례대표 득표율 3% 이상 또는 지역구 5석 이상"인 비례대표 의석 배분 규칙에 미달하여 원내 입성이 좌절되어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 무소속 및 기타 정당 === * 제17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문경시·예천군]]의 [[신국환 (1939년)|신국환]]과 [[나주시·화순군]]의 [[최인기]]뿐이었다.(이후 두 의원 모두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 [[국민통합21]]은 [[동구 (울산 선거구)|울산 동구]]의 [[정몽준]]이 당선에 성공하여 1석을 얻었지만 대한민국의 시·도당과 당원의 수가 부족하여 17대 국회가 개시된 후 약 3개월여가 2004년 9월경에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정몽준 의원은 한나라당으로 입당했다. == 투표율 == * 전국 선거인수 35,596,497명 중 21,581,550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0.6%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지난 16대 총선의 투표율 57.2%와 비교하면 높고, 2002년 대선의 70.8%에 비교하면 낮은 수치이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80%; text-align:center;"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별 투표율 |- !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 !투표율 |62.2 % |61.9 % |59.3 % |57.4 % |60.2 % |58.9 % |62.0 % |59.7 % |59.7 % |58.2 % |56.0 % |61.2 % |63.4 % |61.5 % |62.3 % |61.1 % |} == 선거 결과 == === 정당별 당선자 수 === {| style="width:100%;" |- | colspan="7"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white;">↓</span>↓ |- | style="background:#F8941D; text-align:center; width:3.3%;"|<span style="color:white;">'''10'''</span> | style="background:#FFE04D; text-align:center; width:50.7%;"|'''152'''</span> | style="background:#00A594; text-align:center; width:3%;"|<span style="color:white;">'''9'''</span> | style="background:#aaaaaa; text-align:center; width:0.7%;"|<span style="color:white;">'''2'''</span> | style="background:#197C53; text-align:center; width:0.3%;"|<span style="color:white;">'''1'''</span> | style="background:#498C00; text-align:center; width:1%;"|<span style="color:white;">'''4'''</span> | style="background:#0095DA; text-align:center; width:40.3%;"|<span style="color:white;">'''121'''</span> | |-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F8941D;">'''[[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FFE04D;">'''[[열린우리당]]'''</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00A594;">'''[[새천년민주당]]'''</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DDDDDD;">'''무소속'''</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197C53;">'''[[국민통합21]]'''</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498C00;">'''[[자유민주연합]]'''</span> | style="text-align:center;" | <span style="color:#0095DA;">'''[[한나라당]]'''</span> |} {{원 도표 | 섬네일 = right | 설명 = 정당별 의석 비율 | 이름1 = 열린우리당 | 값1 = 50.8 | 색1 = {{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이름2 = 한나라당 | 값2 = 40.5 | 색2 = {{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이름3 = 민주노동당 | 값3 = 3.3 | 색3 = {{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 | 이름4 = 새천년민주당 | 값4 = 3 | 색4 = {{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이름5 = 자유민주연합 | 값5 = 1.3 | 색5 = {{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 | 이름6 = 국민통합 21 | 값6 = 0.3 | 색6 = {{정당색/대한민국|국민통합21|색1}} | 이름7 = 무소속 | 값7 = 0.7 | 색7 = gray }} {{원 도표 | 섬네일 = right | 설명 = 정당별 비례대표 득표율 | 이름1 = 열린우리당 | 값1 = 38.26 | 색1 = {{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이름2 = 한나라당 | 값2 = 35.76 | 색2 = {{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이름3 = 민주노동당 | 값3 = 13.03 | 색3 = {{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 | 이름4 = 새천년민주당 | 값4 = 7.09 | 색4 = {{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이름5 = 기타 정당 | 값5 = 5.86 | 색5 = black }} {| class="wikitable" style |+정당별 당선자 수 |-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합계 |- !열린우리당 |{{막대|열린|10|0}}{{막대|열린|2|9}} 129 |{{막대|열린|2|3}} 23 |{{막대|열린|10|0}}{{막대|열린|5|2}} 152 |- !한나라당 |{{막대|한|10|0}} 100 |{{막대|한|2|1}} 21 |{{막대|한|10|0}}{{막대|한|2|1}} 121 |- !민주노동당 |{{막대|민노|0|2}} 2 |{{막대|민노|0|8}} 8 |{{막대|민노|1|0}} 10 |- !새천년민주당 |{{막대|5민|0|5}} 5 |{{막대|5민|0|4}} 4 |{{막대|5민|0|9}} 9 |- !자유민주연합 |{{막대|자민|0|4}} 4 | 0 |{{막대|자민|0|4}} 4 |- !국민통합21 |{{막대|녹|0|1}} 1 | 0 |{{막대|녹|0|1}} 1 |- !무소속 |{{막대|무|0|2}} 2 |align=center|― |{{막대|무|0|2}} 2 |- !합계 |{{막대|열린|10|0}}{{막대|열린|2|9}}{{막대|한|10|0}}{{막대|5민|0|5}}{{막대|자민|0|4}}{{막대|민노|0|2}}{{막대|녹|0|1}}{{막대|무|0|2}} 243 |{{막대|열린|2|3}}{{막대|한|2|1}}{{막대|민노|0|8}}{{막대|5민|0|4}} 56 |{{막대|열린|10|0}}{{막대|열린|5|2}}{{막대|한|10|0}}{{막대|한|2|1}}{{막대|민노|1|0}}{{막대|5민|0|9}}{{막대|자민|0|4}}{{막대|녹|0|1}}{{막대|무|0|2}} 299 |} === 지역별 지역구 의석 분포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font-size:100%;" |- style="background-color: #cccccc;" ! 지역 !! 한나라당 !! 민주당 !! 열린우리당 !! 자유민주연합 !! 민주노동당 !! 국민통합21 !! 무소속 !! 합계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서울]] | {{막대|한|3|3}} 16 | - | {{막대|열린|6|7}} '''32''' | - | - | - | - | {{막대|열린|6|7}}{{막대|한|3|3}} 48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광역시|부산]] | {{막대|한|9|4}} '''17''' | - | {{막대|열린|0|6}} 1 | - | - | - | - | {{막대|한|9|4}}{{막대|열린|0|6}} 18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광역시|대구]] | {{막대|한|10|0}} '''12''' | - | - | - | - | - | - | {{막대|한|10|0}} 12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광역시|인천]] | {{막대|한|2|5}} 3 | - | {{막대|열린|7|5}} '''9''' | - | - | - | - | {{막대|열린|7|5}}{{막대|한|2|5}} 12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광역시|광주]] | - | - | {{막대|열린|10|0}} '''7''' | - | - | - | - | {{막대|열린|10|0}} 7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광역시|대전]] | - | - | {{막대|열린|10|0}} '''6''' | - | - | - | - | {{막대|열린|10|0}} 6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광역시|울산]] | {{막대|한|4|9}} '''3''' | - | {{막대|열린|1|7}} 1 | - | {{막대|민노|1|7}} 1 | {{막대|녹|1|7}} 1 | - | {{막대|한|4|9}}{{막대|열린|1|7}}{{막대|민노|1|7}}{{막대|녹|1|7}} 6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경기]] | {{막대|한|2|9}} 14 | - | {{막대|열린|7|1}} '''35''' | - | - | - | - | {{막대|열린|7|1}}{{막대|한|2|9}} 49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도|강원]] | {{막대|한|9|0}} '''6''' | - | {{막대|열린|1|0}} 2 | - | - | - | - | {{막대|한|9|0}}{{막대|열린|1|0}} 8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충북]] | - | - | {{막대|열린|10|0}} '''8''' | - | - | - | - | {{막대|열린|10|0}} 8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충남]] | {{막대|한|1|0}} 1 | - | {{막대|열린|5|0}} '''5''' | {{막대|자민|4|0}} 4 | - | - | - | {{막대|열린|5|0}}{{막대|자민|4|0}}{{막대|한|1|0}} 10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전북]] | - | - | {{막대|열린|10|0}} '''11''' | - | - | - | - | {{막대|열린|10|0}} 11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전남]] | - | {{막대|5민|3|8}} 5 | {{막대|열린|5|0}} '''7''' | - | - | - | {{막대|무|1|2}} 1 | {{막대|열린|5|0}}{{막대|5민|3|8}}{{막대|무|1|2}} 13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경북]] | {{막대|한|9|5}} '''14''' | - | - | - | - | - | {{막대|무|0|5}} 1 | {{막대|한|9|5}}{{막대|무|0|5}} 15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경남]] | {{막대|한|8|2}} '''14''' | - | {{막대|열린|1|2}} 2 | - | {{막대|민노|0|6}} 1 | - | - | {{막대|한|8|2}}{{막대|열린|1|2}}{{막대|민노|0|6}} 17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도|제주]] | - | - | {{막대|열린|10|0}} '''3''' | - | - | - | - | {{막대|열린|10|0}} 3 |- class="sortbottom" | 합계 | {{막대|한|4|1}} 100 | {{막대|5민|0|2}} 5 | {{막대|열린|5|3}} '''129''' | {{막대|자민|0|2}} 4 | {{막대|민노|0|1}} 2 | 1 | {{막대|무|0|1}} 2 | {{막대|열린|5|3}}{{막대|한|4|1}}{{막대|5민|0|2}}{{막대|자민|0|2}}{{막대|민노|0|1}}{{막대|무|0|1}} 243 |} === 지역구 득표 결과 === {| class="wikitable sortable" |-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비고 |- ! [[한나라당]] |align=right|8,083,609 ||{{막대|한|3|7}} 37.90% |align=center|100 || |- ! [[새천년민주당]] |align=right|1,698,368 ||{{막대|5민|0|7}} 7.96% |align=center| 5|| |- ! [[열린우리당]] |align=right| 8,957,665||{{막대|열린|3|8}} 41.99% |align=center|129 || |- ! [[자유민주연합]] |align=right|569,083 ||{{막대|자민|0|2}} 2.67% |align=center|4 || |- ! [[국민통합21]] |align=right|63,989 || 0.30% |align=center|1 || |- ! [[민주국민당 (2000년)|민주국민당]] |align=right|4,347 || 0.02% |align=center| ||등록취소 |- ! [[가자희망2080]] |align=right|1,253 || 0.01% |align=center| ||등록취소 |-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1997년)|민주공화당]] |align=right|2,405 || 0.01% |align=center| ||등록취소 |- ! [[구국총연합]] |align=right|226 ||0.00% |align=center| ||등록취소 |- ! [[한국기독당]] |align=right|8,267 || 0.04% |align=center| ||등록취소 |- ! [[노년권익보호당]] |align=right|2,582 ||0.01% |align=center| ||등록취소 |- ! [[녹색사민당]] |align=right|37,789 ||0.18% |align=center| ||등록취소 |- !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align=right|920,229 ||{{막대|민노|0|4}} 4.31% |align=center|2 || |- ! [[사회당 (대한민국, 1998년)|사회당]] |align=right|8,004 || 0.04% |align=center| ||등록취소 |- ! 무소속 |align=right|972,954 ||{{막대|무|0|4}} 4.56% |align=center|2 || |- ! 총합 |align=right|21,330,770 || |align=center|243 || |} === 비례대표 득표 결과 === {{참고|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비례대표 개표결과 시작|선거명=[[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비례대표 개표결과 |유권자=35,596,497}} {{당선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열린우리당 |득표수=8,145,824 |득표율=38.26 |당선자수=23}} {{당선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한나라당 |득표수=7,613,660 |득표율=35.76 |당선자수=21}} {{당선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민주노동당 |득표수=2,774,061 |득표율=13.03 |당선자수=8}} {{당선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새천년민주당 |득표수=1,510,178 |득표율=7.09 |당선자수=4}}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자유민주연합 |득표수=600,462 |득표율=2.82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한국기독당 |득표수=228,837 |득표율=1.07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국민통합21 |득표수=119,746 |득표율=0.56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녹색사민당 |득표수=103,845 |득표율=0.48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사회당1998 |득표수=47,311 |득표율=0.22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민주화합당 |득표수=39,785 |득표율=0.18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노년권익보호당 |득표수=37,084 |득표율=0.17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가자희망2080 |득표수=31,501 |득표율=0.14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민주공화당2000 |득표수=24,360 |득표율=0.11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국가=대한민국 |정당=구국총연합 |득표수=9,330 |득표율=0.04 |당선자수=0}} {{비례대표 개표결과 합계|합계=21,285,984 |무효표=295,566}} {{비례대표 개표결과 끝}} 열린우리당은 당초 170석, 많게는 200석까지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턱걸이하는데에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박근혜]]의 지도 아래 기사회생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데에 성공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중에선 최초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이 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경우, 4석을 얻는데 그쳤고 봉쇄조항을 넘기지 못함으로써 비례 1번이었던 [[김종필]]이 낙선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 당선자 == === 지역구 === <span style="font-size:90%;">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글씨 색|black|열린우리당|링크=예}}}}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글씨 색|white|한나라당|링크=자유한국당}}}}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글씨 색|white|새천년민주당|링크=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글씨 색|white|자유민주연합|링크=예}}}}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글씨 색|white|민주노동당|링크=민주노동당 (대한민국)}}}}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국민통합21|색1}}|{{글씨 색|white|국민통합21|링크=예}}}} {{색 상자|{{정당색/대한민국|무소속|색1}}|{{글씨 색|white|무소속|링크=예}}}} </span>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80%; margin-right:0px; white-space:nowrap; line-height:1.4em;" ! width="90" | 시·도 ! colspan="4" | 선거구 / 당선자 |- ! rowspan="3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 style="text-align:left;" width="180" | [[종로구 (1988년 선거구)|종로구]] ! style="text-align:left;" width="180" | [[중구 (1988년 서울 선거구)|중구]] ! style="text-align:left;" width="180" | [[용산구 (1988년 선거구)|용산구]] ! style="text-align:left;" width="180" | [[성동구 갑 (2004년 선거구)|성동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진|링크=박진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성범|링크=박성범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진영|링크=진영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재천|링크=최재천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성동구 을 (2004년 선거구)|성동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광진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광진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동대문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임종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영춘|링크=김영춘 (196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형주|링크=김형주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희선|링크=김희선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동대문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중랑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중랑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성북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홍준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화영|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덕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재건|링크=유재건 (1937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성북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강북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강북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도봉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신계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오영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규식|링크=최규식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근태|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도봉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노원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노원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노원구 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인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봉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우원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임채정|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은평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은평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서대문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서대문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미경|링크=이미경 (1950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재오|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우상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두언|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마포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마포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양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양천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노웅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청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원희룡|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낙순|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강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강서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구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구로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신기남|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노현송|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인영|링크=이인영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한길|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금천구 (선거구)|금천구]] ! style="text-align:left;" | [[영등포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영등포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동작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목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고진화|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권영세|링크=권영세 (195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전병헌|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동작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관악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관악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서초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계안|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기홍|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해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혜훈|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서초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강남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강남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송파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덕룡|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종구|링크=이종구 (1950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공성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맹형규|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송파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송파구 병]] ! style="text-align:left;" | [[강동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강동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계동|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근식|링크=이근식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충환|링크=김충환 (1954년생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상경|링크=이상경 (1964년)}}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15"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광역시|부산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중구·동구 (부산 선거구)|중구·동구]] ! style="text-align:left;" | [[서구 (1988년 부산 선거구)|서구]] ! style="text-align:left;" | [[영도구 (1988년 선거구)|영도구]] ! style="text-align:left;" | [[부산진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의화|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유기준|링크=유기준 (195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형오|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병호|링크=김병호 (1943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부산진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동래구 (2000년 선거구)|동래구]] ! style="text-align:left;" | [[남구 갑 (2004년 부산 선거구)|남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남구 을 (2004년 부산 선거구)|남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성권|링크=이성권 (1968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재웅|링크=이재웅 (1953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정훈|링크=김정훈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무성|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북구·강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북구·강서구 을]] ! style="text-align:left;" | [[해운대구·기장군 갑]] ! style="text-align:left;" | [[해운대구·기장군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형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허태열|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서병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안경률|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사하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사하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금정구 (2000년 선거구)|금정구]] ! style="text-align:left;" | [[연제구 (선거구)|연제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엄호성|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조경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승환|링크=박승환 (1957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희정|링크=김희정 (1971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수영구 (선거구)|수영구]] ! style="text-align:left;" | [[사상구 (선거구)|사상구]] | rowspan="2" colspan="2"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형준|링크=박형준 (1960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권철현|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9"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광역시|대구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중구·남구 (대구 선거구)|중구·남구]] ! style="text-align:left;" | [[동구 갑 (2004년 대구 선거구)|동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동구 을 (2004년 대구 선거구)|동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서구 (대구 선거구)|서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곽성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주성영|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창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강재섭|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북구 갑 (대구)|북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북구 을 (대구)|북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수성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수성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명규|링크=이명규 (1956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안택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한구|링크=이한구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주호영|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달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달서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달서구 병]] ! style="text-align:left;" | [[달성군 (1996년 선거구)|달성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종근|링크=박종근 (1937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해봉|링크=이해봉 (194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석준|링크=김석준 (195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근혜|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9"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광역시|인천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중구·동구·옹진군]] ! style="text-align:left;" | [[남구 갑 (인천)|남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남구 을 (인천)|남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연수구 (선거구)|연수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한광원|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필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안영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황우여|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남동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남동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부평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부평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윤성|링크=이윤성 (1944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호웅|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문병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용규}}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계양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계양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서구·강화군 갑]] ! style="text-align:left;" | [[서구·강화군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신학용|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송영길|링크=송영길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교흥|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경재|링크=이경재 (1941년)}}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동구 (광주 선거구)|동구]] ! style="text-align:left;" | [[서구 갑 (2004년 광주 선거구)|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서구 을 (2004년 광주 선거구)|서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남구 (광주 선거구)|남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양형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염동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동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지병문|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북구 갑 (광주)|북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북구 을 (광주)|북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광산구 (선거구)|광산구]] | rowspan="2" colspan="1"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강기정|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태홍}}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동철|링크=김동철 (1955년)}}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광역시|대전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동구 (대전 선거구)|동구]] ! style="text-align:left;" | [[중구 (대전 선거구)|중구]] ! style="text-align:left;" | [[서구 갑 (대전)|서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서구 을 (대전)|서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선병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권선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박병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구논회|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유성구 (선거구)|유성구]] ! style="text-align:left;" | [[대덕구 (선거구)|대덕구]] | rowspan="2" colspan="2"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상민|링크=이상민 (1958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원웅|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광역시|울산광역시]] ! style="text-align:left;" | [[중구 (울산 선거구)|중구]] ! style="text-align:left;" | [[남구 갑 (울산)|남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남구 을 (울산)|남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동구 (울산 선거구)|동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갑윤|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최병국|링크=최병국 (194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기현|링크=김기현 (195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국민통합21|색1}} | {{글씨 색|white|정몽준|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북구 (울산 선거구)|북구]] ! style="text-align:left;" | [[울주군 (2000년 선거구)|울주군]] | rowspan="2" colspan="2"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 | {{글씨 색|white|조승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강길부|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39"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경기도]] ! style="text-align:left;" | [[수원시 장안구 (선거구)|수원시 장안구]] ! style="text-align:left;" | [[수원시 권선구 (선거구)|수원시 권선구]] ! style="text-align:left;" | [[수원시 팔달구 (선거구)|수원시 팔달구]] ! style="text-align:left;" |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수원시 영통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심재덕|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기우|링크=이기우 (1966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남경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진표|링크=김진표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성남시 수정구 (선거구)|성남시 수정구]] ! style="text-align:left;" |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성남시 중원구]] ! style="text-align:left;" | [[성남시 분당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성남시 분당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태년|링크=김태년 (1965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상락}}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고흥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임태희|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의정부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의정부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안양시 만안구 (선거구)|안양시 만안구]] ! style="text-align:left;" | [[안양시 동안구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문희상|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강성종|링크=강성종 (1966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종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석현|링크=이석현 (1951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안양시 동안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부천시 원미구 갑]] ! style="text-align:left;" | [[부천시 원미구 을]] ! style="text-align:left;" |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부천시 소사구]]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심재철|링크=심재철 (1958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기석}}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배기선|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문수|링크=김문수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부천시 오정구 (선거구)|부천시 오정구]] ! style="text-align:left;" | [[광명시 갑]] ! style="text-align:left;" | [[광명시 을]] ! style="text-align:left;" | [[평택시 갑]]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원혜영|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원영|링크=이원영 (1954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전재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우제항|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평택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양주시·동두천시]] ! style="text-align:left;" | [[안산시 상록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안산시 상록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장선|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성호|링크=정성호 (196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장경수|링크=장경수 (195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임종인|링크=임종인 (1956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안산시 단원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안산시 단원구 을]] ! style="text-align:left;" | [[고양시 덕양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고양시 덕양구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천정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제종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시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성|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고양시 일산구 갑]] ! style="text-align:left;" | [[고양시 일산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의왕시·과천시]] ! style="text-align:left;" | [[구리시 (선거구)|구리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한명숙|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영선|링크=김영선 (1960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안상수|링크=안상수 (창원 출신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윤호중|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남양주시 갑]] ! style="text-align:left;" | [[남양주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오산시 (선거구)|오산시]] ! style="text-align:left;" | [[화성시 (선거구)|화성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재성|링크=최재성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박기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안민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안병엽}}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시흥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시흥시 을]] ! style="text-align:left;" | [[군포시 (1996년 선거구)|군포시]] ! style="text-align:left;" | [[하남시 (선거구)|하남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백원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조정식|링크=조정식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부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문학진|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파주시 (선거구)|파주시]] ! style="text-align:left;" | [[이천시·여주군]] ! style="text-align:left;" | [[용인시 갑 (2000년 선거구)|용인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용인시 을 (2000년 선거구)|용인시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재창|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규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우제창|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한선교|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안성시 (선거구)|안성시]] ! style="text-align:left;" | [[김포시 (선거구)|김포시]] ! style="text-align:left;" | [[광주시 (경기 선거구)|광주시]] ! style="text-align:left;" | [[포천시·연천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선미|링크=김선미 (1961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유정복|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혁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철우|링크=이철우 (1960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양평군·가평군]] | rowspan="2" colspan="3"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병국|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도|강원도]] ! style="text-align:left;" | [[춘천시 (2000년 선거구)|춘천시]] ! style="text-align:left;" | [[원주시 (2000년 선거구)|원주시]] ! style="text-align:left;" | [[강릉시 (2000년 선거구)|강릉시]] ! style="text-align:left;" | [[동해시·삼척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허천|링크=허천 (1943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계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심재엽|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최연희|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속초시·고성군·양양군]] ! style="text-align:left;" | [[홍천군·횡성군]] ! style="text-align:left;" |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 ! style="text-align:left;" |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문헌|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조일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광재|링크=이광재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세환}}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6"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충청북도]] ! style="text-align:left;" | [[청주시 상당구 (선거구)|청주시 상당구]] ! style="text-align:left;" | [[청주시 흥덕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청주시 흥덕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충주시 (1996년 선거구)|충주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홍재형|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오제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노영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시종|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제천시·단양군]] ! style="text-align:left;" | [[청원군 (1988년 선거구)|청원군]] ! style="text-align:left;" | [[보은군·옥천군·영동군 (1988년 선거구)|보은군·옥천군·영동군]] ! style="text-align:left;" |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서재관|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변재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용희|링크=이용희 (1931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종률|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9"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충청남도]] ! style="text-align:left;" | [[천안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천안시 을]] ! style="text-align:left;" | [[공주시·연기군]] ! style="text-align:left;" | [[보령시·서천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양승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박상돈|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오시덕|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 | {{글씨 색|white|류근찬|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아산시 (선거구)|아산시]] ! style="text-align:left;" | [[서산시·태안군]] ! style="text-align:left;" |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style="text-align:left;" | [[부여군·청양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복기왕|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문석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 | {{글씨 색|white|이인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 | {{글씨 색|white|김학원|링크=김학원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홍성군·예산군]] ! style="text-align:left;" | [[당진군 (1988년 선거구)|당진군]] | rowspan="2" colspan="2"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홍문표|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자유민주연합|색1}} | {{글씨 색|white|김낙성|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9"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전라북도]] ! style="text-align:left;" | [[전주시 완산구 갑]] ! style="text-align:left;" | [[전주시 완산구 을]] ! style="text-align:left;" |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전주시 덕진구]] ! style="text-align:left;" | [[군산시 (2000년 선거구)|군산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장영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광철|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채수찬|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강봉균|링크=강봉균 (정치인)}}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익산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익산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정읍시 (선거구)|정읍시]] ! style="text-align:left;" | [[남원시·순창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한병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조배숙|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원기|링크=김원기 (1937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강래|링크=이강래 (1953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김제시·완주군]] ! style="text-align:left;" |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 ! style="text-align:left;" | [[고창군·부안군 (2000년 선거구)|고창군·부안군]] | rowspan="2" colspan="1"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규성|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정세균|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춘진|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12"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전라남도]] ! style="text-align:left;" | [[목포시 (2000년 선거구)|목포시]] ! style="text-align:left;" | [[여수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여수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순천시 (2000년 선거구)|순천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이상열}}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성곤|링크=김성곤 (195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주승용|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서갑원|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나주시·화순군]] ! style="text-align:left;" | [[광양시·구례군 (2000년 선거구)|광양시·구례군]] ! style="text-align:left;" | [[담양군·곡성군·장성군]] ! style="text-align:left;" | [[고흥군·보성군 (2004년 선거구)|고흥군·보성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무소속|색1}} | {{글씨 색|white|최인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우윤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김효석|링크=김효석 (194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신중식}}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장흥군·영암군]] ! style="text-align:left;" | [[강진군·완도군]] ! style="text-align:left;" | [[해남군·진도군 (1988년 선거구)|해남군·진도군]] ! style="text-align:left;" | [[무안군·신안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유선호|링크=유선호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이영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이정일|링크=이정일 (1947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한화갑|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함평군·영광군]] | rowspan="2" colspan="3"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이낙연|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12"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경상북도]] ! style="text-align:left;" | [[포항시 북구 (선거구)|포항시 북구]] ! style="text-align:left;" | [[포항시 남구·울릉군]] ! style="text-align:left;" | [[경주시 (2000년 선거구)|경주시]] ! style="text-align:left;" | [[김천시 (1996년 선거구)|김천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병석|링크=이병석 (1952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상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정종복|링크=정종복 (1950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임인배|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안동시 (2000년 선거구)|안동시]] ! style="text-align:left;" | [[구미시 갑]] ! style="text-align:left;" | [[구미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영주시 (선거구)|영주시]]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권오을|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성조|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태환|링크=김태환 (1943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장윤석|링크=장윤석 (1950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영천시 (선거구)|영천시]] ! style="text-align:left;" | [[상주시 (선거구)|상주시]] ! style="text-align:left;" | [[문경시·예천군]] ! style="text-align:left;" | [[경산시·청도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덕모|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상배|링크=이상배 (193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무소속|색1}} | {{글씨 색|white|신국환|링크=신국환 (1939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최경환|링크=최경환 (1955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고령군·성주군·칠곡군]] ! style="text-align:left;" | [[군위군·의성군·청송군]] ! style="text-align:left;" |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 rowspan="2" colspan="1"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인기|링크=이인기 (1953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재원|링크=김재원 (1964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광원}}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15"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경상남도]] ! style="text-align:left;" | [[창원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창원시 을]] ! style="text-align:left;" | [[마산시 갑 (2004년 선거구)|마산시 갑]] ! style="text-align:left;" | [[마산시 을 (2004년 선거구)|마산시 을]]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권경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 | {{글씨 색|white|권영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정부|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안홍준|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진주시 갑]] ! style="text-align:left;" | [[진주시 을]] ! style="text-align:left;" | [[진해시 (1996년 선거구)|진해시]] ! style="text-align:left;" | [[통영시·고성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최구식|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재경|링크=김재경 (1961년)}}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학송|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명주}}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사천시 (선거구)|사천시]] ! style="text-align:left;" | [[김해시 갑]] ! style="text-align:left;" | [[김해시 을]] ! style="text-align:left;" | [[밀양시·창녕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방호|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맹곤|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최철국|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용갑|링크=김용갑 (1936년)}}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거제시 (선거구)|거제시]] ! style="text-align:left;" | [[양산시 (선거구)|양산시]] ! style="text-align:left;" | [[의령군·함안군·합천군 (2004년 선거구)|의령군·함안군·합천군]] ! style="text-align:left;" | [[남해군·하동군 (1988년 선거구)|남해군·하동군]]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기춘|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양수}}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김영덕|링크=김영덕 (정치인)}}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박희태|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style="text-align:left;" | [[산청군·함양군·거창군 (2004년 선거구)|산청군·함양군·거창군]] | rowspan="2" colspan="3"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이강두|링크=예}} |- | height="6" colspan="4" | |- ! rowspan="2"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도|제주도]] ! style="text-align:left;" | [[제주시·북제주군 갑]] ! style="text-align:left;" | [[제주시·북제주군 을]] ! style="text-align:left;" | [[서귀포시·남제주군]] | rowspan="2" colspan="1" | |-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강창일|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우남|링크=예}} |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김재윤|링크=김재윤 (1965년)}} |} === 비례대표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85%; margin-right:0px; white-space:nowrap;" ! # | width="100"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열린우리당|색1}}" | {{글씨 색|black|열린우리당|링크=예}} | width="100" bgcolor="{{정당색/대한민국|한나라당|색1}}" | {{글씨 색|white|한나라당|링크=자유한국당}} | width="100" bgcolor="{{정당색/대한민국|민주노동당|색1}}" | {{글씨 색|white|민주노동당|링크=민주노동당 (대한민국)}} | width="100" bgcolor="{{정당색/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색1}}" | {{글씨 색|white|새천년민주당|링크=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 |- ! 1 | [[장향숙]] | [[김애실]] | [[심상정]] | [[손봉숙]] |- ! 2 | [[홍창선]] | [[박세일]] | [[단병호]] | [[김종인]] |- ! 3 | [[김명자]] | [[박찬숙 (정치인)|박찬숙]] | [[이영순 (1962년)|이영순]] | [[이승희 (1956년)|이승희]] |- ! 4 | [[김혁규]] | [[윤건영 (1952년)|윤건영]] | [[천영세]] | [[김홍일 (1948년)|김홍일]] |- ! 5 | [[이경숙 (1953년)|이경숙]] | [[송영선 (1953년)|송영선]] | [[최순영 (정치인)|최순영]] | |- ! 6 | [[박찬석]] | [[황진하]] | [[강기갑]] | |- ! 7 | [[홍미영]] | [[전여옥]] | [[현애자]] | |- ! 8 | [[조성태 (정치인)|조성태]] | [[정화원]] | [[노회찬]] | |- ! 9 | [[박영선 (정치인)|박영선]] | [[이계경]] | | |- ! 10 | [[정의용]] | [[박재완 (1955년)|박재완]] | | |- ! 11 | [[김현미 (정치인)|김현미]] | [[나경원]] | | |- ! 12 | [[박명광]] | [[이주호 (1961년)|이주호]] | | |- ! 13 | [[김영주 (1955년)|김영주]] | [[김영숙 (1943년)|김영숙]] | | |- ! 14 | [[조성래]] |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 | |- ! 15 | [[강혜숙]] | [[고경화]] | | |- ! 16 | [[정덕구]] | [[이군현]] | | |- ! 17 | [[이은영 (1952년)|이은영]] | [[진수희]] | | |- ! 18 | [[민병두]] | [[배일도]] | | |- ! 19 | [[윤원호]] | [[안명옥 (1954년)|안명옥]] | | |- ! 20 | [[박홍수 (1955년)|박홍수]] | [[서상기 (1946년)|서상기]] | | |- ! 21 | [[유승희]] | [[박순자]] | | |- ! 22 | [[장복심 (정치인)|장복심]] | | | |- ! 23 | [[김재홍 (1950년)|김재홍]] | | | |} == 기록 == {{본문|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기록}}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목록]] * [[2005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 [[2006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 [[2007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 참고자료 == * 법률 제7189호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2004년 3월 12일) * [http://www.nec.go.kr/sinfo/index.html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웹아카이브|url=https://archive.today/20120903234322/http://www.nec.go.kr/sinfo/index.html |날짜=2012-09-03 }} * 『제17대 국회의원선거총람 : 2004.4.15 시행』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4)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의 선거}}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분류:2004년 대한민국의 선거]] [[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 [[분류:2004년 4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 정보 | name = 교향곡 3번 | subtitle = "영웅" | composer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type = 교향곡 | image = Beethoven wiki.jpg | alt = | caption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translation = | native_name = | native_name_lang = | key = 내림마장조 | catalogue = | opus = 55 | genre = [[교향곡]] | form = | text = | time = | language = | period = [[고전주의 음악]] | melody = | client = | dedication = 요제프 프란츠 폰 로브코비츠 공작 | composed = {{시작 날짜|1803-04}} | performed = | published = 1806-파트보; 1809-총보 | movements = 4 | scoring = | misc = | premiere_date = {{시작 날짜|1805|4|7|df=y}} | premiere_location = 로브코비츠의 궁전 | premiere_performers = 오케스트라, 루트비히 판 베토벤(지휘) }} 《'''교향곡 제3번''' 내림마장조, [[작품 번호]] 55》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세 번째 교향곡이다. 흔히 《'''영웅'''》 혹은 《'''영웅 교향곡'''》({{llang|it|Sinfonia Eroica}}; {{llang|de|Heroische Sinfonie}})이라는 부제로도 가장 많이 알려진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베토벤의 혁신적인 중기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ref>''The Symphony'', ed. Ralph Hill, Pelican Books (1949), p. 99.</ref><ref>Symphony No. 6 in F Major, Op. 68 ''Pastorale'' (Schott), ed. Max Unger, p. vi.</ref> 1802년부터 1804년에 걸쳐 쓰인 이것은 교향곡의 형식, 길이, 화성, 감정과 문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고, 더불어 첫 번째 낭만주의적 교향곡으로 간주된다. 작품의 초연은 1828년 3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에 의해 베토벤의 교향곡 중 첫 번째로 이루어졌다. == 역사 == === 배경 및 작곡 ===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는 것을 의도로 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무급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럽의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아이디어는 1798년 빈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또는 베르나도트의 측근으로서 방문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헌정자 [[루돌프 크로이처]]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추정된다.<ref>{{서적 인용|제목=Biographie von Ludwig van Beethoven|url=https://archive.org/details/bub_gb_Vw85QJ2GIFMC|성=Schindler|이름=Anton Felix|날짜=1840|판=|출판사=|쪽=|장=}}</ref><ref>{{웹 인용|url=https://www.naxos.com/mainsite/blurbs_reviews.asp?item_code=8.550112&catNum=550112&filetype=About%20this%20Recording&language=English#|제목=베토벤: 교향곡 3번 / 레오노레 서곡 1번|확인날짜=2020-11-24}}{{깨진 링크|url=https://www.naxos.com/mainsite/blurbs_reviews.asp?item_code=8.550112&catNum=550112&filetype=About%20this%20Recording&language=English }}</ref>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작곡가 자신의 것이었다. 리스의 설명처럼 베토벤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처럼 나폴레옹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804년 초 악보를 완성했을 때 그는 표지에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고 썼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원고를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ref>{{웹 인용|url=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music-time/beethoven-and-napoleon|제목=Beethoven and Napoleon {{!}} History Today|언어=en|확인날짜=2020-11-25}}</ref> 보나파르트는 베토벤과 단 1년 차이인,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감탄을 자아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거의 의식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운명 사이에서 수평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보나파르트의 모습으로 구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감탄했다. 베토벤은 빠르면 1789년에 영웅주의의 교향곡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펜을 들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1801년 자신의 청각 장애를 인식하고 난 후 그 해 여름 빈 기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베토벤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예술만이 나를 붙잡았다"고 표현했다.<ref>{{웹 인용|url=https://de.wikisource.org/wiki/Heiligenst%C3%A4dter_Testament|제목=하일리겐슈타트 유서 - 위키출처|확인날짜=2020-11-24}}</ref> 그는 이 단계에서 내면의 투쟁을 선언했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향곡의 작곡은 공식적으로 1803년 5월에 시작되었고 1804년 초에 완료되었다. 주된 작업 시기는 베토벤이 [[바덴바이빈]]과 [[되블링]]에서 보내던 1803년 여름(6월/10월) 즈음이다. === 나폴레옹에의 헌정 철회 ===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웅'' 교향곡이라는 부제는 원래 교향곡에 할당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베토벤은 그것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었으며, 1804년 경 빈에서 파리로 이동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잠시 후에 일어난 작곡가와 악보에 관한 일화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제목을 너무 세게 지워서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 구멍이 뚫어졌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러뜨릴 정도의 힘을 가하여 펜으로 제목을 흐리게 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책상으로 뛰어올라가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잡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1838년의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스의 황제(1804년 5월 14일)로 선포한 것에 대한 그의 스승의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blockquote>이 교향곡을 쓰면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대 집정관 시절의 보나파르트를 생각했다. 당시 베토벤은 그에 향한 큰 존경을 가졌고,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들과 비교했다. 나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가까운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테이블에서 이 교향곡을 보았는데, 원고를 아름답게 베껴 적었다. 제목 페이지 맨 위쪽에는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했고, 그는 이에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군! 이제 그도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을 탐닉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폭군이 될 것이다!" 베토벤은 테이블로 가서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쥐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 페이지는 다시 만들어야 했고, 교향곡은 ''영웅'' 교향곡이라는 다른 제목을 부여받았다.<ref>[http://www.napoleon-series.org/ins/scholarship98/c_eroica.html#1 ''Eroica''], Napoleon Series.</ref></blockquote>그러나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찢었다고 하는 일화는 리스의 회고록 이전에 1836년 3월 18일 런던 매거진 ''The Musical World'' ("음악계")의 기사와 베토벤과 개인적 연분이 없었던 에른스트 오르틀레프의 1836년 베토벤 소설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blockquote>프랑스 혁명은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교향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인 프랑스 집정관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읽어야 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뜯어내었고 ''Symphonia'' ("영웅") 또는 ''Sinfonia Eroica'' ("영웅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있는 다른 페이지를 만들었다.<ref>Ernst Ortlepp: ''Beethoven. Eine phantastische Charakteristik.'' Leipzig 1836, S. 83. [http://books.google.de/books?id=XUFDAAAAcAAJ&printsec=frontcover&dq=Ernst+Ortlepp+Beethoven&hl=de&sa=X&ei=_MGZU_nHDoLhywO47oDwBQ&ved=0CB8Q6AEwAA#v=onepage&q=Ernst%20Ortlepp%20Beethoven&f=false (Digitalisat)]</ref></blockquote> 현존하는 사본의 악보에는 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흔적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문구가 나타난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된 ''Intitolata Bonaparte'' ("제목 보나파르트")가 있고, 두 번째로 독일어로 된 ''Geschriben auf Bonaparte'' ( "보나파르트를 위해 씀")가 이탈리아어 부제 아래 네 번째 줄에 있다. 이것은 현재 빈의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악우회")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의 자필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 초연 === 1804년 6월 9일 몇 달 동안 공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획득한 로브코비츠 공작의 궁전에서 비공개로 초기 리허설과 사적 연주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부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수수료 청구서에 문서화되어 있으며, 영웅에서만 요구하는 세 번째 호른이 관련되어 있음이 명시되어 있다.<ref>Brinkmann (1984)</ref> 공작의 카펠마스터 안톤 브라니츠키가 제출한 1804년 6월 9일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은 두 번의 리허설을 위해 22명의 추가 음악가를 고용했음을 보여준다. 첫 공공 연주회는 1805년 4월 7일 [[테아터 안 데어 빈|안 데르 빈 극장]]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연주회에서는 그의 친구 프란츠 클레멘트가 주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 출판 및 헌정 === 1806년 10월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때, 베토벤은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 un grand'uomo''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탈리어어 부제가 부여되었다. 이 위대한 사람은 이상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보다 베토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웅주의 정신 그 자체였다. 헌정은 베토벤의 고귀한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이루어졌다. == 의의 == 이 작품은 고전주의 음악의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교향곡에 비해 길이는 2배에 가장 가깝다. 첫 번째 악장은 (주제 제시부의 반복과 함께) 고전주의 교향곡과 거의 비슷하다. 주제적으로는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보다 더 많은 감정적 근거를 다루고 있으며, 19세기 초 서양 예술 음악을 정의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과도기에서 중요한 이정표룰 세우고 있다. 두 번째 악장은 특히 장례식 행진 주제의 비참함에서부터 가장 행복하고 제일 중요한 주요 에피소드의 상대적 위안에 이르기까지 큰 감정적 범위를 보여준다. 피날레는 비슷한 감정적 범위를 보여주며 당시에는 들어 보지 못한 주제별 중요성이 부여된다. 초기 교향곡에서 피날레는 빠르고 산뜻한 결론이었다. 여기서의 피날레는 긴 변주와 푸가이다.<ref name="bernstein-inf-variety">[[Leonard Bernstein|Bernstein, Leonard]], ''The Infinite Variety of Music'', Hal Leonard Corporation, {{ISBN|978-1-57467-164-3}}</ref> === 평단의 의견과 표현 === * 기악법과 오케스트레이션에 관한 논문 (1844, 1855년)에서 [[엑토르 베를리오즈|헥터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의 [[관현악]] 사용과 이 교향곡의 [[호른]]과 [[오보에]]의 적용에 대해 논했다.<ref>[http://www.wisdomportal.com/EroicaSymphony.html Eroica Symphony] {{web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70516064939/http://www.wisdomportal.com/EroicaSymphony.html|date=16 May 2007}}, Wiſdom Portal.</ref> * [[로베르트 슈만]]은 제1악장은 "청각 장애와 맞서고 있는 베토벤의 희망"을 표현하고; 제2악장은 "느리고 장송 행진곡 같은 그의 용기와 사랑을 전달"하고; 제3악장인 스케르초는 "창조적 에너지의 불굴의 반란"이며; 제4악장은 "넘쳐나는 에너지"라고 말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메타모르포젠]] (1945년)에서 ''영웅'' 교향곡의 장례 행진과 유사한 주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메타모르포제의 결론에 다다를 때 베이스는 영웅 교향곡으로부터 적절한 장례 행진을 인용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스트라우스의 부제목인 ''In Memoriam'' ("…을 기리며")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ref>{{서적 인용|title=Richard Strauss: New Perspectives on the Composer and His Work|last=Jackson|first=Timothy L.|year=1997|editor=Bryan Gilliam|publisher=Duke University Press|pages=193–242|chapter=The Metamorphosis of the ''Metamorphosen'': New Analytical and Source-Critical Discoveries|isbn=978-0-8223-2114-9|chapter-url=https://books.google.com/books?id=qR6YppNwDwUC&pg=PA193}}</ref> * 지휘자 겸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은 영웅 교향곡의 녹음 시 (1953년)'','' 그리고 그의 책 ''The Infinite Variety of Music'' ("음악의 무한한 다양성") (1966년)에서 제1악장과 제2악장은 "아마 모든 교향곡에서 가장 위대한 두 악장"이라고 말했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iUcyva1FEz4C&q=Eroica|title=The Infinite Variety of Music|last1=Bernstein|first1=Leonard|year=2007|isbn=9781574671643}}</ref> *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가레스 젠킨스는 베토벤의 ''Beethoven's'' ''Cry of Freedom'' ("베토벤의 자유의 외침") (2003년)이라는 글을 썼는데,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을 음악을 위해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통을 뒤집는 것"이었며 프랑스 혁명 때 처음 등장한 "인간의 잠재력과 자유에 대한 감각'을 구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ref>Jenkins, Gareth. [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2496 "Beethoven's Cry of Freedom"] {{웨이백|url=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2496 |date=20150924103451 }}, ''Socialist Worker'' (UK) 4 October 2003.</ref> *''영웅'' 교향곡은 2016년 BBC 뮤직 매거진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지휘자 1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교향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6/aug/04/beethoven-eroica-greatest-symphony-vote-bbc-mozart-mahler|title=Beethoven's Eroica voted greatest symphony of all time|last=Brown|first=Mark|date=4 August 2016|newspaper=The Guardian|accessdate=29 September 2017}}</ref> == 악기 편성 == 작곡 당시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편성에서는 호른이 2개 또는 4개였지만, 이 곡은 호른이 3개인 편성을 택했다. 제3악장 트리오에서는 이 3개에 의한 연주가 이루어진다. {| class="wikitable" ! colspan="2" |목관 악기 ! colspan="2" |금관 악기 ! colspan="2" |타악기 ! colspan="2" |현악합주단 |- |플루트 |2 |호른 |3 |팀파니 |한 쌍 |제1바이올린 |● |- |오보에 |2 |트럼펫 |2 | rowspan="4" |기타 | rowspan="4" | |제2바이올린 |● |- |클라리넷 |2 | rowspan="3" |기타 | rowspan="3" | |비올라 |● |- |바순 |2 |첼로 |● |- |기타 | |콘트라베이스 |● |} == 악장 구성 == {{듣기|type=music|filename=Beethoven SymphonyNo.3Eroica LudwigVanBeethoven-SymphonyNo.3InEFlatMajorEroicaOp.55-01-AllegroConBrio.ogg|title=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15:12)|description=|filename2=Beethoven SymphonyNo.3Eroica LudwigVanBeethoven-SymphonyNo.3InEFlatMajorEroicaOp.55-02-MarciaFunebreAdagioAssai.ogg|title2=제2악장.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15:29)|description2=|filename3=Beethoven SymphonyNo.3Eroica LudwigVanBeethoven-SymphonyNo.3InEFlatMajorEroicaOp.55-03-ScherzoAllegroVivace.ogg|title3=제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5:49)|description3=|filename4=Beethoven SymphonyNo.3Eroica LudwigVanBeethoven-SymphonyNo.3InEFlatMajorEroicaOp.55-04-FinaleAllegroMolto.ogg|title4=제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11:45)|description4=모든 파일 제공 Musopen}} 연주 소요 시간은, 20세기 중반에는 제1악장의 반복을 포함하여 약 52분 정도의 연주 소요 시간이 많았지만(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20세기 후반부터 고대 음악의 융성에 의한 연주 양식의 역사적 고증의 진전에 따라 베토벤의 메트로놈 지정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 반복을 포함하여 42분부터 48분 정도의 연주가 늘고 있다. 제1악장에는 거대한 전개부와 2전개부에 필적하는 코다, 제2악장에는 가곡풍 악장 대신 장송 행진곡, 제3악장에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단 이는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에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는 론도풍 피날레 대신 변주곡이 배치된다. === 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 내림마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 서주 격으로 두 번 꽝꽝 때려주고 시작하는데, 주제 두 개를 던져주는 것은 고전 시대와 마찬가지지만 그 주제를 주물러대는 전개부는 무려 200 마디를 훨씬 넘을 정도로 확장되어 있다. 길이만 길어진 게 아니라 리듬의 파격, 불협화음, 잦은 조바꿈 등으로 거의 폭력적인 인상까지 주고 있다. 물론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몇몇 교향곡들의 전개부에서 다양한 조바꿈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대개 원 조성의 4도 혹은 5도권 이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고 이렇게까지 길고 터프한 전개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주제를 다시 내놓는 재현부나 마무리짓는 종결부도 기존의 것과 달리 많이 변화시키고 있다. 애초에 내림마장조는 신성한 것을 찬양하는 데나 쓰였던 장조인데 이를 인간을 위해 가지고 내려왔다는 데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1악장의 첫 번째 주제는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의 《[[탄호이저 (오페라)|탄호이저]]》 서곡이나 좀 과하게 보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교향곡 39번 (모차르트)|교향곡 39번]] 1악장에서도 그 단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여담으로 본 교향곡의 제1악장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후기 3대 교향곡 중 하나인 《[[교향곡 39번 (모차르트)|모차르트 교향곡 39번]]》 1악장의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 코다의 트럼펫 제1주제에 대해 ==== 과거에는 일반 악보에서 코다의 655 마디부터의 주제를 트럼펫이 끝까지(662 마디까지) 불도록 [[한스 폰 뷜로 남작|한스 폰 뷜로]]에 의한 개편을 채택하는 지휘자가 많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본래의 원본 형태로 연주하는 식도 늘고 있다.<ref group="주">이것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의 "어느 지휘자에 의한 제언 베토벤 교향곡의 해석"에서 소개되고 있다.</ref> 이 코다의 주제에 대해서는 원본에서는 트럼펫이 657 마디 3박 째부터 주제를 벗어나 B♭ 음을 연주한다(E♭ 관이므로 기보는 G 음). 당시의 트럼펫에서는 주제를 통해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사용하던 트럼펫의 자연 배음열에서도 658 마디가 높은 B♭ 음까지는 655 마디 시작 시의 형식 그대로 2개의 트럼펫이 1옥타브 차이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은 가능하다. 659 마디부터 662 마디에 걸쳐서는 제2트럼펫의 음역에서는 배음열에 포함되지 않는 음이 많아 당시의 트럼펫으로는 연주할 수 없다. 제1트럼펫의 고음역에서는 659 마디 1박 째의 높은 F(기음은 D)는 배음 계열 음이므로 연주할 수 있고, 659 마디 3박 째의 높은 A♭(기음은 F)는 배음 계열 음에서는 A(기음은 F#)가 되어버리지만 입술의 피치 조정으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이 곡의 제2악장을 비롯해 자주 사용되는 소리이다. 다만 일본의 음악평론가 가네코 겐지는 "음정적으로 #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꺼려했을 가능성이 강하다"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제2악장이 "장송 행진곡"으로 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자 첼리스트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아르농쿠르]]는 트럼펫의 탈락을 "영웅의 추락(죽음)"로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덧붙여서 베렌라이터 신판에서는 브라이트코프 구전집에서 8분음표의 새김이었던 658 마디의 낮은 B♭ 음이 정서 악보를 기초로 하여 불기 위해 부점 2분음표로 변경되어, 658 마디까지는 1옥타브를 내려 주제를 불게 되므로 트럼펫이 선율 도중에 갑자기 탈락하는 양상은 되지 않는다. 겐지는 657 마디부터 658 마디에 걸친 높은 B♭ 음을 피하고, 그 후 주제가 아닌 낮은 B♭를 불게 한 것은 "영웅의 추락"이 아니라 단지 트럼펫의 고음의 날카로운 음색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440 마디부터 443 마디의 주제 연주에 있어서도, 트럼펫은 442 마디에서와 같이 멜로디 라인이 무너져 있다. 베토벤 교향곡 작품에서 이 높은 B♭ 음이 사용되는 것은 《[[교향곡 6번 (베토벤)|교향곡 6번 "전원"]]》 4악장의 뇌우 장면, 85 마디와 《[[교향곡 8번 (베토벤)|교향곡 8번]]》 4악장의 330 마디부터 333 마디 뿐이다. === 제2악장.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Marcia funebre: Adagio assai) === 다단조, 2/4박자. [[론도 (음악)|론도 형식]].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 이라고 달아놓았는데, 나폴레옹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층 달아오른 기분을 한번에 주저앉히는 효과를 보이는 무겁고 어두운 대목인데,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런 조용하고 어두운 정서를 유지하고 있으나 중간에는 다단조와 반대되는 조성인 다장조로 한층 밝아지게 되고, 후반에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강음을 시작으로 한, 결코 다크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가장 드라마틱한 악구가 등장한다. 느린 악장에 단조 조성을 사용하는 것은 이전에도 꽤 자주 볼 수 있던 시도였지만, 이 정도로 확장되고 비극적인 감정 이입을 시도한 예는 없었기 때문에 이것도 제일 중요하다. 이 장송 행진곡의 반주에서 등장하는 작품의 이후 "영웅 교향곡의 용기와 사랑"이 만나, 《[[교향곡 1번 (브람스)|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의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 제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Scherzo: Allegro Vivace) === 내림마장조, 3/4박자. 복합 3부 형식. 전작인 《[[교향곡 2번 (베토벤)|교향곡 2번]]》과 마찬가지로 스케르초인데, 템포가 훨씬 빨라져 4분음표 세 개가 한 박으로 취급되는 스피드를 보여준다. 중간 부분에서 호른 3개가 불리는 사냥 나팔식 악구가 튀어나오는 부분이라던지, 처음 부분이 다시 반복되는 대목에서 박자를 갑자기 확 바꿔 진행하는 부분 등도 꽤 신선한 대목이다. === 제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Finale: Allegro Molto) === 내림마장조, 2/4박자. 자유로운 변주곡의 형식. 특이하게 주제 하나를 내놓고 여러 방법으로 가공하는 변주곡 형식을 썼는데, 그 주제가 예전 작품들에서 이미 여러 번 사용한 멜로디라서 재활용이 비교적 적었던 베토벤의 창작 방식상 꽤 이례적인 경우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냥 변주만 죽어라 하는 것도 아니고, 텐션을 주기 위해 푸게타(짧은 푸가)를 도입하거나 소나타 형식의 전개부 원리를 응용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보여준다. == 동일 소재 음악 == * [[교향곡 1번 (브람스)|브람스 교향곡 1번]] : [[요하네스 브람스]]의 1번째 교향곡. == 같이 보기 == * [[교향곡 1번 (브람스)]] == 각주 == '''주석''' {{각주|group= "주"}} '''출처''' {{각주|3}} == 외부 링크 == * 리뷰 및 추가 정보: ** [http://www.beethovenseroica.com/eroica2.html ''영웅'' 교향곡에 관한 사이트] {{웨이백|url=http://www.beethovenseroica.com/eroica2.html |date=20100126095041 }} ** [https://www.npr.org/templates/story/story.php?storyId=5456722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위한 프로그램 노트] ** [https://www.allmusic.com/composition/symphony-no-3-in-e-flat-major-eroica-op-55-mc0002396628 교향곡 3번 내림마장조 ("영웅"), Op. 55] [https://www.allmusic.com/ 올뮤직]의 짧은 리뷰 ** ** {{서적 인용|title=베토벤 : 편지, 저널 및 대화|last=조지|first=크리스토퍼 T.|date=1998년 12월|판=|volume=1|출판사=|쪽=|장=|isbn=978-0-8371-9899-6|ref=none|contribution=영웅 수수께끼 : 나폴레옹이 베토벤의 "영웅"으로 남아 있었습니까?|contribution-url=http://www.napoleon-series.org/ins/scholarship98/c_eroica.html|periodical=나폴레옹 장학금 : 국제 나폴레옹 학회지|issue=2}} ** {{웹 인용|url=https://sites.google.com/site/johnaricecv/beethoven-reicha-and-the-eroica|title=베토벤, 라이하와 영웅|author=존 A. 라이스 교수|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none|archive-date=2022-12-06|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1206190228/https://sites.google.com/site/johnaricecv/beethoven-reicha-and-the-eroica|url-status=}} , 교향곡의 구상 기간 동안 푸가 이론과 연습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에 관한 기사 * 시트 뮤직: ** [http://www.dlib.indiana.edu/variations/scores/adh1166/large/soundscore.html 총보] ** {{IMSLP|work=Symphony No.3, Op.55 (Beethoven, Ludwig van)|cname=교향곡 3번}} * 미디어: ** 마이클 틸슨 토마스 (Flash 필요)의 분석, 배경 및 해설이 포함된 SF Symphony의 'Keeping Score'의 [http://www.keepingscore.org/sites/default/files/swf/beethoven/beethoven-full 영웅 웹사이트]. ** [http://www.bbc.co.uk/radio3/discoveringmusic/videolibrary/eroica.shtml 음악 발견], BBC 라디오 3. 심포니의 분석 및 전체 연주 동영상. 분석은 Stephen Johnso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교향곡은 Christophe Mangou 아래의 BBC National Orchestra of Wales에서 연주한다. 교향곡의 듣기 노트도 [http://www.bbc.co.uk/programmes/b00qps03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http://konserthuset.23video.com/video/919426/the-eroica-effect 에로이카 효과], [http://www.helsingborgskonserthus.se/ 헬싱보리 콘서트홀]. 교향곡의 완벽한 연주. 이 교향곡은 Andrew Manze의 지휘 아래 헬싱보리 교향악단이 연주한다. ** 교향곡 3번, [[브루노 발터]]가 감독한 뉴욕 필하모닉의 전체 공연,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이용 가능. ** [https://www.youtube.com/watch?v=GKFStVrKNU4 교향곡 3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에 의한 연주 영상 (1982년) on YouTube {{베토벤의 교향곡}} {{전거 통제}} [[분류: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분류:내림마장조 작품]] [[분류:여름]] [[분류:1803년 작품]] [[분류:헌정곡]]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도시 정보 |이름 = 헤이그 |정식표기 = Den Haag<br/>'s-Gravenhage |그림 = The Hague Montage 2021.png |그림설명 = 헤이그의 주요 건축물 모음 |별명 = |표어 = |시기 = Flag of The Hague.svg |휘장 = Den Haag wapen.svg |위치지도 = 네덜란드 |위치지도너비 = |위도 = 52.08 |경도 = 4.31 |나라 = {{국기나라|네덜란드}} |행정구역 = [[자위트홀란트주]] |지역 = |설립일 = |인구 = 545,838 |인구년도 = 2020 |인구밀도 = 6,523 |광역인구 = 2,390,101 |면적 = 98.13 |해발 = 1 |시간대 = CET (UTC+1)<br /> · 일광 절약 시간제: CEST (UTC+2) |우편번호 = 2490–2599 |지역번호 = 070, 015 |웹사이트 = {{언어링크|nl|en|fr}} [https://www.denhaag.nl/nl.htm 공식 웹사이트] }} '''헤이그'''({{llang|en|The Hague|더헤이그}}, {{문화어|헤그}})는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자 정부 소재지다. 네덜란드 왕국의 공식적인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정부 청사가 있는 헤이그가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1049802517|제목=Varieties of capital cities: the competitiveness challenge for secondary capitals|성=Kaufmann|이름=David|isbn=978-1-78811-643-5}}</ref> 저지대 서쪽 [[북해]] 연안의 대도시로, 네덜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광역 대도시권을 이루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 명칭 == 헤이그는 영어식 지명의 한국어 표기다. [[네덜란드어]]로는 '''덴하흐'''({{llang|nl|Den Haag}} {{소리|Nl-Den_Haag.ogg|듣기}})라고 하며, 이름의 기원은 1242년 처음 언급된 Die Haghe로 추정된다.<ref>{{웹 인용|url=https://geschiedenisvanzuidholland.nl/locatie/geschiedenis-van-den-haag|제목=Geschiedenis van Den Haag|언어=네덜란드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616203832/https://geschiedenisvanzuidholland.nl/locatie/geschiedenis-van-den-haag|보존날짜=2018년 6월 16일}}</ref> 또다른 이름은 백작의 숲을 의미하는 '''스흐라벤하허'''({{llang|nl|'s-Gravenhage}})로, 출생 신고서 등 각종 서류에 표기되는 정식 명칭이다. 하지만 시 정부에서도 덴하흐를 사용하며, 우편물을 보낼 때 스흐라벤하허로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덴하흐도 용인된다. 헤이그를 가리키는 [[네덜란드 철도]] 표지판도 덴하흐로 표기한다. == 역사 == [[파일:Joust on the Hofvijver, by Dutch School of the 17th century.jpg|왼쪽|섬네일|비넨호프를 묘사한 17세기 그림]] === 비넨호프 궁전의 건설 === 초기 헤이그의 역사에 대한 현대적인 기록은 전무하지만, 도시 발전의 중심이 된 비넨호프 궁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229년, 네덜란드의 [[백작]] [[플로리스 4세]]는 사냥터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호프페이베르 호수 근처 땅을 사들였다. 자신의 세 번째 사유지인 이 땅에 넓은 궁전을 짓고 싶어했던 플로리스 4세는 1234년 아무것도 짓지 못한 채로 사망했다. 그러자 후계자 빌럼 2세는 [[1248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뒤 아버지의 사유지로 돌아와 비넨호프(Binnenhof)라고 명명한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궁전이 완성되기 전인 [[1256년]] 죽었지만 아들 [[플로리스 5세]]가 과업을 마무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아직도 남아있는 리더잘(Ridderzaal)<ref group="주">기사들의 연회장을 뜻한다.</ref>이다. 비넨호프에서는 오늘날에도 [[오라녜나사우가]]의 연례 연설과 같은 정치적 이벤트가 자주 열린다. 1242년 왕실 헌장에 나타난 Die Haghe는 비넨호프 궁전을 둘러싼 마을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헤이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1358년 네덜란드 백작들의 거주지가 되면서 여러 관청이 들어섰다. === 떠오르는 정치 중심지 === 제대로 된 방벽이 없었던 탓에 [[네덜란드 독립 전쟁]] 당시 [[스페인]]군에 쉽게 함락당했다. 1575년에는 잠시 델프트로 거처를 옮긴 [[홀란트 백국]]이 도시 폐쇄를 추진했으나 [[빌럼 1세 판 오라녜|빌럼 1세]]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1588년,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구적인 정부소재지로 발돋움한다. 헤이그는 왕실의 직권 행사를 위해 단 한 번도 도시, 즉 자치 단체의 지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 실질적으로 도시만이 가지는 여러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1801년, 네덜란드가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이던 시절에 [[루이 보나파르트]]로부터 [[도시권 (네덜란드)|도시권]]을 부여받았으나 이는 오늘날 말소된 지위에 불과하다.<ref>{{웹 인용|url=http://www.denhaag.nl/en/residents/news-and-events/press-room/to/A-short-history-of-The-Hague.htm|제목=A short history of The Hague|날짜=2011년 11울 28일|웹사이트=Denhaag.nl|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13125843/http://www.denhaag.nl/en/residents/news-and-events/press-room/to/A-short-history-of-The-Hague.htm|보존날짜=2014년 4월 14일|확인날짜=2014년 4월 14일}}</ref><ref group="주">하지만 이는 중앙집권화가 완료된 공화국 시대 이후의 일로 지방 영주의 권한이 막강했던 중세 네덜란드의 도시 특권과 같은 중요성을 부여하기 힘들다.</ref> 이어지는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뭉쳐 프랑스를 견제했다. 이때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이 번갈아 수도 역할을 맡았는데 일종의 절충안으로써 정부 수반은 헤이그에 그대로 남겨졌다. 1830년대 벨기에의 독립으로 수도 지위를 암스테르담에 넘겨주었으나 1850년대 들어 커져가는 정부의 영향력에 힘입어 귀족과 은퇴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동인도 회사]] 직원을 다수 수용했다. === 현대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많은 [[유대인]] 인구가 사망했으며, [[나치 독일]]의 [[V-2 로켓]] 설치를 막으려던 [[영국 왕립공군|영국 공군]]의 오폭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kb.nl/dossiers/geschiedenis/bombardement-op-bezuidenhout|제목=Bombardement op Bezuidenhout maart 194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5125838/http://www.kb.nl/dossiers/geschiedenis/bombardement-op-bezuidenhout|보존날짜=2013년 12월 15일}}</ref> [[대서양 방벽]]이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전후 도시개발을 통해 남서쪽으로 광범위하게 뻗어나가며 유럽에서 가장 큰 재개발을 단행한 헤이그는 1965년 인구 60만명을 돌파하며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후 80년대까지 외곽의 [[주테르메이르]]를 중심으로 꾸준한 백인 중산층 인구의 유입이 있었으며 개발이 더딘 시내 중심부가 [[교외]] 주택가보다 낙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거주지역을 헤이그 시에 합병하려는 계획은 많은 반발을 낳았으나 1990년대 의회의 승인을 얻어냈다. == 지리 == [[파일:DenHaag-plaats-OpenTopo.jpg|왼쪽|섬네일|헤이그의 세부 지형도, 2014년 제작]] 헤이그는 [[북해]]에 면한 네덜란드 도시 가운데 가장 거대하다. 헤이그와 그 주변부를 헤이그 광역 대도시권으로 분류하며 [[레이스베이크]], [[로테르담]], [[델프트]]와 인접해있다. 로테르담과 매우 가까운 탓에 종종 하나의 대도시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일례로 [[로테르담-헤이그 공항]]과 [[란드스타트레일]]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연담도시화|연담도시]]는 [[암스테르담]]과 [[위트레흐트]]가 포함되는 [[란트스타트]]를 구성하는데, 이곳에서 약 6,659,300명이 생활한다. 란트스타트는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연담도시다. 헤이그는 하위 동네로 구분된 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와 가장 빈곤한 동네 모두가 공존한다. 해변과 가까운 북서쪽 지역은 평균 소득이 매우 높은 반면에 남동쪽 구역은 확연한 대비를 보인다. 이런 특징은 지역 방언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부유한 시민들의 별명은 하허너(Hagenaars)인데 일명 고급언어(bekakt Haags)를 구사한다고 여겨지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허네즌(Hagenezen)으로 불린다. == 인구 == 2021년 1월 1일 기준 54만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3번째로 많은 것이다. 1800년부터 1900년까지 16만명에 달하는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고, 1960년에 총 인구 60만명을 달성했다. 이는 1901년 주택법이 불러온 도시 확장에 따른 결과였다. 1960년대 이후 주택난의 영향으로 줄곧 감소세를 보여 80년대에는 44만명을 기록했다. 이후 주변 지역의 통합과 주택 건설을 거쳐 2011년 인구 50만명을 회복했다. 시 정부는 2030년 헤이그 인구를 60만명으로 예상한다.{{Historical populations|align=none | percentages = pagr | cols = 3 | source = {{Harvnb|Lourens|Lucassen|1997|pp=108–110}} (1369–1795)<br />[http://www.denhaag.buurtmonitor.nl/ buurtmonitor.nl] (1795–present) | 1369|1494 | 1398|1300 | 1477|6066 | 1514|5500 | 1550|6000 | 1622|15825 | 1632|16600 | 1665|20000 | 1732|33500 | 1795|38433 | 1850|72000 | 1874|90000 | 1895|180000 | 1900|206022 | 1910|271280 | 1920|359610 | 1930|432680 | 1940|504262 | 1950|558849 | 1960|606110 | 1970|550613 | 1980|456376 | 1990|441327 | 2000|441097 | 2010|489271 | 2014|509779 | 2015|515880 | 2019|544766 }} 헤이그 출신의 인물을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은 하허너(Hagenaar)지만 비공식적으로 하허네스(Hagenees)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계급의식]]에 기반하며, 상대적으로 빈곤한 배경의 시민을 하허네스로 지칭하는 경향을 보인다.<ref>{{웹 인용|url=https://www.haacs.nl/identiteit-den-haag-keeping-up-appearances/|제목=Den Haag: uitvergrote versie van Keeping Up Appearances?|언어=네덜란드어}}</ref> === 인종 구성 === 네덜란드인 43%로 이민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ref>{{웹 인용|url=http://www.denhaag.buurtmonitor.nl/|제목=Den Haag in Cijfers|언어=네덜란드어}}</ref> 이민자 가운데 [[수리남]]계와 [[터키계 네덜란드인|터키계]], [[모로코]]계가 각각 8.7%, 7.52%, 5.91%로 다수를 이룬다.<ref>{{웹 인용|url=https://statline.cbs.nl/Statweb/publication/?DM=SLNL&PA=37713&D1=0-8&D2=0&D3=1-2,6-55&D4=603&D5=l&HDR=T,G4&STB=G1,G3,G2&VW=T|제목=CBS StatLine – Bevolking; leeftijd, herkomstgroepering, geslacht en regio, 1 januari|언어=네덜란드어}}</ref> == 기후 == 헤이그의 날씨는 여타 네덜란드 도시와 비슷하게 [[서안 해양성 기후]]로 분류된다. 바다와 가까운 위치 덕택에 내륙 지방에 비해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이 시원하다. 반면 같은 이유로 겨울철에는 강한 돌풍이, 여름철에는 높은 습도가 관측된다. 다른 지역보다 일조량이 많다. {{Weather box |location = 발켄부르크 공군 기지 |metric first = Yes |single line = Yes | Jan record high C = 13.8 | Feb record high C = 15.9 | Mar record high C = 20.8 | Apr record high C = 25.9 | May record high C = 29.7 | Jun record high C = 33.5 | Jul record high C = 36.5 | Aug record high C = 34.6 | Sep record high C = 31.7 | Oct record high C = 24.5 | Nov record high C = 17.5 | Dec record high C = 15.4 |year record high C = 36.5 | Jan high C = 5.9 | Feb high C = 6.3 | Mar high C = 9.3 | Apr high C = 12.8 | May high C = 16.7 | Jun high C = 19.0 | Jul high C = 21.3 | Aug high C = 21.5 | Sep high C = 18.4 | Oct high C = 14.5 | Nov high C = 9.9 | Dec high C = 6.6 |year high C = 13.5 | Jan mean C = 3.6 | Feb mean C = 3.6 | Mar mean C = 6.1 | Apr mean C = 8.7 | May mean C = 12.5 | Jun mean C = 15.1 | Jul mean C = 17.4 | Aug mean C = 17.5 | Sep mean C = 14.8 | Oct mean C = 11.3 | Nov mean C = 7.4 | Dec mean C = 4.3 |year mean C = 10.2 | Jan low C = 1.0 | Feb low C = 0.7 | Mar low C = 2.7 | Apr low C = 4.5 | May low C = 8.1 | Jun low C = 11.0 | Jul low C = 13.3 | Aug low C = 13.3 | Sep low C = 10.9 | Oct low C = 7.8 | Nov low C = 4.5 | Dec low C = 1.7 |year low C = 6.6 | Jan record low C = -16.4 | Feb record low C = -14.0 | Mar record low C = -11.1 | Apr record low C = -4.4 | May record low C = -1.5 | Jun record low C = 1.7 | Jul record low C = 5.4 | Aug record low C = 5.5 | Sep record low C = 1.2 | Oct record low C = -4.4 | Nov record low C = -7.1 | Dec record low C = -10.6 |year record low C = -16.4 | precipitation colour = green | Jan precipitation mm = 68.4 | Feb precipitation mm = 51.2 | Mar precipitation mm = 59.8 | Apr precipitation mm = 42.9 | May precipitation mm = 54.7 | Jun precipitation mm = 61.6 | Jul precipitation mm = 72.7 | Aug precipitation mm = 84.0 | Sep precipitation mm = 89.2 | Oct precipitation mm = 89.9 | Nov precipitation mm = 90.4 | Dec precipitation mm = 76.4 |year precipitation mm = 841.2 |unit precipitation days = 1&nbsp;mm | Jan precipitation days = 12 | Feb precipitation days = 10 | Mar precipitation days = 11 | Apr precipitation days = 9 | May precipitation days = 9 | Jun precipitation days = 9 | Jul precipitation days = 10 | Aug precipitation days = 10 | Sep precipitation days = 12 | Oct precipitation days = 13 | Nov precipitation days = 14 | Dec precipitation days = 13 |year precipitation days = 132 | Jan snow days = 5 | Feb snow days = 5 | Mar snow days = 3 | Apr snow days = 1 | May snow days = 0 | Jun snow days = 0 | Jul snow days = 0 | Aug snow days = 0 | Sep snow days = 0 | Oct snow days = 0 | Nov snow days = 2 | Dec snow days = 4 |year snow days = 20 |Jan humidity = 86 |Feb humidity = 84 |Mar humidity = 83 |Apr humidity = 79 |May humidity = 78 |Jun humidity = 79 |Jul humidity = 80 |Aug humidity = 80 |Sep humidity = 83 |Oct humidity = 84 |Nov humidity = 87 |Dec humidity = 87 | Jan sun = 65.5 | Feb sun = 89.6 | Mar sun = 133.7 | Apr sun = 190.5 | May sun = 229.0 | Jun sun = 216.1 | Jul sun = 227.4 | Aug sun = 207.1 | Sep sun = 145.5 | Oct sun = 110.3 | Nov sun = 61.1 | Dec sun = 49.2 |year sun = 1726.1 |source 1 = 네덜란드 왕립 기상연구소 (평년값: 1981년~2010년, 극값/강설: 1971년~2000년)<ref>{{웹 인용 |url = http://www.klimaatatlas.nl/tabel/stationsdata/klimtab_8110_210.pdf |title = Klimaattabel Valkenburg, langjarige gemiddelden, tijdvak 1981–2010 |publisher = 네덜란드 왕립 기상연구소 |language = nl |access-date = 10 September 2013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71010161642/http://www.klimaatatlas.nl/tabel/stationsdata/klimtab_8110_210.pdf |archive-date = 10 October 2017 |url-status = live }}</ref><ref>{{웹 인용 |url = http://www.knmi.nl/klimatologie/normalen1971-2000/per_station/stn210/5-extremen/210_extremen.pdf |title = Klimaattabel Valkenburg, langjarige extremen, tijdvak 1971–2000 |publisher = 네덜란드 왕립 기상연구소 |language = nl |access-date = 10 September 2013 }}{{깨진 링크|url=http://www.knmi.nl/klimatologie/normalen1971-2000/per_station/stn210/5-extremen/210_extremen.pdf }}</ref> }} == 도시 경관 == {{파노라마 |image = The Hague Skyline Part I.jpg |height = 250 |alt = 헤이그의 전경 }} 헤이그는 호프페이베르 호수와 비넨호프 궁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역사적인 이유로, 헤이그의 구도심은 레이던이나 델프트와 같은 근처 소도시의 그것과 여러 측면에서 다른 양상을 띈다. 