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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집 2 | 예술경험 | 유아 |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있는 집. 집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이나 동물이 더위나 추위, 비바람을 피해서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해요. 하지만 현대인들은 집을 더 이상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인 기능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편안한 공간을 원하지요. 그래서 해마다 아파트와 최신식 고층 건물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래전 우리 조상들의 멋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집을 그리워합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높다란 아파트 사이에서는 마음껏 햇볕을 바라볼 수도 없고, 예쁜 꽃 한 송이도 기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바로 우리의 옛집을 살펴보기 위해 꾸며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의 집이 어떻게 변해왔나 살펴보고, 팔도강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옛집을 꼼꼼히 둘러볼 거예요. 풋풋한 풀잎 향이 나는 초가집과 솟을대문 안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 기와집 속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발로 밟아 보고, 으리으리한 궁궐과 사천왕이 지키는 사찰,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서원의 특징과 그 의미도 새길 수 있을 거예요. 알면 알수록 귀하고 소중한 우리 옛집을 공부하며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느끼길 바랍니다. 집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팔도강산 어느 집에나 옹기에서부터 농기구까지 살림살이가 많이 있었어요. 특히 부엌과 마당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지요. 부엌에는 음식을 만들고 담을 수 있는 작은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마당에는 논과 밭에서 사용하는 여러 농기구나, 볏짚으로 만든 생활 용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답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남녀가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자들이 머물던 안방의 세간과 남자들이 머물던 사랑방의 세간이 달랐어요. 그리고 남쪽과 북쪽 지역의 날씨가 달라서 즐겨먹던 음식도, 농사일도 달랐지요. 북쪽은 산이 많아 주로 밭농사를 지었고, 남쪽은 큰 강이 많아 논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그러니 살림살이도 지역마다 가지각색이었겠죠?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우리 옛집의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살펴보아요. 뚝딱뚝딱, 요리하는 기구. 부엌은 음식을 하거나 방을 데우기 위하여 불을 때는 곳으로, 주로 여성들이 드나들던 장소예요. 그래서 부엌에는 여성들의 손때가 묻은 그릇이나 솥들이 있었지요. 어떤 그릇에 밥을 하고 음식을 담았을까요? 조상의 지혜가 새록새록 묻어나는 옛집의 부엌살림을 알아보아요. 신선로. 신선로는 그릇 자체를 상에 올려놓고 가운데에 백탄을 넣어 음식을 직접 끓여 먹도록 되어 있어요. 넓은 대접과 유사한 형태의 그릇으로 재료가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가는 궁중 음식을 만드는 데 쓰였지요. 신선로라는 명칭은 ‘신선이 쓰는 화로’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맛있다는 의미로 ‘열구자탕’이라고도 했어요. 신선로는 주로 놋이나 백통으로 만들었으나 돌로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약탕관. 약을 달이는 데 쓰는 그릇으로, ‘약차관’, 또는‘약탕기’라고도 불렀어요. 주로 곱돌로 만든 약탕관이 널리 쓰였어요. 상보. 음식에 먼지나 나쁜 물질이 앉지 않도록 덮는 보자기예요. 조리. 가느다란 대오리나 싸리 등을 이용하여 조그만 삼태기 모양으로 만들고 한쪽에 손잡이를 단 요리기구예요. 주로 쌀을 이는 데 썼답니다. 뚝배기. 질그릇에 흑갈색이나 황갈색의 유약을 입혀 구워 낸 그릇이에요. 무쇠솥. 집을 옮길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부뚜막에 있는 살림살이였다고 해요. 솥은 재료에 따라 무쇠솥과 돌솥, 질그릇 솥이 있어요. 시루.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하여 뜨거운 김이 올라와 음식을 쪄내는 솥이에요. 소반. 음식을 얹어 먹던 작은 상이에요. 부엌에서 안방으로 가져가기 쉽도록 작게 만들어졌어요. 짚은 최첨단 소재. 우리 조상들은 주로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짚을 흔하게 구할 수 있었어요. 짚에는 볏짚, 밀짚, 보릿짚 등이 있으나 볏짚이 가장 널리 쓰였어요. 사람들은 짚을 이용해 땔감, 여물, 퇴비, 공예품을 만들고, 나아가 초가집의 지붕을 얹고 소의 여물을 만들었지요. 짚으로 엮은 소박하고 정갈한 공예품들을 보면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어요. 자연에서 얻은 짚은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요.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비닐이나 플라스틱과 비교하면 짚으로 엮은 생활용품들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답니다. 멍석.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말리는 데 쓰였어요. 큰 잔치나 제사가 있을 때에는 마당에 깔아 놓고 손님을 맞았어요. 멱서리. 짚으로 날을 촘촘하게 엮어서 만든 용기로, 곡식을 담는 데 쓰였어요. 씨오쟁이. 짚으로 만든 씨를 담는 용기예요. 농부들은 이듬해 사용할 씨를 정성스럽게 씨오쟁이에 담아 보관했어요. 달걀꾸러미. 짚으로 엮어 깨지기 쉬운 달걀을 감싸는데 이용했어요. 똬리. 여인들이 짐을 일 때 머리에 받치는 것으로 짚으로 만들고 왕골로 감았어요. 끝에 달린 꼬리는 물건을 일 때 입에 물고 똬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랍니다. 삼태기. 흙이나 곡식을 실어 나르는 물건이에요. 아궁이의 재를 담아서 잿간에 버리거나 쓰레기를 나르기도 하고, 퇴비를 논밭에 뿌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어요. 가마니. 짚으로 곡물을 담을 수 있도록 짠 용기예요. 짜임이 촘촘해서 작은 곡물도 담을 수 있어요. 또한 혼자 들기 쉽고, 빈 가마니는 접을 수도 있어 아주 유용해요. 짚신. 짚으로 만든 신발이에요. 멀리 떠날 때에는 봇짐에 여러 켤레를 매달고 길을 나섰답니다. 주루막. 가는 새끼로 엮은 네모꼴 주머니예요. 주둥이를 죌 수 있도록 고리를 지어 붙이고, 고리와 아래 양 끝에는 멜빵을 달았어요. 오래 두고 쓰려고 닳기 쉬운 고리에 칡덩굴이나 왕골 또는 가래나무껍질을 감아두었어요. 농부의 땀이 배어 있는 농기구.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풍년이 드는 것을 최고로 여겼어요. 농부는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열심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했지요. 그 덕분에 농부들의 농기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답니다. 동력 기계가 없었던 과거에는 어떤 농기구를 사용했을까요? 디딜방아. 절구와 같이 곡식을 찧는 도구지만, 발로 밟아서 사용한다는 점이 달라요.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 이전부터 사용한 아주 오래된 도구예요. 지게. 짐을 얹어 사람이 등에 지는 운반 기구예요. 따비. 가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이 혼자서 논밭을 갈 때 사용하는 것이에요. 손으로 자루를 잡고 발로 발판을 밟아서 땅을 팠어요. 갈퀴. 낙엽이나 짚 따위를 긁어모으기 위해 끝에 부챗살 같은 발을 붙인 갈고리예요. 용두레. 농사에 필요한 물을 긷기 위해 만든 농기구예요.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서 몸통을 만들고, 세 개의 작대기를 세워 쓰러 지지 않도록 했어요. 한쪽에 모인 물을 옮기거나,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으로 퍼올릴 때 사용했답니다. 가래. 여럿이 힘을 합쳐 땅을 파고 흙을 옮기는 데 쓰던 기구예요. 한 사람이 몸체를 땅에 박고 양쪽에 선 사람들이 몸체 끝에 맨 줄을 잡아당겨 일을 했지요. 이 같은 일을 가래질이라고 해요. 쟁기. 소를 이용해서 논밭을 깊이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예요. 농가에서 아주 귀하게 사용하던 것이랍니다. 절구. 곡식이나 양념, 떡을 찧는 도구예요.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 돌절구, 무쇠 절구 등이 있어요. 방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집은 한옥이에요. 한옥은 과학적인 기능은 물론이고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지요. 세계인들은 시원한 마루와 아궁이의 불기운으로 방을 데우는 온돌을 세계 최고의 온냉방 시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한옥의 부엌과 안방은 여자들의 공간이에요. 안방에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살림살이가 많이 있지요. 그리고 안채와 떨어져 있으면서, 남자들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 사랑방이에요. 사랑방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안방마님의 아기자기한 소품. 부엌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한 안방은 여자들의 공간이었어요. 가족의 옷을 만들고, 수를 놓고, 책을 읽고, 부엌살림을 도맡아 하던 여자들의 휴식 공간이기도 했지요. 방 옆면이나 윗목에는 반닫이를 두고 옷을 만들거나 수선을 했어요. 또한 경대를 앞에 두고 곱게 분단장을 했답니다. 안방 곳곳에 숨어 있는 여자들의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찾아보아요. 반닫이. 앞부분에 열고 닫는 문이 있는 가구로, 옷이나 귀한 문서, 책을 넣어두었어요. 화각함. 얇게 편 쇠뿔 위에 곱게 그린 그림을 나무 상자에 붙여 만든 상자예요. 머릿장. 머리맡에 두고 필수품들을 넣어두던 작은 가구예요. 경대. 여자들이 화장품이나 여러 화장도구를 넣어두던 가구예요. 물레. 물레는 실을 뽑는 데 쓰는 도구예요.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 육각형의 틀을 만들고, 가운데에 손잡이를 박아 그것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어요. 삼층 농. 농은 물건을 넣어 두는 가구인데, 장과 달리 각 층을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삼층 농에는 주로 의복을 보관했어요. 남자는 남자끼리 생활해요. 사랑방은 남자들만의 공간이었어요. 예전에는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기 때문에 사랑방은 가능한 안방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답니다. 남자들은 이곳에서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글공부를 했지요. 살금살금 사랑방으로 건너가 볼까요? 갓집. 갓을 넣어 두는 상자예요. 원통형으로 만들어 벽에 걸거나 천장에 달아 두고 옆이나 밑에서 열고 닫았어요. 붓. 붓이 생기기 전에는 나뭇가지에 먹을 묻혀 글을 썼어요. 이후 짐승의 털을 이용해 붓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여러 종류의 붓이 만들어졌어요. 문방사우. 문인들이 서재에서 쓰는 붓, 먹, 종이, 벼루를 말해요.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이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와 먹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만큼 우리의 문방사우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답니다. 고비. 편지 따위의 종이를 꽂아 두는 물건이에요. 주머니나 상자처럼 만들어서 벽에 달아두었어요. 경상. 공부를 하거나 붓글씨를 쓸 때 사용하던 책상이에요. 연적.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사용할 물을 담아 두는 용기예요. 두 개의 구멍이 공기를 조절해 주기 때문에 물이 쉽게 나온답니다. 벼루와 먹. 먹은 벼루에 물을 붓고 갈아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검은 물감이에요. 아교를 녹인 물에 그을음을 반죽하여 굳혀서 만들지요. 먹을 가는 데 쓰는 벼루는 주로 돌로 만들지만 도자기나 진흙으로 만들기도 한답니다. 궁궐 나들이. 한옥 중 가장 큰 건물은 궁궐이랍니다. ‘궁'은 방이 많은 큰 집이란 뜻이고, '궐'은 그 궁을 튼튼히 지키는 궁성과 성루, 성문을 가리키는 뜻이에요. 궁궐은 왕과 많은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곳이자,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데 필요한 행정,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지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왕조가 건국될 때마다 아름답고, 위엄 있는 궁궐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궁궐들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조선 왕조의 궁궐만이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답니다. 지금부터 넓은 궁궐의 구석구석을 찾아가 보아요! 오백 년 역사가 살아 있는 곳. 조선 시대에 지어진 궁궐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있어요. 이를‘5대 궁궐’이라고 하지요. 이 궁궐들을 천천히 걷다 보면 아주 오래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돼요. 수백 년 전 이곳에 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을까요? 궁궐 속의 작은 숲, ‘후원’. 왕과 왕의 가족들은 궁궐에서만 생활했어요. 산과 들에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나들이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지요. 그래서 왕과 왕의 가족들이 자연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후원을 만들었답니다. 그곳에서 왕은 즐거운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환대하기도 했어요. 창경궁.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전인 수강궁을 지었어요. 이후 성종은 이곳에 창경궁을 건립하였답니다. 덕수궁. 태조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고 불렀으나, 광해군 때는 경운궁이라고 하였답니다. 경희궁. 광해군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이 살던 집터에 궁궐을 지어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영조가 다시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제일의 궁궐로 태조 4년에 창건되었어요. 태조는 온 백성이 큰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창덕궁. 태종 때 처음 세워진 궁궐로, 덕의 근본을 밝혀 번창하라는 뜻을 담고 있답니다. 조선 왕조를 빛낸 궁궐, 경복궁.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짓기 시작한 왕궁이 바로 경복궁이랍니다. 태조 4년(1395)에 완성되었어요. 경복궁은 왕과 신하들의 공간인 외전과 궁궐 안 사람들의 공간인 내전으로 나뉘어 있어요. 외전은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자리 잡고 있지요. 그리고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거쳐야 한답니다. 경복궁의 중심, 근정전.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보던 외전이에요. 근정전에서는 새 임금의 즉위식을 행하거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였어요. 2층 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린 근정전의 건물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요. 경복궁의 아름다운 후원, 경회루. 태조는 경복궁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아름다운 다락집을 세웠어요. 경회루에서는 나라의 기쁜 경사가 있거나 외국의 중요한 사신이 왔을 때 연회가 열렸지요.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에 타 돌기둥만 남게 되었지만 고종 때에 다시 지어 올렸답니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어요. 대비 마마의 거처, 자경전. 경복궁의 자경전은 궁궐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인 내전이랍니다. 교태전 동쪽 자미당 터에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 고종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건물이에요. 만수무강을 바라는 뜻에서 글자나 꽃, 동물 형태를 새겨 넣은 고운 꽃담과 십장생을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큰 자랑거리지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태조 4년(1395)에 지어진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에요. 왕이 드나드는 정문으로,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규모도 크고 화려했어요. 그리고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에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세워 조선의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었답니다. 아미산 굴뚝. 경복궁 안에는 보물 제811호로 지정된 아미산의 굴뚝이 있어요. 왕비가 머무는 교태전의 구들과 연결된 굴뚝이에요. 육각형 평면을 한 아미산 굴뚝에는 다양한 나무와 꽃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답니다. 궁궐에 숨어있는 수수께끼. 우리 조상들은 왕의 건강과 나라의 발전, 궁궐 수호를 기원하며 궁궐 곳곳에 여러 가지 상징물을 설치했어요. 근정전 둘레에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세운 열두 개의 조각상을 비롯하여, 궁궐 화재를 막기 위해 설치한 드므, 임금님의 용상을 더욱 화려하게 해 주던 일월오악도 등이 그것이지요. 넓은 궁궐 안에 숨어 있는 상징물들을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되면 궁궐 나들이가 아주 흥미진진해진답니다. 정. 경복궁 근정전 앞에 놓여 있는 향로 모양의 큰 그릇이에요. 정은 왕권과 군주를 상징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히 생활하고 하늘의 복이 온 나라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에요. 해태. 자와 비슷하지만 머리에 뿔이 달려있어요. 옳고 그름을 현명하게 판단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랍니다. 잡상. 큰 건물의 처마 마루에 줄지어 앉아있는 흙인형을 본 적이 있나요? 이것을‘잡상’이라고 해요. 잡상은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여러 동물이나 신선, 괴수, 기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이것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답니다. 일월오악도. 임금님의 용상 뒤에 큰 병풍이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병풍은‘일월오악도’라고 부르는 것으로, 왕의 권력을 상징하지요. 그림의 양쪽으로 해와 달이 있고, 가운데에는 다섯 봉우리와 소나무, 폭포, 그리고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있어요. 드므.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의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고 해요. 옛날에는 궁궐에 화재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여 물을 가득 담아두었던 것이에요. 차일고리. 궁궐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 인정전, 명전전의 기둥과 조정에 깔린 평평한 돌에는 둥근 쇠고리가 박혀 있어요. 이 쇠고리의 용도는 중요 행사나 의례가 있을 때 햇빛을 막아주는 천막을 치기 위해 줄을 묶었던 것이에요. 근정전의 십이지 신상. 근정전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에는 훌륭한 솜씨로 조각된 열두 동물상이 있어요.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가 그것이랍니다. 사찰과 서원 나들이. 유명한 산을 오르다 보면 어김없이 예스러운 한옥 건물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사찰이랍니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우수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어요. 그래서 전국의 어느 산에나 아름다운 사찰을 지었답니다. 사찰 안에서 울리는 은은한 독경소리와 코끝을 간질이는 향은 아름다운 사찰을 더욱 멋스럽게 만든답니다. 아름다운 한옥이 산속에만 숨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청년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서원을 마을에 세웠어요. 서원 또한 우리나라 옛집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한옥이지요. 우리 함께 멋들어진 옛 건물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대웅전까지 가는 길. 사찰 앞에 서면 우리는 여러 개의 문과 만나게 돼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이 그것이지요. 모두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관문이랍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문이 있는지 아세요? 그것은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바르고 곧은 마음가짐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여러 개의 문을 세운 것이랍니다. 불전사물. 해탈문인 불이문을 지나 불교의 깨우침을 얻기 위해 사찰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이곳저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 있는 목어, 범종, 법고, 운판을 볼 수 있어요. 이를 ‘불전 사물’이라고 한답니다. 이 사물들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알아볼까요? 금강문. 금강문은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해요. 문에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사찰을 지키고 있지요. 목어.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내어 만든 거예요. 물고기처럼 잠 자지 않고도를 닦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천왕문.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면 만나는 문이에요. 사천왕을 모셨기 때문에 사천왕문이라고도 불러요. 사천왕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물리치는 수호신이랍니다. 운판.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모양으로 만든 공예품이에요. 살짝만 두드려도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로 백성의 괴로움을 날려줄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에요. 신성한 곳에 들어서기 전에 마음을 깨끗이 비우라는 의미로 세운 문이랍니다. 사천왕. 천왕문의 양쪽에는 네 개의 커다란 사천왕을 볼 수 있어요. 갑옷을 입고 칼과 무기를 들고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어요. 웃음을 띠고 있는 사천왕도 있답니다. 범종. 범종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해요.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을 울렸어요. 법고. 불교 의식에 쓰이는 타악기예요. 북소리처럼 불법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글 읽는 소리가 가득한 기와집. 먼 옛날 우리의 학교는 어땠을까요? 김홍도의 그림 서당을 보면 코흘리개부터 떠꺼머리총각까지 모두 한자리에 앉아 훈장님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서당은 오늘날의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 기관이에요. 더 깊이 학문을 닦으려는 사람들은 서원에서 공부를 했답니다. 서원은 훌륭한 인재를 길러 내고 선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교예요. 서원과 일반 한옥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만대루. 아름다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진 누각이에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어울려 토론을 하거나, 잠시 휴식을 취했어요. 홍살문. 사람들에게서 원이 아주 중요한 곳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문이에요. 홍살문은 서원뿐만 아니라 능이나 묘, 대궐, 관아에 세우기도 했어요. 소수 서원. 소수 서원은 사적 제55호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에요. 사액 서원은 임금으로부터 책이나 노비뿐 아니라 사원의 이름도 하사받았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기관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답니다. 하마비. 서원을 지날 때에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이에요. 서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양반과 서민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든지 존경을 표시해야 했답니다. 장판각. 문집이나 책을 펴내기 위해 목판이나 서책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마루를 땅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설치하고, 환기구나 살창도 설치했어요. 우리 옛집은 요즘같이 인공적인 시멘트와 벽돌로 짓지 않았어요. 자연을 억지로 집 안에 들이지 않고 산천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지요. 풋풋한 풀잎 향이 나는 초가집과 솟을대문 안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 기와집, 으리으리한 궁전, 사천왕이 지키는 사찰,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서원이 모두 대표적인 우리의 옛집이에요. 우리의 옛집은 과학적인 기능은 물론이고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답니다. 멋스럽게 꾸며진 지붕, 더운 여름을 피할 수 있는 마루, 혹독한 추위를 막아 주는 온돌방, 햇볕과 바람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창 등이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요. 자연을 닮은 다양한 우리 옛집. 우리나라는 남쪽과 북쪽의 기후가 다르고 지역마다 자라는 나무와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각 고장의 기후에 알맞은 나무나 식물들을 이용해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자연을 닮은 다양한 우리 옛집을 살펴봐요. 한옥의 과학, 온돌과 마루. 한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온돌과 마루예요. 온돌과 마루는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에 가장 알맞은 구조랍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추위를 이겨 냈지요. 조상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온돌과 마루를 자세히 살펴봐요. 한옥의 아름다움, 창과 문. 한옥의 창과 문은 외부와 소통하는 통로예요. 우리 조상들은 바람 한 줄기도 집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창과 문에 창호지를 붙였어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은 부드러웠지요. 또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은 그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이름을 갖고 있어 정겨움을 주었답니다. 옛집의 살림살이, 부엌, 안방, 사랑방. 한옥의 부엌에는 음식을 만들고 담을 수 있는 그릇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요. 또한 우리 조상들은 남녀가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자들이 머물던 안방의 살림살이와 남자들이 머물던 사랑방의 살림살이는 아주 다르답니다.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땅 1 | 예술경험 | 유아 | 지도에는 세상이 담겨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짚신 여러 켤레를 봇짐에 달고, 높고 험한 산을 넘어, 허허벌판과 바닷길을 건너 한달 두달 여행을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하루 안에 어디든지 갈 수가 있지요. 이처럼 여행을 하는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잊지 않고 꼭 챙기는 것이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예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지도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알아볼 거예요. 삼국 시대 지도에서부터 수백 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과학적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까지 모두 살펴볼 수 있어요. 또한 지도에는 어떤 것들이 기록되어 있는지, 산과 집, 학교는 어떤 기호로 나타냈는지도 알아보고, 옛 지도와 오늘날 지도의 공통점과 차이점도 비교해볼 거예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가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땅을 소중하게 여겼던 조상들의 풍수 사상과 명당에 자리 잡은 건물이나 궁궐도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뛰어난 과학 기술도 없었던 시대에 정교한 지도를 남긴 조상들의 솜씨와 지혜로움에 감탄을 하게 될 거예요. 우리의 땅 이야기. 우리나라는 지방마다 산과 들의 모습이 달라요.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르지요. 물론 봄 여름 가을 겨울 피는 꽃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답니다. 이렇게 지방에 따라 생활 모습이 다른 우리나라의 지역 정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지도랍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도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해요. 다스리는 왕과 관리들은 지도를 이용해 도시를 세우고, 장수들은 지도를 이용해 전략을 세웠으며, 백성들은 지도를 보고 먼 길을 여행하였지요. 그래서 지도를 보면 당시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알 수 있어요. 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알아보아요. 우리나라의 옛 지도. 옛날에 장군의 편지를 먼 곳까지 전하던 병사는 어떻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을까요? 임금의 명을 받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다니던 암행어사는 어떻게 길을 잃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우리나라의 옛 지도가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 알아볼까요?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지도를 제작했어요. 삼국 시대에 들어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우리 조상들은 지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옛 문헌 구당서를 보면 고구려 영류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봉역도라는 고구려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시대에 제작된 지도들이 실려 있고, 삼국을 통일한 시기에 지도를 적극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지도의 제작은 중국과의 교역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고려의 행정 구역. 고려의 현종은 행정 구역을 10도에서 5도 양계로 바꾸고 전국 지도를 제작했어요. 그것이 바로 5도 양계도랍니다. 이 지도는 여러 실증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으며, 조선 전기에 전국 지도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어요.조선방역지도는 고려 시대의 5도 양계도를 참고로 그린 것이에요. 조선 전기의 지도 제작. 조선 시대에는 세조 때 만들어진 동국지도와 영조 때 만들어진 동국지도 두 개가 있어요. 조선 초기, 지도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세조는 양성지에게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제작하라는 명을 내렸어요. 이에 1463년, 양성지는 정척과 함께 첫 번째 동국지도를 완성했어요. 이후 영조 때에 정상기는 우리나라의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평지는 100리를 1척으로 하고, 굴곡이 심한 지역은 120~130리를 1척으로 계산하는‘백리척’을 도입했어요. 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로 축척이 표시된 두 번째 동국지도가 완성되었어요. 이 지도에는 산과 강, 도로의 모습이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땅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우리 조상들은 땅의 생긴 모양과 형세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면서 점차 자연 그대로의 지리를 기록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지요. 산천 평야 해양 기후 생물을 그려 보고, 글로 기록해 후세에 남기기도 했어요. 그런 노력으로 지도와 지지가 만들어지게 된거랍니다. 조선 시대의 전국 지도. 조선 시대에는 팔도를 한눈에 볼 수 있고 휴대하기 쉬운 전도가 등장하였어요. 19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전도를 잘 살펴보면 군현의 이름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쓰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지도에 사용한 이 색깔들은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다섯 가지 색이 중심이 되는데, 이를 ‘오방색’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산맥과 강을 사람의 뼈와 혈관으로 생각하고 그 하나하나를 지도 속에 자세히 그려 넣고 색을 칠했지요. 그로 인해 옛 지도는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웠답니다. 복을 부르는 명당. 옛사람들은 집터와 궁궐터 또는 조상들의 무덤 자리를 찾을 때, 가장 먼저 주위의 산과 땅, 그리고 물을 관찰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좋은 명당 자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명당은 주변에 좋은 기운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명당에 삶의 터전을 꾸려야 복이 깃든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전국을 돌며 명당자리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답니다. 또한 그것을 토대로 풍수 지도도 만들었어요. 풍수지리는 만능 해결사. 풍수지리에서는 산이나 언덕이 있고, 그 앞으로 강이나 개울 등 물이 흐르는 곳을 최고의 명당이라고 해요. 왜냐하면 산은 집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물은 집으로 들어온 산천의 생기를 보호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지형을‘배산임수’라고해요. 한양은 최고의 명당. 한양을 그린 옛 지도를 보면 한양이 최고의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어요. 태조 이성계는 원래 조선의 도읍지로 계룡산을 마음에 두었지만, 한양을 두루 돌아본 뒤 마음을 바꾸었다고 해요. 한양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산맥이 북한산과 백악산, 남산(낙타산),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남한강과 북한강은 양수리에서 하나로 합쳐져 한강을 이룬 후 한양을 휘감고 흐르지요. 이렇듯 한양은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명당이랍니다. 어떻게 지도를 만들었을까요? 지도를 만드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야 가능했어요. 그래서 나라에서 주관했지요. 조선은 천문과 지리, 날씨와 관련된 일을 도맡아 보는‘상지관’이라는 관리를 두고 지도 제작에 관한 모든 일을 맡겼어요. 일반적으로 상지관은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이 임명되었으며, 그는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을 찾아 궁궐이나 묏자리를 정했어요. 상지관이 모은 자료는 궁궐에서 일하는 화가들에게 맡겨졌어요. 이렇게 완성된 지도는 지금의 국방부 역할을 했던 비변사에 보관되었지요. 그리고 문관과 무관이 지도를 중심으로 모여 행정 및 군사 계획을 세웠어요. 지도를 만들기 위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걸어서 거리를 측량하고, 각 마을의 위치를 확인했던 그 먼 옛날로 떠나 볼까요? 지도를 만든 과학적 기구. 옛날에는 어떤 도구들을 사용해 지도를 만들었을까요? 먼저, 거리를 재기 위해서 ‘기리고거’를 타고 다녔어요. 기리고거는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횟수로 거리를 알 수 있는 기구예요. 그리고 동서남북의 방향을 찾고 별자리의 위치와 땅의 위도 경도를 알아내기 위해 앙부일구, 간의 등의 관측기구들을 사용했답니다. 휴대용 나침판은 선추에 달린 나침반으로 둥근 향나무 상자에 사각형의 나침반이 붙어 있어요. 선추는 부채의 고리나 자루에 달던 장식품이에요. 방위를 측정하는 기능 이외에 부채에 매달아 장식한 멋스러움이 돋보여요. 성좌판은 둥근 놋쇠 판 앞뒤에 별자리를 표시하여 쉽게 별을 찾아볼 수 있게 만든 장치예요. 간의는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와 함께 조선의 가장 중요한 관측기기예요. 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어요.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관측용 기구예요. 조선 시대 최초의 혼천의는 세종 15년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관측용 혼천의를 만들기 위한 소규모 모형이었어요. 후에 이천, 정인지, 김빈이 많은 연구를 하여 관측용 혼천의를 만들어 간의대에 설치했답니다. 앙부일구 해시계는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든 것으로, 태엽을 이용한 시계가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이용되었어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는 세종 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로, 24절기와 시각이 표시되어 있어요. 지도의 쓰임. 우리의 옛 지도에는 울퉁불퉁 투박한 땅, 구불구불 휘어져 흐르는 강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 먼 곳의 땅 모양을 짐작하였지요.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좀 더 전문적인 정보를 담은 지도들이 만들어졌어요. 전국의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 지도, 운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통 지도, 지역마다 다른 기후를 비교할 수 있는 기후 지도 등이 그것이에요. 또한 어린이들이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역사 지도와 연표도 많이 이용되고 있어요. 역사 지도는 옛날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지도에 나타낸 거예요. 지도를 보면 국가의 위치, 도읍지의 위치, 전국 각 지역의 주요 도로 등을 알 수 있답니다. 지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어요. 지도의 종류는 크게 일반지도와 특수 주제 지도로 나눌 수 있어요. 일반지도는 하천이나 평야, 산지, 도로 등의 일반적인 내용을 표현한 지도로 여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한국 전도와 세계 전도가 일반 지도에 해당된답니다. 특수 주제 지도는 일반지도를 바탕으로 특정한 사항만을 표현한 지도예요. 교통 지도, 관광 지도, 특산물 지도, 인구 분포 지도가 이에 해당되지요. 관광 안내도. 전국의 주요 볼거리, 가는 길, 관광지 등을 나타낸 지도예요. 수산업 지도. 각 지역에서 잡히는 주요 물고기 종류와 연간 어획량을 표시한 지도예요. 교통 안내도. 도로망, 길, 철도 등을 나타낸 지도로,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고장을 여행할 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요. 역사를 지도로 공부해요. 역사 지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민족이 겪은 정치 문화적 변화 과정이나 중요한 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지도예요.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발견된 곳, 주요 사건이 일어난 곳, 나라가 세워진 곳, 도읍지와 경계, 대표적인 문화재 및 도로 등을 나타낼 수 있답니다. 옛 통신 수단의 불씨, 봉화. 옛날에는 주위가 훤히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에 봉화대를 만들어 놓고 밤에는 횃불을, 낮에는 연기를 피워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나 중요한 정보를 전달했어요. 1149년에 처음 실시한 봉화는 전쟁과 같은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하루에 1~4번까지 올리게 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봉수대를 나라 곳곳에 만들고 관리를 임명해 관리하게 했어요. 연표는 무엇일까요? 연표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일어난 순서에 따라 표로 정리한 것을 말해요. 예를 들어, 국가의 건국 연도, 전성기, 멸망한 시기를 나타낼 수 있지요. 연표의 종류로는 책자 연대표, 접음 연대표, 게시 연대표, 그림 연대표, 줄자 연대표, 원반형 연대표, 반원형 연대표, 줄 연표 등이 있어요.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우리나라의 지도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정호예요. 김정호는 30여 년 동안 지도 제작에 헌신하여 대동지지, 청구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적 지도로 평가 받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어요.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철저하게 답사하고 고증한 끝에 만들어진 지도로, 다른 지도에 비해 상당히 정밀하고 체계적이에요. 우선, 지도를 들고 다니기 쉽게 여러 권의 책으로 나누어 놓았어요. 그래서 필요에 따라서는 책을 이어 붙일 수도, 다시 접어서 보관할 수 있었지요. 또한 다양한 기호를 만들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았어요. 김정호는 이외에도 지구전후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을 그린 여지전도, 대동여지도를 줄여 만든 대동여지전도 등을 남겼답니다. 신비한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우리나라의 대축척 지도예요. 이 지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게 전국 방방곡곡이 새겨져 있어요. 현대의 측량 지도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이지요. 먼 옛날 어떻게 이와 같은 지도를 만들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요. 단, 30여 년 동안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직접 걸어서 일주한 그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대동여지전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1861년에 70여 장의 목판에 우리나라를 새겨 22첩으로 만들어 낸 지도예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실측 지도로 평가 받고 있어요. 대동여지전도는 대동여지도를 축소해서 만든 지도예요. 수선 전도.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 서울 지도예요. 도봉산,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잘 표현되어 있으며, 도성 내부에 흐르는 청계천의 모습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요. 지리학에 일생을 바친 김정호. 김정호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우리나라 최고의 지리학자예요. 그러나 지도 만들기에 임하던 단편적인 모습만 전해질 뿐 출생과 삶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는 평생 지리학에 헌신하여 우리 땅 구석구석을 정확하게 담아낸 많은 지도를 만들었어요. 조선 팔도의 모든 산과 강을 그리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도로를 특별하게 표현한 것이에요. 물론 다른 지도에도 산과 도로가 표시되어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 산은 우뚝 서있는 봉우리로 그려져 있고 도로는 구불구불한 곡선으로만 그려져 있어요. 그러나 김정호는 산을 산맥으로 나타냈어요. 또한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그려서 산의 크기와 높이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답니다. 도로 또한 다른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냈어요. 구불구불한 하천과 도로를 구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한 것이지요. 또한 10리마다 점을 찍어 정확한 거리를 지도에 담았답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지도표.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긴 설명을 넣는 대신 오늘날의 지도처럼 간단한 지도표를 사용하여 많은 정보를 넣었어요. 그래서 대동여지도 속에는 산줄기, 하천, 바다, 섬, 마을을 비롯하여 역참, 창고, 관아, 봉수, 목장, 진보, 읍치, 성지, 온천, 도로 등이 기호로 고스란히 담겨져있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여러 기호를 사용한 것은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낱말들이 많이 있어요. 이 낱말들의 뜻을 알아볼까요? 영아는 감사가 직무를 보고 군대가 머무르는 마을. 읍치는 도 아래 부, 목, 군, 현과 같은 지방 행정 구역에 있는 관청. 성지는 적의 침입을 대비해 쌓은 성. 진보는 지방 군대가 머무르는 지방 행정 구역. 역참은 중요 도로에 약 30리 간격으로 설치한 관리들의 숙박 시설. 창고는 나라의 물건을 보관하는 곳. 목소는 말을 키우는 목장. 봉수는 봉수대가 있는 곳. 능침은 죽은 왕과 왕비의 무덤. 방리는 오늘날의 읍 동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고현은 지도가 만들어진 때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없어진 현의 지방 관청. 고진보는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진과 보. 고산성은 군대가 머물지 않는 옛 산성. 도로는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직선으로 표시한 길. 역사 속의 위대한 선구자들. 우리나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도 제작에 힘을 쏟았어요. 그러나 장비나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걸어 다니며 지형을 확인하고, 하나하나 목판을 파서 지도를 만들었어야 했지요. 발로 뛰는 지리 학자들의 땀과 정성 덕분에 우리는 지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자주 국방을 튼튼히 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답니다. 이제,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가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지리학자들을 만나 볼까요? 우리나라의 최초 지도를 만들다, 이회. 일찍이 지도 제작에 관심과 재주를 보인 이회는 1402년(태종 2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도인 팔도도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회가 김사형, 이무 등과 함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도 만들어 조선 전기 지도를 평가 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요. 독창적인 선각자, 최한기. 현실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최한기는 새로운 문화와 생각을 앞장서 받아들였던 신세대
학자였어요. 천문, 지리, 농학, 의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천 권이 넘는 책을 남기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현재는 15종 80권만이 남아 있답니다. 발로 뛰는 실학자, 정상기.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정상기는‘백리척’을 도입해 동국지도를 그렸어요. 또한 우리나라의 국경과 군현, 산천, 마을, 성곽, 바닷길, 궁실 등에 대한 역사적 변화와 여러 정보도 함께 기록했어요. 서양의 지리를 소개한 마테오리치. 예수회의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는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정착해 선교 활동을 벌이던 중, 명나라 학자 이치조와 함께 곤여 만국 전도를 만들었어요. 곤여 만국 전도는 우리 조상들이 서양의 지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중요한 자료였어요. 복잡한 지도 쉽게 읽기. 김정호가 사용한 지도표와 같이 오늘날의 지도에는 많은 기호들이 사용되고 있어요. 그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많은 기호들이 등장했답니다. 처음 지도를 본 어린이들은 산수 문제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고 느끼게 되지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기호와 줄과 선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니까요. 지도를 보려면 기호들을 반드시 알아야 해요. 지도의 기호 속에는 실제 지형이나 주위 상황에 대한 정보, 산의 높이, 마을의 크기 등 모든 사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해요. 이제부터 지도표 속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 보아요. 색깔마다 의미가 있어요. 지도에는 다양한 색깔이 등장해 예쁜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그 색깔에 아주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지도의 기호들이 담고 있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의미를 알면 아주 쉽게 지도를 해석할 수 있어요. 색깔마다 모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도에는 알 수 없는 많은 기호와 선 들이 등장하지만, 기호의 색깔을 보면 지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답니다. 지도를 색으로 구분한다? 지도를 분류하는 데도 여러 가지 기준이 있어요. 축척, 형태, 제작 방법, 사용 목적, 투영법 그리고 색에 의한 분류가 있답니다. 빨간색. 주택지, 관광지, 도로 및 해로의 기호 들은 빨간색을 사용해요. 초록색. 들판처럼 지형이 낮은 곳, 밭과 과수원의 기호 들은 녹색을 칠해요. 검정색. 관공서, 건축물, 산, 철로 등은 검정색을 사용해요. 갈색과 노란색. 산이나 고원처럼 지형이 높은 곳을 나타낼 때는 짙은 갈색으로 나타내고, 고도가 낮아질수록 노란색으로 변해요. 파란색. 강과 호수에는 파란색을 써요. 강이나 호수의 깊이가 얕은 곳은 하늘색으로, 깊이가 깊어질수록 파란색으로 나타내요. 그리고 항공로도 파란색이랍니다. 알면 편리한 지도의 기호. 지도의 방위 알기. 지도에는 동서남북을 찾을 수 있도록 방위로 방향을 표시해 놓았어요. 일반적으로 방위표는 북쪽, 동쪽, 남쪽, 서쪽을 가리키는 4방위표와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서쪽, 서쪽, 북서쪽을 가리키는 8방위표가 있답니다. 지도의 등고선 알기. 등고선은 바다의 수면을 기준으로 하여 높이가 같은 지점을 이어서 나타낸 것이랍니다. 등고선의 생김새를 잘 살펴보면 땅의 모양이나 높이를 알 수 있어요. 산이 있는 높은 곳은 진한 갈색으로,평야와 같이 낮은 곳은 연두색으로 나타내요. 지구본으로 땅을 읽어요. 세계 여러 나라의 위치, 넓이, 모양을 세계 지도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지구본이에요. 지구본은 육지와 바다의 모양이 색으로 구분되어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과 주요 도시가 표시되어 있어요. 또한 지구본에는 적도와 날짜 변경선, 북극과 남극이 나타나 있으며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평행한 위도와 지구의 남북 양극으로부터 수직으로 연결된 경도를 확인할 수 있답니다. 지도의 기호 알기. 지도는 땅의 일부나 전체를 종이 위에 기호나 문자를 사용하여 실제보다 축소해서 그린 것이에요. 울퉁불퉁한 땅의 생김새나 건물들을 실제 크기로 나타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도에는 많은 기호와 선, 색깔이 있어요. 모두 지도를 좀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지요. 우리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지도지만, 그 속에는 논과 밭, 산과 바다, 도시와 시골이 마술처럼 펼쳐져 있답니다. 지금까지 지도에 관한 많은 것을 공부했어요. 그럼 이제 우리가 직접 그려 볼까요? 우리나라 지도와 같이 큰 지도는 그리기 어렵지만, 동네 그림지도 정도는 쉽게 그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림지도를 그려 보면 내 고장의 자연적인 특색을 알 수 있고, 중요한 건물들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답니다. 내 손으로 쓱쓱 지도 만들기. 종이의 위쪽을 북쪽 방향으로 정하고 주요 도로를 그려요. 하천과 산 그리고 철도를 그려요. 논과 밭 등을 그려요. 우체국, 학교 등 중요한 건물을 그려요. 집과 나무, 골목 등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그려요. 완성된 우리 동네 그림지도예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땅 2 | 예술경험 | 유아 | 지도에는 세상이 담겨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짚신 여러 켤레를 봇짐에 달고, 높고 험한 산을 넘어, 허허벌판과 바닷길을 건너 한달 두달 여행을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하루 안에 어디든지 갈 수가 있지요. 이처럼 여행을 하는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잊지 않고 꼭 챙기는 것이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예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지도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알아볼 거예요. 삼국 시대 지도에서부터 수백 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과학적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까지 모두 살펴볼 수 있어요. 또한 지도에는 어떤 것들이 기록되어 있는지, 산과 집, 학교는 어떤 기호로 나타냈는지도 알아보고, 옛 지도와 오늘날 지도의 공통점과 차이점도 비교해 볼 거예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가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땅을 소중하게 여겼던 조상들의 풍수 사상과 명당에 자리 잡은 건물이나 궁궐도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뛰어난 과학 기술도 없었던 시대에 정교한 지도를 남긴 조상들의 솜씨와 지혜로움에 감탄을 하게 될 거예요. 우리나라의 지형. 우리나라의 지형은 북쪽과 동쪽은 높은 반면 서쪽과 남쪽은 낮아요. 그래서 북부 지방은 기온이 아주 낮지만, 남부 지방으로 갈수록 기온이 높아지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많이 있어요. 강은 사람들의 식수가 되고,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가 되고, 농작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농업용수가 된답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 대간은 우리나라를 든든히 받쳐 주고 있어요. 백두 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자, 한민족의 기반이 되는 산줄기예요. 산과 물이 어우러진 가운데 우리 조상들은 마을을 이루어 대대손손 살아가고 있답니다. 비단에 수놓은 듯 아름다운 강산. 우리나라에는 백두 대간을 비롯해서 아름다운 산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땅을 비옥하게 하는 강이 흐른답니다. 그 모습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워 ‘금수강산’이라고 부르지요. 민족의 백두 대간. 백두 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우리 땅의 골격을 이루며 이어 온 큰 산줄기예요.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 조상이 한반도의 자연을 이해하는 주요한 사상이었어요.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지리서를 쓰고 지도를 만들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은? 우리나라는 산세가 복잡하고, 강이 무척 많아요. 우리나라의 강은 모두 5,399개나 되지요.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을 합쳐 가장 긴 강은 무엇일까요? 바로 압록강이에요. 압록강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가 무려 803킬로미터나 된답니다. 두만강은 548킬로미터, 낙동강은 506킬로미터, 한강은 481킬로미터입니다. 민족의 젖줄, 강. 강은 농수뿐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식수를 제공하기 때문에 나라의 도읍이나 집터를 정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들이었어요. 우리 조상이 처음 정착한 곳도 강가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곳도 언제나 강가였어요. 그래서 강을 일컬어 우리나라를 세우고, 문화를 꽃피우게 한 ‘민족의 젖줄’이라고 한답니다. 수자원과 농작물이 풍부한 우리나라. 강은 산과 들 사이를 흐르면서 땅의 모양을 바꾸거나 부드러운 흙을 쓸고 내려와 새로운 땅을 만들어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낮고 평평한 들판을 평야라고 합니다. 산 사이사이에 형성된 평야에는 밭과 과수원, 목장을 일구어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고, 하천의 하류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에는 논을 만들어 대규모 벼농사를 지어요. 또한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고,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해역에 조경 수역이 형성되어 있어요. 갯벌은 바다를 정화시켜 주고 조경 수역에서는 일 년 내내 풍부한 물고기가 잡힌답니다. 삼 면을 둘러싼 병풍, 바다. 우리나라는 삼 면이 동해, 서해, 남해로 둘러싸인 반도예요. 삼 면을 둘러싼 병풍 같은 바다는 자원의 공급원일 뿐만 아니라 교통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답니다. 물고기들의 천국, 동해. 동해는 물의 깊이가 평균 1,700미터 이상으로 배가 드나들기 쉬워요. 밀물과 썰물의 차이와 염분의 농도가 높으며 난류와 한류가 만나 좋은 어장을 만들기 때문에 어업이 발달했어요. 동해안에는 산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 파도에 의해 깎인 절벽과 모래사장이 많고, 빠른 물살 때문에 계단 모양의 지형이 발달했어요. 그래서 동해안의 해안선은 대체로 모양새가 매끄럽답니다. 갯벌이 있는 서해. 서해는 수심이 평균 44미터인 얕은 바다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배가 드나들기 불편해요. 또한 해안선이 복잡하고 반도와 만이 많이 있어요. 썰물에는 넓은 갯벌이 있어 많은 조개와 굴이 생산되지요. 서해안은 앞으로 다양한 해산물과 풍부한 지하자원의 개발로 기대가 크답니다. 남해의 수심은 평균 101미터가 높고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하여 반도와 만, 섬이 많아요. 사계절 따뜻한 난류가 흘러 고기잡이와 양식업이 발달했어요. 지방마다 사는 모습이 달라요. 우리나라는 크게 북부 지방, 중부 지방, 남부 지방으로 나눌 수 있어요. 지방마다 기후와 지형이 달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다양하지요. 남한은 서울특별시와 6개의 광역시(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울산), 9개의 도(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도)로 이루어져 있어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구석구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아요. 우리나라 땅의 크기는 세계에서 몇 등일까? 북부 지방, 중부 지방, 남부 지방을 합친 우리나라 땅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한 나라의 땅 크기 즉, 영역은 국민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을 말해요. 그래서 국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땅 ‘영토’와 그 근처의 바다 ‘영해’, 영토와 영해 위의 하늘 ‘영공’이 모두 포함된답니다. 땅의 크기로 볼 때 우리나라는 220개 나라 중에서 80위랍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는 러시아(우리 땅의 77배), 캐나다(45배), 미국(44배), 중국(43배) 순이에요. 산골짜기마다 자리한 밭농사 지역. 북부 지방은 산이 많고, 겨울이 길고 추우며, 강수량이 적어서 벼농사를 짓는 데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옥수수, 조, 밀, 콩, 감자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발달했어요. 밭이 경지의 60% 이상 되는 곳은 제주도와 산간 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있어요. 기름진 평야가 있는 논농사 지역. 중부 지방은 든든한 등줄기인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지형이에요. 넓고 기름진 평야와 길고 풍부한 강 덕분에 오래전부터 김포, 여주, 이천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발달했어요. 논이 경지의 60% 이상 차지하는 지역으로 남서부의 평야 지대가 이에 속해요. 우리나라의 곡창 지대인 서해안 간척지. 서해안의 대규모 간척지는 청정 해역의 퇴적 유기물과 무기질이 풍부해서 벼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곳이에요. 호남평야(만경강, 동진강)와 나주평야(영산강)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벼농사 지역이랍니다. 우리 지방 특산물이 최고. 지역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생산되는 농작물이 달라요. 그 이유는 기후나 지형 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지요. 평야 지역에서는 주로 벼농사를 하고, 산과 가까운 산간 지역에서는 계단식 논이나 고랭지 농업이 발달하고, 산나물과 버섯, 꿀, 인삼 등의 특용 작물이 생산된답니다. 또한 해안 지역에서는 물고기나 해산물이 풍부하게 나고, 산촌에서는 밭농사가 발달했어요. 서늘한 곳에서는 고랭지 농업. 고랭지 농업이란, 높은 고원이나 산지 같은 서늘한 곳에서 하는 농업을 말해요. 감자, 메밀의 잡곡류나 배추 따위의 채소를 심어 가꾼답니다. 우리나라에는 대관령 일대나 진안, 고원 등지의 고랭지 농업이 가장 대표적이에요. 고랭지 농업은 여름이 짧기 때문에 감자, 무, 배추, 당근과 같이 재배 기간이 짧은 작물을 기른답니다. 우리나라의 기후.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특징이 아주 뚜렷해요. 봄에는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꽃샘추위가 오고 가뭄이 들기도 해요.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리는 장마기를 거쳐 북태평양 기단이 지배하는 습하고 무더운 기후가 나타나요. 가을에는 대체로 공기가 건조해지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적어 하늘이 아주 높게 보이지요. 또한 동해안을 제외한 곳곳에서 안개가 자주 나타나요. 겨울은 7일을 주기로 3일은 춥고 4일은 따뜻한 ‘삼한 사온’이 가장 큰 특징이에요. 게다가 매섭고 차가운 한파가 불어 닥쳐 온 세상을 꽁꽁 얼려 놓지요. 이렇듯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기온과 바람, 강우량이 뚜렷하게 바뀐답니다. 그래서 주로 농사를 짓던 우리 조상들은 기후의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어요. 계절마다 하는 일이 달라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일 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24절기로 나누었어요. 그리고 24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을 정해 놓았답니다. 24절기는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는 ‘농사 달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절기와 음식.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절기 때마다 계절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어요. 입춘 무렵에는 나물을 캐서 먹고, 삼짇날에는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을 부쳐 먹었지요. 또한 한식에는 차가운 음식을 즐겼는데, 주로 쑥떡, 쑥탕 등을 만들어 먹었어요. 복날에는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삼계탕을, 동지에는 팥죽을 먹었답니다. 입춘 양력으로 2월 4일경이에요. 이때에는 집 안의 기둥이나 벽에 ‘입춘대길’이라는 글귀를 붙여 새로운 한 해에도 행운이 가득하길 빌었어요. 우수와 경칩 우수는 양력으로 2월 18일경이며, 경칩은 3월 5일경이에요. 경칩에 벽을 새로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은 일부러 그 날짜에 벽을 바르기도 하고, 보리 싹의 상태를 보고 일 년 농사를 점치기도 했답니다. 춘분 양력으로 3월 21일경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져요. 춘분 이후로 점점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며, 농촌에서는 논밭을 처음으로 갈아준답니다. 입하 양력으로 5월 5일경이에요. 못자리판에서는 모내기를 해도 하기 좋을 만큼 모가 자라 있어요. 논과 밭의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기도 해요. 소만과 망종 소만은 양력으로 5월 21일경, 망종은 6월 6일경이에요. 이 시기에는 모내기와 김매기를 시작합니다. 24절기와 속담.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24절기를 잊지 않고 명심하기 위해 24절기와 관련된 속담들도 많아요. 24절기와 관련된 속담들을 봄부터 겨울까지 살펴보아요.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 아무리 춥던 날씨도 우수, 경칩이 지나면 풀린다는 뜻이에요.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 곡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에요. 칠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못 먹어도 팔월 백로에 패지 않는 벼는 먹는다. 팔월에 백로가 드는 해는 절기가 늦어진다는 말이에요. 하지를 지내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 하지 후에는 논에 물 대는 것이 농가의 주요한 일임을 나타내요. 동지때 개 딸기. 추운 동지에 개 딸기가 있을 리 만무하니, 도저히 얻을 수 없음을 뜻해요. 하지 양력으로 6월 21일경이에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이랍니다. 남쪽 평야 지역에서는 모내기를 끝내고, 산간 지역에서는 햇감자를 수확해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어요. 소서와 대서 소서는 양력으로 7월 7일경, 대서는 7월 24일경이에요.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지요. 여름철 과일이 가장 맛있는 시기이기도 해요. 입추 양력으로 8월 8일경이에요. 가을이 시작되는 날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철에 김장을 담 그기 위해 무와 배추를 심어둬요. 처서와 백로 처서는 양력으로 8월 23일경, 백로는 양력으로 9월 8일경이에요. 처서에는 논두렁이나 묘소에 풀을 깎는답니다. 백로에는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아침저녁으로 풀잎에 이슬이 맺혀요. 추분 양력으로 9월 23일경이에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랍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일군 곡식을 거둬들이고, 고추를 말려 두는 등 겨우 내내 먹을 곡물과 야채를 준비해 둬요. 한로와 상강 한로는 양력으로 10월 8일경, 상강은 10월 23일경이에요. 추수를 끝내고 타작을 시작하면서 겨울 준비에 들어가요. 입동 양력으로 11월 8일경이에요. 겨울을 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음식인 김장을 담가요. 소설과 대설 소설은 양력으로 11월 22일경, 대설은 12월 8일경이에요. 냇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대설에는 눈이 많이 와요. 동지 양력으로 12월 22일경이에요. 팥죽을 쑤어 먹는 날이기도 하지요.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이 집안의 나쁜 악귀를 쫓아낸다고 믿었답니다. 우리의 옛 지도는 삼국 시대의 지도에서부터 수백 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과학적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까지 모두 조상들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랍니다. 그런데 옛 지도에는 어떤 것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과 집, 학교는 어떤 기호로 나타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옛 지도와 오늘날 지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나라 지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배우게 되고 우리 땅이 더욱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질 거예요. 옛 지도와 옛 지도를 만드는 도구들.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선비와 배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물건을 팔러 가는 상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바로 지도예요. 이렇게 중요한 지도는 무엇으로 만들까요? 그리고 옛 지도는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옛 지도에 관한 궁금한 점들을 하나하나 알아보아요. 다양한 오늘날 지도. 지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우리는 길을 찾을 때만 지도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도를 통해 다양한 정보도 알 수 있답니다. 세계의 나라를 찾기 위해서 보는 지도가 다르고, 중요한 문화 유적을 찾아 가기 위해 보는 지도가 다르답니다. 다양한 쓰임만큼 세분화되고 과학화된 오늘날의 지도를 살펴보아요. 재미있는 우리나라 지형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백두 대간에서 뻗어 내린 아름다운 산과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강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북쪽 지방은 지형이 높고 기온이 낮은 반면, 남쪽 지방은 지형이 완만하고 기온이 높지요. 흥미로운 우리나라의 지리와 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공부해 보아요. 조선방역지도 조선방역지도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전도예요. 수선 전도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 서울 지도예요. 도봉산,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잘 표현되어 있으며 도성 내부에 흐르는 청계천까지도 잘 나타나 있어요. 대동여지전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축소해서 만든 지도예요. 성좌판 둥근 놋쇠 판 앞뒤에 별자리를 표시하여 쉽게 별을 찾아볼 수 있게 만든 장치예요. 윤도 ‘윤도’는 무덤 자리나 집터를 정할 때 풍수사나 지관이 사용하던 나침반이에요. 휴대용 나침반 선추에 달린 나침반으로 둥근 향나무 상자에 사각형의 나침반이 붙어 있어요. 한국 전도 우리나라의 경계와 지명을 자세히 나타낸 지도예요. 세계 전도 오대양 육대주가 나타난 세계전도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과 주요 도시, 주요 산맥과 강, 평원까지 나타나 있고 경선과 위선도 나타나 있어요. 관광 안내도 관광 지도는 주요 볼거리, 가는 길, 관광지 등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교통 안내도 교통 지도는 도로망, 길, 철도 등을 나타낸 지도로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고장을 여행할 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수산업 지도 수산업 지도는 각 지역에서 잡히는 주요 물고기 종류와 연간 어획량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동해 동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와 염분의 농도가 높으며 난류와 한류가 만나 좋은 어장을 만들어 어업이 발달했어요. 모래사장이 풍부하고 물살이 빨라서 해수욕장이 많아요. 서해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해안선이 복잡해서 반도와 만이 많아요. 다양한 해산물과 풍부한 지하자원 개발이 기대되는 해안이에요. 밭농사 산이 많고, 겨울이 길고 추우며, 일년 내내 강수량이 적은 북부 지방에서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요. 대신 옥수수, 조, 밀, 콩, 감자 등 밭농사가 발달했어요. 논농사 넓고 기름진 평야와 길고 풍부한 강이 있는 중부 지방은 벼농사를 짓기에 알맞아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지형이에요. 간척지 서해안의 대규모 간척지는 청정 해역의 퇴적 유기물과 무기질이 풍부해서 벼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곳이에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옷 1 | 예술경험 | 유아 |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 아주 먼 옛날에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옛날에는 풀과 나뭇잎, 산에서 자라는 칡이나 삼,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옷을 입었어요. 점차 기술이 발달하면서 식물의 껍질이나 누에고치, 목화에서 실을 얻어 옷감을 만들게 되었어요. 식물의 껍질에서 얻은 것이 바로 모시와 삼베이고, 누에고치에서 얻은 것이 비단이에요. 그리고 보송보송 목화에서 얻은 것이 바로 무명이랍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옷감을 이용해서 만든 옷이 바로 한복이에요. 한복은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옷을 말하는 데 지금의 한복은 예전의 한복과 많이 다른 모습이에요. 저고리도 긴 것부터 짧은 것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었어요. 치마도 허리에 걸쳐 입는 것이 많았지요. 그리고 치마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답니다. 조선 시대에 와서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기본 옷차림이 자리 잡게 되었지요. 그리고 저고리도 임진왜란 이후 짧아져서 지금의 한복 모양으로 완성되었답니다. 요즘은 실용성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멋을 살린 한복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한복은 사선과 곡선의 아름다움과 오방색을 사용해서 화려하고 품위가 있는 옷이에요. 세계인도 인정한 아름다운 옷, 한복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랍니다. 우리나라 옷에도 우리 문화와 역사가 가득 담겨 있어요. 우리 옷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잘 나타나 있지요. 고구려 시대의 저고리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고 남녀 모두 비슷했어요. 백제나 신라도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에 띠를 둘렀어요.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바지를 입었지요. 통일 신라 시대에는 주로 신라의 옷을 기본으로 백제나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인 옷도 입었어요. 고려 시대에는 몽고 복식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고려 후기부터 짧아지기 시작한 저고리의 길이는 조선 시대 때 더욱 짧아졌고, 남자들은 갓을 쓰고 도포도 입게 되었어요. 개화기는 한복과 양복을 함께 입었던 시기로 남자들의 겉옷은 두루마기 한 가지로 통일되었고, 여자들은 쓰개용의 장옷 대신 방한용 겉옷 두루마기를 입기도 했어요. 그리고 같은 색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것도 유행했답니다. 어떤 옷을 입었을까? 삼국 시대에는 남녀 모두 선 장식이 있는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맸어요. 깃과 도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돌린 옷이 많았지요. 바지는 양복바지와 비슷한 것, 가랑이가 넓은 것, 잠방이와 같은 것 등 종류가 많았고, 치마는 길이가 길고 끝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었어요. 두루마기는 무릎 아래로 내려갈 만큼 길고, 저고리와 같이 선을 둘렀답니다. 백제의 왕과 왕비가 입었던 옷 백제의 왕과 왕비의 옷을 재현한 한복이에요. 당시에는 색으로 신분을 구별하기도 했는데, 왕과 왕비의 옷은 주로 붉은색과 자주색을 이용했어요. 양직공도 중 백제 사신 양직공도는 중국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 중국을 찾은 외국 사신과 그 나라 풍습을 소개한 화첩이에요. 각저총에 그려진 고구려 시대 한복 각저총에 그려진 시종들의 옷차림을 보면 머리에 모자를 쓰고 바지 위에 치마를 입거나 저고리 위에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고 있어요. 저고리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길이였고, 귀족 옷의소매가 평민 옷보다 넓었어요. 각저총에 그려진 고구려 시대 한복을 재현한 옷이에요. 백제 사신복 백제 사신은 소매가 넓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에 대님을 매지 않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어요.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한복 고구려 무영총 벽화에 그려진 옷을 재현해서 만든 한복이에요. 여자들도 바지를 입고 바지 위에 주름이 많이 잡힌 치마를 입었답니다. 앗, 여자들도 바지를 입었다니, 놀라운 일이군! 다양하게 발전한 우리 옷. 통일 신라 시대 옷의 기본형은 삼국 시대의 고유 복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당나라의 복식 제도를 일부 받아들여 다양하게 발전했어요. 그래서 이 무렵부터 전통 예복으로 활옷, 원삼, 당의를 입기 시작했답니다. 고려 시대에도 몽고의 침략으로 의복과 생활에 몽고의 풍습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고려 시대 옷의 기본형은 삼국 시대의 것을 계승하면서 중국과 몽고의 영향으로 더욱 다양하게 발전해 나갔답니다. 토우(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 귀부인 옷. 통일 신라 시대에는 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겉옷을 입었는데,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여자 옷은 치마를 길게 하여 대부분 바지가 보이지 않았답니다. 고려 시대 왕과 왕비의 옷. 고려 시대 왕과 왕비가 입었던 옷으로 소매가 넓고 화려하며 임금을 상징하는 용을 수놓았어요. 고려 시대의 옷은 점차 몽고나 송나라, 명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양하게 발전했어요. 특히 고려 시대의 왕과 관리들이 입는 관복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고려 시대 옷이 그려진 고분 벽화. 경기도 파주군 서곡리에 있는 고려 시대 고분 벽화를 보면 고려 시대에 입었던 옷을 짐작할 수 있어요. 붉은색의 모자를 쓰고, 품과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으며, 가슴부터 아래까지 붉은색 띠가 길게 늘어져 있어요. 고려 시대 귀부인 옷. 고려 시대 귀부인의 복식은 저고리의 길이가 많이 짧아져서 지금의 한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에요. 밀양 고법리 박익묘 벽화.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고려 시대 벽화예요. 이 벽화를 통해서 고려 시대의 머리 모양이나 저고리, 치마, 모자 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알 수 있어요. 고려 말에는 면화를 재배하게 되어 비단을 입기 어려웠던 서민들이 무명옷을 입으면서 의생활이 더욱 다양해졌어요. 왕과 왕비의 옷. 조선 시대는 유교의 예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별된 옷을 입었어요. 왕이 입었던 옷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수놓아져 있었어요. 왕비의 옷에도 용을 수놓았지요. 왕의 옷은 만나는 사람이나 의식의 중요성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어요. 중국의 사신이나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면류관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어요. 평상시에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답니다. 홍룡포. 왕이 평상시에 입었던 옷을 곤룡포라 하는데, 색에 따라 파란색을 청룡포, 노란색을 황룡포, 붉은색을 홍룡포라고 했어요. 홍룡포는 청룡포보다 소매가 더 넓고 깃도 더 많이 파여 있어요. 면복. 왕이 제사를 지낼 때나 즉위식, 또는 왕비를 맞이할 때 입었던 옷이에요. 면복에는 해, 달, 별 등의 무늬가 있는데, 모두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상징한다고 해요. 익선관. 왕이 평상복인 곤룡포를 입고 집무를 할 때에 쓰던 관으로, 매미의 날개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아침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의 청렴함과 검소함을 상징하는 익선관은 임금이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인 학문, 청렴, 검소, 신의를 뜻한다고 해요. 왕비의 평상복인 노의. 왕비의 평상복인 노의는 4품 이상의 부인이 입을 때는 예복이었어요. 노의는 신분에 따라 색이 달랐는데, 왕비는 붉은색의 노의에 금으로 수를 놓은 흉배를 달았어요. 4품 이상의 부인 예복일 경우에는 녹색 노의를 주로 입었지요. 노의는 조선 중기까지 입었는데, 원삼, 당의가 생기면서 거의 입지 않게 되었답니다. 곤룡포. 왕이 평소에 일을 할 때에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어요. 곤룡포는 용포라고도 하는데, 임금을 상징하는 용무늬를 수놓아 가슴, 등, 양어깨에 붙였어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당의. 당의는 당저고리, 당적삼, 당한삼이라고도 하는데, 저고리 위에 덧입던 것으로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다가 조선 후기부터 소례복으로 입었어요. 소례복으로 사용할 때에는 가슴 등 어깨에 흉배를 붙였어요. 그리고 왕비, 공주, 옹주가 입을 때는 꽃잎이나 박쥐 그림과 수 복 희 등의 글자를 어깨에서 소매 끝까지 금박으로 박았어요. 왕의 옷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무늬가 있어서 용포라고 하지. 한복의 완성. 조선 시대에는 삼국 시대부터 이어진 한복이 완성된 시기로 고려 말부터 점점 짧아진 저고리에 고름이 생겨 지금의 한복 모양으로 갖추어졌어요. 조선 시대 양반 남자는 대개 소매가 넓은 옷을 입은 후에 가슴에 띠를 둘렀어요. 여자는 열세 폭 겹치마를 입었고,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장옷을 입었지요. 평민 남자는 무명이나 삼베로 지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여자는 열두 폭 홑치마를 입고, 외출할 때에는 양반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녔어요. 서민들의 옷. 조선 시대 서민들은 주로 무명으로 된 옷을 입었는데, 무명은 세탁하거나 햇볕에 건조시키면 점점 흰색으로 변해요. 이렇게 서민들이 흰 무명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랍니다. 무명 저고리. 무명 바지. 무명 치마. 조선 시대 최고의 패션, 갓. 갓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모자의 하나로 실용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물건이에요. 흰 도포에 챙이 넓은 ‘하늘 같은’ 갓을 쓴 모습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멋이자 자부심이었지요. 갓은 처음에는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화려해지면서 장식품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갓끈을 말총으로 만들고 보석으로 장식하여 갓은 갈수록 비싸고 귀한 물건이 되었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양반들만 쓸 수 있게 되었고, 갓을 쓴 사람 은 양반으로 대접받게 되었답니다. 관복. 문관복과 무관복은 관리들이 입던 관복으로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려 있어요. 흉배는 왕족이 사용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고, 기린, 학, 호랑이, 해치 등의 문양을 품계에 따라 달리 사용했어요. 문관복에는 학이, 무관복에는 호랑이 흉배가 달려 있어요. 처음에는 가슴을 덮을 정도로 컸지만 점점 작아졌어요. 두루마기. 남자들이 입었던 대표적인 외투로 개화기 때는 남자들의 외투가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었어요. 외투는 추위를 막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의식을 치르거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입었어요. 사규삼. 관례 때에 입던 예복으로 깃과 도련에 검은색 깃을 두르고 오래 살거나 복을 받으라는 글자로 금박을 한 옷이에요. 답호. 소매가 없는 남자 한복으로 관복 안에 입거나 윗옷으로 입었어요. 조선 시대 양반 여자 한복. 조선 초기에 입었던 한복으로 지금보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었어요.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식품. 옛날에는 머리숱이 많은 여자가 미인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드리거나 결혼한 여자의 올린 머리가 풍성할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했지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할수록 의복뿐만 아니라 머리치장과 장식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떨잠. 어여머리는 크게 땋아 올린 의식용 머리로 궁중이나 양반집 부인들이 대례복을 착용할 때 하는 머리예요. 가르마 위에 어염족두리를 얹고 비녀와 붉은 댕기로 고정시키고, 떨잠을 꽂아 화려하게 장식했지요. 떨잠은 동그란 모양이나 나비 모양 등 다양했는데, 어여머리나 큰머리에 꽂아 떨리는 율동감을 주어 머리를 한층 더 아름답게 했어요. 뒤꽂이. 쪽찐 머리 위아래로 꽂는 것으로 아래쪽이 뾰족한 모양이에요. 재료나 장식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며, 신분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어요. 다양한 머리 장식품. 옛날에 처녀와 총각은 머리를 이마 한가운데에서 좌우로 가른 다음 양쪽 귀 위에서 귀밑머리를 땋아 뒤로 모았어요. 그리고 다시 세 가닥으로 나눈 뒤에 서로 엇갈려 땋아 하나로 엮어서 늘어뜨린 뒤에 머리 끝에 댕기를 맸지요. 그런 뒤에 결혼한 여자는 머리를 얹은 다음 비녀를 꽂고, 남자는 상투를 틀었어요. 이처럼 머리를 묶는 댕기와 올린 머리에 사용하던 장식품의 종류가 아주 많았답니다. 곱고 편리한 주머니.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돈이나 소지품을 넣기 위해서 주머니를 따로 들고 다녔어요. 주머니는 실용성을 갖춘 아름다운 장식품이랍니다. 오색실 고운 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 허리 등에 차는 장신구로 한복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줘요. 노리개는 궁중을 비롯해서 양반이나 일반 서민들도 널리 사용한 것으로 장식뿐 아니라 장수나 복을 비는 뜻도 담겨 있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락지. 지환이라고도 부르는 가락지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예요. 한 짝만 끼는 것을 반지라고 하고, 쌍으로 끼는 것을 가락지라고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반지보다 가락지를 더 많이 끼었답니다. 족두리. 부인들이 의식을 갖추어 쓰던 모자로 영조, 정조 때 가체의 금지로 화관이나 족두리의 사용을 장려해서 자주 썼어요. 족두리를 화려하게 꾸민 화관은 주로 활옷과 당의를 입을 때나 일반 서민들은 혼례식 때 주로 사용했지요. 비녀. 비녀는 쪽찐 머리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장신구예요. 한쪽 끝이 뭉툭하여 빠지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 여러 가지 재료로 아름다운 장식을 했어요. 재료에 따라 금비녀, 은비녀, 백동 비녀, 진주 비녀, 옥비녀 등이 있으며, 모양에 따라 봉잠, 용잠, 원앙잠, 국화잠 등이 있답니다. 무엇을 신었을까? 신발은 옷과 함께 우리 몸을 보호해 주는 물건이에요. 겨울에는 발을 따뜻하게 해 주고 비가 올 때는 발이 젖지 않도록 해 주지요. 옛날에는 신발이 옷과 함께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어요. 가죽으로 만든 갖신은 높은 지위의 귀족과 양반만이 신을 수 있었어요. 갖신의 화려한 장식과 모양은 당시 양반들의 부유한 생활을 잘 나타내 준답니다. 반대로 짚신은 소박하고 꾸밈없는 평민들의 삶을 잘 보여 주지요. 우리 조상이 아주 먼 옛날부터 신었던 신발에는 ‘화’와 ‘이’가 있어요. ‘화’는 주로 북쪽 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신던 목이 긴 신발이고, 짚신이나 나막신, 목이 짧은 가죽신인 ‘이’는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신던 신발이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남북의 기후대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계절에 맞게 남쪽과 북쪽에 사는 사람들 모두 화와 이를 번갈아 신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화와 이는 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 뿐 그대로 전해졌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재료와 장식이 더욱 다양해졌지요. 근대에 들어서자 개화 정책으로 양복과 함께 서양 신발인 구두를 신게 되었어요. 오늘날에는 디자인뿐 아니라 건강을 생각한 신발이나 스포츠용 신발 등 다양한 종류의 신발이 나오고 있답니다. 다양한 종류의 신발. 신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 신발은 왕족이나 양반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된 신을 신었고, 일반 백성들은 짚신이나 목이 없는 가죽신을 신었어요.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신의 재료가 더욱 다양해져서 가죽, 풀, 마, 놋쇠, 종이, 나무 등으로 만들었지요. 적석. 임금이 신던 붉은색의 가죽신이에요. 나막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소나무, 오동나무 등을 통으로 깎아 만들었어요. 굽이 있기 때문에 비오는 날 발에 물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당혜. 신의 앞 코와 뒤꿈치에 당초무늬를 새겨 넣은 당혜는 고무신과 모양이 비슷하며, 양반집 부녀자들이 신었어요. 옛날에도 양말이 있었을까? 옛날 사람들은 양말이 아니라 버선을 신었어요. 궁중에서는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 비단으로 버선을 만들어 신었고, 관리나 평민들은 흰색 광목이나 무명으로 만든 버선을 신었어요. 겨울에는 따뜻한 누비버선이나 소가죽으로 만든 가죽 버선을 신기도 했지요. 버선의 수눅은 버선코에서 발등을 타고 오르는 중앙선으로 수눅이 안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신어야 바르게 신는 것이랍니다. 버선. 제혜. 제혜는 궁중 제사 때 신었던 검은 가죽신이에요. 고구려 무용총 벽화.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 그림을 보면 고구려 시대 때 신었던 신발 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어요. 벽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시대에는 굽이 낮은 신을 신었어요. 목화. 관복을 입을 때는 목이 긴 목화를 신었어요. 태사혜. 높이가 낮은 신의 한 종류인 태사혜는 주로 남자가 신었어요. 짚신. 짚을 엮어 만든 신발로 삼국 시대부터 백성들의 신발로 이용되었어요. 짚 대신 삼을 촘촘히 엮어 만든 신은 ‘미투리’라고 하여 짚신보다 귀하게 여겼지요. 혼례는 가장 경사스럽고 축복받는 결혼식을 말하지요. 상례는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고 탈상하기까지의 의식이에요. 제례는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의식으로 돌아가신 날, 명절날, 묘를 찾는 날 등에 지내던 제사를 말한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마음만큼 형식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의식에 맞는 절차와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결혼식을 할 때나 제사를 지낼 때 예법에 맞는 옷을 입었지요. 우리 조상들은 혼례를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이 만나는 신성한 의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부를 뜻하는 음과 신랑을 뜻하는 양이 만나 우주가 이루어지듯이, 혼례를 올리는 시간도 해가 저물고 달이 뜨는 시간에 맞춰 올렸어요. 그리고 혼례식 때에는 일반 서민들도 양반들이 입던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답니다. 아이의 돌복으로 입던 색동저고리에는 장수와 부귀, 행복을 담았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부모를 죽게 한 죄인이 좋은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뜻으로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어른이 되는 혼례.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올렸어요. 초례상 앞에서 신랑 신부가 절을 하고 합근 주를 마시면서 부부가 되었음을 알렸지요. 그리고 혼례 때에는 일반 서민들도 관리들만 입을 수 있었던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답니다. 늠름하고 씩씩한 신랑 옷. 신랑이 입은 예복은 흉배가 달린 푸른색 관복으로 허리에는 각대를 했어요.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목이 긴 목화를 신었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신부 옷. 신부는 머리에 화관을 쓰고 초록색 원삼과 활옷, 앞 댕기, 스란치마 등을 입었어요. 초록색 원삼을 입기 전에 붉은 치마에 노랑 또는 연두저고리를 입어요. 붉은 치마에는 자손과 가문이 불처럼 일어나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 원삼을 입은 신부. 초례상. 혼례를 지낼 때 베풀어 놓는 큰 상을 말해요. 나무 기러기. 신랑이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뜻으로 신부 어머니에게 드리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예요. 신부 집에 도착한 신랑이 붉은색 보자기를 깐 상 위에 기러기를 놓고 절을 하지요. 기러기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짝에게 신의를 지킨다고 해요. 그래서 나무나 종이로 기러기 모양을 만들고 곱게 색칠했답니다. 화관. 화려하게 꾸민 족두리로 검은색 비단에 아름다운 수를 놓고 나비나 학 모양의 장식을 달았어요. 화관은 양옆의 용잠으로 머리에 잘 붙들어 달았어요. 사모. 검은색의 얇고 성긴 비단이나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실과 말총으로 만든 모자예요. 양쪽에 날개를 달아 혼례 때 신랑이 썼어요. 용잠. 다듬어 틀어 올린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꽂는 큰 비녀로 앞 댕기를 감아 장식해요. 용 모양으로 화려하게 만든 용잠은 혼례 때에 서민들도 꽂을 수 있었어요. 앞 댕기. 앞 댕기는 큰 비녀 양쪽을 감은 후, 앞쪽으로 드리우는 댕기예요. 활옷. 저고리와 금박 무늬가 있는 스란치마 위에 입는 혼례복이에요. 원래는 상류 계급에서 특별한 날 입는 옷이지만 서민의 혼례 옷으로도 널리 쓰였답니다. 꽃신. 여자들이 신는 신으로 매화, 나비 등을 수놓은 비단을 둘러 아름답게 꾸몄어요. 각대. 관복 위로 허리에 두르던 띠로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어요. 관복(단령). 원래는 관리들이 나라에서 일할 때 입던 예복으로 일반 백성들도 혼례 때에는 입을 수 있었어요. 목화.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가죽신으로 바닥은 나무로 만들고 목은 가죽이나 융으로 만들었어요. 복을 받는 옷, 돌복. 아이가 첫돌을 맞으면 돌잔치를 여는 데, 이때 남자 아이는 까치두루마기에 전복을 입었어요. 여자 아이는 다홍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고 당의를 덧입었지요. 돌잔치에 입는 옷들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장수와 부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답니다. 남자 아이 돌복. 머리에는 호건을 쓰고 까치두루마기 위에 길상무늬를 수놓은 전복을 입었어요. 호건. 복건의 한 종류인 호건은 아이들이 머리에 쓰던 것으로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덕담을 새긴 글을 금박으로 박고 총명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눈과 귀를 모방하여 만든 복건이에요. 까치두루마기와 전복. 돌 때부터 5~6세까지 입었던 까치두루마기는 소매를 색동으로 하고 깃과 고름은 청색으로 했어요. 전복은 남색 길에 금박을 하거나 길상무늬를 수놓은 돌띠를 달아 돌뿐 아니라 명절날에도 두루마기 위에 덧입었어요. 깃과 소매가 없고 옆과 뒤가 트인 옷이에요. 돌상에는 무엇을 놓았을까요? 돌상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실타래와 국수, 행복을 기원하는 수수팥떡과 붉은 대추, 백설기를 놓았어요. 그리고 장래에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미리 점쳐 보는 돈, 책, 붓, 활, 실패, 자 등도 올려놓았어요. 타래버선. 오목버선이라고도 하는 타래버선은 솜을 넣어 누빈 버선이에요. 양 볼에 수를 놓았고 버선코에는 색실로 술을 달아서 돌 때에 돌복과 함께 신겼어요. 굴레. 아이들이 장식으로 쓰던 쓰개로 돌을 맞이한 아이가 많이 써서 돌모자라고도 해요. 여자 아이 돌복. 아이들 옷은 어른옷과 같으나 작게 만든 것으로 여자 아이는 돌이 되면 다홍치마와 노랑 저고리에 색동을 넣은 옷을 주로 입었어요.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 돌이나 명절에는 주로 색동저고리를 입고, 다홍색의 치마를 입었어요. 제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사진 찍어 주세요. 김치! 책. 활. 돈. 붓. 실패. 마음을 깨끗이 하는 옷. 조선 시대에는 효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부모가 죽으면 3년 동안 산소 옆에 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는데, 이것에는 부모를 죽게 한 죄인이 좋은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일반인이 제사 때 입은 옷. 장례는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들이 슬픈 마음을 나타내며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묘를 쓸 때까지의 예절을 말해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상복을 입었는데, 돌아가신 분과 가족 관계에 따라 상복의 종류가 달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대나무 지팡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었어요. 종묘 대제. 조선 역대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에서 지내던 제례로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왕을 비롯한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과 악사 등 약 700여 명이 참가한 큰 제사랍니다. 왕과 신하들은 모두 격식에 맞는 옷을 입었어요. 제례 때 입는 제복. 종묘에서 지내는 제례는 다른 제사들과 같이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지냈어요. 왕과 신하 귀족들은 제사 의례에 맞는 옷과 모자를 갖추고 제사에 참여했는데, 제복을 입고 손에는 홀을 들었어요. 화려한 꽃상여. 상여는 죽은 사람이 타고 가는 것으로 장식물을 달아 아주 화려하게 꾸며서 꽃상여라고도 하지요. 용과 봉황, 귀면과 저승사자, 호랑이, 새, 십장생 등으로 꾸민 상여는 4층 누각식 건물로 각 층마다 목각 인형과 십이지 신상이 배치되어 있어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옷 2 | 예술경험 | 유아 |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 아주 먼 옛날에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옛날에는 풀과 나뭇잎, 산에서 자라는 칡이나 삼,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옷을 입었어요. 점차 기술이 발달하면서 식물의 껍질이나 누에고치, 목화에서 실을 얻어 옷감을 만들게 되었어요. 식물의 껍질에서 얻은 것이 바로 모시와 삼베이고, 누에고치에서 얻은 것이 비단이에요. 그리고 보송보송 목화에서 얻은 것이 바로 무명이랍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옷감을 이용해서 만든 옷이 바로 한복이에요. 한복은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옷을 말하는 데 지금의 한복은 예전의 한복과 많이 다른 모습이에요. 저고리도 긴 것부터 짧은 것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었어요. 치마도 허리에 걸쳐 입는 것이 많았지요. 그리고 치마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답니다. 조선 시대에 와서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기본 옷차림이 자리 잡게 되었지요. 그리고 저고리도 임진왜란 이후 짧아져서 지금의 한복 모양으로 완성되었답니다. 요즘은 실용성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멋을 살린 한복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한복은 사선과 곡선의 아름다움과 오방색을 사용해서 화려하고 품위가 있는 옷이에요. 세계인도 인정한 아름다운 옷, 한복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랍니다. 아름다운 우리 옷. 전통과 역사가 담겨 있는 한복은 우리 조상의 정신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에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복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 오면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에요. 그리고 실용적인 면과 현대적인 멋을 살린 한복이 꾸준히 나오면서 요즘도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지요. 한복은 크게 예복과 평상복으로 구분되고 남녀에 따라서, 계절에 따라서, 그리고 성인용과 어린이용으로 나누어져요. 입는 방법과 순서에 맞게 입으면 맵시를 더욱 살릴 수 있는 한복은 좋은 점이 많은 옷이에요. 우선 색감과 선이 고와서 세계인도 한복의 아름다움에 놀라곤 하지요. 한복은 풍성하게 재단이 된 옷이어서 몸에 조이지 않아 건강에도 아주 좋은 옷이랍니다. 그리고 키만 비슷하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여유가 있고, 뚱뚱하거나 마른 사람의 체형도 보완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요. 마치 우리 민족의 품성을 닮은 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요즘 한복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서 한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을 널리 알리는 것이 우수한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이랍니다. 선이 고운 여자 한복.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복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저고리와 치마의 길이가 변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한복 저고리의 소매 선이나 버선코의 곡선은 아름다운 기와의 고운 선과 닮아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답니다. 종류가 다양한 여자 한복. 여자 한복은 남자 한복과 달리 저고리와 치마의 종류가 다양해요. 하지만 짧은 저고리와 긴치마가 여자 한복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랍니다. 장옷. 장옷은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쓰던 옷이에요. 초록색 바탕에 흰 끝동을 달았으며, 옷의 모양은 두루마기와 비슷하지만 겉깃이나 안깃을 좌우 대칭으로 똑같이 만들었어요. 장옷과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것으로 쓰개치마도 있었답니다. 선이 고운 여자 저고리. 저고리는 길, 소매, 섶, 깃, 동정, 고름이 갖추어진 옷으로 옛날에는 ‘유’라고 했어요. 저고리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세종 때부터 사용한 것이에요. 저고리의 길이는 처음에는 길었지만 점점 줄어들고, 허리띠 대신 고름이 생기고, 깃에 동정을 달아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여름에는 적삼, 깨끼저고리를 입었고, 겨울에는 솜저고리, 누비저고리 등을 입었어요. 모양에 따라서 민저고리, 삼회장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색동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어요. 바르게 입어야 맵시가 나요. 한복을 입을 때는 입는 방법과 순서를 잘 지켜서 입어야 해요. 그리고 속옷을 꼭 갖추어서 입고 저고리의 겉깃과 안깃을 잘 맞추어 입어야 해요. 또한 가능하면 버선을 신고 낮은 신발을 신는 것이 좋아요. 한복을 입은 다음에는 층계를 오르내릴 때 옷이 밟히지 않도록 하고, 속옷이 보이지 않도록 몸 가짐을 조심해야 한답니다. 여자 한복 입는 순서. 여자 한복을 입을 때에는 먼저 속바지를 입고 속치마를 입어요. 그리고 오른쪽 발에는 수눅이 오른쪽으로 오게 신고, 왼쪽 발에는 수눅이 왼쪽으로 오도록 버선을 신어요. 치마를 입고 앞에서 묶은 다음 저고리를 입어요. 한복을 맵시 있게 입으려면 저고리를 입기 전에 속저고리와 속적삼을 입는 것이 좋아요. 저고리를 입고 순서에 맞게 고름을 맨 다음 진동선을 정리해 주고 두루마기를 입으면 된답니다. 버선의 구조. 버선은 무명, 광목 등으로 만들어 발에 꿰어 신는 것으로 남녀 모두 신었어요. 버선은 버선코가 뾰족하여 위로 치켜졌고, 버선목에 비해 회목이 좁게 되어 있어요. 버선을 신을 때는 버선목의 바느질 눈이 오른쪽으로 된 것은 오른발에, 왼쪽으로 된 것은 왼발에 좌우를 구별해서 신었어요. 옷고름 매는 순서. 옷고름은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깃 끝과 그 맞은편에 하나씩 달아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한 헝겊 끈을 말하는데, 옷고름은 순서에 맞게 매어야 예쁘답니다. 짧은 고름은 위로, 긴 고름은 아래로 가도록 하여 한 번 매 줘요. 위쪽으로 뺀 고름을 사용해 삼각형 모양의 고리를 만들어요. 긴 고름으로 고를 내어 삼각형 안쪽으로 접어 넣어요. 고름의 아래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예쁘게 정돈해요. 여자 속옷의 종류. 여자 속옷은 상의와 하의로 구분되는데, 상의에는 속저고리, 속적삼 등이 있고 하의에는 속치마, 단속곳, 속속곳 등이 있어요. 재료는 주로 베나 삼베, 무명 등으로 만들었어요. 베로 만든 속옷은 약간 거친 느낌이고 모시는 올이 고와 시원한 것이 특징이지요. 속치마 속치마는 치마 안에 입는 속옷이에요. 속바지(고쟁이) 치마 안에 입던 속곳으로 속속곳 위에 입었는데, 허리끈이 달려 있어요. 여름에 입는 한 겹으로 만든 여자 속바지는 흔히 고쟁이라고 불렀어요. 속속곳 바지 밑에 입는 것으로 단속곳과 모양이 같아요. 단속곳보다 약간 작고 살에 닿는 속옷이어서 단속곳과 옷감을 다르게 했어요. 속저고리 여자들은 삼복더위를 제외하고는 저고리 밑에 반드시 속저고리를 입었어요. 속저고리는 보통 겹저고리로 하는데, 추울 때는 얇게 솜을 넣기도 했어요. 속적삼보다는 넉넉하게 하고 겹저고리보다는 약간 작게 만들었으며, 고름은 좁고 짤막하게 하여 앞깃 속으로 찔러 넣었어요. 적삼(속적삼) 한 겹으로 된 속옷을 말하는데, 형태는 저고리와 비슷하고 저고리보다 약간 작게 만들었어요. 예의와 멋을 갖춘 남자한복. 조선 시대 남자들은 옷을 통해서 자신의 멋과 취향을 표현하기도 했어요. 요즘에는 남자들의 겉옷이 두루마기 한 종류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외투의 종류만 해도 소창의, 대창의, 중치막, 도포 등 종류가 다양했어요. 고종 때 의복을 간소화하는 정책을 펴면서 다양한 종류의 남자 외투가 두루마기 한 가지만 입는 것으로 점차 변해 갔답니다. 배자 마고자와 비슷한 옷으로 소매가 없어요. 남녀가 같이 입기도 하고 속에 털을 넣어 겨울에 방한복으로도 입었답니다. 마고자 깃과 동정, 옷고름이 없는 옷으로 저고리와 조끼를 입은 위에 입는 옷이에요. 주로 방한용으로 많이 입었어요. 삼일유가 삼 일 동안 친척들과 시험 감독관에게 인사를 다니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특별한 날 입는옷, 과거 급제. 조선 시대는 과거에 급제하면 관리가 될 수 있어서 과거 급제는 가문의 영광이었어요.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면 ‘삼일유가’라고 해서 어사화를 꽂고 악대를 동반하여 삼 일 동안 일가 친척들과 시험 감독관에게 인사를 다녔답니다. 도포 외출할 때 꼭 갖추어 입었던 옷이에요. 답호 주로 철릭 위에 겉옷으로 입은 답호는 조선 후기에 관복의 특징적인 옷이 되었어요. 학창의 창의는 관리들이 평상복으로 입던 외투로 대창의는 소매가 넓고 소창의는 소매가 좁았어요. 학창의는 대창의처럼 소매가 넓은 옷이에요. 철릭 허리에 선을 넣은 것으로 상의와 하의를 이어서 만든 활동적인 옷이에요. 지금의 원피스와 비슷하지요?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입었던 옷이랍니다. 남자 한복은 어떻게 입을까요? 남자 한복은 여자 한복보다 종류가 많아서 입는 순서를 잘 알아야 해요. 먼저 속옷을 입고 바지를 입는데, 바지의 앞 중심에서 왼쪽으로 주름이 가도록 접어서 허리둘레를 조절해서 입어요. 그리고 저고리는 동정을 잘 맞추고, 저고리가 마고자의 소매 끝이나 도련 밑으로 보이지 않게 입어요. 그리고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를 꼭 갖추어 입는답니다. 남자 저고리가 여자 저고리보다 길고 옷고름은 남자 저고리가 더 짧아요. 그리고 옛날에는 바지를 '고의'라고 했어요. 그리고 신분에 따라 바지의 폭, 길이, 색 등을 구분해서 입었지요. 넉넉한 폭으로 넓게 만들어진 바지는 좌식 생활에 편리한 모양이지요. 옛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것과 넓은 것 두가지가 있었고, 대님으로 발목을 매게 되어 있었어요. 대님 매기. 대님은 한복을 입을 때 남자들이 바지를 입은 뒤에 가랑이의 끝 쪽을 접어서 발목을 졸라매는 끈을 말해요. 안쪽 복사뼈에 마루폭 솔기를 대요. 바짓부리를 발목 뒤로 돌려서 바깥쪽 복사뼈에 접은 선이 닳도록 해요. 발목에 대님을 대고 두 번 돌려 감아요. 안쪽 복사뼈에서 한번 묶은 뒤 나머지로 고를 만들어 매고 보기 좋게 정리해요. 남자 한복 입는 순서. 제일 먼저 속옷을 잘 갖추어 입어요. 왼쪽에 주름이 가도록 허리둘레를 잘 조절해서 바지를 입어요. 동정니를 잘 맞추어서 저고리를 입어요. 버선을 신고 대님을 순서에 맞게 잘 정리해서 묶어요.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어요. 저고리의 소매 끝이나 도련 밑이 보이지 않게 마고자를 입어요.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를 꼭 갖추어서 입어요. 철마다 고운 한복. 한복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옷감이나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입었어요. 여름에는 더운 여름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삼베와 모시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요. 몸과 옷 사이를 헐렁하게 하여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하고, 저고리는 고름 없이 매듭을 짓고, 바지는 가랑이가 짧은 잠방이를 입기도 했어요. 날이 아주 덥거나 농사를 지을 때에는 대님을 매지 않고 무릎까지 걷어 올려 입기도 했지요. 겨울에는 옷을 덧입거나 옷감 사이에 솜을 얇게 넣은 누빈 옷을 입어서 따뜻하게 지냈어요. 그리고 바지에 대님을 꼭 매고, 소매 끝에 토시를 끼어서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했어요. 저고리 위에 배자를 입거나 털가죽을 안에 댄 저고리를 입기도 했답니다. 특히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운 북부 지방 사람들은 털과 가죽을 이용한 옷을 많이 만들어서 입었어요. 바람 솔솔 시원한 여름. 여름에는 무엇보다도 시원한 것이 최고였어요. 그래서 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옷을 입었지요. 등등거리나 등토시 등을 한복 안에 입어 옷이 몸에 달라붙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하였어요. 밤에는 죽부인을 이용해서 이불 속에 바람이 잘 통하게 하거나 부채로 더위를 식히기도 했지요. 올이 가늘고 고운 세모시는 섬세할 뿐 아니라 청아한 멋이 있어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요. 세모시는 인체에 해가 없는 천연 섬유로 통풍이 잘 되고 흡수력이 좋으며 열 발산 속도가 빨라 시원해요. 또 색깔이 희고 가볍고 까칠까칠해서 여름철 옷감으로 으뜸이에요. 등토시 저고리 소매 안쪽에 끼워서 사용한 것으로 옷 사이로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시원하게 해 주었어요. 등등거리 등에 걸치는 것으로, 등나무의 가지를 구부려서 만들었어요. 옷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하고 바람을 잘 통하게 해 준답니다. 죽부인 대나무로 만들어 감촉이 차가워요. 더운 여름밤에 끼고 자면 이불 속에 공간이 생겨 바람이 잘 통하여 시원하지요.우리나라 부채의 특징. 우리나라 전통 부채는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의 멋을 살려 가볍고 아기자기해요. 닥나무 껍로 만든 한지는 질기고 가벼워서 부채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종이랍니다. 부채 자루를 고정시키는 장식에도 연꽃, 복숭아, 대나무 등 다양한 무늬를 조각하여 정성스럽게 치장했어요. 부채는 선비들이 판소리 한 대목을 할 때에 장단을 맞추면서 폈다 접었다 하며 흥을 돋우는 데도 쓰였지요. 단오가 가까워지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내라는 뜻에서 친지나 웃어른께 부채를 선물하기도 했답니다. 팔랑팔랑 시원한 부채. 손에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는 도구예요. 손바닥이나 종이 등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도구이지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대오리로 살을 만들고 한지나 헝겊을 발라서 자루를 붙여요. 부채는 원래 더위를 쫓는 데 쓰였으나, 점차 의례용이나 장식용으로도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보송보송 따뜻한 겨울. 겨울철 한복은 추위를 막기 위해 무명과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무명과 비단은 삼베와 모시에 비해 올의 간격이 촘촘하여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서 겨울철 옷감으로 아주 좋아요. 그리고 옷감 사이에 솜을 얇게 넣어 누빈 옷을 입거나 여러 벌을 겹쳐 입기도 했답니다. 누비저고리 옷감과 옷감 사이에 솜을 넣어 촘촘히 바느질을 한 누비저고리로 추운 겨울을 이겨 냈어요. 남바위 속에는 털이 붙은 가죽은 대고 겉은 비단 등의 천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로 주로 부인과 노인이 사용했어요. 배자 조선 시대 중부 지방이나 북부 지방에서 즐겨 입던 방한복으로 안에 털을 넣은 배자를 입으면 아주 따뜻하지요. 겨울에 신는 설피. 눈이 많이 오는 고장에서는 겨울철에 신발 바닥에 설피를 덧대어 신었어요. 설피를 신으면 눈이 많이 쌓여도 발이 빠지지 않고 비탈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았어요. 누비 토시 털가죽이나 솜을 덧대어 만든 것으로, 소매에 끼워 추위를 막는 데 사용했어요. 목도리 겨울철에 목에 둘러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어요. 풍차 겨울철 방한용 모자로 남녀 모두 사용한 모자로, 털가죽이나 헝겊에 솜을 두어 갸름하게 만들어서 귀와 뺨, 턱을 가리는 볼끼가 달려 있어요. 굴레 주로 어린아이가 사용한 방한용 모자예요. 조바위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사용한 방한용 모자로 귀와 뺨을 가릴 수 있었어요. 자연을 담은 한복. 곱고 편리한 한복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한복의 재료로 삼은 옷감에는 주로 모시, 삼베, 비단과 무명이 있었어요. 여름철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는 모시나 삼베로 한복을 지어 입었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보온이 잘 되는 비단과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었어요. 삼베와 모시는 식물의 줄기인 모시풀과 삼에서 실을 얻어 베틀로 짠 옷감이에요. 모시나 삼베로 만든 옷은 손질할 때 풀을 먹여 두면 땀이 나도 몸에 달라붙지 않고 쾌적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여름에 많이 이용되었답니다. 무명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이후 목화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으로 우리 옷에 가장 많이 사용된 옷감이에요. 다른 옷감에 비해 짜기가 쉽고 질겨서 백성들의 의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옷감이랍니다. 비단은 누에를 치기가 까다롭고 옷감을 손질하기 어려워 일반 백성들보다는 귀족이나 양반들이 주로 사용한 옷감이에요. 부드럽고 따뜻해서 주로 겨울철에 많이 이용했답니다. 자연에서 얻은 소중한 옷감. 우리 조상들은 한복을 만들 때 자연에서 한복의 재료가 되는 실과 옷감을 얻었어요. 그런데 이런 옷감은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요? 모시는 모시풀에서, 삼베는 삼에서, 비단은 누에에서, 무명은 목화에서 얻었답니다. 삼베는 물에 강하고,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해요. 모시는 모시풀의 속껍질로 만든 것으로 감촉이 깔깔하고, 통풍이 잘 되며, 빨리 마르는 특징이 있어요. 그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무명은 사계절 내내 사용되었지요.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은 광택과 촉감이 좋아서 매끄럽고 따뜻하답니다. 하늘하늘한 모시. 모시는 삼베와 달리 재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생산 지역이 한정되어 있어요. 충청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등에서 재배되며 충남 서천의 한산 모시가 가장 유명해요. 부드러운 무명. 삼베, 비단, 모시 등에 비해 짜기 쉽고 질겨 백성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옷감이에요. 무명이 없었을 때에는 비싼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던 백성들은 추운 겨울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무명이 생산되면서부터 백성들도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답니다. 보들보들한 비단. 누에를 치기가 까다롭고, 옷감을 손질하기도 어려워 일반 백성들은 많이 사용할 수 없는 귀한 옷감이었어요. 무명이 만들어지기까지. 무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정성껏 목화를 가꾸어요. 보송보송 탐스럽게 열린 목화를 따서 잘 말린 다음 씨아에 넣어 돌리면서 씨를 빼내요. 씨를 뺀 목화송이를 활대로 두드려 목화송이가 부풀도록 해요. 이것을 솜반 짓기라고 하지요. 목화를 도마에 올려놓고 손으로 밀어 고치를 말아 다발로 묶은 다음, 실을 뽑아요. 베틀에 실을 걸어 놓고 옷감을 짜면 부드러운 무명이 만들어진답니다. 베틀. 옷감을 짜는 틀인 베틀은 씨실의 꾸리를 넣은 북을 날실의 틈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옷감을 짜는 도구예요. 물레. 솜에서 실을 뽑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말해요.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 육각형의 틀을 만들고 가운데 손잡이를 박아 돌리게 되어 있어요. 고치에서 나오는 실을 감는 가락, 물레가 돌아감에 따라 가락을 돌게 하는 물렛줄, 이 줄에서 힘을 받아 가락을 돌리는 물레바퀴 등으로 되어 있어요. 까실까실한 삼베. 삼은 기후에 작 적응하는 식물로 비가 적게 내려도 잘 자라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우리 조상들의 대표적인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어요. 씨아. 무명을 얻기 위해 목화솜에서 씨앗을 빼는 데 사용하는 도구예요. 두 개의 나무 기둥에 구멍을 뚫고 둥근 나무 막대를 맞물려 놓은 모양이에요.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로 목화를 넣고 돌리면 목화씨는 막대에 걸려서 빠져 나오고 부드러운 솜만 얻을 수 있어요. 자연을 담은 아름다운 색.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서 옷감 재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자라는 풀이나 과실, 나뭇잎 등의 식물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염색 재료도 얻었어요. 화학 염료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연에서 얻은 치자, 울금, 홍화, 쪽 등의 식물성 염료에 잿물, 석회, 명반 등을 넣어서 옷감을 염색했지요.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옷감에는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빛깔이 담겨 있답니다. 우리 민족의 색, 오방색. 우리나라의 전통색은 오방색이에요. 여기에서 오방은 중앙과 네 개의 방위를 의미하는데, 오방색도 중앙과 네 개의 방위를 상징한답니다. 오방색 중 적색은 남쪽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여름을 상징해요. 청색은 동쪽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봄을 상징을 해요. 황색은 중앙을 가리키고, 밝음을 의미하는 태양을 상징해요. 흑색은 북쪽을 가리키며 겨울을 상징하고, 백색은 서쪽을 가리키고 가을을 상징한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로 입었던 색동저고리에도 오행의 의미가 담겨 있는 오방색을 주로 이용했어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색, 쪽빛. '쪽빛 하늘, 쪽빛 바다'라는 말을 할 만큼 쪽빛은 우리나라의 푸른빛을 대표하는 색이에요. 쪽을 재배하여 받아 낸 쪽물에 석회를 넣어 옷감에 염색하여 푸른빛을 내는 쪽 염색법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염색 방법이에요. 아주 옅은 옥색 혹은 하늘색에서 부터 짙고 검푸른 군청색에 이르기까지 쪽은 염색의 횟수에 따라 푸름의 정도가 다양해진답니다. 쪽 아침 일찍 쪽잎을 따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많이 부어 두면 남색이 우러나요. 짙은 쪽색부터 연한 색까지 다양한 색을 얻을 수 있어요. 치자. 옷감의 노란색은 치자 열매로 들여요. 깽깽이풀이라 불리는 황련의 수염뿌리도 노란색을 내요. 오미자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단맛의 다섯 가지 맛을 가지고 있는 오미자를 삶으면 붉은빛이 나요. 풋감 7, 8월에 덜 익은 풋감을 따서 으깬 즙에 옷감을 적셔 말리면 적갈색으로 변해요. 홍화 진홍색은 홍화에서 얻어요. 홍화에 물을 부어 두면 색이 우러나오는데 오래 둘수록 예쁜 색이 나온답니다. 정성을 담은 한복. 우리 전통 한복은 옷을 입었을 때 넓고 여유 있는 모양이어서 바느질법 역시 이런 특성에 맞추어 개발되었어요. 바느질 도구로는 바늘, 실, 실패, 골무, 가위, 자 등이 있었는데, 사용한 다음에는 반짇고리에 잘 정돈해 두었지요. 바느질은 옷을 만들기 위해서 생겨났지만 여인들의 섬세함과 뛰어난 장인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어요.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옷을 사서 입지만 옛날에는 집에서 옷을 만들어서 입었어요. 여자들이 가족의 옷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어서, 옷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옷본은 신부의 필수품이었지요. 옷을 세탁할 때도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물가나 개울가에서 직접 빨았어요. 빨랫방망이로 두들기거나 손으로 비벼서 빨고, 볏집을 태워 만든 잿물을 넣고 삶기도 했답니다. 옷을 잘 말린 다음 풀을 먹이기도 했는데, 풀을 먹이면 때도 덜 타고 옷이 반듯해져서 옛날에는 거의 모든 옷에 풀을 먹였지요. 옷뿐만 아니라 덮고 자는 이불에도 풀을 먹여서 때가 덜 타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옛날에도 다리미가 있어서 옷의 구김살을 펴고 주름도 잡아서 깔끔하게 옷을 입었답니다. 요즘에는 전기다리미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숯불 다리미와 인두를 사용했어요. 규방의 일곱 친구들. 규방은 여자들이 머무는 방으로 여자들이 있는 방에는 항상 바느질 도구가 있었어요. 바느질 솜씨는 여성의 교양과 맵시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바느질 도구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지요. 특히 규방에 있는 일곱 가지 바느질 도구인 규방칠우는 여성에게 소중한 친구였답니다. 여자들은 바늘, 실, 자, 인두, 다리미, 골무, 가위를 이용해서 옷은 물론 조각보, 버선, 바늘집 등의 소품을 만들어 솜씨를 쌓아 갔지요. 바늘은 조각난 옷감을 서로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구예요. 옛날에 여자들이 칠석날 지붕에 올라가 동쪽을 보고 바늘에 실을 꿰어 옷을 기우면 그 옷을 입는 사람의 운이 트인다고 해서, 칠석날 이런 풍습을 행하기도 했어요. 교두 각시, 가위. 옷감을 자를 때 쓰는 도구로 옷을 만들 때 꼭 필요한 도구랍니다. 옷은 어떤 순서로 만들까요? 먼저 옷을 입을 사람의 치수를 자로 재고, 옷본을 만들어요. 옷본을 대고 옷감을 가위로 자른 다음 실과 바늘로 옷감을 꿰매지요. 바느질할 때 골무를 끼면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정성으로 손질해요. 요즘은 세탁기를 이용해서 빨래를 하지만 옛날에는 동네 우물가나 개울가에 모여서 빨래를 했어요. 그리고 비누 대신 볏짚을 태워 만든 잿물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하얀 옷감을 잿물에 넣어서 뽀얗게 삶았지요. 그리고 깨끗이 헹구어 햇볕에 말려서 풀을 곱게 먹였어요. 옷에 풀을 먹이면 때도 덜 타고 옷이 반듯해졌지요. 그리고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 구김살을 펴고, 풀기가 고르게 배도록 했어요. 마지막으로 인두나 다리미로 매끄럽고 빳빳하게 정성 들여서 손질을 했답니다. 빨랫방망이의 원리. 세탁기가 없던 옛날에 어떻게 깨끗이 빨래를 했을까요? 옛날에는 빨래를 손으로 비벼서도 빨았지만 방망이로 두들겨서 때를 뺐어요. 요즘의 세탁기도 옷감을 두들겨서 때를 빼는 방망이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지요. 빨래판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으며 밭고랑처럼 골이 나 있어요. 빨래판에 빨랫감을 놓고 힘껏 비비면, 골이 있어 빨랫감의 때를 쉽게 빠지게 해 주지요. 빨랫방망이 길쭉하고 납작하거나 둥근 모양의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들기면 작은 공기 방울이 생겨 옷감 사이의 때를 밀어내요. 다듬이질 소리는 두 개의 다듬잇방망이가 다듬잇돌 위의 옷감을 두드리면서 나는 독특한 소리로 우리 민족의 정겨운 소리예요. 어스름 저녁 때 조용히 울려 퍼지는 다듬이질 소리는 우리 조상이 물려준 아름다운 소리랍니다. 다듬이질로 잘 다듬어진 옷감은 다림질한 것처럼 매끈하고 구김도 잘 가지 않아요. 옛날에 옷을 손질하는 과정. 옛날과 오늘날에 옷을 손질하는 모습은 아주 달라요. 요즘은 세탁기에 빨래와 세제를 넣고 빨래를 하고 구겨진 옷은 전기다리미로 다리지요. 그럼, 세탁기도 없고 세제도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옷을 손질했는지 알아볼까요? 빨래하기 바느질한 부분을 뜯어내고 빨랫방망이로 두들기거나 손으로 비벼서 빨아요. 잿물에 넣고 삶기 볏짚을 태워 만든 잿물을 넣고 삶아서 옷감을 하얗게 만들어요. 말리기 옷이나 옷감을 물에 깨끗이 헹구어 햇볕에 말려요. 흰옷은 햇볕에 말리면 더욱 하얗게 된답니다. 풀 먹이기 옷을 잘 말린 다음 풀을 먹여요. 풀을 먹이면 때도 덜 타고 옷이 반듯해진답니다. 접기 올은 반듯한지 구겨진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차곡차곡 접어요. 다듬이질하기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 구김살을 펴고, 풀기가 고르게 배도록 해요. 다리미질하기. 다리미는 열과 압력, 그리고 섬유의 적당한 습기를 이용해서 옷의 구김살을 펴고 주름을 잡는 데 쓰이는 기구예요. 온도가 높기 때문에 살균 효과가 있답니다. 옛날에는 숯불 다리미와 인두를 사용했고, 요즘에는 전기다리미를 사용하고 있어요.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옷. 아주 먼 옛날에는 풀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점차 기술이 발달하면서 식물의 껍질이나 누에고치, 목화에서 실을 얻어 옷감을 만들게 되었지요.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옷감을 이용해서 만든 옷이 바로 한복이에요. 한복은 사선과 곡선, 오방색의 아름다움을 살려 화려하고 품위가 있는 옷이에요. 이제 한복은 세계인도 인정한 아름다운 우리 옷이랍니다. 우리 옷의 역사. 나라마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옷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어요. 우리 옷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특히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옷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 있어요. 그리고 삼국 시대를 거쳐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고유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갔답니다. 한복의 완성, 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삼국 시대부터 이어진 한복이 완성된 시기로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고름이 생겨 지금의 한복 모양이 갖추어졌어요. 남자는 대개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여자는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장옷을 입기도 했어요. 일반 서민들은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 옷을 입었답니다. 화려한 장신구와 다양한 종류의 신. 옛날에는 머리숱이 많은 여자가 미인으로 여겨졌다고 해요. 그래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할수록 의복과 머리치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답니다. 그래서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가 다양해요. 그리고 신분에 따라 다르게 신어서 신발의 종류도 많아요. 신을 만드는 재료 또한 비단이나, 가죽, 나무, 짚 등 여러 가지를 이용해서 만들었답니다. 계절을 이겨내는 지혜.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계절에 맞는 옷을 입었어요.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삼베와 모시로 옷을 만들어 입고, 겨울에는 옷감 사이에 솜을 얇게 넣은 누비옷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냈지요. 그리고 계절마다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는 물건들을 만들어서 사용했어요. 각저총에 그려진 고구려 시대 한복. 벽화에 그려진 시종들의 옷차림을 보면 머리에 모자를 쓰고 바지 위에 치마를 입거나 저고리 위에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는 한복의 처음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백제의 왕과 왕비 옷. 백제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옷의 색깔을 달리했는데 왕의 옷은 주로 붉은색과 자주색이 많았어요. 면복. 왕이 제사를 지낼 때나 즉위식, 또는 왕비를 맞이할 때 입었던 옷이에요. 면복에는 해, 달, 별 등의 무늬가 있는데 모두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상징한다고 해요. 곤룡포. 곤룡포는 용포라고도 하는데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를 수놓은 옷이랍니다. 노의. 왕비의 평상복인 노의는 4품 이상의 부인이 입었을 때는 예복이었어요. 이 노의는 조선 중기까지 입었는데 원삼, 당의가 생기면서 거의 입지 않게 되었답니다. 떨잠. 동그란 모양이나 나비 모양 등 화려한 떨잠은 어여머리나 큰머리에 꽂아 떨리는 율동감을 주는 장식품이에요. 뒤꽂이. 쪽진 머리의 위아래로 꽂는 것으로 아래쪽은 뾰족하고 위쪽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있어요. 비녀. 쪽진 머리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장신구인 비녀는 한쪽 끝이 뭉툭하여 빠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재료에 따라 금비녀, 은비녀, 백동 비녀, 진주 비녀, 옥비녀, 등이 있고, 모양에 따라 봉잠, 용잠, 원앙잠, 국화잠 등이 있어요. 세모시 한복. 올이 가늘고 고운 세모시는 섬세할 뿐 아니라 청아한 멋이 있어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요. 통풍이 잘 되고 땀을 잘 흡수해서 여름철 옷감으로 으뜸이에요. 죽부인. 대나무로 만들어 감촉이 차가워요. 잠잘 때 끼고 자면 이불 속에 공간이 생겨 바람이 잘 통하여 시원하지요. 등등거리. 등나무 가지를 구부려서 만든 것으로 등에 걸쳐서 사용해요. 옷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하고 옷 속에 바람을 잘 통하게 해준답니다. 부채. 손에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는 부채는 여름철 필수품이에요. 통일 신라 시대 토우. 통일 신라 시대에는 삼국의 전통을 이으면서 중국 당나라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고려 시대 왕과 왕비 옷. 고려 시대 왕과 왕비가 입었던 옷으로 소매가 넓고 화려해요. 왕의 옷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을 수놓았어요. 밀양 고법리 박익묘 벽화. 고려 시대의 이 벽화에는 당시의 머리 모양이나 저고리, 치마, 모자 등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 놓았어요. 홍룡포. 왕이 평상시에 입었던 옷을 곤룡포라 하는데, 색에 따라 파란색을 청룡포, 노란색을 황룡포, 붉은색을 홍룡포라고 했어요. 당의. 당의는 저고리 위에 덧입던 것으로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다가 조선 후기부터 소례복으로 입었어요. 소례복으로 사용할 때에는 가슴 등 어깨에 흉배를 붙였어요. 서민들의 무명옷. 조선 시대 서민들은 주로 무명으로 된 옷을 입었는데, 무명은 세탁하거나 햇볕에 건조시키면 점점 흰색으로 된답니다. 관복. 관복은 관리들이 입었던 옷으로 문관복에는 학이, 무관복에는 호랑이 흉배가 달려 있어요. 족두리. 부인들이 의식을 갖추어 쓰던 모자로 족두리를 화려하게 꾸민 화관을 활옷과 당의를 입을 때 썼어요. 일반 서민들은 혼례식 때 주로 사용했지요. 당혜. 신의 코와 뒷꿈치에 당초무늬를 넣은 당혜는 고무신과 모양이 비슷하며 양반집 부녀자들이 신었어요. 나막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소나무, 오동나무 등을 통으로 깎아 만들지요. 굽이 있기 때문에 비오는 날 주로 신었어요. 짚신. 짚을 엮어 만든 신발로 일반 서민들이 가장 자주 신던 신발이에요. 목화. 주로 관복에 착용한 신으로 목이 길어요. 누비저고리. 옷감과 옷감 사이에 솜을 넣어 촘촘히 바느질 한 저고리로 겨울에 입던 한복이에요. 풍차.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방한용 모자로 남녀 모두 사용한 모자예요. 누비 토시. 털가죽이나 솜을 덧대어 만든 것으로, 소매에 끼워 추위를 막는 데 사용한 것으로 남녀가 모두 사용했어요. 조바위. 여자들이 나들이 할 때 사용한 방한용 모자로 귀와 뺨을 가릴 수 있었어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민속 1 | 예술경험 | 유아 | 요즘은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불러요.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고 나라와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마치 이웃 마을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라마다 민족마다 사는 모습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생활 방식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생활문화나 방식을‘민속’이라고 해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에는 고유의 민속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우리만의 민속이 있어요. 설날 아침에 곱게 설빔을 입고 어른께 세배를 하거나, 추석에 조상의 묘를 찾아 감사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민속이지요. 민속은 한 민족의 지혜가 담긴 훌륭한 문화유산이에요. 대보름날 들녘에서 하는 쥐불놀이나 볏짚 태우기 풍습을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 조상들이 겨울에 여러 가지 불놀이를 즐긴 까닭은 다음해 농사를 짓기 전에 빈 논밭에 불을 놓아서 농작물을 해치는 해충을 없애고, 겨울철에 약해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서였답니다. 정말 지혜롭지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민속 덕분에 후손들은 더욱 지혜롭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훌륭한 민속이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고유의 민속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거예요. 어떤 것들은 아주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거예요. 자, 그럼 우리의 민속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 볼까요? 우리 조상이 세운 첫 번째 나라는 고조선이에요. 그리고 고조선을 세운 분은 단군왕검이에요.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 있는 단군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먼 옛날,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다스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자, 환웅은 이들에게 마늘과 쑥을 주며,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동굴 속에서 생활하라고 했어요. 며칠 후 호랑이는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잘 참아 내어 마침내 여인이 되었지요. 환웅은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이에요. 단군은 나라의 이름을 ‘고조선’이라 정하고, 2천 년 동안 다스렸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나라를 다스렸던 사실을 보여 주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유적을 신성하게 여기고 제사를 모시거나 기도를 올렸지요. 또한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곳을 중심으로 굳게 뭉쳤답니다.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신화예요.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되어 있어요. 또한 유화와 해모수가 만나서 낳은 주몽, 백제를 세운 온조와 비류, 신비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는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이에요. 이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등에 실려 있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숨어 있어요. 이제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 보아요. 왜 단군을 ‘단군왕검’ 이라 부를까요? ‘단군’ 은 제사장을 가리키며,‘왕검’ 은 임금을 뜻하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당시 단군은 제사장이자 정치적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곰이 정말 사람이 되었을까요? 단군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곰이에요. 여기서 곰이 의미하는 것은 곰을 수호신으로 믿었던 부족이랍니다. 곰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 부족과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결합을 했다는 의미지요. 신화란 무엇인가요? 신화는 신과 인간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로 옛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에요. 신화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답니다. 건국 신화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국가는 지배자가 등장하는 청동기 시대 이후에 나타납니다. 부족들 사이에 정복 전쟁이 일어나거나 동맹을 맺음으로써 세워지지요. 건국 신화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신화로 전해진 것이에요. 나라를 세운 부족은 신화를 통해 자신의 왕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나라를 통치할 정당성을 얻으려 했던 것이랍니다. 고조선의 세력이 동방 사회에서 큰 힘을 갖게 되자, 이를 견제하던 한나라는 마침내 고조선을 침략하였어요. 이로 인해 고조선의 많은 유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찬란한 고조선 문명을 바탕으로 삼국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어요. 이후 한반도에 세워진 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랍니다. 삼국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어요. 이 세 나라의 문화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독특한 건국 신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답니다.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조, 신라의 박혁거세의 신기하고 용맹스러운 이야기를 한번 살펴볼까요? 고구려의 건국을 공부하려면 먼저 주몽 신화를 알아야 해요. 이 신화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다스렸던 부여와 여러 나라들의 모습도 엿볼 수 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 물의 신 하백에게는 유화라는 딸이 있었어요. 어느 날 유화는 목욕을 하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백은 몹시 화를 내며 유화를 내쫓았어요. 하루는 동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에서 사냥을 하다가 강가에서 울고 있는 유화를 보고 왕궁으로 데리고 왔어요. 얼마 뒤 유화는 알을 낳았고, 사내아이가 태어났지요. 그 아기가 바로 고구려를 세운 ‘주몽’ 이랍니다. 백제를 세운 왕은 주몽의 아들 온조예요. 주몽과 예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인 유리가 왕위를 잇게 되자 온조는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했어요.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보살폈지요. 그리고 나라 이름을 ‘백제’ 라고 하였답니다.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에요.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집 안 곳곳을 지키는 신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어요. 집 안에는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액운을 물리치는 터주신, 변소를 지키는 측신 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혹시 집에 걱정거리가 찾아오거나 아픈 사람이라도 생기면 정성이 부족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치성을 드렸어요. 그리고 조상신이 후손의 성공과 건강을 돌봐 준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집 안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차려 놓고 어른이 살아 계셨을 때처럼 예를 갖췄답니다. 또한 돌아가신 날과 명절에는 좋은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어요. 우리 조상들은 모든 집에는 가족을 지켜 주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어요. 조상신을 비롯하여 부엌을 지키는 신, 집터를 닦아 주는 신,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장하는 신 등 집 안 곳곳마다 모두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신이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제사는 각 지방과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풍습에 따라 지냈어요. 그래서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 는 속담이 생겨난 거예요.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조상의 은덕을 입어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조상이 죽었다 하여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전통이지요.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의식을 올렸어요. 이것을 ‘마을 신앙’ 이라고 해요. 마을 신앙은 지역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을 지녔는데 고사, 풍물놀이, 무당굿으로 나눌 수 있어요. 고사는 제관들만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풍물놀이는 농악대가 주도하여 펼치는 의식이에요. 이때 줄다리기와 고싸움 같은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놀이를 한답니다. 무당굿은 무당을 불러와 하는 것으로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졌어요. 지금은 이러한 풍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예술과 문화의 한 형태로 남아 있답니다. 장승은 돌이나 나무 기둥에 무사나 장군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으로, 주로 마을 어귀에 세워졌어요. 장승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는 나쁜 기운을 얼씬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장승의 종류에는 돌로 만든 돌장승과 나무로 만든 나무장승이 있어요. 또한 마을을 지키는 장승 이외에도 방위를 알려 주는 장승, 나라를 지키는 장승, 사찰 또는 성문을 지키는 장승들이 있었답니다. 서낭당은 토지와 마을을 지켜 주는 서낭신을 모시는 공간이에요. 주로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 또는 돌무더기와 오래된 나무 등에 차렸지요. 그리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해마다 서낭굿을 벌였답니다. 서낭당 앞을 지날 때에는 돌을 주워 돌무더기에 던지거나 침을 뱉어 나쁜 귀신을 쫓아냈어요. 안동 하회 마을에 전승되어 오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신을 즐겁게 해 드려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했던 탈놀이에요. 이것은 우리나라의 탈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랍니다. 탈놀이 중에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향하여 평소 잘못한 것을 꾸짖는 장면은 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별신굿은 3~5년 혹은 10년에 한 번씩 열렸어요.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오랜 풍습이 있어요. 부여에서는 영고, 삼한에서는 천신제, 백제에서는 제천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강릉 단오제,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 완도 장보고제 등과 같은 행사가 거행되고 있지요. 이러한 제천 의식은 농사의 풍년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집단적인 종교 활동이랍니다.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민속 2 | 예술경험 | 유아 | 글을 쓴 아작은 어린이를 위한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모인 아줌마 글작가 모임입니다. 전통문화 그림책, 전래 동화, 어린이 경제 학습서 등을 기획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림을 그린 홍우정은 상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여러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어린이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든 것을 그림책 속에 모두 담길 바라며 즐겁고 재미있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홍효정은 동덕여자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동물들이 대화를 나누며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알콩달콩 재미있는 세계를 그림책에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불러요.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고 나라와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마치 이웃 마을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라마다 민족마다 사는 모습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생활 방식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생활문화나 방식을‘민속’이라고 해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에는 고유의 민속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우리만의 민속이 있어요. 설날 아침에 곱게 설빔을 입고 어른께 세배를 하거나, 추석에 조상의 묘를 찾아 감사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민속이지요. 민속은 한 민족의 지혜가 담긴 훌륭한 문화유산이에요. 대보름날 들녘에서 하는 쥐불놀이나 볏짚 태우기 풍습을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 조상들이 겨울에 여러 가지 불놀이를 즐긴 까닭은 다음해 농사를 짓기 전에 빈 논밭에 불을 놓아서 농작물을 해치는 해충을 없애고, 겨울철에 약해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서였답니다. 정말 지혜롭지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민속 덕분에 후손들은 더욱 지혜롭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훌륭한 민속이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고유의 민속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거예요. 어떤 것들은 아주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느껴질거예요. 자, 그럼 우리의 민속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 볼까요? 우리는 크게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는 12개월로 시간을 구분해요. 그런데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이보다 더 자세한 달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태양의 위치 변화에 따라 일 년을 24개의 절기로 나누었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절기는 달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진 음력보다 더욱 정확하게 계절의 변화와 일치했어요. 농부들은 이 절기에 맞춰 논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였지요. 이와 같이 생활 속에 녹아든 과학은 우리 조상들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였답니다. 절기는 씨앗을 뿌려도 되는지, 또는 농작물이 자랄 환경이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신호와 같은 것이었어요. 그러니 조상들은 절기에 따라 그에 맞는 농사일을 하면 되었지요. 절기에 따라 어떤 농사일을 했을까요? 봄에는 땅을 갈고 씨를 뿌려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과 우수가 지나면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땅이 푹신푹신해져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도 논둑길을 폴짝폴짝 뛰어 다니지요. 이때 우리 조상들은 땅을 갈고 거름을 뿌리면서 일년 농사를 시작했어요. 따뜻한 지방에서는 씨앗을 뿌리거나 모를 심었지요. 여름에는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요 여름은 농작물이 쑥쑥 자라는 계절이에요.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는 소만과 망종이 되면 모내기를 하거나 밭작물을 심어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농작물이 더 잘 자라도록 농부들은 잡초를 뽑아주거나 거름을 주지요. 가을에는 알곡과 열매를 거두어요 봄과 여름을 거쳐 무럭무럭 자란 농작물이 익어 가는 계절이에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나면 농부들은 서서히 추수를 준비하지요. 추수하는 시기는 지방마다 다르지만, 어느 지방에 서든 서리가 내리는 상강 전에는 농작물을 거두어야 해요. 바쁘고 힘들지만 노력한만큼 거두는 기쁨이 있답니다. 겨울에는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해요 농부들에게 겨울은 다음해 농사를 준비하는 방학과 같은 기간이에요. 농사철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끝내야 할 숙제도 많지요. 추수가 끝난 논과 밭에 불을 놓아 해충을 없애야 하고, 동짓날 긴긴 밤에는 짚으로 새끼를 꼬아 농사에 필요한 물건들도 만들어야 해요. 또한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다음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답니다. 왜 시루떡으로 고사를 지낼까요? 우리나라의 떡은 가족끼리 먹는 밥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는 음식이었어요. 아이를 낳고 삼칠일이 지나면 시루떡을 돌리고, 백일이면 수수떡을 돌리고, 돌에는 백설기를 돌렸어요. 또한 이사를 하거나 잔치를 할 때에도 떡을 나누어 먹었지요. 그런데 왜 고사를 지낼 때는 시루떡을 만들었을까요?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이 강한 기운을 낸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나쁜 악귀를 물리칠 때에는 붉은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었답니다. 김장 입동은 겨울에 들어선다는 뜻이에요. 보통 양력 11월 8일경으로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가한 때이지요. 하지만 이때 아주 큰일이 남아있어요. 그것은 바로 김장이랍니다. 입동이 지나서 김장을 하면 김치의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부지런히 김장을 했답니다. 우리 조상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농사일 말고도 아주 특별한 행사를 치렀어요. 이를 세시 풍속이라고 한답니다. 우리나라에는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고, 가족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올리는 의식에서부터 여럿이 어울려 즐기기 위한 다양한 세시 풍속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정월 대보름날에는 부럼 깨물기와 쥐불놀이를 하고, 단옷날에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으며,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었답니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되면 겨우내 꽁꽁 닫아 걸었던 문을 활짝 열고 농사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면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자연을 즐겼지요. 특히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건강을 지키는 피서법이 많았어요. 