운하와 벽으로 구획을 나눈 좁은 시내 대신에, 중세 후기에 생겨난 작은 거리와 외교관을 비롯한 상류층을 위해 지어진 넓고 호화로운 18세기 주택을 찾아 볼 수 있다. 헤이그를 관통하던 몇몇 운하는 19세기를 거치며 말라버렸는데 최근 복원된 일부가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14세기 경 설계된 헤이그 대성당, 16세기에 지어진 시청, 17세기에 완공된 대형 궁전 그리고 18세기에 등장한 주거단지 등이 헤이그의 건축 명소로 손꼽힌다. 과거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헤이그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19세기 이래로 동인도 회사에서 활동하던 상류층 공무원들은 종종 헤이그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많은 지명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과 수리남을 비롯한 다른 식민지의 지명을 빌려와 지어졌다. 또한 헤이그에는 많은 인도(Indo), 즉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혼혈 인구가 살고 있다. [[파일:Duiker.Thomsonplein.The Hague.3-11-2011.jpg|섬네일|헤이그의 주거 지역]] 구도심의 가장 큰 특징은 넓고 긴 거리와 3층 이하의 낮은 주택이다. 새로 개발된 남서쪽 지역은 진취적인 건축가였던 [[헨드릭 베를라헤]]의 설계안을 따랐다. 1910년 즈음 발표된 일명 베를라헤 계획은 넓은 공간과 아늑한 거리 풍경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도시 서쪽 대부분이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전후 [[모더니즘 건축|모더니즘]] 건축가 W. M. 두독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열린 공원 형태의 공간에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블록을 배치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 행정 == 네덜란드의 모든 정부 부서와 대법원, 그리고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이 헤이그에 있다. 헤이그에는 또 다음과 같은 여러 [[유엔]] 기구가 있다. * [[국제사법재판소]] - [[앤드루 카네기]]의 재정지원을 받았음. [[평화궁]](Vredespaleis)에 소재. *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국제형사재판소]] * [[화학무기금지기구]] == 교육 == 왕실의 지원을 받는 헤이그 예술대학이 있다. 헤이그 예술대학은 네덜란드 왕립음악원과 [[헤이그 왕립예술원]]이 통합해 출범했다. 종합 대학으로, 2012년 문을 연 [[레이던 대학교]]의 헤이그 분교<ref group="주">캠퍼스 더 헤이그(Campus The Hague)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일부 석사 과정과 함께 사용한다.</ref>와 [[원격 교육]]을 제공하는 네덜란드 개방 대학교가 위치해있다. == 문화 == [[빌럼알렉산더르]] 국왕과 [[네덜란드 왕비 막시마]]를 포함한 여러 왕실 구성원이 헤이그에 거주한다. 헤이그에서 촬영된 영화로 [[오션스 트웰브]]와 [[넷플릭스]] 시리즈 [[센스8]]이 있다. === 스포츠 === 네덜란드 프로 축구 2부 리그인 [[에이르스터 디비시]]에 속한 [[ADO 덴하흐]]의 연고지다. 약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ADO 덴하흐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른다. == 인물 == 헤이그 출신의 유명 인물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토성의 고리를 발견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썬]]의 창시자 [[귀도 반 로섬]], 네덜란드 총리 [[마르크 뤼터]] 등이 있다. == 같이 보기 == * [[헤이그 특사 사건]] - [[이준 열사 기념관]]이 존재함. * [[평화궁]] * [[란트스타트]] * [[로테르담]] == 주해 == <references group="주" />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Den Haag}} * {{언어링크|nl|en}} [http://www.denhaag.nl/ 공식 홈페이지] {{전거 통제}} [[분류:헤이그| ]] [[분류:네덜란드의 도시]] [[분류:자위트홀란트주의 도시]] [[분류:네덜란드의 주도]] [[분류:북해의 항구 도시]] [[분류:네덜란드의 옛 수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우리당|2020년에 창당된 정당|우리당 (2020년)}} {{정당 정보 |국가=대한민국 |배경색 = 열린우리당 |이름 = 열린우리당 |약칭 = 우리당 |정부 = [[참여정부]] |지도자1_직명 = 대통령 |지도자1_이름 = [[노무현]] |지도자2_직명 = 의장 |지도자2_이름 = [[정세균]] |지도자3_직명 = 원내대표 |지도자3_이름 = [[장영달]] |지도자4_직명 = 최고위원 |지도자4_이름 = [[김근태]]<br>[[우상호]]<br>[[오영식]]<br>[[이인영]]<br>[[이해찬]]<br>[[원혜영]]<br>[[김춘진]] |로고 = Logo of the Uri Party.svg |로고크기 = 250px |중앙 당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신로]] 162([[여의도동]])<ref name=info>흡수합당 당시 중앙 당사 소재지와 의장</ref> |이념 = [[자유주의]]<ref>{{뉴스 인용|url=http://news.bbc.co.uk/2/hi/asia-pacific/3627419.stm|제목=S Korea's Uri Party wins election}}</ref><br/>[[제3의 길]]<ref>[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0095605?sid=100/ 김근태의장 “성장·복지 아우르는 ‘제3의길’ 걸어야 난관 극복”]</ref><br>[[사회자유주의]]<ref>{{웹 인용|url=https://core.ac.uk/download/pdf/51180856.pdf |제목=Electoral Systems, Political Career Paths and Legislative Behavior: Evidence from South Korea's Mixed-Member System1 |author=Hae-Won Jun |work=Cambridge University Press|page=158}}</ref> |스펙트럼= [[중도주의|중도]] ~ [[중도좌파]]<ref>{{도서 인용|editor=Jean-Mark Peterson |제목=Brief History: Brief History of Korea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ByIo1D9RY40C&q=center-left+Uri+Party&pg=PA242 |date=2009 |page=242 |publisher=Infobase Publishing|isbn=9781438127385 }}</ref><ref>{{웹 인용|url=https://koreajoongangdaily.joins.com/2005/12/19/socialAffairs/Centrist-politics-in-favor-among-younger-Koreans/2659275.html |제목=Centrist politics in favor among younger Koreans |quote=Translated into political support, the center-left Uri Party last year was supported by 35 percent of those in their 20s, while the conservative Grand National Party was favored by only about 17 percent of those young adults. |date=19 December 2005|publisher=[[코리아중앙데일리]]}}</ref> |창당 = [[2003년]] [[11월 11일]] |해산 = [[2007년]] [[8월 20일]] |분당전 = [[민주당 (2000년 대한민국)|새천년민주당]] |통합정당 = [[대통합민주신당]] |상징색 = [[노랑]] |분당후=[[중도개혁통합신당]], [[대통합민주신당]]}} [[파일:Logo of the Uri Party (Sign only).svg|섬네일|250픽셀|열린우리당의 로고]] [[파일:Uri Party logo.svg|섬네일|250픽셀|2006년 지방 선거에 사용된 열린우리당의 로고]] [[파일:Political parties of south korea.svg|섬네일|250픽셀|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열린우리당'''(열린우리黨, 약칭 '''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새누리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개혁가들이 [[2003년]] [[11월 11일]]에 결성한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당의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로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 시대적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행정수도 이전]]을 주장했으며, [[2004년]] 주류정당들이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 총선]]을 통해 [[1988년]] 이래 최초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되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야당과의 충돌이 일었고, [[2005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의 거부로 대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한길]]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호남기반의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과 합당하자는 수많은 대통합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에 이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 · 합당되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533626 2차 대규모 탈당 '초읽기'… 열린우리당, 당 해체 수순]{{깨진 링크|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533626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40901033137175002]</ref> == 역사 == === 창당 과정 === [[2003년]] [[7월 7일]]에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등 개혁파 의원 5명과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1943년)|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1938년)|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정치인)|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정치인)|송영길]], [[송영진 (정치인)|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1953년)|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이종걸]], [[천정배]] 총 35명, [[9월 23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덕규]], [[배기선]], [[10월 23일]]에 [[유선호 (정치인)|유선호]], [[오영식]], [[우상호]] 등 원외 인사들이 대거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11월 1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규]], [[11월 3일]]에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하여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 속에 [[2003년]] [[11월 11일]]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2004년]] [[3월 8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승국 (정치인)|박승국]]과 [[3월 3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조성준 (1948년)|조성준]]이 입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초 민주당을 깨서는 안 된다며 신당 창당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대부분의 민주당 내 친노 및 개혁파 세력이 탈당을 결심하자 결국 열린우리당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0818187&nidx=21093|제목=노무현, 열린우리당 창당 반대에서 찬성으로 바뀐 이유는?|날짜=2015-08-28|언어=ko|확인날짜=2019-09-05|archive-date=2020-09-22|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922065122/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0818187&nidx=21093|url-status=}}</ref> === 창당 초기 ===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민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하여 1위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9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표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3월 12일]] 한나라당 소속의 박관용 국회의장이 국회경비대를 동원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표결을 진행시킴으로써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은 정지되었고, [[고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이 연합하여 통과시킨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부정적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을 비판하고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 기각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리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같은 해 4월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그 해 5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중 3명만이 인용 의견을 내고, 5명이 기각, 1명이 각하 의견을 냄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한다고 판결하였다. === 2004년 총선거~2005년 === 한때 정동영 당 의장의 "60대 이상의 노인들은 투표 하면 안된다"는 노인 폄하발언 논란으로 제1당 달성이 어렵게 보이기도 하였으나,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의 비례대표 후보 사퇴 등 최선의 대응을 통해 [[대한민국 17대 총선|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회 과반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권한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였고, [[한나라당]]의 ‘도덕성’ 문제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 [[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천정배]] 의원이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121석의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에 완강하게 맞섰다.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내에 4대 개혁 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초, 당의장을 맡게 된 임채정 의원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선진사회협약 체결>을 제시하였으며 1월에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 [[4월 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장 취임직후 실시되었던 4월 재보궐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2005년 10월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겸임 선출하였다.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혁 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상황은 종료되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0510145741 "盧가 번지수 잘못 찾은 대연정, 제대로 만들어보라" - 프레시안<!-- 봇이 따온 제목 -->]</ref> 이에 대해 한나라당 뿐만아니라 민주당, 민주노동당도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수석부대표는 "한나라당과 차라리 합당할 것을 권고한다"면서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선을 그었으며,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고 비판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1&aid=0000092588 盧대통령 대연정 제안에 野3당 일제히 비판]</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86192 여야, 대연정 반응]</ref> [[8월 1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데 대하여 "지역주의 집착당임을 재확인해준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 대한 당내 호남권 일부 의원들의 반발과 관련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이날 상임중앙위원회의 직후 브리핑을 통해 "박 대표 회견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453140 與, 대연정 거부는 지역주의 안주]</ref> === 2006년 === [[2006년]] [[1월 2일]] [[정세균]] 의원이 [[대한민국 산업자원부|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당의장을 사퇴함으로써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국민적 지지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원들은 어려운 당상황을 극복하고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하였다. [[2006년]] 1월 당시, [[한나라당]]은‘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앞에서 끊임 없는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당은 국회정상화 노력을 통하여 [[2006년]] [[2월]] 임시국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지방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였다. 우리당은 결국 [[2006년]] [[5월 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에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했으며, 정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 ===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리당은 지지자와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정치를 위한 최우선과제가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단결, 대통합신당의 건설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과의 재통합, 시민사회 등 다양한 연대 등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대통합신당 건설을 앞당기고자 하는 고민속에 당의 일부는 탈당을 선언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1956년)|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1월 23일 [[최재천 (정치인)|최재천]], [[이계안]], 1월 28일 [[천정배]], 1월 30일 [[염동연]], 2월 3일 [[정성호 (1962년)|정성호]]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였다. 2월 6일에는 소속 국회의원 23명 집단 탈당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의회 제2당으로 변모하였으며 [[2007년]] [[6월]]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과 2007년 대선승리를 위한 전 당원의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하여 2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정세균]] 당의장을 선출하였다. 아직 낮은 국민지지도와 일부 의원들의 집단탈당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속에서 전당대회가 자칫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우리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모인 약 72%의 당원들이 참석하여 <대통합을 통한 2007년 대선승리>를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였으며, 이들에게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18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공식 의결하였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시민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2007년 8월 5일에 창당된 정당이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532173# 우리당 사수파 반발 속 민주신당과 합당 결의]</ref> 2007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하였다. 2007년 [[8월 21일]] 열린우리당 사수파 당원들로 구성된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합당수리 무효확인 가처분 및 본안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장에서 "우리당 당규에 따르면 전당대회 5일 전인 8월13일까지 대의원 명부를 확정하도록 돼있다"며 "그러나 당 지도부는 8월15일에 가서 재적 대의원 5천347명을 확정했고 다시 전대 당일인 18일 재적 대의원을 5천200명으로 임의 보고해 합당을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당 지도부가 우리당 당헌.당규를 명백하게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불법과 반칙으로 얼룩진 8.18 전대는 원천무효"라고 덧붙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32585 우리당 사수파, 합당무효소송 제기]</ref> [[2007년]] [[8월 30일]]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열린우리당이 추구한 정치.정당 개혁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당의 법통과 정통성을 온전히 승계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에 열린우리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를 등록했다"고 밝혔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41126 우리당 사수파, 열린우리당 창준위 등록]</ref> == 계파 == 주로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친노]]와 비노 실용파 친정,영[[진보주의|진]] 성향의 친[[김근태]], 중도보수 성향의 친[[고건]]계와 중진인 광장파 등이 있다. 2007년 들어 통합신당 움직임이 보이면서 대통합파와 당사수파로 분열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061041501&code=910402 덜컹덜컹 가던 與 갈림길 만났다…신당파 분열][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701/h2007012218544321060.htm 둑 터진 與… 탈당 급물살 타나]{{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701/h2007012218544321060.htm }}</ref><ref>{{뉴스 인용 |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106004011|제목=“차라리 한나라로 가라” “소수야당 하겠단 거냐” |출판사=서울신문 |날짜=2007-01-06 |확인날짜=2013-06-05}}</ref> == 조직 == * 당원([[기간당원제|기간당원]]) * 전국 대의원 대회 * 중앙 위원회 * 상임 중앙 위원회 ** 상임 중앙 위원 * 당의장 ** [[정세균]] ( (전) 당의장) * 전국위원회 * 사무처(사무처장) === 역대 당의장 === {| class="wikitable" |- !대수||역대 대표||직함||임기 |- | 1 || [[김원기 (1937년)|김원기]] || 의장 || [[2003년]] [[10월 27일]] ~ [[2004년]] [[1월 11일]] |- | 2 || [[정동영]] || 의장 || [[2004년]] [[1월 11일]] ~ [[2004년]] [[5월 17일]] |- | 3 || [[신기남]] || 의장 || [[2004년]] [[5월 17일]] ~ [[2004년]] [[8월 20일]] |- | 4 || [[이부영]] || 의장 || [[2004년]] [[8월 20일]] ~ [[2005년]] [[1월 3일]] |- | (임시) || [[임채정]] || 임시집행위원장 || [[2005년]] [[1월 5일]] ~ [[2005년]] [[4월 2일]] |- | 5 || [[문희상]] || 의장 || [[2005년]] [[4월 2일]] ~ [[2005년]] [[10월 28일]] |- | (임시) || [[정세균]] || 비상집행위원장 || [[2005년]] [[10월 29일]] ~ [[2006년]] [[1월 3일]] |- | (임시) || [[유재건 (1937년)|유재건]] || 비상집행위원장 || [[2006년]] [[1월 6일]] ~ [[2006년]] [[2월 18일]] |- | 6 || [[정동영]] || 의장 || [[2006년]] [[2월 18일]] ~ [[2006년]] [[6월 1일]] |- | 7 || [[김근태 (1947년)|김근태]] || 의장 || [[2006년]] [[6월 9일]] ~ [[2007년]] [[2월 14일]] |- | 8 || [[정세균]] || 의장 || [[2007년]] [[2월 14일]] ~ [[2007년]] [[8월 20일]] |} === 역대 원내대표 === * [[김근태 (1947년)|김근태]]: [[2003년]] [[10월 27일]] 창당 준비위원회에서 원내대표로 선출 * [[천정배]]: [[2004년]] [[5월 11일]] * [[정세균]]: [[2005년]] [[1월 24일]] * [[김한길]]: [[2006년]] [[1월 23일]] * [[장영달]]: [[2007년]] [[1월 31일]] == 주요 활동 == * 정책적 국헌 개선을 위한 취지의 국가적 상생론 등을 내세워 [[4대 개혁 입법]] 시도 * 국민 평화 대통합을 위한 취지의 [[연대 (사회학)|상생적 연대론]] 등을 내세워 [[대연정]] 시도 == 비판 == === [[자유한국당|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은 "영남 패권정당을 노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며 "만일 한나라당과의 연정이 성사된다면 과거 3당 합당 때처럼 호남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차라리 그럴바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선거제도 개편에는 동조하나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비판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86192 여야, 대연정 반응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부정 ===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도청 문제를 가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격하시켜 DJ와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북송금특검으로 [[6·15 남북 공동선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구냉전세력인 한나라당에 팔아넘긴 천박한 인식이 있다”고 비난했다.<ref>[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1/20050811/20050811163100.html 다른신문, 생각하는 신문. - 프로메테우스<!-- 봇이 따온 제목 -->]</ref>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탈당파들과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214&aid=0000046946 DJ, 열린우리당에 사과요구‥질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 호남 민심 이반 ===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민주당]]에 밀려 호남의 지지율이 낮아진 것은 국민의 정부를 부정하는 등의 호남 소외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news/200606/e2006061621320970290.htm]{{깨진 링크|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news/200606/e2006061621320970290.htm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006493 열린우리당 호남민심 홀대,오만했다]</ref> === 국론 분열 === 보수파들은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청산 등의 일련의 개혁이 국론분열시킨다"면서 "모든 국력을 경제와 안보 등의 현안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주장한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3187 보수원로 "친일파 청산 중단해야"]</ref> 열린우리당을 분열과 실패의 상징으로 규정하며 탈당파, [[국민중심당]], 민주당원들은 反한나라당 대통합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해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친노세력과 당내 사수파는 "지역주의 야합"이라며 비판하며 열린우리당으로의 대통합을 요구했다. == 주요 선거 결과 == === 국회의원 선거 === {{선거기록 시작|KR|정당|총선}} {{선거기록/KR/정당/총선|열린우리당|[[2004년]]|[[대한민국 제17대 총선|17대]]|129|243|23|56|38.26}} {{선거기록 끝}} === 지방선거 === {{선거기록 시작|KR|정당|지선}} {{선거기록/KR/정당/지선|열린우리당|[[2006년]]|[[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4회]]|1|16|19|230|52|733|630|2888}} {{선거기록 끝}} == 역대 전당대회 == ===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 [[2003년]] [[11월 11일]], 우리당 창당대회는 모든 공직후보를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뽑고 지도부도 당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당헌을 채택한 뒤, [[김원기]], [[이경숙]], [[이태일]] 창당준비위원장들을 공동 임시의장으로 추대했다. === 열린우리당 제1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정동영]] |align=right|5,307 |{{막대|신당|6|4}} 63.7% |'''의장''' |- !{{숨은키|102}}2 |align=center | [[신기남]] |align=right|2,817 |{{막대|열린|3|4}} 33.8%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3}}3 |align=center | [[이부영]] |align=right|2,817 |{{막대|한|2|6}} 25.7%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4}}4 |align=center | [[김정길 (1945년)|김정길]] |align=right|1,742 |{{막대|황|2|1}} 20.9%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5}}5 |align=center | [[이미경]] |align=right|1,695 |{{막대|황|2|0}} 20.3%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6}}6 |align=center | [[장영달]] |align=right|1,092 |{{막대|녹|1|3}} 13.1% | |- !{{숨은키|107}}7 |align=center | [[허운나]] |align=right|1,073 |{{막대|녹|1|3}} 12.9% | |- !{{숨은키|108}}8 |align=center | [[유재건 (1937년)|유재건]] |align=right|808 |{{막대|녹|1|0}} 9.7%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8,338 | |} [[2004년]] [[1월 11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 열린우리당 제2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문희상]] |align=right|4,266 |{{막대|열린|4|3}} 43% |'''의장''' |- !{{숨은키|102}}2 |align=center | [[염동연]] |align=right|3,339 |{{막대|열린|3|4}} 33.7%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3}}3 |align=center | [[장영달]] |align=right|3,092 |{{막대|녹|3|1}} 31.2%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4}}4 |align=center | [[유시민]] |align=right|2,838 |{{막대|참여|2|9}} 28.6%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5}}5 |align=center | [[김두관]] |align=right|2,687 |{{막대|열린|2|7}} 27.1% | |- !{{숨은키|106}}6 |align=center | [[송영길 (정치인)|송영길]] |align=right|1,468 |{{막대|8민|1|5}} 14.8% | |- !{{숨은키|107}}7 |align=center | [[김원웅]] |align=right|1,076 |{{막대|열린|1|1}} 10.9% | |- !{{숨은키|108}}8 |align=center | [[한명숙]] |align=right|1,058 |{{막대|정의|1|1}} 10.7% |여성 몫 '''상임중앙위원'''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10,498 | |} [[2005년]] [[4월 2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문희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 열린우리당 제3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정동영]] |align=right|4,450 |{{막대|신당|4|8}} 48.2% |'''의장''' |- !{{숨은키|102}}2 |align=center | [[김근태 (1947년)|김근태]] |align=right|3,847 |{{막대|열린|4|2}} 41.7%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김두관]] |align=right|3,218 |{{막대|열린|3|5}} 34.9%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4}}4 |align=center | [[김혁규]] |align=right|2,820 |{{막대|한|3|1}} 30.6%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5}}5 |align=center | [[임종석]] |align=right|1,991 |{{막대|정의|2|2}} 21.6% | |- !{{숨은키|106}}6 |align=center | [[김부겸]] |align=right|1,355 |{{막대|정치|1|5}} 14.7% | |- !{{숨은키|107}}7 |align=center | [[조배숙]] |align=right|424 |{{막대|홍|0|4}} 4.2% |여성 몫 '''상임중앙위원''' |- !{{숨은키|108}}8 |align=center | [[김영춘 (1962년)|김영춘]] |align=right|353 |{{막대|한|0|4}} 3.8%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9,229 | |} [[2006년]] [[2월 18일]], 우리당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70%, 당원 여론조사 30% 예비경선을 통해 8명으로 압축한 후보들에 대해 선거인단이 1인 3표로 투표한 결과, 정동영 전 의장을 비롯한 5명을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하였다. === 열린우리당 제4차 전당 대회 === [[2007년]] [[2월 14일]], 2/3에 가까운 소속 의원들의 탈당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세균]] 전 원내대표를 새 의장으로 추대하고, 추대된 지도부에 대통합신당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 === 2007년 [[8월 20일]], 통합신당과 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는 열린우리당의 [[대통합민주신당]] 흡수합당을 결의하였다. == 역대 정당 당원 == {{참고|분류:열린우리당 당원}} == 같이 보기 == * 인물 ** [[노무현]] * [[참여정부]] * [[대한민국의 정당]] ** [[개혁국민정당]] (2002년) ** [[국민참여당]] (2010) ** [[대통합민주신당]] (2007) - 열린우리당을 기반으로 창당한 정당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각주 == {{각주}}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역사}} [[분류:열린우리당| ]] [[분류:2003년 설립된 정당]] [[분류:2007년 해체된 단체]]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당]]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분류:더불어민주당|-]] [[분류:대한민국의 해산된 정당]] [[분류:민주당계 정당]] [[분류:2007년 해산된 정당]]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한나라당}} {{다른 뜻 넘어옴|새누리당|2017년에 창당된 정당|새누리당 (2017년)}} {{정당 정보 | 국가 = 대한민국 | 이름 = 자유한국당 | 언어1 = 영어 | 언어1_이름 = Liberty Korea Party | 배경색 = 자유한국당 | 워드마크 = [[파일:Logo of the Liberty Korea Party.svg|250px]] | 약칭 = 한국당 | 대표 = [[황교안]] | 최고위원 = {{단순목록| * [[조경태]] * [[정미경 (정치인)|정미경]] * [[김순례]] * [[김광림 (1948년)|김광림]] * [[신보라 (정치인)|신보라]] }} | 원내대표 = [[심재철 (1958년)|심재철]] | 정책위의장 = [[김재원 (1964년)|김재원]] | 사무총장 = [[박완수]] | 피병합 = {{단순목록| * [[한국미래연합]]<small>(2002)</small> * [[자유민주연합]]<small>(2006)</small> * [[미래희망연대]]<small>(2012)</small> * [[선진통일당]]<small>(2012)</small> * [[늘푸른한국당]]<small>(2018)</small> }} | 선행조직= [[신한국당]] | 개명전= {{단순목록| * 한나라당 * <small>(1997년 11월 21일 ~ 2012년 2월 13일)</small> * 새누리당 * <small>(2012년 2월 13일 ~ 2017년 2월 13일)</small> }} | 통합정당 = [[국민의힘|미래통합당]] | 중앙 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73, 2층, 3층([[영등포동7가]], 우성빌딩) | 정책연구소 = [[여의도연구원]] | 재정지원 = 3,325,899천원 | 재정_연도 = 2018년 3/4분기 | 당원 = 3,340,979명<br/>(책임 당원: 430,736명)<ref>{{웹 인용|url=http://www.nec.go.kr/portal/bbs/view/B0000338/39743.do?menuNo=200185&searchYear=&searchMonth=&searchWrd=%EC%A0%95%EB%8B%B9%EC%9D%98%20%ED%99%9C%EB%8F%99%EA%B0%9C%ED%99%A9&searchCnd=1&viewType=&pageIndex=1&section=&searchOption1=|제목=2018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ref> | 당원_연도 = 2018 | 창당 = [[1997년]] [[11월 21일]] | 해산 = [[2020년]] [[2월 17일]] | 상징색= [[빨강|빨간색]] | 이념 = [[보수주의]]<ref>{{인용|first=Mark E. |last=Manyin |title=U.S.-South Korea Relations |publisher=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year=2010 |page=26 |url=http://books.google.co.uk/books?id=PW8xrTdixW8C&pg=PA26&dq=grand+national+party+conservative&hl=en&sa=X&ei=qp9fT4iOBoPQhAfl_8CqBw&ved=0CD4Q6AEwBA#v=onepage&q=grand%20national%20party%20conservative&f=false}}</ref><ref>{{인용|first=Gi-Wook |last=Shin |title=One Alliance, Two Lenses: U.S.-Korea Relations in a New Era |publisher=Stanford University Press |page=208 |year=2010 |url=http://books.google.co.uk/books?id=acKZaB4RlGEC&pg=PA208&dq=grand+national+party+korea+conservative&hl=en&sa=X&ei=XaBfT4WEBci4hAePpsnEBw&ved=0CDEQ6AEwATgU#v=onepage&q=grand%20national%20party%20korea%20conservative&f=false}}</ref><ref>{{인용|first1=Mark |last1=Peterson |first2=Phillip |last2=Margulies |title=A brief history of Korea |publisher=Facts On File |year=2010 |page=242 |url=http://books.google.co.uk/books?id=ByIo1D9RY40C&pg=PA242&dq=grand+national+party+conservative&hl=en&sa=X&ei=qp9fT4iOBoPQhAfl_8CqBw&ved=0CC8Q6AEwAQ#v=onepage&q=grand%20national%20party%20conservative&f=false}}</ref><br/>{{•}}[[사회보수주의]]<ref>http://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3032710&cloc=joongangdaily%7Chome%7Cnewslist1</ref><br/>{{•}}[[국민보수주의]]<ref>{{웹 인용 |url=http://kaisnet.or.kr/resource/down/11_1_06.pdf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9-09-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10204708/http://www.kaisnet.or.kr/resource/down/11_1_06.pdf |보존날짜=2017-08-10 |url-status=dead }}</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898504.html</ref><br/>[[반공주의]]<ref>{{뉴스 인용|url=https://thediplomat.com/2018/03/the-deeper-meaning-of-south-koreas-constitutional-debate/|제목=The Deeper Meaning of South Korea's Constitutional Debate}}</ref><ref name="wordpress">{{뉴스 인용|url=https://asiansecurityblog.wordpress.com/2019/02/16/the-south-korean-right-in-the-wilderness-part-2-models-for-a-reformed-liberty-korea-party/|제목=The South Korean Right in the Wilderness, part 2: Models for a Reformed Liberty Korea Party}}</ref><br/>[[우익포퓰리즘]]<ref name="wordpress"/> |스펙트럼 = [[우익]]<ref>{{bulleted list|[https://www.upi.com/South-Korea-conservatives-planning-boycott-over-North-Korea/6631518053687/ South Korea conservatives planning boycott over North Korea]. ''United Press International''. Author - Elizabeth Shim. Published 7 February 2018. Retrieved 13 June 2018.|[https://www.foreignbrief.com/daily-news/south-koreans-set-to-continue-backing-president-moons-agenda-in-local-elections/ South Koreans set to continue backing President Moon’s agenda in local elections]. ''Foreign Brief''. Published 13 June 2018. Retrieved 13 June 2018.}}</ref> ~ [[극우]]<ref name="far-right">{{bulleted list|{{웹 인용|author=Elizabeth Shim|url=https://www.upi.com/Top_News/World-News/2018/06/01/South-Korea-politicians-to-urge-special-prosecutor-for-Druking-scandal/4671527871825/|title=South Korea politicians to urge special prosecutor for 'Druking' scandal|quote=The far-right Liberty Korea Party is likely to recommend one of the candidates, while the other three parties are likely to haggle over the second candidate, out of the total four.|work=UPI|accessdate=1 June 2018}}<br> |{{웹 인용|url=https://www.channelnewsasia.com/news/asia/south-korean-presidential-elections-the-leading-candidates-8819202|title=South Korean presidential elections: The leading candidates|quote=Two candidates with more conservative leanings – Ahn Cheol-soo of the centrist People’s Party and ultra-conservative Liberty Party of Korea’s Hong Joon-pyo stand tied at approximately 18 per cent, with the latter’s support rising.|work=[[Channel NewsAsia]]|date=5 May 2017|확인날짜=2019-12-14|archive-date=2019-03-30|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330022948/https://www.channelnewsasia.com/news/asia/south-korean-presidential-elections-the-leading-candidates-8819202|url-status=}}<br> |{{웹 인용|author=Steven Denney|url=https://sinonk.com/2017/05/08/anti-communist-ideology-endures-political-implications-of-rok-conservative-political-culture/|title=Anti-Communism Endures: Political Implications of ROK Political Culture|quote=It is typically associated with hard-right political pundits and conservative lawmakers like Hong, who publicly accused Moon Jae-in of being a "pro-North Korea leftist" during the current campaign.|work=sino NK|accessdate=8 May 2017}}<br> |{{웹 인용|url=https://www.newser.com/story/280064/pol-to-female-nominee-fulfill-national-duty-have-kids.html|title=At Confirmation Hearing, Woman Chastised for Being Childless|quote="You have a great resume, but please fulfill your duties to the nation," Jeong Kab-yoon, a member of the far-right Liberty Korea Party, told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ructor Joh Sung-wook at her confirmation hearing this week, per the Guardian. "The biggest problem in South Korea is that women are not giving birth."|work=Newser|date=5 September 2019}} |{{웹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70426000830|title=[Election 2017] Gay rights neglected on Korea campaign trail|quote=Hong, the outspoken candidate of the far-right Liberty Korea Party, is the most vocal about his objection to the issue.|work=The Korea Herald|date=8 May 2017}} |{{웹 인용 |author=Park Se Yeol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38956 |title=South Korea's Party Isolated in 'Youngnam' Becomes 'Asphalt far-right' |work=pressian |accessdate=1 May 2019 }}<br> |{{웹 인용 |author=Lee Man-Soo |url=https://www.ytn.co.kr/_ln/0101_201902160512095093 |title=The Korea Party, from the 'far-right' swamp to the 'pro-Park new party' theory. |work=YTN |accessdate=16 February 2019 }}<br> |{{웹 인용|author=Park ji-won|url=http://m.koreatimes.co.kr/pages/article.asp?newsIdx=264176|title=Voices of far-right groups strong in LKP leadership race|work=The Korea Times|accessdate=21 February 2019}}<br> |{{웹 인용|author=Kim Bo-gyung|url=http://m.koreaherald.com/view.php?ud=20190313000646|title=[Newsmaker] Tensions escalate over Liberty Korea Party floor leader Na Kyung-won’s remarks on President Moon|quote=Na's strident criticism of the Moon administration has been seen as a strategic move to cement the conservative party's far-right support base|work=The Korea Herald|accessdate=13 March 2019}}<br> |{{웹 인용|author=Park ji-won|url=http://m.koreatimes.co.kr/pages/article.asp?newsIdx=258109|title=LKP's embrace of far-right individuals raises concern|work=The Korea Times|accessdate=14 November 2018}} }}</ref><ref group="주">한나라당 시절에는 [[중도우파]] ~ [[우익]]으로 분류되었다.</ref> | 자매정당 = [[미래한국당]] | 국제의회 = [[국제민주연합]]<br />[[아시아 태평양 민주연합]] | 웹사이트 = [http://www.libertykoreaparty.kr/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김병준(1954년)|비상대책위원={{단순목록| * [[김성태 (1958년)|김성태]](원내대표) * [[함진규]](정책위의장) * [[박덕흠]] * [[김종석]] * [[최병길 (기업인)|최병길]] * [[이수희]] * [[정현호 (정치인)|정현호]]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자유한국당'''(自由韓國黨, {{llang|en|Liberty Korea Party}})은 1997년 11월 21일부터 2020년 2월 17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국민보수주의|보수주의]] 정당이다. 상징색은 [[빨강|빨간색]]이었으며 [[2020년]] [[2월 17일]]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여러 정당들이 미래통합당(현재의 [[국민의힘]])으로 통합되어 소멸되었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을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다. 한나라당은 대선 정국과 외환 위기로 혼란스러웠던 [[김영삼 정부]]에서 여당이었다가 자당 대선 후보 이회창이 한 달 후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이 되었다. 이후 영남권에서 반DJ 여론이 높아짐과 동시에 개혁에 앞장서서 이회창이 이끈 2000년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총선]]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선]]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대선]]에서 이회창이 또 패배해서 야당 위치에 계속 있게 되었다. [[박근혜]]가 이끈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악재로 작용하여 패배하였다. 그러나 박근혜가 이끈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선]]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대선]]에서 자당 대선 후보 [[이명박]]이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면서 다시 여당으로 자리잡았으며,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때도 압승을 거두어 여대야소 정국을 형성하였다. 이후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촛불 시위]]와 2009년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자살 등 잇따라 당이 위기에 놓였으나, 박근혜가 이끈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대선]]에서도 자당 대선 후보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여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7년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박근혜가 탄핵이 되어]]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상당수 보수 유권자들이 이탈하면서 2017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대선]]과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선]]에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를 제외하고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본래 [[한나라당]] 내에는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 곧 민주정의계(민정), 통일민주계(민주), 신민주공화계(공화)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많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민주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민주 계열은 2003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친박연대]]로, 또한 [[심대평]]과 같은 충청도 출신 보수 계열의 의원들이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이전까지의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꾸었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제도권 보수정당 중에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미래통합당 출범 이전 원내 최장수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명칭을 쓰던 1997년부터 이어져 왔었다.<ref>원래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 최장수 정당이었으나 [[2015년]] 7월에 이 기록을 뛰어넘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최장수 정당이 되었다.</ref>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깊어지고,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한 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비박계의 동조로 가결]]된 이후 갈등이 커지면서, 비박계 29명이 이탈하여 [[바른정당]], 친박계인 [[조원진]]이 이탈하여 [[새누리당 (2017년)|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 == 역사 == {{본문|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역사}} {{참고|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한나라당 출범 이전 === [[파일:Political parties of south korea (1988-).svg|섬네일|300px|[[1988년]] 이후 대한민국의 정당사. 푸른색이 보수정당이다.]] ==== 민주자유당 창당에서 민주계의 당권 장악 ==== {{본문|3당 합당}}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허나 이것은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 분당에서 한나라당의 출범까지 ==== {{본문|신한국당}}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면서 공화계의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상목]], [[박희태]], [[강재섭]]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10617/38115615/1 리멤버 1996년 공천혁명]. 동아일보. 2011년 6월 17일.</ref><ref>김형준. [http://www.womennews.co.kr/news/51700 벼랑 끝에 선 한나라당] {{웨이백|url=http://www.womennews.co.kr/news/51700 |date=20120109053837 }}. 여성신문. 2011년 12월 9일.</ref>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ref name="polinews.co.kr">{{웹 인용 |url =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163963|제목 = 15대 대통령 선거(Ⅱ) - 역대 대통령선거 캠페인 평가|저자 = 김자경|날짜 = 2012-12-11|확인날짜 = 2013-07-28}}</ref>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ref name="polinews.co.kr"/>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 한나라당 출범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 === ==== 야당으로의 몰락과 이회창의 활약 ==== [[파일:Logo of the Grand National Party (1997–2004).svg|섬네일|250픽셀|1997년부터 2004년까지 사용된 한나라당 로고]] 1997년 11월, 과거 대법관 시절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취지로서 소수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는 [[이회창]]이 이끄는 [[신한국당]]이 [[조순]]이 이끄는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고 대선 직전에는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등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북한 인사와 접촉하여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총풍 사건|총풍]]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총풍 사건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음).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과 [[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국회의원|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 책임제|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ref>하지만, 이는 이회창의 참신한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1994년]] [[김영삼]]이 [[김문수 (1951년)|김문수]], [[이재오]] 등을 영입한 것과 유사하다.</ref> ==== 대선 패배와 계속되는 야당 생활 ==== {{본문|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1936년)|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2/04/003000000200204111844007.html |제목=한나라 보수파 '이회창 공개지지'논란 |확인날짜=2013-11-23 |archive-date=2005-08-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50816192431/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2/04/003000000200204111844007.html |url-status= }}</ref>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020189 donga.com[뉴스&#93;-昌측 823억-盧측 120억 불법모금… ‘차떼기’ 떠들썩<!-- 봇이 따온 제목 -->]</ref>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제2연평해전|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ref>대선 선거일 직전의 지지철회로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내 민족해방 계열의 표가 [[노무현]]에게 갔다.</ref>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 탄핵 역풍과 17대 총선 패배 ==== [[파일:Logo of the Grand National Party.svg|섬네일|250픽셀|2004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된 한나라당 로고]]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이회창이 대선 출마를 위해 총재직에서 물러나자 서청원이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서청원 대표 역시 [[차떼기 사건]]으로 사퇴하자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 (정치인)|최병렬]]이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차떼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다수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도 노무현 대통령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민주당]]의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개혁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노무현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것이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10%대까지 추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서청원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킨 역풍으로 최병렬 대표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탄핵 기간에 국내 정당으로써는 최초로 [[한나라당]]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인터넷 한나라당 당원'을 모집한다. 인터넷 [[한나라당]] 당원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젊은 층에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당비 납부 의무는 없었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23일]],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었다.<ref>대한민국에서 여성 정당 대표 중 [[박순천]]에 이어 두 번째</ref>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박근혜는 탄핵 역풍 속에서 [[한나라당]]을 구해내긴 했지만,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제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 여당을 향한 압박에서 정권 교체까지 ====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ref>{{뉴스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56&aid=0000000202& |제목=동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한나라-자민련, 이제 함께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자! |출판사=한나라당 |날짜=2006-04-07 |확인날짜=2009-05-04}}</ref>,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대표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ref>{{뉴스 인용 |제목 =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0/2007082000855.html |출판사 = 조선닷컴 |저자 = |쪽 = |날짜 = 2007-08-20 |확인날짜 = 2009-07-07}}</ref>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 지지율 추락과 친이계의 몰락 ====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특히 서울에서 48석 가운데 40석을 차지했지만 충청지역에서 야권에게 패배했지만 일단 친여 성향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4개월 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80616150452&Section= 李대통령 지지율 7.4%…'한자리 충격'] 프레시안, 2008년 6월 16일자.</ref>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선거 3개월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안보 이슈에 상당한 호재를 받았지만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ref name="kr.news.yahoo.com">{{뉴스 인용|제목 = 한나라, '두나라 분당' 수순 밟나|url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12214390937074&linkid=20&newssetid=455&from=rank|출판사 = 프론티어타임스|저자 = 이민기 기자|쪽 = |날짜 = 2010-01-22|확인날짜 = 2010-01-22|archive-date = 2018-01-12|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80112215109/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12214390937074&linkid=20&newssetid=455&from=rank|url-status = dead}}</ref>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최구식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수행비서관이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 선관위를 디도스로 공격한 데다가 야권연대 등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 새누리당으로 개명과 정권 창출 === ==== 새누리당으로 개명 ==== [[파일:Logo of the Saenuri Party.svg|섬네일|새누리당 당명 시절 로고]] [[2011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었다<ref name="새누리">[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510203 새누리, 당명ㆍ정강정책 확정..`박근혜당' 완성]</ref>. ==== 19대 총선 승리와 정권 연장 ====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2017년]] 1월 [[바른정당]]이 출범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 박근혜 정부 출범과 세월호 침몰 사고, 그리고 재보궐선거의 연전연승 ==== 박근혜 취임 이후 새누리당은 계속해서 재보궐선거에서 연승했지만 [[2014년]] [[4월 16일]]에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면서 위기에 몰렸고, 결국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패배했다. 다만 기초단체장 선거는 117곳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15명을 뽑는 다음 달 7.30 재보궐선거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에서 사상 처음 전남 곡성-순천 지역구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선되었다, 11명 당선되어 의석수 157석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이 강화되었다. ==== 20대 총선에서 16년만에 여소야대 그리고 참패 ====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공천권 문제와 계파간의 갈등,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치·정책 방식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오히려 여당·대통령의 지지율는 정체되어 가고 심지어 공천을 받지 못한 이재오, 유승민, 주호영, 윤상현, 권은희, 류성걸, 강길부, 김태환 의원 등은 상향식 공천을 문제삼아 대거 탈당하고 심지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서울 용산구의 진영 의원도 역시 새누리당에서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송광호, 박상은, 조현룡, 심학봉 의원<ref>조현룡, 송광호 의원은 철도비리 혐의로, 박상은 의원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심학봉 의원도 국회 윤리위 제명을 앞두고 사퇴했다.</ref>마저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의석수도 감소되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원내 의석수도 146석으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120~140석 정도 획득한다는 전망과 함께 수도권에서 야권에게 참패할 것이 예상되었고 심지어 영남권도 야당, 무소속 후보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패배를 예상했다. 결과는 그대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122석을 얻어 원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전국 유권자가 과반이 넘는 수도권에서 1여다야 구도 속에서 완패했으며 특히 서울에는 1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는 13대 총선 [[민주정의당]]이 세운 10석보다 못한 것으로, 최악의 성적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통적 강세 지역인 [[강남3구]]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7석을 모두 차지했는데 20대 총선에서는 3곳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내주고 경기도에서 60석 가운데 19석만을 차지하고 인천에서도 4석만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영남지역에서 전통 텃밭 대구·경북에서 대구에서 3곳에서 패배하고 부산에서 6곳에서 더민주, 무소속 후보에게 헌납하고 경남에서는 4곳과 울산 3곳에서도 야권·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호남권에서는 전남 순천시에서 이정현, 전북 전주시 을에서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누리당은 호남에 교두보를 확보했다.<ref>1996년 15대 총선 신한국 [[강현욱]]의원이 당선 이후 20년만이다.</ref> 새누리당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반면 제주도에서 야당 후보에게 완패하며 3회 연속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논란 끝에 지도부가 사퇴하고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친박계는 탈당파의 복당에 반대했지만 개원 이후 6월 16일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소속 정당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던 [[강길부]]·[[유승민 (정치인)|유승민]]·[[안상수 (인천 출신 정치인)|안상수]]·[[윤상현 (정치인)|윤상현]]의 복당을 승인했고 주호영·장제원·이철규의원에 대한 복당은 6월 23일에 승인했다. 그러나 조해진·류성걸·권은희 전 의원등 친유승민계 낙선자에 대한 복당은 승인되지 않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37&aid=0000123471 동반 사퇴로 급한 불 껐지만…갈 길 먼 새누리], 6월 28일 JTBC</ref>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분당과 바른정당의 창당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탈당자가 생기는 등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비박계와 일부 친박계는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거대야당과 동조했고, 국회에서 이들의 동조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친박계인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대표가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지 않았고, 이후 치뤄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친박계 [[정우택 (1953년)|정우택]] 의원이 선출되면서 비박계 의원 30여명이 2016년 12월 말 대거 탈당하여 보수 정당 사상 최초로 분당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12월 16일 의원총회에서 119표 중 62표를 얻은 친박계의 [[정우택]]이, 55표를 얻은 [[나경원]]을 누르고 원내대표가 되고,<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74928.html|제목=새누리 원내대표 친박계 정우택|날짜=2016-12-16|성=김진철|성2=이경미|뉴스=한겨레|확인날짜=2016-12-22}}</ref> 이정현 대표가 사의를 밝혀 대표대행이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16/0200000000AKR20161216137100001.HTML|제목=與 이정현 지도부, 일괄사퇴…정우택 대표 대행체제 전환(종합)|성=이승관|날짜=2016-12-16|뉴스=연합뉴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6-12-22}}</ref> 이후 윤리위원 문제는 추가 인선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나<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19/0200000000AKR20161219054151001.HTML|제목=與, 윤리위 '친박 8인 충원' 무효화…정우택 "사직 처리"(종합)|성=이승관|성2=현혜란|날짜=2016-12-19|뉴스=연합뉴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6-12-22}}</ref> 비상대책위원장 인선 문제로 비박계와 친박계가 대립하였다. 비박계는 유승민을 비대위 위원장으로 선임할 것을 요구했으나 친박계가 거부하였고,<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192243025|제목=[박근혜 탄핵 정국]비박계 ‘유승민 비대위원장’ 추천…분당 불사 최후통첩|성=김진우|뉴스=경향신문|확인날짜=2016-12-22}}</ref>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5명은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21일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6/12/21/0502000000AKR20161221055451001.HTML|제목=비박 의원 35명 "27일 새누리 탈당"…사상 첫 보수정당 분당(종합)|성=이승우|성2=류미나|이름=|날짜=2016-12-21|뉴스=연합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2016년 12월 27일 비박계 29명이 탈당해 또 다른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을 결성한다. ===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 변경 ===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3월 31일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 19대 대선 패배로 9년 5개월 만에 야당 생활 시작 ====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밀릴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적지 않은 격차로 2위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19대 대선 직전, 홍준표 대통령 후보의 당무 우선권 발동에 따라 옛 새누리당에서 탈당했던 바른정당 국회의원 12명과 2017년 1월에 탈당했던 정갑윤 의원까지 의원 13명이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면서 일단 개헌저지선 100석을 회복했고 보수층이 막판에 결집하는데 불구하고 결국 2위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대경권]]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 [[부울경]]에서 2위, [[수도권 (대한민국)|수도권]]에서 3위를 기록하는 등 처음 추세에 비해 선전하긴 했지만 호남권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2백만표 차이로 참패를 당했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558만표 차이로 패배하면서 지난 17대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집권여당 생활은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개표 초반쯤 자유한국당 당사를 찾아가서 기자회견을 통해 홍준표는 이번 대선 패배를 승복했고 자유한국당 복원하고 보수우파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일으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홍준표가 대선후보 자격으로 당헌 104조의 당무우선권에 따라 복당을 승인한 것과 친박의원 3인(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여 사면한 것에 대한 합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박계는 복당 승인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복당 조치와 친박 3인 사면을 추인했다.<ref>[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6&news_seq_no=3221450]</ref><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5/12/0200000000AKR20170512039051001.HTML]</ref>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2017년 말에는 홍준표 대표의 주도로 보수통합을 계속 추진해 11월 초 박근혜를 제명했고 11월 6일 바른정당 통합파 9명의 의원이 자유한국당 복당 계획을 밝혔다. 이중 8명의 의원은 11월 8일에 탈당을 하였고 11월 9일 자유한국당 당원자격심사회의의 결정으로 국회의원 8인과 지역위원장 그리고 지방의원등 기타 복당신청자들의 복당을 승인했다. 자유한국당은 남은 1명인 주호영의원의 복당도 승인할 예정이지만, 나머지 바른정당 국회의원들은 탈당 후 복당 신청을 해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친박계는 홍준표 대표가 이들의 복당을 받아들인 것에 반발하였다. 이후 홍준표의 성완종 리스트 재판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친홍준표계 바른정당 복당파 김성태가 결선투표 없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친홍계 바른정당 복당파가 완전히 당권을 잡았다. 한편 홍 대표는 복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바른정당을 탈당한 [[김세연]] 의원과 [[박인숙]] 의원을 받아들였다.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 5곳과 경기·인천지역을 사수하고 서울을 탈환한다는 전력을 세워서 승리한다고 각오했지만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드루킹 게이트와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추행 스캔들으로 인해 악재가 발생되어 역전을 할 수 있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러나 대구 북구 갑 [[정태옥]] 의원의 특정 지역 비하 발언으로 악재가 발생하여 선거판세에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정태옥 의원은 자유한국당에서 탈당을 시키고 사태를 수습했지만 결국에는 대구·경북권을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역시 226명 중 53명만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 66곳 지역 가운데 4곳에서만 승리하여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기록하고 만다. 특히 수도권 빅3 가운데 완패하여 경기·인천을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심지어 부울경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23년만에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또한 동시에 치러진 [[201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2018년 재보궐선거]]에서도 12곳 중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던 경북 김천에서 한국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겨우 방어하는 성공했지만 경북 김천을 제외한 11곳에서 모두 패배했다.<ref>{{웹 인용|url=http://www.ytn.co.kr/_ln/0101_201806141205006881|제목=6.13 지방선거 與 '압승', 보수야당 '몰락'|언어=ko|확인날짜=2018-06-17}}</ref> 자유한국당의 역사상 최대 참패로 끝나면서 홍준표 대표는 사퇴하였고,<ref>{{뉴스 인용|url=http://news.mk.co.kr/newsRead.php?no=375988&year=2018|제목=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사퇴…모든 책임은 제게|뉴스=mk.co.kr|언어=ko|확인날짜=2018-06-17}}</ref>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7월 11일]]에는 [[여의도]]에서 [[영등포동]]으로 당사를 옮겼다.<ref>{{뉴스 인용|저자1=유성운 |제목=김병준도 깜짝 놀란 텅빈 '한국당 곳간'···당 존속도 어렵다 [출처: 중앙일보] 김병준도 깜짝 놀란 텅빈 '한국당 곳간'···당 존속도 어렵다 |url=https://news.joins.com/article/22868435#home |날짜=2018-08-08 |확인날짜=2018-09-03 |뉴스=중앙일보}}</ref> 김성태 대행은 "여의도 당사의 15%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기존의 기득권과 잘못된 인식, 사고를 전부 여의도에 버려두고 여기서는 오로지 국민의 삶만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 정당으로 태어나겠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11/0200000000AKR20180711121500001.HTML|제목=한국당, 영등포 당사로…"국민이 기회 주실 때까지 혹독한 세월"|성=이신영|이름=|날짜=2018-07-11|뉴스=연합뉴스|출판사=|언어=ko-KR}}</ref> 한편 당 체제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이회창]], [[김용옥]], [[이국종]], [[최장집]] 등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대위원장직을 고사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ocutnews.co.kr/news/4994860|제목=한국당, 비대위원장 후보군 '아무나 대잔치'?|언어=ko-KR|확인날짜=2018-07-09}}</ref> 그러나 [[7월 16일]] [[김병준 (1954년)|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비대위원장에 내정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fnnews.com/news/201807162110002665|제목=구원투수 김병준 한국당 불 끌까|성=|이름=|날짜=2018-07-16|뉴스=|출판사=}}</ref> 김 비대위원장은 인적청산보다 가치와 비전 정립이 먼저임을 강조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864499|제목=[주영진의 뉴스브리핑] 김병준 "한국당, 인적청산보다 가치·비전 먼저 볼 것"|성=|이름=|날짜=2018-07-26|뉴스=SBS NEWS|출판사=|언어=ko-KR}}</ref> 또한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기획주의에 입각해 기업을 간섭하는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에)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면서 시장자유 확대를 강조하였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국가주의]]라고 비판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80726006029|제목=[세계초대석] 김병준 “박정희식 국가 개입에 동의하는 사람은 같이 갈 수 없다”|성=세계일보|이름=|날짜=2018-07-26|출판사=}}</ref> 그러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임명한 김대준 비대위원의 [[더불어민주당]] 당적 및 전과 논란이 발생했고, 김대준 비대위원은 사퇴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730_0000377310&cID=10301&pID=10300|제목=한국당, '자격논란' 김대준 비대위원 사의표명|성=NEWSIS|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ko}}</ref> 또한 인적청산 등에서도 소극적이고, 가치와 정책 재정립도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조사상으로도 지지율은 횡보 상태이며 원내 5당인 정의당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80815002332|제목=출범 3주 김병준호…뜨지 못하는 3대 이유|날짜=2018-08-15|출판사=세계일보}}</ref> 2018년 10월 1일, [[전원책]] 변호사가 자유한국당 내 인적쇄신을 책임질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위원이 되었다. [[김병준 (1954년)|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조강특위에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대규모 인적청산을 예고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0011800001|제목=전원책 조강특위 확정, 대규모 인사청산 예고|날짜=2018-10-01}}</ref> 그러나 전당대회 개최 시기 등의 현안을 두고 전 위원과 당 비대위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결국 11월 9일 당 비대위는 전 위원에게 문자로 해촉을 통보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869588.html|제목=한국당, 갈등 소화 하겠다더니…전원책 ‘문자해고’|날짜=2018-11-09|출판사=한겨레}}</ref> 2018년 말로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연이은 악재로 인하여 반대 급부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2019년 초 [[리얼미터]] 조사 결과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20% 후반을 기록했으며,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한 자리수까지 좁혔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202_0000549449|제목='자고 나면 또 악재' 與 우울한 설…"연휴에도 비상상황"|날짜=2019-02-03|출판사=뉴시스}}</ref> 그러나 친박계 김진태,김순례,이종명의원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망언으로 인해 큰 악재가 발생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뒤에는 30%대의 지지율도 회복하였다. 그리고 [[201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서 통영 고성 지역구에서 [[정점식]] 후보가 여유롭게 승리하고, 창원 성산에서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 (대한민국)|정의당]]의 [[여영국]] 후보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선전했다. == 약력 == {{참고|민주자유당|신한국당|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 [[1995년]] [[12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법처리로 민자당은 5공 세력을 청산하고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하였다. 당시 당명은 한나라당. *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여 야당이 됨. ([[김영삼 정부]]의 IMF위기와 친인척비리사건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이 당시 자유민주연합과 새정치국민회의의 단일화 후보 김대중에게 패배) * [[2002년]] [[4월 22일]]: [[박근혜]] 의원이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탈당([[한국미래연합]] 창당) * 2002년 [[11월 19일]]: [[한국미래연합]]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흡수 합당. *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 두 번째 낙선. * [[2003년]]: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 ([[열린우리당]]으로 이동) * [[2006년]] [[2월 20일]]: [[자유민주연합]]을 흡수합당. * [[2007년]]: 선진평화연대 계열 당원들이 탈당.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이동) * 2007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 10년 만에 재집권. *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당선자가 제17대 [[대통령]]에 취임. * 2008년 [[3월 21일]]: 공천파동으로 친박근혜계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 ([[친박연대]]로 이동) * 2008년: 충청권 기반의 당원들이 탈당. ([[자유선진당]]으로 이동) * 2008년 [[4월 9일]]: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3석을 차지하며, 제1당을 차지함. * [[2012년]] [[2월 2일]]: [[미래희망연대]]를 흡수합당. *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 *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 의석으로 1당을 차지함. * 2012년 [[11월 16일]]: [[선진통일당]]을 흡수합당. *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 당선.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당선자가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 취임. * [[2016년]] [[4월 13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2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원내 제1당 지위는 상실. * 2016년 [[6월 16일]]: 무소속 4인을 복당시켜 원내 제1당에 복귀. * 2016년 [[12월 27일]]: 대통령 탄핵 등 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비박근혜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 ([[바른정당]]으로 이동) 다시 원내 제2당이 됨. *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여 집권여당 지위를 상실. * 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홍준표]] 후보가 낙선하여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됨. * [[2018년]] [[2월 12일]]: [[늘푸른한국당]]을 흡수합당. == 지도부 == === 최고위원 === 자유한국당은 과거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였으나 2016년 총선 참패 이후 지도체제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협의를 거쳐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제10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박희태]], 최고위원으로 [[정몽준]]·[[허태열]]·[[공성진]]·[[박순자]]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송광호]] 의원, [[박재순]]을 임명하였다. * 박희태 대표는 2009년 10.28 재보선 출마를 위해 2009년 9월 사퇴하였고, 2008년 전당대회에서 2위를 득표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6.2 지방선거가 당의 패배로 끝나자, 정몽준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6월 3일 총사퇴하였으며, 약 1개월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제1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안상수 (1946년)|안상수]], 최고위원으로 [[홍준표]]·[[나경원]]·[[정두언]]·[[서병수]] 의원이 선출되었으나, 2011년 4.27 재보궐 선거가 패배로 끝나면서,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5월 8일 총사퇴하였고, 약 2개월 동안 원내대표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1년 7월 4일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전직 지도부 중 1명인 [[홍준표]] 의원이 선출되었고, 최고위원으로 [[유승민 (정치인)|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 의원이 선출되었다. 최고위원 당선자 4명 중 [[나경원]]·[[원희룡]] 의원 역시 전직 지도부였다. 그러나,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에게 패하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12월 9일 총사퇴하였고, 2011년 12월 19일부터 2012년 5월 15일 전당대회까지 약 5개월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제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황우여]], 최고위원으로 [[이혜훈]], [[심재철 (1958년)|심재철]], [[정우택 (1953년)|정우택]], [[유기준 (1959년)|유기준]]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한기호]] 의원, [[유수택]]을 임명하였다. *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김무성]], 최고위원으로 [[서청원]], [[김태호 (1962년)|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의원을 임명하였고, 2016년 1월 [[안대희]] 전 대법관을 임명하였다. *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최고위원으로 [[조원진]], [[이장우 (1965년)|이장우]], [[강석호 (1955년)|강석호]], [[최연혜]]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유창수]]가 선출되었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를 임명하였다. *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홍준표]], 최고위원으로 [[이재만 (1959년)|이재만]], [[김태흠]], [[류여해]], [[이철우 (1955년)|이철우]]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이재영 (1975년)|이재영]]이 선출되었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종혁 (1956년)|이종혁]] 전 경상남도청 정무특별보좌관을 임명하였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염동열]] 의원을 임명하였다. 류여해 최고위원은 제명당하고 이철우 최고위원은 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황교안]], 최고위원으로 [[조경태]], [[정미경 (정치인)|정미경]], [[김순례]], [[김광림 (1948년)|김광림]]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신보라 (정치인)|신보라]]가 선출되었다. === 의원 총회 ===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는 자유한국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원내대표는 [[심재철 (1958년)|심재철]]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김재원 (1964년)|김재원]]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 사무처 ===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 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박완수]]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에 있다. === 현재 주요 당직자 === ;(2019년 12월 기준) * 사무총장 : [[박완수]] * 원내수석부대표: [[김한표]] ** 원내부대표단: [[강석진 (1959년)|강석진]], [[강효상]], [[김규환 (1956년)|김규환]], [[김정재]], [[김현아 (정치인)|김현아]], [[송석준]], [[송언석]], [[이만희 (정치인)|이만희]], [[이양수]], [[이은권]], [[정유섭]], [[정점식]] * 정책위원회 의장: [[김재원 (1964년)|김재원]] **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이종배]] * 중앙직능위원회 의장: [[김재경 (1961년)|김재경]] * 당무감사위원장: [[배규한]] * 인권위원장: [[이은권]] * 법률자문위원장: [[최교일]] * 국민공감전략위원장: [[김승희 (1954년)|김승희]] * 인재영입위원장: [[염동열]] * 여의도연구원장: [[성동규]] * 전략기획부총장: [[송언석]] * 조직부총장: [[원영섭]] * 홍보본부장: [[김찬형 (대학교수)|김찬형]] * 대변인: (수석대변인), [[김성원 (정치인)|김성원]], [[전희경]], [[이창수]], [[박용찬 (1964년)|박용찬]] * 원내대변인: [[김정재]], [[이만희 (정치인)|이만희]], [[이양수]] → [[성일종]] * 당대표 비서실장: [[김명연 (1964년)|김명연]] === 목록 === ==== 총재 ==== {| class="wikitable" |- !대수||역대 총재||직함||임기 |- | 1 || [[조순]] || 총재 ||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4월 9일]] |- | 2 || [[조순]] || 총재 || [[1998년]] [[4월 10일]] ~ [[1998년]] [[8월 4일]] |- | (임시) || [[이기택]] || 총재 권한대행 || [[1998년]] [[8월 5일]] ~ [[1998년]] [[8월 30일]] |- | 3 || [[이회창]] || 총재 || [[1998년]] [[8월 31일]] ~ [[2000년]] [[5월 22일]] |- | (임시) || [[강창성]] || 총재 권한대행 || [[2000년]] [[5월 23일]] ~ [[2000년]] [[5월 30일]] |- | 4 || [[이회창]] || 총재 || [[2000년]] [[5월 31일]] ~ [[2002년]] [[4월 1일]] |- | (임시) || [[박관용]] || 총재 권한대행 || [[2002년]] [[4월 2일]] ~ [[2002년]] [[5월 13일]] |- |} ==== 대표 ==== {| class="wikitable" |- !대수||대표||직함||임기 |- | 1 || [[이한동]] || 대표위원 ||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4월 10일]] |- | 2 || [[서청원]] || 대표최고위원 || [[2002년]] [[5월 14일]] ~ [[2003년]] [[1월 29일]] |- | (임시) || [[박희태]] || 대표 권한대행 || [[2003년]] [[1월 30일]] ~ [[2003년]] [[6월 25일]] |- | 3 ||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 대표최고위원 || [[2003년]] [[6월 26일]] ~ [[2004년]] [[3월 22일]] |- | 4 || [[박근혜]] || 대표최고위원 || [[2004년]] [[3월 23일]] ~ [[2004년]] [[7월 4일]] |- | (임시) || [[김덕룡]] || 대표 권한대행 || [[2004년]] [[7월 5일]] ~ [[2004년]] [[7월 18일]] |- | 5 || [[박근혜]] || 대표최고위원 || [[2004년]] [[7월 19일]] ~ [[2006년]] [[6월 15일]] |- | (임시) || [[김영선 (1960년)|김영선]] || 대표 권한대행 || [[2006년]] [[6월 15일]] ~ [[2006년]] [[7월 10일]] |- | 6 || [[강재섭]] || 대표최고위원 || [[2006년]] [[7월 11일]] ~ [[2008년]] [[7월 2일]] |- | 7 || [[박희태]] || 대표최고위원 || [[2008년]] [[7월 3일]] ~ [[2009년]] [[9월 6일]] |- | 8 || [[정몽준]] || 대표최고위원 || [[2009년]] [[9월 7일]] ~ [[2010년]] [[6월 3일]] |- | (임시) || [[김무성]] || 비상대책위원장 || [[2010년]] [[6월 4일]] ~ [[2010년]] [[7월 13일]] |- | 9 || [[안상수 (1946년 2월)|안상수]] || 대표최고위원 || [[2010년]] [[7월 14일]] ~ [[2011년]] [[5월 8일]] |- | (임시) || [[정의화]] || 비상대책위원장 || [[2011년]] [[5월 8일]] ~ [[2011년]] [[7월 3일]] |- | 10 || [[홍준표]]|| 대표최고위원 || [[2011년]] [[7월 4일]] ~ [[2011년]] [[12월 9일]] |- | (임시) || [[나경원]] || 대표 권한대행 || [[2011년]] [[12월 9일]] ~ [[2011년]] [[12월 11일]] |- | (임시) || [[황우여]] || 대표 권한대행 || [[2011년]] [[12월 12일]] ~ [[2011년]] [[12월 18일]] |- | (임시) || [[박근혜]] || 비상대책위원장 ||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4일]] |- | 11 || [[황우여]] || 대표최고위원 || [[2012년]] [[5월 15일]] ~ [[2014년]] [[5월 14일]] |- | (임시) || [[이완구]] || 비상대책위원장 || [[2014년]] [[5월 15일]] ~ [[2014년]] [[7월 13일]] |- | 12 || [[김무성]] || 대표최고위원 || [[2014년]] [[7월 14일]] ~ [[2016년]] [[4월 14일]] |- | (임시) || [[원유철]] || 대표 권한대행 || [[2016년]] [[4월 14일]] ~ [[2016년]] [[5월 10일]] |- | (임시) || [[정진석 (정치인)|정진석]] || 대표 권한대행 || [[2016년]] [[5월 11일]] ~ [[2016년]] [[6월 1일]] |- | (임시) || [[김희옥]] || 혁신비상대책위원장 || [[2016년]] [[6월 2일]] ~ [[2016년]] [[8월 9일]] |- | 13 ||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 당대표 || [[2016년]] [[8월 9일]] ~ [[2016년]] [[12월 16일]] |- | (임시) || [[정우택 (1953년)|정우택]] || 대표 권한대행 || [[2016년]] [[12월 16일]] ~ [[2016년]] [[12월 28일]] |- | (임시) || [[인명진]] || 비상대책위원장 || [[2016년]] [[12월 29일]] ~ [[2017년]] [[3월 31일]] |- | (임시) || [[정우택 (1953년)|정우택]] || 대표 권한대행 || [[2017년]] [[4월 1일]] ~ [[2017년]] [[7월 2일]] |- | 14 || [[홍준표]] || 당대표 || [[2017년]] [[7월 3일]] ~ [[2018년]] [[6월 14일]] |- | (임시) || [[김성태 (1958년)|김성태]] || 대표 권한대행 || [[2018년]] [[6월 15일]] ~ [[2018년]] [[7월 16일]] |- | (임시) || [[김병준 (1954년)|김병준]] || 혁신비상대책위원장 || [[2018년]] [[7월 17일]] ~ [[2019년]] [[2월 27일]] |- | 15 || [[황교안]] || 당대표 || [[2019년]] [[2월 28일]] ~ [[2020년]] [[2월 17일]] |- |} ==== 원내대표 ==== {| class="wikitable" |- !대수||원내대표||직함||임기 |- | 1 || [[목요상]] || 원내총무 || [[1997년]] [[9월 3일]] ~ [[1997년]] [[12월 21일]] |- | 2 ||[[이상득]] || 원내총무 || [[1997년]] [[12월 22일]] ~ [[1998년]] [[4월 19일]] |- | 3 || [[하순봉]] || 원내총무 || [[1998년]] [[4월 20일]] ~ [[1998년]] [[8월 10일]] |- | 4 || [[박희태]] || 원내총무 || [[1998년]] [[8월 10일]] ~ [[1999년]] [[1월 14일]] |- | 5 || [[이부영]] || 원내총무 || [[1999년]] [[1월 15일]] ~ [[2000년]] [[6월 1일]] |- | 6 || [[정창화 (1940년)|정창화]] || 원내총무 || [[2000년]] [[6월 2일]] ~ [[2001년]] [[5월 13일]] |- | 7 || [[이재오]] || 원내총무 || [[2001년]] [[5월 14일]] ~ [[2002년]] [[5월 16일]] |- | 8 || [[이규택]] || 원내총무 || [[2002년]] [[5월 17일]] ~ [[2003년]] [[6월 29일]] |- | 9 ||[[홍사덕]] || 원내총무 || [[2003년]] [[6월 30일]] ~ [[2004년]] [[5월 18일]] |- | 10 || [[김덕룡]] || 원내대표 || [[2004년]] [[5월 19일]] ~ [[2005년]] [[3월 4일]] |- | 11 || [[강재섭]] || 원내대표 || [[2005년]] [[3월 5일]] ~ [[2006년]] [[1월 11일]] |- | 12 || [[이재오]] || 원내대표 || [[2006년]] [[1월 12일]] ~ [[2006년]] [[7월 12일]] |- | 13 || [[김형오]] || 원내대표 || [[2006년]] [[7월 13일]] ~ [[2007년]] [[8월 26일]] |- | 14 || [[안상수 (1946년 2월)|안상수]] || 원내대표 || [[2007년]] [[8월 27일]] ~ [[2008년]] [[5월 17일]] |- | 15 || [[홍준표]] || 원내대표 || [[2008년]] [[5월 18일]] ~ [[2009년]] [[5월 20일]] |- | 16 || [[안상수 (1946년 2월)|안상수]] || 원내대표 || [[2009년]] [[5월 21일]] ~ [[2010년]] [[5월 3일]] |- | 17 || [[김무성]] || 원내대표 || [[2010년]] [[5월 4일]] ~ [[2011년]] [[5월 5일]] |- | 18 || [[황우여]] || 원내대표 || [[2011년]] [[5월 6일]] ~ [[2012년]] [[5월 8일]] |- | 19 || [[이한구 (정치인)|이한구]] || 원내대표 || [[2012년]] [[5월 9일]] ~ [[2013년]] [[5월 14일]] |- | 20 || [[최경환 (1955년)|최경환]] || 원내대표 || [[2013년]] [[5월 15일]] ~ [[2014년]] [[5월 7일]] |- | 21 || [[이완구]] || 원내대표 || [[2014년]] [[5월 8일]] ~ [[2015년]] [[1월 25일]] |- | 22 ||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 원내대표 || [[2015년]] [[2월 2일]] ~ [[2015년]] [[7월 8일]] |- | 23 || [[원유철]] || 원내대표 || [[2015년]] [[7월 14일]] ~ [[2016년]] [[5월 3일]] |- | 24 || [[정진석 (정치인)|정진석]] || 원내대표 || [[2016년]] [[5월 3일]] ~ [[2016년]] [[12월 16일]] |- | 25 || [[정우택 (1953년)|정우택]] || 원내대표 || [[2016년]] [[12월 16일]] ~ [[2017년]] [[12월 12일]] |- | 26 || [[김성태 (1958년)|김성태]] || 원내대표 || [[2017년]] [[12월 12일]] ~ [[2018년]] [[12월 11일]] |- | 27 ||[[나경원]] || 원내대표 || [[2018년]] [[12월 11일]] ~ [[2019년]] [[12월 9일]] |- | 28 || [[심재철 (1958년)|심재철]] || 원내대표 || [[2019년]] [[12월 9일]] ~ [[2020년]] [[2월 17일]] |} ==== 정책위의장 ==== * [[전재희]] * [[이주영]] * [[이한구]] * [[임태희]] * [[김성조]] * [[고흥길]] * [[심재철]] * 이주영 * [[김기현 (1959년)|김기현]] * [[유일호]] * [[원유철]] * [[김정훈]] * [[김광림]] * [[이현재]] * 김광림 * [[함진규]] * [[정용기]] * [[김재원]] ==== 사무총장 ==== * [[김영일]] * [[박주천]] * [[이재오]] * [[이상득]] * [[김형오]] * [[김무성]] * [[최연희]] * [[허태열]] * [[황우여]] * [[이방호]] * [[권영세 (1959년)|권영세]] * [[안경률]] * [[장광근]] * [[정병국]] * [[원희룡]] * [[정희수]](권한대행) * [[김정권]] * [[권영세 (1959년)|권영세]] * [[서병수]] * [[홍문종]] * [[윤상현 (정치인)|윤상현]] * [[이군현]] * [[황진하]] * [[홍문표]](직무대행) * [[권성동]] * [[박명재]] * [[박맹우]] * [[이철우]] * [[박맹우]] * [[염동열]] * [[홍문표]] * [[김명연]](직무대행) * [[김용태]] * [[한선교]] * [[추경호]](직무대행) * [[박맹우]] * [[박완수]] == 당원 목록 == {{참고|분류:자유한국당 당원}} === 새누리당 시절 당원 === {{참고|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 === 한나라당 시절 당원 === {{참고|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 기타 == === 야당 시절 ===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논란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0071934& 2004 정치권 뜬별진별]</ref>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82934 '글로벌 석간 종합일간지' 아시아투데이<!-- 봇이 따온 제목 -->]</ref>[[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oid=055&aid=0000050358 한나라당, 천안 연수원 국가 헌납]</ref>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9326 운명의 이력서: Save Internet 뉴데일리<!-- 봇이 따온 제목 -->]</ref> === 친이, 친박계 갈등 ===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ref name="kr.news.yahoo.com"/>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ref>{{뉴스 인용|제목 = 홍준표, 박근혜 겨냥 "탈당하고 당 만들어야"|url = http://www.vop.co.kr/A00000279111.html|출판사 = 민중의소리|저자 = 김동현 기자|쪽 = |날짜 = 2010-01-19|확인날짜 = 2010-01-22}}</ref>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 비판 자제하던 정운찬 “공격 앞으로”|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058456|출판사 = 중앙일보|저자 = 정효식 기자|쪽 = |날짜 = 2010-02-05|확인날짜 = 2010-02-05}}</ref>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운찬, 박근혜 공격 파장‥총리 인책론 확산|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32656|출판사 = MBC|저자 = 김수진 기자|쪽 = |날짜 = 2010-02-05|확인날짜 = 2010-02-05}}</ref>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 주요 선거 결과 == === 대통령 선거 === {{선거기록 시작|KR|정당|대선}} {{선거기록/KR/정당/대선|한나라당|[[1997년]]|[[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15대]]|[[이회창]]|9,935,718표|38.74|2위|낙선}} {{선거기록/KR/정당/대선|한나라당|[[2002년]]|[[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16대]]|[[이회창]]|11,443,297표|46.58|2위|낙선}} {{선거기록/KR/정당/대선|한나라당|[[2007년]]|[[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이명박]]|11,492,389표|48.67|1위|당선}} {{선거기록/KR/정당/대선|새누리당|[[2012년]]|[[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18대]]|[[박근혜]]|15,773,128표|51.55|1위|당선}} {{선거기록/KR/정당/대선|자유한국당|[[2017년]]|[[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19대]]|[[홍준표]]|7,852,849표|24.03|2위|낙선}} {{선거기록 끝}} === 국회의원 선거 === {{선거기록 시작|KR|정당|총선}} {{선거기록/KR/정당/총선|한나라당|[[2000년]]|[[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112|227|21|46|39.0}} {{선거기록/KR/정당/총선|한나라당|[[2004년]]|[[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100|243|21|56|35.76}} {{선거기록/KR/정당/총선|한나라당|[[2008년]]|[[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131|245|22|54|37.48}} {{선거기록/KR/정당/총선|새누리당|[[2012년]]|[[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127|246|25|54|42.80}} {{선거기록/KR/정당/총선|새누리당|[[2016년]]|[[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105|253|17|47|33.50}} {{선거기록 끝}} === 지방선거 === {{선거기록 시작|KR|정당|지선}} {{선거기록/KR/정당/지선|한나라당|[[1998년]]|[[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2회]]|6|16|74|232|224|616}} {{선거기록/KR/정당/지선|한나라당|[[2002년]]|[[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3회]]|11|16|136|227|467|682}} {{선거기록/KR/정당/지선|한나라당|[[2006년]]|[[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4회]]|12|16|155|230|557|733|1621|2888}} {{선거기록/KR/정당/지선|한나라당|[[2010년]]|[[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5회]]|6|16|82|228|287|762|1247|2888}} {{선거기록/KR/정당/지선|새누리당|[[2014년]]|[[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6회]]|8|17|117|226|416|789|1413|2898}} {{선거기록/KR/정당/지선|자유한국당|[[2018년]]|[[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7회]]|2|17|53|226|137|824|1009|2927}} {{선거기록 끝}} == 역대 전당대회 == === 한나라당 시기 === ==== 창당대회 ====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 제1차 전당대회 ====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표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 제2차 전당대회 ==== 정권교체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 이후 4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여당으로 향함으로써 한 때 과반을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조순 총재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이회창]] |align=right|4,083 |{{막대|선진|5|6}} 55.7% |'''총재''' |- !{{숨은키|102}}2 |align=center | [[이한동]] |align=right|1,554 |{{막대|청|2|1}} 21.2% |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김덕룡]] |align=right|1,283 |{{막대|신한|1|8}} 17.5% | |- !{{숨은키|104}}4 |align=center | [[서청원]] |align=right|392 |{{막대|적|0|5}} 5.4%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7,326 | |} 1998년 [[8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명예총재를 조순 총재를 대신할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 제3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이회창]] |align=right|4,717 |{{막대|선진|6|6}} 66.3% |'''총재''' |- !{{숨은키|102}}2 |align=center | [[김덕룡]] |align=right|1,473 |{{막대|신한|2|1}} 20.7% |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강삼재]] |align=right|663 |{{막대|한|0|9}} 9.3% | |- !{{숨은키|104}}4 |align=center | [[손학규]] |align=right|257 |{{막대|8민|0|4}} 3.6%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7,110 | |} [[2000년]] [[5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총재를 총재로 재선출했다. ==== 제4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 ! !! [[이부영]] !! [[이상희]] !! [[이회창]] !! [[최병렬]] !! 합 계 |- align=leftt !인천 |{{막대|황|1|4}} 201||{{막대|청|0|1}} 10||{{막대|선진|7|9}} 1,111||{{막대|한|0|6}} 79||{{막대|선진|7|9}}{{막대|황|1|4}}{{막대|한|0|6}}{{막대|청|0|1}} |- align=left !울산 |{{막대|황|1|0}} 73||{{막대|청|0|4}} 31||{{막대|선진|5|9}} 446||{{막대|한|2|7}} 206||{{막대|선진|5|9}}{{막대|한|2|7}}{{막대|황|1|0}}{{막대|청|0|4}} |- align=left !제주 |{{막대|황|1|0}} 48||{{막대|청|0|4}} 18||{{막대|선진|7|3}} 361||{{막대|한|1|3}} 65||{{막대|선진|7|3}}{{막대|한|1|3}}{{막대|황|1|0}}{{막대|청|0|4}} |- align=left !강원 |{{막대|황|0|6}} 71||{{막대|청|0|4}} 44||{{막대|선진|8|1}} 891||{{막대|한|0|9}} 101||{{막대|선진|8|1}}{{막대|한|0|9}}{{막대|황|0|6}}{{막대|청|0|4}} |- align=left !대구,경북 |{{막대|황|0|4}} 133||{{막대|청|0|1}} 54||{{막대|선진|8|4}} 3,143||{{막대|한|1|1}} 427||{{막대|선진|8|4}}{{막대|한|1|1}}{{막대|황|0|4}}{{막대|청|0|1}} |- align=left !전북 |{{막대|황|3|0}} 278||{{막대|청|0|3}} 31||{{막대|선진|5|4}} 505||{{막대|한|1|3}} 117||{{막대|선진|5|4}}{{막대|황|3|0}}{{막대|한|1|3}}{{막대|청|0|3}} |- align=left !부산,경남 |{{막대|황|0|5}} 197||{{막대|청|0|3}} 103||{{막대|선진|7|0}} 2,895||{{막대|한|2|3}} 934||{{막대|선진|7|0}}{{막대|한|2|3}}{{막대|황|0|5}}{{막대|청|0|3}} |- align=left !대전,충남 |{{막대|황|0|6}} 124||{{막대|청|0|2}} 45||{{막대|선진|8|4}} 1,643||{{막대|한|0|8}} 153||{{막대|선진|8|4}}{{막대|한|0|8}}{{막대|황|0|6}}{{막대|청|0|2}} |- align=left !광주,전남 |{{막대|황|2|5}} 512||{{막대|청|0|3}} 67||{{막대|선진|5|4}} 1,112||{{막대|한|1|8}} 368||{{막대|선진|5|4}}{{막대|황|2|5}}{{막대|한|1|8}}{{막대|청|0|3}} |- align=left !경기 |{{막대|황|1|4}} 486||{{막대|청|0|2}} 81||{{막대|선진|7|1}} 2461||{{막대|한|1|2}} 424||{{막대|선진|7|1}}{{막대|황|1|4}}{{막대|한|1|2}}{{막대|청|0|2}} |- align=left !충북 |{{막대|황|0|7}} 60||{{막대|청|0|2}} 15||{{막대|선진|7|2}} 592||{{막대|한|1|9}} 152||{{막대|선진|7|2}}{{막대|한|1|9}}{{막대|황|0|7}}{{막대|청|0|2}} |- align=left !서울 |{{막대|황|1|5}} 743||{{막대|청|0|2}} 109||{{막대|선진|4|8}} 2,321||{{막대|한|3|5}} 1,668||{{막대|선진|4|8}}{{막대|한|3|5}}{{막대|황|1|5}}{{막대|청|0|2}} |- align=left !총합 |{{막대|황|1|1}} 2,926||{{막대|청|0|2}} 608||{{막대|선진|6|8}} 17,481||{{막대|한|1|8}} 4,694||{{막대|선진|6|8}}{{막대|한|1|8}}{{막대|황|1|1}}{{막대|청|0|2}} |}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전국순회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 후보가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한나라당 역시 당원 50%, 국민 50% 총 500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순회경선을 실시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독주로 인해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서청원]] |align=right|3,603 |{{막대|적|3|4}} 33.6%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 |- !{{숨은키|102}}2 |align=center | [[강창희]] |align=right|3,336 |{{막대|청|3|1}} 31.1% |'''최고위원'''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김진재]] |align=right|2,788 |{{막대|청|2|6}} 26% |'''최고위원''' |- !{{숨은키|104}}4 |align=center | [[강재섭]] |align=right|2,652 |{{막대|청|2|5}} 24.7% |'''최고위원''' |- !{{숨은키|105}}5 |align=center | [[박희태]] |align=right|2,478 |{{막대|청|2|3}} 23.1% |'''최고위원''' |- !{{숨은키|106}}6 |align=center | [[하순봉]] |align=right|2,062 |{{막대|청|1|9}} 19.2% |'''최고위원''' |- !{{숨은키|107}}7 |align=center | [[김일윤]] |align=right|2,060 |{{막대|옥|1|9}} 19.2% | |- !{{숨은키|108}}8 |align=center | [[이해구]] |align=right|1,933 |{{막대|회|1|8}} 18% | |- !{{숨은키|109}}9 |align=center | [[정형근]] |align=right|1,593 |{{막대|신한|1|5}} 14.8% | |- !{{숨은키|110}}10 |align=center | [[김부겸]] |align=right|1,448 |{{막대|열린|1|4}} 13.5% | |- !{{숨은키|111}}11 |align=center | [[김기배]] |align=right|1,415 |{{막대|청|1|3}} 13.2% | |- !{{숨은키|112}}12 |align=center | [[안상수]] |align=right|977 |{{막대|한|0|9}} 9.1% | |- !{{숨은키|113}}13 |align=center | [[김정숙 (1946년)|김정숙]] |align=right|936 |{{막대|홍|0|9}} 8.7% |여성 몫 '''최고위원''' |- !{{숨은키|114}}14 |align=center | [[김호일]] |align=right|883 |{{막대|한|0|8}} 8.2% | |- !{{숨은키|115}}15 |align=center | [[홍준표]] |align=right|883 |{{막대|한|0|8}} 8.2% | |- !{{숨은키|116}}16 |align=center | [[함종한]] |align=right|844 |{{막대|청|0|8}} 7.9% | |- !{{숨은키|117}}17 |align=center | [[강인섭]] |align=right|569 |{{막대|창|0|5}} 5.3%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7,110 | |}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경선 결과에 따라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그에 따라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해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1946년)|김정숙]]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3일 뒤 제1차 최고위원회의는 최고위원 최다득표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 제5차 전당대회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재검표 결과 선거 결과에 거의 변동이 없음에 따라 서청원 대표는 대선 패배와 대선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사퇴한다. 그 뒤, 2번의 대선 패배를 겪은 한나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에 따라 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득표수 !class=unsortable|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최병렬]] |align=right|46,074 |{{막대|청|3|6}} 35.8% |'''대표''' |- !{{숨은키|102}}2 |align=center | [[서청원]] |align=right|42,965 |{{막대|친박|3|3}} 33.4% |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강재섭]] |align=right|18,899 |{{막대|한|1|5}} 14.7% | |- !{{숨은키|104}}4 |align=center | [[김덕룡]] |align=right|15,680 |{{막대|신한|1|2}} 12.2% | |- !{{숨은키|105}}5 |align=center | [[이재오]] |align=right|2,697 |{{막대|옥|0|2}} 2.1% | |- !