봄과 여름에 우리 조상들이 어떤 세시 풍속을 즐겼는지 알아볼까요? 대문 앞에 입춘방 붙이기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입춘이 되면 사람들은 대문에 ‘입춘대길’이라는 입춘방을 써 붙이고 대청소를 했어요. 입춘대길이란 봄을 맞아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미지요. 또 대청소는 깨끗한 마음으로 봄을 맞이 하기 위한 것이었답니다. 쌉싸름한 나물 무쳐 먹기 입춘이 되면 차가운 땅에 파릇파릇 솟아난 나물을 무쳐 절식을 만들어 먹었어요. 파나 마늘, 달래, 부추 등 주로 쓴맛이 나는 나물들을 먹었는데, 쓴 나물을 먹으면 나른하고 축 처지는 봄날에도 기운이 불끈불끈 솟기 때문이랍니다. 진달래 꽃잎으로 전 부쳐 먹기 우리 민족이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3이 겹치는 3월3일을 삼짇날이라고 해요. 삼짇날에는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전을 부쳐 먹었어요. 찹쌀가루를 하얗게 반죽해서 기름에 노릇노릇 지져 낼 때 꽃잎을 살짝 올리면 예쁘고 맛있는 화전이 만들어진답니다. 줄타기 단옷날에 즐기는 놀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단옷날에만 하는 것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제호탕을 먹는 것이지요. 또한 줄타기는 가장 인기있는 놀이였답니다. 삼복 중에 복날 음식 먹기 초복, 중복, 말복은 여름날 중에서도 가장 더운 때예요. 너무 더워서 몸이 축축 처지고 건강도 나빠지기 쉽지요. 우리 조상들은 더위로 인해 자칫 건강을 해치기 쉬운 계절엔 몸에 좋은 보양식을 먹고 더위를 이겼어요. 우리의 명절 ‘단오’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명절인 단오는 명절 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날이에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명절이니까요. 그네뛰기, 씨름, 줄다리기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민속놀이들이 바로 단오의 대표적인 세시 풍속이랍니다. 가을은 봄에 씨앗을 뿌려서 여름 내내 가꾼 농작물을 추수하는 시기예요. 수확을 하면 우리 조상들은 제일 먼저 조상에게 감사하고, 가족 친지와 더불어 햅쌀로 지은 밥이나 햇과일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지요. 뿐만 아니라 곧이어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겨울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기예요. 그래서 겨울의 세시 풍속도 대부분이 새해 맞이를 위한 것이거나 다음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많답니다. 또 농부들은 겨울이 가장 한가한 시기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어요. 송편 한가위라 부르는 추석에는 막 거두어들인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고, 햇과일을 먹었어요. 솔향기가 솔솔 나는 송편, 달콤 한 밤으로 만든 단자, 구수한 토란국 등이 추석에 먹는 음식 이랍니다. 달맞이 우리 민족은 예부터 달을 신성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둥근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지요. 달맞이는 일 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추 석에하는 대표적인 세시 풍속이에요. 벌초하고 성묘하기 우리 민족은 조상들의 묘를 잘 관리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겨 왔어요. 그래서 추석이 되기 전에는 꼭 벌초(무덤에 자란 잡초를 뽑아 주는 일)를 했어요. 이후 추석날이 오면 온 가족이 함께 조상들의 묘를 찾아다시 한번 제사를 올린답니다. 귀밝이술 마시고 부럼 깨물기 대보름날 새벽에 일어나 찬술을 한 잔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좋은 소식만 듣게 된다고 해요. 이때 마시는 술을 ‘귀밝이술’ 이라고 불렀어요. 또 새벽에는 밤이나 호두 같은 딱딱한 열매를 소리 나도록 깨물어 먹었는데, 이렇게 하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어요. 복조리 돌리기 그믐날부터 초하루 아침까지 복조리를 파는 풍속이 있었어요.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기 때문에 복조리를 사 두면 한 해 동안 쌀을 일 때처럼 복이 온다고 믿었지요. 쥐불놀이 대보름날 밭이나 논두렁에 짚을 흩어 놓고 불을 놓아 잡초를 태우는 풍속이에요. 농사에 해를 끼치는 쥐와 해충을 잡기 위한 것인데, 쥐불이 크게 일어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지요. 어린이들은 쑥방망이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놀기도 했답니다. 민속놀이는 지역에 따라,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매우 달랐어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민속놀이만 해도 102가지나 된다고 하니, 옛날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놀이가 있었겠죠? 컴퓨터 오락이나 텔레비전 보기와 같이 얼마 되지 않는 요즘의 놀이를 생각한다면 우리 조상들의 놀이 문화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 수 있어요. 우리 조상들이 즐긴 민속놀이 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같이 즐기는 놀이가 많았어요. 또한 모든 놀이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지요. 씨름이나 줄다리기는 놀이를 하며 협동심을 기를 수 있고, 쥐불놀이는 논과 밭에 있는 나쁜 벌레나 병균을 없앨 수 있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졌어요. 그래서 힘겨운 농사일이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도움을 주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놀이를 즐기는 이유는 흥겨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심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지요. 강원도의 패다리 놓기 강원도 양양을 중심으로 전해 오는 놀이예요. 산간 마을에서 장마에 떠내려간 다리를 새로 놓은 데서 유래되었는데, 두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다리 놓기 시합을 벌이는 놀이지요. 시합에서 이긴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답니다. 부산의 좌수영 어방놀이 부산 연안에서 어부들이 풍어를 기원하며 즐긴 놀이예요. 주로 멸치 잡이 어부들이 이것을 즐겼는데, 서로 단결하여 고기잡이 모습을 재연한답니다. 줄다리기 마을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볏짚으로 만든 줄을 잡고 서로 당기는 놀이예요. 마을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 할 수도 있지만, 주로 마을과 마을이 대항을 벌였어요. 이웃 마을과 줄다리기를 할 때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응원을 했답니다. 이긴 마을은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었어요. 씨름 모래밭에서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상대편을 넘어뜨리는 놀이예요. 요즘에는 운동 경기로 발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요. 씨름 대회에서 일 등 한 사람을‘장사’라고 부르고 상으로 소 한마리를 주었답니다. 고싸움놀이 정월 대보름날에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 평안하기를 비는 놀이예요. ‘고’란 하나의 긴 끈을 동그란모양으로 맺어 놓은것인데, 상대편 고를 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되지요.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놀이랍니다. 차전놀이 경북 안동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하던 놀이예요. 옛날,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 안동 지방 사람들이 여러 수레로 이를 막아 낸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요. 차전놀이는 고싸움놀이와 비슷한데, 참나무를 ‘X’자로 엮어 만든 것이 다르답니다. 다같이 모여 어깨춤을 덩실덩실 풍물놀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놀이예요.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할 때 늘 풍물패가 앞장서 나오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힘든 농사일을 할 때 자주 풍물놀이를 했어요. 흥겨운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일을 하면 농사일이 한결 쉬웠을 거예요. 또 풍물은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도 이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풍물굿’ 혹은 ‘두레굿’이라고도 해요. 풍물놀이의 구성 요소 풍물놀이는 단지 악기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춤, 기예, 노동이 모두 담겨 있는 놀이예요. 풍물패가 덩더쿵 하고 신나는 가락을 연주하면서 서커스단처럼 긴 상모를 돌리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답니다. 풍물놀이는 마을의 잔치에 흥을 돋우는 민속놀이예요. 풍어제를 지낼 때에도 항상 풍물놀이를 했어요. 소고 작고 앙증맞은 북으로, 소리보다는 치는 모양새를 중시해요. 나발 하나의 음만 내지만 풍물의 기운을 힘차게 돋우어줘요. 장구 양면을 다 칠 수 있고, 어떤 음악과도 잘 어울리는악기예요. 징 놋쇠를 두드려 만드는 악기로, 웅장하고 깊은소리를 내요. 태평소 단단한 나무로 만들고, 화려하고 강렬한 소리를내요. 북 장단을 맞추는데 꼭필요한 악기로 소박하면서도 깊은 소리를 내요. 꽹과리 풍물놀이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풍물을 이끄는 악기예요. 사물놀이는 풍물놀이와 형제 풍물놀이에서 연주하던 악기 중 꽹과리와 징, 북, 장구 네 개의 악기만 따로 떼어 연주하는 것을‘사물놀이’라고 해요. 서양의 악기에 밀려 풍물 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던 무렵, 흥겨운 사물놀이가 인기를 끌면서 풍물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답니다. 무궁무진한 가족놀이 우리의 민속놀이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많이 달랐어요. 주로 명절에 즐기는 윷놀이와 그네뛰기와 같은 세시 놀이, 그리고 실뜨기나 비석 놀이 같은 평상시에 즐기는 놀이가 있는 반면, 농악처럼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놀이와 일부 지역에서만 즐기는 향토 놀이도 있어요. 또한 남녀에 따라, 어른과 아이에 따라서도 놀이가 달랐어요. 남자 어른들은 씨름이나 고싸움처럼 움직임이 많은 놀이를 즐긴 반면, 여자들은 실뜨기나 그네뛰기처럼 손을 움직이거나 율동적인 놀이를 즐겼지요. 또한 어린이들은 사방치기, 공기놀이, 연날리기, 자치기, 팽이치기처럼 건강한 몸과 두뇌를 발달시킬 수 있는 놀이를 했답니다. 함께 어울리는 가족놀이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는 약 120여 가지예요. 그중에는 정월 대보름, 단오, 한가위와 같은 명절에 가족이 모두 모여 즐기는 놀이가 많아요. 윷놀이나 투호 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가족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되지요. 윷놀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는 놀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윷놀이예요. 이 놀이는 주로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 까지 가족들이 모여서 즐겼어요. 놀이 방법은 네 개의 윷가락을 던져 나온 결과만큼 말을 윷판 위에 놓는 거예요. 윷 말은 동물을 나타낸 것으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에 해당하지요. 상대편의 말보다 먼저 말판을 돌면 이기는 거예요. 투호 놀이 옛날 궁중에서 여자들이 많이 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온 가족이 즐기던 놀이예요. 놀이 방법은 화살을 긴 통이나 항아리에 집어 넣는거예요. 화살을 통 속에 가장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긴답니다. 칠교놀이 서로 다른 일곱 개의 나무판을 가지고 논다고 해서 칠교놀이라고 해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놀이지만, 한때 손님이 기다리지 않도록 내주는 놀이 도구라고 해서 ‘유객판’이라고도 불렀어요. 놀이방법은 퍼즐이나 은물 조각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답니다. 연날리기 여러 모양의 한지에 대나무 살을 붙여 만든 연을 하늘 높이 날리거나 상대의 연줄을 끊는 놀이예요. 주로 겨울철에 언덕이나 들판에서 했어요. 전쟁때 적군의 움직임이나 아군의 상태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하다가 조선 영조때 부터 널리 즐기는 놀이가 되었어요. 이순신 장군의 얼이 담긴 방패연 방패연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썼던 연이라고 전해져요. 가운데 방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인 방패연은 구멍 때문에 높이 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도 있답니다. 몸과 마음이 자라는 어린이놀이 민속놀이는 단순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민속놀이에는 우리 조상의 생활과 지혜가 그대로 배어 있지요. 특히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는 몸과 마음을 튼튼히 자라게 하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놀이랍니다. 제기차기 제기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발로 여러 번 차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예요.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지만, 예전엔 주로 남자 아이들이 즐겼어요. 주로 겨울에 많이 하는데, 몸을 움직여 놀기 때문에 추위를 이기는 데 좋 았어요. 차는 방법에 따라 발을 바닥에 한 번씩 딛고 차는 맨제기, 바닥에 딛지 않고 연속으로 차는 헐렁이, 양발을 바꾸어 가며 차는 양발 차기 등이있답니다. 팽이치기 주로 추운 겨울에 꽁꽁 언 강가, 연못, 논바닥이나 냇가에 나가 팽이를 돌리며 노는 놀이예요. 이때 팽이가 얼음판 위에 쓰러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열심히 팽이채를 쳐서 팽이를 돌려야하지요. 팽이는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들고, 팽이채는 막대기에 헝겊이나 실을 달아서만들어요. 비석 치기 비사치기와 마찬가지로 납작한 돌을 이용해 노는 놀이로, 주로 남자 아이들이 많이 했어요. 놀이 방법도 차이가 있는데, 비사치기는 납작한 돌을 세워 놓고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돌을 던져 맞히는 것이지만, 비석 치기는 돌을 옮겨서 상대편의 돌을 쓰러뜨려야 이기는 놀이예요. 상대편의 돌을 쓰러뜨릴 때는, 돌을 발등이나 배, 무릎 사이에 끼워서 날라야 해요. 공기놀이 조선 시대 헌종 때 편찬된 책에도 공기에 대한 기록이 나올 만큼 오래된 놀이예요. 남자 아이보다는 여자 아이들이 즐겨 했지요. 작고 동글동글한 여러 개의 돌을 던져 받거나 집어서 점수를 내는데, 규칙을 달리 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응용할 수 있어요. 보통은 다섯개의 공깃돌로 초집기와 두집기, 세집기, 막집기, 꺾기의 순으로 진행하지요. 고누 놀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아주 오래된 놀이예요. 놀이 방법은 바둑이나 장기, 체스 등과 비슷하답니다. 땅바닥이나 널빤지에 여러 가지 모양의 놀이판을 그리고 말을 움직여 상대편의 말을 꼼짝 못하게 포위하면 이기게 되지요. 움직이는 말은 작은 돌이나 바둑알, 꽃잎 등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예전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가르쳐 주곤 했는데, 어린이의 두뇌 발달에 큰 도움이되었어요. 자치기 주로 겨울에 많이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사계절 내내 즐겨 했어요. 긴 막대기로 짧은 막대기를 쳐서 멀리 날아가는 사람이 이기게 되지요. 지방에 따라 막대기를 치는 방법은 조금씩 달라요. 짧은 막대기를 땅 구멍에 넣거나 돌에 기대어 치기도 해요. 기본적으로 짧은 막대기를 멀리 쳐서 보내는 사람이 이기지만, 거리를 정해 놓고 칠 수도 있어요. 알콩달콩 재미있는 아녀자 놀이 오늘날에는 남자 어린이나 여자 어린이 구분 없이 서로 한데 어울려 같은 놀이를 즐겨요. 그러나 예전에는 남자들은 주로 공격적이고 격렬한 ‘치기’와 ‘차기’놀이를 즐긴 반면, 여자들은 손놀림이 많거나 율동적인 놀이를 많이 했답니다. 널뛰기 옛날 여자들은 마음대로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늘 바깥세상을 궁금해 했지요. 널뛰기는 이 때문에 생겨난 놀이예요. 긴 널빤지의 중간을 괴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가서 번갈아 뛰면 공중으로 몸이 높이 올라가는데, 바로 그때 세상 구경을 하였답니다. 널뛰기는 고려 시대 이전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는 단오와 추석 등 주로 명절에 즐겼어요. 강강술래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아군의 수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여자들이 모여 빙빙 원을 돌았던 데에서 유래한 놀이예요. 이후 전라도 바닷가 마을의 여자들은 대보름날이나 추석에 보름달 아래에서 흥겹게 이 놀이를 즐겼어요. 현재 중요 무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흥겨운 다듬이 소리 세탁기나 다리미가 없었던 시절에 여자들은 빨래를 구김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 다듬이 방망이로 옷을 두드렸어요. 다듬이질은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 하기도 하는데, 이때 여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에 쌓인 근심을 날려 보냈지요. 그네뛰기 5월 단옷날에 주로 여자들이 즐겼던 놀이예요. 굵은 동아줄을 나무에 매어 그네를 만든 뒤, 그네에 올라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발을 구르면 높이 올라가게 되지요. 단옷날에는 마을 여자들이 모여 그네뛰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네뛰기는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는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즐기는 놀이가 되었는데, 그래도 양반집에서는 점잖지 못하다며 즐기지 않았답니다. 놋다리밟기 정월 대보름날 밤에 여자들이 하던 놀이예요. 고려 시대에 공민왕이 공주를 데리고 안동 지방에 왔는데, 마침 개울이 있어서 공주가 건너기 힘들었대요. 그때 마을 여자들이 공주를 위해 허리를 숙여 다리를 만들어 주었지요. 그 후 부터 경북 안동 지방의 여자들은 대보름날 저녁이 되면 모여서 이 놀이를 즐겼어요. 공주로 뽑힌 여자가 예쁘게 단장하고 다리를 건너면, 여자들은 모두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논답니다.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가까운 이웃처럼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른 점은 여전히 많아요. 아주 오랫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생활 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오래전부터 전승 되어온 생활 문화나 방식을 ‘민속’이라고 해요. 우리 민족에게도 우리만의 민속이 있어요. 설날 아침에 곱게 설빔을 입고 어른께 세배를 하거나, 추석에 조상들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고유한 민속이에요. 민속은 한 민족의 지혜가 담긴 훌륭한 문화유산이에요. 우리 민족에게 전승된 고유의 민속을 공부하면서 우리 민족의 지혜를 느껴보세요. 우리 조상이 세운 첫 번째 나라는 고조선이에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고조선을 세운 왕은 단군이라고 해요. 단군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고조선’이라고 하였어요. 또한 강한 고대 국가로 성장한 고구려, 백제, 신라도 모두 독자적인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어요.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조, 신라의 박혁거세가 바로 삼국을 세운 영웅들이랍니다. 단군의 영정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은 아버지 환웅과 어머니인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해요.일연의 (삼국유사) 고려 충렬왕 11년에 일연이 쓴 역사책이에요. 단군 신화와 고구려, 백제, 신 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어요. 참성단 고조선을 세운 단군은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차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장군총 중국 길림성에 있는 장군총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의 무덤으로 여겨져요. 동명왕릉 1974년 발굴된 북한의 평양시에 있는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어느 무덤보다 벽화가 잘 보존되어 있어요. 벽면과 천장 가득 연꽃이 그려져 있답니다.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최근에 발굴된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에서는 백제의 왕궁터를 암시하는 각종 유물들이 발굴되었어요. 학자들은 이곳이 백제 초기의 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오릉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왕후인 알영 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분묘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집 안 곳곳을 지키는 신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어요. 조상신이 후손의 성공과 건강을 돌봐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공동으로 의식을 올렸어요. 이것을 마을 신앙이라고 하지요. 이때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놀이를 하기도 했어요. 묘제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로 검은 갓과 흰옷을 갖추고, 산소를 깨끗이 정리한 다음 토지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냈어요. 제사상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여 풍성하게 상을 차렸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을 부르기 위해 향을 피운답니다. 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에요. 장승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은 솟대와 함께 마을 입구에 세워져서 마을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답니다. 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함께 세웠어요. 서낭당 토지와 마을을 지켜 주는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은 주로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 또는 돌무더기나 오래된 나무 근처에 지어졌어요. 용왕제 바닷가 마을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용왕제를 지냈어요. 나라마다 민족마다 사는 모습도 다르고 생활환경도 달라서 내려 오는 풍습도 많은 차이가 있어요. 우리 민족도 예로부터 전해 오는 독특한 풍습이 많이 전해지고 있어요.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일 년을 24개의 절기로 나누었답니다. 농부들은 이 절기에 맞춰 논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였지요. 농사뿐만 아니라 절기마다 세시 풍속이 있어서 다양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놀이도 즐겼답니다. 봄 논갈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과 우수가 지나면 우리 조상들은 땅을 갈고 거름을 뿌리면서 일 년 농사를 시작했어요. 여름 김매기 모내기가 끝나고 여름이 되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농작물이 더 잘 자라도록 농부들은 김매기를 하거나 거름을 주었어요. 가을 추수 가을은 봄과 여름을 거쳐 무럭무럭 자란 농작물들이 익어가는 계절이에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나면 농부들은 서서히 추수 준비를 하고 서리가 내리는 상강 전에 농작물들을 거두었답니다. 겨울 새끼 꼬기 겨울은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간이에요. 짚으로 새끼를 꼬아 농사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두었답니다. 송편과 햇과일 먹기 한가위라 부르는 추석에는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고, 햇과일을 먹었어요. 그리고 솔향기가 솔솔 나는 송편을 빚어 먹었어요. 화전 봄이 시작되는 3월 3일 삼짇날에는 곱고 고운 진달래로 화전을 붙여 먹었어요. 삼계탕 초복, 중복, 말복이 있는 여름에는 삼계탕과 같이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 더위를 이겨 냈어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돈 1 | 예술경험 | 유아 | 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돈은 어떻게 유통될까? 돈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궁금증을 술술 풀어 놓았답니다. '돈'은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경제란 가정의 살림살이, 나라의 살림살이를 두루 일컫는 말이에요. 가정의 살림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열심히 일하시고 받는 임금을 중심으로 꾸려져요. 그리고 국가의 살림살이는 국민의 세금과 저축으로 운영되지요. 경제는 바로 가정과 국가의 살림, 돈이 유통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은행,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복잡하게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해도, 돈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아주 많은 돈을 벌고,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사용한 위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들은 우리 경제를 크게 발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이웃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일구었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돈을 소중히 여기고 알뜰하게 사용하는 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돈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에요. 그런데 사람들 왜 ‘돈’이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화폐를 ‘돈’ 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화폐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천하를 돌고 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와 옛날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엽전 열 닢을 한 ‘돈’ 으로 부른 화폐 단위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약이나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중량 단위인‘ 돈쭝’ 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아득한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로 필요한 것을 물물 교환으로 얻었어요. 맛있는 사과와 싱싱한 물고기를 서로 맞바꾸는 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물물 교환을 하기 위해 매번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무겁고 불편했어요. 또한 바꾸고 싶은 물건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사과 하나를 얻기 위해 돼지 한 마리와 맞바꿀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물물 교환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가 바로 ‘돈’ 이랍니다. 물물 교환에서 물품 교환으로. 아주 먼 옛날에는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서로서로 가진 물건을 바꾸어 썼어요. 쌀이 필요한 집에서 닭을 내놓고, 닭이 필요한 집에서 쌀을 내놓는다면 그것을 서로 교환하는 식이었지요. 이와 같은 방식을 ‘물물 교환’이라고 해요. 볍씨. 볍씨는 물물 교환을 하던 시대에 많이 사용했던 화폐예요. 조개화폐. 조개 껍데기는 선사 시대부터 다양한 장신구와 화폐로 사용 되었어요. 베. 이불과 옷감의 재료인 베는 물물 교환에 사용된 귀한 화폐예요. 포전과 도전을 알아보자. 포전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약 5,000년간 중국 대륙에서 사용한 중국 최초의 화폐예요. 지금의 삽이나 가래에 해당하는 농기구 모양에서 유래되었어요. 포전보다 늦게 나온 도전은 중국 춘추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에 걸쳐 사용된 칼 모양의 청동 화폐랍니다. 포전. 도전. 금과 은을 이용한 금속 화폐. 소금, 조개, 가죽을 이용하던 물품 화폐는 금과 철 같은 금속 화폐로 바뀌어 갔어요. 또한 금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어도 녹이 슬지 않고, 작은 크기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훨씬 쉬웠지요. 작고 편리한 금속 화폐. 사회가 발전하면서 교환할 물품의 수가 늘어나자 물품 화폐 또한 번거롭고 무겁게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물품 화폐의 크기가 갈수록 작아졌고, 결국 작은 금속이 대신하게 되었어요.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금속 화폐들이 만들어져 널리 유통되었답니다. 삼국 시대에도 화폐가 있었을까? 삼한 시대에는 철이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어요. 삼국 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에서는 철로 만든 물건들이 발견되었는데, 무기와 농기구는 물론 화폐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오수전. 중국 전한 시대에 만들어진 화폐로, 무령 왕릉(백제)에서 발견되었어요. 고려 시대의 건원중보. 고려 성종 때 만들어져서 사용된 건원중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쇠돈으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 중국에도 건원중보가 있어 우리나라 화폐와 혼동될 것을 염려하여 뒷면에 동국이란 글자를 새겼다고 하지요. 이외에도 동국통보, 삼한중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해동통보, 해동원보 등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만들어졌어요. 건원중보. 동국통보. 해동통보. 병 모양의 돈이 있었어요. 1101년, 고려의 숙종은 은을 재료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었어요. 당시 은병 한 개의 가치는 포목 100필과 맞먹는 고액 화폐였지요. 그래서 은병은 주로 다른 나라와 교역할 때 사용되었어요. 은병의 재료인 은을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은과 동을 섞어 만든 가짜 은병이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가짜 은병이 성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1331년에는 은병의 크기를 작게 한 소은병이 출현하기도 했답니다. 조선 시대 화폐. 조선을 대표하는 세 가지 화폐는 조선통보, 십전통보, 상평통보예요. 1423년 세종은 조선통보를, 1651년 효종은 십전통보를, 1633년 인조는 상평통보를 만들었어요. 상평통보는 1678년 숙종 때에 법정 통화로 채택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여 약 2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어요.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적으로 유통된 화폐이기도 하지요.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근대에 고종은 서구식 화폐 제도를 받아들여 은으로 만든 대동은전을 만들었어요. 서양 화폐를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가운데 구멍이 없답니다. 상평통보. 대동은전 뒷면(왼쪽)과 앞면(오른쪽) 화폐에도 등급이 있어요. 우리 주변에는 화폐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화폐는 시간이 지나면 모양과 색이 변하기 때문에 이것을 모아 두면 좋은 역사적 자료가 된답니다. 수집한 화폐에도 등급이 매겨지는데, 전체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화폐가 좋은 등급을 받아요. 반대로 인쇄나 색깔의 상태가 좋지 않거나, 찢어지고 구멍이 난 화폐는 좋은 등급을 받지 못한답니다. 원형 별전. 쌍어형 별전. 나뭇가지에 동전이 주렁주렁. 조선 시대 숙종은 활발한 상업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화폐를 만들었어요. 이때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사용된 상평통보가 등장했어요. 숙종은 나라의 살림을 담당하던 호조와 곡식 공급을 담당하던 상평창에서 화폐를 만들도록 했어요. 우리는 상평통보처럼 둥글납작하고 가운데 구멍이 있는 화폐를 엽전이라고 부르는데, 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요? 엽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재미있게만 보이는 엽전에는 우리 조상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어요. 엽전 밖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안의 네모난 모양은 땅을 본뜬 거예요. 작은 엽전 속에 자연의 이치를 고스란히 담아 둔 것이지요. 하지만 엽전은 널리 사용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물물 교환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엽전은 낯설었기 때문이죠. 엽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상업이 크게 발달하는 조선 후기였답니다.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우리 화폐. 1883년에 고종 황제는 나라의 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문란해진 통화 정책을 정비하기 위해 전환국을 설치하였어요. 이후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근대 화폐가 제조되었답니다. 그러나 전환국은 1904년에 일본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어요.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하고 한국 조폐 공사에서 만들고 있어요. 전환국에서 제조한 주화. 은화. 적동화. 백동화. 최초의 중앙은행이 태어났어요. 190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세워졌어요. 그리고 1910년에 일 원권, 그 다음해에 오 원권과 십 원권이 만들어졌어요. 1966년에는 십 원, 오 원, 일 원 등 세 종류의 주화가 만들어지고, 1970년대는 우리나라 화폐가 현재의 화폐 체계를 형성한 시기였어요. 이후 점차 화폐 도안을 수정하여 지금과 같이 과학적이고 세련된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주화. 십 환. 백 환. 오십 환. 손으로 읽는 돈. 장애인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지폐에는 돈의 액수를 구별 할 수 있는 점자가 있어요. 지폐의 앞면 오른쪽 숫자 아래를 보면 천 원권, 오천 원권, 만 원권 형식의 점자가 있어요. 1982년, 화폐 체계를 다시 세우면서 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새겨 넣었다고 해요. 2009년도에 발행된 오만 원권에는 점자 대신 볼록 인쇄한 줄이 다섯 개 있어요. 손가락으로 가만히 지폐를 더듬어 보세요. 오톨도톨한 촉감이 느껴질 거예요. 요즘 사용되고 있는 돈. 십 원화. 오십 원화. 백 원화. 오백 원화. 천 원권. 오천 원권. 만 원권. 오만 원권. 주화란, 쇠붙이를 녹여 만든 금속 화폐를 말하는 거예요. 전환국이란,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만들어 내던 조폐 기관이에요. 지폐에는 위조방지 장치가 있어요. 돈의 일생 돈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과정을 겪게 된답니다. 먼저, 화폐가 태어나는 과정을 살펴볼까요?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를 만드는 곳은 한국 조폐 공사예요. 이곳에서 만들어진 화폐는 한국은행과 일반 은행을 거쳐 우리가 사용하게 되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다가 낡고 헤진 화폐는 한국은행으로 돌아가 폐기된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화폐의 일생이에요.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 제조 기술은 크게 발달하여 과거에 비해 아주 손쉽게 화폐를 만들게 되었어요. 그러나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짜 돈의 유통을 막기 위해 특수 문양을 새기고, 꼼꼼한 공정과 엄격한 검사를 하는 등 복잡한 제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어요. 이렇게 과학적인 우리 돈에 얽힌 궁금한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 볼까요? 돈을 만드는 곳과 발행하는 곳. 땡그랑땡그랑! 돼지 저금통이 묵직해지면 기분이 절로 좋아집니다. 도대체 돈은 어디에서 만드는 걸까요? 여러 곳에서 많이 만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돈은 한국 조폐 공사에서만 만들 고 한국은행에서 일반 은행으로 발행한답니다.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 위해 한국은행과 한국 조폐 공사는 어떤 일을 할까요? 돈도 수명이 있다. 돈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만 원권 지폐는 4년 6개월, 오천 원권 지폐와 천 원권 지폐는 2년 동안 우리의 소중한 도구로 쓰인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일찍 우리 곁을 떠나는 돈도 있어요. 사람들이 돈에 낙서를 하고, 찢고, 태운다면 돈은 원래 수명보다 일찍 한국은행으로 돌아가야 되지요. 평소에 돈을 소중히 보관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우리 돈을 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겠죠? 한국 조폐 공사. 한국은행은 한국 조폐 공사에 인쇄해야 할 돈에 관한 자료를 주고, 한국 조폐 공사는 이를 바탕으로 인쇄판을 만드는 준비 과정을 거친 후에 돈을 인쇄해요. 이렇게 돈이 태어나기까지는 무려 1년 6개월이 걸린답니다. 나는 화폐를 만들어서 한국은행에 보내 주는 역할을 해. 금융 기관. 한국 조폐 공사에서 정성껏 만든 돈은 한국은행에 보관되었다가 일반 은행으로 보내진답니다. 은행에 보내진 돈이 우리 손으로 들어오는 것이죠. 은행에서 돈을 찾아 장사를 하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는 거예요. 나는 한국은행이 유통한 화폐를 유용하게 사용해. 한국은행. 나는 우리나라 화폐의 발행부터 폐기까지를 담당하지. 우리나라의 돈은 한국은행이 발행하고, 실제로 만드는 곳은 한국 조폐 공사야. 돈은 한국은행에서 만드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돈은 돌고 돌아 만들어져요. 돈을 만들려면 디자인, 종이, 잉크, 인쇄 공정까지 최고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래서 세계 200여 곳의 나라 가운데 스스로 돈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겨우 40여 곳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 제조 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화폐는 물론 다른 나라의 화폐도 만들어 준답니다. 한국은행은 돈을 만드는 설계자. 한국은행의 가장 큰 목표는 물가 안정이에요. 한국은행은 돈을 만들어 널리 쓰이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중요한 기관이지요. 대신에 물가를 안정시킬 책임도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부여 받은 기관이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국은행에서 돈을 많이 만들어 내면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많은 돈을 찍어 시장에 내놓는다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결국 물가가 오르게 되기 때문이에요. 가격은 어떻게 정해질까요? 가격은 물건을 파는 사람과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결정돼요. 물건을 파는 사람은 물건을 만드는 데 든 재료비, 광고비, 세금 등을 붙여서 가격을 정하지요. 반대로 물건을 사는 사람은 파는 사람이 정한 가격을 보고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요. 사려는 사람은 싼값에 사려고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가격을 정하기 위한 흥정이 끊이질 않는답니다. 한국 조폐 공사는 돈을 만드는 공장. 돈이나 수입 인지, 수표, 우표 등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특수한 종류의 인쇄물들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이에요. 한국 조폐 공사는 한국은행으로부터 돈을 얼마만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돈을 만든 다음, 한국은행에 다시 보내는 일을 해요. 활판 인쇄. 검사가 끝나면 볼록한 모양의 활자로 은행권 번호와 인장 등을 인쇄해요. 컷팩 기계 작업. 인쇄 검사가 끝난 지폐는 자동 기계에 넣어 한 장씩 자르고, 묶음으로 포장해요. 그런 다음 한국은행으로 보낸답니다. 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져요. 돈은 매우 바빠요. 돈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사람의 땀과 노력이 필요해요. 이렇게 만들어진 돈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돈으로 물건의 가치를사요. 오늘 미술 시간에는 찰흙으로 꽃병 만들기를 한대요. 그러면 친구들은 문방구에 가서 찰흙을 사야 해요. 무엇으로 찰흙을 살까요? 맞아요, 바로 돈으로 찰흙을 살 수 있어요. 문방구에 가면 찰흙, 연필, 공책에 가격이 붙어 있어요. 가격은 물건의 가치를 나타낸 것이지요.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그 가치를 사는 것이랍니다. 세계의 돈을 모아라. 세계의 많은 나라마다 독특한 자기 나라의 돈이 있어요. 하지만 돈을 세는 단위가 모두 다르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지폐의 단위를 ‘원’이라고 불러요. 그럼, 다른 나라의 돈을 세는 단위가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1792년 미국에서는 돈을 ‘달러’로, 1871년부터 일본에서는 ‘엔’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유럽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 12개 나라는 미국의 달러에 대응하기 위해 ‘유로’라는 새 돈을 만들었답니다. 돈으로 물건을 구입해요. 내일은 즐거운 소풍날이에요. 시골에 사는 알뜰이 아버지는 알뜰이에게 새 옷을 사 주기 위해 아침마다 달걀을 낳던 어미 닭을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은행에 돈을 저금해요.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으로 늘 군것질만 하던 절약이는 알뜰이가 용돈을 모아 산 장난감을 보고 아주 부러웠어요. 그래서 절약이도 새 장난감을 사기 위해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이처럼 돈을 모으면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어요. 돈은 필요할 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치 저장의 역할을 한답니다. 내일은 저축왕이 될래요. 여러분은 쓰고 남은 용돈을 어떻게 하나요? 어떤 친구는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사거나 군것질을 하거나 책을 사 볼 거예요. 그러나 하나만 명심하세요! 누구나 세 가지만 지키면 저축왕이 될 수 있어요. 하나, 쓰고 남은 돈은 꼭 저축을 해요. 둘, 은행을 찾아가 자기 이름으로 된 예금 통장을 만들어요. 셋, 용돈 기입장을 만들어요. 그리고 용돈을 받았을 때의 느낌, 저축을 하면서 가졌던 생각, 학용품을 사고 받은 영수증을 모아 두어요. 돈 대신 카드를 사용해요. 오늘날 우리는 돈이 없어도 물건을 살 수 있어요. 바로 신용 카드가 있기 때 문이지요. 신용 카드만 있으면 물건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민세나 전기 요금 같은 세금을 낼 수도 있답니다. 또한 백화점에 나가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고, 계산까지 마칠 수 있어요. 이외에도 전자 화폐나 직불 카드도 돈과 똑같이 사용되고 있지요. 어쩌면, 먼 훗날에는 돈이 사라질지도 몰라요. 전자 화폐 하나면 무엇이든 살 수 있어요. 정보화 사회가 발달하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 전자 화폐예요. 동전이나 지폐는 부피나 무게가 있으므로 사용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전자 화폐는 카드에 IC칩이 내장되어 있거나 네트워크와 연결된 은행에서 저금되어 있는 돈을 사용하는 것이랍니다. 즉, 버스 카드나 전화 카드같이 일정한 액수만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전자 화폐. 신용카드나 전자화폐는 금과 은 같은 귀금속도 아니고 중앙은행이 만든 화폐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제3의 화폐’라고 해요. 카드만 있으면 지하철도 척척. 우리는 학교에 갈 때나 친구 집을 갈 때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요. 그런데 사람들로 붐비는 아침이나 잔돈이 없을 때에는 표를 사기가 아주 어렵지요. 이런 불편함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통카드예요. 신용 카드를 쓰면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우리는 신용 카드를 가지고 무엇이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돈 없이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카드 회사가 백화점이나 식당에서 카드를 이용한 사람들의 물건 값을 대신 지불해 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카드 회사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건 값을 사용자로부터 받는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당당하게 버는 돈. 알뜰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일을 해요. 아침 일찍 나가시는 부모님의 바쁜 생활 때문에 알뜰이는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시는 덕분에 알뜰이가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부모님 대신 집안 일도 알아서 하게 되었답니다. 그럼, 알뜰이 부모님처럼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아볼까요? 플라스틱으로 만든 돈이 있어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돈을 만드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요. 그래 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쓸 수 있는 돈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최근에는 종이나 금속 대신 플라스틱으로 만든 지폐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현재 베트남, 말레이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돈을 사용하고 있답니다. 근로 소득은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하고 받는 돈이에요. 회사의 책임자는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살펴보고 일꾼으로 채용을 해요. 회사에서 일하게 된 사람은 성실히 일하여 자신의 꿈도 이루고, 매달 정당한 돈도 받게 된답니다. 재산으로 돈을 벌어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건물 등으로 돈을 버는 것을 재산 소득이라고 해요. 은행에 저축해서 이자를 받거나, 건물을 빌려 주고 임대료를 받을 수도 있어요. 임금은 일을 통해 얻은 귀한 결과물이야. 광업 관공서 어업 음식점 금융 서비스 농업 기업 은행은 우리의 이웃.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다 보면 금융이라는 말이 자주 나와요. 금융이란, 사람들이 저축한 돈을 보관하기도 하고 빌려 주기도 하는 일을 말해요. 이러한 금융에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을 금융 기관이라고 하지요. 금융 기관으로는 일반 은행, 특수 은행, 협동조합 등이 있답니다. 금융 기관의 종류. 금융 기관의 종류를 살펴보면, 금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은행법에 의해 설립된 한국은행과 돈을 보관하고 빌려 주는 일을 하는 일반 은행, 일반적인 업무 외에 특별한 일을 하는 특수 은행으로 나눌 수 있어요. 그 외에도 농업, 임업, 축산업,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해 세워진 협동 조합, 우체국, 새마을 금고, 상호 신용 금고, 증권 회사, 보험 회사 등이 있답니다. 중앙은행. 1950년에 설립된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이에요.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제1금융권. 예금을 맡아서 필요한 사람이나 기업에 대출해 주는 업무를 하는 일반 은행을 말해요. 제2금융권. 은행을 제외한 금융 기관을 가리켜요. 종합 금융 회사, 투자 신탁 회사, 상호 신용 금고, 보험 회사, 증권 회사 등이 포함된답니다. 외국에 갈 때는 돈을 바꾸어야 해요. 우리나라를 떠나서 외국으로 갈 때는 돈을 바꾸어야 해요. 이것을 ‘환전’이라고 해요.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을 가도 그 나라의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환전이 필요해요. 환전은 은행에서 한답니다. 외국 돈에 해당하는 만큼의 우리나라 돈을 내면 외국 돈으로 바꾸어 줘요. 금융 기관에서 하는 일. 은행에 가면 언제나 사람들이 많아요. 돈을 저금하거나 전기 요금 같은 세금을 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이에요. 은행에서는 그 밖에 어떤 일을 할까요? 돈의 흐름을 알아볼까요? 공과금 수납. 한 달 동안 사용한 전기료나 수도료, 가스비와 같은 세금, 학교나 학원의 등록금, 교통법 등을 어긴 후 내는 범칙금 등을 받는 공과금 수납 업무를 맡아요. 예금. 부지런히 저축한 사람들의 돈을 보관하고 이자를 나누어 주는 예금 업무를 맡아요. 대출. 급하게 돈이 필요한 기업이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대출 업무를 해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과학 2 | 예술경험 | 유아 | 그런 생각 해 봤나요? 바쁜 엄마 대신 식사를 준비하고, 아빠의 힘든 일을 도와줄 로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멀지 않아 모두가 꿈꾸는 그런 시간이 올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생활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반드시 만들어 냈거든요. 그럼, 그 첫 번째 과학 작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해답을 알려면 선사 시대로 올라가야 해요. 짐승보다 힘도 약하고 빠르지도 않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은 돌을 쪼개고 다듬어 정교한 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그리고 청동과 철기로 농기구를 만들어 충분한 먹을거리를 거두어들였지요. 이후 우리의 과학은 비약적인 속도로 발전하였어요.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정복하기 위해 위대한 과학적 발명품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냈어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첨성대, 우주를 그린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모두 한국인의 뛰어난 창조성을 증명하는 과학 문화재랍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리나라의 어디쯤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거예요. 바로 이 호기심을 과학적으로 풀어 놓은 것이 지도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지도를 만들었어요. 정착 생활을 한 신석기인들은 갈림길에 나뭇가지를 꺾어 두거나 돌을 세워 두는 식으로 표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길을 그림으로 남겨 놓기 시작했어요. 그 위에 방향을 표시하고 일정한 비율에 맞춰 지형을 그려 놓은 것이 지도랍니다. 지도는 길을 찾을 때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어요.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지도 제작 기술이 과학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는데, 오늘날 인공위성으로 찍은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흡사한 국토의 모습을 그려 냈답니다.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은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까요? 우리나라 지도에 중국 이외의 대륙이 등장한 것은 1402년 태종 때예요.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여 개의 유럽 나라와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지중해, 사하라 사막까지 표시되어 있어요. 오늘날 세계 지도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조선 시대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지도라 할 수 있어요. 새로운 세계관에 고무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많은 지도들을 제작하였지만, 정확성이 다소 떨어졌어요. 이러한 결점을 보완한 지도가 영조 시대의 실학자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예요. 정상기는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여 평탄한 곳은 100리를 1척으로 하고, 굴곡이 심한 산악 지역은 120~130리를 1척으로 계산하여 지도를 만들었어요. 이를 ‘백리척’이라고 해요. 이것은 과학적인 근대 지도 제작을 앞당기는 획기적인 성과였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김사형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성교광피도와 승려 청준이 만든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라고 해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조선인들의 세계관과 지리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해 가장 크게 그렸으며,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작게 그렸어요. 혼일강리역대국지도에는 한반도의 모습과 백두 대간, 강줄기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고, 도성도는 조선 정조 때에 북한산성을 포함한 수도 서울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예요. ‘팔도도’라고도 불리는 동국지도는 도로와 물길, 통신망 등이 잘 나타나 있어요. 정상기는 지금껏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따라 제작된 까닭에 거리가 실제와 맞지 않아 어둠 속에서 여행하는 것과 같다며 자신이 직접 지도를 제작하게 된 이유를 밝혔어요. 조선 시대의 지도 중 백미를 꼽으라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들 수 있어요. 김정호는 이전까지의 정확하지 않은 지도들을 바로잡고자 청구도를 제작한 뒤, 이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어요.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적 실측 지도로 평가받는 대동여지도는 해안선과 지형 묘사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산맥이 뻗쳐서 이룬 산, 산들이 집결된 산, 독립된 산으로 구분할 만큼 세밀하고 정교하답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다고 해요. 이를 바탕으로 김정호는 도로를 나타내는 선 위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명시했어요. 김정호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학사상을 근본으로 지도를 만들었답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70여 장의 목판에 새겨 만든 것이에요. 이것을 모두 펼치면 세로 약 6.7미터 가로 약 3.8미터 크기의 우리나라 전국 지도가 만들어진답니다. 대동여지도는 산과 강의 주된 줄기는 물론 갈라져 나온 물줄기까지 세밀하게 구분하고, 바다와 섬 등 자연 지형을 아주 자세히 나타냈어요. 또한 모든 도로를 거리까지 정확히 표시하고 행정 관청, 국방 시설도 구체적으로 수록했어요. 이것은 김정호가 평소 정치, 국방 등 어떤 분야에서도 지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학문의 시작은 지도에서 시작한다는 선구자적 생각이 이 정교하고 거대한 사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에요.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면서 산을 산맥으로 나타냈어요. 산의 크기와 높이에 따라 선의 굵기를 달리했지요. 또한 도로는 하천과 구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하고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도 알 수 있도록 했답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전통을 집대성한 최고의 지도로 평가받고 있어요. 근대의 측량 기술로 제작된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확하답니다. 대동여지전도는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만든 지도예요. 역사적으로 세계 곳곳에서는 많은 전쟁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각 나라의 과학자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첨단 무기 발명에 온 관심을 기울였지요. 그 덕분에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무기들은 어느 과학 분야보다 빠르게 발달했어요. 주변국의 침입이 잦았던 우리나라도 일찍부터 무기 개발에 크게 노력했어요. 삼국 시대에는 철제 무기가 등장하고, 고려 시대에는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발명되었지요. 또한 조선에서는 로켓포가 만들어졌어요. 바로 신기전과 화차랍니다. 고려의 화약이 비로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바다를 지키는 무적함대 거북선이 발명되어 감히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거북선은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배예요. 그러나 당시에 제작된 거북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이나 제작 방법이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왜군을 초토화시킨 돌격선이라는 것이에요.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가 왜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명장 이순신의 지략과 거북선의 주도적인 역할, 조선의 강력한 화약 무기, 대포를 실을 수 있는 판옥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북선의 모양은 대부분 정조 때 발간된 충무공 전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에요. 전체 길이는 약 35미터에 이르며, 노의 수는 16개 또는 20개이고, 총 180여 명이 탈 수 있었다고 해요. 또한 뱃머리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적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어요. 판옥선.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은 판옥선이에요. 함실 위에 갑판을 올려 2층 구조로 만들어 왜군이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고안되어 있어요. 거북선은 바로 이 판옥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쇠못을 박아 보호막을 만든 것이랍니다. 임진왜란 해전도.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당시 거북선은 3척에서 5척에 불과했다고 해요. 그런데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왜군이 거북선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지요. 거북선 구조.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백 년 전인 태종 때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매우 다르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적군이 승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을 달고 그 위에 뾰족한 창을 세웠지요. 고조선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우리의 주요 무기는 청동으로 만든 칼이나 창, 화살이었어요. 그러나 고려 후기에 화약 무기가 등장하면서 천자총통, 지자총통과 같은 대포가 만들어졌답니다. 그리고 신기전처럼 화약을 장치하거나 불을 달아 쏘던 화살이 등장하여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지요. 우리나라에 처음 화약이 전해진 것은 14세기 전후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당시 고려는 잦은 왜구들의 침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이에 고려의 최무선은 혼자 힘으로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1376년, 화약 무기 발명에 성공하였답니다. 고려 시대에 발명된 화약 무기는 세종 대왕 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어요. 세종 대왕은 적극적으로 화약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무기를 개발하였지요. 이때 기동성이 뛰어난 총통 완구와 로켓 무기 신기전이 개발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개발된 무기들을 수록하여 총통등록을 편찬하였어요. 우리의 독창적인 무기인 신기전은 문종이 직접 고안한 새로운 화차예요. 신기전의 등장으로 조선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갖게 되었어요. 강력한 로켓 화살을 대량으로 장착한 후 한꺼번에 쏘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문종의 화차는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한 후 꾸준히 발전해 온 우리의 군사 기술이 최절정에 올라 개발된 무기였답니다. 지자총통은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화포예요. 임진왜란 때 거북선 등에 설치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답니다. 최무선은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하고 사용한 무기 발명가예요. 무관이었던 그는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를 막아 내기 위하여 화약과 총을 발명하고, 그다음 해에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여 석포, 화포, 신포, 화통 등을 만들었어요. 조선의 태종 때 최해산이 만든 중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불렸어요. 전체 길이 64.5센티미터인 중완구는 힘이 아주 강해 포탄이 1리까지 날아갔어요.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 때 이장손이 개발하여 임진왜란 때 사용했어요. 표면은 둥근 무쇠로 덮여 있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들로 채워져있어요. 우리가 전통적인 것들을 하나둘 버릴 때,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외국인들이었어요. 우리 조상의 과학적인 생활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지요. 마음으로 몸을 다스리는 건강법, 숨을 쉬는 초가지붕의 소박함, 천 년 동안 변함없는 한지의 아름다움, 생명이 담겨 있는 옹기의 지혜 등 우리 조상이 어느 민족보다 풍요로운 웰빙 생활을 누린 흔적들이에요. 그러나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우리의 전통을 쓸어 가면서 고유한 생활양식이 제자리를 잃게 되었어요. 요즘 들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농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짚을 엮어 만든 둥근 초가집이에요. 그래서 초가집은 언제나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느낌을 주지요. 또한 시골집 마당에는 으레 장독대에 옹기들이 나란히 놓여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우리 조상의 놀라운 과학적 생활을 살펴보아요. 짚을 엮어 얹은 초가지붕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무척 따뜻해요. 또한 장마에도 집 안을 습하지 않게 하여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는 우리나라의 기후에 안성맞춤이었지요. 더구나 농사를 짓고 난 뒤에 나오는 볏짚을 이용했으므로 경제성까지 갖춘 훌륭한 재료였답니다. 옹기는 태토라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무수히 섞여 있는 흙으로 빚은 그릇이에요. 그래서 그릇 표면에 미세한 숨구멍이 있지요. 옹기는 마치 생명체와 같이 제 몸속에 습기가 있으면 뿜어내고, 또 건조해지면 습기를 들이마신답니다. 할머니들이 항아리를 열심히 닦는 이유는 바로 옹기가 숨 쉬는 것을 도와주는 거랍니다. 우리나라에서 옹기가 사용된 것은 기원전 5,000년으로 올라가요. 그런데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옹기를 버리고 플라스틱을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이렇듯 생명을 담는 그릇이 일순간에 고물로 취급받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에요. 초가집이 많이 지어진 배경은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서민들이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이나 흙을 이용해 집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조상들은 숨 쉬는 그릇의 효능을 제대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마당에 장독대를 만들고 옹기에 음식을 담아 놓았지요. 옹기에 담긴 음식은 보약보다 더 좋은 건강 지킴이었답니다. 우리 조상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멋과 아름다움을 표현했어요. 자연에서 얻은 재료는 부드럽고 은은한 색을 내며 생명이 아주 길었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한지와 쪽빛이 있어요. 한지는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푸른 빛깔을 띠는 쪽빛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한지를 사용했어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서 종이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답니다. 또한 불국사 석가탑에서는 한지에 찍은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어요. 그러니 한지의 수명이 1,300년을 넘긴 것이지요. 쪽은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 옥색에서부터 진한 감색까지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어요. 그중 보라색이 약간 섞인 남색을 가장 아름다운 쪽빛으로 평가하고 있답니다. 선조들의 경험에 의하면 쪽은 항균의 효과가 있어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다고 해요. 또한 화학 염료와는 달리 햇빛을 받거나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훌륭한 염색 재료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자연에서 얻은 식물을 이용해 자연의 색과 가장 가까운 염료를 만들었어요. 약 50여 종에 이르는 식물의 잎과 꽃, 열매, 뿌리까지 이용해 빛깔을 만들어냈지요. 그중 쪽빛은 ‘쪽빛 하늘’, ‘쪽빛 바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늘과 바다를 닮은 남색을 의미해요. 이 빛깔은 귀족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이용한 색이랍니다. 쪽만큼 많이 사용한 염료는 홍화예요. 홍화에는 황색 색소가 있어 일찍부터 붉은색을 내기 위해 사용되었지요. 또한 홍화에서 나온 색소는 방충성이 강하고 피부병,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답니다. 옛날에는 냉장고도, 크레인도, 전화도 없었어요. 그럼 얼음을 보관하지 못하고, 무거운 돌도 운반하지 못하고, 멀리 사는 사람에게는 소식을 전하지 못했을까요? 물론 아니에요. 우리 조상들은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얼음 창고에 보관한 후 한여름에 꺼내 사용했어요. 크레인 대신 도르래를 응용한 기구를 만들어 큰 바위도 거뜬히 옮겼지요. 또한 높은 산에 불을 지피는 봉수대를 만들어 오늘날의 첨단 통신 기계만큼이나 정확하게 급한 소식을 알렸답니다. 이처럼 최첨단 시설을 만들어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풀기 어려운 과학적 생활을 한 조상들의 슬기가 아주 놀랍지 않나요?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사계절이 뚜렷하며 계절마다 기온 차이가 많이 나요. 이러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 온돌과 석빙고예요. 석빙고는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기 위한 돌 창고이고, 온돌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고안된 난방 시설이랍니다. 온돌이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이에요. 세죽리 집터가 발견되면서 우리나라의 온돌 생활은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아요. 그중에서도 석빙고는 가장 한국적인 과학이 빛을 낸 구조물이지요.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려고 돌로 만든 창고예요.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하였다니 얼마나 과학적인 작품인지 상상이 되지요. |
한 권으로 읽는 교과서 우리 예술 1 | 예술경험 | 유아 | 바위 그림에서 조선의 민화까지. 우리 조상들은 풍요를 기원하며 바위에 동물이나 물고기를 그려 넣었어요. 이러한 바위 그림에는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이 잘 나타나 있지요. 국가 체제가 정비된 삼국 시대에는 대부분 무덤 안에 그림을 그렸어요. 무덤 안의 벽화들은 주로 무덤 주인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담은 것인데, 당시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생생하게 남아 있답니다. 이후 국가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자,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정겨운 삶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어요. 특히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의 산천과 더불어 서민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을 풍자한 풍속화와 무명화가에 의해 그려진 민화가 널리 발전하였습니다. 바위와 무덤에 그림을 그려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선사 시대 사람들이 그린 바위그림이에요. 울산의 반구대 바위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고래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 많은 동물과 물고기를 잡기 원하는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것이지요. 이렇듯 당시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간절한 소원을 비는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았답니다. 신라와 백제의 무덤에서는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들이 발견되어 수준 높은 예술 세계를 보여준답니다.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 선사 시대에 평평한 바위 위에 동물이나 물고기를 그려 넣은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해요. 당시의 신앙과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답니다. 울산 반구대의 세부 모습. 바위그림에서는 농사짓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학자들 은 당시를 수렵 생활을 하던 시기로 추측하고 있답니다. 왜 돌로 시대를 구분할까요? 우리는 선사 시대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 하는데,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이 돌이랍니다. 이렇게 돌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사용한 것이 돌이기 때문이지요. 덴마크의 선사고고학자 톰센은 고대 유물들을 정리하다 이 분류법을 만들었답니다. 신라의 하늘을 나는 말.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은 경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와 기마인물도예요. 천마도에 등장하는 말의 모습이나 테두리 문양 등은 고구려의 무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기법으로 신라 그림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그림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는 천마의 신비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답니다. 천마총. 천마도가 출토된 무덤이라 해서 ‘천마총’ 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천마도.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리는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에요. 하얀 천마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을 그린 것이랍니다. 능산리 무덤의 벽화 무늬.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백제 그림으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의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가 있어요.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 그림의 일면을 볼 수 있어요. 산수 무늬 벽돌.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이상향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을 표현한 벽돌이에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아요. 죽은 사람들은 무덤에서 살아요. 고구려인들은 많은 고분 벽화를 남겼어요. 이 고분 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어 고구려의 시대상과 생활 풍습을 이해하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몇 개 안 되는 미술품을 보존하고 있는 민족이에요. 우리 조상이 1,500년 전에 그린 그림이 아직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지 않나요? 신들과 함께 놀아요. 신화는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인들이 자랑하는 신들의 세계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등장해요. 해의 신, 달의 신, 수레 의 신, 철의 신, 불의 신, 농사의 신이 바로 우리의 신들이지요. 그들은 하늘과 땅을 만들고 우리의 문화를 세웠답니다.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 사신. 초기와 중기에 인물과 풍속을 주로 그렸던 고구려 벽화는 후기로 들어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지킨다고 믿었던 상징적인 동물인 ‘사신’을 그려 넣었어요. 사신이 무덤 속 죽은 이를 지키는 존재라고 생각했답니다. 남쪽에는 주작,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북쪽에는 현무를 주로 그렸어요.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광개토 대왕비와 마주하고 있는 무용총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렵도와 무용도가 있어요. 무용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묘실의 동쪽 벽에 여러 명의 남녀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에요. 또한 무용총에는 넓은 대륙에서 거침없이 말을 타고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답니다. 해의 신과 달의 신 (오회분 4호묘). 해의 신은 두 손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받쳐 들고 아름다운 꼬리를 달고 있어요. 달의 신은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를 받들고 있어요. 농사의 신과 불의 신 (오회분 4호묘). 머리는 소의 형상이고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농사의 신은 한 손에 이삭을 들고 있어요. 불의 신은 꼬리를 뒤로 흘리며 타오르는 불꽃을 들고 있어요. 주인의 초상 (안악 3호분). 무덤이 발굴된 지 50여 년이 지나도록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답니다. 무용도 (무용총). 옛 중국 책을 보면 우리 민족을 가리켜 ‘음악과 춤을 즐기는 민족’ 이라고 했어요. 이 그림에도 고구려인들이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어요.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다. 산수화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어요.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화원을 설치하여 많은 화원을 육성하였는데, 이들은 산수, 인물, 화초와 같은 다양한 소재들을 그렸어요. 그중에서도 산수화가 가장 인기를 얻었지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꼽을 수 있어요. 비단 바탕의 수묵 담채화로 그린 몽유도원도는 세련된 표현과 환상적인 분위기가 조선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답니다. 고사관수도.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화가인 강희안의 작품이에요. 한 선비가 바위에 엎드려 평화롭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어요. 몽유도원도. 안평 대군이 꿈속에서 여행하고 본 것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에요.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산수화 자연속의 선비들. 자연보다 인물을 중심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산수 인물화’라고 해요. 조선 시대에는 주로 학문과 예술에 능했던 선비들이 산수 인물화를 그렸어요. 특히 이상좌와 강희안의 그림이 많은 사랑을 받았답니다. 진정한 우리 산천을 그리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함께 예술도 활짝 꽃을 피웠어요. 특히, 정선에 의해 발전한 ‘진경산수화’는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어요. 진경산수화란 형식화된 중국의 화풍을 뛰어넘어 우리의 산천을 직접 여행하고, 자세히 관찰하여 가장 솔직하게 그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도담삼봉. 김홍도는 푸른 강물 가운데 우뚝 선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진경산수화로 표현했어요. 도담 삼봉의 실제 모습. 단양 팔경의 하나로,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에 세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에요. 소박하고 진실한 삶 속으로. 풍속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후기였어요. 당시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자연을 있는 그리는 진경산수화와 서민들의 삶을 담아낸 풍속화가 많이 그려졌답니다. 으라차차 씨름 한판 벌여 보자. 조선 시대의 풍속을 그린 많은 화가 중에서 특히 김홍도의 그림이 으뜸이에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밝고 긍정적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김홍도는 누구보다 서민의 삶을 사랑했던 화가라고 할 수 있어요. 김홍도의 씨름. 시장판에서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을 그린 그림이에요.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답니다. 씨름에 등장하는 엿장수.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였어요. 그래서 시장에는 여러 가지 물건을 들고 다니며 파는 장사꾼들이 많이 있었답니다.김홍도의 서당. 옛날 서당의 풍경이 아주 정겹게 표현된 이 그림은 김홍도의 대표작 중 하나예요. 훈장님에게 회초리를 맞고 우는 소년이나 그 뒤에서 킥킥대며 웃는 친구들의 표정이 아주 재미있답니다.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들. 김홍도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풍속 화가는 신윤복이에요. 김홍도와 신윤복은 모두 조선 시대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아냈지요. 그러나 소재나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크게 달랐어요. 김홍도가 서민층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아낙네들이나 양반층의 모습을 그렸어요. 신윤복의 그림은 김홍도에 비해 선이 가늘고 섬세하며 색깔이 화려하답니다. 김득신의 반상도. 조선 시대 3대 화가 중 한 명인 김득신이 그린 이 그림에는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살아가는 양반과 상민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신윤복의 연당의 여인. 신윤복은 유교적 윤리관이 지배했던 조선 시대에 남녀 간의 자유연애나 여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어요. 신윤복의 단오풍정. 신윤복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에요. 단오를 맞아 여인들이 그네를 뛰고 머리를 감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소원 성취를 기원해요. 민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가장 대중적인 그림이에요. 대부분의 민화는 서민들의 신앙과 염원을 주제로한 그림이지요. 사람들은 민화를 방 안에 놓고 감상을 하거나 장식용으로 쓰기도 했지만, 무 엇보다 민화가 나쁜 일을 막고 복을 부르는 주술적 역할을 한다고 믿었답니다. 귀여운 호랑이와 용감한 까치.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까치와 호랑이예요. 보통 그림 중앙에 호랑이가 있고 주변에는 겁 없는 까치가 한두 마리 등장하지요. 이 두 동물이 유난히 민화에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호랑이는 단군 신화에 등장할 만큼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동물이고, 까치 또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길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황룡도. 까치와 호랑이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용이에요.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용을 물의 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뭄이 되면 비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용을 그렸답니다. 까치와 호랑이. 호랑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와요. 민화의 익살스러움이 잘 드러난 작품이랍니다. 방 안에는 그림이 가득. 민화의 소재로는 동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어요. 그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꽃과 새, 물고기, 글씨, 무신, 신선, 책거리, 십장생 등이 있어요. 각 소재는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꽃과 새는 행복과 부부의 화합을, 물고기는 다산과 평화를, 십장생은 불로장생을 의미했답니다. 모란도. 꽃과 새 그림을 ‘화조화’라고 불러요.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은 가장 사랑받는 주제였어요. 어락도.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그린 그림을 ‘어락도’라고 해요. 가정의 화목과 다산을 상징한답니다. 책가도.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게 책과 서가를 그린 ‘책가도’는 자식들이 무사히 벼슬길에 오르고 가문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사대부의 바람을 담은 것이에요.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도자기. ‘고려의 비취색’을 아세요? 세상에서 그 곱고 푸른 빚깔을 만들 수 있는 곳은 고려밖에 없었어요. 우리나라보다 더 유구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도 고려의 비취색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답니다. 그러나 고려의 청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투박하게 만들어진 빗살무늬 토기와 민무늬 토기를 비롯해서 삼국 시대의 곡식을 저장하고 술을 담던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고려청자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의 아름다움과 상감 기법의 세련된 조화로 ‘천상의 예술’이라는 칭호를 얻었어요. 우아하고 부드러운 선과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비색, 화려한 상감 기법이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이지요. 고려청자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 깨끗하고 담백한 백자로 이어졌답니다. 흙으로 그릇을 빚다. 신석기 시대는 이전과 달리 기후가 온화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곡식을 보관할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신석기 시대에 등장한 토기는 훗날 우리 고유의 자기를 제작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가마에 굽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사라지고 민무늬 토기가 등장했어요. 빗살무늬 토기는 표면에 빗살 같은 줄이 새겨져 있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이고, 민무늬 토기는 표면에 무늬가 없는 청동기 시대의 토기예요. 민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는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바닥에 세울 수가 있었어요. 또한 빗살무늬 토기와는 달리 주둥이가 있는 것이 큰 특징이에요. 빗살무늬 토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기원전 오천 년경부터 그릇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그릇은 단순하고 소박한 토기였지요. 그중 신석기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랍니다. 생활을 담는 그릇. 농업이 발달하여 농작물 수확이 많아지면서 더 많은 종류의 그릇들이 필요해졌어요. 쌀을 저장하거나 술을 담그는 그릇들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또한 의식을 치르기 위한 특별한 그릇들도 만들어졌어요. 삼국 시대의 다양한 그릇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생활 모습과 신앙생활을 추측할 수 있답니다. 귀가 네개 달린 항아리. 백제의 토기로 귀가 네 개 달린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에요. 세 발 토기. 백제의 토기는 모양과 종류가 무척 다양하답니다. 발이 세 개 달린 토기와 바닥이 넙적한 토기, 장고형 그릇 받침 등이 발굴되었지요. 기마 인물형 토기. 신라인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강직한 모습이 엿보이는 작품이에요. 말을 타고 있는 사람과 말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의상과 마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인답니다. 세계를 매료시킨 고려의 비색. 토기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은 고려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도자기 하면 대부분 고려청자를 떠올려요. 그것은 고려 장인들이 창조해 낸 독창적인 자기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우리 조상들의 예술 세계와 장인들의 땀방울이 어우러진 우리 예술의 결정체랍니다. 빚고 새기고 메우는 상감 청자. 상감 청자는 청자에 상감 기법으로 무늬를 넣은 자기예요. 상감 기법은 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문양이나 글자를 파낸 뒤, 그 패인 홈에 백토나 다른 흙을 메우는 것이지요. 이 기술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절정에 올려놓았답니다. 순청자. 순청자는 전혀 장식 무늬가 들어가지 않은 청자를 말해요. 대부분 동물이나 식물의 모양을 모방해 만든 청자들이 포함된답니다. 순청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아 버리는 신비한 색으로 만들어졌어요. 중국인들은 이 색을 가리켜 ‘고려 비색’이라고 불렀어요. 이 깊고 푸른 비색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답니다. 모양을 본떠서 빚어요. 고려 초기에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어요.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는 용의 모습을, 청자 참외모양 병은 참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지요. 이외에도 어떤 재미있는 모양의 자기가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깨끗하고 소박한 백자. 조선 시대에 들어서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쇠퇴한 반면, 검소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백자를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어요. 백자는 크게 분청사기와 순백자, 청화 백자로 나눌 수 있답니다. 소탈함과 흰색의 멋. 청자에 백토로 분을 발라 다시 구워 낸 분청사기는 투박하면서도 소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요. 주로 회청색이나 회황색을 띠고 있지요. 반면 순백자는 다른 색깔의 장식 무늬가 전혀 없는 흰색의 자기를 말해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아름다움과 흰색의 단아함을 지니고 있지요. 이러한 백자는 한국 예술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푸른색으로 절개를 표현하다. 청화 백자는 백자 위에 푸른색을 내는 천연 안료로 무늬나 그림을 그려 구워 낸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중엽부터 청화 백자를 굽기 시작했는데, 푸른색을 내는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들어온 것을 중국을 통하여 수입했다고 해요. 흰색의 도자기 위에 청색으로 그려진 무늬는 조선 시대 선비의 높은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답니다.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 공예품. 우리 조상들은 돌이나 바위를 깨뜨려 도구를 만들었어요. 그러나 도구를 제작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미적 감각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청동과 철기 같은 새로운 재료는 우리 조상들에게 예술의 날개를 달아 주었답니다. 흙을 빚어 만든 토우와 수막새에는 우리 조상의 익살과 해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불교가 종교적, 사상적으로 꽃을 피운 삼국에서는 화려하고 정교한 불상을 만들어 깊은 불심을 표현했어요. 또한 금으로 왕관과 향로를 만들어 강한 왕권을 나타냈지요. 이것은 부강한 국가 권력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답니다. 재료의 성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어디에 쓰이는지 마음으로 헤아려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의 솜씨는 볼수록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 냈답니다. 신라인의 미소와 익살을 굽다. 토우는 ‘흙으로 빚은 인형’이라는 뜻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작고 투박하게 만든 것이에요. 토우는 신라 시대의 여러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익살스럽고 발랄한 모습으로 신라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어요. 반면 순장할 때 사람 대신에 무덤 속에 묻었던 토용은 사실적이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른답니다. 토우 장식 항아리. 국보 제195호인 토우 장식 항아리는 몸과 몸통에 남녀의 모습과 새, 개구리 등 18점의 토우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하회탈 ‘우리의 미소’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것은 바로 안동 하회탈이에요. 진솔함과 솔직함이 묻어나는 모습이 얼굴 무늬 수막새와 닮아 보이지 않나요? 처마에 새긴 우리의 미소. 수막새란 지붕의 처마 끝을 꾸미는 기와예요. 집을 좀 더 멋있게 꾸미기 위하여 우리 조상은 작은 부분까지 공을 들여 조각을 새겨 넣었어요. 삼국 시대의 수막새는 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 줘요. 백제의 기와는 우아하고 섬세하며,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굳센 느낌을 주지요. 또한 신라의 기와는 투박하고 넓지만 소박한 모양새랍니다. 특히 경주의 얼굴 무늬 수막새에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미소가 새겨져 있답니다. 우리의 닮은 부처님의 얼굴. 삼국 시대는 불교가 사상적, 종교적으로 활짝 꽃피운 시기였어요. 그래서 삼국의 문화 근본에는 불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많은 불상을 제작하였어요. 그중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삼국을 대표하는 불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랍니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우리나라에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국보가 있어요. 왼쪽에 있는 국보 제83호와 오른쪽에 있는 국보 제78호가 그것이지요. 모두 세계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품이랍니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부처의 모습이 무척 인간적으로 보이지요. 일본의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우리나라의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재료만 다를 뿐 매우 닮아 있어요. 신라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답니다. 석굴암 본존불.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세운 사찰이에요. 가운데 부처님을 중심으로 주변에 부처님의 제자와 보살상을 조각해 놓았어요. 신라인의 이상적인 부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랍니다. 연가 칠년명 금동 여래입상. 국보제119호로, 고구려 예술의 특징인 단순하고 강직한 느낌이 묻어나요. 서산 마애 삼존 불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는 고란사라는 작은 절이 있어요. 그 절을 한 바퀴 돌아 뒷마당으로 오르면 백제 불상의 걸작으로 꼽히는 서산 마애 삼존 불상이 우리를 반겨 줘요. 터질듯한 탐스러운 볼에 은은히 퍼지는 소박하고 맑은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준답니다. 신의 솜씨로 명품을 만들다. 청동기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금속 제품을 만들었어요. 또한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발전한 삼국 시대에는 더욱 화려한 공예품들이 탄생했지요. 그중 부여 능산리 집터 유적에서 발견된 백제의 금동 대향로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는 걸작이에요. 봉황의 머리에서 용의 꼬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과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형태는 백제 장인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 주지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순금판을 오려서 만든 것이에요. 그 모양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불꽃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무령왕의 권위를 표현한 것이랍니다. 백제인의 정교한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지요. 황금의 나라, 신라. 신라는 많은 금속 공예품을 남겼어요. 옛 문헌에도 귀금속 공예품이 많은 신라를 보고 일본인이 ‘황금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를 증명하듯 신라의 무덤에서는 금관과 귀고리, 목걸이 등과 같은 많은 금 장신구들이 출토되었지요. 신라인의 황금 사랑은 화려한 황금 문화를 탄생시켰고 뛰어난 금세공 기술로 이어졌답니다. 백제 금동 대향로. 향로의 윗부분에는 여러 신선과 호랑이, 봉황, 원숭이 등이 조각되어 있고, 아랫부분에는 용과 물결, 연꽃이 조각되어 있어요. 용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동물로 여겨졌으며, 연꽃은 불교의 극락정토를 상징했지요. 또한 열두 개의 구멍을 내어 연기가 신비로운 모양으로 빠져나가도록 했어요. 귀고리. 금은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금속이에요. 신라인들이 많은 금 장신구를 만든 것도 장수와 명예, 부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어요. 신라 금관에는 왜 출자 장식이 있을까요? 금관의 중앙에 있는 장식이 마치 한자 출자 같지 않나요? 이것은 나무를 단순화시킨 모양이에요.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은 나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서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어요. 하늘로 뻗은 모양이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한 것이죠. 돌과 나무로 짓는 건축. 우리 조상들은 팔도강산 어느 곳에나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고, 그곳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동양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 첨성대를 올리고, 산처럼 커다란 바위로 석탑을 쌓아 불교 건축물을 지었지요. 그리고 오백 년 왕조가 시작될 때에는 도읍지 한복판에 큰 궁궐을 짓고 국가의 위상을 높였답니다. 우리 건축물은 화려하지 않지만 세련되고, 날아갈 듯 가벼우나 중후한 멋을 지니고 있어요. 각 시대마다 다른 생활양식과 사상을 배경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은 예술과 기술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요. 이제는 세계인의 문화재가 된 것이랍니다. 문화 건축이 현해탄을 건너다. 백제의 건축물은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석탑 2기와 절터, 그리고 왕릉만이 당시의 건축 양식이나 규모를 짐작하게 할 뿐이에요. 그중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축조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보물이랍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에요. 목조탑 모양을 본떠 만든 석탑으로 약간은 투박한 모습이지만 단순한 조형에서 강한 힘이 느껴져요.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킬로미터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에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어요. 또한 집터와 저장용 구덩이, 동전 무늬가 찍힌 자기 조각, 여러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지요. 백제 초기의 군사와 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 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을 비롯한 많은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랍니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비교해 더욱 세련되고 아름다워진 모습이에요.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랍니다. 무령왕릉. 불교 건축 이외의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은 제25대 왕인 무령왕의 무덤이에요. 무령왕릉은 벽돌로 만든 지하 건축물 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에요. 벽돌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무척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요. 일본의 호류사 5층 목탑. 호류사 5층 목탑은 우리나라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탑이에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백제 목탑이 없기 때문에 역사 학자들은 이를 통해 백제 탑의 형태를 추측하고 있어요. 불교의 나라에 우뚝 선 건축. 신라의 건축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첨성대와 불국사, 석굴암이에요. 360여 개의 화강암을 술병 모양으로 쌓아 올린 첨성대는 아무런 장식 없이 실용성만을 강조한 신라의 독특한 석조 건축이지요. 또한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화강암을 정교하게 쌓아 석굴을 만들고, 그 내부에 본존불을 비롯한 여러 불상을 모신 사찰이에요. 뛰어난 건축 기법을 인정받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불국사. 불국사는 목조 건축의 형식을 돌로 표현하여 화려한 조형미를 보여 준답니다. 통일 신라의 능숙한 돌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첨성대. 우리나라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전체 높이가 9미터에 이르며 360여 개의 돌이 사용되었어요. 신라 선덕 여왕 때 지어진 것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대랍니다. 석굴암 내부의 팔뚝 돌. 불국사의 내부는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져 있어요. 전실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땅을 상징하며, 주실은 석가모니가 있는 하늘을 상징해요.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짜 맞춘 인공 석굴로 치밀한 수학적 비례에 의해 지어졌어요. 특히 둥근 천장에는 주먹을 쥔 것 같은 모양의 돌(팔뚝 돌)을 돌과 돌 사이에 끼워서 더 견고하고 튼튼하답니다. 석가탑. 석가탑은 기단과 탑신이 서로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안정감과 균형미가 느껴져요. 또한 석가탑에서는 목판으로 인쇄한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지요.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랍니다. 다보탑. 다보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모습이 아닌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있어요. 사각형과 팔각형, 원기둥이 기본을 이루며, 탑신부에 새겨진 조각은 나무를 깎거나 진흙을 붙여서 만든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답지요. 불교 국가의 불교 건축물. 고려는 건축 초기부터 불교를 국교로 내세우고 많은 사찰을 지었어요. 그중 경상북도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로 꼽혀요. 무엇 하나 뺄 것 없는 단순미와 살아 날아갈 듯한 곡선미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랍니다. 날갯짓을 하는 지붕의 추녀. 부석사 무량수전은 가운데에 있는 기둥보다 귀퉁이에 있는 기둥을 높게 세움으로써 건물을 날렵하게 보이게 했어요. 이것은 귀퉁이 처마가 처지는 느낌을 방지해 준답니다. 주심포 양식. 주심포 양식은 건물을 받치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리는 것을 말해요. 반면, 다포식 양식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더 넣는 것이지요. 주심포 양식은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답니다. 배흘림 기둥. 배흘림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볼록하게 함으로써 기둥이 지붕의 무게에 짓눌린 것이 아니라 지붕을 가뿐하게 받치고 있는 느낌을 줘요. 기와집을 올려 놓았어요. 고려 시대의 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경천사 10층 석탑이에요. 날렵한 몸매와 세련된 조각, 경쾌한 선, 기와집을 올려놓은 것 같은 형태는 우리나라의 어느 탑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 이랍니다. 경천사 10층 석탑.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화강암으로 만든 대부분의 탑보다 훼손될 위험이 크답니다. 재질이나 형태 모두 기존에 보아 왔던 탑과는 너무 달라 보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답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어요.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여요.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 구조가 고려 시대의 경천사 10층 석탑과 아주 비슷하답니다. 탑은 어떻게 셀까요? 탑은 기단부와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의 층을 세야해요. 세련된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 고려 시대에는 사찰 건축이 주로 지어졌지만, 조선 시대에는 궁궐과 성곽, 그리고 서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어요. 그중에서도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가 대표적인 건축이랍니다. 웅장하면서 사치스럽지 않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특징이지요. 아름다운 궁궐의 정원. 창덕궁의 후원은 우리나라의 전통 방법에 따라 조성된 정원으로 자연적인 지형을 훼손하지 않은 채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판 후 건물을 배치했어요.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부용정.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 부용지 위에 한껏 멋을 내고 있는 정자가 바로 부용정이에요. 정자 자체도 아름답지만 정자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뛰어나답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국가의 공식적 의식을 거행하고, 문무 관료의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정전이에요. 선비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도산 서원. 조선 후기에는 서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주택 건축 양식과 정자 건축 양식이 배합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냈어요. 그중 이황을 기리고 그의 학문을 이어받고자 세운 도산 서원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랍니다. 경치가 아름답고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도산 서원은 소박하고 검소한 분위기 아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답니다. 수원에 세운 신도시. 경기도 수원에 있는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고 불려요.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를 명당인 수원으로 옮기고 정약용에게 성을 설계하라고 명하였어요. 정조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당파를 끊어 내기 위해 신도시를 계획했던 것이에요. 수원 화성은 그 과학적 기능은 물론 아름다움에서도 조선 문화의 절정을 보여 준답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단순히 성곽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50여 개의 부속 시설물과 관청, 도로, 상가와 같은 도시 기반 시설물을 갖춘 도시 전체를 가리키지요.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숭례문. 조선 시대에 세운 대표적인 성문인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제1호랍니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부르지요.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석축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의 누각을 올린 2층 건물이에요. 지봉유설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은 양녕대군이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어요. |
백두대간을 지키는 호랑이 | 예술경험 | 유아 | 우리나라는 산, 강, 바다 등 아름다운 자연으로 가득해요. 그 가운데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 주는 생명의 줄기예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부터 금강산, 태백산, 그리고 지리산에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랍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지리산에 단군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호랑이야! 어디 있느냐!” 나무 중에 으뜸인 소나무 할아버지가 호랑이를불렀지요. “내 가지를 꺾어 태백산 신단수로 달려가거라. 그리고 이 땅에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나신 단군님께 바치거라.” “네, 알겠습니다.” 호랑이는 푸른 가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꺾어 길을 떠났어요. 호랑이는 지리산을 떠나, 분홍빛 진달래들이 가득히 피어 있는 영취산에 도착했어요. “호랑이님, 어딜 가세요?” “아, 진달래구나. 난 태백산에 간단다.” “왜요?” “왕이 되실 단군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거야.”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도 단군님을 만나 뵙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호랑이는 예쁜 진달래 한 송이를 물었지요. 호랑이는 한참을 달려 덕유산에 도착했어요. 덕유산에는 철쭉이 연한 빨간빛으로 산 전체를 덮고 있었지요. “너희들 혹시 단군님이 태어나신 걸 알고 있니?” “정말이에요? 그럼 저희도 인사를 드리러 갈래요.” 호랑이는 싱긋 웃고는 철쭉 한 송이를 입에 물었어요. 덕유산을 지나 대덕산 봉우리에 오르자 구름도, 산도, 나무도, 모두 발 아래에 있었어요. “우와, 여기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곳이야.” 호랑이는 봄꽃들로 새 옷을 갈아입은 덕유산을 넋 놓고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잠시 후,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갔어요. “휴, 한참을 달렸더니 목이 마르네.” 추풍령 고개를 달리던 호랑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시원한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내려갔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맑은 시냇물을 마셨지요. “아, 시원하다.” 목을 축인 호랑이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았어요. 하늘엔 구름도 바람도 잠시 쉬고 있었지요. 호랑이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어요. 마침내 봉황을 닮은 봉황산에 도착했지요. 그곳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많이 있었어요. “와, 여기는 온통 푸른빛 천지구나!” 호랑이는 소나무 길을 걸으며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불렀지요. 그때였어요. “호랑이님, 어딜 가세요?” 호랑이는 위를 보았지요. “까막딱따구리구나, 잘 있었니?”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음, 단군님께 간단다.” “아, 저도 들었어요. 태백산에 왕이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를요. 마침 저도 만나 뵙고싶었는데.......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붉은 머리 까막딱따구리와 호랑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길을 떠났답니다. 밤이 되었어요.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는 은빛 달에 물든 월영대에 올라 까만 세상을 바라보았지요. “까막딱따구리야,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하룻밤 쉬어 가자.” “네, 좋아요.” 밤하늘은 총총히 박힌 별들과 대낮처럼 밝은 달로 눈이 부실 정도였어요. 다음 날, 길을 가던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는 길 위에 하얀 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넌 누군데, 여기에 쓰러져 있니?” 호랑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지요. “예, 저는 동해 바다에 사는 갈매기인데, 큰 폭풍 때문에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갈매기는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그래? 그럼 내 등에 오르거라. 내가 데려다 주마.”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는 소백산을 지나, 드디어 동해에 도착했어요. 시원한 바닷바람이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와 갈매기를 반갑게 맞아 주었지요. “호랑이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갈매기는 호랑이 곁을 맴돌다가, 힘찬 날갯짓을 하며 바다로 날아갔어요. “그래,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마침내 태백산에 도착한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는 신단수 아래로 달려갔어요.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지요. 호랑이와 까막딱따구리는 얼른 절을 했어요. “단군님이 태어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너는 누구냐?” 여인이 호랑이를 바라보며 물었지요. “저는 지리산 호랑이로 이 땅에 사는 모두를 대신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호랑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소나무 가지, 진달래, 철쭉을 앞에 내놓았어요. “그래, 고맙구나. 그 험한 백두대간을 이렇게 달려와 주다니.” “아닙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 즐거웠습니다.” 호랑이는 벅찬 마음으로 말했지요. “너는 정말 어질고 착한 마음을 가졌구나. 앞으로 백두대간의 지킴이가 되어 대대로 아름답고 소중한 이 땅을 지키거라.” “네!” 호랑이는 머리를 들어 백두대간을 바라보았어요. 지금도 백두대간에서는 호랑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에서 산으로 울려 퍼지고 있답니다. |
효령이의 색동저고리 | 예술경험 | 유아 | 이삿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골목길에 들어섰어요. 수찬이네가 이사 온 거예요. 수찬이는 트럭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말했어요. “치, 이제 승헌이랑 놀지도 못하고. 민기랑 유진이도 못 보잖아.” 수찬이는 친구들과 헤어져서 무척 속상했지요. 수찬이는 이사 온 집 동네를 둘러보았어요. 그때 누군가 뒤에서 뛰어와 어깨를 치고는 앞집으로 후다닥 들어갔어요. 그 바람에 수찬이는 넘어질 뻔했지요. “뭐야? 사람을 치고 그냥 가네!”수찬이는 기분이 나빴어요. 짐 정리도 다하기 전에 엄마가 수찬이를 불렀어요. “앞집에 이 떡 좀 갖다 주고 오너라.” 수찬이는 아까 봤던 아이가 떠올라 가기 싫었지만, 엄마한테 떠밀려 집을 나섰어요.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어요. 순간 수찬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예쁜 여자 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거든요. “저, 저기, 난 요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수, 수찬이야. 이사 떡을 가지고 왔는데.” 수찬이는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더듬더듬 말했어요. “아, 그래? 난 효령이라고 해. 들어와! 엄마, 앞집 애가 놀러 왔어요!” 효령이는 대뜸 수찬이 손을 잡아끌었어요. 수찬이는 효령이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지요. 방에는 갖가지 한복이 가득 있었어요. “우리 엄마는 한복 만드는 일을 하셔.” “우와! 예쁘다.”수찬이는 저도 모르게 한복을 만졌어요. 그러자 효령이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다홍치마하고 노랑 저고리가 마음에 드니? 그건 결혼한 새색시가 입는 거란다.” “효령이가 입은 건 무슨 한복이에요?” “색동저고리란다. 너도 한번 색동저고리를 입어 보련?” “에이, 남자가 어떻게 저런 걸 입어요?” “색동저고리는 여자 아이만 입는 게 아니란다. 설날 같은 날 아이들이 입는 때때옷이지.” 수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효령이 엄마가 말을 이었어요. “그리고 조금 더 크면 남자 저고리를 입지.” 수찬이가 윗옷 하나를 만지작거렸어요. “이것도 저고리예요? 아까 것과 조금 다르게 생겼는데.” “그건 마고자란다.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입는 거야.” “노란 단추가 참 예뻐요.” “그건 호박으로 만든 거야.”“호박요? 먹는 호박요?” 그러자 효령이 엄마는 씽긋 웃으며 말했어요. “호박은 보석 이름이란다.” 수찬이는 한쪽에 쌓아 둔 옷감 곁으로 갔어요. “옷감이 굉장히 많아요. 이걸로 한복을 만들어요?” “그렇단다.” 수찬이는 옷감을 이것저것 만져 보았어요. “어떤 것은 부드럽고, 어떤 것은 까슬까슬해요.” “부드러운 건 비단이고, 까슬까슬한 건 삼베란다. 겨울에는 비단으로 옷을 지어야 따뜻하고,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로 지어야 시원하지.” 효령이 엄마가 남자 한복을 하나 꺼내며 말했어요. “이거 한번 입어 보련?” 수찬이는 선뜻 받지 못했어요. 바로 옆에 효령이가 앉아 있었거든요. 수찬이가 효령이 눈치를 살피자, 효령이 엄마가 웃으며 말했어요. “저기 옷 무더기 뒤에 가서 갈아입으렴.” 수찬이는 한참만에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말했어요. “이 바지는 아주 뚱뚱한 사람이 입는 건가 봐요.” “호호, 한복 바지는 원래 통이 넓고 허리도 크단다. 그래서 몸에 맞게 허리끈을 하고, 대님을 매지.” “대님이 뭐예요?” “바짓부리를 묶는 끈이야.” 효령이 엄마는 바지 대님을 매 주었어요. 효령이가 저만치 앉아 투덜댔어요. “치, 수찬이한테는 바지를 입혀 주면서 왜 나는 못 입게 해요!” 그러자 효령이 엄마는 효령이를 나무랐어요. “넌 여자 애가 또 남자 한복 타령이니?” “남자 한복이 더 편하고 좋단 말예요, 뭐. 달음박질할 때도 편하고, 제기찰 때도 편하고, 축구할 때도 편하고, 앉아 있기도 편하고.” 그때 수찬이가 옆에서 끼어들었어요. “그래서 너 아까 남자 한복 입고 다녔구나?” 그러자 효령이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수찬이 입을 막았어요. 효령이 엄마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지요. “효령이, 너 또 남자 한복 입고 나갔니?” 효령이는 수찬이를 흘겨보았어요. 수찬이는 고개를 푹 수그렸지요. 한참만에 수찬이가 더듬더듬 말했어요. “효령아, 넌 남자 한복을 입은 것보다 지금 모습이 더 예뻐!” 효령이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어요. “정말이야?” “그래, 넌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가 참 잘 어울려. 거울을 봐.” 효령이와 수찬이는 나란히 거울 앞에 섰어요.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지요. |
신라 시대로 간 한얼이 | 예술경험 | 유아 | “엄마, 내 로봇 장난감 어디 있어요?” “글쎄. 다락방에서 한번 찾아보렴.” 한얼이는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다락방 문을 열었어요. 다락방은 뽀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지요. “장난감 상자가 어디에 있을까? 어, 이게 뭐지?” 오래된 책상 위에 낡은 사진첩이 놓여 있었어요. 한얼이는 사진첩 위에 뽀얗게 앉은 먼지를 쓱쓱 닦아 낸 뒤 가만히 사진첩을 열어 보았어요. 사진첩 속에는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꾸만 한얼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지요. 한얼이는 이상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어요. 그때였어요. “어, 어.” 한얼이는 빛과 함께 사진첩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고 말았답니다. 빛이 사라지자, 한얼이는 가만히 눈을 떴어요.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땅! 땅! 뚝딱! 뚝딱!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커다란 절을 짓고 있지 뭐예요. “안녕? 한얼아!” 어느새 왔는지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한얼이 옆에 서 있었어요. “앗, 사진 속에 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는 한얼이를 보고 씽긋 웃더니 사람들이 짓고 있는 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이 절은 불국사란다. 방이 이천 개에다 작은 건물이 팔십여 동이나 있지. 정말 크지? 자, 나를 따라오렴. 더 멋진 것을 보여 주마.” 할아버지는 한얼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어요. “와, 멋있다.” “이 탑은 김대성 재상이 세운 다보탑이란다.” “아, 다보탑이요?” “다보탑은 네 면에 팔 층 계단을 깎아 놓은 삼층탑이란다. 정말 아름답지 않니?” 할아버지는 한얼이의 손을 잡고 조금 옆으로 갔어요. “자, 우아하게 서 있는 이 탑을 보렴. 이 탑이 바로 석가탑이야. 무영탑이라고도 하지.” “무영탑이요?” “그렇단다. ‘그림자가 없는 탑’이란 뜻이야.” “탑에 그림자가 없다고요?” “거기에 대해선 이 할아버지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마.” 할아버지와 한얼이는 석가탑 앞에 나란히 앉았어요. “백제에 아사달이란 사람이 살았단다. 어느 날, 아사달은 탑을 세우기 위해 신라로 가게 됐지.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이 보고 싶어서 신라로 갔단다. 하지만 아사달이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만날 수 없었지. 아사녀는 탑이 완성되면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거라는 말을 듣고, 연못가에서 그림자가 비치기를 계속 기다렸단다. 하지만 탑이 완성됐어도 끝내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지. 기다리다 지친 아사녀는 그만 연못에 뛰어들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석가탑을‘무영탑’이라 부른단다.” “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나 볼까?” 갑자기 한얼이와 할아버지 앞에 커다란 빛이 생겼어요. 할아버지는 한얼이의 손을 잡고 성큼 발을 내딛었지요. 그 순간, 할아버지와 한얼이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여긴 어디지?” 빛이 사라지자 한얼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눈앞에 아주 커다란 종이 있었지요. “쉿, 지금이 종을 칠 시간이란다.” 할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말했지요. “성덕대왕 신종이 내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렴.” 드디어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어요. “한얼아, ‘에밀레, 에밀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니?”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종소리 같은데요?” “가만히 들어 보면 정말 종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는 것처럼 들린단다. 그래서 성덕대왕 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도 하지.” “정말‘에밀레, 에밀레’하는 것 같아요.” “예로부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바치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바로 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뜨거운 쇳물에 넣었다는구나. 그래서 종소리가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에밀레’로 들리는 게지.” 할아버지는 성덕대왕 신종에 얽힌 슬픈 전설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어요. 할아버지가 눈을 뜨자, 이번엔 큰 절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한얼이는 신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요. 때마침, 스님 한 분이 한얼이와 할아버지 쪽으로 걸어왔어요. 스님과 할아버지는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지요. “스님, 여기가 어딘가요?” “얘야, 여기는 황룡사란다. 신라에서 제일 큰 절이지. 우리 절은 원래 진흥왕이 궁궐로 지으려고 했던 곳이란다. 그런데 땅을 파는 순간, 커다란 황룡이 나왔지. 그래서 이곳을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로 했단다.” “와! 정말이에요?” 그때 휘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커다란 황룡이 나타났어요. “가자, 더 신기한 것을 보여 주마.” 할아버지는 한얼이를 안고 황룡에 올라탔어요. 황룡은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요. 할아버지와 한얼이는 깜깜한 밤하늘을 날다가 큰 벽돌로 쌓은 탑 앞에 내렸어요. 그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밤하늘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지요. “아저씨, 이 꽃병같이 생긴 탑은 뭐예요?” 한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요. “이곳은 별을 관측하고 하늘을 연구하는 첨성대란다.” “그럼, 그곳에 올라가면 별을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렇단다. 움직이는 별자리도, 달이 변하는 것도 다 볼 수 있지.” “할아버지, 저도 올라가 볼래요.” 한얼이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안 돼. 위험하니 올라가지 마라.” “싫어요. 올라갈래요.” 한얼이는 사다리를 타고 성큼성큼 올라갔어요. “한얼아, 안 된다니까!” 한얼이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올라갔지요. 그러다가 그만 우당탕쿵쾅! “아이고!” “한얼아, 무슨 일이니?”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은 엄마가 다락방으로 달려왔어요. 한얼이는 흐트러진 장난감 상자 틈에서 머리를 감싸고 일어났지요. “어, 여긴 다락방이잖아!” “어머, 이 사진이 여기 있었네! 한얼아, 이것 좀 보렴.” 엄마는 한얼이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어요. “너는 한 번도 뵌 적 없지? 이분이 바로 네 외할아버지란다. 평생 우리 문화재를 연구하셨지.”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는 황룡사 스님과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답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우리나라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많이 지니고 있는 도시예요.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경주에는 지금까지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삼십여 가지이고, 그 밖에 도시 전체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득하답니다. 그래서 경주는 문화의 도시로 불리지요. 당시 신라 시대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큰 궁궐을 짓고, 왕이 죽었을 때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 많은 보물을 넣어 두었는데, 후대 우리에게는 이것이 소중한 문화재가 되었어요. 경주에 지금까지 많은 문화재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외세 침입이나 전쟁에서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우리 조상들이 지켜 온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며 세계에 알리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랍니다. |
도깨비를 물리친 사물놀이 | 예술경험 | 유아 | 벼가 익어 가는 논길에서 아이들이 경주를 해요. “자, 마을 어귀에 있는 장승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민이 이겨라! 순덕이 이겨라!” 허수아비가 두 팔을 팔랑거리며 열심히 응원을 하지요. “이야! 내가 일등이다.” 먼저 도착한 훈이가 소리쳤어요. “여기서 뭐 하는 게냐?” 때마침 지나가던 훈이네 할아버지가 물었지요.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제가 일등을 했어요.” “그래? 우리 훈이 대단하구나.” “참! 할아버지, 올해는 저희들도 사물놀이에 끼워 주세요. 네?” 훈이는 할아버지를 졸랐어요. “허허, 그런데 사물이 뭔지 알고는 있는 게냐?” “그럼요. 사물은 하늘의 소리잖아요.” “꽹과리는 천둥소리이고, 징은 바람 소리이며, 장구는 빗소리이고, 북은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예요. 이 네 소리가 어울려 큰 울림이 되면 나쁜 기운은 물러가고 세상이 평온해지죠.” “우리 훈이가 잘 알고 있구나. 좋다! 이번 추수 때는 너희들도 끼워 주마. 대신 잘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야호, 신 난다!” 다음 날 아침, 논에 나온 할아버지와 아이들은 깜짝 놀랐어요. 벼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이코, 큰일이구나. 일 년 농사를 다 망치게 됐어.”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이건 분명히 나쁜 도깨비짓일 거야.” “그래 맞아! 우리 모두 도깨비를 혼내 주자!” 훈이와 아이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그날 밤, 훈이와 아이들은 꽹과리, 징, 장구, 북을 가지고 도깨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어요. “정말 도깨비가 나타날까?” “꼭 나타날 거야. 기다려 보자.” 그때, 휘이익 바람이 불며 벼들이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도깨비다!” “떨지마! 자, 꽹과리 먼저 들어간다!” 훈이는 논둑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꽹과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하늘이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번쩍번쩍, 우르릉 쾅쾅 요동을 쳤지요. 그러자 깜짝 놀란 도깨비들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자, 이번에는 징 들어간다!" 민이가 징을 치면서 재빨리 논둑으로 올라섰어요. 그러자 휘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왔지요. 도깨비들은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우왕좌왕 몰려다녔어요. "자, 이번에는 장구 들어간다!" 순덕이가 논둑으로 올라서며 장구를 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후드득 쏟아지는 것 같았지요. 도깨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자, 이번에는 북 들어간다!" 덕이가 덩실덩실 북을 치며 논둑으로 올라섰어요. 그러자 커다란 구름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뭉게뭉게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어요. 도깨비들은 무서워서 덜덜덜 떨었어요. 꽹과리, 징, 장구, 북소리가 하나로 어울려 울려 퍼지자, 도깨비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어요. 훈이와 아이들은 더욱 신명 나게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쳤지요. 그 소리에 못 이겨 빙빙 돌던 도깨비들은 슬금슬금 먼 하늘로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와!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도깨비들을 물리쳤다!" 훈이와 아이들은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지요. 낡이 밝자마자, 일을 나온 어른들은 깜짝 놀랐어요. 쓰러져 있던 벼들이 다시 일어나 있었거든요. "하늘이 우리를 도우신 거야." "자, 올해도 풍년입니다. 추수를 시작합시다!" 추수가 시작되고 농악대가 흥을 돋우었지요. 이때, 멀리서 아이들이 달려왔어요. "할아버지, 저희들도 농악대에 끼워 주세요." "오냐, 어서 오거라. 같이 하자꾸나." 훈이와 아이들은 농악대와 어울려 하나가 되었어요. "얼쑤 좋다! 자, 우리도 열심히 추수를 합시다!" 벼를 베던 아저씨들도 신명 나게 일했지요. 이때 지나가던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농악대의 흥겨움에 웃음을 지었답니다. |
민이네 김장하는 날 | 예술경험 | 유아 | 오늘은 민이네 김장하는 날. 어젯밤 간해 둔 배추를 씻고, 여러가지 채소도 다듬느라 엄마는 꼭두새벽부터 무척 바빠요. 일요일이면 늘 늦잠을 자던 아빠도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났지요. 덩달아 민이도 부산하고요. 옆집 새댁 아줌마가 김장 담그는 걸 도우러 왔어요. “아유, 몸도 무거운데 뭐 하러 왔어요?” 찹쌀 풀을 쑤고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줌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어요. 동그랗게 튀어나온 아줌마의 배 속에는 예쁜 아기가 살고 있답니다. 절인 배추를 깨끗이 씻어 채반에 받쳐 두고, 엄마와 새댁 아줌마는 무를 썰기 시작했어요. 탁탁탁탁! 톡톡톡톡! 손끝에서 가늘게 썰려 나오는 무가 민이는 신기하기만 해요. 통통통통! 아빠도 김칫소에 넣을 마늘과 생강을 찧고 있지요. “힝, 매워요.” 저런, 민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어요. 무슨 일일까요? 아! 엄마가 파를 썰고 있군요. “민이야, 네 방에 가서 놀아라.” 재미있는 채소 썰기를 볼 수 없게 된 민이는 심술이 나서 매운 파를 살짝 흘겨보았답니다. 무, 갓, 파, 미나리 채소를 모두 썬 엄마는 아빠에게 커다란 그릇을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거기에 고춧가루를 넣고 찹쌀 풀과 젓갈, 마늘, 생강을 섞은 후, 곱게 썰어 둔 채소와 생굴을 넣어 다시 한 번 휘젓자 맛난 김칫소가 완성되었어요. “어때요? 간이 맞아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김칫소를 우적우적 씹으며 아빠는 엄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어요. “와, 맛있겠다! 엄마, 나도 먹고 싶어요.” 매워서 안 된다는 엄마를 졸라 민이도 맛있는 김칫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굴은 빼고요. 미끈거려서 싫어요.” “민이! 편식하면 안 된다고 그랬지?” 엄마에게 혼이 난 민이는 얼굴이 뾰로통해지고 말았답니다. 꼭 짜서 물기를 뺀 배추와 김칫소를 준비한 엄마는 깨끗하게 씻은 갓과 파 위에 소금을 살짝 뿌렸어요. “갓이랑 파는 간을 너무 오래 하면 맛이 없어져요.” 엄마를 도와 갓과 파에 살살 소금을 뿌리던 새댁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갓을 뒤적였어요. 새초롬하던 민이는 향긋한 갓 냄새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지요. 빨간 고무장갑을 낀 엄마와 새댁 아줌마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김치를 버무리기 시작했어요. 엄마와 아줌마는 정성껏 소를 넣은 김치를 커다란 그릇에 담았지요. 그동안 아빠는 김치를 담아 보관할 커다란 항아리를 깨끗이 씻었어요. ‘우와! 이렇게 큰 항아리를 언제 다 채우지?’ 민이는 자꾸만 항아리를 들여다보았어요. 꼬르륵! 민이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민이 배고프니?” 웃으며 묻는 새댁 아줌마를 향해 민이도 배시시 웃었어요. “조금만 기다려라. 이것만 마저 하고 얼른 밥 먹자.” 민이는 어서 빨리 식사 시간이 되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답니다. 열무김치는 주로 여름에 담가 시원하게 먹어요. “민이야! 민이 자니?” 기다리다 지쳐 잠든 민이를 엄마가 소리쳐 불렀어요. 민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지요. 아! 김장이 다 끝났나 봐요. 맛있는 김치가 커다란 그릇에 가득가득 차 있었어요! 새댁 아줌마에게 줄 김치를 담던 엄마가 민이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지요. 아빠는 김치 항아리를 묻기 위해 땅을 팠어요. “이건, 겨우내 먹을 김치란다.” 아빠는 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속에 차곡차곡 김치를 채워 넣었어요. 옆에서 민이도 열심히 도왔지요. 그러고는 비나 눈이 와도 끄떡없도록 짚으로 만든 작은 지붕으로 김장독을 덮었답니다. 오늘 저녁 반찬은 막 담근 김치와 맛있는 동태찌개예요. 민이는 새댁 아줌마와 함께 저녁상 차리는 것을 도왔지요. 엄마는 통깨를 뿌린 맛깔스러운 김치와 보글보글 끓는 동태찌개를 내왔어요. 맛있는 반찬들을 보며 민이는 군침을 꼴깍 삼켰답니다. 옆집 아저씨도 와서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엄마는 손으로 김치를 찢어 김이 솔솔 나는 밥 위에 올려 주었지요. 민이는 싫어하던 굴도 골라내지 않고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엄마, 내 배도 아줌마처럼 볼록해졌어요.” 민이가 톡 튀어나온 자기 배를 보며 말했어요. “뭐? 녀석......, 하하하.” 맛있는 김치를 먹으며 모두 즐거운 저녁 한때를 보냈답니다. |
대장간이 들썩들썩 | 예술경험 | 유아 | 우리 마을에는 시끌벅적 재미난 대장간이 하나 있어요. 대장간 식구들은 항상 자기 자랑을 하느라 바쁘답니다. 대장간 식구들의 자랑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볼까요? 나는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가마야. 너무 뜨거워서 차갑고 단단한 쇠붙이들이 내게 오면 말랑말랑 녹아 버려. 내가 없으면 농기구들을 절대로 만들 수 없어. 나는 부웅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야! 내 방귀 한 방이면 작은 불씨도 대번에 커지고 약한 불길도 활활 타오르지 .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만들 수 없어. 난 기다란 집게야. 아무리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라도 내 손에 걸리면 옴짝달싹 못하지. 달궈진 쇳덩이를 만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걸? 나는 대장간 최고 장사인 메야. 내 턱으로 몇 번 내리치면 아무리 두꺼운 쇳덩이라도 얇게 펴지지. 내가 없으면 절대 쇳덩이를 철판으로 만들 수 없다고! 나는 튼튼하고 단단한모루야. 아무리 힘센 메라도 내 뱃심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 내가 밑에서 단단하게 받쳐 줘야 힘 있게 메를 내려쳐 쇠를 다듬을 수 있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어. 난 물이 담겨 있는 함지박이야. 아무리 뜨거운 것이라도 내 안에 담기면 모두 차갑게 식고 말지. 내가 없으면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식힐 수 없어. 대장간 식구들의 자기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어요. 하지만 서로 앞 다투어 뽐내다가도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모두 조용해져요. 대장간에서 제일은 역시 대장장이 할아버지거든요.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집게로 뜨거운 쇳덩이를 잡고 탕탕탕탕! 텅텅텅텅! 함지박에 쇳덩이를 치익 치익, 치이이이익! 쇠를 어르고 달래다 보면, 어느새 호미며 낫이며 괭이가 뚝딱뚝딱 만들어져요.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할아버지의 대장간을 찾아와요. “대장장이 할아버지, 가위 좀 만들어 주세요.” “대장장이 할아버지, 쇠스랑 좀 만들어 주세요.” 재주 좋은 할아버지의 대장간은 늘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린답니다. 가을이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오고 또 계절이 바뀌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대장간은 점점 더 조용해졌답니다. “아이, 심심해! 할 일이 없으니 손이 근질근질하네.” 사람들은 이제 공장에서 연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대장간 일이 줄어들었답니다. 하지만 대장장이 할아버지는 실망하지 않아요. “자, 다시 일을 시작해 볼까? 무엇이든 손으로 만들어야 단단한 게야!” 대장장이 할아버지는 메를 들고 쇠를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어요. 조용하던 대장간이 다시 떠들썩해졌지요. 대장장이 할아버지는 쇠만 있으면 못 만드는 물건이 없어요. 호미, 괭이, 낫, 삽 등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지요. 사람들은 아직도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만든 연장이 제일 좋다고 말해요. 대장간 식구들도 다시 시끌벅적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요. 농기구를 만드는 곳,대장간. 대장간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이었어요.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고 메로 두드려서 낫, 호미 등 여러 연장을 만들었어요. 대장간에서 일하는 대장장이들이 농사일에 필요한 낫, 호미, 쟁기 등 농기구를 만들거나 고치는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대장간은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생겨났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양반, 양민, 천민으로 나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대장장이는 신분이 높지 않았어요. 하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지요. 대장간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이었어요.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고 메로 두드려서 낫, 호미 등 여러 연장을 만들었어요. 대장간에서 일하는 대장장들이 농사일에 필요한 낫, 호미, 쟁기 등 농기구를 만들거나 고치는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대장간은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생겨났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양반, 양민, 천민으로 나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대장장이는 신분이 높지 않았어요. 하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지요. |
꼭꼭 숨어라! | 예술경험 | 유아 | 강이, 동이, 태산이, 금복이, 막둥이는 동네 친구예요.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고, 목소리만 들어도 신이 나지요. 어깨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얘들아! 우리 뭐 하고 놀까?” “닭싸움?” “자치기?” “말타기?” “숨바꼭질?” “그래! 우리 숨바꼭질하자!” 다섯 친구들은 강이네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강이네는 넓은 기와집이라 숨을 데가 많거든요. “자, 술래를 뽑자! 모두들 앉아!” “헤헤, 강이가 술래다!” “어서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 숨자!” 강이는 솟을대문 기둥에 눈을 가리고 섰지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일라! 앉아서도 보이고 서서도 보인다. 꼭꼭 숨어라! “이제 찾는다!” 강이는 행랑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하지만 행랑채에도 헛간에도 아무도 없었지요. 그때, 김 서방이 헛기침을 에헴, 에헴! “요기 숨었네, 금복이. 외양간에서 찾았다!” 강이와 금복이는 중문을 열고 사랑 마당으로 갔어요. “너희 아버지가 계시면 어떡해?” “괜찮아, 아버지는 오늘 관가에 나가셨어.” 드르륵, 사랑방 문을 열었지만 비어 있었어요. 그때, 어디에선가 재채기 소리가 에에에취! “요기 숨었네, 태산이. 병풍 뒤에서 찾았다!” 강이, 금복이, 태산이는 안채로 가 보았어요. “쉬이! 어머니 나오실라.” 강이는 살금살금 안방으로 다가가, 살문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았지요. “어머니께서 바느질을 하고 계셔. 여긴 아냐.” 그때, 대청마루 밑 누렁이가 으르렁, 멍멍! “요기 숨었네, 동이. 뒤주 뒤에서 찾았다!” 그런데 막둥이가 보이질 않았어요. “광 속에도 없네!” “장독대에도 없네!” “대나무 숲에도 없네!” 하는 수 없이, 강이가 소리쳤지요. 못 찾겠다 꾀꼬리! 못 찾겠다 꾀꼬리! 여기 있지롱! “헤헤, 부엌에 숨어 있었는데.” 막둥이는 한껏 으스댔지요. 그때......, “네 이 녀석! 감히 가마솥에 손을 대!” 행랑어멈이 밥주걱을 휘두르며 쫓아오지 뭐예요! 다섯 친구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을 쳤지요. “휴, 백 걸음은 뛰었겠다.” “백 걸음이 뭐야? 만 걸음은 뛰었겠다.” “만 걸음? 만에 만, 만, 만 걸음은 뛰었겠다.” 어느덧, 서산 머리로 뉘엿뉘엿 해가 졌답니다. 어깨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안채에는 여자 주인이 생활하는 안방과 며느리들이 사용하는 건넌방, 부엌, 곳간 등이 있어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안채의 뒷마당에는 장독대와 뒷동산이 있지요. 기와지붕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처마가 양쪽으로 자연스럽게 솟아올라 있는데, 이처럼 기와지붕은 날아갈 듯한 아름다운 곡선미가 가장 큰 특징이지요. 그리고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에도 기왓장을 올려, 지붕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답니다. |
우리 누나 시집간대요 | 예술경험 | 유아 | 민재는 김 역관 집 막내 도령이에요. 늦둥이로 태어나 작은누나와는 네 살, 큰누나와는 여덟 살 차이가 나지요. 그래서 큰누나는“우리 막둥이.”하면서 민재를 무척이나 아끼고 귀여워했어요. 민재가 말썽을 부려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도, 큰누나는 언제나 민재 편이 되어 주었지요. 오늘은 민재네 집에 경사가 있는 날이에요. 바로 민재의 큰누나가 혼례를 치르는 날이지요. 석 달 전, 중매쟁이가 다녀간 뒤로 사주단자가 들어오고, 신랑 집으로는 택일단자가 보내졌어요. 그리고 한 달 전에는 신랑집에서 온갖 폐물과 옷감을 보내오더니, 어제는 함진아비 일행이 몰려와서, 온 동네가 한바탕 떠들썩했답니다. “함 사세요! 함이요!” 어제 저녁, 동구 밖에서부터 함진아비의 외침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어요. 어느샌가 구경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대문 앞에 도착한 함진아비 일행은 노자를 더 달라며, 마중 나간 사람들과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였어요. 민재네 집에서는 노자를 넉넉하게 쥐어 준 후에야 함을 건네받을 수 있었답니다. 함 속에는 곱게 포장된 채단과 혼서가 들어 있었어요. “애걔, 저게 뭐야! 옷감이랑 편지 하나밖에 없잖아!” 잔뜩 기대에 차서 바라보던 민재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어요. 그때 작은누나가 아는 척하며 끼어들었지요. “저 편지가 보통 편지인 줄 아니?” “보통 편지가 아니면?” “저건 신부한테 제일 소중한 혼서라고! 혼서는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편지인데, 신부는 한 남편만을 섬기겠다는 의미로 저걸 평생 간직하는 거야.” 혼례 날인 오늘,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민재의 큰누나도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드린 뒤, 일찍부터 신부 단장을 시작했지요. 어느새 신랑 올 시간이 다 되었어요.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민재는 시무룩해 보였답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드디어 신랑 일행이 대문 앞에 도착한 거예요. 신랑은 짚불을 넘어, 의젓한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섰어요. “와, 진짜 잘생겼다!”작은누나가 감탄하며 말했어요. 하지만 민재 눈에는 신랑이 그리 잘생겨 보이지 않았답니다. “코는 매부리코고, 눈은 꼭 개구리눈 같네. 잘생기긴 뭐가 잘생겼다고 그래?” 신부 집에 들어온 신랑은 전안청으로 갔어요. 드디어 동네 어르신이 홀기에 따라 부르는 대로 혼례 의식이 시작되었어요. 신랑은 기럭아비에게서 나무 기러기를 건네받아 상 위에 올려놓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두 번 절했어요. “작은누나, 저 나무 기러기는 뭐야?” “음, 그건 말이지. 어, 그러니까.” “쳇, 작은누나도 모르는 거지?”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던 행랑어멈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어요. “호호호, 기러기는 한 번 짝을 맺으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부부의 관계를 잘 지킨다고 해요. 그래서 기러기처럼 평생 함께하자고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정표랍니다.” 이어서 신랑이 초례청으로 갔고, 잠시 후에는 곱게 단장한 신부가 모습을 나타냈어요. 신랑, 신부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마주 서는 순간이지요. “어머나, 신부가 어쩜 저렇게 고울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네.” “신랑은 또 어떻고요. 이목구비가 반듯한 게 인물이 참 훤하네요.”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과 부러움의 눈길로 신랑, 신부를 바라보았답니다. 신랑, 신부는 수모의 도움을 받아 대야에 담긴 물에 손을 씻었어요. 그다음, 신부가 신랑에게 두 번 절하고, 신랑은 그 답례로 신부에게 한 번 절했어요. 신부가 다시 신랑에게 두 번 절하자, 신랑도 신부에게 한 번 절하며 답례했지요. 신랑, 신부는 서로 읍한 뒤, 각자 자리에 앉았어요. 이번에는 신랑과 신부가 수모의 도움을 받아 술잔을 주고받고 술이 담긴 표주박도 교환했어요. 민재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이번에도 행랑어멈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어요. “술잔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의미예요. 또 표주박으로 술을 마시는 건 부부의 화합을 의미하는 거랍니다. 반으로 쪼개진 표주박은 그 짝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서로 합쳐야 하나를 이룬다는 뜻에서 유래된 거지요.” 이제 모든 혼례 의식이 끝났어요. 저녁때가 되자, 신랑과 신부는 신방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신방 창호지를 뚫고, 방 안을 엿보지 않겠어요?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이에요. 궁금해진 민재는 아주머니들 틈으로 끼어들었어요. “저리 가지 못해? 남자 애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막내 이모가 호통을 치며 민재를 내쫓았답니다. 이튿날 아침, 신랑과 신부가 민재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렸어요. 신랑은 민재에게도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지요. “처남, 잘 부탁해!” 하지만 민재는 못 본 척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답니다. 점심때가 되자, 젊은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랑달기를 시작했어요. 신랑의 다리를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신랑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답니다. 신랑이 대답을 잘 못하면 방망이로 사정없이 발바닥을 때렸지요. “아이고, 사람 살려!”매형이 아파하는 것을 보니, 민재는 속이 확 풀리는 것 같았어요. ‘히히, 그것 참 고소하다. 우리 큰누나를 데려가는 벌이야!’ 하지만 왠지 매형이 조금은 불쌍하게도 느껴졌지요. 오늘은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가는 날이에요. 이제 언제 다시 큰누나를 보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신랑, 신부가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민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민재는 큰누나의 꽃가마를 쫓아가며 울먹였어요. “큰누나, 다시 와야 해! 열 밤만 자고 꼭 놀러 와!” 그러자 신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지요. 일행의 모습이 멀리 사라져 갈 무렵, 민재는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누나!” 사주단자는 옛날에 혼례를 치르기 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냈던 편지예요. 여기에는 신랑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고, 이를 받은 신부 집에서는 혼례 날짜를 정해 택일단자를 신랑 집으로 보냈지요. 요즘에는 교통이 발달하여 양쪽 가족이 함께 모여 의논하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서식을 이용했답니다. |