{{숨은키|106}}6 |align=center | [[김형오]] |align=right|2,406 |{{막대|창|0|2}} 1.9%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128,721 | |} [[2003년]] [[6월 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따라 [[최병렬]] 전 서울시장을 대표로 선출했다. ==== 제6차 전당대회 ==== [[2004년]] [[2월 22일]], 불법대선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역풍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퇴진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인한 역풍으로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3월 1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하고, 국민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1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10px | 선거인단 !width=11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박근혜]] |style="text-align: right;"|1,255(환산) |style="text-align: right;"|1,359 |style="text-align: right;"|2,614 |rowspan=2 |'''당 대표'''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0}} 49.8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9}} 53.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2}} 51.8 |- !rowspan=2 |2 |rowspan=2 |5 |rowspan=2 |[[홍사덕]] |style="text-align: right;"|553(환산) |style="text-align: right;"|900 |style="text-align: right;"|1,45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2}} 22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5}} 35.7 |style="text-align: left;"|{{막대|녹|2|9}} 28.8 |- !rowspan=2 |3 |rowspan=2 |4 |rowspan=2 |[[김문수 (정치인)|김문수]] |style="text-align: right;"|498(환산) |style="text-align: right;"|109 |style="text-align: right;"|607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0}} 19.8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2}} 12 |- !rowspan=2 |4 |rowspan=2 |3 |rowspan=2 |[[박진 (정치인)|박진]] |style="text-align: right;"|106(환산) |style="text-align: right;"|104 |style="text-align: right;"|210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1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2 |- !rowspan=2 |5 |rowspan=2 |1 |rowspan=2 |[[권오을]] |style="text-align: right;"|110(환산) |style="text-align: right;"|50 |style="text-align: right;"|160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황|0|4}} 4.4 |style="text-align: left;"|{{막대|황|0|2}} 2 |style="text-align: left;"|{{막대|황|0|3}} 3.2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0}}{{막대|녹|2|2}}{{막대|한|2|0}}{{막대|황|0|4}}{{막대|한|0|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9}}{{막대|녹|3|5}}{{막대|한|0|4}}{{막대|한|0|4}}{{막대|황|0|2}}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2}}{{막대|녹|2|9}}{{막대|한|1|2}}{{막대|한|0|4}}{{막대|황|0|3}} | - |}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부총재를 과도기 대표로 선출한다. ==== 제7차 전당대회 ==== 2004년 [[5월 19일]] 한나라당 당선자총회는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대의원 50%, 여론조사 30%, 인터넷 선거인단 20%가 1인2표로 각각 대표,최고위원을 뽑아 1~5위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1위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 class="wikitable sortable" |- !득표순위 !이름 !class=unsortable|합산득표수 !class=unsortable|반영득표율 !class=unsortable|비고 |- !{{숨은키|101}}1 |align=center | [[박근혜]] |align=right|8,433 |{{막대|친박|8|4}} 84.2% |'''대표최고위원''' |- !{{숨은키|102}}2 |align=center | [[원희룡]] |align=right|2,610 |{{막대|한|2|6}} 26.1% |'''최고위원''' |- !{{숨은키|103}}3 |align=center | [[김영선]] |align=right|2,249 |{{막대|홍|2|2}} 22.5% |'''최고위원''' |- !{{숨은키|104}}4 |align=center | [[이강두]] |align=right|2,185 |{{막대|창|2|1}} 21.8% |'''최고위원''' |- !{{숨은키|105}}5 |align=center | [[이규택]] |align=right|1,968 |{{막대|적|2|0}} 19.66% |'''최고위원''' |- !{{숨은키|106}}6 |align=center | [[정의화]] |align=right|1,525 |{{막대|신한|1|5}} 15.2% | |- !{{숨은키|107}}7 |align=center | [[곽영훈]] |align=right|1,050 |{{막대|회|1|0}} 10.4% | |- |- class="sortbottom"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총투표수 |10010 | |}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당헌당규를 개정한 뒤 투표에 들어가, 여론조사, 인터넷투표와 합산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한편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과 [[김영선]] 의원이 여론조사와 인터넷투표에서의 강세로 중진인 [[이강두]], [[이규택]] 의원을 꺾고 최고위원직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 제8차 전당대회 ==== 박근혜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권을 장악하려는 친이계의 [[이재오]] 전 원내총무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박계가 지원한 [[강재섭]] 전 원내대표의 대결이 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00px | 대의원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4 |rowspan=2 |[[강재섭]] |style="text-align: right;"|954(환산) |style="text-align: right;"|4,299 |style="text-align: right;"|5,254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청|3|0}} 30.2 |style="text-align: left;"|{{막대|청|5|8}} 58.4 |style="text-align: left;"|{{막대|청|5|0}} 50 |- !rowspan=2 |2 |rowspan=2 |3 |rowspan=2 |[[이재오]] |style="text-align: right;"|1,423(환산) |style="text-align: right;"|3,368 |style="text-align: right;"|4,791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5}} 45.1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6}} 45.7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6}} 45.6 |- !rowspan=2 |3 |rowspan=2 |7 |rowspan=2 |[[강창희]] |style="text-align: right;"|554(환산) |style="text-align: right;"|2,071 |style="text-align: right;"|2,626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자민|1|8}} 17.6 |style="text-align: left;"|{{막대|자민|2|8}} 28.1 |style="text-align: left;"|{{막대|자민|2|5}} 25 |- !rowspan=2 |4 |rowspan=2 |5 |rowspan=2 |[[전여옥]] |style="text-align: right;"|1,161(환산) |style="text-align: right;"|833 |style="text-align: right;"|1,994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생각|3|7}} 36.8 |style="text-align: left;"|{{막대|생각|1|1}} 11.3 |style="text-align: left;"|{{막대|생각|1|9}} 19 |- !rowspan=2 |5 |rowspan=2 |2 |rowspan=2 |[[정형근]] |style="text-align: right;"|633(환산) |style="text-align: right;"|1,339 |style="text-align: right;"|1,993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2|0}} 20.1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1|8}} 18.2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1|9}} 18.9 |- !rowspan=2 |6 |rowspan=2 |1 |rowspan=2 |[[권영세 (1959년)|권영세]] |style="text-align: right;"|540(환산) |style="text-align: right;"|1,223 |style="text-align: right;"|1,77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1|7}} 17.1 |style="text-align: left;"|{{막대|옥|1|7}} 16.6 |style="text-align: left;"|{{막대|옥|1|7}} 16.9 |- !rowspan=2 |7 |rowspan=2 |8 |rowspan=2 |[[이규택]] |style="text-align: right;"|809(환산) |style="text-align: right;"|847 |style="text-align: right;"|1,656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미래|2|6}} 25.6 |style="text-align: left;"|{{막대|미래|1|2}} 11.5 |style="text-align: left;"|{{막대|미래|1|6}} 15.7 |- !rowspan=2 |8 |rowspan=2 |6 |rowspan=2 |[[이방호]] |style="text-align: right;"|213 |style="text-align: right;"|735 |style="text-align: right;"|949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7}} 6.8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0}} 10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9}} 9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3}}{{막대|생각|1|8}}{{막대|청|1|5}}{{막대|미래|1|3}}{{막대|신한|1|0}}{{막대|자민|0|9}}{{막대|옥|0|9}}{{막대|한|0|3}} |style="text-align: left;"|{{막대|청|2|9}}{{막대|한|2|3}}{{막대|자민|1|4}}{{막대|신한|0|9}}{{막대|옥|0|8}}{{막대|미래|0|6}}{{막대|생각|0|6}}{{막대|한|0|5}} |style="text-align: left;"|{{막대|청|2|5}}{{막대|한|2|3}}{{막대|자민|1|2}}{{막대|생각|0|9}}{{막대|신한|0|9}}{{막대|옥|0|8}}{{막대|미래|0|8}}{{막대|한|0|5}} | - |} [[7월 11일]], 1인 2표제로 대의원 70% 여론조사 30%를 반영한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강재섭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 제9차 전당대회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후보자 선출 선거]].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압승으로 이끈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경선룰에 반발해 곧바로 탈당한 뒤, 후에 창당되는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한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가,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붉어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209 |제목 = MB와 정동기, 그리고 베일의 도곡동사건 |날짜 = 2011-01-12 |확인날짜 = 2011-01-12 |뉴스 = 미디어오늘 |저자 = 류정민 기자 }}</ref>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국민 여론조사(20%) !width=100px |선거인단(80%) !width=100px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비율 !비율 !비율 |- !rowspan=2 |1 |rowspan=2 |1 |rowspan=2 |[[이명박]] |style="text-align: right;"|16,868(환산) |style="text-align: right;"|64,216 |style="text-align: right;"|81,084 |rowspan=2 |'''대통령 후보'''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2}} 51.54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9}} 49.0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0}} 49.56 |- !rowspan=2 |2 |rowspan=2 |3 |rowspan=2 |[[박근혜]] |style="text-align: right;"|13,986(환산) |style="text-align: right;"|64,648 |style="text-align: right;"|78,63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3}} 42.7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9}} 49.3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8}} 48.06 |- !rowspan=2 |3 |rowspan=2 |2 |rowspan=2 |[[원희룡]] |style="text-align: right;"|1,079(환산) |style="text-align: right;"|1,319 |style="text-align: right;"|2,398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3}} 3.30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1}} 1.01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1}} 1.47 |- !rowspan=2 |4 |rowspan=2 |4 |rowspan=2 |[[홍준표]] |style="text-align: right;"|793(환산) |style="text-align: right;"|710 |style="text-align: right;"|1,50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0|2}} 2.42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0|1}} 0.54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0|1}} 0.92 |- !rowspan=2 |- |rowspan=2 |5 |rowspan=2 |[[고진화]] |style="text-align: center;"|- |style="text-align: center;"|- |style="text-align: center;"|- |rowspan=2 style="text-align: center;"|후보 사퇴 |- |} [[8월 20일]], 여론조사에서 크게 격차를 벌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 제10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00px | 대의원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박희태]] |style="text-align: right;"|1,865(환산) |style="text-align: right;"|4,264 |style="text-align: right;"|6,129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6|0}} 60.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6}} 56.4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8}} 57.6 |- !rowspan=2 |2 |rowspan=2 |7 |rowspan=2 |[[정몽준]] |style="text-align: right;"|2,896(환산) |style="text-align: right;"|2,391 |style="text-align: right;"|5,287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녹|9|3}} 92.6 |style="text-align: left;"|{{막대|녹|3|2}} 31.7 |style="text-align: left;"|{{막대|녹|5|0}} 49.6 |- !rowspan=2 |3 |rowspan=2 |4 |rowspan=2 |[[허태열]] |style="text-align: right;"|555(환산) |style="text-align: right;"|2,792 |style="text-align: right;"|3,284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0}} 19.8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7}} 37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1}} 30.8 |- !rowspan=2 |4 |rowspan=2 |3 |rowspan=2 |[[공성진]] |style="text-align: right;"|283(환산) |style="text-align: right;"|2,306 |style="text-align: right;"|2,589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0}} 9.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3|1}} 30.5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4}} 24.3 |- !rowspan=2 |5 |rowspan=2 |6 |rowspan=2 |[[김성조]] |style="text-align: right;"|209(환산) |style="text-align: right;"|2,245 |style="text-align: right;"|2,45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6}} 5.5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0}} 29.7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3}} 23 |- !rowspan=2 |6 |rowspan=2 |5 |rowspan=2 |[[박순자]] |style="text-align: right;"|382(환산) |style="text-align: right;"|509 |style="text-align: right;"|891 |rowspan=2 |여성 몫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홍|1|3}} 12.5 |style="text-align: left;"|{{막대|홍|0|7}} 6.7 |style="text-align: left;"|{{막대|홍|0|8}} 8.4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녹|4|6}}{{막대|한|3|0}}{{막대|친박|1|0}}{{막대|홍|0|6}}{{막대|한|0|5}}{{막대|친박|0|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8}}{{막대|친박|1|9}}{{막대|녹|1|6}}{{막대|한|1|5}}{{막대|친박|1|5}}{{막대|홍|0|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9}}{{막대|녹|2|5}}{{막대|친박|1|5}}{{막대|한|1|2}}{{막대|친박|1|2}}{{막대|홍|0|4}} | - |} [[2008년]] [[7월 3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허태열]] 전 충북지사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제11차 전당대회 ====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추인하고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00px | 대의원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13 |rowspan=2 |[[안상수]] |style="text-align: right;"|1,295(환산) |style="text-align: right;"|3,021 |style="text-align: right;"|4,316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1}} 40.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1}} 40.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1}} 40.6 |- !rowspan=2 |2 |rowspan=2 |3 |rowspan=2 |[[홍준표]] |style="text-align: right;"|1,482(환산) |style="text-align: right;"|2,372 |style="text-align: right;"|3,854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4|6}} 46.4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3|2}} 31.9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3|6}} 36.3 |- !rowspan=2 |3 |rowspan=2 |10 |rowspan=2 |[[나경원]] |style="text-align: right;"|1,530(환산) |style="text-align: right;"|1,352 |style="text-align: right;"|2,882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홍|4|8}} 47.8 |style="text-align: left;"|{{막대|홍|1|8}} 18.2 |style="text-align: left;"|{{막대|홍|2|7}} 27.1 |- !rowspan=2 |4 |rowspan=2 |6 |rowspan=2 |[[정두언]] |style="text-align: right;"|472(환산) |style="text-align: right;"|1,964 |style="text-align: right;"|2,436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5}} 14.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6}} 26.4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3}} 22.9 |- !rowspan=2 |5 |rowspan=2 |12 |rowspan=2 |[[서병수]] |style="text-align: right;"|142(환산) |style="text-align: right;"|1,782 |style="text-align: right;"|1,924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4}} 4.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4}} 2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8}} 18.1 |- !rowspan=2 |6 |rowspan=2 |5 |rowspan=2 |[[이성헌]] |style="text-align: right;"|89(환산) |style="text-align: right;"|1,301 |style="text-align: right;"|1,390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3}} 2.6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7}} 17.5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3}} 13.1 |- !rowspan=2 |7 |rowspan=2 |9 |rowspan=2 |[[한선교]] |style="text-align: right;"|790(환산) |style="text-align: right;"|403 |style="text-align: right;"|1,19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5}} 24.6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5}} 5.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1}} 11.2 |- !rowspan=2 |8 |rowspan=2 |4 |rowspan=2 |[[이혜훈]] |style="text-align: right;"|144(환산) |style="text-align: right;"|1,034 |style="text-align: right;"|1,178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4}} 4.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4}} 13.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1}} 11.1 |- !rowspan=2 |9 |rowspan=2 |2 |rowspan=2 |[[김대식]] |style="text-align: right;"|155(환산) |style="text-align: right;"|819 |style="text-align: right;"|97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5}} 4.8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1}} 11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9}} 9.2 |- !rowspan=2 |10 |rowspan=2 |1 |rowspan=2 |[[김성식 (1958년)|김성식]] |style="text-align: right;"|132(환산) |style="text-align: right;"|533 |style="text-align: right;"|665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4}} 4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7}} 7.2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6}} 6.3 |- !rowspan=2 |11 |rowspan=2 |8 |rowspan=2 |[[정미경]] |style="text-align: right;"|147(환산) |style="text-align: right;"|299 |style="text-align: right;"|446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5}} 4.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4.2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홍|2|4}}{{막대|신한|2|3}}{{막대|한|2|0}}{{막대|친박|1|2}}{{막대|한|0|7}}{{막대|한|0|2}}{{막대|한|0|2}}{{막대|친박|0|2}}{{막대|친박|0|2}}{{막대|옥|0|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0}}{{막대|신한|1|6}}{{막대|한|1|3}}{{막대|친박|1|2}}{{막대|홍|0|9}}{{막대|친박|0|9}}{{막대|친박|0|7}}{{막대|한|0|6}}{{막대|옥|0|4}}{{막대|친박|0|3}}{{막대|한|0|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0}}{{막대|신한|1|8}}{{막대|홍|1|4}}{{막대|한|1|1}}{{막대|친박|0|9}}{{막대|친박|0|6}}{{막대|친박|0|6}}{{막대|한|0|5}}{{막대|옥|0|3}}{{막대|한|0|2}} | - |} 국민 여론조사 30%를 합산한 투표 결과, [[안상수]] 전 원내대표가 [[홍준표]] 전 원내대표와 [[나경원]] 전 원내부대표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제12차 전당대회 ==== [[2011년]] [[5월 8일]], 안상수 지도부가 [[2011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4.27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한나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6월 7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지도부 선출 경선에 70% 반영되는 선거인단을 대의원, 당원, 청년선거인단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00px | 선거인단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3 |rowspan=2 |[[홍준표]] |style="text-align: right;"|12,356(환산) |style="text-align: right;"|29,310 |style="text-align: right;"|41,666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5|0}} 50.4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5|1}} 51.3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5|1}} 51 |- !rowspan=2 |2 |rowspan=2 |6 |rowspan=2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style="text-align: right;"|4,638(환산) |style="text-align: right;"|27,519 |style="text-align: right;"|32,157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9}} 18.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8}} 48.1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9}} 39.4 |- !rowspan=2 |3 |rowspan=2 |7 |rowspan=2 |[[나경원]] |style="text-align: right;"|14,903(환산) |style="text-align: right;"|14,819 |style="text-align: right;"|29,722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홍|6|1}} 60.8 |style="text-align: left;"|{{막대|홍|2|6}} 25.9 |style="text-align: left;"|{{막대|홍|3|6}} 36.4 |- !rowspan=2 |4 |rowspan=2 |1 |rowspan=2 |[[원희룡]] |style="text-align: right;"|6,579(환산) |style="text-align: right;"|22,507 |style="text-align: right;"|29,086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2|7}} 26.8 |style="text-align: left;"|{{막대|옥|3|9}} 39.4 |style="text-align: left;"|{{막대|옥|3|6}} 35.6 |- !rowspan=2 |5 |rowspan=2 |4 |rowspan=2 |[[남경필]] |style="text-align: right;"|6,036(환산) |style="text-align: right;"|8,860 |style="text-align: right;"|14,896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2|5}} 24.6 |style="text-align: left;"|{{막대|옥|1|5}} 15.5 |style="text-align: left;"|{{막대|옥|1|8}} 18.2 |- !rowspan=2 |6 |rowspan=2 |5 |rowspan=2 |[[박진 (정치인)|박진]] |style="text-align: right;"|3,294(환산) |style="text-align: right;"|5,662 |style="text-align: right;"|8,956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회|1|2}} 12.4 |style="text-align: left;"|{{막대|회|1|0}} 9.9 |style="text-align: left;"|{{막대|회|1|1}} 11 |- !rowspan=2 |7 |rowspan=2 |2 |rowspan=2 |[[권영세 (1959년)|권영세]] |style="text-align: right;"|1,211(환산) |style="text-align: right;"|5,695 |style="text-align: right;"|6,906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5}} 5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0}} 10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8}} 8.5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홍|3|0}}{{막대|신한|2|5}}{{막대|옥|1|3}}{{막대|옥|1|2}}{{막대|친박|1|0}}{{막대|회|0|6}}{{막대|친박|0|3}}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2|6}}{{막대|친박|2|4}}{{막대|옥|2|0}}{{막대|홍|1|3}}{{막대|옥|0|8}}{{막대|친박|0|5}}{{막대|회|0|5}}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2|6}}{{막대|친박|2|4}}{{막대|홍|1|8}}{{막대|옥|1|8}}{{막대|옥|0|9}}{{막대|회|0|6}}{{막대|친박|0|4}} | - |} [[7월 4일]], 경선 결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홍준표 전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친박계 핵심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제14차 전국위원회 ==== 2011년 [[12월 7일]], [[2011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10.26 재보선]] 패배와 뒤이은 [[2011년 재보궐선거 사이버테러 사건|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하자,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했고, 이틀 뒤인 [[12월 9일]] 버티던 홍준표 대표마저 사퇴하자 지도부가 붕괴되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지도부 사퇴로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던 [[나경원]] 최고위원마저 [[12월 11일]] 사퇴하자 [[12월 19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박근혜 전 대표를 만장일치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 제15차 전국위원회 ====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의결했다. === 새누리당 시기 === ==== 제1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00px | 선거인단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황우여]] |style="text-align: right;"|8,540(환산) |style="text-align: right;"|21,487 |style="text-align: right;"|30,027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5|8}} 58.2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6|3}} 62.7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6|1}} 61.3 |- !rowspan=2 |2 |rowspan=2 |3 |rowspan=2 |[[이혜훈]] |style="text-align: right;"|3,241(환산) |style="text-align: right;"|11,213 |style="text-align: right;"|14,454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홍|2|2}} 22.1 |style="text-align: left;"|{{막대|홍|4|8}} 32.7 |style="text-align: left;"|{{막대|홍|3|0}} 29.5 |- !rowspan=2 |3 |rowspan=2 |7 |rowspan=2 |[[심재철]] |style="text-align: right;"|5,695(환산) |style="text-align: right;"|5,805 |style="text-align: right;"|11,500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3|9}} 38.8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7}} 16.9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3}} 23.5 |- !rowspan=2 |4 |rowspan=2 |5 |rowspan=2 |[[정우택]] |style="text-align: right;"|4,305(환산) |style="text-align: right;"|6,900 |style="text-align: right;"|11,205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9}} 29.3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0}} 20.1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3}} 22.9 |- !rowspan=2 |5 |rowspan=2 |4 |rowspan=2 |[[유기준]] |style="text-align: right;"|2,040(환산) |style="text-align: right;"|7,742 |style="text-align: right;"|9,782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4}} 13.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3}} 22.6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0}} 20 |- !rowspan=2 |6 |rowspan=2 |6 |rowspan=2 |[[홍문종]] |style="text-align: right;"|1,704(환산) |style="text-align: right;"|6,820 |style="text-align: right;"|8,52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2}} 11.6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0}} 19.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7}} 17.4 |- !rowspan=2 |7 |rowspan=2 |8 |rowspan=2 |[[원유철]] |style="text-align: right;"|1,587(환산) |style="text-align: right;"|3,168 |style="text-align: right;"|4,755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1}} 10.8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9}} 9.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1|0}} 9.7 |- !rowspan=2 |8 |rowspan=2 |1 |rowspan=2 |[[김경안]] |style="text-align: right;"|1,008(환산) |style="text-align: right;"|2,855 |style="text-align: right;"|3,86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7}} 6.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8}} 8.3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8}} 7.9 |- !rowspan=2 |9 |rowspan=2 |9 |rowspan=2 |[[김태흠]] |style="text-align: right;"|1,251(환산) |style="text-align: right;"|2,541 |style="text-align: right;"|3,792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9}} 8.5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7}} 7.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8}} 7.7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9}}{{막대|한|1|9}}{{막대|친박|1|5}}{{막대|홍|1|1}}{{막대|친박|0|7}}{{막대|친박|0|6}}{{막대|한|0|5}}{{막대|친박|0|4}}{{막대|친박|0|3}}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1}}{{막대|홍|1|1}}{{막대|친박|1|1}}{{막대|친박|1|0}}{{막대|친박|1|0}}{{막대|한|0|8}}{{막대|한|0|5}}{{막대|친박|0|4}}{{막대|친박|0|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1}}{{막대|홍|1|5}}{{막대|한|1|2}}{{막대|친박|1|1}}{{막대|친박|1|0}}{{막대|친박|0|9}}{{막대|한|0|5}}{{막대|친박|0|4}}{{막대|친박|0|4}} | - |}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 제2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90px |선거인단 !width=90px |여론조사 !width=90px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비율 !비율 !비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박근혜]] |style="text-align: right;"|71,176 |style="text-align: right;"|15,413 |style="text-align: right;"|86,589 |rowspan=2 |'''대통령 후보'''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8|6}} 86.18%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7|5}} 74.73%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8|4}} 83.97% |- !rowspan=2 |2 |rowspan=2 |5 |rowspan=2 |[[김문수 (정치인)|김문수]] |style="text-align: right;"|5,622 |style="text-align: right;"|3,333 |style="text-align: right;"|8,955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0|7}} 6.81%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1|6}} 16.16% |style="text-align: left;"|{{막대|신한|0|9}} 8.68% |- !rowspan=2 |3 |rowspan=2 |3 |rowspan=2 |[[김태호 (1962년)|김태호]] |style="text-align: right;"|2,616 |style="text-align: right;"|682 |style="text-align: right;"|3,298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3}} 3.17%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3}} 3.31%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3}} 3.20% |- !rowspan=2 |4 |rowspan=2 |1 |rowspan=2 |[[임태희]] |style="text-align: right;"|2,341 |style="text-align: right;"|335 |style="text-align: right;"|2,676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3}} 2.8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2}} 1.6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3}} 2.60% |- !rowspan=2 |5 |rowspan=2 |4 |rowspan=2 |[[안상수 (인천 출신 정치인)|안상수]] |style="text-align: right;"|739 |style="text-align: right;"|861 |style="text-align: right;"|1,600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1}} 0.89%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4}} 4.17% |style="text-align: left;"|{{막대|옥|0|2}} 1.55% |- |}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은 경선을 통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 제1차 전국위원회 ==== 2012년 [[11월 6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 제3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10px | 선거인단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김무성]] |style="text-align: right;"|13,153(환산) |style="text-align: right;"|39,553 |style="text-align: right;"|52,706 |rowspan=2 |'''대표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4|9}} 49.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6|3}} 63.4 |style="text-align: left;"|{{막대|새|5|9}} 59.1 |- !rowspan=2 |2 |rowspan=2 |8 |rowspan=2 |[[서청원]] |style="text-align: right;"|9,821(환산) |style="text-align: right;"|28,472 |style="text-align: right;"|38,293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7}} 36.7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6}} 45.6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3}} 43 |- !rowspan=2 |3 |rowspan=2 |1 |rowspan=2 |[[김태호 (1962년)|김태호]] |style="text-align: right;"|5,427(환산) |style="text-align: right;"|19,903 |style="text-align: right;"|25,330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0}} 20.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3|2}} 31.9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8}} 28.4 |- !rowspan=2 |4 |rowspan=2 |3 |rowspan=2 |[[이인제]] |style="text-align: right;"|10,524(환산) |style="text-align: right;"|10,258 |style="text-align: right;"|20,782 |rowspan=2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3|9}} 39.4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1|6}} 16.4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2|3}} 23.3 |- !rowspan=2 |5 |rowspan=2 |6 |rowspan=2 |[[홍문종]] |style="text-align: right;"|2,472(환산) |style="text-align: right;"|14,157 |style="text-align: right;"|16,629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0|9}} 9.24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3}} 22.7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9}} 18.9 |- !rowspan=2 |6 |rowspan=2 |5 |rowspan=2 |[[김을동]] |style="text-align: right;"|8,751(환산) |style="text-align: right;"|5,839 |style="text-align: right;"|14,590 |rowspan=2 |여성 몫 '''최고위원''' |- |style="text-align: left;"|{{막대|홍|3|3}} 32.7 |style="text-align: left;"|{{막대|홍|0|9}} 9.4 |style="text-align: left;"|{{막대|홍|1|6}} 16.4 |- !rowspan=2 |7 |rowspan=2 |9 |rowspan=2 |[[김상민]] |style="text-align: right;"|1,399(환산) |style="text-align: right;"|2,136 |style="text-align: right;"|3,535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0|5}} 5.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0|3}} 3.4 |style="text-align: left;"|{{막대|새|0|4}} 4 |- !rowspan=2 |8 |rowspan=2 |4 |rowspan=2 |[[박창달]] |style="text-align: right;"|923(환산) |style="text-align: right;"|2,370 |style="text-align: right;"|3,29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4}} 3.5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4}} 3.8 |style="text-align: left;"|{{막대|청|0|4}} 3.6 |- !rowspan=2 |9 |rowspan=2 |7 |rowspan=2 |[[김영우 (1967년)|김영우]] |style="text-align: right;"|998(환산) |style="text-align: right;"|2,069 |style="text-align: right;"|3,067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4}} 3.7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3}} 3.3 |style="text-align: left;"|{{막대|한|0|3}} 3.4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새|2|5}}{{막대|통일|2|0}}{{막대|친박|1|8}}{{막대|홍|1|6}}{{막대|한|1|0}}{{막대|친박|0|5}}{{막대|친박|0|3}}{{막대|한|0|2}}{{막대|청|0|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3|7}}{{막대|친박|2|3}}{{막대|한|1|6}}{{막대|친박|1|1}}{{막대|통일|0|8}}{{막대|홍|0|5}}{{막대|청|0|2}}{{막대|새|0|2}}{{막대|한|0|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3|0}}{{막대|친박|2|2}}{{막대|한|1|4}}{{막대|통일|1|2}}{{막대|친박|0|9}}{{막대|홍|0|8}}{{막대|새|0|2}}{{막대|청|0|2}}{{막대|한|0|2}} | - |}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 제4차 전국위원회 ==== [[2016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정진석 (정치인)|정진석]] 대표권한대행의 추천으로 [[김용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되었으나 친박계의 반발로 [[5월 17일]] 전국위원회가 무산되면서 김용태 내정자는 사퇴하였다. 이후 [[6월 2일]] 다시 열린 전국위원회가 [[김희옥]] [[동국대학교]] 총장을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 제4차 전당대회 ====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들어선 새누리 혁신비상대책위원회는 [[7월 14일]] 5차 전국위원회를 통해 대표 권한을 강화하고 최고위원과 분리 선출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친박계는 [[최경환 (1955년)|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대표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비박계에서는 이에 맞서 [[유승민 (정치인)|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판론이 나왔으나 [[6월 28일]],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불출마를 결정하자 [[7월 6일]], 최경환 전 부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친박계는 [[서청원]] 전 대표를 추대하려 했고, 이에 [[나경원]] 전 최고위원이 출마를 고심하기도 했으나 [[7월 19일]] 서청원 전 대표 역시 불출마를 선언하자 다음날 나경원 전 최고위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친박계는 [[홍문종]] 전 사무총장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7월 27일]] 홍문종 전 사무총장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고, 막판에 출마를 고심하던 [[김문수 (1951년)|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역시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대표 경선에는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주영 (1951년)|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용태]] 전 혁신위원장 내정자와 [[한선교]] 의원 등이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된 친박계 측이 오히려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내 조직력이 강화되면서, 비박계에서는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고, [[7월 29일]], 정병국 의원과 김용태 의원이 여론조사를 통해 정병국 의원만이 후보로 등록했고, [[8월 5일]], 주호영 후보와 정병국 후보 간 여론조사를 통해 주호영 후보가 비박계 단일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비박계 대권주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친박계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적 멀어진 이주영 후보나 한선교 후보 대신 이정현 후보를 지원하면서, '오더 투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00px | 국민 여론조사 !width=110px | 선거인단 투표 !width=10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 rowspan="2" |'''1''' | rowspan="2" |1 | rowspan="2"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 | |style="text-align: left;"|44,421 | rowspan="2" |'''당 대표''' |-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4|1}} 40.9 |- | rowspan="2" |'''2''' | rowspan="2" |4 | rowspan="2" |[[주호영]] | | |style="text-align: left;"|31,946 | rowspan="2" | |-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9}} 29.4 |- | rowspan="2" |'''3''' | rowspan="2" |2 | rowspan="2" |[[이주영 (1951년)|이주영]] | | |style="text-align: left;"|21,614 | rowspan="2" | |- |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2|0}} 19.9 |- | rowspan="2" |'''4''' | rowspan="2" |5 | rowspan="2" |[[한선교]] | | |style="text-align: left;"|10,757 | rowspan="2" | |- |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1|0}} 9.9 |- |'''-''' |3 |[[정병국]] | | | |사퇴 |- | colspan="7" | |}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전 최고위원을 당대표으로 선출하였다. ==== 제6차 전국위원회 ====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비대위원장에 [[인명진]]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 제7차 전국위원회 ==== [[2017년]] [[2월 13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개정을 의결했다. === 자유한국당 시기 === ==== 제1차 전당대회 ====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3월 12일]] 자유한국당은 31일 전당대회를 개최해 여론조사 50%, 책임당원투표 50%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까지 진행된 후보 등록에는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김진태]] 의원,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안상수]] 의원, [[원유철]] 전 원내대표, [[조경태]] 의원,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용한 청년위원장이 등록했다. [[2017년]] [[3월 18일]]에 실시된 1차 컷오프에서는 [[김진 (1959년)|김진]], 신용한, [[조경태]]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20일]]에 실시된 2차 컷오프에서는 [[안상수 (인천 출신 정치인)|안상수]], [[원유철]] 후보가 탈락했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50px | 여론조사 (50%) !width=150px | 책임당원 투표 (50%) !width=150px | 총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1 |4 |[[홍준표]]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7}} 46.7 |style="text-align: left;"|{{막대|한|6|2}} 61.6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4}} 54.15 |'''대통령 후보''' |- !2 |3 |[[김진태 (1964년)|김진태]]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8}} 17.5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1}} 21.1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9}} 19.3 | |- !3 |1 |[[이인제]]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2|5}} 24.6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0|5}} 5.1 |style="text-align: left;"|{{막대|통일|1|5}} 14.85 | |- !4 |2 |[[김관용]] |style="text-align: left;"|{{막대|새|1|1}} 11.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1|2}} 12.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1|2}} 11.7 |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7}}{{막대|통일|2|5}}{{막대|친박|1|8}}{{막대|새|1|1}} |style="text-align: left;"|{{막대|한|6|2}}{{막대|친박|2|1}}{{막대|새|1|2}}{{막대|통일|0|5}}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4}}{{막대|친박|1|9}}{{막대|통일|1|5}}{{막대|새|1|2}} | - |}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책임당원투표 50%, 여론조사 50%를 통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홍준표]] 후보를 선출하였다. ==== 제2차 전당대회 ====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50px | 국민 여론조사(30%) !width=150px | 선거인단 투표(70%) !width=15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2 |rowspan=2 |[[홍준표]] |style="text-align: right;"|11,697(환산) |style="text-align: right;"|40,194 |style="text-align: right;"|51,891 |rowspan=2 |'''당 대표'''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9}} 49.4 |style="text-align: left;"|{{막대|한|7|3}} 72.7 |style="text-align: left;"|{{막대|한|6|6}} 65.7 |- !rowspan=2 |2 |rowspan=2 |3 |rowspan=2 |[[원유철]] |style="text-align: right;"|7,103(환산) |style="text-align: right;"|11,021 |style="text-align: right;"|18,125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3|0}} 30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0}} 19.9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3}} 23 |- !rowspan=2 |3 |rowspan=2 |1 |rowspan=2 |[[신상진]] |style="text-align: right;"|4,877(환산) |style="text-align: right;"|4,036 |style="text-align: right;"|8,91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2|1}} 20.6 |style="text-align: left;"|{{막대|새|0|7}} 7.3 |style="text-align: left;"|{{막대|새|1|1}} 11.3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한|4|9}}{{막대|친박|3|0}}{{막대|새|2|1}} |style="text-align: left;"|{{막대|한|7|3}}{{막대|친박|2|0}}{{막대|새|0|7}} |style="text-align: left;"|{{막대|한|6|6}}{{막대|친박|2|3}}{{막대|새|1|1}} | - |}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홍준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 제3차 전국위원회 ==== [[2018년]] [[6월 14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김성태 (1958년)|김성]] 대표권한대행은 [[6월 24일]] [[안상수]] 전 [[인천광역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비대위원장을 물색하였고, [[김병준]] 전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었다. [[7월 17일]]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 제3차 전당대회 ==== [[2018년]] [[11월 29일]],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이 입당한 데 이어 [[2019년]] [[1월 15일]], 야권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입당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유력한 차기 대표로 대세론을 형성하자 [[1월 30일]]에는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홍준표]] 전 대표가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다. [[2월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는 [[황교안]] 전 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해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진태]] 의원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2월 7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2월 27일]]부터로 발표되자 황교안 전 총리와 김진태 의원을 제외한 오세훈 전 시장, 홍준표 전 대표, 심재철 전 부의장, 안상수 전 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장관 등은 전당대회를 2주 이상 연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대위와 선관위가 27일 개최를 강행하자 결국 해당 후보 6명은 [[2월 10일]] 전당대회 보이콧을 선언한다. 결국 [[2월 12일]] [[황교안]] 전 총리, [[김진태]] 의원과 입장을 번복한 [[오세훈]] 전 시장만이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다. [[2월 8일]]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및 폄하 논란이 확산되자 윤리위원회는 [[2월 14일]] 이종명 의원을 제명하고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후보로 등록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보해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김진태 후보의 막말에 이어 압도적인 지지율의 황교안 후보까지 '태블릿 PC 조작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 등 김진태 후보의 극우적인 주장에 동참하며 당이 극우화되어간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text-align: center; " |- style="background:#efefef" !width=40px rowspan=2 |순위 !width=40px rowspan=2 |기호 !width=80px rowspan=2 |이름 !width=150px | 선거인단 투표(70%) !width=150px | 국민 여론조사(30%) !width=150px | 총 득표 !rowspan=2 | 비고 |-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 !rowspan=2 |1 |rowspan=2 |1 |rowspan=2 |[[황교안]] |style="text-align: right;"|53,185 |style="text-align: right;"|15,527(환산) |style="text-align: right;"|68,713 |rowspan=2 |'''당 대표''' |- |style="text-align: left;"|{{막대|새|5|5}} 55.3 |style="text-align: left;"|{{막대|새|3|8}} 37.7 |style="text-align: left;"|{{막대|새|5|0}} 50 |- !rowspan=2 |2 |rowspan=2 |2 |rowspan=2 |[[오세훈]] |style="text-align: right;"|21,963 |style="text-align: right;"|20,689(환산) |style="text-align: right;"|42,653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한|2|2}} 22.9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0}} 50.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3|1}} 31.1 |- !rowspan=2 |3 |rowspan=2 |3 |rowspan=2 |[[김진태]] |style="text-align: right;"|20,955 |style="text-align: right;"|4,969(환산) |style="text-align: right;"|25,924 |rowspan=2 | |-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2|2}} 21.8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2}} 12.1 |style="text-align: left;"|{{막대|친박|1|9}} 18.9 |- |colspan=3 | 합계 |style="text-align: left;"|{{막대|새|5|5}}{{막대|한|2|3}}{{막대|친박|2|2}} |style="text-align: left;"|{{막대|한|5|0}}{{막대|새|3|8}}{{막대|친박|1|2}} |style="text-align: left;"|{{막대|새|5|0}}{{막대|한|3|1}}{{막대|친박|1|9}} | - |}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황교안 전 총리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 제4차 전국위원회 ==== [[2020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 전국위는 신설 합당 추진에 대한 결정 권한을 당 최고위원회에 위임하기로 의결하였다. == 논란 == ===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에 대한 공약 논란 ===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329101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32&pageNo=1&printNo=16070&publishType=00010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입장 밝힐 예정] 1997.4.8 경향신문</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209101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20&pageNo=1&printNo=23501&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盧(노)씨 사면건의 검토 金潤煥(김윤환)고문"대법 刑(형)확정후 실시 이미 건의"]1997.4.6 동아일보</ref>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5839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 1997.4.17 mbc뉴스</ref>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557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팔일오 사면 실무 검토 ] 1997.7.22 mbc뉴스</ref> 이런 집권당에서의 사면 논의에 대해 [[1997년]] [[8월 31일]],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3100209101008&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31&officeId=00020&pageNo=1&printNo=23638&publishType=00010 全(전)|盧(노)씨 사면결정金(김)대통령 임기내" 金大中(김대중)총재 국민회의 ]1997.8 .31 동아일보</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3100329101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31&officeId=00032&pageNo=1&printNo=16203&publishType=00010 全(전)·盧(노)씨 현정권서 사면해야” 김대중총재 밝혀] 1997.8.31 경향신문</ref><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8472_19482.html 김대중 총재,김대통령 임기내 전직대통령 사면 요청] 1997.8.31 mbc 뉴스</ref>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8482_19482.html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전직 대통령 사면 시기 이견] 1997.9.1 mbc뉴스</ref> 이렇게 김대중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내세우자 [[경향신문]]은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0100329106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01&officeId=00032&pageNo=6&printNo=16204&publishType=00010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 1997.9.1 경향신문</ref> 그리고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0230032910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0-23&officeId=00032&pageNo=2&printNo=16252&publishType=00010 "全(전)·盧(노)씨 사면 바람직"] 1997.10.23 경향신문</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02300289101010&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10-23&officeId=00028&pageNo=1&printNo=3016&publishType=00010 집권하면 대사면 단행” 국민회의 국회 대표연설 박정수 국민회의 부총재] 1997.10.23 한겨레</ref> 이날 [[김대중]] 후보를 대신해 대표 연설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집권 정치 보복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후보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아무런 전제 조건을 달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297_19482.html 국민회의, 전두환.노태우씨 사면 촉구] 1997.10.23 mbc뉴스</ref> 그에 대응하여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8481_6187.html 신한국당 이회창,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전 조기 석방 건의] 1997.9.1 mbc</ref><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8514_6187.html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1997.9.2 mbc</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010032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01&officeId=00032&pageNo=1&printNo=16204&publishType=00010 전노씨 추석 이후로 사면] 1997.9.1 경향신문</ref>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0300099102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7-09-03&officeId=00009&pageNo=2&printNo=9849&publishType=00010"全(전)·盧(노) 추석전 사면 不可(불가)"]1997.9.3 매일경제</ref>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1100329105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11&officeId=00032&pageNo=5&printNo=16214&publishType=00010 한가위'정치오염'] 1997.9.11 한겨레신문</ref>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1800329101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18&officeId=00032&pageNo=1&printNo=16218&publishType=00010 全(전)·盧(노)씨 대선前(전) 사면 검토] 1997.9.18 경향신문</ref>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400329104010&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24&officeId=00032&pageNo=4&printNo=16224&publishType=00010 옥중 전씨 사면건의 고맙다, 이회창 대표에 구두 메세지] 1997. 9.24 경향신문</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400209105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24&officeId=00020&pageNo=5&printNo=23659&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1997. 9. 24 동아일보</ref>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400209105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24&officeId=00020&pageNo=5&printNo=23659&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ref>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400289126004&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9-24&officeId=00028&pageNo=26&printNo=2991&publishType=00010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씨, 이회창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ref>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400289104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9-24&officeId=00028&pageNo=4&printNo=2991&publishType=00010 이회창, 대표인선 원점 재검토] 1997.9.24 한겨레</ref> 이는 곧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운 것에 대해 [[이인제]]도 경쟁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096_6187.html 97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경남,부산 유세,집권후 정계] 1997.12.15 mbc</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1600289104003&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12-16&officeId=00028&pageNo=4&printNo=3066&publishType=00010 이인제 pk다지기] 1997.12.16 한겨레</ref>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1600329104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16&officeId=00032&pageNo=4&printNo=16303&publishType=00010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1997.12.16 경향신문</ref> 결국 이렇게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경쟁적으로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대선 이후 낙선한 [[이회창]]후보 측근도 "이회창쪽에서도 추석전 조기사면을 요구한 만큼 [[김대중]]당선자도 사면을 주장했으니 당연한조치"라고 평했고 낙선한 [[이인제]]후보쪽에서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이제는 국민대화합의 계기가 되어야 하고 매우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1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4&publishType=00010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사면에 여야 모두긍정적 반응] 1997.12.21 동아일보</ref> [[12월 21일]], [[김대중]]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과 협의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평가했다. 당시 사면에 대해 [[1997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200209107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2&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5&publishType=00010 全(전)-盧(노)씨 사면 「12.12사태」서「12.22석방」까지 뒤바뀐 영욕]1997.12.22 동아일보</ref> === 정체성 ===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ref>[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404630 중도실용주의 포퓰리즘 변질 경계해야] {{웨이백|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404630 |date=20140219105918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51766 한나라당의 진짜 대선 징크스]</ref>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판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자 일부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서울시의 무상급식 정책 논란|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200282 한나라, 무상급식 주민투표 독려운동 본격화] 한나라당 2011년 8월</ref>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10808103625387&p=ned 무상보육 한다면서 무상급식은 왜 반대?” 딜레마 빠진 한나라당] 헤럴드경제 2011년 8월</ref>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733 한나라 ‘무상보육’, 아기들 밥은 돈 내고 먹어라?] 미디어오늘 2011년 8월</ref>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3&aid=0000014501 보수층 절반 이상 한나라당에 등 돌렸다] 조선일보 2011년 7월</ref>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미디어 관련법 개정 논란|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회창 한나라당 정체성 분명히 해야 |url =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07/21/0502000000AKR20090721051900001.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고일환 기자 |쪽 = |날짜 = 2009-07-21 |확인날짜 = 2009-07-24}}</ref> === 이회창 비리 ===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ref>[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83 서정우 구속수감, 'LG 현금 150억, 차떼기 수법으로 인수']</ref>.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020189 donga.com[뉴스&#93;-昌측 823억-盧측 120억 불법모금… ‘차떼기’ 떠들썩<!-- 봇이 따온 제목 -->]</ref> [[2004년]] [[2월 4일]]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ref>{{뉴스 인용|제목 = 검찰, 거제 '돈공천 의혹' 관련자 계좌추적 |url =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0/05/25/0505000000AKR20100525031100052.HTML?template=2088|출판사 = 연합뉴스|저자 = 임형섭 기자|쪽 = |날짜 = 2010-05-25|확인날짜 = 2010-05-26}}</ref>,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4662&PAGE_CD=N0001&CMPT_CD=M0016 비박 "뇌물공천은 성매매보다 나빠"- 박근혜"멘붕 지경"]</ref> === 인터넷 여론 문제 ===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ref>{{뉴스 인용|제목 = '알바' 고용 조직적 댓글 與당원 법정구속|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1976595|출판사 = 머니투데이|저자 = 정영일 기자|쪽 = |날짜 = 2008-04-27|확인날짜 = 2009-12-30}}</ref> 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대학생 고용해 대량 댓글 선거운동원 실형 |url = http://world.kbs.co.kr/korean/news/news_Po_detail.htm?No=94696&font_size=13&id=Po |출판사 = KBS |날짜 = 2008-04-28 |확인날짜 = 2009-09-16 |archive-date = 2012-01-23 |archive-url = https://web.archive.org/web/20120123202807/http://world.kbs.co.kr/korean/news/news_Po_detail.htm?No=94696&font_size=13&id=Po |url-status = dead }}</ref> 지난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직원에 따르면 2006년 지방 선거 때부터 한나라당에서 댓글과 공감 수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왔고,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여론 조작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활동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변경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4년 지방 선거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SNS 소통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상대 후보를 비판하는 뉴스를 확산시켰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으며 민주당의 댓글 조작 사건을 담당하던 드루킹 특검에도 이 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요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7688.html|제목=[단독] “한나라당, 2006년 선거부터 여론조작”|날짜=2018-06-05|언어=ko|확인날짜=2018-06-05}}</ref><ref>{{뉴스 인용|url=http://imnews.imbc.com/replay/2018/nwtoday/article/4637288_22669.html|제목="한나라·새누리 댓글 관리"…인터넷 여론조작 폭로|날짜=2018-06-07|언어=ko|확인날짜=2018-06-13}}</ref>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1951년)|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석현, "아고라에 여당 '알바' 침투"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0237953& |출판사 = YTN |날짜 = 2009-02-12 |확인날짜 = 2009-09-16}}</ref> 이들은 아고라에서 비판 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부여당 토론의 꽃밭에 재 뿌리고 있다”|url = 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97690&section=sc1|출판사 = 브레이크뉴스|저자 = 손주영 기자|쪽 = |날짜 = 2009-03-04|확인날짜 = 2009-12-31}}</ref> 한나라당과 국민 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두언 "돈 안 받는 알바가 어딨나"|url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41002|출판사 = 데일리안|저자 = 김현 기자|쪽 = |날짜 = 2009-01-06|확인날짜 = 2009-12-31}}</ref> === 성추행 === {{중립 필요 문단|날짜=2014-02-15}}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2014년 9월 전 국회의장이자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던 [[박희태]] 씨가 골프장에서 여성 캐디의 배를 찌르는 등의 성추행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 항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에서 기각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원심이 유지되었다. === 날치기 === 새누리당은 [[대한민국 제18대 총선|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2713 국회 예산안 심사, 3년째 부실 졸속 처리] mbc 2010년 12월 8일</ref>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12252595 미디어법 날치기 1년, 재입법이 근본처방이다] 경향신문 2010년 7월 21일</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2247209 민주 "'4대강예산' 날치기처리, 원천무효"] 머니투데이 2009년 12월 8일</ref>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098361 박희태 국회의장, 국회 질서유지권 발동] 경향신문 2010년 12월 8일</ref>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194695 예산안 여당 단독처리…날치기 통과에 '몸싸움'] sbs 2010년 12월 9일</ref>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했다.<ref>[http://news.nate.com/view/20101213n02298 사과, 사과, 사퇴…' 고개숙인 한나라당] 노컷뉴스 2010년 12월 13일</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ref>[http://news.nate.com/view/20101229n00773 서민예산 몽땅 도둑질...날치기 7적 물러나라] 오마이뉴스 2010년 12월 29일</ref> === 돈봉투 사건 === 2012년 총선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이후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 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 사면되었다.<ref>[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3/01/20130129169833.html 최시중·천신일·박희태·서청원 특별사면]</ref>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 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 십자군 선거운동 === {{본문|십자군 알바단 사건}} 2012년 12월 13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 여러대로 여론 조작 작업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해당 오피스텔 입구에는 선거 6일 전을 알리는 문구와 ‘President War Room(대통령 선거 상황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으며, [[박근혜]] 대선 후보가 발행한 임명장과 SNS 미디어본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이 다량 발견됐다. 선관위 등에 따르면 이 사무실 대표 [[윤정훈 (목사)|윤정훈]]은 2012년 대선 기간 새누리당‘국정홍보대책위원회’ 총괄팀장 겸 국민편익위원회 SNS미디어본부장을 맡았으며,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미등록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7명을 고용해 인터넷, SNS에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혀 졌다.<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지지 불법 선거운동' SNS업체 대표 구속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24/2013012402200.html?news_Head1 |work=조선일보 |date=2013-01-24 |accessdate=2018-05-11}}</ref> 이들은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유리하고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글을 [[트위터]]에 게시하고 리트윗(공유)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당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당에서 돈을 들여 사무실을 차려주거나 지원한 사실이 없다.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한 것으로, 새누리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ref>{{뉴스 인용 |title=朴 여론조작 불법사무소 ‘덜미’, 현장 보니…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2&aid=0002373449 |work=헤럴드경제 |date=2012-12-13 |accessdate=2018-05-11}}</ref> 그러나 2012년 12월 14일 선거관리위원회는 ‘SNS 불법 선거운동’이 이뤄진 여의도 오피스텔의 임차 비용을 [[박근혜]] 대선 후보 선대위 권아무개 새누리당 국정홍보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아무개 새누리당 수석부위원장이 지급했다고 밝혔고, 특히 “직원들의 리트윗 활동 실적을 ‘박근혜 후보를 위한 가계부채특별위원회 SNS 활동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새누리당]] 가계부채특위 [[안상수 (인천 출신 정치인)|안상수]] 위원장에게 수시로 보고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선대위 간부가 ‘불법선거 오피스텔’ 임차료 냈다 |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5490.html |work=한겨레 |date=2012-12-14 |accessdate=2018-05-11}}</ref> 이 사건으로 윤정훈은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지지 '십알단' 윤정훈 목사, 유죄 확정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1490 |work=오마이뉴스 |date=2013-12-26 |accessdate=2018-05-11}}</ref> == 같이 보기 == * [[박근혜 대통령 탄핵]] *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19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습격]] == 각주 == === 인용 === {{각주}} === 기타 === <references group="주" /> {{자유한국당}}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 원내 구성}} {{대한민국의 정당 역사}}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역사}} [[분류:자유한국당| ]] [[분류:대한민국의 정당]] [[분류:1997년 설립된 정당]]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분류:이명박|*]] [[분류:박근혜|*]] [[분류:홍준표|*]] [[분류: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국제민주연합]] [[분류:국민의힘|+]] [[분류:2020년 해산된 정당]] [[분류:대한민국의 극우 정치]] [[분류:대한민국의 우익 정치]] [[분류:반공주의 정당]]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 포맷 정보 | 그림 = PDF file icon.svg | 그림크기 = 120px | 이름 = {{lang|en|Portable Document Format}} | 확장자 = .pdf | MIME = application/pdf | 개발 = [[어도비 시스템즈]] | 종류 = 전자 문서 }} '''PDF'''({{llang|en|Portable Document Format}}{{해석|이동가능 문서형식}})는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전자 문서 형식으로 일반 문서 및 [[문자]], [[도형]], [[그림]], [[글꼴]]을 포함할 수 있다. PDF는 컴퓨터 환경에 관계없이 같은 표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장치 독립성 및 해상도 독립성을 가진다.<ref>Tim Bienz외, Portable Document Format Reference Manual Version 1.2, Adobe Systems Inc., 1996년 11월 12일, {{ISBN|0-201-62628-4}}, [http://www.pdf-tools.com/public/downloads/pdf-reference/pdfreference12.pdf 2011년 6월 21일 확인] {{웨이백|url=http://www.pdf-tools.com/public/downloads/pdf-reference/pdfreference12.pdf |date=20051103044315 }} 중 19면</ref> PDF는 2008년에 ISO 32000 [[오픈 포맷]]으로 표준화되었으며 구현을 위해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는다. == 역사 == {{본문|PDF의 역사}} 1993년 어도비사 PDF 1.0버전과 어크로뱃<ref>PDF 파일을 만들거나 읽을 수 있게 만들어진 소프트웨어</ref> 1.0 버전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초기 도입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도비사가 [[어도비 어크로뱃]]을 무료로 배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PDF의 초기 버전은 기능적으로 당시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외부로의 하이퍼링크가 지원되지 않았고, 파일 크기가 너무 커서 당시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운로드하거나 파일을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경쟁 파일 포맷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Envoy, Common Ground Digital Paper, Farallon Replica가 있다. 심지어 어도비사의 [[포스트스크립트]](.ps)는 같은 회사의 PDF에 비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995년에는 AT&T Lab에서는 도서관의 도서나 각종 문서의 보관을 위해 새로운 파일 포맷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후 DuVu 프로젝트로 발전하여 .djv/.djvu 포맷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이 포맷은 e북이나 온라인 카탈로그, 이미지 파일 교환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어도비사는 [[어크로뱃 리더]](현재의 어도비 리더)를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PDF 포맷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PDF는 온라인 상의 인쇄용 문서의 [[데 팍토|실질적 산업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ref>[http://www.pragatool.org/a1084453-portable-document-format.cfm Prag A Tool]{{깨진 링크|url=http://www.pragatool.org/a1084453-portable-document-format.cfm }} 2011년 6월 21일 확인</ref> == 특징 == 문서 형식이나 제작 기술에 독점적인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서 형식이 공개되어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In-Design 뿐 아니라 다양한 상용 프로그램 및 무료 프로그램에서 PDF를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서가 표현 가능하고 암호화 및 압축 기술을 통해 내용의 변조가 어려우며, 사용권을 다양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지원 가능하다는 점이 다른 문서 형식과 비교될 수 있는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서 실용적인 [[가상 프린터]]로 사용된다. == 지원 소프트웨어 == {{본문|PDF 소프트웨어 목록}} 어도비 시스템즈에서는 PDF를 읽을 수 있는 [[어도비 리더]] 프로그램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리눅스]] 등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어도비사에서는 PDF 제작을 위한 [[어도비 어크로벳]]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 역시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PDF를 읽거나 또는 읽고 쓰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https://www.microsoft.com/store/apps/9NVQQ9KXS9NW DK PDF] - UWP(윈도우 스토어)용 PDF 뷰어이다. PDF 뷰어 기능 외에 PDF 합치기, 나누기, 이미지를 PDF로 변환하기, PDF 구절 번역하기 기능이 있다. 현직 변호사([http://dklaw.co.kr/ 이동근 변호사] {{웨이백|url=http://dklaw.co.kr/ |date=20191002083326 }})가 만들어서인지 수사기관 제출용 도장찍기 기능도 존재한다. * [https://web.archive.org/web/20090924022023/http://epapyrus.com/ PDF-Pro] - 한국어 PDF 제작 도구. * [http://www.cutepdf.com/ CutePDF] – 광고를 출력하지 않는 무료 PDF 변환기. * [http://doc2pdf.sourceforge.net/ Doc2pdf] – [[전자 우편]] 로봇에 의한 변환. * [http://www.freshmeat.net/projects/gpdf/ GNOME PDF 뷰어] {{웨이백|url=http://www.freshmeat.net/projects/gpdf/ |date=20041209024736 }} * [[팍스잇 리더]] * [http://www.lowagie.com/iText/ iText] – 자바 PDF 변환기 * [http://gnujpdf.sourceforge.net/ gnujpdf] – 자바 PDF 변환기 * [http://pjx.sourceforge.net/ PJX] PDF 프로그래밍을 위한 자바 패키지 * [http://www.sourceforge.net/projects/libharu libharu] – C/C++ 변환기. * [[OpenOffice.org]] – PDF 형식으로 문서를 출력할 수 있음. * [https://web.archive.org/web/20041204011233/http://www.myndkryme.com/news.html OttoPDF] * [[팬더 라이브러리]] * [http://www.ascertia.com/Products/PDF-Sign-Seal.aspx PDF Sign&Seal] - PDF 문서 디지털 서명 * [https://web.archive.org/web/20110415095041/http://www.ascertia.com/Products/Ascertia-Docs.aspx Ascertia Docs] 온라인 디지털 서명 * [http://www.pdfx3.org/ PDF/X-3] * [http://sharppdf.sourceforge.net/ sharpPDF] – C# PDF 라이브러리. * [http://www.foolabs.com/xpdf/ Xpdf] – PDF 뷰어. * [http://pdftohtml.sourceforge.net/ PDFTOHTML] – PDF 대 HTML 변환기. * [http://wikipdf.sourceforge.net/ WikiPDF] – 미디어위키 글 PDF 변환기. * [http://sourceforge.net/projects/nrmpom/ POM] - PDF 파일을 합지는 오픈소스 자바 도구. * [[에빈스]] - [[그놈]]을 위한 여러 문서 형식을 지원하는 문서 뷰어. * [http://kpdf.kde.org/ KPDF] - [[KDE]]를 위한 xpdf 기반의 PDF 뷰어. * [http://www.nespdf.com/ NESPDF] * [[구글 오피스]] * 폴라리스오피스 [[드롭박스]], [[원드라이브]] 등의 많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PDF 보기를 지원한다. == PDF 프린터 == {{참고|가상 프린터}} * [http://www.go2pdf.com/product.html Go2PDF] – 프리웨어 가상 프린터 드라이버. 단, 설치시 번들기능주의 해제 * [http://pdfcreator.sourceforge.net/ PDFCreator]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PDF 프린터 드라이버, 단 설치시 '''번들기능'''(무언가 추가적으로 다른걸 같이 설치하려는 시도)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해제할 것 == 프라이버시 == 다음은 PDF 포맷의 민감한 정보가 파일내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미디어위키]]의 알림창이다.<ref>[https://www.mediawiki.org/wiki/Help:Security/PDF_files 미디어위키-보안/PDF파일]</ref> {{인용문|개인정보 고려사항<br> PDF의 포맷은 복잡하므로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정보의 일부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안전한 방식으로 PDF 뷰어를 구성했는지 확인하십시오. <U>이 문제에 대해 더 알아보세요.</U><br> 이 문제는 이 특정 파일에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며, PDF 포맷의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 같이 보기 == * [[전자 문서]] * [[DjVu]] * [[enscript|GNU enscript]]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200102134456/https://www.pdfa.org/ PDF Association] - The PDF Association is the industry association for software developers producing or processing PDF files.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101007220449/http://partners.adobe.com/public/developer/tips/topic_tip31.html Adobe PDF 101: Summary of PDF] {{그래픽 파일 포맷}} {{오피스 문서 파일 포맷}} {{ISO 표준}} {{전자책}} {{전거 통제}} [[분류:페이지 기술 언어]] [[분류:그래픽 파일 포맷]] [[분류:어도비 시스템즈]] [[분류:오픈 포맷]] [[분류:벡터 그래픽스]]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워드프로세서 (자격)||대한민국의 국가기술자격}} [[파일:TOSHIBA JW-10.JPG|섬네일|1978년 출시된 도시바 JW-10 독립형 워드 프로세서]] [[파일:LibreOffice 6.2 screenshot.png|섬네일|가장 대중적인 [[자유-오픈 소스]] 워드 프로세서의 하나인 [[리브레오피스 라이터]]]] '''워드 프로세서'''({{llang|en|word processor}})는 각종 전자 문서를 읽고 고치거나 작성할 수 있는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또,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인기있던 독립형 사무 기기의 일종을 뜻하기도 하는데, 문서 편집을 위한 [[타자기]]에 자판 입력과 인쇄 기능을 더한 것이 특징이었다. == 역사 == 워드 프로세서는 2개의 천공 테이프 스테이션이 있고 하나의 테이프를 다른 테이프로 교체하는 것(한 테이프는 이름과 주소가 포함되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송신할 본문을 포함함)을 허용하는 [[Friden Flexowriter]]에서 파생되었다. 줄 바꿈 기능은 없었으나, 이 기능은 IBM의 [[IBM MT/ST|Magnetic Tape Selectric Typewri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 워드 프로세서의 특징 == === 문서 작성 === 단순한 [[문서 편집기]]와는 달리 문서의 문단 모양, [[글꼴]] 모양, [[표]] 편집, [[그림]] 삽입 등을 외양에 집중하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초기에는 [[한글]], 영문 등 단어나 문장 입력과 간단한 [[편집]]에 집중되었으나 고급 사용자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전자출판]]에 응용하면서 [[교회]] 주보, [[수학]] 문제지 등의 간단한 [[전자출판]]도 가능하게 되었다. [[아래아한글]]의 경우 [[도스]]용 시절부터 일부 고급 사용자들이 한글과 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선전을 위해 발행하던 월간지였던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출판]] 노하우를 투고할 만큼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애용되었다.<ref>월간 《한글과 컴퓨터》[[1994년]] [[7월호]]에 아래아한글 2.1/일반용의 키 [[매크로]] 기능과 특수문자를 이용한 [[악보]] 편집 디자인 노하우가 투고된 적이 있음.</ref> 대학생들에게는 1990년대부터 글을 쓰고 고치기 쉽기 때문에 널리 사랑받기 시작했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는 [[한/글|아래아한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숙제]]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는 등 널리 사랑받는 문서작성 프로그램이다. === 단점 === 하지만 워드 프로세서의 전자출판 기능은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전문적인 전자출판 프로그램에 비해 출력 기능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쿼크익스프레스]]의 경우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다양한 [[인쇄]]에 맞춘 망점 조절이 가능하지만, 워드 프로세서는 망점 조절 기능이 없다. 워드 프로세서 파일은 [[그림]]이 들어갈 경우 상대적으로 [[문서]]의 용량이 커지고, 워드 프로세서별 확장자나 형식이 달라 같은 제품임에도 버전별로 호환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 [[파일:Hardwarewordprocessor.png|섬네일|230px]]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는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로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 워드프로세서, 전열 방식의 [[프린터]], 충전용 [[전지|배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1983년]] 개발된 [[큐닉스]] 글마당이며,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개발되었다.<ref> [http://www.dt.co.kr/contents.htm?article_no=20000626185813002 디지털타임즈 2000년 6월 26일자-한글 워드프로세스의 역사]</ref> 그외 [[대우전자]]에서 개발된 르모도 사용되었다. 기존의 [[타자기]]에 비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문서의 수정과 편집이 용이하고 별도의 출력도 가능하여 수동식 타자기를 대체할 사무용품으로 큰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전자식 타자기도 보급되었고, 곧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개인용 컴퓨터]]와 [[프린터]]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그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까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를 [[워드프로세서 (시험)|워드프로세서 실기시험]] 수검기종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 폐지되었고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도 전자식 타자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 {{본문|워드 프로세서 목록}} ===한글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본문|한국어 워드 프로세서}} ====도스용==== * [[한글 2000]]([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17055 사임당] {{웨이백|url=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17055 |date=20180507221807 }}) * [[보석글]] * [[한/글]](아래아한글, 한글과컴퓨터) * [[하나워드]] ==== 윈도우용 ==== *아리랑,윈워드등이 개발되었음. * [[한/글]](한글과 컴퓨터)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S Word]](마이크로소프트) * [[훈민정음 (소프트웨어)|훈민정음]] * [[오픈오피스]] ==== 현재 ==== 현재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는 다음과 같다. * [[한/글]](한글과 컴퓨터)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S Word]](마이크로소프트) * [[훈민정음 (소프트웨어)|훈민정음]] * [[워드퍼펙트]] * [[오픈오피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워드프로세서 점유율은 한/글이 2 정도를, MS 워드가 8정도를 차지하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41|제목=한글 VS 워드, 과연 승자는?|성=이연선|이름=|날짜=2015-12-01|뉴스=|출판사=시선뉴스|확인날짜=2019-02-23}}</ref> 전세계적으로는 MS 워드가 90% 넘는 점유율을, 한/글은 0.4% 정도의 점유율을 보인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11115587056799|제목=한글과컴퓨터 - 토종 소프트웨어의 역사|성=한규석|이름=|날짜=2018-01-11|뉴스=|출판사=머니투데이|확인날짜=2019-02-23}}</ref> == 만화속의 워드 프로세서 == * 《[[소년탐정 김전일]]》공포의 보물찾기편에서는 진범이 수사를 피하기 위해 워드 프로세서로 가짜 유서를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오히려 김전일의 의심을 받게 된다. * 《[[짱구는 못말려]]》에서는 짱구 아빠가 밤을 새워서 작성한 기획서를 워드 프로세서에 내장된 프린터로 인쇄하는 내용이 나온다. == 같이 보기 == * [[오피스 제품군|오피스]] * [[워드 프로세서 목록]] ==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줄|Word processors}} {{워드 프로세서}} {{전거 통제}} [[분류:워드 프로세서|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문서 편집기'''(文書編輯機) 또는 '''텍스트 에디터'''({{lang|en|text editor}})는 단순한 문서 파일을 편집하기 위해 쓰이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진 형식이 아닌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형식의 파일을 읽고 간단한 조작으로 편집하여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중의 하나이다. == 일반 텍스트 파일 vs. 워드 프로세서 파일 == 텍스트 에디터로 생성된 일반 텍스트 파일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워드퍼펙트]], 또는 [[OpenOffice.org]]와 같은 워드 프로세서로 생성된 문서 파일에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반 텍스트 파일은 파일에서 표현된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편집하고 나타낼 수 있다. '표시'할 수 없는 유일한 문자는 사용된 문자 집합의 제어문자이다; 실질적으로 줄바꿈, 탭 그리고 폼 피드(formfeed)를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요즘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 집합은 ASCII로 일반 텍스트 파일은 과거에 문서 작성을 할 때(예를 들면 구체적인 사용 설명, 혹은 사용 안내)보다, 프로그래밍과 구성을 하는데 더 자주 사용된다. 문서는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을 정의하는 것 이외에도 구체적인 파일 포맷 "제어 문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굵게, 기울임꼴, 글꼴, 열, 표 등의 기능을 활성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일반 페이지 포맷 기호들이 일단 바탕화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가장 간단한 워드 프로세서의 기본 화면에서 볼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일반 텍스트 파일을 편집하며 기본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작성 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작성해야 한다. 저장 형식을 지정할 때에, 특히 소스 코드, HTML, 그리고 구성, 제어 파일과 같이 특히 더 중요한 파일에는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프로그램을 초기값으로 그대로 둘 경우 파일은 "특수 문자"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파일이 의도하고자 했던 유틸리티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 종류 == {{참고|문서 편집기 목록}} [[파일:Colorsyntax.png|thumbnail|right|[[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 실행 중인 Emacs.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유명한 문서 편집기의 하나이다.]] * [[유닉스 계열]]: 보통 [[vi]] 계열, [[이맥스]] 등이 설치되어 있다. * [[그놈]] 계열: [[Gedit]] 등이 설치되어 있다. {| class="wikitable" ! ! [[개발사]] ! [[플랫폼]] ! [[운영 체제]] ! [[라이선스]] ! [[특징]] |- ! [[이맥스]] ,([[Emacs]]) | [[GNU]] | [[Win32]],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리눅스]], [[솔라리스]], [[AIX]], [[맥 OS X]] | [[GPL]] |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자유 소프트웨어]] |- ! [[Vim]] ,([[vi]]) | [[Bram Moolenaar]]와 [[Vim Developers]] | [[GNOME]]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리눅스]], [[유닉스]] | [[GPL]] |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 ! [[gedit|그놈 에디터]] ,([[gedit]]) | [[GNU]] | [[GNOME]] | [[리눅스]] | [[GPL]] | GNOME 기본 문서 편집기 |- ! [[Leafpad|Leafpad(잎사귀메모장)]] | [[GNU]],Tarot Osuji | [[GNOME]], [[KDE]] | [[리눅스]] | [[GPL]] | http://tarot.freeshell.org/leafpad/ {{웨이백|url=http://tarot.freeshell.org/leafpad/ |date=20161003124941 }} |- ! [[블루피시]] ,([[BlueFish]]) | [[GNU]] | [[GNOME]]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리눅스]] | [[GPL]] | http://bluefish.openoffice.nl/ |- ! [[카테]] ([[Kate]]) | [[GNU]] | [[KDE]] | [[리눅스]] | [[GPL]] | KDE 기본 문서 편집기 |- ! [[KWrite]] | [[GNU]] | [[KDE]] | [[리눅스]] | [[GPL]] | KDE 기본 문서 편집기 |- ! [[Scribes]] | [[GNU]] | [[GNOME]] | [[리눅스]] | [[GPL]] | |- ! [[노트패드++]] | [[GNU]] | [[GNOME]] | [[리눅스]] | [[GPL]] | 무료,http://notepad-plus.sourceforge.net/ |- ! [[메모장 (소프트웨어)|메모장]] | [[GNU]] | [[GNOME]]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리눅스]] | [[GPL]] |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 ! [[SimpleText]] | [[애플]] | [[GNOME]] | [[맥 OS X]] | [[GPL]] |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 ! [[TextEdit]] | [[애플]] | [[GNOME]] | [[맥 OS X]] | [[GPL]] |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 ! [[당근에디터|당근 편집기]] | 개발자 김상형 | MS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 [[오픈소스]], [[퍼블릭도메인]](PD) | 무료 |- ! [[에디트 플러스]] | |개발자 김상일 |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 [[셰어웨어]] | 가격 $35 |- ! [[엠에디터]] | Emurasoft |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 [[셰어웨어]] | 가격 $40 |- ! 울트라 에디트 | IDM Computer Solutions |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맥 OS X]], [[유닉스]] | 사유 저작권 | 가격 $60 |- ! EditPad Pro | Just Great Software Co. | | [[OS X]] | 사유 저작권 | 가격 $50 |} == 문서 편집기의 일반 기능 == * [[문자열 검색|검색 및 치환]] <!--([[:en:String searching algorithm]] 참고)--> * [[잘라내기, 복사, 붙여넣기]] * [[조판]] * [[실행 취소|실행 취소 및 다시 시도]] * [[데이터 변형|가져오기]] * [[필터 (소프트웨어)|필터링]]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워드 프로세서]] * [[파일 뷰어]] {{전거 통제}} [[분류:문서 편집기| ]] [[분류:기술 소통 도구]]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옛한글}} {{소프트웨어 정보 | 이름 = 한/글(ᄒᆞᆫ글, HWP) | 로고 = | 화면 = 한-글2010 스크린샷.png | 설명 = 한/글2010의 화면 스크린샷 | 원저자 = [[이찬진]] 등 | 개발자 = [[한글과컴퓨터]] | 발표일 = {{시작 날짜와 나이|1989|4|24}} | 최근 버전 = 한/글 2024 | 최근 버전 출시일 = {{시작 날짜와 나이|2023|10|12}} | 미리보기 버전 = | 미리보기 버전 출시일 = | 지원중단 = | 프로그래밍 언어 = | 운영체제 = 윈도우, 맥, 리눅스<ref>현재 [[페도라]]는 한글2014 뷰어를 설치할 수 있으며 데비안은 한글 2020과 2022버전을 설치할 수 있다.</ref>, 안드로이드, ios | 플랫폼 = | 크기 = | 언어 = 한국어 | 종류 = 워드프로세서,오피스프로그램 | 라이선스 = [[상용 소프트웨어]]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http://www.hancom.com}} }} '''한/글''' 또는 '''아래아한글'''은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된 [[워드 프로세서]]이다. 제품 이름은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ㆍ]]를 쓴 '''ᄒᆞᆫ글'''로 표기하고, ‘'''HWP'''(Hangul(Hancom) Word Processor의 준말)’ 또는 '''아래아 한글''' 또는 '''한/글'''<ref>‘하안글’ · ‘한/글’ 등으로 대체하여 표기했으나, 국가 표준인 완성형 한글 코드에선 'ᄒᆞᆫ' 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출처|날짜=2021-08-08|2002년부터는 '한/글'로도 표기한다.}}</ref> 로도 표기한다. 2014년 기준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이다.<ref name="vs">{{뉴스 인용|url=http://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41|제목=한글 VS 워드, 과연 승자는?|성=이연선|이름=|날짜=2015-12-01|뉴스=|출판사=시선뉴스|확인날짜=2019-02-23}}</ref> [[MS-DOS|도스]]용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는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유닉스]], [[리눅스]]([[데비안]]계열 한정) [[매킨토시]]<ref>2014이후 최신제품없으며 [[폴라리스 오피스]]와 호환된다. 단 미등록시에는 [[네이버 웨일]]을 통해 뷰어 기능만 할 수 있다.</ref>와 안드로이드 및 아이폰용으로도 제작되고 있으며 여러 운영체제중 [[페도라 리눅스]] 나 [[하이쿠 (운영 체제)|하이쿠]]는 읽거나 편집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글로 작성된 문서 파일은 [[파일 확장자]]로 .hwp를 갖고 있으며, .hwt로 저장하여 양식(Form)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2010년부터 HWP의 개방형문서포맷인 OWPML(Open Word Processor Markup Language)은 KS X 6101로 등록되어 있으며, 확장자로 .hwpx 또는 .owpml 을 지원한다. == 역사 == === 1999년 이전 === ==== 한/글 1.0 ~ 2.1 ==== ===== 1989년 1.0, 1.1, 1.2, 1.3 출시 ===== {{본문|한글 1.0}}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이찬진]]은 [[1988년]] 가을 서울대 컴퓨터연구회에서 만난 [[김형집]], [[우원식 (기업인)|우원식]], [[김택진]]<ref>NC SOFT 창업자로 한/글 1.0 팩스 드라이버 개발함</ref>과 함께 아래아한글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베타 버전인 0.96판을 [[1989년]] 3월에 발표하였다. 베타버전인 0.96판은 5.25인치 360kb 디스켓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린터로 출력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0.96의 버그를 수정한 0.99도 발표했다. 이찬진은 [[한글 2000]]에서 잠깐 일한 경력이 있으며, 한/글은 이의 영향을 받았다.<ref>http://www.economy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8</ref> 최초의 상용버전인 1.0판이 [[1989년]] [[4월 24일]] 출시되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한글 1.0]] 문서를 참조. [[1989년]] 6월에는 주석 처리 기능<ref>문서에 해설을 다는 기능, 한/글에서는 문서 밑에 해설을 다는 각주와 문서 뒤에 해설을 다는 미주 모두 가능하다.</ref>, [[줄 바꿈 규칙|금칙 처리]] 기능과 9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에서의 인쇄 품질이 향상된 1.1판이 출시됐다. 또한 1.0판에서는 설명서 대신 몇 장의 안내문만을 제공했던 것에 비해 1.1판 후반부터는 정식 설명서를 링 파일에 묶어 제공했다. (책자 형태로 되어 있는 정식 설명서의 날짜는 1989년 11월 27일로 되어 있다.) [[한글과컴퓨터]]가 설립되기 전인, [[1990년]] 1월 한/글의 1.20판이 출시되었다. 1.20판이 출시되기 전에도 1.11판등 버전업이 수시로 있었다 1.2판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다. * [[ASCII]] 텍스트파일 저장 기능 강화 * 한/영 전환키가 shift+space 키로 변경 * 선 그리기로 만든 표 보호 기능 등 [[1990년]] 6월 300 DPI [[레이저 프린터]] [[해상도]]를 지원하는 한/글 1.2L이 출시되었다. 한/글 1.2판 이후로 한/글은 출력할 수 있는 해상도의 조건에 따라 레이저판, 도트판이 따로 나뉘었으며 30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레이저판은 14만 원, 18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도트판은 5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레이저판에는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프린터 포트에 꽂아야만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하드웨어 키(lock)가 들어 있었는데 후에 한/글 2.5가 출시되면서 제거되었다. [[1990년]] 9월에는 글꼴 다운로드 인쇄 방식을 사용해 레이저 프린터에서의 인쇄 속도를 향상시키고, 그림 인쇄, [[SVGA]] 모니터 지원 기능이 추가된 한/글 1.3L이 출시되었다. ===== 1990년 1.5 출시 ===== ====== 창업 ====== [[1990년]] 10월 이찬진이 한글과컴퓨터사를 열었으며, [[한글문화원]] 사무실 내부에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정내권]], [[박흥호]] 등 외부 직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 도트, 레이저용 ====== [[1990년]] [[12월 20일]]에 1.5판이 도트판과 레이저판의 두 종류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도트판의 경우 5.25인치 2D(360KB) [[플로피 디스크]] 다섯 장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당시 [[컴퓨터]]의 대부분이 [[하드 디스크]]가 없는 [[IBM PC XT|XT]]나 [[IBM AT|AT]] 기종이었기 때문에, 한자 사전을 쓰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고, [[인쇄]]하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는 식으로 오늘날보다 훨씬 불편하게 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 기능 추가 ===== 이 외에도 다음의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 도트판에서도 그림 인쇄 가능 * 로마자 가변폭 글꼴 추가 * 한글 필기체 추가되어 한글 필기체, 명조체,고딕체,샘물체가 한글서체였다. * 자동 쪽 번호 매김(페이징), 구역(컬럼 블록, 단축키 F4) 설정 등 ===== 1.51 ===== 몇 가지 버그를 수정한 1.51판이 [[1991년]] 1월 출시되었다. ===== 1.52 ===== [[1991년]] [[11월 18일]] 텍스트 파일을 문단 단위로 읽는 기능과 [[플로터]] 파일을 인쇄하는 기능을 추가한 한/글 1.52판이 출시되었으며, 한/글 1.53D도 출시되었다. 