민수의 일기 | 예술경험 | 유아 | 2003년 2월 4일 (입춘) 오늘 나는 그림책을 아홉 번 보았다. 할아버지는 새끼 아홉 발을 꼬고, 할머니는 옷을 아홉 가지 빠셨다. '아홉 차리'라 하여 입춘에 자기가 맡은 일을 아홉 번씩 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는다고 한다. 이제 곧 땅과 개울물이 녹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날 준비를 할 거다. 2003년 2월 19일 (우수) 끼룩, 끼룩, 끼룩, 끼룩!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들 행렬이 하루 종일 줄을 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보네. 기러기도 추운 곳을 찾아 떠나는 걸 보니." 하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정말 따뜻한 바람이 훅 밀려오는 것 같다. 2003년 3월 6일 (경칩)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온다는 경칩이다. 아침부터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로 달려갔다. 개울가에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개구리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동네 개구리들은 모두 잠꾸러기들인 모양이다. 2003년 3월 21일 (춘분) 지지배배, 지지배배. 마당에서는 제비들이 온종일 울어 댔다. 텃밭을 일구시던 할아버지와 씨앗을 고르시던 할머니는 제비를 보고 빙긋 웃으셨다. 그리고 "그래, 잘 다녀왔어?" 하고 말도 건네셨다. 제비들은 겨울 동안의 남쪽 여행이 아주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할 말이 많은 걸 보니 말이다. 2003년 4월 5일 (청명)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꼐 뒷산에 있는 조상님 묘로 성묘를 갔다. 그리고 준비해 간 오동나무 묘목도 심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이 지나면 우리가 심은 오동나무에서 꽃이 활짝 필 거라고 하셨다. 나무를 심고 나자 비가 내렸다. 잠시 후 비가 갠 하늘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수를 놓았다. 2003년 4월 20일(곡우) 하루 종일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할머니는 가마니 가득 볍씨를 담고, 솔가지로 정성스레 덮어 두셨다. "오늘 비가 내리는 걸 보니, 볍씨도 싹이 잘 트고, 올 농사도 풍년이겠네." 하고 내리는 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셨다. 비 때문에 밖에 나가 놀지 못해 속상했었는데, 이제는 비가 고맙게 느껴진다. 2003년 5월 6일 (입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판에 돋아난 파릇파릇한 모를 바라보며 흐뭇해하신다. 동네 어른들은 잡초를 뽑고 농작물에 해로운 벌레를 잡느라 전보다 더 바빠지셨다. 나는 마당에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지렁이를 봉지 가득 잡았다. 내일은 지렁이 미끼를 가지고 개울에 낚시하러 가야지. 2003년 5월 21일 (소만) 며칠째 비가 내리지 않자,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할머니는 "이러다가 모내기를 못하는 건 아닐까요?" 하고 할아버지께 물으셨다. "원래 소만에는 가뭄이 들기 마련이지. 이러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할 거요." 할아버지 말씀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내일은 꼭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2003년 6월 6일 (망종) 오늘은 우리 논에 모내기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도와주셨다. 나도 새참을 나르고, 심부름을 하며 하루 종일 바쁘게 지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리 논을 촉촉히 적셔 주었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해 주세요." 2003년 6월 22일 (하지) 맴맴맴맴, 맴맴맴맴! 매미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저녁을 먹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밖이 환하다. 오늘은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다. 평상에 누워 할머니가 쪄 주신 햇감자를 먹었다. 날이 많이 더워져서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2003년 7월 7일 (소서)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나는 개울가로 물놀이를 갔다. 흠뻑 젖은 옷을 말리며 할머니가 해 주신 호박 부침개와 참외를 먹었다. "이제 장마가 끝이 나려나?" 할아버지께서 별이 총총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2003년 7월 23일 (대서) 굉장히 더운 날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개울가에 모여 더위를 피했다. 아랫마을 수호 어머니가 닭죽을 끓여 주셔서 모두 맛있게 먹었다. 저녁때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천둥과 번개가 함께 쳤다.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빗소리가 무척 시원하게 들린다. 2003년 8월 8일 (입추) 밭에 무와 배추를 옮겨 심는 날이다. 할아버지는 오늘이 가을 문턱이라고 하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무와 배추의 어린싹을 밭으로 날랐다. 아침엔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시원했는데, 한낮은 여전히 무덥다. 저녁 무렵에 할아버지와 함께 밭을 둘러보았다. 어린싹들이 나란히 줄을 선 듯 심어져 있었다. 2003년 8월 23일 (처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해지는 날이다. 할머니와 함께 여름내 눅눅해진 옷가지와 이불을 마당에 널어 말렸다. 바람에 날리는 옷들을 보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더위도 가시고, 정말 가을이 오려나 보내." 2003년 9월 8일 (백로) 얼마 후면 추석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곶감이며 대추, 밤 등 차례를 지낼 때 필요한 음식들을 샀다. 달콤한 향이 나는 먹음직스러운 포도도 바구니 가득 샀다. 나는 추석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추석에는 서울에서 엄마와 아빠가 오시기 때문이다. 2003년 9월 23일 (춘분) 초봄에 날아갔던 기러기들이 다시 돌아왔다. 제비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집집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올해도 풍년이구나. 조상님들 덕분이야." 할아버지는 곳간에 둔 쌀가마니를 보며 행복해하셨다. 2003년 10월 9일 (한로) 마당에 심어 놓은 국화꽃이 활짝 피었다.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다. 우리 집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국화잎을 따 국화주를 담그고, 국화전을 지져 먹었다. 할아버지께서 오늘이 제비가 강남 간다는 중양절이라고 하셨다. 2003년 10월 24일 (상강) 요즘엔 가을 햇볕에 고추를 말리느라 바쁘다. 아침이 되면 창고에 치워 두었던 고추를 마당에 넓게 펼치는 일이 내 몫이다. 오늘도 고추를 널고 "훠이, 훠이" 참새를 쫓으며 보초를 섰다. 2003년 11월 8일 (입동)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침부터 우리 집으로 모이셨다. 몰래 김칫소를 얼마나 집어먹었던지, 저녁 무렵엔 배가 아파 한참을 누워 있었다. 남자 어른들은 마당 한 옆에 땅을 파고 김칫독을 묻었다. 맛있게 익을 김치를 생각하니 또다시 입가에 군침이 돈다. 2003년 11월 23일 (소설) 첫눈이 내렸다. 눈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눈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눈을 맞으며 뛰어다녔다. 산에 사는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는지 보이질 않았다.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2003년 12월 7일 (대설)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마당에 눈사람도 두 개나 만들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눈이 좋으신가 보다. "눈이 많이 내리면 겨울이 따뜻하고,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지." 하시며 엽신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2003년 12월 22일 (동지) 동지 팥죽을 쑤어 먹었다. 할머니께서는 팥죽을 정성껏 담아 장독에 가져다 놓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팥죽 몇 국자를 떠, 문밖과 부엌에 뿌리셨다. 모두 잡귀를 쫓고,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라고 하셨다. 2004년 1월 6일 (소한) 친구들과 함께 언덕에서 썰매를 탔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할아버지가 꾸중을 하셨다. "소한 추위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러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옷을 갈아입고, 화롯불에 손을 쬐니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2004년 1월 21일 (대한) 할아버지께서 오늘을 끝으로 추위가 물러갈 거라고 하셨다. 정말 요즘 들어 날이 많이 푸근해졌다. 오늘 밤에도 할머니가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밖에는 물러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운지 싸락눈을 뿌리고 있다. |
할머니 댁 앞마당 | 예술경험 | 유아 | 할머니 댁 너른 앞마당은 우리들 놀이터예요. 아침이 되면 모두들 할머니 댁 앞마당으로 모여들고, 할머니가 준비해 놓은 새로운 놀이를 하지요. 제기차기. 탁, 탁, 탁! 술 달린 제기가 발 위에서 나풀나풀 춤을 춰요. 저런, 저런! 땅에 제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뛰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어요. 어, 저기 좀 보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우와! 오늘 제기차기는 수남이가 일등이에요. 투호. “우리 편, 이겨라! 우리 편, 이겨라!” 빨간 끈과 파란 끈을 머리에 동여매고, 화살을 던지며 투호놀이를 해요. 두 발은 모으고, 화살은 힘껏 던져요. 휙, 휙! 할머니가 던진 화살이 모두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네요. 팽이치기. 솔이 팽인 저렇게 잘도 돌건만, 내 것은 비틀비틀 힘이 없어요. “이를 어째,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굴러 보지만, 팽이는 이내 그만 픽, 쓰러져 버리네요. 그네뛰기. 쉬잉, 슝, 쉬잉, 슝! 나무에 매어 놓은 그네를 타고, 파란 하늘 하얀 구름까지 날아올라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 날리고, 우리 마을 한눈에 다 보이지요. 씨름 으라차차차! 할머니 댁 모래판에서 씨름 경기가 열렸어요. 대추나무 집 주호는 홍 샅바, 재 너머 골 수한이는 청 샅바. 으라차차차 어이쿠! 털썩! 수한이의 한판 승! 모두들 덩실덩실 춤을 추어요. 칠교놀이. 마루에서는 칠교놀이가 한창이에요. 알록달록 색깔 입힌 칠교 조각을, 이리저리 요리조리, 맞춰 보아요. 솔이는 토끼를. 순돌이는 호랑이를 만들어요. 장난꾸러기 동화가 칠교판 위로 넘어졌어요. 애써 만든 칠교 조각이 흩어져 버리자 영희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지요. 널뛰기. 기다란 널빤지 위에 마주 서서, 쿵더쿵 쿵더쿵 널을 뛰어요. “쿵더쿵 쿵더쿵 널뛰는데, 싸라기 받아서 닭을 주고, 왕겨를 받아서 개를 주고, 종다래끼 옆에 차고, 널뛰기 하늘의 별 따러 가자. 쿵더쿵 쿵더쿵, 쿵 더러 쿵.” 윷놀이. “와, 윷이오!” “에이, 도네.” 네 개의 윷가락이 공중에서 핑그르르 돌다 떨어졌어요. 도, 개, 걸, 윷, 모! 돼지, 개, 양, 소, 말! 어떤 말은 업혀 가고, 어떤 말은 잡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네 개의 윷가락에 모두의 눈이 모여 있어요. 사자놀이. 둥둥둥, 둥둥둥둥! 할머니가 둥근 북을 치면 으르렁, 어흥 어흥! 사자탈을 쓴 친구들이 마당으로 나와요. 발은 번쩍, 고개는 흔들, 신 나는 사자춤을 추지요. 우리도 장단 맞춰 사자춤을 추지요. 강강술래. 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떴어요. 우리는 할머니 댁 앞마당에 손을 잡고 섰어요. 둥근 보름달처럼 둥글게 둥글게. “강강술래, 강강술래. 돈다 돈다 잘도 돈다. 강강술래, 올해도 풍년이고, 내년에도 풍년일세, 강강술래.” 마을 가득히 울려 퍼지는 우리들의 노랫소리. 도깨비 놀이. “우히히히, 나는 도깨비다!” 종이로 만든 탈을 쓰고, 도깨비방망이를 들고서 도깨비 놀이를 즐겨요. 깡통 불을 들고 휙휙 돌리면, 동그란 불빛이 도깨비불 같아요. “도깨비방망이 들고서 에루화 둥둥, 도깨비가 잡아갈까, 콩닥콩닥 쿵!” 마을 사람 모두 모여 흥겨운 춤을 추고, 도깨비 놀이에 밤새도록 시끌벅적. 내일은 또 어떤 놀이가 할머니 댁 앞마당에서 펼쳐질까요? |
우리 집에 금줄이 걸렸어요 | 예술경험 | 유아 | 내 이름은 달래예요. 나는 이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그래서 항상 엄마를 따라 들에도 가고, 산에도 가고, 장에도 가요. 아빠는 이런 나를 보고 “우리 달래는 엄마 꼬리네.”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우리 엄마 배는 엄청 커요. 나는 불룩한 엄마 배가 신기해서 자꾸 만져 봐요. 엄마 배 속엔 동생이 살고 있대요. 그래서 곧 동생이 생길 거래요. 난 여동생이면 좋겠어요. 그래야 머리도 예쁘게 땋아 주고, 아껴 신은 내 꽃신도 줄 수 있으니까요. 엄마는 지금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고 계세요. “엄마, 무슨 옷이 이렇게 작아요?” “응, 이건 아기가 입을 배내옷이라서 그렇단다.” “아이, 귀여워!” 아주 조그마한 게 아기가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셨던 아빠가 돌아오셨어요. “달래야, 이 미역을 부엌에 잘 놓아두어라.” 아빠는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미역국을 드셔야 한대요. 그래야 아기가 먹을 젖도 많이 나오고, 엄마도 빨리 건강해질 수 있대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어요.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아빠가 장작을 패고 계셨어요. “우리 달래, 일찍 일어났구나.” “아빠, 땔감을 왜 그렇게 많이 만드세요?” “으응,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방을 따뜻하게 해야 하거든. 그래야 엄마와 아기가 고뿔에 걸리지 않지.” 아침을 먹고, 엄마를 따라 빨래터에 나왔어요. 빨래를 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새하얘졌어요. 날이 추운데도 땀을 아주 많이 흘리셨지요. “엄마, 어디 아프세요?” “으응, 아무래도 아기가 나오려나 보구나.” 빨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자주 멈춰 서곤 하셨어요. 엄마가 마당을 힘들게 서성이고 계시는 동안, 아빠가 부리나케 산파 할머니를 모셔 오셨어요. “아빠! 엄마가 많이 아프신데 왜 자리에 눕지 않아요?” “아기가 잘 나오기 위해서는 몸을 자꾸 움직여야 한단다. 네가 태어날 때도 그랬어.” 방 안에서 엄마의 아파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산파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지요. “아빠! 엄마가 많이 아프신가 봐요?” 나도 모르게 아빠 손을 꼬옥 잡았어요. 그리고 엄마가 너무 많이 아파하셔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어요. 그때였어요. “응애애! 응애!”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아들이야. 아들!” 산파 할머니가 이렇게 외치자, 안절부절못하시던 아빠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어요. 나도 눈물을 닦아 내며 배시시 웃었지요. 아빠는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가위와 함께 방에 넣어 주셨어요. 나는 문틈으로 살짝 방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산파 할머니가 아기를 씻기고 있었지요. “어이쿠, 고놈! 씩씩하게도 생겼네!” 잠자는 모습이 귀여운 남동생이에요. 사실 여동생이면 더 좋았겠지만 남동생도 아주 귀엽고 예뻐요. 엄마가 만든 배내옷을 입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가 내 동생이라니 정말 신기해요. 엄마가 아기를 낳자, 아빠는 무척 바빠지셨어요. “아빠, 짚으로 무엇을 만드세요?” “으응, 금줄을 만들고 있단다.” “금줄이요? 그게 뭐예요?” “우리 달래에게 남동생이 생겼다고 사람들한테 알리는 거지.” 금줄은 지푸라기를 꼬아 솔가지나 종이를 끼우고, 남자 아기일 때는 고추랑 숯이랑 같이 끼워 넣는 거래요. 우리 집 싸리문 앞에 금줄이 걸렸어요. 숯과 고추, 종이, 솔가지를 끼워 놓은 금줄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려요. 이제 우리 집 식구를 뺀 다른 사람은 스물한 밤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도 올 수 없대요. 엄마와 아기에게 안 좋다나요. 그날 저녁 밥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과 고기가 들어 있는 미역국이 놓여 있었지요. 아빠가 엄마를 위해 맛있는 미역국을 끓인 거예요. 엄마는 아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번갈아 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답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요. 나는 엄마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았어요. 엄마 옆은 항상 내 자리였는데, 오늘부터는 아기가 엄마 옆에서 잠을 자네요. 나는 아기에게 가만히 속삭였어요. “잘 자라, 아가야. 네가 태어나서 참 기뻐.” 금줄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문간에 두르는 새끼줄을 말해요. 짚으로 꼰 새끼줄에 아들이면 숯, 고추, 생솔 가지를 섞어서 끼우고, 딸이면 숯과 생솔 가지 또는 흰 종이를 끼워 대문 앞이나 장독대, 부엌에 매달아 놓는답니다. 금줄은 아기가 태어났음을 알리고, 산모와 아기를 악귀로부터 보호하여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의미로 사용됐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 걸어 두는 고추는 사내아이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추의 붉은색이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요. 그리고 함께 꽂는 생솔 가지는 추운 겨울을 씩씩하게 잘 이겨 내라는 마음과 악귀를 내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
씨름 장사 동이 | 예술경험 | 유아 | 시골 장터 한 마당에 요란한 풍물 소리가 울려 퍼져요. 징징징! 징징징! 개갱 개갱 갱개개갱! 둥! 두둥! 둥! 장에 나온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흥겨운 풍물 가락에 어깨춤을 추며 따라가요. 징징징! 개갱 개갱 갱개개갱 개갱. 피리 피리필리리! 덩기 덩기 덩더 쿵! 둥둥둥짝 ! 오늘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에 사는 장사들이 모두 모여 씨름을 하는 날이에요. “이번에는 누가 황소를 타 갈까?” “그야, 김 서방이지! 아마 아랫마을 김 서방을 당해 낼 장사는 아무도 없을걸.” 징! 징 소리와 함께 드디어 씨름이 시작됐어요. 건장한 두 장사가 힘겨루기를 해요. 상투를 튼 장사는 윗마을 최 서방이고요. 댕기 머리 장사는 아랫마을 우람이에요. 서로 밀고 당기고, 두 장사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아요. “씨익씩! 으랏차차!” 두 장사의 입에서 동시에 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최 서방이 들배지기란 기술을 이용해 우람이를 들어요. 하지만 우람이도 호미걸이로 최 서방의 다리를 걸어 버텼지요. “으랏차차!” 드디어 최 서방이 우람이의 샅바를 앞으로 당겼어요. ‘쿵’하는 소리와 함께 우람이가 먼저 넘어지고 뒤이어 최 서방도 쓰러졌지요. 최 서방이 이겼어요. 두 번째 씨름판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체구가 좀 작아 보이는 소년이 자기보다 체구가 큰 장사와 샅바를 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지요. “아니, 저 소년은 누구지?” “윗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 동이야!” 동이는 어른과 비교해 체구는 작았지만 꾀가 많고 씨름 기술도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몸집이 작은 동이가 상대방을 오금당기기로 넘어뜨렸어요. 사람들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지요. “와! 소년 장사가 탄생했군그래!” “누가 아니래! 저 덩치가 나무처럼 쓰러지다니 말이야.” 동이는 그 이후에도 세 명의 건장한 장사들을 모래판에 차례로 넘어뜨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씨름판엔 동이와 작년에 황소를 타 갔던 김 서방만이 남게 되었지요. “소년 장사! 이번에도 멋지게 넘기라고!” “김 서방, 어린애라고 봐주지 말게!”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응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동이와 김 서방이 샅바를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갔어요. “이봐, 소년 장사! 네 기술은 내 힘 앞에서는 어림없을걸.” 그러자 동이도 지지 않고 대답했지요. “우리 어머니께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셨어요.” 동이와 김 서방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어요. “으랏차차!” 김서방이 먼저 동이를 번쩍 들어 올렸어요. 동이는 김 서방의 발을 딛고 중심을 잡았지요. “소년 장사, 이겨라!” “김 서방, 뭐 해? 어서 넘기라고!” 하지만 동이를 들어 올려 몇 바퀴 돌던 김 서방은 그만 힘이 빠져 동이를 내려놓고 말았지요. “소년 장사, 제법인걸. 내 들배지기를 피하다니 말이야.” 김 서방이 다시 동이를 밀어붙였어요. 동이도 지지 않고 김 서방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지요. “이야압!” 동이는 김 서방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틈을 이용해서 정면뒤집기로 김 서방을 모래밭에 거꾸러뜨렸어요. “저럴 수가! 저 큰 덩치를 뒤로 넘겨 버리다니!”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만 지를 뿐이었지요. “와아! 윗마을에 소년 장사가 탄생했다!” “소년 장사 만세!” 동이가 올해의 씨름 장사가 되었어요. 동이는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렸지요. 풍물패들이 한바탕 신명 나게 놀며 흥을 돋우어주었어요. 동이는 황소를 타고 장터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어요. 마을 사람들과 풍물패들이 뒤따랐지요. 징 징 징! 징 징 징! 개갱 개갱갱개개갱! 덩기 덩기 덩더 쿵! 아이들이 뛰어가는 저만치 동이의 집이 보였어요. 동이의 마음도 아이들처럼,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지요. 우리의 전통 운동 경기, 씨름. 씨름은 아주 먼 옛날 원시 시대부터 사람들이 즐겨 하던 운동이에요. 두 사람이 ‘샅바’라는 홍색과 청색의 끈을 다리와 허리에 두르고 심판의 지시에 맞추어 힘과 기술을 겨룬 후, 먼저 무릎 윗부분이 땅에 닿는 사람이 지는 규칙으로 진행되지요. |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 | 예술경험 | 유아 |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커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어요. “부인, 정말 고생이 많았소!” 점잖기로 소문난 이 대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았어요. “여봐라,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일 터이니 준비하거라.” 이 대감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하인에게 말했어요. “예, 대감마님. 경하 드리옵니다.” 도대체 이 대감 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튿날, 아침부터 이 대감 댁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어요. “마님이 날마다 치성을 드리시더니 정말 잘됐구먼.” “결혼한 지 십 년 만에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좋으실까!” “정말로 축하할 일이에요!” 이 대감 댁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축하의 말을 전했어요. 이 대감은 싱글벙글 웃으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했지요. ‘가만 있자, 귀한 우리 아들 이름을 뭐라고 짓는담.’ 이 대감과 부인은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잔치에 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아내의 말을 듣고 이 대감은 잔치에 온 사람들에게 부탁했어요. “우리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데, 누구라도 좋으니 말씀을 해 주시오. 그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이 대감의 말이 끝나자 마당쇠가 말했어요. “대감마님, 해동이가 어떨까요? 제가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다 보면 밝게 빛나는 해만큼 멋진 것도 없거든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해처럼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면 좋잖아요!” 이 대감이 가만히 들어 보니 마당쇠의 말도 맞는 것 같았어요. “그래, 만약 해가 없다면 이 세상도 없을 테지.” 이 대감은 아기 이름을 해동이라고 지을까 생각했어요. 그때, 옆에 있던 김 대감이 말했어요. “이보게나, 사내란 모름지기 구름처럼 높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네. 그래야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대감은 친구인 김 대감의 말도 맞는 것 같았어요. “그럼 해와 구름 중에 어떤 것으로 이름을 정할까?” 이 대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 대감에게 물었어요. “그렇다면 해와 구름 둘 다 좋으니 해 구름동이라고 지으면 되겠네그려.” 그때, 우물가에 사는 강 서방이 말했어요. “대감님, 물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강 서방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옳았어요. 그래서 이 대감은 아기 이름을 해 구름 물동이라고 짓기로 했어요. “대감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믿음도 중요하답니다.” 나무꾼 임 서방의 말도 빼놓을 수 없었지요. “그 말 참 좋구려. 소나무처럼 늘 푸르게 살면 얼마나 좋겠소.” 그래서 이 대감은 아기 이름을 해 구름 물 솔동이라고 짓기로 했어요. “대감님, 소나무 옆에는 항상 듬직한 바위가 있잖습니까? 우리 남편이 언제나 제 옆에서 챙겨 주듯이 말이에요.” 임 서방의 아내도 말을 거들었어요. “그래, 우리 아들이 바위처럼 듬직한 사람이 되면 참 좋겠지.” 그래서 이 대감은 아기 이름을 해 구름 물 솔 바위동이라고 지었어요. “대감,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하오! 나무와 동물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사는 산도 참 좋더구먼” 포도대장의 말도 듣고 보니 산도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기 이름을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동이라 했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어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 짓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이 대감은 아기에게 좋은 것은 뭐든지 다 붙여 주고 싶었거든요. “이보게, 더 좋은 이름이 또 없겠나?” 이 대감은 돌아가려는 최 판서를 붙잡고 물었지요. “허허, 자네 욕심이 많구먼.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가 봐야겠네.” 최 판서는 이렇게 말하곤 발걸음을 옮겼어요. 이 대감은 할 수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왔지요. 그때, 최 판서가 되돌아와 이 대감을 붙잡고 말했어요. “예로부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학 같다 하였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럼 우리 아들 이름을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 학동이라 해야겠네.” “아참, 이 대감! 거북을 빼놓을 뻔했네그려. 거북이야말로 오래 사는 것 중 으뜸 아닌가!” “역시 최 판서 자네는 아는 것도 많네그려.” 이제 아기 이름은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 학 거북동이가 되었어요. 이 대감은 아기 이름을 부인에게 알려 주었어요. “대감, 아무리 오래 살고 멋있어도 착한 마음이 없으면 안 돼요. 사슴은 큰 뿔이 있어도 남을 괴롭히지 않고 은혜를 잊지 않는대요.” 이 대감은 아내의 말을 듣고 아기 이름에 사슴도 넣어 부르기로 했어요.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 학 거북 사슴동이! 이젠 다 되었소.” “아마 우리 아기처럼 좋은 이름을 가진 아기도 없을 거예요.” 이 대감과 부인은 아기를 바라보며 행복해했어요. 이름 짓기를 끝낸 이 대감 부부가 막 잠이 들려 할 때였어요. 송 의원이 급하게 이 대감을 찾아왔어요. “대감님, 불로초라 부르는 신비한 약초가 있습니다. 그 불로초를 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고 합니다. 귀한 아들에게 불로초라는 이름도 꼭 넣으십시오.” “그렇게 귀한 불로초를 빼놓다니 큰일 날 뻔했구려.” 이 대감은 송 의원에게 고맙다며 떡을 한 보따리 싸 주었어요. “부인, 그럼 마지막으로 불로초까지 넣읍시다.” “그럼 이제 아기 이름을 크게 한번 불러 볼까요?” “우리 아기,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 학 거북 사슴 불로초동이야!” 그런데 아기 이름을 불러 보니 너무 길어서 부르기가 불편했어요. “허허,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만 골라야겠소.”하지만 밤이 깊어 가도록 하나만 고를 수 없었지요. “해 구름 물 솔 바위 산 학 거북 사슴 불로초 중에 뭘 고르지요?” “잠깐,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어 준 이름이 모두 십장생이구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오래 사는 열 가지 말이오.” “호호호, 정말 그렇네요. 우리 집 병풍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허허허,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고생만 했구려.” 그 뒤로 이 대감 아들은 이름처럼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
토끼와 자라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먼 옛날, 동쪽 바다에 놀기 좋아하는 용왕이 살았어. 용왕은 날마다 잔치를 열어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 먹고 놀았지. 그러던 어느 날, 용왕이 덜컥 병에 걸렸지 뭐야. 용왕의 병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 용하다는 의원이 모두 다녀갔지만, 아무도 용왕의 병을 고치지 못했지. 그때 용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가재가 나서서 말했어. 토끼의 간을 먹으면 세상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토끼의 간이라고? 그렇다면 당장 구해 와야지! 정말일까요? 땅에 사는 토끼말인가? 누가 가지러 가지? 용왕은 당장 신하들을 불러 모았어. 누가 땅에 가서 토끼를 데려오겠느냐? 신하들은 각자 핑계를 댔어. 저는 다리가 여덟 개라 땅에서는 마구 뒤엉켜 걷지 못합니다. 저도 8개. 전 10개. 흑흑, 저는 가고 싶지만 발이 없습니다. 저도요. 저는 몸이 미끄러워 산을 오르지 못합니다. 자라 차례가 되었어. 제 단단한 등딱지에 토끼를 태우고 오고 싶지만,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 그럼 토끼 생김새를 알려 줄 테니 네가 가면 되겠구나! 용왕은 토끼 모습을 아는 신하들을 모두 불렀어.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신하에게 토끼를 그리게 했지. 길쭉한 귀가 달렸지요. 눈은 동그랗고요. 꼬리는 뭉툭합니다. 털은 눈처럼 하얗답니다. 마침내 토끼를 똑 닮은 그림이 완성되었어. 토끼 그림 완성이요! 저렇게 생겼구나! 자라는 토끼 그림을 가지고 용궁을 나섰어. 첨벙첨벙 헤엄치고 넘실넘실 파도 넘어 드디어 땅에 도착했지. 자라는 토끼를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녔어. 나무가 빽빽한 숲속이며, 너른 들판, 절벽 위, 동굴, 폭포까지 구석구석 토끼를 찾아다녔지. 토 선생! 거기에 있소? 토 선생! 한참을 돌아다니던 자라는 토끼의 길쭉한 귀와 닮은 동물을 발견했어. 혹시 토 선생이오? 나는 사슴이오. 토끼의 동그란 눈과 닮은 동물도 만났지.토 선생 맞지요? 잘못 봤소. 나는 호랑이요. 그러다 뭉툭한 꼬리를 보고 슬쩍 건드렸는데 글쎄, 집채만 한 곰이지 뭐야. 놀란 자라는 등딱지에 머리를 넣고 벌벌 떨었지. 얼마 뒤 자라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는데 하얀 털을 가진 동물이 깡충깡충 뛰어가고 있었어. 토 선생? 앗! 토 선생이다! 자라는 곧장 토끼를 따라갔어. 토 선생, 여기 계셨군요. 나와 함께 용궁에 갑시다. 용궁이요? 땅에서는 상상도 못할 맛있는 음식이 많답니다. 난 아삭아삭 풀이 더 좋소! 진주가 달린 아름다운 궁전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잔다오. 난 넓은 풀밭에서 자는 것이 더 좋소! 그때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 토끼 살려! 토끼가 깜짝 놀라서 숨자, 자라는 토끼를 꼬드길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 날마다 산짐승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얼마나 힘드시오?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용궁으로 갑시다. 토끼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열두 달 하루도 궁둥이 편히 붙이고 있어 본 적이 없었지. 좋소. 가 봅시다! 토끼가 자라 등에 깡충 올라타자, 자라가 바닷속으로 풍덩! 출렁출렁 파도 넘고 울렁울렁 물길 따라 가는 길이 어찌나 신기한지. 가는 곳마다 진주 구슬이 반짝 반짝. 토끼 눈알이 뱅뱅.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드디어 용궁에 다다랐지. 자라는 토끼를 용왕 앞에 데려갔어. 용왕은 토실토실 토끼를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토끼야, 약으로 써야 하니 어서 네 간을 내놓아라." "제 간을 내놓으라고요?" 토끼가 새파랗게 질려서 물었어. "그래, 네 간을 먹어야 내 병이 낫는다는구나." 앗! 토끼는 그제야 자라에게 속은 걸 알았지. 소화 시키는 위도 아니고 숨 쉬는 폐도 아니고 콩콩 뛰는 심장도 아니고 똥 만드는 대장도 아니고 간? 이제 까딱하면 죽게 생겼잖아. 토끼는 재빨리 꾀를 내어 말했어. "이를 어쩌지요? 간을 두고 왔지 뭡니까." "뭐? 간을 두고 와? 세상에 간을 빼놓고 다니는 동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용왕이 버럭 화를 냈어. 정말입니다.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토끼는 능청스레 이야기를 시작했어. 제 간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다들 저만 보면 간을 달라고 하길래 빼놓고 다니는 겁니다. 하긴, 귀한 것을 함부로 가지고 다니면 안 되지. 그럼 네 간은 지금 어디 있느냐? 아무도 찾을 수 없게 깊은 바위틈에 꼭꼭 숨겨 두었지요. 그럼, 어서 가서 네 간을 가져와야겠구나! 그럼요, 그럼요. 용왕은 자라에게 명령했어. "자라야, 어서 토끼와 함께 가서 간을 가져오너라." 자라는 토끼를 등에 태우고 다시 땅으로 향했어. 빨리 갑시다. 야호, 살았다! 토끼는 기뻐서 풀밭을 데구루루 굴러다녔어. 어서 간을 가지러 갑시다. 자라의 말에 토끼가 배꼽 잡고 웃었어. 어떻게 간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겠느냐? 뭐라고? 속았구나! 토끼는 자라에게 새까맣고 동글동글한 자기 똥을 주며 말했어. 네 덕분에 용궁 구경은 실컷 하였구나. 이건 그 값이다. 자라가 어쩌겠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그게 토끼 똥인지도 모르고 받아 챙겼지. 이거라도 가져가야지. 자라는 토끼에게 받은 것을 용왕에게 바쳤어. 용왕은 그것이 토끼 간인 줄 알고 정성껏 달여 먹었지. 그런데 참으로 이상도 하지. 용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거야. 그동안 잔치를 열지 못해 먹고 놀지 않아서일까? 그 덕분에 자라는 용왕에게 높은 벼슬을 받고 오래오래 잘 살았대. |
돌 장승 재판 | 예술경험 | 유아 | “아이고, 좀 쉬었다 갈까?” 비단 장수 이 서방, 돌 장승 앞에서 쉰다네. 돌 장승에 기대앉은 이 서방, 스르르 잠이 들었네. 잠시 뒤, 잠에서 깬 이 서방, 두리번두리번 비단을 찾네. 위로 휙! 아래로 휙! “내 비단이 어디 갔지?” 여기저기 비단을 찾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네. “아이고, 귀한 내 비단, 아무도 못 보셨소?” 비단 찾는 이 서방, 고래고래 소리쳐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네. 비단 찾는 이 서방, 마을로 내려왔네. 꺼이꺼이 울며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네. 내 비단 보셨소? 내 비단 본 적 없소? 내 비단 어디 있는지 아시오? 그때, 지나가던 아이가 말하네. “우리 원님한테 가 보세요. 무슨 일이든 뚝딱 해결하시거든요.” 비단 찾는 이 서방, 후다닥 원님을 찾아가네. “원님, 제발 제 비단 좀 찾아 주세요!” 비단 찾는 이 서방, 원님에게 비단 잃어버린 이야기를 하네. 이야기를 다 들은 원님, 이 서방에게 이것저것 묻네. 어디서 잠들었다고? 돌 장승 앞이요. 비단은 어디에 두었지? 돌 장승 옆에 두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무엇을 보았느냐? 돌 장승입니다. 돌 장승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비단 도둑을 알겠다! 두 눈 반짝이던 원님, 돌 장승을 잡아 오라 명령하네. ‘돌덩이를 잡아 오라니!’ 돌 장승을 잡으러 가는 포졸들, 어리둥절하지만 원님 명이니 따를 수밖에. 돌 장승이면 돌 아니야? 도둑이 아니라 돌을 잡아 오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돌 장승을 잡은 포졸들, 낑낑 끙끙 원님에게 가져가네. “돌 장승을 왜 가져가지?” 궁금한 마을 사람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네. 돌 장승과 마주한 원님, 몇 가지 돌 장승에게 묻네. 이 서방이 네 앞에서 정말로 잠들었느냐? 비단을 네 옆에 두었고? 이 서방이 잠들기 전에도, 일어나서도 너밖에 보지 못했다던데! 혹시 네가 비단을 가져간 자를 보았느냐? 어허, 말이 없는 걸 보니 네가 가져간 게로구나! 여봐라, 이 돌 장승을 매우 쳐라! 딱! 딱! 딱! 포졸들이 돌 장승을 때리네.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 너도나도 아하하 푸하하 웃음을 참지 못하네. 돌 장승이 비단을 훔쳤다고? 아이고, 돌을 때리다니! 웃음소리에 화가 난 원님, 큰 소리로 명령하네. 돌 장승 맞는 걸 보고 웃던 사람들,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비네. 용서해 주세요. 풀어 주세요.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던 원님, “내일까지 비단 한 필을 가져오면 용서해 주겠다.” 라고 하네. 알겠습니다, 원님! 네, 꼭 가져오겠습니다! 얼마 뒤 마을 사람들, 비단 한 필씩 들고 모두 모였네. “이 서방, 이 중에 네 비단이 있느냐?” 원님의 질문에 이 서방 두 눈이 반짝! 비단 찾은 이 서방, 기뻐서 소리치네. 이것들이 제 비단입니다! 비단을 어디서 구했느냐는 원님 질문에 사람들이 대답하네. “뒷마을 도 서방한테서요.” “도 서방이 비단 도둑이다! 어서 잡아 와라!” 원님의 명령에 잡혀 온 도 서방, 무릎 꿇고 용서를 비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도둑을 잡으려고 비단을 구해 오라 하셨구먼.” 원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들, 원님의 지혜에 감탄하네. 우리 원님이 최고야! 지혜로운 원님, 이 서방 비단도 찾아 주고, 도둑도 잡고! 사람들 비단값도 모두 돌려주네! 비단 장수 이 서방, 비단 팔러 가네. 한 고개 넘고 두 고개 넘어서 비단 팔러 가네. 이 서방이 가는 곳마다 지혜로운 원님 이야기로 왁자글왁자글. 그 덕분에 우리도 이렇게 듣는 거라나 뭐라나. |
나무 그늘을 산 총각 | 예술경험 | 유아 | 마을 최고 부자, 최 영감은 욕심쟁이예요. 콩 한쪽, 쌀 한 톨도 이웃과 나누는 법이 없지요.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마을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의 그늘도 자기 거래요. 이 나무는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심었으니, 이 그늘은 내 거야! 그날도 최 영감은 혼자 나무 그늘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런데 갑자기 한 총각이 그늘로 불쑥 들어왔어요. "왜 내 그늘에 함부로 들어오느냐!" 최 영감은 총각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당장 나가거라! 쳇, 그늘에 주인이 어딨다고! 총각은 최 영감이 너무 얄미웠어요. 그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지요. "이 나무 그늘을 저에게 파십시오." 총각의 말에 최 영감은 귀가 솔깃했어요. "이 나무 그늘을 사겠다고? 좀 아깝긴 하지만, 열 냥이면 팔겠네." 총각은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최 영감에게 건넸어요. "이제 이 나무 그늘은 제 것입니다!" 총각에게서 돈을 받은 최 영감은 신이 나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러자 총각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무 그늘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러는 동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나무 그늘도 길어졌어요. 얼씨구나, 나무 그늘을 팔아 돈을 벌었네! 길어진 나무 그늘은 어느새 최 영감네 집 담장을 성큼 넘었어요. 그러자 총각도 그늘을 따라 최 영감네 집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지요. "네가 내 집에는 웬일이냐?" 최 영감이 총각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 나왔어요. "나무 그늘이 영감님 댁까지 길어져서 따라 들어왔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무 그늘을 따라 들어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최 영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제가 나무 그늘을 샀으니, 나무 그늘이 지는 곳은 어디든 제 것이잖아요!" 총각의 말에 최 영감은 할 말을 잃었어요. 제 그늘이 마루까지 길어졌네요! 잠시 뒤 총각은 방으로 들어갔어요. '아니, 저 녀석이?' 최 영감은 총각을 당장 끌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무 그늘이 방까지 길어진 걸 보고는 부글부글 속만 끓여야 했지요. 으이구, 저놈을 어떻게 내쫓는담? 총각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나무 그늘을 따라 최 영감네 집을 드나들었어요. 나무 그늘 사기를 잘했네, 잘했어! 쨍쨍 햇볕이 뜨겁다며 강아지랑 들락거리고, 심심하다며 마을 사람들과 오갔지요. 어느 날은 논일하다 밥 먹으러 우르르 들어오고, 어느 날은 나무하다 힘들다고 와르르 들어오고, 어느 날은 별일이 없는데도 떼 지어 워르르 들어왔어요. '열 냥을 돌려주고 내쫓을까?' 최 영감은 화가 치솟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돈을 돌려주기가 아까웠거든요. 끙, 참자, 참아! 그러던 어느 날, 최 영감은 자기 생일에 큰 잔치를 열었어요. 멀리서 친척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최 영감네 집은 손님들로 북적였지요. 허허, 껄껄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최 영감의 얼굴이 활짝 펴졌어요. 하지만 최 영감은 곧 불안에 떨었어요. 나무 그늘이 점점 길어지더니 최 영감네 집 안으로 들어왔거든요. '그 녀석이 오늘도 오면 어떡하지?' 최 영감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총각이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왔어요. 물론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오늘도 제 그늘에서 편히 쉬세요! "아니, 왜들 이러는 것이오?" 손님들이 놀라 총각에게 물었어요. "제가 최 영감님한테서 저 나무 그늘을 샀거든요." 총각은 손님들에게 나무 그늘을 사게 된 일을 이야기했어요. 세상에, 나무 그늘에 주인이 어디 있다고! 세상에 둘도 없는 욕심쟁이군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봤나!" 손님들은 최 영감을 한심해하며 모두 집으로 돌아갔어요. 최 영감은 망신까지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총각을 불러 돈 자루를 내밀었지요. 스무 냥을 줄 테니 나무 그늘을 다시 나에게 팔게. 싫습니다! 그럼 쉰 냥은 어떤가? 싫다니까요! 그럼 백 냥은? 천 냥, 만 냥을 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총각은 나무 그늘을 절대 팔지 않겠다며 고개를 저었어요. 그 뒤로도 총각은 나무 그늘을 따라 최 영감네 집을 계속 들락거렸어요. "으, 다시는 저 나무 그늘을 보고 싶지 않다!" 최 영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결국 집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 버렸어요. "이 나무 그늘은 이제 우리가 주인이에요!" 총각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었어요. 마을의 나무 그늘은 누구나 언제든 쉬어 갈 수 있는 모두의 쉼터가 된 거예요. |
콩 한 알과 송아지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부자에게 딸이 셋 있었어요. 부자는 딸들을 귀하게 키웠지요. 하지만 딸들이 커 가면서 부자는 걱정이 생겼어요. “애써 모은 재산을 딸들이 마구 쓰면 어쩌지?” 곰곰 생각하던 부자는 딸들의 지혜를 알아보기로 했어요. 할아버지 생신날, 부자는 딸들을 불렀어요. “다음 할아버지 생신날에는 이걸로 선물을 각자 준비해 보렴.” 부자는 딸들에게 콩 한 알씩을 나누어 주었어요. “이런 작은 콩 한 알로 뭘 할 수 있겠어?” 방으로 들어온 첫째 딸은 콩알을 창밖으로 휙 던져 버렸어요. “땅에 대충 심어 볼까?” 둘째 딸은 바닥에 콩알을 툭 떨어뜨리고 발로 꾹꾹 눌렀어요. 그러고는 물도 안 주고 놀러 나갔지요. “이 콩 한 알로 무얼 할까?” 셋째 딸은 콩알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어요. 하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책들을 살펴보기도 했지요. “쓸모없는 콩알로 뭘 하려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은 고민하는 셋째 딸이 못마땅했어요. 그때 셋째 딸이 뭔가 생각난 듯 밖으로 달려 나갔어요. 셋째 딸은 산으로 가서 칡덩굴을 마구 뜯었어요. 한참 뒤에는 몸에 깃털이 잔뜩 붙은 채로 산에서 내려왔지요. 셋째 딸은 곧장 시장으로 달려가 여기저기 두리번대더니 작은 보자기를 몰래 들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부터 셋째 딸은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났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뒷마당으로 갔지요. 어떤 날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옷에 지푸라기를 잔뜩 묻히고 나타나기도 했어요. 그러는 사이 일 년이 지나고 할아버지 생신날이 돌아왔어요. 부자가 딸들을 불러 물었어요. “얘들아, 내가 준 콩 한 알로 할아버지 생신 선물을 준비했느냐?” “그게, 그러니까.” 첫째 딸은 눈치를 보며 대답을 얼버무렸어요. “콩알을 심긴 심었는데, 돌보지 않아서.” 둘째 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어요. “셋째야, 너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느냐?” 부자는 한숨을 쉬며 셋째 딸에게 물었어요. 그러자 셋째 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리나케 뒷마당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셋째 딸이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지 뭐예요. “콩 한 알로 마련한 할아버지 생신 선물이에요.” 송아지를 본 식구들이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어요. “거짓말! 콩 한 알로 어떻게 송아지를 마련하니?” “혹시 옆집 송아지 아니야?”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샘이 나서 말했어요. “얘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부자가 묻자, 셋째 딸이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먼저 콩 한 알을 가지고 산으로 갔어요. 칡덩굴을 뜯어 올가미를 만들고 그 옆에 콩알을 두었지요.” “나무 뒤에 숨어 한참을 기다리니 꿩 한 마리가 콩알을 먹으려고 다가왔어요.” “꿩이 올가미에 다리를 넣는 순간, 줄을 휙 잡아당겨 꿩을 잡았지요.” “잡은 꿩을 가지고 시장에 갔어요. 닭 장수를 찾아 꿩을 병아리와 바꾸자고 했죠.” “닭 장수는 꿩 대신 병아리 두 마리를 내주었어요. 암컷과 수컷을 한 마리씩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병아리들을 돌봤어요. 모이 챙겨 주랴 닭장 청소하랴 볕이 좋을 땐 산책시키랴 정신없었어요.” “병아리들은 커서 닭이 되었고, 날마다 달걀을 낳았어요. 달걀에서 병아리가 태어났고, 병아리는 커서 또 닭이 되었고, 닭은 또 달걀을 낳았고.” “그렇게 키운 닭과 병아리, 달걀을 모두 팔아 새끼 돼지들을 샀어요. 돼지를 키우는 건 닭보다 더 힘들었어요.” “포동포동 돼지들을 정성껏 키워 시장에 나가 팔았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이 송아지를 산 거예요.” “옳거니, 우리 셋째 딸, 참 잘했네. 잘했어!” 부자는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어요.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지요. 그 뒤로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콩 한 알도 소중히 여기며 부지런히 살았어요. 모두 지혜로운 셋째 딸 덕분이었답니다. |
무서운 엽전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에 한 농부가 밭일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지 뭐야. 그림자는 키가 엄청 큰 도깨비였지. 깜짝 놀란 농부에게 도깨비가 말했어. “심심해서 그러니 나랑 씨름 한 판 하자.” 농부는 겁이 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어. "안 돼! 얼른 일하고 집에 가야 해." "그러지 말고 한 판만 해. 딱 한 판만 하자. 응?" 도깨비는 농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졸라 댔어. "제발 씨름하자! 하자, 응?" "좋아. 딱 한 판만이야!" 그 소리에 도깨비가 뒤돌아보자 농부는 얼른 도깨비의 다리를 걸었어. 농부는 도깨비를 이기려고 꾀를 내었어. 도깨비가 힘을 주려는 순간, 농부가 도깨비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쳤지. "저게 뭐지?" "앗!" 그러자 도깨비는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지. "어이쿠!" 당황한 도깨비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어. “다시 해, 다시!” "한 번만 더 해." “딱 한 판만 하기로 했잖아. 그만 가.” 농부는 도깨비가 계속 졸라도 무시하고 밭일을 했어. 그러자 도깨비는 크게 화를 내더니 그냥 가 버렸지. 며칠 뒤 농부는 밭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 크고 작은 돌이 잔뜩 뿌려져 있었거든. ‘흠, 도깨비가 한 짓이 분명해!’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크게 소리쳤어. “아이, 좋아! 누가 돌을 뿌려서 농사가 잘되겠는걸. 똥을 뿌렸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도깨비는 농부의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어. "이런, 돌이 아니라 똥을 뿌릴걸!" 다음 날 농부가 밭에 가 보니 돌이 없어지고 똥이 잔뜩 뿌려져 있었어. ‘흐흐, 밭에 똥거름을 주었으니 농사가 잘되겠는걸.’ 농부는 기뻤지만 겉으로는 속상한 척하며 외쳤어. “아이고, 이를 어째. 올해 농사는 다 망했구나!” 농부의 소리에 도깨비는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했지. "히히, 고소하다, 고소해!" 한참 지난 뒤 도깨비는 농부네 밭에 가 보았어. 농사가 망한 걸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농사가 망하기는커녕 아주 잘되었지 뭐야. 그제야 도깨비는 농부에게 속은 걸 알았어. "분하다, 분해! 가만두지 않겠어!" 그때부터 도깨비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농부를 괴롭혔어.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가 하면, 다 된 밥에 흙을 뿌리고, 밤에는 큰 소리로 노래도 불렀지. "으악! 어이쿠!" "아이고, 아까워라!" "제발 잠 좀 자자!" 농부는 마음 편히 먹지도 자지도 못해 괴로웠어. “안 되겠다. 도깨비를 살살 달래야겠어.” 농부는 도깨비가 또 괴롭히러 오자 도깨비가 좋아하는 고기와 메밀묵을 내놓았어. “도깨비야, 맛난 거 먹고 화 풀어.” 도깨비는 못 이기는 척하며 농부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어. 그 뒤로 도깨비는 농부를 매일 찾아와 놀다 갔어. 농부는 도깨비와 놀아 주는 척하며 도깨비를 떼어 낼 방법을 궁리했지. "도깨비를 어떻게 떼어 내지?" 그러다 하루는 농부가 도깨비를 슬쩍 떠봤어. “도깨비야, 넌 무서운 게 없지?” “아니야, 난 붉은 팥이 무서워!” “그래? 난 돈이 제일 무서운데.” 다음 날 농부는 팥을 구해다 마당에 가득 뿌려 놓았어. 도깨비는 농부를 찾아왔다가 그걸 보고 깜짝 놀랐지. “나를 오지 못하게 하려고 무서운 팥을 뿌려 놨겠다!” 화가 난 도깨비는 한참을 씩씩대다 돌아갔어. "어디 두고 보자!" 짤랑짤랑! 얼마 뒤 농부네 집 마당에 엽전이 떨어졌어. 농부는 도깨비 짓인 걸 눈치채고 무서운 척 소리쳤지. "아이고, 무서워! 어디서 돈이 떨어지네! 어휴, 무서운 돈이 계속 떨어져!" 농부의 말에 신이 난 도깨비는 엽전을 계속 던졌어. "아이고, 무서워서 기절하겠네!" "아이고, 사람 살려!" "후후, 어떠냐? 무서운 돈 맛이!" 도깨비는 농부네 마당에 엽전이 가득 차자 만족해하며 떠났어. 그 뒤로 도깨비는 농부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어. 농부는 도깨비 덕분에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지.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잘 살았대. |
꾀많은 하인 장굴대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마을에 장글대라는 하인이 살았어. 장글대의 주인은 마음씨가 무척 고약했지. 하인들에게 밥도 제때 주지 않고 힘들게 일만 시켰거든. 장글대도 맨날 배고픈 걸 참으며 일을 했어. 어느 날, 장글대는 주인을 따라 한양에 가게 되었어. 점심때가 되자 장글대가 주인에게 물었지. “나리, 밥은 언제 먹지요?” “길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밥을 찾느냐?” 그러고는 자기 혼자 쩝쩝거리며 곶감을 먹는 거야. 장글대는 주린 배를 잡고 말했지. "밥은 오래 두면 똥이 된다던데요?" "뭐라고? 밥이 어떻게 똥이 되느냐!" 얼마나 갔을까? 주인이 배가 아프다며 똥을 누러 갔어.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장글대는 꾀를 냈지. ‘밥을 먹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어.’ '주인님 밥을 얼른 먹고, 밥통에 개똥을 넣어 둬야지.' 잠시 뒤, 똥을 누고 돌아온 주인이 배가 고프다며 밥통을 열었어. “이게 뭐야? 밥통 안에 웬 똥이냐!” 당황한 주인이 장글대에게 소리쳤지. “거봐요, 밥은 오래 두면 똥이 된다니까요.” 배고픈 주인은 장글대에게 죽을 사 오라고 시켰어. 얼마 뒤 장글대가 죽을 들고 오는데 손가락을 그릇에 넣었다 뺐다 하지 뭐야. “예끼, 이놈! 뭐하는 짓이냐?” “제 콧물이 떨어져서요. 다 건졌으니 이제 드세요.” 주인은 더러워서 안 먹는다며 치우라고 했지. 드디어 한양에 도착했어. 주인은 밥을 먹으러 가면서 장글대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어. "한양은 눈 뜨고도 코가 베이는 곳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있거라!" 장글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어린아이가 땔감을 잔뜩 들고 지나가는 거야. 장글대는 아이에게 말에 짐을 싣고 가라고 하며 말고삐를 건네주었어. "정말 고맙습니다." "조심히 가거라." 장글대는 주인에게 혼날까 봐 꾀를 냈어. 코를 잡고 눈을 꼭 감은 채 주인을 기다렸지. "이 녀석아, 말은 어디에 두고 이러고 있느냐" "눈 뜨고 있다가 코를 베일까 봐 눈을 감고 코를 잡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 그래서 장글대 등에 글을 써서 혼내 주기로 했지.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네 등에 쓰인 대로 하라고 전하거라!" "네, 나리." 장글대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아주머니를 만났어. 아주머니는 떡방아를 찧다가 지쳐서 쉬고 있었지. “아주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장글대는 땀이 송송 나도록 떡방아를 찧어 주었어. 아주머니는 고맙다며 보자기에 찰떡을 싸 주었어.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 집에 도착할 즈음, 장글대는 주인이 등에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졌어. 그래서 서당 가는 아이에게 찰떡 한 개를 주고 읽어 달라고 했지. "뭐라고 써 있니?" "장글대를 매질한 뒤, 자기가 올 때까지 헛간에 가두라고 써 있어요." 장글대는 바로 냇가에 가서 등을 깨끗이 씻었어. 그리고 지나가는 스님에게 등에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지. 남은 찰떡을 모두 주고 말이야. "장글대를 사위 삼으라고 써 주세요." 장글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집 식구들에게 등을 보여 주었어. “나리께서 꼭 이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식구들은 놀랐지만 주인의 뜻이라니 따르기로 했지. 그렇게 장글대는 주인집 막내딸과 혼인을 하게 되었어. 주인은 장글대를 궤짝에 넣은 뒤 직접 지게에 실었어. "감히 내 딸과 혼인을 해?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얼마쯤 가다 주인이 궤짝을 두고 똥을 누러 갔지. 이때 한 남자가 궤짝 옆을 지나가자 장글대가 소리쳤어. "궤짝 안에 이렇게 귀한 것이 있다니!" "귀한 거라고?" 남자가 궁금해서 궤짝을 열자 장글대가 밖으로 나왔어. 장글대는 궤짝 안에 커다란 돌덩이를 넣어 놓고는 부리나케 도망쳤어. 똥을 누고 돌아온 주인은 다시 궤짝을 지게에 지고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어. 그리고 궤짝을 깊은 바다에 풍덩 던져 버렸지. 궤짝 안에 장글대가 없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장인어른 덕에 용궁을 구경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장글대가 멀쩡한 모습으로 주인 앞에 나타난 거야. “아니, 네가 어떻게…….” 장글대는 용궁에 다녀왔다고 말했어. “용궁에는 화려한 보물이 가득하더라구요!” 주인은 장글대 말에 귀가 솔깃해졌지. 주인은 그길로 바다로 갔어. 용궁에 있다는 보물이 탐이 났던 거지. 그런데 그 뒤로 주인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대. 장글대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사람들에게 베풀기도 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지 아마. |
토끼의 재판 | 예술경험 | 유아 | “살려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나그네가 산길을 지나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어. “이상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나그네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 보았어. 그런데 글쎄, 구덩이 속에 호랑이가 빠져 있는 게 아니겠어? "나그네 님!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꺼내 주면 날 잡아먹으려고?" "아닙니다! 절대 잡아먹지 않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어디 한번 믿어 보마. 이걸 타고 올라오거라." 호랑이는 순식간에 통나무를 타고 올라왔어. 그러고는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며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하지 뭐야. “으악!” 나그네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쿵 찧었어. 나그네는 정신을 차리고 호랑이에게 말했어. "날 잡아먹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 약속을 믿었단 말이야? 난 약속보다 배를 채우는 게 중요해!" 넌 정말 고마움도 모르는구나! "나는 고마움 따윈 몰라!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널 잡아먹어야겠다!" 호랑이가 잡아먹으려고 하자 나그네는 다급하게 말했어. “이건 옳지 않아! 네가 날 잡아먹는 게 옳은지 그른지 재판을 해 보자. 저 소나무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호랑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어. “흥, 좋아! 어디 한번 물어보든가!” “소나무야! 나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호랑이의 약속을 믿고 호랑이를 구덩이에서 꺼내 주었어. 그런데 호랑이는 고마움도 모르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 그런 호랑이의 행동이 옳으니, 그르니?” 나그네가 소나무에게 간절하게 물었어. "호랑이가 옳아. 어차피 사람들도 고마움을 모르잖아. 우리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솔잎과 솔방울도 주는데, 고마움을 잊고 우리를 베어 땔감으로 쓰잖아." 소나무의 말에 나그네는 크게 실망했어. 하지만 곧 지나가던 소를 보고 뛰어가며 말했어. “잠깐! 저 소한테 다시 물어보자!” 호랑이는 시큰둥한 말투로 그러라고 했어. 나그네는 소에게 호랑이를 구덩이에서 꺼내 준 이야기를 들려주고 물었어. “소야, 호랑이가 나를 잡아먹으려는 게 옳은지 그른지 말 좀 해 주렴.” 소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어. “우리 소들은 사람들이 밭일을 하도록 돕지만, 사람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우리를 잡아먹잖아. 그러니 호랑이가 잡아먹으려는 건 옳아.” 나그네는 소의 대답에 정말로 억울하고 답답했어. “다들 내가 옳다고 하는군! 그럼 잡아먹어 볼까?” 호랑이는 씩 웃으며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어. 나그네는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지. 그런데 바로 그때, 토끼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야. “잠깐, 잠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물어보자.” “나 참,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나그네는 토끼를 불러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 “토끼야, 호랑이가 옳은지 그른지 말해 주겠니?” 토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어. “저는 믿겨지지가 않는걸요. 날쌘 호랑이가 어떻게 구덩이에 빠져요? 그리고 빠졌더라도 올라오면 되잖아요.” 토끼는 정말 믿지 못하는 것 같았어. 토끼의 말에 호랑이는 크게 소리쳤어. “에이, 답답해!” 호랑이는 씩씩거리며 구덩이 쪽으로 걸어갔어. 모두들 호랑이를 가만히 지켜보았지. "이제 내가 구덩이에 빠졌다는 걸 믿겠니? 내가 이렇게 구덩이에 쿵 떨어졌다고!" "이 통나무를 타고 올라오면 되잖아요! 나그네가 뭘 도와준 거예요?" "아이고, 답답하기는! 아까는 통나무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고마움도 모르고 약속도 지키지 않은 벌이에요!" 호랑이는 구덩이에 다시 빠지고 말았어. 토끼가 낸 꾀에 호랑이가 걸려든 거지. "아이고! 내가 속았구나!" “토끼야, 정말 고맙구나! 네 덕분에 살았다.” 나그네가 토끼의 손을 덥석 잡고 인사했어. “고마움도 모르고 약속도 지키지 않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토끼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말했어. 그 후로 산속에서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끊이지 않았대. |
흥부 놀부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마을 큰 기와집에 형 놀부와 동생 흥부가 함께 살았어요.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놀부는 재산을 혼자 챙기려고 흥부 가족을 빈털터리로 내쫓았지요. "이 집에서 당장 나가거라!" 추워요! 우리, 어디로 가요? 쫓겨난 흥부 가족은 먹을 것이 늘 부족했어요. "배고파요. 밥 주세요!" 흥부가 열심히 일했지만 많은 아이들이 배불리 먹기에는 음식이 턱없이 모자랐어요. 겨울이 되자, 온 가족이 굶는 날이 더 많아졌지요. "더 이상 아이들을 굶길 수 없어." 흥부는 쌀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 싶어서 놀부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형님 댁에 다녀오겠소. "형님, 쌀 좀 빌려주세요. 아이들이 굶고 있어요." 흥부가 놀부를 만나 간절히 부탁했지만 놀부는 냉정하게 거절했지요. "네놈에게 줄 쌀은 한 톨도 없다! 어서 나가거라!" "제발요, 형님." 흥부는 두 손 모아 사정했지만 오히려 주걱으로 매만 맞고 쫓겨났어요. 결국 흥부 가족은 남은 겨울을 힘겹게 지내야 했지요.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어느 봄날, 흥부가 처마 밑을 보니, 구렁이가 새끼 제비들을 노리고 있지 뭐예요. 깜짝 놀란 흥부는 작대기를 휘저어 구렁이를 쫓아냈어요. 이놈, 저리 가거라! 그런데 그사이 새끼 제비 한 마리가 땅으로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요. 흥부 가족은 제비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어요. 건강해진 제비는 날이 점점 추워지자 따뜻한 곳으로 날아갔어요. 제비야, 잘 가! 또 와! 다음 해, 봄과 함께 제비 한 마리가 흥부네 집을 찾아왔어요. "제비가 돌아왔구나!" 흥부 가족은 반갑게 제비를 맞았어요. 제비는 흥부네 마당에 박씨 하나를 톡 떨어뜨리고 날아갔지요. 제비가 준 선물이니 정성껏 키워 보자. 가을이 되자, 흥부네 초가지붕 위에 크고 탐스런 박이 세 개 열렸어요. "아버지, 이렇게 큰 박은 처음 봐요!" "어서 박을 타서 죽을 쑤어 먹자꾸나." 흥부 가족은 노래를 부르며 첫 번째 박을 탔어요. 모두들 배불리 먹을 생각에 신이 났지요. 슬근슬근 박을 타세. 슬근슬근 박을 타세. 이 박 타서 나눠 먹고 저 박 타서 나눠 먹고. 우지직! 마침내 박이 갈라졌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갈라진 박에서 새하얀 쌀이 우르르 쏟아졌어요. "쌀이다, 쌀!" 흥부 가족은 얼떨떨하고 믿기지가 않았어요.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지요. 에구머니! 세상에! 우아, 쌀이 쏟아져요! "우리 두 번째 박도 타 봐요." 흥부 가족은 더 신나게 노래 부르며 박을 탔어요. 그러자 두 번째 박이 쫙 갈라지더니 금은보화와 온갖 귀한 물건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지요. 우아! 반짝반짝 빛나요! 경사 났네! "이번에는 무엇이 나올까?" 마지막 박에서는 일꾼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일꾼들은 흥부 가족에게 집과 비단옷을 지어 주었지요.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놀부는 배가 몹시 아팠어요. 그래서 흥부에게 어찌 된 일인지 꼬치꼬치 물었어요. '나도 제비 다리를 고쳐 주고 박씨를 받아야지!' 이듬해 봄, 놀부는 제비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어요. 게 섰거라! 그러다 제비 둥지까지 올라가 새끼 제비의 멀쩡한 다리를 똑 부러뜨렸지요. 놀부는 제비 다리에 헝겊을 대충 감아 주었어요. 귀찮아.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날이 점점 추워지자 제비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날아갔어요. 내년에 박씨를 꼭 가져오너라! 봄과 함께 놀부가 기다리던 제비가 돌아왔어요. 제비는 놀부네 집에 박씨를 떨어뜨리고 쌩 가버렸어요. “옳지! 이게 바로 부자가 되게 해 주는 씨앗이로구나!” 놀부는 박씨를 심고 똥물을 거름으로 잔뜩 부었어요. 흥부의 박보다 더 크게 키워야지! 어느덧 놀부네 기와지붕 위에도 크고 둥그런 박이 세 개 열렸어요. "박이 큰 걸 보니 엄청난 게 들어 있겠지?" 싹둑싹둑 박 자르세. 댕강댕강 박 자르세. 이 박 잘라도 다 내 거. 저 박 잘라도 다 내 거. 놀부 가족은 노래를 부르며 톱질을 했어요. 더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났지요. 드디어 첫 번째 박이 갈라졌어요. "으악! 이게 뭐야?" 박에서 쥐가 우르르 나오더니 놀부네 곳간에 있는 쌀을 몽땅 먹어 치우는 게 아니겠어요? 놀부는 깜짝 놀랐지만, 두 번째 박을 자르자고 했어요. 악, 쥐다! 어머나! 으악! "이번에는 금은보화가 나오겠지!" 두 번째 박이 갈라졌어요. 그런데 박에서는 도둑들이 나와 놀부가 숨겨 둔 금은보화와 귀한 물건을 죄다 훔쳐 가는 거예요. 도둑이야! 놀부는 너무 놀랐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박을 어서 잘라 보자!" 놀부 가족은 서둘러 세 번째 박을 잘랐어요. 그런데 이럴 수가! 박에서 엄청난 똥물이 철철 흘러나오는 거예요. 결국 놀부네 집은 똥물 범벅이 되고 말았어요. 얼마 뒤, 놀부는 거지꼴을 하고 흥부를 찾아왔어요. "흑흑, 흥부야, 나 좀 도와주겠니?" 흥부는 한걸음에 달려 나와 놀부를 반겼어요. "어서 오세요, 형님. 걱정 마세요." 흥부는 형에게 집도 지어 주고 땅도 나누어 주었어요. 그 뒤로 흥부와 놀부는 서로 위하며 사이좋게 잘 지냈대요! 미안하다, 흥부야! 형님! 어서 오세요! 어서 와! 잘 왔어! |
콩쥐 팥쥐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마을에 콩쥐랑 아버지랑 단둘이 살았어. 하루는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팥쥐를 집으로 데려왔어. 외로웠던 콩쥐는 식구가 생겨 무척 행복했지. 콩쥐, 안녕? 앞으로는 내가 잘 돌봐 주마. 하지만 콩쥐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어. 새어머니와 팥쥐가 몹시 심술궂었거든.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새어머니는 콩쥐에게 온갖 집안일을 시켰어. 그러면 착한 콩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했지. 물론 팥쥐는 뒹굴뒹굴 놀기만 했고. 콩쥐야! 쉬지 말고 일해라. 아이, 더워! 아이, 손 시려. 시간이 흐를수록 새어머니와 팥쥐는 점점 더 심하게 콩쥐를 구박했어. 결국 콩쥐는 집안일을 모두 혼자서 해야만 했지. 콩쥐는 추운 겨울에도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가며 빨래하고 청소하느라 바빴어. 콩쥐야! 춥다고 핑계 대지 말고 어서 일해!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오시는 원님을 환영하는 마을 잔치가 열렸어. “어서 준비해서 가 보자꾸나.” 새어머니와 팥쥐는 아침부터 꾸미느라 난리였지. “어머니, 저도 잔치에 가고 싶어요.” 콩쥐가 부러워하며 말했어. “물론 콩쥐 너도 잔치에 가야지. 우리는 먼저 가 있을 테니 너는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앞마당에 널려 있는 벼를 다 찧어 껍질을 벗기고, 옷감도 다 짠 다음에 오너라!” 새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콩쥐와 함께 마을 잔치에 가 버렸어. 그 많은 일을 언제 다 하고 가지? “빨리 하고 잔치에 가자!” 콩쥐는 기운을 내서 물독에 물을 부었어. 그런데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독이 차지 않는 거야. 콩쥐는 이상해서 물독을 살펴보았지. “어? 아래가 깨져 있네. 그럼 물독을 채울 수가 없잖아.” 콩쥐는 속상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어. 깨진 물독에 물을 어떻게 채우지? 그때였어. 두꺼비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몸으로 물독 아래에 난 구멍을 척 막는 게 아니겠어? 콩쥐는 두꺼비 덕분에 물독에 찰랑찰랑 물을 채울 수 있었지. "두꺼비야, 고마워!" “이제 벼를 찧어야지.” 콩쥐는 서둘러 앞마당으로 갔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참새들이 벼를 콕콕 쪼아서 껍질을 벗기고 있지 뭐야. 콩쥐는 기뻐서 폴짝폴짝 뛰었어. "참새들아,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옷감만 짜면 되는구나.” 콩쥐는 힘을 내어 베틀에 앉았어. 그때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어. “콩쥐야, 옷감은 내가 짜 줄 테니 이걸 입고 어서 잔치에 가렴.” 선녀는 콩쥐에게 비단옷과 비단신을 주며 말했어. “선녀님, 정말 고마워요!” 콩쥐는 예쁘게 차려입고 서둘러 집을 나왔어.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콩쥐는 잔치에 거의 다 와서는 급한 마음에 달려갔어. 그러다 그만 비단신 한 짝이 벗겨졌어. “비키시오! 원님 행차요!” 콩쥐가 비단신을 찾아 신으려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어. ‘어떡하지? 그냥 가야겠다.’ 콩쥐는 비단신 한 짝을 길에 둔 채 걸음을 재촉했어. “잠깐 멈추어라!” 원님은 마을 잔치로 가는 길 위에 한 짝만 덩그러니 있는 비단신을 보고 말에서 내렸어. “고운 비단신이구나.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 원님은 포졸들에게 비단신을 챙겨 들게 했어. 잠시 뒤, 원님은 잔치에 도착했어. 포졸이 비단신 한 짝을 들고 소리쳤지. “이 비단신의 주인을 찾습니다!” 그러자 새어머니와 팥쥐가 신어 보겠다고 나섰어. “에잇, 비단신이 너무 작네!” “내 발은 들어가지도 않네.” “억지로 신지 마세요! 그러다 찢어져요!” "또 누가 신어 보겠소?" 원님은 잔치에 온 모두에게 비단신을 신어 보라고 했어. 너도나도 나서서 비단신을 신어 보았지만 비단신이 발에 꼭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끙끙." "너무 크잖아!" "아이코!" “제가 신어 볼게요.” 맨 마지막으로 콩쥐가 비단신을 신었어. 당연히 비단신은 콩쥐 발에 딱 맞았지. “딱 맞아요. 딱 맞아!” 포졸들은 신이 나서 소리쳤고 원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콩쥐를 바라보았어. “주인을 찾았어요!” 콩쥐는 비단신을 신게 된 이야기를 원님에게 들려주었어. “하늘에서 우리를 만나게 해 주신 것 같군요.” 원님과 콩쥐는 서로 마음에 쏙 들었어. 그래서 얼마 뒤 혼인을 했지. “우아, 경사다. 경사!” 마을 사람들은 원님과 콩쥐를 축복했어. 하지만 새어머니와 팥쥐는 부러워 배가 아팠지. “흥! 샘나!” 그 후로 콩쥐는 원님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어. 새어머니와 팥쥐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둘은 콩쥐에게 계속 심술을 부리다가 결국 원님에게 혼쭐나게 벌을 받았어. 멀리멀리 먼 곳으로 쫓겨났다지, 아마. "우리 이제 어디로 가요?" "아이고, 쫓겨나게 되다니!" |
저승에 있는 곳간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영암골에서 있었던 일이야. 어느 날 영암골에 새 원님이 왔는데 욕심이 아주 많았어. 백성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곳간만 채우기 바빴지.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한 가난한 여인이 원님을 찾아왔어. "제가 곧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까지만 이곳에 머물게 해 주세요." 여인이 간절히 부탁했지만, 원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달랑 볏단 하나만 던져 주고 밖으로 내쫓았지. 그날 밤 원님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카만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원님 앞에 나타났어. "어서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누, 누구십니까?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원님이 깜짝 놀라 물었어. "네가 죽었으니 저승으로 간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짜고짜 원님을 끌고 가는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죽다니요?" 원님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어. 저승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어. 원님은 저승사자를 따라 걷고 또 걸었지. 뿌연 안개를 지나 물결치는 강을 건너고, 험한 자갈밭을 지났어. 그러다 마침내 커다란 문 앞에 다다랐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어. 원님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어. "염라대왕님,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승에서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염라대왕은 원님의 나이가 적힌 책을 들여다보았어. "좋다. 죽기엔 아직 젊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저승사자, 이 자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라." 저승사자는 원님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왔어. '아이고, 이제 살았구나.' 원님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지. 그때 저승사자가 원님에게 말했어. "네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 "예? 돈을 내라고요?" "갑자기 오는 바람에 한 푼도 없는데 어떡합니까?" 원님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저승사자에게 말했어. "사람은 누구나 저승에 곳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네 곳간에 있는 것으로 내면 될 터이니, 날 따라오너라." 저승사자는 원님을 저승 곳간으로 데려갔어. "이곳이 너의 곳간이다." 원님은 잔뜩 기대하며 곳간을 열었어. 그런데 달랑 볏단 하나만 있지 뭐야. "어, 왜 제 곳간에는 이것뿐입니까?" 원님이 실망한 얼굴로 물었어. "저승 곳간에는 남에게 베푼 만큼 재물이 쌓인다. 그런데 너는 살면서 베푼 것이 고작 저것뿐이로구나." 저승사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어. 원님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 "그럼 전 돌아가지 못하는 겁니까?" "흠, 다른 사람의 곳간에서 빌릴 수 밖에." 저승사자는 원님을 데리고 다른 곳간으로 갔어. 곳간 안에는 비단과 쌀, 돈이 가득 쌓여 있었지. "이곳은 누구의 곳간입니까?" 원님이 깜짝 놀라 물었어. "네 고을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이의 곳간이다. 여기서 쌀 삼백 석을 빌릴 테니 이승에 돌아가서 갚도록 해라!" "예,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원님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또 인사했어. 저승사자에게 계속 인사를 하던 원님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지. "휴, 내가 정말 살아 돌아온 건가?" 원님은 저승에 다녀온 게 믿기지 않았어. 원님은 자기 볼을 힘껏 꼬집어 보았어. "아야, 아픈 걸 보니 살았구나!" 원님은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지. 원님은 쌀을 챙겨서 덕진이의 주막으로 갔어. 덕진이는 장사를 하면서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면 먹을 것, 입을 것을 나눠 주었어. "저렇게 남에게 베풀다니, 덕진이는 틀림없이 복을 받을 거야."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덕진이를 칭찬했어. 원님은 덕진이의 곳간이 왜 가득 찼는지 알게 되었지. 원님은 덕진이를 불러 말했어. "덕진아, 이 쌀은 내가 네게 빌린 것이니 어서 받아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원님에게 쌀을 빌려 드린 적이 없습니다." 덕진이가 계속 거절하자, 원님은 지난밤에 겪은 일을 이야기했어.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네 덕이다." 원님이 계속 받으라고 하자 덕진이는 마지못해 쌀을 받았어. 덕진이는 원님이 준 쌀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어. 그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 '매년 홍수가 나서 강물이 불어나면 사람들이 오갈 수 없었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어.' 덕진이는 원님이 준 쌀을 모두 팔아 다리를 놓았어. 사람들은 그 다리를 '덕진 다리'라고 불렀지. 그 뒤로 원님은 확 달라졌어. 자기 곳간을 활짝 열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마을을 잘 다스렸대. 원님의 저승 곳간도 점점 가득 차겠지? |
효녀 심청 | 예술경험 | 유아 | 어느 바닷가 마을에 앞 못 보는 심 봉사가 살았어요. 심 봉사는 아내를 병으로 잃고 혼자 젖먹이 딸을 키웠지요. "우리 배고픈 청이에게 젖 좀 주시오!" 심 봉사는 딸을 꼭 안고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하루도 빠짐없이 젖을 얻어 먹였지요. 심 봉사의 보살핌으로 청이는 무럭무럭 자랐어요. "아버지, 이제 제가 잘 모실게요." 청이는 심 봉사를 정성껏 돌보았어요. 심 봉사가 가는 곳은 어디든 함께 다녔고, 제 손을 꼭 잡으세요. 맛난 음식도 심 봉사에게 먼저 드렸어요. 아버지부터 드세요. 청이는 남의 집 일을 돕거나 바느질을 해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어요. 하루는 청이가 집에 늦게 오자, 걱정된 심봉사는 청이를 찾아 집을 나왔어요. 그러다 그만 강물에 풍덩 빠져 버렸지요. "어이쿠, 사람 살려!" 다행히 한 스님이 심 봉사를 발견하고 구해 주었어요. 그리고 앞 못 보는 심 봉사에게 말했어요. "쌀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눈을 뜰 수 있을 텐데요." 스님의 말에 심 봉사는 귀가 번쩍 뜨였어요. "정말입니까?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요!" 잠시 뒤 집으로 돌아온 심 봉사는 고민에 빠졌어요. 덜컥 약속부터 해 버렸네. 쌀 삼백 석을 어디서 구할꼬? 심 봉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쉬었지요.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어요. 스님과 한 약속이라 꼭 지켜야 하는데. "아버지,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사실은." 심 봉사는 청이에게 스님과의 일을 이야기했어요. "제가 구해 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청이도 걱정이 되었지만, 심 봉사를 위로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이상한 이야기가 퍼졌어요. "뱃사람들이 용왕에게 제물로 바칠 처녀를 찾는대. 그래야 배가 인당수라는 험한 바다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다는구먼." 소문을 들은 청이는 부랴부랴 뱃사람들을 찾아갔어요. "쌀 삼백 석을 절로 보내 주시면 제가 제물이 될게요." "좋소, 배가 뜨는 날 데리러 가겠소!" 뱃사람들은 기뻐하며 쌀 삼백 석을 절로 보내 주었어요. 그날 이후 청이는 심 봉사를 더욱 정성껏 모셨어요. 심 봉사가 먹을 쌀을 쌀독 가득 채우고 입을 옷과 버선도 지어 두었어요. "아버지 혼자 어찌 지내실까." 인당수로 떠나기 전날 밤, 청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닭아, 닭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는 간다. 가엾은 우리 아버지는 누굴 믿고 살아갈까. 아침이 되어 뱃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청이는 심 봉사에게 그동안의 일을 사실대로 말하며 마지막 인사를 올렸지요. "아이고, 청아! 안 된다! 네가 죽는데 내가 눈을 떠서 무엇하냐!" 심 봉사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청이를 말렸어요. "아버지, 꼭 눈을 뜨세요!" 청이는 울고 또 울면서 뱃사람들을 따라나섰어요. 청이를 실은 배는 바다로 나아갔어요. 배가 인당수에 이르자,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거세게 일었어요. "제발 아버지가 눈을 뜨게 해 주세요!" 청이는 뱃머리에 서서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어요. 그러고는 바다로 풍덩 몸을 던졌어요. 청이는 정신을 잃고 바다 밑으로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았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청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용왕님 앞이었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이 대단하구나. 널 다시 인간 세상으로 보내 주마! 그로부터 얼마 뒤, 인당수를 지나던 뱃사람들은 커다란 연꽃을 하나 발견했어요. "바다 위에 꽃이라니. 거참, 신기하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꽃은 처음 봐. 이 꽃을 임금님께 바치자!" 뱃사람들은 연꽃을 조심조심 건져서 궁궐로 가져갔어요. 연꽃을 본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였지요. 임금님은 연꽃을 궁궐 연못에 띄웠어요. 그런데 갑자기 연꽃이 활짝 피더니 그 안에서 청이가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청이는 임금님에게 인당수로 뛰어든 일을 이야기했어요. "오, 하늘에서 내린 인연이구나!" 임금님은 기뻐하며 청이를 왕비로 맞았어요. 왕비가 된 청이는 심 봉사를 찾았지만, 심 봉사는 집을 떠나고 없었어요. 청이는 심 봉사 걱정에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샜지요.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엽시다. 그러면 왕비의 아버지가 오실 수도 있지 않겠소?" 임금님은 청이를 위해 궁궐에 큰 잔치를 열었어요.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심 봉사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사실 심 봉사는 청이가 떠난 뒤 이웃 마을에 사는 뺑덕 어멈에게 속아 가진 돈도 살던 집도 모두 빼앗겼어요. 그러다 궁궐에서 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오고 있었지요. 어느덧 잔치 마지막 날이 되었어요. 청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폈지요. 그때 저 멀리서 심 봉사가 더듬더듬 걸어왔어요. 청이는 심 봉사를 향해 달려갔어요. 아버지, 저예요. 청이예요! 뭐라고? 청이가 살아 있다고? 어디 우리 딸 얼굴 좀 보자! 심 봉사는 청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눈에 힘을 불끈 주었지요.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번쩍! 심 봉사의 두 눈이 떠진 거예요. 그뿐이 아니에요. 앞 못 보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번쩍 눈을 떴어요. "세상에, 내 딸이 보이는구나!" 심 봉사는 청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모두 왕비님의 효심 덕분이네!" 사람들은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했어요. 흥겹고 행복한 잔칫날이었어요. 지화자 지화자 좋을시고, 어화 좋구나. 이렇게 좋을 수가 없구나. 살아 생전 눈을 뜨니, 지화자 좋을시고. |
백두산 장생초 | 예술경험 | 유아 | 먼 옛날, 백두산에 겁 많은 아기 호랑이가 살았어요. 아기 호랑이는 백두산 꼭대기를 쳐다보며 말했어요.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가지? 게다가 꼭대기에 무서운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아기 호랑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 호랑이가 슬며시 다가왔어요. 할머니 호랑이는 아기 호랑이 곁에 앉아 말했어요. "백두산 꼭대기는 무척 험해서 오래전부터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단다. 그런데 작고 힘없는 사람 아이가 오른 적이 있었지." "사람 아이가요? 정말요?" 아기 호랑이가 궁금해하자 할머니 호랑이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건 아주 먼 옛날이었단다. 백두산 아래, 어느 마을에 아들이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 아들은 아픈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았지. 하지만 어머니의 병은 낫지 않고 점점 심해질 뿐이었단다. 하루는 마을 의원이 아들에게 말했어. "백두산 꼭대기에 장생초라는 약초가 있는데 어떤 병이든지 싹 낫게 한다고 하더구나." "백두산 꼭대기요? 하지만 거긴 오르기 어려워서 다녀온 사람이 없다던대요." 아들은 귀가 솔깃했지만 겁이 났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점점 더 아파하는 어머니를 보고는 용기를 냈어. '어머니를 위해 반드시 장생초를 구해 오자.' 아들은 굳게 마음먹고 백두산 꼭대기로 향했지. 백두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힘들었단다. 산비탈을 오르다 미끄러지고 눈밭에 발이 푹푹 빠졌거든. 게다가 눈까지 날리기 시작했지. 눈은 금방 굵어졌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갑자기 바람도 휭 불었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아들이 뒤를 홱 돌아보니, 길 끝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 거야. 아들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지. 으악! 저게 뭐지? 검은 그림자는 점점 다가오며 모습을 드러냈어. 다름 아닌 눈썹이 큼직한 할머니였지. "할머니,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마음이 놓인 아들은 할머니에게 물었단다. 할머니는 백두산 꼭대기에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어. 아들도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지. 아프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꼭대기에 가고 있어요. 할머니는 아들에게 주머니를 건네며 부탁했어. "내가 더는 산에 오를 힘이 없구나. 꼭대기에 올라가거든 나를 대신해서 이 씨앗을 뿌려 주겠니?" "네, 그렇게 할게요." 아들은 할머니와 약속하고 다시 길을 떠났지. 아들은 힘을 내서 한 발 한 발 올라갔어. 마침내 백두산 꼭대기에 다다란 거야. 그런데 꼭대기에는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어. "이럴 수가! 아무것도 없잖아!" 아들은 절망스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렸단다. 말도 안 돼! 아들은 꼭대기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어. 꼭 장생초를 구해서 어머니를 낫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그러다 할머니의 부탁이 떠올랐지. '그래, 씨앗을 뿌리고 어서 집에 돌아가자.' 아들은 주머니에 든 씨앗을 꺼내 눈밭에 뿌렸어. 그런데 갑자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단다. 눈밭에 뿌린 씨앗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더니 순식간에 잎이 열리고 꽃이 피는 거야. 아들은 놀라서 얼떨떨했지.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말했어. "바로 이게 장생초이니 가져가서 어머니를 낫게 해 드리거라." 아들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산을 내려왔어. 나는 백두산을 지키는 산신령이란다. "어머니, 제가 장생초를 구해 왔어요." 아들은 정성껏 장생초를 달여 어머니께 드렸어. 장생초를 먹은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병이 싹 나았지. 그 뒤로 아들은 어머니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단다. "사람 아이가 정말 대단해요!" 할머니 호랑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아기 호랑이는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어요. "저도 용기를 내서 꼭대기에 올라가 볼래요!" 아기 호랑이는 백두산 꼭대기를 향해 달려갔어요. 할머니 호랑이는 그런 아기 호랑이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답니다. 먼 옛날, 백두산에 겁 많은 아기 호랑이가 살았어요. 아기 호랑이는 백두산 꼭대기를 쳐다보며 말했어요.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가지? 게다가 꼭대기에 무서운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아기 호랑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 호랑이가 슬며시 다가왔어요. 할머니 호랑이는 아기 호랑이 곁에 앉아 말했어요. "백두산 꼭대기는 무척 험해서 오래전부터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단다. 그런데 작고 힘없는 사람 아이가 오른 적이 있었지." "사람 아이가요? 정말요?" 아기 호랑이가 궁금해하자 할머니 호랑이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건 아주 먼 옛날이었단다. |
재주꾼 세 사람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옛날 세 친구가 한 마을에 살았어. 세 친구는 저마다 재주가 하나씩 있었지. 큼직한 손으로 활 잘 쏘는 활손이, 커다란 눈으로 멀리까지 잘 보는 왕눈이, 길쭉한 발로 빠르게 뛰는 뜀발이. 세 친구의 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볼래? 활손이가 얼마나 활을 잘 쏘는가 하면 말이야, 큼직한 손으로 활을 당겨 휙 쏘면 어디든 화살이 정확히 꽂힌단 말이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도 척! 나무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이파리도 척! 냇물 건너 동글동글 조약돌도 척! 왕눈이 재주도 만만치 않아. 커다란 눈을 껌뻑이면 저 멀리 있는 것도 잘 볼 수 있어. 앞마을에 도둑이 들었어. 껌뻑! 멀리 보는 재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주는 소식통이지! 뒷마을에 강물이 넘쳤어. 껌뻑! 뜀발이 재주는 또 어떻고? 길쭉한 발로 풀쩍풀쩍 뛰면 먼 곳도 금세 쌩 하고 갈 정도야. 옆 마을까지도 쌩! 세 고개 너머 마을까지도 쌩! 얼마나 빠른지 뜀발이가 지나가는 곳마다 바람이 쌩 분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러던 어느 날이야. 활손이가 마을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어. "우리 모험을 해 보는 건 어때?" "그거 재미있겠다!" "그래, 우리 멀리 떠나 보자!" 그렇게 해서 세 친구는 넓은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어. 길을 걷던 세 친구는 한 마을에 다다랐어. "배고파. 우리 뭐 좀 먹고 가자." 세 친구는 근처 주막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지 뭐야? 최 부자가 또 나그네에게 내기를 걸었다며? 그렇다네. 최 부자와 내기를 하면 무조건 지는데 말이야. 맞아, 최 부자 꾀에 안 넘어갈 수가 없지. "무슨 일이에요?" 세 친구가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어. "우리 마을 최 부자가 전 재산을 걸고 나그네와 내기를 하는데, 여태까지 이긴 나그네가 하나도 없다네." 사람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어. 소곤소곤 수군수군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마을 최고 부자 최 부자가 말이지. "그러니까 최 부자가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를 걸고 나그네가 지면 그 나그네를 머슴으로 삼는다는 거잖아." 세 친구는 못된 최 부자를 그냥 둘 수 없었어. 우리 재주면 내기에서 반드시 이길 거야. 우리가 이겨서 나그네들을 구해 주자. 좋아! 다 함께 용기를 내어 힘을 합쳐 보자! 세 친구는 최 부자의 집을 찾아갔어. "내기를 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허허, 잘 찾아왔소. 저 언덕 너머에 있는 우물에 가서 물 한 바가지 떠 먼저 돌아오면 이기는 내기요. 내 딸이 이기면 우리 집 머슴이 되고, 내 딸이 지면 내 전 재산을 주겠소." 최 부자는 세 친구를 반기며 말했어. 흐흐, 내 딸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모를 게다. “달리기라면 내가 자신 있지!” 뜀발이가 최 부자의 딸과 내기를 하기로 했어. 뜀발이는 출발선에 최 부자의 딸과 나란히 섰지. 출발! 뜀발이와 최 부자의 딸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달려 나갔어. 뜀발이는 우물에 도착했는데 딸은 아직 반밖에 못 갔어. 이제 뜀발이가 우물물을 뜨고 있어! 이야, 뜀발이가 물을 떠서 돌아오고 있어! 최 부자는 왕눈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부랴부랴 줄을 챙겨 들고 어디론가 뛰어갔지. 뜀발이가 출발선에 거의 다 왔을 때야. 휘리릭! 뜀발이의 발목이 덫에 걸려 버렸어. 최 부자가 뜀발이를 방해하려고 놓은 덫이었지. "어떻게 하지? 뜀발이가 나무에 매달려 꼼짝 못 해! 게다가 저기 최 부자의 딸도 돌아오고 있어!" 왕눈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활손이가 활을 꺼내 들었어. 덫을 손으로 가리켜 줘. 내가 활을 쏘아 끊을게. 바로 저기야. 휙! 활손이가 쏜 화살이 단번에 밧줄을 툭 끊었어. “야호, 명중이다, 명중!” 왕눈이가 기뻐서 소리쳤어. 뜀발이는 냉큼 일어나 재빨리 우물로 달려갔어. 잽싸게 우물을 다시 떠서 최 부자의 딸을 뒤쫓더니 순식간에 앞질렀지. 이겼다! 만세! 드디어 최 부자를 이겼어! "세 친구가 힘을 합쳐 내기에서 이겼어!" 사람들이 모여들어 환호했어. 전 재산을 내놓게 된 최 부자는 털썩 주저앉았지. "머슴으로 삼은 나그네들을 모두 풀어 주고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겠다 약속하면 재산은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최 부자는 알겠다며 곧장 나그네들을 풀어 주었어. 아이고, 망했네! 나그네들은 세 친구의 뛰어난 재주에 감탄하고 고마워했어. 그리고 세 친구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단다. |
구렁덩덩 신선비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마을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길에서 커다란 알을 하나 주웠어.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되었네!" 할머니는 알을 집으로 가져가 먹었지. 그런데 그때부터 할머니 배가 쑥쑥 커지더니 에구머니, 할머니가 구렁이를 낳은 거야. 할머니는 구렁이를 마당에 두고 삿갓으로 덮어 놓았지. 며칠 뒤, 마을의 부잣집 세 딸이 할머니 집에 찾아왔어. "앗, 구렁이잖아?" 첫째 딸은 삿갓을 들추더니 화들짝 놀라 달아났어. 둘째 딸은 구렁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 으악, 무서워!아이, 징그러워! 하지만 셋째 딸은 구렁이를 보고 방글방글 웃었어. 구렁이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지.구렁덩덩 신선비 님, 안녕하세요? 멋진 삿갓을 쓰고 계시네요. 세월이 흘러 구렁이는 무럭무럭 자랐어. 그런데 어느 날 구렁이가 할머니를 조르는 거야. "마을의 부잣집 딸한테 장가갈래요!" "안 된다! 누가 구렁이한테 시집오겠느냐?" 할머니가 말렸지만, 구렁이는 계속 고집을 부렸어. 할머니는 할 수 없이 부자를 찾아갔지. 부자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세 딸을 불렀어. "누가 구렁이한테 시집갈 테냐?"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어. 셋째 딸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 제가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렁이는 장가를 가게 되었어. 혼례식 날, 구렁이는 구불구불 부잣집으로 기어가 셋째 딸과 혼인을 했어.내 색시가 되어 주어 고맙소! 혼례식이 끝나고 밤이 되자, 구렁이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구렁이가 허물을 훌훌 벗더니 달처럼 빛나는 구렁덩덩 신선비가 된 거야. 구렁덩덩 신선비와 색시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냈어. 하지만 곧 구렁덩덩 신선비는 과거를 보러 떠나야 했지. "내가 없는 동안 이 허물을 잘 가지고 계시오. 허물이 없어지면 난 못 돌아온다오." 구렁덩덩 신선비가 색시에게 허물을 맡기며 부탁했어. 색시는 알겠다며 허물을 옷장 안에 잘 두었지. 그런데 하루는 색시의 언니들이 옷장 속에 있는 허물을 보고 말았어. "어머나, 징그러워. 당장 없애 버려!" 언니들은 허물을 불 속에 휙 던져 버렸어. 색시는 활활 타는 허물을 보며 눈물을 흘렸지. 허물 타는 냄새는 멀리멀리 퍼져 구렁덩덩 신선비가 있는 곳까지 날아갔어. "허물이 없으니 이제 돌아갈 곳이 없구나!" 구렁덩덩 신선비는 크게 슬퍼하며 어디론가 가 버렸지. 색시는 구렁덩덩 신선비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하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가도 구렁덩덩 신선비가 돌아오지 않는 거야. 색시는 구렁덩덩 신선비를 찾아 나섰어. 얼마나 걸었을까? 색시는 들판에서 까치를 만났어. "까치야, 구렁덩덩 신선비 님이 어디로 갔는지 아니?" 색시는 배가 고프다는 까치들에게 벌레를 한가득 잡아 주며 물었어. 고개 너머 숲속에 사는 멧돼지가 알걸? 색시는 고개를 넘어 멧돼지를 찾아갔어. "멧돼지야, 구렁덩덩 신선비 님이 어디로 갔는지 아니?" 색시는 배가 고프다는 멧돼지에게 밤송이를 한가득 까 주며 물었어. 고개 너머 개천 옆에 사는 할머니가 알걸? 색시는 고개를 넘어 할머니를 찾아갔어. "할머니, 구렁덩덩 신선비 님이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색시는 개천에 다리가 필요하다는 할머니에게 징검다리를 놓아 주며 물었어. "이걸 타고 가 보렴." 할머니는 개천에 큰 바가지를 띄우며 대답했지. 색시를 태운 바가지는 두둥실 개천을 따라 한참을 흘러가더니 한 낯선 마을에 닿았어. 구렁덩덩 신선비가 있는 곳에 도착한 거야. 색시는 구렁덩덩 신선비가 사는 집을 찾아갔어. 구렁덩덩 신선비는 색시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지. 색시는 구렁덩덩 신선비에게 말했어. "나와 함께 집으로 가요!" 하지만 구렁덩덩 신선비는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어. 왜 갈 수 없나요? 그동안 신세를 진 정승 댁 딸과 혼인하기로 했소. 그러자 색시는 정승을 찾아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어. 정승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색시에게 말했어. "내 딸과 시합을 해서 이기면 구렁덩덩 신선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색시가 좋다고 하자, 바로 시합이 벌어졌어. 첫 번째 시합은 물 길어 옮기기! 정승 딸은 꽃신을 신고 물동이를 이고 촐랑촐랑 걸었어. 그 바람에 물동이 속 물이 다 쏟아졌지. 색시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물동이를 이고 사뿐사뿐 걸었어. 그 덕분에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 내가 이겼다! 두 번째 시합은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가져오기! 정승 딸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와다닥 달려갔어. 그 바람에 새들이 놀라 파드닥 날아갔지. 색시는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주워 살랑살랑 흔들었어. 나뭇가지에 새들이 날아와 앉자, 색시는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가져왔지. 이번에도 이길 수 있어! 세 번째 시합은 호랑이 눈썹 뽑아 오기! “뭐? 호, 호랑이 눈썹을 한 가닥 뽑으라고?” 정승 딸은 너무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호랑이 대신 고양이 눈썹을 쏙 뽑았지. 야옹! 색시도 털컥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숲속으로 들어갔어. 수풀 속에서 잠자는 호랑이를 발견하고는 살금살금 다가갔지. 후욱! 색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팔을 쭉 뻗었어. 그리고 조심조심 호랑이 눈썹을 한 가닥 잡아 쑥 뽑았지. 마, 마지막 시합도 내가 이겼다! 이렇게 해서 색시는 시합에서 모두 이겼어. 색시는 구렁덩덩 신선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지. 그리고 둘은 다시는 헤어지는 일 없이 오래오래 잘 살았대. |
은혜 갚은 두꺼비 | 예술경험 | 유아 |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한 달이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어요. 하루는 달이가 밥을 지어 푸는데 비쩍 마른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으로 비틀비틀 들어왔어요. 두꺼비는 오래 굶은 듯 기운이 없어 보였지요. 끄르륵. 어, 두꺼비잖아? "가엾어라. 배고픈가 보구나!" 달이의 말에 두꺼비가 두 눈을 끔뻑끔뻑. 가난한 살림이라 남은 밥이 없었지만, 달이는 제 밥을 반으로 뚝 나누어 두꺼비에게 내주었어요. 이거라도 먹어! 냠냠, 쩝쩝! 두꺼비는 넙적넙적 밥을 받아먹었어요. 그러고는 부뚜막 위로 폴짝 뛰어올랐지요. 이제 기운이 나니? 쩝쩝! 그날 이후 두꺼비는 날마다 달이를 찾아왔어요. 달이는 자기 밥을 남겨 두었다가 두꺼비에게 주었지요. 그 덕분에 두꺼비는 몸집이 쑥쑥 커졌어요. 널름널름! 우걱우걱! 쑥쑥! 어느덧 달이와 두꺼비는 정이 들었어요. 두꺼비는 달이가 가는 곳은 어디든 졸졸 따라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달이에게 큰 걱정이 생겼어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신 거예요. "아버지 드실 약을 사야 하는데,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달이는 한숨을 내쉬었어요. 끄르륵끄르륵. 두껍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다음 날 달이는 빨래터에서 우연히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젯밤에도 뒷산 동굴에서 괴물이 내려와 사람을 해쳤다며? 에그, 무서워라! 벌써 몇 번째야? 에그, 무서워라! 벌써 몇 번째야? 제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원님께서 큰돈을 주신다고 하잖아! 괴물? 제물? 사람! 큰돈! "제물이 되는 사람에게 큰돈을 준다고?" 달이는 두 눈이 동그래졌어요. 두껍아, 그 돈이면 아버지 약을 살 수 있겠어! 달이는 곧장 원님에게 달려갔어요.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정말이냐? 달이는 제물이 되기로 약속하고, 원님에게서 큰돈을 받아 아버지의 약을 샀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정성껏 약을 달였지요. 그러는 동안 달이에게 또 다른 걱정이 생겼어요. 두껍아, 내가 없으면 아버지는 누가 돌봐 드리지? 시간이 흘러 달이가 제물이 되기로 한 날이 되었어요. 달이는 밥을 푸다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어요. "아버지께 해 드리는 마지막 밥이구나!" 달이는 두꺼비에게 밥을 주면서도 울었어요. "이제 너한테는 누가 밥을 주니?" 두꺼비는 눈을 끔뻑이며 달이를 쳐다봤어요. 그러고는 다른 때보다 널름널름 밥을 더 많이 먹었지요. 이게 너한테 주는 마지막 밥이구나! 달이네 집 앞에는 가마꾼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가마꾼들은 달이를 가마에 태우고 곧장 뒷산 동굴로 향했지요. 두꺼비는 가마 뒤를 엉금엉금 따라갔어요. 달이는 그런 두꺼비를 보고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어요. 두껍아, 두껍아, 불쌍한 두껍아, 나를 따라와도 이제는 소용없다. 오늘 가면 다시는 못 보네. 앞으로 너에게 누가 밥을 주랴! 두꺼비는 엉금엉금 가마를 계속 따라갔어요. 달이가 따라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어도 두꺼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요.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가마꾼들은 동굴 앞에 가마를 놓아두고 마을로 돌아갔어요. 달이는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혼자 걸어 들어갔어요. "으, 너무 무서워!" 달이는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부들부들 떨었지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쓰르륵쓰르륵, 어디선가 무서운 소리가 났어요. 그 순간 천장을 올려다본 달이는 깜짝 놀랐어요. 거대한 지네가 무섭게 노려보며 달려들었거든요. "으악!" 달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어요. 그때였어요. 달이 뒤에서 두꺼비가 나타나 지네를 막아섰어요. 그리고 독이 든 거품을 지네에게 부글부글 내뿜었지요. 순식간에 거품에 휩싸인 지네는 괴로워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어요. 끄르륵! 끄르륵끄르륵! 하! 두꺼비는 지네를 향해 온몸을 날렸어요. 지네는 긴 꼬리를 휘둘러 두꺼비를 쳤고요. 풀쩍! 휘릭! 두꺼비는 다시 지네에게 다가가 온 힘을 다해 거품을 내뿜었어요. 엎치락뒤치락! 두꺼비와 지네의 싸움은 밤새 이어졌어요. 부글부글. 끄르륵! 어느덧 날이 밝았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달이는 동굴 안을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지네가 허연 거품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죽어 있었거든요. 두꺼비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지요. "날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구나!" 달이는 두꺼비를 끌어안고 서럽게 엉엉 울었어요. 두껍아, 정말 고맙구나! 달이는 두꺼비를 해가 잘 드는 마을 입구에 정성껏 묻어 주었어요. 두꺼비 덕분에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지요. 그 뒤로 사람들은 두꺼비 무덤을 지날 때면 노래를 부르며 두꺼비를 떠올렸답니다. 두껍아, 두껍아, 은혜 갚은 두껍아, 아무리 불러도 이제는 볼 수 없구나. 대단한 너의 용기, 우리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옛날에 한 아이가 혼자 집을 보고 있었어. 아이가 목을 길게 빼고 엄마랑 오빠를 기다리는데, 마침 엄마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거야. 아이는 "엄마!" 하고 반기며 달려갔지. 그런데 어디선가 어마어마하게 큰 새가 나타나 엄마를 널름 집어삼키고는 날아가 버렸어. 잠시 뒤 오빠가 집에 돌아와 보니 동생이 벌벌 떨며 울고 있었어. "왜 울고 있니?"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엄마를 집어삼키고 날아가 버렸어!" 오빠와 동생은 몇 날을 밤낮으로 울었어. "안 되겠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를 잡아서 혼내 주고 말 테야!" 오빠는 새 쫓는 줄을 손에 꼭 쥐고 집을 나섰어. 못된 새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오빠는 새를 찾아다니다가 산에서 약초꾼을 만났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어딨는지 아시나요?" 약초를 모두 캐면 알려 주마. 오빠는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모두 캤어. 그러자 약초꾼이 칼을 주며 말했어.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렴." 오빠는 개울로 달려가 빨래하는 아주머니를 만났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어딨는지 아시나요?" 빨래를 모두 깨끗이 빨면 알려 주마. 오빠는 빨래를 비비고 헹궈서 모두 깨끗이 빨았어. 그러자 아주머니가 바가지를 주며 말했어. "논에서 벼 베는 농부한테 물어보렴." 오빠는 논으로 달려가 벼 베는 농부를 만났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어딨는지 아시나요?" 벼를 모두 베면 알려 주마. 오빠는 넓은 논을 오가며 벼를 모두 베었어. 그러자 농부가 주걱을 주며 말했어. "들판을 지나고 강을 건너 고개를 넘어가 보렴. 거기에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살 게다." 오빠는 풀이 높게 자란 들판을 가로질렀어.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도 건너고 숨이 넘어갈 만큼 높은 고개도 넘었지. 그랬더니 가시울타리로 둘러싸인 커다란 집이 나타났어. 오빠가 숨어 지켜보니 그 집에 진짜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새가 살고 있었지. 오빠는 몰래 집 안으로 숨어들었어. 새는 그것도 모르고 혼잣말을 했어. "오늘은 뭘 먹을까? 그래, 떡을 해 먹자!" 그러더니 떡을 한 시루 쪄 놓고는 칼을 빌리러 밖으로 나가지 뭐야.이런, 칼이 없네! 그사이 오빠는 솥으로 가서 숭덩숭덩 떡을 잘라 몽땅 먹어 치웠어. 그러고는 항아리 속에 꼭꼭 숨었지. 조금 뒤 새가 칼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떡이 없잖아? "이상하네. 떡이 다 어디로 간 거지?" 새는 떡을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어. 그러다가 떡은 못 찾고 그냥 잠들고 말았지. 다음 날이 되었어. "오늘은 죽을 쒀 후루룩 마시자!" 새는 한 솥 가득 죽을 쑤었어. 그러더니 바가지를 빌리러 또 나가지 뭐야. 그사이 오빠는 바가지로 죽을 몽땅 퍼 먹고 또 항아리 속에 꼭꼭 숨었어. 에구, 이번에는 바가지가 없네! 조금 뒤 새가 바가지를 가지고 돌아와 보니, 또 죽이 없잖아? "어느 놈이 나 몰래 먹은 거야!" 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 안을 뒤졌어. 하지만 기운만 쪽 빼고 배고픈 채로 잠들고 말았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어. “아, 배고파. 얼른 밥이나 해 먹자!” 새는 한 솥 가득 밥을 지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주걱이 없네. 새는 주걱을 빌리러 힘없이 느릿느릿 집을 나섰어. 흑, 주걱은 언제 빌려 오나? 한참 뒤 새가 주걱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또 빈 솥이야. 당연하지. 오빠가 주걱으로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먹었으니까. 새는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어. 사흘을 쫄쫄 굶어 기운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 순간 오빠가 줄을 빙빙 돌리더니 새를 향해 돌멩이를 날렸어. 아야! 벌레가 무나? 톡! 톡! 아이, 따가워! 벼룩까지 괴롭히네! 씽! 핑! 쌩! 안 되겠다. 솥 안으로 들어가자! 새가 솥 안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았어. 그러자 오빠는 얼른 뚜껑 위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고 아궁이에 불을 땠지. "아, 졸려!" 새는 뜨끈한 솥 안에서 이내 잠들고 말았어. 오빠는 장작을 아궁이에 계속 집어넣었어. 시간이 흘러 사나운 불길이 아궁이를 가득 채우자, 솥도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랐지. 솥 안에 있던 새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긴, 바싹 타서 새까만 재가 되었지. 그럼 오빠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용감하게 새를 혼내 주었으니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대. |
천 년 묵은 지네 | 예술경험 | 유아 | 어느 마을에 약초를 캐는 총각이 있었어. 하루는 총각이 산에서 약초를 찾다가 길을 잃었지 뭐야. "큰일이네. 날이 어두워지는데." 총각은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 발을 헛딛어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 다음 날 총각은 낯선 집에서 눈을 떴어. 몸을 크게 다쳐 움직일 수가 없었지. "괜찮아요? 어젯밤 낭떠러지 아래에 쓰러져 있었어요." 어떤 여인이 총각을 보며 말했어.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렸군요." 총각은 여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지. 여인은 총각을 정성껏 돌봐 주었어. 그 덕분에 총각은 몸이 점점 나아졌지.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이 집을 비운 사이 한 사내가 불쑥 총각 앞에 나타났어. "이 집 주인은 천년 묵은 지네요. 당신이 지네를 죽이지 않으면 지네가 당신을 잡아먹을 것이오.""네? 그게 정말인가요?" 총각이 깜짝 놀라자 사내가 약초를 건네주며 말했어. "지네를 죽이려면 이 약초를 태운 뒤 매운 연기를 지네의 방 안에 불어 넣으시오." 사내는 독한 약초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지. 저녁이 되자 여인이 집으로 돌아왔어. 총각은 몰래 여인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지. '으악, 이럴 수가!' 여인이 커다란 지네로 변하지 뭐야. 총각은 벌벌 떨며 부엌으로 갔어. 사내가 준 약초를 태우려고 말이야. 그런데 선뜻 그럴 수가 없었어. '지네가 내 목숨을 살려 줬는데.' 총각은 차마 지네를 죽일 수 없었어. 그래서 약초를 강에 던져 버렸지. 총각은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왔어. 그사이 지네는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지. "오늘 한 사내가 나를 찾아왔어요. 그런데." 총각은 지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어. 지네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어. "그 사내는 내 남편을 죽인 천년 묵은 구렁이예요. 나는 오랫동안 구렁이와 싸울 날만을 기다려 왔어요." 지네는 총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내일은 구렁이와 싸우는 날이에요. 부디 나를 도와주세요." 지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탁했어.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내가 구렁이와 싸울 때 큰 소리를 질러 주세요." 총각은 지네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했지. 다음 날 지네와 구렁이가 만났어. 지네랑 구렁이는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어. 그 모습을 본 총각은 너무 무서웠나 봐.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바들바들 떨다가 까무러치고 말았지. 지네와 구렁이의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았어.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싸우기로 하고 헤어졌지. 지네는 총각에게 간절하게 부탁했어. "내일은 꼭 소리를 질러 주세요." 총각은 지네에게 굳게 약속했어. "알겠어요. 반드시 그렇게 할게요." 용기를 내 주세요. 다음 날 지네와 구렁이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 총각은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서운지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았어. 총각은 덜덜 떠느라고 소리를 지를 생각조차 못했지. 으악! 너무 무서워! 한참 싸우던 지네와 구렁이는 힘이 빠져 싸움을 멈추었어.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싸우기로 했지. 지네는 총각에게 간곡히 부탁했어. "제발 소리를 질러 주세요." "미안해요. 내일은 꼭 용기를 낼게요." 총각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지. 이를 어쩌지! 다음 날 지네와 구렁이가 마지막 싸움을 시작했어. 둘은 한참 동안 엎치락뒤치락 싸웠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지네가 구렁이에게 밀리는 거야. 이러다가 꼼짝없이 지네가 질 것 같았어. '제발 소리를 질러 주세요.' 지네가 총각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 총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 '그대로 두면 지네가 죽고 말 거야. 내가 용기를 내야 해!' 총각은 온 힘을 다해 크게 소리쳤어. "이놈! 이 못된 구렁이야!" 총각의 목소리에 구렁이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지네가 구렁이를 꽉 물었지. 구렁이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헉! 꽉! 드디어 지네가 구렁이를 물리친 거야.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마음 편히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요. 당신은 어서 내가 살던 집으로 가 보세요." 지네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총각에게 손을 흔들며 하늘로 올라갔어. 총각은 지네가 살던 집으로 갔어. 그런데 집은 없고 상자들만 덩그러니 있지 뭐야. 상자 안에는 돈과 보석이 가득했어. 총각의 용기 덕분에 구렁이를 물리치고 하늘로 올라간 지네의 선물이었나 봐. |
해와 달이 된 오누이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깊은 산속에 엄마와 오누이가 살았어. 엄마는 고개 너머 마을에 일하러 다녔지. 하루는 엄마가 일을 하고 광주리 가득 떡을 받았어.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얼른 집에 가야겠다." 엄마가 첫 고개를 넘으려는 때였어. 커다란 호랑이가 엄마 앞에 나타났지 뭐야. “음, 맛있는 냄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엄마는 겁에 질려 떡을 휙 던져 주었어. 호랑이는 떡을 물고 유유히 사라졌지. 그런데 고개를 넘을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떡을 달라고 하는 거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이게 마지막인데. 다음 고개에서도 호랑이가 나타났어. 이를 어쩌나. 떡이 하나도 없는데. 엄마는 울먹이며 호랑이에게 말했어. "살려 주세요. 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저고리 주면 안 잡아먹지!" 엄마는 벌벌 떨며 저고리를 벗어 주었어. 그다음 고개에서도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지 뭐야. "치마 주면 안 잡아먹지!" 옷을 모두 내어 준 엄마는 서둘러 걸었어. 그런데 마지막 고개에서 또 호랑이가 나타나 엄마를 꿀꺽 삼켜 버렸지. 휘릭 휘릭 휘릭 호랑이는 엄마 옷을 걸치고 머릿수건을 둘렀어. 그러더니 오누이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지. "흐흐, 얼른 가서 오누이를 잡아먹어야지." 호랑이는 오누이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어. "얘들아, 엄마 왔다. 어서 문 열어 줘." 호랑이는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어. "어?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요?" 여동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지. "바깥바람이 차가워서 목이 쉬어 그렇단다." "그럼, 손을 보여 주세요." 오빠의 말에 호랑이는 털이 숭숭한 앞발을 내밀었어. 오누이는 슬쩍 호랑이 앞발을 만져 보았지. "이상하다. 우리 엄마 손은 부드러운데." "오늘 밭을 매느라 손이 거칠어져서 그렇단다. 바람이 차고 춥다. 어서 문 열어 주렴." "오빠, 엄마 감기 걸리면 어떡해?" 여동생은 엄마를 걱정하며 문을 벌컥 열었어. 호랑이는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치마 사이로 툭 튀어나온 호랑이 꼬리가 보이는 거야. '앗, 호랑이다!' 오빠는 비명을 지르려는 여동생의 입을 다급히 막았어. "쉿! 얼른 밖으로 나가자." 오빠는 용기를 내어 호랑이에게 말했어. "엄마, 저 똥 마려워요." "방 안에 누렴." "고약한 냄새가 날 거예요." "그럼 마루에 누렴." "밟아서 찍 미끄러지면 어떻게 해요?" "그럼 뒷간에 가던지!" 호랑이가 귀찮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 오누이는 집 밖으로 나와 후다닥 나무 위로 올라갔지. "얘들아, 어디 갔니?" 오누이가 오지 않자 호랑이는 집 밖으로 나왔어. 마침 우물을 들여다보니 오누이가 보이지 뭐야. "너희들 거기서 뭐 하니? 엄마가 꺼내 줄게." 호랑이는 오누이를 잡으려고 허우적댔어. "바보, 우리가 우물 안에 있는 줄 아나 봐." 여동생의 목소리에 호랑이가 나무 위를 쳐다보았어. 오누이를 본 호랑이가 씩씩대며 말했어. "요 녀석들, 어떻게 올라간 게냐?" "손에 참기름을 듬뿍 묻히고 올라왔지." 오빠가 꾀를 내어 대답했어. 호랑이는 네 발에 참기름을 듬뿍 바르고 나무에 뛰어 올랐어. 그런데 호랑이는 손이 미끌미끌해서 나무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어. 결국 호랑이는 주르륵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어. 내려 와! 이쯤이야. 얼른 올라가야지! 아이고, 미끄러워! 쿵! 그 모습을 본 여동생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어. "바보,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서 올라오면 쉬운데."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호랑이가 도끼를 가져왔어. "나를 놀렸겠다. 기다려라. 요 녀석들." 호랑이는 나무를 쿵쿵 찍으며 위로 올라갔지. 오누이도 호랑이를 피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어. 겁에 질린 오누이는 하늘을 향해 빌었어. "하느님, 저희를 살리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아니면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어. 오누이는 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갔지. 이에 질세라 호랑이도 두 발을 모았어. "저를 살리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아니면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늘에서 또 동아줄이 내려왔어. 호랑이는 덥석 줄을 잡고 올라갔지. 호랑이 손에 오누이가 닿을 듯 말 듯 잡힐 것 같았어. 그때였어. 호랑이가 잡은 동아줄이 뚝 끊어지지 뭐야! "악, 으악! 안 돼!" 호랑이는 그만 땅으로 쿵 떨어지고 말았어. 오누이는 무사히 하늘로 올라갔어. 그 뒤 오빠는 해가 되었고, 동생은 달이 되었지. 그런데 동생이 깜깜한 밤을 무서워하자 오빠가 대신 달이 되어 주었어. 지금도 달이 된 오빠는 의젓하게 밤을 지키고 해가 된 동생은 낮에 밝은 빛을 내뿜고 있대. |
떡 먹기 내기 | 예술경험 | 유아 | 어느 날 토끼가 보슬보슬 쌀가루를 가져왔어요. 두꺼비는 고소한 팥고물을 가져왔고요. "토끼야, 우리 떡이나 쪄 먹을까?" "그래, 좋아!"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구수한 떡 냄새가 온 숲에 폴폴. 토끼는 군침을 꿀꺽 삼켰어요. 두꺼비도 입맛을 쩝쩝 다셨지요. 맛있겠다! 먹어 볼까? 바로 그때였어요. 토끼와 두꺼비 앞에 호랑이가 불쑥 나타났지 뭐예요. 이게 웬 떡이냐! 호랑이가 떡시루를 보며 말했어요. "이 맛난 떡을 너희들끼리만 먹으려고?" "그럴 리가 있나. 같이 나눠 먹어야지." 깜짝 놀란 토끼와 두꺼비가 호랑이에게 살살거렸지요. "이렇게 조금밖에 안 되는 걸 어떻게 나누어 먹어? 그러지 말고 떡 먹기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떡 먹기 내기? "우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이가 떡을 몽땅 먹기로 하자." 토끼와 두꺼비는 호랑이가 무서워 고개를 끄덕였어요. "자, 그럼 나부터 말할게. 나는 강이 처음 생기던 날 태어났어." 훗,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을걸. 호랑이의 말이 끝나자 토끼가 큼큼 기침을 하며 말했어요. "강이 처음 생기던 날, 나는 거기서 낚시를 했는걸." 토끼가 실실 웃으며 떡시루를 슬그머니 당겼지요. 그럼 내가 호랑이보다 나이가 많은 거지? 그때 갑자기 두꺼비가 엉엉 울며 말했어요. "강이 처음 생기던 날, 그 강을 건너다 죽은 손자가 생각나네. 흑흑." "뭐? 손자라고?" 토끼와 호랑이는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두꺼비는 눈물을 닦으며 떡시루를 끌어안았지요. 어때, 내 나이가 가장 많지? 내기에서 진 호랑이가 꾀를 내었어요. 떡 먹기 내기, 한 번 더 해! 이번엔 저 강을 가장 빨리 건너는 이가 떡을 몽땅 먹기로 하자. "그래. 한 번 더 하지, 뭐." 두꺼비는 억울했지만 호랑이 말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자, 출발! 나 먼저 간다!" 호랑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강으로 냉큼 뛰어들었어요. 토끼도 질세라 그 뒤를 따랐고요. 두꺼비는 폴짝 뛰어 호랑이 꼬리에 매달렸어요. 호랑이는 두꺼비가 자기 꼬리에 매달린 건 꿈에도 몰랐지요. 호랑이가 가장 먼저 강을 건넜어요. 곧이어 도착한 토끼는 아쉬워서 귀가 축 처졌지요. 두꺼비는 호랑이가 강을 건너자마자 꼬리에서 휙 날았어요. 내가 일 등이다! 에구. 휘리릭. 두꺼비는 돌 더미 위에 척 내려앉았어요. 그러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지요. "이제 도착한 거니? 난 벌써 왔는데." 두꺼비를 본 호랑이와 토끼는 놀라서 눈이 툭 튀어나올 뻔했어요. 너희들 기다리다가 깜빡 졸았네. 흐흐. 척! 약이 바짝 오른 호랑이가 또 나섰어요. 내기를 하려면 세 번은 해야지! 셋은 바로 앞에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마지막으로, 떡시루를 언덕 아래로 굴려서 가장 먼저 잡는 이가 떡을 몽땅 먹는 걸로 하자!" 호랑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떡시루를 냅다 굴렸어요. 휙! 떡시루를 따라 호랑이가 펄쩍펄쩍. 토끼는 그 뒤를 깡충깡충. 두꺼비는 앙금앙금. 셋은 떡시루를 쫓아 열심히 달렸어요. 언덕 아래에 가장 먼저 도착한 호랑이가 떡시루를 향해 손을 뻗었어요. 받았다! 떡이 어딨지? 밑에 있나? 호랑이는 빈 떡시루를 보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어요. 뒤따라온 토끼도 놀라서 눈이 똥그레졌지요. "도대체 떡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호랑이와 토끼는 떡을 찾아 다시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맙소사! 두꺼비가 혼자 떡을 우적우적 먹고 있는 거예요. "떡이 여기 그루터기에 걸려 있지 뭐야. 어찌나 맛이 좋은지 멈출 수가 있어야지." 두꺼비가 불룩 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지요. 호랑이와 토끼는 화가 나서 입이 떡 벌어졌어요. 그런데 두꺼비가 먹고 남은 떡고물을 건네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떡고물 맛 좀 볼래?" "뭐라고? 너 혼자 다 먹어!" 화가 폭발한 호랑이와 토끼는 떡고물을 두꺼비 등에 휙 던졌어요. 떡고물은 그대로 두꺼비 등에 착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지요. 그때부터 두꺼비 등이 우둘투둘한 거라나 뭐라나. |
머리벅벅이 코줄줄이 눈곱재이 | 예술경험 | 유아 | 어느 마을에 세 꼬마가 살았는데, 이름이 참 재미나. 머리벅벅이, 코줄줄이, 눈곱덕지래. 머리벅벅이는 머리를 벅벅 긁어 대고 코줄줄이는 콧물을 줄줄 달고 살고 눈곱덕지는 눈곱이 덕지덕지 붙었다고 그리 불렸지. 세 꼬마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어. 머리벅벅이는 간질간질 머리를 쉬지 않고 긁었지. 잠을 자면서도 벅벅, 마당을 쓸면서도 벅벅, 세수를 하면서도 벅벅. 비로 마당을 쓰는 건지, 머리를 긁는 건지. 세수를 하는 거니, 머리를 긁는 거니? 코줄줄이는 또 어떻고? 줄줄 흐르는 콧물을 쉬지 않고 닦았지. 책을 읽으면서도 쓱, 밥을 먹으면서도 쓱, 우물물을 길으면서도 쓱. 눈곱덕지도 만만치 않았어. 덕지덕지 낀 눈곱에 몰려드는 파리들을 쉬지 않고 쫓았어. 옷을 입으면서도 훠이, 훠이, 심부름을 하면서도 훠이, 훠이, 똥을 누면서도 훠이, 훠이. 빨리 나와라! 세 꼬마는 머리 긁고 콧물 닦고 파리 쫓느라 놀 때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어. 그래서 셋이 모이면 시끌시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이 녀석들아, 가만히 좀 있어라." "너희는 조용히 노는 법이 없냐!" 마을 사람들은 세 꼬마를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세 꼬마는 어김없이 시끌시끌 놀고 있었지. 한참 재미나게 놀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떡 한 접시를 주는 거야. 제기 한 번 차고, 벅벅! 제기 세 번 차고, 훠이, 훠이! 제기 두 번 차고, 쓱! 이거 먹으면서 앉아서 놀아라! 고맙습니다. 떡을 한 개, 두 개, 세 개 먹다 보니 어느새 떡이 한 개만 남게 되었지. "이건 누가 먹지?" 세 꼬마는 남은 떡 하나를 두고 내기를 하기로 했어. 바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세 꼬마는 가만히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지만, 하나 남은 떡이 먹고 싶어 자신들이 말한 대로 꼼짝하지 않기로 했지. 난 아무리 머리가 간지러워도 벅벅 긁지 않을 거야! 나도 아무리 콧물이 줄줄 흘러도 쓱 닦지 않을 자신 있어! 나야말로 아무리 눈곱에 파리가 들러붙어도 훠이, 훠이 쫓지 않을 테니까, 두고 봐! 그때부터 세 꼬마는 움직이지 않았어. "오늘은 어찌 이리 얌전할꼬?" 마을 사람들은 믿기지 않아 눈이 동그래졌지. 세 꼬마는 한동안 입도 뻥긋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 내가 꼭 먹고 말 거야! 콧물을 닦고 싶지만 참아야 해! 내기에서 질 수 없지! 머리벅벅이는 머리를 벅벅 긁지 못해 땀이 뻘뻘. 코줄줄이는 콧물을 쓱 닦지 못해 땀이 줄줄. 눈곱덕지는 파리를 쫓지 못해 땀이 빨빨. 머리벅벅이는 머리를 긁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코줄줄이는 콧물을 닦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고 눈곱덕지는 파리를 쫓고 싶어 쩔쩔맸어. 아, 도저히 못 참겠어! 헉! 콧물이 너무 나와. 에잇, 이 파리들이! 그때, 머리벅벅이가 꾀를 냈어. "아참, 우리 아버지가 어제 산에 갔다가 노루를 봤는데, 뿔이 요렇게 조렇게 나 있더래." 머리벅벅이는 뿔이 난 노루를 흉내 내며 시원하게 머리를 벅벅 긁었어. 뿔이 요렇게 나고! 뿔이 조렇게 나고! 코줄줄이도 이때다 싶었지. "나도 그 노루 이야기 들었어. 갑자기 사냥꾼이 나타나 그 노루한테 활을 쏘았다던데? 활을 여기저기 쏘아 댔대!" 코줄줄이는 활 쏘는 흉내 내며 마음껏 콧물을 쓱 닦았지. 활을 여기 쏘고! 활을 저기 쏘고! 그러자 눈곱덕지가 소리쳤어. "아니야, 아니야! 다 아니야! 노루 뿔이 요렇게 조렇게 난 것도, 사냥꾼이 여기저기 활을 쏜 것도 아니야!" 눈곱덕지는 아니라고 하면서 실컷 파리를 훠이, 훠이 쫓았어. 활을 쏜 것도 아니야! 뿔이 난 것도 아니야! 세 꼬마는 각자 이야기를 계속했어. 이미 내기는 까맣게 잊고 신나게 긁고, 닦고, 쫓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지. 벅벅 벅벅 쓱 쓱 훠이훠이 훠이훠이 그러다 세 꼬마는 남은 떡을 보았어. "우리 모두 내기에서 졌네." "그럼 이 떡은 누가 먹지?" "우리 나눠 먹을까?" 세 꼬마는 떡 하나를 셋으로 나누어 먹었어. 떡 조각은 너무 작아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사라졌지만, 냠냠 나누어 함께 먹으니 맛은 기막히게 더 좋았대. |
호랑이 배 속 구경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에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소금을 파는 소금 장수가 살았어. 하루는 고개를 넘으려는데 사람들이 말리는 거야. "혼자 넘다가는 큰일 나요." "사람을 잡아먹는 커다란 호랑이가 있다오." 하지만 소금 장수는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로 향했지. 소금 장수가 저벅저벅 고개를 오르는데 정말 엄청나게 큰 호랑이가 나타났지, 뭐야! 소금 장수는 너무 놀라 꼼짝할 수 없었어. 호랑이는 소금 장수를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지. 어흥. 소금 장수는 호랑이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여기 쿵 저기 쿵 부딪히더니 쭈르르 미끄러졌지. 그러다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졌어. "헉,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는데 아직 살아 있다니! 이게 꿈인가?" 소금 장수는 믿어지지 않아서 뺨을 꼬집어 보았어. "아야!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구나!" 아야! 그럼 여기가 호랑이 배 속? 소금 장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만져 보았어. 바닥은 푹신푹신하고 축축했어. 벽은 미끌미끌하고 말랑말랑했지. 소금 장수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어. 그러다 불빛이 보여 달려가니 두 사람이 있지 뭐야. "난 소금 장수인데, 당신들은 누구요?" "난 기름 장수고, 이쪽은 숯장수요. 우리는 며칠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오."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갈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가서 거기로 나갈까요?" 숯장수가 호랑이의 목구멍 쪽을 가리키며 말했어. "미끄러워서 올라가기 힘들 텐데요?" 기름 장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똥구멍으로 나가는 건 어때요?" 소금 장수의 말에 두 사람은 좋다고 했지. 목구멍으로 나갈까요? 똥구멍으로? 세 사람이 일어나 가려는데 기름 장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 "배고프시오? 마침 감자가 있는데." 소금 장수가 망태기에서 감자를 꺼냈어. "오! 숯불에 구워 먹읍시다." 숯장수가 숯불을 피워 감자를 구웠지. 세 사람은 잘 익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었어. 그런데 그때 호랑이가 몸을 비틀지, 뭐야. 숯불 때문에 배 속이 너무 뜨거웠던 거지. 그 바람에 기름통이 숯불 쪽으로 엎어져 불이 사방으로 번졌어. "위험해요. 다른 데로 피합시다!" 세 사람은 저만치 보이는 구멍으로 달려갔어. 한편 호랑이는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어. 배 속에서 불이 났으니 오죽 아프겠어. "아이고, 배야! 아이고, 뜨거워!" 호랑이는 데굴데굴 구르며 몸부림을 쳤어. 호랑이 살려! 아이고! 구멍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호랑이의 몸부림에 따라 이리저리 굴렀어. 구불구불하고 좁은 굴을 미끄럼을 타듯 끝없이 미끄러져 갔지. 그러다 똥 냄새가 지독한 넓은 굴에 이르렀어. 세 사람은 코를 막고 한참을 지나갔지. 그러자 드디어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보이는 거야. "와, 똥구멍이다! 이제 나갈 수 있어!" 세 사람이 기뻐하는 순간, 갑자기 누런 물줄기가 세 사람 쪽으로 밀려왔어. "으악, 똥물이다!" 배 속이 온통 불에 타자 호랑이가 죽으면서 물똥을 싼 거야. 그 덕분에 세 사람은 똥물에 밀려 호랑이 몸 밖으로 빠져나왔지. 쏴아! 쏴아! 퐁! 퐁! 퐁! 소금 장수는 똥물을 뒤집어쓴 채 말했어. "허허, 호랑이 배 속 구경 참 재밌네그려!" 세 사람은 서로를 보고 껄껄 웃었어. 지독한 똥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뭐 어때?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는데 살아 나왔잖아. '호랑이 배 속 구경' 이야기에는 힘겨운 일이 생겨도 웃어넘기는 소금 장수가 나와요. 소금 장수는 호랑이한테 잡아먹혀 목숨을 잃을 뻔한 무서운 일을 겪었는데도, “호랑이 배 속 구경 참 재밌네그려!”라고 웃으며 말하지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웃음은 큰 힘이 돼요. 한번 웃고 나면 괴롭거나 슬픈 일도 가볍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우리 친구들도 어려움이 생긴다면 죽을 고비를 넘긴 소금 장수의 웃음을 떠올려 보세요. 무섭고 힘든 일도 한결 가볍게 느껴질지 몰라요. '호랑이 배 속 구경'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등장인물이 대장장이, 포수, 나무꾼, 옹기장수, 엿장수, 쌀장수 등으로 바꿔서 나오기도 해요. 또 호랑이 배 속에서 나오는 방법도 호랑이 입으로 나오는 경우, 칼로 배를 가르고 나오는 경우 등 다양하답니다. |
이야기로 쫓은 도둑 | 예술경험 | 유아 | 산속 외딴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 하루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어.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은 안 오고 심심했거든. 영감, 재미난 이야기나 해 주구려. 허허, 난 아는 이야기가 없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할머니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자,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찾아 집을 나섰어. 재미난 이야기 좀 꼭 알아 와요! 어디로 가면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까? 산으로! 강으로! 아니야, 들로! 약초꾼 양반, 이 옷감을 드릴 테니 재미난 이야기 좀 들려주시오. 들려줄 이야기는 없고 약초만 있소. 낚시꾼 양반, 어디 재미난 이야기 없소? 이야기값으로 옷감을 드리겠소. 물고기는 있지만 이야기는 없소이다. 농부님들, 혹시 재미난 이야기 알고 계시오?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 옷감을 드리겠소. 농사짓기도 바쁜데 이야기는 무슨. 아는 이야기가 있어야 말이지. 저 옷감으로 어머니 옷을 지으면 좋겠는데, 생각나는 이야기가 없네. 그때 황새가 날아와 바위에 올라앉았어. 한 농부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이야기하듯 말했어. 덩그렁 올라 앉았구나!덩그렁 올라 앉았구나! 황새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걸어 다녔어. 그러자 농부는 황새를 따라 하며 말했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네!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네! 황새가 눈을 커다랗게 떴어. 개골개골 개구리를 발견했거든. 부리부리한 두 눈! 부리부리한 두 눈! 황새가 긴 부리로 개구리를 콕콕! 콕 찍어 먹었네! 콕 찍어 먹었네! 황소가 음매 울자, 황새가 놀라 후룩 날아올랐어. 화들짝 달아나네! 화들짝 달아나네! 농부가 이야기를 마치자, 할아버지가 기뻐하며 말했어. 이야기가 참 재미나구려. 이야기값 여기 있소! 얼쑤, 신난다!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네! 할아버지는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어. 할멈, 할멈! 재미난 이야기를 알아 왔소. 아이고, 영감! 어서어서 그 이야기 해 주구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방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도둑이 할아버지 집 담벼락에 훌쩍 뛰어오르는 거야. 오늘은 이 집 물건을 훔쳐야겠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어. 할머니도 얼씨구나 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따라 했지. 덩그렁 올라 앉았구나! 덩그렁 올라 앉았구나! 말소리를 들은 도둑은 주위를 살폈어. 설마 나를 봤나? 일단 부엌으로 숨자! 도둑은 마당을 조심조심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했어. 그때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계속했어.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네!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네! 앗, 내 얘기를 하고 있나? 이상하네. 도둑은 고개를 갸웃대며 부엌 안으로 들어갔어. 부엌에서는 보글보글 팥죽이 끓고 있었지. 도둑은 팥죽을 보고 눈이 둥그레졌어.우아, 내가 좋아하는 팥죽이다! 도둑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에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 부리부리한 두 눈! 도둑은 자기를 보고 하는 말 같아 주르륵 식은땀이 났어. 하지만 팥죽 맛이 궁금해 참을 수가 있어야지. 도둑이 손가락으로 팥죽을 콕 찍어 한 입 맛보는데, 음. 할아버지가 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콕 찍어 먹었네! 콕 찍어 먹었네! 도둑은 깜짝 놀랐어. 어이쿠, 정말 계속 나를 보고 있었구나! 도망가자! 도둑은 와들와들 떨면서 부리나케 부엌을 나와 쏜살같이 담벽락을 넘어 달아났지. 화들짝 달아나네! 화들짝 달아나네! 진짜 들켰네! 산속 외딴집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새도록 마냥 즐거웠어. 모두 재미난 이야기 덕분이야. 영감, 이야기가 참말 재미나요! 할멈, 내일은 더 재미난 이야기를 구해 오겠소. 깔깔깔 껄껄껄 걸음아, 날 살려라! |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옛날 한 마을에 소문난 구두쇠가 둘 있었어. 바로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였지. 둘은 누가 더 지독한지 모를 정도였어. 아껴야 잘 산다! 마을 사람들은 둘을 보고 말했어. "둘 다 지독한 구두쇠야!" "아껴도 너무 아껴!" 아껴라, 아껴! 지독해 구두쇠 어느 날 오후, 자린고비가 마루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파리가 된장 항아리에 앉았다가 날아가지 뭐야. 자린고비는 파리를 쫓아갔어. 아이고, 도둑이야! 된장 도둑! 파리가 잡힐 듯 말 듯. 자린고비는 꼬불꼬불 고갯길까지 따라가 파리를 잡았지. 그러고는 파리 다리를 쪽쪽 빨아 먹었어. 아까운 내 된장! 옆집에 사는 달랑곱재기도 파리가 간장 항아리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걸 보았어. 당연히 달랑곱재기도 파리를 쫓아갔지. 파리가 간장을 훔쳐 가네! 도둑 잡아라! 파리가 잡힐 듯 말 듯. 달랑곱재기는 동네를 빙빙 돌고 나서야 파리를 겨우 잡았어. 그러고는 파리 다리를 물에 휘휘 헹궈 그 물을 마셨어. 내 간장을 훔쳐 가게 둘 순 없지! 다음 날 아침, 자린고비네 밥상에는 밥과 간장만 달랑 놓여 있었어. 그리고 천장에는 굴비 한 마리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지. 자린고비가 굴비를 가리키며 말했어. 밥 한 숟가락 먹고 굴비 한 번 보려무나. 많이 짤 테니 여러 번 보지 말고! 보기만 하는데 뭐가 짜요, 아버지. 달랑곱재기네 아침 밥상에도 밥과 간장뿐이었어. 달랑곱재기는 굴비 그림을 벽에 떡 하니 붙이며 말했어. 밥 한 숟가락 먹고 굴비 그림 한 번 보렴. 실하게 그렸으니 맛있게 먹자! 그림의 떡이네요!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어. 점심에 고깃국을 먹자꾸나. 정말이요? 자린고비는 고기 장수를 찾아갔어. 고깃국을 끓이려 하니, 좋은 고기 좀 보여 주시오. 요걸 살까? 말까? 그만 만져요! 자린고비는 고기를 뒤적거렸어. 그러고는 집으로 뛰어가서 가마솥에 손을 씻었지. 요걸로 국을 끓이면 구수한 고깃국이 될 게다. 맙소사! 달랑곱재기는 자린고비네 고깃국 냄새를 킁킁 잘도 맡았어. 고기도 안 들어갔는데 말이야. 자린고비가 고깃국을 끓이는구나. 우리도 고깃국을 먹자. 달랑곱재기도 고기 장수를 찾아갔어. 고기를 잔뜩 넣어 고깃국을 끓이려는데, 좋은 고기로 보여 주겠소? 요게 맛있나? 조게 맛있나? 아니, 이 사람이! 달랑곱재기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고기를 주물럭거렸어. 그러고는 집으로 곧장 뛰어가 물 항아리에 손을 씻었지. 요 물이면 한 달 동안 고깃국을 끓여 먹겠구나! 말도 안 돼요!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이웃 마을에 큰 잔치가 열렸지.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는 잔치 음식을 실컷 먹을 생각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이웃 마을로 향했어. 나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네. 나는 삼 일 전부터 굶었다네. 꼬르륵 꾸르륵 이웃 마을로 가는 길에는 그늘 한 점 없었어. "아이고, 덥다. 더워!" 자린고비는 부채를 반만 펴서 팔랑팔랑 부쳤어. 이렇게 반만 펴서 부치면 부채가 덜 닳으니 좀 더 오래 쓸 수 있지! 반면 달랑곱재기는 부채를 쫙 펼쳤어. 그러더니 부채를 부치는 게 아니라 머리를 요리조리 흔들어 대지 뭐야. 요렇게 하면 부채가 전혀 닳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보군!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는 잔칫집에서 음식을 잔뜩 먹고,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픈 거야. 급하게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난 거지. 금방이라도 똥을 쌀 것 같았어. 아이고, 배야! 아이고, 내 배! 하지만 둘은 똥을 눌 생각은커녕 오히려 똥이 나오지 않게 엉덩이에 힘을 꽉 주었지. 휘청휘청 비틀비틀 앞서거니 뒤서거니 똥을 참고 뛰어가는 모습이란! 아까운 내 똥! 아무 데나 쌀 수 없어! 내 귀한 똥을 길에다 쌀 순 없지! 누구 좋으라고! 자린고비는 자기 밭에 와서 똥을 뿌직뿌직. 밭에 거름으로 주려고 똥을 참고 참았던 거야. 달랑곱재기도 마찬가지였지. 자기 밭에 가자마자 똥을 빠직빠직. 그해 가을, 마을에는 큰 걱정이 생겼어.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농사가 엉망이 되어 먹을 게 없었거든.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는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이 걱정되었어. 둘은 곰곰이 생각했지. 땅이 말라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네. 당장 먹을 게 없어서 큰일이야.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는 자신의 곳간을 활짝 열었어. 그리고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지. 나만 쌀밥 먹으면 무엇합니까? 다 같이 먹어야지요.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이럴 때 나누려고 그동안 아낀 겁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구두쇠가 쌀을 나누어 주다니! 그 후에도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는 늘 살던 대로 살았어.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면서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둘을 보고 입을 모아 말했지. "써야 할 때는 쓸 줄 아는 좋은 구두쇠야!" "지독한 줄 알았는데 훌륭한 구두쇠구먼!" 짚신과 버선이 닳지 않게 들고 가세!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
단 방귀 장수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나무꾼이 살았어. 나무꾼은 날마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하루 두끼 먹기도 힘들었지. 그래도 나무꾼은 늘 싱글벙글 누구에게나 친절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벌 한 마리가 머리 위로 윙 날아왔어. 그리고 한 바퀴 돌더니 큰 바위 옆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가는 거야. '벌이 나보고 따라오라는 건가?' 이게 웬 구덩이지? 나무꾼은 벌이 들어간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았어. 나무꾼이 머리를 더 넣어 보다가 그만 데굴데굴 떼굴떼굴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지. 나무꾼은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어.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 왔거든. 나무꾼이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 보니 달콤한 꿀이 퐁퐁 솟아나는 옹달샘이 있는 거야. "우아, 꿀 샘이네! 배고픈데 잘 됐다!" 나무꾼은 꿀을 맛있게 먹었어. 꿀꺽꿀꺽 냠냠! "아, 배부르다! 끄윽!" 나무꾼이 트림을 하는데, 트림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어. 어라? 달콤한 냄새네? 뽀옹! 갑자기 방귀도 나왔어. 세상에, 방귀 냄새마저도 달콤한 게 아니겠어? 방귀 냄새가 달콤하네? 나무꾼은 구덩이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어. 그리고 걸으면서 방귀도 뀌었지. 뽕! 뽀봉! 뽀옹! 포롱 포로롱! 삐요 삐요오! 방귀 냄새를 맡을수록 기분이 좋아졌어. 나비들도 새들도 달콤한 방귀 냄새를 따라왔지! 너희도 내 방귀 냄새가 좋구나? 실컷 맡으렴! 나무꾼이 마을로 들어서며 방귀를 뀌자 아이들이 나무꾼 뒤를 졸졸 따랐어. "킁킁, 달콤한 냄새가 나!" "기분이 좋아지는 게, 행복 방귀인가 봐!" 방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행복해하며 콧구멍을 벌름거렸어. 나무꾼은 사람들을 위해 방귀를 더 많이 뀌었지. 뿌웅! 뿡! 뿌웅! 뿡뿡! 달콤한 단 방귀가 금방 사라지자, 사람들은 아쉬워했어. "단 방귀를 사고 싶소. 병에 담아 파시오." 나무꾼은 사람들의 부탁에 단 방귀를 병에 담아 팔았어. 뿌웅! 뿡! 단 방귀 한 병! 뿌웅! 뿡뿡! 단 방귀 두 병! 사람들은 앞다퉈 단 방귀를 사 갔지. 단 방귀에 대한 소문은 원님의 귀에도 들어갔어. 원님은 나무꾼을 불렀지. "네가 신통한 방귀를 뀐다고 하던데 여기서도 한번 뀌어 보아라!" "네, 알겠습니다." 나무꾼은 원님을 향해 방귀를 뀌었어. 뿌웅 뿡! 원님은 단 방귀 냄새를 맡고 깜짝 놀랐어. "소문대로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원님은 구름에 두둥실 올라탄 듯 행복했어. "후하게 쳐줄 테니 단 방귀 열 병을 다오!" 나무꾼은 단 방귀 덕분에 부자가 되었어. 나무꾼의 소식은 욕심쟁이 방 서방 귀에도 들어갔지. 방 서방은 샘이 나서 나무꾼을 찾아가 물었어. "대체 뭘 먹고 단 방귀를 뀐 게요?" 나무꾼은 욕심 많은 방 서방을 골리고 싶었나 봐. "볶은 콩 한 바가지와 찬물 한 바가지, 고춧가루 한 바가지를 먹으면 배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방귀가 달콤해집니다." 방 서방은 나무꾼보다 더 달콤한 방귀를 뀌고 싶었어. 그래서 콩도, 찬물도, 고춧가루도 훨씬 더 많이 먹었지.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어야지." 잠시 뒤 방 서방은 배가 부글부글했어. 똥이 당장이라도 나올 것 같이 똥구멍이 실룩거렸지. "안 돼! 여기서 방귀를 뀔 수 없어!" 방 서방은 똥구멍을 솜으로 꽉 틀어막고 원님에게 달려갔어. 부글부글 쿠르릉 쿠르릉! "단 방귀 사세요! 달콤하고 향기로운 단 방귀입니다!" 원님은 단 방귀라는 말에 방 서방을 불러들였어. "너는 단 방귀 장수가 아닌데, 누구냐?" "저는 지난번 단 방귀 장수의 이웃입니다. 제 방귀도 아주아주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그것참, 기대가 되는구나! 어서 뀌어 보아라." 원님은 방 서방의 엉덩이에 코를 바짝 들이댔어. 방 서방은 똥구멍을 막은 솜을 쏙 빼고는 배에 잔뜩 힘을 주었지. 꾸르륵 꾸르륵 흐아압! 그러자 구린내와 함께 똥이 뿌지직뿌지직! 윽, 고약해! 앗, 냄새! 으윽! "으악! 퉤퉤! 나에게 똥 벼락을 퍼붓다니! 당장 저놈을 잡아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원님은 고래고래 소리쳤어. "에구,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방 서방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꽁무니가 빠질세라 도망쳤지. 방 서방은 도망치면서도 뿌지직뿌지직! 구린내 나는 방 서방의 방귀는 멈출 줄을 몰랐대. |
도깨비 감투 | 예술경험 | 유아 | 나무꾼이 깊은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나무꾼은 하룻밤 머무를 곳을 찾았지요. "옳지, 저기에서 쉬어야겠다." 나무꾼은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초가집으로 들어갔어요. "배가 고픈데 떡이나 좀 먹어 볼까?" 나무꾼이 떡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어요. 그리고 조그만 아기 도깨비가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지 뭐예요? 나무꾼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아기 도깨비는 떡을 보더니 침을 꼴깍 삼켰어요. "아저씨, 떡 좀 나눠 주세요." 나무꾼은 곧 정신을 차리고 아기 도깨비에게 떡을 건네주었지요. 떡을 맛있게 먹은 아기 도깨비가 옷 속에서 감투를 꺼내며 말했어요. "아저씨, 나랑 찾기 놀이해요. 나를 찾아 보세요!" 아기 도깨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에 감투를 썼어요. 그리고 순간 나무꾼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지요. 어, 어디로 사라졌지? 잠시 뒤 아기 도깨비가 감투를 벗고 다시 나타났어요. 나무꾼과 아기 도깨비는 감투를 가지고 밤새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지요. 어디 있는지 찾아 보세요! 다음 날 아침, 나무꾼이 일어나 보니 아기 도깨비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바닥에는 아기 도깨비와 가지고 놀았던 감투가 떨어져 있었지요. 내가 한번 써 볼까? 나무꾼은 감투를 쓰고 밖으로 나왔어요. 마침 저 앞에 농부가 낑낑 수레를 끌고 가는 게 보였지요. 나무꾼은 수레를 뒤에서 힘껏 밀어 주었어요. 나무꾼은 사방치기하는 아이들 앞에서 돌멩이를 던져 보기도 하고,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끌어 올려 보기도 했어요. 돌멩이가 저절로 날아간다! 수레가 왜 이렇게 잘 나가지? 도깨비가 장난을 치나?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어요. "부인, 여기 좀 나와 보시오!" 나무꾼의 아내는 마당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렸어요. 그런데 목소리만 들릴 뿐 나무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요. "나, 여기 있소!" 바로 그때, 나무꾼이 감투를 벗고 아내 앞에 불쑥 나타났어요. "에구머니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무꾼은 신이 나서 간밤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머리에 쓰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도깨비감투를 주웠다오. 다음 날, 나무꾼은 도깨비감투를 쓰고 시장에 갔어요. 그때 못된 심술쟁이 짚신 장수가 보였지요. '요놈, 맛 좀 봐라.' 나무꾼은 짚신 장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어요. "아야! 대체 누구야?" 짚신 장수가 펄쩍 뛰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요. 거참, 재미있네.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심술쟁이를 골려 주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이게 다 도깨비감투 덕이라오. 하하하." 그때 마침 욕심쟁이 영감이 지나가다가 나무꾼의 이야기를 엿들었어요. "도깨비감투라고? 고것 참 탐나는걸." 짚신 장수를 골려 주고 왔다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쁜 짓을 하면 안 돼요. 그러던 어느 날, 도깨비감투가 나뭇가지에 걸려 구멍이 나고 말았어요. "아이고, 이를 어째!" 나무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감투를 꿰매어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아내는 구멍 난 곳에 빨간 천을 덧대어 주며 말했지요. "장난이 점점 심해지는 거 아니에요? 이제 도깨비감투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나무꾼은 아쉬웠지만 아내의 말대로 하기로 했어요. 도깨비감투를 그만 쓰는 게 좋겠어요. 더 쓰고 싶었는데. 며칠 후 나무꾼 부부가 집을 비운 사이, 욕심쟁이 영감이 감투를 몰래 가져갔어요. 그리고 도깨비감투를 쓰고 다니며 못된 장난을 쳤지요. '내 모습이 안 보이다니, 정말 신기하군.' 욕심쟁이 영감은 장난을 칠 곳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감투에 덧댄 빨간 천이 사람들 눈에 보이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에요. 내가 한번 써 봐야겠다. 히히, 재밌다. 재밌어! 마침 강 부잣집에서 잔치가 열리고 있었어요. 욕심쟁이 영감은 잔칫집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고, 상을 엎으며 소란을 피웠지요. '좀 더 재미난 일이 없을까? 그래, 강 부잣집의 보물을 훔치자.' 욕심쟁이 영감은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갔어요. 눈에 안 보이는데 뭐 어때? 한편 사람들은 빨간 도깨비가 나타났다며 수군거리고 있었어요. 그러던 그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빨간 천이 둥둥 떠서 밖으로 나오고 있지 뭐예요? 게다가 욕심쟁이 영감이 금두꺼비를 놓치는 바람에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진 금두꺼비를 보게 되었지요. 어디서 나타났지? 앗, 금두꺼비다! 아뿔싸! 내 금두꺼비. 금두꺼비를 본 주인이 소리쳤어요. "누가 내 보물을 훔쳐 간다! 빨간 천을 잡아라!" 하인들이 빨간 천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그 바람에 감투가 훌러덩 벗겨지면서 욕심쟁이 영감의 모습이 드러났지요. "네가 바로 도둑놈이구나!"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 주세요." 욕심쟁이 영감이 싹싹 빌었지만 소용없었어요. 결국 욕심쟁이 영감은 벌로 매를 맞고 쫓겨났어요. "아이고, 내가 너무 욕심을 냈구나. 그나저나 도깨비감투는 누가 가져갔을꼬?" 이렇게 후회하며 며칠 동안 끙끙 앓아누웠답니다. |
빨간 부채 파란 부채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에 한 농부가 살았어. 하루는 장에 다녀오는데 날이 더워 땀이 줄줄 흐르는 거야. "그늘에서 땀 좀 식혀야겠다." 농부는 나무 그늘로 갔어. 그런데 그곳에 부채 두 개가 떨어져 있지 뭐야. 하나는 빨간 부채, 다른 하나는 파란 부채였지. "마침 더운데 잘됐다." 농부는 빨간 부채를 펴서 펄렁펄렁 부쳤어. 아, 시원해!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뭐야! 어, 코가 왜 이러지? 아니, 코가 길어졌잖아! 아이고, 내 코! 농부는 길어진 코를 보고 어쩔 줄 몰랐어. "호, 혹시 이 부채 때문인가?" 농부가 빨간 부채를 부치자 코가 더 길어졌어. "정말 부채 때문이잖아!" 농부는 코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코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어. 울상이 된 농부가 파란 부채를 펼쳤어. "혹시 모르니 이 부채로 부쳐 볼까?" 농부는 파란 부채를 팔랑팔랑 부쳤어. 코야, 제발 줄어라! 오, 준다 줄어! 줄어라! 계속 줄어라! 휴, 다행이다! "오호라, 이게 신통방통한 요술 부채로구나!" 농부는 부채를 들고 집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상상을 했어. 강아지 코가 쑥쑥! 고양이 코가 쑥쑥! 돼지 코가 쑥쑥! 흐흐, 상상만 해도 재밌군. 농부가 정자 앞을 지나다 자고 있는 박 영감을 보았어. 못되기로 소문난 부자 영감이었지. "이 부채로 박 영감이나 놀려 줄까?" 농부는 살금살금 다가가 빨간 부채를 부쳤어. 살랑살랑 부채 바람에 박 영감 코가 쑥쑥 길어졌지. 마을에는 곧 소문이 퍼졌어. "박 영감이 병에 걸려 코가 길어졌대요." "병을 고쳐 주는 사람한테 큰돈을 준대요." 박 영감 집에는 병을 고쳐 보겠다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어. 용하다는 의원에, 무당에, 점쟁이까지 나섰지만 소용없었지. 며칠 뒤 농부는 가짜 약을 만들어 박 영감을 찾아갔어. 그러고는 자기가 박 영감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지. 박 영감은 농부가 내민 약을 벌컥벌컥 마셨어. 자네가 나를 고칠 수 있다고? 네, 이 약을 드시면 금세 나을 겁니다. 한 번에 다 드세요. 조금 뒤 박 영감은 땀을 뻘뻘 흘렸어. 가짜 약은 고추, 마늘 같은 걸로 만들어 몹시 매웠거든. 농부가 파란 부채를 부치자, 박 영감 코가 쏙쏙 줄었지. 땀이 나니 부채를 부쳐 드릴게요. 오! 코가 줄어드네, 줄어들어! 여보게, 정말 고맙네! 농부는 박 영감에게 큰돈을 받아 부자가 되었어. 아무 걱정 없이 날마다 놀 수 있었지. 하루는 농부가 심심해서 빨간 부채를 꺼냈어. '이 부채를 계속 부치면 코가 얼마나 길어질까?' 농부는 장난삼아 빨간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어. 빨간 부채를 부칠수록 농부 코가 쑥쑥 길어졌어. 지붕을 뚫고 쑥쑥! 새 무리를 지나 쑥쑥! 구름을 뚫고 쑥쑥! 하늘 나라로 쑥쑥! 농부 코는 옥황상제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밥상을 엎고 말았어. 옥황상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 "여봐라, 저 괘씸한 것을 당장 묶어라!"신하들은 농부 코를 기둥에 꽁꽁 묶었어. 영차 영차 영차. "아이고, 숨 막혀!" 농부는 코가 묶여 숨 쉬기 힘들었어. 그래서 얼른 파란 부채를 부쳤지. 그랬더니 농부 몸이 쑥 떠오르는 거야. 지붕을 뚫고 위로! 새 무리를 지나 위로! 구름을 뚫고 위로! 하늘 높이 위로! 농부가 하늘로 올라오는 동안 농부 코에서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어. 밥상이 엎어질 때 코 속에 고춧가루가 들어갔거든. "아, 코가 맵고 간질간질해." 농부는 코를 씰룩씰룩 움직이다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어. 그 순간 콧물 때문에 미끄럽던 농부 코가 밧줄에서 쏙 빠지고 말았지. "으악!" 농부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 가지고 있던 부채도 함께 떨어졌지. 농부와 부채는 어디로 떨어졌을까? |
신기한 그림 | 예술경험 | 유아 | 옛날옛날,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살았어요.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 나무꾼은 산에서 덫에 걸린 노루를 발견했지요. "아프겠구나. 어서 멀리멀리 가거라." 나무꾼은 노루를 풀어 주었어요. 나무꾼이 집에 돌아오자, 나무꾼의 아내는 쌀 대신 마른 나물 하나를 넣고 죽을 끓였어요. '저 하얀 눈이 쌀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마당에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그때, 수염이 긴 도사가 나무꾼의 집을 찾아왔어요. "지나가던 나그네인데,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겠소?" 나무꾼과 아내는 도사에게 방금 끓인 죽을 주었어요. "차린 건 없지만 따뜻할 때 드세요." "잘 먹었소. 따뜻한 죽에 대한 감사요." 도사는 종이와 붓을 꺼내더니 닭 한 마리를 그렸어요. "나무 막대기로 이 그림을 한 번 쳐 보겠소?" 나무꾼이 막대기로 그림을 탁 치자, 그림 속 닭이 푸드덕푸드덕 날개를 퍼덕였어요. 그러고는 그림에서 쌀이 좌르르 쏟아졌지요. "그림은 하루에 한 번만 쳐야 하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도사는 나무꾼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떠났어요. 다음 날부터 나무꾼은 하루에 한 번, 닭 그림을 치고 쌀을 얻었어요. 겨우내 죽만 먹던 식구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어요. "천천히 먹으렴." 나무꾼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도사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지요. 식구들은 이제 여유롭게 밥을 먹었어요. "맛있게 먹으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어요. 나무꾼과 아내가 일하러 나간 동안 아이들은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어요. 술래인 첫째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두 동생은 숨을 곳을 찾았어요. 둘째는 벽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다 닭 그림을 발견했지요. "어? 웬 닭 그림이지?"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말했어요. 첫째와 막내가 벽장으로 달려왔어요. "닭 그림이라고?" "어디서 난 거지?" 그때 첫째가 막대기를 무심코 휘두르다 그림을 치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쌀이 쏟아져 나왔어요. 아이들은 신기해서 계속 그림을 톡톡 쳤어요. 그러자 쌀이 자꾸자꾸 쏟아져 나왔지요. "꺄르르, 쌀이 게속 나와!" "우아, 신난다!" 결국 쌀은 벽장을 넘어 방 밖까지 넘쳐 나왔어요. 한편, 마을 관아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갑자기 쌀이 왜 줄어든 것이냐!" 원님은 곳간을 보고 포졸들에게 당장 쌀 도둑을 잡아 오라고 소리쳤어요. 당장 쌀 도둑을 잡아 오너라! 포졸들은 쌀알이 곳간에서부터 조르르 어디론가 이어져 있는 걸 발견했어요. "이 쌀알을 따라가면 쌀 도둑을 잡을 수 있겠군!" 쌀알을 따라간 포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나무꾼의 집이었지요. 쌀은 집 마당까지 흘러나와 있었어요. "곳간의 쌀이 다 여기 있었군!" 마침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과 아내를 보고 포졸들이 소리쳤어요. "이 자들이 쌀 도둑이다!" "쌀 도둑을 잡아라!" 포졸들은 나무꾼과 아내를 원님에게 데려갔어요. "이놈들! 너희가 관아의 곳간에서 쌀을 훔쳤느냐!" 화가 난 원님이 큰 벌을 내리려는데, 그때 갑자기 도사가 나타나 말했어요. "두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그려 준 그림 속 닭이 이들에게 쌀을 가져다 준 것뿐입니다." 물론 원님은 도사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제가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그러면 저의 말을 믿으실 겁니다." 원님은 도사에게 한 번 그려 보라고 했어요. 도사는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넘실대는 강물과 가파른 벼랑을 그리고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돛단배도 그렸지요. 도사는 그림을 다 그리고 원님에게 물었어요. "배에 타 보시겠습니까?" 원님은 기가 막혔어요. "그림 속에 있는 배에 어떻게 타느냐!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그럼 제가 타 보지요." 도사는 정말로 그림 속으로 쑥 들어가 배에 탔어요. 도사가 그림 속으로 사라지자 원님이 소리쳤어요. "무엇 하느냐! 저놈을 잡아라, 당장!" 포졸들은 도사를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어요. 허둥지둥 도사가 사라진 그림 주위만 맴돌았지요. |
세종대왕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임금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이끌다. 태종은 충녕 대군이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말했어요. "충녕! 잠시 책을 멀리하라 그리 일렀거늘, 또 책을 읽는구나.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좋으나 혹시라도 건강을 잃을까 염려스럽다." "아바마마, 걱정 마시옵소서. 책을 읽는 것은 소자의 큰 즐거움이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런데 한 번 읽은 책을 여러 번 다시 읽는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이 있느냐?" "예. 훌륭한 분들의 책을 어찌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있겠사옵니까? 깊은 뜻을 이해할 때까지 읽으려 하옵니다." 태종은 충녕 대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어요. '셋째 아들인 충녕이 글공부에 가장 열심이구나. 또한 마음이 너그럽고 도타워 따르는 사람도 많고.' 태종은 임금의 자리를 누구에게 물려줄지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세자로는 첫째 아들인 양녕 대군을 정했지만, 양녕 대군은 놀기를 좋아해서 늘 말썽만 피웠지요. 둘째 아들인 효령 대군은 몸이 약했어요. 태종은 신하들과 이야기한 끝에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충녕 대군을 세자로 다시 정했어요. 이리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바로 세종 대왕이랍니다. '훌륭한 임금이 되어 나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한 형님들께 보답해야겠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더 많이 공부하고, 덕을 쌓아야지.' 세종 대왕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첫날, 이렇게 다짐했어요. '나라를 잘 이끌려면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필요해. 하루빨리 인재를 모으자.' 세종 대왕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인 집현전을 더욱 크게 늘렸어요. 그리고 집현전에 자주 나가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나랏일을 이야기했지요. 또 세종 대왕은 좋은 책이 있으면 부지런히 읽고, 집현전 학자들도 읽게 했어요. '학문이란 참으로 넓고 깊구나!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어.' 세종 대왕은 임금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책을 많이 읽었답니다. 어느 늦은 밤, 세종 대왕은 내관을 불러 집현전 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어요. "전하, 신숙주라는 선비가 책을 읽고 있사옵니다." "오, 그렇소? 내관은 지키고 섰다가 신숙주가 잠들면 짐에게 알려 주시오." 세종 대왕은 흐뭇했어요.하루 내내 나랏일에 지친 피로도 모두 가시는 듯했지요. '내 정성이 헛되지 않았구나. 집현전 학자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 보람이 있었어. 다른 학자들도 모두 신숙주와 같겠지.' 희뿌옇게 동이 틀 때쯤 내관이 와서 알렸어요. "전하, 이제야 신숙주가 촛불을 껐사옵니다." 세종 대왕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관에게 주며 말했어요. "추울 텐데 잠든 신숙주에게 덮어 주어라." 잠에서 깬 신숙주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건 전하의 옷인데. 내가 잠든 틈에 전하께서 다녀가셨구나!" 신숙주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이렇게 우리를 아끼시다니!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높은 은혜에 보답하리라." 다른 집현전 학자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답니다. 인재라면 누구든지 불러들이다. "짐은 귀양 가 있는 황희를 다시 부를까 하오." 신하들은 세종 대왕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황희는 전하를 세자로 정할 때 앞장서서 반대했습니다. 벌써 잊으셨사옵니까?" "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렇지만 황희는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여서 결정했으니 내 뜻을 따라 주시오." 신하들은 나라를 위해 힘든 결정을 한 세종 대왕 앞에서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어요. "또한, 양반이든 천민이든 재능이 있는 사람은 모두 불러들이시오.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오. 짐은 앞으로 도천법을 실시하겠소." 도천법은 능력이 있는 젊은이라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나라에서 뽑아 쓰는 제도였어요. '내 나이 벌써 서른이니,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도 8년이나 지났구나. 백성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세종 대왕은 백성을 위한 길을 늘 생각했지요. 하루는 동래 현감이 세종 대왕에게 장영실이라는 젊은이를 보냈어요. 장영실은 동래현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도천법에 따라 뽑혀 온 거예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나 무엇이든 잘 만들었거든요. "네가 발명을 잘한다는 장영실이냐?"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 대왕은 장영실을 반갑게 맞았어요. "짐이 너를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줄 터이니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솜씨를 펼쳐 보아라.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중국에 많이 기대어 왔다. 그래도 하늘을 관측하는 일만은 신라 시대부터 우리 힘으로 해 왔는데, 지금은 첨성대만 달랑 남아 있구나. 너를 중국에 보내 줄 테니 새로운 기술을 많이 배워 오도록 하라." 장영실은 종의 신분도 벗고, 좋아하는 일까지 마음껏 할 수 있어서 한없이 기뻤어요. 게다가 장영실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 대왕은 상의원별좌라는 벼슬까지 내렸지요. '보잘것없는 저에게 벼슬까지 내리시다니.' 장영실은 세종 대왕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밤낮 연구에 매달렸어요. 먼저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 만드는 일부터 계획했지요. 하늘을 관측해야 농사에 꼭 필요한 달력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전하, 밤도 깊었는데 또 어디를 그리 가시옵니까?" "학자들이 밤늦도록 일하는데, 어찌 짐만 편히 자겠소?" 그때, 세종 대왕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어요. 바로 장영실이었지요. "아니, 장 별좌가 아니오! 이 밤에 왜 그리 하늘을 보고 있소?" "중국에서 보던 별자리와 우리나라에서 보는 별자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별자리가 다르다?" "그렇사옵니다. 별자리는 계절에 따라 다른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보는 별자리가 다르옵니다." "그러면 중국과 우리나라의 계절이 차이가 있다는 것 아니오?" "예. 그러니 우리나라에 맞는 천문 관측이 필요하옵니다." "그렇다면 장 별좌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맞는 천문 관측 기계를 만들어 보오." 장영실은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를 세우고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해서 적었어요. 그리고 ‘혼천의’라는 천문 시계를 만들었지요. 장영실은 물시계 '자격루'와 해시계 '앙부일구'도 만들었어요. 세종 대왕은 시간을 몰라 답답해하던 백성을 위해 앙부일구를 종로 거리에 두게 했지요. 백성들은 앙부일구를 보며 즐거워했답니다. 세종 대왕의 관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어요. "농사를 잘 지으려면 비가 언제 얼마만큼 오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소?" "예. 전하, 힘써 지은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빗물의 양을 잴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옵니다." 이렇게 해서 장영실은 측우기도 만들었어요. 농민들은 계획을 세워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아했지요. 우리 음악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바로잡다. 세종 대왕은 과학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대가 음악의 천재라는 박연이오?"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들었소. 그동안 우리는 모든 음악을 중국 악기로 연주했소. 이제 우리 악기로 연주하고 싶구려." 박연은 우리 음률에 맞는 악기 재료인 경돌을 구하려고 온 나라를 돌아다녔어요. 우리 것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박연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지요. 마침내 박연은 마음에 드는 경돌을 찾아서 '편경'이라는 악기를 만들었답니다. 세종 대왕은 눈을 지그시 감고, 편경 소리를 들었어요. "중국 것보다 소리가 훨씬 아름답소. 정말 수고 많았소." 박연은 용기를 얻어 더 많은 악기를 만들고, 악보도 정리했답니다. 세종 대왕은 우리 역사에도 관심이 깊었어요. 그래서 정인지, 김종서 등에게 고려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했지요. 학자들이 여러 해 동안 매달린 끝에 (고려사)를 펴냈어요. 세종 대왕은 우리 활자로 엮어진 책을 읽으며 감격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종 대왕의 얼굴이 굳어졌어요. "이 책에는 조선 편에 서서 전 왕조인 고려를 잘못 말하는 부분이 있소. 역사란 있는 그대로 똑바로 기록해야 하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을 모르시오?" 혼쭐이 나긴 했지만, 학자들은 세종 대왕의 참뜻을 깨닫고 입을 모아 말했어요.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역사를 기록하라 하시니, 전하는 참으로 올바르시다!" 수많은 외적을 물리치다. 이 무렵, 북쪽에서 끊임없이 여진족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혔어요. 세종 대왕은 김종서 장군과 최윤덕 장군을 불렀지요. "내 그동안 여진족을 달래려고 했으나, 또 쳐들어왔소. 이참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 땅을 되찾으면 어떻겠소?" 호랑이 장군이라 불리는 김종서 장군이 아뢰었어요. "전하, 이번 기회에 우리 땅을 꼭 되찾아야 하옵니다." 최윤덕 장군도 거들고 나섰지요. "맞사옵니다. 조상이 물려준 땅을 여진족에게 줄 수는 없사옵니다." "씩씩한 그대들이 참 믿음직스럽소. 두만강은 김 장군이 맡고, 압록강은 최 장군이 맡아 주시오." 두 장군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말을 달렸어요. 여진족은 두 장군의 씩씩함에 놀랐지요. 하지만 여진족은 오랫동안 계속 쳐들어왔어요. 그래서 세종 대왕은 북쪽에 4군 6진을 세워 여진족을 잘 막았지요. 마침내 여진족이 항복을 했어요. 세종 대왕은 두만강 남쪽 땅이 모두 조선 땅이라며 크게 기뻐했답니다. 한편, 남쪽에서는 왜구가 날이 갈수록 사납게 굴었어요. 세종 대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했어요. "짐은 왜구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이 딱해서 더 이상은 못 보겠소. 이종무 장군이 앞장서 왜구를 무찔러 주시오." 이종무 장군은 배 200여 척과 2만 명에 이르는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로 쳐들어갔어요. 이종무 장군은 씩씩하게 싸워 이겼지요. 세종 대왕은 대마도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종무 장군과 군사들에게 큰 상을 베풀었어요. 또 세종 대왕은 왜구에게까지 너그러움을 베풀었어요. "앞으로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다고 왜구에게 일러라. 그리고 왜구가 부산포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하라." "전하, 못된 짓만 일삼던 왜구에게 왜 그리 너그러우시옵니까?" "땅을 빼앗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일도 어려운 법이오. 이쯤에서 너그럽게 해야 왜구가 다시 쳐들어올 마음을 먹지 못할 것 아니오!" 백성을 위해 우리글을 만들다. 나라도 평화로워졌지만 세종 대왕은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어요. '백성들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으니 참으로 안타깝도다!' 세종 대왕은 집현전에 나가 학자들에게 말했어요. "짐은 중국 글자인 한자를 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소. 한자는 공부를 오래 한 선비도 깨우치기 어려운데, 백성은 어떻겠소. 그래서 짐은 쉬운 우리글을 만들려고, 혼자 연구해 왔소." "전하, 우리글을 새로 만드신다니요?" "쉬운 우리글을 만들자는 것이오. 우리나라가 언제까지 남의 나라 글자를 빌려 써야 한단 말이오!" "전하, 새 글자를 만들어서 중국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옵니다." 세종 대왕은 자신의 깊은 뜻을 몰라주는 신하들에게 실망했어요. 그러나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지요. "그대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오? 새로운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이거늘. 모두 다른 일은 접어 두고,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에 힘을 써 주시오." 신하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 대왕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이리하여 세종 대왕은 우리글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세종 대왕이 왕자에게 물었어요. "새 울음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 뜻밖의 질문에 왕자는 새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지요. "꾀꼴꾀꼴, 뻐꾹뻐꾹, 짹짹, 구구." "그렇지. 그럼 그 새소리를 글로 써 보겠느냐?" "아바마마, 한자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라 소리를 적을 수 없사옵니다." "바로 그것이다. 소리를 적을 수 있는 글자! 중국과 우리는 글자를 똑같이 쓰지만 말은 서로 다르니, 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어야겠구나." 그때부터 세종 대왕은 글자의 모양을 연구하느라 꼬박 밤을 새웠어요. 그래서 눈뿐 아니라 몸이 많이 약해졌지요. 그러나 우리글을 하루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볼 새도 없었답니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어요. "아래아, ㅡ, ㅣ, ㅣ아래아(ㅏ), 아래아ㅣ(ㅓ), 아래아ㅡ(ㅗ), ㅡ아래아(ㅜ). 됐소! 어머니 노릇을 하는 모음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아들 노릇을 하는 자음을 만들어야겠소. 소리를 연구하려면 입의 모양뿐 아니라 입술도 잘 살펴야 하오. 그렇지! 바로 그것이라오." 세종 대왕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누구라도 거뜬히 익힐 수 있는 우리글이 만들어졌소!" 곁에 있던 정인지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전하, 이제 우리 글자로 새소리, 바람 소리 모두 쓸 수 있사옵니다." "그렇소. 글자가 쉬워서 백성이 금방 배울 수 있을 것이오." 세종 대왕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우리글 스물여덟 자가 만들어졌지요. 1446년 10월 9일,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인 글자를 온 나라에 알려서 쓰도록 했어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요.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훈민정음 머리말에 이렇게 썼답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가지고는 서로 뜻을 통할 수가 없다. 백성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우리말을 적는 글이 없어서 그 뜻을 나타내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세종대왕은훈민정음을만드는데그치지않고, 널리퍼뜨리는데도앞장섰어요. 훈민정음은 이제 '한글'로 불리며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지요. 훈민정음은 뛰어난 글자로 널리 알려져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올라 있답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어요. 그 꿈을 이루려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과학, 문화,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지요. 그리하여 세종 대왕은 우리 민족 문화를 꽃피운 임금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답니다. |
우장춘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한 할아버지가 커다란 밀짚모자에 고무신 차림으로 수박 밭을 오갔어요.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 것도 잊고 요리조리 수박을 살폈지요. "허허, 어디 보자. 오늘은 또 얼마나 컸니?" 아이코, 할아버지는 둥글둥글한 수박을 통통 두드리며 말까지 걸었어요. 바로 이 분이 '고무신 박사님, 씨앗 할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 할아버지랍니다. 우장춘 할아버지는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씨앗을 연구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쌀밥과 김치, 온갖 채소와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요. 우장춘 할아버지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모진 차별로 가슴을 앓았지만 곧 다시 일어섰어요. 아무리 밟혀도 다시 피는 민들레처럼 말이에요. 수없이 흘린 우장춘 할아버지의 땀방울은 눈물방울이었을지 몰라요. 아무도 모르게 흘린 눈물방울이 희망의 씨앗이 되고, 미래를 수놓는 아름다운 꽃이 되었답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한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우리나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지요. 우장춘은 일본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성인 '우'를 버리지 않았어요. 그러자 일본 사람들은 우장춘이 우리나라 사람인 것을 알고 얕보거나 차별했어요. 우장춘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어요. "야, 센진노꼬! 센진노꼬!" 같은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장춘을 에워쌌어요. "센진노꼬! 시험 좀 잘 쳤다고 선생님께 칭찬받았지?" "쳇, 센진노꼬 주제에 공부를 잘해서 뭐 해? 안 그래?" 아이들은 우장춘을 보기만 하면 '센진노꼬!'라고 놀렸어요. 하지만 우장춘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갔지요. 갑자기 한 아이가 우장춘의 발을 탁 걸었어요. 바닥에 쓰러진 우장춘은 눈물이 핑 돌았지요. 하지만 꾹 참고 얼른 일어섰답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지는 거야. 참고 다시 일어서야지.' 이날도 우장춘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어요. "엄마!" 우장춘은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길에서 만났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혼자 살림을 꾸려 왔지요. 우장춘은 어머니 품에 안겼어요. 어머니는 우장춘의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보았어요. 어머니는 알 수 있었지요. 조선 사람이라고 놀림받는 아들의 슬픔을 말이에요. 어머니는 길 한구석에 핀 민들레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이 민들레 좀 봐. 참 예쁘지?" 우장춘은 작고 샛노란 민들레를 보았어요. "민들레는 봄이 오면 여기저기 핀단다. 이 조그만 민들레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 길을 가던 사람들이 아무리 밟아도 봄이 되면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지. 어디 꽃 뿐이니? 수많은 꽃씨를 세상 곳곳에 퍼트려 생명을 전한단다." "엄마는 네가 민들레처럼 살았으면 해. 사람들이 너를 조선사람이라고 놀려도 부끄러워할 필요없어.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그래, 나는 조선 사람이다!'라고 말하렴. 알겠지?" "네!" 우장춘은 씩씩하게 대답한 뒤, 속으로 생각했어요. '아무리 밟혀도 다시 꽃을 피우는 민들레. 수많은 생명을 세상에 전하는 민들레. 나도 민들레처럼 살아야지!' 씨앗을 연구하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어요. 일본 사람은 만세를 부르며 즐거워했지만, 우장춘은 마음이 아팠지요. '우리나라는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까? 우리나라는 이제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는 비록 멀리 있지만, 우장춘에게 가장 소중한 조국이었어요. 어느새 자란 우장춘은 도쿄 제국대학 농학실과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늘 논밭에 나가 농업을 배웠어요. 하루 내내 흙을 파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몸이 약한 우장춘은 무척 힘이 들었어요. '그냥 그만둘까? 아니야.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우장춘은 다시 힘을 내어 하루 내내 밭에서 일했답니다. 우장춘은 대학을 마친 뒤, 농림성에 있는 농사 시험장에서 일했어요. 우장춘은 일하는 틈틈이 나팔꽃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했지요. '야호! 내 첫 논문이 잡지에 실렸다!' 우장춘은 들뜬 가슴을 안고 더욱 열심히 연구했어요. 1923년, 큰 지진이 일어나 일본 간토 지방이 쑥대밭이 되었어요. 사람이 많이 죽거나 다치고, 집과 도로가 폭삭 주저앉았지요. 게다가 큰불까지 났어요. 동네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시커먼 연기가 가득했지요. 이윽고 무서운 소문이 돌았어요. "조선 사람이 지진을 틈타 불을 질렀대." "우리한테 복수한 거야. 우리가 자기 나라를 빼앗았다고 말이야." 몇몇 일본 사람이 지진으로 일어난 불을 우리나라 사람 탓으로 돌렸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마을을 공격했지요. 다행히 우리나라 사람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소문은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뒤였지요. '아,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살기는 너무 힘들구나.' 우장춘은 무척 안타까웠어요. 우장춘은 식량을 많이 거두려고 벼와 보리 등을 연구했어요. 그리고 나팔꽃과 피튜니아도 연구했지요. 서양 사람은 피튜니아 겹꽃을 참 좋아했어요. 우장춘은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 씨앗을 만들려고 연구했어요. '아무도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 씨앗을 만들지 못했어. 내가 꼭 만들어야지.' 마침내 우장춘은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 씨앗을 만드는데 성공했어요.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성공이야! 내가 해냈어!" 이 소식은 세계 곳곳으로 퍼졌어요. 서양 사람은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를 많이 사들였답니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다. 우장춘은 나팔꽃의 유전과 잡종 연구를 계속했어요. 나팔꽃 씨앗을 심어놓고 날마다 들여다보았지요. '나팔꽃은 잘 자라니까 잡종을 만들기에 좋아. 종류가 다른 나팔꽃 씨앗을 서로 섞으니 빛깔과 잎, 줄기가 다른 꽃이 나왔어. 왜 그럴까?' 우장춘은 나팔꽃을 연구하며 열심히 박사 학위 논문을 썼어요. 드디어 오랫동안 노력한 연구가 열매를 맺었어요. 우장춘은 논문을 끝내는 순간, 눈시울을 붉혔지요. '이제는 일본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을 얕보지 못할 거야!' 그런데 그만, 시험장에 불이 나 논문이 다 타 버렸어요. "아, 내 논문! 몇 년 동안 고생해 겨우 끝냈는데, 한순간에 재가 되다니!" 우장춘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답니다. 다시 봄이 왔어요. 어느 날, 힘이 없던 우장춘은 민들레를 보았어요. 봄이 오자 민들레는 다시 샛노란 꽃을 피웠지요. 우장춘은 '민들레처럼 살자!'고 다짐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어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 다시 힘을 내자!' 우장춘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새로운 그루갈이 씨앗을 만들려고 했답니다. '그루갈이에는 무나 배추 같은 채소가 좋아. 서양 품종과 일본 품종에는 각각 장점과 단점이있어. 두 품종을 섞은 첫 번째 잡종을 만들자. 첫 번째 잡종에 다시 서양 품종을 섞은 뒤, 수정이 되는 두 번째 잡종을 만들어야 해. 잡종은 수정이 안 되지만, 나는 수정이 되는 잡종을 만들 거야.' 우장춘은 자그마치 4년을 연구한 끝에 성공했어요. 열매도 많고, 빨리 자라는 채소 씨앗을 만든 거예요. 우장춘은 이 씨앗을 '농림 1호'라고 불렀어요. 우장춘은 농림 1호를 바탕으로 새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사람들은 이 논문을 종의 합성이라고불렀어요. 종의 합성으로 우장춘은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답니다. 조국을 위해 힘을 다하다. 어느 날, 우장춘은 가슴 아픈 사실을 알았어요.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저버리고 일본에 왔다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목숨을 빼앗겼다는 사실이었지요. 우장춘은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 지금까지 저는 누구보다 떳떳하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본에서는 센진노꼬라고 손가락질받고, 우리나라에서는 배신자의 아들이라고 떳떳하지 못하고.' 우장춘은 뜨거운 눈물만 삼켰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꿈에 그리던 독립을 했어요. 그해 우장춘은 우리나라에서 온 편지를 읽었어요. 조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부탁이 쓰여 있었지요. 우장춘은 곧 답장을 썼어요. '네. 조국을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1950년 3월, 우장춘은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어요. 학교 운동장에서 환영식이 열렸는데, 사람이 많이 모였어요. 우장춘은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요. "저를 불러 주신 조국과 동포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머니 나라에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버지 나라를 위해 일하고, 조국에 뼈를 묻겠습니다!" 우장춘이 말을 끝내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박수를 쳤어요. 부산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문을 열었어요. 우장춘이 소장을 맡았지요. 우장춘이 연구를 시작할 무렵,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직원들은 전쟁이 걱정되어 일을 멈추었어요. "자, 밭으로 나가세. 전쟁이 났다고 연구를 멈출 수 있나. 우리가 빨리 씨앗을 만들어야 온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네." 우장춘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밭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뒤따르는 직원들에게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하루빨리 좋은 배추와 무의 씨앗을 만들어야 하네. 우리 품종과 외국 품종을 비교해 보고 실험해야지. 그래서 좋은 품종이 나오면 교배해서 좋은 씨앗을 만들어야 해. 우리는 거기서 끝내지 않을 걸세. 더 좋은 씨앗을 만들도록 연구를 해야지. 그러면 8년은 걸릴 거야." 우장춘은 늘 밭에 쭈그리고 앉아 식물을 살폈어요. 흙 묻은 작업복에 밀짚 모자, 고무신 차림으로 밭두렁을 오가는 박사님! 사람들은 우장춘을 '고무신 박사님' 또는 '씨앗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눈물 한 방울이 샘을 이루어. 1953년, 드디어 6 25 전쟁이 끝났어요. 전쟁이 끝나자, 굶는 사람이 늘었어요. 우장춘은 더 열심히 우리나라 배추와 무의 씨앗을 연구했지요. 그때 일본에서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이 왔어요. 우장춘은 서둘렀지만 일본으로 가지 못했어요. 나라에서 우장춘이 일본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요. 며칠 뒤 우장춘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 어머니! 내내 고생하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슬픔을 다스리던 우장춘은 목 놓아 울음을 터트렸어요. 우장춘은 원예 시험장 강당에서 어머니를 기리는 제사를 올렸지요. 사람들은 우장춘을 도우려고 돈을 모아 주었어요. 우장춘은 그 돈을 직원들에게 주며 말했지요. "시험장에 물이 모자라니 이 돈으로 우물을 파세. 우물 이름은 '자유천'이라고 지었으면 하네. 따뜻한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이지." 우장춘은 아침마다 자유천에서 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주위를 청소했어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정성껏 말이에요. 드디어 우장춘은 우리나라 배추와 무의 씨앗을 만들었어요. "이제 배추와 무의 씨앗을 다른 나라에서 사지 않아도 된다네!" "와, 만세!" 우장춘과 직원들은 씨앗을 보며 기뻐했어요. "모두 수고했네. 전쟁 전에 시작한 연구가 이제 끝났어. 이제 채소와 과일뿐 아니라 새로운 볍씨도 만드세." 어느날, 정부에서 사람이 와 우장춘에게 농림 장관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우장춘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지요. "나는 연구소가 좋아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입니다." 그제야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어요. 사실 직원들은 우장춘이 연구소를 떠난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지요. 왜냐고요? 모두 우장춘을 존경했기에 멀리 보내기 싫었거든요. 배추와 무의 씨앗을 만들기 전에, 우장춘은 제주도에 귤나무 기르는 법을 전했어요. 이때, 귤은 참 귀한 과일이었지요. 제주도 사람들은 귤나무를 많이 기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어요. 우장춘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제주도 날씨는 귤나무를 기르기에 알맞습니다. 우선 맛 좋은 귤나무를 심어 보세요.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부니까 울타리를 꼭 쳐야 해요." 제주도 사람들은 우장춘의 말대로 귤나무를 길렀어요. 제주도에는 차츰 귤나무가 늘었지요. '밥 대신 먹으려면 감자가 많아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 씨감자는 병에 잘 걸려서 조금만 열려. 병에 안 걸리는 씨감자를 만들어야겠어.' 우장춘은 강원도 대관령에서 새로운 씨감자를 길렀어요. 그리고 병이 안 드는 씨감자를 거두는 데 성공했지요. '됐다!곧 우리 손으로 우리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씨앗 속에 우주가 있단다. 사람들은 구경도 하고, 우장춘도 만나려고 시험장을 찾아왔어요. 시험장은 늘 사람으로 넘쳤지요. 한 직원이 사람이 많다고 투덜대자, 우장춘이 타일렀어요.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야 하네. 사람들이 여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우리 농업이 빨리 발전하지 않겠나." 우장춘이 아이들과 시험장을 둘러볼 때였어요. "얘들아! 주위를 한번 둘러보렴. 생물이 뭐가 있는지 말해 보겠니?" 우장춘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아이들이 대답했어요. "저기 날아가는 까치요!" "여기 땅에 기어가는 벌레요!" "밭두렁에 폴짝폴짝 뛰는 메뚜기도 있어요!" 우장춘은 밭에서 굵은 무를 쑥 뽑으며 말했어요. "까치도, 벌레도, 메뚜기도 다 맞아. 그런데 모두 동물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여기 보렴. 이 무도 생명이 있단다. 이름 없는 풀들도 다 숨 쉬는 생물이지. 한 알의 씨앗이 쑥쑥 자라 이렇게 크는 거야." "와, 신기하다! 무가 숨을 쉬다니!" "정말! 조그만 씨앗이 이렇게 큰 무가 되다니!"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리조리 무를 살폈어요. 우장춘은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어요. "이 작은 씨앗이 싹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 열매는 다시 땅에 떨어져 씨앗이 된단다. 꼭 우리 사람과 비슷하지? 우리도 아이로 태어나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잖아. 씨앗도, 우리도 돌고 도는 생명이야. 그러니 씨앗 하나라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단다.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 이 세상에서 싸움이 없어질 거야. 어때?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있지?" “예!” 아이들의 밝은 대답이 민들레 씨앗처럼 멀리 퍼졌어요. 우장춘은 문득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어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 말씀대로 민들레처럼 굳세게 살았어요. 제가 만든 씨앗들이 조국의 땅과 아이들의 미래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겠지요?' 우장춘은 따스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답니다. 우장춘은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는 시험장을 소중하게 돌보았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낮에는 밭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지요. 그러다 그만 몸이 아파 쓰러지고 말았어요. 우장춘은 큰 수술을 하면서도 실험하는 벼가 잘 자라는지 걱정했어요. 직원들은 우장춘의 걱정을 덜어 주려고 병실에 벼를 가져왔지요. "음, 잘 자라고 있군. 정말 다행이야." 벼를 본 뒤에야 우장춘은 마음을 놓았답니다. 하루는 농림부 장관이 병실에 찾아왔어요. 우장춘에게 최고 훈장인 문화 포장을 주었지요. 우장춘은 떨리는 손으로 훈장을 어루만지며 울먹였어요. "조국이 나를 인정해 주었어!" 어느 새벽, 우장춘은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우장춘은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났지요. 자신이 가꾼 꽃으로 꾸민 상여였어요. 사람들은 우장춘의 업적을 떠올리며 말했답니다. "우장춘 박사님은 흙 속에서 잠시 주무시는 거야. 꼭 씨앗처럼 말이야. 박사님의 꿈은 새싹과 꽃으로 피어나 우리나라의 앞날을 환히 비춰줄 거야!" |
뉴턴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과!’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무시무시한 독이 들어서 백설 공주가 먹자 마자 쓰러졌던 사과? 아니면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놓고 화살을 쏘았던 사과?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 ‘뉴턴의 사과’를 떠올릴 거예요. 뉴턴은 나무에서 툭 떨어지는 사과 한 알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만유인력의 법칙은 과학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지요. 뉴턴은 운이 좋아서, 아니면 머리가 무척 뛰어나서 사과 한 알로 위대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머리도 좋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뉴턴의 비밀은 호기심과 끈기랍니다. 뉴턴은 늘 아이처럼 순진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왜일까? 왜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그리고 늘 생각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여러분도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꾸준히 생각해 보세요. 뉴턴이 찾은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진리’라는 조가비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영국에는 봄이 늦게 찾아와요. 아직 이른 봄이라 바람이 차가운 어느 날이었어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줄을 지어 걸어갔어요. 맨 앞에는 커다란 십자가를 든 신부와 관을 든 사람들이 있었지요. 이윽고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다다랐어요. 영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이곳에서 사람들은 눈을 감고 기도했지요. “누구의 장례식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거지요?” 한 외국 사람이 묻자, 옆 사람이 속삭였어요. “위대한 과학자 뉴턴 선생님의 장례식이랍니다.” 사과 한 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 영국 사람은 모두 천재 과학자를 사랑하고 존경했답니다. 나는 어린이 발명가. 뉴턴은 1642년 영국 링컨셔의 작은 마을 울스소프에서 태어났어요. 마을 사람들이 갓 태어난 뉴턴을 보러 집에 왔어요. 어머니는 방긋 웃으며 뉴턴을 다독다독 잠재우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새근새근 잠든 뉴턴을 보며 소곤거렸어요. “이런, 아기가 너무 작고 가냘프네요.” “걱정 마세요. 지금은 약하지만 곧 튼튼해질 거예요.” 어머니가 말한 대로 뉴턴은 차츰 건강을 되찾았답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홀로 뉴턴을 키우다가 다시 결혼했어요. 그래서 다정한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뉴턴을 돌보았지요. 어느 날, 뉴턴은 창고에서 나무 상자를 하나 찾아냈어요. 상자 안에는 망치와 톱 같은 연장이 있었지요. 뉴턴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하나 살펴보았어요. '우아, 이 연장만 있으면 나도 뭔가 만들 수 있겠다!' 이날부터 뉴턴은 쓱싹쓱싹 톱질하고, 탕탕 못질하며 여러 가지를 만들었어요. "얘야, 하루 종일 무엇을 만드니?" 외할머니가 창고로 와 뉴턴에게 물었어요. "할머니, 잠깐만 눈을 감고 계세요. 하나, 둘, 셋! 하면 눈을 뜨시는 거예요. 자, 준비되셨지요? 하나, 둘, 셋!" 슬그머니 눈을 뜬 외할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작지만 튼튼하고 아기자기한 배가 눈앞에 있지 뭐예요. "이 배를 정말 네가 만들었니?" "그럼요!" "정말 잘 만들었구나! 참 똑똑하기도 하지."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뉴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사실 학교에서 뉴턴은 부끄러움이 많아 늘 주눅이 들어 있었어요. 하지만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외할머니의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감이 쑥쑥 자랐답니다. 뉴턴은 외할머니를 도우려고 닭에게 물을 주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날마다 여러 번 물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 귀찮았어요. 알아서 닭에게 물을 주는 기계를 만들어야겠어. 뉴턴은 나무 양동이 바닥에 조그만 구멍을 내서 물그릇 위에 달았어요. 그리고 양동이에 물을 가득 부었지요. 그러자 양동이 바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물그릇에 찼어요. 닭은 맛있게 물을 먹었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닭장 바닥이 축축했어요. 밤에는 닭이 물을 먹지 않아 그릇에서 물이 넘친 거예요. '앗! 좋은 생각이 났다!' 뉴턴은 아침에 양동이를 가득 채웠던 물이 저녁 때 바닥난 것을 보고, 물시계를 만들었답니다. '먼저 아침과 점심, 저녁 때 시간에 따라 양동이에 물이 얼마나 있는지 눈금을 긋자. 그런 다음, 눈금과 눈금 사이에 다시 똑같은 간격으로 눈금을 긋는 거야. 눈금이 시간을 가리키는 거지. 그럼 시간이 궁금할 때마다 양동이에 남은 물과 눈금을 보고 대충 시간을 알 수 있어. 야호! 내가 양동이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뉴턴은 학교 문을 지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학교 문 기둥 그림자가 시간마다 방향과 길이가 달라져.’ 이런 사실을 이용해 뉴턴은 해시계를 만들었답니다. 뉴턴은 수업 시간에 해시계를 만든 경험을 발표했어요. 뉴턴이 수줍어하며 더듬더듬 말하자, 친구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뉴턴을 칭찬하며 집에 있는 해시계를 보여 달라고 했지요. 뉴턴은 선생님과 함께 집에 가서 해시계를 보여 주었어요. 선생님은 요모조모 해시계를 살펴보며 크게 놀랐어요. "참 잘 만들었구나. 너에게 이런 재능이 있다니!" "수업 시간에 다른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걱정을 덜었다. 너는 꼭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이 칭찬하자, 뉴턴은 기뻐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나도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어. 주눅 들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칭찬도 듣잖아!' 과학자가 되고 싶어! 자신감을 얻은 뉴턴은 뛰어난 성적으로 킹스 스쿨에 들어갔어요. 뉴턴은 학교가 멀어서 하숙을 해야 했답니다. 뉴턴은 약국 2층에 하숙방을 구했어요. 집주인은 뉴턴에게 무척 친절했지요. 뉴턴은 집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물시계를 만들어 주었어요. "오! 이게 말로만 듣던 물시계로군. 정말 고맙네." 뉴턴은 약국 지붕에 커다란 풍차 날개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요. "풍차 날개를 단 약국이 있대. 정말 신기하지?" 금세 소문이 퍼져 약국에는 손님이 부쩍 늘었어요. "뉴턴 학생은 우리 집의 복덩이야!" 집주인은 무척 기뻐했지요.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어요. 밤마다 언덕에 도깨비불이 둥둥 떠다닌다는 소문이었지요. "도깨비불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 오늘 밤 언덕에 가 보자." 마을 사람들은 밤에 언덕으로 갔어요. 하늘에는 도깨비불이 떠 있고, 누군가 도깨비불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소리쳤어요. "꼼짝 마라! 너는 누구냐?" "앗! 저는 킹스 스쿨 학생 뉴턴이에요. 연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 뉴턴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연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에 작은 등불을 매달아 하늘로 날렸어요. 깜깜한 밤에 빛나는 등불의 움직임을 보면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알 수 있었지요. "허, 그것참, 킹스 스쿨의 우등생이 이런 엉뚱한 짓을 하다니." 도깨비불 소동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두고두고 뉴턴의 이야기를 하며 재미있어 했어요. 뉴턴이 눈을 반짝이며 친구에게 말했어요. "내 머릿속에는 질문이 가득해." "무슨 소리야? 너는 늘 일 등만 하잖아. 모르는 것이 없는 네가 왜 머릿속에 질문이 가득해?"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답니다. 하지만 뉴턴은 정말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하늘은 왜 파란색일까? 지구는 왜 둥글까? 달은 왜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을까?' 뉴턴은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부지런히 했어요. 하지만 궁금증은 줄지 않았지요. 오히려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이 더 늘어났어요. '과학자가 되어서 궁금한 것을 다 풀어 보아야겠어.' 뉴턴은 더욱더 열심히 연구와 실험을 했어요. 어느덧 뉴턴이 킹스 스쿨을 졸업하는 날이 다가왔어요. 뉴턴은 학교 벽에 자기의 이름을 쓰며 다짐했지요. '언젠가 내 이름을 온 세계에 알릴 날이 올 거야!'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어요. 뉴턴은 공부를 시작하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몰랐답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장난삼아 뉴턴의 도시락을 몰래 먹었어요. 뉴턴은 공부에 빠져 아무것도 몰랐지요. 한참이 지나서야 배가 고파 도시락을 열었어요. 물론 도시락은 텅 비어 있었지요. 어리둥절해하던 뉴턴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어? 분명히 도시락으로 빵과 소시지를 가져왔는데. 음, 내가 도시락을 먹은 걸 깜박 잊고 있었나 봐. 그런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친구들은 뉴턴의 집중력에 깜짝 놀랐어요. "뉴턴! 너는 어떻게 늘 집중할 수 있니?" 한 친구가 묻자, 뉴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갸웃하며 되물었어요. "이상하네? 재미있는 과학 책을 읽는데 어떻게 집중이 안 될 수 있지?" 뉴턴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학교에 다닐 돈을 자기가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공부할 시간이 늘 모자랐지요. 그즈음 배로 교수는 뉴턴의 재능과 노력을 눈여겨보았어요. 뉴턴이 힘들게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무척 안타까워했지요. 배로 교수는 여러 교수와 만나 이야기했어요. "뉴턴은 재능이 있는 학생입니다. 뉴턴에게 장학금을 줍시다. 그러면 우리 학교, 더 나아가 영국의 자랑스런 과학자가 될 것입니다." 드디어 뉴턴은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뉴턴은 참 기뻤지요. 날마다 좋아하는 연구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배로 교수는 늘 뉴턴을 곁에서 도와주었어요. 뉴턴은 뒷날,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되었답니다. 위대한 발견을 하다. 맑은 봄날, 뉴턴은 친구와 함께 박람회에 갔어요. 한창 볼거리에 빠져 있던 뉴턴은 신기한 것을 보았어요.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프리즘'이었지요. 뉴턴은 프리즘에서 여러 가지 빛깔을 보았어요. '와! 신기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걸까?' 뉴턴은 프리즘을 사서 후다닥 집으로 달려갔어요. 커튼을 내려 방을 어둡게 한 뒤, 한쪽 틈으로만 빛이 들어오게 했지요. 뉴턴은 숨을 죽이고 빛에 프리즘을 대었어요. 그러자 빛은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로 보였어요. '사람들은 빛이 한 가지 빛깔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야. 햇빛 자체가 여러가지 빛깔이 합쳐진 거야.' 뉴턴의 발견은 과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답니다. 그즈음 영국에 무서운 전염병이 퍼졌어요. '페스트'라는 병이었지요. 페스트에 걸린 사람은 피부가 검게 변해서 죽었어요. 사람들은 페스트에 걸리지 않으려고 도시를 떠났어요. 뉴턴도 잠시 공부를 멈추고 고향으로 내려갔지요. 다행히 고향 마을에는 페스트가 퍼지지 않았어요. 뉴턴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과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고 생각에 잠겼어요. '태양과 지구, 달은 어떤 힘으로 움직이는 걸까? 달은 왜 지구의 둘레를 도는 걸까? 지구는 왜 태양의 둘레를 도는 걸까?' 이때 사과 한 알이 땅으로 툭 떨어졌어요. 순간, 뉴턴의 머리에 번개처럼 빠르게 생각이 지나갔어요. '사과는 아래로 떨어져. 사과뿐만 아니라 모든 물건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지구가 모든 물건을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야!' 그러자 뉴턴은 또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지구와 마찬가지로 별들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런데 왜 별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을까?' 뉴턴은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고 연구한 끝에, 뒷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했답니다. 페스트가 사라지자 뉴턴은 대학교로 돌아왔어요. 어느 날 뉴턴은 빛의 원리를 생각하다가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어요. 반사 망원경을 보고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왕까지 크게 칭찬했답니다. "뉴턴, 그대는 정말 뛰어난 과학자이구려!" 반사 망원경은 천문학이 발전하는 데 크게 도왔어요. 반사 망원경이 없었다면 우주를 잘 관찰할 수 없었을 거예요. 왕립학회는 뉴턴을 새로운 회원으로 뽑았어요. 뉴턴은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자의 자리에 올랐지요. 어려움을 이기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 뉴턴은 힘겨운 일을 맞았어요. 집에 큰불이 난 거예요. 뉴턴이 정성껏 쓰던 논문이 불에 다 탔어요. 뉴턴은 눈물을 흘리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지요. '아, 다시 연구할 자신이 없어.' 그때 뉴턴을 일으킨 것은 사람들이었답니다. "뉴턴 선생님!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가 필요합니다."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찾아와 뉴턴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지요. '다시 일어나서 연구를 하자. 내가 연구할 것은 아직 많아.' 뉴턴은 힘을 내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가장 자랑스러운 과학자로서 왕립학회 회장이 되었지요. 뉴턴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어요. 오로지 과학만이 뉴턴의 친구이자 가족이었지요. "뉴턴 선생님! 이 세상에서 선생님만큼 자연과 과학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뉴턴은 겸손하게 말했어요. "저는 자연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찾아낸 진리는 바닷가에서 주운 조가비 한 개와 같지요. 바닷가에는 더 아름다운 조가비가 얼마든지 있어요. 또 넓게 펼쳐진 바다에는 더 훌륭한 보물이 많이 있지요." 뉴턴은 연구에 마음을 다하다가 1727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우주의 비밀을 밝혀 과학을 크게 발전시켰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든 과학의 바탕이 되었지요. 오늘날 과학자들은 반사 망원경을 더욱 발전시켜 천체 망원경을 만들었어요. 사람들은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를 더 잘 관찰할 수 있었어요. 뉴턴은 우주 곳곳에 숨은 자연법칙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로 역사에 남아 있답니다. |
파브르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어요. “할아버지, 개미들이 한 줄로 먹이를 끌고 가요!” 양 떼를 돌보던 파브르가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어요. “오, 붉은 병정개미로구나.” 개미를 찬찬히 살피던 할아버지가 말했지요. “개미는 왜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나요?” 파브르가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붉은 병정개미 뒤를 쫓다가 물었어요. “그건 다른 개미집에 쳐들어가 먹이를 훔치려고 그러는 거란다. 먼저 붉은 병정개미 몇 마리가 주위를 살피다가 신호를 보내. 그러면 나머지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가서 다른 개미집을 덮치지. 그렇게 떼 지어 다니면서 풍뎅이나 번데기를 잡기도 한단다.” 파브르는 두 눈을 반짝이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어요. “우아, 할아버지는 붉은 병정개미 박사네요!” “너도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관찰해 보렴. 그러면 할아버지처럼 잘 알 수 있을 거야. 벌써 어두워지는구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파브르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어요. 깊은 산속에 있는 할아버지 집은 언제나 농사일로 바빴어요. “파브르, 집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지 않니?” 할아버지가 미안한 듯 묻자 파브르는 씩씩하게 대답했어요. “아니요, 신 나요. 문밖에 나가면 새도 곤충도 모두 제 친구인걸요.” 파브르가 가난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아버지 집으로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어요. 파브르는 산속에서 찌르륵찌르륵 우는 풀무치랑 숨바꼭질하다가 길을 헤매기도 하고,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기도 했지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파브르가 사랑스러웠답니다. 부모님이 사는 생 레옹 마을로 돌아온 파브르는 학교에 다녔어요. ‘이제 학교에 다니니까 무엇이든 선생님께 물어봐야지.’ 파브르는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학교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늘 바빴지요. 수업을 하다가도 마을에 결혼식이 있으면 주례를 서러 갔어요. 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의사 노릇도 하고, 어떤 때에는 면도칼을 들고 이발사 노릇까지 했어요. 그날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공부하고 있으라며 어디론가 뛰어나갔어요. 그때 열린 문틈으로 아기 돼지 한 마리가 쑥 들어왔지요. 꿀꿀거리며 뛰어다니는 아기 돼지를 보고, 파브르가 신이 나서 외쳤어요. “너도 우리랑 같이 어울리고 싶은 거지?” 아기 돼지를 뒤따라 닭까지 교실로 들어와서 교실이 마치 동물 농장 같았어요. 교실 문 바로 앞에 닭장과 돼지우리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었지요. 교실로 돌아온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하하, 교실이나 돼지우리나 똑같네. 교실이 동물 농장이야!” 파브르는 들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신났어요. 좋아하는 곤충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 숲속에는 곤충이 많이 사는데, 왜 죽은 곤충은 별로 안 보이나요?” “그건 송장벌레라는 청소부가 있어서란다. 송장벌레는 죽은 동물을 먹거든. 또 먹다가 남아도 땅속에 묻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잘 안 뜨이는 거란다.” 파브르는 송장벌레에게 잔뜩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송장벌레가 다니는 길목에 죽은 생쥐를 놓아두고 숨어서 지켜보았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송장벌레 한 마리가 다가왔어요. 그런데 송장벌레는 생쥐 둘레를 빙빙 돌더니, 먹이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돌아갔어요. 파브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송장벌레가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어요. 생쥐가 너무 커서 혼자서는 옮길 수 없자, 다른 송장벌레들을 데리고 온 거예요. 파브르는 끈기 있게 송장벌레를 관찰했어요. 그래서 송장벌레가 먹다 남은 먹이에 알을 낳아서 땅에 묻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지요. 시간이 지나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이 먹이를 먹고 자란다는 것도요. 어느 날, 아버지가 파브르에게 그림 괘도를 선물했어요. 파브르는 그림 괘도를 펼쳐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처음 보는 동물들이 눈앞에 펼쳐졌거든요. “우아, 신기한 동물이다!” 호기심에 가득 찬 파브르는 그림 괘도를 보면서 동물 이름을 외워 금세 글을 깨쳤어요. ‘역시 그림 괘도를 선물하니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군.’ 파브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어요. 아버지는 글을 깨친 파브르에게 라퐁텐 우화집을 사 주었어요. 우화집에는 여러 동물들이 재미있게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요. 파브르는 더욱 많은 동물을 알 수 있었답니다. 파브르네 집은 점점 가난해져만 갔어요. 쫓기듯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도 마찬가지였지요. 더욱 가난에 쪼들릴 뿐이었거든요. ‘집을 떠나서 내가 직접 돈을 벌어야겠어!’ 파브르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돈을 벌었어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자기 몸은 스스로 책임지기로 한 거예요. 파브르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기도 하고, 철도 공사장에서 짐을 나르기도 했어요. 그리고 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사 먹기보다는 책방으로 달려가 책을 살 때가 많았지요.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책을 읽으며 공부할 때만은 배고픔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사라지고 행복했어요. 비록 잠은 공원 의자에서 자야 했지만요. 하루는 공사장에서 땅을 파다가 매미의 애벌레인 굼벵이를 발견했어요. 죽은 듯 꼼짝하지 않던 굼벵이가 손바닥에 올려놓자 꿈틀꿈틀 간지럼을 태우며 아는 척을 했지요. ‘넌 허물을 벗으면 목청이 좋은 가수로 변하겠지?’ 곧잘 굼벵이를 관찰하던 파브르는 나중에 곤충기에서 매미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었어요. 매미는 땅속에서 애벌레로 5년에서 10년까지 지내요. 그런데 땅 위에서 사는 시간은 겨우 여름 한 철뿐이랍니다. 매미로는 한철밖에 못 살고 죽는 것이지요. 매미는 타고난 가수이지만, 사실은 옆에서 대포를 쏘아도 끄덕하지 않는 귀머거리예요. 그러나 매미의 눈은 무척 예민하지요. 커다란 겹눈은 무엇이든 환히 볼 수 있답니다. ‘장 앙리 파브르, 수석 합격!’ 세상에! 떠돌이 생활을 하며 틈틈이 공부한 파브르가 아비뇽 사범학교의 장학생 모집 시험에서 당당히 일 등으로 합격을 했지 뭐예요. ‘이제 돈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파브르는 2학년으로 올라가자 성적이 뚝 떨어졌어요. 공부보다는 들판에 나가 곤충을 관찰하는 것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거든요. 수업 시간에도 곤충이 가득 든 책가방을 몰래 열어 보기 일쑤였지요. 그러다 그만 선생님한테 들키고 말았어요. “이게 곤충 가방이지 책가방이야? 장학생이 이래도 되는 거냐?” 파브르는 빨리 졸업해서 마음껏 곤충을 관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했지요. “교장 선생님, 저를 3학년으로 넣어 주세요.” “뭐라고? 성적이 엉망인데 한 학년을 건너뛰겠다고?” “제가 따라가지 못하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결국 파브르는 3년 동안 배울 내용을 2년 만에 끝내고 뛰어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래서 남은 일 년 동안은 학교에 가서도 좋아하는 곤충을 관찰하고 책을 읽으며 보낼 수 있었답니다. 파브르는 아비뇽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리고 같은 초등학교에서 만난 상냥한 마리와 결혼도 했지요. 파브르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중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수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코르시카섬에 있는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지요.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코르시카 섬은 무척 아름다웠답니다. 파브르에게 코르시카섬은 날마다 자연을 알아 가는 배움터였어요. 파브르는 수업이 끝나면 식물 채집을 했는데, 늘 하루해가 짧게 느껴졌지요. 어느 날, 바위틈에서 조개를 캐던 파브르에게 툴루즈 대학교의 탕동 교수가 찾아왔어요. “아니, 교수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식물 채집을 하러 왔다네. 그런데 자네 꼴이 왜 그런가? 껄껄.” 조개를 캐내느라 진흙 범벅인 파브르를 보고 탕동 교수가 함박웃음을 터뜨렸어요. 탕동 교수는 한동안 파브르네 집에서 머물렀어요.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지요. 섬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탕동 교수가 파브르에게 말했어요. “자네가 생물에 갖는 관심을 학문으로 발전시켜 보는 것이 어떻겠나?” 파브르는 탕동 교수의 진지한 눈빛에 가슴이 떨렸어요. “교수님, 어떻게 하면 학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생물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생물의 습성이나 몸의 구조도 밝혀 보게나.” 탕동 교수는 파브르에게 달팽이를 어떻게 해부하는지 알려 주었어요. “여기 보이는 것이 더듬이라네. 이것은 음식을 내려보내는 곳이지.” 파브르는 하나라도 놓칠까 봐 마음 졸이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탕동 교수의 손놀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어요. “이렇게 조그만 달팽이도 몸의 구조가 무척 복잡하군요.” 파브르는 이때부터 생물을 잡으면 직접 해부를 해 보면서 더욱 깊이 연구를 할 수 있었지요. 아름다운 그물을 짜는 거미에 대해서도 이 무렵에 알아낸 것이에요. 어느 여름날, 거미가 그물을 짜려고 준비를 했어요. 거미는 나무 꼭대기에서 뚝 떨어지더니 몸에서 가는 실을 빼내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어요. 그러고는 몸에서 계속 나오는 실을 타고 다시 올라갔지요. 그러니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실을 두 줄 만든 거예요. 거미는 이런 식으로 부지런히 안쪽에서부터 촘촘하게 그물을 짜요. 거미줄 사이가 어찌나 고른지, 마치 기계로 짜는 것 같지요. 거미는 단단하게 짜 놓은 거미줄에 벌레들이 걸리면 곧 그 벌레들을 잡아먹는답니다. 코르시카섬에서 지낸 지 4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곤충 연구에 매달리던 파브르가 많이 아팠어요. 파브르는 몸을 돌보려고 섬을 떠나 아비뇽으로 돌아갔지요. 파브르는 고향처럼 포근한 아비뇽에서 건강을 되찾았어요. 그리고 아비뇽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시 곤충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싱그러운 봄기운이 밀려오는 어느 날이었어요. “자, 오늘은 왕쇠똥구리를 보러 가자.” 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파브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나섰어요. 마을 건너 바닷가에 있는 레잔그르 언덕으로 왕쇠똥구리를 보러 가기로 한 거예요. 학생들은 검은 박쥐우산을 활짝 펼쳐 든 파브르 뒤를 졸졸 따라갔어요. 멀리서 보면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 같았답니다. 레잔그르 언덕에 다다르자 파브르가 큼지막한 쇠똥을 가리켰어요. 쇠똥 위에는 왕쇠똥구리들이 잔뜩 달라붙어 엎치락뒤치락 야단이었지요. 학생들은 쇠똥을 구슬 모양으로 만드는 솜씨 좋은 왕쇠똥구리를 숨죽이며 지켜보았어요. “저놈들, 잠시도 쇠똥에서 떨어지지를 않지? 톱니 같은 앞머리와 앞다리로 쇠똥에서 용케도 똥 구슬을 만들어 내지!” 왕쇠똥구리는 똥 구슬을 힘차게 누르며 다듬더니 비탈길도, 울퉁불퉁한 자갈길도 거뜬히 밀고 나갔어요. “우아, 거꾸로 서서 똥 구슬을 굴려요!” 학생들이 왕쇠똥구리를 보며 소리쳤어요. 그때 열심히 똥 구슬을 굴리던 왕쇠똥구리가 떡갈나무 아래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어요. “왕쇠똥구리는 저 구멍에 쇠똥을 넣고 먹는단다. 실컷 먹고 나면 먹다 남은 똥에 알을 낳지. 재미있는 사실은 알에서 깬 애벌레가 그 똥을 먹고 자란다는 거란다.” 파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왕쇠똥구리는 똥 구슬과 함께 구멍으로 쏙 들어갔어요. 어느 겨울밤, 난롯가에 앉아 책을 읽던 파브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책에 나오는 레옹 뒤푸르의 노래기벌 이야기가 파브르를 곤충의 신비함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거든요. ‘뒤푸르보다 더 깊이 연구해 보겠어!’ 마침내 파브르는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어요. 뒤푸르는 노래기벌의 애벌레가 죽은 비단벌레를 먹고 자란다고 했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애벌레가 먹는 비단벌레는 싱싱하게 살아 있었어요! 노래기벌은 자식인 애벌레가 싱싱한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비단벌레를 마취만 시키고 몸에 알을 낳은 것이었지요. 파브르는 연구한 내용을 발표했어요. “뒤푸르보다 훨씬 뛰어난 연구다.” 프랑스 학사원은 칭찬을 하며 파브르에게 상을 주었어요. 노래기벌 연구로 파브르는 곤충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어요. 하지만 여전히 괭이를 넣은 배낭을 메고, 산과 들로 곤충을 찾아다녔지요. “나라를 빛낸 그대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겠소.” 파브르는 역사에 남을 만한 곤충 연구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답니다. 파브르는 그 뒤 조용한 시골 마을로 와서 마음 놓고 곤충 연구에 매달렸어요. 파브르는 곤충의 신비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이렇게 다짐을 했지요. “소중한 곤충들아, 내가 관찰한 신비한 곤충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려 줄게.” 1879년, 파브르는 첫 번째 곤충기를 펴냈어요. 그렇게 2, 3년마다 한 권씩 모두 곤충기 열 권을 펴냈지요. 파브르의 곤충 연구가 널리 알려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물과 돈을 보내왔어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파브르는 행복했지요. 하지만 받은 돈은 모두 돌려보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파브르는 이제 많이 늙었어요. 더 이상 곤충을 연구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곤충의 다정한 친구였던 파브르는 뜰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답니다. “나는 꿈에서 단 몇분 만이라도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
노벨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옛날 이집트에서는 일꾼 3만 명이 물길 17킬로미터를 놓는 데 11년이 걸렸어요. 하지만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면서 달라졌어요. 그 정도 일은 일꾼 100명이 열 달 만에 마칠 수 있었지요. 금, 은, 석탄을 캐는 곳에서는 너도나도 다이너마이트를 찾았어요. 힘을 조금만 들여도 더 빨리, 더 많이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노벨은 발명가이자 과학자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어요.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도 되었지요. 하지만 노벨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어요.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쓰이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거든요.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뿐 아니라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발명품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없었답니다. 과연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 마지막 발명품은 무엇일까요? 기계를 좋아하는 아이.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은 183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어요. 노벨이 어렸을 때, 발명가이자 공학자인 아버지는 러시아로 떠났어요. 아버지는 무기 공장을 차려 성공하자, 가족을 러시아로 불렀지요. 노벨은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살아 참 기뻤어요. 그리고 틈만 나면 신기한 기계가 가득한 아버지의 공장으로 달려갔답니다. “아버지! 이것은 무엇인가요?” “아, 그것은 화약이란다. 잘못하면 터지니까 조심해야 해.” “네, 아버지. 그런데 화약은 어디에 쓰나요?” “광산을 터뜨릴 때 쓰지. 화약을 쓰면 여러 사람이 오래 할 일을 얼른 끝낼 수 있단다.” 노벨은 호기심에 가득 차 화약을 요모조모로 살펴보았어요. 노벨은 관찰하고 실험하기 좋아했어요. 시를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했답니다. 아버지는 노벨에게 기대가 컸어요. 어느 날, 아버지는 노벨에게 말했지요. “얘야, 다른 나라에 가서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배워 오렴.” “네? 저 혼자 다른 나라에 가라고요?” 노벨은 깜짝 놀라 아버지에게 되물었어요. “그래. 너는 똑똑하고, 다른 나라 말도 잘하니 걱정이 없단다. 공부하고 돌아와서 아버지 일을 도우면 좋겠구나.” 노벨은 시와 소설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과학도 좋아했기 때문에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답니다. 노벨은 프랑스 파리에서 화학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에릭슨에게 기계에 대해서 배웠지요. 에릭슨은 뒷날 장갑함 모니터호를 만든 사람이에요. 하루는 노벨이 에릭슨에게 말했어요. “선생님, 기계는 참 정직해요!” “정직하다니? 노벨 군, 무슨 뜻이지요?” “기계는 손질만 잘해 주면 쉬지 않고 일해요. 하지만 한 군데라도 탈이 나면 바로 멈추잖아요.” “하하, 맞아요! 기계는 참 정직하군요.” 노벨은 기계를 배우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몇 년 뒤, 노벨은 러시아로 돌아왔답니다. 아버지는 기뻐하며 노벨에게 말했지요. “러시아 군대가 우리 공장에서 만든 무기를 쓴단다. 일이 많으니, 너도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렴.” 그때 러시아는 터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어요. 여러 나라가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싸웠는데, 이 전쟁을 ‘크림 전쟁’이라고 부르지요. 공장은 무척 바빴어요. 러시아 군대에 여러 무기를 보내야 했지요. 노벨은 공장에서 형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러시아가 크림 전쟁에서 졌어요. “러시아가 지다니! 우리 공장은 이제 망했어!” 아버지는 넋을 잃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전쟁이 끝나자, 공장에는 다 만든 무기가 팔리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은행에서는 돈을 갚으라고 야단이었지요. 아버지는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을 은행에서 빌렸거든요. 빚쟁이들은 빚을 못 받자, 공장을 빼앗았어요. “아버지, 힘내세요. 저희가 있잖아요!” 노벨은 형들과 함께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 에밀과 고향 스웨덴으로 돌아갔어요. 노벨은 형들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공장을 일으키기로 했답니다. 새로운 화약을 발명하다. 노벨은 새로운 화약을 만들려고 날마다 실험을 멈추지 않았어요. 나이트로글리세린으로 화약을 만들려고 했지요. ‘나이트로글리세린은 폭발력이 참 크다는 말이야. 화약으로 만들면 흑색 화약보다 잘 팔릴 거야. 그런데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폭발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것이 문제야.’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으로 연구를 거듭하다, 마침내 충격에도 터지지 않는 화약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두 형과 강가로 나가 새 화약을 터뜨리는 실험을 했지요. 쾅! 큰 폭발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어요. “해냈어! 성공이야!” “노벨, 축하한다!” 노벨과 두 형은 기뻐서 얼싸안았어요. 노벨은 새 화약을 스웨덴에 가지고 가 특허를 땄어요. 그리고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새 화약을 보여 주었지요. “이 화약은 흑색 화약보다 열 배나 셉니다. 한번 보시지요.” 노벨은 새 화약으로 커다란 바위를 산산조각 냈어요. “와, 대단하군요! 이렇게 센 화약이 있다니!” 새 화약에 대한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졌답니다. 금, 은, 석탄을 캐는 곳에서 새 화약을 많이 찾았지요. 노벨은 아버지와 함께 화약 공장을 세웠어요. 쾅! 어느 날, 노벨은 큰 폭발 소리를 들었어요. 노벨은 얼른 공장으로 달려갔지요. 공장에는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자욱했어요. 폭발 사고가 일어나 동생 에밀과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이 사고로 공장은 문을 닫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어요. 노벨이 나이트로글리세린으로 만든 화약은 폭발력이 크지만, 액체라서 옮길 때 아주 위험했어요. 그래서 새 화약은 여기저기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켰지요. 수많은 사람이 새 화약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새 화약을 발명한 노벨은 마음이 무거웠답니다. ‘아, 내가 안전한 화약을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텐데.’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크게 성공하다. 노벨은 안전하고 센 화약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나라에서는 위험하다며 화약 공장을 못 짓게 했지요. 할 수 없이 노벨은 도시에서 떨어진 호숫가에 공장을 세우고, 배 위에 실험실을 차렸어요. ‘나이트로글리세린은 액체라서 옮길 때 위험해. 고체로 만들면 덜 위험하겠지?'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 톱밥 등 여러 가지와 섞으며 실험했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알아냈지요. ‘맞다! 규조토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가장 잘 빨아들이니까 이 둘을 섞어 고체로 만들면, 옮길 때도 터지지 않을 거야.’ 노벨은 규조토, 목탄 등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빨아들이게 해서 새로운 화약을 만들었어요. 새 화약은 지난번 화약 못지않게 폭발력이 엄청났지요. “성공이다! 드디어 안전한 화약을 만들었어.” 노벨은 새로운 화약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어요. 다이너마이트는 힘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말 ‘뒤나미스’에서 따온 이름이지요.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로 특허를 냈어요. 노벨의 공장은 다시 바쁘게 돌아갔지요. 공사장과 광산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다이너마이트를 찾았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폭발력이 뛰어나고 안전하니, 공사를 빨리 끝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사람들은 다이너마이트로 터널과 댐을 만들고, 길을 넓혔답니다. 노벨은 여러 나라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웠어요. 다이너마이트는 온 세계에 날개 달린 듯 팔렸지요. 노벨은 세계에서 가장 큰 화약 회사의 사장 자리에 올랐어요. 사업가에서 평화 운동가로! 한 여자가 노벨을 찾아왔어요. 노벨은 비서를 찾고 있었거든요. “안녕하세요? 저는 베르타라고 합니다. 사장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노벨은 베르타가 마음에 들어 비서로 뽑았어요. 베르타는 똑똑할 뿐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지요. 두 사람은 소설을 좋아해 이야기도 잘 통했어요. 그래서 곧 친해졌답니다. 하루는 베르타가 노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사장님처럼 다정한 분이 왜 무서운 다이너마이트를 파시지요? 다이너마이트는 전쟁할 때도 쓰잖아요.” “베르타, 사실은 나도 고민이에요. 안전한 화약을 만들었더니 몇몇 사람이 무기로 쓰네요. 그래서 요즘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길을 찾고 있어요.” 노벨은 베르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어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지요. 베르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러 고향으로 돌아갔거든요. 다이너마이트 회사는 나날이 커졌어요. 하지만 노벨은 전쟁에서 다친 군인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요. ‘저 군인은 내가 만든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다친 것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은 베르타가 보낸 책 (무기를 내려놓아라!)을 읽었어요. 책에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생생하게 나왔답니다. 노벨은 전쟁의 위험을 크게 깨닫고, 베르타에게 편지를 썼어요. ‘베르타, 나도 전쟁에 반대하는 당신과 뜻을 같이하겠소. 우리 같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시다.’ 노벨은 베르타의 답장을 받았어요. 베르타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지요. ‘전쟁으로 혼자가 된 아이와 다친 군인을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인을 만나면 전쟁을 막자고 말씀해 주세요.’ 노벨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살폈어요. 그리고 정치인과 대학생 앞에서 평화를 이야기했어요. 베르타가 이끄는 평화 운동도 아낌없이 도왔지요. 어느새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사업가에서 평화 운동가로 변했답니다. 세계의 평화를 밝히는 등불이 되다. 세월이 흘러 노벨은 건강이 나빠졌어요. 노벨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지요. 그래서 재산을 물려줄 사람이 없었어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도 나처럼 외로웠겠지. 당장 먹고살 길도 없어 얼마나 막막했을까?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데 내 재산을 써야겠다.’ 노벨은 힘없는 손으로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1896년, 노벨은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여러 나라의 사업가와 정치인, 평화 운동가가 노벨의 장례식에 왔지요. 드디어 노벨의 유언장이 발표되었어요. 사람들은 유언장 내용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남긴 재산으로 상을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세계 평화와 행복을 위해 애쓴 사람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노벨의 말대로 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노벨을 기리기 위해 상의 이름을 ‘노벨상’이라고 지었지요. 1901년, 첫 번째 노벨상 수상식이 열렸어요. 그 뒤로 노벨상 수상식은 세계의 잔치로 자리 잡았어요. 자, 이제 알았지요? 노벨의 마지막 발명품은 바로 노벨상이에요. 노벨상에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노벨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요. 노벨상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랍니다. 교과서에도 없는 지구별 알짜 정보. 노벨상이 알고 싶어요! 노벨은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으로 상을 만들게 했지요. 세계 평화와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예요. 사람들은 노벨을 기리려고 상의 이름을 노벨상이라고 했어요. 해마다 노벨이 세상을 떠난 12월 10일에는 노벨상 수상식이 열려요. 오늘날 노벨상 수상식은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고, 노벨의 뜻을 되새기는 잔치로 자리하고 있어요. 첫 번째 노벨상 수상식은 언제였나요? 첫 번째 노벨상 수상식은 1901년 12월 10일에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열렸어요. 물리학, 화학, 생리학 의학, 문학, 평화 5개 부문에 상을 주었지요. 1969년부터는 경제학까지 모두 6개 부문에 상을 주고 있어요. 노벨상 수상식은 어디에서 열리나요? 평화상을 빼고 5개 부문의 수상식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려요. 평화상 수상식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지요. 다른 부문 수상자는 모두 스웨덴에 있는 기관에서 정하는데, 평화상만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정하거든요. 수상자들은 메달과 상장, 상금을 받는답니다. 노벨이 생각한 노벨상의 주인공은? 노벨은 나라와 피부색, 종교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했어요. 물리학, 화학, 생리학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문학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평화 부문에서는 세계 평화를 위해 애쓴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했답니다. 노벨상 수상식이 안 열렸던 때도 있나요? 그럼요. 노벨이 생각한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을 때는 상을 주는 것을 미루지요. 또 제1차, 2차 세계 대전처럼 세계가 전쟁에 휩싸여서 상을 줄 사람을 고르기 힘들 때도 미뤄진답니다. 요모조모 노벨상 이야기. 우리가 잘 아는 수상자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와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흑인 인권 대통령 만델라가 평화상을 받은 것은 다 알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부문에서 상을 받은 사람도 있어요. 정치가로 이름난 처칠은 1953년 문학상을, 탐험가 난센은 1922년 평화상을 받았답니다.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사람도 있나요? 마리 퀴리는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았어요. 라이너스 폴링은 1954년 화학 분자 구조 연구로 화학상을, 1962년 핵을 반대하는 활동으로 평화상을 받았지요. 가장 평범한 노벨상 수상자는? 2002년 화학상을 받은 일본인 다나카 고이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생물체의 고분자 단백질 구조를 밝힌 뒤, 연구를 거듭해 화학상까지 받았지요.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받은 사람이 있나요? 네.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에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인권, 남북 화해에 이바지한 공으로 평화상을 받았어요. 노벨상을 받은 여성을 알려 주세요! 1903년 마리 퀴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어요. 현재 여성 수상자는 노르웨이 여성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 인디오 인권의 어머니 멘추 등 30여 명이 넘게 늘어났어요. 특히 노벨의 친구였던 베르타 폰 주트너는 국제 평화에 이바지해서 1905년에 평화상을 받았어요. 로봇 공학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로봇 공학자는 로봇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인공 지능이나 로봇 설계 등을 연구하고, 생활에서 사람이 할 일을 대신하는 로봇이나 공장, 의료, 해저나 우주 탐사 등에 쓰일 여러 로봇을 연구하고 개발하지요.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 전자, 통신, 컴퓨터 공학 등을 결합해 좀 더 인간과 가까운 로봇을 만들려고 노력한답니다. 로봇을 만들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요? 로봇을 직접 만들고 연구해야 하므로 기계와 관련된 내용을 연구하는 기계 공학이나 컴퓨터 공학, 제어 계측 공학 등을 공부해야 해요. 과학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고 수학적 상상력과 논리력을 길러 두세요. 친근한 로봇을 만들기 위한 상상력과 감수성도 필요해요. 그래야 인간과 닮은 로봇을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로봇들은 어디에 활용되고 있나요? 가정, 산업, 의료, 건설, 국방, 우주, 해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을 활용하고 있어요. 로봇은 흔히 생각하듯 사람의 형태를 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요. 로봇 공학자가 되고 싶은 어린이에게. 가까운 미래에는 로봇이 사람들을 더욱 편리하게 해 줄 거예요. 로봇이 인간의 능력보다 물리적으로 뛰어난 게 많거든요. 하지만 로봇의 특성을 악용하면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 로봇이 평화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해요. 로봇 공학은 오랜 시간 되풀이해서 시험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러니 한 가지 일을 끝까지 이루어 내는 끈기를 길러서, 세상에 꼭 필요한 로봇을 개발해 보세요. |
에디슨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미국이 사랑한 발명가, 에디슨. “사랑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모두 전깃불을 꺼 주십시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슬픈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어요. 그 순간 미국의 모든 도시에서 전깃불을 껐지요. 깜깜해진 1분 동안 사람들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바로 전구뿐만 아니라 엄청 많은 발명품을 만든 세계 최고의 발명가, 토머스 앨바 에디슨에게 미국 사람들이 보내는 사랑과 존경의 인사였지요. 하루 내내 일하는 것도 모자라 꿈에서까지 발명을 했던 에디슨은 그렇게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답니다. 호기심 많고 엉뚱한 꼬마. 에디슨이 네 살 때였어요. 아침을 먹은 뒤로 에디슨이 보이지 않았어요. 가족들은 걱정스러워서 에디슨을 찾아다녔지요. “에디슨, 어디 있니?” 어머니는 혹시나 해서 헛간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어요. 에디슨이 거위 알을 품고 있었거든요. “에디슨!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알에서 아기 거위가 깨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어요.” 에디슨은 이처럼 호기심이 많고 엉뚱한 아이였어요. 어느 날, 에디슨이 삶은 달걀을 먹다가 불쑥 물었어요. “엄마! 병아리는 왜 달걀에서 나오나요?” 에디슨이 질문을 하자 형들은 벌떡 일어나 모자를 썼어요. “또 시작이군. 아유, 시끄러워.” 궁금한 것이 많은 에디슨의 쉴 새 없는 질문에 형들은 도망치기 바빴어요. 시무룩해진 에디슨이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물었어요. “엄마도 내가 귀찮아요?” “아니, 귀찮지 않단다. 너는 똑똑해서 질문이 많은 거야. 에디슨! 너는 분명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거란다.” 어머니는 에디슨이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제나 에디슨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 주었지요. 에디슨은 나중에 어머니의 말대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발명가가 되었어요.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지요. 하늘을 나는 물약. 나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 참 신기했어. 그래서 하늘을 나는 물약을 만들어서 마이클에게 보여 주었지. “이 물약을 먹으면 정말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니?” 마이클은 신이 나서 내가 만든 물약을 벌컥벌컥 마셨어. 그런데 물약을 먹자마자 소리를 꽥 지르더니 쓰러져 버렸지 뭐야. “아이고, 배야! 에디슨, 나 죽을 것 같아!” 마이클 입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나왔어. 나는 마이클이 진짜로 죽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 다행히도 마이클은 약을 모두 토해 내더니 살아났지. 하지만 그 뒤로 몇 달 동안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학교를 그만두다. 에디슨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궁금한 것이 더욱 많아졌어요. “선생님, 어째서 1 더하기 1이 2인가요?” 에디슨이 질문을 하자, 선생님은 찰흙 덩어리를 양손에 하나씩 들어 보이면서 설명했어요. “자, 이제 1 더하기 1이 2이라는 것을 알겠지?” 에디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냉큼 앞으로 나왔어요. 그러고는 찰흙 한 덩어리를 다른 한 덩어리에 척 붙였지요. “보세요, 이렇게 하면 한 덩어리잖아요!” 선생님은 당황해서 에디슨의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어요. “아무래도 에디슨은 머리가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선생님은 1 더하기 1이 왜 2가 되는지 그 이유를 아시나요?” “당연히 2가 되는 것이지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아이의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도 못해 준다면 제가 직접 에디슨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렇게 에디슨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에디슨, 앞으로 엄마가 공부를 가르쳐 줄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엄마한테 마음껏 물어보렴.” 어머니는 에디슨에게 여러 가지 공부를 가르쳤어요. 그 가운데 에디슨은 과학 실험 시간을 가장 재미있어했지요. “엄마, 과학은 정말 신 나요!” 에디슨에게 작은 실험실도 생겼어요. 비록 지하실 창고 한구석에 마련한 실험실이었지만, 에디슨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지요. 하지만 에디슨은 이 실험실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날이 갈수록 실험 도구와 재료가 더 많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에디슨은 돈을 벌려고 기차에서 신문을 팔았어요. 게다가 기차 한구석에 버려진 작은 창고에서 실험을 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답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실험을 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어요. “불이야! 기차에 불이 났다!” 에디슨이 실험실 선반에 올려놓은 실험 도구가 떨어지면서 불이 났어요. 에디슨이 신문을 팔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잘 들리지 않지만 괜찮아! 어디선가 ‘펑!’하는 소리가 나더니 불길이 치솟았어. 기차 안에 꾸며 은 내 작은
실험실에서 폭발이 일어났던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 내가 기차에서 실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친절한 차장 아저씨도 이때만큼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쳤어. “나쁜 놈! 너 때문에 내가 일터에서 쫓겨나게 생겼잖아!” 차장 아저씨는 내 뺨을 때리더니 나를 기차에서 내쫓았어. 뺨을 너무 세게 맞았는지 이제 내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하지만 괜찮아.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실험에만 힘을 쏟을 수 있으니까. 전신 기술을 배우다. 그 뒤로 에디슨은 기차에서 실험을 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신문은 계속 팔 수 있었어요. 하루는 에디슨이 신문 뭉치를 들고 기차역에서 잠깐 쉬고 있었어요. 그때 철길 위로 귀여운 꼬마가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어요. 에디슨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꼬마야, 위험해!” 바로 앞에서 기차가 무척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어요. 에디슨은 잽싸게 달려가 꼬마를 안고 철길에서 빠져나왔어요. 아이의 아버지가 놀라서 헐레벌떡 달려왔어요. “에디슨, 정말 고맙네.” 에디슨은 깜짝 놀랐어요. 아이의 아버지가 기차역의 역장인 거예요. “내 아들을 살려 주어서 정말 고맙네.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네.” 역장은 고마워하며 에디슨에게 전신 기술을 가르쳐 주었어요. 에디슨은 역장의 도움으로 전신 기사로 일할 수 있었지요. 에디슨은 전신 회사에서 밤부터 아침까지 일했어요. 전신 회사에서는 밤에 일하는 전신 기사가 졸까 봐 걱정했어요. 그래서 전신 기사에게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신호를 보내라고 했지요. ‘신호가 저절로 가게 할 수는 없을까?’ 에디슨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 책 읽는 데 거슬리자 편한 방법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 시간마다 전신 회사에 저절로 신호가 가도록 전신기를 바꾸어 만들었지요. 그런데 그만 감독관에게 들켜 전신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전신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어요. 전신기를 다루어 본 것을 바탕으로 이중 전신기와 인쇄기를 발명했으니까요. 축음기를 발명하다. 에디슨은 전신기와 인쇄기를 발명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 이제부터 제대로 발명을 해 보자.” 에디슨은 발명에 자신이 생기자 실험실과 공장을 짓고,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어요. 그런데 에디슨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종종 불편했어요. ‘소리를 기계에 담아서 필요할 때마다 들을 수는 없을까?’ 그러던 어느날, 연구를 하던 에디슨이 실험실 직원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러고는 앞에 놓여 있는 기계의 손잡이를 돌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메리는 아기 양을 가지고 있네.” 어리둥절해하는 직원들을 보며 에디슨은 기계에 있는 단추를 눌렀어요. 그랬더니 기계에서“메리는 아기 양을 가지고 있네.”하고 에디슨의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지요. 직원들은 깜짝 놀랐어요. 에디슨은 이 말하는 기계를 ‘토킹 머신’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이것이 세계 최초의 축음기랍니다. 축음기의 발명. 그냥 장난삼아서 연필 두 자루를 쥐고 글씨를 써 보았어. 그랬더니 글씨가 두 겹으로 써지더라고. 그때 ‘소리도 이렇게 복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연필을 대신할 물건으로 가느다란 바늘을 골랐어. 바늘을 진동판에 연결하고, 구리 원기둥에 은종이를 감았지. 그러고는 바늘을 대고 원기둥을 돌려 소리의 세기에 따라 홈의 깊이를 다르게 만들어서 소리를 담아 두었어. 그 홈에 다시 바늘을 대었더니 소리가 났어. 드디어 축음기가 만들어진 거야! 어떤 사람은 귀가 잘 안 들리는 내가 소리 내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신기해 했어.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소리 내는 기계가 더 필요했지. 내 장애는 오히려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 수 있게 한 행운이야. 전구를 발명하다. 어느 날, 에디슨의 어머니가 책을 읽다가 말했어요. “밤에는 어두워서 책을 볼 수 없어 속상하구나.” 에디슨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어요. 때마침 마당에 있는 반딧불이가 에디슨의 눈에 들어왔지요. ‘그래, 저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물건을 만들어야겠다!’ 에디슨은 그날부터 곧바로 연구를 시작했어요. 전구 발명. 전기는 번개와 비슷하니까 열과 빛이 있다고 생각했어. 부싯돌도 두 개를 맞부딪히면 불꽃이 일어나잖아? 이 원리를 이용해서 실험을 해보았어. 먼저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하려고 동그란 유리공을 만들었지. 그러고 나서 유리 공 안에 질소를 넣고, 실을 백금과 연결해서 함께 넣었지. 그렇게 만드니까 실이 질소와 부딪히며 빛을 내기 시작하더라고. 빛이 나는 순간 어찌나 기쁘던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 나는 이 물건에 ‘전구’라는 이름을 붙였어. “세상에! 빛이 유리 공 안에 들어 있어요!” 사람들은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전구는 몇 시간 밖에 빛을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에디슨은 오랫동안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려고 계속해서 실험을 했어요. 실패한 게 아니야! 전구가 빠지직거리더니 ‘펑!’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폭발했어. “에디슨! 또 시작이야? 벌써 천 번이 넘게 실패했잖아.” 친구 바첼러는 내가 전구 발명에 매달리는 걸 걱정하더라고. 하지만 나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전구가 만들어지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야. ‘질소양이 너무 많았나?’ 나는 화상을 입을 뻔한 것도 잊은 채 다시 생각에 잠겼어. ‘그래, 탄소야! 백금 말고 탄소로 실험을 해 보자!’ 탄소가 정답이었어. 전구는 15시간이 지나도 켜져 있었거든. 세계 최고의 발명가로 우뚝 서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해서 세계 최고의 발명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어요. 그러나 에디슨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하루 내내 연구만 했거든요. “실험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시나요?” 한 기자가 묻자 에디슨이 웃으며 대답했어요. “다시 들어가서 실험을 해야지요. 당연하지 않나요?” 에디슨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어요.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에디슨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한 말처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발명가로 우뚝 섰답니다. |
마리 퀴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마냐. “마냐, 이리 와서 아빠 일 좀 도와줄래?” 마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을 꺼내 읽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불렀어요. “읽던 것만 마저 읽고 도와드리면 안 돼요?” “책은 그만 읽고 어서 이리 오렴.” 마냐가 마지못해 책을 덮고 일어섰어요. 아버지는 마냐에게 꽃에 물을 주라고 시켰지요. “마냐가 몸이 너무 약해졌어. 쯧쯧.” 아버지는 마냐가 방에서 꼼짝 않고 책만 읽는 것이 걱정스러웠어요. 하지만 마냐는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어느 날, 마냐가 다니는 학교에 러시아 장학관이 들이닥쳤어요. 마침 폴란드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놀라서 소리쳤지요. “어서 책을 숨기고, 바느질 도구를 꺼내도록 하세요!” 곧바로 러시아 장학관이 교실로 들어왔어요. 장학관은 교실을 한번 쭉 둘러보더니 마냐에게 물었지요.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시지?” 그때 폴란드는 러시아가 다스리고 있었어요. 폴란드에서 태어난 마냐는 러시아 황제가 다스린다고 대답하기 너무 싫었어요.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말해야만 했으니까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폐하이십니다.” 마냐의 대답에 장학관이 흐뭇하게 웃으며 교실을 나갔어요. 하지만 선생님도 아이들도 마냐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지요. 희망과 용기를 가지다. 마냐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공부를 무척 잘했어요. 하지만 폴란드에는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없었어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소르본 대학교는 여자가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마냐는 집이 가난해서 다닐 수 없었지요.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싶다.’ 마냐는 브로냐 언니에게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브로냐 언니도 파리에 가고 싶어 했어요. “그럼, 언니가 먼저 파리로 가. 내가 일해서 언니한테 돈을 보낼게.” “아니야. 미안해서 어떻게 그러니?” “괜찮아. 언니가 먼저 파리로 가서 자리를 잡아. 그러고 나서 나를 도와주면 되잖아.” 브로냐 언니는 파리로 떠나고, 마냐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폴란드 사람들이 똑똑해지면 독립을 하려고 나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럴수록 마냐는 더욱 열심히 폴란드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마냐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파리에 있는 브로냐 언니에게 보냈어요. ‘브로냐 언니, 열심히 공부해. 우리에게는 꿈이 있잖아.’ 편지를 보내는 마냐도 하루빨리 파리에서 공부하고 싶었지요. 꿈에 그리던 파리로 가다. ‘마냐, 이제 파리로 와.’ 드디어 브로냐 언니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깐이었어요. 브로냐 언니와 결혼하기로 한 폴란드 청년이 독립운동가였거든요. 그래서 러시아 경찰한테 잡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였어요. ‘내가 파리에서 아무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마냐는 아버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아버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버지는 마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어요. “마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파리에서 폴란드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렴.” 마침내 마냐는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을 사람들은 왜 따분하다고 할까?’ 가난한 마냐는 하루에 달걀과 초콜릿을 하나씩만 먹으며 공부했어요. ‘이렇게 먹으면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어.’ 하지만 돈을 아끼느라 추운 겨울에 난로조차 피우지 않아서 건강이 나빠졌어요. 친구들이 걱정하며 물었지요. “마냐, 아파 보여. 괜찮니?” “괜찮아. 잠을 조금밖에 못 자서 그런가 봐.” 결국 마냐는 대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가난에 쫓기면서도 좋아하는 연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마리 퀴리.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마냐는 프랑스 공업진흥협회에서 연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하지만 연구를 할 만한 실험실이 없었지요. “코바르스키 교수님, 실험실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내가 아는 프랑스 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라면 실험실을 빌려 줄 것 같네. 내일 한번 만나 보게나.” 다음 날 마냐는 코바르스키 교수를 찾아갔어요. 거기에는 한 남자가 유행이 지난 헐렁한 옷을 입고 서 있었어요. “인사하게나. 이 사람이 피에르 퀴리라네.” 마냐는 피에르 퀴리를 바라보았어요. 그러자 피에르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지요. “실험실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제 실험실을 쓰세요.” 그때부터 마냐는 피에르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했어요. 마냐와 피에르는 날마다 함께 연구를 하면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지요. “마냐! 나와 결혼해서 함께 과학 연구에 힘씁시다.” 피에르가 마냐에게 청혼을 했어요. 마냐는 피에르를 사랑했지만 망설였어요. 피에르와 결혼하면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야 했으니까요. 고민하는 마냐에게 가족들이 말했어요. “마냐, 피에르와 함께 과학을 연구하는 것도 폴란드를 빛내는 일이란다.” 결국 마냐는 피에르와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과학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며 자전거 여행을 떠났지요.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다. 피에르와 결혼하면서 마냐의 이름도 바뀌었어요. 폴란드의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에서 프랑스의 ‘마리 퀴리’로 말이에요. 피에르는 아내 마리의 손을 꼭 잡고 말했어요. “단 일 분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연구에 매달립시다.” “그래요. 시간을 아끼면서 연구해요.” 퀴리 부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했어요. 얼마 뒤, 첫딸 이렌이 태어났어요. 마리는 집에서는 상냥한 아내와 엄마였어요. 또한, 실험실에서는 훌륭한 과학자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답니다. “찾았다! 이건 엄청난 발견이야!” 마침내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라는 광석에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방사능을 내뿜는 원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마리는 첫 번째로 발견한 원소에 이름을 붙였어요. “폴란드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하겠어요.” 마리는 고생해서 발견한 새로운 원소를 조국 폴란드에 바쳤어요. 아직 정확하게 밝히지는 못했지만, 나머지 원소에도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과학자들은 퀴리 부부의 연구에 관심을 보였어요. 하지만 새 원소인 라듐이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지요.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듐을 만들려면 피치블렌드가 아주 많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피치블렌드는 너무 비쌌어요. 그래서 가난한 퀴리 부부는 살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마리의 친구가 도와주어서 광산에 버려진 피치블렌드 찌꺼기를 얻을 수 있었지요. 그 뒤로 몇 년 동안, 퀴리 부부는 라듐을 얻어 내려고 피치블렌드 찌꺼기를 끓이고 휘젓는 고된 작업을 되풀이했어요.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다. 드디어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에서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라듐을 떼어 냈어요. 이제 모든 과학자가 라듐이 있다는 걸 믿었지요. 1903년, 퀴리 부부는 라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여자가 노벨상을 받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지요. 피에르는 노벨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만약 라듐을 나쁜 사람이 쓴다면 얼마나 위험할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고 저는 믿습니다.” 퀴리 부부가 라듐을 발견한 뒤로 방사능 연구가 활발해졌어요. 라듐이 암을 고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퀴리 부부를 찾아왔지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라듐을 만들어 주세요.” 하지만 퀴리 부부는 힘들게 알아낸 연구 결과를 아무런 대가 없이 세상에 알렸어요. 라듐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만들어 쓸 수 있게요. 퀴리 부부는 비가 새는 허름한 실험실에서 깨끗하고 좋은 실험실로 옮긴 것만으로 행복했답니다. 하루 내내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이었어요. 마리는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슬픔에 빠진 마리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일찍이 피에르와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어요. “만약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은 연구를 계속합시다.” 마리는 연구를 다시 시작했어요. 소르본 대학교 첫 여성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바쁘게 생활했지요. 1911년, 마리는 금속 라듐을 만들어서 다시 노벨 화학상을 받았어요. 피에르의 꿈이었던 라듐 연구소도 세웠고요. 하지만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연구소 문을 닫아야 했지요. 마리는 전쟁 때문에 몸속에 총알이 박힌 군인들을 라듐을 이용한 엑스선 기계로 살려냈어요.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을 했어요. 마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깐이었어요. 마리는 오랫동안 방사능을 쬐어 백혈병에 걸렸거든요. 결국 마리는 사랑하는 남편 피에르 곁에 묻혀 편안히 눈을 감았답니다. |
아인슈타인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부스스한 머리에 혀를 날름 내밀고 있는 괴짜 할아버지. 이 괴짜 과학자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에요.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은 널리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상대성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상대성 이론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이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이론을 생각해 낸 아인슈타인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일까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마땅히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죽고 나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뇌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고 해요. 아인슈타인이 특별하게 머리가 좋아서 어려운 이론을 알아낸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한 학생이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훌륭한 과학자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지요. “참는 것! 참고 나서 조금만 더 참는 거야. 나도 특별한 재능이 있지는 않았단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많은 호기심을 풀려고 끈기 있게 노력했을 뿐이지.” 별난 아이가 태어나다. “응애!” 독일의 작은 도시 울름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할머니는 아기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어요. “아기가 너무 뚱뚱하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른 아기들보다 몸집이 크고, 머리 모양도 울퉁불퉁했어요. 게다가 세 살 때까지 말도 못했어요. 아인슈타인은 학교에 들어가서도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요.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걸 좋아했지요. 아인슈타인은 호기심도 많았어요. 하루는 삼촌 야코프가 친구와 대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 때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인슈타인이 물었지요. “삼촌, 대수가 뭐예요?” “이를테면 이름을 모르는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즐거운 수학 놀이란다. 이름을 모르니까 먼저 사냥감에 X(엑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거야. 그러다가 사냥감을 잡으면 올바른 이름을 찾아주는 거지.” 아인슈타인은 야코프의 설명을 듣고 수학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어린아이가 어려운 수학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 보며 참 별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야코프는 아인슈타인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아버지는 아인슈타인에게 나침반을 사다 주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나침반을 뒤집어도 보고, 휙휙 흔들어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나침반을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바늘이 늘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바늘이 북쪽만 가리키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걸까?’ 아인슈타인은 나침반에 숨어 있는 비밀이 무척 궁금했어요.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열심히 과학 공부를 했지요. 결국 아인슈타인은 ‘보이지 않는 힘’을 연구하는 뛰어난 물리학자가 되었답니다.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이나 과학 공부는 아주 잘했지만, 다른 과목은 성적이 나빴어요. 그래서 대학도 겨우 들어갔지요. 난 아인슈타인이야. 나에게 도움을 준 좋은 친구들을 소개할게. 난 아인슈타인과 취리히 공과대학을 같이 다닌 마르셀 그로스만이야. 연구에 빠져서 수업을 빼먹던 아인슈타인에게 수학 공책을 빌려 주기도 했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을 때, 특허 사무소를 소개해 준 사람도 나야.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모범생 그로스만을 만났어요.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베소와 아들러를 만났지요. 아인슈타인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보냈답니다. 안녕? 난 아인슈타인과 함께 특허 사무소에서 일한 미하엘 베소야. 우리는 같이 공부도 하고, 토론도 했지. 아인슈타인은 나와 토론을 하다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만드는 데 중요한 생각을 떠올렸어. 내 소개를 할 차례군. 난 정치인 프리드리히 아들러야. 아인슈타인이 특허 사무소를 그만두고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교수로 있을 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 아인슈타인 가족에게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가까운 아파트를 빌려 주기도 했지. 아인슈타인은 주말마다 친구들과 함께 산이나 들로 놀러 다녔어요. 또 서로의 집에 모여서 밥을 먹으며 수학과 과학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아인슈타인은 이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라고 이름 붙였어요.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아인슈타인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었어요.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논문을 쓰면 늘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생각을 물었어요. 아,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만난 친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어요. 바로 밀레나예요. 아인슈타인은 똑똑하고 상냥한 밀레나를 좋아했어요. 나중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지요. 밀레나는 친구로서, 애인으로 서, 아내로서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힘껏 도왔답니다. 아인슈타인, 노벨상을 타다! 아인슈타인은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는 걸 좋아했어요. 돈이 많거나 커다란 집에서 사는 것도 원하지 않았지요.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였어요. 한참 강의를 하던 아인슈타인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헐레벌떡 연구실로 뛰어갔어요. “아인슈타인 교수님은 참 엉뚱해!” “맞아. 헝클어진 머리 모양도 정말 우습잖아.” 학생들은 허둥지둥 연구실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인슈타인을 보며 웃었어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이론을 계속 내놓자 놀라서 말했지요. “과연, 아인슈타인 교수님은 천재 과학자야!” 다른 과학자들이 아주 놀란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에요. “해 가까이에 있는 별은 해가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별빛이 휜다고?”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에딩턴은 직접 별을 관찰해 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햇빛이 너무 강해서 해 가까이에 있는 별을 볼 수가 없었어요. “맞아! 달이 해를 완전히 가리는 개기 일식 때에는 하늘이 어두워지니까 해 가까이에 있는 별을 볼 수 있을 거야.” 에딩턴은 달이 해를 완전히 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별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원래 별자리와 사진으로 찍은 별 위치를 비교해 보았지요. “우아, 정말 별 위치가 다르게 보이잖아! 우리에게 별빛이 휘어져 들어온다는 이야기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맞았다고!” 이 소식은 신문에 실리면서 세계 곳곳으로 전해졌답니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여러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만 하다가 드디어 광전 효과 법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그 뒤로 아인슈타인은 더욱 더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강연을 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아인슈타인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으며,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답니다. 기자들은 재치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엉뚱한 질문을 해댔어요. “지구 말고 다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요?”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까요?” 아인슈타인은 어떤 질문에도 재치 있게 대답했어요. 그러고는 아내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지요. “이 친구들 질문에 모두 대답하면 도서관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아인슈타인의 똑똑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가 신문을 통해 널리 퍼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물어 왔지요. 아인슈타인은 사람들이 보낸 편지 하나하나에 정성껏 답장을 해 주었어요.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수학 때문에 고민하는 한 아이가 보낸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냈어요.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였지요. 비브라, 너의 정다운 편지는 잘 받았단다. 아저씨는 지금까지 영웅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영웅이라고 칭찬해 주니 정말 영웅이 된 것만 같구나. 미국 대통령으로 뽑히면 이런 기분이 들려나? 참, 수학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은 이 아저씨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아저씨도 늘 수학 때문에 머리가 아프단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건 수학이 아니야. 수학은 반드시 풀리는 것이라고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 늘 너에게 좋은 일이 함께하기를 바란단다. 1943년 1월 7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바이올린을 켜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과학 연구 못지 않게 바이올린 켜는 것을 좋아했어요. 물론 바이올린 연주 실력도 아주 뛰어났지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인슈타인이 바이올린 켜는 걸 좋아한 건 아니에요. 어렸을 때에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싫어서 도망 다니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바이올린은 아인슈타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였답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하다가 막히면 바이올린을 연주했어요.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래, 바로 그거야!” 하고 외치며 다시 연구실로달려갔지요. 또 아인슈타인은 어디를 가더라도 늘 바이올린을 챙겼어요. 걸핏하면 열쇠를 잃어버릴 정도로 기억력이 나빴지만,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어떤 사람이 할아버지가 된 아인슈타인에게 물었어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차르트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음악을 좋아했답니다. 평화를 꿈꾸며 전쟁을 반대하다. 아인슈타인이 어렸을 때, 독일 사람들은 군인을 존경했어요. 독일 군대가 프랑스를 이기고 땅을 넓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독일 남자 아이들 대부분은 꿈이 군인이었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부터 전쟁을 일으키는 군대가 싫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이좋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평화 운동을 많이 벌였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거든요. 얼마 뒤, 끔찍했던 전쟁은 끝났지만 아이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갔어요. 거리에는 거지와 도둑이 넘쳐 났고요.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세상이 힘들어진 이유가 유대인 때문이라고 우겼어요. 진짜 이유는 전쟁 때문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유대 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은 ‘상대성 이론’이 다른 사람의 업적이라며 따돌리기까지 했지요. 나치스는 아인슈타인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목숨처럼 아끼는 바이올린도 빼앗아 갔지요. 아인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독일을 떠나야만 했답니다. 한편, 독일은 나라 사정이 점점 나빠졌어요. 나치스를 이끄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켰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끔찍한 소문을 들었어요. 독일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원자 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아인슈타인과 평화를 사랑하는과학자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어 더 끔찍한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독일은 원자 폭탄을 만들지 못하고 항복했어요. 그러나 일본은 끈질기게 전쟁을 계속했고, 결국 미국은 원자 폭탄을 만들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렸답니다. “오, 맙소사!” 아인슈타인은 너무나 괴로웠어요. 누구보다 전쟁을 반대했는데, 자기가 만든 상대성 이론이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쓰였거든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만든 이론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되었구나.’ 전쟁이 끝나고 아인슈타인은 원자과학자비상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어요. “핵전쟁이 일어나면 이 세상에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원자 폭탄을 만들면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평화 운동을 벌여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해주었어요. 자기 몸을 돌볼 틈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져, 결국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숨을 거두는 날까지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어요. 1955년 4월 18일, 조용히 세상을 떠난 아인슈타인의 침대 위에는 과학 이론을 계산하다가 둔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오랜 옛날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의 생활을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새롭게 달라진 세상에 크게 놀랄 거예요. 이처럼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이론도 엄청 새로운 것이라서 그때 과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리고 상대성 이론은 우리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았지요.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이 이론을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해서 1916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 있어요. 그때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은 변하지 않고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확한 시계와 자만 있으면 누구든지 똑같이 잴 수 있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달랐어요.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이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이랍니다. 우주선 여행을 예로 들어 볼게요. 빛은 이 세상 무엇보다 속도가 빨라요. 만약 빛과 같은 속도로 우주선을 타고 1시간 동안 우주 여행을 다녀 왔다면, 지구에서도 1시간이 흘렀을까요? 아니에요. 지구에서는 며칠, 몇 년이 지났을 수도 있어요. 우주선이 매우 빠르게 움직여서 지구보다 우주선 안의 시간이 느리게 간 거예요.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것이지요. 혹시 아스팔트 바닥에 길게 쓰여 있는 글씨를 본 적이 있나요? 이 기다란 글씨를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면, 차 밖에서 본 것보다 길이가 짧게 느껴질 거예요. 왜냐하면 속도가 빨라질수록 물체 길이가 줄어들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시간, 공간, 운동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랍니다. 상대성 원리가 숨어 있는 영화.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을 이용하면 자유롭게 과거와 앞날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타우 제로(1970년), 영원한 전쟁(1975년), 백 투 더 퓨쳐(1985년), 로스트 인 스페이스(1998년), 혹성 탈출(2001년) 같은 과학 영화를 만들었답니다. 물리학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과학 발전의 밑바탕을 만드는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요. 물질은 모든 물체 즉 사람과 동물,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해요. 이러한 물질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나타내는 현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운동을 하는지, 물질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히고 연구하는 일을 해요. |
신사임당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그림 솜씨가 빼어난 아이. "인선이는 무얼 하느라 방에서 종일 꼼짝을 안 하느냐?" 아버지 신명화가 신인선의 방에 들어서며 물었어요. "안견의 산수화를 본떠 그림을 그려 보았어요." 신인선은 그림 한 폭을 살그머니 아버지 앞으로 내밀었어요. "아니, 이게 정말 네가 그린 그림이더냐?" 신인선의 그림을 본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일곱 살짜리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거든요. 신인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어요.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따라 하기보다는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려고요. 부끄럽지만 제 호도 지어 보았어요." "스스로 호를 지었단 말이냐? 그래, 무엇이라 지었느냐?" "사임당이라 지었어요." 이처럼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신인선이 바로 현모양처로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이에요. 신사임당은 강릉 북평촌의 조용하고 아담한 오죽헌에서 태어났어요.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가였지요.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대부분 시집에 가서 살았어요. 하지만 외동딸은 결혼한 뒤에도 친정에 머무르며 아들 노릇을 하기도 했지요. 신사임당의 어머니도 외동딸이라서 결혼하고도 친정 오죽헌에 머물렀어요. 그래서 신사임당도 어머니와 함께 오죽헌에서 지냈지요. 부지런히 그림과 글을 배운 신사임당은 지혜로운 아이로 자랐답니다. 바다같이 마음이 넓은 사람과 짝을 이루다. "여보, 인선이 나이가 어느새 열아홉이구려. 이제는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해야 할 텐데." 아버지가 걱정하며 말하자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사실 우리 인선이가 학문과 그림 솜씨가 뛰어나 결혼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많지요.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청년이 없으니어쩌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한양에서 마음에 꼭 드는 청년을 만났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이원수라는 청년이었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신사임당을 불러 물었어요. "내가 한양에서 사람됨이 올바르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청년을 만났소. 나이는 스물두 살이라 하오. 인선이와 짝을 지어 주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사람됨만 훌륭하다면 괜찮지요." "인선아, 네생각은 어떠하냐?" "저도 어머님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얼마 뒤, 신사임당은 이원수와 결혼을 했어요. 결혼식은 그때 풍습대로 신부 집에서 치렀지요. 사흘이 지나고, 신사임당은 남편과 함께 한양으로 떠날 준비를 했어요. 이제는 부모 곁을 떠나 시집으로 가야 했으니까요. ‘아버님 건강은 괜찮으실까.’ 신사임당은 몸이 아픈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답니다. 이원수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인사를 올리자 아버지가 힘겹게 말했어요. "여보게, 인선이는 총명해서 참 아끼는 딸일세. 행복하게잘살아야하네." 아버지는 슬픔에 잠겨 말을 잇지 못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이원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지요. "아버님, 한양에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아버님의 병환이 좋아지면 그때 안사람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남편의 따스한 마음 덕분에 신사임당은 계속 친정에 남을 수 있었어요. 애틋하게 어머니를 그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났어요. 신사임당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동생들을 보살피며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렀지요. 삼년상을 마치자 어머니가 신사임당을 조용히 불렀어요. "얘야, 이제 시댁에 가서 살아라. 계속 친정에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구나." 신사임당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어요. 하지만 어머니 말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집을 향했지요. 시집에서 남편과 살 때에도신사임당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어요. 신사임당은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랬답니다. 대관령을 넘으면서.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이 몸 혼자 서울로 떠나는 마음. 돌아보니 고향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 날고 산은 저무네. 어머님을 그리며. 머나먼 내 고향 집은 첩첩 산 넘어 언제나 꿈속에서 달리는 마음. 한송정 언저리에는 외로운 달 뜨고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톱에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는 파도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 길을 다시 찾아가 때때옷 입고 슬하에서 바느질하랴. 신사임당이 어머니를 그리워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집안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 딸은 공부 시키지 않았어요. 그러나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달랐어요. 신사임당의 재능을 알아보고 칭찬했지요. "인선아, 그림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여자도 글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글을 모르면 세상을 반 밖에 모른단다." 이처럼 어머니는 따뜻하고, 사랑이 깊었어요. 신사임당은 누구보다 어머니를 따르고 그리워했지요. 지혜로운 아내와 어진 어머니. 하루는 시집에서 잔치를 크게 벌였어요. 잔치에 온 신랑 친구들은 이원수에게 짓궂은 부탁을 했지요. "여보게, 자네 부인이 그림을 잘 그린다던데, 한번 보여 주게나." 이원수는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하인을 불러 신사임당의 그림을 가져오라고 일렀지요. 하인은 얼른 달려가 신사임당에게 말했어요. "마님, 나리께서 그림 한 장을 그려서 보내라 하십니다." 신사임당은 고민에 빠졌어요. 그때만 해도 집안 여자가 그림을 그린다고 종이를 펼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났거든요. 더군다나 여자의 그림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요. 신사임당이 잠시 생각하더니 하인에게 일렀어요. "놋 쟁반 하나를 가지고 오너라." 놋 쟁반 위에 그림을 그리면 종이를 펼칠 필요가 없고, 그림이 집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지요. "정말 소문대로 훌륭한 그림일세!" 사람들은 놋 쟁반 위에 그린 그림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답니다. 이원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어요. 바로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이었지요. 신사임당은 안타까워하다가 굳게 마음먹고 말했어요. "서방님의 사람됨은 훌륭하나 의지가 약해 학문이 늘지 않는 듯합니다. 앞으로 십 년 동안 헤어져 지내고, 서방님이 학문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이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떠났지만, 이내 마음이 약해졌어요. 결국 대관령을 넘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지요. "여보, 굳이 떨어져서 살 이유가 무엇이오? 내 앞으로는 당신 곁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으리다." 신사임당은 잠자코 말을 듣고 있다가 가위를 꺼내 들었어요. "서방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차라리 머리를 자르고 절에 들어가겠습니다." 신사임당이 딱 부러지게 말하자 이원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집을 떠나 학문에 힘썼지요. 신사임당은 세상 이치에도 밝았어요. 이원수의 당숙인 이기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였어요. 그때 이기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지요. 신사임당은 당숙인 이기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이원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서방님, 영의정 댁에는 발길을 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영의정은 내 당숙이 아니오?" 이원수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어요. "당숙은 사람을 해치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영의정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많지요. 만약 당숙이 권세를 잃으면 주위 사람들이 크게 어려울 것입니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말을 따라 이기를 만나지 않았어요. 곧 피비린내 나는 다툼이 일어났어요. 이기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 모두가 죽거나 귀양을 갔지요. 그러나 이원수는 지혜로운 아내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답니다. 신사임당은 남편뿐만 아니라 일곱 아이들도 바르게 이끌었어요. 신사임당은 늘 책을 가까이하며 아이들이 보고 배우게 했지요. "어머니, 책은 왜 읽는 것인가요?" "훌륭한 책에는 옛 성현의 말씀이 담겨 있거든. 뜻을 세우려면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단다." 또한, 딸들이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가르쳤어요. "가정을 꾸려 나가려면 여자가 지혜로워야 한단다. 늘 열심히 배우고 자신을 가다듬어라." 신사임당은 늘 바르게 앉아 책을 읽으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남편 이원수는 신사임당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웃음 지었어요. "허허, 여보. 내가 당신에게 배우는 게 참 많구려." 이원수와 아이들은 신사임당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본받으려 노력했지요. 아이들은 지혜를 겨루는 부모를 보며 학문과 예술을 갈고 닦았어요. 맏딸 이매창은 신사임당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 자수, 바느질에 뛰어났어요. 신사임당은 늘 매창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지요. "네가 그림에 재능이 있어 기쁘단다. 네 그림은 섬세하면서도 따뜻한느낌이드는구나."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주기도 했지요. "이 벌레는 다리가 어색하구나. 다시 잘 살펴보고 그려 보렴." 특히 셋째 아들 이이는 훗날 ‘겨레의 스승’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학자로 자랐어요. 이이는 존경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절에 머물기도 했지요.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생각하며 이런 글을 남겼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럽게 말씀하셨고, 집안이 화목하도록 힘쓰셨다. 우리 가족 모두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다.’ 이처럼 신사임당은 아이들에게 훌륭한 스승이자 따뜻한 어머니였답니다. 그림에 지혜를 담은 예술가, 신사임당. 어느 날, 신사임당은 잔칫집에서 부인들과 음식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자 하인이 음식을 나르다가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졌어요. 그 바람에 음식이 어느 부인의 치마에 쏟아졌지요. "어이구, 이를 어찌하나? 빌려 입은 비단 치마가 얼룩졌으니." 부인은 얼룩진 치마를 움켜잡고 어쩔 줄 몰랐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고 잔치에 왔거든요. 신사임당은 울먹이는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어요. "부인, 제게 생각이 있으니 치마를 잠시 벗어주십시오." 그러고는 여자 하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일렀지요. "어서 가서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 신사임당은 붓을 먹에 적셔 얼룩진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덩굴에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그림이었지요. 지켜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세상에! 치마의 얼룩이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싱싱한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네. 정말 멋진 포도 그림이야!" 신사임당은 부인에게 치마를 주며 말했어요. "이 치마를 시장에 내다 파세요." 부인이 치마를 시장에 내놓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사람들은 치마를 서로 사겠다고 했지요. "정말 잘 그렸네요! 꼭 진짜 포도 같아요. 먹고 싶어서 침이 다 고여요." "내가 사겠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나한테 파시오!" 부인은 포도가 그려진 치마를 팔았어요.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만큼 많은 돈이 생겼답니다. 신사임당은 나날이 그림 솜씨를 키웠어요. 마당에 핀 꽃을 보며 곱고 가늘게 그림으로 옮겼지요. 하루는 맏딸 이매창이 신사임당에게 물었어요. "어머니, 이 그림은 색깔이 참 곱고 아름다워요. 서로 다른 색깔이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까요?" "무엇이든지 잘 살펴보고 꼼꼼하게 그려 보아라. 자연의 빛깔은 거짓 없이 옮기면 저절로 아름다워진단다." 맏딸 이매창은 풀벌레 그림을 가만히 살펴 보았어요. 그림 속에 있는 풀벌레는 무언가를 하느라 바빠 보였어요. 이매창은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신사임당에게 말했지요. "어머니, 풀벌레가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저도 어머니처럼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사물을 자세히 관찰해야겠어요. 그럼 제 그림도 살아 있는것처럼느껴질거예요." 특히, 신사임당이 그린 여덟 폭 병풍의 풀벌레 그림은 산뜻한 색과 가늘고 고운 선으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오늘날에도 신사임당의 풀벌레 그림을 보면 소박하고 따뜻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답니다. 조용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다. 이원수는 느즈막하게 벼슬길에 올랐어요. 그러면서 어렵던 살림이 차츰 좋아졌어요. 신사임당이 마흔여덟 살 때에는 삼청동으로 이사도 했지요. 수운판관인 이원수는 그해 여름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가져오려고 평양으로 길을 떠났어요. 맏아들 이선과 셋째 아들 이이도 함께였지요. 넓은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보라며 신사임당이 보냈던 거예요. 그런데 이원수와 두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들었어요. 신사임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거예요. 이원수는 아내의 소식을 듣고, 털썩 주저앉았어요. "이제야 벼슬길에 올라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려 했건만, 이 무슨 날벼락이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두 아들도 목 놓아 울었어요. "어머니, 어찌 저희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 훌륭한 예술가이자, 지혜로운 아내, 좋은 어머니였던 신사임당은 이렇게 조용하고 쓸쓸히 짧은 생을 마쳤답니다. |
허난설헌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글재주가 뛰어난 아이. 오늘도 허엽 대감의 집은 아들들이 책 읽는 소리로 가득했어요. 한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요. ‘아, 나도 오빠들과 어울려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여자아이는 책 읽는 소리를 따라 읊어 보았어요. 네, 이 여자아이가 바로 허난설헌이예요. 허난설헌은 조선 명종 때 외할아버지 집인 강릉에서 태어났어요. 허난설헌의 본이름은 허초희랍니다. 허난설헌은 스스로 붙인 호인데, 본 이름보다 더 널리 알려졌지요. 허난설헌의 집안은 이름이 높았어요. 남자 형제들도 똑똑하기로 소문이 났지요. 허난설헌도 남자 형제들 못지않게 똑똑했지만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는 공부를 자유롭게 배울 수 없었거든요. 허난설헌은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며 생각했어요. ‘나도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고,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내 마음을 담은 시를 쓰고,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 허난설헌은 신선이나 선녀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하늘 위 세상을 시로 자주 썼지요. "오라버니, 제가 글을 한 편 썼는데 읽어 보시겠어요?" 허난설헌은 한자로 광한전 백옥루상량문이라는 글을 써서 오빠 허봉에게 보여 주었어요. 허봉은 허난설헌과 열두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답니다. 하지만 여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지요. 은빛 누각이 해에 반짝이니 노을 난간은 이 세상을 벗어난 것처럼 아름다워요. 신선이 나팔을 불어 구슬 기와 궁전을 짓고, 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훅 불어 구슬 나무 궁전을 지었어요. "대단하구나! 아이가 이 글을 썼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허봉이 칭찬하자, 허난설헌은 기뻐서 두 뺨이 붉게 물들었지요. 다른 사람들도 허난설헌의 글을 읽고 크게 칭찬했어요. "허허, 상상력이 넘치는 글이야. 참 잘 썼어!" 허난설헌은 글재주가 뛰어난 소녀로 널리 널리 알려졌어요. 하루는 오빠 허봉이 사랑채 곁을 서성이는 허난설헌을 보았어요. 허봉은 글벗 이달과 시를 쓰다가 바람을 쐬러 나온 길이었지요. "오라버니, 저도 시 쓰는 것을 배우고 싶어요." 허난설헌이 부탁하자, 허봉이 이달에게 말했어요. "우리 누이동생에게 시를 가르쳐 주겠나? 우리 동생은 똑똑해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칠 걸세. 두고 보게. 앞으로 아름다운 시를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할걸!" 그날부터 허난설헌은 이달에게 시를 배웠어요. 허난설헌은 이달을 따르며 나날이 좋은 시를 썼지요. 집안에서는 허난설헌이 맘껏 시를 쓸 수 있게 도왔어요. 허난설헌은 형제들과 함께 책도 읽고, 오순도순 시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시를 쓰며 행복해하다. 허난설헌이 봉숭아로 손톱에 물을 들이고 있을 때였어요. 동생 허균이 살그머니 다가와 빙그레 웃었지요. "누님은 봉숭아 물들일 때도 시가 떠오르지요?" 허난설헌은 생긋 웃더니 금세 시 한 수를 지었어요. "풀잎을 뜯을 때는 붉은 호랑나비가 나는 듯하고, 가야금을 탈 때는 복숭아꽃 잎이 날리는 듯하여라." "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봉숭아로 붉게 물들인 손으로 풀잎을 뜯으면, 움직이는 손이 붉은 호랑나비가 나는 듯하다는 거지요? 그리고 가야금을 타면 살랑살랑 움직이는 손이 복숭아꽃 잎 같다는 말이지요?" "맞아. 내 시를 잘 아는구나." "그럼요. 제가 누님 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허난설헌과 허균은 환히 웃었어요.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었어요. 그네뛰기 노래. 이웃집 친구와 그네를 뛰었어요. 띠를 매고 수건을 쓰니 신선이 노는 것 같았지요. 바람을 일으키며 오색 그넷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데, 우거진 버드나무 위로 잘랑잘랑 노리개 소리만 흩날려요. 허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결혼했어요. 그때는 결혼을 참 일찍 했지요. 남편은 김성립이라는 선비였어요. 허난설헌은 결혼을 앞두고, 가슴이 두근댔어요. ‘나의 낭군은 어떤 사람일까?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그럼 내가 쓴 시도 좋아하겠지. 아, 빨리 만나고 싶어!’ 연꽃을 따며. 고요한 가을 호수는 푸른 옥처럼 반짝여요. 연꽃 흐드러진 깊은 연못에 배를 매었어요. 임을 만나 연꽃을 따서 물 건너로 던졌는데, 혹시 누가 보았을까 계속 부끄러웠어요. 슬픔을 담아 시를 쓰다. 허난설헌은 바라던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어요.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이 책 읽는 모습을 보면 혀를 끌끌 찼지요. "여자는 남편을 돕고,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남자의 일이니 앞으로 멀리하여라." 허난설헌은 책을 덮고 뒤돌아 눈물을 흘렸답니다. 또한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을 차츰차츰 멀리했어요. 남편은 우연히 허난설헌이 쓴 시를 읽었어요. '참 아름다운 시다!' '내가 이런 글솜씨만 있으면 금방 과거에 붙을 텐데. 사람들이 나보다 아내를 칭찬하니 부끄럽구나.' 남편은 허난설헌을 멀리하며 차갑게 대했어요. 여인의 슬픔. 비단 띠 비단 치마에 눈물 자국이 생겼어요. 임 그리며 흘린 눈물로 생긴 자국이지요. 거문고를 타는데 빗방울에 배꽃은 떨어지고, 문은 굳게 잠겼어요. 가을밤, 누각에 달이 뜨지만, 고운 병풍도 그저 쓸쓸해 보여요. 서리 내린 갈대밭에 기러기가 앉네요. 거문고를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시고 연못에서 연꽃은 쓸쓸히 지고 있어요. "집에서는 공부가 안되는구려. 따로 나가 친구들과 공부할까 하오." 이 말을 남기고 남편은 집을 떠났어요. 허난설헌은 남편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며 외로운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하지만 남편은 차츰 소식이 뜸해졌지요.