이들 제품을 통해 한/글은 완성형보다 한글을 많이 쓸 수 있는 조합형 한글, 다양한 글꼴, 인쇄기를 이용한 깔끔한 인쇄를 쓸 수 있는 터라 [[한국인]]이 널리 사용하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표 기능이 없어서 선 그리기로 표를 그려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1992년 한/글 2.0이 개발되면서 기존 버전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었다. 김진섭은 책 만들기를 가르쳐주는 책인 《책 잘 만드는 책》에서 [[1990년]]대에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실례로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에서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와 손글씨로 [[학급신문]]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첨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대에게는 글을 깔끔하게 쓴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에게는 숙제를 깔끔하게 써서 낸다는 자부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앞선 문서 작성 도구였다. ===== 1992년 2.0 출시 ===== [[1992년]] [[7월 27일]] 한/글 2.0 전문용이, [[9월 21일]]에 일반용이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레이저판과 도트판의 구분을 버리고, 일반용과 전문가용이라는 구분을 달고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문서 작성 기능만 갖추고 있던 한/글 1.52와는 달리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 출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기능들을 추가시켰다. * 1포인트부터 127포인트까지의 글꼴 가변 크기 조정 기능<ref>한/글 1.53D까지는 14포인트로 확대하는 게 글자 크기 확대의 전부였다.</ref> * 자간<ref>글자간의 간격 조정 기능</ref>, 장평<ref>글자의 장(가로)와 평(세로) 비율을 조정하는 기능</ref>, 가변 조정 기능 및 문단 모양 편집 지원 * 글꼴과 문단 모양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스타일 지정/적용 기능 * 한/글 2.0 전문용에서 비트맵 [[글꼴]]<ref>글자를 점 단위로 구성하는 글꼴. 명조, 고딕, 샘물, 필기가 이에 해당한다.</ref>과 윤곽선 글꼴<ref>수학적인 계산으로 글자를 구성한다. 확대해도 선명하며, [[신명조]]가 대표적 윤곽선 글꼴이다.</ref>을 모두 지원 * 전문용에서 추가 확장팩을 통해 2수준 확장한자(4888자+1만여 자) 지원 * [[수식]] 편집 기능 * 표를 작성하고 편집하는 기능, 다단 편집 기능, 글상자, 그림 등의 틀 자유 배치 기능 * 한글 [[맞춤법]] 검사 기능 *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도움말 개선 * [[메모리]] 관리 방식의 변화로 최대 편집 쪽수의 증가 * [[마우스]] 지원 이 기능들은 [[IBM]] [[개인용 컴퓨터|PC]]에서 한글을 지원하는 워드프로세서로서는 한/글 2.0이 최초로 구현한 기능들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추가한 2.0버전의 출시로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최고의 스타로서 한글과컴퓨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의 추가로 인해 디스켓의 장수도 이전 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하드 디스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전문가용 버전은 XT 컴퓨터에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업그레이드 수요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묵향 등 한/글용 외부 글꼴 패키지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글이 인기를 끌면서 IBM PC용 한글 글꼴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타자기]] 출력물과 별 차이 없는 품질로 전자 출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글 옛 버전과 달리, 수식 편집, 인화지 출력<ref>[[잉크젯 프린터]] 출력</ref>, 편집 가능 쪽수 확대, 윤곽선 글꼴, 다단 편집 등으로 기능을 강화한 한/글 2.0의 등장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간이 전자 출판이 IBM PC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수식 기능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수학 교재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 1993년 2.1 출시 ===== [[1993년]] 9월 한/글 2.1 버전이 출시되었으며, 전문가용, 일반용, 수검용<ref>과거 [[도스]] 시절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 실기 시험용으로 쓰인 한/글 2.1</ref>, 꼬마 등으로 구분되었다. ====== 특징 ====== * [[80386]] 프로세서용 32비트 코드로 제작 (전문가용) *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직관화 * 문서 압축 저장 기능 * [[글꼴]]을 그리는 알고리즘을 개선, 글꼴의 추가 및 삭제 관리 지원 * [[가상메모리]]를 사용, 편집 매수 제한이 100여 쪽에서 500쪽으로 늘어남 (전문가용) * 전문용에서 컬러 인쇄 및 1200 DPI [[인화지]] 출력을 지원함으로써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출판]]의 가능성을 제시 * 출력에 필수적인 포스트스크립트(PS) 호환용 로마자 글꼴<ref>포스트스크립트 서체는 서체 박스에 서체가 있어야 출력이 가능한 서체를 말한다.</ref>, 샘체, 안상수체, 휴먼고딕 등 휴먼컴퓨터사 글꼴 기본 제공 (전문가용) 이외에도 세세한 개선점들이 많았다. ==== 멀티미디어와 윈도 환경의 보편화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992년 4월 개발된 [[윈도우 3.1]]을 다음해인 1993년 6월 한글 [[윈도우 3.1]]로 내놓으면서 멀티미디어 PC/홈 PC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멀티미디어 PC의 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윈도우 3.1]]의 대대적인 보급이 한/글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글이 갓 2.1판을 출시하고 도스용 2.5판 개발에 들어갔을 즈음, 한글 [[윈도우 3.1]]에서 동작하는 즉,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의 장점을 살린 여러 가지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워드 프로세서)|파피루스]], 금성소프트의 윈워드,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워드]] 5.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소프트웨어)|훈민정음]],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워드 프로세서)|아리랑]],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등이 등장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3.0b 윈도용이 등장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업체들은 이미 [[윈도우 3.1]]용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한/글에서 불가능한 멀티태스킹(다중 작업), OLE(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든 개체의 삽입 수정), 3차원 글꼴 다듬기(글맵시/워드아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트루타입]] 글꼴(화면의 글꼴 모양과 인쇄한 글꼴 모양이 동일한 서체)<ref>{{웹 인용 |url=http://vepachoi.gsnd.net/windo603.html# |제목=트루아트에 대한 설명 |확인날짜=2007-10-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0716050834/http://vepachoi.gsnd.net/windo603.html# |보존날짜=2004-07-16 |url-status=dead }}</ref> 호환, 9개까지의 다중 문서 편집(한/글은 그때까지 2개의 문서만 동시에 열 수 있었음)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나름대로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즈음, 한글과컴퓨터는 여전히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5를 개발하면서 시간을 천천히 끌어갔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 한/글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속도나 안정성 측면에서 부족했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3.1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 한/글 2.5 ~ 3.0b ==== ===== 1994년 2.5 발표 ===== [[파일:Hangul word processor 2.5.jpg|300px|섬네일|한글 2.5의 구성품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94년]] SEK 전시회에서 한/글 2.5가 발표됐다. * 덧실행(add-on) 프로그램 지원<ref>한/글 사용시 같이 사용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ref> * 신명시스템, 태시스템 등의 추가 글꼴 및 프라임 영한 사전을 제공하는 확장팩 출시 * 인쇄 속도 개선 및 모아찍기<ref>2장 이상의 문서를 한 장의 문서에 축소 인쇄하는 기능. 현재는 인쇄 메뉴에서 ‘2쪽에 모아 찍기’나 ‘4쪽에 모아 찍기’ 옵션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개선되었으며, 최대 16쪽까지 가능하다.</ref>, 나눠 찍기<ref>인쇄할 문서가 많은 경우 분량을 나누어서 인쇄하는 기능이다.</ref> 등의 변형 인쇄 기능 지원 * 글꼴 미리보기 기능 지원 * 수식 및 확장 한자 윤곽선 글꼴 지원 * [[불법 복제]] 방지용 락을 제거<ref>[[테크니컬라이터]] [[탁연상]]씨가 월간《한글과 컴퓨터》[[1994년]] 10월호에 기고한 기사</ref> * 신명조를 기본글꼴로 사용함. 2.5판부터는 전문용/일반용 구분이 없어진 대신 2.1 전문용을 업그레이드 한 2.5 기본판이 12만원에 판매되면서 가격을 50% 정도 인하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사용자를 위해 한/글 2.5 구입자들에게는 윈도용 한/글 3.0 무료 교환쿠폰이 제공되었다. 또한 [[서울 1000년 타임캡슐|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한/글 2.5가 포함되었다. 한/글은 2.0 버전 이후부터 미국의 [[워드퍼펙트]]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능의 구현이나, 조판 방식 등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출시 전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가졌던 [[워드프로세서]]인 워드퍼펙트와의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윈도용 한/글 3.0이 몇 달 뒤 출시되었다. ===== 1995년 3.0 발표 ===== [[파일:한글 3.0 CD.jpg|섬네일|한글 3.0 도스용]] ====== 모습 ====== 한/글 3.0판 윈도용이 [[1995년]] 3월 출시되었다. 윈도용 한/글의 첫 출시는 윈도우 95 출시와 함께 그 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윈도용 한/글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운영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 인터페이스, 독립 입출력 방식을 채택하였다. 윈도용 한/글 3.0은 윈도 3.1의 기본 프로그램 모양을 따르지 않고, 넥스트스텝과 윈도우 95의 인터페이스를 혼합한 형태의 프로그램 모양을 선보였다. ====== 한컴2바이트코드 ====== 또한 완성형 한글 코드만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입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도스]]용 한/글의 입력 체계, 즉 조합형 한글 코드를 변형한 [[한컴 2바이트 코드]]를 사용으로써, 11,172자 현대 [[한글]]은 물론 [[옛 한글]]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조합형 한글 체계를 통한 한글의 완전한 표현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한/글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도스용 한/글의 글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단축키도 도스용 한/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도스용 한/글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기존 도스용 한/글의 문서를 아무런 손상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 좋은 점과 나쁜 점 ====== 이렇게 기존 도스용 한/글의 커널을 그대로 윈도용으로 컨버전한 한/글 3.0은 도스용 한/글의 장점 위에 멀티태스킹, OLE 기능, 윈도용 글꼴 및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 글맵시 기능 등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서 꼭 필요한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도스용 한/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글 3.0에는 버그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32비트 코드로 작성된 한/글 3.0이 16비트 운영체제인 윈도 3.1에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Win32s]] 런타임이 불안정했기 때문으로, [[패치]] 버전인 한/글 3.0a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윈도우 95가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여전히 많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 가격 ====== 가격은 기본팩이 12만원으로 책정되어 2.5와 동일했으며, 2.5의 확장팩 내용을 담은 추가 CD가 4만원의 가격으로 추가 인하되었다. ===== 마지막 도스용 한/글인 한/글 3.0 발표 ===== 그리고 도스용 한/글의 마지막 버전인 한/글 3.0이 [[1995년]] 6월 출시되었다. 한/글 3.0 도스용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 윈도용 한/글 3.0에서 저장한 파일 열기 지원(단, 글맵시 등은 불러오지 못함) * 인터페이스 개선 및 도구 상자 추가 * 한/영 자동 변환 기능 및 빠른 교정 기능 * 문서 내 하이퍼 링크(하이퍼텍스트) 기능 * 덧실행 기능이 더 강화되어 [[PC통신]] 에뮬레이터, 공학용 계산기, CD 플레이어 등을 한/글 내부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함. * 수채화라는 그래픽 편집/드로잉 프로그램을 도스용 한/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번들로 제공 * 타자 연습 프로그램 제공 가격은 기본팩 + CD-ROM이 12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되었으며, 개정판인 한글 3.01 도스용은 한/글 오피스 96에 포함되었다. ===== 3.0b 발표 ===== ====== 윈도우 환경으로 이전 ======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된 뒤 [[1995년]] 11월 한글 [[윈도우 95]]가 출시된 직후, 도스용 한/글 3.0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최초의 윈도 버전인 3.0b가 출시되었다. 기본 내용은 도스용 한/글 3.0과 동일하지만 윈도우 95에서도 실행이 가능해졌고, 여러 가지 버그가 수정되었으며,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이 추가되었다. 윈도 3.1에서의 한/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윈도우 95에서는 대부분 해결됨으로써 이 때를 기점으로 한/글이 윈도우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글 3.0b가 대중적인 성공을 얻고 난 후, 한/글은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 완전히 성격을 탈바꿈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6년 출시할 예정이었던 한/글 4.0(가칭) 도스용 개발을 취소하고, 더 이상의 도스용 버전 개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3.0b는 프로그램이 실행되면 가상 도스창이 열린 것처럼 상단 메뉴와 팝업창이 DOS용 제품과 거의 동일한 프로그램이 윈도우에서 열렸다. 당시 사용자들은 DOS환경을 켜서 실행시켜야 하는 복잡한 운영체제였던 [[윈도우 3.1x]]보다 눈과 손에 익어 상대적으로 단순한 DOS환경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였기에, 이 무늬만 윈도우용 같던 제품이 [[윈도우 95]] 기반에서는 후속 제품인 한/글 96 제품을 누르고 대세가 되어 [[윈도우 98]]이 대중화될 때까지 시장에서 계속 주력 제품이 된다. 윈도우 95보다 기술적으로는 불완전한 [[다중작업|멀티테스킹]] 환경이던 윈도우 3.1x였으나, 3.0b제품 자체는 상당히 안정적이어서 도스용보다 사용하기에 불안하다는 제품은 아니었으며, 단순히 3.0b를 사용하기 위해서 윈도우 3.1x를 윈도우 95로 바꾸는 사례는 없었다. 공공 분야에도 DOS용 [[하나 워드프로세서|하나워드]]를 대체하는 행정 업무용 워드 프로그램으로 광범위하게 보급된다. ====== 유닉스 기반으로 제품 출시 ======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으로 분류되는 [[IRIX]] 등에 몇가지 [[유닉스]] 기반 한/글 제품이 [[미지리서치]]에서 출시된다. [[X 윈도 시스템|X윈도우]]의 X마크와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한/글 마크가 등장하며 윈도우용 제품과 차별화된 한/글 표기가 미지리서치의 웹사이트에서 제품 설명과 제품명에서 등장하여 폭넓게 사용된다. 제품 설명 사진도 [[솔라리스 (운영 체제)|솔라리스]] [[공통 데스크톱 환경|CDE]]환경에서 실행되는 모습이었다. 제품 설명은 솔라리스가 대부분이었으나 저렴함이 강점이던 리눅스용 제품이 제일 마지막으로 추가된다. 실행 환경이 컴퓨팅 능력은 월등한 고가의 워크스테이션이거나 서버 환경으로 완전히 다르다 보니, 윈도우용 제품만을 공급하던 한글과 컴퓨터 웹사이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기술적 이질감을 풍기는 미지리서치만의 제품 웹페이지였다. 최초 제품은 한글 3.0b제품이 [[:en:Virtual DOS machine|DOS에뮬레이터]] 기반은 아니지만 X윈도우 윈도우창 내에서 [[MS-DOS]] 응용 프로그램처럼 실행되는 윈도우용 제품과 메뉴 모양과 팝업 창, hwp파일 등에 모든 것이 완전히 동일한 형태였다. 윈도우 제품에서와 같이 역시나 [[모티프 (위젯_툴킷)|모티프]] 기반으로 만들어진 그래픽 환경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느낌이었다. 윈도우 제품과 동일한 인쇄 창에서 출력 명령을 내리면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에서처럼 프린터 대기열이 아닌 유닉스 프린터 디바이스로 출력물이 전달되었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공략과 한/글 오피스 ==== 윈도우 95 출시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국내 기업체 공략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널리 쓰였던 [[로터스 1-2-3]]와 [[워드퍼펙트]]를 1990년부터 이겨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95 버전까지만 해도 한글판의 불완전한 번역과 잦은 버그, 한/글 문서와의 비호환 문제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7 버전에서부터 VBA를 이용한 특유의 확장성, 네트워크를 통한 다중 사용자의 작업 공유 기능, 강화된 도움말, 다량의 클립아트와 글꼴 번들, 여러 가지 사용자 편의 기능,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의 강화, 전 세계 문서 호환,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엑셀]],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파워포인트]]와의 통합 등을 앞세워 점차 기업체를 중심으로 사용자 수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훈민정음 등도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미처 기업 시장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던 한글과컴퓨터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한글과컴퓨터도 한/글을 기반으로 한컴 오피스 스위트(Haancom Office Suite)를 출시했는데, 이 첫 주자는 한/글 3.0b의 초기판에 저가로 번들(한/글 3.0b 구입자에 한해 3만원의 가격에 판매)된 윈도용 [[로터스 1-2-3]](스프레드시트)와 프리랜스 그래픽스(프레젠테이션 소프트웨어)였다. 물론 서로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패키지만 통합한 것인 만큼, 호환성에 약간에 문제가 있었고, 로터스 1-2-3, 프리랜스 그래픽스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버린 제품들이라 그 파급력이 덜했지만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 한/글 96의 출시와 한글과컴퓨터의 부진 ==== ===== 한/글 프로 96 =====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6년 7월에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의 통합패키지로 선보인 한/글 프로 96과 한/글 오피스 96이 출시되었다. 한/글 프로 96은 기본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인터넷]]문서 편집,문서모음집인 문서마당 등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96을 기반으로, 주소록, 타자연습, 폼프로세서 틀마름이, 팩스 프로그램, 메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틸리티]]를 추가한 종합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한/글 오피스 96에는 이전에 선보였던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의 업그레이드 판이 포함되었다. ===== 한/글 오피스 96 ===== 하지만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과는 달리 기업체 판매를 목적으로 출시된 한/글 오피스 96은 포함된 로터스 1-2-3 5.0과 프리랜스 그래픽스 프로그램의 기능 미비로 인해, MS 오피스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로터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한/글 96간의 인터페이스 차이도 이용자의 불만을 샀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도 개인용 시장의 포화와 심각한 [[불법 복제]] 등의 영향으로 이전 수준의 성공을 거뒀을 뿐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되었다. 한/글을 제외하면 한/그림(그림 그리기), 한/아름, 한/맥 등 출시한 여러 제품이 모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진출한 인터넷 시장에서도 [[검색 엔진]]인 [[심마니]]를 빼고 별다른 실적을 낳지 못했다. ===== 완성도 ===== 한/글 96이 윈도우 95가 사용되던 시점에서는 일부 PC에서 아주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타이핑 중일 때 등에 상황에서 오류 메시지 조차 없이 갑자기 워드 프로세서 실행창이 닫히며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윈도우 95 관련 심각한 결함이 알려져서 이전 제품인 3.0b로 교체되며 확산이 번번히 저지되고, 윈도우 98SE 보급 시점에야 뒤늦게 비슷한 외관 때문에 한/글 97과 혼동되며 한동안 사용된다. 하지만 한/글 96은 프로그램 설치자와 프로그램 사용자 모두가 제품명을 정확히 확인하기 전에는 한/글 97로 많이 착각하고 사용하는 한/글 97처럼 쓰던 대용품이었다. 사용중에 한/글 96이라는 제품명이 확인되면 바로 삭제되고 한/글 97이 설치되고는 하였다. ==== 한/글 97 ==== [[파일:한글_97_CD.jpg|섬네일|250px|한/글 97 설치 CD]] ===== 출시 ===== [[1996년]] 11월에는 [[한/글 96]]을 기반으로 [[중국어]], [[일본어]] 인터페이스 및 다국어 입력기를 채용한 한/글 국제판과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한 한/글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한/글 97을 탑재한 [[한컴홈 97]]과 [[한컴 오피스 97]]이 출시되었으나,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한컴에서는 한컴오피스 97을 [[대학생]]들을 위한 아카데믹 버전으로도 출시하는 등 사용자의 구매력에 맞추는 방식의 [[영업]]을 사용하였다. DOS용 워드프로세서 제품을 윈도우용으로 변경하여 출시한 제품으로 윈도우 기반으로 바꾸는데만 100억원이 개발비로 들었다고 유명하였다. ===== 한/글 8.15 ===== [[파일:한글 815 특별판 CD.jpg|섬네일|한컴오피스 한글97 815 특별판]] [[1998년]] 6월에는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한/글 소스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기고, 더 이상의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하는 양해 각서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체결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용자의 반대 여론에 부딪친 한글과컴퓨터는 이 계약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한글지키기운동본부로부터 {{출처|날짜=2021-08-08|100억원 투자 유치를 받아 한/소프트 회원유치운동과 함께 한/글 815버전을 출시했다.}}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은 회사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지오이월드 대표이사였던 전하진이 신임 대표 이사로 선임되었다. [[MBC 뉴스데스크]] 취재에 따르면, 한/글 97 8.15 국제판에는 그리기 마당에 [[태극기|태극 문양]]과 [[지도]]를 빠져서, [[오류 (논리학)|오류]]가 발생되었다.<ref>[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2004995_30723.html 한글 815 태극문양 전도, 지도 등 오류], 〈MBC 뉴스데스크〉 1998년 9월 14일 작성.</ref> ===== 완성도 ===== 한/글 97은 '실행 취소' 기능이 매우 취약했지만 역대 윈도용 한/글 시리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으며, 가장 높은 보급율을 보여준 제품이었다. 또한 [[매킨토시]]용으로도 개발되어 맥사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자 출판]] 종사자가 [[개인용 컴퓨터|PC]]에서 작성된 원고 내용을 [[한/글 97]]로 작업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ref>그 이전에는 PC에서 작업한 문서를 읽으려면 텍스트 파일을 맥용 텍스트 파일 작성기인 Simple Text를 띄우거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인 [[쿼크익스프레스]]의 텍스트 불러오기 기능(pc용은 ctrl키와 e를, 맥용은 코맨드키와 e를 같이 누르면 됨)으로 확인해야 했다.</ref> 한/글 97은 [[출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그 예로 출판기획자 모민원씨는 《너희가 한/글 97을 아느냐?》(혜지원)을 초보자편과 활용편으로 출판하였다. 활용편에서는 [[편지|편지지]], [[단행본]], [[생활정보지]], [[일기예보]](한/글 97의 도형기능 사용), [[잡지]] 만들기 등을 소개했다. 윈도우 95가 사용되던 시점에서는 일부 PC에서 아주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타이핑 중일 때 등에 상황에서 오류 메시지 조차 없이 갑자기 워드 프로세서 실행창이 닫히며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윈도우 95 관련 심각한 결함이 알려져서 이전 제품인 3.0b로 교체되며 확산이 번번히 저지되고, 윈도우 98SE 보급 시점에야 뒤늦게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한/글 97과 매우 비슷한 외관의 한/글 96 제품부터의 악명도 한몫하였다. 그리고 [[윈도우 XP]] 사용이 아주 저변화되고도 얼마후에야 점차 워디안이 아닌 후속 제품으로 한/글 97은 교체되게 된다. 후속 제품인 워디안에 관한 시장의 냉대로 인터넷 시대가 막 도래하던 시기에 토종 제품으로써 충성스런 고객들을 확보한 마지막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운영체제 단축키, 메뉴와 구분이 안되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구별되는, 과거 도스용 이전 한/글 제품의 답습이었으나 완전히 워드 작업 자체에만 최적화된 단축키와 메뉴 구성이었다. 메뉴 색상톤은 DOS제품때와 동일한 색상이었다. 편집 화면은 완전한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이었으나 메모장 같은 텍스트를 편집하는 느낌이 아닌 그림판 같은 인쇄물 자체를 편집하는 사용감을 3.0b버젼처럼 약간은 예전 DOS버젼 같이 잘 구현해 내었다. ===== 워디안과의 호환성 문제 ===== 후속 제품인 워디안이 출시되었는데도 한/글 97과의 호환성 문제와 커다란 인터페이스의 변화로 인해 한/글이 가지고 있던 독창적인 요소들을 상당수 잃게 되어 사용자로 하여금 한/글 97에서 신버전으로 교체를 꺼리게 하였고, 한/글 97 사용자들이 상위 버전인 워디안의 문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한/글 97 사용자를 위해 상위 버전의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무리한 변화와 호환 불능은 그 이전의 한/글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한/글 2.1과 한/글 2.5는 그리고 한/글 2.5과 한/글 3.0(도스용)는 인터페이스가 바뀌지 않아서 새로운 버전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윈도용 한/글 96문서를 글맵시등의 윈도 고유의 기능을 빼고는 한/글 3.0에서 읽었으므로 정보를 쉽게 주고받았다. ===== 리눅스 ===== 한/글 국제판을 통합한 한/글 97 기능 강화판도 출시되었고 한/글 815 버전 구입자들에게는 정가 19,800원, 처음 사용자에게는 60,000원에 판매되었다. 또한 리눅스 개발 업체인 [[미지리서치]]에서는 한/글 96을 리눅스용으로 포팅한 [[모티프 (위젯_툴킷)|모티프]] 기반으로 제작한 한/글 for X R4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참고|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환율과 외채}} 다양한 유닉스 운영체제 별로 제품이 공급되지 않고 리눅스용 제품만 출시한다. 다른 유닉스 운영체제에서도 충분히 실행 가능한 X윈도우 기술이 적용되었으나 리눅스 실행 파일만 포함한 rpm파일만 제공되었다. [[데비안]] 배포본에서도 무리없이 설치가 가능하였다. ===== 기능 ===== 한/글 97에서 제공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ref>《너희가 한/글 97을 아느냐》활용편/모민원 지음/도서출판 혜지원</ref> * [[한글 맞춤법]] 검사 기능 강화: 한/글 97에서는 맞춤법에 어긋나는 문장이나 단어에 붉은 밑줄이 그어지게 하여, 맞춤법 기능을 강화하였다. * 손가락 아이콘을 사용한 기능 구분: 한/글 97에서는 대화 상자에서 기본 기능과 세부 기능을 모두 접기와 펴기 아이콘으로 구분하였다. 손가락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면 세부 기능이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 표 도구 모음 기능: 한/글 97에서는 도구 모음으로 표작성과 편집을 하도록 기능을 추가하였다. === 2000년대 === ==== 한/글 워디안 ==== 2000년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1 이후, 한/글 97까지는 커널 기반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파일의 호환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사용법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글 워디안은 모든 소스 코드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이전 버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한/글 97의 소스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 한글과컴퓨터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출처|날짜=2008-05-07}}). 한/글 워디안은 256단계의 다단계 되돌리기/반복(실행 취소) 기능을 지원하고, 변형 다단 편집<ref>각 문장별로 단수를 다르게 편집하는 기능을 말한다.</ref>, 표 서식 기능 강화, 엣센스 영한사전과 표준 국어 대사전을 삽입하는 등 커다란 개선 사항이 있었지만, 워디안에서 작성한 문서를 이전 버전에서 읽을 수 없는 문제<ref>워디안에서는 한/글 97 문서로 변환하는 기능이 제공되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내부 구조가 완전히 바뀌자 확장자를 바꾼 것과 달리 확장자가 이전 버전과 같아(*.hwp) 많은 혼란을 일으켰으며([[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이 당시 이전에 내부 구조를 바꾸고 확장자를 바꿨다면 '''한/글 워디안'''도 확장자를 바꿨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변형 다단 편집된 문서를 한/글 97로 변환하면 2단으로 바뀌는 등 한계가 있었다.</ref>, 이전 버전의 문서를 워디안에서 본래대로 읽을 수 없는 문제, 프로그램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었고, 바뀐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못한 사용자들이 여전히 한/글 97을 계속 사용하면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존 제품과는 많이 달라진 단축키였다. 그리고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나 메모장 제품 마냥 편집창에 글자들의 아랫 부분만 부분적으로 모두 지워져 보이는 기존 사용자들에게 권하기엔 좀 거슬리는 문제가 화면 출력 기능에서 생겨나 있었다. 한글과컴퓨터사에서는 한/글 워디안의 패치파일을 1개월에 1번씩 제공하는 등의 강행군으로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1729 빌드의 서비스 팩을 발표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잠복해 있었다. ==== 한/글 2002 ==== 2001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워디안을 기반으로 이전 버전 파일과의 호환성 문제 및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제품으로 나중에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향상시킨 한/글 2002 SE로 무상 업그레이드되었다. 한/글 2002판은 한/글 워디안 사용자들을 위해 업데이트 다운로드와 정품 CD가 무상 배포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비스타까지 설치/실행 가능하다. 이후 외국계 펀드와 당시 경영진과의 한글과컴퓨터사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한글과컴퓨터는 [[프라임산업개발]]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 한/글 2004 ==== [[XML]] 문서 원과 공개 키 기반 암호화, 스킨, 작업창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다. 한/글 2004와 함께 출시된 한컴오피스 2004는 국산 스프레드시트인 [[넥셀]]과 자체 개발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한컴 슬라이드 2004를 포함함으로써 토종 오피스 스위트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능 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비해 아직 부족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엑셀]],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파워포인트]]와 사용법이 비슷하며, 파일 호환도 가능해 주목을 받았다. ==== 한/글 2005 ==== 협동 작업을 위한 버전 관리 기능, 메모 기능의 추가. [[XML]]로 작성된 한/글 서식과 ODBC의 연동, 표의 가로 세로 대칭 뒤집기, 아랍어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 한/글 2005는 itq 워드와 같은 컴퓨터 문서에 관한자격증 시험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용과 [[리눅스]]용이 함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컴퓨터 공간 용량 문제 때문에 2000년도부터 2011년도 당시에는 2002,2004,"2005",2007버전은 컴퓨터 실기 자격증 표준 소프트웨어로 잘 알려져 있다. ==== 한/글 2006 for 맥 ==== 한/글 2006 for 맥: [[애플|애플컴퓨터코리아]]의 기술 지원으로 [[OS X]]용이 2005년 출시되었다. 기존의 한/글이 가진 기능을 Mac OS X 환경에서 구현하였다. [[트루타입]]과 한/글 전용 글꼴을 지원하며 지원 사양은 OS X 10.3/10.4 이상, 파워PC G4와 G5 (인텔은 로제타 기술로 실행되나, 속도가 느리고 512 MB 이상 [[메모리]]가 필요하다. 한/글 2014 for 맥: 2013년 12월 19일 OS X(10.4) 인텔CPU용으로 출시하였다. 한/글 2010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만들어지고, MAC UI를 충실히 따랐다. ==== 한/글 2007 ==== 선과 도형에 [[앤티에일리어스]]가 적용되었고, 반투명한 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이 향상되었고, 워터마크<ref>문서의 보안 유지를 위해서 반투명한 문자나 그림을 넣는 기능</ref>, 암호화 기능, 세로쓰기, 공인 인증서 암호화 기능, 개체 연결선, 개체 그림자 삽입 등 보안성이 향상되었다. 또한 추가로 ValuePack를 설치하면 다양한 기능과 더불어 PDF 문서를 쉽게 생성할 수 있는 무료 Haansoft PDF 문서 변환 드라이버를 설치할 수 있어 편리한 문서 변환 기능을 제공한다. ==== 한/글 2008 for 리눅스 ==== 한/글 2007을 기반으로 [[리눅스]] 사용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운영체제 특성의 차이로 인해 일부 동작이나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응용 프로그램 간 복사 및 붙이기나 ActiveX 및 윈도용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능은 제한된다. 게다가 문서 인쇄시 인쇄기의 드라이버에 따라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해당 인쇄기의 드라이버가 리눅스용 드라이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의 형태가 .rpm로 되어있기 때문에 rpm군의 패키지를 사용하지 않는 리눅스 배포판(특히 우분투)은 몇 가지 설정을 해야 했다. === 2010년 이후 === {{글 숨김}}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colspan=2 | ! 2010 ! 2014 ! NEO ! 2018 ! 2020 ! 2022 ! 2024 |- ! rowspan=9 | [[데스크톱 컴퓨터|데스크톱]] ! [[Windows 2000]] | {{no|SE 버전 미지원}} | colspan=6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XP]] | {{yes|있음}} | {{partial|SP3만 지원}} | colspan=5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Vista]] | colspan=2 {{yes|있음}} | colspan=5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7]] | colspan=5 {{yes|있음}} | colspan=1 {{partial|SP1만 지원}} | colspan=1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8]] | colspan=5 {{yes|있음}} | colspan=2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8.1]] | colspan=6 {{yes|있음}} | colspan=1 {{no|지원 종료 미지원}} |- ! [[Windows 10]] | colspan=7 {{yes|있음}} |- ! [[Windows 11]] | colspan=7 {{yes|있음}} |- ! [[리눅스]] | colspan=4 {{no|없음}} | colspan=3 {{yes|있음}} |- ! rowspan=2 | [[모바일]] ! [[iOS]] | colspan=2 {{yes|있음}} | colspan=5 {{partial|기종 내장 확인}} |- !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 | colspan=2 {{yes|있음}} | colspan=5 {{partial|기종 내장 확인}} |} {{글 숨김 끝}} ==== 한/글 2010 ==== [[2010년]] [[3월 3일]] 출시된 제품으로<ref>[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0030302010660739006 한컴오피스 2010 정식 출시]</ref> 한/글 2010은 한/글 2007의 차기작으로 리본 메뉴<ref>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도입된 메뉴 방식</ref>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도입하였다. [[오픈도큐먼트|ODF]]문서를 읽어올수 있으며, 저장할 수 있고<ref>한컴오피스 2010 유의사항. hwp 파일을 odf 변환하는 변환기를 사용하여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ref>, MetaBlog API를 한글자체에서 적용하여 한글로 작성한 문서를 블로그로 업로드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기능도 추가되어 있다. 또한 한/글 2007에서 제공하던 Haansoft PDF의 명칭이 회사 이름의 영문 표기법이 바뀜에 따라 Hancom PDF로 바뀌었다. [[2010년]] [[6월 29일]] HWP 문서의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다. 이로써 ISO 국제 표준 문서 형식인 ODF와 OOXML을 지원과 함께 표준화와 개방성 강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hancom.co.kr/notice.noticeView.do?targetRow=1&notice_seqno=33 한글과컴퓨터<!-- 봇이 따온 제목 -->]</ref> [[2010년]] [[7월 29일]]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2010 기반의 한컴오피스를 볼 수 있는 한컴오피스 뷰어를 출시하였으며, 이 프로그램은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다.<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729000412 헤럴드경제-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또한 [[옛 한글]] 표현 방식으로 2008까지 써 오던 한양 PUA 코드를 버리고, 유니코드 표준인 첫가끝 코드를 사용한다. 시스템 내용 구성이 이전 2000 시리즈하고는 완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으로 구성을 했다.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었는데 차트에다가 복잡한 선을 그리는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어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공부 학생들한테 많은 비난을 샀다. 다만, 그림에 복잡한 선을 집어넣는 기능은 남아 있다. 아직까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아래아 한글 현역를 쓰고 있다. ==== 한/글 2014 ==== [[2013년]] [[10월 10일]]에 한컴 오피스 2014가 출시되었다. .hwpx 파일을 첫 적용하고 윈도우 8용 터치 인터페이스 지원이 특징적이다. ==== 한/글 NEO ==== [[2016년]] [[1월 26일]]에 한컴 오피스 NEO가 출시되었다. 지원하는 파일 형식이 많아졌다는게 특징이다. '''2016'''이라는 연도 표시가 나오지 않으며, '''NEO'''로 대체하였다. ==== 한/글 2018 ==== 2017년 11월 2일에 한컴오피스 2018이 출시되었다. ==== 한/글 2020 ==== 2019년 10월 10일에 한컴오피스 2020이 출시되었다. ==== 한/글 2022 ==== 2021년 10월 8일에 한컴오피스 2022(버전 12.0)가 출시되었다. ==== 한/글 2024 ==== 2023년 10월 12일에 한컴오피스 2024를 출시했다. == 한글뷰어 == [[한글과컴퓨터]](한컴)에서는 2010년도를 전후해 이후 지속적으로 꾸준히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윈도우]], [[매킨토시|맥]], [[리눅스]]([[페도라 (운영 체제)|페도라]], [[우분투 (운영 체제)|우분투]]),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 [[아이폰]]등 다양한 컴퓨터및 스마트폰등의 운영체제에서 한글을 열어볼 수 있는 한글뷰어를 무료로 제공해오고 있다.<ref>[https://www.hancom.com/cs_center/csDownload.do 한컴오피스뷰어 다운로드]</ref> 한편 한글과 컴퓨터는 한/글 뷰어에서 전자문서인 [[PDF]]파일이나 [[SVG]]형식 [[포스트스크립트]] 등의 [[파일 형식]]으로의 인쇄출력을 지원해주고있다. == 관련 제품 == === 한/글 815 === 8·15광복을 기념하여 출시된 제품이다. 한/글 97에 기반한(R4) 제품으로, 제품이 담긴 CD와 함께 1년간의 사용권을 판매하였다. 이 제품에 포함된 한/글 97은 표 아이콘을 제공하는 등의 개선점이 있고 한/글 96 기반의 국제판도 함께 포함되었다. === 넷 한/글 === 매달 사용료(개인 월 2,500원)를 내고 인터넷에서 인증을 받아 사용하는 한/글 제품이다. 한/글 2002 SE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전, 클립아트, 일부 글꼴 데이터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이용할 수 있고, 원격 저장소(10MB)도 제공하였다. === 다큐맨 ===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 작은 한/글 프로그램을 내장하여 USB를 연결할 수 있는 어느 PC에서나 한/글 작업이 가능하게 만든 제품이다. === 한/셀 === {{참고|한컴 오피스}} 넥스소프트 사가 개발한 스프레드시트 제품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비슷한 인터페이스와 사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한글과컴퓨터에 '''넥셀'''을 매각하였다. 엑셀의 일부 고급기능이 없는 대신 저가로 공급되어, 중소기업 등을 대상으로 인기를 끈 제품으로 현재 [[한컴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판매되고 있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넥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 '''한/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 한/쇼 === {{참고|한컴 오피스}} 한/쇼는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한 기능을 지닌 프레젠테이션 제품으로 한컴오피스 제품군의 하나이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한컴 슬라이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 장점 == === 다양한 기능 === ==== 책 만들기 ==== 다른 한글과컴퓨터 제품처럼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같은 외국 [[소프트웨어]]의 훌륭한 대체품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한/글로 워드 프로세싱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부 출판 기획자는 미적 감각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 위주의 [[전자 출판]]이나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 교재 편집 등에 활용하고 있다. 그 실례로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은 모민원 씨, 위형복 씨등의 고급 사용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한글과컴퓨터|한컴]]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는 한/글 2.1을 이용한 [[악보]] 만들기,문서 클리닉등의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 노하우들이 독자 기고등으로 실려서 출판 기획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 외래어 ==== 한/글은 [[일본어]], [[노르웨이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그리스어]](헬라어), [[독일어]] 등의 [[외래어]]를 쓸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인 [[정체자]], [[중국어]] [[간체자]] 및 [[번체자]], 일본 [[한자]] 및 [[가나 (문자)|가나]]<ref>일본어를 읽고 쓸 수 있다면, [[로마자]]로 [[가나 (문자)|가나]]를 입력할 수 있다.</ref> 뿐만 아니라 [[구결]] 및 [[옛 한글]](한양 사용자 정의) 지원 [[글꼴]]과 같이 배포한다. 또한 한/글에서는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말인 [[헬라어]]를 [[로마자]]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 연구를 위해 헬라어를 사용해야 하는 [[성서학자]], [[신학]]생, [[기독교]] [[성직자]], 신학서적 기획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 간이 전자 출판 === 한/글은 사용자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급 사용자들은 한/글을 이용하여 단순한 전자 출판을 하기도 한다. 한/글을 이용하면 적절한 [[전자출판]] 항목으로는 1.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교재 2. 각주와 표가 많이 들어가는 논문 3. [[교회]] [[주보]], [[소식지]]처럼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표와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문서 4. [[일본어]] [[가나]], [[헬라어]] 등을 빠르게 입력해야 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외국어나 [[성서]] 교재등이 있다. ==== 책 만드는데 유용한 기능들 ==== 한/글은 스타일 기능 제공, 반복되는 [[글자]]나 [[그림]]을 넣을 수 있는 바탕쪽, 간단한 [[도형]]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 바탕쪽 기능은 한 개의 파일 내에서 페이지마다 들어가는 글자와 그림을 각 페이지마다 다르게 넣을 수 있는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페이지마다 들어가야 하는 글자나 그림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의 마스터 기능과 거의 비슷하다. 그외 자간, 행간 조절, 그림 위치 조정, [[한글]], [[로마자]], [[숫자]]와 특수 문자에 맞춘 다른 글꼴 사용 및 자간 조절 등 간이 전자 출판에 필요한 기능들을 한/글에서는 세심하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글은 한글글꼴인 윤명조, 영문은 영문서체인 Garamond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글의 [[맞춤법]] 기능은 교정/교열의 수고를 일부 덜어준다. 물론 한/글의 맞춤법은 오자(誤字)를 고치는 수준의 기계적 맞춤법 기능이므로, [[편집자]]는 원고를 인쇄하여 여러 번에 걸친 교정교열을 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글은 문서 작성을 위해 개발된 워드프로세서이기 때문에, [[북 디자인]], 카드, [[달력]], 편지지 등의 [[팬시]](Fancy) 디자인에는 [[쿼크 익스프레스]], [[인디자인]]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가 더 적합하다. ==== 공공기관에서 널리 사용 ==== 한/글은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인 [[우체국]]에서 문서작성과 표계산을 할 때에 한/글과 한/셀을 사용한다. ====== 옛한글 사용 ====== 한/글의 강점은 옛한글을 한글자판을 옛한글 자판<ref>{{키눌림|Alt|F2}}를 누르면 다양한 언어로 변환 가능</ref>을 설정하면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옛한글로 쓴 중세국어 문서([[훈민정음]], [[석보상절]], [[두시언해]], [[노걸대]], [[훈민정음 언해]], [[조선 전기의 문학|악장가사]]인 [[용비어천가]] 등의 고전시가), [[고전소설]]과 [[근대소설]] 사이를 잇는 [[신소설]] 등을 연구하는 [[한국 문학|국어국문학자]] 및 학생들의 학문에 도움이 된다. == 단점 == === 호환성 문제 === 비록 HWP 형식이 한국 내부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DOC]], [[PDF]]<ref>Portable Document File, 어도비 사에서 개발한 문서 형식으로 윈도, 맥 OS,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 또는 소프트웨어 구분없이 [[어크로뱃 리더]]로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ref>, RTF 파일 대신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편이지만, 이 프로그램이 한국 밖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HWP 형식의 문서를 읽어들이지 못하며, 여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서의 내용이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글과컴퓨터 뷰어'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또 2010년 6월 29일 한/글 문서 파일형식(hwp)을 공개하였고<ref name="autogenerated1" />, 개방형 문서포맷인 OWPML은 KS에 등록하여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네이버오피스나 MS-WORD에서 HWP파일을 지원한다. 한 때 파일 이름에 컴퓨터의 고유 코드 페이지(한국어 윈도의 경우 [[KS X 1001]])에 없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오류를 표시하고 파일을 읽고 쓸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약자나 속자로 된 한자 이름이 포함된 파일). 이 문제는 한/글 2010 이상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버전 간 호환성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자면 한글 2022에서 wmf 파일을 삽입하고 한글 내부에서 그림 자르기를 한 이미지가 있다면, 다른 버전의 한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이미지가 왜곡되어 깨진 이미지로 보일 것이다. 동일 한글 2022 버전의 패치 상태나 윈도우 OS의 버전, 심지어 32비트인지 64비트인지에 따라서도 이미지 변형이나 잘림이 발생한다. 출력이나 인쇄 시 wmf나 emf, png 등의 그림 이미지에 투명도가 있다면 이미 문제가 생긴다는걸 차치하고 말이다(예전에 작업했던 한글 파일을 최근에 다시 열면 자주 이런 문제를 겪을 것이다). 제대로 지원이 되지 않는다면 해당 파일 형식을 삽입하지 못하도록 하는것도 방법일텐데 이 부분의 대응이 너무 아쉽다. 출력이나 인쇄, pdf 변환 등에서도 역시 문제가 있다. 이미지나 글자 등에 투명도 효과를 주거나 그림자 효과를 준다면 예외 없이 원하는 깔끔한 결과물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ms 오피스 시리즈에도 동일한 에러가 있었지만 현재는 많이 개선된 상태) 클립보드를 이용한 작업에서 사용하는 데이터를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 인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근래에 들어 아래아 한글의 클립보드 데이터 호환성 문제에 많은 진전이 있었고, 아래아 한글 마크업 언어 체계의 정비 등을 통하여 호환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 미흡한 전자 출판 기능 === 한/글은 전자출판 소프트웨어에서 비한다면 인쇄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다.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에서 제공되는 [[CMYK 감산혼합|CMYK]] 색조합 기능,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인쇄 방식에 따라 망점의 개수를 다르게 조정해 주는 망점 조정 기능 등이 한/글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 === 성능 저하 === 한/글은 새로운 판이 출시될 수록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 기타 == === ASV 파일 형식 === ASV는 Auto Save File(자동 저장 파일)의 준말로, 한글 문서 작업 도중에 컴퓨터(혹은 프로그램이)가 갑자기 잘못된 종료가 되었을 경우에 자동으로 저장(백업)이 되는 파일이다. ASV형식의 파일은 잘못된 종료 이후 한/글 최초실행시에 자동으로 로드되며, 로드 즉시 삭제된다. === 3.0b 부록 민중가요 === 3.0b제품은 [[CD-ROM]] 1장으로 설치 프로그램이 제공되었다. CD-ROM은 PC에서 읽고 쓰는 형식이지만 일반 오디오CD 트랙을 PC에서 읽고 쓰는 데이터와 함께 제공할 수가 있었다. 3.0b제품 설치 CD가 그랬는데, PC에서는 CD-ROM으로 인식되었으나 오디오에 오디오CD처럼 넣으면 [[민중가요]]가 한 곡 감상이 가능하였다. 그 곡은 가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였다. == 점유율 == 2014년 기준 대한민국 내 점유율은 20% 정도이다.<ref name="vs"/> 전세계 점유율은 0.4%이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11115587056799|제목=한글과컴퓨터 - 토종 소프트웨어의 역사|성=한규석|이름=|날짜=2018-01-11|뉴스=|출판사=머니투데이|확인날짜=2019-02-23}}</ref> == 수출 == [[일본]]에도 수출한 적 있으나 매출이 좋지 않아 철수했다. == 같이 보기 == * [[한컴 오피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http://www.hancom.com}} {{한컴 오피스}} {{워드 프로세서}} [[분류:한글과컴퓨터]] [[분류:워드 프로세서]] [[분류:도스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소프트웨어]] [[분류: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분류:유닉스 소프트웨어]] [[분류:1989년 소프트웨어]]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4-01-19}} {{케냐 표}} '''케냐 공화국'''({{llang|en|Republic of Kenya|리퍼블릭 오브 케냐}}, {{llang|sw|Jamhuri Ya Kenya|잠후리 야 케냐}}) 또는 '''케냐'''(Kenya, {{문화어|케니아}})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 [[루오족]], [[칼렌진족]], [[캄바족]], [[키시족]], [[메루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백인]], [[인도인]], [[아랍인]] 등 비아프리카계 민족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는 5,221만 4,791명(세계 27위)이다. == 역사 ==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있었다. === 독립 전의 케냐 ===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다.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줘 두 열강 사이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 사태하에 있었다.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이끄는 [[케냐 아프리카 국민연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독립 정부 조직을 주도하게 되었다. === 케냐의 독립 ===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1년 후 케냐타는 [[케냐의 대통령|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인민연맹]](KPU, Kenya People's Union)이 정당 활동을 금지한 1969년 이후로는 KANU가 유일한 정당이었다. === 케냐가 자유화 되기까지 === [[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케냐의 부통령|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선거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해 힘입어 재선되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들했다. 그러나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 무지개 연립]](National Rainbow Coalition, NARC)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를 대표로 내세워 당선시켜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 무지개 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 행정 구역 == [[파일:Map showing Counties underthe new kenyan constitution..gif|섬네일|케냐의 행정 구역]] {{본문|케냐의 행정 구역}} 케냐는 47개의 현({{llang|sw|kaunti}})으로 나누어져 있다. == 지리 == 면적은 224,961 제곱마일, 혹은 582,646 Km<sup>2</sup>이며, 케냐는 마다카스카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6위로 면적이 넓다. 인도양 해변측은 낮은 평지가 있으며 내륙에는 고지대 산맥과 고원이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고지대는 거대한 단층 계곡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 서쪽에는 기름진 고원이 있다. 케냐 고지는 아프리카에서 하나의 가장 성공적인 농업지대이다. 고지에는 케냐의 가장 높은 지대가 있다(또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음) : 또한, 5,199미터인 케냐 산맥은, 빙하적 지형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확연히 다르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케냐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인 [[동아프리카 지구대|케냐 열곡]]에 의해 양분되며 이 [[열곡대]]에 의해 지진이 활발하다.<ref>{{웹 인용|url=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1464343X13001945|제목=The seismicity in Kenya (East Africa) for the period 1906–2010: A review|출판사=ScienceDirect, Journal of African Earth Sciences|날짜=2014년 1월|인용문=Kenya is seismically active since the Kenya rift valley traverses through the country from north to south bisecting the country into eastern and western regions...The Kenya rift valley and the Kavirondo (Nyanza) rift are the most seismically active where earthquakes of local magnitude (Ml) in the order of <2.0–5.0 occur.}}</ref>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 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파일:Mount Kenya.jpg|섬네일|250px|케냐 산]] == 기후 ==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케냐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북반구 나라들과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6-8월은 겨울이다. 그러나 케냐의 겨울은 동북아시아의 겨울과 매우 다른 풍경이다.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날씨 또한 영하로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일교차가 매우 심해 새벽과 밤에는 매우 쌀쌀하게 느껴지며, 낮에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겨울 햇살은 뜨겁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차가워서 땀이 금세 마르고 겨울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기도 많이 없다. 그만큼 날씨가 상대적으로 더 쌀쌀하다는 것이다. 케냐는 적도에 있지만 연평균 기온이 16도이다 == 정치 == 케냐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직접 선거를 통해 뽑는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것은 물론 케냐의 7개 주 중 적어도 5개 주에서 표의 25% 이상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10년 개정된 케냐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효투표의 과반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47개 카운티의 절반 이상에서 최소 25%의 득표를 해야 한다. [[케냐의 부통령|부통령]]과 [[내각 (정치)|내각]]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한다. [[입법부|국회]]를 '''[[붕게]]'''(Bunge)라고 부르며 [[단원제]]를 실시한다. 총 의석 수는 224석이다. == 주민 == 200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키쿠유족(17.15), 루햐족(13.83), 칼렌진족(12.87), 루오족(10.48), 캄바족(10.08), 케냐의 소말리족(6.18), 키시족(5.71), 미지켄다족(5.08), 메루족(4.29) 순으로 나타났다. 이외 백만명 이하인 민족들은 10.98%를 차지했다. == 언어 == 2010년 헌법 7조에는[국민어, 공식어, 기타 언어]는 “(1) 공화국의 국민어는 스와힐리어다. (2) 공화국의 공식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다. (3) 국가는 (a) 케냐 인민의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 보호하며 (b) 토착어, 케냐의 수화, 점자 및 장애인에게 접근가능한 다른 의사소통의 형식과 기술의 발전과 사용을 증진한다.”라고 명시했다. 국민어는 영어(national language)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암암리에 국가어(State language)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이고, 모든 영역에서 하위단계는 스와힐리어, 고위단계에서는 영어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법정의 경우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전용한다. 교육의 경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 스와힐리어가 영어를 누르고 상층부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논자들이 말하는 아프리카비관주의의 일면이다. 케냐는 독립 이후 [[영연방]]의 정회원국이다. == 종교 == 2009년 인구조사(2010년 8월 발간)에 따르면 기독교는 82.99%-그중 [[개신교]](47.66%), [[로마 가톨릭]](23.46%), 기타(11.87%)-, 이슬람교는 11.21%로 나타났다. 이외 극소수의 [[힌두교]]도와 [[정령신앙]]도 있다. == 교육 ==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문맹률]]도 높다. <!-- == 군사 == --> == 경제 ==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인근 국가들과 달리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서방 자본을 유치해 독립 이래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가 부패와 일부 수출품에 대한 의존 때문에 [[대니얼 아랍 모이]] 정부 시절에 경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경제 개혁의 실패로 [[국제 통화 기금|IMF]] 원조가 몇 번 중단되기도 하였다. [[2002년]] 새로 들어선 정부는 부패척결과 외국 원조의 확보에 노력을 치중하고 있으며, 케냐의 경제는 [[농업]]과 [[관광업]]에 의존한다. {{넓은 그림|Nairobi panorama from westlands.jpg|1400px|나이로비|오른쪽}} === 산업 === 주 산업은 의류산업이며 케냐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이다. === 관광업 === 한 해 3,000억 원 이상이 관광업 수입이다. 참고로, 영국 일본 등과 마찬가지로 도로에서 좌측 통행이 시행되는 나라들에 속한다. <!-- === 공업 === --> == 기아문제 ==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 기아 지수|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케냐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1.9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볼 때,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7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아주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목할만한 수준이다.<ref>{{저널 인용|제목=Global Hunger Index-기아가 없는 세상|저널=2016 세계기아지수 보고서|성=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이름=|url=http://www.concern.or.kr/load.asp?subPage=510|날짜=2017-10-13|출판사=|확인날짜=2017-08-1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728160644/http://www.concern.or.kr/load.asp?subPage=510|보존날짜=2017-07-28|url-status=dead}}</ref> == 문화 == 많은 케냐인은 직접 조각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는데 장신구 등도 직접 만들며 또한 모든 작품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재료를 자연에서 채취한다. 또한 케냐는 현재까지도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 [[육상 경기]]의 양대 산맥이자 최대의 라이벌로 불리며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중·장거리 달리기와 [[마라톤]]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킵초게 킵 케이노]], [[새뮤얼 완지루]], [[엘리우드 킵초게]] 등 수많은 마라톤 스타를 배출했으며 그 명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반면 축구는 현재까지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이 전무하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는 6번 출전했지만 그나마도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등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CECAFA컵에서는 7번의 우승과 7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대회는 현재까지 케냐 축구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국제 대회이며 현재 케냐의 유명 축구 선수로는 [[메이저 리그 사커]]의 [[CF 몽레알]]에서 활약 중인 [[빅터 완야마]], [[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알두하일 SC]]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이클 올룽가]] 등이 있다. == 국제 관계 == === [[대한민국]] === 대한민국과는 1964년 2월 7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같은 해 수도 [[나이로비]]에 주케냐 대한민국 대사관이 설립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으며 현재 대한민국과 케냐는 [[대한항공]] 직항편이 운항 중단으로 폐선되면서 주로 중동 지역을 경유해 출입국을 하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 때는 선수단과 일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는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케냐는 사실상 남한의 우방국이므로 지금까지도 북한의 상주 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 주요 인물 == * [[루이스 리키]] (고인류학자) * [[리처드 리키]] (생물학자) * [[대니얼 아랍 모이]] (케냐의 2대 대통령) * [[응구기 와 티옹오]] (케냐의 시인) *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환경운동가, 정치운동가) * [[라일라 오딩가]] (케냐의 현 총리) * [[토머스 음보야]] * [[조모 케냐타]] (케냐의 [[케냐의 대통령|초대 대통령]]) * [[음비유 코이낭게]] * [[음와이 키바키]] (케냐의 3대 대통령) * [[우후루 케냐타]] (케냐의 현 대통령) * [[버락 오바마 시니어]]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 * [[조너선 무취리]] (현 [[테크니온]] 인터네셔널 토목공학 전공 중) * [[빅터 완야마]] ([[메이저 리그 사커]] [[CF 몽레알]] 소속 축구 선수) * [[마이클 올룽가]] ([[카타르 스타스 리그]] [[알두하일 SC]] 소속 축구 선수) * [[엘리우드 킵초게]] (마라톤 선수) * [[켈빈 킵툼]] (마라톤 선수) * [[새뮤얼 완지루]] (전 마라톤 선수)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케냐 === * [http://www.parliament.go.ke 케냐 의회 홈페이지] * {{언어링크|en}} [http://www.tourism.go.ke/ 케냐 관광부] {{웨이백|url=http://www.tourism.go.ke/ |date=20100106111438 }}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100225235516/http://mfa.go.ke/ 케냐 외무부] === 대한민국 === * {{언어링크|ko}} [https://web.archive.org/web/20040407140710/http://www.ilovekenya.com/kor/ 주 대한민국 케냐 명예총영사관] * [https://web.archive.org/web/20090103231857/http://www.mofat.go.kr/ek/ek_a004/ek_keke/ek_02.jsp 주케냐 대한민국 대사관] === 기타 === * {{dmoz|Regional/Africa/Kenya}} * {{언어링크|en}} {{Wikiatlas|Kenya|케냐}} * {{osmrelation-inline|192798}} {{아프리카}} {{영국 연방}} {{아프리카 연합 회원국}}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전거 통제}} [[분류:케냐| ]] [[분류:영국의 옛 식민지]]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영어권]] [[분류:스와힐리어권]] [[분류:아프리카 연합 회원국]] [[분류:영연방 회원국]] [[분류:반투어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한글 맞춤법'''( - 法)은 [[한국어]]의 [[맞춤법]]으로, 맞춤법은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 역사 == 조선 시대에는 [[연철 (한국어)|연철]]이라 하여 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 예를 들면 '잡히다'를 소리나는 대로 '자피다'로 썼다.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말의 원형을 밝혀 쓰는 (잡-히-다) 방식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 분단 이후 ===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분단 직후에도 계속 쓰이다가 도전을 받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안의 표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며 극단적인 형태주의의 [[조선어 신철자법]]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완화되었지만, 아직 북측의 철자법은 남한보다는 형태주의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953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기법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학계의 반대로 그러지 못한 것이다. [[1980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을 내었고, 현재는 문교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에서 [[1988년]] [[1월 19일]] 고시하여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는 규정을 따른다. 1988년 개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한자어에서는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였고(다만 두 음절로 된 6개 한자어만 예외로 사이시옷을 붙이기로 함), "가정란/가정난" 등으로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두음법칙]] 규정을 구체화하면서 "가정란"으로 적도록 하였다. 띄어쓰기 규정에서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씀도 허용하였고, 성과 이름은 붙여 쓰도록 하였다. 수를 표기할 때도 종전에는 십진법 단위로 띄어 쓰던 것을 만 단위로 띄어 쓰도록 하였다. 따라서 123456은 '십이만 삼천사백오십육'이다(종전에는 '십 이만 삼천 사백 오십 육'이라고 썼음). == 현행 맞춤법의 구성== {{위키문헌|대한민국 한글 맞춤법(제2014-39호)}} 한글 맞춤법은 6개의 장, 15개의 절, 57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문장 부호)도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korean.go.kr/front/page/pageView.do?page_id=P000060&mn_id=30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7-02-17 |archive-date=2017-02-2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0223150248/http://www.korean.go.kr/front/page/pageView.do?page_id=P000060&mn_id=30 |url-status=dead }}</ref>. * 제1장: 총칙(總則) * 제2장: 자모(字母) *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 제1절: 된소리 ** 제2절: 구개음화(口蓋音化) ** 제3절: 'ㄷ'소리 받침 ** 제4절: 모음(母音) ** 제5절: 두음 법칙(頭音 法則) ** 제6절: 겹쳐 나는 소리 * 제4장: 형태에 관한 것 ** 제1절: 체언과 조사 ** 제2절: 어간과 어미 ** 제3절: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 ** 제4절: 합성어 및 접두사가 붙은 말 ** 제5절: 준말 * 제5장: 띄어쓰기 ** 제1절: 조사 ** 제2절: 의존 명사,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및 열거하는 말 등 ** 제3절: 보조 용언 ** 제4절: 고유 명사 및 전문 용어 * 제6장: 그 밖의 것 * 부록 === 한글 맞춤법과 조선말규범집의 차이 === * 한글 맞춤법에서는 보조 용언을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인 데 반해, 조선말규범집에서는 붙여 쓴다. * 한글 자모의 명칭과 사전에서의 배열 순서가 서로 다르다. == 같이 보기 == * [[국립국어원]] * [[맞춤법]] * [[띄어쓰기]] * [[문장부호]] * [[표준어]] * [[대한민국 표준어]] * [[표준어 규정]] ** [[표준어 사정 원칙]] ** [[표준 발음법]] * [[외래어 표기법]] * [[로마자 표기법]] *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한국어의 남북간 차이]]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http://kornorms.korean.go.kr/regltn/regltnView.do 한글 맞춤법] {{웨이백|url=http://kornorms.korean.go.kr/regltn/regltnView.do |date=20190831201151 }} * [https://web.archive.org/web/20051213085101/http://yu.ac.kr/~koredu/webzine7/hak3.htm 남, 북한 맞춤법 비교] {{한국어}} [[분류:한국어]] [[분류:한국어 어문 규정]] [[분류:한글 맞춤법|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수학]]에서 '''주기 함수'''(週期函數, {{llang|en|periodic function}})는 함숫값이 일정 주기마다 되풀이되는 [[함수]]이다. 일상적인 예로, 시계 시간은 시간에 대한 함수로서 주기 함수이다. 즉, 시계의 행동은 날마다 똑같다. == 정의 == === 실수 함수 === 0이 아닌 [[실수]] <math>t\in\mathbb R\setminus\{0\}</math> 및 실수 [[부분 집합]] <math>D\subset\mathbb R</math> 및 실수 함수 <math>f\colon D\to\mathbb R</math>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함수 <math>f</math>를 '''주기 함수'''라고 하고, 실수 <math>t</math>를 <math>f</math>의 '''주기'''(週期, {{llang|en|period}})라고 한다. * 임의의 <math>x\in D</math>에 대하여, <math>f(x+t)=f(x)=f(x-t)</math>이다. * <math>\textstyle f=\bigsqcup_{n\in\mathbb Z}T_{nt}(f|_{D\cap I})</math>인 유한 실수 구간 <math>I\subset\mathbb R</math>이 존재한다. 즉, <math>f</math>의 [[함수의 그래프|그래프]]는 그 "유한한" [[함수의 제한|제한]]의 그래프에 대한 거듭된 수평 [[평행 이동]]으로 생성된다. ** 여기서 <math>T_t(g)\colon\operatorname{dom}g+t\to\mathbb R</math>이며, <math>T_t(g)(x+t)=g(x)\ (\forall x\in\operatorname{dom}g)</math>이다. 즉, <math>T_t</math>는 함수의 그래프를 수평 방향으로 <math>t</math>만큼 평행 이동하는 변환이다. 이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 임의의 <math>x\in D</math>에 대하여, <math>x+t,x-t\in D</math>이다. * <math>\textstyle D=\bigsqcup_{n\in\mathbb Z}(D\cap I+nt)</math>인 유한 실수 구간 <math>I\subset\mathbb R</math>이 존재한다. === 기본 주기 === 실수 주기 함수 <math>f\colon D\to\mathbb R</math> 및 실수 <math>T\in\mathbb R</math>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실수 <math>T</math>를 <math>f</math>의 '''기본 주기'''(基本週期, {{llang|en|fundamental period, primitive period}})라고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 <math>T</math>는 양의 최소 주기이다. * <math>\operatorname{prd}f=T\mathbb Z</math>. 즉, <math>f</math>의 주기는 곧 <math>\ldots,-2T,-T,0,T,2T,\ldots</math>이다. == 성질 == 실수 주기 함수 <math>f\colon D\to\mathbb R</math>의 주기와 0의 집합을 <math>\operatorname{prd}f</math>로 적자. 즉, :<math>\operatorname{prd}f=\{t\in\mathbb R\colon f(x+t)=f(x)\}</math> 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덧셈에 대하여 닫혀있다. 다시 말해, * 임의의 <math>t,u\in\operatorname{prd}f</math>에 대하여, <math>t+u,t-u\in\operatorname{prd}f</math>이다. * 특히, 임의의 <math>t\in\operatorname{prd}f</math> 및 <math>n\in\mathbb Z</math>에 대하여, <math>nt\in\operatorname{prd}f</math>이다. 따라서 <math>\operatorname{prd}f</math>는 덧셈에 대한 [[아벨 군]]을 이룬다. === 기본 주기 === 실수 주기 함수 <math>f\colon\mathbb R\to\mathbb R</math>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 <math>f</math>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 * <math>\operatorname{prd}f</math>가 <math>\mathbb R</math>에서 [[조밀 집합]]이다. 만약 주기 함수 <math>f\colon\mathbb R\to\mathbb R</math>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면, 상수 함수이거나, 아니면 모든 곳에서 불연속이다. == 예 == 실수를 그 소수 부분으로 대응시키는 함수 <math>f</math>는 :<math>\cdots = f(-2.9) = f(-1.9) = f(-0.9) = 0.1 = f(0.1) = f(1.1) = f(2.1) = \cdots</math> :<math>\cdots = f(-2.7) = f(-1.7) = f(-0.7) = 0.3 = f(0.3) = f(1.3) = f(2.3) = \cdots</math> 과 같이, 주기 함수이며, 그 기본 주기는 1이다. [[삼각 함수]]는 모두 주기 함수이다. 사인 · 코사인 함수는 <math>2\pi</math>, 탄젠트 함수는 <math>\pi</math>를 기본 주기로 한다. :<math>\sin(x+2\pi)=\sin x</math> :<math>\cos(x+2\pi)=\cos x</math> :<math>\tan(x+\pi)=\tan x</math> [[상수 함수]]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실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디리클레 함수]] :<math>f(x)=\begin{cases}1&x\in\mathbb Q\\0&x\in\mathbb R\setminus\mathbb Q\end{cases}</math> 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유리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 같이 보기 == * [[주파수]] * [[파동]] {{전거 통제}} [[분류:미적분학]] [[분류:초등 수학]] [[분류:푸리에 해석학]] [[분류:함수의 종류]]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도시 정보 | 정식표기 = Nairobi | 이름 = 나이로비 | 한자 = | 나라 = {{국기나라|케냐}} | 행정구역 = [[나이로비 주]] | 지역 = | 위치 = | 방언 = |pushpin_map = Kenya | 지도너비 = 280px | 인구 = 4,397,073 | 인구년도 = 2019 | 인구밀도 = 6,247 | 면적 = 703.9 | 그림 = Nairobi Montage.jpg | 웹사이트 = http://www.nairobicity.go.ke/ | 위치지도 = 케냐 | 위도도 = 1 | 위도분 = 17 | 위도초 = | 남북 = S | 경도도 = 36 | 경도분 = 49 | 경도초 = | 동서 = E }} '''나이로비'''({{llang|sw|Nairobi}})는 [[케냐]]의 [[수도]]이다. '시원한 [[물]]'을 뜻하는 [[마사이]]어 '에와소 니이로비(Ewaso Nyirobi)' 또는 '엥카레나이로비(Enkarenairobi)'에서 현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이로비의 인구는 4,397,073명으로 [[아프리카|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해발 1700m로 이 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899년]] [[몸바사]]와 [[캄팔라]]를 잇는 우간다 철도 건설을 위한 조달 기지로 세워진 것이 유래가 되어 [[20세기]] 초 전염병과 화재 이후 완전히 재건되어 오늘날의 대도시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고 [[1963년]] 케냐의 독립과 함께 케냐의 수도가 되었다. [[1998년]] [[8월 7일]]에는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한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폭탄 테러]]가 발생, 나이로비에서만 213명(미국인 12명 포함)이 사망했다. 미국 대사관이 나이로비 중심지에 있어 인명 피해가 특히 심했다. [[1999년]] [[2월 17일]]에는 [[터키]]의 [[쿠르드]]인 반군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주 나이로비 [[그리스]] 대사관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추방되었다. == 행정 == 나이로비에는 두 개의 [[유엔]] 기구가 소재해 있다. * [[유엔환경계획]](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 UNEP) * [[유엔인간정주센터]](United Nations Centre of Human Settlement, 약칭 Habitat) 대한민국 주케냐대사관은 1964년 나이로비에 설립되었으며 [[아프리카]] 주재 공관 중 가장 역사가 깊다. == 교통 == [[파일:Jomo Kenyatta International Airport.jpg|200px|왼쪽|섬네일|조모 케냐타 국제공항]] 나이로비의 공항은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이다. 예전에 주 공항이었던 [[윌슨 공항]]은 오늘날에는 주로 국내선용으로 쓰인다. 고속도로로는 대표적으로 티카와 나이로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인 [[티카 도로]]가 있다. {{비우기}} == 자연 == 나이로비 시 안에는 특이하게도 야생동물 보호지인 [[나이로비 국립공원]](Nairobi National Park)이 있어서 맹수들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넓은 그림|Nairobi panorama from westlands.jpg|1400px|나이로비|오른쪽}} == 기후 == {{Weather box |location = Nairobi ([[Dagoretti]]) 1961–1990, extremes 1955–1982 and 1984–present |metric first = yes |single line = yes |collapsed = yes |Jan record high C = 29.8 |Feb record high C = 30.5 |Mar record high C = 30.9 |Apr record high C = 29.0 |May record high C = 26.8 |Jun record high C = 28.1 |Jul record high C = 32.7 |Aug record high C = 32.5 |Sep record high C = 30.0 |Oct record high C = 29.0 |Nov record high C = 27.9 |Dec record high C = 27.6 |year record high C = 32.7 |Jan high C = 25.5 |Feb high C = 26.7 |Mar high C = 26.8 |Apr high C = 25.0 |May high C = 23.5 |Jun high C = 22.5 |Jul high C = 22.0 |Aug high C = 22.7 |Sep high C = 25.0 |Oct high C = 25.7 |Nov high C = 24.0 |Dec high C = 24.5 |year high C = 24.5 |Jan mean C = 18.0 |Feb mean C = 18.8 |Mar mean C = 19.4 |Apr mean C = 19.2 |May mean C = 17.8 |Jun mean C = 16.3 |Jul mean C = 15.6 |Aug mean C = 15.9 |Sep mean C = 17.3 |Oct mean C = 18.5 |Nov mean C = 18.4 |Dec mean C = 18.1 |year mean C = 17.8 |Jan low C = 10.5 |Feb low C = 10.9 |Mar low C = 12.1 |Apr low C = 13.4 |May low C = 12.1 |Jun low C = 10.0 |Jul low C = 9.2 |Aug low C = 9.1 |Sep low C = 9.7 |Oct low C = 11.3 |Nov low C = 12.7 |Dec low C = 11.7 |year low C = 11.1 |Jan record low C = 3.3 |Feb record low C = 2.2 |Mar record low C = 6.7 |Apr record low C = 7.8 |May record low C = 7.9 |Jun record low C = 4.4 |Jul record low C = 1.1 |Aug record low C = 2.9 |Sep record low C = 3.9 |Oct record low C = 5.5 |Nov record low C = 6.7 |Dec record low C = 6.2 |year record low C = 1.1 |precipitation colour = green |Jan precipitation mm = 58.3 |Feb precipitation mm = 49.8 |Mar precipitation mm = 92.2 |Apr precipitation mm = 242.3 |May precipitation mm = 189.5 |Jun precipitation mm = 38.6 |Jul precipitation mm = 17.6 |Aug precipitation mm = 24.0 |Sep precipitation mm = 31.2 |Oct precipitation mm = 60.8 |Nov precipitation mm = 149.6 |Dec precipitation mm = 107.6 |year precipitation mm = 1061.5 |unit precipitation days = 1.0 mm |Jan precipitation days = 4 |Feb precipitation days = 4 |Mar precipitation days = 8 |Apr precipitation days = 15 |May precipitation days = 13 |Jun precipitation days = 5 |Jul precipitation days = 3 |Aug precipitation days = 4 |Sep precipitation days = 4 |Oct precipitation days = 7 |Nov precipitation days = 14 |Dec precipitation days = 9 |year precipitation days = 90 |Jan humidity = 60 |Feb humidity = 56 |Mar humidity = 62 |Apr humidity = 71 |May humidity = 73 |Jun humidity = 73 |Jul humidity = 73 |Aug humidity = 71 |Sep humidity = 64 |Oct humidity = 63 |Nov humidity = 71 |Dec humidity = 66 |year humidity = 67 |Jan sun = 288.3 |Feb sun = 266.0 |Mar sun = 266.6 |Apr sun = 204.0 |May sun = 189.1 |Jun sun = 159.0 |Jul sun = 130.2 |Aug sun = 127.1 |Sep sun = 180.0 |Oct sun = 226.3 |Nov sun = 198.0 |Dec sun = 257.3 |year sun = 2491.9 |Jand sun = 9.3 |Febd sun = 9.5 |Mard sun = 8.6 |Aprd sun = 6.8 |Mayd sun = 6.1 |Jund sun = 5.3 |Juld sun = 4.2 |Augd sun = 4.1 |Sepd sun = 6.0 |Octd sun = 7.3 |Novd sun = 6.6 |Decd sun = 8.3 |yeard sun = 6.8 |source 1 = NOAA<ref name=NOAA> {{웹 인용 | url = ftp://ftp.atdd.noaa.gov/pub/GCOS/WMO-Normals/TABLES/REG__I/KN/63741.TXT | title = WMO Climate Normals for DAGORETTI 1961–1990 | accessdate = 7 July 2015 | publisher =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ref> |source 2 = [[독일 기상청]] (extremes from 1955–1982 and humidity, 1961–1990),<ref name = DWD1> {{웹 인용 | url = http://www.dwd.de/DWD/klima/beratung/ak/ak_637410_kt.pdf | title = Klimatafel von Nairobi-Dagoretti (Obs.) / Kenia | work = Baseline climate means (1961–1990) from stations all over the world | publisher = Deutscher Wetterdienst | language = 독일어 | accessdate = 31 August 2016}}</ref> Meteo Climat (extremes from 1984–present)<ref name = meteoclimat1> {{웹 인용 | url = http://meteo-climat-bzh.dyndns.org/index.php?page=stati&id=1765 | title = Station Nairobi | publisher = Meteo Climat |language = 프랑스어 | accessdate = 31 August 2016}}</ref> |date=August 2010 }} {{Weather box |location = Nairobi ([[Jomo Kenyatta International Airport]]) |metric first = yes |single line = yes |Jan record high C = 32.2 |Feb record high C = 32.8 |Mar record high C = 32.1 |Apr record high C = 32.2 |May record high C = 31.1 |Jun record high C = 28.9 |Jul record high C = 29.4 |Aug record high C = 32.2 |Sep record high C = 31.1 |Oct record high C = 33.0 |Nov record high C = 32.2 |Dec record high C = 32.2 |year record high C = 33.0 |Jan high C = 26.7 |Feb high C = 27.9 |Mar high C = 27.5 |Apr high C = 26.0 |May high C = 24.5 |Jun high C = 23.7 |Jul high C = 22.6 |Aug high C = 23.0 |Sep high C = 25.6 |Oct high C = 26.6 |Nov high C = 24.9 |Dec high C = 25.3 |year high C = 25.4 |Jan mean C = 19.4 |Feb mean C = 20.2 |Mar mean C = 20.7 |Apr mean C = 20.2 |May mean C = 19.1 |Jun mean C = 17.7 |Jul mean C = 16.7 |Aug mean C = 17.3 |Sep mean C = 18.6 |Oct mean C = 19.7 |Nov mean C = 19.3 |Dec mean C = 19.0 |year mean C = 19.0 |Jan low C = 12.9 |Feb low C = 13.1 |Mar low C = 14.1 |Apr low C = 14.9 |May low C = 14.3 |Jun low C = 12.3 |Jul low C = 11.4 |Aug low C = 11.5 |Sep low C = 12.0 |Oct low C = 13.3 |Nov low C = 14.0 |Dec low C = 13.5 |year low C = 13.1 |Jan record low C = 4.7 |Feb record low C = 7.2 |Mar record low C = 7.2 |Apr record low C = 9.8 |May record low C = 6.3 |Jun record low C = 6.1 |Jul record low C = 4.6 |Aug record low C = 4.4 |Sep record low C = 4.2 |Oct record low C = 5.4 |Nov record low C = 7.8 |Dec record low C = 7.9 |year record low C = 4.2 |precipitation colour = green |Jan precipitation mm = 42.1 |Feb precipitation mm = 48.3 |Mar precipitation mm = 68.8 |Apr precipitation mm = 157.2 |May precipitation mm = 108.3 |Jun precipitation mm = 26.5 |Jul precipitation mm = 11.5 |Aug precipitation mm = 13.6 |Sep precipitation mm = 24.8 |Oct precipitation mm = 43.3 |Nov precipitation mm = 120.9 |Dec precipitation mm = 79.8 |year precipitation mm = 745.1 |unit precipitation days = 0.1 mm |Jan precipitation days = 4.9 |Feb precipitation days = 3.7 |Mar precipitation days = 6.5 |Apr precipitation days = 13.0 |May precipitation days = 11.1 |Jun precipitation days = 6.2 |Jul precipitation days = 5.2 |Aug precipitation days = 5.0 |Sep precipitation days = 5.1 |Oct precipitation days = 6.8 |Nov precipitation days = 13.6 |Dec precipitation days = 9.0 |year precipitation days = 89.7 |Jan humidity = 69 |Feb humidity = 63 |Mar humidity = 66 |Apr humidity = 77 |May humidity = 79 |Jun humidity = 76 |Jul humidity = 74 |Aug humidity = 71 |Sep humidity = 67 |Oct humidity = 67 |Nov humidity = 77 |Dec humidity = 76 |year humidity = 72 |Jan sun = 282.1 |Feb sun = 265.6 |Mar sun = 263.5 |Apr sun = 204.0 |May sun = 179.8 |Jun sun = 159.0 |Jul sun = 124.0 |Aug sun = 124.0 |Sep sun = 168.0 |Oct sun = 213.9 |Nov sun = 204.0 |Dec sun = 254.2 |year sun = |Jand sun = 9.1 |Febd sun = 9.4 |Mard sun = 8.5 |Aprd sun = 6.8 |Mayd sun = 5.8 |Jund sun = 5.3 |Juld sun = 4.0 |Augd sun = 4.0 |Sepd sun = 5.6 |Octd sun = 6.9 |Novd sun = 6.8 |Decd sun = 8.2 |yeard sun = 6.7 |source 1 = [[독일 기상청]]<ref name = DWD2> {{웹 인용 | url = http://www.dwd.de/DWD/klima/beratung/ak/ak_637400_kt.pdf | title = Klimatafel von Nairobi-Kenyatta (Int.Flugh.) / Kenia | work = Baseline climate means (1961–1990) from stations all over the world | publisher = Deutscher Wetterdienst | language = 독일어 | accessdate = 31 August 2016}}</ref> }} == 자매 도시 == * {{국기나라|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1975) == 사건, 사고 == {{본문|2014년 나이로비 폭탄테러}} 2014년 5월 5일 급조폭발물이 티카 도로의 버스 안에서 터지면서 3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영향으로 버스에 큰 구멍이 난 후 전소되었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Nairobi}} ; 뉴스 * [http://www.nationmedia.com/ 데일리 네이션] * [http://www.eastandard.net/ 더 스탠다드] * [http://www.nairobi.com/ Nairobi.com] ; 커뮤니티 * [http://www.nairobians.com/ Nairobians.Com] {{웨이백|url=http://www.nairobians.com/ |date=20120317211008 }} * [https://web.archive.org/web/20091123094512/http://www.graduates.com/ls.aspx?city=Nairobi&pid=411 나이로비의 학교와 단과대학] ; 기타 * [https://web.archive.org/web/20130427045807/http://www.nairobi.go.ke/ The City of Nairobi] (공식 웹사이트) * [https://web.archive.org/web/20090330010844/http://www.nairobimap.info/ 나이로비 시의 구글 맵] * [https://web.archive.org/web/20081014211809/http://www.magicalkenya.com/default.nsf/doc21/4YQ4W3FZEI64?opendocument&l=1&e=7 나이로비의 신비한 케냐 리뷰] * [http://www.nse.co.ke/ 나이로비 주식 교환소] * [https://web.archive.org/web/20060811231343/http://www7.nationalgeographic.com/ngm/0509/feature2/index.html 나이로비에 대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 [http://www.fallingrain.com/world/KE/5/Nairobi.html 폴링레인 지도 - 고도 = 1738 m (붉은 점들이 철도이다)] * [https://web.archive.org/web/20130729175728/http://www.bauck.com/travel/nairobi-green-city-in-the-sun/ 나이로비에 전 거주자의 도시 가이드] * [https://web.archive.org/web/20071011141344/http://www.memorialparkkenya.org/index.html 8월 7일 기념 공원], 1998년 폭발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에게 바침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321&path=|184|197|&leafId=245 네이버 캐스트 : 여행 - 나이로비] {{전거 통제}} [[분류:나이로비| ]] [[분류:아프리카에 위치한 수도]] [[분류:케냐의 도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과학자 정보 |이름 = 찰스 다윈 |그림 = Charles Robert Darwin by John Collier.jpg |그림 크기 = 270px |그림 설명 = 말년기의 찰스 다윈 |태어난 날 = {{출생일|1809|2|12}} |태어난 곳 = [[잉글랜드]] [[슈루즈버리]] |죽은 날 = {{사망일과 만나이|1882|04|19|1809|02|12}} |죽은 곳 = 잉글랜드 [[런던]] [[던하우스]] |거주지 = |시민권 = |국적 = [[영국]] |인종 = |분야 = [[박물학]] [[생물학]] |소속 = |출신 대학 =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에든버러 대학교]] 의과대학 |지도교수 = [[존 스티븐스 헨슬로]],<br />[[애덤 세지윅]] |지도학생 = |주요 업적 = |영향 = [[알렉산더 폰 훔볼트]],<br />[[존 허셜]],<br />[[찰스 라이엘]] |영향줌 = [[조지프 돌턴 후커]],<br />[[토머스 헨리 허슬리]],<br />[[조지 로메인즈]],<br />[[에른스트 헤켈]],<br />[[프랜시스 골턴]],<br />[[존 러벅]],<br />[[그레고어 멘델]] |수상 = [[로열 메달]],<br />[[월스턴 메달]],<br />[[코플리 메달]] |종교 = [[불가지론]] |서명 = Charles Darwin Signature.svg |참고 사항 = }} '''찰스 로버트 다윈'''({{llang|en|Charles Robert Darwin}}, [[왕립 학회|FRS]],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ref>{{harvnb|Desmond|Moore|Browne|2004}}</ref>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 (생물학)|종]]이 [[공통 조상|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ref>{{서적 인용|author=Coyne, Jerry A. |title=Why Evolution is True|publisher=Viking|year=2009 |pages=8–11|isbn=978-0-670-02053-9}}</ref>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품종개량|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ref name="Larson79-111">{{Harvnb|Larson|2004| pp=79–111}}</ref>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또 다윈은 우생학 이론을 창시하였던 골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진화론]]을 발표했다.<ref>{{서적 인용|title=Why Evolution is True |last = Coyne |first=Jerry A. |year=2009 |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 |location= Oxford |isbn=0-19-923084-6 |page=17 |quote=In ''The Origin'', Darwin provided an alternative hypothesis for the development, diversification, and design of life. Much of that book presents evidence that not only supports evolution, but at the same time refutes creationism. In Darwin's day, the evidence for his theories was compelling, but not completely decisive.}}</ref><ref>{{서적 인용|title=Forerunners of Darwin |last=Glass |first=Bentley |year=1959 |publisher=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location=Baltimore, MD |isbn= 0-8018-0222-9|page=iv |quote=Darwin's solution is a magnificent synthesis of evidence...a synthesis...compelling in honesty and comprehensiveness}}</ref>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ref name=JvW>{{Harvnb|van Wyhe|2008}}</ref><ref name=b3847>{{harvnb|Bowler|2003|pp=178–179, 338, 347}}</ref>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물학|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ref>[http://darwin-online.org.uk/biography.html The Complete Works of Darwin Online&nbsp;– Biography.] ''darwin-online.org.uk''. Retrieved 2006-12-15<br />{{Harvnb|Dobzhansky|1973}}</ref><ref>As Darwinian scholar Joseph Carroll of the University of Missouri–St. Louis puts it in his introduction to a modern reprint of Darwin's work: "''The Origin of Species'' has special claims on our attention. It is one of the two or three most significant works of all time—one of those works that fundamentally and permanently alter our vision of the world...It is argued with a singularly rigorous consistency but it is also eloquent, imaginatively evocative, and rhetorically compelling." {{서적 인용|title=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editor=Carroll, Joseph |year=2003 |publisher=Broadview |location= Peterborough, Ontario|isbn= 1-55111-337-6|page=15 |url= }}</ref>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ref>찰스 다윈 이전에도 에라스무스 다윈이나 쟝 라마르크 등에 의해 진화론이 주장된 바 있다. 그러나 퀴비에 등의 학자들과 가톨릭 교단, 프로테스탄트 교단과 기독교도인 언론인, 정치가들에 의해 논박당하거나 언급이 금기시 되었다.</ref>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릭 교수는 '다윈은 사람과(科)에 속한 두 종(種)이 서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바있다.<ref>[참고](“다윈, 원숭이가 조상이라 한 적 없다”로잔대교수 "진화론은 당시 충격적"2009.02.13 13:00 ,제네바=연합뉴스 제공)https://www.sciencetimes.co.kr/news/quot%EB%8B%A4%EC%9C%88-%EC%9B%90%EC%88%AD%EC%9D%B4%EA%B0%80-%EC%A1%B0%EC%83%81%EC%9D%B4%EB%9D%BC-%ED%95%9C-%EC%A0%81-%EC%97%86%EB%8B%A4quot/</ref>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있다. == 생애 == === 유년기 === [[파일:Charles Darwin 1816.jpg|섬네일|위오른쪽|7살의 찰스 다윈, 1816년]]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주의|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사이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 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 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 [[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 (영국)|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en:Erasmus Alvey Darwin|에라스머스]]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 학창시절 === ==== 청소년기 ==== 그는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 의대진학 ====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6세 때인 [[1825년]]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혈액|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 (의학)|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 박물학과의 만남 === 흑인 해방[[노예]] 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ref>영국에서는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의회에 통과되었고 1834년에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노예무역이 폐지되기 이전에 해방노예들이 존재했었다.</ref><ref name=":03">[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560&cid=59014&categoryId=59014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 노예제 폐지와 도덕성 회복 운동에 헌신한 영국의 정치가 (인물세계사, 함규진)</nowiki>]</ref> 이때 배운 박제제작법은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의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수집을 자랑한 [[에딘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 신학과 진학 ==== =====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사제|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 대학|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존 스티븐스 헨슬로|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1831년]]에 졸업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부 ===== ====== 부친의 권유 ======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버지는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 [[고전]], [[수학]]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지만 찰스 다윈의 관심은 신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육촌 [[윌리엄 다윈 폭스]]와 함께 필수는 아니었던 [[박물학]]이나 [[곤충]] 채집에 심취했다. 폭스의 소개로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다윈은 학내에서 헨슬로가 만든 정원을 둘이서 자주 산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헨슬로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성직자]]이면서 [[지질학]]자였던 [[아담 세지윅]]에게 배워, [[층서학]]에 평범하지 않는 재능을 발휘했다. ===== 자연신학 ===== 동시에 당시 다윈은 신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읽었고, 모든 생물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완벽한 형태로 창조했다고 하는 설을 납득하고 믿었다. 자연철학의 목적은 관찰을 기반으로 한 [[귀납적 추리|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기술한 [[존 허쉘]]의 새로운 책이나, [[알렉산더 훔볼트]]의 과학적 탐험 여행 등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의에 자극되어 [[열대]] 지방에서 박물학을 배우기 위해서 졸업한 뒤 동년배들과 [[테네리페섬]]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그 준비 단계로 세지윅의 [[웨일스]] 지질 조사에 참가했다. ===== 여행 ===== 이때의 그의 취미는 [[음악]]이나 후에 잔인하다며 그만둔 [[사냥]]이었다. 입학을 했던 [[1827년]] 여름에는 조시아 2세와 그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엠마 웨지우드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 몇 주간 머물렀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륙 여행이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일주를 허용하였고,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HMS 비글|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비글호 === {{참고|로버트 피츠로이#비글호의 두 번째 탐험}} {{참고|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 [[파일:Voyage of the Beagle-en.svg|섬네일|400px|비글호의 여행 경로]] ==== 탐험 항로 ====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출항 →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리우데자네이루]]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포클랜드 섬]] →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서 → [[칠레]] [[발파라이소]] →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갈라파고스섬]]→ [[태평양]] 횡단 → [[뉴질랜드]]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 [[대서양]]의 [[어센션섬]] → 다시 브라질 살바도르 항구 → 영국 팔머스 항 도착 ===== 비글호 탑승 ===== 다윈은 [[성공회]] [[교회]]에서의 목회보다는 [[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세지위크 교수를 따라 북[[웨일스]]에 지질학 연구를 위해 여행했다. 헨슬로의 추천으로 [[1831년]] [[12월 27일]]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이 이끄는 〈[[비글 호|비글]]〉이라는 이름의 탐험선에 민간인 신분으로 탑승했다. 하지만 이후 뛰어난 박물학 실력을 인정받아 박물학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원하는 선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선실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다윈은 피츠로이의 함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HMS 비글|비글호]]의 항해는 피츠로이가 의도한대로 거의 5년이나 지속되었고, 다윈은 그 시간 대부분을 육지에서 지질학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자연사 수집물을 수집하면서 보냈다. 그동안 비글호는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렸다. ===== 견본수집 ===== 그는 관찰한 것, 이론적 고찰을 꼼꼼히 기록했고, 가끔씩 견본들을 편지와 함께 가족들을 위해 잡지 사본을 캠브리지로 보냈다. 그는 [[지질학]], [[딱정벌레]] 수집, 해양 [[무척추동물]]에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초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위해 열심히 견본을 수집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겪게되는 반복적인 뱃멀미로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물학]] 노트는 조용한 휴식기간에 수집한 [[플랑크톤]]으로부터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갈라파고스 군도]]의 각 섬, 그리고 섬의 해변과 내지에 사는 [[거북]]과 새들이 동일한 과에 속하는 종임에도 환경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그를 깊이 매료시켰다. ===== 지질학 책을 읽다 ===== 세인트 줄리안 항구의 첫 번째 정박에서, 다윈은 높은 화산바위 절벽의 흰띠가 조개껍질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피츠로이는 그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의 1권을 선물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융기]]와 [[침강]]을 한다는 육지의 균일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윈은 라이엘이 주장한 것을 목격하고, 지질학에 대해 이론화하고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된다. [[브라질]]에서 다윈은 [[열대우림]]을 보고 기뻐했지만, 노예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대하는 [[노예제도]]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 고대동물 화석 발견 ===== [[파타고니아]]에 있는 [[푼타아틀라]]에서는 절벽의 오래되지 않은 조개껍질 옆에서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날씨]]나 [[재해]]로 인한 변화의 징조없이 최근에 멸종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였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메가테리움]](Megatherium) 곧 땅에서 나무뿌리를 먹으며 사는 [[늘보]]의 화석을 [[치아]]와 뼈장갑의 연관관계를 이용해서 밝혀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아르마딜로]]가 가지고 있는 장갑의 거대한 확장판처럼 보였다. 그 최초의 발견은 [[영국]]에 귀국했을 때 큰 흥미를 불러일어켰다. 그는 [[가우초]](목동)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내륙으로 지질학을 탐사하며 [[화석]]을 더 수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혁명의 시기에 원주민이나 식민지 사람 모두를 바라보는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통찰을 가지게 했으며, 두가지 종류의 [[레아]](남미 타조)가 분리되긴 했지만,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는 계단 모양의 널빤지 같은 평원과 해안에서 길러진 조개껍질을 목격했는데, 이것은 일련의 융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엘의 두 번째 권을 읽고, 종의 창조의 중심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발견과 라이엘의 부드러운 연속과 종의 멸종에 관한 개념에 도전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 원주민과의 만남 ===== [[파일:HMS Beagle by Conrad Martens.jpg|섬네일|비글호의 첫 번째 남미 탐사에서 푸에지언의 습격]] 비글호에는 세 명의 파타고니아 원주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비글호의 항해에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이들이었다. 첫해에는 잉글랜드에서 보냈고, 이번 여행에서는 [[선교사]]로 참여하였다. 다윈은 이들이 정감있고, 문명화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친척들은 야생에서 길들인 동물들처럼 거칠고, 비참하고, 저급한 야만인들처럼 보았다. 다윈에게는 이들의 차이가 [[문명]]의 진보의 차이이지, 인종적 저능함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과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전통]]이 다른 것 뿐이지, [[인종]]이 우열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반(反)진화론 기독교인들이 다윈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하여 [[인간]]과 [[유인원]]사이의 중간진화단계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고 철회했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ref>실제 수원중앙침례교회의 [[김장환]] 목사가 [[PC통신]]이 널리 쓰이던 1990년대 후반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했던 Q.T 300초에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ref> 그의 과학자 친구들과는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수 없는 다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속되었고, 선교는 포기를 하고 만다. 