'서방님이 떠나신 지 오래인데, 편지 한 장 없으시구나. 잘 지낸다는 편지 한 장만 보내도 이리 쓸쓸하지는 않을 텐데.' '아, 시를 쓰고 싶어. 시를 쓰면 슬픔이 잦아들 것 같아.' 허난설헌은 힘겹고 외로울 때마다 붓을 들어 시를 썼어요. 강가의 집에서 글을 읽는 남편에게. 제비는 짝을 지어 처마 비스듬히 날고 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쳐요. 보이는 것 모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봄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당신은 돌아오지 않네요. 강남곡. 남들은 강남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강남이 서럽기만 해요. 해마다 배가 닿는 곳에 나가 돌아오는 배가 있나 애타게 바라만 봐요. 허난설헌은 오빠와 동생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어요. 오빠 허봉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동생 허균은 글솜씨로 이름을 떨쳤지요. 허난설헌은 슬프거나 외로울 때면 형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럴 때마다 살포시 웃음이 났지요. 함께 지내며 행복했던 시절이 떠올랐거든요. 어느 날, 오빠가 허난설헌에게 편지와 두보의 시집을 보냈어요. 누이야, 홀로 떨어져 지내니 참 외롭겠구나. 너에게 힘이 되었으면 해서 두보의 시집을 보낸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받은 시집이란다. 그동안 보물처럼 간직했는데, 너에게 주고 싶구나. 부디 두보처럼 좋은 시를 쓰기 바란다.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편지에 뚝 떨어졌어요. 허난설헌은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했어요. 눈물이 앞을 가렸으니까요. ‘오라버니, 우리가 다시 만나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을 잊은 지 오래랍니다. 하지만 힘을 낼게요. 집안에서 못마땅해하지만, 몰래라도 시를 쓰겠어요.’ 허난설헌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오빠가 보내 준 시집을 읽었어요. 허난설헌은 병으로 딸과 아들까지 차례로 잃었어요. 허난설헌은 가슴이 무너졌어요. 너무 슬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요.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난해에는 어여쁜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어요. 슬프고 슬픈 광릉 땅! 두 아이의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어요.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 도깨비불이 일렁거려요. 나는 종이돈을 태워서 아이들의 넋을 부르고 무덤에 맑은 술을 올려요. 나는 알아요.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밤마다 함께 논다는 것을. 나는 또 아이를 가졌지만 제대로 자랄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가슴 아픈 울음을 삼켜요. 난설헌, 눈밭에 난초가 피어 있는 집. 두 아이가 죽고 나서 허난설헌은 몸이 많이 약해졌어요. 눈이 내리는 날, 허난설헌은 우두커니 마당을 내다보았어요. 그리고 문득 떠올렸지요. 새하얀 눈밭에 가녀리게 피어난 난초를 말이에요. ‘아! 차가운 눈을 맞고 시드는 난초가 꼭 내 모습 같구나.’ 그 뒤로 허난설헌은 자기의 호를 ‘난설헌’이라고 지었어요. 난설헌이란 눈밭에 난초가 피어 있는 집이라는 뜻이랍니다. 난초. 창 아래 아름다운 난초가 피었어요. 가녀린 줄기 같은 이파리가 참 예뻤지요. 가을바람이 잎을 스치더니, 슬프게도 차가운 서리에 다 시들었어요. 시들어 떨어진다 해도 고운 모습과 맑은 향기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초라한 모습에 마음 아파 눈물이 흘러 소매를 적셔요. 어느 날 허난설헌은 잠결에 본 아름다운 꿈을 글로 남겼답니다. 꿈에서 나는 구슬로 된 산에 올랐어요. 산 위에는 오색 빛깔 구름이 자욱하게 피었지요. 나는 선녀들을 만나 함께 산에 올랐어요. 산 굽이굽이 이름 모를 풀과 꽃이 활짝 피었지요. 난새와 학, 공작도 훨훨 날았어요. 산꼭대기 연못에서 부용꽃도 보았어요. 부용꽃은 빛깔은 아름다운데 서리를 맞아 반쯤 시들어 있었어요. 한 선녀가 말했지요. "이 산은 광상산이에요. 당신은 선녀와 인연이 있어 선녀만 노는 산에 올 수 있답니다. 기념으로 시를 한 수 읊어 보세요. 어서요!" 내가 시를 읊으니, 선녀들이 활짝 웃으며 손뼉 쳤어요. "멋져요! 선녀가 지은 시와 똑같아요." 잠이 깬 허난설헌은 꿈에 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픔으로 손이 떨렸지만, 다시 붓을 들었지요. 꿈꾸듯 광상산을 거닐며 쓴 시. 푸른 바다가 구슬 바다를 적시고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었어요.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서리 위에 비친 달빛은 차갑기만 해요. 허난설헌이 겨우 슬픔을 다잡고 있을 때였어요. 언제나 허난설헌을 다독여 주던 오빠 허봉이 세상을 떠났어요. 허봉은 정치 다툼에 휘말려 귀양을 갔다가 풀려났지요. 그 뒤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눈을 감고 말았어요. ‘오라버니, 이제 저는 누구에게 기대지요? 아, 먼저 간 오라버니는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시다니!’ 허난설헌은 오빠를 거문고라고 상상하며 시를 썼어요. 거문고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지요. 슬픈 거문고.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산에서 자라 여러 해 추운 비바람을 견뎠어요. 다행히 이름난 장인을 만나 거문고로 만들어졌지요. 그 거문고로 멋들어지게 한 곡 탔지만 기쁘게 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광릉산 거문고 곡이 전해지지 않았나 봐요. 시에 꿈을 수놓다. ‘선녀가 사는 세계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어. 따스한 봄볕에 새는 노래하고, 꽃은 활짝 피어나지. 시를 쓸 때면 언제나 선녀의 세계를 꿈꿀 수 있어.’ 허난설헌은 외롭고 슬플 때마다 선녀가 사는 세계를 시로 썼어요. 봄비 맞아 배꽃은 더욱 희고, 새벽이 되도록 촛불은 밝아요. 우물가 까마귀는 새벽빛에 놀라고 대들보 위의 제비는 새벽바람에 놀라요. 비단 휘장이 외로워 보여 걷었더니 이부자리가 쓸쓸하게 비어 있어요. 구름 수레 돌려서 학을 타고
은하수 건너 동쪽 누각으로 가고 싶어요! 1589년 3월 19일, 허난설헌은 숨을 거두었어요. 이때 허난설헌은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허난설헌은 눈을 감기 전, 자기가 쓴 시를 모두 불태웠어요. 천여 편이 넘는 시였지요.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이 남긴 시를 읽고 생각했어요. ‘떨어진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누님은 혹시 스물일곱 살에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셨던 걸까. 누님, 아름다운 시들을 왜 다 태워 버리셨나요?’ 쉴 새 없는 눈물이 허균의 뺨을 타고 흘렀어요. 허균은 허난설헌의 시를 모아 시집 난설헌집을 펴냈어요. 난설헌집은 중국과 일본까지 퍼져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시를 널리 알렸지요.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슬픔 속에 스물일곱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아름다운 시는 남아 우리나라 문학을 곱게 수놓고 있답니다. 보허사. 아홉 폭 노을 치마와 가벼운 저고리 선녀 옷 입고 학 등에 찬바람 내며 하늘 쉴 곳으로 돌아갑니다. 요해에 달은 밝고 별과 은하수 떨어지니 옥피리 부는 소리에 구름 속으로 날아올라요. |
김홍도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이런 모습을 담은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씨름하는 모습, 아이들이 서당에서 훈장님과 공부하는 모습, 농부들이 가을걷이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모습. 이처럼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담은 그림을 풍속화라고 해요. 김홍도는 다른 화가들이 중국 그림을 흉내 내서 그리고 있을 때, 우리나라 백성이 사는 모습을 그렸어요. 또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림으로 담았지요. 김홍도는 우리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일깨워 준 참되고 올바른 조선의 화가랍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홍도야! 홍도야, 어디 있니?” 어머니는 마을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왔어요. 들판에는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고, 그 앞에는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어요. 바로 김홍도였지요. “홍도야, 거기서 뭐 하니?” 어머니는 김홍도에게 다가갔어요. 김홍도는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소가 풀을 뜯어 먹는 그림이었지요. “너, 또 그림을 그리고 있었구나!”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어요. ‘얘는 왜 이렇게 그림을 좋아할까?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려 하니.’ 정말 그랬어요. 김홍도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늘 숯을 들고 다니며 담벼락이나 바위에 그림을 그렸어요. 숯이 없을 때는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지요. ‘우리 홍도는 꼭 그림을 그리려고 태어난 아이 같아.’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말리고 싶지 않았어요. 화가가 되고 싶다면 그 꿈을 키워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김홍도에게 종이와 붓을 사다 주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했지요.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김홍도를 불렀어요. “내일은 강세황 선생님 댁에 갈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린 그림을 챙겨 두렴.” “강세황 선생님이 누구신데요?”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문인화가로 학문도 깊은 분이란다. 그분을 만나 네 그림을 보여 드리려고.” 김홍도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그림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홍도는 마음이 설레어 잠을 잘 수 없었어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 그동안 그려두었던 그림을 꺼내 보았지요. 그런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이런 그림을 보여 드릴 수는 없어. 새로 그려야겠다.’ 김홍도는 등불을 켜고 종이 앞에 앉아 붓을 들었어요. ‘무엇을 그리지? 아, 그래. 개울에서 물고기 잡는 아이들을 그리자.’ 김홍도는 붓에 먹을 적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붓이 춤을 추자, 개울 풍경이 종이에 되살아났지요. 다음 날 아침, 김홍도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어요. 어머니는 강세황을 만나 공손히 절하며 말했어요. “선생님의 높으신 이름을 듣고 왔습니다. 제 아들이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머니는 강세황에게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어요. 강세황은 눈을 크게 뜨고 그림을 들여다보았지요. ‘으음, 타고난 재주가 보통이 아닌걸. 잘만 가르치면 훌륭한 화원이 되겠어.’ 강세황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재주가 있는 아이로군요. 그림을 배우고 싶다면 우리 집에 보내 주십시오. 제가 틈틈이 그림 공부를 시키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김홍도는 강세황 밑에서 그림을 배웠어요. 지구별 사전. 강세황(1713, 1791년)은 조선 시대의 서화가 문신으로 김홍도를 어려서부터 가르쳤어요. 강세황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서 1784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강세황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요. 지은 책으로는 표암집이 있고, 그림으로는 난죽도, 산수도, 묵죽도 따위가 있어요. 빼어난 그림 솜씨를 펼쳐 보이다. 김홍도는 강세황에게 그림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배웠어요.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에 글을 써 주고, 제목을 달아 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이나 고쳐야 할 점도 이야기해 주었지요. 또한, 김홍도는 강세황의 집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강세황은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늘 김홍도에게 인사를 시켜 주었거든요. 그런 만남 속에서 역사나 철학,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배울 수 있었답니다. 김홍도가 그림 공부를 시작한 지 여러 해가 지났어요. 김홍도는 나날이 그림 솜씨가 좋아졌지요. 하루는 언젠가 장터에서 보았던 닭싸움 그림을 그렸어요. 마치 닭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그림이었지요. 이제 김홍도는 누가 보아도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재주꾼이었어요. 김홍도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도화서라는 곳에 들어갔어요. 도화서는 나라에서 쓰는 그림을 맡아 그리는 곳이에요. 화원과 그림을 배우는 생도를 두고 있었는데, 김홍도가 생도로 뽑힌 거예요. 김홍도는 도화서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생도들보다 더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마음껏 펼쳐 보였어요. 김홍도의 이름은 금세 널리 알려졌지요. 하지만 김홍도는 늘 겸손하게 행동했어요. “참 대단해. 그림 솜씨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쓰고, 시와 음악에도 두루두루 솜씨가 있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사람 됨됨이도 훌륭하고요.” 도화서 사람들은 김홍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김홍도는 도화서에서 김응환도 만났어요. 김응환은 김홍도보다 겨우 세 살이 많았지만, 벌써 궁궐에서 이름난 화원이었어요.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요. 김홍도는 사람 얼굴이나 산과 물을 담은 풍경도 잘 그렸지만, 특히 꽃과 새를 어우러지게 그리는 화조화에 뛰어났어요. 몇 해가 지나자, 도화서에서는 김홍도만큼 화조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 없었지요. 도화서 화원으로 뽑히다. 김홍도가 스무 살 무렵이었어요. 도화서 앞에 있는 너른 마당에 화원과 생도가 모두 모였어요. 얼마 뒤, 도화서 우두머리인 제조가 나타났지요. 제조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어요. “이번에 김홍도가 새로 화원으로 뽑혔습니다.” 김홍도는 무척 기뻤어요. 화원들도 다가와서 김홍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어요. “축하하네. 앞으로 좋은 그림을 많이 그리도록 하게.” “나는 자네가 화원으로 뽑힐 줄 알았어. 정말 열심히 했잖아.” 김홍도는 곧바로 강세황을 찾아가서 인사를 했어요. “선생님 덕에 화원으로 뽑혔습니다. 고맙습니다.” “허허, 자네가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한 덕이지. 정말 잘됐네.” 강세황은 김홍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어요. 김홍도는 화원이 되자 더욱 바빠졌어요. 나라에서 시키는 여러 가지 그림을 맡아서 그려야 했거든요. 그 가운데는 궁궐에서 벌이는 잔치 모습이나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어요. 김홍도는 도화서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대부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그린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김홍도는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자기가 정말 그리고 싶어서 그린 그림이 아니었으니까요. ‘우리나라 화가들은 중국 그림을 흉내 내서 그리고 있어. 중국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기 때문이지. 우리만의 빛깔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김홍도는 혼자 있을 때면 늘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김홍도는 강세황을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놓았어요. 그러자 강세황은 빙그레 웃더니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여보게, 그림은 저 연못처럼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네. 자네 마음을 연못처럼 맑게 하여 거기에 비친 세상을 그려 보도록 하게.” 김홍도는 강세황이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되뇌었어요.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을 그리라고?’ 백성이 사는 모습을 그리다. 다음 날, 김홍도는 강세황이 남긴 말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때 어디선가 힘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차, 이차!” 김홍도가 돌아보니 느티나무 아래에서 두 젊은이가 씨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구경하고 있었지요. “힘내! 번쩍 들어서 넘어뜨려.” “넘어가면 안돼! 끝까지 버텨!” 사람들은 목이 쉬어라 응원을 했어요. 이때 엿 파는 아이가 나타나 씨름판을 돌며 소리쳤어요. “엿 사세요, 엿을 사! 달달하고 맛있는 엿이 왔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씨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김홍도는 씨름판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아,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인가! 모든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이 씨름판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 김홍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림을 그렸어요. 이 그림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풍속화 씨름이랍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며칠 뒤, 김홍도는 길을 가다가 글 읽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어요.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서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지 뭐예요. 훈장님은 그 모습을 보고 아이를 크게 꾸짖었어요. “이놈, 뭐 하고 있느냐? 방금 다 같이 읽은 곳이 어디인지 냉큼 읽어 보아라.” 하지만 아이는 졸다가 깨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종아리 걷어라!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려?” 훈장님은 회초리를 들어 아이의 종아리를 때렸어요. 그러자 아이는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지요. 김홍도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이것이 바로 풍속화 서당이지요. ‘그래, 이거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자. 씨름하고, 서당에서 공부하고, 그네 타고, 농사일하고. 이것이야말로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이고, 우리 조선만의 그림이다.’ 지구별 사전. 풍속화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무용도, 씨름도 같은 풍속화가 남아 있고, 조선 시대에는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이 빼어난 풍속화를 많이 그렸어요. 백성의 숨결이 살아 있는 풍속화는 그때의 생활 모습을 아는 데 소중한 자료로 쓰인답니다. 김홍도는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모두 그림으로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틈만 나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요. 김홍도는 길거리, 논밭, 나루터, 대장간, 빨래터, 우물가에서 만난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림에 담았어요. 어느 날 김홍도는 친구 이인문에게 자기 그림을 보여 주었어요. 그러자 이인문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말했지요. “백성들은 자네 그림을 무척 좋아할 거야. 일하는 모습을 생생히 담았으니까.” “정말 그럴까? 나는 우리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담은, 우리만의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어.” 김홍도는 환하게 웃었어요. 또, 김홍도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도 제대로 그려 보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산과 강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깊이 있게 그리고 싶어.’ 금강산을 화폭에 담다. 1788년 어느 날, 임금인 정조는 김홍도와 김응환을 불렀어요. “내 그대들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지금 곧바로 길을 떠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금강산을 그려 와 줄 수 있겠소?” “봄, 여름, 가을, 겨울 저마다 아름다운 색깔을 내는 금강산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소. 그대들의 솜씨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김홍도는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두 사람은 험한 산길을 따라 걷고 걸어, 마침내 단발령에 올라섰어요. 봄이면 아침 이슬이 떠오르는 태양에 금강석과 같이 빛난다고 하여 금강산, 여름이면 푸른 나무가 우거져 신록의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하여 봉래산,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들어 붉게 타는 것 같다고 하여 풍악산, 겨울이면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구석구석에 있는 바위까지 다 보여 준다고 하여 개골산이라 불리는 금강산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김홍도와 김응환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금강산의 경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두 사람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이 달아날까 마음을 졸이며 열심히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어요. 눈에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그렸지요. 이렇게 그린 금강산 그림은 무려 100장이 넘었답니다. 몇 해 뒤, 정조는 금강산 그리는 일을 잘 끝낸 김홍도에게 연풍 현감이라는 벼슬을 내렸어요. 김홍도가 부임한 그해, 연풍에는 심한 가뭄이 들었어요.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렸지요. 김홍도는 관리들에게 명령했어요. “우리 집에 남아 있는 곡식을 가져다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래도 모자라면 살림살이를 팔아 먹을거리로 바꾸어 오너라.” 백성들은 김홍도 덕에 굶주림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어요. “우리 사또는 자기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훌륭하신 분이야.” 백성들은 입을 모아 김홍도를 칭찬했지요. 김홍도는 백성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고을을 돌아다녔어요. ‘땀 흘려 일하는 농부, 생선 파는 아주머니, 손자를 업고 잠을 재우는 할머니. 이런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구나!’ 김홍도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 바빠서 그림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지요. ‘내가 할 일은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는 거야.’ 김홍도는 현감 벼슬을 그만두고 한양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다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림에 담았지요. 끝까지 붓을 놓지 않다. 김홍도는 조선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였어요. 그래서 김홍도에게 그림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어요. 하루는 남주헌이라는 친구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김홍도는 기꺼이 좋다고 했지요. 그런데 석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예요. 남주헌은 기다리다 지쳐서 김홍도를 찾아왔어요. “어찌 된 일인가? 자네, 내 부탁을 잊어버렸나?” “잊어버릴 리가 있나? 그림은 억지로 그릴 수 있는 게 아닐세. 흥이 나야 그림을 그리는 거지. 돌아가서 조금만 더 기다리게.” 김홍도는 허허 웃으면서 남주헌을 돌려보냈어요. 그러다가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김홍도는 종이를 펼쳤어요. 그런데 막 붓을 들 무렵에, 이웃에서 심부름꾼이 찾아왔어요. “화원님, 저희 대감님이 그림을 부탁한다고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김홍도는 심부름꾼에게 버럭 화를 냈어요. “그림을 그리려는데 왜 흥을 깨느냐? 나는 속된 양반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니 어서 돌아가게.” 김홍도는 심부름꾼을 돌려보내고 남주헌이 부탁한 그림을 그렸어요. 김홍도는 정말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던 거지요. 김홍도가 화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날, 김홍도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저는 소금 장사를 하는 김한태라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며칠 뒤에 환갑이십니다. 그런데 환갑잔치에 쓸 병풍 하나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화원님께 자그마한 병풍 하나 그려 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김홍도는 가슴이 뭉클했어요.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제가 한번 그려 볼 테니 며칠 뒤에 찾으러 오십시오.” 김홍도는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학, 거북, 소나무, 사슴, 해 등 오래 산다는 십장생을 그려 넣은 병풍이었지요. 김한태는 그 병풍으로 환갑잔치를 마치고 다시 찾아와서 김홍도에게 넙죽 절하며 말했어요. “화원님 덕분에 제가 모처럼 아들 노릇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병풍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덩실덩실 춤까지 추셨습니다.” 이렇게 김홍도는 신분이 높고 낮은 것을 따지지 않고, 흥과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어요. 어느덧 김홍도도 나이가 많이 들었어요. 예순 살이 가까워 왔지요. 김홍도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편했어요. 언제든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김홍도는 연풍 현감으로 일할 때 그리다 만 그림들이 생각났어요. 백성이 사는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었지요. ‘이 그림들을 버려둘 수는 없지. 내가 가장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림이잖아.’ 김홍도는 그 그림들을 꺼내 다시 그렸어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김홍도만의 그림이었지요. 김홍도는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방법과 깊이를 더해 그림을 그렸어요. 남산 기슭에 작은 초가를 짓고 남은 삶을 살던 김홍도. 김홍도는 건강이 나빠져 자주 앓아누웠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답니다. |
신재효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얼쑤! 잘한다!" 구경꾼이 넣는 추임새에 고수도, 소리꾼도 더욱 신 나요. 신재효는 우리 겨레 누구나 좋아하는 판소리를 다듬고 정리해서 우리에게 물려주었어요. 신재효가 어떻게 판소리 지킴이가 되었는지 지금부터 들어 볼까요? 얼쑤! 사나이로 조선에 태어났지만. 전라도 고창, 마을에 잔치가 열렸어요. 잔치 마당에 소리판이 벌어지자, 마을 사람들이구경을 갔어요. 어린 신재효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지요. 마침 소리꾼이 흥보가 가운데 제비를 맞는이야기를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흥보가 보고 좋아라, "얼씨고나! 떴구나 내 제비야. 어디를 갔다가 이제 와." 제비가 집으로 펄펄 날아들어 들보 위에 올라앉아 제비 말로 운다. 지지지지 주지주지 거지연지 우지배요. "얼씨구!" 북을 치는 고수가 추임새를 넣어 소리꾼의 흥을 돋우었어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지요. 신재효는 '있을 재, 효도 효'라는 이름처럼 부모님을 잘 섬기고, 마을 어른을 받들었어요. 신재효는 어릴 때부터 무척 똑똑했어요. 하지만 중인이어서 마을 관아에서 낮은 관리로 일했지요. '아, 답답하다! 양반만 높은 벼슬에 올라 뜻을 펼칠 수 있다니!' 신재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뒷날 신재효는 자서가라는 노래를 지어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었답니다. 사나이로 조선에 태어났지만 양반집에 못 태어나, 활을 잘 쏘아도 장수가 되지 못하고,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를 치지 못하네. 동리정사에서 판소리를 지키다. 신재효는 관아 잔치에 소리꾼을 부르는 일을 맡았어요. 그래서 뛰어난 소리꾼의 판소리를 많이 들었지요. 신재효는 판소리에 흠뻑 빠졌어요. '판소리는 정말 훌륭하구나! 답답한 세상을 꼬집고, 슬픔을 흥과 웃음으로 이기는 우리의 혼이 판소리에 담겨 있어!' 신재효는 소리꾼을 집에 불러 소리판을 벌였어요. 판소리를 좋아하는 양반들도 신재효와 사귀려고 찾아왔답니다. 어느 날, 한 양반이 신재효의 집 동리정사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외쳤어요. "이 집 주인이 판소리를 좋아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인의 대답에 양반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어요. "험,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집 안에 들인단 말이냐?" "우리 주인 어른께서 말씀하셨지요. 소리를 좋아하는 분은 누구든지 안으로 모시라고요." "허허, 주인 양반이 멋을 아는 분이로구나!" 양반은 대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대문은 키 작은 두충나무를 엮어 만들었어요. 그래서 대문을 지나려면 누구나 허리를 굽혀야 했지요. 신재효는 중인이었지만,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양반에게 인사를 받는 셈이었어요. 신재효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아껴서 늘렸어요. 그래서 살림이 넉넉했지요. 신재효는 좋은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내놓았답니다. 어느날, 한 소리꾼이 신재효에게 하소연했어요. "양반집에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돈도 못 받고 쫓겨났답니다." 신재효는 안타까워하다가 문득 생각했어요. '내 재산으로 소리꾼을 보살피고, 훌륭하게 키워 보자.' 신재효는 동리정사로 찾아온 소리꾼을 재우고 먹이며, 소리 공부를 시켰어요. 동리정사에는 소리꾼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넘쳐 흘렀답니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다. 이름난 소리꾼들이 동리정사로 찾아왔어요. 신재효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반가이 맞았지요. 소리꾼들은 저마다 소리를 뽐냈답니다. 그런데 같은 소리를 해도 어느 선생님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랐어요. 판소리는 글로 따로 정리한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이 소리를 하면 제자가 따라 부르며 익혔지요. 신재효는 생각했어요. '이 소리꾼이 부르는 이야기는 이 부분이 재미있고, 저 소리꾼이 부르는이야기는 저 부분이 재미있구나. 사람들이 좋아하고, 재미난 부분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야겠다.' 신재효는 관아 일을 그만두고 판소리 사 설을 정리하기로 굳게 마음을 정했어요. 신재효는 옛날부터 전해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여섯 마당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소리꾼의 판소리를 들은 뒤,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를 가려 글로 옮기는 일이었지요. 그 가운데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마당은 오늘날까지 널리 불린답니다. 소리꾼을 기르다. 신재효는 판소리의 바른 정신을 소리꾼에게 가르쳤어요. 광대가를 지어 뛰어난 소리꾼이 갖추어야 할 재능도 알렸지요. 광대라 하는 것은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다음이 득음이요, 그 다음이 너름새라. 소리꾼 김세종이 신재효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다른 소리꾼에게전 했어요. "슬픈 대목은 눈물을 닦는 시늉이나,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이는 너름새를 하며 불러야지. 말뚝처럼 뻣뻣하게 서서 부르는데, 듣는 사람이 어찌 감동하겠소?" 이래서 동리정사에서는 뛰어난 소리꾼이 많이 나왔어요. 어느날, 신재효가 동리정사에 모인 명창들에게 물었어요. "여자에게도 소리를 가르치면 어떻겠소?" 명창들은 한목소리로 반대했어요. "말도 안됩니다. 남자만 하는 소리를 여자가 어찌합니까?" 그러자 신재효가 말했어요. "판소리에는 여자의 시름과 눈물도 담겨 있소. 그러니 여자가 직접 판소리를 부르면, 아기 엄마에서 할머니까지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원하겠소?" 그제야 명창들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신재효가 가르친 소리꾼 가운데 여자 명창이 나왔어요. 바로 진채선이었지요. 마침 대궐에서 이름난 소리꾼을 불러 잔치를 벌였어요. 신재효는 잔치가 열리는 서울로 진채선을 보내며 말했어요. "그동안 네가 배운 소리를 마음껏 펼쳐 보아라." "네, 선생님." 진채선은 신재효와 헤어져 먼 길을 떠났답니다. 대궐 잔치 마당은 드넓었어요. 온 나라에서 명창들이 모였지요. 진채선은 남자 옷을 입었지만, 떳떳했어요. 대원군은 진채선의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했어요. 진채선이 여자인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답니다. "네 소리가 뛰어난 것을 보니 훌륭한 스승에게 배웠구나! 너를 가르친 신재효에게 상을 내리겠다." 대원군은 신재효에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내렸어요. 신재효는 제자 진채선이 나라에서 인정을 받아 기뻤어요. 하지만 진채선이 곁에 없어 쓸쓸했지요. 진채선은 계속 서울에 남아 소리를 했거든요.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리는 마음을 도리화가에 담아 불렀답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오얏꽃은 희고도 희다. 향기 쫓는 벌 뒤에는 나팔과 북이 따라가고, 보기 좋은 범나비는 너푼너푼 날아든다. 바르고 곧은 마음을 지니다. 어느 봄날이었어요. 신재효는 친구와 꽃구경을 갔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신재효에게 꾸벅 인사를 했어요.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만들어 주신 갓은 잘 쓰고 있습니다." 신재효는 높임말로 대답하며 함께 인사했어요.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신재효에게 물었어요. "저 사람은 갓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지." "자네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인데, 왜 높임말을 쓰는가?" 신재효는 타이르듯 친구에게 말했어요. "여보게, 우리는 저 사람이 만든 갓을 쓰고 다니네. 그러니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함부로 대해서 쓰겠는가!" 신재효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어요. 1876년, 큰 흉년이 들어,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려 목숨까지 잃었답니다. 신재효는 곳간 문을 열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어요. "고맙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고마워하자 신재효가 말했어요. "아니오. 어려운 때 서로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소." 이 일로 신재효를 칭찬하는 말이 널리 퍼졌어요. 나라에서는 신재효에게 큰 상을내렸지요. 하루는 한 나그네가 찾아와 신재효에게 허름한 보따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신재효는 보따리를 받아 작은 궤짝에 넣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지요. 나그네가 신재효에게 물었어요. "보따리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소중하게 다루십니까?" "내 것이 아닌데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여기 열쇠가 있으니 필요할 때 찾아가시지요." 나그네는 무릎을 탁 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어요. "하하, 이 마을에 됨됨이가 뛰어난 인물이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려." 사실 보따리에는 마패가 들어 있었어요. 나그네는 암행어사 어윤중으로, 신재효의 사람됨을 알아보려고 일부러 들렀던 거예요. 신재효는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 살다가 1884년 세상을 떠났어요. 판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큰 슬픔에 잠겼지요. 그래서 신재효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어요. 우리는 비석을 보고 판소리에 모든 것을 바쳤던 신재효의 뜻을 알 수 있지요.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화 둥둥 내 사랑이야. 얼쑤! 지금도 신재효의 집 곁에는 흥겨운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아요. 판소리를 아끼는 사람들이 신재효의 뜻을 이어받아 동리국악당을 만들었거든요. 우리는 동리국악당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인 판소리를 배울 수 있어요. 오늘도 동리국악당에는 판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쭉 이어지고 있답니다. 판소리 다섯 마당. 판소리는 2003년 11월7일 유네스코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정했어요. 그래서 온 세계에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알려졌지요. 이렇게 뛰어난 판소리가 예전에는 열두 마당이 있었어요. 신재효는 소리꾼이 많이 부르는 여섯 마당을 글로 옮겼어요. 그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는 지금도 널리 불리지요. 이 다섯 마당은 음악도 뛰어나고, 우리 겨레가 옛날부터 좋아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널리 사랑받고 있답니다. 춘향가. 남원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이 남원 사또의 아들 이몽룡과 사랑에 빠지지만, 금세 헤어져요. 새로 온 변사또는 춘향에게 자신을 받들라고 하지만, 춘향은 몽룡과 맺은 사랑을 지키려고 거절하지요. 춘향은 옥에 갇히지만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구해 준다는 이야기예요. 신재효는 여자가 남자 목소리로 부르는 남창 춘향가와 아이가 부르는 동창 춘향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뒷날 판소리가 창극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도왔지요. 춘향가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음악도 뛰어나 오늘날 영화나 연극으로도 볼 수 있어요. 흥보가. 가난하지만 착한 흥보가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 주고 박씨를 얻었어요. 박씨를 심어서 거둔 박을 쪼갰더니 보물이 나와 부자가 되었지요. 부자이지만 심술 궂은 형 놀보는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 다음 고쳐 주어요. 하지만 박에서 나온 무서운 장수에게 혼만 난답니다. 흥보가는 우스운 대목이 많고, 노래로 하는 소리보다 사이사이에 말로 이야기하는 '아니리'가 많답니다. 우리가 자주 들어 본 '제비 몰러 나간다! 라는 노래도 흥보가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심청가. 어린 심청이 눈먼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팔려 인당수에 빠져요. 하지만 심청은 용왕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와 왕비가 되고, 심봉사도 눈을 뜨지요. 심청가는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계면조'로 많이 불려요. 수궁가. 용궁에 사는 자라가 용왕의 병에 쓸 토끼의 간을 구하러 땅으로 올라왔어요. 자라는 토끼를 속여 용궁으로 데려가서 토끼 간을 꺼내려고 해요. 하지만 토끼는 꾀를 내어 살아 돌아오지요. 수궁가에는 여러 동물이 나오는데 이 동물들은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빗대어 보여 준답니다. 적벽가. 적벽가는 나관중이 지은 중국 소설 삼국지 연의 가운데 조조가 100만여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와 싸우던 '적벽 대전'의 이야기예요. 장수가 싸우는 대목이 많아서, 빠른 장단에 씩씩한 소리를 많이 쓰지요. |
백남준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손가락을 펴 볼래요? 손가락 끝에 있는 지문이 보이나요? 어떤 사람은 지문이 동글동글하고, 어떤 사람은 지문이 길쭉길쭉해요. 이처럼 세상에는 지문이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답니다. 정말 놀랍지요?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똑같은 사람도 없어요. 쌍둥이라 하더라도 생김새나 성격이 똑같지는 않지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개성’이란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특징을 말하지요.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 이건 예쁘다, 저건 추하다.’ 모두가 이렇게 똑같은 생각만 하고 산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그래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디오 예술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있어요. 바로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이랍니다. 백남준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사람이에요. 세계 100대 예술가를 뽑는 자리에서 당당히 8위로 오른 백남준을 한번 만나 보지 않을래요? 미술관에서 만난 백남준 할아버지. “아이 참, 이런 숙제는 너무 귀찮아.” 현지는 미술관으로 가는 내내 투덜거렸어요. 선생님이 미술관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과 작가를 조사해 오라고 숙제를 내주었거든요. 그런데 현지는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우아, 이게 정말 텔레비전이야?” 아주 많은 텔레비전이 둥글게 둘러서서 커다란 탑을 이루고 있었거든요. “마음에 드니?”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가 현지에게 물었어요.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난 이 작품을 만든 백남준이란다.” “이걸 만드셨다고요?” 현지는 할아버지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어요. 할아버지는 아주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파란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텔레비전을 만드셨다는 건가요?” “아니. 텔레비전은 기술자들이 만들었지. 나는 텔레비전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든 거야. 제목은 다다익선이란다.” 현지는 어리둥절해서 텔레비전 탑을 다시 쳐다보며 물었어요. “텔레비전을 잔뜩 쌓아 놓은 것이 예술 작품이라고요?” “이런, 너도 그림이나 조각품만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건 고정관념이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거지.” “고정관념이오? 그게 뭔데요?” “물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딱 붙여 버리는 걸 ‘고정시킨다.’고 하지? 고정관념이란, ‘생각을 딱 고정시켜 놓는다.’는 뜻이야.” 현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말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그럼 다다익선을 가지고 더 설명해 줄게.” 할아버지는 다다익선 앞으로 다가갔어요. “지금 보이는 다다익선에 텔레비전이 모두 몇 개나 쓰였는 줄 아니?” “정말 많아서 셀 수가 없어요.” “놀라지 마렴. 모두 1,003대란다.” “우아! 그렇게나 많아요? 그런데 왜 1,003대예요?” “지금부터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해 줄게.”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어요. 다다익선. 다다익선은 내가 1988년에 열린 서울 올림픽 대회를 기념하려고 만든 작품이야. 높이가 18.5m, 지름이 7.5m이지. 내가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크단다. 단군 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이 10월 3일이잖니? 그래서 텔레비전 1,003대를 가지고 우리나라 전통 탑 모양으로 쌓아 올렸단다. ‘다다익선’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야.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텔레비전처럼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어. 나는 그 생각들을 서로 주고받자는 뜻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지. 다다익선은 내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단다. 고정관념을 버려! “하지만 할아버지, 왜 굳이 텔레비전으로 표현을 하셨어요? 그냥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지 않나요?” “그림은 반드시 종이에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란다. 자, 텔레비전 화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렴.” 현지는 텔레비전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요. “음, 이 화면에는 우리나라 전통춤이 나오고, 저 화면에는 우리나라 조각품이 나오네요.” “바로 그거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문화를 가졌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 그런데 종이에 그리는 그림으로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을 들려줄 수 없잖아. 춤추는 모습도 더 생생하게 보여 줄 수 없고 말이야.” “아하!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텔레비전에 영상과 소리로 담아서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거네요.” “이제 이해했구나. 그래, 그렇게 고정관념을 버리는 거야!” 현지는 할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났어요. “고정관념을 버려!” 현지가 콩콩 뛰며 외치자 할아버지는 손뼉을 쳤어요. 현지는 백남준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문득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지요. “할아버지! 어릴 때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부모님도 할아버지처럼 재미있는 분이셨나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어요. “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별로 없단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았다고요?” “그래, 아버지와 나는 생각이나 목표가 너무 달랐거든.” 할아버지는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어. 아주 큰 섬유 회사를 하고 있었거든. 그때 종로에 있던 포목점 가운데 반 정도가 우리 아버지 거였으니까.” “우아, 대단해요!” “그래. 그렇지만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았단다.” “아버지는 내가 훌륭한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셨어. 그래서 공부를 많이 시키셨지. 하지만 나는 피아노 치는 게 더 좋았단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피아노 치는 걸 싫어했어. 그래서 나는 누나의 도움을 받았어. 누나가 ‘이제 피아노 연습해요.’ 하고 방으로 들어가면 나도 따라 들어가 누나 대신 피아노를 쳤지.” “그러면 아버지는 누나가 피아노를 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만 아버지한테 들키고 말았어. 그 뒤로 나는 피아노를 칠 수가 없어서 흙으로 피아노 모양을 만들고, 소리를 상상하며 피아노를 쳤단다.” “현지야 그게 예술이란다. 세상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않고, 상상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거지.” “아, 그렇구나.” 현지가 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어요. “하하, 그런데 내가 흙으로 만든 피아노를 치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아니? 내가 음악보다는 미술에 더 솜씨가 있다는 거였어.” 할아버지는 이어서 이야기를 했어요. “6 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가족은 일본으로 피난을 갔어. 그때 나는 대학교에 들어갈 나이였지. 아버지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미학? 그게 뭔데요?” “미학은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학문이야. 예술을 배우는 거란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잖아요.” “맞아.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비밀로 하고, 입학금을 받아서 미학 공부를 시작했지.” “이번에는 들키지 않았나요?” “물론 들켰지. 몹시 야단을 맞았단다.” “그래서 미학 공부를 그만두셨어요?” “아니. 이번에는 아버지께 간절하게 부탁했어. 그러자 아버지도 마지못해 허락을 해 주셨지. 그래서 나는 예술을 공부하려고 독일로 유학을 갔단다.” 지구별 사전. 6 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도선 아래로 쳐들어와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에요. ‘한국 전쟁’이라고도 불린답니다. 행위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다. “나는 독일로 가서 꿈에 그리던 예술 공부를 시작했어. 그런데 예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림이나 조각만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림, 조각, 음악, 이 모든 것이 다 들어간 예술을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행위 예술’을 시작했지.” “행위 예술은 무용 같은 건가요?” “아니, 조금 다르단다. 무용은 음악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이잖아? 하지만 행위 예술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몸이나 도구로 나타내는 거란다. 어떤 것인지 알려 줄게.” 머리에 참선을. 1961년에 ‘오리지널’이라는 행사가 있었어. 그때 나 같은 행위 예술가들이 각각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도구나 몸으로 나타냈지. 나는 가장 우리나라다운 걸 표현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먹물통에 넣었다가 꺼내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어. 유럽 사람들은 이걸 보고 무척 감탄했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에서 알아준 거야. 이때 내가 머리카락으로 그린 그림과 먹물이 묻은 넥타이는 지금도 독일의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단다.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예술이라니 조금 이상해요.” 현지의 말에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어요. “머리에 참선을 이라는 제목의 뜻을 풀어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거야. 옛날 선비들은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맑게 했거든.” “아, 이제 알겠어요.” 현지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붓으로 글씨를 써야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일까? 나는 좀 다른 방법으로 해 보겠어.’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바로 그거야! 나는 남과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렸지.” 현지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백남준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한테 행위 예술을 배웠어요?” “나는 ‘존 케이지’라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삶이 바뀌었어. 존 케이지 선생님은 작곡가였는데, 왜 꼭 악기로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야 하느냐며 늘 궁금해했어.” “음, 그분도 남과 다른 걸 원하셨나 봐요.” “맞아. 그래서 존 케이지 선생님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모든 물건이 내는 소리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어. 그릇 깨지는 소리, 기차 소리, 물건 부딪히는 소리.” “한번은 4분 33초라는 제목으로 행위 예술도 했어. 그런데 존 케이지 선생님은 행위 예술을 한다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처음에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까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자동차 소리, 구두 소리, 말소리. 존 케이지 선생님은 그걸 들으라고 한 거였어. 4분 33초 동안!” “하하, 정말 남과 다른 생각을 했네요!” “그래서 나도 바이올린 연주라는 제목으로 나만의 행위 예술을 해 보였지.” “어떻게 하셨는데요?” 바이올린 연주. 바이올린 연주는 무대의 막이 오르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보이면 내가 나오는 거야. 나는 바이올린을 아주 천천히 5분 동안 들어 올려. 그런 다음 ‘쾅’ 하고 피아노에 바이올린을 내리치는 거야.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바이올린이 피아노를 때리니까 건반은 ‘땅땅’ 요란한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와지끈’하면서 부서졌어.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이야. 단 몇 분 사이에 공연장 안은 여러 가지 소리로 가득 찼지. 그게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거야. 나는 이 작품으로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고, 널리 이름이 알려졌단다. “존 케이지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나요?” “그랬단다. 여기 우리 선생님 사진이 있어.”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 주었어요. 기대하며 사진을 들여다본 현지는 깜짝 놀랐어요. “이건 레코드, 텔레비전, 피아노 부품이잖아요!” “이게 내가 만든 선생님이야. 제목은 존 케이지란다.”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내가 1990년에 만든 작품이야. 존경하는 존 케이지 선생님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가지고 얼굴과 팔, 다리를 만들었어. 그리고 선생님은 작곡가니까 피아노 부품과 레코드로 꾸몄지. 참! 몸통과 팔, 다리를 이루고 있는 텔레비전은 ‘나’를 나타낸 거야. 왜냐하면 내가 주로 텔레비전으로 예술을 하니까. 나는 존 케이지 작품에서 존 케이지 선생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단다. 그런데 슬프게도 존 케이지 선생님은 내가 이 작품을 다 만들고, 2년 뒤에 돌아가셨어. 난 지금도 선생님이 무척 그립단다.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예술가. “왜 할아버지는 특별히 텔레비전으로 작품을 만드시나요?” “요즘에는 텔레비전 없는 집이 거의 없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말이야.”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대부분 믿어.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은 엄청난 힘이 생겼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영국의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는 텔레비전이 힘을 가지는 것이 두려웠나 봐. 조지 오웰은 1984년이라는 책을 썼어. 이 책에는 무시무시한 지배자가 나와서 텔레비전으로 사람들을 감시한단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몹시 무서워했겠어요.” “그래. 조지 오웰은 텔레비전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전쟁까지 하다가 결국 1984년에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무 무서운 나머지 어느 작은 섬에 숨어 버렸단다.” “나는 조지 오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지.” 굿 모닝 미스터 오웰. 조지 오웰은 세상이 1984년에 사라질 거라고 했어. 하지만 1983년 12월에도 지구는 계속 있었지. 그래서 나는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같은 시간에 텔레비전 쇼를 벌이자고 했어. 1984년 1월 1일, 새 아침이 열리는 때에 맞추어서 말이야. 세계 여러 나라는 희망찬 1984년을 맞는 기쁨을 여러 가지 방송 프로그램으로 보여주었지. 전 세계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그 순간만큼은 세계가 하나로 모아졌어. 이 지구 최대의 텔레비전 쇼가 내 작품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이란다. 자유롭게 상상하는 삶을 살다. 백남준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마셨어요. “할아버지 셔츠 주머니는 엄청 크네요. 주머니가 아니라 자루 같아요.” “내가 물을 많이 마시거든. 그래서 물병을 넣으려고 큰 주머니를 만들어 달았단다.” “그런데 주머니 안에 칫솔과 치약은 왜 넣고 다니세요?” “나는 늘 작품 생각을 해. 그러다 보니까 양치질을 하고 나서 깜빡 잊고 칫솔과 치약을 주머니에 넣고 나오는 일이 많단다. 오늘도 실수를 했구나. 현지가 보기에는 내가 이상하니?” 현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어요. “아니요. 할아버지의 개성인 거잖아요.” “제대로 이해했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이야. 예술가가 되든지, 과학자가 되든지 자유롭게 상상하라는 이 할아버지의 말을 꼭 기억하렴.” 백남준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요. 현지도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요.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유롭게 상상하기.’ 현지는 꼭 이렇게 살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답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참 다양해요. 세상에는 병을 고치는 사람도 있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으며, 시를 쓰거나 악기를 다루는 사람도 있어요. 친구들은 무엇을 잘하나요? 또,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사실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잘하는 것도 무척 힘들어요. 재주도 있어야 하고, 노력도 꾸준히 해야 하지요. 그런데 500년 전쯤에 열 가지, 스무 가지가 넘는 일을 고루 잘 해낸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 이름 앞에는 이렇게나 많은 말이 붙었지요.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수학자, 공학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그 사람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랍니다. 지금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 보세요. 친구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자기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고루고루 잘 펼쳐 보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자연을 살피는 꼬마 화가. "개구리는 앞발이 두 개, 뒷발이 두 개야. 난 팔이 둘이고, 발이 둘이니까 우린 비슷해. 하지만 난 헤엄을 못 치는데 개구리는 수영 선수야. 물고기도 아닌데 어쩜 저렇게 헤엄을 잘 치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늘도 하루 내내 물속만 들여다보며 중얼거렸어요. 하얀 종이 위에 개구리를 그럴듯하게 그리면서 말이에요. 며칠 전 강가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본 다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에 온답니다. 한참 물속을 들여다보던 레오나르도가 갑자기 옷을 훌훌 벗더니 강물로 뛰어들었어요. 하지만 몸이 가라앉는 바람에 물만 실컷 먹었지요. 레오나르도는 물 밖으로 나와 곰곰이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개구리처럼 손발을 써 봐야지.' 레오나르도는 다시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어요. "야호! 내 몸이 앞으로 나간다!" 레오나르도는 가르쳐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헤엄치는 법을 혼자서 익힌 거예요.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을 꼼꼼하게 살피고, 자기가 헤엄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한 결과였지요. 레오나르도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늘 숯을 들고서 그리고 싶은 것을 찾아다녔지요.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면 한참 살펴보고 곰곰이 생각한 뒤 그림을 그렸어요.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방패에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예요. 아버지는 그 일을 레오나르도에게 맡겼지요. '뭘 그리지?' 레오나르도는 한참을 고민했어요. '방패라면 칼이나 창을 막아야 하니까 좀 무서운 게 좋겠지? 그래, 메두사처럼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걸 그리자.' 레오나르도는 도마뱀, 박쥐 같은 동물을 섞어 놓은 괴상한 동물을 그렸어요. 며칠 뒤 레오나르도가 그린 방패를 본 아버지는 깜짝 놀랐지요. 방패에 그려진 동물이 마치 진짜처럼 무시무시해 보였거든요.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살려 주어야겠어. 제대로 그림을 배우면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그림을 배우다. 아버지는 레오나르도를 데리고 피렌체로 갔어요.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가는 곳마다 멋진 건물과 조각상, 아름다운 그림들이 넘쳐났지요. "레오나르도, 앞으로 베로키오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울 거란다. 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베로키오는 피렌체에서 이름난 화가이자 조각가였어요. 베로키오에게 그림과 조각을 배우는 제자들이 아주 많았지요. "베로키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레오나르도라고 합니다.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대신 그림을 잘 그린다고 뽐내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칠 테니 앞서가려는 욕심은 버려야 해. 알겠지?" "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베로키오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레오나르도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레오나르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건축과 조각도 배웠어요. 또 틈나는대로 건축학, 물리학, 수학 공부를 했지요. 호기심 많은 레오나르도는 특히 수학을 재미있어했어요. '기둥 하나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기는 힘들어. 하지만 두 개가 모이면 지붕이 좀 무거워도 버틸 수 있지. 세 개가 모이면 더욱더 무거운 지붕도 문제없을 테고.' 레오나르도는 수학을 잘하면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스물한 살이 된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협회의 회원으로 들어갔어요. 나이는 어렸지만 뛰어난 그림 솜씨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거예요. 친구들은 그런 레오나르도에게 말했어요. "화가 모임에 들었으니까 이제 너도 인정받는 화가가 된 거야. 베로키오 선생님께 더 배울 필요 없잖아." "그래.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 곁을 떠났는데, 너는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야?"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지요. "화가라고 해도 실력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화가라는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잘 그리는지가 중요하지. 난 아직 부족해. 선생님께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 곁에서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배우는 데 마음을 쏟았어요.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꼼꼼히 살피고, 부지런히 그리며, 마음 깊이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를 조용히 불렀어요. "레오나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없네. 여길 떠나서 새로운 길을 가게." 이제 막 스물여섯 살이 된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 곁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요. 레오나르도는 혼자서 생활하는 동안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한편 레오나르도가 살던 피렌체 북쪽에 밀라노라는 도시가 있었어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이 새로 밀라노를 다스렸는데, 사람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퍼졌지요. "스포르차 공작은 밀라노를 피렌체보다 더 멋지게 꾸미고 싶어 한대. 그래서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하는 사람을 찾는다는군." 레오나르도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런 곳이라면 내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리도록 자극하는 게 많을 거야.'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 공작에게 보낼 편지를 썼어요. 자기 스스로를 추천하는 글이었지요. 그리고 이 편지 한 통으로 스포르차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1482년, 레오나르도는 드디어 밀라노로 떠났어요. 살아있는 기마상을 만들다. 스포르차 공작은 레오나르도를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 공작의 궁전에서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만들면서 바쁘게 지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스포르차 공작은 앞서 나라를 다스렸던 아버지를 기념할 만한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레오나르도에게 부탁했어요. "아주 큰 기마상을 만들어 주게. 자네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일을 맡은 레오나르도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례차례 써 나갔어요. 첫째, 진짜 말보다 네 배쯤 커야 함. 둘째, 크기만 큰 기마상은 안 됨. 셋째, 말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어야 함. 그날부터 레오나르도는 마구간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틈만 나면 말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지요. 열 장, 백 장, 천 장도 넘게 그렸을 거예요.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말을 겉으로만 보고 그린 그림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을 해부해야겠어. 말 근육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봐야지." 레오나르도는 완벽한 기마상을 만들려고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 일 년, 삼 년 자꾸만 시간이 흘렀어요. 기마상 스케치를 끝낸 레오나르도는 점토로 기마상 틀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날마다 진흙 범벅인 채로 기마상을 다듬고 매만졌지요. 레오나르도가 기마상을 만들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어요. 어느새 커다란 틀이 다 만들어졌지요. 아직 청동으로 기마상을 굽지도 않았는데, 레오나르도가 만든 기마상은 한발 앞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어요. 삘리리삘리리,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어요. 사람들은 레오나르도가 만든 기마상 앞으로 몰려들었어요. 그 순간 6미터가 넘는 기마상을 덮고 있던 천이 천천히 벗겨졌지요. 곧 앞으로 내달릴 듯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말!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놀라워했어요. 그때부터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최후의 만찬을 그리다. 기마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스포르차 공작은 다빈치에게 또 다른 일을 맡겼어요. 수도원 식당 벽을 그림으로 채워 달라는 거였지요. 그날 다빈치는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어요. '수도원 식당 벽에 무얼 그리지? 그래! 수도원이고 식당이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밥 먹는 모습을 그리는 게 좋겠다.' 첫째, 예수님은 식탁 가운데 혼자 앉아 있을 것. 둘째, 제자들은 세 사람씩 네 무리로 나누어 그릴 것. 셋째,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표정이 나타나게 그릴 것. 넷째, 앞에 있는 식탁과 사람들에 견주어 뒤에 있는 벽과 창문은 작게 그릴 것. 그래야 멀고 가까운 곳이 구별되니까. 꼼꼼한 다빈치는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하나하나 써 내려갔어요. 다빈치는 열두 제자의 얼굴에 저마다 다른 감정을 담아내려고 사람들 얼굴 표정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어요. 줄곧 밀라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날 본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행동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림으로 그렸지요. 다빈치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림을 마무리 지었어요. 꼬박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요. 그렇게 해서 완성한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까지도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이에요. 사람들은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앞에 서서 이렇게 외쳤어요.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아!"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이 내 앞에서 저녁밥을 먹는 것처럼 생생해." 이 그림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어요. 무엇이든 잘 만드는 천재 발명가. 바로 그다음 날, 다빈치는 기마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틈틈이 연구해 두었던 실험을 시작했어요. 바로 하늘을 나는 실험이었지요. 다빈치는 새가 나는 모습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관찰했어요. 벌판으로 나가 솔개가 나는 모습, 산 위로 올라가 독수리가 나는 모습, 동굴로 들어가 박쥐가 나는 모습까지 주의 깊게 살폈지요. 새가 나는 모습을 보고 깨달은 것들도 공책에 꼼꼼히 적어 두었어요. '커다란 천막이 있으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텐데.' '문제는 날개야. 새는 날개를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다빈치는 먼저 큰 천으로 새의 날개를 닮은 커다란 날개를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 높은 곳으로 올라갔지요. 새처럼 날개를 어깨 위에 얹고, 하늘로 힘차게 뛰어내렸어요. 하지만 바닥으로 꽈당 떨어지고 말았지요. 그래도 다빈치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무려 25년 동안 연구를 계속해서 지금 우리가 보는 낙하산과 헬리콥터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답니다. 다빈치는 낙하산과 헬리콥터 말고도 많은 발명품을 남겼어요. 망원경, 자전거, 대포, 물 위를 걷는 도구, 원형 건축물 따위가 있지요. 하지만 다빈치가 만든 발명품은 그림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모나리자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영원한 예술가. 최후의 만찬과 함께 다빈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그림이 있어요. 바로 모나리자예요. 1503년에 다빈치가 조콘도라는 상인의 부탁을 받고 그린 그림이지요.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많은 걸작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혀요. 사람들이 흔히 '모나리자의 미소'라고 말하는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웃음 때문이지요. 알쏭달쏭한 웃음과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신비한 느낌을 주는 모나리자! 곧 입을 벌릴 듯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나리자의 표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슬픈 사람이 보면 슬픈 얼굴을 한 모나리자로 보이고, 기쁜 사람이 보면 웃음을 짓고 있는 모나리자로 보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신비한 모나리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보아요. 모나리자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아직까지 모나리자의 미소에 숨겨진 비밀을 푼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1510년, 따스한 봄 햇살이 눈부시게 퍼지는 날이었어요. 다빈치는 천천히 길을 걷다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어요.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네 이름이 뭐니?" "프란체스코 멜치라고 합니다."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화가란다."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그림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다빈치는 40년 전쯤에 베로키오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어요. 그때 자기의 모습과 프란체스코의 모습이 닮아 보였어요.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열정이 가득 담겨 있었거든요. 다빈치는 기쁘게 프란체스코를 제자로 받아들였어요. 다빈치는 제자들 가운데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프란체스코를 무척 아꼈어요. 어디를 가든지 늘 데리고 다녔지요.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예술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다빈치는 이제 많이 늙었어요. 움직일 힘조차 없던 다빈치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느꼈는지 마지막 힘을 다해 붓을 들었어요. 그러고는 힘겹게 써 내려갔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제자 프란체스코에게 넘긴다. 단, 모나리자는 프랑수아 왕께 드린다. 며칠 뒤, 다빈치는 프란체스코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어요. 모나리자를 선물 받은 프랑수아 왕은 모나리자를 루브르 박물관에 소중히 걸었어요. 모든 프랑스 사람이 모나리자를 볼 수 있게 말이지요. 다빈치가 죽은 날은 아마도 모나리자의 표정이 슬프게 보였을 거예요. 다빈치가 가장 아꼈던 모나리자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신비한 웃음을 보여 주고 있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다빈치는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낙하산이나 자전거, 움직이는 로봇까지 만들 정도로 뛰어난 발명가이자 과학자였답니다. 다빈치는 발명품을 공책에 꼼꼼히 적거나 그려 놓았어요. 다빈치가 처음으로 생각해 낸 물건들 가운데 지금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어요.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간 발명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다빈치의 공책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500년 만에 하늘을 난 낙하산. 1485년, 다빈치는 나무 막대, 천, 밧줄로 신기한 물건을 만들었어요. 다빈치는 불이 났을 때 높은 곳에서 이 신기한 물건을 타고 내려와 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500년이 더 지난 1999년, 아드리안 니컬러스라는 영국 사람이 다빈치가 공책에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낙하산을 만들었어요. 니컬러스는 낙하산을 타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고, 안전하게 바닥으로 내려왔지요. 다빈치의 낙하산이 진짜로 쓸 수 있는 훌륭한 발명품이라는 걸 보여 준 거예요. 관악기 키보드. 다빈치의 공책을 보면 관악기에 쓰는 키보드를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때 벌써 다빈치는 키를 눌러 가면서 악기의 음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같은 관악기는 바로 그런 원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랍니다. 다빈치의 발명품은 이처럼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하늘을 나는 행글라이더. 세계에서 처음으로 행글라이더를 만든 사람은 오토 릴리엔탈이라는 독일 사람이에요. 릴리엔탈은 1891년에 날개 모양을 한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았지요. 하지만 그보다 앞서 행글라이더를 만들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다빈치랍니다. 다빈치는 새가 나는 것을 날마다 관찰한 뒤,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 그림을 공책에 남겨 놓았거든요.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사자 로봇. 다빈치가 만든 발명품에는 그때 살았던 다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만한 것들이 참 많아요. 특히 사자 로봇은 아주 놀라운 발명품이랍니다. 다빈치는 프랑스 왕을 위해 사자처럼 생긴 로봇을 만들었어요. 사자 로봇은 진짜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왕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무척 즐거워했다고 해요. 페달이 달려있는 자전거. 다빈치의 공책을 보면 페달과 체인을 단 탈 것이 눈에 뜨여요. 오늘날의 자전거와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지요. 페달이 달린 자전거는 1861년에 프랑스 사람인 피에르 미쇼가 처음 만들었는데, 다빈치가 그린 자전거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발명가다운 다빈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
베토벤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오스트리아 하일리겐슈타트에 가면 베토벤 아저씨가 거닐던 길이 남아 있어요. 베토벤 아저씨는 산책을 좋아하는 음악가였어요. 산책을 나설 때마다 코트와 모자, 지팡이를 챙겼지요. 참, 수첩도 빼놓지 않았답니다. 베토벤 아저씨는 이름난 피아노 연주가이자 작곡가였어요. 그런데 베토벤 아저씨에게 비밀이 하나 있었어요. 갈수록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이었지요. 음악가인데 귀가 안 들리다니, 참 큰일이지요? 그래서 베토벤 아저씨는 하일리겐슈타트로 쉬러 갔답니다. 베토벤 아저씨는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걸으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음악을 부지런히 수첩에 옮겼어요.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가슴에는 온갖 소리가 살아 있었던 거예요. 마음에 흐르는 음악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꼬마 음악가, 첫 연주회를 열다. 응애! 응애! 독일에서 손꼽히는 예술의 도시 본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돕던 할머니가 사내 아이의 할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축하합니다! 귀여운 손자가 태어났어요!"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지요. "아가야, 너를 훌륭한 음악가로 키워 주마." 이 아기가 바로 위대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에요. 베토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궁전에서 일하는 음악가였답니다. 베토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할아버지를 따르고 존경했어요. 아버지는 어린 베토벤에게 쳄발로를 가르쳤어요. 쳄발로는 겉모습은 그랜드 피아노와 비슷하지만, 그랜드 피아노보다 가늘고 화려한 음을 낸답니다. "손을 건반에 올리고 이렇게 쳐 보렴." "이렇게요?" 어린 베토벤이 잘 따라 치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참 잘하는구나! 너는 앞으로 모차르트와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될거야!" 아버지는 베토벤을 이름난 음악가로 키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연습을 시켰지요. 베토벤은 날마다 부지런히 쳄발로 치는 연습을 했어요. 아버지는 베토벤을 위해 첫 연주회를 열었어요. 베토벤은 가슴이 두근두근했지요. '사람들 앞에서 틀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베토벤은 쳄발로 앞에 앉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첫 음이 중요해. 자, 첫 음은 도였지?' 베토벤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살짝 눌렀어요. 이윽고 악보에 그려진 음들이 연주회장에 울려 퍼졌지요. 사람들은 꼬마 음악가가 들려주는 멋진 음악에 흠뻑 빠졌답니다. 네페에게 음악을 배우다. 어느 날,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새로운 음악 선생님을 소개했어요. 궁전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네페였지요. 베토벤은 네페를 잘 따랐어요. 네페는 베토벤에게 오르간 연주와 작곡 같은 음악 공부뿐 아니라, 음악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가르쳤답니다. "베토벤, 연주 연습만 많이 한다고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게 아니란다. 좋은 책도 읽고, 아름다운 마음도 길러야 해." "네, 선생님!" 베토벤은 연주하고 음악을 만드는 실력이 쑥쑥 올랐어요. 네페는 베토벤에게 평생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지요. "베토벤, 뛰어난 음악가 모차르트 선생님이 네 연주를 들어 보시기로 했단다. 빈에 다녀 오렴." 베토벤은 네페의 말에 따라 모차르트를 만나러 빈에 갔어요. '모차르트 선생님이 내 연주를 듣고 뭐라고 하실까?' 베토벤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모차르트 앞에서 연주했어요.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 참 좋아했지요. "멋진 연주구나! 너는 앞으로 훌륭한 음악가가 될 거야. 좋아! 내가 너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마."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어서 참 기뻤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베토벤은 어머니가 아파서 고향으로 돌아왔답니다.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눈을 감고 말았어요. 뒷날 병을 얻은 모차르트도 세상을 떠났지요. '모차르트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음악을 배울 기회가 사라졌어. 후유, 나는 어쩌면 좋지.' 베토벤은 고개를 푹 숙였어요. 베토벤은 열일곱 살이 되자 동생들과 아버지를 돌보아야 했어요. 궁전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교향악단에서 비올라도 연주했지요. 그리고 귀족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베토벤 선생님, 우리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세요.” “좋습니다, 브로이닝 부인.” 베토벤은 브로이닝 부인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어요. 브로이닝 부인은 베토벤에게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들을 소개했지요. 특히 발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의 연주를 좋아해서 도움을 많이 주었답니다. 음악의 세계를 넓히다. 베토벤은 다시 음악의 도시 빈으로 공부하러 떠났어요. '다시 빈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니, 꿈만같아!' 베토벤은 교향곡 작곡가로 이름난 하이든을 찾아갔어요. 하이든은 지난날 네페의 소개로 베토벤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베토벤이 쓴 악보를 보고 약속했지요. 베토벤이 빈에 오면 음악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이에요.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작곡을 열심히 배웠어요. '나는 아직도 배울 게 많아. 다른 음악가들을 찾아가 더 배워야지.' 베토벤은 셴크, 살리에리 등에게 배우며 음악의 세계를 넓혔어요. 빈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이 많았어요. 귀족은 악기 연주하는 것을 열심히 배웠지요. 연주를 잘하는 사람들은 음악가와 연주 솜씨를 겨루기도 했어요. 베토벤은 빈에서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리히노프스키 후작이 베토벤의 연주회를 열었어요.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곡과 자기가 만든 곡을 연주했어요. "오, 모차르트를 뛰어넘는 연주야!" "베토벤은 가장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예요!" 후작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어요. "여러분, 모차르트의 뒤를 이을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났어요!" 베토벤은 이름이 알려져 외국으로 연주 여행을 갔어요. 베토벤은 여러 나라에서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로 사랑받았지요. 베토벤은 아름다운 아가씨 줄리에타와 사랑에 빠졌어요. "줄리에타, 당신을 보면 내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요!" 베토벤은 사랑하는 줄리에타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어요. 바로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이었답니다. "줄리에타, 이 곡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고맙습니다. 음악이 참 아름다워요!" 하지만 신분이 낮은 베토벤은 신분이 높은 줄리에타와 결혼할 수 없었어요. 베토벤은 마음이 아팠지만, 줄리에타와 헤어졌지요. '아, 음악만이 늘 내 곁에 머무는구나.' 베토벤은 아픈 마음을 음악으로 달랬어요.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다. 베토벤에게 남모를 고민이 생겼어요. 귀가 점점 들리지 않는 거예요. 베토벤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 고민했어요. '음악가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베토벤은 의사에게 물었답니다. "소리가 점점 안 들려요. 어쩌면 좋지요?" "귓병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소리를 못 들을 수 있어요.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서 푹 쉬십시오.” 베토벤은 빈을 떠나 조용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갔어요. '자연의 품에서 쉬면 귓병도 금세 나을거야!' 베토벤은 혼자서 자주 숲길을 걸었어요. 산책할 때면 베토벤은 마음이 편안했어요. 나무 사이로 핀 꽃과 노래하는 새,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참 평화로웠지요. '아,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언제까지나 못 들으면 어떻게 하지?' 베토벤은 걱정에 잠겨 숲길을 거닐었어요. 자연은 베토벤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어요. 베토벤은 다시 힘을 냈지요. '저 새소리에는 어떤 악기가 어울릴까? 시냇물 소리는 아무래도 현악기가 좋겠지? 그래, 나에게는 음악이 있어. 빈으로 돌아가 다시 음악을 만들자. 온 세상을 음악에 담아내는 거야!'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온 뒤, 피아노 연주를 그만 두었어요. '되도록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지. 소리를 못 듣는 음악가라는 말은 듣기 싫어.' 베토벤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에 마음을 쏟았어요. 드디어 베토벤은 세 번째 교향곡 영웅을 다 만들었답니다. 베토벤은 존경하는 나폴레옹에게 영웅을 바치려고 했어요. 그때,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베토벤은 크게 실망했어요. '나폴레옹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어.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왕도 모자라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니! 그런 사람에게 내 음악을 바칠 수 없어.' 베토벤은 악보의 표지를 찢었어요. 표지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께 바침'이라고 쓰여 있었지요. 세상의 소리를 음악에 담아내다. 베토벤은 귓병이 더 심해졌어요. 아플수록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뜨거웠지요. 1808년 겨울, 빈의 한 연주회장에서 베토벤은 새로운 교향곡을 지휘했어요. 바로 교향곡 제5번 운명과 제6번 전원이었지요. 빠바바밤, 빠바바밤! 운명 교향곡을 들은 사람들은 감동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시작할 때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끝은 운명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 힘차게 외치는 소리 같았지요!"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어요. 다음으로 교향곡 제6번 전원이 흐르자, 사람들은 환한 웃음을 머금었어요. 고요한 숲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현악기 소리가 어쩌면 이렇게 시냇물 소리 같지요?" "새가 지저귀는 듯한 클라리넷 소리가 참 멋져요!" "밝고 아름다운 느낌을 잘 나타냈어요!"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에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담았던 거예요. 외로움과 아픔이 즐겁고 밝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1824년, 베토벤은 마지막 교향곡인 제9번 합창을 발표했어요.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연주회장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하지만 지휘를 끝낸 베토벤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어요.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은 귀가 어두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요. "선생님, 사람들을 보세요!" 한 젊은이가 베토벤의 몸을 붙잡고 사람들 쪽으로 돌려 주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치고 있었지요. 그제야 베토벤은 연주가 크게 성공한 것을 알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베토벤은 마음의 소리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어요.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세월을 뛰어넘는 감동을 느낀답니다. 교향곡과 교향악단. 베토벤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교향곡을 만들었어요. 교향곡 제6번 전원에서는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느꼈던 자연의 노랫소리를 담아냈어요. 그리고 교향곡 제9번 합창에서는 악기와 사람의 목소리가 잘 어울린 교향곡을 빚었답니다. 참, 교향곡이 무엇인지 아세요? 지금부터 교향곡과 교향악단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요. 교향곡이란? 교향곡은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 등이 함께 연주하는 음악이에요. 영어로는 심포니Symphony라고 하는데, 그리스 말로 '함께'라는 뜻의 '신Syn'과 '울린다'라는 뜻의 '포니아Phonia'가 어울려 만들어졌어요. 베토벤 은 소리가 다른 여러 악기가 아름답게 어울리도록 교향곡을 만들었답니다. 교향악단이란? 교향곡을 연주하는 단체를 교향악단 또는 관현악단이라고 해요. 교향악단은 크게 네 무리의 악기로 이루어져요. 바로 바이올린, 첼로 등으로 이루어진 현악기, 플루트, 클라리넷 등으로 이루어진 목관 악기, 트럼펫, 호른 등으로 이루어진 금관 악기, 큰북, 작은북, 심벌즈 등으로 이루어진 타악기랍니다. 교향곡 삼총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이름을 떨친 작곡가들을 통틀어 '빈악파'라고 해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빈악파로 알려져 있지요. 하이든은 100여 곡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교향곡의 형식을 만들어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려요. 모차르트는 교향곡의 형식을 더욱 세련되고 우아하게 만들었지요. 베토벤은 교향곡을 아홉 곡 남겼는데, 정해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갔어요. 널리 알려진 교향곡. 하이든의 교향곡 제94번 G장조. 이 곡은 1791년, 하이든이 런던에 머물고 있을 때 만든 곡이에요. 제2악장에서 처음에는 현악기로 조용히 나아가다가 갑자기 아주 세게 꽝 때리듯이 연주하는 부분이 있지요. 연주회장에서 졸던 영국 귀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서 '놀람 교향곡'이라고도 불려요.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 G단조 K.550. 슈베르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을 듣고 '천사의 목소리가 들린다.'라고 말했어요. 제40번 교향곡은 사람의 슬픔을 맑고 고운 음으로 연주해, 슬픔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어요.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베토벤은 제6번 교향곡을 만든 뒤, 4년 만에 제7번 교향곡을 만들었어요. 1813년에 제7번 교향곡을 처음 연주했을 때,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어요. 제7번 교향곡은 밝고 경쾌해서 듣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답니다. |
톨스토이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우리 아빠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우리 아빠 이름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랍니다. 그리고 저는 막내딸 알렉산드라예요. 아빠가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늘 곁에서 함께했지요. 아빠는 귀족처럼 화려하게 사실 수 있었어요. 하지만 번쩍이는 반지 하나 끼지 않고, 농민처럼 열심히 일하셨지요. 그래서 아빠 손은 여기저기 터지고 갈라졌답니다. 밭일을 하고, 옷과 신발도 손수 만드셨거든요. 이제부터 우리 아빠가 왜 그렇게 사셨는지 들려 드릴게요. 엄마와 제자들도 아빠를 사랑했지만, 저만큼 아빠를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니 오늘은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경험을 담아 첫 소설을 쓰다. 내가 서재로 들어설 때였어요. 엄마가 활짝 웃으며 아빠에게 말씀하셨어요. “여보, 당신이 쓴 원고를 깨끗이 옮겨 썼어요. 참! 쓰면서 읽었는데, 이번 소설도 감동이 넘쳐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여보, 고마워요!” 아빠는 엄마의 뺨에 살짝 입 맞추며 말씀하셨어요. 우리 아빠는 유명한 작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랍니다. 아빠는 글씨를 너무 삐뚤빼뚤 쓰셔서 엄마 말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쓰신 글을 또박또박 다시 쓰셨지요. “엄마!” “우리 귀염둥이 막내딸! 잘 잤어?” 나는 엄마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엄마 품은 언제나 따뜻해요. 아빠는 살그머니 다가와 내게 뽀뽀해 주셨어요. 아빠의 긴 수염이 내 뺨에 닿아 간질간질했어요.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에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순간마다 정성을 다해야 해요.” 톨스토이. 우리 집안은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뿐 아니라, 러시아에서 이름난 귀족이에요. 땅도 넓고, 일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우리는 일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었어요. 아빠는 산책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아침밥을 먹으면 늘 산책을 하셨지요. “아빠, 저도 갈래요!” 나는 사뿐사뿐 걸어가 아빠의 손을 꼭 잡았어요. 나는 아빠와 산책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아빠가 어떻게 살았는지 재미나게 이야기해 주셨거든요.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글쎄다. 두 분 다 아빠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구나.” 아빠는 큰형, 그러니까 큰아빠와 친하셨대요. 그래서 군인이셨던 큰아빠를 따라 군대에 가셨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에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에요.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요.” 톨스토이. 군대에 가기 전, 아빠는 대학교에 다니셨어요. 하지만 수업이 너무 성의가 없어서 대학교를 그만두셨지요. 아빠는 고향에 돌아와 혼자 공부하며 집안 땅을 돌보셨어요. 그리고 가난한 농민을 도우려고 애쓰셨지요. 아빠는 한숨을 푹 쉬며 계속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잘 안되었단다. 아빠는 너무 속상해서 다시 도시로 갔어.” “술을 마시고, 노는 생활에 빠졌지. 그러다가 큰형을 따라 군대에 갔단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글을 썼지.” 아빠는 어렸을 때 이야기인 어린 시절을 다 쓰고,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차례로 쓰셨대요. 그 뒤, 전쟁 경험을 담은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를 쓰셨지요. “사람들은 아빠 소설을 좋아했단다. 서로 자기 문학 모임에 오라고 하더구나.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며 글을 쓰는 게 내키지 않았어.” 결국 아빠는 고향에 돌아오셨어요. 땅을 돌보고, 외국 여행도 하며 계속 소설을 쓰셨답니다. “가장 위대하고 깊은 진리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하답니다.” 톨스토이.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가 깨달았단다. 우리나라 농민이 배울 기회가 없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가난한 농민의 아이를 모아서 학교를 열었단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칠까 고민했어.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자료도 모으고 연구했지. 아빠가 연구한 결과를 잡지에 내고, 교과서도 만들었단다.” “우아,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아빠, 엄마를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장난스럽게 물으니까 아빠는 껄껄 웃으셨어요. “엄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어. 귀족이며 작가인 아빠와 참 잘 맞았지.” “길을 가려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지요? 다른 사람의 삶을 이끌 때도 똑같답니다. 다른 사람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 알아야 해요.” 톨스토이. 명작을 쓰며 현실에 눈뜨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셨어요. 아빠는 정성을 들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같은 명작을 쓰셨어요. 두 소설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소설이지요. "전쟁과 평화는 아빠가 7여 년에 걸쳐 썼단다. 자료도 참 많이 읽었지.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꼼꼼하게 썼다며 모두 좋게 이야기했단다." 안나 카레니나를 쓸 무렵, 아빠는 고민이 생기셨어요. 엄마에게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늘 한숨을 쉬셨지요. 안나 카레니나에는 아빠의 고민이 담겨 있어요. “아빠는 진실하고 올바르게 살고 싶었단다. 혼자 잘살기보다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을 돕고 싶었지. 아빠는 작가니까 글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마음먹었어.” “일을 성공하려면 참고 견디는 마음이 가장 필요해요.” 톨스토이. “우리 아이들은 귀족이니까 큰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야 해요.” 엄마의 말에 따라 우리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사했어요. 아빠는 반대했지만, 엄마를 말릴 수 없으셨지요. 모스크바에는 알록달록 화려한 궁전과 멋진 음악회, 귀족이 많았어요. 우리 가족은 모스크바에 푹 빠졌어요. 아빠만 빼고요. “당신은 참 이상해요! 멋진 옷은 거들떠보지 않고, 왜 허름한 옷만 입어요? 귀족들과 어울리면 좋을 텐데, 가난한 사람하고만 어울리고.” 엄마는 아빠를 시큰둥하게 대했어요. 얼마 뒤, 아빠는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셨어요. 아빠는 엄마에게 말씀하셨지요. “가난한 사람은 정말 힘들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황제와 귀족은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아요. 사회 제도를 바꾸어야 해요.” 아빠는 ‘백성을 돌보지 않는 황제는 반성해야 한다. 귀족도 땀 흘리며 일해야 한다.’고 글을 쓰셨어요. 아빠의 소설을 좋아하던 황제와 귀족은 차츰 아빠를 멀리했답니다. “모든 말에는 반대말이 있어요. 하지만 단 하나, 사랑이란 말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미움이라는 말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넓고 크니까요.” 톨스토이. 하루는 엄마가 화를 내며 아빠에게 물으셨어요. “여보, 어떻게 그런 책을 쓴 거예요?” 엄마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고백이라는 책 때문이었지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빠는 말씀하셨어요. “여보, 나는 고백에 내 고민을 모두 담았어요. 무엇이 참된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일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해요. 귀족이라고 일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빠는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셨지요. 결국 황제는 고백을 팔지 못하게 막았어요. 아빠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작가인데도 말이에요.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용서하세요. 그럼 여러분은 용서라는 행복을 알게 될 거예요.” 톨스토이. 헐벗은 이들과 함께하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 가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집에는 방이 하나 더 생겼어요. 아빠가 신발을 만드시는 방이었답니다. 아빠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가위로 싹둑싹둑 가죽을 잘랐어요.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면, 돋보기를 쓰신 아빠는 싱긋 웃으며 말씀하셨지요. “얘야, 바늘에 실 좀 꿰어 주겠니?” 내가 바늘에 실을 꿰어 드리면 아빠는 참 좋아하셨어요. 아빠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손수 농사를 짓고, 신발을 만드셨던 거예요. “아이코!” 아빠는 가죽을 꿰매다 바늘에 손가락이 찔렸어요. 아빠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어요. 나는 냉큼 아빠의 손을 잡고 피를 닦아 드렸어요. 아빠 손은 참 거칠었어요. 옛날에는 보들보들했는데. 그래도 나는 아빠 손이 참 좋았어요. “사람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해요. 일을 해야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톨스토이. “아빠, 피곤하세요? 하품을 자주 하시네요.” 아빠는 고민이 많은지 잠을 못 주무셨어요. 글도 잘 안 써지는 것 같았지요. 나는 갑자기 종이에 글을 막 썼어요.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다가 종이를 박박 찢었지요. 아빠 흉내를 낸 거예요. 아빠는 배를 잡고 껄껄 웃으셨어요. 나는 아빠와 함께 마구간으로 갔어요. 아빠는 말 타는 것을 참 좋아하셨거든요. 아빠와 나는 말을 타고, 농민이 일하는 벌판을 지났어요. “농민은 날마다 일하는데 왜 가난할까? 힘들게 일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살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날이 밝는단다.” 아빠의 고민은 나한테 너무 어려웠어요. 아빠는 옛날보다 말이 적어지고, 어딘지 외로워 보였어요. “보통 사람에게 본받을 점을 찾으세요. 보통 사람에게는 참된 위대함이 있어요.” 톨스토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빠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아빠의 책을 읽고 감동해서 집에 찾아왔지요.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의 책을 읽고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부디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선생님 말씀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어느덧 아빠는 훌륭한 작가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셨답니다. 아빠는 엄마에게 말씀하셨어요. “여보, 우리는 일하지 않고도 잘살고 있어요. 하지만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굶주려요. 우리가 힘을 합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해요. 그래야 우리도 참된 삶을 살 수 있어요.” “농민이 가난한 건 우리 탓이 아니에요. 당신은 제자들 말은 들으면서 내 말은 왜 듣지 않지요?”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셨지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기보다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톨스토이. 그때 체르트코프 아저씨가 들어오셨어요. 아저씨는 아빠를 가장 열심히 따르는 제자였지요. “선생님! 황제가 나라에서 믿는 종교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도와야지!” 아빠는 여러 나라에 도움을 부탁하셨어요. 러시아 일이 밖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황제와는 반대였지요. “톨스토이는 황제보다 더 훌륭해!” 사람들이 아빠의 편에 섰어요. 황제는 아빠를 돕는 사람을 못살게 굴었지요. 아빠는 힘을 다해 소설 부활을 서둘러 썼어요. 부활은 날개 달린 듯이 팔렸지요. 아빠는 그 돈을 종교가 달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썼답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거예요.” 톨스토이. 연필은 칼보다 강하다. “톨스토이 선생님은 정말 천사 같은 분이셔!” 제자들은 아빠를 떠받들었어요. 제자들이 돌아가면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지요. “제자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옳고 착한 일만 한 줄 아는구나.” 어느새 훌쩍 큰 나는 아빠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있었어요. “아빠, 저는 아빠의 마음을 알아요. 아빠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드셨는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글을 쓰면서 지난날을 뉘우치셨지요?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수없이 고민하셨지요?” “그래, 사랑스러운 내 딸! 너는 내 마음을 아는구나!” “그럼요. 아빠, 저는 언제나 아빠 곁에 있을게요.”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아빠에게 드렸어요. 아빠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요. “나는 굶주린 사람들 곁에 있을 때 참삶을 깨달았어요.” 톨스토이. 러시아는 점점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전쟁이 일어나고, 굶주린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황제에게 맞섰어요. 황제는 맞서는 사람들을 힘으로 억눌렀지요. 아빠는 수많은 글에서 이렇게 외쳤어요. ‘신발 한 켤레가 없어 추위에 떠는 사람 앞에서 값비싼 마차를 굴리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황제와 귀족은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나라 밖에서는 아빠의 노력을 높이 사서 노벨상을 주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아빠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러시아가 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면 노벨상을 받겠습니다. 모두 함께 받아야 할 상을 저 혼자만 받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 지난해의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자신을 느끼는 거예요.” 톨스토이. 마지막 여행을 떠나다. 아빠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려고 하셨어요. 하지만 엄마는 아빠의 뜻을 반대하고, 계속 화려하게 사셨지요. 아빠는 슬픈 얼굴로 내게 말씀하셨어요. “난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려 했지만, 쉽지 않구나.” 며칠 뒤, 아빠는 나와 의사를 데리고 집을 나와 여행을 떠나셨어요. 하지만 아빠는 몸이 안 좋으셨지요.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빠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셨어요. 고요히 잠이 드신 채로 말이에요. 우리 아빠는 이제 새소리도 들을 수 없으세요. 숲속 작은 무덤에 계시니까요.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 적은 없을 거예요.” 톨스토이. 아빠는 늘 일기를 쓰셨어요. 하지만 아빠의 진짜 일기는 세상을 떠나기 전, 3개월 동안 쓰신 일기랍니다. 아빠의 생각이 모두 담긴 진짜 일기.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아빠의 일기를 정리했어요. 그리고 아빠의 바람대로 땅을 모두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세계의 위대한 작가로 수많은 명작을 쓰신 아빠. 마지막까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걱정했던 아빠. 아빠, 편안하게 잠드세요! 모두 아빠의 소설을 읽고, 영원히 아빠를 기억할 거예요. “물건을 쓸 때는 늘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 노력하고 힘쓴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물건을 망가뜨리면 그 물건뿐만 아니라 만든 사람의 수고, 노력까지 없애는 것이니까요.” 톨스토이. |
펄 벅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펄 벅은 미국 사람이었지만 중국에서 오래 살았어요. 처음에 중국 사람은 피부색이 다르다고 펄벅을 멀리했지요. 펄 벅은 마음이 아팠지만 곧 씩씩하게 일어났어요.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멀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중국을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요. 이렇게 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대지가 태어났어요. 펄 벅에게는 소중하지만 남과 달라 가슴아팠던 사람도 있었어요. 정신 지체아인 딸 캐럴이지요. 펄 벅은 참 많이 울었지만 결국 웃음을 되찾았어요. 딸은 남과 다를 뿐, 모자라지 않다고 깨달았거든요. 펄 벅은 남과 다르다고 상처받은 세상 아이들을 껴안기로 했어요. 그래서 펄벅인터내셔널을 세웠답니다. 자, 이제 알았지요? 우리도 상처를 상처로만 생각해서 주눅들지 말자고요. 상처는 소중한 씨앗이 되어 더 큰 사랑의 나무로 자랄 수 있으니까요. 중국을 사랑하는 미국 아이. "양키체! 양키체!" 중국 아이들이 한 아이를 놀렸어요. 양키체는 다른 나라에서 온 악마라는 말이지요. 놀림받는 아이는 언뜻 보기에 중국 아이 같았어요.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을 했으니까요. 아이는 울먹울먹하다가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물었지요. "엄마, 아이들이 나를 '양키체'라고불러요.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닌가요?"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며 말했어요. "너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란다." 아이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어요. "미국 사람이요? 그럼 왜 우리가 중국에 사나요?" "1892년, 네가 태어났을 때는 미국에 살았단다. 그런데 네가 아기일 때 중국에 왔지. 아버지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로 했거든." 그제야 아이는 자기가 미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아이가 바로 펄 벅이랍니다. 펄 벅은 중국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중국 아이들은 펄 벅을 끼워 주지 않았지요. 하루는 펄 벅이 중국 사람인 유모 왕에게 물었어요. "유모, 중국 아이들이 왜 나를 싫어하지요?" "아가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외국 사람을 싫어하는 거예요." "외국 사람을 왜 싫어해요?" 왕은 펄 벅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중국 사람은 '세계에서 우리가 최고!'라고 여겨요. 그런데 서양 사람이 들어와 중국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했어요. 서양의 문화나 종교까지 받아들이라고 했지요." "그럼 유모도 내가 싫어요?" "아니요. 중국 사람이 모두 서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서양의 좋은 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답니다." 왕은 활짝 웃으며 펄 벅을 꼭 안아 주었어요. 펄 벅은 친구가 없어 어머니, 유모인 왕과 가장 친했어요. 어머니에게 영어를 배우고, 왕에게 중국어를 배웠지요. 펄 벅은 영어와 중국어로 쓴 책을 모두 읽었어요. 책 읽기와 글쓰기도 무척 좋아했답니다. 어느덧 펄 벅은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했답니다. "여보, 우리딸을 미국에 있는 대학에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여성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드물었어요. 하지만 펄벅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가서 대학에 들어갔지요. 낯선 미국에서 씩씩하게! 펄 벅은 처음에 미국 생활이 낯설었어요. 미국 문화는 중국과 많이 달랐거든요. 친구들은 중국에서 온 펄 벅을 멀리했어요. 어쩌다 펄 벅에게 말을 거는 친구도 엉뚱한 것만 물었지요. "중국 사람은 글자도 모르고 말소리도 시끄럽지?" "책에서 보니까 중국 사람은 비쩍 마르고 못생겼더라. 정말 그래?" 펄 벅은 화들짝 놀랐어요. '세상에! 미국 사람은 중국을 너무 몰라. 그래, 내가 중국에서 겪은 것을 이야기로 써 보자. 나만큼 중국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거야.' 펄 벅은 외로울 때마다 글을 썼어요. 글을 쓸 때면 외로움을 잊었지요. '미국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중국을 좀 더 알면 좋겠어.' 펄벅은 하루하루 글을 쓰며 글재주를 키웠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글을 잘쓰기로 널리 알려졌지요. 하루는 친구들이 펄 벅에게 코르셋을 주며 말했어요. "이 코르셋을 입어 보렴. 몸이 정말 날씬하게 보일 거야." 하지만 펄 벅은 고개를 흔들었어요. "고맙지만 코르셋은 입지 않을래." "아니, 왜?" "중국에 '전족'이라는 게 있어. 여자 아이의 발을 천으로 꽁꽁 묶는 거지. 꽉 묶인 발은 피가 잘 안 통해. 뼈가 부러지기도 한단다. 그런데도 전족을 왜 하는 줄아니? 여자 발은 작아야 예쁘다고 생각해서야." "코르셋과 전족이 무슨 상관이야?" 친구들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펄 벅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어요. "나는 코르셋도전족과 같다고 생각해. 허리가 아픈데도 날씬하게 보이려고 졸라매기 싫어." 펄 벅은 늘 자기주장을 씩씩하게 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나왔지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다. 아버지가 펄 벅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중국에 있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편지였지요. 펄 벅은 얼른 중국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돌보았어요. 펄 벅은 중국에서 미국 젊은이와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곧 결혼했답니다. 펄 벅은 남편과 함께 외딴 마을로 이사했어요.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음, 이곳 생활을 자세히 써 놓으면 어떨까? 그럼 나중에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야.' 펄 벅은 그날그날 겪은 일을 빠짐없이 공책에 썼어요. 설날이다. 아이들은 빨간 옷을 입고 집집이 세배를 다닌다. 중국 사람은 빨간색을 좋아한다. 복을 부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홍수와 가뭄이 차례로 닥쳤다. 농사를 망친 사람은 풀뿌리를 먹으며 산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다. 중국 여성은 남성 못지 않는 일을 한다. 이곳 여성들은 아기를 낳기 전까지 밭에서 일한다. 다른 지역의 군인이 이곳으로 쳐들어왔다. 군인들끼리 큰싸움이 났다. 오늘은 우리 집 앞마당으로 총알이 휙휙 지나갔다. 한 중국 여자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너무 무서워서 하루 내내 덜덜 떨었다. 펄 벅은 이런 글감들을 뒷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대지에 썼답니다. 펄 벅은 남편과 함께 난징으로 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던 가운데 첫딸 캐럴이 태어났어요. 펄 벅은 천사처럼 예쁜 아기를 보며 행복해했어요.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어요. 캐럴은 정신 지체아였지요. 펄 벅은 캐럴을 정성껏 돌보고 가르치는 데 애썼어요. 힘들 때도 있지만, 펄 벅은 캐럴을 돌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답니다. "아이가 몸이나 정신, 아니면 둘 다 부족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우리는 아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시선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는 우리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생명입니다." 펄 벅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다. 펄 벅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서, 첫 소설 동풍서풍을 세상에 내놓았어 요. 동풍서풍은 인기가 많았어요. 용기를 얻은 펄 벅은 다음 소설을 쓰려고 여러 글감을 떠올렸지요. 그때 펄 벅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왜 서양 사람은 동양을 흥밋거리로만 생각할까? 동양은 서양과 다를 뿐이지, 이상한 곳이 아닌데. 동양에도 훌륭한 역사와 문화가 있어. 내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담은 소설을 내면 어떨까?' 펄 벅이 자기 생각을 말하자, 출판사 사장이 물었어요. "미국 사람인 당신이 중국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그럼요. 나는 중국에서 오래 살았으니까요. 나는 중국 농부 왕룽을 주인공으로 해서 중국을 있는 그대로 그릴 겁니다.” 이렇게 해서 펄 벅은 소설 대지를 썼어요. 대지가 미국에서 소설책으로 나왔어요.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저마다 소설을 칭찬했지요. "대지에는 중국 사람이 먹는 음식, 즐겨 입는 옷이 잘 나타나 있더군요.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중국 농부가 전쟁과 가뭄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어요. 그러면서도 땅을 믿고 열심히 살아가니, 코끝이 찡했어요." "왕룽의 부인이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어요.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머니의 모습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일반 독자뿐 아니라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대지를 높이 평가했답니다. "펄 벅은 중국에 훌륭한 문화와 전통이 있다는 것을 미국에 알렸습니다. 대지는 세계에 중국의 참모습을 알릴 것입니다." 높은 인기 속에 펄 벅은 대지로 퓰리처상을 받았어요. 1938년, 노벨 문학상 심사 위원들이 수상자를 발표했어요. "대지의 작가 펄 벅을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습니다!" 심사 위원들은 펄 벅을 뽑은 이유를 밝혔어요. "그동안 서양 사람은 서양이 동양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펄벅은 소설 대지를 써서 서양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대지에서 펄 벅이 중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펄 벅은 위대한 작가입니다!" 펄 벅은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어요.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이 상을 받아야 하는건데." 펄 벅은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요. 펄 벅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지요. '아직도 서양은 동양을 너무 몰라. 앞으로 동양과 서양의 거리를 좁히는데 더 노력해야지.' 펄 벅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바쁘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펄 벅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지요. "중국에 있는 외국 사람은 모두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중국 사람은 외국 사람을 차츰 멀리했어요. 일본이 중국에 쳐들어왔거든요. "펄 벅 선생님, 어서 중국을 떠나세요. 중국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사람들이 걱정하자 펄 벅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중국은 나의 조국과 마찬가지랍니다. 나는 중국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얼마 전에도 어떤 외국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펄 벅은 깊이 생각한 끝에 말했어요. "네. 그럼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중국에 올 겁니다." 결국 펄 벅은 중국을 떠났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뒤로 중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답니다. 펄 벅은 미국으로 돌아와 인종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했어요.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이를 두어서 사람을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 평등하게 살아야 해요. 저는 중국에서 쫓겨나다시피 미국에 왔어요. 백인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중국을 사랑해요. 저를 쫓아낸 것은 중국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에요." 한 백인이 펄 벅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오? 백인 편이요, 중국 사람 편이요?" "피부색과 핏줄로 편을 가르는 것은 어리석어요. 인종이 다르더라도 서로 좋은 점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펄 벅은 인종 차별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고 있었지요. 우리나라와 아름다운 인연을 맺다. 펄 벅은 늘 전쟁을 반대했어요. "전쟁으로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칩니다. 전쟁은 사라져야 해요." 펄 벅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예순여섯 살에도 지치지 않고 우리나라에 왔지요. 그때 우리나라에는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가 많았거든요. 펄 벅은 가난과 병으로 힘들어하는 어린이를 보면 마음이 아팠어요. 버림받은 혼혈 어린이도 많았지요. 펄 벅은 미국 정부에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와 혼혈어린이를 돕자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좋아. 그럼 내가 직접 아이들을 돕겠어.' 펄 벅은 힘겹게 사는 어린이를 도우려고 '펄벅인터내셔널 한국'을 세웠어요. 일흔 살이 되었지만, 펄 벅은 조금도 쉬지 않고 세계를 누볐지요. 그리고 펄벅인터내셔널 한국에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답니다. 펄 벅의 집에 찾아온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아니, 집에 화장실이 왜 이렇게 많아요?" 펄 벅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지요.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을 위해서 화장실을 많이 만들었답니다." 펄 벅은 피부색이 다른 아이를 데려와 자기 아이처럼 키웠답니다. 아이들을 직접 씻기고 입히며 돌보았지요. 그리고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두루 도왔어요. 펄 벅이 버림받은 아이를 보살피게 된 것은 딸 캐럴 때문이에요. 펄 벅은 사람들에게 말했지요. "나는 살면서 두 가지 선물을 받았어요. 하나는 노벨 문학상이고, 하나는 정신 지체아로 태어난 제 딸입니다. 처음에는 슬퍼했지만, 딸을 키우며 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답니다." 펄 벅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뒤로 꾸준히 소설을 선보였어요. 또한 차별을 없애고 약한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요. 펄 벅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말했답니다. "펄 벅은 참된 평화의 여신이었어!" |
허준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지금부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요. 첫째, 머리카락을 자주 빗으세요. 둘째, 얼굴을 자주 만지세요. 셋째, 눈을 자주 움직이세요. 넷째, 귀를 자주 만지세요. 다섯째, 혀를 자주 입 안에서 굴리세요. 여섯째, 이를 자주 두드리세요. 일곱째, 침을 자주 삼키세요. 여덟째, 탁한 것을 버리세요. 가래 따위를 버리라는 말이에요. 아홉째, 등을 따뜻하게 하세요. 열째,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보호하세요. 열한째, 배를 자주 만지세요. 열두째, 항문을 오므리듯 자꾸 안으로 당겨주세요. 정말 쉽지요? 이 내용은 허준 선생님이 지은 동의보감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백성이 병 없이 오래 살길 바랐던 허준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지요. 서자로 태어나다. 서당 공부를 마치고, 혼자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뒤따라가며 놀려댔지요. "얘들아, 우리가 공부를 잘 못한다고 훈장님께 혼나는 게 누구 때문인 줄 아니?" "누군 누구야? 잘난 준이 녀석 때문이지!" "맞아. 훈장님은 과거에 붙을 사람은 준이밖에 없다고 하셨어." "흥, 과거 좋아하네. 공부만 잘한다고 아무나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줄 알아? 서자는 높은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 "맞아, 맞아. 공부 좀 잘한다고 뻐기는 꼴이라니!" 그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홀로 길을 가는 아이는 허준이었어요.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지요. '이까짓 공부는 해서 뭣해! 서자라서 높은 벼슬도 할 수가 없는걸!' 허준은 1539년에 경기도 양천현에서 허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허준은 서당에서 아무리 글공부를 잘해도, 서자이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어요.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돌아온 날 밤, 허준은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어머니, 앞으로는 절대 서당에 가지 않겠어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서당에 가지 않겠다니." 허준은 어머니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가엾은 것, 어미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야. 내 죄가 크다. 모든 게 내 탓이로구나!" 어머니는 허준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곧 마음을 굳게 먹고, 허준을 달래면서 말했지요. "준아, 너무 실망하지 마라. 사람이 하는 일에 무슨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의술에 뜻을 품다. 얼마 뒤, 허준은 어머니를 따라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갔어요. 할머니 집에 머무는 동안, 허준은 가끔 약 심부름을 했어요. 그러다가 그 마을에서 널리 이름난 의원을 알게 되었지요. 허준은 의원 집을 자주 찾아갔어요. 의원이 환자에게 침을 놓고, 약을 짓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거든요. 허준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의원이 말했어요. "내 의술이 신기하게 보이느냐? 그래, 공부는 어디까지 했는고?" "서당에서 소학까지 배웠습니다." "그래? 그럼 내게 의술을 배워 보겠느냐?" "네! 저도 의원님처럼 사람들 병을 고쳐 주고 싶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허준은 의원 집에 머물며 의술 공부를 시작했어요. 갖가지 의서를 읽고, 산과 들에서 약초를 캐며 열심히 의술과 약초에 대한 공부를 했지요. 허준은 서른 살 때 스승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의원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하루는 유희춘이라는 대감이 병에 걸렸어요. 유 대감은 허준의 스승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 줄 의원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요. 스승이 허준에게 말했어요. "자네가 유 대감의 병을 고쳐 보도록 하여라." "네, 스승님." 허준은 의술 도구와 갖가지 약재를 준비해 유 대감을 찾아갔어요. 허준은 유 대감을 진맥하고,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요. 그러고는 침을 놓고, 약을 지어 주었어요. 유 대감은 이 약을 먹고, 곧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요. "허 의원, 정말 고맙네. 자네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토록 용한 줄은 몰랐네. 자네의 의술이라면, 내의원에서 일해도 모자람이 없을 걸세. 어떤가, 내의원 어의가 되어 볼 생각은 없나?" "대감님, 저 같은 서자가 어찌 내의원 어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염려 말게. 내가 소개해 보겠네." 유 대감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어요. 그때에는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이 추천해 주면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요. 고맙게도 유 대감이 허준을 내의원 어의로 추천해 주었답니다. 마침내 허준은 내의원 어의로 뽑혀 한양으로 갔지요. 그때 허준은 서른한 살이었어요. 내의원에서 임금의 병을 고치다.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며 의학 연구에 힘썼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선조가 내의원에 명령을 내렸지요. "과인의 몸이 편치 않으니, 허준을 들라 하여라!" 그 말에, 내의원 의관들이 쑥덕대기 시작했어요. "이름 있는 어의들을 제쳐 놓고 허준을 부르시다니." 그러나 선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게 허준을 맞았어요. "내 이미 그대의 높은 의술과 노력하는 자세를 알고 있네. 내가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그대를 불렀으니 어서 맥을 짚어 주게." 허준은 떨리는 손으로 선조를 진맥했어요.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음식이 체해 생긴 병이니 바로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선조는 허준이 지은 약을 먹고, 곧 건강을 되찾았어요. "허준은 진맥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약을 짓는 기술도 뛰어나구나." 선조는 크게 감탄했답니다. 다음 날, 선조는 다시 허준을 불렀어요. "내 그대 덕분에 병이 금세 나았소. 이처럼 제때에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우리 백성의 삶이 더욱 좋아질 것이오. 하지만 백성이 의서를 쉽게 볼 수 없으니. 그대가 그 방법을 연구해 주겠소?" "황공하옵니다. 마마!" 사실 허준은 오래전부터 어려운 의서를 우리글로 옮겨 펴내는 일을 꿈꾸어 왔어요. 왜냐하면 그때의 의학은 부자나 양반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거든요. 그래서 백성은 병에 걸려도 의원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고, 더욱이 백성이 볼 수 있는 의서는 거의 없었지요. 허준은 불쌍한 백성을 위해, 쉽게 볼 수 있는 의서를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혼자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지요. 그런데 마침 선조에게서 백성을 위한 의서를 만들라는 말을 들은 거예요. 허준은 기쁜 마음으로 밤낮없이 의학을 연구했지요. 허준은 우선 두창에 관한 의서인 창진집을 우리글로 풀어 쓴 언해두창집요를 펴냈어요. 선조는 허준이 쓴 책을 보고, 크게 칭찬했어요. "그대는 백성을 위해 참으로 큰일을 하였소. 이 책대로 한다면, 가벼운 병은 백성들 스스로가 고칠 수 있을 것이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허준은 점점 내의원에서도 의술이 뛰어난 어의로 알려졌어요. 선조는 허준을 더욱 믿고, 가까이했지요. 1592년, 수많은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왔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에요. 왜군은 집을 불태우고, 보물을 빼앗으며, 백성을 마구 죽였어요. 마침내 왜군은 한양 가까이까지 쳐들어왔지요. 신하들이 선조를 걱정하며 말했어요. "왜군이 한양까지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전하, 피난을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결국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기로 했어요. 그러나 선조의 건강을 보살피려고 함께 가려는 어의는 한 사람도 없었지요. 오직 허준만이 선뜻 따라나섰답니다. 2년 가까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선조는 다시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어요. 선조는 불에 타 버린 집들과 곳곳에서 숨진 백성을 보고 눈물을 흘렸지요. 아프면서도 치료 한 번 못 받고 쓰러진 백성들이 많았어요. 선조는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큰 결심을 했지요. '그래! 백성들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는 의서를 만들어야겠다!' 선조는 곧 내의원에 명령을 내렸어요. 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의서를 펴내라고요. “이제부터 새 의서 편찬은 그대가 맡아서 해 주시오. 가엾은 백성을 생각하며 새로운 의서를 펴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바라오." 선조가 허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어요. 허준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지요. "예, 전하.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훌륭한 의서를 펴내겠습니다." 새로운 의서를 만드는 데 힘쓰다. 허준은 새 의서를 펴내려고 다양한 약초를 가져다가 무슨 병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연구했어요. 선조는 허준의 노력을 높이 사 '정2품 정헌대부'라는 벼슬을 내렸지요. 허준에게는 큰 영광이었어요. 그러자 허준을 못마땅해하던 신하들이 선조에게 허준을 나쁘게 말했지요. 하지만 선조는 허준을 굳게 믿고, 새로운 의서를 펴내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답니다. 허준은 선조와 백성을 위해 새로운 의서를 꼭 펴내겠다고 다짐했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지요. 너무 서두르면 내용이 알차지 않은 책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 한 몸 잘살고 편하려면 이 일을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의원으로서 온 백성이 보기 쉬운 의서를 만들어 병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리라!' 허준은 스스로를 달래며 새 의서를 펴내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요. 내의원에 있는 갖가지 의서들을 두루 살펴보며 연구했지요. 허준은 맨 먼저 건강을 지키는 데 필요한 내용을 적었어요. 백성이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했지만, 건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다음, 병이 났을 때 필요한 처방과 이론을 적고, 가난한 백성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썼어요. 또한 책을 볼 때 내용을 찾아보기 쉽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이는 모두 허준이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허준은 여러 의관들과 의견을 나누며, 우리 형편에 맞는 의서를 만들려고 정성을 다했어요. 귀양살이를 하다. 의서 연구를 시작한 지 몇 년이 흘렀어요.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 게 많았지요. 선조는 혼자 묵묵히 해내는 허준이 더없이 자랑스러웠어요. '조금만 더 허준을 도와주면, 백성이 병을 고치는 데 필요한 의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더욱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겠다!' 그러나 선조는 점점 몸이 약해졌어요. 허준이 정성을 다해 침과 약을 썼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지요. 결국 선조는 쉰일곱 살에 숨을 거두었답니다. "전하, 이렇게 가시다니요! 백성을 위한 의서는 보고 가셔야지요." 허준은 너무나도 슬퍼 눈앞이 캄캄했어요.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러자 허준을 샘하던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말했지요. "전하, 허준이 어의로서 책임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물어야만 합니다." "그러하옵니다. 아무리 선왕의 신임을 받았다 해도, 죄가 있으니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허준에게 큰 벌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하들의 거센 주장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었지요. 결국 광해군이 입을 열었어요. "그대들의 뜻을 알겠소. 하지만 허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왕의 병을 고치는 데 힘썼소. 큰 벌을 내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오. 대신 허준을 멀리 귀양 보내기로 하겠소!" 허준은 어명에 따라 의주로 떠났어요. 귀양을 가며 허준은 생각했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야. 이제부터 마음 놓고 의서를 쓸 수 있겠구나.' 그러나 허준은 의주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추위와 배고픔은 물론이고, 혼자 있는 외로움이 밀려왔거든요. 하지만 허준은 모든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오직 새로운 의서를 연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그럴 때마다 선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요. '그대가 정성을 다해 만드는 새 의서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 안타깝구려. 내가 죽더라도 그대는 꼭 책을 마무리 지어야 하오. 가엾은 백성을 살리는 길이 그대에게 달렸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오.' 허준은 힘들 때마다 선조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힘을 냈답니다. 동의보감을 펴내다. 그렇게 1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귀양을 풀어 준다는 어명이 내려왔어요. 허준은 귀양살이를 마치고 얼마 뒤, 마침내 새로운 의서를 완성했지요. 선조의 명을 받아 시작한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허준은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연구가 그 결실을 맺어 기뻤어요. 허준은 벼슬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며 고생한 일들이 떠올랐어요. 외로움과 굶주림에 몸을 떨어야 했지요. 하지만 새 의서를 펴내겠다는 열정과 뜻을 굽히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어려울수록, 의서를 향한 의지는 더욱 세차게 타올랐지요. 허준은 새 의서를 완성함으로써 선조와 한 약속을 지키고, 백성을 돕겠다는 자기 뜻도 이루었답니다. '이제 중국 의학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허준은 의서를 어루만지면서 끝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허준은 의서 25권을 보자기에 싸 들고 광해군을 뵈러 갔어요. "전하, 선왕께서 소신에게 명하셨던 일을 이제야 완성하여 바칩니다." 광해군은 허준이 쓴 의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것이 선왕께서 그토록 기대하셨던 새 의서란 말이오? 이토록 방대하고 힘든 일을 혼자서 해내다니, 정말 장하오! 이 책이야말로 '동양 의학의 보배이며 거울'이오! 책 이름을 동의보감이라 지으시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신하들에게도 보여 주었어요. 신하들은 동의보감을 보고,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이 엄청난 일을 허준 혼자서 해내다니! 하늘이 허준을 도왔나 봐!"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널리 펴내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동의보감은 마침내 훈련도감 활자본으로 인쇄되어 나왔지요. "이제야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의서가 생겼어. 우리 백성도 병에서 벗어나게 됐구나!" 동의보감의 뛰어남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져, 많은 사신이 책을 구하러 조선을 찾아왔어요. 그러나 책을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답니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다른 나라에서도 귀중한 책으로 여겨졌어요. 허준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었어요.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아픈 사람과 한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를 돕는 한의학의 큰 별로 우뚝 섰답니다. |
유일한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어느 날,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끌끌 혀를 차며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여보, 우리나라 사람은 기업가를 싫어한대요. 하기는, 정치인에게 잘 봐 달라고 돈을 주거나 음식에 이상한 것을 넣는 기업가가 많으니." 어머니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어요. "우리나라에 정직한 기업가도 많아요. 유일한처럼 말이에요." 그때, 호기심이 많은 태주가 나섰어요. "엄마, 유일한이 누구예요?" "정직하게 기업을 이끌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애쓴 기업가란다. 자, 지금부터 내가 유일한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꿈과 도전이 가득한 이야기야." 태주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답니다. 나라에 빛을 주는 사람이 되자! 유일한은 처음 이름이 '유일형'이었어. 훌쩍 자란 뒤에 자기 이름을 '유일한'으로 바꾸었단다. 유일형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어.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인 뒤였지. 그때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어. 유일형의 아버지는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어. 유일형은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었지. 유일형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손꼽히는 상인이었어. 평양은 다른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빨리 받아들였어. 그리고 민족운동가가 많이 있는 곳이었지. 유일형은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랐어. 하루는 아버지가 유일형에게 말했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려 하는구나. 너는 앞으로 열심히 배워 우리나라에 빛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 아버지!" 유일형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어. "일형아, 공부도 중요하지만, 기술을 배우면 힘이 된단다. 누에에서 비단실을 어떻게 뽑는지 배워 오너라." 그때 아버지는 누에를 쳐서 비단으로 만드는 일을 했어. 그래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양잠 학교에 유일형을 보냈지. 하지만 유일형은 학교에 다니다가 가족이 그리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집에 돌아온 유일형은 가족이 누에 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어. 누에는 추위와 더위, 강한 햇빛에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으려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해.' 유일형은 뽕잎을 따면서 보고 들은 것을 하나하나 깨달으며 배워갔어.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단다. 그 무렵, 아버지가 유일형을 불러서 말했어. "일형아, 미국에서 공부하면 어떻겠니? 어머니는 네가 아홉 살밖에 안 되어서 걱정하지만, 너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게다. 네 생각은 어떠니?" 유일형은 골똘히 생각했어.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두렵기는 해. 하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공부 해 보고 싶어. 좋아, 용기를 내서 가 보자!' 유일형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버지에게 대답했어. "네, 아버지. 넓은 세상을 보고 와서 우리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유일형은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서 가족과 헤어졌어. 유일형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지.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뵙고 싶겠지만 꾹 참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배는 유일형을 태우고 끝없이 드넓은 바다를 헤치고 나아갔단다. 유일형은 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어. 유일형은 미국에서 힘들게 지냈지. 집 형편이 어려워져 학비와 생활비를 받지 못했거든. 얼마 뒤, 유일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커니로 갔단다. 기차는 며칠을 달렸어. 유일형은 낯선 풍경을 보다가 고향 생각에 젖었지.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가족 모두 잘 있을까?' 커니에 도착한 유일형은 기뻤어. 커니는 우리나라의 시골 같았거든. 유일형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집에서 살았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일을 거들었지. 청소하고, 석탄을 나르고, 심부름도 했어. 유일형은 석탄으로 불을 피우는 법도 배웠지. 어찌나 불을 잘 피우는지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났단다. 새 이름 유일한. 어느 날, 고등학교에 들어간 유일형이 친구들에게 말했어. "이제부터 나를 유일한이라고 불러줘." 미국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 "왜 이름을 '일한'이라고 바꾼 거야? 일한이 무슨 뜻이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어. 나는 조국을 잊지 않으려고 대한민국의 '한'자를 이름에 넣은 거야." 이 소식을 듣고 친척 어른들은 크게 화를 냈단다.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제멋대로 바꾸었다고 야단이었지. 하지만 아버지는 흐뭇했어. "하하, 나라 위하는 마음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아예 다른 아이들 이름도 바꿀 생각입니다. 삼한이, 오한이, 칠한이, 구한이! 어떻습니까?" 어때,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유일한은 접시 닦기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에서 늘 1등을 했어. '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야. 내가 1등을 하면 미국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그런데 미국 친구들은 유일한을 멀리했단다. 유일한은 이유를 몰랐지. 어느 날, 한 미국 친구가 다가와 살짝 말했어. "일한! 공부만 잘해서는 성공하지 못해. 몸도 건강하고, 친구와 잘 어울려야지." 유일한은 얼른 미식축구부에 들어갔어. 미식축구는 거칠게 몸을 부딪치는 경기였지. 하지만 유일한은 끄떡없었어. 신문을 배달하며 몸을 튼튼히 했거든. "우아! 일한이 잘한다!" "대한민국 사람은 약한 줄 알았는데, 일한은 참 대단해!" 유일한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어. 유일한이 인기를 얻을수록 대한민국의 이름도 빛을 받았지. 정직한 기업가를 꿈꾸다. 유일한은 미시간 대학교에 들어갔어. 미시간 대학교가 있는 도시에는 중국 사람이 많이 살았지. 중국 사람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자기 나라 물건을 잘 샀단다. 유일한은 쉬는 날에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며 중국 물건을 팔았어. "자! 항저우가 고향인 분은 이 비단 좀 보세요. 아름다운 항저우 비단이에요! 중국차와 찻잔도 있어요." 중국 사람들은 앞다투어 물건을 샀단다. 어릴 때 미국에 온 유일한은 중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잘 알았지. "물건도 잘 팔리는데, 더 비싸게 팔면 어떨까?" 미국 친구의 말에 유일한은 고개를 가로저었어. "정직하게 물건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어." 이때부터 유일한은 정직한 기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단다. 유일한은 우리나라와 중국 학생이 함께하는 모임을 이끌었어. 두 나라 학생은 친하게 지냈지. 두 나라 모두 일본이 힘으로 쳐들어와 힘들었거든. 학생들은 뜻을 합해 일본을 물리칠 방법을 이야기했어. 어느 날, 유일한은 중국 여학생을 만났어. 의과 대학에 다니는 호미리였지. 호미리는 똑똑하고 야무졌어. "안녕하세요? 유일한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당신 이름은 여학생들 사이에 쫙 퍼졌으니까요." 두 사람은 함께 거리를 거닐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어. 좋은 친구로 지내던 두 사람은 어느 틈에 벌써 사랑을 느꼈단다.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생각하다. 1919년 3월 1일, 우리 겨레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어났단다. 어린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지.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만세를 부르려고 한자리에 모였어. 유일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단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람들은 큰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거리를 걸었어. '나만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유일한은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을 보며 다짐했단다. 유일한은 대학을 마친 뒤, 전기 회사에서 일했어. 회사에서도 뛰어난 직원으로 이름을 날렸지. 하지만 유일한은 2년 정도 일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어. '기업가가 되자. 이제부터 내 힘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거야. 중국 사람이 잘 먹는 숙주나물 장사를 하면 어떨까?' 숙주나물은 중국 사람이 좋아하는 만두에 꼭 들어가는 재료였지. 유일한은 싱싱한 숙주나물을 팔 방법을 연구했어. 이윽고 병조림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잘 팔렸어. 하지만 이내 잘 팔리지 않았단다. '병조림은 비싸고, 잘 깨져서 옮기기 힘들어.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유일한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했어. 마침내 숙주나물 통조림을 만들었지. 통조림은 그 무렵 나온 새로운 식품 저장법인데, 옮기기 쉬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단다. 숙주나물 통조림은 중국 사람뿐만 아니라, 미국 사람도 참 좋아했어. 유일한은 숙주나물 통조림을 들고 미국 친구 윌레스를 찾아갔어. "윌레스, 내가 새로 만든 숙주나물 통조림이야. 같이 회사를 만들어 보지 않겠나?" "아, 이게 그 이름난 숙주나물 통조림이군! 좋아, 같이 해 보세!" 두 사람은 라초이 식품회사를 만들었어. 회사를 연 지 4년 만에 큰돈을 벌었단다. 유일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콩나물처럼 동양 사람이 자주 먹는 식품을 통조림으로 계속 만들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미국에서는 숙주나물의 재료인 녹두를 찾기가 힘들어졌지. "이 기회에 부모님도 뵙고, 녹두도 찾을 겸 고국으로 가자." 버드나무처럼 굳세게 뜻을 이루다. 유일한은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에 왔어. 하지만 아픈 국민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지. 그때 우리나라에는 약이 모자랐단다. '약만 있으면 모두 빨리 나을 텐데. 내가 우리나라로 돌아와 좋은 약을 만들어야겠다!' 유일한은 미국으로 가서 라초이 식품회사를 정리했어. 유일한은 미국을 떠나기 전, 서재필을 만나 헤어지는 인사를 했단다. "박사님, 우리나라로 돌아가 우리 겨레를 건강하게 만들겠습니다!" 서재필은 유일한에게 버드나무가 새겨진 목각화를 주며 말했어. "버드나무는 우리 땅 어디에서나 푸르게 자란다오. 부디 버드나무처럼 굳세게 뜻을 이루시오." 유일한은 버드나무 목각화를 늘 소중하게 간직했어. 버드나무는 유일한이 세운 제약회사의 상표가 되었단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유일한은 약을 만드는 기업인 유한양행을 세웠단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에서 약을 사다가 팔았어. 하지만 곧 연구소와 공장을 세우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는 약을 만들었어. 유일한은 공장을 지을 때, 직원을 위해 수영장과 꽃밭까지 만들었지. 열심히 일하는 직원은 월급도 듬뿍 올려주었어. 어떤 사람은 유일한이 장사를 잘 모른다고 말했어. "장사는 물건을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얻는 거예요." "아닙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면서 정직하게 팔아야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나중에는 이익을 보지요." 결국 유일한의 말이 옳았어. 직원들은 열심히 일했고, 사람들은 버드나무 상표가 붙은 약이면 믿고 샀거든. 유한양행의 약은 멀리 중국까지 팔렸단다. 유일한은 약의 쓰임새와 효과를 알리는 광고를 해서 국민을 바로 이끌기도 했지. 정직한 기업으로 한국을 빛내다. 어느 날, 유일한은 직원들에게 놀라운 발표를 했어. "우리 기업이 이만큼 발전한 것은 다 직원 여러분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업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여러분을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들은 깜짝 놀랐어. 기업에서 나눠 주는 주식을 받아 주주가 되면 기업의 이익을 다 같이 나눌 수 있었어. 직원들은 기업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했지. 유일한은 정치인에게 잘 보이려고 돈을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 화가 난 정치인들은 유한양행이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꼼꼼하게 조사를 했어.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도 잘못된 점이 없는 거야. 유일한은 늘 제때 세금을 꼬박꼬박 냈거든. 오히려 유한양행은 상을 받았단다. 유일한은 정치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업을 이끌었어. 국민도 유한양행을 성실하고 알찬 기업으로 인정했지. 유일한은 나라가 바로 서려면 똑똑한 젊은이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세우고, 뛰어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단다. 1971년, 유일한이 세상을 떠났어. 유일한은 늘 정직한 기업인으로 살며 국민의 건강을 생각했지. 온 국민이 유일한의 죽음을 슬퍼했어. 얼마뒤, 유언장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놀랐어. "내 재산을 모두 여러 사람을 위하는 일에 써 주시오." 유일한은 기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단다. 사회와 나라, 직원의 것이라고 생각했지. 유일한은 늘 생각하던 대로 평생 일군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 거야. 사람들은 유일한의 사람됨이 점잖은 신사같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신사 상인'이라는 뜻으로 '신상'이라고 불렀지. 신사 상인, 유일한! 멋지지않니? 지금도 사람들은 유일한을 존경한단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기업가들이 유일한을 본받았으면 참 좋겠어.그렇지? |
최용신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에요. 벌거숭이 나무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네요. 그런데 저기 소나무 한 그루가 푸른 잎을 뽐내며 우뚝 서 있어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넌 춥지 않니?" "물론 추워. 하지만 난 이겨 낼 수 있단다."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겨울날 소나무처럼 꿋꿋한 사람이 참 많아요. 우리가 만나 볼 최용신도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아파하고 있을 때, 최용신은 온몸을 바쳐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때에는 돈이 많은 사람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한숨만 내쉬었지요. 하지만 최용신은 나라를 되찾으려면 아이들이 배워야 한다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최용신은 꽁꽁 언 역사 속에 우뚝 솟은 상록수였답니다. 마음이 예쁜 사람. 작은 아이가 거울을 들여다보아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심하게 얽어 있어요. 네 살 때 마마를 앓았거든요. 아이의 이름은 최용신이랍니다. 최용신은 예배당 주일 학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용신아, 얼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이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굴이 예쁜 미순이만 귀여워하는걸요." "예쁜 얼굴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지. 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마음이란 건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선생님처럼 나이가 들면 누구나 볼 수 있단다. 선생님이 보니 용신이 마음은 정말 곱게 생겼구나." 최용신은 자기 가슴을 살짝 만져 보았어요. "이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마음이 그렇게 예쁘게 생겼단 말이지?' 최용신은 해맑게 웃었어요. 우리 겨레에게 힘을 주는 선생님이 될 거야! 최용신은 이제 열 살이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지요. 집안 살림이 몹시 어려웠거든요. 게다가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은 아주 드물었어요. "엄마, 학교에 보내 주세요. 공부해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최용신은 날마다 어머니를 졸라 댔어요. "그렇게 학교에 가고 싶니? 그래, 배우는 것은 때가 있는 법이지. 내일부터 학교에 가자." "우아, 정말요?" 어머니는 최용신을 학교에 보내기로 마음먹었어요. 학교는 무척 멀리 있었어요. 꼬불꼬불한 길을 십 리나 걸어야 했지요. 하지만 최용신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 길을 다녔어요. "나는 선생님이 될 거야. 가난해서 학교에 올 수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님이 될 테야." 최용신은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울 때도, 방에서 동생들을 돌볼 때도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중얼거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큰아버지가 최용신에게 말했어요. "용신아, 내가 학비를 보태 줄 테니 좀 넓은 세상에서 공부해 보련?" "큰아버지, 정말이에요? 정말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어요?" 최용신의 재주를 아낀 큰아버지는 최용신을 원산에 있는 루씨여자보통학교로 보냈어요. 최용신은 루씨여자보통학교가 마음에 쏙 들었어요. 몇 해 뒤, 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하지만 그다지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은 큰아버지에게 계속 짐이 될 수는 없었지요. '내 손으로 학비를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최용신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용신아, 수업 끝나고 도서관 일을 도와줄 수 있겠니?" "네, 선생님. 무엇이든지 할게요." 이렇게 해서 최용신은 도서관에서 선생님을 도우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무거운 책을 낑낑거리며 책꽂이에 꽂는 일은 몹시 힘들었어요. 그래도 최용신은 행복했답니다. 짬짬이 책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최용신은 책을 많이 읽으면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우리 겨레의 처지를 깨닫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왔어요. "최우수 졸업생! 최용신!" 졸업식장에 앉아있던 최용신의 부모는 눈물을 훔쳤어요. 딸이 한없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지요. 최용신은 빙그레 웃으며 다짐했어요. '나는 꼭 선생님이 될 거야.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에게 힘을 주는 선생님이 될 거야!' 보석 같은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자. 농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최용신의 꿈이 이루어졌어요. '샘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선생님으로 가게 된 거예요. 샘골은 경기도 수원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어요. 어디에서나 물이 퐁퐁 솟아오른다고 해서 샘골이라 불렸지만 마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퍽 가난했지요. "나라 잃은 백성의 모습은 어디나 다 같구나!" 최용신은 마음이 무척 아팠답니다. 마을 교회에서 도와준 덕분에 최용신은 예배당 한쪽에 공부방을 갖출 수 있었어요. 하지만 공부를 하러 오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지요. 최용신은 하는 수 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어요. "아이들을 공부방으로 보내주세요. 아이들은 배워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돈은 안 받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걔가 공부하러 가면 나무는 누가 하누?" 먹고 살기 어려워 아이들도 집안일을 도와야 했거든요. "공부가 끝나면 나무를 하러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을 공부방으로 보내주세요." 최용신은 마을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렸지요. 최용신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아이들이 하나둘 공부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최용신은 아이들에게 한글, 역사, 바느질 같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을 가르쳤어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일이 끝나면 공부방으로 찾아왔어요.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 어느새 공부방이 꽉 찼지요.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문가에 서서 공부를 할 정도였어요. 최용신은 문가에 서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가르쳐야 했어요. 최용신은 비좁은 공부방이 늘 안타깝고,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 학교를 짓는 거야!" 최용신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그 뜻을 알렸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농사지을 땅도 없는데 어디다 학교를 짓누?"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은 어디서 구한담." "우리는 일 년을 계획하면서 볍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백 년을 계획하면서 사람을 기릅니다. 소나 돼지를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기르는 일입니다. 학교는 꼭 지어야 합니다." 최용신은 마음을 굳혔어요. 어느덧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최용신과 아이들은 '추석 발표회'를 열어 그동안 배운 것을 부모님께 보여 드리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신나게 흥얼거리면서 준비를 해 나갔지요. 최용신은 직접 천을 끊어 아이들이 발표회 때 입을 옷을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들었답니다. 발표회 날은 금방 왔어요. 무용복을 입은 아이들이 무대 위로 우르르 올라오자 어른들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텔레비전도 영화도 없던 때였거든요. "아이고, 곰례가 저렇게 차려 입으니 선녀같구나." "여기 복남이가 그린 그림 좀 보세요. 보통 솜씨가 아닌걸요." 아이들이 준비한 노래와 춤과 연극을 본 사람들의 얼굴은 함박꽃처럼 활짝 피었어요. 예배당을 꾸며놓은 글씨와 그림에서도 눈을 떼지 못했지요. "배우면 저렇게 달라지는 것을." 눈물을 닦는 어머니도 있었어요. 발표회가 끝나자 최용신은 무대 앞으로 나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여러분! 우리 아이들은 보석입니다.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차이면서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흙 속에서 꺼내 잘 닦아 줍시다. 옥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게 해 줍시다. 그게 바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최용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마을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고는 너도나도 학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섰지요. 추석 발표회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을 모은 뜻깊은 자리였어요. 좋은 일은 연달아 생겨났어요. 마을의 부자 어른이 학교 지을 땅을 내놓겠다고 나선 거예요. 어머니들은 짬짬이 부었던 곗돈을 몽땅 내놓았지요. 최용신과 아이들이 꿈꾸어 온 샘골학교, 이제는 꿈만이 아니었어요. 드디어 힘을 모아 학교를 짓기 시작했어요. 최용신은 팔을 걷어붙이고 지게를 지고 돌을 날랐어요. "앗, 선생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어요. 산에서 자갈을 주워 지게에 지고 내려오던 최용신이 미끄러진 거예요. 무릎에 피가 뚝뚝 흘렀지요. 하지만 최용신은 다음날도 붕대를 감고 나와서 지게를 졌어요. "선생님, 지게 주세요. 공부는 선생님께서 잘 가르치시지만, 자갈은 제가 훨씬 더 잘 나를 수 있어요." 한 청년이 최용신이 메고 있던 지게를 빼앗으며 말했어요. 처음부터 최용신을 못마땅해하며 투덜거리던 청년이었어요. 최용신은 늦게나마 자기 마음을 알아준 청년이 참 고마웠어요. 이 청년이 다른 청년들을 불러 모아 학교 짓는 일이 빨라졌어요. 청년들은 학교 터를 고르고, 나무를 잘라 기둥 베는 일을 척척 해냈거든요. 어머니들도 질세라 새끼를 꼬고, 수숫대로 외를 엮었어요. 아이들도 모래와 자갈을 부지런히 날랐지요. "너희가 나르는 것은?" "모래!" "내일 다음에 오는 것은?" "모레!" "소리는 같지만 다른 말이라는 거 알겠지?" "네!" 최용신은 일하는 중에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어요. "우리 선생님은 정말 못 말려." 아이들은 킥킥대며 즐겁게 일하고, 신나게 공부했어요. 드디어 '샘골학교'가 다 지어졌어요. "우리 모두의 손으로 학교를 지은 겁니다." 최용신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어요.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요. 마을 사람들도 기쁨에 겨워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샘골에 봄이 왔어요. 얼었던 땅에서 졸졸 물소리가 나고, 새싹이 파릇파릇 움텄지요. 샘골학교는 뛰노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그늘에 앉아 즐겁게 뛰노는 손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들에서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들은 학교 쪽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샘골학교 곳곳에는 최용신과 아이들이 심은 과일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어요. 학교 동산에는 상록수도 심었답니다. "얘들아, 저 소나무를 보렴. 우리도 언제나 푸른 소나무처럼 살자꾸나. 마음속에 저 소나무를 심어 놓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꿋꿋이 헤쳐 나가자." "선생님, 우리 해마다 상록수 한 그루씩 심어요. 제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 이곳이 상록수로 가득 차게요." "멋진 생각이구나. 너희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너희들의 아들딸들이 상록수 동산에서 꿈을 키워 나가겠지." 아이들과 최용신은 앞날을 그리며 즐거워했어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최용신, 정말 기분 나쁜 여자입니다." 일본 사람인 오오야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최용신을 헐뜯었어요.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일본 천황 폐하께서 다 알아서 조선 아이들에게 배울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여자가 왜 저렇게 나설까요?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겁니다." 오오야마는 샘골학교에 학생들이 몰리자 일본 총독부에 부탁해서 샘골학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랗고 번듯한 학교를 세웠어요. 샘골학교에서는 한글을 가르쳤지만, 오오야마의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가르쳤어요. 샘골학교에서는 '지금은 비록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언제든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하지만 오오야마의 학교에서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조선 사람이 아는 것도 없고 게으른 탓이다.'라고 가르쳤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어요. 오오야마의 학교는 텅텅 비었는데, 샘골학교는 아이들로 넘쳐났어요. "바보 같은 조선 사람의 학교가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학교보다 더 잘되다니. 가만두지 않겠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오오야마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당장 샘골학교에 불똥이 튀었어요. 일본 순사는 최용신을 불러 소리쳤어요. "그런 누추한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오. 지금 바로 학생 수를 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게 하겠소!" 학교가 좁고, 시설도 마땅하지 않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60명이 넘는 학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린 거예요. 최용신은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아이들을 단 한 명도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교 문을 닫을 수도 없었어요. 결국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정든 친구들과 선생님을 뒤로한 채 학교를 떠나야만 했지요. 하지만 최용신은 이 아이들을 버리지 않았어요. 최용신은 오전반과 오후반 수업을 끝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만났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단 하루도 쉬지 않았지요. '이게 모두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야. 꼭 나라를 되찾아야 해.' 이 일로 최용신과 샘골학교 아이들은 더 단단해졌어요. 그즈음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일으켰어요. 일본은 전쟁과 상관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라고 했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모든 학교에서 일본 말만 가르치게 했어요. 최용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최용신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나라 말은 한글이다. 일본이 우리나라 말이라고 우기는 일본 말은 일본 사람들의 말이다." 이제 학교에서도 일본 선생들이 군인처럼 칼을 차고 공부를 가르쳤어요. 순사들은 감시를 한다며 샘골학교에도 마음대로 드나들었지요. 최용신은 겉은 일본어로 쓰여 있고, 속은 한글로 쓴 교과서를 만들었어요. 아이들은 숨죽이며 한글 공부를 해야 했지요. 그렇게 조심했지만 겉과 속이 다른 교과서는 결국 들통나고 말았어요.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속임수를 쓰다니." 순사는 최용신을 경찰서로 끌고 갔어요. 경찰서에서 돌아온 최용신은 얼굴과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걸음조차 제대로 못 걸었어요. "혼자서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누가 시킨 짓이냐?" 일본 순사가 최용신에게 모질게 고문을 했던 거예요. 몸은 차츰 나아졌지만 최용신은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어요. '샘골학교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계속 탄압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난 너무 부족해. 공부를 더 해야겠어.' 최용신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1934년 봄에 새로운 선생님이 왔어요. 최용신은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일 년 동안 공부할 계획으로 샘골을 떠났어요. "공부를 더 해서 온다니 말릴 수도 없지만, 난 최 선생과 한글 공부를 하고 싶은데." "모르는 거라곤 없는 최 선생이 더 배워야 한다니." 마을 사람들은 무척 섭섭해했어요.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고 생각해서 참고 기다리기로 했지요. 샘골학교 종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에. 하지만 일본에 건너간 최용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기병에 걸렸어요. 걷는 것이 불편할 정도였지요. 공부를 쉬고 먼저 치료부터 해야 했어요.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일본에 머물 필요가 없어. 우리나라로 돌아가 병을 고쳐야겠다." 최용신은 샘골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마을 사람들이 정성으로 돌보아 준 덕분에 몸도 많이 좋아졌지요. 최용신은 다시 열심히 일했어요. 유학을 가기 전처럼 샘골학교 수업이 끝나면 몇십 리를 걸어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러 갔어요. 그러다 보니 눈에 띄게 몸이 야위어 갔어요. "선생님, 또 병이 나면 어떡해요? 좀 쉬세요." 마을 사람들이 말렸지만 최용신은 쉴 시간이 없었어요. "학교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험해요. 제 몸은 샘골과 우리나라를 위해서 생긴 것이니 이렇게 일하다 죽으면 영광이지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던 최용신은 끝내 쓰러지고 말았어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요. 장이 빈 상태에서 계속 무리를 해 창자가 꼬여 들어가 곪은 것이었어요. 최용신은 급히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는 좋지 않았어요.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다 정신을 잃기도 했지요. 병실에는 최용신을 걱정해 찾아온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었어요. 아이들은 마르고 새까맣게 변한 선생님을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 들려 드릴게요." 아이들은 입을 모아 '선생님 노래'라고 이름 붙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최용신은 노래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었지요. "고마워. 내가 죽으면 샘골학교 종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에 묻어줘." 밤이 지나고 막 동이 틀 무렵이었어요. 잠에 빠져 있던 최용신이 "샘골! 샘골!"하고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지요. 최용신은 유언대로 샘골학교 종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햇볕 따뜻한 동산에 묻혔어요. 장례식에는 가족과 샘골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최용신의 몸은 샘골에 있었지만 최용신이 살아가는 모습은 나라를 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던 거예요. 나라와 아이들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친 최용신. 최용신은 지금도 사랑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샘골 학교 종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상록수 동산에 조용히 누워 있답니다. |
나이팅게일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저는 어렸을 때 간호사가 정말 무서웠어요.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면, 집이 떠나가라 으앙 울음을 터트렸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간호사가 된답니다. 어느새 훌쩍 커서 간호사가 되는 첫발을 내디뎌요. 두근두근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친구들과 함께 간호사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한자리에 모였어요.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려고요. 나이팅게일 선서가 무엇이냐고요? 나이팅게일처럼 훌륭한 간호사가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이지요. 나이팅게일은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늘 보살폈어요. 하지만 남을 도와주었다고 존경받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지요. 자, 기대하세요. 저도 나이팅게일처럼 훌륭한 간호사가 될 거예요. 나이팅게일이 어땠느냐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금부터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착한 아이. 1820년, 귀여운 여자아이가 태어났어요. 영국 사람인 부모님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다가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고 지었지요. 플로렌스는 피렌체를 이르는 영국말이에요. 나이팅게일은 가족과 함께 영국에서 살았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덕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늘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나이팅게일은 거리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어요. '거리에는 아프고 배고픈 사람이 많은데, 우리 집에서는 늘 잔치를 벌여. 잔치를 벌일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을 텐데.' 나이팅게일은 어서 커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돕고 싶었답니다. 나이팅게일이 어릴 때였어요. 늦은 밤, 나이팅게일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어머니가 방문을 살짝 열었어요. 나이팅게일은 인형을 돌보고 있었지요. "아프지? 조금만 참아. 내가 아프지 않게 돌보아 줄게. 아, 아프다고? 미안, 살살 할게." 나이팅게일은 망가진 인형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어요. 바닥에는 나이팅게일이 아픈 사람을 돌보듯 보살핀 인형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지요. 하루는 양치기 개가 아파서 끙끙 앓았답니다. 나이팅게일은 정성을 다해 개를 돌보았어요. 이윽고 개는 건강을 되찾고, 다시 신나게 양을 몰았지요. "개가 다 나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참 좋아!" 마음씨 고운 나이팅게일은 아픈 사람이나 동물을 돌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나이팅게일은 가정교사 크리스티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크리스티는 나이팅게일이 잘 알아듣도록 하나하나 꼼꼼하게 가르쳤답니다.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라야 해요. 남에게 친절하고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지요. 그리고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해요." “네, 선생님! 앞으로 배운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될게요." 나이팅게일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나이팅게일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어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예쁜 옷도 샀지요.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야.' 나이팅게일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아픈 사람에게 음식과 약을 나누어 주고, 따뜻하게 보살폈답니다. 나이팅게일은 참 행복했어요. 그래서 마음을 정했지요. "저는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간호사가 되겠어요." 나이팅게일의 말에 가족은 펄쩍 뛰며 반대했어요. "간호사는 신분이 낮은 여자가 하는 일이야. 너는 부자고 집안도 좋은데, 왜 힘든 일을 하려고 하니? 다시 생각해 보렴.”"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어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 나이팅게일은 꿈을 버리지 않고 공중보건을 공부했어요. 3년 동안 열심히 혼자서 공부한 끝에 전문가가 되었답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더 공부하고 싶었어요. '독일에 있는 간호 교육 기관에 가서 간호 공부를 더 해야지.' 나이팅게일은 독일에서 공부한 뒤, 간호 감독으로 일했어요. "간호사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아픈 사람을 돌보아야 해요. 돌보는 방법도 마찬가지지요. 낡은 방법 대신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새로 배운 방법으로 아픈 사람을 돌보았어요. 크림전쟁이 터졌어요. 병사가 병에 많이 걸리고 다쳤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지요. 나이팅게일은 아픈 병사들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아픈 병사를 돌볼 간호사가 필요해요. 어서 전쟁터로 떠납시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세 명과 함께 전쟁터로 떠나려고 했어요. 그때 나이팅게일의 친구이자 전쟁 장관인 허버트가 부탁했어요. "간호사를 더 모아서 간호대를 꾸리면 어떻겠소?" "제가요?" "그렇소. 간호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가서 아픈 병사들을 돌보아 주시오." "네, 알겠어요. 간호사를 더 모아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나이팅게일은 간호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있는 야전 병원으로 갔어요. 등불을 든 여인.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을 둘러보고 크게 놀랐어요. '아픈 사람을 더러운 복도에 두다니! 쥐와 벼룩이 들끓고, 여기저기에서 썩는 냄새가 나.' 나이팅게일은 얼른 간호사들에게 말했어요. "여러분! 먼저 청소부터 합시다. 너무 더러워서 힘이 많이 들겠지만, 힘을 냅시다! 우리는 아픈 병사들을 돌보려고 왔어요. 힘들고 궂은일이라도 참고 합시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과 함께 병원의 구석구석을 말끔히 쓸고 닦았답니다. 얼마 못 가서 병원의 약과 음식이 다 떨어졌어요. '큰일 났어. 아픈 사람은 약과 음식을 꾸준히 먹어야 하는데, 어쩌지. 그래, 나라에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 나이팅게일은 편지를 써서 영국에 보냈어요. '야전 병원에 약과 음식을 빨리 보내 주세요. 병사들이 약과 음식을 못 먹어서 잘 낫지 않아요. 어떤 병사는 너무 굶어서 목숨까지 위험해요. 하루빨리 도와주세요.' 나이팅게일이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약과 음식은 오지 않았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병사들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시간이 없으니 내 돈을 써야겠다. 빨리 약과 음식을 사야 해!' 나이팅게일은 자기의 돈을 아픈 병사들을 위해 내놓았답니다. 나이팅게일이 온 뒤로 야전 병원은 싹 바뀌었어요. 병원 곳곳이 말끔해지고, 다친 병사는 깨끗한 옷을 입고 편히 쉴 수 있었지요. 병사들은 약과 음식을 잘 먹고 차츰 건강을 되찾았어요. 어느 날 밤, 잠 못 드는 병사들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나이팅게일은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돌보아 준다네." "예전에는 병원에서 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확 줄었어. 다 나이팅게일 덕분이지." 그때, 나이팅게일이 반짝이는 등불을 들고 나타났어요.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많이 아프시지요?" "어제보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금방 나아지실 거예요." 나이팅게일은 밤마다 등불을 들고 병실에 찾아갔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두루 살피며 따뜻하게 용기를 주었지요. '아픈 사람이 빨리 나으려면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해야 해. 간호사는 아픈 사람이 희망을 갖도록 몸과 마음을 함께 보살펴야 하지.' 병사들은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어요. 약이 또 다 떨어졌어요. 나이팅게일은 약을 빨리 보내 달라고 영국에 계속 편지를 썼지요. 드디어 차가 약을 싣고 도착했어요. 그런데 병원 관리자가 약을 주지 않았어요. "약을 쓰려면 윗사람이 허락해야 합니다. 조금 더 기다리세요."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서 약을 써서 구해야 합니다." 나이팅게일이 아무리 말해도 관리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나이팅게일은 기다리다 못해 차에서 약을 끌어 내렸어요. 그 시간에도 병사들은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나이팅게일은 영국과 맞서 싸우는 러시아 병사도 병원에서 돌보았어요. 병실에 침대가 모자라 자기 침대까지 내놓았지요. '어, 왜 이렇게 어지럽지?' 어느 날 나이팅게일은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어요. 누워서도 아픈 병사들을 돌볼 생각만 했지요. 그래서 병이 낫자마자 다시 열심히 병사들을 돌보았답니다. 간호학교를 세우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어요. 나이팅게일은 끝까지 야전 병원에 남아 병사를 돌보았지요. 마지막 병사가 병원을 떠나자, 나이팅게일도 영국으로 돌아왔어요. 사람들은 나이팅게일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식을 준비했어요. 나이팅게일이 정성을 다해 아픈 병사를 돌본 것을 알고 온 국민이 크게 감동했거든요. "나이팅게일은 나라에서 특별히 준비한 배를 타고 온대." "어, 배는 왔는데 나이팅게일은 어디 있지?" 사람들은 나이팅게일을 만날 수 없었어요. 나이팅게일은 나라에서 준비한 배를 타지 않고, 조용히 따로 돌아왔답니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간호사로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나이팅게일은 환영식에 가지 않고 조용히 지냈어요. 돌아와서도 나이팅게일은 다친 병사를 돌보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 이야기했지요. "여왕 폐하, 병사들이 건강하려면 무엇보다 환경이 깨끗해야 합니다. 부디 전쟁에서 싸우는 병사를 돌보아 주십시오." 빅토리아 여왕은 다친 병사의 건강을 보살피려고 '왕립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나이팅게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아픈 사람을 돌보는 법을 가르칠 학교가 필요해.' 이런 나이팅게일의 생각을 알고 온 국민이 돈을 모아 나이팅게일에게 보내왔어요. "나이팅게일! 당신이 아픈 사람을 더 잘 돌보도록 우리도 정성을 모았어요. 부디 값진 일에 써 주세요." 나이팅게일은 이 돈으로 세계 최초로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어요. "저는 나이팅게일 선생님을 보고, 간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어요." "간호는 힘들지만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에요. 저는 꼭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젊은 여성들이 간호사가 되려고 간호학교에 찾아왔어요. 나이팅게일은 잔잔하게 웃으며 학생들에게 말했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위해 어려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 거예요. 우리는 자기 뜻에 따라 간호사가 되기로 했어요. 그러니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환자를 돌보아야 해요." "그런데 선생님, 간호사는 의사와 무엇이 다른가요?" 한 학생이 묻자, 나이팅게일이 대답했지요. "의사는 직접 환자의 병을 고치지요. 하지만 간호사는 아픈 사람이 나을 수 있게 옆에서 돕고 보살핀답니다." 세계를 위해 일하다. 어느 날, 나이팅게일은 병이 들었어요. '몸이 아프지만 일을 멈출 수 없어. 계속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 있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세상에 알리자.' 나이팅게일은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나이팅게일! 우리나라도 국민의 건강을 위해 사업을 벌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른 나라에서 나이팅게일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어요. 그때마다 나이팅게일은 일하면서 쌓은 경험을 들려주고, 많이 도와주었지요. 나이팅게일은 자기의 아픈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일했어요. 1910년 8월 13일, 나이팅게일은 숨을 거두었어요. 영국 정부는 나이팅게일을 위해 큰 장례식을 준비했지요.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시골 묘지에 묻혔어요. 숨을 거두기 전에 이렇게 말했거든요.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장례식을 조용하게 치러 주세요." 마지막까지 겸손했던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자세를 지금까지 가르쳐 주고 있어요. 오늘 새내기 간호사가 되는 저에게도 말이에요. 여기 모인 간호사들이 여러분 앞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를 할 거예요.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되새겨 보아요. 저는 늘 정직하게 살며 간호사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저는 사람의 생명을 해롭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환자를 보살피는 데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환자나 가족의 비밀은 가슴에 간직하겠습니다. 정성을 다해 의사나 다른 간호사를 돕겠습니다. 제가 돌보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슈바이처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나만 행복하게 살 수는 없어!" 어느 날, 학생을 가르치며 편안하게 살던 슈바이처가 외쳤어요. 슈바이처는 아프고 힘든 사람도 많은데, 자기만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미안했어요. 그래서 의학을 공부한 뒤, 아프리카로 떠났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가난과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슈바이처는 원주민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지요. 그리고 원주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어요. 이렇게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가 태어난 것이에요. 편안한 삶을 버리고, 무덥고 힘든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슈바이처가 생각한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잘사는 것이 부끄러운 아이. "어이, 슈바이처! 우리 한판붙자." 덩치가 커다란 게오르크가 슈바이처를 째려보며 말했어요. 슈바이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피했지요. 그랬더니 게오르크가 화를 내며 슈바이처를 툭 치는 거예요. "야! 목사 아들이라고 내 말 무시하냐?" 게오르크와 슈바이처가 풀밭에서 씩씩거리며 맞붙었어요.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슈바이처가 게오르크를 이겼지요. 그러자 게오르크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어요. "쳇, 나도 너처럼 고깃국을 먹으면 질 리가 없어!" "너는 고깃국 안 먹니?" "그래. 너희 집은 잘살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잖아." 슈바이처는 게오르크의 말을 듣고 미안해졌어요. 그래서 그날부터 슈바이처도 고깃국을 먹지 않았어요. 차림새도 마을 아이들처럼 허름하게 하고 어울려 놀았지요.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요?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포도 덩굴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알자스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알자스가 프랑스 땅이지만, 슈바이처가 태어났던 때에는 독일 땅이었지요. 슈바이처는 알자스 귄스바흐 마을에서 자랐답니다. 슈바이처는 어렸을 때 음악을 무척 좋아했어요. 길을 가다가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우뚝 멈추어 서서 들을 정도였지요. "아버지, 피아노를 꼭 배우고 싶어요." 슈바이처는 아버지를 졸라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금세 악보 보는 법을 익히더니 직접 곡까지 만들어서 악보도 없이 연주했지요. 오르간은 여덟 살 때부터 배웠는데, 솜씨가 뛰어나서 교회 오르간 연주를 맡기도 했어요.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오르간 연주를 하고 싶어. 또, 종교를 공부해서 사람들을 이끌고도 싶고." 슈바이처는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슈바이처는 음악가, 대학교 강사, 작가로서 두루두루 이름을 떨쳤지요. "나는 어렸을 때 학교에 다니던 일이 가장 신 났어요. 그때 나는 아이들과 실력을 견주어 보는 일을 좋아했는데,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고 즐거웠어요." 슈바이처. 의학을 공부하다. 슈바이처는 예전부터 간직해 온 꿈이 있었어요. '서른 살부터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겠어.' 하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지 아직 못 정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슈바이처는 파리 선교사 모임에서 보낸 팸플릿을 읽었어요. 팸플릿에는 무서운 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 이야기와 함께 의사의 손길이 무척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어요. "그래, 바로 내가 찾던 일이야!" 슈바이처는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먹었어요. "의과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요?" 사람들은 슈바이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어요. 신학 박사이자 철학 박사로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슈바이처가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왜 꼭 무덥고 전염병이 도는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니?" "지금처럼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사는 것도 좋은 일이야." 모두 슈바이처를 걱정하며 말렸어요. 하지만 벌써 마음을 굳힌 슈바이처는 의과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지요. 이 무렵 슈바이처는 헬레네를 만났어요. 헬레네도 슈바이처처럼 남을 도우며 살고 싶어 했지요. "제가 간호사 공부를 해서 당신을 돕겠어요." 서로 마음이 잘 맞았던 슈바이처와 헬레네는 사랑에 빠졌어요.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하고, 함께 의학 공부를 하며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다. 드디어 의사가 된 슈바이처는 헬레네 와 함께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떠났어요. 슈바이처 부부는 배를 타고 오고우에 강을 거슬러 올라갔어요. 넓은 강을 따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지요. 그때 랑바레네에서 사는 원주민들은 무서운 전염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고, 사나운 짐승이나 뱀에게 물리기도 했어요. 슈바이처는 먼저 병원을 세운 뒤에 아픈 사람들을 돌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의사가 왔다는 이야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퍼지면서 이른 새벽부터 아픈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지요. 슈바이처는 찾아온 사람들을 차마 돌려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마당 한쪽에 있는 닭장을 깨끗이 청소해서 진료소를 만들었지요. 슈바이처는 아픈 사람을 정성껏 치료했어요. 그러면 헬레네는 아픈 사람에게 붕대를 감아주거나 약을 지어 주었답니다. "나는 나무에서 잎사귀 한 장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았어요. 여름 밤 등을 켜고 일할 때, 벌레의 날개가 등불에 타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마시기로 했지요." 슈바이처. 하루는 발이 썩어 가는 아이가 슈바이처를 찾아왔어요. 슈바이처는 서둘러 아이를 마취시키고 정성껏 수술했지요. 수술이 끝난 아이가 마취에서 깨어나자 원주민들이 놀라서 외쳤어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 "오강가, 오강가가 오셨다!" '오강가'는 원주민 말로 주술사라는 뜻이에요. 원주민들은 마취 때문에 아이가 움직이지 않자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깨어났으니 화들짝 놀란 것이지요. 이 일로 원주민들은 더욱더 슈바이처를 믿고 따랐어요. 그런데 슈바이처는 원주민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병을 고쳐 주었지만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고,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가 너무 어려웠거든요. 때마침 영어와 프랑스 말을 잘하는 원주민 요제프가 찾아왔어요. 요제프는 오랫동안 슈바이처를 도와주었지요. 진료소에는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와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러니 진료소는 늘 사람들로 북적댔지요. 그래서 슈바이처는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어요. 1. 땅에 침을 뱉지 마세요. 2.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3. 하루치 먹을 음식을 가지고 오세요. 전쟁이 일어나 포로로 붙잡히다. 그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어요. "여기 랑바레네는 프랑스 땅이오." "당신은 독일 사람이니 프랑스 포로수용소로 가야만 하오." 프랑스 군인은 슈바이처를 포로수용소로 끌고 갔어요. 슈바이처가 머무는 포로수용소에는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요. "여기에서는 책이 없어도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어." 슈바이처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는 것도 배우는 기회로 삼았어요. 또한 포로수용소에 있는 아픈 사람들도 정성껏 돌보았지요. 얼마 뒤, 프랑스 포로와 독일 포로를 서로 맞바꾼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어요. 슈바이처는 포로에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갔지요. 하지만 슈바이처는 포로 생활로 건강이 나빠졌어요. 기차를 타는 것조차 힘겨웠지요. 겨우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름다웠던 귄스바흐 마을은 전쟁 때문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어요. 사람들은 지쳐 있었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더욱이 슈바이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픔에 빠졌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다. 마침내 끔찍했던 전쟁이 끝났어요. 슈바이처 부부에게는 예쁜 딸 레나가 태어났지요. 슈바이처도 건강을 되찾았고, 생활도 편안해졌고요. 하지만 슈바이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병과 싸우고 있을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눈에 아른거렸거든요. "내가 할 일은 아프리카에 있어. 랑바레네로 돌아가야 해." 슈바이처는 다시 랑바레네로 가려고 했지만, 병원을 지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강연회와 오르간 연주회를 열어 돈을 모았지요. 슈바이처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강연과 뛰어난 오르간 연주는 언제나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을 지을 돈이 금세 모였답니다. 다시 랑바레네로 돌아온 슈바이처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누더기를 걸친 아이의 모습까지도."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슈바이처가 원주민을 돌보던 곳이 풀로 뒤덮인 거예요. "좋아. 이번에는 좋은 장소를 찾아서 멋진 병원을 짓자!" 슈바이처는 정성을 가득 담아 새 병원을 지었어요. 그리고 병원 옆 농장에 야자나무를 심어 누구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게 했지요. 풀밭에서는 염소가 풀을 뜯어 먹게 했고요. "내가 아프리카에 온 뒤로 아픈 사람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어요." 슈바이처. 노벨 평화상을 받다. "올해의 노벨 평화상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에게 돌아갔습니다." 슈바이처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랑바레네에 많은 축하 편지가 날아들었어요. 또 슈바이처를 만나려고 기자들도 찾아왔지요. "박사님,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상금은 어디에 쓰실 건가요?" "물론, 병원을 짓는 데 써야지요." 슈바이처는 새로운 병원을 지을 생각에 마음이 들떴어요. 이처럼 슈바이처는 늘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생 각하며 검소하게 살았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슈바이처가 기차를 타고 유럽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슈바이처를 맞이하려고 역에 나와 있었어요. 그런데 당연히 일등칸에서 내릴 줄 알았던 슈바이처가 한참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어요. 슈바이처는 삼등칸에서 아픈 곳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다가 내렸거든요. 기자가 깜짝 놀라서 슈바이처에게 물었어요. "어쩌다 삼등칸에 타신 겁니까?" "이 기차에는 사등칸이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슈바이처의 말을 듣고 감동했어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아흔 살이라는 나이에도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으니 말이에요." 슈바이처. 슈바이처는 남은 삶을 랑바레네에서 보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하며 동물을 길렀지요. 슈바이처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픈 사람들을 위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어요. 또 늘 평화로운 웃음도 잃지 않았답니다. |
헬렌 켈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 터스컴비아에서는 장미 향기가 온 마을을 뒤덮는 6월이면 큰 축제가 열려요. 멋진 행진과 연주회, 연극 공연, 전시회로 온 동네가 일주일 동안 시끌시끌하지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 축제를 보려고 터스컴비아를 찾아와요. 무슨 축제냐고요? 이 마을에서 태어난 한 사람을 기념하는 축제예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는 꽃밭이 무척 아름다운 집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이 집을 '초록 담쟁이덩굴'이라고 불렀지요. 하얀 집과 울타리를 초록색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었거든요. 1880년 6월, '초록 담쟁이덩굴'에서 건강하고 예쁜 아기가 태어났어요. 그런데 아기는 가엾게도 열병을 심하게 앓고 나더니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장애를 딛고 일어나 세상 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놀라운 삶을 살았지요. 이제 누구인지 알겠나요? 네, 그래요. 장애인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헬렌 켈러랍니다. 건강하게 태어나다. "헬렌, 생일 축하해!" '초록 담쟁이덩굴'은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어요. 헬렌 애덤스 켈러가 첫 생일을 맞았거든요. 부모는 방긋 웃으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헬렌을 보면서 무척 행복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답니다. "여보, 큰일 났어요! 헬렌 몸이 불덩이 같아요." 어머니가 헬렌을 만져 보다가 깜짝 놀라 말했어요. 아버지는 곧바로 의사를 불렀어요. 의사는 헬렌의 열이 내려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요. 그렇게 며칠이 흘렀어요. 다행히 헬렌은 차츰 열이 내리더니 파란 눈을 반짝였지요. 의사는 깨어난 헬렌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놀라운 일입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마음 놓으세요." 헬렌은 이제 열도 완전히 내리고 언제 아팠냐는 듯이 건강해졌지요. 한숨 돌린 어머니가 헬렌에게 인형을 주었어요. 그런데 헬렌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거예요. 좋아하는 인형을 본체만체하다니! 이상한 생각이 든 어머니는 헬렌의 눈앞에서 손뼉을 치며 불러 보았어요. 그래도 헬렌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당황한 어머니가 허겁지겁 의사를 불렀지요. 헬렌을 살펴본 의사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어요. "헬렌이 앞으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우리 헬렌이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니요!" 헬렌의 부모는 가엾은 헬렌을 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빛과 소리를 잃고 거칠어지다. 헬렌은 빛과 소리를 잃은 뒤로 성격이 너무 거칠어졌어요. 툭하면 접시를 깨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를 할퀴기도 했어요. 누구도 헬렌을 당해 낼 수 없었지요. 더욱 거칠어지는 헬렌에게 동생 밀드레드가 생겼어요. 헬렌은 밀드레드에게 샘이 났어요. 어머니가 동생만 예뻐하는 것 같았거든요. 한번은 헬렌이 밀드레드의 요람을 뒤집어서 큰일 날 뻔한 일도 있었지요. 하지만 헬렌은 자기가 한 일이 나쁜 것인지 몰랐어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이 헬렌의 어머니에게 넌지시 이야기했어요. "헬렌을 보호 시설로 보내는 게 어떻겠어요?" 하지만 가족들은 사랑하는 헬렌을 보호 시설로 보내기 싫었어요. 헬렌은 사납게 굴었지만, 그럴수록 가족들은 헬렌을 더욱 정성껏 보살폈답니다. 아버지는 헬렌의 눈을 고치려고 이름난 의사를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헬렌의 눈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없었지요. "헬렌을 볼 수 있게는 못하지만, 가르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한 의사가 벨 박사를 소개해 주었어요. 부모는 헬렌과 함께 벨 박사를 만나러 워싱턴으로 갔어요. 벨 박사를 만난 헬렌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벨 박사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서 시계를 만지작거렸지요. 벨 박사는 헬렌의 부모에게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아학교가 헬렌과 잘 맞을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퍼킨스 맹아학교는 보거나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헬렌의 아버지는 퍼킨스 맹아학교의 애너그노스 교장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헬렌을 가르칠 만한 선생님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애너그노스 교장은 편지를 읽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어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를 누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그래, 맞아! 애니 설리번이라면 잘해 낼 거야." 설리번은 부모 없이 자란 고아였어요. 고아원에서 힘들게 자란 설리번은 열네 살부터 퍼킨스 맹아학교를 다니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어요. 설리번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끈기 있게 공부해서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설리번은 아직 누구를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욱 자신이 없었지요.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지만 설리번은 헬렌을 가르치기로 굳게 마음먹고 먼 길을 떠났답니다. 설리번과 만나다. 마침내 설리번은 헬렌의 집에 도착했어요. 현관에는 귀여운 아이가 서 있었지요. "안녕? 네가 헬렌이구나. 이리 오렴." 설리번은 헬렌을 꼭 안고 입을 맞추었어요. 그런데 헬렌은 낯설었나 봐요. 설리번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거든요. 그러더니 설리번의 가방을 만져 보며 손짓을 했어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던 거예요. 어머니가 말렸지만 헬렌은 계속 떼를 썼어요. 헬렌은 화를 참지 못해서 어머니의 옷을 쥐어뜯고, 발로 차기도 했지요. 거친 행동은 밥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고, 다른 사람이 먹는 것도 손으로 만져서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그러지 못하게 말리면 헬렌은 발로 문을 차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요. 설리번은 어떻게 하면 헬렌이 글을 깨우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헬렌이 만지는 물건의 이름을 손가락 수화로 알려 주면 글을 익힐 수 있을 거야.' 처음으로 가르친 낱말은 '인형'이었어요. 헬렌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면 설리번이 헬렌에게 손가락 수화로 천천히 '인형'이라고 알려 주었지요. 하지만 헬렌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은 무척 어려웠어요. 손만 닿아도 헬렌은 설리번을 때리며 화를 냈거든요. 그런데 그건 설리번이 인형을 빼앗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여느 때처럼 헬렌이 설리번의 접시에 손을 댔어요. 설리번은 헬렌이 먹을 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지요. 그러자 헬렌이 포크를 내동댕이치면서 소리 높여 엉엉 울었어요. 설리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헬렌의 부모에게 말했어요. "얼마 동안 헬렌과 단둘이 지내면서 헬렌의 버릇을 고치고 싶습니다." 헬렌의 부모는 설리번을 믿고 허락했어요. 그렇게 헬렌은 설리번과 집 옆의 오두막에서 따로 살기 시작했어요. 어머니와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는 헬렌은 너무 불안했어요. 울고불고 뒹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이 없었어요. 설리번은 헬렌이 잠옷을 벗지 않으면 아침 10시가 넘어도 밥을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설리번은 깜짝 놀랐어요. 여느 때는 손가락 수화를 가르치면 화를 내던 헬렌이 조용히 앉아 낱말의 뜻을 생각했거든요. 또, 잠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포크로 음식을 먹었어요. 게다가 설리번 곁에는 가지도 않던 헬렌이 설리번의 무릎 위에 앉기도 했고요. 설리번은 기뻐서 가슴이 벅차올랐답니다. 그렇게 거칠던 헬렌이 왜 갑자기 고분고분해졌을까요? 그건 헬렌의 호기심 때문이었어요. 어느 때부터인가 헬렌은 같은 물건을 만질 때마다 설리번이 같은 손놀림을 되풀이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그 움직임에 뜻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지요. 그래서 물건을 만질 때마다 설리번이 어떤 손놀림을 할까 궁금해졌던 거예요. 그런데 헬렌이 잘못을 하면 설리번은 올바른 행동을 할 때까지 손가락 수화를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헬렌은 몹시 답답했어요. 그래서 설리번이 원하는 행동을 했지요. 헬렌은 따로 설리번과 지내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얌전하게 행동하고, 공부도 하려고 했지요. 글과 말을 배우다. 어느 날, 헬렌이 세수를 하다가 설리번의 손등을 두드리며 물을 가리켰어요. 설리번은 헬렌에게 '물'이라고 천천히 알려 주었지요. 하지만 헬렌이 물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맞아, 물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는 거야!' 설리번은 헬렌을 펌프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갔어요. 헬렌에게 컵을 쥐어 주고 펌프질을 했지요. 찬물이 콸콸 쏟아지자 헬렌은 화들짝 놀라서 컵을 떨어뜨렸어요. 헬렌은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었어요. 그러고는 신이 나서 '물'이라고 여러 번 쓰기 시작했어요. '물'이라는 낱말을 깨우친 헬렌은 설리번에게 이것저것 물었어요. '땅에 떨어뜨린 것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누구예요?' 이제 헬렌에게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렸어요. 헬렌은 혼자서도 물건과 그 이름을 짝지을 수 있었어요. 헬렌이 손가락 수화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지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봄날이었어요. 설리번은 헬렌에게 아름다운 봄의 풍경과 향기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헬렌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어요. 정원을 거닐던 헬렌이 가장 향기로운 꽃을 꺾어서 설리번에게 내밀었어요. 꽃을 받은 설리번이 손가락 수화로 '헬렌, 사랑해.'라고 말했어요. 헬렌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사랑이란 꽃향기와 같나요?' 설리번은 사랑이란 보이거나 향기가 나지는 않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거라고 알려 주었어요. 며칠 뒤,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였어요. 헬렌은 분위기가 어둡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러다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어요. 헬렌이 활짝 웃으며 설리번에게 물었어요. ‘선생님, 사랑이란 이런 느낌인가요?’ "맞아, 사랑이란 지금처럼 헬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야. 구름이 비를 내리면 땅 위의 나무와 꽃은 아주 기뻐해. 비를 맞아야 잘 자라거든. 사랑이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거야." 설리번에게 사랑을 배운 헬렌은 평생동안 사랑을 베풀며 살았어요. 어느덧 열 살이 된 헬렌은 보스턴에 있는 호레이스 맨 특수학교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교장인 풀러에게 교육을 받았지요. "헬렌, 내가 말할 때 손을 입술과 목에 대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느껴 보렴." 헬렌은 수업이 끝나도 설리번의 입술과 목을 만지며 발음 공부를 했어요. 헬렌은 오랜 노력 끝에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입술을 만져 보고 알 수 있었지요. 더욱 공부에 재미를 붙인 헬렌은 대학교에 가서 더 깊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다니려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했지요. 그래서 헬렌은 케임브리지 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어요. 마침내 헬렌은 하버드 대학교의 여자대학인 래드클리프 대학에 들어갔답니다. '괜히 대학에 온 건 아닐까?' 헬렌은 생각보다 힘든 대학 생활을 종종 후회하기도 했어요. 헬렌이 학교를 다닐 때는 점자책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설리번이 함께 수업을 들으며 수업 내용을 헬렌의 손바닥에 일일이 써 주어야 했지요. 수업이 많은 날이면 설리번의 손가락은 퉁퉁 부어오르며 아팠어요. 게다가 설리번은 눈이 더욱 나빠졌지요. 다행히 2학년이 되자 헬렌과 설리번은 대학 생활에 익숙해졌어요. 헬렌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기도 했어요. 헬렌은 그렇게 꾸준히 쓴 글을 모아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어요. 이 책은 인기가 많아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즐겨 읽었답니다. 그 뒤로 헬렌은 책을 14권이나 더 펴냈어요. 차별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앞장서다. 헬렌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헬렌에게 글을 써 달라, 강연을 해 달라 부탁했어요. 어느새 헬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거예요. 헬렌은 장애인을 도우려고 미국 맹인 협회에서 열심히 일했어요.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을하고, 돈을 모았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라디오가 꼭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헬렌은 라디오를 만드는 회사에 가서 라디오를 그냥 얻어 오기도 했어요.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은 헬렌이 나누어 준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 소식을 알 수 있었지요. 헬렌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차별받고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열심이었어요. 그런데 장애인 문제를 넘어서까지 일하는 헬렌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설리번과 가족들은 헬렌이 걱정스러웠어요. "헬렌, 앞으로 장애인 문제만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하지만 헬렌은 세상 누구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 없이 나섰답니다. 그런데 설리번의 건강이 나빠져서 헬렌을 돕는 것이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톰슨이라는 사람도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헬렌과 설리번, 톰슨은 서로를 믿고 도우면서 즐겁게 지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설리번이 세상을 떠났어요. 슬픔에 빠진 헬렌은 차디찬 설리번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장애인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설리번 선생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야.' 헬렌은 전쟁으로 장애인이 된 군인들을 도우려고 유럽과 아시아를 돌아다녔어요. 헬렌의 따뜻한 마음씨에 세상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지요. 헬렌은 여러 나라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장애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면 누구나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마음만은 잃지 않았어요.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거든요. 여러분이 정말 슬플 때, 내 말을 떠올려 보세요. 이 세상에는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바로 우리가 함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삶은 절대 헛되지 않을 거랍니다.' |
테레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오늘날 가장 무서운 병은 무엇일까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오늘날 가장 무서운 병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입니 다. 밥을 못 먹어 굶어 죽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아요." 테레사 수녀는 인도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어요. 그리고 자기를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했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남김없이 끝까지 전하는,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이에요. 테레사 수녀의 사랑은 온 세계에 퍼졌어요.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를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머더 테레사'라고 불렀어요. 작지만 넉넉한 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따스하게 안아 주었기 때문이지요. 꼭 우리 어머니처럼 말이에요! 어머니에게 사랑을 배우다. 테레사 수녀의 어렸을 때 이름은 아그네스 곤히야 브약스히야였어요. 아그네스의 어머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믿음이 깊었어요.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내놓았지요. 하루는 아그네스가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엄마,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가난한 이웃이란다. 모두 우리와 한 가족이니 따뜻하게 맞아야 한다." 아그네스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베푸시는구나. 나도 엄마를 도와야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고, 살림이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가난한 이웃을 돌보았어요. 아그네스는 어머니에게 따스한 사랑을 배우며 자랐답니다. 하루는 성당의 신부님이 아그네스에게 편지를 읽어 주었어요. 인도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선교사의 편지였지요. 아그네스는 아낌없이 남을 돕는 선교사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했어요. '참 아름다운 모습이야! 나도 남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그네스는 신부님에게 물었어요. "신부님, 어떻게 하면 수녀님이 될 수 있을까요?" 신부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지요. "먼저 '하느님께 저를 바칩니다!'하고 기도드리렴. 그때 네 마음이 기쁘고 평화로우면 수녀님이 될 수 있단다." 아그네스는 마음을 다해기도 했어요. '제 삶을 모두 하느님과 이웃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어느 날, 아그네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어요. 한창 기도를 하는데 어느 때보다 마음이 기쁘고 평화로웠거든요. 아그네스는 비로소 하느님이 자기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아그네스는 꿈을 이루려고 고향을 떠나 인도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갔답니다. 테레사 수녀로 다시 태어나다. 아그네스는 인도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에서 살았어요. 인도 사람과 친해지려고 영어와 인도 말도 열심히 익혔지요. 수녀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는 날, 아그네스는 기쁨이 넘쳤어요.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이었으니까요. '하느님, 가난한 이웃을 제 몸처럼 돌보겠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에 있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테레사 수녀와 아이들은 즐겁게 공부했지요. 아름다운 수녀원 밖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어요. 테레사 수녀는 헐벗고 외로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요. "오, 하느님!"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은 움직일 힘도 없어 길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아이들은 아무 표정 없이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지요.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맞추었어요. 그제야 아이들은 힘없이 웃었어요. 테레사 수녀는 안타까웠어요.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로레토 수녀원은 수녀를 밖에서 지내지 못하게 했거든요.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 곁으로! 테레사 수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콜카타를 위해 기도했어요. '하느님! 콜카타 사람들을 보살펴 주세요. 사람들이 큰 가뭄으로 굶주리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다르다고 싸워 서로를 해쳤습니다.' 이때 테레사 수녀는 하느님의 부름을 듣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어요. '그래,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 테레사 수녀는 행복한 수녀원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 밖으로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어렵게 받았어요. 가톨릭에서는 수녀원에서 평생 살겠다는 약속을 어기면 수녀로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교황청은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참된 마음을 알았지요. 어느 날 밤,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수녀원을 나왔어요. 푸른 줄이 있는 흰 사리를 두르고 말이에요. 테레사 수녀는 인도 여성이 입는 사리를 새 수녀복으로 정했답니다. '가장 먼저,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테레사 수녀는 먼저 병원으로 갔어요. 병원에서 주사 놓는 법, 아이 낳는 여성을 돕는 법, 약을 다루는 법 등을 배웠지요. 테레사 수녀는 아픈 사람과 이야기하며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하나 익혔어요. 테레사 수녀는 작은 마을 모티즈힐에 갔어요. 모티즈힐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요. 병원도, 학교도 없었어요. 테레사 수녀는 마을 어른들에게 말했어요. "마을에 학교를 열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보내 주시겠어요?" "네,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도 글자를 배울 수 있겠네요." 이튿날, 아이들이 테레사 수녀를 찾아왔어요. 교실과 칠판, 분필도 없었지요. 테레사 수녀는 나무 아래 그늘을 가리켰어요. "저기 나무 그늘이 좋겠다. 얘들아, 나무 아래로 가자!" 테레사 수녀는 나뭇가지로 땅에 글자를 썼어요. 아이들은 테레사 수녀가 땅에 쓴 것을 보고 글자를 배웠지요. 하루하루 아이들이 늘어났어요.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책상과 의자를 가져왔어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교실도 생겼답니다. 마을에 아이들이 책을 읽는 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 넘쳤어요. 콜카타에는 병에 걸려 아픈 사람이 많았어요. 테레사 수녀는 마음이 아팠지요. '값싸고 흔한 약만 있어도 나을 텐데. 진료소를 열고 약을 나누어 줘야 해.' 마침 의사와 간호사들이 테레사 수녀를 돕겠다고 나섰어요. 그래서 드디어 콜카타에 진료소를 열었지요. 사람들은 치료를 받고, 약을 얻으려고 진료소 앞에 줄을 섰답니다. "테레사 수녀님, 신께서 당신을 보내 주셨군요!" "우리를 위해 애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어느새 얼굴이 밝아졌어요. 외로운 이웃을 돌보는 어머니. 테레사 수녀는 정성을 들여 기도했어요. '하느님, 저와 함께 아픈 사람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합니다.' 때마침 성 마리아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스바시니가 테레사 수녀를 찾아왔어요. "저도 수녀 님과 함께 이웃을 돌보고 싶어요!" 곧이어 제자 고메스와 여러 사람이 함께하겠다고 테레사 수녀를 찾아왔지요. 테레사 수녀는 힘이 났어요. 수녀들은 힘을 모아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사리를 입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돌보려고 콜카타 곳곳을 누볐지요.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테레사 수녀의 뜻대로 가난하고 수수하게 살았어요. 수녀복 세 벌과 신발, 조그만 십자가와 묵주만 가졌지요. 어느 날, 테레사 수녀와 고메스 수녀는 길에 쓰러진 남자를 보았어요. 수녀들은 얼른 병원으로 남자를 데려갔지요.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데려와서 어쩌라는 겁니까?" 병원에서는 퉁명스레 쏘아붙이며 남자를 받아 주지 않았어요. 수녀들은 서둘러 약을 구했지만, 남자는 이미 숨을 거두었지요. 테레사 수녀는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하느님, 가슴 아프게 숨진 이 사람을 보살펴 주소서!" 그 뒤, 사랑의 선교회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집을 만들었어요. 죽어 가는 사람들을 데려와 몸을 씻겨주고,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도왔지요. 테레사 수녀는 온몸에 구더기가 있는 사람까지 정성껏 씻겼어요. 테레사 수녀와 뜻을 같이하는 수녀가 늘어났어요. 사랑의 선교회는 새로운 본부로 머더 하우스를 열었어요. 테레사 수녀는 아픈 사람을 더 많이 보살필 수 있어서 참 기뻤답니다. 콜카타 거리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어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을 보살펴야겠어.' 테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에 아이들을 돌보는 집을 열었어요. 그리고 병든 아이, 몸이 불편한 아이, 굶주리는 아이를 따뜻하게 보살폈지요. 늘 얼굴을 찡그리던 아이들은 웃음을 되찾았어요. 테레사 수녀에게 안겨 장난도 쳤답니다. "아이가 한 시간밖에 못 산다고 해도 저희에게 데려와 주세요." 테레사 수녀는 아픈 아이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달려갔어요. 어느 날 밤, 얼굴을 천으로 가린 사람들이 수녀들을 찾아왔어요. "우리는 나병에 걸려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수녀들도 손발이 문드러지고 눈썹이 빠진 나병 환자들을 꺼렸어요.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환자들을 정성껏 보살폈지요. 그 모습을 본 수녀들은 테레사 수녀의 넓은 사랑을 깨닫고, 나병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았어요. 나병을 잘 돌보는 의사가 테레사 수녀를 돕겠다고 나섰어요. 수녀들은 의사와 함께 나병에 걸린 사람을 찾아가 돌보았지요. 테레사 수녀는 늘 기도했어요. '나병 환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며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어요. 나병 환자가 사는 곳에 나병을 돌보는 '평화의 마을'이 생겼답니다. 어느덧 테레사 수녀는 예순 살이 훌쩍 넘었어요. 작은 키는 더 작아지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어요. 환자들을 돌보느라 허리도 굽었지요.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어요. 사랑의 선교회는 병을 오래 앓는 사람을 위해 '프렘단'이라고 부르는 집을 세웠어요. 프렘단은 사랑의 선물이라는 말이지요. "프렘 단에 재활 센터와 일터도 만들어요. 버려진 코코넛 껍질로 밧줄을 만들어 팔면 좋겠어요." "수녀님,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드디어 우리도 일해서 돈을 벌 수 있군요. 쓰레기를 다시 쓰니 환경에도 좋겠어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기뻐하며 즐겁게 일했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노벨상을 받다. 사랑의 선교회는 세계에 널리 퍼졌어요. 여러 나라 사람이 테레사 수녀와 함께했지요. 사랑의 선교회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은 모두 보살폈어요. 종교와 피부색을 가리지 않았지요. 온 세계 사람이 테레사 수녀와 사랑의 선교회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답니다. 테레사 수녀는 여러 나라에서 상을 받았어요. 상금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 썼지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테레사 수녀는 말했어요. "이 상은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마쳤어요. 사람들은 작지만 위대한 테레사 수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지요.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1997년 9월, 테레사 수녀는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요. 하늘도 슬퍼하는 듯 비가 내렸지요. 댕, 댕, 댕, 댕. 테레사 수녀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어요. 온 세계 사람이 테레사 수녀가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슬퍼했지요. 인도에서는 국민이 함께 장례식을 치렀어요. 인도의 총리는 테레사 수녀를 그리워하며 말했어요. "오늘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사람을 잃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 기쁨을 주셨어요." 테레사 수녀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나고 없어요. 하지만 테레사 수녀가 베풀었던 사랑은 남아 있지요.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의 뜻을 따라 세상 곳곳에서 사랑을 베풀고 있으니까요. |
김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김구는 흰 두루마기 입는 것을 좋아했어요. 두루마기가 양복이나 셔츠보다 더 편해서 입었을까요? 아니에요. 옷 하나라도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서였지요. 왜냐하면 김구는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여러분이 이 책을 덮을 때쯤, 김구는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살며시 다가와 속삭일지도 몰라요. “작은 것이라도 너의 것을 찾고, 아끼고, 키우면 다른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단다. 그러면 우리가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만들었듯이, 너도 너의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마음이 훌륭한 사람이 되자. 하루는 엿장수가 쩌렁쩌렁하게 외쳤어요. “헌 놋쇠나 부러진 숟가락을 엿으로 바꿔 줍니다!” 어린 김구는 엿이 먹고 싶어 침을 꼴깍 삼켰어요. 그리고 부러진 숟가락이 없나 여기저기 찾았지요. 그때 김구는 아버지의 숟가락을 보았어요. ‘엿과 바꾸려면 부러진 숟가락이 있어야 해.’ 김구는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리고, 살그머니 엿장수를 불렀어요. 어른들이 엿장수는 무섭다고 했거든요. 김구는 문에 구멍을 뚫어 숟가락과 엿을 바꿔 먹었어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는 소문난 개구쟁이였어요. 하지만 생각한 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줄도 아는 야무진 소년이었답니다. 김구는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려고 과거를 준비했어요. 김구는 부지런히 공부해 과거를 보았어요. 하지만 떨어지고 말았지요. 그때 과거는 깨끗하게 치러지지 않았거든요. 돈을 주고 답을 사는 사람이 많았지요. 아버지는 어깨가 축 처진 김구에게 말했어요. “얘야, 관상을 공부하면 어떻겠니?” 김구는 아버지 뜻대로 관상을 공부했어요. 먼저 자신의 관상부터 보았지요. ‘이런, 관상을 보니 나는 운이 나쁘게 나왔어.’ 하지만 김구는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거든요.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몸이 튼튼한 것만 못하다. 몸이 튼튼한 것은 마음이 훌륭한 것만 못하다.’ 김구는 꼭 마음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김구는 열여덟 살 때, 동학에 들어갔어요. ‘동학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고 했어. 다 같이 힘을 합쳐 양반이나 평민 모두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김구는 동학농민운동을 하면서 이름을 널리 떨쳤어요. 열아홉 살 때, 황해도를 대표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유학자 고능선이 김구에게 말했어요. 김구는 고능선을 누구보다 잘 따랐지요. “옳은 일을 하게. 옳은 마음이 없으면, 재주가 뛰어나도 올바른 일을 못 하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네. 이럴 때 옳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김구는 옳은 일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아, 나라의 앞날이 어둡구나! 나는 앞으로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려움을 이기고 나라를 위하다. 김구가 나루터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어요. 한 나그네가 우리말을 했는데, 말투가 이상했지요. 그때, 김구는 나그네의 두루마기 사이에서 칼집을 보았어요. ‘아니, 칼을 숨기고 있다니! 말투도, 생김새도 수상해.' '일본이 우리나라 왕비인 명성 황후의 목숨을 빼앗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혹시 이놈이 명성 황후의 목숨을 빼앗고 달아나는 왜놈이 아닐까? 내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으리라!’ 김구는 힘껏 나그네에게 덤볐어요. 그러자 나그네는 번쩍이는 일본 칼을 들고 김구를 공격했지요. 한바탕 몸싸움 끝에 나그네가 쓰러졌어요. 나그네는 일본 군인인데, 우리나라를 몰래 살피고 있었어요.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놈을 없앴노라.’ 이렇게 글을 쓴 뒤, 김구는 감옥에 끌려가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고종 황제는 김구를 사형에서 구했지요. 하지만 김구는 차가운 감옥에 계속 있어야 했답니다. 김구는 감옥에서 책을 꾸준히 읽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지요. ‘나는 우리 것만 옳다고 고집부렸어. 서양의 것이라도 좋은 점은 받아들여야지.' '그리고 나라를 되찾도록 힘을 기르려면 글과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해. 먼저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가르쳐야겠다.’ 그날부터 김구는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을 가르쳤어요. 김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자주 끌려갔답니다. 일본 순사는 김구를 모질게 고문했어요.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알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 순사는 매질을 하고, 밥과 물도 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김구는 끄떡도 하지 않았지요. “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란 말이야!” 화가 난 일본 순사가 다시 김구를 매질했어요. 김구는 너무 아파 정신을 잃었지요. 일본 순사가 차가운 물을 붓자, 김구는 겨우 눈을 떴어요. 김구는 밤새도록 고문하는 일본 순사를 보고 생각했어요. ‘일본 순사도 밤새워 일하는데, 나라를 되찾겠다는 나는 얼마나 밤새워 일했던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김구는 감옥에서 나온 뒤, 농민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어요. 1919년, 우리나라는 3.1 운동을 벌였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우리 겨레는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 만세를 불렀어요. 온 나라가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했지요. 그때는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에 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할 참이네. 부디 뒷일을 부탁하네.” “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구는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기차를 탔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다. 1919년 4월, 김구는 상하이에서 여러 사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잠시 만든 우리나라 정부랍니다. 하루는 김구가 안창호 내무 총장에게 말했어요. “저는 임시정부 건물을 지키는 문지기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국무 회의에서는 김구에게 경무국장을 맡겼지요. “앞으로 경무국장을 맡아 우리를 감시하는 일본을 막아주십시오. 그리고 독립운동가가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살펴주십시오.” 결국 김구는 경무국장을 맡아 온 힘을 다해 일했답니다. 임시정부는 살림이 어려워졌어요. ‘몰래몰래 도와주던 사람이 다 사라졌어. 일본이 감시를 심하게 하기 때문이지.' '외국에 사는 동포에게 도와 달라고 하자.’ 김구는 정성껏 편지를 써서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사는 동포들에게 보냈어요. 그러자 멀리 떨어져 사는 동포들이 답장과 돈을 보내왔지요. ‘비록 적은 돈이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써 주십시오.’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는 사람, 하루 내내 짐을 나르는 사람. 수많은 동포가 꼬깃꼬깃 접은 돈을 보내왔어요. 김구는 동포들의 정성에 가슴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답니다. ‘여러분이 보내신 돈을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인애국단을 만들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끄는 한편, 한인애국단을 만들었어요. 한인애국단은 목숨을 바쳐 일본에 맞서는 단체였지요. 한 젊은이가 김구를 찾아왔어요. "저는 이봉창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부디 뜻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김구는 이봉창의 맑은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 뒤로 몇 달이 흘렀어요. 이봉창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기로 하고 일본에 갔답니다. 1932년 1월 8일, 일왕이 거리를 지날 때였어요. 이봉창은 폭탄을 휙 던졌어요.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일왕 주위의 병사들만 다쳤어요. 하지만 이봉창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결국 이봉창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우리나라 젊은이는 앞다투어 김구를 찾아왔어요. “저도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하루는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왔어요. “선생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용기에 크게 힘을 얻었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기념식이 열렸어요. 쾅! 윤봉길이 행사가 열리는 곳에 폭탄을 던졌어요. 일본군은 윤봉길을 붙잡아 일본으로 끌어갔어요. 결국 윤봉길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요. “일본을 위험에 빠트린 김구를 잡아라!” 일본이 뒤쫓자 김구는 상하이를 떠났어요. 1937년 일본은 중국까지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였어요. 일본군 비행기가 중국 땅에 폭탄을 퍼부었지요. 임시정부는 폭탄을 피해 여러 도시로 옮겨 다녔어요.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끄는 주석을 맡아 한국광복군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일본과 싸운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여러 곳에서 일본과 싸웠어요. “용기를 갖고 싸웁시다! 힘을 냅시다!” 김구는 한국광복군에게 용기를 주었답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이 하루빨리 우리 땅에서 일본을 물리치기를 빌었지요.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어요. 일본이 다른 나라와 싸우다가 항복했던 거예요. 김구는 기뻤지만,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어요. ‘아, 아쉽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는데. 일본이 물러가서 다행이지만, 다른 나라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지만 김구는 다시 힘을 내어 2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어요. 하나 된 나라를 바라다. 슬픈 소식이 들렸어요. 우리나라를 38선으로 갈라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머문다는 것이었지요. 김구는 안타까움에 힘껏 외쳤어요. "미국과 소련의 간섭을 받아야 하다니! 우리 힘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선거해서 우리나라의 바탕을 다집시다!" 북쪽은 처음에 김구와 생각이 같았어요. 하지만 갑자기 선거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김구의 동료들도 생각을 바꾸었어요. “북쪽을 빼고 남쪽만 선거해서 정부를 세웁시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김구는 흔들림 없이 하나 된 나라를 위해 애쓰자고 했어요.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답니다. “통일 없이는 독립이 없고, 독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김구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외쳤어요. 어느 날,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찾아왔어요. 탕 탕 탕 탕! 김구의 방에서 총소리가 울리자, 비서가 방으로 달려갔어요. “선생님!” 문을 연 비서는 깜짝 놀랐어요. 김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지요. 통일을 반대하는 친일파들이 안두희를 내세워 김구의 목숨을 빼앗았던 거예요. 이날, 우리 겨레의 큰 별이 떨어졌답니다.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김구의 죽음을 슬퍼했어요. “김구 선생님! 늘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시다가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이제 우리가 선생님 대신 남과 북이 하나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평생을 우리 겨레와 나라를 위해 살았던 김구! 김구는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믿음과 의지를 품었어요. 김구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통일에 평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랍니다. 김구의 글 나의 소원 가운데.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았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이 소원을 이루려고 살 것이다. |
안중근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구월산 사냥을 나가다. 안응칠은 머리에 자줏빛 수건을 두르고, 어깨에 총을 멘 채 집을 나섰어요. 그때, 아버지 안 진사와 문 앞에서 딱 마주쳤지요. "응칠아, 또 사냥을 나가는 게냐? 너도 이제 열네 살이다. 사냥꾼이 되려고 그러느냐?" 안응칠은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짓는 솜씨가 뛰어났을 정도로 총명했어요. 그러한 안응칠이 사냥을 다니며 공부를 멀리하자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물었지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힘센 나라에 둘러싸여 위태롭지 않습니까?" "글공부도 중요하지만 무예를 닦아서 우리나라를 지키고 싶습니다." "알겠다. 그렇지만 진정 네 뜻을 펼치고 싶다면 학문에도 힘써야 한다." 안응칠은 아버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어요. 밤새 내린 눈으로 온 마을이 하얗게 덮인 어느 날이었어요. 안응칠의 집 사랑방이 사람들 이야기 소리로 시끌벅적했어요. 이웃 마을 포수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지요. 포수들은 내일 새벽에 구월산으로 사냥을 떠날 거래요. "나도 따라가고 싶어요." 안응칠이 포수들에게 말했어요. "사냥하러 가기 위험한 날이에요. 안 진사 어른이 아시면 우리만 야단맞아요." 포수들은 안응칠에게 겁을 잔뜩 주었어요. 그래도 안응칠은 고집을 꺾지 않았지요. 그러자 한 포수가 소나무 가지 끝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정 따라가고 싶으시면 저기 있는 솔방울을 한번 맞혀 보세요." 포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응칠의 총에서 불꽃이 튀었어요. "우아, 솔방울을 정확하게 맞혔어! 총 쏘는 솜씨가 대단한걸." 바라보던 포수들은 크게 감탄했어요. "그만한 솜씨면 충분합니다. 내일 함께 사냥을 나가기로 하지요." 다음 날 새벽, 안응칠은 포수들과 함께 구월산으로 사냥을 떠났어요. 산이 무척 험했지만, 늘 동네에 있는 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던 안응칠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지요. 얼마쯤 지났을까, 풀숲이 흔들리더니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튀어나왔어요. "멧돼지다!" 그 순간 안응칠의 총에서 불꽃이 튀었어요. 탕! 총에 맞은 멧돼지가 그 자리에 폭 고꾸라졌어요. 흩어져 있던 포수들이 멧돼지 가까이로 모여들었어요. "응칠이 도련님이 쏜 거지요? 정말 훌륭한 솜씨예요!" 포수들은 안응칠을 번쩍 들어 올렸어요. "우아, 도련님 만세! 응칠이 도련님 만세!" 만세 소리가 눈 덮인 산골짜기로 메아리쳐 나갔어요. 배워야 삽니다. 안응칠은 자라면서 더욱더 총 솜씨가 늘었어요. 또한 아버지 말을 떠올리며 글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하루는 삼촌이 안응칠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전라도 땅에서 전봉준이 동학군을 만들어서 들고일어났다는구나." "나라가 어수선하더니 기어이 일이 터졌군요." "전봉준의 뜻은 참 좋지만, 동학군 이름을 팔아 나쁜 짓을 일삼는 무리들이 문제란다." "이때를 틈타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넘보지는 않을까요?" "나도 그게 걱정이란다." "나라에서는 동학군을 물리치려고 청나라에 도움을 구했다는구나. 게다가 일본도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며 군사를 불러들이고 있어. 앞으로 우리나라의 앞날이 정말 걱정이구나." 안응칠은 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어느덧 안응칠도 열여섯 살이 되었어요. 안응칠은 김아려라는 처녀를 만나 결혼을 했지요. 그리고 이름도 안중근으로 바꾸었어요. 할아버지가 몸가짐을 무겁게 하라고 이름을 새로 지어 준 거예요. 또한 천주교 성당에서 만난 프랑스 신부 빌렘에게 '도마'라는 영세명도 받았고요. 그 무렵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어요. 일본은 힘이 약한 우리나라를 보살펴 준다며 억지로 을사늑약을 맺고, 나랏일을 마음대로 휘둘렀어요. 안중근은 나라를 걱정하다가 빌렘 신부를 찾아갔지요. "신부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 벗어나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워서 힘과 지혜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어요. "도마의 생각이 옳소." 그 뒤,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안중근은 스물여덟 살 때 평안남도 진남포에 학교를 세웠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지요. "배워야 삽니다. 우리가 지혜를 키워서 나라를 되찾아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학교로 몰려들었어요. 안중근은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쳤어요. 또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나라 안팎으로 힘을 키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남포에 도산 안창호가 와서 연설을 했어요. "여러분, 우리나라를 어지럽힌 이토 히로부미가 명성 황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나랏일까지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안중근과 같은 또래였어요. 안중근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강한 동지애를 느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힘을 기르려면 배워야 하오. 일본은 우리의 정신만은 빼앗지 못할 것이오." "옳은 말이오!" 안중근과 안창호는 서로 뜻이 맞아 편지를 주고받으며 독립의 꿈을 키웠어요. 독립 운동을 하다. 일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안중근은 일본의 총칼에 힘없이 당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여웠어요.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독립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안중근은 일본의 눈을 피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요. 그곳에서 대한 독립군을 만들고, 훈련을 하며 힘을 키웠어요. 마침내 훈련을 마친 대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싸우려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로 나아갔어요. 대한 독립군은 일본군이 있는 곳까지 아무 탈 없이 다다랐어요. 그리고 어두워질 때까지 숲속에서 조용히 기다렸지요. 어둠이 짙게 깔리자, 안중근이 대한 독립군에게 명령했어요. "자, 불을 질러라!" 불길이 바람을 따라 빠르게 번졌어요.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서 도망치기 바빴지요.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일본군 몇 명이 독립군에게 끌려왔어요. 안중근은 일본군을 바라보며 크게 꾸짖었어요. "너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아느냐?" "저희는 이토 히로부미가 시켜서 했을 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안중근은 일본군을 죽일 수 없었어요. 그러면 일본군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요. 안중근은 일본군을 풀어 주었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본군이 대한 독립군을 치러 다시 왔어요. 안중근은 이 싸움에서 겨우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많이 다쳐서 겨울 내내 상처를 치료해야 했지요. "이번에는 결사대를 만들자!" 안중근은 건강을 되찾자마자 노브키에프스크에 독립 운동을 할 자리를 잡았어요. 이곳에서 '동의단지회'라는 결사대를 만들고, 11명의 동지와 함께 손가락을 잘랐지요. 그리고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맹세를 했어요. 첫째, 우리는 목숨을 다해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둘째,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어느 날, 안중근은 애국지사들의 연락을 맡고 있는 대동 공보 신문사의 편집국장 이강을 만났어요. 신문사에는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우덕순도 있었지요. 신문을 보던 안중근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10월 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관과 함께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내용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거든요. "안 선생, 어찌하면 좋겠소?" 이강이 묻자, 안중근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지요. "당연히 이토를 없애야지요. 내가 그자를 해치우겠습니다." "장하오. 이 엄청난 일에 앞장을 서겠다니!" 이강은 안중근의 용기 있는 모습에 감동하여 안중근을 힘껏 껴안았어요. 가슴에 총을 품고 하얼빈으로 가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중국 하얼빈에 가기로 했어요. 그러나 그 전에 하얼빈 가까이에 있는 채가구역에서 다른 동지들을 만나기로 했지요. 안중근은 채가구역에서 이틀 뒤에 이토 히로부미가 이 역을 거쳐서 하얼빈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안중근이 우덕순을 불러 말했어요. "우 동지, 나는 하얼빈역으로 먼저 가 있겠소."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는 특별 열차라서 채가구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러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시간이 바뀔지도 모르니 우 동지는 여기 남아서 시간이 바뀌거든 바로 알려 주시오." "알겠소. 안 동지, 성공을 빕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은 품속에 총과 태극기를 넣고, 하얼빈역으로 갔어요. '9시라고 했지? 시간이 꼭 맞아야 할 텐데.' 역에는 러시아 장관과 군인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맞으려고 모여 있었어요. 안중근은 사람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지요. 곧이어 기차가 들어왔고, 흰 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늙은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저자가 바로 이토구나!' 안중근은 침착하게 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겨누었어요. 탕! 탕! 탕! 안중근이 쏜 총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안중근은 총을 버리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었어요. 그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지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재판을 받다. 안중근은 결국 붙잡혀서 중국 하얼빈에 있는 러시아 헌병 분소로 넘겨졌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왜 죽였는가?"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나라 왕비를 죽였으며, 동양 평화를 핑계 삼아 온갖 몹쓸 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토를 죽였다." "몇 명이 이번 일을 꾸몄나?" "우리 겨레 이천만 동포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 혼자 한 일이다." 그때 하얼빈은 러시아가 다스리고 있어서 안중근은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어요. 하지만 일본이 힘을 써서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 분소에서 일본이 다스리는 뤼순 감옥으로 넘겨졌어요. 안중근은 일본 재판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열다섯 가지 이유를 또박또박 밝혔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지은 죄, 열다섯 가지. 1. 대한의 명성 황후를 죽인 죄. 2. 대한의 황제를 억지로 물러나게 한 죄. 3. 을사늑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억지로 맺은 죄. 4. 아무런 죄 없는 대한 사람을 죽인 죄. 5. 대한의 나랏일을 마음대로 휘두른 죄. 6. 철도, 광산, 산림, 농지 등을 억지로 빼앗은 죄. 7. 일본 제일 은행의 지폐를 억지로 가져다 마구 쓴 죄. 8. 대한의 군대를 억지로 흩은 죄. 9. 민족 교육을 못 하게 막은 죄. 10. 대한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을 막은 죄. 11. 대한 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2. 대한 사람들이 일본의 보살핌을 원한다고 세계에 거짓말한 죄. 13. 일본 국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우리나라가 평화로운 것처럼 일본 국왕을 속인 죄. 안중근의 당당한 모습에 뤼순 감옥 소장과 간수들도 감동을 받았어요. 뤼순 감옥에서는 안중근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했지요. 아침마다 우유 한 잔씩을 들고 오는 감옥 소장에게 안중근이 말했어요. "나를 내버려 두시오. 나는 곧 죽을 몸이오." "걱정스러워서 왔습니다. 좀 드십시오." 안중근은 늘 조국의 앞날만 걱정했어요. 그래서 잘 먹지도 못했지요. 감옥 소장은 안중근이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과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안중근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재판을 오래 끌어 여러 나라에서 알면 안중근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재판을 서둘렀지요.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느냐?" "살해란 말은 틀린 것이다. 나는 대한 독립군의 대장이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도 살해라 하느냐?" 안중근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그러나 결국 안중근을 죽이라는 선고가 내려졌어요. 안중근은 차분하게 받아들였지요.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1910년 3월 26일 아침, 안중근은 그동안 친절을 베푼 간수를 불렀어요. "당신이 내게 부탁했던 글씨를 써 주겠소. 종이를 가져다주시오." 안중근은 붓을 들어 빠르게 써 내려갔어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 붓을 놓은 안중근은 손바닥에 먹을 묻혀 글씨 옆에 손도장을 찍었어요. 안중근의 마지막 붓글씨를 선물 받은 간수는 고마움에 목이 메었지요.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지어 보낸 한복을 입고, 찾아온 두 아우에게 말했어요. "내가 죽거든 하얼빈에 묻어 다오.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나를 우리나라 땅으로 옮기지 마라." 죽으러 가면서도 안중근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어요. 끝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치는 안중근의 목소리가 하늘 위로 메아리쳤답니다. |
유관순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1919년 3월 1일, 이화학당 교장이 학생들을 막아섰어요. "여러분, 위험해요. 나가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하나둘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갔어요. 유관순도 담을 훌쩍 넘었지요. 거리에는 온통 태극기 물결로 가득했어요. 유관순도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어요. "대한 독립 만세!" 그날, 우리 겨레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다 함께 3.1 운동을 일으켰어요. 일본 순사들이 총칼을 휘둘렀지만, 만세 소리는 점점 더 멀리 퍼졌지요. 나라 안에서도, 밖에서도 만세 운동의 불은 활활 타올랐어요. 1945년 우리 겨레가 나라를 되찾던 날, 유관순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눈시울이 뜨거웠어요. 누구보다 기뻐했을 유관순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하지만 해마다 봄이 오면, 유관순의 나라 사랑 정신은 우리 가슴에 새싹처럼 파릇파릇하게 돋아난답니다. 밝고 씩씩한 아이로 자라다. 으앙, 으앙!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여자 아기가 태어났어요. "여자 아기가 울음소리 한번 우렁차다!" "하하, 눈도 또록또록하고 정말 똑똑하게 생겼어요!" 가족은 건강한 아기를 보며 싱글벙글했답니다. 아기는 밝고 씩씩한 아이로 무럭무럭 컸어요. 이 아이가 유관순이지요. "관순이는 참 똑똑해요. 그리고 옳다고 생각한 일은 꼭 해내요." "친구와 놀 때는 장난도 잘 치고 정말 씩씩하지요." "게다가 집에 가면 엄마를 잘 돕는다니, 참 착해요." 동네 사람들은 유관순을 칭찬했어요. 어느 날, 유관순의 오빠가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왔어요. "엄마, 일본 순사가 집이 깨끗한지 검사하러 온대요!"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집을 깨끗하게 치웠지요. 그때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어요. 일본 순사는 집마다 깨끗한지 검사하는 척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하루는 아버지가 일본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고 돌아왔어요. 유관순은 시름시름 앓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답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겨서 설움 받는 거야. 꼭 나라를 되찾아야 해.' 새로운 학문을 배우다. 유관순은 혼자서 글을 공부했어요. 유관순의 작은아버지는 서양에서 들어온 새 학문을 공부했는데, 어느 날 유관순에게 말했어요. "관순아, 여자도 배워야 한다. 새로운 학문을 공부해 우리 겨레의 앞날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라." "네, 작은아버지.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도록 열심히 공부할게요." 유관순은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에 들어갔지요. 유관순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힘든 일이나 어려운 친구를 돕는 데 앞장섰어요. 댕댕! 이화학당 기숙사에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렸어요. 그날은 유관순이 기도를 하는 날이었지요. 유관순은 기도 끝에 말했어요. "명태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어요. 한바탕 웃음소리에 선생님이 유관순을 타일렀지요. "관순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해야지. 명태라고 하면 어떻게 하니? 기도할 때는 장난치면 안 된단다." "방금 먹은 명태 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그만." "와하하!" 친구들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어요. 이처럼 유관순은 장난기가 넘쳤어요. 기숙사 담을 넘어 군것질거리를 사 오다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요.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미끄럼도 잘 탔답니다. 유관순은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는 이정수와 마음이 척척 잘 맞았어요. 나라를 사랑하고 독립을 바라는 마음도 같았지요. 어느 날 밤, 유관순과 이정수는 태극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태극기를 만들어서 학교에 붙이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널리 전해질 거야." 두 사람은 종이에 태극과 사괘를 그렸어요. 나라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듬뿍 담아 정성껏 그렸지요. 유관순과 이정수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태극기를 그렸어요. 그리고 모두가 잠든 사이, 학교 곳곳에 태극기를 붙였답니다. 이튿날 아침, 학생들은 태극기가 붙은 곳 앞에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우아! 태극기다! 누가 붙여 놓았지?" 유관순과 이정수는 태극기로 둘러싸인 학교를 보았어요. 곧 독립이 이루어질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댔지요. 고종 황제는 일본 몰래 '만국 평화 회의'에 사람을 보냈어요. 일본이 억지로 우리나라를 빼앗았다는 것을 알려 우리나라를 되찾으려 했지요.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고종 황제를 감시했지요. 1919년 1월, 고종 황제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일본은 고종 황제가 병으로 숨졌다고 알렸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답니다. 우리 겨레는 큰 슬픔에 잠겼지요. "세상에! 고종 황제 폐하께서 숨을 거두시다니!" "황제 폐하까지 없으니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고종 황제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덕수궁 앞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3.1 운동을 하다. 민족 대표 33인은 3월 1일에 독립을 널리 알리고,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했어요. "하루빨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해!" "우리힘으로 나라를 되찾도록 만세 운동을 하자!" 이화학당 학생들도 만세 운동을 하기로 했답니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굳게 마음을 다졌어요. "태극기를 만들어서 품고 다니자!" "그래, 우리도 3월 1일에 거리로 나가서 만세를 부르자!" 드디어 3월 1일이 밝았어요. 민족 대표 33인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온 세상에 알렸어요. 우리 겨레는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지요.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여러분, 위험하니 학교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교장 선생님이 말렸지만, 유관순과 친구들은 거리로 나갔어요. 모두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외쳤지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탕! 탕! 탕! 일본 순사들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았어요. 사람들은 태극기를 손에 꼭 쥔 채 쓰러졌지요. 하지만 우렁찬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답니다. 일본은 억지로 학교 문을 닫게 했어요.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유관순과 친구들은 모여서 이야기했어요. "이대로 독립운동을 끝낼 수는 없어." "맞아,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모두 고향으로 가서 만세 운동을 계속하자." "좋은 생각이야! 만세 운동을 해서 독립을 앞당기자." 유관순은 친구들과 굳게 약속했어요. 그리고 사촌 언니와 함께 고향으로 씩씩하게 돌아갔지요. 독립을 위해 횃불을 들다. 유관순은 만세 운동을 같이할 사람을 모았어요. 사촌 언니와 계획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말했지요. "아우내 장날에 다 같이 독립 만세를 외쳐요!" "그래, 우리도 함께 하마." "그럼 만세 운동 전날 밤, 제가 횃불로 신호를 보낼게요. 보시고 꼭 횃불을 높이 올려주세요. 약속대로 내일 만세 운동을 하자는 뜻으로요." 유관순은 낮에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늦도록 태극기를 만들었답니다. 드디어 만세 운동 전날 밤, 유관순은 사람들과 매봉산에 올랐어요. 그믐날이라 주위가 온통 깜깜했지요. 타닥타닥 횃불 타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어요. 유관순은 횃불을 높이 올렸어요. '왜 다른 횃불이 안 보일까? 모두 내일 만세 운동을 하자는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유관순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어요. 그때였어요. 먼 산에 횃불이 어둠을 뚫고 붉게 타올랐어요. "저기 횃불을 보세요! 모두 내일 만세 운동을 하겠다고 횃불을 올렸어요!" 유관순과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어요. 유관순은 기쁨에 벅찬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제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부디 일본을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세요. 내일 큰일을 맡은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고 우리 겨레가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세요. 부디 함께하시어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겨레의 어둠을 밝히다. 이튿날, 아우내 장터에 유관순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여러분,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온갖 설움을 받았어요. 우리 모두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불러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삼천리강산이 울리도록 만세를 불러요. 대한 독립 만세!"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외쳤어요. "대한 독립 만세!" 아우내 장터는 만세 소리로 가득 찼어요. 일본 순사는 사람들에게 총칼을 휘둘렀어요. 유관순의 부모님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요. 유관순은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갔지요. 유관순은 재판받을 때도 떳떳했어요.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 사람이 무슨 권리로 나를 재판하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유관순은 7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어요. '내가 눈물만 흘리고 있으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더 슬퍼하시겠지? 힘을 내서 일본에 더 씩씩하게 맞서자.' 유관순은 감옥에서 더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어요.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받아 나날이 몸이 약해졌어요. '비록 몸은 약해지지만, 독립을 바라는 내 마음은 더 강해져.' 유관순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일본 사람에게 말했어요. "나를 없앨 수는 있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게 될 거예요." 이듬해 1920년, 유관순은 열아홉 살 꽃다운 나이로 숨을 거두었어요. 그리고 1945년, 마침내 우리 겨레는 나라를 되찾았지요. 유관순의 나라 사랑 정신은 총칼과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어요. 우리 겨레는 유관순을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되찾았지요. 유관순은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우리 겨레의 어둠을 밝혔답니다. |
김대중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여러분, '인동'이라는 식물을 아세요? 인동은 겨울 찬바람에도 시들지 않고 참고 견뎌 봄에 새순을 피운답니다. 흔히 '인동초'라고 불리며, 강한 의지와 끈기를 나타내지요. 우리 역사에는 인동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람들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힘겨운 시절을 견뎠던 김대중 할아버지를 인동초라고 부른답니다. 김대중 할아버지는 긴 어려움을 이기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리고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 회담을 이루어 한반도에 평화를 일구었지요. 평화를 이끈 노력으로 김대중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탔답니다. 사람들은 김대중 할아버지를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해요. 김대중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죽을 뻔한 순간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어요. 과연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지금부터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을거예요. 겨레의 독립을 꿈꾸다. 우리 겨레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였어요. 1924년 1월 6일, 남쪽 섬 하의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아이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어머니에게 말했지요. "여보,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고생 많았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았어요. “아이 이름도 지어 놓았어요. 대중이라 지읍시다. 김대중, 어때요?” 아버지가 묻자, 어머니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김대중은 아름다운 섬 하의도에서 맘껏 뛰놀며 건강하게 자랐어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아버지에게 우리 겨레의 역사와 예술을 배웠답니다. 어느 날, 김대중은 친구들과 놀다가 길바닥에 누워 있는 엿장수 아저씨를 보았어요. 엿장수 아저씨는 술에 취해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지요. 친구들은 아저씨의 가방을 살짝 열어 보았어요. 가방 안에는 엿과 빗,거울 등 여러 물건이 가득 들어 있었지요. 친구들은 아저씨 몰래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들었어요. 김대중도 담뱃대를 들고 집으로 갔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세요." 김대중은 어머니에게 담뱃대를 주며 어디서 구했는지 이야기했어요. 김대중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남의 것을 말도 없이 가져오면 도둑질이란다. 옳은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해." 어머니는 김대중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회초리를 들었어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앞으로 옳은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지.' 김대중은 어머니 말씀을 평생 가슴에 간직했어요. 하루는 김대중이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아버지,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데 왜 가난하지요?" 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일본 사람이 곡식을 다 빼앗아 가서 그렇단다. 우리는 땅이 없으니 일본 사람에게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지. 그런데 일본 사람이 땅을 빌려 주는 값으로 터무니없이 쌀을 많이 가져간단다." "그럼 일본 사람 땅 말고, 다른 사람 땅에 농사지으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김대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았기 때문에 땅은 모두 일본 사람 것이란다." 김대중은 우리 겨레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아,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독립해서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야 해.' 김대중은 학교에서 반장을 맡았어요. 하루는 김대중이 글짓기 시간에 일본의 잘못을 말하는 글을 썼어요. 김대중의 글을 읽은 일본 선생은 버럭 화를 냈어요. "아니, 반장이라는 학생이 일본에 대해 나쁘게 쓰다니! 김대중, 너는 반장 자격이 없다!" 결국 김대중은 반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답니다. 김대중은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삼켰어요. '분하다! 나라를 빼앗긴 겨레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구나. 생각과 글도 자유롭지 않다니! 이런 설움을 겪지 않으려면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 해.' 올바른 정치인을 꿈꾸다. 김대중이 자라면서 우리나라는 드디어 1945년에 나라를 되찾았어요.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어요. 1950년에 6 25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거든요. 전쟁이 끝난 뒤 김대중은 생각했어요. '정치인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그래,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올바로 이끌자!' 그러나 정치는 쉽지 않았어요. 김대중은 선거에 도전했지만, 떨어지거나 다른 후보의 방해로 선거에 아예 못 나가기도 했지요. 김대중은 정치를 포기할까 생각했어요. 선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써서 가족에게 미안했지요. 하지만 아내는 김대중에게 힘을 주었어요. "용기를 내세요. 당신은 꼭 다시 일어나 큰 일을 하셔야 해요." 어느날, 아내가 세상을 떠났어요. 김대중은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못난 나 때문에 아내가 너무 힘들었어. 지금이라도 정치를 그만두어야 할까? 아냐.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올바른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바로 이끌어야지.' 마침내 1961년, 김대중은 국회의원이 되었어요. 국회의원 선거에 네 번이나 도전한 끝에 성공한 거지요. 그런데 그 무렵, 군인들이 힘으로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어요. 김대중도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요. '아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어요. 나라를 올곧게 세워야 한다는 뜻을 꺾지 않았지요. 새로운 아내 이희호가 큰 힘이 되었어요. 몇 년 뒤, 김대중은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어요. 김대중은 국민에게 뛰어난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렸지요. "김대중 의원처럼 말 잘하는 국회의원은 처음 봤어!" "국민이 궁금해 하는 것을 콕콕 집어서 시원하게 대답하잖아." "책도 많이 읽고, 여러 가지 공부도 열심히 한다면서요?" "국회 도서관에서 늘 회의 준비를 꼼꼼하게 한대요." 김대중은 뜻이 깊은 정치인으로 국민에게 사랑을 받았답니다. 1971년,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에 올라 박정희와 맞붙었어요. 하지만 아주 적은 표 차이로 져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지요. 시련을 넘어 민주의 길로! 박정희 대통령 때, 김대중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일했어요. 사람들은 김대중을 믿고 따랐지요. 김대중에게는 언제나 위험이 끊이질 않았어요. 일본에서는 억지로 끌려가 죽을 뻔했지요. 어떤 때는 밖으로 못 나가고, 집 안에 갇혀 지내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전두환이 군사 정권을 세웠을 때였어요. 1980년 5월에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군사 정권은 김대중을 잡아갔지요. 김대중이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고 말이에요. 김대중은 재판장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어요. '다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어. 다시 세상에 나가 올바른 정치를 펼칠 날을 준비해야지.' 김대중은 다시 힘을 냈답니다. 김대중은 감옥에서 역사, 철학, 경제, 문학 등 책을 많이 읽고 지혜를 길렀어요.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책에서 배운 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지요. 김대중은 감옥에 있을 때,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진실로 너그럽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자." 사람들은 김대중을 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김대중은 죄가 없다! 김대중을 풀어 주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김대중을 구하자는 운동을 벌였지요. 군사 정권은 김대중을 나라 밖으로 억지로 망명하게 했어요. 김대중은 감옥에서 나와 미국으로 떠났답니다. 김대중이 미국에 있을 때였어요. 우리나라 국민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지요. 김대중도 우리나라로 돌아와 국민과 함께 했어요. 마침내 군사 정권이 물러났어요. 우리나라는 이제 국민이 대통령을 뽑았지요. 김대중은 두 번에 걸쳐 대통령 선거에 나갔지만, 모두 떨어졌어요. 김대중은 선거에 진 것을 받아들이고, 정치를 그만두겠다며 영국으로 떠났답니다. 김대중은 나라를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어요. 사람들은 김대중이 정치를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지요.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김대중은 다시 우리나라 땅을 밟으며 눈시울을 붉혔어요.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다. 1998년 2월 25일, 드디어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이 되었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 앞에서 약속했지요. "저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평화롭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국민의 정부,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와 국민 여러분이 힘을 합쳐 더 큰 대한민국으로 이끌어 갑시다!” 그때 우리나라는 경제가 무척 어려웠어요. 김대중 정부는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국민과 한마음으로 힘껏 뛰었지요. 마침내, 우리나라 경제는 다시 일어났어요. 2000년 6월, 세계의 눈과 귀가 평양의 순안공항에 쏠렸어요. 이윽고 비행기 한 대가 공항 하늘에 나타났어요. 비행기가 땅에 내리자 힘찬 음악이 울렸어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요. 비행기 문이 열리자, 김대중 대통령이 나타났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가슴이 뭉클했어요. '내 동포가 사는곳! 내가 드디어 북녘 땅을 밟는구나!'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 계단을 내려왔어요. 공항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마중 나와 있었지요. 바로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남과 북의 지도자는 분단 55년 만에 두 손을 뜨겁게 마주 잡았어요. "어려운 길을 오셨습네다!" "반갑습니다.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밝게 인사했어요. 남북 화해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지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6월 15일, 서로 이야기한 내용을 발표했지요. 바로 평화롭게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6 15 남북공동선언'이랍니다. 짧은 만남이 끝나고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떠나며 생각했어요.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과 북, 서로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여는 것이 통일로 가는 다리를 놓는 일이다.' 평화를 지키다. "저는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어려운 북한을 돕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설득했지요. "여러분! 북한 동포는 우리와 한 형제입니다. 한반도가 평화롭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대화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화해하려고 애썼어요.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 '햇볕정책'도 펼쳤지요. 그래서 남과 북에 헤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만났어요. 우리나라 사람도 북한에 있는 금강산에 갈 수 있었지요. 남과 북의 경제도 힘을 합쳤답니다. 2000년 12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세계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하고,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연 것을 인정한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 세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어요. "사형이 내려졌을 때 저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저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두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세계의 인권과 평화, 하나로 나아갈 우리 겨레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감사의 말을 마치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답니다. |
만델라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어느 날 만델라는 한 소녀의 편지를 흐뭇하게 읽었어요. 만델라 할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할아버지는 제 삶을 아름답게 바꿔 주셨어요. 저도 할아버지처럼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할 거예요. 만델라는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다 27여 년을 차가운 감방에서 보냈어요. 그때 만델라의 힘은 잘못된 일에 굽히지 않는 ‘신념과 용기’였지요. 감옥에서 나온 뒤, 만델라에게 힘이 하나 더 생겼어요. 바로 ‘용서와 화해’의 힘이지요. 백인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했던 거예요. 만델라가 백인과 계속 싸웠다면 소녀의 편지를 받지 못했을 거예요. 그 소녀는 바로 만델라를 감옥에 가두었던 백인 지배자의 증손녀였으니까요.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다. “우리는 템부 족 전사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아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 흑인 아이들이 남아프리카 강가에 모여 전쟁놀이하고 있었어요. 유난히 크고 검은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바로 템부 족 족장의 아들인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였지요. 아이들은 만델라를 따라 신나게 노래하며 강가를 달렸어요. “우리는 전사의 아들! 용감한 템부 족! 땅의 여신은 우리를 사랑하네.” 이때였어요. 백인 경찰들이 말을 타고,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려왔어요. 순간, 아이들은 겁에 질려 길 한쪽으로 비켜섰지요. 백인 경찰들은 아이들을 흘끗 보더니 일부러 더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어요. “나는 백인 경찰이 너무 무서워!” “또 무슨 잘못을 했다고 트집을 잡을까 봐 혼났어!” 백인 경찰들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얘야, 얼굴이 어둡구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저녁밥을 먹다가 아버지가 만델라에게 물었어요. 슬픈 얼굴로 있던 만델라는 아버지에게 말했지요. “아버지, 여기는 우리 흑인의 땅인데. 왜 백인이 다스리지요?”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많은데. 왜 백인에게 꼼짝 못 하나요? 우리는 용감한 부족인데.” “왜 참고만 살지요?” 아버지는 만델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낀단다.” “꼭 필요한 것만 자연에서 얻고, 욕심 없이 살아가지. 그런데 몇몇 백인이 다른 나라에 욕심을 내서 침략했단다. 이곳 남아프리카까지 손에 넣고, 우리를 다스리려고 총칼을 쓰지.” “우리는 끝없이 싸워 왔고, 앞으로도 싸울 거야. 지금은 백인의 총칼과 겨룰 실력을 기르고 있단다.” “아버지,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덜덜 떨며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용감한 전사의 아들이에요.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말하겠어요.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고요!” 만델라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두 손을 꼭 쥐었어요. 어느 날, 만델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요. 슬픔에 빠진 만델라는 아버지가 한 말을 떠올렸어요. “힘을 내자!” “아버지는 언제나 하늘에서 나를 지켜 주신다고 하셨어. 그리고 올바르게 살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만델라는 두 눈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았어요. 그리고 힘차게 학교로 뛰어갔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만델라는 주위의 도움으로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었어요. 흑인만 다니는 학교에서는 간단한 산수와 국어, 청소, 꽃밭 가꾸기 같은 것만 가르쳤어요. 하루는 만델라가 학교에 가는데, 백인 아이들이 놀렸어요. “야, 깜둥이! 열심히 배워서 우리 집 청소 좀 해 줘!” 만델라는 백인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를 보았어요. 사회, 역사, 외국어 등 여러 과목 교과서였지요. '우아, 재미있겠다! 우리는 왜 저런 과목을 못 배우지?' '하인으로 일할 때 필요한 것만 배우잖아. 결국 많이 배운 백인은 늘 주인이 되고, 흑인은 하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이건 차별이야!' 만델라가 고민을 털어놓자, 한 족장이 말했어요.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게 살려면 법을 바꾸어야 한단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정치가, 법률가가 모두 백인이야. 그러니까 흑인에게 이롭지 않은 법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저는 정치가나 법률가가 되겠어요. 힘들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꿈을 이룰 거예요.” 만델라는 백인 학교에만 있는 교과서를 구했어요. 그리고 혼자 힘으로 차근차근 공부한 끝에 대학에 들어갔지요. ‘변호사가 되어 힘없고 차별받는 흑인을 돕겠어!’ 만델라는 꿈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강의실 문을 힘차게 열었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다. 만델라는 흑인 동료들과 ‘아프리카 민족 회의’에 참여했어요. 그리고 백인과 흑인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었지요. 드디어 만델라는 변호사가 되었어요. 흑인으로서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 상담소를 열었지요. “흑인이 변호사라니! 변호사는 백인만 하는 거 아냐?” 백인들이 쑤군댔지만, 만델라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주눅 들지 말자. 백인이 하는 일이라면 흑인도 할 수 있어!’ 만델라는 거리로 나가 동료들과 외쳤어요. “흑인도 투표할 수 있게 하라!” “백인 어린이와 흑인 어린이를 똑같이 교육하자!” “흑인도 도시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라!” 흑인들은 줄을 지어 평화롭게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때였어요. 탕! 탕! 샤프 빌 거리에 총소리가 울렸어요. 이윽고 행진하던 흑인이 하나둘씩 쓰러졌어요. 경찰과 군인이 행진을 막으려 하다가 흑인에게 총을 쏜 거지요. 결국 이날, 수많은 흑인이 목숨을 잃거나 잡혀갔어요. 살아남은 흑인은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가족과 친구를 땅에 묻어야 했지요.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평등한 사회를 꿈꾼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 일어섰다 죽은 동료를 잊지 맙시다!” 만델라는 슬픔과 분노로 이날을 가슴에 새겼어요. 이 사건을 ‘샤프빌 학살 사건’이라고 해요.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찾아. 흑인들은 절망에 빠졌어요. “나는 싸울 용기를 잃었어. 다 포기했어.” “아무래도 우리는 노예로 살아야 할 운명인가 봐.” 만델라도 슬픔에 빠졌지만, 곧 다시 일어섰어요. 그리고 온 나라를 다니며 외쳤지요. “자유와 평등은 우리의 꿈. 우리의 미래입니다. 주저앉지 말고 다 같이 일어섭시다!” 만델라는 변호사일도 열심히 했어요. “흑인 여러분, 법을 몰라 억울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세요!” 힘없는 흑인은 만델라를 찾아갔어요. 만델라가 있는 법률 상담소는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어요. 만델라는 투투 대주교를 찾아갔어요. “대주교님! 죄 없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비극을 세계에 알려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네, 당신을 돕겠습니다. 신은 정의와 함께하시니까요.” 투투 대주교는 온 세계에 만델라의 뜻을 전했어요. 그러자 여러 나라에서 만델라를 돕겠다고 나섰지요.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힘들고 외롭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만델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어요. 백인 정부는 만델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만델라가 다른 흑인을 부추겨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이끕니다. 게다가 흑인의 주장을 세계에 알려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만델라를 당장 잡아들입시다. 감옥에 가두면 조용하겠지요.” 경찰이 만델라를 잡으러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만델라는 경찰을 피해 빠져나갔지요. 만델라는 경찰을 피하며 열심히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어요. “만델라를 또 놓치다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해.” 조마조마한 백인 정부는 만델라를 잡으려고 온갖 방법을 썼어요. 거리 곳곳에 만델라의 사진을 붙이기도 했지요. 사진 밑에는 이런 글이 있었어요. 만델라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러 우리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만델라를 본 사람은 재빨리 경찰에 알리기를 바란다. 철창에 갇힌 새. “자네, 잠시 외국으로 몸을 피하는 게 어때?” 친구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만델라는 고개를 저었어요. “도망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나는 흑인과 백인이 사이좋게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목숨을 바치기로 했어.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쳐 만델라를 붙잡았어요. “만델라, 너를 국가 반역죄로 체포한다!” “국가 반역죄라니요?” “나는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합니다. 단지 흑인과 백인의 차별을 없애려고 했을 뿐입니다.” 만델라는 경찰에 끌려가는 순간에도 떳떳하게 말했어요. 만델라는 평생 감옥에 갇혀 지내는 벌을 받았어요. 감옥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로번 섬에 있었지요. 만델라는 꽁꽁 묶인 채 배를 탔어요. 만델라는 아스라이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며 그리운 가족과 동료, 고통받는 흑인을 생각했어요. 그때,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어요. 만델라는 훨훨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았지요. ‘비록 내 몸은 감옥에 갇히지만, 내 마음은 저 새처럼 자유로워. 재판장에서는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았지만 나는 떳떳해.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 죄뿐이니까.’ ‘앞으로 힘든 시간이 오겠지. 아버지, 하늘에서 저를 보고 계시나요? 부디 저의 신념이 변하지 않게 힘을 주세요!’ 이윽고 로번 섬에 도착한 만델라는 감옥으로 끌려갔어요. 철커덩! 감옥 문이 닫히고, 만델라는 홀로 남겨졌어요. 들리는 소리라고는 쓸쓸한 파도 소리, 죄수의 슬픈 울음소리뿐이었지요. 만델라는 절망에 빠진 흑인 죄수를 위로했어요. “눈물을 거두세요. 이제 기운을 냅시다.” “하루빨리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려면 힘을 길러야 해요. 총칼로 얻은 힘은 총칼로 무너지지만, 지혜의 힘은 강합니다.” 만델라는 감옥에 갇힌 흑인에게 공부를 가르쳤어요. 힘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흑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지요. 어느 날, 소웨토에 사는 흑인이 정부에 항의하는 모임을 했어요. 흑인을 차별하는 교육 때문이었지요. 이 소식은 곧 다른 도시로 퍼져, 수많은 흑인이 함께 항의했어요. 백인 정부는 거세게 흑인을 막았어요. 이때 무려 600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어요. 이 일을 ‘소웨토 반란’이라고 해요. 이 소식을 들은 만델라는 가슴을 움켜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먼저 눈 감은 여러분.'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자유와 평등이 깃든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만델라가 감옥에 갇힌 지 27여 년이 흘렀어요. 할아버지가 된 만델라는 감옥에 오래 있어서 몸이 아주 아팠어요. 세계 여러 나라가 만델라를 풀어주라고 백인 정부에 항의했어요. “만델라에게 자유를!” 마침내 1990년 2월 11일. 백인 정부는 만델라를 풀어주었어요. 만델라가 감옥에서 나오자, 흑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만델라가 풀려났다! 만세!” “만델라 선생님, 당신은 우리의 미래를 이끌 예언자입니다!” 그러자 만델라는 빙긋 웃으며 손을 저었어요. “아닙니다. 저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 애쓰는 하인 말입니다.” 화해의 시대를 열다. 만델라는 흑인 차별 법을 없애려고 백인 대통령 드 클러크를 만났어요. 그러자 몇몇 흑인이 깜짝 놀라 물었지요. “선생님! 오랜 세월을 갇혀 지내셨는데, 백인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세요?” 만델라는 담담하게 대답했어요. “아니요. 저의 꿈은 백인을 누르고 흑인만 잘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저는 흑인과 백인이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과거에 고통을 받았다고 해서 백인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미워하면 복수에 복수를 거듭할 뿐이지요.” “이제는 모두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습니다.” 만델라는 드 클러크와 협상해 긴 세월 동안 이어지던 인종차별 법을 없앴어요. 그래서 백인 드 클라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요. “드디어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울리는 세상이 왔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삶을 바치신 만델라 선생님께 힘찬 박수를 보냅시다!”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어요. 1994년, 흑인은 처음으로 국민 투표를 했어요. 그동안 흑인은 투표도 할 수 없었지요. 흑인은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에 표를 던졌어요. 아프리카 민족 회의가 표를 가장 많이 얻어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말했어요. “움츠러들어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기를 갖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나와 이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만델라는 피부 색깔을 떠나 다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어요. 그러다 만델라는 타보 음베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천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지요. “화해의 시대로 들어섰으니, 저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젊은 사람이 이끌어야 합니다.” 만델라가 쉬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물론 아니에요. 만델라는 지금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평화를 호소하고 있어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만델라! 만델라는 우리의 마음에 인권과 평화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남아있어요. |
마틴 루서 킹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마틴 루서 킹 목사님께 안녕하세요? 킹 목사님! 저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살고 있는 호크라고 해요. 저도 목사님처럼 흑인이랍니다. 엄마한테 들었는데, 목사님 덕분에 제가 백인 친구들과 마음껏 놀 수 있는 거라면서요? 뵌 적은 없지만 왠지 좋은 분일 것 같아요. 오늘은 1월 15일이에요. 바로 목사님 생일이지요. 온 나라가 목사님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있어요. 저도 엄마한테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고마워서 오늘 아침 아무도 몰래 옥상에 올라가 고맙다고 외쳤는데 혹시 들으셨어요? 킥킥, 못 들으셨을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조그맣게 말했거든요. 아, 저 오늘 결심했어요. 목사님처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요. 그러니까 꼭 지켜봐주세요. 약속하신 거예요. 목사님 생일을 축하하며 호크 올림. 흑인과 백인은 다른가요? 마틴 루서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남부의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이름난 흑인 목사였지요. 마틴은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틴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백화점 앞에서 실수로 백인 부인의 발을 살짝 밟았는데, 뺨을 맞았거든요. "더러운 검둥이 주제에 감히. 정말 재수 없는 날이군." 마틴은 속이 상해서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아버지, 백인 부인이 저보고 '더러운 검둥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더러운 사람인가요?" "아들아, 그렇지 않단다. 피부색만 다를 뿐 백인과 흑인은 똑같은 사람이란다. 하지만 어떤 백인은 흑인을 자기 노예쯤으로 생각하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너도 자라면서 여러 가지 차별을 겪을 거야. 하지만 꼭 기억하렴. 아무리 백인이 흑인을 업신여기고 얕보아도 언젠가는 차별 없는 세상이 올 거란다." "아버지! 저는 자라서 꼭 흑인과 백인의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거예요. 그래서 흑인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어요." 마틴은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어요.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이다. 흑인의 인권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은 마틴은 모어하우스 대학을 졸업하고, 크로저 신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한 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시작했지요. 이제 마틴은 '킹 목사'로 불렸어요.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부인이 버스에서 '백인 전용 좌석' 뒤에 앉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붙잡혔지요. 흑인 지도자들은 파크스 부인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킹 목사의 교회에 모였어요. 킹 목사와 흑인 지도자들은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들에게 '버스 안 타기 운동' 소식을 알렸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흑인은 가난해서 버스를 타야만 오고 갈 수 있었지요. 흑인 지도자들은 흑인 택시 회사에 간절히 부탁했어요. "5일 하루만 흑인이 버스 요금으로 택시를 타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12월 5일 날이 밝자, 킹 목사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과연 '버스 안 타기 운동'이 성공할 수 있을까?" 킹 목사는 창밖을 내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언제나 흑인으로 빼곡하던 버스가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흑인은 모두 '버스 안 타기 운동'에 함께했던 거예요. 그래서 버스를 안 타고 걸어 다니거나, 버스 요금만 내고 흑인 택시 회사의 택시를 탔지요. 그러나 12월 5일에 열린 재판에서는 파크스 부인에게 유죄 판결이 났어요. 킹 목사와 흑인 지도자들은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 사건을 더 높은 법원에 보내서 다시 판결받기로 했지요. 재판이 끝난 뒤, 흑인 지도자들은 버스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없애려고 몽고메리개선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킹 목사가 젊고, 사람들을 잘 이끈다고 의장으로 뽑혔지요. 킹 목사는 먼저 몽고메리시의 관리와 버스 회사 간부들을 만나 흑인의 목소리를 전했어요. '버스에서 흑인도 앞에 앉을 수 있고, 백인도 뒤에 앉을 수 있게 합시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일단 자리에 앉으면, 양보하지 않아도 되게 합시다!' '버스 운전사는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합시다!' '흑인도 버스 운전사로 일할 수 있게 합시다!' 사람이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권리이므로 킹 목사는 다 받아들여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몽고메리시와 버스 회사 쪽은 딱 달라 거절했지요. "법에 따르면 버스에서 흑인과 백인 자리는 따로 있고, 흑인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말한 대로 한다면 법을 어기는 셈입니다." 킹 목사는 몹시 실망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버스 안 타기 운동'을 계속해서 법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백인들은 킹 목사를 미워했어요. 어떤 백인은 킹 목사를 죽이겠다고 무서운 전화까지 했지요. 1956년 1월 30일 밤, 하늘이 무너질 듯한 폭발 소리가 킹 목사의 집을 뒤흔들었어요. 킹 목사를 미워하는 백인이 킹 목사의 집에 폭탄을 던진 거예요. 흑인들은 킹 목사의 집이 폭발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냈어요. "백인들이 폭력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이번 기회에 백인 놈들을 혼내줍시다." 흑인들은 무기를 들고, 킹 목사의 집으로 몰려들었어요. 경찰들이 길을 막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지요. 이때 킹 목사가 폭발로 부서진 베란다에 나와서 말했어요. "제 아내와 아이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제발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 폭력으로 맞선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니.' 감동한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흑인들이 버스를 안 탄 지 344일이 지난 1956년 11월 13일, 드디어 미국 최고 법원이 판결했어요. '버스 안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따로 나누는 것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 흑인들은 더할 수 없이 기뻤어요. "여러분! 우리가 드디어 이겼습니다. 몽고메리에서는 더 이상 법을 핑계로 버스 안에서 차별할 수 없습니다. 백인 자리와 흑인 자리를 따로 나눌 수 없습니다!" 몽고메리에서 이긴 뒤, 흑인들은 자신감을 가졌어요. 킹 목사는 '버스 안 타기 운동'에 성공한 덕분에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 회의' 의장으로 뽑혔지요. 버밍햄 운동을 일으키다. 1963년 봄, 킹 목사와 흑인 지도자들은 버밍햄에 왔어요. 버밍햄은 흑백 차별이 아주 심한 곳이었지요. 식당뿐만 아니라 화장실, 엘리베이터까지 백인용과 흑인용이 나뉘어 있었어요. 흑인은 어디에서든 백인과 어울릴 수 없었지요. 게다가 버밍햄의 경찰서 서장 코너는 백인을 뛰어난 사람으로, 흑인을 부려 먹는 짐승쯤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킹 목사는 버밍햄에서 흑인 차별 폐지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킹 목사와 흑인들은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서 외쳤어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흑인과 백인을 가르지 마라!" "누구나 백화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라!" 성격이 거칠고 사나운 코너 서장이 가만있을 리 없었지요. "모두 끌어내!" 목소리를 높이던 흑인들은 모두 감옥으로 끌려갔어요. 다음날,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흑인들이 거리에 모였어요. 흑인들은 화를 참으며 평화롭게 행진했지요. "흑인과 백인을 가르는 법을 없애라! 우리를 차별하지 마라!"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개와 몽둥이를 든 경찰들이 앞을 가로막았어요. 흑인들은 겁내지 않고 계속 행진했지만, 경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고 감옥으로 끌려갔답니다. 킹 목사 또한 감옥으로 끌려갔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어요. 미국의 대표 성직자 여덟 명이 킹 목사의 평화 행진을 나쁘게 말하는 글을 신문에 실은 거예요. 감옥에 갇혀 있던 킹 목사는 신문을 보고 기가 막혔어요. 킹 목사는 곧 자기 뜻을 알리는 편지를 썼답니다. 그 편지가 바로 널리 알려진 '버밍햄 감옥에서 쓴 편지'예요.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라!" 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 말은 흑인이라면 누구나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기다려라!"라는 말은 대부분 "안돼!"라는 뜻입니다. 이름난 법학자의 말처럼 "정의를 이루지 않고 미루는 것은 정의를 물리치는 것과 같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에 덴 상처는 덮어 놓으면 쉽게 낫지 않기 때문에 흉하더라도 빛과 공기에 드러내야 합니다. 나쁜 일을 드러내면 힘들겠지만, 인간의 양심에 빛을 쪼이고 국민의 의견이라는 공기가 닿도록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일이 고쳐질 수 있습니다. 1963년 4월 16일 평화와 사랑을 위해 '버밍햄 감옥에서 쓴 편지' 가운데에서. 킹 목사는 감옥에서 풀려났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요. 코너 서장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흑인들을 마구 잡아 가두었어요. 킹 목사는 버밍햄에서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그때, 킹 목사의 보좌관이 말했어요. "고등학생과 함께 하면 어떨까요? 아무리 사나운 코너 서장이라도 아이들까지 잡아 가두겠어요? 게다가 폭력을 쓰지 않으니, 별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건 안 됩니다. 어린 학생을 끌어들이는 건 옳지 못해요.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킹 목사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런데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학생들이 함께하겠다고 나섰어요. "우리도 행진할 거예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어리다고 계속 참을 수는 없어요." 학생들의 굳은 의지를 아무도 말릴 수 없었어요. 더구나 이 소식을 들은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평화 행진에 함께 하겠다고 나섰지요. "우리도 차별을 없앨 때까지 싸우겠어요. 허락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아이들까지 시위에 함께했어요. 물론 코너 서장이 가만있을 리 없었지요. "저 검둥이들에게 물벼락을 퍼붓도록 해! 그리고 닥치는 대로 잡아서 감옥에 처넣어!"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어찌나 센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나동그라졌어요.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지는 아이들을 개들이 물어뜯었지요. 이날, 아이 세 명이 크게 다쳤어요. 미국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이 사건을 크게 내보냈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버밍햄 운동에 관심을 가졌어요. 케네디 대통령도 이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지요. "아이들을 저렇게 다루다니 너무 끔찍합니다. 흑인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정의를 생각하는 백인들도 나섰어요. "평화롭게 행진하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흑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에서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고, 사람됨으로 사람을 보는 나라에서 사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잘라서 희망의 표지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아름다운 사랑의 교향곡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함께 행동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가운데에서 흑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버밍햄을 이끄는 큰 회사들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들 장사에 안 좋을 게 뻔했거든요. 그래서 마지못해 흑인 대표들을 만나 다음과 같은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답니다. '식당, 마시는 물이 나오는 분수대,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없앤다.' '흑인도 판매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한다.' '흑인도 버밍햄의 공공시설을 조금씩 쓸 수 있게 한다.' 아이들이 시위에 함께한 지 8일 만에 얻은 결과였지요. 마침내 케네디 대통령도 흑인의 인권을 보호해 달라는 법안을 의회에 냈어요. 법이 정해지기를 원하는 수많은 흑인과 백인이 워싱턴에서 평화 행진을 했어요. 이날 킹 목사는 링컨 기념관 앞에서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연설했답니다. 셀마에서 흑인 참정권을 넓히는 운동을 하다. 드디어 1964년 여러 사람을 위한 장소와 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졌어요. 그해 12월, 킹 목사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요. 킹 목사는 노벨상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큰 상을 받게 되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좀 더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고통과 위험이 있더라도 깊은 골짜기로 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골짜기로 가려고 합니다. 그 골짜기에는 투표권을 가질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흑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셀마의 경찰서 서장 또한 사나운 사람이었어요. 흑인들은 시위하다가 다치고, 감옥에 갔지요. 그런데도 시위는 끊이지 않았어요. 그 무렵 흑인 지도자들은 계속 감옥에 가거나 백인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어요. 흑인들은 화가 났지요. 킹 목사의 평화로운 방법을 버리고, 폭력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킹 목사는 끝까지 폭력을 반대했어요. "여러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면 미움은 끝이 없습니다. 평화로운 방법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입니다. 끝까지 질서를 지키면서 행진합시다. 대신 우리의 굳은 의지를 전하러 몽고메리까지 걸어갑시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는 아주 먼 거리였지만, 많은 사람이 몽고메리를 향해 평화롭게 행진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또 경찰들이 흑인들을 때려서 크게 다쳤지요. 텔레비전 뉴스에 이 사건이 생생하게 나왔어요. 뉴스를 본 존슨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말했지요.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정부는 다음 월요일에 흑인의 투표권 법안을 의회에 내겠습니다." 몇 개월 뒤, 드디어 투표권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어요. 이제 흑인들도 까다로운 조건 없이 투표권을 갖게 된 거예요. 킹 목사와 흑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인권 운동의 큰 별이 지다. 투표권 법안이 통과된 뒤부터는 흑인을 차별하는 문제는 많이 없어졌어요. 법에서는요. 하지만 아직도 생활에서는 차별이 많이 남아 있었지요. 차별받는 사람들은 흑인뿐이 아니었어요. 가난한 백인도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었지요. 그즈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1967년 4월 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킹 목사는 전쟁 반대 연설을 했어요. “지금 미국 젊은이들이 베트남 전쟁을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인종 차별과 가난, 전쟁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전쟁을 끝까지 반대합니다." 킹 목사는 전쟁해야 한다고 했던 미국 정치가와 백인에게 미움을 샀지요.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킹 목사는 암살되기 하루 전인 1968년 4월 3일, 메이슨 교회에서 이런 말로 연설을 시작했어요. 킹 목사의 마지막 연설이었지요.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나는 이따금 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어서 킹 목사는 나중에 자기가 죽은 뒤 어떤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은지 이야기했어요. 그날이 오면, 제가 남을 도우며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전쟁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 '그날이 오면' 가운데에서.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총소리가 들렸어요.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킹 목사였지요. 총을 쏜 사람은 제임스 얼레이라는 백인이었고요. 수많은 사람이 킹 목사가 낫기를 바랐지만, 킹 목사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킹 목사의 나이 서른아홉이었지요. 4월 8일 애틀랜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15만 명이 와서 미국 역사의 큰 별이 진 것을 슬퍼했어요. 그 뒤, 미국 의회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킹 목사의 생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정했답니다. |