지미 버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아내를 얻어 다른 원주민들처럼 살았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ref>Keynes, Richard (2001).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1925&viewtype=text&pageseq=1 Charles Darwin's Beagle Dia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0-521-23503-0}}</ref> 다윈은 [[칠레]]에서 [[지진]]을 경험했고, 높은 파고에 휩쓸린 홍합층을 포함한 육지가 막 솟아올랐던 징후를 보았다. 높은 [[안데스산맥]]에서 조개껍질과 모래 해변에 자라는 여러 화식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육지의 [[융기]]와 바다 섬의 침강 그리고 산호 보초 그들을 둘러싸 산호섬이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더 오래된 “창조의 중심”에 덧붙여진 야생에서 증거를 찾았고, [[흉내지빠귀]](mockingbird)가 [[칠레]]의 그것과 연관은 있지만, 섬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왔던 섬마다 약간씩 변종된 [[거북이]] 껍질 형태가 있다는 것을 총독에게 들었지만, 식용으로 잡은 거북이를 잡아먹은 후에도 그것들을 수집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대류]] 쥐캥거루와 [[오리너구리]]가 너무 특이해 보여 이 두가지가 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에보리진)들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이지만,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글호는 [[코코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사를 했으며, 그 조사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다윈의 일기를 보고서는 한권의 평가서로 합치자고 제안을 한다.<ref name=Letter301>{{웹 인용|url=http://www.darwinproject.ac.uk/darwinletters/calendar/entry-301.html|제목=Darwin Correspondence Project - Letter 301 — Darwin, C.R. to Darwin, C.S., 29 Apr 1836}}</ref> 다윈의 저널은 결국 자연사에 대해 분리된 세 번째 권으로 다시 쓰여진다.<ref>{{Harvnb|Browne|1995|p= 336}}</ref> [[케이프타운]]에서 다윈과 피츠로이는 [[존 허셀]]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에 대한 찬사를 썼는데, “기적의 진행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자연”을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여는 대담한 숙고이자, 다른 것에 의해 멸종된 종의 대체”라고 찬사를 했다.<ref name=Rascals>{{harvnb|van Wyhe|2007|p=[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viewtype=text&itemID=A544&pageseq=21 197]}}</ref> 배가 고향을 향해 갈 때 다윈은 노트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흉내지빠귀]], [[거북]], 포크랜드 제도의 여우가 옳다면, "종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그런 사실들”(such facts undermine the stability of Species)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would를 undermine 앞에 덧붙였다. (‘종의 안정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그런 사실들’로 번역된다.)<ref name=xix>{{Harvnb|Keynes|2000|pp=[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viewtype=text&itemID=F1840&pageseq=22 xix–xx]}}<br />{{Harvnb|Eldredge|2006}}</ref> 그는 이후 그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빛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ref>{{Harvnb|Darwin|1859|loc=[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373&viewtype=text&pageseq=16 p. 1]}}</ref> [[1836년]]까지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나온 화석과 현생 생물과의 비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동물의 지리적 변이에서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한다. === 진화론 연구 === [[파일:Charles Darwin by G. Richmond.jpg|섬네일|위오른쪽|찰스 다윈의 초상화]]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스러우스베리에 있는 고향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캠브릿지로 서둘러 갔다. 헨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비글 호 항해기>>로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곧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왕립외과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그의 저널을 다시 쓰기 위해 캠브릿지에서 숙박을 했다. 그는 최초의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새|조류]]의 표본에 대한 발표를 했다. 조류학자 [[존 굴드]]는 곧 다윈이 검은새 그로스-비크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를 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을 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 (영국)|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토머스 맬서스|맬더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티노]]도 그의 신념의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ref>van Wyhe, John (27 March 2007). "Mind the gap: Did Darwin avoid publishing his theory for many years?". Notes and Records of the Royal Society 61: 177–205. doi:10.1098/rsnr.2006.0171</ref> 굴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ref>Sulloway, Frank J. (1982). [http://www.sulloway.org/Finches.pdf "Darwin and His Finches: The Evolution of a Legend" (PDF).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 15 (1)]: 1–53. doi:10.1007/BF00132004</ref>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ref>Browne 1995, p. 360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1643&viewtype=text&pageseq=1 "Darwin, C. R. (Read 14 March 1837) Notes on Rhea americana and Rhea darwinii, Proceedings of the Zoological Society of London"]</ref>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en:Macrauchenia|마크라우케니아]]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 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 누나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 종의 기원과 진화론 === [[파일:Editorial cartoon depicting Charles Darwin as an ape (1871).jpg|섬네일|위오른쪽|[[1871년]] 당시 찰스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서 풍자한 [[영국]]의 신문 만평]] {{참고|종의 기원|진화론}}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을 수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부분은 당시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ref>정작 당사자인 다윈은 토론회 참석을 회피하였다.</ref>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허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쪽 선조가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진화론의 찬반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그의 발표는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차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 <가축과 재배 식물의 변이>와 사람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인간의 유래]]>(1871) 등이 있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 생애 후반 == === 기타 === [[파일:다윈 풍자 만화 2.jpg|섬네일|오른쪽|140px|[[1859년]] 당시 찰스 다윈을 풍자한 신문 만화]]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그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ref>독일을 방문하여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목격한 헉슬리, 월리스, 라이엘 등은 깊은 감명을 받고 진화론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선언했는데, 다윈은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발견 소식을 접하였으나 이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였다.</ref> === 유언 ===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ref>이한음(역)(2007), 만들어진 신, Richard Dawkins의 The God Delusion, 김영사, p155~156</ref>. 다윈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ref>한스 할터(한윤진 역), 《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 말글빛냄, 2007년 , 5장</ref>라는 말을 남기고<ref>{{출처|날짜=2019-05-21|사실 이는 자신의 처 엠머 웨지우드 곁에서 임종 전 수 일간 습관처럼 남겼던 말이며, 혼수 상태 직전인 4월 18일 "쓰러질 것 같다"라는 외마디를 남겼다고 한다.}}</ref>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 심리학 ==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심리학]]을 언급하고 있다. :In the distant future I see open fields for far more important researches. Psychology will be based on a new foundation, that of the necessary acquirement of each mental power and capacity by gradation. Light will be thrown on the origin of man and his history.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 CHAPTER XIV. Recapitulation and Conclusion)<ref>(위키문헌-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 CHAPTER XIV [488])https://en.wikisource.org/wiki/On_the_Origin_of_Species_(1859)/Chapter_XIV</ref> :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훨씬 더 중요한 연구를 위한 열린 분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심리학은 이러한 새로운 기초, 점진적으로 각 정신작용과 능력을 알아가는데 필요한 새로운 획득의 기초를 기반으로 할것입니다. 사람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에 빛이 비춰질 것입니다. 한편 그의 예상대로 [[동물행동학]]과 [[진화심리학]] 등은 그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학문분야이다. == 저서 == * 산호초의 확산과 그 구조 (The Structure and Distribution of Coral Reefs, 1842 London). *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servation on the vocanic Islands, 1844 London). *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eservation on South America 1846 London). *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1859 London) *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The Descent of Man, 1871 London) *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1872, London) *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1881)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Darwin_bibliography Charles Darwin bibliography] == 가족 == *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 * 할머니 [[매리 하워드]] *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 (1766 - 1848) * 어머니 [[수잔나 웨지우드]], 조지아 웨지우드의 딸 (1765 - 1817) ** 형 * 처 [[엠머 웨지우드]], 조수이자 외사촌 누나(1808 - 1896) ** 사촌 남동생 [[프랜시스 골턴]] ** 친족 [[로버트 워링 다윈 (엘스턴)|엘스턴의 로버트 워링 다윈]] == 기타 == === 진화론의 주요 이론 === * [[자연선택]] * [[성 선택]] === 자폐증 === [[영국]]일간지 [[더 타임스]]는 [[2009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 [[진화론]]을 창시한 다윈의 뛰어난 창의력은 [[자폐증]]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는 보도를 하였다. 더 타임스는 "다윈은 아마도 자폐증의 한 종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던 것 같다. 다윈의 독창성은 이 자폐증 증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교]]의 마이클 피츠제럴드 [[정신의학]] 교수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으로 다윈은 놀라운 [[집중력]], 보통 사람 이상의 집요함,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미세한 부분을 보는 엄청난 능력, 한 과제에 평생 매달리는 끝없는 열정, 독창적 연구를 하는 독립적인 [[정신]] 등을 보유했다."고 설명했다.<ref>{{뉴스 인용|저자1=김진형 |제목=다윈의 독창성은 자폐증의 산물 |url=http://www.sciencetimes.co.kr/?news=quot%EB%8B%A4%EC%9C%88%EC%9D%98-%EB%8F%85%EC%B0%BD%EC%84%B1%EC%9D%80-%EC%9E%90%ED%8F%90%EC%A6%9D%EC%9D%98-%EC%82%B0%EB%AC%BCquot |날짜=2009-02-19 |확인날짜=2020-02-28 |뉴스=사이언스타임즈}}</ref> 아스퍼거 증후군은 WHO의 [[ICD-11]]이나 미국의 [[DSM-5]]가 개정되며 삭제된 상태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2004년에 쓴 책 <<Autism and Creativity: Is There a Link between Autism in Men and Exceptional Ability?>>에서 다윈 외에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루이스 캐럴]] 등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신과 의사인 Sabina Dosani는 '피츠제럴드가 그들의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으며 전기작가도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피츠제럴드의 주장은, 당사자들을 면담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해당 인물들의 전기들 중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사례를 취사선택하여 내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의사과학]]"이라고 하였다.<ref>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the-british-journal-of-psychiatry/article/autism-and-creativity-is-there-a-link-between-autism-in-men-and-exceptional-ability-by-michael-fitzgerald-london-taylor-francis-2003-294-pp-2999-hb-isbn-1-583912134/964597B6A0DAAC6D15AE239BB132F682/core-reader</ref> Mark Osteen은 자폐에 관한 컨퍼런스를 정리하여 낸 책 <<Autism and Representation>><ref>https://markosteen.com/biography/</ref>에서 역시 피츠제럴드의 주장을 "비합리적"(absurd)이라고 비판한다. 한편 뛰어난 전문가가 되거나 창의성을 보이는 인물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ref>{{서적 인용|제목=몰입|성=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이름=|날짜=|판=|출판사=|쪽=|장=}}</ref><ref>{{서적 인용|제목=Quiet|성=수전 케인|이름=|날짜=|판=|출판사=|쪽=|장=}}</ref><ref>{{서적 인용|제목=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성=에릭 바커|이름=|날짜=|판=|출판사=|쪽=|장=}}</ref>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윈가의 내력 === 2010년 후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IBM이 후원하는 계통학 추적 프로젝트 따라 다윈의 고손자인 크리스 다윈의 DNA 추출하여 Y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다윈의 조상은 4만5천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이주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에 살다가 1만2천년 무렵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다윈의 유전자는 ’R1b’라는 집단으로 분류됐는데, 크로마뇽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ref>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5/2010020501263.html{{깨진 링크|url=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5/2010020501263.html }}</ref> === [[샤가스병]] === 다윈은 비글호에 탑승해 여행하던 중, 남미에서 흡혈곤충에게 물려 샤가스병에 걸렸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성= 칼 짐머|제목= <기생충 제국>|출판사= 궁리}}</ref> === 말년의 편지 === 다윈이 말년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한 편지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1&aid=0002609745 무려 19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 == 같이 보기 == {{Col-begin}} {{Col-2}} * [[종의 기원]] * [[진화론]] * [[찰스 라이엘]] * [[이래즈머스 다윈]] * [[라마르크]] * [[진화이론의 사회적 영향]] * [[토머스 헉슬리]] {{Col-2}} * [[적자생존]] * [[용불용설]] * [[앨프리드 월리스]] * [[요한 칼 플로트]] * [[네안데르탈인]] * [[다윈주의]] * [[비교심리학]] {{Col-end}}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문헌|en:author:Charles Darwin}} {{위키공용과 분류|Charles Darwin}} * {{브리태니커|b04d1696b}} * {{두피디아|101013000834200}} * {{네이버캐스트|449}} * [http://darwin-online.org.uk The Complete Work of Charles Darwin Online] {{위대한 브리튼인}} {{전거 통제}} {{기본정렬:다윈, 찰스}} [[분류:찰스 다윈| ]] [[분류:1809년 출생]] [[분류:1882년 사망]] [[분류:잉글랜드의 생물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지질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박물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불가지론자]] [[분류:진화생물학자]] [[분류:갑각류학자]] [[분류:사상가]] [[분류:세계일주자]] [[분류:남아메리카 탐험가]]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동물행동학자]]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다윈-웨지우드가]] [[분류: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수훈자]] [[분류:잉글랜드의 곤충학자]] [[분류:19세기 생물학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츠 칼리지 동문]] [[분류:공리주의자]] [[분류:잉글랜드의 여행 작가]] [[분류: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은 사람]] [[분류:왕립지리학회 석학회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카프카}} {{작가 정보 | 이름 = 프란츠 카프카 | 원어이름 = {{llang|de|Franz Kafka}} | 그림 = 값찾기 | 그림크기 = 200px | 설명 = 프란츠 카프카, [[1906년]] | 출생명 = | 출생일 = [[1883년]] [[7월 3일]] | 출생지 = {{국기나라|체코}} [[프라하]] | 사망일 = [[1924년]] [[6월 3일]] (40세) | 사망지 = {{국기나라|오스트리아}} [[빈]] | 필명 = | 별칭 = | 직업 = [[소설가]], [[단편 소설가]], [[일기 작가]], [[번역가]], [[변호사]], [[각본가]], [[산문가]], [[저술가]], [[작가]] | 언어 = [[체코어]], [[독일어]] | 국적 = {{CZE}} | 학력 = [[프라하 카렐 대학교]] | 활동 기간 = | 등단시기 = | 등단작 = | 장르 = | 주제 = | 사조 = [[실존주의]] | 주요 작품 = [[변신 (카프카)|변신]], [[심판 (소설)|심판]], [[실종자 (소설)|실종자]] | 수상 = 값찾기 | 스승 = | 제가 = 값찾기 | 배우자 = 값찾기 | 부모 = | 형제 = | 동거인 = | 자녀 = | 친척 = 값찾기 | 영향 받은 인물 = 값찾기 | 영향 준 인물 = | 서명 = 값찾기 | 웹사이트 = | 묘소 = | 묘비 = 값찾기 }} '''프란츠 카프카'''({{llang|de|Franz Kafka}},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 카프카의 삶 == === 가족 === [[파일:Kafka5jahre.jpg|섬네일|200px|5살의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꽤 부유층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의 정신적 폭력 === 콘골드(1972)에 따르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로 그리고, 카프카 자신에 따르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 좋으며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만족감에 충만한,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과 지식을 갖춘 진짜 카프카'로 그린다. 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넷째 아들로 남부의 피세크(Pisek) 가까운 곳의 유대인 마을인 오섹(Osek)에서 프라하로 이주해, 외판원으로 몇 년간 일한 후, 액세서리를 파는 소매점을 열었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로, 소매점은 곧 15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성장한다. 그곳에서 헤르만 카프카는 포데브라디(Poděbrady)의 양조업자 야콥 뢰비(Jakob Löwy)의 딸 율리(1856-1943)와 결혼하였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 헤르만에게 아들 카프카는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에 불과했고,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던 헤르만은 틈만 나면 아들 카프카에게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041739335&code=900305|제목=[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5) 비애-결핍에서 출발 허무로 귀착하는 비극뿐인 자괴감|저자=이승수|날짜=2008-07-04|뉴스=경향신문|보존url=https://archive.today/2013050120101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041739335&code=900305|보존날짜=2013-05-01|url-status=live|확인날짜=2008-10-24}}</ref> 카프카가 부친의 말 때문에 느꼈을 감정은 열등감과 수모감이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동생들 === 카프카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만다. 여섯 살 때인 1889년에는 여동생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가, 또 1년 뒤에는 발레리(발리,1890-1942)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리(오틀라, 1892-1943)가 태어났지만,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 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 교육 ===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상인의 기질이 보이지 않자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휴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락 등 평생을 두고 교우하게 될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1901년]] 프라하의 [[프라하 카를 대학교|카를 대학교]]([[프라하 카렐 대학교|카렐 대학교]])에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년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대인의 [[전통]]을 배우는 시간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대교]] [[회당]]([[시나고그]], 신약성서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회당이 [[유대인]] 등의 종교적 공동체인 시나고그임.)가서 [[예배]]를 하는 종교 교육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지 광장(Stare Mesto)의 킨스키(Kinský) 궁전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 직업 === [[1907년]] [[11월 1일]] 그는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밥벌이(Brotberuf, 브로트베루프)라고 불렀다. [[1908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죽기 2년 전인 [[1922년]]까지 그곳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에 무관심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직접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으며,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 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인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 등이 속한 그룹을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로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다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카프카는 공무 출장과 노동자들과의 접촉 등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통찰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말년 === [[파일:Grave of Kafka.JPG|섬네일|200px|프란츠 카프카의 무덤]] [[1912년]] 그의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있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종종 만났다. 두 번이나 약혼하기도 했지만 [[1917년]]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부터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 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음은 정설로 이해된다. 또 편두통, 불면증,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증도 있었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들이 나타났다. 그는 채식이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곧 그는 프라하로 돌아와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굶주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목은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졌고 1924년 12월 31일 지즈코프(Žižkov)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 개인적인 면 ===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그는 자신의 인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한 적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을 만큼 쓰는 것 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타계]]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대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대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화부', '단식광대',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 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들의 수사적 관습을 은근히 나타낸다. 그는 정확하게 말하면 '실존주의자'라 말하기 조금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실존주의 사상이 드러나지만, 그는 실존주의라는 사상이 세상에 나오기 전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 카프카의 문학 세계 == [[파일:Kafka statue Prague.jpg|섬네일|위오른쪽|카프카의 동상]]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 (카프카)|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 문체 ===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을 번역하는 번역자가 직면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llang|de|Verkehr}}{{해석|교통,교류,성교}}'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가 글을 쓸 때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인용문2|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용문2|아가씨 F.C. 내가 8월 13일 브로트집에서 식탁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식모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난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곧바로 나름대로 정리를 하였다. 블라우스를 걸쳐 입은 모습이 아주 가정적으로 보였으나, 잠시후 그녀는 이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울퉁하고 빈 얼굴은 공허 그대로였으며, 삐뚤어진 코, 약간 무디고 매력없는 금발, 거센 턱.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그녀를 처음으로 자세히 눈여겨 보면서 나는 그녀에 관해 확고한 판단을 내렸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 저작 == === 장편 === * 아메리카 (Amerika) 혹은 실종자 (Der Verschollene) * [[심판 (소설)|심판 (Der Prozess)]] * [[성 (소설)|성 (Das Schloß)]] === 중/단편 === * 선고 (Das Urteil) * 지방에서의 결혼예식 (Hochzeitvorbereitungen auf dem Lande) * 관찰 (Betrachtung) * [[변신 (카프카)|변신]] (Die Verwandlung) *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 단식 예술가 (Der Hungerkünstler) * 시골 의사 (Ein Landarzt) *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 편지 === {{빈 문단}} == 사소한 정보 == 그는 죽기 전에서야 비로소 "살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모순되는 삶을 살았다. 병을 앓지 않던 시절에는 고독과 우울의 바다에 빠져 살았고, 병이 악화되면서는 약혼녀와 둘이 생활했는데, 말년 당시에 그는 자신의 약혼녀와 작은 바구니에 손을 담구고 "우리집 목욕탕"이라 했으며, 심심할 때는 그림자 놀이를 즐겨했다고 한다.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https://web.archive.org/web/20070927051314/http://franz-kafka.redorb.co.uk/ Franz Kafka]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전거 통제}} {{기본정렬:카프카, 프란츠}} [[분류:프란츠 카프카| ]] [[분류:1885년 출생]] [[분류:1924년 사망]] [[분류:체코의 소설가]] [[분류: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분류:체코의 무신론자]] [[분류:오스트리아의 무신론자]] [[분류: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분류:프라하 출신]] [[분류:프라하 카렐 대학교 동문]]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실존주의자]] [[분류:19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분류: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아나키스트]] [[분류:괴기물 작가]] [[분류:오스트리아의 공무원]] [[분류:명언가]]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골프 선수 정보 |이름= 안니카 소렌스탐 |본명= Annika Sörenstam |사진= 2008-06-03-Annika-Sörenstam.JPG |사진 크기= 250px |사진 설명= |국적= 스웨덴 |이전 국적= |생년월일= {{출생일과 나이|1970|10|19}} |출생지= |사망일= |사망장소= |신장= |체중= |별칭= |별명= |학력= |배우자= |국가= 스웨덴 |종목= [[골프]] |소속팀= |프로데뷔= |선수활동= |캐디= |프로우승= |은퇴= |LPGA 투어= |유럽 투어= |일본 LPGA 투어= |한국 LPGA 투어= |아시안 골프 투어= |시메트라 투어= |기타 투어= | 나비스코 챔피언십 = | LPGA 챔피언십 = | US 여자 오픈 = | 위민스 브리티시 오픈 = | 에비앙 챔피언십 = | 메달틀 = }} '''안니카 쇠렌스탐'''({{llang|sv|Annika Sörenstam|[ˈan.niː.ka ˌsøː.rɛn.ˈstam]}} {{소리|Sv-Annika_Sörenstam.ogg}}, [[1970년]] [[10월 9일]] ~ )은 [[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록들을 남긴 골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톡홀름]] 출생으로, 12세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 유학 중이던 [[1992년]]에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93년]]에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1994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신인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95년]]에는 3승을 거둬 상금왕에 올랐다. [[2003년]] 5월에는 여성 선수로는 58년 만에 미국 프로 골프([[PGA (골프)|PGA]]) 투어에 초대받았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뱅크 오브 아메리칸 콜러니얼 (총상금 500만 달러)에 출전한 그녀는 2라운드 합계 5오버파 145타 96위에 머물러 컷 오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해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 같이 보기 == * [[그랜드 슬램 (골프)]]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Annika Sorenstam}} * {{LPGA player|29}} {{2006년 이후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 달성 선수}} {{여자 커리어 그랜드 슬램 챔피언 골프 선수}} {{위민스 브리티시 오픈 우승}} {{US 여자 오픈 챔피언십 우승}} {{전거 통제}} {{기본정렬:소렌스탐, 안니카}} [[분류:1970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 [[분류:애리조나 대학교 동문]] [[분류: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스웨덴의 무신론자]] [[분류:LPGA 투어 골프 선수]] [[분류:스웨덴계 미국인]] [[분류: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베토벤}} {{음악가 정보 | 이름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원어이름 = Ludwig van Beethoven | 그림 = Beethoven.jpg | 설명 =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를 들고 있는 베토벤의 초상화 | 본명 = Ludwig van Beethoven | 출생일 = {{출생일|1770|12|17}}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본 (독일)|본]]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827|3|26|1770|12|17}} | 사망지 = [[오스트리아 제국]] [[빈]] | 가족 = | 배우자 = | 장르 = [[서양 고전 음악]] | 직업 = [[작곡가]], [[피아노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 악기 = [[피아노]], [[오르간]] | 학위 = | 종교 = | 활동시기 = 1778년 ~ 1827년 | 소속팀 = | 관련활동 = | 웹사이트 = | 서명 = Beethoven Signature.svg }} '''루트비히 판 베토벤'''({{llang|de|Ludwig van Beethoven}}, {{IPA-de|ˈluːtvɪç fan ˈbeːtˌhoːfn̩|3=De-Ludwig van Beethoven.ogg}},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독일의 [[본 (독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6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고전주의 음악|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종종 영웅적인 인물로도 묘사된다. '''음악의 [[성인 (불교)|성인]]'''(聖人) 즉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 (베토벤)|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베토벤)|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베토벤)|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 《[[피아노 소나타 8번 (베토벤)|비창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 생애 == === 집안 === [[파일:Beethoven house of birth Bonn 2008.jpg|섬네일|200px|위오른쪽|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탄생지, 현재는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small>(Ludwig van Beethoven, 1712–1773)</small>이었다.{{refn|"판(van)"은 베토벤의 가족이 [[플란데런]] 지역에서 왔음을, "베토벤"은 [[비트 (뿌리)|비트]] 농장 근교에서 생활했음을 암시한다.{{sfn|Cooper|1996|p=36}}|group=n}}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어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sfn|Cooper|2008|p=407}} 루트비히가 죽기 전에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일종의 음악적 부적으로 그의 손자 루트비히의 방에 걸려 있었다. 루트비히는 같은 궁정에서 테너로 고용되어 노래를 불렀으며 때때로 부업으로 건반악기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던 외아들 요한<small>(Johann van Beethoven, 1740–1792)</small>이 있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마그달레나 케베리히<small>(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small>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small>(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small>의 딸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현재 본의 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ref>{{웹 인용|url=https://www.beethoven.de/en/about-us#history|title=Beethoven-Haus History|author=<!--Not stated-->|date=|website=Beethoven-Haus Bonn|publisher=|access-date=16 April 2020|quote=}}</ref>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 세례를 받은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자신도 본인의 생일을 12월 16일로 여겨왔으나 직접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sfn|Thayer|1967a|p=53}}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small>(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small>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ref group="n">베토벤 전기 작가인 알렉산더 휠록 세이어<small>(Alexander Wheelock Thayer, 1817–1897)</small>는 《일곱 개의 바가텔, Op. 33》과 가곡 《여덟 개의 노래, Op. 52》 등으로 추측한다.</ref> 팔아치우는 등 여러 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small>(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small>{{sfn|Stanley|2000|p=7}}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요한은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되어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형의 반대를 꺾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한 후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 어린 시절 === 베토벤은 아버지 요한에게서 처음 음악을 배웠다. 흔히 어린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하며 요한을 가혹한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mall>(Sir George Grove, 1820–1900)</small>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적는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알아차리고, 같은 궁정 동료 등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베토벤의 교육을 맡겼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된 질 판 덴 에덴<small>(Gilles van den Eeden, 1708–1782)</small>, 가족의 후원자인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small>(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small>,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small>Franz Rovantini</small>{{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sub>Franz Anton Ries</sub>{{sfn|Swafford|2014|p=74}}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베토벤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엄격한 교육 방침 안에서 종종 울기도 했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가 침대에서 자고있던 베토벤을 건반 앞으로 끌고가는 일도 있었다.{{sfn|Swafford|2014|pp=22, 32}} 베토벤이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 요한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볼프강]]과 딸 나넬을 어릴 때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것을 보고,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일곱살의 베토벤이 여섯살의 "신동"으로 선전하기도 했다.{{sfn|Thayer|1967a|pp=57–8}}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본에서의 생활<sup>1780–1792</sup> === ==== 베토벤의 교사 ==== [[파일:Christian Gottlob Neefe.jpg|왼쪽|섬네일|크리스티안 네페 (1780년 경, 고틀로브 아우구스트 리베에 의한 초상화)|223x223픽셀]]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small>(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small>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sfn|Solomon|1998|p=34}}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출판작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가 출판된다.{{sfn|Stanley|2000|p=7}}{{refn|[[작품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은 독일의 음악학자 한스 할름과 게오르크 킨스키가 [[WoO]] 번호를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그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는 "WoO Anhang" 번호를 붙였다. 이후 미완성되었거나 짧은 일부 작품들에는 Hess 번호가 또 새로 붙여졌다.{{sfn|Cooper|1996|p=210}}|group=n}} 베토벤은 1782년부터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하다가 1784년부터 궁정 예배당에서 임금을 받는 직원으로 일했다.{{sfn|Thayer|1967a|pp=65–70}} 1783년에 출판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 (베토벤)|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small>(Maximilian Friedrich von Königsegg-Rothenfels, 1708–1784)</small>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선제후"(Kurfürst)라는 부제로 불린다.{{sfn|Thayer|1967a|p=69}}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sfn|Thayer|1921|p=59}} 같은 해에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blockquote>"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blockquote>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small>(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small>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임금 약간을 지불하며 1784년 그를 두 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히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에 돈을 대주었다.{{sfn|Cooper|1996|p=50}}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 베토벤은 이 시기 앞으로 도움이 될 될 여러 인연을 만들었다. 폰 브로이닝<sub>von Breuning</sub> 가문도 그 중 하난데, 그곳에서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이닝로부터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앞으로 평생 친구가 될 폰 브로이닝 가문의 약혼자인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small>(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small>도 이 시기 만났다. 폰 브로이닝 집안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던 차에 또다른 가정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 손님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small>(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small>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이 본에서 사는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sfn|Cooper|1996|p=55}}{{sfn|Solomon|1998|pp=51–52}}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sfn|Thayer|1967a|p=121–122}} ==== 궁정악단 ==== [[파일:Count von Waldstein.jpg|섬네일|upright=0.8|발트슈타인 백작: 1800년 경, 안토닌 마체크에 의한 초상화|191x191픽셀]] 1785–90년에는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초기 출판물이 끌었던 미지근한 반응과 베토벤 가족의 지속적인 문제 때문일 수 있다.{{sfn|Solomon|1998|pp=36–37}} 그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1795년 빈을 처음 방문한 동안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궁정에서 알콜중독의 결과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sfn|Thayer|1967a|p=95}} 이에 따라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고, 가르치는 일과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가족의 수입에 더 기여했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글루크]], [[조반니 파이시엘로|파이시엘로]]의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인 요세프 라이하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작곡가, 플루티스트,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톤 라이하<small>(Anton Reicha, 1770–1836)</small>와도 친구가 되었다.{{sfn|Thayer|1967a|p=96}}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음)을 작곡했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일련의 변주곡에서 그의 [[교향곡 3번 (베토벤)|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를 확인했다.{{sfn|Cooper|2008|pp=35–41}} 베토벤이 그의 첫 번째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마도 네페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1790년 본의 문학 협회는 선제후에 의해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으로 칸타타, WoO 87을 의뢰하고, 이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 황제 즉위 축하 기념으로 추가로 칸타타, WoO 88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sfn|Cooper|1996|pp=93–94}} 이 두 황제 칸타타는 그 당시에 연주된 적이 없었으며 1880년대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 그리고 그의 음악이 고전주의의 전통과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양식의 예언자로 묘사될 때까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었다.{{sfn|Swafford|2014|pp=107–111}} 베토벤은 아마도 1790년 말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의 크리스마스 무렵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sfn|Cooper|2008|p=35}} 그들은 1년 반 후인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본에서 다시 만났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곡(《[[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과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하이든에게 보여준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베토벤은 고데스베르크의 무도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그 당시 베토벤은 나이든 스승과 함께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sfn|Cooper|2008|p=41}}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blockquote>"당신은 오랫동안 좌절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빈으로 갈 것입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blockquote> === 빈 – 초기<sup>1792–1802</sup> === ==== 하이든과의 만남 ==== {{참고|베토벤과 그의 동시대인#요제프 하이든|}}[[파일:Beethoven1791.jpg|왼쪽|섬네일|upright=0.8|열아홉 살의 베토벤 (1791년, 작자 미상)|185x185픽셀]] 베토벤은 1792년 11월 프랑스에서 전쟁이 퍼졌다는 소문이 있는 가운데 [[선제후]]의 도움으로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그는 빈에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sfn|Thayer|1967a|pp=34–36}}{{sfn|Cooper|2008|p=42}}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최근 사망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후계자라는 널리 퍼진 감정에 대해, 그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고 뚜렷하게 모차르트적 풍미를 가진 작품을 쓰면서 화답했다.{{sfn|Cooper|2008|p=43}} 그는 즉시 작곡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와 연주에 전념했다.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서 그는 [[대위법]]을 마스터 하려고 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3}} 그는 또한 이그나츠 슈판치히<small>(Ignaz Schuppanzigh, 1776–1830)</small> 밑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sfn|Cooper|2008|pp=47, 54}} 이 시기의 초기에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주로 이탈리아 성악 작곡 형식에 대하여 이따금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적어도 1802년까지, 그리고 아마도 1809년까지 계속되었다.{{sfn|Thayer|1967a|p=149}}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베토벤은 [[선제후]]에 의해 본으로 귀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도리어 빈에 남는 것을 선택했고,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요한 알브레흐츠베르거]] 및 다른 스승들과 함께 [[대위법]] 공부를 계속 했다. 여하튼, 이 시기까지 1794년 10월에 그랬던 것처럼, 본이 프랑스로 넘어가서 사실상 급료나 복귀의 필요성 없이 베토벤을 남겨둘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고용주들에게는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sfn|Ronge|2013}}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sfn|Cooper|2008|p=53}} [[파일:Beethoven Riedel 1801.jpg|섬네일|upright=0.9|젊은 베토벤 (1801년, 카를 트라우곳 리델의 초상화)]] ==== 연주 활동 ====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sfn|Solomon|1998|p=59}}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sfn|Cooper|2008|p=46}}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sfn|Cooper|2008|p=53}}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refn|이 때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피아노 협주곡 1번 (베토벤)|1번]]인지 [[피아노 협주곡 2번 (베토벤)|2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곡 모두 당시에 작곡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sfn|Cooper|2008|p= 59}}|group=n}}{{sfn|Lockwood|2005|p=144}}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sfn|Cooper|2008|p=59}}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sfn|Cooper|2008|p=56}} ==== 유명세를 타다 ====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ref name="Cooper62_5">[[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62–65</ref>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ref name="Cooper68">[[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68</ref>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small>(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small>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ref name="Cooper69">[[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69</ref>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a piano he joked was "far too good for me..because it robs me of the freedom to produce my own tone". (번역 검토 필요)-->라고 말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5119&template=dokseite_digitales_archiv_en&_eid=5055&_ug=Musicians&_dokid=b88&_mid=Written%20documents%20by%20Ludwig%20van%20Beethoven%20and%20others&_seite=1|제목=Letter to Andreas Streicher in Vienna, Preßburg|성=Beethoven|이름=Ludwig|날짜=19 November 1796|출판사=Beethoven-Haus Bonn Digital Archives|언어=독일어|확인날짜=2009-06-28}}{{깨진 링크|url=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5119&template=dokseite_digitales_archiv_en&_eid=5055&_ug=Musicians&_dokid=b88&_mid=Written%20documents%20by%20Ludwig%20van%20Beethoven%20and%20others&_seite=1}}</ref>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ref name="Cooper72">[[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72</ref>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ref name="Cooper75_6">[[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75–76</ref>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small>(Joseph Johann Baptist Wölfl, 1773''–''1812)</small>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small>(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small>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small>(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small>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sfn|Solomon|1998|p=79}}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8번 (베토벤)|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small>(Barry Cooper, 1949''–'')</small>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ref>strength of character, depth of emotion, level of originality, and ingenuity of motivic and tonal manipulation</ref> ==== 음악적 성숙 ==== [[파일:Ölenhainz - Franz Joseph Maximilian von Lobkowitz.jpg|섬네일|왼쪽|롭코비츠 공작: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욀렌하인츠의 초상화|233x233픽셀]] 베토벤은 1798년과 1800년 사이에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small>(Joseph Franz von Lobkowitz, 1772–1816)</small> 공작의 요청으로 첫 [[현악 사중주 1-6번, Op.18 (베토벤)|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을 작곡했다. 그것들은 1801년에 출판되었고 역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그는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Op. 20을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그는 교향곡 [[교향곡 1번 (베토벤)|1번]]과 [[교향곡 2번 (베토벤)|2번]]의 초연으로 [[요제프 하이든|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에 이어 젊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세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 음악적 발전, 변조 및 조화의 사용, 감정의 묘사는 모두 그를 그의 영향으로부터 차별화 시켰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일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생겨났던 영향을 고조시켰다.{{sfn|Cooper|2008|p=58}}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1800년 4월 2일 [[부르크 극장]]을 고용하고, [[요제프 하이든|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교향곡 1번 (베토벤)|교향곡 1번]], 그리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후자의 세 작품은 모두 미발표)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일반음악신문''<sub>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sub>''》이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표현한 이 연주회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이 굳이 독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sfn|Cooper|2008|p=90}}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다.{{sfn|Cooper|2008|p=97}}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베토벤)|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Op. 16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피아노와 목관 5중주)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임), [[무치오 클레멘티]]({{llang|it|Muzio Clementi}}, 1752–1832)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의 것들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이 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sfn|Cooper|2008|p=97}} ==== 교습 ==== [[파일:Josephine Brunsvik.jpg|233x233px|섬네일|요제피네 브룬스비크, 펜슬 미니어처 (1804년 이전, 작자 미상)]] 1799년 5월 헝가리 귀족인 안나 브룬스비크<small>(Anna Brunswik, 1752-1830)</small><ref>{{웹 인용|url=https://familypedia.wikia.org/wiki/Elisabeth_Wankel_von_Seeberg_(1752-1830)|제목=Elisabeth Wankel von Seeberg (1752-1830)|언어=en|확인날짜=2020-11-09}}</ref>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작은 딸 요제피네<small>(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small>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요제피네는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베토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요제프 다임<small>(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small> 백작과 얼마후 혼인을 했다(베토벤은 이후에도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다.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다시 인연을 이어 나가지만, 역시나 브룬스비크 가족의 압력으로 그들의 관계는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ref name="Cooper80">[[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80</ref> 1801년 후반에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가족을 통해 젊은 백작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small>(Julie Guicciardi, 1784–1856)</small>를 만났다. 그는 1801년 1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줄리에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신분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서 그것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1802년 그는 현재 일반적으로 "월광 소나타"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14번]], Op. 27-2를 출판했다. 이 소나타는 줄리에타에게 헌정되었다.{{sfn|Steblin|2009}} 그에게는 그 밖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de:Ferdinand Ries|페르디난트 리스]]<small>(Ferdinand Ries, 1784–1838)</small>를 가르쳤는데, 작곡가가 된 리스는 베토벤이 사망한 지 11년 후, 어린 시절 친구에 관한 중요하고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억들을 모아놓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전기적 노트''<sub>Biographische Notizen über Ludwig van Beethoven</sub>''》를 프란츠 베겔러와 함께 공동으로 썼다. 후에 스스로 유명한 음악 교사가 된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도 있다. ==== 음악 사업 ==== 1801년 봄 그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베토벤)|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 43》을 완성,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고 같은 해 [[빈]]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프로테우스 신화를 음악적,철학적으로 신비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연주되었고,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ref name="Cooper98_103">[[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98–103</ref>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베토벤)|교향곡 2번]]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 버렸다.<ref group="n">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안 데르 빈 극장]]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 (베토벤)|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베토벤)|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베토벤)|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도 같이 연주되었다. 당시 발레음악에 잘 쓰이지 않았던 특정화음을 사용해 제각각 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 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ref><ref name="Cooper112_127">[[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112–127</ref> 1802년 이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스파가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에 작곡된 작품에 대해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하는 것 외에도 카스파는 베토벤이 이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베토벤의 선호에 반하여) 형에게 그의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거나 개작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순순히 응하고 있는데, 이유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그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f name="Cooper112_115">[[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112–115</ref> === '영웅적' 시기<sup>1802–1812</sup> === ==== 난청 ==== [[파일:Beethoven_Hornemann.jpg|섬네일|205x205픽셀|1803년의 베토벤 (크리스티안 호르네만에 의한 초상화)]]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small>(''Charles Neate'', 1806–1879)</small>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sfn|Solomon|1998|p=160}}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sfn|Swafford|2014|pp=223–24}}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small>(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small>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small>(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small>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ref name="Cooper10822">[[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108</ref>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5}}{{refn|이 난청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지목되고 있지만, 그 중 베토벤이 즐겨 마셨던 와인으로부터 [[납 중독]]{{sfn|Stevens|2013|pp=2854–2858}}<ref>{{웹 인용|url=https://pubmed.ncbi.nlm.nih.gov/23686526/|title=Lead and the deafness of Ludwig van Beethoven|access-date=2020-10-21|website=National Center for Biotechnology Information}}</ref> 또는 [[발진열]]로 본다.{{sfn|Oiseth|2015|pp=139–47}}|group=n}}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ref name="Cooper12022">[[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120</ref>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seize Fate by the throat; it shall certainly not crush me completely."-->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5}}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Let your deafness no longer be a secret – even in art."-->라고 언급했다.{{sfn|Solomon|1998|p=162}}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5}}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sfn|Ealy|1994|p=262}}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 '영웅적' 양식 ==== [[파일:Eroica_Beethoven_title.jpg|왼쪽|섬네일|"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 나폴레옹의 이름이 베토벤에 의해 긁어내져 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sfn|Tyson|1969|p=138-141}}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sfn|Cooper|2008|p=131}}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베토벤)|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4}}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ub>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sub>"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sfn|Cooper|2008|p=148}}[[파일:Beethoven_3.jpg|섬네일|214x214픽셀|요제프 빌리브로르도 멜러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현악 사중주 7-9번, 작품 번호 59 - 라주몹스키 (베토벤)|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21번 (베토벤)|발트슈타인]]과 [[피아노 소나타 23번 (베토벤)|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베토벤)|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6}}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교향곡 4번 (베토벤)|4번]]부터 [[교향곡 8번 (베토벤)|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4 and 15}}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베토벤)|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sfn|Cassedy|2010|pp=1–6}}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sfn|Cooper|2008|pp=78–79}}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sfn|Lockwood|2005|pp=300–01}}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피아노 삼중주 7번 (베토벤)|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듣기|type=music|pos=left|filename=Ludwig van Beethoven - Symphonie 5 c-moll - 1. Allegro con brio.ogg|title=교향곡 5번, 작품번호 67 (1악장)|description=}}[[테아터 안 데어 빈|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이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베토벤)|''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런 인정만으로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1808년 12월에 조직하여 널리 광고된 대규모 자선 공연의 초연에는 교향곡 [[교향곡 5번 (베토벤)|5번]]과 [[교향곡 6번 (베토벤)|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4번]], [[미사곡 다장조 (베토벤)|미사곡 C 장조]], 소프라노를 위한 셰나와 아리아, [[아! 못 믿을 이여|''아! 못 믿을 이여'']], [[합창환상곡|합창 환상곡]] c 단조 등에서 발췌한 것이 포함되었다. ([[카를 체르니|체르니]]와 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를 포함한) 많은 청중들이 있었다. 그러나 연습이 부족했고, 많은 중단과 시작이 수반되었으며, 환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베토벤이 음악가들에게 "나쁜 연주, 잘못된 연주, 또 다시!"라고 외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재정적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sfn|Cooper|2008|p=150}} 1808년 가을, 왕립극장에서의 자리를 거절당한 후, 베토벤은 [[카셀]] 궁정의 [[카펠마이스터]]라는 좋은 급료를 받는 자리를 당시 웨스트팔렌 왕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세 번째(막내)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었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Georg Ludwig Kinsky, 1882-1951) 백작, 그리고 로브코비츠 공작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sfn|Thayer|1967a|p=457}}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 만이 베토벤에게 합의된 날짜에 주기로 한 연금에 대한 자신의 몫을 지속적으로 지불하였다.{{sfn|Cooper|2008|p=195}} 장교직 복무로 소환된 킨스키 공작은 1812년 11월 말에서 떨어진 후 사망하였다.{{sfn|Cooper|1996|p=48}}{{sfn|Cooper|2008|p=48}} 로브코비츠 공작은 그의 연주실을 만들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였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산,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그는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빈에서 도망쳐야 했다. 베토벤은 다시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는 몹시 괴로워하며 가난하게 죽었다. 베토벤은 법률에 의지하였고, 1815년에 그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sfn|Solomon|1998|p=194}}<ref>{{웹 인용|url=https://www.classicfm.com/composers/beethoven/guides/beethovens-life-prince-lobkowitz/|제목=Prince Lobkowitz (1772-1816): Beethoven's improvisation contest and more|언어=en|확인날짜=2020-11-13}}</ref>[[파일:Archduke Rudolph.jpg|섬네일|216x216픽셀|루돌프 대공 (19세기 초반, 요한 밥티스트 폰 람피 더 엘더에 의한 초상화)|왼쪽]][[빈]]에 도의 건강이 악화된 것과 함께 베토벤의 출판사는 이 기간 동안 현저하게 줄어든 생산량을 설명한다. 올해의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에는 ''[[현악 사중주 10번 (베토벤)|현악 사중주 10번]]'' E♭ 장조, Op. 74 ("하프"), 그리고 요제피네의 언니인 테레제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24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24번'']], F# 장조, Op. 78 ("테레제를 위하여”) 등이 있다. ==== 괴테 ==== [[파일:Goethe_Kügelgen.jpg|섬네일|210x210픽셀|1808년의 괴테: 게하르트 폰 퀴겔겐에 의한 초상화]] 1809년 말에 베토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희곡 [[에그몬트]]의 [[부수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받았다. 1810년에 등장한 결과물(Op. 84, 서곡과 9개의 악곡으로 구성됨)은 베토벤의 "영웅적" 양식에 잘 들어맞았고, 베토벤이 괴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괴테의 시 세 편을 설정으로 하여 노래를 만들었다(Op. 83). 괴테의 친구이자 안토니 브렌타노의 사촌인 [[베티나 폰 아르님|베티나 브렌타노]](Bettina von Arnim, 본명: 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1785[[4월 4일|–]]1859)로부터도 시인에 대해서 배웠다(또한 이때 베티나는 베토벤에 관하여도 괴테에게 글을 썼다). 비슷한 맥락의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사중주 세리오소"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현악 사중주 11번 (베토벤)|현악 사중주 11번]]'' F 단조, Op. 95와 "대공 삼중주"라는 별칭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후원자 루돌프에게 헌정한 [[피아노 삼중주 7번 (베토벤)|''피아노 삼중주 7번'']] B♭ 장조, Op. 97이 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7}}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베토벤)|''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His talent astounded me; nevertheless, he unfortunately has an utterly untamed personality, not completely wrong in thinking the world detestable, but hardly making it more pleasant for himself or others by his attitude. Yet he must be shown forgiveness and compassion, for he is losing his hearing, something that affects the musical part of his nature less than the social. He is naturally laconic, and even more so due to his disability." (In reply, Zelter confessed that he admired Beethoven’s music ‘with alarm’.)-->{{sfn|Cooper|1996|p=47}}<ref>{{웹 인용|url=https://theamericanscholar.org/when-beethoven-met-goethe/|제목=When Beethoven Met Goethe|날짜=2017-07-27|언어=en-US|확인날짜=2020-11-12}}</ref><ref name=":2">{{웹 인용|url=https://www.gramophone.co.uk/features/article/a-meeting-of-genius-beethoven-and-goethe-july-1812|제목=A meeting of genius: Beethoven and Goethe, July 1812|언어=en|확인날짜=2020-11-13}}</ref>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Goethe delights far too much in the court atmosphere, far more than is becoming in a poet."-->라고 편지를 보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7}}<ref name=":2" />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The admiration, the love and esteem which already in my youth I cherished for the one and only immortal Goethe have persisted."-->{{sfn|Cooper|1996|p=47}}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ref name=":2" /> ==== 불멸의 연인 ==== {{본문|불멸의 연인}}[[파일:Antonie_Brentano3.jpg|섬네일|280x280픽셀|안토니 브렌타노 (1808년, 요제프 카를 슈틸러의 초상화)]]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sfn|Brandenburg|1996|p=582}}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sfn|Cooper|1996|p=107}}{{refn|Solomon sets out his case in detail in his biography of Beethoven.{{sfn|Solomon|1998|pp=223–231}}|group=n}}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벤첼 로베르트 폰 갈렌베르크|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sfn|Solomon|1998|pp=196–197}}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sfn|Solomon|1998|pp=197–199}}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sfn|Cooper|1996|p=20}}{{refn|The manuscript (now lost) was found in Therese Malfatti's papers after her death by Beethoven's early biographer [[Ludwig Nohl]]. It has been suggested that Nohl misread the title, which may have been ''Für Therese''.{{sfn|Thayer|1967a|p=502}}|group=n}} 베토벤보다 열 살 아래인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의 가족 소개를 제공했던 베티나 브렌타노의 이복 동생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였다. 안토니는 베토벤과 짧은 시기 동안(1811-1812년) 바람을 피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토니는 1812년 말에 남편과 함께 빈을 떠나 베토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또는 그와 서신 왕래가 분명했다). 말년에 그녀는 베토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친절하게 말했다.{{sfn|Solomon|1998|pp=231–239}} === 찬사<sup>1813–1822</sup> === ==== 가족 문제 ==== [[파일:Karl_van_Beethoven_Miniature_Portrait.jpg|왼쪽|섬네일|250x250픽셀|카를 판 베토벤, 1820년경: 작자 미상의 초상화]] 1813년 초 베토벤은 어려운 감정적 시기를 겪은 것 같았고 그의 작곡의 결과도 떨어졌다. 그의 개인적 모습도 퇴화되었다—일반적으로 깔끔했었다—공공장소에서의 그의 태도, 특히 식사할 때 그의 태도가 그랬다. 가족 문제가 이것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sfn|Solomon|1998|pp=284–285}} 베토벤은 1812년 10월 말에 그의 둘째 동생 요한을 방문했다. 그는 요한이 이미 사생아를 가졌던 테레제 오버마이어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기를 바랬다. 그는 요한에게 관계를 끝내도록 설득할 수 없었고 지역 시민 및 종교 당국에 호소했지만 요한과 테레제는 11월 8일에 결혼했다.{{sfn|Solomon|1998|p=282}} 그의 동생 카스파의 결핵으로 인한 질병과 궁극적인 죽음은 점점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카스파는 한동안 아팠다. 1813년에 베토벤은 그에게 1500 플로린을 빌려 주었고 그 상환금은 결국 복잡한 법적 조치로 이어졌다.{{sfn|Solomon|1998|pp=301–302}} 1815년 11월 15일에 카스파가 사망한 후 베토벤은 당시 아홉살이었던 아들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카스파의 아내 요한나와 오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베토벤은 카스파에 대한 성공적인 지원으로 소년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지명되는 것에 성공했었다. 카스파의 유언장에 대한 늦은 유언 보충서로 그와 요한나는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sfn|Solomon|1998|pp=302–303}} 베토벤은 1816년 1월에 조카를 양육권에서 빼내는데 성공했고, {{sfn|Solomon|1998|p=303}}1818년에 그를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안 다시 카를 주변의 법적 절차에 몰두했다. 귀족 계급(the nobility), 란트법(Landrechte)에 대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베토벤은 자신이 고귀한 출생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1818년 12월 18일에 빈의 민사관으로 사건이 옮겨져 단독 후견인 자격을 잃었다.{{sfn|Solomon|1998|p=303}}{{refn|Their ruling stated: "It&nbsp;... appears from the statement of Ludwig van Beethoven &nbsp;... is unable to prove nobility: hence the matter of guardianship is transferred to the Magistrate{{sfn|Solomon|1998|p=303}}|group=n}} 그는 1820년에 격렬한 법적 투쟁 끝에 양육권을 되찾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카를이 위압적인 태도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조카의 삶에 자주 간섭했다.{{sfn|Solomon|1998|pp=364–365}} ==== 전후의 빈 ==== 1813년 6월 베토벤은 마침내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769–1852)이 이끄는 연합에 의한 [[비토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중요한 작곡을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 받았다. 발명가 요한 네포묵 멜젤(Johann Nepomuk Mälzel, 1772–1838)은 그의 기계 오케스트라 팬하몬니콘의 행사를 기념하는 작품을 쓰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큰 밴드를 위한 작곡을 썼기 때문에 멜젤이 만든 기계로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대안으로 베토벤은 오케스트라를 위해 교향곡을 다시 작성, 첫 번째 부분에서 추가 작업을 하고 작품 이름을 [[웰링턴의 승전]](Op. 91, "전쟁 교향곡"이라고도 함)으로 변경했다.{{refn|The work is not a true symphony, but a [[programme music|programmatic]] piece including French and British soldiers' songs, a battle scene with artillery effects and a [[fugue|fugal]] treatment of ''[[God Save the King]]''.{{sfn|Cooper|1996|p=220}}|group=n}} 이것은 12월 8일에 그의 [[교향곡 7번 (베토벤)|일곱 번째 교향곡, Op. 92]]와 함께 전쟁 피해자를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12월 12일에 반복되었다. 오케스트라에는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와 도메니코 드라고네티(Domenico Dragonetti, 1763–1846)를 포함하여 당시 빈에 있었던 여러 유명하고 떠오르는 음악가가 포함되었다.{{sfn|Thayer|1967a|pp=559–565}} 그 작품은 1814년 1월과 2월에 베토벤의 연주회에서 반복되는 공연으로 받아들여졌다.{{sfn|Thayer|1967a|pp=575–576}} 이 연주회는 베토벤이 그의 경력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사망 당시 그의 재산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될 은행 주식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sfn|Scherer|2004|p=112}} 베토벤의 새로운 인기로 인해 피델리오의 부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개정판은 빈에서 7월에 개막했을 때 호평을 받았으며 다음 해에도 그 곳에서 자주 상연되었다.{{sfn|Solomon|1998|pp=288, 348}} 베토벤의 출판사인 아르타리아(Artaria)는 스무살의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오페라의 피아노 악보를 준비하도록 의뢰했으며,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끝났습니다!"라고 새겼다 – 베토벤은 "오 남자, 그대 스스로를 도우라."를 추가했다.{{refn|"''Fine'' mit Gottes Hülfe" – "O, Mensch, hilf dir selber."|group=n}}{{sfn|Conway|2012|p=129}} 그해 여름, 베토벤은 5년 만에 처음으로 피아노 소나타([[피아노 소나타 27번 (베토벤)|27번]] e 단조, Op. 90)를 작곡했다.{{sfn|Solomon|1998|p=292}} 그는 또한 1814년 11월에 시작된 빈 의회에 온 많은 국가 원수들과 외교관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애국적인 분위기에서 음악을 제작한 많은 작곡가들 중 한 명이었는데, 메이너드 솔로몬은 Op. 136의 [[영광의 순간]]과 이와 유사한 합창 작품들에 대해, "베토벤의 인기를 넓혔지만, 진지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sfn|Solomon|1998|p=287}} 1814년 4월과 5월에 그의 대공 삼중주에서 연주한 베토벤은 독주자로서 마지막으로 공개 출연했다. 작곡가 [[루이스 슈포어]]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피아노는 음정이 좋지 않았고, 베토벤은 그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술가의 미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매우 슬펐다." 1814년부터 베토벤은 멜젤에 의해 디자인 된 나팔형-보청기를 사용하였다(이 중 다수는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다).{{sfn|Ealy|1994|pp=266–267}} 그의 1815년의 Op. 94는 시 "희망에 부쳐"("An die Hoffnung")의 표현력 있는 두 번째 설정을 포함하고 있다. 1805년 Op. 32의 첫 번째 설정(요제피네 브룬스비크를 위한 선물)과 비교하면, "훨씬 더 극적이고 ... 전체 정신은 오페라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이다."{{sfn|Lockwood|2005|p=278}} 그러나 그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작품 외에도 그는 두 개의 첼로 소나타(Op. 101-1,2)와 몇 개의 작은 작품을 시작했지만, 여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포기했다.{{sfn|Cooper|1996|pp=24–25}}(희망에 부쳐, Op. 32) ==== 중단 ==== 1815년과 1819년 사이에 베토벤의 생산량은 다시 그의 성숙한 삶에서 유일무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sfn|Solomon|1998|p=296}} 그는 그 원인 중의 하나가 1816년 10월부터 1년 이상 앓았던 긴 병("염증열")이라고 생각했다.{{sfn|Solomon|1998|p=296}} 그의 전기 작가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Elliott Solomon, 1930–2020) 은 이것이 그의 조카 카를과 관련된 현재 진행중인 법적 문제들,{{sfn|Solomon|1998|p=297}} 그리고 베토벤이 현재의 음악적 경향과 점점 더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초자연적인 독일 낭만주의의 발전에 공감하지 않고(슈포어, 하인리히 마르슈너,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에서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순환형식에 대해 작은 양식과 서정적 분위기의 소품으로 임박하고 있는 낭만주의의 파편화에 저항했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헨델]] 및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팔레스트리나]]에 대한 연구로 향했다.<!--Unsympathetic to developments in German romanticism that featured the supernatural (as in operas by Spohr, Heinrich Marschner and Carl Maria von Weber), he also "resisted the impending Romantic fragmentation of the ... cyclic forms of the Classical era into small forms and lyric mood pieces" and turned towards study of Bach, Handel and Palestrina.--> 1817년 멜젤이 새로 개발한 메트로놈에 대한 베토벤의 지지를 구하고 얻었을 때 옛 인연이 갱신되었다.{{sfn|Thayer|1967b|pp=684–686}} 이 기간 동안 그가 완성한 몇 가지 주요 작품으로는 1818년의 "하머클라비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29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29번]]'', Op. 106과 알로이스 야이텔레스의 시를 설정으로 고전주의의 레파토리에 연가곡을 도입한 1816년의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 98이 포함된다. 1818년에 그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의 일부가 될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sfn|Solomon|1998|p=322}} 1818년 초에 베토벤의 건강이 좋아졌고, 열한살인 그의 조카 카를은 1월에 그와 함께 움직였다(카를의 어머니가 1년 안에 그를 법정에서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sfn|Cooper|1996|p=41}} 하지만 곧 베토벤의 청력은 다시 심각하게 악화되어 베토벤과 그의 대화 상대자들은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 공책에 글을 써야했다. 이 "필담장"(筆談帳)은 이 시기 이후 그의 생애에 대한 풍부한 기록 자료이다. 여기에는 음악, 비즈니스 및 개인 생활에 대한 토론이 포함된다. 그것들은 또한 그의 접촉에 대한, 그리고 그가 의도한 그의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조사, 그리고 음악 예술에 대한 그의 의견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sfn|Cooper|1996|pp=164–167}}{{refn|It was suggested by Beethoven's biographer [[Alexander Wheelock Thayer]] that, of 400 conversation books, 264 were destroyed (and others were altered) after his death by his secretary Schindler, who wished only an idealised biography to survive.{{sfn|Clive|2001|p=239}} The music historian [[Theodore Albrecht]] has however demonstrated that Thayer's allegations were over the top. "[It is now] abundantly clear that Schindler never possessed as many as c. 400 conversation books, and that he never destroyed roughly five-eighths of that number."{{sfn|Albrecht|2009|p=181}} Schindler did however insert a number of fraudulent entries that bolstered his own profile and his prejudices.{{sfn|Cooper|1996|p=52}}{{sfn|Nettl|1994|p=103}} Presently 136 books covering the period 1819–1827 are preserved at the [[Staatsbibliothek Berlin]], with another two at the Beethoven-Haus in Bonn.{{sfn|Hammelmann|1965|p=187}}|group=n}} 그의 가계 관리는 다소 개선되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도왔던 호텔 주인 여자 나네테 슈트라이허(Nanette Streicher, 1789–1833)는 계속해서 약간의 지원을 제공했고 마침내 숙련된 요리사를 찾았다.{{sfn|Cooper|2008|p=260}} 영국에서 베토벤이 행했던 존경심에 대한 감사의 후기는 그 해 소유주인 토마스 브로드우드(Thomas Broadwood)가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발표해 베토벤이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열 필하모닉 협회가 제안한 그 해의 런던 방문을 단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sfn|Thayer|1967b|pp=696–698}}{{refn|The Broadwood piano is now in the collection of the [[Hungarian National Museum]] in [[Budapest]].{{sfn|Cooper|1996|p=43}}|group=n}} ==== 부활 ==== [[파일:Ludwig_Van_Beethoven_LCCN2003663902.jpg|왼쪽|섬네일|베토벤 (1819년, 페르디난드 시몬에 의한 초상화)]] 넓은 서신과 로비활동을 포함하는 카를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법적 투쟁으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sfn|Thayer|1967b|p=790}} 1819년에 베토벤의 주요 작곡 프로젝트를 촉발시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올로모우츠]](현 체코) 대주교로서 루돌프 대공이 [[추기경]]-[[대주교]]로 승진했다는 발표였는데, 이것은 1820년 3월 루돌프의 올로모우에서의 취임을 위해 ''장엄미사'', Op. 123을 촉발시켰다. 다른 하나는 출판인 안토니오 디아벨리(Antonio Diabelli, 1781–1858)가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체르니, 여덟 살의 프란츠 리스트 등 50명의 비엔나 작곡가를 초청하여 그가 제공한 주제에 대한 각 변주곡을 작곡하도록 한 것이다. 그가 제공한 주제에 각각. 베토벤은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1819년 중반까지 이미 서른세 개의 ''[[디아벨리 변주곡]]'', Op. 120이 될 스무개의 변주곡을 완성했다. 이 두 작업 중 어느 것도 몇 년 동안 완료될 예정이 작품이 아니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8}}{{sfn|Cooper|1996|p=45}} 1819년의 중요한 헌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40개의 변주곡을 작곡한 루돌프 대공 주제로 쓰여진 G 장조 피아노곡 ''오 희망(O Hoffnung)'', WoO 200이었다. 1818년에 대공이 40개의 변주곡을 썼을 때 "오 희망, 당신이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우리의 고통을 달래주길 바랍니다"(O Hoffnung, du stählst die Herzen, du milderst die Schmerzen)라는 원고의 문구들을 바탕으로 베토벤은 그의 제자를 위한 노래 주제를 작곡했다.{{sfn|Thayer|1967b|pp=741, 745}} 다음 세기에 가장 친숙한 모습 중 하나였던 오늘날의 페르디난트 시몬(Ferdinand Schimon, 1797–1852)의 베토벤 초상화는 예술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쉰들러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그 특별한 모습의 표현에서, 장엄한 이마 ... 단단히 닫혀진 입과 껍질 모양의 턱, ... 다른 어떤 그림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sfn|Thayer|1967b|p=742}} 루돌프를 위한 미사곡을 집필하겠다는 베토벤의 다음 해 결심은 독실한 [[가톨릭주의|가톨릭교도]]로서의 동기가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주의|가톨릭교도]]로 태어났지만 그가 자란 [[본 (독일)|본]]에 있는 궁정에서 행한 종교의 형태는 메이너드 솔로몬의 말에 따르면 "교회와 합리주의 사이에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을 허용하는 타협 이데올로기"였다.{{sfn|Solomon|1998|p=54}} 베토벤의 일기(1812년과 1818년 사이에 가끔 간간히 간직한 일기)는 인도, 이집트, 동양의 종교 철학과 [[리그베다]]의 저술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1821년 7월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개인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 내 가장 깊은 마음을 보시고 인간으로서 가장 양심적으로, 그리고 모든 경우에 인류, 하느님, 그리고 자연이 내게 부여하는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의 스케치 중 하나에서 그는 "내면과 외면의 평화를 위한 간청"을 썼다.{{sfn|Solomon|1998|p=342}} 베토벤의 위상은 1819년/1820년과 1820년/1821년 시즌에 연주자 프란츠 시버 게바우어(Franz Xaver Gebauer, 1784–1822)가 빈에서 행했던 일련의 연주회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교향곡 8곡 모두 연주되었으며 여기에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와 [[미사곡 다장조 (베토벤)|미사곡 C 장조]]가 더해졌다.{{sfn|Thayer|1967b|pp=770–771|loc=(editor's translation)}}{{듣기|type=music|filename=Beethoven - Piano sonata in C minor (opus 111), movement 1.ogg|title=피아노 소나타 32번 C 단조, 작품번호 111 (1악장)|description=베토벤의 후기 동안인 1821년과 1822년 사이에 쓰여졌다.}} 출판인 모리츠 슐레진저(Moritz Adolf Schlesinger, 1798–1871)가 베토벤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19년이었다.{{sfn|Thayer|1967b|pp=734–735}} 그 결과 슐레진저는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 곡과 마지막 사중주를 확보하게 되었다;{{sfn|Thayer|1967b|pp=734–735}} 베토벤에게 있어 슐레진저가 끌리는 것 중 하나는 독일과 프랑스에 출판 시설을 가지고 있고, 저작권 침해 문제가 생길 경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영국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sfn|Conway|2012|pp=185–187}} 베토벤이 1820년에 슐레진저와 계약한 세 개의 소나타 중 첫 번째 소나타는 소나타 당 30 두카트(미사 완료 지연)로 그해 말 출판사에게 발송되었다(''[[피아노 소나타 30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30번]]'', Op. 109, 안토니 브렌타노의 딸 막시밀리안에게 헌정됨).{{sfn|Cooper|1996|pp=27–28}} 1821년 초, 베토벤은 류머티즘과 황달에 시달리는 건강 상태가 다시 한 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슐레진저에게 약속한 나머지 피아노 소나타(''[[피아노 소나타 31번 (베토벤)|31번]]'', Op. 110은 12월에 출판됨)와 미사곡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sfn|Thayer|1967b|pp=776–777, 781–782}} 1822년 초 베토벤은 결혼한 그의 형제 요한과 화해하기를 원했다. 1812년의 요한의 결혼은 그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제 요한은 (당시의 대화책에서 목격된 바와 같이) 단골 방문객이 되었고, 그의 작품 중 일부의 일부의 소유권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등 그의 사업상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또한 반대편인 카를의 승인에는 비록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소득을 지원하는 것을 포함하여 조카의 어머니와 화해를 구했다.{{sfn|Solomon|1998|pp=362 -363}} 1822년 말 두 번의 수수료가 베토벤의 재정 전망을 향상시켰다. 11월 런던 필 하모닉 협회는 교향곡을 위한 커미션을 제안했다. 그는 그가 작업하고 있는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의 적절한 보금자리로서 기쁘게 받아들였다.{{sfn|Thayer|1967b|pp=833–834}} 또한 1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갈리친(Nikolai Borisovich Galitzin, 1794–1866) 공작은 베토벤에게 현악 사중주 세 개를 요청하며 원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베토벤이 당시 그와 함께 살던 조카 카를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각 사중주 당 50 듀카드의 높은 수준으로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다.{{sfn|Thayer|1967b|pp=815–816}} 1840년, 베토벤의 초기에 관하여 최고의 영향력 있는(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이 된 안톤 쉰들러는, 1822년 동안 작곡가의 무보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그가 1814년부터 베토벤 서클의 일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쿠퍼는 "베토벤은 그의 도움을 크게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를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제안했다.{{sfn|Cooper|1996|pp=52, 309–10}} === 마지막 해<sup>1823–1827</sup> === [[파일:Beethoven_Waldmuller_1823.jpg|섬네일|1823년의 베토벤, 페르디난드 게오르그 발트뮐러의 초상화]] 1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sfn|Thayer|1967b|p=879}}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sfn|Conway|2012|p=186}} 베토벤은 그의 작품에 대한 빈의 수용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1822년에 방문한 독일의 [[음악 평론|음악평론가]] 요한 프리드리히 로흘리츠(Johann Friedrich Rochlitz, 1769–1842)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나의 음악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 ''피델리오'' 그들은 그것을 줄 수 없으며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교향곡: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내 협주곡: 누구나 자신이 만든 재료만을 갈고 갑니다. 독주곡: 그것들은 오래 전에 유행에서 벗어났고 여기의 유행이 모든 것입니다. 기껏해야 슈판치히는 가끔 사중주를 파헤칩니다."{{sfn|Thayer|1967b|p=801}} 따라서 그는 베를린에서 미사곡과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을 초연하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 그의 [[빈]] 추종자들이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지역 공연을 준비해달라고 간청했다. 베토벤이 승리했고 교향곡은 1824년 5월 7일에 ''장엄미사'' 섹션과 함께 처음으로 연주되어 캐른트너토르테아트르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9}}{{refn|The first full performance of the ''Missa Solemnis'' had already been given in St. Petersburg by Galitzin, who had been a subscriber for the manuscript 'preview' that Beethoven had arranged.{{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group=n}} 베토벤은 공연의 비트 타임 동안 지휘자 미카엘 움라우프(Michael Umlauf, 1781–1842) 옆에 서 있었다. 움라우프는 베토벤이 [[청각 장애|청각장애인]]인 것을 배려한 콘트랄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 1803–1877)와 오케스트라에게 그를 무시하라고 경고했지만, 청각장애 때문에 베토벤이 목격하기 전까지 뒤따른 박수조차 알지 못했다.{{sfn|Solomon|1998|p=351}}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게 된 베토벤은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는 공명함을 눈으로 확인,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ref name=":0">{{저널 인용|제목=Some Tributes to Beethoven in English Verse|저널=The Musical Times|성=White|이름=Felix|연도=1927|권=Vol. 68|번호=No. 1010|발행월=1 April}}</ref>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은 "지치지 않는 천재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고 표현했고, [[카를 체르니]]는 교향곡에 대해 "너무 신선하고 활기차며 정말 젊은 정신을 들이마셨다 ... 그는 때때로 확실히 낡은 가발이 머리를 흔들도록 이끌었지만, 이 독창적인 사람의 머리에서는 언제나처럼 많은 힘과 혁신, 그리고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고 기록했다. 공연은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기 때문에 베토벤에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하지는 못했다.{{sfn|Cooper|2008|p=317}} 5월 24일에 프로듀서가 그에게 최소한의 수수료를 보장한 두 번째 공연은 참석률이 낮았다. 조카 카를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 나라로 입국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베토벤의 마지막 공개 공연이었다.{{sfn|Cooper|2008|p=318}} 베토벤은 쉰들러가 부정 행위를 하거나 티켓 영수증을 잘못 관리했다고 여겼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해 졌다. 1826년에 두 사람은 화해를 했음에도, 결국 베토벤의 비서는 쉰들러에서 카를 홀츠(슈판치히 사중주단의 두 번째 바이올린 연주자)로 교체되었다.{{sfn|Cooper|1996|p=310}}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현악 사중주 12번 (베토벤)|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현악 사중주 13번 (베토벤)|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현악 사중주 13번 (베토벤)|사중주]] 13번 [[현악 사중주 13번 (베토벤)|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sfn|Thayer|1967b|pp=974–975}}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현악 사중주 14번 (베토벤)|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sfn|Morris|2010|p=213}}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현악 사중주 16번 (베토벤)|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sfn|Thayer|1967b|p=977}}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현악 사중주 13번 (베토벤)|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sfn|Thayer|1967b|p=1014}} === 사망 === {{본문|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죽음}}[[파일:Beethoven_on_his_deathbed.jpg|대체글=|왼쪽|섬네일|250px|임종 순간의 베토벤ː 1827년 3월 27일, 죠셉 단하우저에 의한 스케치]]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sfn|Thayer|1967b|pp=1017–1024}}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sfn|Solomon|1998|p=377}} [[파일:Beethoven_Funerals.jpg|대체글=|섬네일|베토벤의 장례 행렬: 1827년, F. X. 스토버의 수채화]]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요한 네포무크 훔멜|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0}}{{sfn|Solomon|1998|pp=378–379}}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sfn|Solomon|1998|pp=380–381}}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sfn|Thayer|1967b|p=1050-1051}}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sfn|Solomon|1998|pp=381–382}}{{sfn|Conway|2012|p=44}}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sfn|Conway|2012|p=44}}{{sfn|SaccentiSmildeSaris|2011}}{{sfn|SaccentiSmildeSaris|2012}}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 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요한 네포무크 훔멜|훔멜]], [[카를 체르니|체르니]], [[프란츠 그릴파르처|그릴파르처]], [[요제프 마이세더|마이세더]], [[이그나츠 슈판치히|슈판치히]], [[이그나츠 프란츠 카스텔리|카스텔리]], [[요제프 카를 베른하르트|베른하르트]], [[페르디난트 피링거|피링거]], [[토비아스 하슬링거|하슬링거]], [[요제프 뵘|뵘]], [[요한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슈트라이허]], [[지그문트 안톤 슈타이너|슈타이너]], [[카를 홀츠|홀츠]], [[요한 네포무크 볼프마이어|볼프마이어]], [[요제프 링케|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sfn|Cooper|2008|pp=318, 349}}{{sfn|Thayer|1967b|pp=1053–1056}}<ref>{{저널 인용|제목=Beethoven: A Medical Biography|저널=Journal of Medical Biography|성=Palferman|이름=Thomas G|url=https://doi.org/10.1177/096777209300100108|날짜=1993-02-01|권=1|호=1|쪽=35–45|언어=en|doi=10.1177/096777209300100108|issn=0967-7720}}</ref>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 사인(死因)과 건강에 대해 == 만성 복통이나 설사는 일생의 골칫거리였다. 사후에 실시된 부검에서 간, 신장, 비장 외에도 많은 내장에 손상이 보였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정설은 없다. 최근 베토벤의 모발에서 통상의 104배 가까운 납이 검출되어 눈길을 끌었다. 납은 청각이나 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중금속이다. === 청각 장애에 대해 === 베토벤의 난청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ref>{{서적 인용|url=http://www.h-up.com/bd/isbn978-4-588-41021-5.html|title=음악과 병력으로 보는 대작곡가의 모습|last=오시에|first=존|authorlink=오시에 존|날짜=|year=2007|edition=신장판|series=HUP 뮤직 컬렉션|publisher=[[호세대학출판국]]|쪽=|장=|others=칸노 히로유키 역|isbn=978-4-588-41021-5|ref=오시에 2007|month=11|일본 서적}}</ref> [[1796년]] 경부터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ref name="GroveOnline52">Grove Online, section 5</ref> 베토벤은 심각한 [[이명|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ref>그의 이름은 페르디난드 힐러로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이다.</ref> ==== 귀경화증(귀硬化症) 설 ==== 전음성(伝音性)의 난청. 중이(中耳)의 이소골(耳小骨)의 "망치 · 다듬이 · 등자" 중 등자뼈가 경화되어, 진동을 전달하지 못하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병. 현대에 와서는 수술로 개선된다. 베토벤의 난청이 귀경화증인 논거(論據)로, 베토벤이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도 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제자에게 "거기는 이상해!"라고 주의를 준 일화를 들 수 있다. 이는 귀경화증 특유의 사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지만 피아노의 고음부 진동은 약간 느낄 수 있는 성질로 보인다. 또 베토벤은 치아와 피아노 건반을 스틱으로 연결함으로써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일화도 이 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꼽힌다(고도난청 이상은 감음성 난청이며 골도음(骨导音) 이용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의학적 분석으로는 이들 증상으로부터 도출된 가상 오디오그램과 실제 귀경화증 및 페이젯병의 현미경 사진과의 비교 등에서 이과 의사의 다수의견이 귀경화증이라는 논문이 있어 유력설이 되고 있다. 또한 귀경화증이라면 전음성 난청으로, 고도 난청이나 전농이 되는 것은 드물며, 현대의 의학 분류에서는 고작 중도난청(中度難聴)으로 생각된다. ==== 선천성 매독 설 ==== "증발성 연고를 몸에 칠했다"(수은의 가능성, 당시 매독의 치료법 중 하나)고 하는 기술이 있어 논거로 삼고 있다. 나중에 베토벤의 모발을 분석한 결과 수은이 검출되지 않았고, 게다가 매독은 현기증을 병발하는데도 그런 말이 없어 선천성 매독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 납 중독 설 ==== 성인의 낮은 수준의 납에 대한 계속적인 피폭으로 청각장애를 발생시킨다는 것은 박성균 외 논문 등에서 제시된 바 있다.<ref>Park, et al.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934752/ "Cumulative Lead Exposure and Age-related Hearing Loss: The VA Normative Aging Study"], "Hearing Research Volume 269, Issues 1–2, 1 October 2010, Pages 48-55"</ref> 그러나, 전농(全聾)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귀결될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전술한 박성균 외 논문에서는, 30dB 정도가 경도난청(軽度難聴)이다(단, 이 청력이라고 하면, 리스트를 칭찬했다는 등의 베토벤의 행동에 설명이 붙는다). 베토벤이 어떤 경위로 납에 오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다음과 같다. * 와인의 감미료로 사용된 아세트산 납이라는 설 * 1826년 1월부터 간경화에 의한 복수 환자를 치료한 안드레아스 바브루치 의사가 복부에 바늘로 천자(穿刺)하여 복수를 배수할 때 모발의 분석 결과에서는 복부에 관통할 때마다 납 농도가 높아져 있기 때문에, 상처 소독을 위해 사용된 납이 아닐까 하는 설 [[SBS|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2003년 8월 1일 방송분)에서도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제2차 세계 대전|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ref>그 원인으로 납에 노출되기 쉬운 당대의 생활환경이 지적된다.</ref> 이러한 이유로 백만불 미스터리는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을 납중독으로 추정했다.<ref>납중독으로 청력상실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ref> ==== 메테르니히 정부 대책 설 ==== 실제로는 베토벤이 전농(全聾)이 아니었다는 설이다. 21세기의 현대에서는, 베토벤이 그 자유주의적 주장으로 메테르니히 정권 하에서는 반체제 분자로 여겨지고 있던 것을 들어, 난청이었다고 해도 전농까지는 악화되지 않고, 도청을 막기 위해서 필담(筆談)장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그 연장으로서 "베토벤은 암호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가설에 기초한 "비밀첩보원 베토벤"<ref name="h">후루야마 카즈오 『비밀 첩보원 베토벤』 신초신서, 2010년。{{ISBN|978-4-10610-366-7}}</ref>이라는 서적도 출판되었다. 이 설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베토벤 말년의 1823년 4월 13일, 데뷔 직후인 리스트의 연주에 임해 그를 높게 평가한 에피소드가 남아 있지만, 귀경화증에 의한 난청이라면 몰라도 전농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지적이나, "하녀에게 계란을 던졌다"라고 하는 류의 유명한 일화도, 이것은 "하녀로 변장한 스파이"에의 정당방위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완전실청 및 청각장애를 앓았던 작곡가들로는 윌리엄 보이스와 [[가브리엘 포레]]가 있지만, 이들의 작곡 활동은 그 후 저조한 모습을 보인 데 비해 베토벤은 그 사이에 많은 중요작을 썼다는 점도 지적된다. == 예술관 == 동시대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E. T. A. 호프만|E. T. A 호프만]]은 베토벤의 예술을 칭송하며, 자신들의 낭만주의 진영에 베토벤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베토벤은 당시 낭만주의의 형식적인 통일감을 무시한, 감상과 감정 표현으로 대표되는 예술과는 거리를 두었다. 베토벤이 주목한 것은 동시대의 문학에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실러]], 또 그 이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들의 것이며, 본업인 음악에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헨델]]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 등의 영향을 받았다.<ref name="木之下&堀内1996p852">[[루트비히 판 베토벤# 키노시타 & 호리우치 1996|키노시타&호리구치 1996]], 85쪽</ref> 베토벤이 "전위"였는가의 여부는 많은 음악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린다. "베토벤은 전위가 아니다"라고 단언한 하라 히로시는 당시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변주곡 등의 구조 모델을 준수하고 발안한 새로운 장르라는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ref>[[하라 히로시 (작곡가)|하라 히로시]] 『무시된 청중』 아트 유니온, 1996년。{{ISBN|978-4-90120-9-014}}</ref> 그러나 "메트로놈의 활용", "모국어에 의한 속도 표시", "피아노의 구조 개선과 음역의 확장", "악곡의 대규모화", "대담한 관현악 편곡", "연주 불가능에의 도전", "소음의 도입"(전쟁 교향곡) 등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 외양, 사생활, 성격 == 안톤 쉰들러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베토벤의 신장은 168 cm로,<ref>Bankl, Hans 및 H. Jesserer.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질병: 그의 삶의 병리와 고통의 병리 (W. Maudrich, 1987)</ref><ref>{{웹 인용|url=https://beethoven.ru/en/node/1313|제목=16. 베토벤의 신장은 얼마입니까?|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en|확인날짜=2020-10-22}}</ref> 당시의 일반 서양인 남성으로는 평균 이상이었으며, 신체는 근육질에 건장한 편이었다. 순수 백인으로서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천연두 반흔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초상화와 동상, 라이프 마스크와 근래에 밝혀진 다양한 여성 관계 등을 볼 때 용모가 미남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정은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눈빛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많은 숭배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옷을 차려 입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 체르니는 처음 베토벤을 만났을 때 [[로빈슨 크루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에서 부스스 곤두선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방 안은 난잡한 반면, 목욕과 빨래를 선호하는 등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결벽증처럼 손을 집요하게 씻는 버릇도 있었다. 또한 생애 최소 60회 이상 이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빵과 날달걀을 넣고 푹 삶은 수프와 [[생선]], [[고기]], [[마카로니 앤드 치즈]]를 좋아했다. 또 와인을 즐겼고, 브랜드는 값싼 [[토커이 포도주]]를 선호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커피는 한 잔을 끓일 때마다 60알의 원두를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ref>Amanda Scherker (2014년 6월 5일 16시 30분 JST). "9명의 위인이 커피 중독이었다니 놀랍다" The Huffington Post. 2017년 8월 20일에 확인함.</ref> 성격은 모순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 반대인 측면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사귐성 있게 친절하고 순진하면서도, 엄격하고 냉혹하며 무도할 정도의 행동을 하는 등 기분의 흔들림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빈에서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경애받고 있었고, 그것은 성대한 장례식과 다수의 참석자를 그린 서화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토벤 괴짜설은 메테르니히 정권에 의한 유언비어라는 견해도 있다 == 사상 == 학자들에 의하면, 베토벤은 [[가톨릭주의|가톨릭 교도]]였지만 진정한 [[기독교인|그리스도교인]]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종교적 작곡가로 분류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 [[안톤 브루크너|브루크너]] 등과는 달리 제도적 [[기독교|그리스도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플라톤]] 등의 고대 그리스 사상에 공감하여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나 [[실러]]에게서도 나타나는 [[범신론]]적인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10번 (베토벤)|교향곡 10번]]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와 그리스 세계의 융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가 파우스트 2부에서 시도한 것인데, 베토벤의 생존 동안에는 1부만 발표되었고 2부는 베토벤 사후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종교관은 결국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과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 등의 후기 작품에서 궁극적 보편성과의 우주적 합일이라는 결론을 보았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등 [[인도 철학]]에도 심취했고,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칸트]]의 사상도 언급하며 칸트의 강의에 출석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었다.<ref name="木之下&堀内1996p85">키노시타 & 호리 1996, 85 페이지</ref> 정치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고, 자유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에서는 반체제 분자로 보여지기도 했다. 천문학에 관한 책들도 깊이 있게 읽고 있었던 그는, 본 대학에서 청강생 자격으로서의 수강이나 [[알프레트 베게너|베게너]] 가문에서 교육을 받은 것 이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당한 교양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 후세의 음악가에 대한 영향 평가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23-04-08}} 베토벤의 음악계에 대한 기여는 매우 컸고, 그 이후의 음악가는 크든 작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가들은 궁중이나 유력 귀족을 섬겼으며, 작품들은 공식 및 사적 행사에 있어서의 기회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베토벤은 그런 후원자와의 주종 관계 및 그 주종 관계에 따른 음악을 거부하고 대중을 향한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가의 효시가 되었다. 음악가=예술가임을 공언한 그의 태도 표명, 또 한 편의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창작이었다는 것은 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자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의 "시와 음악의 융합"이라는 이념에 촉발되어, [[낭만주의 음악]]의 급선봉으로서 그 이념을 더욱 밀고 나아가 악곡을 탄생시켰다. 또 그 표현을 위해 풍부한 관현악법으로 음향 효과를 증대시켰고, 베토벤을 이용한 고전적 화성법을 해체하고,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혁신적 화성으로 조성을 확대했다. 반면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에 살면서 바그너파와 선을 긋고, 어디까지나 베토벤의 견고한 구성과 극적인 전개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 형식의 구축이라는 측면을 이어받아 낭만주의 시대 속에서 음악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유지했다. 그러나 선율이나 화성 등 음악 자체에 넘치는 서정성은 낭만주의 이외의 누구도 아니었다. 또한 이 고전주의 형식에서의 극적인 전개와 구성이라는 측면은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 뿐 아니라 [[안토닌 드보르자크|드보르자크]]와 [[표트르 차이콥스키|차이콥스키]], 그리고 20세기에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쇤베르크]], [[버르토크 벨러|벨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라헨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음악 == {{본문|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목록}} === 세 개의 시기 === 역사가 윌리엄 드랩킨은 이르면 1818년에 한 작가가 베토벤 작품의 세 개의 시기 분할을 제안했으며 그러한 분할은 (종종 시기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날짜나 저작물을 채택하지만) 결국 안톤 펠릭스 쉰들러, 프랑수와-요셉 페티스와 빌헬름 폰 렌즈를 시작으로 모든 베토벤 전기 작가가 채택한 관습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중에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구조 내에서 하위 기간을 식별하려고 했다. 단점은 일반적으로 네 번째 기간, 즉 작업이 덜 고려되는 본에서의 초기 기간을 생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범주의 작업에 대해 수년에 걸친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의 차별적 발전을 무시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피아노 소나타]]는 지속적인 발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진행으로 베토벤의 생애 내내 쓰여졌다; 교향곡이 모두 선형적인 진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모든 유형의 작품에서, 아마도 세 개의 기간으로 그룹화 되는 "현악 사중주"(1801-1802년의 [[현악 사중주 1-6번, 작품 번호 18 (베토벤)|Op. 18]], 1806-1814년의 [[현악 사중주 7-9번, 작품 번호 59 - 라주몹스키 (베토벤)|Op. 59]], [[현악 사중주 10번 (베토벤)|74]] 및 [[현악 사중주 11번 (베토벤)|95]], 그리고 1824년부터의 오늘날 [[후기 현악 사중주 (베토벤)|'후기'로 알려진 사중주]])는 이 분류에 가장 깔끔하게 들어맞는다. 드랩킨은 "이제 우리는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 프로그램 노트, 녹음과 함께 쓰인 에세이, 모든 베토벤 연주회가 있는 한, 우리가 별개의 양식적 기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결론을 내렸다.{{sfn|Cooper|1996|pp=198–200}}{{sfn|Cooper|1996|pp=198–200}} === 본 1782 - 1792 === 1785년까지 베토벤이 쓴 열 개의 초기 작품을 포함하여 약 40개의 작품은 베토벤이 본에서 살았던 해부터 살아 남았다. 베토벤은 1785년에서 1790년 사이에 작곡을 거의 포기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출판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적 반응의 결과 일 것이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영향력 있는 ''Musikalischer Almanack'' ("음악적 연감")의 1784년 리뷰는 베토벤의 노력을 랭크 초보자의 노력과 비교했다.{{sfn|Solomon|1972|p=169}}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면밀히 모델링 한 1785년의 ''초기 피아노 사중주 세 개'', WoO 36는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한 그의 의존성을 보여준다. 베토벤 자신은 본 시기의 작품들에 Op.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나중에 그의 경력에 사용할 목적으로 재작업을 위해 비축한 것이다. 예를 들어, 1805년 빈에서 출판된 여덟 개의 노래, Op. 52의 몇몇 곡들은 본 시절 쓰여진 것들이고, 1796년 빈에서 작곡되고 출판된 [[현악 오중주, Op. 4 (베토벤)|현악 오중주]] E{{music|flat}} 장조, Op. 4는 1792년 쓰여진 관악 팔중주를 재구성 한 것이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2}}{{sfn|Cooper|1996|pp=227, 230}} 찰스 로젠은 본이 빈에 비하면 산만한 곳이라고 지적한다. 로젠은 당시의 베토벤이 [[요제프 하이든|하이든]]이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성숙한 작품을 잘 알지 못했을 것 같았고, 오히려 그의 초기 스타일이 [[요한 네포무크 훔멜|훔멜]]이나 [[무치오 클레멘티|클레멘티]]의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sfn|Rosen|1972|pp=379–380}} 커먼은 본 단계에서의 베토벤은 소나타 스타일의 그의 작품보다 오히려 그의 성악곡으로 더 유명하다고 제안한다. 그는 1792년 빈으로 이주하여 그가 알려지게 된 장르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길을 열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12}} === 첫 번째 시기 === 전통적인 "첫 번째 시기"는 1792년 베토벤이 빈에 도착한 후 시작된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본에서 보다는 작곡을 덜 한 것 같고, 그의 피아노 삼중주, Op. 1은 1795년에야 출판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빈 양식"(오늘 날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나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을 익혀 그 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1795년부터 1800년까지의 그의 작품은 표준보다 규모가 크다(예를 들어 3악장이 아닌 4악장으로 소나타를 쓴다); 전형적으로 그는 미뉴에트와 트리오 보다는 스케르초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종종 극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극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며 템포와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을 포함한다. 하이든이 Op. 1의 세 번째 삼중주가 청중들이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3}} 그는 또한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점차 작품의 범위와 야망을 넓혔다. 초기의 중요한 곡으로는 두 개의 교향곡 ([[교향곡 1번 (베토벤)|1번]]에서 [[교향곡 2번 (베토벤)|2번]]까지: 2번부터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의 도입이 시도됨), [[현악 사중주 1-6번, 작품 번호 18 (베토벤)|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 세트]] ([[현악 사중주 1번 (베토벤)|1번]]에서 [[현악 사중주 6번 (베토벤)|6번]]까지), 첫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베토벤)|1번]]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베토벤)|2번]]까지), 그리고 첫 열네 개의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번 (베토벤)|1번]]에서 [[피아노 소나타 12번 (베토벤)|12번까지]], 그리고 19번과 20번) 등이 있다. === 중기 === 그의 중간의 (영웅적) 시기는 잠식하는 청각 장애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위기가 닥친 직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당시의 위기를 빈 [[고전주의 음악|고전주의]] 형식을 재발견함으로써 탈출하고 있다. 즉, 빈 [[고전주의 음악|고전파]] 두 선배보다 소재로서의 동기의 발전과 전개 · 변용을 철저히 중시하고, 형식적 · 구성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이후 [[코다]]의 확장 등 [[고전주의]] 형식의 확대에 성공했다. 중기에는 영웅주의와 투쟁을 표현하는 대규모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중기의 작품에는 여섯 개의 교향곡 ([[교향곡 3번 (베토벤)|3번]]에서 [[교향곡 8번 (베토벤)|8번]]까지), 마지막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베토벤)|5번]]까지 ), [[삼중 협주곡 (베토벤)|삼중 협주곡]] 및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바이올린 협주곡]], 5개의 현악 사중주 ([[현악 사중주 7번 (베토벤)|7번]]에서 9번까지 3개의 "[[현악 사중주 7-9번, 작품 번호 59 - 라주몹스키 (베토벤)|라주모프스키]]"와 [[현악 사중주 10번 (베토벤)|10번 "하프"]], [[현악 사중주 11번 (베토벤)|11번 "세리오조"]]), 여러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6번 (베토벤)|16번]]에서 [[피아노 소나타 18번 (베토벤)|18번]],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21번 (베토벤)|21번]]에서 [[피아노 소나타 27번 (베토벤)|27]]번까지), [[바이올린 소나타 9번 (베토벤)|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포함된다. 교향곡 부문에서는, 기존 소나타 형식의 비약적 확대 ("[[교향곡 3번 (베토벤)|3번]]"), 선율의 바탕이 되는 동기와 리듬의 철저한 조작 ("[[교향곡 5번 (베토벤)|5번]]", "[[교향곡 7번 (베토벤)|7번]]"), [[표제 음악]]의 시도 ("[[교향곡 6번 (베토벤)|6번]]"), 악장의 연결 시도 ("[[교향곡 5번 (베토벤)|5번]]", "[[교향곡 6번 (베토벤)|6번]]"), 5악장 형식 시도 ([[교향곡 6번 (베토벤)|6번]]) 등 혁신적인 기법이 창조되어 지고, 그 작품들은 [[고전주의]]의 양식미와 [[낭만주의]]를 지극히 높은 차원에서 양립시키며, 음악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 5번 (베토벤)|교향곡 5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어둠→밝음"(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른다)이라는 도식은 극성 구성의 규범이 되어, 이후 [[낭만주의 음악|낭만주의]]의 많은 작품이 이를 추종했다. 이러한 베토벤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연주 인원의 증가와 연결됐고, 그 인원수로 만들어진, 삶을 고무하는 듯한 강음이나 흐느끼는 듯한 약음은 많은 음악가를 자극했다. "중기"는 때때로 "영웅적" 작곡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베토벤 학문에서 점점 더 논란이 되고 있다.{{sfn|Solomon|1990|page=124}} 이 용어는 중기의 대체 이름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중기 전체를 설명하는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ref name="Steinberg2006">{{서적 인용|url={{google books |plainurl=y |id=Xj43LwnGAccC|page=59}}|title=Listening to reason: culture, subjectivity, and nineteenth-century music|last=Steinberg|first=Michael P.|authorlink=Michael P. Steinberg|year=2006|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pages=59–60|isbn=978-0-691-12616-6|accessdate=4 August 2011}}</ref> 교향곡 3번과 5번과 같은 일부 작품은 "영웅적"으로 설명하기 쉽지만 그의 [[교향곡 6번 (베토벤)|교향곡 6번 ("전원]]")이나 그의 [[피아노 소나타 24번 (베토벤)|피아노 소나타 24번]]과 같은 다른 작품은 그렇지 않다.<ref name="BurnhamSteinberg2000">{{서적 인용|url={{google books |plainurl=y |id=iIAexj-DFqYC|page=39}}|title=Beethoven and his world|last1=Burnham|first1=Scott G.|last2=Steinberg|first2=Michael P.|authorlink2=Michael P. Steinberg|year=2000|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pages=39–40|isbn=978-0-691-07073-5|accessdate=4 August 2011}}</ref> === 후기 === [[파일:Zentralfriedhof_Vienna_-_Beethoven.JPG|섬네일|240x240픽셀|빈 중앙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 베토벤의 후기는 1810-1819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청력 저하로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과 맞물려, 동생 카스파의 사망, 그리고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위한 법적 투쟁과 카를에 대한 기대와 집착으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서 두 번째 위기를 겪게 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헨델]]의 작품을 포함하여 오래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으며(특히 호모포니의 전성기였던 당시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의 유산인 [[대위법]], 즉, [[다성음악|폴리포니]]를 연구하였고, 그의 중기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대위법을 대대적으로 도입시키고자 함), 이후의 결과물로부터 첫 번째 시도로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 중에는 [[푸가]]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서곡 ''헌당식'' (1822년)는 이러한 영향을 통합하려는 초기 작업이었다. "후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는 이 시기에 그는 거의 10년 만에 가장 먼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건반으로 돌아왔다. 후기 작품에는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28번 (베토벤)|28번]]에서 [[피아노 소나타 32번 (베토벤)|32번]]까지)와 ''디아 벨리 변주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마지막 두 개의 소나타 ([[첼로 소나타 4번 (베토벤)|4번]]에서 [[첼로 소나타 5번 (베토벤)|5번]]까지), 후기 현악 사중주 ([[대푸가 (베토벤)|대푸가]]와 [[현악 사중주 12번 (베토벤)|12번]]에서 [[현악 사중주 16번 (베토벤)|16번]]까지), 그리고 매우 큰 세력을 위한 두 개의 작품: [[장엄미사 (베토벤)|장엄미사]]와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 등이 포함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지적인 깊이, 형식적인 혁신, 강렬하고 매우 개인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현악 사중주 14번 (베토벤)|''현악 사중주 14번'']], Op. [[현악 사중주 14번 (베토벤)|131]]에는 7개의 연결된 악장이 있다. [[교향곡 9번 (베토벤)|9번째 교향곡]]은 2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하고 있고, 3악장에서는 일반 교향곡의 악장에서 완서악장으로의 교체를 이루고 있으며, 4악장에서는 독창 · 합창을 포함한 성악을 사용, 지금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 === 악기 === 베토벤이 젊은 시절 주로 사용했던 피아노 중 하나는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제작한 것인데, [[발트슈타인 백작]]이 선물한 것으로 여겨진다.{{sfn|Newman|1970|p=486}} 1786년부터는 슈타인의 사위인 요한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와 전속 계약을 맺었음을 시사하는 근거들이 있다. 1796년 11월 19일 베토벤은 슈트라이허에게 “어제 전날 당신의 포르테 피아노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갖고 싶어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ref>https://www.beethoven.de/en/media/view/6748358303547392/scan/0</ref> 슈트라이허는 슈타인의 사업을 남겨둔채 1803년에 자신만의 기업을 설립하는데, 베토벤은 슈트레이허의 제품을 계속 이용한다.하고 1817년에는 특별히 그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글도 남긴다.{{sfn|Newman|1970|p=486}} 이외에는 [[칼 체르니]]가 회상 한 바와 같이, 1801년에 월터 피아노를 두었다.<ref>Carl Czerny, Über den richtigen Vortrag der sämtlichen Beethovenschen Klavierwerke (Vienna 1963), ed. Paul Badura-Skoda p.10</ref> 1802년에는 월터에게 친구 즈메스칼(Zmeskall)에게 선물할 피아노 포르테를 주문제작하기도 했다.<ref>[https://www.beethoven.de/en/media/view/6076153240485888/Ludwig+van+Beethoven%2C+Brief+an+Nikolaus+Zmeskall%2C+Wien%2C+November+1802%2C+Autograph?fromArchive=5649946187399168 Ludwig van Beethoven, Brief an Nikolaus Zmeskall, Wien, November 1802, Autograph]</ref> 1803년에는 에라르 그랜드 피아노를 받았다. 에라르 피아노는 음의 지속시간이 특별히 긴 것이 특징으로, 베토벤은 이 피아노를 갖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작곡을 시작한다.{{sfn|Skowroneck|2002|p=530-531}} 그러나 1810년에는 더 이상 그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1824년에 동생 요한에게 선물로 주었다.{{sfn|Skowroneck|2002|p=530-531}}{{refn|이 피아노는 지금 [[린츠]]의 박물관에 있다.{{sfn|Skowroneck|2002|p=522}}|group=n}} 1818년에는 토마스 브로드우드로부터<ref>https://special-collections.wp.st-andrews.ac.uk/2018/02/02/beethoven-two-men-and-a-fortepiano/</ref> 브로드우드사([[:en:John_Broadwood_&_Sons|John Broadwood & Sons]])의 피아노를 선물로 받았다. 이 선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긴 했지만 음이 살짝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는 베토벤의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베토벤은 피아노의 음량을 키우기 위해 피아노를 개조할 방법을 알아보기도 하였다.{{sfn|Newman|1970|p=489-90}}{{refn|The piano is now in the [[Hungarian National Museum]], Budapest, to which it was donated by [[Franz Liszt]]; it was restored to playing condition in 1991.{{sfn|Winston|1993}}|group=n}}1827년 베토벤이 사망 할 때까지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있었다.<ref>https://www.beethoven.de/en/media/view/5356326855114752/Beethovens+Wohn-+und+Musikzimmer+im+%26quot%3BSchwarzspanierhaus%26quot%3B+in+Wien%2C+1827+-+Radierung+von+Gustav+Leybold+nach+einer+Zeichnung+von+Johann+Nepomuk+Hoechle?fromArchive=5461069061423104</ref> 베토벤의 마지막 악기는 4중 그라프 피아노였다. 베토벤은 이 6 ½ 옥타브 피아노를 받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후에 이 피아노는 윔머 가문에 팔렸다가<ref>https://www.beethoven.de/en/media/view/5758857464774656/Conrad+Graf%2C+Echtheitsbest%C3%A4tigung+f%C3%BCr+den+Fl%C3%BCgel+Ludwig+van+Beethovens%2C+Wien%2C+26.+Juni+1849%2C+Autograph?fromHansexpSearch=1&person=Graf%252C%2BConrad&parent=6261811254919168</ref> 1889년에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게 인수되었다.<ref>S. Geiser, 'Ein Beethoven-Flügel in der Schweiz', Der Bund, no.469 (Berne, 3 Nov 1961), no.480 (10 Nov 1961)</ref> == 유산 == [[파일:Beethoven_bust_statue_by_Hagen.jpg|섬네일|미국 워싱턴 D.C.의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중인 휴고 하겐의 베토벤 흉상.]] [[본 (독일)|본]]의 베토벤 기념비는 1845년 8월 탄생 75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언스트 율리우스 하넬의 제작으로 [[뮌스터광장]](Münsterplatz)에 설치, 공개되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첫 작곡가 동상이었다. 제막과 함께 열린 음악 축제는 본 [[베토벤할레]]의 매우 성급한 건축을 위한 자극제였다(프란츠 리스트의 촉구에 따라 한 달 이내에 설계 및 제작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베토벤 기념비가 1880년 5월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카스파 폰 춤부슈의 제작으로 [[베토벤광장]](Beethovenplatz)에 설치, 공개되었다(흉상은 앞선 1812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설치, 공개되었다. 이것은 조각가 프란츠 클라인에 의해 제작되었다).{{sfn|Comini|2008|p=316}} 본 중앙에는 그의 출생지인 [[베토벤하우스]]라는 박물관이 있다. 같은 도시에서 1845년부터 음악축제인 베토벤페스트가 개최되었다. 이 축제는 처음에는 비정기적 이었으나 2007년부터 매년 조직되었다. [[베토벤 연구를 위한 이라 브릴러 베토벤 연구센터|이라 브릴러 베토벤 연구센터]]는 박물관, 연구센터, 그리고 이 삶과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강의 및 공연의 호스트 역할을 한다. 그의 음악은 두 개의 [[보이저 탐사선]]과 함께 우주 공간으로 보내진 지구의 이미지, 일반적인 소리, 언어 및 음악의 광범위한 샘플을 포함하는 축음기 음반, [[보이저 금제 음반]]에 두 번 등장한다.<ref name="Golden Record Music List">{{웹 인용|url=http://voyager.jpl.nasa.gov/spacecraft/music.html|title=Golden Record Music List|publisher=[[NASA]]|accessdate=26 July 2012}}</ref> [[수성]]에서 세 번째로 큰 분화구, [[베토벤 (분화구)|베토벤]]은 [[소행성대|주소행성대]] [[1815 베토벤]]이 그러하듯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orplanetcenter.net/db_search/show_object?object_id=1815|title=1815 Beethoven (1932 CE1)|work=Minor Planet Center|accessdate=15 April 2020}}</ref> 조각가 아놀트 푀르스터가 제작한 베토벤의 7피트 주조 청동상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퍼싱 스퀘어 역]]에 설치, 공개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스앤젤레스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시자인 윌리엄 앤드류스 클라크 주니어에게 헌정되다.<ref>{{웹 인용|url=https://www.publicartinpublicplaces.info/beethoven-1932-by-arnold-foerster|title=''Beethoven'' (1932) by Arnold Foerster|last=|first=|date=May 13, 2020|website=Public Art in Public Places|archive-url=|archive-date=|url-status=live|access-date=May 15, 2020}}</ref> == 참고 문헌 == === 각주 === {{각주|group=n|colwidth=30em}} === 인용 === {{각주|colwidth=21em}} === 출처 === {{div col|colwidth=30em}} * {{백과사전 인용|title=Anton Schindler as destroyer and forger of Beethoven's conversation books: A case for decriminalization|first=Theodore|last=Albrecht|authorlink=Theodore Albrecht|url=https://rilm.org/historiography/talbrecht.pdf|encyclopedia=Music's intellectual history|editor-first=Zdravko|editor-last=Blažeković|year=2009|publisher=RILM|location=New York|pages=169–181|isbn=978-1-932765-05-2|access-date=2020-11-10|archive-date=2020-10-22|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1022030919/https://rilm.org/historiography/talbrecht.pdf}} * {{서적 인용|editor-last=Brandenburg |editor-first=Sieghard |title=Ludwig van Beethoven: Briefwechsel. Gesamtausgabe |location=Munich |publisher=Henle |year=1996|isbn=9783873280618 }} * {{저널 인용|title=Beethoven the Romantic: How E. T. A. Hoffmann Got It Right|first=Steven|last=Cassedy|journal=[[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volume=71|issue=1|date=January 2010|pages=1–34|doi=10.1353/jhi.0.0071|jstor=20621921|s2cid=170552244|doi-access=free | issn = 0022-5037}} * {{서적 인용|first=H.P. |last=Clive|title=Beethoven and His World: A Biographical Dictionary|url=|year=2001|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Oxford|isbn=978-0-19-816672-6 }} * {{서적 인용|url= |title=The Changing Image of Beethoven: A Study in Mythmaking |date=2008 |accessdate=|isbn=978-0-86534-661-1|last1=Comini |first1=Allesandra|publisher=Sunstone Press|location=Santa Fe}} * {{서적 인용|url= |title=Jewry in Music: Entry to the Profession from the Enlightenment to Richard Wagner|year=2012|isbn=978-1107015388|last1=Conway|first1=David|authorlink=David Conway (music historian)|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location=Cambridge}} * {{서적 인용|title=The Beethoven Companion|editor-first=Barry|editor-last=Cooper|authorlink=Barry Cooper (musicologist)|edition=revised|publisher=Thames and Hudson|location=London|year=1996|isbn=978-0-50-027871-0 |url=}} * {{서적 인용|title=Beethoven|first=Barry|last=Cooper|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Oxford|year=2008|isbn=978-0-19-531331-4 |url=}} * {{저널 인용|title=Of Ear Trumpets and a Resonance Plate: Early Hearing Aids and Beethoven's Hearing Perception|first=George Thomas|last=Ealy|journal=[[19th-Century Music]]|volume=17|issue=3|date=Spring 1994|pages=262–73|jstor=746569|doi=10.1525/ncm.1994.17.3.02a00050}} * {{서적 인용|first=Alfred |last=Einstein|authorlink=Alfred Einstein|title=Essays on Music|url=|year=1958|publisher=Faber and Faber |location=London|isbn=|oclc=713913183}} * {{저널 인용|title=The lead in Beethoven's hair|year=2008|last1=Eisinger|first1=Josef|journal=Toxicological & Environmental Chemistry|volume=90|issue=1|pages=1–5|doi=10.1080/02772240701630588|s2cid=95824344}} * {{저널 인용|doi=10.2307/948240|title=Beethoven's Conversation Books|last1=Hammelmann|first1=Han|journal=[[The Musical Times]]|volume=106|issue=1465|date=March 1965|jstor=948240|pages=187–189}} * {{백과사전 인용|encyclopedia=Oxford Music Online|title=Ludwig van Beethoven|last1=Kerman|first1=Joseph|authorlink1=Joseph Kerman|last2=Tyson|first2=Alan|authorlink2=Alan Tyson|last3=Burnham|first3=Scott G.|year=2001|doi=10.1093/gmo/9781561592630.article.40026}} * {{서적 인용|first=Lewis |last=Lockwood|title=Beethoven: The Music and the Life|url=|year=2005|publisher=W.W. Norton|location=New York|isbn=978-0-393-32638-3}} * {{저널 인용|last=Lorenz|first=Michael|authorlink=Michael Lorenz (musicologist)|title=Commentary on Wawruch's Report: Biographies of Andreas Wawruch and Johann Seibert, Schindler's Responses to Wawruch's Report, and Beethoven's Medical Condition and Alcohol Consumption|url=https://www.questia.com/read/1P3-1543548641|journal=Beethoven Journal|volume=22|issue=2|pages=92–100|date=Winter 2007|access-date=2020-11-10|archive-date=2021-02-16|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216103955/https://www.gale.com/databases/questia|url-status=}} * {{저널 인용|pmid=17214130|year=2006|last1=Mai|first1=F. M. M.|title=Beethoven's terminal illness and death|volume=36|issue=3|pages=258–63|journal=[[Journal of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Edinburgh]]}} * {{저널 인용 |first1=William Rhea |last1=Meredith |year=2005 |title=The History of Beethoven's Skull Fragments |url=https://www.questia.com/read/1P3-1552096671 |journal=Beethoven Journal |volume=20 |issue=1–2 |pages=3–46 |oclc=64392567 |access-date=2020-11-10 |archive-date=2021-02-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216103908/https://www.gale.com/databases/questia |url-status= }} * {{서적 인용|last=Morris|first=Edmund|authorlink=Edmund Morris (writer)|title=Beethoven: The Universal Composer|url=|accessdate=|year=2010|publisher=HarperCollins|location=London|isbn=978-0-06-075975-9}} * {{서적 인용|last=Nettl|first=Paul|authorlink=|title=Beethoven Encyclopedia|url=|accessdate=|year=1994|publisher=Carel Publishing|location=Secaucus, NJ|isbn= 9780735101135}} * {{저널 인용|last=Oiseth|first=Stanley J.|date=27 October 2015|title=Beethoven's autopsy revisited: A pathologist sounds a final note|journal=[[Journal of Medical Biography]]|volume=25|issue=3|pages=139–147|doi=10.1177/0967772015575883|pmid=26508624|s2cid=19048190}} * {{저널 인용|first1=Julia |last1=Ronge |year=2013 |title=Beethoven's Studies with Joseph Haydn (With a Postscript on the Length of Beethoven's Bonn Employment|url=|journal=Beethoven Journal |volume=28 |issue=1 |pages=4–25 |oclc=}} * {{서적 인용|last=Rosen|first=Charles|authorlink=Charles Rosen|title=The Classical Style: Haydn, Mozart, Beethoven |url=|accessdate=|year=1972|publisher=Faber|location=London|isbn= 0571102344}} * {{앵커|{{harvid|Saccenti2011}}}}{{저널 인용|first1=Edoardo |last1=Saccenti |first2=Age K |last2=Smilde |first3=Wim H M |last3=Saris |year=2011 |title=Beethoven's deafness and his three styles |journal=[[The BMJ]]|pmid=22187391 |doi=10.1136/bmj.d7589 |volume=343 |pages=d7589|s2cid=206894214 }} * {{앵커|{{harvid|Saccenti2012}}}}{{저널 인용|doi=10.1136/bmj.e512 |title=Beethoven's deafness and his three styles |first1=Edoardo |last1=Saccenti |first2=Age K |last2=Smilde |first3=Wim H M |last3=Saris|year=2012 |journal=[[The BMJ]]|volume=344 |pages=e512|doi-access=free }} * {{서적 인용|last=Scherer|first=E. M.|title=Quarter Notes and Bank Notes: the Economics of Music Composition in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edition=|location=Princeton|url=|date=2004|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isbn=978-0-6911-1621-1}} * {{저널 인용|last=Solomon|first=Maynard|authorlink=Maynard Solomon|year=1972|title=Beethoven's Productivity at Bonn|journal=[[Music & Letters]]|volume=LIII|issue=2|pages=165–172|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Oxford|doi=10.1093/ml/LIII.2.165}} * {{서적 인용|last=Solomon|first=Maynard|title=Beethoven Essays|url={{google books |plainurl=y |id=2ZH3v2_-4F4C|page=124}}|accessdate=4 August 2011|year=1990|publisher=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06379-2|page=124}} * {{서적 인용|last=Solomon|first=Maynard|title=Beethoven|edition=2nd revised|location=New York|url=|date=November 1998|publisher=Schirmer Trade Books|isbn=978-0-8256-7268-2}} * {{서적 인용|date=2000|editor-last=Stanley|editor-first=Glenn|title=The Cambridge Companion to Beethoven|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location=Cambridge|doi=|isbn=978-0-521-58074-8}} * {{저널 인용| last1 = Steblin | first1 = Rita | authorlink = Rita Steblin | year = 2009 | title = 'A dear, enchanting girl who loves me and whom I love': New Facts about Beethoven's Beloved Piano Pupil Julie Guicciardi | url = | journal = Bonner Beethoven-Studien | volume = 8 | issue = | pages = 89–152 }} * {{저널 인용|last=Stevens|first=Michael|display-authors=etal|date=November 2013|title=Lead and the Deafness of Ludwig van Beethoven|journal=[[The Laryngoscope]]|volume=123|issue=11|pages=2854–2858|doi=10.1002/lary.24120|pmid=23686526}} * {{서적 인용|first=Jan|last=Swafford|authorlink=Jan Swafford|title=Beethoven: Anguish and Triumph|url=|year=2014|publisher=Faber & Faber|isbn=978-0-571-31255-9|location=London}} * {{서적 인용|first=Richard|last=Taruskin|authorlink=Richard Taruskin|title=Music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url=|year=2010|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isbn=978-0-19-538482-6|location=Oxford}} * {{서적 인용|first=Alexander Wheelock |last=Thayer|authorlink=Alexander Wheelock Thayer|editor-first=Elliot|editor-last=Forbes|title=Thayer's Life of Beethoven|volume=1|url=|year=1967a|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isbn=978-0-691-02717-3|location=Princeton}} * {{서적 인용|first=Alexander Wheelock |last=Thayer|authorlink=Alexander Wheelock Thayer|editor-first=Elliot|editor-last=Forbes|title=Thayer's Life of Beethoven|volume=2|url=|year=1967b|publisher=Princeton University Press|isbn=978-0-691-02718-0|location=Princeton}} * {{저널 인용|last=Tyson|first=Alan|date=February 1969|authorlink=Alan Tyson|title=Beethoven's Heroic Phase|journal=[[The Musical Times]]|volume=110|issue=1512|pages=139–141|doi=10.2307/952790|jstor=952790}} {{div col end}} == 외부 링크 == {{위키공용|Ludwig van Beethoven}} {{위키인용집}} {{Wikisource1911Enc|Beethoven, Ludwig van}} * {{네이버캐스트|283}} * 본, [https://web.archive.org/web/20101225122042/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template=portal_de&_sprache=deutsch 베토벤-하우스] - Bonn 소재 [[:de:Beethoven-Haus|베토벤 생가]] 웹사이트 * [[O|Raptus Association]] (베토벤 관련) - 위대한 거장 베토벤 * [https://www.nndb.com/people/871/000024799/bibliography/ NNDB 인명사전: 베토벤의 바이오그라피] - www.nndb.com * {{Britannica|58473}} * {{IMSLP|id=Beethoven, Ludwig van}} * {{ChoralWiki}} * [http://www.sjsu.edu/beethoven/ 이라 브릴러 베토벤 연구센터], [http://www.sjsu.edu/beethoven/research/beethoven_gateway/ 베토벤 관문] {{웨이백|url=http://www.sjsu.edu/beethoven/research/beethoven_gateway/ |date=20170419155541 }} (산호세 주립 대학교) * {{구텐베르크 저자|id=Beethoven,+Ludwig+van | name=루트비히 판 베토벤}} * {{인터넷 아카이브 저자|sname=Ludwig van Beethoven}} * {{리브리복스 저자|id=4437}} * “[[imdbtitle:11496350|루이 반 베토벤” 영화 (2020)]]. 니키 스타 인 감독의 베토벤에 관한 사극. 독일, 체코. {{루트비히 판 베토벤}} {{고전주의 음악}} {{낭만주의}} {{위대한 독일인}} {{전거 통제}} {{기본정렬:베토벤, 루트비히 판}} [[분류:루트비히 판 베토벤| ]] [[분류:1770년 출생]] [[분류:1827년 사망]]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분류:19세기 독일 사람]] [[분류:18세기 클래식 작곡가]] [[분류:19세기 클래식 작곡가]] [[분류:독일의 클래식 작곡가]] [[분류:독일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분류:독일의 클래식 오르간 연주자]] [[분류:고전주의 작곡가]]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분류:피아노 작곡가]] [[분류:오페라 작곡가]] [[분류:본 출신]] [[분류:오스트리아에 거주한 독일인]]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감기로 죽은 사람]] [[분류:청각 장애 음악가]] [[분류:독일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요제프 하이든]] [[분류:네덜란드계 독일인]] [[분류: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민간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2=오스트리아의 수도}} {{다른 뜻 넘어옴|비엔나}} {{도시 정보|정식표기={{lang|de|Wien}}|이름=빈|한자=|현지명=|그림=File:Montage of Vienna.jpg|그림설명='''왼쪽 위에서부터''': 빈 미술사 박물관, 빈 시청, 슈테판 대성당,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빈 국립 오페라극장|시기=Flag of Salzburg, Vienna, Vorarlberg.svg|휘장=Wien 3 Wappen.svg|지도=|위치지도=오스트리아|위도=48.208889|경도=16.3725|나라={{국기나라|오스트리아}}|인구=1,911,191|인구년도=2020|인구밀도=4,326.1|면적=414.65 km²|해발=151~542 m|시간대=UTC+1|우편편호=|지역번호=1|웹사이트=[https://www.wien.gv.at/ wien.gv.at]|지위=수도, 주, 게마인데|지역어=[[독일어]]<br />[[오스트로바이에른어]]|별명=빈도보나, 음악의 도시<ref>{{웹 인용|url=https://www.wien.info/en/music-stage-shows/city-of-music|제목=Vienna, the City of Music|publisher=빈 관광청|accessdate=2023-01-01|언어=영어}}</ref>, 스파이들의 도시<ref>{{웹 인용|url=https://www.nationalgeographic.com/traveler/articles/1100vienna.html|제목=Vienna: To Catch a Spy|publisher=National Geographic Traveler|accessdate=2023-01-01|언어=영어}}</ref><ref>{{웹 인용|url=https://www.prospectmagazine.co.uk/world/russians-austria-vienna-spies-neutrality-ukraine-war|제목=Russians convene in the “city of spies”|publisher=Prospect Magazine|accessdate=2023-01-01|언어=영어}}</ref><ref>{{웹 인용|url=https://www.thelocal.com/20220329/is-austrias-capital-vienna-really-a-city-of-spies/|제목=Is Austria’s capital Vienna really a ‘city of spies’?|publisher=The Local|accessdate=2023-01-01|언어=영어}}</ref>|데모님=비너 (Wiener, 남)<br />비너린 (Wienerin, 여)|UTC_시차=|행정구역코드=AT-9|자동차번호판=W|단체장=미하엘 루트비히|광역인구=2,890,577|상징동물=|우편번호=1010–1239|홈페이지=}} '''빈'''({{llang|de|Wien}}, {{llang|bar|Wean}}, {{llang|fr|Vienne|비엔}}, {{llang|cs|Vídeň|비덴}}, {{llang|hu|Bécs|베치}}, {{문화어|윈}})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영어 명칭인 '''비엔나'''({{llang|en|Vienna|비에너}})로도 알려져 있다. [[다뉴브강|도나우강]]이 도시를 관통하며 인구는 약 190여만 명이고 대도시권 광역 인구는 약 230여만 명이다.<ref>2020년 1월 12일 기준</ref> == 명칭 == 영어식 표기인 비엔나(Vienna)는 같은 철자의 [[이탈리아어]] 이름에서 유래했다. 빈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게일어군|게일어]]로 하얀 마을을 뜻하는 [[로마 제국]]의 정착지 [[빈도보나]]에서 유래했다는 설과,<ref>{{웹 인용|url=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Vienna&allowed_in_frame=0|제목=Vienna|웹사이트=Online Etymology Dictionary|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922014129/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Vienna&allowed_in_frame=0|보존날짜=2017년 9월 22일}}</ref> 숲속 계곡을 의미하는 ''vedunia''가 [[고대 고지 독일어]]의 ''uuenia''로, 이것이 다시 [[고지 독일어]]의 ''wien''과 방언 ''wean''으로 변형되었다는 가설이 존재한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55006422|제목=Das römische Österreich|성=Pleyel|이름=Peter|날짜=2002|출판사=Pichler|위치=Wien|isbn=3-85431-293-8}}</ref> == 역사 == === 개척과 발전 === [[파일:Nuremberg chronicles f 098v99r 1.png|왼쪽|섬네일|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실린 빈을 묘사한 도판]] 오늘날 빈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500년 즈음으로, [[켈트족]]이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5년 로마인들은 로마 제국을 [[게르만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신들이 [[빈도보나]]라고 이름 붙인 개척지를 요새화했다. 빈과 켈트족의 밀접한 관련성은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아일랜드인 수도승 성 콜먼은 [[멜크 수도원]]에 묻혔으며 성 퍼질은 [[잘츠부르크]]에서 40년 동안 [[주교]] 자리를 맡았다. 그런가 하면 12세기 무렵 아일랜드 [[베네딕도회]]는 수도원을 겸하는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한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활동했던 쇼텐 대사원을 통해 보여지듯이 빈의 일부가 되었다. 976년, [[바벤베르크가]]의 [[레오폴트 1세 (오스트리아 변경백)|레오폴트 1세]]는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의 지도자가 된다. 레오폴트 1세가 다스린 영토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바바리아]] 지방 동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다. 이 지역이 훗날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성장한다. 변경백국의 작위 계승자들은 다뉴브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했는데, 최종적으로 빈과 그 동쪽 지역에 이르게 된다. 1145년, 하인리히 2세는 가문의 거처를 [[니더외스터라이히주|니더외스터라이히]]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빈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빈은 바벤베르크가의 주무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1440년부터 빈에 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빈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예술, 과학, 음악, 요리의 중심지로 등극한다. 1485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파일:TB Wien vorher.jpg|왼쪽|섬네일|1683년의 빈]]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빈은 [[기독교]] 진영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터였다. 1529년 [[빈 공방전]]과 1683년 [[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두 번의 패배를 기록한다. 1679년 [[역병]]이 창궐해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24467446|제목=The city & the crown : Vienna and the imperial court, 1600-1740|성=Spielman|이름=John P.|날짜=1993|출판사=Purdue University Press|위치=West Lafayette, Ind.|isbn=1-55753-021-1}}</ref> === 오스트리아 제국과 근대 ===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던 1804년 빈은 새로 등장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814년부터 2년에 걸쳐 [[빈 회의]]를 개최하는 등 유럽과 세계 정치에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한편 1848년 합스부르크 왕조에 불만을 품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 당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협정 이후,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로 남게 된다. 이 시기에 [[요제프 하이든|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 등 고전 음악의 거장이 다수 등장해 [[제1빈악파|빈악파]]라는 용어가 생겨났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44391762|제목=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날짜=2001|판=2nd ed|출판사=Grove|위치=New York|isbn=1-56159-239-0}}</ref> 19세기 후반 시 정부는 원래 [[보루 (건축)|보루]]와 [[글라시]]였던 곳을 [[순환선|순환도로]]로 재개발하며 현대적 도시의 기반을 다졌다. 이 도로를 [[링슈트라세]]라고 부른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빈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919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제1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독일]]에 강제 합병 당하기 전까지 상류층 문화와 모더니즘의 본고장으로 남았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을 길러냈다. 이 밖에도 [[빈 분리파]], [[정신분석학]], [[제2빈악파]], [[근대 건축|모더니즘 건축]],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을 필두로 한 [[빈 학파]]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서양 문화|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3년의 빈은 [[아돌프 히틀러]], [[레프 트로츠키|레온 트로츠키]], [[요시프 브로즈 티토|조시프 브로즈 티토]],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오시프 스탈린]] 등이 도시 중심부 몇 킬로미터 반경 안에 동시에 거주하던 곳이었다. 심지어 그 중 일부는 같은 카페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bbc.co.uk/news/magazine-21859771|제목=1913: When Hitler, Trotsky, Tito, Freud and Stalin all lived in the same place|뉴스=BBC 뉴스|인용문=Freud's favourite haunt, the Cafe Landtmann, still stands on the Ring, the renowned boulevard which surrounds the city's historic Innere Stadt. Trotsky and Hitler frequented Cafe Central, just a few minutes' stroll away, where cakes, newspapers, chess and, above all, talk, were the patrons' passions.}}</ref> 이 무렵 오스트리아인들은 빈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심지로 여기며 [[붉은 빈]]이란 별명을 붙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에서,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는 사회주의 민병대가 점령한 [[칼 마르크스 호프]]와 같은 공영 주택을 포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 안슐루스와 2차 대전 === {{추가 정보|안슐루스|나치 오스트리아}} [[파일:Bundesarchiv Bild 146-1972-028-14, Anschluss Österreich.jpg|섬네일|아돌프 히틀러를 맞이하는 시민들]] 1938년,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빈에 입성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헬덴 광장]]의 발코니에서 연설을 했다. 이때부터 나치는 빈에 살던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며, 외딴 곳으로 내몰거나 처형했다. 1938년 벌어진 [[안슐루스|강제 병합]]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의 일부가 되었고, 빈은 [[베를린]]에게 수도의 지위를 내줘야 했다. 한편 전쟁 동안 빈은 하인리히 마이어가 주축이 된 [[레지스탕스]] 운동의 진앙지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추축국]]의 주요 장비인 [[V-1 비행폭탄|V-1]], [[V-2 로켓|V-2]], [[6호 전차 티거 1|티거 전차]], [[메서슈미트 Bf 109|메서슈미트]] 도면을 입수해 [[연합국]]에 넘기기도 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발각되어 [[게슈타포]]에게 처형 당하고 만다.<ref>{{뉴스 인용|제목=Die Spione aus dem Pfarrhaus|성=Hansjakob|이름=Stehle|날짜=1996-01-05|뉴스=Die Zeit}}</ref> === 분할점령 === {{추가 정보|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파일:Wien Besatzungszonen.png|섬네일|네 조각으로 나뉜 빈]] 전후 빈은 1945년 9월까지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다. 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 이뤄진 위원회가 빈을 네 구역으로 나눠서 감독했다. 차이점은 도심 지역인 [[인네레슈타트|1구]]를 각 국가가 한 달씩 교대로 통제하는 국제 지대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은 "지프에 탄 네 명의 군인" 방식으로 유명한데 사실상 네 국가 모두가 매일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였다.<ref>{{웹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rMlnAAAAMAAJ&q=%22four+soldiers+in+a+jeep%22+vienna|제목=Austria: Facts and Figures|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221025172400/https://books.google.com/books?id=rMlnAAAAMAAJ&q=%22four+soldiers+in+a+jeep%22+vienna&dq=%22four+soldiers+in+a+jeep%22+vienna&hl=en&sa=X&ved=0ahUKEwim5rzos-7KAhXCJJoKHRBNBNsQ6AEIMzAA|보존날짜=2022년 10월 25일}}</ref> 1948년 베를린 영공 차단 사태로 인해, 서양은 소련이 빈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품게 되었다. 영국 하원의원 앤소니 너팅은 "빈은 베를린과 완전히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있나?"라며 문제를 제기했다.<ref>{{웹 인용|url=http://hansard.millbanksystems.com/commons/1948/jun/30/germany#column_2238|제목=HC Deb 30 June 1948 vol 452 cc2213-49|웹사이트=|확인날짜=|archive-date=2022-06-10|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20610035208/http://hansard.millbanksystems.com/commons/1948/jun/30/germany#column_2238|url-status=}}</ref> 넷으로 나뉜 빈은 [[그레이엄 그린]]의 1949년 작품 《제3의 사나이》의 배경이 되었다. 이 영화는 소설로 탈바꿈해 출판되었다. 이러한 냉전 시대의 분위기는 [[필립 커]]의 1991년 소설 《독일의 레퀴엠》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과 그 이후 === {{추가 정보|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파일:Graben, szemben a Pestisoszlop. Fortepan 58901.jpg|섬네일|1966년의 빈]] 1955년 5월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체결되면서 갈라졌던 빈이 하나가 되었고, 복원 작업을 거친 [[빈 국립 오페라 극장|국립 오페라 극장]]과 부르크 극장도 운영을 재개했다. 소련은 연합군이 철수한 뒤,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선언할 것을 연방 정부로부터 확실히 보장 받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55년 10월 말 통과된 이 중립에 관한 법은 현대 오스트리아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 소련 진영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것을 담보하며, 1995년 오스트리아가 EU에 가입을 망설인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1970년대,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국제 기구들을 위한 업무 단지인 빈 국제 센터를 개관했다. 빈은 [[유엔]] ([[유엔 산업 개발 기구]], [[유엔 빈 사무국]],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마약 범죄 사무소]]), [[유엔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기구]],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석유 수출국 기구|OPEC]],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와 같은 단체의 사무국을 유치하며 이전의 외교적 영향력을 되찾았다. == 주민 == {{Historical populations|align=right |1637|61,300 |1683|90,850 |1710|113,800 |1754|175,460 |1783|247,753 |1793|271,800 |1830|401,200 |1840|469,400 |1850|551,300 |1857|683,000 |1869|900,998 |1880|1,162,591 |1890|1,430,213 |1900|1,769,137 |1910|2,183,630 |1916|2,439,000 |1923|1,918,720 |1934|1,935,881 |1939|1,770,938 |1951|1,616,125 |1961|1,627,566 |1971|1,619,885 |1981|1,535,145 |1990|1,492,636 |2000|1,548,537 |2010|1,689,995 |2020|1,911,728 |footnote=2020 data<ref>{{웹 인용|url=http://statistik.at/wcm/idc/idcplg?IdcService=GET_NATIVE_FILE&RevisionSelectionMethod=LatestReleased&dDocName=080904|title=Statistik Austria - Bevölkerung zu Jahresbeginn 2002-2020 nach Gemeinden (Gebietsstand 1.1.2020)|확인날짜=2021-02-06|archive-date=2021-10-03|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003014144/http://www.statistik.at/wcm/idc/idcplg?IdcService=GET_NATIVE_FILE&RevisionSelectionMethod=LatestReleased&dDocName=080904|url-status=}}</ref> }}1867년부터 1918년까지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오헝제국]]의 수도였다. 이때 산업화와 대규모 이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가가 발생했다. 1910년 빈의 주민은 2백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과 파리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428125708|제목=Frommer's Vienna & the Danube Valley|성=Porter|이름=Darwin|날짜=2009|판=7th ed|출판사=Wiley Pub|위치=Hoboken, NJ|isbn=978-0-470-49488-2}}</ref> 20세기 초 빈은 체코 수도 프라하를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체코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wieninternational.at/en/node/3586|제목=Czech and Slovak roots in Vienna|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512221406/http://www.wieninternational.at/en/node/3586|보존날짜=2014년 5월 12일}}</ref>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많은 체코인들과 헝가리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빈의 인구는 감소하게 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유럽 각지에 퍼진 동유럽 이민자, 특히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출신 주요 인력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공산주의 진영의 경제 발전을 꾀하면서 인구 감소가 가속화되었다.{{출처|날짜=2023-04-07}} 이러한 경향은 2000년 [[인구 조사]]에서 가파른 성장을 보일 때까지 지속되었다. 2020년 빈의 인구는 1916년 보고된 인구 정점을 한참 밑돈다. 뿐만 아니라 빈은 유대인의 보금자리였다. 1930년대 초, 오스트리아 유대인 중 17만 8,000명에 이르는 많은 인구가 빈에 거주했다.<ref>{{웹 인용|url=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map/jewish-communities-in-central-europe|제목=중부 유럽의 유태인 커뮤니티들|웹사이트=홀로코스트 백과사전|확인날짜=}}</ref> 하지만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65,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추방 당하거나 [[나치 강제 수용소|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죽음을 맞이했다. 총 13만 명의 유대인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jsource/judaica/ejud_0002_0020_0_20409.html|제목=Vienna|웹사이트=Jewishvirtuallibrary.org}}</ref> 2012년 오스트리아 통계청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빈 인구의 38.8퍼센트인 66만명 이상이 이민자 조상을 둔 것으로 나타났으며 [[유고슬라비아]], [[튀르키예]],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출신이 주를 이뤘다.<ref>{{웹 인용|url=https://www.statistik.at/web_de/statistiken/menschen_und_gesellschaft/bevoelkerung/bevoelkerungsstand_und_veraenderung/bevoelkerung_zu_jahres-_quartalsanfang/023582.html|제목=Bevölkerung zu Jahres-/Quartalsanfang|날짜=2022년 4월 1일|웹사이트=오스트리아 통계청|언어=de|종류=PDF}}</ref>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빈의 인구는 10.1퍼센트 성장했다.<ref>{{웹 인용|url=http://www.wien.gv.at/statistik/pdf/viennainfigures.pdf|제목=Vienna in figures|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329025117/https://www.wien.gv.at/statistik/pdf/viennainfigures.pdf|보존날짜=2017-03-29|확인날짜=2023-04-07|url-status=}}</ref> [[유엔 인간 주거 계획]]은 빈을 17개의 유럽 대도시 가운데 2025년까지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도시로 지목했다.<ref>{{웹 인용|url=http://www.unhabitat.org.jo/en/inp/Upload/1052216_Data%20tables.pdf|제목=City population by country, 2000-202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5074331/http://www.unhabitat.org.jo/en/inp/Upload/1052216_Data%20tables.pdf|보존날짜=2015-09-25}}</ref> === 종교 === 2001년 인구조사 결과, 주민의 49.2%가 [[천주교]]이었으며, 무신론자가 25.7%, [[무슬림]]가 7.8%, [[동방 정교회|동방정교도]]가 6.0%, [[개신교]] 신자는 4.7% (대부분 [[루터교회|루터교]]), [[유대교|유대교도]] 0.5%였고, 기타 종교나 답변하지 않은 사람들이 6.3%였다.<ref>{{웹 인용|url=ftp://www.statistik.at/pub/neuerscheinungen/vz01wien_web.pdf|제목=Volkszählung. Hauptergebnisse I – Wien}}</ref> 그러나 2011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보고서에서 따르면 천주교 41.3%, 무신론자 31.6%, 이슬람교도 11.6%, 동방정교도 8.4%, 개신교 신자 4.2%, 그리고 기타 종교가 2.9%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diepresse.com/3857289/wien-anteil-der-katholiken-seit-1970ern-halbiert|제목=Wien: Anteil der Katholiken seit 1970ern halbiert|성=|이름=|날짜=2014-08-20|웹사이트=DiePresse.com|언어=de|확인날짜=}}</ref> 각 종교 단체가 시 정부에 직접 신고한 회원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2018년 빈 통계 연감에 따르면 약 610,269명 (인구의 32.3%)이 천주교이며, 195,000명 (10.3%)이 이슬람교, 70,298명 (3.7%)이 동방정교, 57,502명 (3.0%)이 기타 개신교, 9,504명 (0.5%)이 다른 종교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wien.gv.at/statistik/pdf/jahrbuch-2019.pdf#page=172|제목=Statistisches Jahrbuch der Stadt Wien 2019|웹사이트=오스트리아 통계청|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01040527/https://www.wien.gv.at/statistik/pdf/jahrbuch-2019.pdf#page=172|보존날짜=2020년 7월 1일}}</ref> 빈 인구통계 연구소에서 실시한 2018년 연구에서는 천주교 34%, 무신론자가 30%, 이슬람교도가 15%, 동방정교도가 10%, 개신교 신자는 4%, 기타 종교가 6%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derstandard.at/story/2000136038218/mehr-orthodoxe-christen-muslime-und-konfessionslose-in-wien|제목=Mehr orthodoxe Christen, Muslime und Konfessionslose in Wien|뉴스=Der Standard|언어=de-at}}</ref> 2014년 봄 기준으로 빈의 학생 인구 가운데 30%는 무슬림이다.<ref>{{뉴스 인용|url=https://uk.news.yahoo.com/muslim-catholic-children-viennas-state-primary-schools-102432801.html|제목=The European capital where there are more Muslim than Catholic children in state primary schools|뉴스=Yahoo News UK}}</ref> 빈은 천주교 대주교구의 본부가 있으며, 오스트리아 [[비잔틴 전례]] 천주교 집행부도 이 구역에 속한다. 현재 대주교는 크리스토프 쇤본 추기경이다.{{출처|날짜=2023-04-07}} 중심가의 많은 천주교 교회에서는 고전 음악이나 오르간 연주와 함께 열리는 미사를 비롯한 많은 공연이 열린다. 성스테판 대성당(Stephansdom), 카를 교회(Karlskirche), 페터 교회(Peterskirche)와 보티프 교회(Votivkirche) 등 역사적인 건물 중 다수가 천주교 교회이다. [[다뉴브강]] 둔치에는 [[일본산 묘법사]]의 승려들이 지은 불교평화탑이 있다. == 지리 == [[파일:Vienna,_Austria_ESA392209.tiff|섬네일|센티넬-2A가 촬영한 빈의 위성사진]]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빈은 [[알프스산맥|알프스]] 동쪽 끝자락인 [[빈 분지]] 위에 지어졌다. 오늘날 [[빈도보나|빈 도심]]에 해당하는 가장 오래된 정착지는 도나우강의 남쪽 둔치를 따라 형성되었으며 나중에 강 반대편으로 확장되었다. [[해발고도]]는 최저 151미터에서 최고 542미터다. 면적은 414.65 제곱킬로미터에 달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넓은 도시다. === 기후 ===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빈의 기후는 [[서안 해양성 기후]]로, 선선한 여름과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 특징이다. 강수량은 7월과 8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각 66.6mm와 66.5mm 수준의 비가 내린다. 6월부터 9월까지의 평균 최고 기온은 약 21°C에서 27°C(70°F에서 81°F) 사이이며, 최고 기온 기록은 38°C(100°F)를 넘어가고, 9월의 최저 기온은 5.6°C(42°F)이다. 겨울 평균 기온은 0°C를 조금 넘는다. 봄은 일교차가 심하고 가을은 서늘하며, 11월에는 눈이 내릴 가능성이 높다.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연간 약 550mm(21.7인치)로,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쪽 [[비너발트|비엔나 숲]] 지역은 연간 700mm에서 800mm(28인치에서 31인치)로 가장 습기가 많은 지역이며, 동쪽의 평평한 평야는 연간 500mm에서 550mm(20인치에서 22인치)로 가장 건조한 지역이다. 겨울에는 눈이 자주 오지는 않지만, 오스트리아의 서부 및 남부 지역과 비교하면 많은 편이다. {{Weather box|location= 빈 ([[인네레슈타트]]) |metric first = Y |single line = Y |Jan record high C = 19.5 |Feb record high C = 20.0 |Mar record high C = 25.4 |Apr record high C = 31.2 |May record high C = 34.1 |Jun record high C = 37.7 |Jul record high C = 38.4 |Aug record high C = 39.5 |Sep record high C = 34.5 |Oct record high C = 28.5 |Nov record high C = 21.3 |Dec record high C = 16.4 |year record high C = 39.5 |Jan high C = 4.2 |Feb high C = 7.0 |Mar high C = 11.0 |Apr high C = 17.4 |May high C = 21.1 |Jun high C = 25.7 |Jul high C = 26.9 |Aug high C = 26.6 |Sep high C = 21.6 |Oct high C = 15.0 |Nov high C = 9.5 |Dec high C = 4.7 |year high C = 15.9 |Jan mean C = 2.1 |Feb mean C = 3.8 |Mar mean C = 7.7 |Apr mean C = 13.0 |May mean C = 17.3 |Jun mean C = 21.0 |Jul mean C = 23.0 |Aug mean C = 22.8 |Sep mean C = 17.7 |Oct mean C = 12.3 |Nov mean C = 7.2 |Dec mean C = 2.8 |year mean C = 12.6 |Jan low C = -0.1 |Feb low C = 1.1 |Mar low C = 4.0 |Apr low C = 8.6 |May low C = 12.3 |Jun low C = 16.4 |Jul low C = 17.7 |Aug low C = 17.5 |Sep low C = 13.8 |Oct low C = 8.9 |Nov low C = 5.0 |Dec low C = 0.7 |year low C = 8.8 |Jan record low C = -17.6 |Feb record low C = -16.4 |Mar record low C = -11.0 |Apr record low C = -2.4 |May record low C = 3.0 |Jun record low C = 6.8 |Jul record low C = 10.9 |Aug record low C = 10.1 |Sep record low C = 5.1 |Oct record low C = -2.1 |Nov record low C = -7.0 |Dec record low C = -15.4 |year record low C = -17.6 |precipitation colour = green |Jan precipitation mm = 37.6 |Feb precipitation mm = 33.5 |Mar precipitation mm = 46.3 |Apr precipitation mm = 39.6 |May precipitation mm = 78.3 |Jun precipitation mm = 82.0 |Jul precipitation mm = 80.3 |Aug precipitation mm = 73.8 |Sep precipitation mm = 67.3 |Oct precipitation mm = 47.7 |Nov precipitation mm = 42.9 |Dec precipitation mm = 39.9 |year precipitation mm = 669.2 |unit precipitation days = 1.0 mm |Jan precipitation days = 7.5 |Feb precipitation days = 6.3 |Mar precipitation days = 7.7 |Apr precipitation days = 6.4 |May precipitation days = 9.3 |Jun precipitation days = 9.0 |Jul precipitation days = 8.9 |Aug precipitation days = 8.0 |Sep precipitation days = 7.2 |Oct precipitation days = 7.0 |Nov precipitation days = 6.9 |Dec precipitation days = 7.7 |year precipitation days = 91.9 |time day= 14:00 |Jan humidity = 75.0 |Feb humidity = 67.6 |Mar humidity = 62.1 |Apr humidity = 53.9 |May humidity = 54.3 |Jun humidity = 56.9 |Jul humidity = 54.4 |Aug humidity = 54.4 |Sep humidity = 61.0 |Oct humidity = 64.9 |Nov humidity = 74.9 |Dec humidity = 78.4 |year humidity = 63.2 |Jan sun = 70.4 |Feb sun = 103.7 |Mar sun = 154.9 |Apr sun = 216.6 |May sun = 248.5 |Jun sun = 259.1 |Jul sun = 273.3 |Aug sun = 266.3 |Sep sun = 194.0 |Oct sun = 133.3 |Nov sun = 70.7 |Dec sun = 57.1 |year sun = 2047.9 |Jan percentsun = 26.7 |Feb percentsun = 37.1 |Mar percentsun = 42.8 |Apr percentsun = 53.8 |May percentsun = 53.9 |Jun percentsun = 55.2 |Jul percentsun = 57.9 |Aug percentsun = 61.7 |Sep percentsun = 52.6 |Oct percentsun = 40.9 |Nov percentsun = 26.4 |Dec percentsun = 23.0 |year percentsun = 44.3 |source 1= 오스트리아 중앙기상지구역학연구소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961년~2020년)<ref name="Central Institute for Meteorology and Geodynamics"> {{웹 인용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0605200319/https://www.zamg.ac.at/cms/de/dokumente/klima/dok_klimauebersichten/copy_of_klimanormalperiode_19912020.xlsx |archive-date=5 June 2023 |url=https://www.zamg.ac.at/cms/de/dokumente/klima/dok_klimauebersichten/copy_of_klimanormalperiode_19912020.xlsx |title=Klimamittelwerte 1991–2020 |publisher=오스트리아 중앙기상지구역학연구소 |language=de |access-date=11 April 2023 }}</ref><ref>{{웹 인용 |url=http://www.zamg.ac.at/fix/klima/oe71-00/klima2000/klimadaten_oesterreich_1971_frame1.htm |title=Klimadaten von Österreich 1971–2000 – Wien-Innere-Stadt |language=de |publisher=오스트리아 중앙기상지구역학연구소 |access-date=20 October 2019 |archive-date=12 October 2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1012234750/http://www.zamg.ac.at/fix/klima/oe71-00/klima2000/klimadaten_oesterreich_1971_frame1.htm |url-status=live }}</ref> }} == 행정 구역 == {{추가 정보|빈의 구}} [[파일:Vienna, administrative divisions - Nmbrs.svg|섬네일|빈의 23개 구를 표시한 지도]] 빈은 23개 구(Bezirke)로 이뤄져 있다. 빈 행정 구역 사무소는 다른 오스트리아 주의 사무소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경찰을 제외한 공무원들은 빈 시장 아래서 일한다. 경찰은 연방 정부가 관리한다. 각 구의 주민들은 오스트리아 국적 혹은 [[유럽 연합|EU]] [[영주권]]을 가졌다면 구 의회(Bezirksvertretung) 의원을 선출할 권한이 있다. 공공시설을 위한 운영 예산은 시청에서 분배하지만 우선 순위를 정해 예산을 사용하는 일은 각 구의 독립적인 권한이다. 하지만 구에서 이뤄진 모든 결정은 시 의회(Gemeinderat) 혹은 담당 시 의원이 뒤바꿀 수 있다. [[파일:Wien 1830 Vasquez Innere Stadt.jpg|왼쪽|섬네일|1830년의 인네레슈타트]] 오늘날 인네레슈타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중심부는 들판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1850년 포어슈테테(Vorstädte)라고 불린 34곳의 인접한 마을이 황제의 명령으로 빈에 흡수된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27458914|제목=Historisches Lexikon Wien : in 5 Bänden|성=Czeike|이름=Felix|날짜=©1992-©1997|출판사=Kremayr & Scheriau|위치=Wien|쪽=289|isbn=3-218-00543-4}}</ref> 현재 빈의 2구~9구 지역이다. 1857년 자연스럽게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심이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새로 생긴 공간에 [[링슈트라세]]라고 이름 붙인 넓은 거리가 조성되었다. 20세기 초 여러 건축물, 기념비, 공원이 링슈트라세를 따라 지어졌다. 라트하우스, 부르크 극장, 빈 대학교, 의회의사당, 자연사박물관과 미술관, 국립 오페라 극장 등이 들어선 것이다. 또한 [[호프부르크]]의 새로운 측동, 제국 황궁, 1913년 완공된 제국 국방부 건물도 있었다. 도시 중앙의 슈테판 광장에는 대체로 고딕 양식을 따른 [[슈테판 대성당]]이 있다. 황실은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시 재건 기금을 설립하고 상당량의 부지를 개인 투자자들에게 매각했다. [[파일:Historisches Ansichtskartenmotiv der Wiener Ringstraße 21.jpg|섬네일|링슈트라세의 사진이 인쇄된 엽서]] 1850년부터 1890년까지, 리닌발(Linienwall)이라는 또 다른 성벽이 남서쪽의 도시 경계로 간주되었다. 이곳을 통과하려면 통행료인 리닌겔트(Liniengeld)를 내야 했다. 1873년 경, 성벽 바깥을 둘러싼 순환도로인 귀르텔(Gürtel)이 건설되었다. 1890년, 포어오르테라 불린 33곳의 교외 지역을 빈과 통합시킨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892년 1월 1일부터 빈의 일부가 된 이 지역은 지금의 11~19구다.<ref group="주">10구는 앞선 1874년 추가되었다.</ref> 리닌발은 1894년 초 철거되었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27458914|제목=Historisches Lexikon Wien : in 5 Bänden|성=Czeike|이름=Felix|날짜=©1992-©1997|출판사=Kremayr & Scheriau|isbn=3218005469}}</ref> 20구인 [[브리기테나우]]는 1900년 2구에서 분리된 지역이다. 1850년부터 1904년까지 빈의 확장은 도나우강의 오른쪽 기슭에서만 일어났다. 1904년 강 왼편의 플로리드스도르프, 카그란, 슈타드라우, 히르쉬슈테텐, 아스페른을 통합한 21구가 생겨났고, 이어서 1910년 슈트레베르스도르프가 통합되었다. 1938년 10월 15일, [[나치 오스트리아]] 정부는 26개 구와 96개 마을을 합쳐 대빈(Great Vienna)을 만들었다. 이때 통합된 마을 가운데 80곳은 1954년 [[니더외스터라이히주]]로 되돌려졌다. 이렇게 형성된 23개 구로 이루어진 도시가 지금의 빈이다. == 문화 == === 음악, 연극과 오페라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이 빈에서 활동했다. 빈의 예술과 문화는 연극, 오페라, 고전 음악과 순수 미술 분야를 아우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르크 극장]]은 함께 운영되는 아카데미 극장과 더불어 [[D-A-CH|독일어권]] 최고의 공연장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폴크스 극장과 요제프슈타트 극장도 명성을 누리고 있다. 작은 극장도 많이 존재하며, 이들 대부분은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연극이나 [[카바레]]와 같은 덜 대중적인 공연 예술을 위한 장소다. 또한 다수의 [[오페라 극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테아터 안 데어 빈]], [[빈 국립 오페라 극장]], 폴크스 오퍼 등이 대표적이다. 후자는 전형적인 [[오페레타|빈 오페레타]]를 내걸곤 한다.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보금자리인 [[빈 음악협회]]는 매년 개최하는 신년 연주회로 유명하고, [[빈 콘체르트하우스]]는 [[빈 교향악단]]의 공연을 선보인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연주회를 열며,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2세]]의 음악이 인기 있는 주제다. 비너리트는 빈에서 유래한 독창적인 [[가곡]]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austria.info/kr/where-to-go/cities/wien/vienna-international-capital-of-music|제목=비엔나- 세계 음악의 수도|웹사이트=오스트리아 관광청 공식사이트|언어=ko|확인날짜=}}</ref> 지금까지 약 70,000곡에 달하는 비너리트가 발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wvlw.at/|제목=WIENER VOLKSLIEDWERK|확인날짜=}}</ref>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14]]의 우승자는 오스트리아의 [[콘치타 부르스트]]였는데, 우승한 나라가 이듬해 대회를 개최하는 전통에 따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15|2015년 대회]]는 빈에서 열렸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무득점을 기록한 첫 개최국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ref>{{웹 인용|url=https://eurovision.tv/story/the-grand-final-live-from-vienna|제목=The Grand Final live from Vienna!|날짜=2015-05-24|웹사이트=Eurovision Song Contest|언어=en|확인날짜=}}</ref> === 건축 === [[파일:Otto Wagner's main post office in Vienna, Austria (22691715830).jpg|섬네일|우체국 저축은행]] 빈에는 다양한 건축 양식이 존재한다. 잘 알려진 예시는 [[로마네스크 건축|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루퍼트 교회]]와 [[바로크 건축|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카를 성당]]이다. 빈의 건축 양식은 고전주의부터 [[근대 건축|모더니즘]]까지 다양한데, 비교적 최근 등장한 [[아르 누보]]가 도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빈 분리파 전시관]], 카를플라츠 슈타트판 역사,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슈타인호프 교회]]는 아르 누보 건축을 정의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오토 바그너의 학생이었던 [[요제 플레치니크]]도 빈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1990년대 도시 외곽이라고 할 수 있는 [[다뉴브강]] 북쪽의 [[도나우슈타트]]와 도시 남부 [[비너베르크]]에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20미터 높이의 [[DC 타워|DC 타워 1]]은 다뉴브 강 인근에 건설되었고 2013년 완공되었다. 아직까지 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ref>{{웹 인용|url=http://emporis.com/en/wm/bu/?id=millenniumtower-vienna-austria|제목=Millennium Tower - Buildings|웹사이트=Emporis|위치=빈|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217064200/http://www.emporis.com/en/wm/bu/?id=millenniumtower-vienna-austria|보존날짜=2007-02-17}}</ref> 빈은 다른 대도시와 견주어 건물 대다수가 비교적 낮은 높이로 건설되었는데 2006년 초 조사에 따르면 40미터 이상의 건물은 100채에 불과했다. 녹지를 확보하고 세계 문화 유산 구역을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강력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도시 중심부에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 아르 누보 ==== ==== 빈 모더니즘 ==== 아르 누보 운동, 이른바 [[유겐트 스틸]]<ref group="주">독일어로 젊은 양식, 새로운 양식을 뜻한다.</ref>과 경쟁한 모더니즘은 화려한 장식을 거부하고 직선과 기능을 강조했다.<ref>{{웹 인용|url=http://happy.designhouse.co.kr/magazine/magazine_view/00010005/6456|제목=비엔나 모더니즘 백 년을 산책하다|성=정규영|날짜=2018-07-02|웹사이트=행복이 가득한 집|출판사=디자인하우스|언어=ko-KR|확인날짜=2023-04-06}}</ref> 빈 모더니즘을 이끈 인물로는 "장식은 죄악"이라 선언한 [[아돌프 로스]]가 있다. 한편, 로스는 전통을 철저히 배격하는 [[독일 공작연맹]]에 반대했다.<ref>{{웹 인용|url=https://garden-history-lexicon.com/encyclopedia/%ec%95%84%eb%8f%8c%ed%94%84-%eb%a1%9c%ec%8a%a4adolf-loos/|제목=아돌프 로스Adolf Loos|날짜=2019-01-20|웹사이트=고정희의 서양정원사 백과|언어=|확인날짜=2023-04-06|archive-date=2023-04-06|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0406133125/https://garden-history-lexicon.com/encyclopedia/%EC%95%84%EB%8F%8C%ED%94%84-%EB%A1%9C%EC%8A%A4adolf-loos/|url-status=}}</ref> 로스하우스, 아메리칸 바, 슈타이너 주택 등이 빈에 남아있는 로스의 대표작이다. ==== 훈데르트바서 ====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가 설계한 훈데르트바서하우스는 빈의 상징과도 같은 모더니즘 건축의 말끔한 인상과 정반대의 모습을 띈다. [[환경주의|환경주의자]]였던 훈데르트바서는 앞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건축가들과 달리 자연을 참조한 곡선을 선호했다. 이곳의 계약서는 특이하게도 세입자가 자신의 창문을 장식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woodplanet.co.kr/news/view/1065616333627599|제목=산업문명을 해방시킨 치유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성=유재형|뉴스=우드플래닛}}</ref> 오늘날 빈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다. 비슷한 곳으로 조각가 [[프리츠 보트루바]]가 지은 보트루바 성당이 있다. == 스포츠 == [[파일:FK_Austria_Wien_-_SK_Rapid_Wien_20101128_(03).jpg|섬네일|공중에서 경합하는 아우스트리아와 라피트의 선수들]] 많은 [[축구]] 구단이 빈을 연고지로 삼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지역 구단은 [[FK 아우스트리아 빈]]<ref group="주">[[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21회, 컵 대회에서 27회 우승했다.</ref>과 [[SK 라피트 빈]]<ref group="주">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32회 우승했다. 현재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ref>이며, 가장 오래된 구단은 1894년 창단된 [[퍼스트 비엔나 FC]]이다. 아우스트리아와 라피트 간의 라이벌 의식은 매우 치열해서 두 팀이 맞붙는 비너 더비(Wiener Derby)가 열리는 날이면 여러 건의 기물 파손과 폭력 행위가 보고되곤 한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vienna.at/randale-pfeffersprayeinsatz-und-verletzte-polizisten-beim-wiener-derby/7683052|제목=Randale, Pfeffersprayeinsatz und verletzte Polizisten beim Wiener Derby|뉴스=Vienna Online}}</ref><ref>{{뉴스 인용|url=https://www.laola1.at/de/red/fussball/bundesliga/news/rapid-stellungnahme-zu-pyro-vorkommnissen---voellig-inakzeptabel-/|제목=Rapid: "Völlig inakzeptabel, gefährlich und kriminell"|뉴스=LAOLA1}}</ref> 빈은 여러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개최해왔다. 비엔나 도심 마라톤이 대표적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10,0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모여든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2005년 [[아이스하키 월드컵]]의 결승전 경기는 빈에서 열렸다. 빈에 위치한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은 1964년, 1987년, 1990년, 1995년 네 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경기가 열린 곳이다.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UEFA 유로 2008]] 결승전 경기도 이곳에서 열렸다. 비너 슈타트할레는 1974년부터 테니스 대회인 비엔나 오픈을 개최하고 있다. == 관광지 == <gallery mode="packed-hover"> 파일:Kohlmarkt Viena2.jpg|호프부르크 왕궁 파일:Albertina01.jpg|알베르티나 파일:Wien.Stephansdom23.jpg|슈테판 대성당 파일:Château de Schönbrunn Vienne.jpg|쇤브룬 궁전 파일:Opera-Vienna-Austria-2005.jpg|빈 국립 오페라 극장 파일:Karlskirche vespere.jpg|칼스 교회 파일:Austria Parlament Athena.jpg|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파일:Belvedere Vienna June 2006 009.jpg|벨베데레 궁전 </gallery> 1996년, [[쇤브룬궁]]과 정원 군이 [[세계유산|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2001년에 시내 중심부가 추가로 등재되며 빈 역사 지구로 명명되었다. 빈 역사 지구는 몇 가지 역사적인 건물, 성 슈테판 성당 및 문화 기관을 포함한다. * [[호프부르크|호프부르크 왕궁]](Hofburg) * 알베르티나 (Albertina) *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 *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 * 카를 교회(Karlskirche) *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 *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Parlamentsgebäude) == 국제 관계 == === 스파이 도시 === 국제 기구가 여럿 모인 빈의 특성상 [[간첩 행위|스파이]]가 많이 활동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빈은 [[냉전]] 시절에 양측 정보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공식적으로 협상을 맺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냉전이 끝난 지금도 그 지위는 여전하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이라크]] 등의 중동 국가를 대신해 스파이들의 중요한 활동무대로 기능해 왔다. 2014년 보도에 따르면 빈에서 활동 중인 스파이의 수는 7천 명에 달하며, 교육 및 의료 수준이 높아 부양할 가족이 있는 스파이들이 특히 빈을 선호한다.<ref>{{웹 인용|url=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04/2014080400175.html|제목=오스트리아 빈에 스파이가 많은 까닭?|성=이성훈|웹사이트=프리미엄조선|확인날짜=2023-04-07|archive-date=2023-04-0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30407102743/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04/2014080400175.html|url-status=}}</ref> 스파이 활동 전문가인 에밀 보비는 빈의 외교관 중 절반이 자국 정보요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대사관은 요원들로 가득 차 있다고 저술한 바 있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881386909|제목=Die Schattenstadt was 70.000 Agenten über Wien aussagen|성=Bobi|이름=Emil|날짜=2014|위치=Salzburg|isbn=978-3-7110-0060-6}}</ref> 빈은 국제사회의 경제 제제를 받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밀수 통로다. 100명 가량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자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빈에서 활동하는 [[국가보위성]] 관계자는 10명 내외로 파악되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72930.html|제목=“북한 간첩활동 교두보는 오스트리아 빈…밀수 핵심통로”|날짜=2020년 12월 5일|뉴스=한겨레|확인날짜=2023년 3월 7일}}</ref><ref>{{뉴스 인용|url=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0-12-05/for-north-korean-spies-vienna-provides-key-gateway-to-europe|제목=For North Korean Spies, Vienna Provides Key Gateway to Europe|날짜=2020-12-05|뉴스=Bloomberg.com|언어=en|확인날짜=2023-03-06}}</ref> === 국제 기구 === [[파일:Vereinte_Nationen_in_Wien.jpg|섬네일|유엔 빈 사무국]] [[유엔 빈 사무국]] 뿐만 아니라, [[유엔 산업 개발 기구]],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유엔 난민 기구]] (UNHCR), [[유엔 국제 무역법 위원회]] (UNCITRAL), [[유럽 안보 협력 기구]] (OSCE), [[석유 수출국 기구]](OPEC)가 빈에 본부를 두었다. === 협약 도시 === 빈은 [[자매 도시]]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 도시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 valign="top" |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체코 [[브르노]] * 헝가리 [[부다페스트]] | valign="top" | * 독일 [[함부르크]] * 폴란드 [[크라쿠프]]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 valign="top" | * 체코 [[프라하]] * 캐나다 [[밴쿠버]]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 스위스 [[취리히]] |} == 인물 == {{분류 참고|빈 출신}} === 빈 출신의 배우 === [[헤디 라마르]], [[크리스토프 발츠]], [[존 배너]], [[크리스티아네 회르비거]], [[에릭 폴먼]], [[보리스 코조]], [[젠타 베르거]] 등이 빈에서 태어나거나 자랐다. == 같이 보기 == * [[오스트리아의 세계유산]] * [[빈 독일어]] == 각주 == === 내용주 === <references group="주" /> === 출처주 === {{각주}} == 참고 문헌 == * {{글로벌세계대백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언어링크|de|en|tr|hr|ba}} [https://www.wien.gv.at/ 공식 웹사이트] * {{언어링크|de|en|fr|it|es|hr|ru|pl|ro|cs|ja|ar|zh}} [https://www.wien.info/de 빈에 대한 정보] * [http://www.modetour.co.kr/Eagle/Area/SubMain3.aspx?MLoc=0901&Pid=1626 빈에 대하여]{{깨진 링크|url=http://www.modetour.co.kr/Eagle/Area/SubMain3.aspx?MLoc=0901&Pid=1626 }}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152&path=|184|197|&leafId=242 네이버 캐스트 : 여행 - 빈] {{유럽 연합의 수도}} {{오스트리아}} {{전거 통제}} [[분류:빈| ]] [[분류:오스트리아의 도시]] [[분류:오스트리아의 주]] [[분류:오스트리아의 주도]] [[분류:유럽에 위치한 수도]] [[분류:다뉴브강 주변 도시]] [[분류:오스트리아의 세계유산]]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강 정보|(지리 유형: 강) <!-- *** 제목 *** --> | 이름 = 다뉴브강 | 다른이름 = 도나우강·도나피아·두너·두나레 | 다른이름1 = 두나브·두나이·투나 | 다른이름툴팁 = 다뉴브강의 다른 이름: 도나우, 도나피아(Donapia: 슬로베니아), 두나(Duna: 헝가리), 두나레(Dunărea: 루마니아), 두나브(Дунав·Dunav: 불가리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두나이(Dunaj: 슬로바키아, Дунáй·Dunay: 우크라이나), 투나(Tuna) | 지리유형 = <!-- *** 이름 **** --> | 어원 = | 별명 = <!-- *** 그림 또는 사진의 수동 삽입 ***--> | 수동그림 = <!-- *** 그림 또는 사진 *** --> | 그림 = Iron Gate Danube.jpg | 그림설명 =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의 경계에 있는<br />다뉴브강의 협곡인 [[철문 (다뉴브강)|철문]](鐵門, Iron Gates) <!-- *** 나라 *** --> | 나라툴팁 = 다뉴브강이 소재하는 나라 | 국기사용안함 = | 나라 = 독일 | 나라1 = 오스트리아 | 나라2 = 슬로바키아 | 나라3 = 헝가리 | 나라4 = 크로아티아 | 나라5 = 세르비아 | 나라6 = 불가리아 | 나라7 = 몰도바 | 나라8 = 우크라이나 | 나라9 = 루마니아 <!-- *** 지방 *** --> | 지방 = | 지방1 = <!-- *** 도시 *** --> | 도시 = [[울름|<span title="울름(Ulm): 독일">울름</span>]] | 도시1 = [[잉골슈타트|<span title="잉골슈타트(Ingolstadt): 독일">잉골슈타트</span>]] | 도시2 = [[레겐스부르크|<span title="레겐스부르크(Regensburg): 독일">레겐스부르크</span>]] | 도시3 = [[파사우|<span title="파사우(Passau): 독일">파사우</span>]] | 도시4 = [[빈|<span title="빈(Vienna): 오스트리아">빈</span>]] | 도시5 = [[브라티슬라바|<span title="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슬로바키아의 수도">브라티슬라바</span>]] | 도시6 = [[부다페스트|<span title="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부다페스트</span>]] | 도시7 = [[모하치|<span title="모하치(Mohács): 헝가리">모하치</span>]] | 도시8 = [[부코바르|<span title="부코바르(Vukovar): 크로아티아">부코바르</span>]] | 도시9 = [[바치카팔란카|<span title="바치카팔란카(Bačka Palanka): 세르비아">바치카팔란카</span>]] | 도시10 = [[노비사드|<span title="노비사드(Novi Sad): 세르비아">노비사드</span>]] | 도시11 = [[베오그라드|<span title="베오그라드(Belgrade): 세르비아">베오그라드</span>]] | 도시12 =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span title="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Drobeta Turnu-Severin): 루마니아">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span>]] | 도시13 = [[비딘|<span title="비딘(Vidin): 불가리아아">비딘</span>]] | 도시14 = [[루세|<span title="루쎄(Rousse): 불가리아">루세</span>]] | 도시15 = [[갈라치|<span title="갈라치(Galaţi): 루마니아">갈라치</span>]] | 도시16 = [[브러일라|<span title="브러일라(Brăila): 루마니아">브러일라</span>]] | 도시17 = [[툴체아|<span title="툴체아(Tulcea): 루마니아">툴체아</span>]] | 도시18 = [[술리나|<span title="술리나(Sulina): 루마니아">술리나</span>]] <!-- *** 광역계 *** --> | 광역계 = <!-- *** 지류 *** --> | 왼쪽지류 = | 왼쪽지류1 = | 왼쪽지류2 = | 오른쪽지류 = | 오른쪽지류1 = [[파일:Iron Gate Danube.jpg|섬네일|The [[Iron Gate (Danube)|Iron Gate]], on the Romanian–Serbian border]] | 오른쪽지류2 = <!-- *** 구역 *** --> | 구역 = | 구역1 = <!-- *** 섬 ***--> | 섬 = | 섬1 = <!-- *** 발원지 또는 주 발원지 *** --> | 발원지 = [[브레그강]]([[:en:Breg River|Breg]]) | 발원지위치 = [[독일]] [[검은숲]]의 [[푸르트방엔시]] | 발원지길이 = 49 | 발원지고도 = 1078 | 발원지고도주석 = | 발원지좌표제목 = | 발원지위도 = | 발원지경도 = | 발원지위도도 = 48 | 발원지위도분 = 05 | 발원지위도초 = 44 | 발원지남북 = N | 발원지경도도 = 08 | 발원지경도분 = 09 | 발원지경도초 = 18 | 발원지동서 = E <!-- *** 2차 발원지 *** --> | 2차발원지 = [[브리가흐천]]([[:en:Brigach|Brigach]]) | 2차발원지위치 = [[독일]] [[검은숲]]의 [[산크트 게오르겐]] | 2차발원지길이 = 43 | 2차발원지고도 = 940 | 2차발원지좌표제목 = | 2차발원지위도 = | 2차발원지경도 = | 2차발원지위도도 = 48 | 2차발원지위도분 = 06 | 2차발원지위도초 = 24 | 2차발원지남북 = N | 2차발원지경도도 = 08 | 2차발원지경도분 = 16 | 2차발원지경도초 = 51 | 2차발원지동서 = E <!-- *** 기타 발원지 *** --> | 기타발원지 = | 기타발원지위치 = | 기타발원지길이 = | 기타발원지고도 = | 기타발원지좌표제목 = | 기타발원지위도 = | 기타발원지경도 = <!-- *** 합류점 *** --> | 합류점 = | 합류점위치 = [[독일]] [[검은숲]]의 [[도나우에싱겐]] | 합류점좌표제목 = | 합류점고도 = | 합류점위도 = | 합류점경도 = | 합류점위도도 = 47 | 합류점위도분 = 57 | 합류점위도초 = 03 | 합류점남북 = N | 합류점경도도 = 08 | 합류점경도분 = 31 | 합류점경도초 = 13 | 합류점동서 = E | 하구 = [[다뉴브 삼각주]] | 하구위치 = [[루마니아]]의 [[도브로제아]]<br>[[우크라이나]]의 [[오데사주]] | 하구좌표제목 = | 하구좌표각주 = | 하구좌표주석 = | 하구고도 = | 하구고도주석 = | 하구위도 = | 하구경도 = | 하구위도도 = 45 | 하구위도분 = 13 | 하구위도초 = 3 | 하구남북 = N | 하구경도도 = 29 | 하구경도분 = 45 | 하구경도초 = 41 | 하구동서 = E <!-- *** 목록 *** --> | 목록 = | 목록문서 = | 목록1 = | 목록문서1 = | 목록2 = | 목록문서2 = | 목록3 = | 목록문서3 = <!-- *** 길이 *** --> | 길이 = 2860 | 길이각주 = | 길이주석 = <!-- *** 폭 *** --> | 폭 = | 폭각주 = | 폭주석 = <!-- *** 수심 *** --> | 평균수심 = | 평균수심각주 = | 평균수심주석 = | 최대수심각주 = | 최대수심주석 = | 최대수심 = | 최소수심각주 = | 최소수심주석 = | 최소수심 = <!-- *** 면적/유역 면적 *** --> | 유역면적 = 817000 | 유역면적각주 = | 유역면적주석 = <!-- *** 유량 *** --> | 평균유량 = 6500 | 평균유량위치 = [[다뉴브 삼각주]] 앞 | 평균유량각주 = | 평균유량주석 = | 최대유량 = | 최대유량각주 = | 최대유량주석 = | 최소유량 = | 최소유량각주 = | 최소유량주석 = | 기타유량1 = 580 | 기타유량위치1 = 파사우 | 기타유량주석1 = <br>[[파사우]]의 30&nbsp;km 앞 | 기타유량2 = 1900 | 기타유량위치2 = 빈 | 기타유량3 = 2350 | 기타유량위치3 = 부다페스트 | 기타유량4 = 4000 | 기타유량위치4 = 베오그라드 <!-- *** 지도 *** --> | 지도 = Danube basin.png | 지도설명 = 다뉴브강 지도 <!-- *** 위치 지도 *** --> | 위치지도 = | 위도 = | 경도 = | 위치지도1 = | 위치지도1라벨위치 = | 위치지도2 = | 위치지도2라벨위치 = <!-- *** 웹사이트 *** --> | 웹사이트 = <!-- *** 참고 문헌 *** --> | 참고문헌 = }} '''다뉴브강'''({{llang|la|Danubius|다누비우스}}, {{llang|en|Danube|다뉴브}}) 또는 '''도나우강'''({{llang|de|Donau}}, {{문화어|두나이강}})은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루마니아]] 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860&nbsp;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다뉴브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강과 브리가흐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철문 (다뉴브강)|철문]](鐵門, Iron Gates)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게 된다. 흑해에 가까워지면서 다뉴브강은 도브루자 구릉지대를 만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흑해로 유입한다. 강 하구에서는 세 개의 주요 분류로 나뉘면서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그 면적은 약 5,000&nbsp;km<sup>2</sup>이다.<ref>{{서적 인용 |저자= James F. Luhr |제목= Smithsonian Institution Earth |쪽= 228 |출판사= Smithsonian Institution |날짜= 2009 |ISBN=978-0-7566-6115-1}}</ref> 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 [[독일]], [[오스트리아]]: 도나우강 (Donau) * [[슬로바키아]]: 두나이강 (Dunaj) * [[헝가리]]: 두너강 (Duna) * [[크로아티아]]: 두나브강 (Dunav) * [[세르비아]]: 두나브강 (Дунав / Dunav) * [[불가리아]]: 두나프강 (Дунав) * [[루마니아]]와 [[몰도바]]: 두너레강 (Dunăre) * [[우크라이나]]: 두나이강 (Дунаи)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 운하]]가 1992년 건설된 이후 다뉴브강은 [[북해]]의 [[로테르담]]으로부터 [[흑해]]의 [[술리나]]까지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3500km 수로의 일부가 되었다. 다뉴브강으로 운송된 화물량은 1987년에 1950년 수준의 13.3배인 9천 180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 시기에 있었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과정에서 세르비아 교량 3곳이 파괴되어 다뉴브강 운행이 한동안 힘들어졌다가 2002년 그 잔해가 모두 치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명한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가 있다. == 명칭과 어원 == 다뉴브강은 [[인도유럽조어]] ''다누'' (*dānu)에서 유래한, 원시 유럽 강의 이름이다. 동일한 어근에서 만들어진 다른 강에는 두나이강, 치비나/[[다우가바강]], [[돈강]], [[세베르스키도네츠강|도네츠강]], [[드네프르강]], [[드네스트르강]], [[지스나강]], [[타나강|타나강/데아트누강]], [[투오넬라|투오니강]]이 있다. [[베다어]]에서, ''다누''는 "흐르는, 떨어지다"를 뜻하며, [[아베스타어]]에서는 같은 단어가 "강"을 의미한다. [[리그베다]]에서 [[다누 (아수라)|다누]]는 “강의 수로를 막는 용”인 [[브리트라]]의 어머니로 한번 등장하기도 했다. 핀란드어로 다뉴브강을 뜻하는 토나바는 스웨덴어, 독일어 명칭인 도나우강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사미어]] 명칭인 데아트누는 “거대한 강”을 뜻한다. 아베스타어의 경우처럼, [[스키타이어]]의 다누가 “강”에 대한 총칭어일 가능성이 있다. 다나프리스(Danapris)와 다나스티우스(Danastius)에서 전래한 드네프르강과 드네스트르강은 각각 스키타이어 다누 아파라 (*dānu apara, "먼 강")과 다누 나즈디야 (*dānu nazdya, "가까운 강")에서 지속된 것으로 가정한다.<ref name="Mallory, J.P 2000. p. 106">{{서적 인용|authorlink1=J. P. Mallory|last1=Mallory|first1=J.P|authorlink2=Victor H. Mair|first2=Victor H.|last2=Mair|title=The Tarim Mummies: Ancient China and the Mystery of the Earliest Peoples from the West|location=London|publisher=Thames and Hudson|year=2000|page=106}}. {{서적 인용|url=http://i.ironau.ru/pdf/osjazfolk1949.pdf|author=V. I. Adaev|language=ru|title=Осетинский язык и фольклор|trans-title=Ossetian language and folklore|location=Moscow|publisher=Publishing house of Soviet Academy of Sciences|year=1949|page=236}}</ref> 다뉴브강은 [[고대 그리스|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스트로스''({{llang|grc|Ἴστρος}})<ref>[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urn:cts:greekLit:tlg0016.tlg001.perseus-grc1:4.48 Herodotus, Histories, §4.48]</ref>로 알려졌다. == 주요 도시 == * [[울름]] - 독일 * [[빈]] - 오스트리아 * [[브라티슬라바]] - 슬로바키아 * [[부다페스트]] - 헝가리 * [[베오그라드]] - 세르비아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분류:다뉴브강| ]] [[분류:독일의 강]] [[분류:루마니아의 강]] [[분류:몰도바의 강]] [[분류:불가리아의 강]] [[분류:세르비아의 강]] [[분류:슬로바키아의 강]] [[분류:오스트리아의 강]] [[분류:우크라이나의 강]] [[분류:크로아티아의 강]] [[분류:헝가리의 강]] [[분류:유럽의 국제 하천]] [[분류:루마니아-불가리아 국경]] [[분류:루마니아-세르비아 국경]] [[분류:루마니아-우크라이나 국경]] [[분류: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분류: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 [[분류:오데사주의 강]] [[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강]] [[분류:바이에른주의 강]] [[분류: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강]] [[분류:빈의 강]] [[분류: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강]]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Mandelset hires.png|섬네일|300px|망델브로 집합]] '''망델브로 집합'''({{llang|en|Mandelbrot set}})은 [[브누아 망델브로]]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 정의 == 망델브로 집합은 다음 점화식으로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c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math>z_0 = 0</math> (단, <math>z_n</math>은 복소수) :<math>z_{n+1} = z_n^2 + c</math> : 이를 복소수를 사용하지 않고 정의하려면 모든 복소수를 실수부와 허수부로 나누면 된다. 