달라이 라마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2001년, 그린란드와 티베트는 축구 경기를 펼쳤어요. 티베트는 그린란드에게 4대 1로 졌지만, 뛸 듯이 기뻐하며 서로를 껴안았어요. 이상하지요? 졌는데도 기뻐하다니. 티베트는 그때까지 자기 나라의 이름으로 세계 경기에 나가지 못했어요. 중국에게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티베트 축구 선수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티베트의 이름으로 나왔어요.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티베트 축구단 코치는 말했어요. "우리가 축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자유를 위해서이지요."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축구단에게 큰 박수를 보냈어요. 비록 경기에는 졌지만 티베트의 자유를 향해 힘차게 뛰었으니까요. 세계도 평화롭게 독립 운동을 펼치는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사람을 응원하고 있답니다. 우리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니까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다. 1935년 티베트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았어요. 어머니가 날마다 정성껏 기도했지만 병은 더욱 깊어졌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은 거예요.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우리의 소원대로 신께서 나를 낫게 해 주셨나 보오. 그러니 아이의 이름을 '라모 된둡'이라고 지읍시다." "그래요. 우리 아이는 부처님이 보내주신 아이가 틀림없어요." 라모 된둡이란 티베트말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라는 뜻이랍니다. 라모 된둡은 가족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어요. 얼마나 귀엽고 상냥한지 화가 난 사람도 라모 된둡만 보면 웃었지요. 그런데 라모 된둡은 곧잘 짐을 싸서 어디로 떠나려고 했어요. "얘야, 짐을 싸서 어디 가려는 거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으면 라모 된둡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지요. "원래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무슨 소리니? 너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여기가 네 집이야." 라모 된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아니에요. 제가 살던 곳은 따로 있어요. 제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부모님이 달래는 바람에 잠잠해졌지만, 라모 된둡은 자주 이런 말을 했어요. 달라이 라마가 되다. 어느날,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낯선 사람들은 금빛과 초록 지붕이 있는 마을 사원을 따라왔지요. 낯선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이 동네에 지붕이 파란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대답했어요. "라모 된둡의 집이 파란 지붕이지요." 낯선 사람들은 얼른 라모 된둡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사실 그 사람들은 승려였답니다. 그때였어요. 라모 된둡이 늙은 승려의 염주를 보더니 반가운 듯 달려갔지요. "이 염주는 제 거예요! 옛날에 제가 스님께 드렸던 거예요." 늙은 승려는 빙그레 웃으며 라모 된둡에게 고개를 숙였어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모 된둡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라모 된둡은 태어난 뒤로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왜 라모 된둡은 승려의 염주가 자기 것이라고 했을까요? 한 승려가 자루에서 물건을 꺼냈어요. 수건, 안경, 염주. 라모 된둡은 물건을 하나하나 만져보더니, 몇 개를 골랐어요. 그리고 말했지요. "이것은 모두 제가 쓰던 물건이에요." 그러자 승려들이 라모 된둡에게 큰절을 하며 외쳤어요. "달라이 라마님! 저희 티베트를 보살펴주소서!" 라모 된둡은 여러 물건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달라이 라마가 쓰던 것을 찾아냈어요. 가장 나이 많은 승려가 들고 있던 염주도 달라이 라마가 쓰던 것이었지요. 그래서 승려들은 세상을 떠난 달라이 라마가 라모 된둡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믿었답니다. 달라이 라마는 라모 된둡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 뒤, 승려들은 달라이 라마가 어디선가 다시 태어났다고 믿고 여기저기 찾아 다녔답니다. 그런데 승려들이 어떻게 라모 된둡을 찾아 이 마을까지 왔을까요? 2년 전,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어요. 승려들은 달라이 라마의 장례를 하려고 한자리에 모였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의자에 앉아서 숨을 거둔 달라이 라마의 얼굴이 남쪽을 향해 있었는데, 며칠 뒤에는 동쪽을 향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의자의 북동쪽에 있는 기둥에는 별 모양의 하얀 버섯이 하나 피어나 있었지요. 가장 높은 승려가 말했어요. "이것은 달라이 라마님이 동쪽이나 북동쪽에서 다시 태어나신다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 어서 성스러운 호수로 갑시다. 성스러운 호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으니, 달라이 라마님이 어디서 다시 태어나시는지 알려 줄 겁니다." 승려들은 성스러운 호수로 가 기도하고, 호수를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그러자 호수에 어느 시골에 있는 파란 지붕의 집, 금빛과 초록 지붕의 사원이 비쳐 보였지요. 승려들은 성스러운 호수에서 보았던 집과 사원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라모 된둡이 사는 마을까지 왔던 거예요. 티베트를 자유로운 나라로! 승려들은 라모 된둡을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데려갔어요. 라모 된둡은 이제 달라이 라마로 불렸답니다.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서 보는 것들이 마냥 신기했어요. 가장 놀라운 것은 라싸로 가는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었지요. "달라이 라마님, 다시 태어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라이 라마님, 티베트를 행복한 나라로 만들어 주세요!" 사람들은 춤을 추고, 기뻐하며 새 달라이 라마를 반겼어요. 달라이 라마는 한 해 동안 공부와 예절을 배웠어요. 그러고 나서 뽀딸라 궁에서 달라이 라마가 되는 의식을 치렀어요. 가장 높은 승려가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어요. "오늘부터는 라모 된둡이 아니라 14대 달라이 라마 땐진 갸초입니다. 이제는 가장 앞에서 티베트를 이끄셔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뽀딸라 궁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답니다. 하루는 달라이 라마가 궁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었어요. 달라이 라마는 일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거든요. "우리 티베트는 왜 가난하지요?" "우리 나라는 독립 국가인데, 중국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못 한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자유롭게 못하니 가난할 수밖에 없지요." 달라이 라마는 하루빨리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섭정관이 대신 나랏일을 보았어요. 섭정관은 조국 티베트보다 힘센 중국의 눈치를 보기 바빴지요. 달라이 라마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얼른 커서 티베트를 자유롭게 해야지!' 1950년, 중국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티베트로 쳐들어왔어요. 티베트의 관리들은 서둘러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을 마련했어요. "달라이 라마님이 나라를 이끄시면 국민이 힘을 낼 것입니다." 전쟁이 한창이라 즉위식은 수수했어요. 열다섯 살의 달라이 라마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국민을 떠올렸지요.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내 나라 티베트와 국민을 이끌어야지.' 달라이 라마는 여러 나라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티베트는 당당한 독립 국가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우리 나라를 힘으로 억누르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 티베트를 도와 주십시오!" 관리들은 중국에게 총칼로 맞서자고 했지만, 달라이 라마는 차분하게 타일렀지요. "우리는 끝까지 평화롭게 맞서야 합니다." 어느날,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달라이 라마에게 외쳤어요. "중국 군대가 라싸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어서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달라이 라마는 고개를 저었어요. "저 혼자 살겠다고 국민을 두고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때 늙은 관리가 간절하게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어요. "달라이 라마님께서 중국에 잡히시면 저희는 희망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어서 떠나 주십시오." 결국 달라이 라마는 불타는 라싸를 떠났답니다. "여러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티베트를 구하겠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불타는 라싸를 뒤돌아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중국에 평화롭게 맞서다. 중국 장군이 찾아와 달라이 라마를 설득했어요. 라싸로 돌아오면 티베트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중국 장군을 믿으면 안 됩니다.” 관리들이 말렸지만, 달라이 라마는 생각이 달랐어요. "국민이 힘들게 지내는데 저만 편히 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 믿어 봅시다." 결국 달라이 라마는 중국 장군을 따라 라싸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중국 장군은 약속을 어기고, 라싸로 군인을 더 많이 불러들였지요. 라싸 거리는 중국 군인들로 넘쳤어요.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을 반대하며 곳곳에서 일어났어요. 달라이 라마는 마음을 굳게 다졌어요. "제가 직접 중국 지도자를 만나 우리 나라에서 물러가라고 하겠습니다." 관리들은 달라이 라마를 걱정하며 반대했어요.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씩씩하게 중국으로 떠났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달라이 라마의 용기를 칭찬하며 티베트를 돕겠다고 나섰지요. 드디어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났어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다시는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달라이 라마의 말에 마오쩌둥은 강하게 맞받아쳤어요. "티베트는 우리 중국이 지켜줄 것이오. 두 나라를 하나로 합쳐야 합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달라이 라마는 늘 생각했어요. '아, 어떻게 해야 평화로운 방법으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갔어요. 그리고 간디를 화장한 강으로 갔지요. 그곳에서 달라이 라마는 간디의 지난 날을 되새겼답니다. '간디가 평화롭게 독립 운동을 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인도를 도와주었어. 나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해야 해.' 마침내 평화가 오리라! 중국은 티베트의 불교 사원들을 부수고, 승려들을 가두었어요. 달라이 라마와 불교 때문에 티베트를 차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티베트 국민이여, 자유를 되찾자! 중국은 물러가라!” 1959년 성난 티베트 국민이 중국과 맞서 싸우려고 라싸에 모였어요. 하지만 중국은 군대의 힘으로 티베트 국민의 목숨을 빼앗았지요. 결국 달라이 라마는 인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다람살라로 망명했답니다. 그곳에 티베트 망명 정부도 세웠지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국민에게 부탁했어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나 자신을 해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중국을 용서하고,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티베트는 참된 자유를 찾아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평화로운 독립 운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어요. 세계 여러 나라가 티베트를 도우려고 힘을 모았지요.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국민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도울게요." "중국이 티베트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우리는 중국과 무역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티베트는 외롭지 않았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달라이 라마는 독립 운동을 계속 할 수 있었어요. 총칼 앞에서도 평화롭게 맞선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국민은 세계에 큰 감동을 주었어요.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달라이 라마는 수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사랑과 이해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모든 생명의 아픔을 줄일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도 티베트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이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세계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이랍니다. |
멘추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나는 과테말라에 사는 리고베르타 멘추 툼입니다. 우리 조상은 먼 옛날, 뛰어난 문화를 선보였던 마야족이에요. 마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지요. 사람들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사는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불러요. 그래서 중앙아메리카에 사는 마야족도 인디오로 불린답니다. 오래전, 백인이 우리 땅에 들어왔어요. 백인은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의 말과 글자도 못 쓰게 했지요. 백인은 오랫동안 우리를 못살게 굴었답니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이 살아요.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은 힘이 들지요. 어린이 여러분은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세요. 자, 다른 친구에게 손을 내밀고 말해 보세요. “난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우리는 힘없는 인디오예요. 내가 핀카에 처음 일하러 간 것은 다섯 살 때였어요. 차 안은 꼭 찜통같이 더웠어요. 시큼한 땀 냄새가 코를 찔렀지요. 여러 인디오가 개, 고양이, 닭과 뒤엉켜 차를 탔거든요. 우리는 차 덮개 때문에 바람도 쐴 수 없었어요. 차는 꼬박 이틀을 달려 핀카에 다다랐어요. 트럭에서 내릴 때는 사람과 동물 모두 힘이 빠져 비틀거렸답니다. 나는 어머니께 여쭈었지요. “엄마, 왜 우리는 핀카에서 일해야 하나요?” 어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슬프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인디오니까.” 나는 1959년 중앙아메리카 북쪽에 있는 나라. 과테말라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집은 나무가 빽빽한 북쪽 산에 있었지요. 우리 가족은 1월에서 4월까지는 마을 땅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고, 나머지 여덟 달은 핀카로 일하러 갔어요. 부모님은 백인에게 쫓겨 산속으로 오셨어요. 우리는 열심히 땅을 일구고 옥수수 씨를 뿌렸지요. 하지만 옥수수가 너무 적게 열려온 가족이 먹기에 모자랐어요. 정부에 세금을 내려면 돈도 필요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핀카에서 일을 해 세금도 내고 먹을거리도 샀어요. 어느새 나는 어머니께 핀가에 가기 싫다고 떼쓰지 않았어요. 우리가 왜 핀카에서 일해야 하는지 알았으니까요.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의 행복을 위해 꾹 참기로 했어요. 나는 어서 어머니처럼 의젓한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커피콩을 따셨어요. 우리가 먹을 끼니도 준비하셨지요. 어머니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맛나는 요리를 해 주셨어요. 비록 완두콩과 말라비틀어진 토르티야였지만, 나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웠어요. 나도 여덟 살이 되면서 커피콩을 따서 돈을 벌었어요. 뙤약볕 아래에서 커피콩을 따는 일은 참 힘들어요. 라디노 감독은 가지나 잎이 상하는지 눈을 번뜩이며 지켰지요. 그래서 조심조심한 알갱이씩 따야 했어요. “조심해! 가지가 하나 부러졌잖아. 부러진 가지 값은 오늘 품삯에서 빼겠다.” 감독이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난 이제 어른이야. 엄마처럼 의젓해야 해.’ 나는 울음을 꾹 참았어요. 어느새 나는 가지를 부러뜨리지 않고, 재빨리 커피콩을 딸 수 있었어요. 내가 돈을 벌어서 가족을 돕는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답니다. 우리를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 가족은 처음에 아홉 명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지 못했어요. 첫째 오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 핀카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백인이 비행기를 타고 농약 가루를 뿌렸는데, 일하는 오빠 위로 다 떨어졌거든요. 내가 핀카에서 일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였어요. 동생은 어디가 아픈지 배가 볼록 튀어나온 채 울어댔어요. “동생이 많이 아파요.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다른 인디오도 어쩌지 못했어요. 인디오 부족들은 서로 말이 달라서 통하지 않거든요. 어머니와 나는 우는 동생을 달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다른 핀카에 계셔서 소식을 알릴 길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울음을 그쳤어요. “엄마, 동생의 몸이 차가워요!” 나는 뻣뻣해지는 동생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요. 어머니는 멍하니 눈물만 흘리셨지요. 어머니는 동생을 핀가에 묻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감독이 차갑게 말했답니다. “여기에 묻어도 좋다.” “하지만 돈을 내야 해.” 감독은 돈을 많이 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돈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답니다. 바닷가 지방은 너무 무덥고 습해서 동생을 빨리 묻어야 했으니까요. 어머니는 감독에게 말했어요. “한 달 동안 일한 돈을 받지 않을 테니 허락해 주세요!” 그제야 감독은 허락했지요. 동생을 묻던 날, 어머니와 나는 일을 하지 않았어요. 우리 부족의 풍습대로 동생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게 기도했지요. 그런데 이튿날. 감독은 게으름을 피웠다며 돈도 주지 않고 어머니와 나를 내쫓았어요. 어머니는 에스파냐 말을 몰라서 따지지도 못했지요. “동생을 두고 못 가요! 조금만 더 있게 해주세요!” 힘껏 소리쳤지만, 결국 나는 엄마와 다른 핀카로 떠났어요. 핀카의 땅 주인은 백인이었어요. 나는 땅 주인을 처음 보았지요. “주인님이 오셨다!” 감독은 호들갑을 떨며 우리를 불렀어요. 땅 주인은 엄청나게 뚱뚱했답니다. 여러 사람이 총을 들고 땅 주인을 지켰어요. 땅 주인은 연설을 했어요. 물론 우리는 땅 주인이 하는 에스파냐 말을 알아들 을 수 없었지요. 연설이 끝나자 감독이 어른들에게 쪽지를 나누어주며 말했어요. “내가 말하는 쪽에 선을 그어라. 선을 긋지 않으면, 일을 주지 않겠다.” 우리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선을 그었답니다. 우리는 한참 뒤에야 그날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었고, 우리가 투표를 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후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땅 주인 편인 후보를 뽑았던 거예요. 그날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뽑은 대통령은 인디오를 무척 괴롭혔어요. 모두를 위해 일해요. 나는 생일날 가족한테 아기 돼지와 양, 병아리를 선물로 받았답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우리 마을을 위해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마을 일을 돕기로 했어요. 아이들의 생일날 기도하는 일도 맡았지요. 처음에는 글을 몰라서 기도문을 외웠지만, 조금씩 글을 배웠답니다. 나는 친구들과 작은 모임도 만들었어요. 마을에서 많이 쓰는 물건을 도시에서 구해 와 싸게 팔고, 전통 악기를 배워 연주도 했지요. 마을 사람들과 신부님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모임에 달려갔어요. 우리 마을에는 집이 띄엄띄엄 있어서 모두 모이려면 시간이 꽤 걸렸어요. 나는 모임에서 만난 마리아와 친했어요. 우리는 핀카에서 같이 일했는데, 일할 때도 잘 맞았지요. 목화솜을 따던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마리아가 있는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어요. “마리아, 조심해! 불이야!” 마리아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숨을 거두었어요. 감독이 목화 나무를 태우다가 잘못해서 불을 냈던 거예요. “마리아, 눈 좀 떠봐!” 나는 마리아를 안고 울부짖었어요. 나는 핀카가 지긋지긋했지요. 핀카는 나에게서 오빠와 동생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친구 마리아까지 빼앗아 갔어요. 사람들은 눈물만 흘리고, 감독에게 따지지도 못했지요. 나는 울먹이며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난 굶어 죽더라도 다시는 핀카에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도시로 가서 백인 집에서 하녀로 일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아버지, 하녀로 일하면서 백인이 쓰는 에스파냐 말을 배울 거예요. 백인의 말을 모르고는 제대로 따지고 들 수도 없어요.”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끈질기게 졸랐어요. 결국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도시로 갔어요. 그리고 잘 사는 백인 집에서 하녀로 일했지요. “저 애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 맨발에다 저 더러운 옷 좀 봐.” 주인 여자는 늘 나를 멀리했답니다. 나는 청소와 빨래를 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요. 하지만 그때 나는 돈이 없었어요. 주인 여자도 핀카의 감독처럼 일일이 트집을 잡아 돈을 주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입만 열면 인디오는 게으르다고 흉을 보았어요. 함께 일하는 하녀는 라디노였는데,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아버지가 찾아오셨을 때, 주인 여자에게 잘 말해서 일한 돈을 받아주기도 했지요. 나는 더욱 부지런히 에스파냐 말을 익혔어요. 그리고 한푼 두푼 돈을 모으며,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답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를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셨단다.” 나는 백인 집을 나와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요. 아버지는 그동안 백인 땅 주인과 정부에 맞서 20여 년이 넘게 싸우셨어요. 못된 땅 주인이 우리의 땅을 빼앗으려 했거든요. 아버지는 땅을 지키려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셨어요. 아버지는 감옥에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답니다. “우리 조상은 겁쟁이가 아니다.” “인디오는 용감하게 싸워야 한단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뒤, 농민 연합위원회라는 단체에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우리 마을뿐 아니라 더 많은 인디오를 위해 일하셨지요. 백인은 아버지를 늘 감시했어요. 심지어 사람을 보내 아버지를 해치려고까지 했지요. 아버지는 몸을 피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으셨어요. 부족을 이끌겠어요. 정부와 땅 주인들은 인디오가 힘을 모으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이윽고 끔찍한 소식이 들렸어요. 땅 주인이 군인을 보내 이웃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이들 목숨까지 빼앗았다는 소식이었지요.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해요!”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모여 살자고 했어요. 힘을 합쳐야 땅 주인에게 맞서기 쉬울 테니까요. 우리는 힘을 합쳐서 집을 빨리 지었어요. “우리는 무기가 없어요. 가까이에서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아보세요.” 우리는 돌과 손도끼를 챙기고, 길에 올가미도 놓았어요. 산속에 몰래 숨을 곳도 만들었지요. 아버지는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이면 집에 오셨어요. “네가 마을을 잘 이끌고 있구나. 꼭 기억해라. 우리가 이기려면 인디오가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없어서 참 쓸쓸했어요. 하지만 나는 용기를 냈지요. 이제 내가 마을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밤에도 집에 못 오시는 날이 많았어요. 감시가 심해졌거든요. 우리 가족은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어요. 우리 가운데 누가 잡혀도 다른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하려고요. 우리 가족은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어요. 상에는 돼지고기와 터말리가 올랐어요. 사람들은 북을 치고 마야의 전통 피리를 불었지요. 폭죽놀이도 하고, 춤도 추며 모두가 흥겹게 놀았어요. 이윽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어요. “저는 인디오의 밝은 앞날을 위해 일하려고 고향을 떠납니다. 여러분도 힘을 모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단단히 부탁하셨어요. “부디 우리가 마야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나는 농민 연합위원회 일을 도왔어요. 여러 마을을 돌며 정부와 땅 주인에게 맞설 방법을 전했지요. 그런데 부족마다 말이 달라서 이야기를 전하기가 어려웠어요. ‘서로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말부터 배워야겠어!’ 나는 다른 부족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신부님에게 에스파냐 말도 배웠지요. 인디오끼리 말이 통하려면 에스파냐 말도 필요했거든요. 나는 핀카에서 일하며, 인디오 친구들과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했답니다. 우리는 인디오 모두가 힘겹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많은 인디오가 가족을 잃었지요. 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했어요.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른 부족의 말과 에스파냐 말을 가르쳤어요. 서로 말이 통하면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온 세상에 인디오의 아픔을 알려요. 1981년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멕시코로 탈출했어요. 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채 비행기에 올라탔지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거든요. 오빠는 모진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어요. 아버지는 에스파냐 대사관에 들어가 인디오의 처지를 세계에 알리다 목숨을 잃으셨지요. 어머니도 군인에게 붙잡혀 숨을 거두셨답니다. 나는 조국 과테말라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과테말라에서 인디오가 겪는 끔찍한 일을 온 세상에 알리자!’ 나는 전통 마야 옷을 입고 여러 나라를 돌면서 우리의 처지를 알렸어요. 그리고 내 가족과 고향 이야기를 책으로 냈지요. 사람들은 책을 읽고, 나에게 힘을 내라고 말했어요. 1992년, 나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동안 인디오의 권리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것을 세상이 알아준 거지요. 과테말라에서 싸우는 인디오 모두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덕분에 나는 과테말라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그동안 인디오를 몰래 잡아 가두거나 해치는 일도 많이 줄었어요. 세계 사람들이 내 책을 읽고 “더 이상 인디오를 괴롭히지 마라!” 하고 한목소리로 외쳤거든요. 나는 상금으로 멘추 재단을 세웠어요. 멘추 재단은 인디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이들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돕고 있지요. 우리는 이제 희망을 갖기 시작했어요. 인디오, 라디노, 백인 모두가 평등하고 사이좋게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힘을 모을 거예요. |
황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아, 한번쯤 있다고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고려와 조선이라는 두 나라에서 여러 임금을 내리 섬기며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 보기 드문 신하가 있었어요. 늘 자기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던 신하. 백성들처럼 입고 먹고 자며 검소하게 생활하던 신하. 임금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바른 말을 하던 신하. 바로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신하로 꼽히는 황희 정승이에요. 황희 정승을 만나고 나면 어린이 친구들 생각이 싹 바뀔지도 몰라요. 곧고 깨끗한 황희 정승처럼요. 누런 소와 검은소. 멀리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고마운, 무더운 여름날이었어요.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들길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어요. 젊은 선비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있는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땀을 식히기로 했어요.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었지요. "여보시오, 날씨도 더운데 좀 쉬었다가 하시구려." 젊은 선비가 소리치자 농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무 그늘로 다가왔어요. 농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선비는 뜬금없이 농부에게 물었어요. "저 소들 가운데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나요?"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젊은 선비를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어요. 그러고는 젊은 선비 귀에다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누런 소는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지요. 하지만 검은 소는 꾀가 많아 다루기 힘들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로 하십니까?" "한낱 짐승이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다 압니다. 나를 위해 애쓰는 그놈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농부의 사려 깊은 마음씨에 젊은 선비는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 농부 말이 맞아. 남의 잘못을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옳지 못해.' 그때부터 젊은 선비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어요. 이 젊은 선비가 바로 황희랍니다. 고려 백성을 구하라! 황희는 1363년 가을, 개경의 가조리에서 태어났어요. 고려 공민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12년째 되던 해였지요. 황희는 어렸을 때 몸이 몹시 약했어요. 하지만 아주 똑똑하고 총명했지요.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한 황희는 무엇이든 한 번 배우면 잊지 않았어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해 날마다 밤늦게까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었지요. 황희 집 근처를 지나던 마을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황희가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허허, 글 읽는 소리가 참 듣기 좋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댁 도련님이 그렇게 총명하다지요?" 황희는 계속 열심히 공부해서 스물일곱 살에 과거에 붙었어요. 그리고 이듬해에 성균관 학관이 되었지요. 성균관 학관은 학생을 맡아 가르치는 사람이랍니다. 성균관 학관이 된 황희는 적성현이라는 고을에 가서 일했어요. 적성현에 있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때로는 현감이 하는 일을 돕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 무렵 고려는 나라 힘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어요. 그러자 이웃에 있는 명나라에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오기가 일쑤였지요. 신하들도 두 무리로 나뉘어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공민왕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우왕은 잃었던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아 나라 힘을 키우려고 요동성을 쳐들어가기로 했어요. 우왕의 뜻에 따라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사를 이끌고 싸움길에 나섰지요. 하지만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어요. 그런 다음, 곧바로 고려의 수도인 송도로 쳐들어갔지요. 송도로 간 이성계는 우왕을 내쫓고 최영, 정몽주 같은 고려의 충신들도 몰아냈어요. 이것이 널리 알려진 '위화도 회군'이랍니다. 결국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가 세워진 거예요. 왕조가 바뀌자, 고려 신하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어요. 새 왕조에서 그대로 벼슬을 하는 사람과 사라진 고려에 끝까지 마음을 다하려고 벼슬을 그만둔 사람이었어요. 벼슬을 그만둔 사람들은 송악산 아래 골짜기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풀과 나무껍질로 겨우 끼니를 이어 갔지요. 그 사람들 가운데 황희도 끼여 있었어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자기를 도와 새 정치를 펼 훌륭한 신하들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두문동에 숨어 사는 고려의 충신들을 불렀어요. 하지만 고려의 충신들은, "우리는 죽어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라며 꼼짝도 하지 않았지요. 섬기던 임금을 내쫓고 그 자리를 빼앗은 이성계를 새로운 임금으로 섬길 수는 없었어요. 한참을 고민한 태조는 두문동으로 사람을 보내, 부디 자기를 도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에 힘써 달라는 말을 전했어요. 두문동의 충신들은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어요. "우리가 어찌해야 좋을지 의견을 말해봅시다."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겁고 어두운 얼굴이었어요. "이성계는 역적이오. 그런 사람 밑에서 벼슬을 할 수는 없소." "우리가 고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다가, 이제 와서 조선 임금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맞는 말씀이오. 불쌍한 건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뿐이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젊은 선비들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가엾은 백성을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조선의 신하로 일해야 한다고 마음을 모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지요. "가장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야 합니다." 한 사람이 황희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그때 황희는 서른한 살이 었고, 일찍부터 글공부에 힘써 지식이 깊고 풍부했어요. "고려의 신하였던 제가, 어찌 이제 와서 조선의 신하가 된단 말입니까? 저도 이곳에서 제 삶을 마치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분명한 태도로 말하는 황희의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황희를 달랬어요. "새로운 왕조에는 그대처럼 젊고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오. 우리는 이제 너무 늙고 힘이 없소. 부디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부탁을 물리치지 말아 주시오." 황희는 깊이 고민했어요. '나라는 바뀌었지만 백성들은 우리 백성이다. 비록 조선의 신하가 된다 해도,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이 한 몸을 바칠 수가 있다. 그래, 조선의 신하가 되어 고려 백성을 구하자!' 황희는 결국 두문동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태조는 황희를 반갑게 맞았어요. 그리고 황희에게 성균관 학관이라는 벼슬을 내렸지요. 황희는 그곳에서 나라의 앞날을 책임질 젊은 선비들을 가르쳐 나갔답니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성균관에서 일하던 황희는 지신사로 일하던 박석명의 추천을 받아 태종의 지신사 자리를 이어받았어요. 지신사는 오늘날의 비서실장과 비슷한 벼슬이에요. 황희가 지신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명나라 사신인 황엄이 조선에 왔어요. 황엄은 내내 거드름을 피우며 조선을 깔보았지요. 그것도 모자라 조선에서 아름다운 처녀 15명을 뽑아 명나라에 바치라고 억지를 부렸어요. 곧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방이 붙었어요. 하지만 찾아온 처녀들은 겨우 4명 뿐이었지요. 이들을 데려가자 황엄은 언짢은 얼굴로 태종에게 따져 물었어요. "어째서 우리 황제께서 요구한 대로 뽑지 않았소?" "스스로 원한 처녀들만 뽑았기 때문이오." "좋소. 그럼 난 돌아가서 조선의 무례함을 황제께 보고하겠소!" 황엄은 화를 내며 자기가 묵는 곳으로 돌아갔어요. 태종과 신하들은 명나라에게 앙갚음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지요. 그때 황희가 나서서 태종에게 말했어요. "전하, 제가 가서 명나라 사신을 달래 보겠습니다." 황엄을 찾아간 황희는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부드럽게 말했어요. "별일도 아닌 걸 갖고 왜 그리 노여워하십니까? 명나라는 대국이라고 들었는데, 체통을 생각하셔야지요." 하지만 황엄은 여전히 거드름을 부리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조선이 너무 성의 없이 일을 처리하니까 그렇지 않소?"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명나라가 살기 좋은 곳이라기에 방을 붙이면 많은 처녀가 올 줄 알았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처녀들이 많이 모였지만, 그 가운데서 예쁜 처녀를 뽑아 보니 네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황 칙사께서는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께 제 말을 그대로 옮기면 오히려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황희가 조근조근 이야기하자 황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모자라는 수를 다 채우려면, 명나라에 가기 싫어하는 처녀들을 보내야 합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명나라에 가서 정성을 다해 황제를 모실 것 같습니까? 오히려 명나라와 황제의 체면만 깎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황엄은 가슴이 뜨끔했지요. '조선에도 이토록 대쪽 같은 사람이 있었구나!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다가는 큰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황엄은 곧장 명나라로 돌아갔어요. 이 일로 태종은 더욱 황희를 믿고 아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황희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어요.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수선한 이때에, 민씨 형제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못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나라와 백성에게 큰 누가 될 것이옵니다. 불행한 일이 더 크게 일어나기 전에 엄하게 다스려 나라를 바로 세워 주시옵소서!' 황희가 말한 민씨 형제들은 태종의 아내인 민씨 왕비의 형제들을 가리켜요. 이들은 누이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못된 일을 저질렀어요. 태종은 이들이 못마땅했지만 왕비의 형제들이라 마음대로 벌할 수도 없었어요. 신하들 또한 앙갚음이 두려워 어느 누구도 민씨 형제들을 나쁘게 말하지 못했지요. 죽을 각오로 상소를 올리고 난 황희는 태종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태종은 뜻밖에도 황희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따뜻하게 말했어요. "경이야말로 참된 충신이오. 나는 지금껏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신하가 없어서 늘 불안했다오. 그런데 경이 그 일을 해 주어 참으로 고맙소." 그 뒤, 민씨 형제들은 벼슬에서 쫓겨나 벌을 받거나 멀리 귀양을 갔어요. 이제 신하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하루는 황희의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야무지게 생긴 남자 아이를 데리고 말이지요. 친구는 황희에게 종으로 부리라며 아이를 두고 갔어요. "앞으로 대감마님을 모시며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아이는 또렷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황희에게 공손히 인사했어요. 황희는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며 생각했지요. '예의 바르고 똑똑하게 생겼구나! 앞으로 지켜봐야겠어.' 아이는 정말 바지런하고 똘똘했어요. 게다가 남몰래 글을 익히기도 하고, 책도 꾸준히 읽었어요. 어느 날, 황희가 사랑방으로 아이를 불렀어요. "그동안 너를 쭉 지켜보았느니라. 비록 종이지만, 너는 큰사람이 될 그릇이다. 그러니 이 돈을 가지고 여기를 떠나도록 해라.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대감마님, 고맙습니다!" 아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어요. 황희는 아이의 작은 손에 돈을 쥐어 주고는 종 문서를 활활 불태웠지요. 세월이 흘러 황희가 과거를 감독하러 시험장에 갔을 때였어요. 과거가 끝나고, 일 등으로 합격한 젊은이가 황희에게 달려와 넙죽 절을 하지 뭐예요. "대감마님!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어허, 이게 누구시더라?" "소인, 예전에 대감마님 댁에서 종으로 일하던." 맞아요. 예전에 황희가 종의 신분에서 풀어 주었던 바로 그 아이였어요. 그제야 젊은이를 알아 본 황희는 조심스럽게 속삭였어요. "쉿! 옛날 자네 신분이 알려지면 합격을 무를지도 모르니 조용히 하게. 부디 옛일은 잊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게." "하오나 대감마님의 은혜를 갚아야." "은혜라니. 태어날 때부터 종과 양반이 따로있나? 사람은 다 똑같네. 자네도 나도 위아래없이 두루 잘 사는 세상을 위해 힘쓰세." 이렇게 황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어요. 집에서는 사랑방 문을 활짝 열어 아이들이 와서 놀 수 있게 했지요. 양반집 자식이든, 종의 자식이든 모든 아이들에게 문은 열려 있었어요. 황희는 아이들을 모두 손자처럼 예뻐해 주었어요.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들려주세요!" "할아버지, 자장가 불러 주세요!" 황희의 사랑방은 늘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했답니다. 곧고, 검소하게. 황희가 이조 판서에 오른 이듬해인 1416년이었어요. 어느 날 태종은 신하들을 한자리에 불렀어요. "경들도 아는 대로 첫째인 세자의 행실이 눈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렀소. 과인은 오래 전부터 셋째 충녕을 눈여겨보고 있었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성품도 어질어서 임금으로서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전하, 충녕 대군께서는 뛰어난 학문으로 보나 어진 성품으로 보나 세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모든 신하들이 첫째인 양녕 대군 대신 셋째인 충녕 대군이 세자를 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어요. 그때 황희가 신하들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어요. "전하, 세자를 다시 세우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하셔야 하옵니다. 충녕 대군이 훌륭하신 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오나 형 대신 동생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나쁜 일이 일어날까 두렵사옵니다." 황희는 임금 자리를 놓고 형제끼리 다투다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날까 걱정했던 거예요. 그러자 평소 황희를 미워하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어요.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형제들과 싸운 일이 있었는데, 황희가 그 일을 들춘다고 생각한 거지요. "전하, 당장 황희의 벼슬을 빼앗고 귀양 보내소서!" 태종은 바르고 곧은 황희를 계속 곁에 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지요. 결국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귀양 보냈어요. 그리고 얼마 뒤인 1418년, 충녕 대군이 태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요. 이 사람이 바로 세종이랍니다. 남원으로 내려간 황희는 책을 읽고 시를 쓰면서 조용히 지냈어요. 황희가 귀양살이를 한 지 5년이 지나자, 세종은 황희를 귀양살이에서 풀어 주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어요. 그때 황희의 나이 예순 살이었지요. 세종은 황희를 따뜻하게 맞으며 말했어요. "경이 한 일을 이해하오. 과인이 미워서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전하." "그 마음 변치 말고, 앞으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더욱 힘써 주시오." 황희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온 힘을 쏟아 일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북쪽에서 여진족이 자주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은 황희는 김종서에게 특별히 명하여 그곳을 튼튼하게 지키게 했어요. 또한 강원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말을 듣고,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려고 쌓아 두었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지요. 또 한편으로는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만드는 일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애썼어요. 황희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답니다. 황희는 1431년에 조정의 으뜸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어요. 황희는 영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들과 똑같이 검소하게 생활했어요. 살림이 어려워서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때도 많았지요.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황희의 녹봉을 올리자는 말을 꺼냈어요. 하지만 황희는 세종의 뜻을 따르지 않았어요. 지금 받고 있는 녹봉도 모자라지 않고 넉넉하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또 세종은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없이 멍석만 달랑 놓여 있는 황희의 집을 보고, 집과 살림살이를 마련하라며 돈을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에도 황희는 나라의 재산을 한 개인을 위해 쓰는 것은 잘못이라며 세종의 마음을 돌렸어요. 세종은 이런 황희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어요. 황희의 검소한 생활을 본받아 언제나 검소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지요.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에 비싸고 귀한 것은 오르지 못하게 했고, 모든 일 처리를 검소하고 공평하게 하려고 했어요. 신하들에게도 틈이 날 때마다 검소하게 생활하라고 이르고, 또 일렀답니다. 황희도 나이가 들어 어느덧 일흔 살이 넘었어요. '이제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어. 젊은 사람들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보는 게 내가 할 일이야.'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마음먹은 황희는 세종을 찾아갔어요. "전하, 신은 이제 너무 늙었사옵니다. 더 이상 나라의 큰 일을 맡아서 해내기가 어려우니 젊은 사람에게 신의 자리를 맡겨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직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질 않소? 부디 지금처럼 나를 도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좀 더 애써 주시오." 결국 황희는 세종의 간절한 부탁을 물리칠 수 없었어요. 황희가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여든일곱 살이 넘어서였어요. 황희는 책을 벗삼아 조용한 나날을 보냈어요. 황희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일 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났어요. 온 백성이 슬픔에 잠겼지요. 어질고 훌륭한 임금을 먼저 떠나보낸 황희는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흐느껴 울었어요. 그 뒤 황희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새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문종이 황희의 충성을 기억해서 이따금 사람을 보내 황희의 생활을 도왔어요. 백성의 큰 별이 지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452년, 황희는 아흔 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문종은 황희의 죽음을 크게 안타까워했지요. "비록 황 정승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과 다름없이 이 나라의 기둥으로 우뚝 서 있을 것이오. 우리 모두는 그 마음을 본받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 황 정승의 장례식은 나라에서 치를 것이니 사흘 동안 모든 조정 일을 쉬도록 하시오." 황희의 상여가 나가는 날, 백성들은 길가에 엎드려 구슬피 울었어요. 황희가 백성을 위해 올바른 정치를 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깊이 알고 있었거든요. "어버이같이 백성을 돌보시던 분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났구나!" 바른 정치는 선비의 바른 생활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황희! 한 올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며, 임금 앞에서도 떳떳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던 황희! 깨끗하고 검소한 생활로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였던 황희! 황희가 남긴 이 모든 것들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뒷날 많은 선비들에게 길을 밝혀 주었어요.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답니다. |
정약용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보고 들은 것을 몸소 실천하다. 정약용은 1762년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열심히 배웠지요. 어느 날, 산을 바라보던 정약용이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제가‘산’이라는 시를 지었어요." "그래? 어디 한번 들어 보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지." "참 잘 지었구나! 뜻도 풀어 줄 수 있겠느냐?" "가까이 있는 산은 더 크게 보여, 멀리 있는 산이 아무리 높아도 가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허허, 참으로 뛰어나구나!" 정약용은 글을 읽고, 짓는 것을 참 좋아했답니다. 정약용이 냇가에서 신 나게 놀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소나기가 쏟아졌지요. 정약용은 비를 흠뻑 맞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아버지, 비가 오는 걸 미리 알 수 없나요?" "개미가 이사를 하거나 제비가 땅 가까이로 낮게 날면 큰비가 온단다." 며칠 뒤, 정약용은 나무로 이사하는 개미 떼를 보고 옆집 아저씨에게 알렸어요. "아저씨, 큰비가 올지도 몰라요. 어린 감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하세요." "알겠다. 버팀나무를 세워 두마."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어요. 하지만 아저씨가 키우는 감나무는 쓰러지지 않았지요. 정약용은 크게 깨달았어요. ‘아는 것으로 사람을 도울 수도 있구나! 새로운 학문으로 생활을 이롭게 하다. 새로운 임금 정조가 시골에 살던 학자들을 서울로 불러 벼슬을 내렸어요. 정약용의 아버지도 서울로 올라가 온 가족이 서울에서 살게 되었지요. 서울에는 이름난 학자 이가환과 매형 이승훈이 있었어요. 정약용은 새로운 책을 빌려 읽고, 함께 이야기했어요. 정약용은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눈떴답니다. 하루는 이승훈이 정약용에게 물었어요. "지난번에 빌려 간 성호사설은 다 읽었는가?" "네. 그 책을 읽고 앞으로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약용은 글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어요. 여행을하며 백성이 사는 모습도 보고, 형들과 이야기하며 학문을 닦았지요. 정약용은 진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지요. 정조는 정약용의 시험 답안지를 보고 기뻐했어요. "뛰어난 글이로다! 이 글을 쓴 선비를 보고 싶구나!" 정조는 정약용을 대궐로 불러들였어요. 정약용은 떨리는 마음으로 정조 앞에 엎드렸지요. 정조가 다정하게 말했어요. "고개를 들라. 그대의 나이가 올해 스물두 살이라고 들었다. 젊은 나이에 학문이 깊으니 참으로 기대가 크구나! 앞으로 더욱 학문에 힘을 쏟으라." 정조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에게 어려운 시험 문제를 자주 냈어요. 시험을 잘 친 사람에게 상으로 책을 내렸지요. 정약용은 늘 일 등을 해 정조에게 책을 많이 받았답니다. 드디어 정약용은 벼슬길에 올랐어요. 정조는 정약용을 초계문신으로 뽑아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연구하게 했어요. 중국에 다녀온 선비들이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소개했어요. 서학은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다루는 학문이었지요. 정약용과 형제들, 이승훈, 이벽 등 젊은 선비들은 서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높은 벼슬아치들은 옛것을 고집하며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정약용이 서학을 가까이한다며 정조에게 정약용을 벌하라고 했지요. "전하, 정약용이 나라에서 못 믿게 하는 천주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어서 조사해 벌을 내려 주십시오." 정조는 안타까웠어요. ‘허, 참 큰일이구나. 젊은 선비가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게 무슨 죄라고! 서학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아우성이니 일단 정약용을 귀양 보냈다가 꼭 다시 부르리라.’ 정약용은 귀양을 가며 생각했어요. ‘전하께서는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 나를 다시 부르실 때까지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다리자.’ 얼마 뒤, 정약용에게 죄가 없음이 밝혀졌어요. 정약용은 다시 정조의 부름을 받아 나랏일을 도왔답니다. 관리가 되어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리다. 어느 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책 한 권을 주며 말했어요. "수원에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오.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이용한 기계를 만들면 백성의 힘을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소. 이 일을 할 사람은 그대밖에 없구려." 정약용은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보고, 거중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거중기를 쓰는 방법을 기중도설이라는 책에 적었어요. 성을 쌓는 방법도 잘 적어 정조에게 올렸지요. 정조는 정약용이 쓴 대로 성을 쌓게 했어요. 수원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정약용을 크게 칭찬했지요. "거중기 덕분에 백성이 한결 쉽게 일했소. 2년 9개월 만에 아름다운 성을 쌓다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소!" 이렇게 정조와 정약용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맞았답니다. 경기도에 큰 가뭄이 들었어요. 정조는 정약용에게 일렀어요.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가서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에게 큰 벌을 주시오." 정약용은 암행어사가 되어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살폈어요. 가는 곳마다 병들고 굶주린 백성이 가득했지요. ‘아, 백성이 괴로워 울고 있는데 관리들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다니!’ 정약용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시로 남겼어요. 적성 마을에서. 아이들 해진 옷은 어깨 팔뚝 다 나왔고, 날 때부터 바지와 버선도 제대로 못 입었네. 강아지 세 마리가 태어나 아이들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타리 밖에서 울어 대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이웃에 일하러 가 대낮에도 사립문 닫힌 집이 슬퍼 보이는구나. 지난 봄, 관에서 꾸어 온 쌀이 닷 말인데 올해도 이 꼴이니 무슨 수로 산다는 말인가. 나졸놈들 오는 것만 겁날 뿐 관가에서 맞을 일 두려워 않네. 이런 집이 세상에 가득한데 임금 계신 궁궐은 깊고 멀어 어찌 다 살펴보랴. 정약용은 올바르고 엄하게 관리를 다스렸어요. 백성을 잘 돌보는 관리에게 상을 주고, 백성을 괴롭히며 자기 욕심만 채우는 관리에게는 벌을 내렸지요. 정조는 정약용을 칭찬했어요. 하지만 부정한 관리들은 정약용을 미워했지요. 정약용은 서울에서‘죽란사’라는 집에 살았어요. 집 근처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었지요. 정약용은 뜰에 아름다운 꽃나무를 심었어요. 철마다 꽃이 피면 친구들과 모여 꽃을 보면서 시를 지었어요. 이 모임은 죽란사에서 시를 짓는 모임이라고 해서 ‘죽란시사’라 했지요. 국화가 처음 핀 가을날, 죽란시사 친구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정약용은 시를 한 수 지었어요. 때는 가을인데 쌀은 오히려 귀하고 가난한 집이라도 꽃은 더욱 많네. 가을빛 속에 꽃은 피어 다정한 사람들 밤에 서로 찾았지. 정약용은 죽란시사 친구들과 시를 지으며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을 이야기했답니다. 정약용이 황해도 지방 관리로 있을 때였어요.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아이가 목숨을 잃었어요. 정약용도 어릴 때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요. 정약용은 몹시 안타까웠어요. ‘아직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아이가 있다니. 의원은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 백성이 어서 건강을 되찾게 해야겠다.’ 정약용은 여러 책을 찾아 전염병을 고치는 방법을 공부했어요. 마침내 정약용은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아냈지요. 정약용은 마과회통이라는 책을 써서 치료법을 널리 알렸어요. 마음이 잘 맞는 벗을 잃다. 1800년 봄, 정약용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고향 집의 이름을 ‘여유당’이라 짓고 책을 쓰는 데 힘을 기울였지요. 어느 날 밤, 정조가 보낸 신하가 정약용을 찾아와 책을 건네며 말했어요. "전하께서 이 가운데 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정조는 고향으로 돌아간 정약용이 무척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얼굴 대신 정약용이 쓴 글씨라도 보고 싶었던 거지요. ‘전하께서 나를 이렇게 아껴 주시다니!’ 정약용은 제목을 정성껏 써서 정조에게 보냈어요. 그런데 얼마 뒤, 정조는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아아, 전하! 그날 밤 보내 주신 책이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전하를 뵐 수 없겠지요.’ 정약용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두 사람은 임금과 신하 사이였지만, 나라와 학문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맞는 벗이기도 했지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되었어요. 정약용을 싫어하는 신하들은 순조에게 말했어요.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 등은 청나라 신부를 끌어들여 나라를 어지럽히려 했으니 귀양을 보내야 합니다." 이 일로 천주교를 믿는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정약용의 셋째 형도 목숨을 잃고,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귀양을 갔지요. 그때 천주교를 믿는 황사영이 청나라 주교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들켰어요. 정약용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지요. "정약용도 황사영과 같은 편인지 모르니 조사해야 합니다." 나라에서는 정약용과 정약전을 조사하려고 서울로 다시 불렀어요. 그리고 서울에서 아주 먼 곳으로 다시 귀양을 보냈어요. 두 형제는 주막집 삼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어요. "아우님, 부디 몸조심하시게." "형님도요. 우리 꼭 건강하게 살아서 다시 만나요."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떠났어요. 그 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정약용은 형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거예요. 다산초당에서 학문의 길을 걷다. 강진은 남쪽 바닷가 마을이었어요. 정약용은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쓰는 데 힘을 다했어요. 제자들도 하나 둘 늘었지요. 어느 날, 한 선비가 정약용을 찾아왔어요. "선생님께서 차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차나무가 많은 산에 작은 집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모시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곳에 머물기로 하지요." 선비가 말한 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이라고 불렀어요. 산속에 있는 작은 집은 ‘다산초당’이었지요. 정약용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다산’이라고 불렸어요. 그래서 정약용의 호가 ‘다산’이 되었답니다. 정약용은 정치부터 바로잡으려고 경세유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때까지 목민심서를 쓰는 데 온 힘을 바쳤어요.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정리한 책이었지요. 정약용은 멀리 있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답니다. 정약용은 멀리 떨어진 부인과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시와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특히 두 아들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가르침을 전했지요. 어느 날,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보냈어요. 정약용은 빛바랜 치마를 보며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혔어요. ‘부인,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군요. 멀리 귀양 온 몸이라 딸의 결혼식을 못 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약용은 치마를 가위로 잘랐어요. 먹과 붓도 꺼냈지요. 딸에게 줄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었어요. 정약용은 매화와 새를 그렸어요. 시집간 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도 썼답니다. 가볍게 펄펄 새가 날아와 우리 뜨락 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아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그 열매도 주렁주렁 많으리. 1818년, 정약용은 드디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어요.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거예요. 고향 집 여유당에서 정약용은 생각에 잠겼어요. ‘산과 강은 그대로인데 내 머리는 하얗게 세었구나!’ 정약용이 다시 벼슬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정약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를 막았어요. ‘이제는 여유당에서 조용히 글을 쓰며 살리라.’ 고향에 돌아온 이듬해, 정약용은 흠흠신서를 마무리했어요. 흠흠신서는 관리가 올바른 재판과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쓴 책이지요. 정약용은 억울하게 벌받는 백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거예요. 1836년, 정약용은 고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정약용은 한평생 꿈을 꾸었어요. 백성을 행복하게 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꿈이었지요. 정약용은 젊어서 재능을 인정받고, 정조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어요. 그리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정약용이 펼친 학문의 길은 어려움이 많았지요. 하지만 정약용은 꿈을 잃지 않고 실학을 완성했어요.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일이라면 의학, 농업, 형벌 제도, 건축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지요. 정약용이 쓴 책은 500여 권에 이른답니다. 정약용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학문과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있어요. |
예수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거리는 반짝반짝 불빛으로 넘쳐 나고, 여기저기에서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사람들은 두 손 가득 선물을 들었어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하고요. 집집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네요.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날이지요. 온누리에 사랑을 전한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우리도 동방박사들과 함께 별을 따라 예수님이 태어난 곳으로 가 보아요. 구세주가 나셨다. 이스라엘은 역사가 참 깊은 나라예요. 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계속 쳐들어와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 인을 괴롭 혔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고, 이집트의 노예 생활도 했어요. 이번에는 로마 제국의 다스림을 받았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생겼어요. “하늘이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맞아. 이제 곧 우리에게 구세주가 나타날걸. 저 반짝이는 별을 봐. 유대 인은 낮이나 밤이나 구세주를 기다렸어요. “여러분! 구세주가 나타났대요. 어서 가 봅시다!” 사람들은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곳으로 몰려갔어요.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지요. 유대 인의 뼈아픈 괴로움과 슬픔을 해결해 줄 참된 구세주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즈음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살았어요. 목수인 요셉과 곧 결혼하기로 약속한 '마리아'라는 처녀였지요. 그런데 결혼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어요. 실망한 요셉은 마리아와의 결혼을 조용히 무르려고 했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말했어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아내로 맞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은 성령께서 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곧 아들을 낳을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낼 구원자이니라.” 요셉은 천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마리아가 아기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로마 제국이 인구 조사를 했어요. 그래서 요셉은 인구 조사를 받으려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찾아갔지요. 배가 부른 마리아와 함께 말이에요. 밤이 깊었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방을 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여관의 허름한 마구간으로 들어갔어요. 그날 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아기를 말구유에 누이자 천사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태어남을 노래했지요. “높고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안고, 하늘에 감사 기도드렸답니다. 그때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 세 명이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따라 예루살렘으로왔어요. “유대 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있습니까? 우리가 그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 왕은 동방 박사의 말을 듣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불러 물었어요. “유대 인의 왕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 같소?”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유대 인을 구원할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이 쓰여 있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면 내 자리를 넘볼 텐데. 결코 가만둘 수 없다!’ 그러나 헤롯 왕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동방 박사들에게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라고 말했어요. 헤롯 왕은 자기도 경배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아기 예수를 찾아내 죽이려는 속셈이었지요.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가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요. “유대 인의 왕이 태어난 걸 축하드립니다. 여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니 받아주십시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헤롯 왕을 찾아가서 이 소식을 알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꿈에서 헤롯 왕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자기 나라로 돌아갔답니다. 그 뒤, 요셉도 꿈을 꾸었는데 한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어요. “헤롯 왕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어서 이집트로 피하여라.”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아기를 안고 이집트로 떠났어요. 헤롯 왕은 동방 박사들이 찾아오지 않자 속은 줄 알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어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지 두 해가 지나지 않은 사내 아기를 모두 죽여라!” 다행히 먼저 이집트로 피했던 예수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그 뒤로 예수는 헤롯 왕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집트에서 살았답니다. 소년 예수, 예루살렘으로 가다. 어느덧 예수의 나이 열두 살이 되었어요. 그동안 이집트를 떠나 나사렛에서 살던 예수는 길을 나섰어요. 유월절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찾아 가는 길이었지요. 예루살렘 성전 안팎에는 사람들로 꽉 찼어요. 게다가 하나님께 바치려고 끌고 온 어린양이며, 비둘기까지 뒤섞여 엄청 시끄러웠지요. 예루살렘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하룻길을 돌아가던 마리아는 예수가 없어진 것을 알았어요. 요셉과 마리아는 안절부절못하여 고향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물어 보았지요. “우리 예수를 못 보았나요?” “네, 못 보았는데요.”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갔어요. “아니, 예수가 저기에 있어요!” 사흘 뒤에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를 보았어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예수의 지혜로움에 감탄한 모습이었지요. 마리아가 예수에게 다가가 물었어요. “너는 여기에서 무얼하고 있는 거니?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사흘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저를 찾으시다니요?” 예수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어요. “제가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있으리라는 걸 모르셨어요?” “아버지의 집.” 요셉과 마리아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두었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제자를 모으다. 예수는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했어요. 밤에는 어머니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지혜를 더 키워 갔고요. 예수는 서른 살 때, 세례 요한을 찾아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그리고 광야로 나아가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하며 마귀의 꼬임도 물리쳐 냈지요. 모든 괴로움을 이겨 낸 예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갈릴리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용서와 사랑의 정신을 사람들에게 전하러 다녔지요. “때가 이르렀도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독생자인 나를 보내셨도다!” 그동안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유대인은 가난과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답니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갔어요. 그곳에는 가난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어요. 어부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물고기가 통 잡히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지요. 예수는 배에 올라 어부들에게 말했어요. “저기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시오.” 어부들은 예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어요.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잡힌 물고기를 배 두 척에 채워 놓으니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답니다. 지구별 사전. 예수의 제자는 12명이에요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의 시몬, 유다랍니다. 어리둥절한 어부들은 너도나도 예수 앞에 엎드리며 말했어요. “당신은 대체 누구이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어부들은 어쩔 줄 몰라 했어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어부였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어요. 그 뒤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지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답니다. 하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하늘의 말씀을 전했어요. 또, 아픈 사람과 몸이 약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고쳐 주었지요. “죄짓고 병든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에게 가면 병을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예수가 가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어요. 신약성경 마태복음 14장 13~21절에 보면,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 써 있어요. “예수님, 날도 저물었는데 사람들에게 먹일 것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제자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어린아이가 찾아와 자기 도시락을 내놓았어요. 도시락 안에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들어 있었지요.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를 칭찬하고는 하늘에 기도를 올렸어요. “자, 이 떡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네? 모두에게 다 나누어 주라고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제자들이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5개를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 양이 무척 많았지요. 5,000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12바구니가 남았으니까요. 이 기적은 생명의 떡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었다는뜻이에요. 또 예수가 신으로서의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지요. 기적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 어느 날, 사람들은 죄지은 한 여자를 붙잡아 유대인의 관습대로 돌로 쳐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예수를 시험해 보려고 이렇게 말했지요. "예수님, 당신은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 여자도 벌을 주지 않고 용서해야 할까요?"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악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준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 말이 거짓이 되고,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기 마련이지요. 예수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어요.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벌을 내릴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그 자격이 없느니라." "여러분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있다면 저 여자를 향해 돌을 던져라!”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뜨끔했어요. 그리고 자기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요. 예수는 가는 곳마다 하늘의 뜻을 전했어요. 그래서 따르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아졌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은 풀어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은 자유를 얻게 하셨도다.”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예수는 창칼을 들고 서 있는 로마 병사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늘 당당했으며, 오히려 로마 병사들을 불쌍하게 여길 뿐이었지요. “저 로마 병사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 양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높고 낮은 사람 없이 모두 가엾은 죄인일 뿐이니라.” 십자가를 짊어지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특히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그랬지요. “예수라는 자가 우리 자리를 넘보고 있소. 예수는 아예 대놓고 자기를 유대 인의 왕이라 한단 말이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예수를 믿고 따를 텐데 어찌하면 좋겠소?” 결국 꾀를 내어 예수를 죽이기로 했어요. 그래서 예수의 제자였던 가리옷 지방 사람 유다를 돈으로 꼬였지요.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 주면 너에게 은화 서른 닢을 주겠다.” “고맙습니다. 알려 드릴 테니까 잡아가십시오.” 예수는 스스로 자기가 죽을 날이 가까워 왔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열었지요. 그런 뒤에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드렸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니 이 일을 저에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는 기도를 마치고 동산에서 내려 오자마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갔어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예수에게는 죄가 없지 않은가?” “아니오. 예수는 엄청난 죄인이오." "차라리 몹쓸 강도 바라바를 풀어 주고, 우리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주시오!” 빌라도는 고민이었어요. 예수에게 아무런 죄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유대 인들은 더욱더 소리를 높였어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마저 무서워서 조용히 있거나 함께 거들었어요.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 인들에게 넘겨 주었지요. 유대 인들은 곧바로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웠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는 예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지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어요. 그러자 대낮인데도 하늘이 캄캄해지며 어둠만이 계속되었어요. 예수는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어요. “다 이루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 마침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어요.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향료를 들고 무덤에 찾아갔는데, 예수님이 무덤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어요. 제자들은 유령을 본 것처럼 깜짝 놀랐지요. 그러나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는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었어요. 그렇게 예수는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지내고, 하늘로 올라 갔어요. 그 뒤 제자들은 예수가 가르친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어요. 특히 사도 바울이 많은 일을 했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곳을 돌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마음만 가득했지요. 교과서에도 없는 지구별 알짜정보. 구원과 사랑의 기독교.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약 2,000년 전에 태어난 예수는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동안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했어요. 예수는 공자, 석가모니,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고 있답니다. 지금은 전 세계 사람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기독교를 믿고 있지요.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기독교는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 사람 등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낸 하나님을 믿는 종교예요. 하나님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이랍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며 살아가요. 성경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인 구약 성경 39권과 예수가 태어난 이후의 이야기인 신약 성경 27권으 로 이루어져 있어요. 구약 성경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된 내용이에요. 신약 성경은 구약에서 약속한 바로 그 구세주,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려 주지요. 또,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 의 나라를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담겨 있어요. 기독교의 명절, 부활절. 예수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축제일이에요. 부활절은 해마다 춘분 뒤 첫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이에요. 부활절은 보통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있지요.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서로의 소망을 담은 그림을 그린 달걀을 주고받는답니다. 생명의 태어남을 뜻하는 달걀에 예수 부활의 의미를 담은 것이지요. 추수 감사절. 가을에 한 해 농사를 지어 잘 거둔 것을 감사하는 기독교의 축제일이에요.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있던 축제이지요. 미국에서는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뒤 첫 농작물을 거둔 1621년에 추수 감사절을 지키기 시작했고,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국경일로 정했어요. 1941년부터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정해 칠면조와 호박 파이를 먹으며 기념하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11월 셋째 주 일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의 고대 영어에서 생겨난 말이에요. 예수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로, 12월 25일로 정해진 것은 4세기쯤이랍니다. 그 전에는 예수의 태어남과 세례를 기념하는 날인 1월 6일을 명절로 지켰다고 해요. 크리스마스가 왜 12월 25일로 정해졌는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그 가운데 처음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태양 탄신일’이라는 고대 로마 사람들의 축제와 같은 날로 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믿을 만하대요. 현재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휴일로 정하고 있으며,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사랑을 전하는 축제일로 자리 잡았답니다. 종교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나라에는기독교, 가톨릭교, 불교등 여러가지 종교가 있어요. 그러한 종교를 믿으며 교회, 성당, 절과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스님 같은 분을 말해요. 성직자라고도 하지요. 자신이 따르는 종교의 경전, 즉 성경이나 불경등의 교리를 해석하여 신자들에게 전한답니다. 종교인은 어떤 일을 하나요? 각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에 실린 신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뜻을 해석해 신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해요. 믿음을 가지고 신의 뜻을 전하면서 신자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지도한답니다. 더불어 예배, 예불, 미사 등 여러 가지 종교 의식을 이끄는 것도 종교인이 주로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 활동에도 앞장선답니다. 종교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그 종교에 대한 공부를 하거나 특정 종교 교단에서 운영 하는 성직자 교육 과정을 마쳐야 해요. 그리고 자신이 속한 종교의 교리를 열심히 공부해 종교의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요. 그 이전에 무엇보다 그 종교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희생정신과 봉사 정신도 필요해요. 여러분은 교회나 성당,절 등에 자주 가서 기도만 하면 신자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따르는 신의 뜻을 믿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 종교인이 되고 싶다면 먼저 성실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세요. 신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에요. 또한 신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종교인이 가져야 할 자세랍니다. 주변의 종교인을 살펴보고 올바른 자세를 배워 보세요. |
공자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다. 한 어머니가 이구산에 올라가 날마다 정성을 다해 기도했어요. "부디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를 가지게 해 주세요." 마침내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서 아이가 생겼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가지고 나서도 날마다 이구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렸어요. 그러다 이구산에서 아이를 낳았지요. 이 아이가 바로 공자예요. 공자는 중국 춘추 시대에 노나라에서 태어났어요. 공자가 태어났을 때, 중국은 아주 어지러웠어요.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로 나뉘어 싸움이 끊이지 않았거든요. 나라도 어지러운데, 공자가 어릴 때 아버지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살림이 몹시 어려워졌어요. 하지만 공자는 밝고 똑똑한 아이로 자랐답니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옛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루는 공자가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았어요. "얘들아, 우리 제사 놀이 하자!" "제사 놀이? 그게 뭐야?"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놀이야." "누구한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말이야." "어떻게 하는 건데?" 어린 공자는 지난밤 집안 어른들이 제사 지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친구들 앞에서 그대로 했어요. 상을 차리고 얌전하게 절을 하면서 말이에요. 학문에 뜻을 두다. 공자는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집안 살림이 어려워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없었어요. 어린 공자는 살림을 도우려고 사냥도 하고, 공사장에서 돌도 나르며 돈을 벌었어요.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공자를 보며 마음이 아팠어요. 어머니는 공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랐지요. "얘야, 배움에는 때가 있단다. 지금은 네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때야." "하지만 제가 일을 그만두면 어머니가 힘드신걸요." "아니다. 나는 네가 공부하는 모습만 보아도 행복하단다." 공자는 열다섯 살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자가 일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니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지요. 하지만 공자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공부에 온 힘을 쏟았어요. 이윽고 공자는 낮은 벼슬에 올랐어요. 나라의 물품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아주 성실하고 공평하게 일한다고 널리 이름났지요. 그런 공자가 아들을 낳자 노나라를 다스리던 소공은 선물로 귀한 잉어를 내렸어요. 아들 낳은 것을 축하하고,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공자를 칭찬하는 뜻이었지요. 공자는 아들의 이름을 ‘잉어’라는 뜻의 ‘공리’로 지어 불렀어요. 그런데 공자가 인정을 받자 시샘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공자는 마음을 다잡았어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리라." 공자는 더욱 열심히 일했어요. 이듬해에는 가축을 기르는 벼슬을 맡았지요. 공자는 가축을 잘 보살펴 무럭무럭 자라게 했답니다. 어느 날, 공자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 저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요!’ 공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어요. 공자는 어머니 장례를 정성껏 치렀어요.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묻어 드리고, 무덤 옆에 작은 집도 지었지요. 그리고 3년 동안 슬픔을 달래며 어머니의 무덤을 지켰어요. 삼년상을 지낸 거예요. 공자는 다시 학문에 힘을 쏟았어요. 공자는 공부하는 게 무척 즐거웠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이렇게 말했지요.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가 살던 때에는 지금처럼 종이로 책을 만들지 않았어요. 대나무 조각을 가죽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들었는데, ‘죽간’이라고 불렀지요. 공자는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 넘게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답니다. 또한 공자는 음악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양자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거문고를 배웠지요. 공자가 양자에게 거문고를 배운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어요. "음악을 만든 사람의 마음까지 알고 연주하다니 참으로 훌륭하오!" 양자는 공자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공자에게 절을 하며 말했어요. 음악에서 도를 깨우치는 공자에게 감동한 거예요.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을 쏟다. 공자는 나날이 이름을 떨쳤어요. 곳곳에서 여러 사람이 찾아와 공자에게 가르침을 구했지요. 공자는 남다르게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배우는 사람이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애태우지 않으면 틔워 주지 않으며, 주제를 알려 주었는데도 나머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다시 일러 주지 않는다." 공자는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모두 제자로 삼았어요. 하루는 가난한 젊은이가 공자를 찾아왔어요. 젊은이는 공자의 무릎에 매달려 부탁했어요. "선생님, 저는 배움에 목이 마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마른 고기 조금밖에 없습니다. 돈 대신 드릴 테니 저를 제자로 삼아 주세요." "마른 고기면 어떠하냐. 배우고 익히는 데 신분의 높고 낮음이 무슨 상관이겠느냐." 공자는 이렇게 말하며 젊은이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이 공자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어요. 자로라는 사람은 공자가 학식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공자와 학문을 겨루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자를 찾아가 물었지요. "진정한 배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공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너무 알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모르는 것까지 안다고 우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로는 공자의 학식과 인품에 감동하여 제자가 되었어요. 공자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로를 친구처럼 의지하며 가까이했지요. 어진 임금이 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다. 공자가 제자들과 제나라로 향할 때였어요.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지요. 공자는 제자 자로를 보내어 여인이 우는 이유를 알아 오라고 했어요. 자로가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어요. "왜 그리 슬피 울고 계십니까?" 여인은 훌쩍이며 대답했어요. "오래전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호랑이한테 물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답니다." 자로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어요. "그렇다면 왜 빨리 다른 곳으로 가서 살지 않습니까?" "이곳에는 호랑이는 있지만, 백성을 괴롭히며 많은 세금을 걷어 가는 무서운 관리는 없거든요." 자로는 이 이야기를 공자에게 전했어요. 공자는 안타까워하며 제자들에게 말했어요.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것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꼭 기억해라. 임금은 덕이 있어야 하며, 덕과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겼답니다. 그때 제나라 신하들은 서로 힘을 더 가지려고 싸움이 한창이었어요. 제나라에 도착한 공자는 임금인 경공을 찾아갔어요. 경공은 공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까?" 공자는 어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요.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착해집니다. 또한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자기가 할 일을 다하면 나라가 편안해진다는 뜻이랍니다. 임금은 공자의 말에 감탄하여 벼슬을 내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권력을 쥐려는 신하들은 반대했지요. "공자는 오만하고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 합니다. 신하로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임금은 공자를 믿었어요. 하지만 많은 신하가 공자를 시샘하니 함께 어울려 나랏일을 이야기하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임금은 공자에게 벼슬을 내리지 못했어요. 임금을 도우며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공자의 꿈을 이루기에 제나라의 벽은 너무 높았어요. 공자는 다시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았지요. 드디어 공자는 노나라 임금을 도와 재상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우선 임금의 힘을 키우고, 노나라의 문화를 발달시키려고 애썼지요. 제나라는 노나라가 강해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공자가 정치를 맡았으니 노나라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우리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무릎을 꿇을까 걱정스럽구나!" 제나라는 꾀를 내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 여러 명을 노나라에 보냈어요. 그러자 노나라 임금은 나라를 돌보지 않고 노는 데 푹 빠져 버렸어요. 공자가 아무리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써도 소용없었지요. 공자는 땅을 치며 한탄했어요. "아, 이렇게 덕이 모자란 사람들과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으랴!" 공자는 크게 실망하고 벼슬을 버렸어요. 세상을 떠돌며 어진 임금을 찾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어요. 10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이었지요.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끝내 만날 수가 없었지요. 공자는 세상을 떠돌면서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때로는 먹을거리가 떨어져 힘들기도 했지요. 공자가 송나라에 갔을 때 일이에요. 공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런데 환퇴라는 관리가 나무를 뽑아 공자를 해치려고 했어요. 환퇴는 예전에 공자가 자기의 잘못을 꼬집어 말한 것에 마음이 상해서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선생님, 위험합니다! 어서 도망가셔야 합니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공자에게 말했어요. 그러나 공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어요. "괜찮다. 하늘이 나에게 온 세상에 덕을 펼치게 하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공자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예순이 훌쩍 넘어서야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어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전을 다듬어 새로이 펴냈지요. 공자는 오늘날 유학을 공부할 때 기본으로 삼는 사서오경 가운데 서경과 예기를 처음으로 펴냈어요. 그리고 시 3,000여 수를 예에 맞는 것만 추려 새로 엮어냈지요. 또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를 썼어요. 공자는 춘추를 쓴 다음에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세상의 큰 스승으로 남다. 어느 날, 공자는 제자 자로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자로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나쁜 사람과 홀로 싸우다 갑자기 죽은 거예요. 공자는 크게 놀라서 앓아누웠어요. 이듬해 제자 자공이 공자를 찾아왔을 때, 공자는 몸이 약해져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어요. 공자는 자공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큰 산이 무너지는가. 큰 기둥이 부수어지는가. 성현이 사라지는가." 공자는 노래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는구나!’ 며칠 뒤, 공자는 아끼던 제자들 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답니다. 제자들은 공자를 북쪽 강가에 묻었어요. 그리고 삼년상을 치른 뒤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하지만 제자 자공은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공자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어요.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6년이나 더 무덤을 지켰지요. 그 뒤, 공자의 제자와 노나라 사람들이 공자의 무덤 가까이에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공자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공리’라고 불렀지요. 공자는 뛰어난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교육자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공자는 지식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어요. 공부를 하고 나라를 다스릴 때, 반드시 ‘사람다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공자는 사람다움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답니다. "집에 들어오면 효를 다하고, 밖에 나가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몸가짐과 말을 조심스럽고 믿음이 가게 하며,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도 남은 힘이 있거든 그때 학문에 힘써야 한다." |
마호메트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성스러운 사람으로 사랑받다.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는 여러 나라 상인이 오가는 바쁜 도시였어요. 메카는 쿠라이시 족이 다스리고 있었지요. 하루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쿠라이시 족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며느리가 첫아들을 낳았지요.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아이를 안고 달래다가 한숨을 쉬었어요. "불쌍한 아브드 알라! 아들이 태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구나." 아이의 아버지인 아브드 알라는 장사를 하러 떠났다가 병으로 숨지고 말았거든요.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아이의 이름을 ‘마호메트’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그때 아라비아의 관습대로 아이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을 나누어 주었어요.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마호메트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이 금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마호메트, 저렇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라. 부디 큰사람이 되어 사람들을 지혜롭고, 어질게 이끌어야 한다." 어느 날,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마호메트를 사막에 사는 유목민의 집에 맡겼어요. "마호메트! 너는 쿠라이시 족의 아들이야. 훌륭한 쿠라이시 족 남자로 크려면 어릴 때 사막에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해." 이렇게 해서 마호메트는 사막의 한 집에서 자랐어요. 마호메트를 돌보는 가족은 따뜻하고 친절했어요. 집에는 아이가 아주 많았는데 모두 마호메트와 사이좋게 지냈답니다. 사막에 사는 유목민은 가난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했어요. 마호메트는 마음씨 따뜻한 유목민과 어울리면서 생각했지요.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존경받고, 어떤 사람은 무시당할까? 왜 어떤 사람은 잘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할까? 모두가 똑같이 행복하게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여섯 살이 되던 해, 마호메트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어요. 마호메트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말했지요. "엄마! 우리 이제 떨어지지 말고 같이 살아요." 하지만 얼마 뒤, 어머니가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불쌍한 마호메트, 힘을 내렴. 이 할아버지가 너와 함께 있으마." 마호메트는 착하고 똑똑하게 자라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하인과 가난한 사람들도 마호메트를 참 좋아했답니다. "마호메트 도련님은 마음씨가 참 따뜻해! 맛난 음식이 있으면 꼭 나누어 주셔."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챙겨 주시지."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기뻤어요. ‘마호메트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어느 해, 메카에 큰 가뭄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쿠라이시 족을 대표해서 카바 신전에서 기우제를 지냈어요. 마음이 맑고, 착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알라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했지요. 할아버지는 여러 이름을 외쳤지만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어요. 갑자기 할아버지는 마호메트의 이름이 떠올랐어요. "알라신이시여! 어질고 착한 아이 마호메트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메카에 비를 내려 주소서! 드넓은 땅을 적셔 주소서! 곡식을 키워 주소서!" 바로 그때, 먹구름이 몰려오고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왔어요. "우아, 비가 온다! 마호메트 도련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비가 와!" "마호메트 도련님은 역시 성스러운 분이셔!" 기쁨에 넘친 사람들은 마호메트를 성스러운 아이로 생각했답니다. 마호메트는 큰 슬픔에 빠졌어요. 할아버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거예요. 쿠라이시 족의 지도자 자리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고, 장사도 잘되지 않았지요. 게다가 먼 나라로 장사를 하러 갔던 배가 가라앉아 크게 손해를 보았어요.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떠나 버렸어. 이제 나에게는 삼촌뿐이구나.’ 마호메트는 삼촌을 따라 낙타를 타고 멀리 시리아로 장사를 하러 갔답니다. 하루는 마호메트가 시리아의 여관에 있을 때 한 남자가 찾아왔어요. "저는 수도승 바히라 님의 하인입니다. 바히라 님께서 두 분과 함께 저녁밥을 먹자고 초대하셨습니다." 마호메트와 삼촌은 놀랐어요. 바히라는 시리아에서 제일가는 수도승이었지요. 그날 밤, 두 사람은 바히라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배불리 먹었어요. 그런데 저녁을 먹는 내내 바히라는 마호메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답니다. 차를 마신 뒤 바히라가 말했어요. "어젯밤 꿈에 낙타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갑자기 한 사람의
주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저는 빛에 둘러싸인 그 사람이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맡아 태어난 것을 깨달았지요. 그런데 오늘 메카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초대했답니다." 이윽고 바히라는 마호메트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 젊은이가 바로 제가 꿈속에서 본 사람입니다." 마호메트는 어리둥절했어요. "아닙니다. 저는 그냥 물건을 파는 장사꾼입니다." 마호메트가 말했지만 바히라는 고개를 저었어요. "당신은 알라신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위하는 큰 스승이 될 것입니다. 당신을 노리는 사람이 많을 테니 늘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큰 스승이 되려고 하면 수많은 어려움이 당신을 괴롭힐 테니까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다. 바히라의 예언을 들은 삼촌이 마호메트에게 말했어요. "마호메트! 네 이름으로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왔고, 바히라 님도 너를 알라신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시는구나. 아무래도 너는 알라신을 위해 살 운명인가 봐." 하지만 마호메트는 삼촌을 도와 장사를 하며 살았어요. 마호메트는 장사를 하다 보니 가끔씩 노예를 사고팔아야 했어요. 그때 메카에는 노예가 참 많았어요. 전쟁에 져서 끌려온 사람, 빚을 갚지 못한 사람 등이 노예로 팔렸지요. ‘아,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일까! 이것은 알라신의 뜻이 아닐 거야.’ 마호메트는 가슴이 아파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는 했어요. 마호메트는 메카에 있는 가장 큰 가게에서 일했어요. 가게의 주인인 하디자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힘으로 큰돈을 벌었지요. 하디자는 가게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정직한 마호메트를 좋아했어요. 마호메트도 하디자를 사랑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호메트는 노예 아이를 선물 받았어요. 노예 아이는 슬픈 얼굴로 마호메트에게 인사했지요. 마호메트는 가슴 아파하며 아내에게 말했어요. "하디자! 나는 이 아이를 아들로 삼겠소. 그리고 앞으로는 노예를 모두 풀어 줍시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주고받는 것은 큰 죄요." 마호메트는 노예 아이를 아들로 삼았어요. 마호메트가 노예를 풀어 준다는 소문이 돌자 노예는 모두 마호메트를 존경하며 따랐답니다. "나는 마호메트 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마호메트는 행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어요. 하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지요. ‘마호메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라. 부디 큰사람이 되어 사람들을 지혜롭고, 어질게 이끌어야 한다.’ 마호메트는 아침저녁으로 알라신에게 기도를 올렸어요. ‘알라신이여! 저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노예를 모두 풀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노예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있을까요? 부디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나 알라신은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하디자, 나는 장사를 그만두고 기도를 하며 지내고 싶소." 마호메트의 말에 하디자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답니다. "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나는 늘 당신을 도울 거예요." 알라신의 뜻을 깨닫다. 마호메트는 히라 언덕의 동굴에 들어가 기도와 명상의 나날을 보냈어요. 어느 날 마호메트가 오랫동안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쓰러졌을 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났어요. "마호메트! 너는 알라가 보낸 사람, 예언자이다." 마호메트는 깜짝 놀라 일어났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냥 보통 장사꾼입니다." "아니다. 알라신은 오래전에 너를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다. 그러니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알려라. 알라신을 믿어라.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재물을 아낌없이 베풀어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쳐라." 천사가 사라진 뒤, 마호메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달았어요. ‘바히라 님이 예언하신 대로 나는 알라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바르게 이끌어 가야 하는구나. 그래, 나가서 알라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자!’ 마호메트의 말을 들은 하디자는 남편의 손을 꼭 쥐었어요. "알라신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이제부터 가르침을 널리 전하세요. 집안은 제가 돌볼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 마호메트는 날마다 알라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어요. 그럴수록 마호메트의 지혜는 더욱더 깊어졌지요. 드디어 마호메트는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끝없는 어려움 속에서. "마호메트 님이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모두 평등하대. 노예도 왕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이래." 노예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마호메트에게 몰려와 제자가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가 만들어졌답니다. 마호메트는 열심히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알렸어요. 왕과 귀족, 부자들은 두려웠지요. "어떤 마을에서는 노예들이 반란까지 일으켰대요." "이대로 가다가는 마호메트 때문에 우리 모두 끝장날 거예요." 결국 왕, 귀족, 부자들은 마호메트를 없애려고 새벽에 마호메트의 집을 덮쳤어요. 그러나 마호메트는 없었지요. 도망가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슬람교도와 함께 벌써 메디나로 떠난 거예요. 마호메트와 이슬람교도는 622년 9월 24일 메디나에 모였어요. 이슬람에서는 이날을 ‘헤지라’라고 부른답니다. 메디나에 이른 마호메트는 더욱 열심히 신의 뜻을 전했어요. 메디나의 높은 사람들은 마호메트의 말을 잘 받아들였어요. "마호메트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어. 노예를 풀어 주면 우리도 좋은 점이 있어. 노예에게 일한 만큼 돈을 주면 더 열심히 일할 거야." 마호메트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메카의 사람들은 마호메트와 사이가 더 벌어졌어요. 크고 작은 싸움을 하다가 메카 군이 메디나로 쳐들어왔지요. "알라신을 따르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메카의 군대가 우리의 꿈을 짓밟기 전에 맞서 이기자!" 이슬람 군과 메카 군은 큰 싸움을 벌였어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슬람 군과 함께했지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힘찬 이슬람 군에 겁을 먹은 메카 군은 달아났어요. 마호메트는 전쟁을 멈추고, 메카로 카바 순례를 가기로 했어요. "메카 군은 들어라. 우리는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카바 순례를 위해 잠시 동안 메카를 찾을 것이다." 마호메트는 메카 군과 협상해서 ‘후다이비야 조약’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메카 군은 후다이비야 조약을 처음에만 지키고 또다시 마호메트를 공격했지요. 마호메트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갔어요. 그런데 메카를 이끄는 아부 수피안이 이슬람 군을 몰래 살피다가 들켰어요. 마호메트는 아부 수피안에게 말했어요. "내가 메카에 갔을 때 사람들이 집 안에 있으면 항복하는 것으로 알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다고 전하라." 마호메트가 메카에 갔을 때 메카의 사람은 모두 집 안에 있었어요. 마호메트에게 말없이 항복한 거지요. 마호메트는 평화롭게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지역과 아프리카까지 빠르게 퍼졌어요. 마호메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사람들은 마호메트의 뜻에 따라 자기의 노예를 풀어주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호메트는 알라신의 곁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졌음을 느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카바 성전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지요.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마호메트는 사막을 지나다가 유목민들을 보았어요. 유목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평화롭게 양을 치고 있었지요. 마호메트는 빙긋이 웃었어요. 어린 시절 자기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던 유목민 가족이 생각났거든요. ‘아, 이제 그 가족도 무시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여행을 마친 뒤, 마호메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 "인간은 피부색과 신분의 차이 없이 모두 같은 형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도와야 합니다." 마호메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있답니다. |
광개토 대왕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여러분, 중국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를 본 적이 있나요?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 대왕이 땅을 넓혀 우리 겨레의 용기를 떨친 업적을 기리려고 세웠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물이 왜 중국에 있는 걸까요? 고구려 시대에는 우리 땅이 중국까지 넓게 뻗어 있었거든요. 하지만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 나라의 역사라고 해요. 광개토 대왕릉비만 보아도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말이에요. 자, 이제 우리가 나설 때예요. 세상에 고구려의 힘찬 용기를 떨친 광개토 대왕처럼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지켜내자고요!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르다. 한반도 북쪽에 있는 고구려는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와 싸우며 살았어요. 한창 중국 연나라와 싸우고 있으면, 틈을 노려 백제가 쳐들어왔지요. 광개토 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때, 연나라의 왕 모용황이 쳐들어왔어요.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치고,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갔답니다. 고국원왕은 연나라에 값진 재물을 바쳐 어머니와 아내를 데려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어요. "짐이 앞에서 싸우니 그대들도 물러서지 마라!" 고국원왕은 앞에서 용감하게 백제군과 싸웠어요. 핑! 그때 백제군 쪽에서 화살이 날아와 고국원왕의 가슴에 박혔어요. 고국원왕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소수림왕이 고국원왕의 뒤를 이었어요. 소수림왕은 연나라와 백제를 치려고 준비를 많이 했지요. 하지만 뜻을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소수림왕에 이어 고국양왕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고국양왕은 아들 '담덕'에게 말했지요.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고구려를 빛나게 만들어라" "연나라와 백제에 맞설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힘써야 한다." "네, 아버님! 고구려를 빛내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담덕은 주먹을 꼭 쥐고 마음을 다졌어요. 하지만 고국양왕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어요. 담덕은 열여덟 살에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지요. 이 젊은 왕이 바로 고구려 제19대 왕, 광개토 대왕이랍니다. 광개토 대왕은 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힘차게 말했어요. "그동안 우리 고구려는 백제와 연나라에 시달려 왔다. 짐은 고구려를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어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먼저 힘을 길러 백제를 치겠다. 오늘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하라!" 광개토 대왕의 명령을 들은 신하들은 깜짝 놀랐어요. 왕이 되자마자 전쟁을 치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요. 고구려의 혼이 되살아나다. 광개토 대왕은 무기와 말을 챙기고, 고구려 군사들에게 외쳤어요. "짐은 우리 고구려 백성을 믿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배웠다. 씩씩한 우리가 연나라와 백제의 눈치만 보며 지낼 수는 없다. 상대가 마음을 놓고 있을 때 공격해야 크게 이길 수 있다. 자, 가자!"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군을 이끌고 백제의 여러 성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관미성까지 공격했지요. "뭐라고?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해?" 백제의 진사왕은 서둘러 관미성으로 달려갔어요. 고구려와 백제는 관미성을 놓고 숨 가쁜 전투를 펼쳤답니다. 고구려군이 백제군을 물리치고 관미성을 차지했지요. "젊은 분이 이렇게 큰일을 하시다니!" "이제 우리 고구려의 힘을 보여 줄 때가 왔다!" "하늘이 우리 고구려에 영웅을 내려 주셨어!"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 대왕을 보고 만세를 불렀어요. 광개토 대왕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지요.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번 승리로 용기를 되찾았으니, 이제 머지않아 고구려는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고구려 만세!" 고구려 사람들은 땅이 울리도록 만세를 불렀어요. 스러지던 고구려의 혼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지요. 드넓은 세상으로 말달리자. 백제는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웠어요. 관미성을 빼앗기고, 진사왕까지 세상을 떠났지요.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새로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관미성을 빼앗기면 나의 자리도 위험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관미성을 되찾아야 해.' 아신왕은 군사를 이끌고 관미성으로 갔어요. 하지만 고구려군을 이길 수 없었지요. 광개토 대왕은 백제군을 막으려고 성을 고치고, 군사도 늘렸거든요. "다 같이 백제군을 무찌르자!" 고구려군은 힘을 다해 백제군을 물리쳤어요. 백제군은 또다시 고구려군을 공격했어요. 광개토 대왕은 수곡성과 패수에서 백제군을 물리쳤지요.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군 앞에서 외쳤어요. "사랑하는 군사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다 같이 가슴을 쫙 펴고 적에 맞서자. 우리는 드넓은 벌판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자란 고구려의 아들이다! 고구려를 위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자!" 온 백성이 늠름한 광개토 대왕을 따르며 열심히 일했어요. 농부는 힘차게 쟁기질하고, 대장장이는 땀을 흘리며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었지요. 상인은 고구려군의 보호를 받아 저 멀리 서역까지 장사를 하러 갔답니다. 고구려의 힘을 세상에 알리다. 광개토 대왕은 말을 타고 달리며 생각했어요. '고구려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싶다.' '고구려 사람의 용기를 세상에 보여 주고 싶다. 백제와 싸움을 마무리 짓고 이제는 북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 다시는 백제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거세게 밀어붙이자.' 광개토 대왕은 수군을 이끌고 백제로 떠났어요. 신하가 헐레벌떡 들어오자, 백제의 아신왕이 깜짝 놀라 물었어요. "무슨 일이냐?" "전하, 큰일입니다!" "고구려 수군이 몰려왔습니다!" 아신왕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어요. "어서 군사를 모아라! 고구려를 막아라!” 광개토 대왕은 앞에서 고구려 수군을 이끌었어요. 핑핑! 고구려군이 백제군의 배 쪽으로 불화살을 쏘았어요. 백제군의 배는 이내 활활 탔지요. "어서 불을 꺼라! 어서!" 백제군은 어쩔 줄 몰랐어요. 그 틈을 타, 고구려군은 재빨리 백제 땅에 올랐어요. 그리고 백제의 58성을 차지했지요. 고구려군이 무섭게 밀려들자, 아신왕은 힘없이 말했어요.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라." 아신왕과 백제 귀족은 광개토 대왕에게 무릎을 꿇었어요. 광개토 대왕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아신왕에게 말했지요. "그대는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그러면 다시 백제를 다스리게 해 주겠다." "전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백제의 왕을 살려 주시다니요!" 신하들이 화들짝 놀랐지만, 광개토 대왕은 침착했어요. "짐이 백제의 왕을 죽이면, 백제 사람들은 영원히 고구려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왕을 살려 주면, 백제 사람들은 고구려를 따를 것이다." "적을 없애는 것보다는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진짜 승리다. 백제의 왕은 들어라! 짐의 뜻을 거스르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네, 영원히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아신왕은 광개토 대왕과 단단히 약속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백제의 아신왕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고구려의 왕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구려의 신하로 살 수는 없지.' 그때 백제의 신하들이 아신왕에게 말했어요. "전하! 나보다 강한 적이 있으면, 나보다 약한 적도 있는 법입니다. 고구려에 땅을 빼앗긴 만큼 신라의 땅을 빼앗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옳다! 다른 나라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하자."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공격해 오자,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구했어요. "우리는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 왔다. 힘없는 신라를 도와 백제와 왜를 물리치자." 광개토 대왕은 신라를 향해 힘차게 말을 달렸답니다. 백제 아신왕이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할 때였어요. 백제군은 광개토 대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벌벌 떨었지요. "고구려 군사 오 만여 명이 신라를 도우러 온대!" "아이고, 우리는 어쩌지?" 광개토 대왕은 두려움에 떠는 백제군과 왜를 쳐서 이겼어요. 하지만 아신왕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다시 군사들을 모아 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감히 고구려를 넘보다니! 고구려 군사들아, 어서 나가자! 백제와 왜를 우리 땅에서 몰아내자!" 광개토 대왕은 또다시 백제군을 몰아냈어요. 아신왕은 고구려와 잇단 싸움에서 크게 졌지요. 그래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광개토 대왕은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렸어요. "요즘 후연이 우리 고구려를 넘보는 듯하다." "우리와 서쪽 땅을 맞대고 있으니 걱정을 놓을 수가 없구나. 어디 후연과 맞붙어 보자." 고구려군은 후연의 모용귀가 지키는 숙군성으로 쳐들어갔어요. 모용귀는 용감한 고구려군과 싸울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에서 꼼짝하지 않았지요. 고구려 군사들이 큰 소리로 모용귀를 놀렸어요. "모용귀는 겁쟁이! 우리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리지?" 모용귀는 버럭 화를 내며 후연 군사들에게 소리쳤어요. "얼른 나가서 고구려군을 싹 물리쳐라!" 후연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갔어요. 바로 그때, 고구려군은 화살을 빗발치듯 쏘았어요. 후연 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고구려군이 와르르 덮쳤지요. 모용귀는 겨우 달아났어요. 광개토 대왕은 후연을 공격해 랴오허강 언저리까지 땅을 넓혔어요. 고조선 때 잃었던 땅을 700여 년 만에 되찾았답니다. 어느 날, 한 사신이 광개토 대왕에게 와서 편지를 전했어요. 북연의 왕이 보낸 편지였지요. '전하! 저는 원래 고구려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 신하는 전쟁을 일삼는 후연을 끝내고, 새로운 나라 북연을 세웠습니다.' '저희는 고구려를 따르며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의 뜻을 받아 주십시오.' 광개토 대왕은 반가워하며 사신에게 말했어요. "그대의 나라로 가서 전하라. 북연과 고구려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낼 것이다. 그대의 왕이 부디 평화를 지키기 바란다."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의 땅을 넓히는 데 있는 힘을 다했어요. 북쪽으로 헤이룽강, 남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내몽고와 중국 북부에 이르기까지 땅을 넓혔지요. 광개토 대왕은 그만 큰 병에 걸렸어요.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돌보다 병을 얻은 것이었지요. 광개토 대왕은 숨을 거두기 전, 아들에게 말했어요. "나는 수많은 전쟁을 벌이면서 전쟁 때문에 백성이 힘들지 않을까 늘 걱정했다. 이제 우리 고구려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백성이 편히 잘 사는 나라를 만들도록 해라." 광개토 대왕은 드넓은 마음으로 고구려의 이름을 세상에 떨쳤어요. 그리고 용기와 지혜로 백성을 보살폈지요. 광개토 대왕의 업적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남아, 눈부신 우리 역사를 말해 준답니다. 나쁜 무리를 쓸어버리니 백성이 편안하도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도 편안하며 곡식은 풍성하게 익었도다.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려고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 대왕릉비에 있는 글. 교과서에도 없는 지구별 알짜 정보. 광개토 대왕의 '광개토'는 한자로 '땅을 넓히다'라는 뜻이에요. 광개토 대왕은 중국까지 땅을 넓혀 고구려의 이름을 떨쳤지요. 18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39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를 위해 힘껏 달렸어요.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의 굳은 의지로 동아시아의 큰 나라로 발전했지요. 장수왕도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뜻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빛냈답니다. 광개토 대왕의 대륙 정복.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의 땅을 넓히고 힘을 크게 키웠어요.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를 넘보는 백제와 여러 번 전쟁을 벌였어요. 북쪽의 거란을 치려면 백제를 먼저 막아야 했거든요. 거란을 친 뒤에 고구려는 다시 백제와 싸웠어요.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고구려가 크게 이겨, 임진강 북쪽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백제와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왔어요. 백제를 막고 신라와 평화를 이룬 뒤, 광개토 대왕은 더 넓은 땅으로 눈을 돌렸어요. 북쪽의 여러 나라와 힘을 겨뤄 요동, 요서 지방을 차지했지요. 광개토 대왕은 북쪽으로 헤이룽강, 남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내몽고와 중국 북부까지 땅을 넓혔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 광개토 대왕릉비는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려고 세운 비석이에요. 광개토 대왕릉비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동쪽, 국강상에 있는 광개토 대왕의 무덤 근처에 있어요. 지금의 중국 지린 성 지안 시에 있지요.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이 세상을 떠난 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땅을 넓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왕'이라는 뜻이지요. 줄여서 '광개토 대왕'이라고 부른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높이 6.39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이에요. 또한 비석에는 1,700여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고구려를 세울 때 이야기, 광개토 대왕이 땅을 넓힌 이야기 등을 말해 주지요. 중원 고구려비. 중원 고구려비는 1979년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찾았어요. 중원 고구려비는 우리나라에 딱 하나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으로, 국보 제205호랍니다. 장수왕이 남한강 근처 여러 성을 차지한 뒤, 기념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짐작하지요. 돌기둥 모양으로 4면에 모두 글이 있어요. 모양새는 만주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비슷하지요.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뿐만 아니라 한반도 중부 지역과 충주 지역까지 이르렀음을 말해 주어요.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사이를 알려 주는 소중한 자료랍니다. |
김유신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신라 장군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힘차게 말을 달려요. 마음속은 친구 김춘추 걱정으로 가득해요. 김춘추가 지금 위험하거든요. 김춘추는 백제군에게 사랑하는 딸과 사위를 잃은 뒤,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도움을 구하러 갔어요. 김유신은 김춘추가 돌아오지 못하면 구하러 가겠다고 굳게 약속했지요. 따가닥 따가닥! 저 멀리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네요. 바로 김춘추예요! 김유신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어려요. 김유신은 김춘추를 꼭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려요. 뒷날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에 올라요. 김유신과 김춘추, 두 사람은 끈끈한 우정으로 서로를 도우며, 삼국 통일을 위해 함께 힘썼답니다. 지혜롭고 씩씩한 화랑으로 자라다. 삼국 시대, 신라 만노군 태수 김서현이부인에게 말했어요. “지난밤에 별 두 개가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오.” “저도 꿈을 꾸었어요.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아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제 품에 안기지 뭐예요.” “허허, 우리 둘 다 태몽을 꿨군요. 아무래도 귀한 아이가 태어날 모양입니다.” 김서현은 부인과 함께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김서현은 없어진 나라 금관가야의 사람이었어요. 신라 왕족인 부인과 부부가 되기까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요. 드디어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부부는 아이 이름을 김유신이라고 지었어요. 갓난아이 김유신은 척 보아도 장군감이었지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땅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어요. 신라에서는 지혜롭고 씩씩한 젊은이의 모임인 화랑이 나라를 든든하게 떠받쳤어요. 어린 김유신도 나라를 지키는 화랑이 되려고 열심히 몸과 마음을 닦았지요. 아버지는 씩씩하게 자라는 김유신이 자랑스러웠어요. “유신아, 용감하고 지혜로운 젊은이로 자라야 한다.” “네, 아버지." "화랑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겠습니다.” 김유신은 열다섯 살 때 화랑이 되어 세속오계를 마음에 깊이 새겼어요. 그리고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자연을 벗 삼아 활쏘기를 익혔답니다. 하루는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으로 놀러 왔어요. 김춘추는 신라의 왕족으로 김유신과 친한 사이였지요. 두 사람은 뜰에서 축국을 하며 놀았어요. 그런데 김유신이 그만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았어요. “아, 미안해. 저런, 옷이 뜯어졌네.” “괜찮아.” “아냐, 기다려봐. 꿰매 줄 사람이 있을 거야.” 김유신은 여자 형제가 두 명 있었어요. 바로 보희와 문희였지요. 김유신이 사정을 말하자 보희는 부끄럽다며 거절했어요. 하지만 문희는 꿰매겠다고 나섰어요. 문희는 바늘과 실로 김춘추의 옷을 한땀 한땀 정성껏 꿰매었어요. 그 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요. 김유신과 김춘추는 더 친해 졌어요. 김유신은 아름다운 여인 천관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김유신이 천관을 만나느라 공부를 게을리 하자, 어머니는 김유신을 크게 나무랐어요. ‘어머니 말씀이 맞아. 다시는 천관을 만나지 말자.’ 김유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어느 날, 김유신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떴어요. 그런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바로 천관의 집 앞이지 뭐예요. 말은 날마다 천관의 집으로 가다 보니 김유신이 자는 사이에 버릇처럼 천관의 집으로 간 거예요. ‘말아, 미안하다! 다시는 천관을 만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무너트렸으니 가만 둘 수가 없구나.’ 김유신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들어 말을 쳤어요. 천관은 김유신을 맞으러 나왔지만, 붙잡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품은 뜻을 지켜주고 싶었지요. 낭비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다. 고구려와 백제는 틈만 나면 신라의 땅을 차지하려고 쳐들어왔어요. 신라도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어요. 고구려군이 거세게 맞서는 바람에 신라군은 용기를 잃었지요. 김유신이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저를 보내주세요." "제가 앞장서 싸우겠습니다.” “너는 오늘 전쟁터에 처음 왔으니 안 된다.” “화랑은 싸움터에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씩씩한 눈빛을 보고 허락했어요. 김유신은 말을 타고 혼자 적에게 달려갔어요. 그리고 고구려 장군을 무찌르고 돌아왔지요. “와, 와!” 신라군은 크게 힘이 났어요. 이날 신라는 고구려를 물리치고 낭비성을 차지했어요.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였어요. 신라에서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도움을 구하기로 했지요. 적의 나라인 고구려에 혼자 가는 것은 아주 위험했어요.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약속했어요. “만일 자네가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꼭 구하러가겠네.”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보장왕에게 말했어요.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신라가 위험하면 고구려도 안전하지 않겠지요. 부디 우리 신라를 도와주십시오.” 보장왕은 씩씩한 김춘추를 보고 생각했어요. ‘겁도 없이 다른 나라에 와서 도와 달라고 하다니, 참 용감하군!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겠어.' ‘어떻게 하면 신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김춘추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좋은 방법을 찾았어요.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전하, 신하인 제가 마음대로 신라 땅을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신라로 돌아가 여왕님께 땅을 돌려드리라고 전할 테니 먼저 저를 풀어 주시지요.” 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을 믿고 풀어 주었어요. 김춘추는 얼른 신라로 떠났지요. 보장왕은 뒤늦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김춘추를 뒤쫓았어요. 김춘추가 신라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어요. 김유신이 신라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어요.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김춘추가 오지 않자, 김유신이 친구를 찾아 나선 거지요.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네!” 김유신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김춘추와 부둥켜안았어요. 김유신이 백제의성을 잇달아 차지하고 신라로 막 돌아왔을 때였어요. 백제군이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김유신은 선덕 여왕의 명령에 따라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전쟁터로 가야 했어요. 집에 다 왔는데 말이에요. 김유신은 자기 집을 그냥 지나친 뒤 부하에게 말했어요. “목이 마르구나. 우리 집에 가서 물을 한 바가지 떠 오너라.” 부하는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어요. 김유신의 부인은 우물물을 한 바가지 떠서 보냈지요. 김유신은 물을 꿀꺽꿀꺽 마신 뒤 말했어요. “물맛이 그대로니 가족이 모두 잘 지내고 있겠구나. 자, 가자!” 신라군은 그 모습을 보고 힘을 내서 전쟁터로 갔어요. “장군님도 가족이 보고 싶지만 참으시잖아. 우리도 얼른 이기고 돌아와 가족을 만나자!” 신라군은 전쟁터에서 힘차게 싸웠답니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잠재우다. 귀족 비담과 염종이 선덕 여왕 때에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러웠어요. 반란 군은 신라의 궁궐인 월성을 에워싸고 공격했어요. 열흘이 지나도 반란군은 힘이 꺾이지 않았지요. 더욱이 한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는 안 좋은 소문까지 떠돌았답니다. “큰 별이 떨어졌으니 여왕이 죽고 우리가 이길 거야.” 반란군은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어요. “이러다 정말 여왕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지는 게 아닐까?” 월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어요. '우리 군사들에게 힘을 줘야 할 텐데.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믿게 할 방법 을 찾아보자.’ 김유신은 짚으로 큰 허수아비를 만들었어요. 허수아비에 불씨를 넣어 연에 매달아 띄웠지요. 허수아비는 밤하늘 높이 올라가면서 불타올랐어요. 꼭 큰 별처럼 보였지요. “하늘에 큰 별이 다시 나타났다!” 성 안팎의 군사들은 불타는 허수아비를 보며 수군댔어요. “떨어진 큰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와! 하늘도 우리 여왕님 편이시다! 신라 만세!” 월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다시 힘을 냈어요. 이번에는 반란군이 어쩔 줄 몰라 했지요. 그 틈을 타 김유신은 성문을 열고 나가 반란군을 모두 무찔렀어요. 반란 중에 선덕 여왕이 돌아가자,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동생 진덕 여왕을 왕으로 받들었어요. 진덕 여왕은 반란군을 물리친 김유신에게 큰 상을 내렸어요. 삼국 통일을 향해. 진덕 여왕이 아이 없이 세상을 떠났어요.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에서 김춘추를 왕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김춘추는 진덕 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 무열왕에 올랐지요. 김유신은 태종 무열왕에게 말했어요. “전하, 때가 왔습니다!" "백제 의자왕은 잔치만 열고, 충성스러운 신하 성충을 옥에 가뒀답니다. 백제를 시작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전쟁을 끝내실 때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워낙 강한 나라라 걱정이 크오.” “당나라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당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삼국 통일을 이루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했어요.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오천 명의 백제 결사대와 맞섰어요.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요.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은 목숨을 걸고 싸웠지요. 신라군은 힘이 크게 떨어졌어요. 그러자 신라의 화랑 반굴과 관창이 앞장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요. 어린 화랑들의 죽음에 신라군은 용기를 내어 백제군에게 힘차게 뛰어갔어요. 쨍! 쨍! 황산벌은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어요. 계백 장군과 오천 명의 결사 대는 황산벌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어요. 김유신은 우렁차게 다시 외쳤어요. “신라가 이겼다! 자, 백제의 사비성으로 가자!”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에서도 이겨 마침내 백제는 항복했어요. 태종 무열왕이 세상을 떠나고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어요. 어느 날,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말했어요. “전하, 고구려 평양성을 치러 간 당나라군이 식량이 떨어져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식량을 전하고 고구려를 치겠습니다.” “좋소. 장군이 나선다면고 구려군도 꼼짝하지 못할 것이오.” 추운 겨울날, 김유신은 흰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다시 전쟁터로 나갔어요. 추위를 무릅쓰고 평양성에 가까이 갔을 때였어요. 당나라군이 고구려에게 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보장왕이 살아있는 한 고구려를 치긴 어렵겠어.’ 김유신은 군사를 돌려 신라로 돌아왔어요. 보장왕이 죽은 뒤,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쳤어요. 김유신은 먼저 눈을 감은 태종 무열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어요. ‘전하, 기뻐하십시오! 드디어 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당나라를 물리치다. 신라 사람들은 통일을 이룬 기쁨을 나누었어요. 하지만 김유신과 문무왕은 걱정이 컸지요. 당나라군이 고구려에 머물면서 신라 일에 자꾸 끼어들었거든요. “전하, 고구려와 백제 땅에 살던 백성이 당나라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몰아내겠습니다!” 김유신이 앞장서 신라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김유신이 병이 들고 말았어요. 김유신은 앓아누워서도 나라를 걱정했어요. “전하, 부디 당나라를 쫓아내고 완전한 삼국 통일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까이 하시어 이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려주십시오.” 얼마 뒤, 김유신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 마침내 신라가 당나라군을 모두 몰아냈어요. “와, 당나라군을 몰아냈다!” “만세! 신라 만세!” 삼국 통일로 우리 겨레는 한 나라 사람이 되었어요. 세 나라로 갈라져 싸우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바로 통일 신라 시대였지요. 김유신이 태종 무열왕과 함께 품었던 큰 꿈이 이루어진 거예요. 나라에서는 세상을 떠난 김유신에게 흥무대왕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어요. 김유신이 세웠던 공을 기리는 비석도 여러 곳에 세웠어요. 삼국 통일을 위해 싸움터를 누비고, 우리나라를 넘보는 당나라군에 맞서 싸운 김유신의 지혜와 용기는 우리 가슴에 빛나고 있답니다. 마침내 신라가 당나라군을 모두 몰아냈어요. “와, 당나라군을 몰아냈다!” “만세! 신라 만세!” 삼국 통일로 우리 겨레는 한 나라 사람이 되었어요. 세 나라로 갈라져 싸우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바로 통일 신라 시대였지요. 김유신이 태종 무열왕과 함께 품었던 큰 꿈이 이루어진 거예요. 나라에서는 세상을 떠난 김유신에게 흥무대왕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어요. 김유신이 세웠던 공을 기리는 비석도 여러 곳에 세웠어요. 삼국 통일을 위해 싸움터를 누비고, 우리나라를 넘보는 당나라군에 맞서 싸운 김유신의 지혜와 용기는 우리 가슴에 빛나고 있답니다. 김유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어요. 김유신은 용감하고 지혜로운 장군으로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볐어요. 그리고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와 고구려를 합해 삼국 통일을 이루었지요. 지금도 김유신의 발자취는 여러 곳에 남아 있어요. 김유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옛 신라의 향기를 느껴 보아요. 월성 터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신라 궁궐을 월성이라고 불러요.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반월성, 왕이 있던 성이라고 재성이라고도 하지요.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뒤 별궁인 임해전, 신라의 지도 모양을 닮은 연못 안압지, 첨성대 등을 지어 성을 점점 넓혔답니다. 신라 사람들은 남쪽에 있는 절벽과 월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인 해자를 이용해서 적을 막았어요. 지금은 옛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성안에 터가 많이 남아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석빙고는 1741년 이곳으로 옮겨진 거예요. 김유신이 태어난 곳 위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만노군 태수였어요. 만노군은 지금의 충북 진천이에요.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큰 담으로 둘러싸여서 ‘담안밭’이라고 불렸어요. 가까이 있는 만뢰산의 기운이 담안밭으로 모여 장군이 태어날 자리라고도 했지요. 담안밭 뒤에는 김유신의 탯줄이 묻혀 있다는 태령산이 있어요. 김유신이 말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와 연보정 이라는 우물도 널리 알려졌지요. 김유신의 묘.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은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송화산 중턱에 묻혔어요. 김유신의 묘는 왕릉 못지않게 크고 화려해요. 조각 솜씨가 뛰어난 십이지 신 상도 있지요. 김유신이 세상을 떠난 뒤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기려‘흥무대왕’으로 지위를 올렸어요. 흥무대왕이란 ‘무공을 일으킨 큰 왕’이라는 뜻이랍니다. 천관의 전설이 전해지는 천관사 터.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동쪽 도당산 기슭. 김유신은 사랑한 여인 천관을 기리려고 천관사라는 절을 세웠어요. 절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서 절이 얼마나 컸는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탑의 흔적과 주춧돌 등으로 이곳이 천관사가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답니다. 김유신의 집에 있던 우물, 재매정.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김유신의 집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어요. 이 우물이 바로 재매정이에요. 전쟁터에서 돌아온 김유신이 재매정 물맛을 보고 가족이 잘 지낼 것이라며 마음을 놓고 다시 전쟁터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재매정은 화강암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 올렸어요. 그리고 맨 위에 기역자 모양의 돌 두 개를 짜 맞추어 정사각형으로 짜임새 있게 만들었어요. 화랑이 몸과 마음을 닦던 수련터, 단석산.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은 경주 가까이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에요. 신라 화랑이 몸과 마음을 닦던 수련터로 널리 알려졌지요. 특히 단석산 신선암에는 김유신이 나오는 전설이 전해져요. 바위 굴에서 무예를 닦던 김유신이 한 노인에게 칼을 얻었어요. 김유신이 그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고 해서 ‘단석산’이라 불러요. 신선암은 큰 암벽이 디귿자로 솟은 석굴 사원이에요. 암벽에 새겨진 국보 199호 마애 불상이 많이 알려졌답니다. |