만약 z<sub>n</sub>을 (x<sub>n</sub>,y<sub>n</sub>)로, c를 (a,b)로 바꾸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x<sub>0</sub>,y<sub>0</sub>)=(0,0) :x<sub>n+1</sub> = x<sub>n</sub><sup>2</sup> - y<sub>n</sub><sup>2</sup> + a :y<sub>n+1</sub> = 2 x<sub>n</sub> y<sub>n</sub> + b (단, x<sub>n</sub>,y<sub>n</sub>,a,b는 [[실수]].) 가 된다. 이 집합의 이름은 이를 고안한 프랑스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의 이름을 따라서 만들었졌는데, 원래 독일어(또는 이디시어) 이름대로 '만델브로트' 집합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망델브로 집합 표기로 f(z) = z<sup>2</sup> + c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함수로 표현하면 f(z) = z<sup>2</sup> + c가 된다. == 집합을 그리는 법 == 망델브로 집합을 실제로 그릴 때에는 점화식에 따라 z<sub>n</sub>을 계산하면서 수열이 발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대수적으로 검사하게 된다. z<sub>n</sub>의 [[절댓값]]이 2보다 크다면(즉, x<sub>n</sub><sup>2</sup>+y<sub>n</sub><sup>2</sup>>2<sup>2</sup>이라면) z<sub>n</sub>은 발산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때의 c는 망델브로 집합에 속해 있지 않는다. 이 때의 2라는 값은 발산하는 수열의 계산을 미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며, 경계값이라고 부른다. 반면 망델브로 안에 속해 있는 점의 경우 z<sub>n</sub>은 발산하지 않으므로 무한히 계산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n값 이후에 계산을 멈추어야만 한다. 무한히 계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론적인 망델브로 집합이 아닌 이에 근사한 집합만 얻을 수밖에 없다. 수학적인 의미에서 망델브로 집합을 그린다면 집합 안의 부분과 밖의 부분 두 가지만 의미가 있으며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져도 충분하다. 하지만 많은 프랙탈 생성 소프트웨어에서는 처음으로 경계값을 벗어난 z<sub>n</sub>의 n값에 따라 망델브로 집합 바깥의 영역을 다른 색으로 칠한다. 예를 들어 가장 빨리 발산하는 점은 어두운 녹색으로, 그리고 발산속도가 느려질수록 더욱더 밝은 녹색으로 칠하면 이론적으로 발산속도가 늦어질수록 그 c값은 망델브로 집합에 가깝다는 뜻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망델브로 집합에 색을 입히는 방법에 따라서 예술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한 [[프랙탈 예술]]도 있다. == 성질 == [[파일:Mandelbrot sequence new.gif|프레임]] === 자기 유사성 ===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지닌다. === 차원 === 망델브로 집합의 경계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 자체도 물론 2차원이다.)<ref>{{저널 인용|이름=Mitsuhiro|성=Shishikura|제목=The Hausdorff dimension of the boundary of the Mandelbrot set and Julia sets|arxiv=math/9201282}}</ref> === 쥘리아 집합과의 관계 ===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Julia set)의 일종의 "지도"가 된다. 망델브로가 그려지는 복소 평면의 각 점이 쥘리아 집합의 초기값과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있는데, 망델브로 집합 내부의 점에 대응하는 쥘리아 집합은 [[연결 공간]]인 반면, 바깥의 점들은 연결 공간이 아닌 쥘리아 집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 망델브로 집합의 변형 == [[복소수]]의 다른 점화식으로 정의되는 다른 프랙탈의 경우도 망델브로 집합에 대응되는 것과 쥘리아 집합에 대응되는 것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종종 해당되는 프랙탈의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으로 정의되고 "피닉스 집합(phoenix set)"이라고 불리는 프랙탈의 경우, :<math>x_{n+1} = x_{n}^{2} + y_{n}^{2} + a + b x_{n-1}</math> :<math>y_{n+1} = 2 x_{y}y_{n} + b y_{n-1}</math> 우리는 x와 y의 초기치를 (x<sub>1</sub>,y<sub>1</sub>)=(x<sub>0</sub>,y<sub>0</sub>)=(0,0)으로 놓고 "피닉스의 망델브로 집합Mandel-type phoenix"을 그릴 수 있고 임의의 c값에 대해서 "피닉스의 쥘리아 집합Julia-type phoenix"을 그릴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합에서도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지도"가 되며 망델브로 집합의 안의 점에 대응되는 쥘리아 집합은 connected이며 바깥의 점에 대응되는 것은 disconnected인 성질이 보존된다. 한 개의 변수 c 대신 여러 개의 변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완전한 지도가 되기 위해서 2차원 이상의 차원을 가져야 할 것이다. == 같이 보기 == * [[부다브로]] * [[멩거 스펀지]]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위키공용|Mandelbrot set}} * ''프랙탈과 카오스'', 안대영 ; 교우사 ; {{ISBN|978-89-8172-947-9}}(2015.3.5) * [http://cafe.naver.com/chaosfractals/3560 프랙탈을 찾는 사람들] * {{언어링크|en}} [http://mandelbrot-set.sellit.pl/ "Mandelbrot set - online generator"] * [http://www.ultrafractal.com/ Ultra Fractal] - 가장 대중적인 소프트웨어 (윈도) * [https://web.archive.org/web/20080506072938/http://spanky.triumf.ca/www/fractint/fractint.html Fractint] - 거의 모든 플랫폼 지원. (도스, 윈도, 리눅스, 유닉스, ...) * "[https://web.archive.org/web/20030719025142/http://skyscraper.fortunecity.com/terabyte/966/ Makin' Magic Fractals]" * [http://www.chaospro.de/ ChaosPro] - (윈도) * [http://xaos.sourceforge.net/ Xaos] - 실시간 확대/축소 가능. (오픈소스 - 윈도, 맥킨토시, 리눅스, etc.) * [https://web.archive.org/web/20071129201106/http://www.apophysis.org/ Apophysis] - 가볍고 다루기 편함. {{프랙탈}} {{전거 통제}} [[분류:프랙탈]] [[분류:복소동역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Julia set (highres 01).jpg|섬네일|쥘리아 집합.]] '''쥘리아 집합'''({{llang|en|Julia set}})은 [[가스통 쥘리아]]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 정의 == 쥘리아 집합은 주어진 [[복소수]] c에 대해서 다음 점화식에 따라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z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z<sub>n+1</sub> = z<sub>n</sub><sup>2</sup> + c 위의 점화식은 [[만델브로 집합|망델브로 집합]]의 것과 같지만, [[만델브로 집합|망델브로 집합]]은 z<sub>0</sub>=0+0i일 때 z를 발산하지 않게 하는 c의 집합이라는 점이 다르다. 즉, z와 c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쥘리아 집합은 [[만델브로 집합|망델브로 집합]]과 동일하게 자기유사성을 가지며 가까운 두 점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도 가진다. == 같이 보기 == * [[극한 집합]] * [[혼돈 이론]] == 외부 링크 == {{위키공용|Julia set}} * [https://web.archive.org/web/20110317020756/http://www.lizardie.com/links/download/fractal-generator 쥘리아 집합을 생성하기 위한 간단한 프로그램 예제 (Windows, 370 kb)] * ''프랙탈과 카오스'', 안대영 ; 교우사 ; {{ISBN|978-89-8172-947-9}}(2015.3.5) * [http://www.kias.re.kr/etc_img/bbs_file/201104081718121.pdf 만델브로 집합_복소수와 프렉탈] {{웨이백|url=http://www.kias.re.kr/etc_img/bbs_file/201104081718121.pdf |date=20180403051350 }} {{프랙탈}} {{전거 통제}} {{토막글|기하학}} [[분류:프랙탈]] [[분류:극한 집합]] [[분류:복소동역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이 문서는 [[사람]]에 대한 목록 문서를 나열한 것이다. == 이름별 == {{빈 문단}} == 국적별 == * [[국적별 사람 목록]] == 종교별 == * [[성경 등장인물 목록|구약성경의 인물]] * [[역대 교황|가톨릭 교황 일람]] == 직업별 == * [[직업별 사람 목록]] **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의 목록|서양 고전음악 작곡가]] {{토막글|사람}} [[분류:사람 목록|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파일:Seoul montage.PNG|섬네일|[[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서울]]이다.]] [[파일:Taipei Skyline 2022.06.29.jpg|섬네일|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수도'''({{한자|首都}}, {{Llang|en|Capital city}})는 한 [[국가]]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말한다. 수도에는 대부분 [[중앙정부]]가 소재해, [[국가원수]] 등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거점으로 두는 도시이다. 다만 중앙 정부의 소재와는 별도로 그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도시가 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국가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수도가 있기도 하며, 수도에 실제 [[정부|행정부]]가 위치하지 않거나, 주요 국가 기관이 여러 도시에 나뉘어 위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부는 [[프리토리아]]에, [[입법부]]는 [[케이프타운]]에,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있다. [[네덜란드]]의 헌법은 [[암스테르담]]을 수도로서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정부와 [[최고 법원]]은 [[헤이그]]에 위치해 있다. == 기원 ==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잉여 식량이 확보됨에 따라 [[도시]]가 형성되고 잉여 식량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집권화]]가 이루어 졌다. 이후 경제, 문화, 정치적 중심지가 나타나고 각 지역들이 연합하고 점령을 진행하면서 한 도시는 계속해서 커지게 되고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 여러 자본이 유입되면서 수도가 등장했다.<ref>{{저널 인용|제목=도시지리학 - 도시의 기원과 발달|성=John Wiley & Sons|url=http://www.sigmapress.co.kr/shop/shop_image/g33668_1455239934.pdf|편집자-성=번역: 김학훈, 이상율, 김감영, 정희선}}</ref><ref>{{웹 인용|url=https://www.thoughtco.com/capital-city-relocation-1435389|제목=Where Next: The Reasons Why (Some) Countries Move Their Capitals|언어=en|확인날짜=2024-04-20}}</ref> == 대한민국의 수도 == 현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헌법|헌법]]에 명시하지 않았지만,<ref>다만 서울특별시는 서울특별시행정특례에관한법률(일부개정 1995.12.6 법률 5000호)에 따라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ref> 사실상 [[서울특별시|서울]]이 수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충청남도]] [[연기군]] 등(현 [[세종특별자치시]])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ref>[[백지계획]],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ref> 하였으나, [[2004년]] [[10월 21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위헌 판결]]을 내렸다. 수도에 대한 고유어 표현은 '서울'이다. 그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어]]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은 '쇠[鐵]-벌[源]'이나 '설[새: 新, 金]-벌[땅: 羅, 城]'의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를 '{{첫가끝|셔ᄫᅳᆯ}}(shovl)'이라고 읽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서울을 '徐蔚'(천천히 할 서, 고을 이름 울)로 음차해 사용했다. == 같이 보기 == * [[수도 이름순 수도 목록]] * [[나라 이름순 수도 목록]] * [[수도권]] * [[옛날 국가 수도 목록]]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거 통제}} {{토막글|나라|정치}} [[분류:수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승려 정보 | 법명 = 쿠마라지바({{llang|sa|कुमारजीव Kumārajīva}}) | 그림 = Kumarajiva at Kizil Caves, Kuqa.jpg | 그림설명 = [[키질 석굴]] 입구의 광장에 세워진 쿠마라지바의 동상 | 출생일 = [[334년]]? [[350년]]? | 출생지 = 쿠차국(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쿠차 현) | 입적일 = [[409년]]? [[413년]]? | 입적지 = 중국 장안(長安) | 종파 = | 속명 = | 출가 = 356년 | 저작 = 《대승대의장》 | 소속 = | 수행 = | 칭호 = 삼장법사(三蔵法師) | 배우자 = 쿠차국의 왕녀(쿠마라지바 본인의 사촌여동생) | 부모 =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어머니: 지바카(Jīva) }} {{불교}} '''쿠마라지바'''({{llang|sa|कुमारजीव Kumārajīva}}) '''구마라습''', '''구마라십''', '''구마라집''', {{zh|t=鳩摩羅什|s=鸠摩罗什|p=Jiūmóluóshí|h=주모뤄스}}: [[344년|344]]~[[413년|413]]<ref>350년에 태어나 409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ref>)은 [[쿠차|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ref name="글로벌-구마라습"/>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의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게 유명하며, 그의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파라마르타|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 약력 ==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cw}}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ref name="글로벌-구마라습">[[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한·당의 사상#구마라습|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한·당의 사상 > 구마라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ref name="글로벌-구마라습"/>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ref name="글로벌-구마라습"/>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ref name="글로벌-구마라습"/>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ref name="글로벌-격의불교">[[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역사#격의불교|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교학연구의 발달 > 격의불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 번역 == [[파일:Amitabha Sutra book.jpg|250px|섬네일|오른쪽|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아미타경]]]]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 『[[법화경|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 『[[유마경]]』(維摩經) 3권 *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 『[[중론]]』(中論) 4권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나라|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 쿠마라지바와 김만중 === 쿠마라지바는 번역에 대해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으며, 한역에 대해서도 "천축의 풍습은 문채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조선 중기의 문인 서포 김만중은 쿠마라지바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가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음성언어)에서 시작해 글과 노래(즉 시각언어)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여진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당시의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 저서 == *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 3권 - 여산(廬山)의 승려 혜원(慧遠)과 주고 받은 문답집이다. == 각주 == <references/> == 참고 자료 == {{위키공용분류}} * 『[[출삼장기집]]』(出三蔵記集) 권14 * 『[[고승전]]』(高僧傳) 권제2([[대정신수대장경]] 제50책 No.2059) * 『[[진서]]』(晉書)「열전」 <!--*『자치통감』(資治通鑑)권제211--> * 오쵸 에니치(横超慧日), 스와 요시즈미(諏訪義純) 공저 『라지바』(羅什)(신정판新訂版 인물 중국의 불교人物中国の仏教, 오쿠라 출판大蔵出版, 1991년) {{ISBN|4804351078}}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분류=불교}} {{불교 둘러보기}} {{전거 통제}} [[분류:344년 출생]] [[분류:413년 사망]] [[분류:후량 (오호 십육국)의 불교 신자]] [[분류:후진 (오호 십육국)의 불교 신자]] [[분류:중국의 승려]] [[분류:중국의 번역가]] [[분류:중국의 불교 선교사]] [[분류:불교 철학자]] [[분류:불경 번역가]] [[분류:쿠차]] [[분류:토하라인]] [[분류:서역의 승려]]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동물행동학'''(動物行動學, ethology)은 20세기 초엽에 [[동물학]]의 한 연구 분야로 시작되었다. 동물의 행동, 행태, 습성 뿐 아니라 진화, 유전, 학습, 환경 등의 관찰을 통하여 동물행동에 대해 이해하려 하는 학문이다.<ref name="패트리샤51">{{서적 인용|url=|제목=당신의 몸짓은 개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성=패트리샤 맥코넬|이름=|날짜=2011|출판사=페티앙북스|쪽=51}}</ref> 일반 대중 및 학계에 동물행동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학자로는 1973년 동물 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생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헌]](Nikolaas Tinbergen)과 오스트리아 생물학자들인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들 수 있다. == 동물행동학의 연구분야 ==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행동의 인과관계 분석, 행동의 생존값, 행동의 개체발생 및 계통 발생 검토, 네 가지의 큰 과제로 나뉜다. [[유전학]], [[생리학]], [[신경생물학]] 등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동물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여러 최첨단 장비와 수학적 통계 분석이 수반되어야 하는 정밀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동물행동학에서는 행동의 정밀한 관찰이 중요하다.<ref name="패트리샤51"/> 예를 들어, '우리 집 개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관찰은 충분치 않다. '우리 개는 초당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걷고 있다. 머리는 어깨 관절 높이와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이 풀린 듯 귀가 옆으로 40도 각도로 쳐져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와 같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해야한다. 동물은 아주 짧은 동안에도 많은 수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이러한 많은 수의 행동들을 관찰해야 하는 학문이 동물행동학이다.<ref>{{서적 인용|url=|제목=당신의 몸짓은 개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성=패트리샤 맥코넬|이름=|날짜=2011|출판사=페티앙북스|쪽=52}}</ref> ==행동== 본능은 동물행동학의 가장 근본적인 관찰대상이며, 동물행동학은 이외에도 생태학적인 관점뿐만아니라 진화에 발달에 영향을 주는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두는 사회행동과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다루기도 한다. 한편 [[비교심리학]](Comparative psychology)은 인간과 여러 동물의 행동을 비교ㆍ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이자 교차학문이다. 이는 [[동물 심리학]]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적응주의적 접근방법== 적응주의적 접근방법 또는 진화적 접근방법은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다. 주로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행동이 [[적합도]]가 집단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유전형질]]인지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생태학]] == 각주 == {{각주}} *[참고][http://www.kmooc.kr/courses/course-v1:EwhaK+EW10930K+2020_S17/courseware/db06980f51474a74ac37536181382c19/b1fea475a81548e0a3a68ff819a02cb1/?child=first KMOOC-동물의 행동]{{깨진 링크|url=http://www.kmooc.kr/courses/course-v1:EwhaK+EW10930K+2020_S17/courseware/db06980f51474a74ac37536181382c19/b1fea475a81548e0a3a68ff819a02cb1/?child=first }} *[참고][http://www.kocw.net/home/cview.do?cid=a0d21b645cd415a0 KCOW - 동물행동학, 이화여자대학교, 장이권] {{동물학}} {{전거 통제}} {{토막글|생물학}} [[분류:동물학| ]] [[분류:동물행동학|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작가 정보 |이름 = <!--위키데이터 값 불러오기-->값찾기 |원어이름 = {{lang|fr|Albert Camus}} |그림 = 값찾기 |그림크기 = |설명 = 1957년 알베르 카뮈 |출생일 = {{출생일|1913|11|7}} |출생지 =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 몽도비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60|1|4|1913|11|7}} |사망지 =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르뱅 |필명 = |별칭 = |직업 = 작가, 철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 수필가, 극작가, 각본가, 시인, 축구 선수, 시사 평론가 |언어 =값찾기 |국적 = 값찾기 |학력 = 값찾기 |활동 기간 = [[1935년]] - [[1960년]] |등단시기 = |등단작 = |주제 = 값찾기 |사조 = 값찾기 |주요 작품 = 값찾기 |수상 = 값찾기 |스승 = 값찾기 |제가 = 값찾기 |배우자 = 값찾기 |부모 = 값찾기 |형제 = 값찾기 |동거인 = 값찾기 |자녀 = 값찾기 |친척 =값찾기 |서명 = 값찾기 |웹사이트 = |묘소 = 값찾기 |묘비 = 값찾기 }} '''알베르 카뮈'''({{llang|fr|Albert Camus}} {{IPA-fr|albɛʁ kamy}},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언론인]]이자 [[철학자]]이다. == 생애 == === 어린 시절 ===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llang|fr|Lucien Camus}})는 1885년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1차 마른 전투|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카트린 엘렌 생테스({{llang|fr|Catherine Hélène Sintès}})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sfn|Carroll|2013|p=50}}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ref>리세(lycée): 고등학교, 일부학교에서는 [[그랑제콜 준비과정]]인 대학교 1, 2학년에 해당하는 수업도 운영</ref>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 청년기 ===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다.{{sfnm|1a1=Cohn|1y=1986|1p=30|2a1=Hayden|2y=2016|p=9}} 당시 카뮈는 시몬이 [[모르핀]] 중독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결혼했지만 이후 주치의와 불륜관계라는 것을 알자 1940년 이혼한다.{{sfn|Hayden|2016|p=9}} 1935년 카뮈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님에도 알제리인과 유럽인들 간의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스승인 그르니에의 권고로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알제리 공산당에서 카뮈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카뮈는 보다 온건한 독립 성향 정당인 [[알제리 인민당]]과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는데, [[전간기]] 두 정당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공산당과 인민당이 갈라설 때 카뮈는 공산당과 입장을 달리해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당시 극단 활동을 하며 썼던 대본은 이후 소설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sfn|Hayden|2016|pp=10–11}}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당국이 알제 뤼페블리껭의 발행을 금지하자 파리로 간 카뮈는 일간지 파리스와 ({{Llang|fr|Paris-soir}})에서 편집자로 근무했으며, 이때 소설《[[이방인 (소설)|이방인]]》과 수필《[[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를 발표한다.{{sfnm|1a1=Hayden|1y=2016|1pp=12-13|2a1=Sherman|2y=2009|2pp=12–13}} === 제2차 세계대전 시기 ===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에서 해고되자 리옹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sfn|Hayden|2016|pp=13–14}} 이후 카뮈와 포르는 오랑으로 돌아갔으며, 카뮈는 그곳에서 학교 선생으로 근무했다.{{sfn|Sherman|2009|p=13}} 이후 결핵 치료를 위해 프랑스 알프스에서 머물렀으며, 이 때 《[[페스트 (소설)|페스트]]》와 《[[오해 (소설)|오해]]》를 집필한다. 카뮈의 작품이 점점 알려지게 되자 카뮈는 파리로 돌아갔으며, 이때 [[장폴 사르트르]]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sfnm|1a1=Hayden|1y=2016|p=14|2a1=Sherman|2y=2009|2p=13}}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sfnm|1a1=Hayden|1y=2016|2a1=Sherman|2y=2009|2p=23}}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시|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 문학가로서의 경력 === 전쟁 이후에 카뮈는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사이에 낳은 쌍둥이 카트린, 장과 함께 파리에 머문다.{{sfn|Willsher|2011}}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인해 이름난 작가가 된 카뮈는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에 여러 대학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 이후 다시 알제리에 가보기도 하였지만 억압적인 식민통치가 지속되는 것을 보고 실망해 떠난다. [[1951년]]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와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옹호한 수필 《[[반항하는 인간]]》을 출판한다.{{sfn|Hayden|2016|pp=16–17}}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좌익 성향의 지식인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와 사실상 절교하기에 이른다.{{sfn|Hayden|2016|pp=16–17}}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 사회 활동 ===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 알제리 문제 ===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 사망 === [[파일:20041113-002 Lourmarin Tombstone Albert Camus.jpg|섬네일|250px|알베르 카뮈의 묘비]] 카뮈는 상스(sens)에서의 자동차 사고로 Villeblevin의 작은 마을에 있는 Le Grand Fossard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1960년 1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파리 행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다. 카뮈가 전철로 여행을 떠나려 했음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사고 당일 아침 친구인 미셸 갈리마르가 자동차를 몰고 찾아 오자 전철 대신에 그 차를 탔고 사고를 당했다. 카뮈는 젊은 시절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카뮈가 [[소련]] 체제와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것으로 인한 의도적 암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카뮈는 평소 자신이 사랑하여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인 루르마랭(Lourmarin)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카뮈 사후, 두 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4년에 출판되었다. == 카뮈의 문학 및 철학 ==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 (소설)|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 부조리 ===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인용문2|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943년 11월}}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용문2|지금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나치의 꼭두각시와 그들의 이름을 말하려 하는 척하는 수다쟁이들을 판단할 때 유용한 정의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인용문2|이미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벌판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피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우리는 숨이 다하도록 그들을 질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소중하게 유럽과 자유를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테러의 제도를 만든 누군가와 자신을 크리스쳔이라고 말하는 조사의 실행자가, 설혹 단기적일지라도, 이에 책임을 지고 사직을 하더라도 여기에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기념일에 나는 내 심장의 헝가리 인들의 소리없는 저항을 견뎌내고, 좀 더 강하게 되어, 우리가 육성 가능한 지원의 목소리를 강화하여, 만장일치로 그들로 하여금 압제를 거부하도록 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작품 목록 == === 소설 === * 《행복한 죽음》''A Happy Death'' (''La Mort heureuse'') (1936–1938, 사후 출간 1971) * 《[[이방인 (소설)|이방인]]》''The Stranger''/''The Outsider'' (''L'Étranger'') (1942) * 《[[페스트 (소설)|페스트]]》''The Plague'' (''La Peste'') (1947) * 《전락》''The Fall'' (''La Chute'') (1956) * 단편집《적지와 왕국》''Exile and the Kingdom'' (''L'exil et le royaume'') (collection) (1957) * 《최초의 인간》''The First Man'' (''Le premier homme'') (집필 중 사망하여 미완성 유작이 됨, 1994) === 논픽션 === *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 ''Christian Metaphysics and Neoplatonism'' (학위논문) (1935) * 《안과 겉》''Betwixt and Between''/''The Wrong Side and the Right Side'' (''L'envers et l'endroit'') (모음집, 1937) * 《결혼》''Nuptials'' (''Noces'') (1938) * 《[[시지프 신화]]》''The Myth of Sisyphus'' (''Le Mythe de Sisyphe'') (1942) * 《[[반항하는 인간]]》''The Rebel'' (''L'Homme révolté'') (1951) * 《시사평론1》''Actuelles I, Chroniques 1944-1948'' (1950) * 《시사평론2》''Actuelles II, Chroniques 1948-1953'' (1953) * 《시사평론3》(알제리 연대기) ''Actuelles III, Chroniques algériennes, 1939-1958'' (1958) === 희곡 === * 《아스튀리의 반란》''Révolte dans les Asturies'' (1936), 공저 * 《칼리굴라》''Caligula'' (1938) * 《오해》''The Misunderstanding'' (''Le Malentendu'') (1944) * 《계엄령》''The State of Siege'' (''L'État de Siège'') (1948) * 《정의의 사람들》''The Just Assassins'' (''Les Justes'') (1949) * 《정령》 ''Les Esprits''(피에르 드 라리베의 원작을 번안) (1953) * 《십자가에의 예배》 ''La Dévotion de la croix''([[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의 원작을 번안) (1953) * 《흥미있는 경우》 ''Un cas intéressant''([[디노 부차티|디노 부챠티]]의 원작을 번안) (1955) *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Requiem for a Nun'' (''Requiem pour une nonne'', [[윌리엄 포크너]] 원작을 번안) (1956) * 《올메도의 기사》 ''Le Chevalier d'Olmedo''([[로페 데 베가]]의 원작을 번안) (1957) * 《악령》''The Possessed'' (''Les Possédés'', [[도스토옙스키]] 원작을 번안) (1959) === 수필 === *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à un ami allemand'' (1948), 공저의 부분으로 출간 * 《여름》''L'Été'' (1954) * 《단두대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Guillotine'' (''Réflexions sur la guillotine'') (Extended essay, 1957) * 《태양의 후예》''La Postérité du soleil'' (사진집) (1965) * 《스웨덴 연설》''Discours de Suède'' (1958) * 《작가수첩1》''Notebooks 1935–1942'' (1962) * 《작가수첩2》''Notebooks 1943–1951'' (1965) * 《작가수첩3》''Notebooks 1951–1959'' (1989) * 《여행일기》''Journaux de voyage'' (1978) <!-- * ''Create Dangerously'' (''Essay on Realism and Artistic Creation'') (1957) * ''The Ancient Greek Tragedy'' (''Parnassos lecture in Greece'') (1956) * ''The Crisis of Man'' (''Lecture at Columbia University'') (1946) * ''Why Spain?'' (''Essay for the theatrical play L' Etat de Siege'') (1948) * ''Le témoin de la liberté'', Albert Camus, allocution publiée dans la revue ''La Gauche'' en décembre 1948 * ''La dernière fleur'', de James Thurber, traduction d'Albert Camus, Gallimard, 1952 * ''Désert vivant'', album de Walt Disney contenant un texte d'Albert Camus, Société française du livre, 1954 * ''Pluies de New York'', impression de voyage, Essais, Éditions Gallimard, 1965 * ''Neither Victims Nor Executioners'' (''Combat'') (1946) * ''Resistance, Rebellion, and Death'' (1961)&nbsp;– a collection of essays selected by the author. * ''Lyrical and Critical Essays'' (1970) * ''Between Hell and Reason: Essays from the Resistance Newspaper "Combat", 1944–1947'' (1991) * ''Camus at "Combat": Writing 1944–1947'' (2005) --> * 《젊은 시절의 글》''Écrits de jeunesse d'Albert Camus''(1973) === 전집 === 김화영이 번역하고 책세상에서 출간된 카뮈의 전집 # 1권 (1931~1939) : 문학청년 시절의 미발표 원고 모음인《젊은 시절의 글》,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의 초기 산문《안과 겉》,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소설《행복한 죽음》,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산문《결혼》, 절대성에 대한 갈망을 비장하게 그린 희곡《칼리굴라》 # 2권 (1939~1942) : 카뮈가 천착한 첫 번째 주제인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를 담은 소설《이방인》과 철학적 에세이《시지프 신화》그리고 작품 구상을 위한 메모와 철학적·문학적 단상을 기록한 《작가수첩1》 # 3권 (1944~1947) : 부조리 연극의 대표작《오해》, 나치의 폭력에 대한 저항 의지를 드러낸 네 편의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첫 번째 장편소설《페스트》 # 4권 (1947~1950) : 희곡《계엄령》, 희곡《정의의 사람들》,《여행일기》,《시사평론1》 # 5권 (1950~1951) : 《작가수첩2》, 에세이《반항하는 인간》 # 6권 (1951~1957) : 지중해적 사유를 보여주는 ‘태양’의 에세이《여름》, 카뮈 문학의 원숙기에 쓰인《전락》,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은《단두대에 대한 성찰》, 카뮈의 유일한 연작 단편집《적지와 왕국》 # 7권 (1957~1959) : 1959년 12월까지의 기록을 담은《작가수첩 III》,에세이《스웨덴 연설》, 에세이《문학비평》 == 각주 == <references/> === 참고 문헌 === * {{저널 인용|title=The Colonial Politics of the Plague: Reading Camus in 2020|journal=Journal of Contemporary Development & Management Studies|last=Amin|first=Nasser|url=https://lcc.ac.uk/?r3d=lcc-journal-volume-9-number-1-spring-2021#28|date=2021|volume=9 Spring 2021|pages=28–38|archive-url=https://ghostarchive.org/archive/20221009/https://londonchurchillcollege.ac.uk/wp-content/uploads/2021/03/LCC-Journal-Volume-9-Number-1-Spring-2021.pdf#page=28|archive-date=2022-10-09|url-status=live|ref=harv}} * {{서적 인용|title=Camus and Sartre: The Story of a Friendship and the Quarrel that Ended it|last=Aronson|first=Ronald|year=2004|publisher=[[University of Chicago Press]]|isbn=978-0-22602-796-8|ref=harv}} * {{백과사전 인용|last=Aronson|first=Ronald|title=Albert Camus|encyclopedia=[[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editor=Edward N. Zalta|editor-link=Edward N. Zalta|url=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17/entries/camus/|year=2017|ref=harv}} * {{뉴스 인용|url=https://www.nytimes.com/1997/12/19/books/books-of-the-times-camus-as-a-principled-rebel-among-poseurs.html|title=BOOKS OF THE TIMES; Camus as a Principled Rebel Among Poseurs|last1=Bernstein|first1=Richard|date=19 December 1997|newspaper=[[The New York Times]]|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60510104040/http://query.nytimes.com/gst/fullpage.html?res=9806EED9113FF93AA25751C1A961958260|archive-date=10 May 2006|url-status=live}|ref=harv}} * {{서적 인용|title=Albert Camus|last=Bloom|first=Harold|author-link=Harold Bloom|year=2009|publisher=[[Infobase Publishing]]|isbn=978-1-4381-1515-3|ref=harv}} * {{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TyOjcCm8XDMC&pg=PA74|title=Camus: Portrait of a Moralist|last=Bronner|first=Stephen Eric|author-link=Stephen Bronner|year=2009|publisher=[[University of Chicago Press]]|isbn=978-0-226-07567-9|ref=harv}} * {{서적 인용|title=Albert Camus the Algerian: Colonialism, Terrorism, Justice|last=Carroll|first=David|date=4 May 2007|publisher=[[Columbia University Press]]|language=en|isbn=978-0-231-51176-6|ref=harv}} * {{서적 인용|title=Brave Genius: A Scientist, a Philosopher, and Their Daring Adventures from the French Resistance to the Nobel Prize|last=Carroll|first=Sean B.|year=2013|publisher=Crown|location=New York|language=English|isbn=978-0-307-95234-9|ref=harv}} * {{저널 인용|title=Football as a metaphor: learning to cope with life, manage emotional illness and maintain health through to recovery|journal=[[Journal of Psychiatric and Mental Health Nursing]]|last=Clarke|first=Liam|year=2009|volume=16|issue=5|publisher=[[Wiley (publisher)|Wiley]]|pages=488–492|doi=10.1111/j.1365-2850.2009.01403.x|issn=1351-0126|pmid=19538606|ref=harv}} * {{저널 인용|title=The True Camus|journal=[[The French Review]]|last=Cohn|first=Robert Greer|year=1986|volume=60|issue=1|pages=30–38|jstor=393607|ref=harv}} * {{저널 인용|title=The absurdity of rebellion|journal=[[Man and World]]|last=Curtis|first=Jerry L.|date=1 August 1972|volume=5|issue=3|pages=335–348|language=en|doi=10.1007/bf01248640|issn=0025-1534|s2cid=144571561|ref=harv}} * {{저널 인용|title=Albert Camus and the Anarchist Alternative|journal=Australian Journal of French Studies|last=Dunwoodie|first=Peter|year=1993|volume=30|issue=1|publisher=Liverpool University Press|pages=84–104|doi=10.3828/ajfs.30.1.84|issn=0004-9468|ref=harv}} * {{서적 인용|title=Albert Camus: From the Absurd to Revolt|last=Foley|first=John|year=2008|publisher=[[McGill-Queen's University Press]]|isbn=978-0-7735-3467-4|ref=harv}} * {{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ZYeRCwAAQBAJ&pg=PT26|title=Camus and the Challenge of Political Thought: Between Despair and Hope|last=Hayden|first=Patrick|date=9 February 2016|publisher=[[Springer Publishing|Springer]]|doi=10.1057/9781137525833|isbn=978-1-137-52583-3|ref=harv}} * {{서적 인용|title=The Cambridge Companion to Camus|last=Hughes|first=Edward J.|date=26 April 2007|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1-139-82734-8}} * {{웹 인용|url=http://www.users.muohio.edu/shermalw/honors_2001_fall/honors_papers_2000/lattal.html|title=Albert Camus|last=Lattal|first=Ashley|year=1995|publisher=Users.muohio.edu|access-date=17 October 2009|ref=harv}} * {{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UJY8PgAACAAJ|title=Albert Camus: A Biography|last=Lottman|first=Herbert|author-link=Herbert Lottman|year=1979|publisher=Axis|isbn=978-1-870845-12-0|ref=harv}} * {{서적 인용|title=Demanding the Impossible: A History of Anarchism|last=Marshall|first=Peter H.|author-link=Peter Marshall (author)|year=1993|publisher=[[HarperCollins|Fontana]]|isbn=978-0-00-686245-1|ref=harv}} * {{저널 인용|title=Camus and Heidegger: Anarchists|journal=[[University of Toronto Quarterly]]|last=Nicholson|first=Graeme|author-link=Graeme Nicholson|url=https://www.muse.jhu.edu/article/559809|year=1971|volume=41|pages=14–23|doi=10.3138/utq.41.1.14|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504181134/https://www.muse.jhu.edu/article/559809|archive-date=4 May 2019|url-status=dead|access-date=4 May 2019|s2cid=154840020|ref=harv}} * {{서적 인용|title=Albert Camus: l'exigence morale : hommage à Jacqueline Lévi-Valensi (L'esprit des lettres)|last=Schaffner|first=Alain|year=2006|editor=Agnès Spiquel|publisher=Editions Le Manuscrit|language=fr|isbn=978-2-7481-7101-3|ref=harv}} * {{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pdZ0CgAAQBAJ&pg=PA9|title=Camus, Philosophe: To Return to our Beginnings|last=Sharpe|first=Matthew|author-link=|date=3 September 2015|publisher=[[Brill Publishers|Brill]]|isbn=978-90-04-30234-1|ref=harv}} * {{서적 인용|title=Camus|last=Sherman|first=David|date=30 January 2009|publisher=John Wiley & Sons|isbn=978-1-4443-0328-5|ref=harv}} * {{백과사전 인용|last=Simpson|first=David|title=Albert Camus (1913–1960)|encyclopedia=[[Th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year=2019|url=https://www.iep.utm.edu/camus/|issn=2161-0002}} * {{서적 인용|title=Albert Camus: A Life|last=Todd|first=Olivier|author-link=Oliver Todd|year=2000|publisher=[[Carroll & Graf]]|isbn=978-0-7867-0739-3|ref=harv}} * {{뉴스 인용|url=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1/aug/07/albert-camus-killed-by-kgb|title=Albert Camus might have been killed by the KGB for criticising the Soviet Union, claims newspaper|last=Willsher|first=Kim|date=7 August 2011|work=The Guardian|ref=harv}} * {{잡지 인용|last=Zaretsky|first=Robert|url=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no-longer-the-person-i-was-the-dazzling-correspondence-of-albert-camus-and-maria-casares/#!|title='No Longer the Person I Was': The Dazzling Correspondence of Albert Camus and Maria Casarès|magazine=[[Los Angeles Review of Books]]|year=2018|ref=harv}} * {{서적 인용|title=Life Worth Living|last=Zaretsky|first=Robert|date=7 November 2013|publisher=[[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72837-0|ref=harv}} == 외부 링크 == {{위키공용과 분류|Albert Camus}} {{위키인용집|알베르 카뮈}} * [http://www.citedulivre-aix.com/Typo3/fileadmin/documents/Expositions/centrecamus/index.htm Fonds Albert Camus - Cité du livre d'Aix en Provence] * [https://web.archive.org/web/20180106174345/http://www.etudes-camusiennes.fr/wordpress/ 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 * [https://web.archive.org/web/20180108062442/http://camus-society.com/ The Albert Camus Society] * {{브리태니커|b21k0908b}} * {{두피디아|101013000781138}} * {{네이버캐스트|6370}} * {{OL author|OL124171A}} {{포털|철학}} {{철학}} {{대륙 철학}} {{공산주의 꼬리말}} {{노벨 문학상 수상자}} {{1957년 노벨상 수상자}} {{위대한 프랑스인}} {{전거 통제}} {{기본정렬:카뮈, 알베르}} [[분류:알베르 카뮈| ]] [[분류:1913년 출생]] [[분류:1960년 사망]] [[분류:프랑스의 작가]] [[분류:20세기 프랑스 소설가]] [[분류:프랑스의 수필가]] [[분류:프랑스의 극작가]] [[분류:프랑스의 철학자]] [[분류:프랑스의 인문주의자]] [[분류: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스페인계 프랑스인]] [[분류:알제리계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레지스탕스 관련자]] [[분류:장폴 사르트르]] [[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분류:프랑스 공산당원]] [[분류:프랑스의 공산주의자]] [[분류: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분류:실존주의자]] [[분류:알제리에 거주한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무신론자]] [[분류:알제 대학교 동문]] [[분류:프랑스의 평화주의자]] [[분류:프랑스의 반자본주의자]] [[분류:1940년대 반문화]] [[분류:1950년대 반문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Sérgio Vieira de Mello.jpg|테두리|오른쪽|160px|섬네일|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Sérgio Vieira de Mello,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출신 [[유엔]] 외교관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인 지 멜루는 [[파리시|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그는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하면서 [[캄보디아]], [[동티모르]],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분쟁조정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특별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2003년]] [[8월 19일]]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차랑 폭탄테러에 의해 사망하였다. 테러에 희생되기 전 그는 일부에 의해 [[코피 아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 같이 보기 == * [[세르지우 (영화)]] == 참고 자료 == {{위키공용분류}} * [https://web.archive.org/web/20200420134916/http://www.sergiovdmfoundation.org/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 외부 링크 == {{전임후임| |전임자 = [[니콜라 도스 레이스 로바토]] |후임자 = [[샤나나 구스망]] |대수 = |직책 = [[동티모르의 대통령|동티모르의 임시 대통령]] |임기 = [[1999년]] [[10월 25일]] ~ [[2002년]] [[5월 20일]] }} {{전거 통제}} {{기본정렬: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분류:1948년 출생]] [[분류:2003년 사망]] [[분류:브라질의 정치인]]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리우데자네이루 출신]] [[분류:프리부르 대학교 동문]] [[분류:브라질의 테러 피해자]] [[분류:차량 폭탄으로 죽은 사람]] [[분류:브라질의 유엔 직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작가 정보 |이름 = <!--위키데이터 값 불러오기-->값찾기 |원어이름 = |그림 = 값찾기 |그림크기 = |설명 = |출생명 = |출생일 = 값찾기 |출생지 = 값찾기 |사망일 = 값찾기 |사망지 = 값찾기 |필명 = |별칭 = |직업 = 값찾기 |언어 =값찾기 |국적 = 값찾기 |학력 = 값찾기 |활동 기간 = |등단시기 = |등단작 = |장르 = |주제 = |사조 = 값찾기 |주요 작품 = 값찾기 |수상 = 값찾기 |스승 = 값찾기 |제가 = 값찾기 |배우자 = 값찾기 |부모 = 값찾기 |형제 = 값찾기 |동거인 = 값찾기 |자녀 = 값찾기 |친척 =값찾기 |영향 받은 인물 = 값찾기 |영향 준 인물 = |서명 = 값찾기 |웹사이트 = |묘소 = 값찾기 |묘비 = 값찾기 }} '''미하엘 안드레아스 헬무트 엔데'''({{llang|de|Michael Andreas Helmuth Ende}}, [[1929년]] [[11월 12일]]<!--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 [[1995년]] [[8월 28일]]<!--[[필더슈타트]]-->)는 [[독일]]의 작가이다. [[바이에른주]]의 최남단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 근처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문학으로 유명하다. 뮌헨의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1973년 동화소설 《모모》를 발표하여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엔데의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의 재고가 판매되고 약 40종류 언어로 번역되었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시에 사로잡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전세계에 수천만의 독자를 가진 엔데에 대해 세계의 언론들은 동화와 환상소설을 통해 금전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작품으로는 <기관차 대여행>, <모모>, <끝없는 이야기>,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마법학교>, <냄비와 국자 전쟁> 등이 있다. == 주요 작품 == *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Jim Knopf und Lukas, der Lokomotivführer)》 * [[1962년]]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Jim Knopf und die wilde Dreizehn)》 * [[1967년]] 《Die Spielverderber (The Spoilsport)》 * [[1972년]] 《[[끈기짱 거북이 트랑퀼라]] (Tranquilla Trampeltreu die beharrliche Schildkröte)》 * [[1973년]] 《[[모모 (소설)|모모]] (Momo)》 * [[1975년]] 《Das Kleine Lumpenkasperle》 * [[1978년]] 《Das Traumfresserchen (Translated into English by Gwen Mars as The Dream Eater in 1978)》 《Lirum Larum Willi Warum: Eine lustige Unsinngeschichte für kleine Warumfrager》 * [[1979년]] 《[[끝없는 이야기]] (Die unendliche Geschichte)》 * [[1981년]] 《Der Lindwurm und der Schmetterling oder Der seltsame Tausch (1981)》 * [[1982년]] 《Die zerstreute Brillenschlange》 《Die Schattennähmaschine》 《Das Gauklermärchen (The Juggler's Tale)》 《Written with Erhard Eppler and Hanne Tächl - Phantasie/Kultur/Politik: Protokoll eines Gesprächs (Fantasy/Culture/Politics: transcript of a conversation)》 《Die Ballade von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 [[1983년]] 《[[거울 속의 거울]] (Der Spiegel im Spiegel)》 * [[1989년]] 《Der satanarchäolügenialkohöllische Wunschpunsch)》 * [[1984년]]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Der Spiegel im Spiegel (1986) (Translated into English by J. Maxwell Brownjohn as Mirror in the Mirror: a labyrinth in 1986)》 《Filemon Faltenreich》 《Der Goggolori (1984)》 * [[1985년]] 《Archäologie der Dunkelheit (Archaeology of Darkness)》 * [[1986년]] 《Trödelmarkt der Träume: Mitternachtslieder und leise Balladen (Midnight songs and quiet ballads)》 * [[1988년]] 《Ophelias Schattentheater (Translated into English by Anthea Bell as Ophelia's Shadow Theater in 1989)》 《Wrote the libretto for Die Jagd nach dem Schlarg》 * [[1989년]] 《Der satanarchäolügenialkohöllische Wunschpunsch (Translated into English by Heike Schwarzbauer and Rick Takvorian as The Night of Wishes: or, The Satanarchaeolidealcohellish Notion Potion in 1992)》 《Die Vollmondlegende (1989) (The Legend of the Full Moon)》 * [[1990년]] 《Die Geschichte von der Schüssel und vom Löffel》 * [[1992년]] 《[[자유의 감옥]] (Das Gefängnis der Freiheit)》 《Der lange Weg nach Santa Cruz (The Long Road to Santa Cruz)》 * [[1993년]] 《Der Teddy und die Tiere》 《Der Rattenfänger)》 * [[1998년]] 《[[망각의 정원]] (Der Niemandsgarten)》 외 다수 == 외부 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050412033319/http://wiki.sfreaders.org/MichaelEnde 미하엘 엔데 (SFReaders.org] * https://web.archive.org/web/20110202123233/http://www.michaelende.de/ www.michaelende.de 독일어 * https://web.archive.org/web/20040513115029/http://www.michael-ende-gymnasium.de/treffpunkt/michael-ende/start.htm 독일어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 {{기본정렬:엔데, 미하엘}} [[분류:1929년 출생]] [[분류:1995년 사망]] [[분류:독일의 소설가]] [[분류:독일의 판타지 작가]] [[분류:독일의 아동문학 작가]] [[분류:신화창조 작가]] [[분류:인지학자]] [[분류:연방공로십자소수장 수훈자]] [[분류: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출신]] [[분류:위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20세기 독일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철학자 정보 |지역     = |시대     = |그림 = Paul Feyerabend Berkeley.jpg|그림크기 = 240px|그림설명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 교수 시절의 파이어아벤트 |이름 = 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 |출생일 = {{출생일|1924|1|13}}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빈]]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4|2|11|1924|1|13}} |사망지 = [[스위스]] [[보주 (스위스)|보주]] [[제놀리에]] |학파 = 인식론적 아나키즘 |연구분야 = {{hlist|[[과학 철학]]|비판적 반증주의|[[인식론]]|[[정치학]]}} |주요업적 = |영향받음 = {{hlist|[[존 스튜어트 밀|밀]]|[[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레싱]]|[[칼 포퍼|포퍼]]|[[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쇠렌 키르케고르|키르케고르]]|[[가스통 바슐라르|바슐라르]]|[[알렉상드르 쿠아레|쿠아레]]}} |영향줌 = {{hlist|[[러커토시 임레|러커토시]]|[[토머스 쿤|쿤]]}} |서명     = |상자너비 = }} '''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llang|de|Paul Karl Feyerabend}}, [[1924년]] [[1월 13일]] ~ [[1994년]] [[2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이다. [[UC 버클리]]에서 철학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 [[과학철학]]에 크게 공헌했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였으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종류의 지식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 생애 == {{무정부주의}} 폴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43년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동부 전선에서 척추에 유탄을 맞았고,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1947년에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가서 [[칼 포퍼]]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뒤에 포퍼의 과학관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955년 이후 1990년까지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취리히]]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마지막엔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의 두 군데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 1990년에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스스로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의 [[러커토시 임레]]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이 계획은 1974년 러커토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반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1991년 학계에서 은퇴한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 사상 == === [[과학철학]] ===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정해진 방법론이야말로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과학적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파이어아벤트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이성적 요소가 아닌 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갈릴레오 등의 과학사적 사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노력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귀납을 강조하는 [[논리실증주의]]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각된 [[칼 포퍼]]의 [[반증주의]] 양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관찰이나 반증주의적 논박 모두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경계 조건을 설정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로 보았다. [[라카토쉬 임레]]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 자체의 모호함이 자신이 주창한 아나키즘적 과학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파이어아벤트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중세 기독교,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교조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과학의 억압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의 발전을 인문사회적 결과로 해석하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 민주적 상대주의 === 그는 과학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의 확보는 과학의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과학주의에 반대한다. 즉, 과학주의가 권력과 손을 잡고 행정과 교육과 정치 등 인간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허용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는 ‘민주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유일하게 참되다고 생각 한 종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듯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과학의 속박에서 이 사회를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어아벤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이다. == 비판 == 만약 과학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카를 포퍼|포퍼]] 등 기존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인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 주요 저작 == * 이성이여 안녕(Farewell to Reason) 이 책은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근대 이후 서구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이며, 과학이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는 상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과학이나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비교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는 파이어아벤트의 결론은 고유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은 논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기 때문에 몇가지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다. * [[반방법론]](Against Method :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과학철학]] * [[상대주의]] * [[칼 포퍼]] * [[토머스 쿤]] * [[러커토시 임레]] * [[방법론적 아나키즘]] {{과학철학}} {{전거 통제}} {{기본정렬:파이어아벤트, 파울}} [[분류:1924년 출생]] [[분류:1994년 사망]] [[분류: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아나키스트]] [[분류:빈 출신]] [[분류: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동문]] [[분류: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오스트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과학사회학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Olympians.jpg|섬네일|오른쪽|200px|올림포스 12신을 묘사한 18세기 후반 Monsiau 작품.]]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 또는 '''도데카테온'''({{llang|el|Δωδεκάθεον < δώδεκα}}, dōdeka, "열둘" + θεοί, theoi, "신들")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 [[판테온]]의 주역 열두 신을 말한다. 숫자 12는 고대 [[바빌론]]에서 통용되던 [[황도대|12천문성좌도]]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포스 12신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 신화에 정착되었으며,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최초로 이 열두 신을 신전에 봉정하였다. 이들에 대한 종교 의식이 처음으로 언급된 고대 문헌은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호메로스 찬가]]이다. 예술과 시에 표현된 고전적인 구성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는 별개로 로마 신화의 구성은 [[유피테르]], [[유노 (신화)|유노]], [[넵투누스]], [[케레스]], [[미네르바]], [[아폴론|아폴로]], [[디아나]], [[마르스]], [[베누스]], [[메르쿠리우스]], [[불카누스]], [[베스타]]로 이루어져 있다.<ref name="PapAm">{{백과사전 인용|제목=Greek mythology|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날짜=1993|권=13|쪽=431}} {{백과사전 인용|제목=Dodekatheon|백과사전=Papyros-Larousse-Britanicca|날짜=2007|언어=그리스어}}</ref> 그러나 고대에는 이 숫자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이 쉽게 바뀌는 유동성을 띄었다.<ref name="Stoll">{{서적 인용 | 성=스톨 | 이름=하인리히 빌헬름 (R. B. Paul 역) | 제목=Handbook of the religion and mythology of the Greeks| 출판사=Francis and John Rivington | 연도=1852|쪽=8|인용문=The limitation of their number [of the Olympians] to twelve seems to have been a comparatively modern idea}}</ref> 기원전 400년 경 [[헤로도토스]]는 도데카테온을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론, 알페이오스, [[크로노스]], [[레아 (신화)|레아]], [[카리테스]]로 구성하였다.<ref name="Pap">{{백과사전 인용|제목=Dodekatheon|백과사전=Papyros-Larousse-Britanicca|날짜=2007|언어=그리스어}}</ref> 근대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헤로도로스의 열두 신을 따랐다.<ref name="Wil">{{서적 인용 |제목=Der Glaube der Hellenen (Volume 1) |성=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 |이름=울리히 폰 |저자링크=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 |coauthors= |연도=1931-1932 |출판사=Weidmansche Buchhandlung|출판위치=Berlin |언어=독일어|쪽=329}}</ref> [[헤로도토스]]는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헤라클레스]]를 포함시켰다.<ref name="Herod">[[헤로도토스]], 《[[역사 (헤로도토스)|역사]]》, 2.[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1.0126;query=chapter%3D%23259;layout=;loc=2.42.1 43-44]</ref> [[루키아노스]] 또한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는데,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두 신은 설명하지 않았다. 코스 섬에서는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으며,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는 제외하였다.<ref>{{백과사전 인용|성=Berger-Doer|이름=Gratia|제목=Dodekatheoi|백과사전=Lexicon Iconographicum Mythologiae Classicae|날짜=1986|쪽=646-658|권=3}}</ref> 그러나 [[핀다로스]], [[아폴로도로스]],<ref name="PAp">핀다로스, 《올림피안 오데스》, 10.[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text:1999.01.0162&query=line%3D%23271 49]</ref> 헤로도로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헤라클레스를 열두 신이 아닌 숭배의 대상 중 한 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f name="Pap" /> [[플라톤]]은 올림포스 열두 신을 일 년의 열두 달과 연관지으며, 마지막 달에는 하데스와 죽음의 영혼의 영광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가 [[하데스]]를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ref name="Pl">플라톤, 《[[법률 (플라톤)|법률]]》, 828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1.0166;query=section%3D%23935;layout=;loc=8.828c d-e]</ref> 그러나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구성에는 점차 제외되었다.<ref name="Am">{{백과사전 인용|제목=Greek mythology|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날짜=1993|권=13|쪽=431}}</ref>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열두 신을 황도 12궁과 함께 나열하였으며, 이 구성에서 헤스티아는 제외하였다.<ref name="Ph246e-f">[[파일:Wikisource-logo.svg|15 px]], 플라톤, 《[http://en.wikisource.org/wiki/Phaedrus 파이드로스]》, 246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text:1999.01.0174&query=section%3D%23839 e-f]</ref> 헤스티아를 대신하여 디오니소스가 열두 신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ref name="Am" /> [[헤베]], [[헬리오스]],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열두 신에 포함되기도 한다. [[에로스]]는 다른 열두 신, 특히 그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와 나란히 묘사되어 있기도 하는데, 올림포스 열두 신 중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가 형제들과 함께 [[티탄 (신화)|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는 모두 한 형제이며,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자녀이다. 일부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를 헤라 혼자서 낳은 것으로 설명한다. 이밖에 제우스로부터 태어났지만 다른 신을 수행하거나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 않았다.<ref>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161.</ref> == 올림포스 12신 구성 == === 고전 올림피안 === {| class="wikitable" |- ! 그리스 이름!!로마 이름!!동상!!주관!!세대!!출생 및 정체 |- |[[제우스]]||[[유피테르]]||[[파일:Jupiter Versailles Louvre Ma78.jpg|80px]]||신들의 왕이자 올림포스 산의 지배자, 하늘과 천둥, 정의의 신.||1세대|| 올림포스 12신의 리더<br /> 모친:[[레아]]<br/> 부친:[[크로노스]]<br /> |- |[[헤라]]||[[유노 (신화)|유노]]||[[파일:Hera Campana Louvre Ma2283.jpg|80px]]||신들과 하늘의 여왕, 여성과 결혼, 양육의 신.||1세대||제우스의 본처이자 누나 모친:레아<br/> 부친:크로노스<br /> |- |[[포세이돈]]||[[넵투누스]]||[[파일:Fontana di trevi Oceanus detail.jpg|80px]]||바다의 지배자, 말을 창조한 바다와 지진의 신.||1세대||제우스의 형 모친:레아<br/> 부친:크로노스<br /> |- |[[데메테르]]||[[케레스]]||[[파일:Demeter pushkin.jpg|80px]]||풍요와 농업, 자연, 계절의 신.||1세대||제우스의 내연녀이자 누나 모친:레아<br /> 부친:크로노스<br /> |- |[[아테나]]||[[미네르바]]||[[파일:Mattei Athena Louvre Ma530 n2.jpg|80px]]||지혜와 기술, 전략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메티스]] |- |[[아폴론]]||[[아폴론|아폴로]]||[[파일:Apollo ny carlsberg glyptotek.jpg|80px]]||태양신, 광명과 의술, 음악, 시, 예언, 궁술, 진리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레토]] |- |[[아르테미스]]||[[디아나]]||[[파일:Diane de Versailles Leochares.jpg|80px]]||사냥,처녀,출산 그리고 달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레토 |- |[[아레스]]||[[마르스]]||[[파일:Ares Ludovisi Altemps Inv8602 n2.jpg|80px]]||전쟁과 격분, 증오, 유혈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헤라 |- |[[아프로디테]]||[[베누스]]||[[파일:Cnidus Aphrodite Altemps Inv8619.jpg|80px]]||사랑과 아름다움, 욕망, 다산의 신.||2세대|| 부친 : 우라노스 <br/> 모친 : 없음 |-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파일:Mercury Pigalle Louvre RF3023.jpg|80px]]||신들의 사자, 상업과 체육, 도둑, 목동, 나그네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마이아 (신화)|마이아]] |-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파일:Vulcan Coustou Louvre MR1814.jpg|80px]]||신들의 대장장이, 불과 대장간의 신.||2세대|| 부친 : 제우스 <br/> 모친 : 헤라 |- |[[디오니소스]]||[[바쿠스]]|| ||포도주와 포도 그리고 풍요의 신 |2세대|| 부친:제우스 모친:세멜레 |} === 다른 정의 === 다음은 고전 올림포스 12신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다른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 신들이다. * 알페이오스 - 강의 신. * [[아스클레피오스]] - 의술의 신. 아폴론의 아들. * [[카리테스]] -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신들. * [[크로노스]] - 티탄. 제우스의 아버지. * [[헤스티아]] - 화로의 신. 제우스의 누나 * [[하데스]] - 죽은 자의 지배자. 저승과 지하 풍요(보석과 귀금속)의 신. 제우스의 맏형. 페르세포네의 남편. * [[헤베]] - 청춘의 신, 술 따르는 자. * [[헬리오스]] - 티탄. 태양의 화신. * [[헤라클레스]] - 그리스 신화의 영웅. * [[페르세포네]] - 봄과 죽음의 신, 데메테르의 딸. 하데스의 부인. * [[레아 (신화)|레아]] - 티탄. 제우스의 어머니. 다산의 여신 === 올림피안과 가까운 신 === * [[비아 (신화)|비아]] - 폭력의 화신. * [[크라토스]] - 권력의 화신. * [[에일레이티이아]] - 출산의 신. 헤라와 제우스의 딸. * [[에오스]] - 새벽의 신. * [[에리스 (신화)|에리스]] - 불화의 신. * [[에로스]] - 사랑과 욕망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 [[호라이]] - 올림포스의 관리인. * [[이리스]] - 무지개의 화신, 헤르메스와 함께 올림포스의 사자. * [[레토]] - 티탄.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 * [[모르페우스]] - 꿈의 신. * [[무사 (신화)|무사]] - 과학과 예술을 주관하는 9명의 신들. * [[네메시스]] - 보복과 징벌의 신. * [[니케]] - 승리의 신. * [[판 (신화)|판]] - 야생, 양치기, 자연, 동물의 신. * 파이안 - 만물의 치유자. * [[셀레네]] - 티탄이자, 달의 신. * [[젤로스]] - 경쟁의 신. * [[프로메테우스]] - 티탄이자, 앞을 보는 자. 남자 인간을 만들고 불을 나눠 줌 == 같이 보기 == * [[고대 그리스의 종교]] *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 * [[그리스 신화]] == 각주 == <references /> {{그리스 신들}} {{전거 통제}} [[분류:올림포스 12신| ]] [[분류:그리스 신화]] [[분류:그리스 신|*]] [[분류:명수 12]] [[분류:올림포스의 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음악가 정보 | name = | image = George Frideric Handel by Balthasar Denner.jpg | caption = [[발타자르 데너]]가 그린 헨델의 초상. 1726년-1728년 경.정도 | alt = | birth_name = Georg Friedrich Händel | birth_date = {{출생일|1685|3|5}} | birth_place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마그데부르크 공국]] [[할레]] | death_date = {{사망일과 나이|1759|4|14|1685|3|5|}} | death_place = [[잉글랜드]] [[런던]] | burial_place = [[웨스트민스터 사원]] | education =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 works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작품목록]] | signature = George Frideric Handel Signature.svg }} [[파일:Haendel.jpg|섬네일|173px|오른쪽|1733년경의 모습]] [[파일:George Frideric Handel Signature.svg|오른쪽|180px]] <div style="position: relative; float: {{{float|right}}}; clear: {{{float|right}}}; border:1px solid #CCCCCC; background-color:white; font-size:85%; width:250px; padding:10px; margin: {{{margin|0 0 .5em .5em}}};"> <div style="font-size:130%; font-weight:bold">음악 듣기</div> {{여럿듣기 처음}}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uite Vol. 1 No. 8 in F minor HWV 433 - 5. Gigue.oga|제목=Gigue - HWV 433|설명=|format=[[Ogg]]}} {{여럿듣기|제목="Ombra mai fù"|파일 이름=Enrico Caruso, George Frideric Handel, Ombra mai fu (Serse).ogg|설명="[[Ombra mai fù]]" (and the introductory[[recitative]], as performed by [[Enrico Caruso]] in 1920.}}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uite Vol.1 No. 2 in F major HWV 427 - 1. Adagio.oga|제목=Suite I, No. 2 in F Major, HWV 427 – I. Adagio|설명=Performed by [[Ivan Ilić]], courtesy of [http://www.musopen.com Musopen]|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uite Vol.1 No. 2 in F major HWV 427 - 2. Allegro.oga|제목=Suite I, No. 2 in F Major, HWV 427 – II. Allegro|설명=Performed by Ivan Ilic, courtesy of [http://www.musopen.com Musopen]|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uite Vol.1 No. 2 in F major HWV 427 - 3. Adagio.oga|제목=Suite I, No. 2 in F Major, HWV 427 – III. Adagio|설명=Performed by Ivan Ilic, courtesy of [http://www.musopen.com Musopen]|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uite Vol.1 No. 2 in F major HWV 427 - 4. Allegro.oga|제목=Suite I, No. 2 in F Major, HWV 427 – IV. Allegro|설명=Performed by Ivan Ilic, courtesy of [http://www.musopen.com Musopen]|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George Frideric Handel - Fantasias 8,12 and Carillon.ogg|제목=Fantasias 8, 12 and Carillon|설명=|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ogg|제목=Arrival of the Queen of Sheba|설명=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Humbert Lucarelli and Edino Biaggi on oboes|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Concerto for Organ Op. 7 No. 1 HWV 306 - 1. Andante, 2. Andante.oga|제목=Organ Concerto – Op. 7 No. 1 – HWV 306 – 1. Andante – 2. Andante|설명=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organist David Schrader|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Concerto for Organ Op. 7 No. 1 HWV 306 - 3. Largo e piano.oga|제목=Organ Concerto – Op. 7 No. 1 – HWV 306 – 3. Largo, e piano|설명=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organist David Schrader|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onata for flute in E minor HWV 359b - 1. Grave.oga|제목=Flute Sonata in E minor – 1. Grave|설명=Performed by Al Goldstein (flute) and[[Martha Goldstein]](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onata for flute in E minor HWV 359b - 2. Allegro.oga|제목=Flute Sonata in E minor – 2. Allegro|설명=Performed by Al Goldstein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onata for flute in E minor HWV 359b - 3. Adagio.oga|제목= Flute Sonata in E minor – 3. Adagio|설명=Performed by Al Goldstein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Sonata for flute in E minor HWV 359b - 4. Allegro.oga|제목= Flute Sonata in E minor – 4. Allegro|설명=Performed by Al Goldstein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Fitzwilliam Sonata 1.ogg|제목=Fitzwilliam Sonata No. 1|설명=The first [[Fitzwilliam Sonatas|Fitzwilliam Sonata]] performed by Alex Murray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Fitzwilliam Sonata 2.ogg|제목=Fitzwilliam Sonata No. 2|설명=Performed by Alex Murray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파일 이름=Handel - Fitzwilliam Sonata 3.ogg|제목=Fitzwilliam Sonata No. 3|설명=Performed by Alex Murray (flute) and Martha Goldstein (harpsichord)|format=[[ogg]]}} {{여럿듣기 끝}} </div>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llang|de|Georg Friedrich Händel}}, {{llang|en|George Frideric Handel|조지 프리더릭 핸들}},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 음악|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 역시 [[바흐]]처럼 개신교회 교회음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개신교인 영국국교회와 교회음악을 위한 노력을 하였고,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 (헨델)|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ref>King James version, [[1611년]]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잉글랜드)|제임스 1세]]에 의해 번역된 영어 성서이며, 한국말로는 흠정역 성서로 불린다.</ref>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 생애 ==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하였지만, 한 달만에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2020) 이후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조반니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연주 시합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를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였고<ref>일설에 의하면 그는 그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미친듯이 곡만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따금 방을 서성거리며 '할렐루야'하고 외치기도 했다고 하며, 탈고 후에는 14시간 동안 계속 잤다고 한다.</ref>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 중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ref>[[예수]]의 수난을 40일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ref>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든 삶을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몰두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 헨델의 음악적 특징 ==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 같이 보기 == * [[헨델의 작품 목록]]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악보와 음반 === * [https://en.wikipedia.org/wiki/Choral_Public_Domain_Library ChoralWiki] - [http://www.cpdl.org/wiki/index.php/George_Frideric_Handel 헨델 작품의 무료 악보] * [http://www.mutopiaproject.org/cgibin/make-table.cgi?Composer=HandelGF&preview=1 The Mutopia Project] - 헨델의 작품의 무료 악보, [[MIDI]] 파일 다운로드 * [https://en.wikipedia.org/wiki/Werner_Icking_Music_Archive Werner Icking Music Archive] - [http://icking-music-archive.org/ByComposer/Handel.html 헨델 작품의 무료 악보] * [https://en.wikipedia.org/wiki/University_of_California%2C_Santa_Barbara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도서관 - [http://cylinders.library.ucsb.edu/search.php?query=Handel+George+Frideric&queryType=%40attr+1%3D1 Handel cylinder recordings] * [http://www.kunstderfuge.com/handel.htm Kunst der Fuge] 헨델 작품의 MIDI 파일 * [http://magnatune.com/collections/handel Creative Commons recordings] - [[수상 음악]], 오르간 협주곡 작품 4번, [[타메를라노]] 등 === 기타 === * [http://www.gfhandel.org/ GFHandel.org], Brad Leissa와 David Vickers 제작 * [http://www.haendel.it/ Haendel.it] (이탈리어) * [https://web.archive.org/web/20070103043438/http://www.handel-with-care.net/ Handel-with-care.net] (프랑스어) * [http://www.boydell.co.uk/43832682.HTM Winton Dean's magisterial "Handel's Operas" covering the years 1726-1741, 재판본 ] {{웨이백|url=http://www.boydell.co.uk/43832682.HTM |date=20090926214736 }}. * [https://web.archive.org/web/20010615174748/http://www.handelhouse.org/ 헨델 박물관], [https://web.archive.org/web/20061112004648/http://www.haendelhaus.de/ENGLISH/haendelhaus_e.htm 할레의 헨델 가옥] * [https://web.archive.org/web/20130603082446/http://www.haendelfestspiele.halle.de/en 할레의 헨델 페스티발] : [[2007년]] 5월 31일 ~ 6월 10일 {{기본정렬: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바로크 음악}} {{전거 통제}} [[분류: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분류:1685년 출생]] [[분류:1759년 사망]] [[분류:잉글랜드의 클래식 작곡가]] [[분류:잉글랜드의 클래식 오르간 연주자]] [[분류:영국의 성공회교도]] [[분류:독일의 클래식 작곡가]] [[분류:독일의 클래식 오르간 연주자]] [[분류:독일의 성공회교도]] [[분류: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분류:하프시코드 작곡가]] [[분류:파이프 오르간 작곡가]] [[분류:하프 작곡가]] [[분류:바로크 시대 작곡가]] [[분류:할레 출신]] [[분류:독일계 영국인]] [[분류:영국으로 귀화한 사람]] [[분류:18세기 클래식 작곡가]] [[분류:독일에서 잉글랜드로 이민간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1807}} {{기년법|1807}} '''180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 [[청나라|청]](淸) [[가경]](嘉慶) 12년 * [[일본]](日本) [[분카]]({{lang|ja|文化}}) 4년 * [[응우옌 왕조]](阮朝) [[자롱 (연호)|자롱]](嘉隆) 6년 == 기년 == * [[류큐왕국|류큐]](琉球) [[쇼코왕]]({{lang|ja|尚灝王}}) 4년 * [[청나라|청]](淸) [[가경제|인종 가경제]](仁宗 嘉慶帝) 12년 * [[조선]](朝鮮) [[조선 순조|순조]](純祖) 7년 * [[응우옌 왕조]](阮朝) [[자롱 황제|가륭제]](嘉隆帝) 6년 == 사건 == * [[2월]] - [[나폴레옹]], [[러시아]] 공격. * [[3월 29일]] - [[하인리히 올베르스]], [[소행성]] [[4 베스타]]를 발견. * [[8월 17일]] -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 [[허드슨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시운전 성공 * [[영국]]과 [[덴마크]], 군사 분쟁. == 탄생 == <!--이 단락을 편집할 때는 다음을 꼭 지켜주세요. * 모든 인물은 위키백과에 등재된 인물이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어야 합니다. * 국가 이름에 내부 링크( [[ ]] )를 만들지 마세요. {{국기나라}}틀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 * [[8월 6일]] - 미국의 예술가 [[앤디 워홀]]. 년월일 문서의 편집지침은 [[백:위키프로젝트 년월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1월 19일]] - 미국의 군인 [[로버트 E. 리]]. (~[[1870년]]) * [[2월 3일]] - 미국의 군인 [[조지프 E. 존스턴]]. (~[[1891년]]) * [[2월 27일]] -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1882년]]) * [[3월 14일]] - 스웨덴의 왕비 [[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 (~[[1876년]]) * [[7월 4일]] - 이탈리아의 군인 겸 정치가 [[주세페 가리발디]]. (~[[1882년]]) * [[8월 8일]] - 청나라의 황족 종실 겸 정치가 이혁정친왕 [[단화 (정친왕)|단화]]. (~[[1861년]]) * [[10월 27일]] - 조선의 개화파 문신 [[박규수]]. (~[[1877년]]) == 사망 == * [[5월 10일]] - 프랑스의 원수, 군인 [[로샹보 백작 장바티스트 도나티앵 드 비뫼르|로샹보 백작 장바트스트 도나트앵 디 비뫄르]]. ([[1725년]]~) * [[10월 1일]]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 ([[1748년]]~) == 달력 == {{연간달력|1807}} ===음양력 대조 일람===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임인]] || 대 || [[2월 7일]] || [[계묘]] |- | [[음력 2월|2월]] || [[계묘]] || 대 || [[3월 9일]] || [[계유]] |- | [[음력 3월|3월]] || [[갑진]] || 대 || [[4월 8일]] || [[계묘]] |- | [[음력 4월|4월]] || [[을사]] || 소 || [[5월 8일]] || [[계유]] |- | [[음력 5월|5월]] || [[병오]] || 소 || [[6월 6일]] || [[임인]] |- | [[음력 6월|6월]] || [[정미]] || 대 || [[7월 5일]] || [[신미 (간지)|신미]] |- | [[음력 7월|7월]] || [[무신 (간지)|무신]] || 소 || [[8월 4일]] || [[신축]] |- | [[음력 8월|8월]] || [[기유]] || 소 || [[9월 2일]] || [[경오]] |- | [[음력 9월|9월]] || [[경술]] || 대 || [[10월 1일]] || [[기해]] |- | [[음력 10월|10월]] || [[신해]] || 소 || [[10월 31일]] || [[기사 (간지)|기사]] |- | [[음력 11월|11월]] || [[임자]] || 대 || [[11월 29일]] || [[무술 (간지)|무술]] |- | [[음력 12월|12월]] || [[계축]] || 대 || [[12월 29일]] || [[무진]] |} [[분류:1807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연도표기원후|1940}} {{기년법|1940}} '''194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 연호 ==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大韓民國) 22년 *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기원|민국]](民國) 29년 * [[만주국]](滿州國) [[강덕 (만주국)|강덕]](康德) 7년 * [[일본]](日本) [[쇼와 시대|쇼와]]({{lang|ja|昭和}}) 15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연호)|바오다이]](保大) 15년 == 기년 == * [[만주국]](滿洲國) [[푸이|강덕제]](康德帝) 9년 * [[응우옌 왕조]](阮朝) [[바오다이 황제|보대제]](保大帝) 15년 == 사건 == * [[1월 4일]] - 조선총독부, 조선영화령 공포로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을 통제 * [[1월 9일]] - 조선총독부, 신년도 노무동원계획 결정 * [[1월 31일|1월 22]] * [[1월 31일|일]] - 일제, 육군통제령 및 해군통제령 공포 * [[2월 11일]] ** 조선에서 [[창씨개명]] 실시 ** 조선영화인협회 창립 * [[2월 14일]] - 일제가 묘지규칙을 개정, 신고제를 허가제로 변경 * [[2월 29일]] **해티 맥다니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머미 역으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상|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일제가 [[석탄]] 등 18개 품목을 수출통제품으로 결정 * [[3월 5일]] -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표, 조선의 참정권 청원을 위해 일본 도쿄로 출발되었다. * [[3월 6일]] - [[겨울전쟁]] 정전. * [[3월 21일]] - [[프랑스]]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 총사퇴 * [[3월 31일]]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조선사> 전 37권 완간 * [[4월]] - 만주 지안현에서 [[고구려]] 벽화 다수 발견 * [[4월 9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덴마크]]·[[노르웨이]] 침공. ([[베저 작전]]) * [[4월 15일]] - [[평안북도]] [[선천]]의 유림, 전 회원 [[창씨개명|창씨]] 결정 * [[4월 18일]] - 경조전보 제도 폐지 * [[5월]] - 인천 강화 [[전등사]]에서 묘법연화경판 발견 * [[5월 9일]] -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하와이 애국단 등이 [[한국독립당 (1940년)|한국독립당]] 조직 (위원장 [[김구]]) * [[5월 10일]] **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체임벌린 내각 총사퇴.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베네룩스]] 삼국 공격 개시. * [[5월 20일]] - [[유대인 대학살]]: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다. * [[5월 21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볼로뉴를 점령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분리시킴 ** [[제2차 세계 대전]]: 구데리안군은 솜므강을 도하하여 교두보 확보 * [[6월]] - [[일본]] [[나고야]]에서 [[민족부흥회 사건]]으로 [[이수영 (독립 운동가)|이수영]] 등 23명 체포 * [[6월 2일]] - 사탕배급증제 실시 * [[6월 7일]] - [[조선어학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발표 * [[6월 10일]] - [[제2차 세계 대전]]: [[노르웨이]]가 [[독일]]에 항복하다. ([[베저 작전]]) * [[6월 11일]] - 평양박물관, [[강서군]] [[고려요지]], [[낙랑고분]] 발굴 착수 * [[6월 14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이 [[파리시|파리]]에 진주하다. * [[6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가 점령한 프랑스의 [[파리시]]를 방문하다. * [[7월]] -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 발견 * [[7월 1일]] - 조선총독부, 학생의 만주, 중국 여행 금지 * [[7월 10일]] - [[프랑스]]에 [[비시 정권]] 수립. * [[7월 14일]] - [[경기도]] 학생근로대 조직 * [[8월 11일]]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강제 폐간 * [[8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 본토 공습 개시]] * [[8월 17일]]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전시생활체제 강요 * [[8월 18일]] - [[미국]]과 [[캐나다]], 공동방위조약 체결 * [[8월 20일]] -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망명지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피살 * [[8월 30일]] - 제2차 [[빈 중재]]: [[루마니아]]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의 절반이 [[헝가리]]의 영토로 편입된다. * [[9월]] - [[대한민국 임시정부]], [[충칭시|충칭]]으로 거점 이전 * [[9월 7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57일간의 [[런던]] 야간 폭격을 시작([[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9일]] - 일제가 학생 복장을 국방색으로 통일 * [[9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 [[이집트]] 침공([[북아프리카 전역]]) * [[9월 17일]] - [[중화민국]] [[충칭시|충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한국 광복군]] 창설. * [[9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일본의 군사|일본군]],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 개시 * [[9월 27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세 [[추축국]]이 독일 [[베를린]]에서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다. * [[10월 9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제도를 국무위원제로 개정 * [[10월 15일]] ** [[인도]] 민족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반영 불복종 운동 개시 **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한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되다. * [[10월 16일]] ** [[제2차 세계 대전]]: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한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지다. ** 벤저민 O. 데이비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장성이 되었다. ** 국민총력연맹이 조직되어 [[황국신민화운동]] 강제 시행 * [[10월 25일]] - 중국 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국 전선 참전을 승인 * [[11월 5일]]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미국)|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공화당 (미국)|공화당]]의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꺾고 사상 처음 세 번째 임기를 지내는 미국 대통령이 되다. * [[11월 29일]]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충칭시|충칭]]에서 [[시안시|시안]]으로 본거점을 이전, 군사특파단을 폐지하고 건군공작 착수와 유격전 수행 * [[12월 11일]] -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연하, 연회, 선물, 여행 폐지 결정 * [[12월 22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침에 관한 선포문 발표 * [[12월 25일]] - 경성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황도협회]] 결성 == 문화 == * [[1월 23일]] - [[중앙선]] [[죽령터널]]이 개통되었다. * [[2월 23일]] -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 (1940년 영화)|피노키오]]가 개봉되었다. * [[5월 15일]] ** 최초의 [[맥도날드]] 식당이 생겼다. ** [[나일론]] 스타킹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판매되었다. == 탄생 == {{분류 참고|1940년 출생}} === 1월 === * [[1월 1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황인용]]. * [[1월 3일]] - 일본의 레슬링 선수 [[하나하라 쓰토무]]. (~[[2024년]]) * [[1월 4일]] ** 영국의 물리학자 [[브라이언 데이비드 조지프슨]]. ** 프랑스의 소설가 [[가오싱젠]]. * [[1월 7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공무원 [[김백준]]. (~[[2022년]]) * [[1월 10일]] ** 대한민국의 공인회계사 겸 정치가 [[임길수]]. (~[[1990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하림 (1940년)|김하림]]. *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2022년]]) ** 몰도바의 제2대 대통령 [[미르체아 스네구르]]. (~[[2023년]]) ** 우루과이의 대통령, 정치인 [[타바레 바스케스]]. (~[[2020년]]) * [[1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패션 디자이너 [[최지희 (1940년생 배우)|최지희]]. (~[[2021년]]) ** 영국의 배우 [[존 허트]]. (~[[2017년]]) * [[1월 25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안대륜]]. * [[1월 26일]] - 대한민국 정치인 [[김우식 (1940년)|김우식]]. * [[1월 29일]] ** 미국의 배우 [[캐서린 로스]]. ** 미국의 희극인 [[하워드 헤스먼]]. (~[[2022년]]) * [[1월 31일]] - 미국의 영화배우 [[스튜어트 마골린]]. (~[[2022년]]) === 2월 === * [[2월 4일]] - 캐나다의 영화감독 [[조지 A. 로메로]]. * [[2월 6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황일청]]. * [[2월 7일]] - 대한민국의 대금, 아쟁 명인 [[서용석 (국악인)|서용석]]. (~[[2013년]]) *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황인용]]. * [[2월 9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존 맥스웰 쿠체]]. * [[2월 11일]] -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허버트 긴티스]]. (~[[2023년]]) * [[2월 1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승현 (성우)|정승현]]. * [[2월 1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임국찬]]. * [[2월 17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현길언]]. (~[[2020년]]) * [[2월 19일]] -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2006년]]) * [[2월 20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지미 그리브스]]. (~[[2021년]]) *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정훈 (배우)|최정훈]]. (~[[2023년]]) ** 브라질의 배우 [[아라시 발라바냔]]. (~[[2023년]]) ** 미국의 농구 선수 [[쳇 워커]]. (~[[2024년]]) * [[2월 24일]] - 스코틀랜드의 전 축구 선수 [[데니스 로]]. *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여운계]]. (~[[2009년]]) * [[2월 27일]] - 미국의 희극인 [[하워드 헤스먼]]. (~[[2022년]]) * [[2월 29일]] ** 일본의 배우 [[하라다 요시오]]. (~[[2011년]]) ** 독일의 배우 [[마르기트 카르스텐센]]. (~[[2023년]]) === 3월 === * [[3월 1일]] - 대한민국의 시인 [[이근배]]. * [[3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용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민섭]]. (~[[1987년]]) * [[3월 4일]] - 미국의 배우 [[지-투 컴부카]]. (~[[2017년]]) * [[3월 10일]] - 미국의 영화배우 [[척 노리스]]. * [[3월 13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영일 (법조인)|김영일]]. (~[[2024년]]) * [[3월 15일]] ** 소련과 리투아니아의 카누 선수 [[블라다스 체슈나스]]. (~[[2023년]]) ** 대한민국의 시인 [[송수권]]. (~[[2016년]]) * [[3월 16일]] ** 독일의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 ** 대한민국의 배우 [[김무생]]. (~[[2005년]]) *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겸 정치인 [[박성범 (정치인)|박성범]]. *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공학자, 정치인 [[오명 (정치인)|오명]]. * [[3월 24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전상국]]. * [[3월 26일]] ** 미국의 정치인 [[낸시 펠로시]]. ** 미국의 배우 [[제임스 칸]]. (~[[2022년]]) *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순원 (성우)|김순원]]. * [[3월 29일]] - 브라질의 보사노바 가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2023년]]) === 4월 === * [[4월 1일]] - 케냐의 환경·정치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2011년]]) * [[4월 3일]] - 미국의 배우 [[버트 영]]. (~[[2023년]]) * [[4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세환 (1940년)|박세환]]. (~[[2021년]]) * [[4월 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응용]]. ** 대한민국의 기업인 [[임성기]]. (~[[2020년]]) * [[4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영인 (1940년)|김영인]]. * [[4월 11일]] - 미국의 작가 [[토머스 해리스]]. * [[4월 1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국회의원 [[최선영 (1940년)|최선영]]. (~[[2010년]]) ** 프랑스의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 프랑스의 영화 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블라디미르 코스마]]. * [[4월 14일]] - 리히텐슈타인의 대공부인 [[브히니츠와 테타우 백작부인 마리 킨스키]]. (~[[2021년]]) * [[4월 16일]] - 덴마크의 군주 [[마르그레테 2세]]. * [[4월 25일]] - 미국의 배우 [[알 파치노]]. * [[4월 26일]] - 이탈리아의 음악가 [[조르조 모로더]]. * [[4월 30일]] - 미국의 영화배우 [[버트 영]]. (~[[2023년]]) === 5월 === * [[5월 2일]] - 대한민국의 행정가, 정치인 [[정문화]]. * [[5월 4일]] - 미국의 의사, 소설가 [[로빈 쿡 (소설가)|로빈 쿡]]. * [[5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세윤]]. *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사미자]]. * [[5월 20일]] - 중화민국 국적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오 사다하루]]. === 6월 === * [[6월 1일]] - 미국의 물리학자 [[킵 손]]. * [[6월 2일]] -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2023년]]) * [[6월 5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차수웅]]. (~[[2023년]]) * [[6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근형]]. ** 영국의 음악가 [[톰 존스 (가수)|톰 존스]]. * [[6월 8일]] ** 대한민국의 공무원 [[임인택]]. (~[[2020년]]) ** 미국의 가수 [[낸시 시나트라]]. * [[6월 13일]] - 미국의 육상 선수 [[댈러스 롱]]. (~[[2024년]]) *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도언 (1940년)|김도언]]. ** 대한민국의 배우 [[최불암]]. * [[6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음악가 [[차도균]]. **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 * [[6월 19일]] - 재일 한국인 출신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장훈]]. * [[6월 21일]] - 대한민국의 요리연구가 [[심영순]]. * [[6월 22일]] - 이란의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 [[6월 23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윌마 루돌프]]. * [[6월 27일]] - 미국의 수학자 [[대니얼 퀼런]]. (~[[2011년]]) * [[6월 28일]] - 방글라데시의 은행가 [[무함마드 유누스]]. * [[6월 30일]] - 스페인의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 === 7월 === * [[7월 3일]] ** 대한민국의 방송연출가 [[유길촌]]. (~[[2022년]]) ** 폴란드의 정치인 [[예지 부제크]]. * [[7월 4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성진 (법조인)|정성진]]. (~[[2024년]]) * [[7월 6일]] - 카자흐스탄의 정치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7월 7일]] ** 영국의 드럼 연주자 [[링고 스타]]([[비틀즈]]).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창화 (1940년)|정창화]]. (~[[2022년]]) * [[7월 1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종인]] * [[7월 13일]] - 영국의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 [[7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미]]. * [[7월 18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조 토리]]. * [[7월 22일]] - 미국의 방송인, 퀴즈쇼 진행자 [[앨릭스 트리벡]]. (~[[2020년]]) === 8월 === * [[8월 3일]] - 미국의 배우 [[마틴 신]]. * [[8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광세]]. * [[8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성덕]]. * [[8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동룡]]. (~[[2023년]]) * [[8월 21일]] - 헝가리계 미국인 수학자, 컴퓨터 과학자 [[세메레디 엔드레]]. * [[8월 23일]] ** 대한민국의 목사 [[이종윤 (1940년)|이종윤]]. (~[[2023년]]) ** 미국의 생화학자, 연구원 [[토머스 A. 스타이츠]]. (~[[2018년]]) * [[8월 25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이재후]]. === 9월 === * [[9월 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엄창섭 (1940년)|엄창섭]]. * [[9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찬석]]. ** 미국의 배우 [[라켈 웰치]]. (~[[2023년]]) * [[9월 7일]]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 [[9월 10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유상열]]. (~[[2022년]]) * [[9월 11일]] - 미국의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 [[9월 12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강성구]]. * [[9월 13일]] - 대한민국의 무술인, 배우 [[황인식 (1940년)|황인식]]. * [[9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금희 (가수)|이금희]] (~[[2007년]]) * [[9월 20일]] - 일본의 제92대 총리 [[아소 다로]]. * [[9월 22일]] - 덴마크, 프랑스의 배우 [[아나 카리나]]. (~[[2019년]]) * [[9월 29일]] -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니콜라 디 바리]]. === 10월 === *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교육인 [[김광웅]]. (~[[2019년]]) * [[10월 6일]] -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어도비 시스템즈의 창립자 [[존 워녹]]. (~[[2023년]]) * [[10월 8일]] - 대한민국의 교육학자 [[권이종]]. (~[[2022년]]) * [[10월 9일]] - 영국의 대중음악가) [[존 레논]]. ([[비틀즈]]) (~[[1980년]]) * [[10월 13일]] ** 한국계 미국의 태권도 선수 [[조희일]]. ** 미국의 연주자 [[파로아 샌더스]]. (~[[2022년]]) * [[10월 14일]] - 영국의 가수, 음악가, 보컬리스트 [[클리프 리처드]]. *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정치인 [[변웅전]]. * [[10월 19일]] - 아일랜드의 배우 [[마이클 갬본]]. (~[[2023년]]) *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 [[윤용남]]. (~[[2021년]]) *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김창국 (법조인)|김창국]]. (~ [[2016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펠레]]. (~[[2022년]]) *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겸 제14대 국회의원 [[이주일]]. (~[[2002년]]) *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유병호 (1940년)|유병호]]. === 11월 === * [[11월 2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저술가 [[손충무]]. (~[[2010년]]) * [[11월 3일]] - 멕시코의 배우 [[마누엘 오제다]]. (~[[2022년]]) * [[11월 9일]] - 대한제국의 황족 출신 인물 [[이종 (1940년)|이종]]. (~[[1966년]]) *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해양학자 [[한상복]]. (~[[2023년]]) * [[11월 15일]] ** 미국의 배우 [[샘 워터스턴]]. ** 이탈리아의 패션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 (~[[2024년]]) ** 덴마크의 배우 [[울프 필고르]]. (~[[2024년]]) * [[11월 22일]] ** 영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테리 길리엄]]. ** 폴란드의 영화 감독, 작가 [[안제이 주와프스키]]. (~[[2016년]]) * [[11월 23일]] - 쿠바의 야구 선수 [[루이스 티안트]]. (~[[2024년]]) * [[11월 25일]] - 미국의 가수 [[퍼시 슬레지]]. (~[[2015년]]) * [[11월 26일]] - 이탈리아 수학자 [[엔리코 봄비에리]]. * [[11월 27일]] - 홍콩의 무술 배우 [[이소룡]]. (~[[1973년]]) *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작가 [[손춘익]]. (~[[2000년]]) *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정갑 (1940년)|서정갑]]. ** 대한민국의 배우 [[조춘]]. === 12월 === * [[12월 3일]] - 일본의 사진가 [[시노야마 기신]]. (~[[2024년]]) * [[12월 4일]] - 일본의 정치인, 초대 방위대신 [[규마 후미오]]. * [[12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라종일 (1940년)|라종일]]. *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박재란]]. *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양영준]]. * [[12월 24일]] - 미국의 의사, 병리학자 [[앤서니 파우치]]. *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양승춘]]. (~[[2017년]]) * [[12월 26일]] - 미국의 경제학자 [[에드워드 프레스콧]]. (~[[2022년]]) *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신중식]]. == 사망 == {{분류 참고|1940년 사망}} * [[6월 22일]] - 독일의 기상학자 [[블라디미르 쾨펜]]. ([[1846년]]~) * [[6월 29일]] -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 ([[1879년]]~) * [[7월 15일]] -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 [[로버트 워들로]]. ([[1918년]]~) * [[8월 20일]] - 러시아의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 도끼 살인. ([[1879년]]~) * [[9월 27일]] - 독일의 문학 비평가 [[발터 베냐민]]. ([[1892년]]~) * [[11월 24일]] - 일본의 겐로 [[사이온지 긴모치]]. ([[1849년]]~) * [[12월 21일]] - 미국의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 ([[1896년]]~) == 달력 == {{연간달력|1940}} ===음양력 대조 일람=== {| class="wikitable" |- ! 음력월 !! 월건 !! 대소 !! 음력 1일의<br />양력 월일 !! 음력 1일<br/>간지 |- | [[음력 1월|1월]] || [[무인 (간지)|무인]] || 대 || [[2월 8일]] || [[신사 (간지)|신사]] |- | [[음력 2월|2월]] || [[기묘]] || 대 || [[3월 9일]] || [[신해]] |- | [[음력 3월|3월]] || [[경진]] || 소 || [[4월 8일]] || [[신사 (간지)|신사]] |- | [[음력 4월|4월]] || [[신사 (간지)|신사]] || 대 || [[5월 7일]] || [[경술]] |- | [[음력 5월|5월]] || [[임오]] || 소 || [[6월 6일]] || [[경진]] |- | [[음력 6월|6월]] || [[계미]] || 대 || [[7월 5일]] || [[기유]] |- | [[음력 7월|7월]] || [[갑신]] || 소 || [[8월 4일]] || [[기묘]] |- | [[음력 8월|8월]] || [[을유]] || 소 || [[9월 2일]] || [[무신 (간지)|무신]] |- | [[음력 9월|9월]] || [[병술]] || 대 || [[10월 1일]] || [[정축]] |- | [[음력 10월|10월]] || [[정해]] || 소 || [[10월 31일]] || [[정미]] |- | [[음력 11월|11월]] || [[무자]] || 대 || [[11월 29일]] || [[병자]] |- | [[음력 12월|12월]] || [[기축]] || 소 || [[12월 29일]] || [[병오]] |} {{전거 통제}} [[분류:1940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유다인|배우|유다인_(배우)}} {{낡음|날짜=2023-03-13}} {{민족 정보 | 민족명 = 유대인 | 현지어명 = יהודי | 기 = | 문장 = Star of David.svg | 문장설명 =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상징인 [[다윗의 별]] | 총인구 = 2050만 명<ref name="JDB">{{보고서 인용|editor-last1=Dashefsky |editor-first1=Arnold |editor-link1=Arnold Dashefsky |editor-last2=DellaPergola |editor-first2=Sergio |editor-link2=Sergio DellaPergola |editor-last3=Sheskin |editor-first3=Ira |date=2018 |title=World Jewish Population, 2017 |url=https://www.jewishdatabank.org/content/upload/bjdb/World_Jewish_Population_2017_AJYB_DataBank_Final.pdf |publisher=Berman Jewish DataBank |access-date=7 December 2018}}</ref> [[파일:Jewish people around the world.svg|center|frameless|260x260px]] | 지역1 = {{국기|이스라엘}} | 인구1 = 6,835,500<ref name="JDB"/> | 지역2 = {{국기|미국}} | 인구2 = 10,000,000<ref name="JDB"/> | 지역3 = {{국기|프랑스}} | 인구3 = 456,000<ref name="JDB"/> | 지역4 = {{국기|캐나다}} | 인구4 = 390,000<ref name="JDB"/> | 지역5 = {{국기|영국}} |인구5 = 370,000<ref name="JDB"/> | 지역6= {{국기|아르헨티나}} | 인구6 = 180,500<ref name="JDB"/> | 지역7 = {{국기|러시아}} |인구7 = 176,000<ref name="JDB"/> | 지역8 = {{국기|독일}} | 인구8 = 116,000<ref name="JDB"/> | 지역9 = {{국기|호주}} | 인구9 = 140,000<ref name="JDB"/> | 지역10 = {{국기|브라질}} | 인구10 = 93,800<ref name="JDB"/> | 지역11 = {{국기|남아공}} | 인구11 = 69,300<ref name="JDB"/> | 지역12 = {{국기|우크라이나}} | 인구12 = 53,000<ref name="JDB"/> | 지역13 = {{국기|헝가리}} | 인구13 = 47,500<ref name="JDB"/> | 지역14 = {{국기|멕시코}} | 인구14 = 40,000<ref name="JDB"/> | 지역15 = {{국기|네덜란드}} | 인구15 = 29,800<ref name="JDB"/> | 지역16 = {{국기|벨기에}} | 인구16 = 29,300<ref name="JDB"/> | 지역17 = {{국기|이탈리아}} | 인구17 = 27,300<ref name="JDB"/> | 지역18 = {{국기|콜롬비아}} | 인구18 = 27,000<ref name="JDB"/> | 지역19 = {{국기|스위스}} | 인구19 = 18,700<ref name="JDB"/> | 지역20 = {{국기|칠레}} | 인구20 = 18,300<ref name="JDB"/> | 지역21 = {{국기|우루과이}} | 인구21 = 16,900<ref name="JDB"/> | 지역22 = {{국기|튀르키예}} | 인구22 = 15,300<ref name="JDB"/> | 지역23 –25,000<ref name="JDB"/> | 언어 = [[히브리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br>[[이디시어]], [[라디노어]], 유대인 아랍어 등 | 종교 = [[유대교]] | 민족계통 = [[히브리인]] | 기원발상 = [[유다 왕국]] | 근연민족 = [[사마리아인]], [[아랍인]], [[아시리아인]] 등 }} '''유대인'''(단수: {{llang|he|יְהוּדִי|예후디}}, 복수: {{llang|he|יְהוּדִים|예후딤}}) 또는 '''유태인'''(猶太人)은 [[히브리 민족]]에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민족성과 종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ref>이들은 유대교를 통하여 근대적 민족주의에 맞먹는 민족주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공화주의나 귀족주의를 이기지 못하였다. 물론 교육이나 가난 혹은 도덕성의 부재가 원인인지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에 의하면 유대인들 역시 민족주의적인 개념들로 선전선동을 해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 여성들을 노예 무역으로 엄청나게 팔아치웠던 역사가 있다.</ref>인데 이는 [[유대교]]가 유대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은 보통 유대인 사회 내에서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주류 유대교에서 개종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이에 해당된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 민족은 고대 [[가나안]]의 족장이던 [[아브라함]]에게서 유래되었다. 이집트에 의해 잔혹한 정복과 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대대로 노예 민족으로 살며 탄압받다가 이집트인들이 끝내 유대인 남자는 아기까지 다 죽이고 여자들만 남겨 멸족시키려 하자 [[출애굽]]을 거쳐 가나안에 다시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유다 지역은 이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갔으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 진출하였고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동화되지 않은 채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중세에도 다수가 동화되지 않고 차별을 겪었는데, 이로 인해 천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금융, 상업, 무역 등에 종사하게 되어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차별의 고통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가진 부에 비해 나약했기 때문에 많은 습격을 당했다. 심지어 극심한 차별로 인하여 가난해진 유대인들은 신과 민족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동족들을 팔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s://jwa.org/encyclopedia/article/white-slavery|제목=White Slavery|언어=en|확인날짜=2023-04-08}}</ref> 근대에 와서도 차별은 잔존하였고 유럽 정치의 극단화의 끝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일어나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가 죽고 남은 대부분은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현대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도 스스로를 유대 국가로 규정하므로 [[귀환법]]에 의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 역사 == '''<big>후기 청동기 시대 (1550–1150 BCE)</big>''' 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100-1550년) 에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ref>Jonathan M Golden,''Ancient Canaan and Israel: An Introduction,'' OUP, 2009 pp. 3–4.</ref>.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50-1200년) 동안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 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형성했다<ref>Braunstein, Susan L. (2011). "The Meaning of Egyptian-Style Objects in the Late Bronze Cemeteries of Tell el-Farʿah (South)".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364''' (364): 1–36. doi:10.5615/bullamerschoorie.364.0001. JSTOR 10.5615/bullamerschoorie.364.0001. S2CID 164054005.</ref>.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ref>Dever, William G. ''Beyond the Text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Press, 2017, pp. 89–93</ref><ref>S. Richard, "Archaeological sources for the history of Palestine: The Early Bronze Age: The rise and collapse of urbanism", ''The Biblical Archaeologist'' (1987)</ref>. 하솔, 벧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및 아스글론은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ref>Knapp, A. Bernard; Manning, Sturt W. (1 January 2016). "Crisis in Context: The End of the Late Bronze Age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120''' (1): 130. doi:10.3764/aja.120.1.0099. ISSN 0002-9114. S2CID 191385013.</ref>.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민족이 기원전 1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비문(Merneptah Stele)에 처음으로 등장한다<ref>K.L. Noll, ''Canaan and Israel in Antiquity: A Textbook on History and Religion,'' A&C Black, 2012, rev.ed. pp. 137ff.</ref>. 이스라엘인의 조상에는 이 지역에서 태어난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ref>Miller, James Maxwell; Hayes, John Haralson (1986).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Westminster John Knox Press. ISBN <bdi>978-0-664-21262-9</bdi>.</ref>. 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야훼를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단일 숭배(후에는 일신교) 종교의 발전을 통해 가나안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서 분기되었다<ref>Mark Smith in "The Early History of God: Yahweh and Other Deities of Ancient Israel" states "Despite the long regnant model that the Canaanites and Israelites were people of fundamentally different culture, archaeological data now casts doubt on this view. The material culture of the region exhibits numerous common points between Israelites and Canaanites in the Iron I period (c. 1200–1000 BCE). The record would suggest that the Israelite culture largely overlapped with and derived from Canaanite culture... In short, Israelite culture was largely Canaanite in nature. Given the information available, one cannot maintain a radical cultural separation between Canaanites and Israelites for the Iron I period." (pp. 6–7). Smith, Mark (2002) "The Early History of God: Yahweh and Other Deities of Ancient Israel" (Eerdman's)</ref><ref>Rendsberg, Gary (2008). "Israel without the Bible". In Frederick E. Greenspahn. The Hebrew Bible: New Insights and Scholarship. NYU Press, pp. 3–5</ref><ref>Gnuse, Robert Karl (1997). ''No Other Gods: Emergent Monotheism in Israel''. England: Sheffield Academic Press Ltd. pp. 28, 31. ISBN <bdi>1-85075-657-0</bdi>.</ref>.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히브리어 의 고대 형태를 사용했다<ref>Steiner, Richard C. (1997), "Ancient Hebrew", in Hetzron, Robert (ed.), ''The Semitic Languages'', Routledge, pp. 145–173, ISBN 978-0-415-05767-7</ref>. 비슷한 시기에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ref>Killebrew, Ann E. (2005). ''Biblical Peoples and Ethnicity: An Archaeological Study of Egyptians, Canaanites, Philistines, and Early Israel, 1300-1100 B.C.E.'' Atlanta, Georgi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ISBN <bdi>1-58983-097-0</bdi>.</ref>. '''<big>철기 시대 I (기원전 1150-950년)</big>''' 고고학자 Paula McNutt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철기 시대의 (가나안)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혼인 금지, 가족사 및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이웃과 차별화 하였을 것입니다"<ref name=":0">McNutt, Paula (1999). Reconstructing the Society of Ancient Israel. Westminster John Knox Press. <nowiki>ISBN 9780664222659</nowiki>.</ref>.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ref name=":0" />.  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이다<ref name=":0" />.  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그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특징도 식별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ref name=":1">Miller, James Maxwell; Hayes, John Haralson (1986).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Westminster John Knox Press. <nowiki>ISBN 978-0-664-21262-9</nowiki>.</ref>.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던 네방형(four-room) 집이나 collared-rim 항아리들은 고지대 밖에서도 확인되었기에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ref name=":1" />. 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ref>Killebrew, Ann E. (2005). Biblical Peoples and Ethnicity: An Archaeological Study of Egyptians, Canaanites, and Early Israel, 1300–1100 B.C.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nowiki>ISBN 9781589830974</nowiki>.</ref>.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초기 고지대 일부를 구별하는 타원형 또는 원형 레이아웃과 언덕 지역에서 눈에 띄는 돼지 뼈의 부재가 인종의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며 반드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ref>Edelman, Diana (2002). "Ethnicity and Early Israel". In Brett, Mark G. (ed.). Ethnicity and the Bible. Brill. <nowiki>ISBN 978-0391041264</nowiki>.</ref>.  다른 아람 유적지도 초기 가나안 및 후기 블레셋 발굴과 달리 그 당시 돼지 유해가 동시대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다. [[:en:The_Bible_Unearthed|''The Bible Unearthed'' (2001)]] 에서 Finkelstein과 Silberman은 최근 연구를 요약했다. 그들은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 이었다고 설명했다 . 그 이후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ref name=":2">Finkelstein and Silberman (2001), p. 107</ref>. 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어디서나 블레셋 식단의 20%를 돼지고기가 차지함),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 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ref>Avraham Faust, "How Did Israel Become a People? The Genesis of Israelite Identity",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1 (2009): 62–69, 92–94.</ref>.<blockquote>이러한 조사는 초기 이스라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몇 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빽빽한 고원 촌락 네트워크의 유적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극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했습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하게 정의된 민족 집단의 침투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라이프 스타일의 혁명인 것 같았습니다.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희박했던 고지대에 와해되고 와해되고 있던 가나안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약 250개의 산꼭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이 있었습니다<ref name=":2" />. These surveys revolutionized the study of early Israel.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of a dense network of highland villages – all apparently established within the span of few generations – indicated that a dramatic social transformation had taken place in the central hill country of Canaan around 1200 BCE. There was no sign of violent invasion or even the infiltration of a clearly defined ethnic group. Instead, it seemed to be a revolution in lifestyle. In the formerly sparsely populated highlands from the Judean hills in the south to the hills of Samaria in the north, far from the Canaanite cities that were in the process of collapse and disintegration, about two-hundred fifty hilltop communities suddenly sprang up. Here were the first Israelites<ref name=":2" />.</blockquote>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ref>Compare: Gnuse, Robert Karl (1997). No Other Gods: Emergent Monotheism in Israel.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Supplement series. Vol. 241. Sheffield: A&C Black. p. 31. <nowiki>ISBN 9781850756576</nowiki>. Retrieved 2 June 2016. Out of the discussions a new model is beginning to emerge, which has been inspired, above all, by recent archaeological field research. There are several variations in this new theory, but they share in common the image of an Israelite community which arose peacefully and internally in the highlands of Palestine.</ref>.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400명 정도였다<ref name=":0" />. 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다. 그들은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 에 의해 인도되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역 추장과 정치가 보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다. 기록 및 문자의 사용은 작은 사이트/지역에도 보급되었고 기록이 가능해졌다<ref name=":0" />. '''<big>철기 시대 II (기원전 950–587년)</big>''' Israel Finkelstein에 따르면 , BCE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대규모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셰숑크 1세|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다고 한다<ref>Finkelstein, Israel (2020). "Saul and Highlands of Benjamin Update: The Role of Jerusalem". In Joachim J. Krause; Omer Sergi; Kristin Weingart (eds.). Saul, Benjamin, and the Emergence of Monarchy in Israel: Biblical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Atlanta, GA: SBL Press. p. 48. <nowiki>ISBN 978-0884144519</nowiki>. ...Shoshenq I, the founder of the Twenty-Second Dynasty and seemingly the more assertive of the Egyptian rulers of the time, reacted to the north Israelite challenge. He campaigned into the highlands and took over the Saulide power bases in the Gibeon plateau and the area of the Jabbok River in the western Gilead. The fortified sites of Khirbet Qeiyafa, Khirbet Dawwara, et-Tell, and Gibeon were destroyed or abandoned. Shoshenq reorganized the territory of the highlands - back to the traditional situation of two city-states under his domination... (p. 48)</ref>. 그러나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또 다른 대규모 정치가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다<ref>Finkelstein, Israel (2019). "First Israel, Core Israel, United (Northern) Israel". Near Eastern Archaeology.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ASOR). 82 (1): 12. doi:10.1086/703321. S2CID 167052643. Retrieved 22 March 2020. ...the emergence of the 'Tirzah polity' (the first fifty years of the Northern Kingdom) in the middle of the tenth century BCE...</ref>.  이스라엘 왕국은 중요한 지역 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의 초기 존재 와 그 범위와 권세에 대한 논쟁이 있다<ref>Kuhrt, Amiele (1995). ''The Ancient Near East''. Routledge. p. 438. ISBN <bdi>978-0-415-16762-8</bdi>.</ref>. 이스라엘 연합 왕국이 <abbr>있었</abbr>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ca. 기원전 900년에는<ref>Finkelstein, Israel; Silberman, Neil Asher (2001). ''The Bible unearthed :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tories'' (1st Touchstone ed.). New York: Simon & Schuster. ISBN <bdi>978-0-684-86912-4</bdi>.</ref>, 그리고 유다 왕국<abbr>은</abbr> ca. 기원전 850년<ref>The Pitcher Is Broken: Memorial Essays for Gosta W. Ahlstrom, Steven W. Holloway, Lowell K. Handy, Continuum, 1 May 1995 Quote: "For Israel, the description of the battle of Qarqar in the Kurkh Monolith of Shalmaneser III (mid-ninth century) and for Judah, a Tiglath-pileser III text mentioning (Jeho-) Ahaz of Judah (IIR67 = K. 3751), dated 734–733, are the earliest published to date."</ref>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 이스라엘 왕국은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오므리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 갈릴리, 요단 계곡 상류, 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제했다<ref>Israel., Finkelstein. ''The forgotten kingdom : the archaeology and history of Northern Israel''. p. 74. ISBN <bdi>978-1-58983-910-6</bdi>. OCLC 949151323.</ref>.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ref>Finkelstein, Israel (2013). ''The Forgotten Kingdom: the archaeology and history of Northern Israel''. pp. 65–66, 73, 78, 87–94. ISBN <bdi>978-1-58983-911-3</bdi>. OCLC 880456140.</ref>. '''<big>고전 시대</big>'''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 의해 멸망하였고 기원전 586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남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당시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이 끝났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하는 기원전 333년까지 제국에서 평화로운 지역에 속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다시 기원전 140년에서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의 [[외경]] 중 '[[마카비 상권|마카비 상]], [[마카비 하권|하]]'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66년|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족|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 중세 유럽 === 유대인들은 유럽 곳곳에 퍼져 살게 되었으나 이들에게 허용된 직종은 한정되어 있었다. 중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이자와 관련된 금융활동을 죄악시하여 엄금하였기 때문에 대신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비롯하여 금융과 무역에 관련된 직업을 도맡게 되었다.<ref>Ben-Sasson, Hayim.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유대인들의 역사). 하버드대학 프레스. 1976.</ref>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포도주를 만들었다.<ref name="아슈케나짐">{{웹 인용| url=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jsource/Judaism/Ashkenazim.html| 제목=아슈케나짐| 이름=Shira|성=Schoenberg| 출판사=Jewish Virtual Library| 확인날짜=2006-05-24}}</ref> 이들에 대한 반감인 [[반유대주의]]는 역사적 뿌리가 깊어, 유럽에서 최초의 반유대 폭동은 11세기에 발생하였고 1182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ref name="아슈케나짐" /> 이에 따라 독일에 주로 거주하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서서히 동유럽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15세기 경 [[폴란드]]에 받아들여지게 된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최대 규모의 [[디아스포라]]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ref name="아슈케나짐" /> 홀로코스트 직전까지도 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역이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서부 등지에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 근대 === 18세기부터 프랑스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계몽시대]]로 불리는 여러 자유 사상의 영향으로 유대인의 해방과 사회적 지위 상승이 이루어져 특별세금이나 게토 거주 등의 의무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아슈케나즈 유대인 인구가 독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편 이와 함께 독일 등 중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움직임 역시 증가하면서 중유럽의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중심으로 '궁극적인 귀환'을 추구하는 [[시오니즘]]이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유대인 대학살 === {{참고|홀로코스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많은 국가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발흥하여 [[파시즘]] 성향의 정부들이 잇따라 집권하였고, 그 중 대부분이 반유대주의를 내걸면서 유대인들은 명시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주도로 이루어진 [[홀로코스트]] 정책으로 인해 유럽 유대인 인구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전 유럽에 존재했던 약 8백만 유대인들 중 약 6백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 인구와 학살당한 인구 모두 절대다수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폴란드]]에 존재했던 330만 유대인 중 3백만 명(91%)의 [[폴란드]] 출신 유대인과 110만 명 중 90만명의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82%)들이 희생당했다. [[슬라브 민족]],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와 [[발칸반도]] 출신 유대인들은 50~90%가 학살당했다. 아슈케나즈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jsource/Holocaust/killedtable.html| 제목=유대인대학살로 죽은 유대인들 예측|출판사=Jewish Virtual Library| 확인날짜=2006-05-24}}</ref> 생존한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유럽 밖의 [[이스라엘]],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들 국가에 살고 있다. == 오늘날의 유대인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약 1천 8백만 명 정도였으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약 1천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약 14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약 580만 명, 이스라엘에 약 6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소련]]의 경우 홀로코스트의 탄압을 피해서 자국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을 [[만주]]까지 도피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에 따라 그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40만 명, [[라틴 아메리카]]는 약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되며,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이고, 그 다음이 영국이다. 그 외,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이 있다.<ref>{{보고서 인용 |저자= |url=http://www.jewishdatabank.org/Studies/downloadFile.cfm?FileID=3394 |제목=World Jewish Population |출판사=Berman Jewish Databank |쪽=6p |날짜=2015년 |확인날짜= |인용문= }}</ref>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재이주해 온다. == 유대인의 분파 ==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스파라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이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 [[아슈케나짐]] -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일부는 [[네덜란드]]와 [[독일]]에 살고 있지만 인근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아르헨티나]]에도 살고 있다. [[호세 페케르만]] 축구 감독이 [[아슈케나짐]] 출신 아르헨티나인이다. * [[스파라딤]]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았으나, 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에 소수만 남게 되고, 상당수는 [[프랑스]], [[터키]],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다. * [[미즈라힘]] -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지에도 퍼졌다. 이들은 스파라딤 유대인들과 종교 의례가 거의 같아 보통 스파라딤이라 부르기도 한다. * [[베타 이스라엘]] - [[에티오피아]]에 살던 흑인 유대인으로 '팔라샤(Falasha)'라고도 불린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 [[예멘]] 유대인 (Yemenite Jews) - '[[테이마님]](Teimanim)'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대인이었는데 지리적·사회적으로 다른 유대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특이한 예배식과 의례가 발전하였다. * 베네 이스라엘 -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 살았다. * 코친 유대인 - 이들도 인도에 살았다. * 로마니오트 (Romaniotes) -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발칸반도]]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전 세계에 6천 명 정도 있다.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스파라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과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스파라딤]]과 [[아슈케나짐]]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슈케나짐이 압도적이다.<ref name= '주역'/>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스파라딤계이다. 기타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지방|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 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 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 마사미]] 등은 [[아슈케나짐]]이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족|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칸국|하자르]] 멸망 후 [[동유럽]]·[[중앙유럽]]으로 흩어져 아슈케나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슈케나짐 중에는 백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ref name= '주역'>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박재선 지음, 모아드림, 1999년</ref> 2005년 유럽 유전체 학술지에 따르면 최근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ref name="European Journal of Human GeneticsI2005">2005년 조사. {{언어링크|en}} [http://www.nature.com/ejhg/journal/v13/n3/full/5201319a.html], Y chromosome evidence for a founder effect in Ashkenazi Jews</ref> === 중국의 유대인 ===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 유대인]](開封猶太人) 또는 '''이츠러예'''(一赐乐业, 일사락업)인으로 불렸다. '이츠러예'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는데,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 내 통혼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히브리 민족]] * [[이스라엘 민족]] * [[사마리아인]] * [[유대교]]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Curlie|Society/Ethnicity/Jewish}} {{셈족}} {{전거 통제}} [[분류:유대인| ]] [[분류:러시아의 민족]] [[분류:아시아의 민족]] [[분류:유럽의 민족]] [[분류:이스라엘의 민족]] [[분류:중국의 민족]] [[분류:미국의 민족]] [[분류:캐나다의 민족]] [[분류:프랑스의 민족]] [[분류:영국의 민족]] [[분류:독일의 민족]] [[분류:민족종교집단]] [[분류:종교적 정체성]]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시스템 소프트웨어'''(system software, {{문화어|체계소프트웨어}})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컴퓨터 하드웨어]]를 동작,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ref>{{웹 인용 |url=http://searchsoa.techtarget.com/sDefinition/0,,sid26_gci213024,00.html |제목=What is software? - Definition from WhatIs.com |publisher=Searchsoa.techtarget.com |date= |accessdate=2012-06-24 |archive-date=2010-10-27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1027233533/http://searchsoa.techtarget.com/sDefinition/0,,sid26_gci213024,00.html |url-status= }}</ref> [[컴퓨터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대한 일반 용어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응용 소프트웨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랜덤 액세스 메모리|메모리]]에서 [[하드 디스크]]로 [[데이터]]를 전송한다든지 문자열을 [[디스플레이 장치]]로 출력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한다. 시스템 소프트웨어에는 [[로더 (컴퓨팅)|로더]], [[운영 체제]], [[장치 드라이버]], [[프로그래밍 도구]], [[컴파일러]], [[어셈블러]], [[링커 (컴퓨팅)|링커]], [[유틸리티 소프트웨어|유틸리티]] 등이 포함한다. [[라이브러리|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C (프로그래밍 언어)|C 런타임 라이브러리]]는 보통 시스템의 일부로 여기지만, [[오픈GL]]이나 [[데이터베이스]] 라이브러리의 경우는 명확하지 않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집적 회로]]의 [[비휘발성 기억 장치|비휘발성 기억 장소]]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보통 [[펌웨어]]로 부른다. ==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분류와 예 == * [[부팅|부트 로더]] * [[운영 체제]] * [[장치 드라이버]] * [[셸]] * [[로더 (컴퓨팅)|로더]] * [[라이브러리]] ** [[C 표준 라이브러리]] 등 * 부호 생성 도구 ** [[컴파일러]]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소프트웨어 공학]] * [[상용 소프트웨어]] * [[응용 소프트웨어]] == 참조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http://www.webopedia.com/TERM/s/systems_software.html Definition of System software @ Webopedia] * [https://web.archive.org/web/20081117201609/http://sourceforge.net/softwaremap/trove_list.php?form_cat=136 System software @ sourceforge.net] {{전거 통제}} [[분류:시스템 소프트웨어| ]] [[분류:전산장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알찬 글}} {{과학자 정보 | 이름 = 앙투안 라부아지에 | 원어이름 = Antoine Lavoisier | 본명 = Antoine-Laurent de Lavoisier | 그림 = Antoine lavoisier color.jpg | 그림 크기 = | 그림 설명 = [[쥘리앵레오폴 부아이]]가 제작한 라부아지에의 [[캐리커처]](1847년) | 태어난 날 = {{출생일|1743|8|26}} | 태어난 곳 = [[프랑스 왕국]] [[파리 (프랑스)|파리]] | 영문명 = | 죽은 날 = {{사망일과 나이|1794|5|8|1743|8|26}} | 죽은 곳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프랑스)|파리]] [[콩코르드 광장]] | 거주지 = | 국적 = [[프랑스]] | 분야 = [[화학]] | 소속 = 세금 징수 조합<br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 출신 대학 = [[파리 대학교]] | 지도교수 = | 지도학생 = | 주요 업적 = [[플로지스톤설]] 부정<br />[[질량 보존의 법칙]] 확립<br />[[원소 (화학)|원소]]와 [[화합물]] 구분<br />[[산소]] 명명 | 영향 = [[기욤프랑수아 루엘]]<br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 | 수상 = | 종교 = | 서명 = Antoine Lavoisier Signature.svg | 참고사항 = }} {{포털|화학}}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llang|fr|Antoine-Laurent de Lavoisier}}, {{IPA-fr|ɑ̃twan lɔʁɑ̃ də lavwazje}}, {{문화어|앙뜨왕 라부아지에}}, [[1743년]] [[8월 26일]]~[[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공직자이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원소 (화학)|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두 명이기도 하다.<ref name="2007britannica">ed. by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Lavoisier",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Vol.22, 15th editio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pp.841~842.</ref> 그러나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면서 심각한 가렴주구와 폭정으로 [[프랑스]]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혐의를 받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오르며 생을 마감했다. == 초년 (1743~1789) == === 유년 및 청년기 ===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 (프랑스)|파리]] [[고등법원 (프랑스)|고등법원]]의 법률 고문으로 일하던 장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인 에밀리 라부아지에({{small|[[혼인 성씨|혼전 성씨]]:}} 푕크티스·{{lang|en|Punctis}}) 사이의 첫째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리 라부아지에는 딸을 한 명 더 낳은 뒤 1749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ref>Poirier, J. P.,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trans. by Balinski, R.,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6, p.4~5.</ref> 그의 아버지의 바람으로, 1022년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lang|fr|Collége Mazarin}})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그들에 기대에 부응하여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가졌다.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ref>''Ibid.'', p.6.</ref> 라부아지에는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하였고,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ref>''Ibid.'', p.7.</ref> 라부아지에는 [[파리 식물원|왕의 정원]]<ref>오늘날의 [[파리 식물원]]({{llang|fr|Jardin des Plantes}})</ref>에서 베르나르 드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ref>''Ibid.'', pp.8~10.</ref>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ref name="2007britannica"/> === 과학적 활동 === ==== 초기 연구 ==== 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ref>''Ibid.'', p.12.</ref>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ref>''Ibid.'', pp.13~16.</ref> 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시|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ref>''Ibid.'', p.20.</ref>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ref>''Ibid.'', p.28.</ref> ==== 물에서 흙으로의 변화 ====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ref>''Ibid.'', pp.33~34.</ref>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ref>''Ibid.'', p.32~33.</ref> ==== 연소 연구 ==== 1772년 11월 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 (기체)|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ref>''Ibid.'', p.66.</ref>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 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시|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ref>''Ibid.'', pp.74~76.</ref>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f>''Ibid.'', pp.77~78.</ref>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ref>유지영, 〈프리스틀리와 라봐지에〉, 《한국과학사학회지》, 서울: 한국과학사학회, Vol.12 No.1, 1990, 159쪽.</ref>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 (기체)|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하였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79~80.</ref> 이 실험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이후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ref>Donovan, A.,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137.</ref> === 세금 징수원 === [[파일:Anne Robert Jacques Turgot.jpg|섬네일|오른쪽|220px|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23~24.</ref>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ref>''Ibid.'', p.25.</ref>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딸인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마리안 피에레트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안은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라부아지에는 많은 돈을 벌어 최고의 과학 장비를 사들일 수 있었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ref name="2007britannica"/>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ref>''Ibid.'', p.85.</ref>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ref>''Ibid.'', p.87.</ref>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시|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ref>''Ibid.'', p.88.</ref> == 활동기 (1775~1789) == [[파일:David -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jpg|섬네일|오른쪽|220px|〈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자크루이 다비드]], 1788.]] === 과학적 활동 === ==== 새로운 연소 이론 ==== ===== 산소 연구 ===== 1775년 5월 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 (기체)|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칼 빌헬름 셸레|셸레]]와 [[조지프 프리스틀리|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 (화학)|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ref>''Ibid.'', p.106.</ref>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ref>''Ibid.'', pp.107~108.</ref> ===== 물의 조성 =====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ref>''Ibid.'', pp.143~144.</ref>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화학 원소|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ref>''Ibid.'', pp.150~151.</ref>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된다. ===== 새로운 이론의 제시 =====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ref>''Ibid.'', pp.176~177.</ref>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ref>''Ibid.'', p.178.</ref>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ref>''Ibid.'', pp.181~182.</ref>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ref name="1911britannica"/>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 (기체)|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 (화학)|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192~193.</ref> ===== 평가 =====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하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반응에 적용되었으며 [[호흡]]·[[발효]]·[[부패]]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도입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수많은 새로운 [[산 (화학)|산]]·[[염기]]·[[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화학 원소|원소]]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화학 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ref>조정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基礎科學硏究誌》, Vol.15,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1996, p.78.</ref> ==== 화학적 명명법 ====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ref>Poirier, J. P., ''op. cit.'', pp.182~183.</ref>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ref>''Ibid.'', p.184.</ref>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ref name="1911britannica">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LAVOISIER, ANTOINE LAURENT"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Vol.16, 11th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1911, pp.295~296</ref>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ref>''Ibid.'', p.190.</ref> ==== 열 연구 ==== [[파일:Ice-calorimeter.jpg|오른쪽|섬네일|220px|1789년 출판된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에 실린 얼음 열량계의 그림]]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의 협력하에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어떤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출입하는 열은 상태 변화를 역으로 진행할 경우 열 출입 역시 반대로 되고 그 양은 같다는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제시하였다.<ref name="P137">''Ibid.'', p.137.</ref> 1783년에 라플라스와 함께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라부아지에는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물질 입자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체]]를 [[온도]]와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액체]] 또는 [[고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ref>Donovan, A., ''op. cit.'', p.133.</ref> ==== 생물학 연구 ====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서도 연구하였고, 이에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5년 10월 13일의 실험을 통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ref>Poirier, J. P., ''op. cit.'', p.103~104.</ref> 그는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熱)에 관한 논문인 〈열에 관한 보고서〉(''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생체 내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생명체가 들이마신 [[산소]]는 일종의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고, 발생한 열은 [[혈액]]을 통해서 몸 전체로 공급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P137"/> 실제로 체내에서 일어나는 [[소화 (생물학)|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라부아지에는 반응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파악하였다. 반응은 [[허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물질대사|물질 대사]]를 통해서 생명체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ref>''Ibid.'', p.139.</ref> === 공직에서의 활동 === ==== 튀르고와 네케르 ==== [[파일:Jacques Necker.jpg|섬네일|오른쪽|220px|자크 네케르]]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ref>''Ibid.'', p.92.</ref>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ref>''Ibid.'', pp.94~96.</ref>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가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튀르고]]가 해임하고<ref>''Ibid.'', p.100.</ref>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ref>''Ibid.'', pp.117~119.</ref>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ref>''Ibid.'', pp.121~122.</ref>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ref>''Ibid.'', p.127.</ref>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ref>''Ibid.'', p.134.</ref> ==== 고위공직자 생활 ====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ref>''Ibid.'', pp.154~159.</ref>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ref>''Ibid.'', pp.160~161.</ref>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시|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ref>''Ibid.'', pp.171~172.</ref>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자크 네케르|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Gazette de France'')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ref>''Ibid.'', pp.199~200.</ref>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ref>''Ibid.'', pp.201~205.</ref>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시|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llang|fr|vingtième}})<ref>1/20세(소득의 5%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것)</ref>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llang|fr|taille}})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ref>''Ibid.'', pp.207~208.</ref>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ref>''Ibid.'', p.209.</ref>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ref>''Ibid.'', pp.210~213.</ref> ==== 혁명 직전 ==== 1788년 4월 16일 라부아지에는 할인 은행({{llang|fr|Caisse d'Escompte}})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1776년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튀르고]]가 설립한 이 은행은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배타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지폐를 발행하는 것 역시 주 업무였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하어 있어서 자크 네케르가 복직한 8월 말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케르는 할인 은행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사들은 이를 승낙하였다.<ref>''Ibid.'', pp.220~223.</ref> 라부아지에도 또한, 재정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을 국영화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의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했지만,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여전히 국가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하여 갔으며, 의회는 은행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영화에 비협조적이었고, 이와 함께 프랑스의 경제 역시 심하게 악화하여 갔다.<ref>''Ibid.'', p.253~256.</ref> 라부아지에는 이 기간에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788년 여름, 그는 [[자크 네케르|네케르]]에게 보내는 논문을 통해서 [[삼부회]]를 개최할 때 그 대표를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역에서부터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각의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ref>Donovan, A., ''op. cit.'', p.249.</ref> == 혁명 정국 (1789~1794) == === 활동 === 1789년 7월에 라부아지에의 경력은 최고에 달했다. 그는 학문과 공직 양쪽 모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활동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다.<ref>''Ibid.'', p.273.</ref>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당시 라부아지에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8월 6일에 그는 [[코뮌]]의 대표자로서 화난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생루이]]에 있는 화약고를 찾기도 하였다.<ref>''Ibid.'', p.270.</ref> 그런데도 프랑스 혁명은 점점 진행되어 갔다. 1790년 5월 8일 국회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하였다. 비록 국제적인 협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320.</ref> 라부아지에는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일의 진행을 보고하는 일 역시 그가 맡았다.<ref>''Ibid.'', p.322.</ref> 1793년 1월에는 질량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ref>''Ibid.'', p.323.</ref> 그 밖에도 라부아지에는 많이 활약하여 1791년 12월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ref>Donovan, A., ''op. cit.'', p.280.</ref> 1792년 1월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에서 조직한 기술 및 교역 고문 위원회에 참석하였으며,<ref>Poirier, J. P., ''op. cit.'', p.316.</ref>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의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ref>''Ibid.'', pp.324~328.</ref> 한편, 1791년 3월 20일 헌법제정국민의회는 라부아지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봉직해온 세금 징수 조합을 해체하였으며, 그 대신 국가에서 관장하는 징세 기관이 도입되었다. 라부아지에는 기관의 장으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선정되지 못하였다.<ref>''Ibid.'', p.272.</ref> === 생물학 연구 === [[파일:Lavoisier-humanexp2.PNG|오른쪽|섬네일|220px|호흡에 관한 실험 장면. [[마리안 폴즈|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 그림.]] 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ref>''Ibid.'', pp.300~301.</ref> 또한, 그는 [[땀|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여, 열이 호흡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ref>''Ibid.'', p.305.</ref>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ref>''Ibid.'', p.310.</ref> === 사형 === 라부아지에는 혁명 중에도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792년 8월 15일 그는 화약국장에서 물러나면서 병기창에 있는 자신의 집과 연구소도 옮겨야 했다. 게다가 1793년 8월 8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ref>Donovan, A., ''op. cit.'', p.291~292.</ref> 1793년 9월, 세금 징수 조합의 청산이 빠르게 진행되기를 원했던 [[국민 공회]]는 전직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인이었던 앙투안 뒤팽에게 전직 세금 징수원들의 처리를 맡겼다.<ref>''Ibid.'', p.296.</ref> 1793년 11월 24일, 국민 공회의 의원인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체포를 발의하였고, 이는 국민 공회를 통과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351.</ref> 라부아지에는 11월 28일 그의 장인인 자크 폴즈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ref>''Ibid.'', p.353.</ref> 1794년 5월 2일, 뒤팽이 제안한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처분안이 혁명법원으로 넘겨졌으며, 라부아지에는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월 5일 뒤팽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결국 5월 8일 기소된 32명 중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로 결론지어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자크 폴즈와 함께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다.<ref>Donovan, A., ''op. cit.'', p.302.</ref> {{인용문2|이 머리를 베어 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충분하지만, 프랑스에서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br />({{lang|fr|“Cela leur a pris seulement un instant pour lui couper la tête, mais la France pourrait ne pas en produire une autre pareille en un siècle.)}}|[[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의 논평}} == 사후 == === 마리안 라부아지에 === {{본문|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의 [[사형]] 직후, 집행관이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의 모든 책, 기자재 등의 목록을 작성해 갔고, 5월 30일 이를 몰수하였다. 거의 모든 라부아지에의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라부아지에의 부인인 마리안 라부아지에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녀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ref>Poirier, J. P., ''op. cit.'', pp.388~390.</ref> 결국 6월 14일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으나 남편과는 달리 [[사형]]은 면하고 8월 17일에 풀려났다.<ref>''Ibid.'', pp.391~393.</ref> 12월 10일, 전직 세금 징수원의 [[사형]] 이후 매우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의 이야기가 담긴 ''Le cri dis familles''가 출판되자 [[사형]]을 주도한 [[앙투안 뒤팽]]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95년 마리안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몇몇 유족이 뒤팽에게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그 결과 1796년 4월 그녀는 공식적으로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ref>''Ibid.'', pp.395~399.</ref> 1805년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하였고,<ref>''Ibid.'', p.407.</ref> 1836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ref>''Ibid.'', p.411.</ref> === 재평가 ===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되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1795년 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라부아지에에 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관한 업적을 기술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796년 8월 2일 두 번째 장례식이 치러졌고 이는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3,000명이 장례식에 참여하였으며, 라부아지에에 관한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의 사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ref>''Ibid.'', pp.399~401.</ref> === 듀폰 ===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 미국에 이민하여 [[듀폰 (1802–2017)|듀폰]]사를 설립했다. == 같이 보기 == * [[칼 빌헬름 셸레]] * [[자크루이 다비드]] * [[산소]] * [[플로지스톤설]] == 각주 == {{각주|2}} == 참고 문헌 == * 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년 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11th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1911. * Donovan, A.,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ISBN|0-521-56218-X}}. * ed. by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itio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ISBN|978-1-59339-292-5}}. * Poirier, J. P.,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trans. by Balinski, R.,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6, {{ISBN|0-8122-3365-4}}. * 유지영, 〈프리스틀리와 라봐지에〉, 《한국과학사학회지》, 서울: 한국과학사학회, Vol.12 No.1, 1990. * 조정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基礎科學硏究誌》, Vol.15,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1996. == 외부 링크 == * {{위키인용집-줄}} * {{위키공용분류-줄}} * [https://web.archive.org/web/20120707005637/http://www.philiplarson.com/e1.shtml Antoine Laurent Lavoisier] * [http://moro.imss.fi.it/lavoisier/ A virtual museum of Antoine Lavoisier] * [http://www.chemheritage.org/classroom/chemach/forerunners/lavoisier.html Antoine Lavoisier] - Chemical Achievers profile. * [http://antoine.frostburg.edu/chem/senese/101/matter/faq/who-defined-compounds.shtml Who was the first to classify materials as "compounds"?] - Fred Senese * {{언어링크|fr}} [http://www.lavoisier.cnrs.fr The Complete Works of Lavoisier] edited by Pietro Corsi (Oxford University) and Patrice Bret (CNRS) * [http://www.bbc.co.uk/radio4/history/inourtime/inourtime_20071115.shtml Radio 4 program on the discovery of oxygen] by the [[BBC]] {{전거 통제}} {{기본정렬:라부아지에, 앙투안}} [[분류:앙투안 라부아지에| ]] [[분류:1743년 출생]] [[분류:1794년 사망]] [[분류:18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프랑스의 화학자]] [[분류:프랑스의 생물학자]] [[분류:프랑스의 저술가]] [[분류:화학 원소를 발견한 사람]] [[분류:산업혁명 관련자]] [[분류:파리 출신]]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참수된 사람]] [[분류: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
{{위키낱말사전|언론}} {{보호-훼손|크기=작게}} '''언론'''은 다음을 가리킨다. * [[저널리즘|언론]](言論): 매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 행위. ** [[언론의 자유]] * [[뉴스 미디어|언론기관]] / 언론사: 뉴스를 전달하는 대중 매체의 일종. * [[언론윤리헌장]] == 같이 보기 == * {{in title|언론}} {{동음이의}}
다음은 나라별 '''언론사'''(言論社) 목록이다. * [[신문 목록]] * [[나라별 텔레비전 방송국 목록|텔레비전 방송국 목록]] * [[라디오 방송국 목록]] {{색인 모음 문서}} {{Short pages monitor}}<!-- 이 긴 주석은 문서가 [[특수:짧은문서]]에 표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가되었습니다. 틀:Long comment를 통해 자동으로 생성되었습니다. {{Short pages monitor}} 틀과 이 주석은 한 묶음으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이 주석을 제거하지 않은 채 모니터링 틀({{Short pages monitor}})을 제거하지 말아 주십시오.--> [[분류:목록의 목록]]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문자 정보 |색=음소 |이름=그리스 문자 |원래이름=Ελληνικό αλφάβητο |유형=음소 문자 |표기 언어=[[그리스어]] |시기=[[기원전 800년]] ~ 현재 |계통1=[[원시 시나이 문자]] |계통2=[[원시 가나안 문자]] |계통3=[[페니키아 문자]] |자매=[[로마자]], [[콥트 문자]], [[고트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조지아 문자]], [[키릴 문자]] |그림=Greekalphabet.svg }} {{음소 문자}} '''그리스 문자'''({{llang|el|Ελληνικό αλφάβητο|엘리니코 알파비토}}) 또는 '''희랍 문자'''(希臘文字)는 [[그리스어]]를 쓰는 데 사용되는 [[자모 문자]]이다. 현대 서유럽과 동유럽의 거의 대부분 국가 문자에 영향을 끼친 문자이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 있는 [[자모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로, 자모 문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알파벳(alphabet)’은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α|알파]]와 [[β|베타]]에서 왔다. [[기원전 9세기]]경 발달하여 현재까지 그리스어 표기에 사용된다. 그 밖에 [[그리스 숫자]]를 비롯, [[원주율]] 등의 여러 수학 기호, [[물리학]]의 여러 [[입자물리학|입자]] 이름, [[항성]]의 이름 등 다양한 용도로도 쓰인다. :그리스 문자 스물네 글자의 대소문자는 다음과 같다. {{lang|el|[[Α]] α}}, {{lang|el|[[Β]] β}}, {{lang|el|[[Γ]] γ}}, {{lang|el|[[Δ]] δ}}, {{lang|el|[[Ε]] ε}}, {{lang|el|[[Ζ]] ζ}}, {{lang|el|[[Η]] η}}, {{lang|el|[[Θ]] θ}}, {{lang|el|[[Ι]] ι}}, {{lang|el|[[Κ]] κ}}, {{lang|el|[[Λ]] λ}}, {{lang|el|[[Μ]] μ}}, {{lang|el|[[Ν]] ν}}, {{lang|el|[[Ξ]] ξ}}, {{lang|el|[[Ο]] ο}}, {{lang|el|[[Π]] π}}, {{lang|el|[[Ρ]] ρ}}, {{lang|el|[[Σ]] σ}}/ς, {{lang|el|[[Τ]] τ}}, {{lang|el|[[Υ]] υ}}, {{lang|el|[[Φ]] φ}}, {{lang|el|[[Χ]] χ}}, {{lang|el|[[Ψ]] ψ}}, {{lang|el|[[Ω]] ω}}.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마 문자]]와 [[키릴 문자|키릴 문자]]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익히 알려진 그리스 문자 형태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사용되던 형태로 아테네와 그 연맹 도시들이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이오니아 지방, 특히 아티카 변형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로마 문자]]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확히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을 받아들인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온 것이다. [[키릴 문자|키릴 문자]]는 사실상 포교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스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토착 문자를 혼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종류 == 그리스 문자와 그 기원은 아래와 같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text-align:center" |- ! rowspan="2" | 문자 ! colspan="3" | 이름 ! colspan="2" | 발음 ! rowspan="2" | 해당하는 <br />[[페니키아 문자|페니키아 <br />문자]] ! colspan="2" | [[로마자 표기법]] |- ! 고대<br/>그리스어<br/>(한글) ! 현대<br/>그리스어<br/>(한글) ! 고철자법<br/>영어<br/>(한글) ! 고대 ! 현대 ! 고대 ! 현대 |- | [[Α|Α α]] | {{lang|grc|ἄλφα}}<br/>(알파) | {{lang|el|άλφα}}<br/>(알파) | Alpha<br/>(알파) | {{IPA|[a] [aː]}} | {{IPA|[a]}} | [[파일:Phoenician aleph.svg|20px|Aleph]] [[알레프]] | a | a |- | [[Β|Β β]] | {{lang|grc|βῆτα}}<br/>(베타) | {{lang|el|βήτα}}<br/>(비타) | Bet(a)<br/>(벳/베트/비타) | {{IPA|[b]}} | {{IPA|[v]}} | [[파일:Phoenician beth.svg|20px|Beth]] [[베트]] | b | b, v |- | [[Γ|Γ γ]] | {{lang|grc|γάμμα}}<br/>(감마) | {{lang|el|γάμμα}}<br/>(감마) | Gamma (감마) | {{IPA|[ɡ]}} | {{IPA|[ʝ]}}<small>({{IPA|[e̞]}}나 {{IPA|[i]}} 앞)</small><br />{{IPA|[ɣ]}}<small>(기타)</small> | [[파일:Phoenician gimel.svg|20px|Gimel]] [[기멜]] | g | gh, g, j |- | [[Δ|Δ δ]] | {{lang|grc|δέλτα}}<br/>(델타) | {{lang|el|δέλτα}}<br/>(델타) | Delta<br/>(델타) | {{IPA|[d]}} | {{IPA|[ð]}} | [[파일:Phoenician daleth.svg|20px|Daleth]] [[달레트]] | d | d, dh |- | [[Ε|Ε ε]] | {{lang|grc|ἒψιλόν}}<br/>(엡실론) | {{lang|el|έψιλον}}<br/>(엡실론) | Epsilon<br/>(미국 가끔)엡사일론 | {{IPA|[e]}} | {{IPA|[e̞]}} | [[파일:Phoenician he.svg|20px|He]] [[헤(페니키아 문자)|헤]] | e | e |- | [[Ζ|Ζ ζ]] | {{lang|grc|ζῆτα}}<br/>(제타) | {{lang|el|ζήτα}}<br/>(지타) | Zet(a)<br/>(젯/제트/지타) | {{IPA|[zd]}},<br />후에 {{IPA|[zː]}} | {{IPA|[z]}} | [[파일:Phoenician zayin.svg|20px|Zayin]] [[자인(페니키아 문자)|자인]] | z | z |- | [[Η|Η η]] | {{lang|grc|ἦτα}}<br/>(에타) | {{lang|el|ήτα}}<br/>(이타) | Eta<br/>(이타) | {{IPA|[ɛː]}} | {{IPA|[i]}} | [[파일:Phoenician heth.svg|20px|Heth]] [[헤트]] | e, ē | i |- | [[Θ|Θ θ]] | {{lang|grc|θῆτα}}<br/>(테타) | {{lang|el|θήτα}}<br/>(씨타) | Theta<br/>(씨타) | {{IPA|[tʰ]}} | {{IPA|[θ]}} | [[파일:Phoenician teth.svg|20px|Teth]] [[테트(페니키아 문자)|테트]] | th | th |- | [[Ι|Ι ι]] | {{lang|grc|ἰῶτα}}<br/>(여타) | {{lang|el|ιώτα}}<br/>(요타) | Iota<br/>(미국 가끔)아이오타 | {{IPA|[i] [iː]}} | {{IPA|[i]}}, {{IPA|[j]}} | [[파일:Phoenician yodh.svg|20px|Yodh]] [[요드 (문자)|요드]] | i | i |- | [[Κ|Κ κ]] | {{lang|grc|κάππα}}<br/>(카파) | {{lang|el|κάππα}}<br/>(카파) | Kappa<br/>(카파) | {{IPA|[k]}} | {{IPA|[c]}}<small>({{IPA|[e̞]}}나 {{IPA|[i]}} 앞)</small><br />{{IPA|[k]}}<small>(기타)</small> | [[파일:Phoenician kaph.svg|20px|Kaph]] [[카프 (문자)|카프]] | k | k |- | [[Λ|Λ λ]] | {{lang|grc|λάμδα}}<br/>(람다) | {{lang|el|λάμδα}}<br/>(람다) | Lambda<br/>(람다) | {{IPA|[l]}} | {{IPA|[l]}} | [[파일:Phoenician lamedh.svg|20px|Lamedh]] [[라메드]] | l | l |- | [[Μ|Μ μ]] | {{lang|grc|μῦ}}<br/>(므프/무/뮈) | {{lang|el|μι}}<br/>(미) | Mu<br/>(뮤) | {{IPA|[m]}} | {{IPA|[m]}} | [[파일:Phoenician mem.svg|20px|Mem]] [[멤]] | m | m |- | [[Ν|Ν ν]] | {{lang|grc|νῦ}}<br/>(누…) | {{lang|el|νι}}<br/>(니) | Nu<br/>(뉴) | {{IPA|[n]}} | {{IPA|[n]}} | [[파일:Phoenician nun.svg|20px|Nun]] [[눈(페니키아 문자)|눈]] | n | n |- | [[Ξ|Ξ ξ]] | {{lang|grc|ξῖ}}<br/>(크시) | {{lang|el|ξι}}<br/>(크시) | Xi(s/z/ks/gz)aɪ<br/>(자이) | {{IPA|[ks]}} | {{IPA|[ks]}} | [[파일:Phoenician samekh.svg|20px|Samekh]] [[사메크(페니키아 문자)|사메크]] | x | x, ks |- | [[Ο|Ο ο]] | {{lang|grc|ὄμικρόν}}<br/>(오미크론) | {{lang|el|όμικρον}}<br/>(오미크론) | Omicron<br/>(미국 가끔)아마크란 | {{IPA|[o]}} | {{IPA|[o̞]}} | [[파일:Phoenician ayin.svg|20px|Ayin]] [[아인(페니키아 문자)|아인]] | o | o |- | [[Π|Π π]] | {{lang|grc|πῖ}}<br/>(피) | {{lang|el|πι}}<br />(피) | Pi<br/>(파이) | {{IPA|[p]}} | {{IPA|[p]}} | [[파일:Phoenician pe.svg|20px|Pe]] [[페]] | p | p |- | [[Ρ|Ρ ρ]] | {{lang|grc|ῥῶ}}<br/>(러) | {{lang|el|ρω}}<br/>(로) | Rho<br/>(로) | {{IPA|[r]}}, {{IPA|[r̥]}} | {{IPA|[ɾ]}} | [[파일:Phoenician res.svg|20px|Res]] [[레스]] | r({{lang|grc|ῥ}}: rh) | r |- | [[Σ|Σ σ <br /> ς]] | {{lang|grc|σῖγμα}}<br/>(싱마) | {{lang|el|σίγμα}}<br/>(시그마) | Sigma<br/>(시그마) | {{IPA|[s]}} | {{IPA|[s]}} | [[파일:Phoenician sin.svg|20px|Sin]] [[신 (문자)|신]] | s | s |- | [[Τ|Τ τ]] | {{lang|grc|ταῦ}}<br/>(타우) | {{lang|el|ταυ}}<br/>(타우/타프) | Tau<br/>(타우) | {{IPA|[t]}} | {{IPA|[t]}} | [[파일:Phoenician taw.svg|20px|Taw]] [[타우]] | t | t |- | [[Υ|Υ υ]] | {{lang|grc|ὒψιλόν}}<br/>(웁실론) | {{lang|el|ύψιλον}}<br/>(입실론) | Upsilon<br/>(미국 가끔)업살란 | {{IPA|[u] [uː]}},<br/>후에 {{IPA|[y] [yː]}} | {{IPA|[i]}} | [[파일:Phoenician waw.svg|20px|Waw]] [[와우 (문자)|와우]] | u, y<small>(자음 사이)</small> | y, v, f |- | [[Φ|Φ φ]] | {{lang|grc|φῖ}}<br/>(피) | {{lang|el|φι}}<br/>(피) | Phi<br/>(파이) | {{IPA|[pʰ]}} | {{IPA|[f]}} | [[ཕ]]파 | ph | f |- | [[Χ|Χ χ]] | {{lang|grc|χῖ}}<br/>(키) | {{lang|el|χι}}<br/>(히) | Chi<br/>(카이) | {{IPA|[kʰ]}} | {{IPA|[ç]}}<small>({{IPA|[e̞]}}나 {{IPA|[i]}} 앞)</small><br />{{IPA|[x]}}<small>(기타)</small> | [[ཁ]]카 | ch | ch, kh |- | [[Ψ|Ψ ψ]] | {{lang|grc|ψῖ}}<br/>(프시) | {{lang|el|ψι}}<br/>(프시) | Psi<br/>싸이(영어 Psy같이 발음) | {{IPA|[ps]}} | {{IPA|[ps]}} | [[파일:Phoenician heth.svg|20px|Heth]] [[헤트(페니키아문자)|헤트]] | ps | ps |- | [[Ω|Ω ω]] | {{lang|grc|ὦμέγα}}<br/>(어메가) | {{lang|el|ωμέγα}}<br/>(오메가) | Omega<br/>(오미가) | {{IPA|[ɔː]}} | {{IPA|[o̞]}} | [[파일:Phoenician ayin.svg|20px|Ayin]] [[아인]] | o, ō | o |} === 옛 문자 === 아래 문자는 표준 그리스 문자는 아니지만, 예전, 혹은 일부 방언에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와우, 코파, 삼피는 [[그리스 숫자]]에서도 사용된다. {{-}} {{그리스어의 역사}} {| class="wiki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text-align:center" ! 글자 ! 이름 ! 발음 ! 해당하는 <br />[[페니키아 문자|페니키아 <br />문자]] ! [[로마자 표기법]] |- | [[Ϝ|Ϝ ϝ/Ͷ ͷ]] | 와우(Digamma) | {{IPA|[w]}} | [[파일:Phoenician waw.svg|20px|Waw]] [[와우 (문자)|와우]] | w |- | [[Ϛ|Ϛ ϛ]] | 스티그마(Stigma) | {{IPA|[st]}} | | st |- | [[Ͱ|Ͱ ͱ]] | 헤타(Heta) | {{IPA|[h]}} | | h |- | [[Ϻ|Ϻ ϻ]] | 산(San) | {{IPA|[s]}} | [[파일:Phoenician sade.svg|20px|Sade]] [[차데]] | s |- | [[Ϙ|Ϙ ϙ/Ϟ ϟ]] | 코파(Koppa) | {{IPA|[k]}} | [[파일:Phoenician qoph.svg|20px|Qoph]] [[코프]] | q |- | [[Ͳ|Ͳ ͳ/Ϡ ϡ]] | 삼피(Sampi) | {{IPA|[ts]}} | 기원 불명 | ss |- | [[Ϸ|Ϸ ϸ]] | 쇼(Sho) | {{IPA|[ʃ]}} | | š |} == 같이 보기 == * [[팔라메데스]] == 외부 링크 == * [http://unicode.org/charts/PDF/U0370.pdf U0370.pdf]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onattic.html#digamma 와우 (영어) Ϝ ϝ]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other_nonattic.html#pamphyliandigamma 와우 (영어) Ͷ ͷ]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other_ligatures.html#stigma 스티그마 (영어) Ϛ ϛ]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unicode_aitch.html#tackheta 헤타 (영어) Ͱ ͱ]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onattic.html#san 산 (영어) Ϻ ϻ]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onattic.html#koppa 코피 (영어) Ϙ ϙ]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umerals.html#koppa 코피 (영어) Ϟ ϟ]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other_nonattic.html#sampi 일타 삼피 (영어) Ͳ ͳ]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umerals.html#sampi 일타 삼피 (영어) Ϡ ϡ] {{언어링크|en}} * [http://www.opoudjis.net/unicode/nonattic.html#sho 쇼 (영어) Ϸ ϸ] {{언어링크|en}} {{고대 그리스}} {{전거 통제}} [[분류:그리스 문자|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 넘어옴|시지프스|드라마|시지프스 : the myth}} [[파일:Punishment sisyph.jpg|섬네일]] '''시시포스'''({{llang|grc|Σίσυφος}}{{IPA|['sɪsɪfəs]}}, {{llang|la|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시지푸스''', '''시지프스''', '''시지프''' 등으로 표기하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시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 평가 ==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졌을 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부조리라고 평가했다.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시지프 신화]] * [[글라우코스]] * [[아우톨리코스]] * [[오딧세우스]] * [[벨레로폰]] * [[헬렌]] {{전거 통제}} {{토막글|그리스 신화}} [[분류:그리스 신화의 영웅]] [[분류:코린토스의 왕]] [[분류:트릭스터]] [[분류:아이올로스 가]] [[분류:코린토스 신화]]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논리학]]에서 '''러셀의 역설'''(-逆說, {{llang|en|Russell's paradox}})은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에 발견한 [[역설]]이다.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과 [[게오르크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 따위의 논리 체계가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정의하고 이 집합이 자기 자신의 원소인지 여부를 물으면,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정하더라도 모순이 유도된다. [[유형 이론]]과 [[공리적 집합론]]이 도입되면서 해결되었다. == 정의 == [[파일:Russell's paradox.svg|thumb]] '''러셀의 역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전 대부분의 논리 체계가 함의한 모순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소박한 집합론 === 칸토어의 집합론이나 [[주세페 페아노]]의 집합론을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집합을 생각하자. :<math>y=\{x\colon x\not\in x\}</math> 즉, 임의의 <math>x</math>에 대하여, :<math>x\in y\iff x\not\in x</math> 이다. 특히, <math>x=y</math>인 경우 :<math>y\in y\iff y\not\in y</math>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math>y\in y</math>라고 가정하면, <math>y</math>의 정의에 따라 <math>y\not\in y</math>이므로 가정에 모순되며, 반대로 만약 <math>y\not\in y</math>라고 가정하여도 <math>y</math>의 정의에 따라 <math>y\in y</math>이므로 가정과 모순이다. ===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 === 프레게가 저술한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를 가정하자. 이 논리 체계에서 [[논리식]]의 변수는 논리식으로 직접 [[치환 실례|치환]]될 수 없으나, 논리식의 '''값렬'''(-列, {{llang|en|course-of-values, value-range}})로는 치환될 수 있으므로,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 구체적으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math>\phi</math>의 값렬 <math>\operatorname{cov}\phi</math>는 다음과 같은 공리로 정의된다. :<math>\forall\phi\forall\psi((\operatorname{cov}\phi=\operatorname{cov}\psi)\iff\forall x(\phi[x]\iff\psi[x]))</math>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에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math>\phi</math>, <math>\psi</math>에 대하여, <math>\phi[\psi]</math>는 논리식이 아니지만, <math>\phi[\operatorname{cov}\psi]</math>는 새로운 논리식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논리식 <math>\psi</math>를 생각하자. :<math>\psi=\lnot\forall\phi((\operatorname{cov}\phi=x)\implies\phi[x])</math> 이는 1개의 자유 변수 <math>x</math>를 갖는 논리식이다. 그러면 :<math>\lnot\psi[\operatorname{cov}\psi]\iff\forall\phi((\operatorname{cov}\phi=\operatorname{cov}\psi)\implies\phi[\operatorname{cov}\psi])\iff\psi[\operatorname{cov}\psi]</math>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math>\lnot\psi[\operatorname{cov}\psi]</math>라고 가정하면, <math>\psi</math>의 정의에 따라 :<math>\forall\phi((\operatorname{cov}\phi=\operatorname{cov}\psi)\implies\phi[\operatorname{cov}\psi])</math> 이며, 특히 <math>\operatorname{cov}\psi=\operatorname{cov}\psi</math>이므로 <math>\psi[\operatorname{cov}\psi]</math>이다. 이는 가정 <math>\lnot\psi[\operatorname{cov}\psi]</math>과 모순이다. 반대로, 만약 <math>\psi[\operatorname{cov}\psi]</math>라고 가정하면, 값렬의 정의에 따라 :<math>\forall\phi((\operatorname{cov}\phi=\operatorname{cov}\psi)\implies\phi[\operatorname{cov}\psi])</math> 이며, 다시 <math>\psi</math>의 정의에 따라 <math>\lnot\psi[\operatorname{cov}\psi]</math>이다. 이는 가정 <math>\psi[\operatorname{cov}\psi]</math>과 모순이다. === 기타 === 논리식의 변수를 논리식으로 치환할 수 있는 논리 체계의 경우, 단순히 1개의 자유 변수 <math>\phi</math>를 갖는 논리식 :<math>\psi=\lnot\phi[\phi]</math> 을 생각하면 모순 :<math>\psi[\psi]\iff\lnot\psi[\psi]</math> 을 얻는다. == 역사 == 러셀은 1901년 5월이나 6월에 칸토어의 논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역설을 발견하였다.<ref name="Griffin">{{서적 인용 |url=https://books.google.com/?id=Xg6QpedPpcsC&pg=PA349 |성=Griffin |이름=Nicholas |장=The Prehistory of Russell’s Paradox |제목=One hundred years of Russell's paradox |언어=en |편집자-성=Link |편집자-이름=Godehard |총서=de Gruyter Series in Logic and Its Applications |권=6 |출판사=Walter de Gruyter |위치=Berlin |날짜=2004 |쪽=349-371 |isbn=3-11-017438-3 |issn=1438-1893 |lccn=2004006962 }}</ref>{{rp|350}}<ref name="Kamareddine">{{서적 인용 |성1=Kamareddine |이름1=Fairouz |성2=Laan |이름2=Twan |성3=Nederpelt |이름3=Rob |제목=A Modern Perspective on Type Theory |언어=en |총서=Applied Logic Series |권=29 |출판사=Springer |위치=Dordrecht |날짜=2005 |isbn=978-1-4020-2334-7 |doi=10.1007/1-4020-2335-9 }}</ref>{{rp|ⅸ, Preface}} 러셀은 1902년에 프레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의 논리 체계에서 “자기 자신을 술어로 가할 수 없다는 술어”를 정의할 경우 모순이 유도된다고 지적하였다. 러셀에게 보낸 회신에서 프레게는 그 역설이 《개념 표기법》에 적용될 수 없다고 정정하면서도, (《개념 표기법》을 확장한) 《산술의 기본 법칙》 속의 역설로 수정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ref name="Kamareddine" />{{rp|15, §1.b.2}} (《개념 표기법》에는 “변수를 함수로 치환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짧은 주해가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은 프레게의 1891년 논문 《함수와 개념》({{llang|de|Funktion und Begriff}})에 등장한다.) [[에른스트 체르멜로]]도 비슷한 시기에 이 역설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 러셀의 역설과 소박한 집합론 === 칸토어가 세상에 내어 놓은 집합론은 러셀의 역설과 같은 서술이 논리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강력한 수학이론이다. 이러한 소박한 집합론에서 아무 원소를 포함하지 않는 공집합을, ψ = { } 로 표시하는데, 이러한 공집합을 표현할 수 있는 서술 방법은 무한히 많다. 예를 들어 { x | x=1 and x≠1 } = ψ, 러셀의 역설에서 가정하는 집합은 수학적 대상은 아니지만, 소박한 집합론에서 공집합의 원소는 될 수 있다. 공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ψ, {ψ}, {ψ, {ψ}},….  되고, 자연수가 도출된다. 다른 수학이론의 기초가 되고,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면, 또한 무한한 대상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래서, 수학자 힐버트는 칸토어의 집합론이 이끄는 세계를 수학자의 낙원이라고 묘사했다. 소박한 집합론에서 ‘소박한’은 후대 수학자들이 칸토어가 발견한 집합론을 공리 집합론과 구분 짓기 위해 붙인 것이다. ‘naïve’ 란 단어를 ‘소박한’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덜 성숙된’, ‘생각이 얕은’ 이런 느낌의 단어이다. 칸토어의 집합론에 그런 단어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천재 칸토어는 집합론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논의 역설]] 이후 금기 시 되어온 무한의 개념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한한 집합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시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년배인 수학자 푸앙카레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무한 수를 심각한 수학 질병이라고 불렀고, 칸토어에게 중요했던 선배 수학자 크로네커는 그를 과학 사기군, 배교자, 젊은이를 지적 타락으로 이끄는 자라고 매도했다. 철학자들도 이러한 비난에 가세했고, 성직자들은 그의 시도를 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러셀의 역설과 [[베른의 역설]]과 같은 역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 그의 당대 일부 수학자들은 칸토어 집합론의 공리화를 시작한다.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에 나오는 그 [[공리]]화 방법론을 집합론에 도입한 것이다. 집합론을 체계화 시킨 측면도 있지만, 러셀의 역설을 비롯한 역설들이 주장하는 칸토어 집합론이 지닌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도 있다. 오직 이러한 역설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계급의 공리]](Axiom of class)는 그 필요성이 의문일 뿐만 아니라, 칸토어의 집합론에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 == 같이 보기 == * [[자기언급]]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 {{매스월드|id=RussellsAntinomy|title=Russell's antinomy}} {{논리 역설}} {{집합론}} [[분류:소박한 집합론의 역설]] [[분류:자기언급 역설]] [[분류:버트런드 러셀]] [[분류:1901년 과학]]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토요일 (텔레비전 프로그램)||텔레비전 프로그램}} {{칠요일}} '''토요일'''(土曜日, Saturday)은 [[요일]] 중의 하나로, 금요일 뒤의 날, 일요일 앞의 날이다. 토요일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에서 [[주말]]의 일부로 취급한다. == 이름 채지원 == 일부 [[게르만어파]] 언어에서 토요일은 '[[사투르누스]]의 날'({{llang|en|Saturday}}, {{llang|nl|Zaterdag}})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사투르누스는 [[토성]]을 상징하는 신이므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토요일'로 불린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 [[북게르만어]] 즉 [[노르만어]] 위주로는 lördag이라고 한다. 그러나 게르만어의 중심인 독일어는 Samstag[zámsta:k]라고 다르게 부른다. 잠(Sam)이라는 위인/신이 있는가 혹은 아래 라틴어파 sabato 특히 불어를 접해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남부 유럽 언어 및 동남아 언어에서 '토요일'이란 낱말은 [[안식일]](샤밭)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는 [[그리스어]] {{lang|el|Σάββατο}}, [[이탈리아어]] {{lang|it|sabato}}, [[인도네시아어]] {{lang|id|sabtu}} 등이 있다. === 중국 === * [[중국]]에서는 토요일을 한 주의 여섯째 날이라는 의미로 '星期六'이라고 한다. === 페르시아 === * [[이란]]에서는 일반적인 요일을 뜻하는 샴베(شنبه)라고 부른다. 이란은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이므로, 토요일이 한 주의 첫번째 날이다. [[당나라]] 대의 점성술 서적인 수요경에서는 토요일을 '흡삼물(翕森勿)'이라고 했다고 했는데, 이는 7번째 날이라는 것을 뜻한다. == 행사와 문화 == *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는 2012학년도부터 [[주5일근무제|주5일제]]를 전면 실시하여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게 되었다. * [[대한민국]]의 기업체에서는 [[2005년]] [[1월 1일]]부터 [[주5일근무제|주5일제]]를 적용하면서 토요일에는 근무하지 않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토요일에 휴무지만 일부 중소기업 등에서는 토요일에도 사실상 근무한다. * [[일본]]에서는 1월 14일 이후 첫 토요일에 [[센터시험]]의 지리역사•공민, 국어, 외국어 시험을 본다. * 2009-10시즌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와 [[UEFA 유로파리그]]의 결승전이 토요일에 열린다. * [[프리미어리그]] 등 프로 축구 리그는 대체로 토요일에 경기를 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헝가리]]는 공휴일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면 연휴를 만들고 직전 토요일을 평일로 한다. == 같이 보기 == {{위키낱말사전|토요일}} {{위키공용분류}} *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 *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전거 통제}} {{토막글|시간}} [[분류:토요일|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파일:East China Sea Map.jpg|섬네일|240px|동중국해의 위치]] {{수역 정보 | 이름     = 동중국해,동지나해 | 다른표기 = | 그림 = East Sea ko.png | 지도 = | 위성사진 = | 위치 = [[동아시아]] | 좌표 = {{좌표|30|N|125|E|type:waterbody_scale:10000000|display=inline,title}} | 유형 = | 어원 = | 수문계 = | 유입 = | 하천 = | 유출 = | 해양 = | 유역면적 = | 유역국가 = {{PRC}}<br />{{JPN}}<br />{{KOR}}<br />{{국기나라|중화민국}} | 관리기구 = | 지정내역 = | 건설일 = | 건설자 = | 최초범람 = | 최대길이 = | 최대폭 = | 수면면적 = | 평균수심 = | 최대수심 = | 수량용적 = | 체류시간 = | 염분 = | 기슭 길이 = | 해발고도 = | 최저수온 = | 최고수온 = | 빙결 = | 섬 = | 부속지형 = | 해구 = | 단구 = | 거주지 = | 웹사이트 = | 수치 출처 = }} '''동중국해(東中國海)''' 또는 '''동지나해(東支那海)'''({{llang|en|East China sea}})는 [[제주도]] 남쪽부터 [[타이완|대만]]에 걸쳐있는 서[[태평양]]의 [[연해]]이다. [[일본]]에서는 히가시시나카이(東支那海, {{llang|ja|東シナ海|히가시시나카이}})라고 부르며 [[한국]]에서 동지나해로 불렀다가 최근에는 동중국해라고 부른다. '''지나'''는 영문 차이나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중]][[중화민국|국]]에서는 동해({{zh|s=东海|t=東海|h=둥하이}})라고 부른다. == 수역의 정의 == [[타이완 해협|대만 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대한해협|대한 해협]]과 제주도 북동쪽 해역을 통해 [[동해]]와, 제주도 서쪽 해역을 통해 [[황해]]와 이어져 있다. [[국제 수로 기구]]에서 [[1953년]]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에 따르면, 동중국해는 동쪽의 [[규슈]]와 류큐 열도를 따라 그은 곡선을 경계로 [[필리핀해]]와 나뉜다. 북동쪽은 [[제주도]] 동쪽 끝부터 [[일본]]의 [[후쿠에섬]] 남쪽 끝과 [[규슈]]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동해]]와 접한다. 북서쪽은 [[제주도]] 서쪽(북위 33°17')부터 [[중국 대륙]]의 [[장강]] 하구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황해]]와 접한다. 남서쪽은 [[타이완|대만]] 북쪽 끝과 [[푸젠성]]의 동쪽 해안(북위 25°24')을 이은 선을 경계로 [[남중국해]]와 접한다.<ref>[http://www.iho-ohi.net/iho_pubs/standard/S-23/S23_Ed3_Sheet_1_Small.jpg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 지도] {{웨이백|url=http://www.iho-ohi.net/iho_pubs/standard/S-23/S23_Ed3_Sheet_1_Small.jpg# |date=20120305080226 }}, 국제 수로 기구, 1953년 발행.</ref><ref>[http://www.iho-ohi.net/iho_pubs/standard/S-23/S23_1953.pdf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 {{웨이백|url=http://www.iho-ohi.net/iho_pubs/standard/S-23/S23_1953.pdf |date=20111008191433 }}, 국제 수로 기구, 1953년 발행, PDF파일 페이지 33쪽(책자 페이지 31쪽) - 동중국해와 황해의 경계에 대한 설명.</ref> [[바다|해역]]의 크기는 약 1,249,000&nbsp;km<sup>2</sup>이다. == 자원 분쟁 == {{본문|동중국해 EEZ 분쟁}} 동중국해 해역의 [[천연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 [[대한민국]]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동중국해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경계로 [[중일 중간선]]을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오키나와 해구]]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중일 중간선 서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서 천연가스 채굴시설 준샹{{zh|t=春曉 |p=chūn xiǎo}}, {{llang|ja|白樺, しらかば|시라카바}})를 건설하자 일본은 중간선 동쪽의 천연가스까지 흡수될 수 있다며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양국은 2008년 6월 중간선을 포함한 해역의 공동 개발에 합의했고, 춘샤오 개발에 일본 기업이 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교섭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ref name="고쿠분 료세">{{서적 인용 |저자= 고쿠분 료세{{lang|ja|(国分良成)}} |제목= 현대용어의 기초지식{{lang|ja|(現代用語の基礎知識)}} |장={{lang|ja|中国}} |출판사=지유고쿠민샤{{lang|ja|(自有国民社)}} |판=| 언어=일본어 |ISBN=978-4-426-10128-2}}</ref>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센카쿠 열도|센카쿠 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 * [[타이완|대만]] * [[제주도]] * [[마라도]] * [[이어도]] * [[남해]] * [[남중국해]] == 각주 == {{각주}} {{바다}} {{중국의 해역}} {{전거 통제}} [[분류:동중국해| ]] [[분류:태평양의 해역]] [[분류:아시아의 해역]] [[분류:중국의 해역]] [[분류:일본의 해역]] [[분류:대한민국의 해역]] [[분류:대만의 해역]]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출처 필요|날짜=2013-6-10}} {{공직자 정보 |이름 = {{작게|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 |원어명 = {{작게|{{lang|no|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 |그림 = Portrett av Vidkun Quisling i sivile klær, ukjent datering.jpg |그림설명 = 1919년에 촬영한 비드쿤 크비슬링의 모습 |국가 = {{국기|노르웨이}} |직책 = [[노르웨이의 총리|총리]] |임기 = 1942년 2월 1일 ~ 1945년 5월 9일 |군주 = [[호콘 7세]] |총독 = [[요제프 테르보펜]] |전임 = [[요한 뉘고르스볼]] |후임 = [[요한 뉘고르스볼]] |직책2 = [[국방장관 (노르웨이)|국방장관]] |총리2 = [[페더 콜스타드]]<br />[[옌스 훈드세이드]] |임기2 = 1931년 ~ 1933년 |전임2 = [[토르게이르 안데르센뤼스트]] |후임2 = [[옌스 이삭 데 랑게 코브로]] |국가3 = [[파일:Flag of Nasjonal Samling.svg|22px|테두리|link=국민연합 (노르웨이)]] [[국민연합 (노르웨이)|국민연합]] |직책3 = 당수 |임기3 = 1933년 5월 13일 ~ 1945년 5월 8일 |전임3 = (신설) |후임3 = (폐지) |직책4 = |임기4 = |전임4 = |후임4 = |직책5 = |임기5 = |전임5 = |후임5 = |신장 = |체중 = |혈액형 = |출생일 = {{출생일|1887|7|18}} |출생지 = [[노르웨이]] [[텔레마르크주]] [[퓌레스달]]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45|10|24|1887|7|18}} |사망지 = [[오슬로]] [[아케르스후스 요새]] |본관 = |거주지 = |정당 = [[조국동맹 (노르웨이)|조국동맹]] (1930년-1931년)<br />[[중앙당 (노르웨이)|농업당]] (1931년-1933년)<br />[[국민연합 (노르웨이)|국민연합]] (1933년-1945년) |내각 = |소속기관 = |부모 = |배우자 = [[알렉산드라 보로니나]]<br />[[마리아 크비슬링]] |자녀 = |학력 = |종교 = |경력 = |별명 = |서명 = Quisling signature.png |서훈 = |웹사이트 = <!-- 이하 군경력 변수는 변수 중 하나 이상이 채워져야 화면에 나타남 --> |복무 = |복무기간 = |소속 = |계급 = |지휘 = |근무 = |참전 = }}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llang|no|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ˈvidkʉn ˈkvisliŋ]}}, [[1887년]] [[7월 18일]] ~ [[1945년]] [[10월 24일]])은 [[노르웨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텔레마르크주]] 출생이며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냈다. 종전 후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 생애 ==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소련]]에서 [[1920년대]] 기근 당시 그곳에서 난민 구제 사업을 하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르웨이의 헌법 기념일인 [[1933년]] [[5월 17일]] 크비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국민연합 (노르웨이)|국민연합]](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따서 반(半)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크비슬링이 당에서 히틀러가 나치당에서 맡은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국민연합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으나 [[1935년]]을 전후하여 노골적인 친독 반유대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자 지지는 줄어들어 [[베저 작전|독일의 침공]] 당시 당원수는 2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독일이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간 혼란을 틈타 크비슬링은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한 이가 되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전해에 면담한 바 있어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여 크비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되고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으로 앉혔다.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테르보펜은 높은 자리에 노르웨이인을 앉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지 [[1942년]] 크비슬링을 정부수반(총리에 해당)으로 임명, [[1943년]] [[2월 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그러나 크비슬링의 괴뢰정부는 허울 상의 정부에 불과했고, 여전히 실권은 테르보펜에게 있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다. 그는 [[오슬로]]의 뷔그되위(Bygdøy)에 있는 별장([[:en:Villa Grande (Oslo)|Villa Grande]])에서 살았는데, 당시 이를 [[북유럽 신화]]에서 딴 [[기믈레]](Giml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 하에서 벗어난 뒤 다른 두 명의 국민연합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 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 때문에 후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사후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이 반역자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이미 크비슬링 생전에도 사용되었다. 일례로 당시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 만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크비슬링: 저는 크비슬링입니다.<br />히틀러: 그리고 이름은?}} 크비슬링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는 반역자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풍자이다. == 같이 보기 == * [[베저 작전]] * [[노르웨이의 저항운동]] {{위키공용분류}} {{파시즘 하단}} {{전거 통제}} {{기본정렬:크비슬링, 비드쿤}} [[분류:1887년 출생]] [[분류:1945년 사망]] [[분류:노르웨이의 섭정]] [[분류:노르웨이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노르웨이 파시스트]] [[분류:노르웨이의 나치 부역자]] [[분류:언어 유희]] [[분류:파시스트 지배자]] [[분류:노르웨이의 반공주의자]] [[분류:노르웨이의 전쟁범죄 기결수]] [[분류:덴마크계 노르웨이인]] [[분류:노르웨이의 총리]] [[분류:자기애적 인격장애인]] [[분류:19세기 노르웨이 사람]] [[분류:20세기 노르웨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