왕건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먼 옛날 우리나라는 세 나라로 갈라져 있었어요. 서로 미워하고 싸움이 끊이지를 않았지요. 왕건은 골똘히 생각했어요. ‘우리는 한겨레인데 왜 서로를 미워하는 걸까?’ 왕건은 모두가 싸우지 않고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결국 꿈을 이루었어요. 왕의 자리에 올라, 여러 나라로 갈라진 우리나라를 하나로 모았어요. 그런데 왕건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한데 모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마음 때문이에요. 언제나 남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뿔뿔이 흩어진 삼국을 하나로 만들었지요. 지금 우리는 왕건의 큰 꿈으로 사이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답니다. 송악이 낳은 큰사람. 때는 신라 시대였어요. 송악을 다스리는 왕륭의 집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왕륭 부부는 기뻐하며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었어요. 왕건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신라는 진성 여왕 시대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러웠어요. 사람들은 왕륭의 집에 모여 나라 걱정을 했지요. “고구려와 백제를 쳐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입니다." "그런데 귀족은 자기 욕심만 챙기고 백성을 괴롭히니 어쩌면 좋습니까!” “나라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어요.” “어떤 귀족은 상인과 짜고 백성을 외국에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왕륭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기도했어요. ‘아, 하늘이시여! 제 아들 왕건이 어지러운 세상을 이끄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십시오.” 왕건은 덩치가 우람하고 참 똑똑했어요. 아이들은 왕건을 잘 따랐지요. 하루는 어린 종이 함께 놀고 싶어 왕건 곁으로 다가왔어요. 왕건과 함께 있던 아이가 종에게 침을 뱉었어요. “퉤! 종놈 주제에 어디를 기웃거려?” 하지만 왕건은 종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손을 잡았어요. “우리와 같이 놀고 싶은 거지? 자, 어서 이리와.”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졌어요. “어, 신분이 높은 왕건이 종을 친구처럼 대하잖아?” “우리가 너무 못되게 굴었어. 반성해야겠다.” 아이들은 왕건의 착한 마음씨를 본받으려고 했어요. 후고구려의 왕, 궁예를 따르다. 왕건이 자라는 동안 신라는 더욱 어지러워졌어요. 신라 사람은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을 차별했어요.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은 불만에 가득 찼지요. “신라를 뒤엎고 다시 고구려를 세우자!” “백제 사람끼리 새로운 백제를 만들자!”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강원도 지방에서는 궁예가 힘을 키워 가고 있었지요. ‘아,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의젓하게 자란 왕건은 아버지의 고민을 알아차렸어요. “아버님! 송악 백성을 위해서 궁예를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륭은 왕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왕건과 함께 궁예를 만나러 떠났어요. “궁예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제 아들 왕건을 전하의 신하로 삼아 주십시오.” 궁예는 날카로운 눈으로 왕건을 살펴보다가 말했어요. “저기 보이는 소나무의 솔방울을 맞춰 떨어트리면 내 신하로 삼겠다.” 왕건은 숨을 고르고, 멀리 있는 솔방울을 바라보며 활을 겨누었어요. 핑!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솔방울을 딱 꿰뚫었어요. 모두 왕건의 활 솜씨를 크게 칭찬했어요.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궁예였지요. “좋다! 그대를 내 신하로 받아들이겠다. 죽을 때까지 나에게 충성하라.” 이렇게 왕건은 궁예의 신하가 되었어요. 후고구려를 위해 싸우다. 왕건은 후고구려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어요. 병법에도 아주 뛰어났지요. 궁예는 왕건을 무척 아꼈어요. 어느 날 왕건은 궁예에게 말했어요. “전하! 우리도 수군이 필요합니다.” 신하들은 어리둥절해 왕건에게 물었어요. “신라와 후백제는 산길로 쳐들어오고, 우리도 산길로 공격하오. 그런데 무슨 수군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바로 그래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후백제와 신라는 늘 우리가 산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생각을 뒤엎자는 것이지요. 바닷길로 다른 나라를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왕건의 말에 궁예는 무릎을 탁 쳤어요. “왕건의 말이 옳다! 어서 수군을 만들도록 하라.” 궁예의 명령에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로 출발했어요. “영차, 영차!” 군사들은 힘껏 노를 저었어요. 바다를 건너 마침내 나주에 도착했지요. 후고구려군은 재빨리 후백제를 공격했어요. 후백제군이 몰려왔지만, 왕건은 끄떡도 하지 않았지요. “승리는 우리 것이다! 용기를 내어 다 같이 공격!” 왕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후고구려군은 용기를 냈어요. 그리고 후백제군을 향해 불화살을 쏘았어요. 결국 후백제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답니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 후고구려 군사들은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어요. 왕건은 힘을 내어 전라도 여러 곳을 차지했어요. 후백제의 견훤은 화가 많이 났어요. “후삼국을 통일할 영웅은 바로 나다. 애송이 왕건이 감히 내 땅을 빼앗다니!” 견훤은 왕건이 이끄는 후고구려군을 막으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씩씩한 후고구려군에게 밀리고 말았지요. 후고구려 군사들은 한껏 웃으며 승리를 기뻐했어요. “왕건 장군님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어! 장군님은 참 따뜻하셔. 아무리 낮은 군사라고 해도 다정하게 챙기시잖아.” “어디 그뿐인가! 전쟁터에서 늘 앞장서시니 우리도 힘이 부쩍 나.” 군사들은 왕건을 누구보다 믿고 따랐어요. 궁예도 왕건을 칭찬하며 높은 벼슬을 내렸답니다. “그대의 노력으로 후고구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대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를 영원히 빛나게 하라!” 고려를 세워 백성을 위하다. 백성은 궁예보다 왕건을 더 좋아했어요. 궁예는 질투심에 왕건을 의심했어요. ‘왕건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를 죽일지 몰라.’ 하루는 궁예가 왕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나는 미륵불이라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네 마음을 읽어 보니 나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는구나.” 왕건은 기가 막혔어요. “전하! 소인은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신하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트렸어요. 최응은 붓을 주우며 살짝 왕건에게 속삭였어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안 그러면 목숨을 잃습니다.” 그제야 왕건은 무릎을 꿇었어요. “황공합니다, 전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궁예는 비죽거리며 말했어요. “그래. 네가 잘못을 뉘우치니 용서해 주마.” 궁예는 걸핏하면 누군가 자기를 없애려 한다며 누명을 씌워 신하들 목숨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백성까지 못살게 굴었지요. “나는 미륵불이다!" "미륵불에게 어울리는 궁궐이 필요해. 어서 궁궐을 새로 지어라.” 백성은 허리가 휘었어요. 세금도 많이 내고, 궁궐을 짓는 데 억지로 끌려갔지요. 어느 날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왔어요. “이제 궁예는 백성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백성은 왕건 장군님을 새 임금으로 모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왕건은 고개를 저었어요. “나는 궁예 전하의 신하로 살았소." "절대 전하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소.” 그때 왕건의 아내가 왕건에게 갑옷을 건넸어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대장부의 도리입니다." "백성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이니 어서 갑옷을 입으세요." 왕건은 마음이 무거웠어요. '왕으로 모신 분을 내 손으로 내쫓아야 하다니!' '하지만 백성을 힘들게 하는 왕을 모시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다. 그래, 백성을 위해서 이 짐을 달게 받겠다.’ 왕건은 힘차게 궁궐로 달려갔어요. 궁예는 왕건과 신하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파르르 성을 냈어요. "여봐라! 왕건을 죽여라!" 하지만 궁궐은 텅 비어 있었어요. 모두 왕건의 군사가 되어 궁예를 떠났던 거예요. 궁예는 신하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가다가 비참하게 눈을 감았어요.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짓고 송악을 도읍으로 정했어요. 왕건은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지었지요. 왕건은 왕이 되자마자 백성을 위하는 법을 펼쳤어요. 백성이 세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풀어 주었지요. 백성은 얼굴이 활짝 폈어요. “우리 임금님은 백성을 사랑하는 분이야." "난 우리 임금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왕건의 이름은 후백제와 신라까지 널리 널리 퍼졌어요. “아! 우리가 고려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후백제와 신라의 백성은 고려를 참 부러워했어요.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려가 힘을 키울수록 후백제의 견훤은 애가 탔어요. ‘고려를 치기 전에 먼저 힘없는 신라를 치자.’ 후백제군은 신라로 쳐들어가 경애왕의 목숨을 빼앗았어요. 왕건은 동맹국 신라를 도우려고 고려군을 이끌고 신라로 향했어요. 후백제군은 공산에 숨어 있다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어요. 그리고 얼른 달아났지요.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뒤쫓아 골짜기 깊숙이까지 갔어요. "고려를 쳐라!" "왕건을 죽여라!" 바로 그때, 산속에 숨어 있던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덮쳤어요.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유인했던 거예요. 왕건이 위험해지자 신하 신숭겸이 말했어요. “전하, 제 옷을 입고 어서 피하십시오!” 왕건은 신숭겸이 걱정되었지만, 고려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왕건과 신숭겸은 옷을 바꿔 입었지요. 신숭겸은 후백제군과 용감히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쓰디쓴 눈물을 삼켰어요. ‘견훤!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다. 충신 신숭겸의 피를 절대로 헛되이 하지 않겠다.’ 이 싸움이 바로 ‘공산 전투’랍니다. 견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공산 전투에서는 우리 후백제가 이겼지만, 고려를 계속 밀어붙여야 해.’ 왕건 또한 후백제군을 무찌르려고 벼르고 있었지요. 드디어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고창에서 맞붙었어요. “견훤,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고려군은 들어라!" "고려의 용기를 보여 줄 때가 왔다. 다 같이 앞으로!”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어요. 이 싸움을 ‘고창 전투’라고 하지요. 이번에는 고려군이 훨씬 잘 싸웠어요. 고려군은 산에서 하는 싸움에 강했거든요. 고려군은 달아나는 척하면서 후백제군을 골짜기로 끌어들였어요. 그리고 숨어 있다가 화살을 쏘았지요. 후백제군은 허우적대다가 크게 졌어요. 고려는 고창 전투에서 이겨 후삼국 통일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답니다. 후백제 백성은 고창 전투에서 진 뒤로 견훤을 잘 따르지 않았어요. 게다가 견훤은 어이없게 아들 신검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겼어요. 위험에 빠진 견훤이 찾아오자 왕건은 따뜻하게 맞았어요. “한때는 서로 싸우던 사이였지만 다 용서했습니다. 부디 고려에서 편히 지내십시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어려운 결심을 했어요. ‘왕건이라면 신라의 백성을 잘 돌볼 것이다.’ 경순왕은 왕건에게 기꺼이 항복했어요. 왕건은 후삼국 통일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지요.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뿐이다!” 왕건은 신검이 다스리는 후백제를 쳐서 항복을 받았어요. 드디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으로 이름을 떨쳤어요.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 북쪽으로 땅을 넓히려고 애썼어요.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다. 우리도 고구려처럼 북쪽의 드넓은 땅으로 나아가야 한다!” 왕건은 고려의 땅을 더욱 넓혔어요. 그리고 나라를 잃은 발해 백성까지 모두 받아들였지요. 또한 왕건은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상업이 발전하면 백성이 더 잘살 수 있다.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우리 고려 물건을 사게 만들겠다.’ 왕건은 상인이 안전하게 장사할 수 있게 보호했어요. 덕분에 고려 상인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장사할 수 있었지요. 고려는 더욱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어요. 왕건은 고려, 후백제, 신라가 사이좋게 살기를 바랐어요. 모두가 서로 미워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나라를 꿈꾸었지요. 숨을 거두기 전,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겨 다음 왕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부탁했어요. 왕건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할 일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역사에 빛나는 통일 영웅으로 남아있답니다. 찬란한 역사, 고려의 문화.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웠어요. 왕건은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지요. 왕건의 노력으로 고려는 편안해지고 문화도 발전했어요. 특히 불교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지요. 왕건이 세운 고려는 어떤 문화를 가진 나라였는지 함께 알아볼까요? 위대한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몽고가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부처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치려고 만들었어요.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 목판 인쇄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보여 주고 있어요. 또한 8만 장이 넘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변함없이 깨끗하게 지켜 세계에서 인정받았어요.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장경각은 국제기구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정했답니다. 몽고의 영향을 받은 고려 문화. 몽고에서 들어온 말도 많이 퍼졌지요. 이것을 ‘몽고풍’이라고 해요. 또한 고려 사람이 몽고로 건너가 고려 문화를 퍼트리기도 했어요. 몽고에 전해진 고려의 옷과 음식 등은‘고려양’이라고 부르지요. 우리의 전통 혼례에서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를 찍는 풍습과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금줄을 매는 것은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랍니다. 고려의 불화. 고려 시대에 온 국민은 불교를 믿었어요. 그래서 불교의 예술 작품이나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지요. 특히 불교 그림인 ‘불화’는 고려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할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고려 시대의 불화는 빈 곳의 아름다움과 넘치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어요. 또한 다른 시대의 불화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어요. 고려의 자랑거리,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세계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해요. 처음에는 우리나라 기술자가 중국에서 청자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왔어요. |
이성계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이랴, 이랴!” 이성계가 말을 세차게 몰았어요. 활시위는 이미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지요. 그 앞에는 적의 장수가 자기 힘을 뽐내며 서 있었어요.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감싸서 쏠 곳이 없잖아. 그렇지! 투구 꼭지를 맞혀야겠다.' '투구가 떨어질 때를 노리는 거야.’ 이성계가 화살을 힘껏 쏘았어요. 화살은 곧장 날아가 투구 꼭지를 맞혔어요. 적의 장수는 투구 끈이 떨어져 기울어지자 얼른 투구를 바로 고쳐 썼어요. 이성계는 또 다시 화살을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지요. 이번에는 투구가 땅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결국 적의 장수는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고, 이성계는 싸움에서 이겼답니다. 이처럼 이성계는 용감했고, 지혜가 뛰어났어요. 그래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500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조선’은 이성계가 세웠어요. 영웅처럼 나타나 새 나라를 연 이성계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아요. 어릴 때부터 활을 잘쏘다. 이성계는 1335년, 화주에서 태어났어요. 그때에 화주는 원나라 땅이었지요. "에후, 원나라 관리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우리를 괴롭히기만 하니." 화주에 사는 백성들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어요. 더욱이 원나라 도둑들이 마구 쳐들어왔지요. “이렇게 살기 어려워서야, 원. 모두 굶어 죽겠어.” “맞아. 어서 다른 데로 이사를 가자고!”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어요. 이 모습을 바라 보는 어린 이성계의 마음도 아팠답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양반으로 뿌리박고 살았어요. 그런데 못된 관리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고조할아버지 때 삼척으로 이사를 갔지요. 그 뒤 원나라 땅으로 또 옮겨 갔답니다. 어느 날, 이성계의 집 담 위에 까마귀 다섯 마리가 날아와 앉았어요. 어머니는 까마귀를 보며 이성계에게 말했어요. "마치 원나라 도둑 떼 같구나." "성계야! 네가 저 까마귀들을 맞혀보겠니?” “어머니, 몇 마리나 맞힐까요?” 이성계는한번에 여러 마리를 맞힐 자신이 있었어요. “다섯 마리를 다 맞힐 수 있겠니?” “네! 잘 보세요.” 이성계가 쏜 화살이 핑 날아가더니 까마귀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맞혔어요. “오, 너는 하늘이 내린 신궁이구나!” 어머니는 이성계를 바라보며 칭찬했어요. 신궁 귀신 같은 활이라는 뜻으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나 그 활을 이름. 이성계는 자주 말을 타고 다니며 무예를 닦았어요. 하루는 이성계가 아끼는 말에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저쪽 산으로 화살을 쏠 테니 너는 화살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라야 해." "그렇지 않으면 느림보인 너를 살려 두지 않겠어.” 이성계는 활을 힘껏 쏘았어요. 동시에 이성계를 태운 말도 아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지요. 산언덕까지 쉬지 않고 달렸어요. 그런데 이미 소나무에 화살이 꽂혀 있었어요. “네 이놈! 지금껏 너를 아꼈지만 이제는 할 수 없구나.”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말을 죽였어요. 그때였어요. 핑, 딱! 화살이 날아와 소나무에 꽂혔어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성계가 쏜 화살이었지요. 깜짝 놀란 이성계가 소나무에 박혀 있던 화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어제 쏜 화살이었어요. “오, 내가 죄 없는 너를 죽이다니.” 이성계는 수년 동안 함께해 온 말을 너무 쉽게 죽인 걸 뉘우쳤어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요. 지구별 사전. 뒷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성계는 말의 죽음을 슬퍼하고, 말을 타고 달리던 곳을 기념하려고 말이 죽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웠어요. 그곳을 ‘치마대’라고 한답니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꼬끼오! 1356년, 고려의 임금인 공민왕은 그동안 원나라의 다스림을 받아 왔던 동북 지방을 되찾기로 마음먹었어요. 원나라 조정에 다툼이 생겨 세력이 약해진 틈을 노린 것이지요. “잃었던 우리 땅을 되찾을 때가 왔다!” 유인우는 공민왕의 명령을 받아 고려군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나아갔어요. 이때 이성계와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로 돌아 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자춘은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되찾을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 주었어요. 고려는 이자춘 덕분에 동북 지방을 고려땅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공이 큰 이자춘에게 동북면 병마사의 벼슬을 내리노라!”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큰 벼슬을 내렸어요. 그런데 이자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들 이성계가그 벼슬을 이어받았지요. 조정, 임금과 신하가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는 곳. 쌍성총관부, 원나라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인 화주 이북을 다스리려고 둔 관아. 그러던 어느 날, 이성계는 낮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어요. ‘세상에! 내가 꿈속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꼬끼오!’ 하고 울다니. 이게 무슨 꿈일까?’ 이성계는 궁금해서 무학 대사를 찾아갔어요. 꿈 이야기를 듣던 무학 대사는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장군님은 앞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셨다면, 그건 임금 왕 자이옵니다. 그리고 ‘꼬끼오’를 한자로 쓰면 고귀위이지요." "그러니까 장군님은 앞으로 가장 높고 귀한 분이 되실 것이옵니다.” “쉿! 이 꿈 풀이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시오.” 이성계는 이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어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장군. 이성계는 동북면을 다스리며 많은 부하를 거느렸어요. 이성계는 자기 부하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힌 다른 나라의 병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요. 이성계 군대가 여진족 무리를 만나 싸웠을 때였어요. 싸움은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가 이겼고, 여진족 세 명을 포로로 붙잡았지요.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포로들에게 다가갔어요.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여기 다친 병사를 돌보아 주어라.” 포로들은 무척 놀랐어요. 자기들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으니까요. “장군님!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장군님께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이성계는 허허 웃어 보이고는 “그래, 좋은 일이지.” 하며 포로들을 새로운 부하로 삼았어요. 그렇게 이성계는 가는 곳마다 부하를 늘려 갔답니다. 이성계는 나라의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동해안으로 갔어요. 바닷가 마을은 왜구가 자꾸 쳐들어와 엉망이었어요. 이성계는 백성이 가여워서 군대에게 힘차게 외쳤지요. “왜구를 모두 몰아내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왜구를 크게 무찔렀어요. “장군님! 이곳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랍니다. 천막 기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좀 베어 왔습니다.” 한 부하가 이성계에게 말했어요. “뭐라? 대나무를 막 베었단 말이냐? 네 이놈! 이 대나무는 모두 백성의 것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이성계는 어디를 가든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오히려 백성을 힘써 도우려고 했지요. “가자! 이 나라에서 원나라 군사와 홍건적을 몰아내야한다!” 이성계는 날이 갈수록 뛰어난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어요. 친명파와 친원파가 맞서다. 그때 중국 땅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 벌어졌어요. 그러다가 힘이 센 명나라가 일어났지요. 그래서 중국 땅에서는 새로 일어난 명나라와 기운이 거의 다한 원나라가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고려 조정에서도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자는 친원파와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자는 친명파로 갈려 싸웠답니다. “명나라가 우리더러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했소. 그게 말이나 되오?” “하지만 명나라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아니오. 차라리 우리가 명나라를 치러 갑시다.”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 장군은 원나라 편을 들었어요. 우왕도 마찬가지였지요. 최영 장군은 이성계를 불러 명령을 내렸어요. “이성계 장군,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쳐들어가 주시오!” 요동은 명나라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곳이었어요. “하오나 힘이 센 명나라로 쳐들어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뭐라고? 이건 어명이오! 어서 요동으로 쳐들어가시오!” 친명파였던 이성계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향했지요. 요동으로 가는 길에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졌어요. 군사들은 벌써 지쳤고, 떼를 지어 도망치기도 했지요. 이성계의 군대는 압록강 아래쪽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이렇게 군사들 사기가 떨어져서야, 원!’ 이성계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 갔어요. 이성계는 함께 갔던 조민수 장군과 고민을 나누었지요. “우리가 요동으로 쳐들어간다면 오히려 명나라 군대가 고려로 쳐들어와 나라를 어렵게 할 것이오. 그렇다고 이대로 되돌아가면 역적이나 다름없으니.” 군대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계속 위화도에 머물렀어요. 이성계는 할 수 없이 우왕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편지를 읽은 우왕과 최영 장군은 크게 화를 냈어요. “어허, 다시 돌아오는 걸 허락해 달라고?” “마마, 허락지 마시옵소서. 명나라로 쳐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사옵니다.” 우왕은 편지를 가지고 온 이성계의 부하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그리고 답장도 보내지 않았지요.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다. 왕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자 이성계는 군대를 향해 크게 외쳤어요. “나의 군사들이여! 지금 명나라로 쳐들어가는 건 옳지 않으니 어서 말 머리를 돌려라! 고려 궁궐로 돌아가자!” “와! 와!” 군사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소리 높여 외쳤어요.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거예요. 이성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궁궐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최영 장군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군사를 모았지요. “이를 어째! 이를 어찌하면 좋소!” 우왕은 신하들 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어요. 이성계는 궁궐을 앞에 두고 군사들에게 명령했어요. “자, 가자! 궁궐로 들어가자!” 이성계의 군대는 엄청난 싸움을 치룬 끝에 궁궐을 차지했답니다. 그리고 친원파를 궁궐에서 모두 몰아냈지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성공하면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어요.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를 모아라!” “예, 알겠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과 같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나랏일을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우왕을 물러나게 하고는 새로운 임금으로 창왕을 세웠어요. 그런데 이때에는 왜구가 늘 골칫거리였어요. 아무 때나 바닷가 마을로 쳐들어와 도둑질을 일삼았거든요. “우리 백성들은 계속 왜구에게 당하기만 하는데, 나라에서는 대체 뭐하는거야!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나라를 탓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이성계는 왜구를 뿌리 뽑아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서 정벌군을 보내라. 못된 왜구를 가만두지 않겠노라!” 얼마 뒤, 군사들이 남해안에 모였어요. 박위 장군을 앞세운 고려의 배 100여 척이 바다를 건너갔지요. 고려 군대가 곧바로 쳐들어간 곳은 쓰시마 섬이었답니다. “이곳을 아예 우리 땅으로 만들자!” 고려 군대는 왜구를 물리치고, 쓰시마 섬까지 차지했어요. 이성계는 쓰시마 섬을 차지한 뒤, 더 큰 힘을 얻었어요. “우왕과 창왕은 왕가의 자손이 아닙니다. 다른 왕을 세워야 합니다.” 결국 창왕 또한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어요. 그 뒤로 공양왕이 세워졌지요. 이성계는 능력이 모자란 공양왕을 대신하여 여러 정책을 직접 펼쳐 나갔어요. “못된 권문세족들의 땅을 모두 빼앗아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성계는 가장 먼저 토지 제도를 새롭게 바꾸었어요. “와, 우리에게도 땅이 생기다니!” “이성계 장군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백성들 사이에서 이성계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만 갔지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다.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큰 꿈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더욱이 길거리마다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요. “이 씨가 나라를 얻을 것이다!” “고려는 망하고, 새 나라가 들어설 것이다!” 이성계를 따르는 신하들은 새로운 나라를 반대하는 무리를 설득해 나갔어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도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하여 설득하려 했지요. 하지만 고려 왕실에 충성하는 신하들이 꽤 많았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고려의 신하들은 모두 이성계 편으로 바뀌었어요. 신하들은 이성계에게 엎드리며 말했지요. “부디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어 새 나라를 열어 주소서!” 1392년, 신하들은 모두 한목소리를 냈어요. “능력이 없는 고려의 왕을 몰아내야 하옵니다.” “이제는 이성계 장군님께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셔야 하옵니다.” 마침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쫓겨났어요. 그리고 최고 권력자인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았지요. 이렇게 이성계는 새 나라의 첫 임금이 되었어요.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과 함께 새 나라를 다스려 나갈 좋은 정책들을 마련했어요. 그리고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정신과 뜻을 이어 나간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지었지요. ‘이제는 도읍지를 옮겨 보자.’ 이성계는 계룡산 아래를 도읍지로 정하고 궁궐 공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계룡산은 비좁아 많은 사람이 살기 어렵고, 땅도 기름지지 못했어요. 또 교통이 불편했지요. 이성계는 궁궐 공사를 멈추었어요. 그러고는 무학 대사를 불렀어요. “무학 대사, 이제 도읍지를 어디로 삼는 게 좋겠소?” “한양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그리하라!” 이리하여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자리 잡았어요. 이성계는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러 정책을 내놓았어요.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노라!” 이성계는 나라 안에 유교를 널리 권했어요. 그리고 농사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또, 주변 여러 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었지요. 이성계는 그동안 자기를 도와 많은 일을 했던 정도전을 불러서 말했어요. “어서 오시오. 이제 나라의 법을 마련해야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대가 여러 학자들과 뜻을 모아서 이 일을 시작해 주시오.” 그래서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이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조선 왕조 500년 역사가 문을 열었어요. 군인에서 정치가로, 정치가에서 최고의 자리인 임금의 자리까지 오른 이성계! 영웅으로서의 모습은 조선 역사 첫자리에 영원히 남아 있답니다. 이성계가 세운 새 나라 ‘조선’. 고려는 후기로 갈수록 나라가 어지러워졌어요. 안으로는 권문세족들이 땅을 많이 차지하며 제멋대로 굴었고, 밖으로는 여진족, 왜구, 홍건적 등이 계속해서 쳐들어왔지요. 이성계는 다른 나라와 싸워 이기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키워 갔어요.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성공하면서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답니다. 이성계가 세운 새 나라 ‘조선’을 좀 더 알아볼까요? 조선의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에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고 도읍지를 옮기기로 했어요. 이성계는 한강이 굽이굽이 감돌며 지나가는,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했어요. 한양은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게다가 산과 강이 있어 아름답고, 한강 뱃길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물건을 나르기에 좋았지요. 이성계는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뒤, 사대문(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과 사소문(북동쪽의 홍화문인 동소문, 남동쪽의 광희문인 남소문, 남서쪽의 소덕문인 서소문, 북서쪽의 창의문인 북소문)을 세웠답니다. 조선의 건국 정책. 문화 정책 억불숭유. 고려 말기에 절은 땅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세금도 내지 않고, 법을 어기며 노비를 많이 거느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이성계는 유교를 정치와 문화의 기본 정신으로 삼아 중요하게 여기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폈어요. 그래서 조선에서는 유학을 가르치는 성균관과 향교가 많이 세워졌고, 교육 제도나 풍습도 유교 것을 많이 따랐지요. 외교 정책 사대교린. 이성계는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화목하게 지내는 정책을 폈어요. 그러니까 큰 나라였던 명나라는 섬기면서 경제와 문화에서 도움을 받으려 했고, 왜구와 여진족은 으르고 달래면서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지요. 이성계는 왜구가 사는 쓰시마 섬을 치면서도 우리나라 항구에 왜구가 드나들 수 있게 해 주었어요. 또, 여진족은 압록강 밖으로 쫓아내면서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요. 모두 조선을 평화롭게 하려는 정책이었답니다. 경제 정책 농본민생. 이성계는 농업을 나라 살림의 밑바탕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농민의 지위가 고려 시대보다 좋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졌어요.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정책은 조선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었어요. 이성계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인재를 찾는 사냥꾼 헤드헌터. 새로운 인재를 기용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알맞은 인재를 찾아내는 헤드헌터와 어울려요. 헤드헌터는 어떤 사람인가요? 헤드헌터는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인재를 찾아서 그 사람을 기업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기업이 원하는 인력 선정에서부터 평가, 알선까지 여러 단계의 조사 과정을 거쳐 알맞은 인재를 소개시켜 주지요. 헤드헌터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요? 특별히 해야 할 공부나 과목은 없어요. 하지만 각 분야에 따른 풍부한 전문 지식과 실무 경험을 갖추어야 해요. 단지 기업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헤드헌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헤드헌터 일을 훌륭하게 해내려면 능력을 갖춘 사람을 발굴하려는 관심과 노력, 끈기가 필요해요. 좋은 인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하고, 오랫동안 관심 있게 지켜 보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외국인을 상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외국어 능력도 갖추고 있으면 좋아요. 헤드헌터가 되고 싶은 어린이에게. 헤드헌터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므로 넓은 인간관계가 중요한 직업이에요. 그러므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자세가 필요해요. 뿐만 아니라 인재를 필요로 하는 여러 회사에서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야 해요. 그래야 그 회사에 맞는 인재를 더 정확하게 찾아 줄 수 있지요. 그러니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많이 읽고, 신문이나 뉴스를 열심히 챙겨보세요. 인재를 찾으려는 회사와 그 관련 분야의 경험을 쌓으면 더욱 좋아요. |
명성 황후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명성 황후가 건청궁 뜰을 거닐고 있어요. 건청궁은 고종이 경복궁 향원정 북쪽에 지었어요. 궁궐 안은 참 조용해요. 하지만 마음 속이 시끄러워 잠이 오지 않아요. 명성 황후는 열여섯 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어요. 조선의 국모가 된 거예요. 하지만 나라는 안팎으로 시끄럽기만 했어요.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를 넘보는데, 신하들은 아무도 든든한 힘이 되지 않았어요. 명성 황후는 고종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바지런히 도왔답니다.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귀를 기울여 슬기와 지혜를 떨쳤지요. 명성 황후는 오늘 밤도 애가 탑니다. 하지만 조용하고 맑은 얼굴에 의지가 서리지요.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말이에요.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1866년 프랑스 로즈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외쳤어요. “너희가 죽인 우리 나라 선교사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하지만 조선군은 대포를 쏘며 맞서 싸워 프랑스 군을 물리쳤어요. 그때 조선의 임금은 고종이었어요. 하지만 고종이 어려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대신 나랏일을 했어요. 흥선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을 널리 알렸어요. 얼마 뒤, 미국 장삿배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나타나 통상을 맺자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거절하자 미국 사람은 평양 백성을 괴롭혔어요. 평양 백성은 들고일어나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지요. 서양의 여러 나라는 자꾸만 우리나라 앞바다에 몰려왔어요. 조선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신세였어요. 지구별 사전. 서양 여러 나라는 앞 다투어 커다란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와 통상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흥선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닫고 서양을 물리쳐야 한다는 ‘쇄국 정책’을 펴면서,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금지했어요. 그런데 프랑스 선교사가 이를 어기고 활동하다가 목숨을 잃은 거예요. 어느 날, 흥선 대원군이 부인에게 물었어요. “부인, 전하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니 결혼할 때가 되었어요. 신붓감으로 어느 집안 딸이 좋겠습니까?” “저희 집안 민치록의 딸이 어떨까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지만 밝고 똑똑한 아이랍니다.” 흥선 대원군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어요. “아, 그 아이가 좋겠습니다! 친척이 별로 없으니, 그동안 왕비의 친척처럼 나라를 어지럽힐 일도 없겠지요.” 민치록의 딸은 자기가 왕비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잘살고 힘이 있는 집안에서만 왕비를 뽑더니, 이번에는 왜 나를 왕비로 선택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풀었지요. ‘궁궐 안은 어떤 곳일까? 임금님은 어떤 분일까? 사람도 많고 신기한 일도 많을 거야!’ 지구별 사전. 고종이 왕이 되기 전, 수십 년 동안 왕비의 친척인 외척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렸어요. 흥선 대원군은 왕의 힘을 다시 강하게 만들려고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조선의 국모가 되다. 가례를 올리는 날, 민치록의 딸은 곱고 아름다운 수가 놓인 옷을 입었어요. 머리에는 무거운 장식을 올려 한 걸음 딛기도 힘들었지요. ‘후, 너무 떨려. 하지만 자신감을 가지자. 오늘부터 나는 조선의 국모니까!’ 운현궁 마당에는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가례는 어렵고 길었지만, 민치록의 딸은 잘 참았어요. 그리고 가례를 마친 뒤, 왕비의 자리에 올랐답니다. “마마, 아침저녁으로 어른들께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왕비는 궁궐에서 지켜야 하는 예절과 왕비가 할 일을 하나하나 열심히 익혔어요. 이 왕비가 바로 명성 황후예요. 명성 황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궁궐 안은 참 조용했어요. 명성 황후는 고종을 만나기도 힘들었어요. 고종은 나랏일로 바빴지요. 신하들도 끼리끼리 다니고, 명성 황후는 외로웠어요. 시간이 흘러 자기가 왜 왕비로 뽑혔는지 알았을 때는 한숨이 나왔지요. ‘아, 내가 부모도 친척도 거의 없다고 왕비로 뽑혔다니!’ 하지만 명성 황후는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나는 조선의 국모야. 마냥 외롭다고 할 게 아니라 나라를 돌보아야 해. 나랏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두자.’ 나라 안은 시끄러웠어요. 흥선 대원군은 임금의 힘을 내세우려고 경복궁을 새로 짓고 있었어요. 나라에 돈이 모자라 세금을 자꾸 거두고, 새 화폐 당백전까지 만들었지요. 물가는 껑충 뛰어올랐어요. 게다가 백성에게 경복궁을 짓게 해 백성의 울음소리는 높아만 갔어요. ‘나라 밖에서는 서양이 자꾸 들어오려고 하는데, 나라 안까지 어지러우니 큰일이구나.’ 명성 황후는 나랏일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폈어요. 지구별 사전.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어요. 경복궁은 큰 궁궐이라 다시 짓는 데 돈이 많이 들었지요. 이 무렵, 프랑스 군과 전쟁을 치르느라 나라의 돈은 더 모자랐어요. 큰불이 나서 모아 둔 나무가 불에 다 타기도 했지요. 흥선 대원군은 백성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백성은 점점 힘에 겨웠어요. 어느덧 명성 황후와 고종은 어엿한 젊은이로 자랐어요. 명성 황후는 나랏일에 더욱 밝아졌지요. “중전 마마, 미국 군함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흥선 대원군께서 크게 화를 내시며 받아들이지 말고, 싸워 물리치라 하셨습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가 통상을 하자고 찾아오고 있다. 청나라와 일본도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문을 닫고 뒤처져서 되겠느냐.” 명성 황후는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러웠어요. 하지만 흥선 대원군은 서양을 멀리하고 싸우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답니다. 지구별 사전. 서양의 여러 나라는 기계와 옷감을 많이 만들어 아시아로 몰려왔어요. 겉으로는 서로 장사를 하고 문화를 나누면 이익이 생긴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식민지로 만들어 물건을 비싸게 팔고 원료는 값싸게 사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늘리려는 속셈이었지요. 얼마 뒤, 흥선 대원군이 명령을 내렸어요. “서원은 재산을 늘리고 백성을 괴롭혀 왔다. 나라에 있는 서원을 모두 없애라!” 흥선 대원군은 서원에 준 땅을 돌려받아 나라를 잘살고 강하게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신하와 선비가 들고일어났어요. “서원을 없애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몇몇 서원을 빼고 서원 문을 닫았어요. 명성 황후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전하의 나이 스물이 넘었는데, 흥선 대원군께서는 물러나지 않고, 나라 안팎을 어지럽게 하시는구나. 이제는 전하께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셔야 해.’ 명성 황후는 최익현에게 흥선 대원군이 물러 나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했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흥선 대원군을 탓했지요. 결국 흥선 대원군은 나랏일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어요. 지구별 사전. 서원은 선비가 공부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서원에 세금을 안 내도 좋다고 허락했어요. 하지만 서원은 세금을 안 내는 점을 이용해 땅을 넓히고, 백성을 괴롭히면서 정치 싸움에 앞장섰어요. 흥선 대원군은 서원을 없애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던 거예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다. 명성 황후는 고종에게 나랏일을 돌보는 데 필요한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고종도 명성 황후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여러 가지를 물었지요. “일본이 군함 수십 척을 보내 우리 조선군을 공격했소. 일본 무기가 훨씬 뛰어난데 조선군이 어떻게 이기겠소?” “전하, 나라의 문을 열고 통상을 하십시오. 서양 기술을 받아 들여 무기를 만들면 일본이 얕잡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1876년, 일본은 자기 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우리나라와 강화도 조약을 맺었어요. 불평등한 문호 개방이었지만 명성 황후는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더욱 애썼어요. “전하, 젊은 인재를 쓰시어 나라를 새롭게 하십시오.”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만들어 젊은 인재인 개화파에게 나랏일을 맡겼어요. 조선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지구별 사전.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힘에 억눌려 억지로 맺은 조약이에요. 이 조약으로 우리나라는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일본에게 열었어요.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어서 ‘강화도 조약’이라고 부르지요. “서양의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나라를 잘살고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명성 황후는 개화파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리고 일본으로 떠나는 조사 시찰단과 청나라로 가는 영선사 일행에게 일렀어요. “일본과 청나라는 서양 문화를 먼저 받아들였소. 두 나라가 발전한 모습을 조사하면 분명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빠짐없이 보고, 배워 오시오.” 조사 시찰단은 일본의 산업과 문화 시설을 살펴 왔어요. 영선사는 신식 무기를 만드는 법과 서양의 과학 기술, 외국 말을 배워 왔지요. “아, 일본과 청나라가 발전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이냐!” 명성 황후는 우리나라가 뒤처진 것을 깨닫고 크게 안타까워했어요. 지구별 사전. 영선사는 김윤식을 대표로 한 젊은 유학생 38명으로 이루어졌어요. 영선사는 청나라 톈진에 가서 신식 무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돌아 왔지요. 일본으로 간 조사 시찰단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관청 시설과 박물관, 도서관 같은 문화 시설을 돌아보고 왔어요. “전하, 청나라와 일본은 신식 무기를 만들어 신식 군대까지 꾸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식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명성 황후의 말에 고종도 찬성했어요. “내 생각도 그러하오. 새로운 군대를 만듭시다.” 조선에 새로운 군대가 생겼어요. 새로운 군대의 이름은 ‘별기군’이었어요. 일본 사람을 불러 별기군에게 신식 훈련도 시켰어요. 별기군은 무기부터 옷까지 구식 군대와는 많이 달랐지요. 구식 군인은 별기군만 위하는 나라가 못마땅했어요. “아니, 우리 월급은 미루고 주지도 않으면서 왜 별기군만 잘 챙겨 주는 거지?” 지구별 사전. 별기군은 군인들 가운데 몸이 튼튼한 80여 명을 새로 뽑아 만들었답니다. 별기군은 별기대, 또는 일본 훈련관에게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왜별기라고도 불렸어요. 구식 군인은 무기를 들고 일어났어요. 월급으로 모래가 섞인 쌀이 나오자 그동안 쌓인 불만이 터진 거예요. “별기군만 군인인가! 지금까지 나라를 지킨 건 우리야!” “우리를 무시하고 못살게 구는 일본도 가만두어선 안 돼!”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공격한 뒤 궁궐로 몰려갔어요. 명성 황후는 잠시 궁궐을 떠나 몸을 피했지요. 이때 흥선 대원군이 나서서 구식 군인을 달랬어요. “밀린 월급을 주고, 별기군을 없애겠소!” 구식 군인은 그제야 잠잠해졌답니다. 한편 일본 공사는 군대를 이끌고 와 어려운 요구를 했어요. “군인들이 공사관에 쳐들어와 피해가 많았으니 다 갚아 주시오.” 명성 황후는 생각했어요. ‘어서 궁궐로 돌아가야 해. 청나라에 도와 달라고 하자.’ 청나라에서는 곧 군대를 보내 흥선 대원군을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갔어요. 명성 황후는 겨우 궁궐로 다시 돌아왔지요. 명성 황후는 이 일로 일본을 조심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구나. 일본의 힘이 커지는 걸 막아야겠어.’ 강한 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다. 백성은 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나라들이 못살게 굴고, 나쁜 관리가 어렵게 거둔 곡식까지 다 빼앗아 끼니도 잇기 힘들었지요. “동학농민군 만세! 다른 나라를 몰아내고 못된 관리를 혼내 주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나라를 위해 힘차게 외쳤어요. 전주성을 무너트리고 서울까지 올라올 것 같았지요. 청나라와 일본에서 동학농민군을 핑계로 군대를 보냈어요. 동학농민군은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요. “우리가 내놓는 열두 가지 주장을 지킨다고 약속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소. 약속하겠소.” 나라의 약속을 믿고 동학농민군은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명성 황후는 일본 때문에 걱정이 컸어요. ‘일본 군대가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큰일이야. 오히려 전하를 위협해 흥선 대원군에게 다시 나랏일을 맡겼으니 이를 어쩌나!’ 청나라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청나라와 일본은 전쟁을 시작했지요. 두 나라의 싸움으로 우리나라 땅이 피로 물들었어요. 일본 군대는 승리를 거듭하며 청나라 땅까지 공격했답니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과 휴전을 맺고 랴오둥 반도를 주기로 약속했어요. 일본이 이긴 거예요. ‘청나라가 일본에게 지다니! 일본의 힘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일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제는 청나라까지 넘보는구나.’ 명성 황후는 가슴이 답답했어요. 청나라에게 이긴 일본은 우리나라 정치에 마음대로 끼어들었어요. 신하도 일본과 친한 사람으로 모두 바꾸었지요. ‘일본보다 힘이 센 나라를 불러야 해.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에 신하를 보내 일본을 막아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는 일본에게 강하게 말했어요. “일본이 청나라에게 랴오둥 반도를 받으면 안 되오. 청나라와 약속을 없던 걸로 하시오!” 러시아는 일본 앞바다에 군함을 보내기도 했지요. 힘센 나라가 끼어들자 결국 일본은 청나라 땅을 포기했어요. 명성 황후는 외교에 성공한 뒤, 러시아를 눈여겨보았어요. ‘일본이 러시아에게는 쩔쩔매는구나.’ 흥선 대원군은 다시 정치에서 물러났답니다. 명성 황후는 일본과 친한 신하를 몰아내고, 러시아와 친한 신하를 조정에 들였어요. 러시아와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칠 생각이었지요. 조선의 국모, 일본의 칼에 스러지다. 1895년, 궁녀들이 급하게 명성 황후를 불렀어요. “중전 마마,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러느냐?” “일본 사람들이 칼을 차고 궁궐로 들이닥쳤습니다. 마마를 찾고 있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그때, 우르르 발소리가 가까워졌어요. 명성 황후는 매서운 눈초리로 밖을 노려보았지요. 결국 명성 황후는 일본 공사가 보낸 사람의 칼에 목숨을 잃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몰래 일을 꾸몄던 거예요. 우리나라를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명성 황후라고 생각했지요. “흑흑, 중전 마마!” “일본의 칼에 돌아가시다니!” 온 백성의 슬픔과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어요. 나라 곳곳에서 백성이 일어나 일본에 맞서 싸웠지요. 처음으로 일본에 맞서 의병이 일어난 거예요. 명성 황후는 열여섯 살에 국모가 되었어요. 몰려드는 강한 나라 앞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하게 나라를 이끌었지요.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조선이 꺼지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인 명성 황후는 우리 겨레의 마음에 등불로 빛나고 있답니다. |
알렉산드로스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테베 성을 무너뜨린 뒤에 있었던 일이에요. 테베 성은 시리아 땅에 있는 성으로, 시리아는 귀한 향료가 많이 나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테베 성에서 차지한 물건들 가운데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 상자가 있었어요. "이 보물 상자 안에는 귀중한 것을 넣어야겠구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라면 여기에 향료를 넣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상자 안에 호메로스의 시집을 넣었어요. "보물보다 귀중한 것은 지혜이다. 호메로스의 시집에는 살아 있는 지혜가 담겨 있지." 호메로스의 시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늘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는 책이었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누구보다도 지혜와 지식을 사랑한 왕이었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로 떠날 때 그리스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를 데려가 그리스 문화를 전하게 했던 거예요.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나는 순간이었지요. 용감하고 지혜로운 왕자. 기원전 349년,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이었어요. 레오니다스는 제자들을 데리고 아폴론 신전으로 갔어요. 레오니다스는 마케도니아 궁전에서 왕자와 귀족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랍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러고는 향을 향로에 넣어 연기를 피웠지요. 신에게 제사를 올리려는 거예요.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차례가 왔어요. 알렉산드로스는 두 손으로 향을 듬뿍 쥐어 향로에 넣었어요. 그러자 구름 같은 연기가 확 피어올랐지요. "왕자님, 향을 그렇게 많이 쓰시면 어떡합니까? 향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아 동쪽 나라에서 들여오는 귀한 물건입니다." 레오니다스가 타이르자 알렉산드로스가 딱 부러지게 말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왕이 되면 향을 많이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말을 타고 향이 많이 나는 나라로 가서, 그 땅을 우리나라로 만들면 되지요." 알렉산드로스는 자신 있는 얼굴로 싱긋 웃었어요. 열세 살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과 같이 사냥 대회에 나갔어요. 삘리리삘리리, 대회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말을 타고 여기저기로 흩어졌어요. 알렉산드로스는 앞장서서 달려 나갔어요. 친구들도 곧 뒤따랐지요. "왕자님, 오늘은 무엇을 잡으실 거예요?" "음, 뭐가 좋을까? 그래, 좋다! 오늘은 사자를 잡을 테다." 알렉산드로스는 더 빨리 앞장서 나갔어요. 곧 사자 한 마리가 눈앞에 보였어요. 알렉산드로스는 재빨리 사자에게 덤벼들었지요. 그런데 사자가 먼저 말의 목덜미를 무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는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사자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달려드는 순간, 친구가 달려와 창으로 사자를 찔렀어요. 알렉산드로스도 그 틈에 벌떡 일어나 칼을 휘둘렀지요. 사자는 발버둥 치다가 땅에 털썩 쓰러졌어요. "만세! 왕자님이 사자를 잡으셨어요!" "아니야.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잡은 거야." 알렉산드로스가 친구들과 함께 사자를 잡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아버지 필리포스 왕은 무척 놀랐어요. "참으로 용감하구나! 알렉산드로스는 앞으로 큰일을 해낼 거야!" 며칠 뒤, 필리포스 왕과 신하들이 궁전 마당에 모였어요. 필리포스 왕은 넓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말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 말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말이라고?" "얼마나 잘 달리는지 시험해 보아라." 곧바로 한 장군이 말 등에 올라탔어요. 그러자 말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길길이 날뛰었지요. 장군은 고삐를 잡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아니, 저건 명마가 아니라 미친 말이로구나. 당장 목을 베어 버려라!" 왕이 화가 나서 소리치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알렉산드로스가 나섰어요. "저 말은 미친 말이 아닙니다. 제가 한번 길들여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말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쓸어 주었어요. 그런 다음, 말 머리를 하늘로 추켜올리고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지요. 별 탈 없이 마당을 서너 바퀴나 돌았어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놀라워했어요. "와! 왕자님, 대단하세요!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 말이 날뛴 것은, 마당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고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해 기분을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신하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용기와 지혜에 감탄했어요. 필리포스 왕은 그 말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필리포스 왕은 일 년 내내 전쟁만 하며 보냈어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같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과 걸핏하면 싸움을 벌인 거예요. 늘 그렇게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알렉산드로스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지요.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칠 훌륭한 스승을 모셔 와야겠다.' 필리포스 왕은 이름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데려왔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친구들을 가르쳤어요. 어느 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너희들이 뒷날 큰 부자가 된다면 나를 어떻게 대접하겠느냐?" "저는 스승님을 위해 좋은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 나라를 여행시켜 드리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두 친구가 대답했어요.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좀 달랐지요. "스승님, 뒷날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은 언제든지 그럴싸하게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날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오, 현명한 대답입니다! 왕자님은 정말 훌륭한 왕이 되실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뻐하며 말했어요.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왕이 되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리포스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그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왕이 되었지요.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어요. 마케도니아의 다스림을 받고 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필리포스 왕이 죽고 어지러운 틈을 타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기로 뜻을 모았어요. 서둘러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쟁 준비를 해 나갔지요. 이 소식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재빨리 전해졌어요. "뭐라고? 내가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한발 앞서 테베로 쳐들어갔어요. 테베의 군사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칠 수 없었지요. 테베를 무너뜨린 뒤, 한 여인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으로 끌려왔어요. 자기를 해치려는 마케도니아 병사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 죄로 잡혀 온 거예요. "너는 누구냐?" "나는 테베의 장군 테아게네스의 여동생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여인을 풀어 주고, 식구들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여인의 용기와 당당함이 본받을 만했으니까요. 테베를 손에 넣은 마케도니아 군대는 이제 아테네로 출발했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길을 가다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적군 대장을 보았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말에서 내려 적군 대장에게 다가갔어요. "심하게 다쳤군. 여봐라, 이 사람을 치료해 주어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명령하자, 부하 장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어요. "폐하, 이 사람은 적의 장수입니다." "안다. 하지만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칠백 년 전에 한 겨레였지 않느냐? 우리는 그리스 사람을 적으로 대하지 말고 친구로 대해야 한다." 적군 대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아테네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겁을 집어먹었어요. 그래서 싸우기도 전에 미리 항복해 버렸지요. 다른 도시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너도나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손을 들었어요. 세계를 다스리는 왕을 꿈꾸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여러 나라 대표를 한자리에 불렀어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한 겨레입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며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힘을 모아 페르시아를 멸망시켜야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와 힘을 합쳐 페르시아를 무찌르기로 했어요.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폐하, 페르시아는 우리보다 군사가 수십 배나 많은 큰 나라입니다. 그렇게 강한 페르시아를 우리가 어찌 이긴단 말입니까?" "알고 있소. 하지만 페르시아는 거의 백 년 동안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괴롭혀 온 나라요. 나는 반드시 페르시아를 무찌를 것이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딱 잘라 말하고서, 떠나기 전에 자기 재산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폐하, 어쩌시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십니까? 폐하께서는 빈털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소. 나한테는 아직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소." 신하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폐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다. 우리는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신하들은 이렇게 말하며 충성을 다짐했어요. "페르시아로 떠날 때는 군대뿐 아니라 학자, 예술가, 기술자도 데려갈 생각입니다. 뛰어난 그리스 문화를 세계 여러 나라에 전해야 하니까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로 떠나기 전에 그리스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어요. 그런데 단 한 사람, 이름난 철학자인 디오게네스가 오지 않았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직접 디오게네스 집을 찾아갔어요. 그때 디오게네스는 나무 술통 안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지요. "나는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드로스입니다. 선생님을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오. 내 앞에서 좀 비켜 주시겠소? 그대가 햇볕을 가로막고 있어 으스스 추우니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엉뚱한 대답에 깜짝 놀랐지만, 곧 디오게네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어요. "내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렇게 당당하다니. 아무 욕심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 부럽구나. 내가 왕이 아니라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디오게네스의 집을 나섰어요. 기원전 334년 5월,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가 손잡은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치러 떠났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군대는 용감히 싸워서 페르시아 한가운데까지 뚫고 들어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르디온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지나가다가 끈으로 친친 묶여 있는 수레를 보았어요. "수레가 왜 끈으로 묶여 있느냐?" "예, 이 수레의 매듭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풀 수 없도록 복잡하게 엉켜 있습니다."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직 아무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한번 풀어 보도록 하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말에서 내려 한참 동안 매듭을 바라보았어요. 그러고는 갑자기 칼을 뽑아 들더니 단칼에 끈을 잘라 버렸지요. "어떠냐? 매듭을 꼭 손으로 풀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이제부터 나는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손으로 매듭을 푸는 것만 생각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주 새로운 생각으로 한 번에 매듭을 풀었으니까요. 페르시아를 손에 넣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이수스라는 곳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60만 군대와 싸웠어요. 군사 수는 페르시아의 10분의 1밖에 안 되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 끝에 크게 이겼지요. 싸움이 끝난 뒤, 부하 장수 한 사람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달려왔어요. "폐하, 다리우스 왕의 어머니와 부인과 두 딸을 붙잡았습니다." "이리로 데려오너라." 다리우스 왕의 가족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으로 끌려왔어요. 가족들은 다리우스 왕이 버리고 간 마차와 활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 다리우스 왕이 죽은 줄 알았던 거예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리우스 왕의 가족을 다독였어요. "다리우스 왕은 죽지 않고 멀리 달아났소. 나는 다리우스 왕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오. 그대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아 줄 테니 마음을 놓으시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약속대로 다리우스 왕의 가족을 따뜻이 보살펴 주었어요. 싸움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왕과 마지막 싸움을 벌인 것은 기원전 331년이었어요. 다리우스 왕은 이 싸움에서 또 져서 남은 병사들과 같이 달아났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 뒤를 쫓기 시작했지요. 용감한 장군이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앞서 나아갔어요. 그때 장군을 따르던 한 병사가 소리쳤어요. "장군님, 저기 좀 보십시오. 전차 한 대가 뒤집혀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칼에 찔린 다리우스 왕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어요. 병사는 투구에 물을 담아 와서 다리우스 왕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지요. 그러자 다리우스 왕은 겨우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하며 말했어요. "알렉산드로스 왕이 내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면서요?" "고맙다는 말을 꼭 좀 전해 주시오." 다리우스 왕은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어요. 자기 신하인 베수스에게 죽임을 당했던 거예요. 뒤늦게 도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옷을 벗어 다리우스 왕에게 덮어 주었어요. 그리고 베수스를 붙잡아 큰 벌을 주었지요. 또한 다리우스 왕의 장례도 정성껏 치러 주었어요. 세계의 끝인 인도를 향해. 페르시아를 손에 넣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어요.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지요. '나는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고 싶다. 아직 인도가 남아 있지 않은가!' 그때 사람들은 인도가 세계의 끝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또 인도를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작은 나라로 여겼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군대를 이끌고 인도로 갔어요. 그리고 얼마 뒤, 인도 포루스 왕의 군대와 맞닥뜨렸지요. 포루스 왕은 코끼리를 타고 공격해 왔어요. "고작 저런 코끼리를 타고 싸우겠다는 거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어요. 하지만 코끼리를 탄 인도 군대를 이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 이어졌지요. 결국 포루스 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 땅 깊숙이 들어가 그 땅도 정복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오랜 싸움에 지친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울면서 매달렸지요. "저희는 너무 지쳤습니다. 이제는 싸울 기운도 없습니다." "알겠다.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병사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았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을 향해 떠났어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갑자기 일어난 물난리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사막을 힘겹게 지나야 했거든요. 그날도 하늘에는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어요. 병사들은 목이 말라 헉헉거리고, 픽픽 쓰러지기도 했지요. 참다못한 병사들이 투덜거렸어요. "헉헉, 며칠째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어.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아." "집에 가기는커녕 이러다 모두 죽고 말 거야."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말라 쓰러질 것만 같았어요. 그때 한 병사가 어렵게 구한 물을 투구에 담아 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바쳤어요.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투구에 담긴 물을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물을 땅에 쏟아 버렸어요. "모두가 목말라하는데, 어찌 나 혼자 물을 마실 수 있겠느냐!"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쏟은 물은 자기들이 나누어 마신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지요. 병사들은 힘을 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어요. 더 크고 높은 꿈을 가져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오랜 꿈은 세계를 정복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자기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어요. 또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합쳐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고 애썼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더 넓은 세계를 다스리고 싶은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지도를 보니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 있군.' '아라비아와 아프리카가 남아 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병사들에게 출전 준비를 시켰어요. 그런데 사흘 뒤, 심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로 끝내 눈을 감고 말았어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말을 타고 달리며 외치던 소리는 병사들의 귀에 생생하게 남았답니다. "병사들아! 더 넓은 세계로 떠날 준비를 하자.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드넓은 땅이 우리를 기다린다. 지금 얻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크고 높은 꿈을 가지자!" 세계 정복과 헬레니즘 문화.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싸움터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보통 때에는 시를 가까이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함께 가 볼까요? 도시 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멸망. 기원전 431년, 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가장 힘센 나라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기긴 했지만, 그때부터 그리스는 어지럽고 질서가 없어졌어요. 그 뒤,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에게 지면서 완전히 힘을 잃고 멸망했답니다. 페르시아를 내 손 안에! 21세라는 어린 나이에 마케도니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려고 길을 떠났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수스라는 곳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 싸워 크게 이겼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 뒤에 벌어진 싸움에서도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기원전 333년에 페르시아를 무릎 꿇게 만들었답니다.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건설. 꿈에 그리던 페르시아를 손에 넣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중해 해안 지방과 이집트까지 정복했어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군사를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나 이란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에까지 이르렀어요. 서쪽으로는 그리스,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큰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답니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하나로! 알렉산드로스가 왕으로 있었던 기간은 13년 정도로 매우 짧았어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하나로 합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답니다. 새로 정복한 곳에 그리스 사람을 살게 해서 그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했어요. 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곳곳에 세워 그리스 문화를 널리 퍼지게 했지요. 그 결과, 그리스 문화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화가 합쳐진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어요.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헬레니즘. 헬레니즘은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를 '헬레네스(헬렌의 후손)'로 부른 데서 나온 말로, '그리스풍'을 뜻해요.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개인의 행복과 실제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이런 특징은 인도에도 영향을 주어 인도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합쳐진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지요. 간다라 미술은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
진시황제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어린 나이에 왕이 되다 옛날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싸움이 계속 일어났어요. 춘추시대에는 100개가 넘는 작은 나라가 서로 싸웠다가, 힘을 모았다가, 다시 갈라서기를 되풀이했지요. 전국시대에는 그 가운데 힘센 일곱 나라가 남아 서로 다투었어요. 일곱 나라는 진 연 조 위 초 제 한나라였어요. 진나라는 가장 서쪽에 있는 작은 나라였어요. 하지만 빠르게 힘을 길러 다른 나라를 위협했지요. “진나라가 나날이 강해지니 큰일이오. 우리 여섯 나라가 힘을 모아 맞섭시다.” 초나라 왕의 말에 따라 여섯 나라가 힘을 모으기로 했어요. 하지만 모두 진나라 와 맞서는데 실패했어요. 진나라가 남 몰래 여섯 나라와 따로따로 동맹을 맺었거든요. 그래서 여섯 나라의 힘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던 거예요. 전국 시대가 끝나 갈 무렵, 진나라의 자초는 전쟁 때문에 조 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어요. 그때 상인 여불위가 자초를 많이 도왔어요. 그래서 자초는 진나라에 돌아와서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요. 조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자초가 바로 장양왕이에요. 그래서 장양왕은 여불위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답니다. 몇 년 뒤, 장양왕은 병으로 앓아누웠어요.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장양왕은 아직 어린 아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그래서 여불위에게 부탁했지요. “내가 죽으면 내 아들 영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시오.”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겨우 열세 살짜리 영정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진나라 왕인 영정을 줄여서 ‘진왕 정’이라고 불렀지요. 진왕 정이 바로 뒷날의 진시황제랍니다. 진왕 정은 신하들에게 말했어요. “나는 앞으로 우리 진나라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하오. 아직은 내가 어리고 배울 것이 많소. 여불위가 먼저 나랏 일을 맡기로 했으니 잘 도와주시오.” 신하들은 진왕 정의 의젓한 모습에 감탄했어요. 여불위는 진왕 정이 자랄 때까지 나랏일을 맡아보았답니다. 진왕 정은 지혜롭고 씩씩한 젊은이로 자랐어요. ‘이제부터는 내가 나라를 다스려야겠다.’ 진왕 정이 이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 신하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진왕 정은 화가 나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했어요. “노애는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히더니 기어코 반란을 일으켰구나! 용서할 수 없다. 군대를 보내 노애의 반란을 잠재워라!” 왕의 군대와 반란군은 큰 싸움을 벌였어요. 왕의 군대는 용감하게 싸워 반란군을 무찔렀지요. 진왕 정은 자신감이 넘쳤어요. ‘나라를 편안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천하를 통일할 준비를 해야겠다.’ 진나라는 오래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도 재능이 뛰어나면 높은 벼슬을 주었어요. 덕분에 여러 나라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진나라로 몰려와 벼슬을 받았어요. 이 사람들을‘객경’이라고 불렀지요. 진나라는 객경의 힘으로 크게 발 전했어요. 하지만 진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하들은 불만이 컸어요. “이러다 다른 나라에서 온 객경이 우리 자리까지 다 차지하겠어.” 객경 가운데 정국이라는 뛰어난 기술자가 있었어요. 정국은 수로를 만들어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자고 했지요. 그래서 진왕 정은 정국에게 어마어마한 수로공사를 맡기고, 몇 년 동안 공사를 계속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정국이 한나라 왕이 보낸 첩자였음이 밝혀졌어요. 한나라는 여섯 나라 가운데 힘이 가장 약했어요. 진나라가 자꾸 쳐들어오자 꾀를 내어 정국을 보낸 거예요. 많은 백성이 공사 일을 하면 군사가 모자라 나라의 힘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랍니다. 진나라의 신하들은 목소리를 높여진 왕정에게 말했어요. “정국같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객경을 쫓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정국의 말대로 수로를 만들면, 우리 진나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소?” “그렇다고 해도 이 나라에 객경을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왕 정은 어쩔 수 없이 객경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라고 명령했어요. “모든 객경은 벼슬을 버리고, 사흘 안에 진나라를 떠나라!” ‘이번 일은 왕이 잘못 생각한 거야. 이대로 물러서지 말고, 왕의 마음을 돌이켜보자.’ 초나라에서 온 이사라는 객경은 진왕 정에게 상소를 올렸어 요. 진왕 정은 이사의 상소를 읽고 나서 생각에 잠겼어요. ‘진나라는 재능이 뛰어난 객경 덕분에 지금처럼 강해졌어. 객 경을 쫓아내면 진나라는 다시 약해질 거야.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 우리 진나라를 넘보겠지. 천하를 얻으려면 뛰어난 재능 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 진왕 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어요. “객경을 다시 불러들이고, 이사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라.” 객경을 싫어하던 신하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어요. 진왕 정은 이 일이 있은 뒤, 이사를 굳게 믿고 일을 맡겼어요. 그리고 이사의 도움으로 여섯 나라를 통일할 준비를 했지요. 하루는 진왕 정이 이사에게 물었어요. “천하를 통일하려면 어느 나라를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게 좋겠소?” “폐하, 가까운 한나라를 먼저 공격하십시오.” “허허, 그대도 나와 생각이 같구료." 진나라는 힘이 약한 한나라를 금세 차지했어요. 그다음 진왕 정은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했어요. “반드시 조나라를 차지하리라!” 조나라는 진나라가 동쪽으로 나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었어요. 하지만 조나라는 여섯 나라 가운데 두 번째로 강한 나라여서 이기기가 쉽지 않았지요. 진왕 정은 조나라 신하와 장수가 서로 다투게 해서 조나라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어요. 그런 뒤, 진나라 군대를 조나라 수도로 보내 조나라를 차지했지요. 진왕 정은 세 번째로 연나라를 위협했어요. 연나라는 진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였는데 힘이 많이 약했어요. 어느 날, 연나라 신하인 형가가 진왕 정을 찾아왔어요. “저희 연나라는 진나라와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그 뜻으로 연나라 지도를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진왕 정은 형가가 내미는 지도를 받으려고 했어요. 그때 형가가 옷 안에 감추었던 칼을 꺼냈어요. “아니, 너는!” 진왕 정은 재빨리 몸을 피해 목숨을 구했어요. 형가는 진왕 정을 죽이려고 연나라에서 보낸 사람이었지요. ‘내 목숨을 노리고 사람을 보내다니, 연나라를 가만두지 않겠다!’ 진왕 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명령했어요. “왕전 장군,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로 쳐들어가시오!” 이듬해, 진나라는 연나라를 차지했어요. 진왕 정은 끊임없이 다른 나라로 나아갔어요. “왕 분장 군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가시오!” 왕분 장군은 왕전 장군의 아들이었어요. 왕분 장군은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 나라의 수도로 갔어요. ‘위나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물로 성을 공격해야겠다.’ 왕분 장군은 군사들에게 명령했어요. “황허강에서 성 쪽으로 수로를 파라!” 군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장군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위나라를 공격할 생각은 안 하고 수로를 파라니!” 위나라는 땅이 낮아 황허강의 물이 넘치면 쉽게 잠기는 땅이었어요. 왕분 장군은 황허강에서 물을 끌어와 위나라 성을 덮치려고 했던 거예요. 드디어 수로를 다 만들었어요. 진나라 군대가 황허강의 물을 성으로 흘려보내자, 위나라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홍수가 났다! 황허강에서 물이 넘친다!” 강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성안을 휩쓸었어요. 결국 위나라는 진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빼앗겼지요. 진나라는 한 조 연 위나라를 차지했어요. ‘이제 초나라와 제나라만 남았구나. 어느 나라를 먼저 공격할까? 강한 초나라를 먼저 치면 제 나라는 약하니까 저절로 항복할 거야.’ 진왕 정은 남쪽에 있는 초나라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여러 장군을 불러 물었어요. “초나라 공격에 군사가 얼마나 필요하겠소?” 젊고 용감한 이신 장군이 대답했어요. “폐하, 군사 이십만 명만 있으면 됩니다.” 경험이 많은 왕전 장군은 생각이 달랐어요. “아니 옵니다. 군사 육십만 명은 있어야 합니다.” 진왕 정은 먼저 이신 장군을 초나라로 보냈어요. 그런데 이신 장군은 싸움에서 계속 졌어요. 진왕 정은 왕전 장군에게 말했어요. “왕전 장군! 내 생각이 짧았소. 군사 육십만 명을 줄 테니 초나라와 싸워서 반드시 이겨주시오!” “폐하, 반드시 이겨서 돌아오겠습니다.” 왕전 장군은 바로 싸움을 벌이지 않았어요. 먼저 군사를 잘 쉬게 하고, 배불리 먹였지요. 그리고 군사들이 충분히 힘을 길렀을 때, 초나라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마지막으로 제나라만 남았어요. 제나라는 진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진나라는 옛 날부터 제나라와 사이좋게 지냈어요. 멀리 있는 나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가까운 나라를 함께 공격하는 작전을 쓰고 있었거든요. 진왕 정은 제 나라 공격을 앞두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작전이 효과가 있었어. 하지만 이제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니 제 나라와 갈라설 수밖에 없어. 되도록 백성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제 나라를 차지하자.’ “자, 이제 제 나라로 가자!”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로 향했어요. 힘이 약한 제 나라 왕은 곧바로 항복했어요. 이렇게 해서 진왕 정은 싸움을 하지 않고, 제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지요. 마침내 진왕 정은 여섯 나라를 모두 차지하여 천하를 통일했어요. 천하통일에 나선지 10년 만의 일이었지요.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진왕 정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불렀어요. 천하를 다스리는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가 된 거예요. 진시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일을 시작했어요. “폐하, 넓은 땅을 다스리려면 멀리 있는 땅에도 관리를 보내 황제께서 친히 다스리셔야 합니다.” “옳은 말이다. 온 나라를 서른여섯 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현제도를 실시하라.” “폐하, 나라마다 화폐와 도량형이 다르니 하나로 통일해서 백성들이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옳거니,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해서 널리 사용하게 하라!” “폐하, 나라마다 문자가 달라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지! 천하의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라.” 신하들이 올리는 문서가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진시황제는 밤낮으로 열심히 문서를 처리했답니다. 진시황제가 다스리는 지역은 아주 넓었어요. ‘여러 지역이 고르게 발전하려면 서로 길이 잘 통해야 해.’ 그래서 진시황제는 신하들에게 새로운 길을 닦으라고 일렀어요. “길을 닦아 교통을 편하게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라!”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어요. 바로 북쪽에서 계속 쳐들어오는 흉노족이었어요. 옛 조나라와 연나라에서도 흉노족을 막으려고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을 정도였으니까요. “몽염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족을 공격하라!” 몽염 장군이 흉노족을 치고 돌아오자 진시황제가 다시 명령했어요. “장성을 더욱 튼튼하게 쌓아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라.” 몽염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장성을 쌓았어요. 이렇게 해서 진나라는 연나라와 조나라의 장성까지 합쳐서 만 리가 넘는 엄청난 장성을 완성했어요. 공사를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의 일이었지요. 산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만리장성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누워있는 것 같았어요. 진시황제는 자기가 다스리는 천하를 둘러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네 번이나 바깥세상을 둘러보러 나갔지요. 그런데도 또 보고 싶었어요. “천하를 살펴보러 떠날 테니 수레를 준비하라!” 진시황제가 다섯 번째로 천하를 둘러보러 떠났을 때였어요. 황제의 수레 뒤로 수많은 신하가 뒤따랐어요. 마치 오색단풍이 든 여러 산이 한꺼번에 떠서 움직이는듯했지요. ‘천하를 통일했으니 이제는 백성이 더욱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텐데. 나도 어느덧 늙었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어요. 진시황제의 천하 통일로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어지러운 시대는 끝이 났어요. 진나라는 옛날부터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라를 따지지 않고 높은 벼슬을 주었어요. 진시황제는 그런 전통이 진나라의 힘을 길러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덕분에 진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보다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지요.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뒤, 어마어마하게 큰 중국 땅을 다스리는 여러 기틀을 마련했어요. 나라마다 다른 제도를 통일하여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바탕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 거예요. 높은 산 위로 구불구불 끝없이 펼쳐지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이루어 낸 중 국문화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답니다. |
칭기즈 칸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초원을 달리는 바람의 아들. 드넓은 몽골 초원, 한 아이가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왔어요. 아이의 이름은 테무친, 가장 단단한 강철이라는 뜻이지요. 이 아이가 바로 뒷날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이랍니다. 테무친의 아버지는 몽골 족의 족장이었어요. 테무친 은 다른 몽골 족 아이처럼 서너 살 때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지요.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지, 어서 달려요!” “하하! 테무친, 화살집이 너만 하구나.” 이날은 아버지가 테무친에게 처음으로 활쏘기를 가르친 날이었어요. “테무친, 저 금나라 땅이 우리보다 백 배나 넓단다.” “우리 몽골이 그렇게 작아요?” “그래. 하지만 금나라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단다. 우리는 강하니까. 활도 잘 쏘고, 말을 타고 바람처럼 빨리 달리거든.” 아버지의 말에 테무친의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맞아, 약하면 자기를 지킬 수 없어.’ 테무친이 아홉 살 때, 아버지는 테무친을 데리고 길을 떠났어요. 테무친의 신붓감을 찾으려고요. 몽골에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테무친과 잘 어울리는 신붓감 보르테를 찾았어요. “테무친, 우리가 좋은 신붓감을 만났구나!” 테무친도 기뻐하며 말했지요. “참 건강하고 예쁘게 생겼어요.” 보르테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어요. 아버지는 테무친을 남겨 두고 혼자 말에 올랐어요.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우리 몽골 풍습대로 약혼한 보르테의 집에 머물며 일을 도와야 한단다.” “네. 아버지,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조심히 돌아가세요.” 테무친은 씩씩하게 인사한 뒤,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았어요.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초원에서 타타르 족과 마주쳤어요. 타타르 족은 테무친의 부족과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목이 마르구나. 타타르 족에게 물을 좀 얻어야겠다.” “족장님, 위험하니 가지 마십시오.” “물 좀 얻어 마시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아버지는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말에서 내려 타타르 족에게 다가갔어요. 그런데 타타르 족은 비겁하게도 아버지에게 물 대신 독을 탄 술을 주었어요. 며칠 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몹시 앓았어요. “내 아들 테무친을 빨리 데려오너라.” 테무친은 아버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초원에 홀로 서다. 가축을 기르며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 사람들은 풀이 많은 땅을 찾아 늘 옮겨 다녀야 했어요. 그래서 몽골의 여러 부족은 풀이 잘 자라는 땅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싸웠지요. 테무친과 같은 부족이었던 타이치우트가 새로운 족장 편이 되어 부족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테무친은 너무 어려서 우리를 보살필 수 없소. 그러니 새로운 족장을 따릅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무친 곁을 떠났어요. 그러나 테무친의 어머니는 용기를 잃지 않고, 아이들에게 말 했어요. “이제 우리는 스스로 몸을 지키고,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한단다.” “어머니, 제가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할게요.” 테무친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야무지게 말했어요. ‘테무친이 크면 우리를 공격할지도 몰라. 그대로 두어선 안되겠다.’ 타이치우트는 테무친의 가족을 습격했어요. 다행히 가족은 숲으로 몸을 피했지요. 숲까지 테무친 가족을 쫓아온 타이치우트가 외쳤어요.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테무친만 내놓아라!” 테무친의 형제들은 활을 쏘아 타이치우트를 막았어요. 그사이 테무친은 혼자 말을 타고 숲 속 깊이 도망쳤지요.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어. 난 더 강해져야 해. 반드시 아버지의 초원을 되찾을 거야!’ 하지만 테무친은 타이치우트에게 붙잡히고 말았어요. 테무친은 목에 칼이 채워진 채 집집마다 끌려 다녔어요. 한 아이가 테무친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곁에서 늘 지켰지요. 무더운 여름 저녁, 잔치가 벌어졌어요. ‘지키는 아이를 따돌리고 도망쳐야지.’ 잔치가 끝날 무렵에 테무친은 사람들이 흩어진 틈을 타서 도망쳤어요. 그렇게 테무친은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어요. 몽골 부족을 하나로 모으다. 테무친은 강한 청년으로 자랐어요. 아홉 살에 약혼한 보르테도 데려와 아내로 맞았지요. “양과 말을 배불리 먹일 풀밭은 테무친이 가장 잘 찾지.” “어찌나 말을 잘 다루는지 적을 요리조리 잘도 피한다네.” 테무친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초원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어요. 그러자 여러 부족이 테무친을 찾아왔어요. 떠났던 테무친의 부족 사람들도 차츰 돌아왔지요. 테무친은 돌아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 주었어요. “우리에게 오는 사람 모두에게 집과 말을 주어라!” ‘테무친이 왕이 되면 누구도 몽골을 얕보지 못할 거야.’ 몽골의 여러 족장은 테무친이 뛰어난 지도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테무친, 당신을 몽골의 왕 ‘칭기즈칸’으로 모시겠습니다.” 칭기즈 칸은 어느덧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모아 이끌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졌어요. 칭기즈 칸은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요. ‘아버지를 죽인 타타르 족과도 싸워서 이겼다. 이제부터는 몽골 전체를 통일해야지!’ 칭기즈 칸은 숨 가쁘게 전쟁을 이어 갔어요. 칭기즈 칸을 따르지 않는 부족은 힘을 모아 칭기즈 칸에게 맞서기도 했지요. 칭기즈 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과 계속 싸웠어요. 칭기즈 칸은 적군을 혼란 시키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어느 날 밤, 칭기즈 칸과 맞서 싸우던 적군은 칭기즈 칸의 군대가 있는 쪽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어요. “칭기즈 칸의 군사가 저렇게 많았단 말인가!” 드넓은 초원이 횃불로 가득 뒤덮여 있었거든요. 칭기즈 칸은 초원 곳곳에 허수 아비를 세웠어요. 그리고 허수아비마다 횃불을 5개씩 꽂아 군사가 더욱 많아 보이도록 적을 속였던 거예요. 이처럼 지혜롭기까지 한 칭기즈 칸은 마침내 다른 힘센 부족을 모두 물리쳤어요. 1206년, 오논 강가에 야크 꼬리가 9개 달린 흰 깃발이 가득 휘날렸어요. 몽골의 족장과 군사가 칭기즈 칸을 나타내는 흰 깃발을 세운 거예요. 칭기즈 칸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였지요. “칭기즈 칸이시여, 부디 몽골을 다스려 주십시오.” “몽골을 가장 크고 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십시오.” 드디어 칭기즈 칸은 몽골 부족 전체를 다스리는 지도자로 우뚝 섰어요. “크고 강한 몽골 사람들이여! 나를 따르면 모든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을 다스리며 군대를 새롭게 갖추었어요. 몽골은 빠른 기마병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를 키워 갔어요. 세계로 향한 꿈을 펼치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중국 땅으로 눈을 돌렸어요. “우선 서하로 가자. 서하를 차지한 뒤,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로 가자!” 그러나 서하에서는 성을 쌓아 몽골군을 막았어요. 날쌘 몽골 기마병이 화살을 쏘았지만, 탄탄한 성은 끄떡도 않았지요. 칭기즈 칸은 성을 에워쌌다가 후퇴해서 적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로 했어요. 몽골군이 넓은 사막으로 후퇴하자 적은 몽골군이 겁나서 도망치는 줄 알고 뒤쫓아왔어요. 몽골군은 그때부터 적과 싸워 성을 빼앗고이기기를 되풀이했지요. 몽골군이 서하의 수도를 공격할 때였어요. 적군은 성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고 버텼어요. 더구나 서하의 수도는 성과 둑, 두겹으로 성을 보호하고 있었어요. 고민하던 칭기즈 칸이 몽골군에게 명령했어요. “황허 강의 물길을 바꿔 성을 물바다로 만들자. 성 쪽으로 물길을 파고, 댐을 세워라!” 몽골군이 높다랗게 쌓은 댐을 무너뜨리자 어마어마한 물보라가 서하를 덮쳤어요. 서하 왕은 마지못해 칭기즈 칸에게 항복하고 낙타를 바치기로 약속했어요. 칭기즈 칸도 더 이상 서하를 공격하지 않고 금나라를 치러 떠났지요.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공격하려고 만리장성을 넘었어요. “몽골의 전사들아, 이제 금나라 황제를 혼내 주러 가자!” “우아, 칭기즈 칸 만세! 몽골 제국 만세!” 금나라는 중국에서 가장 힘센 나라였어요. 튼튼한 성을 쌓아 적의 공격을 잘 막았고, 군대도 무척 강했어요. 게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도 몽골군처럼 말을 타고 활을 잘 쏘았지요. “성을 둘러싸고 물러서지 마라!” 칭기즈 칸의 기마 부대는 금나라 황제의 성을 둘러싸고 공격했어요. 금나라 황제는 어리석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칭기즈 칸의 군대가 계속 공격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지요. 마침내 칭기즈 칸은 아시아 땅 대부분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용감하게 싸운 부하들에게 상을 주었지요. 또한 새로 차지한 나라의 종교를 이해해 주고, 상인들을 보호해서 상업을 발달시켰어요. 이렇게 해서 칭기즈 칸은 수많은 나라를 거느릴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칭기즈 칸은 호라즘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었어요. 호라즘은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어요. 칭기즈 칸은 호라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어요. 그래 서호라즘에 두 번이나 신하를 보냈지요. “칭기즈 칸께서 호라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호라즘을 다스리던 술탄은 칭기즈 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뭐라? 술탄이 우리 신하를 죽였단 말이냐? 몽골의 전사들아, 호라즘으로 가자!” 칭기즈칸은 군사를 이끌고 호라즘으로 떠났어요. 호라즘은 서쪽 산 너머에 있었어요. 몽골군은 높고 험한 산을 넘어 용감하게 나 나갔어요. 그런데 여러 날이 흐르자 몽골군은 먹을 것이 떨어졌어요. “조금만 더 가면 호라즘에 도착할 것이다. 힘을 내라!” 몽골군은 굶주림과 따가운 햇볕을 견디며 마침내 호라즘에 다다랐어요. 호라즘의 술탄은 싸울 준비를 끝내고, 칭기즈 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서 오너라! 너희가 우리를 이길 것 같으냐? 높고 단단한 성이 우리 호라즘을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호라즘의 성은 몽골군의 공격에 와르르 무너졌어요. 칭기즈 칸은 이미 금나라와 싸우면서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알았거든요. 몽골군은 폭풍처럼 호라즘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어요. 칭기즈 칸은 항복하는 사람은 해치지 않고 보살펴 주었지요.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겠다면 너희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몽골군은 호라즘의 도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잿더미로, 우르겐치를 물바다로 만들었어요. 술탄은 겁에 질려 도망쳤어요. 칭기즈 칸은 장군을 시켜 술탄을 뒤쫓아 없앴지요. 그런데 술탄이 죽은 뒤, 술탄의 아들이 새롭게 군대를 일으켰어요. 칭기즈 칸은 군대를 이끌고 술탄의 아들과 싸움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칭기즈 칸은 호라즘을 차지했답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차지한 땅은 끝이 없었어요. 칭기즈 칸은 드넓은 몽골 제국을 다스리게 된 거예요. ‘이제는 넓은 땅을 다스리는데 힘을 쏟아야겠다.’ 칭기즈 칸은 인더스 강 지역에서 여러 나라의 문화를 배웠어요. ‘발달한 문화를 배우면 넓은 지역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거야.’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방법을 하나하나 갖추어 나갔지요. 위대한 칭기즈 칸의 마지막 길. 칭기즈 칸이 몽골로 돌아왔을 때, 나이는 예순을 훌쩍 넘겼어요. 칭기즈 칸은 이제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요. 그런데 서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내가 호라즘에 가 있는 틈을 타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서하는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을 넘어 처음으로 차지한 나라였어요. 칭기즈 칸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서하로 향했지요. 따가닥따가닥. 갑자기 야생마들이 칭기즈 칸 앞을 바람처럼 지나갔어요. 칭기즈 칸이 타고 있던 말이 깜짝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지요. “으악!” 칭기즈 칸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밤새 칭기즈 칸의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어요. 장군들은 칭기즈 칸이 걱정스러웠어요. 그래서 서하와 싸우는 것을 미루자고 했지요. “편찮으신 몸으로 서하와 싸우는 것은 힘드십니다.” “아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어 돌아갔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칭기즈 칸은 아픈 몸으로 계속해서 싸움을 이끌었어요. 칭기즈 칸은 군대를 이끌고 서하와 싸워 이겼어요. 하지만 건강이 더욱 나빠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신하들은 칭기즈 칸을 마차에 싣고 몽골을 향해 먼 길을 떠났어요.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릅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 돌아가신 칭기즈 칸께서 우리 몽골 사람들을 보살펴 주실 테니까요.” 칭기즈 칸이 숨을 거둔 뒤에도 몽골 제국은 계속해서 땅을 넓혀 나갔어요. 칭기즈 칸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하지만 용기와 지혜로 꿋꿋하게 이겨 내고, 아시아 땅에 몽골의 이름을 널리 떨쳤지요. 칭기즈 칸의 용감했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초원의 바람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답니다. |
장보고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꿈이란, 마음속의 등불 같은 거예요. 꿈을 꿀수록 마음속이 환하게 밝아지지요. 가난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궁복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바다에서 해적을 몰아내고, 우리 배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지요. 그 큰 꿈을 안고, 궁복은 당나라로 갔어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 마리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듯 거침없이 헤쳐 나갔지요. 꿈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답니다. 마침내 궁복은 바다를 지키는 장군으로 우뚝 섰어요. 궁복, 이 어린아이가 바로 해상왕 '장보고'랍니다. 어린이 친구들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다. 장보고는 남쪽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본래 이름은 '궁복'으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는 궁복의 집안은 늘 가난에 쪼들렸어요. 게다가 아무 때나 해적이 몰려와 사람을 잡아가거나, 물건을 빼앗는 일이 많았지요. 궁복은 바닷가에 앉아 장군이 될 꿈을 키웠어요. '나는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래서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못된 해적을 물리쳐야지. 하지만 나는 신분이 낮아서 신라에서는 장군이 될 수 없으니 어쩌지? 그래, 당나라로 가자!' 어느새 청년으로 자란 궁복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요. "어머니, 당나라로 건너가 장군이 되어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네 꿈을 이루어 다시 돌아오너라. 늘 몸조심하고." 궁복은 부푼 가슴을 안고 당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어요. 마침내 궁복은 당나라에 도착했어요. "우아, 커다란 배들이 늘어서 있네! 저 커다란 집 좀 봐. 이야, 상점에는 물건이 넘쳐 나고 있어!" 궁복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신기하고 놀라웠어요. 그때 누군가 다가왔어요. "옷차림을 보니 신라 사람인 것 같은데, 맞소?" "네, 그렇습니다." "어허, 당나라에는 신라 사람들이 잡혀 와서 몹시 힘들게 살고 있는데, 어쩌자고 이 위험한 땅으로 왔소?" "마음의 준비는 이미 했습니다. 다만 이곳에 온 첫날이라 아직 묵을 곳을 못 찾았습니다." "내가 도와주겠소. 같은 신라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지요." 궁복은 길에서 만난 신라 사람에게 며칠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계속 놀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궁복은 부잣집에 머슴살이하러 들어갔지요. 궁복은 일하는 틈틈이 당나라 말을 익혔어요. 또 무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지요. 무술을 갈고닦는 궁복에게 큰 머슴이 다가와 말했어요. "네가 제법 창을 잘 다루는 듯한데, 당나라 사람에게는 못 당할 거야." "뭐요? 저도 잘합니다. 신라의 창 솜씨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어요." 궁복은 당나라 창잡이와 시합을 벌이기로 했어요. 이윽고 시합 날이 밝았어요. 궁복이 창을 들고 나오자 여기저기서 구경꾼이 모여들었어요. 당나라 창잡이가 먼저 궁복을 향해 창을 휘둘렀어요. "이놈! 내 창을 받아라." "어림없는 소리!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챙챙! 창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러나 곧 당나라 창잡이는 궁복이 휘두른 창에 찔려 쓰러지고 말았지요. 구경꾼들은 궁복의 놀라운 창 솜씨에 감탄했어요. 당나라에서 장군의 꿈을 이루다. 궁복은 자주 해적들과 맞서 싸웠어요. "어, 저 신라 놈이!" "이놈! 어디 신라 맛 좀 봐라!" 궁복의 무술 실력은 무척 뛰어났어요. 해적들은 궁복이 떴다 하면 도망치기 바빴지요. 어느 날, 궁복은 무술만 잘하면 누구든지 군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드디어 내 꿈을 펼칠 기회가 온 거야!' 궁복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당나라 군대에 당당히 들어갔어요. "어허, 궁복이란 이름이 활을 잘 쏘고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이름처럼 무술 실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당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보고'라 하지. 이제부터 너를 '장보고'라고 부르마." "고맙습니다." 장보고는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웠어요. 그래서 많은 전쟁에서 이겼지요. 장보고는 그 공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이라는 벼슬에 올랐어요. 그토록 원하던 장군이 된 거예요. 하루는 장보고가 부하들과 함께 밤새도록 해적선을 기다렸어요. "장군님, 저기 배가 보입니다." "그래. 드디어 나타났군." 새벽어둠을 뚫고, 바닷가에 배 한 척이 소리 없이 들어왔어요. 배에서 끌려 나오는 건 신라의 아이들이었지요. 아이들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어요. "이놈들! 게 섰거라!" 장보고가 말을 타고 달려가자 해적들은 칼을 빼들었어요. 그러나 용감한 장보고의 모습에 곧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을 쳤지요. 장보고는 말에서 내려 신라 아이들을 둘러보았어요.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오,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딘가로 팔려가 평생 노예로 살며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장보고는 팔을 크게 벌려 아이들을 와락 껴안았답니다. 신라방을 지키는 장군. 어느 날, 한 신라 상인이 울면서 장보고에게 뛰어왔어요. "장군님,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왜 그러는가?" "제 가게가 다 부서졌습니다. 더구나 어린 딸마저 해적에게 붙잡혔습니다." 장보고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어요. 그리고 신라 상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으로 곧장 내달렸지요. "신라방이 엉망진창이로군. 저 못된 놈들!" 장보고는 칼을 빼 들고 해적들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해적들과 엄청난 칼싸움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곧 해적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쳐 버렸답니다. 장보고는 혼자 떨어져서 울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았어요. "얘야, 이젠 무서워할 것 없다. 울지 마라." "장군님, 정말 고맙습니다." 장보고는 여자 아이를 번쩍 들어 말 위에 태웠어요. "장군님 만세! 장보고 장군님 만세!" 신라 사람들은 두 손을 치켜들며 소리 높여 외쳤지요. '신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날마다 시달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절을 짓기로 했어요. 몇 년 뒤, 적산촌에 법화원이 지어졌어요. 신라 사람들은 법화원에서 사이좋게 지내면서 장보고를 중심으로 힘을 길렀지요. 장보고는 언덕 위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았어요. '바다 저 멀리, 내 나라 신라가 보이는 듯하구나. 참으로 그립도다!' '나는 신라에서 장군이 될 수 없었기에 당나라로 왔어. 이제 장군의 꿈은 이루었다. 그런데 당나라 해적에게 노예로 잡혀 온 신라 사람들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구나. 해적을 뿌리 뽑고, 신라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 어찌해야 좋을까?' 장보고는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어요.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살고 있는 신라 사람들에게 더없는 영웅이었어요. 하지만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뿌리째 해결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지요. '그래, 신라로 돌아가자. 여러 나라 배가 오가는 청해 쪽에 진을 치고, 군대를 키우면 되겠구나. 해적이 넘볼 수 없는 신라의 바다를 만들리라!' 마침내 장보고는 신라 아이들을 데리고 미리 마련해 둔 배에 올랐지요. "모두 안녕히 계시오!" "장군님,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바닷가에는 법화원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신라 사람이 나왔어요. 모두 기쁜 마음으로 장보고를 보내 주었답니다. 신라로 돌아오다. 장보고를 태운 배가 신라에 닿았어요. '고향을 떠난 지 벌써 십여 년이 흘렀구나!' 신라 땅을 다시 밟은 장보고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지요. 장보고는 곧 궁궐로 들어가서 흥덕왕에게 인사를 올렸어요. "마마, 당나라 해적이 아무 때나 쳐들어와 재물을 빼앗고 신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군대를 키워야 하옵니다." "그대 말이 옳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청해는 신라, 당나라, 일본의 배가 모두 만나는 중요한 곳입니다. 청해에 진을 치고, 강한 군대를 두어 우리 백성을 지켜야 하옵니다." "어허, 내 기꺼이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노라." 얼마 뒤, 청해에 진을 치라는 명이 내려왔어요.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을 받았고요. "그대에게 군사 만 명을 줄 테니 우리 바다를 잘 지키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이었던 청해는 하루아침에 큰 해상 도시로 바뀌었어요. "군사가 자그마치 만 명이니 신라에서 이만한 진이 없도다!" "장군님, 앞으로 오가는 배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렇네. 잘 살펴서 해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 그 뒤로 청해진 군사들은 해적이 보이면 곧장 배를 몰고 가 무찔렀어요. 아울러 장보고는 어떤 파도에도 끄떡없는 배를 만들도록 했지요. "우리는 해적을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도 해야 하지. 그러려면 크고 튼튼한 배가 꼭 필요하다. 우리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자!" "예이." 장보고의 우렁찬 명령에 답하듯 사람들은 힘차게 대답했어요. 그리고 밤낮으로 열심히 배를 만들었지요. "튼튼한 배를 만들었으니, 이제는 강한 군대를 키워야 한다. 날마다 열심히 훈련해서 어떤 적의 공격에도 맞설 수 있게끔 하라!" 군사들은 움직이는 배에서 화살을 정확하게 쏘는 훈련, 적의 배에 올라타 적에게 창칼을 휘두르는 훈련 등을 받았어요. 청해진에서 국제 무역을 하다. "저기 당나라의 배가 다섯 척 들어옵니다." "이곳으로 들어와서 쉬었다 가게 해라." 청해진에는 푸른 파도가 수천수만의 물결을 이루며 밀려오고 밀려갔어요. '오, 바다에 떠다니는 배를 바라보고 있으니 또 하나의 큰 계획이 밀려오는구나.' 장보고는 해적을 무찌르고, 뱃길의 안전을 어느 정도 갖추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국제 무역을 하고 싶었지요. "장군님, 일본에서 배를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스님을 태우는 일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유학생과 사신을 당나라로 데려다 주어야 한답니다." "배를 보내 주도록 해라." 일본에서 아무 탈 없이 당나라로 가려면 으레 청해진 배의 힘을 빌려야 했지요. "장군님, 저번에 값비싼 보석과 도자기를 인도로 보냈잖습니까? 그런데 막상 인도에 도착해 보니 물난리가 나서 물건을 살 돈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냥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으흠. 믿을 만한 사람들인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니다. 그들에게 다시 배를 보내라." "물건 값이야 나중에 받아도 된다. 그동안 믿음이 쌓였다면 앞으로도 믿어야지." 장보고는 물물 교환을 주로 했지만, 믿음이 있으면 나중에 물건 값을 받기도 했어요. 청해진에는 날마다 수많은 배가 모여들었다가 떠나갔어요. 또한 장보고는 해상 무역을 넓히려고 당나라의 남부, 오늘날의 강소성이나 절강성 등에서 페르시아 상인들과 무역을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있으면서 국제 무역을 더욱 발전시켰답니다. 날이 갈수록 청해진의 힘은 커졌고, 동북아시아 해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어요. "장군님, 조정에서 왜구를 무찔러 달라고 일본에 강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허, 그 지긋지긋한 왜구 놈들!" 얼마 뒤, 신라가 일본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장보고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나 곧 마음을 정하고, 부하들에게 말했지요. "왜구 때문에 백성들끼리 하는 무역까지 끊어서야 되겠느냐! 어서 그 당나라 물건을 일본으로 보내라." "예이." "우리는 국제 무역을 어떠한 때에도 계속한다. 조정에서 도 내 뜻을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야." 청해진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국제 무역항이었어요.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다른 나라로 물건을 팔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들이기도 했어요. 또,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중간에서 도와주기도 했지요. 게다가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다른 나라에 팔기까지 했답니다. "규슈 지방에서 만들어진 향료가 참 좋구나. 아주 많은 양을 사들여라." "예이." "당나라 등주에 있는 도자기를 되도록 많이 사들여 나중에 페르시아 상인에게 비싸게 팔아라." "예이. 장군님, 신라의 인삼이 당나라에서 큰 인기랍니다." "그럼 좋다. 인삼을 당나라로 가져가 비싸게 팔아라." "알겠습니다." 장보고는 국제 무역을 해서 번 돈으로 바다를 장악했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뒷날 사람들은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장보고를 가리켜 '해상왕' 또는 '해신'이라고 부른답니다. |
이순신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깊고 푸른 바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막막한 바다. 그 바다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어렸을 때 동네 꼬마들을 이끌며 전쟁놀이를 즐겼던,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였어요. 아이는 나라를 지키는 장군을 꿈꾸며 의젓한 청년으로 자랐어요. 뒤늦게 벼슬자리에 오른 뒤에는 궂은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해냈지요. 청년은 나라의 바다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일본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쳐들어왔어요.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끔찍하게 짓밟았지요. 장군은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일본 군대와 맞서 싸웠어요.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지요. 적을 물리치는 마지막 싸움터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백성과 나라 걱정만 했어요. “나는 이 바다에 수많은 부하와 백성을 묻었다. 누구 하나 아깝지 않은 목숨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그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기 목숨보다 백성과 부하의 목숨을 훨씬 소중히 여긴 사람, 옳지 않은 일은 단호히 물리치며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은 사람, 왜군과 맞서 싸워 바다를 지켜내고 나라와 백성을 구한 사람. 우리는 그 사람을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불러요. "얘들아, 개울가로 모여라!" "순신이 부른다. 어서 가자." 어느새 동네 아이들이 개울가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손에는 저마다 나무로 만든 칼을 쥐고서 말이에요. 고만고만 한 또래 아이들이었지만 이순신보다 몇 살 위인 아이들도 눈에 띄었어요. "양쪽으로 흩어져라. 오늘은 진치기 놀이다. 먼저 일자 진이다!" 이순신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아이들이 와르르 마주 보고 늘어섰어요. 길을 지나던 동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멈추고 한마디씩 했지요. "진짜 군사훈련 같은걸!" "이순신은 보통 아이가 아니야. 장군감이야, 장군감!" "어디 그뿐인가? 글공부 잘하지, 그림 잘 그리지..." "효성은 또 얼마나 지극한지. 우리 고을 인물일세." 이순신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열두 살 때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왔어요. 이 고을은 이순신이 내려오면서부터 부쩍 떠들썩해졌지요. 이순신은 산과 들을 누비며 하루가 다르게 의젓하고 당당한 청년으로 자라났어요. 이순신은 말타기와 활쏘기는 물론이고, 글공부도 아주 열심히 했어요. 밤에는 병법 책을 읽고, 혼자서 병법 연구도 했지요. 어느 날, 한양에 올라간 이순신은 세 살 위인 유성룡을 만났어요. 이순신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자 유성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그래, 자네는 글재주도 대단하지만 무술에도 뛰어나지 않은가? 앞으로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을 거야." 유성룡이 하는 말에 이순신은 용기를 얻었어요. "우리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요." 이순신은 유성룡이 과거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나가는 동안에도 묵묵히 고향에서 과거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스물여덟 살 때 처음으로 무과시험을 쳤고, 4년이 지난 뒤에는 과거에 당당하게 합격했지요. 과거에 합격한 이듬해, 이순신은 벼슬을 받아 함경도 북쪽에 있는 동구비보라는 곳으로 갔어요. 주위 사람들은 험한 산골의 수비 대장이라는 보잘것없는 직책을 맡은 이순신을 기를 쓰고 말렸지요. 하지만 이순신은 떳떳하게 말했어요.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지. 그런 곳에 아무도 가지 않겠다면 오랑캐는 누가 막는단 말인가?" 이순신이 동구비보에 도착해 보니 성벽은 무너져 있고, 무기도 제대로 없었어요. 이순신은 병사들 훈련시키랴, 무기 손질하랴, 성벽을 고치랴, 하루 해가 짧았지요. 동구비보에서 3년을 보낸 이순신은 한양의 훈련원 봉사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맡은 일을 조용히 해 나갔지요. 하루는 상관인 서익이 이순신을 찾았어요. 서익은 훈련원에서 일하는 친척을 지금보다 몇 단계나 높은 자리로 올리려고 한다며 이순신에게 서류를 꾸며 달라고 했지요. 이순신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아랫사람을 이유 없이 위로 올리면,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은 어찌합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네가 감히 내 부탁을 거절하고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으냐!" 거절을 당한 서익은 화를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어요. 하지만 이순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몇 년 뒤, 이순신은 수군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전라도에 있는 발포 마을로 내려갔어요. 이순신은 탁 트인 바다 앞에 서서 각오를 새롭게 다졌어요. “끊임없이 저 바다를 건너와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왜적들! 내가 이곳을 지키는 한 너희들은 함부로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은 병사를 뽑고, 훈련시키느라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바다 싸움의 기술과 방법을 연구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전라좌수사 성박이 보낸 병사들이 이순신을 찾아왔어요. |
전봉준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다. 1855년 전라도의 작은 마을에서 전봉준이 태어났어요. 전봉준은 키는 작지만 참 씩씩한 아이였어요. 마을 사람들은 전봉준이 작고 옹골찬 녹두를 닮았다고 '녹두'라고 불렀지요. 농민은 허리가 휘도록 열심히 벼농사를 지었지만 늘 배가 고팠어요. 탐관오리가 세금으로 곡식을 다 거두어 갔거든요. "아버지, 오늘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세금을 꼬박꼬박 내야 하나요?" 전봉준이 묻자, 아버지가 대답했어요. "세금을 못 내면 관아에서 우리를 잡아간단다." "녹두야, 앞으로 힘과 지혜를 키워 나라를 바로 잡으렴! 불쌍한 백성을 구해야 한다." "네, 아버지." 전봉준은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어요. 전봉준이 어렸을 때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어지러웠어요. 밖으로는 침략을 일삼는 여러 나라가 물밀듯이 밀려왔어요. 특히 청나라와 일본은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팽팽하게 맞섰지요. 그런데도 나라의 벼슬아치들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했어요. 힘겨워하는 백성 사이에는 '동학'이라는 종교가 널리 퍼졌어요. 어느 날, 청년 전봉준은 마음이 끌리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여보게, 힘없는 사람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종교가 있다네." 친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봉준이 물었어요. "무슨 종교인가?" "동학일세. 동학을 믿는 사람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려고 힘쓴다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다니! 나도 동학에 들겠네!" 전봉준은 기뻐하며 동학을 믿기 시작했어요. 동학을 믿는 사람들이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 모두 모였어요. 처음 동학을 만든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널리 알리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이듬해, 동학을 이끄는 2대 지도자 최시형이 보은에서 다시 사람을 모았어요. 소식을 들은 전봉준도 금구에서 사람을 모았지요.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습니다. 다 같이 보은으로 갑시다!" 보은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어요. 나라에서는 부랴부랴 어명을 내렸어요. "우리가 못된 벼슬아치에게 벌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흩어졌어요. 전봉준은 큰 뜻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눈여겨보며 크게 실망했어요. "아깝다! 세상을 바로잡을 때를 놓치다니." 전봉준은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못된 벼슬아치를 몰아내자. 고부 군수 조병갑이 전봉준이 사는 마을을 다스렸어요. 조병갑은 욕심쟁이 탐관오리였답니다. 가난한 백성의 집에서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무명과 곡식을 마구 긁어 갔지요. 전봉준의 아버지는 관아를 찾아가 말했어요.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백성의 피와 살을 말리는 일을 당장 그만두십시오!" 그러자 조병갑은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여봐라, 저놈을 묶고 곤장을 쳐라!" 아버지는 심한 매를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어요. '아, 아버지! 이 억울함을 누가 풀어 준다는 말입니까! 제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겠습니다.' 전봉준이 동학의 작은 조직을 책임지고 있을 때였어요. 농민들이 전봉준을 찾아와 말했어요. "조병갑이 멀쩡한 만석보를 다시 쌓으며 돈도 안 주고 우리를 부리더니, 이번엔 물세까지 비싸게 받고 있어요." "자기 아버지 기념비를 세운다고 돈까지 걷어 가다니! 제발 물세라도 낮춰 달라고 해 주세요." "네. 제가 여러분의 뜻을 글로 써 드리지요." 농민들은 전봉준이 써 준 글을 관아에 냈지만 조병갑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화가 난 농민들은 힘을 모아 조병갑을 몰아내기로 했어요. 농민들의 뜻에 따라 전봉준은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어요. 집집마다 사발통문을 돌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았지요. 농민 수백 명이 말목 장터에 모였어요. 낫과 괭이를 든 농민도 있고, 대나무로 만든 창을 든 농민도 있었지요. 전봉준이 힘차게 농민들에게 외쳤어요. "여러분, 우리 힘으로 못된 조병갑을 혼내 줍시다!" "와! 어서 조병갑을 몰아내자!" 전봉준과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갔지만,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어요. 전봉준은 곡식이 쌓인 곳간과 감옥 앞에서 농민들에게 소리 높였어요. "여러분, 빼앗긴 곡식을 백성에게 돌려주고, 감옥에 갇힌 억울한 사람을 풀어 줍시다! 그리고 못된 짓을 한 벼슬아치에게 벌을 줍시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따랐어요. 그리고 만석보까지 힘차게 무너트렸지요. "만세! 만세!" 농민들은 콸콸 시원하게 흐르는 물을 보고 만세를 불렀어요. 이 사건이 바로 '고부 봉기'예요.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군수가 내려와 성난 농민들을 달랬어요. "조병갑은 나라에서 붙잡아 꼭 벌을 주겠소." "그동안 잘못된 일을 다 바로잡을 테니 나를 믿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농민들은 군수의 약속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나라에서 고부 봉기를 조사할 벼슬아치가 내려왔어요. 그런데 이 벼슬아치도 농민의 재산을 마구 빼앗고 백성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못된 짓을 했어요. "우리 얘기를 들어준다더니. 뭐야, 조병갑보다 더한 놈을 보냈어!" 농민들은 억울한 마음이 다시 끓어올랐어요. 전봉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먹었지요. '여러 사람과 더욱 힘을 합치자.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위해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해!' 전봉준은 친구 손화중과 김개남에게 도와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3,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이끄는 군대와 무장에서 만났어요. 다시 동학농민군이 봉기를 일으킨 거예요. "우리 힘으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잘 살게 합시다!" 전봉준은 나라 곳곳에 농민군의 뜻을 알렸어요. 그리고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한 뒤 백산으로 갔지요. 농민군 수천 명이 백산에 모였어요. "농민군이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면 규율을 잘 지키고, 백성을 위하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전봉준은 총대장으로 농민군을 이끌었어요. 1894년 4월 4일 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백성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녹두 장군님이 이끄시는 농민군은 백성의 편이야!" 백성은 전봉준을 '녹두 장군'이라 부르며 농민군을 기쁘게 맞았어요.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고개에서 관군과 마주쳤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전봉준은 부하들에게 일렀지요. "관군이 마음을 놓도록 불을 끄고 자는 척합시다." 전봉준의 계획도 모른채, 관군은 농민군을 얕잡아 보았어요. 싸움이 시작되자 전봉준이 소리쳤답니다. "다같이 공격!" "관군을 몰아내시오!" 농민군은 성난 파도처럼 관군을 공격했어요. 관군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지요. 농민군은 처음으로 관군에게 이겨 용기를 얻었어요. "와, 우리가 이겼다!" 농민군의 고함 소리가 황토현에 울려 퍼졌어요. 농민군은 '보국안민'이라고 쓴 깃발을 더욱더 힘차게 흔들었어요. 동학농민군은 관군에게 계속 이기며 장성 황룡촌에 이르렀어요. 나라에서는 농민군을 막으려고 신식 무기를 갖춘 관군을 보냈지요. 농민군이 강가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어요. 쾅! 갑자기 대포 소리가 나더니 농민군이 쓰러졌어요. 관군이 농민군에게 대포를 쏘았던 거예요. 관군은 도망가는 농민군을 뒤쫓았어요. 그런데 그때, 언덕에 숨어 있던 농민군이 나타나 학이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관군을 에워쌌어요. "장태를 굴려서 총알을 막아라!" 전봉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농민군은 장태를 굴리며 언덕을 내려왔어요. 관군은 놀라서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았지요. 하지만 농민군은 장태 뒤에 숨어 총알을 피하며 관군에게 몰려갔어요. 관군은 겁에 질려 대포도 버리고 도망쳤지요. 황룡촌 싸움에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이겼어요. 대포와 총 같은 신식 무기도 많이 빼앗았지요. 나라를 구하려고 다시 일어서다. 동학농민군은 계속 싸움에 이겨 전주성까지 차지했어요. 나라에서는 깜짝 놀라 청나라에 도움을 구했어요. 청나라는 재빨리 군대를 보냈지요. 그러자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만 노리던 일본도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왔어요. 전봉준은 안타까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아, 우리 땅에 들어온 다른 나라 군대를 하루빨리 몰아내야겠다.'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성을 두고 싸움을 계속했어요. 농민군은 관군의 대포에 눌려 싸움에서 자꾸 졌어요. 농민군은 관군과 싸움을 그만두려고 전주화약을 맺었어요. "우리의 뜻대로 이 나라 정치를 바로잡아 주시오. 그리고 농민군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면 전주성에서 물러나겠소." "좋소. 나라에 전해서 농민군의 뜻대로 되도록 하겠소." 농민군은 약속대로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전봉준과 농민군은 마을마다 집강소를 만들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나라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물러갔으니 일본 군대도 물러가라고 했지만, 일본은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밤에 경복궁에 들어가 고종을 가두었지요. 그리고 청나라와 싸워 이긴 뒤, 우리나라 일에 늘 끼어들었어요. 화가 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일으켰어요. "이제 우리의 적은 일본입니다." "우리 땅에서 일본 군대를 몰아냅시다!" "옳소! 우리나라를 우리 손으로 지키자!" "와!" 농민군은 땅이 울리도록 크게 외치며 다시 무기를 번쩍 들었어요. 동학의 2대 지도자 최시형이 앞에서 이끌며 동학농민군을 모두 모았어요. 농민군의 장군은 전봉준과 손병희,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이었답니다. 드디어 공주 우금치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어요. 농민군은 힘껏 공격했어요. 하지만 신식 무기를 쓰는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어요. 더구나 다시 일어난 농민군이 두려워 관군이 일본군과 함께했지요. 결국 농민군은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더 싸우면 아까운 우리 농민군의 목숨만 잃겠다. 일단 물러나자." 전봉준은 뒤로 물러날 것을 명령했어요. 의로운 뜻은 살아남다. 전봉준은 쫓아오는 관군을 피해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아갔어요.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김경천은 기쁘게 맞는 척했지만 나쁜 생각을 품었어요. '전봉준을 잡으면 나라에서 큰돈을 준다고 했어. 어서 전봉준이 있는 곳을 알려 상금을 타야지!' 김경천은 돈에 눈이 멀어 그만 전봉준이 있는 곳을 지방 사람에게 알렸어요. 전봉준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전봉준을 붙잡았지요. 백성들은 서울로 끌려가는 전봉준을 뒤따르며 슬퍼했어요. "우리의 희망인 녹두 장군님이 끌려가신다!" "엉엉, 녹두 장군님!"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개화파는 재판에서 반역죄로 전봉준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어요. 전봉준은 차분하고 당당하게 말했어요. "반역죄는 나라와 백성을 저버린 죄이다. 나는 우리 백성과 나라를 위해 바른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역죄라는 말이냐!" 하지만 전봉준은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전봉준은 가슴에 품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요. 전봉준은 죽기 전에 시 한 편을 써서 의로운 뜻을 남겼지요.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와 함께했으나,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꾀할 바 없다. 백성을 사랑한 정의에 내 잘못은 없노라.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겠나. 이듬해, 우리나라를 넘보던 일본이 명성 황후의 목숨을 빼앗았어요. 일본에 맞서 나라를 구하려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섰어요. 숨어 지내던 농민군도 의병이 되어 다시 무기를 들고 일본과 싸웠지요.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의로운 뜻은 우리 겨레의 가슴에 살아 있답니다. |
잔 다르크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프랑스 군사여, 힘을 내세요! 신은 우리와 함께하시니 꼭 이길 것입니다!" 한 소녀가 수많은 프랑스 군사를 이끌며 힘껏 외쳤어요. 소녀는 한 송이 코스모스처럼 여려 보였지만, 가슴에 화살을 맞아도 나라를 위해 꾹 참았지요. 이 소녀가 바로 잔 다르크랍니다. 500여 년 전, 어려움에 빠진 프랑스를 구한 소녀 영웅이지요. 어린 나이로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다니 정말 대단하지요? 하지만 잔 다르크는 마녀로 오해를 받고 억울하게 숨지고 말았어요. 프랑스 오를레앙에 가면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어요. 잔 다르크는 지금 세상에 없지만, 순수한 마음과 나라를 위한 굳센 의지는 이 동상에 담겨 있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다. 1412년쯤,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가 태어났어요. "여보, 우리 딸 참 예쁘지요?" "그래요.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요." 부부는 갓 태어난 잔 다르크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어요. 잔 다르크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무럭무럭 자랐어요. 하루는 잔 다르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어머니는 잔 다르크를 찾아 헤매다가 성당 안에서 겨우 딸을 찾았지요. "얘야, 혼자 여기서 뭐 하니?" 어머니가 묻자, 잔 다르크는 평화로운 얼굴로 빙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기도하고 있어요. 기도하면 하느님이 제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잔 다르크는 어느 때보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답니다. 프랑스는 땅과 왕의 자리를 놓고 영국과 자주 전쟁을 벌였어요. "영국이 우리 땅에 쳐들어와서 왕의 자리까지 넘보다니!" "벌써 여러 땅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괜찮을까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던 잔 다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얼마 전, 이웃 마을에는 프랑스 사람이 쳐들어왔다던데. 왜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 사람을 괴롭히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의 부르고뉴 공작과 몇몇 귀족이 프랑스 왕을 저버리고, 영국과 손을 잡았단다. 이웃 마을에 쳐들어온 건 바로 우리 프랑스를 저버린 부르고뉴 군이지." "오, 하느님! 부디 프랑스를 지켜 주세요!" 잔 다르크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했어요. 하루는 잔 다르크가 양 떼를 돌보고 있었어요. 그때, 어디에선가 신비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잔 다르크! 프랑스를 구하여라!" 잔 다르크는 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요? 제가 어떻게 프랑스를 구할 수 있을까요?" "내일 샤를 왕세자를 찾아가거라.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프랑스가 꼭 이길 것이다." 잔 다르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외쳤어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잔 다르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샤를 왕세자를 만나려고 길을 떠났어요. 조국을 위해 앞장서다. "왕세자 전하, 한 소녀가 전하를 뵙고 싶다고 왔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프랑스 군을 이끌고 전쟁터로 가겠다고 합니다." 신하의 말에 샤를 왕세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여자가 어떻게 싸움을 하겠느냐? 어서 돌아가라고 전하여라." 하지만 잔 다르크가 돌아가지 않자, 샤를 왕세자는 일단 시험해 보기로 했어요. 이튿날 성으로 간 잔 다르크는 왕세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 신하에게 다가가 인사했어요. "왕세자 전하! 인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그 신하가 바로 샤를 왕세자였거든요.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시험하려고 신하 옷을 입고 있었지요. "어떻게 나를 알았느냐?" 샤를 왕세자가 묻자 잔 다르크가 조용하게 대답했어요. "신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잔 다르크는 샤를 왕세자에게 또박또박 말했어요. "신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프랑스 군을 이끌라고 말입니다." "왕세자 전하! 전쟁에 나가게 해 주십시오."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음, 처음 보는 소녀가 한 번에 나를 알아보다니 놀랍군.' '이 소녀는 정말 신께서 보내 주신 사람일지도 몰라.'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믿기로 했어요. "잔 다르크가 전쟁에 나가도록 허락한다." "잔 다르크에게 군대를 주고, 누구든 잔 다르크의 말에 따르라." 전쟁에 나가기 전, 잔 다르크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어요.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어머니, 내일 저는 전쟁터로 갑니다. 용감한 프랑스 군이 꼭 이길 것이라고 믿지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됩니다. 부디 제가 용기를 잃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내일, 저는 용감하게 싸울 거예요! 잔 다르크 프랑스 군의 성스러운 소녀. 잔 다르크는 영국군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영국군은 들어라! 그대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프랑스는 프랑스 사람의 나라다. 그런데 어째서 영국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려고 하는가? 어서 프랑스에서 물러가라. 잔 다르크 그러나 영국군은 콧방귀만 뀌었지요. 잔 다르크는 전쟁터에 도착해 잠시 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외쳤어요.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싸움이 벌어졌어요!" 잔 다르크는 말을 타고 재빨리 동쪽으로 달려갔어요. 동쪽에서는 정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이여, 힘을 내세요! 신은 우리와 함께하시니 꼭 이길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펄럭이는 깃발을 들고 앞장섰어요. 그러자 힘없이 서 있던 프랑스군이 힘찬 함성을 질렀어요. "와! 승리는 우리 것이다!" 프랑스 군은 힘차게 깃발을 흔드는 잔 다르크를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성스러운 소녀가 우리와 함께한다! 프랑스는 이긴다!" 잔 다르크는 군사에게 작전을 일렀어요. "제1부대는 동쪽을 공격하고, 제2부대는 서쪽을 치고 들어가세요." 프랑스 군이 갑자기 공격하자, 영국군은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프랑스 군이 거칠게 공격하자 잔 다르크가 외쳤어요. "어린이와 여성, 노인을 지키세요! 항복하는 적은 용서하세요!" 프랑스 군은 잔 다르크의 명령을 잘 따랐어요. "성스러운 소녀가 우리를 구하러 왔어." "우리도 힘을 모아 영국군을 공격합시다!" 영국군에게 시달리던 프랑스 백성은 다 같이 힘을 모았어요. 프랑스는 군사와 백성이 하나가 되어 영국군과 맞섰지요. "아뿔싸! 우리가 졌다. 어서 도망가자!" 영국군은 뿔뿔이 달아나거나 프랑스에 항복했어요. "만세! 프랑스 만세! 잔 다르크 만세!"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잔 다르크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하하! 잔다르크, 드디어 그대가 해냈구나!"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저의 공이 아닙니다. 신께서 프랑스와 왕세자 전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영국 편이었던 귀족이 우리 편으로 돌아오고 있다. 참으로 기쁘구나."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잔 다르크는 또 다른 작전을 짰어요. "프랑스 군은 지금 용기가 넘칩니다." "이때 영국군을 몰아쳐야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제1부대가 영국군을 끌어들이면, 제2부대가 영국군의 가운데를 치십시오. 그러면 놀란 영국군은 뒤로 달아나겠지요." "그때 제3부대가 뒤를 치는 것입니다." 잔 다르크의 작전을 듣고 장군들은 감탄했어요. "정말 대단해! 우리보다 씩씩하고, 작전을 짜는 솜씨도 놀라워." 잔 다르크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군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름이 뭐예요?" "루이라고 합니다." "루이, 고향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우리 꼭 이겨서 다 같이 고향에 돌아가요. 그때까지 힘을 내세요. 아셨죠?" 잔 다르크는 싸움과 배고픔에 지친 군사의 손을 꼭 잡았어요. 프랑스 군은 잔 다르크의 따뜻한 마음에 더욱 용기를 얻었어요. 또한 잔 다르크는 싸움을 벌일 곳이 있으면, 적의 편이라도 그곳 사람들에게 먼저 편지를 띄웠어요.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게 하고, 큰 싸움을 피하게 했지요. 여러분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 편에 있습니다. 연합군은 조국 프랑스의 왕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조국을 사랑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프랑스 군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할 수 없이 여러분의 땅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절대로 여러분을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프랑스를 저버린 연합군만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정의로운 프랑스 군의 편에 돌아와 주십시오. 조국이 이길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잔다르크. 승리는 우리 것이다! "다 같이 공격하라! 승리는 우리 것이다!" 어느 날, 잔 다르크가 맨 앞에서 싸우고 있을 때였어요.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잔 다르크에게 꽂혔지요. "아!" 잔 다르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답니다. "세상에! 잔 다르크가 쓰러졌다!" 프랑스 군은 걱정에 빠져 허둥댔어요. 그 모습을 본 잔 다르크는 입을 꽉 물고, 몸에서 화살을 뺐지요.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프랑스 군을 보며 외쳤어요.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공격하라!" "와! 잔 다르크가 다시 일어났다. 만세!" 프랑스 군은 전쟁터가 떠나갈 듯이 외쳤어요. 겁내지 않고 나아간 끝에 또다시 크게 이겼지요. 잔 다르크는 싸움에서 계속 이겨 대관식을 치르는 도시, 랭스까지 나아 갔어요. 그래서 샤를 왕세자는 왕이 되는 의식을 치를 수 있었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되었답니다. 샤를 7세가 거리에 나서자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어요. 뒤이어 잔 다르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더 크게 만세를 불렀지요. 샤를 7세는 어리둥절했어요. '아니, 백성이 나보다 잔 다르크를 더 좋아하잖아!' 이때 한 신하가 샤를 7세에게 거짓말을 속삭였어요. "전하! 잔 다르크를 조심하십시오. 언제 전하에게 등을 돌릴지 모릅니다." "백성도 잔 다르크를 더 따르지 않습니까?" 샤를 7세는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잔 다르크를 힐끗 보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잔 다르크는 즐겁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어요. 잔 다르크는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에 맞섰어요. "잔 다르크다!" 연합군은 잔 다르크만 나타나면 겁을 먹고 주춤했어요. 하지만 프랑스 군은 반대였지요. "잔 다르크와 함께라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잔 다르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했어요. 잔 다르크는 군사를 잘 이끌고, 가난한 사람도 정성껏 돌보았지요. 잔 다르크는 연합군을 다 몰아내려고 애썼어요. 콩피에뉴에서 싸울 때였어요. 갑자기 연합군이 프랑스 군의 뒤쪽으로 몰려갔어요. '뒤에는 어리거나 다친 군사가 많은데 큰일이다. 뒤에서 연합군을 막아야겠어.' 잔 다르크는 뒤쪽에서 연합군과 싸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어요. "잔 다르크가 땅에 떨어졌다! 어서 잡아라!" 연합군은 재빨리 잔 다르크를 잡아갔어요. 프랑스 군사는 울부짖으며 잔 다르크의 이름을 불렀지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연합군은 잔 다르크를 종교 재판에 넘겼어요. 재판장에서는 잔 다르크를 마녀라고 했어요. 잔 다르크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요. 잔 다르크는 힘주어 말했어요. "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제게 프랑스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재판장 밖에서는 프랑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외쳤어요. "잔 다르크를 풀어 주세요! 잔 다르크는 아무 죄가 없어요!" 하지만 재판은 멈추지 않았어요. "전하! 어째서 잔 다르크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잔 다르크를 따르는 귀족이 묻자, 샤를 7세가 조용히 말했어요. "잔 다르크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잠자코 기다리게." 며칠이 지나도 샤를 7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답니다. '아, 잔 다르크! 결국 이대로 죽고 마는 것인가!' 잔 다르크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결국 잔 다르크는 마녀로 몰려 장작더미가 쌓인 화형대에 세워졌어요. "하느님의 이름을 팔며 세상을 어지럽힌 마녀를 벌하노라!" 장작더미에 불이 붙자, 잔 다르크가 사람들에게 외쳤어요. "십자가를! 저에게 십자가를 주세요!" "마녀에게 십자가를 줄 수 없다!" "그러면 십자가를 높이 들어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때 한 사람이 나뭇가지 두 개로 십자가를 만들어 높이 들었어요. 잔 다르크는 십자가를 보며 행복하게 웃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했지요. "제 조국 프랑스를 영원히 지켜 주세요!" 세월이 흘러, 잔 다르크는 마녀라는 누명을 벗고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남았어요. 교황은 잔 다르크를 성녀로 받들고, 프랑스 의회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날을 만들었지요. 잔 다르크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은 영웅으로 남아 있답니다. |
처칠 | 예술경험 | 초등_저학년 | 이름난 집안의 개구쟁이. 1874년 영국 옥스퍼드셔에 있는 큰 성에서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어요. 이 성의 주인인 랜돌프는 이름난 귀족이었지요. 갑자기 하녀가 달려와 랜돌프에게 말했어요. “나리, 마님께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으셨어요!” 랜돌프는 허겁지겁 아내에게 달려가 아이를 보고 웃음 지었어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손님들이 박수를 치며 축하했지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들이 큰사람이 되도록 잘 키우겠습니다.” 랜돌프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어요. 이 아이가 뒷날 영국을 이끄는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이랍니다. 처칠은 씩씩한 아이로 쑥쑥 자랐어요. 학교에 간 처칠은 성적이 좋지 않아 주눅이 들었어요. 하지만 장난감 병정놀이를 할 때만은 참 즐거웠지요. 아버지가 다가오자, 처칠은 활짝 웃으며 말했어요. “아버지, 저는 장난감 병정으로 작전을 짜는 것이 참 재미있어요!” “수학이나 라틴어는 공부하기 싫으니?” “싫다기보다는 잘 모르겠어요.” “음, 그렇구나. 괜찮다. 못 하는 것이 있으면 잘하는 것이 있단다. 너는 병정놀이할 때 작전을 많이 짜 봤으니까, 군인으로 일할 때 크게 도움을 받을 거다.” 아버지가 용기를 주자, 처칠은 힘이 났어요. 처칠은 해로 학교에 들어가려고 입학시험을 쳤답니다. 하지만 라틴어 시험을 칠 때, 시험지에 답을 하나도 못 쓰고 그냥 냈지요. 교장 선생님이 처칠에게 물었어요.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대충 써서 내는데, 자네는 왜 그냥 냈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잘 아는 것은 무엇인가?” “영어와 역사입니다. 특히 저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는 곧 망하니까요.” 결국 처칠은 해로 학교에 들어갔어요. 영어와 역사 등 다른 과목 성적이 뛰어났거든요. 정치가의 꿈을 키우다. 해로 학교는 성적과 규칙을 많이 따졌어요. 처칠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걱정에 빠졌어요. 아버지는 처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답니다. “공부가 맞지 않으면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게 어떻겠니?” 처칠은 이내 얼굴이 환해졌어요. “네, 좋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육군 사관학교에 꼭 들어가겠습니다.” 처칠은 육군 사관학교에 시험을 쳤지만,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세 번째 시험에서 가까스로 합격했지요. ‘안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하나도 안 부끄러워. 내 힘으로 떳떳하게 시험을 쳤으니까.’ 처칠은 가슴을 쫙 펴고 학교 문으로 씩씩하게 걸어갔어요. 육군 사관학교에서 처칠은 말이 별로 없었어요. 발음이 똑똑하지 못해 친구들이 많이 놀렸거든요. ‘모자란 점을 부끄럽게 생각할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서 고쳐야겠어!’ 처칠은 발음을 고치려고 피나는 연습을 했어요. 발표를 맡으면 미리 원고를 다 외웠어요. 그리고 발음과 동작을 연습한 다음, 발표를 했지요. 발표가 끝나자, 친구들이 처칠에게 와르르 몰려왔어요. “처칠,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 원고도 참 잘 썼더라.” “목소리와 동작도 멋졌어!” 처칠은 칭찬에 우쭐하지 않고 더 열심히 발표를 연습했어요. 정치가이던 아버지는 처칠을 의회에 데려갔어요. 처칠은 의원들이 나라 문제를 뜨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설레었지요. “아버지! 저도 정치가가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래. 넌 꼭 훌륭한 정치가가 될 거야.” 하지만 어느 날, 늘 뒷받침해 주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처칠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흘렸지요. ‘내 꿈은 정치가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거였어.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꿈을 버리지 말자. 올바른 정치가가 되어 아버지의 몫까지 열심히 해야지.’ 처칠은 정치가의 꿈을 이루기로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어요. 처칠은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일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어요. 1895년 쿠바에서 전쟁이 일어났어요. 스페인과 쿠바 독립군이 벌인 전쟁이었지요. 처칠은 쿠바로 가서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처칠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사람이 수없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세상이 평화로울까?’ 처칠은 전쟁의 비극을 널리 알리려고 신문에 기사를 냈어요. 이 기사로 처칠의 이름이 영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답니다. ‘뛰어난 정치가로 크려면 여러 가지를 보고 배워야 해.’ 처칠은 인도로 떠났어요. 그때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파탄족이 독립 전쟁을 벌였지요. 처칠은 군인과 기자로 일하며 전쟁터를 누볐어요. 전쟁터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사와 책에 담아 이름을 떨쳤지요. 그리고 책을 펴서 번 돈은 뒷날 정치가가 되는 데 쓰려고 모았어요.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처칠에게 물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아버님이 남긴 유산을 쓰면 되지 않나?” 처칠은 고개를 저었어요. “절대로 아버지의 이름이나 유산에 기대지 않을 셈이네. 내 힘으로 정치가가 되겠네.”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다. 처칠은 의원으로 일하려고 선거에 나갔지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너무 실망하지 말자. 난 젊으니까, 경험을 쌓은 뒤에 다시 도전하면 될 거야.’ 그때 한 신문사에서 처칠에게 일을 맡겼어요.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보어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금과 다이아몬드 때문이지요. 남아프리카로 가서 기사를 쓰지 않겠습니까?” “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처칠은 씩씩하게 대답한 뒤, 남아프리카로 떠났어요.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처칠은 취재를 하려고 영국군과 함께 움직였어요. 하루는 보어인이 처칠이 있는 군대를 갑자기 공격했어요. 처칠은 다친 군인을 돕다가 그만 보어 인에게 붙잡혔지요. 처칠은 포로수용소에 갇혔어요. 하지만 몰래 포로수용소를 빠져나와 영국으로 돌아왔지요. 처칠은 전쟁 영웅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어요.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걸고 빠져나오다니, 용기가 참 대단해!” “처칠이라면 믿고 정치를 맡길 수 있겠어!” 선거에 다시 나간 처칠은 의원으로 뽑혔답니다. ‘아버지! 꼭 훌륭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 처칠은 처음으로 의회에 들어서며 아버지를 떠올렸어요. 처칠은 영국이 치르는 전쟁을 잘 알았어요.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터를 누비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았거든요. 처칠은 의회에서 연설을 했어요. “전쟁을 준비하는 데 나라의 돈을 쓰지 맙시다. 전쟁에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씁시다!” 하지만 처칠과 같은 당의 의원들은 반대했어요. 처칠은 당을 옮겨 다시 정치 활동을 펼쳤어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뜻을 꿋꿋하게 밀고 나갔답니다. 오로지 국민을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어요. 처칠은 해군 장관이 되어 전쟁을 이끌었어요.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지요. ‘사람은 자기의 실수를 받아들이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해.’ 처칠은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아 다시 일어섰어요.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을 조심스럽게 살폈답니다. “독일을 잘 지켜봐야 합니다. 독일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잠시도 마음을 놓지 말고 독일의 움직임을 살펴야 합니다!” 처칠이 힘주어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처칠의 말이 맞았어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거든요. 영국 국민과 의원은 뒤늦게 처칠의 말을 떠올렸어요. “처칠의 말대로 했다면 독일이 전쟁 준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처칠처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영국을 이끌어야 해.” 온 나라 사람이 처칠을 믿고 따랐어요. 드디어 처칠은 영국의 총리 자리에 올랐어요. 처칠은 국민 앞에서 약속했지요. “저는 국민 여러분께 제 피와 노력과 눈물과 땀방울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꼭 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땅에서, 들판과 도시에서, 산에서 싸우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은 처칠의 연설을 듣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답니다. 세계의 영웅으로 남다. 독일은 이탈리아, 일본과 손을 잡고 영국과 프랑스 등을 공격했어요. 독일의 공격을 받은 나라는 서로 힘을 모으려고 연합군을 꾸렸어요. 처칠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어요. 미국과 소련도 연합군과 함께하기를 바랐거든요.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은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자기 나라와 민족만 빼고 모두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디 미국과 소련이 우리 연합군과 함께하여 정의가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미국과 소련은 처칠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움직였어요. 연합군과 함께 힘을 모으기로 한 거지요. 연합군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총공격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어요. “만세! 전쟁이 끝났다!” “처칠 만세! 처칠이 영국을 구했다!” 처칠은 기뻐하는 국민을 향해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펴서 높이 올렸어요. 쫙 벌린 손가락 두 개는 승리를 뜻하는 영어 ‘빅토리(Victory)’의 머리글자 ‘브이(V)’ 자를 뜻했지요. 그 뒤로 사람들은 승리를 뜻할 때 처칠처럼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만들었어요.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뒤돌아보는 내용으로 책을 냈어요. 책의 제목은 제2차 세계 대전이었지요. 이 책으로 처칠은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요. 영국 국민은 처칠을 ‘의회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했어요. 처칠이 숨을 거두었을 때, 온 국민이 슬퍼했어요.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던 처칠! 지금도 우리는 처칠을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하고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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